① 止門(지문)  지(止)의 수승한 공능을 밝힘

若修止者(약수지자) 住於靜處(주어정처) 端坐正意(단좌정의) 不依氣息(불의기식)

만일 지를 수행하는 자라면, 고요한 곳에 안주하여 단정히 앉아 의식을 바르게 해야 하고, 호흡을 의지하지 말며,

不依形色(불의형색) 不依於空(불의어공) 不依地水火風(불의지수화풍)

형상과 색상에 의지하지 말며, 허공을 의지하지 말며, 지·수·화·풍을 의지하지도 말며,

乃至不依見聞覺知(내지불의견문각지)

나아가서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見聞覺知에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元曉 : 靜處(정처) - ① 숲과 같이 고요한 곳. ② 생활을 깨끗이 함(持戒). ③ 의식(衣食)이 넉넉할 것(小欲知足 필요). ④ 선지식을 만나야 함. ⑤ 번거로운 반연을 쉼(사람을 만나지 말 것)

* 지운 : 좌선의 자세 - 오른발을 왼발 위로 하고 왼손을 오른손 위로 한다. 허리를 펴고 엉덩이를 약간 뺀다. 시선은 코끝을 향한다. 혀끝을 입천장에 붙인다.-물처럼바람처럼]

 

[여기서는 지(止)의 수행방법 즉, 좌선(坐禪)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본론의 목적인「진여의 관찰」즉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어가는 것을 밝히고 있다.
먼저 수지(修止)의 방법으로서「지(止)를 닦는 자는 고요한 곳에 머물며, 단정히 앉아 뜻을 바르게 한다」고 설한다. 단정히 앉는다는 단좌(端坐)는 결가부좌(結跏趺坐) 또는 반(半)가부좌하여 몸을 바르고 곧게 앉는 것을 말하며, 정의(正意)는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 자타(自他)를 무상도(無上道)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항상 갖는 것을 말한다. 선정(禪定)의 방법에 있어「기신론」은 원시불교이래 설해지는 방법을 부정하고 있다.

不依氣息 기식(氣息)에 의하지 않는다」, 원시불교에 있어서는, 호흡을 헤아려 마음을 통일하는 수식관(數息觀)이 있으나,「기신론」은 유식관(唯識觀)에 의하여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와 같은 전통적인 선(禪)수행을 채택하지 않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不依形色 형색(形色)에도 의하지 않는다」는 신체의 부정(不淨)을 관하는 부정관(不淨觀)과 해골(骸骨)을 관하는 골쇄관(骨 觀)등을 말한다. 우리의 탐욕을 없애기 위하여 관하는 법이다.
不依於空 不依地水火風, 일체는 공(空)이라는 관법이나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관법은 사정(事定) 즉 색정(色定) 무색정(無色定)에 들어가는 선정방법의 하나를 말한다.

흩어진 마음에서 보고 듣는 육진(六塵)의 일체는 의식(識)의 소산(所産)이라고 관하는 견문각지(見聞覺智) 등 원시불교에서 행하는 전통적 선정(禪定) 방법에 의하지 말 것을 설하고 있다.
이들 관법은 외계에 사상(事象)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것을 관(觀)함으로써, 마음의 통일을 수행하는 방법이나,「기신론」은 유식관(唯識觀)을 취하기 때문에 그러한 사상관(事象觀)을 취택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본론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헤아리는 기식(氣息)에 의하지 아니하고, 또는 해골과 뼈와 그 밖의 더러운 육체라는 부정관(不淨觀)등 형색(形色)에 의하지 아니하며 공(空)이니 지수화풍(地水火風)이니 또는 보고 듣고 아는 의식이나 관념 등에 의하지 아니한다고 설하고 있다. 그리하여 온갖 상념(想念)을 그 상념이 생기는 찰나 찰나에 모두 제거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더욱이 그 상념을 제거하여야 한다는 그 상(想) 자체마저 역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일체법은 본래 무상(無相)으로서 찰나찰나 생기는 것이 아니며 또한 찰나찰나 멸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일체는 유심소작(唯心所作)으로서 마음의 본성은 본래 무념(無念)이므로 이 법성무상(法性無相)의 이(理)에 도달되면, 일체법은 본래 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 밖의 경계를 인정하면서, 그 후에 마음에 의하여 마음을 제거하는 그러한 방식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외경(外境)에 집착하여 산란해지면, 그 산란한 마음을 가다듬어 정념(正念)에 들게 하여야 한다.
-금강사]

 

["住於靜處 고요한 처소에 안주한다"= 외부의 조건이 심난하고 시끄러운 처소를 버리는 입니다. 천태의 '소지관(小止觀)'에선 선정에 들어가는 시초에 우선적으로 조신(調身조심(調心조식(調息) 배우라고 밝혔는데, "端坐, 단정히 앉는 " 몸을 고르게 하는 조신에 해당하며, 자세를 앞으로 숙이지도 않고 위로 바짝 쳐들지도 않기 때문에 "단정히 앉는다" 합니다

"正意, 의식을 바르게 한다" 것은 마음을 고르게 하는 조심입니다. 마음이 혼침에 빠지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아서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함이 쌍으로 흐르기 때문에 "의식을 바르게 한다" 합니다. 또한 호흡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호흡은 고를 필요가 없습니다.

"호흡과 형체와 색상을 의지하지 않는다" 것은 육신의 집착을 여읜 것이고, "오대(五大) ((((() 의지하지 않는다" 것은 세계의 집착을 여읨이며, 不依見聞覺知 보고 들어 지각한 경험적인 지식을 의지하지 않는다" 것은 마음마저 여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덕(禪德)께서 말하길, "안으로는 몸과 마음을 벗어버리고 밖으로는 세계를 버려라. 모름지기 망상인 심의식(心意識) 떠나서 참구하고, 범부·성인이라는 상대적인 길에서 벗어나 배우며, 망상과  경계를 떠나서 참구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不依, 의지하지 말라"   모든 말은 고덕이 말씀한 "벗어남"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수선]

 

一切諸想(일체제상) 隨念皆除(수념개제) 亦遣除想(역견제상)

일체 모든 상념을 생각을 따라 모두 제거하되, 역시 제거한다는 일념마저도 버려야 한다.

 

[지운 ; 隨念(수념) - 알아차림을 말한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차려 이를 버리되, 버렸다는 생각도 버린다.]

 

以一切法本來無相(이일체법본래무상) 念念不生(념념불생) 念念不滅(념념불멸)

일체법은 본래 상념이 없어서 생각 생각이 나지 않으며, 생각 생각이 사라지지도 않으니,

亦不得隨心外念境界(역불득수심외념경계) 後以心除心(후이심제심)

또한 마음이 밖으로 경계를 생각하는 것을 따르지 않은 뒤, 마음으로써 마음을 제거하려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

 

[일체 경계가 무상(無相)임을 알게 되면 그 경계를 생각하는 것에 따르지 않게 된다.

* 지운 : 以心除心(이심제심) - 뒤의 마음은 동요하는 마음이고, 앞의 마음은 바르게 하는 마음으로, 正知의 힘으로 동요하는 마음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心若馳散(심약치산) 卽當攝來(즉당섭래) 住於正念(주어정념)

마음이 만일 치달아 흩어진다면 마땅히 당장에 거두어 들여 정념에 안주해야 하며,

是正念者(시정념자) 當知唯心無外境界(당지유심무외경계)

이 정념이란 것은 오직 마음일 뿐 외부의 경계란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하나니,

旣復此心亦無自相(기부차심역무자상) 念念不可得(념념불가득)

곧 다시 이 마음까지도 또한 자체의 모습이 없으므로 생각 생각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지운 : 最極寂靜(최극적정) - 주객이 하나가 되는 상태이나 혼침과 들뜸으로 인해 끊어짐이 있다.]

 

[정념(正念)이란 유심무경(唯心無境) 즉 오직 마음에 의한 것으로서 마음 밖의 경계는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마음에 자상(自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체는 진여(眞如)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찰나 찰나의 마음을 인식하는 한, 그것은 아직 유심(唯心)의 이치에 이르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정념(正念)에 주하게 되면, 마음은 염념(念念)으로 불가득(不可得)인 것이다. ]

 

[ "일체 모든 상념"으로부터 "상념마다 사라지지 않는다"까지의 다섯 구절은 마음 쓰는 방법을 명확하게 제시한 입니다. 일체 중생은 근본 진심을 미혹하고 한결같이 망상에 의지하는 측면에서만 멋대로 일을 하기 때문에 지금 ()방편문을 수습하여 망상을 제거하는 것으로써 최상을 삼았습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능가경'에서는 "위로부터 모든 성인들이 서로가 전수했던 것이 망상엔 자성이 없다"는   마디 말로써 정확한 요점을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망상에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망상을 제거해야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心若馳散 卽當攝來, 일체 모든 상념을 상념이 일어나는 그대로 따라서 제거하라' 하였습니다.  일념이란 직심으로 진여법을 올바르게 염하는 일념입니다. 지금 마음을 쓰는  있어서  일념만을 홑으로 이끌어내어 그것만을 위주로 하고 다시는 제이념(第二念)이란 없습니다.  일념이 망상무성(妄想無性) 진여법을 관조하는 힘으로써 망상이 일어나는 곳을 보기만 하면 그것을 따라서 즉시 일념을 관조하고 타파하여  자리에서 소멸시키고 다시는 분별망상이 상속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영가대사(永嘉大師) 말한 "상속하는 분별심을 끊는다" 것에 해당하겠습니다. 참선하는 요점이  일념을 벗어나지 않는  요점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 隨念皆除 亦遣除想, 또한 제거했다는 일념마저 버린다"는 상념을 제거하는 주관적인 일념까지도 버리는 입니다. 최초의 일념으로써 상념을 제거하여 망상의 상념이 사라지고 나면 바로 주관적인 일념까지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버려야 객관인 상념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일념마저 버려야 니다. 그리고 이미 올바른 생각인 정념(正念)이라고 말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정념마저 버려야 하느냐 하면 주관적인 정념의 일념은 객관의 상념을 버리기 위해서 그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수립되었을 뿐이므로 진여일심의 자체는 본래 망상을 여의었는데 무슨 주관적인 일념인들 용납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래 망상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있지 않습니다. 망상이 이미 본래 있는 것이 아닌데도 가령 일념을 수립하여 망상을 상대한다면 다시 일념은 망상의 근본이 되어버립니다. 때문에 일념마저도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있는 자리가 바로 진여일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과 망상이 함께 끊기고 주관과 객관을 모두 잊은 것을 정념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일념마저 성립하지 않으면 상념마다 나온 실재가 없게 되고, 상념마다 생멸의 인연으로 나온 실재가 없다면 상주하는 광명이 목전에 나타나고 실지의 고요와 권지(權智) 관조가 환하여 상념마다에서 사라지지 않는가 하는 이것이 참선하는 확실한 종지입니다

"亦不得隨心外念境界 後以心除心, 마음 밖으로 생각하는 경계를 따라서, 그런 뒤에 마음으로써 마음을 제거하지 말라" 말은 마음을 쓰지 못하는 병통을 제시한 것입니다. 일념으로 관조한 힘으로써 다시는 망상을 따라 마음이 구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마음이 망상을 따라 밖으로 경계를 생각한 뒤에, 도리어 마음으로써 마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경계를 제거한다면 이는 주관적인 망상으로써 객관의 모습인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생멸하는 망상을 쫓으면서 생사에 유전하게 되어버립니다. 이처럼 마음을 썼다간 끝내 생멸하는 망상을 여의지 못하게 되므로 이야말로 마음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만일 마음이 경계로 치달아 흩어지면 자리에서 거두어 들여 정념으로 귀결시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망상은 나오자마자 바로 그곳에서 즉시 망상이 성공(性空) 이치를 관조하고 망상을 타파하여 그를 따라서 마음이 구르지 않으면, 정념으로 귀결하여 마음이 외부의 경계의 반연을 따르길 기다린 뒤에야 그것은 망상분별이라는 것을 깨닫고 거두어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론을 제시하여 알아야 것은 '當知唯心無外境界, 경계가 마음의 모습일 마음 밖에 실재하는 경계란 없다' 하였고, 밖으로 마음의 양상인 경계뿐만 아니라, 다시 안으로 마음까지도 역시 자체의 양상이란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상념마다 실재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안의 마음과 밖의 경계에서 일체의 번뇌가 고요히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상념마다 훈습하여 수행한다면 자연히 진여를 체득하고 그와 하나로 계합(契合)하게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즉지지관(卽止之觀)입니다.]

 

若從坐起(약종좌기) 去來進止(거래진지) 有所施作(유소시작)

만약 앉은 곳에서 일어나 가고 오며, 나아가고 멈추며, 행하는 바가 있다면, 

於一切時(어일체시) 常念方便(상념방편) 隨順觀察(수순관찰)

일체의 시간에 항상 방편을 생각하여, 수순하고 관찰하여

久習淳熟(구습순숙) 其心得住(기심득주)

오랜 동안 익혀 익숙하여지면 그 마음이 안주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 지운 : 專住一趣(전주일취) - 주객이 없는 자리에 머물러 끊어짐이 없으나, 외부 자극이 있으면 이 상태에서 벗어남.]

 

以心住故(이심주고) 漸漸猛利(점점맹리) 隨順得入眞如三昧(수순득입진여삼매)

그 마음이 안주할 수 있기 때문에 점점 맹렬하게 날카로워져서 수순하여 진여삼매에 들어갈 수가 있다.

深伏煩惱(심복번뇌) 信心增長(신심증장) 速成不退(속성불퇴)

번뇌를 깊이 조복받고 신심이 더욱 자라나 신속하게 불퇴전을 성취한다.

 

[지운 : 等持(등지) - 정진의 힘으로서 아니라 숙달된 상태로서 비록 외부 자극이 있어도 흔들림이 없다.]

 

[만약 좌선(坐禪)을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좌선 이외의 행주좌와(行住坐臥) 등 여러 가지 행동, 즉 가고 오고 나아가고 머무는 거래진지(去來進止)의 경우에도 언제나 항상 마음을 집중하는 지(止)의 방편을 잊지 않도록 염하여 법성부동(法性不動)의 이치를 관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편을 오래 익혀, 순수하게 성숙해지면 마음은 정념에 들어 득주(得住)하게 되는 것이므로, 마음을 집중하는 지(止)의 힘은 더욱 맹렬해져서, 그것을 따름으로서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번뇌를 깊이 굴복시키고 신심을 증장시킬 수 있게 되어, 물러서지 않는 신심을 속히 이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唯除疑惑(유제의혹) 不信誹謗(불신비방) 重罪業障(중죄업장)

오직 의혹하는 것과 불신하는 비방과 중죄업장과 

我慢懈怠(아만해태) 如是等人(여시등인) 所不能入(소불능입)

아만, 게으름하는 사람은 제외하니, 이와 같은 사람은 능히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원효 : 九住, 《瑜伽師地論》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 사마타관

① 內住(내주) - 경계에 반연하는 것을 거두어 안에 묶어두고 바깥으로 어지럽지 않음. 不依氣息 不依形色 不依於空 不依地水火風 乃至不依見聞覺知

② 等住(등주) - 번뇌에 묶인 마음의 성품이 거칠어 모든 경계에 두루 평등하게 머물 수 없어서 차례대로 이것이 인연한 경계에 마음의 집중이 이어지게 하는 방편과 맑게 하는 방편으로 미세하게 두루 감싸 머물게 함. 一切諸想 隨念皆除

③ 安住(안주) : 내주와 등주를 했더라도 집중력을 잃게 하는 마음에 있는 작용으로 밖으로 어지럽게 되면 그 마음을 거두어 안의 경계에 편안히 둠. 亦遣除想

④ 近住(근주) : 먼저 내주와 같은 마음에 맞추고 생각을 모아 머무는 마음을 가까이 하고 생각을 모은 마음으로 자주 주의를 기울여 안에 마음을 머물게 하여 바깥에 멀리 나가지 않게 함. 以一切法本來無相 念念不生 念念不滅

⑤ 調順(조순) : 온갖 모습이 마음을 어지럽게 하니, 즉 색석향미촉법의 경계, 탐진치의 마음, 남녀의 차별이니 비구는 먼저 저 모습이 근심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생각이 커짐으로 모든 모습에서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흐트러지지 않게 함. 亦不得隨心外念境界

⑥ 寂靜(적정) : 온갖 욕심과 성냄, 해치려는 마음과 같은 나쁜 심사(尋思)와 탐욕과 같은 모든 수번뇌(隧煩惱 : 근본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번뇌)가 마음을 움직이므로 그 모든 법들이 근심이라 생각하고, 이런 생각이 커짐으로 나쁜 심사와 수번뇌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음. 後以心除心

⑦ 最極寂靜(최극적정) : 집중력을 잃게 하는 마음에 있는 작용으로 나쁜 심사(尋伺)와 수번뇌가 잠깐 일어날 때, 비구의 마음이 일어나는 곳을 따르지만 번뇌는 받아들이지 않고 바로 물리침. 心若馳散 卽當攝來 住於正念 是正念者 當知唯心無外境界 旣復此心亦無自相 念念不可得

⑧ 專住一趣(전주일취) : 열심히 수행하는 힘이 있어 마음의 집중이 이어짐. 若從坐起 去來進止 有所施作 於一切時 常念方便 隨順觀察 久習淳熟 其心得住

⑨ 等持(등지) : 자주 닦아 익힌 공부의 인연 때문에 열심히 수행한다는 생각이 없이 흘러가는 인연 속에 도가 굳어짐. 以心住故 漸漸猛利 隨順得入眞如三昧 深伏煩惱 信心增長 速成不退

* 고순호 : 疑惑(의혹) - 과연 그럴까 하는 것. 不信(불신) - 이러한 도리를 믿지 않는 것. 誹謗(비방) -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고 비방하는 것, 즉 외도. 我慢(아만) - 자기 생각과 배운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교만한 것, 懈怠(해태) - 게을러서 미루거나 정진하지 않는 것. 이 모두가 자질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수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지운 : 삼매에 대해 혼침이 있는가 없는가로 참다운 삼매에 들었는가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무아를 체득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람은, 지(止)를 완성할 수가 없다. 즉 진여를 의혹(疑惑)하는 자, 즉 의심이 있으면 마음이 산란해져 하나로 통일 할 수 없는 것이며, 불신(不信)하는 자, 믿음이 없으면 역시 그러하며, 비방(誹謗), 즉 정법을 비방하는 자도 지(止)를 이룰 수 없는 것이며, 오역(五逆)을 범하는 등의 중죄(重罪)의 업장이 있는 사람이나, 아만(我慢) 즉 자기에 대한 자만심이 강한 사람, 해태(懈怠) 즉 게으른 사람들은 진여삼매를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에 수행자가 앉아 있을 때는 지(止)를 닦을 뿐만 아니라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거래(去來)하고 나아가고 멈추면서 하는 일이 있거든 일체의 시간에 항상 지방편(止方便)을 사유하여 움직이지 않는 진여법성의 도리를 수순하며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수습하여 순일하게 익숙하여지면 그 마음이 지방편을 성취하여 안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안주할 수 있기 때문에 점점 맹렬하고 날카로운 선정을 얻어 진리의 본성을 수순하면서 진여삼매에 깨달아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번뇌를 깊이 조복받고 신심이 더욱 자라나 십신(十信)이 원만해지면 십주(十住)와 십지(十地)에 들어가 신속하게 불퇴전(不退轉) 경지를 성취하게 되나, 오직 진여의 이치에 망설이면서 의혹하는 것과 불신하는 일천제(一闡提)와 비방하는 외도(外道) 오역사중(五逆四重) 중죄업장(重罪業障)과 자기를 스스로 자랑하며 스스로 뽐내는 아만(我慢)와 방일하여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은 제외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여섯 종류의 장애 가운데서 하나의 장애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깨달아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방편수연지(方便隨緣止)를 제시하였는데, 여기서 () 항상 단정히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을 따라 닦고 익히면서 잠시도 폐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찰을 오래 하고 나서 차츰차츰 순일하게 익숙해지면 그 마음이 자연히 진여삼매에 안주한다는 것입니다. 번뇌를 점차 조복받고 신심이 더욱 자라나게 되면 신속하게 불퇴전의 경지를 성취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삼매는 십신(十信)을 능히 원만하게 성취하고 십행(十行)을 행하려는 자라면 모두가 얻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불신하는 마음으로 악업의 장애를 중지하고 아만을 부리는 자는 제외되어, 그들은 깨달아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깨달아 들어가지 못할 근기로써 그 반대인 유일하게 십신을 성취해야만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 때문에 불법의 큰 바다엔 신심(信心)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신심(信心) () 근원이요, 모든 공덕의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이란 삼세를 이어주고 무한한 우주로의 확장을 시켜주는 바탕입니다. 우선 내 자신의 진여불성의 자성을 믿고 그러한 불성자성은 이 우주의 모든 존재자가 다 진여법성의 나타남임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불성(佛性)이요, 우주의 존재들에 있어서는 법성진여입니다.-수선]

 

[“지관을 수순한다는 말은 모든 경계를 그치고 정관의 지에 따르는 것이다. 관관을 수순한다는 것은 인연관을 분별함으로써 정관의 관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아홉 가지 심주, 네 가지 혜행으로 수순한다.” 심주란 마음이 머무는 곳입니다. 지(止)를 하려면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 알아야 합니다.

선정의 단계를 살펴보면 “초선(初禪)에서는 각(覺)과 관(觀)으로써 욕계의 악을 떠나,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며, 말을 멸한다. 이선 (二禪)에서는 각(覺)과 관(觀)이 쉬고 마음의 평정을 취하여 정(靜)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데, 감각과 관찰이 멸한다.” 각(覺)이란 번뇌망상의 경계에 따라 분별된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관(觀)은 관찰, 관조함으로써 기본 원리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욕계에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항상 공존하나, 악한 마음이 좀 더 강해서, 우리는 분별에 의한 자기 이기에 따라 살아갑니다. 선정을 하면 이 악한 마음에서 떠나 기쁨과 즐거움 이 생깁니다. 고에서 벗어나 낙으로 가기 위해서 욕계의 악한 마음을 떠날 필요가 있습니다. 선정의 기쁨이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기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초선을 얻을 때 말을 멸한다는 것은 선정에 들면 말이 자연스럽게 없어 지는, 묵언이 됩니다.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갈 수록 오염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이 나와서 사선의 상태가 되면 견성입니다. 지혜가 열립니다. 이선에 들어오면 감각과 관찰이 멸합니다.

“삼선(三禪)에서는 공(空)에 머물러 즐거워함으로 제3선을 얻는데 3선을 얻을 때는 기쁨을 멸한다. 사선(四禪)에서는 기쁨도 즐거움도 괴로움도 멸하고 맑고 깨끗함이 있는 정념(淨念)을 통해 근본 자리에 들면 제4선을 얻는데, 4선일 때는 숨결이 멈춘 다.” 공에 머무른다는 것은 현상으로부터 벗어나 허공, 청정에 머무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무상과 무아를 철저하게 인식하게 되고 감정들이 전부 멸하게 됩니다. 사선은 확실하게 견성성불 하는 자리입니다. 여기서 끝없는 자비와 지혜가 샘솟는 것입니 다. 사선에 들면 숨결이 멈춥니다. 위대한 선사들을 보면 한 달 씩 선정에 들곤 합니다. 이것은 숨결이 멈추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동물들을 보면 동면을 하면 석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 고도 살 수 있습니다. 이것도 숨결이 멈추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숨결이 멈추는 것과 의식이 없는 것은 다릅니다. 전신을 통해 기를 받을 수 있고 기가 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공부나 수행이 어느 정도 된 사람이 가 능합니다. 일반 중생은 문을 통해 기가 나가고 들어옵니다. 보통은 기운이 머리 백회혈로 들어와서 발로 나갑니다. 들어오는 만큼 나가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욕심이란 나가는 것을 적게 내보내게 합니다. 기운이 고여 몸과 마음에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들어오는 만큼 내보내는 마음 상태가 되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사선을 통해 생기는 지혜가 이런 것입니다.

선정에는 앉는 자세, 복장, 손의 자세, 몸의 자세, 입의 모양, 눈의 자세, 호흡법, 사유(思惟)가 중요합니다.  공부를 익히기 위해서는 어떤 일정한 방법으로 익혀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정도 수많은 과정을 거치며 어느 정도 표준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호흡법은 입을 열고 기를 뱉어내는 심호흡을 한 두번 한 다음 좌정하는데 몸을 일곱 여덟 번 작게 시작하여 크게 흔들다가 조용히 멈추어서 올올단좌(兀兀端坐)가 됩니다. 호흡은 바람(風), 기운(氣), 헐떡거림, 호흡(息) 네 가지가 있는데, 바람은 소리가 나고 기운은 맺히고 정체하며 헐떡거림은 숨 쉬기가 자유롭지 못하고 호흡은 앞의 세 가지 장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흡 중에서도 헐떡거림에 빠지면 피로하고 기운을 쓰면 맺히고 바람은 산란한 마음을 일으키며 호흡은 고요해 집니다. 몸을 여러 번 작게 크게 흔들다가 멈추라고 하는 것은 몸을 꼿꼿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호흡은 네 가지가 있는데 잘 못하면 바람, 기운, 헐떡거림이 됩니다. 참선을 하면서 호흡법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호흡을 편안하고 안정되게 해야 생각이 안정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안정되면 깊은 곳으로 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고요해지면 평소에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리고 미세한 것들의 움직임을 알게 됩니다. 고요함이란 멍하니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호흡은 배꼽 아래 단전에까지 복식호흡을 합니다. 숨이 들어 갈 때에는 들어가는 숨을 생각하여 여실히 알고, 숨이 나갈 때는 숨이 나가는 것을 여실히 알며, 혹은 길고, 혹은 짧게 일체 입식( 入息)과 출식(出息)을 생각하여 여실히 알며, 휴식(休息), 수행의 입식과 출식을 생각하여 여실히 관(觀)합니다. 단전에 손을 대고 호흡을 쭉 들이 내쉬면 복식호흡이 됩니다. 이런 복식호흡을 생활화되면 평상시에도 조용히 호흡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항상 깨어있을 수 있게 됩니다. 산만하지 않고 집중이 됩니다. 앞에서 나온 설명이 바로 위빠사나에서 호흡을 통해 알아차림에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아홉 가지 심주는 내주(內住), 등주(等住), 안주(安住), 근주(近住), 조순(調順), 적정(寂靜), 최극적정(最極寂靜), 전주일취(專住 一趣), 등지(等持)입니다. 마지막 등지를 거치면 견성하게 됩니다. 
① 내주(內住)란 밖에 있는 일체의 반연하는 경계로부터 마음을 거두어 단속하여 안에다 두고 밖으로 산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주는 외부의 대상에 마음이 이끌리지 않는 상태를 말하며, 화두에 들면 외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주의 상태가 되면 ‘이뭣고’가 순일하게 잘 들리는 것입니다.
② 등주(等住)는 최초에 계박된 마음은 그 심성이 거칠게 움직이는 마음(육추)이어서 아직 두루 머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반연하는 바 경계에 대하여 상속방편과 집중방편으로 꺾어 미세하게 하여 두루 거두어 들여서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좀 더 깊이 ‘이뭣고?’가 들리는 상태입니다. 
③ 안주(安住)는 내주, 등주하는 마음을 놓쳐 밖으로 산란하기 때문에 또 다시 거두어 단속하여 내 마음안에 안치하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드는데 간혹 다른 곳으로 마음이 빠져나가면 이것을 다시 돌려놓는 것입니다. 다른 생각이 일어났을 때 이뭣고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 안주의 단계입니다. 
④ 근주(近住)는 마음을 안으로 머무르게 하여 이 마음이 밖에 머무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항상 마음에 ‘이뭣고?’가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바깥 경계에 이끌리지 않고 항상 화두에 머무는 단계입니다.
⑤ 조순(調順)은 색성향미촉의 오경과 탐진치의 삼독과 등의 갖가지의 상들이 근심거리가 되어 마음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순리대로 조화롭게 따르는 단계입니다. ‘이뭣고?’ 외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⑥ 적정(寂靜)은 욕, 에, 해 등의 나쁜 심사와 탐욕개등의 수번뇌가 마음을 요동케 하는 여러 가지 근심거리, 즉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오개를 덮어 적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로지 ‘이뭣 고?’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공부하면서 가장 안 좋은 것이 의심입니다. 자기 생각에 막혀 다른 소리를 듣지 않는 것입니다. 
⑦ 최극적정(最極寂靜)은 적정의 마음을 놓침으로 해서 나쁜 심사와 수번뇌가 잠시 일어나지만, 곧바로 토하는 것입니다. 다른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을 흐트리지 않고 ‘이뭣고?’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⑧ 전주일취(專住一趣)는 가행이 있고 용공이 있어서 부족함이 없고 간격이 없어 삼매가 상속하여 머무르는 것을 말합니다. 항상 ‘이뭣고?’의 삼매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끝없이 정진하여 공덕이 생겨 부족함이 없고, 간격 없이 끝없이 삼매에 머무는 것이 전주일취입니다. 오로지 하나에 머무는 것입니다. 
⑨ 등지(等持)는 자주 닦고 자주 익혀 많은 수습으로 인연을 삼기 때문에 가행도 없고 용공도 없게 되어 자연히 도에 들어가 는 것입니다. 선정 삼매에 들어 ‘이뭣고?’를 통하여 본래 성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전주일취가 계속되면 어느 순간 삼매에 들어 견성하게 됩니다. 
선정에 들면 네 가지 지혜가 저절로 생깁니다. 네 가지 혜행은 내심의 사마타에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법중에 바르게 생각 하여 판단하며, 가장 지극하게 생각하여 판단하며, 빠짐없이 두루 심사하며, 빠짐없이 두루 사찰하게 됩니다.
심주는 사마타를 하면서 생기는 아홉 가지 단계를 말한 것으로, 사마타를 하면 내 마음이 어떻게 되는가를 상세하게 설명 한 것입니다.-통섭불교]

⑸ 止觀門(지관문) - 진문(進門)

云何修行止觀門(운하수행지관문) 所言止者(소언지자)

어떻게 지관문을 수행해야 하는가? 말한 바 지=止라고 하는 것은 

謂止一切境界相(위지일체경계상) 隨順奢摩他觀義故(수순사마타관의고)

이른바 일체 경계의 현상=境界相(망분별)을 멈추는 것을 말하니, 사마타란 관의 뜻을 따르는=隨順하기 때문이다.

 

[奢摩他(사마타;samatha) : 만약 모든 보살이 청정한 원각을 깨달아 청정한 원각심으로써 고요함을 취하여 수행을 삼는다면 모든 망념들이 맑아짐으로 말미암아, 식이 번거롭게 움직임을 깨달아 고요한 지혜가 생겨나, 심신의 객진이 이로부터 영원히 사라진다. 곧 안으로 적정하고 편안한 마음을 낼 수 있다. 적정하므로 시방 세계 모든 여래심이 그 가운에 드러남이 거울 중의 그림자 같다. 《원각경》위덕자재보살장-물처럼바람처럼]

 

所言觀者(소언관자) 謂分別因緣生滅相(위분별인연생멸상)

말한 바 관이라는 것은, 이른바 인연으로 생멸하는 현상=因緣生滅相을 분별하는 것을 말하며,

隨順毘鉢舍那觀義故(수순비바사나관의고)

위빠사나=毘鉢舍那란 관찰의 뜻에 따르기 때문이다. 

 

[毘鉢舍那觀(비바사나관;vipasana) : 동적으로 지혜를 내어 만법을 관조하는 것.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함.

* 元曉 : 止一切境界相이란 앞서 분별함에 의해 모든 바깥 경계를 짓다가 이제는 각혜(覺慧)로써 바깥 경계의 상을 깨뜨리는 것이니, 경계상이 이미 그치면 분별할 바가 없기에 ‘지(止)’라고 하는 것이다.

分別因緣生滅相이란 생멸문에 의하여 법상(法相)을 관찰하기 때문에 분별한다고 말한 것이니, 이는 ≪유가론≫ 보살지에서 “이 중의 보살이 곧 모든 법에 분별할 바가 없으니, 이를 지(止)라 이름함을 알아야 할 것이요, 모든 법의 승의이취(勝義理趣) 및 모든 한량없는 안립이취(安立理趣)에 대한 세속의 묘지(妙智)를 관(觀)이라 이름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 憨山奢摩他란 그 의미가 공관(空觀)에 해당한다. 지의 방편문을 닦으면서 공관의 의미를 수순한다고 말한 의도는 지에 상즉한 관[卽止之觀]을 드러낸 것인데, 그 바른 의도는 관에 있는 것이다. 즉, 지방편문을 따라서 관으로 들어감을 말한다. 천태학에서는 지관을 삼지와 삼관(三止三觀)으로 수립하였는데, 삼지 가운데 첫째는 체진지(體眞止)이다. 이는 삼관에서 공관에 해당한다.…所言觀者 謂分別因緣生滅相 隨順毘鉢舍那觀義故라고 한 것은 삼지삼관에서 두 번째인 가관(假觀)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식이변분별지(息二邊分別止)인데 이는 삼관에서 중도관에 해당한다.…지금 여기에서는 지와 관을 합하여 쌍으로 수행하여 중도관을 갖춘 삼관의 이치를 분명하게 말하진 않았으나 그 의미가 실제로 빠짐없이 만족한다.

* 지운 : 위빠사나란 법(法)을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법이란 결과가 있는 원인을 말하는 것으로 그 이치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혜를 이룰 수 있다. 사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고 사유하며, 또는 사유하며 관찰한다. 예를 들면 분노나 성냄 같은 것은 단순히 믿음으로써 해결되지 않는다. 그 원인을 사유하여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를 지혜라고 한다.]

 

云何隨順(운하수순) 以此二義漸漸修習(이차이의점점수습)

어떻게 수순해야 하는가? 이는 두 가지의 뜻으로써 점차 닦아 익혀서=修習하여 

不相捨離(불상사리) 雙現前故(쌍현전고)

서로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 두 가지=雙으로 목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수행오문(修行五門) 중 시(施), 계(戒), 인(忍), 진(進)의 네 가지 수행방법을 제시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내면적 수행인 지관문(止觀門)에 대하여 설하는 것이다. 지관문은 욱바라밀(六波羅蜜) 중 선(禪)바라밀과 반야(般若)바라밀과 같은 것으로서, 여기서는 지관문으로 이를 통합하고 있다.
지(止)는 마음을 멈추는 것으로서, 마음의 통일 즉 선(禪)에 해당되고, 관(觀)은 혜(慧)의 성격이 있으나, 관(觀)에도 마음을 집중하는 성격이 있으므로, 이 둘을 기계적으로 선(禪)과 혜(慧)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론은「지관문(止觀門)을 어떻게 수행하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지(止)는 일체의 경계상(境界相)을 멈추는 것」이라고 설한다. 일체의 경계상은 우리 범부에 있어 망분별(妄分別)이다. 이 망분별로 인하여 일체의 외계가 그대로 실재한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객관적 존재인 외계는 모두가 유심소작(唯心所作)이므로 우리는 망심으로 보는 외계의 상을 떠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지(止)이다. 객관을 떠나면 주관의 망분별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止)라는 것은「사마타관(奢摩他觀)에 수순하는 뜻」이라고 설하는 것은, 사마타관의 방법을 따라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마타(Samatha)는 지(止)의 원어로서, 한문 사마타(奢摩他)는 그 원어의 음역이다.
신역에는 샤마타라는 원어(原語)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지(止)라고 의역(意譯)하여「이것은 지(止)의 뜻이다(是止義).」라고 간단히 말하고 있다.
지(止)는 사마타관에「수순한다」고 수순(隨順)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지(止)만으로는 불완전하고 관(觀)과 함께 할 때만이 각각의 힘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므로「수순한다」고 말한 것이라고 법장의 의기(義記)에서 밝히고 있다.
다음 관(觀)은「인연생멸(因緣生滅)의 상(相)을 분별하여 비파사나(毗針舍那)관에 수순하는 뜻」이라고 설한다.
비파사나는 원어 "비파슈야나"의 음역으로 관(觀), 혜(慧), 정견(定見) 등으로 번역되며, 법상(法相)을 관찰하는 것이다.
인연생멸(因緣生滅)이라 함은 생멸문에서 제법의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법의 시간적 존재는 생멸이다. 그러나 그 생멸에는 연기(緣起)의 이법(理法)이 관통하고 있으므로 제법의 생멸속에서 연기의 이치를 보는 것이며, 이것을 인연생멸의 상(相)이라 하는 것이다.

인연의 상을 분별한다는「분별(分別)」은 여기서 망분별(妄分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나누어 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비파사나관에 수순한다」는 것은 관(觀)의 본 뜻에 수순한다는 것으로서, 인연생멸의 상을 분별하는 것이며,「수순」이라는 용어 역시 지(止)와 함께 할 때만이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므로 수순(隨順)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관(觀)의 깊은 곳에는 지(止)가 있다. 지(止)는 일체의 산란한 생각을 멈추고 일체는 바로 진여(眞如)라는 이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止)는 진여문에서 모든 경계의 상을 멈추고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에 이르는 것이다. 이 근본무분별지 속에서 생멸의 상을 분별하는 이치를 아는 것이 바로 관(觀)이다.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은 일심(一心)의 양면이므로 숙달되면 지(止)와 관(觀)은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본론에서는 이를「수순」이라 설명하고, 이 두 가지 뜻을 점점 닦아 나아가면 서로 떨어져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앞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止)는 육바라밀에서 정(定)에 해당되고 관(觀)은 혜(慧)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정(定)도 지관(止觀)에 통하고 혜(慧) 또한 지관에 통하는 것이므로, 이를 본론에서는 나누지 아니하고 통합하여 지관(止觀)을 설하는 것이다.
즉, 지관문(止觀門)은 지(止)와 관(觀)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止)는 일체의 어지러운 생각을 멈추고 마음이 적정(寂靜)에 귀일하는 것이며,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를 얻는 인(因)이 된다. 이것에 의하여 진여문(眞如門)에 들어가는 것이다. 관(觀)은 진리를 관찰하는 것으로서 생멸문(生滅門)에 들어가는 지(智)로서 후득지(後得智)를 얻는 인(因)이 된다.
이상은 지관문(止觀門)을 총체적으로 설한 것이며 이하에서는 지(止)와 관(觀)을 각각 나누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금강사]

 

[여기에서는 지관의 의미와 쌍수(雙修)할 것을 논하였습니다. 지(止,  samatha)란 만법유식(萬法唯識)의 이치를 깨달은 지혜로써 외부적인 육진(六塵)의 일체 경계를 분별하는 마음의 양태를 그쳐서 무심(無心)해진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마타의 공관(空觀)인 지(止)를 수순하여 만법유식의 도리를 관찰하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관(觀, Vipasyana)이란 인연으로 생멸하는 양상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빠샤나의 가관(假觀)을 수순하여 생멸하는 제법의 인연은 환유(幻有)임을 관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지관을 수순해야 하느냐 하면 지(止)와 관(觀)은 차츰차츰 수습하여 서로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 지(止)와 관(觀)이 쌍으로 목전에 나타난다는 것으로, 이러한 수행은 참선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지(止)에만 중점을 두고 수행하면 혼침(昏沈, 침울함)에 빠지기 쉽고, 관(觀)에만 중점을 두고 수행하면 도거(掉擧, 들뜸)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지관(止觀)을 쌍수(雙修)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바라밀 가운데 선정과 반야를 마땅히 정(定)과 혜(慧)의 두 문으로 나누어서 말해야 하는데도 지금은 선정인 정(定)을 지(止), 반야의 혜(慧)를 관(觀)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의 인지(因地)에 있어선 지관(止觀)이고, 과위(果位)에 있어선 정혜(定慧)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지와 관을 쌍으로 닦고 함께 운행하는 인지의 수행단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와 관을 하나의 방편문으로 묶은 것입니다. 사마타의 의미를 다시 말한다면 그 의미가 공관(空觀)에 해당하겠습니다. 지(止)의 방편문을 닦으면서 공관의 의미를 수순한다고 말한 의도는 지(止)에 상즉(相卽)한 관(觀)이란 즉지지관(卽止之觀)을 드러낸 것인데, 그 바른 의도는 관에 있습니다. 즉 지(止)를 통해 관(觀)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태학(天台學)에선 지관(止觀)을 삼지(三止)와 삼관(三觀)으로 수립하였습니다. 먼저 지(止)란 삼지(三止) 가운데 첫째는 체진지(體眞止)입니다. 이는 삼관에서 공관(空觀)에 해당하며, 그 의미는 목전의 제법이 진여성공(眞如性空)인 이치를 체득하여 거기에 계합하면 모든 생멸의 인연이 스스로 고요해져 일심은 진여의 이치를 환하게 관조하면서 일진법계로서의 만법이 여여(如如)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즉지지관(卽止之觀)입니다. 즉 망상의 분별은 목전에 전개된 만법을 마주하여 일어납니다. 그런데 지금 만법은 유식일 뿐이란 도리를 깨달은 지혜로써 외진(外塵)의 만법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였습니다. 일심으로 생멸하는 외진의 모습에 대한 분별망상이 그치고 나면 분별할 대상이 없는 지(止)입니다. 이것이 체진지(體眞止), 즉 만법의 자체인 진여성공을 체득하여 모든 번뇌가 저절로 고요한 것을 체득한 것입니다. 이렇게 번뇌가 고요한 자리에 나아가서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인연으로 생멸하는 모든 현상을 분별하는 것이 관(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즉지지관(卽止之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타의 공관(空觀)의 의미를 수순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여문을 관찰하는 것인데 이를 통해 근본실지를 이룹니다.

관(觀)이란 인연으로 생멸하는 양상을 분별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위빠사나란 관찰의 의미를 수순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천태의 지관수행의 이론인 삼지삼관에서 두 번째인 방편수연지(方便隨緣止)에 해당하겠습니다. 이는 삼관 가운데서 가관(假觀)에 해당하며, 그 의미는 일심과 세계는 둘이 아닌 하나의 이치로 항상 여여(如如)하긴 하나 다시 일심으로 인연생멸하는 환영같이 존재는 제법을 관찰하는 것이 방해되지 않습니다. 환유인 제법은 자성이 없이 생멸하는 인연관계이므로, 그것은 있다 해도 정말로 있는 것은 아니어서 그 자성은 항상 스스로 공적한 일심진여이기 때문에 제법의 인연을 관찰하면서 육도만행을 버리지 않는다고 관(觀)해도 일심중도는 항상 한가한 적정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지와 별개가 아니라 관(觀)에 상즉(相卽)한 지(止)라는 즉관지지(卽觀之止)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빠사나가 관의 의미를 따르게 되는데, 이는 생멸문을 관찰하여 수행한 후에 얻은 권지(權智)를 성취한 것입니다.

세 번째 식이변분별지(息二邊分別止), 이는 삼관에서 중도관(中道觀)에 해당하겠습니다. 그 의미는 진여성공에 거처하면서도 육도만행을 버리지 않고, 가유(假有)의 세계를 거닐면서도 일심중도가 청정하여 공(空)과 유(有)의 이변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공(性空)의 이치와 가유(假有)의 현상이 일시에 나타나 이(理)와 사(事) 둘이 아닌 일심중도의 이치가 환하여 본체와 현상을 일시에 조감합니다. 이는 공과 유를 융합하여 일심중도에 오묘하게 계합(契合)한 것이기 때문에 삼지(三止)를 따라서 삼관(三觀)을 성취합니다. 그렇다면 삼관과 일심이 본래 차별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는 지와 관을 합하여 밝히고 쌍으로 수행하여, 쌍차쌍조(雙遮雙照)하는 중도관(中道觀)을 갖춘 삼관(三觀)의 이치를 분명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 이치가 실제로 빠짐없이 만족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공관과 가관의 두 문을 완전하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 가운데서 일심중도관이 스스로 밝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승으로 향해서 나가는 중요한 문입니다. 그 때문에 여기의 오종방편문 가운데 앞의 사종방편문은 지관문을 보조하여 일심중도를 성취시킨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논서의 근본 의도는 지관 하나의 방편문에 초점을 두었습니다.-수선]

 

[우리는 불각의 세계에서 오문수행을 통해 각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진여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오문 수행 가운데 마지막 지관문(止觀門)은 육바라밀 가운데 선정과 지혜에 해당합니다. 선정과 지혜는 하나로서, 선정을 통해 지혜를 얻고, 지혜를 통해 선정에 들 수 있습니다.

지(止), 사마타란,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삶, 생각을 한번 그쳐 보자는 것입니다. 움직이던 것을 멈추었을 때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 가서 이해할 수 없던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이 생을 현생이라 하고 태어나기 전 삶을 전생이라 하고 죽은 뒤 다시 태어나는 삶을 내생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구분되어 있지 않고 연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현생만 인식하고 알지만, 전생과 내생은 무언가의 원인에 의해 모를 뿐입니다. 움직일 때는 고요하게 멈춰있는 원래 모습들이 안 보입 니다. 사마타관이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경계(번뇌망상)를 멈출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다른 생각은 그치고 화두에 모든 생각을 모으는, 즉 하나의 일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이르는 핵심 중 하나입니다.

인연의 생멸상이란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소멸하고 어떤 일이 어떤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살피는 것이 위빠사나, (觀)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왜 그런 일이 벌어졌 을까하고 원인을 살펴보는, 이러한 행위가 바로 지혜가 됩니다. 생각을 그치고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위빠사나입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 ‘왜 이 생에서 나는 이렇게 사는가?’ 그 원인을 찾아가는 것이 위빠사나가 됩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부처의 세계, 진여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수순. 어떻게 수순하는가? 공부에는 특별한 왕도가 없습니다. 열심히 꾸준히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삶 속에서 꾸준히 닦고 익히는 것이 바로 수순입니다. 삶은 습(습관)입니다. 부처가 되는 것도 지옥에 가는 것도 나의 습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부지런히 노력하고 익히는 것에 따라 부처가 되거나 지옥에 가기도 합니다. 두 가지 즉, 지와 관을 수순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고 부처 가 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생기면 나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의 관계를 알게 되고, 그러면 이기적인 마음이 사라져 저절로 자비가 베풀어지고 지계가 되고 인욕, 정진이 됩니다. 그리고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을 계속하게 되면 지와 관을 터득합니다. 

지관이 세상에서 적용되는 것은 명상입니다. 명상은 지관을 현대화시킨 것입니다. 이런 명상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집중명상(Concentrationn Meditation)과 통찰명상(Insight Meditation)이 있습니다. 집중명상은 지이고 통찰명상은 관입니다. 

한국의 불자는 대부분 특별한 날에 절에 가서 기도를 하지만 서구사회에서는 불교가 명상, 수행의 형태로 전파, 실행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핵심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적용되지만 입문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일단 입문해야 스스로 깊은 경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관도 그런 것입니다.

틱낫한 스님은 세계에 명상을 전파하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 다. 그는 프랑스 남부 보르도의 플럼빌리지에 명상센터를 열었 고 ‘명상은 휴식과 예술이다.’고 말하며 걷기 명상, 명상 수행을 전파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수많은 씨앗이 마음에 있습니다. 어떤 씨앗은 꽃이 되고 열매를 맺어내지만 어떤 씨앗은 마음을 병들게 만듭니다. 씨앗 하나가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맨 처음부터 잘 솎아내야 좋은 꽃이 핍니다.” 명상이야말로 ‘좋은 씨앗에 물주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을 밭에 비유하여, 그 밭에는 사랑, 미움, 분노, 희망, 열정, 자비, 폭력 등의 다양한 씨앗이 섞여 있어서 부정적인 씨앗을 솎아내고 긍정적인 씨앗에 물을 주는 과정이 명상이라고 했습니다.  

위빠사나(Vipassana)의 위(Vi)는 접두어로 ‘여러가지’라는 뜻으로, 여러 가지란 제법무아의 제법, 제행무상의 제행, 일체개고의 일체를 가리킵니다. 빠(Pa)란 자세히, 면밀히란 뜻이고 사나(Ssana)란 꿰뚫어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대념처경 에서는 “모든 삶의 깨끗함을 위하여,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정신적인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해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하여 네 곳에 마음을 챙겨 관찰하라.” 위빠사나란 여러 가지 일어난 일들을 ‘왜 일어났는가?’ 생각하며 자세히 꿰뚫어 관찰하는 것입니다. 피상적이 아닌 원인을 꿰뚫어 살피는 것입니다. 관찰하고 생각하다보면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것이 통찰과 집중입니다. 알아차리게 되면 진리에 깨어있기 때문에 무지, 아집에 물들지 않습니다. 

송나라 청원 유신 선사의 유명한 말을 성철 스님이 말씀하셔서 더 유명해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입니다. 여기에는 뒷말이 있습니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그대로 산이요 물은 그대로 물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뿐인데 주체(나)에 따라서 인식 되어질 뿐입니다. 나의 육신(身)과 육신의 느낌(受)과 대상에 대한 생각(心)과 대상(法)을 모두 인식할 수 있는 것, 즉 신수심법을 모두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안이비설신의 가운데 비입니다. 눈은 보기만 할 뿐이고 귀는 듣기만 할 뿐이고 혀는 맛을 볼 뿐이고 몸은 느끼기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코를 통해 숨을 뱉고 숨 을 들이킬 수 있습니다.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은 호흡법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경전입니다. 안반수의경은 아나파나사티 (anapanasati)라고도 하는데 아나(ana)가 들숨이란 뜻이고 아파나(apana)가 날숨이란 뜻이고 사티(sati)가 의식의 집중이란 뜻입니다. 들숨과 날숨을 통해 의식을 집중시켜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것이 안반수의경입니다. 

호흡수련의 단계에는 수, 상수, 지, 관, 환, 정이 있습니다. 수(數)란 들숨과 날숨의 수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상수(相隨)란 호흡에 따라 의식과 호흡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지(止)란 마음이 호흡을 의식하지 않고 고요히 안정된 것입니다. 관(觀)이란 사물을 관찰하게 되는 정신 집중의 상태입니다. 환(還)이란 다시 고요한 자기의 주체로 돌아오는 상태입니다. 정(淨)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세계입니다. 수를 통해 모든 것을 일정하게 만들어 숫자를 잊어버리고 의식과 호흡이 하나가 됩니다. 그 후 지관의 상태가 됩니다. 지의 상태가 되어야 제대로 관을 할 수 있습니다. 고요히 안정된 상태에서 사물의 본질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환원되어 자기에게 되돌아오면 자기 관조가 됩니다. 결국 견성성불하게 되어 청정한 세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월지국의 사기유국에 머무르시며 안반수의를 90일 동안 행하셨습니다. 다시 90일을 홀로 앉아 생각을 가다 듬어 온 세상의 인간과 날아다니는 새와 굼틀대는 동물을 구제하고자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안반수의를 통해 모든 존재의 본성을 일깨워주고 구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들숨(안)과 날숨(반). 안은 생명의 창조가 되고 반은 그치는 것이 됩니다. 수의는 잘못되지 않게 하는 것이니 그것은 되어진 그대로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보호한다는 것은 일체의 것이 잘 못되지 않도록 두루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의식이 한 곳에 쉬고 있는 것이니, 또한 마음의 본래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생과 멸의 깨달음에서 안은 생하는 것이 되고, 반은 멸하는 것이 되며, 마음은 인연이 되고 수는 도가 됩니다. 수식과 정신 집중에서 안은 수를 헤아림이 되고, 반은 서로 따름이 되며, 수의는 그치는 것입니다. 정신 집중해서 그치게 됩니다. 

합리적인 호흡에서 안은 도를 생각하는 것이 되고, 반은 맺힘을 푸는 것이 되며, 수의는 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안은 죄를 피하는 것이 되고, 반은 죄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되고, 수의는 도가 됩니다. 수의는 바로 견성하는 상태로 가는 것입니다. 

  “삼매를 닦을 지어다.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을지어다. 비구들이여, 삼매에 든 비구는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린다.(pajanati)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어떠한가? 눈(眼)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시각 대상(色)에 대해 무상 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눈의 의식(眼識)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눈의 접촉(觸)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눈의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즐겁거나 고통스럽거나 즐겁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느낌(受)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있는 그대로’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대상의 무아와 무상과 본성과 같은 모든 것을 보는 것입니다. 삼매에 들면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니까 무지에서 벗어나고 아집을 깨트리고 공덕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념처관에서 신(身) 몸의 현상을 관찰, 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혐오감에서 벗어나라. 수(受) 느낌의 현상을 관찰, 느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혐오감에서 벗어나라. 심(心) 마음의 현상을 관찰, 마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혐오감에서 벗어나라. 법(法) 법의 현상을 관찰, 법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혐오감에서 벗어나라 입니다. 지관을 통해서 끊임없이 사념처관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지관해야 하느냐?’라고 할 때 생각할 네 가지입니다.-통섭불교]

 ⑶ 忍門(인문)

云何修行忍門(운하수행인문)

어떻게 인욕문=忍門을 수행해야 하는가?

所謂應忍他人之惱(소위응인타인지뇌) 心不懷報(심불회보)

이른바 마땅히 다른 사람이 뇌란시키는=번뇌를 참고, 보복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으며,

亦當忍於利衰毁譽稱譏苦樂等法故(역당인어리쇠훼예칭기고락등법고)

또한 마땅히 이익과 쇠잔함=利衰과 훼방함과 찬탄함=毁譽과 칭찬함과 나무람=稱譏과 괴로움과 즐거움=苦樂 등의 법도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利衰(이쇠)= 재물의 이익과 손해. 衰 쇠할 쇠,

毁譽(훼예)= 뒤에서 비방함과 칭찬함. 毁 헐 훼, 譽 기릴 예, 명예 예, 

稱譏(칭기)= 직접적인 칭찬과 나무람.  稱 일컬을 칭, 譏 나무랄 기, 비웃을 기

苦樂(고락)= 즐거움과 괴로움.[

 

[憨山 : 위의 역경과 순경을 합하여 팔풍(八風)이라고 말한다. 이 팔풍의 경계가 중생의 심해(心海)를 얽어매어 탐진치 삼독의 번뇌를 일으킨다.… 인(忍)에는 생인(生忍), 무생인(無生忍), 적멸인(寂滅忍)이 있으며, 여기에서는 중생이 역순의 경계를 참아야 하는 생인이다.-물처럼바람처럼]

 

[인문(忍門)은 인욕(忍辱)을 행하는 것을 말하며, 인(忍)에는 타불요익인(他不饒益忍)과 안수인(安受忍)의 2 가지가 있다. 타불요익인(他不饒益忍)은 다른 사람이 가하는 불이익을 참는 것이며, 안수인(安受忍)은 역경(逆境)이나 순경(順境)을 막론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타인이 괴롭히는 것을 참고 마음에 원수 갚을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은 타불요익인(他不饒益忍)이며, 세간의 ‘이익이나 손해, 명에나 헐뜯음, 칭찬이나 비방, 고통이나 즐거움’ 등 8가지의 역경이나 순경에도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안수인(安受忍)에 해당외며, 이를 세팔법(世八法) 또는 순역팔풍(順逆八風)이라고도 한다.-전종식]

 

[인욕(忍辱)하는 방편문을 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주 대하는 세계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이 있는데, 이 모두를 참고 견디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이 나를 심란하게 하고 어지럽게 하는 것을 참는 것은 참기 어려운 역경이며, 이익·쇠잔 등 여덟 가지는 역경과 순경 어느 쪽에도 다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즉, 재물을 얻는 것을 이익, 재물을 잃는 것을 쇠잔, 다른 사람의 악함에 공격하는 것을 훼방이라고 하고, 자기의 착한 점에 담론하는 것을 찬탄이라 하며, 얼굴을 마주하고 그의 착한 점을 드날리는 것을 칭찬이라고 하고, 말로써 그의 악한 점을 풍자하는 것을 나무란다고 하며, 자기의 육신을 핍박함이 괴로움이고, 자기의 의식에 알맞은 것을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이상의 역경과 순경을 합하여 모두 팔풍(八風)이라고 합니다. 이 팔풍의 경계가 중생의 마음바다를 얽어매어 탐하고, 성내며 어리석어 번뇌의 파랑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참을 수 있다면 팔풍의 역순경계를 따라서 일심이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忍)에 세 종류가 있는데 생인(生忍)·무생인(無生忍)·적멸인(寂滅忍)입니다. 즉, 중생이 역순의 경계를 참아야 하는 것이 생인(生忍)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남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무생인(無生忍)이고, 사선(四禪)·팔정(八定)·구차제정(九次第定)의 수행에서 얻어진 열반이 적멸인(寂滅忍)입니다.-수선]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은 인욕으로써 삶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인욕바라밀은 다른 사람의 모욕을 잘 참아 보복할 생각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이로움, 쇠퇴함, 명예로움, 비방받음, 칭찬받음, 조롱받음, 괴로움, 즐거움 등을 잘 참는 것으로, 육체적, 정신적 모든 고통을 참아 이겨내는 것입니다. 인욕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내원해인(耐怨害忍)으로 노여움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아서 자기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며, 둘째 안수고인(安受苦忍)은 분해하고 원망하지 않는다면 남을 괴롭히지 않음이 될 것이며셋째 관찰법인(觀察法忍)은 관계를 바로 관찰하여 나와 남을 평화롭게 함 입니다.<배보적경> 진리를 안다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관계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관찰을 통하여 바로 알게 되면 나도 편안하고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욕은 만복의 근원이다. 사람이 제 마음을 이기지 못하면서 도리어 남의 마음을 이기려 해서야 될 것인가. 제 마음을 이기지 못하면 진리를 알지 못하며, 불도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제 마음을 이겨 노함을 제거하면 만복이 몸을 따르게 된다.<육바라밀경>” 

인욕의 10가지 작용이 있다. 첫째는 아와 아소의 공함을 관찰함이다. 둘째는 교만을 제거함이다. 셋째 남이 악한 일을 해도 보복하지 않음이다. 넷째 자비를 닦음이다. 다섯째 마음이 방일하지 않음이다. 여섯째 노여움을 끊음이다. 일곱째 기갈, 고락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여덟째 지혜를 수행함이다. 아홉째 종성을 생각하지 않음이다. 열째 무상함을 관찰함이다.” 

인욕의 10가지 이익. 첫째 불도 능히 태우지 못한다. 둘째 칼도 능히 베지 못한다. 셋째 독도 능히 해치지 못한다. 넷째 물도 능히 떠내려가게 하지 못한다. 다섯째 신장들의 보호를 받는다. 여섯째 신상이 훌륭해진다. 일곱째 모든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 여덟째 원하는 바에 따라 하늘에 태어난다. 아홉째 밤낮으로 항상 평안하다. 열번째 몸과 마음에 기쁨이 떠나지 않는다.<월등 삼매경>”  우리의 이기심, 즉 ‘나’라는 생 각이 인욕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내 것이 맞아야 되고 원하는 대로 되어야 되니까 못 참는 것입니다. -통섭불교]

 

⑷ 進門(진문)

云何修行進門(운하수행진문)

어떻게 정진문=進門을 닦아야 하는가?

所謂於諸善事(소위어제선사) 心不懈退(심불해퇴) 立志堅强(입지견강) 

이른바 모든 좋은 일에 마음이 게을러 물러남이 없으며, 뜻을 굳고 강하게 세우며,  

遠離怯弱(원리겁약) 當念過去久遠已來(당념과거구원이래)

겁내거나 약한 마음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 구원한 시간 이래로 

虛受一切身心大苦(허수일체신심대고) 無有利益(무유리익)

일체 신심의 큰 고통을 부질없이 받아들이면서 이익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며, (잊지 않으며) 

是故應勤修諸功德(시고응근수제공덕) 自利利他(자리리타) 速離衆苦(속리중고)

그러므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면서 모든 괴로움을 신속히 여의어야만 하며, 

復次若人雖修行信心(부차약인수수행신심) 以從先世來(이종선세래)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을 수행하긴 하나 먼저 세상으로부터 

多有重罪惡業障故(다유중죄악업장고) 爲魔邪諸鬼之所惱亂(위마사제귀지소뇌란)

무거운 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사악한 마군과 귀신에 의한 번뇌와 어지럽힘=惱亂을 당하거나,

 

[지운 : 신심이 있어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이러한 것이 일어나면 다음 세 가지를 하면 된다. ① 계율을 지킴. ② 다라니를 외움. ③ 기도를 함.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내적 번뇌를 제거할 수 없다. 내적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

 

['기신론'에서는 정진노력을 세 가지 방면에서 다루고 있다.
첫째는 선(善)을 향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나태해지거나 후퇴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 「於諸善事 心不懈退 온갖 선한 일에 있어서 마음이 해퇴(懈退)하여서는 안된다」 
둘째는 뜻을 세움이 확고하여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여도 겁내거나 나약해져서는 안된다는 것. →「立志堅强 遠離怯弱 뜻을 세워 견강케하고 겁약(怯弱)함을 멀리 떠나야 한다」
셋째는 과거의 구원한 세월 동안 정진수행 부족으로 헛되게 심신(心身)의 큰 고통을 받아 무익한 세월이 흘렀음을 이해하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모든 공덕을 닦아야 한다는 것 → 이를 본론에서는「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 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과거 구원이래 헛되이 일체신심(身心)의 큰 고통을 받아 이익이 없었음을 염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온갖 공덕을 근수하여, 자리 이타로 속히 온갖 고통을 떠나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를 3가지로 요약하면 정진하는 마음이 나태해져서는 안된다. 정진을 겁내서는 안된다. 정진이 부족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진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는 원시불교의 팔정도(八正道)에서도 여섯 번째에 정정진(正精進)을 두고 사정근(四正勤)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정근(四正勤)은 아직 생기지 않은 선(善)은 생기도록 정진 노력하는 것이고, 이미 생긴 선은 그것이 멸하지 않도록 정진 노력하는 것이며, 아직 생기지 않은 악(惡)은 생기지 않도록 정진 노력하는 것이고, 이미 생긴 악은 속히 그것을 멸하도록 정진 노력하는 것이다. 「기신론」에서는 이를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보살행에 중점을 두어, 그 위에서 온갖 공덕을 쌓아 속히 온갖 고통에서 멀리 떠나도록 설하고 있다.]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혹위세간사무종종견전) 或爲病苦所惱(혹위병고소뇌)

혹은 세간의 사무=일들에 갖가지로 이끌려 얽매이기도 하며, 혹은 병고로 인해 근심하는 바가 되며, 

有如是等衆多障碍(유여시등중다장애) 是故應當勇猛精勤(시고응당용맹정근) 

이러한 등등의 여러 가지 많은 장애가 있으므로, 응당 용맹하게 부지런히 정진하여야 하며,

纏(전) 얽히다. 묶다.

晝夜六時禮諸佛(주야륙시예제불) 誠心懺悔(성심참회) 勸請隨喜(권청수희) 

밤낮 육시에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면서 성심으로 참회하고 권청하며 따라서 기뻐하고

廻向菩提(회향보리) 當不休廢(당불휴폐) 得免諸障善根增長故(득면제장선근증장고)

깨달음=菩提에 회향하여, 마땅히 쉬거나 그만둠=廢하지 않아야 하나니, 모든 장애을 면하고 선근이 더욱 자라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晝夜六時(주야육시) : 하루를 여섯으로 나눈 것, 신조(晨朝), 일중(日中), 일몰(日沒), 초야(初夜), 중야(中夜), 후야(後夜).

* 용맹정진 : 용맹정진한다고 해서 몸에 무리가 가도록 하라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중도를 말씀하셨으니, 쾌락에 떨어지지 말고 고행에 치우치지도 말라고 하셨다. 너무 급하지도 말고 게으르지도 말아야 한다.

* 勸請隨喜(권청수희) : 법을 청하여 듣는 것을 권청이라고 하고, 남의 좋은 일을 따라 기뻐하는 것을 수희라고 한다.

* 元曉 : 禮諸佛 이것이 모든 장애를 제거하는 방편을 전체적으로 밝힌 것이니, 마치 사람이 빚을 졌을 때 왕에게 의지하여 붙으면 채주(債主)가 어찌할 수 없는 것과 같아서 이와 같이 수행하는 사람도 모든 부처에게 예배하면 모든 부처의 보호를 받아 모든 장애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 元曉 : 네 가지 장애가 있으니, ① 나쁜 업으로 인한 장애인데 이는 참회를 통해 없앤다. ② 바른 법을 헐뜯는 장애가 있으니 이는 법을 청하여 듣는 것으로 없앤다. ③ 다른 사람의 훌륭한 점을 시기하는 장애가 있으니 이는 따라서 함께 기뻐함으로써 없앤다. ④ 삼계의 괴로움을 모르고 집착하는 장애가 있으니 이는 공덕을 세워 회향함으로써 없앤다.]

 

[이상에서 시(施), 계(戒), 인(忍), 진(進) 등 네 문을 설하였으므로 다음은 지관문(止觀門)을 설하는 차례이지만, 그에 앞서 장애를 제거하는 방편을 설하고 있다.
장애를 제거하는 방편(除障方便), 즉 제장방편(除障方便)은 시(施), 계(戒), 인(忍), 진(進) 모두와 지관문(止觀門)에도 관계가 있지만, 이들 장애를 제거하는 방편은 정진(精進)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 방편을 진문(進門)속에 넣어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 속에는 전세(前世)의 업장(業障)이라는 것이 있다.
이와 같은 과거의 악업(惡業)은 수행의 장애가 되어, 수행에 지장을 준다. 그러므로 그러한 장해(障害)를 끊기 위해서는 가일층 정진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효는 예배(禮拜), 참회(懺悔), 권청(勸請), 수희(隨喜), 회향(廻向)의 다섯 가지 수행을 장애를 제거하는 방편이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禮拜諸佛者, 此總明除障方便, 제불에게 예배하는 것은 온갖 장애를 제거하는 총체적 방편을 밝히는 것이고,
懺悔以下, 別除四障, 참회 이하는 네 가지 장애를 개별적으로 제거하는 방편으로서
諸惡業障, 懺悔除滅, 온갖 악업장은 참회로 제멸하는 것이며,
誹謗正法, 勸請滅除, 정법을 비방하는 장애는 권청으로 멸제하는 것이고,
嫉妬他勝, 隨喜對治, 남이 뛰어남을 질투하는 장애는 수희로 치유하는 것이며,
樂著三有, 廻向對治, 삼유(三有) 윤회의 생존을 바라는 장애는 회향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장애는 수행자가 선행을 일으킬 수 없어, 불도에 나아갈 수 없는 것이므로 사행(四行)으로 이를 치유하는 것이다. 전세의 업장(業障)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정진(精進)에 의하여 이를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며, 그 방편이 여기에서 말하는 예불, 참회, 권청, 수희, 회향 등의 행법(行法)이다.]

 

[번뇌의 장애와 죄없이 무거운 중생의 근기를 대치하기 위하여 장애를 제거하는 방편을 제시하였습니다. 또 "예불"은 세간에서 가장 수승한 분에게 귀의하여 부처님 위신력의 가호를 청한 것인데, 이는 장애를 제거하는 총체적인 방편의 양태입니다. 즉, "성심"의 다음부터는 네 가지 장애를 따로따로 제거한 양태입니다. 첫째 "참회"는 악업의 장애를 제거함이며, 둘째 법문을 청하는 "권청"은 법을 비방하는 장애를 제거함이며, 셋째 남의 착한 공덕을 따라서 기뻐하는 "수희"는 상대방의 훌륭한 점을 질투하는 장애를 제거함이며, 넷째 이상의 정진에서 얻은 모든 공덕을 "보리로 회향함"은 삼계(三界)의 이십오유(二十五有)를 즐기는 장애를 제거한 것이며, "쉬거나 폐지하지 않음"은 이상의 장애를 대치하는 주관을 총체적으로 결론지었고, "모든 장애를 면한다"함은 대치해야 할 대상인 장애를 총체적으로 결론지은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장애 때문에 수행인이 선행을 발기하지 못하여 보리도로 향해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네 가지 장애를 끝까지 다스리면 선근이 더욱 자라납니다.]

 

[어떻게 정진문=進門을 수행하는가?” 정진은 평소보다 열심히 하는 것, 좀더 집중하는 것입니다.

정진은 공덕을 부지런히 닦는 것입니다. 이 생에 아무리 잘 살고 싶어도 안되는 사람들은 닦아놓은 공덕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내 그릇만큼, 베푼 만큼 복과 돈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내가 다른 생명들을 위해 긍정적인 마음을 낼 수 있는 것으로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겁약이란 마음이 약해서 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입니 다. 무지와 아집에 의해 끊임없이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 오랜 세월 받아온 고통이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들 안에는 선한 업과 불선한 업들이 있습니다. 정진을 통해 이런 업장이나 죄악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정진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첫째 피갑정진(被甲精進), 둘째 가행정진(加行精進), 셋째 유정들을 요익(饒益)케하는 가행정진입니다. 보통 정진을 하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게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일반 중 생들이 하는 정진은 피갑정진과 가행정진입니다. 중생을 뛰어 넘어 보살이 되면 유정들을 요익하게 하는 가행정진을 합니다. 피갑정진이란 갑옷을 입은 것과 같이 용맹하게 정진하는 것을 말하며, 가행 정진이란 평소보다 더욱 열심히 하는 정진으로 용맹정진과 비슷합니다.

용맹정진의 어원은 아난에서 출발합니다. 부처님 열반 100일 후 수제자 가섭이 제자들을 모아 결집한 것이 제 1결집입니다. 제1결집은 아라한과를 터득한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아난은 부처님의 법을 제일 많이 들었던 제자였지만 여기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아난은 그 때부터 7일간 용족산에서 용맹정진한 것이 용맹정진의 시초입니다. 그제서야 아난은 아라한과를 터득해서 제1결집에 참가할 수 있었 습니다.

정진의 다섯 가지. ① 홍서정진(弘誓精進), 넓게 서원을 세워 굳게 결의하여 행하고자 하는 정진, ② 발행정진(發行精進), 온갖 선심을 발해 실천으로 옮기는 정진, ③ 무하정진(無下精進), 천하고 비열한 마음 없이 나아가는 정진. ④ 무염정진(無厭精進),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정진. ⑤ 부동정진(不動精進), 추위 나 더위 따위의 괴로움을 능히 이겨 흔들림이 없는 정진이다. - 대승자엄경. 분별에서 벗어나야 이런 정진을 할 수 있습니다.  

37 조도품에는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가 있다.” 37 조도품이란 불교에서 공부해야할 핵심을 요약한 것입니다. 사념처(四捻處)는 알아차림을 기울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신념처(身念處)는 몸은 깨끗한 것이 아님을 알고, 수념처(受念處)에서는 감각작용(느낌)은 괴로운 것임을 알고, 심념처(心念處)에서는 마음은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법념처(法念處)에서는 모든 존재가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신수심법에서 각각 알아차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념처를 통해 무아와 무상과 고를 알 수 있습니다.

사정근(四正勤)은 바른 노력이란 뜻으로, ① 이미 지은 불선업을 다 시 짓지 않도록 빼어버리는 것, ② 아직 생기지 아니한 불선업을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③ 생기지 아니한 선업을 생기도록 노력하는 것, ④ 이미 지은 선업을 거듭 다시 기억하여 자라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노력할 것인가를 말한 것입니다.

사여의족(四如意足)은 향상 하는 큰 신통이란 뜻으로, ① 소원(欲), 이렇게 하고 싶다고 바라는 것, ② 노력(進),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 ③ 생각(念), 마음에 분명히 새겨서 잊지 않는 것, ④ 지혜(慧), 바르게 사유하고 분별하여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쌍윳타에 나오는 네 가지 신통의 기초가 사여의족 즉 사신족입니다.

부처님께서 편하고자 아난을 시자로 뽑은 것이 아니라 옆에서 법을 듣고 그 법을 전하기 위해서 시자를 뽑은 것이었습니다. 그 후 25년 동안 아난은 부처님의 시자를 하면서 부처님의 법을 그대로 기억하여 후세에 전하게 되었습니다.

오근(五根)은 선업을 키우고 악업을 막도록 잘 다스리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지혜란 마음이 통일되어 더욱더 지혜를 밝히는 것이며, 노력이란 믿음을 가지고 더욱 더 노력하는 것이며, 알아차림이란 다시 돌이켜 마음에 새기는 것이며, 선정이란 마음에 새긴 지혜를 향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도록 집중하는 것이며, 신심이란 진리를 확신 있게 믿는 것입니다.

오력(五力)은 향상하고 번영하기 위해 필요한 힘입니다. 건강의 힘, 지혜의 힘, 재산과 물건의 힘, 예의와 행동 등이 좋은 것의 힘, 친구의 힘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칠각지(七覺支)란  깨달음의 조건 7가지를 의미합니다. 알아차림(念), 법을 살펴서 택함(擇法), 노력을 기울임(正進), 기뻐함(喜), 가뿐하고 편해짐(輕安), 마음이 조용히 머묾 (定), 좋고 싫음에 기울지 않음(捨=平等)입니다. 

방일에는 12가지 과실이 있습니다. 1 세상의 악한 행위를 즐겨함이오. 2 무익한 말을 즐겨 말함이오. 3 잠을 즐김이오. 4 세속일을 즐겨 말함이오. 5 나쁜 벗을 가까이 함이오. 6 항상 게으르고 태만함이오. 7 늘 남을 경멸함이오. 8 무엇을 들으면 이내 잊음이오. 9 소견이 바르지 못함이오. 10 육근을 제어하지 못함이오. 11 탐욕의 포로가 됨이오. 12 헛되이 시간을 낭비함입니다. -열반경. 

정진은 결국 우리의 삶이며, 평생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모두 거룩한 모습으로 장엄하여 부처되도록 합시다.]

2) 五門(오문)

修行有五門(수행유오문) 能成此信(능성차신) 云何爲五(운하위오)

수행에는 다섯 가지 문이 있어서, 능히 이 신심을 성취할 수 있으니, 무엇이 그 다섯 가지인가?

能成此信 : 이 믿음=此信이란 위의 네 가지 믿음 즉, 근본과 불법승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一者施門(일자시문) 二者戒門(이자계문) 三者忍門(삼자인문)

첫째는 보시문=施門이고, 두 번째는 계문=持戒門이며, 세 번째는 인문=忍辱門이고, 

四者進門(사자진문) 五者止觀門(오자지관문)

네 번째는 진문=精進門이며, 다섯 번째는 지관문이다.

 

[육바라밀을 말한다. 즉,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반야바라밀이다. 지관문은 선정과 반야의 바라밀을 합쳐놓은 것이다.-물처럼바람처럼]

 

[이 오행(五行)의 수행에 의하여 사신(四信)을 증장시켜, 확고하게 완성하는 것이다.

원효와 법장은 믿음(信)의 종교적 실천과 체험을 통한 완성을 위하여 ‘신심만 있고 수행이 없으면 바로 신심이 성숙(법장은 견고로 표현)하지 못한다. 성숙하지 못한 신심은 어떤 외적 계기를 만나면 바로 후퇴하게 되는 것이므로 오행(五行)을 수행하여야 비로소 네 가지 신심이 완성되는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수행 오문(五門)은 오행을 수행하는 것으로서,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지관(止觀)을 말하며, 오행을 오문(五門)이라고 하는 것은 실천의 입구이기 때문에 문(門)이라 하였고, 수행에 의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므로, 오문은 수행의 문 역할을 다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오문 중 지관문(止觀門)은 선정과 지혜가 포함된 것이므로, 오문과 육바라밀은 그 내용이 동일한 것이다.-전종식]

 

[여기서는 신심을 성취할 수 있는 육바라밀을 오바라밀로 설명하고 다음에 보시바라밀을 설명하였습니다. 즉, 수행하는 데는 다섯 가지 방편문이 있는데, 이는 앞에서 논한 네 가지 신심을 성취할 수 있는 실천방편입니다. 이러한 방편문은 첫 번째는 보시(布施), 두 번째는 지계(持戒), 세 번째는 인욕(忍辱), 네 번째는 정진(精進), 다섯 번째는 지관(止觀)입니다. 이상은 앞의 네 가지 신심 모두가 대승을 발기하는 내적인 요인이라면, 이 다섯 가지 방편문을 닦는 것은 내적인 요인을 도와 성취시키는 외연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믿음과 실천은 서로 서로 기대되는 것으로 믿음이 있어도 실천이 없다면 신심이 확고해지지 못합니다. 여기서 다섯 가지를 들어 실천을 말하였는데, 이는 육바라밀 가운데 선정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통합하여 지관(止觀)바라밀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止)는 선정(禪定)을 의미하고, 관(觀)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는 불교수행의 가장 요체가 되는 방편으로 지관(止觀) 또는 정혜(定慧)를 쌍수(雙修)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본론의 주제 즉 일심(一心)·이문(二門)·삼대(三大)·사신(四信)·오행(五行)을 일목요연하게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수선]

 

[“오문 수행으로 신심을 성취하다. 첫째 보시문(施門)이며, 둘째 지계문(戒門)이며, 셋째 인욕문(忍門)이며, 넷째 정진문(進門) 이며, 다섯째 지관문(止觀門)이다.” 중국에서 선불교가 태동하기 전 교종을 완성한 것이 천태 지의입니다. 천태 지의의 마하 지관이 바로 지관문의 지관입니다. 지는 집중하는 사마타를 의미하고 관은 관조하는 위빠사나를 의미합니다. 오문 수행을 잘 닦기만 해도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처방전도 중요하지만 처방 전대로 약을 먹고 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문 수행은 처방 전을 따라 약을 먹고 병을 낫게 하는 과정에 해당합니다. 팔만대장경은 처방전에 불과합니다. 결국 수행을 해야합니다. 경전을 아무리 많이 본다고 해도 처방전에 불과합니다. 그 처방전을 갖고 실천을 해야하는, 그 실천이 오문 수행인 것입니다.

오문은 육바라밀입니다. “바라밀(paramita)는 도피안, 열반에 도달하다는 의미입니다. 육바라밀은 보시(dana), 지계(sila), 인욕(ksanti), 정진(vyayama), 선정(dhyana), 지혜(prajna)입니 다.” 오문에서 앞의 네 가지는 그대로 쓰고 선정과 지혜를 지관에 합친 것입니다.-통섭불교]

 

   ⑴ 施門(시문) - 布施(보시)

[첫째의 시문(施門)은 보시(布施)를 말하며, 여기서는 보시를 재시(財施), 무외시(無畏施), 법시(法施)의 셋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云何修行施門(운하수행시문)

어떻게 시문=布施門을 수행하는가?

若見一切來求索者(약견일체래구삭자) 所有財物(소유재물) 隨力施與(수력시여)

만약 모든 사람이 와서 찾아 구하는 이를 보거든, 소유한 재물을 자기의 능력에 따라 베풀어주고

以自捨慳貪(이자사간탐) 令彼歡喜(령피환희)

자신의 아끼고 탐하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며, → 재시(財施)의 수행방법 

若見厄難(약견액난) 恐怖危逼(공포위핍) 隨己堪任施與無畏(수기감임시여무외)

만약 재앙이나 어려움=厄難에 빠졌거나, 두려워하거나, 위험에 빠지거나 핍박 받는 것을 보면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따라서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이며,    무외시(無畏施)의 수행방법 

若有衆生來求法者(약유중생래구법자) 隨己能解方便爲說(수기능해방편위설)

만약 어떤 중생이 와서 법을 구하는 자가 있거든, 자기가 알 수 있는 방편을 따라 설하되, 법시(法施)의 수행방법 

不應貪求名利恭敬(불응탐구명리공경)

마땅히 명예나 이익과 공경 받기를 구하지 않아야 하니,

唯念自利利他(유념자리리타) 廻向菩提故(회향보리고)

오직 자리이타만을 생각하여 보리에 회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시, 무외시 등은 오직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정신에 의하여 베푸는 것으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베풀었는가의 세 가지를 잊어버리는 보시가 참된 보시이며, 이것이 바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을 염하여 보리(菩提)에 회향하는 보시이기 때문이다]

 

[《金剛經》 大乘正宗分 第三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중생(생명체)들, 난생이거나 태생, 습생, 화생,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비무상을 내가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멸도 하겠다. 이와 같이 한량없고 무수하며 가없는 중생을 멸도 하였으나 실제로는 멸도 된 중생이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 三施(삼시) : 재시(財施), 무외시(無畏施), 법시(法施)

* ≪華嚴經≫ 十行品에서는 ‘나는 먼저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키자. 그 후에 나의 위없는 궁극의 깨달음을 완성하리라.’ 보살이 이와 같이 생각할 때 보살은 주는 것을 보지 않고, 그 받는 것을 보지 않고, 재물을 보지 않고, 복전을 보지 않고, 업보를 보지 않고, 결과를 보지 않는다.]

 

[보살이 중생을 유익하게 하려면 세 가지 보시인 재시(財施)·법시(法施)·무외시(無畏施)를 평등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만일 일체중생이 찾아와서 찾아 구하는 이를 보거든 소유한 재물을 자기의 능력을 따라서 베풀어주고 자신의 아끼고 탐하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재시(財施)라는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또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고받는 물건, 즉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청정(淸淨)이란 일체의 모든 존재가 텅 비어서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마음입니다. 즉, 모든 행위를 하되 그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마음입니다. 

다음에 가령 어떤 중생이 찾아와서 법을 구하는 자가 있거든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방편을 따라서 설법을 해주되 명예와 이익과 공경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자리이타만을 생각하며 그 공덕을 보리로 회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므로 법시(施法)는 궁극적으로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의 실현입니다. 끝으로 가령 액운의 어려움을 당하여 공포심을 느끼며 위태롭게 핍박을 당하는 경우를 보거든 자기가 감당할 만한 능력을 따라서 두려움을 없애주어야 한다는 무외시(無畏施)는 궁극적으로 무아(無我)의 실현이요, 공(空)의 실현을 말합니다.]

 

[“보시문의 수행을 밝히다. 재물보시, 무외시보시, 법보시가 있다.” 보시는 부처님께서 초기불교에서 설명하신 사성제와 팔 정도에는 없습니다. 대승불교로 넘어가며 정견의 행위를 설명할 때 나옵니다.

자비의 실천이 보시로 나타납니다. 일반 중생은 이기적인 아집과 진리를 모르는 무지 때문에 내것이 아까워서 한 단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것 안 아까운 사람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시를 할 수 있는 것은 나름의 확신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 사람들은 살면서 연기를 직접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것 다 챙기고 나머지를 보시하는 것이 중생들의 마음입니다. 진리를 보지 못하는 한 평등한 마음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지금 만원이 있어도 보시하는 사람은 돈이 많아져도 보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베푸는 것이란 조건 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오염되어 아집에 싸여있는 나에서 벗어나면 끝없는 자비가 일어납니다. 

무외(無畏)를 보시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어느 날 부처님께 묻습니다. “혼자서 6년간 고행을 하셨을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도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때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밤 혼자 있다 보면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두려움의 대상이다. 새가 날아가는 것도 어떤 동물이 나를 덮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일어나게 하여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만 그것들을 정확하게 관찰해보니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며 새가 날아 가는 소리였다. 그 소리들을 정확하게 알고 나니까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는 현상을 정확하게 알면 두려움이 없어지더라는 것입니다. 

법을 보시하다.  바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진리로 회향할 수 있도록 법을 설하는 것이 법보시입니다. 내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바른 곳으로 회향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법을 듣고 바른 것을 알고 그를 향해 간다면 이것보다 더 좋고 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보시바라밀은 베푸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정시(淨施)와 부정시(不淨施)로 나눌 수 있다. 정시(淨施)는 칭찬, 존경 등 대가나 보 답을 바라지 않고 베풀었다는 자부심이나, 자만심이 없는 순수 하고 자비한 마음의 보시이다. 둘째 부정시(不淨施)는 보람, 칭 찬, 감사, 보답, 복을 기대하는 보시이다.”

보시 못할 5가지 물건은, 첫째 도둑질한 물건이나 부정한 물건 등, 도리에서 벗어난 방법으로 구한 재물입니다.  두 번째 술과 마약 등 중생을 어지럽게 하는 물건입니다. 세 번째 짐승을 잡는 덫이나 그물, 낚시대 등 중생을 괴롭히는 물건입니다. 네 번째 총이나 화살같은 중생을 해치는 물건입니다. 다섯째 음악과 여색 등 깨끗한 마음을 깨는 물건입니다. 

보시를 청정하게 만들어 주는 5 가지 보물은, 첫째 보시를  행하면서도 바램이 없음이요. 둘째 보시하는 마음에 집착함이 없음이요. 셋째 보시받는 사람에게 상을 일으키지 않음이요. 넷째 보시에 대한 과보를 염두에 두지 않음이요. 다섯째 받는 자로 하여금 보답함이 없게 함이다.” 

위대한 과보를 얻는 5 가지 보시, 첫째 음식을 보시하면 큰 힘을 얻고, 둘째 의복을 보시하면 좋은 일을 얻으며, 셋째 수레를 보시하면 안락을 얻고, 넷째 등불을 보시하면 밝은 눈을 얻고, 다섯째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면 그것은 단이슬(甘露)과 같다.” 

때맞추어 하는 5 가지 보시, 첫째 멀리서 온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 둘째 멀리 가는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 셋째 병자에게 보시하는 것, 넷째 괴롭고 어려울 때 보시하는 것, 다섯째 처음으로 거둔 과일, 곡식 등을 먼저 계(戒)를 지키며, 불도를 닦는 사람에게 드리고 나서 자기가 먹는 것이다.”

보시의 10가지 이익. ①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번뇌를 없애고, ② 기쁘게 베푸는 마음(捨心)을 익히며, ③ 그 재산을 영원토록 견고히 하고, ④ 부호의 집에 태어나며, ⑤ 태어나는 곳마다 보시의 마음이 생기며, ⑥ 사부대중의 애호를 항시 받으며, ⑦ 많은 사람과 있되 두려운 일이 없고, ⑧ 훌륭한 명성이 널리 퍼지고, ⑨ 손발이 부드럽고 편안하며, ⑩ 언제나 선지식과 같이 있게 되어 불자가 된다.”

베풀지 못하고 인색한 사람은 자기 것을 지키려는 마음 때문에 항상 남을 의심하여 두려움을 느낍니다. 세상에 공짜 없고 무관한 인과는 없습니다. 다 원인이 있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

 

   ⑵ 戒門(계문) - 지계(持戒) 십선계(十善戒)를 설함.

云何修行戒門(운하수행계문)

어떻게 지계문=戒門을 수행하는가?

所謂不殺(소위불살) 不盜不婬(불도불음) 不兩舌不惡口(불양설불악구)

이른바 살생하지 않음=不殺, 도둑질하지 않음=不盜, 음행하지 않음=不婬과 두 말 하지 않음=不兩舌, 헐뜯는 말하지 않음=不惡口이며, 

不妄言不綺語(불망언불기어) 遠離貪嫉欺詐諂曲瞋恚邪見(원리탐질기사첨곡진에사견)

꾸미는 말하지 않음=不綺語, 허망한 거짓말하지 않는=不妄言이다. 탐욕=貪, 질투=嫉, 속임수=欺詐, 아첨=諂曲, 성냄=瞋恚, 사견=邪見을 멀리 여의어야 하며,

若出家者爲折伏煩惱故(약출가자위절복번뇌고) 亦應遠離憒鬧(역응원리궤료)

만일 출가한 자라면 번뇌를 꺾어 항복=調伏받아야 하기 때문에 또한 마땅히 심난하고 시끄러운 곳을 멀리 떠나

常處寂靜(상처적정) 修習少欲知足頭陀等行(수습소욕지족두타등행)

항상 고요한 곳에 머물며, 욕심을 적게 하고=少欲 만족할 줄 아는 두타행 등의 수행을 닦아 익혀야 하며,

* 憒(궤) : 심란하다. 鬧(료) : 시끄럽다.

乃至小罪心生怖畏(내지소죄심생포외) 慙愧改悔(참괴개회)

나아가서는 적은 죄라 할지라도 마음에 공포와 두려움을 내어=生怖畏, 뉘우치고=慙, 부끄러워하며=愧, 고치고=改, 후회하여=悔

참(慙)= 자기가 지은 죄 를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괴(愧)= 다른 사람들에 게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不得輕於如來所制禁戒(불득경어여래소제금계)

여래께서 제정하신 금하고 경계하신 바=禁戒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하며, 

 

[지운 : 작은 죄라도 참회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작은 죄가 점점 모여 큰 죄가 된다. 어느 절에 거사 두 사람이 종종 오는데, 한 거사는 큰 죄를 지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참회를 하는 모습이 역력했으나, 한 거사는 당당한 모습으로 다녔다. 그래서 큰스님이 물은 즉,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거사는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하였고, 한 거사는 죄를 지은 바가 없으므로 그렇다고 하였다. 이에 큰 스님은 큰 죄를 지었다는 사람에게는 큰 돌을 하나 주어오라고 하였고, 별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는 거사에게는 작은 돌을 여러 개 주어오라고 하였다. 잠시 뒤에 돌을 가져오자 큰스님은 돌을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놓고 오라고 하였다. 큰 돌을 주어온 거사는 바로 제자리에 두고 왔지만, 작은 돌을 여러 개 가지고 온 거사는 어디서 주었는지 알 수가 없어 제자리에 놓아둘 수가 없었다. 이처럼 작은 죄라도 자각하지 못하면 그 죄가 점점 많아진다.]

 

當護譏嫌(당호기혐) 不令衆生妄起過罪故(불령중생망기과죄고)

마땅히 꾸짖음이나 혐의를 받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나니, 중생들로 하여금 허망하게 허물과 죄를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 때문에 상대방이 꾸중 듣거나 혐의를 받는 짓을 하지 않음이며, 자기 때문에 중생들이 허물과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 모든 계율은 삼취정계(三聚淨戒)로 포섭할 수 있다. 삼취정계란 섭율의계(攝律儀戒), 섭선법계(攝善法戒), 섭중생계(攝衆生戒)를 말한다. 여기서 불살생 등은 삼업의 악을 끊는 섭율의계이며,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할 줄 하는 것은 번뇌를 꺾어 조복 받는 섭선법계이며, 작은 죄라도 두려운 마음을 내고 상대방의 중생들이 비방과 혐의하지 않도록 보호하여 그들이 나로 인해 삼보의 교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허물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은 섭중생계인데, 즉 스스로 계율의 모습을 보호하여 중생들이 죄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이 섭중생계이다.]

 

[십선계(十善戒)는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양설(不兩舌) 불악구(不惡口) 불기어(不綺語) 불탐(不貪) 불진한(不嗔恨) 불사견(不邪見).

몸의 세 가지 계, 

① 불살(不殺)은 일체의 생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지만, 또한 죽을 목숨을 설려주려는 자비의 마음이 더욱 중요한 것이고

② 불투도(不偸盜)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이지만, 오히려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중요하며,

③불음(不淫)은 그릇된 관계를 떠나, 남의 아내에게 접근하지 않는 것이다

입의 네 가지 계

① 불양설(不兩舌)은 두 말로 남을 이간시키거나 비방하지 않는 것이지만, 오히려 서로 친근해지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고

② 불악구(不惡口)는 다른 사람에게 악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지만,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며

③ 불망어(不妄語)은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지만, 항상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이며

④ 불기어(不綺語)는 아첨하거나 꾸민 말로 남을 희롱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의 3 가지 계

무탐(無貪)은 탐욕을 버려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탐내고 질투하는 탐질(貪嫉), 남을 속이는 기사(欺詐), 남에게 아첨하여 자기 마음이 굽어지는 첨곡(諂曲) 등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② 무진(無瞋)은 남을 미워하여 성내고 노여워하지 않는 것

정견(正見)은 사견(邪見)즉 그릇된 견해를 버리는 것이다

이상이 대승불교에서 통설로 세우는 십선계(十善戒)로서, 재가불자(在家佛子)에 대한 계율이다. 신역(新譯)에는 재가보살(在家菩薩)의 계(戒)라고 확실히 하고 있지만 구역(구譯)은 불사음(不邪淫)이 아닌 불음(不淫) 등으로 표시하여 확실한 표현을 하지 않고 있다. 이상의 십선(十善)은 재가자나 출가자 모두가 행하여야 할 총상계(總相戒)이나 특히 출가자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계율을 제시하고 있다. 출가자(出家者)의 경우에는 번뇌를 끊기 위하여 소란한 도시 등을 멀리 떠나, 항상 고요한 자리를 찾아 머무르며, 욕심을 줄이고, 최소한도의 생활필수품 등 적은 것에 만족하여, 금욕고행(禁慾苦行)의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하여야 한다. 그래서 적은 죄(계율위반)를 짓더라도 크게 두려워하고, 범한 죄를 뉘우쳐 회개하며, 여래가 제정한 계율(250계)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 특별히 악(惡)은 아닐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고 비방 받는 일은 행하지 않도록 몸가짐을 잘 지켜, 중생으로 하여금 함부로 과실이나 죄를 짓지 않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출가한 자라면 번뇌를 꺾어 조복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심난하고 시끄러운 곳을 멀리 떠나 항상 고요한 곳에 거처하면서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해 할 줄 아는 두타(頭陀) 등등의 수행을 수습해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아가서는 적은 죄라 할지라도 공포스런 두려운 마음을 내어 아직 짓지 않은 악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고, 이미 지은 악업은 고치고 후회하여 여래께서 제정하신 금계(禁戒)를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섭선법계(攝善法戒)입니다. 이어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상대방이 나무라거나 혐의를 가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중생들이 나의 잘못 때문에 비방하는 허물과 죄를 허망하게 일으키게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섭중생계(攝衆生戒)입니다.

다시 말해서 삼취정계란 섭율의계(攝律儀戒)와 섭선법계(攝善法戒)와 섭중생계(攝衆生戒)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불살생(不殺生) 등은 세 가지 악업(惡業)을 끊는 섭율의계이며,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해 할 줄 아는 것은 번뇌를 꺾어 조복 받는 섭선법계이며, 작은 죄라도 두려운 마음을 내고 상대방의 중생들이 비방하며 혐의하지 않도록 보호하여 그들이 나로 인해 삼보(三寶)의 교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허물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은 섭중생계입니다. 즉 스스로 계율을 보호하여 중생들이 죄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이 섭중생계입니다. 이와 더불어 사무량심(四無量心)과 보리심(菩提心)을 항상 가지고 팔정도(八正道)와 육바라밀·사섭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삼취정계(三聚淨戒)는 보살(菩薩)의 계법(戒法)을 총칭한 것이다. 범망경(梵網經)과 영락경(瓔珞經),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에서 설한 계이다. 이 삼취정계에 의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다. 대승소승의 일체 계법을 포섭하는 큰 계이다. 이 중 섭율의계와 섭선법계는 자리(自利), 섭중생계는 이타(利他)이다.

① 섭율의계(攝律儀戒)= 비구계, 보살계의 계목(戒目)을 지키고 육근을 단속하여 악을 끊는 것(斷惡)이다. 즉 악을 방지하기 위해 제정한 것으로, 비구의 250계와 비구니의 348계를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계율을 말한다. 이것은 대승 이전에 교단 내에 제시되어 있던 모든 금지 조항으로 흔히 ‘하지 마라’고 하는 계율이다.

​② 섭선법계(攝善法戒)=선을 닦는(修善) 공덕행으로 정진하는 것이다. 즉 모든 선(善)을 행한다는 적극적인 의미의 계율이다. 보살이 계를 받은 다음 선을 쌓아가는 것을 말한다.

​③ 섭중생계(攝衆生戒)= 동체대비심으로 중생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사섭법이다. 즉 선을 쌓아가면서 중생에게 이익을 베푸는 행위이다.]

 

[눈, 코, 귀는 받아들이기만 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습니다.  6근 중 안, 이, 비는 죄를 안짓고 설, 신, 의는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는 근본 원인은 감각의 수용에 있습니다. 이 가운데 눈이 상당 부분을 차지 하지만 행동이나 생각으로 옮겨 죄를 짓는 것은 몸, 입, 뜻입니다. 죄악을 경계하고 참회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죄를 나타나게 하는 뿌리에는 업식(업상), 전식(능견상), 현식 (경계상), 아만, 아치, 아집, 아애, 탐진치만의견이 있습니다. 업식(업상), 전식(능견상), 현식(경계상)은 제8식 아뢰야식에 속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거짓말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일으 키는 출발점은 업식에서 형성된 미세한 흐름이 전식을 통해 구체화되고 현식에서 만들어지고, 이것이 거울에 비치듯이 제7식에 반영된 것은 6식을 통해 외부로 표출됩니다. 탐진치만의견은 삶을 부정적으로 만듭니 다. 이것들은 누구에게도 다 들어 있지만 사람마다 들어있는 양은 다릅니다. 내 속에 든 생각들이 그대로 투영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좋게 보이는 것은 내 생각만큼, 즉 나의 업과 지혜만큼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반응이 다른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는 이유는 십악을 멀리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어는 상대방에게 잘 보이려고 말을 꾸미는 행위입니다. 

“뜻으로 짓는 업인 탐욕과 질투[貪嫉], 속임[欺詐]과 간사함[諂曲], 성냄[瞋恚], 삿된 견해[邪見]를 멀리 여의는 것이다.” 악을 떠나 선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선과 악은 같이 있어서 악한 마음만 일으키지 않으면 선은 그냥 일어납니다. 선 한 마음을 일으키면 악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어두운 방에 불을 키면 어둠이 없어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를 위해 지계, 규칙적인 생활이 필요하고, 규칙적인 생활은 따분해 보이지만 긍정적이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보시라 하며 눈의 도적을 버리면 모든 빛의 경계를 떠나서 마음에 인색함이 없어지므로 저 절로 보시가 이루어집니다. 자기자신을 잘 지키는 것을 지계라 하며 귀의 도적을 막으면 소리의 경계에 끄달리지 않으므 로 스스로 구속 속에 있으나 구속에서 자유로운 지계가 이루어 진다. 자기자신을 잘 다스리는 것을 인욕이라 하며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면 향기로운 좋은 냄새와 악취가 나는 나쁜 냄새에 균등하여 자유롭게 길들여져서 저절로 인욕이 이루어집니다. ‘눈의 도적을 버리면 모든 빛의 경계를 떠나서’라는 말은 대상을 분별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구속에서 자유로운 지계 가 이루어진다.’라는 말은 억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켜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큰 일을 하려면 참을성, 인욕이 되어야 합니다. 참을성이 없는 사람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1960대 미국의 어떤 대학원생이 학위 논문으로 아이들을 상대로 실험을 합니다. 마시멜로를 아이들에게 주면서 5분을 참으면 하나를 더 준다고 했습니다. 그 때 참고 안 먹은 아이들은 모두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성공하는 인생을 살았지만, 그 때 못 참은 아이들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눈코귀, 세 가지 도적을 항복시키면 보시, 지계, 인욕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자기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을 정진이라 하며 혀의 도적을 제어하면 삿된 맛을 탐내지 않으며, 옳고 싫어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저절로 정진 속에 머물게 됩니다. 나와 남이 하나가 되는 것을 선정이라 하며 몸의 도적을 항복시키면 모든 애욕에 초연하여 요동하지 않고, 물들지 않으므로 항상 선정 속에 머물게 됩니다. 생명의 본 면목을 깨닫는 것을 지혜라 하며 뜻의 도적을 조복하면 무명을 따르지 않고 항상 생각이 깨어 있어 행하는 모든 행위가 법에 맞으며, 모든 공덕을 즐겨 닦으므로 지혜의 빛이 항상 밝게 빛나게 됩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두타제일 가섭 존자가 있습니다. 가섭 존자는 평생동안 지킨 사항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마을과 떨어진 산림 속에서 사는 것(在阿蘭若處), 둘째 언제나 탁발걸식한 음식을 먹는 것 (常行乞食), 셋째 걸식하는데 있어서 빈부의 집을 가리지 않는 것(次第乞食), 넷째 하루 한끼만 먹는 것(受一食法), 다섯째 수행에 적당한 몸을 지탱하기 위한 최소량만 먹는 것(節量食), 여섯째 중식 이후에는 음료를 마시지 않는 것(中後不得飮漿), 일곱째 세속에서 버린 옷들을 모아 기워 입는 것(着弊納衣), 여덟째 옷을 세 벌 이상 가지지 않는 것(但三衣), 아홉째 잠을 잘 때는 무덤 사이에서 자는 것(塚間住), 열 째 수행을 할 때는 나무 아래에서 하는 것(樹下止), 열 한번째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지 않고 한 곳에 앉아 지내는 것(露地坐), 열두 번째 잘 때도 누워 자지 않고 좌선하는 자세 그대로 자는 것(但坐不臥). 가섭은 절제된 수행자의 삶을 철저하게 살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 구성의 대부분은 출가수행자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간혹 출가하지 않는 뛰어난 거사들도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부설 거사가 있습니다. 부설은 원래 불국사에서 출가한 스님이었으나, 같은 승려였던 영희, 영조와 유행을 떠나, 전라도를 지나다가 무구원이란 거사의 집에서 묵게 됩니다. 무구원 거사에게는 묘화라는 벙어리 딸이 있었는데, 그녀가 부설을 보더니 말문이 터져버렸습니다. 세 승려가 떠나려고 하는데 묘화가 부설을 붙잡고 자신이랑 결혼하지 않으면 죽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며칠 고민한 후 부설은 환속하고 묘화와 결혼하여 살게 되어, 같이 온 두 승려는 10년 후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떠납니다. 10년 후 영희, 영조가 찾아와서 수행의 성과를 보기 위해, 물을 넣은 물병을 깨어 물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보고 수행의 정도를 판단하기로 합니다. 영희, 영조는 물병을 깨니 물이 다 흘러나왔는데, 부설은 병만 깨 지고 물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설이 말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고? 이 몸은 병이고 이 마음은 물이로다. 눈으로 보아도 본 바가 없고 귀로 들어도 들은 바가 없으면 분별시비 다 없어져 마음에는 오로지 부처뿐이라네.” 훗날 부설은 묘화와 사이에 아들과 딸을 낳게 되는데 아들은 이름이 등운이고 딸은 월명입니다. 이들은 모두 출가해 그들의 이름을 딴 ‘등운암’과 ‘월명암’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팔청정(八淸淨)은 지계를 청정히 하는 8가지이다. 첫째 몸으로 행하는 행위가 곧으며, 둘째 업(業)이 청정하고, 셋째 마음 가운데 허물과 더러움이 없으며, 넷째 뜻을 높게 가져 굳고 바르며, 다섯째 바른 생활방법에 의해 살아가며, 여섯째 탐욕을 버리고 수행에 전념하며, 일곱째 온갖 거짓과 진실치 않은 모습을 떠나며, 여덟째 언제나 보리심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청정지계입니다. 왜 수행자는 복을 받을까요? 그것은 지계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출가를 했건 안했건 청정지계를 지키고 사는 사람이 바로 수행자인 것입니다.]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밀린다왕문경(나가세나 비구경)에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에게 묻습니다. “비구여 그대들은 어째서 젊은 시절부터 머리를 깎고 수행을 하는가? 젊어서는 놀다가 늙어서 수행하면 되지 않는가.” 그 말을 듣고 나가세나는 밀린다 왕에게 전쟁을 잘하는 비결을 묻습니다. 그러자 밀린다 왕은 “짐은 전쟁 전에 병기, 성벽, 식량 등 만반의 준 비를 다 해놓기 때문에 백전백승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가세나 비구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젊어서 수행하는 이유도 젊어서부터 준비를 하는 것에 있습니 다. 목이 마른 후에 땅을 파는 사람은 그 목마름 때문에 죽게 되지만 미리 우물을 파놓은 사람은 목 마를 때 언제든지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밀린다 왕도 감탄을 하며 납득합니다. 

밀린다 왕이 또 나가세나에게 묻습니다. “부처님은 정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가?”라고 묻자 나가세나는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계율을 다 정해놓을 것이지 왜 일이 생기고 나서야 계율을 만드는가?”라고 하자 나가세나 비구가  “대왕이시여 당신은 옷이 낡으면 어떻게 합니까?” 밀린다 왕은 옷이 낡으면 깁어 입는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 가세나 비구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계율을 알고 계셨지만 계율이 범해질 때마다 계율을 만드신 것은 헌 옷을 깁어 입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사람이 필요할 때 설하는 것이니 필요 없을 때 설해서 구속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밀린다 왕이 납득합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 전역에 흉년이 들어 다 굶어 죽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승려들이 걸식을 나가도 모두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수디나 비구가 부처님께 제안을 합니다. 자신의 집과 고향 마을은 풍족하니 일단 그곳에 잠시 머무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해서, 부처님은 수락합니다. 그래서 수디나 집에 머무르는데 어느 날 수디나의 어머니가 수디나에게 말합니다. “네가 출가를 해서 우리 집의 재산은 나중에 국가에 귀속될 것이다. 자식을 낳고 가거라.” 수디나는 고민 끝에 수락합니다. 그 후 다시 부처님과 그 제자들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부처님은 어느 날 수디나의 얼굴이 어두운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습 니다. 그러자 수디나가 사실대로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그것을 듣고 음행에 대한 계율을 설하게 됩니다. 하지만 수디나는 퇴출되지 않았습니다.

다니가 비구의 일화가 있는데 다니가 비구는 퇴출을 당했습 니다. 부처님은 알려진 대로 빔비사라 왕과 가까운 사이였습니 다. 다니가 비구는 그것을 이용해서 부처님의 이름을 빙자해 관청에서 물자를 받아 절을 지었는데, 절이 완성되자 다니가 비구는 부처님을 초청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물자가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습니다. 다니가 비구는 사실대로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부처님은 왜 거짓말을 했냐고 질책합니다. 다니가는 거짓말은 했지만 좋은 일에 썼으니 괜찮은 것이 아니냐고 당당하게 반문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다니가여 너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계율을 어겼으므로 너를 교단에서 퇴출하겠노라.”라 하고 다니가를 퇴출시켰습니다. 

수바 비구니는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수행자들은 산 속에 혼자 들어가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비 구니들 가운데는 산에 혼자 들어가 수행을 하다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희롱을 당하거나 겁탈을 당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수바 비구니가 산에서 수행을 하고 있는데 마을의 잘 생긴 청년이 찾아와 희롱을 합니다. 집요하게 구니까 수바 비구니는 청년에게 자신의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드냐고 묻습니다. 청년이 눈이 마음에 든다고 하자 수바 비구니는 자신의 눈을 뽑아 청년에게 줍니다. 청년은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진심으로 사죄를 합니다. 그 후로 부처님께서 비구니들은 절대로 혼자서 수행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고 합니다.-통섭불교]

4. 修行信心分(수행신심분)

已說解釋分(이설해석분) 次說修行信心分(차설수행신심분)

이미 解釋分(해석분)을 설하였으니, 다음으로 수행신심분을 설할 것이다.

是中(시중) 依未入正定衆生故(의미입정정중생고) 說修行信心(설수행신심)

이 가운데 아직 정정취로 들어가지 못한 중생을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신심분을 설한다.

 

[元曉 : 위의 발취도상을 말하는 중에서는 부정취중생에 의한다고 말하고, 이제 여기에서는 아직 정정취에 들어가지 않은 중생에 의한다고 말하였으니, 이 또한 부정취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부정취 내에도 열등한 이와 수승한 이가 있으니, 수승한 이는 더욱 나아가고 열등한 이는 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저 수승한 이를 위하기 때문에 발취를 말하였으니, 소위 신성취발심으로부터 증발심 등은 수승한 이로 하여금 차례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요, 그 중에 열등한 이를 위한 까닭에 믿음을 닦을 것을 말하니 소위 네 가지 신심과 오문(五門)의 행 등은 저 열등한 이로 하여금 퇴전치 않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 만약 열등한 이가 믿음이 성취되면 다시 발취분 중의 세 가지로 발심에 의하여 나아가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분(二分;해석분과 수행신심분)의 하는 일이 다름이 있으나 그 나아가는 도리는 다름이 없다.

* 앞에서 이미 삼심(三心)과 네 가지 방편행(方便行)을 설명하였는데 여기서 다시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근기가 약한 사람, 즉 정정취(正定聚)에 들지 못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근기가 약한 사람은 방편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종신심(四種信心)과 오종방편문(五種方便門)을 설하고 있다. 근기가 약한 사람 중에도 하열(下劣)한 사람이 있고 수승(殊勝)한 사람이 있는 바, 여기의 수행신심분은 하열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대승기신 중 신심을 일으키는 기신(起信)을 설하는 부분으로, 신심에는 네 가지가 있는 사신(四)과 수행에는 오문(五門) 의 오행(五行)에 의하여 수행과 신심을 이루도록 설하고 있다.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에서 보살의 수행과정을 세 가지 발심의 모습을 해명한 바 있었으나, 어떻게 신심을 얻을 수 있는가 라는 구체적인 해명이 없었으므로 여기에서 ① 신심이란 무엇인가 ② 신심을 수행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과제를 바탕으로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설하는 것이다. 수행신심분은 아직 정정취(正定聚)에 들지 못한 중생을 위하여, 그들위 신심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사신(四信)과 오행(五行)을 설하는 것이다]

 

[수행신심분이 해석분의 다음에 오게 된 의도는 위에서 입의분에 수립했던 대승의 정의를 해석함으로써 대승의 올바른 의미를 밝혔고, 여기 수행신심분에서는 해석된 대승에 대한 신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를 밝힙니다. 그리하여 아직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지 못한 중생을 발기하여 대승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앞의 두 가지 부정취(不定聚) 중생 가운데 수행한 신심이 아직 십신(十信)에 가득 차지 못한 하열한 근기자가 그 발심이 결단적이지를 못하여 이승에 떨어질까 염려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의 편에 의지하여 신심을 수행하는 방편을 설하고 그가 큰 신심을 일으켜 정정취로 나아가게 합니다. 

해석분의 설명이 이미 끝났고 여기서 수행신심분을 설명합니다. 이종(二種)의 부정취(不定聚) 중생들 가운데 수행의 신심이 아직 원만하지 못하여 정정취로 아직 들어가지 못한 근기가 하열한 중생을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신심분을 설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공부는 믿음으로 시작됨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수행의 바탕이 되면서 도를 성취하는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 결정적인 믿음을 가질 때에 바로 불교공부에 들어선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무엇을 믿을 것인가? 이에 대해 여기에서는 앞의 문장을 결론짓고 뒷 문장의 단서를 달았습니다.]

 

[대승기신론의 내용은 크게 일심(一心, one mind), 이문(二 門, two aspects), 삼대(三大, three greatnesses), 사신(四信, four faiths), 오행(五行, five practices)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은 삼대까지입니다. 이제부터 공부할 것은 사신과 오행입니다. 사신은 우리가 믿어야할 네 가지로 근본, 불, 법, 승입니다. 오행은 부처가 되기 위해 행할 다섯 가지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관입니다.

  “수행신심분. 부정취 중생에게 설하다. ‘이 중에 아직 정정취( 正定聚)에 들지 못한 중생이 있기 때문에 신심을 수행함을 설한다. 무엇이 신심이며, 어떻게 수행하는가?’” 정정취, 부정취,  악취가 있습니다. 우리가 육도윤회를 하는데 제일 바닥에 지옥이 있습니다. 악취는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합니다. 정정취는 육도 윤회 가운데 인간과 천상을 말합니다. 부정취는 어디에 태어날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이 내용의 목적은 부정취 중생들에게 수행신심분을 설하여 제대로 수행하게 하여 정정취에 들게 하려는 것입니다. 부정취에서는 공부에 확신이 없지만 공부에 확신이 서면 정정취에 들어갑니다. 세세생생 이 공부에서 물러나지 않게 됩니다.-통섭불교]

 

1) 四信(사신)

何等信心(하등신심) 云何修行(운하수행)

어떤 것들이 신심이고, 어떻게 수행하는가? 

略說信心(략설신심) 有四種(유사종) 云何爲四(운하위사)

신심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 진여법과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을 설명하고 있다.

 

[앞의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에서 네 가지의 수행방편을 설명하여 수행해 나아가고 닦아 증득하는 것을 빠짐없이 밝혔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어떤 신심을 어떻게 수행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대승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일으킨 자는 삼심(三心)과 네 가지 방편행(方便行)을 설하여 진여에 대한 신심은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바로 진취하여 진여를 수증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근기가 하열한 중생은 번뇌의 장애가 지중하여 반드시 많은 종류의 방편을 빌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종신심(四種信心)과 오종방편문(五種方便門)을 설하여 그들을 길들이고 대치하는 방편을 삼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오종방편문으로 하열한 이들을 인도하여 포섭하는 것이지 중복된 설명은 아닙니다.-수선]

 

一者(일자) 信根本(신근본) 所謂樂念眞如法故(소위락념진여법고)

첫째는 근본을 믿는 것이니, 이른바 진여법을 즐겨 생각=念하기 때문이다.

 

[근본(根本)= 진여를 말함. 원효와 법장은 진여의 법은 모든 부처가 귀일하는 곳(법장은 스승으로 표현)이며, 온갖 수행의 근원이므로 이를 근본이라 한다’고 설명함.

일체지(一切智)=일체법을 아는 지혜, 불지(佛智)를 말함-전종식]

 

[憨山 : 앞에서 이종의 부정취중생들 가운데 신심의 수행이 십신에 가득 찬 수승한 근기의 중생은 이미 진여법을 믿었으므로 단지 직심으로 진여법을 올바로 사념한다[直心正念]라고만 말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십신의 수행이 아직 가득 차지 못한 하열한 근기의 부정취중생은 대승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아직 발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즐겨 사념한다[樂念]라고 말하였다.

* 지운 : 念은 不忘의 뜻이 있음.-물처럼바람처럼]

 

[첫째, 근본(根本)을 믿는 것이다. 근본이란 바로 진여법(眞如法)을 말하며, 진여는 온갖 부처가 귀일()하는 근원이므로 ‘근본’이라 설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근본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가기의 본성이 진여(眞如)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신심의 첫 번째이며, 이를 기쁘고 즐거이 염(念), 즉 정념(正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전종식]

 

[첫째는 우주 만물과  모든 수행의 근원인 진여법을 믿을 뿐만 아니라 진여법을 즐겨 염하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의 내용은 크게 일심(一心, one mind), 이문(二 門, two aspects), 삼대(三大, three greatnesses), 사신(四信, four faiths), 오행(五行, five practices)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은 삼대까지이고, 이제부터는 사신과 오행입니다. 사신은 우리가 믿어야할 네 가지로 근본, 불, 법, 승입니다. 오행은 부처가 되기 위해 행할 다섯 가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관입니다.

육도윤회의 제일 바닥에 지옥이 있는데, 악취는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합니다. 정정취는 육도 윤회 가운데 인간과 천상을 말합니다. 부정취는 어디에 태어날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내용의 목적은 부정취 중생들에게 수행신심분을 설하여 제대로 수행하게 하여 정정취에 들게 하려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신심의 네 가지를 설하다. 근본에 대한 믿음이며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며 불법에 대한 믿음이며 승가에 대한 믿음이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은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고, 불법에 대한 믿음은 깨닫는 법에 대한 믿음이고, 승가에 대한 믿음은 수행자에 대한 믿음입니다. 근본에 대한 믿음은 이 세상에 일심, 진여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근본을 믿는 것이니 진여법을 즐겨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신론소에서)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 진여한 마음은 다 그곳으로 귀일하는 바이며, 모든 행위가 바로 그곳으로부터 나오는 근원이기 때문에 근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심, 진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중생은 물들어서 본연의 모습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물들기 전의 본래 성품, 청정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볼 수 있는 세계가 있는 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진리, 진여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 근본 목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습니다. 원효스님의 해설에서 '오염된 중생의 마음은 이기적인 생각에 의해 수시로 무상하고 바뀝니다.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생각은 제6식에서 일어납니다. 그 근본이 제7식 말라식이고 말라식의 바탕이 되는 것이 제8식 아뢰야식입니다. 근본 에 해당하는 제8아뢰야식을 이해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선 근본, 즉 진여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통섭불교]

 

二者(이자) 信佛有無量功德(신불유무량공덕) 常念親近供養恭敬(상념친근공양공경)

두 번째는 부처님에게는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니, 항상 친근해서 공양하고 공경하기를 염하면서

發起善根(발기선근) 願求一切智故(원구일체지고)

선근을 일으키어 일체지 구하기를 발원하기 때문이다. 

 

[고순호 : 一切智(일체지) - 모든 것을 아는 지혜. 성문과 연각의 지혜도 일체지라고 하고, 이와 구분하기 위해 부처의 지혜을 일체지지(一切智智)라고 하니, 여기의 일체지는 일체지지를 말한다.]

 

[둘째는 부처님에겐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는 것을 믿으므로 항상 부처님의 공덕을 염하면서 가까이 하고 공양을 올리고 공경을 하면서 선근을 발기하여 일체지를 구하고 모든 선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부처를 믿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대비 즉 끝없는 자비로, 한량없는 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일체의 지혜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일체의 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얻어지는 지혜가 아닌, 분별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분별지를 포용하고 뛰어넘는 무분별지입니다. 

참고로 귀명삼보에서 “목숨을 거두어 돌아가나이다. 어디에서나 어느 때에나 가장 훌륭한 일을 하시며, 두루 모르시는 바 없이 다 아시며, 그 인간성이 자유자재하시고 세상을 구하고자 큰 자비를 베푸는 자이시여.” 귀명삼보란 삼보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삼보는 앞에서 말했듯이 ‘불, 법, 승’입 니다. ‘목숨을 거두어 돌아간다’는 말은 목숨을 걸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겠다는 말입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수행을 하고 부처를 보는 것입니다. 훌륭한 일이란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6 신통이 생기는데 그 영향으로 두루 모르는 바가 없게 됩니다. 숙명통이란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전생까지 다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허황된 소리가 아닙니다. 과학에서 DNA를 보면 전생부터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DNA를 풀어보니 단세포 생물이 35억년 동안 살았던 삶의 흔적들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도를 닦아서 알아야 합니다. 모두 막혀 있는데 식이 맑아지면, 제8아뢰야식, 6추 3세의 3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미세한 것도 알 수 있는 상태가 바로 적멸이고, 적멸하니 미세한 것도 알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견성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죽으면, 상태가 변합니다. 나의 상(형태)이 다 깨어집니다. 그래서 과거의 흔적들을 기억을 못합니다. 하지 만 공부하고 수행을 하면 식이 덜 깨어집니다.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식이 덜 깨어진 사람들입니다. 공부하면 잘 알고 암기를 잘 하는 것도 식이 맑아서 입니다. 식이 맑아지면 나의 저장창고에 담긴 내용들을 다 알게 됩니다. 이것이 다름이 아니라 전생을 아는 것입니다. 목숨을 거두어 돌아간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진리를 대하는 마음은 진지하고 지극해야 합니다. ]

 

三者(삼자) 信法有大利益(신법유대리익) 常念修行諸波羅蜜故(상념수행제파라밀고)

세 번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니,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길 염하기 때문이다.

 

[부처님 법을 믿는 것에 큰 이익이 있다고 하는 이유는 그 법이 바라밀 법이기 때문이다. 바라밀이란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즉 번뇌와 괴로움으로 가득한 상태에서 이를 여읜 열반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부처님이 증득하신 진여의 공덕을 말한 교법에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믿으므로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길 염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믿는 것은 부처님께서 깨친 내용을 믿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법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법칙이 있더라는 것으로, 그것이 연기입니다. 세상에는 법칙이 많아서, 수학의 법칙들, 물리의 만유인력의 법칙, 운동의 법칙, 관 성의 법칙, 상대성 이론 등 이런 것들이 모두 법칙입니다. 이 법칙들은 생명, 무생물이 구분되어 적용되지만 연기의 법칙은 생물, 무생물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무생물은 의지가 없어서,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하면 그대로 결과가 나옵니다. 하지만 생물은 의지가 있기 때문에 어떤 조건에서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돈을 그냥 준다고 한다면 돈이 많은 사람도 기분 나쁠리가 없습니다. 반대로 아무 이유 없이 따귀를 맞으면 기분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의지가 있어도 좋은 행위를 할 때 좋은 결과가 오고 나쁜 행위를 할 때 나쁜 결과가 오는 원칙은 바뀌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베푸는 행위를 많이 했는데도 나쁜 결과가 나오고 어떤 사람은 악행만 하는데 부유하게 사는 것은 과보가 어느 정도 수준까지 익어야 정확하게 결과로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결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아보가드로수만 넘으면 통계의 법칙, 확률의 법칙을 따릅니다. 불교 경전을 보면 어마어마한 수나 공간들이 등장합니다. 이것들은 통계와 확률을 바탕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착한 일을 하면 바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한 일을 하면 언젠가 그 과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의 법칙이고 인과응보입니다. 이 생에서 받고 있는 모든 것이 인과응보입니다. 세상에 절대로 공짜는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보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푼 것이 자기에게 돌아오지, 베풀지 않은 것이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귀명삼보의 법 부분에서, “목숨을 거두어 돌아가나이다. 그 (지혜롭고 자비로운 자의) 몸이여, 그 몸의 모습이여, 참되고 영원함이 저 바다와 같은 진리여.” 법은 체상용의 상에 해당합 니다. 부처님께서 연기의 법칙을 깨치셨지만 최초로 설법하신 내용은 사성제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전 마지막에 설법하신 내용도 사성제, 팔정도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성제와 팔정도 이외의 도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누군가가 도를 이루려면 사성제와 팔정도를 행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성제는 고집멸도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상하기 때문에 생멸을 하고 이것이 반복되는 것이 윤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는 삶의 현상 그 자체인 것입니다. 집은 이유, 원인으로 부처님께서는 일이 일어난 원인만 알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해결된 상태가 멸입니다. 해결하는 방법이 도입니다. 사성제는 삶의 모습과 나아가야할 길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연기를 풀어쓰면 고집멸이 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집) 생겼으며(고), 원인이 소멸되면(도), 없어진다(멸). 이것이 연기입니다. 

과학도 원인 규명입니다. 어떤 현상이 있다면 그 현상에 합당한 원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원인을 아는 것은 보편성이 있 는 것입니다. 원인을 모르면 특수한 경우에는 적용될 수 있어도 모든 경우에 적용이 안 됩니다. 원인을 알면 응용이 가능해 지고 보편성을 갖게 됩니다. 이것도 결국은 사성제입니다. 우리는 사성제를 통해 연기의 법칙을 알고 터득하여 삶을 변화시켜 갈 수 있습니다.]

 

四者(사자) 信僧能正修行自利利他(신승능정수행자리리타)

네 번째는 스님은 능히 올바른 수행을 하면서 자리이타를 행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常樂親近諸菩薩衆(상락친근제보살중) 求學如實行故(구학여실행고)

항상 즐거이 모든 보살대중을 친근해서 참다운=如實한 수행을 구하여 배우기 때문이다.

 

[僧能正修行自利利他(승능정수행자리리타) : 스님들이 자기를 이익 되게 하고 남을 이익 되게 한다고 함은 스스로 수행하여 성불의 길을 나아감이 자기를 이익되게 하는 것이며, 불법을 유지하고 전함이 남을 이익 되게 하는 핵심이다. 물론 보시를 행하여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 사회의 문제점을 바로 잡으려 하는 것도 이타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불법을 유지하고 바르게 전하는 것이다.

* 憨山 : 진여법을 믿고 즐겼던 것은 내인의 훈(內因熏)이 수승한 것이며, 여기에서 삼보에 대한 신심은 외연의 자훈(外緣資熏)이 수승한 것이다. 내인훈과 외연자훈이 함께 수승하기 때문에 항상 즐기고 항상 사념하면서 마음에 잊지 않게 된다면 내인과 외연이 교대로 훈습하기 때문에 사종신심을 신속하게 성취하게 된다. 이로써 앞에서 이승의 경지로 퇴전하여 떨어진 자는 내인과 외연이 함께 하열하였기 때문이었음을 나타냈다.

* 고순호 : 僧(승) - 범어 samgha의 음역인 승가(僧伽)의 준말이며, 이는 단체를 뜻하는 말이기에 중(衆)이라 번역하고 불과 법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모인 화합된 단체이므로 그 의미를 살려 화합중(和合衆)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승에서는 수행자의 호칭을 모두 보살이라고 하였고, 보살의 집단인 경우는 bodhisattvagana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에서의 승(僧)은 보살중(菩薩衆)이란 말과 함께 쓰였으니 재가와 출가를 막론한 보살들을 지칭하는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이 논(論)의 성격상 결코 비구승가(比丘僧伽;bhiksusamgha)나 비구니승가(比丘尼僧伽;bhiksunisamgha를 말한 것으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넷째는 스님들이 올바른 수행을 하면서 자기도 이롭고 다른 이도 이롭게 하는 믿음으로 자리이타의 올바른 수행을 항상 즐기면서 모든 보살들을 친근히 하고 진여 실제의 수행을 배우길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여로써 신심과 모든 수행의 근본을 삼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즐겨 염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두 가지 부정취(不定聚) 중생들 가운데서 신심의 수행이 십신에 원만한 수승한 근기의 중생은 이미 진여법을 믿었으므로 단지 "곧은 마음으로 진여법을 올바로 염한다"고만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는 십신의 수행이 아직 원만하지 못한 하열한 근기의 부정취중생은 대승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아직 발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즐겨 염한다"고 하였습니다.
위에서 진여법을 믿고 즐겼던 것은 내인(內因)의 훈습이 수승한 것이며, 여기에서 삼보에 대한 신심은 외연(外緣)의 자훈(資熏)이 수승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인훈과 외연자훈을 함께 수승하기 때문에 항상 즐기고 항상 생각하면서 생각생각에 잊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인과 외연이 교대로 훈습하기 때문에 사종신심을 신속하게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앞에서 이승의 경지로 퇴전하여 떨어진 자는 내인과 외연이 함께 하열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논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말법시대에 수행을 하면서 이 내인과 외연을 버린다면 대승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낼 수는 없습니다. 이를 쉽게 말하면 수행의 주체인 자기의 굳은 믿음과 물러나지 않는 수행, 그리고 부처님과 보살님의 자비로운 도움이 함께 어우러져 수행을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 “승가를 믿다. 승가는 수행을 열심히 잘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승가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개인이 아닌 집단, 즉 수행하고 공부하는 집단입니다. 진리를 추구 하는 모임입니다. 

귀명삼보 승 부분으로, “목숨을 거두어 돌아가나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의 씨앗이여. 있는 그대로 그리고 모든 것 속에서 생활하는 그 숱한 구도자들이여.” 목숨을 거두어 진리로 돌아가는 이 사람들이 수행자, 승가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법에 맞게, 즉 사성제에 맞게 살아가는지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삶은 알고 시작하는 순간 달라집니다. 나를 되돌아보지 않으면 똑같은 삶만 되풀이할 뿐입니다. 진리를 추구 하고 진리를 논하고 실천해야 승가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부처님과 같이 자비심이 많아야 합니다. 집단 이기심이 강해지면 그것은 진정한 승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즘 종교들은 집단 이기심이 매우 강합니다. 집단 이기심은 국가나 정치에서도 강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법을 믿고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집단은 종교 수행집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도 진리를 추구하는 곳입니다. 대학도 일종의 승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대학은 시스템이 체계화되어 있고 종교 수행 단체는 계율은 있지만 비교적 덜 체계적이고 자율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이렇게 불교만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세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공부하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소중하게 됩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면 화합할 수 있습니다.]

② 증발심(證發心)의 상(相) 

又是菩薩發心相者(우시보살발심상자) 有三種心微細之相(유삼종심미세지상)

또한 이 보살의 발심상에는 세 가지 마음의 미세한 상이 있으니, 무엇을 그 셋이라 하는가?

云何爲三(운하위삼) 一者眞心(일자진심) 無分別故(무분별고) 

첫째는 진심으로, 분별이 없기 때문이며, 

二者方便心(이자방편심) 自然遍行利益衆生故(자연편행리익중생고)

두 번째는 방편심으로, 자연스럽게 두루 수행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며,

三者業識心(삼자업식심) 微細起滅故(미세기멸고)

셋째는 업식심으로, 미세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起滅하기 때문이다.

 

[元曉 : 眞心(진심) - 무분별지(無分別智), 方便心(방편심) - 후득지(後得智), 業識心(업식심) - 두 가지의 지혜에 의거하는 아리야식이니, 사실을 말한다면 또한 전식과 현식이 있는 것이지만 다만 지금은 근본의 세상(細相)만을 대략 든 것이다. 그러나 이 업식은 발심의 덕이 아니니, 다만 두 가지 지혜가 일어날 때 이러한 미세하게 생멸하는 허물이 있어 불지(佛智)의 순정한 덕과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합해서 발심상이라고 말한 것뿐이다.

* 高淳豪 : 眞心(진심)이라 한 것은 근본지(根本智)를 말하며, 方便心(방편심)은 후득지(後得智)인 권지(權智)를 말하며, 業識心(업식심)은 원효스님은 “무분별지와 방편심에 의지하는 아리야식으로 전식(轉識)과 현식(現識)은 있으나, 삼세(三細) 중에 업식만을 든 것이며, 이것은 법신보살이 발심의 덕은 아니나, 앞의 2지가 일어날 때 아직은 무명업식을 완전히 다하지 아니하여 미세하게 기멸하는 누가 있음을 밝혀 순정의 덕과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고 하였다.

* 지운 : 증발심(證發心)이란 주객이 없는 상태에서 발심하는 것으로, 진심(眞心)은 근본지이고, 방편심(方便心)은 후득지로서 여량지(如量智)라고도 하며, 중생을 보면 제도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업식심(業識心)은 선천적인 것으로 주객미분이지만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이 있는 것을 말한다.

* 憨山 : 지상(地上)의 법신보살이 권지와 실지의 작용이 있기는 해도 아직은 구경의 극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와 동일하지 않음을 밝혔다. … 眞心無分別故(진심무분별고) - 근본실지. 方便心(방편심) - 방편권지. 業識心(업식심) - 미세하게 생멸하는 심상. 이것은 이 보살이 권지와 실지가 있긴 하나 아직은 근본무명 업식심인 이숙식(異熟識)이 공적하지 못하여 그래도 미세하게 생멸하는 마음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이 점이 부처와 동일하지 않음을 말하였다.-물처럼바람처럼]

 

[앞에서 원효의 설명을 들어 이 부분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한바 있었지만, 법신보살의 발심에는 세 가지 미세한 마음의 특성이 있다.
첫째는 진심(眞心)이다. 이는 진여를 증득하는 지혜로서 근본지(根本智)이다. 이 지혜는 분별이 없는 참 지혜이다. 진심(眞心)은 진여가 진여를 아는 마음이지만 주객(主客)의 분열이 없는 직관(直觀)이므로 이를 무분별(無分別)이라 한다.
둘째는 방편심(方便心)이다. 이는 원효가 말했듯이 후득지(後得智)이다. 진여의 무분별지(無分別智)가 중생구제를 위하여 나타내는 방편심이다. 일체는 오직 마음인 유심(唯心)으로서 거기에는 주객의 분별이 없으나 마음밖에 중생계가 있으므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한 활동에는 주객의 분별을 인정하는 자연적인 방편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방편심이다.
셋째는 업식심(業識心)이다. 앞에서 원효의 해석을 인용했듯이 원효는 진심(眞心)의 근본지(根本智)와 방편심의 후득지(後得智)와의 둘을 들어「이지소의(二智所依)의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리야식은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원효는 이를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의 삼식(三識)으로 성립되는 것이라고 보고있어 업식이 있으면 당연히 전식, 현식도 있는 것이지만,「지금 여기서는 생략하여 근본의 세상(細相)을 든다」고 하여 업식심(業識心)만을 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야식의 최초(生相)는 업식이므로 업식(業識)만으로도 설명이 충분하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십지(十地) 이전의 보살은 아직 성불(成佛)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아직 미세한 무명망념(無明妄念)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보살이 중생구제를 위하여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가 활동할 때는 이 아리야식의 업식(業識)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법신보살의 이지(二智)는 아리야식을 전혀 갖지 않는 불타의 그것과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삼심(三心)의 하나로 업식심(業識心)을 든 것은 보살이 두 가지 지심(智心)이 발휘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업식에 의한 것이므로 미세한 생멸의 과실이 있으며 따라서 불타의 순정(純淨)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전종식]

 

[여기에서는 지상(地上)의 법신보살이 권지와 실지의 작용이 있긴 해도 아직은 구경의 극치에 이르진 못하였기 때문에 부처와 동일하지 않음을 밝혔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의문을 일으키길, "위에서 말한 대로 보살에 이와 같은 진여의 덕성과 작용이 있다면 어찌 부처의 경지와 동일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그에 대한 답변으로 보살은 세 가지 미세하게 발심한 마음의 양상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은 부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 "진심으로 발심한 양상인데 분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근본실지인 여리지(如理智)이고, 둘째 "방편으로 발심한 양상"은 방편권지인 여량지(如量智)이며, 세 번째 "업식심"은 미세하게 생멸하는 심상입니다. 이것은 이 보살이 권지와 실지가 있긴 하나 아직은 근본무명 업식심인 이숙식(異孰識)이 공적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미세하게 생멸하는 마음의 양상이 있기 때문에 이 점이 부처와 동일하지 않습니다.-수선]

 

* 증발심(證發心)의 공덕성만(功德成滿)의 상(相) 

又是菩薩功德成滿(우시보살공덕성만) 於色究竟處(어색구경처)

또한 이 보살의 수행공덕이 원만하게 성취되어, 색구경처에서

示一切世間最高大身(시일체세간최고대신)

모든 일체 세간의 가장 큰 몸을 나타내 보이나니,

謂以一念相應慧(위이일념상응혜) 無明頓盡(무명돈진) 名一切種智(명일체종지)

이른바 일념이 상응하는 지혜로써 무명이 단박에 다하는 것을 이름하여 일체종지라고 하니,

自然而有不思議業(자연이유불사의업) 能現十方(능현시방) 利益衆生(이익중생)

자연스럽게 불가사의한 업이 있어, 능히 시방에 나타나서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

 

[일념상응혜(一念相應慧), 시각(始覺)의 마지막 찰나의 지혜가 본각(本覺) 진여의 근본지(根本智)와 합일되어, 심원(心源)을 각(覺)하는 지혜로서 여기서 망념이 모두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일체종지(一切種智), 일체제법의 본질[理]에 통달한 지혜로서 차별(差別)과 평등(平等)의 양자를 포함하는 지혜이다. 일체제법의 본질을 안다는 점에서는 근본지(根本智)이고, 동시에 일체의 차별상을 조견(照見)하는 점에서는 후득지(後得智)이다. 그러므로 일체종지는 이 이지(二智)에 통하는 지(智)이다. 이를 가행도(加行道) 무간도(無間道) 해탈도(解脫道) 승진도(勝進道) 등 사도(四道)로 구분하면 일념상응지(一念相應智)는 무간도에 해당되고 일체종지(一切種智)는 해탈도에 해당된다. 일념상응혜는 인(因)에서 과(果)에 이른 순간적 지혜로서, 끊어지는 무명과 끊는 지혜가 동시에 있어 찰나의 간극이 없으므로 무간도(無間道)라 말하고, 일체종지는 증과(證果)로서 무명은 이미 사라져 없고, 지혜만이 있으므로 해탈도(解脫道)라 부른다.]

 

[高淳豪 : 제십지 보살은 색계의 최고인 색구경천에서 성도를 한다고 한다. 이는 보신(報身)으로 가장 큰 몸이 되는데, 자기에게는 자수용신(自受用身)이 되고 남에게는 타수용신(他受用身)이 된다.

* 三身(삼신)법신, 보신, 응신으로 나누기도 하고, 자성신, 수용신, 변화신으로 나누기도 한다.

①자성신(自性身) - 저절로 존재하는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② 수용신(受用神) - 깨달음의 경지를 스스로 즐기고, 또 그 경지를 중생들에게 설하여 즐겁게 하는 부처.(자수용신 : 깨달음의 경지를 스스로 즐기는 부처, 타수용신 : 깨달음의 경지를 중생들에게 설하여 즐겁게 하는 부처) 

③ 변화신(變化身) -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변화하여 나타나는 부처. ≪시공불교사전≫

이렇게 나눈다면 자성신은 법신, 자수용신은 보신, 나머지는 응신에 해당한다.

* 元曉 : 욕심이 있는 색계와 무색계에서 부처님이 성불한 것이 아니었다네. 색계 중의 높은 하늘 구경천에서 욕심을 떠나갈 때 도를 얻었네.

* 삼계(三界)는 욕계, 색계, 무색계로 되어 있다. 모든 부처님이 성불한 것은 욕계나 무색계가 아니라 색계의 제일 위 하늘인 색구경천이다. 그 이유는 중생 구제를 위해서는 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보살이 수행을 계속하여 공(功)과 덕(德)을 쌓아, 수행이 완성되면, 증발심(證發心)의 성만공덕(成滿功德)으로 성불(成佛)한다.
여기서는 증발심의 보살이 수행의 공덕을 완성한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설하는 내용은 인(因)의 입장에서 공덕성만(功德成滿)을 다루고 있으며, 과(果)의 입장에서의 공덕성만은 성불(成佛)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보살의 인행(因行)이 완성되어 불타가 되면, 그 불신(佛身)은 색계(色界)인 색구경처(色究竟處)에 있어서 일체세간에서는 최고의 큰 몸을 나타낸다. 색계십팔천(色界十八天)중 최고인 색구경천(色究竟天)이라고 해석해 오고 있다.
일체세간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로 구성되어 있다함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욕계, 색계는 신체가 있는 세계이며, 무색계는 신체는 없고 마음만이 있는 세계를 말한다. 욕계(欲界)는 남녀(男女)의 구별이 있으며, 식욕이나 성욕 등이 있는 세계이며, 색계(色界)는 선정(禪定)에 들어간 세계로서, 마음이 통일되어 외계의 인식은 사라지고, 신체의 락(樂)을 감수(感受)하는 세계이다. 무색계(無色界)는 선정체험이 더욱 심화되어 육체의 인식도 사라져, 마음만이 경험되는 세계이다. 이와 같이 외계에는 삼계(三界)가 있다고 보고, 이것이 우주로서 일체의 생물이 이 세계에 포함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증발심의 보살이 수행공덕을 완성하면 불타가 되고, 이 불신(佛身)은 일체세간의 최고대신(最高大身)을 나타낸다고 본론은 설하고 있다.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신체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이 색구경천(色究竟天)의 신체에 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보살은 일체세간에 두루 가득한 진여법신(眞如法身)에 수순하여 진여와 일여(一如)가 되는 것이므로 그 법신은 일체세간에 편만(편滿)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 색신은 최고최대의 몸이 된다.

이 보살은 일념상응혜(一念相應慧)로 지금까지 계속된 무명(無明)의 최후 일념(一念)까지 마침내 다해 사라진다. 이와 같이 무명이 다하여 진지(眞智)가 나타나는 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말한다.

이 일체종지(一切種智)는 의지(意志) 없이도 저절로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신비한 부사의(不思議)의 작용이 있어, 십방세계에 나타나서 일체의 중생을 이익케 하는 것이다. 일체종지는 수염본각(隨染本覺)에서 다룬 지정상(智淨相)과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의 두 가지 작용을 포함한다. 이와 같은 일체종지와 부사의업의 공덕성만(功德成滿)의 모습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각각의 의문에 대하여 이를 대답하며 해명한다.]

 

[여기서는 구경의 과덕을 밝혔습니다. 즉, 이 보살의 수행공덕이 원만하게 성취되면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모든 세간의 가장 큰 몸을 낸다는 자수용신(自受用身)입니다. 이는 이른바 일념(一念)이 서로 호응하는 지혜 즉 시각(始覺)이 일심의 근원에 이르러 본각(本覺)과 서로 호응하는 지혜로 근본무명이 단박에 다하는 것을 이름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자연히 불가사의한 지혜의 작용이 있어 시방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유익하게 할 수 있기에 타수용신(他受用身)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수행의 인지가 끝까지 다하고 과덕이 원만하게 성취된 것을 논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색구경처천에서 세간의 가장 높고 큰 몸을 나타내어 정각을 성취합니다. 이로써 현보(現報)인 자수용보신(自受用報身)의 이익을 나타내어 불과위(佛果位)를 수용하기 때문이며, 후보(後報)인 타수용신(他受用身)을 나타내어 중생을 유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근본무명업식이 다한 자는 자연스럽게 불가사의한 지혜작용이 있어 일체종지를 성취한다고 한 것에 해당하겠습니다. 여기서 "색구경처천"은 색계 최고 정상의 하늘인 유정천(有頂天)입니다. 부처님마다 모두 이 하늘의 연화궁(蓮華宮)에 앉아서 가장 높고 큰 몸을 나타내시고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성취한 몸은 자수용보신불입니다.]

 

   ③ 一切種智(일체종지)

問曰(문왈) 虛空無邊故世界無邊(허공무변고세계무변)

묻나니, 허공이 끝이 없기 때문에 세계가 끝이 없으며,

世界無邊故衆生無邊(세계무변고중생무변)

세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중생이 무변하며,

衆生無邊故心行差別亦復無邊(중생무변고심행차별역부무변)

중생이 끝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작용=心行의 차별도 또한 끝이 없다.

如是境界不可分齊(여시경계불가분제) 難知難解(난지난해) 若無明斷(약무명단)

이와 같이 경계는 한계 지음=分齋할 수 없으니, 難知=알기 어렵고 難解=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무명이 끊어지면 

無有心想(무유심상) 云何能了名一切種智(운하능료명일체종지)

심상이 있지 아니할 것이나, 어떻게 능히 알아 일체종지라고 이름하는가.

 

[一切種智, 모든 종류의 경계와 심상을 아는 지혜이다. 그런데 세계도 끝이 없고 중생도 한량없으며, 그 심행도 각각 다른데 어떻게 그것을 다 알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금강경》<일체동관분>에도 이와 같은 말이 나온다. “그 국토에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모두 안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모든 마음은 모두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심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문은 일체종지(一切種智)에 대한 것으로, 일체종지는 일념상응으로 무명이 끊기어 망분별의 심상(心想)이 없어진 상태이므로 차별세계에 대한 인식은 없어지는데, 어찌 그 차별상을 조견(照見)하는 일체종지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여기에서는 일체종지(一切種智)의 개념과 작용을 문답을 통해 확실하게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일체종지란 모든 사물의 공통성과 개별성 즉, 허공과 그 안에 있는 세계, 그 속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심념(心念)의 수를 끝까지 낱낱이 다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허공과 세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중생도 끝이 없으며, 그들의 심의식(心意識)이 진행하는 차별의 모습도 또한 끝이 없어서 이러한 끝없는 세계는 참으로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살이 근본무명을 다하여 일체종지가 현전하다면 절대로 망상심이 없게 됩니다. 이처럼 분별로 아는 망상심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들을 낱낱이 알 수 있고, 일체종지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는 범부의 사유가 있는 허망한 생각으로써 불가사의한 진여(眞如)의 세계를 헤아린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答曰(답왈) 一切境界本來一心(일체경계본래일심) 離於想念(리어상념)

답하여 말하나니, 일체경계는 본래 일심으로서, 상념을 떠나 있으나,

以衆生妄見境界故(이중생망견경계고) 心有分齊(심유분제) 

중생이 망상으로 경계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한계=分齊가 있는 것이다.

以妄起想念(이망기상념) 不稱法性故(불칭법성고) 不能決了(불능결료)

허망하게 상념을 일으킴으로써, 법성에 稱合=맞지 않기 때문에 결코 요해하지 못하지만,

 

[元曉 : 一切境界本來一心 離於想念이란 도리를 세운 것이다. 모든 경계는 본래 끝이 있지 않지만, 끝이 없지도 않으니, 일심을 벗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끝이 없지 않기 때문에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니, 이 때문에 상념을 여의었다고 하는 것이다. 以衆生妄見境界故 心有分齊란 보는 바가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대답하여 말한다. 일체의 대상세계는 본래 일심(一心)이며, 망상과 망념이 떠나 있는 것이지만, 중생이 망념(妄念)으로 일체대상을 보는 것이므로, 마음에 차별과 구별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일어난 망념 망상은 본래 일심(一心)인 진여법성과는 합치할 수가 없는 것이므로, 마음의 세계가 하나라는 사실을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타가 되면 제불여래(諸佛如來)는 차별적 망견(妄見)과 망상(妄想)에서 떠나 있으므로, 보는 작용이 일체에 두루 퍼져있다. 법성진여의 전체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증득된 마음의 진실상이기 때문이다.
중생이 아무리 끝이 없고 그 망법(妄法)이 끝이 없다 하더라도, 증득된 마음의 진실상은 스스로 일체의 망법에 비추어, 망법은 망법대로,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다. 불지(佛智)는 자체 위에 중생의 일체망법을 현조(顯照)하여 망법을 망법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諸佛如來(제불여래) 離於見想(리어견상) 無所不遍(무소불편) 心眞實故(심진실고)

제불여래는 견해의 모습=見想을 여의었기 때문에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마음은 진실한 것이기 때문에,

卽是諸法之性(즉시제법지성) 自體顯照一切妄法(자체현조일체망법) 

바로 이것이 제법의 본성=性이며, 자체가 일체의 허망한 제법=妄法을 환하게 비추고,

 

[元曉 : 離於見想 無所不遍이란 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心眞實故 卽是諸法之性이란 불심은 망상을 여의어 일심의 근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니, 망상을 여의었기 때문에 마음이 진실하다고 한 것. 이리하여 불심이 모든 망법의 체이며, 모든 망법은 다 불심의 상인지라 상은 자체를 나타내고 자체는 그 상을 비추는 것이니, 이와 같이 알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체는 모든 망법을 환하게 비춘다고 말한 것이니, 이는 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된 이유를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불타의 후득지(後得智)에는 중생의 일체망법을 불심(佛心) 속에 나타내는 크나큰 지혜의 작용과 무량한 방편이 있다. 일체종지(一切種智)는 중생의 일체망법이 불심(佛心)에 비치어 나타나게된 것으로서 이를 자체현조(自體顯照)라 한다. 이와 같이 중생의 망법은 모두가 불심(佛心)에 비치어 나타나 있으므로 불타는 그들 중생 하나하나의 요구에 응하여, 그들이 이해하는 바에 따라 적절히 여러 가지 법의 뜻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지(佛智)를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有大智用(유대지용) 無量方便(무량방편) 隨諸衆生所應得解(수제중생소응득해)

대지의 작용과 무량한 방편이 있어서, 온갖 중생이 응하는 것을 따라 이해=得解하는 바에 따라

皆能開示種種法義(개능개시종종법의) 是故得名一切種智(시고득명일체종지)

모두 능히 여러 가지 법의 뜻=法義를 열어 나타내니, 그러므로 일체종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진여는 상념이 없는데(眞心無知) 어떻게 한량없는 중생들의 경계를 아는가? 왜냐하면 진여는 여실공과 여실불공의 두 측면이 있어서, 중생의 경계에 상응하여 정념으로 중생들의 경계를 안다.]

 

[이에 대한 답변에서, 허망한 생각을 여읜 일심의 세계는 시각(始覺)을 통해서 본각(本覺)을 증오해야만 상응하고 심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일체종지의 명칭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끝없는 일체의 세계가 본래 일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일심진여의 세계는 망상으로 분별하는 허망한 생각을 여의었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끝없는 세계를 한계가 있는 망상의 견해로 보기 때문에 마음의 분야를 나누어 한계가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허망하게 상념을 일으킴으로써 진여법성에 걸맞게 계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끝까지 밝게 통달하지 못하지만, 제불여래는 허망한 견해의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에 두루 보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부처님의 마음은 일심의 진실을 체득하여 본각(本覺)이 시각(始覺)과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일심이 모든 법의 본성입니다. 제법자체인 이 일심이 일체 허망하게 생멸하는 제법을 환하게 비춥니다. 그러나 그 자체엔 위대한 지혜의 작용인 한량없는 방편이 있어 모든 중생을 따라 이해할 수 있도록 감응하면서 모두에게 갖가지 법의 의미를 열어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일체종지라고 하였습니다.]

 

④ 世間(세간)에서 부처를 보지 못하는 이유
又問曰(우문왈) 若諸佛有自然業(약제불유자연업)

또 묻나니, 만약 모든 부처님에게 자연업이 있어서,

能現一切處利益衆生者(능현일체처리익중생자)
일체의 모든 곳에 나타나시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분이라면,
自然業(자연업) : 의도가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행위
一切衆生(일체중생) 若見其身(약견기신) 若覩神變(약도신변) 若聞其說(약문기설) 

모든 중생이 그 몸을 보거나 신통변화를 보거나, 그 설법을 듣는다면

無不得利(무부득리) 云何世間多不能見(운하세간다불능견)

이익을 얻지 않음이 없을 것이나, 어찌하여 세간에서는 보지 못함이 많은가?
答曰(답왈) 諸佛如來(제불여래) 法身平等遍一切處(법신평등편일체처) 

답하나니,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지만, 

無有作意故(무유작의고) 而說自然(이설자연)
의도를 지음=作意가 없기 때문에 자연이라고 설하나니,

但依衆生心現(단의중생심현) 衆生心者猶如於鏡(중생심자유여어경)

다만 중생의 마음에 의지하여 나타낼 뿐이니, 중생의 마음이라는 것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鏡若有垢色像不現(경약유구색상불현) 如是衆生心(여시중생심)

만약 거울에 때가 끼어 있으면 색상이 나타나지 않으니, 이처럼 중생의 마음도 

若有垢法身不現故(약유구법신불현고)

만약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憨山 : 여래의 법신 대용인 보신과 화신의 작용은 항상 그러하여 중생의 심의식을 보편하게 관조한다. 그러나 단지 중생의 심의식에 여래의 법신을 보는 데 장애가 되는 더러운 때가 끼어 무명의 어둠이 가리어졌을 뿐이다. 그 때문에 보지 못할지언정 그것이 부처님의 허물은 아닌 것이다. 거울로써 부처님을 뵙고 뵙지 못하는 의미를 비유하였다. 이를 《화엄경》에서는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심은 비유한다면 햇빛이 대지를 두루 비추면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보지만, 유독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봉사는 보지 못한다. 봉사가 비록 햇빛을 보지 못한다고는 하나 역시 따스한 햇빛의 혜택을 받는다.”

* 佛身의 법체는 없는 곳이 없어서, 중생이 볼 수 있는 상태가 되면 늘 볼 수 있다. 무명에 의해 물들어 보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법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렇게 수행되었다는 뜻이니, 본인 역시 부처가 된다. 그러다보면 법신을 여실하게 본다는 것이나 성불한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불여래인 진여법신의 위대한 작용인 보신과 화신은 항상 여여하지만 단지 중생이 처한 상황에 밝음과 어두움이 있을 뿐임을 문답으로 밝혔습니다. 앞의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의 문장에서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간 중생이 법을 의지해 수행하는 모습을 밝혀 바른 종취(宗趣)를 결론짓고, 십신(十信)을 수행하여 십해(十解)를 성취한 의도로써 대(大)와 승(乘)의 의미를 밝혔었습니다. 다음 문장에서 다시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설명하게 된 것은 특별히 정정취에 아직 들어가지 못한 중생을 위하여 신심을 열어 보여주고 올바른 신행(信行)을 발기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는 위에서 설명이 끝난 대승에 대한 신심을 일으키는 의미를 밝힌 것입니다.]

 

[두 번째의 의문은 불지(佛智)의 자연업(自然業)에 대한 것이다. 다시 물어 말하기를, 만약에 제불에게 저절로 중생을 구제하는 자연업(自然業)이 있어, 온갖 장소에 나타나 중생을 이익케한다면, 일체중생은 모두 그 불신(佛身)을 보고, 그 불신의 신비스러운 신통신변(神通神變)을 보게 되며, 또한 불타의 설법을 듣고 이익을 얻어 구제될 것인데, 어찌하여 세간에는 불타를 볼 수 없는 중생이 많은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제불여래의 법신은 평등하고, 일체처에 두루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어 중생의 마음속에도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것은 불타가 인위적 의지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나타내는 것이므로 이를 자연업(自然業)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중생의 마음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중생심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거울에 만약 때[垢]가 묻어 있으면 색상이 나타나지 않듯이, 중생의 마음에 만약 번뇌의 때가 묻어 있으면, 거기에 법신(法身)이, 보신(報身)이나 응신(應身)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발심단계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전종식]

(4) 證發心(증발심)

  ① 發心(발심)의 因緣(인연)

證發心者(증발심자) 從淨心地(종정심지) 乃至菩薩究竟地(내지보살구경지)

증발심이라함은 정심지로부터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에 이르기까지이니,

證何境界(증하경계) 所謂眞如(소위진여) 以依轉識(이의전식) 說爲境界(설위경계)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이른바 진여이다. 전식을 의지하는 것으로, 설하여 경계로 삼는다.

[淨心地(정심지) : 보살 십지 중 초지인 환희지(歡喜地)를 말함.

究竟地(구경지) : 보살 십지 중 제 십지인 법운지(法雲地)를 말함.]

[元曉 : 以依轉識 說爲境界란 전식의 상은 능견의 작용이어서, 이 능견에 대하여 경계라고 말한 것이니, 이러한 제지(諸地)에서 일어난 증지(證智)는 전식에 의해서만 증득하기 때문이다. 능견의 소의(所依)에 대하여 임시로 경계라고 말하나 바로 증지에 나아가서는 곧 能과 所가 없기 때문에 而此證者 無有境界라고 말한 것이다.

* 憨山 : 근본 실지로 진여의 이치를 반연하면 실지인 주관과 진여인 객관의 차별적인 모습이 없다. 실지인 마음과 진여 경계가 일여(一如)다. 그런데 以依轉識 說爲境界라 함은 전식 뒤에서 진여의 이치를 반연하여 진여변상(眞如變相)인 현상의 경계를 통해서 진여성공의 이치를 관찰하므로 이는 관찰하는 주관과 관찰한 객관인 진여가 상대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때문에 관찰할 진여의 경계가 상대적으로 있게 된다. 진여를 증득함은 이런 경계가 아님을 구별해주기 위해서 이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증득한 진여는 주관과 객관의 상대성을 여의어 진여의 이치와 근본실지가 절대 홀로 존재한다. 그 때문에 증오할 대상인 진여의 경계가 따로 없고 유일한 진여지(眞如智)일 뿐임을 법신이라고 명칭한다.-물처럼바람처럼]

 

[셋째의 증발심(證發心)이라 함은 진여를 증득하여, 그 증득한 진여의 지(智)를 바탕으로 일으키는 발심을 말한다. 진여를 깨닫는 것은 보살이 정심지(淨心地)인 초지(初地)에 들어가서 부터이며, 거기서부터 제10지인 구경지(究竟地)까지 보살이 증발심(證發心)을 일으키는 것이다.-전종식]

 

而此證者(이차증자) 無有境界(무유경계) 唯眞如智(유진여지) 名爲法身(명위법신)

그러나 이러한 증득에는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진여의 지혜=眞如智일 뿐이므로 이름하여 법신이라고 한다.

 

[전식(轉識)으로 인해 경계를 나타내어, 경계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전식으로 설명하니 진여 경계라고 할 뿐, 진여 그 자체는 아무런 경계가 없이 진여의 지혜만 있을 뿐이다. 경계상은 전식이 있어야 일어난다. 부처의 경지를 대상화하거나 개념화하는 것은 전식에 의한 것이다. 만약 불지에 든다면 주객과 개관의 나뉨이 없어 경계라는 것이 없다.]

 

[여기서 진여를 증득했다고 세운 것은 단지 이를 세우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가 없으므로 편의상 진여라고 말한 것일 뿐이다.
본문에서는 전식(轉識)에 의하여 경계를 삼는다고 하였지만 진여를 아는 것은, 아는 지(智)와 알게되는 진여와의 사이에 주객(主客)의 분열이 없는 전체적 직관(直觀)이며,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법신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방금 초지(初地)에 들어선 보살은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등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가 아니며 십지(十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무명(無明)이 멸해지면서, 사라져 가 마침내 십지(十地)인 구경지(究竟地), 보살진지(菩薩盡地)에 이르러 완전히 업식(業識)까지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법신보살이라 하더라도 어느 일면에 있어서는 업식, 전식, 현식의 삼상(三相)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그중 전식(轉識)을 빌어 증발심(證發心)에서의 증득의 대상(對象)즉 경계를 나타낸 것이다. 전식의 경계는 현식(現識)이다. 그렇다고 해서「실재로 증득의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여지(眞如智)만이 있는 것이므로 이를 이름하여 법신(法身)으로 삼는다」고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진여지(智)는 곧 진여이다. 진여는 이(理)이지만 이지(理智)는 합일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근본지(根本智),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이다. 진여(眞如)는 이(理)이면서 본성이 지(智)이고, 그것이 바로 범부의 본성이며, 동시에 불(佛)의 본성인 법신(法身)이다. 법신은 바로 지신(智身)이다.]

 

[앞의 해행발심은 아직 진여의 법신을 증득하지 못하였는데, 여기 증발심은 진여법신을 증득한 초지의 정심지로부터 보살의 마지막 경지인 십지만심(十地滿心)에 이르기까지 법신보살이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하면 진여(眞如)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식(轉識)을 의지하기 때문에 진여를 증오할 경계라고 설명하긴 하였으나 실제로 증득한 대상의 경계란 없고 진여의 이치를 근본지로 증득하여 진여와 근본지가 평등한 것을 다만 법신이란 이름을 붙였을 뿐입니다. 즉, 앞서의 삼현(三賢)보살은 진여법성을 따라서 수행하긴 하였으나 그들은 진여의 이치를 직접 증득하진 못하였고 단지 비량(比量)으로 추리하여 관찰하였을 뿐입니다. 그러한 경지에선 무명을 아직 타파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진여를 실제로 증득하진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십지의 법신보살들은 정심지에 깨달아 들어가면서 무명의 허망한 생각의 분별인 두 가지 장애를 이미 여의고 진여가 환하게 나타나 일심이 개발되었습니다. 이를 진여의 이치를 실제로 증득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발심"이라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진여의 위대한 작용이 발현하였기 때문입니다.-수선]

 

是菩薩於一念頃(시보살어일념경) 能至十方無餘世界(능지시방무여세계)

이 보살은 일념 사이=一念頃에 능히 시방의 남김이 없는 세계=無餘世界에 이르러

供養諸佛請轉法輪(공양제불청전법륜)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진리의 바퀴=法輪을 굴리시기를 청하며,

 

[憨山 : 진여를 정면으로 증오(證悟)했다면 시방법계의 평등한 일법계의 모습으로 환하게 나타나 목전에 있는 듯하여 자타의 신상(身相)이 마치 거울과 거울의 광채가 서로 장애함이 없이 하나로 교차하듯 한다. 그 때문에 일념의 제망찰토(帝網刹土)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을 섬기고 설법해주기를 청한다. 일체 중생이 진여의 이치로 평등하여 자타의 두 모습이 없음을 본다. 그 때문에 일체 중생에게 이익을 줄 뿐이다.]

 

[이 지위에 있는 보살을 이른바 법신보살(法身菩薩)이라 불린다. 이들 보살이 증득한 경계는 이른바 진여(眞如)이다. 그러나 진여를 증득했다 하더라도 자기와 진여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유심(唯心)의 이(理)에 도달되면 자기 자신이 진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진여의 지(智)이다. 진여를 인식의 대상으로 관(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바로 진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진여를 자기의 인식대상으로 관하는 것은 지전(地前)의 보살이다.]

 

[진여의 수승한 작용에 방편과 실지의 덕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 보살은 일념 사이에 시방세계에 남김없이 도달하여 그 모든 세계의 모든 중생들을 솔선하여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설법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 오직 중생을 개발하여 인도하여 이익을 주는 설법은 하지만 언어문자를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여를 실제로 증오했다면 시방법계가 평등한 일법계의 모습으로 환하게 나타나 목전에 있는 듯하여 자타의 몸의 형상이 마치 거울과 거울의 광채가 서로 장애없이 하나로 교차하는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념에 제망찰토(帝網刹土)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을 섬기고 설법해 주시기를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체중생이 진여의 이치로 평등하여 자타의 두 모습이 없음을 봅니다. 그 때문에 일체중생에게 이익을 줄뿐입니다. 그가 하는 설법은 한결같은 진여의 자체에서 불가사의한 업지의 작용이 발현하여 업지인 권지(權智)와 그 자체인 실지(實智)가 함께 나타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다음에 여러 가지 모습을 나타냅니다.]

 

唯爲開導利益衆生(유위개도리익중생) 不依文字(불의문자)

오직 중생을 개도하여, 이익되게 하기 위할 뿐이며, 문자에 의존하지 않으며,

或示超地速成正覺(혹시초지속성정각) 以爲怯弱衆生故(이위겁약중생고)

혹은 경지=地를 초월하여 속히 정각을 이룸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니, 이는 겁이 많고 약한 중생을 위한 까닭이며,

說我於無量阿僧祇劫(설아어무량아승기겁) 當成佛道(당성불도)

혹은 아=我는 무량아승기겁에서 마땅히 불도를 성취하게 된다고 설하기도 하는 것은,

以爲懈慢衆生故(이위해만중생고) 能示如是無數方便(능시여시무수방편) 不可思議(불가사의) 

게으르고 교만한 중생을 위한 까닭이며, 능히 이와 같은 무수한 방편을 보이는 것이 불가사의하나,

 

[보살의 종성과 근기가 같으나 중생들을 위해 여러 가지 방편을 보임을 설명하였다. 엄청난 시간이 걸림을 두려워하여 처음부터 발심하지 않는 중생을 위하여 경지를 초월하여 속히 이룸을 보여주기도 하고, 교만하고 게으른 중생을 위해서는 한량없는 시간이 지나야 성불하게 된다고 말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법신보살은 한 찰나에 시방(十方)의 온갖 세계에 빠짐없이 이르러, 제불(諸佛)을 공양하고, 법륜 즉 설법을 청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념(一念)은 한 찰나를 의미한다. 이렇게 보살이 청법(請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중생을 인도하고 가르쳐, 그들을 이익케하기 위한 것으로서 미묘한 불타의 음성을 듣기 위한 것도 아니며, 그 음성에 집착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는 신역(新譯)에서 말하는 것으로서 구역(구譯)은「문자에 의존하지 아니한다」고만 되어 있어 뜻이 다소 애매하지만 문자를 세우지 않는 선(禪)사상의 근원이 바로 이것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또한 그는 속성(速成)으로 정각을 이룰 수 있다고 설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방편으로써 십지(十地)를 하나 하나 단계적으로 거치지 아니하고도 초지(初地)에서 삼지(三地)로, 또는 이지(二地)에서 사지(四地)로 단계를 뛰어넘어 속성으로 정각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겁약(怯弱)한 중생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때로는 그와 반대로 해태(懈怠)한 중생, 다시 말하면 불도수행(佛道修行)을 안이(安易)하게 생각하는 만심(慢心)의 중생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의 한정된 기간이 아니라 무량한 아승지겁의 수행을 한 연후에야 불도를 이룬다고 설하기도 하는 것이다.]

 

而實菩薩種性根等(이실보살종성근등) 發心則等(발심즉등) 所證亦等(소증역등)

그러나 실은 보살의 종성은 뿌리가 같고, 발심 또한 같으며, 증득하는 바도 역시 같아서,

無有超過之法(무유초과지법) 以一切菩薩皆經三阿僧祇劫故(이일체보살개경삼아승기겁고)

초월해서 능가할 만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니, 일체의 보살은 모두 삼아승기겁을 경유했기 때문이다.

 

[증득하여 발심하는 보살에 대한 설명이다.

種性根等(종성과 근기가 같음)이라 한 것은 성불할 근기가 같다는 말이다.

發心則等(발심이 같음)은 모든 보살이 성불하려는 발심을 하기 때문이다.

所證亦等(증득한 것이 같음)은 모든 보살이 경계와 주관이 없음을 증득하였음을 말한다.

無有超過之法(이를 넘어서는 법이 없음)은 보살들을 뛰어넘는 법이 없음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이 증발심(證發心)의 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무수한 방편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방편은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를 증득한 보살이 나타내는 후득지(後得智)로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뛰어난 작용이다. 후득지는 근본지의 뒤에 일어나는 지혜라고 해서 후득지라고 한다.
원효(元曉)는 후득지에 대하여 그의 소(疏)에서 방편심(方便心)이라 말하고,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를 진심(眞心)이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진심(眞心)이라는 것은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말하고, 방편심(方便心)은 후득지(後得智)를 말하며, 업식심(業識心)은 위 두 가지 지혜가 의지하는 바의 아리야식(阿梨耶識)을 말한다. (言眞心者謂無分別智, 方便心者是後得智, 業識心者二智所依阿梨耶識.)」고 하여 증발심의 세 가지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법신보살이라 하더라도 후득지(後得智)의 활동은 업식(業識)에 의존하는 것이다.
위에서 원효는 업식심(業識心)을 근본지와 후득지가 의지하는 바 아리야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보살의 후득지는 업식(業識)의 작용을 빌어 나타내는 것이다. 후득지는 세상에 대한 차별지(差別智)로서「나와 너의 구별이 있다」. 그러므로 보살은 유심(唯心)의 이치를 통달했다 하더라도 자기의 마음밖에 외계(外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에 대하여 활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보살은 업식(業識)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전식(轉識), 현식(現識)을 의존하여 활동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불타가 되면, 불타 자신은 업식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므로, 불타의 후득지의 활동은 업식의 의지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연적 중생구제 활동이다. 불타의 자연적 중생구제활동은 중생의 업식(業識)을 빌어 나타나는 것으로써 중생의 내훈(內熏)과 외훈(外熏)으로 작용한다. 법신은 일체에 두루 퍼져있으므로 중생에 있어서의 법신의 작용은 진여의 내훈으로 업식(業識)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며, 또한 진여의 용훈습(用熏習)이 외부에서 현식(現識)을 매개로 활동하는 것이다.]

 

但隨衆生世界不同(단수중생세계부동) 所見所聞(소견소문)

다만 중생의 세계는 한결같지 아니하여, 보는 바도, 듣는 바도, 

根欲性異故(근욕성리고) 示所行亦有差別(시소행역유차별)

근기=根와 바라는 바=欲과 성품=性이 다르기 때문에 수행하는 바를 나타내는 것도 역시 차별이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이 증발심(證發心)의 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무수한 방편을 나타낼 수가 있다. 그것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다. 이같은 보살의 종성(種性) 즉 마음씨가 같고, 이근둔근(利根鈍根)의 구별 없이, 능력이 동등하며, 발심 또한 동등하고 증득하는 바도 역시 동등하다. 아무도 특별히 뛰어난 것이 아니어서, 수행단계를 뛰어넘는 일도 없다. 일체 보살이 모두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을 동일하게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세계는 제각기 차별이 있어 그들을 교화하는데 있어, 그들이 보는 것이나 듣는 것, 또한 그들의 근기나 능력, 의욕이나 성격 등이 제각기 달라 그들과 대응하는 방편행에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증발심보살의 후득지(後得智)이다.]

 

[진여와 그가 지닌 덕상과 작용에 의지하여 권지(權智)와 실지(實智)의 수행을 나타내었습니다. 우선 권지(權智)의 수행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혹은 점진적인 수행경지를 단박에 초월하여 신속하게 정각을 이루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불도는 장원(長遠)하여 장구한 세월을 부지런히 고행해야만 한다는 말을 듣고 겁을 내는 나약한 중생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혹은 나는 무량아승기겁을 수행하여야만 불도를 성취하게 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불과(佛果)를 용이하게 여기는 중생들이 게으름과 교만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셀 수 없는 불가사의한 방편을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살의 종자인 종성(種性)과 오근(五根)은 일승종성(一乘種性)인 상근(上根)과 평등하며, 보리심을 발하여 두 가지 이로운 행을 수행하는 것도 평등하며, 증득한 이공(二空)의 이치도 역시 평등합니다. 이를 초월해서 능가할 만한 법은 없는데, 왜냐하면 일체보살이 모두가 삼아승기겁의 수행을 경유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중생과 그들이 의지한 세계가 동일하지 아니함을 따라서 보고 듣는 데에 있어서도 근기(根機)와 욕구(欲求)와 종성(種性)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보살이 나타낸 수행도 역시 차별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쉼터 이야기

난다는 부처님의 배다른 동생입니다. 그는 부처님의 동생이었으나 성격이 짓궂었습니다. 원래는 출가하지 않으려고 했으 나 강제로 부처님께서 출가시켰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심사가 뒤틀리고 불만에 가득 차 있었겠습니까. 어느 날 사리불 존자가 달빛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가 달빛에 빛이 나는 광경을 보고 화가 난 난다는 사리불의 머리를 세게 때렸습니다. 사리불은 선정의 힘 때문에 무엇엔가 부딪히는 미세한 힘을 느꼈을 뿐이지만 난다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부처님은 이 일을 제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자기의 마음을 되풀이하여 반조해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내 마음은 탐욕과 성냄 그리고 무지에 의해 오염되었다.’라고. 비구들이여, 마음이 오염되면 중생이 오염된다.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이 청정하다.” 난다는 자기 속에 들어있는 성냄을 이기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를 통해 부처님께서는 내 마음 속의 탐욕, 성냄, 무지에서 벗어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잔인한 새 사냥꾼의 이야기입니다. 뿌띠가따 띳사(부 처님 시대의 이름)는 가섭불 시대에서는 사꾸니까라는 새 잡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잔인하게도 새의 날개와 다리를 부러뜨려 도망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느 생에서 그는 발우에 공양을 올리고 절을 하면서 자신도 아라한이 되기를 발원하였습니다. 그는 새를 괴롭힌 업보로 수백만년 동안 지옥의 고통을 받다가 그 공덕으로 부처님 때 인간의 몸을 받아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복을 받았지만 뿌띠가따 띳사는 얼마 후에 병을 얻어 죽고 말았습니다. 죽기 전에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었습니다. 비록 아라한의 원을 세워 부처님을 만나고 출가를 했지만 새를 괴롭힌 과보로 고통스럽게 죽은 것이었습니다.

부처님 시대에 바꿀라 존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청정하게 계를 지키며 사무량심을 닦은 사람이었습니다. 수만 겁 전에 그는 학식이 있는 브라만이었습니다. 그 때 그는 미래 생에도 자신의 행복이 이어지기를 발원하였습니다. 이번 생에도 항상 부지런하고 건전하게 살고 있었는데 마침 부처님이 출현 하셨고 그 때 법문을 듣고 불법에 귀의하였습니다. 하루는 배가 아픈 부처님께 약을 올렸습니다. 부처님께서 걸식을 나가 공양 받은 밥이 상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꿀라의 약을 먹은 덕분에 부처님은 복통에서 벗어나셨습니다. 바꿀라는 이후에 세세 생생 아프지 않는 건강한 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나중에 파두뭇따라 부처님 시대 때 함사와띠시에 재가자로 살았는데 어느 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부처님의 제자로 살기를 발원하였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야무나 강에서 간호사가 그를 씻기다가 잘못하여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물고기가 그를 잡아먹었지만 전생 선정의 힘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선정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보시의 조건은 덕이 있는 자가 바르게 얻어진 재물을 덕이 있는 자에게 청정한 마음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를 청정하게 지켜야 한다. 덕이 있는 사람에게 온 마음으로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재물 등을 제공하고 돌보아 주어야 한다. 계속해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수행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청정하게 계를 지켰기 때문에 계가 있는 사람의 소원은 이루어진다.” ‘청정하게’라 함은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내마음 속에 흘러넘치는 자비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속에 있는 업은 뒤죽박죽되어 있습니다. 옷장을 정리해두면 입고 싶은 옷을 쉽게 꺼내 입을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 옷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져야 합니다. 기도란 내 속의 옷장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두면 전생의 착한 업이 바로 꺼내지기 때문에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내 속에 선한 업이 쌓여있지 않으면 수백 생이 지나도 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가 되겠다는 원을 세우고 계속 선한 업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통섭불교]

(3) 解行發心(해행발심)

解行發心者(해행발심자) 當知轉勝(당지전승)

해(解)와 행(行)의 발심=解行發心이라는 것은, (신성취발심보다) 더욱 수승하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하나니,

以是菩薩從初正信已來(이시보살종초정신이래)

이 보살은 처음 바른 믿음=初正信을 따른 이래, 

於第一阿僧祇劫將欲滿故(어제일아승기겁장욕만고) 

제1의 아승기겁에서의 (수행이) 장차 원만하게 다 채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第一阿僧祇劫(제일아승기겁) : 석가모니 부처님이 발심하여 성불하는 데 3아승기겁이 걸렸다고 하며, 제일아승기겁이란 앞에 나온 신성취발심을 이룬 기간이다.

於眞如法中(어진여법중) 深解現前(심해현전) 所修離相(소수리상)

진여법 가운데서 깊은 이해가 앞에 나타나고, 닦은 바 수행이 그 모습=相을 여읜 것이다. 

深解現前(심해현전) : 이해는 하나 증득은 아니다.

 

[解行發心(해행발심) : 십주와 십행이 원만하여 십회향에서 발심함.

* 지운 : 해행발심에서는 我空과 法空을 체득하고 진여법을 이해하여, 성문과 연각의 경지에 든다. 상사각(相似覺) 발심이다.

* 憨山 : 이 보살은 정신(正信)으로부터 십회향의 마음이 가득 찬 데에 이르기까지 시간적으로 제일무수겁을 경유했다면 앞에서 일만 겁을 수행했던 것을 능가하고, 차별적인 모습을 떠난 진여행을 닦는다면 앞의 보살이 십신으로 불상에 공양하고 스님을 공경하면서 모습에 집착하여 수행하는 것을 능가한다.

이 보살은 일체법이 심식에 상즉한 자성임을 알아 다른 사람을 경유하지 않는 깨달음으로 지혜법신을 성취한다. 그 때문에 분명히 심오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진여법성의 이치를 따라서 집착 없는 수행을 하게 된다.

* 元曉 : 於第一阿僧祇劫將欲滿故 於眞如法中 深解現前이란 십회향의 자리에서 평등공(平等空)을 얻었기 때문에 진여에 대한 깊은 이해가 나타난 것이니, 지전(地前)의 일아승기(一阿僧祇)가 차려고 하기 때문이니 이는 해행에서 발심을 든 것이다.-물처럼바람처럼]

 

[해행발심은 신성취발심보다는 한층 뛰어난 발심이다. 첫째의 신성취발심에서 초발심주(初發心住)에 도달된 보살이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한 단계 위의 발심수행을 행해나가는 것이다. 해행발심(解行發心)은 십주(十住)에서 십행(十行)의 자리에 나아가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행을 닦는 발심으로 여기서 수행하는 육바라밀(六波羅蜜)과 진여무상(眞如無相)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단(檀)바라밀이다. 진여법성에는 애당초 탐내는 간탐심(慳貪心)이 없는 것이므로 이를 알고, 그 법성의 진리에 따라 보시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간탐심을 전혀 갖지 않으며 또한 이것이 보시(布施)라고 하는 것 자체까지도 떠나서, 보시를 행할 때 보시바라밀의 완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등무상의 법성에 수순하는 보시바라밀의 행이다.]

 

[여기에서는 십해와 십행이 원만하여 십회향에서 발심한 것을 밝히고 보다 수승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십해(十解)와 십행(十行)이 원만하여 십회향(十廻向)에서 발심한 자는 십신(十信)보살을 더욱 능가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왜 더욱 능가하는가 하면 이 보살이 최초의 정신지(正信地)로부터 십지(十地)의 초지(初地)인 환희지(歡喜地)에 이르기까지 제1의 아승기겁의 수행을 원만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보살은 진여법 가운데서 분명하게 나타난 진여의 이치를 깊게 이해하여 수행하는 것과 그 모습에 대한 집착을 여읜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십신을 성취한 보살은 십신(十信)이 원만하여 십주(十住)로 진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십주(十住) 다음의 십행(十行)이 원만하여 십회향(十廻向)으로 진입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수승(殊勝)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앞의 보살계위에서는 자리이타의 행을 수행하긴 했으나 그래도 진여법신을 추리로 유추해서 아는 관행(觀行)을 실천하면서 진여의 이치에 진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진여에서 다시 나와 세속으로 들어가 회향하였기 때문에 더욱 수승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더욱 수수한 까닭을 풀이합니다.]

 

以知法性體無慳貪故(이지법성체무간탐고) 隨順修行壇波羅蜜(수순수행단바라밀)

법성의 자체는 아끼거나 탐함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단바라밀=보시바라밀을 수행하며, 

 

[慳 아낄 간

* 元曉 : 십행의 자리에서 법공(法空)을 얻었기 때문에 법계에 수순하여 육도를 닦는 것이니, 이는 발심에 의거한 해행을 나타낸 것이다.

* 十行(십행) : 환희행(歡喜行), 요익행(饒益行), 무진한행(無瞋恨行), 무진행(無盡行), 이치란행(離癡亂行), 선현행(善現行), 무착행(無着行), 존중행(尊重行), 선법행(善法行), 진실행(眞實行)]

* 지운

十信 十解 十行 十回向 十地
信成就發心 解行發心 證發心
  人空 法空 平等空 진여가 드러남  
외범부,범부각 내범부, 이승(초지까지) 상사각 수분각 구경각

 

以知法性無染(이지법성무염) 離五欲過故(리오욕과고) 隨順修行尸波羅蜜(수순수행시바라밀)

법성은 오염됨=染이 없어, 오욕의 허물에서 떠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시바라밀=지계바라밀을 수행하며,

 

五欲(오욕) : 불교에서 경계하는 인간의 5가지 욕망. 재물욕(財物慾), 색욕(色慾),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欲), 명예욕(名譽欲). 흔히 유교의 <예기(禮記)>에 나오는 인간의 감정인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즐거움(樂), 사랑(愛), 미움(惡), 욕망(欲)인 칠정(七情)과 함께 '오욕칠정(五慾七情)'이라 부르며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는 말로 쓰기도 한다. 오욕은 인간의 다섯 가지 기관인 눈, 코, 귀, 혀, 몸과 관련이 있으며, 빛과 냄새, 소리와 맛, 감촉이라는 다섯 가지 경계에 집착할 때 나타나는 욕망을 말한다. 욕계(欲界)는 사람에게 오욕이 있어 본성에 휘둘리는 세계를 말하며, 색계(色界)는 선(禪)을 닦는 수행자가 다시 태어나는 곳으로 오욕의 굴레에서 벗어나 빛과 같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고, 무색계(無色界)는 몸과 같은 물질이 없이 ‘정신적 삼매경’이 지속되는 곳이다. 색계와 무색계는 천상(天上)에 속하고, 욕계는 하계(下界)에 속한다.

석가모니는 ‘재색명식수 지옥오조근(財色名食睡 地獄五條根)’이라고 하여, 이 다섯 가지 욕망이 내생에 지옥에 태어나게 만드는 근원이라고 가르쳤다. 오욕을 채우기 위해 남에게 준 고통은 인과응보에 따라 내생에 자신에게 되돌아 오게 되는데, 이것이 지옥의 고통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불가에서는 오욕의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을 수행의 1차적인 목표로 삼는다.-다움백과]

 

[둘째는 시라(尸羅)바라밀, 즉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이다. 진여법성에는 애당초 번뇌의 염(染)이 없고, 자성이 청정하여 오욕(五欲)의 허물에서 벗어나 있다. 이 무염무욕(無染無欲)의 법성에 수순하여 계(戒)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계(戒)라 함은 악행(惡行)을 제어하는 것으로, 신구의(身口意) 삼업의 악행을 제어하고 십선(十善)을 행하는 것이다.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의 세 가지 신업(身業)의 악(惡)과 망어(妄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기어(綺語)의 네 가지 구업(口業) 및 탐(貪) 진(瞋) 치(癡)의 세 가지 의업(意業)을 떠나 십선계(十善戒)를 행함으로써, 오욕(五慾)의 허물에서 떠나있는 무염(無染)의 진여법성에 수순하는 것이다.]

 

以知法性無苦離瞋惱故(이지법성무고리진뇌고) 隨順修行羼提波羅蜜(수순수행찬제바라밀)

법성에는 괴로움=苦가 없어, 성냄의 번뇌=瞋惱를 떠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찬제바라밀=인욕바라밀을 수행하며,

* 羼(찬) : 양이 뒤섞임. 여기서는 음역

 

[셋째는 羼提波羅蜜(찬제바라밀), 즉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이다. 진여법성에는 애당초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니며 미움과 노여움에서 떠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진여의 본성에 수순하여 인욕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일체법의 본성은 진여로서 그 안에는 고(苦)나 진뇌(瞋惱)가 애당초 없는 것이므로, 그러한 고뇌(苦惱)를 참고 노여움이나 미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以知法性無身心相(이지법성무신심상) 離懈怠故(리해태고)

법성에는 신심의 모습=상이 없어 게으름=懈怠를 떠나 있음을 알기 때문에, 

隨順修行毘黎耶波羅蜜(수순수행비리야바라밀)

수순하여 비리야바라밀=정진바라밀을 수행하며,

 

[넷째는 비리야(毗梨耶)바라밀로, 즉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이다. 진여법성에는 애당초 심신(心身)의 차별상이 없는 것이며 또한 태만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해태(懈怠)가 진여법성에는 애당초 없다는 것을 알면서, 정진(精進)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게으름 없이 심신을 단련하고 중단 없는 노력으로 수행을 정진해 나가는 것이다. 심신(心身)의 상대적 대립 없이 하나된 심신으로 온갖 노력을 경주하여 정진 수행하는 것이다. 어떤 목표에 대한 노력이 아니라 노력 그 자체에도 얽매이지 아니하는 노력이 정진바라밀이다.]

 

以知法性常定體無亂故(이지법성상정체무란고) 隨順修行禪波羅蜜(수순수행선바라밀)

법성은 항상 안정되어 그 자체=體에 산란함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선바라밀=선정바라밀을 수행하며,

 

[다섯째는 禪波羅蜜(선바라밀), 즉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이다. 진여법성은 본래 안정 그 자체이므로 거기에는 애당초 산란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선(禪)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선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 진여의 무상무념(無相無念)에 수순하여 선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以知法性體明離無明故(이지법성체명리무명고) 隨順修行般若波羅蜜(수순수행반야바라밀)

법성의 자체=體는 밝아 무명을 여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般若波羅蜜(반야바라밀),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이다. 진여법성에는 지혜광명이 갖추어져 있어 거기에는 무명이 없는 것이다. 보살은 이같은 진여의 본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수순하여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육바라밀 : 壇(dana)波羅蜜 - 보시, 尸(sila)波羅蜜 - 지계, 羼提(ksanti)波羅蜜 - 인욕, 毘黎耶(virya)波羅蜜 - 정진, 禪(dhryana)波羅蜜 - 선정, 般若(prajna)波羅蜜 - 반야

* 해행발심에서의 육바라밀은 진여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내가 재물이 아깝지만 아까운 마음을 참고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법 자체에는 인색함과 탐욕이 없음을 이해하여 자연스럽게 보시를 하게 되는 것이다.]

 

육바라밀을 신구역(新구譯)에 나타난 용어 및 원어 그리고 현재 사용된 용어 등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해행발심보살의 수행은 집착하는 형태를 여읜 수행임을 밝혔습니다. 분명하게 나타난 법성의 자체엔 간탐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법성의 이치를 수순하여 보시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망상의 오염이 없어 오욕의 허물을 여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법성을 수순하여 지계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괴로움이 없어 성냄과 번뇌를 여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법성을 수순하여 인욕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신심(身心)의 형태가 없어 해태를 여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법성을 수순하여 정진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항상 안정되어 자체에 산란함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법성을 수순하여 선정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의 자체는 밝아 무명을 여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법성을 수순하여 반야바라밀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범어로 빠라미따(Paramit )는 한역하면 도피안(到彼岸)이라고 합니다. 피안(彼岸)이란 구경의 진실한 깨달음의 세계이고 도(到)는 도달한다 또는 이른다·완성한다는 뜻입니다. 즉, 생사윤회하는 고통의 세계에서 깨달은 열반의 세계에 이르거나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쉼터이야기

선로(宣老) 스님의 이야기입니다. ‘선로’란 태어나자마자 노인이란 말입니다. 송나라 때 곽공보(郭功輔)라는 문장가가 있었는데, 곽공보가 임제종의 귀종선(歸宗宣) 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귀종선 선사가 곽공보에게 “내가 너희 집에 6년만 있어도 되겠느냐?”라고 하자 곽공보는 흔쾌히 응낙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선사가 열반에 들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곽공보의 집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위아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가장 어른인 듯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알려준 적도 없는데 자기가 귀종선 선사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감당이 안되는 곽공보는 임제종의 백운단 선사에게 부탁하여 아이를 한번 봐 달라고 합니다. 백운단 선사가 곽공보의 집에 오니까 그를 본 아 이가 “어, 조카 잘 왔네!”라고 합니다. 어리둥절한 백운단 선사는 자기가 귀종선 선사라고 하는 아이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서 대조해봅니다. 놀랍게도 귀종선 선사와 자신만이 아는 이야기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아이가 태어난지 6년이 지나자 어느 날 곽공보에게 말합니다. “내가 자네 집에 6년 있겠다고 했는데 이제 6년이 되었으니 가겠네.” 그러자 평범한 아이로 돌아 왔습니다. 이렇게 태어나자마자 전생을 기억하는 것을 격생불망(隔生不忘)이라고 합니다. 티베트의 활불사상(活佛思想)도 이런 것입니다. 전생에 자신만이 아는 무언가를 해놓고 이생에 다시 태어나면 그것을 찾아갑니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이런 신기한 세계가 무궁무진하게 있는데 우리는 못 들어갑니다. 여기서는 시시비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부,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다원과나 사다함과를 얻으면 악처(惡處)에 태어나게 만드는 무기한으로 효과가 있는 모든 업이 소멸된다. 아나함과를 얻으면 욕계의 세계에 태어나는 과보를 가져올 수 있는 무기한으로 효과가 있는 모든 업이 소멸된다. 아라한이 되어 열반을 성취하면 어떠한 세계에 태어나게 만드는 무기한으로 효과가 있는 모든 업이 완전히 소멸한다.” 우리 속에는 세세생생의 업들이 쌓여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 수다원과를 얻으면 많은 업이 소멸되어 악처에 태어나지 않게 됩니다. 악처는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합니다. 악처에 태어나지 않는 생명들은 악처보다는 편안하고 좋습니다. 아나함과를 얻으면 욕계 이상의 세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적어도 색계, 무색계 이상에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아라한이란 열반적정의 상태를 이룬 사람을 말합니다. 불교의 사법인은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입니다. 앞의 세 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속성입니다. 이것의 본질, 즉 연기를 인식하고 터득하면 열반적정의 상태가 됩니다. 선정에 들어서 보는 세계가 열반적정의 세계입니다. 아라한이 되면 열반적정의 상태가 되어 어떠한 몸으로도 태어나지 않게 됩니다.

무기한이란 언젠가 인연이 부딪히면 업이 발동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업들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취에 태어나지 않고, 욕계에 태어나지 않고, 다시는 태어나지 않게 됩 니다.

“유익한 업의 금생 과보를 받을 조건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대상의 성취이다. 보시를 받는 사람은 멸진정에 들 수 있는 아라한이나 아나함이어야 한다. 둘째 생필품의 성취이다. 보시 할 물건은 법에 따라 얻어진 것이어야 한다. 셋째 의도의 성취이다. 보시자의 의도는 순수해야 한다.” 보통은 현생에 과보를 지으면 내생에 받는데 현생에 과보를 지으면 현생에 과보를 받는 경우도 있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보시를 받는 사람이 아라한이나 아나함 이상의 상태여야 합니다. 멸진정은 선정에 드는 순간을 말합니다. 선정은 지속적으로 계속드는 상태를 말합니다. 둘째는 보시하는 물건이 합법적이어야 합니다. 지나가다 주운 물건이나 남에게서 빼앗아서 준 물건은 효과가 없습니다. 보시를 해도 복을 받지 못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물건이어야 보시의 효과가 금생에 나타납니다. 셋째는 보시자의 의도가 순수해야 합니다. 대가를 바라고 보시하면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듭니다.-통섭불교.

④ 發心(발심)의 利益(이익)

菩薩發是心故(보살발시심고) 則得少分見於法身(즉득소분견어법신)

보살이 이 마음을 발하였기 때문에 곧 약간의 분야에서 법신을 볼 수 있다.

 

[是心= 직심(直心), 심심(深心), 대비심(大悲心)

元曉 : 이것은 자리(自利)의 공덕을 밝힌 것이니, 이는 상사견(相似見)이므로 조금(少分)이라고 말한 것이다.

* 憨山 : 십주위보살(十住位菩薩)은 진여법신을 추리로 관찰하는 비량관문(比量觀門)을 의지하기 때문에 약간의 분야에서 진여법신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여덟 종류의 모습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십주위 가운데 초주보살은 팔상성도를 나타낼 수 있으므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물처럼바람처럼]

 

[전절에서 직심(直心) 심심(深心) 대비심(大悲心) 등 보살의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과 네 가지 방편을 설한바 있다. 여기서는 그러한 신성취발심을 갖게 되면 어떠한 이익이 있는가를 밝히는 부분이다.
보살이 이러한 신성취발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법신(法身)이 무엇인가를 이해함으로서, 소분 법신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그 법신을 다소 볼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대서원(大誓願)을 일으킨다. 즉 신성취발심에 의하여 이 대원력이 몸에 갖추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원력을 바탕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원력을 바탕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원생신(願生身)이라 한다. 석가세존의 생애인 팔상성도(八相成道)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석존(釋尊)은 보살로서 도솔천에 주하다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도솔천을 떠나 카피라성의 정반왕비(淨飯王妃)인 마야부인에 입태하게 된다.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제 1상이다. 본론에서는 주태(住胎)까지 설하지만 제 2상은 출태(出胎) 즉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는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이며, 제 3상은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이고, 제 4상은 성을 넘어 출가하는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이다. 제 5상은 6년 동안의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이며, 제 6상은 마구니에게 항복 받고 성도하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이다. 그리고 제 7상은 본론에서도 나오는 전법륜(轉法輪) 즉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이고 제 8상은 45년간의 중생교화(衆生敎化) 후에 구시나가라에서 입멸하는 쌍림열반상( 林涅槃相)이다.
이와 같은 석존의 생애는 원생신(願生身)으로서 응신불(應身佛)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같은 성도(成道), 전법륜(轉法輪) 입열반(入涅槃) 등 불타의 활동은 사실상 완전한 불(佛)이 아니고, 보살로 칭해지고 , 그렇다고 십지(十地)의 지상(地上) 법신보살도 아니라고 일컫고 있다.
법장은 이에 대하여, 최초로 소분법신(少分法身)을 나타낸 것이며, 다음의 팔상(八相) 시현은 이 보살의 이타공덕(利他功德)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여하튼 이 보살은 법신진여를 증득하기 이전의 십주(十住) 보살이라는 것이다.
이 보살은 과거 무량세 이래의 유루업(有漏業), 즉 번뇌가 아직 완전히 차단된 것이 아니어서 얼마간 남아 있어, 그 때문에 성불의 팔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생사의 미세한 고(苦)는 받고 있다는 것이다.-전종식]

 

[앞의 네 가지 방편을 종합하면서 석존의 팔상성도(八相成道)를 나타내어 보살이 실제로 수행하는 과정을 세 가지로 나누어 격려하고 찬탄하였습니다. 먼저 발심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십주위보살(十住位菩薩)은 진여법신을 추리로 관찰하는 비량관문(比量觀門)을 의지하기 때문에 약간의 수행분야에서 진여법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덟 가지 모습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십주위 가운데 초주보살은 팔상성도를 나타낼 수 있으므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팔상성도란 이른바 도솔천에서 내려와 모태에 들어가서 머물다가 출생하고 출가해서 성도(成道)하여 진리를 펴다가 열반에 들어간 것입니다.-수선]

 

以見法身故(이견법신고) 隨其願力(수기원력) 能現八種利益衆生(능현팔종리익중생)

법신을 보기 때문에 그 원력에 따라 능히 여덟 가지 모습을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하나니,

所謂從兜率天退(소위종도솔천퇴) 入胎住胎出胎(입태주태출태)

이른바 도솔천으로부터 물러나 入胎=모태에 들어가고, 住胎=모태에 머물다가 出胎=모태에서 출생하고,

出家成道(출가성도) 轉法輪入於涅槃(전법륜입어열반)

출가하여 成道=도를 이루고, 轉法輪=법륜을 굴리다가 열반에 드시니,

 

[兜率天(도솔천)=지족천(知足天), 욕계 6천 중 제 4천으로 석가모니불이 보살로 여기에 머물다 내려옴. 

* 元曉 : 이것은 이타(利他)의 덕을 나타낸 것이다. 能現八種利益衆生은 《화엄경》에서 십주 처음의 발심주를 찬탄하여 말하기를 “이 발심보살이 여래의 일신(一身)과 무량신을 얻어 모두 일체의 세간에 성불하게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然是菩薩未名法身(연시보살미명법신)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법신보살이라 이름하지 못하는 것은, 

以其過去無量世來(이기과거무량세래) 有漏之業未能決斷(유루지업미능결단)

그는 과거 한량없는 세상으로부터의 유루의 업을 아직 결연히 끊지는 못하나,

隨其所生(수기소생) 與微苦相應(여미고상응) 亦非業繫(역비업계)

그가 태어날 곳을 따라서 미세한 괴로움과 상응하긴 하지만 역시 업에 얽매이진 않으니,

以有大願自在力故(이유대원자재력고)

대원의 자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지운 : 아라한은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나오지 않지만, 보살은 미세한 번뇌를 남겨 다시 세상으로 나오니, 이는 업에 얽매여서가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이다.

* 憨山 : 초주보살이 미세한 변역생사와 업을 따르는 분단생사가 있는 까닭을 말해보자. 이 보살은 중생을 남김없이 교화하겠다는 대원력 때문에 일부러 번뇌의 혹을 남겨 둔 채 업을 따르는 윤생(潤生)의 과보를 받으면서 과거세의 업을 결연히 끊지 않는다. 그 때문에 보살의 변역생사와 업을 따르는 분단생사의 미세한 괴로움이 있다. 업을 따르는 변역생사가 있으므로 아직은 법신보살이 아니며, 대원력을 지녀 수명의 길고 짧음을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범부가 혹업에 얽매여 받는 분단생사도 아닌 것이다.]

 

[이 보살은 과거 무량세 이래의 유루업(有漏業), 즉 번뇌가 아직 완전히 차단된 것이 아니라 얼마간 남아 있어, 그 때문에 성불의 팔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생사의 미세한 고(苦)는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소의 유루업이 있다 하더라도, 이 보살이 업에 속박되거나 계박(繫縛)당하는 업생신(業生身)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초발심시의 대서원의 힘으로 자재력(自在力)을 가지고 있으며, 이 원력에 의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원생신(願生身)이기 때문이다. 경전 속에는「이러한 보살에 대해서까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수 있다」고 설해져 있지만, 이것은 실제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초학의 보살이 아직 정정취(正定聚)의 바른 자리에 들어가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기 위하여, 다시 말하면 태만한 자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하기 위하여, 불타가 방편을 빌어 설한 것으로서, 그로 인해서 더욱 분발하여 용맹심을 갖도록 고무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방편설이다. 따라서 보살이 한 번 발심한 뒤에는 대서원에 의해서 마음이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 겁을 먹고 약해지는 일은 멀리 사라져 없는 것이며, 결코 연각 등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진다는 두려움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설사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보살의 보리심은 상실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주보살이 지상(地上)보살과 다른 것은 미세한 변역생사(變易生死, 보살이 일부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나고 죽는 것)와 업을 따르는 분단생사(分段生死, 개인의 업력에 이끌려서 나고 죽는 것)의 괴로움이 있기 때문임을 간별하여 밝혔습니다. 이 초주보살은 아직은 진여법신을 증득하진 못하고 단지 십신(十信)을 성취한 힘에 의해서 약간의 수행분야에서만 진여를 보기 때문에 아직은 법신보살이라고 하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과거 한량없는 세상으로부터 지었던 유루의 업을 아직은 결연히 끊지를 못하여 태어날 곳을 따르는 이 점에서 법신보살과는 다르다 하겠습니다. 태어난 곳을 따라 변역생사와 업을 따르는 분단생사의 미세한 괴로움과 상응하긴 하지만 역시 혹업(惑業)에 얽매어 받는 중생들의 분단생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대원으로 수명의 길이를 자유자재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如修多羅中(여수다라중) 或說有退墮惡趣者(혹설유퇴타악취자)

수다라=경에, 혹은 "혹 어떤 이가 물러나 악한 세계로 떨어진다"고 설하는 것 같은 것은,

非其實退(비기실퇴) 但爲初學菩薩(단위초학보살) 未入正位(미입정위)

그것은 실제로 물러난 것=實退이 아니고, 초학의 보살이 아직 정위에 들지도 못하고서

而懈怠者恐怖(이해태자공포) 令使勇猛故(령사용맹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를 위해 두렵게 하여 하여금 용맹하게 정진하게 하려는 까닭이다.

 

[元曉 : 이는 《본업경》에서 “칠주(七住:불퇴주)가 되기 전은 퇴분이 되므로 만약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이에 일겁 내지 십겁에 보리심이 퇴전하게 되는 것이니, 정목천자와 법제왕자와 사리불 등이 제칠주에 들고자 하다가 악지식과 악인연을 만났기 때문에 범부의 불선한 악 중에 들어간 것과 같으며, 내지 설한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여기서 이뜻이 실제로 퇴전함이 아님을 풀이한 것이다.]

 

[다음에 경전의 말씀은 방편교에 통한다는 것입니다. 즉 경전에서, "혹 이 보살이 수행에서 물러나 범부의 악한 세계로 떨어진다"라고 말한 경우는 "본업경(本業經)"에서, "십주위 가운데 칠주(七住)보살위의 이전을 수행지에서 퇴전하는 퇴분(退分)이라고 말한다. 칠주 이전의 수행지에서 선지식을 만나지 못한다면 가령 일 겁이나 내지는 십 겁을 지나는 동안에 보리심이 퇴전하여 악지식(惡知識)의 인연을 만나면 범부의 위치로 물러나 좋지 못한 세계로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방편으로 초학자들을 두렵게 하려고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도를 잘 이해하여 불교의 수행에 박차를 가하라는 것입니다. ]

 

又是菩薩一發心後(우시보살일발심후) 遠離怯弱(원리겁약)

또한 이 보살은 한번 발심한 후에는 겁약함을 멀리 여의고

畢竟不畏墮二乘地(필경불외타이승지)

필경에 이승의 지위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若聞無量無邊阿僧祇劫(약문무량무변아승기겁) 勤苦難行(근고난행)

만약 무량무변의 아승기겁토록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부지런히 고행=勤苦難行을 하여서, 

乃得涅槃(내득열반) 亦不怯弱(역불겁약)

이에 열반을 얻는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역시 겁약하지 않으니,  

以信知一切法(이신지일체법) 從本已來(종본이래) 自涅槃故(자열반고)

일체의 법은 본래부터 스스로 열반이라고 믿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성불까지는 한없이 긴 세월인 무량무변 아승지겁(無量無邊 阿僧祗劫)의 고통과 어려운 수행을 격지 않으면, 열반을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듣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비관하거나 절망하는 겁약(怯弱)한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일체의 법은 본래부터 자성불생(自性不生)으로 본성이 진여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열반에 들어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스스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열반은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清淨涅槃)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 유여열반(有餘涅槃), 무여열반(無餘涅槃) 등 사종열반(四種涅槃)이 있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 阿僧祇(아승기) : 아승지라고도 읽음. 셀 수 있는 수 중 가장 큰 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 구사론에서는 10의 51제곱이라고 한다.

信成就發心 行根本方便 根本方便 自性無生과 因果를 믿음 直心
能止方便 慙悔 허물을 참회함 深心
發起善根方便 善根增長 삼보를 공양함
大願平等方便 發願 중생 제도를 원함 大悲心
解行發心 육바라밀을 수행함.
證發心 眞心 분별이 없음 根本智
方便心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함 後得智
業識心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이 있음 無明業識

 

②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의 상(相)

復次信成就發心者(부차신성취발심자) 發何等心(발하등심)

다시, 신성취발심이란 어떤 마음을 발하는 것인가?

略說有三種(략설유삼종) 云何爲三(운하위삼).

간략하게 말하면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세 가지인가?

一者直心(일자직심) 正念眞如法故(정념진여법고)

첫째, 직심이니, 진여법을 올바로 생각하는=正念이기 때문이며,

二者深心(이자심심) 樂集一切諸善行故(낙집일체제선행고)

둘째, 심심이니, 일체 모든 선행을 즐겨 모으기 때문이며,

三者大悲心(삼자대비심) 欲拔一切衆生苦故(욕발일체중생고고)

셋째, 대비심이니, 일체중생을 고통에서 구해 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元曉 : 직심(直心)의 직(直)은 불곡(不曲), 구부러지지 않음이니 제법의 본성을 그대로 안다는 뜻.

심심(深心)의 심(深)은 궁원(窮源) 즉, 마음의 근원을 드러내는 것으로 마음의 근원에는 선(善)만이 있으므로 선행으로 그러한 마음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대비심(大悲心)은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다.

* 지운 : 직심(直心)은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심심(深心)은 자리(自利)가, 대비심(大悲心)에는 이타(利他)의 마음이 있다.

* 憨山 : 직심(直心)은 마음이 활줄처럼 곧아야만 도에로 깨달아 들어간다고 한 데에 해당한다. 이는 비틀리고 치우치고 빗나간 모습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이로 인해 진여법을 올바르게 사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여삼매이다. 왜냐하면 진여로써 자리이타수행의 근본을 삼기 때문이다. 즉 진여에는 무루의 공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것이 자리행의 근본이 되고, 중생의 성품이 동일한 진여임을 관찰하기 때문에 이타행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진여 자체엔 모든 덕상이 갖추었음을 알기 때문에 일체의 선행을 즐겨 수행하긴 하나 닦아도 닦는 모습에 집착이 없이 낱낱의 수행이 진여 자성에 걸맞게 된다. 그 때문에 심심(深心)이 되고, 이 마음이 자리행의 근본이 된다. 진여 자체는 모두가 동일한 데서 일으킨 동체대비로써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광대하게 구제하여 보리 열반을 얻게 하므로 이타행의 근본이 된다.

* 앞뒤의 글을 연결하여 본다면 직심(直心)은 진여법을 일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심심(深心)은 좋은 방편을 수행하려는 것이며, 대비심(大悲心)은 본래 발심을 하는 것이 생사고를 싫어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자기의 생사고를 생각한다면 저절로 중생들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一切諸善行(일체제선행)이라 한 것은 부처님께서 이루신 도(道)로 나아가는 모든 방편을 말한다.-물처럼바람처럼]

 

[신심(信心)을 성취하고 결심을 발하게 하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직심(直心)이요 둘째는 심심(深心)이요 셋째는 대비심(大悲心)이다. 말하자면 발심(發心)의 모습을 밝히는 것이다.
첫째의 직심(直心)은 바르게 진여(眞如)를 염(念)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에는 돌아갈 갈림길이 없는 것이므로 직심이라고 한다. 발심한 보살은 항상 진여를 염하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된다. 이 마음이 바로 심심(深心)과 대비심(大悲心)의 근본이 되는 자리이다. 직심은 사물의 본성을 직관으로, 있는 그대로 알고, 그것에 직결되는 마음이다.
원효(元曉)는 '직심은 구부러지지 않는 불곡(不曲)의 뜻이니 만약 진여를 염하면, 그것이 바로 심평등(心平等)이요, 다시 이것저것 분별이 없어지는 것이니 어찌 거기에 우여곡절[廻曲]이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본문에서 진여의 법을 정념(正念)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두 행(行)의 근본이다 (直心是不曲義, 若念眞如則心平等, 更無別岐, 何有廻曲. 故言'正念眞如法故' 卽是二行之根本也)'라고 말하고 있다.
둘째 심심(深心)이란 일체의 선행(善行)을 즐겨 모으는 마음이다. 진여는 무루(無漏)의 성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므로 그에 수순(隨順)하여 크고 작은 선행을 실천하고 마음의 원천인 심원(心源)의 성덕에 귀향(歸向)코저하는 것이 심심이다. 따라서 심심은 자리행(自利行)의 근본이며, 일체의 선(善)을 실행코저하는 결심을 말한다.
원효는 '심심(深心)'이란 궁극적 마음의 근원 즉 심원(心源)의 뜻이다. 만약 한 가지 선(善)이라도 갖추지 못하면, 마음의 근원에 귀향하지 못한다. 심원에의 귀향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반드시 모든 선행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즐겨 일체의 모든 선을 모으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즉 이것은 자리행(自利行)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深心者, 是窮原義, 若一善不備, 無由歸原, 歸原之成 必具萬行, 故言,「樂集一切諸善行故」, 卽是自利行之本也).'라고 말하고 있다.
셋째의 대비심(大悲心)이란 널리 일체중생의 고통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즉 이타행(利他行)의 근본이다.
원효는 대비심(大悲心)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겠다는 뜻을 가진 마음으로서 본문에서 말하기를「중생의 고통을 뽑아내고자 하는 까닭에」라고 하였고, 바로 이타행의 근본이라(大悲心者, 是普濟義, 故言「欲拔衆生苦 卽利他行之本也」)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발심을 직심, 심심 및 대비심의 셋으로 구분 설명한데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위에서는 법계일상(法界一相)이고 불체무이(佛體無二)를 설한 바 있는데 어찌하여 진여만을 염(念)하지 아니하고 다시 모든 선행을 수행하고 중생구제의 행을 하라는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각(覺)의 설명에서 망념을 떠난 '이념(離念)의 상은 허공계와 동등하여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라고 설한 바 있고, '바로 이것은 여래의 평등법신'이라고 설하여 진여는 평등하여 불체(佛體)는 무이(無二)임을 설했으므로 진여(眞如)만을 염하는 직심(直心)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어찌하여 심심(深心)과 대비심(大悲心)까지 설하여 모든 선행과 중생구제행을 행하라 하는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전종식]

 

[앞에서는 발심(發心)을 하게 된 인연만을 밝혔고, 여기서는 발현한 마음의 모습을 직접 밝혔습니다. 신성취발심이란 요약하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진여의 이치로 향하는 마음에 다른 길이 없는 직심(直心)입니다. 왜냐하면 곧은 마음으로 진여법을 올바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덕상을 빠짐없이 갖추고 일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심심(深心)입니다. 왜냐하면 심오한 마음으로 일체 모든 자리행의 근본적인 선행을 기꺼이 모으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광대하게 구제하여 그들이 보리열반을 얻게 하는 대비심(大悲心)입니다. 왜냐하면 대비의 마음으로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의 직심(直心)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믿는 것이요, 둘째의 심심(深心)은 의심이 없는 깊은 신심을 가지는 것이며, 셋째의 대비심(大悲心)은 부처님의 마음을 일으켜 일체중생의 고통을 구제하여 보리열반을 얻게 하므로 이타행의 근본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리이타의 오묘한 수행이 광대하긴 하나 이상의 세 마음으로 총괄하여 수습할 수 있기 때문에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하였습니다.-수선]

 

問曰(문왈) 上說法界一相佛體無二(상설법계일상불체무이)

묻나니, 위에서 법계는 하나의 모습=一相이며, 불의 본체=佛體는 둘이 아니라고 설명하였으나,

何故不唯念眞如(하고불유념진여) 復假求學諸善之行(부가구학제선지행)

무엇 때문에 오직 진여만을 생각=念하지 않고, 다시 모든 선행=諸善의 행을 구하고 배움을 빌려야 하는가?

答曰(답왈) 譬如大摩尼寶體性明淨(비여대마니보체성명정) 而有鑛穢之垢(이유광예지구) 

답하나니, 비유하면 대마니 보주의 보배의 자체의 성품=體性은 밝고 깨끗하지만, 그러나 광석의 더러운 때=鑛穢가 있는 것과 같다.

若人雖念寶性(약인수념보성) 不以方便種種磨治(불이방편종종마치) 終無得淨(종무득정)

만약 어떤 사람이 비록 보배의 성품을 생각할지라도, 갖가지 방편으로 갈고 닦지 않으면 끝내 맑음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이,

 

[若人雖念寶性은 위의 직심(直心)을 말한다. 아무리 진여법을 일념으로 생각해도 선법(善法)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그것을 증득할 수 없다.

* 憨山 : 진여자체만을 올바르게 사념하면 만족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모든 선행의 모습을 빌려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중생들의 번뇌혹이 여러 가지로 많기 때문에 모든 선행을 꼭 닦아야만 한다. 진여의 이치에 걸맞게 모든 선행을 닦기 때문에 밖으로는 허망한 번뇌의 오염을 청정히 하고, 안으로는 진여법을 순종한다. 방편은 관행(觀行)이다.]

 

[이상과 같이 발심을 직심, 심심 및 대비심의 셋으로 구분 설명한데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위에서는 법계일상(法界一相)이고 불체무이(佛體無二)를 설한 바 있는데 어찌하여 진여만을 염(念)하지 아니하고 다시 모든 선행을 수행하고 중생구제의 행을 하라는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각(覺)의 설명에서 망념을 떠난 '이념(離念)의 상은 허공계와 동등하여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라고 설한 바 있고, '바로 이것은 여래의 평등법신'이라고 설하여 진여는 평등하여 불체(佛體)는 무이(無二)임을 설했으므로 진여(眞如)만을 염하는 직심(直心)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어찌하여 심심(深心)과 대비심(大悲心)까지 설하여 모든 선행과 중생구제행을 행하라 하는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진여의 이치는 하나이나 번뇌의 미혹이 다르므로 모든 선행을 닦아야 한다는 것을 문답으로 밝혔습니다. 즉, 법계가 일심의 진여인 한 모습이므로 본래 깨달음 자체인 진여의 본체는 법계와 상대적인 두 모습이 없다고 앞에서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진여만을 올바로 염하지 않고 다시 모든 선행을 구하여 배워야 하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如是衆生眞如之法體性空淨(여시중생진여지법체성공정)

이처럼 중생의 진여의 법의 자체성품은 공적하고 청정=空淨하지만 

而有無量煩惱染垢(이유무량번뇌염구) 若人雖念眞如(약인수념진여) 

한량없는 번뇌에 물든 때=煩惱染垢가 있어서, 만약 어떤 사람이 비록 진여를 생각한다 해도 

不以方便種種熏修(불이방편종종훈수) 亦無得淨(역무득정)

갖가지 방편으로써 훈습하고 수행하지 않는다면 역시 청정함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以垢無量遍一切法故(이구무량편일체법고) 修一切善行(수일체선행) 以爲對治(이위대치)

때가 한량이 없어서 일체법에 두루하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선행을 닦아 이로써 대치하여야 한다. 

若人修行一切善法(약인수행일체선법) 自然歸順眞如法故(자연귀순진여법고)

만약 어떤 사람이 일체의 선법을 닦아 행하면 자연히 진여의 법으로 돌아가 따르는=歸順하기 때문이다.

 

[대답하여 말한다. 비유컨대 큰 보석인 마니보주(摩尼寶珠)는 그 체 자체는 아름답고 밝고 맑은 것이지만, 그러나 자연 그대로의 상태는 표면이 더러운 광석의 때가 덮여 있으며, 비록 사람이 그 마니보(摩尼寶)의 깨끗한 본성만을 염한다 할지라도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을 써서 연마하고 닦지 않으면, 끝내 그 보석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중생의 진여법도 그러한 것이다. 중생의 진여법이 그와 같이 체성(體性)에 번뇌는 전혀 포함되지 아니한 본래 공정(空淨)하여 청정하다 할지라도, 현실적으로는 한량없는 번뇌에 오염된 때가 부착되어 있다. 만약 사람이 진여의 청정성을 염하는 것만으로는 그 오염된 때를 씻어낼 수가 없는 것이며, 실재로는 여러 가지 훈습이나 수행 방법을 통하여 이를 정화(淨化)시키려는 노력 없이는 진여 본연의 정덕(淨德)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번뇌의 때는 무량무변하여 일체법에 두루 침투하고 있으므로, 그 오염된 때를 벗겨내기 위해서는 일체 선행(善行)으로 치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사람이 직심(直心)을 바탕으로 일체의 선법을 수행한다면, 심심(深心)과 대비심(大悲心)이 일어나, 밖으로는 온갖 염법(染法)이 제거되고, 안으로는 진여의 정덕에 자연히 귀순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심심(深心)에 의하여 크고 작은 선행으로 자리행(自利行)을 하고, 대비심(大悲心)에 의하여 중생구제의 이타행(利他行)을 구한다면 번뇌의 때는 씻기어 직심(直心)에 의하여 진여에 도달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즉 '이 세 가지 마음을 발하여, 악(惡)을 떠나지 않음이 없고, 선(善)을 닦지 않음이 없으며, 하나의 중생까지도 제도하지 않는 바 없는 것을 일컬어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이라고 한다 (發此三心, 無惡不離 無善不修, 無一衆生所不度者, 是名無上菩提心也.) '고 말하였다.]

 

[이 질문에 대해 비유와 함께 그 이치를 답변하길, 먼저 큰 마니주의 보배가 자체의 성품은 밝고 깨끗하나 광석의 더러운 때가 있다면 마니보배의 밝고 청정함이 드러나지 못하는 것처럼, 가령 어떤 사람이 마니보배의 밝고 깨끗한 성품을 생각한다 해도 갖가지 방편으로써 문질러 닦아 관리하지 않는다면 끝내 그 밝고 깨끗한 성품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생들의 진여법도 본체의 성품엔 번뇌가 공적하고 청정하지만 한량없는 번뇌에 오염된 때가 있기에, 가령 어떤 사람이 번뇌가 공적하여 청정한 진여법을 생각한다 해도 갖가지 방편으로 훈습하고 수행하지 않는다면 역시 청정함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뇌에 오염된 때가 한량이 없어 일체법에 두루하기 때문에 일체의 선행을 닦는 수행으로써 대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밖으로 허망한 생각의 오염을 어기고 안으로 진여법을 따르는 일체의 선법을 수행한다면 자연히 진여법으로 귀순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번뇌에 오염된 일체법을 대치하기 위해 일체의 선행을 닦는 네 가지 방편을 논합니다.]

 

   ③ 眞如(진여)에 歸順(귀순)하는 方便(방편)

略說方便(약설방편) 有四種(유사종) 云何爲四(운하위사)

간략히 방편을 말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一者(일자) 行根本方便(행근본방편) 謂觀一切法自性無生(위관일체법자성무생)

첫째, 수행의 근본방편=行根本方便이니, 이른바 일체법이 자성이 남이 없음=無生임을 관하여,

離於妄見(리어망견) 不住生死(부주생사) 

망견을 떠나 생사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며, 

觀一切法因緣和合(관일체법인연화합) 業果不失(업과불실)

일체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업과 과=業果를 잃지 않음을 관찰하여

業果不失 :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 과보가 있다는 것.

起於大悲修諸福德(기어대비수제복덕) 攝化衆生(섭화중생) 不住涅槃(부주열반)

대비심을 일으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들을 포섭=攝化하고 교화하며 열반에 안주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以隨順法性無住故(이수순법성무주고)

이는 법성의 머묾이 없음=無住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생사는 무명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며 그 자성이 없음을 알면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열반에만 머물려 하는 것도 역시 머묾이다. 이는 진여성품이 무한한 공덕이 있어서 대상을 만나면 공덕을 낸다는 것과 같다.

* 위의 발심의 모습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 것에서 직심(直心)에 대한 설명이다.]

 

[앞에서 여러 가지 방편을 가지고 훈습(熏習)이나 수행방법을 통하여 번뇌의 오염된 때[垢]를 정화(淨化)시키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다면, 진여의 청정성(淸淨性)을 염하는 것만으로는 진여 본연의 정덕(淨德)을 나타내지 못한다고 설한 바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방편을 가지고 수행함으로써 진여에 귀순할 수 있다는 것을 설한 것이다.
본절에서는 그에 따른 네 가지 방편(方便)을 설하고 있다. 방편이란 법성(法性) 즉 진여(眞如)에 수순(隨順)하는 방법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법성은 진여(眞如)를 의미하는 것이다. 앞절 끝 부분에서 '만약 사람이 일체 선법을 수행하면 자연히 진여법에 귀순하다'고 설한 것에 대한 방편인 것이다.
본절의 네 가지 방편에서 수순(隨順)하는 진여의 본성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 무주(無住) 생사·열반
□ 능지방편(能止方便), 이제과(離諸過), 능지악법(能止惡法)
□ 발기선근증장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 이치장(離癡障), 구공덕 (具功德)
□ 대원평등방편(大願平等方便), 무단절(無斷絶), 평등(平等), 적멸(寂滅)
첫째는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이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등 온갖 행의 근본에 있는 방편을 말한다.  '일체법의 자성은 무생(無生)이라고 관하면 망견(妄見)을 떠날 수 있고, 생사(生死)에 주(住)하지 아니하며, 일체법은 인연화합이고, 업(業)의 과보는 소실되는 것이 아니라고 관하면 대비심(大悲心)이 일어나 온갖 복덕을 닦게 되고, 중생을 섭화하여 열반에도 주하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즉 행근본방편은 본체와 현상의 두 가지 측면에서의 관법(觀法)에 의하여 일체법을 관찰함으로써 생사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대비심이 일어나 열반에도 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법의 한 측면은, 일체법의 자성(本體)은 무생(無生) 즉 생하는 것이 아닌 불생불멸의 영원한 것이라고 관하면, 망념으로 보는 그릇된 견해가 사라져, 현상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생사(生死)에 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관법의 다른 측면은 현상으로 나타난 일체법은 모두가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업과(業果)는 소실되지 않는다는 것을 관하면, 거기에서 대비심(大悲心)이 일어나,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誓願)이 생기고, 따라서 선행(善行)을 행하고 복덕을 닦아 중생을 섭화(攝化) 인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계는 한이 없는 무변(無邊)인 것이므로 섭화중생의 행이 끝날 날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보살은 '열반에도 주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사가 있는 현상의 세계에서는 중생구제에 전심(專心)하는 일이 바로 형태를 바꾼 열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다. 따라서 첫째의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은 무주처열반 속에서 영원히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행을 행하여 나아가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무주(無住)라고 하는 성격에 수순하는 것이다. 진여는 법계일상(法界一相)으로서 무주를 본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신론'이 현시정의(顯示正義)와 대치사집(對治邪執) 등을 통하여, 바른 뜻을 나타내는 것이 무엇이고, 그릇된 견해를 어떻게 고쳐 나가야 할 것인가를 거듭 강조해 온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치사집에서 누누이 강조된 그릇된 견해는, 본체에 대한 정의(正義)를 현상적 생멸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일체법을 해석함에 있어, 그것이 본체적 측면에서 설해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현상적 입장에서 설해진 것인가를 먼저 파악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즉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구분하여 관찰할 수 있다면 그릇된 견해는 사라져갈 것이다.]

 

[세 가지 발심을 의지한 모든 선행의 4가지 방편 가운데, 먼저 수행의 근본적인 방편을 논한 것입니다. 이른바 일체법의 자성은 생멸이 없다는 것을 관찰하여 나고 멸하는 허망한 견해를 여의고 생사의 업식에 안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체법은 원인과 조연이 화합하여 악업과 고과(苦果)를 잃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하여 대비심을 일으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포섭하여 받아들이어 교화하면서 열반에도 안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여의 진리성은 본래 실제로 있지 않으므로 지금 생사에 안주하지 않으며, 생사는 본래 실제로 없지도 않으므로 중생을 포섭하여 교화하기 위해 열반에도 안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진여법성을 따라서 생사와 열반 어느 쪽에도 집착하여 안주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여의 법성을 의지하여 수행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것이 유익한 수행의 근본이 됩니다. 진여법성은 본래 생멸하는 현상이 없으므로 생멸하는 허망한 견해를 여의었습니다. 진여인 대지(大智)에 의지하여 번뇌를 끊었으므로 생사에 안주하지 않으며, 다시 일체법은 인연으로 화합하여 악업과 그에 따른 괴로운 과보를 잃지 않는 것을 관찰하고 대비심을 의지합니다. 그 때문에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면서 열반에도 안주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진여의 본성이 텅 빈 열반과 생사의 거짓 존재인 이 둘 어느 쪽에도 안주하지 않고 자리이타의 이로운 수행을 일제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에 집착하지 않고 실천하는 무주행(無住行)이라고 이름합니다. 진여법성은 본래 생사와 열반 어느 쪽에도 안주함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진여인 법성을 따라서 이로운 수행을 닦는 것입니다.]

 

二者(이자) 能止方便(능지방편) 謂慙愧悔過(위참괴회과) 能止一切惡法(능지일체악법)

두 번째는 중지할 수 있는 방편=能止方便이니, 이른바 참괴하고, 과거를 참회하는=悔過하며 

慙愧(참괴) : 자기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을 참(慙)이라고 하고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을 괴(愧)라고 한다.

不令增長(불령증장) 以隨順法性離諸過故(이수순법성리제과고)

일체의 악법을 중지하여 더 증장하지 않게 하며, 법성에 수순하여 모든 허물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발심의 세 가지 모습에서 심심(深心)이다. 악법이란 선법에 반하는 것으로 진여로부터 멀어지는 일체 행위이다.]

 

[둘째의 능지방편(能止方便)으로, 능지(能止)라고 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악(惡)을 끊고 버리는 것이다. 악을 끊는 힘은 참( 慙)과 괴(愧)이다. '참'은 자기의 양심에 대한 부끄러움이며, '괴'는 사회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따라서 참괴(慙愧)의 마음이 강할 때 악(惡)을 떠날 수가 있다. 그러나 악의 유혹에 빠져 악행(惡行)을 저질렀을 때는 즉시 그것을 참회하는 것이다. 그것을 회과(悔過)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잘못을 본능적으로 감추려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과오를 남에게 고백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는 기분을 갖고 있다. 악을 고백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본론은 이 참괴(慙愧)와 회과(悔過)에 의하여 '능히 일체 악법을 끊고, 증장시키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참괴(慙 愧)는 악법을 끊는 것이고, 회과(悔過)는 악법을 증장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방편으로 법성진여(法性眞如)는 온갖 허물에서 떠나 있어 이를 '이제과(離諸過)'라 하고 있다.]

 

三者(삼자) 發起善根增長方便(발기선근증장방편)

셋째, 선근을 발기하여 증장하는 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이니, 

謂勤供養禮三寶(위근공양예삼보) 讚歎隨喜(찬탄수희) 勸請諸佛(권청제불)

이른바 불법승=삼보를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찬탄하고 따라서 기뻐하는=隨喜하며, 권하고 청하는=勸請으로,

勸請(권청) : 빌고 청함.

以愛敬三寶(이애경삼보) 淳厚心故(순후심고) 信得增長(신득증장)

삼보를 사랑하고 공경=愛敬하는 순후한 마음 때문에 믿음이 증장될 수 있으며,

乃能志求無上之道(내능지구무상지도) 又因佛法僧力所護故(우인불법승력소호고) 

나아가 능히 위없는 진리=無上道를 구할 수 있으며, 또한 불법승의 힘으로 보호받는=因 때문에,

能消業障(능소업장) 善根不退(선근불퇴) 以隨順法性(이수순법성) 離痴障故(리치장고)

능히 악업의 장애=業障을 소멸하고, 선근에서 물러나지 않아, 법성을 수순하여 어리석음의 장애=離痴를 여의기 때문이다.

발심의 세 가지 모습에서 심심(深心)이다.

 

[셋째의 발기선근증장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이다. 이것은 선(善)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즉 선근(善根)의 힘을 강화증대(强化增大)시키는 방편이다. 자리행중에서 지덕(智德)을 말하는 것으로서 선(善)을 되풀이함에 따라 달성되는 것이다.
본론에서 말하는 선행이란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공양하고 예배하는 것, 제불(諸佛)을 찬탄(讚嘆), 수희(隨喜), 권청(勸請)하는 것이다. 찬탄은 모든 불타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것이고, 수희는 타인이 선을 행할 때 그것을 기뻐하고 도우는 것이며, 권청은 지성으로 불타의 가르침을 청하고, 언제까지나 이 세상에 머무르기를 청하는 것이며, 또한 법회(法會)시에 불보살의 내림(來臨)을 간청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보의 공양예배와 찬탄, 수희, 권청 등은 쉬운 방편으로 선행을 권하는 것이 된다. 아직 십신(十信)에 있는 수행보살이기 때문에 난행(難行)의 힘이 없는 것이므로 그같은 이행(易行)의 방편을 쓰는 것이다.  '삼보를 애경(愛敬)하는 순후심(淳厚心)'은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친애하고 공경하는 순수하고 인정 두터운 마음으로서, 그러한 마음에 의하여 믿음이 증장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불타의 행적을 배워 스스로 무상도(無上道)를 지구(志求)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불법승 삼보의 가호(加護)력 때문에 업장(業障)이 해소되고, 선근(善根)이 퇴실하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불법승 삼보에 대한 순후심(淳厚心)은 내부로부터의 진여의 훈습력이 작용하고 외부로부터는 삼보의 외훈(外熏)이 작용하여 악을 끊고 선을 행하겠다는 마음이 항상 일고 있어, 악의 업장이 소멸한다는 것이다. 악의 업장이라 하여도 이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므로 그 마음이 믿음의 기쁨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 업장은 저절로 사라져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선근은 더욱더 증장되는 것이다. 이같은 선근 발기(發起)가 방편이 될 수 있는 것은, 법성진여가 바로 법신지신(法身智身)이므로 그 속에서는 치장(癡障) 즉 무명번뇌가 사라질 수 있는 성질을 본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의 두 방편은 심심(深心)을 의지하여 악법을 그치는 지지문(止持門)과 선법을 일으키는 작지문(作持門)의 방편을 닦는 것입니다. 먼저 이미 일으켰던 악을 끊어서 계속되지 않게 하며, 아직 일으키지 않은 악은 일으키지 않고 중지할 수 있는 방편인 능지방편(能止方便)입니다. 이는 아직 짓지 않은 악을 부끄러워하고, 이미 지은 악법은 그 허물을 뉘우치고 일체의 악법을 중지하여 더욱 자라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여법성을 수순하여 모든 허물을 여의는 수행을 하기 때문에 이것을 지지문(止持門)이라 하겠습니다. 


  다음에 이미 일으킨 선업은 닦아서 더욱 자라나게 하고, 아직 일으키지 않은 선업은 수행하고 선근을 발기하여 더욱 자라나게 하는 방편입니다. 이는 삼보에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찬탄하고 따라서 기뻐하며, 모든 부처님께 권청(勸請)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삼보를 사랑하면서도 공경하고 순수함이 두터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즉, 삼보를 믿는 마음이 더욱 자라나야만 위없는 도를 구하는 데에 뜻을 두게 되며, 또 불법승의 위신력에 보호받기 때문에 악업의 장애를 소멸하고 선근에서 물러나지 않아 진여의 법성을 수순하여 어리석음의 장애를 여의기 때문에 이것을 작지문(作持門)이라 하고, 이상이 자리행입니다. 참고로 "예배"는 어리석은 아만(我慢)의 장애를 여의고, "찬탄"은 삼보를 훼방하는 어리석은 장애를 여의며, "따라서 기뻐함"은 다른 사람을 질투하는 장애를 여의게 하는 것입니다.]

 

四者(사자) 大願平等方便(대원평등방편) 所謂發願(소위발원) 盡於未來(진어미래)

넷째 대원이 평등한 방편=大願平等方便이니, 이른바 발원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化度一切衆生(화도일체중생) 使無有餘(사무유여) 皆令究竟無餘涅槃(개령구경무여열반)

일체 중생을 교화, 제도=化度하여 남김없이 모두가 구경에 무여의 열반에 들게 하려는 것이니,

以隨順法性(이수순법성) 無斷絶故(무단절고) 法性廣大(법성광대) 遍一切衆生(편일체중생)

법성은 단절이 없다는 것에 수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법성은 광대하여 일체 중생에 두루 미치고,

平等無二(평등무이) 不念彼此(불념피차) 究竟寂滅故(구경적멸고)

평등하여 둘이 없으므로 남과 나=彼此를 생각하지 않고, 구경에 적멸하기 때문이다.

발심의 세가지 중 대비심(大悲心)이다.

 

[넷째의 대원평등방편(大願平等方便)이다. 큰 서원(大誓願)을 일으켜, 평등하게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결의가 진여에 수순하는 방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타행(利他行)이다. 중생구제에는 시한이 없다.
따라서 미래가 다할 때까지 일체중생을 교화제도(敎化濟度)하겠다는 보살의 발원이 계속되는 것이며, 유여(有餘)없이 평등하게 일체중생을 구제하여, 궁극적으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려는 것이다. 무여열반은 유여열반(有餘涅槃)에 대(對)한 것으로서 불타가 보리수 밑에서 번뇌를 멸하고 깨달음이 열리었을 때의 열반은 육체가 남아있는 유여열반이며, 무여열반은 육체를 버린 영원의 세계에서의 열반이다. 보살의 서원은 일체중생을 이 무여열반에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이 대원평등방편이 법성진여에 수순하는 방편이 될 수 있는 것은 법성진여 자체가 무단절(無斷絶)을 본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여열반은 단절없는 영원한 세계이다. 법성진여는 광대무변하여, 일체중생 어디에나 두루 미쳐있다. 평등무이(平等無二)하고 진여일상(眞如一相)이다. 그러므로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피차(彼此)를 염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여는 평등무이(無二)한 것이므로 구경적멸(究竟寂滅)이어서, 무여열반 바로 그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방편속에 나타난 찬탄 참회 권청 수희 회향(넷째 첫째 방편과 관련) 등은 오늘날의 불교의식에도 나타나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5, 6 세기경 불교의식으로 기초된 것이다.]

 

[대원이 평등한 방편을 통해 시공을 초월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대비심을 논하였습니다. 즉, 대원이 평등한 방편이란 먼저 미래제가 다하도록 시간을 초월해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여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가 구경에 무여열반에 들게 하리라고 발원한 것입니다. 다음에 진여의 법성을 따라서 단절함이 없기 때문에, 법성은 광대하여 일체중생에게 두루하고 평등하여 둘이 없어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끝내 번뇌가 사라진 적멸이기 때문에 공간을 초월해 중생을 구제하는 제일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비의 평등한 방편에 편승하면 비록 공간적으로 광대하고 시간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친 수행일지라도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자내증(自內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진여에 의지하는 네 가지 방편을 종합하면 근본방편은 수행의 근본방편이요, 자신을 이롭게 하는 방편은 능히 모든 번뇌를 중지하는 단덕(斷德)과 보리심을 발하여 선근을 증장하는 지덕(智德)이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방편은 대원이 평등하고 원만하여 시공을 초월해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비덕(悲德)을 갖춘 것입니다. 이는 진여법성에 의지하여 직심(直心)과 심심(深心)·대비심(大悲心)을 닦아 단덕(斷德)·지덕(智德)·비덕(悲德)으로 승화시긴 원덕(圓德)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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