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經卷第三十 十迴向品第二十五之八

唐于闐國(당나라 우전국三藏沙門(삼장사문實叉難陀 (실차난타 

25. 십회향품   10

 

ㅡ제8 진여상(眞如相) 회향 ㅡ5

 

譬如眞如(비여진여) 無能測量(무능측량)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等虛空界(등허공계) 盡衆生心(진중생심) 無能測量(무능측량)

譬如眞如(비여진여) 充滿一切(충만일체)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一刹那中(일찰나중) 普周法界(주변법계)

비유하자면, 능히 진여(眞如)를 측량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善根廻向) 역시도 그와 같아서

허공계와 같이 평등한 중생심(衆生心)을 다하여도 측량할 수 없으며,

비유하자면, 진여가 일체에 충만한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일찰나(一刹那中, 한 찰나)에 법계에 널리 두루할 수 있으며,

ㅡ비록 밥 한 그릇을 부처님께 올릴 뿐인 공양일지라도, 그 마음으로 올리는 축원은 일체중생들이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하는 것으로 회향하는 것이 주변법계(普周法界) 일찰나 법계에 널리 두루하는 선근회향입니다.ㅡ무비스님

 

譬如眞如(비여진여) 常住無盡(상주무진)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究竟無盡(구경무진) 

譬如眞如(비여진여) 無有比對(무유비대)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普能圓滿一切佛法(보능원만일체불법) 無有比對(무유비대) 

譬如眞如(비여진여) 體性堅固(체성견고)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體性堅固(체성견고) 非諸惑惱之所能沮(비제혹뇌지소능저) 

譬如眞如(비여진여) 不可破壞(불가파괴)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一切衆生(일체중생) 不能損壞(부능손괴) 

비유하자면, 진여가 항상 상주(常住)하여서 무진한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구경(究竟)에 다함이 없이 무진(無盡)하며,

비유하자면, 진여가 무비대(無比對, 비교할 상대가 없음)한 것과 같이 선근회향도 그와 같아서

능히 일체의 불법(佛法)을 두루 원만하게 할 수 있음에 무비대(無比對)하여비교할 상대가 없으며,

비유하자면, 진여의 체성(體性)이 견고한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이 체성이 견고하여서 제뇌혹(諸惑惱, 모든 번뇌)이 능히 저해(沮害)하지 못하,

비유하자면, 진여가 불가괴(不可破壞)하여, 파괴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일체의 모든 중생들이 손괴(損壞) 할 수 없으며,

ㅡ몸은 쇠사슬로ㆍ밧줄로 묶을 수 있지만, 이 진여, 진여불성은 어떻게 하지 못하는불가파괴(不可破壞)한 것입니다

 

譬如眞如(비여진여)  照明爲體(조명위체)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以普照明(이보조명) 而爲其性(이위기성) 

譬如眞如(비여진여) 無所不在(무소부재)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於一切處(어일체처) 悉無不在(실무불재) 

譬如眞如(비여진여) 遍一切時(편일체시)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遍一切時(편일체시)

비유하자면, 진여가 조명(照明)하여 밝게 비춤으로서 체성을 삼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이, 널리 조명(照明)하는 것으로서 그 성(性, 성품)을 삼았으며,

비유하자면, 진여가 없는 곳이 없는 무소불재(無所不在)인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이, 일체처에 실무부재(悉無不在)하여 없는 곳이 없으며, 

비유하자면, 진여가 편일체시(遍一切時)하여 어느 때에나 두루한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이, 편일체시(遍一切時)하여 어는 때에나 두루하며,

ㅡ앞에는 공간을 비유하였고, 여기에서는 시간입니다.

진여는 시간성ㆍ공간성을 다 초월하는 것과 같이, ‘진정한 선행은 시간성ㆍ공간성을 다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譬如眞如(비여진여) 性常淸淨(성상청정)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住於世間(주어세간) 而體淸淨(이체청정)  

 

비유하자면, 진여의 성(性, 성품)이 항상 청정한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세간(世間)에 머무르나, 그 체(體, 체성)은 청정하며, 

 

ㅡ진여(眞如)를 법무애(法無碍)에 비유함  

譬如眞如(비여진여) 於法無碍(어법무애)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周行一切(주행일체) 而無所碍(이무소득) 

譬如眞如(비여진여) 爲衆法眼(위중법안)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能爲一切衆生作眼(능위일체중생작안) 

譬如眞如(비여진여) 性無勞倦(성무노권)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倦 게으럴 권, 일할 로 

修行一切菩薩諸行(수행일체보살제행) 恒無勞倦(항무노권) 

譬如眞如(비여진여) 體性甚深(체성심심)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其性甚深(기성심심) 

譬如眞如(비여진여) 無有一物(무유일물)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了知其性(요지기성) 無有一物(무유일물)

비유하자면, 진여가 법(法)에 걸림이 없어서 무애()한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일체의 모든 곳을 주행(周行)하여 다님에 무소애(無所碍)하여 장애가 없으며,

비유하자면, 진여가 중법안(衆法眼, 여러 가지 법의 눈)인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능히 일체의 중생들을 위하여 작안(作眼)하여 눈이 되며, 

비유하자면, 진여의 성(性, 성품)이 무노권(無勞倦)하여 성품이 피로하거나 게으름이 없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일체 모든 보살들의 제행(諸行)을 모두 수행함에 있어서

무노권(無勞倦)하여 피로함나 게으름이 없으며, 

비유하자면, 진여의 체성(體性)이 심심(甚深)하여 매우 깊은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그 성(性, 성품)이 심심(甚深)하여 매우 깊으며,

비유하자면, 진여가 무유일물(無有一物)으로서, 하나의 물건도 없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그 성(性, 성품)이 무유일물(無有一物)하다는 것을 알,

ㅡ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여기에 하나의 물건이 있으니, 항상 몸을 움직이고(動), 정신을 쓰(用)고 있으나,

동용중수부득(動用中收不得)하여, 그러한 가운데에 있는 그놈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바로 진여자성입니다. 무아(無我)로써 참 나를 삼고, 
하나의 물건도 없는 것으로써 물건을 삼는, 즉 전체로 삼는 것입니다.

 

譬如眞如(비여진여) 性非出現(성비출현)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其體微妙(기체 미묘) 難可得見(난가득견)

譬如眞如(비여진여) 離衆垢翳(이중구예)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慧眼淸淨(혜안청정) 離諸癡翳(이제치예) 

譬如眞如(비여진여) 性無與等(성무여등)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成就一切諸菩薩行(성취일체제보살행) 最上無等(최상무등)

譬如眞如(비여진여) 體性寂靜(체성적정)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善能隨順寂靜之法(선능수순적정지법)

譬如眞如(비여진여) 無有根本(무유근본)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能入一切無根本法(능입일체무근본법)

비유하자면, 진여의 성(性, 성품)이 출현(出現)하지 않는 것과 같이 

(이것이 진여라고 성품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그 체(體)가  미묘하여서 보기 어려운 난가득견(難可得見)하며,

(그 체가 미묘하여서 하나하나 분석해서 찾아들어가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며)  

비유하자면, 진여가 중구예(衆垢翳, 모든 때와 번뇌)를 떠난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혜안(慧眼, 지혜의 눈)이 청정하여서 제치예(諸癡翳, 모든 어리석음의 때, 번뇌)를 떠났으며,

비유하자면, 진여의 성(性, 성품)이 무여등(無與等)하여 더불어 같을 것이 없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일체의 모든 보살행을 성취하는 최상(最上)의 비교할 수 없는 무등(無等)이며,  

비유하자면, 진여의 체성(體性)이 적정(寂靜)한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적정법(寂靜法)을 능히 잘 수순하며,

비유하자면, 진여가 근본이 없는 무유근본(無有根本)인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능히 일체의 모든 무근본법(無根本法)에 능히 들어가며,

 

ㅡ체성이 무변(無邊)함에 대한 비유 

譬如眞如(비여진여) 體性無邊(체성무변)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淨諸衆生(정제중생) 其數無邊(기수무변) 

譬如眞如(비여진여) 體性無着(체성무착)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畢竟(필경) 遠離一切諸着(원리일체제착)

譬如眞如(비여진여) 無有障碍(무유장애)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除滅一切世間障碍(제별일체세간장애)

비유하자면, 진여의 체성(體性)이 무변(無邊)하여 끝이 없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모든 중생들을 청정(淸淨, 훌륭)하게하되 그 수 무변(無邊)하여 끝이 없으며,

비유하자면, 진여의 체성(體性)이 무착(無着)하여 집착이 없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필경(畢竟)에는 일체의 모든 집착을 원리(遠離)하여 멀리 여의었으며,

비유하자면, 진여가 무유장애(無有障碍)하여 장애가 없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일체세간의 장애를 제멸(除滅)하여 제거하였으며, 

ㅡ몸은 밧줄로 묶고 쇠사슬로 묶으면 장애를 받는 것이지만, 진여는 장애를 안 받을 뿐만 아니라,

몸을 장애하면 할수록 우리 진여는 더 자유로워집니다.ㅡ무비스님

 

譬如眞如(비여진여) 非世所行(비세소행)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非諸世間之所能行(비제세간지소능행)

譬如眞如(비여진여) 體性無住(체성무주)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一切生死(일체생사) 皆非所住(개비소주) 

譬如眞如(비여진여) 性無所作(성무소작)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一切所作(일체소작) 悉皆捨離(실개사리)

譬如眞如(비여진여) 體性安住(체성안주)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安住眞實(안주진실)

譬如眞如(비여진여) 與一切法(여일체법) 而共相應(이공상응)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與諸菩薩(여제보살) 聽聞修習(청문수습) 而共相應(이공상응) 

譬如眞如(비여진여) 一切法中(일체법중) 性常平等(성상평등)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於諸世間(어제세간) 修平等行(수평등행) 

譬如眞如(비여진여)  不離諸法(불이제법)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盡未來際(진미래제)不捨世間(불사세간)

비유하자면, 진여가 비세소행(非世所行)인 것으로, 세간이 행할 바가 아닌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모든 세간이 능히 행할 수 있는 바가 아니며,

비유하자면, 진여의 체성이 무주(無住)하여 머무름이 없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일체의 모든 생사(生死) 머무르지 않는 비소주(非所住)이며,  

비유하자면, 진여의 성(性, 성품)이 무소작(無所作)으로 짓는 바가 없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일체의 소작(所作, 짓는 바)을 모두 버려서 여의었으며,

비유하자면, 진여의 체성(體性)이 안주(安住)하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진실에 안주하며, 

비유하자면, 진여가 일체법에 상응(相應)하여 (잘 어울리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모든 보살들의 청문(聽聞)하여 수습(修習)하는 것에 상응(相應)하며,

비유하자면, 진여가 일체법에서 항상 평등한 성품인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모든 세간에서 평등행(平等行)을 닦으며,

비유하자면, 진여가 제법을 불리(不離)하여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미래제(未來際,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세간을 불사(不捨)하여 버리지 않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經卷第三十 十迴向品第二十五之八

唐于闐國(당나라 우전국三藏沙門(삼장사문實叉難陀 (실차난타 

25. 십회향품   9

 

ㅡ제8 진여상(眞如相) 회향 ㅡ4

 

佛子(불자) 菩薩摩訶薩(보살마하살) 修習如是諸善根時(수습여시제선근시) 

得智慧明(득지혜명) 爲善知識之所攝受(위선지식지소섭수) 

如來慧日(여래혜일) 明照其心(명조기심) 永滅癡冥(영멸치명) 勤修正法(근수정법)

入諸智業(입제지업) 善學智地(선학지지) 流布善根(유포선근) 充滿法界(충만법계)

以智廻向(이지회향) 盡諸菩薩善根源底(진제보살선근원저) 以智深入大方便海(이지심입대방편해) 

成就無量廣大善根(성취무량광대선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모든 선근을 수습할 때, 지혜명(智慧明, 지혜광명)을 얻어서 

선지식(善知識)의 섭수(攝受)를 받게 되고 

여래의 혜일(慧日, 지혜의 태양)로서 그 마음을 밝게 비추어서 (한 점의 실수나 오점도 없는 상태)

치명(癡冥, 어리석고 어두움)을 영원히 멸하여서 

정법(正法)을 부지런히 닦아서 모든 지업(智業, 지혜의 업)에 들어가서 지지(智地, 지혜의 지위)를 잘 배우고 

선근을 유포(流布)하여서 법계에 충만하게 하나니,

지혜로서 보살 선근의 원저(源底, 근원)이 다하도록 이와 같이 회향하며, 

지혜로 대방편해(大方便海, 큰 방편의 바다)에 깊이 들어가서 무량하고 광대한 선근을 성취합니다.

 

佛子(불자) 菩薩摩訶薩(보살마하살) 以此善根(이차선근) 如是廻向(여시회향)

所謂不着世間(소위불착세간) 不取衆生(불취중생)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선근으로 이와 같이 회향하나니, 이른바,

세간에 불착(不着)하여 집착하지 않고 (세상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살며)

중생을 불취(不取)하여 취하지도 않으며,

ㅡ중생을 취하지 않으면 중생을 제도할 수 없으니까, 중생을 취하되 취하지 않는 중도(中道)적인 삶,

이세간(離世間)이면서도 입세간(入世間)해서 세간에 들어가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其心淸淨(기심청정) 無所依止(무소의지) 正念諸法(정념제법) 離分別見(이분별견) 

그 마음이 청정하여 무소의지(無所依止)하여 의지하여 머물지 않으며, 

제법을 정념(正念, 사띠)하여 바르게 생각하여서 분별견(分別見, 분별하는 견해)를 여의었으며, 

ㅡ분별견(分別見)을 떠난다는 것은 제법을 정념하는 것으로, 바르게 보면 그것이 ‘좋다ㆍ나쁘다. 갖고 싶다ㆍ버리고 싶다.’등의 분별을 떠나서 있는 대로 보는 것입니다.

 

不捨一切佛自在慧(불사일체불자재혜) 不違三世一切諸佛(불위삼세일체제불)

正廻向門(정회향문) 隨順一切平等正法(수순일체평등정법) 

不壞如來眞實之相(불괴여래진실지상) 等觀三世(등관삼세) 無衆生相(무중생상) 

모든 부처님들의 자재혜(自在慧, 자재하신 지혜)를 버리지 않으며,  

삼세 모든 부처님들의 정회향문(正廻向門)에 불위(不違)하여 어긋나지 않으며, 

일체의 모든 평등한 정법에 수순하며, 

여래의 진실한 상(相)을 불괴(不壞)하여 깨뜨리지 않으며,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를 등관(等觀)하여 평등하게 관찰하여 무중생상(無衆生相)으로 중생이라는 상이 없으며,

ㅡ깨달은 안목에는 과거ㆍ현재ㆍ미래 그 어디에도 중생이라는 것도, 부처라는 것도 없는 것으로, 

중생이고 부처라는 것은 그저 관념일 뿐인 것으로, 따지고 보면 언어의 유희일 뿐입니다. 

 

善順佛道(선순불도) 善說於法(선설어법) 深了其義(심료기의) 入最勝地(심료기의) 

悟眞實法(오진실법) 智慧圓滿(지혜원만) 信樂堅固(신락 견고)

불도에 선순(善順)하여 잘 수순하여서 법을 선설(善說)하여 잘 설하고 

그 의(義, 이치)를 깊이 요달하였으며,

승지(最勝地, 최승의 지위)에 들어가서 진실법(眞實法)을 깨달았으며(悟),

지혜가 원만하고, 신락(信樂, 믿음의 즐거움)이 견고하며, 

ㅡ지혜가 있어야 믿음이 있게 되고, 믿음이 견고할수록 지혜가 더욱 원만해지는 것입니다.

 

 雖善修正業(수선수정업) 而知業性空(이지업성공) 了一切法(요일체법) 皆如幻化(개여환화) 

비롯 정업(正業)을 잘 닦을지라도 업성(業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알며,  

일체법 모두가 여환화(如幻化)한 것이라서 마치 변화한 허깨비와 같다는 것을 알며,

ㅡ정업을 잘 닦으면서도 그 업의 성품이 공함을 아는 것은,

권실쌍행법(權實雙行法), 권(權, 방편)과 실(實, 진실)을 함께 행하는 이치입니다.

업의 성품이 공하다면 정업을 닦을 이유가 없는, 세속적인 논리로는 너무 모순되는 이론이지만,

세속의 논리로는 불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知一切法(지일체법) 無有自性(무유자성) 觀一切義(관일체의) 及種種行(급종종행) 

隨世言說(수세언설) 而無所着(이무소착) 除滅一切執着因緣(멸제일체집착인연) 

知如實理(지여실리) 觀諸法性(관제법성) 皆悉寂滅(개실적멸) 了一切法(요일체법)

同一實相(동일실상) 知諸法相(지제법상) 不相違背(불상위배) 與諸菩薩(여제보살) 

而共同止(이공동지) 修行其道(수행기도) 善攝衆生(선섭중생) 

일체법에는 자성(自性)이 없음을 알아서, 일체의(一切義, 모든 이치)와 갖가지의 종종행(種種行)

세언설(世言說, 세상의 언설)을 따른 것으로,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을  관찰하며,   

일체의 집착할 인연을 멸제(除滅)하여 제거하며  

여실리(如實理, 여여하고 진실한 이치)를 알며, 

제법의 법성(法性, 현상과 성품)이 모두 적멸(寂滅)하다는 것을 관(觀)하여서

일체법이 동일(同一)한 실상(實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요지하고 

제법의 법상(法相)이, 불상위배(不相違背)하여 서로 위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며(知), 

모든 보살들과 더불어 공동지(共同止)하여 함께 머물면서 그 도를 수행하고 

중생들을 선섭(善攝)하여 잘 거두어 들이며, 

ㅡ좋은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같이 살게 되면, 그 사람을 본받고 그러한 행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入(입) 去來今一切菩薩廻向之門(거래금일체보살회향지문) 

於諸佛法(어제불법) 心無驚怖(심무경포) 以無量心(이무량심) 令諸衆生(영제중생) 

普得淸淨(보득청정) 於十方世界(어시방세계) 不起執取我(불기집취아) 我所心(아소심) 

於諸世間(어제세간) 無所分別(무소분별) 於一切境界(어일체경계) 不生染着(불생염착) 

勤修一切出世間法(근수일체출세간법) 於諸世間(어제세간) 無取無依(무취무의) 

於深妙道(어심묘도) 正見牢固(정견뇌고) 離諸妄見(이제망견) 了眞實法(요진실법)

과거 미래 현재의 일체보살의 회향문(廻向門)에 들어가며, 

모든 불법에 대하여 무경포(無驚怖)하여,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며, 

무량심(無量心)으로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널리 청정함을 얻게 하며,(마음이 정화되게 하며)

시방의 세계에서 '아(我, 나) '아소(我所, 나의 것)'에 집취(執取, 집착하고 취하는)하는 마음(心)을 일으키지 않으니,

모든 세간에서 분별할 것이 없으며, 

일체의 경계에 대하여 염착(染着, 탐착하여 집착함)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일체의 모든 출세간법을 근수(勤修)하여 부지런히 힘써 닦아서,

모든 세간에서 무취(無取)하여 취하지도 않으며, 무의(無依)하여 의지하지도 않으며,

심묘도(深妙道, 깊고 묘한 도)에 바른 소견이 뇌고(牢固)하여 확고하게 굳으며,

모든 망견(妄見, 있다 없다, 옳고 그르다는 이견 二見)을 떠나서 진실법(眞實法)을 분명하게 요달하여 압니다. 

ㅡ망견(妄見), 이견(二見)에 바탕하는 것으로, 내 마음에 들면 옳은 것이고, 내 마음에 안 들면 그른겁니다.

자기 상식, 자기가 익혀온 것에 기준해서 옳다 그르다하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나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譬如眞如(비여진여) 遍一切處(편일체처) 無有邊際(무유변제)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遍一切處(편일체처) 無有邊際(무유변제) 

비유하자면, 진여(眞如, 진여불설)가 일체처에 두루하여 끝이 없는 무변제(無邊際)인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이 일체처에 두루하여서 끝이 없는 무변제(無邊際)요,  

ㅡ진여가 일체처에 두루하다는 것은, 내가 인지하는 모든 것에는 나의 진여불성이 두루 하는 것이지만

나에게 인지되지 않은 것, 내가 인지하지 않은 것은 없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譬如眞如(비여진여) 眞實爲性(진실위성)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了一切法(요일체법) 眞實爲性(진실위성)  

譬如眞如(비여진여) 恒守本性(항수본성) 無有改變(무유개변)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恒守本性(항수본성)하야 始終不改(시종불개)

비유하자면, 진여가 진실(眞實)로서 그 성(性, 성품)을 삼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일체법의 진실(眞實)로서 그 성(性, 성품)을 삼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며,

비유하자면, 진여가 항상 본성(本性)을 지켜서 무개변(無改變)하여 변하여 바뀌지 않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항상 본성(本性)을 지켜서 시종일관 불개(不改)하여 바뀌지 않으며,

ㅡ물을 본다고 해서 진여불성이 물이 되는 것도 아니고, 불을 본다고 해서 진여불성의 본성이 바뀌는 것이 아닌,

이 우주에는 가득한 모든 현상들을 낱낱이 다 분별하여도 나의 진여불성은 바꿔지거나 변하지 않습니다.

 

譬如眞如(비여진여) 以一切法(이일체법) 無性爲性(무성위성)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了一切法(요일체법) 無性爲性(무성위성) 

비유하자면, 진여가 일체법의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으로서 그 성(性, 성품)으로 삼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일체법의 무성(無性)으로서 그 성(性, 성품)으로 삼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며,

ㅡ대승에서는 무아(無我)로써 아(我)로 삼고, 무성(無性)으로써 성품을 삼는 것입니다.

 

譬如眞如(비여진여) 無相爲相(무상위상)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了一切法(요일체법) 無相爲相(무상위상)

비유하자면, 진여가 상이 없는 무상(無相)으로서 상(相)으로 삼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일체법의 무상(無相)으로서 그 상(相)으로 삼는다는 것을 분명히 요달하여 알며,

ㅡ말하자면 우리가 작은 선행을 하고나서 생색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분석해보면 아무 것도 없는 무상인데, 보시나 선한 일을 하고나서 그 상하나 가지고 기분이 좋은 겁니다.

그것도 분석해보면 실체가 없는 것인데, 그러면서도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譬如眞如가 若有得者(약유득자) 終無退轉(종무퇴전)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若有得者(약유득자) 於諸佛法(어제불법) 永不退轉(영불퇴전)

譬如眞如(비여진여) 一切諸佛之所行處(일체제불지소행처)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一切如來(일체여래) 所行之處(소행지처)

유하자면, 만약 진여에 얻을 것이 있는 유득(有得)이라 한다면, 결코 퇴전함이 없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만약 얻을 것이 있는 유득(有得)이라면, 모든 불법에서 영원히 퇴전하지 않을 것이요,

비유하자면, 진여가 일체의 제불(諸佛)들이 행하신 바의 소행처(所行處)인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일체여래가 행하시는 바의 소행처(所行處)요, 

ㅡ진여, 우리의 진여불성이 일체불법의 행하는 바의 소행처가 되는 것과 같이,

진여를 떠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우리 모두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譬如眞如(비여진여) 離境界相(이경계상) 而爲境界(이위경계)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離境界相(이경계상) 而爲三世一切諸佛(이위삼세일체제불) 圓滿境界(원만경계)

비유하자면, 진여가 경계를 떠난 이경계(離境界)의 상(相)으로서 경계(境界)를 삼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경계를 떠난 이경계(離境界)의 상(相)으로서 삼세 제불의 원만한 경계를 삼는 것이요, 

ㅡ경계를 떠났다는 것을 제한이 없다는 것으로, 경계를 떠난, 즉 제한되지 않고 원만하다는 것입니다. 

 

譬如眞如(비여진여) 能有安立(능유안립) 善根廻向(선근회향) 亦復如是(역부여시) 

悉能安立一切衆生(실능안립일체중생) 譬如眞如(비여진여) 性常隨順(성상수순) 

盡未來劫(진미래겁) 隨順不斷(수순부단) 

비유하자면, 진여가 능히 유(有, 존재, 있음)를 안립(安立)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능히 일체의 모든 중생들을 안립(安立)하게 할 수 있으며,

비유하자면, 진여의 성(性, 성품)이 항상 수순(隨順)하는 것과 같이  

선근회향 역시도 그와 같아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끊임없이 수순(隨順)하는 것입니다.

ㅡ진여에 대한 좋은 설명들이지만 선생(善行)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지, 진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ㅡ진여불성에 대한 표현을 경전이나 선사들에 따라 달라서, 진여자성, 한 물건, 마음, 무영수, 목우자, 원각경에서는 원각, 일심 등의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ㅡ무비스님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22

新華嚴經論 卷第一 長者  通玄 장순용 번역

 

이상으로 10 개의 회향문을 정석(正釋)하여 바르게 해석하여 마쳤으며, 
제13 단락을 장과하자면, “부처의 신력으로 인하여(佛神力)” 이하를 다시 5 단락으로 나누겠으니,

첫째. 부처의 위의(威儀)가 대지를 진동하는 분(分)이며,

둘째, 모든 제천(諸天)들이 공양을 일으키는 분(分)이니,

다시 제천(諸天)들이 공양을 일으키는 것에 2 가지의 뜻이 있으니,

하나는 향기로운 꽃과 번개(幡蓋)로 공양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모든 천들이 노래로 찬탄하고 예경(禮敬)하고 광명을 놓는 등의 공양이다.

셋째, “이 도솔천에서와 같이(於此兜率天)” 이하 “모두 다 이와 같다(悉亦如是)”에 이르기까지는,

시방이 모두 그와 같다는 것을 총체적으로 들어서 매듭지은 분이다.

넷째, 시방의 명호가 같은 동호(同號)의 금강당보살(金剛幢菩薩)들이 모두 함께 와서 법을 증명하는 분이다.

다섯째, 금강당보살이 대중을 관찰하고 게송을 설함을 밝힌 분이다.


둘째, 다음과 같이 경문을 따라 뜻을 해석하겠으니, 

무엇을 등법계무량 회향(等法界無量迴向)이라 하는 것인가?

해석함에 있어서,

법계에 중간이나 변두리가 없는 것과 같이, 회향심(迴向心)에도 중간이나 변두리가 없는 심무중변(心無中邊)한 회향이며,

법계에 무작자(無作者, 작위하는 자가 없음)인 것과 같이 회향심(迴向心)에도 작위하는 자가 없는 회향이며,

법계에 가고 옴이나 멀고 가까움이 없는 것과 같이

회향심(迴向心)에도 가고 옴이나 멀고 가까움이 없는 심무거래원근(心無去來遠近) 회향이며,

법계가 마치 허공과 같으니, 회향지(迴向智)도 마치 허공과 같으며,

법계가 불사의(不思議)하듯이, 회향지(迴向智)도 불사의한 것이며,

법계가 의지하는 바가 없는 무소의(無所依)인 것과 같이, 회향지(迴向智)도 의지하는 바가 없으며,

법계에 일체제불(一切諸佛)들이 공주(共住)하여 함께 머무는 바인 것과 같이,

회향지(迴向智)도 일체제불이 공주(共住)하는 바이며,

법계가 3세(三世)와 일체의 모든 생멸하는 시분(時分)의 소섭(所攝, 거두는 바)이 아닌 것과 같이

회향지(迴向智)도 3세 시분의 소섭(所攝, 거두는 바)가 아니며,

법계가 3세(三世)의 일들이 원만하게 현전하는 바이니, 회향지(迴向智)도 3세 사업이 원만하게 현전하고 있으며,

법계가 유(有)와 무(無)에 자재로우니, 회향지(迴向智)도 유와 무에 자재한 것이니,

이는 자타(自他)로 하여금, 그 모두가 법계와 같이 걸림 없이 자재하여서 모든 부처와 같이 될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명칭이 등법계무량 회향인 것이니, 그 대의는 보리심을 발한 일체의 모든 이들로 하여금 한결같이 법계의 모든 덕용(德用, 덕의 공용)이 자재롭고 원만하게 하고, 광대하고 무한하게 하고, 크고 작은 성품을 여의게 함으로써

1ㆍ2ㆍ3백천만 등의 유한(有限)함에 속하지 않고, 무한(無限)한 법과 동등하여져서,

세간과 출세간의 대지(大智)와 대비(大悲)와 대희(大喜)와 대사(大捨)가 법계와 중생계와 동등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회향치 않는다면, 설사 보리를 구한다 할지라도 단지 2승의 적멸에 머무는 보리이거나,

보살의 정토에 즐겨나는 것이거나,

모두가 문 밖의 세 수레인 문외삼거(門外三車, 법화경의 양, 사슴, 소가 끄는 수레)에 머물 뿐인 것으로, 

노지백우(露地白牛, 도로상의 흰 소)는 그러한 분수(능력)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10회향은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을 얻은 출세심자(出世心者)를 얻은 모든 3승으로 하여금,

세간의 생사의 성(性, 성품)의 자성법계(自性法界)를 요달하게 하여서 대자비를 일으키게 하는 것으로,

일체 중생과 더불어 중생의 성품이 바로 법계의 지혜하는 것을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에

평등한 자비문을 얻어서 보광명원지(普光明圓智)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니,

그러므로 초암(草庵)의 화성(化城)에는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다.

 
곧, 유마 거사가 설한 일기법문(一期法文)은 3승을 회향하게 하는 소분(小分)인 것이며,

법화경에서 “노지백우(露地白牛, 도로상의 흰 소)의 승(乘)"은 일분(一分)의 보소(寶所)를 대략 진술하여서 총체적으로 법계문의 보광명대지불과(寶光明大智佛果)인 보현의 행해(行海)와 더불어 널리 종결짓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당 경전 속의 10회향문은 10주와 10행 속의 대지혜와 대자비의 법신만행(法身萬行)과 공덕의 장엄이 자타(自他)를 가로막으며, 비경(悲敬, 자비와 공경)이 참되지 못하고, 지견(知見)이 넓지 못하고, 자비심이 넓지 못하고, 마음이 광대하지 못하여서 무한한 법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니, 이러함을 돌이키기 위하여 이 회향으로 균등하게 다스려서 법계의 걸림 없고 무한한 자재로운 성품에 동등하게 부합시키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무한한 회향으로 발원해서 무한한 법계의 중생을 널리 위하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진문(眞門)에만 머물면서 정토에만 치우쳐 태어날 뿐, 법계의 걸림 없는 구정(垢淨, 더러움과 깨끗함)이 평등한 무한의 동체대비(同體大悲)에는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과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10회향으로서 10신ㆍ10주ㆍ10행과 10지ㆍ11지의 행문(行門)과 함께 균형 있게 하는 것이나, 

총체적으로는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뜻은 10지위(十地位)에서 다시 따로 불과(佛果)를 배당하지 않고 단지 이 지위에 있는 10 개 불과의 명칭에서의 첫 번째 글자가  모두 동일한  묘(妙)가 되는 것이며,

보살의 명호도 10지위 중에서의 보살의 명칭의 첫 번째 글자가 이 10회향위의 보살과 더불어 함께 금강(金剛)이 되는 것이다.

다만 당(幢)과 장(藏)이 다른 것은 묘용의 불과와 행하는 바의 법은 다르지 않지만,

축적한 공(功)이 종결되고 대자비의 공이 원만한 것을 장(藏)이라 칭한 것일 뿐,

그 이외의 다른 회향위(迴向位)의 별개의 법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밝힌다.

때문에 선재동자의 10회향에서는 장자(長者)와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으로서 선우(善友)를 나타내는 것이며,

10지(十地)의 지식(知識, 선지식)에서는 9 개의 야천(夜天)들 모두가 여자로서,

그 중의 하나는 여래가 태자였을 때의 아내이니, 순수하게 대자비를 닦는 지위의 대비위(大悲位)를 나타낸 것이다.

10주(十住)와 10행(十行)은 수행의 지위(智位)이고,

10회향(十廻向)은 원력(願力)으로 균등하게 융화함으로써 지혜와 자비로 하여금 등진(等進)하여 동등히 나아가게 한 것이며,

10지(十地)는 수행을 쌓아서 대지혜와 대자비를 심광(深廣, 깊고 넓게)하게 갖출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10 분의 여자들로서 나타낸 것이다.

11지(十一地)에서 자비와 지혜가 원만하여져서 보현행문(普賢行門)을 성취하는 것은 바로 자비로써 지혜를 일으킴을 밝힌 것이니,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불모마야(佛母摩耶)부인을 11지의 첫 번째 선지식으로 삼아서, 능히 일체의 모든 부처를 낳은 것이니,

모(母)는 자비의 지위이며,

불(佛)은 바로 지혜임을 나타낸 것이다.

자비로 지혜를 낳기 때문에 “마야부인이 부처님을 낳았다는 마야생불(摩耶生佛)”이라 말하는 것이니,

그러함으로서 환생법문(幻生法門)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자비와 지혜의 덕이 성취되면서 보현행이 원만함을 밝힌 것이니, 그 닦아 나감의 단계를 밝혀서 이와 같이 안립한 것이지만, 만약 수행이 일시(一時)에 동진(同進)하여 함께 나아가는 것이라면, 선재동자의 10주위 중 제2 해문국(海門國)의 해운(海雲)비구가 이 초발심주(初發心住)의 비지문(悲智門)을 성취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가운데에서 아수라를 등의 10왕은 생사에 들어가는 행의 입생사행(入生死行)을 나타낸 것이며,

또 해운 비구가 이 회향위에서 능히 생사의 대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또 생사해(生死海)가 곧 불해(佛海) 바다이기 때문에 부처가 출현해서 보안경(普眼鏡)을 설한다고 한 것이며,

10왕 등은 만행(萬行)의 자재로움을 나타낸 것이니,

나아가 10주의 제7주에서 휴사 우바이 등 역시도 이에 해당되지만, 단지 성숙한 관습의 증강처(增降處, 증진하고 하강하는 곳)로써 논하였을 뿐이다.

또한 이 5위 법문이 모두 1찰나를 벗어나지 않고서도 시종(始終)이 성취되는 것이니,

총체적으로는 전후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가령 제20단락에서 법시(法施)의 선근 회향으로 불찰을 장엄한 것은 바로 원력의 장엄이니,

의은(義隱, 은밀한 뜻)은 경문과 같은 것이다.

연무(延袤, 길이)는 누각이 서로 인접되어서 무한히 연장된 것을 말하고,

보창유(寶窓牖, 들창)란 것은 큰 것은 창(窓)이라 말하고 작은 것은 유(牖)라고 하며,

보다라(寶多羅)의 형태가 반월과 같다는 것은 서역에 있는 나무 명칭으로, 이곳의 종려수(椶櫚樹) 같아서 보배로 체(體)를 삼고 반월의 보배로 그 나무를 장엄하였으니, 그 나무 형태가 반월과 같다고는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래의 선근으로 일으킨 바가 아님이 없다(無非如來善根所起)'는 것은

원력이 부처와 같은 선근으로 일어난 장엄으로써 불국을 장엄한 때문이다.

'아승기의 보해(寶海)에 법수(法水)가 가득 차 있다(阿僧祇寶海法水盈滿)"는 것이란,

물이 법을 설함을 말한 것이요,

'아승기 보배의 분타리화가 항상 묘법의 분타리 소리를 낸다(阿僧祇寶芬陁利華常出妙法芬陁利聲)'는 것은

바로 백엽백련화(百葉白蓮華)로서 능히 백 가지 음성을 내어서 백 가지 법을 설하는 것이요,

'아승기 보배의 수미산에서 지혜산왕(智慧山王)이 빼어나게 청정하다는 것(阿僧祇寶須彌山智慧山王秀出淸淨)'은

원(願)과 지혜의 업의 뛰어난 과보로 얻은 것이 그 나머지의 법을 능가하는 것이라서 그 명칭이 수출(秀出, 빼어남)인 것이며,

능히 많은 중업(衆業)을 맑히는 것을 청정이라 칭하는 것이며,

수미(須彌)는 묘고(妙高)를 말하는 것으로,

산은 그 명칭을 지(止)라 함으로써 간(艮)이 산이 되고 그 뜻이 지(止)가 되는 것이며,

왕(王)이란 것은 자재로움으로, 그 마음을 지(止, 멈춤)하면 마음이 바로 청정이고,

만약 그 마음이 청정하면 바로 지혜의 묘용이 자재롭게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보로 얻은 그 산 역시도 이와 같은 것이니, 인과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승기의 8릉묘보(八楞妙寶)를 보선(寶線)의 엄정무비(嚴淨無比, 비할 데 없이 순수함)란 것은 가르침이니, 팔정도의 과보요, 

보선(寶線)이란, 가르침이니, 명언(名言, 가르침)을 대나무나 비단에 꿰어 법이 무산실(無散失)하여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때문에 과보를 성취하는 것이다.
보살보(菩薩寶)란, 보살형(菩薩形)과 같은 것이니, 행보(行報, 행의 과보)로 얻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아승기의 보선(寶旋)이 보살지안(菩薩智眼)을 나타내 보인다'는 것은, 무애지(無碍智)의 과보로 얻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하나의 지혜 가운데에서 다함이 없는 무진법문(無盡法門)을 깊고 유현한 무극(無極)으로 알기 때문에 그 명칭을 선(旋)이라 한 것이다.

'아승기 궁전(宮殿)'이란 것은 비궁(悲宮)과 지전(智殿)의 과보상(果報相)을 장엄한 것이다.

'감(鑑)'이란 것은 비추어 사무치는 것이요,

'보산(寶山)이 담장이 된다'는 것은 지(止)를 방호(防護)로 삼은 과보로 얻는 것이요,

'아승기 보화사(寶化事)'란 것은 이 보배가 능히 갖가지 사법(事法)을 화작(化作)하는 것이니,

이는 하나의 지혜로 만행을 행하여 과보로 얻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보장(寶藏)이 일체의 정법(正法)을 나타내 보인다(寶藏現示一切正法)'는 것은 바로 일체의 갖가지 지장(智藏)의 보득(報得)이기 때문이다.

'여래의 당상(幢相)이 우뚝 솟아 있다(如來憧相迥然高出)'는 것은 보배가 부처의 형상과 같이 서서(立) 국토를 장엄한 것이니, 진여지당(眞如智幢)의 기울어지지 않는 보득(寶得)을 밝힌 것이다.

'아승기 보현(寶賢)에 대지현상(大智賢像)이 구족(阿僧祇寶賢大智賢像具足)'한 것은 그 보배가 현인의 형상과 같아서 현인의 상(相)이 있는 것이니, 자현(自賢)으로 과보가 생기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보원(寶園)이 모든 보살 삼매의 쾌락을 낳는다(寶園生諸菩薩三昧快樂)'이란, 삼매를 원림(園林)으로 삼는 보득(報得)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보음(寶音)'이란, 음성으로 보배를 삼는 것이지 형질(形質)이 있는 것이 아니며,

'보형(寶形)'이란, 갖가지 보배로써 갖가지 형상을 짓는 것이며,

'보상(寶相)'이란 것은 보배를 상호(相好)로 삼는 것이며,

'보위의(寶威儀)'란 것은 보배로 보살의 위의를 지어서 상서(庠序)한 것이며,

'보취(寶聚)'란, 보는 자가 모두 지혜취(智慧聚)를 낳는 것이니, 지혜취를 과보로 얻음을 밝힌 것이요,

'보주(寶住)'란, 지혜 경계로써 보살 10주의 지위를 나타내서 지은 것이요,

'보수습(寶修習)'이란, 보배를 닦아 익히는 법문의 단계로 삼아서 보는 자가 일체의 보배를 다 업(業)이라고 아는 것이니, 이는 업보(業報)를 인식하는 것이다.

'보무애지견(寶無礙知見)'이라는 것은 보배를 무애(無礙, 걸림이 없음)의 지견으로 삼아서 보는 자가 청정한 법안(法眼)을 얻어서 청정 지혜의 무애함으로 낳은 바라는 것이며,

'보다라수(寶多羅樹)'란, 이 나무가 종려(椶櫚) 같아서 무쇠같이 견고하고, 잎이 길고 조밀해서 설사 큰 비가 자주 내릴지라도 마치 집안과 같이 항상 건조한 것이다.

 

경문에서 설하는 바는 보배를 체(體)로 삼는다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서역의 인간목수(人間木樹)와는 같지 않은 것이니, 그 인간목수는 가지가 없는 곳이 몸이 되고, 몸이 곧바로 위로 올라간 것이 줄기가 되고, 줄기 위에서 곁으로 난 것이 가지고 되고, 가지 위의 가는 것이 잔가지가 되는 것이다.

 

'왕도(王都)와 취락(聚落)'은 모두 이 대원경으로 화작(化作)하여 불찰을 장엄하게 함을 기준으로 한 것이요,

'발타라수(跋陀羅樹)'를 한역하면 현(賢)이라 칭하는데, 그 나무 아래에 현인의 거처가 있으며, 또 나무가 현재(賢才)를 배출해서 그 위에 제석천의 보망(寶網)이 장엄되어 있는 것이다.

'보취(寶吹)'란, 능히 음보(音寶)를 내는 것이 마치 소라의 형태와 같은 것이며,

'그 소리가 맑다(其聲淸亮)'는 것은 마음이 맑고 밝은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