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26) 십지품③ㅡ3
(1) 환희지③ㅡ3
셋째, 연기(緣起)로 생겨나는 것에 자성(體)이 없음을 알지 못하여 유전하는 불료연생무체유전문(不了緣生無體流轉門)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이 한 단락은 진(眞)을 미혹하고 망(妄, 허망)을 좇음으로서 고통이 생겨나는 인(因)을 밝힌 것이니,
‘이른바(所謂)’에서부터 ‘괴로움의 무더기를 낳고 자라게 한다(生長苦聚)’에 이르기까지의 네 행의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른바 인(因)이 명색(名色)에 의거해서 6근(六根)이 인식하는 대상의 소연(所緣)에서 촉(觸)이 생기고,
촉이 있기 때문에 6근이 대상을 취하여 수(受)를 일으키며,
수(受)를 인연으로 애(愛)가 생기고, 애를 인연으로해 취(取)가 생기며, 취를 인여느로 해서 유(有)가 생기고,
유가 있으므로 노사(老死)와 근심·슬픔·괴로움·번뇌의 우비고뇌(憂悲苦腦)가 있는 것이다.
ㅡ무체(無體)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떠한 현상도 다른 조건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고정된 본체를 갖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소리를 들을 때는 귀와 소리, 의식 및 여러 조건이 함께 작용하는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 소리를 듣는 경험이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여러 조건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을 연기(緣起)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명(名) 가운데 색(色)이 갖추어져 있고, 색(色) 가운데 명(名)이 갖추어져서 명과 색,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이니,
이에는 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모두가 포함되는 것이다.
또한 유표색(有表色)과 무표색(無表色)이 있기 때문에 다만 심의(心意, 마음과 뜻)와 안(眼)ㆍ이(耳)ㆍ비(卑)ㆍ설(舌)ㆍ신(身)ㆍ의(意)이 인식하는 바의 소연(所緣)과 격발해서 미혹(번뇌)을 이루는 것을 모두 촉(觸)이라 한다.
오직 여래만이 조작이 없는 무위(無爲)로서 순수하게 지혜와 더불어 함께 하기에 법에 대한 법촉(法觸)이 없지만,
중생이 촉(觸)과 수(受)를 통해 삼계(三界)의 번뇌를 이루며,
성문(聲問)은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증득하고자 하는 촉(觸)과 수(受)가 있으며,
정토 보살은 청정함과 더러움의 두 가지에 대한 촉(觸)이 있으며,
1승 보살에게는 원만하게 조화된 지혜와 자비가 있지만, 아직 자재롭지 못한 촉(觸)이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촉(觸)을 밝은 지혜로 관찰해서 지용(智用, 지혜의 작용)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명경(淨名經, 유마경)에서는 “모든 촉을 수용하여 여여한 지혜로 증명한다(受諸觸如智證)”고 한 것이며,
또한 “법은 본래 나지도 않으며, 이제 멸하는 것도 아니다(法本不生今則不滅)”라고 한 것이니,
이는 연기하여 생겨나는 연생(緣生)의 체(體)가 본래 자성(自性)이 없어서, 고정된 생멸법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범부는 이를 요달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無明)이라 칭하는 것이나, 마음과 경계가 본래 공하다는 것을 안다면, 곧 법만이 일어나는(起)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며, 그러함은 항상 지혜의 경계(대상)이지 생멸의 연(緣)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선정과 지혜로 관조하면 자연히 깨달아 이해하게 되리라.
ㅡ수제촉여지증(受諸觸如智證)은 촉을 피하거나 감각 경험 자체를 없애는 것보다, 촉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지혜로 관찰하는 태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소리를 듣거나 어떤 감정을 경험할 때, 그 경험을 곧바로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붙잡지 않고, 어떠한 조건을 따라 일어난 현상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촉과 수가 반드시 집착과 번뇌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 보살이 참된 진(眞)을 요달해서 중생의 고(苦)를 가엾이 여기어서 중생을 이끄는 보살달진민고접생문(菩薩達眞愍苦接生門)이라는 것은 바로 “이 가운데 모든 것은 공(空)한 것으로,
아(我, 나)와 아소(我所, 나의 것)를 여의었다(是中皆空離我我所)”에서부터 “대자비의 광명 지혜(大慈光明智)”에 이르기까지 5행의 경문이 이에 해당된다.
ㅡ공을 깨닫는 지혜는 중생을 외면하는 태도가 아니라, 집착 없이 중생의 괴로움을 이해하고 돕는 대자비의 지혜로 드러납니다.
이와 같이 십이유지(十二有支)에 의해 모든 중생은 앞에서 말한 18 가지의 번뇌를 일으키고, 생사윤회 가운데에서 유전하면서 온갖 괴로움(苦)를 받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성문(聲聞) · 연각(緣覺) · 정토의 보살(淨土菩薩)은 생사를 염리(厭離)하여 싫어하여서,
이러한 번뇌의 현행(現行)을 절복(折伏)하여 일어나지 않게 하지만,
반면 일승(一乘)의 보살은 이 십이유지를 바탕으로 해서 근본지(根本智)를 성취하고, 차별지(差別智)를 일으켜 중생을 교화함으로서 선법(善法)을 유지하고 보살의 보리심(菩提心)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비록 미혹과 깨달음이 같지는 않지만, 12유지가 지혜와 더불어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승만경(勝鬘經)에서도 이와 같은 취지로 설하고 있다.
ㅡ‘십이유지가 지혜와 더불어 다르지 않다’라는 말은 십이연기의 12 지분과 지혜가 문자 그대로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라, 미혹의 작용을 올바르게 깨달으면, 같은 연기의 세계가 지혜와 자비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장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한 열여덟 가지 번뇌 가운데 사견(邪見)과 무명(無明) 등을 살펴보면,
십주(十住)의 첫 단계인 초발심주(初發心住)에 처음 들어가 여래지혜가(如來智慧家)에 태어나면, 정사(正使, 근본 번뇌)로 능히 악도에 떨어지게 할 만큼 강한 번뇌 현행의 사견이 제거됨으로써 (사견과 무명)이 그 힘을 잃고, 습기(習氣)도 미약해진다.
그러나 교만 등을 비롯한 열여덟 가지 번뇌의 습기가 모두 멸진하여 사라진 것이 아니다.
십행(十行)과 십회향(十迴向)의 수행 단계에서는 열 가지 수행법과 그에 따른 가행(加行)으로 번뇌를 다스려서, 그에 따라 번뇌의 습기가 점차 희미하게 약해지는 것이며,
십지(十地)에 이르면 바른 지혜의 정지(正智)가 더욱 밝아져서, 오직 견도(見道)의 행을 따른 법집(法執)만 남아 있고,
삼계에서 일어나는 번뇌 현행이나 습기인 불선(不善)의 업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간탐(慳) · 질투(嫉) · 분노(忿) · 원한(恨) · 성냄(瞋)의 다섯 가지 번뇌는 십지에 들어가면 그 습기가 이미 없으며, 그 나머지 번뇌의 습기는 제7지에서 자비가 궁극에 이르고 지혜가 원만해짐에 이르러서 원력에 따라 자유자재하게 작용하는 지혜의 지용(智用)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를 번뇌를 끊었다고 하기보다는, 번뇌를 꿰뚫어 이해하여 지혜의 작용인 지용(智用)으로 전환하였다고 해야 한다.
| 십주(十住) | 발심하여 여래의 지혜를 향한 수행의 기반을 마련함 |
| 십행(十行)·십회향(十迴向) | 여러 수행을 통해 번뇌와 습기를 점차 다스림 |
| 십지(十地) | 바른 지혜가 더욱 밝아지고 미세한 법집을 다스림 |
| 제7지 이후 | 지혜와 자비의 작용이 더욱 자유자재하게 전개됨 |
| 불과(佛果) | 미세한 어리석음까지 완전히 다하는 것으로 설명됨 |
여기서 현행(現行)은 번뇌가 실제로 일어나 작용하는 것이고,
습기(習氣)는 번뇌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는 미세한 경향이나 흔적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화를 내는 행동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미세한 자기중심적 반응이나 익숙한 분별의 경향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집(法執)의 현행은 제7지에까지 이어지는 것이므로, 법집의 습기는 십지에 이르러서야 사라지는 것이며,
또한 수를 헤아리는 광대한 어리석음의 산수광대우(筭數廣大愚)과 수호공덕에 관한 어리석음의 수호공덕우(隨好功德愚),
이 두 가지 어리석음은 불과(佛果)의 수행이 완성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찰하여서 멸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아승기품(阿僧祇品)과 수호광명공덕품(隨好光明功德品)에 해당되며,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스스로 이 두 품을 직접 설하시어, 불과의 두 가지 어리석음의 불과이우(佛果二愚)를 밝히신 것이다.
이는 십이유지(十二有支)와 그에 따른 미세한 습기가 불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함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수행의 단계를 바탕으로 오위(五位)와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세우고,
각각 열 가지씩의 십십(十十) 수행으로 번뇌와 습기를 다스리기 때문에
십주·십행·십회향·십지·십일지(十一地)의 모든 수행 원리는 그 체(體)와 상(相)이 서로 유사하지만, 번뇌와 습기를 다스리는 단계에는 차이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이 다섯 수행 단계의 십바라밀 가운데, 처음 세 바라밀은 속박에서 벗어나 출세간의 길로 나아가는 출세도(出世道)를 다스리는 것이니, 때문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십주의 단계에서 만나는 첫째 · 둘째 · 셋째의 선지식을 세 비구로 나타낸 것이며,
그 다음의 세 바라밀은 출세간의 지혜와 세간의 미혹을 다스리는 것이니, 이는 곧 미가 장자(彌伽長者) · 해탈 장자(解脫長者) · 해당 비구(海幢比丘)로 나타낸 것이며,
그 다음에는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부터 원력바라밀(願力波羅蜜) 등의 세 바라밀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세간에 들어가 활동하면서도 출세간의 지혜를 잃지 않고, 자비와 지혜가 자유자재하게 작용하도록 다스리는 수행으로, 이에 해당하는 선지식은 휴사 우바이(休捨優婆夷) 선인과 고행하는 바라문(婆羅門) 등으로 나타난다.
그 다음에는 세간과 출세간을 아우르는 지혜와 자비가 자유자재하게 작용하는 단계에 이르면, 여기서는 지혜바라밀(智波羅蜜)이 중심이 되어, 지혜가 자비를 일으켜서 자재하기 때문에 자행(慈行)이라하는 이름의 사자당왕의 딸인 자당왕녀(師子幢王女)로써 나타내고 있으니, 지혜가 왕과 같이 자유자재하므로 왕의 딸로서 나타낸 것이다.
제7주(第七住)에서는 자비를 닦아 지혜를 일으키지만,
제10주(第十住)에서는 지혜로부터 자비를 일으키는 자행(慈行)이므로 왕의 딸로서 나타낸 것이다.
이는 지혜바라밀(智波羅蜜)을 통해 지혜로 자비를 성취해서, 그 자비를 자유자재하게 발휘함을 밝힌 것이니,
이는 오위(五位)를 닦아 나아가는 수행이 점차 깊어지는 과정에서, 각 지위에서마다 앞서 말한 4 가지 세분(勢分)의 차이와 공통점의 차별동이(差別同異)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여러 선지식(善知識)을 차례로 만나는 과정에서도 각각의 차별동이(差別同異)를 거듭 밝히는 것은, 이를 통해 비로소 오위를 행해(解行, 이해와 수행)에서 실천하는 행(行)의 같고 다름의 동이(同異)를 분명하게 요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십지(十地)의 법문 역시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미혹을 다스림에 네 가지의 차별동이(差別同異)가 있다.
첫째, 초지(初地)에서 제3지(第三地)에 이르기까지는 세간의 속에서 물들어 있는 습성을 다스려 출세간의 수행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둘째, 제4지 · 제5지 · 제6지에서는 출세간의 지혜를 갖추었으면서도 세간에서 그 지혜를 자유자재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습성을 다스리는 것이며,
셋째, 제7지 · 제8지 · 제9지에서는 세간 속에 들어가 활동할 때 지혜와 자비를 자유자재하게 발휘하지 못하는 습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그러므로 제8지(第八地)의 지위에서는 모든 부처님께서 3 가지 가피의 삼가(三加)와 7 가지 권유의 칠종권발(七種勸發)을 베풀어 보살의 수행을 보호하고 북돋우시나니, 제8지의 문맥에서는 제9지와 제10지의 지혜바라밀(智波羅蜜)을 갖추어 밝히며,
세간에서 자비와 지혜를 자유자재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다스리는 수행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태자이셨을 때의 셋째 부인인 구파(瞿波)를 그 상징으로 삼은 것이니, 이는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이미 원만해졌음을 나타내며, 자비의 법에서 얻는 기쁨을 법열(法悅)을 뜻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선재동자가 십지(十地)의 법문을 나타내는 과정에서, 아홉 명의 천녀와 한 명의 부처님 아내가 있는 것은, 십지의 법문이 대자비의 문을 길러 원만하게 하고, 자비와 지혜를 자유자재하게 발휘하도록 하기 때문에 여천(女天)의 모습으로 이를 나타낸 것이니, 그 지위에 이르면 자세히 밝히겠다.
그러나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이타행(利他行)은 아직 자유자재롭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대략적으로 오위(五位) 수행의 승진하는 대의(大意)의 6 가지를 서술하면,
첫째, 십주(十住)는 처음으로 부처님의 불가(佛家)에 태어남을 밝히며, 번뇌의 현행 가운데 근본이 되는 거친 번뇌를 정사(正使)로로 다스려 제거하는 것을 나타내며,
둘째, 십행(十行)은 세간을 따르는 현행의 번뇌와 습혹(習惑, 습관적인 미혹)을 다스림을 밝힌 것이며,
셋째, 십회향(十迴向)은 큰 서원의 대원력(大願力)을 일으켜서, 지혜와 자비를 조화롭게 융합하여 세간과 출세간에 걸림 없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지위를 밝힌 것이며,
넷째, 십지(十地)는 미세하게 축적된 습기를 다스리고 자비와 지혜를 길러 그 공덕을 원만하게 이루는 지위를 밝힌 것이며,
다섯째, 십일지(十一地)는 보현행(普賢行)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지위인, 이에 해당하는 것이 보현행품(普賢行品)이며, 십정품(十定品) 이후도 여기에 해당된다.
여섯째, 성불의 지위는 수행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어 종결됨을 밝힌 것인,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이세간품(離世間品)은 불과(佛果)에 이르기 위한 수행을 마친 뒤에도 보현행이 영원히 지속됨을 밝힌 것이며,
법계품(法界品)은 전후의 일부(一部) 경전이 모두 법계(法界)를 체로 삼고 있음을 밝힌 것이니,
이와 같이 법계의 대지(大智)가 원만하게 통하면, 총체적으로 일법(一法)과 일시(一時)도 전후의 차별이 없는 것이니, 지혜로 비추면 볼 수 있을 것이다.
ㅡ오위 수행의 여섯 단계.
*십주: 부처님의 지혜를 향한 발심과 수행의 시작
*십행: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번뇌를 다스림
*십회향: 큰 서원으로 지혜와 자비를 조화시킴
*십지: 미세한 습기를 다스리고 지혜와 자비를 원만하게 함
*십일지: 보현의 이타행을 원만하게 함
*불과: 여래의 지혜가 완성됨.
이것은 수행을 단순히 번뇌를 없애는 과정으로만 보지 않고, 지혜와 자비를 점차 넓혀서, 마침내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이 원만해지는 화엄의 관점을 보여 줍니다.
ㅡ'법계의 대지(大智)가 원만하게 통하면, 총체적으로 일법(一法)과 일시(一時)도 전후의 차별이 없는 것'이란,
경전의 시간적 전후나 수행 단계가 일상적인 차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기보다, 궁극적인 법계의 관점에서는 모든 법이 서로 의존하며 원융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오위(五位) 가운데 차별적으로 전개되는 수행의 단계는 모두 초발심주(初發心住) 안에 갖추어져 있의니, 초발심주(初發心住)의 원행(願行)과 지혜(智)와 자비(悲)로서 두루 하나의 인(印)으로해서 원만하게 하기 때문에,
가르침에서는 비록 수행의 순서를 앞뒤로 나누어 설명하지만, 원행(願行)과 지혜(智)와 자비(悲)의 법은 일시(一時)라서 때(時)도 다르지 않고 법 또한 차이가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발심한 선비(수행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수행하고 이와 같이 원만하게 해야 한다.
ㅡ가르침의 순서에서는 수행의 시작과 발전, 완성을 구분하나,
법의 관점에서는 서원·수행·지혜·자비가 서로 떨어진 별개가 아니다.
이는 여래의 부동지(不動智)라는 체(體)의 원만함을 여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불과(佛果)에 지혜와 자비의 시종(始終)이 서로 사무치는 것이며, 또한 일체 중생이 곧 부처님의 불국토라서 들고 나는 출입(出入)이 없음을 두루 보기 때문이다.
여래의 지혜를 미혹한 중생들을 교화하여 근본을 의지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지혜(自智) 안에서 모든 제불(諸佛)과 동일지(同一智, 동일한 지혜)라는 것을 두루 보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요,
자신의 지혜(自智)와 다른 별도의 부처님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안과 밖, 멀고 가까움의 차별한 견해를 일으키지 않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요,
하나의 지혜로운 일지인(一智印)으로 인(印)을 쳐서 정(情, 마음의 분별)의 크고 작고 길고 짧은 양(量)이 있음을 타파시키고자 하는 까닭이니,
ㅡ一智印(일지인)은 하나의 지혜로 모든 법을 비추어 보는 것을 뜻합니다.
중생은 흔히 크고 작음, 길고 짧음, 안과 밖, 멀고 가까움 등의 차별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특정한 조건과 관점에 따라 성립하는 것입니다. 화엄의 지혜는 그 차이를 무조건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실체인 것으로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이 바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불종(佛種)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며,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법을 설하기 때문에 능히 법종(法種)이 끊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부처님의 불지해(佛智海)와 동일함을 두루 깨달아서 부처님의 지견(佛知見)에 널리 들어가게 하는 것이므로 승종(僧種, 승가의 종자) 또한 끊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를 이와 같이 관찰하여, 마음(心)과 경계(境)로 하여금 이와 같이 서로 상응하도록 해야 하리라.
ㅡ불종(佛種)·법종(法種)·승종(僧種), 삼보의 계승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佛種(불종): 중생이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法種(법종):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이 전해지고 수행을 통해 이어지는 것.
僧種(승종):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며 전승하는 승가의 계승을 뜻합니다.
佛智海(불지해): 부처님의 깊고 광대한 지혜를 바다에 비유한 표현입니다.
佛知見(불지견): 부처님의 지혜와 바른 통찰을 뜻하며, 여기서는 중생이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고 그 지견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心境相應(심경상응): 마음과 그 마음이 마주하는 대상 또는 경계가 서로 상응하는 것.
ㅡ자신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화엄의 관점으로, 중생이 부처님의 지혜와 분리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지혜에 들어갈 수 있음을 깨닫도록 가르침을 전할 때, 불종과 법종과 승종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고,
‘자신이 부처님의 지혜 바다와 동일하다’는 표현은 모든 중생이 이미 수행을 마친 부처와 완전히 똑같다는 뜻이라기보다, 중생의 지혜와 부처님의 지혜가 근본적으로 단절된 것이 아니며, 중생도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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