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증발심(證發心)의 상(相) 

又是菩薩發心相者(우시보살발심상자) 有三種心微細之相(유삼종심미세지상)

또한 이 보살의 발심상에는 세 가지 마음의 미세한 상이 있으니, 무엇을 그 셋이라 하는가?

云何爲三(운하위삼) 一者眞心(일자진심) 無分別故(무분별고) 

첫째는 진심으로, 분별이 없기 때문이며, 

二者方便心(이자방편심) 自然遍行利益衆生故(자연편행리익중생고)

두 번째는 방편심으로, 자연스럽게 두루 수행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며,

三者業識心(삼자업식심) 微細起滅故(미세기멸고)

셋째는 업식심으로, 미세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起滅하기 때문이다.

 

[元曉 : 眞心(진심) - 무분별지(無分別智), 方便心(방편심) - 후득지(後得智), 業識心(업식심) - 두 가지의 지혜에 의거하는 아리야식이니, 사실을 말한다면 또한 전식과 현식이 있는 것이지만 다만 지금은 근본의 세상(細相)만을 대략 든 것이다. 그러나 이 업식은 발심의 덕이 아니니, 다만 두 가지 지혜가 일어날 때 이러한 미세하게 생멸하는 허물이 있어 불지(佛智)의 순정한 덕과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합해서 발심상이라고 말한 것뿐이다.

* 高淳豪 : 眞心(진심)이라 한 것은 근본지(根本智)를 말하며, 方便心(방편심)은 후득지(後得智)인 권지(權智)를 말하며, 業識心(업식심)은 원효스님은 “무분별지와 방편심에 의지하는 아리야식으로 전식(轉識)과 현식(現識)은 있으나, 삼세(三細) 중에 업식만을 든 것이며, 이것은 법신보살이 발심의 덕은 아니나, 앞의 2지가 일어날 때 아직은 무명업식을 완전히 다하지 아니하여 미세하게 기멸하는 누가 있음을 밝혀 순정의 덕과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고 하였다.

* 지운 : 증발심(證發心)이란 주객이 없는 상태에서 발심하는 것으로, 진심(眞心)은 근본지이고, 방편심(方便心)은 후득지로서 여량지(如量智)라고도 하며, 중생을 보면 제도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업식심(業識心)은 선천적인 것으로 주객미분이지만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이 있는 것을 말한다.

* 憨山 : 지상(地上)의 법신보살이 권지와 실지의 작용이 있기는 해도 아직은 구경의 극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와 동일하지 않음을 밝혔다. … 眞心無分別故(진심무분별고) - 근본실지. 方便心(방편심) - 방편권지. 業識心(업식심) - 미세하게 생멸하는 심상. 이것은 이 보살이 권지와 실지가 있긴 하나 아직은 근본무명 업식심인 이숙식(異熟識)이 공적하지 못하여 그래도 미세하게 생멸하는 마음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이 점이 부처와 동일하지 않음을 말하였다.-물처럼바람처럼]

 

[앞에서 원효의 설명을 들어 이 부분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한바 있었지만, 법신보살의 발심에는 세 가지 미세한 마음의 특성이 있다.
첫째는 진심(眞心)이다. 이는 진여를 증득하는 지혜로서 근본지(根本智)이다. 이 지혜는 분별이 없는 참 지혜이다. 진심(眞心)은 진여가 진여를 아는 마음이지만 주객(主客)의 분열이 없는 직관(直觀)이므로 이를 무분별(無分別)이라 한다.
둘째는 방편심(方便心)이다. 이는 원효가 말했듯이 후득지(後得智)이다. 진여의 무분별지(無分別智)가 중생구제를 위하여 나타내는 방편심이다. 일체는 오직 마음인 유심(唯心)으로서 거기에는 주객의 분별이 없으나 마음밖에 중생계가 있으므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한 활동에는 주객의 분별을 인정하는 자연적인 방편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방편심이다.
셋째는 업식심(業識心)이다. 앞에서 원효의 해석을 인용했듯이 원효는 진심(眞心)의 근본지(根本智)와 방편심의 후득지(後得智)와의 둘을 들어「이지소의(二智所依)의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리야식은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원효는 이를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의 삼식(三識)으로 성립되는 것이라고 보고있어 업식이 있으면 당연히 전식, 현식도 있는 것이지만,「지금 여기서는 생략하여 근본의 세상(細相)을 든다」고 하여 업식심(業識心)만을 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야식의 최초(生相)는 업식이므로 업식(業識)만으로도 설명이 충분하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십지(十地) 이전의 보살은 아직 성불(成佛)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아직 미세한 무명망념(無明妄念)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보살이 중생구제를 위하여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가 활동할 때는 이 아리야식의 업식(業識)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법신보살의 이지(二智)는 아리야식을 전혀 갖지 않는 불타의 그것과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삼심(三心)의 하나로 업식심(業識心)을 든 것은 보살이 두 가지 지심(智心)이 발휘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업식에 의한 것이므로 미세한 생멸의 과실이 있으며 따라서 불타의 순정(純淨)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전종식]

 

[여기에서는 지상(地上)의 법신보살이 권지와 실지의 작용이 있긴 해도 아직은 구경의 극치에 이르진 못하였기 때문에 부처와 동일하지 않음을 밝혔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의문을 일으키길, "위에서 말한 대로 보살에 이와 같은 진여의 덕성과 작용이 있다면 어찌 부처의 경지와 동일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그에 대한 답변으로 보살은 세 가지 미세하게 발심한 마음의 양상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은 부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 "진심으로 발심한 양상인데 분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근본실지인 여리지(如理智)이고, 둘째 "방편으로 발심한 양상"은 방편권지인 여량지(如量智)이며, 세 번째 "업식심"은 미세하게 생멸하는 심상입니다. 이것은 이 보살이 권지와 실지가 있긴 하나 아직은 근본무명 업식심인 이숙식(異孰識)이 공적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미세하게 생멸하는 마음의 양상이 있기 때문에 이 점이 부처와 동일하지 않습니다.-수선]

 

* 증발심(證發心)의 공덕성만(功德成滿)의 상(相) 

又是菩薩功德成滿(우시보살공덕성만) 於色究竟處(어색구경처)

또한 이 보살의 수행공덕이 원만하게 성취되어, 색구경처에서

示一切世間最高大身(시일체세간최고대신)

모든 일체 세간의 가장 큰 몸을 나타내 보이나니,

謂以一念相應慧(위이일념상응혜) 無明頓盡(무명돈진) 名一切種智(명일체종지)

이른바 일념이 상응하는 지혜로써 무명이 단박에 다하는 것을 이름하여 일체종지라고 하니,

自然而有不思議業(자연이유불사의업) 能現十方(능현시방) 利益衆生(이익중생)

자연스럽게 불가사의한 업이 있어, 능히 시방에 나타나서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

 

[일념상응혜(一念相應慧), 시각(始覺)의 마지막 찰나의 지혜가 본각(本覺) 진여의 근본지(根本智)와 합일되어, 심원(心源)을 각(覺)하는 지혜로서 여기서 망념이 모두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일체종지(一切種智), 일체제법의 본질[理]에 통달한 지혜로서 차별(差別)과 평등(平等)의 양자를 포함하는 지혜이다. 일체제법의 본질을 안다는 점에서는 근본지(根本智)이고, 동시에 일체의 차별상을 조견(照見)하는 점에서는 후득지(後得智)이다. 그러므로 일체종지는 이 이지(二智)에 통하는 지(智)이다. 이를 가행도(加行道) 무간도(無間道) 해탈도(解脫道) 승진도(勝進道) 등 사도(四道)로 구분하면 일념상응지(一念相應智)는 무간도에 해당되고 일체종지(一切種智)는 해탈도에 해당된다. 일념상응혜는 인(因)에서 과(果)에 이른 순간적 지혜로서, 끊어지는 무명과 끊는 지혜가 동시에 있어 찰나의 간극이 없으므로 무간도(無間道)라 말하고, 일체종지는 증과(證果)로서 무명은 이미 사라져 없고, 지혜만이 있으므로 해탈도(解脫道)라 부른다.]

 

[高淳豪 : 제십지 보살은 색계의 최고인 색구경천에서 성도를 한다고 한다. 이는 보신(報身)으로 가장 큰 몸이 되는데, 자기에게는 자수용신(自受用身)이 되고 남에게는 타수용신(他受用身)이 된다.

* 三身(삼신)법신, 보신, 응신으로 나누기도 하고, 자성신, 수용신, 변화신으로 나누기도 한다.

①자성신(自性身) - 저절로 존재하는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② 수용신(受用神) - 깨달음의 경지를 스스로 즐기고, 또 그 경지를 중생들에게 설하여 즐겁게 하는 부처.(자수용신 : 깨달음의 경지를 스스로 즐기는 부처, 타수용신 : 깨달음의 경지를 중생들에게 설하여 즐겁게 하는 부처) 

③ 변화신(變化身) -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변화하여 나타나는 부처. ≪시공불교사전≫

이렇게 나눈다면 자성신은 법신, 자수용신은 보신, 나머지는 응신에 해당한다.

* 元曉 : 욕심이 있는 색계와 무색계에서 부처님이 성불한 것이 아니었다네. 색계 중의 높은 하늘 구경천에서 욕심을 떠나갈 때 도를 얻었네.

* 삼계(三界)는 욕계, 색계, 무색계로 되어 있다. 모든 부처님이 성불한 것은 욕계나 무색계가 아니라 색계의 제일 위 하늘인 색구경천이다. 그 이유는 중생 구제를 위해서는 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보살이 수행을 계속하여 공(功)과 덕(德)을 쌓아, 수행이 완성되면, 증발심(證發心)의 성만공덕(成滿功德)으로 성불(成佛)한다.
여기서는 증발심의 보살이 수행의 공덕을 완성한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설하는 내용은 인(因)의 입장에서 공덕성만(功德成滿)을 다루고 있으며, 과(果)의 입장에서의 공덕성만은 성불(成佛)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보살의 인행(因行)이 완성되어 불타가 되면, 그 불신(佛身)은 색계(色界)인 색구경처(色究竟處)에 있어서 일체세간에서는 최고의 큰 몸을 나타낸다. 색계십팔천(色界十八天)중 최고인 색구경천(色究竟天)이라고 해석해 오고 있다.
일체세간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로 구성되어 있다함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욕계, 색계는 신체가 있는 세계이며, 무색계는 신체는 없고 마음만이 있는 세계를 말한다. 욕계(欲界)는 남녀(男女)의 구별이 있으며, 식욕이나 성욕 등이 있는 세계이며, 색계(色界)는 선정(禪定)에 들어간 세계로서, 마음이 통일되어 외계의 인식은 사라지고, 신체의 락(樂)을 감수(感受)하는 세계이다. 무색계(無色界)는 선정체험이 더욱 심화되어 육체의 인식도 사라져, 마음만이 경험되는 세계이다. 이와 같이 외계에는 삼계(三界)가 있다고 보고, 이것이 우주로서 일체의 생물이 이 세계에 포함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증발심의 보살이 수행공덕을 완성하면 불타가 되고, 이 불신(佛身)은 일체세간의 최고대신(最高大身)을 나타낸다고 본론은 설하고 있다.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신체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이 색구경천(色究竟天)의 신체에 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보살은 일체세간에 두루 가득한 진여법신(眞如法身)에 수순하여 진여와 일여(一如)가 되는 것이므로 그 법신은 일체세간에 편만(편滿)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 색신은 최고최대의 몸이 된다.

이 보살은 일념상응혜(一念相應慧)로 지금까지 계속된 무명(無明)의 최후 일념(一念)까지 마침내 다해 사라진다. 이와 같이 무명이 다하여 진지(眞智)가 나타나는 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말한다.

이 일체종지(一切種智)는 의지(意志) 없이도 저절로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신비한 부사의(不思議)의 작용이 있어, 십방세계에 나타나서 일체의 중생을 이익케 하는 것이다. 일체종지는 수염본각(隨染本覺)에서 다룬 지정상(智淨相)과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의 두 가지 작용을 포함한다. 이와 같은 일체종지와 부사의업의 공덕성만(功德成滿)의 모습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각각의 의문에 대하여 이를 대답하며 해명한다.]

 

[여기서는 구경의 과덕을 밝혔습니다. 즉, 이 보살의 수행공덕이 원만하게 성취되면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모든 세간의 가장 큰 몸을 낸다는 자수용신(自受用身)입니다. 이는 이른바 일념(一念)이 서로 호응하는 지혜 즉 시각(始覺)이 일심의 근원에 이르러 본각(本覺)과 서로 호응하는 지혜로 근본무명이 단박에 다하는 것을 이름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자연히 불가사의한 지혜의 작용이 있어 시방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유익하게 할 수 있기에 타수용신(他受用身)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수행의 인지가 끝까지 다하고 과덕이 원만하게 성취된 것을 논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색구경처천에서 세간의 가장 높고 큰 몸을 나타내어 정각을 성취합니다. 이로써 현보(現報)인 자수용보신(自受用報身)의 이익을 나타내어 불과위(佛果位)를 수용하기 때문이며, 후보(後報)인 타수용신(他受用身)을 나타내어 중생을 유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근본무명업식이 다한 자는 자연스럽게 불가사의한 지혜작용이 있어 일체종지를 성취한다고 한 것에 해당하겠습니다. 여기서 "색구경처천"은 색계 최고 정상의 하늘인 유정천(有頂天)입니다. 부처님마다 모두 이 하늘의 연화궁(蓮華宮)에 앉아서 가장 높고 큰 몸을 나타내시고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성취한 몸은 자수용보신불입니다.]

 

   ③ 一切種智(일체종지)

問曰(문왈) 虛空無邊故世界無邊(허공무변고세계무변)

묻나니, 허공이 끝이 없기 때문에 세계가 끝이 없으며,

世界無邊故衆生無邊(세계무변고중생무변)

세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중생이 무변하며,

衆生無邊故心行差別亦復無邊(중생무변고심행차별역부무변)

중생이 끝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작용=心行의 차별도 또한 끝이 없다.

如是境界不可分齊(여시경계불가분제) 難知難解(난지난해) 若無明斷(약무명단)

이와 같이 경계는 한계 지음=分齋할 수 없으니, 難知=알기 어렵고 難解=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무명이 끊어지면 

無有心想(무유심상) 云何能了名一切種智(운하능료명일체종지)

심상이 있지 아니할 것이나, 어떻게 능히 알아 일체종지라고 이름하는가.

 

[一切種智, 모든 종류의 경계와 심상을 아는 지혜이다. 그런데 세계도 끝이 없고 중생도 한량없으며, 그 심행도 각각 다른데 어떻게 그것을 다 알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금강경》<일체동관분>에도 이와 같은 말이 나온다. “그 국토에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모두 안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모든 마음은 모두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심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문은 일체종지(一切種智)에 대한 것으로, 일체종지는 일념상응으로 무명이 끊기어 망분별의 심상(心想)이 없어진 상태이므로 차별세계에 대한 인식은 없어지는데, 어찌 그 차별상을 조견(照見)하는 일체종지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여기에서는 일체종지(一切種智)의 개념과 작용을 문답을 통해 확실하게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일체종지란 모든 사물의 공통성과 개별성 즉, 허공과 그 안에 있는 세계, 그 속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심념(心念)의 수를 끝까지 낱낱이 다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허공과 세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중생도 끝이 없으며, 그들의 심의식(心意識)이 진행하는 차별의 모습도 또한 끝이 없어서 이러한 끝없는 세계는 참으로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살이 근본무명을 다하여 일체종지가 현전하다면 절대로 망상심이 없게 됩니다. 이처럼 분별로 아는 망상심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들을 낱낱이 알 수 있고, 일체종지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는 범부의 사유가 있는 허망한 생각으로써 불가사의한 진여(眞如)의 세계를 헤아린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答曰(답왈) 一切境界本來一心(일체경계본래일심) 離於想念(리어상념)

답하여 말하나니, 일체경계는 본래 일심으로서, 상념을 떠나 있으나,

以衆生妄見境界故(이중생망견경계고) 心有分齊(심유분제) 

중생이 망상으로 경계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한계=分齊가 있는 것이다.

以妄起想念(이망기상념) 不稱法性故(불칭법성고) 不能決了(불능결료)

허망하게 상념을 일으킴으로써, 법성에 稱合=맞지 않기 때문에 결코 요해하지 못하지만,

 

[元曉 : 一切境界本來一心 離於想念이란 도리를 세운 것이다. 모든 경계는 본래 끝이 있지 않지만, 끝이 없지도 않으니, 일심을 벗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끝이 없지 않기 때문에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니, 이 때문에 상념을 여의었다고 하는 것이다. 以衆生妄見境界故 心有分齊란 보는 바가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대답하여 말한다. 일체의 대상세계는 본래 일심(一心)이며, 망상과 망념이 떠나 있는 것이지만, 중생이 망념(妄念)으로 일체대상을 보는 것이므로, 마음에 차별과 구별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일어난 망념 망상은 본래 일심(一心)인 진여법성과는 합치할 수가 없는 것이므로, 마음의 세계가 하나라는 사실을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타가 되면 제불여래(諸佛如來)는 차별적 망견(妄見)과 망상(妄想)에서 떠나 있으므로, 보는 작용이 일체에 두루 퍼져있다. 법성진여의 전체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증득된 마음의 진실상이기 때문이다.
중생이 아무리 끝이 없고 그 망법(妄法)이 끝이 없다 하더라도, 증득된 마음의 진실상은 스스로 일체의 망법에 비추어, 망법은 망법대로,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다. 불지(佛智)는 자체 위에 중생의 일체망법을 현조(顯照)하여 망법을 망법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諸佛如來(제불여래) 離於見想(리어견상) 無所不遍(무소불편) 心眞實故(심진실고)

제불여래는 견해의 모습=見想을 여의었기 때문에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마음은 진실한 것이기 때문에,

卽是諸法之性(즉시제법지성) 自體顯照一切妄法(자체현조일체망법) 

바로 이것이 제법의 본성=性이며, 자체가 일체의 허망한 제법=妄法을 환하게 비추고,

 

[元曉 : 離於見想 無所不遍이란 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心眞實故 卽是諸法之性이란 불심은 망상을 여의어 일심의 근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니, 망상을 여의었기 때문에 마음이 진실하다고 한 것. 이리하여 불심이 모든 망법의 체이며, 모든 망법은 다 불심의 상인지라 상은 자체를 나타내고 자체는 그 상을 비추는 것이니, 이와 같이 알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체는 모든 망법을 환하게 비춘다고 말한 것이니, 이는 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된 이유를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불타의 후득지(後得智)에는 중생의 일체망법을 불심(佛心) 속에 나타내는 크나큰 지혜의 작용과 무량한 방편이 있다. 일체종지(一切種智)는 중생의 일체망법이 불심(佛心)에 비치어 나타나게된 것으로서 이를 자체현조(自體顯照)라 한다. 이와 같이 중생의 망법은 모두가 불심(佛心)에 비치어 나타나 있으므로 불타는 그들 중생 하나하나의 요구에 응하여, 그들이 이해하는 바에 따라 적절히 여러 가지 법의 뜻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지(佛智)를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有大智用(유대지용) 無量方便(무량방편) 隨諸衆生所應得解(수제중생소응득해)

대지의 작용과 무량한 방편이 있어서, 온갖 중생이 응하는 것을 따라 이해=得解하는 바에 따라

皆能開示種種法義(개능개시종종법의) 是故得名一切種智(시고득명일체종지)

모두 능히 여러 가지 법의 뜻=法義를 열어 나타내니, 그러므로 일체종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진여는 상념이 없는데(眞心無知) 어떻게 한량없는 중생들의 경계를 아는가? 왜냐하면 진여는 여실공과 여실불공의 두 측면이 있어서, 중생의 경계에 상응하여 정념으로 중생들의 경계를 안다.]

 

[이에 대한 답변에서, 허망한 생각을 여읜 일심의 세계는 시각(始覺)을 통해서 본각(本覺)을 증오해야만 상응하고 심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일체종지의 명칭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끝없는 일체의 세계가 본래 일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일심진여의 세계는 망상으로 분별하는 허망한 생각을 여의었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끝없는 세계를 한계가 있는 망상의 견해로 보기 때문에 마음의 분야를 나누어 한계가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허망하게 상념을 일으킴으로써 진여법성에 걸맞게 계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끝까지 밝게 통달하지 못하지만, 제불여래는 허망한 견해의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에 두루 보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부처님의 마음은 일심의 진실을 체득하여 본각(本覺)이 시각(始覺)과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일심이 모든 법의 본성입니다. 제법자체인 이 일심이 일체 허망하게 생멸하는 제법을 환하게 비춥니다. 그러나 그 자체엔 위대한 지혜의 작용인 한량없는 방편이 있어 모든 중생을 따라 이해할 수 있도록 감응하면서 모두에게 갖가지 법의 의미를 열어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일체종지라고 하였습니다.]

 

④ 世間(세간)에서 부처를 보지 못하는 이유
又問曰(우문왈) 若諸佛有自然業(약제불유자연업)

또 묻나니, 만약 모든 부처님에게 자연업이 있어서,

能現一切處利益衆生者(능현일체처리익중생자)
일체의 모든 곳에 나타나시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분이라면,
自然業(자연업) : 의도가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행위
一切衆生(일체중생) 若見其身(약견기신) 若覩神變(약도신변) 若聞其說(약문기설) 

모든 중생이 그 몸을 보거나 신통변화를 보거나, 그 설법을 듣는다면

無不得利(무부득리) 云何世間多不能見(운하세간다불능견)

이익을 얻지 않음이 없을 것이나, 어찌하여 세간에서는 보지 못함이 많은가?
答曰(답왈) 諸佛如來(제불여래) 法身平等遍一切處(법신평등편일체처) 

답하나니,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지만, 

無有作意故(무유작의고) 而說自然(이설자연)
의도를 지음=作意가 없기 때문에 자연이라고 설하나니,

但依衆生心現(단의중생심현) 衆生心者猶如於鏡(중생심자유여어경)

다만 중생의 마음에 의지하여 나타낼 뿐이니, 중생의 마음이라는 것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鏡若有垢色像不現(경약유구색상불현) 如是衆生心(여시중생심)

만약 거울에 때가 끼어 있으면 색상이 나타나지 않으니, 이처럼 중생의 마음도 

若有垢法身不現故(약유구법신불현고)

만약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憨山 : 여래의 법신 대용인 보신과 화신의 작용은 항상 그러하여 중생의 심의식을 보편하게 관조한다. 그러나 단지 중생의 심의식에 여래의 법신을 보는 데 장애가 되는 더러운 때가 끼어 무명의 어둠이 가리어졌을 뿐이다. 그 때문에 보지 못할지언정 그것이 부처님의 허물은 아닌 것이다. 거울로써 부처님을 뵙고 뵙지 못하는 의미를 비유하였다. 이를 《화엄경》에서는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심은 비유한다면 햇빛이 대지를 두루 비추면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보지만, 유독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봉사는 보지 못한다. 봉사가 비록 햇빛을 보지 못한다고는 하나 역시 따스한 햇빛의 혜택을 받는다.”

* 佛身의 법체는 없는 곳이 없어서, 중생이 볼 수 있는 상태가 되면 늘 볼 수 있다. 무명에 의해 물들어 보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법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렇게 수행되었다는 뜻이니, 본인 역시 부처가 된다. 그러다보면 법신을 여실하게 본다는 것이나 성불한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불여래인 진여법신의 위대한 작용인 보신과 화신은 항상 여여하지만 단지 중생이 처한 상황에 밝음과 어두움이 있을 뿐임을 문답으로 밝혔습니다. 앞의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의 문장에서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간 중생이 법을 의지해 수행하는 모습을 밝혀 바른 종취(宗趣)를 결론짓고, 십신(十信)을 수행하여 십해(十解)를 성취한 의도로써 대(大)와 승(乘)의 의미를 밝혔었습니다. 다음 문장에서 다시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설명하게 된 것은 특별히 정정취에 아직 들어가지 못한 중생을 위하여 신심을 열어 보여주고 올바른 신행(信行)을 발기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는 위에서 설명이 끝난 대승에 대한 신심을 일으키는 의미를 밝힌 것입니다.]

 

[두 번째의 의문은 불지(佛智)의 자연업(自然業)에 대한 것이다. 다시 물어 말하기를, 만약에 제불에게 저절로 중생을 구제하는 자연업(自然業)이 있어, 온갖 장소에 나타나 중생을 이익케한다면, 일체중생은 모두 그 불신(佛身)을 보고, 그 불신의 신비스러운 신통신변(神通神變)을 보게 되며, 또한 불타의 설법을 듣고 이익을 얻어 구제될 것인데, 어찌하여 세간에는 불타를 볼 수 없는 중생이 많은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제불여래의 법신은 평등하고, 일체처에 두루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어 중생의 마음속에도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것은 불타가 인위적 의지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나타내는 것이므로 이를 자연업(自然業)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중생의 마음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중생심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거울에 만약 때[垢]가 묻어 있으면 색상이 나타나지 않듯이, 중생의 마음에 만약 번뇌의 때가 묻어 있으면, 거기에 법신(法身)이, 보신(報身)이나 응신(應身)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발심단계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전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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