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하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 卷下  5


何等爲覺?念念爲覺,念念爲得,覺得是意,便隨道也。外七覺意爲墮生死,內七覺意爲隨道。內七覺意者,謂『三十七品經』;外七覺意者,謂萬物也。覺者爲識事,便隨覺意也。有覺意便隨道覺,有覺意墮罪覺。『三十七品經』便正意,是爲隨道;覺善惡,是爲墮罪也。

무엇이 각(覺)인가? 생각 생각이 각이 되고, 생각 생각을 얻음의 득(得)이니,

이 뜻을 깨달아 얻으면 곧바로 도를 따르게 되며,

밖의 외7각의(外七覺意)는 생사에 떨어지고, 안의 내7각의(內七覺意)는 도를 따르는 것이니,

안의 내7각의는 '37품경(37 조도품)'을 말하고, 밖의 외7각의는 만물을 말하며,

각(覺)이라는 것은, 일을 인식하여 문득 뜻을 알게되는 각의(覺意)를 따르는 것으로, 

어떤 각의는 도각(道覺)을 따르고, 어떤 각의는 죄각(罪覺)에 떨어지며,

'37품경(37 조도품)'은 곧 바른 뜻이므로 이것은 도각을 따름이 되고, 악한 뜻은 죄각에 떨어지는 것이다.


問:何等爲從諦身意持報?

謂身持七戒,意持三戒,是爲身意持也。從諦意得休息,從四諦意因緣休;休者爲止,息爲思,得道爲受思也。

묻습니다; 무엇이 진리의 제(諦)를 좇아 몸과 뜻의 신의(身意)를 지니는 것입니까?

답한다; 이른바 몸은 7계(戒)를 지니고, 뜻은 3계를 지니는 것으로, 이것이 몸과 뜻의 신의(身意)를 지니는 것이다.

제(諦)의 뜻을 좇아 휴식(休息)을 얻고, 4제(諦)의 뜻을 좇아 인연이 쉬나니, 쉰다는 휴(休)는은 멈추는 지(止)요,

숨을 쉬는 식(息)은 생각하는 사(思)이며, 도를 얻는 득도(得道)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수사(受思)이다.


貪樂道法,常行道爲愛覺意,持道不失爲力覺意,已得十息身安隱爲息覺意,自知已安爲定覺意。

도법을 탐내고 좋아하여서 마땅히 도를 행하는 것은 애각의(愛覺意)가 되고,

도를 지녀서 잃어버리지 않음은 역각의(力覺意)가 되고,

열 번째의 숨을 얻어서 몸이 안온한 것은 식각의(息覺意)가 되고,

이미 편안함을 저절로 아는 것은 정각의(定覺意)가 되는 것이다.

 

身意持,意不走爲持,從諦自在,意在所行,謂得四諦。亦可念四意止,亦可四意斷,亦可四神足,亦可五根、五力、七覺意、八行,是爲自在意。在所行從諦。

몸과 뜻의 신의(身意)를 지녀서 뜻이 달아나지 않음이 지님의 지(持)가 되나니,

진리의 제(諦)를 좇아 자재하여 뜻이 행하는 바에 있으면 이른바 4제(諦)를 얻은 것이며,

또한 4의지(意止)와 4의단(意斷)과 4신족(神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의(覺意)와 8행(行, 팔정도)을 생각할 수 있으니, 이것이 자재한 뜻이 행하는 데 있어서의 진리의 제(諦)를 좇음이 되며, 


觀者,爲『三十七品經』要。是爲守意覺者,謂諦不復受罪也。

관(觀)은  '37품경(37 조도품)의 요체(要體)를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수의(守意)가 되고,

각(覺)은 이른바 진리의 제(諦)를 깨달아 다시는 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八行有內外,身爲殺、盜、婬,聲爲兩舌、惡口、妄言、綺語,意爲嫉、妒、癡。是上頭三法,爲十事在外,五道在內也。

8행(行, 팔정도)에 안과 밖이 있으니, 몸(신업)은 살생(殺生)ㆍ투도(偸盜)ㆍ사음(邪婬)이 되고,

소리(聲, 구업)는 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가 되고,

뜻(의업)은 질투(嫉妬)ㆍ진에(瞋恚)ㆍ우치(愚癡)가 되니,

이것은 앞의 3법(法)으로 열 가지가 되는 것으로, 밖에 있는 외사(外事)이고, 5직(直)은 안에 있은 내사(內事)이다.


從諦守諦,從爲神,守爲護,謂法不犯罪,諦爲道。

진리의 제(諦)를 좇아서 제(諦)가 따르는 것은 신(神)이 되고, 지키는 것은 호(護)가 되나니,

이른바 법(法)이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며, 진리의 제(諦)는 도(道)인 것이다.

 

知非常、苦、空、非身、不淨爲直見;非常人計爲常,思苦爲樂,空計爲有,非身用作身,不淨計爲淨,是爲不直見也。

무상(無常)과 고(苦)와 공(空)과 비신(非身)과 부정(不淨)을 아는 것은 바른 소견의 직견(直見, 정견)이니, 

사람은 무상을 항상한 상(常)으로 계교하며, 고를 낙(樂)으로 생각하고, 공을 헤아려 유(有)로 삼으며, 비신으로써 몸을 짓고, 부정을 계교하여 정(淨)으로 삼는 것 등은 바르지 못한 소견의 불직견(不直見, 불정견)인 것이다.


何等爲直見?信本因緣,知從宿命有,是名爲直見。何等爲直治?分別思惟,能到善意,是爲直治。何等爲直語?守善言,不犯法,如應受言,是名爲直語也。何等爲直業?身應行不犯行,是名爲直業也。

무엇이 바른 소견의 직견(直見, 정견)인가? 본래의 본인연을 믿으며, 숙명(宿命)을 좇아 있는 것임을 아는 것이, 바로 바른 소견이며, 

무엇이 바른 대치의 직치(直治, 정명)인가? 분별하고 사유하여 능히 선한 뜻을 이루는 것이, 바로 바른 대치이며, 

무엇이 바른 말의 직어(直語, 정어)인가? 선한 말을 지키고 법을 범하지 않아서 응하는 대로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바른 말이이며, 

무엇이 바른 업의 직행(直業, 정업)인가? 몸소 행에 응하여 행을 범하지 않는 것을 바른 업이라 하며, 


何等爲直治?隨得道者教戒行,是名爲直治也。何等爲直精進?行行無爲,晝夜不中止,不捨方便,是名爲直精進方便也。何等爲直念?常向經戒,是名爲直念。何等爲直定?意不惑亦不捨行,是名爲直定。如是行,令賢者八業行具,已行具足,便行道也。

무엇이 바른 직치행(直治行)인가? 도를 얻은 이를 따라 계행(戒行)을 가르치는 것을 바른 직치행이라 하며, 

무엇이 바른 직정진(直精進)인가? 행하고 행하되 행한다는 생각이 없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중단하지 않으며, 방편을 버리지 않는 것을 바른 정진의 방편이라 하며, 

무엇이 바른 생각의 직념(直念, 정념)인가? 늘 경(經)과 계(戒)를 향하는 것을 바른 생각이라 하며, 

무엇이 바른 선정의 직정(直定, 정정)인가? 뜻이 미혹되지 않고 또한 행을 버리지 않는 것을 바른 정이라 하나니,

이와 같은 행으로 현자(賢者)로 하여금 8업행(業行, 팔정도)을 구족하게 하는 것이니, 이미 구족하였다면 곧바로 도를 행하는 것이다.


八直有治、有行,行八直,乃得出要,身不犯戒,是爲直治。慧、信、忍辱是爲行身,意持是名爲直治。謂無所念爲直,有所念爲不直也。

여덟 가지 바름의 팔직(八直)은 대치(對治)가 있고 행(行)이 있으니, 여덟 가지 바름을 행하여 마침내 뛰어난 요체(要體)를 얻어서 몸이 계(戒)를 범하지 않음이 바로 바른 대치의 직치(直治)가 되며,

혜(慧)와 신(信)과 인욕(忍辱)은 행하는 몸이 되며, 뜻을 지님을 바른 대치라고 하나니,

이른바 생각하는 바가 없음이 바름의 직(直)이 되고, 생각하는 바가 있음이 바르지 않음의 불직(不直)인 것이다.

 

十二部經都皆墮『三十七品經』中,譬如萬川四流,皆歸大海。『三十七品經』爲外,思惟爲內。思惟生道故爲內;道人行道,分別『三十七品經』,是爲拜佛也。『三十七品經』亦墮世閒,亦墮道。諷經口說是爲世閒,意念是爲應道。持戒爲制身,禪爲散意。

12부경(部經)은 모두 '37품경(37 조도품)'을 따르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모든 시냇물과 사방의 흐름이 모두 큰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으로,

'37품경(37 조도품)'은 바깥이 되고, 사유(思惟)는 안이 되는 것으로, 사유하여 도(道)를 낳기 때문에 안(內)이 되며,

도인(道人)이 도를 행하여 '37품경(37 조도품)'을 분별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 예배함이 되며,

'37품경(37 조도품)'은 세간을 따르기도 하고 또한 도를 따르기도 하나니,

경을 외워서 입으로 설하는 것은 세간을 위함이요, 뜻으로 생각하는 것은 도에 응함이며,

계를 지니는 것은 몸을 제어하기 위함이요, 선(禪)은 뜻을 흩어버리기 위한 것이다.


行從願,願亦從行。行道所向,意不離;意至佛,意不還也。亦有從次第行得道,亦有不從次行得道。謂行四意止、斷、神足、五根、五力、七覺意、八行,是爲從次第。畏世閒惡,身便一念從是得道,是爲不從次第。

행(行)은 원(願)을 따르고, 원 또한 행을 따르는 것이니, 도를 행하여 향하는 곳을 뜻이 여의지 않는 것이니, 뜻이 부처님께 이르러서 돌이키지 않는 것이며,

차례를 따라 행하여 도를 얻기도 하고, 또한 차례를 따르지 않고 행하여 도를 얻기도 하나니, 이른바 4의지(意止)와 4의단(意斷)과 4신족(神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의(覺意)와 8행(行)을 행하는 것이 차례를 따르는 것이요,

세간을 두려워하고 몸이 편한 것을 싫어하여 한 일념(一念)으로 좇아서 도를 얻는 것은 차례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道人能得三十七品行意,可不順從數息、相隨、止也。身口七事,心、意、識各有十事,故爲三十七品。
四意止、斷、神足屬外,五根、五力屬內,七覺意、八行得道也。

泥洹有四十輩,謂『三十七品經』幷三向,凡四十事皆爲泥洹。

도인이 능히 '37품경(37 조도품)'의 행의 뜻을 얻을 수 있다면 숨을 세는 수식과 서로 따름의 상수와 멈춤의 지(止)를 순종(順從)하지 않아도 되나니,

몸과 입에 일곱 가지가 있고 마음과 뜻과 식(識)에 각각 열 가지씩 있기 때문에 37품이 되는 것이다.

4의지와 4의단과 4신족은 밖에 속하고, 5근과 5력은 안에 속하며, 7각의와 8행은 도를 얻는 것이며, 

니원법(열반법)에 40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37품경과 아울러 3향(向)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40가지가 모두 니원법이 되는 것이다.

 

問:數息爲泥洹,非報數息、相隨,鼻頭止意有所著,不爲泥洹,泥洹爲有不?

報:泥洹爲無有,但爲苦滅,一名意盡。

難:泥洹爲滅。報:但善惡滅耳。

묻습니다; 숨을 세는 수식은 니원법입니까? 숨을 세는 수식과 서로 따르 상수는 코끝에 뜻을 멈추는 것이니, 집착한 곳이 있으므로 니원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답한다; 니원법은 유(有)가 되는가? 니원법은 무유(無有)이니, 다만 고(苦)를 멸하는 것으로, 일명 뜻이 다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따져 묻겠습니다; 니원법은 멸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다만 선과 악만이 멸할 뿐이다.


知行者,有時可行四意止,有時可行四意斷,有時可行四神足,有時可行五根、五力、七覺意、八行。諦者爲知定亂。定爲知行,亂爲不知行也。

행을 아는 이는 때로는 4의지(四意止)를 행할 수 있고, 때로는 4의단(四意斷)을 행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4신족(四神足)을 행할 수도 있고, 때로는 5근(根)과 5력(力)과 7각의(覺意)와 8행(行)을 행할 수도 있다.

진리의 제(諦)라는 것은 어지러움을 정(定)할 줄 아는 것이니, 정하게 되면 행을 알게 되며,

어지러우면 행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問:何以故正有五根、五力、七覺意、八行?

報:人有五根,道有五根;人有五力,道有五力;人有七使,道有七覺意;行有八直,應道八種。隨病說藥,因緣相應。

묻습니다; 무슨 까닭에 5근과 5력과 7각의와 8행이 있는 것입니까?

답한다; 사람에게 5근이 있으므로 도에도 5근이 있고, 사람에게 5력이 있으므로 도에도 5력이 있으며, 사람에게 7사(使)가 있으므로 도에도 7각의가 있으며, 행에 8직(直)이 있으므로 도의 여덟 가지에 응하는 것이니,

병에 따라 약을 설한 것이며, 인연이 서로 응한 것이다.


眼受色、耳聞聲、鼻向香、口欲味、身貪細滑,是爲五根。何以故名爲根?已受當復生,故名爲根。
不受色、聲、香、味、細滑,是爲力,不墮七使爲覺意,已八直爲應道行。五根堅意,五力爲不轉意,七覺爲正意,八行爲直意也。

눈은 색(色)을 받아들이고,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입은 맛을 보고, 몸은 부드러움을 탐하나니, 이것이 바로 5근(根)이 되는데, 무슨 까닭에 근이라 하는 것인가?

이미 받아들였다면 마땅히 다시 낳는 까닭에 근이라 하는 것이다.(경험하여서 좋은 것에는 다시 집착하는 까닭에...)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세활(細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바로 역(力)이 되고,

7사(使)에 떨어지지 않음이 각의(覺意)가 되고, 8직(直)은 도행(道行)에 응함이 되나니,

5근(根)은 견고한 뜻이 되고, 5력(力)은 전변하지 않는 뜻이 되며, 7각의(覺意)는 뜻을 멈춤이 되고, 8행은 바른 뜻이 되는 것이다.


問:何等爲善意?何等爲道意?

報:謂四意止、斷、神足、五根、五力,是爲善意;七覺意八行,是爲道意。有道善,有世閒善。從四意止至五根、五力,是爲道善;不婬、兩舌、惡口、妄言、綺語、貪、瞋、癡,是爲世閒善。

묻습니다; 무엇이 선한 뜻의 선의(善意)가 되고, 무엇이 도의 뜻인 도의(道意)가 되는 것입니까?

답한다; 4의지와 4의단과 4신족과 5근과 5력은 선한 뜻의 선의(善意)가 되고, 7각의와 8행은 도의 뜻인 도의(道意)가 된다.

도의 선함인 도선(道善)도 있고 세간의 선함인 세간선(世閒善)도 있으니,

4의지로부터 5근과 5력까지는 바로 도의 선함인 도선(道善)이 되고,

사음(邪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ㆍ탐(貪)ㆍ진(瞋)ㆍ치(癡)를 하지 않는 것은 세간의 선함인 세간선(世閒善)이 된다.


諦見者,知萬物皆當滅,是爲諦見;萬物壞敗,身當死,以不用爲憂,是爲諦觀。
意撗意走,便責對得制,是爲除罪;諸來惡不受爲禪。

자세히 살핀다는 체견(諦見)은, 만물이 모두 마땅히 멸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자세히 살피는 체견(諦見)이며, 만물은 무너져 어그러지고 몸도 마땅히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 것은 자세히 관찰하는 체관(諦觀)이 되며, 

뜻이 날뛰거나 달아나면 곧바로 꾸짖어 대치(對治)하여 제어하는 것은 죄를 제거함이 되며,

모든 몰려드는 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선(禪)이다.


一心內意十二事智慧,七爲數,八爲相隨,九爲止,十爲觀,十一爲還,十二爲淨,是爲內十二事。

일심(一心) 안에 있는 열두 가지의  뜻은, 첫째는 마음, 둘째로부터 여섯째까지는 지혜, 일곱째는 헤아림의 수(數), 여덟째는 서로 따름의 상수(相隨), 아홉째는 멈춤의 지(止), 열째는 관(觀), 열 한번째는 돌이킴의 환(還), 열 두번째는 정(淨)이니, 이것이 안의 열두 가지인 내십이사(內十二事)이며, 

 

外復十二事,一爲目,二爲色,三爲耳,四爲聲,五爲鼻,六爲香,七爲口,八爲味,九爲身,十爲細滑,十一爲意,十二爲受欲,是爲外十二事也。

밖에 다시 열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눈, 둘째는 색(色), 셋째는 귀, 넷째는 소리, 다섯째는 코, 여섯째는 냄새, 일곱째는 입, 여덟째는 맛, 아홉째는 몸, 열째는 부드럽고 매끄러움, 열한째는 뜻, 열두째는 욕심을 받아들임이니,

이것이 밖의 열두 가지인 외십이사(外十二事)이다.


術闍者爲智,凡有三智:一者、知無數世父母、兄弟、妻子;二者、知無數世白黑、長短,知他人心中所念;三者、毒以斷,是爲三也。

술사(術闍, 지혜)라는 것은 지(智)로써, 대체로 세 가지 지(智)가 있으니,

첫째는 수없는 전세(前世) 적 부모와 형제와 처자를 아는 것이요,

둘째는 수없는 전세의 흑백(黑白)과 장단(長短)을 알고 또한 다른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아는 것이요,

셋째는 독(毒)이 이미 끊어진 것이니, 이것이 세 가지이다.


沙羅惰怠者,爲六通智:一爲神足,二爲徹聽,三爲知他人意,四爲知本所從來,五爲知往生何所,六爲知索漏盡,是爲六也。

사라태타(沙羅惰怠, 육통지)는 6통(通)의 지혜인 육통지(六通智)가 되나니, 첫째는 신족(神足)이요, 둘째는 환히 들음이요, 셋째는 다른 사람의 뜻을 앎이요, 넷째는 본래 온 곳을 아는 것이요, 다섯째는 어느 곳에 왕생(往生)할 것인가를 아는 것이요, 여섯째는 본래 누(漏)가 다한 것을 아는 것으로, 여섯 가지가 되는 것이다.


佛說大安般守意經卷下 終 불설대안반수의경 하권을 마침.

 

此經按經首序及見經文,似是書者之錯,經注不分而連書者也。義當節而注之,然往往多有不可分處,故不敢擅節,以遺後賢焉。

이 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서문과 경문(經文)을 살펴보면, 착오가 있는 듯한데, 경(經)과 주석(註釋)이 구분이 되지 않고 이어서 씌여 있다. 불법의 의미에는 마디가 있어서 이를 해석하는데, 이 경에서는 때때로 구분되지 않는 곳이 많이 있었으나, 함부로 마디를 짓지 않았으니, 뒤에 있을 현자(賢者)에게 맡긴다.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하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 卷下  4

 

意不墮色念,識亦不生,耳、鼻、口、身亦爾。意不在身,爲心意不在痛痒,意不在念,意不在法爲心也。

뜻이 색(色)에 떨어지지 않으면 염식(念識) 또한 생겨나지 않으며, 귀ㆍ코ㆍ입ㆍ몸 또한 그러하나니, 뜻을 몸에 두지 않으면 멈춤(止)이 되고, 뜻을 통양(痛痒)에 두지 않고, 뜻을 생각에 두지 않고, 뜻을 법에 두지 않으면 멈춤(止)이 되는 것이다.


問:誰主知身意痛痒者?

報:有身,身意知;痛痒,痛痒意知;意意,意意知;有飢,飢意知;有渴,渴意知;有寒,寒意知:有熱,熱意知。以是分別知也。

묻습니다; 누가 몸과 뜻과 통양을 주장하여 아는 것입니까?

답한다; 몸이 있어서 몸의 뜻을 알고, 통양이 있어서 통양의 뜻을 알고, 뜻의 뜻이 있어서 뜻의 뜻을 알고, 굶주림이 있어서 굶주림의 뜻을 알고, 목마름이 있어서 목마름의 뜻을 알고, 추움이 있어서 추움의 뜻을 알고, 더움이 있어서 더움의 뜻을 아는 것이니, 이렇게 분별하여 아는 것이다.


身意起身意,痛痒意起痛痒意,意意起意意,法意起法意。四意止,謂意念惡,制使不起,是爲止也。

몸의 뜻이 몸의 뜻을 일으키고, 통양의 뜻이 통양의 뜻을 일으키고, 뜻의 뜻이 뜻의 뜻을 일으키고, 법의 뜻이 법의 뜻을 일으키므로, 4의지(四意止, 사정단)는 이른바 뜻으로 악을 생각하는 것을 제어하여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멈춤(止)인 것이다.


四意止亦隨四禪,亦隨四意止。墮四意止爲近道,不著惡便善意生;四禪爲四意定,爲止意也。

4의지(四意止)는 또한 4선(禪)을 따르며, 사선은 4의지를 따르나니, 4의지를 따르면 도에 가까워져서 악을 짓지 않고 곧바로 선한 뜻이 생기나니, 4선(禪)은 4의정(意定)도 되고, 4의지(四意止)도 되는 것이다.


行道有四因緣:一、止身;二、止痛痒;三、止意;四、止法。止身者,謂見色念不淨;止痛痒者,謂不自貢高;止意者,謂止不瞋恚;止法者,謂不疑道人行。四意止,意起念生,卽時識對行藥,得一意止,便得四意止也。

도를 행함에는 네 가지 인연인 사인연(四因緣)이 있으니, 

첫째는 몸을 멈추는 지신(止身)이요, 둘째는 통양을 멈추는 지통양(止痛痒)이요, 

셋째는 뜻을 멈추는 지의(止意)요, 넷째는 법을 멈추는 지법(止法)이라. 

몸을 멈추는 지신(止身)이란, 이른바 색(色)을 보고 부정(不淨)을 생각하는 것이요, 

통양을 멈추는 지통양(止痛痒)이란, 이른바 스스로 잘난  하지 않는 것이요, 

뜻을 멈추는 지의(止意)이란, 이른바 멈추어서 성내서 않는 것이요, 

법을 멈추는 지법(止法)이란, 이른바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도인은 4의지를 행하여서 뜻이 일어나고 생각이 생겨나면 즉시 인식하여서 대치하고 약을  것이니, 하나의 의지(意止)인 일의지(一意止)만이라도 얻게 되면   의지(四意止) 또한 얻게 되는 것이다.


四意定:一者、自觀身,亦復觀他人身;二者、自觀痛痒,亦復觀他人痛痒;三者、自觀心,亦復觀他人心;四者、自觀法因緣,亦復觀他人法因緣。如是身,一切觀內外因緣、成敗之事,當念我身,亦當成敗,如是是爲四意定也。

4의정(四意定)이란, 첫째는 스스로 몸을 관(觀)하고 또한 다시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하며, 

둘째는 스스로 통양(痛痒)을 관하고 또한 다시 다른 사람의 통양도 관하며, 

셋째는 스스로 마음을 관하고 또한 다시 다른 사람의 마음도 관하며, 

넷째는 스스로 법의 인연을 관하고 또한 다시 다른 사람의 법의 인연도 관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일체의 몸에서 안팎의 인연과 그 이루어지고 무너지 관하여서 마땅히 나의  또한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나니, 이것이 바로 4의정(四意定)인 것이다.

 

人欲止四意,棄爲外,攝爲內;已攝意爲外,棄爲內也。

사람이 4의(四意)를 멈추고자 한다면, 버리는 것으로 밖을 삼고, 거두는 것으로 안을 삼으며, 

이미 거두어들인 뜻으로 밖을 삼고 버리는 것으로 안을 삼는 것이며, 


觀他人身,謂自觀身不離他,便爲觀他人身苦,觀他人身爲非痛,痒意法亦爾也。自貪身,當觀他人身;念他人身,便自觀身,如是爲意止。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한다는 것은, 이른바 스스로의 몸을 관하여서 뜻을 여의지 않고 곧바로 다른 사람 몸의 괴로움을 관하여, 다른 사람의 몸이 통양이 아님을 관하는 것이니, 뜻과  또한 그러한 것이다. 

스스로의 몸을 탐한다면 마땅히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여서 다른 사람의 몸을 생각하고, 곧바로 스스로 몸을 관하는 것이 4의지(四意止)가 되는 것이다.


問:意見行何以爲止?

報:意以自觀身貪,便使觀他人身,爲意從貪轉故應止;若意貪他人身,當還自觀身也

묻습니다; 뜻으로 행하는 것을 보아서 어떻게 멈추는 것입니까? 

답한다; 뜻으로 자기가 몸을 탐하는 것을 관(觀)한다면 곧바로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도록 하는 것이니, 뜻을 탐하는 것으로부터 전변하였 때문에 응당 멈추게 되며, 만약 뜻으로 다른 사람의 몸을 탐한다면 마땅히 돌이켜 자신의 몸을 관하는 것이다.

 

有時自身觀,不觀他人身;有時當觀他人身,不當自觀身;有時可自觀身,亦可觀他人身;有時不可自觀身,亦不可觀他人身。自觀身者,爲挍計觀他人身。

때로는 자신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몸은 관하지 않으며, 때로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고 자신의 몸은 관하지 않으며, 때로는 자기의 몸도 관하고 또한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하며, 때로는 자기의 몸도 관하지 않고 또한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하지 않으니, 자신의 몸을 관하는 이는 계교하여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해야 하는 것이다.


意不止,須自念身爲著,便轉著他人身。觀他人身爲見色、肥、白、黛眉、赤脣,見肥當念死人脹,見白當念死人骨,見眉黑當念死人正黑,見朱脣當念血正赤。挍計身諸所有,以得是意便轉,不復愛身也。

뜻이 멈추지 않으면 모름지기 자신의 몸에 비추어 생각하다가 곧바로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옮겨서 비추어 다른 사람 몸의 살찐 몸뚱이와 하얀 피부와 검은 눈썹과 빨간 입술을 관할 것이니, 살찐 것을 보고는 마땅히 죽은 사람의 불룩함을 생각할 것이고, 하얀 피부를 보고는 마땅히 죽은 사람의 뼈다귀에 비추어 생각할 것이고, 눈썹의 검은 것을 보고는 마땅히 죽은 사람의 아주 검음을 생각할 것이고, 붉은 입술을 보고는 마땅히 붉은 피를 생각해야 하나니,

몸에 있는 모든 것을 계교하여 이러한 뜻을 얻어서 곧바로 굴린다면, 다시는 몸을 애착하지 않을 것이다.


觀有內外,嫉、恚、疑當內觀,貪、婬當外觀,貪當念非常敗,婬當念對所有惡露。如自觀身婬,當念四斷意也。

관(觀)에 안과 밖이 있으니, 질투(嫉妬)ㆍ성냄의 진에(瞋恚)ㆍ어리석음의 우치(愚癡)는 안을 관하는 내관(內觀) 해당되고, 탐음(貪婬)은 밖을 관하는 외관(外觀) 해당된다. 

탐(貪)한다면 마땅히 무상하게 무너짐을 생각하고, 음(婬)하다면 마땅히 소유한 악로(惡露)를 생각할 것이니, 만약 자기의 몸을 관하여 음(婬)하다면 마땅히 4의단(四意斷, 사정단)을 생각해야 하리라.

 

觀有兩輩:一者、觀外;二者、觀內。觀身有三十六物,一切有對皆屬外;觀無所有爲道,是爲內觀也。

관(觀)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밖을 관하는 관외(觀外)요, 둘째는 안을 관하는 관내(觀內)이다. 

몸을 관하는  36가지가 있으니, 일체의 대(對, 상대)가 있는 것은 모두 밖을 관하는 관내(觀內)에 속하고, 

소유가 없는 것은 도가 되는 것으로, 이는 안을 관하는 관외(觀外)이 된다.


觀有三事:一者、觀身四色,謂黑、靑、赤、白;二者、觀生死;三者、觀九道。觀白見黑爲不淨,當前聞以,學後得道;未得道,爲聞得別,爲證得,爲知也。

관(觀)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몸의 검고 파랗고 빨갛고 하얀  가지 빛깔을 관함이요, 

둘째는 생사를 관함이요, 셋째는 9도(道)를 관함이다. 

 것을 관하여 검은 것으로 본다면 부정(不淨)이 되니, 마땅히 전례를 들어서 다음을 배운다면 도를 얻을 것이요, 아직 도를 얻지 못하여 듣기를(공부하기에) 힘쓴다면 각별히 지혜를 증득할 것이다.


觀有四:一者、身觀;二者、意觀;三者、行觀;四者、道觀,是爲四觀。譬如人守物,盜來便捨物;視盜人已得觀,便捨身觀物也。

관(觀)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몸을 관하는 것이요, 둘째는 뜻을 관하는 것이요, 셋째는 행을 관하는 것이요, 넷째는 도를 관하는 것이 바로  가지의 사관(四觀)이라. 

비유하자면, 사람이 물건을 지키다가 도적이다면 곧바로 물건을 놓아버리고 도적을 보듯이, 이미 관을 얻었다면 곧바로 몸을 놓아버리고 물(物)을 관하는 것이다.

 

觀有二事:一者、觀外諸所有色;二者、觀內謂無所有。觀空已得四禪,觀空無所有,有意、無意、無所有,是爲空,亦謂四棄得四禪也。

관(觀)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밖의 모든 소유한 색을 관함이요, 둘째는 안의 무소유를 관함이다. 

공(空)을 관하여 이미 4선(禪)을 얻었다면 공하여 소유가 없는 무소유를 관하니, 뜻이 있거나 뜻이 없거나 간에 소유가 없는 것이 바로 공(空)이 되며, 또한  가지를 버려서 4선(禪)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欲斷世閒事,當行四意止,欲除四意止,當行四意斷,人墮貪,貪故行。四神足飛,但有五根無有五力,不能制,但有五力無有五根,不生。得四神足,尚轉五力,能制上次十二品。四意斷,不作現在罪,但畢故罪,是爲四意斷也。

세간의 일을 끊고자 한다면 마땅히 4의지(四意止)를 행하고, 4의지(四意止)를 제거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4의단(四意斷)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탐욕에 떨어져서 탐욕을 행하기 때문이다.

4신족(神足)을 행하여 날아다니되, 다만 5근(根)만 있고 5력(力)이 없으면 능히 제어하지 못하며, 

다만 5력만 있고 5근이 없다면 능히 4신족을 얻지 못하나니,

오히려 5력을 굴리면 능히 상차(上次)의 12품 4의단(意斷)을 제어할  있으니, 현재의 죄를 짓지 않고 다만 오래된 죄를 마치는 것이 바로 4의단(四意斷)인 것이다.


畢故不受新,爲四意止,故畢新止,爲四意斷,故竟新斷,爲四神足。知足不復求守意,意爲畢,生爲新,老爲故,死爲身體壞敗爲盡也。

 것을 마치고  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4의지(四意止)가 되며, 

 것을 마치고  것을 그치는 것이 4의단(四意斷)이 되며, 

 것을 마치고  것을 끊는 것이 4신족(四神足)이 된다. 

족함을 알아서 다시 구하지 않는 것이 수의(守意)이니, 수의는 마침이 되고, 생겨남은  것이 되며, 늙음은 옛것이 되며, 죽는 것은 신체가 되고, 파괴되는 것은 다함의 진(盡)이 되는 것이다.


四意斷,謂常念道。善念生便惡念斷,故爲斷息道;善念止,便惡念生故爲不斷也。

4의단(四意斷)이란,  도를 생각하여서 선한 생각이 생겨나면 곧바로 악한 생각이 끊어지는 까닭에 악도(惡道)를 끊게 되고, 선한 생각이 그치면 곧바로 악한 생각이 생겨나는 까닭에 악을 끊지 못하게 되며, 


四意斷者,意自不欲向惡是爲斷,亦謂不念罪斷也。

4의단(四意斷)이라는 것은, 뜻이 스스로 악으로 향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 바로 단(斷)이고, 또한 죄를 생각하지 않음을 단(斷)이라 하며, 


四神足:一者、身神足;二者、口神足;三者、意神足;四者、道神足。念飛,念不欲滅,不隨道也。

4신족(四神足)이란, 첫째는 몸의 신신족(身神足), 둘째는 입의 구신족(口神足), 셋째는 뜻의 의신족(意神足), 넷째는 도의 도신족(意神足)이니, 날음의 비(飛)를 생각하여 소멸하려 하지 않음을 생각한다면, 도를 따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四伊提鉢,四爲數,伊提爲止,鉢爲神足。欲飛便飛,有時精進坐七日便得,或七日,或七歲也。

4이제발(四伊提鉢)이란, 4(四)는 숫자가 되고, 이제(伊提)는 멈춤의 지(止)가 되고, 발(鉢)은 신족(神足)이 되며, 날고자 한다면 문득 날고, 때로는 정진하여 7일 동안 앉는다면, 문득 얻게 되니 혹은 7개월 혹은 7년이 되기도 한다.

 

得神足可久在世閒,不死有藥:一者、意不轉;二者、信;三者、念;四者、有諦;五者、有黠,是爲神足藥也。

4신족(四神足)을 얻으면 세간에 오래 있을  있어서 죽지 않는 약이 있으니, 

첫째는 뜻이 전변하지 않는 의불전(意不轉)이요, 둘째는 믿음의 신(信)이요, 셋째는 생각함의 염(念)이요, 넷째는 진리가 있는 유제(有諦)요, 다섯째는 지혜가 있는 유힐(有黠)이니, 이러한 것이 신족의 약이며,

 

得四神足,不久在世閒,有三因緣:一者、自厭其身臭惡,故去;二者、無有人能從受經道,故去;三者、恐怨惡人誹謗得罪,故去也。

4신족(四神足)을 얻어서 세간에 오랫동안 있지 않는 것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스스로  몸의 나쁜 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며, 

둘째는 사람이 능히 경도(經道)를 받음을 좇는 이가 없기 때문에 가는 것이며, 

셋째는 나쁜 사람이 비방하여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神足九輩,謂乘車馬,步疾走,亦爲神足;外戒堅亦爲神足;至誠亦爲神足;忍辱亦爲神足也。行神足當飛意。

신족(神足)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수레와 말을 타거나 그냥 걷거나 빠르게 달리는  또한 신족이요, 밖으로 계(戒)가 견고함 또한 신족이요, 지성스러움 또한 신족이요, 인욕함 또한 신족이니, 신족을 행함은 마땅히 날아다닌다는 뜻이다.

 

問:何爲飛意?

報:有四因緣:一者、信;二者、精進;三者、定;四者、不轉意。何等爲信?信飛行。何等爲精進?飛行。何等定?飛行。何等爲不轉意?謂著飛行不轉意也。身不欲行道,意欲行便行,神足如是,意欲飛卽能飛也。

묻습니다; 무엇이 날아다닌다는 뜻입니까?

답한다; 네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믿음이요, 둘째는 정진이요, 셋째는 정(定)이요, 넷째는 전변하지 않는 불전(不轉)의 뜻이다.

무엇이 믿음의 비행(飛行)이며, 무엇이 정진의 비행이며, 무엇이 정의 비행이며, 무엇이 전변하지 않는 뜻의 비행인가? 이른바 날아다니는 것에 집착하여 뜻을 전변하지 않는 것이니, 몸은 도를 행하고자 하지 않을 지라도 뜻이 행하고자 한다면 문득 행하여지는 것이니, 신족이란 이와 같이 뜻으로 날고자 하면 즉시 날 수 있는 것이다.

 

五根,譬如種物,堅乃生根,不堅無有根。信爲水雨,不轉意爲力,所見萬物爲根,制意爲力也。

5근(五根)이란, 비유하자면, 물(物, 씨앗)을 심은 것이 견고해야 마침내 뿌리가 나며, 견고하지 않으면 뿌리가 있지 않은 것과 같으니, 신(信)은 빗물이 되고, 전변하지 않는 불전의(不轉意)는 힘이 되고,

보는 바의 만물은 뿌리가 되며, 뜻을 제어함은 힘이 되는 것이다.

信根中有三陰:一爲痛痒,二爲思想,三爲識陰。定根中有一陰,謂識陰也。五根、五力、七覺意,中有一陰者,中有二陰者,中有三陰者,有四陰者,皆有陰。  
신근(信根) 가운데에 3음(陰)이 있으니, 첫째는 통양(痛痒)이요, 둘째는 사상(思想)이요, 셋째는 식음(識陰)이며,

정근(定根) 가운데도 1음(陰)이 있으니, 식음(識陰)을 말하는 것이다.

5근(根)과 5력(力)과 7각의(覺意)에는 1음(陰)이 있기도 하고 2음이 있기도 하며 3음이 있기도 하고 4음이 있기도 한 것으로, 모두 음(陰)이 있는 것이다.

 

問:是道行,何緣有陰?

報:以泥洹無陰,餘皆有陰也。七覺意,上三覺屬口,中三覺屬身,下一覺屬意。

묻습니다; 이 도행(道行)은 무슨 연(緣)으로 음(陰)이 있는 것입니까?

답한다; 니원(泥洹, 열)은 음이 없지만 그 나머지 모두에는 음이 있으니,

7각의도 앞의 셋은 입에 속하고, 가운데 셋은 몸에 속하고, 마지막의 하나는 뜻에 속하는 것이다.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하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 卷下  3

 

數息亦墮信力,用不疑,故爲信力;亦墮進力,用精進,故爲進力;亦墮念力,用餘意不能攘,故爲念力;

亦墮定力,用一心,故爲定力;亦墮黠力,用前分別四意止、斷、神足,故爲黠力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을 하면, 신력(信力)에 떨어지나니, 의심하지 않는 까닭에 신력이 되며, 

또한 진력(進力)에 떨어지나니, 정진하는 까닭에 진력이 되며, 

또한 염력(念力)에 떨어지나니, 그 속 뜻의 여의(餘意)가 능히 쇠하지 않는 까닭에 염력이 되며, 

또한 정력(定力)에 떨어지나니, 마음이 한결같은 까닭에 정력이 되며, 

또한 혜력(慧力)에 떨어지나니, 앞에서 말한 4의지와 4의단과 4신족을 분별하는 까닭에 혜력이 되는 것이다.

 

數息亦墮覺意。用識苦,故爲覺意;亦墮法識覺意,用知道因緣,故爲法覺意;亦墮力覺意,用棄惡,故爲力覺意;亦墮愛覺意,用貪樂道,,故爲愛覺意;亦墮息意覺,用意止,故爲息意覺;亦墮定覺意,用不念,故爲定覺意;亦墮守覺意,用行不離,故爲守覺意也。

수식(數息)을 하면, 또한 깨달음의 각의(覺意)에 떨어지나니, 고(苦)를 인식하는 까닭에 각의가 되며, 

또한 법을 분멸하는 법식각의(法識覺意)에 떨어지나니, 도의 인연을 아는 까닭에 법각의(法覺意)가 되며, 

또한 역각의(力覺意)에 떨어지나니, 악을 버리는 까닭에 역각의가 되며, 

또한 애각의(愛覺意)에 떨어지나니, 도를 탐내고 좋아하는 까닭에 애각의가 되며, 

또한 식각의(息覺意)에 떨어지나니, 뜻을 멈추는 까닭에 식각의가 되며, 

또한 정각의(定覺意)에 떨어지나니, 생각하지 않는 까닭에 정각의가 되며,

또한 수각의(守覺意)에 떨어지나니, 행을 여의지 않는 까닭에 수각의가 되는 것이다.


數息亦墮八行,用意正,故入八行。定意、慈心、念淨法,是爲直身;至誠語、軟語、直語、不還語,是爲直口。黠在意,信在意,忍辱在意,是爲直心。所謂以聲息,是爲十善墮道行也。

수식(數息)을 하면, 또한 8행(行)에 떨어니나니, 뜻이 바른 까닭에 8행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 

정의(定意)와 자심(慈心)과 정념(正念)과 정법(凈法)은 바른 몸의 직신(直身)이 되고,

지성스러운 지성어(至誠語)와 부드러운 말의 연어(軟語)와 곧은 말의 직어(直語)와 돌이키지 않는 불환어(不還語)는 바른 입의 직구(直口)가 되며,

지혜에 뜻을 두며, 믿음에 뜻을 두며, 인욕에 뜻을 두는 것은, 바른 마음의 직심(直心)이 되나니, 

이른바 소리와 숨에서 기인하는 것이니, 이러함이 10선(善)으로 도행(道行)에 떨어짐이 되며, 

 

數息亦墮直見,用諦觀,故爲直見;亦墮直行,用向道,故爲直行;亦墮直治,用行『三十七品經』,故爲直治;亦墮直意,用念諦,故爲直意;亦墮直定,用意白淨,壞魔兵,故爲直定,是爲八行。

수식(數息)을 하면, 또한 바른 소견의 직견(直見)에 떨어지나니, 자세히 관하는 까닭에 바른 소견이 되며, 

또한 바른 행의 직행(直行)에 떨어지나니, 도를 향하는 까닭에 바른 행이 되며, 

또한 바른 대치(對治)의 직치(直治)에 떨어지아니, '37품경(37 조도품)'을 행하는 까닭에 바른 대치의 직치가 되며, 

또한 바른 뜻의 직의에 떨어지나니, 진리의 제(諦)를 생각하는 까닭에 바른 뜻이 되며, 

또한 바른 선정의 직정(直定)에 떨어지나니, 뜻이 청백하여서 악마의 마병(魔兵)을 파괴하는 까닭에정이 되나니,

이것이 바로행(八行, 팔정도)이다.


何等爲魔兵?謂色、聲、香、味、細滑,是爲魔兵。不受是爲壞魔兵。三十七品應斂。

무엇이 악마의 마병(魔兵)인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세활(細滑)이 바로 악마의 마병(魔兵)이며,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바로 악마의 마병(魔兵)을 파괴함이 되나니, 37조도품으로 응당 거두어 들여야 하는 것이다.

 

設自觀身,觀他人身,止婬,不亂意,止餘意;自觀痛痒,觀他人痛痒,止瞋恚;自觀意,觀他人意,止癡;自觀法,觀他人法,得道,是名爲四意止也。

만약 스스로 몸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한다면, 음심을 멈추고 뜻이 어지럽지 않게 되어서 그 나머지의 뜻들도 멈추게 되며, 

스스로의 통양(痛痒)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통양을 관한다면, 성냄의 진에(瞋恚)을 멈추게 되며,

스스로의 뜻(意)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뜻을 관하면 어리석음의 우치(愚癡)을 멈추게 죄며, 

스스로의 법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법을 관하면 도를 얻으니, 이것을 4의지(四意止, 사념처)라 하며, 


避身爲避色,避痛痒爲避五樂,避意爲避念,避法不墮願業治生,是名爲四意念斷也。

몸을 피하는 피신(避身) 경계를 피하는 피색(避色)이 되며, 통양(痛痒)을 피하는 것은 5락(樂)을 피함이 되며, 

뜻을 피하는 피의(避意)는 생각을 피하는 피념(避念)이 되며, 

법을 피하는 피법(避法)하여서 원업(願業)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생(生)을 대치하는 것이니, 

이것을 4의념단(四意念斷)이라 하며, 


識苦者,本爲苦,爲苦者,爲有身。從苦爲因緣起者,所見萬物。苦習者,本爲苦,從苦爲因緣生。盡者,萬物皆當敗壞。爲增苦習,復當爲墮八道中。道人當念是八道,是名爲四,爲四收苦,得四神足念也。

고(苦)를 인식한다는 것은 본래 고이기 때문이며, 고(苦)가 것은 몸이 있기 때문이며, 

고(苦)를 좇아 인연이 일어난다는 것은 보는 바의 만물이 고(苦)이기 때문이며,

습(習)이라는 것은, 본래 고(苦)가 되기 때문에 고를 좇아 인연이 생기는 것이며,

다할 진(盡)이라는 것은, 만물이 모두 파괴되어서 고(苦)와 습(習)을 늘리기 때문에 다시 8도(道) 가운데 떨어지는 것이니, 도인은 마땅히 이러한 팔도(八道)를 생각해야 하나니, 

이를 4위(四爲)와 4수고(四收苦)라고 하며, 4신족념(四神足念)을 얻게 되며, 


信佛意喜,是名爲信根。爲自守行法,從諦身意受,是名能根,爲精進;從諦念遂諦,是名識根,爲守意;從諦一意,從諦一意止,是名定根,爲正意;從諦觀諦,是名黠根,爲道意,是名爲五根也。

부처님을 믿고 뜻으로 기뻐하는 것을 신근(信根)이라고 하나니, 스스로 지키고 행하는 법이 되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몸과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능근(能根)이라 하나니, 정진이 되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생각하여 제(諦)를 이루는 것을 제근(諦根)이라 하나니 수의(守意)가 되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뜻을 한결같으며, 제(諦)를 좇아  뜻에 멈추는 것을 정근(定根)이라 하나니 정의(正意)가 되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제를 관하는 것을 혜근(慧根)이라 하나니 도의(道意)가 되는 것으로, 이러함 바로 5근(根)이며, 


從諦信不復疑,是名信力;棄貪行道從諦自精進,惡意不能敗精進,是名進力;惡意欲起當卽時滅,從諦是意無有能壞意,是名念力;內外觀從諦以定,惡意不能壞善意,是名定力;念四禪從諦得黠,惡意不能壞黠意,是名黠力。念出入盡復生,是名爲五力也。

진리의 제(諦)를 좇아서 믿고 다시 의심하지 않는 것을 신력(信力)이라 하나니, 탐(貪)을 버리고 도를 행하며,

진리의 제(諦) 좇아 스스로 정진하여서 나쁜 뜻이 능히 정진을 파괴하지 못하는 것을 진력(進力)이라 하나니, 나쁜 뜻이 일어나려 하다가 즉시 없어지게 되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바른 뜻으로  뜻을 능히 파괴할  없는 것을 염력(念力)이라 하나니, 안과 밖을 관(觀)하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정(定)하여 나쁜 뜻이 능히 좋은 뜻을 파괴하지 못하는 것을 정력(定力)이라 하나니, 4선(禪)을 생각하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지혜를 얻어서 나쁜 뜻이 능히 지혜의 뜻을 파괴하지 못하는 것을 혜력(慧力)이라 하나니, 나고 들며 없어졌다가 다시 생겨남을 생각하는 것이니, 이를 5력(力)이라 하며, 


從諦念諦,是名爲覺意得道意。從諦觀諦,是名法名法識覺意;得生死意,從諦身意持,是名力覺意;持道不失爲力,從諦足喜諦,是名愛覺意;貪道法行道行道法,從諦意得休息,是名息意,覺已息安隱,從諦一念意,是名定覺意;自知意,以安定從諦自在意在,所行從觀,是名守意覺;從四諦觀意,是名爲七覺意也。

진리의 제(諦)를 좇아 진리를 염하는 것을 각의(覺意)라 하나니, 도의 뜻을 얻게 되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제를 관하는 것을 법식각의(法識覺意)라 하나니, 생사의 뜻을 얻게 되는 것이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몸과 뜻을 지니는 것을 역각의(力覺意)라 하나니, 도를 지녀서 잃지 않으니 힘이 되는 것이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희제(喜諦)를 구족하는 것을 애각의(愛覺意)라 하나니, 도법(道法)을 구하여 도행(道行)과 도법을 행하는 것이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뜻이 쉼을 얻는 것을 식각의(息覺意)라 하나니, 이미 뜻을 쉬어 안온하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생각과 뜻을 한결같이 하는 것을 정각의(定覺意)라 하나니, 스스로 뜻을 알아서 안정하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뜻을 자재하고 행하는 바를 좇아 관하는 것을  수의각(守意覺)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렇게 4제(사성제)를 좇아 뜻을 관하는 것을 7각의(覺意)라 하는 것이다.


從諦守諦,是名直信道;從諦直從行諦,是爲直從行念道;從諦身意持,是名直治法。不欲墮四惡者,謂四顚倒。從諦念諦,是名直意不亂意;從諦一心意,是名直定。

진리의 제(諦)를 좇아 제를 지키는 것을 바른 믿음의 신도(信道)라 하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바르게 진리 행하는 것을 바른 염도(念道)라 하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몸과 뜻을 지니는 것을 바른 치법(治法)이라 하나니, 

 가지 악즉 4전도(四顚倒)에 떨어지지 않고자 하는 것이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진리 생각하는 것을 바른 뜻의 직의(直意)라 하며, 뜻을 어지럽히지 않는 불난의(不亂意)라고 하며, 

진리의 제(諦)를 좇아 마음과 뜻을 한결같이 하는 것을 바른 정(定)이라고 하는 것이다.


爲一心上頭,爲三法意行,俱行以聲身心,如是佛弟子八行,是名四禪,爲四意斷也。

 마음의 일심을 우두머리로 삼아  가지 법의(法意)의 행인 삼법의행(三法意行)을 지을 것이니, 

소리의 성(聲)과 몸(身)과 마음(心)의 행을 갖춘다면, 

이와 같은 것이 불제자(佛弟子)의 팔행(八行, 팔정도)이니, 이를 4선(禪)이라 하며, 4의단(意斷, 사정단)이 되는 것이다.


第一行爲直念,屬心,常念道;第二行爲直語,屬口,斷四意;第三行爲直觀,屬身,觀身內外;第四行爲直見信道;第五行爲直行,不隨四惡,謂四顚倒;第六行爲直治,斷餘意;第七行爲直不墮貪欲;第八行爲直定正心,是爲八行。佛、辟支佛、阿羅漢所不行也。

 번째의 제일행(第一行)은 바른 생각의 직념(直念, 정념)이니, 마음을 거두어 항상 도를 생각하는 것이요, 

 번째의 제이행(第二行)은 바른 말의 직어(直語, 정어)이니, 입을 단속하여 4의(意)를 끊음이요, 

 번째의 제삼행(第三行)은관(直觀, 정사유)이니, 몸을 이르는 것으로 안팎의 몸을 관찰함이요, 

 번째의 제사행(第四行)은 바른 소견의 직견(直見, 정견)이니 도를 믿음이요, 

다섯 번째의 제오행(第五行)은 바른 행의 직행(直行, 정정)이니  가지 악인 4전도에 떨어지지 않음이요, 

여섯 번째의 제육행(第六行)은 바른 대치의 직치(直治, 정명)이니 나머지의 뜻을 끊음이요, 

일곱 번째의 제칠행(第七行)은 바른 뜻의 직행(直行, 정업)이니 탐욕에 떨어지지 않음이요, 

여덟 번째의 제팔행(第八行)은 바른정의 직정(直定, 정정진)이니 마음을 바르게 함이다. 

이것이 여덟 가지의 팔행(八行, 팔정도)이니, 행이니, 벽지불과 아라한은 행하지 않는 바이다.

 

第一行爲直念。何等爲直念?謂不念萬物,意不墮是中,是爲直念;念萬物,意墮中,爲不直念也。

 번째의 제일행(第一行)인 바른 생각의 직념(直念)에서, 무엇이 바른 생각의 직념(直念, 정념)인가? 

이른바 만물을 생각하지 않아서 뜻이  가운데에 떨어지지 않음이 바로 바른 생각이요, 

만물을 생각하여서 뜻이  가운데 떨어진다면 이것은 바른 생각의 직념(直念)이 아닌 것이다.


四意止者:一意止爲身念息,二意止爲念痛痒,三意止爲念意息出入,四意止爲念法因緣,是爲四意止也。道人當念是四意止:一者、爲我前世愛身,故不得脫;二者、今有劇怨家。何以故?所欲者愛生,當斷已斷,爲外身觀止也。

4의지(四意止)란,  번째의 일의지(一意止)는 몸과 생각을 쉬는 것이요, 

 번째의 이의지(二意止) 의지는 통양(痛痒)을 생각하는 것이요, 

 번째의 삼의지(三意止) 의지는 숨의 나고 듦을 생각하는 것이요, 

 번째의 사의지(四意止) 의지는 법의 인연을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4의지가 되는 것으로, 

도인은 마땅히  4의지를 생각해야 하나니, 

첫째는 내가 전생에 몸을 사랑했던 까닭에 해탈을 얻지 못하였으며, 

둘째는 극심한 원수가 지금 함께하 때문이니, 왜냐하면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삶에 애착하는 것이니 마땅히 끊어야 하고, 이를 이미 끊었다면 외신(外身) 관하여 멈추어야 하는 것이다.


四意止者,意止者,意不在身爲止意,不在痛痒爲止意,不在意爲止意,不在法爲止意。隨色誠便生,是爲不止也。

4의지(意止)에서 뜻을 멈춘다는 의지(意止)라는 것은, 뜻을 몸에 두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고, 

뜻을 통양(痛痒)에 두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며, 뜻을 뜻에 두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고, 

뜻을 법에 두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지만, 

뜻이 색(色)과 식(識)을 따라서 곧바로 생겨나면 이것은 멈추지 않음의 불지(不止)인 것이다.

 

問:人何以故不墮四意止?

報:用不念苦、空、非身、不淨故,不墮四意止。若人意常念苦、空、非身、不淨,行道者常念是四事不離,便疾得四意止也。

묻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4의지(四意止)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답하나니; 고(苦)와 공(空)과 비신(非身)과 부정(不淨)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4의지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니, 만약 사람이 뜻으로  고와 공과 비신과 부정을 생각하면서 도를 행한다면, 이러한  가지를 항상 생각하면서 여의지 않는 것이므로, 신속히 4의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問:何等爲身意止?

謂念老、病、死,是爲身意止。何等爲痛痒意止?謂所不可意,是爲痛痒意止。何等爲意意止?謂已念、復念,是爲意意止。何等爲法意止?謂往時爲行,還報爲法,亦謂作是得是,是爲法意止也。

묻습니다; 무엇이 몸의 의지(意止)입니까? 

답하나니; 이른바 늙고 병들고 죽음을 생각함이니, 이것이 몸의 의지가 되는 것이다.

무엇이 통양의지(痛痒意止)인가? 이른바 옳지 못한 뜻이니, 이것이 통양의 의지가 되며, 

무엇이 뜻의지(意意止)인가? 이른바 이미 생각하고도 다시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뜻의 의지가 되며, 

무엇이 법의지(法意止)가 되는가? 이른바  때에는 행(行)이 되고 돌아올 때에는 법이 되며, 또한 이러함을 지어서 이러함을 얻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법의 의지인 것이다.

 

四意止有四輩:一者、念非常意止,;二者、念苦身意止;三者、念空有意止;四者、念不淨樂意止,是爲四意止。
一切天下事皆墮身痛痒、墮法,都盧不過是四事也。

4의지(四意止)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상(無常)을 생각하는 의지요, 

둘째는 고(苦)와 몸(身)을 생각하는 의지요, 셋째는 공(空)과 유(有)를 생각하는 의지요, 

넷째는 부정(不淨)과 낙(樂)을 생각하는 의지이니, 이것이 4의지(四意止)이니, 

천하의 모든 일은 모두 몸의 통양(痛痒)에 떨어지고 법에 떨어지나니,

그 모두를 합쳐도   가지 불과할 뿐인 것이다.


四意止者:一者、但念息不邪念;二者、但念善不念惡;三者、自念身非我所,萬物皆非我所,便不復向;四者、眼不視色,意在法中,是名爲四意止也。

4의지(四意止)란, 첫째는 다만 숨을 생각하여 뜻을 삿되게 하지 않음이요, 

둘째는 다만 선(善)을 생각하고 악을 생각하지 않음이요, 

셋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몸도 내것의 아소(我所)가 아니며, 모든 만물도 내것의 아소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다시는 향하지 않음이요, 

넷째는 눈으로 색(色)을 보지 않아서 뜻을  가운데 두는 것이니, 이것을 4의지(四意止)라 하는 것이다.

 

道人當行四意止:一者、眼色當挍計身中惡露;二者、意歡喜念樂,當念痛痒苦;三者、我意瞋他,人意亦瞋;我意轉他,人意亦轉,便不復轉意;四意者,我意嫉他,人意亦嫉;我念他人惡,他人亦念我惡,便不復念,是爲法也。

도인은 마땅히 4의지(四意止)를 행할 것이니, 첫째는 눈으로 마땅히  가운데 악로(惡露)를 헤아릴 것이요, 

둘째는 뜻으로 기뻐하여 즐거움을 생각함에 마땅히 통양(痛痒)의 고(苦)를 생각할 것이요, 

셋째는 나의 뜻이 성을 내면 다른 사람의  또한 성을 낼 것이고, 나의 뜻이 옮겨가면 다른 사람의  또한 옮겨갈 것이므로 다시는 뜻을 굴리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나의 뜻이 질투하면 다른 사람의  또한 질투할 것이고, 내가 다른 사람의 악을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 또한 나의 악을 생각할 것이므로, 다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법이 되는 것이다.


身意止者,自觀身,觀他人身。何等爲身?欲言痛痒是身,痛無有數;欲言意是身,復非身有過去,意未來意;欲言法是身:復非身有過去未來法;欲言行是身,行無有形,知爲非身。得是計,爲四意止也。

몸의 신의지(身意止)란, 스스로의 몸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하는 것이니,

무엇이 몸이 되는가? 통양(痛痒)이 바로 몸이라고 말하고자 하여도 통양은 수(數)가 있지 않으며,

뜻이 바로 몸이라고 말하고자 하여도 과거의 뜻과 미래의 뜻이 있으므로 또한 몸이 아닌 것이며,

법이 바로 몸이라고 말하고자 하여도 과거와 미래의 법이 있으므로 또 한 몸이 아닌 것이며,

행(行)이 바로 몸이라고 말하고자 하여도 행은 형용이 없으므로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

이렇게 헤아려야 4의지(四意止)가 되는 것이다.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하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 卷下  2

 

安般守意有十八惱,令人不隨道:一爲愛欲,二爲瞋恚,三爲癡,四爲戲樂,五爲慢,六爲疑,七爲不受行相,八爲受他人相,九爲不念。 十爲他念,十一爲不滿念,十二爲過精進,十三爲不及精進,十四爲驚怖,十五爲强制意,十六爲憂,十七爲悤悤,十八爲不度意行愛,是爲十八惱。不護是十八因緣不得道,以護便得道也。

안반수의에 열여덟 가지 번뇌의 십팔뇌(十八惱)가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도를 따르지 못하게 하나니, 

첫째는 애욕(愛欲), 둘째는 성냄의 진에(瞋恚), 셋째는 어리석음의 우치(愚癡), 

넷째는 재미와 즐거움의 희락(戱樂), 다섯째는 아만(我慢), 여섯째는 의심, 

일곱째는 받아 행하지 않는 불수행상(不受行相), 여덟째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아홉째는 생각하지 않음이며, 열째는 엉뚱한 생각의 타념(他念), 열한째는 불만스런 생각의 불만념(不滿念), 

열두째는 과도한 정진, 열셋째는 미급한 정진, 열넷째는 놀라고 두려워하는 경포(驚怖), 

열다섯째는 뜻을 강제로 억제하는 강제의(强制意), 

열여섯째는 걱정, 열일곱째는 조급하게 서두르는 총총(悤悤), 

열여덟째는 뜻을 헤아리지 않고 행하는 사랑, 

이러한 것이 바로 열여덟 가지 번뇌의 십팔뇌(十八惱)이니, 이 열여덟 가지의 인연을 호지(護持)하지 않으면 도를 얻지 못하니, 호지함으로써 도를 얻는 것이다.


不受行相者,謂不觀三十二物,不念三十七品經,是爲不受行相。

받아 행하지 않는 불수행상(不受行相)이라는 것은, 이른바 32가지 물(物)을 관(觀)하지 않고, '37품경(37 조도품)'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받아서 행하지 않는이다.


受他人相者,謂未得十息,便行相隨,是爲受他人相。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이라는 것은, 이른바 아직  번째 숨을 얻지 못하였는데 곧바로 서로 따름의 상수(相隨)를 행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이다.

 

他念者,入息時念出息,出息時念入息,是爲他念。

엉뚱한 생각의 타념(他念)이라는 것은, 이른바 들이쉴  내쉬는 숨을 생각하고, 내쉴 때는 들이쉬는 숨을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엉뚱한 생각이다.

 

不滿念者,謂未得一禪,便念二禪,是爲不滿念。

불만스런 생각의 불만념(不滿念)이라는 것은, 이른바 아직  번째 선(禪)을 얻지 못하였는데 곧바로  번째 선을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불만스런 생각이다.


强制意者,謂坐亂,意不得息,當經行、讀經,以亂不起,是爲强制意也。

뜻을 강제로 억제하는 강제의(强制意)라는 것은, 이른바 앉았을  뜻이 어지러워 숨을 얻지 못하면 마땅히 경행(經行)과 경을 읽어 어지러움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야 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뜻을 강제하는 것이다.


精進爲黠,走是六事中,謂數息、相隨、止、觀、還、淨,是爲六也。

정진으로 지혜를 삼아  여섯 가지  가운데서 달릴 것이니, 숨을 세는 수식 서로 따르는 상수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과 돌이킴의 환(還)과 정(淨), 이것이 바로 여섯 가지이다.


何等爲喘?何等爲息?何等爲氣?何等爲力?何等爲風?喘者,爲意息,爲命守,爲氣,爲視聽風,爲能言語,從道屈伸力,爲能擧重瞋恚也。

무엇이 빠른 숨(헐떡이는 숨)이며? 무엇이 느린 숨이며? 무엇이 기운이며? 무엇이 힘이며? 무엇이 바람인가? 

빠른 숨(헐떡이는 숨)이란, 제어하는 것이 뜻이 되고, 숨은 명궁(命宮)이 되고, 기운은 보고 듣는 것이 되며, 바람은 능히 말하는 것이 되나니, 도(道)를 좇아서 굽혔다 펴지며, 힘은 능히 무거운 성냄의 진에(瞋恚)를 들어 올릴  있는 것이다.

 

要從守意得道,何緣得守意?從數轉得息,息轉得相隨,止觀還淨亦爾也。

반드시 수의(守意)를 좇아서 도를 얻을 것이니, 무슨 연(緣)으로 수의를 얻게 되는가?

세는 것으로부터 굴려서 숨을 얻고, 숨을 굴려서 서로 따름의 상수를 얻으며, 멈춤의 지(止)와 관(觀)과 돌이킴의 환(還)과 정(淨) 또한 그러한 것이다.


行道欲得止意,當知三事:一者、先觀念身本何從來,但從五陰行有,斷五陰不復生;譬如寄託須臾耳,意不解,念九道以自證。二者、自當內視心中隨息出入。三者、出息入息念滅時,息出小輕。

도를 행함은 뜻을 멈추고자 하는 것이니, 마땅히  가지를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우선 몸이 본래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를 관하고 생각하되, 다만 5음(陰)의 행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5음을 끊어서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잠깐 동안 맡겨놓은 듯 한 것일 뿐이니, 뜻으로 풀지 않고, 아홉 가지 도를 생각함으로써 스스로 증지(證知)하는 것이며,  

둘째는 마땅히 스스로 마음을 내관(內觀)하여 숨의 나고 듦을 따름이요, 

셋째는 숨을 내쉬고 들이쉬다가 생각이 사라졌을  숨의 나고 듦이 조금 가벼운 것이다.


念滅時,何等爲知無所有?意定便知空,知空便知無所有。

何以故?息不報便死,知身但氣所作,氣滅爲空,覺空墮道也。

생각이 사라졌을 때, 어떻게소유(無所有)라는 것을 아는 것인가? 

뜻이 안정(定)되면 문득 공(空)을 알게 되나니, 공을 알면 곧바로소유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숨을 쉬는 것인가? 숨을 쉬지 않으면 바로 죽기 때문이다. 

몸은 다만 기(氣)가 지은 바라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기가 없어지면 공(空)이 되고, 공을 깨달으면 도(道)에 떨어는 것이다.


故行道有三事:一者、觀身;二者、念一心;三者、念出入息。復有三事:一者、止身痛痒;二者、止口聲;三者、止意念行,是六事疾得息也。

그러므로 도를 행하는 것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몸을 관하는 관신(觀身)이요, 

둘째는  마음을 생각하는 염일심(念一心)이요, 

셋째는 나고 드는 숨을 생각하는 염출입식(念出入息)이다. 

다시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몸의 통양(痛痒)을 멈춤이요, 둘째는 입의 소리를 멈춤이요, 셋째는 뜻의 염행(念行)을 멈춤이니,

 여섯 가지로서 빠르게 숨을 얻게 되는 것이다.


要經言:一念謂一心,近念謂計身,多念謂一心,不離念謂不離念。身行是四事,便疾得息也。

경(經)을 의거하여 말한다면, 한 생각의 일념(一念)을  마음의 일심(一心)이라 이르고, 

가까이 생각함을 몸을 헤아린다고 이르며, 많은 생각을  마음의 일심(一心)이라 이르고, 

생각을 여의지 않음을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고 하나니, 몸소   가지를 행한다면 빠르게 숨을 얻게 되는 것이다.


坐禪數息,卽時定意,是爲今福;遂安隱不亂,是爲未來福;益久續復安定,是爲過去福也。

좌선하면서 숨을 세는 수식을 하여서 즉시 뜻을 정(定)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복(福)이요, 

마침내 안온하여져서 어지럽지 않음이 바로 미래의 복이며, 

더욱 오래되어서 계속 다시 안정되는 것이 바로 과거의 복이 되며, 


坐禪數息不得定意,是爲今罪;遂不安隱亂意起,是爲當來罪;坐禪益久遂不安定,是爲過去罪也。

좌선하면서 숨을 세는 수식을 하여서 뜻을 정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죄요, 

마침내 안온하지 못하여사 어지러운 뜻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미래의 죄며, 

좌선하여 더욱 오래되었으나 마침내 안정하지 못한 것은 바로 과거의 죄가 된다.


亦有身過、意過:身直數息不得,是爲意過;身曲數息不得,是爲身過也。

또한 몸의 잘못인 신과(身過)와 뜻의 잘못인 의과(意過)가 있으니, 

몸은 바르되  세는 수식 얻지 못한다면 이것은 뜻의 잘못인 의과(意過)요, 

몸이 굽어서  세는 수식 얻지 못한다면 이것은 몸의 잘못인 신과(身過)이다.


坐禪自覺得定意,意喜爲亂意,不喜爲道意。

좌선하여 스스로 깨달아 뜻을 정(定)할  있으니, 뜻으로 기뻐하면 뜻을 어지럽히고, 기뻐하지 않으면 도의(道意)가 되며, 


坐禪念息已止便觀,觀止復行息。人行道,當以是爲常法也。

좌선하여서 생각과 숨이 이미 멈추면 곧바로 관(觀)하고, 관하여 멈추면 다시 숨을 행하니, 사람이 도(道)를 행하되 마땅히 이로써 떳떳한법(常法)을 삼아야 하는 것이다.

 

佛說有五信:一者、信有佛有經;二者、去家下頭髮求道;三者、坐行道、四者、得息;五者、定意。所念不念爲空,難不念爲空。

부처님께서 5신(信)을 설하셨으니, 첫째는 부처님이 계시고 경이 있음을 믿음이요, 

둘째는 집을 떠나 머리를 깎고 도(道)를 구함이요, 셋째는 앉아서 도를 행함이요, 

넷째는 숨을 얻음이요, 다섯째는 뜻을 정(定)함이니, 

생각할 바를 생각하지 않음도 공(空)이 되고 어려운 난(難)을 생각하지 않음도 공이 되는 것이다.


何以故念息?報曰:息中無五,色貪、婬、瞋恚、愚癡、愛欲,是亦爲空也。

무슨 까닭에 숨을 생각하는 염식(念息)을 하여야 하는 것인가? 

숨에는 5색(色)과 탐과 음ㆍ진에ㆍ우치ㆍ애욕이 없으니, 이것이 또한 공(空)이 되는 것이다.


可守身中意者,謂意在身觀,是爲身中意。人不能制意:故令數息,以黠能制意,不復數息也。

 가운데에서 뜻을 지킬  있다는 것은, 이른바 뜻을 몸에 두고 관하는 것이니,

이러한 몸 가운데 뜻을 사람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숨을 헤아리게 하여서 지혜로써 능히 뜻을 제어하고 다시 숨을 헤아리지 않는 불수식(不數息)이 되는 것이다.


問:何等爲自知?何等爲自證?

報:謂能分別五陰是爲自知,不疑道是爲自證也。

묻겠습니다; 무엇이 스스로 아는 자지(自知)이며, 무엇이 스스로 증득하는 자증(自證)입니까?

답하나니; 5음(陰)을 능히 분별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 아는 자지(自知)이고, 

도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바로 스스로 증득하는  자증(自證)이다.


問曰:何等爲無爲?

報:無爲有二輩:有外無爲,有內無爲。眼不觀色,耳不聽聲,鼻不受香,口不味味,身不貪細滑,意不志念,是爲外無爲;數息、相隨、止、觀、還、淨,是爲內無爲也。

묻겠습니다; 무엇이 무위(無爲)입니까? 

답하나니; 무위에  가지가 있으니, 밖의무위(外無爲)가 있고 안의 내무위(內無爲)가 있으니, 

눈으로 색을 보지 않고, 귀로 소리를 듣지 않으며, 코로 냄새를 맡지 않고, 입으로 맛을 맛들이지 않으며, 몸으로 부드러움을 탐내지 않고, 뜻으로 망령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밖의 무위인 외무위(外無爲)가 되고, 

숨을 세는 수식과 서로 따르는 상수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과 돌이킴의 환(還)과 정(淨)이 바로 안의 무위인 내무위(內無爲)이다.


問:現有所念,何以爲無爲?

報:身口爲戒,意向道行,雖有所念,本趣無爲也。

묻겠습니다; 현재 생각하는 바가 있는데 어떻게 무위가 되는 것입니까? 

답하나니; 몸과 입으로 계(戒)를 삼고 뜻으로 도행(道行)을 향한다면, 아무리 생각하는 바가 있을지라도 본래 무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問:何等爲無?何等名爲?

報:無者,謂不念萬物;爲者,隨經行 指事稱名,故言無爲也。

묻겠습니다; 무엇을 무(無)라고 하며, 무엇을 위(爲)라고 하는 것입니까가?

답하나니; 무(無)는 만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위(爲)는 경을 따라 행하는 것이니, 이러함으로 이름하여서 무위(無爲)라 하는 것이다.


問:設使宿命對來到,當何以卻?

報:行數息、相隨、止、觀、還、淨,念『三十七品經』能卻。難:宿命對不可卻,數息行『三十七品經』。

묻겠습니다; 만약 숙명(宿命)의 대(對, 대응)가 온다 무엇으로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까? 

답하나니; 숨을 세는 수식을 하고 서로 따르는 상수하며 멈춤과 관(觀)과 돌이킴과 정(淨)을 행하며, '37품경'을 염하여 능히 어려움을 물리칠  있으니, 숙명의 대를 물리칠  없다면 수식과 '37품경'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何以故能卻?

報:用念道故消惡。設使數息、相隨、止、觀、還、淨不能滅惡,世閒人皆不得道,用消惡,故得道。數息、相隨、止、觀、還、淨,行三十七品經尚得作佛,何況罪對,在十方積如山,精進行道,不與罪會。

묻겠습니다; 어떻게 하여서 능히 물리칠  있는 것입니까? 

답하나니; 도를 생각하기 때문에 악이 소멸하는 것이니, 만약 수식을 하 상수하면서, 멈추고 관(觀)하고 돌이키고 정(淨)하여서 능히 악을 소멸하지 못한다면, 세간 사람들이 모두 도를 얻을  없을 것이지만, 

악을 소멸하기 때문에 도를 얻는 것이니, 수식을 하고 상수하면서 멈추고 관하며 돌이키고 정(淨)하며, '37품경(37 조도품)'을 행한다면, 오히려 부처도  것이거늘, 하물며 죄대(罪對)이겠는가? 

시방에 산처럼 쌓였을지라도 정진하여 도를 행한다면 죄와 만나지 않을 것이다.


問曰:經言作是何以故不會?

報:用作是故也。數息爲墮十二品。何謂十二品?數息時,墮四意止;息不亂時,爲墮四意念斷,得十息;有時爲墮四神足,是爲墮十二品也。

묻겠습니다; 경(經)에서 무슨 까닭에 만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까?

답하나니;  이것을 짓기 때문이니, 숨을 세는 수식을 하면 12품에 떨어지게 되나니, 무엇이 12품인가? 

수식을 할 때에는 4의지(意止)에 떨어지고, 숨이 어지럽지 않을 때에는 4의념단(意念斷)에 떨어지며,  번째 숨을 얻으면 4신족(神足)에 떨어지게 되나니, 이것이 바로 12품에 떨어지는 것이다.


問:何等爲念『三十七品經』?

報:謂數息、相隨、止、觀、還、淨,行是六事,是爲念三十七品經也。行數息,亦爲行三十七品經。

묻겠습니다;  무엇이 '37품경(37 조도품)'을 생각하는 것이 됩니까? 

답하나니; 숨을 세는 수식과 서로 따르는 상수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과 돌이킴의 환(還)과 정(淨)의 행이 바로 여섯 가지의 육사(六事)이며, 이것이 바로  '37품경(37 조도품)' 생각하는 것이니, 

수식을 행하는 것은 또한  '37품경(37 조도품)' 행하기 위한 것이다.


問:何以故爲行『三十七品經』?

報:數息爲墮四意止。

何以故?爲四意止,亦墮四意斷,用不待念,故爲四意斷;亦墮四神足,用從信,故爲神足也。

묻겠습니다; 무슨 까닭에  '37품경(37 조도품)' 행함이 되는 것입니까? 

답하나니; 숨을 세면 4의지(意止)에 떨어지게 되나니, 

무슨 까닭에 4의지가 되고, 또한 4의단(意斷)에 떨어지는 것인가? 

생각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4의단이 되고, 또한 4신족(神足)에 떨어지게 되며, 

신(信)을 따르기 때문에 4신족이 되는 것이다.


數息爲墮信根,用信佛意喜,故生信根;亦墮能根,用坐行,故爲墮能根;亦墮識根,用知諦,故爲識根:亦墮定根,用意安,故爲定根;亦墮黠根,用離癡意解結,故爲黠根也。

수식을 하면 신근(信根)에 떨어지게 되나니, 부처님을 믿어서 뜻으로 기뻐하는 까닭에 신근이 생기며,

또한 능근(能根)에도 떨어지나니, 앉아서 근(根)을 행하는 까닭에 능근에 떨어지는 것이며,

또한 식근(識根)에도 떨어지나니, 진리의 제(諦)를 아는 까닭에 식근이 되며,

또한 정근(定根)에도 떨어지나니, 뜻이 편안한 까닭에 정근이 되며,

또한 혜근(慧根)에도 떨어지나니, 어리석은 뜻을 여의고 묶임의 결(結)을 푸는 까닭에 혜근이 되는 것이다.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하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 卷下  1

 

出息入息自覺,出息入息自知;當時爲覺,以後爲知;覺者謂覺息長短,知者謂知息生滅、麤細、遲疾也。

“날숨과 들숨을 스스로 깨닫고 날숨과 들숨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바로  때가 각(覺)이 되고  다음이 지(知)가 되는 것이니,

각(覺)은 숨의 길고 짧음을 깨닫는 것이요, 지(知)는 숨이 생기고 소멸함과, 거칠고 미세함과, 더디고 빠름을 아는 것이다.


出息入息覺盡止者,謂覺出入息欲報時爲盡,亦計萬物身生復滅止者,謂意止也。

날숨과 들숨에서 진(盡)과 지(止)를 깨닫는다는 것은, 

이른바 날숨과 들숨을 깨달아 때를 맞추고자 하는 것은 진(盡)이 되고, 

또한 만물과 몸이 생겨났다가 다시 멸함을 헤아리는 지(止)가 된다.

 

見觀空者,行道得觀,不復見身。便墮空無所有者,謂意無所著;意有所著因,爲有斷六入,便得賢明。賢謂身,明謂道也。

공(空)을 보고 관하는 견관공(見觀空)이란, 도를 행하여 관(觀)을 얻어서 다시 몸을 보지 않아서 공(空)과 무소유(無所有)에 떨어지는 것이니, 

이른바 뜻에 집착하는 바가 없는 것이니, 뜻에 집착한 바가 있으면 이로 인하여 소유(所有)가 있게 되나,

6입(入)을 끊으면 문득 현명(賢明)을 얻을 것이니, 현(賢)은 몸을 말하고, 명(明)은 도를 말하는 것이다.


知出何所、滅何所者,譬如念石出、石入,木石便滅。五陰亦爾,出色入痛痒,出痛痒入思想;出思想入生死,出生死入識,已分別是,乃墮󰡔三十七品經󰡕也。

어느 곳에서 나오고 어느 곳에서 멸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돌을 생각하다가 돌에서 나와 나무에 들어가면, 돌이  소멸하는 것과 같이,

5음(陰) 또한 그러한 것으로, 색에서 나와 통양(痛痒)에 들어가고, 통양에서 나와 사상(思想)에 들어가며, 

사상에서 나와서 생사에 들어가고, 생사에서 나와서 식(識)에 들어가니, 

이러한 것을 분별한다면 이에 '37품경(37 조도품)'을 따르는 것이다.


問:何等爲思惟無爲道?

報:思爲挍計,惟爲聽,無謂不念萬物,爲者如說行,道爲得,故言思惟無爲道也。

묻겠습니다; 무엇이 무위도(無爲道)를 사유(思惟)하는 것인가? 

답하나니; 사(思)는 헤아리는 것이고, 유(惟)는 듣는 것이며, 무(無)는 만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위(爲)는 설한 대로 행하는 것이며, 도(道)는 얻음이 되기 때문에, 무위도(無爲道)를 사유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思爲念,惟爲分別白黑。黑爲生死,白爲道。道無所有,已分別無所有,便無所爲,故言思惟無爲道。

若計有所爲、所著,爲非思惟。思亦爲物,惟爲解意;解意便知十二因緣事。亦謂思爲念,惟爲計也。

사(思)는 염(念)이 되고, 유(惟)는 흑백(黑白)을 분별함이 되나니, 

흑(黑)은 생사가 되고, 백(白)은 도가 되며, 도는 소유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니,

무소유(無所有)라는 것을 이미 분별한다면  무소유(無所有)인 까닭에 무위도를 사유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만약 소위(所爲)와 집착하는 바가 있다고 계교(計校)한다면, 사유가 아닌 것이며, 

사(思)는 또한 물(物)이 되고 유(惟)는 뜻을 이해함이 되나니, 뜻을 이해한다면 문득 12인연을 알게 되며,

또한 사(思)는 염(念)이 되고, 유(惟)는 헤아림이 되는 것이다.


斷生死得神足,謂意有所念爲生,無所念爲死。得神足者,能飛行故,言生死當斷也。

생사를 끊고 신족(神足)을 얻는다는 것은, 이른바 뜻에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생(生)이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으면 사(死)가 되나니, 신족(神足)을 얻은 이는 능히 날아다닐  있기 때문에 마땅히 생사를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得神足有五意:一者、喜;二者、信;三者、精進;四者、定;五者、通也。四神足念不盡力得五通,盡力自在向六通,爲道人四神足,得五通盡意可得六通

盡意,謂萬物意不欲也。一、信;二、精進;三、意;四、定;五、黠,是五事,爲四神足。念爲力者,凡六事也。黠 약을 힐

신족을 얻음에 다섯 가지의 뜻이 있으니, 첫째는 희(喜), 둘째는 신(信), 셋째는 정진, 넷째는 정(定), 다섯째는 통(通)이다.

4신족에서 염력(念力)이 다하지 않으면 5통(通)을 얻고, 염력이 다하여 자재(自在)로우면 6통으로 향하나니, 

도인(道人)으로서 4신족을 한다면 5통을 얻고, 뜻을 없앤다면 가히 6통을 얻을 것이다. 

뜻이 다한 진의(盡意)란, 이른바 만물을 뜻으로 원하지 않는 것이니,

첫째는 신(信), 둘째는 정진(精進), 셋째는 의(意), 넷째는 정(定), 다섯째는 지혜(黠힐)이니, 

 다섯 가지가 4신족이 되고, 생각이 힘이 되는 것은 무릇 여섯 가지의 육사(六事)이다.


從信爲屬四神足念,從喜、從念精進、從定、從黠,是爲屬五根也。從喜定,謂信道;從力定,謂精進;從意定,謂意念定;從施定,謂行道也。爲種故有根,有爲之事皆爲惡,便生想。

신(信)을 따르는 것은 4신족념(神足念)에 속하며, 

희(喜)를 따르고 정진을 따르고 정을 따르고 지혜를 따르는 것은 5근(根)에 속하며,

희정(喜定)에 따름을 도를 믿는 신도(信道)라 하고, 역정(力定)을 따름을 정진이라고 하며, 

의정(意定)을 따름을 의념정(意念定)이라 하고, 시정(施定)을 따름을 도를 행하는 행도(行道)라 하나니,

종자가 되기 때문에 뿌리가 있으며, 함이 있는 유위(有爲)는 모두 악이 되므로 문득 상(想)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不能得勝。謂得禪是因爲力,亦謂惡不能勝善意。滅復起,故爲力。力定者,惡意欲來,不能壞;善意故,爲力定也。

능히 이기지 못한다는 불능득승(不能得勝)이란, 이른바 선(禪)을 얻음은 바로 인(因)이 힘이 되며, 또한 악이 능히 선한 뜻을 이기지 못함을 말하는 것으로,

소멸했다가 다시 일어나기 때문에 힘이 되는 것이니, 역정(力定)이란 악한 뜻이 오려고 하여 능히 선한 뜻을 파괴할  없기 때문에 역정(力定)이 되는 것이다.


道人行道未得觀,當挍計得觀。在所觀意不復轉,爲得觀。止惡一法,爲坐禪;觀二法,有時觀身,有時觀意,有時觀喘息,有時觀有,有時觀無,在所因緣當分別觀也。止惡一法,觀二法,惡已盡。

도인이 도를 행하여 아직 관(觀)을 얻지 못하였다면, 마땅히  얻기를 계교(計校)해야 할 것이니, 있는 곳에서 뜻을 관하되 다시 굴리지 않는 것이 관을 얻음이 되는 것이다. 

악한  가지의 일법(一法)을 멈추고 좌선(坐禪)하여서  가지의 이법(二法)을 관하는 것이니, 때로는 몸을 관하기도 하고, 때로는 뜻을 관하기도 하며, 때로는 헐떡거리는 얕은 숨을 관하기도 하고, 때로는 유(有)를 관하기도 하며, 때로는 무(無)를 관하기도 하니, 인연이 있는 곳에서 마땅히 분별하여서 관해야 하나니,

악한 일법(一法)을 멈추고  가지의 이법(二法)을 관하면, 악은 이미 없어진 것이다.


止觀者爲觀道。惡未盡不見道,惡已盡,乃得觀道也。止惡一法爲知惡,一切能制不著意爲止,亦爲得息想隨止。得息想隨止,是爲止惡一法。惡已止,便得觀故。爲觀二法,爲得四諦,爲行淨。

멈추어 관한다는 지관(止觀)은, 도를 관하는 것이니, 악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면 도를 보지 못하며, 악이 없어진 뒤에야 마침내 도를 관함을 얻게 되는 것이며,

악한  가지의 일법(一法) 멈춤이 악을 앎이 되나니, 일체를 능히 제어하여서 뜻에 집착하지 않음이 멈춤이 되며, 또한 숨을 세어서 서로 따라 상수하여서 멈춤이 되는 것이다. 

숨을 세어서 서로 따라 상수하여 멈춤이 바로 악한  가지의 일법을 멈추는 것이니, 악이 이미 멈추었으면 문득 관(觀)을 얻기 때문에  가지 법을 관함이 되며, 또한 4제(諦)를 얻음이 되며, 정(淨)을 행함이 되는 것이다.


當復作淨者,識苦棄習,知盡行道。如日出時淨,轉出十二門故,經言:從道得脫也。去冥見明,如日出時,譬如日出多所見,爲棄諸冥。

마땅히 다시 정(淨)을 지어야한다는 것은, 고(苦)를 알아서 습(習)을 버리고, 다함의 진(盡)을 알아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마치 해가 돋을 때에 청정함이 12문(門)에서 굴러 나옴과 같기 때문에 경(經)에서 도(道)를 좇아 해탈을 얻는다고 말하였다. 

어둠을 버리고 밝음을 보는 것이 마치 해가 돋을 때와 같으니, 비유하자면, 해가 돋으면 보이는 것이 많아서 모든 어둠을 쓸어버리는 것과 같다.


冥爲苦,何以知爲苦?多所罣礙,故知爲苦。何等爲棄習?謂不作事。

어둠의 명(冥)이 고(苦)가 되나니, 어떻게 고가 됨을 아는 것인가? 

걸리는 괘애(罣礙)하는 바가 많기 때문에 고(苦)가 됨을 아는 것이다.

무엇이 습(習)을 버림이 되는가? 이른바 일을 짓지 않는 것이다.


何等爲盡證?謂無所有。道者,明識苦、斷習、盡證、念道。識從苦生,不得苦,亦無有識,是爲苦也。

무엇이 증득함을 다하는 진증(盡證)이 되는 것인가? 이른바 소유가 없는 것이니, 도(道)는 고(苦)를 분명하게 인식하여 습(習)을 끊고 증득함을 다하여 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盡證者,謂知人盡。當老病死證者,知萬物皆當滅,是爲盡證也。譬如日出作四事:一、壞冥,謂慧能壞癡;二、見明,謂癡除獨慧在;三、見色萬物,爲見身諸所有惡露;四、成熟萬物,設無日月,萬物不熟;人無有慧,癡意亦不熟也。

증득함을 다하는 진증(盡證)이란, 이른바 사람은 마땅히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을 알아서 증득하는 것이며, 

만물도 모두 마땅히 멸하여 없어지는 것임을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증득함을 다함의 진증(盡證)이 되나니,

비유하자면, 해가 돋아서  가지의 일을 지음과 같으니,

첫째는 어둠을 파괴함이니, 지혜(慧)가 능히 어리석음의 치(癡)를 파괴함을 말하고, 

둘째는 소견이 밝음이니, 어리석음을 없애면 홀로 지혜만 있음을 말하며, 

셋째는 만물의 색을 보는 것이니, 몸에 소유한 모든 악로(惡露)를 보는 것이요, 

넷째는 만물이 성숙(成熟)함이니, 만약 해와 달이 없으면 만물이 성숙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사람도 지혜와 어리석음이 없으면 뜻이 성숙하지 못하는 것이다.


上頭行俱行者,所行事已行,不分別說,謂行五直聲,身心幷得行也。

위의 행을  행한 이는 행할 바의 모두가 이미 행하여진 것이므로 분별하여 설하지 않으니, 이른바 5직성(直聲)을 행하여 몸과 마음이 아울러 행을 얻는 것이다.


從諦念法,意著法中;從諦念法,意著所念是便生是,求生死得生死,求道得道。內外隨所起意,是爲念法。意著法中者。

진리의 제(諦)를 좇아서 법을 생각하여, 뜻이  가운데에 있고, 제를 좇아서 법을 생각하여, 뜻이 생각하는 바에 있으면, 이것이 문득 생겨나 생사를 구하고, 생사를 얻어서 도를 구하며, 도를 얻어서 안과 밖으로 행을 따라 뜻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법을 생각하여 뜻이  가운데에 있는 의착법중(意著法中)인 것이다.


從四諦自知意生,是當得,是不生,是不得,是便卻,意畏不敢犯。所行所念常在道,是爲意著法中也。是名爲法,正從諦本起,本著意。

4제(諦, 사성제)를 좇아서 저절로 뜻이 생겨남을 안다면, 이것은 마땅히 태어나지 않고 얻을  없음을 얻은 것이니, 이것이 바로 뜻을 제거하여서 감히 범하지 못하는 것이고, 

행하는 바와 생각하는 바가 항상 도에 있으면, 이것이 바로 뜻이  가운데에 있음이 되나니,

이를 법정(法正)이라고 하는 것으로, 진리의 제(諦)의 근본을 좇아 근본을 일으켜 뜻에 착의(著意)인 것이다.


法正者,謂道法。從諦,謂四諦。本起著意者,謂所向生死萬事,皆本從意起。

법정(法正)이란 도법(道法)을 말하고, 진리의 제(諦)를 따른다는 것은 4제의 근본에서 일어남을 말하며, 

뜻을 둔다는 착의(著意)란, 향하는 바의 생사와 일체의 일이 모두 본래의 뜻을 좇아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便著意,便有五陰所起。意當斷,斷本五陰便斷。有時自斷不念,意自起爲罪,復不定在道爲罪,未盡故也。

뜻을 둔다는 착의(著意)한다면 곧바로 5음(陰)이 생기므로 일으킨 바의 뜻을 마땅히 끊어야 하는 것이니, 근본을 끊으면 5음도 끊어지며, 때로는 저절로 끊어져서 생각하지 않게 되나니,

뜻이 저절로 일어나면 죄가 되고, 다시 도에 있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으로, 아직 다하지 않은 미진(未盡)이기 때문이다.


意著法中者,諦意念萬物,爲墮外法中,意不念萬物,爲墮道法中。

뜻이  가운데 있다는 의착법(意著法)이란 것은, 진리의 제(諦)의 뜻으로 만물을 생각하면 외법(外法) 가운데에 떨어지게 되고, 뜻으로 만물을 생각하지 않으면 도법 가운데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五陰爲生死法,三十七品經爲道法。意著法中者,謂制五陰不犯,亦謂常念道不離,是爲意著法中也。

5음(陰)은 생사법이 되고, '37품경(37 조도품)'은 도법(道法)이 되나니, 

뜻이  가운데에 있다는 의착법(意著法)이란, 이른바 5음을 제어하여 범하지 않는 것이고, 또한 항상 도를 생각하여 여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뜻이  가운데에 있는 의착법(意著法)인 것이다.

 

所本正者,所在外爲物本,爲福所;在內摠爲三十七品經,行道非一時端故。

본래 바른 곳이라는 소본정(所本正)이라는 것은, 밖에 있으면 물(物)의 근본이 되고 복(福)이 되며, 안에 있으면 모두 '37품경'이 되나니, 도를 행함은  때의 끝인 일시단(一時端)이 아니기 때문이다.


言所本者,謂行三十七品經法,如次第隨行,意不入邪爲正故 名爲所本正 所本正,各自異行,以無爲對本,以不求爲對正;以無爲爲對無爲,以不常爲對道,以無有爲對亦無有所、亦無有本、亦無有正,爲無所有也。定覺受身,如是法。

근본으로 하는 바의 소본(所本)이 말하는 것은, 이른바 '37품경'의 법을 행함에 있어서 만약 차례대로 행을 따른다면, 뜻이 사(邪)에 들어가지 않는 바름이 되기 때문에 본래의 바른 곳의 본정(本正)이라 하는 것이니,

본래 바른 본정(本正) 각각의 행이 다른 것이니, 무위(無爲)로써 근본을 대(對)하고, 구하지 않음으로써 정(正)을 대하며, 무위(無爲)를 일삼음으로써 무위를 대하고, 영원하지 않음으로써 도(道)를 대하며, 무유위(無有爲)로써 대하며, 또한 소유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근본도 없는 무본(無本)이며, 바름도 없는 무정(無正)이 무소유(無所有)가 되는 것이니, 

정각(定覺)으로써 몸에 이와 같은 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道說謂法定。道說者,謂說所從因緣得道。

도설(道說)은 이른바 법정(法定)이니, 도설이라는 것은 좇아  바의 인연을 설하여 도를 얻음을 말하며, 


見陰受者,爲受五陰。有入者,爲入五陰中。因有生死陰者,爲受正;正者,道自正,但當爲自正心耳。

음(陰)을 보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5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들어감이 있다는 유입(有入)이란 것은 5음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며, 

인하여 생사음(生死陰)이 있다는 것은 정(正)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정(正)은 도가 스스로 바른 것이니 다만 스스로의 마음을 바르게 할 뿐인 것이다.


人行安般守意,得數,得相隨,得止,便歡喜,是四種。譬如鑽火見煙,不能熟物,得何等喜?用未得出要故也。

사람들은 안반수의(安般守意)를 행하여 숨을 세는 수식을 얻고, 서로 따름의 상수를 얻고, 멈춤의 지(止)를 얻어서 환희하지만,

이 네 가지를 비유하자면, 나무를 비비면 연기는 날지라도 아직 물(物, 음식)을 익힐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무엇을 얻었다고 기뻐할 것인가? 아직 뛰어난 요체(要體)를 얻지 못한 까닭이다.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卷 上 8

 

出息、入息念滅時,何等爲念滅時?謂念出入氣盡時,意息滅。

出息、入息念滅時,譬如畫空中,無有處 生死意道意俱爾也。

出息、入息念滅時,亦不說息,意息說滅時。出息、入息念滅時,物從因緣生,斷本爲滅時也。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하는 때란, 무엇이 생각이 소멸하는 때가 되는 것인가? 

나고 듦의 출입(出入)을 생각하여 기(氣)가 다하였을 때가 뜻과 숨이 소멸하는 의식멸(意息滅)이며,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하는 때란, 비유하자면, 허공에 그림을 그리고자 하여도 그릴 곳이 없는 것과 같이, 생사의 뜻과 도의 뜻도 그러한 것이며,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하는 때란, 숨과 뜻의 의식(意息)을 설명할  없어서 저절로 설명이 소멸하는 때이며,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하는 때란, 물건은 인연을 좇아 생기는 것이므로 근본을 끊는 것이 소멸하는 때가 되는 것이다.

 

內外痛痒見觀者,爲見痛痒所從起,便觀是,爲見觀也。

內外痛痒者,謂外好物爲外痒,外惡物爲外痛;內可意爲內痒,內不可意爲內痛。

안팎으로 통양(痛痒)을 보고 관한다는 것은, 통양이 좇아 일어나는 바를 보면 문득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고 관함이 되며,

안팎의 통양이라는 것은, 밖의 좋은 물건은 외양(外痒)이 되고 밖의 나쁜 물건은 외통(外痛)이 되며, 

안으로 뜻이 맞는 내양(內痒)이 되고, 안으로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내통(內痛)이 된다.

 

在內爲內法,在外因緣爲外法;亦謂目爲內,色爲外;耳爲內,聲爲外;鼻爲內,香爲外;口爲內,味爲外;心爲內,念爲外。見好細滑,意欲得,是爲痒;見麤惡意,不用是爲痛。俱墮罪也。

안에 있으면 내법(內法)이 되고 밖의 인연에 있으면 외법(外法)이 되며, 

또한 눈은 안이 되고 빛은 밖이 되며, 귀는 안이 되고 소리는 밖이 되며, 코는 안이 되고 냄새는 밖이 되며, 

입은 안이 되고 맛은 밖이 되며, 마음은 안이 되고 생각은 밖이 되며, 

좋고 매끄러움을 보고 뜻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양(痒)이 되고, 

추악(麤惡)함을 보고 뜻을 내지 않는 것이 바로 통(痛)이 되니, 모두 죄에 떨어지는 것이다.

 

痛痒觀止者,若人臂痛,意不作痛,反念他一切身痛如是,以意不在痛,爲止痛;

亦可念,亦不可念,念痛無所著。自愛身,當觀他人身;意愛他人身,當自觀身,亦爲止也。

통양을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만약 사람이 팔이 아파도 아프다는 뜻을 일으키지 않고 도리어 일체의 스스로의 몸의 아픔도 이와 같다고 생각하여 아픈 뜻을 두지 않는다면, 아픔이 멈추나니,  

생각할 수도 있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 생각이 아픈 집착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몸을 아껴서 마땅히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고, 뜻으로 다른 사람의 몸을 아껴서 마땅히 스스로의 몸을 관하는 것, 또한 멈춤의 지(止)가 되는 것이다. 

 

內外痛痒所以重出者何?

謂人見色愛有薄厚,其意不等觀,多與少異故。重分別觀道,當內觀有癡,當外觀以自證也。

안팎으로 통양이 거듭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이 경계의 색(色)을 보고 사랑함에 박하고 후함이 있으니, 그 뜻이 평등하지 않아서 관함에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며,

관하는 도를  가지로 분별하나니, 마땅히 안으로는 어리석음이 있는 지를 관하고 밖으로는 자증(自證)할 것을 관해야 하는 것이다.

 

身心痛痒各自異,得寒熱、刀杖痛極,是爲身痛;得美飯、載車、好衣,身諸所便,是爲身痒。

心痛者,身自憂,復憂他人及萬事,是爲心痛;心得所好及諸歡喜,是爲心痒也。痒 가려울 양

몸과 마음의 통양(痛痒)이 각각 다른 것이니, 

춥고 더운 것과 칼과 몽둥이의 극심한 고통을 얻는 것은 몸의통(身痛)이 되고,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수레에 타는 것과 좋은 옷과 몸에 편리한 모든 것은 몸의양(身痒)이 되며, 

마음의 통(痛)이란, 자신을 걱정하고 다시 다른 사람과  가지의 물건을 걱정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심통(心痛)이 되고, 

마음이 좋아하는 바와 모든 환희를 얻는 것이 바로 마음의양(心痒)이 된다.

 

意相觀者,有兩因緣,在內斷惡念道。一者,謂五樂六衰當制斷之。

뜻의상(意相)을 관하는 것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속으로 악을 끊고 도를 생각하는 것과 5락(樂)ㆍ6쇠(衰)를 마땅히 제지하고 끊는 것이다.

 

觀者自觀身,身不知麤細,以得乃覺,是爲意意相觀。意意相觀,息亦是意,數亦是意;數時觀息,爲意意相觀也。

관(觀)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몸을 관하는 것이니, 

몸은 추(麤)와 세(細)를 알지 못하므로 얻어서 마침내 깨닫는 것이 바로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하는 의의상관(意意相觀)이 되며,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하는 의의상관(意意相觀)을 하면,  또한  뜻이요, 세는  또한  뜻이니, 

 때에 숨을 관하는 것이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하는 의의상관(意意相觀)이 된다.

 

意觀止者,欲婬制,不爲欲瞋恚制,不怒欲癡制,不作欲貪制,不求諸惡事,一切不向,是爲觀止;亦謂以知『三十七品經』,常念不離爲止也。

뜻을 관하여 멈춘다는 의관지(意觀止)라는 것은, 음심(婬)을 일으키면 제지하여 멈추며,

진에(瞋恚)를 일으키면 제지하여 멈추며, 어리석은 짓을 하려면 제지하여 멈추며, 

탐하면 제지하여서 구하지 않게 멈추어서, 모든 악한 악사(惡事)에 향하지 않음이 바로 관하여 멈춤이 되며,

또한 '37품경(37 조도품)'을 알아서 항상 생각하여 여의지 않음이 멈춤이 되는 것이다.

 

出息、入息盡定便觀者,盡謂罪盡,定謂息止意。

숨을 내쉬고 들이쉴  다하여 진(盡)하고, 정(定)하여서 편안히 관한다는 것은,

다한다는 진(盡) 죄가 다하는 것을 말하고, 정(定)은 숨이 뜻을 멈추게 하는 식지의(息止意)를 말한다.

 

定觀者,謂觀止還淨也;盡止者,謂我能說是、曉是、遍更是,是爲盡止也。

所起息,若布施作福 一切善法,已起便滅,更意念耶?向習罪行亦無數,古世今世,意不如是相隨;他人亦爾,已知覺,當斷已斷,爲內外意意觀止也。

정관(定觀)은 관하여 멈춰서 돌이켜 청정함을 말하고, 

다하여 멈추는 진지(盡止)라는 것은 내가 능히 이를 설하고 이를 깨우쳤을지라도, 이것을 두루 다시 하는 것이 바로 다하여 멈춤이 되며,

숨을 일으켜서, 만약 보시하여 복을 지음과 일체의 선법(善法)이 이미 일어났다가 곧바로 멸하고, 다시 뜻이 생각는 의념(意念)하는 것이니,

죄행(罪行)을 향하여 익히며, 또한 무수한 전세(前世)와 금세(今世)에 뜻이 이와 같이 서로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이미 깨우쳐 알았다면, 마땅히 끊어야 하고, 이미 끊었다면 안팎의 뜻으로 뜻을 관하여 멈추는 내외의의관지(內外意意觀止)가 되는 것이다.

 

內外法法者,內法謂身,外法謂他人;有持戒法,有不持戒法,是爲內外法法也。

안팎의 법의 법인 내외법법(內外法法)이라는 것은, 

안의 법인 내법(內法)은 몸을 말하고, 밖의 법인 외법(外法)은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 

계를 지니는 법도 있고 계를 지니지 않는 법도 있으니, 이것이 바로 안팎의 법의 법인 내외법법(內外法法)이다.

 

內法謂行黠不離『三十七品經』,一切餘事,意不墮中,行道得道,是爲內法。外法謂墮生死,謂生死行,便得生死。不脫一切,當斷已斷,爲內外法觀止也。

안의 법인 내법(內法)은, 지혜를 행하여 '37품경(37 조도품)'을 여의지 않으며, 일체의 다른 일을  가운데 두지 않고 도를 행하여 도를 얻음이 바로 안의 법인 내법(內法)이 되며,

밖의 법인 외법(外法)은, 생사를 따라서 생사를 행한다면 문득 생사를 얻어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일체를 마땅히 끊어야하나니, 이미 끊었다면 이것이 바로 안팎의 법을 관하여 멈추는 내외법관지(內外法觀止)가 되는 것이다.

 

法觀止者,一切人皆自身爲身,諦挍計非我身。何以故?有眼有色,眼亦非身,色亦非身。何以故?人已死,有眼無所見,亦有色無所應。身如是,但有識亦非身。

법을 관하여 멈춘다는 법관지(法觀止)란, 일체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몸을 자기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자세히 헤아린다면 나의 몸이 아닌 것이니,

왜냐하면, 눈이 있고 색이 있으나,  또한 몸이 아니고  또한 몸이 아니며,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눈이 있어도 보이는 바가 없고, 또한 색이 있어도 응하는 바가 없으니, 

몸이 이와 같다면 다만 식(識)만이 있을 뿐, 몸이 아닌 것이니, 

 

何以故?識無有形,亦無所輕止,如是計眼、耳、鼻、舌、身、意亦爾,得是計爲法觀止,亦謂不念惡爲止。念惡爲不止,何以故?意行故也。

왜냐하면, 식(識)은 형체도 없고 또한 가볍게 멈추는 곳도 없으니,

이와 같이 헤아린다면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 역시도 그러한 것이니,

이와 같은 헤아림을 얻는다면 이것이 바로 법을 관하여 멈추는 법관지(法觀止)인 것이다.

또한 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멈춤의 지(止)가 되나,

악을 생각하는 것은 멈춤이 아니니, 왜냐하면 뜻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佛說大安般守意經卷上 終 불설대안반수의경 상권을 마침.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卷 上 7

 

第五還棄結者,謂棄身七惡;第六淨棄結者,爲棄意三惡,是名爲還。還者,爲意不復起惡;惡者,是爲不還也。

다섯 번째 돌이키는 ()이라는 것은묶임의 () 버리는 것이니이른바 몸의 일곱 가지의 칠악(七惡) 버리는 것이며,

여섯 번째의 청정한 ()묶임의 () 버리는 것이니뜻의  가지 악을 버리는 것이니이를 이름하여 돌이키는 ()이라 하며

돌이키는 환(還)이란, 뜻으로 다시 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악을 일으킨다면 돌이킴의 환(還)이 아닌 것이다.

 

還身者,謂還惡。得第五還,尚有身亦無身。何以故?有意有身,無意無身,意爲人種,是名爲還。還者,謂意不復起惡;起惡者,是爲不還。

몸을 돌이킨다는 환신(還身)이란, 이른바 악을 돌이킨다는 것으로, 

다섯 번째인 돌이킴의 환(還)을 얻어도 아직 몸이 있기도 하고 또한 몸이 없기도 하나니,

왜냐하면, 뜻이 있으면 몸이 있고, 뜻이 없으면 몸이 없으므로, 

뜻이 사람이 되기 때문이니, 이을 이름하여 ‘돌이킴의 환(還)'이라 하며, 

돌이키는 환(還)이란 것은, 이른바 뜻으로 다시 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악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돌이킴의 환(還)이 아닌 것이다.

 

亦謂前助身,後助意。不殺、盜、婬、兩舌、惡口、妄言、綺語,是爲助身;不嫉、瞋恚、癡,是爲助意也。

또한 이른바 먼저 몸을 돕고 뒤에 뜻을 돕는다고 하나니,

살(殺)ㆍ도(盜)ㆍ음(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를 하지 않는 것은 몸을 돕는 조신(助身) 되고, 

탐ㆍ진ㆍ치를 하지 않는 것은 뜻을 돕는 조의(助意)가 되며, 

 

還五陰者,譬如買金得石,便棄捐地不用;人皆貪愛五陰,得苦痛便不欲是,爲還五陰也。

5음(陰)을 돌이킨다 환오음(還五陰)을 비유하자면, 금을 사려다가 돌을 얻었다면 곧바로 땅에 버리고 쓰지 않는 것과 같이, 사람들은 모두 5음을 탐애하여 고통을 얻지만, 문득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 바로 5음을 돌이킴의 환오음(還五陰)이 된다.

 

何等爲便見滅盡處,謂無所有是爲滅處。

무엇이 문득 소멸하여 다한 곳을 보는 것인가? 

이른바 무소유(無所有)가 바로 소멸하여 다한 곳이다.

 

問:已無所有,何以故爲處者?

無所有處有四處:一者、飛鳥以空中爲處;二者、羅漢以泥洹爲處;三者、道以無有爲處;四者、法在觀處也。

묻겠습니다; 이미 소유가 없는 무소유(無所有)라면 무슨 까닭에 ‘곳(處)’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답하나니;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네 곳이 있으니, 

첫째 나는 새는 공중으로 처(處)를 삼고, 

둘째 나한(羅漢)은 니원으로 처(處)를 삼고, 

셋째 도는 유위(有爲)가 없음으로 처(處)를 삼고, 

넷째 법은 관(觀)으로 처(處)를 삼는다.

 

出息、入息受五陰相者,謂意邪念,疾轉還正以生覺斷,爲受五陰相。

言受者,謂受不受相也。以受五陰相,知起何所,滅何所。

滅者,爲受十二因緣,人從十二因緣生,亦從十二因緣死;

不念者,爲不念五陰也。

내쉬는 출식과 들이쉬는 입식에서 5음의 상(相)을 받는다는 수오음상(受五陰相)이라는 것은, 

뜻이 삿되고 생각을 빠르게 굴려서 되돌려 추사(麤思, 각 覺)가 생겨서 오음의 상을 받는 수오음상(受五陰相)인 것이다. 

받는다는 수(受)라는 것은, 상(相)을 받지 않음을 받는 수불수상(受不受相)이니, 5음의 상을 받음으로써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어느 곳에서 소멸하는지를 아는 것이며,

소멸한다는 멸(滅)은, 12인연을 받은 사람이 12인연을 좇아 태어나고 또한 12인연을 좇아 죽는 것이며,

생각하지 않는다는 불념(不念)이란, 5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知起何所、滅何所,謂善惡因緣起便復滅,亦謂身,亦謂氣生滅。念便生,不念便死,意與身同等,是爲斷生死道。在是生死閒,一切惡事皆從意來也。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어느 곳에서 소멸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이른바 좋거나 나쁜 인연이 일어났다가 곧바로 다시 멸하는 것이며, 

또한 몸과 기(氣)가 생기고 소멸하는 것도, 생각을 하면 문득 생겨나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문득 소멸함을 말하는 것으로,

뜻은 몸과 더불어 동등하나니,  생사의 도를 끊음이  생사 가운데 있는 것이며, 

일체의 악한 악사(惡事) 모두가 뜻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今不爲前、前不爲今者,謂前所念已滅,今念非前念;亦謂前世所作,今世所作,各自得福;亦謂今所行善,非前所行惡;亦謂今息非前息,前息非今息也。

현재는 과거 아니고 과거 현재가 아니라는 것은, 

이른바 앞에서 생각하였던 바는 이미 소멸하였으므로,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요, 

또한 전생에 지은 바와 금생에 지은 바가 각기 복(福)을 얻음을 말함이요, 

또한 지금 행하는 바의 선(善)은 앞에서 행한 바의 악이 아님을 말함이요, 

또한 지금 쉬고 있는 숨은 앞의 숨이 아니고, 앞에 쉬었던 숨은 지금 쉬고 있는 숨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爲生死分別者,爲意念生卽生,念滅卽滅。故言生死,當分別萬物及身。過去、未來福爲索盡。

何以故?盡以生便滅,滅便盡;已知盡,當盡力求也。

생사를 분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란, 

뜻(意)은 생각이 생겨나면  생기고, 생각이 소멸하면 소멸하기 때문에 생사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만물과 몸, 과거나 미래의 복도 끝내 다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모든 것이 생겨나면 문득 소멸하고, 소멸하면 다한 것이기 때문이니,

다하는 것임을 이미 알았다 마땅히 힘써 구해야 하는 것이다.

 

視上頭無所從來者,謂人無所從來,意起爲人;亦謂人不自作來者,爲有所從來;人自作自得,是爲無所從來也。

앞을 봄에 좇아서  바가 없다는 것이란, 

이른바 사람은 좇아서  바가 없으므로 뜻이 일어나면 사람이라 하며, 

또한 사람은 스스로 지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좇아서 오는 유소종래(有所從來)인 것이니, 

사람이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얻는  자작자득(自作自得)이 바로 좇아서  바가 없는 무소종래(無所從來)인 것이다.

 

生死當分別者,謂知分別五陰,亦謂知分別意生死 人意爲常,知無有常,亦爲分別也。

생사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5음(陰)을 분별할  아는 것이요, 또한 생사의 뜻과 사람의 뜻과 유상(有常)과 함께 무상(無常)을 분별하여 안다는 것이다.

 

後視無處所者,爲今現在不見罪人在生死,會當得,無有脫於罪故。言後視無有處所。

뒤를 보아도 처소가 없다는 것이란, 

지금 당장에는 죄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사람이 생사를 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죄를 벗어날  없기 때문에 뒤를 보아도 처소가 없다는 것이다.

 

未得道迹不得中命盡,謂已得十五,意不得中死;要當得十五意便墮道,亦轉上至阿羅漢也。

아직 도의 자취인 도적(道亦)을 얻지 못하였으나 중도에 목숨이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란, 

이미 열다섯 가지의 뜻을 얻었으므로 중도에 죽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마땅히 열다섯 가지 뜻을 얻어서 곧바로 도를 따른다면, 또한 굴려서 올라가 아라한에 이르는 것이다.

 

中得道亦不得中命盡,爲息意身,凡三事,謂善惡意要當得道迹,亦復中壞;息死復生善意起復滅,身亦不得中死也。

중도에 도의 자취인 도적(道亦)을 얻으며, 또한 중도에 목숨이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숨(息)과 뜻(意)과 몸(身)의  가지에 있어서, 

이른바 좋거나 나쁜 뜻은 도의 자취인 도적(道亦)을 얻었다가 다시 중도에 무너지기도 하며, 

숨은 죽었다가 다시 생겨나며, 좋은 뜻은 일어났다가 다시 소멸하기도 하지만, 몸은 중도에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何等爲淨?謂諸所貪欲爲不淨,除去貪欲是爲淨。

何等爲五陰相?譬喩火爲陰,薪爲相也。

무엇이 정(淨)인가? 모든 탐욕하는 대상은 부정(不淨)이 되니, 탐욕을 제거하면 바로 정(淨)이 되며,

무엇이 5음(陰)의 상(相)인가? 비유하자면, 불은 음(陰)이 되고 땔감은 상(相)이 되며, 

 

從息至淨,是皆爲觀;謂觀身相隨止觀還淨,本爲無有。內意數息,外意斷惡因緣,是爲二意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으로부터 정(淨)에 이르기까지의  모두가 관(觀)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몸과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 돌이킴의 환(還)과 청정한 정(淨) 본래 존재가 없음을 관하는 것이다. 

안의 뜻으로는 숨을 세는 수식(數息)이고, 밖의 뜻으로 나쁜인연을 끊음이 바로  가지 뜻이 되는 것이다.

 

問:何以故不先內外觀身體,反先數息、相隨、止、觀、還、淨?

報:用意不淨故,不見身,意已淨,便悉見身內外道。行有十九行,用人有十九病故,亦有十九藥。觀身念惡露,是爲止貪婬藥;念四等心,是爲止瞋恚藥;自計本何因緣有,是爲止愚癡藥;安般守意,是爲多念藥也。

묻겠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먼저 안팎으로 신체를 관(觀)하지 않고, 도리어 먼저 숨을 세는 수식(數息)을 하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과 돌이킴의 환(還)과 청정한 정(淨)을 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뜻이 청정하지 않은 부정(不淨)한 까닭에 몸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뜻이 이미 청정하다면 문득 몸의 안팎에 열아홉 가지의 도(道)가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열아홉 가지 행이란, 사람이 열아홉 가지 병이 있기 때문에 또한 열아홉 가지 약이 있으니, 

몸을 관하여 악로(惡露)를 생각하는 것은 바로 탐음(貪陰)을 멈추는 약이 되고,

4등심(等心,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성냄의 진에(瞋恚)를 그치는 약이 되며, 

스스로가 본래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인가?를 헤아리는 것은 바로 어리석음의 우치(愚癡)를 그치는 약이 되고, 

안반수의(安般守意)는 바로 생각이 많은 것의 약이 되는 것이다.

 

內外自觀身體。何等爲身?何等爲體?骨肉爲身,六情合爲體也。何等爲六情?謂眼合色,耳受聲,鼻向香,口欲味,細滑爲身,衰意爲種,栽爲癡,爲有生物也。

스스로 신체의 안팎을 관(觀)해야 하나니, 무엇이 신(身)이고? 무엇이 체(體)인가? 

뼈와 살은 신이 되고, 6정(情)이 합하여 체가 되나니,

무엇이 6정인가? 눈은 빛에 합하며, 귀는 소리를 받아들이며, 코는 냄새를 향하며, 입은 맛에 끌리며, 매끄러운 것에 몸이 쇠퇴하며, 뜻은 종자(種子)도 되고 어리석음도 되고 물건을 낳는 것도 되는 것이다.

 

內外身體所以重出者何?謂人貪求,有大小,有前後。謂所欲得當分別觀。

신체가 안과 밖으로 중복되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의 탐구(貪求)함에 크고 작음이 있고 앞과 뒤가 있으니, 

얻고자 하는 바를 마땅히 분별하여 관(觀)해야 하는 것이다.

 

觀者見爲念,念因見觀者爲知也。

관(觀)한다는 것은, 보는 것은 생각이 되고, 생각으로 인하여 보이게 되나니, 

관(觀)한다는 것은  아는(知) 것이다.

 

身觀止者,坐念起,起念意不離,在所行意所著爲識,是爲身觀止也。

신체를 (觀) 하여 멈춘다는 것은, 앉아서는 일어남을 생각하고 일어나서는 뜻을 생각하여서 소행(所行)하는 뜻과 소착(所着)하는 식(識)을 여의지 않는 것이 바로 신체를 관(觀)하여 멈추는 것이다.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卷 上 6

 

數息欲疾,相隨欲遲;有時數息當安徐,相隨時當爲疾。

何以故?數息意不亂當安徐,數亂當爲疾,相隨亦同如是也。

숨을 세는 수식을 빠르게 하고, 서로 따르는 상수를 느리게 하기도 하며,

때로는 세는 수식을 느리게 하고 서로 따르는 상수를 빠르게 하기도 하나니,

왜냐하면 수를 세는 수식을 뜻이 어지럽지 않으면 마땅히 느리게 해야 하고

뜻이 어지러우면 마땅히 빠르게 해야 하는 것이니, 서로 따르는 상수 또한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第一數,亦相隨所念異,雖數息,當知氣出入,意著在數也。數息,復行相隨。止觀者,謂不得息;前世有習,在相隨止觀。雖得相隨,止觀當還從數息起也。

번째로 세는 수식 또한 서로 따르는 상수가 생각하는 바가 다른 것이니,

비록 숨을 세는 수식을 할지라도 마땅히 () 나고 듦을 알아서 뜻을 세는 것에 붙여두어야 하며,

숨을 세다가 다시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 행한다면, 이른바 쉬는 것을 얻지 못하나, 전생의 () 서로 따르는 상수와 멈춤과 () 있는 것이니, 

비록 서로 따르는 상수와 멈춤과 관을 얻었을지라도 마땅히 돌이켜서 숨을 세는 수식으로부터 일으켜야 하는 것이.

 

數息意不離,是爲法離,爲非法數息,意不隨罪,意在世閒,便墮罪也。數息爲不欲亂意故,意以不亂復行相隨者,證上次意知爲止。止與觀同,還與淨同也。

숨을 세는 수식을 할 때, 뜻(意)을 여의지 않으면, 이는 법을 여읜 것이 되며,

법이 아니기 때문에 수식을 할  뜻이 죄를 따르지 않지만, 뜻을 세간에 둔다면 죄에 떨어지는 것이다.

숨을 세는 것은 뜻을 어지럽히지 않고자 하는 것이 때문이니, 뜻이 어지럽지 않아서 다시 서로 따르는 상수를 행한다면 상지중(上之中) 뜻을 증득하고 멈춤의 지(止)를 아는 것이라.

멈춤의 지(止)는 () 같고 돌이킴의 환(還) 청정한 () 같은 것이다.

 

行道得微意當倒意者,謂當更數息。若讀經已,乃復行禪微意者,謂不數息及行相隨也。

도(道)를 행하여 미세한 뜻을 얻었다가  뜻이 어긋나게 된다면, 

마땅히 다시 숨을 세는 수식을 하거나 경(經)을 읽어야 하며, 

마침내 다시 선(禪)을 행하여 미세한 뜻을 얻었다면, 숨을 세는 수식 서로 따르는 상수를 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佛有六潔意,謂數息、相隨、止、觀、還、淨,是六事能制無形也。

부처님께는 여섯 가지의 깨끗한 뜻의 육결의(六潔意)가 있으니, 

이른바 숨을 세는 수식(數息)과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과 돌이킴의 환(還)과 청정한 정(淨)이라.  여섯 가지로써 능히 형체 없는 무형(無形)을 제어하시는 것이다.


息亦是意,亦非意。何以故?數時,意在息爲是;不數時,意息各自行,是爲非意。從意生息已,止無有意也。

숨(息)은 또한 뜻(意)이기도 하고, 뜻이 아니기도 하나니, 왜냐하면,  때에 뜻이 숨에 있으면 뜻이 되지만, 세지 않을 때에는 뜻과 숨이 각각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니, 이것은 뜻이 아니요, 

숨을 좇아 생겨나는 것이니 숨이 이미 그치면 뜻도 없는 것이다.


人不使意,意使人。使意者,謂數息、相隨、止、觀、還、淨。念『三十七品經』,是爲使意;人不行道,貪求隨欲,是爲意使人也。

사람이 뜻(意)을 부리지 못하고 뜻이 사람을 부리니, 

뜻을 부리는 이는 이른바 숨을 세는 수식 서로 따르는 상수와 지(止)는 관(觀) 환(還)과 정(淨) '37품경(37 조도품)'을 생각하나니, 이것이 바로 뜻을 부리는 것으로, 

사람이 도를 행하지 않고, 탐내어 구하면서 욕심을 따른다면, 이것은 뜻이 사람을 부리는 것이다.


息有垢,息垢不去,不得息。何等爲息垢?謂三冥中最劇者,是爲息垢。何等爲三冥?謂三毒起時,身中正冥,故言三冥。三毒者;一爲貪婬,二爲瞋恚,三爲愚癡。人皆坐是三事死,故言毒也。數息時,意在數息;未數時,有三意:有善意、有惡意、有不善不惡意。

숨에 구식(垢息)이 있으니, 때의 구(垢)를 버리지 못하면 숨을 얻지 못하나니, 무엇이 구식(垢息)인가?

탐진치의 3명(三冥) 가운데에서 가장 극심한 것이  구식이다. 

무엇이명(三冥) 인가? 3독(毒)이 일어날 때의 몸 속은 틀림없이 어둡기 때문에 3명이라고 하는 것이니,

3독이란 첫째 탐음(貪婬), 둘째 성냄의 진에(瞋恚), 셋째 어리석음의 우치(愚癡)이니, 

사람이 모두   가지로 인하여 죽는 까닭에 독(毒)이라 하는 것이다. 

숨을 세는 수식을 할 때에는 뜻이  세는 데에 있지만, 

세지 않을 때에는  가지의 뜻인 삼의(三意)가 있으니, 선한 뜻의 선의(善意)도 있고, 악한 뜻의 악의(惡意)도 있으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는 불선불악의(不善不惡意) 있는 것이다.


欲知人得息相者,當觀萬物及諸好色,意不復著,是爲得息;相意復著,是爲未得,當更精進。行家中意欲盡者,謂六情爲意家,貪愛萬物皆爲意家也。

사람이  쉬는 식상(息相)을 얻었음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만물과 모든 좋은 경계를 관(觀)하여서 뜻이 그러한 것에 다시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쉬는 식상(息相) 얻은 것이요, 

뜻이 다시 집착한다면 이것은 상을 얻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다시 정진하여 가가(家家, 각각)의 뜻을 행하는 것을 없애고자 하여야 하나니, 이른바 6정(情)이 가가의 뜻이니 만물을 탐애하는 것이 모두 가가의 뜻인 것이다.


相隨者,謂行善法,從是得脫,當與相隨;亦謂不隨五陰、六入、息與意相隨也。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란, 이른바 선법(善法)을 행하여 이를 좇아 해탈을 얻어서 마땅히 서로 따르는 것이며, 또한 5음(陰)과 6입(入)을 따르지 않고 숨과 뜻이 서로 따르는 것이다.


問:第三止何以故止在鼻頭?

報:用數息、相隨、止、觀、還、淨,皆從鼻出入,意習故處,亦爲易識,以是故著鼻頭也。

惡意來者斷爲禪,有時在鼻頭止,有時在心中止;在所著爲止。邪來亂人意,直觀一事,諸惡來,心不當動,心爲不畏之哉也。

묻겠습니다; 세 번째의 멈춤의 지(止)는, 무슨 까닭에 코끝에 멈추는 것입니까? 

답한다; 숨을 세는 수식 서로 따르는 상수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과 돌이킴의 환(還)과 청정한 정(淨) 모두가 코로부터 들고 나는 것이니, 뜻으로  곳을 익힌다면 또한 인식하기 쉽기 때문에 코끝에 붙여두는 것이다. 

악한 뜻의 악의(惡意)가 오면 이를 끊는 것이 선(禪)이니, 

어떤 때에는  밑에 멈추어 있고, 어떤 때에는 마음속에 멈춰 있기도 하여서 그 붙어 있는 곳에서 멈추기 때문에, 사(邪)가 와서 사람의 뜻을 어지럽힌다면,  가지의 일사(一事)로 똑바로 관하여서, 마땅히 마음이 움직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止有四:一爲數止,二爲相隨止,三爲鼻頭止,四爲息心止。

멈춤의 지(止)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어서 멈추는 수지(數止)이며, 

둘째는 서로 따라서 멈추는 상수지(相隨止)이며, 

셋째는 코끝에 멈추는 비두지(鼻頭止)이며, 

넷째는 마음을 쉬어서 멈추는 식심지(息心止)이다.


止者,謂五樂六入,當制止之也。入息至盡鼻頭止,謂惡不復入至鼻頭止;出息至盡著鼻頭,謂意不復離身行向惡,故著鼻頭;亦謂息初入時,便一念向不復轉,息出入亦不復覺,是爲止也。

멈춤의 지(止)란, 이른바 5락(樂)과 6입(入)을 제지(制止)하는 것이니,

들이쉬는 입식(入息)이 코끝에 이르러서 모두 그치는 것은, 이른바 악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고 코끝에 이르러 멈추는 것이요, 

내쉬는 출식(出息) 코끝에 이르러서 모두 멈추는 것은, 이른바 뜻이 다시 몸을 떠나서 악으로 향하지 않기 때문에 코끝에 멈추는 것이요, 

또한 처음 숨을 들이쉴  문득  생각으로 향하고 다시 구르지 않아서 숨의 나고 듦을  다시 깨닫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멈춤의 지(止)가 되는 것이다.


止者,如如出息、入息,覺知前意出,不覺後意出。覺前意爲意相觀,便察出入息見敗,便受相畏生死,便卻意,便隨道意相也。莫爲相隨者,但念著鼻頭,五陰因緣不復念,罪斷意滅,亦不喘息,是爲止也。

멈춤의 지(止)란,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 앞의 뜻이 나오는 것은 깨달아도 뒤의 뜻이 나오는 것은 깨닫지 못하므로, 앞의 뜻을 깨달아서 그 뜻을 서로 관(觀)하여서 곧바로 나고 드는 숨을 살피나, 만약 실패한다면 문득 상(相)을 받아들여서 생사를 두려워하면서 그 뜻을 버리고 곧바로 도의(道意)의 상(相)을 따르는 것이니, 

서로 따르지 말고 다만 생각을 코끝에 붙여두고서 5음(陰)의 인연을 다시 생각하지 않으며, 죄가 끊어지고 뜻이 소멸하며, 또한 숨을 헐떡거리지 않음이 바로 멈춤의 지(止)가 되는 것이다.


莫爲相隨者,謂莫復意念出入,隨五陰因緣,不復喘息也。

서로 따르지 말라는 것이란, 

다시 뜻으로 나고 듦을 생각한다거나, 5음의 인연을 따르지 않는 것이며, 다시 숨을 헐떡거리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第四觀者,觀息敗時,與觀身體異息,見因緣生,無因緣滅也。

 번째의 관(觀)이라는 것은, 숨을 관하다가 실패할 때에는 신체(身體)를 관하여  쉬는 것과 달리하는 것이니, 인연이 나타나면 생기고 인연이 없으면 소멸하는 것이다.


心意受相者,謂意欲有所得,心計因緣會當復滅,便斷所欲不復向,是爲心意受相也。

마음과 뜻의 심의(心意)로 상(相)을 받아들이는 것이란, 

이른바 뜻에는 얻고자 하는 바가 있으나, 마음으로는 인연은 모이면 마땅히 다시 소멸한다는 것을 헤아려서 곧바로 욕망하는 바를 끊고 다시 향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마음과 뜻으로 상을 받아들이는 심의수상(心意受相)인 것이다.


以識因緣,爲俱相觀者 謂識知五陰因緣,出息亦觀,入息亦觀;觀者謂觀五陰,是爲俱觀。亦應意意相觀,爲兩因緣,在內斷惡、念道也。

인연을 인식하여 상(相)을 관함을 구족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5음(陰)의 인연을 인식하고 알아서, 내쉬는  또한 관하고 들이쉬는  또한 관하는 것이니,

관(觀)은 이른바 5음을 관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관을 구족하는 것이요, 

또한 뜻에 응하여 의상(意相)을 관함이  가지 인연이 되어서 안으로 악을 끊고 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觀出息異、入息異者,謂出息爲生死陰,入息爲思想陰;有時出息爲痛痒陰,入息爲識陰。隨因緣起便受陰,意所向無有常,用是故爲異,道人當分別知。是亦謂出息滅,入息生;入息滅,出息生也。

내쉬는 출식 다르고, 들이 쉬는 입식 다름을 관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내쉬는 출식 생사음(生死陰)이 되고 들이쉬는 입식 사상음(思想陰)이 되며, 

때로는 내쉬는 출식 통양음(痛痒陰)이 되고 들이쉬는 입식 식음(識陰)이 됨을 말하는 것이니, 

인연을 따라 일어나 문득 음(陰)을 받으며, 뜻이 향하는 바에 떳떳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도인은 마땅히 이러함을 분별하여 알아야 하며,

또한 내쉬는 출식 소멸하는 것을 들이쉬는 입식이 생기는 것이라 하며, 

들이쉬는 입식 소멸하는 것을 내쉬는 출식 생기는 것이라도 한다.


無有故者,謂人意及萬物,意起已滅,物生復死,是爲無有故也。

연고가 없다는 무유고(無有故)란, 이른바 사람과 만물에 대하여 뜻이 일어났다가 이미 멸하고, 

물건도 생겨났다가 다시 죽는 것이니, 이를 바로 연고가 없는 무유고(無有故)라 하는 것이다.


非出息是入息,非入息是出息;非謂出息時意不念入息,入息時意不念出息,所念異故言非也。

내쉬는 출식 아니면, 이것은 들이쉬는 입식이며, 들이쉬는 입식 아니면 이것은 내쉬는 출식이라고 하는 것은, 

숨을 내쉴  뜻으로 들이쉬는 숨을 생각하지 않거나, 숨을 들이쉴  뜻으로 내쉬는 숨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中信者,謂入道中、見道因緣、信道,是爲中信也。

중신(中信)이란, 이른바 도(道) 가운데에 들어가서 도의 인연을 보고, 도를 믿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중신(中信)인 것이다.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卷 上 5

 

數息斷外,相隨斷內,數從外入爲斷外,亦欲離外因緣,數從中出爲欲離內因緣。外爲身離,內爲意離;身離、意離是爲相隨,出入息是爲二事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 바깥을 끊는 단외(斷外)요서로 따르는 상수(相隨)는 안을 끊은 단내(斷內)이며,

밖으로 부터 들어올  세는 것은 바깥을 끊는 단외(斷外)요, 또한 바깥 인연을 여의고자 하는 것이요

가운데로에서 나올  세는 것은 안의 인연을 여의려고 하는 것이니바깥(外)은 몸을 여읨이 되고안(內)은 뜻을 여읨인 것이니, 

몸을 여의고 뜻을 여의는 이것이 바로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가 되며나고 드는 출입식(出入息)의 숨은  가지의 이사(二事)가 된다.


數息爲欲斷內外因緣。何等爲內、外?謂眼、耳、鼻、口、身、意爲內,色、聲、香、味、細滑、念爲外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 안과 밖의 인연을 끊고자 하는 것이니무엇이 안과 밖인가

()ㆍ이()ㆍ비()ㆍ구()ㆍ신()ㆍ의() 안(內)이 되고

()ㆍ성()ㆍ향()ㆍ미()ㆍ세활(細滑)ㆍ염() 밖(外)이 되는 것이니, 


行息爲使意向空,但欲止餘意。何以爲向空?息中無所爲故也。

 쉼을 행하는 행식(行息) 뜻을 ()으로 향하게 하려는 것이니,

다만 나머지 뜻만 멈추고자 할 뿐이라 어떻게 공으로 향할 수 있겠는가 가운데는  쉬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數息意走不?卽時覺者,罪重意輕,罪引意去疾,故不覺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을 할  뜻이 달아나는 것이 아니던가

이를 곧바로 깨닫는다면 죄는 무겁고 뜻은 가벼우니죄가 뜻을 이끌어 빨리 가버리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行道已得息,自厭息意,欲轉不復欲數,如是爲得息。相隨止觀亦爾也。

() 행하여 이미  쉬는 것을 얻은 득식(得息)이라면 저절로  쉬는 것이 싫어져서 뜻을 돌리려고 하여도 다시 세고 싶지 않을 것이니이와 같은 것이  쉬는 것을 얻은 득식(得息)이요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와 멈춤의 지(止)와 () 또한 그러한 것이다.


知出入息滅,滅爲得息相;知生死不復用,爲得生死相。已得四禪,但念空爲種道栽。

나고 드는 출입식(知出入)의 숨의 사라짐을 알아서 숨의 상(相) 얻고

생사(生死) 알아서 다시 쓰지 않음으로써 생사의 상(相) 얻는다면이미 4() 얻은 것이니

다만 () 생각하여 () 심어야 하리라.


行息已得定,不復覺氣出入,便可觀。一、當觀五十五事;二、當觀身中十二因緣也。

숨 쉼을 행하는 행식(行息) 행하여 이미 () 얻어서 다시 () 나고 듦을 깨닫지 못한다면

문득 ()  있으니첫째로는 마땅히 55를 관해야 하고둘째로는 마땅히  가운데서 12인연을 관해야 한다.

 

問:息出入,寧有處不?

報:息入時是其處,出息時是其處。數息身坐,痛痒、思想、生死、識止不行,是爲坐也。念息得道,復挍計者,用息無所知故。

痛痒통양 1. 사물이 자신에 직접 미치는 영향을 이르는 말  2. 아픔과 가려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

묻겠습니다; 그렇다면 숨이 나고 듦의 출입식(知出入)에 있어서, 나고 드는 곳이 있는 것입니까? 

답한다; 숨이 들어올 때가 바로  곳이요, 숨을 내쉴 때가 바로  곳이다. 

숨을 세며 몸으로 앉아서 통양(痛痒)ㆍ사상(思想)ㆍ생(生)ㆍ사(死)ㆍ식(識)을 멈추고 행하지 않음이 바로 앉음(坐)이 되나니, 숨을 생각하여 도를 얻으나 다시 헤아리는 것은 숨은 본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問:念息得道,何以爲無所知?

報:意知息,息不知意,是爲無所知。人不能得挍計意,便令數息,欲令意定。雖數息,但不生惡。無有黠智。,當何等行得黠慧?從一至十,分別定亂,識對行藥;已得定意,便隨黠慧,得挍計爲墮觀也。

묻겠습니다; 숨을 생각하여 도를 얻었는데 어찌하여 아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뜻은 숨을 알지만 숨은 뜻을 알지 못하나니, 이를 아는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능히 뜻을 헤아릴  없다면 곧바로 숨을 세도록 해서 뜻을 정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비록 숨을 셀지라도 다만 악(惡)이 생겨나지 않을 뿐, 지혜가 없으니, 

마땅히 어떠한 행으로써 지혜를 얻어 하나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분별하여 어지러움을 안정시키고,

대경(對境)을 식별하는 약(藥)을 쓰겠는가? 

이미 정의(定意)를 얻었다면 곧바로 지혜를 따라서 헤아림을 얻어 관(觀)을 따르는 것이다.

 

問:何等爲數?

報:數者謂事。譬如人有事更求,是爲數罪。道人數福,何以故正爲十?一意起爲一,二意起爲二,數終於十,至十爲竟,故言十數爲福。

묻겠습니다; 무엇이 세는 것의 수(數)인 것입니까? 

답한다; 센다는 것은 사(事)를 말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사람이 어떤 일이 있으면 곧바로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나, 이것은 죄를 세는 것이지만 도인(道人)은 복을 세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에 이르기까지를 정하여   뜻을 일으키면  번째가 되고,   뜻을 일으키면  번째가 되어, 세기를  번째에서 마치니,  번째까지 이르면 끝이 되는 까닭에, 열까지 세는 것이 복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復有罪者,用不能壞息,故爲罪;亦謂意生死不滅,墮世閒已,不斷世閒事爲罪也。六情爲六事,痛痒、思想、生死、識,合爲十事,應內十息;殺、盜、婬、兩舌、惡口、妄言、綺語、嫉妒、瞋恚、癡,應外十息,謂止不行也。

또한 죄가다는 것은, 능히  쉬는 것을 무너뜨리지 못하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며, 

또한 생사(生死)에 뜻을 두어 소멸하지 못하고 세간에 떨어져 세간 일을 끊지 못하므로 죄가 되는 것이다.

눈(眼)ㆍ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 ㆍ 뜻(意)의 육정(六情)의 여섯 가지에서, 통양(痛痒)ㆍ사상(思想)ㆍ생사(生死)ㆍ식(識)을 합한  가지는 안의  번째의 숨인 내십식(內十息)에 응하고 

살(殺)ㆍ도(盜)ㆍ음(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ㆍ질투(嫉妬)ㆍ진에(瞋恚)ㆍ우치(愚癡)는 밖의  번째까지의 숨인 외십식(外十息)에 응하는 것이니, 

이른바 멈추어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問:何等爲十六事?

報:十事者謂數,至十六者,謂數、相隨、止、觀、還、淨,是爲十六事,爲行不離,爲隨道也。

묻겠습니다; 무엇이 열여섯 가지의 십육사(十六事)입니까? 

답하나니; 열여섯 가지의 십육사(十六事)는 세어서 열여섯 번째까지 이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숨을 세는 수식(數息)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 돌이킴의 환(還)과 청정한 정(淨)을 열여섯 번째에 이르기까지 행하여 여의지 않음이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

 

問:數息念風爲隨色,何以應道?

報:行意在數不念色,氣盡便滅,墮非常、知非常爲道也。道人欲得道,要當知、坐行二事:一者爲坐,二者爲行。

묻겠습니다; 숨을 세는 것은 바람을 생각하여 색(色)을 따르게 되니, 어떻게 도에 응(應)하는 것입니까? 

답하나니; 뜻(意)을 행함이 세는 있고, 색과 기(氣)를 생각하지 않으면, 모두 곧바로 소멸하여 비상(非常)에 떨어지거나 비상을 아는 것으로 이것이 도가 되는 것이다. 

도인(道人)이 도를 얻고자 한다 마땅히 앉아서 행하는  가지를 알아야만 하나니, 

첫째는 앉음의 좌(坐)이고, 둘째는 행함의 행(行)이다.

 

問:坐與行爲同、不同?

報:有時同,有時不同。數息、相隨、止、觀、還、淨,此六事有時爲坐,有時爲行。何以故?數息意定是爲坐,意隨法是爲行;已起意不離爲行,亦爲坐也。

묻겠습니다; 앉음의 좌(坐)와 행함의 행(行)은 같은 것입니까? 같지 않은 것 입니까? 

답하나니; 때로는 같고 때로는 같지 않으니, 숨을 세는 수식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와 멈춤의 지(止)와 관(觀)과 돌이킴의 환(還)과 청정한 정(淨) 등의 여섯 가지의 육사(六事)를 때로는 앉아서 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니면서 하기도 하나니, 

왜냐하면 숨을 세어서 뜻(意)을 정(定)하는 것이 바로 앉음의 좌(坐)가 되고, 

뜻(意)이 법을 따르는 것이 행(行)이 되며, 

이미 뜻(意)을 일으켜서 여의지 않음은 행(行)도 되고 또한 앉음의 좌(坐)도 되는 것이다.

 

坐禪法,一不數二,二不數一。一數二者,謂數一息未竟便言二,是爲一數二,如是爲過精進;二數一者,謂息已入二甫言一,是爲二數一,如是爲不及精進。

좌선(坐禪)하는 법은,  번째에서  번째를 세지 않고,  번째에서  번째를 세지 않는 것이닌,

 번째에서  번째를 센다는 것은,  번째 숨을 세는 것을 아직 마치지 않았는데 곧바로  번째를 말하는 것이 바로  번째에서  번째를 세는 것으로,  것은 지나친 정진(精進)이 되며,  

 번째에서  번째를 센다는 것은, 숨이 이미   들어왔는데 겨우  번째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번째에서  번째를 세는 것이니,  것은 미치지 못하는 정진이 되며, 

 

從三至四、五至六、七至八、九至十,各自有分部,當分別所屬;在一數一,在二數二,是爲法行,便墮精進也。

 번째에서  번째에 이르고, 다섯 번째에서 여섯 번째에 이르며, 일곱 번째에서 여덟 번째에 이르고, 아홉 번째에서  번째에 이르기까지 각각 부분이 있으니, 

마땅히 속한 곳을 분별하여  번째에 있어서는  번째를 세고,  번째에 있어서는  번째를 세는 것이 바로 법을 행하는 것이며,  정진을 따르는 것이다.

 

有三坐墮道:一爲數息坐,二爲誦經坐,三爲聞經喜坐,是爲三也。

앉음의 좌(坐)로써 도를 따르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숨을 세면서 앉아 있는 것이요, 

둘째는 경을 외우면서 앉아 있는 것이요, 

셋째는 경을 듣고 기뻐하며 앉아 있는 것이니, 이것이  가지다.

 

坐有三品:一爲味合坐,二爲淨坐,三爲無有結坐。何等爲味合坐?謂意著行不離是爲味合坐。何謂爲淨坐?謂不念爲淨坐。何等爲無有結坐?謂結已盡爲無有結坐也。

앉음의 좌(坐)에 3품(品)이 있으니, 

첫째는 미합좌(味合坐)요, 둘째는 정좌(淨坐)요, 셋째는 무유결좌(無有結坐)이니, 

무엇이 미합좌(味合坐)인가? 뜻이 행에 집착하여 여의지 않는 것이 바로 미합좌이며,

무엇이 정좌(淨坐)인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좌이며,

무엇이 무유결좌(無有結坐)인가? 맺음이 이미 다한 것이 무유결좌인 것이다.

 

息有三輩:一爲雜息,二爲淨息,三爲道息。不行道,是爲雜息;數至十息不亂,是爲淨息;已得道,是爲道息也。

숨(息)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잡식(雜息)이요, 둘째는 정식(淨息)이요, 셋째는 도식(道息)이니,

도를 행하지 않는 것이 잡식(雜息)이요, 

세어서  번째까지 이르도록 어지럽지 않는 것이 정식(淨息)이요, 

이미 도를 얻는 것이 도식(道息)이며, 

 

息有三輩:有大息,有中息,有微息。口有所語,謂大息止;念道,中息止;得四禪,微息止也。

숨에  가지가 있으니, 대식(大息)이 있고, 중식(中息)이 있고, 미식(微息)이니,

입으로 말하는 바가 있는 것은 대식(大息)이요, 

멈추어서 도를 생각하는 것은 중식(中息)이요, 

멈추어서 4선(禪)을 얻는 것은 미식(微息)이다.

 

問:佛何以教人數息守意?

報:有四因緣,一者、用不欲痛故;二者、用避亂意故;三者、用閉因緣,不欲與生死會故;四者、用欲得泥洹道故也。

묻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왜 사람들에게 숨을 세어서 뜻을 지킬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까?

답한다; 네 가지의 이유(인연)가 있으니,

첫째는 고통을 받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요,

둘째는 뜻이 어지러운 난의(亂意)를 피하게 하려는 까닭이요,

셋째는 인연을 막아 생사와 만나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요,

넷째는 니원도(泥洹道, 열반도)를 얻게 하고자 하신 까닭이다.

 

譬喩說日無光明者,有四因緣:一者、用有雲故;二者、用有塵故;三者、用有大風故;四者、用有煙故。數息不得,亦有四因緣:一者、用念生死挍計故;二者、用飮食多故;三者、用疲極故;四者、用坐不得更罪地故。

비유하자면, 해의 광명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 네 가지의 이유가 있으니,

첫째는 구름이 끼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먼지가 끼었기 때문이요,

셋째는 큰 바람이 불기 때문이요, 넷째는 연기가 끼었기 때문인 것과 같이,

숨 세는 수식을 얻지 못하는 것에도 네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생사를 생각하여 헤아리기 때문이요,

둘째는 음식을 많이 먹기 때문이요,

셋째는 몹시 여위었기 때문이요,

넷째는 앉아서 죄지(罪地)를 고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此四事來皆有相:坐數息,忽念他事失息意,是爲念挍計相;骨節盡痛,不能久坐,是爲食多相;身重意瞪瞢,但欲睡眠,是爲疲極相;四面坐,不得一息,是爲罪地相。以知罪,當經行;若讀經文坐,意不習罪,亦禍消也。

이 네 가지의 사사(四事) 모두에 상(相)이 있으니,

앉아서 숨을 세면서 갑자기 다른 일을 생각하여 숨과 뜻을 잃는 것은 바로 생각하여 헤아리는 교계상(挍計相)이요,

골절이 모두 아파서 능히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은 바로 많이 먹은 식다상(食多相)이요,

몸이 무겁고 뜻이 혼몽하여서 다만 잠을 자려고만 하는 것은 바로 몹시 여읜 피극상(疲極相)이요,

4면(面)으로 앉아 있기만 할 뿐, 한 숨(息)도 얻지 못하는 것은 바로 죄지상(罪地相)이니,

만약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경행(經行)을 하거나 앉아 경문(經文)을 읽어서 뜻으로 죄를 익히지 않는다면 화(禍)가 소멸될 것이다.

 

道人行道當念本。何等爲本?謂心意識是爲本。是三事皆不見,已生便滅,本意不復生,得是意爲道意;本意已滅,無爲痛更因緣生便斷也。定意日勝日勝爲定意,有時從息得定意,有時從相隨得定意,有時從止得定意,有時從觀得定意,隨得定因緣直行也。

도인(道人)은 도를 행하여 마땅히 근본을 생각하여야 하나니, 무엇이 근본인가?

심(心)ㆍ의(意)ㆍ식(識)이 바로 근본이 된다.

이 세 가지 모두는 보이지 않으나 이미 생겼다가 곧바로 멸하는 것으로, 근본의 뜻인 본의(本意)가 다시 생겨나지 않는 것이니, 이 뜻을 얻음이 도의(道意)가 되며,

근본의 뜻인 본의(本意)가 이미 소멸하였다면 고통이 없는 것이나, 다시 인연으로 생겼다가도 곧바로 끊어지니, 정의(定意)가 날로 수승해지는 것으로, 날로 수승해지는 것이 정의(定意)가 되는 것이니,

때로는 숨을 좇아 정의(定意)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따름의 상수를 좇아 정의(定意)를 얻기도 하며, 때로는 멈춤의 지(止)를 좇아 정의(定意)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관(觀)을 좇아 정의(定意)를 얻기도 하나니,

정(定)의 인연(因緣)을 얻음에 따라 곧바로 행하는 것이다.

 

行息亦墮貪,何以故?意以定便喜故。便當計出息、入息、念滅時,息生,身生;息滅,身滅。尚未脫生死苦,何以故?喜已計,如是便貪止也。

숨 쉬는 행식(行息)을 행하여도 역시 탐(貪)에 떨어지나니, 왜냐하면 뜻이 정해지면 문득 기뻐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곧바로 나는 숨과 드는 숨을 헤아려야만, 생각이 사라질 때 숨이 생겨나고, 몸이 생겨나며, 숨이 사라지면 몸도 사라지는 것이니,

아직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왜인가?

기뻐서 이와 같이 헤아리기 때문이니, 곧바로 탐욕을 멈추어야 하는 것이다.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佛說大安般守意經卷 上 4

 

數息不得,有三因緣:一者、罪到;二者、行不互;三者、不精進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 얻지 못함에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죄에 이른 죄도(罪到)요, 둘째는 행이 서로 함께하지 않은 행불호(行不互)요, 

셋째는 정진하지 않는 불정진(不精進)인 것이다.


入息短,出息長。無所從念爲道意,有所念爲罪;罪惡在外,不在內也。

들이쉬는 입식(入息) 짧고 내쉬는  출식(出息) 길며, 

따라서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이 도의(道意)가 되고,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은 죄(罪)가 되나니, 죄는 밖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안에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數息時,有離意爲喘息長,得息爲喘息短,不安行息爲長,定爲短。念萬物爲長息,無所念爲短息。未至十息,壞復更數爲長息,得十息爲短息。得息爲短,何以故?止不復數故。得息亦爲長,何以故?息不休,故爲長也。喘息長自知,喘息短自知;謂意所在爲自知長短,意覺長短爲自知,意不覺長短爲不自知也。

숨을 세는 수식을 할 때, 뜻을 여의면 숨이 길어지고, 숨을 얻으면 숨이 짧아지며, 

편안하게 행하지 못하면 숨이 길게 되고, 정(定)하면 짧게 되며, 

만물을 생각하면  숨이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으면 짧은 숨이 되며, 

 번째 숨에 이르지 못하고 그쳤다가 다시 세는 것은  숨이 되고,  번째 숨을 얻는 것은 짧은 숨이 된다. 

숨을 얻으면 짧게 되나니, 왜냐하면, 멈추고 다시 세지 않기 때문이며, 

숨을 얻으면 또한 길게 되기도 하나니, 왜냐하면, 숨을 쉬지(休) 않기 때문에 길게 되는 것이며,

숨이  것도 스스로 알고 숨이 짧은 것도 스스로 아는 것은, 뜻이 있는 곳을 따라서 길고 짧음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뜻이 길고 짧음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아는 것이 되고, 뜻이 길고 짧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道人行安般守意欲止意,當何因緣得止意?聽說安般守意。

도인(道人)은 안반수의(安般守意)를 행하여 뜻을 멈추는 지의(止意)를 얻고자 하나니, 

마땅히 무슨 인연으로 뜻을 멈추는 지의(止意)를 얻는 것인가? 

이제 안반수의를 설하겠으니 들을지어다.

 

何等爲安?何等爲般?安名爲入息,般名爲出息,念息不離,是名爲安般。守意者,欲得止意。

무엇이 안(安)이 되고, 무엇이 반(般)이 되는가? 

안(安)은 들이쉬는 입식(入息)이라 하고, 

반(般)은 내쉬는 출식(出息)이라 하나니,

생각(念)과 숨(息)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을 안반(安般)이라고 하며, 

수의(守意)는 뜻을 멈춤인 지의(止意)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在行者、新學者,有四種安般守意行,除兩惡十六勝,卽時自知,乃安般守意行,令得止意。

행자(行者)와 새로 배우는 신학자(新學者)에게는  가지 안반수의의 행이 있으니, 

 가지의 악(惡)을 제거하면 16승(勝)을 스스로 즉시 알게 되어서, 마침내 안반수의를 행하여 뜻을 멈춤인 지의(止意)를 얻게 되는 것이다.


何等爲四種?一爲數,二爲相隨,三爲止,四爲觀。

무엇이  가지인가? 첫째는 호흡을 세는 수식(數息)이요, 둘째는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요, 

셋째는 멈추는 지(止)요, 넷째는 관(觀)하는 것이다.


何等爲兩惡?莫過十息,莫減十數。

무엇이  가지 악(惡)인가?  번째 숨을 넘어가지 않는 것과  번보다 덜하지 않는 것이다.


何等爲十六勝?卽時自知喘息長;卽自知喘息短;卽自知喘息動身;卽自知喘息微;卽自知喘息快;卽自知喘息不快;卽自知喘息止;卽自知喘息不止;卽自知喘息歡心;卽自知喘息不歡心;卽自知內心念萬物已去不可復得,喘息自知;內無所復思,喘息自知;棄捐所思,喘息自知;不棄捐所思,喘息自知;放棄軀命,喘息自知;不放棄軀命,喘息自知。是爲十六卽時自知也。

무엇이 16승(勝)인가? 스스로의 숨이 긴 것 곧바로 아는 것과 스스로의 숨이 짧음을 곧바로 아는 것, 

스스로의 숨이 몸을 움직임을 곧바로 아는 것과 스스로의 숨이 미세(微細)함을 곧바로 아는 것,

스스로의 숨이 상쾌함을 곧바로 아는 것과 스스로의 숨이 상쾌하지 못함을 곧바로 아는 것,

스스로의 숨이 멈춤을 곧바로 아는 것과 스스로의 숨이 멈추지 않음을 곧바로 아는 것, 

스스로의 숨이 마음에 기꺼움을 곧바로 아는 것과 스스로 숨이 마음에 기껍지 않음을 곧바로 아는 것,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만물이 이미 없어져서 다시 숨을 얻을  없음을 스스로가 곧바로 아는 것, 

안으로 다시 생각하는 바가 없는 숨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곧바로 아는 것, 

생각하는 바를 버리는 숨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아는 것, 

생각하는 바를 버리지 못하는 숨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아는 것, 

몸과 목숨의 구명(軀命)을 버리는 숨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아는 것, 

몸과 목숨의 구명(軀命)을 버리지 못하는 숨이라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이러함이 스스로 곧바로 아는 열여섯 가지인 것이다.


問:何等爲莫過十數、莫減十數?

報:息已盡未數是爲過,息未盡便數是爲減。失數亦惡,不及亦惡,是爲兩惡。

묻겠습니다; 무엇이  번째 세기를 넘지 않는 것이며,  번째 세기보다 덜하지 않는 것입니까? 

답하나니; 숨이 이미 다하였음에도 아직 세지 않는 것이 넘는 것이요,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음에도 곧바로 세는 것이  하는 것이다. 

셈을 넘어서 놓친  또한 악(惡)이요, 미치지 못하는  또한 악이니, 이것이  가지의 악이 되는 것이다.


至二息亂爲短息,至九息亂爲長息,得十息爲快息。相隨爲微,

意在長便轉意;我何以故念長?意在短,卽時覺不得令意止,止爲著。

 번째 숨에 이르러서 어지러운 것은 짧은 숨의 단식(短息)이 되고, 

아홉 번째 숨에 이르러서 어지러운 것은  숨의 장식(長息)이 되며, 

 번째의 숨을 얻는 것은 상쾌한 숨의 괘식(快息)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미세함이 되나니,

뜻이   있다면 바로 뜻을 돌이켜서 ‘나는   것을 생각하는가?’라고 해야 하며, 

뜻이 짧은 데에 있다면 즉시 깨달아서 뜻이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하나니, 멈추면 집착이 되는 것이다.

 

放棄軀命者,謂行息。得道意,便放棄軀命;未得道意,常愛身故,不放棄軀命也。息細微爲道,長爲生死,短息動爲生死,長於道爲短,何以故?不得道意,無知見,故爲短也。

몸과 목숨의 구명(軀命)을 버리는 것을 숨을 행하는 행식(行息)이라 하나니, 

도의(道意)를 얻으면 문득 구명(軀命)을 버리며, 

아직 도의를 얻지 못하였다면 항상 몸을 아끼는 까닭에 구명(軀命)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숨이 미세한 것은 도(道)가 되고,  장식(長息) 생사(生死)가 되며, 

짧은 단식(短息) 움직이면 생사가 되고, 도(道)보다 길면 짧음이 되나니, 

왜냐하면, 도의(道意)를 얻지 못하여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짧음이 되는 것이다.


數息爲單,相隨爲複,止爲一意,觀爲知意,還爲行道,淨爲入道也。

숨을 세는 것은 단(單)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복(複)이 되며, 

멈춤의 지(止)는 뜻을 한결같은 일의(一意)가 되고, 관(觀)은 뜻을 앎이 되며, 

돌이킴의 환(還)은 도를 행하는 행도(行道)가 되고, 청정함의 정(淨)은 도에 들어가는 입도(入道)가 된다.


數時爲念,至十息爲持,是爲外禪;念身不淨隨空,是爲內禪也。

 때에 생각이  번째 숨에 이르러 붙잡고 있는 것이 바로 외선(外禪)이요, 

몸의 부정(不淨)함을 생각하고 공(空)을 따르는 것이 바로 내선(內禪)이다.


禪法惡來不受,是名爲棄。閉口數息,隨氣出入,知氣發何所,滅何所。意有所念,不得數息;有遲疾、大小,亦不得數;耳聞聲亂,亦不得數也。

선법(禪法)은 악이 와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를 ‘버린다’고 하며,

입을 다물고 숨을 셈에 있어서 기(氣)의 나고 듦을 따르되, 기가 어떤 곳에서 일어나고 어떤 곳에서 멸하는 가를 알아야 하나니,

뜻으로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숨을 세지 못하고, 더디고 빠르고 크고 적음이 있어도 또한 세지 못하며, 귀로 어지러운 소리를 들어도 또한 세지 못하나니, 


數息,意在息,數爲不工,行意在意乃爲止。數息,意但在息,是爲不工。當知意所從起、氣所滅,是乃應數因緣盡,便得定意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 뜻이  세는 것에 있다면 공교함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뜻을 행함이 뜻에 있어야 멈춤의 지(止)가 되며, 

숨을 세는 수식(數息)을 할 때, 뜻이 다만 숨에만 있다면 이것 또한 공교함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마땅히 뜻이 좇아서 일어나는 곳과 기(氣)가 멸하는 곳을 알아야만, 마침내 세는 것에 응하여서 인연이 다하면 문득 정의(定意)를 얻게 되는 것이다.


守意者,念出入息,已念息不生惡,故爲守意。息見因緣生,無因緣滅;因緣斷,息止也。數息爲至誠,息不亂爲忍辱。數息氣微,不復覺出入,如是當守一念止也。息在身,亦在外,得因緣息生,罪未盡故有息;斷因緣,息不復生也。

수의(守意)는 나고 드는 숨을 생각하여서 이미 숨을 생각함에 악(惡)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수의가 되는 것이니,

숨은 인연을 따라 생겨나는 것으로, 인연이 없고 인연을 멸한다면 숨도 끊어져 멈추는 것이다. 

숨을 세는 수식(數息) 지극히 성실하고, 숨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 인욕(忍辱)이 되며, 

숨을 세는 수식(數息) 기가 미세하여 다시 나고 드는 깨닫지 못해여야만, 이에 마땅히  생각을 지켜서 멈추는 지(止)가 되는 것이니,

숨은 몸에도 있고 또한 밖에도 있는 것으로, 인연을 얻어서 숨이 생기며 죄가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숨이 있는 것이니, 인연을 끊으면 숨이 다시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數息以爲隨第二禪。何以故?用不待念故,爲隨第二禪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 제2선(禪)을 따를 것이니, 왜냐하면, 생각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제2선을 따르는 것이며, 


數息爲不守意,念息乃爲守意。息從外入息未盡,息在入 意在盡,識在數也。

숨을 세는 수식(數息)만으로 수의(守意)가 되지 못하며, 숨을 생각해야 마침내 수의가 되나니, 

숨이 밖으로부터 들어와서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그 숨은 들어오는 중이며, 뜻은 다한 것이며, 식(識)은 수를 세는 것에 있는 것이다.


十息有十意爲十絆,相隨有二意爲二絆,止爲一意爲一絆。

 가지 숨의 십식(十息)에  가지의 뜻이 있어서  개의 묶임인 십반(十絆)이 되고, 

서로 따르는 상수(相隨)  가지의 뜻이 있어  개의 묶임인 이반(二絆)이 되며, 

멈춤의 지(止)에  가지 뜻이 있어  개의 묶임인 일반(一絆)이 된다.


不得息數爲惡意不可絆;惡意止,乃得數,是爲和調可意絆也。

 세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악한 뜻이 되어 가히 묶을  없으며, 

악한 뜻이 멈추어야 마침내 숨을 셈을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이 조화되어야 가히 뜻을 묶을  있는 것이다.


已得息棄息,已得相隨棄相隨,已得止棄止,已得觀棄觀,莫復還;莫復還者,莫復數。息亦使意,意亦使息也;有所念爲息使意,無所念爲意使息也。

이미 숨을 얻었으면 숨을 버리고, 

이미 서로 따름의 상수(相隨)을 얻었으면 서로 따름의 상수(相隨)을 버리며, 

이미 멈춤의 지(止)를 얻었으면 멈춤의 지(止)를 버리고, 

이미 관(觀)을 얻었으면 관을 버리며, 다시 돌이키지 말아야 하며, 

다시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숨을 세어서 뜻(意)을 부리거나, 또한 뜻(意)이 숨을 부리지 않는 것이니, 

생각하는 바가 있다면 숨이 뜻(意)을 부리게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다면 뜻(意)이 숨을 부리는 것이다.


息有四事:一爲風,二爲氣,三爲息,四爲喘。有聲爲風,無聲爲氣,出入爲息,氣出入不盡爲喘也。

숨에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바람(風), 둘째는 기운(氣), 셋째는 숨(息), 넷째는 헐떡거림의 천(喘)이니,

소리가 있는 것은 바람(風)이 되고, 소리가 없는 것은 기운(氣)이 되며, 

나고 드는 것은 숨(息)이 되고, 나고 드는 기운이 다하지 못한 것은 헐떡거림의 천(喘)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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