用熏習者(용훈습자) 卽是衆生外緣之力(즉시중생외연지력)

용훈습이라는 것은 곧 중생의 외연적인 힘이니, 

如是外緣(여시외연) 有無量義(유무량의) 略說二種(략설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와 같은 외연에는 한량없는 뜻이 있지만 간략히 말하면 두 가지이다.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用熏習 : 자체상훈습은 누구나 갖추고 있는 진여성이 정인(正因)이 되어 훈습하는 것이며, 내부적인 훈습이지만, 용훈습은 수행에 마음을 낸 중생을 불보살 등이 외부에서 돕는 훈습=外緣이다.]

一者差別緣(일자차별연) 二者平等緣(이자평등연)

첫째는 차별적인 조연=差別緣이고 둘째는 평등한 조연=平等緣이다.

 

[용훈습(用熏習)은 체(體) 상(相) 용(用) 삼대(三大) 중 용대(用大)의 작용을 말한다. 진여의 활동이 부처의 구제 활동이 되어 중생에게 외연(外緣)으로서 작용하여 도와주는 활동을 말한다. 불(佛)이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으로서 교도(敎導)하는 활동이다. '기신론'에서는 체대(體大)와 상대(相大)가 불(佛)의 법신(法身)을 표시한다. 진여의 정용(淨用)이 불(佛)의 용대(用大)로서 완전히 나타나,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이를 '이것이 중생에의 외연의 힘이다' 라고 설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외연(外緣)의 힘이 중생에게 가해지는 불보살(佛菩薩)의 활동이 무수한 것이지만, 이것을 요약하여 설명하면 차별연(差別緣)과 평등연(平等緣)이 있다. 차별연은 개인별로 제각기 상이한 외연(外緣)을 말하며, 평등연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작용하는 외연(外緣)을 말한다.-전종식]

 

[발심(發心)하여 불도를 구하는 중생들을 부처님과 보살들이 외부에서 돕는 조연, 진여법신의 작용에 의해서 배어드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러한 외연의 훈습하는 작용에 한량없는 의미가 있지만, 간략히 두 가지만 언급하고 있는데, 첫째는 분별사식의 훈습으로 발심한 범부와 소승에게 감응하여 훈습해 주는 차별하는 조연(助緣)의 훈습작용이며, 다음은 업식에서 훈습하여 수행하는 모든 보살을 위하여 평등하게 외연으로 훈습해 주는 평등한 조연의 훈습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외연의 훈습하는 작용은 제불보살이 진여법신을 증득하고 나면 자연히 불가사의한 지혜와 자비의 작용이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중생들의 느낌이 부딪쳐 오는 대로 감응하여 나타나는 대비원력으로써 갖가지 몸의 형상과 부처님의 사업(事業)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중생들의 근욕성(根欲性)을 따라서 성취시키면서 발심하여 불도를 구하는 중생들을 위해 외부에서 돕는 조연의 훈습을 합니다. 이는 법신의 작용으로 진여의 작용입니다. 중생이 갖추고 있는 본각의 심체가 바로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법신이며, 그 법신 자체가 동일하게 평등하므로 그 작용도 또한 동일하기 때문에 중생이 발심하는 진여훈습의 작용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낸 정도에 따라 모든 부처님이 그 훈습작용을 성취해 주는 외연을 감득할 수 있습니다.-수선]

 

差別緣者(차별연자) 此人依於諸佛菩薩等(차인의어제불보살등)

차별적인 조연=차별연이란 이 사람이 모든 불보살 등을 의지하여 

從初發意始求道時(종초발의시구도시) 乃至得佛(내지득불)

처음으로 뜻을 내어 불도를 구함=求道를 시작할 때부터 나아가 불과를 얻기까지(성불할 때까지),

於中若見若念(어중약견약념) 或爲眷屬父母諸親(혹위권속부모제친)

그 도중에 혹 보기도 하며, 혹 염(생각)하기도 하며, 혹은 권속, 부모와 여러 친척이 되기도 하며, 

或爲給使(혹위급사) 或爲知友(혹위지우) 或爲怨家(혹위원가) 或起四攝(혹기사섭)

혹은 급사가 되기도 하며, 혹은 자기를 알아주는 벗이 되기도 하고, 혹은 원수의 집이 되기도 하며, 혹은 사섭법을 일으키기도 한다.

 

[於中若見若念 或爲眷屬父母諸親 “수행을 하는 사람이 불보살을 보거나 생각하면 불보살이 권속, 부모, 친족이 되어….” 뒤의 부분도 이와 같이 해석하면 된다. 이는 수행자에 맞게 연(緣)이 되어준다는 말이다. 바로 차별연의 예를 든 것이다. 범부와 이승이 분별사식에 따라 보므로 이들의 정도에 맞추어 외연이 되어주기 때문에 이런 차별이 일어나는 것이다.

《法華經》'관세음보살보문품'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 사부대중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사부대중의 몸으로 나타내어 설해준다. 장자와 거사, 재상, 관리, 바라문의 부인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곧 부인의 몸으로 나타내어 설하고, 동남동녀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동남동녀의 몸으로 나타내어 설해준다.…”

* 四攝(사섭) :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 실질적으로 이익을 줌), 동사(同事 : 중생들과 함께 하며 교화함)

* 元曉 : 差別緣이란, 저 범부와 이승의 분별사식훈습을 위해 연을 짓는 것이니, 연을 짓는 자는 십신이상에서 모든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연을 짓게 된다. 平等緣이란, 모든 보살의 업식 훈습을 위해 연을 짓는 것이니, 초지이상에서 모든 부처에 이르기 까지 동체지력(同體智力)에 의하여야 바야흐로 평등연을 짓기 때문이다.

* 憨山 : 분별사식은 훈습을 따라서 발심한 범부와 소승인의 종류를 따라서 갖가지 응화신을 나타내는 것을 차별연이라고 하며, 근본업식의 훈습을 따라 발심한 대승보살이라면 승응신(勝應身)을 나타내어 평등하게 감응해 주는 것을 평등연이라고 한다.-물처럼바람처럼]

 

[첫째의 차별연(差別緣)은 행자(行者)가 처음으로 보리심을 일으켜, 구도(求道)의 길에 들어서, 차례로 나아가 성불(成佛)할 때까지, 그 중간 과정에서 보고 염(念)하는 불보살의 모든 활동이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러나 제불(諸佛)과 보살 등이 항상 불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도 나타나는 것이다. 때로는 부모 형제나 친척 또는 처자(妻子)로 나타난 불보살도 있고, 때로는 하인(下人)이나 친구로 나타나 교화하기도 하고, 때로는 원수로도 나타나 진로를 바뀌게 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불보살은 수행자를 인도하고 격려하며,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하는 사섭법(四攝法)을 행하여, 행자의 마음을 수습(收拾)하고, 불타의 가르침에 인도하는 등의 여러 가지 무량한 기연(機緣)을 만들어 행자(行者)에게 작용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행자는 그것을 부모나 친척 등의 인도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지만, 실제는 불보살이 그 모습을 바꾸어, 행자에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보살이 그와 같이 온갖 기연을 만들어 행자에게 활동하고 있는 것은, 대비(大悲)의 훈습력이 일어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같은 대비의 훈습력에 의하여 중생은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에서 벗어나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의 선근(善根)을 실행하여 그것을 증장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때로는 보고 듣고 하여 그릇 따라 이익을 얻어가기도 하는데, 그것을 모든 중생은 자기의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훈습력이 활동하게 되는 것이므로, 각자는 서로 상이한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것을 차별연(差別緣)이라 일컬어진다.]

 

[차별적인 인연이란 삼승인(三乘人)이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을 의지하여 처음 발심하여 삼승의 도과(道果)를 구함으로부터 불과에 이르기까지 수행하는 중간에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몸과 형상을 보기도 하며 그 공덕을 깊고 간절히 생각하기도 하며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자비원력으로 중생을 포섭하여 받아들이기도 하고, 혹은 권속·부모·모든 친척이 되기도 하며, 낮은 곳에 거처하면서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혹은 심부름하는 급사가 되어 주기도 하고, 같은 도반(道伴)으로서 발심하기를 권하기도 하며, 혹은 자기를 알아주는 벗이 되기도 하며, 생사에서 공포를 느끼고 불도에로 들어가게 하려고 하기도 하며, 혹은 원수의 집안이 되기도 하며, 혹은 사섭법(四攝法)을 일으켜 그들을 섭수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공부에는 올바로 발심한 자에게는 모든 경계와 모든 존재가 불‥보살의 자비스런 나타남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중생을 성취시키는 외연은 망상의 의식적인 조작이나 인위적인 작위가 없는 지극히 자연스런 대비(大悲)로 훈습하는 위신력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중생들이 허망한 마음으로 조작하는 경지가 아니고, 삼신(三身) 가운데서 응화신(應化身)이 중생들이 처해 있는 개별적인 상황에 따라서 알맞게 작용해 주는 차별적인 인연입니다. ]

 

乃至一切所作無量行緣(내지일체소작무량행연)

나아가 일체 짓는 바 모든 한량없는 수행의 연=行緣에 이르기까지, 

以起大悲熏習之力(이기대비훈습지력) 能令衆生增長善根(능령중생증장선근)

대비의 훈습하는 힘을 일으켜,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증장케 하여 

若見若聞得利益故(약견약문득리익고)

혹은 보기도 하고, 혹은 듣기도 하면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憨山 : 제불보살이 중생을 위해 성취하는 외연은 망상의 의식적 조작이 없는 무작대비(無作大悲)로 훈습하는 세력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음을 나타내었다. --- 삼신(三身) 가운데 응화신이 중생들이 처해 있는 개별적인 상황에 따라서 알맞게 작용해주는 차별연을 말하였다.]

此緣有二種(차연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외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近緣(일자근연) 速得度故(속득도고)

첫째는 가까운 인연=近緣이니, 빨리 제도를 얻는 까닭이며, 

二者遠緣(이자원연) 久遠得度故(구원득도고) 是近遠二緣分別(시근원이연분별)

둘째는 먼 인연=遠緣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제도를 얻는=得度하는 까닭이니,

이것이 가깝고 먼 두 가지 외연의 분별이다.

[得度 : 度는 도(渡)와 뜻이 같다. 건넘이라는 뜻으로 차안=번뇌의 세계에서 피안=열반의 세계로 건너감이다.]

 

[차별연은 다시 근연(近緣)과 원연(遠緣)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근연(近緣)은 근기(根機)가 성숙된 사람에게 빠르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연(緣)을 만들어 주는 것이며, 

원연(遠緣)은 근기가 성숙되지 못한 사람에게 구원한 미래에라도 구원될 수 있도록 기연(機緣)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 근연(近緣)과 원연(遠緣)을 다시 각각 증장행연(增長行緣)과 수도연(受道緣)으로 분류한다.]

 

[이 차별연의 의미를 시간적으로 구별하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근연(近緣)으로 신속하게 생사를 건널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원연(遠緣)으로 구원(久遠)의 오랜 세월을 수행하고서야 생사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연과 원연을 분류하여 구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이 외연이 되어 삼승(三乘)의 수행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수행을 증장하여 정관(正觀)으로 들어가게 하는 증장행연(增長行緣)이며, 둘째는 삼승의 수행하는 사람이 견도위(見道位)에 들어간 뒤에 직접 진여를 증득하게 하는 수도연(受道緣)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을 외연으로 훈습하여 구제하는 주체인 부처님의 교화를 시간적으로 멀고 가까운 차별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이 오래고 가까운 두 가지 바깥 인연인 조연의 훈습은 중생이 처음 발심하여 마지막 성불하기까지의 시종인과에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적인 훈습과정인 멀고·가까움을 말하였습니다. 

예를 든다면 '법화경'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과거전생에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이 교주로 출현하였을 때 그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일승도(一乘道)를 이룰 외연의 종자를 심었다가 지금에야 그 열매가 성숙하여 각자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았는데, 이는 구연(久緣)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또 가령 부처님이 성도하여 사바세계의 교주로 머무시면서 영산회상에서 교화할 근기인 중생들이 부처님을 뵙고 새로 발심한 것은 가까운 인연이며, 그들 중생은 다시 근연을 통해 장래에 득도할 인연을 지었는데, 이는 시간적으로 먼 인연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은 차별연을 총체적으로 시간적인 오램과 가까움의 측면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또 경전에 "내가 지금 세간에 출현하여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일체중생에게 개시(開示)하여 아직 믿지 않는 자들은 믿게 하고, 이미 믿은 자들은 그 믿음이 더욱 자라나게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증장연에 해당하겠습니다. 다시 말씀하시길, "이미 믿음이 더욱 자라난 자들이 각자 여래가에 태어나 진여가 자라나게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수도연에 해당하겠습니다. 가령 수행의 위치에서 시간적인 원근을 요약한다면 이승삼현위(二乘三賢位)에서 더욱 자라나게 하는 차별적인 외연의 훈습력은 근연이며, 십지에서 불과를 성취하는 것은 원연에 해당하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구(久)·근(近)의 차별은 총체적으로 중생들 번뇌가 두텁고 엷은 정도에 따른 개별적인 상황의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지, 진여본질의 세계에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문자의 차별에 집착하지 말고 그 의도를 잘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復有二種(부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근원과 원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고 하는가? 

一者增長行緣(일자증장행연) 二者受道緣(이자수도연)

첫째는 수행을 증장시키는 연=增長行緣이고, 둘째는 도를 수지하는 연=受道緣이다.

[元曉 : 增長行緣이란 보시, 지계 등의 모든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受道緣이란 문·사·수(聞思修)를 들어 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증장행연(增長行緣)은 행(行)을 증장시키는 연(緣)으로서 원효는 이를 육바라밀(六波羅蜜) 등의 수행을 증장시키는 연(緣)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행(行)의 증장(增長)에 의하여 새로운 깨달음의 지혜를 얻는 것이 다음의 수도연(受道緣)이다. 원효는 이 지혜를 문혜(聞慧) 사혜(思慧) 수혜(修慧)의 셋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문혜(聞慧)는 스승의 교훈을 듣고 그대로 이해하는 지혜이며,

사혜(思慧)는 듣고 배운 바를 스스로 생각하여 옳다고 믿는 지혜이며,

수혜(修慧)는 그렇게 해서 얻어진 지혜를 그대로 실천 수행하여 체득해 가는 지혜를 말한다.

증장행연(增長行緣)이 지혜를 얻기 위한 방편행(方便行)이라 한다면,

수도연(受道緣)은 그러한 방편행의 증장에 의하여 결과로서 새로운 지혜를 얻는 것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차별연(差別緣)은 초발심(初發心)으로부터 성불(成佛)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지만, 그 중간에 평등연(平等緣)이 작용한다.]

  

平等緣者(평등연자) 一切諸佛菩薩(일체제불보살)

평등연이라는 것은 일체 부처님과 보살 모두가 

皆願度脫一切衆生(개원도탈일체중생) 自然熏習恒常不捨(자연훈습항상불사)

일체 중생을 해탈하기를 원하셨기에, 자연스럽게 훈습하시면서 항상 (중생들을) 버리지 않으시며

以同體智力故(이동체지력고) 隨應見聞(수응견문) 而現作業(이현작업)

동체지의 힘으로 보고 들음을 따라 출현하시어 업을 지으심을 나타내나니,

隨應見聞 : 중생의 보고 들음에 따라서.

所謂衆生依於三昧(소위중생의어삼매) 乃得平等見諸佛故(내득평등견제불고)

이른바 중생들이 삼매에 의지하여 평등하게 모든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등연이라함은, 삼매(三昧)중에 불(佛)을 보는「관불삼매(觀佛三昧)」를 일컬으는 것으로서, 행자(行者)가 수행이 진척되어 십주위(十住位) 이상이 되면, 삼매에 들어 그 선정(禪定) 체험 속에서 불(佛)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행자의 힘에 의하여 불(佛)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불(佛)쪽에서도 행자에게 훈습작용을 행하는 것이다. 즉 일체제불과 보살은 모두가 일체 중생을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원(願)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 원에 의하여, 저절로, 자연히, 마음먹지 않아도 끊임없이 중생에게 구제 활동을 전개하고 훈습하여, 버리는 일이 없는 것이다. 또한 진여(眞如)에 있어, 일체는 동체(同體)로서, 그러한 동체의 지력(智力)에 의하여 불(佛)은「보고싶어하고 듣고싶어하는」행자(行者)의 원에 따라 그들 행자 앞에 작용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은 관불삼매(觀佛三昧)에서 평등하게 제불(諸佛)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평등연(平等緣)이라고 말한다.]

 

[평등한 조연이란 일체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은 일체 중생을 평등한 마음으로 고통으로부터 구제하여 해탈하기를 근본적으로 원하는 힘인 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중생의 상황 즉, 근성과 역량에 따라 감응의 작용을 일으켜 자연스럽게 훈습하면서 상주불변하고 항구하게 중생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근본지(根本智)의 인연에 동체(同體)의 지혜로 항상 버리지 않고 훈습하는 위신력 때문에 중생들이 몸의 형상을 친견하거나 진리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이것이 수행하여 얻는 후득지(後得智)의 감응으로 나타나 온갖 불사를 짓습니다. 이는 이른바 십주(十住) 이후의 중생들이 삼매력에 의지하여 모든 부처님의 법체의 역량이 평등함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평등연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모두가 일체중생이 생사의 세계를 건너 해탈하도록 수행의 인지에서 본래 서원을 세우셨기 때문에 일체 성인과 범부의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에 동일한 진여 자체가 동일한 본체로 대비의 지혜인 근본지(根本智)로 항상 훈습하면서 중생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생은 모든 부처님의 한 마음 안의 중생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생각 생각에 훈습하여 일념에서 잠시도 버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 가운데 진여삼매(眞如三昧)와 관불삼매(觀佛三昧)에 들어가는 자가 있기만 하다면 그가 과거 숙세에 익혔던 견문(見聞)을 따릅니다. 그리고는 즉시 그들 삼매(sam dhi) 가운데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고 중생들의 도를 성숙시켜 성취시킵니다. 예를 든다면 보현보살이 한량없는 세계와 한량없는 중생들에게 두루두루 몸을 나타내는 것과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음성을 따라 감응하는 것과 지장보살이 중생의 원력을 따라서 조그만 선행을 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먼저 과보를 받게 하여 원력에 부응하게 하는 등의 이 모두가 평등연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서로 차별이 나는 중생들 때문에 차별이 있는 것이지, 불보살은 모든 중생이 똑 같이 제도되도록 무작대비(無作大悲)로 훈습하므로 평등하다. '법화경'의 약초유품에 “삼천 대천 세계의 모든 식물들에게 짙은 구름이 가득 퍼져 비를 뿌리면 모든 식물들은 제각기 비를 맞으며, 그 초목의 성질에 맞게 자라고 크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라고 하였다.

지운 - 주객관이 나뉘어 있는 사람은 외연들을 차별로 보지만, 주객관이 나뉘어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르게 보이는 외연들이 모두 진여의 작용임을 안다.

진여훈습:
정법훈습
妄心熏習 分別事識熏習 진여가 의식을 훈습, 厭生死苦 求涅槃
意(業識)熏習 진여가 업식을 훈습,
眞如熏習 自體相熏習 진여자체가 具無漏法 備不思議業 作境界之性, 정법훈습의 내적원인 [正因]
用熏習 밖으로부터 불보살이 정법훈습이 되도록 돕는 것[外緣]


수행자를 둘러싼 외연이 다름
近緣 : 速得度 - 정진의 차이에 따라 이루어짐
遠緣 : 久遠得度
增長行緣 : 육바라밀을 증장함.
受道緣 : 聞, 思, 修
平等緣 다른 외연이 모두 불보살(진여)의 작용임.

 

此體用熏習分別(차체용훈습분별) 復有二種(부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자체=體와 작용=用 훈습의 분별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이상에서 진여훈습(眞如熏習)을 자체상(自體相)훈습과 용(用)훈습으로 나누어 따로따로 설명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체(體)훈습과 용(用)훈습을 함께 설한다. 다시 말하면 진여 내훈(內熏)인 체훈습과 불보살의 외연(外緣)인 용훈습을 수행자의 입장에서 함께 설하는 것이다.] 

 

一者(일자) 未相應(미상응) 謂凡夫二乘初發意菩薩等(위범부이승초발의보살등)

첫째는 아직 서로 상응하지 못함이니, 범부와 이승, 초발의 보살 등이 

以意意識熏習(이의의식훈습) 依信力故而能修行(의신력고이능수행)

의와 의식으로 훈습하면서 믿는 힘=信力에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할 수는 있지만,

未得無分別心與體相應故(미득무분별심여체상응고)

아직 무분별심이 자체=體와 더불어 서로 호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與體相應 수행자의 () 진여의 () 아직 서로 응함을 말하니, 무분별지를 얻지 못하면 상응하지 못한다. 

未得自在業修行與用相應故(미득자재업수행여용상응고)

아직 자재한 업을 얻지 못하여 수행과 작용이 더불어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與用相應 : 용(用)은 용 훈습으로서 진여의 작용이며, 이를 응신이라고 한다. 자재업을 얻지 못하여 부처의 응신과 상응하지 못함을 미상응(未相應)이라고 한다. 팔지 이상이 되어야 상응할 수 있다.

* 元曉 : 以意意識熏習 - 의식훈습은 범부와 이승의 훈습이며 분별사식훈습이다. 의훈습은 초발심보살 이상의 훈습이며, 업식훈습이다. (별기) - 법신보살이 법신을 증득할 때 능견상을 여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지전(地前 : 십지이전)의 보살을 의훈습이라고 한다고 하였으니, 속지(俗智)로 보불(報佛)을 보는 뜻에 의한다면 금강심(金剛心:제10지의 滿心) 이하에서 모두 견상(見相)이 있음을 통틀어 업식훈습이라고 한다.

 

[진여의 체용(體用)훈습을 수행자의 입장에서 그 수용(受容)상태를 구별하면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아직 상응하지 못한「미상응(未相應)」단계이며, 다른 하나는 이미 상응한「이상응(已相應)」단계이다.
첫째의 미상응(未相應) 단계라 함은, 진여의 내적(內的)훈습이, 그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행자의 마음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단계이다. 범부와 성문, 연각등 이승(二乘), 그리고 처음 발심을 낸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은 법집이 남아있는 의훈습(意熏習)과 분별심을 바탕으로 한 의식훈습(意識熏習)으로 수행이 진행되고 있어, 그들은 진여(眞如)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법력(法力)은 없으나 불타의 가르침에 의하여 자기의 본성이 진여라고 아는 신심(信心)의 힘은 가지고 있다. 이들은 그 신심만으로 수행을 진전시키기 때문에 무분별지(無分別智)의 세계를 증득하지 못하고 있다. 무분별지의 증득가능성은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진여 평등의 체(體)와 상응 즉 일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무분별지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상응(相應)이라는 용어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미상응(未相應)과 이상응(已相應)이 설해져 있으나, 이는 행자(行者)의 지(智)가 그 마음의 본성인 진여(眞如)와 서로 일치하고 있는가의 여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미상응(未相應)은 그 지(智)가 진여와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아직 분열되고 있는 상태를 말하며, 이상응(已相應)은 행자의 지(智)가 진여에 일치하여 무분별지(無分別智)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범부와 이승(二乘) 및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은 아직 수행 단계가 지전(地前)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아직 분별과 법집이 남아 있어, 진여평등(眞如平等)의 본체에 서로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어, 무분별지의 세계가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범부 이승(二乘)등은 진여와 일치하지 않은 미상응 상태에 있어,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를 증득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 뒤에 나타나는「차별후득지(差別後得智)」도 얻지 못하고 있다. 차별후득지라고 하는 것은, 불타의 깨달음의 지혜가 중생 구제를 위하여, 밖으로 나타나는 지혜로서,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으로서의 불타의 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중생 구제의 활동은 불지(佛智)로부터, 자연히, 저절로, 자유자재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이를「자재업(自在業)」이라 일컬은다. 이상과 같은 의미로서 범부, 이승, 초발의보살의 수행 과정에서는 진여훈습(眞如熏習)이 미상응(未相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진여의 자체와 지혜의 작용에 아직 상응하지 못함을 밝혔습니다. 이 진여 자체와 그 훈습하는 작용을 분별하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진여 자체와 그 훈습하는 지혜의 작용에 서로 호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범부와 이승인과 처음 뜻을 발한 보살 등은 오의(五意)로 훈습하고, 범부와 이승은 의식으로 훈습하면서 믿는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할 수 있을 뿐 아직 무분별심(無分別心)으로 진여의 자체와 더불어 서로 호응하진 못하기 때문이며, 진여의 자체를 증득한 데서 일어나는 자재업지(自在業智)로 수행하여 진여 그 작용의 훈습과 더불어 아직은 서로 호응하진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불보살이 능훈(能熏)하는 진여의 자체인 근본지(根本智)와 그 작용으로 얻은 방편지(方便智)는 평등하지만 훈습을 받을 대상인 중생의 근기에 차별이 있다는 것을 종합적으로 밝힌 것입니다. 즉, 범부와 이승과 초발의보살은 단지 오의(五意)와 의식(意識)을 의지하여 훈습할 뿐이므로 발심의 정도가 얕아 오직 십신(十信)의 힘을 의지하여 수행할지언정, 아직은 십지(十地)의 진여삼매에는 깊이 깨달아 들어가진 못하였기 때문에 망념의 분별이 없는 진여일심인 무분별심(無分別心)이 근본지인 진여자체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진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진여자체에 깨달아 들어가지 못했으므로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작용인 부사의한 자재업지(自在業智)로 얻는 방편지를 얻어 자체훈습의 작용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훈습의 차별이 중생이 처한 개별적인 상황의 차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중생의 역량에 따라서 얕은 단계에서 수행한 과보는 얻었지만 보다 깊고 높은 단계에는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二者(이자) 已相應(이상응) 謂法身菩薩(위법신보살)

두 번째는 이미 서로 상응(호응)함이니, 이른바 법신보살(십지 보살)이 

得無分別心與諸佛智用相應(득무분별심여제불지용상응)

무분별심을 체득하여 모든 부처님의 지혜=佛智의 작용=用이 상응함을 말한다.

唯依法力(유의법력) 自然修行(자연수행) 熏習眞如(훈습진여) 滅無明故(멸무명고)

오직 법력만을 의지하여 자연히 수행하며,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십지보살의 훈습이며, 진여의 근본지와 수행으로 얻은 지(智)가 서로 상응하는 단계임.

* 元曉 : 이상응(已相應) 중에 법신보살이란 십지보살이요,

得無分別心은 체와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이다.

與諸佛智用相應은 여량지(如量智)가 있기 때문이며, 自然修行은 팔지 이상에서 공용(功用 : 애써 노력함)이 없기 때문이다.

* 憨山 : 십지 이상의 보살은 무분별심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진여의 자체와 그 작용인 훈습으로 서로 호응할 수 있다. 법신보살은 진여법으로 훈습하는 세력만을 의지하여 의지적인 노력 없이도 임의로 운행하여 정진수행하기 때문에 진여법 자체와 그 작용인 훈습과 서로 호응할 수 있는 것이다. --- 초지에서 칠지까지는 유상관(有相觀)이 많으므로 진여 자체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고, 팔지(八地) 이후 무상관을 닦을 땐 그 작용의 훈습과 더불어 호응하며, 이승인과 삼현보살은 육식(六識)에 의지하기 때문에 진여의 이치를 비교하여 추리로 관찰하기 때문에 자체와 작용 어느 쪽에도 호응하지 못한다.

* 지운 : 분별심이란 주관과 객관이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마음이다. 초지에 이르면 주객이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진여를 조금씩 보게 되고, 8지에 이르면 상응하게 된다. 7지까지는 수행을 하다가 퇴보할 수도 있지만, 8지부터는 퇴전하는 일이 없다. 8지는 객관이 타파되는 단계이고, 9지는 주관이, 10지는 업식이 타파되는 단계이다.


[이미 상응한「이상응(已相應)」단계이다. 이것은 수행자의 마음이 진여와 서로 일치하는 상응단계(相應段階)이다. 보살이 십지(十地)중 초지(初地)에 들어가면 지전(地前)에 있었던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이탈하면서, 진여의 이(理)를 부분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 때문에 초지이상의 보살은 법신(法身)의 보살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마음과 진여가 합체(合體)하여 일치한 상태로서 무분별지(無分別智)가 나타나는 상태이다. 이 무분별지(無分別智)가 진여의 이(理)에 합일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이지불이(理智不二)라고 말하고, 또한 법신(法身)이라고도 말한다.
따라서 법신의 보살은, 불타 자체인 평등진여와 상응하고 있는 것이므로 무분별지(無分別智)의 뒤에 나타나는 중생 구제 활동의 후득지(後得智)가 일어난다. 이 후득지는 무분별지를 바탕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그 지혜가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혜의 활동을「자재업(自在業)」이라고 말한다. 십지(十地)까지의 보살의 깨달음은 불타처럼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무분별지가 진여와 상응하여, 자각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즉 보살에 있어, 진여의 법력(法力)이 활동한다는 것이다. 이 법력에 의하여 보살의 자재업(自在業)은, 법력이 나타나는 대로 저절로 수행하고, 그 수행이 진여에 훈습하여 무명(無明)이 소멸되는 것이다.]

 

[이미 상응하는 것은 진여 자체와 그 작용의 훈습에 이미 서로 호응하는 훈습입니다. 즉, 진여의 이치를 증득한 십지의 법신보살이 진여 자체인 무분별심을 체득하여 모든 부처님의 근본지(根本智)와 그 수행하여 얻은 작용인 방편지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여법신의 세력만을 의지하여 팔지(八地) 이상에선 일부러 의도적으로 수행하려는 노력이 없이도 자연히 수행이 되며 진여법신을 훈습하여 근본무명과 지말무명을 소멸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는 능히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와 구제를 받는 대상인 십지 이상의 보살이 진여 자체와 그 훈습하는 작용이 평등함을 종합해서 밝힌 것입니다. 십지 이상의 보살은 무분별심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진여의 자체와 그 작용인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할 수 있습니다. 법신보살은 진여법으로 훈습하는 세력만을 의지하여 의지적인 노력 없이도 임의로 운행하며 정진수행하기 때문에 진여법 자체와 그 작용인 훈습과 더불어서 서로 호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진여인 근본지로 진여의 평등한 이치를 관조하기 때문에 "진여 법신의 세력"이라 말하였고, 임의로 운행하며 의도적인 수행공부의 노력을 허비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수행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진여(眞如)의 근본지(根本智)로 자연히 수행하면서 진여를 훈습하기 때문에 근본무명과 지말무명인 이혹(二惑)을 소멸시켜 모든 부처님의 진여자체와 그 작용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종합하면 초지에서 칠지(七地)에 이르기까지는 유상관(有相觀)이 많으므로 진여자체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고, 팔지(八地) 이후 무상관(無相觀)을 닦을 땐 그 작용의 훈습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며, 이승인과 삼현위보살은 육식(六識)을 의지하여 진여의 이치를 비교하여 추리로 관찰하기 때문에 자체와 작용 어느 쪽에도 서로 호응하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은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서로 의지하여 훈습하는 것을 밝히는 가운데 염법·정법의 훈습은 이미 끝났고, 다음은 염법과 정법의 훈습이 끝까지 다하고 못한 의미를 밝힙니다.]

 

 • 眞如熏習(진여훈습)

眞如熏習義有二種(진여훈습의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진여가 훈습하는=眞如熏習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自體相熏習(일자자체상훈습) 二者用熏習(이자용훈습)

첫째는 자체상훈습이며, 둘째는 용훈습이다.

自體相熏習者(자체상훈습자) 從無始世來具無漏法(종무시세래구무루법)

자체상훈습이란 비롯함이 없는(시작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무루의 법을 갖추어서 

備有不思議業(비유불사의업) 作境界之性(작경계지성)

불가사의한 업을 갖추어 경계의 성품을 짓는다.

 

[지운 : 無漏(무루)란 새어나감이 없다는 뜻인데, 부동(不動), 공(空)을 말한다. 번뇌가 없음을 말한다.[공] 이것은 가만히 있지만 외부에서 자극을 주면 작용을 한다. 무루법을 갖추고 생각할 수 없는 진여의 작용을 준비하여[不空], 경계를 만드는 성품이다[空].

* 元曉 : 具無漏法 備有不思議業이란 본각 불공의 문에 있는 것이다.

作境界之性이란 여실공문의 경계에서 나아가 말한 것이니, 이러한 본래 가지고 있는 경지(境智)의 힘에 의하여 암암리에 망심을 훈습하여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는 마음 등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 고순호 : 具無漏法 備有不思議業 作境界之性 - 진여는 본래 무루법과 부사의한 업용을 갖추고 있어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시각(始覺)의 관지(觀智)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여실불공], 그 관지의 대경이 되는 본각(本覺)의 성품까지 된다.[여실공]

* 憨山 : 진여 자체를 말한다면 중생들이 무시이래로 원래 갖추고 있는 본각무루의 법성인데, 이는 중생이 본래 지니고 있는 정인불성(正因佛性)인 것이다. 이것이 진여의 본체인데도 자체상이라고 하여 상(相)이라고 한 것은 자체에 상즉한 그 자체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는 여실공한 진여의 자체에 갖춘 여실불공한 정무루공덕의 모습이다. 이는 이른바 항하사와 같은 본성에 걸맞은 공덕에 해당한다. 備有不思議業이란 이 자체에 상즉한 진여의 공덕상에 불가사의한 업지의 작용을 빠짐없이 지니고 있어 외부의 세계에 있어서는 무정과 함께 경계의 근본[性]이 된다.

* 무루법이란 공의 측면에서 한 말이다. 무루(無漏)란 새어 나감이 없다는 뜻으로 불생불멸을 말하며, 불변(不變)을 말하며, 번뇌나 일체의 상이 없음을 말한다. 不思議業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불공(不空)의 측면에서 말한 것으로 진여가 갖추고 있는 공덕을 말한 것이다. 진여를 체득했을 때는 고요하지만, 체득하지 못했을 때는 체득하도록 스스로 영향을 주어 깨달음에로 나아가게 한다. 이때 깨달음에로 나아가려는 것을 시각(始覺)이라고 한다. 경계의 성품을 짓는다는 것은 시각이 본각을 목표로 하되 그 본성이 공함을 말한다.-물처럼바람처럼]

 

[앞에서 설명한 망심훈습(妄心熏習)은 정법훈습(淨法熏習)으로서의 망심훈습이었으므로 진여(眞如)의 정화(淨化)작용이 망심에 훈습하여 이를 정화해 나가는 수행 과정이었다. 그러한 진여의 정화 작용이 어떠한 것인가를 다루는 것이 바로 진여훈습(眞如熏習)의 내용들이다. 진여훈습은 진여(眞如) 본래의 작용인 정화(淨化)시키는 힘을 말한다.
진여훈습에도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이고, 다른 하나는 용훈습(用熏習)이다. 진여에는 체(體), 상(相), 용(用)의 삼대(三大)가 있다함은 여러 번 밝힌바 있지만, 이 가운데 체대(體大)와 상대(相大)를 합친 진여의 작용이 자체상(自體相)훈습이다. 여기에서 스스로라는 「자(自)」자가 붙여진 것은 진여가 인격화되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여 그 자체는 법계일상(法界一相)이므로 자타(自他)의 구별이 없는 것이지만, 생멸문(生滅門)에서는 진여가 자성청정심으로서 인격화(人格化)되어 개인적(個人的)인 것이 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체상(體相)이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진여(眞如)가 스스로의 체(體)이며, 그 덕성인 지혜가 스스로의 상(相)이다. 이것은 아리야식(阿梨耶識)에 있어서는 각(覺)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심생멸문(心生滅門)에서는 자성청정심으로서의 활동이 있고, 그 활동을 통하여, 진여의 체(體)와 상(相)이 구별되고, 불타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용(用)이 있어, 진여의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과 용훈습(用熏習)이 설해지는 것이다. 진여의 자체상훈습은 범부(凡夫)와 이승(二乘), 보살(菩薩)등에 설해지는 것이며, 불타에 대하여는 이미 자체상(自體相)이 완전히 실현되어 있으므로 특별히 진여의 훈습작용을 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용훈습(用熏習)은 저절로 진여의 작용이 중생 구제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불타(佛陀)나 대보살(大菩薩)에 대하여 설해지는 것이다.-전종식]

 

[진여가 훈습하는 의미의 두 종류, 첫째는 인훈(因熏)인 진여의 자체상훈습(自體相薰習)이며, 두 번째는 연훈(緣熏)인 진여의 용훈습(用薰習)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체상훈습은 시작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여실불공(如實不空)의 본각(本覺)인 무루법을 갖추어 불가사의하고 그윽하게 훈습하는 진여자체상의 작용인 업지(業智)가 있어 망심을 훈습하여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게 하는 시각(始覺)의 능관지(能觀智)를 이룰 뿐 아니라, 역시 능관지(能觀智)로 관찰할 대상의 경계인 본각(本覺)의 성품까지를 짓습니다.

이러한 본훈(本熏)과 신훈(新熏)인 이 두 공능의 의미를 의지하여 항상 훈습하면서 그 세력이 있으므로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에서 싫증을 내고 열반의 도를 즐겨 구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기의 몸에 진여의 법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수선]

 

依此二義(의차이의) 恒常熏習(항상훈습) 以有力故(이유력고)

이 두 가지 뜻에 의지하여 항상 훈습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能令衆生(능령중생) 厭生死苦(염생사고) 樂求涅槃(락구열반)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게 하고, 열반을 구하게 하며,

自信己身有眞如法(자신기신유진여법) 發心修行(발심수행)

스스로 자기 몸에 진여의 법이 있음을 믿어, 발심하여 수행하게 한다.

 

[첫째의 자체상훈습; 중생은 시작도 없는 종래의 세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루법(無漏法)인 오염되지 않는, 자성이 청정한 진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진여의 정화력(淨化力)이 끊임없이 내부로부터 무명(無明)의 망심에 활동하고 있음에도 우리 중생은 그러한 진여본각(眞如本覺)의 끊임없는 힘의 작용을 알지 못한다. 이 여실불공(如實不空)의 힘이 중생의 망심에 나타나 시각(始覺)의 지(智)가 된다. 이것을 부사의업(不思議業)이라 한다. 망심에 대한 그러한 끊임없는 힘의 작용에 의하여 역으로 진여 자체가 관찰의 대상이 되어,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의 지혜가 진여 그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각(始覺)의 지(智)로서, 망심 속의 진여가 관찰할 수 있는 능관(能觀)의 지(智)가 되어, 진여 자체를 관찰하게 되며, 이때, 관찰 대상이 된 진여는 여실공(如實空)의 본각진여(本覺眞如)로서, 다른 이름으로 성정본각(性淨本覺)의 진여이다. 그와 같이 관찰의 대상이 된 본각진여는, 그 때 관찰되는 소관(所觀)의 경(境), 즉 관찰되는 자리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여(眞如)는 보려는 능관(能觀)의 지(智)와, 보이는 소관(所觀)의 경(境)과의 두 가지 성품을 갖게 되는 것이다.

원효는 능소(能所)의 구체적 구분설명은 없지만, 보려는 능관(能觀)의 지(智)를 본각 불공문(不空門)으로, 보이는 소관(所觀)의 경(境)을 여실공문(如實空門)으로 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진여의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이다.
이와 같이 진여는, 중생에 있어서, 부사의업(不思議業)과 경계(境界)의 두 성품의 존재로서 중생에 훈습하고 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부사의업을 갖추고 있어 경계의 성품을 만든다」고 설하고 있다. 이같은 진여의 내적 훈습이 무시이래(無始以來)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 힘에 의하여 중생이 불교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생사의 고를 싫어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중생이 가지고 있는 망심(妄心)의 힘이 아니고, 진여(眞如)의 힘이 가동되어 고(苦)를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반의 즐거움을 원하게 되고, 자기에게 진여의 법이 있음을 믿게되어, 발심수행(發心修行)하게 되는 것이다.]

 

[자체상훈습에서 ‘체상용’의 ‘체상’이 나옵니다. 본체와 본체의 모양입니다. 중생이 평생 일으키는 생각, 행동은 모두 유루법입니다. 다음 생에 업따라 태어나게 합니다. 무루는 번뇌 망상, 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진여에 훈습하는 것이 무루법으로, 무명이 훈습되면 끝없는 유루법 속에서 살게 됩니다. 무명의 상을 짓지 않고 경계가 없는 것입니다.

자체상훈습, 내 속에서 진여가 증장하고 진여에 훈습되면 중생도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에게 진여법이 있다고 믿고 수행을 하게 됩니다. 목적만 잘 설정해 놓으면 한 생 끝없이 수행할 수 있습니다.-통섭불교]

 

問曰(문왈) 若如是義者(야여시의자) 一切衆生悉有眞如(일체중생실유진여)

묻나니, "만약 이와 같은 의미가 있다면 일체 중생이 다 진여가 있을 것이므로 

等皆熏習(등개훈습) 云何有信無信(운하유신무신) 無量前後差別(무량전후차별)

평등하게 다 같이 훈습을 할 것인데, 어찌하여 믿음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한량없이 차별하고 전후 차이가 있는가?

皆應一時(개응일시) 自知有眞如法(자지유진여법) 勤修方便(근수방편) 等入涅槃(등입열반)

모든 것은 마땅히 다 일시에 진여법이 있음을 스스로 알아, 방편을 부지런히 수행하여 열반의 도를 평등하게 깨달아 들어가야만 하리라."  

[無量前後差別  진여법이 갖추어져 있음을 믿는데 시간적으로 엄청난 전후의 차이가 있음.]

答曰(답왈) 眞如本一(진여본일) 而有無量無邊無明(이유무량무변무명)

답하나니, 진여는 본래 하나이나, 중생에게는 한량없고 가이없는 무명이 있음으로 해서,

從本已來(종본이래) 自性差別(자성차별) 厚薄不同故(후박불동고)

본래로부터 자성에 차별이 있게 되었으니, 두텁고 엶음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自性差別 厚薄不同故 : 자성이 차별이 있다는 것은 모든 중생들이 갖추고 있는 진여성품이 차별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무명에 물든 정도가 다르다는 말이다. 진여성품은 누구나 같다.]

過恒沙等上煩惱(과항사등상번뇌) 依無明起差別(의무명기차별)

갠지스 강(항하강)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상의 번뇌가 무명을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며,

我見愛染煩惱(아견애염번뇌) 依無明起差別(의무명기차별)

아견과 아애의 물든 번뇌가 무명에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니, 

如是一切煩惱(여시일체번뇌) 依於無明所起(의어무명소기)

이와 같이 일체의 번뇌는 무명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前後無量差別(전후무량차별) 唯如來能知故(유여래능지고)

전후의 한량없는 차별을 오직 여래만이 능히 알수 있기 때문이다.

 

[元曉 : 상번뇌(上煩惱)는 알아야 할 진리를 알지 못해 보리를 장애하는 소지장(所知障)이며,

아견애(我見愛)의 염번뇌는 열반을 장애하는 번뇌장(煩惱障)이다.]

 

[여기서 의문이 제기되어 다음과 같이 질문하게 된다. 만약 진여가 그러한 의미로서 무시이래 중생의 인격에 무루법(無漏法)으로서 존재하고, 항상 훈습하고 있다면, 일체 중생이 모두 진여를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더욱이 그 진여가 불변평등(不 平等)하여 모든 중생에게 동등하게 훈습하고 있을 것이므로,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발심 수행하여, 다같이 열반에 들어가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자기의 불성(佛性)을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또한 발심 수행하는 사람 중에도 빠르고 늦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발심(發心)의 전후(前後)에도 무량한 차별이 있다. 이것들은 어떠한 이유에서인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또한 동시에, 자기에게 진여의 법이 있다는 믿음을 일으키고, 정진 수행하여, 여러 가지 방편을 써, 동등하게 열반에 들어 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대하여 본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진여는 본래부터 하나이다. 또한 자성청정심이나 진여의 본성이 변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무명은 그렇지가 않다. 진여와 무명과는 이점에서 크나큰 차이가 있다. 진여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본성으로 하고 있지만, 무명은 생멸(生滅)의 이치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무명은 제각기 시간과 장소에 따라 천차만별이 있는 것이다. 무명은 무량무변(無量無邊)의 차이가 있으며, 그 존재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사람에 따라 두터운 사람도 있고 엷은 사람도 있다. 무명이 두터운 사람은 신심(信心)이 없으나, 엷은 사람은 신심이 있다. 무명이 두터운 사람은 진여의 광명이 외부로 나오지 못한다. 더욱이 간지스강의 모래만큼의 무수한 번뇌는 모두가 근본무명(根本無明)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의 차이에 의하여, 일어나는 번뇌도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고 또한 아견(我見)등의 견혹(見惑)이나,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 (無色界)의 삼계(三界)에 걸친 탐애(貪愛) 등의 번뇌도 무명의 차이에 의하여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이 일체의 번뇌는 무명을 바탕으로 일어나고 천차만별의 무량한 차별이 있는 것이다. 이 차별은 오직 불타만이 바르게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일체 중생의 본성이 진여라는 사실은, 모두가 평등 하지만, 사람마다 제각기 무명이 다른 것이므로 발심수행(發心修行)의 차별도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묻는 것은 이처럼 진여의 자체상과 그 작용이 둘로 훈습하는 의미가 있다면 일체 중생이 다들 진여법이 있으므로 평등하게 모두 훈습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믿음이 있는 중생과 믿음이 없는 중생이 있으며, 공간적으로는 중생의 믿는 마음이 있고 없는 것이 한량없이 차별하고 시간적으로는 미래와의 전후로 차이가 나는가? 모든 중생들은 안으로 훈습하는 작용이 꼭 같으므로 응당 일시에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방편도를 부지런히 수행하여 열반의 도를 평등하게 깨달아 들어가야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들이 평등하게 진여법을 갖추었지만 발심하고 수행하고 열반을 증득함이 평등하지 않다는 질문입니다. 

질문한 의도에 두 가지 차별을 포함하고 있어 평등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즉, 첫째의 의문은 "중생들이 이 진여법을 동일하게 타고나 한결같은 본각의 성품으로서 평등하다면 무엇 때문에 중생의 근기엔 영리함·둔함·사됨·올바름·믿음·불신 등의 한량없이 차별하여 평등하지 못함이 있는가"이고, 두 번째의 의문은, "중생들이 동일하게 진여의 안으로 훈습하는 것에 의지하여 발심하였다면 의당 일시에 동일하게 믿고, 동일하게 수행하고, 동일하게 열반을 증득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선후지속의 평등하지 못한 한량없는 차별이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답을 합니다. 진여정법은 성인과 범부가 동일하여 자체로서 평등하며 둘이 없는 본래 하나이지만, 중생에겐 한량없고 끝이 없는 근본무명주지(根本無明住地)로 인해서 원래는 평등했던 자성에서 차별이 생겨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마음이 두터운 중생과 믿음은 있으나 마음이 엷은 중생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부연하여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근본무명증상(根本無明增上)의 지말무명의 번뇌는 근본무명을 의지하여 소지장(所知障)과 번뇌장[塵沙惑]의 차별을 일으켰습니다. 근본무명에서 일으킨 사주번뇌장(四住煩惱障)인 아견(我見)과 아애(我愛)로 물든 번뇌가 한량없고 끝이 없는 차별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체의 번뇌인 소지장과 번뇌장은 근본무명을 의지하여 일어난 경계입니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전후가 한결같지 않고 차별이 한량없어서 전후를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유일하게 오직 여래만이 그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답변한 의도도 두 가지 평등하지 않은 차별을 두었습니다. 첫째는 "중생은 원래 진여의 한결같은 성품을 동일하게 타고났으나 단지 근본무명이 안으로 훈습하는 후박(厚薄)의 정도가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에게 영리하고 우둔함, 삿되고 올바름, 믿음과 불신 등등의 차별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였고, 두 번째로 "중생들은 한결같이 근본무명이 안으로 진여를 훈습하여, 훈습으로 성취된 번뇌인 삼세와 육추의 정도가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수행과 증오에 있어서 더디고 신속한 차별이 있을 뿐"임을 말한 것입니다.

"항하사와 평등한……번뇌"는 삼계의 사법(事法)에 무지(無知)한 소지장(所知障)입니다. 이 법집(法執)은 미세하여 끊기 어렵기 때문에 증오를 취함이 더디다는 것입니다. 또 아견(我見)과 아애(我愛)의 염법은 번뇌장입니다. 이 아집의 번뇌는 인지(認知)하기 쉬운 추분별(麤分別)이므로 끊기가 쉬운 때문에 증오함이 신속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신심과 불신, 영리함과 우둔함, 더디고 신속한 차별이 근본무명에서 일어난 이혹(二惑)과 육염심(六染心)의 허물일지언정 진여에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상은 무명을 훈습함이 한결같지 않은 측면에서 요약하였고, 다음에서는 진여외연(外緣)의 훈습이 한결같지 않은 측면에서 요약하고 있습니다.]

 

又諸佛法(우제불법) 有因有緣(유인유연) 因緣具足(인연구족) 乃得成辦(내득성판)

그리고 또 모든 불법은 인=正因이 있고, 연=緣熏이 있으니, 인연이 모두 구족하여야 나아가 판별할 수 있으니,

[有因有緣 : 인(因)은 진여에 의한 훈습이다. 연(緣)은 선지식을 만남이다.]

如木中火性(여목중화성) 是火正因(시화정인) 若無人知(야무인지)

이는 마치 나무 가운데 불의 성품이 있는 것이 불의 정인이지만,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여 

不假方便(불가방편) 能自燒木(능자소목) 無有是處(무유시처)

방편을 빌리지 못한다면, 저절로 나무가 탈수 있다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衆生亦爾(중생역이) 雖有正因熏習之力(수유정인훈습지력)

중생도 그와 같아서, 비록 정인으로 훈습하는 힘이 있다 하여도,

若不遇諸佛菩薩善知識等(야불우제불보살선지식등) 以之爲緣(이지위연)

만약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 등을 만남으로서, 그 인연을 삼지 않으면, 

能自斷煩惱入涅槃者(능자단번뇌입열반자) 則無有是處(즉무유시처)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든다는 것은 옳다고 긍정할 곳이 없다.

若雖有外緣之力(야수유외연지력) 而內淨法(이내정법) 未有熏習力者(미유훈습력자)

만약 비록 밖으로의 연=外緣이 있다 하여도 안으로 정법이 훈습하는 힘이 아직 있지 않은 자는, 

亦不能究竟(역불능구경) 厭生死苦(염생사고) 樂求涅槃(락구열반)

역시 구경에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의 도를 즐겨 구하지 못할 것이다.

若因緣具足者(약인연구족자) 所謂自有熏習之力(소위자유훈습지력)

만약 인과 연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른바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고, 

又爲諸佛菩薩等慈悲願護故(우위제불보살등자비원호고)

또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자비와 원력과 보호함이 되기 때문에,

能起厭苦之心(능기염고지심) 信有涅槃(신유열반) 修習善根(수습선근)

능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선근을 닦아 수습할 수 있으며, 

以修善根成熟故(이수선근성숙고) 則値諸佛菩薩示敎利喜(즉치제불보살시교리희)

선근을 수습하여 성숙한 까닭에, 곧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교법의 이익과 기쁨을 만나, 

乃能進趣向涅槃道(내능진취향열반도)

이에 승진하여 열반의 도로 나아갈 수 있다.

 

[진여가 동일한데 왜 믿고 안 믿는 차이나, 열반에 들어가는 차이가 있는가 하는 물음의 답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무명이 두터움과 엷음이다. 둘째는 내적으로 일어나는 진여훈습의 차이이다. 셋째 외적으로 불보살의 가르침을 만나는 차이이다.]

 

[또하나 생각하여야 할 것은 중생에게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불보살의 연(緣)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因)이 있어도 연(緣)에 의하여 개발되지 않으면 그 인(因)은 힘을 내지 못한다. 마치 종자(種子)라는 인(因)이 있어 싹이 트는 힘이 있다하더라도, 땅에 뿌려져 물이 있고 태양의 빛과 열이 있는 연(緣)을 만나지 못하면, 싹을 티을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제불(諸佛)의 가르침에는 반드시 인과 연이 설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모든 나무는 그 속에 탈 수 있는 성질, 즉 화성(火性)이 불의 정인(正因)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 나무에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나무가 스스로 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중생의 경우도 그와 같아서 진여가 정인(正因)으로서 내부에서 훈습하는 힘은 있다할지라도, 만약 부처나 보살 기타 선지식(善知識) 등 지도자를 만나 외연(外緣)으로서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자력으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갈 도리가 없다. 다시 말하면 인(因)이 있어도 연(緣)이 없으면 일은 성사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연(外緣)이 있다 하더라도, 내부로부터 훈습하는 정화작용( 化作用)이 미비하다면, 궁극적으로 그 중생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게 되고 열반을 즐겨 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불보살(佛菩薩)의 연력(緣力)이 위대하다 하더라도 그 외연의 힘만으로는 성취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생은 내부에 무명(無明)의 힘이 강성하기 때문에 진여(眞如)의 정법력(淨法力)이 충분치 못하면 열반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因)이 결핍된 상태이다.
다음은 인(因)과 연(緣)이 함께 있는 경우로서, 내부에는 진여의 훈습력이, 제힘을 발휘하고 있어 구도(求道)의 마음이 성숙되고, 외부로부터는 부처와 보살의 자비(慈悲)와 서원(誓願)으로 지켜지고 가르침을 받게되는 등 내훈(內熏)의 인(因)과 외연(外緣)의 힘이 겸비될 때, 중생의 망심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며, 열반이 진실로 있다는 것을 믿어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의 삼선근(三善根)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선근이 성숙됨에 따라 시각(始覺)의 지혜가 강화되고, 보살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이해하여, 법(法)에 대한 희열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차차로 향상되어 열반의 길에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현대적 의미로서의 고(苦)의 탈출(脫出)과 상락(常樂)의 추구(追求)를 본론에 설해지는「생사(生死)의 고(苦)에 대한 염리(厭離)」와「열반에의 낙구(樂求)」를 어떻게 해석 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본문이 설해진 과거에는 병고(病苦)와 굶주림, 한서(寒暑)의 고통 때문에「인생은 고통이다」라는 명제(命題)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지만,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욕망'이 충분히 충족되고 있는, 이러한 시대에 '인간은 고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반의 낙(樂)을 구해가야 한다'고 설해질 때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불교에서 설해지는 여덟 가지 고통은 생(生) 노(老) 병(病) 사(死)의 기본적 고통과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취온고(五取蘊苦)등 현실적 생활고가 설해지는 것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원리를 항상(恒常)으로 보는데서 발생하는 것이며, 또한 일시적 향락을 영원한 상락(常樂)으로 보는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므로 불타의 가르침의 근본을 전적으로 믿는다면, 현실적 모든 존재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불타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 사람도 죽음에 직면하게 될 때나 상락(常樂) 이라고 믿었던 사실이 권세의 상실이나 어떤 사고의 발생 등으로 그것이 상실될 때, 비로소 그것이 하나의 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이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론에 제기된 '생사의 고를 싫어하게 되고, 열반의 낙(樂)을 추구하는 의미'를 '인간이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과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한 즐거움이 무엇인가'라는 명제(命題)를 되새기면서,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를 향하여 정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본론의 주장이라 할 것이다.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열반락(涅槃樂)은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서, 그것은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것이며, 순간적 즐거움이 아닌 영원한 극락이며, 또한 자유자재한 참나의 세계이며, 그곳에는 때묻지 아니한 순정(純淨)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위는 쉽게 비유를 든 것으로, 내훈의 정인(正因)과 진여자체의 작용인 연훈(緣熏)이 빠짐없이 만족해야만 모든 불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나무의 불의 성품이 불이 붙는 정인이긴 하지만, 만일 그 정인을 아는 사람이 없어 방편을 빌리지 않는다면 저절로 불이 생겨나서 나무를 태운다는 것은 옳다고 긍정해 줄 곳이 없는 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연훈(緣熏)까지를 갖추었느냐 빠뜨렸느냐 하는 측면에서 요약하여 중생들이 불법을 이룸이 전과 후로 한결같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불성(佛性, buddhata , buddhadhaq tu, tathagatagarbha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즉 정인(正因)과 연훈인 연인(緣因)과 불법을 이루는 요인(了因)입니다. 진여는 중생들이 본래 지녔으므로 불법을 이루는 근본종자인 정인불성이고, 선지식이 본래 지닌 정인을 도와 발심(發心)하게 하는 것은 연인이며, 이와 같은 정인과 연인이 빠짐없이 만족하여 불성을 개오(開悟)하는 것은 요인입니다. 이는 마치 나무에서 불을 내는 나무 속의 불의 정인과 나무를 비비는 연인이 갖추어져야만 그 결과인 불을 취할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즉, 나무에 있는 불의 성품은 중생불성의 정인에 비유하였고, 사람의 힘으로 나무를 비벼서 불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연인에 비유하였으며, 불이 붙어 나무를 태우는 것은 번뇌를 끊고 열반도를 증득하는 요인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록 나무의 불의 성품과 같은 불성(佛性)의 바른 요인의 훈습하는 세력이 있다고 하여도 나무의 불의 성품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제불보살과 선지식 등을 만나 그들의 자비(慈悲)와 원력으로 구하여 보호하는 것으로서 도와주는 조건을 삼지 않고 나무가 저절로 불이 붙어 타지 않듯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로 깨달아 들어가는 자는 옳다고 긍정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이 자비스런 원력과 보호해주는 바깥의 훈습하는 세력이 있다고 해도 무명(無明)이 무겁고 두터운 부류의 중생들은 본각(本覺)으로 내훈한다고 하지만 안으로 본각(本覺)의 정법(淨法)을 훈습하는 세력이 아직 있지 않은 자는 역시 생사의 괴로움에서 염증을 내고, 열반도를 즐겨 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불법이 좋고 잘 가르쳐 주어도 업장이 두텁고 망상번뇌로 뒤얽힌 중생은 깨달아 열반으로 가는 것에서 멀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여래성)이 정인(正因)이고, 제불보살과 선지식의 설법인 진여에서 유출한 자비원호(慈悲願護)의 교법(敎法)이 외연인 연인(緣因)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안으로는 정인의 본훈(本熏)과 외연인 연훈(緣熏)이 교대로 진여정법을 훈습하기 때문에 이혹(二惑)을 끊고 진여를 증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불보살과 선지식은 올바른 의지처이고 믿음의 대상입니다.

즉 안으로 본각의 내훈인 정인(正因)과 밖으로 제불보살 선지식 등의 연인(緣因)을 빠짐없이 갖춘 자라면 스스로에겐 정인훈습의 세력이 있고, 다시 제불보살 등의 자비(慈悲)와 사홍서원(四弘誓願)·호념(護念)의 연인훈습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생사의 고통에서 싫증을 내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의 도가 있다는 것을 믿어 선근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수습하여 선근이 성숙하기 때문에 곧바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제시한 대승법의 의미에 대한 이해(解)와 교법(敎法)의 실천과 대승법의 이익을 얻고, 해(解)와 행(行)을 갖추었기 때문에 법의 희열을 만나게 됩니다. 이리하여 십신위(十信位)에서 십해(十解)·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으로 승진(勝進)하여 더욱 나아가서 마침내 십지(十地)에서 불과(佛果)인 열반의 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정인(正因)과 연인(緣因)을 빠짐없이 만족했기 때문에 불과인 열반의 도를 쉽게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즉, 수행자는 안으론 진여의 승인(勝因)으로 훈습하는 세력을 의지하고, 밖으로는 제불보살의 뛰어나고 훌륭한 도움을 믿고 의지하여 불성의 탁월한 정인(正因)을 돕고 발기하는 세력이 있음으로 해서 열반으로 신속하게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의 가르침을 열어 보여 주심에 이익을 얻어 환희하는 마음을 내는 의미입니다. 이는 조연(助緣)의 탁월함입니다.

이상으로 자성에서 훈습하는 작용을 밝혔고, 다음엔 진여로 훈습하는 작용을 밝힙니다. 불교는 어렵다고 하지만, 사실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불교공부는 하다가 멈추면 물러나 버립니다. 굳은 결심과 믿음으로 완벽한 깨달음을 완성할 때까지 불퇴전(不退轉)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 妄心熏習(망심훈습)

妄心熏習義有二種(망심훈습의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망심훈습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망심훈습(妄心熏習)은 망심에 대한 진여(眞如)의 정화작용, 즉 정용(淨用)이 나타나는 것으로서, 달리 말하면, 미망 속에 있는 중생이 그 미혹의 마음속에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 수행(修行)을 통하여 미혹(迷惑)을 끊고 깨달음에 나아가는 활동을 나타내는 훈습작용을 말한다. -전종식]

 

一者(일자) 分別事識熏習(분별사식훈습) 依諸凡夫二乘人等(의제범부이승인등)

厭生死苦(염생사고) 隨力所能(수력소능) 以漸趣向無上道故(이점취향무상도고)

첫째는 분별사식훈습이니, 모든 범부와 이승의 사람들이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능력에 따라 수행할 수 있는 한도 내에 의지해서 점차 무상의 도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元曉 : 分別事識熏習이란 경계가 식(識)의 작용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모르고, 경계가 있다고 착각하여 집착하는 것을 분별사식이라고 하며, 범부와 이승(二乘)이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는 것 또한 이와 다르지 않으므로 분별사식훈습이라고 한다.

* 지운 : 경계를 분별하는 것은 일곱 가지가 있다. 시.청.후.미.촉의 다섯 감각, 의식, 말라식이다. 이중 가장 강렬한 것이 의식이다. 오각은 경계를 인식할 뿐이고, 말나식은 미세하여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의식을 경계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생각을 한다. 진여가 의식을 훈습하여 생사를 싫어하게 하고 열반을 구하게 하니 이를 분별사식훈습이라고 한다. 이승의 경지이다.

의식의 특징 : a.자유롭다. 생각의 대상에 한계가 없음. b. 유무형을 다 대상으로 함. c. 오구의식 즉, 다섯 감수 작용과 함께 작용. d. 형상 작용. e. 직관과 추리를 다 할 수 있음. 의식이 지혜로 바뀌면 묘관찰지가 된다.-물처럼바람처럼]

 

[첫째는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薰習)인데, 이는 허망한 경계가 유식(唯識)일 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십신(十信) 이전의 모든 범부와 칠식(七識)·팔식(八識)과 사식(事識)의 미세한 부분은 모르고 단지 아공관(我空觀)만을 닦은 이승인이 평등하게 삼계에 나고 죽는 윤회의 괴로움에 염증을 내고 능력을 따라 수행할 수 있는 한도 내에 의지하여 위없는 보리의 도에 점차로 닦아 나아가는 의미에서 분별사식훈습이라고 하였습니다.-수선]

 

[첫째는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이다. 분별사식은 의식(意識)의 이명(異名)으로서, 이 식(識)은 마음에 인식되는 어느 개체가 그대로 외계의 실재라고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범부이승(凡夫二乘)의 사람은 그러한 망심에 진여의 정화작용이 일어나 발심(發心)하게되며,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들 범부와 이승은 그러한 생사(生死)나 윤회(輪廻)의 고통이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들이 발심하게 되면 미혹의 마음속에 점진적으로 정용(淨用)이 일어나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게 되고 그 힘의 정도에 따라 무상도(無上道)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수행해 가는 것이다.]

 

[첫째는 분별사 식훈습(分別事識熏習), 분별이란 제7식 말라식을 가리킵니다. 이승은 성문과 연각으로, 성문과 연각을 알면 이승인이고 모르면 범부입니다. 사성제와 연기를 알면 나름 진리를 알기 때문에 조금씩 진여를 좋아하는 기운이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힘닿는 대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만약 제7식에 훈습되는 우리가 공부할 마음이 생기면 분별사식훈습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부, 수행을 열심히 하면 제8식으로 점점 훈습되어 결과가 쌓이면 어떤 계기로 깨달음을 얻습니다. -통섭불교]

 

二者(이자) 意熏習(의훈습) 謂諸菩薩發心勇猛速趣涅槃故(위제보살발심용맹속취열반고)

둘째, 의훈습이니, 이른바 모든 보살이 발심하여 용맹하고 신속히 열반에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까닭이다.

 

[元曉 : 意熏習이란 업식훈습이라고도 한다. 통틀어 말하자면 다섯 가지의 식(識:業識, 轉識, 現識, 知識, 相續識)을 모두 의(意)라 이름 하니, 그 뜻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근본 쪽으로 말한다면 다만 업식만을 취한다. 업식은 가장 미세하여 모든 식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이 중에서 업식을 의(意)라 하며, 이러한 업식은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이 아직 나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보살은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일 뿐 따로 경계가 없음을 알며 모든 법은 오직 식(識)의 헤아림인 줄 알아서, 앞의 경계가 밖에 있다는 집착을 버리고 업식의 뜻에 따르기 때문에 업식훈습이라 이름하며 또한 의훈습이라 이름 한다. 무명에서 일어난 업식이 바로 발심하여 모든 행을 닦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는 의훈습(意熏習)이다. 의(意)는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지식(智識) 및 상속식(相續識)의 오식(五識)을 말하는 것으로서, 의훈습(意熏習)은 이 5식에 가해지는 진여의 정화작용(淨用)을 말한다.
이것은 초지(初地)이상 보살의 수행심(修行心)으로서, 그들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이치를 깨닫고 있으므로, 마음밖에 어떠한 자아(自我)의 집착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보살의 발심(發心)은 용맹스럽고 강력하며, 분별사식훈습이 점진적인데 비하여, 이 의훈습(意熏習)의 보살은 재빨리 열반에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을 다시 설명하면 범부이승(凡夫二乘)은 온갖 사물과 현상을 여러 가지로 분별하고 좋고 나쁨에 집착을 일으키는 분별사식(分別事識)에 머물러 있으므로, 이 식(識)에 대하여 진여가 정화작용을 일으켜 이를 소멸시키려는 훈습을 계속하면, 그 결과 생사(生死)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고 그 힘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위없는 진리의 길을 향해 점진적 으로 수행해 가는 것이다.

의훈습(意熏習)은 거친 분별사식보다 미세한 망심인 업식(業識)등 5식에 대하여 이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진여가 일으키는 정화작용이기 때문에 이는 보살(菩薩)의 수행결과로서 나타나 유식무경(唯識無境)의 경지를 깨닫게 되고, 그 발심수행은 용맹스럽고 강력하여, 재빨리 열반에 진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해석상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망심훈습(妄心熏習)의 두 가지 모습인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과 의훈습(意熏習)이라고 해서, 그러한 망심(妄心)이 훈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망심을 제거 소멸시키기 위한 진여의 훈습작용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여기의 망심훈습은 정법(淨法)훈습에서 분류된 것으로서 진여가 망심을 정화시키는 망심훈습이며, 염법(染法) 훈습에서 분류된 망심훈습 즉, 망심이 진여에 훈습하는 망심훈습과 구별하여야 한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의훈습(意薰習)은 허망한 경계가 유식(唯識)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한 십신(十信) 이상의 모든 보살이 위없는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마음을 발하여 용맹하게 수행을 하여 열반으로 신속하게 나아가는 의미 때문에 단박에 닦아 버리는 의훈습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여가 망심인 삼세육추를 훈습하여 진여인 정법으로 환원하는 것을 따로 밝히고, 이를 수행하는 사람의 측면에서 돈수(頓修)와 점수(漸修)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즉, 진여가 망심을 훈습하면 망심의 염법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망심의 흐름을 돌이켜 정법의 수행을 이룬다고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망심훈습(妄心薰習), 즉 진여가 망심을 훈습한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러한 의미는 가장 은밀하여 마명보살의 오묘한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진여훈습으로 정법(淨法)을 일으켜 단절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에선 "진여가 망심을 훈습한다"라고 말한 것은 앞장에서 말하길, "진여법이 있음으로 인해 무명을 훈습하는 인연력 때문에 망심으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에 염증을 내고 열반을 즐겨 구하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단지 안에서 진여를 인(因)으로 하였다는 것만을 밝혔을 뿐인, 본훈(本熏)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서 말하길, "이 망심에서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인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관찰수행에 해당하는 신훈(新熏)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앞에서 말했던, "진여법이 있기 때문에 무명망심을 훈습한다"라고 한 망심(妄心)은 오의(五意)를 총체적으로 개괄하여 다섯 가지 의미를 훈습하는 것이 스스로 심천(深淺)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단지 망심을 훈습하여 진여정법으로 환원하는 시종(始終)의 인과(因果)관계만을 통설적으로 설명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돈수와 점수를 분별하는 데는 미치질 않았는데, 지금은 진여정법의 훈습을 받는 망심으로써 도리어 진여를 훈습한다면 이 진여를 대상으로 하여 훈습되는 것이, 훈습하는 주체인 훈습하는 것이 망심엔 저절로 육추와 삼세의 두 가지 능훈망심(能熏妄心)의 의미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육진경계가 유식(唯識)일 뿐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삼세의 허망한 마음으로 법공관지(法空觀智)를 능훈수행하는 삼현십성(三賢十聖)의 돈수와 육진경계가 유식일 뿐임을 알지 못하고 아공관지(我空觀智)만을 닦는 이승인의 점수의 차별을 밝힌 것입니다. 

만일 진여정법의 훈습을 받는 육추의 분별사식에서 발심하는 자는 그 때문에 이승인의 기틀을 이루며, 훈습을 받는 오의(五意)에서 발심하는 자는 삼현(三賢)과 십성(十聖)인 십지(十地)보살의 기틀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망심훈습(妄心薰習)이라고 나타낸 것은 이미 진여정법의 훈습을 받은, 그래서 다시 진여정법을 훈습하는 신훈수행(新熏修行)의 허망한 마음입니다. 지금은 진여에 대한 관찰수행을 일으켜 도리어 진여를 훈습하는 능훈의 허망한 마음임으로 근본무명의 훈습을 받는 허망한 마음이 아닌 그 뜻이 은밀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에서는 망심이 진여를 신훈(新熏)하는데 있어서 삼세와 육추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다음은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면서 자체와 그 작용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밝힙니다.]

 

[둘째의 의훈습은 제8 아뢰야식을 훈습하는 것입니다. 그냥 공부하면 분별사식훈습이 되고 집중해서 깊이 들어가서 선정에 들면 이것은 의훈습에 든 것입니다. 용맹하다는 것은 용맹정진하는 것입니다. 그냥 하는 것은 용맹이 아닙니다. 용맹정진 하다보면 열반으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공부하며 훈습을 하고 있지만 가끔은 밤잠을 설쳐가며 식사도 잊으며 용맹정진 해봐야 합니다. 깨달음의 순간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이런 깨달음을 얻으면 신통력이 생깁니다. 신통력이 생기면 전생의 기억도 납니다. 예를 들어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도 전생에 가본 곳이라면 생각이 난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어려서부터 공부, 수행을 해야하는 이유는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학습력, 흡수력이 성인이 된 뒤와는 매우 다릅니다. 성인이 되면 오염된 틀이 좀처럼 깨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맞다고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젊었을 때와는 다릅니다. 어떤 공부건 금방 익히고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점 의심도 없이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어린 시절, 젊은 시절입니다. 성인이 된 뒤에는 의심과 자기 확신이 생겨서 수행을 해도 ‘지금 이렇게 해봤자 부처가 안 될텐데...’하고 생각하고 맙니다. 의훈습은 용맹정진해야 될 수 있는데 어린 시절, 젊은 시절에 하는 것이 더 용이한 것입니다. 용맹정진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수행을 해도 전생과 비슷한 정 도가 될 것입니다. 용맹을 해야 전생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머리 식히는 이야기 

 기록에 남아있는 부처님의 전생을 보면 먼저 선혜보살이 있습니다. 선혜의 집안은 무마성의 최고 장자였습니다. 하지만 선혜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선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 많은 재산을 그대로 남기고 돌아가신 것입 니다. 생전에 아버지가 애착을 가지고 관리했던 재산들을 죽어서는 가져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선혜는 허무해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죽은 후에도 갖고 갈 수 있는 것을 가져야겠다.’고 생각 합니다. 선혜는 다음 날 국왕에게 알리고 북을 치며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수행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히말라야 산에서 수행을 했는데 당시 연등 부처님의 출현 소식을 듣고 마을로 내려옵니다. 그런데 내려오기 전날 비가 와서 곳곳에 웅덩이가 패여,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연등 부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도 큰 웅덩이가 있었습니다. 선혜는 부처님이 그것을 밟을까봐 몸으로 웅덩이를 메웁니다. 웅덩이가 커서 머리를 풀어 나머지 부분을 메웁니다. 그것을 본 연등 부처님이 “젊은이여 왜 그러고 있느냐? 난 너를 밟고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자 선혜는 “부처님이시여 이렇게 밟고 지나가는 것도 인연이니 밟고 지나가시옵소서.”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지극 정성에 감동한 부처님은 “너는 다음 생에 석가모니 부처로 태어 날 것이다.”라고 말해줍니다.-통섭불교] 

 * 淨法熏習(정법훈습)

云何熏習(운하훈습) 起淨法不斷(기정법부단)

어떻게 훈습하여 청정한 법=淨法을 일으켜 끊어지지 않게 하는가?

所謂以有眞如法故(소위이유진여법고) 能熏習無明(능훈습무명)

이른바 진여법이 있기 때문에 진여가 능히 무명을 훈습하는 것이며, 

 

본훈(本熏)=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는 것.

 

以熏習因緣力故(이훈습인연력고) 則令妄心厭生死苦(즉령망심염생사고) 樂求涅槃(요구열반)

훈습한 인연의 힘에 의하여 곧 허망한 마음=妄心으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게 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게 한다.

 

[중생이 생사고에 빠져 있되, 진여가 훈습하는 인연의 힘으로 생사고를 싫어하여 열반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욕망에 묻혀 살다가도 자주 자기 생활을 회의하고 참다운 길을 생각하게 되는, 이것이 바로 진여훈습 때문이다.]

 

以此妄心有厭求因緣故(이차망심유염구인연고) 卽熏習眞如(즉훈습진여)

 허망한 마음=망심에 (생사를) 싫어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열반을 구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여, 

自信己性(자신기성) 知心妄動無前境界(지심망동무전경계) 修遠離法(수원리법)

스스로 자기 성품(본성)을 믿어, 마음이 헛되게 움직이는=妄動하지만, 목전의 경계가 없음을 알아, 멀리 여의는 법을 닦아 행한다.

 

[元曉 : 以此妄心有厭求因緣故~自信己性이라는 것은 십신위 중의 신(信)을 밝힌 것이다.

知心妄動無前境界 修遠離法이라 한 것은 삼현위 중의 수행을 나타낸 것이다. (三賢 : 십주, 십행, 십회향)

* 憨山 : 여기에서는 진여가 안으로 무명을 훈습하여 발심수행하고 진여정업을 이루게 함을 밝혔다. 이는 본훈(本熏)이다. 바로 이 본훈의 작용인 정인(淨因)이 도리어 진여를 훈습하여 정업의 세력을 더욱 증가하게 하는데 이를 신훈(新熏)이라고 한다.-물처럼바람처럼]

 

[정법훈습(淨法熏習)은 깨달음이 실현되는 순서를 밝히는 부분이다. 정법의 훈습이 어떻게 일어나 끊임이 없는 것인가를 묻는데서 시작되는 것은 진여의 훈습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청정한 작용이 일어나, 단절되지 않는 이유를 묻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마음의 본성은 진여이며, 그것이 인격화되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되어 있다. 이는 이(理)와 지(智)이며, 마음을 정화시키는 힘, 즉 진여의 법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끊임없이 무명에 훈습하여, 그 훈습력으로 무명으로 하여금 청정한 활동력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진여는 무명에 훈습을 가하는 인(因)이 되고, 무명은 진여로부터 훈습을 받는 연(緣)이 되며, 그 결과가 망심에 일어나는 싫고 좋음을 구하는 염구심(厭求心)이다. 이것은 진여훈습(有眞熏習) 또는 체훈습(體熏習)이라고 한다.

염구심(厭求心)이라는 의미는 우리의 망심에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정용(淨用)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정용(淨用) 즉 정화시키는 힘은 역으로 진여에 다시 훈습하여, 진여의 힘을 더욱 증가시키는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무명에 대한 진여의 훈습은 망심에 염구심(厭求心)을 일으키고 염구심이 훈습을 가하는 능훈(能熏)이 되어, 다시 진여에 훈습, 진여의 힘을 강화시켜 진여의 활동을 더욱 조장시킨다. 이경우 염구심(厭求心)은 훈습을 가하는 능훈(能熏)이고 진여는 훈습을 받는 소훈(所熏)이며, 그 결과는 수행(修行)이다.-전종식]

 

[오염된 것을 끝도 없이 훈습하는 것이 염훈습이나, 정훈습은 깨달은 사람이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염훈습은 일반 중생들의 삶이라면 정훈습은 깨달은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끊임없이 일으키는 행위와 생각은 염훈습을 증장시켜 나가지만 깨닫고 일으키는 행위와 생각은 정훈습을 증장시키고, 진여를 증장시켜 가는 것입니다. 염훈습은 무명이 진여를 훈습한다면 정훈습은 진여가 무명을 훈습합니다. 원래 다 진여이지만, 본성품이 무명에 오염 되어서 오염된 것을 내 것이라고 씁니다. 그런데 본래 성품을 보고 제8 아뢰야식을 보면, 즉 제7식을 거치지 않고 제8식으로부터 오염되기 전의 것이 올라오면 항상 진여의 생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견성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고 견성 후 보림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무명에 의해 본성이 오염된 상태가 ‘나’인 것으로 착각 하지만 정훈습에서는 진여법이 무명을 훈습하여 무명이 점점 없어집니다. 진여에 훈습된 사람들은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수행하기를 좋아하고 절제된 삶을 좋아하게 됩니다. 하지만 진여에 훈습되지 않으면 자극, 느낌(수)에 쉽게 따라가게 되는, 이것이 무명에 오염된 상태입니다.-통섭불교]

 

[이른바 진여법에 안으로 훈습하는 본훈(本熏)이 있기 때문에 무명을 훈습하여 정업(淨業)을 이룰 수 있고, 진여의 법에 내훈(內熏)의 훈습하는 인(因)인 진여법(眞如法)과 연(緣)인 무명(無明)의 세력이 있기 때문에 허망한 식심(識心)으로 하여금 두 가지 생사(生死)의 괴로움인 업계고상(業繫苦相)에 염증을 내고 열반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즐겁게 구한다는 것입니다. 이 망상의 식심은 생사에서 염증을 내고 열반을 구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본훈(本熏)에서 일어난 정업(淨業)의 작용인 신훈(新熏)이 도리어 진여를 훈습하여 정업의 세력을 더욱 증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본훈(本熏)의 작용인 정인(淨因)이 도리어 진여를 훈습하여 정업의 세력을 더욱 증가하게 하는데, 이를 새로운 훈습이라고 하여 신훈(新熏)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래는 번뇌가 곧 열반이요, 무명이 곧 반야임을 자각하는 것은 상근대지자의 몫입니다.-수선]

 

以如實知無前境界故(이여실지무전경계고) 種種方便起隨順行(종종방편기수순행)

목전에 나타나는 경계가 없음을 여실히 알기 때문에 갖가지 방편에 수순하여 수행을 일으켜,

不取不念(불취불념) 乃至久遠熏習力故(내지구원훈습력고) 無明則滅(무명즉멸)

취하지도 않고, 망념을 내지도 않으며, 나아가 오랫동안 훈습한 힘에 의하여 무명이 곧 사라지게 된다.

以無明滅故(이무명멸고) 心無有起(심무유기) 以無起故(이무기고) 境界隨滅(경계수멸)

무명이 멸하였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 없으며,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경계가 따라서 멸하며, 

以因緣俱滅故(이인연구멸고) 心相皆盡(심상개진) 名得涅槃成自然業(명득열반성자연업)

인과 연이 함께 멸하였기 때문에 마음의 모양=心相이 모두 다하여, 열반을 얻게 되어 자연업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自然業 : 진여의 마음이 망념을 일으키지 않고 일으키는 자연스런 행위. 곧 부처의 행위이다.

* 元曉以如實知無前境界故는 초지의 견도(見道)에서 유식관이 이루어짐을 밝힌 것이다.

種種方便起隨順行 ~ 久遠熏習力故는 십지의 수도위 중에서 만행(萬行)을 닦음을 나타낸 것이다.

無明則滅이하는 다섯 번째 과지에서 열반을 증득함을 나타낸 것이다.

* 憨山 : 생멸하는 업식의 망심이 진여를 요동시킴을 아는 수행지가 십해위(十解位)이다. 십해를 의지하여 이를 멀리 여의는 수행이 십행(十行)이며, 십해를 의지하여 십행을 성취하고 유식과 심사(尋伺) 등의 추상적으로 비교해서 관찰하는 비량관을 닦아 진여의 실체를 여실하게 알면 십지의 초지에 이른다. 초지에서 여실한 진여의 이치를 보고 갖가지 방편도로써 진여에 수순하여 수행을 일으키면서 십지수행위 가운데서 모든 수행을 광대하게 닦는다.]

 

[이와 같은 훈습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수행(修行)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향상되어 간다.
첫째, 자기의 본성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는 믿음 즉 십신(十信)이 일어난다.
둘째, 마음은 망(妄)으로 움직이는 것으로서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경계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말하면 우리 범부는 자기가 인식하는 것이 외계(外界)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에 집착하고, 업(業)을 쌓아, 고락(苦樂)을 받고 있으나, 그 외계라고 망상하고 있는 것은 마음이 거짓 움직여 나타난 것 일뿐 실재(實在)가 아니라는 것을 추론(推論)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관(比觀)으로서, 본문에서 지심망동(知心妄動)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론(理論)으로 유식(唯識)을 아는 것으로서 삼현(三賢)의 위치이다.
원효(元曉)는 이 둘째 단계를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의 세가지 현자(賢者)의 자리라고 분류하고 있다.
셋째수원리법(修遠離法)으로서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이치를 달관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위치이다. 이 위치에서는 여실(如實)하게 전경계(前境界)가 없다고 달관(達觀)하는 것이다. 이것은 둘째의 비관(比觀)을 지나 이루어지는 여실지(如實知)의 위치이다. 본론에서「여실지(如實知)」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진실한 지혜로 깨닫는 것으로서, 여기에서 유식(唯識)의 이(理)를 증득한다고 한다. 원효(元曉)는 이를 보살 십지(十地)중 초지(初地)의 지위라고 구분한다.
넷째, 이상의 수행과정을 지나, 새로이 제2지부터 제10지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수행을 거듭하면서, 그 사이에 여러 가지 방편행(方便行)을 닦고, 진여의 이(理)에 수순하는 행(行)을 행하여, 집착과 망념을 소멸시키는 불취불념(不取不念)이 된다.
다섯째, 이상과 같은 장시간의 수행을 통하여 진여는 구원한 훈습작용을 계속하여 마침내 무명이 소멸되는 경지에 이른다. 이같은 구원한 훈습으로 제10지의 만위(滿位)에 이르러 근본무명(根本無明)이 완전히 떠났을 때 마침내 성불(成佛)의 행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하여 무명이 완전히 소멸되게 되면 망심(妄心)이 일어나지 않으며, 망심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경계상(境界相)도 그에 따라 멸하게 된다.
의(意)인 법집(法執)과 의식(意識)인 아집(我執)은 보살의 지위에서 이미 소멸된 것이지만 제10지의 만위(滿位)에서 근본무명(根本無明)이 완전 소멸되는 것이므로, 생멸심(生滅心)인 아리야식(阿梨耶識)이 소멸되게 된다.
이와 같이 인(因)으로서의 근본무명과 연(緣)으로서의 망경계(妄境界)가 멸하게되면, 일체의 염법(染法)인 인(因)과 연(緣)이 멸(滅)하게 되고, 마음의 상(相)은 모두 소진(消盡)되어 열반(涅槃)이 실현된다.
여기에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마음이 멸한다고 말하는 것이, 마음 그 자체가 멸한 것이 아니라 심상(心相), 즉 분별하는 망념만이 멸하는 것이지, 심체(心體)마저 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생멸(生滅)이 소실되면, 마음은 적정(寂靜)을 실현하고, 지혜가 빛나게 된다. 이같은 이지불이(理智不二)인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세계가 곧 열반(涅槃)이다. 이 열반에 안주하는 심성(心性), 즉 불타(佛陀)는, 하고자 하지 않아도, 저절로 중생을 구제하는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자연업(自然業)이라 한다.
이상과 같이 정법훈습(淨法熏習)에는 진여훈습(眞如熏習)과 망심훈습(妄心熏習)의 두 종류가 있다. 진여훈습은 다시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과 용훈습(用熏習)으로 나뉘고, 망심훈습은 분별사식훈습(分別事識熏習)과 의훈습(意熏習)의 둘로 나뉜다.-전종식]

 

[정훈습, 내 몸을 진리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진리, 진여를 알고나면 끊임없이 정훈습을 합니다. 내 속에 정훈습을 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으면 진여는 항상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번뇌망상을 안하게 됩니다. 진여의 훈습이 되면 항상 여여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며, 진리에 대한 믿음이 생겨 세세생생 공부와 멀어지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중생은 염훈습에 오염되어 있어 느낌따라 탐진치가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야든지 죽어라고 노력하면 지금의 단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내가 갖고 있는 업에서 한 단계 올라갈 수 있습니다. 나의 단계에서 한 단계 올라가면 세상을 인식하는 눈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어떤 생이든 공부를 하지 않고는 잘 살 수 없게 됩니다. 무언가 성취하려면 목숨 걸고 공부를 하는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진여에 훈습한다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무명 타파입니다. 참선, 수행, 경전을 보는 것이 결국 무명 타파의 방법입니다. 앞에 설명이 정훈습이 이루어져 최고 목적지 열반에까지 이르는 과정인 것입니다.

어떤 공부든 시작은 믿음입니다. 학교 공부는 정해진 수업을 듣거나 학점을 채우면 되지만 마음 공부는 먼저 믿음이 서 있 어야 그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습니다. 절에 가면 간혹 삼천배를 시킵니다. 이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하기 전과 한 후가 전혀 다릅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절에 가서 처음으로 천 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 야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런 믿음이 생기면 수행을 합니다. 삼현, 사선근, 견도, 수도, 무학도는 구사론의 수행단계입니다. 그 다음 눈 앞에 나타나는 경계가 없음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데 이것이 초지 견도입니다. 그렇게 수행한 후 십지에 도달하게 되면 방편을 통해 깨달은 마음을 세상에 베풀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무명이 멸하면 열반을 증득 한 상태가 됩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팔정도 수행입니다. 팔정도가 육바라밀로 바뀌고 선종에서는 계정혜 삼학으로 바뀐 것입니다. 말만 다를뿐 같은 것입니다. 육바라밀의 지혜에 이르면 지혜를 베푸는 방편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보시, 지계, 인욕을 위하여 좋은 방편 을 쓰는 일입니다. 원은 원바라밀로 부지런히 정진할 것을 원으로 발하는 것입니다. 역은 선정을 닦는 힘을 기르는 일입니다. 지는 지바라밀로 지혜를 증득하기 위한 모든 지적인 노력을 말합니다. 수행은 십바라밀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통섭불교]

 

[십신(十信)으로부터 그 이후의 정성(定性)인 십해(十解)인 십주(十住)에서는 식심(識心)이 허망하게 진여를 요동시킬 뿐, 실재하는 목전의 경계가 없다는 것을 알며, 십행(十行)과 십회향(十廻向)은 십해(十解)를 의지하여 이를 멀리 여의는 심사관(尋思觀)인 유식무진관(唯識無塵觀) 등의 법행(法行)을 닦습니다. 그리하여 십지의 초지(初地)인 환희지(歡喜地)에선 진여의 도를 깨달아 보고 목전의 경계가 유식(唯識)의 이치뿐임을 자각합니다. 그 때문에 제2지인 이구지(離垢地)에서 제9지인 선혜지(善彗地)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방편도로써 진여에 수순하는 수행을 일으켜 소취경(所取境)인 무상(無相)의 진여를 취하지도 않으며 능념(能念)인 망념을 내지도 않습니다. 나아가서 십지에 도달할 때까지 삼아승기겁의 구원한 오랜 세월동안 훈습하는 세력 때문에 이상은 진여의 청정한 작용으로 무명의 흐름을 진여의 불과위(佛果位)로 되돌아가는 수행인지(修行因地)의 차제를 밝힌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근본무명이 즉시 사라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서 불과위(佛果位)에서 무명을 끊어 가는 차제를 밝혔습니다. 근본무명은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허망한 무명업식심의 세 가지 불상응염심(不相應染心)이 일어나는 것이 없고, 업식심이 일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세 가지 상응염심(相應染心)인 허망한 경계가 마침내 사라집니다. 근본무명의 인(因)과 허망한 경계(境界)의 연(緣)이 함께 사라졌기 때문에 육염(六染)의 심상(心相)이 모두 다한 것을 열반을 체득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열반인 본각의 지혜인 지정상(智淨相)의 자체에서 불가사의한 업의 작용인 자연업지(自然業智)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좀더 말하자면 불과(佛果) 가운데 근본무명이 바로 업식(業識)과 전식(轉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상의 식심이 일어남이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둘의 업식과 전식의 불상응염심이 진여를 훈습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육진경계가 따라서 사라집니다. 인(因)은 근본무명이요, 연(緣)은 허망한 마음의 경계인 육진(六塵)이며, 심상(心相)은 여섯 가지 물든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근본무명이 사라지면 앞의 세 불상응염심이 다하고, 허망한 경계가 사라지면 뒤의 세 상응염심이 다합니다. 일체 허망한 마음의 모습은 여섯 가지 물든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다한다"고 하였습니다. 앞의 허망한 마음과 허망한 경계가 뒤집혔기 때문에 열반을 얻게 되고, 육염심이 모두 번뇌로 장애하기 때문에 앞의 근본무명을 뒤집어 자연업지(自然業智)를 성취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근본무명이 본각(本覺)의 실지(實智)를 장애하기 때문입니다.-수선]

 

화엄경의 52위(보살 52위)

(1) 십신(十信)=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 52위 중 처음의 10위. 부처의 교법을 믿어 의심이 없는 지위.
① 신심(信心) : 어떻게 믿을 것인가를 아는 것.
② 염심(念心) : 부처를 어떻게 염하여 간직할 것인가를 아는 것.
③ 정진심(精進心) : 믿음을 향하여 어떻게 정진할 것인가를 아는 것.
④ 혜심(慧心) : 어떻게 지혜를 닦을 것인가를 아는 것.
⑤ 정심(定心) : 어떻게 마음을 안정시킬 것인가를 아는 것.
⑥ 불퇴심(不退心) : 어떻게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아는 것
⑦ 호법심(護法心) : 어떻게 진리를 지킬 것인가를 아는 것.
⑧ 회향심(廻向心) : 어떻게 실천의 방향을 잡을 것인가를 아는 것.
⑨ 계심(戒心) :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아는 것.
⑩ 원심(願心) : 어떻게 소원해야 할 것인가를 아는 것.

(2) 십주(十住)=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인 52위 중, 제11위(位)에서 20위까지. 10신위(信位)를 지나서 후퇴함이 없이 마음이 진제(眞諦)의 이치에 안주(安住)하는 자리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주(住)라 한다.
 초발심주(初發心住) : 10신(信)의 지위를 지나 불퇴전(不退轉)의 보리리심을 일으키는 것.
② 치지주(治地住) : 이미 낸 보리심에 의해 정진하여 심지(心地)를 청정하게 다스리는 것.
③ 수행주(修行住) : 만선(萬善) 만행(萬行)을 닦는 것.
④ 생귀주(生貴住) : 정히 부처님의 기분(氣分)을 받아 여래종(如來種)에 들어가는 것.
⑤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 : 부처님과 같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방편 행을 갖추어 중생 을 교화 이익 되게 하는 것.
⑥ 정심주(正心住) : 불법승 등을 찬탄하거나 비방하여도 불법 중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
⑦ 불퇴주(不退住) : 몸과 마음이 한데 이루어 날마다 더욱 성숙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
⑧ 동진주(童眞住) : 그릇된 소견이 생기지 않고, 보리심을 파하지 않는 것이, 마치 동자의 순진한 것과 같아지는 것.
⑨ 법왕자주(法王子住) : 모든 법에 장애가 없어 지혜가 법왕자(法王子)와 같아지는 것.
⑩ 관정주(灌頂住) : 왕자가 관정식(灌頂式)에 의해 왕위에 나가는 것처럼 지혜가 구경에 이르는 것.

(3) 십행(十行)=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를 52위(位)로 한 것 중에서, 10신(信). 10주(住)에서 나아가 제21위(位)에서 30위까지의 이름. 보살이 10주위(位)에서 불자의 인가를 얻은 뒤에 다시 나아가 이타(利他)의 수행을 완수하기 위하여 중생제도에 노력하는 지위를 10으로 나눈 것.
환희행(歡喜行) : 보살이 큰 시주(施主)가 되어 일체를 버리고 언제나 후회 없이 베풀어 다른 사람을 환희케 하는 것.
② 요익행(饒益行) : 보살이 깨끗한 계율을 지켜, 중생의 계율을 세우게 하고,, 자타(自他) 를 함께 유익하게 하는 것.
③ 무진한행(無瞋恨行) : 인욕(忍辱)을 닦게 하여 노여움을 버리고, 자타를 해치지 않으며, 원한을 능히 참게 하는 것.
④ 무진행(無盡行) : 수행을 무량겁(劫) 점진하여 진리를 구하고 중생을 제도하여 널리 선법을 행하는 것.
⑤ 이치란행(離癡亂行) : 항상 바른 마음으로 살면서 정념하여 산란함이 없이 일체의 진리에 있어 어지럽게 함이 없게 하는 것.
⑥ 선현행(善現行) : 일체법에는 소유하는 것이 없음을 알고 삼업(三業)을 없애어, 집착과 속박됨이 없이 일체중생을 교화시키는 것.
⑦ 무착행(無著行) : 부처를 공양하고 진리를 구하여 마음에 싫어함이 없이, 제법을 관하여 일체의 집착을 없게 하는 것.
⑧ 존중행(尊重行) : 선근 지혜의 법을 존중하고 모두를 이루어, 이것으로 하여금 더욱 자타 의 이(利)를 닦는 것.
⑨ 선법행(善法行) : 여러 가지 선법을 성취하여, 정법을 수호하고 부처의 마음이 끊기지 않게 하는 것.
⑩ 진실행(眞實行) : 부처의 진실한 설법을 성취하여, 설한바와 같이 능히 행하고, 부처가 행한 바와 같이 능히 설하여, 말과 행동이 상응하여 따르게 하는 것.

(4) 십회향(十廻向)=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 52위(位) 중에서, 제31위에서 제40위까지. 10행위(行位)를 마치고, 다시 지금까지 닦은 자리(自利)이타(利他)의 여러 가지 행을 일체 중생을 위하여 돌려주는 동시에, 이 공덕으로 불과(佛果)를 향해 나아가 오경(悟境)에 도달하려는 지위.
 구호일체중생 이중생상회향(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 : 육도사섭(六度四攝) 등을 행 하여 일체 중생을 구호(救護)하고 원친(怨親)없이 평등하게 대하는 것.
 불괴회향(不壞廻向) : 삼보(三寶)에 대하여 부서지지 않는 신심을 얻고, 이것을 선근(善根) 중생에게 선리(善利)를 획득케 하는 것.
③ 등일체제불회향(等一切諸佛廻向) : 삼세(三世)의 부처가 회향한 바와 동등하게 생사에 집착함이 없이 깨달음을 향하여 수행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것.
④ 지일체처회향(至一切處廻向) : 회향하는 힘으로 수행한 선근을 가지고 널리 일체의 삼보와 중생이 있는 곳에 나아가, 그들을 공양하고 이익케 하는 것.
⑤ 무진공덕장회향(無盡功德藏廻向) : 다함이 없는 일체의 공덕으로 이것을 기쁘게 따르고 회향하여, 불사(佛事)를 행하고, 그것으로 무진 공덕의 선근을 믿는 것.
⑥ 입일체평등선근회향(入一切平等善根廻向) : 수행하여 베푸는 등의 선근을 회향하여 부처를 위하여 지켜지고, 능히 일체의 경고한 선근을 이루는 것.
⑦ 등수순일체중생회향(等隨順一切衆生廻向) : 일체의 선근을 증장시켜, 이를 회향하여 일체중생을 이익케 하는 것.
⑧ 진여상회향(眞如相廻向) : 진여의 참된 마음에 따라 이루어진 여러 가지 선근을 회향하 는 것.
⑨ 무박무착해탈회향(無縛無著解脫廻向) : 일체의 법에 집착과 속박됨이 없이 해탈심을 얻어, 그것으로 선법(善法)을 회향하여, 보현(普賢)의 행을 행하여 일체의 덕을 갖추는 것.
⑩ 입법계무량회향(入法界無量廻向) : 다함이 없는 일체의 선근을 수습하여, 이것을 회향 하여 무한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

(5) 십지(十地)=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 52위(位) 중, 제41위로부터 제50위까지의 10위는 불지(佛智)를 생성(生成)하고, 능히 주지(住智)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온갖 중생을 짊어지고 교화 이익하는 것이, 마치 대지가 만물을 싣고 이를 윤익(潤益)함과 같으므로 지(地)라 이름.
 환희지(歡喜地) : 처음으로 참다운 중도지(中道智)를 내어 불성(佛性)의 이치를 보고, 견혹(見惑)을 끊으며 능히 자리이타(自利利他)하여 진실한 희열(喜悅)에 가득 찬 지위.
② 이구지(離垢地) : 수혹을 끊고 범계(犯戒)의 더러움을 제하여 몸을 깨끗하게 하는 지위.
③ 발광지(發光地) : 수혹을 끊어 지혜의 광명이 나타나는 지위.
④ 염혜지(焰慧地) : 수혹을 끊어 지혜가 더욱 치성하는 지위.
⑤ 난승지(難勝地) : 수혹을 끊고 진지(眞智)와 속지(俗智)를 조화하는 지위.
⑥ 현전지(現前地) : 수혹을 끊고 최승지(最勝智)를 내어 무위진여(無爲眞如)의 모양이 나타나는 지위.
⑦ 원행지(遠行地) : 수혹을 끊고 대비심을 일으켜, 2승의 오(悟)를 초월하여 광대무변한 진리 세계에 이르는 지위.
⑧ 부동지(不動地) : 수혹을 끊고 이미 전진여(全眞如)를 얻었으므로, 다시 동요되지 않는 지위.
⑨ 선혜지(善慧地) : 수혹을 끊어 부처님의 10력(力)을 얻고, 기류(機類)에 대하여 교화의 가부(可否)를 알아 공교하게 설법하는 지위.
⑩ 법운지(法雲地) : 수혹을 끊고 끝없는 공덕을 구비하여 사람들에게 이익되는 일을 행하여 대자운(大慈雲)이 되는 지위.


(6) 등각(等覺)=보살이 수행하는 지위 중에서 제51위(位)를 말한다.
이는 보살의 극위(極位)로서 그 지혜가 만덕(萬德)에 이르러 부처님과 동등하지만 인지(因地)에서의 구경위(究竟位)이고, 묘각(妙覺)은 과위(果位)로서 여래지까지 1등급이 있으므로 등각이라 한다.

(7) 묘각(妙覺)=보살 수행의 52위, 마지막 지위, 여래지의 불과(佛果)를 말한다.

    * 妄境界熏習(망경계훈습)

此妄境界熏習義(차망경계훈습의) 則有二種(즉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허망한 경계=妄境界 훈습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一者增長念熏習(일자증장념훈습) 二者增長取熏習(이자증장취훈습)

첫째 망녕된 생각을 증장하는 훈습=增長念熏習이며, 둘째 집착심을 증장하는 훈습=增長取熏習이다

 

증장념훈습(增長念熏習)= 망경계의 힘에 의하여 지식(智識)과 상속식(相續識)의 세력을 강화하여, 법집의 분별의 념을 증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증장취훈습(增長取熏習)= 망경계의 힘에 의하여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의 아집의 힘을 강화하여, 취착(取著)을 증장시키는 것

 

[元曉 : 증장념(增長念)이란 경계의 힘으로 사식(事識) 중의 법집분별념(法執分別念)을 증장하는 것이며,

증장취(增長取)란 사취(四取)의 번뇌장(煩惱障)을 증장하는 것이다.

* 四取(사취) : 욕계의 번뇌를 네 가지로 나눈것으로 집취(執取)ㆍ집지(執持)의 뜻으로, 3계의 허망한 상(相)에 집착하여 6취(趣)의 생(生)을 취하므로, 번뇌를 취(取)라 함.욕취(欲取)- 욕계의 번뇌 - 탐욕, 성냄, 어리석음, 교만, 무명, 의심, 십전(十纏). ② 견취(見取) - 유신견(有身見), 변집견(邊執見), 사견(四見), 견취견(見取見). ③ 계금취(戒禁取) - 잘못된 계율에 집착하는 것. ④ 아어취(我語取) - 내면에 집착하여 자아에 대해 설하는 번뇌, 색계와 무색계의 탐욕, 교만, 무명, 의심를 말함. 

* 憨山 : 증장념(增長念)이란 즉 업식의 무명망념이다. 지금 이 무명망념이 경계상을 연(緣)으로 의지하여 업식을 훈습한 세력 때문에 의식 가운데 지상과 상속상을 더욱 증가하여 자라나게 한 법집분별념이다. 허망한 경계상을 실제의 법인 양 집착하고 분별하는 망념인 것이다. 증장취(增長取)란 사식(事識) 가운데 집취상과 계명자상을 더욱 자라나게 하는 인아(人我)의 견일처주지무명(見一處住地無明)과 삼애의 번뇌이다.

* 增長念熏習은 인식 대상을 분별하고 차별하는 망념(업식)을 증장시키는 훈습이며 제7식의 활동으로 나타난다. 법집을 일으킨다.

增長取熏習은 분별하고 차별하는 망념에 집착하여 번뇌를 증장시키는 훈습이다. 의식(意識)의 활동으로 나타난다.-물처럼바람처럼]

 

[망경계훈습(妄境界熏習)에는 두 가지 뜻이 있어, 첫째는 증장념훈습(增長念熏習)이니 망령된 생각을 조장하는 훈습이며, 둘째는 증장취훈습(增長取熏習)이니 집착심을 조장하 는 훈습이다.” 뿌리가 오염되어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에 계속 망령된 생각이 조장됩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과 부딪혀 경계를 일으켜 끊임없는 망녕된 생각과 집착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물들어 있는 오염된 것에서 생각을 끄집어내어 쓰기 때문입니다. 만약 뿌리가 진여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뿌리가 제 7 말라식이면 오염된 것이기 때문에 물들어 있는 것에서 일어나 망령된 생각이나 집착심이 더 조장됩니다. 그래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면 끝도 없는 번뇌망상과 집착 속에서 한 생을 살다 갑니다. 망경계훈습을 통해서 이러한 것이 더 증장됩니다.

증장념(增長念)이란 망경계에 의하여 분별사식 중 법집분별념을 증장 하는 것입니다. 증장취는 사취의 번뇌장을 증장하는 것입니다. 사취(四取)는 삼계의 번뇌를 네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① 욕취란 욕계에서 오욕의 경계에 대하여 일으키는 탐집입니다. ②견취는 잘못된 견해를 진실이라고 집취하는 것입니다. ③ 계금취는 바른 계행이 아닌 것을 바른 계행이라고 집취하는 것입니다. ④ 아어취는 색계, 무색계의 각각 16개의 견혹 과 3개의 수혹입니다. 염(念)이란 생각하는 것이고 취(取)는 내가 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애욕 다음 취가 옵니다. 법집분별념이란 끝도 없이 일어나는 분별념입니다. 네 가지가 취에서 욕취, 견취, 계금취는 욕계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아어취는 색계, 무색계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통섭불교]

 

[첫째는 허망한 경계를 반연하는 세력을 따라 현상의 인식 가운데서 지상(智相)과 상속상(相續相)의 법집(法執)에 대한 분별로 망령된 생각을 증장하는 훈습인 증장념훈습(增長念薰習)이고, 두 번째는 분별하는 현상의 인식 가운데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에서 아(我)의 견(見)과 애(愛)라는 이혹(二惑)을 증장하는 증장취훈습(增長取薰習)입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 증장념(增長念)이란 즉 업식의 무명망념입니다. 지금 이 무명망념이 경계상을 연(緣)으로 의지해서 업식을 훈습한 세력 때문에 의식(意識) 가운데 집취상과 계명자상을 더욱 자라나게 하는 인아(人我)의 견일처주지무명(見一處住地無明)인 견도혹(見道惑)과 삼애(三愛)인 수도혹(修道惑)의 번뇌입니다. 앞에서는 무명일념이 업식을 훈습하여 그 때문에 허망한 경계상(妄境界)이 나타난 것을 밝혔습니다. 다음에는 바로 이러한 허망한 경계를 연(緣)으로 의지하여 다시 업식의 훈습을 돕는 그 업식이 육추상 가운데 지상(智相)·상속상(相續相)·집취상(執取相)·계명자상(計名字相)으로 더욱 자라나게 하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수선]

 

    • 妄心熏習(망심훈습)

妄心熏習義(망심훈습의) 則有二種(즉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망심이 훈습한다는=妄心熏習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一者(일자) 業識根本熏習(업식근본훈습)

첫째 업식근본훈습이니, 

能受阿羅漢(능수아라한) 辟支佛一切菩薩生滅苦故(벽지불일체보살생멸고고)

능히 아라한과 벽지불과 일체보살이 생멸의 괴로움을 받는 때문이며,

二者(이자) 增長分別事識熏習(증장분별사식훈습) 能受凡夫業繫苦故(능수범부업계고고)

둘째 증장분별사식훈습이니, 능히 범부가 업에 얽매여 괴로움을 받기 때문이다.

 

망심(妄心)= 업식(業識) 등의 삼세(三細)와 지식, 상속식 등의 의(意)와 의식(意識, 분별사식) 등 모든 식을 말한다.

 

[業識根本熏習 : 업식이 무명을 훈습하여 전상(轉相)과 현상(現相)을 일으키는 것(아리야식).

增長分別事識熏習 : 망경계가 지말무명(枝末無明)을 훈습하여 말나식과 의식을 일으켜, 이 훈습으로 인해 견사이혹(見思二惑)을 일으키고 심업(心業)과 신업(身業)·구업(口業)의 갖가지 업(業)을 지어 육도의 범부가 그 업에 얽매어 분단생사(分段生死)의 괴로움을 받는다. 견사이혹이란 사물의 이치를 몰라 일어나는 견혹(見惑)과 대상에 집착하는 사혹(思惑)을 말한다.

* 元曉 : 業識根本熏習이란 업식으로 무명을 훈습하여 상(相)이 없는 것임을 잘 모르고 전상과 현상을 일으켜 상속하는 것이니, 저 삼승인(三乘人)이 삼계를 벗어날 때에 사식(事識)의 분단추고는 여의었으나 아직 변역의 아라야 행고(行苦)를 받기 때문에 '삼승의 생멸고를 받는다'고 말한 것이다.

증장분별사식훈습(增長分別事識熏習)이란 범부의 자리에서의 분단고(分段苦)를 말한다.

* 憨山 : 첫째, 업식을 연(緣)으로 의지하여 근본무명을 훈습하고, 그 무명일념을 여의지 못하므로 집착의 대상인 법상(法相)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삼승인으로 하여금 변역생사의 괴로움을 받게 한다.

둘째, 증장분별사식을 연으로 의지하여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見惑)과 삼애를 일으키고 진행하는 목전의 오진(五塵) 경계는 실제가 아님을 오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경계를 망념으로 분별하고 집취하여 견사이혹을 일으키고 신구업(身口業)을 짓는다. 그 때문에 육도 범부로 하여금 분단생사의 괴로움을 받게 한다.

* 고순호 : 증장분별사식훈습이란 분별사식을 증장시키는 훈습으로, 지식(智識)이 다시 무명에 의해 훈습되어 상속상, 집취상, 계명자상을 일으켜, 업을 지어(기업상) 범부들이 고통을 받는다.(업계고상)-물처럼바람처럼]

 

[우리 범부, 중생이 받는 것은 증장분별 사식훈습(增長分別事識熏習)입니다. 분별사식(分別事識)은 바로 제7 말라식입니다. 제7 말라 식에 끝없이 훈습되는 것이 우리 범부들입니다. 업식근본훈습(業識根本熏習)의 업식은 제8 아뢰야식 안에 있는 업식이므로 업식근본훈습은 제8 아뢰야식의 작용입니다. 우리보다 한 단계 뛰어난 아라한, 벽지불, 일체보살, 나름 견성한 사람들이 받는 것입니다. 업식근본훈습은 제8식에 훈습하는 것이고 증장분별사식훈습은 제7식에 훈습하는 것입니다. 견성은 했지만 생멸의 괴로움은 아직 있는 것입니다. 완벽한 부처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명은 능훈(能熏)의 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홀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며, 반드시 진여에 의존해서만이 존재할 수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즉 무명은 훈습을 가하는 능훈(能熏)이고, 진여는 훈습을 받는 소훈(所熏)이며,  결과는 망심(妄心)이다.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이 망심이다. 그러나 그 망심이 오히려 다시 무명에 훈습하여 무명의 힘을 더욱 강화시키는 경우는 망심이 훈습을 가하는 능훈((能熏))이고, 무명이 훈습을 받는 소훈(所熏)이 되고, 그 결과로 불각의 염(染)이 일어나 전식(轉識)의 주관과, 현식(現識)의 객관이 성립되어 망경계(妄境界)가 나타나는 것을 망심훈습(妄心熏習)이라 한다.

업식근본훈습(業識根本熏習)은 업식이 무명에 훈습하여 전식(轉識)과 현식(現識)이 성립되는 것을 말하지만, 이것은 아리야식이 성립되는 것을 의미하며, 아리야식이 있는 한 그사람의 생존은 계속되는 것이다. 아라한, 벽지불, 십지(十地)의 보살들은 윤회의 삼계에서 벗어나 있지만, 아직 아리야식이 있기 때문에 삼계 밖에서의 생사, 즉 불사의 변역생사(變易生死)의 고를 받는다고 한다. 이것은 아주 미세한 고(苦)이기는 하지만, 아직 생멸이 있다는 것이다.
증장분별사식훈습(增長分別事識熏習)은 생사윤회의 고(苦))를 생기게 하는 훈습이다. 망심이 지말무명(枝末無明)에 훈습하여 분별사식(分別事識)의 힘을 강화시키는 것이다.-전종식]

 

[우리의 허망한 업식심이 연(緣)이 되어 근본무명을 도와서 훈습한다는 의미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업식심이 연(緣)이 되어 근본무명을 훈습하여 실상무상(實相無相)인 진여를 미혹하고 전상(轉相)과 현상(現相)을 일으켜 상속케 하는 것이 업식근본훈습(業識根本薰習)입니다. 왜냐하면 이 훈습의 의미 때문에 삼승인(三乘人)인 아라한과 벽지불(辟支佛)과 일체의 대승보살이 분별사식(分別事識)에서 일어나는 범부의 분단생사(分段生死, 업에 의해서 나고 주는 것)는 벗어났으나, 그래도 아뢰야식 내에서 불가사의하게 변역하며 무명으로 진행하는 변역생사(變易生死, 원력에 의해서 나고 죽는 것)의 괴로움을 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지식(智識)이 연(緣)이 되어 지말(枝末)로 일어나 현행(現行)하는 지말무명(枝末無明)을 훈습하여 이혹(二惑)을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증장분별사식훈습(增長分別事識薰習)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훈습으로 인해 견사이혹(見思二惑)을 일으키고 심업(心業)과 신업(身業)·구업(口業)의 갖가지 업(業)을 지어 육도의 범부가 그 업에 얽매어 분단생사(分段生死)의 괴로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 無明熏習(무명훈습)

無明熏習義(무명훈습의) 有二種(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는=無明熏習의 뜻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一者(일자) 根本熏習(근본훈습) 以能成就業識義故(이능성취업식의고)

첫째 근본훈습이니, 능히 업식을 이루게 한다는 뜻인 까닭이며. (업식으로 成就한다는 뜻인 까닭이며)

二者(이자) 所起見愛熏習(소기견애훈습) 以能成就分別事識義故(이능성취분별사식의고)

둘째 소기견애훈습이니, 능히 분별사식을 이룬다=成就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根本熏習 : 근본무명불각이 진여를 훈습하는 근본훈습(根本薰習)이다. 이로 인해 진여를 움직여 업식을 이루게 한다.

所起見愛熏習 : 지말불각이 진여를 훈습하여 분별사식을 성취함.

* 元曉 : 根本熏習이란 근본무명이 진여를 훈습하여 생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을 업식이라 함을 이르는 것. 그러므로 '업식을 성취하는 뜻'이라 말하였다.

所起見愛熏習이란 근본무명에서 일어난 견애가 그 의식을 훈습하여 추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에 분별사식을 성취하는 뜻이다.

不覺
薰習
根本不覺 枝末不覺
阿梨耶識 分別事識
無明 業識 轉識 現識 知識 相續識        
無明業相 能見相 境界相 智相 相續相 執取相 計名字相 起業相 業繫苦相
無明
熏習
根本熏習 →업식을 이룸            
  所起見愛熏習 →분별사식을 이룸
妄心
熏習
  業識根本熏習 →견상과 현상을 일으킴            
        分別事識熏習 →상속상, 집취상, 계명자상을 일으켜, 업을 지어[기업상] 범부들이 고통을 받음[업계고상]
妄境界熏習         增長念熏習 →법집 분별념을 일으킴    
            增長取熏習 →망념에 집착하여 번뇌를 일으킴

[업식은 제8 아뢰야식입니다. 분별사식은 제7 말라식을 말합니다. 말라식에 작용하는 것이 소기견애훈습인 것입니다. 근 본무명훈습이 안으로 들어오면 근본 업식을 훈습하고 밖으로 나가면 제7 말라식을 훈습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망심훈습, 망경계훈습으로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망경계훈습과 무명훈습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무명훈습과 망심훈습은 중복되는데, 망심훈습을 근본무명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근본무명을 둘로 나눈 것입니다.

근본불각이 깨트려져야 부처가 됩니다. 그래서 ‘이뭣꼬’ 즉 이 몸 받기 전에는 무엇이었는가라는 화두를 들고 본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무명을 깨트리면 본래 성품이 보이는 것입니다. 소기견애훈습은 근본훈습에서 파생된 지말불각입니다. 여기까지가 염훈습의 내용입니다.]

 

[근본무명이 진여에 훈습하는 것이 근본훈습(根本熏習)이며, 이것에 의하여 업식(業識)이 성립되고, 이것에 의하여 세중의 세(細中細)의 심생멸(心生滅)이 일어나는 원인을 나타내는 것이다.

소기견애훈습(所起見愛熏習) 신역에는 간단히 견애훈(見愛熏)이라 하고 있다. 이는 지말무명(枝末無明)인 견애(見愛) 등의 번뇌에 의하여 의식(意識,분별사식分別事識)이 성립하는 것이다. 앞에서 의식 즉 분별사식은 견애번뇌(見愛煩惱)에 의하여 증장된다고 설하였지만, 여기서는 증장(增長)을 훈습(熏習)으로 표현한 것이다. 분별사식(分別事識)과 의식(意識)은 동일한 것의 이명(異名)이다.]

 

[근본무명을 연(緣)으로 의지하여 진여를 훈습하는 의미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근본무명불각이 진여를 훈습하는 근본훈습(根本薰習)은 근본무명불각의 훈습으로 진여를 요동시킴으로써 진여를 업식으로 성취한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업식에서 일으킨 지말무명인 견애이혹(見愛二惑)의 훈습인 소기견애훈습(所起見愛薰習)은 지말불각이 진여를 훈습하여 분별사식을 성취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에서는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여 그 때문에 허망한 업식심 등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근본무명이 진여를 의지하고 일어나 삼세와 육추의 총체적인 모습을 이룬 측면에서 요약하여 말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여 업식심을 이루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무명이 이룬 차별의 측면에서 요약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업식은 오의(五意)를 한꺼번에 개괄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무명이 진여를 훈습하여 오의(五意)를 성취한 것입니다. 일으킨 견애(見愛)는 근본무명업식을 의지해서 일어난 지말무명인데, 이 지말무명이 다시 허망한 근본무명업식심을 훈습하여 분별사식을 이룬 것입니다. 

"허망한 경계연(境界緣)을 의지하고 허망한 업식심을 훈습하여 육추상 가운데 지상(智相)·상속상(相續相)의 분별망념과 집취상(執取相)·계명자상(計名字相)의 집착을 이룬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근본무명이 진여를 훈습한다"라고 설명하였기 때문에 앞부분의 훈습하는 의미와 같지가 않다고 하겠습니다. 이상 여기까지는 염법의 훈습하는 측면이었고, 다음은 정법의 훈습하는 측면입니다.]

 

[머리 식히는 이야기; 108번뇌. 절을 할 때도 108 배를 하기기 하지만, 우리는 108번뇌를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불교사전에는 “첫번째 경우는 6근(안이 비설신의)이 6경(색성향미촉법)을 대상으로 각각 호(好), 오(惡), 평(平-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에다 과거, 현재, 미래가 더해 진 것이다.(12x3x3=108) 두 번째 경우는 6근에 고(苦), 락(樂), 사(舍)를 더한 것(18개)과 6근에 호, 오, 평(18개)을 더한 것에 과거, 현재, 미래를 덧붙인 것이다.(18+18=36, 36x3(과거, 현 재, 미래)=108)”

색수상행식의 수는 느낌입니다. 식은 분별하는 인식입니다. 상은 느낌, 분별에 대한 형상입니다. 어떤 느낌이든지 간에 모양으로 다 저장됩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수)들을 6근으로 봅시다. 눈으로 보면 아름답고 추하고, 귀로 들으면 듣기 좋거나 듣기 싫고, 코로 냄새를 맡으면 향기롭거나 역하고, 입으로 맛을 보면 맛있거나 맛없고, 몸으로 느끼면 쾌감이 느껴지거나 불쾌감이 느껴지고, 의식으로 분별하면 좋고 나쁩니다. 식은 분별에서 느끼는 인식으로 고(苦), 락(樂), 사(舍)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에서 보면 6근이 전부 호오(好惡)가 있습니다. 그래서 호오 두 개에 고, 락, 사를 곱하고 여기에다 6근(안이비설신의) 를 곱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곱하는 것입니다.(2x3x6x3) 이렇게 108번뇌가 됩니다.

  수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수는 알아차림이 되기도 합니다. 눈이 형상과 접촉하여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눈에 의지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귀가 소리와 접촉하여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귀에 의지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코가 냄새와 접촉하여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코에 의지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혀가 맛과 접촉하여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혀에 의지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몸이 감촉과 접촉하여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몸에 의지한 느낌이 일어 납니다. 마음이 마음의 대상과 접촉하여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마음에 의지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수(느낌)가 일어납니 다. 수에는 경계가 없지만 좋고 나쁜 것만 있습니다. 그래서 108번뇌를 계산할 때 호오평에서 평을 뺀 것입니다.

108배를 하는 이유는 내가 일으킬 수 있는 모든 번뇌를 소멸시켜 청정법신, 열반적정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은 많이 할 수록 좋습니다. 절을 하면서 내 업이 닦이고 식이 맑아지면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보이거나 일어납니다.-통섭불교]

熏習(훈습)

復次有四種法(부차유사종법) 熏習義故(훈습의고)  

다시 다음에 네 가지 법의 훈습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染法淨法(염법정법) 起不斷絶(기부단절) 云何爲四(운하위사)

염법과 정법이 일어나 단절되지 않으니, 무엇이 그 넷인가?

一者淨法(일자정법) 名爲眞如(명위진여)

첫째 청정한 법=淨法이니, 진여(진여 훈습)라고 하며,

二者一切染因(이자일체염인) 名爲無明(명위무명)

둘째 모든 물듦=一切染의 원인이니, 무명(무명 훈습)이라고 하며,

三者妄心(삼자망심) 名爲業識(명위업식)

셋째 허망한 마음=妄心이니 업식(업식 훈습)이라고 하며,

四者妄境界(사자망경계) 所謂六塵(소위륙진)

넷째 허망한 경계=妄境界이니, 이른바 육진(육진 훈습)이라고 한다.

 

무명훈습(無明熏習)= 근본무명이 불생멸의 진심(眞心)에 활동하여 마음이 생멸을 일으키는 것, 일심(一心)에 무명의 작용이 가해지는 것

인(因)= 여기서의 인은 불각(不覺) 즉 무명을 말한다.

연(緣)= 여기성의 연은 경게상을 말한다. 무명(인因)에 의하여 생기한다.

 

['정법(淨法)은 깨끗한 법으로 진여훈습이 있다. 염법(染法)은 물든 법으로 무명훈습, 업식훈습, 육진훈습이 있다.' 제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우친 것은 연기이며, 연기를 이루고 있는 내용은 무상과 무아입니다. 부처님 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누구도 깨우치면 무상과 무아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누가 깨우쳐도 똑같은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진리를 불교라는 종교로 만들어냅니다. 불교의 첫 출발점은 연기, 바로 무상과 무아입니다.  무상은 불교가 되면서 제행무상이 됩니다. 이 세상에 형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무상합니다. 일정한 모양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모두 언젠가는 변하고 허물어지는, 생멸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고(苦)라고 하셨습니다. 깨달음의 목적은 고(苦)에서 벗어나서 락(樂)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목적입니다. 무아는 불교가 되면 제법무아가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나’라고 하는 독립적인 성품은 없습니다. 전부 다 일심이라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진리를 깨치고 나니 모두 일심인 것입니다. 모를 때는 다 각자입니다. 깨우치고나니 모두의 본래 성품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정법이란 물들기 전의 청정한 본래 성품과 같은 깨끗한 법이며, 깨달음의 세계인 진여입니다. 깨우친 상태에서는 그 어떤 행위도 진여를 따르기 때문에 진여가 훈습되지 무명은 훈습되지 않습니다. 염법은 물든 법입니다. 여기에는 근본 무지인 무명이 훈습되는 무명훈습과 제8식 아뢰야식에 물드는 업식 훈습과 안이비설신의 육근의 대상인 육진[색성향미촉법]이 훈습되는 육진훈습이 있습니다. 육진훈습은 대상에 의해 물드는 것입니다. 내 눈을 통해 무언가를 보면 물들고, 귀를 통해 무언 가를 들으면 물듭니다. 제6식, 제7식 훈습이 육진훈습이 되고 제8식 훈습이 업식훈습이 되어 그 뿌리가 무명훈습입니다.-통섭불교]

 

[거칠고 미세한 두 가지 염심은 무명의 훈습을 그 원인으로 하고 있다. 근본무명(根本無明)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심(眞心)에 훈습하여, 생멸의 파랑(波浪)이 생기는 것이다. 이 염심은 미세한 것(細)에서 거친 것(麤)로 전개 되므로 심생멸에는 인(因)과 연(緣)이 있다.

심생멸은 무명불각(無明不覺)에 의하여 전개되는 것이므로, 이를 ‘인(因)에 의한다’고 말하며, ‘연(緣)에 의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명(無明)의 활동에 의하여, 생멸심에 경계상(境界)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전종식]

 

[진여훈습 (眞如薰習)과 무명훈습(無明薰習)과 망심훈습(妄心薰習)과 망경계육진훈습(妄境界六塵薰習)의 네 가지 명칭을 나열하고, 다음에 훈습의 의미를 설명하였습니다. 즉,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에 훈습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서로 의지하고 일어나서 단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는

첫째로 정법을 일으켜 단절하지 않는 것으로, 이를 생멸문 가운데 진여훈습이라 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육염심과 삼세육추상의 근본종자인 원인인데 이를 무명훈습이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무명으로 일어나는 망심(妄心)인데 이를 업식과 분별사식의 훈습이라고 하였습니다.

네 번째는 분별사식이 반연하는 망경계(妄境界)가 있는데, 이른바 육진훈습에 해당하겠습니다.-수선]

 

 * 熏習(훈습)의 뜻

熏習義者(훈습의자) 如世間衣服(여세간의복) 實無於香(실무어향)

훈습의 뜻이란 마치 세간의 의복과 같이, 실제로는 향기가 없지만,

若人以香而熏習故(야인이향이훈습고) 則有香氣(즉유향기)

만약 사람이 향기를 쐬면(향기를 훈습하면) 향기가 있는 것과 같다.

此亦如是(차역여시) 眞如淨法(진여정법) 實無於染(실무어염)

이 또한 그와 같아서, 진여 정법에는 실로 물듦이 없지만, 

但以無明而熏習故(단이무명이훈습고) 則有染相(즉유염상)

다만 무명으로서 훈습한 까닭에 물든 현상=染相이 있게 된다.

 

훈습(熏習)= 자기의 힘을 다른 상대에게 옮겨 실어주는 것으로, 상대를 자기와 동화시키는 작용.

산스끄리뜨어의 ‘바사나(vāsanā)’를 한역한 것으로 티벳어로는 ‘박착(bag chags)’이라고 한다. 어원적으로 ‘바사나’는 어떤 냄새가 배는 것을 뜻하며 불교에서 전후생을 오가는 업(業, karman)을 설명하면서 체계화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일반적으로 ‘냄새가 옷에 밴다.’, ‘꽃을 만진 손에는 꽃향기가, 마늘을 만진 손에는 마늘 냄새가 밴다.’ 등의 비유를 통해서 널리 알려져 있다.

훈습(熏習)= 지금까지 없었던 습성(習)이 계속 되풀이함에 따라 자기의 습성이 되는 것. 경험을 되풀이하면 습관성이 된다. 그 습관성을 외래적인 것으로 보고 훈습이라고 한다.
염상(染相)= 진여는 무상(一相)이지만 무명의 훈습을 받아 차별상(差別相) 즉 염상을 나타낸다. 여기서’상(相)’이라고 한 것은 무명은 체가 없어 진여를 빌어 모습을 나타낼 뿐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훈습이란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본인이 인식하던 하지 않던 일어난다. 마치 향기로운 꽃 옆에 있으면 내가 인식하든지 인식하지 못하든지 그 향기가 내 옷이나 내 몸에 배는 것과 같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진여 정법이 갖추어져 있어서 물든 마음에 영향을 주며, 거꾸로 무명에 물들어 있는 한 무명이 진여에 영향을 주어 망심(妄心)이 일어난다.-물처럼바람처럼]

 

[네 가지의 훈습요건은 상호 작용하여, 염법과 정법을 생성시켜, 단절되지 않는다. 이 네가지 요건은 ① 정법인 진여의 작용 ② 염법의 원인인 무명 ③ 그래서 나타나는 망심(식작용) ④ 그로 인한 망경계(육진)을 말한다

정법(淨法), 정법의 근원은 미망에서 볼 때 각(覺)이지만, 그 근거는 생멸문 속에 있는 진여(眞如)이다. 진여는 세 가지 뜻을 담아 청정하다고 한다. 첫째 진여는 본성자체가 청정하다는 것 둘째 그 진여는 청정한 훈습력을 갖고 있다는 것 셋째 진여는 염(染)에 반하여 정(淨)을 향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 진여가 미망의 세계에 나타나 각(覺)이 되는 것이므로, 정법의 훈습작용은 진여가 행하는 것으로서 영원히 단절이 없는 것이다.]

 

[훈습(V sana, paribh vana, 어떤 기운이 다른 것에 영향을 남기는 것)의 의미는 비유하자면 의복의 향기가 훈습(薰習)되듯 염법과 정법이 서로서로 의지하여 훈습하며 서로가 원인이 되고 조연이 되는 법에 논리를 합치시켰습니다. 즉, 염법과 정법이 서로 의지하여 훈습한다는 뜻은 마치 세간의 의복에 실제로는 향기가 없지만 가령 사람이 향기로써 의복을 쬐면 그 때문에 곧 의복에 향기가 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즉, 우리가 생선시장에 가면 옷에 생선 냄새가 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염법과 정법이 서로 의지하여 훈습하는 의미도 그러하여 진여정법엔 실제로는 염법이 없지만 단지 무명으로 진여정법을 훈습하기 때문에 곧 염법의 모습이 있게 됩니다. 무명의 염법엔 실제로 진여의 정업(淨業)은 없지만 단지 진여의 정업으로 훈습하기 때문에 곧 진여정업의 작용이 있게 됩니다.]

 

無明染法實無淨業(무명염법실무정업)

무명의 염법에는 실제로 정업이 없지만

但以眞如而熏習(단이진여이훈습) 故則有淨用(고즉유정용)

다만 진여로써 훈습한 까닭에 곧 청정한 작용=淨用(정업의 작용)이 있다.

 

정업(淨業)= 정화시키는 활동력
정용(淨用)= 생멸문에서의 진여의 작용. 진여문(眞如門)에서의 진여는 절대이기 때문에 작용을 말하지 않는다. 본각 안에서 불각을 훈습하여 생사(生死)의 고(苦)를 싫어하는 마음을 생기게 한다. 이 작용을 정용(淨用)이라한다. 무명은 ‘염상(染相)’이라는 ‘상(相)’을 쓰는데 대하여 진여는 ‘정용(淨用)’이라는 ‘용(用)’을 쓰는 것은 진여는 실재(實在)이고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명에 싸인 중생이 늘 어리석은 마음만 내는 것이 아니라 청정한 마음도 내는 것은, 무명의 작용이 아니라 진여의 영향을 받은 작용이다. 무명 자체에는 바른 작용이 없다.]

 

[염법과 정법이 서로가 훈습하는 것을 밝혀 일체의 정법이 일어나 단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앞에서 "아뢰야식이 일체법의 종자를 포섭할 수도 있고 일체법을 현행하여 상속으로 낼 수도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앞의 문장에선 염법과 정법이 생멸하는 모습만을 나타내어, 한결같이 생멸의 염법으로 현행하여 상속하는 의미인 능생일체법(能生一切法)하는 의미만 제시했지, 성인과 범부의 인과관계가 현행으로 상속하여 단절하지 않는 종자훈습의 의미인 능섭일체법(能攝一切法)하는 의미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특별히 진여정업과 망상의 염법이 서로 서로 종자를 훈습하여 정법으로서의 성인과 염법으로서의 범부들의 인과관계가 현행으로 상속하는 데에 이르게 하여 오랜 겁이 지나도록 단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이와 반대로 진여정업으로써 무명염법을 훈습하여 모든 염법의 종자인 근본무명을 소멸시킨다면 진여의 정법작용이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보살의 52위(位)의 정진수행을 이루어 상주불변하는 보리열반의 불과를 취하게 됩니다. 이것이 불가사의하게 습기가 종자를 훈습하고 아뢰야식에 훈습된 종자는 다시 전변하여 현행으로 상속하는 세력입니다. 이야말로 위대한 힘입니다. 그 때문에 여기에서 훈습하는 의미를 제시하고, 다음에서는 우선적으로 염법의 훈습을 밝힘으로써 진여를 생멸문 가운데 두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무명의 불각(不覺)이 진여의 본각(本覺)을 훈습하는 문제를 밝힙니다.-수선]

 

 * 染法熏習(염법훈습)

云何熏習(운하훈습) 起染法不斷(기염법부단)

어떻게 훈습하여 염법을 일으켜 단절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所謂以依眞如法故(소위이의진여법고) 有於無明(유어무명)

이른바 진여법에 의지하기 때문에 무명이 있고, 

以有無明染法因故(이유무명염법인고) 卽熏習眞如(즉훈습진여)

무명에 염법의 원인=染法因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며, 

以熏習故則有妄心(이훈습고즉유망심)

훈습하기 때문에 곧 허망한 마음=妄心이 있게 된다.

 

무명염법인(無明染法因)= 무명이라는 염법의 인(因)을 말한다. 무명이 다른 염법의 인(因)이 되는 것으로서, 이 활동이 무명훈습이다.

염인(染因)= 염법의 원인, 즉 미망의 원인이 되는 무명. 삼세 육추의 지말불각이나 육염의 지말무몀 모두가 염인이지만, 여기에서는 그 근본을 따져 무명(無明)을 세우고 있다.

망심(妄心)= 인식작용을 일컫는 말.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지식(智識), 상속식(相續識)의 오식(五識)이 이에 속하지만 여기에서는 그 근본을 잡아 업식(業識)을 세우고 있다.]

 

[‘依眞如法故 有於無明 진여의 법에 의지함으로, 그 때문에 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밝힌 것은, 훈습을 가하는 무명이 훈습을 받는 진여가 있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을 말한다. 무명은 능훈(能熏)의 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홀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며, 반드시 진여에 의존해서만이 존재할 수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즉 무명은 훈습을 가하는 능훈(能熏)이고, 진여는 훈습을 받는 소훈(所熏)이며, 결과는 망심(妄心)이다.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이 망심이다. 그러나 그 망심이 오히려 다시 무명에 훈습하여 무명의 힘을 더욱 강화시키는 경우는 망심이 훈습을 가하는 능훈((能熏))이고, 무명이 훈습을 받는 소훈(所熏)이 되고, 그 결과로 불각의 염(染)이 일어나 전식(轉識)의 주관과, 현식(現識)의 객관이 성립되어 망경계(妄境界)가 나타나는 것을 망심훈습(妄心熏習)이라 한다.-전종식]

 

[依眞如法故 有於無明 : 근본무명이 진여에 의지해서 일어남을 말한다.

以有無明染法因故 卽熏習眞如 : 무명염법의 인(因)인 무명이 진여를 훈습함을 말한다.

卽熏習眞如 以熏習故則有妄心 :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여 망심이 있게 됨. 여기서 망심이란 업식을 말하니 아리야식이 일어남을 말한다.

* 元曉 : 以有無明 熏習眞如란 근본무명이 훈습하는 뜻이다.

以熏習故有妄心이란 무명의 훈습에 의하여 업식심이 있는 것이며, 이 망심으로 도리어 무명을 훈습하여 그 요달하지 못함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전식과 현식 등을 이루는 것이니, 그러므로 불각하여 망념이 일어나 망경계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별기) 불각하여 망념이 일어남은 이것이 전상(轉相)이고 망경계를 나타냄은 이것이 현상(現相)이다.

* 진여는 본래 망심이 없지만,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여 망심이 일어난다. 진여법에 의지하여 무명이 있다는 것은 무명이 진여를 떠나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음을 떠나면 무명도 없기 때문이다.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여 업식이 일어나니, 업식이란 진여의 작용이므로 진여가 없다면 업식도 없다. 그러므로 진여에 의지한다고 하였다.

업식(망심:불각)이 다시 진여를 훈습한다고 하는 것은 아리야식 속에 화합되어 있는 진여를 말한다. 업식이 진여를 훈습하여 전식과 현식을 내니, 현식이 바로 망경계이다.]

 

[무명의 실재가 실체(實體)로서 진여와 동등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명은 체(體)가 없는 것이므로 상항불변(常恒不變)의 진여를 의지처로 하여 공존하고 있다고 보는 이원적논리(二元的論理)이다. 우리가 마시는 식수(食水) 속에는 순수 H2O를 의지처로 하여 다른 불순물이 공존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진여는 아리야식의 각(覺)의 작용이며, 무명은 불각(不覺)의 작용이다. 각과 불각은 상호 구별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불각 속에 각(覺)이 있으며, 시각(始覺) 속에도 불각이 있다. 진여의 각(覺)은 향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를 반류(反流)의 힘이라 하며, 또한 오계(悟界)에 환원하는 의미로 환멸문(還滅門)이라고도 하나, 이에 반하여 우리 마음 속에서의 악(惡)의 힘은 불각(不覺)이며, 미계를 나타내는 유전문(流轉門)이다. 불각은 각의 염상(染相)이며, 각은 불각 속에 살아있는 정화의 힘이다.]

 

[훈습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습훈(習熏)이고, 두 번째는 자훈(資熏)입니다. 습훈(習熏)이란 근본무명이 일심진여를 염법과 정법의 종자로 훈습하여 염법과 정법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무명의 습기가 진여를 물들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훈(資熏)은 근본무명으로 이루어진 무명의 생멸하는 업식이 반대로 근본무명을 다시 훈습하여 일심진여의 이치를 더욱 밝게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는 생멸업식의 허망한 마음과 허망한 경계로 현행하는 것과 현행하는 허망한 경계에서 허망한 마음의 분별을 일으키는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이 서로서로 의지하여 훈습한다는 의미에서 자훈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진여의 일심법을 의지하기 때문에 근본무명이 있는, 즉 근본무명이 진여를 의지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무명염법의 종자인 원인이 바로 근본무명이 있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합니다. 그러므로 진여가 원인이 되고 무명이 반연이 되기 때문에 무명의 습기가 도리어 진여를 훈습하게 됩니다. 그래서 근본무명이 진여를 훈습하기 때문에 곧 허망한 업식심(業識心)이 있게 되고, 허망한 업식심이 있으면 곧 근본무명을 훈습합니다. 그리하여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여 진여를 생멸하는 아뢰야식으로 변하게 합니다. 근본무명이 있기 때문에 무명에 있는 습기의 세력이 진여를 훈습하여 생멸하는 업식심을 이루기 때문에 이 근본무명이 곧 업식의 허망한 마음을 의지합니다. 그러기에 이 업식이 곧 근본무명을 훈습하여 일심의 진여법을 더욱 밝게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로 인해서 일심의 진여법을 밝게 알지 못하게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인 불각이 허망한 생각을 일으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근본무명이 바로 진여인 인(因)의 연(緣)이 되어 진여를 훈습하여 삼세(三細)와 육추(六麤)의 양상으로 나고 소멸하면서 상속하는 염법이 단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무명(無明)으로 말해 본다면 진여법과 하나인 일심을 밝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홀연히 무명불각의 망념을 일으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진여(眞如)의 원명(圓明)함의 반대 의미인 무명(無明)이라고 하였습니다. '능가경'에서, "이 무명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진여를 의지하여 일어난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무명인 불각에서 일으킨 하나의 망념훈습의 세력이 본래 밝은 본각진여의 지혜를 장애하고 가려 버립니다. 그 때문에 진여의 밝음을 잃고 그로 인해 진여가 변하여 생멸하는 업식이 되며, 따라서 이것을 허망한 업식심인 망심(妄心)이 되어버립니다. 이 업식심이 일어난 곳은 알기 어려워, 그 망심의 진행이 가장 극도로 미세합니다. 그런 이유로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다시 구상(九相)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대체로 일념무명이 삼세육추를 내는 종자가 됩니다. 진여는 그 망념의 훈습을 당하여 이미 무명업식심으로 변하였다면 이 무명일념이 업식의 의지처가 되어 업식이 반대로 무명일념을 훈습함으로써 진여일심법을 더욱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상(轉相)과 현상(現相)이 이루어져 삼세상(三細相)으로 환하게 나타나 망심의 분별과 망경계가 이로 인해 성립됩니다. 그러므로 "무명불각이 망념을 일으켜 허망한 경계상으로 나타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허망한 경계상이 나타나면 곧 그 경계를 연으로 의지하고 일심진여의 바다를 훈습하여 전칠식(前七識)인 지상(智相)과 상속상(相續相)의 무명이란 파랑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입니다. 그리하여 육추상을 이루며, 나아가서는 기업상(起業相)인 삼업을 짓고 삼계에 나고 죽는 윤회의 괴로움을 받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 됩니다. 실로 이 때문에 삼계에 생사하는 원인인 혹(惑)과 업(業)과 결과인 고(苦) 즉 혹·업·고가 단절하지 않고 상속하게 됩니다. 이러한 육추 가운데서 처음 두 가지 지상(智相)과 상속상(相續相)이 염(念)이고, 다음의 두 가지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이 집착입니다. 그리하여 미혹을 일으키어 갖가지 업을 짓는 기업상(起業相)으로 업을 지어 일체 몸과 마음 등의 괴로움을 받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의 과보를 받습니다.]

 

以有妄心(이유망심) 卽熏習無明(즉훈습무명)

망심이 있음으로 해서 곧 무명을 훈습하며, 

不了眞如法故(불료진여법고) 不覺念起(불각념기) 現妄境界(현망경계)

진여법을 완전히 알지 못하기=不了 때문에 불각의 망념(轉識)을 일으켜 허망한 경계=妄境界를 나타낸다.

 

훈습무명(熏習無明)= 망심은 무명훈습에서 일어나지만, 도리어 그 망심이 무명에 훈습하여 그 힘을 강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망경계(妄境界)= 삼세(三細)의 하나인 경계상을 말하며, 지식(智識) 등이 이것을 외계(外界)의 실재(實在)라고 망상하여, 자기의 경계를 만든다. 이것이 훈습의 ‘연(緣)’이 된다. 그러나 망경계가 있기 때문에 망심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이를 망경계 훈습이라고 한다.

 

[망경계(妄境界)= 경계라 함은 인식의 대상을 말하는 것으로 현식, 지식 상속식, 의식(분별사식) 등에 각각의 망경계가 있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 근본을 잡에 경계상(境界相)을 취하는 것이다. 이 경계상은 색성향미촉법 등, 육진(六塵)의 외계가 마음에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 밖의 육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以有妄心 卽熏習無明 : 위에서는 무명이 염법의 인이라고 하였고, 여기서는 다시 망심이 무명을 훈습한다고 하였다. 이는 망심이 무명을 훈습하여 미혹됨을 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식과 현식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以有妄境界染法緣故(이유망경계염법연고) 卽熏習妄心(즉훈습망심)

허망한 경계의 염법의 반연이 있기 때문에 곧 허망한 마음을 훈습하여, 

令其念著造種種業(령기념착조종종업) 受於一切身心等苦(수어일체신심등고)

그것으로 하여금 생각하고 집착하게 하여, 갖가지 업을 지으며, 일체 몸과 마음=身心의 괴로움을 받게 된다.

 

[元曉 : 이 경계로 도리어 현식을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을 훈습한다고 하는 것이다.

令其念著란 제칠식을 일으키는 것이고, 造種種業은 의식을 일으키는 것이고, 受於一切身心等苦란 과보를 받는 것이다.

* 憨山 : 일념무명이 삼세육추를 내는 종자가 된다. 진여는 망념의 훈습을 당하여 이미 무명업식성으로 변하였다. 이 무명일념이 업식에 의지[因]가 되어 업식이 반대로 무명일념을 훈습함으로써 진여일심법을 더욱 알지 못하게 한다. 그 때문에 轉相과 現相이 이루어져 삼세상(三細相)으로 환하게 나타나 망심의 분별과 망경계가 이로 인해 성립된다. 그러므로 ‘무명불각이 망념을 일으켜 허망한 경계상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허망한 경계상이 나타나면 즉시 그 경계를 연으로 의지하고 일심진여의 바다를 훈습하여[資熏] 전칠식의 무명파랑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육추상을 이루며, 내지는 삼업을 짓고 삼계생사의 괴로움을 받는다. 실로 이 때문에 삼계생사의 원인과 결과인 혹,업,고가 단절되지 않고 상속하는 것이다.

육추 가운데 처음 둘(智相, 相續相)이 염(念)이고 다음의 둘(執取相, 計名字相)이 착(着)이다.

* 망경계가 다시 망심(業識)을 훈습하여 지식(智識)과 의식(意識)을 내며 이로 인해 육추(六麤)의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 괴로움을 겪게 된다.

영기념착(令其念著)은 지식(智識)에 의하여 자아에 집착하고 이것이 상속하는 것, 대상에 집착하는 것과 의미와 개념에 집착하는 것[執取相, 計名字相]을 말하며,

조종종업(造種種業)은 갖가지 업을 짓는 것[起業相]을 말하며,

受於一切身心等苦는 갖가지 괴로움을 겪는 것[業繫苦相]을 말한다]

 

[훈습과 연관된 부처님의 일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길에 떨어진 종이를 보시고 제자들에게 그것을 주워 보라고 했습니다. 주워보니 비린내가 나는 고기를 쌌던 종이였습 니다. 좀 더 걸어가다 보니 다른 종이가 떨어져 있어 그것도 주워 보라고 합니다. 주워보니 향기가 나는 향을 싼 종이였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훈습되는 것입니다. 내가 공부하고 수행하면 그것이 훈습되어 맑고 향기로운 냄새가 나고 악한 행동을 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 그것이 훈습되어 탁하고 비린내가 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대로 향기가 날 뿐입니다. 원래 우리는 청정법신인 데 무명에 의해 훈습되기 때문에 오염된 모양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여로 훈습하기도 하고 무명으로 훈습하기도 합니다.

훈습은 크게 오염된 염훈습과 깨끗한 정훈습이 있습니다. 염훈습에는 망경계훈습, 망심훈습, 무명훈습이 있습니다.

망경계훈습에는 증장념훈습, 증장취훈습이 있습니다. 증장념훈습은 생각을 자꾸 증장시키는 훈습이고 증장취훈습은 집착을 자꾸 증장시키는 훈습입니다.

망심훈습에는 업식근본훈습, 증장분별사식훈습이 있습니다. 업식근본훈습은 제8식 아뢰야식에 훈습하는 것이고, 증장분별사식훈습은 제7식 말라식을 증장시키는 훈습입니다.

무명훈습에는 근본훈습, 소기견애훈습이 있습니다. 근본훈습은 뿌리가 되는 훈습이고, 소기견애훈습은 생각, 애욕을 증장시키는 훈습입니다.

정훈습은 망심훈습과 진여훈습이 있습니다. 망심훈습에는 분별사식훈습과 의훈습이 있습니다.

진여훈습은 자체상훈습과 용훈습이 있습니다. 여기도 체상용이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체상용의 구조입니다. 뿌리(본체), 모양, 작용이 있습니다. 본체, 본질(체)과 모양(상), 살아가는 방법, 생각(용)입니다. 여기에 망심훈습이 두 개가 나옵니다. 오염된 망심 훈습은 점점 더 우리를 집착하게 하고 아집에 빠지게 합니다. 하지만 깨끗한 망심훈습은 오염된 것으로부터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③ 生滅(생멸)의 相(상)

復次分別生滅相者有二種(부차분별생멸상자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또한 생멸상을 분별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麤(일자추) 與心相應故(여심상응고)

첫째는 거친 번뇌=麤이니, 이러한 추와 더불어 마음이 상응하는 때문이며, 

二者細(이자세) 與心不相應故(여심불상응고) 

둘째는 미세한 번뇌=細이니, 이러한 미세한 것과 더불어 마음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又麤中之麤(우추중지추) 凡夫境界(범부경계)

또 거친 가운데의 거친 번뇌는 범부의 경계이며, 

麤中之細(추중지세) 及細中之麤(급세중지추) 菩薩境界(보살경계)

거친 가운데에서의 미세한 번뇌와 미세한 가운데의 거친 번뇌는 보살의 경계이며,

細中之細(세중지세) 是佛境界(시불경계)

미세한 가운데의 미세한 번뇌는 바로 부처의 경계이다.

 

* 상응한다는 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마음과 경계가 나뉘어져 마음과 경계가 서로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마음에 따라 경계가 상응하여 물들기 때문이다.

高淳豪 元曉 憨山
三細 無明業相 細中細 佛 경지에서 깨달음 細中細 佛의 경지에서 깨달음 細中細 佛의 경지에서 깨달음
能見相 細中麤 보살 경지에서 깨달음 細中麤 보살이 알 수 있음 細中麤 초지 이상의 법신보살이 깨달음
境界相
六麤 智相 麤中細 麤中細 麤中細
相續相 麤中麤 범부가 알 수 있음
執聚相 麤中麤 범부 경지에서 깨달음 麤中麤 삼계 內凡인 삼현위에서 깨달음
計名字相    
起業相        
業繫苦相        

 

此二種生滅(차이종생멸) 依於無明熏習而有(의어무명훈습이유)

이 두 가지 생멸은 무명의 훈습에 의지해서 있는 것으로, 

所謂依因依緣(소위의인의연)

이른바 인에 의지하고 연에 의지한다.

依因者(의인자) 不覺義故(불각의고) 依緣者(의연자) 妄作境界義故(망작경계의고)

인에 의지한다는 것은 불각(무명)의 뜻이고, 연에 의지한다는 것은 망령되게 경계를 짓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元曉[별기] : 불각의 뜻이란 근본무명이며, 잘못 경계를 짓는다는 것은 현식(現識)이 나타내는 경계이다.

* 元曉[별기] : 만약 생의 인연을 널리 논한다면 모든 식에는 네 가지 인연이 있다.

≪십권능가경≫의 설명 - 네 가지 인연이 있어야 안식(眼識)이 생기는 것이니, ① 자내신(自內身)임을 깨닫지 못하고 경계를 취하기 때문이다. ②.무시이래로 허망하게 색경계(色境界)를 분별하고 훈습하여 희론을 집착하기 때문이다. ③.식이 자성체(自性體)가 이러하기 때문이다. ④, 여러 가지 색상을 보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권능가경≫의 설명 - ①.자심이 나타낸 것을 섭수(攝受)함을 깨닫지 못한다. ②.무시로부터 경계를 경험하는 습기를 헤아려 집착한다. ③.식성(識性)이 자성인이다. ④.여러 가지 색상을 보려 한다.

원효의 해설 ①.자심이 섭수함을 깨닫지 못함 - 근본무명의 인(因)을 밝힌 것이니, 그 색경계가 거친 모양이어서 현식에 나타난 것이며, 식(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이는 자심이 섭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색진(色塵)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②.무시로부터 헛되이 경계를 경험한 습기를 헤아려 집착함 - 무시망상훈습인을 나타낸 것이니 현식이 본래 색진에 집착함을 말하며, 이러한 습기를 내어 안식을 내어 집착하는 것이다.

③.식성(識性) - 자류인(自類因)을 나타내는 것이니, 앞서의 안식의 자성으로 인해 분별하는 것이다.

④.여러가지 생상을 보려한다. - 명언훈습인(名言熏習因)을 나타내는 것이니, 앞서의 안식이 색상을 보고 의식은 이 색상을 보는 안식을 반연하여 의언분별(意言分別)로 집착하여 보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물처럼바람처럼]

 

[추생멸, 심생멸, 추는 거칠고 드러나는 것이고, 심은 깊은 것입니다. 

거친 번뇌라는 것은 우리가 느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제7식까지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과 직접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일으키는 생각의 뿌리는 제7식입니다. 내가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내 유전자, 저장창고에 저장된 흔적들이 ‘나’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판단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것들이 거친것 추(麤)입니다. 마음과 더불어 상응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일으키는 생각과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일으키는 생각은 본성이 오염되어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본성에 오염된 색깔이 입혀진다면 그 색깔이 입혀진 본성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깨우치고 견성하면 본성 그대로를 내놓을 것 입니다. 우리 중생은 평생 제7식과 똑같은 생각을 내놓듯이 자식도 내 자신의 업에 의해 비슷한 자식을 낳습니다. 인연에 의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부모 자식 인연은 뗄 수 없습니다. 

세(細)는 제8식 아뢰야식의 영역으로 오염된 업과 상응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麤中之麤 거친 중에 거친 번뇌’는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모든 생각입니다. ‘麤中之細, 거친 가운데 미세한 번뇌’, ‘細中之麤, 미세한 가운데 거친 번뇌’는 보살의 경계로 제8식 아뢰야식을 본 사람, 견성한 사람입니다. 처음 시작하는 본질은 미세한 가운데 미세한 것입니다. 그 거대한 황하강의 근원을 살펴보면 히말라야산 중턱에서 솟는 작은 샘에서 흘러나온 물로 시작됩니다. 무명을 일으키는 그 하나의 점 그것이 미세하고 미세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려면 부처의 경계에 가야 합니다.-통섭불교]

 

[생멸상(緣滅相)이란 마음의 인식에 의하여 생멸하는 ‘모습’이다.

생멸상의 두 가지 종류란, 첫째는 마음의 거친 생멸상이다. 육염의 집상응염(執相應染), 즉 육상 중 집취상(執取相) · 계명자상(計名字相)의 번뇌와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 즉 상속식의 번뇌 및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 즉 지식이 일으키는 번뇌가 여기에 속하며, 이는 마음과 서로 대응하는 생멸의 모습이다.

둘째는 미세한 생멸상이며, 육염 중 현식(現識)의 작용인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과 전식(轉識)의 작용인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 업식(業識)의 작용인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의 셋이며, 이는 마음과 서로 대응하지 않는 불상응(不相應)의 생멸상이다.

상응염과 불상응염은 마음이 주관과 객관으로 분열되어 서로 대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른 구분이다.

거친 염심으로 구분된 셋은 상응염으로서 마음이 주관과 객관으로 분열, 주관이 객관에 작용하는 마음의 활동이 명확하고, 진폭(震幅) 또한 크고 복잡하다.

미세한 염심인 불상응염(不相應染)은 주객의 분열이 아직 없으며, 주관과 객관의 대응이 성립되지 않아 불상응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첫째 ‘麤中之麤, 추중의 추’는 가장 거친 심작용(心作用)으로서 범부의 마음을 말하며, 육염(六染) 중의 여섯 번째의 집상응염(集相應染)이 이에 속한다. 이는 자아의식으로 말미암아 대상에 집착하고, 그러한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대상을 인식하며, 인식된 대상 그대로 외계에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라 그 대상에 애착이나 혐오를 일으켜 집착하고, 자기가 보고 있는 외계(外界)가 오직 마음이 만들고 있다는 유심소작(唯心所作)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하는 범부의 경계라 일컬어진다.

둘째는 '細中之麤, 추중의 세'의 염심으로 육염 중 부단상응염과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이다. 이는 보살의 경계로서, 이 두가지는 본능적 인식이나 무의식의 영역까지 포함되며, 자아의식이 수반되지 않는 것이므로 인식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집(法執)의 세계이다. 분별지상응염은 제 2지인 구계지로부터 부분적으로 분리되어,  7지인 무상방편지에서 완전히 분리제거 되는 것이므로, 이 염심은 ‘추중의 세’에 속하는, 부단상응염과 더불어 분별지상응염은 보살의 경계가 된다.

셋째는 ‘細中之麤, 세중의 추’이다. 육염 중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과 능견불상응염(能見不相應染)이 이에 속하며, 이 두 불상응염은 앞서 설명한 상응염과 비교하면 미세한 것이지만, 최후의 근본업부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과 비교하면 거칠기 때문에 이를 ‘세중의 추’라 한다. 현색불상응염은 무명에 의하여 기동된 마음이 외계를 비추어 내는 모습, 즉 경계상이다. 이는 현식(現識)으로 식(識)이 나타난 것이며 제8지인 색자재지()에서 분뢰된다. 능견심불상응염은 동심()가운데 주관적 존재로서, 이 염심(染心)은 제9지인 신자재지(色自在地)에서 제거된다.

추중의 세’와 ‘세중의 추’는 보살의 수행단계에서 깨달아 제거되는 것이므로 이를 보살의 경계라고 한다.-전종식]

 

若因滅則緣滅(야인멸즉연멸) 因滅故(인멸고) 不相應心滅(불상응심멸)

만약 인이 멸하면 연도 멸하는 것이니, 인이 멸하였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 마음=不相應心이 멸하고, 

緣滅故(연멸고) 相應心滅(상응심멸)

연이 멸하였기 때문에 상응하는 마음=相應心이 멸하는 것이다. 

 

[元曉 : 若因滅則緣滅은 어느 자리(位)에 따르더라도 대치하게 될 때 무명인(無明因)이 멸하면 경계연(境界緣)이 따라 멸하는 것이다.

因滅故 不相應心滅은 세 가지 불상응심이 바로 무명인에 의해 생기기 때문에 무명이 멸할 때 또한 따라서 멸하는 것이다. 緣滅故 相應心滅은 세 가지 상응심이 경계연을 따라서 일어나기 때문에 경계가 멸할 때 따라서 멸하는 것이다.

* 憨山 : “추상(麤相)과 세상(細相)인 두 종류 생멸상이 무명을 의지해서 있다.”함은 이 육염심이 인과 연을 의지해서 나왔으므로 역시 인과 연을 의지해서 사라짐을 나타내었다. 최초 근본무명의 불각으로 인해 삼세의 생멸상(生滅相)이 나왔고, 삼세상 가운데는 추상인 경계상이 연이 되어 육추로 생멸하는 모습[六麤相]이 증가해서 자라나게 되었다.

지금 근본무명인이 사라졌다면 경계연도 역시 사라진다. 때문에 무명의 인이 사라지면 삼세상이 사라지고, 연이 사라지면 육추상이 사라진다.

* 무명이 사라지면 불상응심과 상응심이 모두 사라지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체득을 해야 한다.

* 지운 : 근본무명[因]이 진여에 영향을 주어 업식이 일어났다. 업식을 지말무명이라고 한다. 업식에서 능견상과 경계상이 일어나니 능견상은 주관이고 경계상은 객관이다. 이 세 가지는 아리야식의 작용 모습이다. 경계상이 다시 아리야식에 영향을 주어 지식(智識)과 의식(意識)이 일어났으며, 지식과 의식이 경계상[緣]을 인식하면서 갖가지 식이 일어난다. 따라서 근본무명을 타파하면 모든 심식 현상은 사라지지만, 근본무명을 없앨 수 없다면 우선 연(緣)이 되는 경계상을 타파해야 한다. 근본무명 타파로 바로 들어가는 수행법이 바로 화두참구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멸하는 것으로, 내 생각도 생했다가 멸하고 이 우주도 생했다가 멸합니다. 이것은 무명의 훈습에 의해 생멸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과 연기가 있습니다. 바로 부처님이 깨우치신 내용이 연기입니다. 연기를 거시적으로 표현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인과법칙, 풀어쓰면 인연과법칙입니다. 인(因)은 주체적인 원인이라면 연(緣)은 비교적 부수적인 것입니다. 이 인연이 합해져서 과(果)를 일으킵니다. 만약 땅에 수박씨를 심는다고 했을때 수박씨는 인이고 땅은 연에 해당합니다. 수박이 열리는 것이 과입니다. 하지만 땅이 비옥하면 수박이 잘 열릴 것이고 척박하면 잘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씨앗이 상태가 안 좋으면 아무리 땅이 비옥해도 잘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인이 직접적으로 크게 작용하고 연은 부수적으로 적게 작용합니다. 중생은 어리석게 도 남 탓을 많이 합니다. 문제의 본질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이 바뀌면 문제해결은 쉽습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본인은 맞다고 생각하여 죽어도 자신을 바꾸지 않습니다. 자꾸 상대방을 바꾸려고 합니다. 내가 바뀌면 세상은 그냥 바뀌어 버립니다. 여기서 본인은 인이고 남은 연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지만 자신의 관점을 바꾸어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불편한 점이 사라지게 되면 상대방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묘한 이치입니다. 집착, 탐욕, 무지를 멈추면 상대방의 진가가 나름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부처가 되면 이 세상은 전부 다 부처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마음에 안 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생명에게 끝없는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이것은 7지보살 이상의 단계입니다. 내가 인(因) 이라면 내 주변의 모든 것은 연(緣)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책임을 미루고 핑계를 대지만 결국 그것은 본인의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인입니다. 죽지 않는 한 의지가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은 가만히 놔두고 연만 핑계대고 있는 것입니다. 무명에 물들어 불각의 상태에 있습니다. 불각의 상태에 있으면 끝없이 경계를 일으킵니다. 무명 때문에 불각의 상태에 있는 것은 인(因)이고 불각의 상태에서 끝없이 경계를 일으키는 것은 연(緣)입니다. 인이 주체, 나, 뿌리라면 연은 주체에 의해 일어 나는 작용들, 대상, 가지 줄기입니다.]

 

問曰(문왈) 若心滅者(약심멸자) 云何相續(운하상속)

문나니, 만약 마음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며? 

若相續者(약상속자) 云何說究竟滅(운하설구경멸)

만약 상속한다면 마침내 어떻게 멸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答曰(답왈) 所言滅者(소언멸자) 唯心相滅(유심상멸) 非心體滅(비심체멸)

답하나니, 멸한다고 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현상=心相이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지, 마음의 본체=心體가 멸하는 것이 아니다.

 

[불상응심과 상응심이라는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은 마음의 현상이 사라짐을 말하지, 심체가 사라짐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심상이 사라졌다하여도 단멸(斷滅)이 아니지만, 심체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니 그렇다면 마음의 모습은 어떠한가 하고 묻는 것도 심상이 사라졌으므로 맞지 않는다.

* 元曉 : 법 가운데 “없어진다.”는 것은 무상정(無想定)에 들어갈 때 모든 식이 없어진다고 말한 것과 같이 다만 거친 식의 모습만 없앨 뿐이며 아리야식의 마음 바탕을 없앤 것은 아니다. 그르므로 “오직 마음의 모습만 없어진다.”고 말한 것이다. 또 다시 위에서 “인(因)이 없어지기에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이 없어진다.”고 한 것은 다만 마음 가운데 업상(業相) 등만 없어진다고 말할 뿐이며 근본 성품인 마음의 바탕이 없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因)이 멸하면 연(緣)도 멸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나이지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생각이 평생 연(緣)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괜찮은데 대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원인은 본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어진 것 중에서 잘못된 것이 있으면 불평합니다. 잘된 것이 있으면 불평하지 않습니다. 끝없는 긍정이란 원인을 자신에게 찾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줍니다. 다시 인이 멸하면 연도 멸한다는 말로 돌아가서 뿌리가 죽으면 다 죽습니다. 주체가 소멸하면 주위의 대상은 없습니다. 인이 멸하면 제8식 불상 응심이 없어집니다. 무명의 뿌리가 없어지면 나의 본성을 볼 수 있습니다. 연이 멸하면, 일어나는 경계, 작용들을 세세히 알면 상응심 제7식, 제6식 이것들이 없어집니다. 멸한다는것은 결국 아는것과 같은 말입니다. 만약 누가 부처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누군가 내 앞에 있네.”도 되고 “이 스크린 화면이 누구 앞에 있네.”도 될 것입니다. 7 곱하기 7은 49도 맞고 6 곱하기 6은 36 도 맞는 것입니다. 우리가 뿌리를 보면 즉 견성을 하면 뿌리를 알게 됩니다. 알면 다 맞지만 모르면 다 틀린 답입니다. 그래서 불상응심이 멸한다고 하는 것은 제8식 아뢰야식을 알아서 견성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번뇌와 망상, 집착을 멸하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며, 상속한다면 어떻게 멸하는지 말할 수 있겠는가?’에서 마음이 멸해도 마음의 뿌리까지 멸한 상태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如風依水而有動相(여풍의수이유동상)

(이를 비유하면) 마치 바람이 바닷물에 의지하여 (파도를) 움직이는 현상이 있는 것처럼,

若水滅者(약수멸자) 則風相斷絶(즉풍상단절) 無所依止(무소의지) 以水不滅(이수불멸)

만약 바닷물이 없어지면 바람의 모습도 끊어져서(사라지니) 의지할 바가 없어서 그치겠지만(파도는 없어지지만), 바닷물이 없어지지 않으므로 

風相相續(풍상상속) 唯風滅故(유풍멸고) 動相隨滅(동상수멸) 非是水滅(비시수멸)

바람의 모습이 상속되는 것이다. 오직 바람이 멸하였기 때문에 (물의) 움직임도 따라서 멸하였지만 바닷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명 또한 그러하여 심체에 의지하여 움직이지만, 만약 심체가 멸하면 중생이 끊어져서 의지할 바가 없지만 심체가 멸하지 않으므로 마음이 상속하는 것이며, 오직 무명만 멸하기 때문에 심상이 따라서 멸하지만 심지(心智)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 바람이 움직이는 현상을 보기위해서는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바람의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이를 물이 없으면 바람의 모습이 사라진다고 하여 물에 비유하였다. 물도 물 그 자체가 파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람 때문에 파도를 만든다. 만약 바람이 자면 파도도 잔다. 그렇다고 해서 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심상(心相)은 마음이 갖고 있는 모양입니다. 심체(心體)는 마음의 체로 뿌리에 해당합니다. 멸한다고 했을 때 내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들의 모양들만 없어지는 것이지 뿌리가 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람은 일반적으로 고기압과 저기압 때문에 일어나는 공기의 움직임을 말합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공기도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움직이게 되고 이것이 바람입니다. 만약 어떤 곳에 바람이 분다고 한다면 고기압과 저기압이 형성되어서 부는 것입니다. 이 바람 때문에 바닷물이 파도를 일으켜 철썩철썩 바위를 칩니다. 바람이 없다면 물결이 일렁여 파도를 일으켜 물결을 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바람이 안불면 바닷물만 있고 파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닷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심상만 없어지는 것이지 심체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해서 나타낸 것입니다. 이 우주에 충만해있는 일심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멸한다는 것은 심상만 없어지는 것이지 심체가 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없으니 파도만 없는 것처럼 보이지 바다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바람이 비유하는 무명이 없어지면 심상은 멸하지만 심체, 일심은 그대로 있다는 말입니다. 일심은 없어지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있을 뿐입니다.
결국 바닷물은 본체, 자성청정심을 의미하고 파도는 지성을 의미하고 바람은 무명을 의미합니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칩니 다.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으면 파도가 치지 않습니다만 바닷물이 있는 한 바람이 불면 또 파도가 칩니다. 무명풍에 의해 우리 몸이 생기고 여러 가지가 생겨나지만 본체, 청정한 본래 마음은 그냥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우리 각자는 물들어 있는 모습입니다. 무명에 의해 물들어 있지만 본체, 일심은 없어지지 않고 우주에 충만해 있을 뿐입니다.]

 

無明亦爾(무명역이) 依心體而動(의심체이동)

무명 또한 그와 같아서 심의 본체=心體에 의지하여 움직이지만, 

若心體滅(약심체멸) 則衆生斷絶無所依止(중중생단절무소의지)

만약 심체가 사라지면 중생도 단절되어 의지할 바 대상이 없지만, 

以體不滅(이체불멸) 心得相續(심득상속)

심체는 멸하지 않으므로 마음이 상속하는 것이며, 

唯癡滅故(유치멸고) 心相隨滅(심상수멸) 非心智滅(비심지멸)

오직 어리석음(무명)만 멸하였기 때문에 마음의 현상=心相도 따라서 멸할지언정, 마음의 지혜=心智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는 입의분 가운데서, "이 마음이 생멸하는 모습"이라고 했던 것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즉, 일심진여는 본래 상대적인 차별상이 없는데 무명의 생멸로 인하여 삼추와 삼세의 무명과 이혹(二惑)과 육염심으로 그 양상이 나타납니다. 본문은 육염심의 망념을 분별하는 생멸의 양상에 거친 마음의 상응과 미세한 마음의 불상응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으로 지상(智相)·집취상(執取相)·계명자상(計名字相) 등 세 가지 거친 양상은 외경(外境)이 있어 심법(心法)과 상대적으로 호응하기 때문에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미세한 생멸의 양상으로 미세한 불상응염심(不相應染心)은 심법(心法)과 외경(外境)이 아직 나뉘어지지 않아 외경이 심법과 더불어 아직은 상대적으로 호응하지 않기 때문에 미세한 생멸양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 가운데서도 집상응염심(執相應染心)은 삼계 안의 범부인 삼현위(三賢位)가 깨달을 경계입니다.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 가운데서 미세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인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과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과 나아가 미세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 가운데서도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인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과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은 십지(十地)보살이 깨달을 경계이며, 그리고 미세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 가운데서 미세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인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은 주관과 객관이 아직 나뉘지 않고 생멸로 진행하는 양상도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오직 부처님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경계라고 하였습니다.

총체적으로 말한다면 거친 마음의 의식과 미세한 마음의 의식이란 2가지 분별생멸양상의 의식(意識)은 모두가 근본무명주지(根本無明住地)를 의지하고 일어나 훈습(薰習)되어 있습니다. 만일 이를 구별해서 말한다면 이른바 근본무명(根本無明)의 인(因)을 의지하여 세 가지 미세한 불상응염심(不相應染心)을 내고 경계의 연(緣)을 의지하여 세 가지 거친 상응염심(相應染心)을 냅니다. 여기서 인(因)을 의지한다는 것은 근본무명불각 때문에 세 가지 미세한 양상을 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며, 연(緣)을 의지한다는 것은 경계의 반연(攀緣)함을 의지하여 망심으로 세 가지 거친 양상의 경계를 일으킨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를 수행으로 대치하여 근본무명의 원인이 사라지면 무명으로 일으킨 현식(現識)의 경계인 연(緣)도 따라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근본무명의 원인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를 의지해서 일어난 세 가지 미세한 불상응염심도 따라서 사라지고, 경계의 반연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를 의지하여 일어난 세 가지 거친 상응염심도 따라서 사라집니다.

상응(相應)한다는 것은 분별지·집취상·계명자상의 세 가지 거친 양상입니다. 이는 밖으로 오진(五塵)의 경계상이 있어 심법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호응하고, 다시 심왕(心王, 인식의 주체)과 심소(心所, 인식작용)도 서로 따라서 호응을 합니다. 불상응(不相應)은 심법과 경계상이 아직은 상대적으로 나뉘지 않았기 때문에 상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여기까지 삼추와 삼세로 생멸하는 모습을 논변하였고, 다음은 수행하는 사람의 측면에서 오염된 마음의 번뇌를 끊어 가는 수행과정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집취상과 계명자상의 두 염심은 거친 양상 가운데서도 거친 양상이므로 삼계내범(三界內凡)인 삼현위(三賢位)에서 깨달을 경계입니다. 분별지상과 상속상은 거친 양상 가운데서는 미세한 의식의 양상에 해당하며, 전상(轉相)과 현상(現相)의 두 염심은 미세한 양상 가운데서는 거친 의식의 양상에 해당하므로 이는 십지(十地) 가운데서 초지 이상의 법신보살이 깨달을 경계입니다. 근본무명업상의 경우는 미세한 양상 가운데서도 미세한 양상에 해당하므로 부처님만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육염심을 깨달아 여의어 가는 대체적인 단계입니다.

"거친 의식의 양상과 미세한 의식의 양상인 두 가지 생멸(生滅)하는 양상이 근본무명을 의지해서 있다"는 것은 이 육염심이 인(因)과 연(緣)을 의지해서 나왔으므로 역시 인(因)과 연(緣)을 의지해서 사라진다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최초에 근본무명의 불각(不覺)으로 인해서 세 가지 미세한 생멸하는 양상이 나왔고, 세 가지 미세한 양상 가운데는 거친 양상인 경계상(境界相)이 연(緣)이 되어 여섯 가지 거친 생멸하는 양상이 증가해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근본무명(根本無明)의 요인이 사라졌다면 경계의 반연(攀緣)도 역시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의 요인이 사라지면 세 가지 미세한 양상이 사라지고, 반연(攀緣)이 사라지면 여섯 가지 거친 양상이 사라집니다. 이는 상대적인 의존관계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형세입니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12연기의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을 상기해 보면 무명(無明)이 명(明)이 되는 것과 같이 불각(不覺)이 각(覺)이 되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수선]

• 根本無明(근본무명)의 여읨

 

[육염심(六染心) 중 세 가지는 상응염(相應染), 나머지 셋은 불상응염(不相應染)이다. 그러나 그 염심은 지말무명(枝末無明)에 의한 여섯 가지 염심이었고, 그 번뇌의 이탈과정이었으므로 여기서는 근본무명(根本無明)에 대하여 그 무명을 어떻게 이단시키는가를 설명하며, 또한 지말무명의 염심과 근본무명에 대하여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를 밝혀 나가는 부분이다.-전종식]

 

不了一法界義者(불료일법계의자) 從信相應地(종신상응지)

觀察學斷(관찰학단) 入淨心地(입정심지) 隨分得離(수분득리)

乃至如來地(내지여래지) 能究竟離故(능구경리고)

일법계의 뜻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자는, 신상응지로부터 관찰하여 배워 끊으며,

정심지에 들어가 분수에 따라 여의게 되며, 여래지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여의게 되기 때문이다. 

 

불료일법계(不了一法界)= 근본무명을 말함. 신진여의 일법계를 통달하지 못한 것.

 

[元曉 : 무명주지(無明住地)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만약 작득주지(作得住地)로 말한다면 초지 이상에서 차츰 끊게 될 것이지만, 생득주지(生得住地)의 문에 의한다면 오직 부처의 보리지라야 끊을 수 있다. 지금 이 론에서는 생득과 작득을 구분하지 않고 합해서 무명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入淨心地 隨分得離 乃至如來地 能究竟離라고 한 것이다.-물처럼바람처럼]

 

[무명을 끊는 지위를 밝히다. 일법계(一法界)의 뜻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신상응지(信相應地)로부터 관찰하여 배우고 끊으며 정심지(淨心地)에 들어가 분수에 따라 여의게 되며 여래 지(如來地)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여의게 된다.” 일법계는 일심을 말합니다. 신상응지는 성문과 연각입니다. 이런 단계를 거치면 사성제, 12연기를 통해 진리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세세생생 진리와 멀어지지 않게 됩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정심지는 보살 10지 가운데 1지에 해당하고 여래지는 마지막 10지에 해당합니다. 여래지가 되면 우리가 무명을 완전히 끊고 부처가 됩니다.-통섭불교]

 

[불료일법계(不了一法界)는 근본무명을 말하는 것으로, 진실 그대로의 진여의 법이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무명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무명은 맨 처음 십지이전(十地以前)의 신상응지(信相應地)로부터 수행을 시작하여, 마음을 관찰하고 배워 이해함으로서 어는 정도 끊을 수 있지만, 그것은 무명에 대하여 공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면 그만큼의 무명을 끊었다고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전(地前)의 수행은 깨달음의 참된 지혜에 의하지 않은 지적(智的) 이해에 불과하지 때문에, 무명을 끊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참된 무명의 이단(離斷)이 아니라는 것이며, 배워서 끊는다하여 학단(學斷)이라 부르고 있다. 무명은 초지인 정심지로부터 부분적으로 제거되기 시작하여, 제 10지인 보살진지(菩薩盡地)를 거쳐 여래지(如來地)에 이르면서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다.]

 

言相應義者(언상응의자) 謂心念法異(위심념법이)

依染淨差別(의염정차별) 而知相緣相同故(이지상연상동고)

상응한다는 뜻=相應義는 심(마음)과 염법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며, 물듦=染과 청정함=淨에 의하여 차별이 있으나, 지상과 연상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心念, 마음과 염법= 심법과 염법을 말함. 심법은 심왕(주관)이고 염법은 심소(객관)의 뜻으로 그 사이에 서로 대응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지상연상(知相緣相)= 지상(知相)은 능연(能緣)의 주관이고, 연상(緣相)은 소연(所緣)의 객관을 말한다.

 

不相應義者(불상응의자) 謂卽心不覺(위즉심불각)

常無別異(상무별이) 不同知相緣相故(부동지상연상고)

상응하지 않는다는 뜻=不相應義은 심(마음)에 곧 불각임을 말하며, 항상 다름(차이)이 없어서, 지상과 연상이 같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즉심불각(卽心不覺)= 무명업상, 능견상, 경계상의 삼상(三相)을 불상응이라고 하는데, 이 삼상은 불각(무명)에 의하여 일어난 순간이어서, 불각과 마음이 다르지 않아 즉심의 불각이라고 한다. 또는 여기에서 마음은 심진여로 보고 불각은 진여에 의하여 생긴 순간이어서 이 둘은 같지 않기 때문에 즉심불각이라고 말한다.

 

[心念法異 : 마음 작용의 주체를 심왕(心王)이라 하고, 마음 작용을 심소(心所)라고 한다. 심왕과 심소는 다르다.

* 高淳豪 : 심적 작용의 주체인 심왕(心王)과 그에 따라 일어나는 종속적인 심적작용인 심소(心所)는 다르다. 그런데 대경(對境)인 염법 즉, 더러운 것과 정법 즉, 깨끗한 것의 차별적인 세계는 모두 마음에서 전개되는 것이라, 마음이 더러우면 그 세계도 더럽고 마음이 깨끗하면 세계도 깨끗하니, 심왕이 더러우면 심소도 더럽고, 심왕이 깨끗하면 심소도 깨끗하다. 따라서 심왕 심소의 모습[知相]세계의 모습[緣相]이 같다. 이를 서로 응한다는 뜻으로 상응(相應)이라고 한 것이다.

* 卽心不覺 常無別異 : 심왕과 불각이 나누어지기 전의 불각을 즉심불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심왕과 심소, 그리고 그 대경(對境)이 다름이 없다. 따라서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따로 있어서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불상응(不相應)이라고 한다.]

 

 [상응의(相應義)라 한 것은 심(心)과 염법(念法)이 달라서 물듦과 깨끗함[染淨]의 차별을 의지하여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같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지상과 연상이 같다는 말은 내 속에 든 것과 나타나는 것이 같음을 말한 것입니다.]

불상응의(不相應義)란 곧 마음의 불각(不覺)이라 항상 차별의 다름이 없어서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같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진여나 제8식은 우리의 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상과 연상이 같지 않습니다. 즉 내 속에 든 것과 나타나는 것이 같지 않습니다. 

죽을 때 통장에 돈 한 푼 더 있다고 훌륭한 인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자식들 다툼의 씨앗만 됩니다. 이 세상에 보 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식입니다.]

 

[상응과 불상응의 차이= 상응염(相應染)은 마음의 작용이 서로 대응(對應)관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로, ‘謂心念法異 마음(心)과 염법(念法)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심법(心法) 즉 주관적 의식작용의 본체인 심왕(心王)과, 염법(念法) 즉 객관적 대상을 인식하는 심소(心所)는 독자적인 심작용(心作用)을 행하는 것이어서 그 작용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이들은 서로 대응관계가 있어서, 선과 악 및 무기(無記 ; 선도 악도 아닌 것)의 삼성에 있어서는 서로 상응하면서 관계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주관의 심왕이 선(善)하면 객관의 심소도 선하고, 심왕이 악(惡)하면 심소도 악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작용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그러나 염정(染淨)의 차별인 선악에 있어서는 서로 대응하여 상응하고 있다. 그래서 주관적 지상(知相)과 객관적 연상(緣相)은 염(染)과 정(淨)으로 항상 대응관계를 이루어 주관이 선(善)이면 객관인 대상도 선, 주관이 염(染)이면 객관인 대상도 염이 되어 서로 일치하는 관계를 보이는 것을 상응(相應)이라 한다. 그러므로 지식(智識), 상속식(相續識) 그리고 의식(意識)의 셋은 이들 아리야식(阿梨耶識)이 경계상을 대상으로 심작용을 일으켜 번뇌를 생성하므로 상응염(相應染)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업식(業識), 전식(轉識) 그리고 현식(現識)의 셋은 불상응염(不相應染),‘마음(心)이 불각(不覺)’이기 때문에, 마음과 불각이 상즉(相卽)하고 있어 서로 대응관계로서의 상응(相應)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업식, 전식, 현식이 행하는 세 종류의 활동은 근본무명에 의하여 마음이 기동하여 아리야식이 된 순간이기 때문에 이는 바로 불각(不覺)의 상(相)이며, 그 불각은 일심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상별무이(相別無異)’라 하여 그 상이 불각의 마음과 다름이 없다고 즉심불각(卽心不覺)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식과 현식이 성립된 찰나에 불과하고, 이 두 모습이 대응관계로서 인식활동이 시작된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을 동일시 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삼세의 번뇌는 불상응(不相應)이라고 하는 것이다.]

 

又染心義者(우염심의자) 名爲煩惱礙(명위번뇌애)

能障眞如根本智故(능장진여근본지고)

또 염심이란 뜻은, 이름하여 번뇌애라고 하나니, 능히 진여의 근본지=眞如根本智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염심(染心)= 육염심(六染心)의 번뇌를 말한다.

번뇌애(煩惱礙)= 번뇌가 지혜를 장애하는 것을 말함.

진여근본지(眞如根本智)= 번뇌는 마음의 적정을 장애하기 때문에 일심의 무념을 어지럽힌다. 이 점을 진여의 근본지를 막는다고 말한다. 진여근본지는 진여의 이(理)를 증득한 근본무분별지를 말한다

 

[眞如根本智 : 본각 가운데의 지정상(知淨相)인 근본지, 여리지(如理智)라고도 한다. 염심이 요동하여 이치에 맞는 근본지를 장애한다.

* 元曉 : 근본지(根本智)란 조적혜(照寂慧)니 적정과 어그러지기 때문에 번뇌애라고 하는 것이다.

* 照寂慧(조적혜) : 은정희 - 6혜(聞慧, 思慧, 修慧, 無相慧, 照寂慧, 寂照慧)의 하나, 照는 중도의 용이며, 적은 중도의 체니 등각위 보살이 중도의 관혜(觀慧)로서 중도의 이체(理體)를 비추는 것.]

 

[지애와 번뇌애를 밝히다. 염심은 번뇌애다. 또 염심(染心)의 뜻을 번뇌애(煩惱礙)라고 하니 능히 진여의 근본지(根本智)를 막는 까닭이다.” 흙탕물에 의해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원래 무명의 흰색에 오염되어 물들어 버리면 흰색은 없어지고 물든 여러 가지 색깔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물들면 근본지혜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견성을 하면, 즉 오염된 것을 걷어내면 근본지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염심의 의미를 장애의 입장에서는 번뇌애라고 한다. 번뇌는 본래 마음의 적정함을 깨는 장애가 되어, 일심의 무념 적정을 교란시켜 근본지(根本智)를 가로 막게 된다.

진여근본지(眞如根本智)란 지혜와 진여가 하나로 합일된 것이므로 진여에 합일된 지혜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진여와 근본지는 별개의 것이 아닌, 바로 하나이다. 이는 시각(始覺)의 지(智)가 완성되어 본각에 귀일된 ‘지정상(知淨相)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하여 무명은 참된 지혜인 진지(眞智)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문제를 밝게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므로 무명은 일체지(一切智)를 막는 장애물이다. 그래서 이름하여 지애(智礙)라 한다. 지애는 소지장으로서 객관적 대상에 대하여 지혜가 명료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은 세간의 자연업지(自然業智)를 가로막게 된다.]

 

無明義者(무명의자) 名爲智礙(명위지애)

能障世間自然業智故(능장세간자연업지고)

무명의 뜻이란 이름하여 지애라고 하나니, 능히 세간의 자연업지를 막는 까닭이다. 

 

지애(智礙)= 소지장(所知障)과 같다. 대상에 대하여 지혜가 명료하지 못한 것이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것을 말한다.

세간자연업지(世間自然業智)= 불타가 세간의 차별 있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그 차별에 응하여, 자연으로 부사의한 업용(業用)이 나타나 중생을 제도하는 지혜, 근본지의 뒤에 일어나는 것이므로 후득지(後得智)라고 한다. 앞의 것이 무분별지(無分別智)라면 이것은 차별지(差別智)이다.

 

[世間自然業智 : 세간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지혜, 후득지(後得智)이다. 근본무명이 일진법계의 이치를 혼미하게 하여 장애를 일으킨다.

* 元曉 : 무명의 뜻이란 근본무명이고, 世間業智란 후득지이다. 무명이 혼미케 하여 분별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세간의 분별지와 어긋나며, 이런 뜻에서 지애(智碍)라고 하는 것이다.

* 지운 : 공(空)을 모른다는 것을 번뇌애(煩惱礙)라고 하며, 번뇌애는 내가 있다고 믿는 번뇌장(煩惱障)과 나밖에 실체가 있다고 믿는 소지장(所知障)가 있음을 말하니, 번뇌장을 벗어나려면 아공(我空)을 체득해야 하고, 소지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법공(法空)을 체득해야 한다. 이를 근본지(根本智)라고 한다. 불공을 모르는 것을 지애(智礙)라고 하며 무명이라고 한다. 이를 벗어남으로써 세간자연업지(世間自然業智)가 생기며, 이는 중생을 구제하는 후득지이다.]

 

[무명은 지애다. 무명의 뜻을 지애(智礙)라고 하니 세간의 자 연업지(自然業智)를 막는 까닭이다. 염심(染心)에 의지하여 보 고 나타내며 경계를 망령되이 취착하여 평등성을 어기는 까닭이다. 일체법(一切法)이 항상 고요하여 일어나는 모양은 없으나 무명으로 깨닫지 못하여 망령되이 법성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간의 모든 경계에 수순하는 여러 가지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지애는 지를 막아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영을 지애라고 합니다. 화두를 들어 무명을 타파 할 때 이 무명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근본무명을 말합니다. 오염되고 나면 있는 것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형성된 업대로 보기 때문에 평등성을 잃게 됩니다. 무명을 깨뜨리면 존재의 본래성품인 법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못 둑이 툭 터져 물이 콸콸 흘러야 되는데, 업에 의해 쌓인 지혜는 바늘구멍 뚫어놓고 흐르는 물을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此義云何(차의운하) 以依染心(이의염심) 能見能現(능견능현)

妄取境界(망취경계) 違平等性故(위평등성고)

이 뜻이 무엇인가? 염심에 의하여 能見=볼 수 있고, 能現=나타낼 수 있으며, 망령되이 경계를 취하여 평등성을 어기기 때문이다.

 

[能見能現 妄取境界 : 능견(能見)은 전식(轉識)이며, 능현(能現)은 현식(現識)으로 아리야식에 해당하며, 망취경계(妄取境界)는 지식(智識)으로 말나식에 해당한다.

* 元曉 : 以依染心 能見能現 妄取境界라는 것은 대략 전식과 현식과 지식을 든 것이다. 違平等性이라는 것은 근본지의 능소평등(能所平等)을 어긴 것이니 이는 번뇌애의 뜻을 풀이한 것이다.]

 

以一切法(이일체법) 常靜無有起相(상정무유기상)

無明不覺妄與法違故(무명불각망여법위고)

不能得隨順世間一切境界種種智故(불능득수순세간일체경계종종지고)

일체법은 항상 고요하여 상을 일으킴=起相이 없으나, 무명의 불각이 망령되게 법(진여의 법)과 어긋나기 때문에, 세간의 일체 모든 경계를 따르는 갖가지 지혜를 능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元曉 : 以一切法 常靜無有起相이라는 것은 무명이 혼미시킨 법성을 든 것이다.

不能得에서 種智까지는 세간의 지혜에 어긋난다는 뜻을 바로 밝힌 것이다.]

 

사위(四位) 사상(四相) 삼세(三細) 육추(六麤) (意)
의식(意識)
육염(六染) 염심(染心)의 이탈
구경각究竟覺
(보살진지)
생상(生) 무명업상
無明業相. 
업식(業識),  근본업불상응염 여래지
보살진지
(10)
수분각隨分覺
(법신보살)
주상(住) 능견상
能見相. 
전식(轉識),  능견심불상응염 심자재지
(9)
경계상
境界相
현식(現識),  현색불상응염 색자재지
(8)
지상
智相
지식(智識),  분별지상응염 무상방편지
(7)

(구혜지)
구계지(2)
상속상
相續相
상속식(相續識) 부단상응염 정심지(초지)
상사각相似覺
(이승초보살)
이상(異) 집취상執取相
계명자상
計名字相
의식(意識)
(분별사식
分別事識
)
집상응염 이승해탈
심상응지
불각(범부) 멸상(滅) 기업상起業相     각지전념기악
(십신범부)
업계고상
業繫苦相

二者(이자) 不斷相應染(불단상응염) 依信相應地(의신상응지)

修學方便(수학방편) 漸漸能捨(점점능사) 得淨心地(득정심지) 究竟離故(구경리고)

둘째, 끊어지지 않고 상응하는 오염=不斷相應染이니, 신상응지에 의해 방편을 수행하고 배워

점점 버릴 수 있으며, 정심지에 이르러서 완전히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 부단은 단절되지 않고 연속하여 일어나는 것. 망념이 단절되지 않고 더욱이 법집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번뇌. 상속상(相續相), 상속식(相續識)에서의 염심을 말한다.

 

[不斷相應染 : 부단상(不斷相)이란 상속(相續)과 같은 말이다. 상속상(相續相)이다.

淨心地 : 십지(十地)의 초지인 환희지와 같은 말이다.

* 元曉 :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이란 다섯 가지 의(意) 가운데 상속식이니 법집과 상응하여 상속하여 생겨나는 것이며, 끊어지지 않음이란 상속의 다른 이름이다. 십해위로부터 유식관의 심사방편(尋思方便)을 닦고 초지에 이르러 삼무성(三無性)을 증득하여 법집분별을 현행하게 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得淨心地 究竟離故라고 한 것이다.

* 憨山 : 不斷相應染(부단상응염) - 천태학에서는 삼계 내와 삼계 외의 진사혹(塵沙惑)이라고 한다. 삼현보살은 이 진사혹을 끊어야 정심지에 오른다. 왜냐하면 정심지에서는 망념으로 분별하는 번뇌장과 소지장의 이장(二障)을 버렸기 때문이다.

* 지운 : 유식 삼무성인 변계소집성(無相), 의타기성(無生), 원성실성(勝義無性)을 깨쳐야 함. 아라한의 경지. 진여가 드러나기 시작함.-물처럼바람처럼]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은 끊어지지 않고 상응하는 오염이니, 신상응지에 의지하여 방편을 수학(修學)하여 점차로 버릴 수 있으며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러 완전히 여의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하건 계속 생각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끝없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신상응지란 철저한 믿음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철저한 믿음이 있으면 부단상응염을 여읠 수 있습니다. 정심지란 마음이 깨끗한 경지로, 보살 10지 가운데 첫 번째 단계(환희지)에 해당하는 것입니 다. 시험에 합격하는 커트라인 점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들기 전 본성, 맑은 마음을 본 것으로, 견성입니다. 정심지에 이르면 부단상응염이 해결됩니다.-통섭불교]

 

[불상응(不相應)이란 번뇌는 서로 관계하지 않아도 무명에 의하여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 생기는 번뇌를 의미하며, 상속상(相續相)과 상속식(相續識)에 있는 번뇌이다. 상속식은 과거의 업을 유지하여 고락의 과보(果報)를 성숙시켜, 기억을 계속 유지하는 작용으로서, 망념이 상속하여,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부단상응염이라 한다. 즉 망념이 연속되어 끊지 못하고, 더욱이 법집(法執)과 관계 상응하여 일어나는 번뇌이다. 주관과 객관이 대응하는 미세한 분별을 바탕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부단상응염은 신상응지(信相應地)을 바탕으로 수학함으로서, 십주, 십행, 십회향의 삽십위(三十位)를 차례차례 나아가면서, 그 사이에 번뇌는 순차적으로 차단되고, 보살의 성위(聖位)인 십지 중, 초지인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러, 이 번뇌가 완전히 차단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정심지를 십지 중 초지에 해당시킨다면, 화엄경 십지품의 초지인 환희지(歡喜地)와 같은 것이지만, 기신론에서는 이를 밝히지 않고 있으나, 전체적 교리 체계로 볼 때 정심지를 초지에 배당시키는 것이 타당하며, 원효의 해동소(海東疏)와 법장의 의기(義記)에서 모두가 이 설을 세우고 있다.

신상응지는 십신을 지나 십주이상의 위치를 말하는 것으로 십지의 초지인 정심지에 이르려면 심행, 회회향을 거쳐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이지만, 기신론에서는 그 수행단계를 밝히지 않고 있다.-전종식]

 

三者(삼자) 分別智相應染(분별지상응염) 依具戒地漸離(의구계지점리)

乃至無相方便地(내지무상방편지) 究竟離故(구경리고)

셋째 분별하여 알아 상응하는 오염=分別智相應染이니, 구계지에서 점차 여의게 되며,

무상방편지에 이르러야 완전히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具戒地(구계지) : 제2지인 이구지(離垢地)를 말한다. 이구지부터 차츰 여의다가 제7지인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원행지(遠行地)에서 완전히 여읜다는 말이다. 

* 元曉 : 분별상응염(分別相應染)이란 다섯 가지 의 가운데 네 번째인 지식(智識)이다. 칠지(七地)이하에서는 이지(二智 : 법공지와 아공지)가 일어날 때는 현행하지 못하다가, 관(觀)에서 벗어나 사물을 반연하여 제멋대로 부릴 때는 현행하기 때문에 점차 여읜다고 하였다. 칠지 이상에서는 오랜 시간 관에 들기 때문에 말나식이 길이 현행하지 못하므로 無相方便地 究竟離라고 한 것이다.

* 憨山 : 초지부터 칠지까지는 유상관(有相觀)이 많아 단지 구생아집(俱生我執)만 타파할 뿐이다. 진여법공관을 닦으면서 관에 들어갔을 때와 나왔을 때가 다르기 때문에 경계상에 있어서 미세한 유상의 분별이 많다. 따라서 이 수행지에선 아직 구생법집(俱生法執)을 타파하진 못한다.]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은 분별하여 알아 상응하는 오염이니, 구계지(具戒地)에 의지하여 점차로 여의며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에 이르러야 완전히 여의게 된다.” 이것은 제7식 말라식입니다. 평생 나라고 생각하는 내 속의 내용물입니다. 자기 속에서 능력껏 분별해서 아는 것입니다. 제7 말라식을 깨트리려면 적어도 구계지에 들어가야 점차 없앨 수 있고 무상방편지에 이르면 모두 깨트려집니다.

구계지는 보살 10지 가운데 제2지 이구지, 제3지 발광지, 제4지 염혜지, 제 5지 현전지(現前地)까지 해당합니다.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란 모든 방면 에 능숙한 경지로 보살 10지 가운데 제7지 원행지(遠行地)에 해 당합니다. 제7식 말라식은 원행지에 이르러야 구생혹이 다 깨어지고 모든 행이 부처에 이르게 됩니다. 아집, 아만, 아애, 아치가 완벽하게 없어집니다. 우리가 공부를 한다면 최소한 제7 식 말라식은 깨트려야겠다고 목표를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가 없어져서 이 세상 모든 생명에게 끝없는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건 베풀어집니다. 제7식이 안깨트려진 중생들은 모두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만큼 보고 느끼고 베풀면서 살다 갑니다. 우리는 무언가 조금 모아놓고 잘 살았다고 생각하고 가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진리를 모르고 그냥 갑니다. 진리를 알고나면 이면에 소중한 것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진리를 알면 더욱 편해집니다. 왜냐하면 불편한 이유가 집착에 있기 때문입니다.]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은 지상(知相)의 지식(智識)이 일으키는 번뇌이다. 지식은 애(愛)와 불애(不愛), 호(好)와 악(惡), 염(染)과 정(淨) 등을 분별하는 분별지(分別智)의 번뇌이다. 이는 본능적으로 호오를 판단하는, 대상에의 집착이지만, 저절로 일어는 법집으로서, 미리 짐작하고 사유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구계지에서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여, 무상방편지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구계지는 십지설에서 제2지인 이구지와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것은 계율을 실행함으로서, 마음의 때를 떼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는 화엄경 십지설과 연관시켜, 제 7지인 원행지(遠行地)에 해당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원행지에서 보살은 법의 상이 없다는 무상관(無常觀)을 수습하여, 지혜로운 방편을 가지고 세간과 성문 연각의 길을 멀리 떠난간다는 의미로서, 원행지라 이름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신론의 무상방편지는 원행지의 의미와 일치하고 있어, 제 7지로 본다.

분별지상응염은 제 2지인 구계지로부터 시작하여 제 7지인 무상방편지에서 완성되는 것이므로, 계속적인 수행의 결과로서 점진적으로 염심이 제거되는 것이다. 화엄경의 십지설로는 제 2지인 이구지(離垢地)로부터 제 3지의 발광지(發光地), 4지의 염혜지(燄 慧地), 5지의 난승지(難勝地), 6지의 현전지(現前地), 7지의 원행지(遠行地)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四者(사자) 現色不相應染(현색불상응염) 依色自在地能離故(의색자재지능리고)

넷째, 현색에 상응하지 않는 오염=現色不相應染이니, 색자재지에 의지하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色自在地: 제8지인 부동지(不動地)와 같은 말.

* 現色(현색)이란 거울에 색과 모양의 그림자가 비치듯, 인식 대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를 앞에서 현식(現識)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 元曉 :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이란 다섯 가지 의 가운데 세 번째인 현식(現識)이다. 맑은 거울에 색깔과 모양을 나타내는 것과 같기 때문에 현색불상응염이라고 하였다. 색자재지는 제팔지이니, 이 팔지에서는 이미 정토(淨土)의 자재함을 얻어서 예토(穢土)의 추색(麤色)이 나타나지 못하니 여읜다고 하였다.

* 憨山 : 現色不相應染(현색불상응염) - 이는 팔지에서 평등진여를 증득하고 불세계인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 중생세간, 기세간(器世間)인 삼종세간에서 색성(色性)의 자유자재함을 체득한다. 이 때문에 염심(染心)을 여읠 수 있는 것이다.]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은 현색에 상응하지 않는 오염이니 색자재지(色自在地)에 의지하여야 여의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불상응염입니다. 색자재지는 보살 10지 가운데 제8지인 부동지에 해당합니다. 부동지의 경지에 가야 아뢰야식의 현색불상응염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 현색(現色)이란 밝은 거울에 색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근본무명에 의하여 성립된 염심(染心)에 대상의 세계가 반영되는 것으로, 현식(現識)의 작용이다. 염심에 반영된 현색(現色)의 경계상(境界相)은 근본무명에 의하여 성립되어 동시에 능견상(能見相)의 전식(轉識)과 서로 대응관계없이, 단독으로 경계가 현식(現識)에 반영되는 것이므로 현색 불상응염이라 한다.

이 번뇌는 색자재지(色自在地)에서 제거 분리되며, 색자재지는 제8지로서, 보살은 정토로서의 자재(自在)를 얻어, 예토(穢土)로서의 색상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색자재지라 한다. 제8지 보살은 유심(唯心)의 이치에 통달하여 경계의 현식이 사라진 상태이므로, 예토의 색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외계가 있는 그대로를 마음에 비추는 경지가 된 것이다.]

 

五者(오자) 能見心不相應染(능견심불상응염) 自心在地能離故(자심재지능리고)

다섯째, 능견의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 오염=能見心不相應染이니 심자재지에 의지하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心自在地(심자재지) : 제9지 선혜지(善慧地).

전식(轉識)으로서 능견상(能見相)이며, 주관과 객관이 나뉜다.

* 元曉 :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란 다섯 가지 의 가운데 전식(轉識)이니 동심(動心)에 의해 능견을 이루기 때문이다. 심자재지(心自在地)는 제구지니, 이 구지에서는 이미 사무애지(四無碍智)를 얻어서 장애를 가진 능연(能緣)이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여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 憨山 : 能見心不相應染(능견심불상응염) - 구지(九地)에서는 중생들의 무명망심인 십종조림(十種稠林)을 훌륭하게 안다. 화엄경에 따르면 십종조림은 다음과 같다. ①심조림(心稠林) ② 번뇌조림 ③ 업조림(業稠林) ④ 근조림(根稠林) ⑤ 해조림(解稠林) ⑥ 성조림(性稠林) ⑦ 요원조림(樂願稠林) ⑧ 수면조림 ⑨ 수생습기상속조림(受生習氣相續稠林) ⑩ 삼취차별조림(三聚差別稠林)]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은 능견의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 오염이니, 심자재지(心自在地) 에 의지하여야 여의게 된다.” 심자재지는 보살 10지 가운데 제 9지인 선혜지에 해당합니다. ]

 

[다섯째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 능견심(能見心)은 전식(轉識)의 작용으로서, 망념이 외계를 보려는 주관적 부분을 말한다. 즉 근본무명에 의하여 마음이 기동하면, 이 염심은 보는 주관(능견상能見相)과 보이는 객관(경계상境界相)으로 분열하는데, 여기서는 보려는 주관의 작용을 말한다. 이 능견심 역시 근본무명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므로 객관과 상응관계가 없어 불상응염이라 한다. 이 능견상의 번뇌는 심자재지(自心在地)에서 차단되며, 제9지 심자재지에서는, 중생의 마음 활동을 자유자재로 알기 때문에 심자재지라 한다. 또한 제9지에서는 사무애지를 얻기 때문에 망념의 주관은 일어나지 않으며, 인식주체의 작용은 자유자재라고 하며, 여기에서 능견의 미세한 장애가 분리 제거되는 것이다.

사무애지(四無礙智)는 막힘이 없는 앎, 막힘이 없는 말재주, 막힘이 없는 풀이능력[解說]이란 뜻으로 ①법무애지(法無碍智) 모든 교법에 통달하여 막힘이 없음 ②의무애지(義無碍智) 모든 교범의 뜻을 아는 것 ③사무애지(辭無碍智) 여러 가지 말을 아는 것 ④요설무애지(樂說無碍智=善說無礙智) 온갖 교법을 근기에 맞추어 설함에 막힘이 없는 것이다.]

六者(육자) 根本業不相應染(근본업불상응염)

依菩薩盡地(의보살진지) 得入如來地能離故(득입여래지능리고)

여섯째, 근본업에 상응하지 않는 오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보살지의 다함=菩薩盡地에 의지하여 부처의 경지에 들어 여래지에서만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 무명업상(無明業相)에서의 염심(染心). 무명의 힘에 의하여 불각의 마음이 기동하는 것으로, 현실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우리의 분별심, 즉 망념의 근본이므로 근본업이라 하고, 일심에 상응하지 못하고 불각의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에 불상응염이라 한다.

보살진지(菩薩盡地)= 제 10지의 만위(滿位), 보살지진(菩薩地盡)이라고도 한다. 십지의 종심(終心)을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 하며, 이 선정으로 최후의 미세한 번뇌를 끊고 보살의 수행이 완성되고 여래의 지위에 들어간다.

 

[根本業不相應染; 업식(業識)이며 무명업상(無明業相)에 해당한다.

* 菩薩盡地 : 보살 십지 중 마지막 단계인 법운지(法雲地)이다. 법운지부터 시작해서 여래지에서 여의며, 이를 묘각(妙覺)이라고 한다.

* 元曉 :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란 다섯 가지 의 가운데 첫 번째인 업식이다. 무명의 힘에 의해 불각하여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보살진지란 제십지이니 그 무구지가 이 지에 속하기 때문이며, 실제로 말하면 제십지 중에도 미세한 전상과 현상이 있는 것이지만, 지상(地相)을 따라서 점차로 여읨을 말한 것뿐이다. … 그러므로 업식이 다 없어지기 않았을 때에는 능견과 능현도 다 없어지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高淳豪의 《大乘起信論》
六染 執相應染 意識 業繫苦相
起業相
計名字相
執聚相
二乘


信相應地
聲聞,緣覺


十信, 三賢
十住, 十行
十回向
不斷相應染 相續識 相續相 淨心地 第1歡喜地
分別智相應染 智識 智相 具戒地~
無上方便地
第2離垢地~
第7遠行地
現色不相應染 現識 境界相 色自在地 第8不動地
能見心不相應染 轉識 能見相 心自在地 第9善慧地
根本業不相應染 業識 無明業相 盡地~
如來地
第10法雲地~
妙覺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은 근본업에 상응하지 않는 오염이니, 보살지(菩薩地)의 다함에 의지하여 부처의 경지에 들어 여래지(如來地)에서만 여읠 수 있다.” 보살 10지의 제10지인 법운지가 되어야 근본업불상응염이 소멸됩니다. 보살 10지의 1지부터 견성이라고 말하고 부처의 시작입니다. 한번 견성했다고 공부를 그치면 완성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일단 무상방편지를 깨트리고 말라식을 깨트려야 해결됩니다. 만약 1지의 단계에서 그친다면 6식만 깨트려지고 업은 그대로 남아있게 됩니다. 견성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일반 중생들보다 못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말라식, 업이 그대로 남아있는 견성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수시로 견성을 하지만 그것이 계속 이어져야 흔히 말해 견성이라고 합니다.]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은 무명업상(無明業相)에서의 염심(染心)이다. 근본업(根本業)은 무명의 힘에 의하여 불각(不覺)의 마음이 기동하는 것을 말하며, 현실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우리의 분별심의 근본을 말한다. 분별하고 있는 마음은 분별이 일어나고 있는 마음의 근본을 알지 못한다. 마치 눈이 모든 것을 보고 있지만, 그 눈은 보고 있는 눈 자체는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와 같은 번뇌의 근본, 망심의 근원은 가장 미세한 최후의 번뇌이기 때문에 제 10지인 보살진지(菩薩盡地)의 만위(滿位)을 넘어 과위(果位)인 여래지에 들어가면서 완전히 불리 제거되는 것이다.

근본업이 이탈되는 이 십지(十地)에 대하여 원효는 ‘십지 가운데도 역시 미헤한 전상(轉相)과 현상(現相)이 있는 것’이라 하고 그 근거로 ‘업식에 의하여 보살구경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보는 것을 보신(報身)이라 이름한다’고 하였으니 ‘만약 업식을 떠나면 바로 보는 상은 없어지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러니 업식이 다 없어지지 얺았을 때에는 능견(能見)과 능현(能現)도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색(現色)의 경계상은 근본무명에 의하여 성립되어 전식(轉識)과 상응(相應) 관계없이, 단독으로 경계가 현식에 반영된다고 하여 불상응염(不相應染)이라고 하였고, 이 번뇌는 8지인 색자재지에서 완전히 분리되므로 보살은 정토로서의 자재(自在)를 얻게 되어, 예토로서의 색상은 나타나지 않게 된다. 따라서 8지 보살은 유심(唯心)의 이치에 통달하여 경계의 현식이 사라진 상태이지만, 그 마음에는 외계가 저절로 있는 그대로 비추어지는 경지가 된다. 더욱이 보려하는 능견심불상응염도 제9지인 심자재지에 이르러 차단되었기 때문에 본다는 주관도 없어진 것이지만 심자재지이어서 중생의 마음 활동을 자유자재로 알게 된다.]

* 無明(무명)의 忽然念起(홀연염기)

所謂心性常無念故(소위심성상무념고) 名爲不變(명위불변)

이른바 마음의 본성=心性은 항상 그러하여 망념이 없는=無念이기 때문에 이름 하여 불변하다고 하며,

以不達一法界故(이부달일법계고) 心不相應(심불상응)

하나의 법계=一法界를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상응하지 못하여

忽然念起(홀연념기) 名爲無明(명위무명)

홀연히 망념을 일으킨 것을 이름 하여 무명이라고 한다.

 

심성(心性)= 마음의 본성, 심진여(心眞如)를 말함

일법계(一法界)= 심진여를 말하며, 일심(一心)과도 같은 뜻이다. 마음은 하나의 진리에 관통하고 있어 일법계라고 한다

불상응(不相應)=마음이 주관과 객관의 대응관계로 활동하기 직전의 상태.

 

[이는 근본 무명을 말한 것으로 워낙 미세하여 부처가 아니고서는 온전히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일심과 일법계가 서로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망념이 홀연히 일어난다고 하였다.

* 元曉 : 心不相應이라 한 것은 이 무명이 가장 미세하여 왕(王;心王)과 수(數;心所)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心不相應이라고 한 것이다. 오직 이것이 근본이 되고, 다른 염법으로서 이보다 미세하고 이보다 앞에 있는 것이 없으므로 이런 뜻에서 홀연히 일어난다고 말한 것이다.-물처럼바람처럼]

 

[중생들은 각자의 세계를 갖고 있고 자기 세계 속에서 자기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무명에 물들면 하나의 법계임을 알지 못합니다. 물들기 전의 종이는 다 같은 종이지만 각자 자기만의 색깔로 물들이면 다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끝도 없이 일어나는 무명 속에서 나의 몸을 만들어서 업을 지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본래 성품을 보면 다 해결됩니다. 자기의 업대로 빗어놓았지만 알고 보면 다 하나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들은 끝없이 헤매고 있습니다.

염심의 여섯 가지를 밝히다. 집상응염(執相應染),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 현색불상응염(現 色不相應染),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 근본업불상응염 (根本業不相應染)이다.” 진여가 무명에 물들면 여섯 가지 마음이 나옵니다. 앞의 세 개는 상응염이고 뒤의 3개는 불상응염입니 다. 앞에 나온 6추 3세에서 3세는 무명업상, 능견상, 경계상이 었습니다. 이 가운데 무명업상은 근본업불상응염과 연결되고, 능견상은 능견심불상응염과 연결되고, 경계상(현식)이 현색불 상응염과 연결됩니다. 그 다음 6추로 넘어가서 지상이 분별지 상응염과 연결되고 상속상이 부단상응염과 연결되고 나머지는 집상응염과 연결됩니다. 불상응염 3가지는 3세와 연결되어 제 8식 아뢰야식과 상응하고, 상응염 3가지는 6추와 연결되어 제7식 말라식과 제6식과 상응합니다. 그 가운데 분별지상응염은 제 7식 말라식과 상응하고 부단상응염은 제6식과 상응합니다. 제6 식, 제7식이 생기려면 근거 뿌리가 모여야 하는데 그것이 집상 응염입니다. 우리는 수(受), 느낌을 안이비설신으로 받아 들이고 그 느낌이 모입니다. 안이비설신이 집의 입구 역할을 합니다. 이것들이 식이 작용하는 근본재료들을 제공합니다. 이 생에서 짓는 업의 대부분은 눈을 통해 짓습니다. 눈을 통해 형상을 보는데 이것이 마음을 일으키는데 많은 작용을 합니다. 보는 것은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듣고 맛을 보고 몸으로 느끼는 것보다 접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모으는 것이 집상응염입니다. 

  부단상응염이란 끝도 없이 오염된 것을 일으키는 것이며, 분별지상응염은 분별된 생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분별은 업에 따라 분별합니다. 우리가 쓰고 아는 일반적인 단계는 상응염의 단계입니다. 상응염은 오염된 것에 상응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업과 내가 일으키는 생각은 같습니다. 나의 의식과 나의 업은 같은 것입니다. 내 업만큼 생각을 일으킵니다. 상응합니다. 내 안에 없는 엉뚱한 것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중생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부처는 자기중심적으로 분별, 판단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생각합니다. 

불상응이란 상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진여는 오염된 것으로 볼 때 모두 상응하지 않습니다. 물든 중생이 일으키는 생 각은 본질과 상응하지 않습니다.-통섭불교]

 

[지금까지 설명한 생멸인연, 즉 생멸연기(生滅緣起)의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마음의 본성은 본래 망념이 전혀 없는 무념의 것이나, 중생의 마음은 한편 염심(染心)을 가지고 있으며, 생멸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염심을 가지고 있는 마음의 본체는 순수청정하고, 변함이 없는 불변의 것으로서, 이것이 생멸과 화합하여 심생멸(心生滅)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동요하고 있으나, 마음의 본성은 고요하고 불멸인 것이므로, 우리가 그 불변의 본성을 자각하여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자기가 자기의 본성을 보려고 하는 한, 자기와 자기의 본성은 주객으로 분열되고 있는 것이므로, 본성으로의 귀환은 불가능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음으로 하여금 마음을 보지 않게 되어야’ 본성으로의 귀환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견성 성불이라는 용어는 기신론 이론에 맞지 않는 것이다.

마음의 본성은 항상 무념이고 불변이지만, 그러한 심성이 바로 ‘나와 너’라는 상대를 초월한 진여의 세계(일법계一法界)라는 사실을 마음 스스로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본성에 상응(相應)할 수가 없어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고, 그것이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홀연히 일어나는 망념이며, 바로 무명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원효와 법장은 ‘영락본업경’을 인용하여, 이것은 바로 그 무명 이전에는 시작의 근본이 되는 별도의 법이 없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시작이 없다’고 말하고, 바로 그것이 기신론에서의 ‘홀연(忽然)’의 뜻이라고 설하고 있다.

또한 이는 미세한 번뇌와 거친 번뇌가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전에는 그것이 없었다고 설하는 것이며, 홀연히 일어난다는 것도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일어나는 시초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설하고 있다.-백련 전종식]

 

 * 有染心(유념심)

 • 枝末無明(지말무명)의 여읨

染心者(염심자) 有六種(유육종) 云何爲六(운하위육)

염심이라는 것은 여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여섯이라 하는가?

一者(일자) 執相應染(집상응염) 依二乘解脫(의이승해탈)

及信相應地遠離故(급신상응지원리고)

첫째 집착으로 상응하는 오염=執相應染이니, 성문 연각의 이승의 해탈과 믿음에 상응하는 경지=信相應地에 의지하여 멀리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집상응염(執相應染)= 집(執)은 집착을 일컬음, 아집과 법집이 있다. 여기서는 아집을 말하며, 앞에서의 집취상(執取相), 계명자상(計名字相) 즉 의식(분별사식分別事識)의 집착을 말한다.

신상응지(信相應地)= 십주, 십행, 십회향의 삼현위(三賢位). 십주이상은 신심이 순후해재고 신근이 성취되어 후퇴하는 일이 없으므로 그들을 신상응지 사람이라고 한다.

 

[執相應染 : 집착하기 때문에 물든 것.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에 해당한다. 이로 인해 기업상(起業相)이 생기고, 업계고상(業繫苦相)이 있다.

信相應地(신상응지) :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의 수행 단계, 신근(信根)이 성취되어, 줄어들거나 사라짐이 없는 상태.

* 憨山 : 信相應地(신상응지) - 십신(十信)으로부터 십주(十住)에 들어가 성공간(性空觀)을 깨달아 견혹과 사혹, 즉 분별사식을 증장하는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와 삼애를 홑으로 타파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집취상과 계명자상의 거친 번뇌만 우선 떨어져 단지 견혹과 사혹만 끊었을 뿐이다.

* 元曉 : 집상응염(執相應染)이란 의식이니, 견애 번뇌가 증장되는 뜻이며, 추분별집착(麤分別執着)으로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승인(二乘人)이라면 아라한의 자리에 이르러 견수 번뇌를 구경에 여의기 때문이요, 보살이라면 십해(十解) 이상에서 멀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상응지(信相應地)라고 한 것은 십해의 자리에서 신근이 성취되어 퇴실(退失)함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 삼현의 자리에 들어갔을 때 이미 인공(人空)을 얻어서 견수번뇌가 현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읜다고 한 것이다.

* 지운 :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의 깨쳐 인공(人空)을 체득해야 함.]

 

[상응염과 불상응염의 상응이란 업과 부합하거나 심소와 심왕이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내 속에 축적된 것과 나타내는 것이 같은 경우입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업만큼 능력을 갖게 되어 알고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8식 아뢰야식보다 근본적인 것들은 물들기 전의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써먹는 물든 후의 것들과 다릅니다. 그래서 근본 뿌리의 마음과 우리가 써먹는 오염된 업은 다릅니다. 이것이 불상응입니다. 제8 아뢰야식은 불상응염이고 제7 말라식과 제6식, 전5식은 상응염이 됩니다.

파도가 치면 우리는 파도가 치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눈앞에 파도가 없어도 파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그 장면을 기억해냅니다. 그 생각의 뿌리는 제8 아뢰야식입니다. 우리는 보통 제7식까지는 알지만 제8식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실제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은 나와 대상이 있습니다.

여기서 불상응염 세 가지를 살펴보면, 불상응염 세가지 는 근본업불상응염, 능견심불상응염, 현색불상응염이 있습니다. 근본업불상응염이란 나와 대상이 나누어지기 전입니다. 예를 들어 파도가 치는 것을 생각을 했을 때 바늘구멍, 점과 같은 어떤 한 생각이 일어나는데 그 현상이 근본업불상응염입니다.

능견심불상응염이란 그 일어난 바늘구멍, 점과 같은 생각이 조금 구체화된 것입니다. 이 때는 아직 어렴풋한 상태라고 보면 될 것 입니다.

현색불상응염이란 그것이 완벽하게 구체화된 상태입니다. 그것이 투영된 것이 제7식인 말라식입니다.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고 분별합니다. 제7식의 형상은 근본적으로 제 8식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시작은 작은 점과 같은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무언가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과정들을 거친 것입니다. 
다시 파도로 돌아와서 파도가 치기 전 잠잠한 바다, 물은 제8식에 해당할 것입니다. 근본업불상응염, 능견심불상응염, 현색불상응염이 해당합니다. 무언가에 부딪히거나 작용으로 파도가 일어나는데 파도를 일으키는 그것은 제7식에 해당할 것입니다. 분별지상응염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끝없이 일어나는 파도의 경계, 작용은 제6식에 해당할 것입니다. 부단상응염 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파도가 일어나는 것을 모으는 것이 전오식인 집상응염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면 눈을 통해 모읍니다. 눈 이외에도 다른 감각들을 통해 받아들이기도 하는, 그것이 제8식 아뢰야식에 자극이 되어 활성화되면 그것이 점에서 구체화되어 생각이 됩니다. 그 생각이 투영되어 나에게 저장된 업과 작용하여 개별적으로 구체화됩니다. 생각을 하고 행위를 일으키기 전에 감각을 통해 모으는 곳이 집(상응염)이며 전5식입니다.

우리는 물든 것만 빼면 부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의 고집, 집착을 빼면 우리가 걸어가는 삶은 바로 부처의 삶 입니다. 앞서 진여나 진각, 시각, 불각이 다른 것이 아닌 하나임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중생들의 삶도 오염되어 있을 뿐 이지 원래 부처의 삶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속에 중생과 부처가 공존하기 때문에 삶 속에서 부처되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 다. 연습을 하다보면 무언가를 객관화시킬 수 있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일어나는 것들 가운데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긍정이지만 나머지는 모두 부정입니다. 나 혼자 올바르고 똑똑하고 다른 사람은 바르지 않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이것이 100% 긍정이 되면 세상에 바르지 않고 옳지 않은 것이 없습 니다. 내가 부처라고 생각하면 삶 속에 물든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끝없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기지만 노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공부, 수행의 노력이 있어야 아집과 무지가 광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부, 수행은 수행자도 할 수 있고 세속의 일반인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공부, 수행을 해야하기에 여러 가지 절제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신’이란 책의 내용을 봅시다. “필자는 기독교인으로 자라났으나 하느님이 누구인가를 오래 추구한 끝에, 스피노자가 그랬듯이, 대우주(大宇宙)가 자신임을 깨달았다. 과학과 종교의 통일이요, 대통합이요, 분열된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나의 기독교는 정점에 이르러 여기에 도달한 것으로, 이것을 남에게 전달하기는 힘들다. 각자가 깨닫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깨닫기 위해서는 배우고 공부를 해야 하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노력 없이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종교지도자에게서 무엇을 들어도 비판적으로 생각하여 소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노예가 되지 않는다. 그 수준에까지 가는 일은 자기 몫이다.” 여기서 대우주가 자신임을 깨달은 것이 바로 일심입니다. ‘비판적으로 생각하여 소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노예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임제가 ‘부처님을 만나면 부처님을 죽이고 조상을 만나면 조상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공부해서 부처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만 부처되어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공부하면 깨달음, 부처의 길이 열립니다. 
다시 6염심으로 돌아가서, 집상응염(執相應染)은 집착으로 상응하는 오염이니, 성문 연각, 이승 (二乘)의 해탈과 믿음에 상응하는 경지[信相應地]에 의지하여 집착을 멀리 여의게 된다.” 집상응염은 전5식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몸으로 느끼는 모든 것에 집착합니다. 집착하기 때문에 내 속에 고여 있습니다. 집착하지 않으면 아무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불안 때문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내 속에 집어넣어 자기화 시킵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업을 만듭니다. 만약 집착하지 않게 되면 눈으로 보는 것을 그냥 보고, 귀로 듣는 것을 그냥 듣고, 냄새 맡는 것을 그냥 맡고, 몸으로 느끼는 것을 그냥 느낍니다. 집착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집착만 하지 않는다면 내 속에 무언가를 넣어놓는 것이 이 삶은 사는데 유리 할 수 있습니다. 돈도 많을 수록 좋습니다. 다만 집착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집착을 여의면 없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입 니다. 여기서 믿음도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공부하는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속에서 믿음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도 믿음이 생깁니다. 내가 헷갈리면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통섭불교]

 

[여기에서는 삼세육추, 오식(五識,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지식(智識), 상속식(相續識)) 등의 무명에 의해 발생된 생멸심(生滅心)이 연기하여 생기(生起)한 염심(染心)을 어떻게 다스려 차단해 가는 것을 다루게 된다. 처음 무명에 의하여 번뇌가 발생되는 양상은, 미세한 번뇌상태로부터 시작하여 크고 거친 번뇌로 전개되는 유전문(流轉門)의 입장에서 설명된 것이지만, 여기에서의 염심 번뇌의 차단은, 반대로 크고 거친 번뇌로부터 차단하기 시작하여 차차로 미세한 번뇌까지 차단해 가는 환멸문(還滅門)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먼지를 털 때, 크고 거친 먼지는 쉽게 떨어지지만, 작고 미세한 먼지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번뇌를 차단하는 경우에도 크고 거친 번뇌로부터 작고 미세한 번뇌를 향하여 차단해 가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다루는 염심(染心)에는 여섯 종류가 있다.

첫째는 집상음염(執相應染)으로, 이것은 삼세 육추의 아홉 상 가운데에서 거친 번뇌의 모습으로 분류되는 육상 중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의 번뇌에 해당되는 번뇌이다. 의(意), 의식(意識)의 분류로는 분별사식(分別事識)인 의식(意識)에 속하는 번뇌이다. 집취상(執取相)은 ‘경계를 연(緣)으로 망념을 일으키고 괴로움과 즐거움에 머물러, 마음이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괴로움은 피하고자 하고, 즐거움을 항상 유지하고자 하는 집착을 일으키고, 계명자상(計名字相)은 그렇게 집착한 대상에 대하여, 헛된 가명와 말을 붙여 분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집착의 바탕에는 자아 의식이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아집(我執)을 기초로 일어나고 있으며, 사랑과 미움에 대한 번뇌 집착이 현저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집상응염(執相應染)이라고 한다.

상응(相應)이란 서로 대응한다는 의미로, 번뇌가 상응한다고 하는 것은 ‘나와 너’, ‘자아와 대상’, ‘심왕(心王)과 심소’가 서로 관계하여, 동일하게 맞아 일어나는 번뇌를 말하면, 자아를 기초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아집을 차단함으로서 끊어지게 된다. 아집이 없어지는 것은 이승(二乘) 중 성문승은 아라한의 위치이며, 연각승은 그 수행이 완성되어 연각, 독각이 된 때이다. 또한 십주, 십행을 거쳐 십회향의 신상응지에 도달된 때에 이 번뇌는 차단된다. 십신의 위치가 충족되고, 다 다음 십주 이상에서 신심이 두터워져, 신근이 성취되어, 물러서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신상응지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자(聖者)에 들어가기 이전의 위치이다. 즉 이승의 해탈과 초발의보살의 신상응지에서 차단되는 번뇌이다. -전종식]

 

[장수왕 이야기

장수왕 이야기는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인과를 설명해줄 때 하셨던 것입니다. 장수왕은 코살라국의 왕이었습니다. 당시 코살라국 남동쪽에 카시국이 있었는데 그곳의 왕은 범예왕이었습니다. 장수왕은 어질고 착했던 반면 범예왕은 악하고 악착같았습니다. 카시국은 코살라 국에 비해 약소국이었으나 범예왕이 장수왕의 빈틈을 타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래서 장수왕은 나라를 버리고 아들 장생태자를 데리고 산에 숨어 살게 됩니다. 장생태자는 복수를 하고 나라를 되찾고 싶었으나 장수왕은 원한을 만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마음을 잘 먹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합니 다. 어느 날 마을 축제 때 씨름대회에서 뛰어난 장생태자를 보고 백성 중 누군가가 장수왕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범예왕은 승리한 후에도 안심하지 못하고 전국에 장수왕과 장생태자를 찾기 위해 사람을 보냅니다. 그 백성을 통해 밀정에게 장수왕의 장소가 알려지고 장수왕은 사로잡혀 처형을 당합니다. 그 후 장생태자는 복수를 위해 범예왕의 측근이 되어 뛰어난 무예를 뽐내며 동시에 이야기로 왕을 즐겁게 합니다. 범예왕의 최측근이 된 장생태자는 어느 날 범예왕이 혼자 낮잠을 자는 것을 봅니다. 그 때 그는 복수를 하려다 아버지의 말이 떠올라 갈등합니다. 그러는 사이 범예왕이 깼고 그는 그 사이 꾼 꿈 이야기를 장생태자에게 해줍니다. 꿈에 장생태자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생태자는 범예왕에게 자신이 장생태자이며 왕을 죽이려고 했다고 밝힙니다. 하지만 아버지 장수왕의 ‘원한은 원한을 낳으니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의 선에서 끝내도록 하라.’라는 말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범예왕은 장생태자의 그 진실된 마음과 장수왕의 말에 감동하여 자신의 지난 과오를 반성하게 됩니다. 그 후 장생태자를 자기의 양아들로 입적시켜 나라를 물려줍니다. 결국 원한을 원한으로 안 갚고도 장생태자는 원래 나라를 되찾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쇼카 왕의 전생 이야기도 살펴봅시다. 부처님이 어느 날 아난과 함께 마을에 탁발을 하러 나갔습니다. 마을 어귀 에서 모래를 가지고 소꿉장난을 하던 키 작은 아이가 모래로 밥을 지어 정성껏 부처님께 올립니다. 그것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모래 밥을 받게 하여 정사로 돌아와 허물어진 벽에 바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 아이가 다음 생에 국왕으로 태어날 것이다. 환희심으로 이 모래를 공양 올렸으니 그 공덕으로 삼보를 공경하여 팔만 보탑을 세울 것이다.” 이 아이가 아쇼카 왕의 전생이었습니다. 팔만 보탑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그 사리를 8등분해서 여덟 개의 탑이 세워집니다. 불교가 인도 전역으로 퍼지게 되자 아쇼카 왕은 탑이 인도 전역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사리를 나누어 팔만 개의 탑을 세웁니다. 그래서 인도 전역에서 공양을 올리고 예불을 올릴 수 있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아쇼카 왕은 출가를 하지 않았지만 불법이 지금까지 전해지게 하는데 1등 공신이 됩니다. 임금이 되어 좋은 환경에 만족하지 않고 불교를 나라 차원에서 전법합니다. 이렇게 한 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진리에 대한 공부가 쌓이거나 진실된 마음이 있으면 세상이 대응합니다. 내 속에 쌓이는 만큼 세상은 물질적인 것 을 내게 줍니다. 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주어진 것을 악한 것으로 잘못 쓰게 되고, 내 마음이 청정하면 주어진 것으로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 내가 진리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세상을 통해 잘 전파되려면 덕성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집착을 없애는 것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끝없는 집착의 연속 속에서 삽니다. 아집, 아만, 아애, 아치에 휘둘려 살게 됩니다. 공부하지 않는 한 이것들은 깨트릴 수 없습니다. 아집이 깨지면 정견이 생깁니다.-통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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