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생(生, 산스크리트어: jāti, 팔리어: jāti, 영어: birth)은 유연생(有緣生)과 생연노사(生緣老死)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유연생은 연유생(緣有生)이라고도 하며 생연노사는 연생노사(緣生老死)이라고도 한다. 유연생 또는 연유생은 유(有)가 있으므로 생(生)이 있다는 뜻이고, 생연노사 또는 연생노사는 생(生)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유정(有情)이 어떤 유정의 부류에 태어나는 것이기도 하고, 또 일상생활에서 어떤 경험이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앞의 경우에는 그 유정의 과거 모든 경험의 여력으로서의 지능·성격·체질 등을 지니고 태어나게 된다. 

각 개인이 각기 일정한 소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 사람의 소질[有]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경험이 생기는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 유라는 소질에서 새로운 생이 발생하는 것은 같다.

 

잡아함경 12 298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 각각의 중생(衆生) 각각의 몸의 종류로 번의 생을 넘어 화합하여 태어나서는, () 득하고, () 득하고, 입처(入處) 득하고, 명근(命根) 득하는 것을 말한다.

"생(生); 존재를 인연하여 태어남이 있다 하니, 어떤 것을 태어남[生]이라고 하는가?

만일 이러저러한 중생들이 이러저러한 몸의 종류로 생겨나, 뛰어넘고 화합하고 태어나서 음(陰)을 얻고, 계(界)를 얻고, 입처(入處)를 얻고, 명근(命根)을 얻으면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하느니라."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나오는 낱말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각각의 중생[彼彼衆生] 유정(有情) 구역(舊譯)으로,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3유의 세계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소의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 개개의 유정을 말한다.

각각의 몸의 종류[彼彼身種類] 중동분(衆同分) 유정의 동류상사성(同類相似性) 말한다.

번의 생을 넘어 화합하여 태어나는 [一生超越和合出生] 5온의 화합이 번의 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으로 상속(相續)되고 유전(流轉)하는 것을 말한다.

() 득하는 [得陰] 5온이 갖추어지는 말한다.

() 득하는 [得界] 18계가 갖추어지는 말한다.

입처(入處) 득하는 [得入處] 12처가 갖추어지는 말한다.

명근(命根) 득하는 [得命根] 생에서 생으로 윤회할 5온이 생에서 생으로 상속되고 유전할 전생(前生) 쌓은 원인에 따라 일정한 수명을 부여받는 말하며, 이것은 또한 수명 동안 살아가는 생애를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생애를 살아가는 것이란, 생애 동안 무명(無明)에서 () 5취온으로 이어지는 유전연기를 행하거나 무명(無明) 단멸시키고 나아가 () 5취온을 5무루온으로 변형시키는 환멸연기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유연생(有緣生) 또는 연유생(緣有生), () 있으므로 () 있다는 것은 욕유 · 색유 · 무색유의 3 가운데 어느 하나의 존재, 5취온의 상태가 있으므로, 생사윤회를 피할 없는 상태가 있으므로 태어남이 생겨난다는 다른 일생을 받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것은 5취온은 죽음으로 그냥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으로 상속되고 유전된다는 것을 뜻한다.

 

유연생(有緣生) 또는 연유생(緣有生) 또한 이미 발생한 생이 있다면,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여 받은 삶이 있다면, 자신이 3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라면, 반드시 원인이 되는 () 존재한다는 , 5취온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순대고취(純大苦聚) 상태의 5취온의 상태의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경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 각각의 유정(有情) 각각의 유정의 종류로 갖가지 생에서 6[] 가운데 태어나서는 () 일으켜 나타내고, () 득하고, () 득하고, 모든 () 득하고, 명근(命根) 생기고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생(生); 유는 생(生)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생인가.

생이란 저들 각각의 중생이 그 중생의 무리에서 자신의 나갈 길에 따라 태어나고, 태어나서는 몸을 나타내고, 18계(界)ㆍ12처(處)ㆍ5온(蘊)을 얻게 되어 생명이 생기고 나타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생이라고 한다."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따르면, () () 의해서 있게 된다.

 

(12) 노사(老死, 산스크리트어: jarā-maraṇa, 팔리어: jarā-maraṇa, 영어: aging (old age), decay and death)는 생연노사(生緣老死)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생연노사는 연생노사(緣生老死)라고도 한다. 생연노사 또는 연생노사는 생(生)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태어난 뒤에 늙고 죽는 등의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며, 일체의 고뇌가 노사에 의하여 대표되어진 것이다. 노사는 미래에 수생(受生)한 뒤에 명색·육처·촉·수로 발생하는 상태이다.

 

잡아함경 12 298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노사(老死) () () 늙음과 죽음을 통칭하는 말이다.

“노사(老死); 태어남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 하니,

어떤 것을 늙음[老]이라고 하는가? 만일 털이 하얗게 세고 정수리가 벗겨지며, 가죽이 늘어지고 감각기관이 문드러지며, 사지가 약해지고 등이 굽으며, 머리를 떨어뜨리고 끙끙 앓으며, 숨이 짧아져 헐떡이고 앞으로 쏠려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몸이 시커멓게 변하고 온몸에 저승꽃이 피며, 정신이 희미해져 멍청히 있고 거동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지면 이것을 늙음이라고 하느니라.

어떤 것을 죽음[死]이라고 하는가? 이러저러한 중생들이 이러저러한 종류로 사라지고, 옮기며, 몸이 무너지고, 수(壽)가 다하며, 따뜻한 기운이 떠나고, 명(命)이 소멸하여 음(陰)을 버릴 때가 이르면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이 죽음과 앞에서 말한 늙음을 합해 늙음과 죽음이라고 한다."

 

() 늙음은 털이 하얗게 세고 정수리가 벗겨지며, 가죽이 늘어지고 5[] 문드러지며, 4[] 약해지고 등이 굽어지며, 머리를 떨어뜨리고 끙끙 앓으며, 숨이 짧아져 헐떡이며,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몸이 검게 변하며, 온몸에 저승꽃이 피며, 정신이 희미해져 멍청히 있으며, 거동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지는 것을 말한다.

 

() 죽음은 각각의 중생(衆生) 해당되는 무리로부터 사라지고 천이(遷移)하며, 몸이 무너지고, () 다하고, 따뜻한 기운[] 떠나고, () 소멸하여, (: 5) 버릴 때가 것을 말한다.

 

생연노사(生緣老死) 또는 연생노사(緣生老死), () 있으므로 노사(老死) 있다는 것은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으로, 열반에 이른 상태가 아닌 생사윤회를 피할 없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미 발생한 노사(老死) 늙음과 죽음이 있다면, 반드시 기본 전제가 되는 () 태어남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순대고취(純大苦聚) 상태의 5취온의 상태의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경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노사(老死) () () 늙음과 죽음을 통칭하는 말이다.[160][161]

 

() 늙음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변하며, 피부가 늘어지고 쭈그러지며, 온몸이 쇠약해지고 모습을 잃어가며, 몸과 등은 구부러지고 굽으며, 검버섯이 몸의 여기저기에 피어나며, 숨결은 가빠지며, 몸의 모양은 구부정해져서 지팡이에 의지하며, 정신은 혼미하고 몸은 파리하여 줄어들고 쇠퇴하며, 5[諸根] 노화하여 기능을 상실해가며, 모든 행동이 부자연스러우며, 몸의 형태가 무너져 가는 것을 말한다.

“노사(老死); 생은 노사(老死)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노인가.

노(老)란 머리카락이 빠지고 변하며, 피부는 늘어지고 쭈그러지고 온몸이 쇠약해지고 제 모습을 잃어가며, 몸과 등은 구부러지고 굽으며, 검버섯이 몸의 여기저기에 피어나고, 숨결은 가빠지고, 몸의 모양은 구부정해져서 지팡이에 의지하며, 정신이 혼미하고 몸은 파리하여 줄어들고 쇠퇴하며, 모든 감관은 노화하여 기능을 상실해가고, 모든 행동이 부자유스럽고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노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이 사(死)인가.

사란 저들 각각의 중생이 그 중생의 무리에서 마침내 사라지고 없어지게 되어, 목숨과 따뜻함을 버리고 그 생명이 끊어지고 5온(蘊)도 버리고, 죽을 때가 되어 다 없어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사라고 한다.

이러한 사와 앞에서 말한 노를 통틀어서 하나로 하여 노사라고 한다."

 

() 죽음은 각각의 유정(有情) 해당되는 무리로부터 마침내 사라지고 없어지며, () 온기[] 버리고, 명근(命根) 다하여 없어지고, 모든 (: 5) 버리고 죽을 때가 되어서 운용[] 다한 것을 말한다.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따르면, 노사(老死) () () () 의해서 있게 된다.

 

*십이연기는 전통적으로 삼세양중(三世兩重)의 인과에 의하여 설명된다. 삼세양중의 인과로 십이연기를 해석하는 것은 불교 일반의 전통적인 통설로 되어 있으며,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① 무명은 과거에 있어서의 무명 등의 번뇌이고, ② 행은 과거에 있어서의 선악업(善惡業)이며, ③ 식은 모태(母胎) 안에 최초로 발생하는 일찰나의 오온(五薀)이며, ④ 명색은 4주째의 태내(胎內) 모습이다. ⑤ 육처는 제5주의 태내에서 눈 등의 육근이 완성되는 상태이고, ⑥ 촉은 출태 뒤의 단순한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상태이다.

 

⑦ 수는 5세부터 14세까지의 단순한 고락의 감수작용을 일으키는 상태이며, ⑧ 애는 재산이나 애욕에 탐착하는 14세 이후이다. ⑨ 취는 이 탐착이 증진되는 상태이고, ⑩ 유는 애욕과 취착의 선악업이 습관력이 되어 미래의 과를 일으키려는 상태이며, ⑪ 생은 미래의 과가 발생한 상태이며, ⑫ 노사는 미래에 수생(受生)한 뒤에 명색·육처·촉·수로 발생하는 상태이다.

(9) 취(取) (산스크리트어: upādāna, 팔리어: upādāna, 영어: attachment)는 애연취(愛緣取)와 취연유(取緣有)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애연취는 연애취(緣愛取)라고도 하며 취연유는 연취유(緣取有)라고도 한다. 애연취 또는 연애취는 애(愛)가 있으므로 취(取)가 있다는 뜻이고, 취연유 또는 연취유는 취(取)가 있으므로 유(有)가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취는 자기가 원하는 것에 집착하는 작용이다. 앞의 애는 마음 속에 생기는 심한 애증의 생각인 데 반하여 이 취는 생각 뒤에 생기는 취사(取捨)에 대한 실제행동이다. 사랑하는 자는 이를 빼앗고 미워하는 자는 이를 버리거나 혹은 살상하는 것과 같은 실제 행동을 가리킨다. 즉, 몸과 말에 의한 취사선택의 행위가 취이다. 살생·도둑질·사음·거짓말·욕설 등이 이에 속한다.

 

잡아함경 12 298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 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 아취(我取) 4(四取) 말한다.

"취(取) 애욕을 인연하여 취함이 있다 하니, 어떤 것을 취함[取]이라고 하는가? 4취(取)이니, 탐욕에 대한 취함[欲取]·소견에 대한 취함[見取]·계에 대한 취함[戒取]·나에 대한 취함[我取]이니라."

 

가운데 계취는 계금취(戒禁取)라고도 하며, 아취는 아어취(我語取)라고도 한다.

"애는 취(取)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취인가.

취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를 말한다. 이것을 취라고 한다." 

 

()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은 가짐 또는 취함인데,

"取: 가질 취 
1. 가지다, 손에 들다
2. 취하다(取--)
3. 의지하다(依支--), 돕다
4. 채용하다(採用--), 골라 뽑다
5. 받다, 받아들이다
6. 이기다
7. 다스리다
8. 멸망시키다(滅亡---)
9. 장가들다
10. 어조사(語助辭)
11. 인연(因緣)의 하나
12. 춘추(春秋)의 필법(筆法)
단어 뜻풀이: ①십이인연(十二因緣)의 한 가지. 애(愛)에 따라 일어나는 집착(執着) ②번뇌(煩惱). 집착(執着)
회의문자: 又(우☞손)와 耳(이☞귀)를 뜻하는 글, 손으로 귀를 떼다→떼다, 옛날 전쟁(戰爭)에서 적을 잡으면 증거물(證據物)로 그 왼쪽 귀를 잘라내어 가져 왔다는 데서 '취하다'를 뜻함"

 

모니어 모니어윌리엄스(Monier Monier-Williams) 산스크리트어-영어 사전 따르면 () 산스크리트어 원어 우파다나(upādāna) 일반적인 의미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취하는 행위(the act of taking for one's self),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전용(轉用: 곳에 쓰지 않고 다른 곳으로 돌려서 )하는 행위(appropriating to one's self), 받아들임(accepting), 허용함(allowing), 취함(taking), 획득함(acquiring) 등이 있고, 불교 용어로서는 '갈애 탐욕이 원인이 되어 존재를 붙잡는 또는 집착하는 것으로 새로운 태어남들의 원인이 되는 (grasping at or clinging to existence caused by tṛṣṇā, desire, and causing bhava, new births)'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후자의 불교 용어로서의 정의는 애연취(愛緣取) 취연유(取緣有) 의미를 합쳐서 (, upādāna) 정의한 것이다.

 

현대의 불교 사전들에 따르면, ()라는 낱말의 일반적인 의미는 집지(執持: 잡아서 가짐, 잡아서 지님, 잡은 버팀, 잡은 유지함) · 집취(執取: 잡아서 가짐, 잡아서 취함, 잡은 받아들임, 잡은 의지함)인데, 좁은 뜻으로는 집착(執著: 붙잡은 들러붙음,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함)이라는 번뇌를 하고, 넓은 뜻으로는 모든 번뇌(煩惱) 한다. , 후자의 넓은 뜻으로는 () 번뇌의 다른 말인데, 4(四取)라고 때의 () 후자의 뜻이다. 그리고 어떤 번뇌를 ()라고 때는 마음이 해당 번뇌의 대상을 그릇되이 좋아하여[惡欲] 취한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한다는 의미를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執取: 執 잡을 집
1. 잡다 2. 가지다 3. 맡아 다스리다 4. 처리하다(處理--) 5. 두려워하다 6. 사귀다 7. 벗, 동지(同志) 8. 벗하여 사귀는 사람
取 가질 취
1. 가지다, 손에 들다 2. 취하다(取--) 3. 의지하다(依支--), 돕다 4. 채용하다(採用--), 골라 뽑다 5. 받다, 받아들이다 6. 이기다 7. 다스리다 8. 멸망시키다(滅亡---) 9. 장가들다 10. 어조사(語助辭)..."

 

 "사취(四取): 취(取)는 번뇌를 뜻함. 번뇌를 네 가지로 나눈 것.

(1) 욕취(欲取). 욕계(欲界)의 번뇌로, 탐(貪)·진(瞋)·만(慢)·무명(無明)·의(疑)·십전(十纏)을 말함.

(2) 견취(見取). 유신견(有身見)·변집견(邊執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을 말함.

(3) 계금취(戒禁取). 그릇된 계율이나 금지 조항을 바른 것으로 간주하여 거기에 집착하는 번뇌.

(4) 아어취(我語取). 내면에 집착하여 자아에 대해 설하는 번뇌로, 색계와 무색계의 貪·慢·無明·疑를 말함."

 

"四取(사취): 3계의 번뇌를 네 가지로 나눈 것.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 이것은 12인연 중의 취지(取支)를 자세히 구별한 것이니, 취(取)는 집취(執取)ㆍ집지(執持)의 뜻으로, 3계의 허망한 상(相)에 집착하여 6취(趣)의 생(生)을 취하므로, 번뇌를 취(取)라 함."

 

4(四取) 모든 번뇌를 () 뜻에 초점을 맞추어 4그룹으로 분류한 것이다. 대상을 그릇되이 좋아하여[惡欲] 취한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한다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모든 번뇌를 4그룹으로 분류한 것이다. 설명하기 좋은 순서대로 말하면, 대체로 견취(見取) 그릇된 견해에 들러붙어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이고, 계취(戒取) 또는 계금취(戒禁取) 그릇된 계율과 그릇된 금지조항에 들러붙어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이고, 욕취(欲取) 욕계의 사물에 들러붙어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이고, 아취(我取) 또는 아어취(我語取) 색계 · 무색계의 사물에 들러붙어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이다. 구체적으로는 4취는 다음과 같다.

 

4(四取, 산스크리트어: catvāry upādānāni, 팔리어: cattāri upādānāni) 모든 번뇌, 정확히 말하면 108번뇌를 () 관점에서 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 아취(我取) 4그룹으로 분류한 것이다. 욕취에 34번뇌, 견취에 30번뇌, 계취에 6번뇌, 아취 또는 아어취에 38번뇌가 있어서 108번뇌를 이룬다. 4취를 구역에서는 4(四受)라고도 한다.

 

욕취(欲取, 산스크리트어: kāmopādāna, 팔리어: kāmopādāna) 욕계의 5(五欲) 대상을 그릇되이 좋아하여[惡欲] 취한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로, 달리 말하면, 욕계의 · · · · 촉의 5경에 들러붙어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이다. 욕취에는 욕계의 6 가운데 6번째인 법경(정신적 사물) 대한 () 제외되는데, 이것은 4 가운데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 소속된다.

 

구체적으로, 욕취에 속한 번뇌들이란 욕계의 () · () · () · 무명(無明) · () · 10(十纏) 말한다.

 

번뇌를 근본번뇌와 수번뇌로 구분할 , 욕취에 속한 번뇌들 · · · 무명 · 의는 근본번뇌에 속하고 10전은 수번뇌에 속한다. 10전은 무참(無慙) · 무괴(無愧) · () · () · () · () · 도거(掉擧) · 혼침(惛沈) · (忿) · () 말한다.

"十纏(십전): 탐(貪) 등의 근본번뇌에 부수되어 일어나는 열 가지 번뇌. 무참(無慙)ㆍ무괴(無愧)ㆍ질(嫉)ㆍ간(慳)ㆍ회(悔)ㆍ면(眠)ㆍ도거(掉擧)ㆍ혼침(惛沈)ㆍ분(忿)ㆍ부(覆). 여러 가지 악(惡)을 지어 중생을 얽매어 생사의 옥(獄) 중에 가두는 뜻에서 이렇게 이름."

 

설일체유부의 번뇌론에서 모든 근본번뇌는 견고소단(見苦所斷) · 견집소단(見集所斷) · 견멸소단(見滅所斷) · 견도소단(見道所斷) · 수도소단(修道所斷) 5(五部) 관점에서 나뉘는데, 각각의 근본번뇌마다 5 모두가 있는 경우도 있고 특정한 () 있는 경우도 있다. 욕취에 속한 () · () · () · 무명(無明) · () · 10(十纏) 5부에 따라 나누면, 욕계의 · · · 무명에는 모두 5부가 존재하기 때문에 20가지의 번뇌가 있게 되고, 의는 견소단의 번뇌이므로 수도소단을 제외한 4부가 존재하기 때문에 4가지의 번뇌가 있게 되고. 10전은 수번뇌인데 비록 수번뇌에 대해서도 5 분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108번뇌를 헤아릴 때는 수번뇌는 5부로 나누는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그대로 10가지의 번뇌가 되므로, 34가지의 번뇌가 있게 된다. 이들 34번뇌를 전통적인 표현으로 34(三十四事)라고 한다. , 108번뇌 34번뇌가 욕취에 속한다.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 나아가 소번뇌법(小煩惱法)의 '지'를 소번뇌지라고 한다. 그리고 제법 가운데 어떤 법이 만약 소번뇌지에 소유되었으면 이것을 소번뇌지법이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일부의 염오심과 함께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이란 바로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분(忿)·부(覆)·간(慳)·질(嫉)·뇌(惱)·해(害)·한(恨)·첨(諂)·광(誑)·교(憍)

 忿覆慳嫉惱 害恨諂誑憍 如是類名爲 小煩惱地法 이와 같은 종류의 법을 일컬어 소번뇌지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종류의 법'은 오로지 수소단(修所斷)으로서 의식 지(地)에서만 일어나며, 무명과 상응하고, 각각 별도로 현행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소'번뇌지법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법에 대해서는 응당 수번뇌(隨煩惱) 중에서 널리 분별하는 바와 같다.

『구사론기』에 의하면 고덕(古德)은 6식과 통하지 않고, 5단(斷)에 통하지 않고, 3성(性)에 통하지 않고, 3계(界)에 통하지 않고, 별두기(別頭起) 즉 각기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는 다섯 가지의 뜻으로서 소번뇌지법을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탐 등의 번뇌와는 관계없이(隨從起가 아니다) 완전히 독립적으로 하여 일어나는 자재기(自在起 혹은 自力起)의 번뇌로서, 오로지 무명과 상응할 뿐이다(즉 여기서 '소'라고 하는 말은 이와 상응하는 법이 '적다'는 뜻으로, 이러한 열 가지의 소번뇌지법은 일체의 염오법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무명과 상응할 뿐이다). 즉 여섯 가지 대번뇌지법은 그 밖의 탐 등의 번뇌에 따라 일어나고[隨從起, 혹은 相應起], 항상 동시에 함께 생기하는 것[幷頭起]이지만, 열 가지 소번뇌지법은 스스로의 힘으로서 일어나는 번뇌[自力起]로서 무명과 상응할 뿐 다른 번뇌와 함께 일어나는 일이 없으며, 또한 동시에 함께 일어나는 일[別頭起]도 없기 때문에 '소'번뇌지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수번뇌(upakleśa)란 탐(貪)·진(瞋)·만(慢)·무명·견(見)·의(疑)의 근본번뇌에 따라 일어나는 번뇌를 말한다. 완성된 유부교학에서는 보통 여기에 무참(無慚)·무괴(無愧)·악작(惡作)·수면(睡眠)·도거(掉擧)·혼침(昏沈)·분(忿)·부(覆)·질(嫉)·간(慳)의 10전(纏)과 뇌(惱)·회(悔)·한(恨)·첨(諂)·광(誑)· 교(憍)의 6번뇌구(垢)가 포함된다. 수번뇌는 본론 「수면품」 권제21(p.952 이하)에서, 교(憍)는 권제4(p.188)에서 설명되고 있다."

 

"수번뇌의 5부 분별;이 같이 이러한 구(垢)와 아울러 전(纏)은 번뇌로부터 생겨나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모두 '수번뇌'라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 같은 '구'와 '전'은 어떠한 도에 의해 끊어지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전' 가운데 무참·무괴와 수면과 혼침·도거는 견소단·수소단이며
纏無慚愧眠 惛掉見修斷 餘及煩惱垢 自在故唯修 그 밖의 나머지와 번뇌구는 자력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수소단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10전 가운데 무참 등의 다섯 가지는 견소단과 수소단에 통하니, 이것들은 모두 2부의 번뇌와 상응하여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견차제소단(見此諦所斷)의 근본번뇌와 상응하여 일어난 것을 설하여 견차제소단의 수번뇌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인 질·간·회·분·부와 아울러 번뇌구는 자력으로 일어나는 이른바 '자재기(自在起)'이기 때문에 오로지 수소단이다. 즉 오로지 타력(他力)에 의해 일어나는 수소단의 무명과 상응하기 때문에 '자재기'라고 이름한 것이다.
수번뇌는 근본번뇌에 따라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끊어지는 것도 근본번뇌에 준하여 끊어진다. 즉 근본번뇌가 견소단이면 그것과 상응하여 일어난 수번뇌도 견소단이다.
여기서 타력에 의해 일어나는 무명이란 '질' 등에 의해 인기되는 상응무명을 말한다. 다시 말해 '질' 등에 의해 인기된 무명은 타력기(他力起)이기 때문에, 그러한 무명을 인기한 '질' 등은 비록 무명과 상응할지라도 '자재기'인 것이다."

 

견취(見取, 산스크리트어: drsty-upādāna, 팔리어: ditthi-upādāna) 3계의 그릇된 견해를 그릇되이 좋아하여[惡欲] 취한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번뇌로서의 () 염오견 그릇된 견해를 이루는 5(五見) 가운데 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견(見取見) 4견을 말한다. , 욕계의 4, 색계의 4, 무색계의 4견을 통칭한다. 번뇌를 근본번뇌와 수번뇌로 구분할 , 4견을 포함한 五見 모두 근본번뇌에 속한다.

 

견취에 속한 3계의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 견취견을 5부에 따라 나누면 30가지의 번뇌가 있게 되고, 이들 30번뇌를 전통적인 표현으로 30(三十事)라고 한다. , 108번뇌 30번뇌가 견취에 속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유신견(有身見) 현행의 결과, 4성제 가운데 (), 5취온에 대해 미혹하여 생겨난 견해이기 때문에 5 가운데 오직 견고소단이다. 따라서 3 각각에 유신견이 있으므로 유신견으로는 3가지의 번뇌가 있다.

 

변집견(邊執見) 또한 5취온이라는 현행의 결과에 대해 영원한 혹은 영원히 소멸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견해이기 때문에 5 가운데 오직 견고소단이다. 따라서 3 각각에 변집견이 있으므로 변집견으로는 3가지의 번뇌가 있다.

 

사견(邪見)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4성제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견고소단 · 견집소단 · 견멸소단 · 견도소단의 4부가 존재한다. 따라서 3 각각에 사견이 있으므로 사견으로는 12가지의 번뇌가 있다.

 

견취견(見取見)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등의 저열한 견해를 진리라고 주장하는 견해이기 때문에 견고소단 · 견집소단 · 견멸소단 · 견도소단의 4부가 존재한다. 따라서 3 각각에 견취견이 있으므로 견취견으로는 12가지의 번뇌가 있다.

 

이상의 설명대로, 유신견에 3가지, 변집견에 3가지, 사견에 12가지, 견취견에 12가지의 번뇌가 있어서 견취는 30가지의 번뇌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5견과 의는 모두 견소단의 번뇌이다. 5견과 의의 구체적인 5 분별에 대해서는 '견소단(見所斷)'을 참조하십시오.)

 

계취(戒取) 또는 계금취(戒禁取, 산스크리트어: śīla-vratopādāna, 팔리어: sīla-bbata-upādāna) 3계의 그릇된 계율이나 금지조항을 그릇되이 좋아하여[惡欲] 취한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번뇌로서의 () 염오견 그릇된 견해를 이루는 5(五見) 가운데 계금취견(戒禁取見) 말한다. , 욕계의 계금취견, 색계의 계금취견, 무색계의 계금취견을 통칭한다. 번뇌를 근본번뇌와 수번뇌로 구분할 , 계금취견을 포함한 5(五見) 모두 근본번뇌에 속한다.

 

계금취에 속한 3계의 계금취견을 5부에 따라 나누면 6가지의 번뇌가 있게 되고, 이들 6번뇌를 전통적인 표현으로 6(六事)라고 한다. , 108번뇌 6번뇌가 계금취에 속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계금취견(戒禁取見) 한편으로는 자재천 등이 5온과 세계의 참된 원인이 아님에도 그것을 참된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릇된 견해이기 때문에, 현행의 결과, 4성제 가운데 (), 5취온에 대한 바른 관찰이 있을 , 고제현관(苦諦現觀) 있을 바로 끊어지는 그릇된 견해이기 때문에 견고소단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계금취견은 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고행이 참된 길이 아닌데 그것을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참된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릇된 견해이기 때문에 견도소단이다. 따라서 3 각각에 계금취견이 있으므로 계금취견으로는 6가지의 번뇌가 있다. (참고로 5견과 의는 모두 견소단의 번뇌이다. 5견과 의의 구체적인 5 분별에 대해서는 '견소단(見所斷) 문서' 참조하십시오.)

 

 아취(我取) 또는 아어취(我語取, 산스크리트어: ātma-vādopādāna, 팔리어: atta-vādupādāna)에서 아취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나를 취하는 '으로 '나에 대한 집착' 뜻한다. 아어취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나에 대한 말을 취하는 '으로 '(계속하여) 나에 대해 말하는 집착' 뜻한다. 아취 또는 아어취는 색계 · 무색계의 사물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로, 달리 말하면, 색계 · 무색계의 소의신의 뛰어난 상태를 ''라고 여겨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 색계 · 무색계의 소의신의 뛰어난 상태를 그릇되이 좋아하여[惡欲] 취한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을 통칭한다.

 

구체적으로는, 색계와 무색계의 () · () · 무명(無明) · () 말한다. 번뇌를 근본번뇌와 수번뇌로 구분할 , 이들은 모두 근본번뇌에 속한다. 욕취의 경우와는 달리 아취 또는 아어취에는 () 포함되지 않는데 이유는 () 욕계에만 존재하는 번뇌이기 때문이다.

 

아취 또는 아어취에 속한 색계와 무색계의 () · () · 무명(無明) · () 5부에 따라 나누면, 색계와 무색계의 · · 무명에는 모두 5부가 존재하기 때문에 색계에 15가지 번뇌가 있고 무색계에 15가지의 번뇌가 있어 30가지의 번뇌가 있다.

 

의는 오직 견소단의 번뇌이기 때문에 5 가운데 수도소단이 제외되므로 색계에 4가지가 있고 무색계에 4가지가 있어서 8가지의 번뇌가 있다.

 

따라서, 아취 또는 아어취에는 38가지의 번뇌가 있게 된다. 이들 38번뇌를 전통적인 표현으로 38(三十八事)라고 한다. , 108번뇌 38번뇌가 아취 또는 아어취에 속한다. (참고로 5견과 의는 모두 견소단의 번뇌이다. 5견과 의의 구체적인 5 분별에 대해서는 '견소단(見所斷) 문서' 참조하십시오.)

 

애연취(愛緣取) 또는 연애취(緣愛取), () 있으므로 () 있다는 것은 번뇌 또는 불선인 () 있기 때문에 108번뇌, 근본번뇌와 수번뇌를 합한 온갖 번뇌 또는 불선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3계의 사물들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상태인 욕애(欲愛) · 색애(色愛) · 무색애(無色愛) 3(三愛) 원인이 되어서 그러한 들러붙음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또한 더욱 고착화되는 것을 말한다.

 

애연취(愛緣取) 또는 연애취(緣愛取) 또한 이미 발생한 () 3계의 갖가지 번뇌가 있고 3계의 사물에 아주 확고히 들러붙어 있어서 이들로부터 떠나는 것이 거의 기대도 되지 않는 상태가 있다면, 반드시 원인이 되는 욕애(欲愛) · 색애(色愛) 또는 무색애(無色愛)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5취온이 형성[]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경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 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 · 아어취(我語取) 4(四取) 뜻한다.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따르면, () 집착(執着) 또는 번뇌(煩惱) 의미하는데, 8지분인 () 연하여 일어나는, 대상에 대한 강한 취사선택(取捨選擇) 행동이다.

다른 학자에 따르면, () 번뇌가 강화되고 이에 따라 아집(我執) 번뇌장(煩惱障)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아집(我執)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는 견해로, 중생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여 열반(또는 해탈) 가로막아 중생으로 하여금 윤회하게 하는 장애라는 뜻에서 번뇌장(煩惱障)이라고도 한다.

 

(10) 유(有) (산스크리트어: bhava, 팔리어: bhava, 영어: becoming)는 취연유(取緣有)와 유연생(有緣生)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취연유는 연취유(緣取有)라고도 하며 유연생은 연유생(緣有生)이라고도 한다. 취연유 또는 연취유는 취(取)가 있으므로 유(有)가 있다는 뜻이고, 유연생 또는 연유생은 유(有)가 있으므로 생(生)이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애·취에 의해서 가지가지의 업을 만들고 미래의 결과를 만드는 작용이다. 유는 넓은 뜻에서 현상적 존재를 가리키므로 행과 유위(有爲)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존재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유는 취에 의한 취사선택의 실제행위가 그 여력을 남긴 것이며, 과거 행위의 습관력의 축척인 동시에 그것은 미래의 행위를 규정하는 것이다. 

취와 유는 앞의 행에 해당하며, 애는 무명에 해당한다. 즉, 무명에서 행이 생기고 행 속에는 실제행위와 그 여력이 포함되는 것처럼, 애에서 실제행위로서의 취가 생기고 취에서 그 여력으로서의 유가 생기는 것이다.

 

잡아함경 12 298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 욕유(欲有) · 색유(色有) · 무색유(無色有) 3(三有) 말한다.

"유(有) 취함을 인연하여 존재가 있다 하니, 어떤 것을 존재[有]라고 하는가?

3유(有)이니, 탐욕의 존재[欲有] · 빛깔의 존재[色有] · 빛깔이 없는 존재[無色有]이니라."

 

3(三有) 세계라는 측면에서는 3계를 뜻하고, 유정이라는 존재의 측면에서는 욕계의 유정 · 색계의 유정 · 무색계의 유정을 뜻한다. 유정이란 명색의 화합체 5온의 화합체를 말하는 것으로, 유전연기의 관점에서는 () 온갖 번뇌에 물들어 있는 5, 5취온을 말한다. 따라서, 유전연기의 관점에서는 () 5취온을 말하며, 달리 말하면, 번뇌로 인해 생사윤회를 피할 없는 상태 윤회할 밖에 없는 상태의 삶을 말한다.[144][145][146][147]

"무탐(無貪)심소; 무엇이 ‘무탐(無貪)심소’인가?

윤회의 삶[有]과 그 원인[有具]에 대해서 탐착하지 않음을 체성으로 삼고, 탐착을 다스려서 선을 행함을 업으로 삼는다.

무탐(無貪, alobha)심소는 애착심을 없애는 심리작용이다. 여기에는 5취온(取)뿐만 아니라 열반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열반에 집착하면, 그 집착이 원인이 되어 3계 윤회의 과보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유(有)는 3유(有:三界)의 과보[果], 즉 윤회의 삶을 말한다.

유구(有具)는 3유(有), 즉 윤회의 삶의 원인[因]이다."

 

"무탐(無貪)심소쪽; 無貪’은 有와 有具에 대하여 厭離하여 애착을 없게 하고 마음속에 품지도 않으며 좋아하지도 않아 집착이 없게 하는 것으로써 體를 삼으며, 貪의 장애를 끊는 것으로서 業을 삼는다. 즉, 具有에 愛着이 없음으로 性用으로 하고, 이와 반대의 貪着을 대치하며 선을 짓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

한편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有와 有具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體로 하고, 악행에 빠지지 않는데 의지가 되는 것을 業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有’란 三有의 果 즉 三界의 果報, 다시 말해서 ‘有情의 五蘊’을 의미한다.

‘有具’란 三有를 生할 因 즉, 涅槃[→ 有에 대한 愛着이 되어야 한다]을 말한다.

‘無貪’의 性用은 有과 有具에 대하여 애착을 없게 하는 작용을 말하며, 그 業用은 貪着을 對治하고 善을 짓게 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곧, 無貪은 迷惑의 세계에 살면서 생존에 집착하지 않는 심리작용을 가리킨다.

 

이와 관련된 내용으로, 잡아함경 2 58 음근경(陰根經)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5온으로 하여금 5취온이 되게 하는 근본 요인은 욕탐(欲貪)이다. 고타마 붓다는 "5온이 (: 구역에서는 라고도 )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5온이 () 다른 것도 아니다. 5온에 욕탐(欲貪) 있으면 5온이 5취온이 된다[非五陰即受 亦非五陰異受 能於彼有欲貪者 是五受陰]" 말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이 5수음(五受陰)은 무엇이 그것의 근본[根]입니까? [즉,] 무엇이 5수음을 모으[集]고, 무엇이 [모아진] 5수음을 생겨나[生]게 하고, 무엇이 [마음으로 하여금 생겨난] 5수음과 접촉[觸]하게 하는 것입니까?'

고타마 붓다는 그 비구에게 말하였다. '이 5수음(五受陰)은 욕탐[欲, 欲貪]이 그것의 근본[根]이다. [즉,] 욕탐[欲, 欲貪]이 5수음을 모으[集]고, 욕탐[欲, 欲貪]이 [모아진] 5수음을 생겨나[生]게 하고, 욕탐[欲, 欲貪]이 [마음으로 하여금, 생겨난] 5수음과 접촉[觸]하게 한다.'"

 

"'세존이시여, 음(陰, 蘊)이 곧 수(受, 取)입니까? 5음(五陰)과 수(受, 取)는 다릅니까?'

고타마 붓다는 그 비구에게 말하였다. '5음(五陰)이 곧 수(受, 取)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5음(五陰)이 수(受, 取)와 다른 것도 아니다. 다만 5음(五陰)에 욕탐(欲貪)이 있으면 5음(五陰)은 곧 5수음(五受陰)이다."

 

취연유(取緣有) 또는 연취유(緣取有), () 있으므로 () 있다는 것은 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 아취(我取) 4(四取) 108번뇌에 물든 상태가 있기 때문에 5취온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 갖가지 번뇌가 있기 때문에 욕계의 유정으로서의 존재이건, 색계의 유정으로서의 존재이건, 무색계의 유정으로서의 존재이건 생사윤회를 피할 없는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취연유(取緣有) 또는 연취유(緣取有) 또한 이미 발생한 () 욕유(欲有) · 색유(色有) 또는 무색유(無色有)로서의 존재가 있고 이러한 존재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반드시 원인이 되는 () 존재한다는 , 갖가지 번뇌에 물든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이제 순대고취(純大苦聚) 5취온이 형성[]되었으며, 5취온의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경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 욕유(欲有) · 색유(色有) · 무색유(無色有) 3(三有) 뜻한다.

"취는 유(有)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유인가.

유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을 말한다. 이것을 유라고 한다."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따르면, () 현존재 또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 () 행위가 잠재의식화되는 것에 의해, 자신의 성품 · 마음 · 습관 · 체질의 일부가 되는 것에 의해 현존재인 () 규정된다.

(3) 식(識) (산스크리트어: विज्ञान vijñāna, 팔리어: viññāṇa, 영어: consciousness)은 행연식(行緣識)과 식연명색(識緣名色)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행연식은 연행식(緣行識)이라고도 하며 식연명색은 연식명색(緣識名色)이라고도 한다. 행연식 또는 연행식은 행(行)이 있으므로 식(識)이 있다는 뜻이고, 식연명색 또는 연식명색은 식(識)이 있으므로 명색(名色)이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함경 12 298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 안식신(眼識身) · 이식신(耳識身) · 비식신(鼻識身) · 설식신(舌識身) · 신식신(身識身) · 의식신(意識身) 6식신(六識身) 뜻한다.

"행을 인연하여 식이 있다 하니, 어떤 것을 식(識)이라고 하는가? 6식신(識身)을 이르는 말이니, 안식신(眼識身)·이식신(耳識身)·비식신(鼻識身)·설식신(舌識身)·신식신(身識身)·의식신(意識身)이니라."

 

여기서 (, 산스크리트어: kāya) 단어의 일반적 의미인 신체의 뜻의 명사로 사용된 경우가 아니라, 복수 · 집합을 뜻하는 복수형 접미사 '~'로서 사용 경우이다. 따라서, 안식신은 안식들 또는 안식들의 집합을 뜻하는데, 온갖 시각적 의식들의 집합 말한다. 마찬가지로, 이식신 · 비식신 · 설식신 · 신식신은 각각 온갖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의식들의 집합 말하며, 의식신은 온갖 정신적 의식들의 집합 말한다. 그리고 6식신(六識身) 이들 6가지 식신(識身) 이들 6가지 ()들의 집합을 말한다. 이들 6가지 식신(識身)들은 일반적으로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이라고 불리며, 6식신(六識身) 6(六識)이라고 불린다.

"신(身):

① 산스크리트어 kāya 몸. 신체.

② 산스크리트어 ātman 나. 자신.

③ 산스크리트어 janma 생존.

④ 산스크리트어 kāya 신근(身根)의 준말.

⑤ 산스크리트어 kāya 인식 주체.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주체.

⑥ 산스크리트어 kāya 모임·종류의 뜻으로, 어미에 붙어 복수를 나타냄."

 

초기불교에서의 6식은 마음[, 산스크리트어: citta, 팔리어: citta] 말하는 것으로, 부파불교에서 마음 6식은 심의식 또는 · · 식이라고도 한다. 부파불교에서는 6식은 하나의 마음의 6가지 다른 모습 또는 작용일 뿐이라고 보며, 이러한 견해를 심체일설 또는 식체일설이라 한다.

"소승불교시대에 저술된 품류족론(品類足論)과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등에 의하면 『심(心)은 곧 의(意)이며, 의(意)는 또 식(識)으로서 그 체성(體性)은 서로 같으며 이름만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소승불교시대에는 심의식(心意識)이라는 명칭이 서로 표현만 다를 뿐 그 체성은 동일한 것으로 보았으며 동시에 이러한 심의식 사상이 일반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체 소승사상을 통해 본다면 인간의 심성은 그 체성이 각기 다르며 활동도 다르게 한다는 학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로 인간의 심체(心體)는 유일한 것이며 그 활동하는 작용만 다를 뿐이라고 주장한 학설이 대부분이었다. 그 대표적인 학설은 소승불교를 최종적으로 종합하여 정리하였다는 세친론사(世親, AD. 4세기)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 잘 나타나 있다.

아비달마구사론에 의하면 『심의식의 3가지 이름은 그 표현의 뜻이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그 체성은 유일하다<心意識三名 所 異 而體是一>』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여 소승불교는 우리 인간의 심체(心體)를 하나로 본 것이 지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

 

대승불교에서 마음을 심의식 또는 · · 식이라고도 하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불교의 6식은 심층의 의식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에 따라 마음이 6식에 말나식과 아뢰야식이 더해진 8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교학을 가지고 있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에는 8식은 체가 각각 별도라는 심체별설 또는 식체별설의 견해와 8식의 체는 하나라는 심체일설 또는 식체일설의 견해가 존재한다.

"이상과 같이 세친론사는 심의식을 매우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정신 활동의 내용을 종래의 이론보다 훨씬 깊고 넓게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심의식 사상은 대승불교에 이어지면서 유식학에서는 소승적인 사상을 대폭 개혁하고 또 그 사상을 대승적으로 크게 증보 하였다.

그리고 심의식을 각각 분리시켜 오늘날의 팔식사상으로 조직화하였던 것이다. 유식학에서 심의식 사상을 가장 중요시 하고 있는 경전과 논전의 예를 들면 해심밀경(解心密經)의 심의식상품(心意識相品)을 비롯하여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아비달마집론(阿비達磨集論) 등 여러 경론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경론에 의하면 심(心)과 의(意)와 식(識) 등은 그 활동과 역할하는 작용이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체성도 각기 다르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소승불교에서 대체로 심의식의 체성을 동일하다고 본 것에 대하여 대승불교의 유가유식학파(瑜伽唯識學派)에서는 다르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에는 심체(心體)의 동일설과 심체의 구별설을 말하는 심체일설(心體一說)과 심체별설(心體別說)이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

 

행연식(行緣識) 또는 연행식(緣行識), () 있으므로 () 있다는 것은 그릇된 , 그릇된 3(三行), 그릇된 신업 · 구업 · 의업의 3(三業) 있기 때문에 그릇된 6식신, 그릇된 시각적 ·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 정신적(6의식의) 마음(의식)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하며, 또한 이미 발생한 그릇된 시각적 ·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또는 정신적(6의식의) 마음(의식) 있다면 반드시 원인이 되는 그릇된 신업 · 구업 · 의업 가운데 그릇된 하나 혹은 다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5취온이 형성[]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를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마음(의식) 행위[, ] 또는 운동을 바탕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근원적 연기관계에서 , 마음(의식) 행위를 낳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마음(의식) 낳는다는 이다. ,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정이 행하는 행위 · 또는 뜻으로 행하는 행위는 단순히 행위 자체에 그치지 않으며 반드시 유정 속에서 어떤 마음(의식) 낳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연기경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 6식신(六識身) 6(六識) 뜻한다.

"행은 식(識)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식인가.

식이란 6식신(識身)을 말하니, 첫째는 안식(眼識), 둘째는 이식(耳識), 셋째는 비식(鼻識), 넷째는 설식(舌識), 다섯째는 신식(身識), 여섯째는 의식(意識)이다. 이것을 식이라고 한다."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따르면, () () · () · () · () · () 5(前五識) 의한 감각작용과 6의식에 의한 지각(知覺) · 추리(推理) · 기억(記憶) · 판단(判斷) 일체의 의식작용 이러한 작용을 하는 주체적 존재를 총칭하는 것으로서, 과거의 모든 행위[] 잠재의식이 되어서 작용하게 이다.

 

(4) 명색(名色) (산스크리트어: nāmarūpa, 팔리어: nāmarūpa, 영어: name and form)은 식연명색(識緣名色)과 명색연6입(名色緣六入)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식연명색은 연식명색(緣識名色)이라고도 하며 명색연6입은 연명색6입(緣名色六入)이라고도 한다. 식연명색 또는 연식명색은 식(識)이 있으므로 명색(名色)이 있다는 뜻이고, 명색연6입 또는 연명색6입은 명색(名色)이 있으므로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이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함경 12 298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명색(名色) () () 정신과 물질 또는 마음[] 육체[] 통칭한다. () 정신 또는 마음[] 5(五陰) 가운데 수음 · 상음 · 행음 · 식음의 4무색음(四無色陰) 말한다. () 물질 또는 육체[] 5(五陰) 가운데 색음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4대종과 4대종의 소조색을 말한다.

"식을 인연하여 명색(名色)이 있다 하니, 어떤 것을 명(名)이라 하는가? 이른바 네 가지 형상[色]이 없는 음(陰)이니, 즉 수음(受陰)·상음(想陰)·행음(行陰)·식음(識陰)이니라. 어떤 것을 색(色)이라고 하는가? 4대(大)와 4대로 만들어진 것을 색이라고 말한다. 이 색과 앞에서 말한 명을 합해 명색이라고 하느니라."

 

여기서, 색음 · 수음 · 상음 · 행음 · 식음의 5음(五陰)은 색온 · 수온 · 상온 · 행온 · 식온의 5온(五蘊)의 구역(舊譯)이다. 그리고, 대상을 제외하고 유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만 볼 때, 여기서의 마음[心] 또는 정신[名] 즉 4무색음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과 마음작용(심소법)을 합한 개념이다. 육체[身] 또는 물질[色]은 안 · 이 · 비 · 설 · 신의 5근을 말한다.

 

식연명색(識緣名色) 또는 연식명색(緣識名色), () 있으므로 명색(名色) 있다는 것은 그릇된 , 그릇된 마음, 그릇된 6, 그릇된 시각적 ·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 정신적(6의식의) 마음(의식)들이 있기 때문에 심신(心身) 그릇된 상태, '정신[] 육체[]' 그릇된 상태, '마음 · 마음작용 · 육체' 그릇된 상태, 심신의 부조화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한다. 또한 이미 발생한 심신(心身) 그릇된 상태 심신의 부조화가 있다면 반드시 원인이 되는 그릇된 시각적 ·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 정신적(6의식의) 마음(의식) 가운데 그릇된 하나 혹은 다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5취온이 형성[]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경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명색(名色) () () 통칭한다. () 5 가운데 수온 · 상온 · 행온 · 식온의 4무색온(四無色蘊) 말하고, () 5 가운데 색온(色蘊) 말하는데 이것은 제소유색(諸所有色)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말하며, 구체적으로 4대종과 4대종의 소조색을 말한다.

"식은 명색(名色)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명(名)인가.

명이란 4무색온(無色蘊)을 말하니, 첫째는 수온(受蘊), 둘째는 상온(想蘊), 셋째는 행온(行蘊), 넷째는 식온(識薀)이다.

그리고 무엇이 색(色)인가. 이는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색(色)을 말하니, 모든 색은 4대(大) 및 4대로 이루어진 것[四大種所造]이다.

이 색(色)과 앞에서 말한 명(名)을 하나로 통합하여 명색이라고 하니, 이것을 명색이라고 한다."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따르면, 명색(名色) 정신적인 [] 물질적인 []으로서 현상세계의 존재를 가리킨다.

 

(5) 6입(六入) (산스크리트어: ṣaḍāyatana, 팔리어: saḷāyatana, 영어: six sense gates, six sense bases)은 6처(六處) · 6입처(六入處) · 내6입(內六入) · 내6입처(內六入處) · 6내입처(六內入處) · 6정(六情) · 제입(諸入) · 6촉입처(六觸入處) · 6촉처(六觸處) · 6갱락처(六更樂處) 또는 6근(六根)이라고도 한다.

"您所查詢的「觸處」:

六處: 指「眼處、耳處、鼻處、舌處、身處、意處」,即「六根」,另譯為「六入處、內六入、內六入處、六內入處、六入、六情、諸入、六觸入處、六觸處、六更樂處」。

 

6입은 명색연6입(名色緣六入)과 6입연촉(六入緣觸)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명색연6입은 연명색6입(緣名色六入)이라고도 하며 6입연촉은 연6입촉(緣六入觸)이라고도 한다. 명색연6입 또는 연명색6입은 명색(名色)이 있으므로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이 있다는 뜻이고, 6입연촉 또는 연6입촉은 6입 즉 6처 즉 6근이 있으므로 촉(觸)이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함경 12 298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에서는 6(六入) 6입처(六入處)라고 부르고 있는데 소경(小經) 나타난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6입처는 안입처(眼入處) · 이입처(耳入處) · 비입처(鼻入處) · 설입처(舌入處) · 신입처(身入處) · 의입처(意入處) 6내입처(六內入處) 말한다.

"명색을 인연하여 6입처(入處)가 있다 하니, 어떤 것을 6입처라고 하는가? 6내입처(內入處)를 일컫는 말이니, 안입처(眼入處)·이입처(耳入處)·비입처(鼻入處)·설입처(舌入處)·신입처(身入處)·의입처(意入處)이니라."

 

입처(入處)라는 낱말은 () () 합쳐서 이루어진 낱말이다.

() 섭입(涉入: 거두어들임) 또는 촉입(趨入: 재촉하여 들임) 뜻으로 6(六根) 6(六境) 서로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 소의(所依) 발동근거 · 의지처 · 도구라는 뜻으로, 6경에 대하여 6식이 생겨날 6근이 소의 발동근거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입처(入處) 6식의 수동적 작용이라는 입장에서는 6근과 6경이 서로를 거두어 들여서 6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또한, 6식의 능동적 작용이라는 입장에서는, 입처(入處) 6식이 6근을 통해 6경을 거두어들임으로써 6경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六入(육입):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6근(根)과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ㆍ법(法)의 6경(境)을 구역에서는 6입,

신역에서는 6처(處)라 함. 이 6근ㆍ6경을 합하여 12입 또는 12처라 함. 그 중에서 6경을 외육입(外六入), 6근을 내육입(內六入). 12인연 중의 6입은 내육입. 입(入)은 거두어들이는 뜻. 6근ㆍ6경은 서로 거두어들여 6식(識)을 내는 것이므로 6입이라 하고, 처(處)는 소의(所依), 6근ㆍ6경은 6식을 내는 소의가 되므로 6처라 함. ⇒육처(六處)"

 

"六處(육처): 육입(六入)이라고도 함. 12인연의 하나. 중생의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6근을 구족하고 모태(母胎)에서 나오는 위(位)를 말함. ⇒십이인연(十二因緣)ㆍ육입(六入)"

 

여기서 '인식한다는 ' 대상에 대한 또는 요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대상과 관련된 여러 가지 마음작용들이 일어나는 것도 포함하는 말이다. 아비달마구사론 따르면, () 생장문(生長門) 뜻하는 것으로, 마음과 마음작용이 생겨나게 하고 증장시키는 역할 하는 것을 뜻한다.

"심(心)·심소법(心所法)이 생장(生長)하게 되는 문(門, ya-dvara)의 뜻, 이것이 바로 '처(處, ayatana)'의 뜻이다. 즉 이 말을 해석하면, 능히 심과 심소법을 생장시키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처'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능히 그러한 심·심소법의 작용을 생장시킨다는 뜻이다."

 

, 6근은 6 마음의 단순한 인식도구가 아니다. 6근은 마음의 인식도구일 뿐만 아니라 마음(6 또는 8, 심왕, 심법) 마음작용을 현행하게 하고 세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6 가운데 의근(意根) 경우 이러한 점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나타난 낱말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6내입처(六內入處): 6가지 내적인 입처(入處), 6식이 6경을 인식할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6식과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내적인 어떤

*안입처(眼入處): []이라는 입처, 안식의 입처, 안식이 색경(색깔과 형태) 인식할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안식과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이입처(耳入處): []라는 입처, 이식의 입처, 이식이 성경(소리) 인식할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이식과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비입처(鼻入處): []라는 입처, 비식의 입처, 비식이 향경(냄새) 인식할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비식과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설입처(舌入處): []라는 입처, 설식의 입처, 설식이 미경() 인식할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설식과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신입처(身入處): []이라는 입처, 신식의 입처, 신식이 촉경(감촉) 인식할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신식과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의입처(意入處): []이라는 입처, 의식의 입처, 의식이 법경(, 정신적 존재, 명색의 ) 비롯한 6경을 인식할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의식과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명색연6(名色緣六入) 또는 연명색6(緣名色六入), 명색(名色) 있으므로 6(六入) 있다는 것은 심신(心身) 그릇된 상태 심신의 부조화가 있기 때문에 6 6 6근의 그릇된 상태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한다. , 6 마음이 6경을 인식할 6근이 인식도구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생겨나기도 하고 혹은 마음과 마음작용을 생겨나게 하고 증장시키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때로는 그릇된 방향으로 생겨나게 하고 증장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명색연6(名色緣六入) 또는 연명색6(緣名色六入) 또한 이미 발생한 6 6 6근의 그릇된 상태가 있다면 반드시 원인이 되는 심신(心身) 그릇된 상태 심신의 부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5취온이 형성[]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경에서는 6(六入) 6(六處)라고 부르고 있는데 경전에 나타난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6처는 안내처(眼內處) · 이내처(耳內處) · 비내처(鼻內處) · 설내처(舌內處) · 신내처(身內處) · 의내처(意內處) 6내처(六內處) 말한다.[79][80]

"명색은 6처(處)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6처인가.

6처란 6내처(內處)를 말하니, 첫째는 안내처(眼內處), 둘째는 이내처(耳內處), 셋째는 비내처(鼻內處), 넷째는 설내처(舌內處), 다섯째는 신내처(身內處), 여섯째는 의내처(意內處)이다. 이것을 6처라고 한다."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나타난 낱말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6내처(六內處): 6가지 내적인 (), 6식의 내적인 (), 6식과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6가지 내적인 어떤

*안내처(眼內處): []이라는 내적인 (), 안식의 내적인 (), 안식과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내적인

*이내처(耳內處): []라는 내적인 (), 이식의 내적인 (), 이식과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내적인

*비내처(鼻內處): []라는 내적인 (), 비식의 내적인 (), 비식과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내적인

*설내처(舌內處): []라는 내적인 (), 설식의 내적인 (), 설식과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내적인

*신내처(身內處): []이라는 내적인 (), 신식의 내적인 (), 신식과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내적인

*의내처(意內處): []이라는 내적인 (), 의식의 내적인 (), 의식과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내적인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따르면, 6(六入) 6(六處) 또는 6(六根)이라고도 하며 6개의 감각기관으로서 감각기관을 통해 () 작용하게 되어 명색을 인식한다.

"六處(육처): 육입(六入)이라고도 함. 12인연의 하나. 중생의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6근을 구족하고 모태(母胎)에서 나오는 위(位)를 말함. ⇒십이인연(十二因緣)ㆍ육입(六入)"

12연기설(十二緣起說)은 12연기(十二緣起) · 12지연기(十二支緣起) · 12인연(十二因緣) · 십이유지(十二有支)라고도 하며, 십이지(十二支)는 ① 무명(無明), ② 행(行), ③ 식(識), ④ 명색(名色), ⑤ 육처(六處), ⑥ 촉(觸), ⑦ 수(受), ⑧ 애(愛), ⑨ 취(取), ⑩ 유(有), ⑪ 생(生), ⑫ 노사(老死)이다. 


《잡아함경》 제12권 제298경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과 《연기경(緣起經)》에서 고타마 붓다는 연기법(緣起法)의 법(法)과 의(義), 즉 연기법 특히 유전연기의 정의 또는 본질[法, 初]과 그 자세한 모습 또는 뜻[義, 差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경전들에 따르면, 연기법 특히 유전연기(流轉緣起)의 정의 즉 법(法)은 연(緣)과 기(起)를 뜻하는데, '

연(緣)'이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此有故彼有]는 것을 의미하고, 

'기(起)'란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此起故彼起]는 것을 의미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연(緣)'은 무명연행(無明緣行) · 행연식(行緣識) · 식연명색(識緣名色) · 명색연6입(名色緣六入) · 6입연촉(六入緣觸) · 촉연수(觸緣受) · 수연애(受緣愛) · 애연취(愛緣取) · 취연유(取緣有) · 유연생(有緣生) · 생연노사(生緣老死)의 일련의 인과관계적 과정을 말하고, 

'기(起)'는 이 과정을 통해 추(愁: 걱정) · 탄(歎: 한탄) · 고(苦: 괴로움) · 우(憂: 근심) · 뇌(惱: 번뇌, 고요하지 못함)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다시 이러한 뜻의 '연(緣)'과 '기(起)'를 총체적으로 간략히 말하면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 또는 순수하게 큰 괴로움의 무더기 즉 5취온(五取蘊)이 형성[集]되는 것을 말한다. 5취온이 형성된다는 것은 생사윤회를 반복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법의 정의 또는 본질[法, 初]

"그 때 세존께서 필추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들에게, 연기의 처음[緣起初]과 그 차별된 이치[差別義]를 말하겠다. 그대들은 반드시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하여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여러 필추들은 말하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디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희들은 듣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연기의 처음이라고 하는가. 이는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해서 저것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무명(無明)은 행(行)의 연(緣)이 되고, 행은 식(識)의 연이 되고, 식은 명색(名色)의 연이 되고, 명색은 6처(處)의 연이 되고, 6처는 촉(觸)의 연이 되고, 촉은 수(受)의 연이 되고, 수는 애(愛)의 연이 되고, 애는 취(取)의 연이 되고, 취는 유(有)의 연이 되고, 유는 생(生)의 연이 되고, 생(生)은 노사(老死)의 연이 되어서, 걱정ㆍ한탄ㆍ괴로움ㆍ근심ㆍ번뇌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을 순수하게 큰 괴로움의 온[純大苦蘊]이 집(集)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연기의 처음 이치[緣起初義]라고 한다."

연기법의 자세한 모습 또는 뜻[義, 差別]은 12연기의 12지 각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어 식연명색(識緣名色)과 명색연6입(名色緣六入)의 연기관계에서 한 요소[支]를 이루고 있는 명색(名色)에 대해 명(名)은 5온 가운데 수온 · 상온 · 행온 · 식온의 4온을 말하고 색(色)은 색온을 뜻하는데 구체적으로는 4대종과 4대종으로 만들어진 소조색을 말한다는 설명과,촉연수(觸緣受)와 수연애(受緣愛)의 연기관계에서 한 요소[支]를 이루고 있는 수(受)에 대해, 수(受)는 낙수 · 고수 · 불고불락수의 3수로 나뉜다는 설명 등과 같은 것을 말한다.

 

인연(因緣)에서 인(因)은 결과를 낳기 위한 내적이며 직접적인 원인을 가리키고, 

연(緣)은 이를 돕는 외적이며 간접적인 원인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양자를 합쳐 원인의 뜻으로 쓴다.

연기(緣起)는 영어로는 "dependent arising (의존하여 생겨남)", "conditioned genesis (조건지워진 생성)",

"dependent co-arising (의존된 상호발생)" 또는 "interdependent arising (상호의존하여 생겨남)" 등으로 번역되는데,

연기(緣起)의 법칙은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다"라고 서술된다. 이 서술에서 "이것"과 "그것"의 두 항목은 서로 연기관계(緣起關係), 즉 인과관계(因果關係)에 있다고 말한다. 즉, "그것"은 "이것"을 의존하여(조건으로하여) 일어나는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사제설(四諦說)인 고집멸도(苦集滅道)는 집과 고라는 연기하는 항목과 도와 멸이라는 연기하는 항목을 합하여 병렬한 것이다. 여기에서 집은 고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되며, 도는 멸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된다. 고집멸도는 고통의 원인이 집착 또는 갈애이며 고통을 소멸시키는 원인 또는 수단이 도라는 연기관계를 밝힌 것이다. 연기(緣起)하는 항목들로는 이들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열 두 항목을 사용하여 설명된 연기설이 12연기설이다.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인본욕생경 수행본기경 증일아함경 중아함경 장아함경 잡아함경 연기경
avijjā avidyā   (癡) 무명(無明) 무명(無明) (癡) 무명(無明) 무명(無明)
saṅkhāra saṃskāra   (行) (行) (行) (行) (行) (行)
viññāna vijñāna (識) (識) (識) (識) (識) (識) (識)
nāmarūpa nāmarūpa 명자(名字) 명자(名字) 명색(名色) 명색(名色) 명색(名色) 명색(名色) 명색(名色)
saḷāyatana ṣaḍāyatana   6입(六入) 6입(六入) 6처(六處) 6입(六入) 6입처(六入處) 6처(六處)
phassa
samphassa
sparśa
saṃsparśa
(更) 갱락(更樂) 갱락(更樂) (覺) (觸) (觸) (觸)
vedanā vedanā (痛) (痛) (痛) (痛) (受) (受) (受)
taṇhā tṛṣṇā (愛) (愛) (愛) (愛) (愛) (愛) (愛)
upādāna upādāna (受) (受) (受) (受) (取) (取) (取)
bhava bhava (有) (有) (有) (有) (有) (有) (有)
jāti jāti (生) (生) (生) (生) (生) (生) (生)
jarā-maraṇa jarā-maraṇa   노사(老死) (死) (死) (死) 노사(老死) 노사(老死)

십이연기는 전통적으로 삼세양중(三世兩重)의 인과에 의하여 설명된다. 삼세양중의 인과로 십이연기를 해석하는 것은 불교 일반의 전통적인 통설로 되어 있으며,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① 무명은 과거에 있어서의 무명 등의 번뇌이고, ② 행은 과거에 있어서의 선악업(善惡業)이며, ③ 식은 모태(母胎) 안에 최초로 발생하는 일찰나의 오온(五薀)이며, ④ 명색은 4주째의 태내(胎內) 모습이다. ⑤ 육처는 제5주의 태내에서 눈 등의 육근이 완성되는 상태이고, ⑥ 촉은 출태 뒤의 단순한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상태이다.

⑦ 수는 5세부터 14세까지의 단순한 고락의 감수작용을 일으키는 상태이며, ⑧ 애는 재산이나 애욕에 탐착하는 14세 이후이다. ⑨ 취는 이 탐착이 증진되는 상태이고, ⑩ 유는 애욕과 취착의 선악업이 습관력이 되어 미래의 과를 일으키려는 상태이며, ⑪ 생은 미래의 과가 발생한 상태이며, ⑫ 노사는 미래에 수생한 뒤에 명색·육처·촉·수로 발생하는 상태이다.

 

대개 세계인생의 일반적인 생멸변화(生滅變化)의 제현상의 관계항목을 보여주는 12지(支 · 항목)의 연기로 설명된 철학적인 이론 또는 담론인 것처럼 보이기 쉬우나, 연기가 설명된 본래의 목적은 그러한 일반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고뇌가 생기고 또 어떠한 인연조건(因緣條件)에 의해서 고뇌를 면할 수가 있는가 하는, 인생의 현실을 실제적으로 이해하고 또 그 현실을 초극(超克)하는 방법과 길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라의 원측(圓測)은 이 십이연기를 유전연기(流轉緣起)와 환멸연기(還滅緣起)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무명에서부터 노사로 나아가는 것을 유전의 연기로 보았고, 무명이 다함에 따라 노사가 없어지는 과정을 환멸연기라고 하였다. 곧, 반야(般若)의 힘으로 무명을 없애고 열반에로 되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환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유전연기: 연기설이 문제로 하고 있는 현상은 선악업(善惡業)과 그 과보(果報)로서의 고락과 같은 종교적 · 윤리적인 가치관계의 현상이다. 그 경우 현상이 가치적으로 악화하는, 즉 고(苦)가 생기(生起)하는 연기관계를 유전연기(流轉緣起) 혹은 연기의 순관(緣起의 順觀) 혹은 순연기(順緣起)라고 한다.
연기의 순관은 구체적으로는 "무명(無名)에 연(緣)해서 행(行)이 있고 행에 연해서 식(識)이 있으며 식에 연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에 연해서 6입(六入)이 있으며 6입에 연해서 촉(觸)이 있으며 촉에 연해서 수(受)가 있고 수에 연해서 애(愛)가 있고 애에 연해서 취(取)가 있으며 취에 연해서 유(有)가 있고 유에 연해서 생(生)이 있으며 생에 연해서 노사(老死) ·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의 갖가지 고(苦)가 생긴다"라는 정형적(定型的)인 글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연기의 순관은 현실의 노사(老死) 등의 고(苦)에서 소급해서 고의 근본으로서의 무명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며 그것이 본래의 모습이라고도 하는 견해가 있지만, 불교 경전에 설명된 정형적인 글로는 무명에서 고가 생겨나는 연기가 설명되어 있다.

 

환멸연기: 현상(現象)이 가치적으로 악화되는 과정인 순관에 대응해서 현상이 순화(純化)되고 정화(淨化)하는, 즉 고뇌의 유전(流轉)이 멸해지고 이상의 열반계(涅槃界)로 돌아가는 연기의 관계는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 말해지며 또 이것을 연기의 역관(緣起의 逆觀) 혹은 역연기(逆緣起)라고 한다.
연기의 역관은 구체적으로는 "무명(無明)이 멸하기 때문에 행(行)이 멸한다. 행이 멸하기 때문에 식(識)이 멸한다. 식이 멸하기 때문에 명색(名色)이 멸한다. 명색이 멸하기 때문에 6입(六入)이 멸한다. 6입이 멸하기 때문에 촉(觸)이 멸한다. 촉이 멸하기 때문에 수(受)가 멸한다. 수가 멸하기 때문에 애(愛)가 멸한다. 애가 멸하기 때문에 취(取)가 멸한다. 취가 멸하기 때문에 유(有)가 멸한다. 유가 멸하기 때문에 생(生)이 멸한다. 생이 멸하기 때문에 노사(老死) · 우비고수뇌(憂悲苦愁惱)의 갖가지 고(苦)가 멸한다"와 같이 설명된다.

 

유전연기의 내용
12연기설을 구성하는 열 두 항목 각각과 이들 간의 유전연기(연기의 순관: 고통과 번뇌가 계속되게 하는 인과관계)는 다음과 같다. 아래에서 각 지분에 대한 설명은 《잡아함경》 제12권 제298경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과 《연기경(緣起經)》에 나타난 고타마 붓다의 설명, 그리고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등에 나타난 현대 학자들의 해석이다.

(1) 무명(無明) (Ignorance)은 무명연행(無明緣行)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무명연행은 연무명행(緣無明行)이라고도 한다. 무명연행 또는 연무명행은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미(迷)의 근본이 되는 무지(無知)로서, 사제(四諦)와 인연의 이치를 모르는 것을 말한다. 불교 근본사상으로서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통하지 않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 무명의 반대는 팔정도(八正道) 중의 정견(正見)이다.


《잡아함경》 제12권 제298경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의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무명은 아래의 목록에 나타난 것들을 통칭한다.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 p. 460 / 2145. 이른바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다'고 한다면 그 어떤 것을 무명(無明)이라 하는가? 만일 과거를 알지 못하고 미래를 알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를 알지 못하며, 안을 알지 못하고 밖을 알지 못하고 안팎을 알지 못하며, 업(業)을 알지 못하고 과보(果報)를 알지 못하고 업과 과보를 알지 못하며, 부처님을 알지 못하고 법을 알지 못하고 승가를 알지 못하며,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발생을 알지 못하며, 소멸을 알지 못하고 길을 알지 못하며, 인(因)을 알지 못하고 인이 일으키는 법을 알지 못하며, 착함과 착하지 않음을 알지 못하고, 죄가 있고 죄가 없음과 익히고 익히지 않음과 못나고 뛰어남과 더럽고 깨끗함과 연기에 대한 분별을 모두 알지 못하며, 6촉입처를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이러저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빈틈없고 한결같음[無間等]이 없어 어리석고 컴컴하며, 밝음이 없고 크게 어두우면 이것을 무명이라고 하느니라."

 무명에 대한 설명에서 부지(不知) 즉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낱말이 계속 사용되고 있는데, 불교에서 앎[知]이란 정지(正知) 즉 바른 앎을 말하는 것으로, 앎[知] 또는 정지는 여실정행(如實正行) 또는 정행(正行)과 동의어이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앎[知]이란 불교의 진리 즉 4성제 · 12연기 등의 이치에 대한 이론적인 앎에 실천이 더해져서 획득하고 성취하게 된 실천적인 앎을 말한다


무치(無痴, amoha) 심소는 모든 사리를 밝게 이해하는 능력의 심리작용이다."
"무엇을 어리석지 않음[無癡]이라고 하는가?
어리석음을 다스리고, 여실(如實)하고 바르게 행동함[正行]을 성질로 한다. 여실하게란 간략하게 말하면 4성제(聖諦)이고, 넓게 말하면 12연기(緣起)이다. 이들에 대해서 행위를 더하는 것이 바로 앎[正知]의 뜻이다. 행동양식은 또한 탐욕 없음[無貪]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것이 무치(無癡)인가. 이는 우치를 대치하는 것이니, 진실대로 바르게 행하는 것을 자성으로 삼는 것이다."

 

역으로 그리고 엄격히 말하자면, 바른 행위 또는 바른 실천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불교에서 정의하는 앎[知] 또는 정지(正知)가 아니다. 다만, 좀 더 완화된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론적인 앎이 실천적인 앎의 출발점 또는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이론적인 앎도 실천적인 앎[知] 또는 정지(正知)의 일부이다. 즉, 유루혜인 3혜 가운데 문혜와 사혜도, 비록 세간의 정견에 포함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정견에 포함된다.

*과거[前際]를 알지 못하는 것[不知], *미래[後際]를 알지 못하는 것, *과거와 미래[前後際]를 알지 못하는 것
*안[內]을 알지 못하는 것, *밖[外]을 알지 못하는 것, *안팎[內外]을 알지 못하는 것
*업(業)을 알지 못하는 것, *과보[報]를 알지 못하는 것, *업과 과보[業報, 업보]를 알지 못하는 것
*불보[佛]를 알지 못하는 것, *법보[法]를 알지 못하는 것, *승보[僧]를 알지 못하는 것
*고제[苦]를 알지 못하는 것, *집제[集]를 알지 못하는 것, *멸제[滅]를 알지 못하는 것, *도제[道]를 알지 못하는 것
*원인[因]을 알지 못하는 것, *원인이 일으키는 법(法) 즉 결과를 알지 못하는 것
*선(善)과 불선(不善)을 알지 못하는 것 *죄가 됨[有罪]과 죄가 되지 않음[無罪], 

*익혀야 할 것[習]과 익히지 않아야 할 것[不習], 

*열(劣: 저열한 것)과 승(勝: 뛰어난 것), 염오(染污)와 청정(清淨), 그리고 이들의 분별(分別: 식별하는 것)과 연기관계[緣起]를 알지 못하는 것, 그리고 이들 모두를 남김없이 즉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皆悉不知]
*6촉입처(六觸入處) 즉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을 여실히 즉 실답게 관찰하고 알지 못하는 것[不如實覺知], 즉 안근 · 이근 · 비근 · 설근 · 신근 · 의근의 6근을 진리[實]와 계합[如]하는 상태에 있게끔 제어[覺知]하지 못하는 것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것[不知],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보지 못하는 것[不見],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의 앎[知: 실천적 앎]에 대해서라도 '간격없이 동등함[無間等]' 즉 '완전한 계합'이 없는 것[無無間等],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어리석고 컴컴한 것[癡闇],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밝음이 없는 것[無明],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크게 어두운 것[大冥]


《연기경》의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무명은 다음을 뜻한다.

"무엇을 연기의 차별된 것이라고 하는가. 즉 무명은 행(行)의 연이 된다는 것이다.
무엇이 무명인가. 무명이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즉 과거에도 앎[知]이 없고 미래에도 앎이 없고 과거와 미래에도 앎이 없으며, 안에도 앎이 없고 밖에도 앎이 없고 안과 밖에도 앎이 없으며, 업(業)에도 앎이 없고 이숙(異熟)에도 앎이 없고 업과 이숙에도 앎이 없으며, 부처에도 앎이 없고 법에도 앎이 없고 승가에도 앎이 없다.
그리고 고제(苦諦)에도 앎이 없고 집제(集諦)에도 앎이 없고 멸제(滅諦)에도 앎이 없고 도제(道諦)에도 앎이 없으며, 원인에도 앎이 없고 결과에도 앎이 없고 원인에서 생겨난 모든 법에도 앎이 없으며, 착한 일에도 앎이 없고 착하지 못한 일에도 앎이 없으며 죄가 있음에도 앎이 없고 죄가 없음에도 앎이 없다.
또한 반드시 닦아 익혀야 하는 것에도 앎이 없고 반드시 닦아 익혀서는 안 되는 것에도 앎이 없으며, 열등한 것에도 앎이 없고 가장 미묘한 것에도 앎이 없으며, 나쁜 행동에도 앎이 없고 착한 행동에도 앎이 없고 나쁜 행동과 착한 행동에도 앎이 없으며, 인연이 생겨난 6촉처(觸處)에도 그대로 일관하여 앎이 없다.
이와 같이 그 곳곳마다 철저하게 앎도 없고 식견도 없고 확실히 진리를 아는 것[現觀]도 없어서, 어리석고 무지하고 우매한 것,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앞의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에서는 무명에 대한 설명에서 부지(不知) 즉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낱말이 계속 사용되고 있는 반면, 《연기경》에서는 무지(無知) 즉 '앎이 없는 것'이라는 낱말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

*과거[前際]에 대해 앎이 없는 것[無知], *미래[後際]에 대해 앎이 없는 것, *과거와 미래[前後際]에 대해 앎이 없는 것
*안[內]에 대해 앎이 없는 것, *밖[外]에 대해 앎이 없는 것, *안팎[內外]에 대해 앎이 없는 것
*업(業)에 대해 앎이 없는 것, *이숙(異熟)에 대해 앎이 없는 것, *업과 이숙[業異熟]에 대해 앎이 없는 것
*불보[佛]에 대해 앎이 없는 것, *법보[法]에 대해 앎이 없는 것, *승보[僧]에 대해 앎이 없는 것
*고제[苦]에 대해 앎이 없는 것, *집제[集]에 대해 앎이 없는 것,

*멸제[滅]에 대해 앎이 없는 것, *도제[道]에 대해 앎이 없는 것
*원인[因]에 대해 앎이 없는 것, *결과[果]에 대해 앎이 없는 것, 

*원인이 일으켜 생겨나는 온갖 법(法)에 대해 앎이 없는 것
*선(善)에 대해 앎이 없는 것, 불선(不善)에 대해 앎이 없는 것
*죄가 됨[有罪]에 대해 앎이 없는 것, *죄가 되지 않음[無罪]에 대해 앎이 없는 것
*반드시 닦아 익혀야 하는 것[應修習]에 대해 앎이 없는 것,

*결코 닦아 익혀서는 안 되는 것[不應修習]에 대해 앎이 없는 것
*저열한 것[下劣]에 대해 앎이 없는 것, *뛰어난 것[上妙]에 대해 앎이 없는 것
*흑(黑) 즉 흑업(黑業: 나쁜 행동, 악업)에 대해 앎이 없는 것,

*백(白) 즉 백업(白業: 착한 행동, 선업)에 대해 앎이 없는 것
*위에서 언급한 것들에 있어서 차이와 분별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有異分]에 대해 앎이 없는 것
*연(緣), 이생(已生: 생겨나서 지금 존재하는 것) 혹은 6촉처(六觸處: 6입, 6처, 6근)에 대해 여실히 통달하는 앎이 없는 것[如實通達無知], 즉 연(緣), 이생(已生) 혹은 6촉처(六觸處)를 진리[實]에 계합[如]하는 상태에 있게끔 제어[通達]하지 못하는 것[無知]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여실한 앎이 없는 것[如實無知],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바른 견해가 없는 것[無見],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현관이 없는 것[無現觀],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어리석은 것[愚癡],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밝음이 없는 것[無明],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몹시 캄캄한 것[黑闇]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무명은 명(明), 즉 지혜가 없는 것으로, 연기의 도리를 알고 있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현실적으로는, 올바른 인생관 · 세계관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행(行); ((mental) formations)은 무명연행(無明緣行)과 행연식(行緣識)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무명연행은 연무명행(緣無明行)이라고도 하며 행연식은 연행식(緣行識)이라고도 한다. 무명연행 또는 연무명행은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이 있다는 뜻이고, 행연식 또는 연행식은 행(行)이 있으므로 식(識)이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함경》 제12권 제298경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의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행(行)은 신행(身行) · 구행(口行) · 의행(意行)의 3행(三行)을 뜻한다.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다 하니, 어떤 것을 행(行)이라고 하는가? 행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몸의 행[身行]·입의 행[口行]·뜻의 행[意行]이니라."

3행은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신업 · 구업 · 의업의 3업(三業, 산스크리트어: trīṇi karmāṇi)과 동의어이다.

무명연행(無明緣行) 또는 연무명행(緣無明行), 즉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있다는 것은 무명이 있기 때문에 그릇된 3행(三行), 즉 그릇된 신업 · 구업 · 의업의 3업(三業)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이미 발생한 그릇된 3업이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무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행(行)은 부파불교의 업감연기(業感緣起)에서 업(業) 또는 업력(業力)에 해당하고, 업 또는 업력이 저장되는 곳은 무표색과 의근이다.

"業感緣起(업감연기): 세계에 있어서 일체의 만상은 다 우리들의 업에 의하여 생긴다는 도리. 이는 불교의 원시적 실천상의 근본 교리로 대개 소승에서 주장하는 『구사론(俱舍論)』ㆍ『바사론(婆沙論)』 등에서 말한 것. 불교에서는 처음부터 중생과 세계는 중생들 제각기의 업력에 의하여 생겨지는 것이라 하므로, 마음의 자유ㆍ부자유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음. 우리들은 각기 뜻을 결정하고, 그 결정을 동작과 말로 발표하여 업력이 되고 업력에 의하여 잠재세력도 되는 것이니, 이들의 세력은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그 결과를 불러온다고 함. 그리하여 인생이나 세계가 모두 이 업이 결과라 함. 인생과 세계가 천차만별임에 따라 업도 차별이 없지 않음. 여기에 미(迷)의 세계와 오(悟)의 세계가 있음. 업감연기는 흔히 미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임. 중생에게는 6취의 차별이 있어, 다 각각 주체인 중생과 중생이 의지하여 사는 국토가 있는데, 사람으로 말하면 몸과 세계임. 그런데 중생의 몸인 정보(正報)는 부모가 종극(終極)의 원인이 아니고 전세에서 자기가 뿌린 업력(業力)의 종자에 의하여 지금 이 과보를 받은 것임. 그 순서는 사유(死有)ㆍ중유(中有)ㆍ생유(生有)ㆍ본유(本有)의 차례로서 끝없는 옛적부터 번뇌로 업을 짓고, 업에 의하여 윤회전생(輪廻轉生)하며 그치지 못하는 것임. 또 우리의 몸과 마음이 전세의 업에 의하여 좌우될 뿐 아니라, 국토도 물질의 원소들이 모이고 흩어지고 하여 세계를 이룩하는 것도 업력에 의한 것이라 함."

 

행(行)은 대승불교의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에서 아뢰야식에 보관된 종자, 그 중에서도 특히 업종자에 해당한다."賴耶緣起(뢰야연기): 법상종(法相宗)에서 우주의 삼라만상은 아뢰야식으로 연기(緣起)한다는 학설. 아뢰야식에는 모든 법을 내는 종자가 있다. 여기에는 선천적으로 있는 본유종자(本有種子)와 현행하는 모든 법이 후천적으로 새로이 훈부(熏付)한 신훈종자(新熏種子)가 있다. 이 두 가지 종자가 화합하여 차츰차츰 온갖 차별의 현상을 일으킨다. 이 연기론은 개인적이며 상대적인 유심론(唯心論)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생 각자의 아뢰야식은 끝없는 과거로부터 중생 각자의 아뢰야식으로 상속하여, 그 각자의 아뢰야식으로부터 모든 중생은 제각기 자기의 우주 만상을 변현한다 하고, 각자의 우주가 교섭함을 말할 적에는 공변(共變)ㆍ불공변(不共變)의 학설을 말한다. 산하대지(山河大地)와 같은 것은 각자의 공통한 변현이고, 각자의 심식(心識)ㆍ승의근(勝義根) 등은 각자의 독특한 변현이라 한다. 여기에는 공중(共中)의 공(共)ㆍ공중의 불공(不共)ㆍ불공중의 공ㆍ불공중의 불공이 구별이 있다. 이상은 미계(迷界)의 생기(生起)를 말한 것이다. 오계(悟界)의 생기에 대해서는 유루(有漏)의 제8식 가운데 이미 선천적으로 무루(無漏)의 종자를 간직하였고, 이 무루의 종자는 중생이 모든 불ㆍ보살의 교법을 듣는 힘을 증상연(增上緣)으로 하고 발전하여 마침내 무루의 증과를 얻는다고 함. ⇒유식소변(唯識所變)ㆍ유심연기(唯心緣起)"


《연기경》의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르면, 행(行)은 신행(身行) · 어행(語行) · 의행(意行)의 3행(三行)을 뜻한다.

"그리고 무엇이 ()인가. 행에는  가지가 있으니, 신체에 관한 [身行] 말에 관한 [語行] 마음의 작용에 관한 [意行] 말한다. 이것을 행이라고 한다." 

3행은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신업 · 구업 · 의업의 3업(三業, 산스크리트어: trīṇi karmāṇi)과 동의어이다.

 

무명연행(無明緣行) 또는 연무명행(緣無明行), 즉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있다는 것은 무명이 있기 때문에 그릇된 3행(三行), 즉 그릇된 신업 · 구업 · 의업의 3업(三業)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이미 발생한 그릇된 3업이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무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행(行)은 행위와 그 행위 경험의 축적(蓄積)을 뜻한다. 또는, 다른 학자에 따르면, 행(行)은 조건지워진 상태 또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특히 정신적인 기질 또는 성향을 의미한다. [David Kalupahana, A History of Buddhist Philosophy]

또한 현대의 승려 비쿠 보디(Bhikkhu Bodhi)에 따르면, 행은 능동적인 측면에서 의지적인 행위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정신적인 기질 또는 성향은 의지적인 행위의 결과로서 형성되고 또 현재의 의지적인 행위는 미래의 의지적인 행위를 일으키는 인과 연이 되기 때문이다.

"Saṅkhāra is derived from the prefix saṃ (=con), "together," and the verb karoti, "to make." The noun straddles both sides of the active-passive divide. Thus saṅkhāras are both things which put together, construct and compound other things, and the things that are put together, constructed, and compounded."

 



 

★ 이통현 장자의 신화엄경론에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한 처소와 법좌의 體를 거듭 편다는 것은  뜻이  가지가 있다. 첫째 법을 설한 처소와 意趣를  것이며, 둘째 광명을 놓은 처소와 의취를  것이며, 셋째 법좌의 體와 의취를  것이다.

 

법을 설한 처소와 의취 편다는 것에서  처소는  가지가 있고  의취는 열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보리장 보리수  1會는 熙連河 , 優樓頻螺迦葉의 아란야에서 도를 얻은 것은 세간법에 의지하여 이러한 것이며, 이는 중생을 교화하는 법칙이니, 부처는 이것이 없다. 그리하여 昇天에 이르기까지 모두 법칙을 나타낸 것이지만, 가령 여래가 지혜의 體로써 두루 한다는 것에 비춰보면 시방에 항상 두루 하면서도 가고 옴이 없이 色身을 對現하는 것이다. 이는 세간과 더불어 법을 성취함으로써 본받아 배울  있음을 밝힌 것이니,   단락은 여래가 자기의 果法을 들어서 중생을 권해 수행케  門이다

*제2회는 보광명전으로 보광명전이란 顯得(얻은 것을 드러냄) 보광명지가 報居하는 殿이니, 지혜의 體가 광대하고 한량없 때문에 과보의 경계도 한량없어 법계와 두루 동등한 것이다. 경문의 처음에서 진술했듯이  대지가 견고하고 금강으로 이루어졌으며, 보배 나무의 행렬과 궁전이나 누각이 이에 해당된다. 모두  빛나는 광명으로 법계에 두루 하고 있으니, 이는 지혜의 體가 報居하는 집이 일체처에 두루 하고 일체처가 모두 터럭 안에 있어서  처소에 구애받을  없음을 밝힌 것이니, 지혜로 두루 관하매  집도 또한 다시 시방에 두루 해서 모두가 무한의 경계이다.

 보광명전에서 10신의 법문을 설한 것은 果를 들어 信을 성취하매 오히려 智果의 보득한  안에서 근본부동지불을 설하는 것을 信位로 삼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자기 마음이 부동지불임을 믿고 이것으로 지혜의 體를 삼음을 밝힌 것이니, 마음 밖에 법이 있으면 신심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래근본지의 집에서 오히려 자기 마음의 분별이 여래의 근본보광명대지혜임을 믿고서 본질적으로 움직임이 없는 것이니, 단지 근본을 미혹해서 망령되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제3, 수미산 정상에서 10住를 설한 것은  지혜에 계합하니 생멸하는 마음으로 이를 바가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 가령 대해 있는 수미산이 높이가 8 4 유순이라서 손이나 발로 반연해 미칠 바가 아닌 것은 8 4천의 塵勞山(번뇌의 ) 번뇌의 대해에 머물면서 일체법에 사념이 없고 작위가 없으면  번뇌의 바다가 고갈해서 진로선이 문득 일체지의 산을 이루고 번뇌의 바다가 문득 성품의 바다를 성취하지만, 만약 마음을 일으켜 思慮하면, 있는 바의 반연으로 진로산이 더욱 높아지고 번뇌의 바다가 더욱 깊어져서 지혜의 정상에 이를  없는 것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이는 定으로 방편을 삼기 때문에 법혜보살이 방편삼매에 들어가  법문을 설함을 밝힌 것이니, 반드시 알라. 사념이 없어지면 지혜가 나타나고, 상념이 있으면  미혹이 존재하고, 적멸에 걸리면 지혜가 잠기고, 情이 비면〔虛〕 지혜가 발한다. 이것이 바로 도를 보는 시초요, 부처의 지혜 집안에 태어나는 시초이니, 범부를 벗어나고 세간을 초월하매 天과 같이 자재하면서 지혜산의 정상을 얻음을 나타냄을 기준으로  것이며,  방편의 定으로 마음을 止滅해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 산의 體가 되기 때문에 艮이 산이 되고 止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10住位에서 처음으로 부처의 지혜 집안에 태어나서 부처가 머무는 곳에 머무는 것이니, 이는 定에 의거해 슬기를 발하는 것이 수미산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제4회는 야마천궁에서 10행을  것이다.  天이 허공에 거처하는 것은 지혜의 법공을 기준으로 행의 體를 삼는 것이니, 이는  세간에 처해서도 오염이 없는 이다.   天의 명칭이 時分天임 보살이 행에 처할  근기의 生熟(설익은 것과 성숙한 ) 時와 非時를 알아서 망령되게 중생을 이롭게 하지 않으며,  미혹이 얼마만큼 많아지고 얼마만큼 감소하는지를 알아서 미혹의 증감에 따라 성숙함을 밝힌 것이다. 근기를 알아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을 시분전이라 칭하고, 법공으로 행을 따르는 것을 空居(허공에 거처함) 칭함을 나타낸 것이다.

*제5회는 兜率天宮에서 10회향을  것이다.  天은 욕계의 중간에 있고, 樂知足天이라 칭하기도 하는데, 이는 회향의 법문이 열반을 탐내지도 않고 생사를 탐내지 않으면서도  생사에 처하고  열반에 처해서  성품이 없기에 중도에 처함 밝힌 것이다. 나머지  天은 放逸이니, 색계와 無色界天은 청정을 좋아해서 중도의 뜻에 융화 회통하지 못하며, 비록 他化自在天에서 10地法을 설했지만  지위의 중도법으로 10地를 성취해서 수행을 쌓아 功을 이루는 것이다. 10회향법을 설할  무릎 위로 광명을 놓는 것은, 거두고 폄의 자재로움이 무릎을 말미암음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理智와 大願과 大悲가 시방에 두루 원만하면서 걸림 없이 융화회통함이 10회향의 지위를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10지는 이에 의거한 행으로 쌓아나가 성숙케 하기 때문에 별개의 법이 없는 것이다.

*제6회는 타화자재천궁에서 10지를  것이다. 이는 欲際의 정상에 도달함을 나타낸 것이며,  중생에 의거해서 融化하기 때문에 自化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니,  때문에  天의 처소를 빌려서 他化의 지혜를 나타낸 것이다.   천의 처소가 마왕 파순의 거처이니, 이는 10地位의 지혜로 心魔를 조복시켜서 대자비의 행을 성취해 성숙시킴을 밝힌 것이다.

*제7회는 3 있다. 이는 보현행이 원만하게 法悅로 중생을 이롭게 함을 나타낸 것이니,  천이 오직 禪悅로만 기쁘게 움직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제8회는 보광명전(普光明殿)에서 「십정품(十定品)」과 「여래출현품」을  것이다. 이는 부처가 출현해서 닦아 나가는 도의 지극함이 본래의 처소〔本處〕를 여의지 않음을 밝힌 것이며,  개의 보광명지를 여의지 않음을 닦아 나감으로 삼음을 밝힌 것이다. 천상(天上) 오른다고 말한 것은 법의 승진이 원래   보광명대지혜와 근본 선정〔本定〕의 집을 여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니, 비록 승진의 행을 닦아서 원만하지만 원래의 근본부동지 중의 보광대용(普光大用) 옮기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제9회는 역시 보광명전에서 이세간법(離世間法)  것이다. 이는 보광명지로 두루 하여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면서도 온갖 법에 물들지 않는 것을 이세간이라 칭함을 밝힌 것이니, 보광명지를 보현행을 갖추어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도 나가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는 것을 이세간이라 칭하기 때문이다. 지혜의 ()  작용하면서도 의지함이 없기 때문에  명칭을 () 하는 것이니, 이는 싫어해서 떠나는〔厭離〕 것이 아니다.

이처럼 3 보광명전에서 설해진 것은 행의 · 아울러 보현행의 원만함이 모두 하나의 普光明 始終 없고 依住함도 없는 자재로운 대지혜임을 밝힌 이니, 만약 보리심을 발한 중생이  지혜를 보지 못하면 발심이라 칭하지 못하고  지혜를  자라야 비로소 발심이라 칭하는 것이며, 만약 마음 밖에 부처를 보는 자와  취해서  구하는   짓더라도 아직은 一切智心 발했다고 하지 못한. 경문에서 “일체지승(一切智乘) 타고서 곧바로 도량에 이른다”고 했으니, 보광명대지혜의 () 타고서도 도리어 보광명대지혜의 도량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이른다) 칭하는 것이다. 이는 발심과 필경(畢竟)  둘이 다르지 않음을 이른 것이니, 이러한  마음 중에서는 선심(先心:발심) 어려운 것이다. 이는  지혜가 믿기 어렵기 때문에 믿음을 얻으면 곧바로 능히 들어감을 밝힌 것이다. 대체로 증발심(證發心:구경의 지위) 쉽지만 먼저 신발심(信發心:초발심) 일으키기란 어려운 것이니, 믿음이 지극하면  지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다만 방편삼매로 나타내면  지혜 경계가 문득 나타나는 것이니,  3() 모두 보광명전에 있는 것은  체용과 시종과 인과와 만행이 똑같이 하나의 지혜임을 밝힌 것이니, 앞에서 서술한 대로이다.

*제10회는 급고독원(給孤獨園)에서 「법계품」을  것이다. 이는 법계가 세간에 양분을 공급함을 여의지 않는다는 뜻을 밝히기 때문이니, 세간에서는 생사(生死) 원림(園林) 바로 법계의 체용이란  나타낸 것이다.  때문에 여래의 거처인 중각강당(重閣講堂) 법계를 포함하고 사자좌가 시방에 미치는 것인데, 오직 제도(濟度) 응하는 자만이   미혹에 처한 자는 깨닫지 못하니 5 명의 성문과 나머지 중생이 이에 해당된다.

*제11회는 각성동(覺城東)에서 있었다. 문수사리가 모든 대중을 위해 법계를 두루 비추는 수다라문(修多羅門) 선재동자의 선지식 등을 설하는 것은 문수가 바로 몽매한 이를 이끄는 首長이니 시방의 모든 부처와 일체 중생이 모두  법에 의거해서 사수(師首) 삼음을 밝힌 것이며, 자체성 없는 묘한 슬기의 첫머리가 되기 때문에  보현으로 행의 첫머리를 삼는 것이니,  가지의 첫머리가 똑같이 발해서 먼저와 나중이 없는 것이다.

 

● 광명을 놓는 곳과 의취에는 간략히 승진의 수행을 나타낸 광명이 대략  가지가 있다.

1  「여래현상품」에서   광명 놓으니,

*하나는 치아 사이의 광명 놓아서 시방의 대중에게 고하여 부처의 성도(成道) 알게 하고, 대중을  모이게 하여 부처의 인과법을 설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미간의 호상(毫相)에서 광명 놓아 시방을 두루 비추니,  명칭이 일체보살력지광명조요시방장(一切菩薩力智光明照曜十方藏)3)이다. 시방을  비추고 나자  광명이 부처의   족륜(足輪)으로 들어오는 것은  들어  성취해서 믿음에 들어가게 하는 광명임을 밝힌 이다.  호상에서 불찰미진수의 보살을 내는데 승음(勝音) 우두머리로 삼는 것은 여래가 행하는 행의 두루 함을 밝힌 것이니, 부처 스스로의 각행(覺行) 두루 하는 로써 믿음을 성취케 함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광명이 부처의   족륜으로 들어가는 것은  광명과 10지를 설할  미간으로 광명을 놓는 것이 비슷함을 밝힌 것이니, 전자는 믿는 바의 불과이며, 후자는 자기가 수행해서 승진해 얻은  광명이다.

*제2회에서 여래가   밑의 족륜에서 광명 놓으니, 이는 보광명전에서 信位 성취한 광명이다. 이것은 초회    족륜으로 들어온 광명을 이제 방출함으로써 10신의  성취한 것인데, 10신을 설하는 광명을 밝히기 때문에  밑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니, 부처의 果德 설함을 통해 신심을 성취함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신심 가운데 불과의 원만함을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제3회에서 여래가 발가락 끝으로 광명 놓은 것은 內位 들어가는 시초와 성도(聖道) 오르는 처음과 불가에 태어나는 첫머리와 성행(聖行) 행하는 시초임을 밝힌 것이기 때문이니, 이는 10住位 설한 광명이 발에서 하여 () 들어가는 시초임을 밝힌 것이다.

*제4회에서  발등 위로 광명 놓은 것은 법공에 의거해 행을 행함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10행위를 설한 광명을 밝힘으로써  의거해 행을 일으킴을 밝힌 것이다.

*제5회에서 여래가 무릎 위로 광명 놓은 것은 10회향의 大願   서로 참여하고 지혜와 자비가 똑같이 제도하는 것이 마치 사람의 무릎이 구부리고 펴는 것을 말미암는 것과 같음을 나타냄을 밝힌 것이다. 이는 바로 10회향을 설한 광명이니, 영원을 세우고 자비를 일으켜서 생사와 열반에 지혜와 자비가 자재로움을 나타낸 것이다.

*제6회에서는 미간에서 광명 놓으니  이름이 보살력염명(菩薩力焰明)이며,  광명이 초회  미간에서 놓은 광명으로  명칭이 보살력지광명(菩薩力智光明)이다. 이는 인과가 서로 같은 것이니, 처음에 역지(力智) 것은 근본지를 나타낸 것이며, 여기서 역염명(力焰明)이라 한것은 으로부터 근본을 요달해서 능히 세속을 비춤을 나타내기 때문에  명칭이 역염명(力焰明)이, 3승에서 근본지라 칭하는 것과 세속에 반연함을 후득지(後得智) 칭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근본지를 요달해서 능히 세속을 비추기 때문에   선후가 없음을 밝힌 것이니, 비록 승진하는 지위의 계급을 세우긴 했지만 지혜와 대자비가 다르지 않고 때〔時〕가 다르지 않고 보현행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총체적으로 변천함이 없는 법이기 때문에 이에 한량없는 지혜를 설하는 것이 모두 작용을 말한 것이지 근본에서 옮기지는 않은 것이니, 지혜로 비추면   있고 으로 보면  미혹한다. 그리하여 大悲門 중에서 세속을 인도하기 때문에  시겁(時劫) 법이 제각기 나눠진 것이지만, 만약 대지혜로  잡는다면 시겁이 원래 의지함이나 장단(長短) 없는 것이니, 이는 총별육상(總別六相)으로 말한 것이다.

*제8회에서 여래가 미간에서 광명 놓아 문수의 정수리에 붓고,  안에서 광명을 놓아 보현의 입에 부은 것은 이지(理智) 만행으로 하여금 서로 참여케 함으로써 부처의 과덕을 설하게 함을 나타낸 것이다. 문수는  묘한 슬기요, 보현은 지혜와 만행의 작용임을 밝힌 이니,  뜻은 이지(理智) 묘한 슬기가 공적과 작용이 서로 사무치고 참여해서 불과의  묻고 대답함을 나타낸 것이다. 문수는 여래의 법신이 형체가 없으면서도 정사(正邪)  결택(決擇)하는 묘한 슬기의 이며, 보현은 여래의 대지혜가 두루 하여 색신을 대현(對現)함으로써 근기를 알아 그에 따라 세속을 이롭게 하는 行果이니, 일체 모든 부처가   가지 법을 써서 성불하기 때문이다. 가르침  「여래출현품」은   법을 융화회통하고 사무치게 함으로써 불과의 이지(理智) 만행(萬行)으로 법계의 원융무애한 문을 성취토록 하기 방광으로 비추어 서로 문답케 함으로써 나중에 배우는 자로 하여금 법을 보는 것이 쉽고 분명하도록  것이다.   분의 인과가 처음 믿음을 발한 때부터 곧바로  종결에 이르기까지 서로 사무치고 융화하는 것이니, 이지(理智)로써 생각하여 자기 마음의 체용을 비추면   있을 것이다. 初會 불과는 부처가 스스로 성취한 것이며,  10지, 11 이후의 불과는 수행자의 自力으로 성취한 것이니, 문수와 보현의  행이 사무침으로써 이지(理智) 만행이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제9 「수호광명공덕품」에서  안에서 광명 놓아 악도의 고통을 비추는 것은 도가 원만하매 대자비로 세속을 제접하는 광명을 밝힌 것이다. 이상은 2 이래부터는 스스로 수행하는 자의 승진이 종결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일종(一終) 교말(敎末)이다. 부촉(付囑) 유통(流通) 또한  「출현품」 안에 있으니, 앞서 밝힌 바와 같다.

*제10 「법계품」에서 또한 미간으로 광명 놓는 것이니, 명칭이 3세를 두루 비추는 법계이다. 이는 3세가 모두 一時이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법계를   삼음을 밝힌 것이니,    회향(回向) 10지와 11지로부터 불과까지 모두 법계를   삼아 문수를 법계의  삼고 보현을 법계의 지혜로 삼아 理智 묘용이 一佛門 되는 것이다.

 1으로  몽매한 이를 교화하기 위해  가지 법으로 나누는 것이니, 만약 근기를 좇고 세속을 따른다면 법문이 다함이 없겠지만, 실다운  논한다면 자체성 없는 가운데 一法 여의지 않는 것이니,   걸림이 없는 것을 보현이라 칭한다. 처음 동몽(童蒙) 제접할  자체성 없는  가운데 정사(正邪) 묘하게 가려냄을 요달해서 無生 슬기에 들어가는 것을 문수라 하고 또한 동자 보살이라 칭하며, 능히 고제(苦際) 함께 하면서 행을 일으켜 중생을 이롭게 하여 부처 가문의 법을 다스리는 것을 보현이라 칭하는 이며,  분의  사무치는 것을 부처라 이름이며, 본래로 자재로움을 법계라 칭하는 것이며, 처음부터 나중까지 사무치는 것이 모두  법계가  되지 다시 다른 법이 없다.  품은 일체 모든 부처의 인과의 대도(大都) 되며,  온갖 성현이 행하는 大路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며,  자기 마음의 一切智王 노닐면서 관하는  집〔大宅〕이며,  일체 중생이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에  이름이 법계인 것이다.

 

법좌  마니(摩尼) () 삼은  本體 법신의 성품에 더러움이 없는 것으로써 마니의 명칭인 이구보(離垢寶) 삼음이다.  뜻은 불과의 보리가 법신의 무구(無垢)함을  삼으니 佛身 化身 지혜의 작용 과보로 얻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의거해 지혜의 작용을 일으킴을 밝힌 것으로 마니로써 법좌의  삼은 것이다.

*제2회에서 법좌의  연꽃을 ()으로 삼은 것은, 2회에서 중생을 교화해 이롭게 함을 기준으로 해서 믿음의 종자를 이루게 함을 나타낸 것이며, 믿음 속에 처해서도 세간에 처한 행이 오염됨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니, 오염됨이 없이 사물을 이롭게 하는 것을 으로 삼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연꽃으로 () 삼은 것이다.

*제3회는 제석천의 묘승전(妙勝殿) 위에 있는 보광명장(普光明藏) 사자좌의 백천(百千) 층급 안치한 것은 뜻이 믿음으로부터 지위에 들어갈  방편의 사념도 없고 작위도 없는 적정삼매(寂靜三昧)로써 하는 것을 안치(安置) 칭하고, 삼매력으로 여래의 근본 지혜를 현득(顯得)해서 처음으로 불가에 태어나 두려움 없는 슬기〔無畏慧〕를 얻는 것을 보광명장인 사자좌라 칭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란  지위가 여래 지혜의 () 들어감을 나타낸 것이며, 사자(師子) 지혜의 두려움 없음을 밝힌 것이며, 보광명(普光明)이란 여래의 근본보광명법계의 대지혜에 계합함을 나타낸 것이며, 백천 층급이란 10주를 닦아 나가는 계급과 세간을 벗어남이 백천 가지 정계(情繫) 무명을 초월한 것이자 백천 가지 업장을 타파함을 나타낸 것이다. 가령 부처의 과좌(果座:과의 법좌) 모두 층급을 닦아 나가는 것의 오르고 내림과 깨달음과 미혹의 깊고 얕음과 지혜의 뛰어남과 열등함을 말하지 않는 것이니, 10주의 처음이  백천 층급인 것은 지위에 들어가 닦아 나갈  업장을 초월하는 분제(分際) 밝힌 것이다.

*제4 야마천궁에서 보련화장(寶輦華藏) 사자좌를 化作 것은10행위를 설할  행이 세간에 처하면서도 집착이  때문에 연꽃으로 나타낸 것이며, 사자는 앞서와 같이 의주석(依主釋)이며, 백만 층급이란 것은 승진이 이전을 넘어서서 업을 초월함이 뛰어나기 때문이며, 법좌를 화작(化作)했다고 말하지 안치(安置)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여래 지혜에 들어가 지혜로써 행을 따르매 행하는 바의 행업(行業) 지혜로써 화위(化爲)하는 것이니, 마치 변화와  때문에 안치라 말하지 않은 것과 같으니, 이는 행이 로부터 함을 밝힌 것이다.

*제5 도솔천궁에서  위에 마니장(摩尼藏) 사자좌를 백만억 층급으로  것은 10회향이 세간을 벗어난 이지(理智) 근본 법신에 의거함으로써 세간에 처해서도 더러움이 없고, 근본 불과의 좌체(座體) 의거해 승진함으로써 오히려 근본에 돌아가기 때문에 설사 회향 방편의 원력으로  자비와 지혜를 성취할지라도 법신 자체의 무구(無垢) 변치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자비의 염원을 회향해 융화하고 회통함으로써 체용을 균등케 하기 때문에 법좌를 편다고 말할  안치나 化作이라 말하지 않은 것이며, 백만억 층급이란 것은 승진이 이전을 넘어서기 때문에 오염과 청정의  가지 장애를 없애서 걸림 없는 법계의 대비지(大悲智) 성취하는 것이다. 비록 10주와 10행에서 5위를 가지런히 닦긴 하지만, 가르침으로 병을 가려내어 앞의  지위는 세속을 벗어나는 마음이 뛰어나고 대비심이 낮기 때문에  10회향위에서 원력으로 회통 융화하여 지혜와 자비가 처소를 얻음을 밝힌 것이다.

*제6 타화자재천왕궁에서 다만 마니장전(摩尼藏殿)이라 말하고 법좌의  말하지 않은  뜻이 법좌가 도솔천의 마니좌를 변역(變易) 않음을 나타낸 것이니, 다만 법성의 더러움 없는 대지혜로 대자비문을 성취해서 중생을 감싸 때문에 (殿)이라고만 말할  법좌를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앞서의 회향법에 의거해 대자비의 (殿) 길이 양육함으로써 중생을 감싸 기르는 것이지, 별개의 승진은 없다는  밝힌 것이다.

*제7회는 3() 있다.  회상의 법칙과 가르침의 행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보현행품]으로 대략  것인데,  [보현행품] 36품에 해당된다.  또한 대략  것일  대본(大本) 오지 않았으니 백만억 게송이 있다.

*제8회와 9  회상이 똑같이 보광명전에 있는  10신의 마음과 승진의 수행으로 불과에 이르는 것과 [이세간품]에서 보현이 항상 행하는 것과 10 10 등이 모두 보광명의  개의 지체(智體) 여의지 않기 때문에 5위와 10 등의 닦아 나감을 성취하는 것이니, 모두가  지혜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보광명지는 시방의 모든 부처와 일체 중생이  함께 공유하고 있지만 모든 부처는 이미 요달했고 중생은 미혹한 것이니, 체용은 하나이지만 미혹과 깨달음은 같지 않은 것이다.

*제10 「법계품」에서 다만 “그 법좌가 법계에 널리 두루 한다”고만 말하고 층급을 말하지 않은 단지 불과의 좌체(座體) 마니를 삼음을 밝힌 것이니, 초회부터 5회에 이르기까지의 좌체가 똑같이 마니를 계로 삼은 것은 불과의 같음을 회통하였기 때문이다. 대의(大意) 지혜로 자비를 행하는 것이 하나의 보광명지와 다르지 않고, 세간에 처해 더러움 없음이 하나의 묘리(妙理) 법신과 다르지 않음이니, 지혜와 법신이 똑같이 하나의 자재로움이 되서 체용이 없으면서도 작위가 없고 가지 않으면서도 이르러서 사물에 응하는 것이니, 이지(理智) 회통해야 비로소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나타낸 뜻은 단지 중생으로 하여금 보고 법을 알게 해서 쉽게 이해하도록 것이며, 닦아 나가는 행을 일으키는 의혹이 없게 것이다.

 글은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주요 논서인 무착이 저술한 대승아비달마집론, 책의 주석서라고 있는, 안혜가 대승아비달마집론 내용에 사자각의 주석을 더하여 편찬한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 설명하고 있는 마음작용 심소법(心所法) 대해 다룬다. 

무착(無着, Asaṅga: 300?~390?)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근본설일체유부(根本說一切有部) 혹은 화지부(化地部) 출가하였다가 후에 대승불교로 전향한 미륵과 함께 인도불교의 유식학의 3 가운데 1기의 논사로서 유식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 하였다.[1] 사자각(師子覺) 무착의 동생이자 제자로,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주석은 그의 주석이다.[8] 안혜(安慧) 인도 불교의 유식학의 3기의 논사로, 10 논사 가운데 명이다.[9]

[1. 무착: 無着 원명은 아상가(Asanga)라고 하며, 300∼390년경 인도 대승불교의 사상가이다. 북서 인도 간다라 지방 부루사부라성의 브라만 집안에서 3형제의 맏이로 태어났다. 성장하여 유부(有部)에 출가했으나, 후일 중인도 아유차국으로 가서 대승의 유가행에 힘썼다. 전설에 의하면, 아상가는 수행중 도솔천에 올라 미륵보살의 계시를 받고, 이에 의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을 전지강설(傳持講說)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이들 저서는 아상가가 아유차국에서 유가행의 스승이었던 마이트레야로부터 받은 학설로서, 후세 마이트레야가 미륵보살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미륵보살의 계시(啓示)에 의한 것으로 전하여지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유식설을 조직·체계화한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지었고, 그 밖에 <육문교수습정론(六門敎授習定論)>, <순중론(順中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등을 나타내어 유가행파의 대표적 논사(論師)로 꼽혔다."]

[8. 大乘阿毘達磨雜集論(대승아비달마잡집론): 【범】 Abhidharmasamuccayavyākhyā. 16권. 당(唐)나라 때 현장(玄奘)이 646년 2월에서 4월 사이에 홍복사(弘福寺)에서 번역하였다. 줄여서 『아비달마잡집론』ㆍ『잡집론』이라고 하며, 별칭으로 『대법론』이라고도 한다. 『대승아비달마집론』을 주석한 것으로서, 유가행파의 법상을 해설한다. 이 책은 무착의 제자인 사자각(師子覺)이 저술한 『대승아비달마집론』에 대한 주석서를 안혜(安慧)가 『대승아비달마집론』과 합하여 편찬한 것으로, 모두 2분 8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9. 安慧(안혜): 【범】 Sthiramati 인도 스님. 범명(梵名)은 실치타말저(悉恥咤末底). 유식 10대론사의 하나. 불멸 후 1100년경 남인도 벌랍비국에 탄생. 세친 보살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의 석론을 짓고, 『구사(俱舍)』의 석론을 지어 중현의 『순정리론(順正理論)』을 반박. 앞의 것은 현장이 『성유식(性唯識)』을 지을 때에 호법의 뜻을 바르다 하고, 다른 9론사(論師)의 뜻을 그르다 하여 혼합하였으므로 전하지 못하고, 뒤의 것은 산실됨. 다른 경전에도 널리 통달, 특히 인명(因明)에 능하였음. 저서로는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 16권, 『대승광오온론(大乘廣五蘊論)』 1권, 『대승중관석론(大乘中觀釋論)』 9권."]

무착은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 마음작용[心所法] 대해 대한 정의를 제공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마음작용이 5 가운데 수온과 상온 그리고 행온의 일부로써 구성된다는 것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점은 안혜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무착은 자신의 다른 저서인 현양성교론에서는 마음작용[心所有法]이란 아뢰야식의 종자로부터 생겨난 법으로서, 마음(8, 심왕, 심법) 의지하여 일어나서 마음과 더불어 함께 전전[俱轉]하는, 마음과 상응(相應)하는 모든 법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마음작용(심소법 또는 심소유법) 속한 법들을 변행심소 · 별경심소 등의 그룹으로 분류하지 않고, () · ()에서 () · ()까지 55가지의 마음작용을 그룹 구분없이 일괄 나열하고 있다. 이에 비해 현양성교론에서는 마음작용에 속한 법들로 작의(作意) · ()에서 () · () 이르기까지 51가지 법을 들고 있으며, 이들 51가지 법들을 변행심소(遍行心所: 5가지) ·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 선심소(善心所: 11가지) · 번뇌심소(煩惱心所: 현양성교론에서는 6가지,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는 10가지) ·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 · 부정심소(不定心所: 4가지) 6그룹으로 나누고 있다.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는 주석에서 55가지의 마음작용이 이들 6그룹으로 나뉜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음작용에 속한 법으로 대승아비달마집론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는 55가지의 법을 들고 있고 현양성교론에서는 51가지의 법을 들고 있으므로 개수에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현양성교론에서의 () 염오견(染汚見) 살가야견 · 변집견 · 견취견 · 계금취견 · 사견의 5(五見)으로 세분하여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양성교론에서는 () 염오견을 하나의 법으로 취급한 이것의 세분으로 5견을 논하고 있기 때문에, 논서에서 들고 있는 마음작용의 개수는 실제로는 동일하다.

정의

무착은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 마음작용[心所法] 대해 대한 정의를 제공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마음작용이 5 가운데 수온과 상온 그리고 행온의 일부로써 구성된다 것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점은 안혜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대승아비달마집론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는 () · () · () · 작의(作意) · ()에서 () · ()까지 55가지의 법이 마음작용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다.[엿볼 사 ① 엿보다 ② 방문하다 ③ 듣다 ④ 맡다]

어떻게 행온을 건립하게 됩니까?

6사신(六思身) 말하는 것이다. 안촉에서 생겨난 ()이고, 이촉에서 생겨난 ()이고, 비촉에서 생겨난 ()이고, 설촉에서 생겨난 ()이고, 신촉에서 생겨난 ()이고, 의촉에서 생겨난 ()이다. () 연유해서 () 갖가지 선업을 짓게 되고, () 잡염(雜染)하게 되고, ()에서 분위차별(分位差別) 짓게 되는 것이다. 같은 () () () 제외한 밖의 다른 심소법(心所法)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 총괄해서 행온이라 이름한다.

어떠한 것을 밖의 다른 심소법이라 합니까?

작의(作意) · () · () · 승해(勝解) · () · 삼마지(三摩地) · () · () · () · () ·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 · () · () · 불방일(不放逸) · () · 불해(不害) · () · () · () · 무명(無明) · () · 살가야견(薩迦耶見) · 변집견(邊執見)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 · 사견(邪見) · (忿) · () · () · () · () · () · () · () · () · () · 무참(無慚) · 무괴(無愧) · 혼침(惛沈) · 도거(掉擧) · 불신(不信) · 해태(懈怠) · 방일(放逸) · 망념(忘念) · 부정지(不正知) · 산란(散亂) · 수면(睡眠) · 악작(惡作) · () · ()이다. 

대승아비달마집론 1. 한글본≫

 

분류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마음작용(심소법 또는 심소유법) 속한 55가지 법들을 변행심소 · 별경심소 등의 그룹으로 분류하지 않고, () · ()에서 () · ()까지 그룹 구분없이 일괄 나열하고 있다.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는 이들 55가지 법들을 변행심소(遍行心所: 5가지) ·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 선심소(善心所: 11가지) · 번뇌심소(煩惱心所: 10가지) ·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 · 부정심소(不定心所: 4가지) 6그룹으로 나누고 있다.

이와 같은 () 등의 55법은 변행심소[遍行]이거나 별경심소[別境]이거나 선심소[]이거나 번뇌심소[煩惱]이거나 수번뇌심소[隨煩惱]이거나 부정심소[不定]이다. 순서대로 변행심소가 5가지, 별경심소가 5가지, 선심소가 11가지, 번뇌심소가 10가지, 수번뇌심소가 20가지, 부정심소가 4가지임을 마땅히 알아야 것이다.

대승아비달마잡집론 1. 한글본≫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의 그룹 구분에 따라 55가지 마음작용들을 목록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변행심소(遍行心所: 5가지): () · () · () · 작의(作意) · ()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 · 승해(勝解) · () · 삼마지(三摩地) · ()

선심소(善心所: 11가지): () · () · () ·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 · () · () · 불방일(不放逸) · () · 불해(不害)

번뇌심소(煩惱心所: 10가지): () · () · () · 무명(無明) · () · 살가야견(薩迦耶見) · 변집견(邊執見)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 · 사견(邪見)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 (忿) · () · () · () · () · () · () · () · () · () · 무참(無慚) · 무괴(無愧) · 혼침(惛沈) · 도거(掉舉) · 불신(不信) · 해태(懈怠) · 방일(放逸) · 망념(忘念) · 부정지(不正知) · 산란(散亂)

부정심소(不定心所: 4가지): 악작(惡作) · 수면(睡眠) · () · ()

·번뇌·수번뇌심소의 작용

대승아비달마집론 1권과 대승아비달마잡집론 1권에 따르면, 모든 선심소(善心所) 선한 마음작용은 자소치(自所治) 그것이 대치(對治)하는 번뇌를 끊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한다. 예를 들어, ()이라는 선한 마음작용은 그것의 자소치인 불신(不信)이라는 수번뇌성(隨煩惱性) 마음작용을 능히 끊을 있다. 마찬가지로 () 그것의 자소치인 무참(無慚) 능히 끊을 있다.

그리고 모든 번뇌심소(煩惱心所)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모든 번뇌, 모든 잡염, 모든 유부무기와 불선의 마음작용은 자능치(自能治) 그것을 대치(對治)하는 () 선한 마음작용을 장애[]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한다. 예를 들어, ()이라는 근본번뇌성(根本煩惱性) 마음작용은 그것의 자능치인 무탐(無貪)이라는 선한 마음작용을 능히 장애하여 생겨나지 않게 있다. 마찬가지로 (忿)이라는 수번뇌성(隨煩惱性) 마음작용은 그것의 자능치인 ()라는 선한 마음작용을 능히 장애(障礙)하여 생겨나지 않게 있다.

55가지 개별 법의 설명 아래 목록은 대승아비달마집론(이하, "집론") 대승아비달마잡집론(이하, "잡집론") 나타난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으며, 해당 정의와 설명도 논서에 따른 것이다. 집론이라고 언급하지 않은 경우 해당 정의 또는 설명은 집론 따른 것이다. 

변행심소(遍行心所: 5가지)

(1) (, 감수작용, 지각, 느낌, 과보의 영납, feeling, sensation), 5 가운데 수온(受蘊) 해당하며, 영납상(領納相) 감수작용의 성질을 본질적 성질[] 하는 마음작용이다. () 마음작용이 있기 때문에 유정은 온갖 () · 부정(不淨) () 온갖 과보[] 이숙(異熟) 영납하게 된다. , 갖가지 이숙과(異熟果) 받아들여 느끼게 된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 마음작용이 있어서 유정은 각종의 () · 부정(不淨) 청정업(清淨業) 불청정업(不清淨業) 따라 득하게 이숙과[異熟, 異熟果] 영납하게 된다. 청정업의 경우 낙이숙(樂異熟) 즐거운 이숙과를 받고, 불청정업의 경우 고이숙(苦異熟) 괴로운 이숙과를 받고, 정부정업(淨不淨業) 경우 불고불락이숙(不苦不樂異熟)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이숙과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있는 이유, 지은 업은 () 또는 부정(不淨)임에 비해 받는 이숙과는 () 또는 () 이유, 원인인 () 결과인 () · 불선 · 무기의 3성의 관점에서 각각 선과 무기로 서로 성질이 다르고 원인인 부정(不淨) 결과인 () 3성의 관점에서 불선과 무기로 서로 성질이 다른데 유정이 원인과는 성질이 다른 과보를 감득할 있는 이유는 () · 부정(不淨) 업에 따라 이숙(異熟) 이숙과를 감득하는 아뢰야식이 항상 사수(捨受) 상응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아뢰야식의 사수(捨受) 바로 이숙과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 유정이 과보로서의 고수(苦受) · 낙수(樂受) · 사수(捨受) 느낄 있는 것은 아뢰야식이 항상 상응하는 사수(捨受)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수(苦受) · 낙수(樂受) 2가지 , 과보로서의 고수(苦受) · 낙수(樂受) 아뢰야식에서 일어나는 이숙(異熟: 다르게 익음) 작용을 따라 생겨나기 때문에 고수(苦受) · 낙수(樂受) 가설(假說)적으로 명명하여 이숙(異熟)이라 한다. 고이숙(苦異熟) · 낙이숙(樂異熟)이라 이름한다. 괴로운 이숙과 · 즐거운 이숙과라 명명한다.

(2) (, 표상작용, 취상(取像), 취상(取相), 구료상(搆了相), perception, cognition, conceptualization, distinguishing, idea) 5 가운데 상온(想蘊) 해당하며, 구료상(搆了相) 요별을 구성하는 성질을 본질적 성질[] 하는 마음작용이다. () 마음작용이 있기 때문에 유정은 갖가지 법의 상류(像類) 모양과 유형을 구성하여 그려낼[搆畫] 있으며, 견문각지(見聞覺知)하여 파악한 의미[] 따라 갖가지 언설(言說) 설명하는 말을 일으킬 있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견문각지(見聞覺知)하여 파악한 의미[]' 견의(見義) · 문의(聞義) · 각의(覺義) · 지의(知義) 말한다. 견의(見義) 보아서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안근 눈으로 보고 받아들인 [眼所受] 말한다. 문의(聞義) 들어서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이근 귀로 들어서 받아들인 [耳所受] 말한다. 각의(覺義) () ()으로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견의와 문의에 응하여 자연히 저절로 생각[] 구성[]되어 파악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 마음작용이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 상응하여 저절로 대강 그린[] 것을 말한다. 지의(知義) () ()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받아들인 [自內所受] 말한다. 예를 들어, () 마음작용이 보고 듣고 저절로 대강 그려진 것을 () 또는 () 상응하여 내적으로 의식적으로 세밀하게 살펴서 파악한 또는 그린 것을 말한다. '갖가지 언설(言說)' 전변(詮辯) 설명하는 말을 뜻한다. 

(3) (, 의사, 의지, 추진, 조작(造作), 짓고 만듦, volition, directionality of mind, attraction, urge) 심조작(心造作) 마음으로 하여금 의업(意業) 짓고 만들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마음으로 하여금 · 불선 · 무기에 대해 작용하게 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 · 불선 · 무기에 대해 작용하게 한다' 것은 이미 지어진 · 불선 · 무기의 법에 대하여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집론 잡집론 따르면, 5 가운데 행온의 본질이 조작상(造作相)으로, () 마음작용이 행온을 대표한다. , 행온은 () () 마음작용을 제외한 모든 마음작용과 심불상응행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 작용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일체행(一切行) 행온에 속한 모든 법들의 으뜸으로 삼는다.

그리고 () 안촉소생사(眼觸所生思) · 이촉소생사(耳觸所生思) · 비촉소생사(鼻觸所生思) · 설촉소생사(舌觸所生思) · 신촉소생사(身觸所生思) · 의촉소생사(意觸所生思) 6사신(六思身)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들 6사신을 발동근거로 하여 () 마음작용은 갖가지 () 짓고, 잡염(雜染) 번뇌 유부무기와 불선을 짓고, 분위차별(分位差別) 짓는다.

(4) 작의(作意, 마음을 일으킴, 기억을 일으킴, 주의, 유의, 발동과 유지, attention, act of attention, ego-centric demanding) 마음을 발동(發動)시키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소연경(所緣境) 마음을 유지[]시키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소연경에 마음을 유지시키는 ' 소연경으로 자주 자주 마음을 이끌어서 마음이 소연경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5) ( 접촉, 3사화합 · 분별 · 변이, contact) · · 식의 3화분별변이(三和分別變異), 3화합(三和合) 의지하여 모든 () 변이(變異) · 분별(分別)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 마음작용의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변이(變異) 또는 변이행상(變異行相) () 생겨날 그것의 소의가 되는 모든 () 따라서 고수(苦受) · 낙수(樂受) 등이 생기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이(變異) 변이행상(變異行相) 따른 분별(分別) 따라서 () 마음작용이 생겨난다.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6) ( 희망, 욕구, 희망의 인발, intention, interest, desire to act, desire for action, aspiration) 소락사(所樂事) 즐거운 , 즐겨하는 또는 좋아하는 일에 대하여 그것을 짓는 것에 대한 희망(希望) 인발(引發)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정근(正勤) 바른 정진의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소락사를 짓는 것에 대한 희망을 인발한다' 것은 욕의 마음작용은 (: ) · () 등의 일체의 작용을 견인하여 포섭한다는 것을 말한다. , 견문각지(見聞覺知) 모아서, 마음의 모든 작용을 모아서 소락사를 짓는 것에 사용하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정진(精進)으로 이끈다는 것을 뜻한다. 

(7) 승해(勝解 확실한 이해, 뛰어난 이해, 인가와 유지[印持], interest, intensified interest, decision, firm conviction, resolution, approval) 결정사(決定事) 대해 결정한 바에 따라 인지(印持)하는 인가(印可)하고 유지(維持)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불가인전(不可引轉) 끌어들여 바꾸지 못하게 하는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결정한 바에 따라 인지(印持)하는 ' 결정사가 반드시 이와 같은 일이며 다른 일이 아니라고 결정적으로 명확히 아는[決了] '확실한 이해 또는 뛰어난 이해[勝解]' 뜻한다. 확실한 이해 또는 뛰어난 이해에 의해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뛰어난 원인[勝緣] 존재하는 상태이고, 따라서 결정 또는 이해를 다른 것으로 끌어들여 바꿀 수가 없다[不能引轉]. 결정한 이해한 바를 뒤흔들 없게 된다. 

(8) (, 정념, 4념처, 끊임없는 수동적 관찰, 명기(明記) 불망(不忘), 주의집중, 불산란, mindfulness, awareness, inspection, recollection, retention, memory) 관습사(串習事) 대해 마음으로 하여금 명기(明記) · 불망(不忘)하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마음으로 하여금 관습사에 대해 산란하지 않게 하는 [不散亂]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관습사(串習事)' 예전에 이미 받았던 [先所受] 말한다. '산란하지 않게 하는 [不散亂] 본질적 작용으로 한다' 것은 () 마음작용으로 인하여 대상[] 분명히 기억하는[明記憶] 까닭에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9) 삼마지(三摩地 심일경, 대상과 하나됨, 전일(專一), 선정과 삼매, concentration, one-pointedness, unification, unification of mind) 소관사(所觀事) 대한 심일경(心一境) 마음으로 하여금 대상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따르면, 삼마지(三摩地) 소관사(所觀事) 대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전일(專一)하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마음으로 하여금 전일(專一)하게 한다' 것은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의 경계[一境界] 대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는 [不散] 말한다. '() 소의가 된다' 것은 마음이 정정(靜定) 고요한 선정 적정(寂靜) 처하여 소관사를 여실히 아는 [知如實]이다. 

(10) ( 반야, 택법, 간택, 식별, 지혜, 의심을 끊음, wisdom, discrimination, discernment) 소관사(所觀事) 대하여 택법(擇法)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의심[] 끊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의심을 끊는다는 ' () 말미암아 택법하여 결정(決定) 득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선심소(善心所: 11가지)

(11) (, 믿음, 인가, 청정, 희망, faith) 유체(有體) · 유덕(有德) · 유능(有能) 대한 인가(忍可) · 청정(清淨) · 희망(希望) 본질적 성질[] 하고, 낙욕(樂欲)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유체(有體) 대한 인가(忍可), 유덕(有德) 대한 청정(清淨), 유능(有能) 대한 희망(希望) () 마음작용이다. , () 실체가 있는 진리 4성제에 대해 인가(忍可)하는 것이고, 공덕이 있는 성도(聖道) 대해 청정(清淨)하는 여실히 계합하는 것이고, 역량이 있다는 것에 대해 희망하는 자신이 성도(聖道) 걸어가 진리를 획득하고 성취하는 것을 기꺼이 바라보는 것이다.

(12) (, 부끄러워함, 자신에게 부끄럽게 여김, 숭중현선(崇重賢善), self-respect, conscientiousness, sense of shame, dignity, respect) 모든 과악(過惡) 허물과 악행을 자신에게 부끄럽게 여기는[自羞]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악행을 그치게 하는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13) (, 뉘우침, 부끄러워함, 남에게 부끄럽게 여김, 경거포악(輕拒暴惡), decorum, shame, consideration, propriety, fear) 모든 과악(過惡) 허물과 악행을 남에게 부끄럽게 여기는[羞他]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악행을 그치게 하는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 () 본질적 작용은 동일하다.

(14) 무탐(無貪, 염착이 없음, 집착하지 않음, purity, non-attachment, without attachment, absence of desire) 모든 () 유구(有具: 유의 원인) 대해 집착하지 않는 [無著] 본질적 성질[] 하고, 악행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15) 무진(無瞋, 자애로움, (), 사랑, 성내지 않음, 노여워하지 않음, good will, non-aggression, non-hatred, imperturbability, non-anger, absence of hatred) 유정의 모든 () 고구(苦具: 고의 원인) 대해 성내지 않는 [無恚] 또는 노여워하지 않는 [無恚] 본질적 성질[] 하고, 악행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16) 무치(無癡, 어리석지 않음, 바른 , 결택, 명료하게 이해함, wisdom, non-delusion, non-bewilderment, lack of naivety, lack of stupidity) 보교증지(報教證智) 통해 결택(決擇)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악행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보교증지(報教證智) () · () · () · () 합쳐진 낱말이다. 이들은 각각 순서대로 생득혜(生得慧) · 문혜(聞慧) · 사혜(思慧) · 수혜(修慧) 의미한다. , 보교증지(報教證智) 4(四慧) 말한다.

결택(決擇) () · () · (), 지혜 · 용맹 · 정진이 모두 갖추어진[] 상태 이들이 모두 함께하는[] 상태를 말한다.

(17) (, 마음의 용맹함, 정진, 결단과 인내, diligence, energy, perseverance, enthusiasm, sustained effort) 심용한(心勇悍) 또는 심용(心勇) 마음의 용맹함을 본질적 성질[] 하고, 성만선품(成滿善品) 선품(善品) 성만(成滿) 선품을 원만히 하고 성취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마음의 용맹함에는 피갑(被甲) · 방편(方便) · 무하(無下) · 무퇴(無退) · 무족(無足) 5가지 단계가 있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피갑(被甲) · 방편(方便) · 무하(無下) · 무퇴(無退) · 무족(無足) 순서대로 경전에서 설하는 유세(有勢) · 유근(有勤) · 유용(有勇) · 견맹(堅猛) · 불사선액(不捨善軛) 말한다.

성만선품(成滿善品) '선품을 원만하게 하고 성취한다' 것은 만선품(滿善品) 성선품(成善品) 통칭한다. 만선품(滿善品) '선품을 원만하게 한다' 것은 먼저 근본정려(根本靜慮) 들어가고 그런 해당 근본정려 선정을 원만히 하는 것을 말한다. , 색계의 4선과 무색계의 4무색정의 각각에 들어간 해당 선정을 원만히 하는 것을 말한다. 성선품(成善品) '선품을 성취한다' 것은 선정들을 지극히 닦아 다스리는 상태[極善修治] 말한다. , 4선과 4무색정의 각각을 완전히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18) (, 조화롭고 가뿐함, 고르고 상쾌함, 평안, pliancy, alertness, flexibility, aptitude) 몸과 마음의 추중(麤重) 거칠고 무거움을 그치게 하여 몸과 마음을 조창(調暢)하게 하는 고르고 상쾌하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일체의 장애를 제거하고 떠나보내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일체의 장애를 제거하고 떠나보낸다' 것은 () 마음작용이 가진 세력 힘을 의지처로 하여 일체의 장애를 제거하고 떠나보내는 일이 일어난다[] 것을 말한다.

(19) 불방일(不放逸, 성실, 선법을 닦음, 마음을 방호함, carefulness, concern, conscientiousness, conscious awareness, diligence) 정근(正勤) ·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 소의로 하여 모든 선법(善法) 닦고 모든 유루법으로부터 마음을 방호(防護)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 성만(成滿)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정근(正勤) ·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 먼저 발동근거로 하여 일체의 선법을 닦고 유루를 막는 것이므로, 불방일은 이들 4가지 법에 근거하여 가립(假立) 가법이다.

'유루법(有漏法)' 모든 () () 처소(處所) 경계(境界) 모든 번뇌와 번뇌의 처소 · 경계를 말한다.

(20) (, 내려놓음, 버림, 평등 · 정직 · 무공용, 고요, 평정, 평정심, 평온, 균형, 평형, serenity, equilibrium, equanimity, stability, composure, indifference) 정근(正勤) ·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 '잡염주(雜染住) 등지는 상태' 소의로 하여 일어나는 심평등성(心平等性) · 심정직성(心正直性) · 심무공용주성(心無功用住性) 본질적 성질[] 하고, 불용잡염(不容雜染) 잡염(雜染) 허용하지 않는 '번뇌에 오염됨' 허용하지 않는 것의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심평등성(心平等性) · 심정직성(心正直性) · 심무공용주성(心無功用住性)' () 차별 단계로, 각각 () 초위(初位) · 중위(中位) · 후위(後位) 해당한다.

마음이 () 마음작용과 상응하면, 먼저 침몰(沈沒, 번뇌에 빠져있음, 번뇌에 함락되어 있음, 침울과 탐욕, 막힘과 지나침) 등과 같은 불평등성(不平等性) 떠나게 되기 때문에 가장 먼저 심평등성(心平等性) 증득된다. 다음으로, 심평등성을 근거로 하여 원리(遠離) 가행(加行) 자연히 상속하기 때문에 심정직성(心正直性) 증득된다. 다음으로, 심정직성을 근거로 하여 모든 잡염 번뇌에 대해 겁려(怯慮) 두려워 하는 마음, 회피하는 마음, 약해지는 마음 또는 움추려드는 마음이 없어지기 때문에 마지막의 심무공용주성(心無功用住性) 증득된다. 

(21) 불해(不害, 아힘사, 해치지 않음, (), 불손뇌(不損惱), 연민, 비폭력, no harm, non-violence) 무진선근(無瞋善根) 일부로서의 마음작용으로, 심비민(心悲愍) () 본질적 성질[] 하고, 불손뇌(不損惱) 손상시키거나 괴롭히지 않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불해(不害) 무진(無瞋) 분리될 없는 마음작용이므로 실법이 아닌 가법이다. 

번뇌심소(煩惱心所: 10가지)

(22) (, 3계의 (), 미착, 탐착, lust, attachment, craving) 3계애(三界愛), 3계의 (), 3계의 갈애 또는 애착, 욕계의 · 색계의 · 무색계의 애를 본질적 성질[] 하고, 중고(衆苦) () 무리 또는 집합이 생겨나게 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중고(衆苦) 생겨나게 한다' 것은 () 힘으로 인해 5취온(五取蘊) 생겨나는 말한다. 

(23) (, 미워함, 성냄, 노여워함, 상처입히고 해치는 것을 좋아함, ill will, anger, repugnance, hatred) 유정의 () 고구(苦具: 고의 원인) 대한 심에(心恚) 마음의 성냄 또는 노여워함을 본질적 성질[] 하고, 불안온주(不安隱住) 악행(惡行)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불안온주(不安隱住) '편안하게 머물지 못한다' 것은 마음에 증에(憎恚), 미워함과 노여워함, 증오와 분노를 품어서, 결과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서 괴로움[] 상태에 머무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24) (, 거만, 자만, 오만, 고거심, pride, arrogance, conceit) 살가야견(薩迦耶見) 발동근거로 하여 일어나는 심고거(心高舉) 마음이 잘난 체하고 거들먹거리는 또는 남에 대해 자신을 높이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불경(不敬) () 생겨나는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불경(不敬)' 스승[師長] 유덕자[有德] 대해 교만이나 거만을 부리는 것을 말한다. '() 생겨난다' 것은 후유(後有) 3계에 속박된 상태의 윤회하는 다음 생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25) 무명(無明, 어리석음, 우치, 무지(無知), 무지(無智), 무현(無顯), ignorance, delusion, error) 3계무지(三界無知), 3계의 무지(無知), 욕계의 무지(無知) · 색계의 무지(無知) · 무색계의 무지(無知) 본질적 성질[] 하고, 제법(諸法) 가운데 어떤 () 대하여 사결정(邪決定) · () 또는 () 생겨나게 하는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한편, 잡집론 따르면, 무명(無明) 3계무지(三界無智), 3계의 무지(無智), 욕계의 무지(無智) · 색계의 무지(無智) · 무색계의 무지(無智) 본질적 성질[] 하고, 제법(諸法) 가운데 어떤 () 대하여 사결정(邪決定) · () 또는 잡염(雜染) 생겨나게 하는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사결정(邪決定) 삿된 결정 또는 그릇된 결정은 전도지(顛倒智) 전도된 지혜[] 말한다. () 의심은 유예(猶豫) 머뭇거림 또는 망설이고 결행하지 않음을 말한다. '잡염이 생겨난다' 것은 () 등의 번뇌가 현행하는 것을 말한다. '사결정 · () · 잡염이 생겨나는 소의가 된다' 것은 우치(愚癡) 무명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온갖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26) (, 의심, 망설임, 주저함, 미룸, 진리에 대한 유예, doubt, indecision, skepticism, indecisive wavering) 진리[] 대해 유예(猶豫)하는 진리[] 대해 머뭇거리거나 망설여서 결행하지 않는 또는 진리[] 대한 결정을 뒤로 미루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선품불생(善品不生) 소의 선품(善品) 생겨나지 않게 하는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진리[] 대해 유예(猶豫)한다' 것에는 () 대해 유예한다는 것도 또한 포함되며, 또한 '() 대한 유예' 상응하는 '멸제(滅諦) 도제(道諦) 대해서 유예' 역시 포함된다.

선품불생(善品不生) '선품(善品) 생겨나지 않게 한다' 것은 진리[] 대해 결정하지 않음으로 인해 수행도 행하지 않게 되며, 따라서 선품(善品) 성취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27) 살가야견(薩迦耶見)[아견, 사번뇌, 아소견, 20살가야견, 증익견, 손감견 참고]

(유신견, view of individuality, self view, identity view) 5취온 등을 관찰[] 관찰의 결론으로서 5취온 등을 [] [我所]이라고 집착하는 갖가지 () · () · () · () · () 본질적 성질[] 하고, 모든 견취(見趣) 소의가 되는 갖가지 염오견[] ()하게[] 하는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 

(28) 변집견(邊執見, 극단적인 견해, 단견과 상견, extreme views, extreme view) 5취온 등을 관찰[] 관찰의 결론으로서 5취온 등에 대해 (: 영원한 소멸, 단멸) 혹은 (: 영원한 존재, 상주)이라고 집착하는 갖가지 () · () · () · () · () 본질적 성질[] 하고, 처중행(處中行)이라는 출리(出離: 벗어남) '중도(中道) 머무르는 ()'이라는 출리를 장애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처중행(處中行) '중도(中道) 머무르는 ()' (: 영원한 소멸) (: 영원한 존재), 단멸(斷滅) 상주(常住)라는 견해, 단견(斷見) 상견(常見) 떠난 연기(緣起) 바른 지혜[正智] 말한다. 존재에 대해 12연기 등의 연기법의 견해를 가진 것을 말한다.

(29) 견취(見取)[증익견, 손감견 참고](염오견에 대한 집착, adherence to views, view of attachment to views) 갖가지 () 염오견과 이들 염오견의 소의가 되는 5취온 등을 관찰[] 관찰의 결론으로서 이들 염오견이나 5취온 등을 (: 최상의 ) 혹은 (: 뛰어난 )이라고 집착하는 갖가지 () · () · () · () · () 본질적 성질[] 하고, 부정견(不正見) 집착하게 하는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30) 계금취(戒禁取)[증익견, 손감견 참고](그릇된 계금에 대한 집착, adherence to observances and rituals, view of rigid attachment to the precepts) 갖가지 계금(戒禁) 계율과 금지사항과 이들 계율과 금지사항의 소의가 되는 5취온 등을 관찰[] 관찰의 결론으로서 이들 계금이나 5취온 등을 청정(清淨) · 해탈(解脫) 혹은 출리(出離)라고 집착하는 갖가지 () · () · () · () · () 본질적 성질[] 하고, 노력해도 결실[] 없는 일이 일어나는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계금취(戒禁取)'에서의 갖가지 '계금(戒禁)' '계율과 금지사항' 악견(惡見) 먼저 존재하는 그러한 계금, 악견으로서의 계율과 금지사항을 말한다.

'노력해도 결실[] 없는 일이 일어난다' 것은 계금취에 의거하여 수행하게 되면, 비록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출리(出離) 득할 없다는 것을 말한다.

(31) 사견(邪見)[증익견, 손감견 참고](그릇된 견해, 진리에 어긋난 견해, 인과를 부정하는 견해, false view, evil view) 원인[] 부정[, 비방, 무시]하거나 혹은 결과[] 부정하거나 혹은 작용(作用) 부정하거나 혹은 실사(實事: 실제의 , 사실) 허물거나 파괴하거나[] 혹은 사분별(邪分別: 그릇된 분별) 행하는 갖가지 () · () · () · () · () 본질적 성질[] 하고, 선근(善根) 끊게 하고 또한 불선근(不善根) 견고하게 하는 소의가 되고 또한 불선(不善) 생겨나게 하고 또한 ()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원인을 부정한다[謗因]' 것은 보시[] · 애락(愛樂) · 사사(祠祀: 제사, 제사의 공덕) · 묘행(妙行) · 악행(惡行) 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결과를 부정한다[謗果]' 것은 묘행(妙行) 악행(惡行) () 의해 초래되는 이숙과[異熟] 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작용을 부정한다[謗作用]' 것은 세상도 세상도 없고, 어미[] 없고 아비[] 없고 화생(化生)하는 유정 등도 없으며, 서로 다른 세상들을 왕래하는[異世往來] 작용도 없고, 종자(種子) 유지하는 작용도 없으며, 상속(相續)이라는 작용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실사(實事: 실제의 , 사실) 허물거나 파괴한다[壞實事]' 것은 세간(世間) 없고 아라한(阿羅漢)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 세간에 묶여 윤회하는 이생범부도 없고 윤회를 벗어난 출세간의 성자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사분별(邪分別)' '그릇된 분별' 원인 · 결과 · 작용 · 실사(實事) 대한 분별(分別) 제외한 다른 모든 분별에 있어서 견해가 전도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 앞에 언급된 4가지 주장을 제외한 나머지 다른 모든 도견(倒見) 전도된 견해 또는 주장을 말한다. 

'선근(善根) 끊게 한다[斷善根]' 것은 사견(邪見) 사견을 증상(增上)시킴으로써, 기존의 사견을 강화시킴으로써 '일체의 () 종자[一切種]' 어긋나게 한다[] 것을 말한다.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

(32) (忿, 분노, 비난과 성냄, 노여워함, fury, rage, indigation, anger) 현전(現前) 불요익상(不饒益相) 바로 눈앞에 나타나 있는 넉넉하거나 이롭지 않은 · 상황 또는 상태에 대한, () 마음작용의 일부인, 심노(心怒) 마음의 노여워함을 본질적 성질[] 하고,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분발(憤發: 격분)하는 행위의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忿) 등의 마음작용, 수번뇌들은 모두 가립된 가법이다. (忿) () 마음작용을 떠나 별도의 자성[別性]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가법인데, (忿) 마찬가지로 다른 수번뇌들도 해당 근본번뇌 외의 별도의 자성을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가법이다.

(33) (, 원한, 원망, resentment, enmity, vindictiveness) '이와 같은 ' 지난 후에 (忿) 지난 후에, () 마음작용의 일부인, 원망[] 마음에 품어서 버리지 않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불인(不忍) 참지 못함의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이와 같은 일이 지난 ' '(忿) 마음작용이 지난 ' 말한다. 불인(不忍) '참지 못한다' 것은 불요익사(不饒益事) 넉넉하거나 이롭지 않은 일을 감당하여 참아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34) (, 숨기고 감춤, concealment, slyness-concealment, hypocrisy) 다른 이가 내가 지은 죄를 바르게 거론하는 때에, () 무명(無明) 마음작용의 일부인, 은장(隱藏) 숨기고 감춤을 본질적 성질[] 하고, () 불안주(不安住) 후회와 불안의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지은 죄를 숨기고 감추게 되면 자연히 마음속에는 필히 우회(憂悔) 근심과 후회가 있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안온주(安隱住) 득하지 못하게 된다. , 안온(安隱) 상태에 머무르지 못하게 된다.

(35) (, 괴롭힘, 사나움, 포악함, 죄사에 대한 견고한 집착, spite, spitefulness, malice, stubbornness) (忿) () 선행한 후에 일어나는 마음작용으로, () 마음작용의 일부인 심려(心戾) 마음의 사나움 또는 마음의 포악함을 본질적 성질[] 하고, 고폭추언(高暴麤言) 폭언 · 욕설 · 악담을 하는 것의 소의가 되고 또한 비복(非福) 박복함이 생겨나게 하고 또한 불안온주(不安隱住) 처하게 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고폭추언(高暴麤言) '폭언 · 욕설 · 악담을 한다' 것은 흉악한 말을 하여 남의 심부(心腑: 복장) 터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

(36) (, 시기, 질투, jealousy, envy) 이양(利養: 이익) 탐착(耽著)하여 다른 이의 영화[] 견디지 못하는, () 마음작용의 일부인, 심투(心妒) 마음의 시기와 질투를 본질적 성질[] 하고, 마음으로 하여금 우척(憂慼: 근심)하게 하고 불안온주(不安隱住: 불안)하게 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37) (, 아까워함, 인색, 희사하지 못함, 베풀지 못함, stinginess, avarice, miserliness, greed) 자생구(資生具) 자량이 생기게 하는 원인이 되는 재물이나 교법 등의 사물이 주는 이양(利養: 이익) 탐착(耽著)하는, () 마음작용의 일부인, 심인(心吝) 마음의 인색함을 본질적 성질[] 하고, 불사(不捨) ()하지 못함 희사(喜捨)하지 못함 또는 베풀지 못함의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버리지 못한다[不捨]' 것은 간색(慳吝) 인색으로 인하여 자생구(資生具) 항상 모아서 그냥 쌓아놓을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38) (, 속임, 미혹시킴, hypocrisy, dishonesty, deception, spirit of deception) 이양(利養: 이익) 탐착(耽著)하는, () () 마음작용의 일부인, 사현(詐現) 속임 실제로는 없는 공덕을 거짓으로 있는 듯이 나타내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사명(邪命) 삿된 생활 또는 그릇된 생활의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39) (, 마야, 가장하여 숨김, 심곡, 아첨, pretense, deceit, dissimilation) 이양(利養: 이익) 탐착(耽著)하는, () () 마음작용의 일부인, () 숨김 방편을 거짓으로 시설하여 실제의 과악(過惡) 숨기는 '가장(假裝)하여 숨김' 본질적 성질[] 하고, 정교수(正教授) 스승 등이 바른 가르침을 주는 것을 장애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방편을 거짓으로 시설하여 실제의 과악(過惡) 숨긴다[矯設方便隱實過惡]' 것은 다른 일을 핑계대어 나머지 일을 회피하는 것을 말한다.

'정교수를 장애한다[障正教授]' 것은 지은 과악(過惡) 사실 그대로 드러내지 않음으로 인하여 과악을 바로잡을 있는 바른 가르침을 스승 등이 없게 되는 것을 말한다. 

(40) (, 교만, 오염된 기쁨, self-satisfaction, self-infatuation, mental inflation, smugness, conceit) 젊음[少年] · 건강[無病] · 장수(長壽) 등의 상태[] 소의로 하여 일어나거나 혹은 어떤 유루(有漏) 영화롭고 이익되는 일을 득함에 따라 일어나는, () 마음작용의 일부인, 심열예(心悅豫) 마음의 기뻐하고 즐거워함을 본질적 성질[] 하고, 일체의 근본번뇌와 수번뇌의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장수의 상태[長壽相] 열예(悅豫)한다' 것은 아직 죽지 않았음에 대한 자각[] 선행하는 행위로 하여 일어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생각' 어떤 분별을 말하는데, 분별로 인하여 수명(壽命) 대한 교만[] 방일[] 생겨나게 된다.

'어떤 유루(有漏) 영화롭고 이익되는 ' 문벌[] · 카스트[] · 신체능력[色力: 운동능력] · 총명함[聰叡] · 부유함[財富] · 역량[自在] 등을 말한다.

'열예(悅豫)' '기뻐하고 즐거워함' 염희(染喜) 오염된 기쁨의 차별(差別)이다. 오염된 기쁨 또는 오염된 즐거움의 상태, 분위차별이다.

(41) (, 핍박, 해침, 손뇌, hostility, cruelty, intention to harm, spirit of violence) () 마음작용의 일부인, 무애(無哀) · 무비(無悲) · 무민(無愍) 애처롭게 여기지 않음 · 가엾게 여기지 않음 · 가련하게 여기지 않음을 본질적 성질[] 하고, 유정을 손뇌(損惱)하는 유정에게 손상을 입히거나 괴롭히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42) 무참(無慚, 스스로에게 부끄러워하지 않음, 공경하지 않음, lack of shame, lack of consciousness, consciencelessness, shamelessness, disrespect) () · () · () 마음작용의 일부인, 불자치(不自羞) 갖가지의 지은 과악(過惡) 대하여 스스로에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일체의 근본번뇌와 수번뇌의 조반(助伴: 보조력)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43) 무괴(無愧, 남에게 부끄러워하지 않음, 뉘우치지 않음, 두려워하지 않음, lack of propriety, disregard, shamelessness) () · () · () 마음작용의 일부인, 불치타(不羞他) 갖가지의 지은 과악(過惡) 대하여 남에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일체의 근본번뇌와 수번뇌의 조반(助伴: 보조력)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무참(無慚) 무괴(無愧) 본질적 작용이 동일하다.

(44) 혼침(惛沈, 몽매함, 침울함, 어두움, 무거움, 감당할 능력이 없음, 민활하지 못함, lethargy, gloominess, foggymindedness, torpor) 우치(愚癡) () 마음작용의 일부인, 심무감임(心無堪任) 마음의 감당할 능력이 없음 또는 마음의 민활하지 못함을 본질적 성질[] 하고, 비발사나(毘缽舍那) () 장애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45) 도거(掉擧, 고요하지 않음, 들뜸, excitement, restlessness, ebullience, flightiness of mind, dissipation) () () 마음작용의 일부인, 심부적정(心不寂靜) 염정상(念淨相) 따라 일어나는 마음의 고요하지 않음을 본질적 성질[] 하고, 사마타(奢摩他) () 장애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염정상에 따라[隨念淨相]' '청정한 상을 기억[]하는 것을 따라' 청정한 과거의 즐겁고 기뻤던 [戲笑] 등을 추억하여 () () 내고 이에 따라 마음이 고요하지 않게[心不寂靜] 되는 것이.

(46) 불신(不信, 믿지 않음, 인가하지 않음, 청정하지 않음, 희망하지 않음, lack of faith, lack of trust, disbelieving a fact, disbelief) 우치(愚癡) () 마음작용의 일부인, 온갖 선법(善法) 대한 심불인가(心不忍可) · 심불청정(心不清淨) · 심불희망(心不希望) 본질적 성질[] 하고, 선법을 인가하지 않음 · 선법에 대해 청정하지 않음(, 선법과 계합하지 않음) · 선법을 희망하지 않음을 본질적 성질[] 하고, 해태(懈怠) 마음작용의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해태(懈怠) 마음작용의 소의가 된다' 것은 불신(不信)으로 인해 방편(方便) 가행(加行) 낙욕(樂欲) 있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다. , 선법(善法) 대한 심불인가(心不忍可) 인해 방편(方便) 선법을 성취하기 위해 닦을 수행법이 없게 되고, 선법에 대한 심불청정(心不清淨)으로 인해 가행(加行) 선법에 지극히 계합하려는 노력이 없게 되고, 선법에 대한 심불희망(心不希望)으로 인해 낙욕(樂欲) 선법을 희구하는 선한 욕구가 없게 된다. 

(47) 해태(懈怠, 게으름, 책려하지 않음, 노력하지 않음, laziness, slothfulness, spiritual sloth, idleness) 우치(愚癡) () 마음작용의 일부인, 심불책려(心不策勵) 잠자거나 눕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마음의 책려하지 않음 또는 마음의 노력하지 않음을 본질적 성질[] 하고, 방편(方便) 선품(善品) 닦는 것을 장애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48) 방일(放逸, 노는 , 불성실, 포기, 선법을 닦지 않음, 마음을 방호하지 않음, heedlessness, carelessness, unconcern, non-diligence) 해태(懈怠) · () · () · () 마음작용이 소의가 되어 일어나는 불수선법(不修善法) 심불방호(心不防護) 본질적 성질[] 하고, 선법을 닦지 않는 것과 유루법에 대하여 마음을 방호하지 않는 것을 본질적 성질[] 하고, 증악손선(增惡損善) () 증장시키고 () 감손시킴의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49) 망념(忘念, 실념, 염오념, 그릇된 , 오염된 , 관을 놓침, 정념을 놓침, 4념처를 놓침, forgetfulness) 갖가지 번뇌와 상응하고 있는 상태의 () 본질적 성질[] 하고, 산란(散亂)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50) 부정지(不正知, 염오혜, 악혜, 그릇된 이해, 그릇된 , 오염된 이해, 오염된 , 바르게 알지 못함, 바르지 않은 , non-alertness, inattentiveness) 갖가지 번뇌와 상응하고 있는 상태의 () 본질적 성질[] 하는 마음작용으로, 이런 상태의 () 인하여 바른 앎이 없는 상태[不正知] 신행(身行) · 어행(語行) · 심행(心行) 3행을 일으키게 된다. 부정지(不正知) 훼범(毀犯) ()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바른 앎이 없는 상태의 신행(身行) · 어행(語行) · 심행(心行) 3[不正知身語心行]' 왕래(往來) 등의 일에 대해 그릇되이 관찰하여 결과 해야 [應作] 하지 말아야 [不應作] 명확히 알지 못하고, 따라서, 대부분의 () 있어서 훼범하는 말한다. , 갖가지3행을 지음에 있어, 해야 일과 해서는 일을 알지 못하므로 결과 대다수의 경우에서 죄를 짓는 것을 말한다. 

(51) 산란(散亂, 마음의 분산, 마음의 흐트러짐, 염오등지, 염오삼마지, 그릇된 등지, 그릇된 삼마지, 오염된 등지, 오염된 삼마지, distraction, desultoriness) () · () · () 마음작용의 일부인, 심유산(心流散) 마음의 흐트러짐을 본질적 성질[] 하고, 능히 이욕(離欲) 욕계를 떠남을 장애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집론 잡집론 따르면, 산란(散亂) 다음의 6종산란(六種散亂)으로 나뉜다.

자성산란(自性散亂): 5식신(五識身)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의 5식을 말한다. 5식은 본질[自性] 외부를 향한 것이어서 내적인 정정(靜定) 공능을 가지지 않는다.

외산란(外散亂): 선법을 지금 닦는 중에[正修善時], 마음이 치산(馳散)하여 5묘욕(五妙欲) 머무는 것을 말한다.

내산란(內散亂): 선법을 지금 닦는 중에[正修善時], 혼침(惛沈) · 도거(掉擧) 또는 미착(味著)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상산란(相散亂): 다른 사람에게 선정력이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해, 선정력이 없는데도 마치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선법을 닦는 것을 거짓되이 내보이는 것을 말한다.

추중산란(麤重散亂): 선법을 닦는 중에[修善法時] 집수(執受) · 간잡(間雜) · 취상(取相)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작의산란(作意散亂): 다른 [餘乘]이나 다른 선정[餘定] 들어가서 예전에 익힌 바를 버리게 되면 이로 인해 산란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부정심소(不定心所: 4가지)

(52) 수면(睡眠, , 흐릿함, 약화됨,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함, torpor, sleep, drowsiness, apathy) 수면인연(睡眠因緣) 수면의 직접적 · 간접적 원인을 소의로 하여 일어나는, 우치(愚癡) () 마음작용의 일부인, 심략(心略) 마음의 약화된 상태를 본질적 성질[] 하고, 월실가작(越失可作) 지을 있는 것을 떨어뜨리고 잃어버리는 것의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집론 잡집론 따르면, 수면(睡眠) 심략(心略) 마음의 약화된 상태는 () · 불선(不善) · 무기(無記) 통하고, () · 비시(非時) 통하고, 응이(應爾) · 불응이(不應爾) 통한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수면인연(睡眠因緣) 수면의 직접적 · 간접적 원인은 수인연(睡因緣)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다음의 것들 등을 말한다.

(: 파리함) · (: 여윔) · (: 피곤함) · (: 진력이 ) 몸의 가라앉고 무거움[身分沈重]으로 인해 잠드는

생각하는 일이 어두워지고 갖가지 짓는 바를 버리는 [思惟闇相捨諸所作]으로 인해 잠드는 , 정신적으로 피곤하여 이상 생각할 없는 상태가 되어 잠드는 , 예를 들어, 공부하다가 꾸벅꾸벅 조는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어 습관적으로 잠에 들게 되는 [曾數此時串習睡眠], 예를 들어, 매일 잠자는

주술이나 신통력에 의해 잠드는 [他咒術神力所引]

부채를 부쳐 시원한 바람이 불게 하여 잠드는 [因動扇涼風吹]

'우치(愚癡) () 마음작용의 일부'라는 것은 수면(睡眠) 심략(心略) 마음의 약화된 상태는 선정[]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 · 불선(不善) · 무기(無記) 통한다' 것은 수면(睡眠) 심략(心略) 마음의 약화된 상태가 반드시 '우치(愚癡) () 마음작용의 일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 · 비시(非時) 통한다' 것에서 () 밤을 뜻하고 비시(非時) 밤이 아닌 때를 뜻한다. , 밤에 잠들기도 하고 밤이 아닌 때에 잠들기도 한다는 것을 말한다. , 수면(睡眠) 심략(心略) 마음의 약화된 상태가 언제나 밤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응이(應爾) · 불응이(不應爾) 통한다' 것에서 응이(應爾) '허용되는 ' 뜻하는데, 예를 들어, 질병이나 휴양하기 위한 경우에서의 비시(非時) 말한다. 불응이(不應爾) 응이(應爾) 외의 밖의 다른 시간을 말한다.

'월실가작(越失可作) 지을 있는 것을 떨어뜨리고 잃어버리는 것의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한다' 것은 수면(睡眠) 수번뇌성(隨煩惱性) 의거하여 수면(睡眠) 본질적 작용[] 설명한 것이다. , 수면(睡眠) 원칙적으로는 부정심소에 속한 것인데, 수번뇌 가운데 하나로서의 수면(睡眠) 수번뇌심소에 속한 여러 법들 가운데 하나로서의 수면(睡眠)이라는 입장에서 수면(睡眠) 본질적 작용[] 설명한 것이다.

(53) 악작(惡作, 후회, 추회 regret, worry) 낙작(樂作) · 불락작(不樂作) · 응작(應作) · 불응작(不應作) 소의로 하여 일어나는, 우치(愚癡) () 마음작용의 일부인, 심추회(心追悔) 마음의 추회 또는 마음의 후회를 본질적 성질[] 하고, 능히 심주(心住) 마음의 머무름을 장애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집론 잡집론 따르면, 수면(睡眠) 심략(心略) 마음의 약화된 상태는 () · 불선(不善) · 무기(無記) 통하고, () · 비시(非時) 통하고, 응이(應爾) · 불응이(不應爾) 통한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낙작(樂作)' 낙욕(樂欲) 자발적 욕구를 바탕으로 하여 짓는 선행(善行) 또는 악행(惡行) 말한다.

'불락작(不樂作)' 자신외의 다른 세력이나 여러 번뇌에 의해 내몰리거나 핍박을 받아서 짓는, 이들 세력이나 번뇌에 상응하는 성질의 선행(善行) 또는 악행(惡行) 말한다.

'우치(愚癡) () 마음작용의 일부'라는 것은 번뇌성의 악작(惡作) 수번뇌에 속한다는 것을 말한다.

'()' 출리(出離)하기까지의 시간을 말하고, '비시(非時)' 출리(出離) 이후를 말한다. , 출리(出離)하기까지의 시간에서도 출리(出離) 후의 시간에서도 악작 후회가 일어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응이(應爾)' 시처(是處) 이치에 합당한 것을 말하고, '불응이(不應爾)' 비처(非處)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 이치에 합당한 것에 대해서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악작 후회가 일어날 있다는 것을 말한다.

(54) (, 대강의 (: 성질, 모습, 자성) 분별함, 거친 성질, 거친 움직임, conception, selectiveness, gross detection, examination, application of thought, applied thinking, initial application, grossness of the mind) () 또는 () 마음작용을 소의로 하여 일어나는, 심추전(心麤轉) 의언(意言: 뜻의 , 마음속의 단어) 심구(尋求)하는 마음의 거친 움직임을 본질적 성질[] 하고, 안주(安住) · 불안주(不安住)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 () 본질적 작용[] 동일하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추탁(推度) 대상 추리하여 판단해야 대상에 대해서는 () 마음작용은 () 소의로 하여 대상의 행상(行相) 추구(追求: 뒤쫓아 구함)하여서 의언(意言) 분별(分別)한다.

불추탁(不推度) 대상 추리하여 판단해야 것이 아닌 대상에 대해서는 () 마음작용은 () 소의로 하여 대상의 행상(行相) 추구(追求: 뒤쫓아 구함)하여서 의언(意言) 분별(分別)한다.

() () 행상(行相) 서로 유사[相類]하기 때문에, 거친 성질인지 세밀한 성질인지에 의해서만 심추전(心麤轉)인지 심세전(心細轉)인지의 차별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된다.

(55) (, 자세한 (: 성질, 모습, 자성) 분별함, 세밀한 성질, 세밀한 움직임, discernment, discursiveness, analysis, sustained application, sustained thinking, selectiveness, subtle discernment, subtlety of the mind) () 또는 () 마음작용을 소의로 하여 일어나는, 심세전(心細轉) 의언(意言: 뜻의 , 마음속의 단어) 사찰(伺察)하는 마음의 세밀한 움직임을 본질적 성질[] 하고, 안주(安住) · 불안주(不安住) 소의가 되는 것을 본질적 작용[]으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 () 본질적 작용[] 동일하다. 

잡집론 해설에 따르면, 추탁(推度) 대상 추리하여 판단해야 대상에 대해서는 () 마음작용은 () 소의로 하여 대상의 행상(行相) 사찰(伺察: 세밀하게 살펴봄)하여서 의언(意言) 분별(分別)한다.

불추탁(不推度) 대상 추리하여 판단해야 것이 아닌 대상에 대해서는 () 마음작용은 () 소의로 하여 대상의 행상(行相) 사찰(伺察: 세밀하게 살펴봄)하여서 의언(意言) 분별(分別)한다.

() () 행상(行相) 서로 유사[相類]하기 때문에, 거친 성질인지 세밀한 성질인지에 의해서만 심추전(心麤轉)인지 심세전(心細轉)인지의 차별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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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주요 논서인 중현의 《아비달마장현종론》에서 설명하고 있는 마음작용 즉 심소법(心所法)에 대한 설명이다.

 

중현(衆賢, Saṃghabhadra: 5세기)은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논사이다.[1] 그는 경량부의 교학을 비롯한 당시의 불교 교학 전반을 참조하여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비판적으로 집대성한 논서인 세친의 《아비달마구사론》을 카슈미르계 정통 설일체유부의 관점에서 반박하는 《아비달마순정리론》을 저술하였는데, 그 후 이 책의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체계적이지 않으므로 그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 · 요약하여 《아비달마장현종론》을 저술하였다.[3]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아비달마구사론》의 내용 중 이치에 합당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대로 기술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반드시 반박을 펼쳐 설일체유부의 종의(宗義)를 드러내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1]"衆賢(중현): 인도 스님. 범어 승가발타라(僧伽跋陀羅, Saṃghabhadra)의 번역. 북인도 가습미라국 사람. 살바다부(薩婆多部)의 『비바사(毘婆娑)』를 배우고, 세친 보살이 지은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을 12년 간 연구한 뒤에 『구사박론(俱舍雹論, 순정리론)』을 지어 반박하고, 다시 세친을 만나 시비를 가리고자 중인도를 향하여 떠났다가 도중 말저보라국 도성(都城) 부근에서 병들어 죽음. 저서로는 『순정리론(順正理論)』 80권, 『아비달마현종론(阿毘達磨顯宗論)』 40권.

[3] 阿毘達磨藏顯宗論(아비달마장현종론): 【범】 Abhidharmakośaśāstrakārikāvibhāya. 40권. K-957, T-1563. 중현 지음. 당(唐)나라 때 현장(玄奘)이 651년 4월에서 652년 11월 사이에 번역하였다. 줄여서 『현종론』이라 한다. 전체 내용은 총 9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사론(俱舍論)』을 반박한 『순정리론(順正理論)』의 중요한 것을 뽑아 정의를 말한 논이다."

 

《아비달마구사론》과 마찬가지로 중현도 《아비달마장현종론》에서 마음작용(심소법)에 대해 '마음작용이란 ~이다'라는 식으로 명시적으로 정의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마음과 마음작용의 성격에 대한 《아비달마구사론》의 언급인, "마음과 마음작용은 반드시 결정코 구생(俱生)하므로, 둘 중의 어느 하나라도 결여될 때에는 다른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心與心所必定俱生 隨闕一時餘則不起]"라는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다.[7] 이 언급에 나타난 내용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다른 논서들에서 나타나는 마음작용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인 '마음과 상응(相應)하는 모든 법(法)'이라는 정의와 그 내용은 동일하다.[11]

 [7] 마음작용의 성격
"이와 같이 색은 결정코 구생(俱生)한다. 다시 말해 동시에 함께 생기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그 밖의 법으로서 결정코 구생하는 것에 대해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心)과 심소(心所)는 반드시 함께하며 제행(諸行)은 상(相), 혹은 득(得)과 [반드시 함께한다.] 
  心心所必俱 諸行相或得 
논하여 말하겠다. 심과 심소는 반드시 결정코 구생하니, 둘 중의 어느 하나라도 결여될 때에는 다른 하나도 생기하지 않는다. 
[본 송에서] 제행(諸行)이라 함은 바로 일체의 유위를 말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색과 심과 심소와 심불상응(心不相應)의 행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앞의 구절에서 언급한 '반드시 함께한다'고 하는 말은 여기에도 적용되니, 이를테면 색이나 심 등의 제행이 생겨날 때에는 반드시 유위의 4상(相 : 즉 生·住·異·滅의 네 가지 상)과 구생하는 것이다. 나아가 '혹은 득(得)'이라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제행 가운데 오로지 유정의 법만이 득과 구생하고 그 밖의 법은 그렇지 않으니, 그렇기 때문에 '혹은'이라고 말한 것이다." — 《아비달마장현종론》 제5권. 한글본]

[11]심소법(心所法)
"어떤 것이 수온인가. 세 가지의 영납(領納: 받아들이어 감각하는 것)을 말하니, 첫째 괴로움이고, 둘째 즐거움이고, 셋째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즐거움이란 사라질 적에 화합의 욕망이 있는 것이고, 괴로움이란 생겨날 적에 분리의 욕망이 있는 것이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이란 이 두 가지 욕망이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이 상온인가. 경계에 대해 갖가지 상(相)을 취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행온인가. 수온과 상온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심소법[心法] 및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이다. 어떤 것이 나머지 모든 심소법인가. 마음과 상응하는 저 모든 법을 말한다. ‘저 모든 법’은 또 어떠한 것인가. 촉(觸) · 작의(作意) · 수(受) · 상(想) · 사(思) · 욕(欲) · 승해(勝解) · 염(念) · 삼마디[三摩地] · 혜(慧) · 신(信) · 참(慚) · 괴 (愧) · 무탐(無貪)선근 · 무진(無瞋)선근 · 무치(無癡)선근 · 정진(精進) · 경안(輕安) · 불방일(不放逸) · 사(捨) · 불해(不害) · 탐(貪) · 진 (瞋) · 만(慢) · 무명(無明) · 견(見) · 의(疑) · 분(忿) · 한(恨) ·부(覆) · 뇌(惱) · 질(嫉) · 간(慳) · 광(誑) · 첨(諂) · 교(憍) · 해 (害) · 무참(無慚) · 무괴(無愧) · 혼침(惛沈) · 도거(掉舉) · 불신(不信) · 해태(懈怠) · 방일(放逸) · 망념(忘念) · 산란(散亂) · 부정지(不正知) · 악작(惡作) · 수면(睡眠) · 심(尋) · 사(伺)이다. 
이 모든 심소법에서 다섯 가지는 변행(遍行) 심소이고, 다섯 가지는 별경(別境) 심소이고, 열한 가지는 선(善) 심소이고, 여섯 가지는 번뇌 심소이고, 그 나머지는 수번뇌(隨煩惱)이고, 네 가지는 결정되지 않은 것이다. 
2) 색을 유견유대(有見有對), 무견유대(無見有對), 무견무대(無見無對)의 셋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유견유대는 현색(顯色) 등을 가리키고, 무견유대는 안근(眼根) 등을 가리키며, 무견무대는 무표색을 가리킨다. 이 중 무표색은 유표업과 삼매에서 생겨난 선율의(善律儀)와 불선율의(不善律儀) 등의 업을 가리킨다."]

 

세친은 《아비달마구사론》에서 수(受) · 상(想)에서 만(慢) · 의(疑)에 이르기까지 총 46가지 법을 들고 있으며, 이들 46가지 법들을 대지법(大地法: 10가지) · 대선지법(大善地法: 10가지) ·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6가지) ·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 2가지) ·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 10가지) · 부정지법(不定地法: 8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중현도 《아비달마장현종론》에서 이 분류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분류

《현종론》에서는 《구사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음작용에 속한 총 46가지 법들을 다음과 같이 6품(六品)으로 분류하고 있다. 목록에 나타난 명칭과 나열 순서는 《현종론》에 따른 것인데, 이들 명칭과 나열 순서도 《구사론》과 동일하다.

대지법(大地法: 10가지): 수(受) · 상(想) · 사(思) · 촉(觸) · 욕(欲) · 혜(慧) · 염(念) · 작의(作意) · 승해(勝解) · 삼마지(三摩地)

대선지법(大善地法: 10가지): 신(信) · 불방일(不放逸) · 경안(輕安) · 사(捨) · 참(慚) · 괴(愧) ·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불해(不害) · 근(勤)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6가지): 치(癡) · 방일(放逸) · 해태(懈怠) · 불신(不信) · 혼침(惛沈) · 도거(掉擧)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 2가지): 무참(無慚) · 무괴(無愧)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 10가지): 분(忿) · 부(覆) · 간(慳) · 질(嫉) · 뇌(惱) · 해(害) · 한(恨) · 첨(諂) · 광(誑) · 교(憍)

부정지법(不定地法: 8가지): 심(尋) · 사(伺) · 수면(睡眠) · 악작(惡作) · 탐(貪) · 진(瞋) · 만(慢) · 의(疑)

 

개별 법의 설명 (46가지)

대지법(大地法: 10가지); 대지법(大地法, 산스크리트어: mahā-bhūmika, mahā-bhūmi)이란 모든 법 가운데 '대지'(大地)에 존재하는 법들을 말한다. 여기서 '대지'는 대법(大法)의 지(地), 즉 대법의 용지처(容止處) 즉 소행처(所行處), 즉 대법이 생기하는 영역으로서의 마음, 즉 일체의 마음[一切心], 즉 모든 마음[一切心]을 가리키며, '대법'은 항상 존재하는 마음작용들을 말한다. 따라서, 대지법이란 일체의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에 항상 존재하는 마음작용들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선한 마음이건, 악한 마음이건, 무기의 마음이건 마음이 존재할 때면 언제나 발견되는 마음작용들을 말한다. 그리고 마음이 이러한 '대법(大法)'들을 소유하며 이들의 용지처(容止處) 즉 소행처(所行處) 즉 용지(진퇴 거동의 뜻)나 소행(所行, 작용)의 근거가 되고 통솔자로서 이들 대법들과 함께 생기(生起)하기 때문에 이러한 측면에서 마음을 '대지(大地)' 즉 '대법의 지'라고 한다. 

한편, 마음은 또 다른 마음과 구생(俱生)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지법이 아니다.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는 수(受) · 상(想) · 사(思) · 촉(觸) · 욕(欲) · 혜(慧) · 염(念) · 작의(作意) · 승해(勝解) · 삼마지(三摩地)의 10가지 법이 있다.

(1) 수(受, 감수작용, 지각, 느낌, 과보의 영납, feeling, sensation)는 소의신을 능히 증익(增益)하거나 감손(減損)하거나 혹은 증익하지도 않고 감손하지도 않는 것으로서, 애촉(愛觸: 애호할 만한 촉) · 비애촉(非愛觸: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촉) · 구상위촉(俱相違觸: 양자 모두가 아닌 촉)을 영수(領受)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수(受)는 고(苦)와 낙(樂), 그리고 양자 모두가 아닌 것 즉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차별(差別)을 영납(領納)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2) 상(想, 표상작용, 취상(取像), 취상(取相), 구료상(搆了相), perception, cognition, conceptualization, distinguishing, idea)은 인식대상[境]에 대하여 남 · 여 등의 차별상(差別相)을 안립(安立)하고 집취(執取)하는 원인[因]이 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상(想)은 인식대상[境]에 대하여 차별상(差別相)을 취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3) 사(思, 의사, 의지, 추진, 조작(造作), 짓고 만듦, volition, directionality of mind, attraction, urge)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선 · 불선 · 무기를 조작(造作: 짓고 만듦)하게 하여 묘(妙: 뛰어남) · 열(劣: 열등함) 혹은 중(中)의 성질을 성취하게 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사(思)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조작(造作: 짓고 만듦)하게 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현종론》에 따르면, 사(思)의 마음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에 마음은 인식대상[境]에 대해 움직이는 작용을 갖게 된다. 이것은 마치 자석의 힘이 쇠붙이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는 것과 같다. 

(4) 촉(觸, 접촉, 3사화합 · 분별 · 변이, contact)은 근(根) · 경(境) · 식(識)이 화합함에 따라 생겨나는 마음작용으로, 능히 수(受)의 마음작용의 원인[因]이 되며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능히 '인식대상과 접촉[觸對]'할 수 있게 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촉(觸)은 근(根) · 경(境) · 식(識)이 화합하여 생겨나는 마음작용으로,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능히 '인식대상과 접촉[觸對]'할 수 있게 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5) 욕(欲, 희망, 욕구, 희망의 인발, intention, interest, desire to act, desire for action, aspiration)은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인식대상을 희구(希求)하고 취하게 하는[希求取境],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욕(欲)은 지어야 할 일[事]과 업(業)을 희구(希求)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6) 혜(慧, 반야, 택법, 간택, 식별, 지혜, 의심을 끊음, wisdom, discrimination, discernment)는 소연(所緣, 인식대상)의 사(邪: 그릇됨) · 정(正: 올바름) 등의 상(相)을 간택(簡擇)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혜(慧)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법(法)에 대해 능히 간택(簡擇)할 수 있게 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7) 염(念, 관, 정념, 4념처, 끊임없는 수동적 관찰, 명기(明記)와 불망(不忘), 주의집중, 불산란, mindfulness, awareness, inspection, recollection, retention, memory)은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인식대상[境]을 명확히 기억[明記]하여 잊어버리지 않게[不忘失] 하는 원인[因]이 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염(念)은 연(緣: 소연 즉 인식대상, 또는 원인)을 명확히 기억[明記]하여 잊어버리지 않는[不忘],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8) 작의(作意, 마음을 일으킴, 기억을 일으킴, 주의, 유의, 발동과 유지, attention, act of attention, ego-centric demanding)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과 마음작용을 인기[引, 引起]하여 소연(所緣)에 대해 경각(警覺)하게 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유의(留意)라고도 한다. 《구사론》에 따르면, 작의(作意)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능히 경각(警覺)하게 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9) 승해(勝解, 확실한 이해, 뛰어난 이해, 인가와 유지, interest, intensified interest, decision, firm conviction, resolution, approval)는 인식대상[境]에 대해 인가(印可: 도장찍듯이 찍어서 가결함)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승해(勝解)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능히 인식대상[境]에 대해 인가(印可: 도장찍듯이 찍어서 가결함)하게 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현종론》에 따르면, 승해(勝解)에서 '승(勝)'은 증승(增勝)을 말하며, '해(解)'는 해탈(解脫)을 말한다. 따라서 승해는 마음으로 하여금 경계 즉 인식대상[境]에 대하여 무애자재(無礙自在)하게 전개[轉]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증상계(增上戒: 뛰어난 계) 또는 증상정(增上定: 뛰어난 선정)이라고 할 때의 증상(增上)과 그 의미가 같다. 

(10) 삼마지(三摩地, 심일경, 대상과 하나됨, 전일(專一), 선정과 삼매, concentration, one-pointedness, unification, unification of mind)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산란 없이 소연경(所緣境)을 취하여 불유산(不流散: 흩어지지 않음)하게 하는 원인[因]이 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삼마지(三摩地)는 심일경성(心一境性) 즉 마음[心: 6식, 즉 심왕, 즉 심법]이 대상[境]과 하나가 되는[一] 것을 본질[性]로 하는, 대지법의 마음작용이다.

 

대선지법(大善地法: 10가지); 대선지법(大善地法, 산스크리트어: kuśala-mahā-bhūmika)이란 모든 법 가운데 '대선지'(大善地)에 존재하는 법들을 말한다. 여기서 '대선지'는 대선법(大善法)의 지(地), 즉 대선법의 용지처(容止處) 즉 소행처(所行處), 즉 대선법이 생기하는 영역으로서의 마음, 즉 선한 마음[善心]을 가리키며, '대선법'은 항상 선한 마음작용들을 말한다. 따라서, 대선지법이란 일체의 선한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에 항상 존재하는 마음작용들을 말한다. 

설일체유부의 교학에 따르면,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는 신(信) · 불방일(不放逸) · 경안(輕安) · 사(捨) · 참(慚) · 괴(愧) ·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불해(不害) · 근(勤)의 10가지 법이 있으며, 이들 10가지 마음작용은 선심(善心) 즉 선한 마음에만 두루 존재한다[唯遍善心].

(11) 신(信, 믿음, 인가, 청정, 희망, faith)은 마음의 혼탁함[心濁]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서, '전도됨이 없는 인과가 각기 개별적으로 서로에게 소속된다[相屬]는 사실[無倒因果各別相屬]'을 즉각적으로 인허(忍許: 인가하는,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 욕(欲)의 소의가 되고 능히 승해(勝解)의 자량[資]이 되는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신(信)은 마음으로 하여금 징정(澄淨)해지게 하는,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또는 신(信)은 진리[諦, 4성제] · 보배[寶, 3보] · 업(業, 원인) · 과(果, 결과)에 대해 현전에서 인허(忍許: 인가하고 허락함, 확신함)하는,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12) 불방일(不放逸, 성실, 선법을 닦음, 마음을 방호함, carefulness, concern, conscientiousness, conscious awareness, diligence)은 기리(己利) 즉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에 전(專)함으로써[專於己利] 즉 수행에 전주(專注) · 전념(專念)함으로써 몸과 말과 뜻을 방호하는 것[防身語意]을 말하며,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대번뇌지법에 속한 방일(放逸)에 반대된다. 《구사론》에 따르면, 불방일(不放逸)은 온갖 선법(善法)을 닦고 온갖 불선법(不善法)을 떠나는 것을 말하며,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닦는다[修]'는 것은 선(善)에 전주(專注)하는 것 즉 전념(專念)하는 것을 본질[性]로 하는 행위 또는 실천이다. 또는 불방일(不放逸)은 호심(護心) 즉 능히 마음을 수호(守護: 지키고 보호함)하는 것을 말하며,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13) 경안(輕安, 조화롭고 가뿐함, 고르고 상쾌함, 평안, pliancy, alertness, flexibility, aptitude)은 바른 작의[正作意]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심신을 경쾌[輕]하고 예리[利]하고 편안[安]하고 적당[適]하게 하는 원인[因]이 되는,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 심감임성(心堪任性) 즉 마음의 감임성(堪任性)을 말한다. 《구사론》에 따르면, 경안(輕安)은 심감임성(心堪任性) 즉 마음의 감임성(堪任性)을 말하며,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즉 경안은 마음을 가볍고 편안하게 하여 마음[心]으로 하여금 능히 선법을 감당[堪任]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본질[性]로 하는 선한 마음작용이다. 

(14) 사(捨, 내려놓음, 버림, 평등 · 정직 · 무공용, 고요, 평정, 평정심, 평온, 균형, 평형, serenity, equilibrium, equanimity, stability, composure, indifference)는 심평등성(心平等性) 즉 마음의 평등성(平等性)을 말하며,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사(捨)는 심평등성(心平等性)과 심무경각성(心無警覺性) 즉 마음의 평등성(平等性)과 마음의 무경각성(無警覺性)을 말하며,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현종론》에 따르면, 사(捨)는 대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인 도거(掉擧)에 반대되는 마음작용으로, '사(捨)'는 '진리에 계합하는 것을 통해 이끌어져 나오는 마음작용[如理所引]'으로서 마음으로 하여금 불균형[越]에 빠지지 않게 한다는 뜻을 가진다. 

(15) 참(慚, 부끄러워함, 자신에게 부끄럽게 여김, self-respect, conscientiousness, sense of shame, dignity, respect)은 여리(如理) 즉 진리와 계합하는 상태를 지향[趣向]하는 자증상(自增上)과 법증상(法增上)의 2종류의 증상에 의하여 생겨나는,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 애(愛)의 등류(等流)와 반대되는 심자재성(心自在性: 마음의 역량)을 말한다. 

《구사론》에 따르면, 참(慚)은 대불선지법에 속하는 무참(無慚)의 반대가 되는 마음작용으로, 공경함[敬]이 있고, 존중함[崇]이 있으며, 어렵게 여겨 꺼림[忌難]이 있으며, 따라 속하는 일[隨屬, 즉 제자로서의 예의]이 있는,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또는 참(慚)은 지은 죄에 대해 그 죄 자체(예를 들어, 이숙인)를 지금 관찰하여 부끄러워함이 있는 선한 마음작용이다.

(16) 괴(愧, 뉘우침, 부끄러워함, 남에게 부끄럽게 여김, decorum, shame, consideration, propriety, fear)는 공덕(功德: 선, 즉 계정혜 3학)을 애락(愛樂)하고 닦는[修習] 것을 우선으로 하는,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 치(癡)의 등류(等流)와 반대되며 또한 악법(惡法)과 열법(劣法)을 싫어하는[厭] 마음작용을 말한다. 또한, 꾸짖음[謫] · 벌(罰) · 악취(惡趣) 또는 자타의 비방[自他謗]의 '원인이 되는 것[因]'을 두려워하는 것[怖畏]을 괴(愧)라고 한다는 견해가 있다. 《구사론》에 따르면, 괴(愧)는 대불선지법에 속하는 무괴(無愧)의 반대가 되는 마음작용으로, 죄에 대해 두렵게 보는,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또는 괴(愧)는 지은 죄에 대해 그 죄의 다른 것(이숙과)을 관찰하여 부끄러워함이 있는 선한 마음작용이다. 

(17) 무탐(無貪, 염착이 없음, 집착하지 않음, purity, non-attachment, without attachment, absence of desire)은 무진(無瞋) · 무치(無癡)와 더불어 선근(善根)을 이루는데, 무탐은 이미 득하였거나 이직 득하지 못한 경계를 탐착(耽著) · 희구(希求)하는 것과 반대되는,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 무애염성(無愛染性) 즉 마음에 애염(愛染)이 없는 성질 즉 마음에 애(愛)라는 번뇌가 없는 것을 말한다. 《구사론》에서는 무탐(無貪)에 대해 정의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무탐은 무진(無瞋) · 무치(無癡)와 더불어 선근(善根)을 이룬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무탐이 모든 '선의 뿌리[善根]'를 이루는 3가지 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무탐에 대한 정의 또는 설명을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무치(無癡)가 대선지법에 속하지 않는 것은 무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인 혜(慧)를 본질[性]로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8) 무진(無瞋, 자애로움, 자(慈), 사랑, 성내지 않음, 노여워하지 않음, good will, non-aggression, non-hatred, imperturbability, non-anger, absence of hatred)은 무탐(無貪) · 무치(無癡)와 더불어 선근(善根)을 이루는데, 무진은 유정이나 비유정에 대하여 에해의(恚害意) 즉 미워하거나 해치려는 마음이 없는 애민의 종자[哀愍種子]로서의,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서는 무진(無瞋)에 대해 정의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무진은 무탐(無貪) · 무치(無癡)와 더불어 선근(善根)을 이룬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무진이 모든 '선의 뿌리[善根]'를 이루는 3가지 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무진에 대한 정의 또는 설명을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무치(無癡)가 대선지법에 속하지 않는 것은 무치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인 혜(慧)를 본질[性]로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9) 불해(不害, 아힘사, 해치지 않음, 비(悲), 불손뇌(不損惱), 연민, 비폭력, no harm, non-violence)는 유정에게 손뇌(損惱: 손상과 괴롭힘)를 입히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작용에 반대되는,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 심현선성(心賢善性) 즉 마음의 어질고 착한 성질을 말한다. 《구사론》에 따르면, 불해(不害)는 무손뇌(無損惱)의 즉 손뇌(損惱)를 입힘이 없는,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즉, 불해(不害)는 손상시키거나[損] 괴롭히지[惱] 아니하는 선한 마음작용이다. 

(20) 근(勤, 마음의 용맹함, 정진, 결단과 인내, diligence, energy, perseverance, enthusiasm, sustained effort)은 이미 생겨난 온갖 공덕(功德: 선, 즉 계정혜 3학)은 수호(守護)하고 이미 생겨난 온갖 과실(過失: 번뇌, 불선, 죄)은 내버리며[棄捨], 아직 생겨나지 않은 온갖 공덕은 생겨나게 하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온갖 과실은 생겨나지 않게 하는,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 심무타성(心無墮性) 즉 마음의 타락됨이 없는 성질을 말한다.

《구사론》에 따르면, 근(勤)은 마음으로 하여금 용한(勇悍: 날래고 사나움, 결단력이 있고 억세고 모짐, 강하고 눈을 부릅뜸, 용기가 있고 억셈)하게 하는 것, 즉 모질게 노력하게 하는 것을 본질[性]로 하는,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현종론》에 따르면, 근(勤)의 마음작용으로 인해 마음은 진리에 계합하는, 짓고 있는 일[事]과 업(業)에 대해 견고히 나아가고 멈추지 않게 된다. 

기타 대선지법

《구사론》과 《현종론》에 따르면, 무치(無癡)는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인 혜(慧)를 본질[性]로 하는 선한 마음작용으로, 선한 마음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므로 실제로는 대선지법에 속하지만 두 그룹에 중복하여 포함시키지 않기 위해 대지법에 소속시켜 논한다. 

또한 《현종론》에서는 《구사론》에서는 논의되지 않은 염(厭)과 흔(欣)도 사실상 대선지법에 포함되어야 할 마음작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선한 마음작용을 대선지법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이 두 마음작용은 상호 모순되기 때문에 '1찰나의 마음[一心]'에서 이 두 마음작용이 동시에 구기(俱起)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므로, 이 둘을 포함시키게 되면 '선한 마음에 항상 존재하는 마음작용들'이라는 대선지법의 정의가 만족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무치(無癡, 어리석지 않음, 바른 앎, 결택, wisdom, non-delusion, non-bewilderment, lack of naivety, lack of stupidity)는 무탐(無貪) · 무진(無瞋)과 더불어 선근(善根)을 이루는데, 대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인 혜(慧)를 본질[性]로 하는 선한 마음작용이다. 선한 마음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므로 실제로는 대선지법에 속하지만 그 본질이 혜(慧)이므로 두 그룹에 중복하여 포함시키지 않기 위해 대지법에 소속시켜 논한다.

염(厭: 싫어함)은 간략히 말하면, 유전연기와 그 결과물인 생사윤회를 염오(厭惡)하게 하는 선한 마음작용이다.

《현종론》의 표현에 따르면, 염(厭)은 선한 마음[善心]에서 일어나는 마음작용으로, 진리[諦: 즉 4성제]를 주의깊게 살피는데 그 중에서도 무량(無量)한 과환법(過患法: 과환의 법, 과실과 근심의 성질의 법, 즉 고제와 집제, 과실은 원인으로 집제에, 근심은 결과로 고제에 해당함)을 관찰하는 '개별적 실체로서의 성질[實性]'로서 무탐(無貪)에 수순하여서 일으키는 심염배성(心厭背性) 즉 마음이 과환법을 싫어하고 등지려는 성질을 말한다. 그리고 염(厭)의 마음작용과 상응하는 것 또는 염(厭)의 마음작용과 상응하고 있는 상태를 염작의(厭作意)라고 한다.

흔(欣, 기뻐함, 즐거워함)은 간략히 말하면, 환멸연기와 그것에 의해 증득되는 열반을 흔락(欣樂: 기뻐하고 즐김)하게 하는 선한 마음작용이다. 《현종론》의 표현에 따르면, 흔(欣)은 선한 마음[善心]에서 일어나는 마음작용으로, 과환법(過患法: 과환의 법, 과실과 근심의 성질의 법, 즉 고제와 집제)으로부터의 출리(出離: 즉 멸제)와 과환법의 대치(對治: 즉 도제)를 흔구(欣求: 기쁘게 구함)하는 '개별적 실체로서의 성질[實性]'이자 증상력으로서, 증수(證修) 즉 증득과 수습[證修: 즉 멸제와 도제]에 수순하여서 일으키는 심흔상성(心欣尚性) 즉 마음이 출리법과 대치법을 기뻐하고 숭상하는 성질을 말한다. 그리고 흔(欣)의 마음작용과 상응하는 것 또는 흔(欣)의 마음작용과 상응하고 있는 상태를 흔작의(欣作意)라고 한다. 

또한, 《현종론》에 따르면, 흔(欣)은 희(喜) 즉 희수(喜受)와는 다른데, 희수를 떠난 경지 즉 제3정려인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나 미지(未至) 등의 경지에서도 현행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교 경전에서도 "흔으로부터 희가 낳아진다[從欣生喜]"라고 하여 희(喜)와 흔(欣)이 다른 것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교 경전의 이 표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흔(欣)은 열희(劣喜) 즉 저열한 희(喜)라고 할 수 있다. 즉, 희(喜)에 저열함과 뛰어남의 차별이 있어서 저열한 것을 흔(欣)이라고 하고 뛰어난 것을 그냥 희(喜)라고 하며, 저열한 것인 흔(欣)이 바탕이 되어 뛰어난 것인 희(喜)가 생겨난다. 반대로, 희수를 떠난 경지 즉 제3정려인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의 경우, 흔(欣)은 묘락(妙樂)를 뜻하며 희(喜)보다 뛰어난 것이다.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6가지)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산스크리트어: kleśa-mahā-bhūmika)이란 모든 법 가운데 '대번뇌지'(大煩惱地)에 존재하는 법들을 말한다. 여기서 '대번뇌지'는 대번뇌법(大煩惱法)의 지(地), 즉 대번뇌법의 용지처(容止處) 즉 소행처(所行處), 즉 대번뇌법이 생기하는 영역으로서의 마음, 즉 염오심(染污心) 즉 번뇌에 오염된 마음을 가리키며, '대번뇌법'은 번뇌성의 마음작용들 즉 번뇌들 가운데 항상 존재하는 것들을 말한다. 따라서, 대번뇌지법이란 일체의 염오심(染污心) 즉 번뇌에 오염된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에 항상 존재하는 마음작용들을 말한다. 

설일체유부의 교학에 따르면, 대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는 치(癡) · 방일(放逸) · 해태(懈怠) · 불신(不信) · 혼침(惛沈) · 도거(掉擧)의 6가지 법이 있으며, 이들 6가지 마음작용은 염오심(染污心) 즉 오염된 마음에 항상 존재한다[恒於染污心有].[33][34] 달리 말하면, 이들 6가지 마음작용은 언제나 오직 온갖 염오심 즉 오염된 마음과 구기(俱起)할 뿐이며[恒唯與諸染心俱] 다른 마음과는 구기(俱起)하지 않는다.

《현종론》에 따르면, 대번뇌지법의 치(癡) · 방일(放逸) · 해태(懈怠) · 불신(不信) · 혼침(惛沈) · 도거(掉擧)의 6가지 마음작용은 각각 그 순서대로 선혜(善慧) 즉 대지법의 혜(慧)의 바른 상태 즉 무치(無癡)와 대선지법의 불방일(不放逸) · 근(勤) · 신(信) · 경안(輕安) · 사(捨)에 의해 대치(對治)된다. 

(21) 치(癡, 어리석음, 우치, 무지(無知), 무지(無智), 무현(無顯), ignorance, delusion, error)는 우치(愚癡) 즉 어리석음을 말한다. 소지경(所知境) 즉 알아야 할 대상에 대한 여리해(如理解) 즉 진리에 계합하는 이해 즉 참다운 이해가 장애되어 있는 무변료상(無辯了相) 즉 소지경에 대한 분별[辯]과 앎[了]이 없는 상태[相]를 말한다. 달리 말해, 치(癡)란 바로 무명(無明) · 무지(無智) · 무현(無顯)의 마음작용으로, 대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치(癡)는 우치(愚癡) 즉 어리석음을 말한다. 달리 말해, 치(癡)란 바로 무명(無明) · 무지(無智) · 무현(無顯)의 마음작용으로, 대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세친과 중현은 해당 단락에서 이들 세 낱말에 대해서 별도의 설명을 제공하고 있지 않은데, 이들 낱말에 대한 현대 학자의 주석에 따르면 무지(無智)는 마음이 사(事: 사물, 현상)와 이(理: 이치, 본질)를 밝게 결택(決擇: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함)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고, 무현(無顯)은 사(事: 사물, 현상)와 이(理: 이치, 본질)가 은폐되어 마음에 밝게 드러나 알려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무명(無明)'이라는 낱말에 대해서는 현대 학자의 주석이 제공되어 있지 않은데, 무명(無明)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밝음[明]이 없음[無]'이다. 《품류족론》과 《구사론》에 따르면 밝음[明]은 혜의 8가지 다른 이름인 지(智) · 견(見) · 명(明) · 각(覺) · 해(解) · 혜(慧) · 광(光) · 관(觀) 가운데 하나이다. 보광(普光)의 《구사론기(俱舍論記)》 제26권에 따르면, 명(明)은 조명(照明: 관조와 밝음)을 뜻한다.

(22) 방일(放逸, 노는 것, 불성실, 포기, 선법을 닦지 않음, 마음을 방호하지 않음, heedlessness, carelessness, unconcern, non-diligence)은 기리(己利) 즉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에 전념[專]하는 것을 포기하고 뜻[情, 마음]을 놓아버리고 내버려두는, 대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방일(放逸)은 온갖 선(善)을 닦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방일은 온갖 선을 닦는 것 즉 불방일(不放逸)에 의해 대치(對治)되는 법으로, 대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23) 해태(懈怠, 게으름, 책려하지 않음, 노력하지 않음, laziness, slothfulness, spiritual sloth, idleness)는 선한 일[事]과 업(業)에 대해서는 뛰어난 능력을 이지러지게 하거나 감소시키지만 악한 일[事]과 업(業)에 대해서는 날쌔고 모질게 수순하여 성취하는, 대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해태를 비열근성(鄙劣勤性) 즉 비천하고 저열하게 노력하는 성질이라고 하는데, 그 노력[勤]과 수습[習]이 비천하고 오염된 것이기 때문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해태(懈怠)는 심불용한(心不勇悍) 즉 마음이 결단력[勇]이 없고 인내[悍]하지 못하는 것, 마음이 모질게 노력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해태는 대선지법에 속한 근(勤)에 의해 대치(對治)되는 법으로, 대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현종론》에 따르면, 해태는 무명(無明)의 등류(等流)이다. 즉, 근본번뇌 가운데 하나인 무명(無明) 즉 치(癡)로부터 일어나는 수번뇌이다. 그리고 해태와 치(癡)는 모두 대번뇌지법에 속하는 마음작용이다.

(24) 불신(不信, 믿지 않음, 인가하지 않음, 청정하지 않음, 희망하지 않음, lack of faith, lack of trust, disbelieving a fact, disbelief)은 심부징정(心不澄淨) 즉 마음이 징정(澄淨)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불신은 사견(邪見)의 등류(等流)이다. 즉, 근본번뇌 가운데 하나인 사견(邪見)으로부터 일어나는 수번뇌로, 대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달리 말하면, 불신(不信)은 온갖 진리[諦] · 보배[寶] · 정려(靜慮) · 등지(等至)에 대해 현전에서 경솔하게 비방하고, 보시 등의 인(因: 원인)과 그 과(果: 과보, 결과)에 대해 '마음에서 즉각 인정하지 않는 것[心不現許]'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불신(不信)은 심부징정(心不澄淨) 즉 마음이 징정(澄淨)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불신은 대선지법에 속한 신(信)에 의해 대치(對治)되는 법으로, 대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25) 혼침(惛沈, 몽매함, 침울함, 어두움, 무거움, 감당할 능력이 없음, 민활하지 못함, lethargy, gloominess, foggymindedness, torpor)은 어둡거나[瞢] 즐겁지 않은[不樂] 일 등에 의해 생겨나는 심중성(心重性) 즉 마음의 무거움으로, 대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마음이 혼침에 의해 덮히고 가려지면[覆蔽] 흐리고 어두운[惛昧] 상태가 되어 선법과 불선법을 감임(堪任)할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은 혼침의 본질적 성질이 몽궤성(瞢憒性) 즉 어두움 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혼침은 대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인 경안(輕安)에 의해 대치된다. 

《구사론》에 따르면, 혼침(惛沈)은 신중성(身重性) · 심중성(心重性) · 신무감임성(身無堪任性) · 심무감임성(心無堪任性) · 신혼침성(身惛沈性) · 심혼침성(心惛沈性)을 말하며, 대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혼침(惛沈)은 수번뇌에 속하며 근본번뇌 가운데 무명(無明) 즉 치(癡)로부터 일어나는 수번뇌이다.

한편, 《현종론》에 따르면, 마음은 4대종의 능생인(能生因)이기 때문에, 즉 마음은 4대종을 낳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혼침과 상응한 마음이 신중성(身重性) 즉 몸의 무거움을 일으키는데, 이에 따라 신중성도 혼침이라고 가설(假說)하지만 신중성은 실제로는 혼침이 아니다. 그 이유는 신중성은 신식(身識)의 소연경(所緣境)이기 때문이다. 

또한, 《품류족론》 제2권 · 《계신족론》 제1권 · 《대비바사론》 제42권에서는 대번뇌지법으로 치(癡) · 방일(放逸) · 해태(懈怠) · 불신(不信) · 혼침(惛沈) · 도거(掉擧)의 6가지 법이 아니라 불신 · 해태 · 실념(失念) 또는 망념(忘念) · 심란(心亂) · 무명(無明) 또는 치(癡) · 부정지(不正知) · 비리작의(非理作意) · 사승해(邪勝解) · 도거 · 방일의 10가지 법을 들고 있다. 즉, 이들 논서에서 혼침을 대번뇌지법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으며, 실념 또는 망념 · 심란 · 부정지 · 비리작의 · 사승해의 5가지 법을 대번뇌지법에 포함시키고 있다. 《현종론》에 따르면, 이들 논서에서 혼침을 대번뇌지법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는 이유는 혼침이란 무명부(無明覆) 즉 '마음이 무명에 의해 덮힌 상태'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이에 대한 해석에는 2가지가 있다. 첫째 해석은, 혼침이 이들 논서에서 설해지고 있지 않은 것은 대번뇌지법에 속한 6가지 법들 가운데 오직 혼침이 무명과 그 상(相)이 유사하기 때문인 것으로, 무명성(無明性)은 대변행(大遍行)이기 때문에 혼침이 대번뇌지법에 속한다는 것은 당연히 성립된다. 둘째 해석은, 이들 논서에서 언급된 무명이라는 명칭은 무명과 혼침의 2가지 법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의 명칭으로, 따라서 이들 논서에서는 실제로는 무명과 혼침의 2가지 법을 무명이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가리킨 것이다. 

(26) 도거(掉擧, 고요하지 않음, 들뜸, excitement, restlessness, ebullience, flightiness of mind, dissipation)는 친하거나 사랑하는 이[親]를 생각하는 것[里尋] 등에 의해 생겨나는 심부적정성(心不寂靜性) 즉 마음으로 하여금 고요히 안정되지 못하게 하는 성질로서, 대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마음은 도거와 화합함으로써 균형을 벗어나[越路]게 된다. 

《구사론》에 따르면, 도거(掉擧)는 마음으로 하여금 부정(不靜)하게 하는 법, 즉 마음으로 하여금 고요히 안정되지 못하게 하는 법으로, 대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도거(掉擧)는 수번뇌에 속하며 근본번뇌 가운데 탐(貪)으로부터 일어나는 수번뇌이다. 

기타 대번뇌지법

《품류족론》 제2권 · 《계신족론》 제1권 · 《대비바사론》 제42권에서는 대번뇌지법으로 치(癡) · 방일(放逸) · 해태(懈怠) · 불신(不信) · 혼침(惛沈) · 도거(掉擧)의 6가지 법이 아니라 불신 · 해태 · 실념(失念) 또는 망념(忘念) · 심란(心亂) · 무명(無明) 또는 치(癡) · 부정지(不正知) · 비리작의(非理作意) · 사승해(邪勝解) · 도거 · 방일의 10가지 법을 들고 있다. 즉, 이들 논서에서 혼침을 대번뇌지법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으며, 실념 또는 망념 · 심란 · 부정지 · 비리작의 · 사승해의 5가지 법을 대번뇌지법에 포함시키고 있다. 

《현종론》에 따르면, 이들 논서에서 대번뇌지법에 포함시키고 있는 실념 또는 망념 · 심란 · 부정지 · 비리작의 · 사승해의 각각은 대지법에 속한 특정한 마음작용의 그릇된 상태이기 때문에, 마치 혜(慧)의 바른 상태 또는 선한 상태인 무치(無癡)가 비록 실제로는 대선지법에 속하지만 대지법에 속한 것으로 논하듯이, 이들은 비록 실제로는 대번뇌지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중복을 피하기 위해 대지법에 속한 것으로 논한다고 말하고 있다.

부정지(不正知) 《구사론》과 《현종론》에 따르면, 부정지(不正知, 염오혜, 악혜, 그릇된 이해, 그릇된 앎, 오염된 이해, 오염된 앎, 바르게 알지 못함, 바르지 않은 앎, non-alertness, inattentiveness)는 대지법 가운데 혜(慧)의 그릇된 상태 또는 오염된 상태인 염오혜(染污慧)이다. 

실념(失念)·망념(忘念) 《구사론》과 《현종론》에 따르면, 실념(失念, 염오념, 그릇된 염, 오염된 염, 관을 놓침, 정념을 놓침, 4념처를 놓침, forgetfulness). 망념(忘念)은 대지법 가운데 염(念)의 그릇된 상태 즉 오염된 상태인 염오념(染污念)이다.

비리작의(非理作意) 《구사론》과 《현종론》에 따르면, 비리작의(非理作意, 염오작의, 그릇된 작의, 오염된 작의)는 대지법 가운데 작의(作意)의 그릇된 상태 또는 오염된 상태인 염오작의(染污作意)이다.

사승해(邪勝解) 《구사론》과 《현종론》에 따르면, 사승해(邪勝解, 염오승해, 그릇된 승해, 오염된 승해)는 대지법 가운데 승해(勝解)의 그릇된 상태 또는 오염된 상태인 염오승해(染污勝解)이다.

심란(心亂) 《구사론》과 《현종론》에 따르면, 심란(心亂, 마음의 분산, 마음의 흐트러짐, 염오등지, 염오삼마지, 그릇된 등지, 그릇된 삼마지, 오염된 등지, 오염된 삼마지, distraction, desultoriness)은 대지법 가운데 삼마지(三摩地)의 그릇된 상태 또는 오염된 상태인 염오삼마지(染污三摩地)이다.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 2가지);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 산스크리트어: akuśala-mahā-bhūmika)이란 모든 법 가운데 '대불선지'(大不善地)에 존재하는 법들을 말한다. 여기서 '대불선지'는 대불선법(大不善法)의 지(地), 즉 대불선법의 용지처(容止處) 즉 소행처(所行處), 즉 대불선법이 생기하는 영역으로서의 마음, 즉 불선심(不善心) 즉 번뇌에 오염된 마음 중에서도 불선한 마음을 가리키며, '대불선법'은 불선한 마음작용들 가운데 항상 존재하는 것들을 말한다. 따라서, 대불선지법이란 일체의 불선심(不善心) 즉 번뇌에 의한 오염이 심화되어 불선의 상태에 처해 있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에 항상 존재하는 마음작용들을 말한다. 

설일체유부의 교학에 따르면, 대불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는 무참(無慚) · 무괴(無愧)의 2가지 법이 있으며, 이들 2가지 마음작용은 불선심(不善心) 즉 불선한 마음에 항상 존재한다[恒於不善心有]. 달리 말하면, 이들 2가지 마음작용만이 모든 불선심 즉 불선한 마음 즉 악한 마음과 구기(俱起)한다[與一切不善心俱]. 

(27) 무참(無慚, 스스로에게 부끄러워하지 않음, 공경하지 않음, lack of shame, lack of consciousness, consciencelessness, shamelessness, disrespect)은 온갖 공덕(功德)과 유덕자(有德者)에 대한 무경(無敬) · 무숭(無崇) · 무소기탄(無所忌難) · 무소수속(無所隨屬)의 마음작용이다. 즉 공덕(功德)과 덕이 있는 자[有德者]에게 공경[敬]하는 일이 없고, 존중[崇]하는 일이 없고, 어렵게 여겨 꺼리는 일[忌難]도 없고, 따라 속하는 일[隨屬: 제자로서의 예의]도 없는, 대불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 공경과 존중을 장애하는 마음작용이다.

《현종론》에 따르면, 공덕(功德)이란 시라(尸羅: 계율) 등을 말하며, 유덕자(有德者)란 친교사(親敎師: 스승)를 말한다. 즉 공덕은 계 · 정 · 혜 3학을 말하고, 유덕자는 스승을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무참은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공덕과 공덕 있는 자에 대해 공경하고 존중하는 일이 없게 하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또는, 유여사(有餘師)의 정의에 따르면, 무참(無慚)은 온갖 번뇌에 대해 능히 염훼(厭毀)하지 않는 즉 능히 싫어하거나 허물려고 하지 않는 마음작용이다. 또는 무참(無慚)은 홀로 있으면서 죄를 짓고서는 무치(無恥)한 것 즉 부끄러워함이 없는 마음작용이다. 또는 무참(無慚)은 불선심을 일으키는 바로 그 때 이숙인(異熟因)에 대해 돌아다봄[顧眄]이 없는 마음작용이다. 즉 온갖 불선의 마음이 현재 바로 눈 앞에 있는 상태에서 그 원인에 대해 돌아다봄[顧眄]이 없는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무참(無慚)은 온갖 공덕(功德)과 유덕자(有德者)에 대한 무경(無敬) · 무숭(無崇) · 무소기탄(無所忌難) · 무소수속(無所隨屬)의 마음작용으로, 공경(恭敬)의 적대가 되는 법[敵對法]이다. 즉 공덕(功德: 계정혜 3학)과 덕이 있는 자[有德者: 스승]에게 공경[敬]하는 일이 없고, 존중[崇]하는 일이 없고, 어렵게 여겨 꺼리는 일[忌難]도 없고, 따라 속하는 일[隨屬: 제자로서의 예의]도 없는, 대불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 공경(恭敬)의 반대가 되는 마음작용이다.

또는, 유여사(有餘師)의 정의에 따르면, 무참(無慚)은 지은 죄에 대해 그 자체를, 예를 들어 이숙인(異熟因)을, 관찰하여 부끄러워함이 없는, 대불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28) 무괴(無愧, 부끄러워하지 않음, 뉘우치지 않음, 두려워하지 않음, lack of propriety, disregard, shamelessness)는 죄(罪) 즉 모든 관행자(觀行者)가 꾸짖고 싫어하는 법[訶厭法]에 대해 두려워 해야 할 것[怖畏]으로 보지 않는 마음작용으로, 대불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즉, 모든 관행자가 꾸짖고 싫어하는 온갖 죄업(罪業)은 능히 현생과 내생의 세계에서 책망할 만하고 헐뜯을 만하고 비난할 만하고 벌할 만하고 애호할 수 없고 참기 어려운 이숙과를 초래하므로 두려워 해야 할 일[怖畏事]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죄업에 대해 그것이 불러올 과보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아무런 꺼림이 없는 마음작용이다. 간단히 말하면, 무괴는 죄가 현행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꺼려하는 바[無所忌憚]가 없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그리고, 미래의 과보를 두려워 하지 않는 마음작용인 무괴(無愧)는 인과를 부정하는 번뇌인 사견(邪見)과 인과의 도리에 미혹한 번뇌인 무명(無明)을 인기(引起)하여 현행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전자의 사견은 나쁜 과보 또는 괴로운 과보가 초래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고, 후자의 무명은 나쁜 과보 또는 괴로운 과보가 초래될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인과에 미혹한 것이다. 

또는, 유여사(有餘師)의 정의에 따르면, 무괴(無愧)는 온갖 불선에 대해 능히 염훼(厭毀)하지 않는 즉 능히 싫어하거나 허물려고 하지 않는 마음작용이다. 또는 무괴(無愧)는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죄를 짓고서는 무치(無恥)한 것 즉 부끄러워함이 없는 마음작용이다. 또는 무괴(無愧)는 불선심을 일으키는 바로 그 때 이숙과(異熟果)에 대해 돌아다봄[顧眄]이 없는 마음작용이다. 즉 온갖 불선의 마음이 현재 바로 눈 앞에 있는 상태에서 그 결과에 대해 돌아다봄[顧眄]이 없는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무괴(無愧)는 죄(罪) 즉 모든 선사(善士)가 꾸짖고 싫어하는 법[訶厭法]에 대해 두려워 해야 할 것[怖畏]으로 보지 않는 마음작용으로, 대불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즉, 원인으로서의 죄(罪) 자체와 그것이 불러올 과보를 두려워 하지 않는 마음작용이다. 

그리고, 《구사론》에 따르면, 원인으로서의 죄와 미래의 과보를 두려워 하지 않는 마음작용인 무괴(無愧)는 인과를 부정하는 번뇌인 사견(邪見)과 인과의 도리에 미혹한 번뇌인 무명(無明)을 인기(引起)하여 현행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또는, 유여사(有餘師)의 정의에 따르면, 무괴(無愧)는 지은 죄에 대해 다른 것을, 예를 들어 이숙과(異熟果)를, 관찰하여 부끄러워함이 없는, 대불선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 10가지)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이란 모든 법 가운데 '소번뇌지'(小煩惱地)에 존재하는 법들을 말한다. 여기서 '소번뇌지'는 소번뇌법(小煩惱法)의 지(地), 즉 소번뇌법의 용지처(容止處) 즉 소행처(所行處), 즉 소번뇌법이 생기하는 영역으로서의 마음, 즉 염오심(染污心) 가운데 특정한 일부, 즉 번뇌에 의해 오염된 마음 가운데 특정한 일부의 마음을 가리킨다. '소(小)'란 바로 적다[少]는 뜻으로, 모든 염오심(染污心)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따라서, 소번뇌지법이란 일부의 염오심에서만 존재하는 마음작용들, 즉 번뇌에 의해 오염된 마음 가운데 특정한 일부의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에서만 존재하는 마음작용들을 말한다. 설일체유부의 교학에 따르면,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는 분(忿) · 부(覆) · 간(慳) · 질(嫉) · 뇌(惱) · 해(害) · 한(恨) · 첨(諂) · 광(誑) · 교(憍)의 10가지 법이 있으며, 이들 10가지 마음작용은 일부의 염오심(染污心)과 구기(俱起)한다[少分染污心俱]. 달리 말하면, 이들 10가지 마음작용들은 모든 염오심 또는 불선심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특정한 염오심 또는 불선심에서만 발견된다.

《현종론》에 따르면, 소번뇌지법에 속한 10가지 마음작용들의 공통된 성격은 불인(不忍) · 불락(不樂) · 분발(憤發)이다. 즉, 받아드릴 수 없고[不忍], 즐길 만한 것이 아니며[不樂], 번민하여 일어난다[憤發]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들 10가지 마음작용들을 소번뇌지법이라고 하는 이유는, 《구사론》에 따르면 다음의 4가지 이유 때문이다. 

유수소단(唯修所斷): 이들 10가지 마음작용들은 오로지 수소단(修所斷)의 번뇌들이다.

유의식지기(唯意識地起): 이들 10가지 마음작용들은 제6의식의 지(地), 즉 제6의식에서만 일어나는 번뇌들이다.

유무명상응(唯無明相應): 이들 10가지 마음작용들은 현행하여 작용할 때 모든 염오법 즉 모든 근본번뇌들과 수번뇌들 가운데 오직 무명(無明)과 상응하여 작용하는 번뇌들이다.

각별현행(各別現行): 이들 10가지 마음작용들은 각각 별도로 현행하는 번뇌들이다.

《현종론》에서도 이들 10가지 마음작용들을 소번뇌지법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이유로 다음의 4가지를 들고 있는데, 순서와 표현만 다를 뿐 그 내용은 《구사론》과 동일하다. 

무상응(無相應): 이들 10가지 마음작용들은 서로 간에 상응의 뜻을 갖지 않는다. 즉, 서로 상응하여 구기(俱起)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각각 별도로 현행하는 번뇌들이다.

유수소단(唯修所斷): 이들 10가지 마음작용들은 오로지 수소단(修所斷)의 번뇌들이다.

유의식구기(唯意識俱起): 이들 10가지 마음작용들은 오로지 제6의식과 구기(俱起)하는 번뇌들이다.

유무명상응(唯無明相應): 이들 10가지 마음작용들은 현행하여 작용할 때 모든 염오법 즉 모든 근본번뇌들과 수번뇌들 가운데 오직 무명(無明)과 상응하여 작용하는 번뇌들이다.

(29) 분(忿, 분노, 비난과 성냄, 노여워함, fury, rage, indigation, anger)은 자신이나 친구의 손해와 원수의 이익으로 인해 생겨나는 마음작용으로, 진에(瞋恚)가 선행의 발동근거가 되어 일어나는 심분(心憤) 즉 마음의 분함[憤]으로,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또는, 유여사(有餘師)에 따르면, 분(忿)은 처(處)와 비처(非處) 즉 옳다고 여기는 바나 그르다고 여기는 바를 거스르는 것이 있을 때 일어나는, 심무고(心無顧)와 심분발(心憤發)의 성질의 마음작용이다. 즉, 마음으로 하여금 되돌아보는 일이 없게 하고 격분[憤發]하게 하는 힘[力] 또는 종자[子]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분(忿)은 근본번뇌이자 부정지법에 속한 진(瞋)과 소번뇌지법에 속한 해(害) 이외의 마음작용으로서, 유정과 비유정에 대한 심분발(心憤發)의 성질 즉 유정과 비유정에 대해 마음으로 하여금 격분[憤發]하게 하는 성질의,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30) 부(覆, 숨기고 감춤, concealment, slyness-concealment, hypocrisy)는 자신의 죄(罪)를 숨기고 감추려고[隱藏] 하는,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죄(罪)는 꾸짖을 만한 것[可訶]을 말한다. 즉, 시라(尸羅: 계율)와 궤칙(軌則), 그리고 온갖 청정한 명[淨命]을 훼범(毀犯: 허물고 범함)하는 것을 말한다. 감추려고 함[隱藏]은 죄를 은닉하고자 하는 욕구[匿罪欲]를 원인으로 하는 행위이다. 또는, 유여사(有餘師)에 따르면, 부(覆)는 문식(捫拭: 비틀고 닦음) 즉 있으면서도 없는 체하는 것을 말한다. 즉, 안으로는 악을 품었으면서도 밖으로는 품지 않은 체하는 마음작용으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알아차리지[覺察] 못하게 하려는 욕구[欲]의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부(覆)는 자신의 죄(罪)를 감추려고 하는,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죄(罪)는 모든 선사(善士)가 꾸짖고 싫어하는 법[訶厭法]으로서 그 자체와 그 과보를 두려워 해야 할 것[怖畏]이다. 

(31) 간(慳, 아까워함, 인색, 희사하지 못함, 베풀지 못함, stinginess, avarice, miserliness, greed)은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자 수번뇌 가운데 10전(十纏)에 속한 번뇌인데, 《현종론》 제4권의 소번뇌지법을 논하는 대목에서는 간(慳)에 대해 뒤에서 수번뇌를 다룰 때 그 본질[相]을 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현종론》 제27권의 수번뇌 가운데 10전을 논하는 대목에서는 간(慳)에 대해 앞에서 논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착오에 따라, 《현종론》에는 간(慳)에 대한 정의가 없다. 《구사론》에 따르면, 간(慳)은 재시(財施) · 법시(法施)의 교시(巧施: 타인에게 보시하여 이익을 주는 것)와 반대되는 마음작용으로, 마음으로 하여금 재물[財]과 교법[法]에 대해 인색하여 집착하게 하는,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32) 질(嫉, 시기, 질투, jealousy, envy)은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자 수번뇌 가운데 10전(十纏)에 속한 번뇌인데, 《현종론》 제4권의 소번뇌지법을 논하는 대목에서는 질(嫉)에 대해 뒤에서 수번뇌를 다룰 때 그 본질[相]을 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현종론》 제27권의 수번뇌 가운데 10전을 논하는 대목에서는 질(嫉)에 대해 앞에서 논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착오에 따라, 《현종론》에는 질(嫉)에 대한 정의가 없다. 《구사론》에 따르면, 질(嫉)은 다른 사람의 온갖 흥성사(興盛事), 온갖 흥하고 성한 일에 대해 마음으로 하여금 기뻐하지 않게[不喜] 하는,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33) 뇌(惱, 괴롭힘, 사나움, 포악함, 죄사에 대한 견고한 집착, spite, spitefulness, malice, stubbornness)는 가훼사(可毀事), 즉 허물어야 할 일, 즉 죄사(罪事: 죄가 되는 일, 악한 일, 나쁜 일)에 대해, 결정적이고도 견고히, 악한 마음으로 집착하는 마음작용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 가훼사 즉 죄사를 버리기 어렵게 하는 원인으로서의,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세간에서는 마음이 뇌(惱)와 상응하고 있는 상태의 사람에 대해 "인도할 수 없다[不可引導]"고 말한다. 죄(罪)는 꾸짖을 만한 것[可訶]을 말한다. 즉, 시라(尸羅: 계율)와 궤칙(軌則), 그리고 온갖 청정한 명[淨命]을 훼범(毀犯: 허물고 범함)하는 것을 말한다. 《구사론》에 따르면, 뇌(惱)는 온갖 죄사(罪事: 죄가 되는 일, 악한 일, 나쁜 일)에 대해 견고히 집착하는,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마음이 뇌(惱)와 상응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참다운 충고[如理諫]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회개[悔]하지도 않는다. 죄(罪)는 모든 선사(善士)가 꾸짖고 싫어하는 법[訶厭法]으로서 그 자체와 그 과보를 두려워 해야 할 것[怖畏]이다. 

(34) 해(害, 핍박, 해침, 손뇌, hostility, cruelty, intention to harm, spirit of violence)는 다른 유정에 대해 전혀 되돌아보지 않는 것은 아니나 섭수(攝受)하는 것처럼 하면서 손뇌(損惱: 손상시키고 괴롭힘)를 끼치는 일을 저지르는 원인[因]이 되는 비장뇌심(悲障惱心) 즉 다른 유정을 슬프게 하고 장애하며 괴롭히는 마음으로,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해(害)는 다른 유정을 핍박(逼迫: 억누르고 괴롭힘)하는,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마음이 해(害)와 상응하게 되면 때리고[打] 매도하는[罵] 등의 일을 저지르게 된다. 

(35) 한(恨, 원한, 원망, resentment, enmity, vindictiveness)은 비애상(非愛相]) 즉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것에 대해 수념분별(隨念分別: 기억에 따른 분별)함으로써 생겨나는,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 분(忿)이 상속하여 후기(後起)한 마음이 원한을 맺는 것[結怨]을 말한다. 《구사론》에 따르면, 한(恨)은 소번뇌지법에 속한 분(忿)의 마음작용의 소연(所緣)에 대해 자주자주 생각[數數尋思]하여 원한을 품어 버리지 않는[結怨不捨],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36) 첨(諂, 마야, 가장하여 숨김, 심곡, 아첨, pretense, deceit, dissimilation)은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己情事]을 방편으로 숨기고 거짓된 모략으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他情]을 유혹하여 실제의 앎[實智]과는 어긋나게 하는 심곡(心曲) 즉 마음의 왜곡으로,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첨(諂)은 심곡(心曲)를 말한다. 즉 마음으로 하여금 아곡(阿曲)하게 하는,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마음이 첨(諂)과 상응하게 되면 스스로를 사실 그대로[如實] 드러내지 않게 되며, 따라서 다른 사람이 나의 허물을 바로잡아주는 그러한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방편을 시설[設]하여 그 결과 내가 참다운 것을 알게 되는 그러한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다. 

《현종론》에 따르면, 심곡(心曲) 즉 마음의 왜곡 즉 첨(諂)과 심험(心險) 즉 마음의 험악함 즉 광(誑)은 다른 이를 속인다는 것에서는 동일하지만 서로간에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심곡은 구불구불한 지팡이[杖]와 같고, 심험은 험악한 길[道]과 같다.

심곡은 자신에 대한 것이고, 심험은 타인에 대한 것이다.

심곡은 견(見)에 인한 것이고 심험은 탐(貪)에 인한 것이다. 즉 심곡은 견(見)이라는 근본번뇌로부터 생겨나는 수번뇌로 견의 등류이며, 심험은 탐(貪)이라는 근본번뇌로부터 생겨나는 수번뇌로 탐의 등류이다.

(37) 광(誑, 속임, 미혹시킴, hypocrisy, dishonesty, deception, spirit of deception)은 명리(名利) 등에 대한 탐(貪)이 선행하는 마음작용으로, 이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혹[惑]시키고자 거짓을 나타내는 일을 하게 하는 원인[因]이 되는 마음작용으로, 바른 결정[正定]과 어긋나게 하는 심험(心險) 즉 마음의 험악함으로서의,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광(誑)은 다른 사람을 미혹시키는[惑],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현종론》에 따르면, 심곡(心曲) 즉 마음의 왜곡 즉 첨(諂)과 심험(心險) 즉 마음의 험악함 즉 광(誑)은 다른 이를 속인다는 것에서는 동일하지만 서로간에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38) 교(憍, 교만, 오염된 기쁨, self-satisfaction, self-infatuation, mental inflation, smugness, conceit)는 자신이 가진 법에 대한 염착을 발동근거 또는 전제로 하여 일어나는 마음작용으로, 마음으로 하여금 거만[傲]하게 하고 방일[逸]하게 하여 다른 것을 돌아보는 것[顧]을 하지 않게 하는 무소고성(無所顧性)의,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즉, 자신의 용감함 · 건강 · 재산 · 지위 · 도덕성[戒] · 지혜 · 친족 등에 대해 먼저 염착을 일으키고 이를 발동근거로 하여 마음에 거만[傲]과 방일[逸]이 생겨남으로써 온갖 선본(善本)을 되돌아보는 일이 없는 마음작용이다. '온갖 선본(善本)을 되돌아보는 일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거만[傲]해짐에 따라 온갖 선업(善業)을 즐거이 수습(修習)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또는, 유여사(有餘師)의 견해에 따르면, 교(憍)는 탐(貪)으로부터 생겨난 마음작용으로, 자신의 젊음과 건강함과 나이 등의 갖가지 흥성사(興盛事)를 믿고 자부하여[恃] 마음이 거만[傲]해 지는 것이다. 

또는, 다른 유여사(有餘師)의 견해에 따르면, 교(憍)는 자상속(自相續: 자신의 소의신)에서 흥성한 제행(諸行) 즉 건강 · 재산 · 지위 등의 갖가지 유위법에 대한 탐착[耽染]을 발동근거 또는 전제로 하여 일어나는 마음작용으로, 다른 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가 뛰어나다고 하면서 '마음이 스스로를 믿고 자부하여 거들먹거리는 것[心自舉恃]'이다. 다른 이를 돌아보지 않는다[不顧他]고 하는 점에서 만(慢)과 차이가 있다. 《구사론》에 따르면, 교(憍)는 자신이 가진 법에 대한 염착을 발동근거 또는 전제로 하여 일어나는 마음작용으로, 마음으로 하여금 거만[傲]하게 하고 방일[逸]하게 하여 다른 것을 돌아보는 것[顧]을 하지 않게 하는 무소고성(無所顧性)의, 소번뇌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또는, 유여사(有餘師)의 견해에 따르면, 교(憍)는 탐(貪)으로부터 생겨난 흔거(欣擧: 들떠 거들먹거리는 것)의 차별이다. 즉, 번뇌에 오염된 상태의 희(喜)다.

 

부정지법(不定地法: 8가지)

부정지법(不定地法)은 그 성질상 대지법 · 대선지법 · 대번뇌지법 · 대불선지법 · 소번뇌지법의 5가지 그룹 가운데 어느 특정 하나에 속한다고 확정할 수 없는[不定] 마음작용들을 말한다. 설일체유부의 교학에 따르면,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으로는 심(尋) · 사(伺) · 수면(睡眠) · 악작(惡作) · 탐(貪) · 진(瞋) · 만(慢) · 의(疑)의 8가지가 있다. 

(39) 심(尋, 대강의 상(相: 성질, 모습, 자성)을 분별함, 거친 성질, 거친 움직임, conception, selectiveness, gross detection, examination, application of thought, applied thinking, initial application, grossness of the mind)은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의 거친 성질[麤性]로서,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한편, 이에 대해 사(伺)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의 세밀한 성질[細性]로서, 역시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심(尋)은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의 거친 성질[麤性]로서,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한편, 이에 대해 사(伺)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의 세밀한 성질[細性]로서, 역시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설일체유부의 정통 교학 즉 비바사사의 견해에 따르면, 심(尋)은 마음(6식 가운데 전5식)으로 하여금 감각적 대상(5경)을 추구하게 하는 보다 거친 성질의 마음작용[心之麤性]이다. 그리고 사(伺)는 마음(6식 가운데 제6의식)으로 하여금 비감각적 대상 (법경)을 파악하게 하는 보다 세밀한 성질의 마음작용[心之細性]이다. 이들 두 마음작용 덕분에, 즉, 심과 사가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하면서 서로 상응(相應)하면서 구기(俱起)하기 때문에 마음은 추(麤) · 세(細)에 치우치지 않고 대상에 대한 고른 인식을 이끌어낼 수 있다. 

또한, 심(尋)과 사(伺)의 상응과 구기에 대해 비바사사는 이 두 마음작용이 어언행(語言行), 즉 어언의 행, 즉 언어[語言] 즉 말을 성립시키는 근거가 되는 거친 성질과 세밀한 성질의 마음작용이라는 2번째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40) 사(伺, 자세한 상(相: 성질, 모습, 자성)을 분별함, 세밀한 성질, 세밀한 움직임, discernment, discursiveness, analysis, sustained application, sustained thinking, selectiveness, subtle discernment, subtlety of the mind)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의 세밀한 성질[細性]로서,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사(伺)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의 세밀한 성질[細性]로서,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41) 수면(睡眠, 잠, 흐릿함, 약화됨,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함, torpor, sleep, drowsiness, apathy)은 줄임말로 면(眠)이라고도 하는데, 심매략성(心昧略性) 즉 마음으로 하여금 [6경과 6근에 대하여] 흐릿하고 약해지게[昧略, 흐리멍덩해지게] 하는 성질[相], 혼침(惛沈)과 상응하는 성질[相], 몸을 집지(執持)하지 못하게 하는 성질[相]의 3가지 성질[相]을 본질로 하는,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현종론》에 따르면, 번뇌로서의 수면은 이들 3가지 성질[相]을 다 갖춘 경우이다. 수면이 혼침과 상응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어 상쾌한 잠이 그러하다. 참고로, 《구사론》에서는 혼침과 상응하는 성질을 제외한 다른 2가지 성질만을 언급하고 있다. 《구사론》에 따르면, 수면(睡眠)은 심매략성(心昧略性) 즉 마음으로 하여금 [6경과 6근에 대하여] 흐릿하고 약해지게[昧略, 흐리멍덩해지게] 하는 성질의,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마음이 수면과 상응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마음은 몸 즉 5근을 집지(執持)할 만한 공력(功力)이 없게 된다. 

(42) 악작(惡作, 후회, 추회 regret, worry)은 회(悔)라고도 하는데 지어진 일 또는 짓지 않은 일, 특히 그릇되이[惡] 지어진 일[作]을 소연으로 하여 생겨나는[緣], 마음의 추회(追悔)하는 성질의 마음작용으로서,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현종론》의 설명에 따르면, 회(悔) 즉 추회 또는 후회는 '그릇되이 지어진 일 또는 잘못 저질러진 일[惡作]'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악작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무상정(無相定)과 신념주(身念住)의 경우와 같다. 즉, 무상정은 공해탈문(空解脫門) ·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 ·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의 3해탈문 가운데 무상해탈문을 말하는데, 그 자체의 본질은 무루정(無漏定) 즉 견도위(見道位) 이상의 성자가 무루지(無漏智)를 발하는 선정으로 깨달음의 세계[悟界]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 되는 선정이지만, 무상(無相)을 소연의 경계로 삼아 일어나는 선정이기 때문에 무상정이라 한다. 신념주(身念住)는 신념주(身念住) · 수념주(受念住) · 심념주(心念住) · 법념주(法念住)의 4념주(四念住) 가운데 하나로 몸은 부정(不淨)한 것이라고 억념하는 관법으로, 부정(不淨)한 것이라고 관하는 것의 본질은 무탐(無貪)이지만 소연이 되는 처소에 따라 '신념주'라고 이름한 것이다. 무상정과 신념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악작의 본질은 후회[追悔]이지만 후회의 소연이 '악작(惡作: 그릇되이 지어진 일, 잘못 저질러진 일)'이기 때문에 '악작'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현종론》에 따르면, 악작은 선과 불선에는 통하지만 무기와는 통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은 일 또는 짓지 않은 일에 대한 심척(心慼), 즉 마음의 슬픔 또는 근심이 악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지은 일 또는 짓지 않은 일에 대해 마음이 우근(憂根)과 상응한 상태라야 악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요즈음 어찌하여 소화시키지도 않고 먹기만 하는가?' 또는 '나는 요즈음 어찌하여 이 벽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인가?'라는 추변(追變: 추억)은 무기에 해당하는데, 아직 마음이 우근과 접촉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악작이라고 할 수 없으며, 우근과 접촉한 상태가 되면 악작이 일어난다. 《구사론》에 따르면, 악작(惡作)은 회(悔)라고도 하는데 심추회성(心追悔性)의 마음작용이다. 즉 그릇되게 지어진 것을 소연으로 하여 생겨나는[緣], 마음의 추회(追悔)하는 성질의 마음작용으로서,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의 설명에 따르면, '악작(惡作)'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그릇되게 지어진 것'인데, 나중에 '그릇되게 지어진 것'을 대상으로 하여 추회 즉 후회하게 되므로, 악작이라는 낱말로 후회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 즉, '그릇되게 지어진 것'이라는 원인으로써 '후회'라는 결과를 가리키는 용도로 사용한 경우이다. 이렇기 때문에, '악작(惡作)'의 문자 그대로의 뜻인 '그릇되게 지어진 것' 자체에는 후회의 뜻이 들어 있지 않지만, '그릇되게 지어진 것'은 나중에 후회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후회의 마음작용'의 명칭으로서 '악작(惡作)'을 사용한 것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악작(惡作) 즉 회(悔)는 선이 될 수도 있고 번뇌 또는 불선이 될 수도 있다. 선을 짓지 않은 것이나 악을 지은 것을 후회하는 것은 선이고, 선을 지은 것이나 악을 짓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것은 불선이다. 

(43) 탐(貪); 《현종론》에서는 탐(貪, 3계의 애(愛), 미착, 탐착, lust, attachment, craving)에 대한 정의가 제공되어 있지 않다. 다만, 《구사론》과 동일하게, 탐이 욕계의 탐인 욕탐(欲貪)과 색계 · 무색계의 탐인 유탐(有貪)으로 나뉜다는 것은 언급하고 있으며, 욕탐에 대해서는 남의 재물에 대한 악욕(惡欲)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욕탐은 남의 재물에 대해 비리(非理)의 욕(欲: 욕구)를 일으켜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나에게 소속시키기 위해 강제로 혹은 슬그머니 취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남의 재물을 탐착[耽]하고 희구[求]하는 악욕(惡欲) 즉 나쁜 욕구 · 사악한 욕구 또는 그릇된 욕구를 말한다. 그리고 《구사론》에서와 동일하게, 욕탐은 대체로 외문전(外門轉)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욕탐은 주로 욕계의 5욕(五欲)의 대상을 소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유탐은 주로 내문전(內門轉)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유탐은 주로 선정이나 유(有) 즉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소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유탐을 굳이 설정하게 된 것은, 이생이나 외도가 무상이숙(無想異熟), 즉 무상천(無想天)에서의 5백 대겁 동안의 무상(無想)의 삶을 해탈이라 여기고 이것에 집착하는 것처럼,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有]를 해탈로 여기고 집착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탐(貪)은 마음으로 하여금 외적 대상[境]이나 자신의 존재 자체[有, 自體]에 대해 깊이 미착(味著: 맛들여 집착함)하게 하는,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탐(貪)은 욕계의 탐인 욕탐(欲貪)과 색계와 무색계의 탐인 유탐(有貪)으로 나뉜다. 욕탐(欲貪)은 욕계 중의 유정이 외적 대상[境]에 대해서 깊이 미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색계와 무색계 중의 유정은 외적 대상[境]에 대해서는 미착하지 않는다. 하지만, 등지(等至, 산스크리트어: samāpatti: 선정, 정려)나 소의지(所依止), 즉 그들의 '존재 자체[自體]', 즉 유(有)에 대해서는 깊이 미착함이 있는데 이와 같이 유(有)에 대해 깊이 미착하는 것을 유탐(有貪)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이생과 외도가 무상이숙(無想異熟) 즉 무상천(無想天)에서의 5백 대겁 동안의 무상(無想)의 삶을 해탈이라고 생각하거나 무상이숙을 획득하는 원인이 되는 선정인 무상정(無想定)을 해탈도 또는 해탈문이라고 여겨 이들에 미착하는 것이 유탐에 해당한다.

(44) 진(瞋, 미워함, 성냄, 노여워함, 상처입히고 해치는 것을 좋아함, ill will, anger, repugnance, hatred)은 유정(有情)을 미워하는,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즉, 유정류(有情類)에 대해 증에심(憎恚心) 즉 증오하고 성내는 마음을 일으켜 핍박(逼迫)하려고 하는 마음작용이다.

《현종론》에 따르면, 진(瞋)은 3계 가운데 욕계에만 존재하는 마음작용 또는 근본번뇌로, 색계와 무색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瞋)이 상계(上界) 즉 색계와 무색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색계와 무색계에는 진수면사(瞋隨眠事), 즉 진(瞋)이라는 근본번뇌의 경계[事] 즉 소연, 즉 미워하거나 성낼 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瞋)은 전5식이 영납하는 고수(苦受)에서 수증되는 것인데 색계와 무색계에는 고수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진(瞋)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색계와 무색계에서의 상속은 선정에 의해 윤택[潤]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즉, 진(瞋)은 풍병(風病: 신경이 탈이나서 생기는 병의 총칭)처럼 메마르고 거친 특성[乾澁相]인데, 색계와 무색계의 유정은 선정에 의해 상속이 윤활(潤滑: 뻑뻑하지 않고 매끄러움)하기 때문에 진(瞋)이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색계와 무색계에는 진(瞋)의 이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색계와 무색계에는 진(瞋)이 이숙인(異熟因)이 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즉 진(瞋)은 반드시, 애락할 수 없는 비애(非愛)의 이숙과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는데, 색계와 무색계에는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좋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는, 다른 견해에 따르면, 진(瞋)이 색계와 무색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색계와 무색계에는 뇌해사(惱害事) 즉 괴롭히거나 해코지할 일이 없기 때문이며, 자(慈) 등의 선근(善根)만이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며, 섭수(攝受)된 온갖 것을 모두 원리(遠離)하기 때문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진(瞋)은 다른 유정에게 상처입히고[傷] 해를 끼치기[害] 위해 그 유정에 대하여 미워하고 성내는[憎恚], 부정지법에 속한 불선의 성질의 마음작용이다. 그리고, 《구사론》에 따르면 진(瞋)은 3계 가운데 욕계에만 존재하는 번뇌성의 마음작용인데, 유부무기가 아닌 불선 즉 악으로 분류되는 번뇌이다.

(45) 만(慢, 거만, 자만, 오만, 고거심, pride, arrogance, conceit)은 심자거성(心自舉性), 즉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이 스스로를 높이는 성질의,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즉, 자신과 다른 사람의 덕(德)의 뛰어남[勝]과 저열함[劣], 또는 진실됨[實]과 거짓됨[不實]을 재고 헤아려서 마음이 스스로를 믿고 자부하여 거들먹거리며 다른 사람을 능멸(陵蔑: 업신여겨 깔봄)하는 마음작용이다. 달리 말하면, 만(慢)은 유사(有事) 즉 원인을 갖는 유위법이나 비유사(非有事) 즉 원인을 갖지 않는 무위법에 대해 먼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고[校] 헤아린[量] 후, 이러한 비교와 헤아림을 발동근거로 하여 일으키는 고거심(高擧心) 즉 잘난 체하고 거들먹거리는 마음 또는 남에 대해 자신을 높이는 마음을 말한다.

《구사론》에 따르면, 만(慢)은 심자거성(心自舉性), 즉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이 스스로를 높이는 성질의,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달리 말하면, 만(慢)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덕(德)에 대해 누가 더 우월한지를 따져 생각하고 헤아려서는 스스로가 더 뛰어나다고 믿거나, 혹은 동등하다고 믿거나, 혹은 못해도 많이 못하지 않다고 믿고,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거들먹거리며 다른 사람을 능멸(陵蔑: 업신여겨 깔봄)하는 마음작용이다.

《구사론》과 《현종론》에 따르면, 만(慢)은 세분하여 만(慢) · 과만(過慢) · 만과만(慢過慢) · 아만(我慢) · 증상만(增上慢) · 비만(卑慢) · 사만(邪慢)의 7만(七慢)으로 나뉜다. 

(46) 의(疑, 의심, 망설임, 주저함, 미룸, 진리에 대한 유예, doubt, indecision, skepticism, indecisive wavering)는 있을까 없을까 또는 그럴까 그렇지 않을까의 유예(猶豫)의 '두 가지 갈래에서 일어나는[二趣轉]' 마음작용으로 그 갈래에서 동요[動]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로 하는,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구사론》에 따르면, 의(疑)는 있을까 없을까 또는 그럴까 그렇지 않을까의 '두 가지 갈래에서 일어나는[二趣相轉]' 마음작용으로 그 갈래에서 동요(動搖)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로 하는, 부정지법에 속한 마음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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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작용 (대승오온론·광오온론)

 

이 문서는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주요 논서인 세친의 《대승오온론》과 그 주석서인 안혜의 《대승광오온론》에서 설명하고 있는 마음작용 즉 심소법(心所法)에 대해 다룬다.

마음작용에 대한 전체적 · 일반적 내용은 '마음작용 문서'에서 다루고 있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에 출가하였다가 후에 대승불교로 전향한, 유식유가행파의 논사 세친(世親, Vasubandhu: 316?~396?)은 자신의 저서 《대승오온론》에서 마음작용[心所法, 心法]이란 마음과 상응(相應)하는 모든 법(法)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1] 이 정의는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품류족론》 등에서의 정의와 동일하다.[5][6] 다만 한역본에서 '마음작용'의 번역어가 '심소법(心所法)'이라 되어 있지 않고 '심법(心法)'이라 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심법은 일반적으로 마음작용이 아니라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낱말이다.

[1  심소법(心所法); "어떤 것이 수온인가. 세 가지의 영납(領納: 받아들이어 감각하는 것)을 말하니, 첫째 괴로움이고, 둘째 즐거움이고, 셋째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즐거움이란 사라질 적에 화합의 욕망이 있는 것이고, 괴로움이란 생겨날 적에 분리의 욕망이 있는 것이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이란 이 두 가지 욕망이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이 상온인가. 경계에 대해 갖가지 상(相)을 취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행온인가. 수온과 상온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심소법[心法] 및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이다. 어떤 것이 나머지 모든 심소법인가. 마음과 상응하는 저 모든 법을 말한다. ‘저 모든 법’은 또 어떠한 것인가. 촉(觸) · 작의(作意) · 수(受) · 상(想) · 사(思) · 욕(欲) · 승해(勝解) · 염(念) · 삼마디[三摩地] · 혜(慧) · 신(信) · 참(慚) · 괴 (愧) · 무탐(無貪)선근 · 무진(無瞋)선근 · 무치(無癡)선근 · 정진(精進) · 경안(輕安) · 불방일(不放逸) · 사(捨) · 불해(不害) · 탐(貪) · 진 (瞋) · 만(慢) · 무명(無明) · 견(見) · 의(疑) · 분(忿) · 한(恨) ·부(覆) · 뇌(惱) · 질(嫉) · 간(慳) · 광(誑) · 첨(諂) · 교(憍) · 해 (害) · 무참(無慚) · 무괴(無愧) · 혼침(惛沈) · 도거(掉舉) · 불신(不信) · 해태(懈怠) · 방일(放逸) · 망념(忘念) · 산란(散亂) · 부정지(不正知) · 악작(惡作) · 수면(睡眠) · 심(尋) · 사(伺)이다.]

{세친은 《대승오온론》에서 마음작용에 속한 법들로 촉(觸) · 작의(作意)에서 심(尋) · 사(伺)에 이르기까지 총 51가지 법을 들고 있으며, 이들 51가지 법들을 변행심소(遍行心所: 5가지) ·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 선심소(善心所: 11가지) ·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 · 불결정심소(不決定心所: 4가지)로 나누고 있다.[2] 여기서 '불결정심소'는 보다 일반적인 명칭으로는 부정심소(不定心所)라고 한다.

《대승오온론》에서는 마음작용[心所法, 心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5온 가운데 행온(行蘊)은 마음작용(심소법)과 심불상응행법의 2그룹으로 나뉘는데, 마음작용(심소법)은 '마음과 상응하는 모든 법(諸法與心相應)'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총 51가지의 법이 마음작용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것이 행온인가. 수온과 상온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심소법[心法] 및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이다. 어떤 것이 나머지 모든 심소법인가. 마음과 상응하는 저 모든 법을 말한다. ‘저 모든 법’은 또 어떠한 것인가. 촉(觸) · 작의(作意) · 수(受) · 상(想) · 사(思) · 욕(欲) · 승해(勝解) · 염(念) · 삼마디[三摩地] · 혜(慧) · 신(信) · 참(慚) · 괴 (愧) · 무탐(無貪)선근 · 무진(無瞋)선근 · 무치(無癡)선근 · 정진(精進) · 경안(輕安) · 불방일(不放逸) · 사(捨) · 불해(不害) · 탐(貪) · 진 (瞋) · 만(慢) · 무명(無明) · 견(見) · 의(疑) · 분(忿) · 한(恨) · 부(覆) · 뇌(惱) · 질(嫉) · 간(慳) · 광(誑) · 첨(諂) · 교(憍) · 해 (害) · 무참(無慚) · 무괴(無愧) · 혼침(惛沈) · 도거(掉舉) · 불신(不信) · 해태(懈怠) · 방일(放逸) · 망념(忘念) · 산란(散亂) · 부정지(不正知) · 악작(惡作) · 수면(睡眠) · 심(尋) · 사(伺)이다.

— 《대승오온론》. 2쪽. 한글본}

[2 심소법(心所法)
무엇을 수온(受薀)이라고 하는가? 느낌[受]에는 세 종류가 있다. 즐거운 느낌[樂受] · 괴로운 느낌[苦受] ·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을 말한다. 즐거운 느낌이란 이것(느낌)이 없어질 때 계속 어울리고 싶어함이 있는 것을 말한다. 괴로운 느낌이란 이것이 생겨날 때 벗어나고 싶어함이 있는 것을 말한다.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란 이 두 가지 바람이 없음을 말한다. 두 가지 바람이 없다는 것은 계속 어울리고 싶어함이나 벗어나고 싶어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느낌이란 식(識)의 받아들임[領納]을 말한다. 
무엇을 상온(想薀)이라고 하는가? 모든 대상의 모습을 더욱 뛰어나게 취할 수 있음을 말한다. 더욱 뛰어나게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뛰어난 힘으로 취할 수 있음을 말한다. 마치 힘이 센 것을 힘이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무엇을 행온(行薀)이라고 하는가? 수온과 상온을 제외한 나머지 심범(心法) 및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행 [心不相應行]을 말한다. 나머지 심법이란 무엇인가? 마음과 상응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접촉 · 작의(作意) · 사유[思] · 바람[欲] · 뛰어난 이해[勝解] · 정신집중[念] · 삼마지(三摩地) · 지혜 · 믿음 · 부끄러워함[慚] · 뉘우침[愧] · 탐욕 없음[無貪] ·성내지 않음[無瞋] · 어리석지 않음[無癡] · 정진(精進) · 경안(輕安) · 불방일(不放逸) · 사(捨) · 해치지 않음[不害] · 탐욕 · 성냄 · 오만함[慢] · 무명(無明) · 견해[見] · 의심[疑] · 부끄러워하지 않음[無慚] · 뉘우치지 않음[無愧] ·혼침(昏沈) · 도거(掉擧) · 믿지 않음[不信] · 해태(懈怠) · 방일(放逸) · 실념(失念) · 살나(散亂) · 부정지(不正知) · 악작(惡作) · 수면(睡眠) · 심(尋) · 사(伺)의 모든 심법이다. 
다섯 가지는 변행(遍行)이다. 이것은 모든 선 · 불선 · 무기심에 두루 미치므로 변행이라고 이름한다. 
다섯 가지는 별경(別境)이다. 이 다섯 가지의 하나하나는 차별된 대상에 전전하여서 대상을 결정하고, 성질을 서로 떠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하나가 있으면 반드시 다른 것들도 다 있다. 
열 한 가지는 선(善)이고. 여섯 가지는 번뇌(煩惱)이고, 나머지는 번뇌를 따르는 것[隨煩惱]이고, 네 가지는 정해지지 않은 것[不定]이다. 정해지지 않은 것의 네 가지는 바로 번뇌를 뒤따르는 것이 아니다. 선 및 무기의 성질에 통하기 때문이다.] 

 

《대승오온론》에서는 마음작용에 속한 총 51가지 법들을 다음과 같이 6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변행심소(遍行心所: 5가지): 촉(觸) · 작의(作意) · 수(受) · 상(想) · 사(思)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욕(欲) · 승해(勝解) · 염(念) · 삼마지(三摩地) · 혜(慧)

선심소(善心所: 11가지): 신(信) · 참(慚) · 괴(愧) · 무탐선근(無貪善根) · 무진선근(無瞋善根) · 무치선근(無癡善根) · 정진(精進) · 경안(輕安) · 불방일(不放逸) · 사(捨) · 불해(不害)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탐(貪) · 진(瞋) · 만(慢) · 무명(無明) · 견(見) · 의(疑)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 분(忿) · 한(恨) · 부(覆) · 뇌(惱) · 질(嫉) · 간(慳) · 광(誑) · 첨(諂) · 교(憍) · 해(害) · 무참(無慚) · 무괴(無愧) · 혼침(惛沈) · 도거(掉舉) · 불신(不信) · 해태(懈怠) · 방일(放逸) · 망념(忘念) · 산란(散亂) · 부정지(不正知)

불결정심소(不決定心所: 4가지) 또는 부정심소(不定心所): 악작(惡作) · 수면(睡眠) · 심(尋) · 사(伺)

어떤 것이 나머지 모든 심소법인가. 마음과 상응하는 저 모든 법을 말한다. ‘저 모든 법’은 또 어떠한 것인가. 촉(觸) · 작의(作意) · 수(受) · 상(想) · 사(思) · 욕(欲) · 승해(勝解) · 염(念) · 삼마디[三摩地] · 혜(慧) · 신(信) · 참(慚) · 괴 (愧) · 무탐(無貪)선근 · 무진(無瞋)선근 · 무치(無癡)선근 · 정진(精進) · 경안(輕安) · 불방일(不放逸) · 사(捨) · 불해(不害) · 탐(貪) · 진 (瞋) · 만(慢) · 무명(無明) · 견(見) · 의(疑) · 분(忿) · 한(恨) · 부(覆) · 뇌(惱) · 질(嫉) · 간(慳) · 광(誑) · 첨(諂) · 교(憍) · 해 (害) · 무참(無慚) · 무괴(無愧) · 혼침(惛沈) · 도거(掉舉) · 불신(不信) · 해태(懈怠) · 방일(放逸) · 망념(忘念) · 산란(散亂) · 부정지(不正知) · 악작(惡作) · 수면(睡眠) · 심(尋) · 사(伺)이다.

이 모든 심소법에서 다섯 가지는 변행(遍行) 심소이고, 다섯 가지는 별경(別境) 심소이고, 열한 가지는 선(善) 심소이고, 여섯 가지는 번뇌 심소이고, 그 나머지는 수번뇌(隨煩惱)이고, 네 가지는 결정되지 않은 것이다. 

— 《대승오온론》. 2-3쪽. 한글본}

 

《대승오온론》과 《대승광오온론》의 한글 번역본 등에 따르면 각각의 마음작용의 한자 명칭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51가지 마음작용의 한글 번역 명칭

변행심소(遍行心所: 5가지)

(1) 촉(觸): 접촉,  (2) 작의(作意): 작의, 마음을 일으킴, 기억을 일으킴,  (3) 수(受): 감수작용, 지각

(4) 상(想): 표상작용,  (5) 사(思): 의사, 의지, 추진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6) 욕(欲): 희망, 욕구,  (7) 승해(勝解): 확실한 이해,  (8) 염(念): 관, 정념, 4념처

(9) 삼마지(三摩地): 대상과 하나됨, 선정과 삼매,  (10) 혜(慧): 택법, 지혜

선심소(善心所: 11가지)

(11) 신(信): 믿음, 청정,  (12) 참(慚): 부끄러워함,  (13) 괴(愧): 뉘우침,  (14) 무탐선근(無貪善根): 염착이 없음

(15) 무진선근(無瞋善根): 자애로움, 자(慈), 사랑,  (16) 무치선근(無癡善根): 어리석지 않음, 바른 앎, 바른 실천

(17) 정진(精進): 정진,  (18) 경안(輕安): 조화롭고 가뿐함, 평안,, (19) 불방일(不放逸): 성실

(20) 사(捨): 고요, 평정,  (21) 불해(不害): 해치지 않음, 비(悲), 연민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22) 탐(貪): 탐착,  (23) 진(瞋): 손해를 입히는 것을 좋아함, (24) 만(慢): 오만,  (24.1) 만(慢): 만

(24.2) 과만(過慢): 과만,  (24.3) 만과만(慢過慢): 만과만,  (24.4) 아만(我慢): 아만,  (24.5) 증상만(增上慢): 증상만

(24.6) 비만(卑慢): 비만,  (24.7) 사만(邪慢): 사만,  (25) 무명(無明): 무명, 무지(無智),  (26) 견(見): 그릇된 견해

(26.1) 살가야견(薩迦耶見): 살가야견,  (26.2) 변집견(邊執見): 변집견,  (26.3) 사견(邪見): 사견

(26.4) 견취(見取): 견취,  (26.5) 계금취(戒禁取): 계금취,  (27) 의(疑): 의심, 주저함, 미룸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

(28) 분(忿): 분노, 비난과 성냄,  (29) 한(恨): 원한,  (30) 부(覆): 숨김,  (31) 뇌(惱): 괴롭힘,  (32) 질(嫉): 질투

(33) 간(慳): 아까워함, 인색,  (34) 광(誑): 속임,  (35) 첨(諂): 아첨, 심곡,  (36) 교(憍): 교만,  (37) 해(害): 해침

(38) 무참(無慚): 부끄러워하지 않음,  (39) 무괴(無愧): 뉘우치지 않음,  (40) 혼침(惛沈): 몽매함

(41) 도거(掉舉): 고요하지 않음,  (42) 불신(不信): 믿지 않음,  (43) 해태(懈怠): 게으름

(44) 방일(放逸): 노는 것, 불성실,  (45) 망념(忘念): 관을 놓침, 정념을 놓침, 4념처를 놓침

(46) 산란(散亂): 마음의 분산,  (47) 부정지(不正知): 바르게 알지 못함, 바르지 않은 앎, 오염된 앎

불결정심소(不決定心所: 4가지)

(48) 악작(惡作): 후회, 추회,  (49) 수면(睡眠): 잠, 흐릿함, 비활동적임

(50) 심(尋): 대강의 모습을 분별함,  (51) 사(伺): 정밀하게 살펴봄

 

소의·능의 분별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마음작용의 각각의 법들과 다른 법들 간에는 다음과 같은 소의(所依) · 능의(能依) 관계가 성립된다. 소의는 능의의 의지처, 근거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법을 뜻하고, 능의는 소의를 근거 또는 바탕으로 하여 작용하는 법을 뜻한다. 

51가지 마음작용과 다른 법들과의 소의 · 능의 관계

변행심소(遍行心所: 5가지)

(1) 촉(觸) → 수(受),  (2) 작의(作意) → 갖가지 마음과 마음작용,  (3) 수(受) → ?

(4) 상(想) → ?,  (5) 사(思) → 선 · 불선 · 무기의 추진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6) 욕(欲) → 정진(精進),  (7) 승해(勝解) → ?,  (8) 염(念) → 불산란(不散亂), 즉 삼마지(三摩地: 선정과 삼매)

(9) 삼마지(三摩地) → 지혜[智, 즈냐나],  (10) 혜(慧) → 의(疑)를 끊음

선심소(善心所: 11가지)

(11) 신(信) → 욕(欲),  (12) 참(慚) → 악행을 막고 그침,  (13) 괴(愧) → 악행을 막고 그침

(14) 무탐선근(無貪善根) → 악행을 일으키지 않음,  (15) 무진선근(無瞋善根) → 악행을 일으키지 않음

(16) 무치선근(無癡善根) → 악행을 일으키지 않음,  (17) 정진(精進) → 선법을 완전히 성취함

(18) 경안(輕安) → 장애를 제거함,  (19) 불방일(不放逸) → 정행(正行),  (20) 사(捨) → 정행(正行)

(21) 불해(不害) → 불손뇌(不損惱)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22) 탐(貪) → 고(苦)를 낳음,  (23) 진(瞋) → 불안온(不安隱)과 악행,  (24) 만(慢) → ?,  (24.1) 만(慢)

(24.2) 과만(過慢) → ?,  (24.3) 만과만(慢過慢) → ?,  (24.4) 아만(我慢) → ?,  (24.5) 증상만(增上慢) → ?

(24.6) 비만(卑慢) → ?,  (24.7) 사만(邪慢) → 존중이 생기지 않게 함,  (25) 무명(無明) → 의(疑),  (26) 견(見)

(26.1) 살가야견(薩迦耶見) → 나머지 4견,  (26.2) 변집견(邊執見) → 중도와 출리(出離)를 장애

(26.3) 사견(邪見) → 선근을 끊고 불선근을 견고히 함, 불선을 낳고 선을 낳지 않음

(26.4) 견취(見取) → 선근을 끊고 불선근을 견고히 함, 불선을 낳고 선을 낳지 않음

(26.5) 계금취(戒禁取) → 헛된 노력과 고행,  (27) 의(疑) → 선법을 낳지 않음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

(28) 분(忿) → 폭력,  (29) 한(恨) → 불인(不忍),  (30) 부(覆) → 불안온(不安隱)

(31) 뇌(惱) → 불안온(不安隱) · 비복(非福: 박복함) · 악명,  (32) 질(嫉) → 우고(憂苦: 근심과 괴로움)

(33) 간(慳) → 무염족(無厭足),  (34) 광(誑) → 사명(邪命: 삿된 생활, 그릇된 생활)

(35) 첨(諂) → 바른 가르침과 꾸짖음을 장애함,  (36) 교(憍) → 선근의 소모,  (37) 해(害) → 폭력

(38) 무참(無慚) → 모든 번뇌를 조력함,  (39) 무괴(無愧) → 모든 번뇌를 조력함,  (40) 혼침(惛沈) → 모든 번뇌

(41) 도거(掉舉) → 사마타(奢摩他) 즉 지(止)를 장애,  (42) 불신(不信) → 해태(懈怠: 게으름)

(43) 해태(懈怠) → 정진을 장애,  (44) 방일(放逸) → 불선법의 증대와 선법의 감소

(45) 망념(忘念) → 산란(散亂),  (46) 산란(散亂) → 이욕(離欲)을 장애,  (47) 부정지(不正知) → 계율을 어김

불결정심소(不決定心所: 4가지)

(48) 악작(惡作) → ?,  (49) 수면(睡眠) → 과실(過失: 허물, 잘못)

(50) 심(尋) → 낙촉(樂觸) · 고촉(苦觸) 등의 촉(觸),  (51) 사(伺) → ?

 

개별 법의 설명 (51가지)

아래 목록은 《대승오온론》과 《대승광오온론》에 나타난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으며, 해당 정의와 설명도 이 두 논서에 따른 것이다. 《대승광오온론》이라고 언급하지 않은 경우 해당 정의 또는 설명은 《대승오온론》에 따른 것이다.

변행심소(遍行心所: 5가지)

(1) 촉(觸)

 3화분별변이(三和分別變異), 근(根), 경(境), 식(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촉(觸, 접촉, 3사화합 · 분별 · 변이, 산스크리트어: sparśa, 영어: contact)은 3화합분별(三和合分別)을 자성[性, 본질적 성질]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3화합(三和合)이란 근 · 경 · 식이 화합하는 것 즉 이들 3가지가 서로 접촉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안근과 색경과 안식이 화합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러한 종류의 갖가지 화합 즉 3화합으로부터 갖가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과 마음작용이 발생[生]하기 때문에 이러한 화합을 촉(觸)이라고 이름한다. 촉(觸)의 본질적 작용[業]은 수(受: 지각, 느낌, 감수작용)의 마음작용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2) 작의(作意)

작의(作意, 마음을 일으킴, 기억을 일으킴, 주의, 유의, 발동과 유지, 산스크리트어: manasikara, 영어: attention, act of attention, ego-centric demanding)는 마음으로 하여금 발오(發悟)하게 하는[能令心發悟] 것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발오(發悟)는 마음과 마음작용이 현전(現前)에서 즉 현재 시점에서 경동(警動: 놀라서 움직임)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작의는 마음으로 하여금 발오하게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마음작용으로 하여금 바로 지금 시점에서 경동하게 하는 마음작용이다. 그리고 이렇게 발오 또는 경동되는 마음과 마음작용이란 억념(憶念) 즉 기억을 뜻한다[是憶念義]. 즉 작의는 기억이 현재화되게 하는 마음작용이다.

작의(作意)의 본질적 작용[業]은 마음(여기서는 억념 즉 기억을 뜻함, 즉 의근을 뜻함)을 임지(任持: 맡아서 유지함)하고 반연(攀緣: ~을 의지함, ~을 근거로 하여 일어남)하는 것[任持攀緣心]이다. 달리 말하면, 과거, 즉 축적된 경험의 총체, 즉 의근(意根)을 근거로 하여, 선한 것이건 악한 것이건 혹은 무기의 것이건 갖가지 마음과 마음작용이 현재 시점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 작의의 본질적 작용[業]이다. [15 攀緣(반연): 대경을 의지한다는 뜻. 마음이 제 혼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칡덩굴이 나무나 풀줄기가 없으면 감고 올라가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또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야 일어나는 것처럼 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대경(對境)을 의지하고 일어나니, 이런 경우에 칡덩굴은 나무나 풀을, 노인은 지팡이를, 마음은 대경을 반연 한다. 이 반연은 일체 번뇌의 근본이 됨.]

(3) 수(受)

수(受, 감수작용, 지각, 느낌, 과보의 영납, 산스크리트어: vedanā, 영어: feeling, sensation)는 5온 가운데 수온(受蘊)에 해당하며, 3가지 영납(領納: 감수작용)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17]

[17  어떤 것이 수온인가. 세 가지의 영납(領納: 받아들이어 감각하는 것)을 말하니, 첫째 괴로움이고, 둘째 즐거움이고, 셋째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즐거움이란 사라질 적에 화합의 욕망이 있는 것이고, 괴로움이란 생겨날 적에 분리의 욕망이 있는 것이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이란 이 두 가지 욕망이 없는 것이다]

3가지 영납은 고(苦) · 낙(樂) · 불고불락(不苦不樂)의 3가지 느낌[受]을 말하며,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17] 

고(苦: 괴로움의 느낌)는 일 또는 대상이 생겨날 때 그것과 떨어지려는 욕구가 있는 것[生時有乖離欲]이다.

낙(樂: 즐거움의 느낌)은 일 또는 대상이 사라질 때에 그것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욕구가 있는 것[滅時有和合欲]이다.

불고불락(不苦不樂: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느낌)은 이 2가지 욕구가 없는 것[無二欲]이다.

수(受)는 식(識) 즉 마음의 영납작용[領納, 감수작용, 지각]을 말한다[受謂識之領納]. 안혜의 이러한 해석은 각각의 마음작용을 개별적 실체로 보며 또한 이것들이 비록 마음과 상응하여 함께 작용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음과는 별도의 실체라고 보는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견해와는 차이가 있다. 

(4) 상(想)

상(想, 표상작용, 취상(取像), 취상(取相), 구료상(搆了相), 산스크리트어: saṃjñā, 영어: perception, cognition, conceptualization, distinguishing, idea)은 5온 가운데 상온(想蘊)에 해당하며, 취상(取相: 표상작용) 즉 경계(境界)에 대해 갖가지 상(相)을 취하는 것[於境界取種種相]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23]

[23 상온(想薀)= 모든 대상의 모습을 더욱 뛰어나게 취할 수 있음을 말한다. 더욱 뛰어나게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뛰어난 힘으로 취할 수 있음을 말한다. 마치 힘이 센 것을 힘이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갖가지 경계(境界)에 대해 그 상(相)을 취하는 표상작용[取諸境相]으로서의 상(想)의 마음작용은 '매우 뛰어나다[增勝]'는 특징을 가진다. 그리고 매우 뛰어나다는 것은 강력[大力]하다는 것을 뜻한다.[23] 즉 안혜는 표상작용은 여러 마음작용들 중에서도 특히 그 세력이 강한 것으로 인간의 의식활동에 있어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고 있다. 

(5) 사(思)

사(思, 의사, 의지, 추진, 조작(造作), 짓고 만듦, 산스크리트어: cetanā, 영어: volition, directionality of mind, attraction, urge)는 공덕(功德)과 과실(過失) 그리고 공덕도 과실도 아닌 것에 대해 마음으로 하여금 의업(意業: 정신적 행위)을 짓게[造作] 하는 것[令心造作意業]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27]

[27 사(思), 사유[思]= 공덕과 과실 및 둘 다 아닌 것에 대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작의의 업을 짓게 하는 것을 성질로 한다. 이 성질이 만약 있다면 식이 용을 반연하여 지금 바로 앞에 드러나게 한다. 마치 자석이 쇠를 끌어서 움직이게 하는 것과 같다. 능히 선 · 불선 · 무기심으로 옮기게 하는 것이 행동양식이다

공덕(功德)과 과실(過失) 그리고 공덕도 과실도 아닌 것이란 선 · 불선 · 무기를 말한다.사(思)의 본질적 작용[業]은 선심(善心: 선한 마음) · 불선심(不善心: 악한 마음) · 무기심(無記心: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마음)을 추진(推進)하는 것[能推善不善無記心]이다. 예를 들어, 작의(作意)에 의해 발오(發悟) 또는 경동(警動)된 선한 마음, 악한 마음 또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마음, 혹은 좋은 기억, 나쁜 기억 또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억을 단지 발오 또는 경동된 상태에서 가만히 두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의지를 더하여서 그 마음 또는 기억을 추진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사(思)의 본질적 작용이다.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6) 욕(欲)

욕(欲, 희망, 욕구, 희망의 인발, 산스크리트어: chanda, 영어: intention, interest, desire to act, desire for action, aspiration)은 가애사(可愛事) 즉 애락(愛樂: 사랑스러워하고 즐거워함)할 만한 일 또는 좋아하고 즐거워할 만한 일에 대해 희망(希望: 앞일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고 바람)하는 것[於可愛事希望]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33]

[33 바람[欲]= 좋아하고 즐길 만한 일에 있어서 희망하는 것을 성질로 한다. 좋아하고 즐길 만한 일이란 좋아할 만한 것을 보고 듣는 일 등을 말한다. 이것은 원하여 즐기고 희구한다는 뜻이다. 정진(精進)이 나타나는 행동양식이다]

가애사(可愛事)는 가애락사(可愛樂事) 또는 애락사(愛樂事)라고도 하는데, 즐겨 보고 듣는 것 등의 일[可愛見聞等事]을 말한다. 욕(欲)은 원요희구(願樂希求) 즉 원하고 좋아하고 바라고 구한다는 의미이다. 

욕(欲)의 본질적 작용[業]은 선심소에 속한 마음작용인 정진(精進)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으로, 안혜는 욕(欲)을 욕망 · 탐욕 등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욕 · 욕구 · 희망 등과 같은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7) 승해(勝解)

승해(勝解, 확실한 이해, 뛰어난 이해, 인가와 유지[印持], 산스크리트어: adhimokṣa, adhimoksha, adhimukti, 영어: interest, intensified interest, decision, firm conviction, resolution, approval)는 결정사(決定事) 즉 결정할 일에 대해 요별한 바대로 즉 아는 바대로 인가(印可: 확실하게 확인한 후 승인함)하는 것[於決定事即如所了印可]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결정사(決定事)는 결정경(決定境)이라고도 하는데 5온 등을 말한다.뒤집어 즉 5온 등은 결정사이다. 즉 (불교도라면) 확실히 이해해야 하는 대상이다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승해(勝解) 즉 확실한 이해란 예를 들어 세친(世親)의 5온에 대한 언급을 들 수 있다. 세친은 5온에 대하여 "색온은 마치 물방울[聚沫]과 같고, 수온은 물거품[水泡]과 같고, 상온은 아지랑이[陽炎]와 같고, 행온은 파초(芭蕉)와 같고, 식온은 마치 환영으로 나타나는 대상[幻境]과 같다(色如聚沫 受如水泡 想如陽炎 行如芭蕉 識如幻境)"라고 진술하였는데 이러한 것이 승해(勝解) 즉 확실한 이해 또는 뛰어난 이해에 해당한다. 또한, 이 예처럼 갖가지 법의 자상(自相) 즉 본질적 성질에 대해 결정하는 것[生決定]도 승해(勝解) 즉 확실한 이해 또는 뛰어난 이해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결정(決定)이란 인지(印持: 새기고 유지함, 즉 도장 찍듯이 마음에 확실히 이해를 새긴 후 그 이해를 상실하지 않고 유지함)를 의미한다. 

승해(勝解) 즉 확실한 이해 또는 뛰어난 이해의 본질적 작용[業]은 다른 것들을 끌어올 필요가 없게 하는 것[餘無引轉]이다. 즉 아주 확실한 또는 아주 뛰어난[增勝] 이해이기 때문에 다른 이해를 끌어올 필요가 없는 것[餘所不能引: 문자 그대로는 '나머지 다른 것들을 끌어올 수가 없음']이다. 어떤 법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면, 그 법의 자상(自相)에 대한 다른 이해, 설명 또는 논설을 끌어와야 하며, 그렇게 하여 확실한 이해가 생기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8) 염(念)

염(念, 관, 정념, 4념처, 끊임없는 수동적 관찰, 명기(明記)와 불망(不忘), 주의집중, 불산란, 산스크리트어: smṛti, 영어: mindfulness, awareness, inspection, recollection, retention, memory)은 관습사(串習事) 즉 관습적인 일 즉 이미 만났던 적이 있는 일 또는 예전에 익힌 일에 대해 마음으로 하여금 잊지 않고 분명히 기억하게 하는 것[令心不忘明記]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43]

[43 "무엇을 정신집중[念]이라고 하는가? 버릇 들고 교육된 일을 마음에 잊지 않고 분명히 기억하는 것을 성질로 한다. 버릇 들고 교육된 일이란 이미 익힌 행동을 말한다. 산란하지 않음이 나타나는 행동양식이다.]

관습사(串習事)는 동음이철의 다른 한자어로 관습사(慣習事)라고도 하는데, '이미 익힌 행[曾所習行]' 즉 '이미 경험한 또는 이미 되풀이 되고 있는 또는 이미 익숙한 행'을 말한다.

염(念, 끊임없는 수동적 관찰, 주의집중)의 본질적 작용[業]은 불산란(不散亂) 즉 삼마지(三摩地: 선정과 삼매)의 마음작용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즉 염(念) 즉 '관습사에 대해 분명히 기억한다는 것'은 이미 익숙한 것, 예를 들어 5온 등에 대해 이미 익숙한 것이므로 잊어버리거나[忘] 분명한 기억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 잊어버리지 않고[不忘] 분명한 기억을 가지는[明記] 것 즉 그것들에 대해 '수동적 주의집중 또는 관찰'을 끊임없이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즉, 8정도 가운데 정념(正念) 또는 37도품 가운데 4념처를 뜻한다. 

(9) 삼마지(三摩地)

삼마지(三摩地, 심일경, 대상과 하나됨, 전일(專一), 선정과 삼매, 산스크리트어: samādhi, ekāgratā, 영어: concentration, one-pointedness, unification, unification of mind)는 소관사(所觀事) 즉 관찰해야 할 일에 대해 마음으로 하여금 대상과 하나가 되어 산란하지 않게 하는 것[令心一境不散]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47]

[47 삼마지(三摩地)= 관(觀)함에서 마음이 한 대상에 머무는 것[心一境性]을 말한다. 관하는 일이란 5온 등과 무상함 · 괴로움 · 공 · 무아 등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는 것이다. 마음이 한 대상에 머문다는 것은 여기에 오로지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지혜가 나타나는 행동양식이다. 마음이 정(定)에 있기 때문에 여실하게 요별하여 안다]

소관사(所觀事) 즉 관찰해야 할 일 또는 관찰해야 할 대상이란 5온 등과 무상 · 고 · 공 · 무아를 비롯한 4제 16행상 등을 말한다.

심일경(心一境) 즉 '마음[心]이 대상[境]과 하나가 되는[一] 것'이란 전주(專注: 오직 한 곳으로 부음, 즉 마음과 힘을 모아 오직 한 곳에 완전한 몰입)를 뜻한다.

삼마지(三摩地, 대상과 하나됨, 선정과 삼매)의 본질적 작용[業]은 지혜[智, 산스크리트어: jñāna, 즈냐나]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마음이 선정에 들면 즉 어떤 대상과 하나가 되면 해당 대상을 여실(如實)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由心定故 如實了知]. 

(10) 혜(慧)

혜(慧, 반야, 택법, 간택, 식별, 지혜, 의심을 끊음, 산스크리트어: prajñā, 영어: wisdom, discrimination, discernment)는 소관사(所觀事)에 대해 택법(擇法)하는 것[於彼擇法]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혜(慧)는 이치에 맞게 택법하기도 하도, 이치(理致)에 맞지 않게 택법하기도 하며, 혹은 이치에 맞는 것도 맞지 않는 것도 아니게 택법하기도 한다.[49][50][51][52]

[50   혜(慧)= 저것에 대해 (자상과 공상 등의) 법을 간택하는 것을 자성으로 삼는 것이니, 혹은 이치에 맞게 끌어온 것이고, 또는 이치에 맞지 않게 끌어온 것이고, 또는 둘 다 아닌 경우로 끌어 온 것에 대하여 관하는 것을 말한다. 법을 선택함이란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서 지혜로 골라내어 결정을 얻기 때문이다. 이치에 맞게 끌어온 것이란 부처님의 제자들을 말한다. 이치에 맞지 않게 끌어온 것이란 모든 외도들을 말한다. 둘 다 아닌 경우로 끌어온 것이란 나머지 중생이다. 의혹을 끊는 것을 행동양식으로 한다. 지혜는 능히 모든 법들 가운데서 능히 결정을 얻기 때문이다]

택법(擇法)은 갖가지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지혜[慧]로써 간택(簡擇)하여 결정(決定)을 득하는 것이다. 그 결정(決定)이란 인지(印持: 도장 찍듯이 마음에 확실히 이해를 새긴 후 그 이해를 상실하지 않고 유지함)를 의미한다.

여리소인(如理所引: 이치에 맞게 이끌어냄) 즉 이치[理]에 맞게 택법하는 것은 불제자(佛弟子)들의 택법 즉 지혜[慧]를 뜻하고, 불여리소인(不如理所引: 이치에 맞지 않게 이끌어냄) 즉 이치에 맞지 않게 택법하는 것은 여러 외도(外道)들의 택법 즉 지혜[慧]를 뜻하고, 구비소인(俱非所引: 둘 다 아니게 이끌어냄) 즉 이치에 맞는 것도 맞지 않는 것도 아니게 택법하는 것은 나머지 중생들의 택법 즉 지혜[慧]를 뜻한다. 

혜(慧)의 본질적 작용[業]은 근본번뇌에 속하는 의(疑: 의심), 번뇌를 끊는 것이다. 이것은 혜(慧)의 마음작용이 능히 간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갖가지 법들 가운데서 결정(決定)을 획득하고 성취하기 때문이다.

 

선심소(善心所: 11가지)

(11) 신(信)

신(信, 믿음, 인가, 청정, 희망, 산스크리트어: śraddhā, 영어: faith)은 업(業) · 과(果) · 진리[諦] · 보배[寶]에 지극히 바르게 계합하고 따르는 것[極正符順] 또는 깊이 바르게 계합하고 따르는 것[深正符順]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업(業) · 과(果) · 진리[諦] · 보배[寶]에 지극히 바르게 계합하고 따르는 것을 가능하게 하거나 그렇게 계합하고 따를 때의 '마음의 청정 상태[心淨]' 즉 '청정한 마음[心淨]'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업(業)은 복업(福業: 욕계의 선업) · 비복업(非福業: 욕계의 불선업) · 부동업(不動業: 색계 · 무색계의 선업)의 복등3업(福等三業)을 뜻한다.

과(果)는 수다원과 · 사다함과 · 아나함과 · 아라한과의 4과(四果)를 뜻한다. 

진리[諦]는 고제 · 집제 · 멸제 · 도제의 4성제(四聖諦)를 뜻한다.

보배[寶]는 불보 · 법보 · 승보의 3보(三寶)를 뜻한다. 

업(業) · 과(果) · 진리[諦] · 보배[寶]와 지극하게 서로 계합하고 따르는 상태[極相符順], 즉 신(信, 믿음)을 또한 청정(清淨)이라 한다. 또한, 신(信, 믿음, 청정)은 선업(善業) · 과(果) · 진리[諦] · 보배[寶]와 지극하게 서로 계합하고 따르는 상태[極相符順]를 희구(希求)하는 것 즉 바라고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信, 믿음, 청정)의 본질적 작용[業]은 별경심소에 속한 욕(欲: 희망, 욕구)의 마음작용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12) 참(慚)

참(慚, 부끄러워함, 자신에게 부끄럽게 여김, 숭중현선(崇重賢善), 산스크리트어: hrī,영어: self-respect, conscientiousness, sense of shame, dignity, respect)은 자증상(自增上)과 법증상(法增上)을 말한다. 즉 지은 죄에 대해 자증상과 법증상을 바탕으로 부끄럽게 여김[於所作罪羞恥]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죄(罪)는 과실(過失: 잘못)을 뜻한다. 그리고 죄 또는 과실은 지혜로운 사람[智者]이 염환(厭患: 싫어하고 근심으로 여김)하는 것[所厭患]이다. 과실(過失)의 일반 사전적인 뜻은 '부주의나 태만 따위에서 비롯된 잘못이나 허물' 또는 '조심을 하지 않거나 부주의로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이다. 부끄럽게 여김 즉 수치스러워 함[羞恥]은 (부끄럽게 여긴 그 죄와 동일한 유형의) 갖가지 죄[眾罪]를 짓지 않는 것을 뜻한다.

참(慚)의 본질적 작용[業]은 악행을 막고[防] 그치는[息] 것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이 행한 어떤 악행을 '자신에 대하여 부끄럽게 여기는 것[慚]'은 그 악행을 더 이상 행하지 않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

(13) 괴(愧)

괴(愧, 뉘우침, 부끄러워함, 남에게 부끄럽게 여김, 경거포악(輕拒暴惡), 산스크리트어: apatrāpya,영어: decorum, shame, consideration, propriety, fear)는 세증상(世增上)을 말한다. 즉 지은 죄에 대해 세증상을 바탕으로 남부끄럽게 여김[於所作罪羞恥]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세증상은 타증상(他增上)이라고도 한다.

타증상(他增上)은 타인의 꾸지람[責]과 벌(罰) 그리고 의논(議論: 의견을 주고받음) 등을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러한 두려워함으로 바탕으로, 자신이 지은 죄와 잘못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괴(愧, 뉘우침)의 본질적 작용[業]은 참(慚, 부끄러워함)의 본질적 작용과 동일하다. 즉 악행을 막고[防] 그치는[息] 것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행한 어떤 악행을 '뉘우치는 것 즉 남에 대하여 부끄럽게 여기는 것[愧]'은 그 악행을 더 이상 행하지 않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 

(14) 무탐선근(無貪善根)

무탐선근(無貪善根) 또는 무탐(無貪, 염착이 없음, 집착하지 않음, 산스크리트어: alobha, 영어: purity, non-attachment, without attachment, absence of desire)은 탐(貪: 탐욕, 집착)을 대치(對治)하는 마음작용이다. 마음으로 하여금 탐의 대상을 깊이 염환(厭患)하여 즉 싫어하고 근심으로 여겨 집착이 없게 하는 것[令深厭患無著]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모든 유(有)와 유자구(有資具)에 대해 염착(染著: 오염되이 집착함)하는 것을 탐(貪)이라 한다. 그리고 유(有)는 3유(三有) 즉 3계를 말하고, 유자구(有資具)는 3계에 태어나게 되는 원인[因] 즉 6도윤회를 하게 되는 원인을 말한다. 

탐(貪)의 마음작용을 대치(對治)하는 마음작용을 무탐(無貪)이라 한다. 무탐(無貪)은 유(有)와 유자구(有資具)에 대해 염착(染著: 오염되이 집착함)이 없다는 의미이다. 

염환(厭患) 즉 싫어하고 근심으로 여기는 것은 생사(生死)의 모든 과실(過失)에 대한 변지(遍知, 두루 철저하게 아는 것)를 말한다. 이러한 변지(遍知)가 있을 때 유(有)와 유자구(有資具)에 대해 일어나는 염환(厭患), 즉 바로 그 싫어함과 근심으로 여김을 말한다. 싫어하고 근심으로 여기는, 염환(厭患)은 윤회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악행과 그 악행에 의해 결과되는 윤회의 인과관계를 '완전하게 아는 것[遍知]'이고 또한 이러한 앎의 상태에서 발견되는 '윤회와 그 원인에 대한 싫어함과 근심으로 여김'이다 무탐선근(無貪善根) 또는 무탐(無貪)의 본질적 작용[業]은 '악행을 일으키지 않는 것[惡行不起]'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15) 무진선근(無瞋善根)

무진선근(無瞋善根) 또는 무진(無瞋, 자애로움, 자(慈), 사랑, 성내지 않음, 노여워하지 않음, good will, non-aggression, non-hatred, imperturbability, non-anger, absence of hatred)은 진(瞋: 성냄)을 대치(對治)하는 마음작용이다. 자(慈: 자애로움, 자애로운 마음)를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무진(無瞋) 또는 자(慈: 자애로움, 자애로운 마음)는 중생에게 손해(損害)를 끼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손해(損害)의 뜻은 '줄임과 해침' 또는 '잃게 함과 해롭게 함'이며, 사전적인 정의는 '가지고 있거나 누릴 수 있는 물질이나 행복 등을 잃게 하거나 빼앗음으로써 좋지 않은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이다. 무진(無瞋, 자애로움)의 본질적 작용[業]은 무탐(無貪, 염착이 없음)의 본질적 작용과 동일하며 '악행을 일으키지 않는 것[惡行不起]'의 소의(所依),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16) 무치선근(無癡善根)

무치선근(無癡善根) 또는 무치(無癡, 어리석지 않음, 바른 앎, 결택, 명료하게 이해함, wisdom, non-delusion, non-bewilderment, lack of naivety, lack of stupidity)는 치(癡: 어리석음, 무명, 무지)를 대치(對治)하는 마음작용이다. 여실정행(如實正行) 즉 여실한 정행 즉 진실한 이치에 계합하는 바른 행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여실(如實) 즉 진실한 이치, 좁은 뜻으로는 4성제와 계합하는 것을 뜻하고 넓은 뜻으로는 12연기와 계합하는 것을 뜻한다.

무치(無癡) 즉 어리석지 않음은 정지(正知) 즉 바른 앎과 같은 말이다. 

정지(正知) 즉 바른 앎, 즉 무치(無癡) 즉 어리석지 않음이란 여실(如實)에 실천[行]을 더한 것이다.  4성제와 12연기를 실천[加行]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바른 앎 또는 어리석지 않음이 '이해'나 '생각'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의해 획득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정행(正行) 즉 바른 실천이 곧 정지(正知) 즉 바른 앎의 원인이며 나아가 정지(正知) 즉 바른 앎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오온론》에서는 무치(無癡: 어리석지 않음) 또는 정지(正知: 바른 앎)의 본질적 성질이 '여실정행(如實正行)' 즉 진실한 이치에 계합하는 바른 실천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행 즉 바른 실천은 8정도 또는 6바라밀 등을 말한다. 

무치(無癡, 어리석지 않음, 바른 앎)의 본질적 작용[業]은 무탐(無貪, 염착이 없음)과 무진(無瞋, 자애로움)의 본질적 작용과 동일하다. 즉 '악행을 일으키지 않는 것[惡行不起]'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17) 정진(精進)

정진(精進, 마음의 용맹함, 결단과 인내, diligence, energy, perseverance, enthusiasm, sustained effort)은 해태(懈怠: 게으름)를 대치(對治)하는 마음작용이다. 마음이 선품(善品)에 대해 용한(勇悍: 용맹스럽고 힘참)한 것[心於善品勇悍]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정진(精進)은 피갑(被甲) · 가행(加行) · 무겁약(無怯弱) · 불퇴전(不退轉) · 무희족(無喜足)의 5정진(五精進)을 말하며 또한 이러한 뜻이다. 정진(精進)의 본질적 작용[業]은 선법(善法)을 원만(圓滿)히 즉 완전하게 성취하는 것이다.

(18) 경안(輕安)

경안(輕安, 조화롭고 가뿐함, 고르고 상쾌함, 평안, pliancy, alertness, flexibility, aptitude)은 추중(麤重: 거침과 무거움)을 대치(對治)하는 마음작용이다.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조창(調暢: 고르고 화창함, 순조롭고 화창함, 조화롭고 가뿐함)하게 하여 감능(堪能: 일을 잘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음)하게 하는 것[身心調暢堪能]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몸과 마음의 조양(調暢)과 감능(堪能)이란 10불선행(十不善行) 즉 10악(十惡)를 버리게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안(輕安)의 본질적 작용[業]은 장애[障]를 제거하는 것이다. 경안의 이러한 공능 또는 힘으로 말미암아 마음은 모든 장애를 제거하고 추중(麤重)을 전변시키고 버리게 된다.  

(19) 불방일(不放逸)

불방일(不放逸, 성실, 선법을 닦음, 마음을 방호함, carefulness, concern, conscientiousness, conscious awareness, diligence)은 방일(放逸)을 대치(對治)하는 마음작용이다. 즉 무탐 · 무진 · 무치 · 정진의 마음작용들이 모두 불방일을 의지처로 함으로써 그 결과 마음은 불선법(不善法: 예를 들어, 추중)들을 버리게 되고 또한 그 불선법(不善法: 예를 들어, 추중)들을 대치하는 선법(善法: 예를 들어, 경안)들을 닦게 된다.

탐(貪) · 진(瞋) · 치(癡) · 해태(懈怠)를 통칭하여 방일(放逸: 불성실, 노는 것)이라고 한다. 즉, 방일(放逸)에 의해 이들 번뇌가 일어난다. 그리고 불방일은 이 번뇌들 즉 방일을 대치(對治)한다는 뜻이며 이러한 이유로 '불(不)'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여 불방일이라 명명한 것이다. 즉, 무탐 · 무진 · 무치 · 정진의 4가지 법에 의지하여 불선법을 대치하고 선법을 닦고 익히게 하는 어떤 실재하는 마음작용이 있는데 이 마음작용을 방일의 반대라는 의미로 즉 방일을 대치한다는 의미로 불방일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불방일(不放逸)의 본질적 작용[業]은 세간과 출세간의 정행(正行) 즉 바른 실천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20) 사(捨)

사(捨, 내려놓음, 버림, 평등 · 정직 · 무공용, 고요, 평정, 평정심, 평온, 균형, 평형, serenity, equilibrium, equanimity, stability, composure, indifference), 무탐 · 무진 · 무치 · 정진의 마음작용들이 모두 이 사(捨)의 마음작용을 의지처로 함으로써 그 결과 마음은 심평등성(心平等性)과 심정직성(心正直性)과 심무발오성(心無發悟性)을 획득하고 소유하게 된다. 또한, 이 사(捨)의 마음작용을 의지처로 함으로써 마음은 이미 제거하고 떨쳐버린 염오법(染污法) 가운데서 오염됨이 없이 안주(安住)할 수 있다.

사(捨)는 무탐 · 무진 · 무치 · 정진의 마음작용을 근거로 하여 획득하는 심평등성(心平等性)과 심정직성(心正直性)과 심무공용성(心無功用性)을 말한다. 이와 같이 획득된 심평등성(心平等性) · 심정직성(心正直性) · 심무공용성(心無功用性), 즉 사(捨)로 말미암아 마음은 모든 잡염법(雜染法)을 떠나서 청정법(清淨法)에 안주할 수 있다.

심평등성(心平等性) · 심정직성(心正直性) · 심무공용성(心無功用性)은 순서대로 획득되는데, 무탐 · 무진 · 무치 · 정진에 의지하여 수행해 가는 중, 사(捨)의 첫 번째 단계인, 혼침(昏沈)과 도거(掉擧)의 모든 과실(過失)을 멀리 떠난 상태[遠離昏沈掉舉諸過失]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것이 심평등(心平等) 또는 심평등성(心平等性)을 획득한 것이다.

그후 다시 무탐 · 무진 · 무치 · 정진에 의지하여 수행해 가는 중에, 사(捨)의 두 번째 단계인, 마음대로 움직여지고 억지로 애씀이 없는 상태[任運無勉勵]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것이 심정직(心正直) 또는 심정직성(心正直性)을 획득한 것이다.

그런 후, 다시 무탐 · 무진 · 무치 · 정진에 의지하여 수행해 가는 중에 어느 날, 사(捨)의 세 번째 단계이자 마지막 단계인, 무공용(無功用)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것이 심무공용(心無功用) 또는 심무공용성(心無功用性)을 획득한 것이다.

사(捨, 고요, 평정, 평온)의 본질적 작용[業]은 불방일(不放逸, 성실)의 본질적 작용과 동일하다. 즉 세간과 출세간의 정행(正行) 즉 바른 실천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21) 불해(不害)

불해(不害, 아힘사, 해치지 않음, 비(悲), 불손뇌(不損惱), 연민, 비폭력, no harm, non-violence)는 해(害: 해침, 해치려는 마음)를 대치(對治)하는 마음작용이다. 비(悲: 연민)를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비(悲: 연민, 연민의 마음)를 자성으로 하기 때문에, 군생(群生: 중생)을 해치지 않는 것 즉 불해(不害)이다. 그리고 불해(不害)는 무진(無瞋, 자애로움, 자애로운 마음)의 마음작용의 '특수한 경우[分]'이다. 

불해(不害)의 본질적 작용[業]은 불손뇌(不損惱) 즉 '손해를 입히지 않는 것 즉 좋지 않은 상태가 되게 하지 않는 것[不損]'과 '괴롭히지 않는 것[不惱]'이다.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번뇌심소에 속한 마음작용들은 구생기 번뇌와 분별기 번뇌로 구분할 수 있다. 견(見)의 마음작용의 세부 구분인 5견(五見) 중 사견(邪見)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의 3견과 의(疑)의 마음작용에는 오로지 분별기 번뇌만이 있다. 그리고 번뇌심소에 속한 나머지 모든 마음작용들 즉 탐(貪) · 진(瞋) · 만(慢: 7가지) · 무명(無明)과 5견(五見) 중 살가야견(薩迦耶見) · 변집견(邊執見)에는 구생기 번뇌도 있고 분별기 번뇌도 있다. 이를 목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세부적으로는 16가지)의 구생기 · 분별기 구분

탐(貪) - 구생기와 분별기 / 진(瞋) - 구생기와 분별기 / 만(慢): 7만(七慢) / 만(慢) - 구생기와 분별기

과만(過慢) - 구생기와 분별기/ 만과만(慢過慢) - 구생기와 분별기 / 아만(我慢) - 구생기와 분별기

증상만(增上慢) - 구생기와 분별기/ 비만(卑慢) - 구생기와 분별기 / 사만(邪慢) - 구생기와 분별기

무명(無明) - 구생기와 분별기

견(見): 5견(五見)

살가야견(薩迦耶見) - 구생기와 분별기 / 변집견(邊執見) - 구생기와 분별기 / 사견(邪見) - 분별기

견취(見取) - 분별기 / 계금취(戒禁取) - 분별기 / 의(疑) - 분별기

(22) 탐(貪)

탐(貪, 3계의 애(愛), 미착, 탐착, lust, attachment, craving)은 5취온을 염애(染愛: 오염된 좋아함)하여 탐착(耽著: 그릇된 몰입과 들러붙음; 탐은 깊이 빠져서 열중하여 즐기는 것, 착은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것)하는 것[於五取蘊染愛耽著]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탐(貪)에는 구생기 탐(俱生起貪)과 분별기 탐(分別起貪)이 2종류가 있다.

한편, 욕전탐(欲纏貪: 3계 가운데 욕계에 매인 탐, 욕계에 속한 탐, 욕계의 탐)과 진(瞋: 진 즉 유정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작용은 오직 욕계에만 있음)과 욕전무명(欲纏無明: 3계 가운데 욕계에 매인 무명, 욕계에 속한 무명, 욕계의 무명)을 3불선근(三不善根)이며, 탐불선근(貪不善根)은 3계의 탐(貪)이 아니라 욕계의 탐(貪)만을 가리키며, 진불선근(瞋不善根)의 경우 진(瞋)은 욕계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진(瞋) 그 자체를 가리키며, 치불선근(癡不善根)은 3계의 무명(無明)이 아니라 욕계의 무명(無明)만을 가리킨다.

5취온을 염애하여 탐착(耽著)하는 것 즉 탐(貪)은 전박(纏縛)이다. 즉 얽어맴[纏]이고 속박[縛]이다. 즉 '3계를 윤회하는 것' 즉 속박의 상태이다. 탐(貪)의 본질적 작용[業]은 고(苦)를 낳는 것이다. 즉, 애(愛: 12연기의 제8지분) 즉 염애(染愛: 오염된 좋아함)의 힘에 의해 고(苦) 즉 순대고취(純大苦聚: 괴로움 뿐인 큰 무더기, 순전히 큰 괴로움의 무더기) 즉 5취온(五取蘊) 즉 취(取: 12연기의 제9지분)가 생겨난다. 

(23) 진(瞋)

진(瞋, 미워함, 성냄, 노여워함, 상처입히고 해치는 것을 좋아함, ill will, anger, repugnance, hatred)은 요작손해(樂作損害) 즉 유정(有情)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좋아함[於有情樂作損害]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진(瞋)에는 2종류가 있다. 즉 구생기 진(俱生起瞋)과 분별기 진(分別起瞋)이 있다. 

진(瞋)의 자성 즉 본질적 성질[性]은 군생(群生: 중생)에게 손해(損害)를 입히는 것이며, 본질적 작용[業]은 불안온(不安隱: 평온하지 않음)에 머무는 것과 악행(惡行)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불안온은 손해(損害: 좋지 않은 상태)인데, 그 이유는 스스로 고(苦: 괴로움)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해(損害)의 뜻은 '줄임과 해침' 또는 '잃게 함과 해롭게 함'이며, 일반적인 정의는 '가지고 있거나 누릴 수 있는 물질이나 행복 등을 잃게 하거나 빼앗음으로써 발생된 좋지 않은 상태' 또는 '그러한 좋지 않은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이다. 

(24) 만(慢)

만(慢, 거만, 자만, 오만, 고거심, pride, arrogance, conceit)은 다음의 7만(七慢)을 말한다. 

만(慢) 즉 7만(七慢)의 2종류, 구생기 7만(俱生起七慢)과 분별기 7만(分別起七慢)이 있다. 

(24.1) 만(慢) 만(慢, arrogance)은 자기보다 열등한 이에 대해 자기가 뛰어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자기와 동등한 이에 대해 자기와 동등하다고 생각하여 고거심(高舉心)을 일으키는 것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24.2) 과만(過慢,  exaggerated arrogance)

(24.3) 만과만(慢過慢, outrageous arrogance)은 자기보다 뛰어난 이에 대해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고거심(高舉心)을 일으키는 것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24.4) 아만(我慢, egotistic arrogance)은 5취온을 보고[觀] '나[我]'라고 생각하거나 '내 것[我所]'이라고 생각하여 고거심(高舉心)을 일으키는 것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24.5) 증상만(增上慢, false arrogance, anticipatory arrogance, arrogance of showing off)은 아직 증득하지 못한 뛰어난 법을 자신이 이미 증득했다고 생각하여 고거심(高舉心)을 일으키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대승광오온론》의 증득해야 할 뛰어난 법[增上殊勝所證法]이란 성과(聖果: 보리, 열반, 4과) · 삼마지(三摩地, 삼매) · 삼마발저(三摩缽底, 등지, 4선8정) 등을 말한다. 증상만은 이러한 높은 경지를 증득하지 못하였으면서도 '나는 이미 얻었다'라고 하여 스스로 자부[矜]하며 거만[倨]한 것을 말한다. 

(24.6) 비만(卑慢, modest arrogance, arrogance of thinking small)은 자기보다 뛰어난 이에 대해 자신이 열등하기는 하나 조금 열등하다고 생각하여 고거심(高舉心)을 일으키는 것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24.7) 사만(邪慢, distorted arrogance, perverted arrogance)은 본질적으로 또는 실제로 덕(德)이 없는 법(행위 또는 사물)인데도 덕이 있는 법(행위 또는 사물)이라고 여기는 그릇된 생각에 바탕하여, 자신이 그러한 법(행위 또는 사물)을 가진 상태를 두고 자신이 덕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고거심(高舉心)을 일으키는 것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사만(邪慢)의 본질적 작용[業]은 존중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다. 즉, 사만(邪慢)은 존자(尊者)와 유덕자(有德者: 덕이 있는 사람)에 대해 거만한 마음과 오만한 마음을 일으켜 이들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한다. 

(25) 무명(無明, 어리석음, 우치, 무지(無知), 무지(無智), 무현(無顯), ignorance, delusion, error)은 업(業) · 과(果) · 진리[諦] · 보배[寶]에 대해 무지(無智: 밝게 결택하지 못함)한 것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무명에는 구생기(俱生起)와 분별기(分別起)의 2종류, 즉 구생기 무명(俱生起無明)과 분별기 무명(分別起無明)이 있다.

한편, 욕전탐(欲纏貪: 3계 가운데 욕계에 매인 탐, 욕계에 속한 탐, 욕계의 탐)과 진(瞋: 진 즉 유정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작용은 오직 욕계에만 있음)과 욕전무명(欲纏無明: 3계 가운데 욕계에 매인 무명, 욕계에 속한 무명, 욕계의 무명)을 3불선근(三不善根)이라 하며, 각각 탐불선근(貪不善根) · 진불선근(瞋不善根) · 치불선근(癡不善根)이라 부른다. 탐불선근은 3계의 탐(貪)을 모두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욕계의 탐(貪)만을 가리키며, 진불선근의 경우 진(瞋)은 욕계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진(瞋) 그 자체를 가리키며, 치불선근은 3계의 무명(無明)이 아니라 욕계의 무명(無明)만을 가리킨다.

업(業)은 복업(福業: 욕계의 선업) · 비복업(非福業: 욕계의 불선업) · 부동업(不動業: 색계 · 무색계의 선업)의 복등3업(福等三業)을 뜻한다.

무명은 구생기(俱生起) · 분별기(分別起)의 2종류로 나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에 비해 《대승광오온론》에서는 구생기(俱生起) · 불구생기(不俱生起) · 분별기(分別起)의 3종류로 나뉜다고 말하고 있다. 이 3종 분류에 따르면, 구생기(俱生起)는 금수(禽獸) 즉 새 · 짐승 등의 무명을 말하고, 불구생기(不俱生起)는 탐(貪) 등과 상응한 무명을 말한다. 그리고 분별기(分別起)는 온갖 부정견[見]과 상응한 무명과 허망한 결정[虛妄決定]을 말한다. 무명(無明)의 본질적 작용[業]은 번뇌심소에 속한 의(疑: 의심)의 마음작용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26) 견(見, 그릇된 견해, wrong view)은 살가야견(薩迦耶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의 5견(五見)을 말한다. 5견(五見) 가운데 살가야견 · 변집견에는 2종류, 즉 구생기 살가야견(俱生起薩迦耶見) · 분별기 살가야견(分別起薩迦耶見) · 구생기 변집견(俱生起邊執見) · 분별기 변집견(分別起邊執見)이 있다. 

반면, 나머지 사견 · 견취 · 계금취의 3견에는 오직 분별기의 1종류만이 있다. 즉 분별기 사견(分別起邪見) · 분별기 견취(分別起見取) · 분별기 계금취(分別起戒禁取)만이 있다.

(26.1) 살가야견(薩迦耶見, 유신견, view of individuality, self view, identity view)은 5취온을 보고[觀] '나[我]'라고 생각하거나 '내 것[我所]'이라고 생각하는 염혜(染慧) 즉 염오혜(染污慧)를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살가야견(薩迦耶見)이라는 낱말에서 살(薩, 산스크리트어: sat)은 패괴(敗壞) 즉 깨어지고 부서진다는 뜻이며, 가야(迦耶, 산스크리트어: kāya)는 화합적취(和合積聚) 즉 화합하여 쌓인다는 뜻이다. 따라서, 살가야(薩迦耶)는 패괴(敗壞)의 적집(積集) 즉 무상(無常)의 적집 즉 5취온을 뜻한다. 그리고 견(見)은 염오견을 뜻한다. 따라서 살가야견(薩迦耶見)이란 이러한 패괴의 적집 즉 무상의 적집 즉 5취온에 대해서 하나[一]라는 견해를 가지거나, 영원하다[常]는 견해를 가지거나, 다른 온[異蘊: '나'와는 다른 무더기]이라는 견해를 가지거나, 유아온(有我蘊: '내'가 존재하는 무더기)이라는 견해를 가져서 패괴의 적집 즉 무상의 적집 즉 5취온을 '내 것[我所]' 등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또한, 《대승광오온론》의 해설에 따르면, 살(薩, 산스크리트어: sat, 패괴, 깨어지고 부서짐)이라는 낱말은 영원하다는 생각[常想]을 깨뜨리고, 가야(迦耶, 산스크리트어: kāya, 화합적취, 적집)라는 낱말은 하나라는 생각[一想]을 깨뜨린다. 즉, 5취온과 그 구성요소들이 영원하다는 생각을 깨뜨리고, 5취온 구성요소들의 집합이 아니라 구성요소들을 통괄하는 '하나의 별도의 실체'라는 생각을 깨뜨린다. 그리고 무상의 적집[無常積集] 가운데는 '나[我]'와 '내 것[我所]'이 존재하지 않는다.

염혜(染慧) 또는 염오혜(染污慧)는 '번뇌와 함께 하는[煩惱俱]' 지혜[慧], 즉 번뇌에 물든 상태의 지혜를 가리킨다. 

살가야견(薩迦耶見, 유신견)의 본질적 작용[業]은 일체(一切)의 견품(見品) 즉 모든 다른 형태 또는 유형의 염오견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즉 5견 중 나머지 4견,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는 모두 살가야견을 근거로 하여 성립된 오염된 견해들, 즉 염혜(染慧) 또는 염오혜(染污慧)이다.

(26.2) 변집견(邊執見, 극단적인 견해, 단견과 상견, extreme views, extreme view)은 살가야견의 증상력(增上力: 뛰어난 힘 또는 역량), 살가야견의 극단적인 경우로서 5취온을 보고[觀] 영원한 것[常]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단멸되는 것[斷]이라고 생각하는 염혜(染慧) 즉 염오혜(染污慧)를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5취온이 영원한 것이라는 극단적인 견해, 즉 상견(常見)은 나[我, 아트만]와 자재(自在: 대자재천 즉 힌두교의 시바신, 힌두교의 3주신 교의에 따르면 시바신은 브라만의 한 측면임)가 편재[遍]하고 영원불멸[常]한 존재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단변(斷邊: 단멸된다는 극단), 즉 5취온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는 극단적인 견해, 즉 단견(斷見)은 마치 깨어진 병에 다시는 물을 담아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작자(作者) · 장부(丈夫) 등이 있어 그들은 죽어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업의 상속과 윤회를 부정하는 유물론적인 견해를 말한다.

변집견(邊執見)의 본질적 작용[業]은 중도(中道)와 출리(出離)를 장애하는 것이다. 

(26.3) 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진리에 어긋난 견해, 인과를 부정하는 견해, false view, evil view)은 원인[因]을 부정[謗, 비방, 무시]하거나, 혹은 결과[果]를 부정하거나, 혹은 작용(作用)을 부정하거나, 혹은 선한 일[善事]을 허물거나 파괴[壞]하는 염혜(染慧) 즉 염오혜(染污慧)를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원인을 부정하는 것에서 원인[因]은 12연기의 12가지 지분 가운데 번뇌(煩惱)와 업(業)의 성질의 지분들인 총 5가지 중 무명(無明) · 애(愛) · 취(取)의 3 지분은 번뇌의 성질이며, 행(行)과 유(有)의 2 지분은 업의 성질이다. 12연기 가운제 제10지분인 유(有)는 아뢰야식의 업종자(業種子)를 말한다. 또한 이 업종자를 업이라고도 하는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고타마 붓다가 아난에게 설한 다음의 성교량(聖教量)에 근거해서이다: "아난아, 만약 업(業)이 능히 미래의 과보를 제공한다면 그것은 또한 유(有)라고도 말한다." 따라서, 원인을 부정하는 것은 무명(無明: 제1지분)이라는 번뇌와 이 번뇌에 의해 야기된 행(行: 제2지분)이라는 업을 부정하는 것과, 또한 애(愛: 제8지분) · 취(取: 제9지분)라는 번뇌와 이들 번뇌들에 의해 야기된 유(有: 제10지분)라는 업을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결과를 부정하는 것에서 결과[果]는 12연기의 12가지 지분 가운데 식(識) · 명색(名色) · 6처(六處) · 촉(觸) · 수(受) · 생(生) · 노사(老死)의 총 7가지 지분을 말한다. 따라서, 결과를 부정하는 것은 7가지 지분의 개별 또는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무명(無明: 제1지분)이라는 번뇌에 의해 야기된 행(行: 제2지분)이라는 업에 의해 식(識: 제3지분) · 명색(名色: 제4지분) · 6처(六處: 제5지분) · 촉(觸: 제6지분) · 수(受: 제7지분)의 5가지 결과가 생겨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애(愛: 제8지분) · 취(取: 제9지분)라는 번뇌에 의해 야기된 유(有: 제10지분)라는 업에 의해 생(生) · 노사(老死)의 결과가 생겨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12연기의 12지분은 크게 원인[因]과 결과[果]로 나뉘고, 원인은 다시 번뇌와 업으로 나뉜다. 달리 말하면, 번뇌와 번뇌의 작용과 동시에 형성되는 업과 업에 의해 생겨나는 결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 분류에 따르면 12지분은 다음과 같이 2그룹으로 분류된다. 

원인

번뇌: ① 무명,  업: ② 행,  결과: ③ 식, ④ 명색, ⑤ 6입, ⑥ 촉, ⑦ 수

원인

번뇌: ⑧ 애, ⑨ 취,  업: ⑩ 유,  결과: ⑪ 생, ⑫ 노사

《대승광오온론》의 해설에 따르면, 원인을 부정하는 것은 선행 · 악행이란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를 말한다. 즉, (윤회의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선행과 악행은 단지 현재 생에만 영향을 미치는 행위일 뿐 미래 생의 과보를 낳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견해를 말한다. 결과를 부정하는 것은 선행 · 악행에 따른 과보를 부정하는 견해를 말한다. 즉 선행에 의해서 즐거운 과보가 악행에 의해서 괴로운 과보가 생긴다는 것을 부정하는 견해를 말한다. 

작용을 부정하는 것은 이 세상[此世]과 저 세상[他世]이 없고, 아버지[父]도 없고 어머니[母]도 없고, 화생(化生)의 중생 즉 천인(天人)도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를 말한다. 즉 선업과 악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견해를 말한다. 즉, 자신이 이 세상으로 다시 윤회하여 태어난 것은 자신이 스스로 지은 업에 따른 것이라고 보지 않아 이 세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탓하거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가족 가운데 태어난 것은 자신이 스스로 지은 업에 따른 것이라고 보지 않고 단지 자신의 부모가 자신을 낳음으로 인해 자신이 태어난 것이라고 보아 자신의 처지에 대해 자신의 부모를 탓하거나, 또는 좋은 업을 쌓아 욕계를 넘어 색계 · 무색계에 태어나는 중생들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선한 일을 허물거나 파괴하는 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저 세상으로 태어나는 작용이 없다고 하는 견해, 종자 즉 원인을 지니고 지속시키는 작용이 없다고 하는 견해, 결생(結生: 수태 시에 중유 즉 바르도에서 모태로 의탁하는 것)과 상속의 작용이 없다고 하는 견해, 또는 세간도 없고 세간을 벗어난 출세간의 아라한도 없다고 하는 견해 즉 세간으로부터 출세간으로 넘어가는 작용이 없다고 하는 견해 등을 말한다. 

사견(邪見)의 본질적 작용[業]은 선근(善根)을 끊고 불선근(不善根)을 견고히 하는 것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불선(不善)을 낳고 선(善)을 낳지 않는 것이다. 

(26.4) 견취(見取, 염오견에 대한 집착, adherence to views, view of attachment to views)는 살가야견 · 변집견 · 사견의 3견(三見)과 이 3견의 의지처인 갖가지 온(蘊)을 보고[觀] 3견 중 특정 견해와 그것의 의지처가 되는 온을 가장 훌륭한 것[最]이라 여기거나, 뛰어난 것[上]이라 여기거나, 혹은 지극한 것[極]이라 여기는 염오혜(染污慧)를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견취(見取)의 본질적 작용[業]은 사견(邪見)의 본질적 작용과 동일하다. 즉 선근(善根)을 끊으며, 불선근(不善根)을 견고히 하는 것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며, 불선(不善)을 낳으며, 선(善)을 낳지 않는 것이다.

(26.5) 계금취(戒禁取, 그릇된 계금에 대한 집착, adherence to observances and rituals, view of rigid attachment to the precepts)는 계율[戒]과 금제[禁]와 이들의 의지처인 갖가지 온(蘊)을 보고[觀] 특정 계율이나 금제 그리고 그것의 의지처가 되는 온을 청정(清淨)이라 여기거나, 해탈(解脫)이라 여기거나, 혹은 출리(出離)라 여기는 염오혜(染污慧)를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계(戒)에 대한 집착'의 계(戒)는 (외도가 설하는 바) 악견(惡見)으로 시작하는 7종의 악[七種惡]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즉, 이 7종의 악을 떠나는 것이 청정 · 해탈 혹은 출리라 여기는 것은 계금취에 속한다. 

'금(禁)에 대한 집착'의 금(禁)은 소 · 개 등의 살생을 금지[牛狗等禁]하거나 스스로 머리카락을 뽑는 것[自拔髮]을 금하는 것 등을 말한다. 즉, 이러한 금제를 지키는 것을 청정 · 해탈 혹은 출리라 여기는 것은 계금취에 속한다. 

소와 개 등의 살생을 위해 세 갈래로 생긴 몽둥이를 드는 것[執三支杖]이나 승거학파[僧佉: 힌두철학의 삼키아학파]의 선정[定]과 지혜[慧] 등은 해탈의 원인이 아닌데, 이런 실천들이 해탈을 증득케 하는 원인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계금취에 속한다. 대자재(大自在: 대자재천, 즉 힌두교의 시바신)를 믿고 따르는 것[計大自在], 혹은 세계의 주[世主]를 믿고 따르는 것[計世主], 혹은 고행으로 물이나 불에 들어가는 것[入水火] 등은 생천(生天: 천계에 태어남)의 원인이 아닌데, 이런 실천들이 생천의 원인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계금취에 속한다. 

'청정(清淨)이라 여긴다'고 할 때의 '청정'이란 위에 열거한 실천들이 해탈 또는 생천을 득하게 하는 무간의 방편(無間方便: 바로 해탈 또는 생천을 득하게 하는 직접적인 수단)이라하여 이러한 실천들을 청정(清淨: 해탈 또는 생천을 가져오는 깨끗한 원인)으로 삼는 견해는 계금취에 속한다.

'해탈(解脫)이라 여긴다'고 할 때의 '해탈'이란 위에 열거한 실천들이 곧 번뇌로부터 해탈이라 여기는 것 또는 번뇌로부터의 해탈을 가져오는 방편이라고 여기는 견해는 계금취에 속한다. 

'출리(出離)라 여긴다'고 할 때의 '출리'란 위에 열거한 실천들이 곧 생사출리(生死出離) 즉 생사(生死: 삶과 죽음, 즉 윤회)를 벗어나는 것[出離] 또는 생사출리를 가져오는 방편이라고 여기는 견해는 계금취에 속한다. 

총괄하면, 계금취(戒禁取) 즉 '계율과 금제에 대한 집착'이란 위에서 해설한 바와 같은 그릇된 견해들을 말한다.

계금취(戒禁取)의 본질적 작용[業]은 아무런 과실[果, 證果]도 가져오지 않는 헛된 노력[唐勞]과 피로한 고행[疲苦]을 행하는 것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계금취(戒禁取)에 속한 실천들은 출고(出苦) 즉 생사윤회의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을 득하게 할 수 없는 방편들이다.

(27) 의(疑, 의심, 망설임, 주저함, 미룸, 진리에 대한 유예, doubt, indecision, skepticism, indecisive wavering)는 4성제 등의 진리[諦等]에 대해 유예(猶豫: 주저함, 미룸)하는 것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의(疑)에는 오직 분별기(分別起)의 1종류만이 있으며 구생기 의(俱生起疑)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疑)의 자성 즉 본질적 성질은 진리[諦]와 보배[寶] 등에 대해 그 존재 유무에 대한 판단 또는 결정을 유예(猶豫: 주저함, 미룸)하는 것이다.

진리[諦]는 고제 · 집제 · 멸제 · 도제의 4성제(四聖諦), 보배[寶]는 불보 · 법보 · 승보의 3보(三寶)를 뜻한다.

의(疑)의 선법(善法)을 낳지 않는 것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 안혜의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20가지 수번뇌심소들 중 몇몇은 탐 · 진 · 치의 3가지 근본번뇌의 개별 또는 다수의 일부분[分] 즉 '특수한 경우[分]'이다. 이를 목록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와 탐 · 진 · 치

분(忿: 분노) - (언급되지 않음) / 한(恨: 원한) - (언급되지 않음) / 부(覆: 숨김) - 치(癡)의 특수한 경우

뇌(惱: 괴롭힘) - (언급되지 않음) / 질(嫉: 질투) - (언급되지 않음) / 간(慳: 아까워함) - 탐(貪)의 특수한 경우

광(誑: 속임) - 탐(貪)의 특수한 경우 / 첨(諂: 아첨) - 탐(貪)과 치(癡)의 특수한 경우/ 교(憍: 교만) - 탐(貪)의 특수한 경우

해(害: 해침) - 진(瞋)의 특수한 경우 / 무참(無慚: 부끄러워하지 않음) - (언급되지 않음)

무괴(無愧: 뉘우치지 않음) - (언급되지 않음)/ 혼침(惛沈: 몽매함) - 치(癡)의 특수한 경우

도거(掉舉: 고요하지 않음) - 탐(貪)의 특수한 경우 / 불신(不信: 믿지 않음) - (언급되지 않음)

해태(懈怠: 게으름) - (언급되지 않음) / 방일(放逸: 노는 것, 불성실) - (언급되지 않음)

망념(忘念: 관찰을 놓침) - (언급되지 않음)/ 산란(散亂: 마음의 분산) - 탐(貪)과 진(瞋)과 치(癡)의 특수한 경우

부정지(不正知: 오염된 지혜) - (언급되지 않음)

(28) 분(忿, 분노, 비난과 성냄, 노여워함, fury, rage, indigation, anger)은 불요익사(不饒益事: 넉넉하고 이롭지 않은 일)를 현전(現前)에서 만날 때 마음으로 하여금 손뇌(損惱: 비난하고 성냄)하게 하는 것[心損惱]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분(忿)의 본질적 작용[業]은 포악한 행위나 채찍이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행위를 행하는 것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29) 한(恨, 원한, 원망, resentment, enmity, vindictiveness)은 원한[怨]을 맺은 후 버리지 않음[結怨不捨]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원한(怨恨, 怨)의 사전적인 뜻은 '원통하고 한되는 생각' 또는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여 응어리진 마음'이다.

한(恨)의 본질적 작용[業]은 불인(不忍) 즉 참지 못하는 것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30) 부(覆, 숨기고 감춤, concealment, slyness-concealment, hypocrisy)는 자신의 죄(罪)를 부장(覆藏: 숨기고 감춤)하는 것[於自罪覆藏]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부(覆)의 자성 즉 본질적 성질은 죄 즉 과실(過失)을 은장(隱藏: 숨기고 감춤)하는 것이다.

죄를 숨기고 감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바른 가르침으로 꾸짖을 때 죄를 드러내지 못한 이유로, 부(覆)는 치(癡: 어리석음)의 '특수한 경우[分]'이다. 부(覆)의 본질적 작용[業]은 추회(追悔: 후회)나 불안온주(不安隱住: 불안온의 상태에 머뭄, 편안하지 못함, 마음이 편치 못함, 불안감)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31) 뇌(惱, 괴롭힘, 사나움, 포악함, 죄사에 대한 견고한 집착, spite, spitefulness, malice, stubbornness)는 포악한 말을 하여 다른 사람을 우저(尤蛆) 하는 것[發暴惡言尤蛆] 즉 포악한 말로써 다른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며 힐책하는 것[發暴惡言尤蛆]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뇌(惱: 괴롭힘)의 자성 즉 본질적 성질은 포악한 말을 하여 남을 능멸하고 죄를 짓는 것이다. 

분(忿: 분노, 비난과 성냄)과 한(恨: 원한)의 마음작용이 먼저 일어난 후에 뇌(惱: 괴롭힘)의 마음작용이 일어난다. 즉, 먼저 어떤 사람에 대해 분과 한의 마음작용이 일어난 후에 다시 그 사람에게 손해(損害: 좋지 않은 상태가 되게 함) 입히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뇌(惱)의 본질적 작용[業]은 우고(憂苦: 근심과 괴로움)와 불안온주(不安隱住: 불안온의 상태에 머뭄, 편안하지 못함, 마음이 편치 못함, 불안감)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며, 또한 비복(非福: 박복함)을 얻게 하며 악명[惡名稱]을 얻게 하는 것이다.

(32) 질(嫉, 시기, 질투, jealousy, envy)은 타성사(他盛事) 즉 남의 잘되는 일에 대해 마음으로 하여금 시기[妒: 시기, 질투]하게 하는 것[於他盛事心妒]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자신의 명리(名利)를 바라기 때문에 타성사(他盛事) 즉 남의 잘되는 일에 대해 참고 견딜 수가 없어서 투기심(妒忌心) 즉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긴다. 질(嫉, 질투)의 본질적 작용[業]은 스스로 우고(憂苦: 근심과 괴로움)에 머무는 것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33) 간(慳, 아까워함, 인색, 희사하지 못함, 베풀지 못함, stinginess, avarice, miserliness, greed)은 보시(布施)와 반대되는 마음작용으로, 마음으로 하여금 인색(吝嗇)하게 하는 것[心吝]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간(慳)이란 재물 등에 대해서 아까워하고 애석해 하기 때문에 베품[惠]과 보시[施]를 행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재물 등과 같은 생활에 도움을 주는 갖가지 물건[利養眾具]에 대해 마음이 두루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에, 간(慳)은 탐(貪)의 '특수한 경우[分]'이다. 간(慳)의 본질적 작용[業]은 무염족(無厭足: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무염족이란 아까워하고 인색하기 때문에 소용없는 물건을 항상 쌓아두는 것을 말한다.

(34) 광(誑, 속임, 미혹시킴, hypocrisy, dishonesty, deception, spirit of deception)은 남을 속이기 위해 진실이 아닌 것[不實事]을 진실인 것처럼 나타내는 것[為誑他詐現不實事]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광(誑)의 자성 즉 본질적 성질은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고[矯] 거짓말을 하여[妄] 사실이 아닌 공덕(功德)을 사실인 것처럼 드러내는 것이다. 광(誑)은 탐(貪)의 '특수한 경우[分]'이다. 광(誑)의 본질적 작용[業]은 8사행 가운데 사명(邪命: 삿된 생활, 그릇된 생활)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35) 첨(諂, 마야, 가장하여 숨김, 심곡, 아첨, pretense, deceit, dissimilation)은 심곡(心曲) 즉 마음의 왜곡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심곡은 자신의 허물[自過]을 부장(覆藏: 덮어 감춤)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편들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첨(諂)은 자신의 허물을 덮어 감추기 위해 마음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왜곡시키게 하는 마음작용이다. 첨(諂)의 자성 즉 본질적 성질은 거짓[矯]으로 방편을 세워 자신의 잘못[過]과 악행[惡]을 숨기는 심곡(心曲: 마음의 왜곡)이다. 말하자면, 첨(諂)은 명리(名利: 명성과 이익)를 위하여 계교를 부리고 집착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첨(諂)은 탐(貪)과 치(癡)의 '특수한 경우[分]'이다. 첨(諂)의 본질적 작용[業]은 바른 가르침과 꾸짖음을 장애하는 것이다. 즉, 죄가 있음에도 스스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참회[懺]하지 못하고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36) 교(憍, 교만, 오염된 기쁨, self-satisfaction, self-infatuation, mental inflation, smugness, conceit)는 자성사(自盛事) 즉 자신의 잘되는 일에 대해 염착(染著)하여 거만[倨傲]해져서 마음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자부하고 믿게 하는 것[心恃]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시(恃) 즉 스스로를 자부하고 믿는 것[恃]이란 자신의 현 상태에 만족하여 더 이상 선업(善業)을 닦으려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교(憍)의 자성 즉 본질적 성질은 성사(盛事: 잘되는 일) 즉 자성사(自盛事: 자신의 잘되는 일)에 대해 염착(染著)하여 거만[倨傲]해져서 능진(能盡: 다 소모함)하는 것이다. 성사(盛事: 잘되는 일) 즉 자성사(自盛事: 자신의 잘되는 일)는 유루(有漏)의 성사 즉 유루의 잘되는 일을 말한다. 염착(染著)하여 거만[倨傲]해지는 것은 염애(染愛: 오염된 애착)에 대해 기뻐하고[悅] 즐기며[豫] 긍지를 가지고[矜] 자부하는[恃] 것을 말한다.

교(憍)는 탐(貪)의 '특수한 경우[分]'이다. 능진(能盡: 다 소모함)은 모든 선근(善根)이 다 소모되어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37) 해(害, 핍박, 해침, 손뇌, hostility, cruelty, intention to harm, spirit of violence)는 여러 유정에게 손뇌(損惱)의 행위들을 하는 것, 즉 여러 유정에게 손해(損害: 좋지 않은 상태가 되게 함)를 입히고 괴롭히는 것[於諸有情損惱]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해(害: 해침)는 진(瞋: 손해를 입히는 것을 좋아함)의 '특수한 경우[分]'이다.

손뇌(損惱: 손해를 입히고 괴롭힘)는 채찍을 휘두르고 몽둥이로 때리는 것[加鞭杖] 등의,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해(害의 본질적 작용[業]은 손뇌(損惱)의 행위들을 하는 것, 즉 폭력을 행사하는 것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38) 무참(無慚, 스스로에게 부끄러워하지 않음, 공경하지 않음, lack of shame, lack of consciousness, consciencelessness, shamelessness, disrespect)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에게 수치스럽게 여기치 않는 것[於所作罪不自羞恥]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무참(無慚)의 본질적 작용[業]은 번뇌심소[煩惱]와 수번뇌심소[隨煩惱]에 속한 마음작용들, 즉 모든 번뇌성의 마음작용들, 즉 모든 번뇌에 대해 조력[助伴]이 되는 것이다.

(39) 무괴(無愧, 남에게 부끄러워하지 않음, 뉘우치지 않음, 두려워하지 않음, lack of propriety, disregard, shamelessness)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남에게 수치스럽게 여기치 않는 것[於所作罪不羞恥他]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무괴(無愧, 뉘우치지 않음)의 본질적 작용[業]은 무참(無慚, 부끄러워하지 않음)의 본질적 작용과 동일하다. 즉 번뇌심소[煩惱]와 수번뇌심소[隨煩惱]에 속한 모든 마음작용들, 즉 모든 번뇌성의 마음작용들, 즉 모든 번뇌에 대해 조력[助伴]이 되는 것이다. 

(40) 혼침(惛沈, 몽매함, 침울함, 어두움, 무거움, 감당할 능력이 없음, 민활하지 못함, lethargy, gloominess, foggymindedness, torpor)은 마음으로 하여금 조양(調暢: 고르고 화창함, 순조롭고 화창함)하지 못하게 하여 감능(堪能: 일을 잘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음)하지 못하게 하고 몽매(蒙昧: 어리석고 어두움)하게 하는 것[無所堪能蒙昧]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혼침(惛沈)은 치(癡)의 '특수한 경우[分]'이다. 

혼침(惛沈)의 본질적 작용[業]은 번뇌심소[煩惱]와 수번뇌심소[隨煩惱]에 속한 모든 마음작용들, 즉 모든 번뇌성의 마음작용들, 즉 모든 번뇌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41) 도거(掉擧, 고요하지 않음, 들뜸, excitement, restlessness, ebullience, flightiness of mind, dissipation)는 마음으로 하여금 부적정(不寂靜: 고요하지 않음, 고요하지 못함)하게 하는 것[心不寂靜]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도거(掉擧, 고요하지 않음)의 자성 즉 본질적 성질은 기쁘고 즐거웠던 일들을 회상하고 기억함[憶念]에 따라 마음이 부적정(不寂靜: 고요하지 않음, 고요하지 못함)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또한 과거의 '즐거웠고 기뻤던 일[遊戲歡笑等事]'을 먼저 회상하고 기억함[憶念]에 의해 마음이 부적정(不寂靜: 고요하지 않음, 고요하지 못함)의 상태, 즉 도거(掉擧, 고요하지 않음)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도거(掉擧)는 치(癡)의 '특수한 경우[分]'이며 도거(掉擧)의 본질적 작용[業]은 사마타(奢摩他) 즉 지(止)를 장애하는 것이다. 

(42) 불신(不信, 믿지 않음, 인가하지 않음, 청정하지 않음, 희망하지 않음, lack of faith, lack of trust, disbelieving a fact, disbelief)은 신(信)에 의해 대치(對治)되는 마음작용으로, 업(業) · 과(果) 등을 바르게 믿고 따르지 않아서[於業果等不正信順] 마음이 청정해지지 않는 것[心不清淨]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불신(不信)의 본질적 작용[業]은 수번뇌심소에 속한 해태(懈怠: 게으름)의 마음작용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43) 해태(懈怠, 게으름, 책려하지 않음, 노력하지 않음, laziness, slothfulness, spiritual sloth, idleness)는 정진(精進)에 의해 대치(對治)되는 마음작용으로, 갖가지 선품(善品)에 대해 마음이 용맹스럽지 않은 것[於諸善品心不勇猛]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해태(懈怠)의 본질적 작용[業]은 갖가지 선법(善法)을 근면하게 닦는 것을 장애하는 것이다. 

(44) 방일(放逸, 노는 것, 불성실, 포기, 선법을 닦지 않음, 마음을 방호하지 않음, heedlessness, carelessness, unconcern, non-diligence)은 탐(貪: 탐욕, 집착) · 진(瞋: 성냄, 손해입힘을 좋아함) · 치(癡: 어리석음) · 해태(懈怠: 게으름)로 말미암아 마음이 갖가지 번뇌를 막아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것[於諸煩惱心不防護]과 갖가지 선품(善品)을 닦지 못하는 것[於諸善品不能修習]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방일(放逸)의 본질적 작용[業]은 불선법(不善法)은 증대되고 선법(善法)은 감소되게 하는 것이다. 

(45) 망념(忘念, 실념, 염오념, 그릇된 염, 오염된 염, 관을 놓침, 정념을 놓침, 4념처를 놓침, forgetfulness)은 실념(失念)이라고도 하는데, 염오념(染污念) 즉 오염된 염(念)을 말하는 것으로, 갖가지 선법(善法)을 명기(明記: 분명히 기억하는 것, 즉 8정도의 정념, 즉 37도품의 4념처)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不能明記]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염오념(染污念) 즉 오염된 염(念)이란 번뇌와 함께 하는[煩惱俱] 염(念)을 말한다. 즉 번뇌와 상응하고 있는 상태의 염(念)을 말한다. '선법을 분명히 기억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善不明記]'은 바른 가르침을 받았지만 기억하여 지니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망념(忘念) 또는 실념(失念)의 본질적 작용[業]은 수번뇌심소에 속한 산란(散亂)의 마음작용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46) 산란(散亂, 마음의 분산, 마음의 흐트러짐, 염오등지, 염오삼마지, 그릇된 등지, 그릇된 삼마지, 오염된 등지, 오염된 삼마지, distraction, desultoriness)은 탐(貪: 탐욕, 집착) · 진(瞋: 성냄, 손해입힘을 좋아함) · 치(癡: 어리석음)의 일부인 심유탕(心流蕩: 마음의 방탕히 흐름)[貪瞋癡分心流蕩]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즉 마음을 분산(分散: 나누어 따로따로 흩어지게 함)시키는 마음작용이다.

산란(散亂, 마음의 분산)의 본질적 작용[業]은 이욕(離欲) 즉 욕계를 떠남을 장애하는 것이다.

(47) 부정지(不正知, 염오혜, 악혜, 그릇된 이해, 그릇된 앎, 오염된 이해, 오염된 앎, 바르게 알지 못함, 바르지 않은 앎, non-alertness, inattentiveness)는 신업 · 어업 · 의업의 3업이 현전(現前)에서 행해질 때 마음으로 하여금 그 행위들에 바르게 의지[依]하고 안주[住]하지 못하게 하는 것[不正依住]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부정지(不正知)는 번뇌와 상응하고 있는 상태의 혜(慧), 즉 염혜(染慧) 또는 염오혜(染汚慧)를 말하는 것으로, 부정지(不正知)의 자성 즉 본질적 성질은 그릇된 신업 · 어업 · 의업의 3업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부정지(不正知)란 그릇된 3업을 일으키는 혜(慧)를 말한다. 부정지(不正知)의 본질적 작용[業]은 계율[律]을 어기게 하는 것이다. 즉, 부정지(不正知)의 상태에서는 가고 오는 것 등에 대해서 바르게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알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서 알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율의(律儀: 계율)를 어기게 되는 것이다. 

불결정심소(不決定心所: 4가지)

(48) 악작(惡作, 후회, 추회, regret, worry)은 심변회(心變悔) 즉 마음이 변하여 후회하는 것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잘못 지은 바가 있음[惡所作]'을 줄여서 악작(惡作: 후회, 즉 잘못 지은 바가 지음 → 그것을 후회함)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한 《대승광오온론》의 해설에 따르면, 이 악작의 마음작용의 본질[體]은 '즉각적인 후회[即變悔]'가 아니다. 즉, 먼저 일단 '잘못 지은 바 있고[惡所作]' 그런 후 시간이 지나서 나중에 그 지은 바에 대해 추회(追悔: 후회)를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악작(惡作)이라는 명칭은 원인으로써 결과를 가리키는 형태의 명명법으로 즉, '잘못 지은 바가 있음[惡所作 → 惡作]'이라는 원인 때문에 '후회'라는 결과가 있는데, '잘못 지은 바가 있음[惡所作 → 惡作]' 즉 '악작'이라는 원인으로써 '후회'라는 결과를 뜻하도록 한 것이다. 

《대승광오온론》의 해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유형의 악작 즉 후회가 있다. 

악작 즉 결과인 후회가 선(善)인 경우

먼저 선을 짓지 않고 나중에 후회하는 마음을 일으킨 경우: 후회의 원인도 선이고 결과인 후회도 선이다.

먼저 악을 짓고 나중에 후회하는 마음을 일으킨 경우: 후회의 원인은 불선이지만 결과인 후회는 선이다.

악작 즉 결과인 후회가 불선(不善)인 경우

먼저 악을 짓지 않고 나중에 후회하는 마음을 일으킨 경우: 후회의 원인도 불선이고 결과인 후회도 불선이다.

먼저 선을 짓고 나중에 후회하는 마음을 일으킨 경우: 후회의 원인은 선이지만 결과인 후회는 불선이다.

(49) 수면(睡眠, 잠, 흐릿함, 약화됨,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함, torpor, sleep, drowsiness, apathy)은 마음과 마음작용으로 하여금 자재(自在)로이 즉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는 심극매략(心極昧略)의 상태에 있게 하는 것, 즉 마음과 마음작용으로 하여금 지극히 흐릿하고[昧, 어둑어둑함] 약화된[略: 간략화함, 생략함, 약탈함, 대략; 어원적으로는 '일시적으로 또는 강제로 빼앗김'] 상태에 있게 하는 것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수면(睡眠, 잠, 흐릿함, 약화됨,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함)의 마음작용은 치(癡)의 '특수한 경우[分]'이다. 

수면(睡眠)의 마음작용은 선 · 불선 · 무기에 모두 통한다. 

수면(睡眠)의 마음작용의 본질적 작용[業]은 과실(過失: 허물, 잘못)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50) 심(尋, 대강의 상(相: 성질, 모습, 자성)을 분별함, 거친 성질, 거친 움직임, conception, selectiveness, gross detection, examination, application of thought, applied thinking, initial application, grossness of the mind)은 능히 의언(意言: 뜻의 말, 마음속의 단어)의 분별(分別)을 심구(尋求: 대강 찾고 구함)할 수 있는 사(思)와 혜(慧)의 마음작용의 차별(差別)로서의, 심추(心麤) 즉 마음의 거친 성질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심(尋, 대강의 상을 분별함)의 마음작용은 사와 혜의 차별[思慧差別]을 말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의언을 심구[意言尋求]하는 사와 혜의 차별[思慧差別]을 말한다. 이것의 자성 즉 본질적 성질은 마음으로 하여금 인식대상의 추상(麤相) 즉 대강의 상(相: 성질, 모습, 자성)을 분별하게 하는 것이다. 

의언(意言) 즉 '뜻의 말' 즉 '마음속의 단어'는 의식(意識) 즉 제6의식이 인식대상의 추상(麤相) 혹은 세상(細相)을 분별하고 있는 상태에서, 즉 심(尋) 혹은 사(伺)와 상응하여 함께 현행하고 있는 상태에서, 의식(意識) 즉 제6의식이 사(思) 또는 혜(慧)를 소의로 하여 일으키는 것들이다.

'추상(麤相) 즉 대강의 모습을 분별한다'는 것은 물병 · 옷 · 수레 등의 인식대상에 대해 그것의 대강의 상(相: 성질, 모습, 자성)을 심구(尋求: 찾고 구함)한다는 의미이다. 

심(尋, 대강의 상을 분별함)의 마음작용의 본질적 작용[業]은 변행심소에 속한 낙촉(樂觸: 3수 중 낙수를 일으키는 촉) · 고촉(苦觸: 3수 중 고수를 일으키는 촉) 등의 마음작용의 소의(所依) 즉 의지처 또는 발동근거가 되는 것이다. 

(51) 사(伺, 자세한 상(相: 성질, 모습, 자성)을 분별함, 세밀한 성질, 세밀한 움직임, discernment, discursiveness, analysis, sustained application, sustained thinking, selectiveness, subtle discernment, subtlety of the mind)는 능히 의언(意言)의 분별(分別)을 사찰(伺察: 정밀하게 살펴봄)할 수 있는 사(思)와 혜(慧)의 마음작용의 차별(差別)로서의, 심세(心細) 즉 마음의 세밀한 성질을 자성으로 하는 마음작용, 즉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사(伺, 자세한 상을 분별함)의 마음작용은 사와 혜의 차별[思慧差別]을 말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의언을 사찰[意言伺察]하는 사와 혜의 차별[思慧差別]을 말한다. 이것의 자성 즉 본질적 성질은 마음으로 하여금 인식대상의 세상(細相) 즉 자세한 상(相: 성질, 모습, 자성)을 분별하게 하는 것이다.

의언(意言) 즉 '뜻의 말' 즉 '마음속의 단어'는 의식(意識) 즉 제6의식이 인식대상의 추상(麤相) 혹은 세상(細相)을 분별하고 있는 상태에서, 즉 심(尋) 혹은 사(伺)와 상응하여 함께 현행하고 있는 상태에서, 의식(意識) 즉 제6의식이 사(思) 또는 혜(慧)를 소의로 하여 일으키는 것들이다. '세상(細相) 즉 자세한 모습을 분별한다'는 것은 물병 · 옷 · 수레 등의 인식대상에 대해 그것의 자세한 상(相: 성질, 모습, 자성)을 분별하여서 어떤 상(相: 성질, 모습, 자성)은 있고 어떤 상(相: 성질, 모습, 자성)은 없는지 등을 차별짓는 것을 말한다. [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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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心, 산스크리트어: citta, 팔리어: citta)은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 등에 따르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의 6식(六識)을 말한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 등에 따르면 6식에 제7식의 말나식과 제8식의 아뢰야식을 더한 8식(八識)을 말한다. 

마음을 주체(主體) 또는 주관(主觀)의 뜻에서 심왕(心王)이라고도 하며, 집기(集起, 산스크리트어: citta)의 뜻에서 심법(心法, 산스크리트어: citta-dharma, 팔리어: citta-dhamma)이라고도 한다. 또한, 마음을 장소 또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지(地, 산스크리트어: bhūmi)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이란 온갖 심소법(心所法)들, 즉 선(善) · 불선(不善) · 무기(無記)의 온갖 마음작용들이 일어나고[生] 작용하고[住] 변화하고[異] 사라지는[滅] 공간이라는 것을 말한다. 또한,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법체계에 따르면, 이러한 주체 또는 공간으로서의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도 유위법(有爲法)의 일종이므로 온갖 마음작용(심소법)들과 마찬가지로, 엄정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 하에, 일어나고[生] 작용하고[住] 변화하고[異] 사라지는[滅] 그러한 법(法, 구체적 존재)이다.

[① 심소법(心所法)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심소법에는 바야흐로 다섯 가지의 품류가 있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고 하는 것인가? 첫 번째는 대지법(大地法)이며, 둘째는 대선지법(大善地法)이며, 셋째는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이며, 넷째는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이며, 다섯째는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이다. 여기서 '지(地)'란 이를테면 행처(行處), 즉 생기하는 영역을 말하니, 만약 이것이 이러저러한 것(즉 심소)의 행처가 될 경우 이것을 설하여 그러한 법의 '지'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을 심(心)이라고도 하며, 의(意)라고도 하며, 식(識)이라고도 하며, 심의식(心意識)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지(地, bhūmi)’란 이를테면 용지처(容止處)를 말한다. 혹은 소행처(所行處)를 말한다. 즉 이것이 만약 그것의 용지(진퇴 거동의 뜻)나 소행(所行, 작용)의 근거가 되었다면, 바로 이러한 법을 설하여 그러한 법의 ‘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여기서의 ‘지’는 바로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마음은 이러 저러한 작용의 심소법이 일어나는 소의처가 되는 것으로, 이러한 마음을 ‘지’라고 한다는 뜻."]

 

마음은 5온(五蘊)의 법체계에서 식온(識蘊)에, 12처(十二處)의 법체계에서 의처(意處)에, 18계(十八界)의 법체계에서 7심계(七心界)에,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의 법체계와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심법(心法)에 해당한다.

또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과 마음작용(심소법)을 합하여 마음이라 하기도 한다. 

부파불교에서는 마음을 심 · 의 · 식 또는 6식이라고 할 때, 본래부터 3가지 또는 6가지의 서로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마음은 본래 1가지로 단일한 것이지만 시각과 청각이 서로 다르듯이 그 작용과 인식의 종류에는 차별이 있는데 그 차별에 따라 심 · 의 · 식의 3가지로 혹은 6가지의 식으로 나누는 것이 편리하기에 그렇게 분류하는 것일 뿐이라고 본다. 즉 심 · 의 · 식 또는 6식의 체(體)가 하나라고 본다.[②] 이러한 이유로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의 법체계에서 심법(心法)은 6식을 하나로 묶은 1가지의 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비해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에는 마음 즉 심 · 의 · 식 또는 8식의 체(體)가 하나라는 심체일설(心體一說) 또는 식체일설(識體一說)의 견해와 심 · 의 · 식 또는 8식 각각에는 별도의 체(體)가 있다는 심체별설(心體別說) 또는 식체별설(識體別說)의 견해가 있다. 전자의 심체일설 또는 식체일설은 안혜 계통의 무상유식파(無相唯識派)의 견해이고, 후자의 심체별설 또는 식체별설은 호법 계통의 유상유식파(有相唯識派)와 중국의 법상종의 견해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식유가행파(정확히 말하면, 유상유식파)와 법상종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심법(心法)은 8식에 해당하는 8가지의 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광출판사. 2013년 1월 19일에 확인.
"소승불교시대에 저술된 품류족론(品類足論)과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등에 의하면 『심(心)은 곧 의(意)이며, 의(意)는 또 식(識)으로서 그 체성(體性)은 서로 같으며 이름만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소승불교시대에는 심의식(心意識)이라는 명칭이 서로 표현만 다를 뿐 그 체성은 동일한 것으로 보았으며 동시에 이러한 심의식 사상이 일반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체 소승사상을 통해 본다면 인간의 심성은 그 체성이 각기 다르며 활동도 다르게 한다는 학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로 인간의 심체(心體)는 유일한 것이며 그 활동하는 작용만 다를 뿐이라고 주장한 학설이 대부분이었다. 그 대표적인 학설은 소승불교를 최종적으로 종합하여 정리하였다는 세친론사(世親, AD. 4세기)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 잘 나타나 있다. 
아비달마구사론에 의하면 『심의식의 3가지 이름은 그 표현의 뜻이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그 체성은 유일하다<心意識三名 所 異 而體是一>』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여 소승불교는 우리 인간의 심체(心體)를 하나로 본 것이 지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유위법으로서의 마음

불교에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은 무위법이 아닌 유위법이다. 즉, 인연 화합의 산물이다. 즉,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온갖 경계들과 마음작용들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유위법이 겪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4상(四相)의 생멸변화를 인과의 법칙에 따라 경험하면서 찰나에서 찰나로 흘러가는 유동체이다. 마음의 이러한 찰나에서 찰나로의 천류(遷流)를 특별히 가리켜 상속(相續) 혹은 심상속(心相續, 산스크리트어: citta-dhra, 영어: mindstream)이라고 한다. 

불교의 인간관에서 볼 때, 일생의 한 순간의 단면에서는 5온의 개별 혹은 화합(다른 말로는, 4종의 유위법의 개별 또는 집합[③])이, '나'라고 하는, 인간 존재의 주체 또는 자아로 간주되지만, 일생 전체에 있어서는 이 같은 심상속이 인간 존재의 주체 또는 자아로 간주되기도 한다. 또한, 이 같은 심상속이 전생과 금생 그리고 후생으로 이어지는 윤회의 주체 또는 자아로 간주되기도 한다.

[③ 5온은 곧 일체의 유위법이다. 그리고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의 법체계와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5위 100법의 법체계는 모두 크게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유위법에는 4종류, 즉 4위(位)가 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이 4종의 유위법을 색법(色法)·심법(心法)·심소법(心所法)·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이라 하고,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에서는 심법(心法)·심소법(心所法)·색법(色法)·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이라 한다. 4종의 유위법의 배치 순서와 이들 각각의 구성원들의 개수와 성격에 대해서는 설일체유부와 유식유가행파·법상종 간에 차이가 있지만, 4종의 분류 자체는 동일하다.]

 

유루·무루법과 마음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은 유루와 무루에 모두 통한다. 즉, 염오에 빠져 괴로움에 허덕이게 될 수도 있고 청정해져서 열반의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다. 불교의 인과설에 따르면 무위법이자 무루법인 멸제(깨달음·열반·진여)는 모든 유위법에 대해 인(因)이 될 수도 있고 연(緣)이 될 수도 있는데, 이러한 점은 마음이 무루에 통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위를 증득(證得) 또는 증오(證悟)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무위는 증득 또는 증오되는 것, 즉 경험되는 것이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즉, 유위 무루법인 도제(道諦: 수행)를 통해 마음은 무위법이자 무루법인 멸제(깨달음·열반·진여)를 성취하게 된다. 달리 말해, 유위 무루법의 나룻배를 타고 유위의 이 언덕[此岸]에서 무위의 저 언덕[彼岸]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부파불교에서는 열반을 증득(證得)한다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진여를 깨친다[證悟]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대승불교 중 선종에서는 견성(見性: [진여의 본래] 성품을 보다)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또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과 마음작용(심소)을 합하여 마음이라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이 해(害)의 마음작용(심소)과 상응해 있는 경우는 악한 마음 혹은 나쁜 마음 혹은 오염된 마음들에 속하고,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이 불해(不害)의 마음작용(심소)과 상응해 있는 경우는 선한 마음 혹은 좋은 마음 혹은 청정한 마음들에 속한다. 전자의 경우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은 유위 유루의 상태에 있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은 유위 무루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이 어떤 마음작용(심소)과 상응하였는가에 따라 반드시 그 상응에 따른 과보를 낳게 된다는 것은 불교의 근본입장 중 하나이다. (참고: 인과법칙, 12연기, 업)

 

법체계에서의 마음

5온(五蘊)의 법체계에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은 색온·수온·상온·행온·식온 가운데 식온(識蘊)에 해당한다. 5온의 법체계에 따르면, 마음은 대상을 지각·표상·분석·판단·종합하여 인식을하는 힘, 즉 수온·상온의 힘과 욕구하고 의지하고 표상하는 힘, 즉 행온·상온의 힘을 본질로 한다. 즉, 인식력과 의지력을 본질로 한다. 식온을 비롯한 5온은 모두 유위법이며, 또한 유루와 무루 둘 다에 통한다. 식온(識蘊)은 의근(意根), 즉 18계의 의계(意界)를 포함한다.

                   

오온五蘊 
물질物質 · 색色 몸 · 물질物質 색온色蘊
지각知覺        수온受蘊
마음작용 · 심소心所 표상表象 상온想蘊
욕구欲求 · 의지意志   행온行蘊
마음 · 심心 · 심왕心王 식識 · 6식六識 또는 8식八識        식온識蘊
마음(心) 또는 심왕(心王)은 식온(識蘊)를 말하며, 식온에는 의근(意根)이 포함된다.

              

12처(十二處)의 법체계에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은 안처(眼處)·이처(耳處)·비처(鼻處)·설처(舌處)·신처(身處)·의처(意處)의 6근(六根) 또는 6내처(六內處) 가운데 의처(意處)에 해당한다. 6내처의 나머지 5처(五處)는 모두 의처(意處), 즉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이 물질적 사물을 인식 또는 요별할 때 사용되는 소의(所依: 의지처, 도구, 감각 기관)이며, 5근(五根)이라고도 한다. 의처(意處)는 의근(意根), 즉 18계의 의계(意界)를 포함한다.

십이처十二處
6내처六內處 · 6근六根 5색근五色根 · 5근五根 안처眼處 · 이처耳處 · 비처鼻處 · 설처舌處 · 신처身處
마음·식識·심왕心王    의처意處                       
6외처六外處 · 6경六境 5경五境 색처色處 · 성처聲處 · 향처香處 · 미처味處 · 촉처觸處
법경法境 · 법계法界 법처法處
마음(心) 또는 심왕(心王)은 6내처 중 의처(意處)를 말하며, 의처에는 의근(意根)이 포함된다.

              

18계(十八界)의 법체계에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은 안식계·이식계·비식계·설식계·신식계·의식계·의계의 7심계(七心界)에 해당한다. 7심계는 단순히 7계(七界)라고도 하며 의처(意處)라고도 한다. 

7심계는 안식계·이식계·비식계·설식계·신식계·의식계의 6식과 의계(意界)로 분류된다. 7심계 중 의계는 6식 모두의 소의(所依: 성립 근거, 도구, 기관)가 되는 의근(意根)이다. 달리 말해, 의계 즉 의근은 제6식인 의식계의 소의가 될 뿐 아니라 안식계·이식계·비식계·설식계·신식계의 5식의 소의도 된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의근은 색계·성계·향계·미계·촉계·법계의 6계(六界) 또는 6경(六境)을 전체적으로 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요리 전문가가 요리의 색깔과 형태를 보고 맛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측하는 경우, 색깔과 형태를 보고 인식하는 것은 오로지 눈(안근)과 안식(안식계)이며 예측하는 것은 음식에 대해 축적(기억)된 시각(색깔과 형태)과 미각(맛)의 경험에 근거하여 현재의 대상(요리)을 분석 · 종합하는 의식계, 즉 제6식(설일체유부의 경우) 또는 후3식(유식유가행파의 경우)이 관계한 것이다. 이 때, 축적된 경험, 즉 기억이 의계(意界) 즉 의근(意根)에 해당한다.

십팔계十八界
6소의六所依 · 6근六根 5색근五色根 · 5근五根 안계眼界 · 이계耳界 · 비계鼻界 · 설계舌界 · 신계身界
의근意根        의계意界                     
6경계六境界 · 6경六境 5경五境 색계色界 · 성계聲界 · 향계香界 · 미계味界 · 촉계觸界
제6경第六境 · 법경法境        법계法界
6능의六能依 · 6식六識6식계六識界          전5식前五識 · 5식五識          안식계眼識界 · 이식계耳識界 · 비식계鼻識界 · 설식계舌識界 · 신식계身識界
제6식第六識 · 후3식後三識 의식계意識界
마음(心) 또는 심왕(心王)은 안식계 · 이식계 · 비식계 · 설식계 · 신식계 · 의식계 · 의계의 7심계(七心界)를 말한다.

 

5위 75법과 5위 100법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의 법체계와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은 심법(心法)에 해당한다. 이들 부파 또는 종파들에서는 마음을 심(心) 또는 심법(心法)이라고 함에 대해 마음의 여러 작용을 통칭하여 심소(心所) 또는 심소법(心所法, mental factors)이라고 하며, 심법과 심소법의 대상을 색(色: 3계의 물질)이라고 한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 등의 경우, 마음은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의 6식(六識)을 말하는데, 제6식인 의식은 의근(意根), 즉 18계의 의계(意界)를 포함한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 등의 경우, 마음은 6식에 제7식의 말나식과 제8식의 아뢰야식을 더한 8식(八識)을 말하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 등에서 마음이라고 보는 6식 중 제6식인 의식의 더 깊은 면인 제7식의 말나식과 제8식의 아뢰야식을 제6식과 구분하여 설정했을 때 성립되는 8식(八識)을 말한다. 부파불교의 6식과 마찬가지로 8식은 의근(意根), 즉 18계의 의계(意界)를 포함한다. (엄밀히 말하면 전찰나의 6식 또는 8식을 의근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의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편,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에서는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이 제6식인 의식의 가장 가까운 근거라는 의미에서, 말나식을 의식(제6식)의 의근(意根)이라고도 말한다.[위키 백과]

 

**마음

 사람의 내면에서 성품·감정·의사·의지를 포함하는 주체.마음은 지각하고 사유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며 자신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마음은 좁은 의미로서 육신에 상대되는 지각능력을 중심으로 인식되기도 하고, 넓은 의미로서 우주와 마음을 일치시키는 유심론적(唯心論的: 우주의 본체를 정신적인 것으로 보며 물질적 현상도 정신적인 것의 발현이라는 이론) 세계관의 마음 개념이 있다. 곧 원효(元曉)는 “삼계(三界: 중생이 생사 왕래하는 세 가지 세계)가 곧 마음이다.”라 하여 우주를 하나의 마음이 일으키는 현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상어에 나타난 마음

일상어 가운데 ‘마음자리’·‘마음결’·‘마음씀’·‘마음씨’라는 단어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의 바탕(體 체)과 그것의 움직임(動 동)과 그것의 발현(用 용)과 그것의 모양(狀 상)이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음자리’는 마음의 바탕을 나타낸 단어이고, ‘마음결’은 마음의 움직임을, ‘마음씀’은 마음의 발현을, ‘마음씨’는 마음의 모양을 나타내는 단어라 할 수 있다.

마음을 바탕·움직임·발현·모양의 4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각각의 설명과 아울러 이에 해당한 단어군(單語群)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마음자리는 ‘마음의 근원’, ‘마음의 바탕’, ‘심지(心地)’, ‘심원(心源)’이라 풀이되는 일체 마음의 근본을 나타내는 단어다. 그것은 마음의 근본을 이룰 뿐이요, 아직 밖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니 관념적 인식의 대상이다.

그것은 선과 악(善惡 선악)이나 아름다움과 추악함(美醜 미추)이나 깨끗함과 더러움(染淨 염정)도 떠나 있는 것이다. 붙잡을 수도 보고 들을 수도 없이 다만 고요하고 담담(湛然 담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고요하고 담담한 마음자리는 외물에 감응이 되면 물결을 일으키게 된다. 감응의 물이 가라앉으면 다시 본연의 상태로 돌아간다. 마치 바람이 불면 물결을 일으키다가도 바람이 자면 고요한 상태로 돌아가는 바다와도 같다.

원효는 이러한 마음을 ‘일심(一心)의 바다’라 표현했다. 이러한 마음은 바탕을 이루기 때문에 만물을 낳은 하늘이 하나인 것처럼 ‘마음자리’도 하나로 인식한다.

둘째, 마음자리는 아직 밖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지만, 마음결은 외물에 감응되면 쉽게 물결을 일으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물결을 일으키는 상태가 ‘마음결’이다. 바다나 강물은 천년이라도 고요함을 지킬 수 있지만 태풍을 만나면 격랑을 일으키고, 벼랑 아래에서는 용솟음치고, 탁류를 만나면 물색이 변한다.

이러하듯이 마음자리도 외물에 감응하면 그 외물의 속성대로 물결을 일으킨다. 마음자리도 외물에 감응되면 외물의 속성대로 결을 일으킨다. 여기에 해당한 단어들은 ‘마음결’ 외에 ‘마음가짐’과 ‘마음보’ 등이 있다.

셋째, ‘마음씀’이다. ‘마음결’이 마음의 움직임을 뜻한다면 ‘마음씀’은 ‘마음결’이 실제 밖으로 드러나는 발현이다. 물론 ‘마음결’과 ‘마음씀’을 다 같이 마음의 발현으로 묶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미세하게 쪼개어 보면 마음이 동요하는 단계와 그것이 실제로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마음은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의 움직임과 마음의 발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넷째, ‘마음씨’다. 이것은 마음결이 일어날 때와 마음씀이 드러날 때 어떤 모양으로 일어나고 드러나느냐 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곧 마음에 관련된 형용사는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이처럼 일상어에 나타난 마음은 그 구조상으로는 바탕·움직임·발현·모양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마음의 바탕이 움직임·발현·모양으로 전개되면서 많은 단어를 파생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와 마음

불교에 나타난 마음을 고찰할 때에는 마음을 마음자리→마음결→마음씀→마음씨의 구조에서 화살표를 거꾸로 놓아 마음자리←마음결←마음씀←마음씨의 구조를 주목한다. 이 구조는 마음을 근원적인 마음자리로 되돌리는 구조다.

마음자리는 선과 악이나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넘어선 담담하고 고요한 그 어떤 경지이다. 마음은 외물에 감응되어 선하고 아름답고 깨끗하게도 되지만 악하고 추악하고 더러움에 물든 것이 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망심(妄心)이라 표현한다. 그러기에 마음결과 마음씀에서 생겨나는 망심을 끊어버리고 마음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벗어 던져버리고, 이른바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불교나 유교에서 어렵게 설명하고 있는 수심론(修心論)은 마음결과 마음씀에서 생겨난 망심을 끊어버리고 본질적인 마음자리를 찾아 나서는 방법이다. 불교의 심론(心論)은 마음의 본체에 대한 설명과 그 본체를 가리는 심식(心識)과 연기가 일어나는 까닭을 밝히고 그것을 씻고 본체에 이르는 방법으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를 타이르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심론의 과정을 불교경전 속에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음의 본체에는 상(相)이 없다. “지난날의 마음을 잡을 수가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잡을 수 없다.”(般若經 반야경), “마음은 안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도 있지 않다.”(維摩經 유마경),

“마음의 자성(自性)은 공적(空寂: 空은 그 어느 것도 형상이 없음을 이르고, 寂은 일어나거나 스러짐이 없음을 이른다.)하여 대립도 없고 소멸한 일도 없다. 그것은 처음인 것도 아니요, 가운데나 뒤인 것도 아니며, 삼세(三世)를 초월하여 그 모습이 허공과 같다.”(華嚴經 화엄경), “마음이란 본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번뇌에 더럽혀질 여지가 없으니, 어찌 마음이 탐(貪)·진(瞋)·치(痴)에 의해서 더럽혀지며, 삼세에 속하는 온갖 것에 무엇을 마음이라 하랴.”(心地觀經 심지관경) 등이 있다.

둘째, 다음으로 마음의 본체는 평등하다. “모든 중생은 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어서 차별이 없다.”(涅槃經 열반경),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여 더러움에 물드는 일이 없다. 마치 하늘에 연기와 먼지나 구름 그리고 안개 따위가 뒤덮여 맑고 깨끗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하늘의 본성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勝思惟梵天所問經 승사유범천소문경), “심성의 청정함은 물속의 달과 같다”(大寶積經 대보적경) 등이다.

마음의 본성은 모든 사람이 누구나 가지고 있다. 또 그것은 상(相)이 없으니 더럽혀 질 까닭도 없다. 마음은 오염과는 관계없이 청정하기만 한 하늘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마음의 본성이요 불성(佛性)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이 무엇 때문에 더럽혀지는가? 그것은 마음에는 심식(心識)과 연기(緣起)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다음의 구절들은 마음의 심식과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마치 달 속에 여러 가지 물체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아서, 세상이 무실(無實)하지만 분별함을 따라서 그것이 일어난다. 분별하는 까닭에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大乘破有論 대승파유론), “중생이 경계를 망령되이 인정하므로 마음의 차별이 생긴다.”(起信論 기신론),

“마음은 본래부터 생긴 일도 일어난 일도 없어서 그 본성이 언제나 청정할 뿐이다. 그러나 바깥에서 들어온 티끌과 번뇌(客塵煩惱 객진번뇌)에 의해서 더럽혀진 까닭에 분별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持世經 지세경), “대해의 물결이 사나운 바람으로 인해 일어나면 큰 파도가 바다에 물결쳐서 끊일 새가 없게 된다. 알라야식(阿賴耶識 아뢰야식)도 그래서 경계의 바람이 불어와 흔들면 여러 가지 식(識)의 물결이 치솟아 날뛰고 자꾸 생겨나기 마련이다.”(入楞伽經 입능가경)

심식과 연기는 마음결이나 마음씨(씀)를 의미한다. 원래 마음의 본성, 곧 마음자리는 바다처럼 고요하고 청렴한 것이지만 외계의 사물에 부딪게 되면 마음자리의 경계를 깨뜨리고 곧장 동요하게 된다. 마치 바다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는 이치와 같다. 그것을 ‘식(識)’이라 하였다.

‘식’은 여덟 가지로 팔식(八識)이다. 사람에게는 감각과 의식의 기능이 있다. 그것이 안식(眼識)·설식(舌識)·후식(臭識)·이식(耳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六識)이다. 이 중에서 앞의 오식(五識)까지는 감각기능이고 제 육식(第六識)인 의식은 사고(思考)에서 나타난 정신적인 인식이다. 이외에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제 칠식(第七識)은 자아의식(自我意識)에 해당한다. 또한 불교 특유의 제 팔식(第八識)을 ‘알라야식’이라 한다. ‘장식(藏識)’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알라야식’은 의식을 초월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잠재의식에 해당한 일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체의 근거이기도 하고 동시에 초개체적 진여(眞如)에 뿌리 박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양면성을 가지므로 ‘알라야식’은 진여로 돌아가려는 성향도 있지만 무명으로 돌아가려는 성향도 함께 가지고 있는 셈이 된다.

따라서 ‘알라야식’을 진여의 방향으로 나타내 보려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그 개별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가르침은 그 ‘알라야식’까지 아주 깨뜨려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의 심론은 ‘식’을 완전히 깨뜨려버리고 마음의 본성, 곧 일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려는 고행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도 오랜 불교의 역사를 가졌다. 불경의 주석서와 『수심결(修心訣)』·『심요(心要)』·『심성론(心性論)』 등의 저술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심론에 일관된 논지는 결국 마음의 본체에 대한 설명과, 그것을 깨닫는 방법과, 그것을 지키는 수양론이다.

마음에 대해서 최초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은 원효이다. 그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가 해골의 물을 마신 것이 기연이 되어 크게 깨달았다. 그 때에 남긴 말이 유명하다. “마음이 없으면 감분(龕墳:불상을 모신 감실과 시신을 묻은 무덤)도 다를 것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기에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이 오직 식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거니 어찌 다른 데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원효는 드디어 유학을 포기하고 마음이라는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다.

많은 원효의 주석은 일심(一心)의 근원에 대한 설명과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일심은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의 대의에도 잘 나타나 있다. “무릇 일심의 근원은 유와 무를 떠나서 홀로 청정하며, 삼공(三空)의 바다는 진(眞)과 속(俗)을 융화하여 담담하다. 담담하므로 둘을 융화하였으나 하나가 아니요, 홀로 청정하므로 양극을 여의었으나 중간도 아니로다. 중간도 아니나 양극을 여의었으므로 있지 않은 법(法)이라 곧 무에 머물지 않으며, 없지 않은 모양이다.”라고 하였다.

유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하나가 아니요 둘을 융화하였으니 진(眞) 아닌 사(事)가 아직 속(俗)이 된 것이 아니다., 속 아닌 이(理)가 아직 진이 된 것도 아니요, 둘을 융합하였으나 하나가 아니니 진과 속의 성(性)이 수립하지 않음이 없고, 더러움과 깨끗함의 형상을 갖추지 아니함이 없도다. 양극을 여의었으나 중간이 아니므로 유와 무란 법이 되지 않음이 없고, 옳거나 그릇됨의 뜻이 미치지 않음이 없도다. 그러므로 파(破)함이 없되 파하지 않음이 없고, 옳거나 그릇됨의 뜻이 미치지 않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파함이 없되 파하지 않음이 없고, 입(立)함이 없되 입하지 않음이 없다. 가히 이치가 없는 지극한 이치(無理之至理 무리지지이)요, 그렇지 않은 크게 그러함(不然之大然 불연지대연)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원효가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의 심오한 내용을 200여 자로 대의를 밝힌 것이다.

일심의 원천과 삼공의 바다가 핵을 이루고 있다. 일심의 원천이란 일체의 ‘식(識)’을 깨뜨려버린 다음에 남아 있는 담연한 마음자리를 말함이다.

삼공(三空)의 바다도 일심의 원천과 같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공(我空)·법공(法空), 더 나아가서는 아공과 법공도 모두 공이라는 구공(俱空)을 말함이다. 철저하게 비워 버리고, 또 비웠다는 사실마저 비워 버리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유(有)니 무(無)니 하는 상대적인 개념도 없게 된다.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비웠으니 모든 것을 다 포괄할 수 있고, 포괄한 것을 다시 초월할 수도 있는, 이른바 포월(包越)의 원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않지만 크게 그러하고’, ‘이치가 아니지만 지극한 이치’라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원효는 『무량수경소(無量壽經疏)』에서도 마음의 설명을 하고 있다. “심성(心性)이란 융통하여 걸림이 없어서(融通無礙 융통무애) 크기가 허공 같고, 담담하기가 큰 바다와 같다. 그 본체는 평등하고 그 성질은 윤활해서 상(相)에 관계없이 만상을 다 포섭할 수 있고, 연(緣)을 따라도 거슬림이 없다.” 본성의 크기는 하늘과 바다와 같다. 그리고 그 본성은 평등하고 윤활한 것이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과 연에 관계없이 모든 것을 다 포섭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마음에 무명(無明)이 왜 생기는가에 대해,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대승법은 이 일심 이외에 또 다른 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무명이 그 자신의 일심에 미혹되어 물결을 일으키고 육도(六道 : 중생이 선악의 원인에 의하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에 유전한다. 비록 육도의 파도를 일으킨다 하여도 일심의 바다에서 벗어나지 않고, 일심이 움직여 육도를 만들어놓는다.” 일심의 깊숙한 밑바닥에는 알라야식이 감춰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알라야식은 진여로 돌아가려는 일면도 있지만 물결을 일으키게 되면 무명으로 번져가려는 성향도 있다고 한다. 그것은 마침내 육도에까지 유전하게 된다고도 하였다. 이것을 더 부연하면 중생들의 감각적·심리적 기관은 일심에서 생기지만, 그것은 도리어 스스로의 근원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져서 번뇌의 먼지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수행은 목숨을 들어 이러한 감각적 심리적 작용을 거두어 잡아 그 본래의 원천인 일심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이 그러한 것처럼 원효의 사상도 실상은 일심을 확인하고 일심으로 되돌아가려는 수행이 핵을 이루었다. 『수심결』·『진심직설(眞心直說)』·『심요』와 같이 마음에 주목을 한 저술을 하였던 고승들로는 고려 중엽의 지눌(知訥)과 말엽의 혜심(慧諶)·보우(普愚)·나옹(懶翁)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지눌은 『수심결』과 『진심직설』에서 자심(自心)이 곧 진불(眞佛)이요, 자성(自性)이 곧 진법(眞法)임을 강조하였다.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고, 성(性) 밖에 법이 없으니, 모든 사람은 마땅히 자기 마음에서 불을 구하고 자성에서 법을 구하라는 것이다. 이른바 진심정신(眞心正信)이다. 그래서 보리(菩提)·법계(法界)·여래(如來)·여여(如如)·법신(法身)·불성·여래장(如來藏)과 같은 명칭도 진심의 다른 명칭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지눌은 진심의 본체를 설명하였다. 진심은 인과를 초월하고, 고금을 관통하며, 모든 대대(對待:무릎맞춤)가 없다. 큰 허공이 보편한 것처럼, 묘체(妙體)가 응집하여 고요하며 담담하여 상주(常住)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일체 중생 본유의 불성인 동시에 일체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진심은 범인이나 성인이 다 갖추고 있으나 범부는 망심(妄心:망령되이 분별하는 마음)에 가려 진심이 나타나지 않은 것뿐이라 하였다. 그러한 진심을 찾아 나서는 길을 돈오·점수로 제시했다.

돈오는 자기의 마음자리가 불(佛)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요, 점수는 비록 돈오하였다 해도 기습(氣習: 특징적으로 보이는 습성이나 습관)을 갑자기 고치기가 어려우므로 끊임없이 닦아가라는 것이다.

혜심은 『심요』에서 불법이란 원래 만론천경(萬論千經: 온갖 책과 논의)으로 그 의로(義路: 뜻)를 설명한다 해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전제하였다. 그러나 그 진원(眞源: 참된 근원)을 깨닫는 데에는 무심(無心)과 무사(無事)가 가장 긴요하다고 했다. 무심이나 무사는 온갖 감각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과 온갖 일을 떨쳐 버리고 원래의 마음자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번에 되는 일은 아니라 했다. 닦고 또 닦아서 무심무무심(無心無無心)·무무심진(無無心盡), 곧 진무심(眞無心)에 이르러야 하고, 무사무무사(無事無無事)·무무사진(無無事盡), 곧 진무사(眞無事)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면 방하(放下)라는 경지에 이른다고 하였다.

바로 이 방하(정신적○육체적인 일체의 집착을 버리고 해탈하는 일)에 잠기는 마음이 진심이요 진불이라 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본심은 불성이어서 원래는 선악의 구별이 없는 것이나 습이성성(習而成性: 습관이 성품을 형성함)한다고 하였다. 결국 『심요』는 직지인심과 견성돈오할 것을 요지로 한 것이다.

보우(普愚)는 『심요』를 남겼다. 보우 역시 심과 불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마음의 본성을 설명하여 그것을 거짓도 없고 비슷한 것도 없으며, 적연부동(寂然不動)하면서도 대영지(大靈知)를 가지고 있으며, 생사도 분별도 명상(名相)도 언설(言說)도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건곤을 삼키고 천지와 성색(聲色)을 덮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였다.

보우는 다시 심을 체와 용으로 나누었다. 체는 광대한 것을 다 감싸고 있으나 바깥이 없고, 미세한 것을 다 포섭하고 있으나 안이 없는 것이라 하고, 용은 종횡자재(縱橫自在)하고 신변(神變)하여 모든 것을 다 나타내 보인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바탕과 신묘한 조화를 편의상 심(心)·도(道)·불(佛)·만법의 왕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보우는 마음의 설명이 교(敎)이고 사람들의 자각을 지시하는 것이 경전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경전은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방편은 많다. 심의 깨끗함(心淨 심정)이 유심정토(唯心淨土: 극락정토는 결국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경지임을 이르는 말)요, 불성의 드러남(性現 성현)이 곧 불성현(佛性現)이니, 마음 밖에 불이 없고, 불 밖에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인들은 이러한 선심을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밝히지(自守自明 자수자명) 못하고 매양 망념(妄念)에 흔들린바 되어 끝없는 생사업고(生死業苦: 죽고 사는 인연의 고통)를 망념되이 짓는다. 그 까닭에 대자대비한 불존(佛尊)이 세간에 나타나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본심이 본래 불성이라는 것을 가르쳤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참선(參禪)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참선은 한편으로 망념을 제거하고 한편으로 신혜(神慧)를 밝혀, 이른바 공적한 영지(空寂靈知 공적영지)의 심경을 지는 것이다. 공적한 영지를 얻은 뒤에는 이 심경을 무너지지 않고 뒤섞이지 않는 상태로 보존하는 것이 용공(用功)의 요령이라 하였다.

나옹은 『나옹어록(懶翁語錄)』에서 일심과 만법이 하나인 것을 깨닫게 되면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이 얼음처럼 녹아서 선(禪)·도(道)도 없게 되어 그것을 파악할 수도 얻어 볼 수도 없는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그 맛은 그저 고요한 밤에 자규(소쩍새)의 울음소리가 공중에서 울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고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 없으며, 구하려고 해도 구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항상 눈앞에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을 밝히고 깨쳐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맑기가 고요한 물(止水 지수)과 같아서 일심은 털끝만한 가리움도 없게 된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기화(己和)·지엄(知嚴)·보우(普雨)·휴정(休靜)·송설(松雪)·편양(鞭羊)·백곡(白谷)·묵암(默庵)·연담(蓮潭)·백파(白坡)·초의(草衣)·월창(月窓) 등이 심법을 이어 갔다. 이들의 심론도 고려 선승들의 심법과 기본 골격은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변화가 있다면 조선시대는 건국 초부터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이념을 표방했기 때문에 불교 쪽에서는 불교를 옹호하면서 한편으로는 유불일치론(儒佛一致論)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심사상(一心思想)이나 그것의 ‘돈오’, 그리고 ‘점수’의 행각은 변화가 없었다.

유교와 마음

조선 초기에 억불숭유의 기치 아래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유학이 등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마음의 해석도 불교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이 시작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은 『심기리편(心氣理篇)』에서 이(理)개념으로 불교의 심개념을 극복하고자 하였고, 권근(權近)은 『입학도설(入學圖說)』에서 이(理)와 기(氣), 심과 성, 정과 의(意), 사단과 칠정 등의 개념체계로 마음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마음에 대해 본격적으로 주목한 것은 이황(李滉)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이황은 ‘마음을 일신(一身)의 주재자(主宰者)’라고 밝혔다. 이것은 일신을 다스려서 주관한다는 뜻이다. 이황에 의하면 “정의 발현은 마음이 하는 것이다.”, “의는 마음의 발현이다.”, “지는 마음이 가는 바다이다.”라고 언급하면서 마음이 일신을 주재함은 정(情)·지(志)·의(意)와 관련된 통솔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황은 “정(情)은 배나 수레[舟車]에 비유할 수 있고, 의(意)는 그 배나 수레를 부리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라 하여 마음의 발현은 정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방향 감각을 잡아주고 그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은 의(意)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음이란 욕구대로 발현될 수도 있고 방향을 설정해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이른바 감성과 이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이(李珥)는 마음을 성·정·의로 나누었다. 이것들은 모두 일로(一路)이면서 각각 경계가 있다고 하였다. 마음의 미발(未發: 아직 발하지 않음.)을 ‘성’이라고 하고, 이발(已發: 이미 발했음.)을 ‘정’이라 했으며, 발한 뒤에 유석상량(怞釋商量: 밝게 풀어서 생각함.)하는 것이 ‘의’라고 하였다. 역시 마음은 근원이 있고 감성이 있으며, 이성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이황과 이이 사이에는 별반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마음을 이와 기에 관련지음으로써 서로 다른 의견이 생기게 되었다.

이황의 기본체계는 이기호발론(理氣互發論)에서 출발한다. 이에 따라 인성론(人性論)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며, 사단(四端)은 이(理)의 발현이요, 칠정(七情)은 기(氣)의 발현이라 한다. 또 마음도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으로 나누어, 전자를 이의 발로 후자를 기의 발로 보았다.

이이는 “이는 지극히 높아 상대가 없다(極尊無對 극존무대)”, “이는 귀한 것이고 기는 천한 것이다.”라 함으로써 본연지성과 도심과 사단을 높이고, 기질지성과 인심과 칠정을 낮추었다. 여기서 이이의 사상적 골격은 이황과는 달리 이의 발현을 부인하고 기발이이승(氣發而理乘)만을 인정한 데서 발단하였다. 기질지성 외에 본연지성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칠정 외에 사단이 따로 있을 수 없으며, 인심 외에 도심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이는 이와 기를 모두 내 마음의 발현으로 보았다. 즉, “천지조화(天地之化)는 곧 내 마음(吾心 오심)의 발현이다. 만약 천지의 조화에 이화자(理化者)와 기화자(氣化者)가 있다면, 내 마음도 또한 마땅히 이발자(理發者)와 기발자(氣發者)가 있어야 한다. 천지에 이미 이화(理化)와 기화(氣化)의 다름이 없다면, 내 마음에도 이발과 기발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만약 내 마음이 천지의 조화와 다르다면 나의 알 바가 아니다.”(票谷全書 卷16)라고 단언하였다. 이것은 이황과는 달리, 인간의 기질적인 면을 중시하는 데서 온 소치라고 생각한다.

이이는 인간이란 높은 지성과 지각을 가지고 선을 행할 수도 있지만, 악과 식욕과 색욕에도 빠져들 수 있다고도 했다. 그것이 모두 천성이라 본 것이다. “인간은 대체로 지(志)가 움직이고 기가 움직일 때는 선과 악을 겸하게 된다.”, “식욕과 색욕과 냄새와 맛에 대한 욕심도 천성이다.”라 한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천지자연과는 달리 혈기와 지각심(知覺心)을 가졌다고 했던 것이다.

이황은 이에 입각해서 본연지성과 도심과 사단을 높이 평가했던 반면에, 이이는 기에 입각해서 기질지성과 인심과 칠정을 중시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이황을 주리론자(主理論者)로, 이이를 주기론자(主氣論者)로 부르게 되었다. 그 뒤에는 이황을 지지했던 주리파와 이이를 지지했던 주기파와 그리고 양자를 절충한 절충파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 세 유파 사이에도 마음의 해석은 물론 다르다. 세 유파의 주장을 몇 사람만 들어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리파는 이이가 이발을 부정하고 기발만을 인정했던 사실을 공박하여 이발을 주장한 것이 골자로 되었다. 그 극단으로 마음을 심즉리(心則理)로 제시한 이진상(李震相)의 주장을 보면, “성은 미발(未發)의 ‘이’요, 정은 이발의 ‘이’이다. 성이 발하여 정이 되니, 다만 일리(一理)뿐이다.

비유컨데, 주인이 나가면 객이 되는 것과 같으니, 다만 일인(一人)뿐이다. 진실로 성정의 실상을 탐구하면 이발은 있어도 기발은 없다.”(寒洲集 卷37 한주집)라고 하여, 성도 정도 철저하게 이의 발현임을 밝혔다.

주기파들은 율곡설을 지지하여 심즉기(心則氣) 또는 칠정포사단(七情包四端)을 주장하였다. “대개 칠정(七情)은 인심과 도심, 선과 악의 총체적 명칭이다.”, “칠정이 형기(形氣)에서 발한 것은 인심이요, 칠정이 의리에서 발한 것은 도심이다.”(鹿門集 卷12 녹문집) 이것은 임성주(任聖周)의 주장이다. 그는 주기적 측면에서 칠정포사단을 주장한 것이다. 인심과 도심과 선과 악도 칠정의 총체적 명칭으로 보고, 형기(形氣)도 의리도 칠정 속에 포괄시키는 것이다.

절충파들은 심즉리설(心則理說)과 심즉기설(心則氣說)을 절충하였다. “이 마음은 비록 묘용(妙用)을 헤아릴 수 없으며 순환(循環)에 만가지 단서가 있지만, 그 까닭을 추구하면 실은 이와 기가 합하여 기발이승함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발이승의 가운데에서 세분하여 말하면 또 이승기(理乘氣)로 동하는 것과 기우리(氣寓理)로 발하는 것이 있다.”(拙修齊集 卷11)

조성기(趙聖期)는 위와 같이 이승기(理乘氣)로 마음이 동하면 도심(道心)이 되고, 기우리(氣寓理)로 마음이 발하면 인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심과 도심이 모두 일심의 발이나, 인욕과 천리는 즉 형기의 사사로움(形氣之私 형기지사)과 성명의 정대함(性命之正 성명지정)의 차이에 달렸다고 보았다. 또 칠정을 사단을 포섭하는 것으로서 인심과 도심의 합으로 보았다. 이것은 이이의 기발이승에 이황의 주리·주기의 사상을 절충한 것이다.

유학에서 마음의 문제는 이와 기에 바탕 하여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도심과 인심, 사단과 칠정의 문제를 놓고 논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학자들의 마음에 대한 시각은 일반적으로 성리학파의 학문태도와 차이를 보여준다. 박세당(朴世堂)은 『중용장구대전(中庸章句大全)』 중에서 “도는 각자의 도를 따름으로써 생기는 것이지, 태어날 때부터 마음속에 갖추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주자(朱子)의 이론을 뒤집어놓은 것이다. 주자는 도를 선천적으로 인간이나 사물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세당은 도란 각자가 가질 수 있는 개성에 따라 다르다고 한 것이다. 도는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보편성이 아니라 후천적이며 경험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박세당의 주장에서 종래의 획일적으로 봉쇄된 마음이 개성적이고 개방적이며 경험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열려갈 수 있게 되었다.

정약용(丁若鏞)은 “성(性)이란 기호(嗜好)다. 육체의 기호가 있는가 하면 심지(心知)의 기호가 있다. 이것을 성(性)이라 한다.”(與猶堂全書 卷16)라고 언급하였다. 이것은 주리론이나 주기론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특이한 시각이다. 굳이 말하면 인간 개체가 가지고 있는 한정적인 특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실학파 학문의 한 특징이다.

문학과 마음

문학은 마음의 표현이다. 그것도 작품마다에 마음의 표현은 다르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문학에서 마음을 찾아보려면 작품마다의 마음을 찾아내야 한다. 역대 선비들의 문학론에는 마음에 대한 언급이 많다.

거기에 나타난 마음을 살펴보면, 문학과 마음의 관계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에 따르는 문학사상도 찾아질 수 있다. 문학론에 나타난 마음은 심(心)·정(情)·성정(性情)·의(意)·지(志)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것들이 시대별로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신라 말까지는 문학론이 없어서 어떻다고 말할 형편은 못 된다. 고려 때에는 대체로 심·정·의·지로 나타난다. “시(詩)는 심(心)에서 근원한다.”(破閑集), “시는 의(意)가 위주가 된다.”(白雲小說), “글은 정(情)을 펴내는 것이다.”(東國李相國集), “시는 지(志)가 가는 바다.”(益齋集 史贊) 이렇게 문학의 정의에 심·정·의·지가 나타나 있다. 이것들이 모두 마음임은 물론이다.

고려 때에는 마음을 구속하는 틀이나 규범이 없었기 때문에 심·정·의·지는 특별한 뜻으로 써진 것은 아니다. 그저 마음일 뿐이다. 그리고 이 마음을 특별히 구속한 것이 없으니,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으면 그대로 표현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규보(李奎報)는 다음과 같이 문학론을 말하였다. “글이란 정(情)에 따라 발동되는 것이므로, 마음속에 격(激)함이 있으면 모름지기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 그것을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驅詩魔文退之送窮文 구시마문퇴지송궁문).” 이와 같이 문학이란 정이 발동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에 격한 것이 있으면 격한 대로 나타내면 글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과 의와 지의 속성이요, 그것의 표현이 문학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을 보면 그러한 마음을 천태만상으로 담아놓았다. 이것은 이규보뿐만 아니라 고려 문인들의 문학관이기도 하다.

고려시대를 겪고 조선 전기에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들도 문학의 발생으로 심·정·의·지를 드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없는 특별한 문학 용어가 하나 생겼다. 정 위에다 성을 하나 더 덮어씌운 것이다. 이것은 성리학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조선을 건국하자 국가 이념으로 성리학을 도입했다. 그것은 천리(天理)를 바탕하여 규범적인 틀을 만든 것이다.

천리는 천지자연에서는 ‘이’이지만 사람에 있어서는 ‘성’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감성대로 생각하고 행동을 하면 불선(不善)에 떨어지기 쉬우므로, 정을 닦고 걸러서 순선(純善)한 성을 회복한다는 원리이다.

이것이 문학의 경우라고 다를 것은 없다. 문학이란 이규보의 말대로 일차적으로는 정을 표출하는 것이지만 치닫게 되면 넘어지기가 쉽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원미(本源美)에 이를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성(性)이다. 그래서 정 앞에다 성을 놓음으로써 ‘정’의 문학은 규범론에 얽매이게 된 것이다.

최초로 성정을 문학론에 도입한 이첨(李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사(文辭)라는 것은 덕(德)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다. 대체로 문사는 정치와 교화로 더불어 유통되는 것이어서 그 시대의 치란(治亂)으로 인해서 그 소리가 슬프고 즐거움의 다름이 있다. 이것은 모두 성정(性情)에 있는 것을 시로 읊어서 그 속에 쌓인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그러나 진실로 삼광오악(三光五嶽 : 해와 달과 별과 이름난 다섯 산)이 신령한 기운을 타고서 음양의 합산(合散)하는 이치를 통찰하고, 사물의 무궁한 변화를 환하게 아는 것이 있으면, 그 문장이 응심하고 아담하며 강건(雅健 아건)하고, 오묘하고 정화(精華)한 것이 천지의 원기를 짝하고, 우주의 조화와 짝할 수 있다면 세대의 오르고 내리는 것과 풍속의 변천하는 것에 무슨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牧隱先生文集 목은 선생문집)

이첨은 문학이란 정치와 교화와 시대의 치란으로 인해서 시적 정서는 바뀐다고 했다. 이렇게 바뀌어 가는 정서를 가지고 시를 쓰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다. 시대를 반영하는 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전기 규범론자들은 그러한 문학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규범을 중시한 성정의 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첨의 말대로 정감의 세계를 한 단계 뛰어 넘어서 우주의 조화적 차원에서 시의 좌표를 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전기 규범론자들은 삼광오악의 신령한 기운을 타고, 음양의 합산하는 이치를 관찰하고, 천지의 원기와 짝하는 우주의 원리와 나란히 하는 것이 문학이 가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성현(成俔)의 말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다.

“시는 이(理)를 중시해야 한다. 만일 근본을 잃게 되면 아무리 호탕하고 아름다우며 여러 가지 수식을 하였다고 해도 이것을 시라고 할 수 없다.”라 한 것이 그것이다. 결국 이러한 말들은 인간의 감성에서 문학을 구하지 말고 높은 이성에서 구하라는 것이다.

조선 전기 규범론자들의 문학관을 도식화하면 성←정이 된다. 이른바, 거정현성(去情顯性)이나 존심양성(存心養性)의 경지에서 시를 쓰라는 것이다. 실제로 서경덕(徐敬德)이나 이황 같은 이들의 시를 보면 그러한 세계가 구축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는 관념적인 성리학이 비판되고 실질적인 학문이 숭상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문학에 부각되는 마음도 변할 수 밖에 없었다. ‘성←정’의 구조가 ‘성→정’의 구조로 바뀌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오면 성은 물(物)의 본질이나 만유의 원인 또는 천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갓 생(生) 이후의 형기(形氣) 또는 혈기심지(血氣心知) 정도로 보는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성(性)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을 말하면 성도 이미 말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성은 관형사적 허사에 불과하다. 성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말하자면 성정을 정(情)과 같은 뜻으로 쓴 것이다. 그러기에 아예 성을 빼버리고 정만을 쓰기도 하였다. “노래는 정(情)을 나타낸 것이다.”(大東鳳雜章 대동 봉잡장), “노래는 정(情)에서 발한다.”(靑丘永言 後章 청구영언 후장), “노래는 정지(情志)에서 펴낸 것인데 천기(天機)에서 발한다.”(鶴岡散筆 卷4 학강산필) 이렇게 정이 나타나고 정지(情志)가 나타나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용어는 천기(天機)이다. 천기라는 용어는 ‘사람이 원래 타고 난 진성(眞性)’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천리(天理)가 어떻고 만유의 원인이 어떻고를 따지는 일이 아니다. 그저 인간이 타고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진솔한 마음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담아놓은 것이 국풍이요 항요(巷謠)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 시인들은 바로 이러한 노래를 좋아했던 것이다.

홍석주(洪奭周)는 “시의 쓰임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데 있다. 삼백편(시경) 이후로 천여년 동안에 비록 고하(高下)가 있고, 문체가 다르고, 사정(邪正)이 있어 느낌이 다르지만, 시는 성정에 근본해서 천기에서 발현되는 것은 한가지다. ……그 발현이 성정에서 근본하지 않고 천(天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나는 성인이 지은 것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여항필부(閭巷匹婦)의 노래에서 구할 망정 율시에서는 구하지 않겠다.”(鶴岡散筆 卷3)고 말한다. 이렇게 성정→천기→여항필부의 구조에서 문학을 확인하고 있다.

홍석주는 시를 어떤 기교나 규범적인 틀에서 구하는 것을 꺼렸다. 시란 어디까지나 천품으로 타고난 진솔한 감정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천기에서 우러난 시였다. 이러한 시는 17세기의 고비를 넘으면서 허균(許筠)·김만중(金萬重)을 거쳐서 18,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홍대용(洪大容)·홍양호(洪良浩)·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홍석주 등에 의해서 고양되었다. 그리고 가집을 낸 김천택(金天澤)·김수장(金壽長) 등에도 여파가 이어졌다.

조선 후기에는 틀과 규범과 수사가 배제되고 타고난 천품대로의 마음을 가지고 문학을 표출하였다. 그래서 문학은 저절로 개성을 찾을 수가 있게 되었고, 개성을 찾다보니 언어도 우리 것으로 구사하면 맛이 더 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국문시가도 많이 나오고 국문시가집도 많이 엮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마음을 일상어에 나타난 마음, 불교와 마음, 유교와 마음, 그리고 문학과 마음으로 한정하여 살펴보았지만, 마음을 설명한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이유는 불교와 유교에 나타난 마음은 물론이지만 문학의 경우도 모든 작품이 다 마음의 표현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골간이 되는 것만을 간추려 보면, 일상어에 나타난 마음은 산발적인 것 같지만 마음자리→마음결→마음씀→마음씨의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바탕·움직임·발현·모양을 이룬 것으로서, 마음에 대한 일체의 단어는 이에서 생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부처니 여래니 보리니 하는 것이 고요하고 담담한 마음자리의 다른 명칭이라는 것이다. 그 마음자리를 일심(一心)·심원(心源)·진심(眞心) 등으로 표현하였다. 이에 비해서 마음결, 마음씀에서 나타나는 마음의 움직임과 모양을 망심(妄心)이라 하였다. 이러한 망심이 일어난 원인을 팔식(八識)에다 두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팔식을 끊어버리고 마음자리 곧 일심으로 귀의하라는 것이 불교였다. 여기에는 돈오와 점수가 따랐다.

우리나라도 긴 불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일심으로 귀의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마음자리←마음결←마음씀의 구조가 어떤 시사가 된다. 결국 마음결과 마음씀에서 일어난 팔식을 일심으로 돌리는 구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유교와 마음에서는 특히 성리학에서 마음의 문제가 크게 다루어졌다. 이황은 이기호발(理氣互發)을 주장함으로써 마음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도심(道心)과 인심(人心), 사단과 칠정으로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본연지성과 도심과 사단은 이의 발현임으로 순수하게 선하나, 기질지성과 인심과 칠정은 기의 발현이므로 천한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여기서 과연 마음을 이원적으로 나눌 수 있느냐, 또는 기질지성과 인심과 칠정은 천한 것이냐 하는 의문을 남기게 되었다.

이이는 이황의 이발기수지(理發氣隨之)와 기발이승지(氣發理乘之) 가운데서 후자만을 인정함으로써 본연지성과 도심과 사단의 독자적 근거를 부정하고 기질지성과 인심과 칠정에 포섭시킴으로써 인심을 크게 부각시키게 되었다.

이후로는 이황을 정점으로 하여 주리론자가 이어지게 되고, 이이를 정점으로 한 주기론자가 이어지는가 하면, 양쪽을 절충한 절충파도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주리론자는 마음을 지극히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게 되었고, 주기론자는 형이하학적으로 해석했으며, 절충파는 양자를 절충적으로 해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문학과 마음이다. 문학론에서는 마음을 심·정·의·지·성정으로 나누었다. 고려까지는 주로 문학론에 심·정·의·지가 나타났다. 이 경지는 마음을 어떤 규범을 따르지 않고 자유스럽게 표현되는 마음의 상태를 뜻하였다.

그러므로 문학의 경우도 마음 내키는 대로 표현해 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이르게 되면 성리학의 영향을 입어 문학에도 성정이란 용어가 등장하였다. 발현한 정이 천리 차원의 성의 규제를 받게 되어, ‘성←정’의 구조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규범론적 문학관이 되고 말았다.

조선 후기에 오면 성리학이 비판을 받게 되면서, 문학의 경우에도 그 규범에서 벗어나게 되어 ‘성→정’의 구조가 된다. 성은 한갓 관형사적 허사에 불과하여 정을 말하면 성도 말하게 된다고 보았다.

문학이란 규범이 아니라 인간이 타고난 발랄한 마음을 가지고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쓰여진 작품을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예컨대 국풍이나 항요 같은 문학 형태가 그것이다. 이 경지를 천기에서 발현된 문학이라 하게 되었다.

천기는 “원래 타고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진성(眞性)”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진솔한 마음을 나타내다 보니 개성이 존중되고 우리 나라 문자인 한글이 중시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우리말 시가가 많이 나타나게 되고 우리말 시가집도 많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다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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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明) 또는 치(癡, 산스크리트어: avidyā, moha, mūdha, 팔리어: avijjā, 영어: ignorance, delusion)는 다음의 분류, 그룹 또는 체계의 한 요소이다.

고타마 붓다가 설한 3독(三毒) 즉 불선근(不善根) 가운데 하나이다. 

부파불교와 설일체유부의 교학에서 5가지 자성불선(自性不善)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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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 부파불교 · 대승불교의 9결(九結) 가운데 무명결(無明結)에 해당한다. 

고타마 붓다가 설한 4성제(四聖諦)의 교의에서 집제(集諦)에 속한다.

고타마 붓다가 설한 12연기(十二緣起)의 교의에서 제1지분인 무명(無明)에 해당하고, 제2지분인 행(行), 제4지분인 명색(名色), 제9지분인 취(取)에 속한다

고타마 붓다가 설한 5온(五蘊)의 법체계에서 행온(行蘊)에 속한다.

고타마 붓다가 설한 12처(十二處)의 법체계에서 법처(法處)에 속한다.

고타마 붓다가 설한 18계(十八界)의 법체계에서 법계(法界)에 속한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의 법체계에서 심소법(心所法: 46가지) 중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6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심소법(心所法: 51가지) 중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무명(無明)은 어리석음, 어둠, 막힘, 미혹(迷惑), 치(癡), 암(闇), 장(障), 미(迷), 우치(愚癡), 무지(無知), 무지(無智) 또는 무현(無顯)이라고도 한다. 이들 중 미혹(迷惑)의 일반 사전적인 의미는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 또는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맴'인데, 불교 사전들에서의 정의에 따르면 미(迷)는 사(事)와 이(理)에서 잘못이 있는 을 말하고, 혹(惑)은 사(事)와 이(理)에 밝지 못한 을 말한다. 

《잡아합경》 제13권 제334경〈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에서, 고타마 붓다는 무명(無明)이란, 근(根) · 경(境) · 식(識)의 화합이 일어날 때 이전까지 쌓은 염오(染污)한 업(業)으로 인해 해당 경(境)에 대한 부정사유(不正思惟, 邪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8정도의 정사유의 반대가 일어나며 이 부정사유로 인해 [해당 경(境)과 그 이치에 대한, 즉 사(事)와 이(理)에 대한] 치(癡) 즉 어리석음이 일어나는데 이 어리석음이 곧 무명(無明)이라고 말하고 있다.(아래 인용문 참조)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비판적으로 집대성한 세친의 《구사론》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치(癡)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어리석게 하는 마음작용으로, 우치(愚癡: 어리석음), 무지(無智) 또는 무현(無顯)이라고도 한다. 무지(無智)는 마음이 사(事: 사물, 현상)와 이(理: 이치, 본질)를 밝게 결택(決擇: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함)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고, 무현(無顯)은 사(事: 사물, 현상)와 이(理: 이치, 본질)가 은폐되어 마음에 밝게 드러나 알려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호법 등의 《성유식론》 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치(癡)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온갖 이(理: 이치, 본질)와 사(事: 사물, 현상)에 대해 미혹[迷]하고 어두워[闇]지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性]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그리고, 치(癡)의 마음작용은 이러한 본질적 성질을 바탕으로 마음이 무치(無癡: 어리석지 않음, 지혜로움)의 마음작용과 상응하는 것을 장애함으로써 마음으로 하여금 온갖 잡염(雜染: 근본번뇌와 수번뇌, 즉 모든 번뇌)과 상응하게 하는 발동근거[所依]가 되는 것을 그 본질적 작용[業]으로 한다. 

현대 학자의 견해들 중 하나에 따르면, 무명(無明)은 산스크리트어 아비드야(avidyā)와 모하(moha)의 번역어로서 명지(明知, vidyā)가 없는 것, 즉 이[理: 진실한 도리]를 깨치지 못하고 사[事: 사물]에 통달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무명(無明)이 12연기(十二緣起)의 제1지분을 이루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무명은 미혹된 존재가 겪는 괴로움[苦]의 근본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추구하는 대상에 대한 채워지지 않은 불만족(不滿足)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갈애(渴愛) 즉 탐욕(貪欲) 또는 집착(執著, 執着)과 표리의 관계를 이루는 으로 이해되고 있다.

 

초기불교

고타마 붓다

《잡아함경》에는 무명(無明)에 대한 정의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 업, 번뇌성의 마음작용(특히, 부정사유와 무명과 갈애(집착, 애욕))의 관계를 보여주는, 아래에 인용된, 고타마 붓다의 설법이 있다.

이 설법에서 고타마 붓다는 무명(無明)이란, 근(根) · 경(境) · 식(識)의 화합이 일어날 때 이전까지 쌓은 염오(染污)한 업(業)으로 인해 해당 경(境)에 대한 부정사유(不正思惟, 邪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8정도의 정사유의 반대)가 일어나며, 즉 구체적으로는 악욕[欲, 惡欲: 불선한 욕구, 원함, 희망, 특히 탐욕] · 에(恚, 瞋: 성냄) · 해(害: 해치려 함) 등의 번뇌성의 마음작용이 일어나며, 이 부정사유로 인해 [해당 경(境)과 그 이치에 대한, 즉 사(事)와 이(理)에 대한] 치(癡) 즉 어리석음이 일어나는데 이 어리석음이 곧 무명(無明)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설법에서 고타마 붓다는 8정도의 정사유(正思惟)의 반대인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가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고타마 붓다는, 다시 무명은 갈애(집착, 애욕)의 원인이 되며, 다시 갈애(집착, 애욕)는 염오(染污)한 업의 원인이 되며, 염오(染污)한 업은 오염된 마음, 즉 3계에 속박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고타마 붓다는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가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의 원인이지만, 이렇게 부정사유에서 생겨난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는 다시 [더 큰 또는 더 오염된]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을 〈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 · 有緣 · 有縛法經)〉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안식[眼]에는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자[縛]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안식[眼]의 인(因), 안식의 연(緣), 안식을 속박시키는 자[縛]인가? [지금까지 쌓은] 업(業, 즉 염오(染污)한 업)이 안식의 인이고, 업이 안식의 연이며, 업이 안식을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이다. 

업(業, 즉 염오(染污)한 업)에도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자[縛]가 있다.

무엇이 업의 인, 업의 연, 업을 속박시키는 자인가? 갈애[愛, 집착, 애욕]가 업의 인이며, 업의 연이며, 업을 [즉, 안식의 업을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이다. 

갈애[愛, 집착, 애욕]에도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자[縛]가 있다. 무엇이 갈애(집착)의 인, 갈애(집착)의 연, 갈애(집착)를 속박시키는 자인가?

무명(無明)이 갈애(집착)의 인이며, 갈애(집착)의 연이며, 갈애(집착)를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이다.

무명(無明)에도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자[縛]가 있다.

무엇이 무명의 인, 무명의 연, 무명을 속박시키는 자인가?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가 무명의 인이며, 무명의 연이며, 무명을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이다.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8정도의 정사유의 반대)에도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며 속박시키는 자[縛]가 있다. 무엇이 부정사유의 인, 부정사유의 연, 부정사유를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자인가? 안식[眼]과 색경[色]을 인연[緣]하여 부정사유가 생기고 그 부정사유에서 생겨난 어리석음[癡]이 다시 부정사유의 인이며, 부정사유의 연이며, 부정사유를 [3계(三界)의 색경(色境)에] 속박시키는 이다. 

안식과 색경을 인연하여 부정사유를 일으키고 어리석음을 일으킬 때, 그 어리석음[癡]이 바로 곧 무명(無明)이다. 바로 이 어리석음을 바탕하여 구하고 원하는 것[求欲]을 갈애[愛, 집착, 애욕]라 하며, 갈애[愛, 집착, 애욕]에 바탕하여 짓는 것[所作]을 업(業, 즉 염오(染污)한 업)이라 한다.

이와 같이[如是], 비구들이여,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8정도의 정사유의 반대)는 무명(無明)을 원인[因]으로 하여 갈애[愛, 집착, 애욕]가 된다[不正思惟因無明為愛]

[이와 같이]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갈애(집착, 애욕)가 생기고[無明因愛], 갈애(집착, 애욕)를 원인으로 하여 업(業, 즉 염오(染污)한 업)이 생기고[愛因為業], 업(염오(染污)한 업)을 원인으로 하여 [갖가지로 오염된, 즉 갖가지 번뇌에 물든, 즉 3계의 색경에 속박된] 안식[眼]이 생긴다[業因為眼]. 이식[耳] · 비식[鼻] · 설식[舌] · 신식[身] · 의식[意]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을 일러 〈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緣 · 有縛法經]〉이라 한다. 

— 《잡아합경》 제13권 제334경〈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한글본≫

 

사리불

《잡아함경》 제18권 제490경 〈염부차경(閻浮車經)〉에서는 염부차(閻浮車)가 사리불(舍利弗)에게 무명이 무엇이며 또 그것을 끊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있으며, 이에 사리불은 무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명을 끊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소경(小經)에서 염부차는 사리불의 설명을 통해 무명이란 '어둠이 크게 쌓이고 모인 것[大闇積聚]'으로 이해하며, 그리고 사리불은 8정도(八正道)가 무명을 끊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염부차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무명(無明)이라고 말들 하는데, 무명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무명이라는 것은 과거[前際]에 대하여 앎이 없고[無知], 미래[後際]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과거[前際] · 미래[後際] · 현재[中際]에 대하여 앎이 없고, 불보(佛寶) · 법보(法寶) · 승보(僧寶)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괴로움[苦] · 괴로움의 발생[集] · 괴로움의 소멸[滅]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에 대하여 앎이 없고 선(善) · 불선(不善) · 무기(無記)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안[內]에 대해서도 앎이 없고 밖[外]에 대해서도 앎이 없으며, 혹은 이러저러한[彼彼] 일[事: 개개의 사물, 특히 앞에 나열한 이치들과 관련된 개개의 구체적인 일]에 대하여 앎이 없고[無知] 어둡고[闇] 막히면[障],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염부차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그것은 어둠이 크게 쌓이고 모인 것[大闇積聚]이겠군요. 

또 물었다. 사리불이여,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무명을 끊게 되는 길이 있고 방법이 있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있습니다. 이른바 8정도(八正道)이니, 즉 바른 소견[正見]과……(내지)……바른 선정[正定]입니다.

— 《잡아함경》 제18권 제490경 〈염부차경(閻浮車經)〉. 한글본≫

 

부파불교

학자들은 설일체유부의 논서들이 세 단계의 발전 단계를 거친 것으로 보는데, 주요 논서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단계:《아비달마집이문족론(阿毘達磨集異門足論)》《아비달마법온족론(阿毘達磨法蘊足論)》

2단계《아비달마시설족론(阿毘達磨施設足論)》《아비달마식신족론(阿毘達磨識身足論)》

《아비달마계신족론(阿毘達磨界身足論)》《아비달마품류족론(阿毘達磨品類足論)》《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

3단계《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아비달마장현종론(阿毘達磨藏顯宗論)》

아래 단락들은 이러한 아비달마 논서들의 발전 순서에 의거하여 배열되어 있으며, 해당 아비달마 논서들에서 나타나는 무명(無明) 즉 치(癡)에 대한 정의를 기술한다.

 

아비달마집이문족론

사리자(舍利子)는 《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3권 제4품〈3법품(三法品)〉에서 다음과 같이 무명(無明) 즉 우치[癡]를 정의하고 있다.

≪(문) "우치의 불선근[癡不善根]"이라 했는데, 우치[癡]란 어떤 것인가? 

(답) 전제(前際)에 대하여 앎이 없고[無知] 후제(後際)에 대하여 앎이 없고 전후제(前後際)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안[內]에 대하여 앎이 없고 바깥[外]에 대하여 앎이 없고 안팎[內外]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업(業)에 대하여 앎이 없고, 이숙(異熟)에 대하여 앎이 없고 업이숙(業異熟)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선(善)을 지을 업[善作業]에 대하여 앎이 없고 악(惡)을 지을 업[惡作業]에 대하여 앎이 없고 무기[善惡, 無記]를 지을 업[善惡作業]에 대하여 앎이 없는 것이다. 

원인[因]에 대하여 앎이 없고 원인으로 생긴 업[因所生法]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불(佛)에 대하여 앎이 없고 법(法)에 대하여 앎이 없고 승가[僧]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괴로움[苦]에 대하여 앎이 없고 괴로움의 원인[集]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괴로움의 소멸[滅]에 대하여 앎이 없고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도(道)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착한 법[善法]에 대하여 앎이 없고 착하지 않은 법[不善法]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죄 있는 법[有罪法]에 대하여 앎이 없고 죄없는 법[無罪法]에 대하여 앎이 없는 것이다. 

닦아야 할 법[應修法]에 대하여 앎이 없고 닦지 않아야 할 법[不應修法]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하열한 법[下劣法]에 대하여 앎이 없고 훌륭한 법[勝妙法]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검은 법[黑法]에 대하여 앎이 없고 흰 법[白法]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적대가 있는 법[有敵對法]에 대하여 앎이 없고 인연으로 생긴 법[緣生法]에 대하여 앎이 없으며, 6촉처(六觸處)를 사실대로 모르는 것이다[如實無知]. 

이와 같이 앎이 없고[無知], 소견이 없으며[無見], 현관이 아니고[非現觀], 몹시 어두우며[黑闇], 어리석고 못났으며[愚痴], 밝음(총명)이 없고[無明], 눈이 멀었으며[盲冥], 가리워 갇혔고[罩網], 감아 싸였으며[纏裏], 미련하고[頑騃], 혼탁(渾濁)하며, 가리고 덮여서[障蓋], 소경이 되고 무명(無明)을 일으키며, 무지(無智)를 일으켜서 뛰어난 지혜[勝慧]를 없애고, 선품(善品)을 장애하여 열반(涅槃)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또 무명루(無明漏)와 무명폭류(無明暴流)의 무명의 멍에[軛]와 무명의 독 뿌리[毒根]와 무명의 독 줄기[毒莖]와 무명의 독 가지[毒枝]와 무명의 독 잎사귀[毒葉]와 무명의 독 꽃[毒花]과 무명의 독 열매[毒果]와 치(癡), 등치(等癡), 극치(極癡)와 개(改), 등개(等改), 극개(極改) 등 치(癡)의 종류와 치로 생기는 것과 개(改)의 종류와 개로 생기는 것을 통틀어서 우치[癡]라 한다. 

— 《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3권 제4품〈삼법품(三法品)〉. 한글본≫

 

아비달마법온족론

12연기: ① 무명 ② 행 ③ 식 ④ 명색 ⑤ 6입 ⑥ 촉 ⑦ 수 ⑧ 애 ⑨ 취 ⑩ 유 ⑪ 생b⑫ 노사

 

목건련(目乾連)은 《아비달마법온족론》 제11권 제21품〈연기품(緣起品)〉에서 다음과 같이 무명(無明) 즉 치(癡)를 정의하고 있다.

또한, 목건련은 무명연행(無明緣行), 즉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있다[無明緣行]'는 12연기(十二緣起)의 제1지분인 무명(無明)과 제2지분인 행(行)의 연기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나아가 무명연행(無明緣行)이란 무명을 인연하여 탐(貪) · 진(瞋) · 치(癡)의 불선근이 생기는 것과 8정도(八正道)의 반대인 8사(八邪) 또는 8사행(八邪行)이 생기는 것을 포괄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있다[無明緣行]'고 함에서 어떤 것이 무명(無明)인가?

이른바 전제(前際)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후제(後際)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전후제(前後際)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안[內]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밖[外]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안팎[內外]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업(業)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이숙(異熟)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업과 이숙[業異熟]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착하게 짓는 업[善作業]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악하게 지은 업[惡作業]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착하거나 악하게 짓는 업[善惡作業]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인(因)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인으로 생기는 법[因所生法]에 대하여도 아는 것이 없다.

또 부처님[佛] · 가르침[法] · 승가[僧]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괴로움[苦] · 괴로움의 원인[集] · 괴로움의 소멸[滅]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착하고 착하지 않은 법[善不善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죄가 있고 죄가 없는 법[有罪無罪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마땅히 닦아야 하고 닦지 않아야 할 법[應修不應修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하열하고 승묘한 법[下劣勝妙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희고 검은 법[白黑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적대가 있는 법[有敵對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緣生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며, 6촉처(六觸處)에 대하여 사실대로 아는 것이 없는 것[如實無知]이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이 없고[無知] 보는 것이 없으며[無見], 현관이 아니고[非現觀] 몹시 어둡고[黑闇] 어리석고[愚癡] 밝음(총명)이 없고[無明], 눈이 멀었고[盲冥] 우리에 갇혔고[罩網] 감아 싸였고[纏裏] 미련하고[頑騃] 혼탁하고[渾濁] 가리고 덮였으며[障蓋], 소경이 되게 하고 밝음(총명)이 없게 하며[發無明], 지혜가 없게 하고[發無智] 하열한 지혜를 일으키며[發劣慧], 선품(善品)을 장애하여 열반(涅槃)을 증하지 못하게 하며, 무명루(無明漏) · 무명폭류(無明暴流) · 무명액(無明軛)과 무명의 독 뿌리[無明毒根] · 무명의 독 줄거리[毒莖] · 무명의 독 가지[毒枝] · 무명의 독 잎[毒葉] · 무명의 독 꽃[毒花] · 무명의 독 열매[毒果]와 어리석고[癡] 평등하게 어리석고[等癡] 극히 어리석으며[極癡], 사납고[欣] 평등하게 패려궂고[等欣] 극히 패려궂으며[極欣], 어리석음의 종류[癡類]와 어리석음[癡]으로 생기는 것을 통틀어 무명(無明)이라 한다. 

어떤 것을 '무명을 반연하여 행(行)이 생긴다[無明緣行]'고 하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알아야 한다. 무명을 인(因)으로 하고 무명을 연(緣)으로 하기 때문에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이 일어나느니라"고 하셨다. 이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의 성품을 바로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생기는 것이라[無明緣行]'고 한다. 

또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명을 앞의 행[前行]으로 하고 무명을 표치[幟]로 삼기 때문에 한량없는 종류의 악한 법[惡不善法]을 일으키나니, 이른바 무참(無慚) · 무괴(無愧) 등이다. 이 무참 · 무괴로 말미암아 모든 삿된 소견[邪見]을 일으키고 삿된 소견으로 말미암아 삿된 생각[邪思惟]을 일으키며, 삿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삿된 말[邪語]을 일으키고 삿된 말로 말미암아 삿된 행위[邪業]를 일으키며, 삿된 행위로 말미암아 삿된 생활[邪命]을 일으키고 삿된 생활로 말미암아 삿된 노력[邪勤]을 일으키며, 삿된 노력으로 말미암아 삿된 기억[邪念]을 일으키고 삿된 기억으로 말미암아 삿된 선정[邪定]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 삿된 소견 · 삿된 생각 · 삿된 말 · 삿된 행위 · 삿된 생활 · 삿된 노력 · 삿된 기억 · 삿된 선정을 '무명을 반연하여 행이 생긴다[無明緣行]'고 한다. 

— 《아비달마법온족론》 제11권 제21품〈연기품(緣起品)〉. 한글본≫

 

아비달마품류족론

세우(世友)는 《아비달마품류족론》 제3권 제4품〈변칠사품(辯七事品)〉에서 다음과 같이 무명(無明) 즉 치(癡)를 정의하고 있다.

≪무명(無明)은 무엇인가? 3계(界)에 아는 것이 없는 성품[無知性]이다.

— 《아비달마품류족론》 제3권 제4품〈변칠사품(辯七事品)〉. 한글본 ≫

 

아비달마발지론

가다연니자(迦多衍尼)는 《아비달마발지론》 제1권 제1잡온(雜蘊) 제3〈보특가라납식(補特伽羅納息)〉에서 다음과 같이, 고타마 붓다의 무명(無明) 즉 치(癡)에 대한 언급을 빌어서 무명(無明)을 정의하고 있다.

≪이 [과거세의] 업[此業]을 인연하여 각각의 번뇌(煩惱)가 일어난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즉, 이러한 상황을, 즉 과거의 업에 바탕하여 탐 · 진 · 해 등의 번뇌를 일으키는 어리석음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 《아비달마발지론》 제1권 제1잡온(雜蘊) 제3〈보특가라납식(補特伽羅納息)≫

 

아비달마구사론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비판적으로 집대성한 세친(世親)의 《구사론》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치(癡)는 마음(6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어리석게 하는 마음작용으로, 우치(愚癡: 어리석음), 무지(無智) 또는 무현(無顯)이라고도 한다.

무지(無智)는 마음이 사(事: 사물, 현상)와 이(理: 이치, 본질)를 밝게 결택(決擇: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함)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고, 무현(無顯)은 사(事: 사물, 현상)와 이(理: 이치, 본질)가 은폐되어 마음에 밝게 드러나 알려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대승불교

현대의 학자들에 따르면 인도불교의 유식학의 역사는 크게 3기로 나뉘는데, 제1기는 미륵(彌勒)과 무착(無着)의 유식학이고, 제2기는 세친(世親)의 유식학이고, 제3기는 호법(護法)과 안혜(安慧) 등의 10대 논사의 유식학이다.

아래 단락들은 이러한 구분에 의거하여 배열되어 있으며, 해당 유식학 논서들에서 나타나는 무명(無明) 즉 치(癡)에 대한 정의를 기술한다.

 

대승아비달마집론·잡집론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무착(無着)의 《대승아비달마집론》 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치(癡)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3계(三界)에 대해 무지(無知)해지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性]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그리고, 무명(無明) 또는 치(癡)의 마음작용은 이러한 본질적 성질을 바탕으로 마음이 온갖 법(法)에 대해 잘못된 결정[邪決定]을 내리게 하고, 의심[疑]을 일으키게 하고, 잡(雜: 잡염)을 일으키게 하는 발동근거[所依]가 되는 것을 그 본질적 작용[業]으로 한다.

 

《대승아비달마집론》 의 주석서에 해당하는 안혜(安慧)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는 위의 《대승아비달마집론》의 정의에서 '3계(三界)에 대한 무지(無知)'라 표현된 것을 '3계(三界)에 대한 무지(無智)'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 따르면, 위의 《대승아비달마집론》의 정의에서, 잘못된 결정[邪決定]이란 전도된 지혜[顛倒智]를 말하며, 의심[疑]은 유예(猶豫)하는 것을 말하며, 잡(雜)은 잡염(雜染: 근본번뇌와 수번뇌, 즉 모든 번뇌)을 말한다. 그리고 발동근거[所依]가 된다는 것은 우치(愚癡: 어리석음)로부터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대승오온론·광오온론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세친(世親)의 《대승오온론》과 그 주석서인 안혜(安慧)의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치(癡)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업과(業果), 즉 업과 그에 따른 과보, 즉 인과의 법칙과, 4성제[諦, 四聖諦]와, 3보[寶, 三寶]에 대해 무지(無智: 밝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할 수 없음)해지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性]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또한, 《대승오온론》과 《대승광오온론》에 따르면, 무명(無明)에는 구생기(俱生起)와 분별기(分別起)의 2종이 있다. 즉, 전생(前生)의 업에 합당하게 태어날 때 타고난 무명이 있고, 이번 생에서 잘못된 스승[邪師]이나 잘못된 가르침[邪敎] 또는 자신의 사사유(邪思惟, 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잘못된 생각이나 논리 또는 추리)에 의해 후천적으로 생긴 무명이 있다.

 

성유식론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인 호법(護法) 등의 《성유식론》 에 따르면, 무명(無明) 또는 치(癡)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온갖 이(理: 이치, 본질)와 사(事: 사물, 현상)에 대해 미혹[迷]하고 어두워[闇]지게 하는 것을 본질적 성질[性]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그리고, 치(癡)의 마음작용은 이러한 본질적 성질을 바탕으로 마음이 무치(無癡: 어리석지 않음, 지혜로움)의 마음작용과 상응하는 것을 장애함으로써 마음으로 하여금 온갖 잡염(雜染: 근본번뇌와 수번뇌, 즉 모든 번뇌)과 상응하게 하는 발동근거[所依]가 되는 것을 그 본질적 작용[業]으로 한 [위키백과]

 

**무명은 무지를 뜻하는 것으로, 불교의 여러 경전에서 갖가지 심오한 해설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일체 사물에 대한 도리를 밝게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거나 진리에 대한 무지로 통용되고 있다.

인간 생사의 근원을 밝히는 12연기(緣起)의 첫머리에 나오는 무명은 ‘나’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요 ‘나’를 범부이게끔 하는 근원이며, 모든 번뇌의 근본이요 일체 악업(惡業)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본업경 本業經≫에서는 “무명은 일체법(一切法)을 밝게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고,

≪대승의장 大乘義章≫에서는 “진리를 요달하지 못하는 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무명은 어리석고 어두운 마음이다. 그 본체에는 지혜도 밝음도 없다.”고 하였다.

≪구사론≫에서는 “무명의 모습은 사제(四諦)와 삼보(三寶) 및 업(業)의 원인과 결과를 모르는 데 있다.”고 하였으며,

≪유식론 唯識論≫에서는 “무명은 모든 사물과 이치에 대하여 미혹되고 어리석은 것을 본성으로 삼고, 능히 지혜를 결박하여 일체를 잡되고 물들게 하는 것으로서 그 업을 삼는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채택하고 있는 것은 ≪기신론 起信論≫에서의 무명에 대한 해설이다. ≪기신론≫에서는 무명을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법계(法界)의 참 이치에 어둡게 된 최초의 한 생각을 근본 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그 근본 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게 또는 거칠게 일어나는 모든 허망한 생각들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고 하였다.

무명은 불교의 기본 교리로서 불교가 여러 부파(部派)로 나누어진 뒤에도 인간의 괴로움을 설명하는 근본 교설로 채택되었고, 2종무명·5종무명·15종무명 등으로 무명을 세분하여 해석하였다.

그러나 석가모니 당시부터 무명은 원래 실체가 없는 것으로 설명되었고, 선종에서는 독자적인 개체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본성을 뜻하는 법성(法性)과의 일체로 파악되었다.

무명법성일체설에서 볼 때 법성과 무명은 마치 얼음과 물의 관계와 같다. 무명이라는 얼음의 본성은 원래가 물이다. 얼음이라고 하지만 물의 성품을 벗어 버리지 못한다. 사람의 심성은 본래 얼음이 아니나 법성의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된 것일 뿐, 어느덧 홀연히 생겨난 무명은 곧 근본 깨달음인 본각(本覺)의 법성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무명법성일체설은 우리 나라 선종에서도 뿌리를 내려 무심선(無心禪)을 정립하기에 이르렀고, 번뇌와 고통을 피하려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생활하라는 실천적 규범을 낳기도 하였다.

신라의 원효(元曉)는 ≪대승기신론소≫에서 일심(一心)을 설명하면서, 일심 이외에 별다른 법이 없으나 무명으로 말미암아 일심을 미하게 되어 갖가지 번뇌를 일으키고 육도(六道)를 윤회하게 된다고 하였다.

원효는 이 무명을 잠재적인 충동력이라고 보았다. 곧 이 충동력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이 동요하게 되지만, 무명 자체는 아직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라고 하였다. 즉, 무명은 일심을 동요하게 하는 원초적인 힘으로 파악하였고, 이 무명의 충동력이 계속해서 일심의 바다에 물결을 일으키게 될 때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무명은 모든 고통스러운 결과의 가장 원초적인 원인이 되며, 이 무명을 없앨 때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 다움 백과

 

**무명(無明)이란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 난 사람에게는 허공꽃(空華)이 보이고 달을 쳐다볼 적에 달이 두 개로 보인 것과 같은 것이다. 허공에는 실제로 꽃이 없는데 눈에 병이나 헛것이 보이고 달은 하나뿐인데 두 개로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허공을 잘못 보는 것이며 달을 잘못 보는 것이라 허공도 실제를 모르고 달도 본래 모습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무명(無明)이라 한다.   - 원각경(圓覺經) -

 

**無(없을 무)는 춤을 추고 있는 무당을 그린 글자이다.

舞(춤출 무)와 通(통할 통)한다.

춤사위는 춤을 추는 동안에는 나타나지만 춤을 멈추면 곧 사라진다. 마치 박수소리가 두 손바닥이 마주쳤을 때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이렇게 존재(existence)에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버리는 것을 因緣(인연)이라고 한다.

즉, 12緣起(연기)는 因緣法으로 시작된다.

實體(실체:substantia) 는 뿌리와 줄기의 관계성이라면, 緣起(연기: transformatio)는 '뿌리가 곧 줄기'라는 개념이다. 즉, 緣起(연기)는 實體(실체)를 탐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실체를 낳게 하는 場所(장소)를 탐구한다.

場이나 所는 實體(실체)가 아니며, 물질적인 것도 아니다. 이러한 非物質的 場所에서 物質이 出現하는 것을 깨달아 보는 것이 無明(무명)의 뜻이다.

因(인할 인)은 네모(口: 에워쌀 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大)을 나타내고 있는데, 여기서의 이 네모(口)가 바로 場所(장소)가 되며, 이 장소로부터 圓(둥글 원)인 360度의 法度가 시작된다. 네모난 場所가 없다면 둥근 하늘을 가질 수 없다. 지구가 '네모나다'는 하는 것은 이렇게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 고대인들이 무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圓方角(天地人)의 순서가 아니라, 角方圓(각방원)의 순서로 나아간다.

角이 있어 方이 만들어지고, 方이 있어 圓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는 一, 二 , 三 의 순서로 보는 것이 아니라, 三, 二, 一의 순서로 보는 것인데, 전자는 量的順序(양적순서)요, 후자는 質的次例(질적차례)이다.

三이 先在(선재)하지 않는다면 一이 二가 되거나 三으로 귀결될 수 없다. 순수한 異質은 서로의 영역으로 옮아갈 수 없으며, 오로지 순수하지 않는 雜(섞일 잡)스러운 것만이 서로의 영역으로 옮아갈 수 있다. 三 은 一과 二를 모두 갖고 있는 雜한 것이므로 이 三의 중개로 一이 二가 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양적으로 보면 一과 二가 합해서 三이 되는 것 같이 보인다. 즉 三이 제일 마지막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實體界(cosmos substantiae)에서는 一, 二, 三 으로 진행되고 因緣界(domus transformationis)에서는 三, 二, 一 의 차례로 드러난다. 즉 실체계는 '진화적'이지만, 인연계는 '선택적'이다.

연기의 첫번째인 無明은 이렇게 실체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연적으로 세상을 보는 것임을 확실하게 定한다. 즉 一 이 二요, 三 이다 라는 관점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니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있고 없고는 실체계에서만 감각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결국 認識(인식)작용이 낳는 Cosmos(세계)일 뿐이다.

그렇다고 실체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방법을 달리한 것이다.- 無明(무명) 작성자 DAN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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