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26)
십지품③ㅡ3
(1)
환희지
③ㅡ3

 

셋째, 연기(緣起)로 생겨나는 것에 자성(體)이 없음을 알지 못하여 유전하는 불료연생무체유전문(不了緣生無體流轉門)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이 한 단락은 진(眞)을 미혹하고 망(妄, 허망)을 좇음으로서 고통이 생겨나는 인(因)을 밝힌 것이니,

‘이른바(所謂)’에서부터 ‘괴로움의 무더기를 낳고 자라게 한다(生長苦聚)’에 이르기까지의 네 행의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른바 인(因)이 명색(名色)에 의거해서 6근(六根)이 인식하는 대상의 소연(所緣)에서 촉(觸)이 생기고,

촉이 있기 때문에 6근이 대상을 취하여 수(受)를 일으키며,

수(受)를 인연으로 애(愛)가 생기고, 애를 인연으로해 취(取)가 생기며, 취를 인여느로 해서 유(有)가 생기고,

유가 있으므로 노사(老死)와 근심·슬픔·괴로움·번뇌의 우비고뇌(憂悲苦腦)가 있는 것이다.

ㅡ무체(無體)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떠한 현상도 다른 조건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고정된 본체를 갖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소리를 들을 때는 귀와 소리, 의식 및 여러 조건이 함께 작용하는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 소리를 듣는 경험이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여러 조건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을 연기(緣起)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명(名) 가운데 색(色)이 갖추어져 있고, 색(色) 가운데 명(名)이 갖추어져서 명과 색,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이니, 
이에는 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모두가 포함되는 것이다.

또한 유표색(有表色)과 무표색(無表色)이 있기 때문에 다만 심의(心意, 마음과 뜻)와 안(眼)ㆍ이(耳)ㆍ비(卑)ㆍ설(舌)ㆍ신(身)ㆍ의(意)이 인식하는 바의 소연(所緣)과 격발해서 미혹(번뇌)을 이루는 것을 모두 촉(觸)이라 한다.

오직 여래만이 조작이 없는 무위(無爲)로서 순수하게 지혜와 더불어 함께 하기에 법에 대한 법촉(法觸)이 없지만,

중생이 촉(觸)과 수(受)를 통해 삼계(三界)의 번뇌를 이루며,

성문(聲問)은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증득하고자 하는 촉(觸)과 수(受)가 있으며,

정토 보살은 청정함과 더러움의 두 가지에 대한 촉(觸)이 있으며,

1승 보살에게는 원만하게 조화된 지혜와 자비가 있지만, 아직 자재롭지 못한 촉(觸)이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촉(觸)을 밝은 지혜로 관찰해서 지용(智用, 지혜의 작용)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명경(淨名經, 유마경)에서는 “모든 촉을 수용하여 여여한 지혜로 증명한다(受諸觸如智證)”고 한 것이며,

또한 “법은 본래 나지도 않으며, 이제 멸하는 것도 아니다(法本不生今則不滅)”라고 한 것이니,

이는 연기하여 생겨나는 연생(緣生)의 체(體)가 본래 자성(自性)이 없어서, 고정된 생멸법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범부는 이를 요달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無明)이라 칭하는 것이나, 마음과 경계가 본래 공하다는 것을 안다면, 곧 법만이 일어나는(起)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며, 그러함은 항상 지혜의 경계(대상)이지 생멸의 연(緣)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선정과 지혜로 관조하면 자연히 깨달아 이해하게 되리라.

ㅡ수제촉여지증(受諸觸如智證)은 촉을 피하거나 감각 경험 자체를 없애는 것보다, 촉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지혜로 관찰하는 태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소리를 듣거나 어떤 감정을 경험할 때, 그 경험을 곧바로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붙잡지 않고, 어떠한 조건을 따라 일어난 현상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촉과 수가 반드시 집착과 번뇌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 보살이 참된 진(眞)을 요달해서 중생의 고(苦)를 가엾이 여기어서 중생을 이끄는 보살달진민고접생문(菩薩達眞愍苦接生門)이라는 것은 바로 “이 가운데 모든 것은 공(空)한 것으로,

아(我, 나)와 아소(我所, 나의 것)를 여의었다(是中皆空離我我所)”에서부터 “대자비의 광명 지혜(大慈光明智)”에 이르기까지 5행의 경문이 이에 해당된다.

ㅡ공을 깨닫는 지혜는 중생을 외면하는 태도가 아니라, 집착 없이 중생의 괴로움을 이해하고 돕는 대자비의 지혜로 드러납니다.

 

이와 같이 십이유지(十二有支)에 의해 모든 중생은 앞에서 말한 18 가지의 번뇌를 일으키고, 생사윤회 가운데에서 유전하면서 온갖 괴로움(苦)를 받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성문(聲聞) · 연각(緣覺) · 정토의 보살(淨土菩薩)은 생사를 염리(厭離)하여 싫어하여서,

이러한 번뇌의 현행(現行)을 절복(折伏)하여 일어나지 않게 하지만,

반면 일승(一乘)의 보살은 이 십이유지를 바탕으로 해서 근본지(根本智)를 성취하고, 차별지(差別智)를 일으켜 중생을 교화함으로서 선법(善法)을 유지하고 보살의 보리심(菩提心)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비록 미혹과 깨달음이 같지는 않지만, 12유지가 지혜와 더불어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승만경(勝鬘經)에서도 이와 같은 취지로 설하고 있다.

ㅡ‘십이유지가 지혜와 더불어 다르지 않다’라는 말은 십이연기의 12 지분과 지혜가 문자 그대로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라, 미혹의 작용을 올바르게 깨달으면, 같은 연기의 세계가 지혜와 자비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장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한 열여덟 가지 번뇌 가운데 사견(邪見)과 무명(無明) 등을 살펴보면,

십주(十住)의 첫 단계인 초발심주(初發心住)에 처음 들어가 여래지혜가(如來智慧家)에 태어나면, 정사(正使, 근본 번뇌)로 능히 악도에 떨어지게 할 만큼 강한 번뇌 현행의 사견이 제거됨으로써 (사견과 무명)이 그 힘을 잃고, 습기(習氣)도 미약해진다.

그러나 교만 등을 비롯한 열여덟 가지 번뇌의 습기가 모두 멸진하여 사라진 것이 아니다.

 

십행(十行)과 십회향(十迴向)의 수행 단계에서는 열 가지 수행법과 그에 따른 가행(加行)으로 번뇌를 다스려서, 그에 따라 번뇌의 습기가 점차 희미하게 약해지는 것이며,

십지(十地)에 이르면 바른 지혜의 정지(正智)가 더욱 밝아져서, 오직 견도(見道)의 행을 따른 법집(法執)만 남아 있고,

삼계에서 일어나는 번뇌 현행이나 습기인 불선(不善)의 업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간탐(慳) · 질투(嫉) · 분노(忿) · 원한(恨) · 성냄(瞋)의 다섯 가지 번뇌는 십지에 들어가면 그 습기가 이미 없으며, 그 나머지 번뇌의 습기는 제7지에서 자비가 궁극에 이르고 지혜가 원만해짐에 이르러서 원력에 따라 자유자재하게 작용하는 지혜의 지용(智用)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를 번뇌를 끊었다고 하기보다는, 번뇌를 꿰뚫어 이해하여 지혜의 작용인 지용(智用)으로 전환하였다고 해야 한다.

ㅡ여기에서 강조하는 수행 단계
십주(十住) 발심하여 여래의 지혜를 향한 수행의 기반을 마련함
십행(十行)·십회향(十迴向) 여러 수행을 통해 번뇌와 습기를 점차 다스림
십지(十地) 바른 지혜가 더욱 밝아지고 미세한 법집을 다스림
제7지 이후 지혜와 자비의 작용이 더욱 자유자재하게 전개됨
불과(佛果) 미세한 어리석음까지 완전히 다하는 것으로 설명됨

여기서 현행(現行)은 번뇌가 실제로 일어나 작용하는 것이고,

습기(習氣)는 번뇌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는 미세한 경향이나 흔적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화를 내는 행동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미세한 자기중심적 반응이나 익숙한 분별의 경향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법집(法執)의 현행은 제7지에까지 이어지는 것이므로, 법집의 습기는 십지에 이르러서야 사라지는 것이며,

또한 수를 헤아리는 광대한 어리석음의 산수광대우(筭數廣大愚)과 수호공덕에 관한 어리석음의 수호공덕우(隨好功德愚),

이 두 가지 어리석음은 불과(佛果)의 수행이 완성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찰하여서 멸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아승기품(阿僧祇品)과 수호광명공덕품(隨好光明功德品)에 해당되며,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스스로 이 두 품을 직접 설하시어, 불과의 두 가지 어리석음의 불과이우(佛果二愚)를 밝히신 것이다.

이는 십이유지(十二有支)와 그에 따른 미세한 습기가 불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함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수행의 단계를 바탕으로 오위(五位)와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세우고,

각각 열 가지씩의 십십(十十) 수행으로 번뇌와 습기를 다스리기 때문에

십주·십행·십회향·십지·십일지(十一地)의 모든 수행 원리는 그 체(體)와 상(相)이 서로 유사하지만, 번뇌와 습기를 다스리는 단계에는 차이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이 다섯 수행 단계의 십바라밀 가운데, 처음 세 바라밀은 속박에서 벗어나 출세간의 길로 나아가는 출세도(出世道)를 다스리는 것이니, 때문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십주의 단계에서 만나는 첫째 · 둘째 · 셋째의 선지식을 세 비구로 나타낸 것이며, 

그 다음의 세 바라밀은 출세간의 지혜와 세간의 미혹을 다스리는 것이니, 이는 곧 미가 장자(彌伽長者) · 해탈 장자(解脫長者) · 해당 비구(海幢比丘)로 나타낸 것이며, 

 

그 다음에는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부터 원력바라밀(願力波羅蜜) 등의 세 바라밀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세간에 들어가 활동하면서도 출세간의 지혜를 잃지 않고, 자비와 지혜가 자유자재하게 작용하도록 다스리는 수행으로, 이에 해당하는 선지식은 휴사 우바이(休捨優婆夷) 선인과 고행하는 바라문(婆羅門) 등으로 나타난다.

 

그 다음에는 세간과 출세간을 아우르는 지혜와 자비가 자유자재하게 작용하는 단계에 이르면, 여기서는 지혜바라밀(智波羅蜜)이 중심이 되어, 지혜가 자비를 일으켜서 자재하기 때문에 자행(慈行)이라하는 이름의 사자당왕의 딸인 자당왕녀(師子幢王女)로써 나타내고 있으니, 지혜가 왕과 같이 자유자재하므로 왕의 딸로서 나타낸 것이다.

 

제7주(第七住)에서는 자비를 닦아 지혜를 일으키지만,

제10주(第十住)에서는 지혜로부터 자비를 일으키는 자행(慈行)이므로 왕의 딸로서 나타낸 것이다.

이는 지혜바라밀(智波羅蜜)을 통해 지혜로 자비를 성취해서, 그 자비를 자유자재하게 발휘함을 밝힌 것이니, 

이는 오위(五位)를 닦아 나아가는 수행이 점차 깊어지는 과정에서, 각 지위에서마다 앞서 말한 4 가지 세분(勢分)의 차이와 공통점의 차별동이(差別同異)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여러 선지식(善知識)을 차례로 만나는 과정에서도 각각의 차별동이(差別同異)를 거듭 밝히는 것은, 이를 통해 비로소 오위를 행해(解行, 이해와 수행)에서 실천하는 행(行)의  같고 다름의 동이(同異)를 분명하게 요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십지(十地)의 법문 역시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미혹을 다스림에 네 가지의 차별동이(差別同異)가 있다.

첫째, 초지(初地)에서 제3지(第三地)에 이르기까지는 세간의 속에서 물들어 있는 습성을 다스려 출세간의 수행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둘째, 제4지 · 제5지 · 제6지에서는 출세간의 지혜를 갖추었으면서도 세간에서 그 지혜를 자유자재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습성을 다스리는 것이며, 

셋째, 제7지 · 제8지 · 제9지에서는 세간 속에 들어가 활동할 때 지혜와 자비를 자유자재하게 발휘하지 못하는 습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그러므로 제8지(第八地)의 지위에서는 모든 부처님께서 3 가지 가피의 삼가(三加)와 7 가지 권유의 칠종권발(七種勸發)을 베풀어 보살의 수행을 보호하고 북돋우시나니, 제8지의 문맥에서는 제9지와 제10지의 지혜바라밀(智波羅蜜)을 갖추어 밝히며,

세간에서 자비와 지혜를 자유자재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다스리는 수행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태자이셨을 때의 셋째 부인인 구파(瞿波)를 그 상징으로 삼은 것이니, 이는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이미 원만해졌음을 나타내며, 자비의 법에서 얻는 기쁨을 법열(法悅)을 뜻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선재동자가 십지(十地)의 법문을 나타내는 과정에서, 아홉 명의 천녀와 한 명의 부처님 아내가 있는 것은, 십지의 법문이 대자비의 문을 길러 원만하게 하고, 자비와 지혜를 자유자재하게 발휘하도록 하기 때문에 여천(女天)의 모습으로 이를 나타낸 것이니, 그 지위에 이르면 자세히 밝히겠다.

 

그러나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이타행(利他行)은 아직 자유자재롭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대략적으로 오위(五位) 수행의 승진하는 대의(大意)의 6 가지를 서술하면,

첫째, 십주(十住)는 처음으로 부처님의 불가(佛家)에 태어남을 밝히며, 번뇌의 현행 가운데 근본이 되는 거친 번뇌를 정사(正使)로로 다스려 제거하는 것을 나타내며, 

둘째, 십행(十行)은 세간을 따르는 현행의 번뇌와 습혹(習惑, 습관적인 미혹)을 다스림을 밝힌 것이며, 

셋째, 십회향(十迴向)은 큰 서원의 대원력(大願力)을 일으켜서, 지혜와 자비를 조화롭게 융합하여 세간과 출세간에 걸림 없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지위를 밝힌 것이며, 

넷째, 십지(十地)는 미세하게 축적된 습기를 다스리고 자비와 지혜를 길러 그 공덕을 원만하게 이루는 지위를 밝힌 것이며, 

다섯째, 십일지(十一地)는 보현행(普賢行)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지위인, 이에 해당하는 것이 보현행품(普賢行品)이며, 십정품(十定品) 이후도 여기에 해당된다.

여섯째, 성불의 지위는 수행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어 종결됨을 밝힌 것인,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이세간품(離世間品)은 불과(佛果)에 이르기 위한 수행을 마친 뒤에도 보현행이 영원히 지속됨을 밝힌 것이며,

법계품(法界品)은 전후의 일부(一部) 경전이 모두 법계(法界)를 체로 삼고 있음을 밝힌 것이니,

이와 같이 법계의 대지(大智)가 원만하게 통하면, 총체적으로 일법(一法)과 일시(一時)도 전후의 차별이 없는 것이니, 지혜로 비추면 볼 수 있을 것이다.

ㅡ오위 수행의 여섯 단계.
*십주: 부처님의 지혜를 향한 발심과 수행의 시작
*십행: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번뇌를 다스림
*십회향: 큰 서원으로 지혜와 자비를 조화시킴
*십지: 미세한 습기를 다스리고 지혜와 자비를 원만하게 함
*십일지: 보현의 이타행을 원만하게 함
*불과: 여래의 지혜가 완성됨.

이것은 수행을 단순히 번뇌를 없애는 과정으로만 보지 않고, 지혜와 자비를 점차 넓혀서, 마침내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이 원만해지는 화엄의 관점을 보여 줍니다.

 

ㅡ'법계의 대지(大智)가 원만하게 통하면, 총체적으로 일법(一法)과 일시(一時)도 전후의 차별이 없는 것'이란,

경전의 시간적 전후나 수행 단계가 일상적인 차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기보다, 궁극적인 법계의 관점에서는 모든 법이 서로 의존하며 원융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오위(五位) 가운데 차별적으로 전개되는 수행의 단계는 모두 초발심주(初發心住) 안에 갖추어져 있의니, 초발심주(初發心住)의 원행(願行)과 지혜(智)와 자비(悲)로서 두루 하나의 인(印)으로해서 원만하게 하기 때문에, 

가르침에서는 비록 수행의 순서를 앞뒤로 나누어 설명하지만, 원행(願行)과 지혜(智)와 자비(悲)의 법은 일시(一時)라서 때(時)도 다르지 않고 법 또한 차이가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발심한 선비(수행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수행하고 이와 같이 원만하게 해야 한다.

ㅡ가르침의 순서에서는 수행의 시작과 발전, 완성을 구분하나, 
법의 관점에서는 서원·수행·지혜·자비가 서로 떨어진 별개가 아니다. 
 

이는 여래의 부동지(不動智)라는 체(體)의 원만함을 여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불과(佛果)에 지혜와 자비의 시종(始終)이 서로 사무치는 것이며, 또한 일체 중생이 곧 부처님의 불국토라서 들고 나는 출입(出入)이 없음을 두루 보기 때문이다.

 

여래의 지혜를 미혹한 중생들을 교화하여 근본을 의지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지혜(自智) 안에서 모든 제불(諸佛)과 동일지(同一智, 동일한 지혜)라는 것을 두루 보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요, 

자신의 지혜(自智)와 다른 별도의 부처님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안과 밖, 멀고 가까움의 차별한 견해를 일으키지 않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요, 
하나의 지혜로운 일지인(一智印)으로 인(印)을 쳐서 정(情, 마음의 분별)의 크고 작고 길고 짧은 양(量)이 있음을 타파시키고자 하는 까닭이니, 

ㅡ一智印(일지인)은 하나의 지혜로 모든 법을 비추어 보는 것을 뜻합니다.
중생은 흔히 크고 작음, 길고 짧음, 안과 밖, 멀고 가까움 등의 차별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특정한 조건과 관점에 따라 성립하는 것입니다. 화엄의 지혜는 그 차이를 무조건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실체인 것으로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이 바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불종(佛種)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며,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법을 설하기 때문에 능히 법종(法種)이 끊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며,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부처님의 불지해(佛智海)와 동일함을 두루 깨달아서 부처님의 지견(佛知見)에 널리 들어가게 하는 것이므로 승종(僧種, 승가의 종자) 또한 끊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를 이와 같이 관찰하여, 마음(心)과 경계(境)로 하여금 이와 같이 서로 상응하도록 해야 하리라.

ㅡ불종(佛種)·법종(法種)·승종(僧種), 삼보의 계승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佛種(불종): 중생이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法種(법종):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이 전해지고 수행을 통해 이어지는 것.
僧種(승종):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며 전승하는 승가의 계승을 뜻합니다.
佛智海(불지해): 부처님의 깊고 광대한 지혜를 바다에 비유한 표현입니다.
佛知見(불지견): 부처님의 지혜와 바른 통찰을 뜻하며, 여기서는 중생이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고 그 지견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心境相應(심경상응): 마음과 그 마음이 마주하는 대상 또는 경계가 서로 상응하는 것.

 

ㅡ자신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화엄의 관점으로, 중생이 부처님의 지혜와 분리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지혜에 들어갈 수 있음을 깨닫도록 가르침을 전할 때, 불종과 법종과 승종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고, 
‘자신이 부처님의 지혜 바다와 동일하다’는 표현은 모든 중생이 이미 수행을 마친 부처와 완전히 똑같다는 뜻이라기보다, 중생의 지혜와 부처님의 지혜가 근본적으로 단절된 것이 아니며, 중생도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26)
십지품③ㅡ2
(1)
환희지
③ㅡ2

 

(앞의 "환희지(歡喜地)의 중의 제7지상(第七地相)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고(苦)을 관찰하여 자비심을 이루는 관고성비문(觀苦成悲門)을 5 부분으로 밝힌 분 전체의 18행을 말함)

이 한 단락의 18행의 경문에 대략 4 가지의 문(四門)의 분별을 세우리니,

첫째는 전체적인 진리의 체(體)를 들어 중생이 미혹되어 있음을 나태어 보여 주는 거체시미문(擧體示迷門)이고,

둘째는 범부가 그 체(體)를 미혹하여 괴로움을 이루는 범부미체성고문(凡夫迷體成苦門)이며,

셋째는 인연으로 생겨나는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알지 못하여 윤회하는 불료연생무체유전문(不了緣生無體流轉門)이고, 넷째는 보살이 참된 이치를 깨달아 중생의 고통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을 거두어 이끌어 주는 보살달진민고접생문(菩薩達眞愍苦接生門)이다.

ㅡ네 가지의 사문은?
①거체시미문(擧體示迷門): 참된 이치의 본체를 먼저 밝히고, 중생이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상태.
②범부미체성고문(凡夫迷體成苦門): 범부가 참된 이치를 미혹하여 괴로움과 업을 만들어 내는 과정.
③불료연생무체유전문(不了緣生無體流轉門): 모든 현상이 인연에 의해 생겨나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윤회하는 모습.
④보살달진민고접생문(菩薩達眞愍苦接生門): 보살이 참된 이치를 깨닫고 중생의 고통을 가엾이 여겨 그들을 돕는 모습.
4문은 중생이 괴로움에 빠지는 과정과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순서대로 보여 준 것입니다.

 

첫째, 체(體)를 들어 미혹을 제시하는 거체시미문(擧體示迷門)이란, 앞의 첫 3행의 경문이 이에 해당된다.

모든 부처님의 정법이 이와 같이 깊은 심심(甚深)하며, 이와 같이 적정(寂靜)하며, 이와 같이 적멸(寂滅)하며,

이와 같이 무상(無相)이라는 등을 들어 밝히고 있으나, 법부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사견(邪見)과 무명(無明)의 장야(長夜)에 덮히고 가려져서 고통의 흐름 가운데에서 전전함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묻겠습니다.

모든 중생은 본래 참된 이치와 지혜의 본체를 갖추고 있으며, 그 이치와 지혜는 여래와 다름이 없다고 하셨거늘,

그런데 어찌하여 미혹으로부터 온갖 괴로움의 고업(苦業)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ㅡ질문은 본래 진여의 이치와 지혜를 갖춘 중생이 왜 미혹하여 괴로움을 겪는가하는 것입니다.
 
▷답한다.

진여(眞如)의 이지(理智)는 그 체가 모두 자체성이 없는 무성(無性)이기 때문이다.

이에 무성(無性)의 이지(理智)는 능히 스스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며,

만약 스스로를 인식한다면 무성(無性)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중생의 여러 연(緣, 인연)의 경계를 따라 유전하면서 선과 악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대상의 경계를 따라 마음이 변하기 때문에 업에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떤 중생은 불보살이 고(苦)의 원인을 설하게 됨을 말미암아 바른 길을 찾게 되고,

어떤 경우는 스스로 고(괴로움)를 겪은 뒤에 그 괴로움을 염리(厭離, 싫어해서 여읨)를 내서 비로소 정견불고(正見不苦, 정견의 고통스럽지 않음)의 도(道)를 구하는 것이다.

ㅡ무성(無性)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 어떤 것이 다른 모든 것과 관계없이 독립적이고 영원한 본질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뜻이고, 진여 역시 고정된 실체로 붙잡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ㅡ예를 들면, 자신을 비난하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분노에 사로잡히면 거친 말을 하거나 상대방을 해치려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상황을 차분히 살펴보고 자신의 반응을 알아차린다면, 그러한 같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자극을 받더라도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행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업이 달라질 수 있는 그것이 대상의 경계에 따라 마음이 변하고, 그에 따라 업에 차이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중생의 미혹을 영원히 고정된 본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인연에 따라 움직이며, 그 흐름을 바르게 이해하고 다스리는 수행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염고(厭苦)하여 괴로움을 싫어하고 벗어나려는 마음이 아직 생기지 않았다면, 끝내 성언(聖言, 성인의 말씀)을 믿지 못해서, 스스로 이것이 진(眞)인지, 가(假, 거짓)인지, 괴로움(苦)인지 즐거움(樂)인지를 알지 못한 채,

단지 태어난 삶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싫어하거나 근심하는 마음도 내지 않는 것이다.

놀라고 두려워하며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한 치열한 번뇌로 괴로워하면서도, 그러한 상태를 전혀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이니, 

만약 스스로 깊이 부지런히 수행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잘못을 살펴서 질책하고, 게으르지 않게 여러 선정과 관찰의 정관(定觀)을 닦아 법계(法界)의 참된 진문(眞門)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끝내 괴로움의 근원(苦源)을 완전히 먈진할 수 없을 것이다.

ㅡ염고(厭苦) 는 삶 자체를 혐오하거나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겪는 괴로움의 원인을 이해하고, 그 괴로움을 일으키는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은 때때로 괴로움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당연한 삶의 일부로 여기거나,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둘째, 범부가 체를 미혹하여 괴로움을 이루는 범부미체성고문(凡夫迷體成苦門)이란,

뒤에 나오는 ‘범부의 마음이 삿된 견해에 빠진다(凡夫心墮邪見)’ 이하 ‘삼계의 밭에서 다시 괴로움의 싹이 돋아난다(於三界田中復生苦芽)’에 이르기까지의 6 행의 경문이 이에 해당된다.

이 단락에서 중생이 겪는 괴로움(苦)와 관련하여 열여덟 가지 번뇌의 18종번뇌(十八種煩惱)가 생겨나는데,

이 번뇌들은 모두가 2 가지의 이종번뇌(二種煩惱)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그렇다면 무엇이 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근본무명(根本無明)으로, 긴 밤의 장야(長夜)에 걸쳐 어둠에 가리우는 것이며, 

둘은 삿된 견해의 사견(邪見)으로, 대상의 경계를 좇아 끊임없이 유전하면서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무명은 근본지(根本智)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이루어야 비로소 지혜의 작용인 지용(智用)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성문·연각·보살의 삼승(三乘)이 닦는 공관(空觀)만으로는 이 두 가지를 끊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ㅡ강조하는 수행은 세 가지로서, 
①심자근수(深自勤修):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꾸준히 수행하는 것.
②책궁비해(責躬匪懈):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살펴 번뇌와 집착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차리는 것.
③정관(定觀): 선정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과 현상의 실상의 관찰을 함께 닦는 것입니다.

 

ㅡ근본지(根本智)는 법계의 참된 이치를 직접 깨닫는 근본적인 지혜이고,

지용(智用)은 그 지혜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발휘되는 작용입니다.

차별지(差別智)와 연결하면, 근본지는 진리의 근본을 깨닫는 지혜이고 차별지는 그 지혜를 바탕으로 여러 현상과 중생의 상황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ㅡ공관(空觀) 은 모든 현상이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 없이 인연에 따라 생겨난다는 사실을 관찰하는 수행입니다.  

 

즉, 괴로움을 제대로 알아차리고 →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을 일으키며 → 스스로를 돌아보며 선정과 관찰을 닦음으로서 → 근본무명과 삿된 견해의 뿌리를 깨달음으로 인하여 → 지혜의 작용을 온전히 드러냄

 

그러므로 승만경(勝鬘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그리고 청정한 불국토에 머무는 보살들은 현재 드러나 작용하는 번뇌인 현행번뇌(現行煩惱)를 억누를 수 있을 뿐, 번뇌를 완전히 끊었다(斷)"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번뇌를 절복(折伏)하여 억누르는 데 그치기 때문에 변역생사(變易生死)를 받으며,

보살은 자신의 뜻과 원함을 따라 태어나는 수의락생신(隨意樂生身)을 얻는다.

이들 모두는 자타(自他)의 불찰을 기뻐하고 싫어하는 흔염(忻厭)의 마음과 자신과 다른 이의 불국토(自他佛剎)에 대해서도 분별하기 때문에 아직 법계의 보광명지(法界普光明智)를 얻지 못하는 것이며,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하나의 지혜 바다인 동일지해(同一智海)를 이루어, 영원히 삿된 견해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취사선택의 모든 견해의 흐름인 일체의 견류(見流)를 아직 끊지 못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의 무명(無明)에 미혹되어 망령되게 염사(厭捨, 싫어하여서 버림)의 마음을 일으키며,

대지(大智)를 미혹한 까닭에 진여(眞如)와 공상(空相)을 따로 증득하려 하는 것이다.

ㅡ현행번뇌(現行煩惱)는 탐욕·분노·어리석음 등 번뇌가 실제로 일어나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는 상태.

ㅡ절복(折伏)은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다스리는 것.

ㅡ단(斷)은 번뇌의 근본 원인을 끊는다는 뜻으로,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 화를 내지 않도록 참는 것은 번뇌를 억누르는 수행에 해당할 수 있고,

자신과 타인을 고정된 실체로 여기고 집착하는 근본적인 미혹까지 깨닫고 벗어나는 것은 더 근본적인 차원의 변화입니다.
다만 이 주석에서 성문·연각·정토 보살을 설명하는 방식은 화엄 일승의 관점에서 다른 수행 경지를 비교한 것으로, 이를 불교 전통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판정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 주석의 교판적 입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합니다.

ㅡ그러므로 이 문맥에서는, 진여나 공을 깨닫는 수행 자체가 아니라, 진여와 공을 다른 모든 현상과 분리된 별도의 경지나 대상으로 붙잡으려는 태도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화엄의 일승 관점에서는 공과 진여를 깨닫는 지혜가 현실의 모든 현상과 단절되는 것이 아닌, 진여를 깨닫는 지혜는 차별적인 현상과 그 현상들이 서로 의존하며 성립한다는 사실까지 밝혀야 합니다.
따라서 대지(大智)는 공을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공의 이치와 다양한 현상의 작용을 함께 꿰뚫는 지혜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ㅡ                분단생사(分段生死)                                                               변역생사(變易生死)

의미 업에 따라 일정한 수명과 형태를 지닌 몸을 받아 태어나고 죽는 생사 수행자의 존재가 미묘하게 변화하고 전환되는 생사
주요 대상 일반적인 윤회 중생 대승불교의 특정 교리 체계에서 설명하는 수행자
특징 업과 번뇌에 의해 생사의 반복이 이루어짐 보다 미세한 변화와 수행의 단계에 따른 존재 상태를 설명함

이 구분은 대승불교의 여러 논서와 종파에서 세부적으로 다르게 설명될 수 있으므로, 변역생사를 모든 수행자가 반드시 겪는 하나의과정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정명경(淨名經, 유마경維摩經)에서, 

“일체 번뇌의 모든 진로문(塵勞門)이 모두 부처의 씨앗인 불종(佛種)이 된다(一切煩惱諸塵勞門,以爲佛種)”고 하였으니, 

이러한 무명의 사견(邪見)도 일승(一乘)의 보살에게는 이를 깨달아 지혜로 전환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삼승(三乘)의 수행자는 현행(現行)하여 현재에 드러난 번뇌만을 절복시키므로, 이를 두고 번뇌를 남겨 생을 이어 가게 하는 유혹윤생(留惑潤生)이라고도 말하는 것이다.

 

ㅡ이 주석에서의 일승과 삼승의 차이

삼승의 수행을 설명하는 관점                                                 화엄 일승의 관점
현재 드러나는 번뇌를 억누르고 다스림 번뇌의 근본을 지혜로 깨달음
번뇌를 남겨 두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생을 이어 감(留惑潤生) 번뇌와 지혜의 관계를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밝힘
공의 이치를 관찰하여 집착에서 벗어남 공의 이치와 법계의 무한한 지혜 작용을 함께 드러냄

이표는 이 부분의 주석을 요약한 것이며, 삼승의 수행 전체를 완전하게 설명하는 표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모두 지혜의 참된 경지에 상응하여 말한 것이 아니며, 일승의 가르침과는 같지 않는 것이다.

일승에서는 부동지(不動智)를 바탕으로 본래 한량없고 자재로운 작용의 무변대자재용(無邊大自在用)의 문(門)이 갖추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니, 예를 들어 십신위(十信位) 가운데 열 분의 지혜로운 부처님의 십개지불(十箇智佛)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부동지불(不動智佛)을 으뜸으로 삼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이와 같이 무명과 사견(邪見)은 일체의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며, 그 밖의 나머지 번뇌도 모두 이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ㅡ부동지(不動智)는 흔들리지 않는 지혜로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의 근본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상황에 맞추어 지혜를 자유롭게 발휘한다는 뜻으로, 부동지를 바탕으로 지혜의 작용이 펼쳐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무명과 사견이 일체 번뇌와 더불어서 근본을 짓고, 그 나머지 이하의 일체 모든 번뇌가 다 이로부터 생기는 것을 총체적으로 수번뇌(隨煩惱)라 칭하나니, 수번뇌(隨煩惱)라고 총칭하는 것은 근본번뇌(根本煩惱)에 의지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명(無明)과 사견(邪見)은 서로 관련되어 있어서,
경(境, 경계)로 인하여 (인연으로 해서) 식(識)이 일어나며,
육근(六根) 가운데서 색(色) 등의 대상을 인식할 때 명색(名色)이 육근에 경계로 작용한다.

경계를 인연으로 식의 종자가 대상을 취하여 집착하는 것을 사견(邪見)이라 하고,

참된 이치와 지혜의 이지(理智)를 미혹하는 것을 무명(無明)이라 한다.

 

명색과 식(識)의 종자로 사견을 일으키게 되며, 이 명색(明色) · 식(識) · 사견(邪見)이라는 세 가지가 6근(六根) 각각의 근마다 갖추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근(耳根)으로 소리를 들으면, ‘이와 같은 소리’라고 알아차리는 과정에도 명색(明色) · 식(識) · 사견(邪見)이라는 세 가지가 작용하는 것이니, 안근(眼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근(意根)도 마찬가지로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명색(明色)과 식(識), 그리고 육근(六根)의 관계를 살펴보면, 명색(名色)은 식(識)의 대상인 경계가 되고,

육근(六根)은 식(識)이 일어나는 근거가 되며, 식(識)은 대상을 취하고 생각하여 분별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ㅡ근본번뇌(根本煩惱)는 다른 번뇌가 일어나는 근본이 되는 번뇌이며, 

수번뇌(隨煩惱)는 근본번뇌에 의지하거나 그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번뇌를 가리킵니다.  

 

ㅡ육근·명색·식의 관계, 즉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육근(六根)이 대상과 접할 때 인식이 일어납니다. 이 글은 그 인식 과정에 명색(名色)과 식(識)이 관여하고, 그 과정에서 잘못된 견해와 집착이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소리를 들을 때 단순히 소리를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소리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며 좋고 싫음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그러한 인식 과정과 번뇌의 발생을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ㅡ원문에서 명색(名色)·식(識)·사견(邪見)을 세 가지로 묶어 육근 각각에 갖추어져 있다고 설명하는 방식은 이 주석의 독특한 해석입니다. 이를 십이연기(十二緣起)의 명색과 식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과 동일하게 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이 명색(名色)을 여의지 않고 증장(增長)해서 6처(六處)의 취락(聚落, 마을)이 생겨나고,

그 가운데에서 마주하여 촉(觸)이 생기고, 촉이 수(受)를 낳고, 수가 애(愛)를 낳고, 애가 취(取)를 낳고,

취를 인연으로 하여 유(有)가 생기며, 유(有)를 인연으로 하여노사(老死) 등이 생긴다”고 한 것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교(憍)와 만(慢)의 두 가지는 증장무명(增長無明)이니,  능히 고(苦)의 종자를 증장함을 이룸으로써 꺾거나 파괴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경문에서 “교만당(憍慢幢)을 세운다”고 한 것이다.

'갈애(渴愛)의 그물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애착이 무명을 윤택하게 적셔 주는 작용의 진윤무명(津潤無明)을 하는 것이니,

이는 능히 생사를 윤택하게 해서 항상 유전하기 때문인 것으로,

애착이 아니면 몸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애착할 대상이 없으면 몸을 받아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아첨과 속임수의 첨광(諂誑)은 빽빽한 숲과 같은 조림무명(稠林無明)이니, 스스로를 미혹한 가리움이 넓고 많기 때문이며, 또한 범부가 항상 행하여 잠시도 끊이지 않기 때문이니, 이는 선정(禪定)의 수행만으로 제어할 수 있는 업이 아니다.

 

간(慳, 간탐)과 질(嫉, 질투) 두 가지는, 항상 집착하고 헤아리는 상계무명(常計無明)이니, 악도(惡道)에 태어나 생사를 겪는 것에의 강힌 원인인, 승인(勝因)을 더하기 때문에 경문에서도 “마음이 간(慳, 간탐)과 질(嫉, 질투)에 상응하면서 이를 버리질 않으면, 끊임없이 여러 갈래의 제취(諸趣)의 생(生)을 받게 되는 인연을 짓게 된다”고 한 것이다.

 

탐욕(貪)·성냄(恚)·어리석음(愚癡)의 탐애우치는 온갖 업을 쌓아 모으는 집업무명(集業無明)이니,

그러므로 경문에서 “탐에우치(貪恚愚痴)로 모든 업을 쌓아서 밤낮으로 증장한다”고 한 것이다.

 

분노와 원한의 분한무명(忿恨無明)은 성냄을 일으키는 인(因, 원인)이 되는 무명(無明)이니,

그러므로 경문에서, “분한(忿恨, 분노와 원한)의 바람으로 심식(心識)의 불길을 불어 일으켜서 치열하게 타올라 쉬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욕류(欲流)ㆍ유류(有流)ㆍ무명류(無明流)ㆍ견류(見流)의 사류(四流)는 끊임없이 흘러 멈추지 않는, 상류무명(常流無明)으로 항상 유전하여 쉬지 않으니, 이 네 가지 흐름의 대하(大河)가 항상 쉬지 않고 흘러서 거대한 고해(苦海)를 이룸을 밝힌 것이다.

ㅡ사류(四流): 
①욕류(欲流) 감각적 욕망의 흐름
②유류(有流) 존재와 생사를 지속시키는 흐름
③무명류(無明流)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명의 흐름
④견류(見流) 그릇된 견해와 집착의 흐름

이러한 비유의 요점은 번뇌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반복적으로 강화될 때, 그 흐름 전체가 생사윤회를 지속시키는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에 어떠한 생각과 집착도 일어나지 않는 무념(無念)이라면, 모든 흐름의 흐름(諸流)가 단박에 고갈되고, 반대로 지혜가 드러나게 되면 곧 법의 흐름인 법류(法流)를 이루는 것이니,

이와 같은 12유지(十二有支)가 서로 주(主)와 반(伴)이 되기에, 하나의 지분인 1지(一支) 안에 12 지분의 12유지이 모두 있어서, 이 모두를 합하면 144 가지의 유지(有支)가 되어서, 이와 같이 끝없는 생사윤회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ㅡ십이유지(十二有支), 곧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열두 지분 각각이 서로 주체가 되기도 하고 다른 지분을 도우는 상호 관계적인 것으로, 그 결과 12 X 12 = 144라고 한 것으로, 이는 열두 지분의 상호 관계를 확장하여 설명한 수일 뿐입니다.

 

이상 18 가지 번뇌와 무명은 모두 12유지를 근본으로 삼고, 12유지는 명색(名色)과 사견(邪見)을 근본으로 삼으니,

만약 작위 없는 무작정문(無作定門)으로 이를 비추어 인(印, 인가)을 치면, 8만 4천의 진로(塵勞, 번뇌)가 모두 법의 흐름인 법류(法流)의 지해(智海, 지혜의 바다)가 되는 것이다.

ㅡ명색(名色): 정신적·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진 대상의 영역

 

이와 같이 무명의 명색이 오근(五根)에 대응하여서 촉(觸)ㆍ수(受)ㆍ상(想)ㆍ행(行)이 있고, 그러한 모두로서 마음이 일어나고, 대상을 취하는 작용으로 주(主)를 삼으며,

이와 같은 눈·귀·코·혀·몸의 5근(五根)과 촉(觸)ㆍ수(受)ㆍ상(想)ㆍ행(行)의 9가지의 9연(九緣)이 함께 일어나서 대상의 경계를 요별(了別)하여 아는 것을 식(識)이라 이름한다.

ㅡ촉(觸): 감각기관과 대상, 인식이 접하는 작용

수(受): 접촉에 따른 느낌

상(想): 대상을 알아보고 표상하는 작용

행(行): 의도와 여러 정신적 형성 작용

식(識):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

 

이러한 10가지의10사(十事)를 모두 통틀어 무명(無明)이라 이름하고, 사견(邪見)이라 이름하기도 하는 것이니,

이는 일체의 번뇌를 일으켜 마음과 경계를 미혹한 것을 무명이라 칭하는 것이며,

경계(境)란 것은 명색(名色)이 이에 해당되니, 6근(六根)이 경계를 대하면 사견(邪見)이 따라 생기하는 것이다.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4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26)
십지품③ㅡ1
(1)
환희지
③ㅡ1
 

(23권의 끝 부분에서 제4단락의 57행 반의 경문을 열두 단락으로 나눈 것 중에서 여섯 번째)

여섯째, “또 대원을 발해서(又發大願)” 이하 “휴식함이 없다(無有休息)”에 이르기까지 5행 반의경문은,

바라건대, 일체 삼계(三界)의 사생(四生)의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 모두가 일체지지(一切智智)의 지위에 안주하게 하겠다는 광대한 서원을 쉬지 않고 실천함을 밝힌 분(分)이다.


이 한 단락은 삼계(三界)의 사생(四生)을 교화하는 법을 밝힌 것으로, 

먼저 욕계(欲界)의 마음이 강한 중생에게는 제법이 고(苦)ㆍ공(空)ㆍ무상(無常)이라는 이치를 관찰하도록 권해서, 욕망고 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대치하여 다스리게 하고, 모든 선법(善法)을 닦아서 청정한 정(定, 선정)의 즐거움을 익히고, 마음의 더러움을 청정히 다스려서 탐욕(貪) · 성냄(嗔) · 어리석음(癡) · 교만(慢)을 여의고, 욕계의 업(業)을 타파해서 고요하고 청정한 적정(寂靜)의 즐거움을 얻게 한다.

ㅡ욕계(欲界)의 중생: 욕망과 번뇌를 다스리는 수행.

욕계는 감각적 욕망과 집착이 강하게 작용하는 세계이다. 
여기서 공(空)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독립적이고 영원불변하는 실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여러 인연에 의지하여 성립한다는 뜻이다.

무상(無常)은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욕망을 무조건 억누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집착이 괴로움을 일으키는 이치를 바르게 알아서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색계(色界)의 마음이 많은 중생에게는 생각과 분별을 쉬게 하는 선정인, 식상선(息想禪)에 머물게 하여서, 유루(有漏)의 선계(善界)에 태어나는 방편을 가르치고, 또한 십바라밀(十波羅蜜)과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를 닦기를 권해서

이를 통해 방편을 원만히 성취하여서 본래 작위가 없는 큰 고요함의 대적정문(大寂定門)에 들게 하며,

식(息)을 여의고 상(想)을 조복해서 일체지(一切智)를 드러내어 한량없는 선교방편의 지혜인 교방편지(巧方便智)를 성취하여서고 중생을 교화하도록 한다.

ㅡ색계(色界)의 중생: 선정에 머물지 않고 지혜와 자비를 완성하는 수행
색계는 욕계의 거친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났지만, 미세한 정신적 작용과 선정에 대한 의존이 남아 있는 세계이다.
선정의 고요함 자체를 최종적인 깨달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으로, 마음이 고요해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고요함을 바탕으로 지혜와 자비를 넓혀 중생을 교화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대적정문(大寂定門)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작용에 얽매이지 않는 크고 고요한 선정의 문을 가리킨다. 그러나 보살은 그 고요함에 머물러 중생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무량한 선교방편지(善巧方便智)를 성취하여 중생의 상황에 맞게 교화한다.

 

무색계(無色界)의 마음이 강한 중생에게는 방편으로 교화해서 널리 듣고 배우는 지혜의 광다문혜(廣多聞慧)를 닦게 하고,

세간의 모든 일과 현상을 분별하여 이해하게 함으로써 미혹하거나 걸림이 없게 하며,

또한 선정에 치우치거나 마음이 산란해지는 어느 한쪽에도 머물지 않고, 대원력(大願力)을 일으키게 하며,

그리하여 신통(神通)을 성취하여 불·법·승(佛法僧) 삼보께 공양하고,

일체종지(一切種智)와 일체지지(一切智智)를 닦아서 일체의 한량이 없는 모든 중생을 교화해서, 마침내 모두 성불(成佛)하도록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서원을 일으키고 그 마음을 조복하여, 모든 중생이 일체지지(一切智智)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근본지(根本智) 안에서 차별지(差別智)를 닦는 것이다.

 

근본지(根本智)는 작위가 없는 선정의 무작정(無作定)에 의지하여 나타나고,
차별지(差別智)는 근본지에 의지하여 수행을 더하고 관찰하는 지혜의 가행기관(加行起觀)를 일으킴으로써 비로소 성취하는 것이며, 혹 어떤 경우에는 자력으로 끝까지 이루지 못하기도 하므로, 먼저 도달한 부처님과 보살에게 배우고 익혀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ㅡ무색계(無色界)의 중생: 선정에 치우치지 않고 지혜와 서원을 넓히는 수행
무색계는 물질적 형상에 대한 의식이 매우 미세해지고, 정신적 선정이 중심이 되는 세계이다.
여기서는 지식이나 선정의 깊이만으로 수행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넓히고 큰 서원을 세워,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고 모두 성불(成佛)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ㅡ일체종지(一切種智): 모든 존재의 다양한 양상과 차이를 두루 아는 지혜.
일체지지(一切智智): 글자 그대로는 ‘일체지의 지혜’를 뜻하며, 대승의 문맥에서는 부처님의 원만한 지혜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ㅡ'근본지(根本智) 안에서 차별지(差別智)를 닦는다'는 말이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근본지(根本智)는 존재의 참된 이치를 깨닫는 근본적인 지혜이고,

차별지(差別智)는 중생의 성향과 처지, 인연의 차이를 살펴 그에 맞는 가르침과 방편을 사용하는 지혜이다.
예를 들어, 같은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집착을 내려놓는 가르침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비와 보시를 실천하는 가르침이 필요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선정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는 지도가 필요할 수 있다.
가르침의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그 바탕에는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깨달음으로 이끌려는 지혜와 자비가 있다.
그러므로 근본지와 차별지는 서로 떨어진 두 종류의 지혜가 아니다. 

근본지는 교화의 바탕이 되고, 차별지는 그 근본지에 의지하여 각 중생에게 알맞은 방식으로 드러나는 지혜이다.


일곱째, “또 대원을 발해서(又發大願)” 이하 “휴식함이 없다(無有休息)”에 이르기까지 4행의 경문은,

바라건대, 지혜로써 거칠고 미세한 추세세계(麤細世界)가 얼마나 광대하고 무한한지를 분명히 요달함을 밝힌 분(分)이니,

형상(形狀)이 있는 세계를 추(麤)라 칭하고 형상이 없는 세계를 세(細)라 칭한다.

어지럽게 머무는 난주(亂住)라는 것은 다양한 종류(類)의 중생이 섞여서 거주하는 것이니, 이는 염부제(閻浮提)와 같이 다양한 중생이 뒤섞여 살아가는 잡거(雜居)의 세계가 이에 해당된다.

옆으로 놓인 세계인 측주(側住)는 예컨대 4천왕(四天王)이 머무는 곳과 같은 곳이 이에 해당되며,

거꾸로 놓인 세계인 도주(倒住)는 말벌의 집인 호봉소(胡蜂巢)와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되며,

바르게 놓인 세계인 정주(正住)는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ㅡ세계의 여러 형태를 밝히는 이유
세계느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하나의 모습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중생의 종류와 업, 그들이 머무는 방식에 따라 세계는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표현을 오늘날의 물리학적 우주 구조나 생물학적 분류와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되고, 화엄의 세계관으로 그러한 무한한 차이와 다양성을 설명한 것이다.

 

약입(若入)이라는 것은, 중생이 다만 들어가기만 하고 나가지 않는 것으로, 땅속에 사는 중생과 같은 경우를 말하며, 

약행(若行)이라는 것은, 가령 사람 등의 몸 속에 8만 4천의 미물이 거주하고 있음에도 사람이 다니고 머물고 앉거나 눕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가 이에 해당되며,

약거(若去)라는 것은, 가령 흐르는 물에 거주하는 중생과 같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말한다.

제석천의 그물과 같은 차별의 제망차별(帝網差別)이라는 것은, 천제의 그물에서 빛과 그림자가 중중(重重, 겹겹으로)으로 서로 비추고 서로를 받아등이는 것과 같으며,

이와 같이 세계들이 겹겹이 서로 함께 머무는 것이 곧 화장장엄세계(華藏莊嚴世界)인 것이다.

이 세계는 중생의 세계해(世界海)와 함께 머물면서도 서로의 업을 방해하지 않는 업불상방(業不相妨)인 것이, 마치 제서천의 제망(帝網)이 서로서로 용납하여 받아들이면서 함께 머무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각각의 중생은 자신의 업에 따라 서로를 보고 인식하는 것이다.

ㅡ“업이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業不相妨)”는 것은 각 중생이 자신의 업에 따라 세계를 경험하면서도, 그 차이 때문에 전체 세계의 상호 관계가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세계에 함께 살더라도 중생마다 업과 인연이 다르므로 경험하는 세계의 모습은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는 서로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 아닌, 각각의 세계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관계를 맺으며 함께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계가 무수히 다양하면서도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을 제망(帝網)의 비유를 통해 드러내는 화엄의 상즉상입(相卽相入) 사상이다.

 

가령 경문에서 “일체종(一切種)과 일체지지(一切智智)”라고 한 것은, 보살의 대자비가 모든 수행의 씨앗이 되고,

대원력이 이를 도와서 일체지(一切智)를 이루도록 돕고, 선정(定)을 통해 차별지(差別智)가 드러나며,

관찰하는 지혜(觀)가 이를 도와 완성하게 한다.

(큰 서원은 지혜의 성취를 돕고, 선정은 차별지를 드러내며, 관찰은 그 지혜가 구체적으로 작용하도록 돕는다)

총체적으로는 이러한 렇게 알라. 모든 지혜의 문은 근본지(根本智)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근본지로부터 한량없는 지혜의 문이 펼쳐진다는 뜻이다.


여덟째, “또 대원을 발해서(又發大願)” 이하 “휴식이 없다(無有休息)”에 이르기까지 6행의 경문은,

바라건대, 불국(佛國)이 상호간에 사무쳐 들어가서 장엄함을 밝힌 분(分)이니,

이 1단락은 지혜 경계에 들어가매 불찰이 빛과 그림자 같아서 서로 참여하여 나타남을 밝힌 것이다.

(이 단락은 지혜의 경계에 들어가면 여러 불국토가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 비추고 서로의 모습 속에 나타나며, 상호 간에 드러나고 어우러짐을 밝힌 것이다.)

ㅡ불국토들이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 비추고 나타난다고 한 것은, 각 세계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하고 서로를 드러낸다는 화엄의 세계관을 보여 주는 것으로,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사상입니다.

 

아홉째, “또 대원을 발해서(又發大願)” 이하 “휴식함이 없다(無有休息)”에 이르기까지 7행의 경문은,

바라건대, 모든 보살의 지(志)와 행이 똑같아서 원한이나 질시가 없음을 밝힌 분이다.

ㅡ수행은 개인의 깨달음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열째, “또 대원을 발해서(又發大願)” 이하 “휴식함이 없다(無有休息)”에 이르기까지 5행 반의 경문은,

바라건대, 퇴보함이 없는 불퇴륜(不退輪)을 타고 보살행을 행해서 신(身)ㆍ어(語)ㆍ의(意)의 업으로,

다른 이들이 보고 듣고 만나는 모든 인연이 헛되이 지나가지 않기를 서원을 밝힌 분이다.

 

열한째, “또 대원을 발해서(又發大願)” 이하 “휴식함이 없다(無有休息)”에 이르기까지 10행의 경문은,

바라건대, 일체 세계에 중생의 욕망과 근기에 따라서 성불(成佛)과 열반(涅槃)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 보일 것을 밝힌 분이다.

 

열두째, “불자야” 이하 2행의 경문은,

열 가지 대원(大願)으로 다함 없는 서원의 무진원(無盡願)을 원만케 함을 모두 매듭지음을 밝힌 분이다.

 

제5의, “불자야, 이 대원은” 이하 7행 반의 경문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누겠으니,

하나. 앞서의 열 가지 다함 없는 원을 10진구(十盡口)로써 능히 성취함을 밝힌 분으로, 이 단락을 다시 두 단락으로 나누나니,

첫째 “불자야” 이하 “중생계가 다하면 나의 원(願)도 곧 다라리라(衆生界盡我願乃盡)”에 이르기까지 5행 반의 경문은,

십진구(十盡句)를 밝힌 분으로, 이는 중생계와 그에 관련된 모든 조건이 다할 때에야 비로소 서원이 다한다는 뜻을 여러 측면에서 드러내 밝힌 분이다.

 

둘째 “그리하여 중생계가 다하질 못한다(而衆生界不可盡)” 이하 “궁진함이 없다(無有窮盡)”에 이르기까지 2행의 경문은,

서원의 다함 없음을 밝힌 분으로, 중생계가 다할 수 없으므로 보살의 서원 또한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간(世間)이 전전하고, 법(法)이 전전하며, 지혜(智)가 전전하고, 중생계(衆生界)가 전전한다고 한 것은,

중생이 삼계(三界) 안에서 끊임없이 윤회하면서 유전(流轉)고, 법의 유전과 지혜의 유전을 밝힌 것이니,

중생계가 다하면 보살의 원행(願行, 서원과 수행)도 비로소 다하겠지만,

이와 같이 중생계가 다함이 없으므로 보살의 원행(願行, 서원과 수행)도도 다함이 없는 것이다.

ㅡ전(轉) 은 단순히 움직인다는 뜻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고 변화하며 순환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간전(世間轉): 중생이 살아가는 세간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법전(法轉): 법이 전개되고 작용하며, 중생을 교화하는 가르침이 이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지전(智轉): 지혜가 여러 상황과 대상에 따라 작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중생계의 전전: 중생이 삼계(三界), 곧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안에서 생사를 거듭하며 윤회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섯째, ‘불자여(佛子)’ 이하의 한 단락은 여덟 행의 경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열 가지 다함 없는 큰 서원의 대진대원(十盡大願)을 세움으로써, 열 가지 부드러운 마음의 십종유연심(十種柔軟心)을 얻게 됨을 밝힌 것이며,

둘째, 열 가지 믿음의 십종신(十種信)을 얻게 됨을 밝힌 것이며,

셋째, ‘요점을 들어 말하면의 거요언지(擧要言之)’ 이하 한 행의 경문에서 전체를 매듭지은 것이니, 경문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ㅡ부드러운 마음의 유연심(柔軟心)은 단순히 성격이 온순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맞추는 마음만을 뜻하지 않고, 아집과 고집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른 중생의 상황과 고통을 받아들이며, 자비와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유연한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ㅡ십종신(十種信)은 서원을 세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의 길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게 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1. 서원의 무궁함 — 중생계가 다하지 않는 한 보살의 서원과 수행도 끝나지 않습니다.
2. 마음과 믿음의 성숙 — 다함 없는 서원을 세움으로써 부드러운 마음과 굳건한 믿음을 기릅니다.
3. 고통을 관찰하여 자비를 실천함 — 중생의 고통을 깊이 살피고, 부처님의 광대한 가르침에 의지하여 자비행을 펼친다는 순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제7, 한 단락의 18행의 경문을 다섯 단락으로 나누겠으니,

이 단락은 환희지(歡喜地)의 중의 제7지상(第七地相)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고(苦)을 관찰하여 자비심을 이루는 관고성비문(觀苦成悲門)을 밝힌 것이다.

첫째, “불자야” 이하 “이같이 광대하다(如是廣大)"에 이르기까지 3행의 경문은,

부처님의 불정법(佛正法)이 지극히 광대함을 드러낸 분이며,  

 

둘째, ‘그러나 범부의 마음은 삿된 견해에 떨어진다(而凡夫心墮邪見)’에서 ‘삼계의 밭에서 다시 괴로움의 싹이 돋아난다(於三界田中復生苦芽)’에 이르기까지의 여섯 행의 경문은,

범부의 마음이 삿된 견해에 빠져 고취(苦趣)에 태어나 그 괴로움의 상속(相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습을 밝힌 분이며,

 

셋째, ‘이른바(所謂)’에서 ‘이와 같이 중생은 괴로움의 무더기를 낳고 자라게 한다(如是衆生生長苦聚)’에 이르기까지의 네 행의 경문은,

십이인연(十二因緣)의 각 지분(支分)이 중생의 생겨남을 일으키는 인(因)이 됨을 밝힌 분이며, 

 

넷째, ‘이 가운데 모든 것은 공하다(是中皆空)’에서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不覺不知)’에 이르기까지의 2행의 경문은,

중생이 자신의 몸이 공한 것이며 고정된 자아가 없다는 신공무아(身空無我)의 사실을 알지 못함을 밝힌 분이며, 

 

다섯째, ‘보살은(菩薩)’에서 ‘대자광명지(大慈光明智)’에 이르기까지의 3행의 경문은,

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보고 자비롭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의 자비와 연민을 일으킴을 밝힌 분이다.

ㅡ삿된 견해와 무명 → 십이인연에 따른 괴로움의 발생과 반복 → 공과 무아를 알지 못하는 집착 → 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보고 일으키는 자비심
화엄의 관점에서 지혜와 자비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중생의 괴로움을 깊이 이해하는 지혜가 그들을 돕고자 하는 큰 자비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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