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26)
십지품③ㅡ6
(2) 이구지(離垢地) ㅡ2

 

(22권의 제1 환희지(歡喜地) 다음으로 이어지는 과목의) 

두번째,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는 단락(捨惡從善段)의 43행 경문은 다시 두 단락으로 나누면,

첫째 “그때 금강장보살이(爾時金剛藏)” 이하부터 “이 열 가지 마음으로 이구지에 들어갈 수 있다(以此十心得入離垢地)”까지의,  4행 반의 경문은, 열 가지 마음의 십심(十心)으로 제2지로 나아가는 수행을 닦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두번째,  부분인 "불자(佛子)여, 보살이 이구지(離垢地)에 머문 뒤로부터" 이하 "다른 이로 하여금 수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경우는 있을 수 없다"까지의 38행의 경문은,

제2지(第二地)의 보살이 지닌 종성(種性, 본래의 성품과 자질)이 스스로의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을 잘 조절하고 선하게 다스리며, 십선(十善)의 선한 마음을 따라 자비를 갖춤을 밝힌 분(分)이다.

 

십선(十善)이란, 몸으로는 살생(殺生) · 투도(偸盜) · 사음(邪婬)을 하지 않고,

뜻으로는 탐욕(貪) · 성냄(嗔) · 어리석음(癡)을 일으키지 않으며,

입으로는 거짓말의 망언(妄言) · 꾸미는 말의 기어(綺語) · 악한 말의 악구(惡口) · 이간질하는 말의 양설(兩舌)을 하지 않는 것이니, 

욕계(欲界)에서는 이 십선을 산선(散善), 즉 선정에 들지 않은 상태에서 닦는 선행으로 수행하지만,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서는 십선을 선정의 정업(定業)과 함께 닦으니, 생각과 분별의 상념(想念)이 쉬어야 비로소

이른 것이다. 

ㅡ몸의 3 가지 악업: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婬)
입의 4 가지 악업: 망언(妄言), 기어(綺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뜻의 4 가지 악업: 탐욕(貪), 진에(瞋), 사견 또는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한 마음의 우치(愚癡)

ㅡ 치(癡)를 보통 어리석음으로 표현하지만, 일부에서는 삿된 견해(邪見)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의 “불자야” 이하 39행 반의 경문은, 상(上)의 10선을 훌륭히 지님을 밝힌 분(分)으로, 이를 다시 세 단락으로 나누겠다.

3-1, “불자야” 이하 “이 같은 방편을 보살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如是方便菩薩當學)”에 이르기 까지 14행의 경문은,

이 지위의 보살이 10선도(十善道)를 지키는 것을 밝힌 분(分)으로, 이 단락에 여섯 가지 뜻이 있으니,

 

3-1-1, 열 가지 불선(不善)의  십악(十惡)을 지으면 지옥이나 축생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염(생각)하는 것이며,

 

3-1-2, 10선업(善業)의 십선업도(十善業道)를 닦으면, 다시 삼계(三界)에 태어나게 되서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를 염(念, 생각)하는 것이나, 이 10선(十善)이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비상정 非想頂)에 이르기까지 두루 수행할 수 있으므로, 이를 통틀어 닦아서 총체적으로 유정(有頂)이라 이름붙이는 것이며,

 

3-1-3, 상등의 십선인 상품십선(上品十善)을 닦는 사람 가운데 고통(苦)을 두려워하여 참된 진(眞)을 닦아서 성문승(聲聞乘)을 얻으니, 이들은 삼계의 유위심(有爲心), 즉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 마음을 벗어나고, 삼계의 번뇌를 굴복시키고 다하여 변화생사(變化生死)에 들어가고, 어떤 이들은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 여러 겁이 지나도록 깨닫지 못하기도 하며, 

 

3-1-4, 상등의 십선을 닦는 사람 가운데 스스로 인연으로 생겨나는 연생(緣生)을 깨달았으나 자비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이는 독각승(獨覺乘)을 성취하고, 또한 변화생사를 얻으니, 근기가 예리한 까닭에 대보리(大菩提)를 향해 회향하면서 쉽게 십천(十千劫, 만겁)이 걸리며, 

 

3-1-5, 상등의 십선을 닦으면서 광대한 서원의 광대원(廣大願)을 세우고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부처님의 대지혜를 구하는 이는 보살행(菩薩行)을 이루는 것이다.

 

3-1-6, 최상급의 상상십선(上上十善)을 닦아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청정하게 하기 때문에 십력(十力)과 사무외(四無畏)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이를 최상승(最上乘)이라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하늘(天)에 태어나는 길과 세간을 벗어나는 길에 걸쳐, 십선업도(十善業道)에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10선업(十善業)의 도(道)가 있는 것이다.

ㅡ이 해설은 십선의 수행을 통해 여러 수행의 길이 펼쳐질 수 있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 성문승(聲聞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추구하고,
- 독각승(獨覺乘)은 인연으로 생겨나는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 길을 추구하고, 
- 보살승(菩薩乘)은 광대한 서원을 세우고 중생을 버리지 않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선이라는 선행 자체만으로 수행의 궁극적인 방향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수행하는가, 그 수행을 누구를 위해 회향하는가가 중요한 것으로, 자신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수행과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보살행은 출발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서원과 지향하는 바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불자야, 이 보살마하살” 이하 “가없는 무리의 대고취(無邊大苦聚)”에 이르기까지 23행의 경문은,

십불선업(十不善業)을 행할 때 각각 두 종류의 원인과 결과가 있음을 밝힌 것으로, 그 구체적인 내용은 경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또한 십불선(十不善) 가운데에도 상·중·하의 세 등급의 삼품(三品)이 있으며, 그에 따른 인연이 서로 다르므로 받게 되는 괴로움(苦)도 같지 않으니, 이 내용 역시도 경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ㅡ주석은 십불선업을 행하더라도 그 원인과 조건, 행위의 정도가 서로 다르므로 결과로 받는 괴로움 역시 같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즉 악업의 결과를 단순히 하나의 고정된 결과로만 보지 않고, 행위의 강도와 그에 관련된 인연을 살펴본 것입니다.

 

셋째, “이 때문에 보살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하 “그 가운데 머물게 한다(令住其中)”에 이르기까지 2행의 경문은,

보살이 스스로 십선(十善)을 실천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교화하여 십선업(十善業)을 행하게 하는 것을 밝힌 분이다.

 

앞에서 말한 상상(上上)의 십선(十善)이란 것은 지혜에 의지하여 발심하는 의지발심(依智發心)을 밝힌 것이며,

그 나머지의 3품은 비록 모두 삼계(三界)의 업을 여의고 삼계를 벗어나는 결과(果)를 얻었다 할지라도, 모두 공(空)에 의지하여 발심한 것이기 때문에 점차 부처님의 지혜를 구해야 비로소 보현의 원행(願行, 서원과 행)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삼승(三乘)에 속하는 보살은 원행(願行, 서원과 행)이 비록 광대할지라도, 부처님의 지혜를 완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삼천대천(三千大千)세계의 국토(國土)를 부처님의 과보로 나타나는 불경계(佛報境)로 삼는 것과 같다.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 가운데서 보현행(普賢行)을 실천하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삼승의 수행자는 공을 관찰하는 수행(觀空)과 오위(五位)의 행문(行門, 수행문)을 통해 이치에 나아가고, 궁극적인 진리에 이른 뒤, 비로소 여래종지(如來種智)의 문을 바라게 된다. 그러나 그 뒤에도 다시 보현의 서원과 수행에 들어간다면, 

곧 부처님 과위의 불과(佛果)에 들어가서, 십신(十信)과 오위의 수행을 마친 뒤에 있으며, 삼기(三祇, 3 아승기겁)을 채워야 비로소 도달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마음을 돌이켜 대승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이들은 모두 문밖의 풀로 지은 암자인 초암(草庵)에 머무는 것과 같은 것이다.

ㅡ삼승과 일승의 차이
ㅡ 삼승; 공을 관찰하고 오위의 수행문을 거쳐 점차 진리에 나아가는 수행으로, 여기에서는 수행이 부처님의 지혜를 완전히 갖추기 전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ㅡ일승; 처음부터 부처님의 지혜를 믿음의 바탕으로 삼는 수행
부동지불(不動智佛)의 지혜를 믿음의 근본으로 삼고, 보광명지(普光明智)를 바탕으로 십신에서 십지와 십일지에 이르는 수행을 이해하고, 부처님의 지혜와 보현행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ㅡ若不迴心者,俱在門外草庵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모두 문밖의 풀로 지은 초암(草庵)에 머문다”는 뜻으로, 
 ‘마음을 돌이킨다는 회심(迴心)’은 단순히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방향을 전환하여 부처님의 지혜와 보살의 광대한 서원을 향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삼승의 수행이 일승의 지혜에 이르기 전의 단계로 설명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상상(上上)의 십선(十善)과 일승(一乘)의 문에서는 여래의 일체처에서 흔들림 없이 머무는 지혜의 부동지불(不動智佛)을 믿음의 바탕으로 삼고, 십주위(十住位)에 들어가면 곧바로 여래의 지혜라는 과위(果)에 들어간다.

십신과 오위의 수행은 모두 부처님의 과위에 해당하는 큰 지혜의 불과대지(佛果大智)로서 행문(수행의 길)을 성취하기 때문에 곧 여래의 보광명지(普光明智)를 바탕으로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迴向)·십지(十地)·십일지(十一地)를 성취하여 그 체(體)로 삼는다.

곧, 부처님의 과위의 불과와 보현행은 서로 같은 바탕에 의지하는 것으로, 지혜의 체가 뚜렷하게 밝고 원만하여서 분별과 집착에서 비롯된 견해를 벗어났으므로 삼세(三世)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삼승(三乘)을 돌이켜 지혜의 바다인 지햬(智海)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 이를 용녀(龍女)로서 나타내고, 이 경전인 화엄경(華嚴經)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들어가는 불문(佛門)을 단박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이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상징하는 바와 같은 것이다.

 

선재동자는 비록 여러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했지만,

그러나 발을 각모(覺母, 문수를 뜻함)의 앞에서 발걸음을 옮기지도 않았고,

자씨(慈氏, 미륵보살)는 비록 일생에 부처를 이루는 일생성불(一生成佛)의 공(功)을 주었지만,

그러나 한 생각의 일념(一念)의 전후가 없는 무생지해(無生智海, 낳음이 없는 지혜의 바다)를 여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일체지(一切智)의 수레를 타고서 고금의 견(見)이 멸진한 것이다.

만약 마음 속에 앞뒤와 전후의 분별을 남겨 두면, 부처님의 지혜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풀로 지은 초암(草庵)에 머물면서 문밖에 서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논주(論主)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으니, 

一切衆生金色界 白淨無垢智無壞 智珠自在內衣中 只欲長貧住門外 

일체 중생의 금색계(金色界, 금빛 세계)는 희고 깨끗하여 더러움이 없으며, 그 지혜는 무너짐이 없도다.
지혜의 구슬인 지주(智珠)가 자신의 내의(內衣) 속에 있거늘, (이를 알지 못하여)
다만 영원히 가난하게 문 밖에서 머무는도다.
ㅡ금색계(金色界): 일체중생을 금빛 세계에 비유한 것으로, 중생을 바라보는 화엄의 관점이고, 

ㅡ 지주(智珠)는 법화경의 옷 속에 감춰진 보배 구슬의 비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廣大寶乘住四衢 文殊引導普賢 扶肥壯白牛甚多力 一念遍遊無卷舒 

광대한 보배 승(乘, 수례)이 사거리 한 가운데에 머물러 있으니, 
문수 보살이 이끌어 인도하고, 보현 보살이 도와서 붙들어 주시며
건장하고 살찐 백우(白牛, 흰 소)는 그 힘이 매우 힘이 세어서
일념(一念)에 두루 노니나, 나아가고 물러섬의 권서(卷舒)가 없도다.

ㅡ 문수보살은 지혜를, 보현보살은 서원과 실천의 행(行)을 상징하며, 지혜와 실천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如是寶乘不能入 但樂勤苦門前立 不覺自身常住中 遣上恒言我不及

이 같은 보배 승(乘, 수레)에 능히 올라타지 못하고
다만 고달픈 수행의 근고(勤苦)함을 좋아하여 즐기면서 문 앞에 서 있을 뿐,

자신이 본래 그 가운데 항상 머물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나아가게 하는 상승(上乘)을 버린 채, 항상 “나는 미치지 못한다(나는 부족하다)”라고 말하는도다.

 

ㅡ법화경(法華經)의 일곱 가지 비유
1. 제3품 비유품(譬喻品)에서의 불타는 집과 세 수레의 비유의 화택삼거유(火宅三車喻)
한 부자의 큰 집에 불이 났지만, 아이들은 놀이에 빠져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양 수레·사슴 수레·소 수레를 주겠다고 하여 집 밖으로 나오게 합니다. 그런 다음 약속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큰 흰 소의 수레를 모두에게 줍니다.
→ 불타는 집은 괴로움이 가득한 삼계(三界)를, 아이들은 중생을, 아버지는 부처님을 상징합니다. 부처님은 중생의 근기에 맞는 방편(方便)으로 이끌어 마침내 일승(一乘)의 가르침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2. 신해품(信解品)에서의 부자와 가난한 아들의 비유의 궁자유(窮子喻)
어린 시절 집을 떠난 아들이 오랫동안 가난하게 떠돌다가 부유한 아버지의 집에 도착합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그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금씩 일을 맡기고 신뢰를 쌓게 한 뒤, 마침내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재산을 물려받을 자격을 알려 줍니다.
→ 중생은 자신이 부처님의 지혜와 얼마나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스스로를 부족한 존재라고 여기지만, 부처님은 중생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 점차 이끌어 갑니다.

3. 제5품 약초유품(藥草喻品)의 약초와 나무의 비유(藥草喻)
큰 구름이 비를 내리면 여러 종류의 풀과 나무가 각자의 크기와 성질에 따라 물을 흡수하며 자랍니다. 비는 고르게 내리지만 식물마다 자라는 모습은 다릅니다.
→ 부처님의 가르침은 차별 없이 중생에게 미치지만, 중생은 각자의 근기와 능력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서로 다른 수행의 모습이 있다고 해서 가르침의 자비가 차별한 것은 아닙니다.

4. 제7품 화성유품(化城喻品)의 화성(化城)과 보처(寶處)의 비유
사람들이 멀고 험한 길을 따라 보배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지쳐 포기하려 합니다. 길잡이는 신통력으로 잠시 쉴 수 있는 환상의 도시를 만들어 줍니다. 사람들이 충분히 쉰 뒤에는 그 도시가 임시로 마련된 곳임을 알려 주고, 다시 보배가 있는 목적지로 이끕니다.
→수행 중에 얻는 특정한 경지나 안락함을 궁극적인 깨달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방편은 중생을 쉬게 하여서 충전하게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부처님의 지혜에 이르는 것입니다.

5. 제8품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에서의 옷 속에 감춰진 보배 구슬의 비유(衣裏繫珠喻)
친구의 집에서 술에 취해 잠들자, 친구는 그가 앞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값비싼 보배 구슬을 옷 속에 몰래 넣어 줍니다. 그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한 채 가난하게 떠돌다가 훗날 친구를 만나 보배 구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이미 지니고 있는 소중한 가능성을 알지 못한 채 밖에서만 행복과 깨달음을 찾는 모습을 비유합니다. 앞서 살펴본 화엄경 주석의 “지주(智珠)가 자신의 옷 속에 있다”는 것이 이 비유입니다.

6. 제14품 안락행품(安樂行品)에서의 상투 속의 귀한 보배 구슬의 비유(髻中明珠喻)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운 장수에게 왕은 여러 가지 상을 내리지만, 가장 귀한 보배 구슬만큼은 쉽게 주지 않습니다. 그 구슬은 왕이 가장 아끼는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장수가 큰 공을 세우자 왕은 그에게 구슬을 줍니다.
→부처님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여러 가르침을 설하시다가, 마침내 가장 깊고 귀한 일승의 가르침을 드러내십니다.

7. 제16품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서의 훌륭한 의사와 독을 먹은 아이들의 비유(良醫病子喻)
훌륭한 의사의 아이들이 독을 먹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의사는 좋은 약을 만들어 주지만, 독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 아이들은 약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그제야 아이들은 아버지가 남긴 약을 먹습니다.
→부처님은 중생의 상태에 맞게 방편을 사용하여 그들을 구제합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고 열반에 드는 모습도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그 밖의 비유로서, 제12품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에서 용녀의 성불(龍女成佛);
용왕의 딸인 어린 용녀가 부처님의 지혜를 드러내며 성불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성별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만으로 성불의 가능성을 제한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앞서 읽으신 주석에서는 삼승을 돌이켜 지혜의 바다로 이끄는 가르침을 나타내는 사례로 인용됩니다.

제20품 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에서의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
상불경보살은 만나는 사람마다 공경하며, 그들이 장차 부처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그를 조롱하거나 괴롭히지만, 그는 사람들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현재 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가능성을 단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를 존중하는 태도가 보살행의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26)
십지품③ㅡ6
(2) 이구지(離垢地) ㅡ1 

 

앞으로 제2 이구지(第二離垢地)를 해석함에 간략하게 다섯 가지 문으로 나누겠다.

첫째 지의 명목을 해석하는 석지명목(釋地名目)이며,

둘째 이구지는 어떤 수행의 행문(行門)을 닦는가를 밝히는 것이며,

셋째 선재동자가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이 지위에서 만나는 선지식(善知識)이 어떤 법(法)을 나타내는지를 밝히는 선재표법(善財表法)이며,

넷째 이 지위에서 삼계(三界) 가운데 어느 계(界)의 해탈을 얻는가를 밝히는 득하계해탈(得何界解脫)이며,

다섯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석지명목(釋地名目)이다.


첫째, 지(地)의 명목을 해석하는석지명목(釋地名目)이란 다음과 같으니,

이 지위는 왜 이구지(離垢地)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이 지위에서는 가장 뛰어나고 깊은 상상(上上)의 십선계(十善戒)를 닦아 그에 따른 번뇌와 더러움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이 십선계는 법신(法身)의 본성에 바탕을 둔 계율의 성계(性戒), 곧 법신성계(法身性戒)이니, 그 자체에 더러움 없이 청정하기 때문에 이구지라 하는 것이다.

ㅡ이구(離垢)란 더러움에서 벗어난, 즉 마음의 번뇌와 오염을 정화하여 본래의 청정한 성품을 드러낸다는 뜻이고, 
ㅡ 법신성계(法身性戒)는 외부에서 부과된 계울을 지키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법신의 청정한 본성에 부합하는 계율을 가리키며, 계율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본성을 맑게 드러내는 수행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둘째, 이구지는 어떤 수행의 행문(行門)을 닦는가를 밝히는 것이란?

이 지위에서는 지계바라밀(戒波羅蜜)을 주(主)로하여 수행하며, 나머지 아홉 바라밀(九波羅蜜)운 반(伴)으로서 보조한다.

ㅡ이구지에서는 지계가 중심이 되고, 보시(布施),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 바라밀은 지계바라밀을 도와서 조화를 이루며 보살의 행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셋째, 선재동자가 법을 나타냄을 밝히는 선재표법(善財表法)이란?

선재동자가 이 지위에서 만나는 선지식의 이름은 보덕정광야신(普德淨光夜神)으로, 

이 선지식은 여성의 모습을 한 여천(女天)으로, 보리도량(菩提場) 안에 머물며,

선재동자는 이 선지식을 통해 보살적정선정락보유보해탈문(菩薩寂靜禪定樂普遊步解脫門)을 얻으며, 

ㅡ보살적정선정락보유보해탈문(菩薩寂靜禪定樂普遊步解脫門),

보유보(普遊步)는 한곳에만 머무르지 않고 두루 다니며 활동한다는 뜻으로,
마음은 고요하지만 그 작용은 자유롭고 넓으며, 세상 속에서 중생을 돕더라도 번뇌와 오염에 물들지 않아서 중생계를 자유롭고 지혜롭게 오가며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무릇 이 야신(夜神)과 하신(河神)과 해신(海神)과 지신(地神)이 모두 여신인 것은 자비의 지위인 자비위(慈悲位)를 나타내는 것이니, 이는 (十地)의 수행에 대비(大悲)를 쌓아서 10회향 중 보현의 원(願)을 만족시킴을 밝히기 때문에 천녀(天女)로 나타낸 것이다.

보덕정광야신(普德淨光夜神)이라 이름한 것에서

‘보덕(普德)’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서원과 행을 원만하게 갖추었음을 뜻하고,
‘야신(夜神)’은 생사의 긴 밤 속에 항상 머물면서 모든 중생이 오랫동안 미혹과 어둠에 빠져 있는 상태를 깨뜨리는 존재를 뜻하고, 
‘신(神)’이란, 그 지혜가 진실(眞)에 부합하여 응하는 까닭에 붙여진 명칭이며, 

이 여천이 보리장(菩提場, 보리도량) 안에 머문다는 것은 법신의 미묘한 묘리(妙理)를 계율의 체(體)로 삼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ㅡ보덕정광야신(普德淨光夜神)에서 
*보덕(普德): 널리 갖춘 공덕을,
*정광(淨光): 청정한 빛을 뜻하며, 번뇌에 물들지 않은 지혜와 자비의 밝음을,
*야신(夜神): 밤의 신으로,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인해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신(神)이란, 단순한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여기에서는 진리에 응하는 지혜와 능력을 지닌 존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ㅡ 생사의 긴밤(生死大夜)은 중생이 무명과 집착에 가리워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윤회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고, 야신은 바로 그 어둠을 밝히는 존재.

 

선재동자가 보살의 적정선정락보유보해탈문(寂靜禪定樂普遊步解脫門, 고요한 선정의 즐거움으로 두루 유행하는 해탈문)을 얻었다는 것은 성계(性戒, 계율의 본성)가 두루 하여 행이 법계와 제등(齊等)하여 법계(法界)에까지 미치며, 

불위이용(不爲而用)하여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으면서도 작용하고, 중생 앞에 색신을 대현(對現)함으로써 항상 세간에 처하면서도 티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이러하게 명칭한 것이다.

ㅡ불위이용(不爲而用)은 억지로 꾸며 내거나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작용한다는 뜻으로, 이는 세상을 떠나야만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집착과 번뇌에 물들지 않는 보살의 실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체(體)와 작용(用)이 언제나 고요하기 때문에 선정(禪定)은 본체이고, 두루 유행하는 유보(遊步)는 작용이며,

즐거움의 낙(樂)은 법의 즐거움인 법락(法樂)인 것이다.

ㅡ여기에서 선정(禪定)은 본체이고, 두루 유행하는 유보(遊步)는 작용이며,  
본체는 마음의 근본적인 고요함을 가리키며, 작용은 그 고요함에서 드러나는 자유로운 활동을 가리키고,

법락(法樂)은 수행에서 얻는 진리의 기쁨이므로 고요함은 활동을 막지 않고, 활동 또한 고요함을 깨뜨리지 않는다.  

 

이 신(神)이 보리장(菩提場, 보리도량) 안에 머문다는 것은, 최상의 십선계인 상상십선(上上十善)이 보리(菩提)의 법신(法身)이 지닌 오묘한 이치의 묘리(妙理)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신은 초지인 환희지(歡喜地)에 해당하는 바산바연저야신(婆珊婆演底夜神)이 처음 발심할 때의 스승이니,

이는 모든 발심(發心)이 보리의 오묘한 이치의 보리묘리(菩提妙理)를 본체로 삼는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ㅡ십선(十善)은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양설(不兩舌), 불악구(不惡口),
불기어(不綺語), 불탐욕(不貪欲), 불진에(不瞋恚), 불사견(不邪見).

ㅡ 상상십선(上上十善)은 이러한 선행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완성된 경지.

 

넷째로, 이 지위가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 가운데 어떤 세계에서 해탈을 얻는지를 밝히는 득하계해탈(得何界解脫)이란?

만약 보리의 조작함이 없는 체의 보리무작지체(菩提無作之體)를 기준으로 한다면,

삼계(三界)와 육도(六道) 전체가 모두 해탈의 의미에 통하는 것이니, 이는 총체적인 관점에서의 총상(總相)이다.

그러나 만약 개별적인 관점의 별상(別相)에서 삼계법을 논한다면, 그 차별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니,

계율의 본체(戒體)로 욕계(欲界)의 번뇌를 다스리고,

보리의 오묘한 이치의 보리묘리(菩提妙理)가 눈앞에 드러나면 욕계 번뇌의 작용과 양상의 행상(行相)을 관찰하여 다스리는 것이니, 보리의 묘리로서 욕계의 미혹과 습기의 혹습(惑習)를 다스리는 것이다.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경우에는 삼지(三地)의 지위 가운데에서 여덟 가지 선정의 팔선정(八禪定)을 닦아야 비로소 색계와 무색계의 행문(行門, 수행문)을 밝힐 수 있다.

ㅡ욕계에는 감각적 욕망과 집착이 강하게 작용하므로, 욕계의 번뇌를 다스리는 데에는 계율(戒)이 중요하다. 계율을 통해 몸과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하고 번뇌가 일어나는 조건을 줄여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본래 보리의 이치와 통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번뇌를 다스리는 수행은 구별해야 한다.

 

ㅡ 혹습(惑習)은 미혹이 반복되면서 마음에 익숙한 습관처럼 남아 있는 것을 가리킨다. 번뇌는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이나 욕망만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굳어진 마음의 경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수행은 번뇌를 단순히 억누르는 데 그치지 않고,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관찰하여서 그 근본이 되는 미혹과 습관을 점차 변화시키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따로따로 각각으로 수행하지 않고, 다만 보리의 무작용(無作用)만으로서 한다면,

삼계에서 물드는 행법의 염행법(染行法)을 분별하여 가려내어 알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삼계의 법을 제대로 요달하지 못하므로 대지(大智)가 없는 성문(聲聞)이나 외도(外道)와 같아지는 것이다.

ㅡ삼계의 차이에 따라 수행하지 않고 보리의 무작용만을 내세우면, 삼계에서 마음을 물들이는 행법을 분별하여 이해할 수 없다.
그 결과 삼계의 법을 제대로 통달하지 못하게 되며, 주석에서는 이를 대지혜가 없는 성문이나 외도의 입장과 같아지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 말은 성문이나 외도를 모두 동일하게 평가하려는 것이라기보다, 보리의 이치만을 추상적으로 말하면서 구체적인 수행과 지혜의 분별을 갖추지 못하는 태도를 경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지위(地)에서는 계율을 닦아 욕계의 번뇌를 다스리고,

삼지(三地)에서는 팔선정(八禪定)을 닦아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를 다스린다.

초지(初地)에서는 범부가 발심하는 모습을 밝히는데, 이 때에는 다만 큰 뜻과 즐거움의 지락(志樂)만이 있어서 대법(大法)을 기꺼이 구하는 것을 밝힌 것이며, 

ㅡ각 수행 지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면,
* 초지(初地): 범부가 뜻을 세우고 대법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단계, 즉 큰 깨달음을 향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
* 이구지(二地): 계율을 닦아 욕계의 번뇌를 다스리는 단계, 즉 계율의 실천하는 것
* 삼지(三地): 여덟 가지 선정의 팔선정을 닦아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를 다스리는 선정 수행의 단계이다.
 

삼지(三地)에서 여덟 가지 선정의팔선정(八禪定)을 닦는다는 것은 상계(上界)의 선정(禪)이 모두 상념을 쉬어서 마음이 안정되어  선정에 머무는 것임을 밝힌다.

보살은 쉼 없이 체(體)의 자적(自寂)에 맡긴 선으로 저 식심(息心)을 버리기 때문에 이(理)가 스스로 공적함에 맡겨서 보리에 부합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그렇게 생각을 억지로 멈추지 않고, 본체에 맡겨 저절로 고요한 선정을 행한다. 곧 생각을 억지로 쉬게 하고 마음을 머물게 하는 방식을 버리고, 이치 자체의 고요함에 머무르니, 이것이 보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무릇 색계와 무색계의 상이계(上二界)의 선(禪)은 그 깊고 얕음에 따라 심상(心想, 마음과 생각)을 쉬게 하고 조복하여 억누르며, 고요함의 적정(寂靜)을 따라 머무는 것이다.

제사선(第四禪)에서는 들숨과 날숨이 없으며, 오직 맑고 청정하며 미묘한 백정묘색(白淨妙色)만이 눈앞에 현전해서, 물·불·바람의 수화풍(水火風) 삼재(三災)가 이르지 못하는 것이니, 염(念, 생각)이 사라지고 망상이 소멸하여 (가라앉아서) 그러한 업이 없기 때문인 것이니, 다만 색계업(色界業)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섯째, 경문에 따라 뜻을 해석하는 석지명목(釋地名目)에서 다시 둘로 나누겠으니,

첫째는 경문의 전체적인 뜻에 따라 단락을 나누는, 장과경의(長科經意)이고,

둘째는 원문을 따라 뜻을 풀이하는 수문석의(隨文釋義)이다.

 

첫째, 경문의 전체적인 뜻에 따라 단락을 나누는, 장과경의(長科經意)란,

이 제2지(第二地)의 경문을 크게 여섯 단락으로 나누는 것이다.

 

5-1-1, “모든 보살이 이를 듣고(諸菩薩聞此)” 이하의 5 행의 게송으로,

모든 보살이 법을 듣고 기뻐하는 문법환희(聞法歡喜)함을 밝힌 분이다.

 

5-1-2, “그때(爾時)” 이하의 한 단락으로, 모두 43행의 경문은,

초지(初地, 환희지)의 수행을 이미 닦은 뒤, 제2지로 나아가고자 하면서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는 사악종선(捨惡從善)을 밝힌 분이다.

 

5-1-3, “불자여(佛子)” 이하의 한 단락으로, 모두 39행 반의 경문은,

제2지에서 최상의 십선인 상상십선(上上十善)을 잘 지키고 실천하는 선지상상십선(善持上上十善)을 밝힌 분이다.

 

5-1-4, “불자여(佛子)” 이하의 39행 반 경문으로, 제2지에서 중생을 향한 자비심을 일으키는 기자비중생(起慈悲衆生)을 밝힌 분이다.

 

5-1-5, “불자여(佛子)” 이하의 한 단락으로, 모두 31행 반 경문은,

제2지인 이구지(離垢地)에 정식으로 바르게 들어가서 여러 부처님을 뵙게 되는 정입제이구지득견다불(正入第二離垢地得見多佛)을 밝힌 분이다.

ㅡ정입(正入)은 해당 수행의 지위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함.

 

5-1-6, “게송을 설한 뒤(說頌)” 이하의 42행 게송으로,

앞에서 설한 법을 거듭 게송으로 풀이하고 제3지(第三地)에 대한 설법을 청하는 중송전업급청설제삼지(重頌前法及請說第三地)를 밝힌 분이다.

 

둘째, 원문을 따라 뜻을 풀이하는 수문석의(隨文釋義)에서는 처음의 다섯 행 게송에 담긴 큰 뜻을 세 가지로 나눈다.

5-2-1, 보살들이 초지(初地)의 법을 설한 것을 듣고 환희하는 것이며, 

5-2-2, 꽃을 흩뿌리며 찬탄하는 것이며, 

5-2-3, 해탈월보살(解脫月菩薩)이 대중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제2지를 설하여 주실 것을 청하는 것이니,

그 뜻은 경문 자체에 자세히 드러나 있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經卷第三十四 十迴向品第二十六之一

唐于闐國(당나라 우전국) 三藏沙門(삼장사문) 實叉難陀 譯(실차난타 역) 

26. 십지품(十地品) ① ㅡ 14

ㅡ정종분(正宗分) 

ㅡ제일(第一) 환희지(歡喜地) ㅡ9

 

ㅡ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의 게송 -2

 

ㅡ보살의 광대한 서원

恒起大願心(항기대원심) 願見於諸佛(원견어제불) 護持諸佛法(호지제불법) 攝取大仙道(섭취대선도)

항상 큰 서원의 마음의 대원심(大願心)을 일으켜 모든 제불(諸佛)을 친견하기를 발원하며,

모든 부처님의 제불법(諸佛法)을 호지(護持)하여 보호하고 지켜 간직하며,

위대한 성자께서 걸어가신 대선도(大仙道)를 섭취(攝取)하여 받아들이는도다.

ㅡ大願心(대원심): 깨달음을 이루고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크고 깊은 서원의 마음.

ㅡ大仙道(대선도): 선(仙)은 세속적인 신선의 뜻이 아닌, 위대한 성자, 곧 부처님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살은 부처님을 친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고 이어 가겠다는 서원으로,

친견과 수호, 수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常生如是願(상생여시원) 修行最勝行(수행최승행) 成熟諸群生(성숙제군생) 嚴淨佛國土(엄정불국토)

항상 이와 같은 여시원(如是願)을 일으키고, 가장 수승한 행의 최승행(最勝行)을 닦아서,

모든 군생(群生, 중생)을 성숙시키며,

부처님의 국토의 불국토(佛國土, 세계, 주변)를 아름답고 청정하게 장엄하는도다.

ㅡ成熟諸群生(성숙제군생)은 중생을 억지로 변화시킨다는 의것이 아니라 지혜와 자비를 키우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는 뜻입니다.

 

一切諸佛刹(일체제불찰) 佛子悉充滿(불자실충만) 平等共一心(평등공일심) 所作皆不空(소작개불공)

모든 부처님의 국토인 일체제불출(一切諸佛刹)에 불자(佛子)들이 두루 가득 차 있으며,

모두가 평등하게 한마음의 일심(一心)을 이루어 함께하나니,

그들이 행하는 바의 소작(所作)의 모든 일이 헛되지 않은 개불공(皆不空)이로다.

ㅡ平等共一心(평등공일심)은 모두가 평등한 마음으로 함께한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차별과 이기적인 집착을 넘어 깨달음과 중생의 이익이라는 공동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一切毛端處(일체모단처) 一時成正覺(일시성정각) 如是等大願(여시등대원) 無量無邊際(무량무변제)

모든 털끝의 자리인 일체모단처(一切毛端處)에서 한 순간에 정각(正覺)을 이루시니,

이와 같은 대원(大願)은 무량(無量)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무변제(無邊際)하여 끝이 없도다.

ㅡ一切毛端處(일체모단처)는 아주 미세한 공간까지도 포함한다 표현으로, 극히 작은 곳에도 광대한 세계와 불가사의한 불국토가 드러날 수 있다는 화엄경의 세계관입니다.

ㅡ一時成正覺(일시성정각)은 보살의 서원과 부처님의 깨달음은 공간의 크기나 범위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주 작은 곳과 광대한 세계가 서로 단절되어 있지 않으며, 깨달음의 세계 또한 한정된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虛空與衆生(허공여중생) 法界及涅槃(법계급열반) 世間佛出興(세간불출흥) 佛智心境界(불지심경계)

如來智所入(여래지소입) 及以三轉盡(급이삼전진) 彼諸若有盡(피제약유진) 我願方始盡(아원방시진)

如彼無盡期(여피무진기) 我願亦復然(아원역부연)

허공(虛空)과 중생(衆生), 법계(法界)와 열반(涅槃)과 세간에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는 불출흥(佛出興)과

부처님의 지혜가 작용하는 마음의 경계인 불지심경계(佛智心境界)와

여래의 지혜가 들어가는 경계인 여래지소입(如來智所入)과 함께

삼전(三轉)이 다하는 것까지를 말하노니, 

만약 이 모든 것이 유진(有盡)하여 다함이 있다면, 나의 서원도 비로소 다할 것이라.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무진(無盡)하여 다함이 없는 때의 무진기(無盡期)와 같으므로,

나의 서원 역시도 그와 같이 다함이 없으리라.

ㅡ삼전(三轉), 삼전법륜(三轉法輪),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은 시전(示轉)ㆍ권전(勸轉)ㆍ증전(證轉)을 가리키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사성제(四聖諦)를 세 가지 방식으로 설하신 것을 말합니다.

1. 시전(示轉) —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 즉 사성제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서 밝히신 것.
- 고성제(苦聖諦): 삶에는 괴로움이 있음을 보이심.
- 집성제(集聖諦):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을 보이심.
- 멸성제(滅聖諦): 괴로움이 소멸할 수 있음을 보이심.
- 도성제(道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보이심.

 

2. 권전(勸轉) — 진리를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실천하도록 권하신 것.
- 괴로움을 알아야 한다.
- 괴로움의 원인을 끊어야 한다.
-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해야 한다.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아야 한다.

 

3. 증전(證轉) — 부처님께서 각 진리에 대한 실천을 완성한 깨달음을 밝히신 것.
- 괴로움을 이미 알았다.
- 괴로움의 원인을 이미 끊었다.
- 괴로움의 소멸을 이미 증득했다.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이미 닦았다.

 

사성제 각각에 세 가지 방식이 적용되므로 열두 가지 양상이 이루어지는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입니다.

 

ㅡ서원(大願)을 세워서 믿음(信)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의지하다. 

如是發大願(여시발대원) 心柔軟調順(심유연조순) 能信佛功德(능신불공덕) 觀察於衆生(관찰어중생)

이와 같이 대원(大願)을 발(發)하니, 그 마음은 부드럽고 유순한 유연조순(柔軟調順)하며,

부처님의 불공덕(佛功德)을 능히 믿으며, 모든 중생(衆生)들을 세심하게 관찰하느니라.

- 대원을 발한것은,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큰 서원을 단순히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그 원을 실천으로 이어 가겠다는 것이고,

- 心柔軟調順(심유연조순): 마음이 부드럽고 조화로우며 잘 다스려진 상태로서, 자기의 주장과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고, 진리에 따라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마음. 

 

ㅡ연기(因緣)를 관찰하여 중생의 괴로움을 이해한다.

知從因緣起(지종인연기) 則興慈念心(즉흥자념심) 如是苦衆生(여시고중생) 我今應救脫(아금응구탈)

모든 현상이 인연(因緣)에 따라 일어나는 것임을 알고서, 곧 자비로운 마음의 자념심(慈念心)을 일으키나니,

이와 같이 괴로움을 겪는 중생들을 내가 이제 마땅히 구제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다짐하노라.

ㅡ 知從因緣起(지종인연기):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지하여 생겨난다는 것으로,

괴로움도 여러 원인과 조건이 모여 생겨나는 것이며,

ㅡ 則興慈念心(즉흥자념심): 인연의 이치로서, 중생의 괴로움은 무지와 집착, 환경과 여러 조건이 얽혀 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자비롭고 애처로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며, 

여기에서는 연기(緣起)를 이해하는 지혜와 자비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으로, 괴로움이 여러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을 알면, 괴로워하는 사람의 그 원인을 이해하고 도움을 줄 방법을 찾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분노를 드러낼 때, 그 분노 뒤에 있는 두려움이나 상처, 잘못된 생각과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일상에서 연기와 자비를 함께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일 것입니다.

 

ㅡ자비(慈念)를 일으켜서 실제로 도움.

爲是衆生故(위시중생고) 而行種種施(이행종종시) 王位及珍寶(왕위급진보) 乃至象馬車(내지상마거)

이러한 중생들을 위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보시의 종종시(種種施)를 행하나니,

왕의 지위와 온갖 귀중한 보물에서부터 코끼리와 말과 수레에 이르기까지를 아낌없이 보시하는도다.

ㅡ모든 보시의 목적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있는 것으로,

오늘날에는 자신이 가진 시간과 능력, 지식과 자원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실천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頭目與手足(두목여수족) 乃至身血肉(내지신혈육) 一切皆能捨(일체개능사) 心得無憂悔(심득무우회)

머리와 눈, 손과 발에서부터 몸의 피와 살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모든 것을 능히 보시하나,

그 마음은 무우회(無憂悔)하여 근심도 후회도 없도다.

ㅡ몸을 보시하는 것은, 이타심이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을 넘어설 만큼 깊다는 점을 극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자기중심적인 집착을 넘어서서 타인을 이롭게 하려는 보살의 서원이 얼마나 깊은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ㅡ경전(經書)을 배우고 그 의취를 이해하여 지혜를 기른다.

求種種經書(구종종경서) 其心無厭倦(기심무염권) 善解其義趣(선해기의취) 能隨世所行(능수세소행)

여러 경전(經書)을 구하여 배우되, 그 마음은 무염권(無厭倦)하여 싫증이나 피로함이 없으며,

경전의 의취(義趣, 뜻과 취지)를 잘 이해하며, 세상에서 행하는 바와 상황에 맞추어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도다.

ㅡ其心無厭倦(기심무염권): 배우는 일을 싫어하거나 지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책을 많이 읽는다는 의미를 넘어, 진리를 향한 꾸준한 열의를 뜻하고,

ㅡ能隨世所行(능수세소행): 세상의 상황과 사람들의 형편에 맞게 가르침을 실천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세상에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관습을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의 취지를 잃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처지와 상황에 맞게 행동한다는 뜻으로 이 게송은 자비와 지혜의 균형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돕고자 하는 마음이 아무리 커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으므로 보살은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침의 뜻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제 삶에 맞게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ㅡ참괴(慚愧)로 자신을 돌아보며 수행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공양과 공경으로 부처님의 실천한다. 

慚愧自莊嚴(참괴자장엄) 修行轉堅固(수행전견고) 供養無量佛(공양무량불) 恭敬而尊重(공경이존중)

참괴(慚愧)로 자신을 장엄하니, 수행이 더욱 견고하여지며,

무량한 부처님께 공양하며, 공경하고 존중하는도다.

ㅡ참(慚)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고,

괴(愧)는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며 삼가는 마음입니다.

참괴하여서 자신의 내면의 인격과 수행을 아름답게 갖추는 것이 장엄(莊嚴)한다는 뜻입니다.

참괴는 자신을 비난하며 괴로워하는 것과 달리, 잘못을 인정하되 거기에 머물지 않고, 고치고 다시 바르게 행하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참괴는 수행을 더 견고하게 하는 내면의 장엄이 되는 것입니다.

 

ㅡ수행을 거듭할수록 선근이 맑아지다

如是常修習(여시상수습) 日夜無懈倦(일야무해권) 善根轉明淨(선근전명정) 如火鍊眞金(여화련진금)

이와 같이 항상 상수습(常修習)하여 익히기를 밤낮으로 무해권(無懈倦)하여 게으르거나 지치지 않으니,

선근(善根)은 갈수록 명정(明淨)하여 더욱 더 밝고 깨끗하여지나니,

마치 불로 진금을 단련하여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과 같으도다.

ㅡ常修習(상수습): 수행을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내지 않고 지속적으로 익히고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ㅡ수행의 성과가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 선근이 점점 밝고 깨끗해진다는 것으로, 

불이 금을 맑게 하듯 수행은 마음을 다듬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ㅡ십지를 청정하게 닦아 수행을 완성하다
菩薩住於此(보살주어차) 淨修於十地(정수어십지) 所作無障礙(소작무장애) 具足不斷絶(구족부단절)

보살은 이 지위(환희지)에 머물러 십지(十地)를 청정하게 닦나니,

수행과 중생을 이롭게 하는 바의 소작(所作)에 장애가 없으며,

필요한 수행의 덕목을 원만하게 갖추어 부단절(不斷絶)하여 끊임없이 이어 가는도다.

 

ㅡ상주(商主)의 비유  

譬如大商主(비여대상주) 爲利諸商衆(위리제상중) 問知道險易(문지도험이) 安隱至大城(안은지도성)

비유하자면, 큰 상인들의 우두머리인 대상주(大商主, 상단의 지도자)가 여러 상인들을 이끌고서 이익을 위하여

길의 위험과 어려움, 안전하고 평탄한 곳을 미리 묻고 살펴서,

모두가 안전하게 대성(大城)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이, 

ㅡ爲利諸商衆(위리제상중): 자기 한 사람의 이익만이 아니라 함께 길을 떠나는 모든 상인의 이익을 위한다는 뜻.

 

ㅡ초지에서 십지까지 용맹하게 나아가다
菩薩住初地(보살주초지) 應知亦如是(응지역여시) 勇猛無障碍(용맹무장애) 到於第十地(도어제십지)

초지(初地, 환희지)에 머무는 보살 역시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용맹(勇猛)하고 굳세게 수행하여 장애에 굴하지 않고 마침내 제십지(第十地)에 이르는도다.

ㅡ초지에서 십지까지 이어지는 보살도의 긴 수행 과정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ㅡ자비로 중생을 교화하다
住此初地中(주차초지중) 作大功德王(작대공덕왕) 以法化衆生(이법화중생) 慈心無損害(자심무손해)

이 초지(환희지)에 머물러서 대공덕(大功德)을 갖춘 왕과 같이 행하고,

법(法)으로 중생을 교화하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도다.

ㅡ作大功德王(작대공덕왕): ‘왕’은 세속적인 지배자의 지위보다는 공덕과 교화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며, 

ㅡ慈心無損害(자심무손해): 교화는 강압이나 해침이 아니라 자비와 지혜에 바탕을 두는 것입니다.

 

ㅡ널리 교화하여 대사(大捨)에 머물게 하다
統領閻浮地(통령염부지) 化行靡不及(화행미불급) 皆令住大捨(개령주대사) 成就佛智慧(성취불지혜)

염부제(閻浮地)를 다스리는 왕과 같이 널리 이끌며, 교화의 화행(化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모든 중생들을 큰 베풂과 평등한 버림의 마음인 대사(大捨)에 머물게 하여서

부처님의 불지혜(佛智慧)를 성취하게 하는도다.

*統領閻浮地(통령염부지): 보살의 교화가 넓게 미치는 것을 나타내고,

*化行靡不及(화행미불급):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에만 한정되지 않음 나타내고,

*大捨(대사)는 집착과 편애를 내려놓고, 특정한 대상에 치우치지 않는 평등하고 넓은 마음으로,

보시로 연상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마음의 평정과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고, 

*成就佛智慧(성취불지혜): 교화의 목적은 단순히 세속적인 복을 주는 것보다는, 지혜를 갖추도록 하는 것입니다.

 

ㅡ최승도(最勝道)를 위해 왕위를 버리다

欲求最勝道(욕구최승도) 捨己國王位(사기국왕위) 能於佛敎中(능어불교중) 勇猛勤修習(용맹근수습)

가장 뛰어난  완전한 깨달음의 길인 최승도(最勝道)를 구하고자 나라의 왕위를 버리고서,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서 용맹하게 정진하고 부지런히 수행을 익히고 실천하는도다.

ㅡ捨己國王位(사기국왕위):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깨달음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

앞의 게송에서는 왕과 같이 중생을 이끄는 공덕을 말하였지만,

여기에서는 최승도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왕위를 버리는 것을 말한 것으로,

왕의 지위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사용될 수도 있지만,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는 그 지위 자체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또한 이 대목은 출가 수행의 전통을 반영한 것입니다.

 

則得百三昧(즉득백삼매) 及見百諸佛(급견백제불) 震動百世界(진동백세계) 光照行亦爾(광조행역이)
그리하여 백 가지 삼매의 백삼매(百三昧)를 얻고, 백 분의 부처님을 뵈오며,

백 개의 세계를 진동시키고, (백개의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광조(光照)하여 빛을 비춤도 역시 그러하도다.


化百土衆生(화백토중생) 入於百法門(입어백법문) 能知百劫事(능지백겁사) 示現於百身(시현어백신)
백 개의 세계 중생을 교화하고, 백 가지의 백법문(百法門)에 들어가며,

능히 백겁사(百劫事, 백 겁에 걸친 일)를 알아서 백신(百身)을 시현(示現)하여 나타내는 도다.

(백 겁에 걸친 일을 알아서, 그에 따라 백 가지의 몸을 시현하는도다)


及現百菩薩(급현백보살) 以爲其眷屬(이위기권속) 若自在願力(약자재원력) 過是數無量(과시수무량)

백 분의 보살을 나투어 자신의 권속으로 삼아서, 자재(自在)한 원력(願力)을 나타냄이

이러한 수를 넘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습을 나툴 수 있도다.

ㅡ보살의 능력이 단순히 ‘백’이라는 수에 갇히지 않으며, 

그 자재한 서원력에 따라 그 범위가 무량하게 확장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ㅡ총결(結說) 

我於地義中(아어지의중) 略述其少分(약술기소분) 若欲廣分別(약욕광분별) 億劫不能盡(억겁불능진) 

나는 지금까지 환희지의 지의(地義) 가운데에서 그 일부의 소분(少分)만을 간략하게 약술(略述)하였으나,

만약 그 내용을 널리 펼쳐 자세하게 광분별(廣分別)하여 설명하고자 한다면,

억겁(億劫)의 세월이 지날지라도 불능진(不能盡)하여 다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

ㅡ億劫不能盡(억겁불능진):이는 초지의 공덕과 의미가 매우 깊고 광대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ㅡ보살의 최승도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菩薩最勝道(보살최승도) 利益諸群生(이익제군생) 如是初地法(여시초지법) 我今已說竟(아금이설경) 

보살의 가장 뛰어난 최승도(最勝道)는 모든 중생들의 제군생(諸群生)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

이와 같은 환희지의 가르침인 초지법(初地法)을 나는 이제 설하기를 마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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