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經卷第三十四 十迴向品第二十六之一

唐于闐國(당나라 우전국) 三藏沙門(삼장사문) 實叉難陀 譯(실차난타 역) 

26. 십지품(十地品) ① ㅡ 1

 

ㅡ어찌하여 그 명칭을 '십지품(十地品)'이라 하는 것인가?
해석하여 말하자면, 여래의 보광명지(寶光明智)로서 지(地)의 체(體)를 성취함을 밝힌 것이니,
예를 들자면, 경문에서 “이 같은 보살이 이미 여래의 보광명지를 밟았다(如是菩薩已踐如來普光明地)”는 것은 바로 대원경지(大圓鏡智)가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즉 설한 바의 4지(四智)와 일체종지(一切種智)와 일체지(一切智)의 차별을 이 지혜의 체(體)로 삼음으로써, 모든 보살이 비록 10주ㆍ10행ㆍ10회향에 오른다 할지더라도 이 체를 여의지 않는 것이며,
도력(道力)이 충분하지 않는다면, 다시 10바라밀을 통하여 10중(重)으로 닦아 나아가서 그 도력을 원만케 하는 것을 10지라 하는 것이며,
또 하나의 바라밀에 스스로 10법을 갖추고 있는 것을 10지라 칭하는 것이며,
십십(十十) 속에 백(百)을 갖추어서, 백(百)이 십(十)으로 옮겨가지 않기 때문에 10지라 칭하는 것이며,
나아가 십백(十百)과 십천(十千)과 십만(十萬)과 십십만(十十萬)과 십억(十億)과 나아가 십불가설(十不可說)에 이르기까지의 십수(十數)가 일다(一多, 하나와 많음)의 무진함을 내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10지라 말하는 것이다.
이 10지의 법이 십(十)을 인(因)으로 해서 통하는 것이니, 즉 10신(信)의 믿음인 10개의 불과를 통하여 곧바로 보광명전에서 설한 10 개의 불과인 부동지불(不動智佛)로써 첫 믿음의 초신(初信)으로 삼은 것이니,
나아가 무애지불과 해탈지불과 함께 10개의 지불(智佛)을 통하여 믿는 바의 신과(信果)로 삼은 것이다.ㅡ신화엄경론

 

ㅡ십지품(十地品) ‘지(地)’란, 대지(땅)와 같이 모든 선한 법과 수행을 받쳐 주고 길러 내는 것을 비유한 것. 
제1지 — 환희지(歡喜地, pramuditã-bhūmi); 이타행의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범부지(凡夫地)를 이탈하여 보살의 성위(聖位)에 들어가서 보살본원(菩薩本願)의 묘행(妙行)을 관행하고 불가진법(不可盡法)으로 정진하는 지위

제2지 — 이구지(離垢地, Vimala-bhūmi), 마음을 자제하는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제3지 — 발광지(發光地, prabhã-kari-bhūmi), 과(果)에 집착하지 않고 연(緣)을 관조하며 역순(逆順)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제4지 — 염혜지(焰慧地, Areismati-bhūmi), 항상 보살의 마음을 놓치지 않고 집중하는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제5지 — 난승지(難勝地, Sudurjayã-bhūmi), 항상 마음의 선정을 유지하는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제6지 — 현전지(現前地, Abimuki-bhūmi), 앞의 5가지 바라밀을 잘 행하여서, 현상의 본질을 밝게 이해하는 지혜(智慧)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제7지 — 원행지(遠行地, Durangama-bhūmi), 지혜바라밀을 완성한 후, 그 지혜로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에 통달하는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

제8지 — 부동지(不動地, Acaia-bhūmi), 지혜와 방편으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완성하는 원바라밀(願波羅蜜)

제9지 — 선혜지(善慧地, Sadhumati-bhūmi), 6 바라밀로 스스로의 수행을 완성하고, 나머지 바라밀로 능히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 역바라밀(力波羅蜜)

제10지 — 법운지(法雲地, Dharmameghã-bhūmi) 모든 바라밀을 통하여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가히 감당할 수 있는 경지로 보살 수행의 최종 완성의 지바라밀(智波羅蜜)


ㅡ십지품의 내용을 세 가지 관점에서 보면, 
1. 지혜의 성장: 보살은 모든 현상이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이치를 깊이 깨닫습니다.
2. 자비의 실천: 자신의 깨달음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중생을 돕기 위해 보시와 계율 등 여러 수행을 닦습니다.
3. 깨달음의 성숙: 수행이 깊어질수록 번뇌에 흔들리지 않고, 중생의 상황에 맞게 법을 설하는 지혜와 방편이 성숙해집니다. 

십지품은 보살이 지혜와 자비를 함께 닦으며, 스스로의 깨달음을 넘어서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부처님의 경지로 나아가는 길을 설명한 가르침으로, 십지는 단순하게 10 단계의 지위를 나열한 것이 아닌, 보살의 마음과 지혜, 실천이 어떻게 깊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수행의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지품은 화엄경에서 보살의 수행 단계를 자세히 다루는 부분이며, 별도의 경전인 '십지경(十地經)'으로도 전해집니다.

 

ㅡ序分(서분); 설법(說法)의 인연(因緣)

爾時(이시) 世尊(세존) 在他化自在天王宮摩尼寶藏殿(재타화자재천왕궁마니보장전)

與大菩薩衆俱(여대보살중구) 其諸菩薩(기제보살) 皆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개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

不退轉(불퇴전) 悉從他方世界來集(실종타방세계래집)

藏 감출 장, 곳집 장, /摩 갈 마, 문지를 마, /殿 대궐 전, 전각 전, /尼 신중 니, 여승 니, 俱 함께 구, 갖출 구

그때, 세존께서 타화자재천왕궁(他化自在天王宮)의 마니보장전에서 

대보살(大菩薩) 대중들과 함께 하셨으니 衆으로 큰 보살대중과 俱하시니, 함께 在= 계셨는데 

그 보살들은 모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anuttara-samyak-saṃbodhi)에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이었으며, 

모두가 타방(他方)의 세계로부터 와서 모인 분들이었다

 

ㅡ마니(摩尼), 용의 턱 아래나 용왕의 뇌에서 나왔다는 구슬 보배로서, 불교에서는 때를 벗어난 청정함을 상징함.

ㅡ'타방의 세계로부터 와서 모였다'는 것은 10회향법으로부터 10지를 성취하함을 타방이라 이름붙인 것으로, 지위의 처소에 이르지 못한 것을 타방이라 칭한 것이며, 나아가 모든 지위도 거의 다 마찬가지다.]

ㅡ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불교에서는 '욕(褥)'을 '뇩'으로, '막(邈)'을 '먁'으로, 제(提)를 '리'로 읽으며, 

가장 완벽한 깨달음을 뜻하며 산스크리트어 anuttara-samyak-sambodhi를 발음 그대로 음사(音寫)한 것입니다.

아뇩보리(阿耨菩提)라고도 하며, 

아(阿)는 한자로 번역하면 무(無)에 해당하며,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아(阿)도 무량(無量)의 무(無)이며,

뇩다라(耨多羅)는 위(上)라는 뜻으로 아뇩다라(阿耨多羅)는 그 위에 다시없는 무상(無上)의 뜻이 됩니다.

삼막삼(三藐三)의 삼막(三藐)은 정(正), 올바름을 말하며,

삼(三)은 변(遍), 넓음을 말합니다.

본래 변(遍)을 두루하다, 넓게 퍼져 있다는 뜻으로 ‘두루 편’이라 발음하지만, 불교에서는 변이라고 발음합니다.

보리(菩提)는 깨달음 또는 지혜(智慧)를 뜻하며,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전체를 한문으로 쓰면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위에 다시없는 올바르고 두루한 깨달음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바로 부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정각(正覺)이라고도 하며, 아뇩다라는 무상(無上), 삼막삼보리는 정등각(正等覺)의 뜻이므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 하며, 간략히 말할 때에는 불지(佛智) 또는 묘지(妙智)라고도 합니다. 

 

 ㅡ법회청중(法會聽衆)

1. 대중(大衆)의 덕(德)을 찬탄(讚歎)함

住一切菩薩智所住境,入一切如來智所入處;勤行不息,善能示現種種神通;諸所作事,教化調伏一切衆生而不失時;爲成菩薩一切大願,於一切世、一切劫、一切剎,勤修諸行,無暫懈息;具足菩薩福智助道,普益衆生而恒不匱;到一切菩薩智慧方便究竟彼岸,示入生死及以涅槃而不廢捨;修菩薩行,善入一切菩薩禪定、解脫三昧、三摩鉢底、神通明智,諸所施爲皆得自在;獲一切菩薩自在神力,於一念頃無所動作,悉能往詣一切如來道場衆會,爲衆上首,請佛說法,護持諸佛正法之輪;以廣大心供養承事一切諸佛,常勤修習一切菩薩所行事業;其身普現一切世閒,其音普及十方法界,心智無礙,普見三世;一切菩薩所有功德悉已修行而得圓滿,於不可說劫說不能盡

 

住一切菩薩智所住境(주일체보살지소주경)

일체의 보살 지혜가 머무는 바의 경계 머물며, (신심과 원력을 가진 보살들이 모였으며) 

ㅡ5위 보살의 지혜 경계가 모두 같아서, 이 10지 중의 불지(佛智)의 경계에 이른 보살들이 모였으며

入一切如來智所入處(입일체여래지소입처) 勤行不息(근행불식)

일체의 여래지(如來智)의 지혜로 들어가는 곳에 들어가서 부지런히 수행하기를 쉬지 않으며,

ㅡ여래의 근본지를 의거해 발심하여 행의 차별지에 들어가서 대자비를 성취하게 되기 때문이며,

善能示現種種神通(선능시현종종신통) 諸所作事(제소작사)

갖가지 신통(神通)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을 능숙하게 잘 나타내며,  

敎化調伏一切衆生(교화조복일체중생) 而不失時(이불실시)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조복(調伏)하되, 불실시(不失時)하여 그 적당한 때를 놓치지 않으며,

爲成菩薩一切大願(위성보살일체대원) 於一切世一切劫一切刹(어일체세일체겁일체찰) 勤修諸行(근수제행)

無暫懈息(무잠해식)

보살의 모든 대원(大願)을 이루기 위하여, 일체의 모든 세상과 일체의 모든 겁(劫)과 일체의 모든 세계(刹)에서

제행(諸行)을 부지런히 닦아 잠시도 게으르거나 쉬지 않으며,懈 게으를 해, 暫 잠깐 잠 

ㅡ‘잠시도 쉬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중생을 이롭게 하고 깨달음을 이루려는 보살의 서원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具足菩薩福智助道(구족보살복지조도) 普益衆生(보익중생) 而恒不匱(이항불궤)

到一切菩薩智慧方便究竟彼岸(도일체보살지혜방편구경피안)匱 함 궤, 다할 궤,

보살의 깨달음의 길을 돕는 복덕과 지혜 수행의 복지조도(福智助道)을 두루 갖추어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되,

그 공덕과 작용은 언제나 불궤(不匱)하여 다함이 없으며,

일체 보살의 지혜와 방편으로 구경에는 피안(彼岸)에 이르나니, 

ㅡ구경의 피안(彼岸)은 그 모든 것들을 완성했다는 뜻이며, 

복덕만을 닦고 지혜가 부족하면 행의 참된 이치를 깊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고,

반대로 지혜만을 추구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실천이 부족하다면 보살행이 온전히 드러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복덕과 지혜를 함께 닦고, 지혜와 방편을 활용하여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示入生死(시입생사) 及以涅槃(급이열반) 而不廢捨修菩薩行(이불폐사수보살행) 廢 폐할 폐, 버릴 폐,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 보이되

보살행을 닦음을 폐사(廢捨)하여 그만두거나 버리지 않으며,  

ㅡ생사에도 들어가고 열반에도 들어 가는 생사열반(生死涅槃) 상공화(相共和)의 경지에 이른 분들, 

즉, 보살은 생사의 세계에 있는 중생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생사의 번뇌에 물들지 않는 지혜를 닦고,

또한 열반을 추구하면서도 자신만의 해탈에 머물러 중생을 위한 수행을 버리지 않습니다.

 

善入一切菩薩(선입일체보살) 禪定解脫三昧三摩鉢底神通明智(선정해탈삼매삼마발저신통명지)

모든 보살의 선정(禪定)과 해탈(解脫), 삼매(三昧), 삼마발저(三摩鉢底, samāpatti), 신통(神通)과

명지(明智, 밝게 꿰뚫어 아는 지혜)에 능숙하며, (모두 이러한 것을 갖추었으며)

ㅡ일체 보살의 선정에 선입(善入)하여 잘 들어간다'는 것은 한결같이 십정품(十定品)의 설과 같다.
십정품에서는 삼마발저(三摩鉢底)와 신통(神通明智)를 설하고 있으며,
삼매(三昧, samādhi)가 능히 지인(智印)의 신통을 일으킴을 밝히고 있으니,
삼(三)이라 말한 것은, 정(正, 바름)을 뜻하고, 여기에서는 정혜(正慧, 바른 지혜)라 하며,
삼마(三摩)라는 것은 삼매를 뜻하고,
발저(鉢底)란 것은 혜(慧, 지혜)이다.
일념(한 생각)이 일어나는 짧은 순간에 무소동작(無所動作)하여 움직임 없이 일체의 도량에 능히 두루 나아가서 이른다고 한 것은 삼매의 지인(智印)으로 그 성품이 스스로 두루 하기 때문이며, 겉과 속의 표외(表裏)가 없기 때문이니,
항상 지혜와 함께하여 무산동(無散動)하여 흩어지거나 흔들림이 없음을 밝히기 때문이다.

ㅡ선입(善入)은 단순히 선정에 들어간다는 뜻을 넘어, 선정에 자유자재하게 들어감을 나타냄
ㅡ삼마발저(三摩鉢底) 산스크리트어 samāpatti, 등지(等至), 곧 마음이 특정한 선정의 상태에 깊이 들어가는 것
ㅡ무소동작(無所動作)은 실제로 몸을 움직여 이동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앞에서 설명한 삼매의 지혜가 공간적 이동이나 외적인 작용에 얽매이지 않음을 나타냄.
ㅡ이 구절은 선정의 고요한 상태에만 머물지 않고 지혜와 결합하여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諸所施爲(제소시위) 皆得自在(개득자재) 
행하는 모든 일에서 자유자재함을 얻었으며, 

ㅡ'자재함'이란, 하고 싶은 일을 무엇이든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 아닌, 지혜와 자비를 바탕으로 상황에 알맞게 행동하고,

중생을 이롭게 함에 걸림이 없다는 뜻입니다.

 

獲一切菩薩自在神力(획일체보살자재신력) 於一念頃(어일념경) 無所動作(무소동작)

悉能往詣一切如來道場衆會(실능왕예일체여래도량중회) 爲衆上首(위중상수) 請佛說法(청불설법)

일체 모든 보살의 자재한 신력(神力)을 얻어서, 일념경(一念頃, 한 순간 사이)에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능히 여래의 모든 도량의 대중들이 모인 중회(衆會)에 왕예(往詣)하여 나아가서 대중 가운데 상수(上首, 으뜸)가 되어 부처님께 법을 설하여 주시기를 청하며,  獲 얻을 획 / 頃 잠깐 경, /詣 이를 예 

ㅡ'일념 사이에 동작하는 바 없이, 능히 일체 도량에 이른다'고 한 것은 삼매의 지인(智印)으로 성품이 스스로 두루 하기 때문이며, 겉과 속이 없기 때문이니, 항상 지혜와 함께 해서 산동(散動)이 없기 때문이다.

ㅡ보살의 활동이 일반적인 공간과 시간의 제약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며, 
일념경(一念頃)은 한 생각이 일어나는 짧은 순간을 뜻하고,

무소동작(無所動作)은 몸을 물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나, 문맥상 지혜와 신력의 작용이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護持諸佛正法之輪(호지제불정법지륜) 以廣大心(이광대심) 供養承事一切諸佛(공양승사일체제불)

常勤修習一切菩薩所行事業(상근수습일체보살소행사업)

모든 부처님의 정법륜(正法輪)을 보호하고 지니며,

넓고 큰 광대심(廣大心)으로 일체 제불께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며,

항상 일체의 보살이 행하는 바의 행(行)과 사업(事業)을 부지런히 닦아 익히며, 

ㅡ일체제불=일체중생 ㅡ 무비스님

 

其身(기신) 普現一切世間(보현일체세간)

其音(기음) 普及十方法界(보급시방법계) 心智無碍(심지무애) 普見三世(보견삼세)
그 몸이 일체의 모든 세간에 두루 나타나며,

그 음성(법문)은 시방의 법계(法界)에 보급(普及)하여 두루 미치며,

심지(心智, 마음과 지혜)는 무애(無碍)하여 걸림없이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를 두루 살피며, 

ㅡ보견삼세(普見三世), 제법이 시간의 흐름과 인과관계 속에서 어떻게 성립하고 변화하는지 지혜로 두루 통찰한다는 것입니다.

 

一切菩薩(일체보살) 所有功德(소유공덕) 悉已修行(실이수행) 而得圓滿(이득원만)

於不可說劫(어불가설겁) 說不能盡(설불능진) 
일체의 모든 보살이 지닌 바의 모든 공덕을 이미 모두 수행하고 원만하게 하였으니,

이러함을 불가설(不可說)의 겁(劫) 동안 설명한다 할지라도 다할 수 없나니, 

ㅡ불가설겁(不可說劫)에 설불능진(說不能盡), 보살의 수행과 공덕의 깊이와 넓이를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뜻.

전체 내용은;  
첫째, 보살은 자신의 지혜에 안주하지 않고 여래의 지혜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며, 
둘째, 신통과 방편을 중생을 교화하는 데 활용하여서 중생의 근기에 맞는 때를 놓치지 않으며, 
셋째, 모든 세상과 모든 겁에 걸쳐 큰 서원을 실천하고, 복덕과 지혜를 함께 닦아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며,
넷째, 생사와 열반에 집착하지 않으며, 선정과 해탈을 닦으면서도 보살행을 버리지 않고, 
다섯째, 정법을 보호하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전해지도록 힘쓰며, 
여섯째, 몸과 음성과 지혜의 작용이 법계에 두루하게 모든 보살의 공덕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입니다.

ㅡ보살 대중의 명호(名號)

其名曰:金剛藏菩薩、寶藏菩薩、蓮華藏菩薩、德藏菩薩、蓮華德藏菩薩、日藏菩薩、蘇利耶藏菩薩、無垢月藏菩薩、於一切國土普現莊嚴藏菩薩、毘盧遮那智藏菩薩、妙德藏菩薩、栴檀德藏菩薩、華德藏菩薩、俱蘇摩德藏菩薩、優鉢羅德藏菩薩、天德藏菩薩、福德藏菩薩、無礙淸淨智德藏菩薩、功德藏菩薩、那羅延德藏菩薩、無垢藏菩薩、離垢藏菩薩、種種辯才莊嚴藏菩薩、大光明網藏菩薩、淨威德光明王藏菩薩、金莊嚴大功德光明王藏菩薩、一切相莊嚴淨德藏菩薩、金剛焰德相莊嚴藏菩薩、光明焰藏菩薩、星宿王光照藏菩薩、虛空無礙智藏菩薩、妙音無礙藏菩薩、陀羅尼功德持一切衆生願藏菩薩、海莊嚴藏菩薩、須彌德藏菩薩、淨一切功德藏菩薩、如來藏菩薩、佛德藏菩薩、解脫月菩薩

如是等無數無量、無邊無等、不可數、不可稱、不可思、不可量、不可說諸菩薩摩訶薩衆,金剛藏菩薩而爲上首

그 이름을 말하자면, 금강장(金剛藏)보살ㆍ보장(寶藏)보살ㆍ연화장(蓮華藏)보살ㆍ덕장(德藏)보살ㆍ연화덕장(蓮華德藏)보살ㆍ일장(日藏)보살ㆍ소리야장(蘇利耶藏)보살ㆍ무구월장(無垢月藏)보살ㆍ어일체국토보현장엄장(於一切國土普現莊嚴藏)보살ㆍ비로자나지장(毘盧遮那智藏)보살ㆍ묘덕장(妙德藏)보살ㆍ전단덕장(栴檀德藏)보살ㆍ화덕장(華德藏)보살ㆍ구소마덕장(俱蘇摩德藏)보살ㆍ우발라덕장(優鉢羅德藏)보살ㆍ천덕장(天德藏)보살ㆍ복덕장(福德藏)보살ㆍ무애청정지덕장(無碍淸淨智德藏)보살ㆍ공덕장(功德藏)보살ㆍ나라연덕장(那羅延德藏)보살ㆍ무구장(無垢藏)보살ㆍ이구장(離垢藏)보살ㆍ종종변재장엄장(種種辯才莊嚴藏)보살ㆍ대광명망장(大光明網藏)보살ㆍ정위덕광명왕장(淨威德光明王藏)보살ㆍ금장엄대공덕광명왕장(金莊嚴大功德光明王藏)보살ㆍ일체상장엄정덕장(一切相莊嚴淨德藏)보살ㆍ금강염덕상장엄장(金剛燄德相莊嚴藏)보살ㆍ광명염장(光明燄藏)보살ㆍ성수왕광조장(星宿王光照藏)보살ㆍ허공무애지장(虛空無礙智藏)보살ㆍ묘음무애장(妙音無碍藏)보살ㆍ다라니공덕지일체중생원장(陀羅尼功德持一切衆生願藏)보살ㆍ해장엄장(海莊嚴藏)보살ㆍ수미덕장(須彌德藏)보살ㆍ정일체공덕장(淨一切功德藏)보살ㆍ여래장(如來藏)보살ㆍ불덕장(佛德藏)보살ㆍ해탈월(解脫月)보살 등이었다. 

이러하게 무수(無數)하고, 무량(無量)하고, 끝없이 무변(無邊)하고, 같을 이 없는 무등(無等)하고,

셀 수 없는 불가수(不可數)하고, 일컬을 수 없이 불가칭(不可稱)하고, 생각할 수 없이 부가사(不可思)하고,

요량할 수 없이 불가량(不可量)하고, 말할 수 없이 불가설(不可說)한

보살마하살 대중들 가운데에서 금강장(金剛藏) 보살이 상수(上首, 우두머리)이셨다.

ㅡ37 분의 보살 명칭이 똑같이 장(藏)인 것은 바로 37 조도행문(助道行門)을 나타낸 것이며,

해탈월 한 분은 37조도행 중에 보리를 돕는 분(分)인 청량(淸凉)의 과(果)를 나타낸 것이며, 모든 보살과 더불어 법을 청하는 주(主)를 짓는 것이며, 모든 대중으로 하여금 법을 듣고 수행케 해서 청량한 즐거움을 얻게 한 것이다. 

ㅡ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이라 한 것은 지혜를 금강에 비유한 것이며, 지혜는 능히 모든 미혹을 타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藏)이란, 지덕(智德, 지혜의 덕)이 두루 함을 칭하는 것을 밝힌 것으로 지혜와 공덕을 두루 갖추었다는 뜻.
보장(寶藏)보살은, 법보(法寶, 부처님의 가르침)가 두루 충만하기 때문에 보장이라 칭하는 것이며,
연화장 보살(蓮華藏菩薩)은, 중행(衆行, 온갖 행)과 열반 및 생사에 염착(染着)하는 바가 없음을 밝힌 것이며,
덕장보살(德藏菩薩)은 온갖 덕을 원만하게 갖추었음을 밝힌 것이며,
연화덕장(蓮華德藏)은 오염이 없는 온갖 행으로 지혜의 덕을 장엄하였음을 밝힌 것이며,
일장보살(日藏菩薩)은 대 지혜로 조용(照用)하여 (진리를) 비추어 작용함을 밝힌 것이며,
소리야장보살(蘇利耶藏菩薩)은 한역하면 태양의 비추는 작용이며,金剛藏(금강장) 보살의 금강이란, 지혜의 금강으로 능히 모든 미혹을 타파하는 것이며, 

ㅡ蘇利耶(Sūrya)는 산스크리트어로 ‘태양’을 뜻하며, 앞의 일장보살과 마찬가지로 태양의 빛에 비유하여 지혜의 비춤과 작용을 나타냄.

무구월장보살(無垢月藏菩薩)은 대자비심으로 세속을 비추어 번뇌의 불꽃을 타파함을 밝힌 것이며,
ㅡ달빛이 뜨거움을 식히는 것과 같이 이 보살의 대 자비는 세속의 중생을 비추어 번뇌의 불꽃을 가라앉힌다는 비유.
일체국토보현장엄장보살(一切國土普現莊嚴藏菩薩)은 복지(福智, 복과 지혜)의 이사(二事, 두 가지)가 두루 함을 밝힌 것이며,
비로자나장보살(毘盧遮那藏菩薩)은 광명이 두루 비추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ㅡ‘광명이 두루 비춤’이라는 것은 지혜의 보편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26)
십지품③ㅡ4
(1)
환희지
③ㅡ4

 

제8, 이 한 단락 21행 반의 경문을 세 단락으로 나누겠으니, 이는 초지 중 제8지의 상(相)이다.
첫째, “불자야” 이하 “무릇 있는 바 일체를 능히 베풀면서도(凡是所有一切能施)”에 이르기까지 2행 반의 경문은,

일체를 능히 보시하는 것을 밝힌 분(分)이며,

“이른바” 이하 “이 명칭이 보살이 초지에 머물면서 대보시를 성취함이다(是名菩薩住於初地大施成就)”에 이르기까지 6행의 경문은, 이 지위의 보살이 부처님의 불지(佛智)를 구하기 때문에 신명(身命)과 재물에 대하여 아까워하지 않음을 밝힌 분(分)다.

이 단락에서 보시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1. 재물과 보물을 보시하는, 재보시(財寶施)이며, 
  2. 코끼리와 말, 아내와 자녀를 보시하는, 상마·처자시(象馬、妻子施)이며, 

  3. 머리와 눈, 눈과 귀, 몸의 살과 같은 신체의 일부를 보시하는, 두목 안이 신육시(頭目、眼耳、身肉施)이다.

둘째, “불자야, 보살이 이 같은 자비로써” 이하 “부처의 교법에서 능히 설한 대로 행한다(於佛教法能說能行)”에 이르기까지 10행의 경문은,

이 지위의 보살이 앞서 설명한 보시를 성취하고 나니 10 가지 이익을 얻는, 득십종이익분(得十種利益分)이니,

1. 대자비로 크게 베푸는 인연을 밝힌 디자비대시소연(大慈悲大施所緣)이며,

2. 베푸는 바가 정법을 구하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것임을 밝힌 것이며,

3. 세간을 벗어난 출세지(出世智)를 구함에 있어서 피로한 마음이 없는 것이며,

4. 일체의 모든 경론(經論)을 대할 때, 두려워하거나 위축되는 마음이 없는 것이며,

5. 상ㆍ중ㆍ하의 중생을 잘 헤아려서, 그 능력을 따라 행하여 세간의 지혜인, 세간지(世間智)를 성취하는 분이며,

6. 참괴(慙愧)로 스스로를 장엄하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도를 닦는 것이며,

7. 부지런히 닦아서 물러남이 없는 것이며,

8. 견고한 힘의 견고력(堅固力)을 성취하는 것이며,

9.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며,

10. 일체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법(佛教法)을 설한 대로 능히 행하는 것이다.

 

셋째, “불자야” 이하 “가르침에 의거해 수행한다(依教修行)”에 이르기까지 2행 반의 경문은,

앞에서 설명한 모든 지(地)를 청정하게 하는 열 가지 법의 십종정제지법 (十種淨諸地法)을 성취함을 총괄하여 매듭지음을 밝힌 분(分)이니, 경문에서 자세히 설한 대로이다.

이 단락에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신(信, 믿음)ㆍ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 버림 또는 평정)와

피로나 싫어함이 없는 것과, 모든 경론(經論)을 아는 것과,

세간의 세법(世法)을 잘 이해하는 것과, 참괴(慙愧)를 갖추는 것과,

견고력(堅固力)을 기르는 것과,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과,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는 것을 법문(法門)으로 삼는다.

이러한 수행으로 수행의 지위를 처정하게 다스리는 정치행지(淨治行地)하나니,

이 가우데에서는 단바라밀(보시바라밀)로 체(體)를 삼고, 그 나머지 아홉 바라밀을 보조로 삼는다.

ㅡ사섭법(四攝法), 사섭법은 보살이 중생을 가까이하고 이롭게 하기 위한 네 가지 방법으로, 
*보시섭(布施攝): 필요한 것을 베풀어 중생을 돕는 것.
*애어섭(愛語攝): 상대방에게 알맞고 따뜻한 말로 대하는 것.
*이행섭(利行攝): 중생에게 실제로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것.
*동사섭(同事攝): 중생과 함께하며 그들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하고 이끄는 것.

 

제9 단락 속의 18행 반의 경문을 대략 세 단락으로 나누면, 
첫째, “불자야” 이하 “무상보리로 회향한다(迴向無上菩提)”에 이르기까지 7행 반의 경문은,

보살이 원력(願力)으로 다백천불(多百千佛)을 뵙고, 아울러 그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며 공양하게 됨을 밝힌 분(分)이다.
둘째, “불자야” 이하 “뜻을 따라 감당해서 쓴다(隨意堪用)”에 이르기까지 7행의 경문은,

부처님께 공양함으로써 뛰어난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을 밝힌 분이다.
셋째, “불자야” 이하 “뜻을 따라 감당해서 쓴다(隨意堪用)”에 이르기까지 4행의 경문은,

연금술사가 금을 제련하는데 자주자주 불에 넣어서 정련하는 것과 같이, 보살이 수행을 거듭함에 따라 더욱더 발전하여 높아지고 깊어지는 것을 비유한 분으로, 이 1단락은 경문에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


제10 단락의 28행의 경문을 대략 세 단락으로 나누면, 
첫째, “불자야” 이하 “여래의 지혜 광명을 성취한다(成於如來智慧光明)”에 이르기까지 14행의 경문은,

보살이 초지(初地)에 들어간 뒤에도 다시 이 지위의 수행을 깊이 닦고, 나아가 십지(十地)에 들어가 여래의 지위(如來地)에 이르는 인과(因果)의 모습을 밝힌다.

둘째, “불자야” 이하 “다 근심 걱정을 벗어난다(悉免憂患)”에 이르기까지 6행 반의 경문은,

상주(相主)가 상인들을 이끌고 간 대성(大城)을 통해 보살이 제지(諸地)의 행(行, 수행)과 상(相, 수행의 모습)과 그 과정에서의 안전과 위험을 물어서 살피고, 필요한 모든 것을 자량하여 일시에 갖추어 구비하는 것의 비유을 밝힌 분이다.
셋째, “불자야” 이하 “백천 아승기의 차별사(百千阿僧祇差別事)”에 이르기까지 7행 반의 경문은,

보살이 수행할 때 지상(地相, 각 지위의 모습)과 안전과 위험를 잘 알아서 중생을 주도하여 걸림 없는 무애해탈(無礙解脫)을 얻게 하는 것이 마치 상주(相主)와 같음을 밝힌 분이다.

ㅡ결국 보살의 지혜는 혼자 깨닫는 데 머무르지 않고, 중생을 돕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입니다.

 

제11 단락의  20행 반의 경문은 앞에서 물은 바의 질문에 정면으로 답한 것으로, 불보살(佛菩薩)과 선지식(善知識)이 초지와 10지의 인과(因果)를 어떻게 잘 아는지를 올바르게 답한 분(分)이다.

이 단락을 다시 두 단락으로 나누면,

첫째, 처음 “불자야” 이하 “일체지지一切智智”에 이르기까지 8행의 경문 가운데 다섯 가지 대의(大意)가 있으니,

  1. 초지(初地)에서 성취하는 과(果)를 바르게 제시한 것이며, 능히 정법(正法)을 보호하고 수호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며, 
  2.  
  3. 중생을 거두어 이롭게 하는 사섭법(四攝法)의 실천을 밝힌 것이며, 

  4. 일체의 짓는 바의 모든 행위가 불ㆍ법ㆍ승, 곧 삼보(三寶)를 염(念)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밝힌 것이며, 

  5. 언제나 그 마음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일체지지(一切智智)를 갖추게 됨을 밝힌 것이다.

여기에서 일체종(一切種)이란, 수행의 힘으로 닦는 가행(加行)과 큰 서원의 대원(大願)으로, 대비(大悲)의 종(種, 씨앗)을 도와 이루게 한다는 것이며, 일체지지(一切智智)의 의미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또한 보살은 큰 뜻과 즐거운 마음의 지락(志樂)을 일으켜 일체지(一切智)와 차별지(差別智)를 닦고, 대자비의 종(種, 씨앗)을 널리 행하는 것이니, 이러한 지혜와 자비는 훈습하고 수행하는 훈수(熏修)를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다.

 

일체지(一切智)는 정(定, 선정)의 힘에 의지하여 드러나서 현발(顯發)하는 것이고,
그 반면 차별지(差別智)는 스승의 가르침과 먼저 그 이치를 요달하여 깨달은 자에 의거하여 수학(修學)함을 말미암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지혜는 모두 근본지(根本智)에 의지하여 성립하는 것이며, 혹은 타고난  근력(根力)을 바탕으로 더욱 깊고 높은 관찰과 통찰의 상상관(上上觀)을 통해 밝은 이해를 얻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 “다시 이렇게 생각했다(又作是念)” 이하 “그리고 게송을 설했다(而說頌曰)”에 이르기까지 12행의 경문은,

이 지위의 보살이 능히 집과 처자를 버리고 출가의 법을 닦아서,  백 부처님을 뵙는백불(百佛)의 경계와 법문을 얻게 됨을 밝힌 것이다.

이 12행 반의 경문 속에 여덟 가지 대의가 있으니,

  1. 중생의 우두머리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춤을 밝힌 것이며, 

  2. 일체지와 차별지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의지처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춤을 밝힌 것이며, 

  3. 버리기 어려운 것을 능히 버릴 수 있음을 밝힌 것이며, 

  4. 출가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정진함을 밝힌 것이며, 

  5. 터득한 삼매가 백(百)이 있음을 밝힌 것이며, 

  6. 과보로 나타나는 의보(依報)에 따라 부처님을 뵙는 수를 밝힌 것이며, 

  7. 원력(願力)에 따라 부처님을 뵙는 범위와 수가 더욱 증광(增廣)함을 밝힌 것이며,  

  8. 계송으로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거듭 설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많은 백의 부처님을 뵙는, 견다백불(見多百佛)이란 것은 바로 화장세계(華藏世界)의 지혜의 경계인 지경(智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일불찰해(一佛剎海)가 시방의 모든 부처님 세계의 바다와 서로 융합하고, 서로를 비추어 사무치는 가운데 나타나는 다백(多百)의 경계이니,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안에 한정된 부처님의 경계에서 한도가 있는 백불(百佛)과는 같지 않은 것이며,  

나아가 몸의 티끌과 모공(毛孔)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법계(法界)와 허공계(虛空界)에 두루 미치는 동등한 백(百)이라서, 이는 범부의 분별하는 정(情)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백불이 아니다.

ㅡ백불은 수량의 한계가 아니라 지혜의 경계를 나타낸 것으로, 백의 부처님을 뵙는다는 표현을 단순히 부처님 백 분을 눈으로 본다는 뜻으로 한정하지 않는 것이다.
화장세계의 지혜의 경계를 설명하면서, 하나의 불찰해가 시방의 모든 부처님 세계와 서로 융합하고 관통한다고 한 것은, 화엄사상에서 강조하는 법계의 상호 포섭과 원융(圓融)의 관점과 연결된다.
따라서 여기서 ‘백’이라는 수는 수행의 단계에 맞추어 지혜의 성취를 설명하기 위한 표현이고, 몸의 티끌과 모공까지 법계와 허공계에 두루 미친다고 설명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지혜의 경계는 특정한 공간이나 방향에 갇히지 않으며, 하나의 존재와 온 법계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화엄의 관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수많은 다백(多百)은 지혜의 경계가 무한한 가운데 나타나는 백이다. 다만 수행의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수행의 단계를 정하고 그에 맞게 설명함으로써, 보살이 어떻게 점차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지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부처님 경계에서는 변두리와 한계를 지닌 중변량견(中邊量見)을 둘 수 없는 것이니,

이는 마치 스스로의 몸을 관찰할 때, 지혜의 경계 안에서 가운데와 가장자리를 나누어 중변견(中邊見)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찌 부처님의 경계에 한계가 있는, 변량견(變量見)을 논할 수 있겠는가?

 

이는 초지(初地)의 중간 과정에서 십지(十地)와 여래지법(如來地法)이 하나의 지로 삼아서, 십지의 수행과 부처님의 지위에 해당하는 불지법(佛地法)을 함께 통틀어 닦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인과(因果)는 십회향(十迴向)에서 설명한 부처님의 과위와 연결되는 것으로, 부처님의 과위는 묘한 묘(妙)라고 이름한 것이다.

십지의 수행은 십회향에서 세운 큰 서원의 대원해(大願海)를 성취하여, 그 큰 서원과 행을 원만하게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수행은 초신심(初信心) 가운데 나타난 금색세계(金色世界)의 부동지불(不動智佛), 문수사리(文殊師利), 보현(普賢) 등의 행을 여의지 않는 것이니, 경전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기를, 

 

"佛子始發生,如是妙寶心,則超凡夫位,入佛所行處。
불자여, 이와 같이 미묘한 보배의 마음을 처음 일으키면, 

곧 범부의 지위를 뛰어넘어 부처님께서 행하시는 바에 들어간다.” 고 한 것이다

 

제12 단락에서 게송을 설한 것 중에 46행 반의 게송은 앞에서 설명한 법을 거듭 읊어서 밝힌 것이니, 경문에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 무릇 경문에서 설하고 있는, 초지(初地)에 들어가는 법을 살펴보면, 이는 이제 막 수행을 시작한 범부라 할지라도 광대한 원행(願行)을 발해서, 능히 경지에 취입(趣入)하여 들어갈 수 있음을 밝힌 것으로, 

이는 반드시 지(地) 이전의 행해(行解)를 인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 뜻은 가르침을 시설해 갖춤으로써 수행을 장애하여 막히게 하는 절급(節級)의 위험과 안전을 빠짐없이 밝히고 있지만,

그러나 발심자(發心者)는 일시에 그 모두를 단박에 수행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일시(一時, 한 순간)와 일행(一行, 하나의 수행) 안에 있지 모든 수행이 갖추어질 수 있으므로, 반드시 단계를 차례로 밟아서 가야만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이는 총별동이성괴(總別同異成壞)의 총상(總相)·별상(別相)·동상(同相)·이상(異相)·성상(成相)·괴상(壞相)의 6상법(六相法)으로 원융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총ㆍ별ㆍ동ㆍ이ㆍ성ㆍ괴의 6자(六字)이고,  총별ㆍ동이ㆍ성괴의 3대법(對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각각의 한 항목에는 나머지 여섯 가지 관점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

우선 사람의 몸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으니, 나머지도 이 예에 준하여 이해할 수 있으리라.

 

사람의 몸에도 육상(六相)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머리·몸통·손·발·눈·귀·코·혀 등은 각각 서로 다른 작용을 하는 것이 모여 하나의 몸을 이루므로 별상(別相)이며,

이러한 전체가 하나의 몸이자 하나의 사대(四大)인 것은 총상(總相)이며, 

모두가 한결같이 공(空)해서 독립된 실체가 없는  무체(無體)라는 점에서는 동상(同相)이며, 

그러나 이와 같이 동일해서 차이가 없는 성품을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머리ㆍ몸ㆍ손ㆍ발ㆍ눈ㆍ귀ㆍ코ㆍ혀 등의 작용이 다른 것은 이상(異相)이 되며,

머리·몸통·손·발·눈·귀·코·혀 등이 함께 모여 하나의 몸을 이루므로 성상(成相)이라 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무작(無作)으로 여러 조건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며, 각각 독립된 자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이며, 실체가 없는 무체(無體)이고, 고정된 형상이 없는 무상(無相)이고, 무생(無生)이고, 무멸(無滅)이며, 이루어짐도 없는 무성(無成)이고 무너짐도 없는 무괴(無壞)이라는 관점에서는 괴상(壞相)이라 한다.

 

또한 일체 중생을 통틀어 말하면 총상(總相)이라 하고, 
중생들 사이에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차이가 있는 것은 별상(別相)이고, 
모두가 부처님의 지혜와 같은 바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상(同相)이며, 
그러한 가운데에서 집착과 업(業)이 서로 다른 것은 이상(異相)이고, 
각기 인(因)으로 업을 지어서 그에 따른 과보를 받아 태어나므로 성상(成相)이고, 
마음이 의지할 고정된 실체가 없는 무체(無體)이고 업체(業體)도 본래 생겨나는 것이 없다는 관점에서는 괴상(壞相)인 것이다.

 

또한 시방의 보신불(報身佛)을 통틀어 총상(總相)이며, 
여러 보배로 장엄된 불신(佛身)과 국토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별상(別相)이며, 
모두가 하나의 법신(法身)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 이치와 지혜의 이지(理智)가 둘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동상(同相)이며, 
지혜가 행을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이상(異相)이며, 
중생을 성취시키고 이롭게 하는 작용은 성상(成相)이며, 
주체와 대상의 능소(能所)가 모두 공하여 얻을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는 것은 괴상(壞相)이라 한다.

 

또한 하나의 지혜가 다섯 지위의 오위(五位)를 모두 아우르는 것을 총상(總相)이라 하며,

수행과 이해의 행해(行解)가 점차 깊어지는 승진은 별상(別相)이라 하며,

부처님의 근본지(根本智)와 같음을 동상(同相)이라 하며,

차별지(差別智)를 닦는 것을 이상(異相)이라 하며, 

대보리(大菩提)를 이루고 보현행(普賢行)을 두루 갖추는 것을 성상(成相)이라 하며,

지혜의 체가 의지하는 바가 없으며, 그 작용 또한 억지로 조작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은 괴상(壞相)이라 한다.

 

또한 삼세(三世)에 걸친 장구한 겁(劫)의 차이를 별상(別相)이라 하고,

지혜로 두루 관찰하여 모든 것을 일찰나(一剎那)에 비추는 보는 것을 총상(總相)이라 하며, 

업(業)에 따라 시간이 길거나 짧게 나타나는 것을 이상(異相)이라 하며,

분별하는 정(情)이 사라지고 견해에 대한 집착이 다하여, 시간의 길고 짧음도 더 이상 고정된 것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을 동상(同相)이라 하며, 

지혜가 의지하여 머무는 바가 없음을 괴상(壞相)이라 하며,

중생의 근기(根機)에 알맞게 감응하여 법을 일으켜 설하 것을 성상(成相)이라 한다.

이와 같이 간략하게 다섯 가지의 사례를 들어 육상의 같고 다름의 동이(同異)를 들었으니, 그 밖의 일체법은 이를 준거해서 알도록 하라.

 

또한 하나의 글자 안에도 육상(六相)의 뜻이 있으니, 이 여섯 가지 뜻은 서로 주(主)와 반(伴)이 되는 관계를 밝히겠으니,

십현문(十玄門)의 뜻도 이 가운데 통하는 것으로, 다음 세 가지 문이 이에 해당한다.

1.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 여러 요소가 동시에 갖추어져 서로 호응하는 문.

(하나의 현상을 이해할 때 그 현상만 따로 떼어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립하게 하는 여러 조건과 관계를 함께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2.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 하나와 여럿이 서로 받아들이면서도 각각의 차이를 잃지 않는 문.

(하나의 존재는 여러 관계 속에서 성립하고, 여러 존재는 하나의 전체 안에서 서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이 각 존재의 차이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3.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 모든 법이 서로 즉하여 걸림 없이 자재하게 성립하는 문이다. 

(모든 법이 서로 관계를 맺고 성립하므로, 어느 하나도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화엄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상호 관계 속에서 모든 법이 걸림 없이 성립하는 모습을 설명한다.)

ㅡ이 세 가지 문은 모두 하나와 여럿, 전체와 부분, 동일성과 차이의 관계를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육상의 뜻은 이와 같은 것으로, 하나의 글자 안에도 육상이 있으며, 모든 글자와 모든 법에도 이 여섯 가지 모습이 갖추어져 있다.

ㅡ육상이 사람의 몸이나 중생, 부처님의 경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글자와 모든 법에도 적용된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글자는 여러 획과 구성 요소가 모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각각의 획은 서로 다르지만, 함께 하나의 글자를 이룬다. 글자 전체와 각각의 획은 서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각각의 차이를 유지한다.

 

이와 같은 관계를 육상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 전체와 부분은 서로 의지한다.
- 부분마다 차이가 있지만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 전체가 성립하더라도 각 부분의 차이가 사라지지 않는다.
- 전체와 부분 어느 쪽에도 독립적이고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이 육상이 특정한 대상에만 적용되는 설명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이해하는 원리라는 것이다.

 

이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지혜에 걸림이 없고 제법을 총괄하여 지니는 총지문(摠持門)을 얻어서,

제법에 대하여, 유(有)와 무(無), 단(斷)과 상(常) 등의 견해에 막히지 않게 된다.

정(情)을 여의어서 분별과 집착을 떠나 이 이치를 비추어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섯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이치와 지혜의 이지(理智)가 원만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초지(初地)에서 관찰하는 법이며, 세간의 모든 법문에도 두루 통하는 원리인 것이다.

ㅡ본문은 육상의 이치를 잘 이해하면 유(有)와 무(無), 단(斷)과 상(常) 등의 견해에 막히지 않는다고 말한다.
- 유(有) 에 집착하면 모든 것이 독립된 실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 무(無) 에 집착하면 존재와 인과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 단견(斷見) 은 죽음이나 소멸과 함께 모든 것이 완전히 끊어진다고 보는 견해이다.
- 상견(常見) 은 어떤 존재나 실체가 변하지 않고 영원히 그대로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육상은 이러한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돕는다. 모든 법은 여러 조건에 의지하여 성립하므로 고정된 자성이 없지만, 그렇다고 인과와 작용이 전혀 없다는 뜻도 아니다.
따라서 공(空)을 이해한다는 것은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서로 의지하여 성립한다는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26)
십지품③ㅡ3
(1)
환희지
③ㅡ3

 

셋째, 연기(緣起)로 생겨나는 것에 자성(體)이 없음을 알지 못하여 유전하는 불료연생무체유전문(不了緣生無體流轉門)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이 한 단락은 진(眞)을 미혹하고 망(妄, 허망)을 좇음으로서 고통이 생겨나는 인(因)을 밝힌 것이니,

‘이른바(所謂)’에서부터 ‘괴로움의 무더기를 낳고 자라게 한다(生長苦聚)’에 이르기까지의 네 행의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른바 인(因)이 명색(名色)에 의거해서 6근(六根)이 인식하는 대상의 소연(所緣)에서 촉(觸)이 생기고,

촉이 있기 때문에 6근이 대상을 취하여 수(受)를 일으키며,

수(受)를 인연으로 애(愛)가 생기고, 애를 인연으로해 취(取)가 생기며, 취를 인여느로 해서 유(有)가 생기고,

유가 있으므로 노사(老死)와 근심·슬픔·괴로움·번뇌의 우비고뇌(憂悲苦腦)가 있는 것이다.

ㅡ무체(無體)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떠한 현상도 다른 조건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고정된 본체를 갖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소리를 들을 때는 귀와 소리, 의식 및 여러 조건이 함께 작용하는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 소리를 듣는 경험이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여러 조건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을 연기(緣起)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명(名) 가운데 색(色)이 갖추어져 있고, 색(色) 가운데 명(名)이 갖추어져서 명과 색,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이니, 
이에는 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모두가 포함되는 것이다.

또한 유표색(有表色)과 무표색(無表色)이 있기 때문에 다만 심의(心意, 마음과 뜻)와 안(眼)ㆍ이(耳)ㆍ비(卑)ㆍ설(舌)ㆍ신(身)ㆍ의(意)이 인식하는 바의 소연(所緣)과 격발해서 미혹(번뇌)을 이루는 것을 모두 촉(觸)이라 한다.

오직 여래만이 조작이 없는 무위(無爲)로서 순수하게 지혜와 더불어 함께 하기에 법에 대한 법촉(法觸)이 없지만,

중생이 촉(觸)과 수(受)를 통해 삼계(三界)의 번뇌를 이루며,

성문(聲問)은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증득하고자 하는 촉(觸)과 수(受)가 있으며,

정토 보살은 청정함과 더러움의 두 가지에 대한 촉(觸)이 있으며,

1승 보살에게는 원만하게 조화된 지혜와 자비가 있지만, 아직 자재롭지 못한 촉(觸)이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촉(觸)을 밝은 지혜로 관찰해서 지용(智用, 지혜의 작용)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명경(淨名經, 유마경)에서는 “모든 촉을 수용하여 여여한 지혜로 증명한다(受諸觸如智證)”고 한 것이며,

또한 “법은 본래 나지도 않으며, 이제 멸하는 것도 아니다(法本不生今則不滅)”라고 한 것이니,

이는 연기하여 생겨나는 연생(緣生)의 체(體)가 본래 자성(自性)이 없어서, 고정된 생멸법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범부는 이를 요달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無明)이라 칭하는 것이나, 마음과 경계가 본래 공하다는 것을 안다면, 곧 법만이 일어나는(起)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며, 그러함은 항상 지혜의 경계(대상)이지 생멸의 연(緣)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선정과 지혜로 관조하면 자연히 깨달아 이해하게 되리라.

ㅡ수제촉여지증(受諸觸如智證)은 촉을 피하거나 감각 경험 자체를 없애는 것보다, 촉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지혜로 관찰하는 태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소리를 듣거나 어떤 감정을 경험할 때, 그 경험을 곧바로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붙잡지 않고, 어떠한 조건을 따라 일어난 현상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촉과 수가 반드시 집착과 번뇌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 보살이 참된 진(眞)을 요달해서 중생의 고(苦)를 가엾이 여기어서 중생을 이끄는 보살달진민고접생문(菩薩達眞愍苦接生門)이라는 것은 바로 “이 가운데 모든 것은 공(空)한 것으로,

아(我, 나)와 아소(我所, 나의 것)를 여의었다(是中皆空離我我所)”에서부터 “대자비의 광명 지혜(大慈光明智)”에 이르기까지 5행의 경문이 이에 해당된다.

ㅡ공을 깨닫는 지혜는 중생을 외면하는 태도가 아니라, 집착 없이 중생의 괴로움을 이해하고 돕는 대자비의 지혜로 드러납니다.

 

이와 같이 십이유지(十二有支)에 의해 모든 중생은 앞에서 말한 18 가지의 번뇌를 일으키고, 생사윤회 가운데에서 유전하면서 온갖 괴로움(苦)를 받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성문(聲聞) · 연각(緣覺) · 정토의 보살(淨土菩薩)은 생사를 염리(厭離)하여 싫어하여서,

이러한 번뇌의 현행(現行)을 절복(折伏)하여 일어나지 않게 하지만,

반면 일승(一乘)의 보살은 이 십이유지를 바탕으로 해서 근본지(根本智)를 성취하고, 차별지(差別智)를 일으켜 중생을 교화함으로서 선법(善法)을 유지하고 보살의 보리심(菩提心)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비록 미혹과 깨달음이 같지는 않지만, 12유지가 지혜와 더불어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승만경(勝鬘經)에서도 이와 같은 취지로 설하고 있다.

ㅡ‘십이유지가 지혜와 더불어 다르지 않다’라는 말은 십이연기의 12 지분과 지혜가 문자 그대로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라, 미혹의 작용을 올바르게 깨달으면, 같은 연기의 세계가 지혜와 자비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장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한 열여덟 가지 번뇌 가운데 사견(邪見)과 무명(無明) 등을 살펴보면,

십주(十住)의 첫 단계인 초발심주(初發心住)에 처음 들어가 여래지혜가(如來智慧家)에 태어나면, 정사(正使, 근본 번뇌)로 능히 악도에 떨어지게 할 만큼 강한 번뇌 현행의 사견이 제거됨으로써 (사견과 무명)이 그 힘을 잃고, 습기(習氣)도 미약해진다.

그러나 교만 등을 비롯한 열여덟 가지 번뇌의 습기가 모두 멸진하여 사라진 것이 아니다.

 

십행(十行)과 십회향(十迴向)의 수행 단계에서는 열 가지 수행법과 그에 따른 가행(加行)으로 번뇌를 다스려서, 그에 따라 번뇌의 습기가 점차 희미하게 약해지는 것이며,

십지(十地)에 이르면 바른 지혜의 정지(正智)가 더욱 밝아져서, 오직 견도(見道)의 행을 따른 법집(法執)만 남아 있고,

삼계에서 일어나는 번뇌 현행이나 습기인 불선(不善)의 업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간탐(慳) · 질투(嫉) · 분노(忿) · 원한(恨) · 성냄(瞋)의 다섯 가지 번뇌는 십지에 들어가면 그 습기가 이미 없으며, 그 나머지 번뇌의 습기는 제7지에서 자비가 궁극에 이르고 지혜가 원만해짐에 이르러서 원력에 따라 자유자재하게 작용하는 지혜의 지용(智用)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를 번뇌를 끊었다고 하기보다는, 번뇌를 꿰뚫어 이해하여 지혜의 작용인 지용(智用)으로 전환하였다고 해야 한다.

ㅡ여기에서 강조하는 수행 단계
십주(十住) 발심하여 여래의 지혜를 향한 수행의 기반을 마련함
십행(十行)·십회향(十迴向) 여러 수행을 통해 번뇌와 습기를 점차 다스림
십지(十地) 바른 지혜가 더욱 밝아지고 미세한 법집을 다스림
제7지 이후 지혜와 자비의 작용이 더욱 자유자재하게 전개됨
불과(佛果) 미세한 어리석음까지 완전히 다하는 것으로 설명됨

여기서 현행(現行)은 번뇌가 실제로 일어나 작용하는 것이고,

습기(習氣)는 번뇌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는 미세한 경향이나 흔적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화를 내는 행동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미세한 자기중심적 반응이나 익숙한 분별의 경향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집(法執)의 현행은 제7지에까지 이어지는 것이므로, 법집의 습기는 십지에 이르러서야 사라지는 것이며,

또한 수를 헤아리는 광대한 어리석음의 산수광대우(筭數廣大愚)과 수호공덕에 관한 어리석음의 수호공덕우(隨好功德愚),

이 두 가지 어리석음은 불과(佛果)의 수행이 완성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찰하여서 멸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아승기품(阿僧祇品)과 수호광명공덕품(隨好光明功德品)에 해당되며,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스스로 이 두 품을 직접 설하시어, 불과의 두 가지 어리석음의 불과이우(佛果二愚)를 밝히신 것이다.

이는 십이유지(十二有支)와 그에 따른 미세한 습기가 불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함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수행의 단계를 바탕으로 오위(五位)와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세우고,

각각 열 가지씩의 십십(十十) 수행으로 번뇌와 습기를 다스리기 때문에

십주·십행·십회향·십지·십일지(十一地)의 모든 수행 원리는 그 체(體)와 상(相)이 서로 유사하지만, 번뇌와 습기를 다스리는 단계에는 차이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이 다섯 수행 단계의 십바라밀 가운데, 처음 세 바라밀은 속박에서 벗어나 출세간의 길로 나아가는 출세도(出世道)를 다스리는 것이니, 때문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십주의 단계에서 만나는 첫째 · 둘째 · 셋째의 선지식을 세 비구로 나타낸 것이며, 

그 다음의 세 바라밀은 출세간의 지혜와 세간의 미혹을 다스리는 것이니, 이는 곧 미가 장자(彌伽長者) · 해탈 장자(解脫長者) · 해당 비구(海幢比丘)로 나타낸 것이며, 

 

그 다음에는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부터 원력바라밀(願力波羅蜜) 등의 세 바라밀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세간에 들어가 활동하면서도 출세간의 지혜를 잃지 않고, 자비와 지혜가 자유자재하게 작용하도록 다스리는 수행으로, 이에 해당하는 선지식은 휴사 우바이(休捨優婆夷) 선인과 고행하는 바라문(婆羅門) 등으로 나타난다.

 

그 다음에는 세간과 출세간을 아우르는 지혜와 자비가 자유자재하게 작용하는 단계에 이르면, 여기서는 지혜바라밀(智波羅蜜)이 중심이 되어, 지혜가 자비를 일으켜서 자재하기 때문에 자행(慈行)이라하는 이름의 사자당왕의 딸인 자당왕녀(師子幢王女)로써 나타내고 있으니, 지혜가 왕과 같이 자유자재하므로 왕의 딸로서 나타낸 것이다.

 

제7주(第七住)에서는 자비를 닦아 지혜를 일으키지만,

제10주(第十住)에서는 지혜로부터 자비를 일으키는 자행(慈行)이므로 왕의 딸로서 나타낸 것이다.

이는 지혜바라밀(智波羅蜜)을 통해 지혜로 자비를 성취해서, 그 자비를 자유자재하게 발휘함을 밝힌 것이니, 

이는 오위(五位)를 닦아 나아가는 수행이 점차 깊어지는 과정에서, 각 지위에서마다 앞서 말한 4 가지 세분(勢分)의 차이와 공통점의 차별동이(差別同異)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여러 선지식(善知識)을 차례로 만나는 과정에서도 각각의 차별동이(差別同異)를 거듭 밝히는 것은, 이를 통해 비로소 오위를 행해(解行, 이해와 수행)에서 실천하는 행(行)의  같고 다름의 동이(同異)를 분명하게 요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십지(十地)의 법문 역시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미혹을 다스림에 네 가지의 차별동이(差別同異)가 있다.

첫째, 초지(初地)에서 제3지(第三地)에 이르기까지는 세간의 속에서 물들어 있는 습성을 다스려 출세간의 수행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둘째, 제4지 · 제5지 · 제6지에서는 출세간의 지혜를 갖추었으면서도 세간에서 그 지혜를 자유자재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습성을 다스리는 것이며, 

셋째, 제7지 · 제8지 · 제9지에서는 세간 속에 들어가 활동할 때 지혜와 자비를 자유자재하게 발휘하지 못하는 습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그러므로 제8지(第八地)의 지위에서는 모든 부처님께서 3 가지 가피의 삼가(三加)와 7 가지 권유의 칠종권발(七種勸發)을 베풀어 보살의 수행을 보호하고 북돋우시나니, 제8지의 문맥에서는 제9지와 제10지의 지혜바라밀(智波羅蜜)을 갖추어 밝히며,

세간에서 자비와 지혜를 자유자재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다스리는 수행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태자이셨을 때의 셋째 부인인 구파(瞿波)를 그 상징으로 삼은 것이니, 이는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이미 원만해졌음을 나타내며, 자비의 법에서 얻는 기쁨을 법열(法悅)을 뜻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선재동자가 십지(十地)의 법문을 나타내는 과정에서, 아홉 명의 천녀와 한 명의 부처님 아내가 있는 것은, 십지의 법문이 대자비의 문을 길러 원만하게 하고, 자비와 지혜를 자유자재하게 발휘하도록 하기 때문에 여천(女天)의 모습으로 이를 나타낸 것이니, 그 지위에 이르면 자세히 밝히겠다.

 

그러나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이타행(利他行)은 아직 자유자재롭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대략적으로 오위(五位) 수행의 승진하는 대의(大意)의 6 가지를 서술하면,

첫째, 십주(十住)는 처음으로 부처님의 불가(佛家)에 태어남을 밝히며, 번뇌의 현행 가운데 근본이 되는 거친 번뇌를 정사(正使)로로 다스려 제거하는 것을 나타내며, 

둘째, 십행(十行)은 세간을 따르는 현행의 번뇌와 습혹(習惑, 습관적인 미혹)을 다스림을 밝힌 것이며, 

셋째, 십회향(十迴向)은 큰 서원의 대원력(大願力)을 일으켜서, 지혜와 자비를 조화롭게 융합하여 세간과 출세간에 걸림 없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지위를 밝힌 것이며, 

넷째, 십지(十地)는 미세하게 축적된 습기를 다스리고 자비와 지혜를 길러 그 공덕을 원만하게 이루는 지위를 밝힌 것이며, 

다섯째, 십일지(十一地)는 보현행(普賢行)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지위인, 이에 해당하는 것이 보현행품(普賢行品)이며, 십정품(十定品) 이후도 여기에 해당된다.

여섯째, 성불의 지위는 수행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어 종결됨을 밝힌 것인,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이세간품(離世間品)은 불과(佛果)에 이르기 위한 수행을 마친 뒤에도 보현행이 영원히 지속됨을 밝힌 것이며,

법계품(法界品)은 전후의 일부(一部) 경전이 모두 법계(法界)를 체로 삼고 있음을 밝힌 것이니,

이와 같이 법계의 대지(大智)가 원만하게 통하면, 총체적으로 일법(一法)과 일시(一時)도 전후의 차별이 없는 것이니, 지혜로 비추면 볼 수 있을 것이다.

ㅡ오위 수행의 여섯 단계.
*십주: 부처님의 지혜를 향한 발심과 수행의 시작
*십행: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번뇌를 다스림
*십회향: 큰 서원으로 지혜와 자비를 조화시킴
*십지: 미세한 습기를 다스리고 지혜와 자비를 원만하게 함
*십일지: 보현의 이타행을 원만하게 함
*불과: 여래의 지혜가 완성됨.

이것은 수행을 단순히 번뇌를 없애는 과정으로만 보지 않고, 지혜와 자비를 점차 넓혀서, 마침내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이 원만해지는 화엄의 관점을 보여 줍니다.

 

ㅡ'법계의 대지(大智)가 원만하게 통하면, 총체적으로 일법(一法)과 일시(一時)도 전후의 차별이 없는 것'이란,

경전의 시간적 전후나 수행 단계가 일상적인 차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기보다, 궁극적인 법계의 관점에서는 모든 법이 서로 의존하며 원융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오위(五位) 가운데 차별적으로 전개되는 수행의 단계는 모두 초발심주(初發心住) 안에 갖추어져 있의니, 초발심주(初發心住)의 원행(願行)과 지혜(智)와 자비(悲)로서 두루 하나의 인(印)으로해서 원만하게 하기 때문에, 

가르침에서는 비록 수행의 순서를 앞뒤로 나누어 설명하지만, 원행(願行)과 지혜(智)와 자비(悲)의 법은 일시(一時)라서 때(時)도 다르지 않고 법 또한 차이가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발심한 선비(수행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수행하고 이와 같이 원만하게 해야 한다.

ㅡ가르침의 순서에서는 수행의 시작과 발전, 완성을 구분하나, 
법의 관점에서는 서원·수행·지혜·자비가 서로 떨어진 별개가 아니다. 
 

이는 여래의 부동지(不動智)라는 체(體)의 원만함을 여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불과(佛果)에 지혜와 자비의 시종(始終)이 서로 사무치는 것이며, 또한 일체 중생이 곧 부처님의 불국토라서 들고 나는 출입(出入)이 없음을 두루 보기 때문이다.

 

여래의 지혜를 미혹한 중생들을 교화하여 근본을 의지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지혜(自智) 안에서 모든 제불(諸佛)과 동일지(同一智, 동일한 지혜)라는 것을 두루 보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요, 

자신의 지혜(自智)와 다른 별도의 부처님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안과 밖, 멀고 가까움의 차별한 견해를 일으키지 않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요, 
하나의 지혜로운 일지인(一智印)으로 인(印)을 쳐서 정(情, 마음의 분별)의 크고 작고 길고 짧은 양(量)이 있음을 타파시키고자 하는 까닭이니, 

ㅡ一智印(일지인)은 하나의 지혜로 모든 법을 비추어 보는 것을 뜻합니다.
중생은 흔히 크고 작음, 길고 짧음, 안과 밖, 멀고 가까움 등의 차별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특정한 조건과 관점에 따라 성립하는 것입니다. 화엄의 지혜는 그 차이를 무조건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실체인 것으로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이 바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불종(佛種)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며,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법을 설하기 때문에 능히 법종(法種)이 끊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부처님의 불지해(佛智海)와 동일함을 두루 깨달아서 부처님의 지견(佛知見)에 널리 들어가게 하는 것이므로 승종(僧種, 승가의 종자) 또한 끊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를 이와 같이 관찰하여, 마음(心)과 경계(境)로 하여금 이와 같이 서로 상응하도록 해야 하리라.

ㅡ불종(佛種)·법종(法種)·승종(僧種), 삼보의 계승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佛種(불종): 중생이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法種(법종):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이 전해지고 수행을 통해 이어지는 것.
僧種(승종):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며 전승하는 승가의 계승을 뜻합니다.
佛智海(불지해): 부처님의 깊고 광대한 지혜를 바다에 비유한 표현입니다.
佛知見(불지견): 부처님의 지혜와 바른 통찰을 뜻하며, 여기서는 중생이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고 그 지견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心境相應(심경상응): 마음과 그 마음이 마주하는 대상 또는 경계가 서로 상응하는 것.

 

ㅡ자신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화엄의 관점으로, 중생이 부처님의 지혜와 분리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지혜에 들어갈 수 있음을 깨닫도록 가르침을 전할 때, 불종과 법종과 승종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고, 
‘자신이 부처님의 지혜 바다와 동일하다’는 표현은 모든 중생이 이미 수행을 마친 부처와 완전히 똑같다는 뜻이라기보다, 중생의 지혜와 부처님의 지혜가 근본적으로 단절된 것이 아니며, 중생도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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