⑸ 止觀門(지관문) - 진문(進門)
云何修行止觀門(운하수행지관문) 所言止者(소언지자)
어떻게 지관문을 수행해야 하는가? 말한 바 지=止라고 하는 것은
謂止一切境界相(위지일체경계상) 隨順奢摩他觀義故(수순사마타관의고)
이른바 일체 경계의 현상=境界相(망분별)을 멈추는 것을 말하니, 사마타란 관의 뜻을 따르는=隨順하기 때문이다.
[奢摩他(사마타;samatha) : 만약 모든 보살이 청정한 원각을 깨달아 청정한 원각심으로써 고요함을 취하여 수행을 삼는다면 모든 망념들이 맑아짐으로 말미암아, 식이 번거롭게 움직임을 깨달아 고요한 지혜가 생겨나, 심신의 객진이 이로부터 영원히 사라진다. 곧 안으로 적정하고 편안한 마음을 낼 수 있다. 적정하므로 시방 세계 모든 여래심이 그 가운에 드러남이 거울 중의 그림자 같다. 《원각경》위덕자재보살장-물처럼바람처럼]
所言觀者(소언관자) 謂分別因緣生滅相(위분별인연생멸상)
말한 바 관이라는 것은, 이른바 인연으로 생멸하는 현상=因緣生滅相을 분별하는 것을 말하며,
隨順毘鉢舍那觀義故(수순비바사나관의고)
위빠사나=毘鉢舍那란 관찰의 뜻에 따르기 때문이다.
[毘鉢舍那觀(비바사나관;vipasana) : 동적으로 지혜를 내어 만법을 관조하는 것.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함.
* 元曉 : 止一切境界相이란 앞서 분별함에 의해 모든 바깥 경계를 짓다가 이제는 각혜(覺慧)로써 바깥 경계의 상을 깨뜨리는 것이니, 경계상이 이미 그치면 분별할 바가 없기에 ‘지(止)’라고 하는 것이다.
分別因緣生滅相이란 생멸문에 의하여 법상(法相)을 관찰하기 때문에 분별한다고 말한 것이니, 이는 ≪유가론≫ 보살지에서 “이 중의 보살이 곧 모든 법에 분별할 바가 없으니, 이를 지(止)라 이름함을 알아야 할 것이요, 모든 법의 승의이취(勝義理趣) 및 모든 한량없는 안립이취(安立理趣)에 대한 세속의 묘지(妙智)를 관(觀)이라 이름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 憨山 : 奢摩他란 그 의미가 공관(空觀)에 해당한다. 지의 방편문을 닦으면서 공관의 의미를 수순한다고 말한 의도는 지에 상즉한 관[卽止之觀]을 드러낸 것인데, 그 바른 의도는 관에 있는 것이다. 즉, 지방편문을 따라서 관으로 들어감을 말한다. 천태학에서는 지관을 삼지와 삼관(三止三觀)으로 수립하였는데, 삼지 가운데 첫째는 체진지(體眞止)이다. 이는 삼관에서 공관에 해당한다.…所言觀者 謂分別因緣生滅相 隨順毘鉢舍那觀義故라고 한 것은 삼지삼관에서 두 번째인 가관(假觀)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식이변분별지(息二邊分別止)인데 이는 삼관에서 중도관에 해당한다.…지금 여기에서는 지와 관을 합하여 쌍으로 수행하여 중도관을 갖춘 삼관의 이치를 분명하게 말하진 않았으나 그 의미가 실제로 빠짐없이 만족한다.
* 지운 : 위빠사나란 법(法)을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법이란 결과가 있는 원인을 말하는 것으로 그 이치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혜를 이룰 수 있다. 사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고 사유하며, 또는 사유하며 관찰한다. 예를 들면 분노나 성냄 같은 것은 단순히 믿음으로써 해결되지 않는다. 그 원인을 사유하여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를 지혜라고 한다.]
云何隨順(운하수순) 以此二義漸漸修習(이차이의점점수습)
어떻게 수순해야 하는가? 이는 두 가지의 뜻으로써 점차 닦아 익혀서=修習하여
不相捨離(불상사리) 雙現前故(쌍현전고)
서로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 두 가지=雙으로 목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수행오문(修行五門) 중 시(施), 계(戒), 인(忍), 진(進)의 네 가지 수행방법을 제시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내면적 수행인 지관문(止觀門)에 대하여 설하는 것이다. 지관문은 욱바라밀(六波羅蜜) 중 선(禪)바라밀과 반야(般若)바라밀과 같은 것으로서, 여기서는 지관문으로 이를 통합하고 있다.
지(止)는 마음을 멈추는 것으로서, 마음의 통일 즉 선(禪)에 해당되고, 관(觀)은 혜(慧)의 성격이 있으나, 관(觀)에도 마음을 집중하는 성격이 있으므로, 이 둘을 기계적으로 선(禪)과 혜(慧)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론은「지관문(止觀門)을 어떻게 수행하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지(止)는 일체의 경계상(境界相)을 멈추는 것」이라고 설한다. 일체의 경계상은 우리 범부에 있어 망분별(妄分別)이다. 이 망분별로 인하여 일체의 외계가 그대로 실재한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객관적 존재인 외계는 모두가 유심소작(唯心所作)이므로 우리는 망심으로 보는 외계의 상을 떠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지(止)이다. 객관을 떠나면 주관의 망분별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止)라는 것은「사마타관(奢摩他觀)에 수순하는 뜻」이라고 설하는 것은, 사마타관의 방법을 따라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마타(Samatha)는 지(止)의 원어로서, 한문 사마타(奢摩他)는 그 원어의 음역이다.
신역에는 샤마타라는 원어(原語)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지(止)라고 의역(意譯)하여「이것은 지(止)의 뜻이다(是止義).」라고 간단히 말하고 있다.
지(止)는 사마타관에「수순한다」고 수순(隨順)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지(止)만으로는 불완전하고 관(觀)과 함께 할 때만이 각각의 힘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므로「수순한다」고 말한 것이라고 법장의 의기(義記)에서 밝히고 있다.
다음 관(觀)은「인연생멸(因緣生滅)의 상(相)을 분별하여 비파사나(毗針舍那)관에 수순하는 뜻」이라고 설한다.
비파사나는 원어 "비파슈야나"의 음역으로 관(觀), 혜(慧), 정견(定見) 등으로 번역되며, 법상(法相)을 관찰하는 것이다.
인연생멸(因緣生滅)이라 함은 생멸문에서 제법의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법의 시간적 존재는 생멸이다. 그러나 그 생멸에는 연기(緣起)의 이법(理法)이 관통하고 있으므로 제법의 생멸속에서 연기의 이치를 보는 것이며, 이것을 인연생멸의 상(相)이라 하는 것이다.
인연의 상을 분별한다는「분별(分別)」은 여기서 망분별(妄分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나누어 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비파사나관에 수순한다」는 것은 관(觀)의 본 뜻에 수순한다는 것으로서, 인연생멸의 상을 분별하는 것이며,「수순」이라는 용어 역시 지(止)와 함께 할 때만이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므로 수순(隨順)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관(觀)의 깊은 곳에는 지(止)가 있다. 지(止)는 일체의 산란한 생각을 멈추고 일체는 바로 진여(眞如)라는 이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止)는 진여문에서 모든 경계의 상을 멈추고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에 이르는 것이다. 이 근본무분별지 속에서 생멸의 상을 분별하는 이치를 아는 것이 바로 관(觀)이다.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은 일심(一心)의 양면이므로 숙달되면 지(止)와 관(觀)은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본론에서는 이를「수순」이라 설명하고, 이 두 가지 뜻을 점점 닦아 나아가면 서로 떨어져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앞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止)는 육바라밀에서 정(定)에 해당되고 관(觀)은 혜(慧)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정(定)도 지관(止觀)에 통하고 혜(慧) 또한 지관에 통하는 것이므로, 이를 본론에서는 나누지 아니하고 통합하여 지관(止觀)을 설하는 것이다.
즉, 지관문(止觀門)은 지(止)와 관(觀)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止)는 일체의 어지러운 생각을 멈추고 마음이 적정(寂靜)에 귀일하는 것이며,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를 얻는 인(因)이 된다. 이것에 의하여 진여문(眞如門)에 들어가는 것이다. 관(觀)은 진리를 관찰하는 것으로서 생멸문(生滅門)에 들어가는 지(智)로서 후득지(後得智)를 얻는 인(因)이 된다.
이상은 지관문(止觀門)을 총체적으로 설한 것이며 이하에서는 지(止)와 관(觀)을 각각 나누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금강사]
[여기에서는 지관의 의미와 쌍수(雙修)할 것을 논하였습니다. 지(止, samatha)란 만법유식(萬法唯識)의 이치를 깨달은 지혜로써 외부적인 육진(六塵)의 일체 경계를 분별하는 마음의 양태를 그쳐서 무심(無心)해진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마타의 공관(空觀)인 지(止)를 수순하여 만법유식의 도리를 관찰하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관(觀, Vipasyana)이란 인연으로 생멸하는 양상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빠샤나의 가관(假觀)을 수순하여 생멸하는 제법의 인연은 환유(幻有)임을 관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지관을 수순해야 하느냐 하면 지(止)와 관(觀)은 차츰차츰 수습하여 서로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 지(止)와 관(觀)이 쌍으로 목전에 나타난다는 것으로, 이러한 수행은 참선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지(止)에만 중점을 두고 수행하면 혼침(昏沈, 침울함)에 빠지기 쉽고, 관(觀)에만 중점을 두고 수행하면 도거(掉擧, 들뜸)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지관(止觀)을 쌍수(雙修)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바라밀 가운데 선정과 반야를 마땅히 정(定)과 혜(慧)의 두 문으로 나누어서 말해야 하는데도 지금은 선정인 정(定)을 지(止), 반야의 혜(慧)를 관(觀)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의 인지(因地)에 있어선 지관(止觀)이고, 과위(果位)에 있어선 정혜(定慧)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지와 관을 쌍으로 닦고 함께 운행하는 인지의 수행단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와 관을 하나의 방편문으로 묶은 것입니다. 사마타의 의미를 다시 말한다면 그 의미가 공관(空觀)에 해당하겠습니다. 지(止)의 방편문을 닦으면서 공관의 의미를 수순한다고 말한 의도는 지(止)에 상즉(相卽)한 관(觀)이란 즉지지관(卽止之觀)을 드러낸 것인데, 그 바른 의도는 관에 있습니다. 즉 지(止)를 통해 관(觀)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태학(天台學)에선 지관(止觀)을 삼지(三止)와 삼관(三觀)으로 수립하였습니다. 먼저 지(止)란 삼지(三止) 가운데 첫째는 체진지(體眞止)입니다. 이는 삼관에서 공관(空觀)에 해당하며, 그 의미는 목전의 제법이 진여성공(眞如性空)인 이치를 체득하여 거기에 계합하면 모든 생멸의 인연이 스스로 고요해져 일심은 진여의 이치를 환하게 관조하면서 일진법계로서의 만법이 여여(如如)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즉지지관(卽止之觀)입니다. 즉 망상의 분별은 목전에 전개된 만법을 마주하여 일어납니다. 그런데 지금 만법은 유식일 뿐이란 도리를 깨달은 지혜로써 외진(外塵)의 만법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였습니다. 일심으로 생멸하는 외진의 모습에 대한 분별망상이 그치고 나면 분별할 대상이 없는 지(止)입니다. 이것이 체진지(體眞止), 즉 만법의 자체인 진여성공을 체득하여 모든 번뇌가 저절로 고요한 것을 체득한 것입니다. 이렇게 번뇌가 고요한 자리에 나아가서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인연으로 생멸하는 모든 현상을 분별하는 것이 관(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즉지지관(卽止之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타의 공관(空觀)의 의미를 수순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여문을 관찰하는 것인데 이를 통해 근본실지를 이룹니다.
관(觀)이란 인연으로 생멸하는 양상을 분별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위빠사나란 관찰의 의미를 수순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천태의 지관수행의 이론인 삼지삼관에서 두 번째인 방편수연지(方便隨緣止)에 해당하겠습니다. 이는 삼관 가운데서 가관(假觀)에 해당하며, 그 의미는 일심과 세계는 둘이 아닌 하나의 이치로 항상 여여(如如)하긴 하나 다시 일심으로 인연생멸하는 환영같이 존재는 제법을 관찰하는 것이 방해되지 않습니다. 환유인 제법은 자성이 없이 생멸하는 인연관계이므로, 그것은 있다 해도 정말로 있는 것은 아니어서 그 자성은 항상 스스로 공적한 일심진여이기 때문에 제법의 인연을 관찰하면서 육도만행을 버리지 않는다고 관(觀)해도 일심중도는 항상 한가한 적정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지와 별개가 아니라 관(觀)에 상즉(相卽)한 지(止)라는 즉관지지(卽觀之止)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빠사나가 관의 의미를 따르게 되는데, 이는 생멸문을 관찰하여 수행한 후에 얻은 권지(權智)를 성취한 것입니다.
세 번째 식이변분별지(息二邊分別止), 이는 삼관에서 중도관(中道觀)에 해당하겠습니다. 그 의미는 진여성공에 거처하면서도 육도만행을 버리지 않고, 가유(假有)의 세계를 거닐면서도 일심중도가 청정하여 공(空)과 유(有)의 이변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공(性空)의 이치와 가유(假有)의 현상이 일시에 나타나 이(理)와 사(事) 둘이 아닌 일심중도의 이치가 환하여 본체와 현상을 일시에 조감합니다. 이는 공과 유를 융합하여 일심중도에 오묘하게 계합(契合)한 것이기 때문에 삼지(三止)를 따라서 삼관(三觀)을 성취합니다. 그렇다면 삼관과 일심이 본래 차별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는 지와 관을 합하여 밝히고 쌍으로 수행하여, 쌍차쌍조(雙遮雙照)하는 중도관(中道觀)을 갖춘 삼관(三觀)의 이치를 분명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 이치가 실제로 빠짐없이 만족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공관과 가관의 두 문을 완전하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 가운데서 일심중도관이 스스로 밝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승으로 향해서 나가는 중요한 문입니다. 그 때문에 여기의 오종방편문 가운데 앞의 사종방편문은 지관문을 보조하여 일심중도를 성취시킨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논서의 근본 의도는 지관 하나의 방편문에 초점을 두었습니다.-수선]
[우리는 불각의 세계에서 오문수행을 통해 각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진여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오문 수행 가운데 마지막 지관문(止觀門)은 육바라밀 가운데 선정과 지혜에 해당합니다. 선정과 지혜는 하나로서, 선정을 통해 지혜를 얻고, 지혜를 통해 선정에 들 수 있습니다.
지(止), 사마타란,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삶, 생각을 한번 그쳐 보자는 것입니다. 움직이던 것을 멈추었을 때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 가서 이해할 수 없던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이 생을 현생이라 하고 태어나기 전 삶을 전생이라 하고 죽은 뒤 다시 태어나는 삶을 내생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구분되어 있지 않고 연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현생만 인식하고 알지만, 전생과 내생은 무언가의 원인에 의해 모를 뿐입니다. 움직일 때는 고요하게 멈춰있는 원래 모습들이 안 보입 니다. 사마타관이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경계(번뇌망상)를 멈출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다른 생각은 그치고 화두에 모든 생각을 모으는, 즉 하나의 일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이르는 핵심 중 하나입니다.
인연의 생멸상이란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소멸하고 어떤 일이 어떤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살피는 것이 위빠사나, 관(觀)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왜 그런 일이 벌어졌 을까하고 원인을 살펴보는, 이러한 행위가 바로 지혜가 됩니다. 생각을 그치고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위빠사나입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 ‘왜 이 생에서 나는 이렇게 사는가?’ 그 원인을 찾아가는 것이 위빠사나가 됩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부처의 세계, 진여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수순. 어떻게 수순하는가? 공부에는 특별한 왕도가 없습니다. 열심히 꾸준히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삶 속에서 꾸준히 닦고 익히는 것이 바로 수순입니다. 삶은 습(습관)입니다. 부처가 되는 것도 지옥에 가는 것도 나의 습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부지런히 노력하고 익히는 것에 따라 부처가 되거나 지옥에 가기도 합니다. 두 가지 즉, 지와 관을 수순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고 부처 가 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생기면 나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의 관계를 알게 되고, 그러면 이기적인 마음이 사라져 저절로 자비가 베풀어지고 지계가 되고 인욕, 정진이 됩니다. 그리고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을 계속하게 되면 지와 관을 터득합니다.
지관이 세상에서 적용되는 것은 명상입니다. 명상은 지관을 현대화시킨 것입니다. 이런 명상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집중명상(Concentrationn Meditation)과 통찰명상(Insight Meditation)이 있습니다. 집중명상은 지이고 통찰명상은 관입니다.
한국의 불자는 대부분 특별한 날에 절에 가서 기도를 하지만 서구사회에서는 불교가 명상, 수행의 형태로 전파, 실행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핵심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적용되지만 입문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일단 입문해야 스스로 깊은 경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관도 그런 것입니다.
틱낫한 스님은 세계에 명상을 전파하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 다. 그는 프랑스 남부 보르도의 플럼빌리지에 명상센터를 열었 고 ‘명상은 휴식과 예술이다.’고 말하며 걷기 명상, 명상 수행을 전파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수많은 씨앗이 마음에 있습니다. 어떤 씨앗은 꽃이 되고 열매를 맺어내지만 어떤 씨앗은 마음을 병들게 만듭니다. 씨앗 하나가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맨 처음부터 잘 솎아내야 좋은 꽃이 핍니다.” 명상이야말로 ‘좋은 씨앗에 물주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을 밭에 비유하여, 그 밭에는 사랑, 미움, 분노, 희망, 열정, 자비, 폭력 등의 다양한 씨앗이 섞여 있어서 부정적인 씨앗을 솎아내고 긍정적인 씨앗에 물을 주는 과정이 명상이라고 했습니다.
위빠사나(Vipassana)의 위(Vi)는 접두어로 ‘여러가지’라는 뜻으로, 여러 가지란 제법무아의 제법, 제행무상의 제행, 일체개고의 일체를 가리킵니다. 빠(Pa)란 자세히, 면밀히란 뜻이고 사나(Ssana)란 꿰뚫어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대념처경 에서는 “모든 삶의 깨끗함을 위하여,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정신적인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해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하여 네 곳에 마음을 챙겨 관찰하라.” 위빠사나란 여러 가지 일어난 일들을 ‘왜 일어났는가?’ 생각하며 자세히 꿰뚫어 관찰하는 것입니다. 피상적이 아닌 원인을 꿰뚫어 살피는 것입니다. 관찰하고 생각하다보면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것이 통찰과 집중입니다. 알아차리게 되면 진리에 깨어있기 때문에 무지, 아집에 물들지 않습니다.
송나라 청원 유신 선사의 유명한 말을 성철 스님이 말씀하셔서 더 유명해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입니다. 여기에는 뒷말이 있습니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그대로 산이요 물은 그대로 물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뿐인데 주체(나)에 따라서 인식 되어질 뿐입니다. 나의 육신(身)과 육신의 느낌(受)과 대상에 대한 생각(心)과 대상(法)을 모두 인식할 수 있는 것, 즉 신수심법을 모두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안이비설신의 가운데 비입니다. 눈은 보기만 할 뿐이고 귀는 듣기만 할 뿐이고 혀는 맛을 볼 뿐이고 몸은 느끼기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코를 통해 숨을 뱉고 숨 을 들이킬 수 있습니다.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은 호흡법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경전입니다. 안반수의경은 아나파나사티 (anapanasati)라고도 하는데 아나(ana)가 들숨이란 뜻이고 아파나(apana)가 날숨이란 뜻이고 사티(sati)가 의식의 집중이란 뜻입니다. 들숨과 날숨을 통해 의식을 집중시켜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것이 안반수의경입니다.
호흡수련의 단계에는 수, 상수, 지, 관, 환, 정이 있습니다. 수(數)란 들숨과 날숨의 수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상수(相隨)란 호흡에 따라 의식과 호흡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지(止)란 마음이 호흡을 의식하지 않고 고요히 안정된 것입니다. 관(觀)이란 사물을 관찰하게 되는 정신 집중의 상태입니다. 환(還)이란 다시 고요한 자기의 주체로 돌아오는 상태입니다. 정(淨)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세계입니다. 수를 통해 모든 것을 일정하게 만들어 숫자를 잊어버리고 의식과 호흡이 하나가 됩니다. 그 후 지관의 상태가 됩니다. 지의 상태가 되어야 제대로 관을 할 수 있습니다. 고요히 안정된 상태에서 사물의 본질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환원되어 자기에게 되돌아오면 자기 관조가 됩니다. 결국 견성성불하게 되어 청정한 세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월지국의 사기유국에 머무르시며 안반수의를 90일 동안 행하셨습니다. 다시 90일을 홀로 앉아 생각을 가다 듬어 온 세상의 인간과 날아다니는 새와 굼틀대는 동물을 구제하고자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안반수의를 통해 모든 존재의 본성을 일깨워주고 구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들숨(안)과 날숨(반). 안은 생명의 창조가 되고 반은 그치는 것이 됩니다. 수의는 잘못되지 않게 하는 것이니 그것은 되어진 그대로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보호한다는 것은 일체의 것이 잘 못되지 않도록 두루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의식이 한 곳에 쉬고 있는 것이니, 또한 마음의 본래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생과 멸의 깨달음에서 안은 생하는 것이 되고, 반은 멸하는 것이 되며, 마음은 인연이 되고 수는 도가 됩니다. 수식과 정신 집중에서 안은 수를 헤아림이 되고, 반은 서로 따름이 되며, 수의는 그치는 것입니다. 정신 집중해서 그치게 됩니다.
합리적인 호흡에서 안은 도를 생각하는 것이 되고, 반은 맺힘을 푸는 것이 되며, 수의는 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안은 죄를 피하는 것이 되고, 반은 죄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되고, 수의는 도가 됩니다. 수의는 바로 견성하는 상태로 가는 것입니다.
“삼매를 닦을 지어다.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을지어다. 비구들이여, 삼매에 든 비구는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린다.(pajanati)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어떠한가? 눈(眼)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시각 대상(色)에 대해 무상 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눈의 의식(眼識)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눈의 접촉(觸)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눈의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즐겁거나 고통스럽거나 즐겁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느낌(受)에 대해 무상하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있는 그대로’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대상의 무아와 무상과 본성과 같은 모든 것을 보는 것입니다. 삼매에 들면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니까 무지에서 벗어나고 아집을 깨트리고 공덕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념처관에서 신(身) 몸의 현상을 관찰, 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혐오감에서 벗어나라. 수(受) 느낌의 현상을 관찰, 느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혐오감에서 벗어나라. 심(心) 마음의 현상을 관찰, 마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혐오감에서 벗어나라. 법(法) 법의 현상을 관찰, 법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혐오감에서 벗어나라 입니다. 지관을 통해서 끊임없이 사념처관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지관해야 하느냐?’라고 할 때 생각할 네 가지입니다.-통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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