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본각(本覺)

글쓴이 : 효암(孝菴) 박규택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한역은 진제(眞諦, Pramārtha, 499569) 553년에 번역한 1권본과 실차난타(實叉難陀, 652∼710) 695∼704년간에 번역한 2권본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금강경(金剛經)』·『원각경(圓覺經)』·『능엄경(楞嚴經)』 등과 함께 불교전문강원의 사교과(四敎科) 과목으로 예로부터 학습되어 왔던 논서(論書)이다.

 

   저자 마명(馬鳴)은 생존연대가 불확실하고, 그의 다른 저술의 성격과 비교할 때 이 논은 현격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위작(僞作)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이 논은 불교문학상으로 볼 때 최대 걸작 중 하나이며, 그 구성의 치밀성과 정확하고 간결한 문체, 독창적인 철학체계는 모든 불교학자들의 찬탄과 함께 뛰어난 명작으로 평가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그 연구가 활발하였다. 원전인 산스크리트 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진제(眞諦)의 한역본이 널리 유통되고 있다.

   여기서는 『대승기신론』에서 본각(本覺)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의미(意味)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Awakening of Mah āyāna Faith)』은 대승불교의 논서이다. 줄여서 『기신론(起信論)』이라고도 한다. “대승기신론”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대승(큰 수레) 또는 대승불교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는 또는 일으키기 위한 논서”이다.

 

   대승기신론은 전통적으로 인도의 마명 보살(馬鳴菩薩, 아슈바고샤, Aśvaghoa: c. 100-160)이 기원후 2세기에 저술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저자와 성립 시기에 대해 전통적인 견해와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은 산스크리트어 원본이나 티베트어 역본 없이 중국 양()나라 진제(眞諦, Paramārtha: 499-569)와 당()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 Śikṣānanda: 652-710) 2종의 한역본만 존재한다. 대승기신론이 인도에서 성립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대승기신론은 크게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에서 논의 본문인 정종분은 다시 인연분(因緣分),입의분(立義分), 해석분(解釋分),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일심(, One Mind), 이문(二門,Two Aspects), 삼대(三大, Three Greatnesses), 사신(四信 · Four Faiths), 오행(五行, Five Practices)으로 요약된다. 대승기신론은 이론과 실천 양면에 있어서 여러 교리사상을 받아들여 작은 책 속에 대승불교의 진수를 요약해 놓은 것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중국, 한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귀경술의(歸敬述意:삼보에 귀의하고 논을 쓴 뜻.)의 게송이 서두에 설해져 있고 본론에 해당되는 정립논체(正立論體)의 대목이 있으며 마지막에 총결회향(總結廻向)의 부분으로 전문이 구성되어 있다. 정립논체의 대목이 다시 논을 지은 이유를 밝힌 인연분(因緣分)과 논의 주제를 제시하는 입의분(立義分), 제시된 주제를 자세히 풀이하는 해석분(解釋分), 어떻게 믿는 마음을 내어 수행할 것인가를 밝힌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그리고 수행을 권하고 그 이익을 말하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으로 나누어진다.

 

  이 논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은 매우 심오하면서도 포괄적이다. 불교사상의 양대 조류라 할 수 있는 중관사상(中觀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이 포함되어 있고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까지 조화되어 있다. 논이란 대개의 경우 특정 경전에 대한 논술이라는 일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기신론』의 경우는 어느 특정한 경전에 국한시켜 논해 놓은 내용이 아니고 대승의 요지를 두루 포괄적으로 논했다 할 수 있다. 물론 『능가경(楞伽經)』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여 능가경의 별신서(別伸書)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승의 대의를 독특한 논리를 전개하여 종합적으로 논했다는 것이다. 일심을 의지하여 두 문을 열어 대승의 법()과 의()를 설명한 것이 『기신론』의 대의이다. 예로부터 이것을 의일심 개이문 (依一心開二門)이라 하였다.

 

  고래로 이 논에 대한 주석서(註釋書)가 많이 나와 중세까지 나온 것이 무려 190여 종에 달하고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의 삼국에서 역대로 수많은 주소가(註疏家)들이 나왔는데 이 중 일본에서 나온 주석서가 150여 종에 달한다. 그러나 예로부터 가장 많이 읽혀온 주석서로 우리나라 신라 때 원효(元曉, 617∼686) 스님이 쓴 『기신론소(起信論疏, 일명 해동소(海東疏)』와 중국 당나라 때의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 스님이 저술한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와 또 중국 수나라 때의 정영 혜원(淨影慧遠, 523∼592) 스님의 『기신론의소(起信論義疏)』가 있다. 이를 3대 소라 한다. 일본 학자들의 손에 의하여 영역(英譯)이 되어 서양에도 소개되었는데 스즈키 다이세쓰의 영역본과 요시토 하케다의 영역본 『The Awakening of Faith』가 있다.

 

  『대승기신론』은 불교의 논장에 들어 있는 책이지만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철학 내지 심리학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마음이 어떤 것인가, 그 정체를 『기신론』처럼 자세하게 설명해 놓은 책은 없다. ‘마음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경전 속에 나오는 구절처럼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고 세상을 살면서도 마음을 모르는 것이 중생이라 한다. 기원 1세기를 전후하여 마음에 대하여 논리 정연하게 분석을 한 『기신론』의 내용을 보고 감탄한 서양 학자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수행의 요지를 간명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설해서 수행의 지침을 명쾌하게 밝혀놓았다.

 

.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본각(本覺)이란

 

   본각(本覺, origianal enlightenment)은 불교철학, 특히 대승불교철학과 원효철학의 궁극적 관심을 반영하는 개념이다. 본각에 대한 독법에는 두 가지 상이한 사유방식이 혼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는, 본각이라 부르는불변의 참된 것/온전한 것’이 이미 인간 내면이나 존재의 이면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유방식으로서, 형이상학적 유형이다. 다른 하나는, 본각이라 부르는참됨/온전함’, 달리 말해온전한 경험지평’ 혹은궁극적 이로움을 누리는 경험지평’은, 아직 경험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부터 확보하는 능력에 의해 비로소 경험하게 되고 또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 보는 사유방식으로서, 경험주의적 유형이다.

 

   불변의 참된 것/온전한 것’의 내면적/이면적 선재(先在)를 설정하는 형이상학적 사유방식과, ‘참됨 및 온전함’의 경험적/역동적 후현(後顯)을 주장하는 경험주의적 사유방식의 차이인 것이다.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으로 보면, 본각이라 할불변의 참된 것/온전한 것’은 언어와 분별망상에 가려 드러나지 않다가 언어를 초월하고 분별의 베일을 거두면 환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주의적 사유방식으로 보면, 존재나 삶의참됨/온전함’은 마음이나 내면에 이미 있지만 가려져 있던 것을 마치 보물 캐내듯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인지능력의 전의(轉依)적 향상을 통해 비로소 그 지평에 눈떠 경험으로 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참됨/온전함을 경험하기 위한 마음/인지 능력의 향상은, 언어와 사유의 퇴행적 폐기가 아니라언어와 사유’ 능력의 전진적 차원 향상에 의해 이루어진다.

 

   여기서는 본각(本覺)에서 불각(不覺)과 시각(始覺)이 있으니 이 세 가지의 상호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본래 깨어있음[본각(本覺)]은 애초 괴로움이 없음을 말하고, 깨어있지 못함[불각(不覺)]은 꿈속에서 헤매는 괴로움의 대명사이며, 깨어나기 시작함[시각(始覺)]은 괴로움을 제거해 가면서 깨어 가는 마음을 말한다.

 

   그런데 본래 깨어있다면[본각(本覺)] 깨어 있지 못한 불각(不覺)이 있을 수 없으며 불각(不覺)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는 시각(始覺) 또한 필요 없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고통[불각(不覺)]이라는 현실에 본각이 있음을 증명해 준다.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 정신적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고 관()해 보면 고()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하여 주체가 없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자각이 바로 고()에서 벗어나 마음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시각(始覺)이다. 주체가 없는 고()와 번뇌란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하면 이는 본래 깨어있음과 다르지 않다.

 

   본각에 의지한 시각과 불각의 삼자 관계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현실의 괴로움 때문에 삼자가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둘째, 서로 의지하는 연기(緣起)의 모습이지만 그 개체는 자성이 없어 공()하기에 본각을 의지한 불각의 괴로움이 발생하는 한편 괴로움이 소멸하는 시각(始覺)의 길을 보여준다.

   셋째, 삼자관계가 자성이 없는 공()이므로 평등일성(平等一性)이며 이 평등일성을 깨치고 보면 본래 무각(無覺)이요 닦아 도달해 보면 무수(無修)요 증득하고 보면 무증(無證)임을 말한다. 본각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깨달음이 번뇌에 가려있기 때문에 본각이라고 했고, 다른 하나는 불각(不覺)과 시각(始覺)에 상대하여 세운 말이다. 이것은 괴로움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처음부터 본각, 시각, 불각이라 하여 세울 것 없는 무차별의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삼자의 관계는 중생이 괴로움을 일으킴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될 수 있는 희망을 주는 근본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경각(究竟覺)이라고 말한 것은 마음의 근원을 가리고 있는 무명불각(無明不覺)을 깨트려 가는 것이 시각(始覺)이 도달하는 최종단계임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시각의 4단계를 기술하여 중생이 온갓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음에는 네 가지 층이 있다. 시각청각미각후각촉각감각과 의식(意識)과 말나식(末那識;자아의식)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보고 듣는 등 모든 경험을 유실하지 않고 함장하여 나타내는 아리야식(阿梨耶識)이 있다. 이것을 정념(正念)으로 차례로 관()하여 심층으로 들어가면 망념(妄念)은 生滅의 네 가지 모습[사상(四相)] 보이고 있으며 거친 번뇌[망념(妄念)]에서 점차 미세한 번뇌[망념(妄念)]에 이르러 최종 무념(無念)의 구경각을 이루는 것이다.

 

   깨달아가는 과정[시각(始覺)] 긴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으로 비유할 수 있다. 원효스님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에서는 망념의 네 가지 모습[생, 주, 이, 멸(生住異滅)]을 꿈속의 생각[망념(妄念):몽념(夢念)]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망념의 사상(四相)을 차례로 깨쳐 소멸해 나가는 과정을 꿈을 꾸다가 꿈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인생이라는 긴 꿈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몽관(夢觀)이라 하고, 괴로움의 꿈에서 깨어나는 네 단계인 범부각(凡夫覺)상사각(相似覺)수분각(隨分覺)구경각(究竟覺)은 마음이 처음으로 꿈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는 시각(始覺)에 비유하고 있다.

  

   원효(元曉)는 그의 『금강삼매경론』에서 본각(本覺)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중생[유정(有情)]은 오랜 과거로부터 무명(無明)의 긴 밤에 들어가 망상의 큰 꿈을 꾸니, 보살이 관법(觀法)을 수행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성취할 때 중생이 본래 적정(寂靜)하여 오직 본각일 뿐이라는 것을 통찰하여 평등한 진여의 침상에 누워 이 본각의 이익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한다.

 

  무생법인을 증득한 보살은 본각의 이익으로써 중생의 허망한 분별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식(唵摩羅識, amala-vijnana) 들어가게 한다. 암마라는 무구식(無垢識), 혹은 청정식(淸淨識)으로서 아리야식의 미혹을 떠나 본래 청정한 자리를 회복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이 식은 바뀌거나 변하지 않고 언제나 여여(如如)한 본각(本覺)에 다름 아니다. 본각에 들어갈 때 팔식이 본래 적멸함을 깨닫고, 깨달음이 완전해졌으므로 모든 분별의식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수선님

大乘起信論에서의如來藏’ 개념 연구 / 고승학

서울大學校人文大學院 (석사학위논문)

 

. 결론

기신론은 그 저자와 번역자에 대한 의혹 때문에 僞經이 아닌가 의심을 받기도 하였지만, 동아시아 불교권에서 가장 사랑받아온 논서 중의 하나로 꾸준히대승에의 믿음을 일으켜” 왔다. 그러나 근자에 여래장사상을 비롯하여 화엄 및 선불교 등을 실체론적이며 비불교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비판불교 운동의 영향으로 기신론 또한 그 가치가 절하되기에 이르렀다.

비판불교 운동가들은 중생에게 내재되어 있는 成佛의 因, 곧 여래장(불성) 또는 자성청정심을 모든 현상적 대상들을 산출해내는 기반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場的존재(dhātu, locus)를 상정하는 이론(dhātu-vāda)은 불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래장사상이 dhātu-vāda라면, 실체로서의 여래장이 현상적 존재들을 산출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허상에 불과한 현상적 존재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신론은 생멸하는 중생의 마음 속에 그 본성이 깨끗한 여래장이 실체로서 내재되어 있지만, 그것이 無明에 의해 물들기도 하며, 반대로 무명에 작용을 가할 수도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무명과 여래장의 영향 관계를 染法과 淨法의 상호 훈습, 染淨互熏’이라 하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유식의 熏習개념과도 다른, 기신론 내지 여래장사상만의 독특한 훈습 개념이다. 본 논문은 이염정호훈’ 개념에 주목하여 본 논서가 단순한 dhātu-vāda만은 아니며, ‘지혜의 자비적 전개’라는 여래장사상의 종교적 목적을 실현하려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기신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개념은 一心, 二門, 三大등이며, 이 중에서도 최상위 개념은 일심일 것이다. 기신론 본문을 검토해 볼 때일심’은진여’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이런 일심이 진여문과 생멸문의 기반이 되고 있기 때문에, 본 논서의 의도가 절대적·보편적 마음인일심’으로부터 모든 상대적·차별적 현상 세계를 연역적으로 설명해 내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기신론을 이끌어가는 중심 개념은 일심과 함께 일심의 대상(一心法)으로서의 중생심이라는, 중생의 현실적인 마음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중생심은 생멸과 불생불멸이 미묘하게 화합한 알라야식으로 단순히 오염된 의식이 아니라는 점에 기신론의 識說의 독특한 점이 있다.

본 논문은 기신론에 대한 분석에 앞서서 여래장사상에 대한 일반적인 개요를 소개하였다. 우선如來藏’의 산스크리트 원어는 ‘tathāgatagarbha인데, 여기에서 ‘garbha’라는 말은容器’, ‘자궁’, ‘태아’ 등을 의미하며, 이러한 具象的 의미가 추상화된 결과, ‘불변의 본성’이라는 뜻의 ‘dhātu라는 말이(buddha)’에 결합되어佛性(buddhadhātu)의 개념이 생겨났다.

여래장사상에서모든 중생에게 불성(여래장)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라는 말은 敎法으로서의 여래의 작용이 두루 미치고 있으며(法身遍滿), 중생과 여래는 모두 그 본성이 공한 참된 모습에서는 차이가 없다(眞如平等)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중생이 여래의 자비를 입고 지혜를 닦아 부처가 되었을 때 그러한 중생 또한 세간에 자비를 실현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여래장사상에서는 지혜와 자비의 작용이 圓環的이기 때문에 여래장사상에서의法身(dharma-kāya)은 단지 진리 그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고, 지혜와 자비가 일체가 된 인격적 존재(理智不二法身)를 가리키게 되었다.

다음으로 기신론에 영향을 끼친 경전들을 살펴보았다. 소위여래장 삼부경’으로 불리는 초기 여래장 경전들 가운데 부증불감경에서 강조한一法界에 대한 바른 知見’은 기신론의근본무명’의 의미를 밝히는 단서가 되었으며, 승만경에서 제시된 여래장의 두 가지 의미(, 不空)는 기신론의언설에 의해 분별한 진여(依言眞如)’가 가지는 두 가지 의미(如實空, 如實不空)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생멸과 불생불멸의 화합식으로 정의된 알라야식 개념은 알라야식과 여래장을 동일시하는 능가경의 識說로부터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신론의 진여문은 현상계의 참모습(眞如)언설을 떠난 것(離言)”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러한 진여를 언설로 분별할 경우에도(依言) 본래 번뇌와 상응하지 않으며(如實空),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다(如實不空)는 뜻이 있다고만 설하고 있다. 그러나 진여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수행과 깨달음의 완성태를 가리킬 뿐, 수행과 깨달음에 대한 절실한 동기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알라야식을 토대로 미혹함(不覺)과 깨달음()의 세계를 역동적으로 그리고 있는 생멸문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기신론에서는 불각을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여(不如實知眞如法一故)” 발생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불각의 상태를 방향을 잃어버린 것에 비유하고 있다. 이러한 비유의 의미는길을 잃는다는 개념이 올바른 방향이 따로 있음을 전제할 때에만 성립할 수 있듯이, 중생의 근본불각 역시 불각과는 별도로 각이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모르는 것”으로 정의된 근본불각은 그러한 각과 불각의 상대성을 보지 못하고 양자를 절대적인 두 실재로 보는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기신론에서진여’는 일반적으로 여래장을 가리키며, 여래장은 무명을 따라 오염되는 성질(隨染性)을 가지고 있으므로, 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안다”는 말은 결국 각이 불각을 떠나 있지 않고, 불각을 따라 반응하며(隨染), 불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안다는 말과 같다. 이러한 불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일으킨 중생의 수행이 始覺이며, 그 수행이 완성되어 깨끗한 지혜와 무량한 공덕을 갖추게 된 것이 本覺이다.

기존의 기신론 연구를 살펴보면, 대개 覺과 不覺의 문제에 대해 천착하거나 또는 二門과 三大의 配屬, 六染과 8식과의 관계 등을 중심으로 원효, 법장의 기신론 이해방식을 비교하거나 진여문과 생멸문을 중관과 유식사상과 연관시키는 등 기신론을 대승불교의 敎學的텍스트로만 다루는 느낌이 든다. 예컨대 진여문을 진제로, 생멸문을 속제로 볼 때, 이 二門이 모두 一心으로 귀일된다는 기신론의 사상으로부터 이 논서가眞俗別體之執’을 제거하여 세속 속에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기신론에서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은 여러 전제들을 상정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곧 진여문과 생멸문이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면서 진여문의 離言진여가 생멸문의 시각의 究竟覺에 남아있는무위진여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여 本覺의 깨끗한 지혜(智淨相)와 불가사의한 공덕들(不思議業相)을 일으킬 수 있다고 추론하는 경우가 그러한 사례이다. 이러한 견해는 기신론의 전체적인 조망을 제시해 준다는 나름의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시각의 구경각에 어떠한 집착이 남아있는지, 본각이 이러한 구경각 보다도 한 단계 더 나아간 깨달음인지 기신론은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판의 소지가 있다.

필자는 기신론에서 시각과 본각과의 관계를 보다 분명하게 나타내 주는 것은 熏習개념이 아닌가 생각한다. 기신론은 진여와 무명의 상호 훈습이라는不可思議’한 훈습을 통해 중생의 구원(還滅)과 방황(流轉), 불도의 추구(上求)과 자비의 실현(下化)를 역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본각의 여러 양태들(隨染本覺의 智淨相, 性淨本覺의 因熏習鏡, 緣熏習鏡)이 훈습 개념을 통해 설명되고 있는데, 이것은 淨法훈습으로서 진여가 중생의 무명에 작용하는 양태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본래 훈습될 수 없는 진여(여래장)가 무명에 의해 훈습되는 것(染法훈습)은 중생의 불각이며, 그런 중생이 스스로 번뇌를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정법 훈습 중 망심훈습) 실천 수행을 일으킨 것은 시각에 대응된다. 아울러 중생의 내부에서 여래장이 因으로서 그들을 각성시키고(정법 훈습 중 진여의 자체상훈습), 중생의 외부에서 佛菩薩의 緣으로서 그들을 이끄는 것(진여의 용훈습)은 본각의 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각이 정법 훈습 중의 망심훈습에 해당된다는 말은 여래장(진여)이 처음에 망심(업식)에 훈습을 가한(本熏) 결과 중생의 망심에 질적인 변화가 생기고 그것이 진여를 지향하려는 힘을 키워 나감(新熏)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각과 본각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불생불멸로서의 여래장은 시각을 촉발하는 효과는 있지만, 시각은 주로 중생의 생멸심에 의지하여 전개되는 중생의 자발적인 실천 수행이며, 본각은 불생불멸로서의 여래장과 중생의 外緣으로서의 여래 법신이 중생에게 가하는 上求와 下化의 작용이다.

기신론은 특히 이러한 진여의 작용(용훈습)이 끊이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그것은 부처가 무한한 중생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同體大悲’의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한다. 기신론은 이러한 동체대비가 중생과 여래가 진여로서 평등하다는 인식에 근거한다고 설하는데, 이것은 모든 중생이 여래장(成佛의 因을 감추고 있는 존재)임을 보는 지혜가 자비의 실천으로 연결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기신론은 실천 수행 가운데 止觀門에서 모든 중생이 무명의 훈습을 받아 고통받고 있는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을 觀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기신론은 번뇌 속의 법신(在纏位), 곧 여래장을 개개인의 성불의 요인으로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번뇌를 벗어난 법신(出纏位)이 중생의 외부에서 항상 중생을 이끌어주고 있음을 진여의 용훈습 개념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온 세계에 부처의 작용이 미치고 있음을 아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신비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성청정심이 번뇌에 물드는 것 또는 무명에 의한 진여의 훈습을불가사의한 여래의 경계”로 언급하는 승만경, 기신론 등의 여래장 계열의 경전들의 修辭學(rhetoric) 또한 이론적 불철저성 보다는 이러한 신비 체험을 기술한 데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명과 진여에 관한 설명이 본 논서의 목적대승에의 믿음을 일으키는 것에 어느 정도 부합할 수 있는가? 물론, 기신론은 그러한불가사의한 훈습’이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믿음을 일으켜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번뇌 망상에 시달리는 중생에게 그가 발심만 하면 그의 내적 요인(그에게 내재된 여래 법신인 여래장)과 외적 조건(佛菩薩의 同體大悲의 發願力)에 힘입어 해탈할 수 있음을 본 논서는 설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본 논서가 이론적인 설명을 포기한 무명의 존재론적 위상, 진여와 무명의 상호 훈습의 원리에 대하여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면, 본 논서는 그 목적인起信’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 海印의 뜨락

大乘起信論에서의如來藏’ 개념 연구 / 고승학

서울大學校人文大學院 (석사학위논문)

. 기신론 의 여래장 개념

4. 同體大悲의 근거로서의 여래장

앞 절에서는 기신론의 생멸문을 이루는 시각, 본각, 불각 개념이 각각 정법 훈습 중의 망심 훈습, 정법 훈습 중의 진여의 자체상 및 용훈습, 그리고 무명·망심·망경계의 염법 훈습을 통해 기술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기신론은 염법 훈습과 정법 훈습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또한 염법은 무시의 때로부터 훈습하여 단절하지 않다가 부처가 된 후에는 곧 단절함이 있으나, 정법 훈습은 곧 단절함이 없어서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니, 이 뜻이 무엇인가? 진여법이 항상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곧 멸하고 법신이 밝게 나타나 用훈습을 일으키므로 단절함이 없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여래장사상의 두 가지 이론적 전제를 보여주고 있다: ⑴ 무명은 그 始源을 알 수는 없지만 실체성이 없으므로 언젠가는 소멸되는 것이다. ⑵ 여래 법신은 끊임없이 중생을 제도하고 있기 때문에 常·樂·我·淨이라는 사바라밀다의 덕을 갖출 수 있다.

⑴은 여래장의 두 가지 의미 가운데 空여래장 개념을 표현하고 있으며, ⑵는 번뇌가 그렇게 공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번뇌의 소멸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중생에게 내재된 법신인 여래장이 중생을 내부로부터 각성시키고, 번뇌로부터 떠난 법신이 중생을 외부로부터 해탈로 이끌어주어야 가능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특히 그러한 법신의 작용이 끊이지 않는 것을 가리켜 법신의 常-바라밀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신론에서는 진여의 용훈습의 항상성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여가 항상 훈습하고 있다는 염법이란 무엇인가?

승만경을 다루면서 언급했듯이 여래장사상은 본래 청정한 여래장이 번뇌에 물드는 것은범부의 경계가 아니며, 여래의 경계”라고 강조해왔다. 여기에서 번뇌가 여래장을 물들이기 위해서는 여래장과 대등한 존재론적 위상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승만경은 상주불변의 여래장과 함께 끊기 힘든 번뇌로서 무명주지가있음’을 강조하며, 염법(무명)과 정법(여래장)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요소를 하나의 이론 체계에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무명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중생의 현실을 설명해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기신론은 무명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명의 훈습에 의하여 일어난 식이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二乘의 지혜로 깨달을 것도 아니니, 이는 보살의 처음의 正信에서 발심하고 관찰함으로부터 저 법신을 증득한다면, 조금이라도 알게 되며, 보살구경지에 이른다 하더라도 다 알 수는 없고 오직 부처만이 끝까지 다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이 마음이 본래부터 그 본성이 깨끗하지만, 무명이 있어서 이 무명에 의하여 물들게 되어 染心이 있는 것이니, 비록 염심이 있으나 항상 변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뜻은 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창조주의 개념이 없는 불교에서는 유신론적 전통에서 논의된 惡(evil)의 기원에 관한 문제, 곧 神正論(theodicy)이 불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불교 역시 고통(dukha)으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유신론적 전통의 악에 해당하는 고통의 본질이 무엇인지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만, 초기불교에서는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시급히 벗어날 것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무명의기원’을 다루는 문제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서 거부되었다(‘독화살의 비유’). 곧 무명·번뇌를 주어진 것으로, 苦성제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에서와 같이 본래 청정하면서도 무명에 물드는 모순적 성격을 가지는 본체를 상정하는 이론이 등장하면서 불교에도 무명과 여래장의 관계를 밝히는신정론’이 요청되었다. 예컨대 기신론에서 무명을 바람에, 여래장을 물에 비유할 경우, 무명은 실체가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없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명은 어떤 방식으로있는’ 것일까? 또 무명의 바람에 의해 물결이 이는 것을마음(자성청정심=여래장)이 물드는 것’이라 할 경우, 그러한 물듦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불교, 특히 여래장사상에서 제기된신정론’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레고리(Peter N. Gregory)는 기신론을 통해 검토한 결과 위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이 문제가 佛智에서나 해결 가능한 신비(mistery)로 남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렇게시초를 알 수 없는’ 무명(염법)이긴 하지만, 그것이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며, 언젠가는(부처가 된 후) 지멸될 수 있고, 그것은정법의 훈습”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는 점은 여래장사상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여기에서 중생에게 해탈의 外緣으로서 작용하는 용훈습이 항상 그치지 않는다는 앞의 인용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신론은 본 논서가 밝히고자 하는진여’가 결국 여래장, 여래 법신임을 밝힌 다음, 그것의 작용() 다음과 같이 설한다.

또한 진여의 用이란 이른바 모든 부처와 여래가 본래 因地에서 대자비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을 닦아서 중생을 섭화하며, 크나큰 서원을 세워 일체의 중생계를 모두 度脫시키고자 하여 劫의 수를 한정하지 않고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니 모든 중생을 돌보기를 자기 몸과 같이하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衆生相을 취하지 않는다.

기신론은 이러한 진여의 작용은 모든 중생을 자기 몸과 같이 보는同體大悲’의 발로라고 보고, 이러한 자비심은모든 중생과 여래의 몸이 진여로서 평등함”을 여실히 알기 때문에 생겨난 마음이라고 해설한다(이는 앞 장에서 살펴본 보성론의眞如平等’의 뜻에 해당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작용이 중생에게 가해질 때 중생은 무명을 없애고, 불가사의한 여러 작용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본각의 지정상과 불사의업상을 말하며, 앞 절에서 다룬 진여의 용훈습을 부연 설명한 것이다.

기신론은 이와 같이 진여의 용훈습을 여래 법신의 자비심으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보고, 중생이 수행을 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자비심을 닦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기신론은수행신심분’에서 수행의 五門으로 ⑴ 施門, ⑵ 戒門, ⑶ 忍門, ⑷ 進門, ⑸ 止觀門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6바라밀에 대응되며 ⑸ 지관문은 그 중의 선정과 지혜를 합한 것이다. 본 논서는 마지막 지관문에 대하여 상당히 자세히 해설하고 있다. 여기에서 止는모든 경계상을 그치게 하는 것”으로, 觀은因緣生滅相을 분별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특히 다음과 같이 止와 觀의 관계를 논한 대목이 주목된다.

만약 사람이 오직 止만을 닦으면 곧 마음이 가라앉거나 혹은 게으름을 일으켜 여러 善을 즐기지 않고 大悲를 멀리 여의게 되니, 이러므로 觀을 닦는 것이다.

만약 止를 닦으면 범부가 세간에 主着함을 대치하고 二乘의 겁약한 소견을 버릴 수 있으며, 만일 觀을 닦으면 二乘이 대비를 일으키지 아니하는 狹劣心의 허물을 대치하고, 범부가 선근을 닦지 않음을 멀리 여읜다.

기신론은 이와 같이 마음을 고요히 하는 止와 그 고요해진 마음으로 세간의 무상함과 중생의 고통을 여실히 보며, 그들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키는 觀을 함께 닦을 것을 함께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신론의 觀이 현상계에 어떠한 실체도 없음()을 여실히 아는 지혜인 반야바라밀다와는 다소 성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기신론은 觀의 내용으로 특히일체중생이 無始로부터 모두 무명의 훈습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을 생멸케 하여 이미 큰 고통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미래에 받을 고통도 한계가 없어서 버리고 여의기가 어렵건만 이를 깨닫지 못하니, 중생이 이처럼 매우 가련한 존재임을 늘 생각해야 한다”는 大悲觀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기신론의 수행으로서의 觀은 여래장사상을지혜의 자비적 전개”라고 부르는 所以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중생이 이러한 수행을 하고 그 수행이 완성된 결과 다른 중생들에게 정법 훈습을 끊임없이 가할 수 있는 근거는 그의 존재가 여래장(在纏位의 法身)으로 규정되기 때문일 것이다(“一切衆生如來藏”). 중생으로 하여금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게 하는” 중생 내부의 因과 그들 앞에 불보살로 현현하여 그러한 내부의 因을 끌어내는 중생 외부의 緣은 모두 법신이 在纏位와 出纏位라는 서로 다른 존재 양태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경우 출전위의 법신인 여래는 중생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존재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그의 業用, 곧 진여훈습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반면, 하나의 개체로서 유한한 중생의 번뇌는 그것이 아무리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끊임없는 진여의 용훈습에 의해 결국에는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는 보살로서의 일천제는 결코 성불하지 않지만, 중생으로서의 일천제는 언젠가는 성불한다는 입능가경의 說과도 통함이 있다). 아울러 진여의 용훈습이 同體大悲로부터 비롯되었고 동체대비의 마음이진여평등’, 곧 중생과 여래가 진여로서 평등하다는 점에 대한 인식에서 나올 수 있다면, 중생에게 내재된 진여, 곧 재전위의 법신으로서의 여래장은 동체대비의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海印의 뜨락

大乘起信論에서의如來藏’ 개념 연구 / 고승학

서울大學校人文大學院 (석사학위논문)

 

3. 4종 熏習과 流轉·還滅연기

1) 기신론 의 熏習개념 

우리가 현재 받고 있는 모든 苦와 樂을 이전에 행했던 業(karma)의 果報로 보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불교 교리인 業說이다. 그런데 유식불교는 그러한 업이 다시 행위자 자신의 미래의 행위를 유발하는 힘이 있음에 주목하고 그것을熏習(vāsanā)이라는 개념으로 정립하였다. ()과 입()과 의지()의 업으로 나타난 결과는現行’이라 불리는데, 그것이 다시 알라야식에 저장되어 미래의 행위를 유발할 경우習氣(경향성)’ 또는種子(씨앗, bīja)로 불리게 된다.

여기에서 현행이 그 습기 또는 종자를 알라야식에 저장하는 작용이 바로 의복에 향내가 스며드는 것으로 비유되는훈습’ 개념인 것이다. 아울러 이렇게 훈습된 종자는 마치 땅에 뿌려진 씨앗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현상세계(現行)를 생겨나게 하며, 종자로부터 생겨난 이 현상세계는 그 영향력(습기)을 알라야식에 남겨 새로운 종자를 만들어내어 결국 종자에서 종자로 이어지게 되는데(種子生現行, 現行熏種子, 種子生種子), 이것이 바로 유식에서 설명하는 輪廻(流轉, sasāra)의 원리인 것이다.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기신론의 가장 독특한 점은 모든 존재의 실상으로서 깨끗한 법(淨法)으로 간주되는 眞如또는 여래장과 온갖 번뇌의 근본인 無明사이에 상호 훈습이 이루어짐(眞妄交徹)을 인정하는 데에 있다. 일반적으로 유식사상에서는 알라야식과 같이 변화될 수 있는 존재만이 중생이 짓는 업(現行)에 의해 훈습을 받을 수 있다(所熏)고 한다. 또한 유식사상은 불변의 진여가 다른 존재를 훈습할 수 있음(能熏)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진여나 여래장과 같은 불변의 존재(常法)가 무명과 같이 변화하는 존재를 훈습하고 반대로 훈습을 받는다는 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원효는 기신론을 해설하면서 이러한 지적을 예상하고서 유식의 훈습 개념이생각할 수 있는(可思議)’ 훈습임에 대하여 이 논서의 훈습은생각할 수 없는(不思議) 훈습’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원효는 여기에서 다루는 진여에 대한 무명의 훈습에서진여’는 발생론적 설명(生義)이 불가능한 진여문에서의 진여가 아니라 생멸문의 性淨本覺에서의 진여이므로 그것이 불가능한 개념이 아니라고 부연하고 있다.

기신론은 그러한 훈습을 ⑴ 무명에 대한 정법(진여)의 훈습, 진여에 대한 무명의 훈습, 무명에 대한 妄心(業識)의 훈습 망심에 대한 妄境界(6: 6식의 대상들)훈습의 四種으로 나누며, ⑴을 淨法훈습, , , ⑷를 染法훈습으로 부르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정법 훈습은 중생이 무명의 세계로부터 진여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는 훈습으로, 어떤 중생에게 정법 훈습이 가해지게 되면, 그는 번뇌로부터 벗어나 열반[]이라는 근원적 상태로 돌아가게[] 되므로, 이러한 훈습은還滅’의 因緣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염법 훈습은 무명과 망심, 망경계가 번갈아가면서 중생의 마음을 훈습하여 끊임없이 業을 지어 미혹의 현상 세계에 계속 머물게 하는 것으로, 이것은流轉’의 인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染法훈습과 流轉연기 

기신론은 위의 두 가지 훈습 가운데 염법 훈습을 먼저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른바 진여법에 의하기 때문에 무명이 있고, 무명염법의 因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며, 훈습하기 때문에 곧 망심이 있게 된다. 망심이 있어서 곧 무명을 훈습하여 진여법을 요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각하여 망념이 일어나 망경계를 나타낸다. 망경계의 染法의 緣이 있기 때문에 곧 망심을 훈습하여 그로 하여금 念着케 하여 여러 가지 업을 지어서 일체의 身心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다.

위의 , , ⑶은 각각무명훈습’, ‘망심훈습’, ‘망경계훈습’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⑴에서 무명염법의 因이 진여를 훈습하는 것은 근본무명의 훈습으로서 그 결과 나타난망심’은 기신론의生滅因緣’의 5意가운데 業識에 해당한다. ⑵는 무명에 의해 생겨난 망심(업식)이 무명을 다시 훈습하여 미혹된 주관과 객관 의식인 망념과 망경계를 산출하고, 그 결과 중생을 더욱 미혹하게 함을 말한다. 여기에서망념’과망경계’는 각각 轉識과 現識을 나타낸다. ⑶은 이와 같이 알라야식의 자기 전변으로 나타난 現識(妄境界)이 다시 망심을 다시 훈습함을 말하는 것으로, 智識, 相續識, 分別事識등은 이로부터 전개되어 流轉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다시 ‘36麤’와 관련해서 살펴보면, ⑴과 ⑵의 단계에서 알라야식에는 無明業相, 能見相, 境界相이 생겨나고, ⑶의 단계에서는 이 경계상에 대하여 智相, 相續相, 執取相, 計名字相을 일으켜 분별·집착하고(‘念着’), 그 집착하는 바를 실현하고자 起業相으로써 업을 일으켜(‘造種種業’), 결국은 業繫苦相이라는 고통스런 결과를 초래하는 것(‘受於一切身心等苦’)으로 볼 수 있다.

기신론은 ⑴ 무명훈습을 다시 根本훈습과 所起見愛훈습으로 나누는데, 원효에 따르면 전자는 알라야식이 물들어 업식이 발생하게 된 것으로 근본불각에 해당하며, 후자는 이로부터 파생된 見愛번뇌로서 分別事識(여기에서는 7식을 포함한다)이 물들어 있는 지말불각에 해당한다.

또한 ⑵ 망심훈습은 업식근본훈습과 增長分別事識훈습으로 나뉘며, 각각 三乘에게는 變易생사의 고통을, 범부에게는 分段생사의 고통을 일으킨다고 한다. 이것은 승만경에서 三乘이 意生身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무명주지’를 끊지 못함으로써 완전한 열반을 얻지 못했다고 말한 것에 대응된다. 다시 말해 三乘은 범부가 겪는 분별사식의 번뇌와 그로 인한 분단생사를 벗어났지만, 업식(無明業相)으로부터 발생한 轉相과 現相등 근본적인, 미세한 번뇌를 끊지 못하여 변역생사의 고통은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⑶ 망경계훈습은 분별사식의 대상에 대한 집착(法執分別念)을 증장시키는 增長念훈습, 그리고 지적인 어리석음(見取)을 비롯하여 三界의 허망한 상에 대한 집착인 欲取·戒禁取·我語取등 四取를 증장시키는 增長取훈습으로 나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염법 훈습은 사실상 기신론 생멸문의不覺’, 곧 근본무명에 의한 연기(流轉)에 대한 설명이며, 알라야식으로부터 五意와 意識이 전변함을 설명한生滅因緣’을무명의 훈습’이라는 개념을 통해 부연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기신론에서 염법 훈습을진여법에 의하여 무명이 있고 무명염법의 因이 있어 진여를 훈습하는 것’으로 정의하고는 있지만, 진여가 所熏이 된다는 점만 다를 뿐, 이러한 훈습을 통하여 중생의 생사유전을 다루는 방식은 유식의 설명과도 비슷해 보인다. 오히려 기신론 만의 독특한 훈습 개념을 잘 드러내주는 것은 이하에 설명할 정법 훈습이라 할 수 있다.

 

3) 淨法훈습과 還滅연기 

기신론 은 승만경에서여래장이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거이 구하게 한다”고 한 것에 대하여 (중생의 허망한 마음 속에) 진여가 있어 무명을 훈습하여 망심으로 하여금 發心, 修行하는 작용을 일으킨다고 설하고 있다(이를 진여의內熏’ 또는‘ 本熏’이라고 한다). 아울러 이러한 허망한 마음 속에 생겨난,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는 인연(厭求因緣)은 다시금 처음의 진여를 훈습하여 그 힘을 增長한다고 한다(이를 진여의新熏’이라 한다). 기신론에 따르면, 이러한 정법 훈습이 있기 때문에 중생은 스스로 자기 본성을 믿어서 제 마음 밖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수행을 닦아 오랫 동안 훈습한 힘으로 무명을 없앨 수 있으며, 무명이 멸할 경우 心相이 사라져 열반과 부처의 自然業을 이룰 수 있다.

기신론은 이와 같은 정법 훈습을 다시 ⑴ 망심훈습과 ⑵ 진여훈습으로 나누고 있다. 앞의 염법 훈습에서의 망심훈습이 무명의 훈습으로 인해 업식이 발생하고 그로부터 전개된 여러 번뇌(3 6) 및 生滅과 業繫의 고통을 일으키는 것이었다면, 정법 훈습의 일종으로서의 망심훈습은 중생의 마음 속에서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열반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厭生死苦, 樂求涅槃)이 생겨나 發心, 修行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망심훈습’의 주체(能熏)를 여래장 자체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망심’이 곧여래장’이라면 다음에 살펴볼 진여훈습, 특히 자체상훈습과 구별이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망심훈습이란, 번뇌로 뒤덮인 중생의 망심(생멸심)이 처음에 여래장에 의해 훈습을 받고난 뒤(本熏), 그 망심이 주체(能熏)가 되어 중생심(알라야식) 속에 있는 불생불멸의 진여(여래장)를 대상(所熏)으로 하여 진여의 작용력을 키운 것(新熏)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신론은 그러한 망심훈습을, 중생이 어떤 관점에서 열반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시 분별사식훈습과 意훈습(업식훈습)의 둘로 나눈다. 곧 범부와 二乘은 생사와 열반을 다른 것으로 보고, 열반을 마음 밖에 있는 것으로 대상화하기 때문에 이들의 열반에의 희구는 사실상 염법 훈습에서의 분별사식의 집착과 다를 바 없으므로 이러한 훈습은 분별사식훈습이라 불리게 된다. 반면, 十住이상의 보살들은 모든 대상들이 오직 마음, 특히 업식의 헤아림(一切法唯是識量)임을 잘 알기 때문에 열반을 마음 밖의 것으로 대상화하지 않으며, 이들이 일으키는 훈습은 업식에까지 미치고 있으므로 이를 업식훈습 또는 의훈습이라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정법 훈습으로서의 망심훈습이 중생이 생멸심에 근거하여 수행을 일으킨 것으로 그들의 주체적인 자각과 노력을 나타낸다면, 이는 생멸문의 始覺에 대응시켜도 좋을 것이다. 한편, 진여훈습은 ⑴ 중생에게 내재된 여래장이라는 소질()과 함께 ⑵ 외적인 환경(外緣)으로서의 부처, 보살, 善知識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기신론은 전자를 自體相훈습, 후자를 用훈습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러한 설정은 여래장의 훈습만을 말할 경우 중생이 모두 성불하여 차별됨이 없어야 할 것이라는 반론을 예상한 것이다. 기신론은 이에 대해 나무가 비록 불에 타는 성질이 있지만, 스스로는 탈 수 없는 것과 같이 성불·열반도 佛法의 因과 緣을 모두 갖추어야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기신론은 우선 여래장의 작용력으로서의 자체상훈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안은 원효의 주석).

자체상훈습이란 無始의 때로부터 無漏法을 갖추고 不思議業을 갖추며[本覺不空], 境界性을 짓는 것이다[如實空]. 이 두 가지 뜻에 의하여 항상 훈습하여 훈습의 힘이 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여 스스로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는 줄 믿어 발심하여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체상훈습은 결국 여래장이 중생심에 작용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승만경의 空, 不空여래장 개념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중생의 外緣의 힘으로 정의된 용훈습은 ⑴ 구도자가 수행 중에 만나는 여러 사람들로서 그에게 온갖 행위를 일으켜 그의 善根을 증장시키는 差別緣과 ⑵ 모든 부처와 보살이 일체 중생을 영원히 훈습하여 중생의 見聞에 응하여 업을 일으키고 있는 平等緣으로 나뉠 수 있다. 차별연과 평등연 모두 그 훈습의 주체는 부처와 보살로서 전자의 경우, 그들이 중생 앞에 권속, 부모, 急使, , 원수 등 여러 모습으로 化現함을 말한 것이며, 후자는 중생의 요구에 응하는 법신의 작용이 항상되어 끊이지 않으며, 그것이 차별없는 모습으로 나타남을 강조한 것이다. 두 경우에 부처가 이렇게 화현할 수밖에 없는 동기는 그의大悲’와同體智力’임을 강조하고 있다.

기신론은 평등연으로서의 진여의 훈습은중생이 삼매에 의하여야”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원효는 이에 대해 범부와 이승의 분별사식훈습을 대상으로 하는 차별연과 달리, 평등연은 보살의 업식훈습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곧 이들 보살은 부처의 작용이 나타난 결과(報身)를 보되, 6(분별사식)의 인식론적 한계(分齊)를 떠나 있으며, 그러한 진여의 평등한 작용은 고도의 정신 집중, 곧 三昧에 의해서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신론은 진여훈습을 자체상훈습과 용훈습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그것은 각각 중생에게 내재된 여래장(在纏位의 법신)의 上求작용과 중생 밖에서 중생을 이끄는 여래(出纏位의 법신)의 下化작용을 나타낸 것이며, 생멸문의 本覺을훈습’이라는 개념을 통해 재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性淨본각의 二相중 智淨相을 설명하면서 제시된법력의 훈습’이라는 말과 隨染본각의 四相중因熏習鏡’, ‘緣熏習鏡’ 등의 용어를 통해서도 기신론의 본각 개념이 진여훈습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본 절에서 다룬 기신론의 훈습 개념과 생멸문의 불각, 시각, 본각과의 관계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4> 기신론 의 훈습 개념과 覺과의 관계

< 4>에서 알 수 있듯이 기신론의 染淨互熏은 불각과 시각, 그리고 본각 개념을 여래장(진여)과 무명이라는 두 요소간의 훈습이라는 측면에서 서술한 것으로, 불각은 염법 훈습(무명, 망심, 망경계훈습), 시각은 정법 훈습 중의 망심훈습에 대응되며, 본각은 정법 훈습 중의 진여훈습으로 중생의 마음 속에서 열반을 희구케 하는 不空진여로서의 여래장의 무량한 공덕(자체상훈습)과 중생 주변에 여러 모습으로 현현하는 佛菩薩의 작용(용훈습)에 대응된다.

그러나 진여훈습 중의 자체상훈습이 중생 내부에 본래 물들지 않은 깨끗한 지혜(無漏法)과 무량한 공덕(不思議業相)이 있음을 믿게 하는 것이라면, 진여훈습의 용훈습은 중생의 외부에 부처와 보살 등이 있어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고 있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기신론이 용훈습에 대하여 부처의大悲’와同體智力’이 그 동기라고 서술한 것으로부터 본 논서의 목표가 중생에게 단지 깨달음의 길만을 제시하는 데에 있지 않고, 현상계에 부처의 자비가 충만되어 있음을 느끼는 종교 체험을 통해 믿음을 일으키려는 데(起信)에 있음을 알 수 있다. - 海印의 뜨락

大乘起信論에서의如來藏’ 개념 연구 / 고승학

서울大學校人文大學院 (석사학위논문)

 

2. 생멸문의 구성 

앞 절에서는 기신론에서 대승의 본체인 중생심, 곧 알라야식이 불생불멸과 생멸, 각과 불각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요소들의 결합(眞妄화합식)으로 정의된 배경을 능가경을 통해 살펴보았다. 본 절에서는 그러한 각 요소들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 그것들이여래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1) 始覺의 四相 

기신론은 알라야식에 의하여 전개되는 중생의 세계가 모두 깨달음()과 미혹(不覺)이라는 두 가지 범주에 포섭된다고 설하면서覺’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覺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본체(心體)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하니, 망념을 여읜 相은 허공계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어 法界一相이며 바로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니, 이 법신에 의하여 本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신론은 이어 覺에는 本覺(근원적인 깨달음)과 始覺(현실화된 깨달음)이 있고,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不覺은 본각에, 시각은 불각에 의지하고 있다고 설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정의와 같이 覺을 마음의 본체가 망념을 떠난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마음의 본체에 처음부터 不覺(無明)이 없다는 말이 되고, 이는 覺이란 것이 별다른 작용이 없음을 함축하는 것이 아닌가? 반대로 비추는 작용을 통해 비로소 법신을 현현시킨다면, 이는 本覺이 아닌 始覺에만 覺이 있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원효는 허공계와 같이 遍在한 覺의 모습을 지혜광명이 법계를 두루 비추는 성질(覺照性)로 파악하면서 覺과 번뇌, 본각과 시각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각이란) 단지 어두움(불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밝게 비추는 작용도 있는 것이니, 이 비추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번뇌를 끊을 수 있다. 만약 먼저 미혹했다가 뒤에 깨닫는 것을 각이라 한다면, 시각에는 각이 있고 본각에는 각이 없을 것이다. 만약 본래 미혹하지 않음을 각이라 하면 본각은 각이고 시각은 각이 아닐 것이다. 번뇌를 끊는 뜻도 이와 같아서 앞서는 번뇌가 있었으나 뒤에 번뇌가 없어진 것을 끊음이라 한다면 시각은 끊음이 있고 본각은 끊음이 없으며, 본래부터 번뇌를 여읜 것을 끊음이라 한다면 본각은 끊은 것이고 시각은 끊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본래 끊었기에 본래 범부가 없을 것이지만, … 아직 시각이 있지 않기 때문에 본래 범부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원효는 본각에는 법신과 같이 망념이 없이 세계를 평등하게 비추는 뜻이 있지만, 중생의 입장에서 깨달음이 아무런 노력(始覺) 없이 얻어지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시각이 본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불각으로부터 시작하여 구경각이라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의 消息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신론은 중생이 실천 수행(始覺)을 통해 얻은 궁극적인 깨달음, 곧 究竟覺을마음의 본원(心源)을 깨달은 것”으로 정의하는데, 이 단계에서는 모든 미세한 생각(微細念)을 여의고 마음의 본성을 바로 볼 수 있어 마음이 상주하며 마음에 최초로 일어나는 相이 없는 無念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이는 마음에 일어나는 악념을 제거하려는 범부의 소극적인 수행인 不覺으로부터 거친 분별과 집착(麤分別執着: 주관과 객관을 분별하고 나와 내 것에 대하여 집착함)을 버린 초발의보살 등의 相似覺, 분별하는 거친 생각(分別麤念相: 내적으로 자아와 대상에 집착함)을 떠난 법신보살의 隨分覺을 거쳐 도달한 것이다.

원효는 여기에서 범부의 수행을 불각이라 부른 것은 범부가 비록 악념(滅相)이 나쁜 것임을 알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꿈과 같은 것임을, 곧 공한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해설한다. 다시 말해 범부는 아직 번뇌의 空과 여래장의 不空이라는 근본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한편, 기신론은 중생이 망념을 가지고 있는 한 깨닫지 못했다(不覺)고 설하고 있으므로 구경각에 이르지 못한 시각의 나머지 단계들도 모두 불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동요함이 없는(無初相可知) 구경각에 이르면, 망념이 사라져(無念) 중생의 四相의 차별을 두루 보게 되지만, 실제로는 어떠한 차별도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원효는 여기에서 四相의 차별이 없다는 것은 四相의 분별이 一心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설한다. 그는 이어 별기에서 능가경과 승만경의 불생불멸의 여래장에 대한 설을 인용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一心’은 여래장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울러 승만경에서 설하였듯이 일심으로서의 여래장은 비록 무명에불가사의’하게 오염되지만, 구경각의 위치에서는 그것을 덮고 있던 무명(번뇌)이 사라져 순수한 법신만이 드러나게 되므로 마음이 상주한다(心卽常住)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신론은마음의 본성을 보게 되어(得見心性)” 마음이 상주하게 되었다고 설하고 있으므로, 구경각에서 常住不變의 마음을 얻은 것이 단지 미세념을멀리 여의었기(遠離)’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원효는 이에 대하여 그러한 마음의 동요가 무명불각에 의해 일어났지만 그것은 꿈과 같으며, 그러한 꿈은본각의 불사의훈’에 의하여 벗어날 수 있다고 해설한다. 삼계를 유전하던 중생은 그러한 본각의 훈습에 의해자기 마음이 본래 동요한 바가 없음을 깨닫고, 이제는 고요하게 할 바도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一如의 자리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번뇌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다루기보다는 그것을 꿈과 같이 실체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마음 속에 본래 유전하지 않는(不生不滅) 법신(여래장)이 있음을 바로 볼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본각의 불사의훈이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찾는 마음(厭樂心)’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이는 승만경에서 언급한 여래장의 작용력에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원효는 구경각에서 깨우친 마음의 初相을 生相으로 보고, 수분각, 상사각, 불각은 각각 마음속의 住相, 異相, 滅相을 깨달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또한 각각의 四相을 8식과 관련하여 정리하는데,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가장 미세한 모습으로 구경각에 이르러 깨닫게 된 生相(원효는 이를 業相, 轉相, 現相의 셋으로 본다)을 알라야식의 위치에 놓은 점이 주목된다(< 2> 참조). 이는 불각으로부터 구경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표층으로부터 심층으로 전개되는 자기 의식의 정화 과정에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시각의 四相을 원효의 해석과 함께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2> 시각의 四相과 그 내용

2) 本覺의 구조 

다음으로 실천 수행, 곧 시각의 토대가 되는 동시에 그것이 궁극에 이르러 도달하게 된 구경각으로서의 본각의 구조를 살펴보자. 기신론은 본각이 번뇌()을 따를 경우의 모습(本覺隨染)으로 智淨相과 不思議業相을 들고 있는데, 먼저 지정상은법력의 훈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다. 智淨相이란 법력의 훈습에 의하여 여실히 수행하여 방편을 만족하기 때문에 화합식상을 깨뜨리고 상속심상을 없애어 법신을 현현하여 지혜가 맑고 깨끗하게 됨을 말한다.

위의 정의는 지정상이 보살의 수행 결과 화합식인 알라야식 가운데생멸’이라는 요소를 제거함으로써불생불멸’인 법신을 드러낸 것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의생멸’은 물론 무명을 가리키며, 그것을깨뜨림’으로써 사라지는 것은 상속심 자체가 아닌 상속심의 相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앞에서 알라야식을 생멸과 불생불멸이非一非異’하게 화합한 것으로 정의했기 때문에 무명(생멸)이 없어짐으로써 상속심(알라야식) 자체가 사라진다면, ‘非一’이라는 규정에 위배될 것이다.

한편, 무명이 바뀌어 明이 된다는 것(법신의 현현)은 생멸이 불생불멸과非異’의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기신론이 무명과 자성청정심(여래장)의 관계를 바람과 물에 비유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바람에 의해 바다에 물결이 생기는 것(動相)이 자성청정심이 무명에 의해 움직이는 것과 같다면,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가라앉아 물의 본성(濕性)이 드러나는 것은 무명과 함께 변화하는 마음의 모습(相續心相)이 사라져 자성청정심의 지혜의 본성(智性)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효는 上記인용문의법력의 훈습’을진여법의 內熏하는 힘’으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수행자의 마음 속에 있는 여래장의 작용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지정상을 갖추게 되면, 다음과 같은業用’으로서의 不思議業相이 발생한다고 한다.

不思議業相이란 지혜가 맑아짐에 의하여 모든 뛰어난 경계를 짓는 것이니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상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으로부터 본각의 불사의업상은 진여문에서의 如實不空에 상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원효는 불사의업상이 나타내는무량한 공덕의 상이 끊어짐이 없는’ 이유를 應身의 常住와 관련하여중생이 다하지 않으므로 업용도 다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여래장의 不空(具足無量性功德)이라는 개념이 중생의 무한성과 그에 대한 부처의 무한한 자비를 매개로 하여 佛身의 常住性으로 이어짐을 볼 수 있다.

기신론은 이상에서 살펴본 지정상과 불사의업상이라는, 염법과의 상관 관계 속에서의 본각(隨染本覺)과 함께 본각 그 자체의 깨끗한 성질(性淨本覺, 覺體相)로서 다음의 넷을 들고 있다: ⑴ 如實空鏡은 마음에나타낼 만한 법이 없는(無法可現)’ 공한 모습 그 자체를 나타내며, ⑵ 因熏習鏡(=如實不空) 일심에 항상 머물면서 염법에 더럽혀지지 않고 중생을 훈습하는 본각의 작용을 나타낸다. ⑶ 法出離鏡은 번뇌애와 지애라는 두 가지 장애를 벗어나고 화합상을 여읜 것으로 수염본각의 지정상에 대응된다. 마지막으로 ⑷ 緣熏習鏡은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 善根을 닦도록 하고 그들의 생각에 따라 나타내는 것으로 수염본각의 불사의업상에 대응된다. 원효는 수염본각의 불사의업상과 성정본각의 연훈습경의 차이로 ⑴ 전자가 응신과 시각의 업용을 밝힌 데 비하여 후자는 본각과 법신의 작용을 나타낸다는 점, ⑵ 전자가 緣의 親疎를 가리지만 후자는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3) 不覺과 알라야식의 전개(生滅因緣) 

기신론에서 不覺은 알라야식의 두 구성요소 가운데생멸’에 해당하며, 불각으로부터 전개되는 알라야식의 여러 모습(生滅因緣相)은 중생의 번뇌와 고통이 어떻게 발생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기신론은 불각을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여(不如實知眞如法一故)” 발생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 불각의 마음으로부터 중생에게 망념이 일어난 것은각에 의하기 때문(依覺故)”이라고도 설하고 있다. Ⅱ장 3절에서 언급했듯이각에 의한다”는 구절은 단지 각과 불각의 상호 의존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어야 하지만, “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모르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는 좀더 설명이 필요하다. 원효는 이를 근본불각(근본무명), 곧 방향을 잃은 것(迷方)으로 보고, 불각의 마음으로부터 망념이 발생한 것은 業相(무명업상)의 動念으로서 방향을 잘못 아는 것(邪方)과 같다고 해설한다. 여기에서 굳이 방향을 잃은 것과 방향을 잘못 아는 것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기신론 본문과 원효의 해설로부터 방향을 잃은 것으로써 불각을 설명하려는 의도는 다음의 사실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길을 잃는다는 개념이 올바른 방향이 따로 있음을 전제할 때에만 성립할 수 있듯이, 중생의 근본불각 역시 불각과는 별도로 각이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모르는 것”으로 정의된 근본불각은 그러한 각과 불각의 상대성을 보지 못하고 양자를 절대적인 두 실재로 보는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앞 장에서 살펴본 부증불감경의一法界에 대한 바른 知見”이 없는 상태와 같을 것이다. 부증불감경에서 중생계와 열반계가 하나(一法界)인 근거가 모든 중생이 여래장이라는 사실, 곧 중생에게 법신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 있었다면, 기신론에서 각과 불각이하나의 진여법’으로 연결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염본각의 지정상과 불사의업상은법신의 현현’, ‘무량한 공덕’ 등의 용어로 설명되며, 이는 여래장의 본체()와 속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일체 중생에게 두루 선근을 닦도록 하는 것으로 정의된 성정본각의 연훈습경은 여래장의 무한한 작용()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기신론의 본각은 여래장의 본체·속성·작용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불각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와 관련하여 기신론은 각과 불각을 同相과 異相의 관계로부터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 同相이라고 말한 것은 여러 가지 瓦器가 모두 똑같은 微塵의 性相인 것처럼 無漏()와 無明(不覺)의 여러 가지 業幻도 다 똑같은 진여의 성상인 것이다. 이러므로 경에서는 이 진여의 뜻에 의하여일체중생은 본래 열반·보리의 법에 常住하여 들어가 있는 것이니, 이는 닦을 수 있는 상이 아니며, 지을 수 있는 상이 아닌지라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色相을 볼 만한 것이 없으며 색상을 봄이 있는 것은, 오직 염법의 업환에 따라 지은 것이지 智色不空(부처의 무량한 광명)의 성질은 아니니 智相은 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異相이라고 말한 것은 여러 가지의 와기가 각기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이와 같이 무루와 무명이 隨染幻의 차별이며 性染幻의 차별이기 때문이다.

원효의 해설에 따르면, 무루()와 무명(불각)은 모두 진여가 업에 의해 나타난 공한 작용(業幻)이라는 점에서 같다(同相). 그러나 무명은 평등성을 어김으로써 그 본성이 물들어 차별(異相: 六染心등)이 있고(性染幻의 차별), 무루는 비록 평등성을 그 본성으로 하지만 무명의 차별에 따라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 갖가지로 차별(본각의 온갖 공덕, 始覺의 四相등)이 있게 된다(隨染幻의 차별).

특히 異相의 관점은 무루(정법=)가 무명(염법=불각)따른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無漏(anāsrava)라고 하면 더 이상 정념과 번뇌가 새어나오지 않는 상태로 열반과 같은 無爲法을 지칭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기신론의 무루는 무명을 따르기도 하고(隨染), 역으로 무명에 작용을 가하기도 하는 활동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루는 단지 진여의 業幻이라 했으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진여가 활동성(隨染性)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신론은 진여의 본체와 속성(自體·相)으로서대지혜광명의 뜻”과자성청정심의 뜻”, “常·樂·我·淨의 뜻” 등을 들면서 진여를여래장’, ‘여래 법신’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여래장사상에서 여래장이 번뇌에 물드는 것(隨染)불가사의한’ 일로서 믿음의 대상, 곧 이론적 전제가 되어 있으며, 위에서 살펴본 진여의 隨染性은 이러한 여래장의 隨染性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안다”는 말은 결국 각이 불각을 떠나 있지 않고, 불각을 따라 반응하며(隨染), 불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안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근본무명으로부터 어떠한 번뇌가 발생하는가? 이하에서는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생략하고 그 대략적인 모습만 밝히고자 한다.

기신론은 근본불각(근본무명)으로부터 세 가지 미세한 번뇌(三細)와 여섯 가지 거친 번뇌(六麤)가 발생하게 된다고 설하는데, 원효는 이들을 支末불각이라 하였다. 먼저 三細는 ⑴ 불각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는 無明業相, 그러한 무명업상으로부터 생겨난 주관적 의식인 能見相, 주관적 의식으로부터 전개되어 보이는 대상 세계인 境界相으로서, 원효는 이 셋을 모두 알라야식의 자리에 있다고 본다.

다음으로 六麤는 3세의 경계상에 의지하여 발생한 것으로 ⑴ 대상에 대한 주관적 好惡의 감정인 智相, 智相에 의하여 苦樂을 일으키고 망념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相續相, 상속에 의하여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는 執取相, 잘못된 집착으로 인해 개념과 언설에 얽매이는 計名字相, 假設에 불과한 개념적 규정을 실재인 양 집착하여 업을 일으키는 起業相, 그런 업에 의해 과보를 받는 業繫苦相등이 있다. 원효는 이 가운데 지상을 제7식에, 상속상부터 기업상까지는 生起識(6)에 두고, 업계고상은 앞의 다섯 가지가 낸 과보(彼所生果)라고 해석한다. 아울러 그는 5蘊과 관련하여 상속식부터 기업상까지를 각각 識蘊, 受蘊, 想蘊, 行蘊에 대응시키고 있다.

기신론은 이어서 알라야식이라는 심층 의식으로부터 사고하고 지각하는 표층 의식이 전개되어 나오는 양상(生滅因緣)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간단히 心→意→意識”의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에서心’은 알라야식으로서 생멸의 근원()인 알라야식이 무명이라는 조건()을 만나 중생의 의식과 함께 번뇌가 전개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心, 곧 알라야식으로부터 ⑴ 業識, ⑵ 轉識, ⑶ 現識, ⑷ 智識, ⑸ 相續識의 五意가 전개되어 나오는데, 이 가운데 특히망념이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는” 상속식이 三世의 인과를 일으키는 것으로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상속식도 결국은 心으로부터 전개된 것이므로 기신론은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의 법이 사라진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라는 唯心사상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원효는 이 가운데 업식, 전식, 현식을 3세와 마찬가지로 본식(알라야식)에 대응시키고, 지식은 제7식에 대응시키고 있다. 원효는相續心’과相續識’을 구분하면서 전자는 알라야식 자체로 보고, 후자는 의식(6)에 대응시키고 있다. 이어 이러한 상속식으로부터 意識(分別事識, 分離識)이 전개되는데, 이것은 자아(, 我所)와 감각적 대상(六塵)에 대한 분별·집착을 가리킨다. (원효는 의식을 6추의 집취상, 계명자상, 기업상에 대응시키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의식의 전개 과정은 마음의 본체(心體, 알라야식)에 있는생멸’이라는 인자()가 무명이라는 조건()을 만나서 일어난 것이다. 심→의→의식”의 과정이 이 가운데 因의 측면에서 기술된 것이라면, 緣으로서의 무명이 일으키는 마음의 오염된 모습은 六染心이라는 개념을 통해 기술된다. 기신론은 이를無明(住持)의 훈습에 의하여 일어난 식’으로 규정하면서, 執相應染, 不斷相應染, 分別智相應染, 現色不相應染, 能見心不相應染, 根本業不相應染의 6염심과 그것들을 끊을 수 있는 각각의 단계를 信相應地로부터 如來地에 이르는 수행 계위로서 제시하고 있다.

원효는 이들 6염심은 앞에서 살펴본 5의와 의식에 해당한다고 보고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⑴ 집상응염은 의식으로 지적인 번뇌(見惑)와 정서적인 번뇌(思惑)가 증가하는 것, 곧 추분별집착에 상응하는 것이다. ⑵ 부단상응염은 상속심으로 대상 세계에 대한 집착(法執)이 증가되는 것이며, ⑶ 분별지상응염은 智識으로 空觀에 의해 止滅할 수 있다. ⑷ 현색불상응염, ⑸ 능견심불상응염, ⑹ 근본업불상음염은 각각 현식, 전식, 업식에 대응한다.

여기에서상응’이란 ⑴⑶의 경우 마음()과 대상(念法)이 구분됨으로써 주관(知相)이 물들거나 깨끗해질 때 객관(緣相)도 따라서 물들거나 깨끗해짐을 말한다. ⑹에서의불상응’이란 알라야식에 아직 대상 세계에 대한 주-객 분별이 생기기 전으로 주관과 객관의 대응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곧 ⑷⑹은 극히 미세한 의식 안에서 범부가 인식하지 못하는, 극히 미세한 번뇌가 생겨난 것을 가리킨다.

기신론은 이상의 6염심을 통틀어 煩惱礙라 하며, 근본무명(무명주지)을 智礙라 한다. 앞 소절에서 다룬 본각의 법출리경과 지정상은 이 두 가지 번뇌를 벗어난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번뇌애를 진여의 根本智(如理智)를 막는 것으로, 지애를 세간의 自然業智(後得智=如量智)를 막는 것으로 설하고 있는 점이다. 다시 말해 기신론에서의 지적인 장애(智礙)란 세속을 敎化하는 등의 행위를 일으키지 않는 소승적 태도로서 승만경에서 설한두려워함이 남아있는 아라한’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기신론은 이러한 지애(근본무명)를 제거할 수 있는 수행 계위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앞에서 살펴본 시각의 구경각 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시각의 구경각은 보살지가 다한 것(菩薩地盡)으로 번뇌애인 6염심 가운데의 업식 등을 제거한다고 설할 뿐, 지애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기신론에 대한전통적 입장’은 유식에 대응되는 생멸문의 구경각에 아직진여에 대한 집착’이라는 근본무명(지애)이 남아 있고, 그것은 중관에 대응되는 진여문의 말을 떠난 진여(離言眞如)에 의해 타파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결과 본각에 이르러 지애와 번뇌애가 모두 사라져 지혜가 깨끗해지고(智淨相) 중생을 위한 불가사의한 작용(不思議業相)을 발생시킨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진여문과 생멸문이 중관과 유식에 대응됨을 전제할 때만 성립할 수 있을 것이며, 기신론 본문 자체는 구경각에 어떤 집착이 남아있는지, 본각이 시각의 구경각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깨달음인지 등을 명시하고 있지 않으므로, 필자는 이러한추론’을 피하고자 한다. 오히려 필자는 기신론에서 시각과 본각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본 논서가 도입하고 있는훈습’이라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논하기로 한다. -海印의 뜨락

이상에서 살펴본 불각의 구조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3> 不覺의 구조

大乘起信論에서의 ‘如來藏’ 개념 연구 / 고승학

 

. 기신론의 여래장 개념

기신론은 크게 ⑴ 본 논서를 짓게 된 동기를 설한 부분(因緣分),

⑵ 大乘이 의지하는 대상()인 중생심과 대승의 실현하고자 하는 바()로서 본체(속성(작용()의 三大를 소개한 총론 부분(立義分),

⑶ 총론에 소개된 중생심과 三大등에 대한 해설 부분(解釋分),

⑷ 실천 수행의 길을 제시한 부분(修行信心分),

⑸ 실천 수행을 권하며 그에 따른 이익을 설하는 부분(勸修利益分)으로 나뉘어져 있다.

본 논서의 중심을 이루는 주요 개념들을 法數에 따라 열거해 보면, 一心, 二門(眞如·生滅), 三大(體·相·用), 三發心(信成就·解行·證), 四信(根本=眞如·佛·法·僧), 五門(施·戒·忍·進·止觀)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一心부터 三發心까지는 해석분에서, 四信과 五門등은 수행신심분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본 장에서는 기신론 해석분의 생멸문에 치중해서 논의하려 하는데, 그것은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진여문에서 설하는 존재의 실상인 진여는 우리의 개념적 분별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신론의 목표가 중생을 상대적 집착으로부터 떠나게 하고 自他不二의 큰 수레(大乘)에 태우는 것이라 할 때, 절대성·보편성을 상징하는진여’라는 개념을 어떻게든 해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여문에서 진여를 단지言說相, 名字相, 心緣相을 떠나 있는 것”으로 설하는 것은 진여를 인식론적으로 초월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릴 뿐, ‘참으로 그러한(如如)’ 현상 세계에 대한 해명으로서는 미흡할 것이다. 따라서 기신론은 진여문에서비록진여’라 말하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모양이 없으며, ‘진여’라는 말은 결국 말에 의하여 말을 버리는(因言遣言) 것”이라고 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생멸문에서 중생심의 역동적인 전개 과정 및 그 역동성 속에 숨어있는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 원리(如來藏, 本覺)를 드러내려 하고 있다.

이하에서는 먼저 생멸문의 토대이자 眞妄화합식으로 정의된 알라야식 개념을 능가경의 識說과 비교하면서 논의하고, 생멸문의 전체적인 구조를 살펴보기로 한다. 아울러 본래 유식사상의 주요 개념이었던훈습’이 기신론에서 어떻게 변형되어 전개되었는지를 살핌으로써 본 논서의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무명(染法)으로부터의 해탈(還滅)이 여래장(淨法)의 작용력에 의하여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려는 데에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작용력, 淨法훈습 중 진여의 용훈습에 함축된 여래의 자비의 의미에 대해서도 되짚어보고자 한다.

 

1. 기신론의 알라야식 개념능가경과 관련하여

원효는 기신론의 一心二門설의 근거를 입능가경의⑴ 寂滅이란 일심이라 이름하며, ⑵ 일심이란 여래장이라 이름한다”라는 구절에서 찾고 있다. 그는 중생의 망념이 사라진 현상계의 있는 그대로의 고요한 모습(寂滅), 곧 진여는 절대적이며 평등한 한 마음(一心)과 다르지 않다고 보고, ⑴을 진여문에 대응시킨 것이다. 또한 ⑵는 그러한 일심(진여)이 무명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여래의 본성이 중생에게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 생멸문에 대응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효는 기신론의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전제를 능가경에 의지하여 해설하고 있지만, 기신론에서 능가경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생멸문의 알라야식 개념이다.

기신론은 생멸문을 정의하면서심생멸이란 여래장에 의하므로 생멸심이 있는 것이다. 불생불멸이 생멸과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 알라야식이다”라고 설하는데, 이로부터불생불멸’이란 곧 여래장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원효 역시 생멸심(能依)이 의지하는 본체(所依)인 불생불멸은 여래장이며, 알라야식에 두 가지 뜻(覺과 不覺)이 있는 것 또한 이 의식이 불생불멸과 생멸의 화합식이라는 사실에 대응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불생불멸()과 생멸(불각)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非一非異)”는 말은 무슨 뜻인가? 원효는 양자가 같다고 할 경우에는 불각으로서의 생멸하는 모습이 사라질 때 불생불멸이라는 마음의 본체도 따라서 사라져야 할 것이고, 다르다고 할 경우에는 고요한 마음의 본체(불생불멸=)가 무명(생멸=불각)에 훈습되어 움직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斷見과 常見으로부터의 중도설을 나타낸 것으로, 특히무명에 의한 진여의 훈습’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신론의 알라야식이 순수한 유식사상의 識說로는 해석될 수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기신론의 알라야식 개념은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의 교섭 결과 성립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앞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승만경은 여래장을 “6식 및 心法智를 초월한 것”으로 설하였고, 이로부터 여래장을 의식과 관련하여 해명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능가경은 승만경보다는 성립 시기가 늦으며,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간의 교섭이 잘 나타나 있는 후기 여래장 경전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능가경에는 여래장사상 고유의 여래장 개념도 나타나 있다. 예컨대여래장은 모든 善과 不善의 因이며, 두루하여 모든 갈래의 生을 능히 짓는다”, “여래장은 여래의 경계이다” 등의 말은 일법계인 중생계와 열반계의 근거이며 難信難解한 인식 대상으로서 여래장을 설명하는 부증불감경, 승만경 등의 사상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능가경은 다음과 같이 여래장과 알라야식과의 관련을 논함으로써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의 교섭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혜여, ⑴ 알라야식은 여래장이라 이름하나니, 무명인 칠식과 함께 함이 큰 바다에 물결이 항상 끊이지 아니함과 같아서 (중생의) 몸과 함께 생겨났기 때문이다. (여래장은) 無常의 허물을 떠났으며, 我라는 허물을 떠나 자성이 청정하다. 나머지 7식은 저 심·의·의식 따위의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는 생멸의 법이니, 7식은 그러한 허망한 因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모든 법을 여실히 잘 분별하지 못하고 높고 낮음과 길고 짧음의 형상을 보고 名相에 집착하므로 자기 마음으로 하여금 색상을 보게 하고 苦樂을 얻게 하고 해탈의 因을 떠나게 하고, 名相으로 하여금 부수적 번뇌인 貪이 나게 한다. 저 생각의 모든 因과 모든 감관들이 완전히 소멸함으로써 차례로 생겨나지 않으면, 나머지 의식 분별에 苦樂의 감수가 생겨나지 않나니, 그러므로 少想定과 滅盡定에 들어가며 等持(samāpatti, 완전한 禪定)와 四禪과 實諦와 해탈에 들어간다.

그러나 수행자가 해탈이라는 相을 내는 것은 허망한 상을 전환하여 없애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혜여, ⑵ 여래장식은 알라야식 가운데에 있지 않나니, 그러므로 7식은 생과 멸이 있지만, 여래장식은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저 7식은 모든 경계를 念觀(생각)함으로써 생기기 때문이며, 이러한 7식의 경계는 모든 성문, 벽지불, 외도의 수행자가 알 수 없는 것이다.

 

위에서 ⑴은 알라야식과 여래장을 동일시함으로써 알라야식의 불생불멸의 뜻을 나타내고, ⑵는 알라야식과 여래장을 구분함으로써 알라야식의 생멸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⑴은 또한 7(轉識)과 여래장으로서의 알라야식(藏識)의 관계를 파도와 바다에 비유하여, 7식이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생멸을 일으키며, 그런 표면적 의식이 소멸하여 수행자가해탈’이라는 생각을 내지만, 그것은 단지허망한 相’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곧 진정한 해탈은 파도에 비유되는 알라야식이라는 심층 의식의 전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⑵는 여래장은 알라야식에 있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알라야식을 단지 생멸하는 의식으로만 취급하고 있다. 아울러 ⑴에서는 알라야식과 7식을 구분하고 있지만, ⑵는 알라야식을 순간적으로 생멸하는 의식 가운데 하나인 제7식으로 설정하고 있다. 물론, 동일한 문헌 안에서 이러한 모순이 발생한다는 점이 이해하기 힘들지만, 능가경의 이러한 이중적인 識說은 기신론의 알라야식 개념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밖에 능가경은 알라야식에 業相, 轉相, 眞相의 三相이 있다고 설하는데, 알라야식에 변하지 않는 참모습(眞相)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알라야식이 단지 개개인의 의식의 흐름만을 가리키지 않고 현상계를 산출하는 불변의 토대로 취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능가경은 알라야식(藏識)을 그것의 전변인 7(轉識)의 因으로 인정하면서, 장식은 전식이 소멸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것임을 주장한다. 또한 생멸하는 의식(相續)의 소멸이란 알라야식의 眞相이 아닌 그 業相만이 소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만약 알라야식 자체가 소멸한다면, 이는 외도의 斷滅論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능가경은 意識이 소멸하여 7식이 함께 소멸한 것을 열반이라고도 설하고 있으며, 여기에서의식’이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능가경에서 알라야식의 참모습, 본체(眞相)를 불생불멸로 보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기신론의 생멸문에서도 그 실체가 되는 것은 불생불멸로서의 여래장이다. 원효는 기신론이 알라야식을불생불멸의 마음이 생멸과 화합한 것”이라고 정의하고, 역으로생멸이 불생불멸의 마음과 화합한 것”이라고는 하지 않은 점에 주목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기신론의 용어 사용 및 어순에도 심오한 의미가 숨어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으나, 더 이상의 구체적인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쨌든 기신론의 알라야식이 단순한 생멸심이 아님은 분명하며, 능가경의 다소 혼란스런 알라야식 개념을 이어받아 불생불멸과 생멸의 요소가 결합한 것으로 체계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능가경에서 제시된 업상과 전상의 개념은 기신론에서 支末불각의 三細가운데 無明業相(알라야식 내부의 무명에 의하여 불각의 망념이 움직인 것)과 能見相(업상으로 인해 생겨난 주관적 의식) 개념으로 연결된다.

능가경은 이와 같이 생멸하는 의식 현상의 배후에 불생불멸의 알라야식의 본체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여래장의 常住性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 특히 여래장의 상주성을 부인하는 이들을 향하여我見을 수미산처럼 일으킬지언정 空見을 일으켜 增上慢(교만)을 품지 마라”고 설하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서 空見을 공격하는 이유는모든 법이 오직 마음이 나타낸 것”임을 모른 채 유와 무에 집착하여 惡取空을 일삼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능가경의 이러한 唯心사상은 유식사상에서 단지 개인의 한정된, 오염된 의식에 지나지 않았던 알라야식을 절대적·보편적 의식으로 끌어올린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유심사상은 기신론에서心→意→意識”의 도식으로 중생의 의식과 번뇌가 전개되어 나오는 모습을 설명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 海印의 뜨락

大乘起信論에서의 ‘如來藏’ 개념 연구 / 고승학

1) 여래장사상의 형성 

대승불교의 발생 시기는 대략 서기 12세기까지 소급할 있을 것이다. 대승경전의 형성은 龍樹 연대(기원후 150250) 기준으로 전후 2기로 나눠볼 있으며, 이에 따르면 금강반야바라밀다경 , 반야심경 , 팔천송반야경 , 유마힐소설경 , 묘법연화경 , 대방광불화엄경 등과 중관사상의 여러 논서들이 초기 대승경전에 해당한다.

이어 굽타 왕조(320년경6세기경) 시기에는 나란다(Nālandā) 대사원을 중심으로 체계적이고 철학적인 불교 연구가 행해지게 되었고, 후기 대승경전으로서

    열반경, 승만경, 여래장경, 부증불감경, 보성론 ;

    해심밀경 , 아비달마경 , 섭대승론 등이 나오게 되었다.

이들 경전은 각각여래장사상과유식사상을 반영하는 것들로 용수 이후 世親(Vasubandhu: 45세기경) 이르기까지 3세기에서 5세기초에 걸쳐 형성된 것들이다. 가운데 열반경은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라며 불성의 보편성을 적극적으로 천명하면서 열반을 常·樂·我·淨으로 규정하는 , 불교사상이 인도 정통사조에 다소 영향을 받고 있었던 점을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식 계열의 논서들은 중관 계열의 논서들보다 시기적으로 나중 나왔는데, 그것은 사상사적으로 존재의 비실체성, 空性 밝히는 것을 소임으로 중관의 철저한 부정적 어법에 대한 반동으로서 유식사상이 나타나게 것으로 이해할 있다. 그것은 대한 허무론적 집착, 惡取空’ 대한 학파의 해석상의 차이에서도 있다. 중관사상의 경우 악취공은공에 대한 관념에 집착하는 이지만, 유식사상의 경우 禪定 修行 토대가 되는 허망분별의(依他起性) 자체와 그에 대한 집착(遍計所執性) 타파함으로써 얻어지는 절대 평등의 경지(圓成實性) 양자에 대한 부정이 악취공인 것이다.

그런데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간에는 시기적인 선후 관계가 분명치 않고, 여래장사상을 체계화한 것으로 알려진 究竟一乘寶性論(Ratnagotravibh ga-Mah y nottaratantra- stra, 이하 보성론 )에도 유식사상적인 요소가 많이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 사상간에는 중관과 유식간의 대립과 같은 문제점은 나타나지 않았을 같다. 그럼에도 사상간에는 깨달음을 둘러싸고 심각한 간극이 있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예컨대 깨달음과 무명의 관계를 논하기 위해 여래장사상에서와 같이본질적인 불성과 우연적인 무명(自性淸淨心客塵煩惱染)” 주장하는 것은 인간 의식의 오염 과정을 상세히 논하는 유식사상의 입장에서는 미봉책으로 보일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좋고 나쁜 경험들을 보관하는 창고로서의 알라야식을 상정하여, 인간의 번뇌는 창고 속에 점점 불순한 종자(bīja)들이 가득 차서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유식사상은 현실적 대한 설명(theodicy)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중생의 존재론적이며 인식론적 근거인 알라야식이 오로지 번뇌를 저장하여 우리를 미혹에 빠뜨리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법을 듣는 같은 외적인 수단에서 구해야 한다는 난점이 있었다. 더욱이 瑜伽師地論 의하면 무수한 번뇌로 오염된 중생이 그러한 인연을 만나 자신의 의식을 정화하여(轉依, āśrayaprāvtti)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3無數劫 (asakhyeyakalpa)이라는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래장사상이 유식사상과 이와 같은 차이를 나타나게 원인은 무엇일까? 중관과 유식의 차이가 공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처럼 또한 공의 교리를 받아들인 방식의 차이와 관련있을 것이다. ‘부처의 본성, 불성=여래장이 모든 중생에게 있다는 여래장사상의 체제는 어떤 면에서 실체론적인 것으로 이해될 있으나, 사상이 대승불교의 맥락에서 나온 것인 , 空觀 떠날 수는 없을 것이다. 점에 대하여 오가와 이치죠(小川一乘)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원래心性淸淨”이라고 해도 마음의 본성이 청정하다(prakti-pariśuddhi) 말은 마음이 본성으로서 청정하다(praktyā-pariśuddhi) 말이고, 무엇인가의 청정한 마음이 곳에 실체시되는 것은 아니다. … 본성으로서라는 말은본래적으로 원래부터라는 의미이고, “청정하다 말은연기적 존재이고, 본질은 空性이다라는 의미이다. 아울러 경우 현실의 우리들의 마음은 허망한 마음이고, 마음의 허망성이 공이라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 그러한 이해로부터는허망하지 않은 마음·본래적인 청정한 마음을 상정할 있다. 그러나마음이 본성으로서 청정하다 말의 의미는 허망한 마음을 부정한, 청정한 마음의 존재를 긍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대개 마음이라고 말해질 정도의 대상은 모두 緣起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절대적인 의미에서 마음은 현실의 허망한 마음이건, (반대로) 청정한 마음이라 있을 정도의 어떤 것이 상정되어 있건 그것들은 모두 실체(reality)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그는 마음의 청정성이란 마음의연기성=허망성=공성임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에 주목하면서, 불성사상에 대한 실체론적 이해와 극단적 형태인자연신비사상(佛性顯在論), ‘만물신비사상 불성사상의 본의를 왜곡한 것으로 본다.

위에서 유식사상의 공성 이해는 의타기성 원성실성을 부정하지 않는데 특징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의타기성이 실천 수행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의타기성은 중생에게 미혹함을 가중시키는 토대가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중생이 연기적으로 존재하는(依他起) 마음에 집착(遍計所執) 일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식에서는 이러한 변계소집성을 부정하는(으로 이해하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유식의 의타기성은 긍정() 부정()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것이다.

대조적으로 여래장사상의 경우 깨달음의 토대로서의 여래장은 오로지 긍정되고 있다(悉有佛性)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여래장사상의 경우 여래(부처) 대한 확신이 중심 테마였기 때문에 중관에서와 같은변증법적 긴장 물론, 유식에서와 같은과정의 논리(의타기의 알라야식으로부터 변계소집을 제거하는 의식의 질적 전환, 轉依<āśraya-parāvtti>)”까지도 결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있다.

여래장사상에서의 강조점은 공성을이해하여 자기를 구제하는 것보다는 여래의 자비가 자신에게 미치고 있음을확신하여 중생 스스로 여래의 지혜를 자비적으로 전개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래의 지혜가 중생에게 작용하고 있으며(法身遍滿), 중생 역시 그와 동일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眞如平等)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공관에 기초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더욱이 보성론에 의하면 불성사상은연기(초전법륜)→空性(2 법륜)여래장(3 법륜)”이라는 三時교판 가운데 스스로를중관사상의 방편분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여래장이있다라는 표현은 다분히 중생을 교화하여 중관사상에서와 같은 공에 대한 인식으로 끌어들이기 위한방편적 성격이 강함을 있다.

2) ‘불성(여래장)’ 원어와실유불성 의미 

보성론 의해불성(여래장)’ 원어를 추적해 보면, 한역어불성 상응하는 산스크리트 원어는 ‘buddha()’ 또는 ‘tathāgata(如來)’ ‘-dhātu(: 요소·성분)’, ‘-garbha(: 태아로서 胎內 있는 상태)’, ‘-gotra(種姓: 가족·동류)’라는 단어의 어느 쪽인가가 합성되어 이루어져 있는 복합어적인 술어임이 밝혀진다. 오가와 이치죠는불성 관계된 산스크리트 원어가 이렇게 다양하게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우리들 모두가 불타의 경지를 체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실천면에서 우리들은 부처의 가족·동류이며, 佛子라고 하는 gotra(種姓) 사상, 또는 우리들은 자신의 신체에 여래를 태아로서 품고 있다고 하는 garbha() 사상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것들은 사상으로서라기 보다는 불도를 구하는 사람의 극히 구체적인 실천 관념으로서 불도수행자들이 확신하고 있던 바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구체적인 종류의 관념이 대승불교의 초기 문헌 가운데에서 여기저기 보이고 있고, 사상이 점차 성숙하여 사상으로서 확인되기에 이르러, ‘불성 dhātu()라고 하는 추상적인 표현으로, 틀림없이부처가 되는 요인으로서 확인되고, 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하에서는佛性’ 또는如來藏’性’, ‘藏’ 등의 한역어에 상응하는 개의 산스크리트 단어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두고자 한다.

첫째 ‘gotra’에는 일반적으로 가족, 種姓’이라는 의미 외에 금속이나 보석이 묻혀 있는 鑛山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여래장을쓰레기더미 속의 寶金’ 등으로 비유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있다.

번째 ‘garbha’안에서 무엇인가를 붙잡아둔다 뜻의gh라는 어원으로부터 파생된 단어로容器’ 또는 태아의 모태인자궁 의미함과 동시에태아 자체를 의미하고 있고, 이로부터여래장이라는 개념에 산출의 기반(근원적 一者)이라는 뉘앙스가 생겼다고 있을 것이다. 또한 ‘garbha’ 이렇게 이중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모든 중생은 여래장(tathāgata-garbha)이다라는 언명은 중생이 여래를 태아처럼 품고 있다는 의미와 동시에 중생이 여래의 태아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번째로 ‘dhātu 장에서 언급했듯이 원래 의미는놓는 장소, ‘토대, ‘의지할 등을 의미하는 공간적 개념이다. 흔히法界=法性(dharma-dhātu)이라는 용법으로 많이 사용되는 데에서 있듯이, 이것은 실체성이 없는 개별적인 존재자들인(dharma) 대한 근원적그것은 緣起, 無常性, 空性, 眞如등으로 불린다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이런 점에서 ‘dhātu 불변의 실체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나, 정호영은 ‘dhātu 있는鑛山’이라는 의미에 주목하여 ‘dhātu로서의 여래장 개념 또한태생학적 어감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모든 중생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성론은悉有佛性’ 의미를부처의 지혜가 중생들에게 작용하고 있음, 본성상 不變이며 無垢 진여가 不二平等, 부처의 種姓이라는 대하여 부처라는 임시로 설정(假說, prajñapti)함이라는 가지 의미(三義)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가지 의미는 각각여래의 法身(dharma-kāya) 작용이 두루 가득차 있음(法身遍滿), 여래의 眞如(tathatā) 본성으로서 무차별함(眞如平等), 여래의 種姓(gotra) 존재함(有佛種姓)으로 요약되고 있다.

실유불성 번째 의미에서법신 여래의 지혜와 敎法, 부처의 자비를 의미하며, 모든 중생들 가운데 그러한 법신의 작용이 두루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중생은부처의 태아라고 있을 것이다. ‘실유불성 번째 의미는 유정·중생(여래장) 여래(법신)간에 有垢 無垢(번뇌가 있고 없음) 현상적 차별은 있을지언정 그들은 자체로 참된 모습(本性空), 진여의 측면에서는 무차별하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진여 부처의 지혜를 가리키고 있다고 있을 것이다. 또한 경우 번째 의미와는 반대로 여래(진여)중생의 태아라고 있을 것이다(또는 중생이부처의 자궁이라 있다).

마지막 의미에서 부처의종성 ⑴ 大地 비유되는 本性住 種姓 ⑵ 果樹 비유되는 修得完成 種姓(習所成 種姓)이라는 2 종성으로 설명된다. 전자가 누구나 부처가 있는 생득적인 소질이나 토대로서 法身 얻어질 있는 기반을 나타낸다면, 후자는 수행을 통해 얻어 계발되는 것으로 色身 얻어지는 토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색신은 앞의 법신으로 부터의 等流(niyanda, 동질의 결과)이므로, 본성주의 종성과 수득완성된 종성은 각각실유불성 번째 의미인 진여의 평등성에 대한 지혜와 번째 의미인 자비의 작용으로서의 법신에 대응시킬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래의 종성이 존재한다 말은 중생으로 하여금여래의 자비의 작용이 항상함(법신편만) 알아 자신에게 있는 진여의 존재(진여평등=본성주의 종성) 지혜(如實智=根本無分別智)로써 깨닫고, 불도 실천을 통해 완성된 지혜(습소성의 종성, 如量智=後得世間智) 자비로써 세간에 전개하도록 佛性이라는 本有 소질을 계발하여 佛身 세간에 출현시키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있다.

이러한 보성론의 설명으로부터불성내재론이나불성현재론 발생할 소지를 찾는다면, 아마 실유불성의 번째 이유인유불종성 대한 해석이 문제가 것이다. 그러나 위의 설명에서 있듯이유불종성 어디까지나 불도수행 대한 記述 설명으로 해석될 있고, 그것은 번째 의미와 번째 의미에 대한 종합적인 강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래장사상은 인도 대승불교의 전개 과정에서 발생하였으며, 설일체유부 등의 실체론적 사고방식을 비판한 중관사상의 부정적 어법(‘空’, ‘無’) 인해 중생들이 다시 허무론에 빠진다거나(‘겁약한 마음) 또는 소승적인 수행에 의해 자신만이 부처될 있는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폐단(‘오만한 마음) 치유하기 위해 여래장의보편적 존재 천명한 이라 있다.

 

3) 법신의 사바라밀다 

한편, 여래장사상을 체계화한 보성론은 법신에 대한 四波羅密多 常·樂·我·淨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                    <>

信解大乘         -바라밀다(本性청정과 離垢청정)

般若波羅蜜多 →  -바라밀다(人·法二無我)

虛空藏三昧      -바라밀다(煩惱 所知障 止滅)

大悲               -바라밀다(보살행의 항상성, 無住處열반)

< 1> 법신의 사바라밀다

 

가지 바라밀다는 각각대승을 비방하는 일천제가 대승법을 믿어 현상적 세계(生死輪廻) 대한 집착을 버리고(淸淨), 푸드갈라나 아트만 등에 집착하는 외도의 수행자가 般若 지혜를 닦아 진리(二無我) 터득하며, 윤회를 두려워하는 聲聞(śrāvakayana)들의 미세한 번뇌(煩惱 所智障) 三昧로써 끊으며, 중생의 고통에 무관심한 緣覺(獨覺=辟支佛, pratyekabuddha)들이 무한한 대비심을 일으킴으로써 얻게 되는 경지이다.

일반적으로波羅蜜多(pāramitā) 보살의 공덕이 궁극적인 경지에 이르러 완성된 상태(到彼岸)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상태에 도달한 법신의 공덕(gua, 속성)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법신이 지니게 되는 속성으로서의바라밀다 또한 보살행이 완성된 결과 顯現하는 것으로 이해할 , 의미가 일반적인 의미로부터 크게 달라졌다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지 속성이 실체에 대한 기술이라기보다는 수행자의 행위를 지시함이 분명하므로, 常·樂·我·淨이라는 술어는 보성론의 저자가 수행의 종국에 가서 보여지는 경지를 표현하기 위해 方便(upāya)으로서 창안해낸 것이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여래장사상의 四波羅密多개념은 무한한 중생을 염두에 보살의 끝없는 자비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이와 같이여래장이라는 자체가모든 중생은 여래의 태아라는 깊은 종교 체험을 표현하고 있고, 그것이 대승불교의 자비와 보살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 여래장사상이 초월적 직관으로 도피하여 세계를 힘들이지 않고 연역적으로 기술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비판불교의 주장은 여래장사상의 발생 배경을 무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래장사상이 스스로를중관사상의 방편분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상, 여래장사상은 중관사상과의 관련을 떠나서 이야기할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중관사상의 변증법은 현상계(세간)에는 어떠한 고정된 실체도 없음(無我=) 보여줌으로써 중생의 대한 집착을 타파하는 효과를 거두었지만, 그러한 논리가 항상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으며, 空觀 간혹 허무론으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때문에 불도 수행에 대하여겁약한 마음 품게 중생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수행에 대해오만한 마음 품게 수행자도 생겨났으며, 이에 여래장사상은 누구나 수행을 통해 부처가 있음을 적극적으로 천명하였다(‘一切衆生悉有佛性). 이는 단지 대한 인식(般若) 머물지 않고, 부처가 가지는 무한한 공덕(자비) 중생들 또한 갖추고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것으로 여래장사상을지혜의 자비적 전개 하는 것은 바로 사실을 말하는 이다.

물론 여래장사상이 발견한 보편적 불성은 직관에 의존하고 있으며, 번뇌에 물들지 않는 불성의 常住라는 것이 그것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難信難解하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고 있다(다음 참조). 그렇다면悉有佛性’ 불도 수행의 전제이기도 하지만, 결과로서 확인되는 명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명제를 단지 이론적 전제로만 받아들일 경우실유불성이므로 노력하면 불타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聖道門 해탈 지향이나, 또는 실유불성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에게는 불타의 경지에 이르는 따위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淨土門 自己放棄” 흐를 수밖에 없으며, 어느 쪽이건 여래장사상의 본래 의도(자비의 실현)로부터는 멀어지게 것이다.

이것은 중생을 일깨우고 종교적 체험을 묘사하기 위해 채택한 방편, 여래장이있다라는 표현이 방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나서도 계속 작용한 결과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치유하기 위해서는부정적 어법으로 무장한 중관의 철학이 결코 폐기될 없을 것이며, 이런 점에서 여래장이있다 말에 집착하는 중생들에게는 중관사상의 강력한 변증법이여래장사상의 방편분으로 기능할 있을 것이다.-海印의 뜨락

Ⅱ. 기신론 에 대한 기존의 시각

1. 기신론 에 대한 ‘전통적 견해’와 그에 대한 반론 


종래에 元曉(617∼686)의 起信論別記의 宗體文에 입각하여 기신론을 중관과 유식사상의 종합·지양으로 보고, 원효가 기신론을 높게 평가한 것을 그의 和諍사상과 연결지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러한 견해를 편의상 ‘전통적 견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 요지는 기신론의 진여문은 중관사상에, 생멸문은 유식사상에 대응하며, 이 두 門이 한 마음(一心)에 있다는 점에서 두 가지 대립되는 사상이 相補的인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견해’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선 원효가 별기를 짓고 소를 작성하기까지 상당한 時差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며, 특히 별기에서 진여문과 생멸문을 각각 중관과 유식사상으로 배대한 구절이 나중에 소를 작성할 때에 삭제된 것은 원효의 기신론에 대한 이해가 이후 성숙되어 이전의 견해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박태원은 일반적으로 기신론 사상을 여래장사상에 입각하여 이해하는 것은, 法藏(643∼712)이 그의 敎判에서 기신론 과 능가경을 ‘如來藏緣起宗’으로 규정한 이래, 이를 따른 일본학계의 성과를 한국의 불교학계가 무비판적으로 답습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기신론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오히려 유식사상, 특히 曇延(516∼588), 慧遠(523∼592), 원효 등 古주석가들이 근거한 眞諦계열의 舊유식에 입각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담연과 혜원 등은 攝大乘論에서 染法(遍計所執性)과 淨法(圓成實性)이 의존하는 것으로서 인식의 연기적 발생 그 자체인 依他起性을 설정하고, 그러한 의타기성이 알라야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설한 데 착안하여 기신론 생멸문의 알라야식을 유식사상에 입각하여 주석하였다. 또한 원효의 주석에 따르면, 기신론의 기본 구조는 一心二門이며, 그 二門가운데 생멸문에서 여래장이 ‘不生不滅’로서 언급되고 있으므로, 일심이 여래장보다 상위개념이며, 여래장은 어디까지나 “일심의 심원을 밝히고 지향하는 과정에서 적절하게 활용될 수 있는 중요한 보조개념”일 뿐이다.


한편, 원효는 오로지 생멸하는 식(一向生滅識)인 유식의 알라야식과 달리 기신론의 알라야식이 생멸과 불생불멸의 화합식으로 설해진 것에 주목하였는데, 박태원은 이 때문에 기신론과 유식사상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원효에 따르면, 알라야식에는 번뇌의 창고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業煩惱所感義門(해심밀경 )과 그러한 번뇌가 진여를 훈습하여 움직이게 한다는 根本無明所動義門(능가경)이라는 두 가지 차원이 있으며, 전자는 常見을, 후자는 眞諦와 俗諦를 별개의 것으로 집착하는 견해(眞俗別體之執)를 각각 對治한다고 한다. 그런데 원효는 기신론이 채택하는 알라야식이 이 중 후자의 차원이며, 이와 같이 그 의미가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가지 서로 다른 알라야식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二意雖異, 識體無二也). 여기에서 박태원은 원효의 이러한 설명이 기신론이 기존의 유식사상으로부터 隔別된 사상이 아님을 입증한다고 보고 있다.


박태원은 원효가 이와 같이 유식과 기신론의 설을 和會시킬 수 있었던 이유를 이전의 두 주석가들과 마찬가지로 원효가 구유식설에 정통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진제 계열의 구유식은 玄奘(602∼664)이 도입한 신유식과 달리 알라야식의 본체로서 제9식, 이른바 淸淨無垢識으로서의 아말라식(amalavijñāna)을 인정하는데, 이는 곧 기신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眞如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장 이전까지 기신론은 여래장을 특별히 궁극적 개념으로 내세우지 않고도 기존의 유식사상의 개념을 활용하여 해명할 수 있었다는 것이 박태원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러나 이후 신유식, 이른바 法相유식이 중국에 들어오자 華嚴家인 법장은 이를 비판할 필요를 느꼈고, 敎判을 통해 유식사상(依理起事差別說)보다 한 단계 나아간 여래장사상(理事融通無礙說)으로서 기신론을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박태원은 이러한 비판은 오로지 생멸하는 식으로서의 알라야식을 인정하는 현장의 법상 유식에만 해당할 뿐이므로 기신론에 대한 유식적 평가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독해만이 기신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다. 앞으로 논의하겠지만,


예컨대 훈습 개념에 있어서 유식과는 너무나 다른, 염법(무명)과 정법(진여)간의 상호 훈습이 전개되는 기신론 특유의 사상을 기존의 유식설에 맞춰 논의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원효는 섭대승론 등의 훈습 개념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러한 훈습을 ‘不可思議熏’이라 불렀다). 오히려 이러한 특이한 훈습 개념은 여래장 계열 경전으로 알려진 승만경, 능가경 등을 통해 시사받을 수 있으므로, 필자 역시 유식사상으로 설명되지 않는 기신론 특유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여래장사상의 여러 개념들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의 논의와 다소 방향은 다르지만, 버스웰(R. E. Buswell Jr.)은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의 대립에 주목하면서 기신론이 양자를 화회시킬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을 대등한 차원에서 다루는 것으로 박태원의 관점과는 다르지만, 기신론을 중관과 유식의 종합·지양이라는 틀로 보려는 ‘전통적 견해’와 다르다는 점에서 양자는 공통점이 있다. 버스웰의 논점은 다음과 같다.


기신론의 一心二門조직에서

⑴ 진여문은 眞諦로서 여래장을 나타내며 여기에는 空과 不空의 두 측면이 있고,

⑵ 생멸문은 俗諦로서 불생불멸과 생멸이 非一非異의 관계로 화합한 알라야식을 나타낸다. 한편, 알라야식으로서의 생멸문은 心진여로 되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고, 그러한 歸入은 止(śamatha)·觀(vipaśyanā), 無念등의 수행을 포함하는 始覺(actualized enlightenment)이라는 과정을 통해 성취된다. 그러나 시각과 그것을 거쳐 도달한 本覺(original enlightenment)의 경지는 사실상 지각·관점의 차이―여래장과 법신의 광채와 청정함이란 것은 성자의 눈으로 보면 ‘본질적·내재적인’(本: 불생불멸) 것이지만, 중생의 눈으로 보면 ‘현실화되어야 할’(始: 생멸) 것이다―에서 나눠지는 것이므로 양자는 不二의 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⑴ 진여문의 진여는 중생에게는 번뇌에 뒤덮인 여래장으로 보이지만, 깨달은 자에게는 법신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存在論적 개념임을 알 수 있다. ⑵ 생멸문(알라야식)은 시각과 본각으로서 自利利他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修證論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신론에서 여래장과 알라야식이 합치된다는 것은 존재론(ontology)이 수증론(救濟論, soteriology)에 융화됨과 수증론에도 존재론적 기반이 제공됨을 의미할 것이다.


우선 생멸문의 알라야식을 수증론적 개념으로 보는 입장은, 기신론의 생멸문이 覺과 不覺이라는 깨달음과 미혹의 세계를 상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진여문의 중심 개념이 여래장이며, 그것을 존재론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가? 우선 기신론 에서 ‘여래장’이란 말이 처음 나오는 곳은 “여래장이 무한한 본성으로서의 공덕을 갖추고 있다”라는 相大에 대한 설명 부분이며, 體·相·用三大가운데 相大는 생멸문에 배속되므로 여래장을 진여문의 기본 개념으로 삼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마음의 진여적인 속성(是心眞如相)이 대승의 본체(體)를 나타낸다”는 진여문에 대한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진여문의 논의 대상인 진여가 아무런 속성(相)이 없는 본체, 형언할 수 없는 본체(離言眞如)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기신론은 그러한 진여의 초월성과 함께 진여를 굳이 언어에 의해 그 속성을 나타내면 如實空과 如實不空을 들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依言眞如). 그런데 이는 승만경 등에서 여래장의 空, 不空을 설한 것과 대응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진여를 여래장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에게는 여래장으로, 깨달은 자에게는 법신으로 顯現하는 진여”를 존재론적인 개념으로 볼 경우, 이 때 ‘존재론적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생멸 현상의 배후에 놓여 그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어떤 절대적 실재를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원효가 지적했듯이 중생으로 하여금 생멸을 일으킨다거나 열반으로 인도하는 힘(生義)을 갖는 실재는 생멸문에 있는 알라야식이다. 버스웰도 이 점에 주목하여 알라야식을 수증론의 본체로서 생멸문에 두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존재론적 개념으로 설정된 진여는 모든 현상을 ‘일으키는’ 근본 원리라기보다는 생멸과 변화라는 현상 그 자체이며, 그런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론적 편견이 사라진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여문에서 不生不滅한 心性과 함께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言說相(음성, verbalization)·名字相(名句, description)·心緣相(名字와 言說의 분별, conceptualization)을 떠났음”을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차별적 인식(妄念)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현상 자체를 ‘진여’라 이름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여를 존재론적 개념이라 부르는 것은 진여를 불변의 실체 혹은 산출의 기반인 것으로 誤導할 우려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박태원과 버스웰의 논의는 그 해석학적 지향은 다르지만, 모두 유식사상 또는 여래장사상이라는 틀 안에서 기신론을 이해하려는 시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기신론을 불교사상사라는 테두리 안에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전통적 시각’과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론으로서 여래장사상은 물론 유식사상에도 비불교적인 요소가 있음을 주장하면서 그에 대한 귀결로서 기신론 역시 비불교적인 논서라고 주장하는 사상 경향도 나타났다. 서론에서 언급한 비판불교 운동이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논의하기로 한다.

 

2.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닌가? ― 비판불교의 경우 


여래장사상의 성립과정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의 견해가 있다.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래장사상을 불교 외적인 인도 전통사조와 연관시키는 비판불교적인 견해가 그 첫 번째이고, 그것을 대승불교의 전통적·정통적인 ‘보살도’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견해가 두 번째 견해이다(이 두 번째 견해는 Ⅲ장 1절에서 다루기로 한다).


세 번째는 샤프(Robert H. Sharf)에 의해 제시된 견해로 ‘佛性’의 ‘性’ 개념에 주목하여 이를 인도불교의 중국화의 사례로 보고 있다. 그는 불성사상의 역사적 근원은 분명히 인도 사상에 있지만, 그것을 無情佛性과 같은 ‘보편적인 불성’으로 확대시킨 것은 중국불교 고유의 사상임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그는 이러한 불교의 중국화 과정 속에서도 불성에 관한 불교 내부의 담론은, 유학자들의 天然之性, 氣質之性등에 대한 “상대적으로 세속적이고 편협해 보이는” 그것과는 구별되는 불교 나름의 정체성을 지켰음을 지적한다.

~ 중략 ~
그렇다면 기신론 에서 그러한 유일 실재로 삼고 있다는 ‘一心’, 곧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기신론은 일반적으로 자기 구제(自利)와 중생 구제(利他)라는 소임을 다할 수 있는 큰 수레, 곧 대승(摩訶衍)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려 하는 논서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대승’이 대상(法)으로 삼는 ‘마음(心)’에 대하여 기신론 은 그 총론이라 할 수 있는 立義分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大乘(摩訶衍)이란 총괄하여 설명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法이요, 둘째는 義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衆生心을 말함이니, 이 마음이 곧 世間法(有爲, 생멸 변화)과 出世間法(無爲, 열반)을 포괄하며, 이 마음에 의하여 대승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어째서인가? 이 마음의 진여상이 대승의 체를 보이기 때문이고, 이 마음의 생멸인연상이 대승 자체의 상과 용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카마야는 여기에서 ‘마음’이 모든 존재와 현상을 포괄한다는 점과 그런 대상들의 의지처가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사실 이러한 ‘마음’은 자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일상적 자아와는 달리 진여에 歸入함으로써 보편성·포괄성을 획득한 절대적인 마음이라 해야 할 것인데, 그는 이러한 절대성을 획득한 대가로 ‘마음’은 차별적인 현상계의 존재 양태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리게 됨을 지적하였다. 또한 그는 일반적으로 ‘마음’이라는 말이 생각한다든가 괴로워 한다든가 하는 구체적인 문맥에서 그 의미를 지님에 대하여, 이러한 보편적인 ‘마음’은 불변의 無爲法인 출세간법까지도 그 外延(extension)에 포함시킴으로써 자발적 활동이라는 특질을 그 內包(intension)로부터 제거해버렸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기신론에서 말하는 ‘마음’은 단지 ‘실재’라는 의미만을 지니는 ‘개념의 괴물’이 되고 말았다고 말한다.


또한 ‘眞如(tathatā)’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如如)’라는 뜻을 가진 ‘tatha’로부터의 파생어라고 간주할 경우, 이 용어는 원래 無常이며 無我인 지속 가운데에서 事象을 ‘있는 그대로’ 잘 보거나 또는 모든 존재가 空함을 여실히 아는 행위와 관련된 문맥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추상화된 ‘tathatā’는 시간 속에서 의존적으로 발생한(緣起) 모든 존재들의 배후로 밀려나 “一切法의 眞如”라는 脫시간적이며 보편적인 理法으로 고착화되고 말았다.

~ 중략 ~

 

3. 기신론 의 성격 규정  


그렇다면 기신론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하카마야의 지적대로 그것은 “단숨에 시간 밖으로 도피하여 세운 연역적 형이상학 체계”로서 세계의 일원적 구조를 해명하고 있는 논서인가? 그리고 그 결과 기신론 은 모든 현상적 차별을 관념적으로 호도하고 중생을 더욱 더 미혹에 빠뜨려 전혀 수행의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만드는 논서라고 해야 하는가? 우선 기신론의 마음 개념이 ‘초시간적·관념적 실재’인지 검토해 보자. 앞에서 든 기신론 立義分의 문장에서 마음을 가리키는 단어로 ‘一心’ 대신 ‘衆生心’이 사용되었음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一心’이 대개 ‘眞如’와 동의어로 쓰이고 있음에 대하여 ‘衆生心’은 ‘중생의 현실적인 마음’을 가리키고 있다.


아울러 ‘一心’과 ‘一心法’의 구분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입의분의 문장을 살펴보면, 대승의 法은 중생심이고, 대승의 義는 이 마음(是心)의 진여상과 생멸인연상이 보이는 體·相·用三大로 정의되고 있다. 여기에서 ‘이 마음’이란 곧 ‘중생심’임을 알 수 있고, 또 解釋分의 顯示正義에서 “일심의 법(一心法)에 의지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고 하면서 心眞如門과 心을 내세우는 여래장사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츠모토는 이 때문에 유식사상을 dhātu-vāda의 傍系라고 규정했고, 그것은 유식사상이 아비달마불교의 다원적 실재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위의 책, pp. 206∼208.


生滅門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입의분의 진여상과 생멸인연상에 대한 설명을 전제로 해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 이 때의 ‘一心法’ 역시 ‘중생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心眞如를 설명하는 가운데 “오직 한 마음이므로 진여라 한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一心’은 ‘진여’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심법으로서의 중생심이란 어떠한 마음인가? 기신론은 본각(性淨本覺)의 특징을 허공과 거울에 비유하여 ⑴ 如實空鏡, ⑵ 因熏習鏡(=如實不空), ⑶ 法出離鏡, ⑷ 緣熏習鏡의 네 가지 양상을 보이고 들고 있다(Ⅳ장 2절 참조). 여기에서 마지막 연훈습경은 그러한 본각=진여가 중생의 마음을 비추어 그들로 하여금 善根을 닦도록 하는 작용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중생심이 진여(淨法)의 작용이 미치는 대상이 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기신론은 ‘보살이 발심하여 나아가는 모습을 분별하여 설하는 부분(分別發趣道相)’에서 ⑴ 信成就發心, ⑵ 解行發心, ⑶ 證發心을 들고 있는데, 이 가운데 증발심이란 보살의 공덕이 완전히 이루어져 無明을 없애 萬象을 낱낱이 아는 지혜(一切種智)를 갖추며, 불가사의한 작용(不思議業)을 통해 세간에 顯現하여 중생을 이롭게 함을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부처와 보살의 자연스러운 작용력(自然業)이 있음에도 중생이 그러한 부처의 몸, 法身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기신론은 때묻은 거울과 같은 중생심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부터 중생심은 어리석은, 현실적인 중생의 모습을 나타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거울(鏡)에 비유된 본각 그 자체는 실체로서의 진여이지만, “그 거울 ‘안에서’ 무엇인가 일어나는 그 지점(當處)은 거울보다 훨씬 동적인 것”으로서 이러한 중생심은 “진여와 다르지도 않고 완전히 같지도 않은” 것이다. 따라서 “중생심은 진여의 바다(眞如海)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관건”이며, 그 위의 “파도에 불과한 우리들이 진여의 바다에 돌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중생심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기신론이 현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공상적인, 이상주의적 체계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비록 일심이 중심이 되어 여래장, 진여 등 ‘초시간적’ 개념들이 전면에 등장하고는 있지만, 緣熏習鏡이라는 진여의 작용을 받는 대상으로서 또는 부처의 自然業, 곧 자비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으로서의 중생심 역시 기신론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축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타락한 중생의 모습을 기신론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도 진여 그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는 이러한 현실적 마음, 곧 중생심을 중심으로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규정되고 있는지를 밝히기로 하였다―더욱이 언어적 규정을 떠나 있는 진여(離言眞如)는 그것을 ‘언어적 규정을 떠나 있는 어떤 것’으로 언설로써 규정하는 순간(依言眞如) 자기 모순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기신론의 생멸문의 설명이 아무리 그럴 듯 하더라도 비판불교에서 주장하듯 그러한 현실적 마음이 초월적·절대적 실재인 진여=일심으로부터 전개된, 그것에 의존하는 비실재적이고 순간적인 존재라면, 결국 중생심의 존재론적·수증론적 위상은 별 의미가 없게 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의존’, ‘전개’라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기신론에서 覺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 다음 구절을 보자.


本覺의 뜻이란 始覺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시각이란 바로 본각과 같기 때문이며,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하기 때문에 不覺이 있으며, 불각에 의하므로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始覺과 本覺과 不覺의 의존 관계를 그려보면 본각에서 시작하여 불각→시각을 거쳐 다시 본각으로 돌아가는 圓環的구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본각과 시각의 관계를 논한 첫 문장을 통해 그 ‘의존’이라는 것이 논리적 의존 관계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각이라는 깨달음의 구현 과정을 논할 때 그 깨달음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본각을 설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또한 불각, 곧 깨닫지 못함을 말할 수 있는 것 역시 깨달음이라는 논리적 기준에 비춰볼 때 가능한 것이므로 “본각에 의하여 불각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자가 상호 의존하고 있는 이러한 관계로부터는 본각에 대하여 어떠한 실체성도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각이 ‘존재’해야만 불각이라는 개념이 의미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의 부정(‘不’覺)이 반드시 그것(‘覺’)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은 龍樹가 廻諍論(Vigrahavy vartan ) 에서 논파한 것으로 이런 견지에서 본각을 단지 인식론적·의미론적으로만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불각의 뜻을 설명하는 다음 문장을 보자.


불각의 뜻이라고 말한 것은 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서 그 망녕이 있게 된 것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망념은 自相이 없어서 본각을 여의지 않았으니, 마치 방향을 잃은 사람이 방향에 의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었으나, 만약 방향을 여읜다면 혼미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와 같아서 覺에 의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었으나, 만약 각의 성질을 여읜다면 불각이 없을 것이며,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名義를 알아서 眞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만약 불각의 마음을 여읜다면 진각 자체의 모습이라고 말한 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불각을 방향을 잃은 것에 비유하여 “覺에 의하기 때문에 혼미하게(不覺) 되었다” 라고 할 경우 覺이 不覺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결론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방향이 ‘있기’ 때문에 길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不覺(妄念) 그 자체의 실체성(自相, 自性)이 없음을 覺에 ‘의하여’라는 말로써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不覺과 마찬가지로 覺또한 실체성이 없음에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名義를 알아서 眞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라는 말은 오히려 (眞)覺의 개념 역시 불각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신론이 覺보다는 不覺(妄想, 無明)의 비실체성(空)을 강조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생멸문으로부터 진여문으로 들어감(從生滅門卽入眞如門)’이라는 제명 아래에서 다음과 같이 마음을 ‘방향 자체’에 비유하면서 그 영원성·불변성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 망념·무명을 외적인 형상, 잘못 인식한 방향 등에 비유하면서 그 우연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형상이 없어서 온 방향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얻을 수가 없으니, 마치 사람이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 하지만, 방향 자체는 실로 변화된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으로 혼미하기 때문에 마음을 망념이라 하지만, 마음은 실로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이며, 만약 관찰하여 마음에 망념이 없는 줄 알면 곧 (존재의 실상을) 따르게 되어 진여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 중략 ~ -海印의 뜨락

大乘起信論에서의 ‘如來藏’ 개념 연구 / 고승학

서울大學校人文大學院 (석사학위논문)

 

국문초록

본 논문은 대승기신론 (이하 기신론 )에 대한 기존의 해석과 평가 방식을 비판하고, ‘如來藏(tathāgatagarbha)’과 ‘熏習(vāsanā)’ 개념을 중심으로 기신론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 것이다.

기존의 기신론 해석 방식은

⑴ 본 논서를 중관과 유식사상의 절충·지양으로 보는 ‘전통적 견해’,

⑵ 본 논서를 유식사상 또는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의 결합으로 해석하는 ‘수정된 견해’,

⑶ 본 논서를 비롯한 여래장사상을 비불교적인 것으로 배척하는 비판불교(Critical Buddhism)의 견해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佛典은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에게 그의 참된 마음은 본래 깨끗하지만, 우연적인 번뇌에 의해 물들어 있음(自性淸淨心客塵煩惱染)을 깨우치려 하고 있다. 기신론은 이러한 본래의 깨끗한 마음을 여래장, 本覺등으로 부르며, 그러한 참된 마음을 현실화할 것을 역설한다.

‘전통적 견해’의 경우 이와 같이 현실화된 깨달음(始覺)은 본질적 깨달음(本覺)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시각과 본각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하는 것은 자의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견해는 시각이 궁극에 이르더라도 거기에는 집착이나 번뇌가 남아있어 본각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기신론은 양자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명시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기신론은 시각이 궁극에 이르게 되면(究竟覺) 본각과 동일하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필자는 이 두 가지 覺의 관계는 ‘훈습’ 개념의 분석을 통하여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수정된 견해’의 경우 기신론에 등장하는 ‘染法과 淨法의 상호 훈습’(染淨互熏)과 같은 개념이 여래장사상이라는 맥락에서 보다 잘 해석된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비록 훈습이라는 개념이 유식사상으로부터 도입된 것이긴 하지만, 이와 같이 ‘변형된’ 훈습 개념은 여래장사상에서만 발견된다. 유식사상에 따르면, 淨法곧 현상계의 참모습인 眞如(tathatā)가 染法곧 어리석음인 無明(avidyā)을 물들이거나 그로부터 물들 수 없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은 그러한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판불교 사상가들은 모든 현상적 존재를 산출해내는 불변의 실체로서 여래장을 상정하는 여래장사상은 비불교적인 ‘일원론’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모든 중생에게 여래장이 ‘있다’는 말(“一切衆生悉有佛性”)은 중생에게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격려의 말로서 거기에는 존재론적 함의가 없다. 또한 그들은 모든 중생이 본질적인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는 본각 개념에 주목하여 기신론이 실천 수행을 필요없게 만드는 논서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훈습 개념을 통해 깨달음의 구조를 분석해 보면 이러한 주장이 성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신론의 훈습설을 통해 깨달음의 구조를 살펴보면, 본각은 중생의 어리석음(無明=不覺)에 작용하여(熏習) 시각(종교적 실천 수행)을 일으키도록 촉발하는 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훈습은 중생에게 여래장이 내적 요인(因)으로서 작용하고 부처와 보살이 외적 환경(緣)으로서 그를 도움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본각은 眞如熏習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의 완성은 진여의 훈습만으로 성취될 수 없다. 궁극적인 깨달음(究竟覺)은 수행자 자신의 실천, 곧 시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시각은 중생의 현실적인 마음, 곧 현재 번뇌로 인해 오염되어 있지만 본래의 깨끗함을 회복할 수 있는 그 마음(妄心)―알라야식(ālayavijñāna, 阿黎耶識)―에 근거하여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시각은 妄心熏習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망심훈습으로서의 시각은 진여훈습으로서의 본각에 의해 촉발된 것이므로 양자는 모두 淨法熏習에 해당된다.

이와는 반대로 중생의 마음이 그 본래의 깨끗함을 잃게 될 경우 이를 不覺이라 하며, 染法熏習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기신론 은 본래 깨끗한 마음을 가진 중생이 어떻게 해서 우연적인 무명에 의해 오염되며 그 본래의 마음의 本源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본래 깨끗한 마음, 마음의 진여 곧 여래장이 외적인, 우연적인 무명에 의해 오염될 수 있는지 합당한 설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달리 말해 어떻게 염법훈습이 가능한지를 해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신론은 단지 그것을 佛智의 영역에 남겨둔 채 ‘不思議熏習’이라 부르고 있다.

아울러 기신론이 본각의 내용으로서

⑴ 중생의 실천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 요인(因)인 여래장과

⑵ 그들을 이끌어주고 있는 외적 환경(緣)인 부처와 보살이 존재함을 강조한 것 역시 초월적 종교 체험을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기신론 은 본각 또는 여래장의 작용(用熏習)이 끊임이 없는 것은 부처와 보살이 모든 중생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同體大悲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비라는 종교적 理想을 사회 속에서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본 논서의 긍정적 요소이다. 그러나 여래장과 무명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회피한 채 그것을 초월적 경지에 남겨두는 것은 기신론이 지니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본 논서가 지향하는 바 ‘起信’ 그 자체를 방해할 수도 있다.


주요어:
如來藏, 佛性, 熏習, 本覺, 始覺, 不覺, 批判佛敎, dhātu-vāda, 染淨互熏, 不思議熏習, 同體大悲

 

Ⅰ. 서론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 )은 그 書名이 암시하는 바 중생의 마음 속에 깨달음의 가능태 또는 번뇌에 물들지 않은, 본래의 깨끗한 마음(自性淸淨心, prabhāsvaracitta)이 있음을 자각케 하여 ‘대승에의 믿음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논서이다. 여래장사상은 중생의 마음 속에 ‘如來藏(tathāgatagarbha)’ 또는 ‘佛性(buddhadhātu)’이라 불리는 깨달음의 가능태가 내재되어 있으며, 그것이 온전히 드러날 때 그 중생은 곧바로 ‘法身(dharma-kāya)’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기신론 에서 중생의 마음 속에 이미 본질적인 깨달음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에서 ‘本覺’으로 제시되며, 그것은 ‘生滅’과 ‘不生不滅’의 和合識으로 정의된 알라야식(ālayavijñāna, 阿黎耶識) 가운데의 ‘불생불멸’에 해당되는 것이다.

 

기신론 은 그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문장으로 인해 그 동안 많은 동아시아 불교인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나, 인도의 馬鳴(Aśvagoṣa, 기원후 1∼2세기경)이 지었다는 梵本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번역자로 알려진 眞諦(Pāramārtha: 499∼569) 또는 그 譯出그룹 가운데에서 저술된 僞經이 아닌지 의심을 받기도 하였다. 더욱이 최근에 12연기설을 기반으로 하는 초기의 불교사상을 제외한 화엄과 여래장 내지 기신론 사상, 禪불교 등을 모두 배척하는 비판불교(Critical Buddhism) 운동은, 자성청정심을 기반으로 하는 여래장사상을 비불교적인, 실체론적인 사고방식으로 보고 있다(여래장을 모든 현상적 존재의 근원으로 보는 ‘如來藏緣起說’에 따르면, 여래장은 현상의 배후에 놓여있는 불변의 실체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여래장사상 내지 기신론 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견해들과 기존의 이해 방식을 우선 살펴보고 나서 여래장 개념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Ⅱ장).


한편, 여래장 개념에 이와 같이 실체론적인 사고방식이 비치고 있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초기불교에서 붓다가 말한 바와 같이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나오지 않건 존재하는 하나의 변치 않는 理法”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의 가능태가 중생에게 如來藏(‘여래의 胎兒’라는 뜻)이라는 형태로 본래적으로 있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깨달음, 곧 번뇌로부터의 벗어남(해탈)이라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여래장이 불변의 속성으로서 중생 안에 항상 내재해 있으며, 중생이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함으로써 생사에 流轉한다고 말할 경우 인도 정통파의 브라만-아트만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여래장사상의 전개과정에서 번뇌를 벗어난 여래장, 곧 여래 법신을 常·樂·我·淨으로 규정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가운데 특히 ‘我’라는 술어는 초기불교 이래의 無我說(anātma-vāda)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我’라든가 ‘常’이라는 용어가 空에 대한 허무론적 집착, 곧 斷見(惡取空見)에 대한 치유책으로써 사용되고 있음을 경전에서는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용어의 사용이 단지 ‘方便(upāya)’에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나름의 종교적이면서도 논리적인 근거가 있는데, 필자는 그것을 入楞伽經에 나타난 一闡提(icchantika 또는 ecchantika) 개념과 연결시키고 싶다. 본래 성불하지 못하는 중생 혹은 ‘無性有情’으로 거론되는 일천제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곧 모든 중생은 成佛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는 평등하지만, 현재 그것을 실현하지 못한 채 佛法을 비방하므로 성불하지 못하는 ‘한시적인’ 일천제와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성불을 미룬 채 보살행을 닦는 ‘영원한’ 일천제, 이른바 ‘大悲闡提’의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이 후자의 일천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처의 ‘작용’이 끊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설정이 비록 종교적인 요청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작용의 양태에는 ‘常’이라는 술어를 적용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아울러 입능가경은 여래 법신에 적용된 ‘我’라는 술어로 인해 여래장에 대한 교설을 외도의 아트만설과 같은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됨을 지적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하에서 살펴보겠지만, 법신의 속성인 아-바라밀다는 보살이 無我에 대한 인식을 철저히 하여 도달하게 된 경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Ⅲ장 1절 3)항 참조).

 

한편, 여래장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기술하게 되면서 여래장에는 空과 不空의 두 가지 뜻이 있다는 설이 제시되었다. 법신이 번뇌에 뒤덮여 있음으로써 아직 성불하지 못한 중생의 경우 그러한 번뇌가 成佛의 因을 감추고 있다(隱覆)는 점에서 그를 ‘如來藏’이라 부르게 된다. 그런데 勝鬘經에 의하면, 이 번뇌가 여래장으로서의 중생에게 있어서 본래적인 것이 아니므로 空여래장의 뜻이 성립되며, 그런 번뇌가 걷히고 나면 무한한 공덕을 드러낼 수 있다는 취지에서, 곧 중생의 본질은 원래 부처(여래 법신)의 공덕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라는 뜻에서 不空여래장의 뜻이 또한 성립된다. 여기에서 중생의 번뇌를 걷어내는 것은 중생 자신에게 있는 여래장의 不空의 공덕에서 비롯하며, 그것은 또한 외재적인 조건(外緣)인 부처와 보살 등의 善知識의 존재에도 의존하고 있다. 기신론 은 이와 관련하여 “染法熏習(無明훈습)은 … 성불한 후에는 끊어지지만 淨法熏習(眞如훈습)은 그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外緣으로서의 선지식들은 중생이 존재하는 한 존재해야 하므로 그러한 진여의 작용(用熏習)은 끝없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필자는 여래장을 서술할 때 적용되는 ‘常’ 또는 ‘我’라는 술어의 의미를 중생 구제의 항구성이라는 대승불교의 종교적인 요청과 관련하여 밝혀보고자 한다.


그런데 대승입능가경 에서는 한편으로는 여래장과 알라야식(藏識, 識藏)을 동일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래장에 장식이 없으면 곧 생멸이 없다”라고 하는데, 여래장과 알라야식의 이러한 관계 설정은 불생불멸의 여래장과 생멸하는 의식의 화합식으로 알라야식을 정의하는 기신론 의 生滅門정의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신론에서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과정(還滅)은, 그 안에 깨끗한 불성(不生不滅)을 간직하고 있지만 중생에게 있어서는 번뇌의 창고(生滅)로도 기능하고 있는 이 알라야식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眞如, tathatā)이 밝게 드러나는, 깨끗한 여래장으로 만들어가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여래장사상은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에서 중관이나 유식사상과 비견될 만한 학설로서의 독자성은 인정받았지만, 독립된 종파나 학파(인맥)를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如來藏經, 不增不減經, 勝鬘經과 같이 ‘如來藏三部經’으로 알려진 경전들이 있긴 하지만, 이들 경전을 所依로 하는 종파가 형성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은 특정 종파나 학파에 국한되지 않고 폭넓게 수용되어 왔으며, 그것은 불교사상이 일반적으로 번뇌를 우연적이며 소멸 가능한 것으로, 그리고 그것이 소멸됨으로써 드러나는 부처의 경지는 절대적이며 불변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기불교 이래의 전제를 체계화한 것이 여래장사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보성론을 통해 집대성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을 살펴보기에 앞서 보성론을 통해 여래장사상의 개요를 살펴보고(Ⅲ장 1절), 이어 여래장 삼부경을 중심으로 기신론과의 상관 관계를 검토해 보기로 하였다(Ⅲ장 2절).


기신론에서 진여문에 대한 설명은 생멸문에 비해 매우 소략한데, 그 이유는 萬有의 변치않는 참모습이라 할 수 있는 眞如(tathatā) 그 자체는 언어적 분별을 떠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 그러한 형용할 수 없는, 진여라는 본래적인 모습과는 달리 미망을 헤매고 있는 현상적 중생의 모습이 나타난 생멸문의 경우는 비교적 자세한 설명이 가능하다. 생멸문은 중생에게 내재된 본래적 깨달음(本覺=心源)과 중생이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始覺), 그리고 그런 본래적 깨달음을 갖춘 중생심이 번뇌에 물들어 있는 현실의 모습(不覺)이라는 세 가지 측면을 모두 설명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멸문은 우선 중생심으로서의 알라야식을 眞(불생불멸=여래장)·妄(생멸) 화합식으로 정의하는데, 이러한 알라야식은 오로지 생멸하는 의식(一向生滅識)에 지나지 않는 유식사상의 알라야식과는 판이한 것이다. 원효는 기신론의 알라야식 개념의 연원을 능가경의 識說로부터 찾고 있으므로, 본 논문에서도 이를 능가경의 識說과 비교하면서 논의하기로 한다(Ⅳ장 1절). 이어 이러한 알라야식으로부터 깨달음의 세계(覺)와 미혹의 세계(不覺)가 전개되어 나오는 모습을 파악하기로 한다(Ⅳ장 2절). 다음으로 중생의 번뇌와 해탈을 설명하기 위해 기신론이 도입한 熏習개념을, 깨달음의 구조와 관련하여 정리해 본다(Ⅳ장 3절). 아울러 능가경에 나온 ‘영원한’ 일천제(大悲闡提)와 비견될 만한 기신론 의 ‘同體大悲’ 의식을 특히 진여의 用훈습과 관련하여 살펴보기로 한다(Ⅳ장 4절).


기신론은 그 經名이 나타내듯이 대승에의 ‘믿음’을 일으키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는 논서이다. 그렇다면 기신론을 해명함에 있어서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이성에 의해 정당화된 믿음인지 아니면 종교적 정열에 의해 맹목적으로 믿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진여와 무명의 상호 훈습에 대한 기신론의 설명은 그 자체가 그야말로 종교적인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기신론 은 본래 평등한 진여가 무명에 의해 훈습되어 중생의 인식이 차별화되는 과정과 진여가 다시 무명을 훈습함으로써 이를 타파해 나가는 과정에 대하여 “오로지 여래만이 알 수 있다”거나 “심식의 분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하는데, 이러한 언급은 여래장에 대한 ―맹목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종교적·초월적인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경향은 대부분의 여래장 계열 경전들이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기신론 에 있어서의 믿음이 결국은 지혜에 바탕을 둔 자비의 실현을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종교적 경지에 대한 초이성적인 직관에 근거하는 것이라는 점 또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에서 기신론을 이해하는 데 참고한 것은 원효의 疏와 別記이다. 일본학자들은 대개 法藏의 起信論義記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법장의 의기는 상당 부분 원효의 소를 그대로 全載한 것이므로 기신론 이해에 있어서 원효의 권위는 유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원효의 起信論觀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어 왔고, 원효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겠지만,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본 논문의 주제가 아니므로 필자는 기신론 이해를 위한 유용한 ‘방편’으로서 원효의 기신론 해석을 일단 인정하고자 한다. - 海印의 뜨락

流通分(유통분)

5. 勸修學利益分(권수학이익분) - 바른 믿음을 권함

已說修行信心分(이설수행신심분) 次說勸修利益分(차설권수리익분)

이미 수행신심분을 설명하였으므로 다음은 권수이익분을 설하나니, 

如是摩訶衍諸佛秘藏(여시마하연제불비장) 我已總說(아이총설)

이와 같이 마하연(대승)의 모든 부처님의 비장은 내가 이미 총체적으로 설명하였으니,

若有衆生(약유중생) 欲於如來甚深境界(욕어여래심심경계) 得生正信(득생정신)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매우 깊은 경계에서 올바른 신심을 내고 

遠離誹謗(원리비방) 入大乘道(입대승도) 當持此論(당지차론)

비방을 멀리 여의어 대승의 도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논서를 지니고(문혜), 

思量修習(사량수습) 究竟能至無上之道(구경능지무상지도)

사량(사혜)하고 수습(수혜)하면 구경에 마침내 능히 위없는 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思量修習(사량수습) : 삼혜(三慧)=  ① 문혜(聞慧) - 선천적인 지혜로써 들은 법의 뜻을 부지런히 구하여 그릇된 법을 버림. ② 사혜(思慧) - 법을 뜻을 사유함. ③ 수혜(修慧) - 사유한 다음 닦아 익힘. 이 논서를 지니는 것은 문혜이며, 사량한다는 것은 사혜이며, 수습하는 것은 수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1) 바른 믿음을 권함

若人聞是法已(약인문시법이) 不生怯弱(불생겁약)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문을 듣고 겁내거나 약함=怯弱한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當知此人定紹佛種(당지차인정소불종) 必爲諸佛之所授記(필위제불지소수기)

마땅히 이 사람은 결정적으로 부처가 될 종자=佛種이니, 반드시 제불의 수기한 바가 됨을 알아야 한다. →삼혜(三慧) 중 문혜(聞慧)

 

假使有人能化三千大千世界滿中衆生令行十善(가사유인능화삼천대천세계만중중생령항십선)

가령 어떤 사람이 능히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하여, 하여금 십선을 행하게 하더라도 

[사바세계와 같은 세계가 천 개 모이면 소천세계, 소천세계가 천 개 모이면 중천세계, 중천세계가 다시 천 개 모이면 삼천대천세계]

不如有人於一食頃正思此法(불여유인어일식경정사차법)

어떤 사람이 밥 먹을 동안=一食頃에 이 법을 올바로 사유하는 것보다 못하나니, 

過前功德不可爲喩(과전공덕불가위유) →삼혜(三慧) 중 사혜(思慧)

앞의 공덕을 능가하여 비유할 수도 없을 것이다.

 

復次若人受持此論觀察修行(부차약인수지차론관찰수행)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논을 받아 지니고 관찰하고 수행하기를 

若一日一夜所有功德(야일일일야소유공덕) 無量無邊不可得說(무량무변불가득설)

하루 낮과 밤 동안 함으로서 소유할 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어, 말로써 설명할 수도 없으니,

假令十方一切諸佛(가령십방일체제불) 各於無量無邊阿僧祇劫(각어무량무변아승기겁)

가령 시방의 일체 모든 부처님이 각각 한량없고 끝없는 아승기 겁 동안 

歎其功德(탄기공덕) 亦不能盡(역불능진)

그 공덕을 찬탄하시더라도 또한 다할 수 없으니, 

何以故(하이고) 謂法性功德無有盡故(위법성공덕무유진고)

왜냐하면 이른바 (진여의) 법성의 공덕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니,  

此人功德亦復(차인공덕역부) 如是無有邊際(여시무유변제)

이 사람의 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끝이 없다. → 삼혜(三慧) 중 수혜(修慧) 

 

2) 비방함을 멀리 여윔

其有衆生(기유중생) 於此論中毁謗不信(어차론중훼방불신)

그 어떤 중생이 이 논서를 훼방하고 믿지 않는다면 

所獲罪報經無量劫受大苦惱(소획죄보경무량겁수대고뇌)

얻는 죄의 과보=罪報는 한량없는 겁을 지나도록 큰 고뇌(괴로움)를 받을 것이다.

[불법을 비방하면, 자기도 수행하지 않게 되며, 다른 사람도 그 길을 가는 것을 막는 것이 되므로 그 죄보가 크다고 하는 것이다. 누가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지은 업보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是故衆生但應仰信不應誹謗(시고중생단응앙신불응비방)

그러므로 중생은 다만 우러러 믿고 마땅히 비방하지 않아야 하며, 

以深自害亦害他人(이심자해역해타인) 斷絶一切三寶之種(단절일체삼보지종)

(비방하면) 깊이 스스로를 해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게 되어, 일체 삼보의 종자를 끊어지게 하는 것이니,

以一切如來皆依此法得涅槃故(이일체여래개의차법득열반고)

왜냐하면 일체 여래께서 이 법을 의지하여 열반을 얻으신 까닭이며, 

一切菩薩因之修行入佛智故(일체보살인지수행입불지고)

일체 보살이 그로 인하여=因地의 수행을 하여 불지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當知過去菩薩已依此法得成淨信(당지과거보살이의차법득성정신)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과거의 보살이 이미 이 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淨信을 성취하였으며,

現在菩薩今依此法得成淨信(현재보살금의차법득성정신)

현재의 보살도 지금 이 법을 의지하여 정신을 성취할 수 있으며, 

未來菩薩當依此法得成淨信(미래보살당의차법득성정신)

미래의 보살도 마땅히 이 법을 의지하여 정신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是故衆生應勤修學(시고중생응근수학)

그러므로 중생은 마땅히 부지런히 수행하고 배워야 한다. 

 

3) 廻向偈(회향게)

諸佛甚深廣大義(제불심심광대의) 

모든 부처님의 매우 심오하며 넓고 위대한 뜻,

['매우 심오하고, 광대하며, 위대하다'는 것은 체(體)·상(相)·용(用) 삼대(三大)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며, 이는 앞에서의 법계총상법문입니다.]

我今隨分總持說(아금수분총지설)

제가 이제 분수를 따라 모든 지혜를 총괄하여 설하였으니,

廻此功德如法性(회차공덕여법성) 普利一切衆生界(보리일체중생계)

이 공덕을 진리의 본성=法性과 같이 회향하오니,
일체 중생의 세계가 두루두루 이익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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