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0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② 6

 

▶論曰:何因變化身,非卽自性身?由八因故,謂諸菩薩,從久遠來,得不退定,於睹史多及人中生,不應道理.

又諸菩薩,從久遠來,常憶宿住,書算數印工巧論中,及於受用欲塵行中,不能正知,不應道理.

▷논문; 어떠한 원인으로 변화신(變化身)은 자성신이 아닌 것인가? 여덟 가지 이유의 팔인(八因) 때문이니,

모든 보살이 아득한 옛적부터 퇴전하지 않는 선정을 얻었다면, 도솔천과 인간세계에서 태어나는 것 도리에 맞지 않으며,

또한 모든 보살이 아득한 옛적부터 과거 세상의 숙주(宿住)를 돌이켜 보아, 글씨ㆍ산술ㆍ조각ㆍ공예 기술 등과 욕락의 경계를 수용하는, 가무(歌舞)ㆍ음식(飮食) 등의 행에 대해서 바르게   없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과거 수 많은 세상에서 닦아 익힌 효력이 나타나서 모든 일을 바르게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又諸菩薩,從久遠來,已知惡說,善說法教,往外道所不應道理.又諸菩薩,從久遠來,已能善知三乘正道,修邪苦行,不應道理.又諸菩薩,捨百拘胝諸贍部洲,但於一處,成等正覺,轉正法輪,不應道理.若離示現成等正覺,唯以化身,於所餘處,施作佛事,卽應但於睹史多天,成等正覺,何不施設,遍於一切贍部洲中,同時佛出?旣不施設,無教無理.雖有多化,而不違彼無二如來出現世言,由一四洲,攝世界故,如二輪王不同出世.此中有頌:

또한 모든 보살이 아득한 옛적부터 잘못 말하였거나 훌륭하게 말하여진 교설을 아는 까닭 외도의 처소에 간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또한 모든 보살이 아득한 옛적부터 능히 삼승의 바른 수행을  아는 까닭 삿된 고행을 닦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또한 모든 보살은  구지(拘胝)의 많은 섬부주(贍部洲)를 버리고 다만  곳에서 등정각을 이루고 바른 법륜을 굴린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니,

만약 등정각을 이루는 것을 시현하지 않고서 오직 화신으로써 나머지 처소에서 불사를 짓는다면, 마땅히 오직 도솔천에서만 등정각을 이루어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모든 섬부주에서 두루 동시에 부처님께서 출현함을 시설하지 않는 것인가? 

이미 시설하지 않으며, 성스러운 가르침도 없고 바른 논리가 없어서 교증(敎證)과 이증(理證)이 모두 성립되지 않으며, 많은 화신이 있지만   분의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는 일이 없다는 말에 위배되지 않으니, 하나의 사주(四洲)에서 세계를 섭수하기 때문이다.  분의 전륜성왕이 동시에 세상에 출현하지 않음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佛微細化身, 多處胎平等, 爲顯一切種, 成等覺而轉.”

부처님의 미세한 화신의 대부분은 모태에 처하여 평등하시니, 

일체 종류의 등각을 이루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전전하신다네.

전전함을 급다(笈多)ㆍ행구(行矩) 역본인 수존(隋本)에서는생을 받음을 나타내네’로 되어 있고,

진제(眞諦) 역본인 진본(陳本)에는세간에 시현하네’로 되어 있다.


爲欲利樂一切有情,發願修行證大菩提,畢竟涅槃,不應道理,願行無果,成過失故.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시고자 원을 세우고 수행하여 대보리를 증득하셨으니, 필경에 열반에 든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니, 서원과 행이 결과가 없다는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釋曰:今當顯示,佛變化身,卽自性身,不應正理,由八因故.此中最初不應理者,謂諸菩薩,從久遠來,已無量劫,得不退定,尚不應生睹史多天,況於人中?然此世閒現受生者,是變化身,非自性身.又諸菩薩,從久遠來,常憶宿住,於書筭等,不能正知不應道理,但爲調伏諸有情故,化爲此事.

▷해석한다; 이제 마땅히 부처님의 변화신이  자성신이라는 것은, 바른 도리에 맞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여덟 가지 원인의 팔인(八因)에 의해서이다.  중,  번째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은, 모든 보살은 아득한 옛적부터 무량겁 동안 퇴전하지 않는 선정을 얻었으니, 오히려 도솔천에도 태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거늘, 하물며 인간세상 이겠는가? 그러므로, 이 세간에 시현하여 생을 받는 것은 변화신일 뿐, 자성신이 아닌 것이며,

또한 모든 보살은 아득한 옛적부터 항상 과거생을 생각하여 글씨ㆍ산술 등에 대해서 바르게   없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다만 많은 유정을 조복하기 위해서 이러한 변화를 하는 것이다.

ㅡ보리수 밑에서 성도하신 석존에 비추어서 변화신을 말하여 자성신이 아님을 밝힌다.


又諸菩薩,三無數劫,勤修福慧,不能正知惡說`善說,邪苦行事,於最後身,證菩提時,何能頓悟?由此道理,是變化身,非自性身.又諸菩薩,捨百拘胝諸贍部洲,但於一處,成等正覺,轉正法輪,不應道理;若變化身,遍一切處,同時現化,應正道理.故變化身,非自性身.

또한 모든 보살은 3무수겁 동안 복과 지혜를 부지런히 닦아서 나쁘게 말해지거나, 훌륭하게 말하여지거나, 삿된 고행 등을 바르게   없다면, 최후신에서 보리를 증득할 때, 어떻게 능히 단박에 깨닫는 돈오(頓悟)를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도리로 인하여 변화신이지, 자성신이 아닌 것이며, 또한 모든 보살은  구지의 섬부주를 버리고 다만  곳에서만 등정각을 이루고 바른 법륜을 굴린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만약 변화신이 모든 곳에서 두루 동시에 시현한다고 한다면 바른 도리에 맞는 것으로, 따라서 변화신이지 자성신이 아닌 것이다.


若諸異部,作如是執,佛唯一處,眞證等覺,餘方現化,施作佛事.若爾,何故不許但住睹史多天,眞證等覺,遍於一切四大洲渚,示現化身,施作佛事?又於一切四大洲中,不現等覺,無教無理,故不應說,此佛土中,有四洲渚,不現成佛.

만약 다른 부파에서 국집하여 “부처님께서는 오직  곳에서 진실로 등각을 이루시며, 다른 곳에는 화신을 나투어서 불사를 짓는다”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다만 도솔천에 머물러서만 진실로 등각을 증득하시고, 모든 사대주(四大州)에 두루 화신을 시현하여 불사를 지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가? 

또한 모든 사대주에서 등각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가르침에도 없고 바른 논리에 맞지 않으니, 이러한 까닭에 이 불국토 중에서 사대주에서의 성불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급다(笈多)ㆍ행구(行矩) 수본(隋本)에는하나의 불찰(佛刹) 중에서 어느 하나의 사대주에서의 정각을 증득하지 않는다’로 되어 있다.


若有說言,縱有是事,便違契經故,經中說,無二如來俱時出現.應知此經,同轉輪王,如說輪王無二竝出,依一四洲,非一佛土.無二如來俱時出現,當知亦爾,此中意說,一四大洲,名一世界.

만약 어떤 이가 비록 이러한 일이 있다고 말한다면, 계경에 위배되는 것이니, 경전에서 말하기를 “두 분의 여래께서는 동시에 출현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경전은 전륜성왕도 마찬가지여서 두 전륜성왕이 함께 출현하는 일은 없다고 하였다고 알아야 한다.  

하나의 사대주에 의지하나, 하나의 불국토는 아니니,  분의 여래께서 동시에 출현하지 않음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한다. 여기서 하나의 사대주를 하나의 세계로 이름한다는 것이다.

급다(笈多)ㆍ행구(行矩) 수본(隋本)에는 하나의 사대주 안에 함께 출현하는 일이 없다. 하나의 불찰(佛刹) 아니다’로 되어 있어서 의미가 분명하다.

 

今復以頌顯示,諸佛化現等覺.佛微細化身等者,此中義說,若於爾時,佛現安住睹史多天,示從彼沒,入母胎等,卽於彼時,化作尊者,舍利子等,無量眷屬,亦現入胎出生等事.安立如是,變化眷屬,當知爲顯一切種覺,殊勝佛事.

이제 다시 게송으로써 모든 부처님께서 등각을 변화로 시현함을 나타내었으니, ‘부처님의 미세한 화신’ 등이 그 뜻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때 부처님께서 나타나서 도솔천에 안주하시고, 그곳으로부터 생을 다하여 모태에 들어가는  등을 시현하신다면,  그 때에 존자 사리자(舍利子) 등의 무량한 권속을 변화로 지어서 역시 모태에 들어가고 출생하는  나타내는 것이니, 이와 같은 변화의 권속을 안립하는 것은, 일체 종류의 깨달음의 뛰어난 불사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今當顯示,如來畢竟,入般涅槃,不應道理.謂爲化度一切有情,先發大願,及修大行,常自誓言:我當利樂一切有情,勤修正行.若始成佛已,便般涅槃,卽所修願行空無有果.由此非理,是變化身,非自性身.

이제 마땅히 여래께서 궁극적으로 반열반에 드신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모든 유정을 교화하기 위해서 먼저  서원을 세우고  행을 닦으며, 항상 스스로 원을 세워 말하기를 “나는 장차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고 부지런히 바른 행을 닦게 하겠다”고 하셨다. 

만약 처음으로 성불하고 나서 문득 반열반에 드셨다면,  수행한 서원과 행은 헛된 것으로, 결과가 없는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변화신일 뿐, 자성신이 아닌 것이다.


▶論曰:佛受用身及變化身,旣是無常,云何經說,如來身常?此二所依法身常故.又等流身及變化身,以恒受用無休廢故`數數現化不永絕故,如常受樂`如常施食.如來身常,應知亦爾.

▷논문; 부처님의 수용신과 변화신은 무상한데, 어찌하여 경전에서 “여래신(如來身)은 상주한다”고 말하는가? 

수용신과 변화신 의지처인 법신은 상주하기 때문이며, 또한 등류신(等流身)과 변화신은 항상 수용하여 쉬지 않 때문이고, 자주자주 나투어서 영원히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간이 항상 즐거움을 수용하고, 항상 음식을 베푸는 것과 같이, 여래신이 상주하는 것 역시도 그러하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釋曰:經說如來其身常住,佛受用身及變化身,皆是無常,云何身常?故次成立二身常義.謂此二身依法身住,法身常故,亦說爲常.又受用身,受用無廢,故說爲常.其變化身,恒現等覺般涅槃等,相續不斷,故亦名常.復以譬喩,顯此二身,是常住義.猶如世閒,言常受樂,雖所受樂,非唯無閒,而得說言,此常受樂.又如世閒,言常施食,非此施食,恒無閒斷,而得說言,此常施食.應知二身,常義亦爾.

▷해석한다; 경전에서 “여래께서는  몸이 상주한다”고 설하지만, 부처님의 수용신과 변화신 모두는 무상하거늘, 어찌하여 몸이 상주한다는 것인가? 따라서 다음으로  불신의 상주의 의미를 성립하는 것이다. 

  불신은 법신에 의지해서 머무는 것이니, 법신이 상주하기 때문에 역시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한 수용신은 수용하여 중단하지 않기 때문에 상주한다고 말하며, 그 변화신은 항상 등각과 반열반을 나타내고 상속하여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역시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비유로써   불신이 상주하는 의미를 나타내었으니, 마치 세간에서 항상 즐거움을 수용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수용하는 즐거움이 끊임없는 것만은 아니지만, 항상 즐거움을 받는다고 말할  있는 것이며,

또한 세간이 항상 음식을 베푼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음식을 베품이 끊임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항상 음식을 베푼다고 말할  있는 것이니, 두 불신이 상주하는 의미 역시도 그러하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由六因故,諸佛世尊,所現化身,非畢竟住.一所作究竟,成熟有情,已解脫故;二爲令捨離不樂涅槃,爲求如來,常住身故;

▷논문; 여섯 가지 원인의 육인(六因)으로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시현하시는 화신은 필경에는 머물지 않는 것이니,

첫째는 해야  바를 마치는 것으로, 유정을 성숙시켜 해탈하게 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열반을 즐기는 것을 버리게 하기 위한 것이니, 여래의 상주하는 불신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ㅡ이 문장의 의미가 모호하다. 급다(笈多)ㆍ행구(行矩) 수본(隋本)에는 열반을 즐기는 생각을 바꾸어 상주하는 불신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으로 되어 있고, 진역(陳譯)에는 만약 해탈을 얻어서 반열반을 구하면 그로 하여금 반열반의 생각을 버리고 상주하는 불신의 얻음을 구하게 하기 때문’으로 되어 있다. 

  소승을 돌려서 대승으로 향하는 회소향대(廻小向大) 의미이며, 아마도 열반을 즐기지 않음을 버리기 위해서’는 열반을 즐기는 것을 버리기 위해서’의 오기(誤記) 듯하다.

 

三爲令捨離輕毀諸佛,令悟甚深正法教故;四爲令於佛深生渴仰,恐數見者,生厭怠故;五令於自身發勤精進,知正說者,難可得故;六爲諸有情極速成熟,令自精進,不捨軛故.此中有二頌:

셋째는 모든 부처님을 가볍게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니, 매우 심오한 정법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부처님에 대해서 깊이 존경함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것이니, 자주 보는 자가 권태로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스스로 있어서 부지런히 정진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것이니, 바르게 말하는 이는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모든 유정을 지극히 빠르게 성숙시키게 하기 위한 것이니, 스스로 정진하여 중생제도의 무거운 임무의 멍에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由所作究竟, 捨不樂涅槃, 離輕毀諸佛, 深生於渴仰.

해야  바를 마치고, 열반을 즐기는 것을 버리며

모든 부처님을 가볍게 여김을 여의고, 깊이 존경심을 일으키며


內自發正勤, 爲極速成熟, 故許佛化身, 而非畢竟住.”

내면에서 스스로 바른 정진을 일으키고, 지극히 빠르게 성숙하기 위함이니

그러므로 부처님의 화신을 인정하지만, 필경에는 머물지 않는다네.


▶釋曰:如是六因,直說及頌,證佛化身,非畢竟住.其文易了,故不煩釋.

▷해석한다; 이상과 같은 여섯 가지 원인의 육인(六因)에 대한 산문과 게송은 부처님의 화신이 필경에는 머물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한 것으로, 그 문장이 알기 쉽기 때문에 번거롭게 해석하지 않겠다.


▶論曰:諸佛法身,無始時來,無別無量,不應爲得,更作功用.此中有頌:

▷논문;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이 없고 무량하나니, 마땅히 얻기 위해서 다시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功用)을 짓지 않는 것이다. 이러함에 게송이 있으니, 


“佛得無別無量因, 有情若捨勤功用, 證得恒時不成因, 斷如是因不應理.”

부처님의 증득은 차별이 없는 무별(無別)이고, 무량함이 원인(因)이라.

만약 유정이 정근(精勤)의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功用)을 버린다면, 증득은 항상 원인을 이루지 않을 것이니, 

이와 같은 원인을 단멸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釋曰:此中有難:若佛法身,無始時來,無別無量,作證得因,能辦有情,諸利樂事,爲證佛果,不應更作正勤功用.

▷해석한다; 이 중에서 비판하기를 “만약 부처님의 법신이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무량한 것으로서, 증득의 원인을 짓는 것이라면, 유정을 이롭게 하는 모든 일들을 능히 하여 하며, 불과를 증득하기 위해서 마땅히 다시 정근(正勤)의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을 짓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爲釋此難,以頌顯示,諸佛證得,無始時來,無別無量,若是有情,爲求佛果,捨精進因,可有此難,諸佛證得,於得佛果,無始時來,不成因故.然佛證得,無始時來,無別無量,恒與有情,作得佛果,勤精進因,故不應難.諸佛法身,無始時來,無別無量,作證得因,爲證佛果,不應更作正勤功用,是故諸佛,證得法身,非是有情,爲求佛果,捨精進因.又佛證得,無始時來,無別無量,作求佛果,勤精進因.

이런 비판에 대답하기 위해서 게송으로써 나타내었으니, 

모든 부처님의 증득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무량하다. 만약  유정이 불과를 구하기 위해서 정진의 원인을 버린다면, '모든 부처님이 증득하여 유정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유정 스스로 발심 수행하여 정진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비판이 있어야 할 것이며,

유정이 정진하지 않고 불과(佛果)를 얻는 일은 없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증득은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뜻의 '모든 부처님의 증득은 불과를 얻음에 있어서 아득한 옛적부터 원인을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증득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무량한 것으로서, 항상 유정에게 불과를 얻는 부지런한 정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옳지 않은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무량한 것으로서, 증득의 원인(因)을 지으며, 불과를 얻기 위해서 다시 올바른 정근의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을 짓지 않아야 하는 까닭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신을 증득하며,

유정은 불과를 구하기 위해서 정진의 원인(因)을 버려서는  되며, 또한 부처님의 증득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이 없고 무량한 것으로서 불과를 구하는 부지런한 정진의 원인(因)이 되는 것이다.


若諸有情,捨勤功用,如是證得,恒不成因故.又斷此因,不應道理,謂諸菩薩,悲願纏心,於諸有情,愍如一子,諸有情類,處大牢獄,具受艱辛,是故菩薩,於諸有情,利益安樂.若作是心:餘旣能作,我當不作.不應道理.恒作是心:餘於此事,若作`不作,我定當作.是故不應斷如是因.

만약 유정이 정근의 의식적인 노력인 공용을 버린다면, 이와 같은 증득은 항상 원인(因)을 이루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원인을 단멸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다. 

모든 보살은 자비와 서원의 마음에 매여서 모든 유정에 대하여 외아들처럼 연민하나니, 모든 유정의 무리는  감옥에 처하여 일체의 고통을 받으므로, 따라서 보살이 유정의 이롭고 안락함에 대해서 “다른 이가 이미 능히으니, 나는 짓지 않아도 된다는, 즉 유정들이 스스로 발심하여 수행하지 않고,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방임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나니, 항상 이러한 마음을 지어서 “다른 이는  사업에 대해서 혹은 짓거나 혹은 짓지 않을지라도, 나는 반드시 지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이러한 원인을 단멸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阿毘達磨大乘經』中「攝大乘品」,我阿僧伽,略釋究竟.

▷논문; '아비달마대승경(阿毘達磨大乘經)' 안의 '섭대승품(攝大乘品)'을 나, 아승가(阿僧伽, 무착)는 간략히 해석해 마친다.


▶釋曰:正趣大乘,制造無量殊勝,論者軌範世親,略釋究竟.

▷해석한다; 바르게 대승에 나아가서 무량수승(無量殊勝)을 저술한, 논사 궤범(軌範, 아사리)인 세친(世親)이 간략히 해석해 마쳤다.

 

아사리(阿闍梨)는 범어 ācārya의 음역어로서, 궤범사(軌範師)ㆍ정행(正行)으로 번역한다. 제자를 가르치고 제자의 행위를 바르게 하여 그 모범이 될 수 있는 스승을 말한다.


攝大乘論釋卷第十 終 섭대승론석 제 10권을 마침.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0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② 5

 

▶釋曰:此中二頌,辯諸佛說一乘意趣.爲引攝一類者,謂爲引攝不定種性諸聲聞等,令趣大乘,

▷해석한다; 여기서의  게송은 모든 부처님께서 일승을 말씀하신 취지를 밝힌 것으로,

‘한 부류를 이끌어 내어 섭수하고, 나머지를 맡아 지니기 위함이니’란, 이른바 부정종성의 성문등을 이끌어 포섭하기 위해서이다.

ㅡ부정종성(不定種性) 성문과 독각은 소승의 근성을 벗어나서 대승에 통달할 만한 소질이 있기 때문에 일승을 설하여서 이끄는 것이.

 

오성(五姓)= 五種姓(오종성)은  菩薩定姓(보살정성, 定性菩薩정성보살) ·  獨覺定姓(독각정성, 定性緣覺정성연각) · ③聲聞定姓(성문정성, 定性聲聞정성성문) · ④三乘不定姓(삼승불정성, 不定種性부정종성) · ⑤無姓有情(무성유정, 無種性무종성)의 다섯으로,

 ② ③은, 각각 佛果(불과 · 辟支佛果벽지불과) · 阿羅漢果아라한과)를 얻는 것에 정해진 決定性(결정성),

② ③을 합쳐서 定性二乘(정성이승)이라하고, 

④는 보살 및 독각 · 성문의 三類(삼류)의 本有種子(본유종자)를 아울러 갖추고, 二乘(이승)의 수행을 한 뒤 大乘(대승)에 轉向(전향)해서 佛果(불과)를 깨닫는 등, 果(과)가 결정적이 부정종성(不定種性)이다.  

⑤의 무성유정은 영원히 迷界(미계)에 빠져서 苦(고)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고, 겨우 五戒(오계) · 十善(십선)의 善因(선인)을 닦아서 사람이나 天(하늘)에 태어날 수가 있게 되는 무종성(無種性)이다.

이 五姓各別(오성각별)의 說(설)은 楞伽經(능가경) 권二와 解深密經(해심밀경) 권二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이 입장에서 보면, 법화경 등과 같이 모든 중생이다 成佛(성불)할 수 있다는 說(설)에 대하여, 그것은 不定性(부정성)인 사람을 인도하여 大乘(대승)에 들어가게 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 說(설)이라고 해석한다. 

 

云何當令不定種性諸聲聞等,皆由大乘,而般涅槃.及任持所餘者,謂爲任持,不定種性諸菩薩衆,令住大乘,云何當令不定種性諸菩薩衆,不捨大乘,勿聲聞乘,而般涅槃.爲此義故,佛說一乘.由不定等句義,已說法無我解脫,乃至廣說,

어떻게 장차 부정종성의 성문등으로 하여금 대승에 의거해서 반열반하게   있는가! 

‘나머지를 맡아 지니기 위함’이란, 부정종성의 보살 대중을 맡아 지녀서 대승에 머물게 하는 것이니,

어떻게 장차 부정종성의 모든 보살 대중으로 하여금 대승을 버리지 않고 성문승으로 반열반하지 못하게   있는가?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 일승을 말씀하신 것이니, 부정종성 등의 문구의 의미로 인하여 이미 법ㆍ무아ㆍ해탈을 말하는 등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此中復由別意趣力,唯說一乘.何別意趣?謂法等故等.法等故者,法謂眞如,諸聲聞等,同所歸趣,所趣平等,故說一乘.無我等故者,謂聲聞等,補特伽羅,我皆無有.由無我故,此是聲聞`此是菩薩,不應道理.由此無我平等意趣,故說一乘.解脫等故者,謂聲聞等,於煩惱障,同得解脫,故說一乘.如世尊言:解脫解脫無有差別.

 중에서 다시 별도의취력(意趣力)에 의거해서 오직 일승을 말씀하셨으니, 어떠한 별도의 의취인가? 

이른바 ‘법이 평등한 법등(法等)이기 때문’ 등이니, ‘법이 평등한 법등(法等)이기 때문’에서의 법은 진여(眞如)로서 모든 성문등이 다 같이 돌아가야  곳으로, 돌아가야  곳이 평등하기 때문에 일승이라 하는 것이다. 

‘무아가 평등한 무아등(無我等)이기 때문’이란 성문등에는 보특가라의 자아는 실재하지 않으니, 무아이기 때문이다. 

성문의 무아와 보살의 무아가 다른 것이 아니기에 ‘이것은 성문이다, 이것은 보살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이 무아의 평등한취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하는 것이다. 

‘해탈이 평등한 해탈등(解脫等)이기 때문’이란, 성문등은 번뇌장에 대해서  같이 해탈을 얻기 때문에 일승을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성문의 해탈과 보살의 해탈에 차이가 없는 것이다.


性不同故者,種性差別故,以不定性諸聲聞等,亦當成佛.由此意趣,故說一乘. 得二意樂故者,得二種意樂故.一攝取平等意樂,由此攝取一切有情,言彼卽是我`我卽是彼.如是取已,自旣成佛,彼亦成佛.由此意趣,故說一乘;二法性平等意樂,謂諸聲聞,法華會上,蒙佛授記,得佛法性平等意樂,未得法身.由得如是平等意樂,作是思惟:諸佛法性,卽我法性.復有別義,謂彼衆中,有諸菩薩,與彼名同,蒙佛授記.由此法如平等意樂,故說一乘.

‘종성이 같지 않은 성부동(性不同)이기 때문’이란, 종성의 차별인 까닭이니, 부정종성의 모든 성문등도 장차 성불할  있으므로, 이러한 의취 의거해서 일승을 말하는 것이며,  

‘두 가지 의욕인 이의락(二意樂)을 얻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의욕을 얻기 때문이니,

첫째는 섭수의 평등의욕인 섭취평등의락(攝取平等意樂)이니, 이로 인하여 모든 유정을 섭수하여 “그는  나이고, 나는  그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렇게 섭수하고 나서 스스로 이미 성불하고, 그들도 역시 성불하게 하는, 이러한 의취 의거해서 일승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법성 평등의 의욕인 법성평등의락(法性平等意樂)이니, 이른바 모든 성문은 법화회상(法華會上)에서 부처님의 수기를 받고, 부처님 법성의 평등한 의욕을 얻었지만 아직 법신을 얻지 못한 까닭에, “모든 부처님의 법성은  나의 법성이다”라고 사유하게 하는 것이며,

다시 다른 뜻으로는,  대중 가운데 많은 보살이 있어서, 법화회상에서 부처님께 수기받은 성문들과 이름을 같이하면서 부처님의 수기를 받는 것이니, 이 법여(法如)의 평등한 의욕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한 것이다.


言化故者,謂佛化作聲聞乘等.如世尊言:我憶往昔,無量百返,依聲聞乘,而般涅槃.由此意趣,故說一乘.以聲聞乘,所化有情,由見此故,得般涅槃,故現此化.究竟故者,唯此一乘,最爲究竟,過此更無餘勝乘故.聲聞乘等,有餘勝乘,所謂佛乘.由此意趣,諸佛世尊,宣說一乘.

‘화현(化)이기 때문’이란 부처님께서 성문승 등으로 화작(化作)하여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세존께서 “내가 옛날을 생각해 보건대 무량한 성문승에 의지해서 반열반하였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은, 이러한 의취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한 것으로, 성문승으로 변화되었으므로 유정은 이것을 봄으로써 반열반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구경(究竟)이기 때문’이란 오직  일승만이 가장 구경임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지나서 다시 다른 뛰어난 교법이 없기 때문이며, 성문승 등에는 나머지 다른 뛰어난 교법의 승승(勝乘)이 있으니, 바로 불승(佛乘)이다. 

이러한 의취(意趣)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하는 것이다.


▶論曰:如是諸佛,同一法身,而佛有多,何緣可見?此中有頌:

▷논문;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께서는 동일한 법신이시거늘, 부처님께서 많이 계시는 것은 무엇을 반연하여   있는가?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一界中無二, 同時無量圓, 次第轉非理, 故成有多佛.”

 세계에  분이 계시니 않으니, 동시에 무량한 이가 원만하게 되네.

순서대로 전전함은 도리에 맞지 않으니, 그러므로 많은 부처님께서 계신다네.


▶釋曰:今當顯示,由此因緣,應知諸佛,雖同法身,而或成一,或復成多.應知一者,法界同故,諸佛皆同法界爲體,法界一故,應知一佛.又一佛者,以於一時,一世界中,無二佛現,故知一佛.又伽他中,顯示諸佛,或一或多.

해석한다; 이제 마땅히 이러한 인연에 의거함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신을 같이하면서도 혹은  분이기도 하고, 혹은 많은 분이기도 하다는 것 알아야 한다. 

‘하나(一)’라는 것은 법계를 같이하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마찬가지로 법계를 자체로 삼으시니, 법계가 하나이기 때문에 마땅히  분의 부처님이라고 알아야 한다. 

‘또한  분의 부처님’이란 동시에  세계에서  분의 부처님께서 출현하시지 않는 까닭에  분의 부처님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으로, 가타(伽他, 게송)에서 모든 부처님의 제불(諸佛)이란, 혹은  분, 혹은 많은 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一界中無二者,此句顯示,唯有一佛.一世界中,無有二佛俱時出現,是故說言,唯有一佛.餘句顯示,諸佛有多.同時無量圓者,無量菩薩,同一時中,資糧圓滿.若諸菩薩,福智資糧,同時圓滿,不得成佛,如是資糧,應空無果;衆多菩薩,修集資糧,同時圓滿,是故應知一時多佛.

‘한 세계에  분이 계시지 않는다’는  문구는, 오직  분의 부처님만이 계심을 나타낸 것으로, 한 세계에서  분의 부처님께서 동시에 출현하는 일은 없으므로 오직  분의 부처님만이 계신다고 말한 것이다. 

나머지 문구는 부처님께서 많이 계심을 나타낸 것으로,

‘동시에 무량한 이가 원만하게 된다’는 것은 무량한 보살이 같은 시기에 자량(資糧)이 원만해지는 것을 말한다. 

만약, 모든 보살의 복과 지혜의 자량이 동시에 원만하여 질지라도 성불을 얻지 못한다면, 이와 같은 자량은 마땅히 헛된 것으로, 결과가 없어야 할 것이나, 많은 보살이 자량을 닦아 모아서 동시에 원만해지는 것이므로 동시에 많은 부처님께서 계시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次第轉非理者,無有次第轉成佛義.若諸菩薩,修資糧時,觀待次第前後成滿,可得佛時,前後次第;然諸菩薩,修資糧時,不待次第前後成滿,故得佛時,亦無次第前後成義.是故同時,有衆多佛.

‘순서대로 전전함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순서대로 전전하여서 성불한다는 뜻이 없음을 말한 것으로,

만약 보살이 자량을 닦을  순서대로 이전과 이후를 관찰하여 원만히 성취한다면, 성불할 때에도 이전과 이후의 순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보살이 자량을 닦을  순서대로 이전과 이후를 기다리지 않고 원만히 성취하는 까닭에, 성불할 때에도 역시 순서대로 이전과 이후를 이룬다는 뜻이 없는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동시에 많은 부처님께서 계시는 것이다.


▶論曰:云何應知於法身中,佛非畢竟入於涅槃,亦非畢竟不入涅槃?此中有頌:

▷논문; 어찌하여, 마땅히 법신 안에서 부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에 들지 않으시며,

역시 궁극적으로 열반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있는가?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一切障脫故, 所作無竟故, 佛畢竟涅槃, 畢竟不涅槃.”

모든 장애를 벗어난 까닭이고, 해야  바의 소작(所作)이 끝이 없는 까닭이니, 

부처님께서는 필경에 열반에 드시나, 필경에 열반에 들지 않으신 것이라네.


▶釋曰:有餘部說,諸佛無有畢竟涅槃,復有別部聲聞乘人說,諸佛有畢竟涅槃故,此頌中顯二意趣.一切障脫故者,由佛解脫一切煩惱`所知障故,依此意趣,說言諸佛畢竟涅槃.所作無竟故者,由佛普於一切有情,未成熟者,欲令成熟;已成熟者,欲令解脫,是所應作,此事無有究竟之期,故佛畢竟不入涅槃.若異此者,應如聲聞畢竟涅槃,是則本願,應空無果.

해석한다; 다른 부파에서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께서는 필경에 열반에 들지 않는다”고 하며,

또한 다른 부파의 성문승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께서는 필경에는 열반에 드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가지의 의취(意趣)를 나타낸 것으로, 

‘모든 장애를 벗어난 까닭’이란, 부처님께서는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을 해탈하신 까닭에, 이러한 취지에 의지해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에 든다고 하는 것이며,

‘해야  바의 소작(所作)이 끝이 없기 때문’이란, 부처님께서는 널리 모든 유정에 대하여, 성숙하지 않은 자는 성숙시키고, 이미 성숙한 자는 해탈시키고자 하시는 까닭에,  마땅히 해야  바인  사업은 궁극의 시기가 없는 것이므로 부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에 들지 않으시는 것이다. 

만약 이러함과 다르다면, 마땅히 성문이 궁극적으로 열반에 드는 것과 같아야 할 것이니, 그러하다면,  본원(本願)이 헛되어 결과가 없는 무과(無果)이어야 할 것이다.


▶論曰:何故受用身,非卽自性身?由六因故,一色身可見故`二無量佛衆會差別可見故`三隨勝解見自性不定可見故`四別別而見自性變動可見故`五菩薩聲聞及諸天等種種衆會閒雜可見故`六阿賴耶識與諸轉識轉依非理可見故,佛受用身,卽自性身,不應道理.

논문;어째서 수용신(受用身)은 자성신(自性身)이 아닌가? 여섯 가지 원인에 의거하기 때문이니,

첫째, 색신(色身)을   있기 때문이며, 둘째, 무량한 부처님의 여러 법회의 차이를   있기 때문이며,

셋째, 뛰어난 승해(勝解)를 따라 보는 자성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며,

넷째, 각각 다르게 보는 것은 자성을 변동하여   있기 때문이며,

다섯째, 보살ㆍ성문ㆍ여러 하늘 등의 갖가지 법회에 섞여서   있기 때문이며,

여섯째, 아뢰야식과 전식(轉識)의 전의(轉依)는 도리에 맞지 않음을   있기 때문이니, 

부처님의 수용신이  자성신이란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수용신이 자성신과 다른 점을 여섯 가지로 말하였다.

 

자성신(自性身)은 모든 여래의 법신(法身)이니, 일체법이 자재하게 전전하는 소의(의지처)이기 때문이며,  

수용신(受用身)은 법신에 의지하여서, 모든 부처님의 갖가지 법회에 나타나는 바로서 청정한 불국토에서 대승의 법락을 향수(享受)하기 때문이며,  (공덕을 수용하는 입장의 부처)

변화신(變化身) 역시도 법신에 의지하며,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이 머무는 도사다천궁(睹史多天宮, 도솔천궁)으로부터 몰(沒)하여, 생을 받는 수생(受生)하고, 하고자 함을 수용하는 수욕(受欲)하며, (성소작지 成所作智의 소현所現으로 초지初地 이하의 보살·2승乘·범부가 감각하는 불신佛身)

성을 나와서 출가하는 유성출가(踰城出家)하며, 외도의 처소에 가서 모든 고행을 닦고, 

대보리를 증득하며, 큰 법륜을 굴리는 전대법륜(轉大法輪)을 하고, 대열반에 드는 까닭이다. -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9 권 4


▶釋曰:今當顯示佛受用身,卽自性身,不應正理.色身可見故者,佛受用身,色身可見,非佛法身,由此非理,故受用身,非卽法身.

▷해석한다; 이제 마땅히 부처님의 수용신이  자성신이라는 것이 바른 도리에 맞지 않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색신(色身)을   있기 때문’이란, 부처님의 수용신은 색신을   있어도 부처님의 법신은 그렇지 않으니, 이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 까닭에 수용신은 법신이 아닌 것이며, 


又受用身,有佛衆會,差別可得,法身無有,如是差別.由此非理,故受用身,非自性身.又受用身,隨勝解見,如契經說:或見佛身,唯有黃色,或見佛身,唯有靑色,如是廣說.若受用身,卽自性身,此自性身,應不決定,體不決定,名自性身,不應正理.由此非理,故受用身,非自性身.

또한 수용신은 부처님의 여러 법회에서 차이를   있지만, 법신은 그 같은 차이가 없으니, 이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 까닭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닌 것이며,

또한 수용신은 뛰어난 이해를 따라서 보는 것이니, 계경(경전)에서 "부처님을 뵈오니 혹 오직 황색뿐이고, 부처님을 뵈오니 혹 오직 청색뿐이다”라고 설한 바와 같은 것으로,

자세히 말한다면, 만약 수용신이 자성신이라면  자성신은 마땅히 자체가 일정하지 않아야 하고, 일정하지 않은 것을 자성신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바른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니, 이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 까닭에 수용신은 법신이 아닌 것이며, 

 

又受用身,一類有情,先見別異,卽此後時,復見別異,非佛法身,自性變動.由此非理,故受用身,非自性身.又受用身,有諸天等,種種衆會,常相閒雜,非自性身,有此閒雜.由此非理,故受用身,非自性身.

또한 수용신은  무리의 유정이 이미 다름을 보고, 그 다음의 때에 다시 다름을 불 수 있는, 사람이 보는 때를 따라 색상(色相)을 달리하지만, 부처님의 법신의 자성은 변동하지 않는 것이니, 이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닌 것이며,

또한 수용신은 여러 하늘 등의 갖가지 법회에서 항상 서로 섞여 있지만, 자성신은 이렇게 섞여 있지 않으니, 이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 까닭에 수용신은 법신이 아닌 것이며, 


又轉阿賴耶識,得自性身,若受用身,卽自性身,轉諸轉識,復得何身?由此非理,故受用身,非自性身.由此六因,不應理故,二不成一.

또한 아뢰야식을 전환하여 자성신을 얻는 것이니, 만약 수용신이 자성신이라면, 모든 전식(轉識)을 전환한다면 다시 어떠한 불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 까닭에 수용신은 법신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 여섯 가지의 이유인 육인(六因)으로, 두 가지는 하나를 이루지 않는 것이다.

 

자성신은 진여와 진지(眞智)가 독존하는 이지명합성(理智冥合性)의 불신이다. 이것은 진여 그 자체가 지성(智性)을 띄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성신이 단순히 진여법성 그 자체만을 가리키지 않고 진여가 ‘현현(顯現)된’ 상태로서, 전의(轉依)에 의해 아공ㆍ법공의 2공(空)이 현현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3신과 5법(진여眞如ㆍ사지四智)의 포섭관계에 있으며,  자성신은 이지명합의 성격므로 진여와 대원경지에 포섭시키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0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② 4

 

▶釋曰:如『菩薩藏百千頌經』「序品」中說,

▷해석한다; 보살장의 백천 송경(頌經)의 서품에서 청정한 불국토를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ㅡ진제의 역본인 진본(陳本) '섭대승론석'에서는 보살장 가운데 '정토경'의  종류, 또는 '화엄경'에서 정토상을 광설하는 문장이라고 되어 있으나,  경문은 '불지경(佛地經)' 서품ㆍ'해심밀경' 서품 나온다.

 

淸淨佛土,此淨佛土,顯示何等殊勝功德? 謂初二句,顯淨佛土顯色圓滿.言七寶者,一金;二銀;三琉璃;四牟娑洛寶;五遏濕摩揭婆寶,擧此應知卽擧末囉羯多等寶;六赤眞珠寶,此赤眞珠赤虫中出,一切寶中,最爲殊勝;七羯鷄怛諾迦寶. 放大光明普照一切無邊世界者,謂次前說,七寶所放諸大光明.此上二句,皆同顯示顯色圓滿.

 청정한 불국토가 나타내는 것에 어떠한 수승공덕이 있는가? 

처음의  문구는 청정 불국토의 빛깔의 현색원만(顯色圓滿) 나타내었으니,

7보라 함이란, 첫째는 금이고, 둘째는 은이며, 셋째는 유리(琉璃)이고, 

넷째는 모파락보(牟波洛寶, 자거車渠, 唓磲, 그 색깔이 말의 뇌와 같아서 마뇌 馬腦라고도 함)이며, 

다섯째는 알습마게파보(遏濕摩揭波寶, 적색보 赤色寶)이니, 이것은 마땅히 알지니 말라갈다(末囉羯多, 녹색보 綠色寶) 등의 보배를 드는 것이며,

여섯째는 적진주보(赤眞珠寶)이니, 이 적진주는 적충(赤蟲) 안에서 나오는 것으로, 모든 보배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며, 

일곱째는 갈계달락가보(羯雞怛諾迦寶, 매괴 玫瑰)이다. 

대광명을 내어 널리 무변한 세계를 모두 비춘다는 것이란, 바로 앞에서 말한 7보에서 나오는 모든 대광명을 말하는 것으로, 이상의  문구는  같이 빛깔의 현색원만(顯色圓滿)원만을 나타낸 것이다.

 

次有一句,顯形色圓滿.次有一句,顯分量圓滿.次有一句,顯方所圓滿.次有一句,顯因圓滿,此何所因?謂出世閒無分別智,及後得智,此後得智,說名爲勝,此後得故,從此二種善根所起,卽此善根,名因圓滿.次有一句,顯果圓滿,謂淨佛土,以極自在淨識爲相.

다음의 문구는 형체의 형색원만(形色圓滿) 나타낸 것이며, 다음의 문구는 분량원만(分量圓滿) 나타내며, 

다음의 문구는 방위ㆍ처소의 방소원만(方所圓滿) 나타내며,

다음의 문구는 원인의 인원만(因圓滿) 나타내는 것이니, 이것은 무슨 원인을 말하는 것인가? 

출세간의 무분별지와 후득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 후득지를 뛰어난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이것은 후득이기 때문이다. 

이는  가지의 선근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니, 곧  선근을 원인의 인원만(因圓滿)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다음의 문구는 결과의 과원만(果圓滿) 나타내는 것으로, 청정한 불국토는 지극히 자재한 청정식의 정식(淨識)으로써 상을 삼는 것이다.

 

次有一句,顯主圓滿.次有一句,顯輔翼圓滿.次有一句,顯眷屬圓滿,前已擧龍,今此復擧莫呼洛伽,爲攝大蟒.次有一句,顯任持圓滿,卽是飮食.次有一句,顯事業圓滿,謂食此食已辦諸衆生一切義利.次有一句,顯攝益圓滿,於淨土中,離諸煩惱,無諸苦故.

다음의 문구는 주원만(主圓滿) 나타내고, 다음의 문구는 보익원만(輔翼圓滿) 나타내며, 

다음의 문구는 권속원만(眷屬圓滿) 나타내는 것이니, 앞에서 용(龍)을 들었고 지금 여기서는 다시 모호락가(莫呼洛伽, mahoraga 마후라가, 큰 구렁이인 대사 大蛇 또는 대복행 大腹行)를  것은,  구렁이를 포함시키기 위한 것이며,

다음의 문구는 맡아 지님의 임지원만(任持圓滿) 나타낸 것이니,  음식을 말하는 것이며,

다음의 문구는 사업원만(事業圓滿)을 나타낸 것으로,  음식을 먹고서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 힘쓰는 것이며,

다음의 문구는 섭익원만(攝益圓滿) 나타낸 것이니, 정토에는 모든 번뇌를 여의어서 일체의 괴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次有一句,顯無畏圓滿,若處無怨,卽無怖畏.怨謂四魔,此淨土中,諸煩惱魔`薀魔`死魔及以天魔,悉皆無有,是故無畏.次有一句,顯住處圓滿.次有一句,顯路圓滿.此淨佛土,由何路入?謂大乘中,聞`思`修慧.如其次第,大念慧行,爲遊入路.

다음의 문구는 두려움이 없음의 무외원만(無畏圓滿) 나타내는 것이니, 처한 곳에서 원한이 없다면  두려움이 없으니, 원한이란 번뇌마ㆍ온마(蘊魔)ㆍ사마(死魔)ㆍ천마(天魔)의 네 가지 마군인 사마(四魔)를 말하는 것으로,  정토에는 모든 번뇌의 마군(번뇌마)ㆍ5온의 마군(온마)ㆍ죽음의 마군(사마)ㆍ하늘의 마군(천마), 모두가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다음의 문구는 머무는 곳의 주처원만(住處圓滿) 나타내고, 

다음의 문구는 길의 노원만(路圓滿) 나타내는 것이니, 이 청정한 불국토는 어떠한 길에 의해서 들어가게 되는가? 

이른바 대승의 들어서 이루는혜(聞慧)ㆍ사유해서 이루는혜(思慧)ㆍ수행해서 이루는혜(修慧)를  순서대로 크게 기억하고 판별하여 수행함으로서 즐겁게 들어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次有一句,顯乘圓滿,乘奢摩他`毘鉢舍那,而遊趣故.次有一句,顯門圓滿,謂此淨土,由何門入?

謂大乘中,大空`無相`無願解脫,爲所入門.

다음의 문구는 교법의 승원만(乘圓滿) 나타내는 것이니, 사마타ㆍ비파사나에 의지해서 즐겁게 나아가기 때문이며,

다음의 문구는 문원만(門圓滿) 나타낸 것이니, 이 정토는 어떠한 문에 의해서 들어가는 것인가? 

이른바 대승의 대공(大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삼해탈문(三解脫門)을 들어가는 문(門)으로 삼는 것이다.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삼해탈문(三解脫門)의 해탈에 들어가는 문이 되는 세 가지 선정이다.

공해탈문은 보특가라(人)와 법의 본성이 공한 것을 관조하는 것이며,

무상해탈문은 차별상을 떠나는 것이고,

무원해탈문은 원하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次有一句,顯依持圓滿,如大地等,依風輪住.此淨佛土,何所依持?無量功德,衆所莊嚴,大紅蓮華之所建立.

다음의 문구는 의지원만(依持圓滿) 나타낸 것으로, 대지(大地) 등이 풍륜(風輪)에 의지해서 머무는 것과 같이, 

 청정한 불국토는 어떠한 곳 의지하는가? 

무량한 공덕으로 장엄한 곳, 뛰어난 보배 연꽃의 대홍련화(大紅蓮華)로 건립된 곳이다.

 

대(大)는 뛰어남의 승(勝)의 뜻이고, 보배꽃 중의 왕인 대보화왕(大寶華王)은 붉은 연꽃을 가리키며, 중(衆)은  연꽃잎이 많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은 첫째로 깨달음의 경지ㆍ원각(圓覺)ㆍ진여ㆍ원성실성의 뛰어나고 미묘한 공덕으로,

그러한 경지는 연꽃과 같은 보살 수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상징한다.

 

受用如是淸淨佛土,一向淨妙者,謂淨土中,無有不淨糞穢等事.一向安樂者,謂淨土中,唯有樂受,無有苦受`無無記受.一向無罪者,謂淨土中,無有不善,亦無無記.一向自在者,謂淨土中,不待外緣,一切所欲,隨自心故.

‘이와 같은 청정한 불국토를 수용함에는 한결같이 청정하고 미묘한 일향정묘(一向淨妙)’란, 정토 중에는 부정하고 더러움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한결같이 안락한 일향안락(一向安樂)’이란, 정토에는 오직 즐거운 감수작용의 낙수(樂受)만이 있을 뿐, 괴로운 감수작용의 고수(苦受)가 없으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수작용의 무기수(無記受)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한결같이 죄가 없다는 일향무죄(一向無罪)’란, 정토에는 불선(不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기(無記) 역시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한결같이 자재한 일향자재(一向自在)’란, 정토에는 외부 조건의 외연(外緣)을 필요로 하지 않고, 하고자 하는 바의 모두가 자기 마음에 따르기 때문이다.


▶論曰:復次應知,如是諸佛法界,於一切時,能作五業:一者救濟一切有情災撗爲業,於暫見時,便能救濟盲聾狂等,諸災橫故;二者救濟惡趣爲業,拔諸有情,出不善處,置善處故;三者救濟非方便爲業,令諸外道,捨非方便,求解脫行,置於如來聖教中故;四者救濟薩迦耶爲業,授與能超三界道故;五者救濟乘爲業,拯拔欲趣餘乘菩薩,及不定種性諸聲聞等,安處令修大乘行故.於此五業,應知諸佛業用平等.此中有頌:

▷논문;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와 같은 모든 부처님의법계는 일체시에 다섯 가지의 오업(五業)을 지으니,

첫째는 모든 유정의 재난을 구제함을 업으로 삼는 것이니, 잠깐만 볼지라도 능히 장님ㆍ귀먹은 이ㆍ미친  등의 모든 재난을 구제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살기 괴로운 세계의 악취(惡趣)를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것이니, 모든 유정을 빼내어 불선의 장소에서 나오게 하여서 선한 선처(善處) 두기 때문이며,

셋째는 방편이 아닌 비방편(非方便)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모든 외도로 하여금 방편이 아닌 것을 버리고 해탈의 행을 구하도록 하여서,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인 여래성교(如來聖教) 안에 두기 때문이며,

넷째는 살가야(薩迦耶, 유신견)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능히 삼계를 벗어나는 도(道)를 주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교법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다른 교법에 나아가려는 보살과 부정종성(不定種性)의 성문들을 빼내어서 안전하게 대승의 행을 닦는 곳에 두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의 오업(五業)에 있어서 모든 부처님의 작용인 불업용(佛業用)은 평등한 것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이러함에 게송이 있다.


“因依事性行, 別故許業異, 世閒此力別, 無故非導師.”

원인(因)ㆍ의지신(依止身)ㆍ사업(事)ㆍ품성(性)ㆍ행(行)이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인 업이(業異)를 인정한다네.

세간에는 이러한 힘의 차이가 있으나, 스승(부처님)에게는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것이라네.

ㅡ이해하지 어려운 문장으로써, 급다(笈多)ㆍ행구(行矩) 역본인 수본(隋本)에는세간에는 이런 차이가 있지만 스승에게는 그런 차이가 없네’로 되어 있다. 스승, 도사(導師), 부처님에게는 업의 차이가 없이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釋曰:應知如是諸佛法界,於一切時,能作五業者,謂佛法身,恒作五業.救濟一切有情災橫,爲業等者,謂盲聾等暫見佛時,便得眼等.救濟惡趣.爲業等者,謂拔惡處,置於善處,名救惡趣.救濟薩迦耶,爲業等者,謂爲世閒,說能超出三界聖道,卽說三界,爲薩迦耶.所餘二句,其義可知.於此五業,應知諸佛諸業平等,

▷해석한다; 마땅히 알지니, 이와 같은 모든 부처님의법계(佛法界)는 어느 때나 항상 다섯 가지의 오업(五業)을 짓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법신은 항상 다섯 가지의 오업(五業)을 짓는 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유정의 재난을 구제함을 업으로 삼는다’이란, 장님이나 귀먹은  등이 잠깐이라도 부처님을 친견한다면, 장님은 눈을 뜨게 되고, 귀먹은 이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며, 

‘살기 괴로운 세계의 악취(惡趣)를 구제함을 업으로 삼는다’ 는 것은, 이른바 살기 괴로운 악취에서 구해내어 살기 좋은 곳에 두는 것을 ‘살기 괴로운 세계를 구제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살가야(薩迦耶, 유신견)를 구제함을 업으로 삼는다’ 는 것은, 세간을 위해서 능히 삼계를 벗어나는 성스러운 성도(聖道) 설하는 것이니, 곧 삼계를 유신견이라 말하는 것으로, 즉 유신견에 의지해서 삼계에 계박되기 때문이다.

나머지  문구는  의미를   있을 것이니, 이 다섯 가지의 오업에 있어서 모든 부처님의 업은 평등하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於此義中,復說一頌.謂因依等,由是因緣,一切如來,諸業平等,一切世閒,業不平等,以一伽他,摠略顯示世閒因別.故許業異者,謂諸世閒,由別因故,生那落迦,別因生天,別因生人,乃至餓鬼,由因別故,許業有異.

이러한 의미 가운데에서 다시  게송을 말하였으니, 이른바 ‘원인(因)ㆍ의지신(依止身)’ 등이니, 이러한 인연에 의거해서 모든 여래의 업은 평등하고, 일체 세간의 업은 불평등한 것이다. 

하나의 게송으로써 총체적으로 간략히 세간의 원인을 나타내었으니,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이란, 

모든 세간은 원인의 차별인 인별(因別)에 의해서 지옥에 태어나고, 

원인의 차별인 인별(因別)에 의해서 하늘에 태어나며, 

원인의 차별인 인별(因別)에 의해서 인간이나 아귀에 태어나나니,

원인의 차별인 인별(因別)에 의거함으로써 업에 차이인 업이(業異)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世閒依別故,許業異者,依謂身體,由依別故,許業有異. 世閒事別故,許業異者,謂諸世閒,商賈事別`營農事別,此等事務,有差別故,許業有異.世閒性別故,許業異者,性謂意趣,意趣別故,許業有異.世閒行別故,許業異者,由作行業,有差別故,許業有異.諸佛作業,皆無功用,一切因等,差別力無,是故導師,非有業異.

‘세간에 의지신(依止身)이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인 업이(業異)를 인정한다’는 것에서,

의(依)는 신체를 말하는 것으로, 의지신이 다르기 때문에 업에 차이인 업이(業異)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세간의 사업이 다른 세간사별(世閒事別)이기 때문에 업의 차이인 업이(業異)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른바 모든 세간에는 상업의 상고(商賈)의 차이, 농업을 경영하는 일의 차이 등, 이러한 사무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업에 차이인 업이(業異)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세간의 품성인 세간성(世間性)이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인 업이(業異)를 인정한다’는 것에서,

여기서 품성(性)은 취향의 의취(意趣)를 말하며, 취향의 의취(意趣)가 다르기 때문에 업에 차이인 업이(業異)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세간의 행이 다르기 때문에 업의 차이인 업이(業異)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른바 행동하는 업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업에 차이인 업이(業異)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작업은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無功用)이고, 모든 원인 등의 차별력(差別力)이 없으므로, 따라서 스승(부처님)에게는 업의 차이인 업이(業異)가 없는 것이다.


▶論曰:若此功德,圓滿相應,諸佛法身,不與聲聞`獨覺乘共,以何意趣,佛說一乘?此中有二頌:

▷논문; 만약 이러한 공덕의 원만과 상응한다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성문승ㆍ독각승과 공통되지 않으니, 어떤 취지에 의해서 부처님께서 일승(一乘)을 말씀하신 것인가?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爲引攝一類, 及任持所餘, 由不定種性, 諸佛說一乘.

 부류를 이끌어 내어 섭수하고, 나머지를 맡아 지니기 위함이니

부정종성(不定種性)으로 인하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일승을 말씀하셨네.


法無我解脫, 等故性不同, 得二意樂化, 究竟說一乘.”

법ㆍ무아ㆍ해탈이 평등하기 때문이고, 종성이 같지 않으며, 두 가지 의욕을 얻음과 화현과

구경(究竟)인 까닭에 일승을 말씀하셨다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0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② 3

 

▶論曰: 논문; 
“煩惱成覺分, 生死爲涅槃, 具大方便故, 諸佛不思議.”

번뇌는 깨달음을 이루고, 생사는 열반이 되나니, 

 방편을 갖추신 까닭에, 모든 부처님을 생각으로 헤아림이 불가사의하다네.


▶釋曰:此頌,顯示不可思議甚深.謂諸菩薩,具大方便,煩惱集諦,轉成覺分,生死苦諦,卽爲涅槃.

해석한다; 이 게송은 불가사의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 불가사의심심(不可思議甚深)으로,

보살은 수행단계인 인위(因位)에서는 자비와 지혜를 갖추서서, 불과(佛果)를 성취하여 3신(三身)을 갖추고,  방편을 갖추고, 번뇌의 집제(集諦)가 전환하여 깨달음을 성취하여서, 생사의 고제(苦諦)는  열반이 되는 것이다.

ㅡ번뇌,  집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스리는 조도법(助道法),  도제(道諦) 성취하는 것으로, 생사의 고제는 도제로 인하여 열반,  멸제(滅諦) 이룬다는 것이다.

 

如是一切諸佛聖教,如前所說,三因緣故,不可思議,謂自內證故等.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지의 인연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니, 이른바 스스로 내면적으로 증득하는 등이다.


▶論曰:應知如是所說甚深,有十二種:謂生住業住甚深`安立數業甚深`現等覺甚深`離欲甚深`斷薀甚深`成熟甚深`顯現甚深`示現等覺涅槃甚深`住甚深`顯示自體甚深`斷煩惱甚深`不可思議甚深.

논문; 마땅히 알지니, 이상에서 말한, 매우 심오함에 12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태어남(生)ㆍ머무름(住)ㆍ업(業)ㆍ의지하여 머무는 것의 심심(甚深)함이고,

안립ㆍ숫자ㆍ업의 심심(甚深)이며, 등각을 현현하는 것의 심심(甚深)이고, 

탐욕을 여의는 것의 심심(甚深)이며, 5온을 단멸하는 것의 심심(甚深)이며, 성숙의 심심(甚深)이고, 

현현의 심심(甚深)이며, 등각과 열반을 시현하는 심심(甚深)이고, 안주의심심(甚深)이며, 

자체를 나타내 보이는 것의 심심(甚深)이고, 번뇌를 단멸하는 것의 심심(甚深)이며, 불가사의의 심심(甚深)이다.


▶釋曰:此十二種,皆難覺了,故名甚深.一一別相,如前已說.

해석한다; 이 12가지는 모두 깨닫기 어려운 까닭에 심심(甚深)하다고 말하는 것이니,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상은 앞에서 말한 설한 바 같다.


▶論曰:若諸菩薩,念佛法身,由幾種念,應修此念?略說菩薩念佛法身,由七種念,應修此念:一者諸佛於一切法,得自在轉,應修此念,於一切世界,得無㝵通故,此中有頌:

논문; 보살이 부처님의 법신을 염(念)하고자 한다면, 몇 가지의 염(念) 의거해서 이러한 염(念)을 닦아야 하는가? 

보살이 부처님의 법신을 생각하는 염불법신(念佛法身)을 간략히 말한다면 7 가지의 칠종염(七種念)에 의거해서  생각(念)을 닦아야 하나니,

첫째는 마땅히 “모든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에 대해서 자재하게 전전(轉轉)할  있다”라는 생각(念)을 닦아야하나니, 일체세계에서 걸림이 없는 무애통(無㝵通) 얻으신 까닭이니, 이러함에 대한 게송이 있다.


“有情界周遍, 具障而闕因, 二種決定轉, 諸佛無自在.”

유정세계에서 두루할지라도, 장애를 갖추어 원인을 결여하나니, 

 가지가 결정적으로 전전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은 무자재(無自在)라네.


二者如來其身常住,應修此念,眞如無閒解脫垢故;三者如來最勝無罪,應修此念,一切煩惱及所知障,竝離繫故;四者如來無有功用,應修此念,不作功用,一切佛事無休息故;五者如來受大富樂,應修此念,淸淨佛土,大富樂故;六者如來離諸染污,應修此念,生在世閒,一切世法,不能染故;七者如來能成大事,應修此念,示現等覺般涅槃等,一切有情,未成熟者,能令成熟,已成熟者,令解脫故.此中有二頌:

둘째는 마땅히 “여래의 몸은 상주한다는, 여래신상주(如來身常住)”라는 생각(念)을 닦아야 하나니, 진여는 끊임없이 번뇌를 해탈하는 까닭이며,

셋째는 마땅히 “여래께서는 가장 뛰어나고 죄가 없다는 여래최승무죄(如來最勝無罪)”라는 생각(念)을 닦아야 하나니,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을 아울러 끊은 까닭이며,

넷째는 마땅히 “여래께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여래무공용(如來無功用)”이라는 생각(念)을 닦아야 하나니,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功用)을 하지 않고서도 모든 불사(佛事)를 쉬지 않으시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마땅히 “여래께서는  부귀와 즐거움을 수용한다는, 여래수대부락(如來受大富樂)”이라는 생각(念)을 닦아야 하나니, 청정한 불국토는 매우 부유하고 즐겁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마땅히 “여래께서는 모든 오염을 여읜, 여래이제염오(如來離諸染污)”라는 생각(念)을 닦아야 하나니, 세간에 머무실지라도 일체의 세간법이 오염시킬  없기 때문이며,  

일곱째는 마땅히 “여래께서는 능히  사업을 성취하시는, 여래능성대사(如來能成大事)”라는 생각(念)을 닦아야 하나니, 등각과 반열반 등을 시현하여, 아직 성숙하지 않은 유정들은 능히 성숙케 하고, 이미 성숙한 이는 해탈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圓滿屬自心, 具常住淸淨, 無功用能施, 有情大法樂.

원만은 자기 마음에 속하고, 상주와 청정을 갖추며,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無功用)으로 능히 유정에게  법락을 베푸시며, 


遍行無依止, 平等利多生, 一切佛智者, 應修一切念.”

두루 행하시나 무의지(無依止)이시며, 평등하게 많은 생을 이롭게 하는 분이시니, 

지혜로운 지자(智者) 모든 부처님에 대하여, 마땅히 모든 생각(念)을 닦아야 하리라.


▶釋曰:今當顯示,若諸菩薩,念佛法身,由七種念,應修其念.於一切法,得自在轉者,由得神通,於一切法,自在而轉.以諸如來,於一切世界,得無㝵神通,非如聲聞等猶有障㝵故.若諸如來,於一切法,自在而轉,何故一切有情之類,不得涅槃?故今一頌,顯由此因,諸有情類,不能證得究竟涅槃.

해석한다; 이제는 보살이 부처님 법신을 생각하려면 일곱 가지의 칠종념(七種念)에 의거해서  생각(念)을 닦아야 함을 나타내 보인 것으로, 

‘일체법에 대해서 자재하게 전전할  있다’는 것이란, 신통을 얻음으로써 일체법에 대해서 자재하며, 여래께서는 모든 세계에서 걸림없는 신통을 얻으신 까닭에, 성문등이 아직 장애가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니,

만약 모든 여래께서 일체법에 대해서 자재하게 전전한다면, 어찌하여 모든 유정의 무리가 열반을 얻지 못하는가? 따라서 지금의  게송은 이러한 원인으로 모든 유정의 부류가 궁극적인 열반을 증득할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有情界周遍具障,而闕因者,謂諸有情,有業等障,名爲具障.由具障故,雖無量佛,出現於世,不能令彼得般涅槃,諸佛於彼無有自在.若諸有情,無涅槃法,名爲闕因.此意說彼無涅槃因,無種性故,諸佛於彼,無有自在.

‘유정세계에서 두루할지라도, 장애를 갖추어 원인을 결여하나니’란, 모든 유정에게는  등의 장애가 있으므로 장애를 갖추었다고 하는 것이며, 장애를 갖춘 까닭에 무량한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실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반열반을   없으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그들 중생에 대해서 자재함이 없으신 것으로,  

만약 모든 유정에게 열반법이 없다면, 원인을 결여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취지는 그들에게 열반의 원인이 없고 종성이 없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자재함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二種決定轉者,決定有二種:一作業決定`二受異熟決定,當知此中,說名決定.諸佛於此,二決定中,無有自在.頑愚等身,名異熟障決定,當墮那落迦等,名受異熟決定,

‘두 가지가 결정적으로 전전한다’는 것에서, 결정(決定)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작업결정(作業決定)이고, 둘째는 과보를 받는 이숙결정(異熟決定)이다. 

이러함에 대해서 결정이라 이름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나니, 모든 부처님께는 이러한  가지 결정에 자재함이 없으시니,

완고하고 어리석음 등의 신(身)을 이숙장애의 이숙결정(異熟決定)이라 하나니, 장차 지옥 등에 떨어질 것을 이름하여 이숙결정(異熟決定) 받는 것이라 한다.

 

이숙결정(異熟決定), 네 가지 살기 괴로운 세계인 악취(惡趣), 즉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의 이숙의 과보를 받을 것이 결정된 것을 말한다.


應知此中,二種差別.如來身,常住眞如無閒解脫垢故者, 謂眞如理無閒解脫一切障垢顯成法身,是故如來其身常住. 如來受大富樂者,應知如來淸淨佛土,名大富樂. 如來能成大事者, 謂諸如來現等正覺般涅槃等,成大義利,已成熟者,令得解脫;未成熟者,令其成熟. 餘修念佛其義易了.復以二頌,顯釋如是七種念佛.於此頌中,宣說諸佛,七種圓滿,令修念佛,

 가운데  가지의 차별이 있음을 알아야 하나니,

‘여래의 몸은 상주한다는, 여래신상주(如來身常住)는 진여는 끊임없이 번뇌를 해탈하기 때문이다’란,

진여의 이체(理體)는 끊임없이 모든 장애의 번뇌를 해탈하고 법신을 성취함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여래께서는  몸이 상주하는 것이며,

‘여래께서는  부귀와 즐거움을 수용한다는, 여래수대부락(如來受大富樂)’이란, 여래의 청정한 불국토를  부귀와 즐거움이라 부르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며,

‘여래께서는 능히  사업을 성취하시는, 여래능성대사(如來能成大事)’란, 이른바 모든 여래께서는 등정각ㆍ반열반 등을 현현하고  이익을 성취하여, 이미 성숙한 자는 해탈케 하고 아직 성숙하지 않은 자는 성숙케 하는 것이다.

나머지 염불의 수행은  뜻을 알기 쉬우며, 다시  개의 게송으로써 이렇게 일곱 가지의 칠종염불(七種念佛)을 나타내었으니, 이 게송에서 모든 부처님의 일곱 가지의 칠종원만(七種圓滿)을 널리하여 염불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謂諸菩薩,初念如來隨屬自心圓滿;次念如來其身常住圓滿;次念如來具足淸善圓滿,卽是最勝無罪;次念如來無功用圓滿,謂作佛事無功用故;次念如來施大法樂圓滿,應知卽於淸淨佛土受大法樂;次念如來離諸染污圓滿,卽是遍行,無所依止.若有所依,而遍行者,卽有苦難,由無所依,而遍行故,佛常無苦,離染遍行.後念如來平等,多利圓滿,卽是念佛,能成大事,成熟解脫諸有情故.

모든 보살이 처음에는 여래께서 외부 조건의 외연(外緣)을 필요로 하지 않는, 스스로 마음을 따르는 수속자심원만(隨屬自心圓滿)을 생각하고, 다음으로 여래의 몸은 상주한다는, 여래신상주(如來身常住)의 원만 생각(念)하며,  

다음에 여래께서는 가장 뛰어나고 죄가 없다는 원만을 생각(念)함이니, 이것이  가장 뛰어나고 죄가 없는 최승무죄(最勝無罪)인 것이며,  

다음에 여래께서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의 원만을 생각(念)함이니, 불사를 짓는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이 없기 때문이며,

다음으로는 여래께서  법락을 베푸는 원만을 생각(念)함이니, 청정한 불국토에서 보살 대중에게  법락을 수용하게 하시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며,

다음으로는, 여래께서 모든 잡염을 여읜 원만을 생각(念)하는 것이니, 곧 두루 행함에 의지하는 바가 없으니, 만약 의지하는 바가 있으면서 두루 행한다면  고난이 있게 되나, 의지하는  없이 두루 행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항상 괴로움이 없고 잡염을 떠나서 두루 행하시는 것이며,

다음은, 여래께서 평등하게 이롭게 하심이 많은 원만을 생각하는 것이니, 능히 부처님의  사업을 성취함을 생각(念)하는 것으로, 모든 유정을 성숙시키고 해탈하게 하기 때문이다.

 

ㅡ이하는 청정한 불국토의 양상을 18가지 원만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박가범(부처님)께서 삼매에서 현현한 정토의 광경을 18가지 측면에서 서술하였으며, 이러한 18가지 원만상은 세존께서 과거 보살로서 오랜 세월 동안 이타행을 펼치신 선근에 의해 이루어진 보토(報土)인 것이다.

▶論曰:復次諸佛淸淨佛土相云何?應知如『菩薩藏百千契經』「序品」中說, 謂薄伽梵, 住最勝光曜七寶莊嚴放大光明普照一切無邊世界,無量方所妙飾閒列,周圓無際,其量難測,超過三界所行之處,勝出世閒善根所起,最極自在淨識爲相,如來所都,諸大菩薩衆所雲集,無量天`龍`藥叉`健達縛`阿素洛`揭路荼`緊捺洛`莫呼洛伽`人`非人等,常所翼從,廣大法味,喜樂所持, 作諸衆生,一切義利,蠲除一切煩惱災橫,遠離衆魔,過諸莊嚴如來莊嚴之所依處, 

 논문; 또한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불국토의 청정불토상(淸淨佛土相)을 어떻게 보아야 마땅한 것인가?

보살장의 백천 가지 계경의 서품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 바와 같으니, 

“박가범(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은 궁전에 머무셨으니, 그곳은 매우 찬란하게 빛나는 7보 장엄이 대광명을 내어 널리 무량한 세계를 모두 비추고, 수많은 방위 공간을 연이어 묘하게 장식하였으며, 주위가 끝없이 무변하여  크기를 헤아리기 어려우며, 삼계에서 행하는 곳을 벗어났으니, 삼계는 미혹의 업으로 초감(招感)된 유루의 과보이고, 정토는 이러한 경계를 초월한 곳인 까닭이며,

뛰어난 출세간의 선근이 일으킨 곳이며, 가장 자재한 청정식(淸淨識)을 모습으로 삼으니, 이 정토는 번뇌가 없고 매우 청정한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식 위에 나타난 체상(體相)인 까닭이며,

여래께서 도읍으로 삼은 곳이며, 모든 대보살들이 운집하고, 수많은 천ㆍ용ㆍ약차ㆍ건달박(건달바)ㆍ아소락(아수라)ㆍ게로다(가루라)ㆍ긴날락(긴나라)ㆍ모호락가(마후라가) 등의 호법신장인 8부중(部衆)과

사람인  아닌 듯한 존재인 인비인(人非人)들이 항상 무리지어 따르나니, 광대한 법미(法味)를 기쁘고 즐겁게 지니며,

중생의 모든 이익을 나타내 지으며, 티끌 같은 번뇌들을 모두 없애고,
번뇌마ㆍ온마(蘊魔)ㆍ사마(死魔)ㆍ천마(天魔) 등의 사마(四魔)를 멀리 여의었으며, 일체의 모든 장엄을 능가하는 여래 장엄의 의지처인 것이다. 

 

인비인(人非人), 첫째는 긴나라의 별명이며, 

둘째는 천룡팔부중과 그 종속자의 총칭이며, 

셋째는, 사람과 사람 아닌 이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대승경전의 서두에서 법회대중 가운데 천ㆍ용 등 8부중에 이어져 나오는 인비인의 경우에는 8부중과 그 종속자의 총칭으로, 그들은 원래 사람이 아니지만 법회석상에서 원래의 모습대로 나타나면 법회에 모인 사람들이 놀랄 것이므로 사람의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大念慧行,以爲遊路,大止妙觀,以爲所乘,大空無相,無願解脫,爲所入門,無量功德,衆所莊嚴,大寶花王之所建立大宮殿中.如是現示淸淨佛土,顯色圓滿`形色圓滿`分量圓滿`方所圓滿`因圓滿`果圓滿`主圓滿`輔翼圓滿`眷屬圓滿`任持圓滿`事業圓滿`攝益圓滿`無畏圓滿`住處圓滿`路圓滿`乘圓滿`門圓滿`依持圓滿.

대념(大念)으로 기억하고 판별하며 수행하는 대념혜행(大念慧行)을 노니는 길로 삼고, 

크게 그침의 대지(大止)와 미묘한 관찰의 묘관(妙觀)을 교법인 승(乘)으로 삼으며, 

뛰어난공(大空)ㆍ무상(無相)ㆍ소원이 없는 무원(無願)의 해탈을 들어가는 문으로 삼는  등의 무량한 공덕으로 장엄하고 뛰어난 보배 연꽃으로 세워진 곳이다.”

이상과 같은 청정한 불국토는 빛깔의 현색원만(顯色圓滿), 형색원만(形色圓滿), 분량원만(分量圓滿), 처소의 방소원만(方所圓滿), 인원만(因圓滿), 결과의원만(果圓滿), 주원만(主圓滿), 보익원만(輔翼圓滿), 권속원만(眷屬圓滿), 맡아 지님의 임지원만(任持圓滿), 사업원만, 섭익원만(攝益圓滿), 두려움이 없음의 무외원만(無畏圓滿), 머무는 곳의 주처원만(住處圓滿), 길의 노원만(路圓滿), 교법의 승원만(乘圓滿), 문원만(門圓滿), 의지원만(依持圓滿)을 나타낸다.

 

크게 기억함의 대념(大念)은 문혜(聞慧)를, 크게 판별하는 대혜(大慧)는 사혜(思慧)를, 크게 수행함의 대행(大行)은 수혜(修慧)를 말한다. 대승을 반연하기 때문에 큰 대(大)로 표현한다.

 

復次受用如是淸淨佛土,一向淨妙`一向安樂`一向無罪`一向自在.

또한 이와 같은 청정한 불국토를 수용함에는 한결같이 청정한 일향정묘(一向淨妙)이며,

한결같이 안락한 일향안락(一向安樂)이며, 한결같이 죄가 없는 일향무죄(一向無罪)이며,

한결같이 자재한 일향자재(一向自在)한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0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② 2

 

▶論曰: 논문;  
“諸佛過諸薀, 安住諸薀中, 與彼非一異, 不捨而善寂.”

모든 부처님께서는온(五蘊)을 초월하시었으나, 오온(五蘊) 가운데 안주하시니,

그것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니, 버리지 않고서도 매우 고요하시네.


▶釋曰:此頌,顯示斷薀甚深,諸佛過諸薀.安住諸薀中者,謂諸如來,超過色等,五種取薀,住無所得法性薀中.與彼非一異者,雖已捨遍計所執諸薀,而與彼非異,以卽安住彼法性故.亦復不一,若是一者,遍計所執應同法性,成淸淨境.不捨而善寂者,謂不棄捨圓成實薀,卽是妙善涅槃體故.

해석한다; 이 게송은 오온(五蘊) 단멸함이 매우 심오함인 단오온심심(斷薀甚深)을 나타낸 것으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오온(五蘊)을 초월하시었으나, 오온(五蘊) 가운데 안주하시니’란,

모든 여래께서는 색온  취착된 5취온(五取蘊)을 초월하시어서, 무소득의 법성온(法性蘊)에 안주하신다는 것을 말하며,

‘그것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것은, 이미 변계소집의 5온을 버렸을지라도 그것과 다르지 않으니, 그것의 법성에 안주하기 때문이며,

또한 같지도 않으니, 만약 같은 것이라면 변계소집은 마땅히 법성과 마찬가지로 청정한 경계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버리지 않고서도 매우 고요하다’는 것은, 원성실성의 5온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 곧 묘선(妙善)의 열반 자체이기 때문이다.

 

5취온(五取薀)5온(五蘊, pañca-skandha)은 생멸 · 변화하는 모든 것, 즉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구성하고 있는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을 말한다. 이들을 각각 색온(色蘊: 육체, 물질) · 수온(受蘊: 지각, 느낌) · 상온(想蘊: 표상, 생각) · 행온(行蘊: 욕구, 의지) · 식온(識蘊: 마음, 의식)이라고도 한다.  
5온설(五蘊說)을 사유하는 것은 개인 존재인 나(我)는 이 5가지 집합적 요소로 분해되고, "나(我)"라고 할 때, 이 5가지 집합적 요소들 중의 하나 혹은 다수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들 5가지 집합적 요소들 밖에 나(我)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의 이치를 깨우쳐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5온은 유루와 무루에 모두 통하고, 유루에 통한 5온을 5취온(五取蘊) 또는 5수음(五受陰)이라 하고,

무루에 통한 5온을 5무루온(五無漏蘊)이라고 한다. 즉 무루에 통한 5온은 유위 무루이며 이것은 곧 4성제 중의 도제(道諦), 즉 '열반(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論曰:
논문; 
“諸佛事相雜, 猶如大海水, 我已現當作, 他利無是思.”

모든 부처님의 사업이 서로 섞인 것이 마치  바닷물과 같네.

나는 이미(已)ㆍ현재(現)ㆍ장차(當) 행하여, 남을 이롭게 한다는, 이러한 생각이 없네.


▶釋曰:此頌,顯示成熟甚深.諸佛事相雜者,謂諸如來,成熟有情,一切事業,悉皆平等.其喩云何?猶如大海水者,譬如大海衆流所入,其水相雜,爲魚鼈等,同所受用.諸佛亦爾,同入法界,所作事業和合無二,等爲成熟有情受用.

해석한다; 이 게송은 성숙의 매우 심오함인 성숙심심(成熟甚深)을 나타낸 것으로,

‘모든 부처님의 사업이 서로 섞인다’는 것이란, 모든 여래께서 유정을 성숙시키는 모든 사업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으로, 그 비유는 어떠한 내용인가!

‘마치  바닷물과 같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바다는 여러 강의 흐름이 유입된 것으로서  물이 서로 섞여서 고기ㆍ자라 등을  같이 수용하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도 역시 그러하여서,  같이 법계에 들어가고, 짓는 사업이 화합하여 둘이 없는 무이(無二)이며, 평등히 유정을 성숙시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我已現當作者,於三時中,隨一時作.他利無是思者,不作是思:我於他利,已現當作.然無功用,能作一切利益安樂諸有情事,譬如世閒末尼`天樂.

‘나는 이미ㆍ현재(已)ㆍ현재(現)ㆍ장차(當) 행한다고’란,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시(三時) 중의 어느  시기에 짓는 것이며,

‘남을 이롭게 한다는, 이러한 생각이 없다’는 것은, “내가 남을 이롭게 함에 있어서 과거ㆍ현재ㆍ미래에 행한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곧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無功用)이면서도 능히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사업을 행한다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세간의 마니보주ㆍ하늘의 음악과 같은 것이다.


▶論曰:
논문; 
“衆生罪不現, 如月於破器, 遍滿諸世閒, 由法光如日.”

중생의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니, 달이 파손된 그릇에 있는 것과 같구나.

모든 세간에 두루 가득함은, 법의 광명이 태양과 같은 때문이라네.

 

▶釋曰:此頌,顯示顯現甚深.若諸世閒,不見諸佛,而說諸佛其身常住,佛身旣常,何故不見?衆生罪不現,如月於破器者,如破器中,水不得住,水不住故,月則不現如是.有情身中,無有奢摩他水,佛月不現.水喩等持,體淸潤故.遍滿諸世閒,由法光如日者,謂今世閒,佛雖不現,然遍一切,施作佛事.由說契經`應頌等法,譬如日光,遍滿世閒,作諸佛事,成熟有情.

해석한다; 이 게송은 현현의 매우 심오함인 현현심심(顯現甚深)을 나타낸 것으로,

만약, 모든 세간에서 부처님을 불 수 없음에도 부처님의 불신이 상주한다고 말한다면, 불신이 이미 상주하시거늘 어찌하여 보지 못하는 것인가? 중생의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달이 파손된 그릇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란, 파손된 그릇에는 물이 머물  없고, 물이 머물  없기 때문에 달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이, 유정의 몸에 사마타의 물이 없으면 부처님의 달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 

물은 등지(等持, 선정)에 비유한 것으로, 그 자체가 맑고 빛나기 때문이다

‘모든 세간에 두루 가득함은 법의 광명이 태양과 같은 때문이다’란, 세간에 부처님께서 지금 시현하시지 않을지라도 모든 곳에서 두루 불사를 베풀고 계시는 것이니, 계경ㆍ응송 등의 법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햇빛이 세간에 두루 가득한 것과 같이, 모든 불사를 지어서 유정을 성숙시키시는 것이다.


▶論曰:
논문;
“或現等正覺, 或涅槃如火, 此未曾非有, 諸佛身常故.”

혹은 등정각을 현현하시고, 혹은 열반에 드는 것이 불(火)과 같으시니, 

이것은 일찍이 비유(非有)인 것으로, 모든 불신은 항상하기 때문이라네.


▶釋曰:此頌,顯示示現等覺涅槃甚深.或現等正覺`或涅槃,如火者,謂諸如來或現成佛`或現涅槃,其事如火,或時燒然`或時息滅.諸佛亦爾,或於未熟諸有情類,現般涅槃,或於已熟諸有情類,現成佛果,爲欲令彼得解脫故.譬如一火性無差別,法身亦爾,應知唯一.餘半頌文其義易了.

해석한다; 이 게송은 등각과 열반을 시현하는 데에 있어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 시현등각열반심심(示現等覺涅槃甚深)이다.

 ‘혹은 등정각을 현현하고 혹은 열반에 드는 것이 불(火)과 같다’는 것이란, 이른바 모든 여래께서는 혹은 성불을 나타내시고, 혹은 열반을 나타내시는 것이 불과 같이 혹 어느 때는 타오르고 혹 어느 때는 소멸하는 것과 같으니, 모든 부처님 역시 그러하시며, 혹은 미숙한 유정의 부류에 대해서는 반열반을 나타내시고, 

혹은 이미 성숙한 유정의 부류에 대해서는 불과의 성취함을 나타내시나니,

그들로 하여금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니, 비유하자면 불(火)의 속성은 한 가지로 차별이 없는 것과 같이, 법신 역시도 그러한 것이니, 오직 하나일 뿐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게송의 나머지 반은  뜻이 알기 쉬울 것이다.


▶論曰:
논문; 
“佛於非聖法, 人趣及惡趣, 非梵行法中, 最勝自體住.”

부처님께서는 성스럽지 않은 비성법(非聖法)인간세계의 인취(人趣)ㆍ살기 괴로운 세계의 악취(惡趣)ㆍ청정한 행이 아닌 비범행(非梵行)의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자체로서 안주하신다네.


▶釋曰:此頌,顯示住甚深.佛於非聖法中`人趣惡趣中`非梵行法中`由最勝自體住最勝住,由聖住等而安住故.

해석한다; 이 게송은 안주함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 주심심(住甚深)으로,

부처님께서는 성스럽지 않은 비성법(非聖法)ㆍ인간세계의 인취(人趣)ㆍ살기 괴로운 세계의 악취(惡趣)ㆍ청정한 행이 아닌 비범행(非梵行)의 법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자체로서 안주하시기 때문이니, 

ㅡ부처님께서는 성스럽지 않은 비성법(非聖法) 있어서 성스러운 법으로 안주하시고, 인간세계와 살기 괴로운 세계에 있어서도 천상의 머무름으로 안주하며, 청정한 행이 아닌 법에 있어서도 청정한 행으로 안주하나니, 가장 뛰어난 자체 때문에 가장 뛰어나게 안주한다고 말한 것이다.

 

此中聖住者,謂空等住.天住者,謂諸靜慮住.梵住者,謂慈等無量住.非聖法者,謂不善法.佛於其中,住空等住,由此空等聖所住故,名爲聖住.人趣及惡趣者,謂緣彼有情,住諸靜慮,所住靜慮,名爲天住.非梵行法者,謂於彼法,住慈悲等,四種梵住.最勝自體住者,謂由如是最勝自體住最勝住,此顯諸佛於諸住中,安住最勝自體諸住.

‘가장 뛰어나게 안주한다는 성주(聖住)’란, 성스러운 안주 등으로 인하여 안주하기 때문이니, 여기에서 성스러운 안주는 공(空)해탈문ㆍ무상(無相)해탈문ㆍ무원(無願)해탈문 등의 안주를 말하며,

‘천상의 안주인 천주(天住)’는 모든 정려(靜慮)의 안주를 말하고, 

'청정의 안주인 범주(梵住)'는 자비희사(慈ㆍ悲ㆍ喜ㆍ捨)의 사무량심 등의 사무량심(四無量心)에 안주하는 것을 가리키며,

‘성스럽지 않은 비성법(非聖法)’이란, 불선법(不善法)으로, 부처님께서는  안에서 공해탈문등의 안주에 머무시는 것이니, 이 공해탈문등은 성인(聖人)이 안주하는 바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안주인 성주(聖住)라 하며,

인간세계와 살기 괴로운 세계는  유정을 반연하여 모든 정려에 안주하는 것을 말한다. 

머무는 바의 정려를 천상의 안주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청정한 행이 아닌 법은  법에 대해서 자(慈)ㆍ비(悲) ㆍ희(喜)ㆍ사(捨)등의  가지 청정의 안주에 머무는 것이다. 

‘가장 뛰어난 자체로서 안주한다’는 것이란, 이와 같은 가장 뛰어난 자체에 의거함으로써 가장 뛰어난 안주에 머무는 것이니, 이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모든 안주 가운데, 안주최승(安住最勝)의 자체 안주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論曰:
논문; 
“佛一切處行, 亦不行一處, 於一切身現, 非六根所行.”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모든 곳에서 행하시나, 역시  곳에서도 행하지 않으시는 것이니, 

모든 곳에서 불신(佛身)을 나투시나, 육근(六根)이 행하는 경계가 아니라네.


▶釋曰:此頌,顯示自體甚深.佛一切處行,亦不行一處者,謂後得智於善`不善,無記等中,分別而轉,無分別智不行一處.第二義者,謂變化身一切處行,其餘二身,不行一處.於一切身現者,卽變化身,遍於一切處處
可見.非六根所行者,卽變化身.爲欲化彼那落迦等,現於彼生.那落迦等,受生有情,見化身時,不如實見`不能了知,但謂卽是那落迦等,是故化身決定非彼那落迦等,六根所行.

해석한다; 이 게송은 자체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 자체심심(自體甚深)으로,

‘부처님께서는 일체처에서 행하시면서도 또한  곳에서도 행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란,

후득지는 선ㆍ불선ㆍ무기 등에 대해서 분별하여 전전하는 것이지만, 무분별지는  곳에서도 행하지 않으며,

 번째의 뜻은, 이른바 변화신은 모든 곳에서 작용하실지라도  나머지의 자성신과 수용신의 두 불신은 어느 곳에서도 작용하지 않으시니, ‘일체처에서 불신을 나투어도’라는 것은 변화신이 일체처에서 두루하신 것이다.

‘육근(六根)이 행하는 경계가 아니네’란, 변화신은  나락가(那落迦, 지옥) 등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생을 나타내실지라도 지옥 등에서 생을 받은 유정이 그 화신을  때에는 변화신이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니,  다만 지옥의 유정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신은 결정적으로  지옥 등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의 경계가 아닌 것이다.


▶論曰:
논문; 
“煩惱伏不滅, 如毒呪所害, 留惑至惑盡, 證佛一切智.”

번뇌를 조복해도 소멸하지 않는 것이니, 독이 주문에 의해 상(害)하는 것과 같으니, 

미혹이 남아 있음이나 미혹이 다함에 이르러, 부처님의 일체지(一切智) 증득한다네.


▶釋曰:此頌,顯示斷煩惱甚深.煩惱伏不滅,如毒呪所害者,菩薩位中,伏煩惱纏`未滅煩惱,有隨眠故.

해석한다; 이 게송은 번뇌를 단멸함이 매우 심오하다는 것을 나타낸, 단번뇌심심(斷煩惱甚深)으로,

‘번뇌를 조복할지라도 소멸하지 않으니, 독이 주문에 의해 상(害)하는 것과 같으니’란, 보살의 지위에서 번뇌의 얽어매임(纏)을 조복하였을지라도, 아직 번뇌를 소멸하지는 못하였으니, 수면(隨眠)이 있기 때문이다.

ㅡ전() 번뇌의 현행 세력을 말한 것으로, 그것을 조복한다는 것은 번뇌의 현행 세력을 제압하는 것이고, 번뇌를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의 근원을 단멸하지 못한다는 이다.

 

譬如衆毒呪力所害,體雖猶在,而不爲害.煩惱亦爾,智了知故,體雖猶在,而不爲害.

비유하자면 갖가지 독이 주문의 힘에 의해서 해를 입은 까닭에, 독 그 자체는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해를 입히지 못하는 것과 같이, 번뇌 역시도 그러한 것으로, 지혜로 알기 때문에 번뇌의 자체가 아직 남아 있어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ㅡ독의 해를 입어도 주술의 힘에 의해서 그것을 제압하면,   자체는 멸하지 않을지라도  효력이 억압되어 해를 입히지 못하는 것 같다.

 

留惑至惑盡者,以留隨眠諸煩惱故,不如聲聞速般涅槃得,至究竟諸煩惱盡.

‘미혹이 남아 있음이나 미혹이 다함에 이른다’는 것이란, 수면의 모든 번뇌를 머물게 함으로써 성문과 같이 속히 반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모든 번뇌가 다함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ㅡ수면(隨眠) 번뇌를 머물게 하여 단멸시키지 않음으로써 생사에 왕래하고 보살의 조도법(助道法) 닦아서 궁극의 증과를 얻는다.

 

證佛一切智者,煩惱盡時,得一切智.

‘부처님의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한다’는 것은 번뇌가 다할 때, 즉 번뇌의 습기까지 모두 소멸하여 청정하게 될 때,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를 증득한다는 것을 말한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0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② 1

 

▶論曰:논문; 

復次諸佛法身甚深,最甚深,此甚深相,云何可見?此中有多頌.

또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매우 심심하고도 최심심(最甚深)하신 것이니,

심심상(甚深相)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여기에 많은 게송이 있으니, 

ㅡ이하 법신의 매우 심오한 양상을 12가지로 설명한다.


▶釋曰:於大乘中,諸佛法身,如甚深相,今當顯示.以十二頌,顯示十二甚深之相.

해석한다; 대승 안에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의 매우 심오한 심심상(甚深相)을 이제 나타내는 것이니, 12개의 게송으로써 12가지의 매우 심심한 상을 나타낸다.


▶論曰:
논문; 

“佛無生爲生, 亦無住爲住, 諸事無功用, 第四食爲食.”

부처님은 태어남 없는 무생(無生)을 태어남으로 삼으시며, 

역시 머무르지 않는 무주(無住)를 머무름으로 삼으시고

모든 사업이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無功用)으로서,

제4식(第四食)을 음식작용물(食)로 삼으시네.


▶釋曰:此中一頌,顯示生住`業住甚深.佛無生爲生者,顯生甚深.以諸如來無業煩惱,同諸凡愚,所造作生,故名無生.然有與此相違之生,其相難了,名生甚深.亦無住爲住者,顯住甚深.無住涅槃,以爲住處,如是涅槃,名住甚深.諸事無功用者,顯業甚深,以諸如來無功用業,一切等故,名業甚深. 第四食爲食者,顯住甚深,以佛所食是不淸淨依止住等,四種食中,第四食故.

해석한다; 이 한 게송은 태어남(生)ㆍ머무름(住)ㆍ업(業)ㆍ의지하여 머무름의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 것으로,

‘부처님은 태어남이 없는 무생(無生)을 태어남으로 삼는다’란, 

태어남의 매우 심심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래는 업의 번뇌가 없으나, 범부나 어리석은 소승의 태어남과 같기 때문에 태어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다른 태어남이 있고  상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태어남의 매우 심심함이라 하는 것이며, 

‘역시 머무르지 않는 무주(無住)를 머무름으로 삼는다’란, 

머무름의 매우 심심함을 나타낸 것으로, 머무름이 없는 무주열반(無住涅槃)이 머무는 곳이 되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열반을 머무름의 매우 심오함이라 하며, 

‘모든 사업이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無功用)이다’란, 

업의 매우 심심함을 나타낸 것으로, 모든 여래의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업은 일체가 평등하기 때문에 업의 매우 심심함이라 하며, 

‘제4식(第四食)을 음식작용물(食)로 삼는다’는 것이란,

의지하여 머무름의 매우 심심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음식작용물로 삼는 것은 부정(不淨)의 의지로서의 머무름 등의  가지 음식작용물 가운데  번째 음식작용물이기 때문이다. 

 

四種食者:一不淸淨依止住食,謂段等四食,令欲纏有情,不淨依止,而得住故;二淨`不淨依止住食,謂觸等三食,令色無色纏有情,淨`不淨依止而得住故.由此依止已離下地諸煩惱故,說名爲淨,未離上地諸煩惱故,說名不淨,是故名淨,不淨依止.如是依止由觸`意`思`識食而住,除其段食;

 가지 음식작용의 사종식(四種食)이란, 첫째는 부정의 의지로서 머무는 음식작용물이니, 이른바 단식(段食)ㆍ촉식(觸食)ㆍ의사식(意思食)ㆍ식식(識食) 등의  가지 음식작용물으로, 욕계에 얽매인 유정으로 하여금 부정에 의지하여 머물게 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청정과 부정이 의지하여 머무는 음식작용물이니, 촉식(觸食)ㆍ의사식(意思食)ㆍ식식(識食)등의  가지 음식작용물이니, 색계와 무색계에 얽매인 유정으로 하여금 청정과 부정에 의지하여 머물게 하기 때문이며,

 의지는 이미 하부지위의 하지(下地)의 여러 번뇌들을 여의었기 때문에 청정이라고 이름하나,

아직 상부지위인 상지(上地)의 여러 번뇌들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이하는 것이므로 청정과 부정의 의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지는 촉식ㆍ의사식ㆍ식식에 의거해서 머물고 단식을 제외하는 것이다.

 

三一向淨依止住食,謂段等四食,令聲聞等,淸淨依止,而得住故;四唯示現依止住食,謂卽四食,諸佛示現,受之得住.是故諸佛食,此第四示現住食,爲令能施諸有情類,淨信爲因,福德增長,雖現受食不作食事,如來食時,諸天受取.施佛意許,諸餘有情,由此因故,彼有情類,速證菩提.如是一切,應知摠說爲一甚深.

셋째는 한결같이 청정함에 의지하여 머무는 음식작용물이니, 이른바 단식 등의  가지 음식작용물은 성문등으로 하여금 청정에 의지해서 머물게 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오직 시현(示現)하고 의지하여 머무는 음식작용물,  제4식(第四食)이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시현하여 그것을 수용해서 머물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음식작용물인 것이다. 

  번째의 시현하여 머무는 음식작용물은 다음과 같으니,

능히 베푸는 유정의 무리들로 하여금 청정한 믿음을 원인으로 복덕을 증장시키기 위한 것으로, 음식작용물을 시현하여 수용하지만 음식을 드시지는 않는 것이니, 여래께서 음식을  때, 여러 하늘이 받아서 유정에게 베푸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허락하시는 뜻이 이러한 것이니, 나머지 모든 유정은 이러한 원인에 의거하기 때문에, 그들 유정은 속히 깨달음을 증득하나니, 이상과 같은 것들을 종합적으로 말하여 하나의 매우 심오한 것이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ㅡ모든 부처님께서 음식을 드실 때, 여러 하늘이 가까이 받아서 나머지 유정들에게 베푸는 인연으로해서 그들 유정들이  장차 깨달음을 증득할 있다고 한다.


又由十因,應知諸佛生無生相,一與愚癡不同法故`二與差別不同法故`三於攝受得自在故`四於住持得自在故`五於棄捨得自在故`六無二相故`七唯似光影故`八同幻化故`九住無住故`十成大事故.

또한 다음의  가지 원인에 의거해서 모든 부처님의 태어남은 태어남이 없는 무생(無生)의 상임을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어리석음과는 다른 법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차별과는 다른 법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섭수(攝受)에서 자재를 얻기 때문이고, 넷째는 맡아 지니는 것에서 자재를 얻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버리는 것에서 자재를 얻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가지가 없는 무이상(無二相)이기 때문이고, 

일곱째는 오직 그림자와 비슷할 뿐이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요술(幻)로 나타난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고, 

아홉째는 머묾이 없는 곳에 머물기 때문이며, 열째는  대사(大事)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復由十因,應知如來不住生死及以涅槃,一非遍知故`二非永斷故`三非修習故`四知非有性故`五無所得無分別故`六遠離心故`七心證得故`八平等心故`九事不可得故`十可證得故.

또한  가지의 십인(十因)에 의거해서 여래께서는 생사와 열반에 머물지 않음을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두루 아는 것이 아닌 비변지(非遍知)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영원히 끊는 것이 아인 비영단(非永斷)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닦아 익히는 것이 아닌 비수습(非修習)이기 때문이니, 열반은 수습(修習)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적멸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실재하지 않는 성품의 비유성(非有性)임을 알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얻는 바가 없고 분별이 없는 무소득부분별(無所得無分別)이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멀리 여의는 마음의 원리심(遠離心)이기 때문이고, 

일곱째는 마음의 증득인 심증득(心證得)이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평등한 마음의 평등심(平等心)이기 때문이고, 

아홉째는 현상(事)은 불가득(不可得)한 것이기 때문이며, 

열째는 증득할  있는 가증득(可證得)이기 때문이다.

 

復由十因,應知諸佛無功用事,而得成立,一妙斷離故`二無所依故`三所作無功用故`四作者無功用故`五作業無功用故`六無所有無功用故`七本來無差別故`八所作已辦故`九所作未辦故`十純熟修習一切法中得自在故.

또한  가지 원인에 의거해서 모든 여래의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사(無功用事)가 성립될  있음을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승묘하게 여의는 묘단리(妙斷離)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의지처가 없는 무소의(無所依)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짓는 대상이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소작무공용(所作無功用)이기 때문이고, 

넷째는 짓는 주체가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작자무공용(作者無功用)이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작업이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작업무공용(作業無功用)이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있는 바가 없어서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소유무공용(無所有無功用)이기 때문이고, 

일곱째는 본래 차별이 없는 본래무차별(本來無差別)이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해야  바를 이미 해마친 소작이판(所作已辦)이기 때문이고, 

아홉째는 해야  바를 아직 해마치지 않은 소작미판(所作未辦)이기 때문이며, 

열째는 닦아 익힘을 순전하게 성숙시켜서 일체법에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


復由十因,應知諸佛實無所食,而現受食, 一示現以食住持身故`二令諸有情福增長故`三爲欲示現有同法故`四爲令隨學正受用故`五爲令隨學廉儉行故`六爲令發起精進行故`七爲令成熟諸善根故`八爲顯自身無染著故`九爲恭敬業助任持故`十爲欲圓滿本願生故.

열 가지 원인에 의거해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음식을 드시지 않으시나 음식을 수용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니, 

첫째는 음식으로써 유지되는 신체를 나타내기 때문이고, 

둘째는 모든 유정에게 복을 증장시키기 때문이며, 

셋째는 같은 법이 있음을 시현하시고자 하기 때문이니, 중생과 마찬가지로 인간세계에 태어나서 음식을 취하는 것이며, 

넷째는 올바른 수용을 따라서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니, 제자로 하여금 여법(如法)하게 음식을 수용하는 것을 부처님을 따라서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다섯째는 검소한 행을 따라서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여섯째는 정진행을 일으키기 위하여서 이며, 일곱째는 모든 선근을 성숙시키기 위해서이며, 

여덟째는 자신에게 탐착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고, 

아홉째는 공경하는 업을 도와서 지니게 하기 위해서이며, 

열째는 본원의 생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이니, 즉 본원(本願)에 의지해서 중생제도를 위해 받은 생을 원만하게 하는 것이다.

 

▶論曰: ▷논문; 

“無異亦無量, 無數量一業, 不堅業堅業, 諸佛具三身.”

다름이 없는 무이(無異)이며 무량하고, 숫자가 한량없으면서도 동일한업(一業)이니, 

견고하지 않은 업과 견고한 업으로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3신(身)을 구족하시네.


▶釋曰:此頌,顯示安立數業甚深.無異亦無量者,顯安立甚深.諸佛法身無差別故,說名無異,無量依止,現等覺故,說名無量.

해석한다; 이 게송은 안립ㆍ숫자ㆍ업의 매우 심심함을 나타낸 것으로,

‘다름이 없는 무이(無異)이며 무량하다’는 것은 안립의 매우 심오함인, 안립심심(安立甚深)을 나타내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차별이 없기 때문에 다름이 없는 무이(無異)라 말하고, 무량한 의지처로 등각(等覺, 정등각)을 현현하기 때문에 무량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ㅡ무량한 ()  법신에 의지해서 불도를 성취한다는 이다.

 

등각(等覺), 등정각(等正覺)을 말하며, 진리를 깨달아서 제불(諸佛)의 깨달음의 내용이 동등하다는 뜻으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도 한다.

 

無數量一業者,顯數甚深.佛雖無量,而同一業,是故甚深.不堅業`堅業,諸佛具三身者,謂諸如來三身相應,其受用身事業堅住,其變化身業不堅住,如是事業,名爲甚深.

‘숫자가 무량하면서도 동일한 일업(一業)’이란 숫자의 매우 심심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부처님은 무량하면서도 동일한 일업이므로 매우 심심한 것이며,

‘견고하지 않은 업과 견고한 업으로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3신을 구족한다’는 것이란, 모든 여래께서는 3신과 상응하나니, 그 수용신의 사업은 견고하게 머물지만, 그 변화신의 사업은 견고하게 머물지 않으니, 이와 같은 사업을 매우 심오하다고 하는 것이다.

 

▶論曰: 논문; 
“現等覺非有, 一切覺非無, 一一念無量, 有非有所顯.”

등각(等覺)을 현현할지라도 실재가 아니고, 모든 깨달음은 비존재가 아닌 비무(非無)라네.

하나하나의 생각이 무량하여서, 존재(有)와 비존재(非有)가 나타난 바라네.


▶釋曰:此頌,顯示現等覺甚深.現等覺非有者,補特伽羅法非有故.一切覺非無者,由假名理,說一切佛現等覺故.

해석한다; 이 게송은 등각의 현현함이 매우 심오함을 나타낸 것으로,

‘등각을 현현할지라도 실재가 아니다’라는 것은 보특가라와 법이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며,

‘모든 깨달음은 비존재가 아닌 비무(非無)’라는 것은, 가명(假名)의 이치에 의거해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등각을 현현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ㅡ앞에서는 깨달음의 대상인 보특가라와 법은 비존재임을 밝혔으나,  문구에서는 깨달음의 대상이 비존재이긴 하지만, 깨달음의 주체의 자체를 가명에 의거해서 부처님, 각자(覺者) 삼는 것을 말한다.

 

云何知佛現等正覺?謂一一念,無量佛故,此卽顯示一一念中,有無量佛,現等正覺.有`非有所顯者,此顯眞如是有`非有,諸佛是此眞如所顯.

부처님께서 등정각을 현현함을 어떻게   있는가? 하나하나의 생각에 무량한 부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니, 이것은  하나하나의 생각 가운데에 무량한 부처님께서 계셔서 등정각을 현현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존재(有)와 비존재(非有)가 나타난 바’란, 진여는 있는 것이면서도 없는 것으로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진여가 나타난 바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論曰:  논문; 

“非染非離染, 由欲得出離, 了知欲無欲, 悟入欲法性.”

잡염이 아니고 잡염을 떠난 것도 아니니, 탐욕에 의거해서 벗어남의 출리(出離)를 얻는다네.

탐욕은 탐욕이 아니라고 안다면, 탐욕의 법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네.


▶釋曰:此頌,顯示離欲甚深.非染非離染者,貪欲無故,說名非染,以無染故,離染亦無.所以者何?貪染若有,可有離染,染旣是無,故無離染.由欲得出離者,由伏斷貪纏,留貪隨眠故,得究竟出離;若不留隨眠,應同聲聞等,入般涅槃故.

해석한다; 이 게송은 탐욕을 벗어남의 매우 심심함을 나타낸 것으로,

‘잡염이 아니고 잡염을 떠난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탐욕이 없기 때문에 잡염이 아니라고 말하며, 잡염이 없기 때문에 잡염을 떠남도 역시 없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탐욕의 잡염이 있으면 잡염을 떠남도 있어야 하는데, 잡염이 이미 없기 때문에 잡염을 떠남도 없는 것이다.

‘탐욕에 의거해서 벗어남의 출리(出離)를 얻는다’는 것이란, 탐욕의 번뇌가 현행하여서 얽어매인 전(纏)을 조복하고, 탐욕의 수면(隨眠, 번뇌의 잠재력)을 머물게 함으로써 구경의 벗어남인 출리(出離, 해탈)을 얻으니,

만약 수면을 머물게 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성문등의 반열반에 들어감과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ㅡ벗어남의 출리(出離) 해탈의 의미이며, 미혹을 머물게 해서 생사에 왕래하고 부처님의 행을 닦음으로써 구경의 해탈을 얻는 것이다.

 

了知欲無欲,悟入欲法性者,了知遍計所執,貪欲`無貪欲性,卽能悟入欲法眞如.

‘탐욕은 탐욕이 아니라고 안다면, 탐욕의 법성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것은 변계소집의 탐욕과 탐욕이 없는 무탐욕성(無貪欲性)을 안다면,  능히 탐욕법의 진여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① 4

 

▶論曰:應知法身幾德相應?謂最淸淨四無量`解脫`勝處`遍處`無諍`願智`四無㝵解`六神通`三十二大士相`八十隨好`四一切相淸淨`十力`四無畏`三不護`三念住`拔除習氣`無忘失法`大悲`十八不共佛法,一切相妙智等功德相應.此中有多頌:

▷논문; 법신은  가지의 덕과 상응한다고 알아야 하는가? 가장 청정한 사무량심(四無量心)ㆍ해탈(解脫)ㆍ뛰어난 곳의 승처(勝處)ㆍ두루하는 변처(遍處)ㆍ번뇌가 없는 무쟁(無諍)ㆍ서원대로 아는 원지(願智)ㆍ사무애변(四無碍辯)ㆍ육신통ㆍ32대사상(三十二大士相)ㆍ80 수형호(八十隨形好)ㆍ사일체상청정(四一切相淸淨)ㆍ십력(十力)ㆍ사무외(四無畏)ㆍ세 가지 지킬 필요가 없는 삼불호(三不護)ㆍ삼념주(三念住)ㆍ습기를 없애는 발제습기(拔除習氣)ㆍ법을 잃어버리지 않는 무망실법(無忘失法)ㆍ대비(大悲)ㆍ18 불공법ㆍ일체상의 승묘한 지혜 등의 공덕과 상응하는 것이니, 이러함에 많은 게송이 있다.

 

*승처(勝處)는 제입(制入)ㆍ제입(除入)ㆍ제처(除處)라고도 하며, 대경(對境)을 제복(制伏)하여 자재를 얻는 차이에 따라 여덟 단계로 나누어서 8승처라고 한다. 즉, 욕계의 볼 수 있는 대상, 즉 색상(色想)인 색처(色處)를 관찰함으로써 이를 이겨내고서 탐욕을 제거하는 여덟 단계이다.

 색상(色想)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색처(色處)의 일부분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이겨서 탐욕을 없애고, 

 다시 색처의 대부분에도 이겨낸다. 

 마음속에 색처가 멸했으나 다시 색처의 일부분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이겨낸다. 

 다시 색처의 대부분도 이겨낸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 색상이 없고 다시 대경(對境)의 색채의 청(靑)ㆍ⑥ 황(黃)ㆍ⑦ 적(赤)ㆍ⑧ 백(白)을 관찰하여 이것도 이겨낸다. 

이중에서 ①②③④는 초선(初禪)과 제2선에 의하고, ⑤⑥⑦⑧은 제4선에 의한다. 

또한 ①②는 8해탈(解脫)의 제1, ③④는 제2, ⑤⑥⑦⑧은 제3에 해당한다. 

참고로 8해탈은 탐심은 버리지만 아직 자재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변처(遍處)는 변입(遍入)ㆍ일체입(一切入)ㆍ변처정(遍處定)이라고도 하며, 구체적으로 지(地)ㆍ수(水)ㆍ화ㆍ풍ㆍ청ㆍ황ㆍ적ㆍ백ㆍ공(空)ㆍ식(識)의 열 가지 법이 일체의 온갖 장소에 널리 퍼져서 틈이 없다고 관찰하는 열 가지 관법(觀法)ㆍ관상(觀想)이다. 십법은 각각 지변처(地遍處)ㆍ수변처(水遍處) 등으로 말하며, 이 관법은 8해탈ㆍ8승처를 닦은 다음에 행한다.

*무쟁(無諍), 쟁(諍)은 다툰다는 의미로서 번뇌의 이명(異名)이다. 무쟁은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탐욕ㆍ성냄 등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지혜이고, 또한 남의 번뇌를 쉬게 하는 힘이므로 부처님과 아라한만 갖고 있을 뿐, 다른 이는 아무도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뛰어난 덕력(德力)의 하나이다.

*원지(願智), 서원대로 대상을 구석구석까지 빠짐없이 아는 것으로, 세속지(世俗智)를 그 본성으로 하고 제4정려(靜慮)에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힘으로써 일어난다고 한다.

무애변(四無碍辯), 4무애지(無碍智)라고도 하며, 마음의 면에서는 지(智)ㆍ해(解)라 하며, 입의 방면에서는 변(辯)이라 한다. ① 모든 교법에 통달한 법무애(法無碍), ② 모든 교법의 요의(要義)를 아는 의무애(義無碍), ③ 여러 가지 말을 알아서 통달하지 못함이 없는 사무애(辭無碍), ④ 일체 교법을 말하는 데 자재한 요설무애(樂說無碍).

*삼불호(三不護), 여래의 신업ㆍ구업ㆍ의업은 청정하여 과실이 없기 때문에, 감출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삼념주(三念住), 부처님께서는 바른 생각ㆍ바른 지혜에 머물러서 중생의 신봉(信奉)과 비방에 흔들림이 없으며, 에 세 가지가 있어서, 제1 염주(念住)는 중생이 부처님을 신봉해도 희심(喜心)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正念)에 머무는 것이며,

제2 염주는 중생이 부처님을 불신해도 우심(憂心)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에 머무는 것이며,

제3 염주는 중생이 부처님을 신봉하거나 비방해도 희심과 우심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에 머무는 것이다.


“憐愍諸有情, 起和合遠離, 常不捨利樂, 四意樂歸禮.

모든 유정을 불쌍히 여기시어서(慈), 화합하여 멀리 여의게 하시며(悲), 항상 버리지 않으시며(捨),

이롭고 즐겁게 하시는(喜),  가지 의요(意樂)를 일으키시므로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 4무량심(無量心)


解脫一切障, 牟尼勝世閒, 智周遍所知, 心解脫歸禮.

모든 장애를 해탈하신 모니께서는 세간에서 뛰어나시며, 지혜는 알아야  바에 두루하시고,

마음이 해탈하셨으므로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 해탈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


能滅諸有情, 一切惑無餘, 害煩惱有染, 常哀愍歸禮.

능히 일체 유정의 모든 미혹을 멸하여 남음이 없게 하시니, 

해로운 번뇌의 잡염이 있어도 항상 불쌍히 여기시어 버리지 않으시니,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무쟁(無諍)


無功用無著, 無㝵常寂定, 於一切問難, 能解釋歸禮.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無功用)이시며 탐착이 없으시고, 걸림없이 항상 고요하게 선정에 드시며, 

모든 질문과 비판에 대해서 능히 해석하므로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서원대로 아는 원지(願智)  


於所依能依, 所說言及智, 能說無㝵慧, 常善說歸禮.

소의(所依, 의지처)의 모든 교법인 계경 등 12분교(分敎)와 의지하시는 능의(能依)의 12분교의 소전(所詮)과

소의와 능의로써 설하신 소설(所說)과 능히 말씀하시는 능설(能說)에 걸림없는 지혜로써

항상  말씀하므로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무애해(四無礙解)


爲彼諸有情, 故現知言行, 往來及出離, 善教者歸禮.

그들 모든 유정을 위해서 일부러 시현하시어 말씀과 행동의 언행(言行)과 가고 옴의 왕래(往來)와 

벗어남의 출리(出離)을 아시며,  가르치시는 분에게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 육신통(六神通)


諸衆生見尊, 皆審知善士, 暫見便深信, 開導者歸禮.

모든 중생은 세존을 뵙고, 모두 살펴서 훌륭한 스승임을 아나니, 

잠깐만 보아도 문득 깊이 믿게 되나니, 열어서 이끌어 주시는 분께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32상호와 80종호.

 

攝受住持捨, 現化及變易, 等持智自在, 隨證得歸禮.

섭수ㆍ맡아 지님의 주지(住持)ㆍ버림의 사(捨)ㆍ시현의 현화(現化)ㆍ변이(變易)ㆍ등지(等持, 삼마지)ㆍ

지혜에 자재하시어, 따라서 증득하시므로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네 가지 모든 상의 청정인 사일체상청정(四一切相淸淨)을 밝힌 것으로, 소의(所依, 의지처)의 청정, 소연(所緣, 인식대상)의 청정, 마음의 청정, 지혜의 청정이다.


方便歸依淨, 及大乘出離, 於此諸衆生, 摧魔者歸禮.

방편ㆍ귀의ㆍ청정, 그리고 대승의 출리(出離), 이러함 있어서 중생을 속이는

마군을 항복시키는 분께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10(十)


能說智及斷, 出離能障㝵, 自他利非餘, 外道伏歸禮.

능히 지혜와 단멸ㆍ벗어남과 능히 장애함을 말씀하시어 스스로와 남을 이롭게 하시고,

다른 외도에게 조복되지 않으시므로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사무외(四無畏)


處衆能伏說, 遠離二雜染, 無護無忘失, 攝御衆歸禮.

대중에 처하여 설하여서 능히 조복하고,  가지 잡염을 멀리 여의시며,

보호함이 없는 대중을 잃어버리지 않고 섭수하시므로 귀의하여 예배합니다.삼불호(三不護)와 삼념주(三念住)


遍一切行住, 無非圓智事, 一切時遍知, 實義者歸禮.

두루 모든 일체 작용하시어 안주하시고, 대원경지의 사업이 아님이 없으시며

두루한 실의(實義)를 어느 때에나 아시 분께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습기를 없애는 발제습기(拔除習氣)


諸有情利樂, 所作不過時, 所作常無虛, 無忘失歸禮.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시고, 해야  소작(所作)의 시기를 지나치지 않으시며

짓는 바가 항상 헛되지 않고, 잃어버림이 없으시므로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무망실법(無忘失法)


晝夜常六返, 觀一切世閒, 與大悲相應, 利樂意歸禮.

밤낮으로 항상 여섯 번을 반복해서 모든 세간을 관찰하시고, 

대자비와 상응하시어 이롭게 하시는 정신이시므로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대비(大悲)


由行及由證, 由智及由業, 於一切二乘, 最勝者歸禮.

수행에 의하고 증득에 의하시며, 지혜에 의하고 업에 의하시며

모든 이승(二乘)에서 가장 뛰어나신 분께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18 불공법


由三身至得, 具相大菩提, 一切處他疑, 皆能斷歸禮.”

불신(三佛身)에 의거해서 상 갖추시어 대보리를 증득함에 이르러서

모든 곳에서 다른 이의 의문을 능히 모두 없애주시므로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일체상의 승묘한 지혜 등의 공덕과 상응하는 것


諸佛法身與如是等功德相應,復與所餘自性`因`果`業`相應`轉功德相應,是故應知,諸佛法身,無上功德.此中有二頌: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이상과 같은 공덕들과 상응하며, 다시 그 나머지의 자성ㆍ원인ㆍ결과ㆍ업ㆍ상응ㆍ전변의 공덕과 상응하시는 것이므로 마땅히 모든 부처님의 법신의 최상의 공덕을 알아야 하나니, 이러함에  게송이 있으니, 


“尊成實勝義, 一切地皆出, 至諸衆生上, 解脫諸有情.

세존께서는 성실한 승의(勝義)로서, 모든 지위에서  벗어나셨으며, 

모든 중생 위에 이르러서 모든 유정을 해탈시키시네.

 

無盡無等德, 相應現世閒, 及衆會可見, 非見人天等.”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이고, 견줄  없는 무등덕(無等德)과 상응하시어

세간과 여러 법회에서 친견할  있으니, 보지 못하는 것은 인간과 하늘 등이라네.


釋曰:諸佛法身,與此所說四無量等功德相應,復與其餘自性`因`果`業`相應`轉功德相應.尊成實勝義者,此顯諸佛法身自性,諸佛皆以成實勝義,淸淨眞如,爲自性故.一切地皆出者,此顯其因,修一切地,得成佛故.至諸衆生上者,此顯其果,諸有情中,此最上故.解脫諸有情者,此顯其業,以能無倒,令諸有情,得解脫故.無盡無等德相應者,此顯相應,與其無盡無等功德共相應故.現世閒可見者,此說變化身.及衆會可見者,此說受用身.非見人天等者,此說自性身,諸人天等皆不能見.此顯佛身三種差別,說名爲轉.

▷해석한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여기서 말한 네 가지의 무량심(無量心) 등의 공덕과 상응하며, 다시 그 나머지 자성ㆍ원인ㆍ결과ㆍ업ㆍ상응ㆍ전변의 공덕과도 상응하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성실한 승의로서’란, 모든 부처님의 법신의 자성을 나타내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은 다 성실한 승의(勝義)이고 청정한 진여로써 자성을 삼기 때문이며, 

‘모든 지위에서 다 벗어난다’는 것이란, 그 원인을 나타낸 것으로, 모든 지위를 닦아서 성불을 증득하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 위에 이른다’는 것은, 그 결과를 나타낸 것으로, 모든 유정 중에서 최상이기 때문이며,

‘모든 유정을 해탈시킨다’는 것은, 그 업을 나타낸 것으로, 능히 전도됨이 없는 것으로써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해탈을 얻게 하기 때문이며,

‘다함없고 견줄 데 없는 덕과 상응한다’는 것은, 상응을 나타낸 것으로, 그 다함이 없고 견줄 데 없는 공덕과 함께 상응하기 때문이며,

‘세간에 시현하여 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변화신(變化身)을 말하는 것이며,

‘여러 법회에서 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수용신(受用身)을 말하며,

‘보지 못하는 것은 인간과 하늘 등’이라는 것은 자성신(自性身)을 말하는 것이니, 모든 인간과 하늘 등은 다 볼 수 없는 것이니, 이러한 불신의 세 가지 차이를 말하여 전변(轉變)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攝大乘論釋卷第九 終 섭대승론석 제 9권을 마침.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① 3

 

▶釋曰:應知法身幾法依止?略有三種,廣說無量.由種種佛住依止者,謂佛安住聖住`天住及與梵住故.言種種法身,爲此諸住所依,是故說名佛住依止.

▷해석한다; 법신은  가지의 법에 의지하는지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간략히 말하면  가지가 있고, 자세히 말한다면 무량하다. 

‘부처님의 갖가지 안주의 의지처가 된다’는 것이란, 이른바 부처님께서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삼해탈문의 성스러움에 안주하시며, 하늘에 안주하시며, 청정에 안주함에 머무시기 때문에 갖가지라 하는 것이며,

법신은 이러한 여러 안주의 소의(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안주의 의지인 불주의지(佛住依止)라 하는 것이다.

 

或謂何用諸佛涅槃?以聲聞等,與諸如來,解脫等故.爲顯諸佛解脫殊勝,說二伽他.

혹은 말하기를 “어째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는 것인가? 성문등과 모든 여래의 해탈은 평등하기 때문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니, 모든 부처님의 해탈의 수승(殊勝)함 나타내기 위해서  개의 가타(伽他, 게송)을 말하였다.

ㅡ이 질문은 다음의 게송을 해석하기 위해서 가설(假說) 것이다.

 

諸佛證得五性喜,皆由等證自界故者,謂諸如來,所得五喜由證法界,離喜都由不證此者,謂聲聞等,離五種喜,都由不證此眞法界.故求喜者,應等證者,是故欲求如此喜者,應須於此勤求正證.

 ‘모든 부처님께서는 다섯 가지 기쁜 성품의 오성희(五性喜) 증득하셨으니, 모두 평등히 스스로의 세계를 증득함에 의한 것이라네’는, 이른바 모든 여래께서 증득하신 다섯 가지의 오성희(五性喜) 법계를 증득한 까닭이며,

‘환희를 여의는 것은 모두 이것을 증득하지 못한 까닭이라’는, 성문등이 다섯 가지의 오성희(五性喜) 여의는  모두는,  진정한 법계를 증득하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환희를 구하는 이는 마땅히 평등하게 증득해야 하리’는, 따라서 이와 같이 환희하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이것에 대해서 부지런히 구하여서 바르게 증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第二伽他,顯此五喜.由能無量及事成法味義德俱圓滿者,應知此中,能無量者,依止法身,有衆多佛,成等正覺,一切功能,悉皆平等,故能無量,由見如是能無量故,深生歡喜.及事成者,謂一如來所作,利樂諸有情事,卽等一切如來所作.由佛多故,事亦無量,是故言及.由見此故,深生歡喜.

 번째 게송은 오성희(五性喜) 나타낸 것으로,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무량함과 사업의 성취와 법미(法味)와 이익과 덕인 의덕(義德)이 원만하게 함께하기 때문이니,’ 중에서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무량하다’는 것은, 이른바 법신에 의지해서 많은 부처님이 등정각을 성취한다면 모든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평등하기 때문에 공능(功能)이 무량하다는 것이니, 이와 같은 공능의 힘이 무량한 것을 보는 까닭에 깊은 환희를 일으키는 것이며,

‘그리고, 사업의 성취’는  분의 여래께서 짓는 바이나,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사업은  모든 여래께서 짓는 것과 평등하다는 것이며, 부처님께서 많이 계시기 때문에 사업도 역시 무량한 것이므로 ‘그리고의 급(及)’이라 하였으며, 이러한 것을 보기 때문에 깊은 환희를 일으키는 것이다.


由法味者,由見契經頌等法有勝滋味,深生歡喜.義德俱圓滿者,謂義圓滿,及德圓滿.應知此中,隨所思念,所有諸事,無不具足,名義圓滿.十力無畏不共法等,無不具足,名德圓滿.

‘법미(法味)에 의거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계경(契經)ㆍ응송(應頌) 등의 법에 뛰어난 재미의 승자미(勝滋味)가 있음을 보기 때문에 깊이 환희하는 것이며,

‘이익과 덕의, 의덕(義德)이 함께 원만하다’는 것은 이익의 원만인 의원만(義圓滿)과 덕원만(德圓滿)이니, 이 중에서 생각하는 바를 따라 모든 불사가 구족되지 않음이 없는 것을 이익의 원만인 의원만(義圓滿)이라 이름하며,

십력(十力)ㆍ사무외(四無畏]ㆍ18가지의 공통되지 않는 법의 18불공법(不共法) 등이 구족되지 않음이 없는 것이 덕원만(德圓滿)이다.

 

계경(契經), 부처님의 설법, 경전
응송(應頌), 설법 끝에 총정리를 하여 마무리하는 싯구, 산문(散文)으로 된 경문(經文)의 뜻을 간결하게 묶어서 운문(韻文)으로 나타낸 것

 

得喜最勝無過失者,此喜超過三界喜故,名爲最勝. 永斷煩惱幷習氣故,名無過失.諸佛見常無盡故者,謂諸如來,見次前說,四種最勝無過失喜,窮生死際,常無有盡,至無餘依大涅槃界,亦無盡故,生殊勝喜.是故世尊,證得五喜,非聲聞等.

‘환희의 가장 뛰어난 것으로서 과실이 없다’는 것에서,  

 환희는 삼계의 환희를 초월하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이라 하고, 

영원히 번뇌와 습기를 단절한 까닭에 ‘과실이 없는 무과실(無過失)이다’고 하며,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다하지 않는 무진(無盡)을 보기 때문’이란, 앞에서 말한  가지의 최승(最勝)으로서 과실이 없는 환희는 생사를 다하여 항상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이고, 무여의 대열반에 들지라도 역시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이기 때문에, 모든 여래께서는 뛰어난 환희를 일으키는 것이니,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의 오성희(五性喜)를 증득하나 성문등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由種種受用身依止等者,謂佛法身與受用身,爲所依止.何故復須如是依止?但爲成熟諸菩薩故,由若離此,已入大地,諸菩薩衆,應不成熟.由種種變化身依止等者,謂佛法身與變化身,爲所依止.何故復須如是依止?多爲成熟聲聞等故,由若離此,下劣信解,諸聲聞等,應不成熟.言多爲者,應知攝取勝解行地諸菩薩衆.

‘갖가지 수용신이 의지하기 때문이다’ 등은 부처님의 법신은 수용신의 의지처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 다시 이러한 의지처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다만 모든 보살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니, 만약 이러한 수용신을 여읜다면, 이미 지위에 들어간 보살 대중들도 성숙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며, 

‘갖가지 변화신이 의지하기 때문이다’ 등은 부처님의 법신은 변화신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무슨 까닭에 다시 이러한 의지처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많은 성문등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니, 이 변화신을 여읜다면 신해(信解)가 하열한 성문등이 마땅히 성숙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많음을 위한, 다위(多爲)’라고 말하는 것은, ‘많은 성문등을 성숙시키기 위해서’를 줄인 말이며,

‘등(等)’은 승해행지(勝解行地)의 보살 대중도 포함시키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應知法身,由幾佛法之所攝持?略由六種:一由淸淨,謂轉阿賴耶識,得法身故;二由異熟,謂轉色根,得異熟智故;三由安住,謂轉欲行等住,得無量智住故;四由自在,謂轉種種攝受業自在,得一切世界無㝵神通智自在故;五由言說,謂轉一切見聞覺知言說戲論,得令一切有情,心喜辯說智自在故;六由拔濟,謂轉拔濟一切災橫過失,得拔濟一切有情,一切災撗過失智故.應知法身,由此所說,六種佛法之所攝持.

▷논문; 법신은  가지의 불법에 의해서 섭지(攝持)된다고 알아야 하는가? 대략 여섯 가지에 의해서이니,

첫째는 청정(淸淨)에 의해서이니, 아뢰야식을 전환하여 법신을 증득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이숙(異熟)에 의해서이니, 감각기관인 색근(色根)을 전환해서 이숙의 지혜를 얻기 때문이며,

셋째는 안주(安住)에 의해서이니, 탐욕행 등의 안주를 전환해서 무량한 지혜의 안주를 얻기 때문이며,

넷째는 자재(自在)에 의해서이니, 갖가지 섭수업(攝受業)의 자재를 전환하여 모든 일체 세계의 걸림없는 무애신통지(無㝵神通智)의 자재를 얻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언설(言說)에 의해서이니, 일체의 보고 들음의 견문(聞覺)ㆍ감각하고 아는 각지(覺知)ㆍ언설ㆍ희론을 전환하여 모든 유정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변설지(辯說智)의 자재를 얻기 때문이며,

여섯째는제(拔濟, 구제)에 의해서이니, 모든 재난ㆍ과실을 구제함을 전환해서 모든 유정의 모든 재난ㆍ과실을 구제하는 지혜를 얻기 때문이니, 

법신은 여기서 말한 여섯 가지의 육종불법(六種佛法)에 의해서 섭지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釋曰:由是佛法攝持法身,今當顯示.由淸淨者,謂由淸淨佛法攝持法身.如是法身,證得淸淨,由轉何法?謂轉阿賴耶識,得法身故者,謂轉滅彼阿賴耶識, 得法身淸淨, 卽法身淸淨,說名淸淨.由異熟者,謂由異熟佛法攝持法身.轉色根者,謂轉眼等色根.得異熟智故者,謂轉彼故,得異熟智.

▷해석한다; 이 불법에 의해서 법신을 섭지하는 섭지법신(攝持法身)을 나타내는 것이니,

‘청정(淸淨)에 의한다’는 것은, 청정한 불법에 의해서 법신을 섭지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법신의 청정을 증득하는 것은 어떠한 법을 전환해서 증득하는 것인가? ‘아뢰야식을 전환해서 법신을 증득하기 때문’이니, 그 아뢰야식을 전환하여 멸하고 법신의 청정을 증득하는 것으로, 곧 법신의 청정을 청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숙(異熟)에 의한다’는 것은, 이숙의 불법에 의해서 법신을 섭지하는 것이니,

‘감각기관인 색근(色根)을 전환한다’는 것은, 안근  감각기관을 전환하는 것이며,

‘이숙의 지혜를 얻기 때문’이란, 이른바 그것을 전환함으로써 이숙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이숙(異熟)은 이숙의 과보로서 5근(根) 등의 몸을 말하며, 여기서 5식의 의지처인 5근을 전환하여 지혜를 얻기 때문에 이숙이라 하며, 이숙은 수행단계인 인위(因位)에서의 명칭이지만, 우선 예전의 5근에 의지해서 이숙의 명칭을 가설한 것이다.


由安住者,謂由安住佛法攝持法身.轉欲行等住者,謂轉世閒欲行等住得佛法住.得無量智住故者,謂由此故,住種種住.由自在者,謂由自在佛法攝持法身.轉種種攝受業自在等者,謂轉世閒殉利務農種種事業自在,得一切世界無㝵神通智自在故.

‘안주(安住)에 의한다’는 것은 안주의 불법에 의해서 법신을 섭지하는 것이니,

‘탐욕행 등의 안주를 전환한다’는 것은 세간의 탐욕행 등의 안주(즐거움)를 전환해서 불법의 안주를 얻게 하는 것이며,

‘무량한 지혜의 안주를 얻기 때문’이란, 이것에 의거함으로써 갖가지의 안주에 머무는 것이며, 

‘자재(自在)에 의한다’는 것은 자재한 불법에 의해서 법신을 섭지하는 것이며,

‘갖가지 섭수업(攝受業)을 자재로 전환한다’는  등은 세간의 이익을 따라 농사에 힘쓰는 등, 갖가지 사업의 자재를 전환해서 모든 세간의 걸림없는 무애신통지(無㝵神通智)의 자재를 얻기 때문이다.


由言說者,謂由言說佛法攝持法身.轉一切見聞覺知,說戲論等者,謂轉世閒見聞覺知言說戲論,得於見聞覺知自在,由此證得能令一切有情心喜智自在故.由拔濟者,謂由拔濟佛法攝持法身,轉拔濟一切災橫過失等者,謂如世閒,有王家等,逼惱事起,由親友力,財寶力等,而能拔濟.由轉此故,證得拔濟一切有情,一切災橫過失智故,由此智力,能除一切災橫過失.

‘언설(言說)에 의한다’는 것은 언설의 불법에 의해서 법신을 섭지하는 것을 말하며,

‘일체의 보고 들음의 견문(聞覺)ㆍ감각하고 아는 각지(覺知)ㆍ언설ㆍ희론을 전환한다는 것’ 등은 세간의 보고 들음ㆍ감각하여서 아는 것ㆍ언설ㆍ희론을 전환해서 보고 들으며, 감각하고 아는 것의 자재를 얻는 것이니, 이로 인하여 능히 모든 유정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지혜의 자재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발제(拔濟, 구제)에 의한다’는 것은 구제의 불법에 의해서 법신을 섭지하는 것을 말하며,

‘모든 재난ㆍ과실을 구제함을 전환한다’는  등이란,

세간에서 왕실 등의 핍박이 일어나서 친구의 힘이나, 재물과 보석의  등에 의해서 능히 구제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러한 것을 전환함으로써 모든 유정의 일체의 재난과 과실을 구제하는 지혜를 증득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지혜의 힘에 의거해서 능히 모든 재난과 과실을 제거하는 것이다.

 

▶論曰:諸佛法身,當言有異`當言無異?

논문;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마땅히 다른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마땅히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ㅡ제불 법신의 불일불이성(不一不異性) 말하는 것이다.

 

依止意樂業無別故,當言無異;無量依身現等覺故,當言有異.如說佛法身,受用身亦爾,意樂及業,無差別故,當言無異;不由依止無差別故,無量依止差別轉故.應知變化身如受用身說.

의지신(依止身)ㆍ의욕ㆍ업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마땅히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나,

무량한 의지신이 등각(等覺)을 현현하기 때문에 마땅히 다르다고 말해야 한다.

부처님의 법신을 말하는 것과 같이 수용신 역시도 그러하나니, 의욕ㆍ업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마땅히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니, 의지신의 무차별에 의거하지 않기 때문이고, 무량한 의지신이 차이 있게 전전하기 때문에, 변화신도 수용신에 대하여 말한 바와 같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釋曰:無量依止差別轉故者,謂受用身,無量依止差別而轉,是故但由意樂及業無差別故,當言無異,依身事別,當言有異.此中意樂無差別者,應知皆爲利益安樂一切有情.業無別者,應知皆同現等正覺般涅槃等種種作業.

해석한다; ‘무량한 의지신은 차이가 있게 전전하기 때문’이란, 수용신의 무량한 의지는 차이 있게 전전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다만 의욕과 업이 무차별이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고 말해야 하며, 

의지신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마땅히 다르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의욕에 차이가 없다’는 것은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하며,

‘업에 차이가 없다’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로 등정각과 반열반 등을 시현하는 갖가지 작업이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한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① 2

 

▶釋曰:有`無無二爲相者,謂一切法遍計所執性相非有,故非有相,空所顯示圓成實性,其體實有,故非無相.

有爲`無爲無二爲相者,是非有爲自性,非無爲自性義.非業煩惱之所生故,非有爲相;於有爲中,得大自在,數數示現,名有爲相,由此意趣,非無爲相.

해석한다; ‘존재(有)와 비존재(無)의 유무(有無)  가지가 없는 무이(無二)를 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란,

일체법의 변계소집성의 상은 있는 것이 아닌, 비유(非有)이기 때문에 존재의 유상(有相) 아니며,

공(空)이 나타내 보이는 원성실성의  자체는 진실로 존재하는 실유(實有)인 까닭에 비존재의 무상(無相) 아닌 것이다. 

‘유위법과 무위법의  가지의 상이 없음을 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유위법의 자성도 아니고, 무위법의 자성도 아니라는 뜻으로, 업의 번뇌가 생겨나게 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유위법의 상이 아니며,

유위법 안에서  자재를 얻어서 삭삭(數數, 종종)으로 시현하는 것을 유위법의 상이라 하는, 즉 세간에 나타나서 섭화자재(攝化自在)의 시현이기 때문에 이러한 의취(意趣)에 의거해서 무위법의 상이 아닌 것이다.

 

異性`一性無二爲相者,所依法身,無差別故,非是異相;無量依止所證得故,非是一相;俱一無故,名無二相.

‘다른 성품의 이성(異性)과 동일 성품의 일성(一性)의 두 가지가 없는 것을 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란,

소의(의지처)인 법신은 차별이 없는 까닭에 이것은 다른 상(異相)이 아니며,

무량한 의지(依止)가 증득하는 바인 가닭에 이것은 하나의 상(一相)이 아니며,

함께하거나 하나가 아닌 까닭에  가지의 상(二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復以伽他,顯如是義.我執不有故,於中無別依者,謂於世閒,我執力故,有別依身,此中我執,都無有故,無別依身. 若所依身,無有差別, 云何而得許有多佛? 隨前能證別故,施設有異者,由多依身各所證得,故有差別.

또한 가타(伽他, 게송)로써타낸 뜻은,

‘아집은 있지 않기 때문에  안에 별도의 의지신이 없다’는 것이란, 세간에서는 아집력(我執力) 때문에 별도의 의지신인 의신(依身)이 있지만,  가운데에서는 아집은 전혀 없기 때문에 별도의 의지신인 의신(依身)이 없는 것이니,  

만약, 의지처인 차별이 없다면 어떻게 많은 부처님이 계신다고 인정할  있겠는가! 

‘이전의 증득 주체의 차별에 따르는 것이므로 다름이 있음을 시설한다’는 것은, 

많은 의지신에 의거해서 각각 증득하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爲顯此義復說伽他.種姓異故者,謂諸菩薩,種姓差別,有多種故.非虛故者,種姓異故,加行亦異.加行異故,資糧圓滿,亦有多種.由是因緣,若唯一佛,餘者資糧應虛無果.

이러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으니,

‘종성이 다르기 때문’이란, 모든 보살 종성의 차별에 많은 종류가 있기 때문이며,

‘허무가 아니기 때문’이란, 종성이 다르기 때문에 가행 역시도 다르고, 

가행이 다른 까닭에 자량의 원만함에도 많은 종류가 있다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에 의거해서, 만약 부처님이 오직 한 분뿐이라면, 다른 이의 자량은 마땅히 허무한 결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圓滿故者,諸佛具作一切有情利益等事,謂正安立於三乘等.若執如來不安有情置於佛乘,所作佛事,應不圓滿.由此道理,應許多佛.無初故者,如彼生死流轉無初, 諸佛亦爾.若唯有一,卽應有初,是故不一. 無垢依無別者,由佛無垢法界爲依,無差別故,無有多種.故非一非多者,由此道理,顯示諸佛非一多相.

‘원만하기 때문’이란,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든 유정의 이익 등을 위한 사업을 지으시는 것이니, 이른바 바르게 삼승(三乘) 등으로 안립하는 것이다. 

만약 여래께서 유정을 편안히 불승(佛乘)에 두지 않는다고 국집한다면, 짓는 불사도 마땅히 원만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이러한 도리에 의거해서 마땅히 많은 부처님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시초가 없기 때문’이란, 그 생사유전에 시작이 없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며,

만약 오직  분의 부처님이라면, 마땅히 그 시초가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분이 아닌 것이다. 

‘번뇌 없는 의지처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은 부처님께서는 번뇌 없는 법계를 의지처로 삼아서 차별이 없는 까닭에 많은 분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가 아닌 비일(非一)이고 많은 것도 아닌 비다(非多)라네’란, 이러한 도리에 의거해서 모든 부처님은 하나이거나 많은 다상(多相)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論曰:四常住爲相,謂眞如淸淨相故`本願所引故`所應作事無竟期故.

논문; 넷째는 상주함을 상으로 삼으니, 진여청정상(眞如淸淨相)이기 때문이고, 

본원이 이끄는 바의 본원소인(本願所引)이기 때문이며, 

마땅히 지어야  소응작사(所應作事)는 마치는 시기가 없기 때문이다.


▶釋曰:由三因緣,顯常住相.眞如淸淨相故者,淸淨眞如體,是常住,顯成佛故,應知如來常住爲相.本願所引故者,謂昔發願常作一切有情利樂,所證佛身,此願所引,由此本願,非空無果,應知如來常住爲相.若謂如來所作一切有情利樂,已究竟者,此義不然,所應作事無竟期故.以於今時,猶有無邊所應作事,一切有情,未涅槃故.由是因緣,應知如來常住爲相. 如是說已,應知諸佛不可思議,由是因緣,不可思議.今當顯示.

해석한다; 세 가지 인연에 의거해서 상주상(常住相)을 나타내었으니,

‘진여청정상(眞如淸淨相)이기 때문’이란, 청정한 진여는 그 자체가 상주하는 것이고, 성불을 현현하는 까닭에, 여래는 상주함을 상으로 삼으며,

‘본원이 이끄는 바의 본원소인(本願所引)이기 때문’이란, 옛날에 서원을 일으켜서 항상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고자 하였으니, 증득한 불신은  서원이 이끈 것이다.  본원은 헛된 결과가 없는 까닭에, 여래는 상주함을 상으로 삼는 것이며,

만약 여래가 짓는 바의,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함이 구경에 이르렀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은 것이니, 마땅히 지어야  바의 사업은 그 끝내는 때가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현재에도 오히려 마땅히 지어야  사업이 있는 것이니, 모든 유정이 아직 열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에 의거해서 여래는 상주함을 상으로 삼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함으로써, 모든 부처님의 불가사의함을 마땅히 알 수 있으니, 이러한 인연에 의거해서 불가사의함을 마땅히 나타내는 것이다.


▶論曰:五不可思議爲相,謂眞如淸淨自內證故`無有世閒喩能喩故`非諸尋思所行處故.

논문; 다섯째는 불가사의를 상으로 삼으니, 진여청정으로서 스스로 내면으로 증득하기 때문이고, 

세간의 비유로 능히 비유할  없기 때문이며, 모든 사유 분별이 작용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釋曰:自內證故者,謂諸如來,自內所證,由此眞如自內證故,非諸尋思所思議處,於諸世閒,亦無與此相似譬喩可喩令知.

해석한다; ‘스스로 내면에서 증득하기 때문’이란, 이른바 모든 여래께서 스스로 내면으로 증득하는 바로서,  진여는 스스로 내면에서 증득함에 의거하는 까닭에 모든 사유 분별로 사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나,  

일체 세간에서 역시 이와 비슷한 비유로써 비유하고는 있지만, 알게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論曰:復次云何,如是法身,最初證得?謂緣摠相大乘法境,無分別智,及後得智,五相善修,於一切地,善集資糧,金剛喩定,破滅微細難破障故,此定無閒離一切障.故得轉依.

논문; 또한 이와 같은 법신을 어떻게 최초로 증득하는가? 

총체적인 총상(摠相)의 대승법의 경계를 반연하는 무분별지와 후득지를 전의(轉依)ㆍ백법(白法)ㆍ무이(無二)ㆍ상주(常住)ㆍ불가사의(不可思議)의 오상(五相)에 의해  닦고, 모든 지위에서 자량을  쌓고, 금강유정(金剛喩定, 선정)에 의해 미세하여 부수기 어려운 장애를 없앰으로써,  선정 다음 찰나에 모든 장애를 여의게 되는 것이니, 그리하여 전의를 증득하는 것이다.

 

금강유정(金剛喩定)은 금강에 비유되는 선정으로, 성문이나 보살이 수도가 완성될 무렵 최후로 번뇌를 끊을 때 생기는 선정이다. 이로 인하여, 성문은 아라한과를, 보살은 불과를 얻는 것이다.


▶釋曰:今次應說法身證得.最初證得者,顯此法身非所生起,體無爲故.若所生起,應是無常.

해석한다; 다음으로 마땅히 법신을 증득함을 말하는 것이니,

‘최초로 증득한다’는 것은,  법신은 생기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니, 자체가 무위(無爲)이기 때문이다. 

만약 생기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무상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ㅡ최초에 증득한다는 것은 시간에 기준한 최초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법신의 자체에 기준해서 무위이기 때문에 무시법이(無始法爾) 증득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金剛喩定者,此三摩地,譬如金剛,能破微細難破障故.故得轉依者,由金剛喩三摩地故,能證轉依,逮得法身.

‘금강유정(金剛喩定)’이란, 비유하자면  삼마지는 금강과 같고 미세하여서 부수기 어려운 장애를 능히 부수기 때문이며, 

‘전의를 증득한다’는 것은, 금강유정의 삼마지에 의거함으로써 능히 전의를 증득하고, 법신을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論曰:復次法身,由幾自在,而得自在?略由五種:一由佛土自身相好無邊音聲無見頂相自在,由轉色薀依故;

二由無罪無量廣大樂住自在,由轉受薀依故;三由辯說一切名身`句身`文身自在,由轉想薀依故;

四由現化變易引攝大衆引攝白法自在,由轉行薀依故;五由圓鏡`平等`觀察`成所作智自在,由轉識薀依故.

논문; 또한 법신은  가지의 자재에 의거해서 자재를 얻는 것인가? 대략 다섯 가지에 의거하나니,

첫째는 불토(佛土)ㆍ자신(自身)ㆍ상호(相好)ㆍ가없는 무변음성(無邊音聲)ㆍ정수리를   없는 광대한 모습의 무견정상(無見頂相)의 자재에 의거하며, 물질의 요소인 색온(色蘊)의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죄가 없는 무죄(無罪)이며 무량한 광대락(廣大樂)에 안주하는 자재에 의거하나니,

감수작용의 수온(受蘊)의 의지처를 전환한 까닭이다.

셋째는 모든 명칭의 명신(名身)ㆍ문구의 구신(句身)ㆍ글자의 무신(文身)을 잘 말하는 자재에 의거하나니, 표상작용의 상온(想蘊)의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현화(現化)ㆍ변이(變易)ㆍ대중을 포섭하는 섭대중(攝大衆)ㆍ청정법을 포섭하는 섭백법(攝白法)의 자재에 의거하나니, 결합작용의 행온(行蘊)의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대원경지(大圓鏡智)ㆍ평등성지(平等性智)ㆍ묘관찰지(妙觀察智)ㆍ성소작지(成所作智)의 자재에 의거하나니, 식별작용의 식온(識蘊)의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이다.


▶釋曰:今次應顯法身自在,由轉色等五薀依故,得五自在.此中由轉色薀依故,證得示現佛土自在,由此示現金銀等寶淨妙佛國,亦得示現隨其所欲自身自在.由此示現大集會中,隨諸有情勝解所樂種種色身,又隨所樂能現種種相好自在,又現無邊音聲自在,又現無見頂相自在.

해석한다; 다음으로 마땅히 법신의 자재를 나타낸 것이니, 물질의 요소인 색온(色蘊) 등의 5온의 의지처를 전환함으로써 다섯 가지 자재를 얻는 것이다. 

 중에서 물질의 요소인 색온(色蘊) 등의 의지처를 전환함으로써 불국토를 시현하는 자재를 증득하나니, 이로 인하여 금ㆍ은 등의 보석으로 청정하게 장엄된 불국토를 시현하고, 또한 원하는 바를 따라 자신을 시현하는 자재를 얻으며,

이로 인하여  법회 중에서 모든 유정들의 승해(勝解) 즐기는 바를 따라 갖가지 색신을 시현하며,

또한 즐기는 바를 따라 능히 갖가지 상호의 자재함이 나타내고, 또한 가없는 음성의 자재함이 나타나며,

또한 그 정수리   없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자재함이 나타나는 것이다.


由轉受薀依故,得無罪無量廣大樂住自在,謂得自在能住無罪無量廣大樂住.應知此中,由衆多故,說名無量,普超一切三界樂故,說名廣大樂住自在.由轉想薀依故,得於名身`句身`文身辯說自在,以能取相,故名爲想,由名身等,能取其相,轉染想薀,還得如是淸淨想薀.

“감수작용의 수온(受蘊) 의지처를 전환함으로써 죄가 없는 무죄(無罪, 번뇌가 없음)이며, 무량하고 광대한 즐거움에 안주함의 자재를 얻는다”는 것은, 이른바 자재를 얻어서 능히 죄가 없고 무량하고 광대한 즐거움에 안주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니, 이 중에서 많은 것에 의거하기 때문에 무량하다고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  

널리 삼계의 모든 즐거움을 초월하기 때문에 ‘광대한 즐거움에 안주함의 자재’이라 하는 것이다.

‘표상작용의 상온(想蘊) 의지처를 전환함으로써 명칭ㆍ문구ㆍ글자에 대해서 훌륭하게 말하는 자재를 얻는다’는 것이란,  인식주체의 능취상(能取相)이기 때문에 표상작용의 상(想)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명칭 등으로 인하여 능히  취하는 것이다. 

잡염된 표상작용의 염상온(染想薀)을 전환해서 이와 같은 청정한 표상작용의 청정상온(淸淨想薀)을 증득하는 것이다.


由轉行薀依故,得現化變易引攝大衆引攝白法自在.應知此中,隨其所欲,示現所作,故名現化,改轉地等,令成金等,故名變易,如意所樂能引天龍`藥叉等衆,應知說名,引攝大衆,隨意所樂,引諸白法,令現在前,應知說名,引攝白法.

‘결합작용의 행온(行蘊)의 의지처를 전환함으로써 현화(現化)ㆍ변이ㆍ대중을 포섭함ㆍ청정법을 포섭함의 자재를 얻는다’는 것이란, 이 중에서  원하는 바를 따라, 해야  바를 시현하기 때문에 ‘현화(現化)’라 부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등을 고쳐 바꾸어서  등을 이루기 때문에 ‘변이’라 이름하며,

마음이 즐겨하는 그대로 능히 천(天)ㆍ용ㆍ야차 등의 대중을 이끄는 것을 ‘대중을 포섭하는 섭대중(攝大衆)’이라 하며,

마음에 즐거워하는 바를 따라 모든 청정법을 이끌어서 현재 앞에 두는 것을 ‘청정법을 포섭하는 섭백법(攝白法)’이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由轉識薀依故,得大圓鏡智`平等性智`妙觀察智`成所作智.此中大圓鏡智者,謂無忘失法,所知境界,雖不現前,亦能記了,如善習誦書論光明.平等性智者,謂先通達眞法界時,得諸有情平等心等,應知此中究竟淸淨.妙觀察智者,謂如藏主如其所欲,隨於何等陁羅尼門`三摩地門,作意思惟,卽得自在無㝵智轉.成所作智者,謂能示現從睹史多天宮而沒乃至涅槃,種種佛事,皆得自在.

‘식별작용의 식온(識蘊) 의지처를 전환함으로써 대원경지ㆍ평등성지ㆍ묘관찰지ㆍ성소작지를 얻는다’는 것에서,

대원경지는 잃어버림이 없는 무망실(無忘失)의 법으로서, 알아야  경계가 현전하지 않을지라도 능히 아는 것이니, 책을  익히고 독송하는 이는, 그 책을 대하지 않을지라도 이미 밝게 아는 것과 같으며,

평등성지는 먼저 진정한 법계에 통달할  모든 유정의 평등한 마음을 증득하는 것이니, 이 가운데 궁극적으로 청정함을는 것이며,

묘관찰지는 창고의 주인이 그 안에 저장된 물건들을 어느 때라도 자유롭게 얻을 수 있과 같이,  원하는 바대로 어떠한 다라니문ㆍ삼마지문을 따라 작의하고 사유할지라도, 시기와 법에 자재하고 걸림이 없는 지혜가 전전함을 얻는 것이며,

성소작지는 능히 도솔천궁에서 생을 마침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에서 시현하는 갖가지의 불사(佛事)에 모두 자재함을 얻는 것이다.


▶論曰:復次法身,由幾種處?應知依止,略由三處:一由種種佛住依止.此中有二頌:

논문; 또한 법신은  가지 처소에 의해서 마땅히 의지가 되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가?

대략  가지 처소에 의해서이니, 첫째는 부처님의 갖가지 안주의 의지처가 되는 까닭이니,

이러함에 두 개의 게송이 있다.


“諸佛證得五性喜, 皆由等證自界故, 離喜都由不證此, 故求喜者應等證.

모든 부처님께서는 다섯 가지 기쁜 성품의 오성희(五性喜) 증득하셨으니,

모두 평등하게 스스로의 세계를 증득함에 의한 것이라네.

환희를 여의는  모두는 이것을 증득하지 못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기쁨을 구하는 이는 마땅히 평등하게 증득해야 하리.


由能無量及事成, 法味義德俱圓滿, 得喜最勝無過失, 諸佛見常無盡故.”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무량함과, 그리고 사업의 성취와 법미(法味)와 

이익과 덕이 의덕(義德)이 원만하게 함께하기 때문이니, 

가장 뛰어난 환희로서 과실이 없으시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다하지 않는 무진(無盡)을 보시기 때문이라네.


二由種種受用身依止,但爲成熟諸菩薩故;三由種種變化身依止,多爲成熟聲聞等故.

둘째는 갖가지 수용신이 의지하기 때문이니, 다만 모든 보살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며,

셋째는 갖가지 변화신이 의지하기 때문이니, 수많은 성문등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8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① 1

 

▶論曰:如是已說,彼果斷殊勝.彼果智殊勝,云何可見?謂由三種佛身,應知彼果智殊勝,一由自性身`二由受用身`三由變化身.此中自性身者,謂諸如來法身,一切法自在轉,所依止故.受用身者,謂依法身,種種諸佛,衆會所顯,淸淨佛土,大乘法樂,爲所受故.變化身者,亦依法身,從睹史多天宮現沒`受生`受欲`踰城出家`往外道所修諸苦行`證大菩提`轉大法輪`入大涅槃故.

논문; 이상과 같이  증과의 단멸인 과단(果斷)의 뛰어남을 설명하였다. 

 증과의 지혜인 과지(果智)의 수승함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마땅히  가지의 삼불신(三佛身)에 의거해서  증과인 지혜인 과지(果智)의 수승함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자성신(自性身)에 의거하고, 둘째는 수용신(受用身)에 의거하며, 셋째는 변화신(變化身)에 의거하는 것이다. 

 중에서 자성신(自性身)은 모든 여래의 법신이니, 일체법이 자재하게 전전하는 소의(의지처)이기 때문이며,

수용신(受用身)은 법신에 의지하여서, 모든 부처님의 갖가지 법회에 나타나는 바로서 청정한 불국토에서 대승의 법락을 향수(享受)하기 때문이며,

변화신(變化身) 역시도 법신에 의지하며,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이 머무는 도사다천궁(睹史多天宮, 도솔천궁)으로부터 몰(沒)하여, 생을 받는 수생(受生)하고, 하고자 함을 수용하는 수욕(受欲)하며, 

성을 나와서 출가하는 유성출가(踰城出家)하며, 외도의 처소에 가서 모든 고행을 닦고, 

대보리를 증득하며,  법륜을 굴리는 전대법륜(轉大法輪)을 하고, 대열반에 드는 까닭이다.


▶釋曰:今當解說,果智殊勝,此由諸佛三身所顯.自性身者,謂諸法界,所流法樂,大自在轉之所依止.受用身者,謂卽依前所說法身,種種諸佛衆會所顯,於諸淸淨佛國土中,受用一切法界所流大乘經等種種法樂之所依止.復有餘義,謂是受用淸淨佛土之所依止,又是受用大乘法樂之所依止.變化身者,謂依法身,從睹史多天宮現沒,乃至入大涅槃故者,謂現人天同分之身之所依止.

해석한다; 이제 마땅히 증과의 지혜인 과지(果智)의 뛰어남을 해설하는 것이니,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3신(三身)이 나타난 바에 의거하는 것이다. 

자성신(自性身)은 모든 법계로부터 흘러나온 법락으로서, 크게 자재하고 전변하는 소의(의지처)이며,

수용신(受用身)은  앞에서 말한 법신에 의지해서 모든 부처님의 갖가지 법회에 현현하는 바이니, 청정한 모든 불국토에서 모든 법계로부터 흘러나온 대승경전의 갖가지 법락을 수용하는 소의(의지처)이며,  

다시 다른 뜻으로는, 이른바 청정한 불국토를 수용하는 소의(의지처)이고, 또한 대승 법락을 수용하는 소의(의지처)인 것이며,  

‘변화신(變化身)은 법신에 의지하여 도솔천궁으로부터 나투어 나아가 대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이란, 인간ㆍ천상과 같은 품류의 몸을 시현하는 소의(의지처)를 말하는 것이다.


▶論曰:此中說一嗢拕南頌:

논문; 여기에서 게송을하나니, 


“相證得自在, 依止及攝持, 差別德甚深, 念業明諸佛.”

상(相)ㆍ증득ㆍ자재ㆍ의지신(依止身)ㆍ섭지(攝持)ㆍ차별ㆍ덕ㆍ매우 심오한 심심(甚深)ㆍ

생각의 염(念)ㆍ업(業)으로써 모든 부처님을 밝힌다네.


▶釋曰:爲明諸佛所得之身故,說相等嗢拕南頌.

해석한다;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한 신(身)을 밝히기 위해서 상(相) 등을 게송으로 말한 것이다.


▶論曰:諸佛法身,以何爲相?應知法身,略有五相.

논문; 모든 부처님의 법신에는 어떠한 상이 있는가?

법신에 대략 다섯 가지의 오상(五相)이 있다고 알아야 한다.

법신의 상을 전의(轉依)ㆍ백법(白法)ㆍ무이(無二)ㆍ상주(常住)ㆍ불가사의(不可思議)의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釋曰:應知法身,有無量相,今於此中,略說五種.

해석한다; 법신에 무량한 상(相)이 있지만, 지금 여기서는 간략히 다섯 가지를 말할 뿐이다.


▶論曰:一轉依爲相,謂轉滅一切障雜染分依他起性故,轉得解脫一切障,於法自在,轉現前淸淨分依他起性故.

논문; 첫째는 전의를 상으로 삼는 상(相)이니, 모든 잡염분 장애의 의타기성을 전환하여 멸함으로써, 모든 장애로부터 해탈하고, 법에 대해서 자재함으로 전환하여 얻으며, 청정분의 의타기성을 전환하여 현전하게 하기 때문이다.


▶釋曰:轉滅一切障雜染分依他起性故者,謂轉滅依他起性雜染分.轉得解脫一切障,於法自在,轉現前淸淨分依他起性故者,謂於一切法,自在轉住故,轉得依他起性淸淨分.

해석한다; ‘모든 잡염분의 장애의 의타기성을 전환하여 멸하기 때문’이란, 의타기성의 잡염분을 전환하여 멸하는 것을 말하며,

‘모든 장애를 해탈하고 법에 대해서 자재함으로 전환하여 얻으며, 청정분의 의타기성을 전환하여 현전하게 하기 때문’이란, 일체법의 자재에 대해서 전환하여 머무는 까닭에 의타기성의 청정분을 전환하여 얻는다는 것이다.


▶論曰:二白法所成爲相,謂六波羅蜜多圓滿,得十自在故.此中壽自在`心自在`衆具自在,由施波羅蜜多圓滿故.業自在`生自在,由戒波羅蜜多圓滿故. 勝解自在,由忍波羅蜜多圓滿故.願自在,由精進波羅蜜多圓滿故.神力自在,五通所攝,由靜慮波羅蜜多圓滿故.智自在`法自在,由般若波羅蜜多圓滿故.

논문 ;둘째는 백법(白法, 청정법)으로 이루어짐을 상(相)으로 삼는 것이니, 6 바라밀다가 원만하여  가지의 십자재(十自在)를 얻기 때문이니,

 중에서 수명의자재(壽自在)ㆍ마음의자재(心自在)ㆍ여러 도구의 중구자재(衆具自在)는 보시바라밀다의 원만함에 의하며,

업자재(業自在)ㆍ태어남의 생자재(生自在)는 지계바라밀다의 원만함에 의하며,

뛰어난 이해의 승해자재(勝解自在)는 인욕바라밀다의 원만함에 의하며,

서원의자재(願自在)는 정진바라밀다의 원만함에 의하며,

신통력의 신력자재(神力自在)는 다섯 가지의 오신통(五神通)이 포함되며 정려바라밀다의 원만함에 의하며,

지혜의자재(智自在)ㆍ법자재(法自在)는 반야바라밀다의 원만함에 의하는 것이다.


▶釋曰:白法所成爲相等者,謂由六波羅蜜多圓滿故,證得法身,十種自在.是彼自性,故名所成.壽自在者,應知隨欲齊幾時住,便能如意示現己身.心自在者,謂生死中,能無染污.衆具自在者,謂於食等,十種衆具,隨其所欲,如意能得.如有頌言: 應知如是三種自在,皆由布施波羅蜜多圓滿爲因.

해석한다; ‘백법(白法, 청정법)으로 이루어짐을 상으로 삼는다’는  등은, 여섯 가지의 6 바라밀다가 원만해짐으로써 법신의  가지 자재를 증득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법신의 자성이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의 소성(所成)이라 하는 것이다.

‘수명의 자재(壽自在)’란, 원하는 바를 따라 어느 한 시기에 한정해서 머물고, 능히 뜻대로 자신의 몸을 시현하는 것이며,

‘마음의 심자재(心自在)’는 생사 가운데에서도 능히 오염이 없는 것이며,

‘여러 도구의 중구자재(衆具自在)’는 음식 등의  가지 도구에 대해서  원하는 바를 따라 뜻대로 능히 얻는 것이니, 게송에서 바와 같으며, 

이와 같은  가지의 자재는 모두 보시바라밀다의 원만을 원인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諸菩薩思惟, 若淨若不淨, 一切成美妙, 皆由意自在.”

모든 보살의 사유는 청정하거나 부정하거나,

일체를 미묘하게 성취함 모두는 의(意, 뜻)의 자재에 의거한다네.


業自在`生自在,由戒波羅蜜多圓滿故者,謂此能攝,彼能生因,及所生果故.應知此中,業自在者,由身`語業自在而轉,隨所欲生業現前故.生自在者,應知於生自在而轉,於諸趣等,隨其所欲,攝受生故.由此道理顯修尸羅,於其業因,及於生果,皆得自在.

‘업자재(業自在)ㆍ태어남의 생자재(生自在)는 지계바라밀다의 원만함에 의해서’라는 것은, 

이것이 능히 태어나는 원인(因)과 태어남의 결과(果)를 포섭하기 때문이며,

 중에서 ‘업자재’는 신업과 구업이 자재하게 전전함으로써, 원하는 바를 따라 태어나는 업이 현전하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하며,

‘태어남의자재’란, 태어남에 대해서 자재하게 전전하고, 여러 윤회세계인 제취(諸趣)에서  원하는 바를 따라 생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리에 의거해서 계율을 닦는다면,  업의 원인(因)과 태어남의 결과(果) 대하여 모두 자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勝解自在,由忍波羅蜜多圓滿故者,謂令諸法,皆隨心轉,隨逐勝解,如所勝解,一切事成.如隨所欲轉變地等,令成金等,轉變水等,令成火等.以修忍時,隨諸有情意所樂轉故,令獲得於一切法,皆隨心轉.

‘뛰어난 이해의 승해자재(勝解自在) 인욕바라밀다의 원만함에 의해서’란,

모든 제법으로 하여금 마음을 따라 전전하여 뛰어난 이해에 따르게 하며, 뛰어나게 이해하는 대로 모든 일을 성취하는 것이니, 원하는 바를 따라  등을 전변하여  등을 만들고,  등을 전변하여  등을 이루는 것과 같이, 인욕을 닦을 때에는 모든 유정의 마음이 즐거워하는 바를 따라 전전함으로써 모든 법에 대하여 마음을 따라 전전함을 얻게 하는 것이다.

 

願自在,由精進波羅蜜多圓滿故者,謂修精進,一切所作,皆能究竟,故所思事,一切皆成.應知在昔修精進時,隨所作事,皆能究竟,中無懈廢.由此爲因,今隨所願,如意皆成.

‘서원의 원자재(願自在) 정진바라밀다의 원만함에 의해서’란, 

정진을 수행해서 해야  모든 사업을 능히 해냄으로써 생각한 사업을 모두  성취하는 것이니, 예전에 정진을 수행을 할 때, 해야  사업 모두를 능히 해내고 중도에서 게을러지거나 그만두지 않아서, 이러함이 원인이 되는 까닭에, 지금에는 원하는 바를 따라 뜻대로  성취하는 것이다.

 

神力自在,五通所攝,由靜慮波羅蜜多圓滿故者,謂由靜慮心有堪能,引發種種神通所作.非但由此陵空往來,亦能了知他心等事,由是說言五通所攝.

‘신통력의 신력자재(神力自在) 다섯 가지 신통이 포함되며, 정려바라밀다의 원만함에 의거하기 때문’이란,

정려에 의거해서 마음으로 감당 능력이 있으며, 갖가지 신통이 짓는 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것에 의거해서 허공을 넘어서 왕래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능히 남의 마음 등을 아는 것이니, 이러함에 의거해서 다섯 가지의 오신통이 포함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智自在`法自在,由般若波羅蜜多圓滿故者,謂遍了知一切爾炎,名智自在.如其所欲,能正安立契經等法,名法自在.又由慧力安立薀等一切法體,名智自在.此後所得,一切種智,名法自在.

‘지혜의 지혜의 지자재(智自在)ㆍ법자재(法自在) 반야바라밀다의 원만함에 의해서’란,

모든 지혜의 대상인 이염(爾炎, 알아야 할 대상)을 아는 것을 ‘지혜의자재’라 이름하고,

 원하는 바를 따라 능히 바르게 계경(경전) 등의 법을 안립하는 것을 ‘법자재’라 하는 것이다. 

또한 지혜의 힘에 의거해서 5온 등의 일체법을 안립하는 것을 ‘지자재’라 하고, 

이러한 이후에 얻게 되는,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법자재’라 하는 것이다.

 

이염(爾炎)은 범어 jeya의 음사로서 알아야 하는 대상인 지경(智境)으로 번역되며, 지혜를 일으키는 대경(對境)이다.


▶論曰:三無二爲相,謂有無無二爲相,由一切法,無所有故,空所顯相,是實有故.有爲`無爲無二爲相,由業煩惱非所爲故,自在示現有爲相故.異性`一性無二爲相,由一切佛所依無差別故,無量相續,現等覺故.此中有二頌:

논문; 셋째는  가지가 없음의 무이(無二)를 상으로 삼는 것이니, 이른바 존재(有)와 비존재(無)의 유무(有無)  가지가 없는 무이상(無二相)을 상으로 삼는 것이니,  

일체법에는 존재하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이고, 

공에서 나타난 바의 상은 참존재인 실유(實有)이기 때문에, 유위법과 무위법의  가지가 없는 것을 상으로 삼는 것이다. 

업의 번뇌가 짓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고, 자재하게 유위법의 상을 시현하기 때문에, 다른 성품의 이성(異性)과 동일 성품의 일성(一性)의  가지가 없는 것을 상으로 삼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의 소의(의지처)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고, 무량하게 상속해서 등각(等覺)을 현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함에 두 개의 게송이 있으니, 


“我執不有故, 於中無別依, 隨前能證別, 故施設有異.

아집(我執)은 있지 않은 불유(不有)이기 때문에,  안에 별도의 의지신인 별의(別依)가 없으며, 

이전의 증득의 차별인 능증별(能證別)에 따르는 것이니, 그러므로 다름의 이(異)가 있음을 시설한다네.


種姓異非虛, 圓滿無初故, 無垢依無別, 故非一非多.”

종성의 차이는 허무가 아닌, 비허(非虛)이니, 원만으로서 그 시초가 없기 때문에

번뇌 없는 의지처에는 차별이 없으니,

그러므로 하나가 아닌 비일(非一)이고 많은 것도 아닌 비다(非多)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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