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大智度論)은 반야부 경전인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의 주석서로 인도의 대승불교 승려인 용수(龍樹, Nagarjuna, 150?~250?) 보살이 저술한 불교 논서 또는 주석서이며, 용수보살의 일방적인 설법이 아닌, 경전에 대한 해설과 함께 질문과 논쟁의 부분이 있기도 하다.

원래의 이름은 마하프라즈냐파라미타샤스트라(Maha prajna paramita ­sastra)라 하며,

지도론(智度論) · 지론(智論) · 대론(大論) · 마하반야석론(摩訶般若釋論) 등으로도 불린다.

 

논서의 명칭에서

"대(大)"는 산스크리트어 마하maha의 ma는 헤아리다, 측량,재다를 번역한 것이며, 
산스크리트어 하 ha는 하늘 ,태양을 뜻하며, 

'지(智)'는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나 prajna는 반야를 뜻하며,

'도(度)'는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 paramita­는 바라밀다를 뜻하며, 
'론(論)'은 사스트라 sastra,  또는 샤스트라(Shastra)는 학술적인 경전을 뜻한다.

 

경(經)과 론(論)의 차이점;
'경(經)'은 부처님의 직설을 말하며, 아함경, 반야심경, 능엄경, 화엄경, 반야경등이며, 
'론(論)'은 부처님의 말씀인 경(經)을 부처님의 제자들이 풀어서 설명한 것을 말하며, 대지도론, 청정도론, 대승기신론, 유가사지론 등이다.


용수(龍樹) 보살이 《반야경》속의 《대품반야(大品般若)》를,  2∼3세기 초엽에 축조하여서 해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산스크리트어 원본도 티베트어역 판본도 존재하지 않으며, 405년 구마라습에 의한 한역본만이 전해져 최근에는 이를 바탕으로 한 프랑스어 번역본도 나오게 되었다.

 

용수 보살은 남인도에서 출생하여 주로 남인도에서 활동하였으며, 현 지명에도 나오는 나가르주나 콘다도 남인도 불교 중심지였던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지도론』에서 인용하고 있는 본생담(本生譚) 등은 거의 서북인도를 중심으로 한 내용들이고, 언급하고 있는 지명 지리 등이 서북인도에 위치하는 것들이어서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용수 보살의 저작을 부정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라모뜨(Etinne Lamotte)는 대지도론 의 대표적 연구가이고 주석가로 『대지도론』의 저자를 서북인도 출신의 누군(秦言云云)가로 주장하고 있다. 특히 『대지도론』은 번역에는 ‘진나라 말 운운’하는 구절이 적지 않게 등장하는데 이것은 구마라집이 첨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대지도론의 번역은 원전에서 많은 분량이 삭제되었다고 하여 구마라집이 상당히 가감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혜원의 대지도론초서에는 “이 논서는 그 뜻이 깊고 넓어서 자세히 연구하기 어렵고 방언은 생략하기 쉽기 때문에 그 내용을 요약하여 100권으로 하였다. 누락된 것을 계산하면 거의 3배를 넘는다”고 하였다. 

또한 승예 대지도론서에도 “인도말과 중국어는 서로 다르고 또한 번쇄하고 간략한 차이가 있어서 3분의 2는 제외시켜 200권을 만들었다. 만약 갖추어 번역했다면 대략 천여 권에 이를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어서, 

원전 대지도론은 현전 한역본 100권의 10배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지도론』의 성립과정은 그 핵심부분은 『중론』을 지은 용수가 저술하고, 그 후 그의 제자인 제바(Ārya-deva)와 나후라(Rāhulabhadra), 그리고 알 수 없는 밝히지 않은 후대인들이 가필하여 전해지다가 구마라집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이 다시 가감되어 현전 『대지도론』이 성립한 것이다.
 

현재 산스크리트 원전은 없고 티베트어역 판본도 존재하지 않으며, 구마라집(鳩摩羅什)의 한역본(漢譯本) 100권만이 전한다.

 

*구성과 내용

 대지도론은 마하반야바라밀경 27 90(대정장8) 대한 주석서로 근본불교부터 부파불교, 그리고 초기 대승불교에서 인도전통사상에까지 이르는 방대한 양의 인용과 관련 기사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 실존 인물과 지명, 부파명 및 경전명 그리고 전설과 비유를 설명하고 있어 당시의 불교백과사전이라고 불린다.

이 논서에는 반야사상을 잘 드러낸 중론(中論)과 마찬가지로 현상의 실재를 부정하는 공사상과 실상을 바로 보는 반야 지혜, 그리고 보살도를 널리 펴도록 하고 있다.
즉 반야공(般若空) 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제법실상(諸法實相) 구현하며 대승보살도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대지도론(大智度論)은 반야경을 설명한 논서라는 뜻이다.

반야경(대반야바라밀다경)(현장역) 600권의 방대한 분량이며, 반야경에서 중요한 내용을 취사선택해서, 자세히 설명한 것이 바로 대지도론(大智度論)이다.

 

이 논은 「대품반야경」의 90품을 모두 해석하고 있는데, 그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권에서 34권까지는 경의 초품 해석하고,

나머지 35 이하에서는 대품반야경 2품부터 나머지 89품을 석하였다.

제1권에서 34권의 해석에서는 52개 항목에 걸쳐서 불보살 성문 등 같은 중요한 불교교학의 개념과 인연 반야 공 열반 등과 같은 불교철학사상을 선정하여 풀이하고 있으며, 이 논서의 특징은 이와 같이 반야경의 경문에 의거하여 주제를 세분화하고 대승불교의 중요한 명제들을 뽑아서 정리하였다.

중요한 내용을 들어 보면;
연기(緣起), 총설여시아문(總說如是我聞), 바가바(婆伽婆), 주왕사성(住王舍城), 사중(四衆), 불보살, 성문,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십유(十喩), 불토원(佛土願), 방광(放光), 시방제보살래(十方諸菩薩來), 사리불(舍利佛), 인연(因緣), 공(空), 반야(般若), 열반, 계상(戒相), 찬제바라밀(羼提波羅密), 비리야바라밀(毘梨耶婆羅蜜), 선바라밀, 반야바라밀, 삼십칠품(三十七品), 삼삼매(三三昧), 팔배사(八背捨), 구상(九想), 팔념(八念), 십상(十想), 십일지(十一智), 십력(十力), 사무외(四無畏),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대자비, 대비(大悲) 등을 들 수 있다.


대지도론은 반야경을 해석하는 근거를 대소승 삼장에서 취하고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 인용된 경론을 들어보면, 「아함경」, 「육족아비담」, 「팔건도비바사」, 「아비담비바사」, 「중의경」, 「법화경」, 「중론」 화엄, 보적, 정토 등의 대승경전 등 비롯하여 백수십 여종의 경전들에 이른다. 경에 나오는 난해한 교리들은 설화와 비유를 들어 설명함으로써 미진한 사람들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게 하고 있다.

이 대지도론(大智度論)은 불교의 대백과사전으로 알려 있듯이 그만큼 방대하고 불교의 핵심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 있으며,  또한 서술방식이 중요한 교리 사상들을 자문자답 형식을 이용해서 비교적 쉽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으로,

즉 용수 보살의 일방적인 설명이 아니라, 언제든지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질문하는 사람들의 종류도 외도에서부터, 무신론자, 소승, 대승 등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망라되어 있다.  


대승경전의 논서답게 필요에 따라서 소승의 교의를 채택하면서도 언제나 소승에 대한 대승의 우위를 선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지도론」은 파사(破邪)자를 위주로 하는 중론의 부정적인 입장에 비하여 「십주비바사론」에서와 같이 제법실상의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대승의 보살사상과 6바라밀의 실천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대지도론이 아비달마의 교리를 소승이라 하여 일방적으로 배제하지도 않고 필요한 내용은 취하여 설명하고 있다. 곧 설일체유부의 주장인 일체법의 ‘실유론(實有論)’ 같은 사상은 강하게 비판하지만, 그 밖의 많은 교의는 반야바라밀의 입장에서 수용하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들어내는데 사용한다.

*천태학과 대지도론

 「대지도론」은 「대품반야경」의 단순한 주석서에 머물지 않고 종파의 소의 논서이기도 하다.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에서는 「중론」·「백론」·「십이문론」에다 「대지도론」을 합하여 4론이라 하고 소의(所依) 삼고 있으며, 한·중·일 3국의 화엄종(華嚴宗)과 천태종(天台宗)에 사상적으로 특별히 큰 영향을 미쳤다.
 『대지도론』은 후대의 여러 대승불교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용수를 “팔종(八宗)의 조사(祖師)”라고 하는 것도 사실 이 논서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대지도론은 인도 유식(唯識)사상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고, 『대승기신론』의 진여사상도 『대지도론』의 이론에 힘입은 바가 크다. 또한 논서의 불신관 특히 법신관(法身觀) 밀교사상의 토대가 되고 진언다라니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책의 여러 곳에서는 아미타불국토를 찬탄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토사상의 흥기에 큰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대지도론』의 교의는 중국의 삼론학파(三論學派)는 물론, 천태교학과 화엄학, 나아가 선종의 성립에도 큰 영항을 끼쳤다.
천태종에서는 대지도론에 여러 경전의 공통된 교리를 말하고 있어서 대승통신론(大乘通申論)이라고 부르며 특히 존중하고 있다. 천태교학의 교학과 관법에서 「대지도론」 「중론」의 사상이 골격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사실단, 이제(二諦) 중론 삼관(三觀) 사성제, 사교(四敎) 등은 양쪽에서 그 이치가 같다.


천태교상에서 보면 반야경은 오시교에서 반야시로 통한다.  
“제4 반야시”란 방등 이후 22년간 반야부 경전을 설한 시기. 경전의 명칭을 따라 시의 이름이 붙여졌으며, 방등에서 소승을 배척하고 대승을 찬양한데 비해, 반야에서는 대승과 소승은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여 반야 空으로 융통시키는 내용이다.


반야는 지혜이지만 번역하지 않고 반야로 . 역경상 번역하지 않는 다섯 가지 원칙에 따른 (五種不飜)으로,

다라니와 같이 뜻이 미묘하고 깊은 (秘密故).

②하나의 말에 여러 가지 뜻이 들어 있는 (多含故).

이곳에는 없는 특별한 문물의 이름(此方無故).

보리와 같은 습관상 원어의 음을 그대로 쓰더라도 누구나 뜻을 있는 (順古故).

번역하면 뜻이 가벼워지는 (尊重故). 반야가 여기에 해당한다.


 반야부 경전에는 소품반야 방광(放光)반야 인왕(仁王)반야 도행반야(道行般若) 문수반야(文殊般若)가 있고, 마하반야경 광찬반야경 금강반야경 대품반야경 등의 경전들이 반야부 경전이 여기에 속한다.

이중에 “마하반야경”은 현장이 번역한 대품반야경 600권(大般若波羅蜜多經) 반야경의 설법은 이 대반야경에 모두 들어 있고, 구역(舊譯)에서는 광찬반야 금강반야 대품반야(혹은 마하반야바라밀경, 2만5천송) 등 여러 종류의 반야경을 따로따로 번역 유행하였다.

현장역에서 구역의 반야경을 모두 포함하므로 첫머리에 마하반야를 두었다.

마하반야 600권에는 16회에 걸쳐 설해졌으니 광찬반야(축법호역)는 그중 제2회에 속하고, 금강반야는 小般若(8천송반야)라고도 하며 제9회에 해당한다. 大品般若(라집역) 역시 제2회에 해당한다.

광찬(光讚)이란 光은 광명 찬(讚)은 강설을 한다(광명이 비치자 황금연꽃이 생기고 그 속에 제불이 출현하여 강설). 금강은 일체의 번뇌를 끊고 집착과 의심을 끊는다는 뜻이 있다.


*반야부 경전의 특징은

첫째, 이승들이 본래 대승을 설할 수 있는 지혜가 없는데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어서 반야경에서 전교(轉敎)가 이루어졌으니, 이는 마치 장자가 궁자에게 재산을 넘겨주었듯이 소승근기인 성문에게 부처님의 법재(法財)를 전해준 것, 곧 전교부재(轉敎付財)를 가리키는 비유이다.
 둘째, 방등시에서 소승들은 ‘자신의 근기로는 대승에 미칠 수 없다고 참괴하였고, 대승은 보살의 법으로서 소승의 한계 밖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승들의 근기가 순숙하여 반야시에 이르러 이들에게 법재를 물려주셨으니, 이승은 소승의 근기이고 대승은 대기의 법문으로 미칠 수 없다고 격리된 관계의 대소승으로만 생각했으나, 그 격리된 상대적 간격을 반야의 법문으로 제거하고 융통시켰기 때문이다. 반야에서는 일체법은 다 불가득 空이라는 진리를 설하였으며, 대승법이든 소승법이든 일체법은 차별이 없는 도리로 대승과 소승의 차별을 끊어서 융통시켰다.
셋째, 반야시에서 공은 아집의 미정(迷情)을 완전히 없애어 절대공을 밝히고 있으므로 대소승의 차별이 끊어진 자리임을 비유한 말이다.

 

영산법화사와 다른 분들의 글을 참고 하였습니다.


 

 

구마라집( 鳩摩羅什) 쿠마라지바(कुमारजीव) Kumārajīva (344 – 413)

한자 표기는 구마라시바(鳩摩羅時婆), 구마라기바(拘摩羅耆婆), 줄여서 나습(羅什), 습(什), 의역하여 동수(童壽)라고도 한다.


출생 구자국(龜玆國, 현재의 중국 신장 쿠차(Kucha) 현에 속함) (위구르어: كۇچار, 중국어 간체: 库车, 정체: 庫車, 屈支 ,屈茨, 丘玆, 중국어 간체자: 龟兹, 정체자: 龜玆) 또는 구자국(龜玆國)은 오늘날 쿠차 현에 위치하던 도시국가이며, 인도, 페르시아 제국, 박트리아와 실크로드 교역국들의 갈림길이었다.

구자국, 쿠차 (Kucha, 신장)은 서한 때에는 36국 가운데에서 9대국에 속하는 나라였으며, 왕성은 연성(延城)으로, 장안에서 7,480리이며, BC 1세기에 이미 불교를 받아들여서, 서역에서 불교가 가장 흥성한 나라였다.

9세기 중엽에 위구르(튀르크)인들이 침입하여 위구르왕국을 세우자, 위구르인들에게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구자국은 중국에 불교를 전해주는 가교 역할을 하여서, 구자국의 많은 스님들이 중국으로 들어와서 포교와 경을 번역하는 역경(譯經)에 종사하였으며, 위진 북방의 부견, 요흥 남조의 양무제 등이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였다.

 

한서에 따르면 쿠차는 현재 위구르 자치구의 지역에 존재하며 사막이기 때문에 인구는 항상 희박하여서 4만명 정도이었으며, 2만 명 정도가 무기를 지닐 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쿠차는 원래 토하라인들이 살았으나 인도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인도화되었고, 이후에는 대부분의 토하라인들이 인도 북부로 이주하였으며, 위구르(튀르크)인들이 들어와 위구르인들이 살게 되었다. 얼마 뒤에 토번에 의해 당나라가 공격당하면서 안서도호부도 점령당하였고 쿠차는 토번의 영토가 되었으며,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과의 무역이 불가능해졌다.

쿠차는 실크로드에서 서역북도(西域北道)의 중심도시로써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신라의 고승 혜초도 이곳을 지나면서  '왕오천축국전'에서 구차국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중국의 진서에 따르면 3세기에 쿠차에는 수천개의 불탑과 사원이 있었으며, 이 때의 쿠차 승려들은 중국으로 여행하기 시작하였고, 4세기에는 불교가 왕국에 더욱 성장하여서 왕국은 불교도의 수도원을 닮아갔다고 하며, 부처의 석상이 있었고 도시 주변에는 수도원이 많았다고 한다.

 

● 이 무렵의 대표적인 분이 구마라집 (344 – 413)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구자국 왕의 누이동생인 지바카(Jīva)이며, 구마라집이 7세일 때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서역(西域)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인 카슈미르(옛 이름은 카슈가르Kashgar:또는 카슈가Kaxgar, 객십喀什)에서 소승불교를 공부하다가, 야르칸드에서 수리아사마라고 하는 대승불교도에 의하여 대승(大乘)을 공부하게 되었고, 나중에 중관학파(中觀學派)로 개종했다. 

인도에 유학하면서 두루 여러 선지식을 참례하여 여러 방면에 대해 잘 알게 되었으며, 후에 육식을 하지 않는 우전국(코탄)에서 대승불교를 공부하고 구자국으로 왔을 때에는 이미 그의 명성이 서역과 중국의 전역에 퍼져 있었으며, 전진(前秦)의 왕인 부견(338-385)이 여광을 보내서 구자국을 공격한 원인 중의 하나가 구마라집을 데려오기 위한 것이었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그의 덕이 뛰어나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 여광(呂光)과 군사를 보내어, 384년 쿠차로 쳐들어왔을 때, 구마라집은 중국 후량(後涼)의 장군 여광(呂光)의 포로가 되었다. (여광이 서쪽으로 가서 구자국을 정벌하여 구마라집을 체포했으나, 돌아오는 도중에 부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광 자신이 하서(河西)에서 자립하여 왕이 되어 7년간 통치했다.)

군사(軍師)의 위치에 있으면서 여광을 돕기도 했지만, 여광은 그를 포로로 취급하여서 달리는 말에서 떨어뜨리거나 함께 포로로 끌려온 쿠차의 왕녀를 강제로 아내로 맞게 하는 등의 잔학한 짓도 했다고 한다.

18년 동안 여광과 여찬(呂纂) 밑에서 양주(涼州)에서 살던 쿠마라지바는 서기 401년 후진의 황제 요흥(姚興)에게 국사(國師)로 영접되어서 402년에 장안(長安)으로 오게 되었으며, 요흥의 뜻에 따라 여성과 혼인하여, 환속한 그는 이후 경전 번역에 종사하여 35부 300권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구마라집은 현자로서 인도학 및 베다학에 관하여 백과전서적인 지식을 가졌다고 널리 알려져 있으며, 삼론종(三論宗)・성실종(成実宗)의 기초가 되었다. 

 

최초의 삼장법사(三藏法師)로 불리며, 훗날 현장(玄奘) 등의 많은 삼장이 등장하여서, 현장과 함께 2대 대역성(大訳聖)으로 불리며, 또한 진제(真諦), 불공금강(不空金剛)과 함께 4대 역경가(訳経家)로 꼽히며,

쿠마라지바의 역문은 유려하여서 《법화경》(法華經)이나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역문 등은 현대의 법의(法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의 번역 사업에 의하여 당시 유행하고 있던 《반야경》(般若經) 연구가 더욱 연구가 깊어졌고 또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의 대승론부(大乘論部)도 처음으로 소개되었으며, 그가 《반야경》을 포함한 불교 경전들을 불교 본연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하면서 당시까지 중국에서 유행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폐단이 비로소 극복되었다.


쿠마라지바는 413년(409년이라고도 함) 장안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 직전에 그는 "내가 전한 것(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내 몸이 사라진 뒤에라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여서,

사후 불교의 방식대로 화장되었고, 다 타버린 그의 시신 속에서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고승전』권2).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이 다시 일어나 여광을 멸망시킨 뒤, 구마라집은 401년(동진 隆安) 장안(長安)에 도착해서, 요흥이 예를 갖추어 그를 국사로 봉하고 소요원(逍遙園)에 머물게 하여 승조(僧肇), 승엄(僧嚴) 등과 함께 역경에 전념하게 하여서,  그는 403년(후진 弘始 5) 4월부터 번역에 몰두하여서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3권,  『불설아미타경』(阿彌陀經) 1권,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27권(30권),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8권, 『유마경』(維摩經) 3권,

『대지도론』(大智度論) 100권,  『중론』(中論) 4권,

백론(百論) · 십이문론(十二門論) · 아미타경(阿彌陀經) ·십송률(十誦律) 등 35부 348권에 달하는 방대한 경전을 번역했다


일부 경전은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없는 쿠마라지바 본인의 창작(해당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의 의역이라고 의심되는 부분도 있으나, 그가 번역한 불경이 후대 동아시아 불교계에 얼마나 큰 영향이 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에 퍼진 불교 용어, 예를 들어 극락(極樂)이라는 단어는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그대로 쓰이고 있으며,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구도 쿠마라지바에게서 나온 것이다.

 

당(唐)의 현장에 의해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중국에 수입되었고, 번역된 뒤에는 「신역」(新譯)이라 불리는 반면,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구역」(舊譯)이라 불리며 존중되었다. (쿠마라지바 이전의 번역은 고역古訳이라 불림).

 

백과 사전들과 여러 분의 글을 참조하였습니다.

大智度論 釋囑累品 第九十 卷第一百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90. 촉루품(囑累品)을 풀이함 2


問曰:若囑累,何以乃爾慇懃鄭重?

묻나니, 부촉하신다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은근하고 정중하게 하신 것입니까?


答曰:佛隨世俗法引導衆生,譬如估客主,欲遠出他國,雖以財寶囑累於子,大價妙寶偏獨慇懃,以其子未識妙寶價重故。餘人以估客主是識寶價人而慇懃囑累,必知其貴;若聞其子讚說寶價,則不信之。佛亦如是。

답하나니, 부처님께서는 세속법을 따라 중생들을 인도하시는 것이니, 마치 장사꾼의 우두머리인 객주(客主)가 다른 나라로 멀리 나고자 할 때, 재보를 그의 아들에게 맡기면서  값어치가 있는 묘한 보물은 유독 은근하게 부촉하는 것과 같으니,  아들은  묘한 보물의 귀중한 값어치를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장사꾼의 우두머리인 객주(客主)가  보물의 값어치를  아는 사람이므로 은근히 부촉한다면, 반드시 그것이 귀중한 것임을 알아차리겠지만, 만약 그의 아들이  보물의 값어치를 찬탄한다면 그 아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는 것과 같이, 부처님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復次,若於餘人異衆中讚歎般若囑累,人則譏佛自稱讚法,疑而不信;自於弟子中囑累,則無嫌。

復有人言:佛上品中說寂滅相無戲論,是一切智,是中無有決定法可取,則人以爲無所可貴;今慇懃囑累,則知佛不著空法。一切衆生中,愛念般若無過佛者,佛知般若恩深故,貴重是般若而慇懃囑累。

또한 만약  밖의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대중 가운데에서 반야를 찬탄하면서 부촉한다면, 사람들은 부처님을 비방하기를, “자기 자신의 법을 칭찬하는구나”라 하면서 의심하고 믿지 않겠지만, 자신의 제자들에게 부촉한다면 싫어  이가 없는 것이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앞의 상품(上品)에서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요, 쓸모없는 희논이 없으니, 그것이  일체지(一切智)이니,  에는 결코 취할 만한 어떠한 법도 없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사람들은 그리 귀하게 여길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은근히 부촉한다면,  부처님께서는 공한법에 애착하지도 않지만, 일체 중생들 중에서 반야를 사랑하는 것은 부처님보다 더한 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반야의 은혜가 깊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반야를 귀중히 여기시어 은근히 부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有人言:佛欲現中道故囑累:先說諸法空,以遮有邊;今慇懃囑累,則破無邊,是則中道。

若人謂佛貪心愛著此法,佛以種種因緣說般若波羅蜜空相;若人謂佛墮斷滅中,是故慇懃囑累。如是,則離二邊。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중도(中道)를 나타내시고자 부촉하신 것이니, 앞에서는법은 공하다고 말씀하셔서 저들의 ‘있다는 치우친 소견의 유변(有邊)’을 막으셨고, 여기에서는 은근히 부촉하시어  ‘없다는 치우친 소견의 무변(無邊)’을 깨뜨린 것이니, 이것이  중도(中道)라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서는 탐내는 탐심(貪心)으로  법에 애착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갖가지의 인연으로 반야바라밀의 공상(空相)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서는 아주 없다는 단멸(斷滅) 가운데에 떨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은근히 부촉하신 것이니, 이와 같이 하여서   가지 치우친 소견을 여의게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曰:佛知阿難是弟子,何以故問阿難:“汝是我弟子不?我是汝師不?“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아난 존자가 당신의 제자임을 알고 계시면서도 무엇 때문에 “아난아, 너는 바로 나의 제자인가? 내가 바로 너의 스승인가?”고 물으신 것입니까?


答曰:佛有惡弟子須那剎多羅等,有少因緣故作弟子,欲於佛所取射法,佛不爲說,於是反戒言:“我非佛弟子。”又如須尸摩爲盜法故作弟子。如是等,是名字弟子。

답하나니, 부처님에게는 삿된 제자로서 수나찰다라(須那刹多羅, Sunakaṣatra. 선숙 善宿) 등이 있었으니, 그들은 조그마한 인연으로 제자가 되었는데 부처님으로부터  쏘는 법을 배우고자 하였으나 부처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자, 이에 배반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우리는 부처님의제자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수시마(須尸摩, Susīma) 같은 이들은 법을 훔쳐가기 위하여 제자가 되었던 것이니, 이와 같은 이들은 바로 이름만 있는 제자였던 것이다.


又復外道等謂阿難不得已而在佛邊 阿難曾作外道弟子,著草衣,求神仙;今以佛是其親族,尊重故給侍。

以如是等事故,於大衆中問阿難:“汝是我弟子不?”若言是眞弟子,當隨我勅。是故阿難爲欲令人信故重答。

또한 외도 등이 말하기를 “아난은 마지못하여 부처님 곁에 있는 것이다. 아난은 일찍이 외도의 제자로 있으면서  옷인 초의(草衣)를 입고 신선이 되고자 하였었는데, 부처님은 그의 친족이라서 존중해야 되기 때문에 시봉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일들 때문에 대중 가운데에서 아난에게 물으시기를, “네가 바로 나의 제자인가?”고 하였으며, 

그가 만약 “진실한 제자입니다”라고 한다면, “마땅히 나의 명에 따라야 한다”고 하실 것이기 때문에 아난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고자 일부러 거듭하여 대답한 것이다.

 

佛告阿難:“弟子所應作法,汝盡具足。”弟子法者,所謂以善身、口、意業供給師。有弟子心好,身、口業不稱;有弟子身、口業好,而心不稱。若弟子以善心深愛樂師,身、口相稱,不惜身命、不難懃勞,自捨其心,隨師教勅 阿難盡具足此事。佛告阿難:“汝今現在恭敬於我,我滅度後,恭敬般若,亦當如是。”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법을 너는 모두  갖추었느니라”고 하셨으니,

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법이란, 이른바 착한 몸(身)과 입(口)과 뜻(意)의 업으로 스승에게 공양하는 것이니,

제자에는 마음은 좋으나 몸과 입의 업이 합치하지 않는 이가 있고, 

제자로서 몸과 입의 업은 좋으나 마음이 합치하지 않는 이도 있으며,

만약 제자가 착한 마음으로 스승을 매우 좋아한다면, 몸과 입이 서로 합치하며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고생을 어렵게 여기지 않으며,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을 버리고 스승의 가르침만을 따르나니, 

아난은 이러함을 모두  갖추었으니,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지금 나를 공경하고 있지만 내가 멸도한 뒤에 반야를 공경함도 역시 이와 같아야 하느니라”고 하셨다.

 

問曰:般若是諸佛師,而阿難何以不恭敬其師,而恭敬佛?

묻나니, 반야가  모든 부처님의 스승인데, 아난 존자는 무엇 때문에  스승을 공경하지 않고 부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까?

 

答曰:阿難雖得初道,漏未盡故,不深知法實,如佛所知。是故佛告阿難:“汝恭敬般若,如恭敬我。”

답하나니, 아난은 비록  번째 도과인 초도(初道, śrota āpatti-phala, 예류과預流果)를 얻었을지라도 번뇌를 아직 다하지 못한 까닭에 법의 진실을 부처님만큼 깊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야를 공경하기를 마치 나를 공경하듯이 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며, 


復次,衆生見佛三十二相、八十隨形好、大光明、金色身,多愛敬;般若波羅蜜微妙甚深,無形、無色,智者能知。佛身相好,愚、智視之,皆無厭足,是故佛以身喩般若。佛在世時,能自遮魔,是故佛告阿難:“我滅度後,好守護般若。”

또한 중생들은 부처님의 32상호와 80수형호(隨形好)와 대 광명 지닌 금색신(金色身)을 뵙게 되면 거의 모두가 사랑하고 공경하게 되는 것이나,

반야바라밀은 미묘하고 매우 깊으면서도 형상과 빛깔이 없는 무형무색(無形無色)이므로 지혜 있는 자만이   있으니, 

부처님 몸의 상호(相好)는 어리석은 이나 지혜가 있는 이거나 간에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의 몸으로써 반야에 비유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몸소 악마를 막을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멸도한 뒤에도 기꺼이 반야를 수호하라”고 하신 것이다.


問曰:一囑累則足,何以至三?

묻나니, 한  부촉하신 것으로 족하거늘, 무엇 때문에  번이나 이르신 것입니까?


答曰:佛深愛般若波羅蜜故三囑。

답하나니,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을 깊이 사랑한 까닭에  번이나 부촉하신 것이다.

 

問曰:若深愛者,何限於三?

묻나니, 만약 그렇게도 깊이 사랑하셨다면, 어찌  번만 하신 것입니까?


答曰:諸佛常法,語不過三。若過三不從,執金鋼神則以杵擬之;又執金鋼神意:若過三不從,則是逆人,便當殺之。是故佛問不過三。復次,若一說,猶緩;過三,太急,似如凡夫貪著者。

답하나니, 모든 부처님의 통상법으로는 말씀이  번을 초과하지 않는 것이니, 만약 세 번을 초과하여 말씀하셔도 따르지 않게 되면, 집금강(執金剛, Vajrapāņi) 신이 그의 지팡이인 금강저(金剛杵, vajrayudha)로 그를 다스리게 되며,

집금강신이 만약 세 번을 초과하여 말씀하셨는데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곧 거역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서 죽이고자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물으실 때에는 세 번을  초과하지 않으시는 것이며, 

또한 만약 한 번만 말한다면 아직 느슨하고,  번을 초과하게 되면 너무 지나져서, 마치 탐착하는 범부와 같이 되는 것이다. 


復次,受者心有三種,鈍根者至三乃生善心;阿難雖復利根,心向聲聞,但一身求度,是故三告。

所以囑累者,爲不令法滅故。汝當教化弟子,弟子復教餘人,展轉相教;譬如一燈復然餘燈,其明轉多。

또한 받아들이는 수자(受者) 마음에는  가지가 있으니,

근기가 둔한 둔근자(鈍根者)  번까지 말을 해야 비로소 착한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니, 아난이 비록 근기는 영리하다 할지라도 마음은 성문(聲聞)을 향하고 있어서 자기  몸만을 제도하고자 할 뿐이었기 때문에  번을 말씀하신 것이며, 

부촉하는 까닭은 법이 소멸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니, ‘너는 마땅히 제자를 교화하고  제자는 다시  밖의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면서 차츰차츰 서로서로를 교화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신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하나의 등불로부터 다른 등불을 옮겨서 밣혀 나간다면, 그 광명이 갈수록  많은 것과 같은 것이다.

 

莫作最後斷種人者,世人有子,若不紹繼,則名斷種,最爲可恥。佛以此喩告阿難:“汝莫於汝身上令般若斷絕!”

‘최후에 종자를 끊는 단종인(斷種人)이 되지 말라’고 함이란, 세상 사람에게 아들이 있으나, 만약 그 후사가 끊어진다면 그것을 바로 종자를 끊는다고 하는 것이니,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니,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비유로써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의 신상(身上)에서 반야로 하여금 단절되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問曰:如先品中明“般若波羅蜜,說亦不增、不說亦不減,畢竟寂滅相”,今何以言“莫令斷滅”?譬如虛空,誰能滅者?

묻나니, 앞의 품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은 설하여도 또한 늘어나지 않고, 설하지 않아도 또한 줄어들지 않아서 필경에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거늘, 지금 무엇 때문에 “단절(斷絶)되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비유하자면,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거늘  누가 끊어 없앨  있다는 것입니까?


答曰:般若波羅蜜雖寂滅、無生無滅相、如虛空、不可戲論,而文字語言書般若波羅蜜經卷,爲他人說,是此中般若,於此因中而說其果。

답하나니, 반야바라밀은 비록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이라서 나고 멸함도 없는 무생무멸(無生無滅)의 상(相)으로 마치 허공과 같아서 희론을   없지만, 

문자와 언어로 반야바라밀의 경권을 서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설하기 위한 것으로,  가운데서의 반야는  원인의 인(因) 가운데에서  결과의 과(果)를 말하는 것이다.


凡人聞般若波羅蜜微妙,卽生著心,取般若相,分別諸法,所謂是善、是不善,是世閒、是涅槃等;以分別故,於是法中生著心,著心故鬪諍,鬪諍故起諸罪業 如是人名爲滅般若波羅蜜。

범부인은 반야바라밀은 미묘하다는 말만 듣고  애착하는 마음을 내어 반야의 상(相) 취하면서법을 분별하나니,

이른바 ‘이것은 착하다, 이것은 착하지 못하다. 이것은 세간이다, 이것은 열반이다’라고 하는 등이 그것이며,

분별하기 때문에 이러한 법 가운데에서 애착심을 내고, 애착심 때문에 투쟁하게 되며, 투쟁하기 때문에 모든 죄업(罪業)을 일으키게 되나니, 

이와 같은 사람들을  반야바라밀을 소멸하게 하는 이라 하는 것이다.


佛告阿難:“汝當如般若波羅蜜相,莫著文字語言,教化衆生。”是名不滅。“

阿難!隨般若在世幾時,則知爾許時佛在世”,如經中廣說。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기를 “너는 반야바라밀의 상(相) 그대로, 문자나 언어에 집착하여서 중생을 교화하지 말아야 하나니, 이것을  소멸하지 않게 하는 불멸(不滅)이라 하는 것이니라. 

아난아, 반야가  세상에서 얼마 동안이라도 있는 한,  만큼의 시간 동안에는 부처님도 세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할지니라”고 하셨으니, 경에서 자세히 말씀한 바와 같다.

 

佛慇懃囑累,在會衆生有疑,是故佛說囑累因緣。所謂“有般若在世,則爲佛在”。所以者何?般若波羅蜜是諸佛母,諸佛以法爲師。

法者,卽是般若波羅蜜。若師在、母在,不名爲失利。所以者何?利本在故。是故說:“若般若在世,佛亦在世。”

부처님께서 은근히 부촉하실 때, 그 모임에 있었던 중생들이 의심하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부촉하는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반야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 때에는 부처님도 세상에 있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이 바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불모(佛母)요, 모든 부처님은 법(法)을 스승으로 삼기 때문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법(法)’이라 함이란, 곧 이 반야바라밀이니, 만약 스승이 있고 어머니가 있으면 이익을 잃는다고 하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 이익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야가 세상에 있으면 부처님도 역시 세상에 있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며, 

 

又法寶不離佛寶。菩薩有三十二相、八十隨形好,不名爲佛,得法寶故名爲佛。法寶卽是般若波羅蜜。如人從佛得利,乃至得解脫涅槃;若人於般若中能信行,亦以三乘法而入涅槃。是故說般若在世,如佛在世,說法無異。

“阿難!若有人聽受般若,及書、持等,當知是人不離見佛、聞法、親近諸佛。”

또한 법보(法寶)는 불보(佛寶)를 여의지 않으니, 보살에게 32상호와 80수형호가 있어도 부처님이라 하지 않으며, 법보를 얻은 까닭에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니, 법보가 바로 반야바라밀인 것이다.

마치 사람이 부처님으로부터 이익을 얻어서 나아가 해탈과 열반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이,

만약 사람이 반야 가운데에서 능히 믿고 행한다면 역시 3승(乘)의 법으로써 열반에 드는 것이니,

이러한 때문에 반야가 세상에 있으면, 마치 부처님이 세상에 계시는 것과 같아서 법을 설함에는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아난아, 만약 어떤 사람이 반야를 듣고는 받아서 지니고 서사하여 지닌다면,

이 사람은 언제나 뵙는 견불(見佛)을 여의지 않을 것이고, 언제나 법을 듣는 문법(聞法)을 여의지 않으면서, 언제나 부처님을 친근히 하는 친근불(親近佛)한다는 것으로 알아야 하느니라”고 하셨다.

大智度論 釋囑累品 第九十 卷第一百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90. 촉루품(囑累品)을 풀이함 3 

 

問曰:有人重罪,三不善業成就,聽、受、書、持般若,是人云何當得不離諸佛、聞法、親近佛不?

묻나니, 어떤 사람이 세 가지 착하지 못한 삼불선업(三不善業)을 성취하여 중한 중죄를 지었음에도 반야를 듣고(聽) 받아서(受) 써서(書) 지닌다면(持), 이 사람이 어떻게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으면서 법을 듣고 부처님을 친근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答曰:是事先品中已答,所謂聽法者有二種人:一者、但聽而不信受行,二者、聽而信受奉行。

如弟子不聽、不信受行師語,是名不聽;

若以一心聽聞,信受奉行,厭世、愛涅槃,離小乘、樂大乘 作如是聽受,是名眞聽。誦讀亦如是。

답하나니,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앞의 상품 가운데에서 이미 대답한 것이니,

이른바 법을 듣는 청법자(聽法者)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니,

첫째는 다만 듣기만 하고 믿거나 받아 행하지 않는 불신수행(不信受行)하는 이요,

둘째는 듣는 대로 믿고 받들어 행하는 신수봉행(信受奉行)하는 이이다.

제자가 스승의 말을 듣지도 않고 믿고 받아 행하지도 않는다면, 그를 바로 듣지 않는 불청(不聽)이라 하는 것과 같으며,

일심으로 들으면서 믿고 받아 받들어 행함으로써 세간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며, 소승을 여의고 대승을 좋아하여 이와 같이 듣고 지닌다면, 그를 진정으로 듣는 청(聽)이라 하나니,

읽고 외우는 독송(誦讀)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正憶念,隨如佛意,離有無二邊,行於中道。如所聞受持,及其義解、爲他人解說,恭敬、尊重、供養、讚歎、花香等。初始微薄,乃至正憶念、爲他人說,其心轉厚,功德轉多,牢固不動。

바르게 기억하는 정억념(正憶念)이란, 부처님의 뜻 그대로를 따르며, 있다(有)ㆍ없다(無)는 두 가지의 치우친 소견인 이변(二邊)을 여의고 중도(中道)를 행하며, 들은 그대로를 받아서 수지(受持)하고, 그 뜻을 이해하여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해설하며, 공경하고 존중하면서 꽃과 향 등으로 공양하고 찬탄하는 것이니, 

처음에는 미미하고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나아가 바르게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연설하게 되면, 그의 마음이 한층 더 두터워지고 공덕은 갈수록 많아지며, 견고하여서 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若聞師說、若見經卷、花香等供養 若智者知般若功德供養者,福德重;不知者供養,福德微薄。

福德純厚者,轉身不離見佛、聞法、親近諸佛;福德微薄者,不言轉身得三福報,償衆罪已,久後亦必當得佛。

스승의 설법을 듣거나 경권을 보거나간에 꽃과 향 등으로 공양하나니,

만약 지혜로운 이로서 반야의 공덕을 알고 공양하는 이라면 복덕이 중하겠지만, 모르는 이가 공양하는 것은 복덕이 미미하고 미약하며,

복덕이 순수하고 두터운 이는 몸을 바꾸면 언제나 부처님 뵙기를 여의지 않아서 법을 듣고 모든 부처님을 친근하게 되지만, 복덕이 미미하고 천박한 이는 몸을 바꾸어도 세 가지 복의 과보를 얻는다고 말할 수 없으며, 많은 죄 값을 다 치르고 나서 오랜 뒤에는 그 역시도 반드시 부처님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此中佛摠說福德純厚、微薄,漸漸皆當見十方佛、聞佛所說,漸漸具足六波羅蜜,皆得作佛。

佛以佛眼見般若有如是大利益衆生故,慇懃囑累。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 통틀어 말씀하셨으니, “복덕이 순수하고 두터운 이나, 미미하고 천박한 이거나간에 점차로 모두가 시방의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의 설하심을 들어서, 6바라밀을 점차로 두루 갖추어서 모두가 부처님이 되느니라”고 하신 것이며, 

부처님은 불안(佛眼)으로써 반야에 이와 같은 큰 이익이 있어서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을 보시므로 은근하게 부촉하신 것이다.


問曰:是諸大阿羅漢已證實際,無復憂喜,小喜尚無,何況大歡喜!

묻나니, 이 모든 큰 아라한들은 이미 실제(實際)를 증득하여서, 다시는 근심이나 기쁨이 없으며, 조그마한 기쁨조차도 오히려 없을 것이거늘 하물며 큰 기쁨이겠습니까?


答曰:諸大阿羅漢,雖離三界欲,未得一切智慧故,於諸甚深法中猶疑不了;

是摩訶般若波羅蜜中了了解說,斷除其疑,是故大歡喜。

답하나니, 모든 큰 아라한들은 비록 삼계(三界)의 욕탐을 여의었을지라도, 아직 일체 지혜를 얻지 못한 까닭에 매우 깊은 심심제법(甚深諸法) 가운데에서 의혹이 있어서 명확하게 알지 못하였다가, 이 마하반야바라밀의 분명한 해설로 그 의심이 제거된 것이니, 이 때문에 크게 기뻐한 것이다.


復次,此諸大弟子已證實際。實際者,卽是空、無相、無量,無所分別。佛以此寂滅法,種種分別名字、語言、譬喩廣說,亦不壞法性,又不與世閒相違;諸阿羅漢是法中證故大歡喜。

또한 이러한 여러 큰 제자들은 이미 실제(實際)를 증득한 이들이라서, 실제란 곧 공(空)하고 무상(無相)이고 무량(無量)하며 분별할 것이 없는 것이나,

부처님께서는 이 고요히 사라진 적멸법(寂滅法)으로써 갖가지의 이름과 언어와 비유로써 분별하여 널리 말씀하셨으나, 또한 법성(法性)을 깨뜨리지도 않았으며, 또 세간을 어기지도 않았나니,

모든 아라한들은 이러한 법 가운데에서 깨달았기 때문에 크게 기뻐한 것이다.


佛善說是空、無相、無量、寂滅法,諸餘大衆未悉漏盡,信力深故,亦大歡喜,言:“此法能盡我等生死苦,令得佛道。”如是等無量因緣故,大衆皆歡喜。

부처님께서는 이 공(空), 무상(無相), 무량(無量)하고 고요히 사라진 적멸법(寂滅法)을 말씀하셨으니,

아라한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대중들 모두는 아직 번뇌를 다하지 못하였으나, 믿음의 신력(信力)이 깊었기 때문에 역시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 법은 우리들의 생사(生死)하는 괴로움을 다하게 하여주면서 부처님의 불도를 얻게 하는구나”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무량한 인연으로 대중들 모두가 기뻐한 것이다.


問曰:若佛囑累阿難是般若波羅蜜,佛般涅槃後,阿難共大迦葉結集三藏,此中何以不說?

묻나니, 만약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이 반야바라밀을 부촉하셨다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아난 존자가 대가섭(大迦葉) 존자와 함께 경장, 율장 논장의 삼장(三藏)을 결집(結集)할 때, 그 가운데에서는 어찌하여 설하지 않았던 것입니까?


答曰:摩訶衍甚深難信、難解難行。佛在世時,有諸比丘聞摩訶衍不信、不解故,從坐而去,

何況佛般涅槃後!以是故不說。

답하나니, 마하연(摩訶衍, 대승)은 매우 깊고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우며 행하기도 어려운 것이니, 부처님께서 세간에 계실 때에도 여러 비구들은 마하연을 들으면, 믿지도 않고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리에서 떠나갔거늘, 하물며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이겠는가! 그러므로 설하지 않은 것이다.


復次,三藏正有三十萬偈,幷爲九百六十萬言。摩訶衍甚多無量無限,如此中「般若波羅蜜品」有二萬二千偈,「大般若品」有十萬偈,諸龍王、阿修羅王、諸天宮中有千億萬偈等。所以者何?此諸天、龍、神壽命長久、識念力强故。今此世人,壽命短促、識念力薄,「小般若波羅蜜品」尚不能讀,何況多者!

또한 삼장에는 정히 30만의 게(偈, 게송)가 있고 아울러 960만의 말씀(言)으로 되어있지만, 마하연은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없이 무한하나니,

이 '반야바라밀품(般若波羅密品)'에도 2만 2천의 게송이 있고, '대반야품(大般若品)'에는 10만의 게송이 있는 것과 같으며, 

모든 용왕과 아수라왕과 여러 천상의 궁중에는 천 억만의 게송 등이 있으니, 왜냐하면, 이 모든 하늘과 용과 신은 수명이 길고 기억하는 의식의 식염력(識念力)이 강하기 때문이나,

지금 이 세간 사람들의 수명은 짧고 의식의 기억하는 식염력(識念力)이 미약하여서 이 작은 '소(小) 반야바라밀품' 조차도 오히려 읽을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보다 더 많은 것이겠는가?


諸餘大菩薩所知般若波羅蜜無量無限。何以故?佛非但一身所說,無量世中或變化作無數身,是故所說無量。

그 밖의 다른 큰 보살들이 아는 바의 반야바라밀도 분량이 없고 한계도 없으니,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는 비단 한 몸만으로 말씀한 것이 아니라, 무량한 세상 동안 혹은 수없는 몸으로 변화신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므로, 그 하신 말씀이 무량한 것이다.


又有『不可思議解脫經』十萬偈,『諸佛本起經』、『寶雲經』、『大雲經』、『法雲經』各各十萬偈,『法華經』、『華手經』、『大悲經』、『方便經』、『龍王問經』、『阿修羅王問經』等諸大經,無量無邊,如大海中寶,云何可入三藏中?小物應在大中,大物不得入小。若欲問,應言:“小乘何以不在摩訶衍中?”摩訶衍能兼小乘法故,是故不應如汝所問。

또 '불가사의해탈경(不可思議解脫經)'에는 10만의 게송이 있고,

'제불본기경(諸佛本起經)ㆍ보운경(寶雲經)ㆍ대운경(大雲經)ㆍ법운경(法雲經)' 등에도 각각 10만씩의 게송이 있으며,

'법화경(法華經)ㆍ화수경(華手經)ㆍ대비경(大悲經)ㆍ방편경(方便經)ㆍ용왕문경(龍王門經)ㆍ아수라왕문경(阿修羅王問經)' 등의 여러 큰 경전도 무량하고 무변하여서, 마치 큰 바다 속의 보물과 같거늘, 어떻게 삼장 가운데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작은 물건은 큰 것에 들어갈 수 있지만, 큰 물건은 작은 것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만약 묻고 싶거든 ‘소승은 어찌하여 마하연 가운데에 있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해야 하리라.

마하연은 소승(小乘)의 법을 겸할 수 있기 때문이므로 그대는 그렇게 묻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復次,有人言:如摩訶迦葉將諸比丘在耆闍崛山中集三藏,佛滅度後,文殊尸利、彌勒諸大菩薩亦將阿難集是摩訶衍。

또한 어떤 분은 말하기를 “마하가섭 존자와 같은 이는 모든 비구들을 데리고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삼장을 결집하였으며,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문수사리와 미륵 등의 모든 큰 보살들도 역시 아난 존자와 함께 이 마하연을 결집하였다”고 한다.

 

又阿難知籌量衆生志業大小,是故不於聲聞人中說摩訶衍,說則錯亂,無所成辦。

佛法皆是一種一味,所謂苦盡解脫味。此解脫味有二種:一者、但自爲身,二者、兼爲一切衆生。

雖俱求一解脫門,而有自利、利人之異,是故有大小乘差別。爲是二種人故,佛口所說,以文字語言分爲二種:三藏是聲聞法,摩訶衍是大乘法。

또 아난 존자는 중생들이 뜻하는 지업(志業)의 크고 작음을 헤아려 알았기 때문에 성문들 가운데서 마하연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니, 만약 설하였었다면, 어수선하고 산란하여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무소성판(無所成辦)이었을 것이다.

부처님의 불법은 모두가 한 가지의 일종(一種)이요 한 맛의 일미(一味)이니, 이른바 괴로움이 다하면 해탈하는 고진해탈미(苦盡解脫味)인 것이다.

이 해탈하는 해탈미(解脫味)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일체 중생들을 아울러 위하는 것이다.

비록 다 같이 하나의 해탈문을 구한다 할지라도 자신만을 이롭게 하는 것과 남까지 이롭게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으니, 이러한 까닭으로 대승ㆍ소승의 차별이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두 종류의 사람들을 위하여 부처님의 불구(佛口)로 말씀하신 법을 문자와 언어 두 가지로 나눈 것이니, 삼장은 곧 성문의 법이요, 마하연은 곧 대승의 법인 것이다.


復次,佛在世時,無有三藏名,但有持修多羅比丘、持毘尼比丘、持摩多羅迦比丘。修多羅者,是四『阿鋡』中經名、摩訶衍中經名。修多羅有二分:一者、四阿含中修多羅,二者、摩訶衍經名爲大。修多羅入二分,亦大乘、亦小乘。二百五十戒,如是等,名爲修多羅。毘尼名比丘作罪,佛結戒:應行是、不應行是,作是事得是罪。略說有八十部。

또한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삼장이라는 이름이 없었으며,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수다라(修多羅, 수트라 sūtra, 계경)를 지니는 비구와,

비니(毘尼, 율장)를 지니는 비구와,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율을 정리한 마다라가(摩多羅迦, mātṛkā, 아비담장 阿毘曇藏, Abhidharma-piṭaka)를 지니는 비구가 있었을 뿐이었다.

‘수다라’란 장아함(長阿含), 중아함(中阿含), 잡아함(雜阿含), 증일아함(增一阿含)의 사아함(四阿含) 중의 경명(經名)이요, 마하연(摩訶衍) 중의 경명이며,

수다라는 두 가지로 분류되나니,

첫째는 사아함 중의 수다라요, 둘째는 마하연의 경을 일컬어 대수다라(大修多羅)라 하며,

이 두 가지의 분류에 들어가면서 대승이기도 하고 또한 소승이기도 한 2백 50의 계(戒)가 있으니, 이와 같은 것 등을 수다라라 하며, 

‘비니(毘尼)’란 비구가 죄를 지으면 부처님께서 계(戒)를 결성하여, “마땅히 이것은 행해야 하고, 이것은 마땅히 행하지 않아야 하며, 이러한 일을 하면 이러한 죄를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간략하게 말하자면 80부(部)가 있다.


亦有二分:一者、摩偸羅國毘尼,含阿波陁那、本生,有八十部;二者、罽賓國毘泥,除卻本生、阿波陁那,但取要用作十部。有八十部毘婆沙解釋。是故知『摩訶般若波羅蜜經』等在修多羅經中以經大、事異故別說,是故不在集三藏中。

또한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첫째는 마투라국(摩偸羅國)의 비니로써 아파타나(阿波陀那)와 본생(本生)을 포함한 80부가 있으며,

둘째는 계빈국(罽賓國)의 비니로써 본생과 아파타나를 제외하고, 요긴한 대목만을 추려서 10부로 만든 것이니, 80부 비바사(毘婆沙)의 해석이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마하반야바라밀경' 등은 수다라 가운데에 있으되, 경이 크고 특이한 것으로 보아서 따로 설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집성한 삼장 가운데에는 들지 않는 것이다.


究摩羅耆婆法師,以秦弘始三年歲在辛丑十二月二十日至長安,四年夏,於逍遙園中西門閤上爲姚天王出此釋論,七年十二月二十七日乃訖。其中兼出經本、禪經、戒律、百論、禪法要解,向五十萬言,幷此釋論一百五十萬言。

구마라기바(鳩摩羅耆婆, Kumārajīva, 구마라지바) 법사는 진(秦)나라 홍시(弘始) 3년(401) 신축(辛丑) 12월 20일에 장안(長安)에 이르렀으며,

4년(402) 여름에 소요원(逍遙園)에 있는 서문각(西門閣)에서 요천왕(姚天王)을 위하여 이 석론(釋論)을 펴기 시작하여 7년(405) 12월 27일에야 끝마쳤다.

그 동안 겸하여 경본(經本)ㆍ선경(禪經)ㆍ계율(戒律)ㆍ백론(百論)ㆍ선법요해(禪法要解) 등을 역출한 것이 50만의 말씀에 달하고, 이 석론과 합치면 1백 50만의 말씀이나 된다.


論初品三十四卷,解釋一品,是全論具本;二品已下,法師略之,取其足以開釋文意而已,不復備其廣釋。得此百卷,若盡出之,將十倍於此。

초품(初品)을 논하면서 34권을 하나의 일품(一品)으로 해석하여서 경본(經本)의 전체에 걸쳐 논하였으며,

2품(品) 이하는 법사가 요약하여 그 요긴한 대목만을 취하여서, 그 글의 뜻을 풀이하고 있으니, 그 광대한 해석을 다 갖추어 싣지 못하고 이 100권만을 엮었으니, 만약 빼지 않고 다 펴냈다면 아마 이 해설품의 열배가 되리라.


大智度論卷第一百 終 대지도론 100권을 마침. 

大智度論 釋囑累品 第九十 卷第一百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90. 촉루품(囑累品)을 풀이함 1 
 
▶經. 爾時,佛告阿難:“於汝意云何?佛是汝大師不?汝是佛弟子不?”阿難言:“世尊!佛是我大師,脩伽陁是我大師,我是佛弟子。”

▷경. 그 때에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처님이 바로 너의 큰 스승인 대사(大師)이며, 너는 바로 그 부처님의 불제자인가?”

아난 존자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바로 저의 큰 스승이신 대사(大師)이시며, 번뇌를 끊고 마지막 목적지에 훌륭히 도달하신 수가타(脩伽陁, Sugata, 선서 善逝)는 바로 저의 대사(大師)이시며, 저는 바로 부처님의 불제자입니다.”


佛言:“如是!如是!我是汝大師,汝是我弟子。若如弟子所應作者,汝已作竟。

阿難!汝用身、口、意慈業供養供給我,亦常如我意,無有違失。

阿難!我身現在,汝愛敬供養供給,心常淸淨;我滅度後,是一切愛敬、供養、供給事,當愛敬、供養般若波羅蜜!乃至第二、第三,以般若波羅蜜囑累汝。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나는 바로 너의 대사(大師)요, 너는 곧 나의 제자이며, 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너는 다하여 마쳤느니라.

아난아, 너는 몸과 입과 뜻의 인자한 자업(慈業)으로써 나에게 잘 공양하고 시중하였으며, 항상 나의 뜻과 같아서 어기거나 잘못이 없었느니라.

아난아, 나의 몸은 현재 네가 사랑하고 공경하며 공양하고 시중들어 준 덕분에 마음이 항상 깨끗하였지만, 내가 멸도한 뒤에는 이 일체의 사랑하고 공경하며 공양하고 시중드는 것을 이 반야바라밀에게 돌려서 사랑하고 공경하면서 공양해야 하리니, 두 번 세 번에 이르도록 이 반야바라밀을 너에게 부촉하느니라.


阿難!汝莫忘莫失,莫作最後斷種人!阿難!隨爾所時般若波羅蜜在世,當知爾所時有佛在世說法。

阿難!若有書般若波羅蜜,受持、讀、誦、正憶念、爲人廣說,恭敬、尊重、讚歎,華香、幡蓋、寶衣、燈燭種種供養,當知是人不離見佛、不離聞法、常親近佛。”

아난아, 너는 잊지도 말고 잃지도 말것이며, 최후의 종자를 끊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는니라.

아난아, 반야바라밀이 세간에 있는 한에는 부처님도 세간에 있으면서 법을 설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아야 할지니라.

아난아, 만약 어떤 이가 반야바라밀을 써서 받아 지니는 수지(持受)하고, 읽고 외우는 독송(誦讀)하며, 바르게 기억하는 정억념(正憶念)하고, 사람들을 위하여 널리 설하는 광설(廣說)하며,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면서 꽃ㆍ향ㆍ번기ㆍ일산과 보배 옷이며 등불과 촛불 등의 갖가지로써 공양한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부처님을 뵙는 견불(見佛)을 여의지 않을 것이고, 언제나 법을 듣는 문법(聞法)을 여의지 않으면서, 언제나 부처님을 친근히 하는 친근불(親近佛)한다는 것으로 알아야 하느니라.”

 
佛說般若波羅蜜已,彌勒等諸菩薩摩訶薩、慧命須菩提、舍利弗、大目犍連、摩訶迦葉、富樓那彌多隸耶尼子、摩訶俱絺羅、摩訶迦栴延、阿難等,幷一切大衆,及一切世閒諸天、人、犍闥婆、阿修羅等,聞佛所說,皆大歡喜。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시기를 마치자, 미륵(彌勒) 등의 모든 보살마하살과 혜명(慧命) 수보리(須菩提) 존자ㆍ사리불(舍利弗) 존자ㆍ대목건련(大目揵連) 존자ㆍ마하가섭(摩訶迦葉) 존자ㆍ부루나미다예야니자(富樓那彌多隷耶尼子) 존자ㆍ마하구치라(摩訶俱絺羅) 존자ㆍ마하가전연(摩訶迦旃延) 존자 및 아난 존자 등과 일체 대중과 온갖 세간의 모든 하늘과 건달바와 아수라 등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모두들 크게 기뻐하였다.

 

부루나미다예야니자(富樓那彌多隷耶尼子, Pūrṇa-Maitrāyanīputra) 혹은 부루나미제례야니자경(富樓那彌帝隷耶尼子)라고도 하며, 만원자(滿願子), 만자자(滿慈子) 등으로 의역하기도 한다. 부처님과 생년월이 같으며, 어렸을 때 이미 총명하고, 바라문의 4베다 (성전) 와 오명 (성·인·의·공·내) 에 통하고 있었지만, 세진을 싫어해서 히말라야에 입산학도 해, 고행을 거듭해 무색계와 5신통을 얻었지만, 석가의 성도를 물어, 파라나 (파라나시) 국의 사르나트에 친구와 향해 불제자가 되었다. 남전 「마하바스트」에는, 5신통에 통지한 29명의 제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부처님이 출세했다고 듣고, 베나레스에 향해 석가의 제자가 되었다고 기록된다. 또한 「전대미문인연경」하에서는, 질투심을 위해서 출가해, 20년 수학해 외도의 학을 통해 왕사성에 돌아가 석가불에 논의를 걸었지만, 불에 찢어져 제자가 된, 또 4개의 변세가 만났다고 전하고 있다.
사리불은 그의 덕풍을 그리워해, 일중에 그가 좌선 하는 장소에 가, 자주 문답을 실시해 서로 칭찬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아난도, 신입의 비구사람들에 대해서, 부루나는 매우 도움이 되는 비구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후에 아라한과를 얻어 각지로 향해 가서, 교화의 실을 두어 9만 9000명의 사람들을 교화했다고도 전해진다.- 위키


▶論. 問曰:佛已斷法愛,乃至一切種智、涅槃,不著不取相,今何以種種因緣囑累是法,似如愛著?

▷논.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이미 법애(法愛)를 끊어셨으며, 나아가 일체종지와 열반에도 집착하지 않으시며, 상(相)을 취하지도 않으셨거늘, 지금 무엇 때문에 갖가지의 인연으로 이 법을 부촉하심에 있어서 마치 애착하시는 것과 같이 하신 것입니까?


答曰:諸佛大慈悲心,從初發意已來乃至到涅槃門,常不捨離。於娑羅雙樹閒,以金鋼三昧,爲衆生碎身如麻米,何況經法多所饒益而不囑累!又阿難是未離欲人,未盡知般若波羅蜜力勢果報多所利益,是以慇懃囑累:“汝當好受持無令忘失!”是故佛雖於一切法無憎愛、常寂滅相,而囑累是般若。

답하나니, 모든 부처님의 큰 자비심은 처음 뜻을 낸 초발의에서부터 열반의 문에 도달하기까지 언제나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신 것이며, 사라쌍수(娑羅雙樹, 부처님께서 이 나무아래에서 열반에 드셨음)에 이르시기까지에서 금강삼매(金剛三昧)로써 중생들을 위하여 몸을 부수기를 마치 한 톨의 깨나 쌀처럼 하셨거늘,

하물며 이익이 많은 경법(經法)을 어찌 부촉(付囑)하지 않으실 수 있겠는가?

또 아난 존자는 아직 욕탐을 여의지 못한 사람이라서 아직 반야바라밀의 세력과 과보에 이익이 많은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은근하게 “너에게 부촉하노니, 마땅히 잘 받아 지니면서 잊거나 잃지 않아야 하느니라”고 하신 것이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에서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것도 없이, 항상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심에도 이 반야를 부촉하신 것이다.


問曰:阿難是聲聞人,何以以般若波羅蜜囑累,而不囑累彌勒等大菩薩?

묻나니, 아난 존자는 곧 성문인(聲聞人)이거늘 무엇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부촉하신 것이며, 미륵 등의 큰 보살에게 부촉하지 않으셨던 것입니까?


答曰:有人言:阿難常侍佛左右,供給所須,得聞持陁羅尼,一聞常不失。旣是佛之從弟,又多知多識,名聞廣普,四衆所依,是能隨佛轉法輪第三師。佛知舍利弗壽短早滅度故不囑累。又阿難是六神通、三明、共解脫五百阿羅漢師,能如是多所利益,是故囑累。

답하나니, 어떤 분은 말하기를, “아난 존자는 항상 부처님을 그 곁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필요한 것을 시중들었으며, 문지다라니(聞持陀羅尼)를 얻었으므로 한 번 들은 것은 결코 잊지 않았으며, 또한 그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는 것이 많고 명문(名聞)이 넓었으므로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니(優婆尼)의 4중(衆, 사부대중)이 그를 의지하고 있었으므로, 능히 부처님에 이어서 법의 바퀴를 굴릴 제3의 스승이 될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사리불(舍利弗) 존자는 수명이 짧아서 일찍 멸도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에게 부촉하지 않으셨으며, 

또 아난 존자는 6신통(神通)과 숙명지명(宿命智明) · 천안지명(天眼智明) · 누진지명(漏盡智明)의 삼명(三明)의 두 가지 해탈을 다 같이 증득하신 분이요, 5백 아라한의 스승이으로써 많은 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그에게 부촉한 것이다”고 하였다.


彌勒等諸大菩薩,佛滅度後,各各分散,至隨所應度衆生國土 彌勒還兜率天上,毘摩羅鞊、文殊師利亦至所應度衆生處。佛又以是諸菩薩深知般若波羅蜜力,不須苦囑累。阿難是聲聞人,隨小乘法,是故佛慇懃囑累。

미륵 등의 큰 대보살들은 부처님이 멸도하신 뒤에 저마다 이리저리 흩어져서 그들이 제도해야 될 중생들이 살고 있는 국토에 가게 되어 있었으니, 미륵 보살은 도솔천(兜率天) 위로 돌아가게 되고,

비마라힐(毗摩羅詰, 유마힐)과 문수사리(文殊師利) 보살 또한 제도해야 할 중생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보살들은 반야바라밀의 힘을 깊이 알고 있었으므로 애써서 부촉하실 필요가 없었지만, 아난 존자는 바로 성문인이라서 소승의 법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은근히 그에게 부촉하신 것이다.


問曰:若爾者,『法華經』、諸餘方等經,何以囑累喜王諸菩薩等?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법화경(法華經)'이나 그 밖의 모든 방등경(方等經) 등은 무엇 때문에 애호할 수 있는 왕에게나 모든 보살들에게 부촉하신 것입니까?

 

答曰:有人言:是時,佛說甚深難信之法,聲聞人不在。又如佛說『不可思議解脫經』,五百阿羅漢雖在佛邊而不聞,或時得聞而不能用。是故囑累諸菩薩。

답하나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때 부처님께서는 심히 깊은 심심(甚深)하고 믿기 어려운 난신(難信)의 법을 말씀하고 계셨는데, 그 곳에 성문인은 없었으며, 또한 부처님께서 '불가사의해탈경(不可思議解脫經)'을 설하실 때와 같이, 5백의 아라한이 비록 부처님 곁에 있었으나, 그들은 듣지 못하였으며, 간혹 들음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에 보살들에게 부촉하신 것이다”고 하였다.


問曰:更有何法甚深勝般若者,而以『般若』囑累阿難,而餘經囑累菩薩?

묻나니, 다시 어떠한 법이 그렇게 깊어서 반야보다 뛰어난 것이기에 '반야경'은 아난 존자에게 부촉하시면서 그 밖의 다른 경은 보살에게 부촉하신 것입니까?


答曰:般若波羅蜜非秘密法。而『法華』等諸經說阿羅漢受決作佛,大菩薩能受持用;譬如大藥師能以毒爲藥。

復次,如先說,般若有二種:一者、共聲聞說;二者、但爲十方住十地大菩薩說,非九住所聞,何況新發意者!

復有九地所聞,乃至初地所聞,各各不同。般若波羅蜜摠相是一,而深淺有異,是故囑累阿難無咎。

답하나니, 반야바라밀은 비밀스런 법이 아니다. 그러나 '법화경' 등의 모든 경에서는 “아라한이 수기를 받고 부처님이 된다”는 것 등을 말씀하시고 있으며, 큰 보살들이라야 능히 받아 지녀서 이용할 수 있으니, 마치 큰 약사(藥師)라야 능히 독을 약으로 쓸 수 있는 것과 같으며, 

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반야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성문과 함께하면서 설하는 반야요,

둘째는 다만 시방의 10지(地)에 머무르는 대 보살들만을 위하여 설하는 반야이니, 9지(地)에 머무른 이도 들을 수 있는 바가 아니거늘, 하물며 새로이 뜻을 낸 신발의자 이겠는가?

또한 9지에서 들을 법이 있고 나아가 초지(初地)에서 들을 법이 있으니, 저마다 같지 않으며,

반야바라밀의 전체의 총상(總相)은 바로 하나인 일(一)이면서도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아난에게 부촉하신 것이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이다.


問曰:先「見阿閦佛品」中囑累,今復囑累,有何等異?

묻나니, '아촉불품(阿閦佛品)'에서도 부탁하시는 촉루(囑累)가 있고, 여기에도 촉루가 있는데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答曰:菩薩道有二種:一者、般若波羅蜜道,二者、方便道。先囑累者,爲說般若波羅蜜體竟;今以說令衆生得是般若方便竟,囑累。以是故,「見阿閦佛」後,說「漚和拘捨羅品」。

답하나니, 보살의 도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반야바라밀의 도요, 둘째는 방편도(方便道)이다.

앞에서의 부촉은 반야바라밀의 본체(體)에 대한 설법을 마치시면서 하신 부촉이요,

여기에서는 중생으로 하여금 이 반야의 방편을 얻게 하기 위한 설법을 마치시면서 하신 부촉이므로, 아촉부처님 뒤에 구화구사라(漚和拘捨羅, upāya-kauśalya. 선교방편 善巧方便)를 설하는 품이 있는 것이다.

 

般若波羅蜜中雖有方便,方便中雖有般若波羅蜜,而隨多受名。般若與方便,本體是一,以所用小異故別說;譬如金師以巧方便故,以金作種種異物,雖皆是金,而各異名。

반야바라밀에도 비록 방편이 있고 또 방편 가운데에도 반야바라밀이 있기는 하나, 어디에 더 많이 포함되었는가에 따라 이름이 붙여지는 것이니, 반야와 방편의 본체는 바로 하나(一)이면서도 그 작용하는 부분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는 것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금세공사가 뛰어난 방편으로 금으로 갖가지의 다른 물건을 만들었다면, 비록 그 모두가 금일지라도 저마다 그 이름을 달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菩薩得是般若波羅蜜實相,所謂一切法性空、無所有、寂滅相,卽欲滅度;以方便力故,不取涅槃證。是時,作是念:“一切法性空,涅槃亦空,我今於菩薩功德未具足,不應取證;功德具足,乃可取證。”是時,菩薩以方便力,過二地,入菩薩位;住菩薩位中,知甚深微妙無文字法,引導衆生,是名方便。

보살은 이 반야바라밀의 실상(實相)을 얻었으니, 이른바 일체법의 성품은 공한 일체법성공(一切法性空)이고,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라서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 그것이니,

곧 멸도하고자 하여도 방편력 때문에 열반의 증득을 취하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일체법의 법성(法性)은 공(空)한 것이므로 열반 또한 공한 것이니, 지금 나는 보살의 공덕을 아직 완전히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증득을 취하지 않아야 하며, 공덕이 완전히 갖추어진 때에 증득을 취하여도 좋을 것이다’라고 하며,

이 때에 보살은 그 방편력으로 성문ㆍ연각의 두 지위를 뛰어넘어서 보살위에 들어가게 되며, 보살위에 머물면서 매우 깊고 미묘한 심심미묘(甚深微妙)하고 문자가 없는 무문자법(無文字法)을 알아서 중생을 인도하나니, 이것을 곧 방편(方便)이라 하는 것이다

 

復次,有方便 菩薩知一切法畢竟空性、無所有,而能還起善法、行六波羅蜜,不隨空。若能生四種事:若疑、若邪見、若入涅槃、若作佛;以般若有如是分別,若能除邪、疑,不入涅槃,是爲方便。

有人言:般若波羅蜜多所饒益,於大珍寶聚中最勝。佛知滅度後,多有怨賊欲毀壞者,品品囑累猶尚無咎,何況二處!

다시 방편이 있으니, 보살은 일체법은 필경공의 성품(性)이라서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리어 착한 선법을 일으켜서 6바라밀을 행하면서 공(空)을 따르지 않나니,

만약 의심(疑)이나, 삿된 사견(邪見)이나, 열반에 드는 입열반(入涅槃)이나, 부처님이 되는 작불(作佛)의 이러한 네 가지를 내게 될 때에는, 반야로써 이와 같이 분별하여서 삿된 사견(邪見)과 의심(疑)은 없애고, 열반에 들지 않는다면 이것도 곧 방편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은 이롭게 함이 많아서 크고 진기한 보배의 더미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으니,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많은 원적들이 헐뜯고 무너뜨리고자 할 것임을 아셨으므로 품(品)마다 부촉하셨으니, 이러함에 오히려 허물이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두어 군데에서 부촉한 것이랴!

大智度論 論釋曇無竭品 第八十九 卷第一百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9. 담무갈품을 풀이함 3


如五衆無邊者,五衆常遍滿世間;般若波羅蜜亦如是,不遠離於五衆,五衆實相卽是般若波羅蜜。

復次,如色等法,分析破裂,乃至微塵則無方,無方故無邊;無色法,無形故無此彼,無此彼故無邊。

般若波羅蜜亦如是,於一切法,分別色乃至微塵、分別無色法乃至一念中,不見決定有常樂我淨。

是故說色無邊故般若無邊。

‘오중(五衆)이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다’고 함이란, 마치중이 항상 세간에 가득  있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 또한 이와 같아서 5중을 멀리 여의지 않는 것이니, 오중의 실상이  반야바라밀인 것이다.

또한 마치 형색이 있는 색법(色法) 등은 낱낱이 쪼개고 깨뜨려서 작은 티끌이 되면 방소가 없게 되고, 방소가 없기 때문에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며, 무색법이라서 형태가 없는 무형(無形)이기 때문에, 이것이라거나 저것이라는 것도 없으며, 

이것저것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끝이 없는 무변(無邊)인 것이니,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일체법에 대하여 색(色)을 분별해서 작은 티끌에까지 이르고, 형색 없는 무색법(無色法)을 분별하여  생각의 일념(一念)에 이르기까지도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 있는 것을 결정코 보지나니, 

 때문에 “물질(色)이 끝이 없는 무변한 것이기 때문에 반야도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다”고 하는 것이다.


乃至虛空六種,亦如是。如金鋼等者,如天王所執金鋼,無憎無愛,隨所用處,無不摧碎;諸佛一切智前心,此心中三昧能斷一切結使煩惱顚倒及習皆滅,故名爲如金鋼。

如金鋼三昧相應智慧觀一切法皆平等,般若波羅蜜觀諸法平等亦如是。何以故?般若先觀諸法平等,然後得是三昧。

나아가 허공에 이르기까지의 여섯 가지 또한 이와 같으니,

‘금강과 같이 평등한 여금강등(如金剛等)’이라 함은, 마치 천왕(天王)이 가지고 있는 금강은 미워함도 없고 사랑함도 없어서 사용하는 곳마다 자르고 부수지 못함이 없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일체지(一切智) 앞에서의 전심(前心)이라는  마음 속의 삼매는 일체의 결사(結使)의 번뇌와 뒤바뀜의 전도(顚倒)와 습기(習氣)를 모두 끊어서 소멸시키기 때문에 금강과 같다고 하는 것이며, 

여금강(如金剛)삼매와 상응하는 지혜로 일체법 모두가 평등하다고 관찰하나니, 반야바라밀이법을 평등하다고 관찰하는 것도 이와 같으니, 왜냐 하면, 반야로 먼저법이 평등하다고 관찰한 연후에  삼매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諸法無分別者,世間凡夫煩惱力故,種種分別諸法;得諸法實相,則皆破壞、變異。是故聖人得般若波羅蜜,不隨憶想分別諸法,入空、無相、無作三昧中;若得諸法變異時,則不憂愁,以先來不分別取諸法相故。

‘제법은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이다’고 함이란, 세간의 범부들은 번뇌의  때문에 갖가지로 법을 분별하지만, 법의 실상을 얻으면 모두가 파괴되고 변하여 달라지기 때문에 성인은 반야바라밀은 얻음으로써 생각하고, 분별하는 제법을 따르지 않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삼매에 들어가며, 

설령 법이 변하여 달라질 때에도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나니, 그것은 이미 제법의 법상(法相) 분별하거나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諸法性不可得者,一切法皆從因緣和合生,無有無因緣、若少因緣而起者;若從因緣生,則無自性。

性者,名本有決定實事。

‘제법의 성품은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다’고 함이란, 일체 모두는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는 것이요, 인연없이 있게 되는 것이 없으니,

만약 작은 인연으로도 생기게 되거나, 또는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면,  스스로의 성품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이니, 성품의 성(性)이란 본래부터 있는 본유(本有)의 결정된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若性從因緣和合邊生,當知未和合時則無;若先無今從因緣和合有者,則知無性。

若從因緣而生性者,性卽是作法。性名不相待、不相因,常應獨有;如是有爲法則無。

是故言“一切諸法性不可得,般若波羅蜜性亦爾”。

만약 성품(性)이 인연 화합의 편에서 생긴다면, 아직 화합하지 않았을 때에는  없다는 것을   있으며, 

앞에서 없었는데 지금은 인연의 화합으로부터 있게 된 것으로, 곧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라는 것을   있는 것이다.

만약 인연으로부터 성품(性)이 생겼다면, 성품(性)은  짓는 작법(作法)이며, 성품(性)은 서로 기다리지 않는 불상대(不相待)이며, 서로 의지하지 않는 불상인(不相因)이라서 언제나 홀로 존재하는 것이니,

유위법(有爲法)은 곧 이와 같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법의 성품(性)은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다’고 말하며, 반야바라밀의 성품(性) 역시도 그러한 것이다.


諸法無所有等故者,諸法性不可得故,衆因緣亦不可得;衆因緣亦不可得故,皆是無所有;入無所有中故,則皆平等。所以者何?有,故有分別;無,故無分別。如草香、栴檀香,燒時有分別。滅時無分別。

‘제법은 있지 않은 무소유(無所有)이니, 평등하기 때문이다’고 함이란,법의 성품은 얻을  없는 불가득이기 때문에  인연 또한 얻을  없는 것이고,  인연은 얻을  없는 불가득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있지 않은 무소유이며, 무소유 가운데에 들어간 때문에  모두가 평등한 것이니,

왜냐하면, 있는 유(有)이기 때문에 분별이 있으며, 없는 무(無)이기 때문에 분별이 없는 것이니, 

마치 초향(草香)과 전단향(栴檀香)을 사를 때에는 분별이 있지만, 둘  없어졌을 때에는 분별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諸法無作者,衆生空、法空故,則皆無作。衆生所作者,所謂十善、十不善等。

‘제법은 짓는 바가 없는 무작(無作)이다’고 함이란, 중생공(衆生空)이 공(法空)이기 때문에 모두가 짓는 바가 없는 무작(無作)이라 것으로,

중생으로서 짓는 소작(所作)이란 이른바  가지의 착한 십선(十善)과  가지의 착하지 않는 십불선(十不善) 등을 말하는 것이며, 

 

法作者,所謂火然、水流、風動、識能識,智能知如是法,各各自有力。無衆生乃至無知者、見者,無色等乃至一切種智,先已破。破衆生故無作者,破法故無所作;但凡夫人顚倒覆故言:“我有所作。”

‘법작(法作)’이라 함이란, 이른바 불은 타는 것이며, 물은 흘러 가는 것이며, 바람은 움직이는 것이고, 의식(識)은 식별하며, 지혜는 아는 것이니, 이와 같이 법에는 저마다 각각의 자신이 지니고 있는 힘이 있으며,

중생도 없는 무중생(無衆生)이고 나아가 아는 지자(知者)ㆍ보는 견자(見者)도 없으며, 물질(色) 등과 일체종지까지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파괴하였으니, 중생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가 없는 무작자(無作者)이고, 법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짓는 바가 없는 무소작(無所作)이거늘, 다만 범부인은 뒤바뀌고 가려진 까닭에 ‘나는 짓는 바가 있는 아유소작(我有所作)이다’고 말하는 것일 뿐인 것이다.


諸法不可思議者,色等一切法不得決定 若常、若無常,若苦、若樂,若實、若空,若我、若無我,若生滅、若不生滅,若寂滅、若不寂滅,若離、若不離,若有、若無等種種門分別,亦如是不可得思議。

‘제법불가사의(諸法不可思議)’란, 물질(色) 등의 일체법은 항상 있는 상(常) 이라거나, 무상(無常)이라거나, 괴롭다거나 즐겁다거나, 진실하다거나 공하다거나, 나(我)라거나, 무아(無我)라거나, 나고 없어지는 생멸(生滅)하는 것이라거나, 불생멸(不生滅)이라거나,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이라거나, 불적멸(不寂滅)이라거나, 여의는 이(離)라거나, 불리(不離)라거나, 있다는 유(有)라거나, 없다는 무(無)라는 등으로 결정할 수도 없으며, 

갖가지의 문으로 분별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미루어 헤아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所以者何?是法皆從心中憶想分別生,亦不可決定;一切法實性,皆過心、心數法、出名字語言道。如前品說:“一切諸法平等,一切賢聖不能行、不能到。”是故不可思議。般若波羅蜜亦爾,觀是法故生。是時,薩陁波崙卽於坐上得諸三昧

왜냐하면, 이러한  모두는 마음속의 생각과 분별에서부터 생기는 것이고, 또한 결정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체법의 진실한 성품의 실성(實性) 모두는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心數法)을 벗어나고, 이름과 말의 언어도(言語道)를을 초월한 것이니, 

앞의 품에서 “일체법의 평등은 일체의 성현들도 행할  없고 도달할 수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이러한 때문에 불가사의한 것이니, 반야바라밀 또한 그러한 것으로, 이러한 법을 관찰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 때에 살타파륜보살은 바로  자리에서 모든 삼매를 얻게 되었다.


問曰:薩陁波崙先已知諸法空相,今種種勤苦,住立七歲,見曇無竭得何等利益?

묻나니, 살타파륜은 이미 앞에서 제법의 공한 법공상(法空相) 알았으며, 지금은 갖은 고행을 하면서 서서 7년 동안 지내다가 담무갈을 보게 되었는데, 어떠한 이익을 얻은 것입니까?


答曰:薩陁波崙先見諸佛,得諸三昧,貴重般若波羅蜜生著相;今曇無竭七歲從定起,爲說般若破其著心,一切法性自空,非般若波羅蜜令其空。是故說:“諸法等故,般若波羅蜜等;諸法離相,乃至諸法不可思議故,般若不可思議。”

답하나니, 살타파륜은 이미 모든 부처님을 뵈었으며, 모든 삼매를 얻었으나, 반야바라밀을 귀중히 여기어서 탐착하는 착상(著相) 내고 있으므로, 이제 담무갈은 7년 만에정에서 일어나서 그를 위하여 반야를 설해 주어서 그의 탐착하는 착심(著心) 깨뜨려 준 것이다. 

온갖 법의 성품(性)은 본래 공한 자성공(性自空)이요, 반야바라밀이 있어서 그것을 공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기를 “제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평등하고,법은 여읜 이상(離相)이며, 나아가법은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반야도 불가사의한 것이다”라고  것이다.


不令輕賤餘法、貴重般若。何以故?不令因般若故更生垢著。般若波羅蜜雖畢竟淸淨,多所饒益,復不可取相而生著心;如熱金雖好,不可手捉。

薩陁波崙得是教化,斷般若中著心,卽得諸法等諸三昧。句句解說,散亂心中,但有智慧,不名三昧;今從師聞已,一心思惟,名爲三昧,攝心不散,智慧變成三昧。如風中燈不能照明,在靜室閉門,明乃遍照。

 밖의 다른 법을 소홀히 여기거나 반야만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도록  것이니, 

왜냐하면 반야로 인하여 다시 때가 끼는 구착(垢著)을 하게 되어서는  되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이 비록 필경에는 청정하고 요익(饒益)하는 바가 많을지라도, 다시  상(相) 취해서 탐착하는 마음의 착심(著心)을 내어서는  되는 것이니, 마치 불에 달구어진 금이 비록 좋을지라도 손으로 잡을 수는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살타파륜은 이러한 교화를 받고서, 반야에 탐착하는 착심(著心) 끊고 제법등(諸法等)의 모든 삼매를 얻었으니, 구절구절마다 해설하고 있으며, 

산란한 마음 가운데에 다만 지혜만이 있는 것을 삼매라 하지 않는 것으로, 스승으로부터 들은 뒤에 일심(一心)으로 사유(思惟)하는 것을 삼매라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서 흩어지지 않아서 지혜가 변하여 삼매로 되는 것이니, 

마치 바람 속에서는 등불이 빛을 밝게 비추지 못하다가 문을 닫은 고요한 방에서 비로소 밝게 비추는 것과 같은 것이다.


先已欲界心散亂故,智慧力未成就;今入攝心中,所聞諸法皆名三昧,能破諸煩惱等及魔人民。如水,寒風未至,未成爲冰,則無堅用;若成凍冰,能有所蹈。

得如是等六百萬三昧門:薩陁波崙得聞曇無竭所說法,得諸法中大智慧明,所謂種種諸法實相門。諸法平等 平等是智慧,入薩陁波崙禪定心中,變爲三昧。

앞에서는 욕계의 마음으로 마음이 산란하였기 때문에 지혜의 힘이 성취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마음을 가다듬어서 섭심(攝心) 속에 들어가 있으므로 들은 바의 제법을 모두 삼매라 하는 것이니, 

모든 번뇌 등과 악마의 백성을 파괴할  있는 것이, 마치 찬바람이 불지 않아서 아직 얼음이 얼지 않았을 때에는 견고하지 않으나, 얼음이 얼게 되면 걸어 갈 수도 있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6백만의 삼매문(三昧門)을 얻었으며, 살타파륜은 담무갈이 설법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으며, 제법 가운데에서  지혜의 광명을 얻었으니, 이른바 갖가지법의 실상문(實相門)인 것이며, 제법의 평등이 그것이니, 

평등이 바로 지혜이니, 살타파륜의 선정심(禪定心) 속에 들어가서 삼매가 된 것이다.


今欲說三昧、智慧今世後世果報故,爾時,佛告須菩提:“如我今在大衆中說般若,以是相、以是像貌、以是名字說般若;薩陁波崙從曇無竭得是三昧,於三昧中見十方佛在大衆中說般若亦如是。

지금 삼매와 지혜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금세와 후세 과보 때문이니, 

이때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기를 “마치 내가 지금 대중 가운데에서 반야를 설하면서 이러한 모양의 이시상(以是相)ㆍ이러한 모습의 이시상모(以是像貌)ㆍ이러한 이름의 이시명자(以是名字)로써 반야를 설하고 있는 것과 같이,

살타파륜이 담무갈로부터  삼매를 얻은 가운데에서 시방의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반야를 설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된 것 역시도 그러하였느니라.


須菩提!薩陁波崙從是以後深愛樂法故,多集諸經,廣誦多聞。如阿難,佛所說皆能持;薩陁波崙亦如是,多聞、智慧不可思議,如大海水。卽於是世常不離佛。”如是等名爲今世果報。

수보리야, 살타파륜은 이로부터는 법을 깊이 좋아한 까닭에 모든 경전을 모아서 널리 독송하고 많이 들었느니라. 

마치 아난이 부처님의 말씀을 모두   지니는 것과 같이, 살타파륜도 이와 같아서 많은 견문(見聞)과 지혜가 불가사의하여 마치  바닷물과 같았으며,   세상에서 언제나 부처님을 여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것들을 이름 하여 금세에서의 과보라 하느니라.


捨身常生有佛國中,好修行念佛三昧故,乃至夢中初不離見佛。地獄等諸難皆已永絕,隨意往生諸佛國土;以其深入般若波羅蜜、集無量功德故,不隨業生。薩陁波崙從一佛土至一佛土,供養諸佛,度脫衆生,集無量功德;譬如豪貴長者,從一會至一會,乃至今在大雷音佛所,淨修梵行。若有欲求般若波羅蜜者,當如薩陁波崙菩薩,堅正一心,不可傾動!

몸을 버린 뒤에는 항상 부처님께서 계신 나라에 태어났으며,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수행하기 좋아한 까닭에 꿈속에서까지도 부처님을 뵙는 일을 여의지 않았으며, 지옥 등의 모든 재난은 모두 영원히 끊어졌으며,

뜻하는 바대로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 태어났으니, 그는 깊이 반야바라밀에 들어가서 무량한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업(業)을 따라 태어나지 않는 불수업생(不隨業生)이니라.

살타파륜은 한 부처님의 일불토(一佛土)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의 일불토(一佛土)에 이르면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중생을 제도하여서 벗어나게 하는, 무량한 공덕을 쌓고 있나니, 마치 호귀(豪貴) 장자가 한 모임에서 다른 한 모임에 이르며, 나아가 지금은 대뢰음(大雷音)부처님 처소에 있으면서 범행(梵行)을 깨끗하게 닦는 것과 같았느니라.

만약 어떤 이가 반야바라밀을 구한다면, 마땅히 살타파륜 보살마하살이 견고하고 바르며 일심이라서 움직일 수 없었던 것과 같이 해야 하느니라”고 하셨다.

 

是故當知般若波羅蜜因緣故,能成就一切功德者,諸菩薩等得般若者,貪欲瞋恚等在家罪垢、邪疑戲論等出家罪垢,皆悉除滅,得心淸淨;心淸淨故,得一切功德成就。

得一切種智者,所謂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六波羅蜜者,從初地乃至七地得無生忍法;八地、九地、十地,是深入佛智慧,得一切種智,成就作佛。於一切法得自在者,皆應受持,乃至華香、妓樂。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의 인연으로 일체의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고 함이란,

모든 보살들로서 반야를 얻은 이는 탐욕ㆍ성냄 등의 재가(在家)하는 이의 허물의 죄구(罪垢)나, 삿된 의심과 희론 등의 출가(出家)한 이의 허물의 죄구(罪垢)들을 모두 다 제거하여서 마음이 깨끗하며,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일체의 공덕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체종지를 얻는다’고 함이란, 이른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며, 

‘육바라밀’이라 함이란, 초지(初地)에서부터 7지(地)까지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으며,

8지ㆍ9지ㆍ10지는 바로 부처님의 지혜인 불지혜(佛智慧)에 깊이 들어가서 일체종지를 얻어서 부처를 이루어서 일체법에서 자유자재하게 되는 것이니, 모두가 받아 지니는 응수지(應受持)하며, 나아가 꽃과 향과 기악으로써 공양해야 하는 것이다.


須菩提雖常樂空行,佛共說般若,又得無諍三昧故,不應囑累。阿難得聞持陁羅尼,又常親近世尊,故廣囑累。

수보리 존자는 비록 항상 공행(空行)을 좋아하였으나, 부처님과 함께 반야를 설하고 또 무쟁(無諍)삼매를 얻었으므로 부탁하여 맡길 수 있는 부촉(囑累)을 할 수 없었으나,

아난(阿難)은 문지다라니(聞持陀羅尼)를 얻었으며, 또한 항상 세존을 곁에서 가까이 모시고 있었으므로 자세히 부촉한 것이다.

大智度論 論釋曇無竭品 第八十九 卷第一百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9. 담무갈품을 풀이함 2

 

問曰:平等者,於般若波羅蜜相已具足,何以故更說“離等是般若波羅蜜相”?

묻나니, 평등(平等)이란, 반야바라밀의 상(相) 이미 두루 갖추어진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여읨의 이(離) 등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상(相)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經中但說“諸法等故般若等”,行者取是平等相而生著,

是故說:“般若波羅蜜平等相自性離,色等諸法自相離故。”離義,如「相無相品」中說。

답하나니, 경에서는 다만 “제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반야도 평등하다”고 말하였을 뿐인데, 

수행하는 행자가  평등한 상(相) 취하여 집착하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평등한 평등상(平等相)이라 스스로의 성품을 여의는 자성이(自性離)이다”고 말하는 것이니, 물질(色) 등의법은 스스로의 성품을 여의는 자성이(自性離)이기 때문이다.

여읨의 이(離)의 뜻에 대해서는 '상무상품(相無相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得此諸法平等,又於平等離,安住空中,空中則不動 戲論不能動,諸煩惱山亦不能動,無常時亦不能動。所以者何?於一切法得實相故。

菩薩住是二空,得不動般若波羅蜜,是則究竟。若有念,卽是有相著處;是故說:“諸法無念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念。”無動相是般若波羅蜜,般若波羅蜜諸相滅故。

법의 평등을 얻었으며,  평등하게 여의는 평등이(平等離)에서 공(空) 가운데에 안주하나니,

공(空)한 가운데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부동(不動)이라서, 희론으로도 움직일  없고, 모든 번뇌의 산(山)으로도 움직일  없으며, 덧없는 무상시(無常時)로도 움직일  없으니, 왜냐하면 일체법의 실상(實相)을 얻었기 때문이다.

보살은   가지의 이공(二空)에 머무르면서 움직이지 않는 부동(不動) 반야바라밀을 얻나니, 이것이  궁극의 경지인 구경(究竟)인 것이니,

만약 생각(念)이 있으면, 상(相) 있고 집착할 곳이 있게 되나니, 그러므로 말하기를 “제법은 생각이 없는 무념(無念)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생각이 없는 무념(無念)이라고 알아야 한다”고  것이다.

움직임이 없는 무동상(無動相)이  반야바라밀이니, 반야바라밀은 모든 상(相) 소멸한 것이기 때문이다.


若不念是般若,或迷悶無所趣向,有戲論者,在大衆中則生怖畏;或於涅槃中不了故,亦生怖畏。

是故說“無怖畏相是般若波羅蜜”。

만약 생각하지 않는 불념(不念) 바로 반야라면, 미혹과 번민이 향하여 나아갈 곳이 없으며,

희론(戲論)을 펴는 이는 대중 가운데에 있으면서 두려운 생각을 내기도 하며, 혹은 열반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도 역시 두려운 생각을 내기도 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두려워함이 없는 무외상(無畏相)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라고  것이다.


是人雖不決定取諸法相,而深入法性故,於大衆中有難論諸相者,心無所畏,於諸法得無相故。

又入無生法忍時,知一切法不可得,於是中亦無所畏。所以者何?是菩薩善通達一切法故。

復次,一切法一相,所謂性空;是故般若波羅蜜隨一切法故,亦性空一味。

이러한 사람은 비록 결정적으로법의 상(相) 취하지 않는다 할지라 법의 성품인 법성(法性)에 깊이 들었기 때문에 대중 가운데에서 모든 상(相) 대하여 힐난하는 이가 있어도 마음으로 두려워함이 없으니,법에서 무상(無相)을 얻었기 때문이며,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어갈 때, 일체법은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임을 아나니,  가운데서도 또한 두려워함이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보살은 일체법을  통달한 때문이며, 

일체법은  모양의 일상(一相)이라서 이른바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일체법을 따르며, 따라서 역시 성품이 공한 성공(性空)과  맛의 일미(一味)인 것이다.


問曰:上已說諸法平等,今何以更說一味?

묻나니, 앞에서 이미법은 평등하다고 설명하였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한 맛의 일미(一味)’를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空,或時有味,或時無味。若行者,爲諸見取相分別好醜籌量,爾時得是諸法平等空 心大歡喜故名爲味。如人爲熱渴所逼,得淸冷水,以爲眞味無比,隨時用故名味。眞實畢竟空,則無味、不味。

답하나니, 공(空)은 때로는 맛이 있는 유미(有味)이기도 하고, 때로는 맛이 없는 무미(無味)이기도 하니,

만약 수행하는 행자의 소견으로 상(相)을 취하면서 아름답다거나 추하다는 것을 분별하고 헤아리던 때에 법의 평등공(平等空)을 얻게 되면, 마음이 크게 기뻐지기 때문에 이것을 맛의 미(味)라 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몹시 덥고 목이 마를 때, 맑고 시원한 물을 얻으면, 비교할  없이 맛있는 진미(眞味)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것으로, 때에 따라 작용하기 때문에 맛의 미(味)라 하지만, 진실로 필경공이라면 맛의 미(味)도 맛이 없는 것도 아닌, 불미(不味)인 것이다.


復次,一味者,菩薩行般若波羅蜜時,所緣、所觀皆爲一味;空智力大故,餘法皆隨而爲空。譬如煮石蜜欲熟時,雖異物和合,皆爲石蜜。又如大海,百川歸之,皆爲一味,所謂畢竟空味。

色等諸法亦如是,凡夫心中各各別異;入般若波羅蜜中,皆爲一味。邊名爲相,若有、若無。實觀色等諸法非有非無故無相,無相卽是無邊;觀是已,卽是無邊般若波羅蜜。

 ‘한 맛의 일미(一味)’라 함은,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반연할 바의 소연(所緣)과 관찰할 바의 소관(所觀) 모두  맛의 일미(一味)가 되는 것이니, 공에 대한 지혜의 힘이 크기 때문에  밖의 다른 법들도 모두 따라서 공하게 되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마치 석밀(石蜜)을 불에 끓일 때, 비록 다른 물질이 화합하였을지라도 모두가 석밀이 되는 것과 같으며, 

또한 마치 대해(大海)에는 온갖 하천의 물이  곳으로 흘러들어가서 모두가  맛의 일미(一味)가 되는 것과 같나니, 

이른바 필경공의 맛인 필경공미(畢竟空味)인 것이며,  

물질(色) 등의 또한 이와 같아서 범부의 마음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반야바라밀의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면 모두가  맛의 일미(一味)가 되는 것이다.

치우친 변(邊)을 상(相)이라 하나니, 있다는 유(有)거나 없다는 무(無)라는 것이며,

물질(色) 등의법을 실관(實觀)한다면 있다는 유(有)도 아니요, 없다는 무(無)도 아니기 때문에 무상(無相)이며,

무상(無相)인 것은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고 관찰한다면, 그것이 곧 끝이 없는 무변(無邊) 반야바라밀인 것이다.


復次,有人言:邊有二種:常邊、斷邊,世間邊、涅槃邊,惡邊、善邊等。此中無如是等諸邊故,名爲無邊般若波羅蜜。復次,有人言:邊名前際、後際。世閒無始故無前際,入無餘涅槃故有前際;不復更出故無後際。如是等分別諸邊,著世閒故畏涅槃。是故般若波羅蜜中無是一切邊,但聞諸法實相無入無出。

또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치우침의 변(邊)에는  가지가 있으니, 

항상하다는 치우침의 상변(常邊)과 아주 없다는 치우침의 단변(斷邊)이요, 

세간에 대한 치우침인 세간변(世間邊)과 열반에 대한 치우침인 열반변(涅槃邊)이며, 

나쁜 것에 대한 치우침인 악변(惡邊)과 착한 것에 대한 치우침인 선변(善邊) 등이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는 이와 같은 등의 모든 치우친 소견의 변(邊)이 없기 때문에 치우침이 없는 무변(無邊) 반야바라밀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치우침의 변(邊)을 전제(前際, 과거)와 후제(後際, 미래)라 한다”고 하며,

세간은 비롯함이 없는 무시(無始)이기 때문에 전제가 없으나,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기 때문에 전제가 있으며, 

 다시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후제도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모든 치우침을 분별하면서 세간에 집착하기 때문에 열반을 두려워하 되며,

 때문에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이러한 일체의 치우침이 없으며, 다만 제법의 실상에는 들어가는 것도 없는 무입(無入)이고 나오는 것도 없는 무출(無出)이라고 들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問曰:諸法平等、諸法離皆是無邊,何以復別說?

묻나니, 제법의 평등과법의 여읨인 이(離) 모두에는 치우침이 없는 무변(無邊)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별도로 설명하는 것입니까?


答曰:有人知諸法平等、知諸法離,則不須說;若有人取相,著是一味,故說無邊。

曇無竭非但爲薩陁波崙故說,薩陁波崙亦不但自爲故問,但爲衆生有種種心、種種行故,於般若波羅蜜相中略說。

無生、無滅,如先種種因緣“破生滅”中說。虛空無邊,如摩訶衍虛空譬喩中說。

大海水無邊、須彌莊嚴,先未說故,今當略說。

답하나니, 어떤 사람은법의 평등을 알고, 제법의 여읨(離)도 알고 있으므로 설명해  필요가 없지만, 

어떤 사람은 상(相) 취하여  일미(一味)에 탐착하기 때문에 치우침이 없는 무변(無邊) 설명하는 것이다.

담무갈은 다만 살타파륜만을 위하여 설한 것이 아니며, 살타파륜 역시도 자신만을 위하여 물은 것이 아니나,

다만 중생들은 갖가지 마음의 종종심(種種心)과 갖가지 행동의 종종행(種種行)이 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상(相) 가운데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며, 

‘나는 것이 없는 무생(無生)이고, 멸하지도 않는 무멸(無滅)’이라 함이란, 앞에서 갖가지 인연으로 생멸을 깨뜨리는, 파생멸(破生滅) 가운데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허공이 끝이 없다는 허공무변(虛空無邊)’이란, 마하연(摩訶衍)의 허공비유 가운데에서 설명한 바와 같으며, 

‘큰 바닷물이 끝이 없다는 대해수무변(大海水無邊)’과 ‘수미산의 장엄’에 대해서는 앞에서 아직 설명하지 않았기에 여기에서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問曰:虛空,無爲、常法故無得其邊者,可言無邊。大海水在四天中,繞須彌山,有由旬數量,有人能渡,何以言無邊?

묻나니, 허공은 무위(無爲)라서 항상 있는 상법(常法)이기 때문에  끝을 얻는 이가 없으므로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고   있지만, 

 바닷물의 대해수(大海水)는  동의 지국천(持國天), 남의 증장천(增長天), 서의 광목천(廣目天), 북의 다문천(多聞天)의 4천(天, 사천왕) 가운데에 있으며, 수미산을 둘러싸고 있어서 유순(由旬)의 수량이 있으므로 사람으로서 건널  있는 이도 있거늘, 무엇 때문에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無邊有二種:一者、實無邊,二者、人不能到故無邊。

海亦有二種:一者、可渡;二者、繞須彌山在九寶山裏,廣八萬二千由旬,世閒人不能得邊,故言無邊。如小海,舩力可渡;大海水,舩力不可渡,唯有神通者能渡。如外道凡夫能生禪定舩,度欲界、色界海;無色界如大海,深廣則不能渡,以不能破我心故。諸賢聖人智慧、禪定翅力,破諸法邪相、得實相,故能度,是故說大海譬喩。翅 날개 시 

답하나니, ‘끝이 없다는 무변(無邊)’는 데에도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진실로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요, 둘째는 사람으로서는 이를  없기 때문에 끝이 없다는 무변(無邊)이며,

바다에도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건널  있는 가도(可渡)요, 

둘째는 수미산을 둘러싼 구보산(九寶山) 속에 있는 것으로, 그 너비가 8만 2천 유순이라서 세간 사람으로서는  끝을 얻을  없기 때문에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다’고 말하며,

마치 작은 바다는 배의 힘으로도 건널  있으나,  바닷물은 배의 힘으로는 건널  없고 오직 신통이 있는 이만이 건널  있는 것과 같으며,

마치 외도(外道)의 범부는 선정의 배를 타고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의 바다는 건널  있지만, 무색계(無色界)의  바다는 깊고 넓어서 건널  없는 것과 같으니, '나'라는 마음의 아심(我心)을 깨뜨리지 못한 때문이다.

모든 성현은 지혜와 선정이라는 날개의 힘인 시력(翅力)으로법의 삿된 사상(邪相) 깨뜨리고 실상을 얻어서 건널  있으니, 이러한 까닭으로 대해(大海)를 비유하여 설명한 것이다.


問曰:須彌山一色,何以言莊嚴?

묻나니, 수미산은  가지 색의 일색(一色)이거늘 무엇 때문에 “장엄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外書說須彌山一色,純是黃金。六足阿毘曇中說:須彌山四邊,各以一寶成,金、銀、頗梨、琉璃莊嚴。若諸鳥隨所至方,各同其色。難陁、婆難陁龍王兄弟,以身圍繞七帀。山頂有三十三天宮,其城七重,名爲憙見,九百九十九門,一一門邊皆有十六靑衣大力鬼神守護。

답하나니, 외서(外書)에서 “수미산은  가지 빛깔이어서 순수하게 그것은 황금으로 되어 있다”고 하며, 

육족아비담(六足阿毘曇)에서는 “수미산의  둘레는 각각 하나의 보배로 되어있고 금ㆍ은ㆍ파리ㆍ유리로 장엄되어 있으며, 모든 새들은  가는 방향을 따라 각각의 빛깔과 같아지며,

난타(難陀)와 바난타(婆難陀) 용왕의 형제가 몸으로 일곱 겹을 둘러싸고 있으며, 산의 정상에는 33천(天)의 궁전이 있으며,  성(城)은 일곱 겹으로 되어 있어서 이름을 희견(喜見)이라 하며,

이성에는 9백 99개의 문이 있는데  하나하나의 문마다에는 열여섯 명의 푸른 옷을 입고 있는 힘이  귀신들이 있어서 성을 수호한다.


城中高處作殿,名曰最勝,四邊有四大園。四天王在四邊,有山名遊乾陁,各高四萬二千由旬,四天王治其上。四大海水,諸阿修羅宮及諸龍王宮殿;遊乾陁等九寶山,日月、五星、二十八宿及諸餘星圍繞莊嚴。如是等種種雜飾以爲莊嚴,視之無厭。

 안의 높은 곳에는 전각이 있는데, 이름을 최승(最勝)이라 하고, 

  둘레에  개의  동산이 있으니, 4천왕(天王)이 살고 있으며,

  둘레에는 산이 있는데 이름은 유건타(游乾陀)라 하고, 

각각의 높이는 4만 2천 유순이며 4천왕이  위를 다스리고 있으며,

사대해(四大海)의 바닷물 속에는 모든 아수라의 궁전들과 모든 용왕(龍王)들의 궁전이 있으며, 

유건타 등의 아홉의 보배산에는 해와 달과 5성(星)ㆍ28숙(宿)이며  밖의 모든 다른 별들이 주위를 에워싸서 장엄하고 있으니, 이와 같이 갖가지로 꾸며져서 장엄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것을 보는 이는 싫증냄이 없다”고 하나니, 

 

般若波羅蜜亦如是。六波羅蜜果報故,作轉輪王、梵、釋天王、淨居天王、大自在天 如是等果報,行般若波羅蜜未具足時,受此果報莊嚴。

般若波羅蜜具足時,則有須陁洹果、斯陁含果、阿那含果、阿羅漢果、辟支佛道、阿毘跋致菩薩、諸佛道果莊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6바라밀의 과보 때문에 전륜왕(轉輪王)과 범천왕(梵天王)과 제석천왕(帝釋天王)과 정거천왕(淨居天王)과 대자재천(大自在天)들이 되며, 이와 같은 등의 과보는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서 아직 완전하게 갖추지 못하였을 때에는 이러한 과보의 장엄(莊嚴)을 받는 것이며, 

반야바라밀을 완전히 갖추었을에는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아비발치(阿毗跋致)의 보살과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도과(道果)의 장엄이 있게 되는 것이다.


如須彌山,上、下皆有莊嚴。般若波羅蜜莊嚴亦爾,未具足時,諸天王等莊嚴;具足已,諸道果莊嚴。

如須彌山者,劫初立時,四邊大風吹,聚地之精味,積爲須彌山;更有風吹,令堅而成寶。

般若波羅蜜亦如是,一切善法中第一堅實牢固和合以爲般若。

마치 수미산의 위아래가 모두 장엄되어 있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의 장엄도 또한 그러하나니, 아직 완전히 갖추지 못하였을 때에는 모든 천왕(天王) 등의 장엄이 있으나, 완전히 갖춘 뒤에는 모든 도과(道果)로 장엄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수미산은 겁초(劫初)에 이루어 때,  둘레에서  바람이 불어서 땅에 모인 정미(精味)를 한 곳에 쌓아 올려서 수미산을 만들었고, 다시 바람이 불어서  산을 견고 하게 하고 보배가 되게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일체의 착한법들 가운데에서 제일 견실하고 단단한 것만이 화합한 것을 반야라 하는 것이다.


如須彌山,四邊大風吹、大海水波所不能動;般若波羅蜜亦如是,邪見、外道、戲論及諸魔民所不能動。

如須彌山頂四園,諸天到者,受種種樂;般若亦如是,行者能登般若頂,到四禪等諸定園中,受種種樂。

마치 수미산은 사변에서 부는 큰 바람이나 큰 바닷물의 파도로도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삿된 소견을 지닌 외도(外道)의 희론으로나 모든 악마의 백성들로서는 움직일 수가 없으며, 

마치 수미산 정상에 있는 네 개의 동산에 하늘들이 이르게 되면 갖가지의 즐거움을 받는 것과 같이,

반야 또한 이와 같아서 수행하는 이가 반야의 정상에 오르면 4선(禪) 등의 모든 선정의 동산에 이르게 되어 갖가지의 즐거움을 받는 것이다.

 

復次,有人言:須彌山,衆鳥到者皆同一色;般若波羅蜜亦如是,諸法入中皆同一相,所謂無相。

如虛空無分別者,虛空無分別是內是外、是遠是近、是長是短、是淨是不淨等;般若波羅蜜亦如是,諸法入般若中,亦無內外、善不善等分別。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미산에 여러 종류의 새들이 이르게 되면 모두가 동일한 색의 일색(一色) 되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제법이  속에 들어가면 모두가 동일한 일상(一相) 되나니, 이른바 무상(無相)이다”라고 하는 것이며, 

‘마치 허공이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인 것과 같다’고 함이란, 허공에서는 ‘이것은 안(內)이다, 밖(外)이다. 이것은 멀다(遠), 가깝다(近). 이것은 길다(長), 짧다(短). 이것은 깨끗하다(淨), 깨끗하지 않다(不淨)’라고 분별함이 없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 또한 이와 같아서 법이 반야에 들어가면, 역시 안과 밖이라거나 착하고 착하지 않다는 등의 분별이 없는 것이다.

大智度論 論釋曇無竭品 第八十九 卷第一百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9. 담무갈품을 풀이함 1

 

▶經. “爾時,薩陁波崙菩薩摩訶薩及長者女幷五百侍女到曇無竭菩薩摩訶薩所,散天曼陁羅華,頭面禮畢,退坐一面。

曇無竭菩薩見其坐已,告薩陁波崙菩薩言:‘善男子!諦聽!諦受!今當爲汝說般若波羅蜜相。

善男子!諸法等故,當知般若波羅蜜亦等。諸法離故,當知般若波羅蜜亦離。

諸法不動故,當知般若波羅蜜亦不動。諸法無念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念。

▷경. “그 때에 살타파륜 보살마하살과 장자의 딸과 5백의 시녀들은 담무갈 보살마하살에게로 가서 하늘의 만다라화를 뿌리고는 머리로 두면례(頭面禮)를 한 뒤에 물러나 한쪽에 앉았으며, 담무갈보살은 그들이  앉은 것을 보고 나서 살타파륜보살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자세히 듣고 받아 지녀라. 이제 그대에게 반야바라밀의 상(相)을 설할 것이니라.

선남자여,법은 평등한 등(等)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평등한 등(等)이라 알아야 하고, 

제법은 여의는 제법이(諸法離)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여의는 이(離)라고 알아야 하며, 

제법은 움직이지 않는 부동(不動)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움직이지 않는 부동(不動)이라 알아야 하고, 

제법은 생각이 없는 무념(無念)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생각이 없는 무념(無念)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諸法無畏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畏。諸法一味故,當知般若波羅蜜亦一味。

諸法無邊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邊。諸法無生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生。

諸法無滅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滅。虛空無邊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邊。

大海水無邊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邊。須彌山莊嚴故,當知般若波羅蜜亦莊嚴。

虛空無分別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分別。

제법은 두려움이 없는 무외(無畏)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두려움이 없는 무외(無畏)로 알아야 하고, 

제법은  맛의 일미(一味)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맛의 일미(一味)라고 알아야 하며, 

제법은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고 알아야 하며고, 

제법은 생겨남이 없는 무생(無生)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생겨남이 없는 무생(無生)이라고 알아야 하며, 

제법은 소멸함이 없는 무멸(無滅)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소멸함이 없는 무멸(無滅)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허공은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고 알아야 하며, 

대해(大海)의 바닷물은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무변(無邊)이라고 알아야 하며, 

수미산은 장엄(莊嚴)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장엄(莊嚴)한 것으로 알아야 하며, 

허공은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色無邊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邊;受、想、行、識無邊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邊。

地種無邊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邊;水種、火種、風種無邊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邊;空種無邊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邊。

물질(色)은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고 알아야 하며, 

수상행식(受想行識)이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고 알아야 하며,

땅의 요소인 지종(地種)이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고 알아야 하며, 

물의 요소인 수종(水種)ㆍ불의 요소인 화종(火種)ㆍ바람의 요소인 풍종(風種)이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이라고 알아야 하며, 

허공의 요소인 공종(空種)이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如金鋼等故,當知般若波羅蜜亦等。諸法無分別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分別。

諸法性不可得故,當知般若波羅蜜性亦不可得。諸法無所有等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所有等。

諸法無作故,當知般若波羅蜜亦無作。諸法不可思議故,當知般若波羅蜜亦不可思議。’

금강과 같이 평등한 여금강등(如金剛等)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평등한 등(等)이라고 알아야 하며, 

제법은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이라고 알아야 하며, 

제법의 성품은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라고 알아야 하고, 

제법은 있는  없이 평등한 무소유등(無所有等)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있는  없이 평등한 무소유등(無所有等)이라고 알아야 하며, 

제법은 조작이 없는 무작(無作)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 또한 조작이 없는 무작(無作)이라고 알아야 하며, 

제법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또한 불가사의하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是時,薩陁波崙菩薩摩訶薩卽於座上得諸三昧,所謂諸法等三昧,諸法離三昧,諸法無畏三昧,諸法一味三昧,諸法無邊三昧,諸法無生三昧,諸法無滅三昧,虛空無邊三昧,大海水無邊三昧,須彌山莊嚴三昧,虛空無分別三昧,色無邊三昧,受、想、行、識無邊三昧,地種無邊三昧,水種、火種、風種、空種無邊三昧;如金鋼等三昧,諸法無分別三昧,諸法不可思議三昧
如是等,得六百萬諸三昧門。”

이 때에 살타파륜 보살마하살이   자리에서 모든 삼매를 얻었으니, 이른바 제법등(諸法等)삼매와 제법리(諸法離)삼매와 제법무외(諸法無畏)삼매와 제법일미(諸法一味)삼매와 제법무변(諸法無邊)삼매와 제법무생(諸法無生)삼매와 제법무멸(諸法無滅)삼매와 허공무변(虛空無邊)삼매와 대해수무변(大海水無邊)삼매와 수미산장엄(須彌山莊嚴)삼매와 허공무분별(虛空無分別)삼매와 색무변(色無邊)삼매와 수상행식무변(受想行識無邊)삼매와 지종무변(地種無邊)삼매와 수종화종풍종공종무변(水種火種風種空種無邊)삼매와 여금강등(如金剛等)삼매와 제법무분별(諸法無分別)삼매와 제법불가사의(諸法不可思議)삼매가 그것이니, 이와 같은 등으로 6백만의 모든 삼매문(三昧門)을 얻게 되었다.”


爾時,佛告須菩提:“如我今於三千大千世界中與諸比丘僧圍繞,以是相、以是像貌、以是名字說般若波羅蜜;薩陁波崙得是六百萬三昧門,見東方、南西北方、四維、上下如恒河沙等三千大千世界中諸佛與諸比丘恭敬圍繞,以如是相、以是像貌、以是名字說是摩訶般若波羅蜜亦如是。

薩陁波崙菩薩從是已後,多聞、智慧不可思議,如大海水;常不離諸佛,生於有佛土中。

乃至夢中未曾不見佛時;一切衆難皆悉已斷,在所佛土隨願往生。

그 때에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3천대천세계 가운데에서 모든 비구승에게 둘러 싸여 이러한 상(相)과 이러한 모습의 상모(像貌), 그리고 이러한 이름의 명자(名字)로써 반야바라밀을 설하고 있는 것과 같이,

살타파륜이  6백만의 삼매문을 얻고는, 동쪽ㆍ남쪽ㆍ서쪽ㆍ북쪽과  간방과 위와 아래의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3천대천세계에 계신 모든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공경히 둘러싸여서 이러한 상(相)ㆍ이러한 모습의 상모(像貌)ㆍ이러한 이름의 명자(名字)로써  마하반야바라밀을 설하고 계신 것을 것도 이와 같았느니라.

살타파륜보살은 그로부터 다문(多聞)과 지혜(智慧)가 불가사의하여서, 마치  바닷물과 같았고, 항상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았으며, 부처님이 계신국토에 태어났으니, 

꿈속에서까지도 일찍이 부처님을 뵙지 않은 때가 없었고, 일체의 숱한 재난은 남김없이 이미 끊어졌으며, 부처님이 계신 국토에 원하는 대로 가서 태어날 수 있었느니라.


須菩提!當知是般若波羅蜜因緣,能成就菩薩摩訶薩一切功德,得一切種智。以是故,須菩提!諸菩薩摩訶薩若欲學六波羅蜜、欲深入諸佛智慧、欲得一切種智,應受持是般若波羅蜜,誦讀、正憶念、廣爲人說,亦書寫經卷,供養、尊重、讚歎,香華乃至妓樂。何以故?般若波羅蜜是過去、未來、現在十方諸佛母,十方諸佛所尊重故。”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의 인연은 보살마하살의 일체의 공덕을 능히 성취하게 하고 일체종지를 얻게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만약 6바라밀을 배우고자 하고, 모든 부처님의 지혜에 깊이 들고자 하며, 일체종지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받아지니는 수지(受持)하고, 읽고 외우는 독송(誦讀)하고, 바르게 기억하는 정억념(正憶念)하며, 사람들을 위하여 자세히 설명하여 주고, 또한 경권(經卷)을 서사(書寫)하여서, 향과  내지는 기악으로써 공양하고 존중하고 찬탄하여야 하느니라.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은 바로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시방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불모(佛母)이시며,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존중하시기 때문이니라.”


▶論. 釋曰:曇無竭旣出,至法座所,遍觀無勝己者,於是而坐。爾時,薩陁波崙菩薩知坐已定,到曇無竭所,頭面禮足,一面坐。

禮有三種:一者、口禮;二者、屈膝,頭不至地;三者、頭至地,是爲上禮。人之一身,頭爲最上,足爲最下,以頭禮足,恭敬之至。

▷논. 해석한다. 담무갈은 이미 나와서 법좌(法座)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 자기보다 뛰어난 이가 없는가를 두루 살펴본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이 때에 살타파륜보살은 그가 좌정한 것을 알고는 담무갈에게로 나아가 머리를 발에 대어 예배하는 두면예족(頭面禮足)하고 한쪽에 앉았으으니, 

예를 올리는 데에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말로 하는 구예(口禮)요, 

둘째는 무릎을 꿇고 머리는 땅에 대지 않는 예이다. 

셋째는 머리를 땅에 대는 예이니, 이것은 최상의 예배이다. 

사람의 몸에서는 머리가 제일 위가 되고 발이  아래가 되는 것이니, 머리로써 발에 예배하는 것은 공경함이 지극하다는 것이다.


曇無竭見其坐已,知從遠來,不惜身命,種種勤苦,爲欲聞法。初相見時,日垂欲沒,少時聞法;曇無竭以日沒故,起入宮中。

今爲法故,七歲渴仰,不生異心;垂欲出時,以血灑地,知其爲法不惜身命,其心不退,決定無疑,堪受教化。是故告言:“善男子!一心諦聽!”

담무갈은 그가 앉은 것을   그가 멀리서 와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갖가지로 애쓰고 있는 것은 바로 법을 듣고자 함임을 알았으니, 

서로가 처음 만났을 때에는 해가 거의 무렵이었으므로 잠시 동안 법을 들었을 뿐이었으며, 담무갈은 해가 지자 일어나서 궁중으로 들어간 것이며, 

이제 법을 위하여 7년 동안 간절히 우러르면서 다른 마음을 내지도 않았으며, 그가 나오려  즈음에는 몸에서 피를 내어 땅에 뿌렸으니, 이에 담무갈은 그가 법을 위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그의 마음은 물러나지 않고 결정되어 의심도 없어서 교화를 받아   있음을 알았으므로 그에게 말하기를 “선남자여, 일심으로 자세히 들어라”고 한 것이었다.


上疑諸佛來去,已斷;今但欲聞甚深般若波羅蜜,是故爲說“般若波羅蜜相”。

“般若波羅蜜相”者,如先諸法平等義中說。或有人言:般若波羅蜜力故,觀諸法皆平等;非諸法性性自平等。

是故,曇無竭言:“諸法平等故,般若波羅蜜平等。”所以者何?因果相似故。初觀諸法平等是因,決定心得般若波羅蜜是爲果。

앞에서는 모든 부처님께서 오고 가는 대한 의심을 이미 끊었었고, 여기에서는 다만 매우 깊은 심(甚深) 반야바라밀만을 듣고 싶어  뿐이었으므로 그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의 상(相) 설한 것이다.

반야바라밀의 상(相)이란, 앞에서법의 평등한 이치인 평등의(平等義) 가운데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의  때문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관찰하는 것이며, 제법의  성품 자체가 저절로 평등한 것은 아니다”고도 하였으니, 

 때문에 담무갈이 말하기를 “제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도 평등하다”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원인의 인(因)과 결과의 과(果)가 닮았기 때문이니, 처음에법의 평등을 관찰하는 것은 바로 원인의 인(因)이요, 결정된 마음으로 반야바라밀을 얻으면 바로 그것은 결과의 과(果)인 것이다.


問曰:觀諸法平等卽是般若、般若卽是平等,何以分別爲因、果?

묻나니, 제법은 평등하다고 관찰하는 것이  반야요, 반야가  평등이거늘, 

무엇 때문에 원인과 결과로 분별하는 것입니까?


答曰:般若及諸法雖一相、、無二無別,行者初觀時是因,觀竟名爲果。如須陁洹道得、向。又如有漏五衆,因時名集,果時名苦。色等一切法平等,卽是般若波羅蜜平等。

답하나니, 반야와법은 비록 하나의 일상(一相)이라서 둘도 없는 무이(無二)이고 구별이 없는 무별(無別)이라 할지라도, 수행하는 행자 처음에 관찰할 때의 그것은 원인의 인(因)이요, 관찰하여서 마치게 되면 결과의 과(果)라 하는 것이다. 

마치 수다원의 도에서 과위를 얻는 득(得)과 도에 향하는 향(向)과 같은 것이며, 

 유루(有漏)의중(五衆)에서와 같아서 원인일 때를 쌓임의 집(集)이라 하고, 결과일 때를 괴로움의 고(苦)라 하는 것으로, 물질(色) 등의 일체법이 평등하게 되면,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의 평등인 것이다.


問曰:應說“般若波羅蜜相”,今何以說平等?因不平故有平等,因平故有不平。

於般若中亦不一相、亦不異相,汝何以故欲取一相?

묻나니, 마땅히 반야바라밀의 상(相) 설해야 되거늘, 지금 무엇 때문에 평등을 설하는 것입니까? 

평등하지 않은 불평등(不平等)으로 인하여 평등(平等)이 있는 것이고, 평등으로 인하여 불평등이 있는 것이니, 반야 가운데에서도 역시 하나의 일상(一相) 아니요, 다른 모양의 이상(異相)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대는 무엇 때문에 하나의 일상(一相) 취하려 하는 것입니까?


答曰:般若波羅蜜甚深微妙,不以方便說則無解者;是故若分別不等,則生諸煩惱,三毒增長,所謂憎怨,愛親;愛善,憎不善。

菩薩住是二等中,觀一切法皆平等:住衆生等中,怨親、憎愛皆悉平等,開福德門,閉諸惡趣;住法等中,於一切法中憶想分別、著心取相皆除滅,但見諸法空,空卽是平等。

답하나니,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은 심심(甚深)하고 미묘하여서 방편으로써 해설하지 않으면 이해하는 이가 없기 때문에 만약 평등하지 않다고 분별한다면,  모든 번뇌가 생기고 3독(毒)이 더욱 자라게 되나니, 

이른바 원수를 미워하고 친한 이를 사랑하며 착한 것을 사랑하고 착하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등이 그것이다.

보살은   가지가 평등한 가운데에 머물러서, 일체법은 모두 평등하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중생이 평등한 가운데에 머무르면 원수거나 친한 이나 미워하는 이나 사랑하는 이의 모두가  평등한 것이니, 

복덕의 문이 열리고 모든 나쁜 세계의 악취(惡趣)가 닫히는 것이다. 

법이 평등한 법등(法等) 가운데에 머무르면, 일체법 가운데에서 생각과 분별과 집착하는 착심(著心) 상을 취하는 등의 모든 것이 제거되고, 다만법이 공한 법공(法空)만을 보게 되나니, 공이  평등인 공즉시평등(空卽是平等)인 것이다.


有人得是諸法平等空,直趣菩薩道,於空不戲論;有人雖得平等而生戲論:若觀都空,有如是失!

如是人於平等卽是不等。是故此中爲“眞平等”故說“般若波羅蜜等”,非是戲論。離平等、不平等二邊,是般若波羅蜜相。

어떤 사람은 이 제법이 평등한 공의 제법평등공(諸法平等空)을 얻으면 곧장 보살도에 나아가 공에 대하여 희론을 펴지 않지만,

어떤 사람은 비록 평등을 얻었을지라도 희론을 일으키나니, 만약 모든 것이 공하다고만 관찰한다면 이와 같은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평등한 가운데에서도 곧 평등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진실한 평등의 진평등(眞平等)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의 평등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희론이 아니며,

평등하다거나 평등하지 않은 불평등(不平等)의 두 치우침의 이변(二邊)을 여읜 것이 곧 반야바라밀의 상(相)인 것이다.

大智度論 釋曇無竭品 第八十九 卷第九十九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9. 담무갈품(曇無竭品) 풀이함 6

 

問曰:不見水時,何以不作是念:“當於何處得水灑地?”

묻나니, 물을 보지 못하였을 때, 무엇 때문에 “나는 어디서 물을 얻어와서 땅에 뿌려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까?


答曰:薩陁波崙以先有水處,卽時皆無,知魔所作;是故自於四大分中刺水分灑地。身中水種雖多,血是命之所在,是故刺以灑地。

華不自有,曇無竭出時欲至,不容遠求;又所須復多,當以遍覆其地,是故生念欲得。

답하나니, 살타파륜은 먼저 물이 있었던 곳이었으나, 바로 그 때에는 물이 전혀 없었으므로 악마가 하는 짓임을 알았기 때문에 스스로가 4대(大)로 나눈 가운데서 수분(水分)을 내어 땅에 뿌린 것이다. 

 가운데는 비록 물의 요소인 수종(水種)이 많다 할지라도  피는 생명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몸을 찔러서 피를 내어서는 땅에 뿌린 것이며, 

꽃은 자신이 가진 것이 아니며, 담무갈이 나오실 때가 되었으므로 멀리까지 가서 구할 여유도 없었으며,  그 땅에다 두루 깔아야 했으므로 소요될 꽃이 많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기를 생각한 것이니, 


帝釋知其念,卽以天華中妙者,名曼陁羅,三千石與之,足以周事。帝釋所以不以人華與者,欲令發希有心故。

薩陁波崙受華已,分作二分:好者留以說法時散,餘者覆地。其國俗法以華覆地,令行其上,以爲供養。

爾時,曇無竭如其先要,滿七歲已,從三昧起,與無量百千衆恭敬圍繞,直趣法座,爲說般若故。

제석이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하늘의  가운데에서도 묘한 꽃인 만다라화를 3천 석(石)이나 가져다 그에게 주면서,  일에 충분히 쓰게 하였으나,

제석이 인간 세상에 있는 꽃을 주지 않은 까닭은 희유한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살타파륜은  꽃을 받은 뒤에  몫으로 나누어서 좋은 꽃들은 법을 설할 때에 뿌리고자 남겨 두었고,  나머지의 꽃들로 땅을 덮었으니, 그 나라의 풍속으로는 꽃을 땅에다 깔은 뒤에  위를 걸어가게 하는 것으로 공양을 삼았기 때문이다.

그 때에 담무갈이 그가 먼저 약속한 대로 7년을  채운 뒤에 삼매에서 일어나 무량한 백천 대중에게 공경을 받으며 둘러싸여 곧장 법좌(法座)가 있는 곳으 나아갔으니, 반야를 설하기 위하여서였다.

 

섬 또는 석(䄷, 石)은 부피의 단위이다. 한 섬은 용량 180리터이며, 곡식의 종류나 상태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벼는 200 kg, 쌀은 144 kg, 보리쌀은 138 kg이다. 한 섬은 열 말이며, 신라시대 부피의 단위인 점(苫)에서 유래했으며, 신라시대의 점은 15말이었다. 최치원의 〈연복사비문〉(演福寺碑文) 주석에 ‘유제일두위점(斞除一斗爲苫) 십육두위유(十六斗爲斞)’라고 적혀 있는데, 당시에는 유(斞 : 16말)에서 1말을 뺀 15말을 점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위키


問曰:若諸菩薩入微妙三昧中,誰能令起?

묻나니, 만약 모든 보살이 미묘한 삼매에 들어가면, 누가 그를 일어나게   있는 것입니까?


答曰:行者初入時,自作限齊,然後入定;時至,其心自在從三昧起,悲心故而生覺觀。

如一比丘,入滅受定三昧時,自期聞犍搥時當起。旣入已,時僧坊失火,諸比丘惶懅,不打犍搥而去。

爾時,過十二歲已,檀越更和合衆僧欲起僧坊,方打犍搥;聞犍搥聲起,卽身散而死。後諸得道者,說其如此。

답하나니, 수행하는 행자 처음 들어갈 때에는 자기 스스로가 기한을 정한 뒤에 선정(禪定)에 들어가서 그 때가 되면  그 마음이 자재롭게 삼매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니, 비심(悲心) 때문에 거칠고 미세한 생각의 각관(覺觀)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어떤 비구는 멸수정삼매(滅受定三昧)에 들어갈 때, 자기 자신이 건추(犍槌, chaṇṭā. 사람을 모으기 위해 두들겨 소리를 내는 기구) 소리를 듣고 일어나겠다고 정하고는 들어가 있었는데, 이 때에 마침 승방(僧坊)에 불이 나서 비구들이 당황한 끝에 건추를 치지도 않고 모두 떠났으니,

 뒤에 12년이 경과하고 나서 단월(檀越, dāna-pati. 시주施主)들이 화합하여서, 비로소 스님들이 승방을 일으키고자 건추를 쳤는데, 그가  건추 소리를 듣고 일어났으나 몸이 산산이 흩어지면서 죽었다는 것을 훗날 도를 얻은 여러 사람들이 말하여 준 것이다.


復次,有人言:法性生身大菩薩,如諸佛常入三昧,無散亂麤心;以神通力故,能說法、飛行度脫衆生。

世俗法故,有出入三昧相。是故雖入微妙三昧而能還出,以大悲心牽故;譬如呪術出龍。

大衆圍繞者,是內眷屬;恭敬散華、燒香,隨從而出,爲說般若波羅蜜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성생신(法性生身)의  보살은 모든 부처님과 같이 항상 삼매에 들어가서 산란하거나 거친 마음이 없으며, 신통력으로 법을 설하고 날아다니면서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며,

세속의  때문에 삼매에 들고 나는 상(相)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미묘한 삼매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다시 나올 수가 있으니, 그것은 대비(大悲)의 마음에 끌리기 때문인 것으로, 비유하자면, 마치 주술(呪術)로써 용을 나오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중에게 둘러싸인, 대중위요(大衆圍繞)’라고 함이란, 바로 안(內)의 권속들이 공경하여 꽃을 뿌리고 향을 사르며 그의 뒤를 따라 나오는 것이니, 반야바라밀을 설하고자 한 때문이다.


說般若波羅蜜者,因世諦名字語言,欲示衆生第一義不動相故。

薩陁波崙見曇無竭,卽得淸淨歡喜,樂遍其身,如比丘入於三禪。所以者何?多欲衆生,雖非淨妙,得猶喜樂,何況得見眞功德莊嚴身者!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설반야바라밀(說般若波羅蜜)’이라 함이란,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의 이름과 언어에 의지하여 중생들에게 제일의(第一義)인 동요하지 않는 부동상(不動相)을 보이고자 하는 때문이며, 

살타파륜은 담무갈을 보자마자  청정한 기쁨을 얻었으며,  즐거움이 온몸에 스며드는 것이 마치 비구가 제3선(禪)에 들어간  같았으니, 왜냐하면, 비록 깨끗하고 묘하지 않을지라도 욕탐이 많은 중생도 보면 기쁨과 즐거움을 얻거늘, 하물며 진실한 공덕으로 몸을 장엄한 이를 보게 되는 것이랴!


薩陁波崙從空中佛聞曇無竭,卽生大欲,得諸三昧,見十方諸佛,復聞十方諸佛說先世因緣:“唯有曇無竭能度汝耳。”聞是已,增益其心,渴仰欲見,是故中道欲賣身供養。今於衆香城七歲不坐不臥 欲見曇無竭。如是渴仰,欲樂來久;如人熱渴所逼,得濁煖潦水,猶尚歡喜,何況得淸冷美水!旣以渴仰情久,又曇無竭功德大,是故悅樂。

살타파륜은 공중의 부처님으로부터 담무갈에 대한 말씀을 듣고   서원을 내어서 모든 삼매를 얻어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뵙게 되었으며, 다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그의 전생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오직 담무갈만이 그대를 제도할  있느니라”고 하심을 듣게 되었으며,

이러한 말씀을 들은 뒤에 그의 마음이 한층  간절하게 우러르면서 담무갈을 만나고자 하였 것이니,

때문에 도중에서 몸을 팔아서 공양하고자 하였고, 지금은 중향성에서 7년 동안이나 앉지도 않고 눕지도 않으면서 담무갈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간절히 우러르면서 보고 싶어  지가 오래 되었으니, 마치 사람이 목이 몹시 마를 때에는 흐리고 미지근한 길바닥의 물을 만나도 오히려 기뻐하게 되거늘, 하물며 맑고 시원한 맛있는 물을 만나는 것이랴!

이미 간절하게 우러르던 정(情)이 오래였고  담무갈의 공덕이 컸기 때문에 기뻐하고 좋아한 것이다.


問曰:樂有四種,何以但說第三禪樂,而不說上地定樂及解脫樂?

묻나니, 즐거운 낙(樂)에는  가지가 있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제3선의 즐거움만 말하고   경지인 상지(上地)에서의 선정의 즐거움인 정락(定樂)과 해탈의 즐거움인 해탈락(解脫樂)은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以欲界衆生,於三受中多貪樂受。聞涅槃樂無所有,則心不樂喜;以上四禪中斷苦樂故,心亦不樂;
第三禪中樂,樂之極。

復有人言:薩陁波崙新發意未入細深妙定故,見曇無竭發大歡喜,似如三禪樂。

薩陁波崙自覺我大歡喜故,卽時捨喜,得淸淨法性,遍身安樂,是故以三禪樂爲喩。

답하나니, 욕계(欲界)의 중생들은 고수(苦受), 낙수(樂受), 사수(捨受)의 세 가지 느낌인 삼수(三受) 가운데에서 대개 즐거운 느낌의 낙수(樂受)만을 탐하기 때문에 ‘열반의 즐거움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다’라고 들으면 곧 마음으로 즐거워하거나 기뻐하지 않을 것이며,

위의 제4선(禪)에서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끊어졌기 때문에, 마음도 즐겁지 않은 것이며,

제3선에서의 즐거움은 즐거움 중에서도 가장 극치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분이 말하기를 “살타파륜은 새로이 뜻을 낸 신발의(新發意)라서 아직은 미세하고도 깊고 묘한 선정(禪定)에 들지 못하였으므로, 담무갈을 보자마자 큰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 마치 3선의 즐거움과 비슷하였다”고 하였다.

살타파륜 보살은 스스로가 ‘아주 기쁜 대환희(大歡喜)’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즉시 그 기쁨을 버리고 깨끗한 법의 성품인 청정법성(淸淨法性)을 얻어서 온몸이 편안하여지고 즐거워진 때문에 3선의 즐거움으로 비유한 것이다.


大智度論卷第九十九 終 대지도론 99권을 마침.

大智度論 釋曇無竭品 第八十九 卷第九十九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89. 담무갈품(曇無竭品) 풀이함 5

 

問曰:曇無竭入三昧,何以乃至七歲?

묻나니, 담무갈은 삼매에 들어서 무엇 때문에 7년 동안이나 걸린 것입니까?

 

答曰:先已答:好世人壽長,雖七歲不以爲久。

又曇無竭宮殿、婇女、微妙五欲與天相似;薩陁波崙等新發意者,心未柔軟,疑曇無竭雖說空法、讚歎離欲,謂其心未能捨。

是故七歲三昧,欲以除衆疑故,生貴敬心。聞曇無竭七歲三昧,心、口相應能說、能行,則信受其語,易可得度。譬如癰瘡未熟,醫則不破,但以藥塗令熟,熟則易破。

답하나니, 앞에서 이미 대답한 것과 같이, 좋은 세상에  사람들은 수명이 길어서, 비록 7년이 걸린다 할지라도 오래라고 여기지 않으며, 

 담무갈의 궁전에 있는 채녀(婇女)들과 미묘한욕은 마치 천상과 비슷한 것이었으니,

살타파륜 등과 같이 새로이 뜻을  초발의자들은 마음이 아직 유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담무갈을 의심하기도 하니, 그가 비록 공한 공법(空法)을 설하면서 욕탐을 여읠 것을 찬탄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아직 버리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여길 것이기 때문에, 7년 동안이나 삼매에 들어가 있으면서 대중들의 의심을 없애고자 한 것이며, 

그러므로 살타파륜 등은 귀하게 여기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서 담무갈이 7년 동안 삼매에 들어서 그의 마음과 말이 상응하여서 능히 말하는 것과 같이 능히 행하므로,  그의 말을 믿고 받아 들여서 쉽게 제도될  있게 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종기가 아직 익지 않았다면 의사가 바로 터뜨리지 않고 다만 약을 발라 두었다가  곪은 뒤에야 쉽게 터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復次,欲受心生實樂故,入無量三昧。

復次,說法有二種:一者、口說法,二者、身現法。今欲以身現法故,入無量三昧,令衆生知攝心入慧,得如實智。

菩薩三昧者,如菩薩義中說。行般若、方便力者,如「方便品」中說。

또한 마음에서 생겨나는 진실한 즐거움의 실락(實樂)을 받기 위하여 무량한 삼매에 들어간 것이며, 

또한 설법에도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입으로 법을 설하는 구설법(口說法)이요, 

둘째는 몸으로 법을 나타내는 신현법(身現法)이니,

지금은 몸으로 법을 나타내고자 한 까닭에 무량한 삼매에 들어가서, 중생으로 하여금 마음을 가다듬고 지혜에 들어가는 방법을 깨달아 여실지(如實智)를 얻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보살삼매(菩薩三昧)’라 함이란, 보살의 뜻인 보살의(菩薩義)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반야의 방편력(方便力)을 행한다’고 함도 '방편품(方便品)'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薩陁波崙於七歲中,三惡覺觀不生,不味於味。是人雖未破煩惱,而集諸善法故,制諸煩惱,不令得生;但一心念:“曇無竭何時當出?我當從聞般若。”過七歲已,作是念:“我當爲曇無竭敷坐處,掃灑莊嚴。”

살타파륜이 7년 동안  가지의 거친 생각인 삼악각관(三惡覺觀, 탐진치)을 내지 않았으며, 맛의 미(味)에 맛들이지 않았으며, 

 사람은 비록 아직 번뇌는 깨뜨리지 못하였을지라도 모든 착한법을 쌓았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제어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있었으며,

다만 일심으로 ‘담무갈이 언제쯤 나오실까? 나는 그분으로부터 반야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으며, 

7년이 지난 뒤에 생각하기를 ‘나는 담무갈을 위하여 앉으실 곳을 마련한 뒤에 쓸고 닦고 물을 뿌리고 장엄하여야 겠다’고 하였다.

 

問曰:薩陁波崙云何得知過七歲已,曇無竭當出?

묻나니, 살타파륜이 어떻게 7년이 지난 뒤에는 담무갈이 나오실 것을 알았던 것입니까?

 

答曰:有人言:先曾七歲展轉聞知。有人言:曇無竭初入三昧時,自說七歲爲限。

如釋迦文尼佛告阿難:“我欲一月、二月入禪定。”阿難以告四衆。

薩陁波崙深愛佛法、敬重曇無竭故,供養莊嚴說法處。

出家菩薩但莊嚴其心,詣師受法;在家菩薩則莊嚴說法處,華香供養。

답하나니, 어떤 말하기를 “먼저 일찍이 7년 걸린다는 것을 여기저기서 들어 알고 있었다”라고 하며, 

 어떤 분은 말하기를 “담무갈이 처음 삼매에  때에 7년 동안이라고 스스로 말하였다”고 하기도 하나니,

마치 석가문니(釋迦文尼)부처님께서 아난(阿難)에게 “나는  달이나   동안 선정에 들고자 한다”고 말씀하시면, 아난은  일을 4중(衆, 사부대중인 비구, 우바새와 우바이, 비구니)에게 알려주는 것과 같이, 

살타파륜은 부처님의 불법을 몹시 사랑하고 담무갈을 공경하며 존중한 까닭에 공양하고 설법할 곳을 장엄하는 것이며,

출가한 보살은 다만  마음만을 장엄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법을 받으면 되는 것이지만, 

재가의 보살은 설법하는 처소를 장엄하고 꽃과 향으로써 공양하는 것이다.

 

復次,薩陁波崙作是莊嚴,欲令曇無竭知其愛法、欲法相,深心信樂,故現是事;是故生心,共五百女等,展力掃灑,自以其金;銀;珍寶敷座。薩陁波崙等雖自有妙好茵褥,爲愛法情至故,以身所著上衣敷座。

또한 살타파륜은 이러한 장엄을 함으로써 담무갈로 하여금 그가 법을 사랑하는 애법(愛法)과 법을 바라는 욕법상(欲法相) 깊은 마음으로 믿고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이렇게 나타내는 것이니, 

 때문에 마음을 내어서 5백의 여인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쓸고 뿌리면서, 스스로 금은의 값진 보물로써 자리를 마련한 것이니, 

살타파륜 등은 비록 자신들에게 훌륭한 깔개가 있었지만, 법을 사랑하는 애법(愛法)의 정이 지극하였기 때문에 스스로가  입고 있는 상의(上衣)를 벗어서 자리에  것이다.

 

求水灑地,魔隱蔽故,求不能得。此中自說因緣:“魔作是念:‘若薩陁波崙求水不得,其心則劣,志願不滿故。又令自鄙其身,我薄福德故,爲供養法,求水不得,以自輕憂愁覆心故。’”福德不增、智慧不照

不明者,諸憂愁煩惱覆心故,諸福德、智慧不能照明;譬如日障蔽故,其照不明。

물을 구하여 땅에 뿌리고자 하였으나 악마가 물을 숨겨버려서 얻을  없었으니, 여기에  인연을 설명하고 있으니, 

“악마가 생각하기를 ‘만약 살타파륜이 물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면, 그의 마음이 하열해질 것이니, 그가 바라던 원이 만족되지 못한 때문이며, 또 스스로의 몸을 비천하게 여기면서 '나는 복덕이 박하기 때문에 법에 공양하기 위하여 물을 구하는데도 얻을  없구나!'라고 하며, 스스로 자신을 업신여기면서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을 덮어버릴 것이므로, 복덕이 더하지 못하고 지혜도 밝지 못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밝지 못한 불명(不明)’이란, 모든 근심과 걱정하는 번뇌가 마음을 덮어버리는 탓에 모든 복덕과 지혜가 환히 비추어지면서 밝아질 수가 없다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해가 가리워진 때문에  빛이 밝게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魔知其心大,不可沮壞,但小沮壞,令其稽留。爾時,薩陁波崙自刺其身,出血灑地,欲以淹塵。人血肉雖臭,以其至心求水不得,意不分別香臭好惡,爲欲淹塵,不惜身命。又薩陁波崙深心愛著般若波羅蜜故,無所愛惜。

악마는 살타파륜 마음가짐이 커서 무너뜨릴  없음을 알면서도, 다만 조금이라도 무너뜨려서 그를 지체시키고자 하였을 뿐인데, 그 때에 살타파륜이 스스로 그의 몸을 칼로 찔러서 피를 내어 땅에 뿌리며 먼지가 나지 않게 하려고 하였으니,

사람의 피와 살은 비록 역겨울지라도 그는 지극한 마음으로 물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게 되자, 향기가 나건 냄새가 나건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먼지가 일어나지 않게 하고자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며, 

 살타파륜은 깊은 마음으로 반야바라밀에 애착하는 까닭에 아깝게 여기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有人言:“多有諸天龍、鬼神等常隨逐薩陁波崙,佐助守護,是故所出之血變爲香水。如羼提仙人被割截時,血化爲乳。”又以無量福德成就故,隨願卽成。

어떤 말하기를 “모든 하늘ㆍ용ㆍ귀신들이 많이 있어서 언제나 살타파륜을 따라다니며 돕고 수호하였기 때문에 나온 피도 향수(香水)로 변하게 되는 것이 마치 찬제선인(羼提仙人)이 몸을 베고 끊을 때에 피가 젖으로 변한 것과 같다”고 하였으며,  무량한 복덕을 성취한 까닭에 원하는대로  성취한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신인, 찬제선인(羼提仙人)이 가리왕에게 손발을 잘리자 그 피가 모두 젖이 되었다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88권 8

 

問曰:若福德成就,隨願卽得,魔不應隱蔽其水?

묻나니, 만약 복덕을 성취하여 원하는 바 대로    있었다면, 악마는  물을 숨기지 못하였어야 할것입니다.

 

答曰:是菩薩新發意能成小願,未能卻魔。此中薩陁波崙自說出血因緣:“我從無始生死已來數數喪身,未曾爲法。”

답하나니, 이 보살은 새로 뜻을  신발의로서, 조그마한 소원은 성취할  있어도 아직 악마를 물리칠 수는 없었으며, 

여기에서 살타파륜이 피를  인연을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비롯함이 없는 무시(無始)로부터 나고 죽으면서 삭삭(數數, 자주자주)하게 몸을 잃었으면서도 아직 일찍이 법을 위한 것이 아니었었다”고 한 것이다.

 

問曰:若薩陁波崙愛法,刺身出血,若其身死,誰復聽法?

묻나니, 살타파륜이 법을 좋아하여 몸을 찔러서 피를 내었는데, 만약 그의 몸이 죽게 되면 누가 법을 듣는다는 것입니까?

 

答曰:是事如破骨出髓中答。又此中諸天、大菩薩守護故,令其不死。又復惡魔知其心不可沮壞,水則還出。

薩陁波崙等皆無異心者,如人初習慈心,欲爲衆生及爲般若波羅蜜故,不惜身命;旣得利刀割身,以痛自逼故,心生悔恨,是名異。

답하나니, 이러함에 대해서는 앞의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는 파골출수(破骨出髓)’에서 대답한 것과 같으며, 

 여기에서는 모든 하늘들과  보살들이 수호하고 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죽지 않게  것이며, 

 악마는 그의 마음을 무너뜨릴  없음을 알았으므로 물이 다시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살타파륜  모두는 다른 마음이 없는 무이심(無異心)이었다’함이란, 마치 사람들이 처음부터 자비심을 익히어 중생들을 위하고, 반야바라밀을 위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을지라도, 날카로운 칼로 몸을 고통이 닥쳐오면 후회하기도 하고 원망하는 마음도 내게 되는 것이니, 이를 바로 ‘다른 이(異)’라 하는 것이며, 

 

是菩薩信力大故,欲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果報故,不計是苦。又以深悲心愛念衆生,雖受種種苦惱,不以爲難;譬如慈母愛子,雖爲子長受勤苦不淨,不以爲惡。

又復見諸法實相畢竟空故,知是身但是虛誑和合;破是虛誑故,割截身時,不妨阿耨多羅三藐三菩提。

 보살은 믿는 신력(信力) 컸으며,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보를 얻고자 때문에, 이러한 고통쯤은 헤아리지 않았으며, 

 깊은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사랑하기에, 비록 갖가지로 고뇌를 받는다 할지라 어려운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니, 마치 인자한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기에 자식 때문에 오래도록 갖은 고생을 하고 더러운 것을 묻힐지라도 싫다고 여기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한 제법의 실상(實相)은 필경공이라고 보기 때문에,  몸은 다만 거짓으로 화합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며,  거짓을 파괴하는 까닭에 몸을 베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방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魔不得其便者,如人有瘡則受毒;菩薩若有貪欲、憂愁瘡者,魔得其便。以出血灑地,心不憂愁故,魔不得便。

如薩陁波崙心,五百女人心亦如是,敬重薩陁波崙故;見其刺身,應有憂愁,以其願得滿故,不以爲愁。

‘악마가  편(便, 기회)을 얻지 못한다’고 함이란, 마치 사람에게 상처가 있으면 바로 독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만약 보살에게 탐욕이나 근심하는 상처가 있으면 악마가  틈을 얻을 수 있겠지만, 피를 내어 땅에 뿌리면서도 그 마음에 근심하는 없었기 때문에 악마가  편(便, 기회) 얻지 못한 것이며, 

살타파륜의 마음가짐과 같이  5백의 여인들 마음 역시도 이와 같았으니, 

살타파륜을 공경하고 존중한 까닭에  몸을 찌르는 것을 보고 마땅히 근심하고 걱정하였어야 함에도, 그로써 그의 원을 만족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은 것이다.

 

爾時,釋提桓因見是事已,歎未曾有者,是人未得無生忍,諸煩惱未斷,爲供養法故,不惜身命,如諸離欲人無異;割截其身,如斷草木。初心旣爾,後心轉增。

그 때에 석제환인이 이러한 것을 보고 나서 “전에 없었던 미증유(未曾有)로다”라고 찬탄하였으니, 

 사람은 아직 무생인(無生忍)을 얻지도 못하였고, 아지 모든 번뇌를 끊지도 못하였거늘, 법에 공양하기 위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 마치 모든 욕탐을 여읜 사람과 다름이 없고, 그의 몸을 베고 끊는 것이 마치 풀과 나무를 끊는 것과 같으며, 처음 일으킨 마음의 초심(初心)도 이미 그러하였으니, 나중의 마음인 후심(後心)은 한층 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復次,未曾有者,此中釋提桓因自說因緣:“薩陁波崙愛法乃爾,以刀自刺等。”

釋提桓因作是心歡喜已,讚言:“善哉!”讚其愛法、樂法,勤心精進。

以過去佛爲喩:“非但汝今辛苦,過去諸佛求般若亦爾。”

또한 ‘전에 없던 미증유(未曾有)’라 함이란, 여기에 석제환인 자신이  인연을 말하였으니, “칼로써 자기의 몸을 찌르고 있으니, 살타파륜이 법을 사랑함이 저러하구나”라고 하는 등이며, 

석제환인이 이러한 마음으로 기뻐하고 나서 찬탄하기를 “훌륭하십니다”고 하며, 그가 법을 사랑하고 법을 좋아하면서 부지런히 마음으로 정진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님에 비유하면서 찬탄하기를 “다만 당신만이 지금 모진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반야를 구하실 때에는 역시 그러하였습니다”고 하였다.

 

薩陁波崙聞釋提桓因安慰其心已,如火得酥,轉更熾盛,作是念:

“我旣敷座灑地,當於何處得好名華莊嚴法處?” 灑 뿌릴 쇄,

살타파륜은 석제환인이 그의 마음을 위로하는 말을 듣자, 마치 불이 기름인 소유(蘇油)를 만나서 더욱 더 훨훨 타오르는 것과 같았으므로 생각하기를, ‘나는 이미 자리를 펴 놓았고 땅도 깨끗하게 뿌려 두었으니, 이제는 어디에서 이름 있는 좋은 꽃들을 얻어서 설법할 곳을 장엄해야 하리라’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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