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證發心(증발심)
① 發心(발심)의 因緣(인연)
證發心者(증발심자) 從淨心地(종정심지) 乃至菩薩究竟地(내지보살구경지)
증발심이라함은 정심지로부터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에 이르기까지이니,
證何境界(증하경계) 所謂眞如(소위진여) 以依轉識(이의전식) 說爲境界(설위경계)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이른바 진여이다. 전식을 의지하는 것으로, 설하여 경계로 삼는다.
[淨心地(정심지) : 보살 십지 중 초지인 환희지(歡喜地)를 말함.
究竟地(구경지) : 보살 십지 중 제 십지인 법운지(法雲地)를 말함.]
[元曉 : 以依轉識 說爲境界란 전식의 상은 능견의 작용이어서, 이 능견에 대하여 경계라고 말한 것이니, 이러한 제지(諸地)에서 일어난 증지(證智)는 전식에 의해서만 증득하기 때문이다. 능견의 소의(所依)에 대하여 임시로 경계라고 말하나 바로 증지에 나아가서는 곧 能과 所가 없기 때문에 而此證者 無有境界라고 말한 것이다.
* 憨山 : 근본 실지로 진여의 이치를 반연하면 실지인 주관과 진여인 객관의 차별적인 모습이 없다. 실지인 마음과 진여 경계가 일여(一如)다. 그런데 以依轉識 說爲境界라 함은 전식 뒤에서 진여의 이치를 반연하여 진여변상(眞如變相)인 현상의 경계를 통해서 진여성공의 이치를 관찰하므로 이는 관찰하는 주관과 관찰한 객관인 진여가 상대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때문에 관찰할 진여의 경계가 상대적으로 있게 된다. 진여를 증득함은 이런 경계가 아님을 구별해주기 위해서 이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증득한 진여는 주관과 객관의 상대성을 여의어 진여의 이치와 근본실지가 절대 홀로 존재한다. 그 때문에 증오할 대상인 진여의 경계가 따로 없고 유일한 진여지(眞如智)일 뿐임을 법신이라고 명칭한다.-물처럼바람처럼]
[셋째의 증발심(證發心)이라 함은 진여를 증득하여, 그 증득한 진여의 지(智)를 바탕으로 일으키는 발심을 말한다. 진여를 깨닫는 것은 보살이 정심지(淨心地)인 초지(初地)에 들어가서 부터이며, 거기서부터 제10지인 구경지(究竟地)까지 보살이 증발심(證發心)을 일으키는 것이다.-전종식]
而此證者(이차증자) 無有境界(무유경계) 唯眞如智(유진여지) 名爲法身(명위법신)
그러나 이러한 증득에는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진여의 지혜=眞如智일 뿐이므로 이름하여 법신이라고 한다.
[전식(轉識)으로 인해 경계를 나타내어, 경계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전식으로 설명하니 진여 경계라고 할 뿐, 진여 그 자체는 아무런 경계가 없이 진여의 지혜만 있을 뿐이다. 경계상은 전식이 있어야 일어난다. 부처의 경지를 대상화하거나 개념화하는 것은 전식에 의한 것이다. 만약 불지에 든다면 주객과 개관의 나뉨이 없어 경계라는 것이 없다.]
[여기서 진여를 증득했다고 세운 것은 단지 이를 세우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가 없으므로 편의상 진여라고 말한 것일 뿐이다.
본문에서는 전식(轉識)에 의하여 경계를 삼는다고 하였지만 진여를 아는 것은, 아는 지(智)와 알게되는 진여와의 사이에 주객(主客)의 분열이 없는 전체적 직관(直觀)이며,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법신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방금 초지(初地)에 들어선 보살은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등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가 아니며 십지(十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무명(無明)이 멸해지면서, 사라져 가 마침내 십지(十地)인 구경지(究竟地), 보살진지(菩薩盡地)에 이르러 완전히 업식(業識)까지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법신보살이라 하더라도 어느 일면에 있어서는 업식, 전식, 현식의 삼상(三相)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그중 전식(轉識)을 빌어 증발심(證發心)에서의 증득의 대상(對象)즉 경계를 나타낸 것이다. 전식의 경계는 현식(現識)이다. 그렇다고 해서「실재로 증득의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여지(眞如智)만이 있는 것이므로 이를 이름하여 법신(法身)으로 삼는다」고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진여지(智)는 곧 진여이다. 진여는 이(理)이지만 이지(理智)는 합일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근본지(根本智),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이다. 진여(眞如)는 이(理)이면서 본성이 지(智)이고, 그것이 바로 범부의 본성이며, 동시에 불(佛)의 본성인 법신(法身)이다. 법신은 바로 지신(智身)이다.]
[앞의 해행발심은 아직 진여의 법신을 증득하지 못하였는데, 여기 증발심은 진여법신을 증득한 초지의 정심지로부터 보살의 마지막 경지인 십지만심(十地滿心)에 이르기까지 법신보살이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하면 진여(眞如)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식(轉識)을 의지하기 때문에 진여를 증오할 경계라고 설명하긴 하였으나 실제로 증득한 대상의 경계란 없고 진여의 이치를 근본지로 증득하여 진여와 근본지가 평등한 것을 다만 법신이란 이름을 붙였을 뿐입니다. 즉, 앞서의 삼현(三賢)보살은 진여법성을 따라서 수행하긴 하였으나 그들은 진여의 이치를 직접 증득하진 못하였고 단지 비량(比量)으로 추리하여 관찰하였을 뿐입니다. 그러한 경지에선 무명을 아직 타파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진여를 실제로 증득하진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십지의 법신보살들은 정심지에 깨달아 들어가면서 무명의 허망한 생각의 분별인 두 가지 장애를 이미 여의고 진여가 환하게 나타나 일심이 개발되었습니다. 이를 진여의 이치를 실제로 증득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발심"이라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진여의 위대한 작용이 발현하였기 때문입니다.-수선]
是菩薩於一念頃(시보살어일념경) 能至十方無餘世界(능지시방무여세계)
이 보살은 일념 사이=一念頃에 능히 시방의 남김이 없는 세계=無餘世界에 이르러
供養諸佛請轉法輪(공양제불청전법륜)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진리의 바퀴=法輪을 굴리시기를 청하며,
[憨山 : 진여를 정면으로 증오(證悟)했다면 시방법계의 평등한 일법계의 모습으로 환하게 나타나 목전에 있는 듯하여 자타의 신상(身相)이 마치 거울과 거울의 광채가 서로 장애함이 없이 하나로 교차하듯 한다. 그 때문에 일념의 제망찰토(帝網刹土)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을 섬기고 설법해주기를 청한다. 일체 중생이 진여의 이치로 평등하여 자타의 두 모습이 없음을 본다. 그 때문에 일체 중생에게 이익을 줄 뿐이다.]
[이 지위에 있는 보살을 이른바 법신보살(法身菩薩)이라 불린다. 이들 보살이 증득한 경계는 이른바 진여(眞如)이다. 그러나 진여를 증득했다 하더라도 자기와 진여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유심(唯心)의 이(理)에 도달되면 자기 자신이 진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진여의 지(智)이다. 진여를 인식의 대상으로 관(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바로 진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진여를 자기의 인식대상으로 관하는 것은 지전(地前)의 보살이다.]
[진여의 수승한 작용에 방편과 실지의 덕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 보살은 일념 사이에 시방세계에 남김없이 도달하여 그 모든 세계의 모든 중생들을 솔선하여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설법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 오직 중생을 개발하여 인도하여 이익을 주는 설법은 하지만 언어문자를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여를 실제로 증오했다면 시방법계가 평등한 일법계의 모습으로 환하게 나타나 목전에 있는 듯하여 자타의 몸의 형상이 마치 거울과 거울의 광채가 서로 장애없이 하나로 교차하는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념에 제망찰토(帝網刹土)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을 섬기고 설법해 주시기를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체중생이 진여의 이치로 평등하여 자타의 두 모습이 없음을 봅니다. 그 때문에 일체중생에게 이익을 줄뿐입니다. 그가 하는 설법은 한결같은 진여의 자체에서 불가사의한 업지의 작용이 발현하여 업지인 권지(權智)와 그 자체인 실지(實智)가 함께 나타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다음에 여러 가지 모습을 나타냅니다.]
唯爲開導利益衆生(유위개도리익중생) 不依文字(불의문자)
오직 중생을 개도하여, 이익되게 하기 위할 뿐이며, 문자에 의존하지 않으며,
或示超地速成正覺(혹시초지속성정각) 以爲怯弱衆生故(이위겁약중생고)
혹은 경지=地를 초월하여 속히 정각을 이룸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니, 이는 겁이 많고 약한 중생을 위한 까닭이며,
說我於無量阿僧祇劫(설아어무량아승기겁) 當成佛道(당성불도)
혹은 아=我는 무량아승기겁에서 마땅히 불도를 성취하게 된다고 설하기도 하는 것은,
以爲懈慢衆生故(이위해만중생고) 能示如是無數方便(능시여시무수방편) 不可思議(불가사의)
게으르고 교만한 중생을 위한 까닭이며, 능히 이와 같은 무수한 방편을 보이는 것이 불가사의하나,
[보살의 종성과 근기가 같으나 중생들을 위해 여러 가지 방편을 보임을 설명하였다. 엄청난 시간이 걸림을 두려워하여 처음부터 발심하지 않는 중생을 위하여 경지를 초월하여 속히 이룸을 보여주기도 하고, 교만하고 게으른 중생을 위해서는 한량없는 시간이 지나야 성불하게 된다고 말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법신보살은 한 찰나에 시방(十方)의 온갖 세계에 빠짐없이 이르러, 제불(諸佛)을 공양하고, 법륜 즉 설법을 청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념(一念)은 한 찰나를 의미한다. 이렇게 보살이 청법(請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중생을 인도하고 가르쳐, 그들을 이익케하기 위한 것으로서 미묘한 불타의 음성을 듣기 위한 것도 아니며, 그 음성에 집착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는 신역(新譯)에서 말하는 것으로서 구역(구譯)은「문자에 의존하지 아니한다」고만 되어 있어 뜻이 다소 애매하지만 문자를 세우지 않는 선(禪)사상의 근원이 바로 이것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또한 그는 속성(速成)으로 정각을 이룰 수 있다고 설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방편으로써 십지(十地)를 하나 하나 단계적으로 거치지 아니하고도 초지(初地)에서 삼지(三地)로, 또는 이지(二地)에서 사지(四地)로 단계를 뛰어넘어 속성으로 정각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겁약(怯弱)한 중생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때로는 그와 반대로 해태(懈怠)한 중생, 다시 말하면 불도수행(佛道修行)을 안이(安易)하게 생각하는 만심(慢心)의 중생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의 한정된 기간이 아니라 무량한 아승지겁의 수행을 한 연후에야 불도를 이룬다고 설하기도 하는 것이다.]
而實菩薩種性根等(이실보살종성근등) 發心則等(발심즉등) 所證亦等(소증역등)
그러나 실은 보살의 종성은 뿌리가 같고, 발심 또한 같으며, 증득하는 바도 역시 같아서,
無有超過之法(무유초과지법) 以一切菩薩皆經三阿僧祇劫故(이일체보살개경삼아승기겁고)
초월해서 능가할 만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니, 일체의 보살은 모두 삼아승기겁을 경유했기 때문이다.
[증득하여 발심하는 보살에 대한 설명이다.
種性根等(종성과 근기가 같음)이라 한 것은 성불할 근기가 같다는 말이다.
發心則等(발심이 같음)은 모든 보살이 성불하려는 발심을 하기 때문이다.
所證亦等(증득한 것이 같음)은 모든 보살이 경계와 주관이 없음을 증득하였음을 말한다.
無有超過之法(이를 넘어서는 법이 없음)은 보살들을 뛰어넘는 법이 없음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이 증발심(證發心)의 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무수한 방편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방편은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를 증득한 보살이 나타내는 후득지(後得智)로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뛰어난 작용이다. 후득지는 근본지의 뒤에 일어나는 지혜라고 해서 후득지라고 한다.
원효(元曉)는 후득지에 대하여 그의 소(疏)에서 방편심(方便心)이라 말하고,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를 진심(眞心)이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진심(眞心)이라는 것은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말하고, 방편심(方便心)은 후득지(後得智)를 말하며, 업식심(業識心)은 위 두 가지 지혜가 의지하는 바의 아리야식(阿梨耶識)을 말한다. (言眞心者謂無分別智, 方便心者是後得智, 業識心者二智所依阿梨耶識.)」고 하여 증발심의 세 가지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법신보살이라 하더라도 후득지(後得智)의 활동은 업식(業識)에 의존하는 것이다.
위에서 원효는 업식심(業識心)을 근본지와 후득지가 의지하는 바 아리야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보살의 후득지는 업식(業識)의 작용을 빌어 나타내는 것이다. 후득지는 세상에 대한 차별지(差別智)로서「나와 너의 구별이 있다」. 그러므로 보살은 유심(唯心)의 이치를 통달했다 하더라도 자기의 마음밖에 외계(外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에 대하여 활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보살은 업식(業識)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전식(轉識), 현식(現識)을 의존하여 활동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불타가 되면, 불타 자신은 업식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므로, 불타의 후득지의 활동은 업식의 의지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연적 중생구제 활동이다. 불타의 자연적 중생구제활동은 중생의 업식(業識)을 빌어 나타나는 것으로써 중생의 내훈(內熏)과 외훈(外熏)으로 작용한다. 법신은 일체에 두루 퍼져있으므로 중생에 있어서의 법신의 작용은 진여의 내훈으로 업식(業識)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며, 또한 진여의 용훈습(用熏習)이 외부에서 현식(現識)을 매개로 활동하는 것이다.]
但隨衆生世界不同(단수중생세계부동) 所見所聞(소견소문)
다만 중생의 세계는 한결같지 아니하여, 보는 바도, 듣는 바도,
根欲性異故(근욕성리고) 示所行亦有差別(시소행역유차별)
근기=根와 바라는 바=欲과 성품=性이 다르기 때문에 수행하는 바를 나타내는 것도 역시 차별이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이 증발심(證發心)의 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무수한 방편을 나타낼 수가 있다. 그것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다. 이같은 보살의 종성(種性) 즉 마음씨가 같고, 이근둔근(利根鈍根)의 구별 없이, 능력이 동등하며, 발심 또한 동등하고 증득하는 바도 역시 동등하다. 아무도 특별히 뛰어난 것이 아니어서, 수행단계를 뛰어넘는 일도 없다. 일체 보살이 모두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을 동일하게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세계는 제각기 차별이 있어 그들을 교화하는데 있어, 그들이 보는 것이나 듣는 것, 또한 그들의 근기나 능력, 의욕이나 성격 등이 제각기 달라 그들과 대응하는 방편행에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증발심보살의 후득지(後得智)이다.]
[진여와 그가 지닌 덕상과 작용에 의지하여 권지(權智)와 실지(實智)의 수행을 나타내었습니다. 우선 권지(權智)의 수행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혹은 점진적인 수행경지를 단박에 초월하여 신속하게 정각을 이루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불도는 장원(長遠)하여 장구한 세월을 부지런히 고행해야만 한다는 말을 듣고 겁을 내는 나약한 중생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혹은 나는 무량아승기겁을 수행하여야만 불도를 성취하게 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불과(佛果)를 용이하게 여기는 중생들이 게으름과 교만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셀 수 없는 불가사의한 방편을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살의 종자인 종성(種性)과 오근(五根)은 일승종성(一乘種性)인 상근(上根)과 평등하며, 보리심을 발하여 두 가지 이로운 행을 수행하는 것도 평등하며, 증득한 이공(二空)의 이치도 역시 평등합니다. 이를 초월해서 능가할 만한 법은 없는데, 왜냐하면 일체보살이 모두가 삼아승기겁의 수행을 경유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중생과 그들이 의지한 세계가 동일하지 아니함을 따라서 보고 듣는 데에 있어서도 근기(根機)와 욕구(欲求)와 종성(種性)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보살이 나타낸 수행도 역시 차별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쉼터 이야기
난다는 부처님의 배다른 동생입니다. 그는 부처님의 동생이었으나 성격이 짓궂었습니다. 원래는 출가하지 않으려고 했으 나 강제로 부처님께서 출가시켰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심사가 뒤틀리고 불만에 가득 차 있었겠습니까. 어느 날 사리불 존자가 달빛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가 달빛에 빛이 나는 광경을 보고 화가 난 난다는 사리불의 머리를 세게 때렸습니다. 사리불은 선정의 힘 때문에 무엇엔가 부딪히는 미세한 힘을 느꼈을 뿐이지만 난다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부처님은 이 일을 제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자기의 마음을 되풀이하여 반조해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내 마음은 탐욕과 성냄 그리고 무지에 의해 오염되었다.’라고. 비구들이여, 마음이 오염되면 중생이 오염된다.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이 청정하다.” 난다는 자기 속에 들어있는 성냄을 이기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를 통해 부처님께서는 내 마음 속의 탐욕, 성냄, 무지에서 벗어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잔인한 새 사냥꾼의 이야기입니다. 뿌띠가따 띳사(부 처님 시대의 이름)는 가섭불 시대에서는 사꾸니까라는 새 잡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잔인하게도 새의 날개와 다리를 부러뜨려 도망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어느 생에서 그는 발우에 공양을 올리고 절을 하면서 자신도 아라한이 되기를 발원하였습니다. 그는 새를 괴롭힌 업보로 수백만년 동안 지옥의 고통을 받다가 그 공덕으로 부처님 때 인간의 몸을 받아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복을 받았지만 뿌띠가따 띳사는 얼마 후에 병을 얻어 죽고 말았습니다. 죽기 전에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었습니다. 비록 아라한의 원을 세워 부처님을 만나고 출가를 했지만 새를 괴롭힌 과보로 고통스럽게 죽은 것이었습니다.
부처님 시대에 바꿀라 존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청정하게 계를 지키며 사무량심을 닦은 사람이었습니다. 수만 겁 전에 그는 학식이 있는 브라만이었습니다. 그 때 그는 미래 생에도 자신의 행복이 이어지기를 발원하였습니다. 이번 생에도 항상 부지런하고 건전하게 살고 있었는데 마침 부처님이 출현 하셨고 그 때 법문을 듣고 불법에 귀의하였습니다. 하루는 배가 아픈 부처님께 약을 올렸습니다. 부처님께서 걸식을 나가 공양 받은 밥이 상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꿀라의 약을 먹은 덕분에 부처님은 복통에서 벗어나셨습니다. 바꿀라는 이후에 세세 생생 아프지 않는 건강한 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나중에 파두뭇따라 부처님 시대 때 함사와띠시에 재가자로 살았는데 어느 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부처님의 제자로 살기를 발원하였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야무나 강에서 간호사가 그를 씻기다가 잘못하여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물고기가 그를 잡아먹었지만 전생 선정의 힘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선정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보시의 조건은 덕이 있는 자가 바르게 얻어진 재물을 덕이 있는 자에게 청정한 마음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를 청정하게 지켜야 한다. 덕이 있는 사람에게 온 마음으로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재물 등을 제공하고 돌보아 주어야 한다. 계속해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수행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청정하게 계를 지켰기 때문에 계가 있는 사람의 소원은 이루어진다.” ‘청정하게’라 함은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내마음 속에 흘러넘치는 자비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속에 있는 업은 뒤죽박죽되어 있습니다. 옷장을 정리해두면 입고 싶은 옷을 쉽게 꺼내 입을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 옷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져야 합니다. 기도란 내 속의 옷장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두면 전생의 착한 업이 바로 꺼내지기 때문에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내 속에 선한 업이 쌓여있지 않으면 수백 생이 지나도 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가 되겠다는 원을 세우고 계속 선한 업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통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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