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아견(法我見)에 의한 이승둔근(二乘鈍根)의 사집(邪執)
② 法我見(법아견)
法我見者(법아견자) 依二乘鈍根故(의이승둔근고)
법아견이라 함은 이승의 둔한 근기=鈍根을 의지하기 때문에
如來但爲說人無我(여래단위설인무아) 以說不究竟(이설불구경)
여래께서 단지 인무아만을 설하고 구경을 설하지 않아,
見有五陰生滅之法(견유오음생멸지법) 怖畏生死(포외생사)
오음이 생멸하는 법이 있다고 보고, 생사를 두려워하여
妄取涅槃(망취열반) 云何對治(운하대치)
헛되게 열반을 취한다.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가?
以五陰法(이오음법) 自性不生(자성불생) 則無有滅(즉무유멸) 本來涅槃故(본래열반고)
오음법의 자성은 생겨남이 없는=不生이라면, 멸함도 없어서, 본래 열반이기 때문이다.
[五陰法(오음법)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한다. 오온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이 오음이라는 것이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남도 없고 멸함도 없다. 그러므로 본래 열반이지만, 생멸의 염법으로 보므로 생사를 두려워하여 열반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물처럼바람처럼]
* 邪執
執의 종류 | 邪執 內容 | 對治 |
人我見 나라는 것이 주재자로서 실체가 있다고 봄 |
여래법신을 허공으로 봄 | 허공도 색상으로 본 것이며, 진여는 모습이 없음 |
여래법신을 空으로만 봄 | 여래법신은 여실불공도 있어 공덕을 갖춤. | |
여래법신이 색법과 심법으로 차별이 있다고 봄. | 업식으로 인해 생멸을 볼뿐 여래법신은 차별이 없음. | |
여래장에 생사법이 있다고 봄. | 생사 염법은 본래 없는 것인데 망념으로 있다고 착각하는 것임. | |
여래가 열반을 얻어도 끝남이 있다고 봄 | 열반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이 있어 얻는 것이 아니라, 불생불멸 무시무종의 여래법신과 합일되는 것임. | |
法我見 | 오음에 생멸이 있음을 보아 생사를 두려워하고 헛되이 열반을 구함. 법에 실체가 있다고 봄. | 오음법은 자성이 없어 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니 본래 열반임. |
[법아견(法我見)은 현상세계의 제법이 고정적 실체가 있다고 보는 그릇된 견해를 말한다. 본란은 그러한 법아견을 가지고 있는 성문(聲聞) 연각(緣覺) 등 이승(二乘) 둔근(鈍根)의 사람이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를 깨뜨리기 위하여 설하는 것이다. 불타는「오온(五蘊)은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라는 삼법인(三法印)을 설하고 인간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으로 분석하여, 거기에는 고정적 자아(自我)는 없다고 하여, 무상(無常)한 현상(現象)적 모습만을 설하고 궁극적 본체를 설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문(聲聞) 연각(緣覺) 등 둔근(鈍根)의 이승(二乘)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영원한 불변의 진여(眞如)를 알지 못하고 오온(五蘊)의 인간은 실재로 생멸(生滅)하는 실체적 법이라고 그룻 생각하고, 생사(生死)의 고(苦)를 두려워하여, 이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생사(生死)의 세계에서 열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 밖에서 별도의 열반을 구하려하기 때문에 그 열반은 진실한 열반이 아니라 허망의 열반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같은 그릇된 견해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그것은 오온 그 자체의 본성은 불생불멸하고 본래 열반임을 들어 대치하는 것이다. 현상세계에 나타난 인간의 오온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원리에 따라 변해가는 것으로서 그러한 생사의 염법(染法)은 허망한 존재이지만, 그러나 이미 설해온 바와 같이 생멸문의 본체는 진여(眞如)이기 때문에 그것은 불생불멸의 영원한 것이다. 그래서 현상세계에서 실재로 생사가 있다고 보는 것은 망견(妄見)으로써, 주관적 망념이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음(五陰:五蘊과 같음)의 법은 자체(自體)인 본체가 있어 실생실멸(實生實滅)하는 것이 아니다. 자성이 본래부터 상주하고 있어 시작이 없는 불생(不生)이므로 멸(滅)이 있을 수 없다. 미망(迷妄)으로 허망의 생사가 있다고 망상하는 것이므로, 그 미망을 떠나면 그것이 바로 열반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진여(眞如) 그것은 바로 열반이다. 지혜를 완성하는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오온개공(五蘊皆空)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은 바로 불생불멸의 오온 본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바로 진여 열반이며,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를 무상한 생멸의 측면에서 보는 것은 바로 법아견(法我見)에 의한 사집(邪執)에 떨어지는 것이 된다.-전종식]
[여기에서는 이승(二乘)의 둔근(鈍根)에 대하여 아공(我空)의 도리인 인무아(人無我)를 설하여 싫증을 낼 만한 생사가 있고, 그에 반대되는 증득할 만한 열반도 있다는 말씀을 듣고 생사법과 열반법이 따로 있다고 집착하는 법아견(法我見)을 타파한 것입니다. 여래께서는 성문과 연각에게 생사의 오음이 무상(無常)하다는 것만을 설하고 생사가 원래 자성이 없으므로 그것이 바로 진상(眞常)의 열반임을 설하진 않았습니다. 이것이 아함경에 설해진 핵심주제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겐 생사가 바로 열반인 구경의 법무아(法無我)인 법공(法空)을 말씀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허망하게 이러한 법아견을 일으킨 것입니다. 생사과 열반이 아(我)가 망정으로 헤아릴 대상의 법(法)이 되기 때문에 법아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에선 대치하는 법을 밝힘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집착을 여의게 하였고, 다음에선 이 두 집착을 끝내 여읨을 밝힙니다.-수선]
(2) 究竟(구경)에 妄執(망집)을 여읨을 밝힘
復次究竟離妄執者(부차구경리망집자)
또한 구경으로 허망한 집착=妄執을 여읜다는 것은,
當知染法淨法皆悉相待(당지염법정법개실상대) 無有自相可說(무유자상가설)
마땅히 알라 염법과 정법 모두는 다 상대하는 것으로, 자상을 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染法淨法皆悉相待 : 염법과 정법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염법이 없으면 따로 정법이라 할 만한 것도 없으니 독립된 자성이 없다. 무슨 말인가? 오답이 있기 때문에 정답을 가려내는 것이지, 만약 오답이 없다면 정답이라 할 만한 것도 없음과 같다. 염법이 있으므로 정법을 말하는 것이지 만약 염법이 없다면 그대로 정법이며, 그 정법이라는 것도 정법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비유하자면 허공에 먼지가 끼었으므로 먼지를 걷어낼 뿐 먼지를 걷어낸다면 남은 무엇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是故一切法(시고일체법) 從本以來(종본이래) 非色非心(비색비심)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색법=色도 아니고, 심법=心도 아니며,
非智非識(비지비식) 非有非無(비유비무) 畢竟不可說相(필경불가설상)
지혜=智도 아니고, 업식=業도 아니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필경에는 설명할 수 있는 상이 아니다.
而有言說者(이유언설자) 當知如來善巧方便(당지여래선교방변)
그러나 설명한 언설이 있는 것은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여래께서 좋은 방편=善敎方便으로
假以言說引導衆生(가이언설인도중생)
언설을 빌어 설명하여, 중생을 인도한 것이다.
其旨趣者(기지취자) 皆爲離念歸於眞如(개위리념귀어진여)
그 종지의 취지는 모든 망념을 떠나 진여로 돌아가게 함=歸於眞如하기 위함이니
以念一切法(이념일체법) 令心生滅(령심생멸) 不入實智故(불입실지고)
일체법을 생각=念함으로써 마음이 생멸하여, 진실한 지혜=實智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元曉 : 네 번째(바로 위의 설명을 가리킴)는 구경에 집착을 여읜다는 뜻이니, 그 중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모든 것이 말을 여읜 도리를 밝혔고, 뒤에는 언설을 빌어 가르치는 뜻을 나타내었으니 글의 양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설명이 있게 된 것은 여래께서 훌륭한 가르침의 방편인 언어의 설명을 빌림으로써 중생을 인도한 것이므로 그 의도가 언어의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의 종지(宗旨)와 그 종지로 나아가는 것은 모두가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의 삿된 집착의 허망한 관념을 여의고 진여에로 귀결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 생사와 열반의 법을 허망한 관념으로 잘못 집착하면 일심이 생멸하여 진여의 진실한 지혜에 깨달아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삿된 집착에 대한 대치는 끝났고, 다음에 발심(發心)하여 최상의 완전한 깨달을 얻어 열반에 안주하는 곳으로 향해 가는 도(道)의 모습을 밝힙니다.]
[이상에서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을 원인으로한 사집(邪執)에 대하여 설명한 바이다. 여기에서는 궁극적으로 그러한 망집(妄執)을 어떻게 떠나게 하는가를 설하는 부분이 된다.
그 동안의 온갖 설법은 우리들 범부 중생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상대적 용어를 사용하여 설해온바 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차별있는 상대적 현상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절대적 불(佛)의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상대적 용어를 사용하여 이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언설로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설로서 표현하자면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상대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기신론'을 설해옴에 있어, 그러한 뜻이 군데군데 밝혀진바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최종적으로 밝혀 궁극적으로 그릇된 견해를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궁극적으로 그러한 망집(妄執)을 떠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설해온 정법(淨法)이나 염법(染法)이 모두 서로 상대해서 설해온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것이 정법(淨法)이라 설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망법(妄法)의 상대적 용어로 설했을 뿐 그것 자체의 자상(自相)이 바로 그것이라고 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善)과 악(惡), 진(眞)과 망(妄), 염(染)과 정(淨), 미(迷)와 오(悟) 그것들은 모두가 상대(相待)해서 성립되는 용어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악(惡)은 선(善)과 비교하여 성립될 뿐, 악이 없는데 선만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 인간이 더럽다고 상대적으로 말하는 분뇨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구더기는 그곳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것이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하는 그 말 자체가 스스로를 기준으로 하여 상대적으로 평가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이것들을 본질적으로 말한다면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그것이 바로 실재의 자상(自相)을 표현하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러므로 본론에서는 일체법이 본래부터 비색비심(非色非心) 즉 '색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 말은 현상적 상대의 의미의 말이 아니라 제일의제(第一義諦)인 본체적 입장에서 설하고 있는 것이다. 지혜라든가 인식이라든가 하는 지(智)와 식(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智)는 통찰(洞察)이고 직관적인 것이어서 진체(眞體)를 아는 것이지만, 식(識)은 분석적이고 분별(分別)하고 판단하는 것으로서 차별을 아는 것이다.
이 또한 진정한 본체적 입장에서는 '비지비식(非智非識)'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비유비무(非有非無)도 마찬가지 이치이다. 유(有)와 무(無)는 상대적 용어에 불과하다. 그래서 본론에서는 이를 '필경 불가설상(畢竟不可說相)'이라고 하여 '궁극적으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것은 말로서 실상(實相)을 설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무분별(無分別)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가설(可說)' 즉 말로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분별이며 망념(妄念)으로서, 망념으로는 현실의 진상인 진여(眞如)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불가설(不可說)'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타는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이지만, 이 설법은 분별의 언어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 본론에서는 '그러나 언설(言說)이 있는 것은, 마땅히 알아라, 여래의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 언설을 빌어 중생을 인도하는 것'이라 설하고 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불타의 설법은 분별있고 차별있는 현상의 세게, 즉 세속제(世俗諦)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고는 가르침을 전달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 언설이 아무리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그 언어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잠깐 그 언설을 빌어' 절묘한 방편을 써서, 중생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타는 어떠한 언어를 써서 설법을 한다 하더라도, 항상 그 언어의 한계를 알고 행하기 때문에 가르침에 집착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불타는 중생을 망념에서 떠나 무념(無念)의 세계에 이끌기 위해서는 언설(言說)의 분별을 빌어쓰는 것이다.
이러한 설법의 목적을 본론에서는 '그 취지는 염(念)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어떠한 진리라도 그것을 세속(世俗)의 입장에서 사념(思念)하면 그것은 망념이어서, 거기에는 마음의 생멸(生滅)이 있고, 마음이 주객(主客)으로 분열하여 암흑(暗黑)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설해진 바 있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일체법을 염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하여 진실한 지혜[實智]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현상계에서의 모든 법은 차별 그 자체가 상대(相待)적인 것으로서 분별의 사념(思念)이고 망념(妄念)이므로 이를 떠나야만이 진실한 지혜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며, 부득이 언설을 빌어 설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자상(自相) 그 자체는 아닌 것이며, 주객(主客)이 합일하여 무념(無念)의 세계 속에서만 진상(眞相)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쉼터이야기, 내생에 과보를 받는 업
부처님 제자 가운데 제바달다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었으나 평생 부처님을 시기질투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부처님을 죽이려고 벼랑 위에서 바위를 밀기도 했습 니다. 다행히 부처님은 피했지만 그 파편 중 하나가 튀어 부처님 발에 피를 냈습니다. 또 코끼리에게 술을 마시게 하여 부처님께서 가는 길목에 풀어놓았습니다. 제바달다는 술취한 코끼리가 부처님을 죽이기를 바랐으나, 신기하게도 코끼리는 부처님 앞에 와서는 얌전히 앉아버립니다.
또 그는 승가를 분열시키기도 했습니다. 승가를 분열시킨 후 무리를 이끌고 부처님 승단을 나갑니다. 하지만 그도 인간인지 라 자신의 죄를 알고 참회하여 죄를 빌러 부처님께 향합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처님께로 가는 도중 죽고 맙 니다. 그는 사후 부처님을 죽이려한 업보로 무간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승가를 분열시킨 업보로 그가 겪은 지옥의 고통은 격심하였고 지속되었습니다. 여기서 10만겁의 기간이 연장 되었습니다.
그럼 현생에 효과가 있는 업을 살펴봅시다. “어떤 업을 행하기 전과 행하는 과정에서 유쾌하거나 불쾌하다면 금생에 과보 를 만드는 업의 결과물이다. 지계하거나 명상할 때 편안한 마음이나 행복한 마음을 느끼고, 12연기에 따라 어떤 일의 원인을 깊이 생각하면 현생에 효과가 있는 업이 된다. 사성제에서 도를 실천하고 나면 바로 다음 순간에 과의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계를 지키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명상을 하면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앞으로의 행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은 현생의 삶을 안정되고 편안하게 하고 내생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은 단순히 내생을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현생을 편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현생이 극락이면 내생도 자연스럽게 극락이 됩니다. 현생이 지옥이라면 아무리 기도를 해도 내생에 극락에 가기 힘듭니다. 과거, 현재, 미래 모두 내가 살았던 삶의 연속입니다.
“소멸된 업. 아라한이 대열반을 성취할 때 업이 소멸한다. 내 생이나 그 다음 생에서 무르익을 수 있는, 셀 수 없는 과거 생에서 지은 무수한 해로운 업과 유익한 업들은 모두 소멸된 업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는 소멸되었다. 더 이상 새로운 존재는 없다. 미래의 존재에 대해 갈망하는 마음이 없이 이것의 씨앗들은 모두 불타버렸다.’” 아라한이 대열반을 성취할 때는 부처가 된 때를 말합니다. 견성성불할 때 내 속에 들었던 업이 모두 소멸합니다. 이것은 어두운 방에 불을 켠 것과 같습니다. 어둠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니지만 불을 켜면 어둠이 없어집니다. 열반을 성취해서 자비광명이 되면 내 속의 악한 마음과 잘못된 것들이 그냥 없어집니다. 견성성불하고 부처가 된 순간 대자대비심 밖에 없습니다. 업에 의한 어떤 분별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열반을 성취하면 나타나는 모든 것은 자비 밖에 없습니다. 내 안의 번뇌, 아집은 모두 멈춥니다.
암수술은 몸 안의 암세포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방사선치료는 분열하는 암세포를 분열하지 못하게 가만히 있게 만듭니다. 있어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이와 같이 열반을 이루면 업이 있더라도 이것이 작용을 못합니다. 작용을 못하니 과거가 소멸한 것이나 다름없고, 더 이상 새로운 존재가 없고 미래에 대한 갈망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통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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