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2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26) 십지품(十地品)① ㅡ4
1. 환희지(歡喜地)① ㅡ4
(두 번째의 승진의 단계를 세 가지 문으로 나눈 것 중 두 번째에서 지위에 따라 닦아 나아가는, 수위진수차제(隨位進修次第)를 설명함에 있어서 10 가지의 문을 세운 것에서).
2-4. 대원(大願)으로 이(理)와 사(事), 비(悲)와 지(智)를 원융시켜 다함이 없는 무진문(無盡門)이니,
곧, 제5회인 도솔천궁에서 10회향을 설하여 다함이 없는 무진대원(無盡大願)으로 이지대비(理智大悲)를 원융하게 하여 보현행을 원만하게 하는 것이니,
열 개의 불과(佛果)의 이름의 첫 글자가 묘(妙)인 것은 이 지위의 과(果)이며,
열 개의 보살 명칭의 아랫 글자가 모두 같은 당(幢)인 것은 이 지위의 수행하는 사람을 나타낸 것이며,
열 개의 세계 명호가 묘(妙)인 것은, 이 지위의 수행하는 법이니,
이지(理智)의 비원(悲願)과 만행의 묘용이 세계가 된 것을 밝힌 것이다.
이는 선재동자가 법을 나타내는 가운데에서 육향 장자의 청련화를 본 것이, 이 지위의 법이 이지자비(理智慈悲)의 원행(願行)과 일체의 다함 없는 무진차별지혜(無盡差別智慧)와 차별의 원행(差別願行)으로서 회향의 꿀과 합쳐서 한 알의 계(戒)ㆍ정(定)ㆍ혜(慧)의 향(香)을 만들고,
의지 함이 없는 무의주지(無依住智)로서 법계에 두루 하면서 색신을 대현(對現)하여, 그 병을 따라 조복하면서도 5분법신향(五分法身香)과 더불어 집착하는 바가 없는 것이, 마치 청련화가 색깔과 향이 제일이지만 집착할 바가 없는 것과 같으며,
원(願)ㆍ지(智)ㆍ비(悲)와 법신과 10바라밀과 4섭법과 4무량심과 37조도분과 세간의 출세간의 법을 화합해서 다 함께 일법(一法)을 만드는 것이 마치 향을 만듬에 있어서 일체의 온갖 향들을 합쳐서 한알의 일환(一丸)으로 만드는 것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2-5. 수행을 쌓아 덕을 성취하는 온수성덕문(蘊修成德門)이니,
제6회의 타화자재천궁에서 10지법(十地法)을 설한 것은, 앞에서의 십회향(十廻向)의 서원과 수행의 원행(願行)을 성취하여 덕행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는 길은 오직 10회향의 법을 닦는 것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불과(佛果)의 경지에 대해서도 다만 10회향 중의 묘용(妙用)의 동일한 공(功)을 취할 뿐, 따로 안립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타화자재천왕(他化自在天王)이 멀리서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서 법좌를 펴서 부처님을 맞이하는 등의 일이 없으니,
이는 10지(十地) 중의 법칙(법리)이 마치 10회향(十廻向)의 융화회통으로 종결된 것과 같은 것이나,
다만 그에 대한 친숙함(익숙함)이 같지 않은 것이며, 다시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다만 십지(十地)와 십일지(十一地)의 행문(行門, 수행)의 관지(觀智)로써 오히려 앞서의 전과(前果)를 자량하는 것은 마치 복채(菔菜, 무우)의 잎이 길어서 뿌리를 자양하는 것과 같이, 앞에서 얻은 결실을 자양분으로 삼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가령 선재동자가 법을 나타내는 가운데에서 선재가 마갈제국(摩竭提國)의 가비라성(迦毘羅城)에서 주야신(主夜神)인 파산파연저(婆珊婆演底, 한역으로 춘시주당 春時主當)를 본 것은, 이 신이 봄에 묘가(苗稼)를 주재하고 담당하는 것을 밝힌 것이며,
또한 두려움이 없는 안식처의 의지무외(依止無畏)라고 이름한 것은 일체 중생들에게 두려움 없는 안식의 의지무외(依止無畏)를 제공하는 것을 일컬은 것이다.
몸에서 성수(星宿, 별자리)를 내어 중생을 비춘 것은 몸의 일일모공(一一毛孔)에서 행을 나타내어 무수한 악도(惡道)의 중생을 교화 제도하는 것이며,
가비라성(迦毘羅城)을 한역하면 황색(黃色)이니, 이 성이 염부제의 중앙에 있음을 밝힌 것이며, 중궁토(中宮土)가 황색이 됨을 밝힌 것이니, 10지가 중도(中道)에 계응(契應)하여 진(眞)에 응하여 치우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여래가 성도한 곳을 보이는 나라이다.
신(神)이란 것이란 것은 진(眞)에 응하는 것으로, 그 지혜가 분별적 사고를 거치지 않고도 모든 존재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지혜가 작위하지 않고 사념이 없으면서도 두루 만유를 자량하는 것이니, 이 신은 최초의 환희지(歡喜地)를 나타내는 것이며,
제9 회향 이래 곧바로 제9지에 이르기까지의 모두가 신위(神位)에 들어가는 것은 승진지(昇進智)가 통하니, 우물(祐物, 만물을 돕는 것)이 무한해서, 작위하지 않고 사념이 없으면서도 지혜가 스스로 두루 함을 밝힌 것이니,
이는 우선 간략히 설한 것일 뿐, 자세한 내용은 나중의 경문에 있다.
무릇 선재동자가, 선지식의 발심한 기간의 구근(久近, 짧고 김)과 세상에 머문 기간의 다소(多少, 많고 적음)를 물은 것 모두는 대비(大悲)의 행을 성취하여 길이 함양하고 키워나감을 밝힌 것이며,
주겁(住劫)의 구원(久遠)은 대자비의 깊고 두터움을 밝힌 것이니, 지혜에 있으면 구원의 겁도 1찰나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관세음보살은 명호와 설한 바의 법으로써 자비경(慈悲經)이라 호칭하는 것과 같으며,
또 10회향에서 제7회향(七迴向)의 선지식으로서 제8회향의 정취(正趣) 보살과 함께 7회향과 8회향의 자비와 지혜의 비지이문(悲智二門)을 성취하는 것이니, 반드시 이와 같이 그 전후(前後)를 회통하여야, 비로소 그 경문의 뜻을 요달할수 있는 것으로,
하나의 법만 보아서는 능히 불심(佛心)을 요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십지(十地)는 십회향(十廻向) 및 여러 법문(法門)들과 함께 원만하게 수행을 쌓아서 자비와 지혜가 완성되고 과거의 서원이 성취됨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환희지에서 원구성만심(願求成滿心)을 얻는 것은 이전 10회향의 원심(願心)에 의거해서 원만함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2ㅡ6. 덕(德)과 행이 원만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자재롭고 무한한 문(德滿行圓利生自在無限門)이니,
이는 제3선(第三禪)에 있으며, 제7회의 경문이니, 범본(梵本)이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백만억의 게송은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의 교설에 의하여 설한것이다.
이 경전은 여래가 3승인(三乘人)을 교화한 후, 3승의 대중들을 거느리고 보리수 아래에 가서 최초로 정각을 성취하였을 때에 '화엄경'을 설한 것으로서 하나하나를 차례대로 배열하여 거듭 그 회상을 펴서 제3선(第三禪)에 이른 것이다.
'영락본업경'에서는 “11지의 등각위(等覺位)가 일생보처 보살의 지위가 된다”고 하였으니,
이 11지(十一地)에서 보현행이 원만하여져서 12지에서 묘각여래(妙覺如來)가 되기 때문에,
이를 일생(一生)의 주(主)로 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선재동자가 수행으로서 법을 나타내는 것과 같으니, 불모(佛母)인 마야 부인을 본 것이 바로 그 수행의 실천이다.
이는 자비에서 비롯된 지혜의 실천으로 좇아 행을 성취하는 십지의 행문(行門)을 밝히는 것으로,
곧 야천(夜天), 여신(女神) 및 여래가 태자였을 때의 아내인 구파(瞿波, 한역으로 수호지 守護地)의 열 분의 여중(女衆, 여자 대중)들로서 대비(大悲)를 성장시켜 대자비지(大慈悲地)를 수호하는 것을 밝힌 것이다.
예를 들어, 보살의 수행단계인 등각위(等覺位)에서 자비를 행하는 행이 원만하여져서, 바로 자비로부터 지혜를 낳아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곧 불모를 보는 견불모(見佛母)로 나타낸 것이니, 모(母)는 자비의 뜻이다.
대지혜를 낳아서 중생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는 것이 바로 등각위(等覺位)에서의 열 분의 선지식에 해당되기 때문에 마야생불(摩耶生佛, 마야부인이 부처님을 낳았다)이라 말하는 것으로, 이는 부처가 바로 지혜이기 때문이다.
2ㅡ7. 덕행이 원만한 불과의 성취를 끝낸 문이니(德行圓滿成佛果終門),
즉 제8회 보광명전에서 설한 11품의 경문인 것으로,
'십정품'이 그 처음이 되고, 그 다음은 '십통품'과 '십인품'과 '아승기품'과 '여래수량품'과 '보살주처품'과 '불불사의법문'과 '여래십신상해품'과 '여래수호광명공덕품'과 '보현행품'과 '여래출현품' 등이다.
초회에서 질문한 것에 준거하여 보면, 10정(十頂, 십정품)은 있어도 설한 곳이 있지 않으니 이는 경문에서 온전하게 갖추지 못한 때문이다. 총체적으로는 선재동자가 법을 나타낸 것 중에서 미륵보살을 본 것이 바로 그 행이니, 이는 선재 동자가 일생에 불과를 성취한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밝힌 때문에, 마침내 누각 안에서 3생(三生)의 행 모두가 금(今, 현재) 가운데에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3생(三生)이란,
첫째 과거의 구원(久遠)에서 도를 보아 수행하는 생(生, 전생)이며,
둘째 현재에 과(果)를 얻어서 원만한 생(현생)이며,
셋째 미래에 정각을 성취함을 나타내 보일 생(후생)이니,
이러한 모두가 누각 안의 지금에 현전하여 (今現前), 고금(古今)과 거래(去來)와 현재(現在)가 없어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3생의 상(相, 특성)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운데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니, 다만 지혜로서 세속을 따라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곧 3생인 것이다.
만약 진(眞, 진리)을 기준으로 하여 논한다면, 보리심을 발한 때(時)도 없고, 수행하여 도를 본 때(時)도 없으며, 현재의 생에서 과(果)를 얻은 때(時)도 없고, 미래에 정각을 성취함을 보일 때(時)도 없는 것이니,
이는 3세(三世)와 심량(心量)이 성품의 체(體)가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본성에는 본질적인 실체가 없기 때문이며)
안립(安立)할 것이 없기 때문이며, 처소도 없는 무처(無處)이고 의지함도 없는 무의주(無依住)이기 때문에 성불하는 때의 성불시(成佛時)라 이름한 것이다.
만약 자심(自心, 자기 마음)에서 능히 보리심을 발하는 때(순간)나 미래에 정각을 성취할 때(순간)가 있음을 본다면,
곧 정식(情識, 분별하는 의식)의 생멸인 것일 뿐이니, 보리심을 참되게 발심하는 때(時)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보현보살의 끊임없는 수행을 포함한 신심(信心)과 불과(佛果)는 결코 보광명전(普光明殿)을 떠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이세간품(離世間品)’ 또한 보광명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인(因)과 과(果)가 ‘보광명(普光明)의 부동한 대지혜’라는 동일한 본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바로 이 지혜가 수행의 길에서 도달하는 궁극적인 귀결점이 됩니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신심(信心)과 불과(佛果) 모두가 보광명전을 여의지 않는 것이며,
나아가 늘 보현의 시종(始終)이 없는 행을 행하는 '이세간품'이 역시도 보광명전을 여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인(因)과 과(果)가 본질적으로 부동(不動)인 보광명대지(普光明大智)와 동본(同本, 같은 본성)의 승진공(昇進功)의 종결(귀결점)로 삼기 때문에, 때(時)도 다시 체(體, 실체)가 없고 지혜 또한 고정되게 의지함이 없는 무의(無依)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미륵 보살이 선재동자로 하여금 문득 최초의 스승인 문수사리 보살을 다시 보게 한 것은, 그 과(果)에 이르는 것이 인(因)의 기초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밝힌 것이며,
선재동자가 문수 보살을 생각하는 순간에 문수 보살의 이름을 듣고는 자신의 몸이 보현 보살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것은, 정각(正覺)의 행(行, 수행)의 과(果)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총체적으로는 인(因)과 과(果)와 행(行, 수행)이 일시에 회통하여 성취되어서 모두가 원만한 것을 포괗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이는 지혜의 경계에서 능히 일체 중생의 다겁(多怯, 오랜 세월)의 정량(情量, 심량, 역량)이 바로 일시(一時)에 포함되기 때문이며, 이는 지혜는 무정(無情)이기 때문이며,
다만 10신(十信)의 단계에 있는 부동지불(不動智佛)의 전제(前際)ㆍ중제(中際)ㆍ후제(後際)가 없기 때문이며,
이것은 문수사리 보살이10신에서 설한 게송의 내용과 같은 것이다.
ㅡ게송; "일념으로 무량한 겁을 널리 관(觀)하니 (一念普觀無量劫)
가는 곳도 없고 오는 곳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구나. (無去無來無住處)
이와 같이 3세의 일을 요달하여 안다면 (如是了知三世事)
모든 방편을 초월해 10력(力)을 이루리라.(超諸方便成十力)"
2ㅡ8. 보현의 행해(行海)가 항상 행하는 문이니(普賢行海常行門),
즉 제9회에서 설한 '이세간품'이 이에 해당된다.
세간에 상주하여 무한한 중생들을 이롭게 하나, 정(情)에 이끌린 업(業)의 작용에 상응(相應)하지 않는 것이니,
가령 선재동자가 행(行, 수행)을 나타낸 것 중에서, 최초의 선지식인 문수 보살을 억념하자, 문득 보현 보살의 명호를 듣게 되는 것과 자신이 보현 보살의 몸에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는 스스로 불과(佛果)를 성취해 마치고 나서 항상 보현 보살의 시종(始終)이 없는 행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러한 보현행 역시 본보광명(本普光明)의 의주(依住)함이 없는 지혜에서 옮겨가지 않은 것임을 칭한 것이다.
고인(古人, 옛 성현)이 해석하기를, “보광명전(普光明殿)이 거듭 언급되는 것, 구체적으로 ‘보광명전에서의 세 차례의 법회’라는 표현은 서로 다른 세 번의 법회가 실제로 반복해서 열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 대체(大體)는 다만 하나의 보광명의 의주(依住)함이 없는 대지혜(一箇普光明無依住大智)가 초발심의 인(因)과 불과(佛果)와 행만(行滿, 수행의 성취)를 행하는 것을 원만히 회통하는 것으로, 이 세 가지의 삼사(三事) 모두가 이 보광명의 지혜를 여의지 않기 때문에 시(時)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는 지혜에 의거하여 발심한 이후로 시종일관 정견(情見)의 자취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2ㅡ9. 여래의 출현하지도 않고 사그라지지도 않는 부처 지혜의 항과문(恒果門)이다(如來不出不沒佛智恒果門).
즉 제10회에서 설한 '법계품' 1품의 경문이 이에 해당되는 것으로, 법계가 부처의 영속적인 과보의 항과(恒果)이기 때문이다.
2ㅡ10. 믿음을 통해서 6위(位)의 인법(人法)이 나아가 구해야 할 문을 나타낸 것이다(表通信六位人法所進求門).
즉 각성동회(覺城東會) 대탑묘의 처소에서 선재동자가 문수 보살과 아울러 하입위(下入位, 아래 지위)의 5위(五位)의 선지식을 보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상의 열 가지 십문(十門)은 보광명전에서 10신(十信)의 가르침을 설한 이래에 총체적으로 거듭 서술함으로써 배우는 학자(學者)들로 하여금 쉽게 경문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며,
아울러 선재동자가 만난 선지식(善知識)들로서, 법을 나타내는 단계를 대략적으로 들어서 회통하여서 이해하기 쉽게 한 것이다.
승진의 단계를 세 가지 문으로 나눈 것 중에서의 세 번째, 부처님께서 법을 설한 설법처(說法處)와 법좌의 좌체(座體)를 거듭 편다는 것의 뜻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법을 설한 처소와 의취(意趣)를 편 것이며,
둘째 광명을 놓은 처소와 의취(意趣)를 편 것이며,
셋째 법좌의 체(體)와 의취(意趣)를 편 것이다.
3ㅡ1 법을 설한 처소와 의취를 편것에서, 그 처소에 10 가지가 있고 그 의취에는 12 가지가 있다.
처소 1, 보리장 보리수 밑의 1회(會)는 희련하(熙連河)의 강변에 있으며, 우루빈라가섭(優樓頻螺迦葉)의 취락까지의 거리가 5리이니 1우후지(牛吼地, 한 마장)이 된다.
이 아란야(숲속의 고요한 수행처)의 처소에서 도(道)를 성취한 것은 세간법(세간의 관습)에 의지한 것이며, 이는 중생을 교화하는 법칙(방편)이지만, 부처 자신에게는 그러한 집착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승천(昇天)하는 것도 모두가 방편으로 나타낸 것이지만,
여래의 지체(智體)는 시방으로 두루하면서도 가고 옴이 없이 색신(色身)을 대현(對現)하는 것이다. 이는 세간을 위하여 색신을 나투어서 법을 성취하는 것을 보임으로써 본받아 배울 수 있게 하는 것을 밝힌 것이니,
이 한 단락은 여래가 스스로의 자과법(自果法)을 들어서, 중생들을 수행하도록 권하고 이끌어 수행하게 하는 거자과법권중생수행문(擧自果法勸衆生修行門)인 것이다.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2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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