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

馬鳴菩薩造 (마명보살조) 

梁天竺三藏法師真諦譯(양천축삼장법사진제역)

I. 序分(서분)

 1) 歸敬序(귀경서) 

① 三寶(삼보)에 귀명

歸命盡十方(귀명진시방) 最勝業偏知(최승업편지) 

다함이 없는 생명에 돌아가 (삼보에) 귀의하며, 最勝業=가장 뛰어난 의업(意業 - 용대)으로 두루하시며, 

色無礙自在(색무애자재) 救世大悲者(구세대비자)

걸림없이 자재로우신 몸(색신, 육신)이시며, 세상을 구제하시는 대자대비하신 이(부처님),  

及彼身體相(급피신체상) 法性眞如海(법성진여해)

及=그리고 彼身=그 불신의 체상(법보)인 법성의 진여해와 

無量功德藏(무량공덕장) 如實修行等(여실수행등)

무량한 공덕장과, 여실히 수행 하시는 분들께 歸命=목숨 바쳐 귀의합니다.

 

2) 述議偈(술의게) - 論(논)을 짓는 목적

爲欲令衆生(위욕령중생) 除疑捨邪執(제의사사집) 

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중생들로 하여금 의혹(의심)을 없애고, 邪執=그릇된 집착을 버리게 하며, 

起大乘正信(기대승정신) 佛種不斷故(불종부단고)

대승(마하연)에 대한 바른 믿음을 일으켜, 부처의 씨앗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2. 發起序(발기서)  

  ㉮ 論(논)의 이유와 구성(논의 체를 정립함)

論曰(논왈) 有法能起摩訶衍信根(유법능기마가연신근) 是故應說(시고응설)

논하여 이르나니, 법이 대승(마하연)의 믿음의 뿌리=信根을 일으키므로, 그러므로 마땅히 설하는 것이다.

說有五分(설유오분) 云何爲五(운하위오)

설명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다섯인가?

一者因緣分(일자인연분) 첫째는 인연분본론을 쓰는 이유를 밝힘

二者立義分(이자입의분) 둘째는 입의분, → 본론의 근본적 의미를 밝힘

三者解釋分(삼자해석분) 셋째는 해석분, → 앞서 밝힌 근본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해석

四者修行信心分(사자수행신심분) 넷째는 수행신심분, 信心과 그를 바탕으로 한 수행을 밝힘

五者勸修利益分(오자권수이익분) 다섯째는 권수이익분이다. → 이익을 나타내어 수행을 권함

 

Ⅱ. 正宗分(정종분)

 1. 因緣分(인연분)  

  1) 論(논)을 짓는 인연

初說因緣分(초설인연분)

먼저 인연분을 설하다.

問曰(문왈) 有何因緣(유하인연) 而造此論(이조차론)

묻나니, 어떤 인연으로 이 논을 짓는가?

答曰(답왈) 是因緣有八種(시인연유팔종) 云何爲八(운하위팔)

답하나니, 이 인연(동기, 이유)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여덟인가?

一者(일자) 因緣總相(인연총상) 所謂(소위) 爲令衆生(위령중생)

첫째는, 인연의 총상으로, 이른바 중생들로 하여금, 

離一切苦(이일체고) 得究竟樂(득구경락) 非求世間名利恭敬故(비구세간명리공경고)

일체의 괴로움=苦를 떠나 궁극의 즐거움=究竟樂(열반)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며, 세속=世間의 명예와 이익=名利나 공경 받음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현시정의를 설하는 이유

二者(이자) 爲欲解釋如來根本之義(위욕해석여래근본지의)

둘째, 여래의 근본 뜻을 해석하여 

令諸衆生正解不謬故(영제중생정해불류고)

중생들로 하여금 바르게 이해하게 하고 그릇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며,→대치사집을 설하는 이유

三者(삼자) 爲令善根成熟衆生(위령선근성숙중생) 於摩訶衍法(어마하연법)

셋째는 선근이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 마하연(대승)의 법을 감당하여 

堪任不退信故(감임불퇴신고)

신심에서 물러서지 않는 믿음=不退信을 견디어 내도록 하기 위함이며,→분별발취도상을 설하는 이유

四者(사자) 爲令善根微少衆生(위령선근미소중생) 修習信心故(수습신심고)

넷째, 선근이 적은=微少한 중생으로 하여금 신심을 닦아 익힘=修習하게 하기 위함이며, →수행신심분 중의 사신과 수행오문 중의 사문을 설하는 이유

五者(오자) 爲示方便(위시방편) 消惡業障(소악업장)

다섯째 방편을 나타내 보여 나쁜 업장=惡業의 장애를 없애고,

善護其心(선호기심) 遠離癡慢(원리치만) 出邪網故(출사망고)

그 마음을 잘 지켜 어리석고 교만함=癡慢을 멀리 여의어, 삿된 그물=邪網에서 벗어나게 하기위한 까닭이다.→수행신심분 중 수행 사문의 결말, 장애를 제거하는 방편을 설하는 이유

六者(육자) 爲示修習止觀(위시수습지관) 對治凡夫二乘心過故(대치범부이승심과고)

여섯째, 지관을 닦아 익힘=修習함을 보여, 범부와 이승의 마음의 허물(과오)을 바로 잡도록=對治하기 위함이며,→수행 오문중의 지관문을 수습을 설하는 이유

七者(칠자) 爲示專念方便(위시전념방편) 生於佛前(생어불전)

일곱째는 염불에 전념하는 방편을 나타내 보여, 불전에 왕생하여, 

必定不退信心故(필정불퇴신심고)

물러섬이 없는 신심을 반드시 갖도록 하기 위함이며,→수행신심분 중 염불왕생, 불퇴방편을 설하는 이유

八者(팔자) 爲示利益(위시이익) 勸修行故(권수행고)

여덟째 이익을 나타내 보여 수행을 권유하기 위한 까닭이다. →권수이익분을 설하는 이유

有如是等因緣(유여시등인연) 所以造論(소이조론)

이와 같은 인연 등이 있으므로 논을 짓는 것이다.

 

2) 論(논)의 특색(목적)  

問曰(문왈) 修多羅中(수다라중) 具有此法(구유차법) 何須重說(하수중설)

물어 말하나니, 수다라 경에 이 법이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하여 거듭 설해야 하는가?

答曰(답왈) 修多羅中(수다라중) 雖有此法(수유차법)

답하여 말하나니, 수다라(경)에 이 법이 있을지라도, 

以衆生根行不等(이중생근행부등) 受解緣別(수해연별)

중생의 근기와 수행이 같지 아니하며,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인연(조건)이 같지 않나니,

  

所謂(소위) 如來在世(여래재세) 衆生利根(중생이근) 能說之人(능설지인)

이른바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在世에는, 중생의 근기도 뛰어난=利根으로서, 

능히 설하는 사람=부처님은, 

色心業勝(색심업승) 圓音一演(원음일연)

색신과 마음=色心의 업이 뛰어나서, 원만한 말씀=圓音으로 설하시면, 

異類等解(이류등해) 則不須論(즉불수론)

서로 다른 사람=異類가 다 같이 해득하였으므로 논이 필요하지 않았느니라.

 

① 若如來滅後(약여래멸후) 或有衆生(혹유중생)

여래께서 입멸하신 뒤라면, 혹 어떤 중생은 

能以自力(능이자력) 廣聞而取解者(광문이취해자)

능히 자력으로 널리 듣고 알 수 있는 중생도 있고,→경에 의하여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

② 或有衆生(혹유중생) 亦以自力(역이자력) 少聞而多解者(소문이다해자)

혹 어떤 이는 역시 자력으로서 조금 듣고서 많이 이해하며. →경에 의하여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

③ 或有衆生(혹유중생) 無自心力(무자심력) 因於廣論(인어광론) 而得解者(이득해자)

혹 어떤 중생은 스스로의 심력이 없어, 널리 논한 것=廣論을 의지하여 해득하며,

④ 或有衆生(혹유중생) 復以廣論文多爲煩(부이광론문다위번)

혹 어떤 중생은 또한 널리 논한=廣論의 글이 많아서 번거롭게 여기고,

心樂摠持少文(심락총지소문) 而攝多義(이섭다의) 能取解者(능취해자)

 다 갖춘 총지는 적은 글이지만 많은 뜻을 거두고 있음을 마음으로 즐겨 능히 해득하여 취하나니,→네 번째 근기의 사람을 위해 이 논을 설함

 

如是此論(여시차론) 爲欲總攝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위욕총섭여래광대심법무변의고) 

應說此論(응설차론)
이와 같이 이 논은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의 끝이 없는 뜻을 모두 거두어 담는=總攝하는 것이므로 그에 응하여 마땅히 이 논을 설하는 것이다. 

 

2. 立義分(입의분) - 본론의 근본 사상을 제시.

1) 法과 義 - 대승의 두 가지

 

已說因緣分(이설인연분) 次說立義分(차설입의분)

이미 인연분을 설하였으니, 다음에는 입의분을 설한다.

摩訶衍者(마하연자) 總說有二種(총설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마하연이라 함에는, 총설하여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가지인가? 

一者法(일자법) 二者義(이자의)

첫째는 법이요, 둘째는 뜻=義이다. 

 

2) 大乘(대승)의 法(법) - 一心二門(일심이문)

 

所言法者(소언법자) 謂衆生心(위중생심)

법이라 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니, 

是心則攝一切世間法出世間法(시심즉섭일체세간법출세간법)

이 마음은 일체의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괄하며,

依於此心(의어차심) 顯示摩訶衍義(현시마하연의)

이 마음에 의지하여 마하연(대승)의 뜻을 나타내 보인다.

何以故(하이고) 是心眞如相(시심진여상) 卽示摩訶衍體故(즉시마하연체고)

왜냐하면, 이 마음의 진여상은 마하연(대승)의 본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며,

是心生滅因緣相(시심생멸인연상) 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능시마하연자체상용고)

이 마음의 생멸인연의 상은 능히 마하연 스스로의 체(體)와 상(相)과 용(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3) 三大(삼대) - 대승의 義(의) 

 

① 所言義者(소언의자) 則有三種(즉유삼종) 云何爲三(운하위삼)

말하는 바 뜻=義라고 하는 것에 세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셋인가?

一者(일자) 體大(체대) 謂一切法(위일체법) 眞如平等(진여평등) 不增減故(부증감고)

첫째는 체대로서 일체법의 진여를 말하며, 그것은 평등하여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기 때문이다.

二者(이자) 相大(상대) 謂如來藏(위여래장) 具足無量性功德故(구족무량성공덕고)

둘째는 상대이니 여래장을 말하며, 그것이 무량한 본성의 공덕을 갖춘 때문이다.

三者(삼자) 用大(용대) 能生一切世間出世間善因果故(능생일체세간출세간선인과고)

셋째는 용대이니, 능히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의 선한 인과를 내기 때문이다. 

 

② 승(乘) 

一切諸佛(일체제불) 本所乘故(본소승고)

일체제불은 본래 이 수레를 타고 (부처가) 되었기 때문이며,

一切菩薩(일체보살) 皆乘此法(개승차법) 到如來地故(도여래지고)

일체 보살도 모두 이 법을 타고 여래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니라.

17. 지관이문 함께 수행할 때 장애도 없다

 

다음은 지관을 합해서 닦는 것을 밝힌다. 

행하거나 머물 때, 눕거나 일어날 때든 어느 때든지 항상 지관을 함께 행해야 하는데, 이 수행에 두 가지가 있다.

◆ 첫째 이치에 따라 지관을 함께 수행하는 것이니 

모든 법의 자성이 나지 않음을 생각하나 또한 인연으로 화합한 선악의 업과 고락 등의 과보가 빠뜨려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비유문(非有門)에 의해 지행을 닦는 것과 비무문(非無門)에 의해 관행을 닦는 것이니, 실제를 움직이지 않은 채 모든 법을 건립하는 것이므로 지행을 버리지 않고 관행을 닦을 수 있다. 

인연의 선악의 업보를 생각하나 또한 곧 본성은 얻을 수 없음을 생각하는 것이니, 이는 가명(假名)을 파괴하지 않은 채로 실상을 따르기 때문에 관행을 그만두지 않고 지문(止門)에 들어갈 수 있다. 

◆ 둘째, 장애에 대하여 지관을 함께 수행하는 것이니

① 만약 지를 닦는다면 두 가지 허물을 여읜다. ㉠ 범부가 집착한 인법상(人法相)을 없애며, ㉡ 이승들의 오음(五陰)이 있다고 보아 고통을 두려워하는 겁약한 소견을 다스린다. 

② 만약 관을 닦는다면 역시 두 가지 허물을 여읜다. ㉠ 이승의 협렬(狹劣)한 마음을 없애어 널리 중생들을 살펴 대비를 일으키게 한다. ㉡ 범부들이 무상을 보지 아니하여 분발하여 도에 나아감을 게을리 하고 선근을 닦지 않으므로 이를 다스린다.

지관 이문은 함께 수행해야 하며 또한 두 가지 장애를 아울러 대치하여 쌍으로 없애야 한다. 지와 관의 두 가지 수행이 함께 이루어져야 함은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한 날개라도 없다면 허공을 나는 힘이 없을 것이오, 두 바퀴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운재(運載)의 공능이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신론』에서는 수행자의 물러남이 없는 방편을 밝힌다. 

즉 이 사바세계에 머무름에 스스로 항상 부처님을 만나 친히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신심은 성취하기 어렵다’고 걱정하면서 뜻이 퇴전하려고 하는 이는 여래가 수승한 방편으로 신심을 섭호함을 알아야 한다.

즉 뜻을 오로지 하여 부처를 생각한 인연으로 원에 따라 타방불토에 나게 되어 항상 부처를 친히 보아서 영원히 악도를 여의게 된다. 이는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염하고 그가 닦은 선근으로 저 세계에 왕생하게 되며, 부처를 친히 보기 때문에 끝내 퇴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권수이익분이다.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매우 깊은 경계에 대해 바른 믿음을 내어서 비방을 멀리 여의고 대승도에 들고자 한다면, 이 논을 가지고 사량·수습함으로써 마침내 무상도에 이를 수 있다. 모든 여래가 이 법에 의해 열반을 얻으며, 모든 보살이 이에 의해 수행하여 불지(佛智)에 들게 되기 때문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보살이 이 법에 의해 정신(淨信)을 이루게 됨으로 우리 중생도 이 법을 부지런히 수학해야 할 것이다.

 

18. 불교 핵심 가르침은 ‘깨달은 후 중생에 회향’

 

『대승기신론』에 대하여 무려 7종의 연구저서를 낼 정도로 이 논서에 심취했던 원효는 『기신론』의 성격을 다음의 세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첫째, 『기신론』은 인간의 마음이 원래 청정한 것임을 강조하는 중관학파와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현실적으로는 깨닫지 못하여 물든 상태에 있으며, 이를 분석, 관찰하는 데 주력하는 유가학파, 이 두 학파의 주장을 지양·종합한 논서임을 주장한다.

원효, “기신론은 삼세·아라야식설”

실제로 『기신론』은 일심, 즉 중생심에는 마음의 자성청정을 밝히는 심진여문과 현실의 물든 마음을 긍정하고 이를 분석하여 종국에는 청정심을 얻을 수 있다는 심생멸문의 두 가지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일심이문의 구조는 『기신론』 전체의 대전제로 설정되어 있으며, 『기신론』이 중관·유가학파의 지양·종합으로 나타난 논서라는 주장을 입증하고 있다.

둘째, 원효는 위의 중관·유가(유식)학파의 지양·종합이라는 성격을 더욱 드러내는 구체적인 전개로서 『기신론』이 삼세·아라야식설임을 주장한다.

이 삼세·아라야식설은 아라야식이 각의(覺義)와 불각의(不覺義)의 이의(二義)를 가진 진망화합식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설득력이 있다.

삼세란 자성청정의 진여심에 무명이 훈습하여 최초에 동요하기 시작하려고 하는 무명업상, 동요하는 맨 처음의 증상으로서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전상, 그리고 바라보는 상대(境界)에 비춰지는 현상의 매우 미세한 의식을 말한다. 

아라야식은 오늘날의 무의식에 해당하는 심층의식으로서 우리의 물든 의식으로의 전개에 최초의 기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 전개된 염오심이 다시 청정심으로 환멸코자 할 때, 마지막 귀결처가 되는 곳이 또한 이 아라야식이다. 

원효는 삼세가 바로 아라야식임을 창설하는데, 이 주장은 당()의 법장이 그대로 수용한 바 있다.

아라야식이 바로 삼세라는 주장은 『기신론』 본문에 명시되지는 않았으나『기신론』의 내용 중에서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것임은 이미 필자가 논문으로 입증한 바 있다. 

『기신론』 출현 이전의 유식학파에서 아라야식을 막연한 잠재심 내지 진실치 못한 망식으로 주장한데 비해서 이 삼세아라야식설에서는 아라야식이 진망화합식 즉 청정심과 염오심이 화합된 심층의식으로서 수행에 의해 삼세의 망식 부분을 제거하면 바로 삼세 자체에 청정식 부분만 남게 되어 이가 곧 깨달음의 심원(心源)에 이르는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는 아라야식을 막연한 잠재심으로 설정한 유식학파와는 달리 삼세라는 구체적인 수행단계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이다.

 

불사의업상이 곧 이타행 

셋째, 수행에 의해 삼세에서 염오심을 제거하여 청정심에 이르게 되면 지정상(智淨相)과 불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라는 두 가지 모습이 나타난다.

지정상이란 모든 염오한 마음이 제거되어 지혜가 순정하게 된 것, 즉 무분별심(根本智)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무분별심에는 또한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일반 범부가 사량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공덕상을 끊임없이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불사의업상이 있다.

원효는 지정상이란 자신이익을 성취하는 것으로 해탈한 뒤에 번뇌장과 소지장의 두 번뇌를 모두 멀리 여의어 아무런 장애가 없는 청정법신을 얻은 경지이며, 불사의업상이란 타신이익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미 자신이익을 성취하였으면 자연히 세간에 자재한 위력과 행위를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즉 지정상과 불사의업상은 자리행과 이타행에 다름 아니다.

한편 『기신론』에서는 수행심신분의 지관문을 설명할 때, ()를 닦으면 범부가 세간에 집착함을 대치하고 관()을 닦으면 이승이 대비를 일으키지 않는 협열심을 대치할 수 있다고 하며, 이 지관 이문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보리(菩提)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언한다. 

위에서의 지정상은 지문에, 불사의업상은 관문에, 나아가 지정상은 심진여문에, 불사의업상은 심생멸문에 배대시킬 수 있다.

원효는 진여문에 의해 지행을 닦음으로써 세간에의 집착을 벗어나 무분별지를 얻으며(自利行), 생멸문에 의해 관행을 닦음으로써 대비심을 일으켜 후득지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지·관 이문 갖춰야 보리에 들 수 있다 

깨달음을 얻은 이가 깨친 자리에서 홀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중생에게 회향하는 이타행, 즉 부주열반 사상이야말로 원효가 그의 수많은 저술들에서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으로 이는 석가 이후 원효에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19. 眞·俗 초월한 일심의 세계가 바로 깨달음 (끝)

 

원효는『대승기신론』에 열중하여 그에 대한 『기신론 소』2, 『기신론 별기』1, 『기신론 이장장』(이장의) 1, 『대승기신론 종요』1, 『대승기신론 요간』1, 『대승기신론 대기』1, 『대승기신론 사기』1권 등 7종의 연구서를 내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 이론의 실천을 통해 당시 신라사회에서의 문제 상황을 해결하려 했다. 그는 과연 『기신론』의 어떤 점에 주목하여 그의 대중 불교화 운동의 이론서로서 『대승기신론』을 선택하였을까.

당시 신라사회의 불교계는 왕실이나 귀족 중심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출·재가 모두에 불성 있음 알아야

승려들은 성내(城內)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면서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는 거의 무관심하였다. 승려들은 자기네들만이진여’의 세계에 안주하면서 스스로를세속’에 머물러있는 서민대중과는 전혀 별개의 존재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원효는 서민들이 높은 승려들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고 보았다. 

즉 승려나 서민들이 다 같이 불성, 즉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민들이야말로 바로 승려들 자신이 교화해야 할 대상이며 나아가 이들 서민들이 깨달음을 얻어야만 승려 자신의 깨달음도 참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대승기신론』을 통해 이 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뒤, 드디어는 스스로 집필의 붓을 꺾고 지방의 촌락이나 가항(街巷)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무애(無碍)박을 두드리고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를 부르며 가무와 잡담 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불교의 상구보리(上求菩提:自利하화중생(下化衆生:利他)의 가르침과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부주열반(不住涅槃) 바로 그것이다.

원효는 그의 모든 저술을 통해서 이 부주열반 사상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나 혼자 깨달았다고 착각하고 그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제대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깨닫지 못한 중생들에게 회향(廻向)하여 중생들까지도 함께 깨달음의 세계로 이르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원효, 부주열반사상 강조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진여의 세계와 생멸의 세계, 즉 진()과 속()을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이 둘을 초월하는 세계에 이르는 것이다. 진과 속을 초월한 일심(一心)의 세계에서는 진과 속의 구분은 이미 무의미하다.

진이 바로 속이며, 속은 바로 진이기 때문이다. 진은 속을 거부하지 않고 포용하며, 속은 진을 향해 나아가므로 속은 진의 표출이 되어 진과 속이 하나의 세계, 즉 하나의 법계(一法界)가 되는 것, 이것이 깨달음의 경지이다.

  

열등 중생도 놓치지 않고 제도

『기신론』은 진여문에서 이 깨달음의 정체를 밝히고 생멸문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다양한 방편들을 제시한다.

육바라밀은 향상·진보하여 이상 경지에 도달할는지 타락·퇴보하여 악도에 떨어질는지 결정이 안 된 대부분의 우리 부정취중생들을 위한 수행요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관문의 설명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선방편(禪方便)을 자세히 논구하고 마지막에 힘이 열악한 중생을 위해서는 염불문(念佛門)을 통해 궁극의 경지에 갈 수 있음을 말하였다. 

이 또한 열등한 중생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제도(濟度)하려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이자 부주열반의 정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海印의 뜨락

13. 진여법 알아 평등한 마음이 자리이타 근본

 

지금까지 정의를 밝혀 드러내고(顯示正義), 삿된 집착을 다스리는(對治邪執) 부분을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모든 부처님들이 증득한 도를 향해 모든 보살이 발심해서 수행해 나아가는 뜻을 밝혀보겠다. 

도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모양을 분별하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에서 도에 발심하는 모습에 또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은 십신의 자리 중에서 신심을 닦아 익혀서 신심이 성취되어 결정심을 일으켜 십주(十住)에 들어가는 것이다.

둘째 해행발심(解行發心)은 십행(十行)의 자리 중에서 법공을 잘 알고 법계를 수순하여 육도행을 닦아서, 이 육도행이 순결해지고 성숙되어 회향심(廻向心)을 일으켜 십회향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셋째 증발심(證發心)은 초지 이상으로부터 십지까지의 자리에서 법신을 증득하여 진심(眞心)을 일으키는 것이다.

『기신론』에서는 초발심인 신성취발심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수행의 단계가 낮은 중생들을 가장 배려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우선 신성취발심을 내는 부류는 부정 (不定聚)중생이다. 십주 이상의 결정불퇴를 정정취(正定聚), 아직 십신에 들어가지 아니하여 인과를 믿지 않는 것을 사정취(邪定聚), 이 둘의 중간에 도에 나아가는 사람이 발심하여 무상보리를 구하려고 하지만 마음이 아직 결정되지 아니하여 어떤 때는 나아가고 어떤 때는 물러서는 것을 십신이라 하고 부정취라 한다. 

다음 이 부정취중생은 어떤 행실을 닦아 믿음이 성취되어 발심할 수 있는 것인가. 여래장 내의 훈습력에 의하고 또한 전세(前世)의 선근을 닦은 힘에 의해 이제 신심을 닦는다.

 

신성취발심 내는 부류는 부정취중생

여기에서 십선을 일으켜 복분(福分)을 닦고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무상보리를 구함으로써 도분(道分)을 닦는다. 나아가 여러 부처를 만나 직접 받들어 공양하고 십신의 신심을 수행한다. 이렇게 일 만 겁을 지나 신심이 성취되면 모든 부처와 보살이 가르쳐서 발심케 하는데 어떤 때는 대비에 의해 스스로 발심케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정법이 없어지려 함에 호법의 인연으로 스스로 발심케 하기도 한다. 

이렇게 발심하게 되면 드디어 정정취, 즉 십주의 초발심주에 들어가 끝내 퇴전하지 아니하는데 이 자리야 말로 여래종(如來種) 즉 부처될 종자에 비로소 머물게 되는 자리이다. 

이렇게 정정취에 들게 된 보살은 어떤 마음을 바라는 것일까. 

첫째는 직심(直心)이니 진여법을 바로 생각하여 마음이 평등해져서 다시 다른 회곡(廻曲: 어그러지고 굽어짐)됨이 없는 것이다. 이는 자리·이타행의 근본이다. 

둘째는 심심(深心)이니 심심은 근원을 궁구한다는 뜻으로 일체의 모든 선행을 즐겨 이루는 것이다. 만약 하나의 선이라도 갖춰지지 않으면 근원에 돌아갈 수 없는 것이어서 반드시 만행을 갖춰야 근원에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리행의 근본이다.

셋째는 대비심(大悲心)이니 대비란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이는 이타행의 근본이다. 이 세 마음을 내면 어떤 악이든 여의지 않음이 없고 어떤 선이든 닦지 않음이 없으며, 한 중생도 제도되지 않는 바가 없으니 이를 무상보리심이라 한다.

  

또한 위의 세 마음을 내어 진여법에 귀순하는데 대략 네 가지 방편이 있다. 

첫째는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이다. 모든 법은 자성이 생김이 없음을 보고 망견을 여의어 생사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법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업과를 잃지 아니함을 보고 대비를 일으켜 여러 복덕을 닦아 중생을 섭화하여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이는 주착함이 없는 법성에 수순하는 것이다.

둘째는 능지(能止)방편이다. 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쳐서 모든 악법을 그치게 하여 증장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허물을 여의는 법성에 수순하는 것이다.

셋째는 선근을 일으켜 증장시키는 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이다. 삼보에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모든 부처를 찬탄하고 따라 기뻐하며 권청한다. 이와 같이 삼보를 애경하는 순후한 마음 때문에 믿음이 증장되어 무상의 도를 구하는데 뜻을 두며 또 삼보의 힘으로 보호됨에 의해 업장을 녹이고 선근이 퇴전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치장(癡障)을 여읜 법성에 수순하는 것이다.

넷째는 대원평등(大願平等)방편이다. 미래에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교화, 제도하여 남음이 없게 하여 모두 무여열반을 이루도록 발원하는 것이다. 이는 단절됨이 없는 법성에 수순하는 것이다.

 

이렇게 발심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공덕이 나타난다.

첫째 자리(自利)의 공덕이다. 이러한 발심에 따라 십주보살이 인공문에 의해 법계를 보는 것이니 이는 상사각이다.

둘째는 이타(利他)의 덕이다. 법신을 보기 때문에 원력에 의해 도솔천에서 내려오심, 마야부인 모태에 들어가 머묾, 모태에서 나옴, 출가함, 마구니를 항복시킴, 불도를 이룸, 법륜을 굴림, 열반에 드심의 팔상(八相)을 행한 것이다.

 

삼보 애경 순후한 마음이 믿음 증장 

둘째 해행발심은 십행위(十行位) 중에서 법공을 얻었기 때문에 법계에 수순하여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바라밀 등 육도행을 닦는다. 그리고 해행에서 얻은 발심으로 정신(正信)을 얻어 지전(地前)의 제일아승기겁이 다 차려고 하는 때에, 십회향의 자리에서 평등공을 얻었기 때문에 진여법에 대한 깊은 이해가 눈앞에 나타난다.

셋째 증발심은 초지에서 제십지까지의 보살이 진여를 증득하여 내는 발심이다. 이에는 진심(眞心: 무분별지), 방편심(후득지), 업식심(미세하게 생멸하는 아라야식)의 세 가지가 있다.

 

14. 항상 모든 바라밀 수행을 생각하는게 믿음

 

지난 번 분별발취도상에서 신성취발심으로부터 해행발심, 증발심 등은 부정취인 중에서도 수승한 이들이 차례로 닦아나가는 모습이었다. 

이제 수행심신분에서는 부정취인 중 열등한 이를 위하여 네 가지 신심(信心)과 오문(五門)의 행을 닦을 것을 권장한다. 만약 이 열등한 이가 믿음을 닦아 네 가지 신심을 성취하면 다시 발취분중의 세 가지 발심에 의해 나아가게 됨은 물론이다.

먼저 네 가지 신심이란

첫째, 근본 즉 진여법을 믿는 것이다. 진여법이야말로 모든 부처의 귀의할 바이며 모든 행동의 근원이다.

둘째, 부처에게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고 믿어 항상 부처를 가까이 하고 공양, 공경하여 선근을 일으켜 일체지를 구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어서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할 것을 생각한다. 

넷째, 사문이 바르게 수행하여 자리·이타 할 것을 믿어서 항상 모든 보살들을 친근히 하여 여실한 수행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다음 오문이란

시문(施門), 계문(戒門), 인문(忍門), 진문(進門), 지관문(止觀門)이다. 이 중에 지관문은 육도 중 정과 혜를 합해서 닦기 때문에 이 둘을 합하여 지관문이라 하니 오문은 곧 육바라밀이다.

첫째, 시문에는 일체의 와서 구하여 찾는 사람을 보거든 가지고 있는 재물을 힘 닫는 대로 베풀어줌으로써 간탐()을 버리어 상대로 하여금 환희케 하는 재()보시, 액난, 공포, 위핍(危逼)을 받는 사람을 보거든 자기의 능력껏 무외(無畏)를 베푸는 무외보시, 만약 중생이 와서 법을 구하는 이가 있으면 자기가 아는 대로 방편으로 설하되 명리와 공경을 탐내지 않고 오직 자리·이타만을 생각하여 보리에 회향하는 법()보시의 세 가지가 있다.

 

육도 중 정·혜 합한 것이 지관문 

둘째, 계문은 살생, 도적질, 음행, 양설(兩舌: 이간질 하는 말), 악구(惡口: 욕설), 거짓말, 기어(綺語: 도리에 어긋나며 교묘히 꾸미는 말)를 하지 않으며 탐질(貪嫉), 기사(欺詐), 첨곡(諂曲: 남을 속이려고 아양부리며 비위맞추는 것), 진에(), 사견(邪見)을 멀리 여의는 것이다.

셋째, 인문은 타인의 괴롭힘을 참아서 마음에 보복할 것을 생각지 않아야하며 또한 이익과 손해, 비난과 명예, 칭찬과 기롱, 괴로움과 즐거움 등 8(八風)법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넷째, 진문은 모든 선한 일에 마음이 게으르거나 주저함이 없어서 마음을 굳세고 강하게 먹어 겁약을 멀리 여의고 과거의 구원한 때로부터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의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음을 생각해야 하며, 이 때문에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하여 빨리 모든 고통을 여의는 것이다.

 

이상으로 오문 중 사문의 수행을 밝혔는데, 이들 수행에는 수행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장애가 있다. 원효는 이러한 장애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이를 제거하는 방편을 친절히 말해준다.

첫째, 모든 악업에 대해 참회하여 제멸한다. 

둘째, 정법(正法)을 비방하는 것에 대해 부처님께 설법해주시기를 권하여 청함으로써 제멸한다. 

셋째, 다른 사람의 수승함을 질투하는 것에 대해 수희(隨喜)함으로써 대치한다. 

넷째, 삼계를 즐겨 애착함에 대해 회향함으로써 대치한다. 

이상의 네 가지 장애는 수행자로 하여금 모든 수행을 내지 못하게 하며, 보리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참회, 권청, 수희, 회향의 네 가지 행을 닦아 대체하게 하는 것이다.

  

다섯 째, 지관문에는 모든 경계상을 그치게 함으로써() 사마타관을 수순하는 것과 인연생멸상을 분별함으로써() 비발사나관을 수순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

 

15. 단정히 앉아 뜻을 바르게 할 때 止 수행

 

단정히 앉아 뜻을 바르게 할 때 止 수행

지를 닦으려면 첫째 고요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 이에는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① 고요한 곳에 한거하는 것이니 곧 산림에 머무는 것이다. 취락에 머물면 반드시 소란스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② 지계가 깨끗해야 한다. 만약 깨끗하지 못하면 반드시 참회를 하여 업장을 여의여야 한다. ③ 의식(衣食)이 구족해야 한다. ④ 선지식을 만나야한다. ⑤ 모든 반연하는 일을 쉬는 것이다. 

()를 닦을 때에는 둘째, 단정히 앉아서 뜻을 바르게 해야 한다. 단정히 앉는 것은 몸을 고르게 하는 것이오, 뜻을 바르게 하는 것은 마음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먼저 몸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는 

① 앉는 곳을 편안케 하는 것이니 오래도록 방해가 없게 한다.

② 다리를 바르게 해야 한다. 만약 반가좌(半跏坐)할 경우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두어서 몸 가까이 끌어당겨 왼쪽 다리의 발가락이 오른쪽 넓적다리와 가지런하게 하며, 만약 전()가좌를 하려면 곧 위의 오른쪽 다리를 고쳐서 반드시 왼쪽 넓적다리 위에 두고 다음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둔다.

③ 옷의 띠를 풀어 느슨하게 하되 앉을 때 띠가 떨어지지 않게 한다. 

④ 손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 왼손바닥을 오른손 위에 두어 손을 겹쳐서 서로 대하여 왼쪽 넓적다리 위에 가지런히 두며 몸 가까이 끌어당겨 중심에 두어 편안케 한다.

⑤ 몸을 바로잡아야 한다. 먼저 그 몸과 팔다리의 마디를 요동시켜 일 여덟 번 반복함으로써 스스로 안마하는 법과 같이 하여 수족을 어긋나지 않게 하며, 몸을 바르게 하여 단정하고 똑바르게 하여 어깨의 뼈가 서로 대하게 하여 구부러지게 하지도 말고 솟게 하지도 말아야 한다.

⑥ 머리와 목을 바르게 해야 한다. 코가 배꼽과 서로 대하게 하여 기울지도 삐딱하지도 않게 하며 위로 올리지도 아래로 내리지도 않게 하여 평면으로 바르게 머물게 한다.

 

뜻 바른 것은 마음을 고르게 하는 것 

다음으로는 마음을 고르게 갖는 것이다. 말세의 수행인이 바르게 원하는 이는 적고 잘못 구하는 이가 많은 것은 명리를 구하여 적정(寂靜)한 위의를 나타내지만 헛되이 세월을 보내어 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이를 막아 정심(定心)으로 자도(自度도타(度他)하여 무상도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셋째, 몸과 마음()을 고르게 한 뒤에는 아홉 가지 심주(心住:內住, 等住, 安住, 近住, 調順, 寂靜, 最極寂靜, 專住一趣, 等持)를 닦아야 한다.

① 내주 : 수식관, 골쇄관(백골관)에서 얻는 상, 사정(事定: 공·지·수·화·풍을 대상으로 수행하여 색정, 무색정에 들어가는 것)이 반연하는 경계와 흩어진 마음으로 취하는 육진경계 등 모든 외진(外塵)들로부터 그 마음을 거두어 단속하여 안에다 매어 두어서 밖으로 산란하지 않게 한다.

② 등주 : 내주에서 수식 등의 상을 각각 깨트렸으나 이는 초수(初修)이며, 따라서 그 마음이 거칠게 움직이기 때문에 이 경계를 깨트렸으되 다시 나머지 경계를 생각한다. 이 나머지 경계에 대해 상속방편과 징정(澄淨)방편으로 이를 꺾어 미세하게 하여 두루 거두어 들여서 머물게 하는 것이다.

③ 안주 : 이 마음이 내주, 등주하였으나 내주, 등주하는 마음을 놓쳐 밖으로 산란하기 때문에 또다시 거두어 단속하여 내경(內境)에 안치하는 것이다. 즉 앞에서는 비록 밖으로 치달리는 생각을 모두 없앴으나 오히려 안으로 없앤다는 생각이 남아있으며, 안의 생각이 없어지지 않으면 밖의 생각이 다시 나는 것이므로 안으로 안주하지 못하게 된다. 이제 다시 이 없앤다는 생각까지 없애는 것이니 안에 두지 않음으로 해서 곧 밖을 잊을 수 있으며, 밖을 잊어서 고요해지면 곧 안주이다. 

 

밖의 경계에 여러 허물 있음을 알아야 

④ 근주 : 앞서 염주(念住 : 안주를 생각함)를 수습하는 힘에 의하므로 안팎의 일체의 모든 법이 본래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생각할 만한 것도 없는 줄 분명히 알아서 그 생각 생각이 나지도 멸하지도 않음을 미루어 자주 자주 뜻을 일으켜 그 마음을 안으로 머무르게 하여 이 마음이 멀리 밖에 머무르지 않게 한다. 

⑤ 조순 : 색·성·향·미·촉의 오진(五塵)과 탐·진·치의 삼독과 남녀 등의 경계상이 마음을 산란케 하는데, 앞서의 안주와 근주를 수습함에 의하여 밖의 경계에 여러 가지 허물이 있음을 깊이 알고 저러한 경계상들을 근심거리의 생각으로 여겨야 하며, 이러한 생각의 증상력으로 저 모든 상들에 대해 그 마음을 꺾어버려서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⑥ 적정(寂淨) : 갖가지 욕구하는 마음, 진에의 마음, 남을 해치는 마음 등 여러 나쁜 심사(尋思)와 탐욕개(貪慾蓋: 자기 뜻에 맞는 것을 탐내어 구하는 정신작용에 의해 우리의 심식을 덮어서 선법을 발생하지 못하게 함) 등의 수번뇌(隨煩惱)가 있어 마음을 요동케 하는데, 앞의 조순에 의해 그 허물을 더욱 깨달아 저러한 여러 가지 심사와 수번뇌들을 근심거리의 생각으로 여겨서 이러한 생각의 증상력에 의해 저러한 것들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다.

⑦ 최극적정(最極寂淨) : 위의 적정의 마음을 놓침으로 해서 여러 나쁜 심사와 여러 수번뇌들이 잠시 현행할 때에 곳에 따라 일어나지만 차마 받지 아니하고 이윽고 토해 내는 것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정념(正念)을 놓치어 잠시 밖의 경계에 치달려 흩어졌으나 정념의 힘에 의해 그대로 차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다음은 정념을 놓치어 다시 내심에 두다가 수행의 힘에 의해 이윽고 돌이켜 토해내는 것이다. 이처럼 안팎에서 받지 않고 돌이켜 토해내기 때문에 최극적정이라 한다. 

⑧ 전주일취 : 이는 가행도 있고 공용(功用)도 있어서 항상 방편을 생각하여 수순하고 관찰하며 부족함이 없고 간격이 없어 삼마지(三摩地)가 상속하기 때문에 오래 익혀 익숙하게 되면 그 마음이 머물게 되는 것이다.

⑨ 등지 : 자주 닦고 자주 익히어 많이 수습하기 때문에 가행도 없고 공용도 없게 되어, 떴다 가라앉았다함을 멀리 여의고 자연히 도에 들어감을 말한다. 등지의 마음이 진여상에 머물기 때문에 진여삼매에 들어가게 되는데, 진여삼매에 들면 번뇌를 깊이 조복하고 신심이 증장하여 속히 불퇴전의 경지를 이루게 된다.

 

16. 법신이 중생신과 평등함 알 때 일행삼매

 

법신이 중생신과 평등함 알 때 일행삼매

이제 사마타를 얻은 사람은 또한 비발사나(윗바사나)를 수습해야 하니,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① 정사택(正思擇) : 정행(淨行: 청정한 행위), 선교(善巧: 부처님이 중생제도시 근기에 맞추어 선하고 공교하게 하는 행위), 정계(淨戒: 청정한 계행)가 반연하는 경계에 대하여 진소유성(盡所有性: 후득지, 여량지의 대상이 됨)을 바르게 생각, 판단하는 것이다. 

② 최극사택(最極思擇) : 저 소연경계에 대하여 여소유성(如所有性: 무분별지, 여리지의 대상이 됨)을 가장 지극하게 사택하는 것이다. 

③ 주변심사(周邊尋思) : 저 소연경계에 대하여 혜()와 함께 행함으로 말이암아 분별하는 작의(作意)를 갖게 되어 저 경계상을 취하여 빠짐없이 두루 심사하는 것이다. 

④ 주변사찰(周邊伺察) : 저 소연경계에 대하여 자세히 추구하여 빠짐없이 두루 사찰하는 것이다.

  

사마타()를 수행한 결과 어떤 공능이 있는가? 

지를 수행하면 진여삼매에 의해 법계가 일상(一相: 一行)임을 알며, 일체 모든 부처의 법신이 중생신과 더불어 평등하여 둘이 아니게 되니 이를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한다. 이 진여삼매에 의해 무량한 삼매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진여가 삼매의 근본임은 물론이다.

 

또 정근하여 전념으로 삼매를 수행하는 이는 어떤 이익이 있는가? 

① 항상 시방의 모든 부처와 보살에게 호념함을 입는다.

② 모든 마구니와 악귀에 의하여 두려움을 받지 않는다.

95외도와 귀신에 의해 혹란되지 않는다.

④ 깊고 미묘한 불법을 비방함에서 멀리 떠나 중죄의 업장이 점점 엷어진다.

⑤ 일체의 의심과 모든 나쁜 심사를 없앤다. 

⑥ 여래의 경계에 대한 믿음이 증장된다.

⑦ 근심과 후회를 멀리 여의어 생사중에 용맹하여 겁내지 않는다.

⑧ 그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교만을 버려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괴롭힘을 받지 않는다.

⑨ 비록 정()을 얻지 못하더라도 모든 때에 모든 경계처에 대해 번뇌를 줄여서 세간을 즐기지 않는다.

⑩ 만일 삼매를 얻으면 외연의 모든 소리에 의해 놀라지 않게 된다.

  

그런데 ()만을 닦으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혹은 게으름을 일으켜 여러 선을 즐기지 않고 대비를 멀리 여의게 됨으로, 이에 관()을 닦아야 한다. 

관을 닦는 데에 네 가지 방법이 있다.

① 법상관(法相觀) : 모든 세간의 유위의 법이 오래 머무름이 없어 잠깐 동안에 변하여 없어지며 모든 마음 작용이 생각 생각마다 생멸하기 때문에(無常), 이것이 고()인줄 알아야 하며 과거에 생각한 모든 법이 어슴푸레 하여 꿈과 같은 줄 알아야 하며 현재 생각하는 모든 법이 번개와 같음을 알아야 하며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이 마치 구름처럼 갑자기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流轉), 세간의 모든 몸뚱이가 모두 다 깨끗하지 못하고 갖가지로 더러워서 하나도 즐거워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不淨). 

② 대비관 : 일체의 중생이 무시의 때로부터 모두 무명의 훈습을 받는다. 이 훈습에 의해 마음이 생멸케 되어 이미 모든 심신의 큰 고통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미래에 받을 고통도 한계가 없어서 버리고 여의기가 어렵건만 이를 깨닫지 못하니 중생이 이처럼 매우 가련한 것임을 늘 생각해야 한다. 

③ 서원관(誓願觀) : 이러한 생각을 하고 곧 용맹스럽게 다음과 같이 대() 서원을 셀淄한다. 즉 원컨대 내 마음으로 하여금 분별을 떠나게 함으로써 시방에 두루하여 일체의 모든 선한 공덕을 수행케 하며,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 일체의 고뇌하는 중생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열반·제일의락(第一義樂)을 얻도록 바라는 것이다. 

④ 정진관(精進觀) : 이러한 원을 일으키기 때문에 모든 때, 모든 곳에 있는 여러 선을 자기의 능력에 따라 버리지 않고 수학하며 마음에 게을리 함이 없는 것이다.

-海印의 뜨락

10. 거칠고 미세함은 무명에 의해 일어난다

 

거칠고 미세함은 무명에 의해 일어난다 

 

앞서 설명한 6염심에 덧붙여 번뇌애와 지애에 대해 간략히 밝혀 보겠다. 원효는 그의 『기신론·소』에서 자세한 설명을 그의 저서 이장장(二障章=二障義)에 미루고 있는데, 우선 명료한 인식을 위해 도표에 의지하면서 설명하겠다. 

번뇌애와 지애는 은밀문에서의 구분이고 번뇌장과 소지장은 현료문에서의 구분인데 『기신론』은 은밀문의 입장이기 때문에 번뇌애와 지애를 말했다. 

번뇌애란 앞서 밝힌 여섯 가지 염심 즉 지말무명이며 이는 근본무명에 의해 움직인 염심(무명업상)이 전식, 현식, 지식으로 변전해 나가 근본지의 능·소평등을 어기므로 진여의 근본지를 막는다고 한다.

지애란 근본무명을 말하며 본래의 법성자리는 항상 고요하여 일어나는 상이 없으나 무명불각(근본무명) 때문에 법성을 혼미케하여 세간의 후득지를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를 세간의 자연업지 즉 후득지를 막는다고 한다. 흔히 번뇌장과 소지장을 각기 번뇌애와 지애에 배대시키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며 소지장, 번뇌장은 번뇌애 안에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생멸문에서 심생멸분과 생멸인연분을 대략 밝혀보았다. 이번에는 생멸상을 이루는 부분을 밝히겠다.

생멸상은 우선 거친 모습(麤)과 미세한 모습()으로 크게 나눈다. 거친 모습은 전에도 언급한 상응심이며 미세한 모습은 불상응심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를 좀더 자세히 구분한다면 추중의 추, 추중의 세, 세중의 추, 세중의 세로 나뉜다. 추중의 추는 범부의 경계이며 추중의 세와 세중의 추는 보살의 경계, 세중의 세는 부처의 경계이다. 

그렇다면 추중의 추는 집상응염과 부단상응염이며 이들은 의식에 있는 것이어서 행상이 거칠기 때문에 범부가 알 수 있다. 추중의 세는 분별지상응염이며 이는 제7식이므로 행상이 거칠지 않아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중의 추는 현색불상응염과 능견심불상응염이며 능·소가 차별되므로 보살이 아는 경계이다. 세중의 세는 근본업불상응염이며 능·소가 아직 나뉘지 않았으므로 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는 경계이다. 

추·세의 생멸이 무명의 훈습에 의해 있는 것인데, 여기에 인()에 의한 것과 연()에 의한 것으로 나뉜다.

인에 의한다는 것은 불각 즉 근본무명에 의해 불상응심이 일어나는 것이며 연에 의한다는 것은 경계상(현식이 나타내는 경계)에 의해 상응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무명인이 멸하면 불상응심이 멸하고 경계연이 멸하면 상응심이 멸한다. 이상으로 추·세의 두 가지 생멸은 모두 무명주지에 의해 일어나는 것임은 물론이겠다.

그런데 자성청정심의 진여와 무명주지인 근본무명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인데 어떻게 진여에 무명이 훈습하고 무명에 진여가 훈습하는 것일까. 이를 원효는 『능가경』의 불사의훈(不思議熏)과 불사의변(不思議變)이란 표현을 빌려 해명한다.

불사의훈이란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는 것을 말하니 훈습할 수 없는 곳에 훈습하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는 훈습이라 하며, 불사의변이란 진여가 무명의 훈습을 받아서 변이할 수 없는데도 변이하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는 변화라고 한다. 이렇게 매우 미세하고 은미한 훈습과 변화에 의해 업·전·현식이 일어나고 또 마지막 현식이 나타내는 경계를 반연하여 분별사식(6의식)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점은 무명인이 멸할 때 불상응심이 멸하고 경계연이 멸할 때 상응심이 멸하는데 이때 불상응심이나 상응심의 심상(心相)이 멸하는 것이지 자상(自相)의 심체(心體)가 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바람이 바닷물에 의해 동상(動相 즉 風相)이 있는 것처럼 무명의 바람이 심체에 의지하여 움직이는 것과 같다. 바닷물이 멸한다면 바람이 의지할 때가 없어 풍상이 단절해 버리지만 바닷물은 멸하지 않기 때문에 풍상이 상속하는 것처럼 그 자상의 심체는 멸하지 않고 업·전·현 등의 심상만 멸하는 것이다.

드디어 불지에 도달했을 때 무명이 영구히 멸하여 업·전·현 등의 지말무명상만 멸하고 그 자상의 심체 즉 심지(心智) 즉 신해(神解)한 성질, 지성(智性)은 멸하지 않는다.

 

11. 본각과 무명염법은 一識에 든 두가지 뜻

 

지금까지 생멸문에서의 심생멸, 생멸인연, 생멸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 생멸의 현상들은 근본적으로 훈습의 작용을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훈습이란 옷에 원래 향기가 없지만 향으로 훈습하면 향이 옷에 배어드는 것과 같이 우리의 몸과 입으로 표현하는 선악의 말이나 행동, 또는 뜻에 일어나는 선악의 생각들이 일어나는 그대로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어떠한 인상이나 세력을 자기의 심체에 머물러두는 작용이다. 『기신론』에서는 훈습에 정법(淨法)으로서의 진여, 일체 염인(染因)으로서의 무명, 업식인 망심(妄心), 육진인 망경계의 네 가지 법을 들고 있다. 

진여정법(본각)에는 본디 염이 없으나 무명의 훈습 때문에 염상이 있고, 무명염법(불각)에는 본래 정업이 없으나 진여로 훈습하기 때문에 정용(淨用)이 있다. 여기서 진여정법 즉 본각과 무명염법 즉 불각은 하나의 식에 함유된 두 가지 뜻으로서 번갈아 서로 훈습함에 의해 두루 염정을 내는 것이므로 이를 불사의훈과 불사의변으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진여법에 의해 무명이 있고 이 무명염범의 인, 즉 근본무명이 있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한다. 이 근본무명의 훈습에 의해 업식심(業識心)이 있으며(무명훈습 중의 근본 훈습) 이 근본무명에서 일어난 견애가 그 의식을 훈습하여 추분별을 일으키므로 이를 무명훈습 중의 소기견해훈습이라 한다.

이 업식심이 거꾸로 무명을 훈습하여 진여법을 요달하지 못함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전식과 현식 등 허망한 경계를 이루는 것이다. 이를 망심훈습 중의 업식근본훈습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삼승인(三乘人)이 삼계를 벗어날 때 분별사식에 의한 분단생사의 고통은 여의었으나 아직 변역생사의 아라야행고(行苦)를 받는다.

 

근본무명이 있어 진여를 훈습

여기서 의식의 견애번뇌가 증장되어 삼계의 업에 메인 과보를 받으므로 범부의 자리에서 분단생사의 고통을 받게 되니, 이를 증장분별사식훈습이라 한다.

이 망경계가 또 망심을 훈습하여 이 망심으로 하여금 염착케 하여 여러 가지 업을 지어 모든 심신의 고통을 받게 하는데 이 망경계훈습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증장념훈습으로서 분별사식 중의 법집분별념을 증장시키며 둘째는 증장취훈습이니 사취(四取 : 욕취, 견취, 계금취, 아어취)의 번뇌장을 증장하는 것이다.

이상의 염법훈습과는 달리 이번에는 거꾸로 진여법이 무명을 훈습하여 이 훈습하는 인연의 힘으로 망심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를 좋아하게 하는 것이다. 즉 이 망심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 좋아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로 자기 본성을 믿으니 이는 십신 자리의 신()이다.

이리하여 마음이 헛되이 움직이는 것이지 앞의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 멀리 여의는 법을 닦으니 이는 삼현위의 수행이다. 이 수행 뒤에 앞의 경계가 없음을 확실히 알게 되는데 이는 초지의 견도에서 유식관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방편으로 수순행을 일으켜 사취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법집분별념도 일으키지 아니하면서 오랫동안 훈습한 힘에 의해(십지의 수도위 중 만행을 닦는 것) 무명이 곧 없어지게 된다. 무명이 없어지므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없고 따라서 경계도 없어진다. 이렇게 인과 연이 다 없어지므로 심상(心相)도 없어지니 이를 열반을 얻어 자연업(부사의업용)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

 

이상의 정법훈습을 『기신론』에서는 좀 더 세분해서 밝히고 있다.

정법훈습이니 만큼 추에서 세의 순서로 설명하는 방법을 취한다. 먼저 망심훈습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사식훈습으로 모든 범부와 이승인등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함에 의해 힘닿는 대로 무상도(불과)에 나아가는 것이다.

범부와 이승인은 그 의식이 모든 경계가 오직 식뿐임을 알지 못하므로 마음 밖에 실제로 경계가 있다고 집착하여 생사는 싫어할 것, 열반은 기뻐할 것이라 생각하니, 이는 분별사식의 집착과 다르지 않으므로 분별사식훈습이라 한다.

둘째는 의훈습으로 모든 보살이 용맹하게 발심하여 속히 열반에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업식훈습이라고도 하니 이 업식은 가장 미세하여 모든 식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아직 견분과 상분으로 나뉘어지지 않았다. 모든 보살은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일 뿐 따로 경계가 없음을 알며 일체법은 오직 식의 헤아림인 줄 알기 때문에 앞의 경계가 밖에 있다는 집착을 알고 발심하여 열반에 나아가는 것이다.

다음 진여훈습에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자체상훈습이니 무시의 때로부터 무루법을 갖추고 부사의업을 갖추며(본각불공문) 여실공문의 경계성을 짓는다. 이에 의해 항상 훈습하므로 이 훈습의 힘에 의해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여 스스로 자기 몸에 진여법이 있는 줄 믿어 발심하고 수행케 하는 것이다.

일체법은 오직 식의 헤아림일 뿐 

둘째 용훈습이니 이는 중생의 외연의 힘을 말한다. 이 외연에 또 차별연과 평등연이 있다. 차별연은 범부와 이승의 분별사식훈습을 위하여 연을 짓는 것이니 이 사람이 처음 발심하여 구도할 때로부터 부처가 될 때까지 권속, 부모, 제친, 급사, 지우, 원가(怨家) 등이 되어 이런 대비의 훈습력으로 선근을 증장케 하고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다.

평등연은 모든 부처와 보살이 일체의 중생을 도탈시키고자 하여 동체지력으로 중생의 견문에 따라 응하여 업용을 나타내는 것이니 십주(十住) 이상의 모든 보살들이 삼매에 의해서 부처의 보신의 무량한 상호가 분제상을 떠나 있음을 보는 것이다.

 

12. 마음에 망념 없는 줄 알면 곧 진여문에 든다

 

지금까지 해석분 가운데 바른 뜻을 밝히는 부분(顯示正義)에서 먼저 뜻을 풀이하였다. 이제는 생멸문으로부터 바로 진여문에 들어가는 부분에 대해 살피기로 한다.

우리 인간의 구성 요소인 오음(五陰)은 크게 색과 심으로 나뉜다. 색음을 추구한다면 모든 색을 부러뜨려서 극미에까지 이른다 해도 그 실체를 영구히 얻을 수가 없다. 육진경계라는 것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마음을 떠나서는 생각할 만한 모양이 없는 것이다. 또한 수·상·행·식음의 심()도 형상이 없어서 시방(十方)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얻을 수가 없다.

중생은 무명으로 혼미하기 때문에 마음을 망념이라 하지만 마음은 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동념(動念: 즉 망념)을 추구해 본다면 이미 없어졌거나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오, 중간에 머무는 바가 없다. 머무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일어남이 없으니 그러므로 심성(心性)이 실로 움직이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잘 관찰하여 마음에 망념이 없는 줄 알면 바로 진여문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정의를 밝혀 진여문에 들어가게 되는 데에는 또 하나의 관문이 있다. 바르지 못한 삿된 집착(邪執)을 다스려 없애는 것이다. 모든 삿된 집착은 결국 아견(我見)에 말미암는 것이므로 이 아견을 없애면 삿된 집착이 없어진다. 이 아견에는 인아견(人我見: 人執, 我執이라고도 함)과 법아견(法我見: 法執)의 두 가지가 있다. 인아견은 총상(總相)을 주재하는 자가 있다고 계탁, 집착하는 것이오, 법아견은 일체법이 각기 체성(體性)이 있다고 계탁, 집착하는 것이다.

『기신론』에서는 인아견을 다섯 가지로 나누고, 그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는다. 

첫째 경의여래법신이 적막하여 허공과 같다.”는 말에서 허공을 여래성으로 잘못 계탁하는 것이다. 허공상은 망법이므로 실체가 없는 것이나 색으로 인해 볼만한 상이 있으며, 이 때문에 마음을 생멸케 한다. 모든 색법은 본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만약 색이 없다면 허공상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경계가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망념이 없어지면 모든 경계가 없어지고 오직 하나의 진심(眞心)으로서 두루하지 않은 바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여래의 광대한 성지(性智). 이를 허공에 빗대어 말했을 뿐 허공상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

둘째 경에서 “…열반·진여의 법도 필경 공하다.”는 말을 듣고 진여·열반의 본성이 오직 공()이라 잘못 생각하는 것이니 진여·법신은 자체가 공하지 아니하여 무량한 성공덕을 구족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 경에서여래장은 증감이 없어서 그 체가 일체 공덕의 법을 갖추었다.”는 말을 듣고 여래장은 색·심법의 자상과 차별이 있다고 잘못 생각하니 이는 진여의 뜻으로 말한 것이며, 다만 생멸염 즉 업식의 생멸상의 뜻에 의해 차별된 상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넷째 경에서세간의 모든 생사염법이 다 여래장에 의해 있는 것으로 일체의 모든 법은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여래장 자체에 모든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을 갖추었다고 잘못 생각하니 여래장은 본래 간지스강의 모래보다 많은 정공덕(淨功德)이 있어서 진여의 뜻을 여의지 않은 것이지, 간지스강의 모래보다 많은 염법이 오직 망녕되이 있는 것일 뿐 그 자성은 본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여래장의 체에 망법이 있다면 우리가 깨달아서 영원히 망법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다섯 째, 경에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으며,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서 중생은 처음이 있으며, 그 처음을 보기 때문에 여래가 얻은 열반이 마침이 있어 다시 중생이 된다고 잘못 생각한다. 여래장은 과거(시초)와 미래(마지막)가 없으니 과거가 없으므로 무명의 상이 시작함이 없으며, 미래가 없으므로 부처가 얻은 열반도 후제가 없는 것이다. 

위의 다섯 가지 집착이 모두 법신·여래장 등 총상의 주()에 대해 집착을 일으키므로 인집이라 한다.

  

다음 법아견이란 중생은 오음으로 구성된 것이므로 오음이 생멸하는 것에 대해 생사를 두려워하여 잘못된 생각으로 열반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음법은 그 자성이 없는 것이며 본래 없으므로 따라서 없어지지도 않아 본래 열반임을 알아야 한다.

원래 여래는 둔근인 이승에게는 인무아(人無我)만을 설하였으나 이는 구경한 설법이 아니며 이에 법무아(法無我)까지 설명한 것이다. 요컨대 인아집·법아집의 망집을 끝까지 다 여의려면, 염법과 정법은 서로 의지하는 것이므로 말할 만한 자상이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색도 아니요, 심도 아니며 지()도 아니요, ()도 아니며, ()도 아니요, ()도 아니어서 그 모양을 끝내 말할 수 없는데도 여래가 이처럼 교묘한 방편으로 언설을 빌어 중생을 인도하는 뜻은 중생 모두 망념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海印의 뜨락

1. 진속일여 사상을 잘 나타낸 대표적 논서

 

불교의 경론서 가운데 『대승기신론』(이하 『기신론』이라 약칭)만큼 일반에게 잘 알려지고 또 그만큼 사랑받는 그러면서도 가장 탁월한 내용을 갖춘 것도 드물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기신론』은 대승불교시대의 후기에 나타난 불교사상서 중 가장 뛰어난 논서로 알려져 있다.

『기신론』은 인도에서 그 당시 대립되고 있던 양대 불교사상 즉 중관 학파와 유가 학파의 사상을 지양·화합시켜 진()과 속()이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 범부들이 미오(迷汚)한 현실 생활() 가운데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추구하고 수행함에 의하여 완성된 인격()을 이루어 갈 수 있으며, 한편 깨달음의 단계()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염오한 단계()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 갈 의무가 있는 것임을 주장함으로써 진과 속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진속일여(眞俗一如)의 사상을 잘 나타낸 논서이다.

『기신론』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그 구조를 간단히 소개하고 이를 도표로 나타내 보이기로 한다.

『기신론』은 인연분(因緣分), 입의분(立義分), 해석분(解釋分),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 등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연분에서는 이 논서를 짓게 된 여덟 가지 이유를 말하였고,

입의분에서는 이 『기신론』의 대의, 즉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를 제시하였다. 일심이란 중생심(衆生心)이며 이문은 중생심의 양면인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삼대란 진여문의 본체인 체대(體大)와 생멸문의 상대(相大) 그리고 그 작용인 용대(用大)이다.

해석분은 앞서의 입의분에서 제시한 일심이문을 구체적으로 논술한 것으로 『기신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 부분은 다시 바른 뜻을 드러냄(顯示正義), 그릇된 집착을 다스림(對治邪執), 도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모양을 분별함(分別發趣道相)의 셋으로 나눠진다.

먼저 바른 뜻을 드러내는, 현시정의(顯示正義) 부분에서는 일심 즉 중생심을 일심 중의 청정한 면인 심진여문과 물든 면인 심생멸문의 둘로 크게 나누었다.

심진여문에서는 번뇌가 없다는 뜻으로 여실공(如實空), 번뇌가 없기 때문에 갖가지 청정한 모습이 갖추어 있다는 뜻인 여실불공(如實不空) 등을 말하여 마음의 청정한 면을 묘사하였다.

심생멸문에서는 청정한 여래장심이 물든 염오심(생멸심)과 화합해서 여래장심과 생멸심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아라야식(阿黎耶識:Alayavijnana) 이라는 것을 내세운다.

이 아라야식에는 깨달은 면인 각()과 무명의 훈습으로 물들어 있어 깨닫지 못한 면인 불각(不覺)의 두 가지 뜻이 있어, 여기에 훈습에 의한 염정연기(染淨緣起)가 전개됨을 밝힌다.

다음으로 그릇된 집착을 다스리는 대치사집(對治邪執) 부분에서는 인집(人執)과 법집(法執)의 이집을 대치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발심수행하여 도에 나아가는 모습을 분별하는 곳에서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해행발심(解行發心), 증발심(證發心)의 세 가지 발심을 말한다.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에서는 앞서의 해석분 중의 발취도상이 부정취(不定聚)중생의 승인(勝人)을 위한 설명임에 비하여 여기서는 부정취중생 중의 열인(劣人)을 위하여 사신(四信), 오행(五行) 및 타력염불(他力念佛)을 설한다.

◆ 마지막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에서는 이 논을 믿고 닦으면 막대한 이익이 있으리라는 것을 말하였다.

 

2. 중관·유가 종합설로 판단한 원효설이 객관적

 

대승기신론의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기신론의 성격에 대한 원효와 법장 두 분의 견해를 간단히 비교하면서 소개하고자 한다.

기신론 출현 이후 기신론에 대한 연구와 주석서, 논문 등의 책자는 오늘날까지 불교 경론서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점하고 있다. 그만큼 기신론의 진가를 입증하는 셈인데 그 중에서도 예부터 기신론에 대한 삼대(三大) ()로 혜원(慧遠), 원효, 법장(法藏)(시대순) 세 분의 것을 꼽는다. 아직 필자의 연구 범위에 미치지 않은 혜원의 것은 잠시 미루고 여기서는 원효와 법장의 것만 다루겠다.

먼저 기신론의 성격에 대해 법장은 여래장연기종설(如來藏緣起宗說)이라 판석한다. 이에 비해 원효는 이 논서가 중관 사상과 유가(유식) 사상의 지·양 종합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신론의 출현 시기와 기신론의 일심이문의 구조상으로 볼 때, 법장설보다는 원효설이 훨씬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승우준교(勝又俊敎, 가츠마타 순쿄)는 단순히 교리 판석의 입장에서 주장한 법장설을 더 발전시켜 대승불교 후기에 중관·유가 두 학파 뿐 아니라 제 삼의 학파로서 여래장연기종 학파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같은 일본 학자인 고기직도(高崎直道, 다카사키 지키도)의 주장은 이와 다르다. 그에 따르면 한역(漢譯)을 잘 사용하지 않는 인도학자와 구미(歐美)학자들은 대승불교라면 중관과 유가의 두 파만을 인정할 뿐이며, 일부 일본학자들이 대승불교 중의 여래장 사상을 또 하나의 특색있는 체계로 고찰하는 것은 그들이 화엄 교학을 통해 오래 전부터 익혀온 생각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또 다른 일본 학자 백목홍웅(柏木弘雄, 가시와기 히로오)은 기신론 자체의 의도와 기신론 내의 하나 하나의 교설의 취지가 반드시 화엄 교학에서의 기신론에 대한 이해와 동일하지 않음은 익히 지적되고 있는 사실이라고 한다. 이상 두 학자의 설을 볼 때 승우준교(勝又俊敎)의 설은 그 근거가 희박하다 할 수 있다.

나아가 법장은 기신론의 과목나눔(分科), 어구 해석에서 원효의 창안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유독 원효의 중관·유식의 지양·종합설을 따르지 않고 여래장연기종설이라 주장한다. 이는 화엄종이 계승한 남도파지론종(南道派地論宗)에서 여래장 내지 진성(眞性)을 말하고 이 지론종남도파의 학설을 대성하여 화엄 교학의 확립에 커다란 공헌을 한 혜원이 그의 『대승의장』(大乘義章)에서 여래장연기, 진성연기를 말한 데 기인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화엄 교학의 관견(管見)에 입각한 법장의 여래장연기종설보다는 그러한 선입견의 전제없이 기신론의 구조와 내용에 의해 중관·유가의 지양·종합설이라 판단한 원효의 설이 훨씬 객관성을 가지며 불교사상 발달사적 입장에서도 더욱 타당성을 갖는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효의 중관·유식설과 법장의 여래장연기종설은 그 내용에 있어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두 설은 내용의 핵심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 단 기신론의 구조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일심이문으로 되어 있고, 이 이문 중 생멸문에서 각()과 불각(不覺)의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는 아라야식에 의해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으로 생멸연기함을 보여준다.

원효가 말하는 진여·생멸 이문과 각과 불각 이의(二義)의 차이점은 이렇다. 즉 이문 중 진여문에는 염법, 정법을 낳게하는 생의(生義)가 없고 염정법을 포괄하는 섭의(攝義)만 있음에 비해 생멸문의 각과 불각의 뜻에는 섭의와 생의가 다 있다는 것이다. 법장의 여래장연기종설이 생멸문 중의 아라야식의 이의성만을 언급한데 비해 원효는 진여와 생멸 이문이 아라야식의 이의성, 나아가 기신론 전체에 대한 대전제로 본다.

따라서 이 이문은 생멸문에서의 아라야식의 이의성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냄에 있어 선도적인 역할을 한다. 이는 또한 거꾸로 일심의 진여·생멸 이문의 전제성(前提性상징성은 아리야식의 각, 불각 이의성을 통해 구체적, 실천적으로 전개됨으로써 이문의 지양·종합이라는 기신론의 특성을 더욱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나아가 인간 마음의 진·속, 염·정 이면성에서 어떻게 속·염이 이루어졌고 어떻게 이를 극복하여 진·정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고찰이라 할 수 있다.

 

3. 선·염불·바라밀 담은 포괄적 불교개론서

 

이제 앞으로 공부하게 될 대승기신론의 제명(題名)을 원효의 해석을 빌려 잠깐 밝혀보기로 한다.

◆ 우선 대승의 뜻에 대해 원효는 허공장경,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그리고 현양성교론 등을 빌려 자세히 풀이하는데 이 경론들의 풀이가 대동소이하다.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 의하면 대승이란 경대성(境大性), 행대성(行大性), 지대성(智大性), 정진대성(精進大性), 방편선교대성(方便善巧大性), 증득대성(證得大性), 업대성(業大性) 등 일곱 가지 대성과 상응하기 때문에 대승이라고 한다.

첫째 보살도는 한량없는 모든 경전의 광대한 교법을 따르는 것으로 그 경계를 삼기 때문에 경대성,

둘째 일체의 자리·이타의 광대한 행위를 바로 행하기 때문에 행대성,

셋째 인아(人我)와 법아(法我)가 무아임을 깨닫기 때문에 지대성,

넷째 삼대겁아승기야 동안에 한량없는 실천하기 어려운 행실을 방편으로 부지런히 닦기 때문에 정진대성,

다섯째 생사와 열반 두 가지에 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방편선교대성,

여섯째 여래의 모든 힘과 무외(無畏)의 불공불법(不共佛法) 등 한량없는 무수한 큰 공덕을 얻기 때문에 증득대성,

일곱째는 생사의 때가 다하도록 보리(菩提)를 이루어 광대한 온갖 불사를 건립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업대성이라 한다.

 

◆ 다음 기신(起信)이란 중생의 믿음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무엇을 믿는가. 체대(體大상대(相大용대(用大)를 믿는 것이다.

체대를 믿는 것이란 평등법계인 이치가 실제로 있음을 믿는 것이다. 상대를 믿는 것이란 닦아서 얻을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니 본성의 공덕을 갖추어(自利) 중생을 훈습함에 의해(利他)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게 됨을 믿는 것이다. 용대를 믿는 것이란 닦아서 얻을 때에 무궁한 공덕의 작용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 마지막 논이란결정적으로’ 궤범이 될 만한 글을 써서 아주 깊은 법상(法相)의 도리를판설하는’ 것이니 이결판’의 뜻에 의해 논이라고 한다. 결국 대승은 논의 종체(宗體)이며 기신은 논의 수승한 기능이다. 이 체용을 함께 들어서 제목을 나타내므로 대승기신론이라 한다.

◆ 이 논을 지은 대의는 중생으로 하여금 의혹을 제거하고 잘못된 집착을 버리게 하여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켜 불종(佛種:부처의 과보를 내는 종자)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자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여기서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켜 불종자를 끊어지지 않게 한다는 것은 위로 불도를 넓힘이며(上弘佛道), 중생들의 의혹을 제거하고 그들의 잘못된 집착을 버리게 한다는 것은 아래로 중생을 교화함(下化衆生)이다.

◆ 인연분에서는 허다한 경전 가운데 이러한 법이 갖추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또 기신론을 지어 거듭 설명하는가에 대해 여덟 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이 논서를 지은 총체적인 이유는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여의고 궁극적인 즐거움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둘째 여기서부터는 개별적인 이유인데 여래의 근본 뜻을 해석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바르게 이해하여 틀리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선근(善根)이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법을 감당하여 신심을 퇴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넷째 선근이 미세한 중생으로 하여금 신심을 수행하여 익히게 하기 위해서다.

다섯째 방편을 보여 악업장(惡業障)을 없애서 그 마음을 잘 호위하고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멀리 여의어 사악한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다.

여섯째 지행(止行)과 관행(觀行)을 수습함을 보여서 범부와 이승의 마음의 허물을 대치하기 위해서다.

일곱째 염불에 전일하는 방편을 나타내어 부처님 앞에 왕생하여 반드시 절대로 신심을 퇴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여덟째 이 논서를 읽는 이익을 보여 수행을 권고하기 위해서다.

이 논을 지은 개별적인 이유 중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육바라밀의 방편에 의해 수행할 것을 말한 것으로 특히 여섯 번째는 지·관의 선수행적 방법을 제시하고 있으며 일곱 번째는 염불로 왕생정토하는 정토적 방법까지 말하고 있다. 결국 기신론은 모든 경론서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불교 개론서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중생심이 일체의 세간·출세간법 통섭

선·염불·바라밀 담은 포괄적 불교개론서

 

기신론의 다섯 가지 큰 구성에서 두 번째 입의분은 기신론의 대의를 천명한 것으로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를 제시한다.

◆ 기신론은 일심을 중생심이라 한다. 이 중생심이 일체의 세간법(세간의 생사법)과 출세간법(열반의 법)을 통섭하는데 이는 이 중생심의 진여상이 대승의 체를 나타내며 중생심의 생멸인연상이 대승자체의 상(()을 나타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생심이 일체의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통섭한다고 한 것은 대승법이 소승법과 다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승법에서는 일체의 모든 법이 각각 자체가 따로 있지만 대승법에서는 모든 법의 자체가 오직 일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효는 별기에서 기신론이 진여법과 세속법이 그 체가 다르다는 치우친 고집을 꺾기 위해 출현한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 그런데 일심이 일체의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통섭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열반법을 나타내는 진여문과 생사법을 나타내는 생멸문이 서로 여의지 않는 불상리성(不相離性)을 뜻하는 것이다.

원효는 별기에서 이 이문의 관계를 미진(微塵)과 와기(瓦器)의 관계로 설명한다.

즉 미진이 모든 와기들의 통상(通相)이어서 통상 외에 따로 와기가 없으며 따라서 와기들은 모두 미진에 포섭되는 것처럼 진여문은 염정(染淨)의 모든 법에 통상이 되므로 통상 이외에 따로 염정 제법(諸法)이 없으며 염정 제법은 모두 통상에 포섭된다는 것이다.

또 미진의 성질이 모여 와기들을 이루지만 항상 미진의 성질을 잃지 않는 까닭에 와기문(瓦器門)이 곧 미진을 포섭하는 것처럼 생멸문이란 선·불선의 인()인 진여가 연()과 화합하여 염정 제법을 변작하는 것으로 비록 제법을 변작하고 있지만 항상 진성을 잃지 않기 때문에 이 생멸문에서도 역시 진여를 포섭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진여·생멸 이문이 서로 융통하여 한계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다 각각 일체의 염정 제법을 통섭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문은 서로 떠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 삼대란 체대(體大상대(相大용대(用大)를 말한다. 앞서 중생심의 진여의 모습은 대승의 체를 나타내고 그 생멸(인연)의 모습은 대승 자체의 상·용을 나타낸다고 했는데 즉 체대는 진여문에, 상대·용대는 생멸문에 배속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첫째 체대는 평등법계의 진여본성자리로서 일체의 상을 여읜 것이며 범부에서 부처에 이르기까지 증감이 없어서 끝내 변하지 않고 머문다.

② 둘째 상대란 그 진여본성이 갖추고 있는 공덕상(功德相)을 말한다. 기신론에서는 진여 자체에 대지혜광명, 법계를 두루 비침(照法界), 진실하게 앎(眞實識知),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상락아정(常樂我淨), 청량(淸凉)하고 불변(不變)하고 자재(自在)함의 뜻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심성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대지혜광명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에 어떤 망견을 일으킨다면 보지 못하는 상이 있는 것이며 심성에 망견을 여의면 바로 법계를 두루 비추는 것이다.

㉰만약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청정한 자성이 없게 되며

㉲상()도 아니고 락()도 아니고 아()도 아니고 정()도 아니다.

㉳이리하여 열뇌(熱惱)하고 쇠변(衰變)하면 자재하지 못하며 이에 간지스 강의 모래들보다 많은 망염(妄染)을 갖게 된다.

그러니 심성의 움직임이 없으면 간지스 강의 모래들보다 많은 온갖 깨끗한 공덕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③ 셋째 용대란 모든 부처와 여래가 본래 인지(因地)에서 대자비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을 닦아서 중생을 섭화(攝化)하며 크나큰 서원을 세워 모든 중생계를 모두 도탈시키고자 하여 겁수를 한정하지 않고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다.

이에 모든 중생 돌보기를 자기 몸과 같이 하며 그러면서도 중생상을 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과 자기의 몸은 다 같이 진여로써 평등하여 다름이 없는 것인 줄 여실히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방편지(大方便智)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완전히 없애어 본래의 법신을 보게 되고(自利), 자연히 불사의업(不思議業)의 여러 가지 작용을 갖는 것이니(利他), 그러면서도 모양 지을 만한 작용도 없다. 다만 중생의 견문에 따라 이익 되게 하기 때문에 용()이라 말하는 것이다.

 

5. 모든 언설은 분별심으로 지은 이름일 뿐

 

이제부터는 기신론의 핵심 부분인 해석분을 설명할 차례이다.

해석분은 지난 시간에 입의분에서 밝힌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를 구체적으로 논술한 것으로 이는 크게 현시정의·대치사집·분별발취도상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는 바른 뜻을 드러낸다는 현시정의 가운데 먼저 일심의 심진여문을 밝히고자 한다. 일심 즉 중생심에 ()진여문과 ()생멸문이 있으며 이 둘 진여·생멸 이문의 관계가 불상리성을 가진다는 것도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기신론은 심진여란 바로 일법계(一法界)이며 대총상법문의 체(大總相法門體)라고 한다. 여기서 심진여를 일법계 즉 일심이라고 한 것은 생멸문과는 별다른 진여문(별상의 진여문)이란 뜻이라기보다는 진여·생멸의 두 문을 통틀어 포괄하는 총상법문을 의미한다.

또 법문이라 할 때 법은 궤범으로써 참된 이해를 낸다는 뜻이고, 문이란 통틀어 열반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체란 진여문이 의지하는 체이니 결국 일법  전체가 생멸문이 되는 것처럼 일법계 전체가 진여문이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미진이 와기들을 이루므로 미진이 모든 와기들의 통상이어서 통상 이외에 따로 와기가 없고, 또한 와기들은 모두 미진에 포섭되니 와기문이 미진을 포섭하는 것처럼 진여문·생멸문은 하나가 아니면서도 둘이 아니다.

따라서 생멸문을 떠나서 진여문을 논할 수 없고 진여문을 떠나서 생멸문을 논할 수 없다. 일법계 즉 일심에 이 진여·생멸 이문이 모두 포섭되기 때문에 일법계 전체가 생멸문이 되고 또한 일법계 전체가 진여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일법계대총상법문의 체인 진여문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먼저 이 일심인 진여에는 그 심성이 평등하여 과현미(過現未)의 삼세(三世)를 떠난 것이어서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다. 단 모든 존재 현상들은 오직 망념 즉 우리들의 분별심 때문에 차별이 있는 것이어서 만약 이 분별심을 여의면 모든 차별 현상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니 모든 존재 현상들은 본래 음성으로 말하는 언설이나 명구로 설명하는 이름, 명목 따위를 여읜 것으로 평등하고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는 오직 일심일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언설은 다만 분별심에 의해 임시로 지은 이름에 불과한 것이지 그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여는 분별심을 떠나고 언설을 떠난 것이지만 언설에 의해 분별하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여기에 여실공(如實空)과 여실불공(如實不空)의 두 가지 뜻이 있게 된다. 여실공이란 필경에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오, 여실불공은 그 자체에 번뇌가 없는 본성의 공덕을 구족한 것이다.

여실공이라 할 때 공은 본래 모든 염법(念法)과 상응하지 않음을 말한다. (객관대상의) 모든 차별상을 떠난 것으로 이는 (주관적으로) 거짓된 심념(心念) 즉 분별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 진여의 자성을 언급할 때, 기신론은 유무(有無), 일이(一異)의 절사구(絶四句)를 써서 설명한다.

즉 진여자성은 유도 아니오(非有), 무도 아니며(非無), 유무를 함께 갖춘 것도 아니오(非有無俱),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도 아니다(非非有·非非無). 또한 같은 것도 아니오(非一), 다른 것도 아니며(非異), 같기도 하고 다른 것도 아니오(非一異俱相),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도 아니다(非非一相·非非異相).

진여의 본성은 중생의 망심, 분별심에 의해 언급할 수 없기 때문에 공이라 말하지만 만약 분별심을 떠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여실불공이란 이미 진여자성이 공하여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진여자성이야 말로 진심(眞心)이며 이 진심은 항상하여 변하지 않고 정법(淨法)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불공이라 한다.

그렇다고 또 이런 정법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되니, 왜냐하면 이 망법을 여읜 불공의 경지는 오직 증득함으로써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효는 이에 대해 공과 불공이 이 둘의 차이가 없음을 말한다.

불공이라 말하지만 취할 만한 상이 없기 때문에 불공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분별하여 반연하는 바를 여읜 경계는 오직 무분별지로 증득함으로써만 상응한다는 것이다.

-海印의 뜨락

 流通分(유통분)

5. 勸修學利益分(권수학이익분)

已說修行信心分(이설수행신심분) 次說勸修利益分(차설권수리익분)

이미 수행신심분을 설명하였으므로 다음은 권수이익분을 설하나니,

如是摩訶衍諸佛秘藏(여시마하연제불비장) 我已總說(아이총설)

이와 같이 마하연(대승)의 모든 부처님의 비장은 내가 이미 총체적으로 설명하였으니,

若有衆生(약유중생) 欲於如來甚深境界(욕어여래심심경계) 得生正信(득생정신)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매우 깊은 경계에서 올바른 신심을 내고 

遠離誹謗(원리비방) 入大乘道(입대승도) 當持此論(당지차론)

비방을 멀리 여의어 대승의 도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논서를 지니고, 

思量修習(사량수습) 究竟能至無上之道(구경능지무상지도)

사량하고, 수습하면 구경에 마침내 능히 위없는 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 高淳豪 : 思量修習(사량수습) : 삼혜(三慧)라는 것은  ① 문혜(聞慧) - 선천적인 지혜로써 들은 법의 뜻을 부지런히 구하여 그릇된 법을 버림. ② 사혜(思慧) - 법을 뜻을 사유함. ③ 수혜(修慧) - 사유한 다음 닦아 익힘. 이렇게 본다면 이 논서를 지니는 것은 문혜이며, 사량한다는 것은 사혜이며, 수습하는 것은 수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물처럼바람처럼]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은 대승(大乘)의 정신(正信)을 수행(修行)하는 이익과, 이것을 비방하는 죄과(罪果)가 깊고 무겁다는 것을 가르쳐, 비방을 떠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까지 설해온 대승의 모든 가르침은 불타가 비밀스럽게 간직한 신비한 가르침이다. 이에 대하여 지금까지 논술자는 그 전체를 설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을 설하여 바른 신심을 수행하는 큰 이익과 이를 비방하는 죄가 얼마나 큰가를 설한다는 것이다.

먼저 이「기신론」에 의한 정신(正信)의 이익을 설하여, 이를 권하는 부분이다. 만약 중생이 여래의 깊고 깊은 깨달음의 경계에 대하여, 올바른 신심이 생길 수 있게 되고, 비방을 떠나, 대승의 길에 들고자 한다면, 먼저 이「기신론」을 의지하여, 그 가르침의 내용을 사색하고 이해하며, 수행을 계속하면, 마침내 불타의 위없는 깨달음의 세계인 무상도(無上道)에 이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금강사]

 

['기신론'으로써 여래의 광대하고 심오한 법을 총체적으로 포섭하고 빠짐없이 밝혔다고 하여, "총체적으로 설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이익과 비방의 손해를 밝혀 수행하도록 권장하였습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라고 한 다음부터는 문(聞)·사(思)·수(修) 삼혜(三慧)의 이익을 총체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즉, '기신론'을 듣고 받아 지니어 아는 것은 문혜(聞慧)이고, 그 내용을 깊이 사유하여 알아 가는 것은 사혜(思慧)이며, 직접 수행하여 깨달아 증득한 것은 수혜(修慧)입니다. 이 세 가지 지혜가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 주체적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설명했던 일심이문(一心二門)은 모든 부처님이 증오한 매우 심오한 경계이므로 깨달아 들어갈 객체적 대상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삼혜(三慧)로 수습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과 여러 보살과 선지식들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즐겨 듣고 가져서 그것을 깊이 사유하여 직접 스스로 체험해 깨달아 가는 과정을 총체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부파불교 수행법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수행의 과정으로 세속지를 완성하는 수행의 단계라고 하였습니다. 하여튼 다음에는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수선]

 

  1) 바른 믿음을 권함

若人聞是法已(약인문시법이) 不生怯弱(불생겁약)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문을 듣고 겁내거나 약함=怯弱한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當知此人定紹佛種(당지차인정소불종) 必爲諸佛之所授記(필위제불지소수기)

마땅히 이 사람은 결정적으로 부처가 될 종자=佛種이니, 반드시 제불의 수기한 바가 됨을 알아야 한다. →삼혜(三慧) 중 문혜(聞慧)

 

[紹(소) - 잇다, 소개하다, 알선하다.

* 授記(수기) - 부처님께서 제자에게 그 제자가 언제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시는 것.]

 

[만약 사람이 이「대승기신론」의 가르침을 듣고도, 그 어려운 수행 등에 대하여, 겁을 내거나, 나약해지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반드시 불종(佛種) 즉 불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반드시 제불에 의하여 장차 불타가 된다는 수기(授記)를 얻게 된다. 이는 문(聞), 사(思), 수(修), 삼혜(三慧) 중 문혜(聞慧)에 해당된다. 이 가르침을 듣고도「겁약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바로 문혜(聞慧)이다.-금강사]

 

假使有人能化三千大千世界滿中衆生令行十善(가사유인능화삼천대천세계만중중생령항십선)

가령 어떤 사람이 능히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하여, 하여금 십선을 행하게 하더라도 

不如有人於一食頃正思此法(불여유인어일식경정사차법)

어떤 사람이 밥 먹을 동안=一食頃에 이 법을 올바로 사유하는 것보다 못하나니, 

過前功德不可爲喩(과전공덕불가위유) →삼혜(三慧) 중 사혜(思慧)

앞의 공덕을 능가하여 비유할 수도 없을 것이다.

 

[三千大千世界(삼천대천세계) : 사바세계와 같은 세계가 천 개 모이면 소천세계가 되고, 소천세계가 천 개 모이면 중천세계가 되며, 중천세계가 다시 천 개 모이면 대천세계가 된다. 이를 삼천대천세계라고 한다.

* 《금강경》에도 이와 같은 설명이 있다.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선여인이 아침에 갠지스강 모래 수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점심때도 다시 갠지스강 모래 수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저녁에도 역시 갠지스강 모래 수 같은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백천만 억 겁 동안 몸으로써 보시한다고 하자.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거슬리지 않는다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나을 것이니,

하물며 베껴 쓰고 받아서 지녀서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해 해설하는 것이겠는가?”

왜냐하면 경을 바르게 생각하는 것은 무루법이지만, 선행이나 보시를 하는 것은 유루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문혜(聞慧)와 사혜(思慧)의 이익을 나타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법문을 듣고 나서 비겁하고 나약한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사람은 결단코 부처가 될 종자를 계승하여 반드시 모든 부처님이 수기를 받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이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淫)·불망어(不妄語)·불기어(不綺語)·불양설(不兩舌)·불악구(不惡口)·무탐(無貪)·무진(無瞋)·불악견(不惡見) 또는 불사견(不邪見) 등의 열 가지 선행을 행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밥 한 끼니 먹는 동안 이 법을 올바르게 사유하는 것이 보다 더 뛰어난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신론'에서 밝힌 일심(一心)의 진여(眞如)는 성불하는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 논을 믿고 받아들여 비겁하고 나약한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반드시 부처가 될 종자를 계승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문혜(聞慧)의 공능(功能)입니다. 다음에 사혜(思慧)의 이익을 따로 나타내었습니다. 십선법은 다함이 있는 유루의 법이지만 이 진여법에 일념이라도 신심을 낸다면 부처를 이룰 종자가 됨으로 그것은 어떤 유루의 공덕으로도 비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復次若人受持此論觀察修行(부차약인수지차론관찰수행)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논을 받아 지니고 관찰하고 수행하기를 

若一日一夜所有功德(야일일일야소유공덕) 無量無邊不可得說(무량무변불가득설)

하루 낮과 밤 동안 함으로서 소유할 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어, 말로써 설명할 수도 없으니,

假令十方一切諸佛(가령십방일체제불) 各於無量無邊阿僧祇劫(각어무량무변아승기겁)

가령 시방의 일체 모든 부처님이 각각 한량없고 끝없는 아승기 겁 동안 

歎其功德(탄기공덕) 亦不能盡(역불능진)

그 공덕을 찬탄하시더라도 또한 다할 수 없으니, 

何以故(하이고) 謂法性功德無有盡故(위법성공덕무유진고)

왜냐하면 이른바 (진여의) 법성의 공덕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니, 

此人功德亦復(차인공덕역부) 如是無有邊際(여시무유변제)

이 사람의 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끝이 없다. → 삼혜(三慧) 중 수혜(修慧) 

 

[이상은 문사수(聞思修)의 정신삼혜(正信三慧)의 공덕을 나타내어, 이를 권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수혜(修慧)의 이익을 따로 나타내었습니다. 이 '기신론'을 의지하여 수행을 하면 그 수행이 한량없고 끝없는 진여법성에 걸맞기 때문에 비록 하루 24시간 동안만을 수행한다 해도 그 공덕은 갓이 없으며, 진여법성은 다함이 없기 때문에 찬탄으론 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여(眞如)의 본성이 공(空)한 공덕도 역시 다하지 못함을 찬탄하는 것으로써 결론지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역대 조사들이 누누이 강조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진여의 본성이 공(空)한 이치를 스스로 체득하는 것만이 참다운 진여본성의 공덕에 계합(契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경(看經)을 하든 예배·참회·염불·참선을 하든 진여본성에 계합한 수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피상적으로 의례적으로 의식을 따르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수행을 하든 자기 본래의 면목을 철관(徹觀)하는 수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기에 관해 부처님과 한 여인의 일화가 있습니 다. 이 일화는 빈자일등(貧者一燈)이라고도 불립니다.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궁궐에서 설법하고 기원정사로 돌아갈 때, 그 나라 국왕과 귀족들은 부처님 일행에게 성대한 공양을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가난한 여인 난타는 부처님을 위해 공양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머리 카락을 잘라 팔았고 구걸을 한 돈으로 기름을 사서 등을 하나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 하였습니다. 다음날 취침시간에 부처님의 제자들이 등불을 끄는데 난타의 등불만은 아무리 꺼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부처님은 “너희들이 아무리 끄려 해도, 바닷물을 가져오고 태풍이 오더라도 그 불은 끌 수 없다. 이 등불을 보시한 이는 자신의 재산과 마음을 다 바쳐 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 공덕으로 후에 반드시 성불하여 수미등광 여래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난타를 불러 그녀에게 수기를 주었습니다.-통섭불교]

 

   2) 비방함을 멀리 여윔

其有衆生(기유중생) 於此論中毁謗不信(어차론중훼방불신)

그 어떤 중생이 이 논서를 훼방하고 믿지 않는다면 

所獲罪報經無量劫受大苦惱(소획죄보경무량겁수대고뇌)

얻는 죄의 과보=罪報는 한량없는 겁을 지나도록 큰 고뇌(괴로움)를 받을 것이다. 

 

[所獲罪報經無量劫受大苦惱(소획죄보경무량겁수대고뇌) : 불법을 비방하면, 자기도 불법을 따라 수행하지 않게 되며, 다른 사람도 그 길을 가는 것을 막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 죄보가 크다고 하는 것이다. 누가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지은 업보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是故衆生但應仰信不應誹謗(시고중생단응앙신불응비방)

그러므로 중생은 다만 우러러 믿고 마땅히 비방하지 않아야 하며, 

以深自害亦害他人(이심자해역해타인) 斷絶一切三寶之種(단절일체삼보지종)

(비방하면) 깊이 스스로를 해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게 되어, 일체 삼보의 종자를 끊어지게 하는 것이니,

以一切如來皆依此法得涅槃故(이일체여래개의차법득열반고)

왜냐하면 일체 여래께서 이 법을 의지하여 열반을 얻으신 까닭이며, 

一切菩薩因之修行入佛智故(일체보살인지수행입불지고)

일체 보살이 그로 인하여=因地의 수행을 하여 불지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當知過去菩薩已依此法得成淨信(당지과거보살이의차법득성정신)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과거의 보살이 이미 이 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淨信을 성취하였으며,

現在菩薩今依此法得成淨信(현재보살금의차법득성정신)

현재의 보살도 지금 이 법을 의지하여 정신을 성취할 수 있으며, 

未來菩薩當依此法得成淨信(미래보살당의차법득성정신)

미래의 보살도 마땅히 이 법을 의지하여 정신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是故衆生應勤修學(시고중생응근수학)

그러므로 중생은 마땅히 부지런히 수행하고 배워야 한다. 

 

[자기의 본성이 진여임을 믿는 가르침을 비방하는 죄가 막중하다는 것을 밝히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정신(正信) 비방의 죄를 다루고 있다. 대승경전에는「정법(正法) 비방의 죄」가 종종 설해지고 있으나, 이「정법 비방의 죄」가 대소승(大小乘)간의 상호비방에 대한 경고인가, 그렇지 않으면 일반적 비방에 대한 경고인가의 또렷한 구분은 없으나, 여기서는 원시불교의 전통을 잇고 있는 부파교단에서, 대승불교의 새로운 가르침에 대하여 비불설(非佛說)이라고 비난한데 대한 응답으로「정법 비방의 죄」를 제기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대소승간의 상호비방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대승의 경전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원시불교에 있는 것이므로 원시불교를 소승(小乘)이라는 이름으로 비방하여서도 안되며, 역시 대승경전을 비불설(非佛說)로 비방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대승과 소승을 통합하여 해석하는 슬기를 갖지 않으며 안된다.
이상으로 정신(正信)의 이익과 정신비방(正信誹謗)의 죄에 대하여 설하였으므로, 다음은 최후의 매듭으로서 부지런히 수학하도록 권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훼방하는 죄를 들어 엄격하게 훈계하고 수행하라고 권하고서 부처님과 보살들도 이를 의지하여 수행하여 정신(淨信, Pra ada)과 불지(佛智)와 열반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자라면 우러러 믿고 비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스스로를 해치고 다른 사람도 해를 끼쳐 일체 삼보의 종자가 끊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논서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혜명(慧命)이며, 삼보가 될 종성(種性)이며, 중생의 법신(法身)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비방을 하고 믿지 않는다면 부처가 될 종자를 끊고 삼보를 단절하며 중생의 법신을 해치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훼방은 자신을 해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해를 끼쳐 그 죄의 과보가 한량이 없습니다. 일체의 여래께선 이것을 의지하여 열반을 증득하셨고, 보살은 이를 의지하여 부처님의 지혜의 세계에 들어가 성불하게 되므로 굳이 믿기만 할 뿐 훼방하진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마땅히 알라"고 한 다음부터는 신심을 결론짓고 수행하라고 권하였습니다. 모든 부처님은 이미 이 법으로 인하여 성불하였으며, 삼세의 보살도 모두가 이를 의지하여 인지(因地)의 수행을 하였고 하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믿어 닦아야 하겠습니다.]

 

廻向偈(회향게)

諸佛甚深廣大義(제불심심광대의) 

모든 부처님의 매우 심오하며 넓고 위대한 뜻,

 

[첫 구절은 대승의 의미 결론지었고, '매우 심오하고, 광대하며, 위대하다'는 것은 체(體)·상(相)·용(用) 삼대(三大)의 의미를 말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법계총상법문입니다.]

 

我今隨分總持說(아금수분총지설)

제가 이제 분수를 따라 모든 지혜를 총괄하여 설하였으니,

 

[의미를 서술한 문장을 결론지었으며, 그 의미를 일만일천여 단어로 남김없이 다 포섭하였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설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른바 "적은 문장으로 많은 의미를 포섭하였다"고 하겠습니다.]

 

廻此功德如法性(회차공덕여법성) 普利一切衆生界(보리일체중생계)

이 공덕을 진리의 본성=法性과 같이 회향하오니,
일체 중생의 세계가 두루두루 이익이 되게 하소서!

 

[여기에서는 총체적으로 결론짓고 그 공덕을 회향하였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매우 심오하고 매우 광대하며, 매우 위대한 의미를 마명보살은 지금 분수를 따라서 그 의미를 총체적으로 수지하여 설명하였고, 이 공덕을 회향하여 법성(法性)과 같이 일체 중생계에 두루 이익이 되길 발원하면서 유통분(流通分)을 삼았습니다.

이 논서를 지은 근본적인 의도는 중생들이 의심을 버리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일심법계인 진여의 본성과 중생계로 회향하여 두루두루 모두에게 이익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체 중생들이 진여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발기하고, 그것을 의지하고 수습하여 진여삼매(眞如三昧)를 성취하게 하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진여삼매에 의해서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에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른바 축원문에서 "삼처(三處)로 회향되어 실제로 원만하여지이다"하는 회향삼처실원만(廻向三處實願滿)에 해당하겠습니다. 여기서 "법성(法性)"이란 진여(眞如)의 보리(菩提)를 완성하여 도달한 경지이며, "일체 중생계를 이익되게 한다"는 것은, 그 일체는 욕계·색계·무색계뿐만 아니라 거듭거듭 다함없이 펼쳐진 우주법계의 중생에게 이익을 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기신론'을 구조와 내용에서 볼 때에 일심(一心)·이문(二門)·삼대(三大) 등은 이론철학적인 부분으로 유심진여연기(唯心眞如緣起) 또는 여래장연기사상이라 할 수 있겠고, 사신(四信)·오행(五行)은 자력적인 윤리실천이며, '나무아미타불'의 육자(六字)회향은 종교적이고 타력적이고 신앙적인 것으로 종합적인 수행체계라고 하겠습니다. 나아가 본론은 소승에 대립되는 대승이 아니라 대승과 소승을 아우른 모든 교리(敎理)와 실천사상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론의 대요(大要)는 중생의 한 마음인 일심(一心)을 마음의 바탕과 마음의 양태로 나누어 이문(二門)으로 삼고, 마음의 바탕은 불변(不變)한 것으로 보고, 마음의 양태는 수연(隨緣)하지만 마음의 바탕인 본성의 공덕을 떠나지 않아 진여에 훈습(薰習)될 수 있다는 지혜의 작용인 삼대(三大)를 밝혔습니다. 이러한 훈습은 허망한 마음을 제거하여 진여에 계합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여 사신(四信)과 오행(五行)의 자타력(自他力)을 밝히고, 나아가 근기가 하열한 중생을 위해 타력염불의 방편도 설하였습니다. 다시 요약하면 불교의 당체(當體)와 나타난 현상 그리고 자비롭고 지혜로운 작용을 지적하여 그 현묘한 이치에 계합해 가는 과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본 논의 글은 쉽지만 법의 내용과 그 의미는 한 번 보고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자꾸 여러 번 반복해서 봄으로써 그 이치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주의 하셔야할 점은 기신론에 설해진 망념(妄念)을 가지고 정념(正念)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논은 비록 북방에 전해진 대승논서 가운데 최상의 위치를 점유하지는 못하였지만 매우 심오한 불교교리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과 한국의 여러 조사들께서 이 논에 관심을 가지고 천착(穿鑿)하여 불교의 이론과 신앙과 수행체계를 수립하여 의지하였습니다. 특히 중국 정영사 혜원스님과 화엄교학의 대성자인 법장스님과 우리 나라 원효성사의 3대소가 유명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능가경}과 {능엄경}·{금강삼매경}·{화엄경}, 그리고 부파칠론과 {아비달마구사론}·{중론}과 {섭대승론}·{구경일승보성론}·{대승장엄경론}·{유식삼십송}·{이입사행론}·{금강사매경론} 등을 참고해 본다면 큰 소득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주신 인연에 깊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부디 대승의 깨끗한 믿음과 물러남이 없는 실천을 통해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완성하시길 빕니다. 나모아미타불-수선]

감사합니다.

 

3. 지관구행(止觀俱行) - 止觀雙修(지관쌍수)를 권함

若行若住若臥若起(약행약주약와약기) 皆應俱行(개응구행)

혹 다니거나 혹 머물거나 혹 눕거나 혹 일어남에 모두 마땅히 지관(止觀)을 함께 수행해야 하나니,

 

[ 《앙굿다라 니까야≫ 쭌다 경(Chunda-sutta)

도반들이여, 그러므로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합니다. ‘법에 열중하는 우리는 참선하는 비구들을 칭송하리라.’라고.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불사(不死)의 경지를 몸으로 체득하여 머무는 이러한 경이로운 인간들은 세상에서 얻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도반들이여, 그러므로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합니다. ‘참선하는 우리는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을 칭송하리라.’라고.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심오한 경지를 통찰지로 꿰뚫어 보는 이러한 경이로운 인간들은 세상에서 얻기 힘들기 때문입니다.-물처럼바람처럼]

 

所謂雖念諸法自性不生(소위수념제법자성불생) 而復卽念因緣和合(이부즉념인연화합)

이른바 비록 제법의 자성이 나지 않음을 생각하나, 다시 곧 인연으로 화합한

善惡之業(선오지업) 苦樂等報(고락등보) 不失不壞(불실불괴)

선악의 업과 고와 락 등의 과보가 잃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음을 생각해야 하며,

 

[앞부분은 지행(止行)이며, 뒷부분은 관행(觀行)이다.

* 元曉 : 雖念諸法自性不生이란 것은- 비유문(非有門)에 의해 지행(止行)을 닦는 것이다.

而復卽念因緣和合이란 것은 비무문(非無門)에 의해 관행(觀行)을 닦는 것이다. 이는 실제를 건립하지 않은 채 모든 법을 건립함을 따르기 때문에 지행을 버리지 않고 관행을 닦을 수 있는 것이니, 진실로 법이 유가 아니지만 무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雖念因緣善惡業報(수념인연선오업보) 而亦卽念性不可得(이역즉념성불가득)

비록 인연이 화합한 선악업보를 생각한다 하여도, 그러나 또한 생각하는 자성=念性은 얻을 수 없음이니,

 

[앞부분은 관행(觀行)이며, 뒷부분은 지행(止行)이다.]

 

若修止者(약수지자) 對治凡夫住著世間(대치범부주착세간)

만약 지(止)를 수행하는 자라면, 범부가 세간을 머물고 집착하는 것을 대치할 수 있으며, 

能捨二乘怯弱之見(능사이승겁약지견)

능히 이승의 겁내고 약한 견해=怯弱之見을 버릴 수 있다.

 

[元曉 : 止를 닦으면 첫째 범부의 주착(住着)하는 고집을 제거하는 것으로 그가 집착한 인법상(人法相)을 없애는 것이며, 둘째 이승의 겁약한 소견을 다스리는 것으로 오음이 있다고 보아, 그 고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若修觀者(약수관자) 對治二乘不起大悲狹劣心過(대치이승불기대비협열심과)

만약 관을 수행하는 자는 이승이 대비를 일으키지 않는 편협하고 용렬한 마음의 허물을 대치할 수 있으며,

遠離凡夫不修善根(원리범부불수선근)

범부가 선근을 수행하지 않는 것을 멀리 여의게 되니, 

 

[元曉 : 觀을 닦으면 첫째 이승의 협열(狹劣)한 마음을 없애는 것으로 널리 중생을 살피어 대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둘째 범부의 게으른 뜻을 다스리는 것이니 무상(無常)을 보지 아니하면 분발하여 도에 나아감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다.]

 

以此義故(이차의고) 是止觀二門(시지관이문) 共相助成(공상조성) 不相捨離(불상사리)

이런 뜻(의미)이므로 이 지와 관의 두 문은 함께 서로 도와 이루며,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니,

若止觀不具(약지관불구) 則無能入菩提之道(약무능입보리지도)

만약 지와 관을 갖추지 않으면 보리의 도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元曉 : 지(止)와 관(觀)은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지(止)와 관(觀), 이 둘을 동시에 닦는 방법을 설한다. 지(止)와 관(觀)을 따로따로 수행하는 것은 수행이 미숙한 사람들이 행하는 것으로서 오랫동안 수행하여 선정(禪定)과 지혜(智慧)가 성취되면, 지와 관을 함께 수행하는 지관구행(止觀俱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止)와 관(觀)을 함께 수행하는 것은,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즉, 지(止)를 수행하는 것은 본체적 입장에서 제법의 자성(自性)은 불생(不生)이라는 것을 염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현상적 입장에서 인연화합(因緣和合)으로 생기는 선악업(善惡業)이나 고락(苦樂)의 과보는 절대로 없어지거나 부서져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前者)는 지(止)의 입장이고 진여문(眞如門)의 입장에서 '영원'의 불생을 보는 것이며, 후자(後者)는 생멸문(生滅門)의 입장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실재로 있다[實有]고 보는 관(觀)의 입장이다. 지(止)는 비유(非有)이고 관(觀)은 비무(非無)로서「비유즉비무(非有卽非無)」는 지(止)를 버리지 아니하고, 더불어 관(觀)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止)에 즉(卽)하는 관(觀)」즉 지관(止觀)을 함께 닦는 것이다.
다음은 역으로, 관(觀)의 입장에 서서 인연선악의 업보(業報)를 염한다 하더라도, 그러나 동시에 지(止)의 입장에 서서 제법의 본성은 공(空)이므로 불가득(不可得)이라고 염하는 것이다. 이것은「관(觀)에 즉하여 지(止)를 행하는 것」으로서, 유(有)를 인정하면서 그러나 그 깊은 곳에서 동시에 공(空)을 보는 것이다.
이상은 법(法)에 대한 지관구행(止觀俱行)을 밝힌 것이며, 다음은 장(障)에 대한 지관구행, 즉 지와 관을 동시에 실천하는 방법을 밝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止)를 수행하게 되면 법의 무자성(無自性)을 보는 유심삼매(唯心三昧)의 정(定)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범부가 세간의 명리(名利)에 집착하는 것을 없앨 수 있음과 동시에, 이승(二乘)의 염세, 즉 생사를 싫어하여 세상을 버리는 겁약한 견해를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지(止)는 범부의 세간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치유하는 것이며, 동시에 관(觀)은 보살로서 세간을 버리지 않는 대비심(大悲心)을 갖게 하는 것으로, 지관구행(止觀俱行)의 실천을 보게 된다.
다음, 관(觀)을 수행하게 되면 대비관(大悲觀)과 대원관(大願觀)을 갖게 되는 것은 물론, 동시에 세간에 집착하지 아니하므로, 대비심을 일으키지 않는 이승(二乘)의 편협하고 옹렬한 마음의 과실을 치유할 수 있음과 동시에, 범부가 세간에 집착하여, 해탈을 위한 선근(善根)을 닦지 않는 과실을 없앨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세간을 버리지 아니하면서 세간에 집착하지 않는「관(觀)에 즉하는 지(止)의 입장」을 볼 수 있게 된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止)는 진여문, 관(觀)은 생멸문의 입장이며, 지(止)는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 관(觀)은 후득지(後得智), 지(止)는 평등관, 관(觀)은 차별관, 지(止)는 공관(空觀), 관(觀)은 유관(有觀) 등 상이한 성격의 것이지만, 그러나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은 일심(一心)의 두 면이므로, 양자는 둘이면서 둘이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또한 공(空)이라고 하더라도 유(有)를 떠난 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유(有)의 본성이 공(空)이기 때문이다. 유(有)는 공(空)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므로 유와 공은 상호 동시에 성립되는 것이다. 평등과 차별 또한 같은 이치이다.
이와 같이 지(止)와 관(觀)은 다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그러나 서로 도와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론에서는「이 지와 관의 두 문은 함께 서로 조성(助成)하여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지(止)와 관(觀)은 동시에 함께 행할 때만이, 비로소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로서의 진실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며, 그 어느 하나를 결하게 되면 불교의 깨달음은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므로, 결론적으로「만약 지와 관을 갖추지 못하면 바로 보리(菩提)의 길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施), 계(戒), 인(忍), 진(進), 지관(止觀)의 오문(五門) 중 지관이 정행(正行)이고 기타 사문(四門)은 조행(助行)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상에서 오행(五行)으로 사신(四信)을 수행하여, 신심을 성취하는 것을 설한 바 있다. 그러나 중생 가운데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는 수행하지 못하는 근기 낮은 중생 또한 있는 것이므로, 불퇴의 방편으로서 다음과 같이 염불왕생(念佛往生)을 설하게 된다.-금강사]

 

[여기에서는 일상의 수행에서 지(止,  amatha)와 관(觀, Vipasyana)을 쌍수(雙修)하라고 다시 강조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비록 제법을 깊이 사유하더라도 자성은 망령된 생각을 따라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지(止)이고, 망령된 생각을 그친 그 자리에서 곧바로 갖가지 인연화합에 의해서 선악의 업과 고락 등의 과보가 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觀)에 해당하겠습니다. 그러나 진여는 불생(不生)의 본체로 없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으며 선악의 업보를 생각하더라도 자성은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止)와 관(觀)의 두 방편은 서로 도와서 평등한 가운데 차별이 있고, 차별이 있는 가운데 평등한 것으로 평등의 본체에 들어가는 것은 지(止)이고, 다시 차별의 법을 관찰하는 것은 관(觀)입니다. 지(止)를 닦으면 차별에 집착하여 세간에 안주하는 범부의 마음을 다스리고, 또한 이승(二乘)의 비겁하고 나약한 견해를 버리게 하며, 관(觀)을 닦으면 자리이타의 대비심을 일으키지 않는 이승의 비겁하고 용렬한 마음을 다스려 선근을 닦지 않는 범부를 멀리 떠나 자리이타를 다 갖추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사마타와 위바사나는 서로 도와 떠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지 않으면 보리의 도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지관(止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선행을 광대하게 닦아 중생을 거두어 교화한다는 것은 지(止)에 상즉(相卽)해서 일으키는 즉지지관(卽止之觀)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비록 인연업보를 깊이 사유한다"는 것은 관(觀)의 수행이며, "사유하는 자성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은 관(觀)에 상즉(相卽)한 즉관지지(卽觀之止)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止)의 공적함에 거처한다 해도 만행의 관(觀)을 버리지 않고, 관(觀)으로 생사의 세계를 거닌다 해도 그 자리에서 지(止)이므로 한결같은 성품은 고요하여 담담하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을 두고 지관(止觀)을 쌍수(雙修)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 사마타를 수행하는 자는 범부가 세간에 안주하여 집착하는 것을 대치하면 이승의 비겁하고 나약한 견해를 버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자는 이승인이 대자비를 일으키지 않는 편협하고 근기가 낮은 마음의 허물을 대치하면 범부가 선근을 수행하지 않는 것을 멀리 여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지관의 두 문은 공통으로 서로가 돕고 성취하여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만일 지관을 함께 다 갖추지 않는다면 깨달음의 불도에 깨달아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관을 함께 닦아 범부로 하여금 세간에 염증을 내게 하기 때문에 뭇 선행을 부지런히 닦게 되고, 이승은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대비심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서로가 돕는 수행의 철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사와 열반 어느 쪽에도 집착하여 안주함이 없어야만 보리의 도로 곧장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지관을 쌍수(雙修)하여 운행하는 데서 얻어지는 이익입니다. 앞에서부터 누차 강조해온 수행의 요체를 결론짓고 있습니다. 즉, 지(止)인 사마타만 수행하면 혼침에 빠지거나 단공(斷空) 또는 악취공(惡取空)에 떨어져 버려서 허무주의에 침잠(沈潛)합니다. 반면에 관(觀)인 위빠사나만 수행하다보면 수행자의 마음이 들떠서 도거(掉擧)를 야기하여 온갖 대상에 현혹되어 번뇌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듭니다.-수선]

 

  ④ 道(도)에서 물러나지 않는 방편

復次衆生初學是法(부차중생초학시법) 欲求正信(욕구정신) 其心怯弱(기심겁약)

다시 다음에 중생이 처음으로 이 법을 배워 바른 믿음을 구하고자 하나, 그 마음에 겁이 많고 약한=怯弱하여 

以住於此娑婆世界(이주어차사바세계)

이 사바세계에 머묾으로써 

自畏不能常値諸佛親承供養(자외불능상치제불친승공양)

스스로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몸소 받들고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懼謂信心難可成就(구위신심난가성취) 意欲退者(의욕퇴자)

두려워서 말하길, "신심은 성취하기 어렵다"라고 하면서 의욕이 물러나고자 하는 자라면,

當知如來有勝方便(당지여래유승방편) 攝護信心(섭호신심)

여래께서는 수승한 방편이 있어 신심을 거두어 보호하심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謂以專意念佛因緣(위이전의념불인연) 隨願得生他方佛土(수원득생타방불토)

이른바 뜻을 하나로 하여=專一하게 하여 염불한 인연으로 원을 따라 다른 불국토에 태어나서,

常見於佛(상견어불) 永離惡道(영리악도)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고, 악도를 영원히 떠남을 말한다. 

如修多羅說(여수다라설) 若人專念西方極樂世界阿彌陀佛(약인전념서방극락세계아미타불)

수다라(경)에서 설하신 것처럼 만약 어떤 사람이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오로지 생각=專念하고 

所修善根廻向(소수선근회향) 願求生彼世界(원구생피세계) 卽得往生(즉득왕생)

닦은 선근을 회향하며, 저 세계에 왕생하기를 구한다면, 곧 왕생하여 

常見佛故(상견불고) 終無有退(종무유퇴)

항상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침내 물러남이 없으며, 

若觀彼佛眞如法身(약관피불진여법신) 常勤修習畢竟得生(상근수습필경득생)

住正定故(주정정고)

만약 저 부처님의 진여의 법신을 관찰하고 항상 부지런히 수습한다면 필경에 왕생하여 정정취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작은 선근(善根)이나 공덕과 인연으로는 저 세계에 날 수 없다. 사리불아,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 이야기를 듣고 그 이름을 지니고, 하루나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를 외우되, 한 마음으로 흐트러짐이 없다면, 그 사람은 목숨을 다 할 때, 아미타부처님께서 모든 성인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나실 것이다. 이 사람은 목숨을 마칠 때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에 가서 날 것이다. -《아미타경》

* 元曉 : 정정취에 머무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견도(見道) 이상을 이제 정정이라고 하니 무루도에 의거하여 정정을 삼기 때문이다. 둘째, 십해 이상을 정정이라고 하니 불퇴위에 머무는 것을 정정으로 삼기 때문이다. 셋째, 구품왕생을 모두 정정이라고 하니 수승한 연(緣)의 힘에 의해 퇴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은 물러서지 않는 불퇴의 방편으로 염불왕생(念佛往生)을 밝히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오행(五行)으로 사신(四信)을 수행하여 신심을 성취하는 방법을 설한바 있으나, 처음 이 법을 배워, 진여를 믿고 수행하여 바른 믿음을 얻고자 하는 중생 가운데에는, 의지가 박약하여, 모처럼 한 발심을 단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자기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 살고 있으나, 현재 이 땅은 무불(無佛)의 세상으로서 석가불(釋迦佛)은 이미 열반에 드시었고, 뒤를 잇는 미륵불(彌勒佛)은 아주 후대에 출현하는 것이므로 이 사바세계에서는 부처를 만나 친승공양(親承供養)할 수 없어, 신심을 성취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근기가 낮고 의지가 약한 사람을 위하여 불타는 대비심(大悲心)을 가지고 훌륭한 방편을 가르쳐 수행을 단념치 않도록 하고 있다. 이 방편으로 중생의 신심이 성취되도록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것이다. 그 사실을 마땅히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 훌륭한 방편이란 마음을 하나로 하여 염불(念佛)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이 정신을 집중하여 불타를 염상(念想)하고 불(佛)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인연에 의하여, 그 중생이 염원한 바에 따라 타방(他方)의 불국토에 왕생하게 된다. 이것은 그 불타의 본원(本願) 즉 원력에 의하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그 불국정토에 태어나 항상 불타를 친견하게 되어 영구히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 이에 대하여 경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해지고 있다. 만약 사람이 전념으로 서방극락세계에 계시는 아미타불을 염(念)하고, 그렇게 얻어진 공덕을 회향(廻向)하여, 그의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여 구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그렇게 하여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면, 항상 불타를 친견할 수 있게 되어, 신심이 후퇴하는 일이 없게 된다. 그보다 근기가 나은 사람이 바로 아미타불의 진여법신을 관하여, 항상 부지런히 그 진여를 염하게 되면, 마침내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게 되어 정정취(正定聚)에 들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론의 저자는 저술의 이유를 밝히는 인연분(因緣分) 제7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아둔한 열근기의 사람 가운데에서도 상품(上品)의 사람들은 자력으로 깨달을 이근(利根)은 없으나, 악(惡)의 업장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애당초 아미타불을 염하여,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방편을 가르쳐, 서방정토의 아미타불 앞에 태어나, 반드시 구원받는 몸이 된다는 것을 확신시켜, 불퇴의 신심을 성취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이상으로 사신오행(四信五行)의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끝마친다.]

이를 도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는 중생 가운데 근기가 하열한 이를 위하여 퇴전하지 않는 방편을 제시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걸맞은 말씀이라 여겨집니다. 우리는 조그만 어려움이 닥쳐오면 그만 물러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공부는 현실적으로 나타난 이득이 없는 듯하기 때문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중도에 그만 두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땅히 여래에게는 수승한 방편이 있기에 신심을 거두어 보호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는 생각을 오로지 하여 집중된 간절한 의식으로 염불한 인연으로 원을 따라 타방의 불국토에 태어나 항상 부처님을 뵙고 영원히 삼악도를 여읠 수 있습니다. 정토삼부경에서 말씀한 것처럼 어떤 사람이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전일(專一)하게 염불하고 수행한 선근을 회향하여 그 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갈구하면 반드시 왕생하여 항상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절대 수행에서 물러나는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 부처님의 진여인 법신을 관찰하고 항상 부지런히 수습한다면 필경에 왕생하여 그는 정정취에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대승을 처음 배우는 중생은 올바른 신심을 체득하지 못하여 안으로는 마음이 하열하고 밖으로는 수승한 인연이 결여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에 대한 올바른 신심에서 물러나 그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수승한 방편을 시설하시어 그 마음을 거두어 보호하십니다. 그 의도를 말해 본다면 전일한 의식으로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을 구하는 것인데, 이는 부처님을 의지함으로써 그의 신심에 보호되는 것입니다. 이는 즉 아미타불을 항상 염하고 서방정토에 왕생하여 불퇴의 수행지에 거처하는 것과 같은 경우인데 이것이 그 수행입니다. 그러나 정토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을 요약한다면 세 단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극락세계의 구품연지(九品連池)에 연꽃이 아직 피어나지 않아 신심과 수행이 원만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이는 단지 물러남이 없는 탁월한 인연에 거처하는 측면에서만 요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불퇴위(不退位)라고 이름합니다. 두 번째는 극락세계에 연꽃이 피어나고 아미타불을 뵙는 것인데, 이는 십신위(十信位)가 원만하게 갖추어져 그 수행의 분야만큼 부처님의 진여법신을 보고 정정취(正定聚)에 안주라는 것인데, 이야말로 진실한 불퇴위라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삼현위(三賢位)의 수행이 원만하여 십지 가운데서 초지에 깨달아 들어간 것인데, 거기에서 두루 원만하게 충만한 진여의 법신을 증득하고 끝없는 불국토에 태어납니다. 이는 본문의 후위(後位)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수행신심분은 끝이 났고, 다음은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입니다.]

② 觀門(관문)

復次若人唯修於止(부차약인유수어지) 則心沈沒(즉심침몰) 或起懈怠(혹기해태)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지만을 닦는다면 곧 마음이 가라앉아 혹은 게으름을 일어나며,

不樂衆善(불락중선) 遠離大悲(원리대비) 是故修觀(시고수관)

여러 선함을 즐겨 행하지 않으며 대비심을 멀리 여의게 되므로, 그래서 관을 닦아야만 한다.

 

[지운 : 위빠사나(觀觀) 수행의 조건

① 선지식에 의지해야 한다. 선지식의 조건은 많이 아는 것, 명확하게 표현하는 능력, 연민을 가짐(가장 큰 조건), 역경을 견딜 수 있음 등이다.

② 가르침에 대한 신중한 탐구.

③ 육식 자제. 이것은 자비심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나쁜 음식을 먹지 말 것. 이것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 憨山 : 心沈沒(심침몰) - 진여에서 오로지 고요함으로만 취향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두 가지 실수를 하게 된다. ① 게으름을 피우며 모든 선업을 수행하지 않으므로 자리(自利)를 잃는다. 그 때문에 다음으로 법상관으로써 그것을 다스리고 성취하였던 것이다. ② 대비심을 멀리 여읜다면 이타(利他)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대비관으로 대치하고 대원관으로 성취하였던 것이다.

* 지운 : 위빠사나 방법.  문(聞) - 법문을 들음. 사(思) - 비판적 관조적 사유.  수(修) - 확인.

* 元曉 : 사(思)의 네 가지 방법

① 능정사택(能正思擇) - 어디서나 현상계의 모든 차별상을 감싸는 궁극적 성품을 바르고 깊이 생각함. 맑은 행으로 반연하는 경계, 좋은 방편으로 반연하는 경계, 번뇌를 맑히는 경계. 

② 최극사택(最極思擇) - 인연 경계에서 존재자의 궁극적인 본질인 진여를 가장 잘 생각함. 

③ 주변심사(周徧尋思) - 심(尋)은 거친 생각이다. 인연 경계에서 지혜로운 행으로 분별하는 마음이 있어, 그 모습을 취함에 두루 살피고 생각함. 

④ 주변사찰(周徧伺察) - 인연 경계에서 세밀하게 살피고 두루 챙기는 마음.-물처럼바람처럼]

 

[지(止)는 육바라밀에서 정(定)에 해당되고, 관(觀)은 혜(慧)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정(定)도 지관(止觀)에 통하고 혜(慧) 또한 지관에 통하는 것이므로, 이를 본론에서는 나누지 않고, 통합하여 지관(止觀)을 설한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관(止觀)을 설함에 있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먼저 지(止)에 관하여 설하였으며, 그에 이어 관(觀)을 설하고, 최후로 이를 통합하여 함께 수행하는 것을 설하게 된다. 먼저 관(觀)의 필요성을 설한다. 지(止)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지(止)만을 닦게 되면, 지(止)가 바로 무상무념(無想無念)의 상태에 있는 것이므로, 이것이 실현되면 심적정(心寂靜)이 되어 마음이 침체, 진취력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그리하여 마음이 해이해지고 태만해진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선(善)을 행하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고 또한 이타(利他)적 대비심마저 상실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止)와 함께 적극적인 관(觀)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관(觀)에는 법상관(法相觀), 대비관(大悲觀), 대원관(大願觀), 정진관(精進觀)의 사관(四觀)이 있다.-금강사]

 

[여기서서는 지(止)만 닦는 수행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여 관(觀)수행, 즉 관(觀)의 위빠사나를 함께 닦는 지관쌍수(止觀雙修)를 권장하였습니다.

"마음이 침몰한다"는 것은 진여에서 오로지 고요함으로만 취향하기 때문에 마음이 공적의 세계에 쉽사리 침몰하게 되기 때문에 두 가지 실수가 있게 됩니다. 첫째는 게으름을 피우며 모든 선업을 수행하지 않으므로 자리(自利)를 잃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법상관(法相觀)으로써 그것을 다스리고 정진관(精進觀)으로써 성취하게 합니다. 두 번째 대비심을 멀리 여읜다면 이타(利他)를 잃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대비관(大悲觀)으로써 그것을 대치하고, 대원관(大願觀)으로써 성취하게 합니다.-수선]

 

    ① 法相觀(법상관)

修習觀者(수습관자) 當觀一切世間有爲之法(당관일체세간유위지법)

無得久停須臾變壞(무득구정수유변괴)  → 무상(無常)을 관함

관을 수습하는 자는 일체 세간의 유위의 법은 오래 머물 수 없어, 순간순간 변하고 무너지며,

고순호 : 유위법이란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것, 모든 사물을 말한다. 인연에 관계없는 열반과 같은 것은 무위법이라고 한다.

一切心行念念生滅(일체심행념념생멸) 以是故苦(이시고고) →고(苦)를 관함.

일체 마음의 진행=心行이 생각 생각에 생멸하니, 이러한 때문에 괴롭다는 것을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應觀過去所念諸法恍惚如夢(응관과거소념제법황홀여몽)

과거에 생각했던 모든 법은 황홀한 꿈과 같다고 마땅히 관찰해야 하며,

應觀現在所念諸法猶如電光(응관현재소념제법유여전광)

현재에 생각하는 모든 법도 마치 번개 불과 같다고 마땅히 관찰해야 하며, 

應觀未來所念諸法猶如於雲忽爾而起(응관미래소념제법유여어운홀이이기)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도 마치 구름이 홀연히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마땅히 관찰해야만 한다. → 무아(無我)를 관함.

應觀世間一切有身悉皆不淨(응관세간일체유신실개부정)

세간의 일체 존재의 몸은 모두가 청정하지 않아 

種種穢汚無一可樂(종종예오무일가락) → 부정(不淨)을 관함.

갖가지 더러움으로 오염되었기에 한 가지도 즐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근본불교의 관법 수행은 신수심법(身受心法)을 관하여 몸은 부정하고, 감수 작용은 괴로우며, 마음은 무상하고,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음(無我)을 관하는 것이다. 이를 사념처관(四念處觀)이라고 한다.

* 《앙굿따라 니까야》<깨달음경> 사람에 따라 다른 수행법 - 탐욕을 제거하기 위해서 부정관(不淨觀), 악의롤 제거하기 위해 자비관(慈悲觀), 자아관을 제거하기 위해 무상관(無常觀), 산란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 수식관(數息觀)을 한다.

* 憨山 : 무상관(無常觀) - 상주라고 집착하는 것을 대치. 고관(苦觀) - 즐거움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대치. 무아관(無我觀) - 주재한다고 집착하는 마음을 대치. 부정관(不淨觀) - 청정하다고 집착하는 마음을 대치.]

 

[법상관은 법의 관찰이다. 유위법(有爲法)은 무상(無常)하다고 보는 무상관(無常觀), 무상한 것은 고(苦)라고 보는 고관(苦觀), 일체제법은 무아(無我)라고 보는 무아관(無我觀), 자기의 신체는 농혈이나 내장 등 모두가 부정하다고 보는 부정관(不淨觀). 이와 같이 제법의 성품을 관찰하는 것이 법상관이다.
관(觀)을 수습하는 자는 일체세간의 유위법(有爲法)은 영구히 동일한 상태로 머무르지 않는다. 순간순간 변화한다고 제법의 무상(無常)을 관하는 것이다. 또한 일체의 마음의 활동도 찰나찰나 변하고 있어, 한 순간도 생멸함이 머무르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고(苦)라고 유위법(有爲法)의 고(苦)를 관한다. 또한 과거에 인식한 온갖 법은 지나가 버린 황홀한 꿈과 같은 것이라고 관하는 것이다. 현재 인식하고 있는 모든 법은 찰나에 과거가 되고, 그 속도가 번갯불과 같이 빠른 것이라고 관하는 것이다.
또한 미래에 인식되는 법은 오직 뜬구름이 홀연히 일어났다 사라지는, 의지할 것이 못된다고 관하는 것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이기 때문이다. 세간에 있는 일체생물의 육신(肉身)은 피나 농, 내장 등 모두가 깨끗하지 못한 부정(不淨)한 것이며 더러운 것이라고 관하고, 하나도 즐겨할 것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론에서 말하는 법상관(法相觀)이다.]

 

[근본불교 이래 전통적으로 관법수행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이것이 사념처관(四念處觀)입니다. 즉, 몸은 부정(不淨)하고, 감수작용은 괴로움이며, 마음은 무상(無常)하고, 모든 존재는 무아(無我)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를 통합해서 관수시고(觀受是苦)를 항상 수행하여 관신부정(觀身不淨)으로 종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을 수습하는 데는 넷이 있는데, 첫 번째는 법상관(法相觀)이며, 두 번째는 대비관(大悲觀), 세 번째는 대원관(大願觀), 네 번째는 정진관(精進觀)입니다. 처음의 법상관을 넷으로 나눈 첫째가 무상관(無常觀)이고, 둘째는 고관(苦觀)이며, 셋째는 무아관(無我觀)으로 과거는 주재하는 자체가 없는 무아(無我)이기에 그 실체를 쫓기 어렵고, 현재는 찰나찰나에 흐르며 안주하지 않고, 미래는 본래 아직 나타나지 않아 단지 인연이 집합하여 홀연히 있으므로 시방세계의 시간 속에서 실재하는 법을 찾아보아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부정관(不淨觀)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는 법상관(法相觀)으로 범부들의 네 가지 전도(顚倒)된 견해인 상(常)·낙(樂)·아(我)·정(淨)에 집착하는 망상을 제거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법은 상주하여 항상하다고 집착하는 것은 무상관(無常觀)으로, 즐거움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은 고관(苦觀)으로, 상일주재(常一主宰)한 아(我)에 집착하는 마음은 무아관(無我觀)으로, 청정하다고 집착하는 마음은 부정관(不淨觀)으로 대치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법의 내용이 '기신론'에 언급된 특이한 관법수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념처관(四念處觀)도 역시 사전도(四顚倒)를 대치하는 수행법인데 여기서는 새로운 관법을 제시하여 대치시키고 있습니다.]

 

② 대비관(大悲觀)

如是當念(여시당념) 一切衆生從無始世來(일체중생종무시세래)

다음과 같이 마땅히 생각해야 하나니, 일체중생은 시작이 없는 세월로부터 흘러오면서

皆因無明所熏習故(개인무명소훈습고) 令心生滅(령심생멸)

모두가 무명으로 인해서 훈습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생멸하게 되었으니,

已受一切身心大苦(이수일체신심대고) 現在卽有無量逼迫(현재즉유무량핍박)

이미 일체 몸과 마음의 큰 괴로움을 받았고,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未來所苦亦無分齋(미래소고역무분재) 難捨難離(난사난리)

미래에도 괴로움을 받을 것이 한계=分齊가 없을 것이니, 버리기도 어렵고 여의기도 어려우니, 

而不覺知(이불각지) 衆生如是(중생여시) 甚爲可愍(심위가민)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중생이 이와 같이 매우 불쌍하게 되었다.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의 법상관(法相觀)을 바탕으로 하여, 중생의 존재를 불쌍히 여기는 대비관(大悲觀)이다. 일체중생은 무시이래(無始以來)의 무한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무명(無明)에 의하여 훈습되어 있어, 망념이 일어나고, 마음이 생멸하는, 미망(迷妄)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이미, 일체의 심신(心身)에 큰 고통을 받고 있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도 무량한 고통으로 핍박당하고 있다. 더욱이 미래에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막대하지만, 그것은 실로 버리기도 어렵고 벗어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중생은 그 사실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을 알지 못하는 중생은 심히 불쌍한 존재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의 어리석음을 가엽게 보는 것이 대비관(大悲觀)이다.]

 

['법성관'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임을 알아, 세상의 모든 중생을 불쌍하고 측은하게 바라보는 것이 대비관입니다.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자비가 나옵니다.-통섭불교]

 

③ 대원관(大願觀)

作此思惟(작차사유) 卽應勇猛立大誓願(즉응용맹립대서원)

이와 같이 사유하여, 곧 마땅히 용맹하게 큰 서원을 세워야 하나니,

願令我心離分別故(원령아심리분별고)

하여금 나의 마음이 분별을 여의도록 원하였기 때문에 

遍於十方修行一切諸善功德(편어시방수행일체제선공덕)

시방에 두루하여 일체 모든 좋은 공덕=善功德을 수행하고

盡其未來(진기미래) 以無量方便(이무량방편) 救拔一切苦惱衆生(구발일체고뇌중생)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써 일체 고뇌하는 중생을 구해내어 

令得涅槃第一義樂(령득열반제일의락)

하여금 열반의 제일의 즐거움=第一義을 얻게 해야 하나니,  

 

[다음은 대비관(大悲觀)을 바탕으로 하여 중생구제의 대서원(大誓願)을 세우는 것이다. 즉, 보살은 중생의 어리석음을 가엽게 여기는 대비관의 사유를 한 뒤에는 큰 용맹심을 일으켜 다음과 같은 큰 서원을 세우는 것이다.
" 원컨대 나의 마음으로 하여금 분별을 떠나게 하여, 일체중생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시방세계에 두루한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모든 선공덕을 수행하여, 미래를 다하여 영원히, 무량한 방편으로 일체중생의 고통을 제거 구제하며, 그들로 하여금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최고의 즐거움을 얻게 하소서." 라고. 이같은 서원을 세우는 것을 대원관(大願觀)이라 한다.]

 

['서원관', 목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이 바로 목표입니다. 목표가 없는 삶은 방향성과 발전이 없습니다. 목표가 있으면 매일매일 내 삶을 되돌아 보고 갈고 닦을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고를 여의고 진리, 해탈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만 열반에 들고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부처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목표입니다.]

 

④ 정진관(精進觀)

以起如是願故(이기여시원고) 於一切時一切處所有衆善(어일체시일체처소유중선)

이와 같은 원을 일으켰으므로, 일체의 시간과 일체의 처소에 있는 여러 선행을 

隨己堪能(수기감능) 不捨修學(불사수학) 心無懈怠(심무해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대로 닦고, 배움을 버리지 않아 마음에 게으름이나 태만함이 없어야 하나니,

唯除坐時專念於止(유제좌시전념어지)

오직 좌선할 때 지에 전념하는 것만은 제외하며,

若餘一切悉當觀察應作不應作(약여일체실당관찰응작불응작)

나머지 모든 것에서는 응당 지어야 할 것과 응당 짓지 않아야 할 것을 관찰해야 한다. → 정진관(精進觀).

 

[이상에서 중생구제를 위한 대서원(大誓願)을 세웠으므로, 다음은 이 대원(大願)을 어디까지 실행할 것인가의 정진(精進)을 일으키는 것이다. 정진은 언제, 어디서나, 일체시(一切時), 일체처(一切處)에서 실행하는 것이며, 세상에 있는 온갖 선(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힘이 미치는 한 모두 실행하여야 하며, 한 순간도 버리지 않고, 게을리 하는 마음을 일으킴이 없이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진관(精進觀)이다.
이와 같이 일체시, 일체처에서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켜 정진해 나가는 것이지만, 그러나 앉아서 지(止)를 전념으로 수행하는 동안은 관(觀)을 수행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시간을 제외한 일체의 시간에는 하여야 할 도리(道理)와 하여서는 안될 일을 구별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여야 할일[應作]을 실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觀)에 대한 설명은 끝마친다.
지금까지 지(止)와 관(觀)의 수행방법을 따로 설명하였으므로 다음에는 이 지(止)와 관(觀)을 함께 하는 지관구행(止觀俱行)을 밝히는 부분이다.]

 

[대비관(大悲觀)은 중생은 괴로움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싫증을 내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괴로움 또한 한이 없기에 이것을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심오한 대비가 아니면 그들을 구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원관(大願觀)은 일체중생을 일심의 자체와 동일하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구제하리라고 발원합니다. 즉, 분별을 여의었다는 것은 동체대비이고, 미래제가 다한다고 하는 것은 오랜 시간의 마음이며, 일체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는 것은 광대한 마음이며, 열반을 얻게 한다고 하는 것은 제일심(第一心)입니다. 그리고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정진관(精進觀)입니다.]

 

['정진관', 원력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관찰하여 아는 것이 정진관입니다. 이 정진관을 통해 원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향해 정진 이외의 왕도는 없습니다.

'위빠사나 닦는 것을 총결하다. 오직 좌선할 때 사마타 지(止)에 전념하는 것 외에는 나머지 일체에서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관찰해야 한다.' 생각을 집중할 때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관찰해야 합니다. 집중하는 것 이외의 모든 것이 바로 위빠사나입니다. 육조단경에서는 지와 관이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중 어느것을 먼저 닦아도 좋다고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하면 더욱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바퀴가 굴러가듯이 위빠 사나와 사마타를 같이 닦는 것이 좋습니다.  본질은 다 같습니다.]

4. 外道三昧(외도삼매)와 眞如三昧(진여삼매)의 차이

應知外道所有三昧(응지외도소유삼매) 皆不離見愛我慢之心(개불리견애아만지심)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외도에게 있는 삼매는 모두가 아견=見, 아애=愛, 아만의 마음을 여의지 못하였으니,

貪著世間名利恭敬故(탐착세간명리공경고)

세간의 명예와 이익=名利와 공경을 탐내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외도에도 삼매가 있다. 기도를 통하여 삼매에 들 수도 있고, 선정에 들 수도 있다. 정법과 다른 점은 아견, 아애, 아만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세간의 명리 즉 이름을 날리거나 이익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외도 삼매는 삼매 중에 마사(魔事)를 보면 정념으로 그것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빠져들어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외도 삼매는 열심히 하면 할수록 지혜는 마비되고 미치광이처럼 되는 수가 많다. 우리 주변에서 가끔 보게 되는 광신도들이 이렇게 하여 생긴다.-물처럼바람처럼]

 

[여기서는 그릇된 외도의 삼매가 참된 불교의 삼매와 어떻게 다른가를 밝히는 부분이다. 외도의 삼매는 불교 이외의 여러 종교에서 닦는 선정(禪定)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들 삼매의 바탕에는 모두가 견애(見愛)와 아만(我慢)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견애는 견혹(見惑)과 탐욕(貪慾), 탐애(貪愛) 등을 말한다. 이같은 견혹과 아만을 바탕으로 하여 세간의 명예나 이익, 존경 등에 탐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외도의 삼매는 무아(無我), 공(空)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의 진여삼매(眞如三昧)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것이 아무리 뛰어난 경우라도 아집(我執)이 있으므로 그것은 참 삼매가 아니다.
따라서 불교의 진여삼매는 자기의 견해에 집착하는 견상(見相)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유심(唯心)의 이치에 통달하고 있어, 외경(外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외경에 집착하는 득상(得相)에도 주(住)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진여삼매(眞如三昧)는 선정 속에서 빠져 나온다 하더라도 해이해지거나 태만해지는 마음이 일어나거나, 자만심을 일으키는 일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탐진치(貪瞋癡) 등 온갖 번뇌가 점점 줄어들고 희박해지는
것이 바른 삼매라는 것이다. 만약 범부수행자가 이 진여삼매법을 닦지 아니하면, 여래가 될 수 있는 성품, 즉 여래종성(如來種性)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이다. 범부는 반드시 진여삼매를 닦음으로서, 여래종성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세간의 선정(禪定)인 외도(外道)를 수습(修習)하면, 외도에는 아견(我見)이 있고 자아(自我)에 집착하기 때문에 선정의 즐거움에 미착(味著)을 일으켜, 삼계(三界) 윤회에 속박되게 된다. 따라서 진여삼매를 닦기 위해서는 선지식(善智識)의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 되는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 외도의 아견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금강사]

 

[여기에서는 외도의 삿된 선정과 불교의 올바른 정념을 논변하여 진여삼매의 수행을 제시하였습니다. 즉, 외도의 삼매는 모두가 아견(我見)·아애(我愛)·아만(我慢)의 마음을 여의지 못하였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안으로 삿된 선정에 집착하고 밖으론 세간의 명예와 이익·공경을 탐내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선정에 있을 때 선미(禪味)에 집착하지 않는 진여삼매는 안으론 마음을 잊었기 때문에 현상을 봄에 안주하지 않으며, 밖으로는 경계를 잊었기 때문에 현상을 얻어도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나아가서는 선정에서 나와도 역시 선정을 믿는 게으름과 아만(我慢)이 없어서 있던 삼독번뇌가 점점 희미하게 엷어진다고 하였습니다.-수선]

 

眞如三昧者(진여삼매자) 不住見相(불주견상) 不住得相(불주득상)

진여삼매라는 것은 상을 봄=見相에 안주하지 않으며, 상을 얻음=得相에도 안주하지도 않으며,

乃至出定亦無懈慢(내지출정역무해만) 所有煩惱漸漸微薄(소유번뇌점점미박)

나아가서는 선정에서 나와도 역시 게으름과 아만이 없어, 가지고 있던 번뇌가 점점 微薄=희미하게 엷어진다. 

若諸凡夫(약제범부) 不習此三昧法(불습차삼매법) 得入如來種性(득입여래종성)

만일 모든 범부가 이 진여삼매법을 닦지 않고 여래종성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無有是處(무유시처) 以修世間諸禪三昧(이수세간제선삼매) 多起味著(다기미착)

옳다고 할 곳이 없으며, 세간의 모든 선정삼매=禪三昧를 닦음으로써 다분히 선미(禪味)의 집착을 일으키어

依於我見繫屬三界(의어아견계속삼계) 與外道共(여외도공)

아견에 의지하여 삼계에 얽매이고 속박되어 외도와 더불어 함께 하나니,

若離善知識所護(약리선지식소호) 則起外道見故(즉기외도견고)

만일 선지식의 보호=護念하는 바를 떠난다면, 곧 외도의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多起味著(다기미착) : 삼매에 들면 특별한 기분 좋은 체험을 하여, 자꾸 그러한 상태가 되도록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위에서도 나왔듯이 삼매 중에 특별한 체험을 하는 것은 모두 마(魔)가 될 수 있다.

* 憨山 : 외도는 아애와 아견, 아만의 전도된 습기에 의지하여 닦으므로 모두가 마군의 업을 이룬다. 그 때문에 안으로는 삿된 견해에 집착하고 밖으로 삿된 욕구에 집착한다. 이는 이른바 착란으로 삼매를 수습하기 때문이다. 진여삼매는 담연하고 고요한 일심이다. 주관과 객관을 잊고 영상이 사라졌으며 게으름과 아만을 여의고 번뇌가 사라졌다. 때문에 수행을 하는 자는 이 진여삼매를 인유하여 여래종성에 깨달아 들어가지 않는 자는 아직까지 없다.

* 元曉 : 바른 선정인지 마구니인지 판별하는 방법

① 같은 공부를 해보는 것 - 취사(取捨)없이 평등한가? 진금인지 확인하기 위해 금을 갈아보는 것과 같으니, 꾸준히 지속되어야 함.

② 위의 방법으로 안 되면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지내봄 - 본래 했던 선정이 계속되고 깊어지는가? 이것은 진금을 확인할 때 두드려 보는 것과 같다. 

③ 지혜로 관찰함 - 삼매 중에 나타난 경계의 근원을 따져 비고 고요함을 깊이 알아 집착하지 않는다. 이는 금을 태워서 변치 않는지 확인하는 것과 같다.

* 元曉 - 바른 선정 중 등지(等持)에서 나타나는 동촉(動觸) ① 정정(靜定;고요한 선정) ② 공허(空虛) ③ 광정(光淨) ④ 희열(喜悅) ⑤ 아락(猗樂;잔잔한 즐거움) ⑥ 선한 마음이 일어남 ⑦ 지견이 명료함 ⑧ 누박(累縛)이 없음 ⑨ 마음이 고르고 부드러움 ⑩ 경계가 앞에 나타남(그대로 비춤).

- 바른 선정에서 동촉이 지나가고 나타나는 여촉(餘觸) - 이것은 차례가 없고 한꺼번에 일어나기도 하고 한두 가지만 일어나기도 한다. ① 동(動;움직임) ② 양(痒;가려움) ③ 량(凉;서늘함) ④ 난(暖;따뜻함) ⑤ 경(輕;가벼움) ⑥ 중(重;무거움) ⑦ 삽(澀;껄끄러움) ⑧ 활(滑;매끄러움)

- 선정에서 나타나는 사상(邪相) ① 증감 ② 정란(定亂) ③ 공유(空有) ④ 명암(明闇) ⑤ 우희(憂喜) ⑥ 고락 ⑦ 선악 ⑧ 우지(愚智) ⑨ 탈박(脫縛) ⑩ 강유(强柔)]

 

[만일 모든 범부가 이 진여삼매법을 닦지 않고 십지(十地) 이후의 불퇴전(不退轉)의 계위인 여래종성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옳다고 긍정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경계의 모습만을 취하는 세간의 모든 선삼매(禪三昧)인 사선(四禪)과 사공정(四空定) 등을 닦으면 경계의 현상에 대한 선미에 집착한 마음을 많이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아(我)를 여의지 못하였으므로 아견(我見)에 의지하여 삼계(三界)에 얽매이고 속박되어 외도가 얻은 선정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선지식의 보호하여 생각해줌을 떠난다면 외도의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외도는 아애(我愛)·아견(我見)·아만(我慢)의 전도된 습기에 의지하여 닦으므로 모두가 마군의 업을 이룹니다. 그 때문에 안으로는 삿된 견해에 집착하고 밖으론 사된 욕구에 집착합니다. 이는 이른바 착란으로 삼매를 수습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서 진여삼매(眞如三昧)는 담연(湛然)하고 고요한 일심(一心)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잊고 영상(影像)이 사라졌으며 게으름과 아만을 여의고 번뇌가 사라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을 하는 사람은 이 진여삼매를 인유(因由)하여 여래종성에 깨달아 들어가지 않은 자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세간의 모든 선정삼매는 모두 아견에 집착하여 외도의 선정과 함께 합니다. 만일 그들을 선지식이 제도하고 보호하지 않는다면 외도의 나약한 견해에 떨어지게 됩니다. 때문에 '능가경'에선 "외도를 멀리 여의고 가장 수승한 선지식을 친근히 해야 한다"고 절실하게 훈계하였습니다.

여기서는 그야말로 불교의 수행자가 가장 경계해야할 내용을 논하였습니다. 불교에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으면서 수행을 한답시고 자기 자신만을, 자기 견해만을, 자기를 높이기를 한없이 합니다. 그리고 명예와 이익과 공경과 존경에 사로잡혀 평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외도들이나 하는 것이지 불자가 취할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5. 奢摩他 수행의 이익 → 修他의 이익

復次精勤專心修學此三昧者(부차정근전심수학차삼매자)

다시 다음에 정성으로 부지런히 정진하는 마음으로 오로지 집중하여 이 삼매를 닦아 배우는 자는

現世當得十種利益(현세당득십종리익) 云何爲十(운하위십)

현세에 마땅히 열 가지 이익을 얻을 것이니,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一者(일자) 常爲十方諸佛菩薩之所護念(상위시방제불보살지소호념)

하나, 항상 시방의 모든 부처와 보살이 보호하고 염려해주시는 바가 되며,

(1) 이는 불보살에 의한 가호의 이익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二者(이자) 不爲諸魔惡鬼所能恐怖(불위제마악귀소능공포)

둘, 모든 천마와 악귀들이 공포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며,  

(2) 천마악귀(天魔惡鬼) 등의 모습이 나타나는 등의 마사(魔事)가 없어진다.

 

三者(삼자) 不爲九十五種外道鬼神之所惑亂(불위구십오종외도귀신지소혹란)

셋, 95종의 외도와 귀신이 미혹하여 산란하게 하지 못하며,

95종 외도 : 96종이라고도 한다. 부처님 재세시 인도에 있었던 외도들을 말한다.

(3) 95종의 외도(外道)는 불타시대에 인도에 있던 이단학파(異端學派)를 총괄해서 말하는 것이다.

둘째와 셋째는 외부로부터 받는 악념(惡念)의 장애에서 떠날 수 있는 이익이 있는 것이다.

 

四者(사자) 遠離誹謗甚深之法(원리비방심심지법) 重罪業障漸漸微薄(중죄업장점점미박)

넷, 매우 심오한 법을 비방함을 멀리 여의고 중죄의 업장이 점점 미세하게 엷어지며,

(4) 심심(甚深)의 정법을 비방한다는 것에 대하여 여기에서 특별히 설하고 있는 것은 외도(外道)에 의한 비방뿐만아니라, 대소승(大小乘) 상호간의 비방논쟁도 있었으므로, 다시말하면 소승에서는 대승의 제설(諸說)을 비불설(非佛說)이라 비방하고, 대승에서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이름 아래 소승(小乘)을 외도(外道)이상으로 비판하는 상호비방논쟁이 계속됨에 따라, 원효는 십문화쟁론(十門和淨論)을 제기하기도 하였지만, 여하튼 본란은 대승의 정법을 비방하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제기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대소승 상호비방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논쟁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대소승통합론적 교리해석이 이루어지도록 더욱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五者(오자) 滅一切疑諸惡覺觀(멸일체의제악각관)

다섯, 일체의 의심과 모든 그릇된 각과 관=覺觀을 소멸하며,  

(5) 일체의 의심과 사악(邪惡)한 관찰사유(觀察思惟)의 그룻된 수행(修行)을 멸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마음, 즉 여래장(如來藏)에 대한 신심이 확립됨으로서, 어떠한 의혹이나 외도의 사악한 사유(思惟)를 멸할 수 있게 되어, 내부의 혹업장(惑業障)을 제거시키는 이익이 있는 것이다. 넷째의 경우도 또한 같다.

 

六者(육자) 於如來境界信得增長(어여래경계신득증장)

여섯, 여래의 경계(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신심이 더욱 증장하며, 

(6) 이는 본체 즉 여래의 법신에 대한 신심을 증장시키는 이익이 있는 것이다.

 

七者(칠자) 遠離憂悔(원리우회) 於生死中勇猛不怯(어생사중용맹불겁)

일곱, 근심과 후회를 멀리 여의어, 생사 가운데에서 용맹하여 겁약하지 않으며, 

(7) 생사의 세계에 태어나, 끊임없이 겪고 받는 슬픔이나 고통에 대하여, 실망하거나 탄식하는 근심걱정을 멀리 할 수 있게 되고, 용맹스러운 마음을 갖게 되어, 생사에 겁내는 일이 없게 된다. 진여삼매는 이러한 용맹심을 일으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오염된 세계에서도 생사를 겁내지 않는 이익이 있게 되는 것이다.

 

八者(팔자) 其心柔和(기심유화) 捨於驕慢(사어교만) 不爲他人所惱(불위타인소뇌)

여덟, 그 마음이 유연해지고 조화로우며, 교만을 버리므로 다른 사람의 괴롭힘=惱亂하는 바가 되지 않으며, 

(8) 진여삼매를 수습함에 따라 마음이 부드럽고 평화로워 겸허하게 되고, 교만한 마음을 버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타인과의 관계도 원만해지는 것이므로 타인에 의하여 괴롭혀지는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악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九者(구자) 雖未得定(수미득정) 於一切時一切境界處(어일체시일체경계처)

則能減損煩惱(즉능감손번뇌) 不樂世間(불락세간)

아홉, 비록 선정을 얻지 못하였지만, 일체의 시간과 어떤 경계에 처해서도, 곧 번뇌를 줄이는=損減시켜 세간을 즐기지 않으며, 

(9) 그러나 아직 진여삼매를 확실히 얻지 못한 경우라 할지라도, 언제 어디서나 번뇌를 잘 경감시킬 수 있어, 세속적 쾌락을 구하는 일이 없어지게 된다. 이는 세속적인 재미를 버릴 수 있는 이익이 있게 되는 것이다.

 

十者(십자) 若得三昧(약득삼매) 不爲外緣一切音聲之所驚動(불위외연일체음성지소경동)

열, 만일 삼매를 얻으면 외연의 일체 음성에 놀라거나 요동하지 않는 것이다.  

 

[不爲外緣一切音聲之所驚動(불위외연일체음성지소경동) : 대개 선정에 들 때 다른 것으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곳에서 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 맛, 감촉, 법 등에 의해서는 영향을 덜 받는다. 냄새도 영향을 주지만 놀라게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는 큰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특히 소리를 예로 든 것이다.]

 

(10) 여기에서 진여삼매를 확실히 얻을 수 있게 되면, 신심이 확립되고 물러서지 않는 불퇴심에 들게 되므로, 외부에서 오는 일체의 언설이나 사상(思想) 유혹에 놀라거나 마음이 움직이는 일은 결코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깊은 선정을 얻은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진여삼매(眞如三昧) 즉 지(止)를 수학함으로서 어떠한 이익이 있는가를 밝혀, 더욱 더 수행할 것을 권유하는 것이다.
진여삼매라 함은 진여에 이르는 삼매인 것이지만 아직 신심의 실현단계인 것이므로 아직 범부의 단계이다. 자기의 본성인 진여와 자기와는 분열된 망념의 세계에 있는 범부로서, 거치른 망념에서 미세한 망념으로 수축되어 가면서, 자기본성인 진여에 근접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진여와 일치했다 하더라도 이는 신(信)의 단계에서 말하고 있다.
이상에서 수지(修止)의 방법, 지(止)의 승능(勝能), 지(止)의 마사(魔事), 외도 의 삼매와 참삼매의 차이, 수지(修止)의 이익 등으로 나누어 지(止)의 수행에 관하여 설명한 바 있다. 다음에는 지관(止觀) 중 관(觀)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진여삼매(眞如三昧)를 닦는 현세에 10가지 유익함을 논하였습니다. 그런데 육진경계 가운데서 유독 성진(聲塵)인 음성만을 말한 것은 선정에 들어갔을 땐 이근(耳根)을 제외한 나머지 오근(五根)은 모두가 닫힙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이근만이 텅 비어 막힘이 없이 소통되기 때문에 음성에 요동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요동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물의 흐름 속에 들어가면 처소를 잊는다'고 한 데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불자가 수행하는데 소리를 듣는 것에 동요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불자가 무슨 수행을 하다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으면 곧 이끌려갑니다. 수행자는 반드시 경계해야할 일입니다. 간경을 하든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참회를 하든 그것으로 끝장을 보아야 합니다. 방법은 달라도 구경에 이르는 도달점은 동일한 목적지입니다. 여기서의 수행법은 사마타인 지(止)방편입니다. 이상에서 지(止)방편문의 수행은 끝이 났고 다음에서는 관(觀)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 止(지)의 功能(공능) → 一行三昧(일행삼매)

復次依是三昧故(부차의시삼매고) 則知法界一相(즉지법계일상)

다시 다음에 이 삼매를 의지하기 때문에 곧 법계가 일상임을 알게 되니, 

謂一切諸佛法身(위일체제불법신) 與衆生身平等無二(여중생신평등무이)

이른바 일체 제불의 법신이 중생의 몸과 더불어 평등하여 둘이 없음으로,

卽名一行三昧(즉명일항삼매)

곧 이름하여 일행삼매라고 한다. 

 

[法界(법계) : 10법계가 있으니 지옥, 축생, 아귀, 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부처이다. 차별이 있으나 그 본래 성품은 모두 같으므로 일상(一相)이라고 한다. 바로 뒤에 나오는 부처의 법신과 중생의 몸이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뜻이다.

* 진여에서 본다면 부처의 진여나 중생의 진여나 평등하여 둘이 없다. 이를 관하는 삼매를 일행삼매라고 한다.

* 지운 : 법계는 다른 말로 하면 연기(緣起)이며,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 특징은 다음 네 가지이다. 

① 무시시래상주(無始時來常住) ② 일체법이 의지(依支)함. ③ 윤회가 있다. 즉 생사가 있으며, 유전연기(流轉緣起)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④ 열반이 있다. 그 본질은 불생불멸이다. 이를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 하며,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고 표현한다.-물처럼바람처럼]

 

當知眞如是三昧根本(당지진여시삼매근본) 若人修行(야인수행)

마땅히 알라 진여는 삼매의 근본이니, 만약 어떤 사람이 수행하면,

漸漸能生無量三昧(점점능생무량삼매)

점점 능히 한량없는 삼매를 낼 수 있다.

 

[진여의 공성은 모든 삼매의 근본이 되므로 진여삼매를 수행하면 모든 삼매를 낼 수 있다.]

 

[지금까지 지(止)의 수행방법을 설해왔다. 지(止)가 완성되어 마음의 안정을 얻으면 마음이 정념에 들게 되고 진여삼매에 득입(得入)하게 된다.
이러한 진여삼매(眞如三昧)의 뛰어난 능력이란, 지(止)가 완성되어, 진여삼매를 얻으면, 마음에는 여러 가지 승능(勝能)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여삼매에 의하여, 법계일상(法界一相)임을 알게 되고, 그래서 제불의 법신(法身)과 중생신(衆生身)이 평등무이(平等無二)임을 알게 된다. 진여는 성인(聖人)이나 범부에 있어 전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 평등무이(平等無二)를 아는 것을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일컬어진다. 신역(新譯)에서는 일상삼매(一相三昧)라 이름한다. 진여(眞如)는 삼매(三昧)의 근본이 된다. 무량한 삼매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이 삼매를 수행하면 진여에 따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무량한 삼매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진여삼매의 지(止)에는 뛰어난 힘이 있다.-금강사]

 

[여기에서는 지관을 수행하여 얻어지는 수승한 이익을 결론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앞에서 진여삼매를 언급하였는데 이 삼매를 자세하게 논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 진여삼매를 의지하기 때문에 법계가 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일체 제불의 진여법신이 중생의 본각법신과 평등하여 둘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한량없는 삼매를 내는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서 수행자는 진여가 바로 삼매의 근본이고 어떤 사람이 진여삼매를 수행하면 점진적으로 한량없는 삼매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진여삼매에 의지하면 법계가 하나의 모습임을 안다고 한 말은 법계는 바로 십법계(十法界)의 성인과 범부, 염법과 정법의 차별적인 모습이 있는데, 이러한 차별적인 모습이 어떻게 평등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진여삼매를 의지해야만 제불의 법신과 중생의 본각법신이 평등하여 둘이 아니라는 것을 총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행삼매이며 유일무이한 진여인 항하사와 같은 제불의 법계엔 끝내 염정의 차별적인 모습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평등합니다. 결국 진여는 모든 삼매의 근본이므로 불가사의한 위대한 작용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진여삼매를 수행한다면 점진적으로 한량없는 삼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지관을 수습하는 방편은 끝이 났고, 다음에서는 마군의 일을 논합니다.-수선]

 

[우리는 나와 너가 분리되어 나만 위하는 생각 때문에 자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라면 자비를 억지로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게 하듯이 똑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대하는 것이 하나입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문수반야경에서 법계는 일상인데 이 법계를 반연함을 일행삼매라 합니다. 일행삼매에 들어간 이는 항하사처럼 많은 제불의 모든 법계가 차별이 없음을 압니다. 진여가 이 삼매의 근본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여가 이러한 무량한 삼매를 내기 때문입니다. 하나임을 알면 모든 것이 평등해지고 같아집니다. 삼매에 들면 이런 평등한 진여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진여에서 무량한 삼매가 나오기도 합니 다. 어떤 방법이든 나름 특색과 장점이 있으며 진여에 갈 수 있지만, 지관을 위해서는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경전을 보는 것은 관은 될지 몰라도 지를 하는 것이 쉽지 않고, 염불을 외우는 것은 지는 되지만 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좋은 방법들을 믿고 과감히 실천하면 수행하기가 쉽습니다.-통섭불교]

 

  * 魔事(마사)

或有衆生(혹유중생) 無善根力(무선근력)

혹 어떤 중생이 선근의 힘이 없으면

則爲諸魔外道鬼神之所惑亂(즉위제마외도귀신지소혹란)

곧 모든 천마=魔와 외도와 귀=堆惕鬼(퇴척귀)와 신=精魅神(정미신)에 의해 미혹되고 어지럽게 되니,

 

[元曉 : 처음에 魔(마)라고 한 것은 천마이며, 鬼(귀)란 퇴척귀(堆惕鬼)이며, 神(신)이란 정미신(精媚神)이니 이러한 귀신이 불법을 요란시켜 사도에 떨어지게 하기 때문에 외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마구니와 귀신들이 모두 세 가지 오진(五塵)을 지어서 사람의 마음을 깨뜨리는 것이다. 첫째, 두려워할만한 일을 짓는 것이니 이는 글에서 於坐中現形恐怖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사랑할 만한 것을 짓는 것이니, 글에서 或現端正男女等相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셋째, 위(違 ; 거슬림)도 아니고 순(順 ; 따름)도 아닌 일이니, 평범한 오진을 나타내어 수행인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을 말하니 이는 글에서 等相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 或現端正男女等相(혹현단정남녀등상) : 단정하다는 것은 잘 생겼다는 뜻으로 이것은 주관적이다. 수행하는 사람에게 멋있게 보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유혹하며 수행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지운 : 선근(善根)은 보시, 인욕, 지계를 말하며 이를 잘 닦으면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마를 막아준다. 마(魔)에는 지혜를 빼앗는 것, 타화자재천자마(他化自在天子魔), 집착 등이 있다. 제8지(不動地)에 이르면 경계상이 사라져 더 이상 마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마란 주관과 객관이 상대했을 때 나타난다.

* 元曉 : 만약 앞서의 모든 경계가 자심(自心)의 분별로 지은 것이어서 자심 밖에 다른 경계가 없는 줄 생각하여 이러한 마음을 일으킨다면 경계상이 바로 없어질 것이니 이는 모든 마구니와 귀신을 내보내는 방법을 밝힌 것이다.

① 퇴척귀(堆惕鬼) - 벌레나 전갈 같은 것, 짐승 모양을 한 귀신이 사람의 신체에 기어올라 신체를 자극하면서 수행을 방해하는 것. 눈을 감고 일심으로 생각하면서 “나는 이제 너를 아니, 너는 염부제 중에 불을 먹고 향기를 맡는 투랍길지(偸臘吉支)이다. 사견을 네가 좋아하며 네가 계행의 종자를 깨뜨리나 나는 이제 계를 가져서 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또 출가자는 계율을 외우고 재가자는 ≪보살계본≫이나 삼귀의, 오계를 외워야 한다.

② 정미신(精媚神) - 십이시(十二時)의 짐승이 변하여 여러 가지 형색을 짓는 것. 그 짐승의 정미(精媚)를 알아서 이름을 말하고 꾸짖으면 인사를 하고 물러간다.

* 지운 : 사마(四魔) ① 번뇌마(煩惱魔) - 탐진치로 인한 마(魔) ② 오음마(五陰魔) - 오온이 나라고 생각하거나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상견(常見). ③ 사마(死魔) -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고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하는 것, 단견(斷見). ④ 천자마(天子魔) - 귀신]

 

[지(止)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신비로운 심리적 마사(魔事)를 접하게 된다. 이것 모두가 선정의 본도(本道)가 아닌 것으로서, 그러한 심적 체험이 진정한 삼매(三昧)가 아님을 경고하기 위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마사(魔事)에 빠지는 것은 선근력(善根力)이 없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본론은 설파하고 있다. 선근력이 없으면 지(止)를 닦고 있는 동안 마라(Mara)나 외도(外道), 귀신 등에 의하여 뇌란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선정 중에 나타나는 심리적 영상에 불과하다. 이것은 자기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행자는 오직 마음이라는 것을 염하여, 이를 제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유심(唯心)을 염하면 이들 마사(魔事)는 사라져 재차 행자를 괴롭히는 일이 없어진다.]

 

[선근이 없는 수행자에게 나타나는 갖가지 마군의 현상과 대치방법을 밝혔습니다. 어떤 중생이 선근의 힘이 없으면 모든 천마와 외도와 퇴척귀(退惕鬼)와 정매신(精魅神)에게 미혹되어 어지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천마와 퇴척귀와 정매신이 오진(五塵)을 세 가지로 변작(變作)하여 사람의 착한 마음을 무너뜨립니다. 그리하여 혹 좌선 중에 두려운 형체를 나타내어 공포심을 불러 일으켜 뜻을 잃게 하며, 혹은 단정한 남녀 등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마땅히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러한 세 가지 오진(五塵)의 경계는 마음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세 가지 오진(五塵)의 경계가 즉시 사라져 끝내 뇌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若於坐中現形恐怖(약어좌중현형공포) 或現端正男女等相(혹현단정남녀등상)

혹 앉아 있는 중에 형상을 나타내어 두렵게 하거나, 혹은 단정한 남녀 등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나니, 

當念唯心(당념유심) 境界則滅(경계즉멸) 終不爲惱(종불위뇌)

마땅히 오직 마음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경계가 곧 사라지고 마침내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當念唯心 境界則滅 終不爲惱(당념유심 경계즉멸 종불위뇌) - 마사(魔事)가 일어나면 이에 대처하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마음이 형상화하여 나타난 것이 마(魔)임을 자각하면 마는 즉시 사라진다는 것이다. 설령 귀신과 같은 것이 실제라고 하더라도, 내 마음이 그에 응하여 귀신이 들어올 통로를 열지 않으면 귀신도 어찌할 수 없다.

* 憨山 :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마군과 외도와 귀신은 대체로 수행의 인지(因地) 가운데 타락한 자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므로 선정의 기분에 훈습으로 발현하였기 때문에 형체를 나타내어 뇌란케 할 뿐이다.

當念唯心 境界則滅은 외부의 마군이 뒤흔든다 해도 실제로는 자신에게 있었던 악한 습기를 따라서 그것이 선정으로 인해 훈습으로 발현했음을 두고 한 말이다. 만약 마음일 뿐임을 관찰한다면 마군의 경계는 저절로 사라지리라.]

 

或現天像菩薩像(혹현천상보살상) 亦作如來像相好具足(역작여래상상호구족)

혹은 천인의 모습=天像이나 보살상을 나타내기도 하며, 또는 여래의 모습인 상호를 갖추어서

若說陀羅尼(약설다라니) 若說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약설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혹은 다라니를 설하기도 하며, 혹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를 설하기도 하며,

 

[或現天像菩薩像(혹현천상보살상) : 이런 현상에 대한 것은 경 곳곳에 있다. 그리고 불보살이 나타나는 경우 마장인지 아니면 정말 불보살이 나투신 것인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불보살이 현신하여 이러저러하다고 말하면 설령 그것이 마장이라도 깊이 빠지기 쉽다. 마장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이 아래에 나온다.] 

 

或說平等(혹설평등) 空無相無願(공무상무원) 無怨無親(무원무친)

혹은 평등, 공, 무상, 무원, 무원, 무친, 

無因無果(무인무과) 畢竟空寂(필경공적) 是眞涅槃(시진열반)

무인, 무과하여 필경에 공적함을 설하고, 또한 이것이 진실한 열반이라고 설하며,

 

[高淳豪 : 空無相無願(공무상무원) : 삼삼매(三三昧)이다. ① 공삼매(空三昧) - 모든 것은 실체가 없어 공하다는 삼매. ② 무상삼매(無相三昧) - 이미 공하니 상이 없다고 관하는 삼매. ③ 무원삼매(無願三昧) - 위와 같이 관하고 무언가 하나도 원구(願求)할 것이 없다고 관하는 삼매. 공에 치우친 면에서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마사는 악마의 형상을 취하는 것만이 아니라 천인상(天人像)이나, 보살상(菩薩像), 또는 여래상(如來像)으로 나타나서 다라니를 설하기도 하고, 보시(布施) 지계(持戒) 등 육바라밀을 설하기도 하며, 때로는 평등,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 인과(因果)를 부정하는 무인무과(無因無果), 원수도 없고 부모친척도 없다는 무원무친(無怨無親)을 설하고, 또는 본체진여(本體眞如)마저 부정하는 필경공적(畢竟空寂)이 참열반이라고 설하기도 하여 수행자를 미혹(迷惑)케 한다.]

 

或令人知宿命過去之事(혹령인지숙명과거지사) 亦知未來之事(역지미래지사)

혹은 사람으로 하여금 숙명통=知宿命으로 과거의 일을 알게 하고, 또 미래의 일=知未來를 알게 하기도 하며,

得他心智(득타심지) 辯才無碍(변재무애) 

타심통의 지혜=他心智를 얻어 말재주=辯才가 걸림이 없게 하기도 하며, 

能令衆生(능령중생) 貪著世間名利之事(탐착세간명리지사)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의 명예와 이익=名利에 탐하고 집착=貪著하게 하기도 한다.

 

[他心智(타심지) :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

* 《능엄경》에 선정 수행 중에 나타나는 마군 현상을 설명해놓았다.

* 貪著世間名利之事(탐착세간명리지사) : 불보살의 형상으로 나타나면 이것이 마인지 불보살이 나투신 것인지 구분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런데 세간의 명리에 집착하게 한다면, 이는 부처님 말씀에 어긋나므로 마(魔)가 나타난 것이다. 아래 이어지는 말들도 마가 되는 예를 설명한 것이다.

* 憨山 : 이는 습기로 일어난 마군이다. 이들 마군은 수행을 하는 사람이 과거 많은 생에 불법을 친근히 하고 익히긴 했으나 그 모습에 집착한 마음을 잊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때로는 수행자에게 신통력(神通力)을 주어, 과거 전생(前生)을 아는 숙명통(宿命通), 미래를 아는 신통력, 남의 마음을 아는 타심지통(他心智通), 자유자재로 법을 설하는 변재무애(辨才無애) 등 불가사의한 힘을 얻게 하는 마사도 있다. 이러한 신통력을 얻은 행자는 세간의 명리(名利)에 탐착하여 수행의 정도를 벗어나 세상의 명예나 이익을 얻는데 빠지는 사람은 악마의 유혹에 빠진 결과이다.]

 

[ '능엄경'에 마군의 현상을 빠짐없이 밝혔는데, 선정 가운데서 오음이 아직 무너지지 않은 상태를 의지하여 나타난 마군의 일어난 현상과 종류가 있어 그 깊고 옅은 정도가 일정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마군의 현상은 혹은 천마와 모든 악한 귀신과 정매망량(精魅망량) 모두가 찾아와 너를 뇌란시키며, 혹은 너의 오음마(五陰魔)와 심마(心魔)가 스스로 재앙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단지 그 개괄적인 내용을 간략히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마군과 외도와 귀신은 대체로 수행의 인지에서 선정을 닦으면서 악한 습기와 삿된 견해 때문에 이 가운데 타락한 자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선정의 기분(氣分)에서 훈습으로 발현하였기 때문에 형체를 나타내어 뇌란케 할뿐입니다. 즉 "마음일 뿐임을 관찰하면 마군의 경계가 즉시 사라진다"는 것은 외부의 마군이 아무리 뒤흔든다 해도 실제로는 자신에게 있었던 악한 습기를 따라서 그것이 선정으로 청정해진 마음에 훈습된 것이 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자기의 심식에 그들 외부의 마군의 자질이 의탁하여 변화로 나타난 그림자가 해를 끼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일 뿐 외부에 실재하는 마군의 경계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오직 마음일 뿐임을 관찰한다면 마군의 경계는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又令使人數瞋數喜(우령사인삭진삭희) 性無常準(성무상준)

또 사람으로 하여금 자주 화를 내게 하고, 자주 기뻐하게 하며, 성품에 일정한 기준이 없게 하며, 

或多慈愛(혹다자애) 多睡多病(다수다병) 其心懈怠(기심해태)

혹은 자애가 많게 하기도 하고, 졸음(잠)이 많고 병이 많게 하며, 그 마음이 게으르게 하기도 한다.

數 자주 삭,

或卒起精進(혹졸기정진) 後便休廢(후편휴폐) 生於不信(생어불신)

혹은 갑자기 정진을 일으키다가, 후에 문득 그만두기도 하며, 불신하는 마음을 내어 

多疑多慮(다의다려) 或捨本勝行(혹사본승행) 更修雜業(갱수잡업)

의심이 많고 생각이 많게 하며, 혹은 본래의 수승한 수행을 버리고 다시 잡된 행위를 닦기도 하며,

若著世事種種牽纏(약착세사종종견전)

혹은 세상(세간)의 갖가지 일에 이끌리어 얽매이기도 하며,  

亦能使人得諸三昧(역능사인득제삼매) 少分相似(소분상사)

또는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삼매를 얻게 하여 약간의 분야에서 서로 비슷하게 하기도 하나,

皆是外道所得(개시외도소득) 非眞三昧(비진삼매)

이것은 다 외도가 얻은 것일 뿐 진실한 삼매는 아니다. 

 

[憨山 : 이것은 번뇌 마군이다. 이 마군은 일찍이 외도의 삼매를 익혀 아직 번뇌를 끊지 않아서 일어났다. 때문에 지금 불법을 의지하여 수행한다 해도 올바른 선정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숙세의 습기가 훈습으로 발현하여 이러한 일이 나타났을 뿐이다.]

 

[여기서는 수행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상적인 현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번뇌의 마군을 논하고 있습니다. 이 마군은 일찍이 외도의 삼매를 익혀 아직 번뇌를 끊지 않아서 일어났기 때문에 지금 불법을 의지하여 수행한다 해도 올바른 선정에 들어가진 못합니다. 그러므로 숙세의 습기가 훈습으로 발현하여 이러한 일이 나타났을 뿐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습기로 일어나는 마군의 현상입니다. 이들 마군은 수행을 하는 사람이 과거의 여러 생에 불법을 친근히 하고 익히긴 했으나 그 모습에 집착한 마음을 잊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 선정으로 인해 훈습되었던 것이 발현하여 삼매 가운데서 이러한 마군의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근본 수행의 인지가 올바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 세간의 명예와 이익에 대한 일을 탐하고 집착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것은 바로 자기의 마음이 변화하여 나타났을 뿐입니다. 

이 내용은 수행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여 어떤 시각화되고 청각화 된 내용을 확인하고자 하는 의식이 팽배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공부에 있어서 그러한 욕구는 결국 마군을 불러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수행의 결과는 현상적으로 그 내용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자기 스스로 의식의 변화를 감지할 뿐입니다. 또 수행이 잘 된 사람은 외형적으로도 모습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의식화되었던 마음이 풀어지면 얼굴이 저절로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변하고 얼굴에서는 빛이 난다고 합니다. 이것을 오로라라고 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수행이 어느 정도 된 사람에게는 그대로 보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도 집착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에 사무량심으로 가득 차 있고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여기고 이분화 된 의식이 되어 있지 않다면 수행이 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或復令人若一日若二日若三日(혹부령인약일일약이일약삼일)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혹 하루, 혹 이틀, 혹 사흘에서

乃至七日住於定中(내지칠일주어정중) 得自然香美飮食(득자연향미음식)

나아가 칠일에 이르기까지 선정 속에 안주하면서 저절로 향기롭고 맛있는 음식을 얻게 하여

身心適悅(신심적열) 不飢不渴(불기불갈) 使人愛著(사인애착)

몸과 마음이 쾌적하고 기뻐서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상태에 애착을 가지게 하며, 

或亦令人食無分齊(혹역령인식무분제) 乍多乍少(사다사소) 顔色變異(안색변이)

혹은  또 사람으로 하여금 음식에 일정한 한계가 없게 하여, 갑자기 많이 먹었다가 갑자기 적게 먹게 하기도 하여 안색이 다르게 변하게 하기도 하니, 

乍(사) : 잠깐, 갑자기

以是義故(이시의고) 行者常應智慧觀察(행자상응지혜관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수행자는 마땅히 항상 지혜로 관찰하고,

勿令此心墮於邪網(물령차심타어사망) 當勤正念(당근정념)

하여금 이 마음이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여야 하며, 마땅히 정념으로 부지런히 닦아 

不取不著(불취불착) 則能遠離是諸業障(즉능원리시제업장)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면 곧 능히 이러한 모든 업장을 멀리 여읠 수 있다.

 

[當勤正念 不取不著(당근정념 불취불착) 앞에서 오직 마음 뿐[唯心]을 말한 바 있다. 여기서는 정념으로 취하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말라고 얘기하고 있다. 오직 마음 뿐이므로 불취불착하는 것은 당연하다.

* 지운 : 正念(정념) ① 알아차림. ② 대상에 끌리지 않음. ③ 마음 챙김. ④ 깨어 있음.

* 憨山 : 이것은 욕심의 마군이다. 중생이 오욕락 가운데 있으면서 음식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때문에 음식에 대한 많은 욕심으로 탐욕과 집착의 마음을 낸다.]


[이상에서 살펴본 선정체험의 진위(眞僞)에 대하여 원효는 상당한 비중을 두고 사정(邪正)의 판단방법을 문답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선정중「보살상등의 경계를 볼 수 있는 것은 숙세(宿世)의 선근(善根)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니, 그것을 어떻게 구별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할 것인가고 묻는데 대하여, 해명하여 말하기를,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는 것이니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만약 모든 마구니가 만드는 상(相)을 보고 이를 좋은 상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희열하는 마음으로 집착한다면, 곧 이러한 그릇된 편벽(偏僻)이 원인이 되어 병을 얻어 발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만약 선근(善根)으로 일어난 경계를 얻고서도 이를 마사(魔事)로 생각하여 마음으로 의심하여 이를 버린다면 바로 좋은 이익을 퇴실시켜 끝내 나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옳고 그름을 구별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그 때문에 세가지 방법으로 시험하여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일이 세가지인가. 첫째는 선정(禪定)으로 연마하는 것이고, 둘째는 본래수행으로 다스려 보는 것이며, 셋째는 지혜로 관찰해 보는 것이다. ..... 중략 ..... 만약 선정중에 경계상이 일어날 때 옳고 그름을 알기 어려우면, 마땅히 정심(定心)에 깊이 들어가 그러한 경계속에서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고, 단지 평등하게 선정에 머물러야 한다. 만약 그것이 선근(善根)에서 나온 것이라면 선정의 힘이 더욱 깊어져서 선근이 더욱 일어날 것이며, 만약 마(魔)가 행한 것이라면, 머지 않아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둘째의 본래수행으로 다스려 본다는 것은 본래수행이 부정관선(不淨觀禪)이었다면 지금 바로 본래대로 부정관을 수행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하여 경계가 더욱 밝아진다면 이는 바로 거짓이 아니며, 만약 본래수행대로 다스려보아 점점 경계가 없어진다면, 이는 그릇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셋째의 지혜로 관찰해본다는 것은 나타난 상(相)을 관찰하여 근원을 추구해 보면 생처(生處)를 보지 못하여 깊이 공적(空寂)함을 알고, 마음이 그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으면 그릇된 것은 마땅히 스스로 없어지며 정당한 것은 스스로 나타난다. .... 중략 .... 이 세가지를 시험해보면 사(邪)와 정(正)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이하생략」]

 

[중생은 오욕락(五欲樂) 가운데 음식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때문에 음식에 대한 많은 욕심으로 탐욕과 집착의 마음을 냅니다. 과거 지난 숙세로부터 익힌 습기가 농후하여 원래부터 아직까지 일념간에도 음식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선정 속에 있다 할지라도 욕심의 습기가 훈습으로 발현하여 몸과 마음을 알맞게 기쁘게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 관찰하고 정념을 부지런히 닦아 취하지도 집착하지도 않는다면 멀리 여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식욕은 곧 바로 성욕과 직결됩니다. 먹는 음식에 따라서 몸의 상태와 마음의 상태가 바뀝니다. 예를 들면 어떤 나라의 음식문화가 그 나라의 국민의식을 반영하는 것과 유사하다 하겠습니다. 불교의 수행자는 음식에 주의를 기울여 먹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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