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26)
십지품③ㅡ8
(2) 이구지(離垢地) ㅡ4

(3) 발광지(發光地)① ㅡ1

 

애욕의 빽빽한 숲의 애욕조림(愛欲稠林)으로 들어가려 한다는 것은,

모든 생사(生死)가 애욕(愛欲)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힌 것으로,

생사가 매우 많고 복잡하기 때문에 마치 빽빽하게 우거진 숲의 조림(稠林)과 같다고 한 것이다.

 

일찰나(一剎那) 사이에 팔백 번의 생멸하는 마음의 팔백생멸(八百生滅)이 일어나서 끊임없이 유주(流主, 흘러 들어감)하는 것이니, 찰나의 때가 멸진하여 다하면 생멸이 나란히 함께 일어난다는 뜻이다.

ㅡ한 찰나 사이의 팔백생멸(八百生滅), 우리 마음은 한 가지 생각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어떤 대상을 보고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좋아하는 마음은 곧 그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발전하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불만과 분노가 일어나고, 
 다시 다른 대상을 찾아 욕망하고 집착하는 것과 같이,

마음의 작용은 순간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며, 다음 생각과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탐내고 애착하는 대상에 깊이 물들어 오염된 집착한다는 심생염착(深生染著)이란는 것은,

깊은 생사(生死)의 업(業)을 지어서 거듭 이어져 멈추지 않고 전전(轉轉)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또한 아만의 언덕과 언덕처럼 높이 솟은 아만원부(我慢原阜)란 것은, 만(慢)에 일곱 가지가 있으니, 곧 칠만(七慢)으로,
1. 만만(慢慢) 자신이 남보다 못하지 않거나 더 낫다고 여기며, 특히 자신보다 나은 사람에게도 우월감을 품는 마음
2. 교만(憍慢) 자신의 지위·재산·능력·젊음 등을 믿고 스스로 우쭐해하는 마음
3. 과만(過慢)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과 비교하면서도 자신이 더 낫거나 동등하다고 여기는 마음
4. 비만(卑慢, 또는 비하만 卑下慢) 자신이 훨씬 뛰어난 사람보다 조금만 못하다고 여기며, 실제 차이를 축소하는 마음
5. 아만(我慢) 오온(五蘊)을 나 또는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마음
6. 증상만(增上慢) 아직 얻지 못한 높은 수행의 경지나 깨달음을 이미 얻었다고 여기는 마음
7. 사만(邪慢) 실제로 갖추지 못한 덕이나 능력이 있다고 믿거나, 잘못된 견해를 옳다고 내세우는 마음

ㅡ애욕(愛欲)은 무엇인가를 붙잡으려는 마음이고,

아만(我慢)은 그것을 붙잡는 주체인 ‘나’를 실체로 세우는 마음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얻고 싶고, 내가 가진 것을 잃고 싶지 않으며, 나의 생각과 지위가 옳다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나’와 ‘내 것’이라는 집착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부(原阜)란 것은 교만한 만(慢) 위에 다시 만이나 과만(過慢) 등을 더하여 거듭 쌓이는 것을 부(阜)라 칭하는 것이다.

예컨대 세간의 평지 위에 다시 높은 고지(高地)가 있고, 그 위가 평탄한 것을 원(原)이라 하며,

그러한 원(原)에서 보다 조금 더 높은 것을 퇴(堆)라 하고,

퇴(堆)에서 다시 더 높은 것을 부(阜)라 하는 것이니,

이는 아만 위에 여섯 가지 만을 더하는 것이 부가 됨을 밝힌 것이다.

이는 아만(我慢) 위에 여섯 가지 교만이 더해져 겹겹이 높아지는 모습을 밝힌 것으로, 이를 부(阜)라고 하는 것이다.

 

육처(六處)의 취락(處聚落)에 안주한다는 것은, 교만(憍慢)의 원부(原阜) 위에 다시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의 육처(六處)를 더하여,

명색(名色)의 경계에 취착(取着)해서, 집착하고 취하는 것을 말한다.

그로 인해 괴로움의 원인(苦因)이 더욱 증장한다는 뜻이다.

그 이하의 14 행의 경문은 문맥에 따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이 열 단락의 경문은 이구지(離垢地)에서 관고(觀苦)하여 중생의 괴로움을 관찰하고,

자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기비구호(起悲救護)함을 밝힌 분이다.

ㅡ괴로움의 원인을 깊이 관고(觀苦)하여서 중생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 원인을 이해하고,

올바른 길을 가르쳐서 지혜를 회복하도록 돕는 기비(起悲)에서 다시 구호(救護)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불자야(佛子)” 이하 31행 반의 경문은, 이 지위의 보살이 원력으로 다백천(多百千)의 부처를 보게 됨을 밝힌 분(分)인데, 이 단락을 다시 열 단락으로 나누겠다.

5-1, “불자여(佛子)”부터 “나유타의 부처님(那由他佛)”에 이르기까지 3 행 반의 경문은,

이 지위의 보살이 원력으로 많은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는 내용을 밝힌 것이다.

 

5-2, “여러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於諸佛所)”부터 “또한 모든 승가에게 공양한다(亦以供養一切衆僧)”까지 2행 반의 경문은,

두 가지 마음의 이심(二心)의 다섯 가지 공양물의 오사(五事)를 갖추어 부처님과 승가에 공양함을 밝힌 분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법·승(佛法僧) 삼보란 것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을 불보(佛寶)로 삼고,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을 법보(法寶)로 삼으며,

보현행(普賢行)을 승보(僧寶)로 삼으며, 

삼승(三乘)과 인천(人天, 인간·천상) 및 육도(六道)가 모두 총체적으로 이 삼보 안에 있으니, 이는 모든 것이 보현행(普賢行)을 따라 가르침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ㅡ불·법·승 삼보를 각각 비로자나·문수·보현에 배대한 것으로,

불보(佛寶) — 비로자나불(毘盧遮那) ㅡ 우주 법계에 두루한 부처님의 지혜와 깨달음, 즉 모든 존재와 현상을 비추는 법신불.
법보(法寶) —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 ㅡ 지혜, 문수의 지혜는 진리를 바르게 관찰하고 분별과 집착을 넘어서는 지혜, 
승보(僧寶) — 보현행(普賢行) ㅡ 보현보살의 서원과 실천, 즉 깨달음의 지혜를 실제 행으로 펼쳐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살행입니다. 승보를 보현보살이라는 한 인물로만 설명하지 않고 보현행(普賢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문수 보살의 지혜(文殊智)와 보현 보살의 실천(普賢行)이 함께 이루어질 때,

비로소 비로자나의 깨달음(毘盧遮那佛)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5-3, “삼선근(三善根)” 이하 “보시와 지계가 청정하게 원만히 갖추어진다(布施持戒淸淨滿足)”까지 4 행의 경문은,

십선계(十善戒)를 거듭 받아 지니는 부분을 밝힌 것으로, 

이는 초지(初地)의 보살도 최상위의 상상십선(上上十善)을 받아 지닌다는 것을 밝힌 것이며,

여기에서는 다시 그 수행을 더욱 단련하고 연마하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5-4, “비유하자면 진금(眞金)” 이하 “계율을 지남이 청정하고 만족스럽다(持戒淸淨滿足)”에 이르기까지 3행 반의 경문은,

진금을 연마하는데 다시 반석(礬石)을 더해서 더욱 맑고 깨끗하게 만드는 것과 같이, 수행을 거듭 단련하여 더욱 청정하게 하는 비유를 밝힌 것이다.  

 

5-5, “불자여(佛子)” 이하 “다만 자신의 능력과 분수에 따라(但隨力隨分)”까지 2 행 반의 경문은,

이 지위의 보살이 행하는 바의 행을 밝힌 분이다.

 

5-6, “불자여(佛子)” 이하 “일체지지(一切智智)”까지 6 행 반의 경문은, 이 지위의 보살이 직분(職)을 받음을 밝힌 분이다.

 

5-7, “또 이렇게 생각한다(又作是念)” 이하 “일체지지의 의지처(一切智智依止)”까지 2 행 반의 경문은,

이 지위의 보살이 자신이 얻은 도가(道家)가 수승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아는 내용을 밝힌 분이다.

 

5-8, “이 보살은(是菩薩)” 이하 “권속으로 삼는다(以爲眷屬)”까지 4 행 반의 경문은,

이 보살 역시 집과 처자(妻子)를 버리고 출가하여 천삼매(千三昧)를 얻고, 부처님을 친견하는 내용을 밝힌 것이다.

 

5-9, “만약 보살의 수승한 원력으로(若以菩薩殊勝願力)” 이하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不能數知)”까지의 경문은,

수승한 원력으로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 이전의 의보업력(依報業力)에 의지하는 경우보다 훨씬 뛰어남을 밝힌 분이다.

 

5-10, “그때(爾時)” 이하의 경문은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이 게송을 설하는 분이다.

여섯 번째, “게송을 설하다” 이하 42행의 게송을 다시 5 단락으로 나누겠다.
6-1, “질직(質直)과 유연(柔軟)과 감능(堪能)” 이하 “모든 불자를 위해 이미 개연했다(爲諸佛子已開演)”에 이르기까지 30행의 게송은, 앞에서 설명한 열 가지 법문을 다시 게송으로 읊은 것으로, 2 행을 한 게송으로 삼아 설명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경문에 갖추어져 있다.  

 

6ㅡ2, “불자여(佛子)” 이하 “제이지 가운데 수행하는 모습(第二地中之行相)”까지 4 행의 게송은, 대중이 법문을 듣고 기뻐하며 공양을 일으키는 부분을 밝힌 것이다.

 

6-3, “이 모든 보살들이(是諸菩薩)” 이하 “바라건대 제삼지의 법문을 설하여 주십시오(願爲演說第三地)”까지 3 행의 게송은,

여러 보살이 제이지(第二地)의 법문을 듣고 나서 다시 제삼지(第三地)의 법문을 설해 주실 것을 청하는 부분을 밝힌 분이다.

 

6-4, “법과 상응하는 여러 지혜의 행(與法相應諸智業)” 이하 “부처님의 청정한 수행과 서원을 모두 설하여 주십시오(佛淸淨行願皆說)”까지 3 행의 게송은, 여러 보살이 함께 법문을 청하는 내용을 밝힌 분이다.


6-5, “그때 해탈월보살이 다시 청하여 말하였다(時解脫月復請言)” 이하 두 행의 게송은,

해탈월보살(解脫月菩薩)이 다시 한 번 제삼지(第三地)의 법문을 설해 주실 것을 청하는 부분을 밝힌 분이다.

 

앞에서 말한 일체종(一切種)이란, 가행(加行)을 통해 훈수(熏手)하는 종(種)이며,  이것이 (일체지) 곧 근본지(根本智)이다.

 

또한 지(智)라는 것은 근본지에 가행을 더하여 차별지(差別智)를 이루는 것을 밝힌 것이다.

가령 근본지는 삼매를 인(因)해 나타나는 것이고, 차별지는 근본지를 통해 관찰하는 가행력을 말미암아 닦아서 성취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가행의 관찰력과 대원력(大願力)을 갖추지 않는다면, 근본지는 고요한 공적에 머물러 정체하게 되는 것이니,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성문승(聲聞乘)과 같은 상태가 되어 실제로 활용할 작용(用)이 없게 되는 것이다.

 

① 근본지(根本智)는 진리의 본성을 깨닫는 지혜, 분별과 집착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이 인연에 따라 생겨나며 고정된 독립적 실체가 없다는 진리를 직접 아는 지혜로서, 여기에서는 근본지가 삼매(三昧)를 인연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삼매를 통해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고요해지면, 사물을 분별하고 집착하던 마음의 작용이 가라앉아 근본적인 지혜가 드러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구별해야 할 점은, 삼매의 고요함 자체가 곧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삼매는 지혜가 드러나는 중요한 조건이지만, 그 지혜를 실제 삶과 보살행 속에서 활용하는 수행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② 차별지(差別智)는 근본지에 의지하여 각각의 현상과 상황을 구체적으로 관찰하고 이해하는 지혜입니다.
- 근본지는 모든 존재가 고정된 자아 없이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고, 
- 차별지는 각각의 중생이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지, 어떤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살펴 볼 수 있는 것이고, 
- 근본지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지혜이고, 

차별지는 그 지혜를 바탕으로 중생을 돕는 방법을 아는 지혜입니다.

따라서 차별지는 근본지에 바탕을 두고 여러 상황에 맞게 드러나는 지혜입니다.

ㅡ 가행(加行)
여기에서 '근본지만 있고 가행과 관찰력, 대눵력이 없다면 근본지가 적멸한 고요함에 머물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행(加行)은 깨달음을 향해 의도적으로 노력하고 실천하는 수행으로, 단순히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지혜를 바탕으로 실제 대상과 상황을 관찰하며 필요한 수행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고통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며, 근본지는 그 사람과 나 자신이 모두 인연에 의해 존재하며, 고정된 자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고, 그러나 그 깨달음만으로는 그 사람의 구체적인 고통이 저절로 해결되지 않으니까, 그 사람의 상황을 살피고, 무엇이 괴로움의 원인인지 관찰하여서 적절한 방법으로 도와주는 것이 차별지의 작용이며, 그래서 가행과 대원력(大願力)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근본지(根本智)
법계의 본성을 깨닫는 지혜
삼매를 통해 드러나는 근본적인 지혜
↔
가행·관찰·대원력의 
차별지 差別智
각각의 상황을 살피는 지혜
중생과 현상에 맞게 지혜를 구체적으로 활용함
→
보현행 普賢行
깨달음의 지혜를 실제 행동으로 펼쳐 중생을 이롭게 함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26)
십지품③ㅡ7
(2) 이구지(離垢地) ㅡ3

 

네 번째 단락 중 40행의 경문은 제2지(第二地)에서 자비를 일으키는 기자비(起慈悲)를 밝힌 분(分)으로서,

이를 다시 열 단락으로 나누겠다.
4-1, “불자야” 이하 40행의 경문은, 중생을 자비롭게 생각하는 열 가지 마음의 십종자념중생(十種慈念衆生)의 마음과 중생이 겪는 괴로움의 고도(苦道)를 열 가지 측면에서 살펴서 그들을 열 가지 즐거움의 십종락(十種樂) 가운데 편안히 안주하도록 하려는 것이니, 스스로 단계적으로 열 가지의 “다시 이렇게 생각했다”를 갖추고 있다.  

중생은 신견(身見)·변견(邊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 등의 잘못된 견해가 사견(邪見)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러한 것을 먼저 들어 첫머리에 있다고 표하고, 

ㅡ身見(신견) 오온으로 이루어진 몸과 마음을 영원하고 독립적인 자아라고 여기는 견해
邊見(변견) 영원히 존재한다거나 완전히 없어진다고 보는 극단적인 견해
見取見(견취견) 잘못된 견해를 진실하고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견해
戒禁取見(계금취견) 잘못된 계율이나 의식, 수행법을 궁극적인 해탈의 길이라고 집착하는 견해
邪見(사견) 인과와 진리 등을 그릇되게 이해하는 견해

ㅡ 오견(五見)은 신견·변견·사견·견취견·계금취견이지만, 원문은 그 가운데 네 가지를 먼저 언급하면서 이러한 견들이 사견에 의지하여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신견이 다른 견해들이 일어나게 하는 바탕이라는 것입니다.

 

'육도(六道)와 삼계(三界)의 무명(無明)이 명색(名色)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그릇된 지혜의 악혜(惡慧)와 그릇된 욕망의 악욕(惡欲)을 낳으니, 이로 인해서 중생은 부처님의 뜻을 멀리 여읜다'는 것은 근(根, 6근)이 대상(境, 경)에 따라 변하고, 자기 안에 본래 갖추어진 부처님의 지혜의 불지(佛智)를 미혹하기 때문이다.

ㅡ명(名): 정신적인 작용과 요소
색(色): 물질적인 형상과 요소,

명색은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로서, 이러한 존재의 구조를 자기 자신이라고 집착하고,

 그 집착을 바탕으로 잘못된 지혜와 욕망을 일으키면 근본지를 제대로 보지 못는 것입니다.

ㅡ 눈·귀·코·혀·몸·뜻의 6근이 대상과 접촉하면, 그 대상에 집착해서 본지를 잊고 분별과 망상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나니, “나는 이와 같은 험난한 곳에서 중생들을 구해 내어, 두려움 없는 일체지(一切智, 부처님의 지혜)의 성(城)에 머물게 하리라.”는 것은 중생의 괴로움(苦)을 생각(念)하여 자비심을 일으키고, 그들이 본지(本智, 근본지)를 요달하게 하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또한 생각하기를, “일체의 모든 중생이 거대한 폭포수와 같은 물결에 휩쓸려 잠겨 있다.”란 것은 애욕의 물(愛水)에 빠지게 된 것을 밝힌 것이며, 

"욕류(欲流) · 유류(有流) · 무명류(無明流) · 견류(見流)에 들어가 생사의 소용돌이에서"란 것은

모두가 애욕의 강물에 휩쓸려 생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표류하면서 전전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ㅡ사류(四流). 사폭류(四暴流)

欲流(욕류) 감각적 욕망에 휩쓸리는 흐름
有流(유류) 존재와 생존에 대한 집착, 삼계에 머무르려는 흐름
無明流(무명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흐름
見流(견류) 잘못된 견해와 분별에 휩쓸리는 흐름.
이 사폭류는 서로 분리되어 작용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욕망에 집착하면 그것을 계속 소유하고 유지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자신과 세상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강해지는 것으로, 그러한 근본에는 무명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센 물살이 빠르게 굽이치고 세차게 흘러 중생들이 살펴볼 겨를조차 없다"는 것은,

앞의 네 가지 흐름의 욕류(欲流)·유류(有流)·무명류(無明流)·견류(見流)가 매우 거세고 빠르게 대상(경계)을 좇아 움직이며, 견(見)을 따라 온갖 망령된 망업(妄業)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를 관찰(觀)하고 다스릴 겨를이 없음을 밝힌 것이며, 

 

욕각(欲覺)ㆍ에각(恚覺)ㆍ해각(害覺)을 좇으면서 버리지 않는 것은, 이러한 세 가지 악작(惡作)의 흐름이 신견(身見)의 나찰(羅刹)에 의지하여 생겨나고, 그 가운데서 집착함으로써 영원히 애욕의 조림(稠林)에 들어감을 밝힌 것이니,

이는 신(身) 등의 5견(五見)이 함께 생기함을 말미암아서 62견(六十二見)이 모두 일어남을 밝힌 것이다.

ㅡ 욕각(欲覺): 감각적 욕망을 일으키는 생각
에각(恚覺): 성냄과 분노를 일으키는 생각
해각(害覺): 다른 존재를 해치려는 생각
여기서의 각(覺)은 깨달음이라는 긍정적인 뜻이 아닌, 생각이나 사유 작용을 의미하고, 
욕망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화를 내고, 화가 깊어지면 다른 존재를 해치려는 마음까지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악한 생각들이 신견이라는 나찰에게 붙잡혀 애욕의 숲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육십이견(六十二見)이란, 비바사론(毘婆沙論)의 설명에 따르면 오온(五蘊) 각각에서 네 가지 견해의 사견(四見)이 일어나므로, 이러한 4 가지에 5을 곱하여 스무 가지가 되고, 그리고 삼세(三世)의 과거 · 현재 · 미래의 각각에 20을 적용하면 모두 60 가지가 된다. 여기에 몸과 자아의 관계에 관한 두 가지 견해, 곧 몸이 곧 자아라는 견해의 신신동일(神身同一)과 몸과 자아가 서로 다르다는 견해의 신신이(神身異)를 더하면 모두 육십이견(六十二見)이 되는 것이다.

ㅡ 오온(五蘊); 

색온(色蘊) 몸과 물질적 현상
수온(受蘊) 느낌과 감수작용
상온(想蘊) 생각하고 표상하는 작용
행온(行蘊) 의지와 여러 정신적 형성작용
식온(識蘊)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

ㅡ 오온 각각에 네 가지의 견해가 있으므로 5 × 4 = 20
이를 과거·현재·미래 삼세에 적용하면 20 × 3 = 60
여기에 몸과 자아가 같다는 신신동일(神身同一) 
견해와 다르다는 신신이(神身異)의 견해를 더하면 62
따라서 육십이견은 단순히 숫자 62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오온과 자아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여 생기는 견해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또한 색온(色蘊)에 관한 네 가지 견해가 있으니,

1. 색(色)이 곧 나(我)라는 견해의 즉색시아(卽色是我),→몸이 변하면 나도 변하고, 몸이 사라지면 나도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

2. 색을 여읜 것이 나(我)라는 견해의 이색시아(離色是我),→몸과 별개로 변하지 않는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3. 나(我) 속에 색(色)이 있다는 견해의 아중유색(我中有色),→‘나’라는 주체가 따로 있고, 그 안에 몸과 물질적 요소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4. 색(色) 안에 나(我)가 있다는 견해의 색중유아(色中有我)→몸이라는 물질적 존재 안에 독립적인 자아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와 같이 오온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살펴볼 수 있다.

ㅡ이 네 가지는 모두 몸과 자아의 관계를 실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생각으로, 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정신의 여러 요소를 영원하고 독립적인 ‘나’라고 집착하는 것을 문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본래 부처 지혜인 불지(佛智)를 타고서(乘) 다섯 수행 단계의 오위(五位)를 거칠 때, 제(諦, 진리)를 보는 안목이 점차 밝아지면서 다시 다섯 가지 원인의 오인(五因)이 있고, 다섯 가지 결과의 오과(五果)가 있으니,

이것은 본래의 근본 오위(五位)으로 세운 것으로, 원인과 결과를 합쳐 10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백열 가지의 백일십법문(百一十法門)이 있으니,

그 각각에는 진리를 미혹하게 하고 수행을 가로막는 어리석음 등의 법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선재동자(善財童子)의 행을 들어 밝힌 바와 같으니, 그 각각의 해당 지위에 도달하는 것을 기다려 자세히 밝히리라.

ㅡ부처의 지혜가 수행을 모두 마친 뒤에야 비로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본래 갖추어진 부처의 지혜를 믿고, 그 지혜를 바탕으로 수행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은 외부에서 새로운 지혜를 얻어 자기 안에 채워 넣는 과정이라기보다, 본래의 지혜를 가리고 있는 미혹과 집착을 점차 밝혀 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행의 각 단계마다 새로운 가르침과 과제가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각 단계의 장애를 미리 하나의 일반적인 설명으로 모두 다루기보다는, 해당 수행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 장애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밝힌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각 지위(位)에 따라 닦아 나아가지만 아직 자재(自在)함을 얻지 못한 상태에 남아 있는 어리석음의 우치(愚癡)란 한 것은, 곧 바로 부처님의 불과(佛果)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것이며, 그 가운데에는 이른바 산수와 헤아림의 광대함에 관한 어리석음의 산수광대우(筭數廣大愚)와 수호광명의 공덕이 지닌 광대한 분량에 관한 어리석음의 수호광명공덕분량광대우(隨好光明功德分量廣大愚)는 오로지 부처의 궁극적인 과(果)라야 비로소 요달해 아는 것이다.

ㅡ처음에는 몸과 마음을 ‘나’라고 여기는 거친 집착을 살펴보고, 수행이 깊어질수록 미세한 무지와 장애를 알아차리게 되는 그 과정이 자신 본래의 자불지(自佛智)를 바탕으로 수행한다는 것으로, 이를 3 가지로 정리하면,
1. 미혹을 알아차림: 오온을 실체적인 나라고 여기는 잘못된 견해를 살펴봄.
2. 본지(本智)
에 의지함: 수행의 근거를 외부의 어떤 대상에 두지 않고 자신의 본래 부처 지혜(自佛智)에 둠.
3. 단계마다 더욱 깊이 밝히는 것: 수행이 진전될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미세한 무지와 장애까지 살피게 됨.
따라서 수행이 단순히 번뇌를 제거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본래의 자불지(自佛智)를 바탕으로 점점 더 깊고 미묘한 진리를 깨달아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승기품(阿僧祇品)과 수호광명공덕품(隨好光明功德品)에서 여래께서 직접 설하신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각 수행 단계의 지위(地位)에 따라 점차 닦아 나아가는 가운데 나타나는 미혹의 장애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찾아간 선지식(善知識)들이 각각 나타내는 법문과 수행에 하나하나 대응시켜 자세히 설명한다. 이는 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며, 중생이 삿된 길의 사도(邪道)를 따라가는 모습을 밝히기 위한 것이며, 

ㅡ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재동자의 선지식(善知識)들이 각각 법을 나타내는 표법(表法)으로, 선지식들은 각각 다른 수행의 모습과 깨달음의 측면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선재동자의 구도 과정은 각 선지식이 보여 주는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수행을 점차 넓히고 깊게 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또한 일체중생 가운데 인간(人), 천상(天), 마왕(魔), 범천(梵), 성문(聲聞), 연각(緣覺), 정토의 보살(淨土菩薩)이 모두 사견(邪見)이면서도 다만 그들이 받는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이 서로 다를 뿐이며, 모두가 참된 정견(正見)이 아니다.

ㅡ부처의 완전한 지혜를 기준에서 보면 인간과 천상의 즐거움에 머무는 것, 범천의 높은 선정에 머무는 것, 성문과 연각의 깨달음에 만족하는 것, 정토의 보살이라 하더라도 아직 부처의 지혜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상태에 머무는 것은 모두 궁극적인 정견(正見)에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견(邪見)이라고 표현한 것은 반드시 그들이 모두 악하거나 잘못된 수행을 한다는 것이 아닌, 불지(佛智)를 기준으로 볼 때 아직 궁극적인 진리를 완전히 깨닫지 못한 견해와 수행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행(顚倒行)이란 네 가지의 사도(四倒)와 여덟 가지의 팔전도(八顚倒) 등을 말한다.

ㅡ사전도(四四倒), 4 가지의 잘못된 생각
상전도(常顚倒)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함
낙전도(樂顚倒) 괴로움이 있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생각함
아전도(我顚倒) 무아인 것을 나라고 생각함
정전도(淨顚倒)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생각함

 

마치 장님과 같아서 이끄는 스승이 없다(猶如盲人無有導師者)는 것은, 보살이 미혹을 관찰하고 자비를 일으켜서 출요도(出要道,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요긴한 길)를 구해 군품(群品, 중생)을 지혜로서 제도함을 밝힌 것이며, 그 이하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의 경계(魔境界)에 들어간다는 것은 오온마(五蘊魔), 번뇌마(煩惱魔), 사마(死魔), 천마(天魔)의 네 가지 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며, 

ㅡ사마(四魔)는 수행자가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
오온마(五蘊魔); 오온으로 이루어진 몸과 마음에 얽매여 생기는 장애
번뇌마(煩惱魔); 탐욕·성냄·어리석음 등 번뇌의 장애
사마(死魔); 죽음으로 인해 수행과 생명의 흐름이 끊기는 장애
천마(天魔); 수행자를 유혹하고 깨달음을 방해하는 마왕의 작용
여기서 마(魔)는 반드시 외부 악한 존재가 아니라, 오온에 대한 집착, 번뇌, 죽음의 두려움처럼 수행자의 마음과 삶을 가로막는 여러 장애로서, 마의 경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러한 장애에 사로잡혀 진리를 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악한 도적에게 사로잡힌다(惡賊所攝者)는 것은 육근(六根)이 각각의 대상(境, 경계)을 따라가면서 여러 사견(邪見)를 일으키는 것을 말하며, 

 

수순마심(隨順魔心)하여 마음이 마의 작용을 따라가면 참된 진(眞)에서 멀어지고, 미혹하여서 명색(名色)을 망령되이 취하여서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계취(戒取)ㆍ견취(見取)ㆍ사견(邪見) 등을 취하여 스스로 올가미가 되어 얽매이고, 고통(苦)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윤회함을 밝힌 것이며, 

 

'우치조림(愚痴稠林, 어리석음의 빽빽한 숲)의 미혹한 바'란 것은 일체중생이 바로 그러한 어리석음의 숲에 빠져 있는 것과 같다.

 

대략 요약하면 팔만사천(八萬四千)이 있으니, 그 대체(大體)를 총론하면, 하나를 미혹하면 허공과 동등하게 미혹하는 것이라서, 자신의 여래 보광본지혜해(普光本智慧海)를 미혹하면 곧 법계(法界)와 허공계(虛空界)와 동등하게 총체적으로 미혹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어리석음이 광대하고 많아서 근본 지혜를 가리기 때문에 조림(稠林)이라 칭하는 것이다.

ㅡ여래의 지혜는 특정한 장소나 한정된 존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법계와 허공계에 두루하지만, 중생은 그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무명(無明)과 집착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지위에 들어가는 보살도(菩薩道)를 미혹한 어리석음은 5위(五位)를 따라 닦아 나가는 인과(因果)가 100(一百)이 있으니, 이는 오위의 각 단계에 십바라밀(十種波羅蜜)이 있으며, 이것을 수행의 바탕인 행체(行體)로 삼는다.  

예를 들자면, 십주(十住)에서는 십신(十信)을 마친 뒤 방편삼매(方便三昧)를 닦는 것은, 십주 가운데 첫 단계인 초발심주(初發心住)의 과위(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며, 마침내 발심주의 과(果)에 바르게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이른바 모든 부처님의 지혜 광명을 기억하고 염하는 억념제불지혜(憶念諸佛智慧)의 광명(光明)을 얻는다는 것이 이러한 것이며, 해문국(海門國)에 들어가서 관(觀)하는 것은 치지주(治地住)를 향해 닦는 것이며,

일체중생해(一切衆生海)가 바로 청정법계해(淸淨法界海)라는 것을 관찰하여, 보안법문(普眼法門)을 얻는 것은 바로 치지주의 과위(果)에 올바르게 들어가는 것이다.

ㅡ보안법문(普眼法門)을 얻는 것이 바로 치지주의 과위에 올바르게 들어간다는 뜻으로, 보안(普眼)은 글자 그대로 두루 보는 눈으로, 일부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존재와 현상을 넓고 두루 관찰하는 지혜를 나타냅니다.
발심주에서 부처님의 지혜 광명을 기억하고 염하는 수행을 했다면,

치지주에서는 그 지혜를 바탕으로 일체중생과 법계를 넓게 관찰하는 수행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위에는 모두 오십 가지의 오십개법문(五十箇法門)이 있으며,

각각 두 가지 원인과 결과의 이종인과(二種因果)가 있으므로,

전체적으로 100 가지 향상과 진전의 승진법문(昇進法門)이 있다.

ㅡ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迴向), 십지(十地) X 10 바라밀 = 50 법문.
각 법문에 두 가지 인과(二種因果)가 있어서 50 법문 X 2 = 100

 

또한 초발심주로부터 생사조림(生死稠林)이 시작되기 때문에 이를 첫머리가 된다고 표시한 것이다.

만약 이러한 여러 견해의 제견(諸見)이 본래 실체가 없다는 것을 밝게 안다면, 그 여러 견해도 곧 법계의 연기로 태어난 법계연생(法界緣生)임을 알게 된다.
일어나는 기(起)는 오직 법에 따라 일어나는 법기(法起)요, 
보는 견(見) 또한 오직 법에 따라 보는 법견(法見)이요,
지혜를 따라 그 대상에 대한 인식과 작용이 구르는 수지이전소연(隨智而轉所緣)인 것이다.
그렇게 반연된 바인 삼계(三界)와 육도(六道)의 착하지 못한 불선도(不善道)가 모두 이 다섯 가지의 견해를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다.

만약 이를 깨달아 요달하면 곧 부처의 불지견(佛知見)지견에 들어가며, 그 이후에는 모든 번뇌가 총체적으로 더 이상 생기지 않을 것이며, 이와 같이 5견상(五見相)을 파괴하는 자는 세간의 업을 여의는 것이다. 

이러한 5견(五見)으로 인(因)해서 투쟁과 성냄과 원한이 생겨나는 것이니,

가령 탐냄으로 인해서 그릇된 생계 수단의 사명(邪命)을 일으키고,

삼독(三毒)을 원인으로 탐욕·성냄·어리석음에 따른 업이 일어나고, 악업이 더욱 왕성해지는 것을 치연(熾然, 치열하게 타는 것)이라고 한다. 반면 청량한 열반(淸涼涅槃)이란 업이 사라지고 지혜가 드러나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또 어리석음의 무거운 어둠과 망령된 견해의 막(膜)을 들은 것은 총체적으로 미혹된 장애의 업이 많음을 밝힌 것이니, 명색(名色)을 미혹함으로써 바른 지혜의 정지(正智)를 가로막게 되는 것을 전체적으로 밝히기 위한 것이다.

 

또한 지옥 · 축생 · 아귀에 떨어지는 것을 들어 설명한 것은, 앞에서 말한 미혹의 장애로 인해 그릇된 길에 빠져 지옥 등에 떨어지게 됨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여기서 말하는 지옥은 십팔지옥(十八地獄)을 가리킨다.

십팔지옥(十八地獄)이란 다음과 같은 열여덟 종류의 지옥을 말하는 것이니, 
1. 확탕지옥(鑊湯地獄) — 큰 가마솥의 끓는 물에 들어가는 지옥
2. 노탄지옥(鑪炭地獄) — 화로와 숯불의 뜨거운 고통을 받는 지옥
3. 도산지옥(刀山地獄) — 칼로 이루어진 산에서 고통받는 지옥
4. 검수지옥(釰樹地獄) — 칼날로 된 나무에서 고통받는 지옥
5. 흑암지옥(黑闇地獄) — 캄캄한 어둠 속에서 고통받는 지옥
6. 한빙지옥(寒冰地獄) — 극심한 추위와 얼음의 고통을 받는 지옥
7. 화거지옥(火車地獄) — 불타는 수레에 의해 고통받는 지옥
8. 화륜지옥(火輪地獄) — 불타는 바퀴에 의해 고통받는 지옥
9. 철망지옥(鐵網地獄) — 쇠그물에 얽히는 고통을 받는 지옥
10. 동주지옥(銅柱地獄) — 뜨겁게 달구어진 구리 기둥과 관련된 고통을 받는 지옥
11. 비시지옥(沸屎地獄) — 끓는 오물 속에서 고통받는 지옥
12. 발설지옥(拔舌地獄) — 혀를 뽑히는 고통을 받는 지옥
13. 정신지옥(釘身地獄) — 몸에 못이 박히는 고통을 받는 지옥
14. 토화지옥(吐火地獄) — 불을 토하는 고통을 받는 지옥
15. 음동지옥(飮銅地獄) — 녹은 구리를 마시는 고통을 받는 지옥
16. 우치지옥(愚癡地獄) — 어리석음과 관련된 지옥
17. 화성지옥(火城地獄) — 불로 둘러싸인 성에서 고통받는 지옥
18. 회하지옥(灰河地獄) — 재와 뜨거운 물질이 흐르는 강에서 고통받는 지옥.

 

이상의 열여덟 가지 지옥은 마음으로 지은 악업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곳에서 과보를 받는다는 뜻이다.

악견의 그물인 악견망(惡見網)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중생이 오온(五蘊) 각각에 이러한 4 가지의 사견(四見)를 모두 갖추고 있음을 밝힌 것이며,

이와 같은 여러 견(見)은 모두 신(身)에 의거해서 일어나는 바이기 때문에 이 경전에서 “신(身)도 없고 또한 견(見)도 없으면 부처의 무상신(無上身)을 얻는다(無身亦無見,得佛無上身)”고 한 것이다.

ㅡ네 가지 견해의 사견(四見)은
1. 즉온시아(卽蘊是我): 오온이 곧 나라고 생각함.
2. 이온시아(離蘊是我): 오온을 떠나 별도의 내가 있다고 생각함.
3. 아중유온(我中有蘊): 나라는 실체 안에 오온이 있다고 생각함.
4. 온중유아(蘊中有我): 오온 안에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함.
이러한 4 가지 견해를 색온(色蘊)· 수온(受蘊)·상온(想蘊)·행온(行蘊)·식온(識蘊) 각각에 적용한다는 것으로, 
예를 들어 수온에 대해서도 느낌이 곧 나라고 생각하거나, 느낌과 별도로 내가 있다고 생각는 것입니다.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26)
십지품③ㅡ6
(2) 이구지(離垢地) ㅡ2

 

(22권의 제1 환희지(歡喜地) 다음으로 이어지는 과목의) 

두번째,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는 단락(捨惡從善段)의 43행 경문은 다시 두 단락으로 나누면,

첫째 “그때 금강장보살이(爾時金剛藏)” 이하부터 “이 열 가지 마음으로 이구지에 들어갈 수 있다(以此十心得入離垢地)”까지의,  4행 반의 경문은, 열 가지 마음의 십심(十心)으로 제2지로 나아가는 수행을 닦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두번째,  부분인 "불자(佛子)여, 보살이 이구지(離垢地)에 머문 뒤로부터" 이하 "다른 이로 하여금 수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경우는 있을 수 없다"까지의 38행의 경문은,

제2지(第二地)의 보살이 지닌 종성(種性, 본래의 성품과 자질)이 스스로의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을 잘 조절하고 선하게 다스리며, 십선(十善)의 선한 마음을 따라 자비를 갖춤을 밝힌 분(分)이다.

 

십선(十善)이란, 몸으로는 살생(殺生) · 투도(偸盜) · 사음(邪婬)을 하지 않고,

뜻으로는 탐욕(貪) · 성냄(嗔) · 어리석음(癡)을 일으키지 않으며,

입으로는 거짓말의 망언(妄言) · 꾸미는 말의 기어(綺語) · 악한 말의 악구(惡口) · 이간질하는 말의 양설(兩舌)을 하지 않는 것이니, 

욕계(欲界)에서는 이 십선을 산선(散善), 즉 선정에 들지 않은 상태에서 닦는 선행으로 수행하지만,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서는 십선을 선정의 정업(定業)과 함께 닦으니, 생각과 분별의 상념(想念)이 쉬어야 비로소

이른 것이다. 

ㅡ몸의 3 가지 악업: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婬)
입의 4 가지 악업: 망언(妄言), 기어(綺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뜻의 4 가지 악업: 탐욕(貪), 진에(瞋), 사견 또는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한 마음의 우치(愚癡)

ㅡ 치(癡)를 보통 어리석음으로 표현하지만, 일부에서는 삿된 견해(邪見)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의 “불자야” 이하 39행 반의 경문은, 상(上)의 10선을 훌륭히 지님을 밝힌 분(分)으로, 이를 다시 세 단락으로 나누겠다.

3-1, “불자야” 이하 “이 같은 방편을 보살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如是方便菩薩當學)”에 이르기 까지 14행의 경문은,

이 지위의 보살이 10선도(十善道)를 지키는 것을 밝힌 분(分)으로, 이 단락에 여섯 가지 뜻이 있으니,

 

3-1-1, 열 가지 불선(不善)의  십악(十惡)을 지으면 지옥이나 축생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염(생각)하는 것이며,

 

3-1-2, 10선업(善業)의 십선업도(十善業道)를 닦으면, 다시 삼계(三界)에 태어나게 되서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를 염(念, 생각)하는 것이나, 이 10선(十善)이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비상정 非想頂)에 이르기까지 두루 수행할 수 있으므로, 이를 통틀어 닦아서 총체적으로 유정(有頂)이라 이름붙이는 것이며,

 

3-1-3, 상등의 십선인 상품십선(上品十善)을 닦는 사람 가운데 고통(苦)을 두려워하여 참된 진(眞)을 닦아서 성문승(聲聞乘)을 얻으니, 이들은 삼계의 유위심(有爲心), 즉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 마음을 벗어나고, 삼계의 번뇌를 굴복시키고 다하여 변화생사(變化生死)에 들어가고, 어떤 이들은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 여러 겁이 지나도록 깨닫지 못하기도 하며, 

 

3-1-4, 상등의 십선을 닦는 사람 가운데 스스로 인연으로 생겨나는 연생(緣生)을 깨달았으나 자비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이는 독각승(獨覺乘)을 성취하고, 또한 변화생사를 얻으니, 근기가 예리한 까닭에 대보리(大菩提)를 향해 회향하면서 쉽게 십천(十千劫, 만겁)이 걸리며, 

 

3-1-5, 상등의 십선을 닦으면서 광대한 서원의 광대원(廣大願)을 세우고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부처님의 대지혜를 구하는 이는 보살행(菩薩行)을 이루는 것이다.

 

3-1-6, 최상급의 상상십선(上上十善)을 닦아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청정하게 하기 때문에 십력(十力)과 사무외(四無畏)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이를 최상승(最上乘)이라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하늘(天)에 태어나는 길과 세간을 벗어나는 길에 걸쳐, 십선업도(十善業道)에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10선업(十善業)의 도(道)가 있는 것이다.

ㅡ이 해설은 십선의 수행을 통해 여러 수행의 길이 펼쳐질 수 있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 성문승(聲聞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추구하고,
- 독각승(獨覺乘)은 인연으로 생겨나는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 길을 추구하고, 
- 보살승(菩薩乘)은 광대한 서원을 세우고 중생을 버리지 않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선이라는 선행 자체만으로 수행의 궁극적인 방향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수행하는가, 그 수행을 누구를 위해 회향하는가가 중요한 것으로, 자신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수행과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보살행은 출발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서원과 지향하는 바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불자야, 이 보살마하살” 이하 “가없는 무리의 대고취(無邊大苦聚)”에 이르기까지 23행의 경문은,

십불선업(十不善業)을 행할 때 각각 두 종류의 원인과 결과가 있음을 밝힌 것으로, 그 구체적인 내용은 경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또한 십불선(十不善) 가운데에도 상·중·하의 세 등급의 삼품(三品)이 있으며, 그에 따른 인연이 서로 다르므로 받게 되는 괴로움(苦)도 같지 않으니, 이 내용 역시도 경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ㅡ주석은 십불선업을 행하더라도 그 원인과 조건, 행위의 정도가 서로 다르므로 결과로 받는 괴로움 역시 같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즉 악업의 결과를 단순히 하나의 고정된 결과로만 보지 않고, 행위의 강도와 그에 관련된 인연을 살펴본 것입니다.

 

셋째, “이 때문에 보살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하 “그 가운데 머물게 한다(令住其中)”에 이르기까지 2행의 경문은,

보살이 스스로 십선(十善)을 실천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교화하여 십선업(十善業)을 행하게 하는 것을 밝힌 분이다.

 

앞에서 말한 상상(上上)의 십선(十善)이란 것은 지혜에 의지하여 발심하는 의지발심(依智發心)을 밝힌 것이며,

그 나머지의 3품은 비록 모두 삼계(三界)의 업을 여의고 삼계를 벗어나는 결과(果)를 얻었다 할지라도, 모두 공(空)에 의지하여 발심한 것이기 때문에 점차 부처님의 지혜를 구해야 비로소 보현의 원행(願行, 서원과 행)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삼승(三乘)에 속하는 보살은 원행(願行, 서원과 행)이 비록 광대할지라도, 부처님의 지혜를 완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삼천대천(三千大千)세계의 국토(國土)를 부처님의 과보로 나타나는 불경계(佛報境)로 삼는 것과 같다.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 가운데서 보현행(普賢行)을 실천하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삼승의 수행자는 공을 관찰하는 수행(觀空)과 오위(五位)의 행문(行門, 수행문)을 통해 이치에 나아가고, 궁극적인 진리에 이른 뒤, 비로소 여래종지(如來種智)의 문을 바라게 된다. 그러나 그 뒤에도 다시 보현의 서원과 수행에 들어간다면, 

곧 부처님 과위의 불과(佛果)에 들어가서, 십신(十信)과 오위의 수행을 마친 뒤에 있으며, 삼기(三祇, 3 아승기겁)을 채워야 비로소 도달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마음을 돌이켜 대승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이들은 모두 문밖의 풀로 지은 암자인 초암(草庵)에 머무는 것과 같은 것이다.

ㅡ삼승과 일승의 차이
ㅡ 삼승; 공을 관찰하고 오위의 수행문을 거쳐 점차 진리에 나아가는 수행으로, 여기에서는 수행이 부처님의 지혜를 완전히 갖추기 전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ㅡ일승; 처음부터 부처님의 지혜를 믿음의 바탕으로 삼는 수행
부동지불(不動智佛)의 지혜를 믿음의 근본으로 삼고, 보광명지(普光明智)를 바탕으로 십신에서 십지와 십일지에 이르는 수행을 이해하고, 부처님의 지혜와 보현행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ㅡ若不迴心者,俱在門外草庵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모두 문밖의 풀로 지은 초암(草庵)에 머문다”는 뜻으로, 
 ‘마음을 돌이킨다는 회심(迴心)’은 단순히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방향을 전환하여 부처님의 지혜와 보살의 광대한 서원을 향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삼승의 수행이 일승의 지혜에 이르기 전의 단계로 설명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상상(上上)의 십선(十善)과 일승(一乘)의 문에서는 여래의 일체처에서 흔들림 없이 머무는 지혜의 부동지불(不動智佛)을 믿음의 바탕으로 삼고, 십주위(十住位)에 들어가면 곧바로 여래의 지혜라는 과위(果)에 들어간다.

십신과 오위의 수행은 모두 부처님의 과위에 해당하는 큰 지혜의 불과대지(佛果大智)로서 행문(수행의 길)을 성취하기 때문에 곧 여래의 보광명지(普光明智)를 바탕으로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迴向)·십지(十地)·십일지(十一地)를 성취하여 그 체(體)로 삼는다.

곧, 부처님의 과위의 불과와 보현행은 서로 같은 바탕에 의지하는 것으로, 지혜의 체가 뚜렷하게 밝고 원만하여서 분별과 집착에서 비롯된 견해를 벗어났으므로 삼세(三世)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삼승(三乘)을 돌이켜 지혜의 바다인 지햬(智海)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 이를 용녀(龍女)로서 나타내고, 이 경전인 화엄경(華嚴經)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들어가는 불문(佛門)을 단박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이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상징하는 바와 같은 것이다.

 

선재동자는 비록 여러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했지만,

그러나 발을 각모(覺母, 문수를 뜻함)의 앞에서 발걸음을 옮기지도 않았고,

자씨(慈氏, 미륵보살)는 비록 일생에 부처를 이루는 일생성불(一生成佛)의 공(功)을 주었지만,

그러나 한 생각의 일념(一念)의 전후가 없는 무생지해(無生智海, 낳음이 없는 지혜의 바다)를 여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일체지(一切智)의 수레를 타고서 고금의 견(見)이 멸진한 것이다.

만약 마음 속에 앞뒤와 전후의 분별을 남겨 두면, 부처님의 지혜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풀로 지은 초암(草庵)에 머물면서 문밖에 서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논주(論主)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으니, 

一切衆生金色界 白淨無垢智無壞 智珠自在內衣中 只欲長貧住門外 

일체 중생의 금색계(金色界, 금빛 세계)는 희고 깨끗하여 더러움이 없으며, 그 지혜는 무너짐이 없도다.
지혜의 구슬인 지주(智珠)가 자신의 내의(內衣) 속에 있거늘, (이를 알지 못하여)
다만 영원히 가난하게 문 밖에서 머무는도다.
ㅡ금색계(金色界): 일체중생을 금빛 세계에 비유한 것으로, 중생을 바라보는 화엄의 관점이고, 

ㅡ 지주(智珠)는 법화경의 옷 속에 감춰진 보배 구슬의 비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廣大寶乘住四衢 文殊引導普賢 扶肥壯白牛甚多力 一念遍遊無卷舒 

광대한 보배 승(乘, 수례)이 사거리 한 가운데에 머물러 있으니, 
문수 보살이 이끌어 인도하고, 보현 보살이 도와서 붙들어 주시며
건장하고 살찐 백우(白牛, 흰 소)는 그 힘이 매우 힘이 세어서
일념(一念)에 두루 노니나, 나아가고 물러섬의 권서(卷舒)가 없도다.

ㅡ 문수보살은 지혜를, 보현보살은 서원과 실천의 행(行)을 상징하며, 지혜와 실천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如是寶乘不能入 但樂勤苦門前立 不覺自身常住中 遣上恒言我不及

이 같은 보배 승(乘, 수레)에 능히 올라타지 못하고
다만 고달픈 수행의 근고(勤苦)함을 좋아하여 즐기면서 문 앞에 서 있을 뿐,

자신이 본래 그 가운데 항상 머물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나아가게 하는 상승(上乘)을 버린 채, 항상 “나는 미치지 못한다(나는 부족하다)”라고 말하는도다.

 

ㅡ법화경(法華經)의 일곱 가지 비유
1. 제3품 비유품(譬喻品)에서의 불타는 집과 세 수레의 비유의 화택삼거유(火宅三車喻)
한 부자의 큰 집에 불이 났지만, 아이들은 놀이에 빠져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양 수레·사슴 수레·소 수레를 주겠다고 하여 집 밖으로 나오게 합니다. 그런 다음 약속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큰 흰 소의 수레를 모두에게 줍니다.
→ 불타는 집은 괴로움이 가득한 삼계(三界)를, 아이들은 중생을, 아버지는 부처님을 상징합니다. 부처님은 중생의 근기에 맞는 방편(方便)으로 이끌어 마침내 일승(一乘)의 가르침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2. 신해품(信解品)에서의 부자와 가난한 아들의 비유의 궁자유(窮子喻)
어린 시절 집을 떠난 아들이 오랫동안 가난하게 떠돌다가 부유한 아버지의 집에 도착합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그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금씩 일을 맡기고 신뢰를 쌓게 한 뒤, 마침내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재산을 물려받을 자격을 알려 줍니다.
→ 중생은 자신이 부처님의 지혜와 얼마나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스스로를 부족한 존재라고 여기지만, 부처님은 중생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 점차 이끌어 갑니다.

3. 제5품 약초유품(藥草喻品)의 약초와 나무의 비유(藥草喻)
큰 구름이 비를 내리면 여러 종류의 풀과 나무가 각자의 크기와 성질에 따라 물을 흡수하며 자랍니다. 비는 고르게 내리지만 식물마다 자라는 모습은 다릅니다.
→ 부처님의 가르침은 차별 없이 중생에게 미치지만, 중생은 각자의 근기와 능력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서로 다른 수행의 모습이 있다고 해서 가르침의 자비가 차별한 것은 아닙니다.

4. 제7품 화성유품(化城喻品)의 화성(化城)과 보처(寶處)의 비유
사람들이 멀고 험한 길을 따라 보배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지쳐 포기하려 합니다. 길잡이는 신통력으로 잠시 쉴 수 있는 환상의 도시를 만들어 줍니다. 사람들이 충분히 쉰 뒤에는 그 도시가 임시로 마련된 곳임을 알려 주고, 다시 보배가 있는 목적지로 이끕니다.
→수행 중에 얻는 특정한 경지나 안락함을 궁극적인 깨달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방편은 중생을 쉬게 하여서 충전하게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부처님의 지혜에 이르는 것입니다.

5. 제8품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에서의 옷 속에 감춰진 보배 구슬의 비유(衣裏繫珠喻)
친구의 집에서 술에 취해 잠들자, 친구는 그가 앞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값비싼 보배 구슬을 옷 속에 몰래 넣어 줍니다. 그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한 채 가난하게 떠돌다가 훗날 친구를 만나 보배 구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이미 지니고 있는 소중한 가능성을 알지 못한 채 밖에서만 행복과 깨달음을 찾는 모습을 비유합니다. 앞서 살펴본 화엄경 주석의 “지주(智珠)가 자신의 옷 속에 있다”는 것이 이 비유입니다.

6. 제14품 안락행품(安樂行品)에서의 상투 속의 귀한 보배 구슬의 비유(髻中明珠喻)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운 장수에게 왕은 여러 가지 상을 내리지만, 가장 귀한 보배 구슬만큼은 쉽게 주지 않습니다. 그 구슬은 왕이 가장 아끼는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장수가 큰 공을 세우자 왕은 그에게 구슬을 줍니다.
→부처님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여러 가르침을 설하시다가, 마침내 가장 깊고 귀한 일승의 가르침을 드러내십니다.

7. 제16품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서의 훌륭한 의사와 독을 먹은 아이들의 비유(良醫病子喻)
훌륭한 의사의 아이들이 독을 먹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의사는 좋은 약을 만들어 주지만, 독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 아이들은 약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그제야 아이들은 아버지가 남긴 약을 먹습니다.
→부처님은 중생의 상태에 맞게 방편을 사용하여 그들을 구제합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고 열반에 드는 모습도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그 밖의 비유로서, 제12품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에서 용녀의 성불(龍女成佛);
용왕의 딸인 어린 용녀가 부처님의 지혜를 드러내며 성불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성별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만으로 성불의 가능성을 제한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앞서 읽으신 주석에서는 삼승을 돌이켜 지혜의 바다로 이끄는 가르침을 나타내는 사례로 인용됩니다.

제20품 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에서의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
상불경보살은 만나는 사람마다 공경하며, 그들이 장차 부처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그를 조롱하거나 괴롭히지만, 그는 사람들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현재 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가능성을 단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를 존중하는 태도가 보살행의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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