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7
(10) 항상 중생들을 수순하다(Always accommodating and adapting to all beings)
復次善男子야 言恒順衆生者는 謂盡法界虛空界十方刹海所有衆生의
부차선남자 언항순중생자 위진법계허공계 시방찰해 소유중생
또한 선남자여, 항상 중생들의 뜻에 수순함이란, 이른바, 온 법계, 허공계, 시방 세계의 중생들이
種種差別이니 所謂卵生胎生濕生化生이 或有依於地水火風而生住者하며
종종차별 소위난생태생 습생화생 혹유의어 지수화풍 이생주자
갖가지로 차별하나니, 이른바, 卵生=알에서 태어나고, 胎生=태에서 태어나고,
濕生=습기에서 태어나고, 化生=변화하여 태어나는 것이며, 혹은 지수화풍에 의지하여 살고,
或有依空及諸卉木而生住者하니라
혹유의공 급제훼목 이생주자 卉 풀 훼,
혹은 허공에 의지하여 살며, 초목(풀)에 머물러 사는 등이니라.
種種生類와 種種色身과 種種形狀과 種種相貌와 種種壽量과 種種族類와
종종생류 종종색신 종종형상 종종상모 종종수량 종종족류
갖가지 생물의 종류, 갖가지의 색신(몸), 갖가지의 형상, 갖가지의 모습, 갖가지의 수명, 갖가지 종족,
種種名號와 種種心性과 種種知見과 種種欲樂과 種種意行과 種種威儀와
종종명호 종종심성 종종지견 종종욕락 종종의행 종종위의
갖가지의 명호(이름), 갖가지 마음의 성품(성질), 갖가지의 지견(소견), 갖가지의 욕락(욕망),
갖가지의 뜻과 행동, 갖가지의 위의,
種種衣服과 種種飮食으로 處於種種村營聚落城邑宮殿하니라
종종의복 종종음식 처어종종 촌영취락 성읍궁전
갖가지의 의복, 갖가지의 음식, 갖가지의 시골 마을, 취락, 성읍, 궁전에 살며
乃至一切天龍八部人非人等과 無足二足과 四足多足과 有色無色과
내지일체천룡 팔부인비인등 무족이족 사족다족 유색무색
내지 천신과 용, 팔부신중, 사람인 듯 아닌 듯 한 것들이며, 발이 없는 것과 두 발을 가진 것,
네 발을 가진 것과 여러 발을 가진 것, 형상이 있는 것과 형상이 없는 것들이며,
有想無想과 非有想非無想이니라
유상무상 비유상비무상
생각이 있는 것과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 등이니라.
如是等類를 我皆於彼에 隨順而轉하야 種種承事하며 種種供養호대
여시등류 아개영입 수순이전 종종승사 종종공양
이와 같은 등등의 종류들에게 내가 모두 수순하여, 갖가지로 받들어 섬기고, 갖가지로 공양함에
如敬父母하며 如奉師長과 及阿羅漢과 乃至如來하야 等無有異하며
여경부모 여봉사장 급아라한 내지여래 등무유이
부모와 같이 공경하고, 스승과 어른 같이 받들고,
아라한과 내지 부처님이나 다름이 없이 받들어 모시며,
항상 중생들의 뜻에 수순한다는 것은 보현보살의 열 가지 행원 중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이 잘 표현된 내용이다. 중생들의 뜻에 수순할 줄 아는 사람은 시대의 흐름과 세상의 변화에도 수순할 줄 안다. 이미 결정된 일과 변하여가고 있는 대세(大勢)에 대해서 거역하거나 불만을 가지지 않고 잘 받아 들이고 수순하며 살줄 안다. 또한 계절과 날씨의 변화에도 잘 수순하여 거스르지 않으면서 순리대로 살줄 안다.
경전에서 말했듯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고 많은 생명체와 중생들과 사람들이 살고 있는가. 태어나는 모습과 의지하여 사는 곳도 각양각색이다. 종류는 얼마나 많으며 몸과 형상과 모양과 수명과 종족과 이름과 성질과 소견과 욕망과 뜻 등등의 차별과 가지 수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사는 곳은 또 얼마나 각양각색인가. 수천 년 전에 이미 그와 같은 다종다양한 생명들이 존재하였으며 오늘날에는 사람들 사는 모습도 옛날보다 더욱 다양해져서 생각과 주의 주장은 또 얼마나 복잡한가. 이와 같이 많고 많은 중생들의 뜻을 다 수순하겠다는 마음자세는 진정한 보살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중생들의 뜻이 한결같지 않아서 수시로 변하니, 하루에도 몇 번을 변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그들의 변하는 뜻을 모두 따라준다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비운 사람이 아니면 참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오로지 사람들을 위해서 살고 오로지 중생들을 위해서 살겠다는 보살의 비원이 잘 표현된 가르침이다. 진정으로 남을 위해서 살겠다는 보살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於諸病苦에 爲作良醫하며 於失道者에 示其正路하며
어제병고 위작양의 어실도자 시기정로
모든 병든 이들에게는 훌룽한 의원이 되고, 길 잃은 이들에게는 바른 길을 보여주고,
於暗夜中에 爲作光明하며 於貧窮者에 令得伏藏이니
어얌야중 위작광명 어빈궁자 영득복장
어두운 밤에는 빛이 되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묻혀있는 숨은 보배를 얻게 하며,
菩薩이 如是平等饒益一切衆生하나니 何以故오 菩薩이 若能隨順衆生하면
보살 여시평등요익 일체중생 하이고 보살 약능수순중생
보살이 이와 같이 모든 중생들을 평등하게 이익되게 하나니,
왜냐하면, 보살이 만약 능히 중생들을 수순하게 됨은
則爲隨順供養諸佛이며 若於衆生에 尊重承事하면 則爲尊重承事如來며
즉위수순 공양제불 약어중생 존중승사 즉위존중 승사여래
바로 모든 부처님께 수순하여 공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만약 중생들을 존중하여 받들어 섬기면, 바로 부처님을 존중하여 받들어 섬김이 되는 것이요,
若令衆生으로 生歡喜者면 則令一切如來로 歡喜니라
약령중생 생환희자 즉령일체여래 환희
만약 중생들을 환희하게 하면, 바로 모든 부처님을 환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위에서는 갖가지의 중생들을 열거하였고, 다시 중생들의 뜻을 따라 수순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한 내용이다. 갖가지로 받들어 섬긴다는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주할 곳과 의약품까지 모두를 받들어 공양 올리는 일이다. 나아가서 세상과 인생의 존재의 원리에 대한 바른 이치까지 깨우쳐주어 소중한 삶을 의미 있고 보람되게 살도록 보살펴드리는 일이다. 그와 같이 하기를 마치 부모를 공경하듯이 하며, 스승을 받들어 섬기듯이 하며, 큰스님이나 도인들이나 성인들을 섬기듯이 하여야 한다. 나아가서 부처님을 섬기는 것과 같이 하여 하나도 다름이 없이,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한다. 자기의 자손들에게 모든 재산을 베풀어주는 일은 누구나 하는 일이다. 그러나 보살행을 하는 사람은 친지나 권속이나 지연이나 학연 등등을 분별하는 친소가 없다. 친소가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그 뜻을 수순해주는 마음을 쓴다.
부처님은 왜 존재하며, 왜 존재했었는가? 또 보살들과 조사들과 일체 성인들은 왜 존재하는가? 그들은 모두 중생들을 위해서 존재한다. 불교가 존재하는 것도 중생들을 위한 것이고 일체 성인들의 가르침이 존재하는 것도 중생들을 위해서 존재한다. 중생들을 위하지 않는 부처님과 조사와 성인들과 선지식들은 있을 수도 없지만 존재할 가치도 없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려는 보살들은 모든 일이 중생을 중심으로 하고, 중생들이 보살의 화두이다. 부처님과 같이, 조사들과 일체 성인들과 같이 오로지 중생들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보현보살을 닮아가려는 모든 사람들은 진정으로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일은 중생들에게 공양 올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안다.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중생들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안다. 부처님께 수순하는 일은 중생들을 수순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중생들을 위한 일을 곧 부처님을 위한 일이며 부처님이 하실 일을 대신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참다운 불공(佛供)은 중생들에게 공양 올리는 일이다.
성철(性徹,1912~1993)스님의 “참다운 불공”이라는 글에 “집집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부모입니다. 내 집에 계시는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거리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잘 받드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발밑에 기는 벌레가 부처님입니다. 보잘 것 없이 보이는 벌레들을 잘 보살피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머리 위에 나는 새가 부처님입니다. 날아다니는 생명들을 잘 보호하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넓고 넓은 우주, 한없는 천지의 모든 것이 다 부처님입니다. 수없이 많은 이 부처님께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이리 가도 부처님 저리 가도 부처님, 부처님을 아무리 피하려 하여도 피할 수 없으니 불공의 대상은 무궁무진하여 미래 겁이 다하도록 불공을 하여도 끝이 없습니다. 이렇듯 한없는 부처님을 모시고 항상 불공을 하며 살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께 한없는 공양구를 올리고 불공하는 것보다, 곳곳에 계시는 부처님들을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이 억 천만 배 비유할 수 없이 더 복이 많다고 석가세존은 가르쳤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올바른 불교사상이며 부처님 마음이다. 중생들을 수순하는 일은 곧 부처님을 수순하는 일이다.
何以故오 諸佛如來가 以大悲心으로 而爲體故로
하이고 제불여래 이대비심 이위체고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모든 부처님은 대비심으로 몸을 삼기 때문이니,
因於衆生하야 而起大悲하며 因於大悲하야 生菩提心하며
인어중생 이기대비 인어대비 생보리심
중생으로 인하여 대비심을 일으키고, 대비심으로 인하여 보리심을 내고,
因菩提心하야 成等正覺하나니라 譬如曠野沙磧之中에 有大樹王하니
인보리심 성등정각 비여광야 사적지중 유대수왕
보리심으로 인하여 등정각을 이루시니, 비유하면 광야의 모래 벌판 가운데 큰 나무가 있으니,
若根得水면 枝葉華果가 悉皆繁茂인달하야 生死曠野菩提樹王도 亦復如是하야
약근득수 지엽화과 실개번무 생사광야 보리수왕 역부여시
그 나무의 뿌리가 만약 물을 얻게 되면,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모두 다 무성함과 같나니,
생사의 광야의 큰 보리수 또한 이와 같느니라.
一切衆生으로 而爲樹根하고 諸佛菩薩로 而爲華果하야 以大悲水로
일체중생 이위수근 제불보살 이위화과 이대비수
모든 중생들은 나무의 뿌리가 되고,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은 꽃과 열매가 되나니,
饒益衆生이면 則能成就諸佛菩薩智慧華果하나니 何以故오 若諸菩薩이
요익중생 즉능성취 제불보살 지혜화과 하이고 약제보살
이러한 대비의 물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면,
능히 즉시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지혜의 꽃과 열매를 성취할 수 있게 하나니,
왜냐하면 만약 모든 보살들이
以大悲水로 饒益衆生이면 則能成就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라
이대비수 요익중생 즉능성취 아뇩다라삼먁삼보리고
이러한 대비의 물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면, 능히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기 때문이니라.
是故로 菩提가 屬於衆生이니 若無衆生이면 一切菩薩이 終不能成無上正覺이니라
시고 보리 속어중생 약무중생 일체보살 종불능성 무상정각
그러므로 보리심은 중생들에게 있나니, 만약 중생들이 없다면,
모든 보살은 끝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정각)을 얻을 수 없게 되느니라.
불교를 흔히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지혜가 왼팔이면 자비의 실천은 오른팔이 된다. 지혜가 어머니라면 자비의 실천은 아버지가 된다. 이와 같이 현명한 지혜가 내면에 충만하고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해서 자비의 실천이 행해져야 이상적인 종교가 되며 조화로운 삶이 된다. 한 인간에게 그와 같은 조화가 완벽하여 졌을 때, 그를 일러 부처님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의 화신이다. 지혜에서 표현된 진정으로 자비한 마음이 근본이 되어기 때문에 어리석은 중생들을 보면 저절로 자비심이 샘솟는다. 그들 중생들을 진리의 세계에서 살도록 하려고 보리심을 발하고 다시 보리심으로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더욱더 중생들에게 진리의 가르침을 베풀게 된다.
그러므로 실은 부처님이 부처님 된 것도 중생들 덕분이다. 불쌍하고 어리석은 중생들이 있어서 그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지혜와 자비를 더욱 보강하고 결국은 정각을 이루게 된 것이다. 마치 자식들을 많이 둔 부모가 자식들을 모두 다 잘 먹여 살리기 위해서 재산을 많이 모으게 되고 그로 인해 부자가 되어 넉넉히 나눠줄 수 있게 된 것과 같은 이치다. 제도할 중생이 없다면 굳이 지혜를 닦고 자비를 기르며 정각을 이룰 필요가 없다.
제도할 중생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주의적 사고 때문에 제도해 줘야할 중생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는 보살들은 이와 같이 중생들을 수순하는 마음이 일상적인 생활 속에 뿌리 깊게 내려져 있어야 하리라.
善男子야 汝於此義에 應如是解니 以於衆生에 心平等故로
선남자 여어차의 응여시해 이어중생 심평등고
선남자여 그대들은 이와 같은 이치를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나니,
중생들의 마음을 평등하게 한 까닭으로
則能成就圓滿大悲하며 以大悲心으로 隨衆生故로 則能成就供養如來니라
즉능성취 원만대비 이대비심 수중생고 즉능성취 공양여래
즉시 능히 원만한 대비를 성취하고,
대비심으로 중생들을 수순하게 한 까닭으로, 즉시 능히 부처님께 공양함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菩薩이 如是隨順衆生하야 虛空界盡하며 衆生界盡하며 衆生業盡하며
보살 여시수순중생 허공계진 중생계진 중생업진
보살은 이와 같이 중생들을 수순하나니,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들의 업이 다하고,
衆生煩惱盡하야도 我此隨順은 無有窮盡이니 念念相續하야 無有間斷하야
중생번뇌진 아차수순 무유궁진 염염상속 무유간단
身語意業이 無有疲厭이니라
신어의업 무유피염
중생들의 번뇌가 다할지라도 나의 이러한 수순함은 다함이 없나니,
염념이 끊어짐이 없이 계속되나니,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은 피로하거나 싫어함이 없음이니라.
어떻게 진정한 자비를 실천할 수 있을까! 자비란 보통 사람들의 인정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인정이란 가까운 사람에게 베푸는 마음, 즉 자신의 가족, 친지들, 이웃들 그리고 인연이 있어서 늘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저절로 자연스럽게 가는 단순한 정이지 자비는 아니다. 자비란 조건없이 베푸는 사랑의 마음이다. 자신과 전혀 인연이 없거나, 오히려 자신을 미워하여도 어여삐 여겨서 온갖 필요로 하는 것들을 아낌없이 베푸는 마음으로, 그것을 무연자비(無緣慈悲)라 한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건네주는 사랑이 아니라 현명한 지혜로 밝게 관찰하여 상대에게 진정으로 이로운 길이 무엇인가를 잘 살펴서 베풀어야 한다. 사랑의 매라는 말이 있듯이 불교에서는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진정한 자비를 베푸는 일을 보통의 중생들은 이해가 안 될 경우도 많다. 우리들의 잣대로 계산하는 자비와 깨어있는 눈으로 보는 자비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은 손해인 것 같이 보이나 결과적으로는 큰 이익이 돌아가게 하는 선행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마치 병이 든 사람을 완전하게 치료하기 위해서 수술을 하는 일과 비슷하다. 우선은 없는 상처를 일부러 만들고 칼로써 살을 베지만 그런 일을 통해서 몸속에 깊이 숨어있는 모진 병을 제거하여 결과적으로 병을 완치하는 큰 소득을 가져다주는 경우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진정한 자비는 중생들에게 마음을 평등하게 함으로써 원만한 자비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모든 중생들, 가까운 사람, 먼 사람,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등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 원만한 자비이다. 진정한 자비가 이루어질 때 중생들을 자비로 수순할 수 있게 되고, 자비로 중생들을 수순할 때 부처님께 공양하는 일이 성취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을 수순하는 일을 하루 이틀이나, 한 두 번 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지라도 결코 지치거나 싫어하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아름다운 삶을 살고자하는 보살의 인생이다.
(11) 모두 다 회향하다(Giving - The practice of making offerings.)
復次善男子야 言普皆廻向者는 從初禮拜로 乃至隨順히 所有功德을
부차선남자 언보개회향자 종초예배 내지수순 소유공덕
또한 선남자여, 널리 두루 모두 회향한다는 것은, 처음 예배하고 공경함으로부터
중생들의 뜻에 수순함에 이르기까지 있는 바 공덕을
皆悉廻向盡法界虛空界一切衆生하야 願令衆生으로 常得安樂하야 無諸病苦하며
개실회향 진법계허공계 일체중생 원령중생 상득안락 무제병고
모두 온 법계, 허공계, 모든 중생들에게 회향하여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항상 안락을 얻게 하고,
모든 병고가 없기를 원하고,
欲行惡法은 皆悉不成하고 所修善業은 皆速成就하며 關閉一切諸惡趣門하고
욕행악법 개실불성 소수선업 개속성취 관폐일체 제악취문
하고자 하는 악법은 모두 이루어지지 않게 하고, 닦은 바 선업은 빨리 성취하게 하며,
일체의 나쁜 갈래의 문은 닫아 버리며,
開示人天涅槃正路니라 若諸衆生이 因其積集諸惡業故로 所感一切極重苦果를
개시인천 열반정로 약제중생 인기적집 제악업고 소감일체 극중고과
인간과 천상의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은 열어 보이며,
만약 모든 중생들이 나쁜 업을 쌓아 모은 까닭으로 받게 되는 모든 지극히 중한 고통의 과보는
내가 모두 대신하여 받으며,
我皆代受하야 令彼衆生으로 悉得解脫하고 究竟成就無上菩提니
아개대수 영피중생 실득해탈 구경성취 무상보리
내가 모두 대신하여 받으며, 그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해탈을 얻게 하고,
마침내는 구경의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기를 원하는 것이니,
菩薩의 如是所修廻向이 虛空界盡하며 衆生界盡하며 衆生業盡하며
보살 여시소수회향 허공계진 중생계진 중생업진
보살이 이와 같이 닦은 바를 회향하나니,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들의 업이 다하고,
衆生煩惱盡하야도 我此廻向은 無有窮盡이니 念念相續하야 無有間斷하야
중생번뇌진 아차회향 무유궁진 염염상속 무유간단
身語意業이 無有疲厭이니라
신어의업 무유피염
중생들의 번뇌가 다할지라도 나의 이러한 회향은 다함이 없나니,
염념이 계속하여 끊어짐이 없이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은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느니라.
어떤 일을 하던지 회향이 가장 중요하다. 용두사미가 되는 것 보다 사두용미가 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크게 시작하여 작게 끝나는 것보다, 작게 시작하여 크게 끝나는 것이 더욱 좋은, “유종의 미”와 같다.
불교에서의 모든 가르침은 선행을 행하기를 권한다. 그러나 그 선행의 결과를 자신이 혼자 누리기를 바라지는 않고,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을 회향이라 한다. 회향하지 않는 선행은 이기적이고 소승적인 선행이다. 불도를 닦아 높은 경지에 이른 경우도 마찬가지로, 도를 닦아 자신만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닦은 도를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회향해야 한다.
흔히들 오랫동안 많이 쌓은 뒤에 나누어도 주고 중생제도도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하루를 수행했으면 하루 한 것만치만 베풀면 된다. 경전 한 줄을 배웠으면 한 줄 공부 한 것만 베풀면 된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고 하지 않던가. 베푸는 것과 구하는 것,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진정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다. 예컨대 돈을 버는 일과 흡사하다. 1만원을 벌었으면 1만원을 모두 다 투자를 해야 10만원도 되고 100만원도 되는 길이 빨라진다. 아예 100만원이 된 뒤에 투자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사람은 100만원이 되는 길이 늦어질 뿐만 아니라 100만원이 되더라도 투자를 하거나 나누어 주는 일이 용이하지가 않다.
공부가 다 된 뒤에 전법(傳法)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평생을 전법 한 번 하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러나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것만이라도 가르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평생 동안 전법을 잘 하게 되고, 스스로의 공부도 전법을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하게 된다.
한국의 불교가 큰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점이다. 2만여 명이나 되는 불교의 전문가인 승려가 포교를 하거나 전법활동을 하는 사람은 고작 몇 명밖에 안 된다. 공부가 가득 차기를 기다리고 있다. 30년 40년이 되면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는 것을 모른다. 부처님이 비유하신 마을 사람들에게 우유를 대접하려던 예와 같이, 매일 매일 우유를 짜던 사람이 그날그날의 우유는 너무 적어서 이웃집에 나누어 줄 수가 없으니 한 달을 모았다가 한꺼번에 짜서 온 동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리라고 마음먹고 기다렸다가 한 달 후에 우유를 짜려니 우유는 이미 다 말라버리고 없었다는 이야기다.
경전에서 말하는 온갖 선행을 중생들에게 모두 다 회향하고 그 회향마저 역시 중생들에게 온갖 이익과 행복이 되도록 서원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불자로서 너무나 당연한 삶의 길이며 아름다운 인생의 본보기인 보살은 반드시 실천해야할 덕목이다. 이렇게 회향하는 일이 허공계가 끝나고, 중생계가 끝나고, 중생의 업이 끝나고, 중생의 번뇌가 끝나더라도 끝나지 않아야 하니, 보살은 모름지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12) 이익을 밝히다(Benefiting and Bringing happiness to all sentient beings)
善男子야 是爲菩薩摩訶薩의 十種大願이 具足圓滿이니 若諸菩薩이
선남자 시위보살마하살 십종대원 구족원만 약제보살
선남자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십종 대서원을 구족하게 원만케 함이니,
於此大願에 隨順趣入하면 則能成熟一切衆生하며 則能隨順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며
어차대원 수순취입 즉능성숙 일체중생 즉능수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만약 모든 보살이 이러한 대서원을 수순하여 나아가면, 즉시 능히 모든 중생들을 성숙하게 하며,
즉시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수순하게 되며,
則能成滿普賢菩薩諸行願海하리니 是故로 善男子야 汝於此義에 應如是知니라
즉능성만 보현보살 제행원해 시고 선남자 여어차의 응여시지
즉시 능히 보현보살의 모든 수행과 원력을 원만히 이루어 만족하게 되리니,
이러한 까닭으로 선남자여, 그대는 이러한 이치를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화엄경은 불교의 결론이고 보현행원품은 화엄경의 결론이다. 즉 보현행원품을 간략하게 줄여서 말하면 보현보살의 열 가지 행원이며, 보현보살의 열 가지 행원은 불교의 총 결론이다. 불교가 아무리 복잡하게 설명되어도 보현보살의 열 가지 행원만 잘 알고 몸소 실천에 옮기면 된다.
왜냐하면 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불교를 묻고 그 53명의 선지식들은 당신들이 평생의 수행을 통해서 깨달은 바를 선재동자에게 모두 다 설명하고 있는 것에서 우리는 불교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데 선재동자의 질문과 선지식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보살행을 묻고 보살행을 대답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보현보살의 열 가지 행원이 불교의 결론이라고 단언하는 까닭은 그 많은 보살행에 대한 설명도 결국은 여기에서 밝히고 있는 보현보살의 열 가지 행원으로 압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만일 모든 보살들이 이 큰 서원을 수순해서 나아가면 능히 모든 중생들을 성숙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곧 최상의 깨달음을 수순하게 되며 능히 보현보살의 수행과 원력을 원만하게 성취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십대행원을 실천하는 이익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를 믿고 불교를 공부하고 불교를 실천하는 이익이 바로 이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불교를 믿는 것이며, 이 일을 위해서 불교를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견성(見性)하고 성불(成佛)해서 결국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하면 보살행을 행하자는 것이며, 그 보살행이란 여기에서 밝힌 열 가지 행원이다. 모든 불자는 이러한 이치를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