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 10권
세친(世親) 보살 지음, 현장(玄奘) 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② 6
▶論曰:何因變化身,非卽自性身?由八因故,謂諸菩薩,從久遠來,得不退定,於睹史多及人中生,不應道理.
又諸菩薩,從久遠來,常憶宿住,書算數印工巧論中,及於受用欲塵行中,不能正知,不應道理.
▷논문; 어떠한 원인으로 변화신(變化身)은 자성신이 아닌 것인가? 여덟 가지 이유의 팔인(八因) 때문이니,
모든 보살이 아득한 옛적부터 퇴전하지 않는 선정을 얻었다면, 도솔천과 인간세계에서 태어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또한 모든 보살이 아득한 옛적부터 과거 세상의 숙주(宿住)를 돌이켜 보아, 글씨ㆍ산술ㆍ조각ㆍ공예 기술 등과 욕락의 경계를 수용하는, 가무(歌舞)ㆍ음식(飮食) 등의 행에 대해서 바르게 알 수 없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과거 수 많은 세상에서 닦아 익힌 효력이 나타나서 모든 일을 바르게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又諸菩薩,從久遠來,已知惡說,善說法教,往外道所不應道理.又諸菩薩,從久遠來,已能善知三乘正道,修邪苦行,不應道理.又諸菩薩,捨百拘胝諸贍部洲,但於一處,成等正覺,轉正法輪,不應道理.若離示現成等正覺,唯以化身,於所餘處,施作佛事,卽應但於睹史多天,成等正覺,何不施設,遍於一切贍部洲中,同時佛出?旣不施設,無教無理.雖有多化,而不違彼無二如來出現世言,由一四洲,攝世界故,如二輪王不同出世.此中有頌:
또한 모든 보살이 아득한 옛적부터 잘못 말하였거나 훌륭하게 말하여진 교설을 아는 까닭에 외도의 처소에 간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또한 모든 보살이 아득한 옛적부터 능히 삼승의 바른 수행을 잘 아는 까닭에 삿된 고행을 닦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또한 모든 보살은 백 구지(拘胝)의 많은 섬부주(贍部洲)를 버리고 다만 한 곳에서 등정각을 이루고 바른 법륜을 굴린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니,
만약 등정각을 이루는 것을 시현하지 않고서 오직 화신으로써 나머지 처소에서 불사를 짓는다면, 마땅히 오직 도솔천에서만 등정각을 이루어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모든 섬부주에서 두루 동시에 부처님께서 출현함을 시설하지 않는 것인가?
이미 시설하지 않으며, 성스러운 가르침도 없고 바른 논리가 없어서 교증(敎證)과 이증(理證)이 모두 성립되지 않으며, 많은 화신이 있지만 그 두 분의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는 일이 없다는 말에 위배되지 않으니, 하나의 사주(四洲)에서 세계를 섭수하기 때문이다. 두 분의 전륜성왕이 동시에 세상에 출현하지 않음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佛微細化身, 多處胎平等, 爲顯一切種, 成等覺而轉.”
부처님의 미세한 화신의 대부분은 모태에 처하여 평등하시니,
일체 종류의 등각을 이루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전전하신다네.
ㅡ전전함을 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역본인 수존(隋本)에서는 ‘생을 받음을 나타내네’로 되어 있고,
진제(眞諦)의 역본인 진본(陳本)에는 ‘세간에 시현하네’로 되어 있다.
爲欲利樂一切有情,發願修行證大菩提,畢竟涅槃,不應道理,願行無果,成過失故.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시고자 원을 세우고 수행하여 대보리를 증득하셨으니, 필경에 열반에 든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니, 서원과 행이 결과가 없다는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釋曰:今當顯示,佛變化身,卽自性身,不應正理,由八因故.此中最初不應理者,謂諸菩薩,從久遠來,已無量劫,得不退定,尚不應生睹史多天,況於人中?然此世閒現受生者,是變化身,非自性身.又諸菩薩,從久遠來,常憶宿住,於書筭等,不能正知不應道理,但爲調伏諸有情故,化爲此事.
▷해석한다; 이제 마땅히 부처님의 변화신이 곧 자성신이라는 것은, 바른 도리에 맞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여덟 가지 원인의 팔인(八因)에 의해서이다. 이 중, 첫 번째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은, 모든 보살은 아득한 옛적부터 무량겁 동안 퇴전하지 않는 선정을 얻었으니, 오히려 도솔천에도 태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거늘, 하물며 인간세상 이겠는가? 그러므로, 이 세간에 시현하여 생을 받는 것은 변화신일 뿐, 자성신이 아닌 것이며,
또한 모든 보살은 아득한 옛적부터 항상 과거생을 생각하여 글씨ㆍ산술 등에 대해서 바르게 알 수 없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다만 많은 유정을 조복하기 위해서 이러한 변화를 하는 것이다.
ㅡ보리수 밑에서 성도하신 석존에 비추어서 변화신을 말하여 자성신이 아님을 밝힌다.
又諸菩薩,三無數劫,勤修福慧,不能正知惡說`善說,邪苦行事,於最後身,證菩提時,何能頓悟?由此道理,是變化身,非自性身.又諸菩薩,捨百拘胝諸贍部洲,但於一處,成等正覺,轉正法輪,不應道理;若變化身,遍一切處,同時現化,應正道理.故變化身,非自性身.
또한 모든 보살은 3무수겁 동안 복과 지혜를 부지런히 닦아서 나쁘게 말해지거나, 훌륭하게 말하여지거나, 삿된 고행 등을 바르게 알 수 없다면, 최후신에서 보리를 증득할 때, 어떻게 능히 단박에 깨닫는 돈오(頓悟)를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도리로 인하여 변화신이지, 자성신이 아닌 것이며, 또한 모든 보살은 백 구지의 섬부주를 버리고 다만 한 곳에서만 등정각을 이루고 바른 법륜을 굴린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만약 변화신이 모든 곳에서 두루 동시에 시현한다고 한다면 바른 도리에 맞는 것으로, 따라서 변화신이지 자성신이 아닌 것이다.
若諸異部,作如是執,佛唯一處,眞證等覺,餘方現化,施作佛事.若爾,何故不許但住睹史多天,眞證等覺,遍於一切四大洲渚,示現化身,施作佛事?又於一切四大洲中,不現等覺,無教無理,故不應說,此佛土中,有四洲渚,不現成佛.
만약 다른 부파에서 국집하여 “부처님께서는 오직 한 곳에서 진실로 등각을 이루시며, 다른 곳에는 화신을 나투어서 불사를 짓는다”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다만 도솔천에 머물러서만 진실로 등각을 증득하시고, 모든 사대주(四大州)에 두루 화신을 시현하여 불사를 지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가?
또한 모든 사대주에서 등각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가르침에도 없고 바른 논리에 맞지 않으니, 이러한 까닭에 이 불국토 중에서 사대주에서의 성불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ㅡ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수본(隋本)에는 ‘하나의 불찰(佛刹) 중에서 어느 하나의 사대주에서의 정각을 증득하지 않는다’로 되어 있다.
若有說言,縱有是事,便違契經故,經中說,無二如來俱時出現.應知此經,同轉輪王,如說輪王無二竝出,依一四洲,非一佛土.無二如來俱時出現,當知亦爾,此中意說,一四大洲,名一世界.
만약 어떤 이가 비록 이러한 일이 있다고 말한다면, 계경에 위배되는 것이니, 경전에서 말하기를 “두 분의 여래께서는 동시에 출현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이 경전은 전륜성왕도 마찬가지여서 두 전륜성왕이 함께 출현하는 일은 없다고 하였다고 알아야 한다.
하나의 사대주에 의지하나, 하나의 불국토는 아니니, 두 분의 여래께서 동시에 출현하지 않음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한다. 여기서 하나의 사대주를 하나의 세계로 이름한다는 것이다.
ㅡ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수본(隋本)에는 ‘하나의 사대주 안에 함께 출현하는 일이 없다. 하나의 불찰(佛刹)은 아니다’로 되어 있어서 의미가 분명하다.
今復以頌顯示,諸佛化現等覺.佛微細化身等者,此中義說,若於爾時,佛現安住睹史多天,示從彼沒,入母胎等,卽於彼時,化作尊者,舍利子等,無量眷屬,亦現入胎出生等事.安立如是,變化眷屬,當知爲顯一切種覺,殊勝佛事.
이제 다시 게송으로써 모든 부처님께서 등각을 변화로 시현함을 나타내었으니, ‘부처님의 미세한 화신’ 등이 그 뜻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때 부처님께서 나타나서 도솔천에 안주하시고, 그곳으로부터 생을 다하여 모태에 들어가는 것 등을 시현하신다면, 곧 그 때에 존자 사리자(舍利子) 등의 무량한 권속을 변화로 지어서 역시 모태에 들어가고 출생하는 등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와 같은 변화의 권속을 안립하는 것은, 일체 종류의 깨달음의 뛰어난 불사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今當顯示,如來畢竟,入般涅槃,不應道理.謂爲化度一切有情,先發大願,及修大行,常自誓言:我當利樂一切有情,勤修正行.若始成佛已,便般涅槃,卽所修願行空無有果.由此非理,是變化身,非自性身.
이제 마땅히 여래께서 궁극적으로 반열반에 드신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모든 유정을 교화하기 위해서 먼저 큰 서원을 세우고 큰 행을 닦으며, 항상 스스로 원을 세워 말하기를 “나는 장차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고 부지런히 바른 행을 닦게 하겠다”고 하셨다.
만약 처음으로 성불하고 나서 문득 반열반에 드셨다면, 곧 수행한 서원과 행은 헛된 것으로, 결과가 없는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변화신일 뿐, 자성신이 아닌 것이다.
▶論曰:佛受用身及變化身,旣是無常,云何經說,如來身常?此二所依法身常故.又等流身及變化身,以恒受用無休廢故`數數現化不永絕故,如常受樂`如常施食.如來身常,應知亦爾.
▷논문; 부처님의 수용신과 변화신은 무상한데, 어찌하여 경전에서 “여래신(如來身)은 상주한다”고 말하는가?
이 수용신과 변화신의 의지처인 법신은 상주하기 때문이며, 또한 등류신(等流身)과 변화신은 항상 수용하여 쉬지 않기 때문이고, 자주자주 나투어서 영원히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간이 항상 즐거움을 수용하고, 항상 음식을 베푸는 것과 같이, 여래신이 상주하는 것 역시도 그러하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釋曰:經說如來其身常住,佛受用身及變化身,皆是無常,云何身常?故次成立二身常義.謂此二身依法身住,法身常故,亦說爲常.又受用身,受用無廢,故說爲常.其變化身,恒現等覺般涅槃等,相續不斷,故亦名常.復以譬喩,顯此二身,是常住義.猶如世閒,言常受樂,雖所受樂,非唯無閒,而得說言,此常受樂.又如世閒,言常施食,非此施食,恒無閒斷,而得說言,此常施食.應知二身,常義亦爾.
▷해석한다; 경전에서 “여래께서는 그 몸이 상주한다”고 설하지만, 부처님의 수용신과 변화신 모두는 무상하거늘, 어찌하여 몸이 상주한다는 것인가? 따라서 다음으로 두 불신의 상주의 의미를 성립하는 것이다.
이 두 불신은 법신에 의지해서 머무는 것이니, 법신이 상주하기 때문에 역시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한 수용신은 수용하여 중단하지 않기 때문에 상주한다고 말하며, 그 변화신은 항상 등각과 반열반을 나타내고 상속하여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역시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비유로써 이 두 불신이 상주하는 의미를 나타내었으니, 마치 세간에서 항상 즐거움을 수용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수용하는 즐거움이 끊임없는 것만은 아니지만, 항상 즐거움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세간이 항상 음식을 베푼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음식을 베품이 끊임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항상 음식을 베푼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니, 두 불신이 상주하는 의미 역시도 그러하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由六因故,諸佛世尊,所現化身,非畢竟住.一所作究竟,成熟有情,已解脫故;二爲令捨離不樂涅槃,爲求如來,常住身故;
▷논문; 여섯 가지 원인의 육인(六因)으로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시현하시는 화신은 필경에는 머물지 않는 것이니,
첫째는 해야 할 바를 마치는 것으로, 유정을 성숙시켜 해탈하게 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열반을 즐기는 것을 버리게 하기 위한 것이니, 여래의 상주하는 불신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ㅡ이 문장의 의미가 모호하다. 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수본(隋本)에는 ‘열반을 즐기는 생각을 바꾸어 상주하는 불신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으로 되어 있고, 진역(陳譯)에는 ‘만약 해탈을 얻어서 반열반을 구하면 그로 하여금 반열반의 생각을 버리고 상주하는 불신의 얻음을 구하게 하기 때문’으로 되어 있다.
둘 다 소승을 돌려서 대승으로 향하는 회소향대(廻小向大) 의미이며, 아마도 ‘열반을 즐기지 않음을 버리기 위해서’는 ‘열반을 즐기는 것을 버리기 위해서’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三爲令捨離輕毀諸佛,令悟甚深正法教故;四爲令於佛深生渴仰,恐數見者,生厭怠故;五令於自身發勤精進,知正說者,難可得故;六爲諸有情極速成熟,令自精進,不捨軛故.此中有二頌:
셋째는 모든 부처님을 가볍게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니, 매우 심오한 정법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부처님에 대해서 깊이 존경함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것이니, 자주 보는 자가 권태로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스스로에 있어서 부지런히 정진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것이니, 바르게 말하는 이는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모든 유정을 지극히 빠르게 성숙시키게 하기 위한 것이니, 스스로 정진하여 중생제도의 무거운 임무의 멍에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두 게송이 있으니,
“由所作究竟, 捨不樂涅槃, 離輕毀諸佛, 深生於渴仰.
해야 할 바를 마치고, 열반을 즐기는 것을 버리며
모든 부처님을 가볍게 여김을 여의고, 깊이 존경심을 일으키며
內自發正勤, 爲極速成熟, 故許佛化身, 而非畢竟住.”
내면에서 스스로 바른 정진을 일으키고, 지극히 빠르게 성숙하기 위함이니
그러므로 부처님의 화신을 인정하지만, 필경에는 머물지 않는다네.
▶釋曰:如是六因,直說及頌,證佛化身,非畢竟住.其文易了,故不煩釋.
▷해석한다; 이상과 같은 여섯 가지 원인의 육인(六因)에 대한 산문과 게송은 부처님의 화신이 필경에는 머물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한 것으로, 그 문장이 알기 쉽기 때문에 번거롭게 해석하지 않겠다.
▶論曰:諸佛法身,無始時來,無別無量,不應爲得,更作功用.此中有頌:
▷논문;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이 없고 무량하나니, 마땅히 얻기 위해서 다시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功用)을 짓지 않는 것이다. 이러함에 게송이 있으니,
“佛得無別無量因, 有情若捨勤功用, 證得恒時不成因, 斷如是因不應理.”
부처님의 증득은 차별이 없는 무별(無別)이고, 무량함이 원인(因)이라.
만약 유정이 정근(精勤)의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功用)을 버린다면, 증득은 항상 원인을 이루지 않을 것이니,
이와 같은 원인을 단멸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釋曰:此中有難:若佛法身,無始時來,無別無量,作證得因,能辦有情,諸利樂事,爲證佛果,不應更作正勤功用.
▷해석한다; 이 중에서 비판하기를 “만약 부처님의 법신이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무량한 것으로서, 증득의 원인을 짓는 것이라면, 유정을 이롭게 하는 모든 일들을 능히 하여야 하며, 불과를 증득하기 위해서 마땅히 다시 정근(正勤)의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을 짓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爲釋此難,以頌顯示,諸佛證得,無始時來,無別無量,若是有情,爲求佛果,捨精進因,可有此難,諸佛證得,於得佛果,無始時來,不成因故.然佛證得,無始時來,無別無量,恒與有情,作得佛果,勤精進因,故不應難.諸佛法身,無始時來,無別無量,作證得因,爲證佛果,不應更作正勤功用,是故諸佛,證得法身,非是有情,爲求佛果,捨精進因.又佛證得,無始時來,無別無量,作求佛果,勤精進因.
이런 비판에 대답하기 위해서 게송으로써 나타내었으니,
모든 부처님의 증득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무량하다. 만약 이 유정이 불과를 구하기 위해서 정진의 원인을 버린다면, '모든 부처님이 증득하여 유정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유정 스스로 발심 수행하여 정진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비판이 있어야 할 것이며,
유정이 정진하지 않고 불과(佛果)를 얻는 일은 없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증득은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뜻의 '모든 부처님의 증득은 불과를 얻음에 있어서 아득한 옛적부터 원인을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증득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무량한 것으로서, 항상 유정에게 불과를 얻는 부지런한 정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옳지 않은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무량한 것으로서, 증득의 원인(因)을 지으며, 불과를 얻기 위해서 다시 올바른 정근의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을 짓지 않아야 하는 까닭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신을 증득하며,
유정은 불과를 구하기 위해서 정진의 원인(因)을 버려서는 안 되며, 또한 부처님의 증득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이 없고 무량한 것으로서 불과를 구하는 부지런한 정진의 원인(因)이 되는 것이다.
若諸有情,捨勤功用,如是證得,恒不成因故.又斷此因,不應道理,謂諸菩薩,悲願纏心,於諸有情,愍如一子,諸有情類,處大牢獄,具受艱辛,是故菩薩,於諸有情,利益安樂.若作是心:餘旣能作,我當不作.不應道理.恒作是心:餘於此事,若作`不作,我定當作.是故不應斷如是因.
만약 유정이 정근의 의식적인 노력인 공용을 버린다면, 이와 같은 증득은 항상 원인(因)을 이루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이 원인을 단멸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다.
모든 보살은 자비와 서원의 마음에 매여서 모든 유정에 대하여 외아들처럼 연민하나니, 모든 유정의 무리는 큰 감옥에 처하여 일체의 고통을 받으므로, 따라서 보살이 유정의 이롭고 안락함에 대해서 “다른 이가 이미 능히 지으니, 나는 짓지 않아도 된다는, 즉 유정들이 스스로 발심하여 수행하지 않고,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방임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나니, 항상 이러한 마음을 지어서 “다른 이는 이 사업에 대해서 혹은 짓거나 혹은 짓지 않을지라도, 나는 반드시 지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이러한 원인을 단멸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阿毘達磨大乘經』中「攝大乘品」,我阿僧伽,略釋究竟.
▷논문; '아비달마대승경(阿毘達磨大乘經)' 안의 '섭대승품(攝大乘品)'을 나, 아승가(阿僧伽, 무착)는 간략히 해석해 마친다.
▶釋曰:正趣大乘,制造無量殊勝,論者軌範世親,略釋究竟.
▷해석한다; 바르게 대승에 나아가서 무량수승(無量殊勝)을 저술한, 논사 궤범(軌範, 아사리)인 세친(世親)이 간략히 해석해 마쳤다.
아사리(阿闍梨)는 범어 ācārya의 음역어로서, 궤범사(軌範師)ㆍ정행(正行)으로 번역한다. 제자를 가르치고 제자의 행위를 바르게 하여 그 모범이 될 수 있는 스승을 말한다.
攝大乘論釋卷第十 終 섭대승론석 제 10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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