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 22권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李 通玄 장순용 번역
이상으로 10 개의 회향문을 정석(正釋)하여 바르게 해석하여 마쳤으며,
제13 단락을 장과하자면, “부처의 신력으로 인하여(佛神力)” 이하를 다시 5 단락으로 나누겠으니,
첫째. 부처의 위의(威儀)가 대지를 진동하는 분(分)이며,
둘째, 모든 제천(諸天)들이 공양을 일으키는 분(分)이니,
다시 제천(諸天)들이 공양을 일으키는 것에 2 가지의 뜻이 있으니,
하나는 향기로운 꽃과 번개(幡蓋)로 공양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모든 천들이 노래로 찬탄하고 예경(禮敬)하고 광명을 놓는 등의 공양이다.
셋째, “이 도솔천에서와 같이(於此兜率天)” 이하 “모두 다 이와 같다(悉亦如是)”에 이르기까지는,
시방이 모두 그와 같다는 것을 총체적으로 들어서 매듭지은 분이다.
넷째, 시방의 명호가 같은 동호(同號)의 금강당보살(金剛幢菩薩)들이 모두 함께 와서 법을 증명하는 분이다.
다섯째, 금강당보살이 대중을 관찰하고 게송을 설함을 밝힌 분이다.
둘째, 다음과 같이 경문을 따라 뜻을 해석하겠으니,
무엇을 등법계무량 회향(等法界無量迴向)이라 하는 것인가?
해석함에 있어서,
법계에 중간이나 변두리가 없는 것과 같이, 회향심(迴向心)에도 중간이나 변두리가 없는 무중변(心無中邊)한 회향이며,
법계에 무작자(無作者, 작위하는 자)가 없는 것과 같이 회향심(迴向心)에도 작위하는 자가 없는 회향이며,
법계에 가고 옴이나 멀고 가까움이 없는 것과 같이
회향심(迴向心)에도 가고 옴이나 멀고 가까움이 없는 심무거래원근(心無去來遠近) 회향이며,
법계가 마치 허공과 같으니, 회향지(迴向智)도 마치 허공과 같으며,
법계가 불사의(不思議)하듯이, 회향지(迴向智)도 불사의한 것이며,
법계가 의지하는 바가 없는 무소의(無所依)인 것과 같이, 회향지(迴向智)도 의지하는 바가 없으며,
법계에 일체제불(一切諸佛)들이 공주(共住)하여 함께 머무는 바인 것과 같이,
회향지(迴向智)도 일체제불이 공주(共住)하는 바이며,
법계가 3세(三世)와 일체의 모든 생멸하는 시분(時分)의 소섭(所攝, 거두는 바)이 아닌 것과 같이
회향지(迴向智)도 3세 시분의 소섭(所攝, 거두는 바)가 아니며,
법계가 3세(三世)의 일들이 원만하게 현전하는 바이니, 회향지(迴向智)도 3세 사업이 원만하게 현전하고 있으며,
법계가 유(有)와 무(無)에 자재로우니, 회향지(迴向智)도 유와 무에 자재한 것이니,
이는 자타(自他)로 하여금, 그 모두가 법계와 같이 걸림 없이 자재하여서 모든 부처와 같이 될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명칭이 등법계무량 회향인 것이니, 그 대의는 보리심을 발한 일체의 모든 이들로 하여금 한결같이 법계의 모든 덕용(德用, 덕의 공용)이 자재롭고 원만하게 하고, 광대하고 무한하게 하고, 크고 작은 성품을 여의게 함으로써
1ㆍ2ㆍ3백천만 등의 유한(有限)함에 속하지 않고, 무한(無限)한 법과 동등하여져서,
세간과 출세간의 대지(大智)와 대비(大悲)와 대희(大喜)와 대사(大捨)가 법계와 중생계와 동등한 것이다.
만약 이렇게 회향치 않는다면, 설사 보리를 구한다 할지라도 단지 2승의 적멸에 머무는 보리이거나,
보살의 정토에 즐겨나는 것이거나,
모두가 문 밖의 세 수레인 문외삼거(門外三車, 법화경의 양, 사슴, 소가 끄는 수레)에 머물 뿐인 것으로,
노지백우(露地白牛, 도로상의 흰 소)는 그러한 분수(능력)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10회향은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을 얻은 출세심자(出世心者)를 얻은 모든 3승으로 하여금,
세간의 생사의 성(性, 성품)의 자성법계(自性法界)를 요달하게 하여서 대자비를 일으키게 하는 것으로,
일체 중생과 더불어 중생의 성품이 바로 법계의 지혜하는 것을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에
평등한 자비문을 얻어서 보광명원지(普光明圓智)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니,
그러므로 초암(草庵)의 화성(化城)에는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다.
곧, 유마 거사가 설한 일기법문(一期法文)은 3승을 회향하게 하는 소분(小分)인 것이며,
법화경에서 “노지백우(露地白牛, 도로상의 흰 소)의 승(乘)"은 일분(一分)의 보소(寶所)를 대략 진술하여서 총체적으로 법계문의 보광명대지불과(寶光明大智佛果)인 보현의 행해(行海)와 더불어 널리 종결짓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당 경전 속의 10회향문은 10주와 10행 속의 대지혜와 대자비의 법신만행(法身萬行)과 공덕의 장엄이 자타(自他)를 가로막으며, 비경(悲敬, 자비와 공경)이 참되지 못하고, 지견(知見)이 넓지 못하고, 자비심이 넓지 못하고, 마음이 광대하지 못하여서 무한한 법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니, 이러함을 돌이키기 위하여 이 회향으로 균등하게 다스려서 법계의 걸림 없고 무한한 자재로운 성품에 동등하게 부합시키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무한한 회향으로 발원해서 무한한 법계의 중생을 널리 위하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진문(眞門)에만 머물면서 정토에만 치우쳐 태어날 뿐, 법계의 걸림 없는 구정(垢淨, 더러움과 깨끗함)이 평등한 무한의 동체대비(同體大悲)에는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과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10회향으로서 10신ㆍ10주ㆍ10행과 10지ㆍ11지의 행문(行門)과 함께 균형 있게 하는 것이나,
총체적으로는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뜻은 10지위(十地位)에서 다시 따로 불과(佛果)를 배당하지 않고 단지 이 지위에 있는 10 개 불과의 명칭에서의 첫 번째 글자가 모두 동일한 묘(妙)가 되는 것이며,
보살의 명호도 10지위 중에서의 보살의 명칭의 첫 번째 글자가 이 10회향위의 보살과 더불어 함께 금강(金剛)이 되는 것이다.
다만 당(幢)과 장(藏)이 다른 것은 묘용의 불과와 행하는 바의 법은 다르지 않지만,
축적한 공(功)이 종결되고 대자비의 공이 원만한 것을 장(藏)이라 칭한 것일 뿐,
그 이외의 다른 회향위(迴向位)의 별개의 법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밝힌다.
때문에 선재동자의 10회향에서는 장자(長者)와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으로서 선우(善友)를 나타내는 것이며,
10지(十地)의 지식(知識, 선지식)에서는 9 개의 야천(夜天)들 모두가 여자로서,
그 중의 하나는 여래가 태자였을 때의 아내이니, 순수하게 대자비를 닦는 지위의 대비위(大悲位)를 나타낸 것이다.
10주(十住)와 10행(十行)은 수행의 지위(智位)이고,
10회향(十廻向)은 원력(願力)으로 균등하게 융화함으로써 지혜와 자비로 하여금 등진(等進)하여 동등히 나아가게 한 것이며,
10지(十地)는 수행을 쌓아서 대지혜와 대자비를 심광(深廣, 깊고 넓게)하게 갖출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10 분의 여자들로서 나타낸 것이다.
11지(十一地)에서 자비와 지혜가 원만하여져서 보현행문(普賢行門)을 성취하는 것은 바로 자비로써 지혜를 일으킴을 밝힌 것이니,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불모마야(佛母摩耶)부인을 11지의 첫 번째 선지식으로 삼아서, 능히 일체의 모든 부처를 낳은 것이니,
모(母)는 자비의 지위이며,
불(佛)은 바로 지혜임을 나타낸 것이다.
자비로 지혜를 낳기 때문에 “마야부인이 부처님을 낳았다는 마야생불(摩耶生佛)”이라 말하는 것이니,
그러함으로서 환생법문(幻生法門)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자비와 지혜의 덕이 성취되면서 보현행이 원만함을 밝힌 것이니, 그 닦아 나감의 단계를 밝혀서 이와 같이 안립한 것이지만, 만약 수행이 일시(一時)에 동진(同進)하여 함께 나아가는 것이라면, 선재동자의 10주위 중 제2 해문국(海門國)의 해운(海雲)비구가 이 초발심주(初發心住)의 비지문(悲智門)을 성취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가운데에서 아수라를 등의 10왕은 생사에 들어가는 행의 입생사행(入生死行)을 나타낸 것이며,
또 해운 비구가 이 회향위에서 능히 생사의 대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또 생사해(生死海)가 곧 불해(佛海) 바다이기 때문에 부처가 출현해서 보안경(普眼鏡)을 설한다고 한 것이며,
10왕 등은 만행(萬行)의 자재로움을 나타낸 것이니,
나아가 10주의 제7주에서 휴사 우바이 등 역시도 이에 해당되지만, 단지 성숙한 관습의 증강처(增降處, 증진하고 하강하는 곳)로써 논하였을 뿐이다.
또한 이 5위 법문이 모두 1찰나를 벗어나지 않고서도 시종(始終)이 성취되는 것이니,
총체적으로는 전후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가령 제20단락에서 법시(法施)의 선근 회향으로 불찰을 장엄한 것은 바로 원력의 장엄이니,
의은(義隱, 은밀한 뜻)은 경문과 같은 것이다.
연무(延袤, 길이)는 누각이 서로 인접되어서 무한히 연장된 것을 말하고,
보창유(寶窓牖, 들창)란 것은 큰 것은 창(窓)이라 말하고 작은 것은 유(牖)라고 하며,
보다라(寶多羅)의 형태가 반월과 같다는 것은 서역에 있는 나무 명칭으로, 이곳의 종려수(椶櫚樹) 같아서 보배로 체(體)를 삼고 반월의 보배로 그 나무를 장엄하였으니, 그 나무 형태가 반월과 같다고는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래의 선근으로 일으킨 바가 아님이 없다(無非如來善根所起)'는 것은
원력이 부처와 같은 선근으로 일어난 장엄으로써 불국을 장엄한 때문이다.
'아승기의 보해(寶海)에 법수(法水)가 가득 차 있다(阿僧祇寶海法水盈滿)"는 것이란,
물이 법을 설함을 말한 것이요,
'아승기 보배의 분타리화가 항상 묘법의 분타리 소리를 낸다(阿僧祇寶芬陁利華常出妙法芬陁利聲)'는 것은
바로 백엽백련화(百葉白蓮華)로서 능히 백 가지 음성을 내어서 백 가지 법을 설하는 것이요,
'아승기 보배의 수미산에서 지혜산왕(智慧山王)이 빼어나게 청정하다는 것(阿僧祇寶須彌山智慧山王秀出淸淨)'은
원(願)과 지혜의 업의 뛰어난 과보로 얻은 것이 그 나머지의 법을 능가하는 것이라서 그 명칭이 수출(秀出, 빼어남)인 것이며,
능히 많은 중업(衆業)을 맑히는 것을 청정이라 칭하는 것이며,
수미(須彌)는 묘고(妙高)를 말하는 것으로,
산은 그 명칭을 지(止)라 함으로써 간(艮)이 산이 되고 그 뜻이 지(止)가 되는 것이며,
왕(王)이란 것은 자재로움으로, 그 마음을 지(止, 멈춤)하면 마음이 바로 청정이고,
만약 그 마음이 청정하면 바로 지혜의 묘용이 자재롭게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보로 얻은 그 산 역시도 이와 같은 것이니, 인과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승기의 8릉묘보(八楞妙寶)를 보선(寶線)의 엄정무비(嚴淨無比, 비할 데 없이 순수함)란 것은 가르침이니, 팔정도의 과보요,
보선(寶線)이란, 가르침이니, 명언(名言, 가르침)을 대나무나 비단에 꿰어 법이 무산실(無散失)하여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때문에 과보를 성취하는 것이다.
보살보(菩薩寶)란, 보살형(菩薩形)과 같은 것이니, 행보(行報, 행의 과보)로 얻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아승기의 보선(寶旋)이 보살지안(菩薩智眼)을 나타내 보인다'는 것은, 무애지(無碍智)의 과보로 얻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하나의 지혜 가운데에서 다함이 없는 무진법문(無盡法門)을 깊고 유현한 무극(無極)으로 알기 때문에 그 명칭을 선(旋)이라 한 것이다.
'아승기 궁전(宮殿)'이란 것은 비궁(悲宮)과 지전(智殿)의 과보상(果報相)을 장엄한 것이다.
'감(鑑)'이란 것은 비추어 사무치는 것이요,
'보산(寶山)이 담장이 된다'는 것은 지(止)를 방호(防護)로 삼은 과보로 얻는 것이요,
'아승기 보화사(寶化事)'란 것은 이 보배가 능히 갖가지 사법(事法)을 화작(化作)하는 것이니,
이는 하나의 지혜로 만행을 행하여 과보로 얻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보장(寶藏)이 일체의 정법(正法)을 나타내 보인다(寶藏現示一切正法)'는 것은 바로 일체의 갖가지 지장(智藏)의 보득(報得)이기 때문이다.
'여래의 당상(幢相)이 우뚝 솟아 있다(如來憧相迥然高出)'는 것은 보배가 부처의 형상과 같이 서서(立) 국토를 장엄한 것이니, 진여지당(眞如智幢)의 기울어지지 않는 보득(寶得)을 밝힌 것이다.
'아승기 보현(寶賢)에 대지현상(大智賢像)이 구족(阿僧祇寶賢大智賢像具足)'한 것은 그 보배가 현인의 형상과 같아서 현인의 상(相)이 있는 것이니, 자현(自賢)으로 과보가 생기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보원(寶園)이 모든 보살 삼매의 쾌락을 낳는다(寶園生諸菩薩三昧快樂)'이란, 삼매를 원림(園林)으로 삼는 보득(報得)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보음(寶音)'이란, 음성으로 보배를 삼는 것이지 형질(形質)이 있는 것이 아니며,
'보형(寶形)'이란, 갖가지 보배로써 갖가지 형상을 짓는 것이며,
'보상(寶相)'이란 것은 보배를 상호(相好)로 삼는 것이며,
'보위의(寶威儀)'란 것은 보배로 보살의 위의를 지어서 상서(庠序)한 것이며,
'보취(寶聚)'란, 보는 자가 모두 지혜취(智慧聚)를 낳는 것이니, 지혜취를 과보로 얻음을 밝힌 것이요,
'보주(寶住)'란, 지혜 경계로써 보살 10주의 지위를 나타내서 지은 것이요,
'보수습(寶修習)'이란, 보배를 닦아 익히는 법문의 단계로 삼아서 보는 자가 일체의 보배를 다 업(業)이라고 아는 것이니, 이는 업보(業報)를 인식하는 것이다.
'보무애지견(寶無礙知見)'이라는 것은 보배를 무애(無礙, 걸림이 없음)의 지견으로 삼아서 보는 자가 청정한 법안(法眼)을 얻어서 청정 지혜의 무애함으로 낳은 바라는 것이며,
'보다라수(寶多羅樹)'란, 이 나무가 종려(椶櫚) 같아서 무쇠같이 견고하고, 잎이 길고 조밀해서 설사 큰 비가 자주 내릴지라도 마치 집안과 같이 항상 건조한 것이다.
경문에서 설하는 바는 보배를 체(體)로 삼는다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서역의 인간목수(人間木樹)와는 같지 않은 것이니, 그 인간목수는 가지가 없는 곳이 몸이 되고, 몸이 곧바로 위로 올라간 것이 줄기가 되고, 줄기 위에서 곁으로 난 것이 가지고 되고, 가지 위의 가는 것이 잔가지가 되는 것이다.
'왕도(王都)와 취락(聚落)'은 모두 이 대원경으로 화작(化作)하여 불찰을 장엄하게 함을 기준으로 한 것이요,
'발타라수(跋陀羅樹)'를 한역하면 현(賢)이라 칭하는데, 그 나무 아래에 현인의 거처가 있으며, 또 나무가 현재(賢才)를 배출해서 그 위에 제석천의 보망(寶網)이 장엄되어 있는 것이다.
'보취(寶吹)'란, 능히 음보(音寶)를 내는 것이 마치 소라의 형태와 같은 것이며,
'그 소리가 맑다(其聲淸亮)'는 것은 마음이 맑고 밝은 것이다.
'화엄경(華嚴經)'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화엄경(華嚴經) 제30권 25. 십회향품(十廻向品)⑧ㅡ 8 (0) | 2026.09.15 |
|---|---|
| 이통현(李通玄)장자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25. 십회향품(十廻向品) ㅡ 9 (0) | 2026.09.14 |
| 화엄경(華嚴經) 제30권 25. 십회향품(十廻向品)⑧ㅡ 7 (0) | 2026.09.13 |
| 화엄경(華嚴經) 제30권 25. 십회향품(十廻向品)⑧ㅡ 6 (0) | 2026.09.12 |
| 이통현(李通玄)장자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25. 십회향품(十廻向品) ㅡ 8 (1) | 2026.09.1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