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分別發趣道相(분별발취도상)

 

[전 절까지는 올바른 뜻을 나타내는 현시정의(顯示正義)와 그것을 그릇되게 이해하는 견해에 대하여 대치사집(對治邪執)으로 이를 시정하였으므로, 본 절에서는 해석분(解析分)의 마지막 절(節)로서, 일체 제불이 증득한 진여의 이치를, 일체 보살도 발심수행하여 그것을 이루고자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설하는 부분이다.]

 

  ⑴ 總說(총설)

分別發趣道相者(분별발취도상자) 謂一切諸佛所證之道(위일체제불소증지도)

분별발취도상이라 함은, 이른바 일체 제불이 증득하신 도이며,

一切菩薩發心修行趣向義故(일체보살발심수행취향의고)

일체보살이 발심하고 수행하여, 취향하는 뜻이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分別發趣道相 - 도(道)란 부처님께서 증득한 경지를 말한다. 그 경지로 마음을 내어 나아가는 모습을 나눈다는 뜻. 수행의 방법은 본래 信· 解· 行· 證, 네 가지로 나눈다.-물처럼바람처럼]

 

略說發心(약설발심) 有三種(유삼종) 云何爲三(운하위삼)

발심을 간략히 말하면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그 셋이라 하는가?

一者信成就發心(일자신성취발심) 二者解行發心(이자해행발심) 三者證發心(삼자증발심)

첫째는 신성취발심이요, 둘째는 해행발심이요, 셋째는 증발심이다.

 

[元曉 : 信成就發心이란 자리[位]가 십주에 있으며 겸하여 십신을 성취하니, 십신의 자리에서 신심을 닦아 익혀서 신심이 성취되어 결정심(決定心)을 일으켜 곧 십주에 들어가기 때문에 신성취발심이라고 한다.

解行發心이란 십회향의 자리에 있으면서 겸하여 심행을 취하니, 십행의 자리 중에서 법공을 잘 알고 법계를 잘 수순하여 육도행(六道行-六波羅密)을 닦아서 육도행이 순결해지고 성숙되어 회향심을 일으켜 회향의 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에 해행발심이라고 한다.

證發心이란 초지(初地) 이상에서 내지 십지의 자라에 있으니, 앞서 두 가지 상사(相似)한 발심에 의해 법신을 증득하여 진심(眞心)을 일으키는 것이다.

* 憨山 : 信成就發心 - 십신의 성취를 통해 십주(十住)를 발기한다는 뜻. 발(發)은 개발한다는 뜻도 있다.

解行發心 - 십행(十行)을 발기하여 십회향으로 나아가는 발심.

證發心 - 십지의 초지(初地)에 오른 보살이 육추의 무명상을 타파하고 나서 진여의 작용이 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진여의 작용이 발기했다는 말이다.-물처럼바람처럼]

 

[발심(發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마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등이 있듯이, 수행의 결심과 태도 및 방법 등도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그 때마다 새로운 입장에 서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은 증득(證得)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는 모습을 분별하여, 어떠한 발심이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발심(發心)은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약칭으로서, 불타의 깨달음을 증득코자 하는 결심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불타의 경계를 목표로 하여 발심하고, 수행하면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이 수행을 유지해 가는 힘은 바로 출발점에서의 결심이다. 그것이 바로 발심(發心)이다.
그러나 발심으로 수행이 진전되기 위해서는, 그 발심에 수행의 '행(行)'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수행의 결과로서 궁극적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득(證得)의 증(證)도 발심에 융합되는 것이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발심(發心)을 그와 같은 넓은 의미에서 설해지고 있다.

본론에서는 발심(發心)을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해행발심(解行發心), 증발심(證發心)의 세 가지가 있다고 설하고 있다.
원효(元曉)는 이 세 가지 발심에 대하여 화엄경의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설 등을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은 십신(十信)을 닦아 십주(十住)의 자리에 이르른 보살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보살이「십신」의 자리에서 신심(信心)을 닦아 그 신심이 성취되면 마음을 견고히 결정하여「십주」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므로 이를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라 한다고 말한다.
둘째, 해행발심(解行發心)이라는 것은「십행」을 닦아「십회향」의 지위에 있는 보살의 마음가짐으로서, 십행위(十行位)에서 능히 법공(法空)을 이해하고 법계에 수순하여 육도행(六度行)을 닦아 그것이 순수하게 성숙할 때, 더욱 분발하여 자비지혜의 회향심(廻向心)을 발하고 십회향위(十廻向位)에 들어가게 되므로 이를 해행발심(解行發心)이라고 말한다고 설하고 있다.
셋째, 증발심(證發心)이라고 하는 것은 초지(初地) 이상 내지 십지(十地)에 이르면서, 앞에서의 두 가지 상사발심(相似發心)보다 더욱 높은 발심으로 법신(法身)을 증득하고 진심(眞心)을 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다시 요약하면 아래의 도표와 같다.-전종식]

 

[본 항은 해석분(解釋分) 가운데 마지막 부분을 이루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을 설명한 것으로, 전장에서 교리를 중심으로 논한 현시정의(顯示正義)와 대치사집(對治邪執)를 실천하기 위한 세 가지 발심으로 불도로 향해 나아가는 수행의 형태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란 뜻을 일으켜 발심하고 수행하여 모든 부처님께서 체득하신 최상의 도에 나아가는 행상(行相)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을 간략히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해행발심(解行發心)·증발심(證發心)이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신성취발심이란 신심을 성취시키고 결심을 발하는 내용의 발심이고, 다음에 해행발신은 이해와 실천을 확고하게 하여 가행정진하고자 하는 발심이며, 끝으로 증발심은 법신을 증득하고 진심을 드러내는 발심입니다. 즉, 믿음·이해·수행·증득하는 과정에서 발심하여 완전한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을 종합한 것입니다. 
이를 좀더 살펴보면, 보리심(菩提心)을 발한 것에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십신(十信)을 성취하여 십주(十住)의 발심주(發心住)에서 삼지(三智)와 오안(五眼)이 일시에 발기한 신성취발심입니다. 둘째는 십행위(十行位) 가운데에서 법공진여(法空眞如)를 이해하고 십바라밀(十波羅密)을 순차적으로 실천합니다. 그 십행이 순수하게 익숙해지면 회향심을 발기하여 십회향위(十廻向位)에 들어가는 해행(解行)발심입니다. 셋째는 초지부터 십지까지 법신보살과 등각(等覺)·묘각(妙覺)이 지니는 마음가짐의 증(證)발심입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발심은 52계위(階位)를 수행하는 점차를 총괄하지만 그 수행의 정도가 동일하지 않아서 신성취발심과 해행발심은 상사발심(相似發心)이라 하고, 증발심은 진실발심(眞實發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발심에 있어서 이전까지는 한결같이 진여와 생멸의 두 문을 밝혀 이 두 문을 진여의 일심(一心)에 귀결시켰습니다.-수선]

 

  ⑵ 信成就發心(신성취발심)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란 신심(信心)을 성취완성하고 그 신심을 바탕으로 하여 성불(成佛)을 향한 결의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신심(信心)은 본래 심징정(心澄淨)이라 하여  '마음을 정화(淨化)시키는 힘'을 일컫는 말이다. 탁(濁)한 물을 가라앉히듯, 탁한 마음을 가라앉혀 정화시키는 힘이 곧 신심이다.

믿음(信)의 대상은 물론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이다. 불(佛)을 믿으면 그 불(佛)의 청정성에 동화되어 자기의 마음도 청정해진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신(信)이다. 법(法)에 대해서나 승(僧)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과(因果)의 이치를 믿는 것도 또한 그렇다. 인과의 도리를 믿는 것은 사람들에게 겸허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진리를 외경(畏敬)하는 마음을 생기게 한다.
불교에서의 신(信)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근본의 진리를 바탕으로 한 이성(理性)적 믿음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를 네 가지 믿음(四信)으로 구분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마음의 근본인 진여의 법을 믿는 것이며, 둘째는 불(佛)에는 무량한 공덕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셋째는 법(法)에는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승(僧)은 능히 올바른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수행을 행한다고 믿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본절에서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즉,  '어떠한 사람'이 발심하고 '어떠한 행을 닦아 발심하며'  '어떻게 하여 발심이 가능한가'라는 세 가지 점을 밝히는 것이다.]

 

   ① 發心(발심)의 因緣(인연)

信成就發心者(신성취발심자) 依何等人(의하등인)

신성취발심이라 함은, 어떤 사람에 의하여, 

修何等行(수하등행) 得信成就(득신성취) 堪能發心(감능발심)

어떻게 수행을 닦아야만, 믿음=信의 성취를 증득하여 능히 발심을 감당할 수 있는가?

得信成就 堪能發心 어떻게 믿음을 가지고 발심하게 할 수 있는가?

所謂依不定聚衆生(소위의부정취중생) 有熏習善根力故(유훈습선근력고)

이른바 부정취의 중생에 의하는 것이니, 과거에 훈습한 선근의 힘이 있기 때문에,

信業果報(신업과보) 能起十善(능기십선) 厭生死苦(염생사고)

업의 과보를 믿고 능히 십선을 일으켜, 생사의 고를 싫어하고 

欲求無上菩提(욕구무상보리) 得値諸佛(득치제불) 親承供養(친승공양)

위없는 깨달음=無上菩提을 구하고자, 모든 부처님을 만나 친히 받들어 공양하고 

修行信心(수행신심) 經一萬劫(경일만겁) 信心成就故(신심성취고)

신심을 닦아 행하니, 일만 겁을 지나야 신심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元曉 : 삼취(三聚)를 나누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지금 이 글 중에서 밝혔으되, 보살 십해 이상으로 결정하여 물러남이 없는 것을 정정취(政定聚)라 하였고, 십신(十信)에 들지 못해 인과를 믿지 않는 것을 사정취(邪定聚)라 하였으며, 이 둘의 중간에서 도에 향하는 사람이 발심하여 무상보리를 구하여 하지만, 마음이 결정되어 있이 않아서 혹 나아가고 혹 물러나니 바로 십신을 말하는 것으로 부정취(不定聚)라고 하였다.

* 不定聚衆生 : 근기의 종류에 따라 삼정취(三定聚)가 있다. 성불 쪽으로 계속 나아가는 정정취(正定聚;十解부터), 거꾸로 타락해 가는 사정취(邪定聚), 연이 있으면 나아가고 아니면 미혹되게 살아가는 부정취(不定聚)로서 모도범부(毛道凡夫)라고 한다.

* 十善(십선) : 3 신업(身業) -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4 구업(口業) - 불양설(不兩舌), 불망어(不妄語), 불악어(不惡語), 불기어(不綺語;진실이 없이 교묘하게 꾸미는 말, 巧言을 하지 않음), 3 의업(意業) - 불탐욕(不貪欲), 부진애(不瞋恚), 불사견(不邪見)

* 信心成就故 : 신심을 성취한다는 것은 십신(十信)을 이룬다는 것이며, 십신을 이루면 십주(十住)에 대한 발심을 하게 된다. 이것이 범부각(凡夫覺) 발심이다.

* 부정취중생(不定聚衆生)이 신심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과거의 훈습으로 업과 과보를 믿음. 십선(十善)을 일으킴. 생사고(生死苦)를 싫어하고 깨달음을 구하고자함, 부처를 만나 공양함.]

 

[첫째의 '어떠한 사람이 발심하는가'에 대하여 본론은 '부정취(不定聚)의 중생'이라고 밝히고 있다. '부정취의 중생'이란 인과(因果)의 도리를 믿고, 십신(十信)의 자리에 들어왔으나, 아직 그 기간이 짧아 일만겁(一萬劫)의 오랜 기간이 경과하지 않았으므로 선연(善緣)을 만나면 진보하고 악연(惡緣)을 만나면 퇴보하는 등, 그 근성이 일정치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초신(初信)에서 십신(十信)까지의 십신위(十信位)에 있는 사람을 부정취(不定聚)라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흔히 중생들을 수행의 정도에 따라 사정취(邪定聚) 부정취(不定聚) 정정취(正定聚)의 세 부류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의 사정취(邪定聚)는 인과의 도리를 전혀 믿지 않고, 불도(佛道)에 뜻을 두지 않는 초신(初信) 이전의 사람을 말하고, 둘째의 부정취(不定聚)는 앞에 설명한 바와 같으며, 셋째의 정정취(正定聚)는 신심이 결정되어 결코 후퇴하는 일이 없는 십주(十住)의 초주(初住) 이상의 계위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인과를 믿지 않는 '사정취(邪定聚)'의 사람은 발심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인과의 도리를 믿는 '부정취(不定聚)'의 사람이 신심을 수행하여 발심하고 '정정취(正定聚)'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부정취(不定聚)의 중생은 문훈(聞熏)과 본각(本覺)의 내훈(內熏)과 전세에 훈습한 선근의 여력이 있기 때문에 업과 그 과보를 믿고 십선(十善)을 일으켜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위없는 보리를 구하려합니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을 만나 직접 받들어 공양하고 열 가지 신심(信心)을 수행합니다. 그리하여 일만 겁이 지나도록 그 수행을 계속하여 십종신심을 성취하기 때문에 제불보살이 십신(十信)이 충만한 마음에서 십주(十住)로 발심하여 나아가도록 가르칩니다. 혹은 제불보살의 대비심 때문에 스스로 십주에 마음을 내기도 하고, 혹은 정법이 소멸하려 하면 정법을 보호하려는 인연 때문에 스스로 마음을 내기도 합니다. 이처럼 십신의 마음을 성취하여 십주에서 발심한 사람은 정정취(正定聚)로 들어가 초주(初住)인 발심주(發心住)에서 범부나 소승의 지위에서 끝까지 물러나지 않습니다. 이를 여래의 종자인 습종성(習種性) 가운데 머문다고 하는데, 성불하는 정인(正因)과 서로 호응하기 때문입니다.]

 

諸佛菩薩敎令發心(제불보살교령발심) 或以大悲故(혹이대비고) 能自發心(능자발심) 

제불과 보살이 가르쳐 발심케하고, 혹은 대비심을 가진 때문에 능히 스스로 발심하기도 하며,

或因正法欲滅(혹인정법욕멸) 以護法因緣(이호법인연) 能自發心(능자발심)

혹은 정법이 소멸하려 함=因으로 인해서 정법을 보호=護法하려는 인연 때문에 능히 스스로 발심하기도 한다.

如是信心成就得發心者(여시신심성취득발심자) 入正定聚(입정정취)畢竟不退(필경불퇴) 

이와 같은 신심을 성취하여 발심한 사람은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 필경에 물러나지 않으니,

名住如來種中(명주여래종중) 正因相應(정인상응)

이름하여 여래종 가운데 안주함이라고 하나니, 정인이 서로 호응=相應함이라고 한다.

 

[如來鍾(여래종) : 부처가 될 수 있는 씨앗.

正因相應 : 정인(正因)이라 함은 누구에게나 내재되어 있는 진여를 말한다. 중생들이 비록 무명에 싸여 있지만 진여가 내재되어 있으므로 안으로부터 훈습하여 생사고를 싫어하고 깨달음에로 나아가게 한다. 이러한 것과 신심을 성취하여 발심한 사람이 정정취로 나아가 마침내 물러남이 없는 것이 서로 상응한다는 말이다.]

 

[둘째의 '어떠한 행을 닦아 발심하는가'에 대하여 본론은 먼저 '훈습'과 '선근력(善根力)'을 들고 있다. 훈습(熏習)은 내부로부터 나오는 진여의 내훈(內熏)과 외부에서 불보살이 가하는 외훈(外熏)에 의하여 수행이 가능해지는 것이며, 선근력(善根力)은 전세(前世)의 선업(善業)에 의하여 몸에 갖추어진 바탕의 힘을 말한다.
수행은, 따라서 이같은 두 가지 힘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업(業)의 인과(因果)를 믿고 십선(十善)을 행하게 되면, 생사의 윤회를 싫어하게 되고, 무상(無上)의 정각(正覺)을 구하고자 노력하여 여러 불타를 만나, 친히 받들어 공양하고 신심을 수행해가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심(信心)의 수행은 업의 인과를 믿고 십선을 행하며 제불을 예배 공양하는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십선은 십선업도(十善業道)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의 세 가지 신선업(身善業)과 불망어(不妄語), 불양설(不兩舌), 불악구(不惡口), 불기어(不綺語)의 네 가지 구선업(口善業),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사견(無邪見)의 세 가지 의선업(意善業)을 말한다. 이에 반(反)하는 것은 십악업도(十惡業道)이다.]

 

若有衆生(약유중생) 善根微少(선근미소) 久遠已來(구원이래) 煩惱深厚(번뇌심후)

만약 어떤 중생이 선근이 작고 적어=微少하여, 오랜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번뇌가 깊고 두터워서,

雖値於佛(수치어불) 亦得供養(역득공양) 然起人天種子(연기인천종자)

비록 부처를 만나고 또한 공양을 올리더라도, 인간·천상에 태어날 종자=人天種子를 일으키거나 

或起二乘種子(혹기이승종자)

혹은 이승의 종자를 일으키기도 하니,

人天種子 :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천상에 날 종자.

設有求大乘者(설유구대승자) 根則不定(근즉불정) 若進若退(약진약퇴)

설사 대승을 구하는 자가 있다 하여도 근기가 일정하지 않아, 혹 정진하기도 하고 혹 퇴실하여,

或有供養諸佛(혹유공양제불) 未經一萬劫(미경일만겁) 於中遇緣(어중우연)

혹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이 있으되, 아직 일만 겁을 지나지 않아, 그 중간에 연=外緣을 만나면 

亦有發心(역유발심) 所謂見佛色相(소위견불색상) 而發其心(이발기심) 

또한 발심하기도 하나니, 이른바 부처님의 색상을 보고 그 마음을 발하기도 하며, 

或因供養衆僧(혹인공양중승) 而發其心(이발기심)

혹은 여러 스님들=衆僧께 공양함으로 인해서 그 마음을 발하기도 하며, 

或因二乘之人敎令發心(혹인이승지인교령발심) 或學他發心(혹학타발심)

혹은 이승인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마음을 발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사람에게 배워서 마음을 발하기도 하나니,

如是等發心(여시등발심) 悉皆不定(실개불정)

이와 같은 등등의 발심은 전혀 모두가 일정하지 않기에,

遇惡因緣(우악인연) 或便退失(혹편퇴실) 墮二乘地(타이승지)

나쁜 인연을 만나면 혹 다시 물러서고 잃음=退失하여 이승의 지위로 떨어진다.

선근(善根)이 깊은 사람과 얕은 사람의 차이를 설명하였다. 선근의 선(善)이란 도를 향하여 나가는 것을 말한다.


[셋째의 '어떻게 하면 발심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본론은, '일만겁이 경과'한 뒤에야 '신심이 성취' 되고 '제불보살이 가르쳐 발심케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신심의 성취는 초신(初信)에서 십신(十信)까지 일만겁(一萬劫)이라는 기나긴 수행을 한 후에라야 이루어지는 것이며, 중도에 발심했다 하더라도 그 발심은 실패하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일만겁의 수행이 종료되었을 때, 시기가 성숙한 것을 보고 제불보살이 가르쳐 발심(發心)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佛)이 없는 경우라도 스스로의 대비심(大悲心)을 일으켜 자력으로 발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정법(正法)이 땅에 떨어져 거짓이 횡행하는 것을 보고, 진리를 수호하겠다는 호법(護法)의 의지 때문에 스스로 발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신성취발심은 오랜 기간의 수행과 불보살의 가르침, 스스로의 대비심(大悲心), 또는 호법의 의지로 발심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하여 믿음으로 성취완성하겠다는 결심을 얻은 신성취발심자(信成就發心者)는 부정취위(不定聚位)를 탈피하여 정정취위(正定聚位)에 들어가, 절대 신심의 후퇴없이 장차 불타가 될 수 있는 여래의 집안에서 살고, 올바른 발심인 정인(正因)과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세 가지 신성취발심 중, 첫째의 발심은 초신(初信)에서 십신(十信)까지의 십신위(十信位) 수행에, 본론에서는 일만겁(一萬劫)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보는 것이지만, 이 수행의 결과 신심이 가득 차기 때문에 제불보살이 가르침을 주어 발심시킨다는 것이며, 둘째의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스스로의 대비심'과 셋째의 '정법의 파괴에 따른 호법(護法)의 의지'로 오랜 기간의 수행과 더불어 발심하여, 부정취(不定聚)의 위치에서 탈피하여 정정취(正定聚)의 첫 위치(初位)인 십주(十住)의 초발심주(初發心住)에 들어가는 것이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다.
다음은 선근(善根)이 미약하여 발심에 어려움을 겪고 실패하는 경우를 들고 있다.
이들은 선근이 미소(微少)한 중생으로서, 번뇌가 깊고 두터워, 비록 불(佛)을 만나 친히 받들어 공양한다 하더라도 깊은 신앙심을 일으킬 수가 없고, 도덕이나 세속적 종교심에 머물러, 내세(來世)에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종자를 일으키는 것에 그치고 만다. 혹은 성문연각 등 이타(利他)없이 자리(自利)를 추구하는 이승(二乘)을 향하여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설사 대승을 구하여 성불(成佛)할 결심을 일으키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선근(善根)이 미약하여, 신근(信根)이 확립되지 못하고, 조그마한 유혹에도 신심이 동요하여, 때로는 나아가고 때로는 후퇴한다.
그와 같은 중생들이 행운으로 불타를 만나 친승공양(親承供養)할 때, 일만겁의 긴 세월이 경과하지 않았더라도 그 속에서 연을 만나 신심이 두터워져 발심하는 경우가 있고, 불타의 뛰어난 색상(色相)인 삼십이상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를 보고 일시적 환희심으로 발심하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중승(衆僧)을 공양할 때의 신앙심으로 발심하는 경우, 또는 성문연각등 이승인(二乘人)의 가르침이나 권유로 발심하는 경우, 또는 다른 사람의 하는 것을 보고 배워 발심하는 경우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은 발심은 모두가 신근(信根)이 확립되지 못한 부정(不定)의 위치에서 일어난 발심에 불과하므로 만약 조그마한 곤란이나 나쁜 친구의 유혹 등 악연(惡緣)을 만나면 재빨리 발심을 단념하거나 수행하기 쉬운 이기적(利己的) 이승(二乘)의 수행으로 떨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부정취(不定聚)의 성품을 지닌 사람은 내인(內因)과 외연(外緣)이 미소하고 하열하기 때문에 물러나 버립니다. 어떤 중생은 숙세에 훈습한 선근종자가 미소하여 오래고 먼 세월에 걸쳐서 탐욕·성냄·어리석음의 번뇌가 매우 두텁습니다. 그는 부처님이나 불상을 만나 공양을 올린다고 해도 인간과 천상에 태어날 종자인 오계(五戒)와 십선(十善)·팔재계(八齋戒) 등을 닦을 마음만 일으키며, 혹은 인간과 천상의 생사를 두려워하여 이승의 종자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설사 대승을 구하는 자가 있다고 해도 선근이 일정하지 않아 정진하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승을 구하는 자가 혹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해도 아직 일만 겁을 지나지 못한 그 중간 과정에서 외연을 만나면 발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於中遇緣 외연을 만나다'하는 것은 혹 부처님의 색상을 부처로 보고 발심하기도 하며, 혹은 색상에 집착하여 여러 스님들께 공양함으로써 발심하기도 하며, 또는 이승인의 하열한 가르침으로 인해서 발심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사람의 자취에서 배우고 발심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모두가 보살의 자비와 지혜의 마음이 아닌 이러한 발심은 모두가 부정취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악한 인연을 만나면 곧 바로 후퇴하여 이승(二乘)의 지위로 떨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나모아미타불]

● 법아견(法我見)에 의한 이승둔근(二乘鈍根)의 사집(邪執)

② 法我見(법아견)

法我見者(법아견자) 依二乘鈍根故(의이승둔근고)

법아견이라 함은 이승의 둔한 근기=鈍根을 의지하기 때문에

如來但爲說人無我(여래단위설인무아) 以說不究竟(이설불구경)

여래께서 단지 인무아만을 설하고 구경을 설하지 않아,

見有五陰生滅之法(견유오음생멸지법) 怖畏生死(포외생사)

오음이 생멸하는 법이 있다고 보고, 생사를 두려워하여 

妄取涅槃(망취열반) 云何對治(운하대치) 

헛되게 열반을 취한다.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가? 

以五陰法(이오음법) 自性不生(자성불생) 則無有滅(즉무유멸) 本來涅槃故(본래열반고)

오음법의 자성은 생겨남이 없는=不生이라면, 멸함도 없어서, 본래 열반이기 때문이다.

 

[五陰法(오음법)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한다. 오온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이 오음이라는 것이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남도 없고 멸함도 없다. 그러므로 본래 열반이지만, 생멸의 염법으로 보므로 생사를 두려워하여 열반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물처럼바람처럼]

* 邪執

執의 종류 邪執 內容 對治
人我見
나라는 것이 주재자로서 실체가 있다고 봄
여래법신을 허공으로 봄 허공도 색상으로 본 것이며, 진여는 모습이 없음
여래법신을 空으로만 봄 여래법신은 여실불공도 있어 공덕을 갖춤.
여래법신이 색법과 심법으로 차별이 있다고 봄. 업식으로 인해 생멸을 볼뿐 여래법신은 차별이 없음.
여래장에 생사법이 있다고 봄. 생사 염법은 본래 없는 것인데 망념으로 있다고 착각하는 것임.
여래가 열반을 얻어도 끝남이 있다고 봄 열반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이 있어 얻는 것이 아니라, 불생불멸 무시무종의 여래법신과 합일되는 것임.
法我見 오음에 생멸이 있음을 보아 생사를 두려워하고 헛되이 열반을 구함. 법에 실체가 있다고 봄. 오음법은 자성이 없어 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니 본래 열반임.

 

[법아견(法我見)은 현상세계의 제법이 고정적 실체가 있다고 보는 그릇된 견해를 말한다. 본란은 그러한 법아견을 가지고 있는 성문(聲聞) 연각(緣覺) 등 이승(二乘) 둔근(鈍根)의 사람이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를 깨뜨리기 위하여 설하는 것이다. 불타는「오온(五蘊)은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라는 삼법인(三法印)을 설하고 인간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으로 분석하여, 거기에는 고정적 자아(自我)는 없다고 하여, 무상(無常)한 현상(現象)적 모습만을 설하고 궁극적 본체를 설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문(聲聞) 연각(緣覺) 등 둔근(鈍根)의 이승(二乘)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영원한 불변의 진여(眞如)를 알지 못하고 오온(五蘊)의 인간은 실재로 생멸(生滅)하는 실체적 법이라고 그룻 생각하고, 생사(生死)의 고(苦)를 두려워하여, 이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생사(生死)의 세계에서 열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 밖에서 별도의 열반을 구하려하기 때문에 그 열반은 진실한 열반이 아니라 허망의 열반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같은 그릇된 견해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그것은 오온 그 자체의 본성은 불생불멸하고 본래 열반임을 들어 대치하는 것이다. 현상세계에 나타난 인간의 오온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원리에 따라 변해가는 것으로서 그러한 생사의 염법(染法)은 허망한 존재이지만, 그러나 이미 설해온 바와 같이 생멸문의 본체는 진여(眞如)이기 때문에 그것은 불생불멸의 영원한 것이다. 그래서 현상세계에서 실재로 생사가 있다고 보는 것은 망견(妄見)으로써, 주관적 망념이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음(五陰:五蘊과 같음)의 법은 자체(自體)인 본체가 있어 실생실멸(實生實滅)하는 것이 아니다. 자성이 본래부터 상주하고 있어 시작이 없는 불생(不生)이므로 멸(滅)이 있을 수 없다. 미망(迷妄)으로 허망의 생사가 있다고 망상하는 것이므로, 그 미망을 떠나면 그것이 바로 열반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진여(眞如) 그것은 바로 열반이다. 지혜를 완성하는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오온개공(五蘊皆空)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은 바로 불생불멸의 오온 본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바로 진여 열반이며,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를 무상한 생멸의 측면에서 보는 것은 바로 법아견(法我見)에 의한 사집(邪執)에 떨어지는 것이 된다.-전종식]

 

[여기에서는 이승(二乘)의 둔근(鈍根)에 대하여 아공(我空)의 도리인 인무아(人無我)를 설하여 싫증을 낼 만한 생사가 있고, 그에 반대되는 증득할 만한 열반도 있다는 말씀을 듣고 생사법과 열반법이 따로 있다고 집착하는 법아견(法我見)을 타파한 것입니다. 여래께서는 성문과 연각에게 생사의 오음이 무상(無常)하다는 것만을 설하고 생사가 원래 자성이 없으므로 그것이 바로 진상(眞常)의 열반임을 설하진 않았습니다. 이것이 아함경에 설해진 핵심주제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겐 생사가 바로 열반인 구경의 법무아(法無我)인 법공(法空)을 말씀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허망하게 이러한 법아견을 일으킨 것입니다. 생사과 열반이 아(我)가 망정으로 헤아릴 대상의 법(法)이 되기 때문에 법아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에선 대치하는 법을 밝힘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집착을 여의게 하였고, 다음에선 이 두 집착을 끝내 여읨을 밝힙니다.-수선]

 

(2) 究竟(구경)에 妄執(망집)을 여읨을 밝힘

復次究竟離妄執者(부차구경리망집자)

또한 구경으로 허망한 집착=妄執을 여읜다는 것은,

當知染法淨法皆悉相待(당지염법정법개실상대) 無有自相可說(무유자상가설)

마땅히 알라 염법과 정법 모두는 다 상대하는 것으로, 자상을 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染法淨法皆悉相待 : 염법과 정법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염법이 없으면 따로 정법이라 할 만한 것도 없으니 독립된 자성이 없다. 무슨 말인가? 오답이 있기 때문에 정답을 가려내는 것이지, 만약 오답이 없다면 정답이라 할 만한 것도 없음과 같다. 염법이 있으므로 정법을 말하는 것이지 만약 염법이 없다면 그대로 정법이며, 그 정법이라는 것도 정법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비유하자면 허공에 먼지가 끼었으므로 먼지를 걷어낼 뿐 먼지를 걷어낸다면 남은 무엇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是故一切法(시고일체법) 從本以來(종본이래) 非色非心(비색비심)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색법=色도 아니고, 심법=心도 아니며, 

非智非識(비지비식) 非有非無(비유비무) 畢竟不可說相(필경불가설상)

지혜=智도 아니고, 업식=業도 아니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필경에는 설명할 수 있는 상이 아니다.

而有言說者(이유언설자) 當知如來善巧方便(당지여래선교방변)

그러나 설명한 언설이 있는 것은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여래께서 좋은 방편=善敎方便으로 

假以言說引導衆生(가이언설인도중생)

언설을 빌어 설명하여, 중생을 인도한 것이다.

其旨趣者(기지취자) 皆爲離念歸於眞如(개위리념귀어진여)

그 종지의 취지는 모든 망념을 떠나 진여로 돌아가게 함=歸於眞如하기 위함이니 

以念一切法(이념일체법) 令心生滅(령심생멸) 不入實智故(불입실지고)

일체법을 생각=念함으로써 마음이 생멸하여, 진실한 지혜=實智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元曉 : 네 번째(바로 위의 설명을 가리킴)는 구경에 집착을 여읜다는 뜻이니, 그 중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모든 것이 말을 여읜 도리를 밝혔고, 뒤에는 언설을 빌어 가르치는 뜻을 나타내었으니 글의 양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설명이 있게 된 것은 여래께서 훌륭한 가르침의 방편인 언어의 설명을 빌림으로써 중생을 인도한 것이므로 그 의도가 언어의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의 종지(宗旨)와 그 종지로 나아가는 것은 모두가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의 삿된 집착의 허망한 관념을 여의고 진여에로 귀결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 생사와 열반의 법을 허망한 관념으로 잘못 집착하면 일심이 생멸하여 진여의 진실한 지혜에 깨달아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삿된 집착에 대한 대치는 끝났고, 다음에 발심(發心)하여 최상의 완전한 깨달을 얻어 열반에 안주하는 곳으로 향해 가는 도(道)의 모습을 밝힙니다.]

 

[이상에서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을 원인으로한 사집(邪執)에 대하여 설명한 바이다. 여기에서는 궁극적으로 그러한 망집(妄執)을 어떻게 떠나게 하는가를 설하는 부분이 된다.
그 동안의 온갖 설법은 우리들 범부 중생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상대적 용어를 사용하여 설해온바 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차별있는 상대적 현상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절대적 불(佛)의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상대적 용어를 사용하여 이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언설로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설로서 표현하자면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상대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기신론'을 설해옴에 있어, 그러한 뜻이 군데군데 밝혀진바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최종적으로 밝혀 궁극적으로 그릇된 견해를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궁극적으로 그러한 망집(妄執)을 떠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설해온 정법(淨法)이나 염법(染法)이 모두 서로 상대해서 설해온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것이 정법(淨法)이라 설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망법(妄法)의 상대적 용어로 설했을 뿐 그것 자체의 자상(自相)이 바로 그것이라고 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善)과 악(惡), 진(眞)과 망(妄), 염(染)과 정(淨), 미(迷)와 오(悟) 그것들은 모두가 상대(相待)해서 성립되는 용어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악(惡)은 선(善)과 비교하여 성립될 뿐, 악이 없는데 선만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 인간이 더럽다고 상대적으로 말하는 분뇨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구더기는 그곳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것이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하는 그 말 자체가 스스로를 기준으로 하여 상대적으로 평가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이것들을 본질적으로 말한다면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그것이 바로 실재의 자상(自相)을 표현하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러므로 본론에서는 일체법이 본래부터 비색비심(非色非心) 즉 '색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 말은 현상적 상대의 의미의 말이 아니라 제일의제(第一義諦)인 본체적 입장에서 설하고 있는 것이다. 지혜라든가 인식이라든가 하는 지(智)와 식(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智)는 통찰(洞察)이고 직관적인 것이어서 진체(眞體)를 아는 것이지만, 식(識)은 분석적이고 분별(分別)하고 판단하는 것으로서 차별을 아는 것이다.
이 또한 진정한 본체적 입장에서는 '비지비식(非智非識)'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비유비무(非有非無)도 마찬가지 이치이다. 유(有)와 무(無)는 상대적 용어에 불과하다. 그래서 본론에서는 이를 '필경 불가설상(畢竟不可說相)'이라고 하여 '궁극적으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것은 말로서 실상(實相)을 설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무분별(無分別)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가설(可說)' 즉 말로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분별이며 망념(妄念)으로서, 망념으로는 현실의 진상인 진여(眞如)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불가설(不可說)'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타는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이지만, 이 설법은 분별의 언어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 본론에서는 '그러나 언설(言說)이 있는 것은, 마땅히 알아라, 여래의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 언설을 빌어 중생을 인도하는 것'이라 설하고 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불타의 설법은 분별있고 차별있는 현상의 세게, 즉 세속제(世俗諦)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고는 가르침을 전달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 언설이 아무리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그 언어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잠깐 그 언설을 빌어' 절묘한 방편을 써서, 중생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타는 어떠한 언어를 써서 설법을 한다 하더라도, 항상 그 언어의 한계를 알고 행하기 때문에 가르침에 집착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불타는 중생을 망념에서 떠나 무념(無念)의 세계에 이끌기 위해서는 언설(言說)의 분별을 빌어쓰는 것이다.
이러한 설법의 목적을 본론에서는 '그 취지는 염(念)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어떠한 진리라도 그것을 세속(世俗)의 입장에서 사념(思念)하면 그것은 망념이어서, 거기에는 마음의 생멸(生滅)이 있고, 마음이 주객(主客)으로 분열하여 암흑(暗黑)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설해진 바 있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일체법을 염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하여 진실한 지혜[實智]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현상계에서의 모든 법은 차별 그 자체가 상대(相待)적인 것으로서 분별의 사념(思念)이고 망념(妄念)이므로 이를 떠나야만이 진실한 지혜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며, 부득이 언설을 빌어 설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자상(自相) 그 자체는 아닌 것이며, 주객(主客)이 합일하여 무념(無念)의 세계 속에서만 진상(眞相)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쉼터이야기, 내생에 과보를 받는 업

부처님 제자 가운데 제바달다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었으나 평생 부처님을 시기질투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부처님을 죽이려고 벼랑 위에서 바위를 밀기도 했습 니다. 다행히 부처님은 피했지만 그 파편 중 하나가 튀어 부처님 발에 피를 냈습니다. 또 코끼리에게 술을 마시게 하여 부처님께서 가는 길목에 풀어놓았습니다. 제바달다는 술취한 코끼리가 부처님을 죽이기를 바랐으나, 신기하게도 코끼리는 부처님 앞에 와서는 얌전히 앉아버립니다. 

또 그는 승가를 분열시키기도 했습니다. 승가를 분열시킨 후 무리를 이끌고 부처님 승단을 나갑니다. 하지만 그도 인간인지 라 자신의 죄를 알고 참회하여 죄를 빌러 부처님께 향합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처님께로 가는 도중 죽고 맙 니다. 그는 사후 부처님을 죽이려한 업보로 무간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승가를 분열시킨 업보로 그가 겪은 지옥의 고통은 격심하였고 지속되었습니다. 여기서 10만겁의 기간이 연장 되었습니다.

그럼 현생에 효과가 있는 업을 살펴봅시다. “어떤 업을 행하기 전과 행하는 과정에서 유쾌하거나 불쾌하다면 금생에 과보 를 만드는 업의 결과물이다. 지계하거나 명상할 때 편안한 마음이나 행복한 마음을 느끼고, 12연기에 따라 어떤 일의 원인을 깊이 생각하면 현생에 효과가 있는 업이 된다. 사성제에서 도를 실천하고 나면 바로 다음 순간에 과의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계를 지키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명상을 하면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앞으로의 행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은 현생의 삶을 안정되고 편안하게 하고 내생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은 단순히 내생을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현생을 편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현생이 극락이면 내생도 자연스럽게 극락이 됩니다. 현생이 지옥이라면 아무리 기도를 해도 내생에 극락에 가기 힘듭니다. 과거, 현재, 미래 모두 내가 살았던 삶의 연속입니다.

 “소멸된 업. 아라한이 대열반을 성취할 때 업이 소멸한다. 내 생이나 그 다음 생에서 무르익을 수 있는, 셀 수 없는 과거 생에서 지은 무수한 해로운 업과 유익한 업들은 모두 소멸된 업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는 소멸되었다. 더 이상 새로운 존재는 없다. 미래의 존재에 대해 갈망하는 마음이 없이 이것의 씨앗들은 모두 불타버렸다.’” 아라한이 대열반을 성취할 때는 부처가 된 때를 말합니다. 견성성불할 때 내 속에 들었던 업이 모두 소멸합니다. 이것은 어두운 방에 불을 켠 것과 같습니다. 어둠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니지만 불을 켜면 어둠이 없어집니다. 열반을 성취해서 자비광명이 되면 내 속의 악한 마음과 잘못된 것들이 그냥 없어집니다. 견성성불하고 부처가 된 순간 대자대비심 밖에 없습니다. 업에 의한 어떤 분별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열반을 성취하면 나타나는 모든 것은 자비 밖에 없습니다. 내 안의 번뇌, 아집은 모두 멈춥니다.

암수술은 몸 안의 암세포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방사선치료는 분열하는 암세포를 분열하지 못하게 가만히 있게 만듭니다. 있어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이와 같이 열반을 이루면 업이 있더라도 이것이 작용을 못합니다. 작용을 못하니 과거가 소멸한 것이나 다름없고, 더 이상 새로운 존재가 없고 미래에 대한 갈망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통섭불교]

三者(삼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如來之藏無有增減(여래지장무유증감)

세 번째 수다라에서 말씀한, '여래의 장=如來藏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減, 

體備一切功德之法(체비일체공덕지법)

일체 공덕의 법을 갖추고 있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以不解故(이불해고) 卽謂如來之藏(즉위여래지장)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곧 여래장에는 

有色心法自相差別(유색심법자상차별) 云何對治(운하대치) 

색법과 심법이 있어 자체의 모습=自相을 차별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以唯依眞如義說故(이유의진여의설고) 因生滅染義(인생멸염의) 示現說差別故(시현설차별고)

오직 진여의 뜻에만 의지하여 설명한 때문이니, 생멸의 물듦의 뜻으로 인하여 나타내 보여 차별을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여래장이 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말을 듣고, 색법과 심법이 따로 있어서 차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여 여래장 자체는 생멸이 없다. 업식에 의해 생멸의 양상이 나타날 뿐이다. 즉, 위에서 업식에 의해 생멸상을 나타낸다고 하였으니, 진여는 차별이 없지만, 업식에 의해 차별상을 볼 뿐이다. 생멸의 인연을 여의면 색법이나 심법이나 차별이 없다.

* 憨山 : 일체법이 유일한 진여일 뿐이라면 색법과 심법이 둘이 아니어서 원래 차별이 없다. 단지 생멸상의 오염된 의미로 인해 모든 진여공덕상의 차별을 제시해서 나타냈을 뿐이다. 이는 진여가 망정으로 인해 생멸상의 오염으로 뒤집힌 것을 상대하여 진여공덕상의 차별이 있음을 설명했을지언정, 진여자성이야 어찌 생멸상인 색법과 심법의 차별이 동일하겠는가?

* 元曉 : 因生滅染義 示現~이라 한 것은 윗글에서 “업식의 생멸상에 의해 나타낸다.”고 하고, 내지 설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물처럼바람처럼]

 

[셋째는 경전에 '여래장에는 증감(增減)이 없다. 그 체(體)에는 일체의 공덕(功德)이 갖추어져 있다'라고 설하는 것을 듣고 여래장 본체를 부득이 차별적 용어로 설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래장에는 생멸법인 색심(色心)의 이치가 차별적으로 자성(自性)과 상(相)이 갖추어져 있다'고 그릇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여래장(如來藏)은 그 본체(本體)를 말하는 것으로서, 본체는 본래 증감이 없는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서 앞에서 말한 지혜광명 등 일체의 성공덕(性功德)을 있는 그대로 갖추고 있다고 설하는 것인데, 범부 중생은 그것을 본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생멸법인 현상의 세계에서 차별적으로 보는 데에서 그러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현상의 세계에서는 차별심은 모두가 망법(妄法)으로서 몸과 마음이 항상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대치하고 시정할 것인가.
여래장이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설하는 것은 본체인 진여문(眞如門)의 입장에서 설하는 것임을 밝혀야 하며, 여래장의 체(體)는 불변으로서, 그 속에는 일체의 염법(染法)의 차별상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장이 갖추고 있는 성공덕은, 부득이 차별의 세계에 살고 있는 범부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차별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 본체 그대로 갖추어져 있다는 의미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여래장의 무량한 성공덕은 늘거나 줄거나 하지 않는 절대 불변(不變)의 자리이고, 이 말을 생멸문에서의 차별적 의미로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전종식]

 

[여기서는 여래장의 본성이 색법(色法)이 심법(心法)과 동일하다고 생각한 잘못된 집착을 타파한 것입니다. 여래장의 본성자체엔 모든 공덕의 미묘한 덕상을 갖추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자체에서 일으킨 공덕이므로 그것은 본래 색법과 심법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이내 여래장은 색법과 심법을 차별하는 것이 동일하다고 잘못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장의 진제(眞諦)를 망법인 색심의 차별법과 동일하다고 잘못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대치한 법으로 일체법은 본래 차별이 없고, 오직 진여가 생멸의 인연을 의지하여 일체법이 있으므로 법마다 모두 진여(眞如)여서, 법마다 유일한 진여일 뿐임을 말한 것입니다. 일체법이 유일한 진여일 뿐이라면 색법과 심법이 둘이 아니어서 원래 차별이 없습니다. 단지 생멸하는 모습의 오염된 의미로 인해서 모든 진여의 공덕상의 차별을 제시해서 나타냈을 뿐입니다. 이는 진여가 망정으로 인해서 생멸상의 오염으로 뒤집힌 것을 상대하여 진여공덕상의 차별이 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로 진여자성이야 어찌 생멸상인 색법과 심법의 차별과 동일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상은 여래장이 색법과 심법이 동일하다고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을 타파한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중도(中道)의 실상을 나타낸 설명이라 하겠습니다.-수선]

 

四者(사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一切世間生死染法(일체세간생사염법)

네 번째는 수다라에서, '일체 세간의 생사하는 염법이 

皆依如來藏而有(개의여래장이유) 一切諸法不離眞如(일체제법불리진여)

모두 여래장에 의지하여 있는 것이며, 일체제법은 진여를 여의지 않고 있다.' 라고 설하는 것을 듣고

以不解故(이불해고) 謂如來藏(위여래장)

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른바 여래장 자체에 

自體具有一切世間生死等法(자체구유일체세간생사등법) 云何對治(운하대치) 

일체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가?

以如來藏(이여래장) 從本已來(종본이래)  唯有過恒沙等諸淨功德(유유과항사등제정공덕)

여래장에는 본래부터 오직 항하의 모래 등을 능가하는 모든 청정한 공덕=淨功德이 있어서, 

不離不斷不異眞如義故(불리부단불리진여의고)

진여의 뜻을 여의지도 않고, 끊지도 아니하여 그(진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以過恒沙等煩惱染法(이과항사등번뇌염법) 唯是妄有(유시망유) 性自本無(성자본무)

항하의 모래수보다 많은 번뇌의 염법은 오직 허망한 존재일 뿐, 본래부터 성품이 없는 것이어서 

從無始世來(종무시세래) 未曾與如來藏相應故(미증여여래장상응고)

시작이 없는 때부터 일찍이 여래장과 더불어 상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若如來藏體有妄法(야여래장체유망법) 而使證會永息妄者(이사증회영식망자)

만약 여래장의 체에 망령된 법=妄法이 있다면, 진여를 증득하고 이해=證會하여 망령됨을 영원히 끊는다는 것은

則無有是處故(즉무유시처고)

바로 근거=處가 없기 때문이다.

 

[생사의 염법이란 본래 여래장에 있지도 않는 것이 망념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다. 만약 진여에 이러한 망법이 있다면 증득한다고 해서 그것을 쉬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이 망법인 줄 알면 그것은 사라진다.

* 憨山 : 중생들이 허망으로 일어난 생사염법은 여래장진체를 의지하여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이는 여래장 진체가 허망한 생멸의 인연을 따른 의미임을 알지 못한다. 이윽고 여래장성엔 생사염법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고 집착하게 되는데, 이것은 진체(眞體)에 허망한 염법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어떻게 대치해야만 하는지 그 문제를 말해보자. 여실불공한 여래장은 원래부터 항하사를 능가하는 성공덕을 갖추어 그것은 여실불공한 진여의 자체와 다르지 않다. 모든 생사염법은 허망한 변계소집성으로 있을 뿐, 그것은 본래 자성이 없이 원래부터 여래장성과 서로 호응하지 않는다. 만일 여래장의 진체에 정말로 허망한 생사법이 있다면 진여를 증득하고 허망을 쉬게한다는 것은 옳다고 긍정할 곳이 없게 된다.]

 

[넷째는 경전에 '일체 세간의 생사염법(生死染法)은 여래장에 의하여 있고, 일체 제법은 진여를 떠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이것은 세간의 생사염법이 진여(眞如)를 의지하여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래장의 본체(本體)에 그대로 생사의 염법이 구비하고 있다고 그릇되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체를 의지(依持)하는 것과 본체에 그대로 갖추어져 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인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여는 이미 설해온 바와 같이 불변의 심진여(心眞如)와 수연(隨緣)의 심생멸(心生滅)이 있어 범부에 있어서는 진여를 의지하여 연(緣) 따라 이루어지는 생사염법이 수반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여를 의지하여 나타난 것일 뿐 불변의 여래장 자체에 생사염법이 체(體)로서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범부는 수연(隨緣)된 여래장 즉 아리야식의 염법(染法)을 불변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여래장의 자성(自性)에 체(體)로서 염(染)이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치유하는가.
그것은 여래장에 있는 무량한 정공덕(淨功德)과 무명(無明)에 의하여 수연기동(隨緣起動)하여 나타나는 생사의 염법은 그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밝혀 대치한다는 것이다.

여래장에는 본래부터 항하(恒河)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무량한 청정공덕이 갖추어져 있다. 진여의 체(體)와 이들 정공덕(淨功德)은 불리(不離) 부단(不斷) 불이(不異)한 것이다. 정공덕 바로 그것이 진여의 본체이므로 그것이 그 본체와 다르다거나, 끊어진다거나 또한 떠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본래부터 있는 것이다. 도중에 구비된다거나, 도중에 소실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생사의 염법(染法)은 그렇지가 않다. 무명의 수연기동에 의하여 망념(妄念)이 일어나는 것이며, 이같이 무량한 모든 번뇌는 그 망념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자성(自性)의 체(體)가 없는 허망(虛妄)의 존재이다. 망념은 마음의 본성이 본래 망념이 없는 무념(無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망념은 심성(心性)에 반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것에 의하여 일어나는 번뇌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인 여래장과는 본래 일치하지 못하여 상응(相應)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바람에 의하여 수연(隨緣)기동하여 천태만상의 파도가 일지만 물의 본성인 수성(水性H2O)과는 관계가 없듯이, 그 바람이 물에 의지하여 파도가 일 뿐 그 바람 자체에는 체(體)가 없듯이, 여래장은 본래부터 정공덕(淨功德)의 체(體)로서 존재하고, 그 체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불변의 것이지만 생사염법은 본래부터 여래장의 체와는 관계없이 의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번뇌는 진여를 의지처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고 허망한 존재이다. 만일 번뇌가 실재의 체(體)로서 여래장에 갖추어져 있다고 가정하면, 만일 깨달아 번뇌가 소멸될 경우에는 여래장 자체마저 소멸되는 것이 되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일 여래장이 소멸되지 않는 상주불변의 것이라면, 그 속에 실재로 있다는 번뇌 또한 상주불변이라는 이치가 성립되어, 그 번뇌를 영원히 소멸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타는 번뇌를 멸하고 있는 것이므로 생사의 염법은 망유(妄有)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여기에서는 여래장에 생사염법이 있다고 여기는 잘못된 집착을 타파한 것입니다. 경전에 일체 세간의 나고 죽는 윤회의 오염된 존재가 모두 여래장을 의지하여 있으며 일체 모든 염법이 진여를 여의지 않는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여래장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을 빠짐없이 갖추어 있다고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대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실(如實)한 불공(不空)의 여래장의 본성은 본래부터 지금까지 항하사를 지나도록 물들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지만 인연을 따라서 물들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장은 본래 모든 공덕을 여의지도 않았고 단절하지도 않아 진여와 다름없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며, 항하사를 지나는 번뇌의 염법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의 허망으로 있는 유정(情有)일 뿐, 여래장의 본성엔 본래부터 없는 것이기에, 시작이 없는 세월로부터 아직까지 여래장과 서로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질의 이치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래장 자체에 정말로 허망한 오염된 법이 있다면 진여를 증득하여 망상을 쉬게 한다는 것은 옳다고 긍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五者(오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다섯째는 수다라에서 

依如來藏故有生死(의여래장고유생사) 依如來藏故得涅槃(의여래장고득열반)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사법이 있고,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열반을 체득한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以不解故(이불해고) 謂衆生有始(위중생유시) 以見始故(이견시고)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생은 시작이 있다'고 하며, 시작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復謂如來所得涅槃(부위여래소득열반) 有其終盡還作衆生(유기종진환작중생)

다시 '여래가 체득한 열반에도 그 끝이 다함이 있어, 도리어 되돌아 가 중생이 된다'고 말한다.

 

[다섯째는 경전에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다.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는다'고 설하고 있는 것을 듣고, 이 경의 진의(眞意)를 이해하지 못하고 중생은 시작이 있는데, 중생에 그러한 시작이 있기 때문에 중생이 열반을 얻어 여래가 되더라도 그 열반에는 끝이 있어 그 여래가 또다시 중생으로 되돌아간다는 견해가 생긴다는 것이다.]

 

云何對治(운하대치) 以如來藏無前際故(이여래장무전제고)

無明之相亦無有始(무명지상역무유시)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가? 여래장은 시간적으로 과거=前際가 없기 때문에 무명의 상도 시작이 있는 것이 아니며,

 

[여래장과 열반은 중생이 어떠한가와 관계없이 늘 갖추어져 있으나, 다만 무명에 가리어져 보지 못할 뿐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러므로 무명 또한 시작도 없다.]

 

[이와 같은 오류를 어떻게 치유하는가? 이것을 대치하는 것은 여래장이나 무명에는 시원(始源)이 없다는 것을 밝힌다는 것이다. 여래장과 진여는 영원한 실재이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하고 있어 시작이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생사(生死)의 근거인 무명(無明)도  '무시(無始)의 무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바와 같이 그 시원(始源)이 없는 것이다. 만일 윤회의 세계인 삼계(三界)밖에 중생이 따로 있어, 그것이 삼계속에 들어온 것이라면, '생사에 시작이 있고 무명에 시원(始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불교의 교설이 아니라 외도(外道)의 경설(經說)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생사윤회의 시원은 없는 것이다.]

 

若說三界外(약설삼계외) 更有衆生始起者(갱유중생시기자) 卽是外道經說(즉시외도경설)

만약 삼계 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것은 외도 경전=外道經의 설명이 된다.

 

[삼계 즉 욕계, 색계, 무색계는 무명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삼계가 없다면 무명에 물든 중생도 없다.]

 

又如來藏無有後際(우여래장무유후제) 諸佛所得涅槃與之相應(제불소득열반여지상응)

卽無後際故(즉무후제고)

또한 여래장에는 미래=後際가 있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깨서 체득하신 열반도 그것과 더불어 상응하여, 바로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고순호 : 여래장이니 열반이니 하는 것을 중생이 느끼며 사는 생멸의 세계와는 관계없이 불생불멸이요 무시무종이다. 따라서 여래장이란 시간적으로 과거가 없기에 그로 인한 무명의 모습도 시작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무명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중생세계를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라고 한다. 따라서 삼계 외에 새삼스럽게 중생을 처음 시작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외도의 경전에서나 설하는 것이지 정법인 불법에서 설하는 것을 아니라는 것이다.

열반을 얻는다는 것도 불생불멸이요 무시무종인 여래장과 합일되는 것이라 과거가 있을 리 없으니 미래도 있을 리 없어 끝남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 《圓覺經》金剛藏菩薩章 第四 : 금광을 녹여 나온 금은 다시 녹임이 없다. 이미 금이 되었다면 다시 금광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무궁한 시간이 지나도 금의 성질은 무너지지 않으며 본래 성취함이 없었다고 말할 필요가 없으니 여래의 원각도 역시 이와 같다.]

 

[다음, 열반에도 끝이 있다는 오류를 밝힌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래장은 영원한 실재이므로, 그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부처가 열반을 얻어 여래장진여(如來藏眞如)에 상응 일치하면, 역시 영원의 상(相)이므로 열반에 끝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아견(人我見)에 의한 범부중생이 범하기 쉬운 다섯 가지의 그릇된 견해와 그에 대한 치유방법을 제시한 바 있다. 이를 다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다섯 가지 중 첫째, 둘째는 공(空)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서
(1) 본체의 공(空)을 현상계의 사공(事空) 즉 허공(虛空)으로 보는 것
(2) 본체 진여에는 번뇌가 없다는 여실공(如實空)을 본체마저도 아무것도 없는 공 무(空無)로 보는 것이며,
셋째, 넷째, 다섯째는 유(有)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서
(3) 본체의 여래장진여에 갖추어진 성공덕을 현상계의 차별있는 색심(色心)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
(4) 본체의 청정한 여래장진여에 염법(染法)이 있다고 보는 것
(5) 시원(始源)이 없는 생사(生死)와 열반에 시작과 끝이 있다고 보는 것 등이다.
다음은 법아견(法我見)에 의하여 이승(二乘) 둔근(鈍根)이 범하기 쉬운 그릇된 견해에 대하여 설명한다.]

 

[여기에서는 생사의 시작과 열반의 끝이 있다고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고 있습니다. 경전에서 여래장을 의지하기 때문에 소과 소생이 있고 여래장을 의지하기 때문에 열반을 체득한다는 말씀을 듣고,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명의 시작과 원인이 여래장이 있기에 중생이 나고 죽는 고통스런 윤회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진여를 의지하여 허망한 생사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진여가 먼저이고 허망한 생사가 뒤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의 생사법은 시작이 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사의 시작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다시 여래가 얻은 열반은 그것이 끝내 다하면 다시 중생이 된다고 잘못 안다는 것입니다. 이를 대치하는 방법으로 여래장은 시간적으로 전제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의지하여 일어난 생사의 무명도 역시 시작이 없다고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삼계 밖에 중생이 있어서 생사를 일으킨다고 한다면 이것은 바로 외도의 견해이지 불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또 여래장은 후제가 없기에 모든 부처님께서 체득하신 열반도 그와 함께 상응하면 후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열반이 다할 때가 있다는 것은 오해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잘못된 아견(我見)은 범부가 불법의 말씀을 듣고 허망한 육식으로 분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말에 대한 집착을 떠나 진정한 의미를 체득하지 못하고 허망한 마음으로 언설(言說)에 집착하여 이러한 변계(遍計)를 잘못 일으켰을 뿐입니다. 다음은 법아견(法我見)에 대해서입니다.]

3) 對治邪執(대치사집)

  (1) 二種 邪執(이종 사집)

對治邪執(대치사집) 一切邪執(일체사집) 皆依我見(개의아견)

삿된 집착을 대치하는 것은 일체 삿된 집착 모두가 아견을 의지하므로, 

若離於我(약리어아) 則無邪執(즉무사집)

만약 '나'라는 아견을 여읜다면 삿된 집착이 없을 것이다.

是我見有二種(시아견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러한 아견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두가지인가? 

一者人我見(일자인아견) 二者法我見(이자법아견)

첫째는 인아견이고 둘째는 법아견이다.

 

[我見 人我 法我 : 我에 대한 견해를 아견(我見)이라고 한다. 見이란 여기서는 정견(正見)을 벗어난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인아(人我)란 개별적인 인간의 실체를 말한 것이며, 법아(法我)는 모든 사물의 실체를 말한다.

* 憨山 : 人我見 - 오온을 실제로 주제하는 我가 있다고 헤아리는 것. 불법 안에서 대승의 가르침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 그 가르침을 미혹하여 허망하게 집착하고 말을 따라 집착하는 것.

法我見 - 오온 등 일체법에 각자의 자체 성품이 있다고 헤아리는 것. 이승인이 일으키는 견해이다.

* 元曉 : 人我見이란 총상(總相)을 주재하는 자가 있다고 계탁하기 때문에 인아집이라고 한다.

法我見이란 일체법이 체성(體性)이 있다고 계탁하기 때문에 법집이라고 한다.-물처럼바람처럼]

 

[지금까지 본론의 정확한 교의(敎義)를 나타내는 현시정의(顯示正義)를 설해온바 있다. 여기에서는 그에 대한 오해(誤解)나 그릇된 주장을 지적하면서 그 치유방법을 제시한다. 대치사집(對治邪執)은 문자 그대로 그릇된 견해와 고집에 대하여 정론(正論)으로 그것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일체의 그릇된 견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본론은 모두가 아견(我見), 다시 말하면 자아(自我)는 상주(常住)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또한 외계의 법(존재)이 실체가 있다고 보는 데 있다고 설하고 있다. 만일 사람이 아(我)에 대한 집착을 떠난다면, 일체의 사집(邪執)은 없어진다는 것이다. 아견(我見)은 불변(不變)의 고정적 견해, 즉 자아(自我)는 변하지 않는다는 견해와 형상세계 모두는 고정적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정적으로 보는 견해의 그 깊은 곳에는 집착이 있고, 이 집착이 일체고(一切苦)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견(我見)이라고 함은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을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그것을 널리 해석하여 '고정적으로 보는 견해'를 아견(我見)이라 하고, 이것을 둘로 나누어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으로 구분하고 있다.
인아견(人我見)은 일반적으로 자아(自我)를 고정적 불변의 실체로 보는 것이고, 법아견(法我見)은 모든 현상을 구성하는 요소[法]를 또한 고정적 실체로 보는 견해를 말한다. 자아(自我)로 보는 우리는 현상적 육체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또한 정신적 작용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어 모든 사람은 자아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자아(自我)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아(自我)에 애착을 가지고 있어 본능적으로 '자아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애착(愛著)과 집착(執著)을 바탕으로 한 고정적 자아관(自我觀)이 인아견(人我見)이다. 이와 같은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에 의하여 일체의 그릇된 견해인 사집(邪執)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그러한 아견(我見)을 떠난다면 일체의 그릇된 견해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본론에서는 그러한 인아견(人我見)을 가지고 있는 아집(我執)의 범부가 빠지기 쉬운 다섯가지의 그릇된 견해를 지적하고 있으며, 그 모두는 자기의 본성인 법신(法身)과 여래장(如來藏)에 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현상을 구성하고 있는 법이 고정적 불변의 실체라는 법아견(法我見)에 빠져있는 이승(二乘) 둔근(鈍根)의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 그릇된 견해를 지적하고 있는데 그들은 오음(五陰)의 생멸법(生滅法)만을 보고 그 오음(五陰)의 궁극적 자성불생법(自性不生法)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을 원인으로 하여 사집(邪執)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러한 아견(我見)을 떨쳐버리면 법신 및 여래장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치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음법(五陰法)에 대한 그릇된 견해도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 본론의 취지이다.
이상은 '기신론'에서 설하는 그릇된 견해의 원인을 밝힌 것이지만, 그 원인이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에서 찾고 있다하더라도 필자(전종식)는 다음과 같은 사집(邪執)의 원인을 따로 제시하여 그릇된 견해를 치유하는데 도움을 주고자한다. 그동안 현시정의(顯示正義)에서 불타 교설(敎說)의 바른 뜻을 누누이 설해온바 있었지만, 그렇게 설해진 바른 뜻을 과연 올바로 이해하였는지의 여부를 우리는 본 대치사집(對治邪執)에서 다시 한번 반성하고 검토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불타가 설해온 교법(敎法)은 항상 두 가지 관점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첫째(1)의 관점은, 그 설법이 일체법의 본체계[眞如門]를 설하고 있는가를 파악해 보는 일이고, 둘째(2)의 관점은, 그 설법이 일체법의 현상계[生滅門]를 설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다. 이는 매우 간단하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타의 교리를 해석하는데 있어, 두 관점을 혼돈함으로써, 그릇된 견해를 나타내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기신론'이 대치사집의 이름으로 이를 다루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범부가 빠지기 쉬운 다섯 가지 그릇된 견해나 이승(二乘)의 기성수도인이 빠지기 쉬운 그릇된 견해 모두는, 그것을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에서 그 원인을 찾고있다 하더라도, 이는 앞에서 필자가 지적한 두 가지 관점을 면밀히 파악하면서 해석해 본다면, 그와 같은 그릇된 견해는 쉽게 해소할 수 있고 치유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인아견(人我見)을 가지고 있는 범부가 빠지기 쉬운 다섯 가지의 그릇된 견해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어서 법아견(法我見)이 있는 이승(二乘)의 기성 수도인(修道人)이 빠지기 쉬운 그릇된 견해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한다.-전종식]

 

[여기서는 삿된 집착인 이집(二執) 또는 이견(二見)의 대치를 총괄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삿된 집착을 대치하는 것은 일체의 삿된 집착이 모두가 아견(我見)을 의지하기에 만일 그렇다면 아견을 여읜다면 일체의 삿된 집착도 따라서 없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견은 두 가지인데, 첫째 인아견(人我見)이란 오온(五蘊)에 실제로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아(我)가 있다고 헤아린 아집(我執)입니다. 이는 불법 안에서 대승의 가르침을 최초로 배우는 사람이 그 가르침을 미혹하여 허망한 마음으로 집착하여, 말을 따라 그 의미에 집착하는 자이지 외도들이 일으키는 견해는 아닙니다. 다음에 법아견(法我見)은 오온 등 일체법에 각자의 자체적인 자성이 있다고 헤아리는 것인데, 이는 바로 이승(二乘)의 사람들이 일으키는 견해로 법집(法執)이라 하겠습니다. 먼저 다섯 가지 인아견(人我見)입니다.-수선]

 

   ① 人我見(인아견)

 

[먼저 잘못 생각하는 내용을 들고, 두 번째로 그에 대한 그릇된 집착의 상(相)을 표시하여, 끝으로 대치(對治)하는 방법을 밝히는 세 단계의 설법을 취하고 있다.]

 

人我見者(인아견자) 依諸凡夫(의제범부) 說有五種(설유오종)

云何爲五(운하위오)

인아견이란 모든 범부들에 따라 설명하면 다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다섯 가지인가?

一者(일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如來法身畢竟寂寞(여래법신필경적막)

첫째, 경전=修多羅에서, '여래의 법신은 궁극적으로 적막하여 

猶如虛空(유여허공) 以不知爲破著故(이불지위파착고) 卽謂虛空是如來性(즉위허공시여래성)

허공과 같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그것이 집착을 파하기 위한 것임을 모르고, 허공이 곧 여래의 본성(성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범부가 오해하는 다섯 가지 집착 중 첫째의 그릇된 견해는 경전(經典)에서 '如來法身畢竟寂寞 猶如虛空, 여래의 법신은 필경 적막(寂寞)으로서, 오직 허공과 같다.'고 설한 것은 여래의 본체를 설한 것인데, 세간에 사는 범부는 현상계에 모습을 나타낸 불타의 본성을 상(相)으로 보고, 육신(肉身)이나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그릇된 견해를 파하기 위하여 설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설(經說)을 그대로 받아들이어 '허공(虛空)이 여래의 성품(性品)'이라고 오해한다는 것이다. 경전에서 '허공과 같다'고 설한 것은 차별의 세계에서 우리의 망념이 보는 적막한 허공 그것이 아니라 여래(如來)의 본체인 법신, 진여 여래장 등이 '바로 여실공(如實空)으로서 허공과 같다' '진여의 법이 일체처에 두루 퍼져있다'는 의미로서의 허공 즉 본체(本體)의 성품을 밝힌 것인데, 범부는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범부가 '허공'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은 바로 망념(妄念)의 소산(所産)인 허공이라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이를 깨뜨리는 것이다.]

 

云何對治(운하대치) 明虛空相是其妄法(명허공상시기망법) 體無不實(체무불실)

어떻게 다스려 대치해야 하는가? 허공의 모습=虛空相 또한 허망한 것=妄法이어서, 자체(본체)=體가 없고 실제=實이 아니며, 

以對色故有(이대색고유) 是可見相(시가견상) 令心生滅(령심생멸)

그것이 색에 대비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밝힌다. 이것은 역시 볼 수 있는 모습=相이며,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하게 하지만,

以一切色法本來是心(이일체색법본래시심) 實無外色(실무외색)

일체의 색법은 본래 마음이기 때문에 실제로 밖의 색=外色은 없는 것이다. 

若無色者(약무색자) 則無虛空之相(즉무허공지상)

만약 색이 없는 것이라면 곧 허공의 모습=相 또한 없는 것이니,

所謂一切境界(소위일체경계) 唯心妄起故有(유심망기고유)

이른바 일체의 경계는 오직 마음으로서, 허망하게 망을 일으키기 때문에 있는 것이며, 

若心離於妄動(약심리어망동) 則一切境界滅(즉일체경계멸)

만약 마음이 헛된 움직임=妄動을 떠나면, 일체의 경계도 곧 사라지고(멸하여), 

唯一眞心無所不遍(유일진심무소불편)

오직 하나의 참된 마음=唯一眞心만이 두루 하지 않음이 없는 것으로,

此謂如來廣大性(차위여래광대성) 智究竟之義(지구경지의)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광대한 성품과 지혜=廣大性智의 궁극적 의미이며,

非如虛空相故(비여허공상고)

허공의 모습=虛空相과 같지 않다고 하는 까닭이다.

 

[여래 법신이 적막하다고 하여, 허공과 같다고 하면 허공과 같은 모습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허공과 같은 모습이라고 하면, 이미 모습이 있는 것이며, 이는 볼 수 있는 모습인 색상(色相)에 견주어 상상한 것이다. 그러나 색상이나 허공상이나 볼 수 있는 상이기는 마찬가지이며, 이렇게 되면 진여인 마음이 생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럴 경우 허공은 경계 중의 하나이며, 경계란 망념이 일으킨 것이므로 진여와는 무관한 것이다.

* 지운 : 허공은 주객이 상대하여 증감이 있으나 공은 주객이 사라져 증감이 없다.

* 憨山 : 허공은 변계소집의 망법이다. 이는 망정(妄情)으로 소집(所執)인 공상을 변계(徧計)한 것일 뿐[情有] 자체인 법신에는 실재하지 않으므로 진여의 이치엔 본래 없는 것이다.[理無] 이를 변계하여 허망하게 집착하고 실제가 있다고 여기면서 마주할 색법이 있을 때와 없을 때를 따라서 마음이 생멸하게 할지언정 보편한 진여법신은 아니다.-물처럼바람처럼]

 

[범부가 허공이라고 눈으로 보는 것은 색(色)인 것이므로 범부가 그렇게 인식하는 색(色)은 범부의 분별사식(分別事識)에 의한 것이고, 그 분별사식은 진심(眞心)이 아닌 망념(妄念)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설한바 있다. 이 망념에 의하여 있다고 인식한 것은 망법(妄法)에 불과한 것이므로 본론에서는 '虛空相是其妄法 體無不實, 허공의 상(相)은 망법(妄法)으로서 체(體)가 없고 실(實)이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색(色)에 의하여 마음의 생멸(生滅)이 있으나, 색은 본래 마음의 인식작용이므로 그 색은 본래 마음이다. 따라서 색은 외계(外界)의 실재가 아니며 일체의 인식대상은 유식(唯識) 즉 오직 마음이고, 마음이 망념(妄念)으로서 생기(生起)하여 외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기신론'의 유심론 (唯心論)적 입장이다. 그래서 마음이 망념의 생동(生動)을 떠나면, 일체의 인식대상은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이때 주관과 객관의 일체 대립이 소멸되어 유일한 진심(眞心)만이 바로 진여(眞如)로 합일(合一)되어, 바로 그 진심이 일체처에 두루 퍼져있다는 것을 '如虛空, 허공과 같다'고 표현한 것으로서 이것이 여래(如來)의 광대한 본각(本覺)의 지혜이고, 그것이 궁극적인 여래의 성품인 것이다.
따라서 '허공과 같다'고 표현한 것은 현상의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인식되는 허공 그것이 아니라 본체의 세계에서 여래의 광대한 지혜가 일체처에 두루한 여실공(如實空) 여실불공(如實不空)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인아견(人我見) 가운데 첫 번째, 경전에서 "여래의 법신(法身)은 필경 번뇌가 적막하여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하는 것을 듣고, 중생은 법신이란 색상도 형상도 없는 공무(空無)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 허공과 같다고 말씀하신 뜻은 색상과 형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이 그 근본의도를 알지 못하고 이 말씀을 들으면 여기에 집착하여 허공이 바로 여래의 성품이라고 집착합니다. 그래서 이 집착을 대치함에 텅 비어 걸림이 없는 허공의 모습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의 허망한 망상으로 진여자체엔 실제가 아닌 허망한 존재의 허공과 같은 모습이란 애초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연하여 일체 색법은 본래 마음이고 실제로 마음 밖에 모든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색이 없는 것이라면 곧 허공의 모습도 없어서 일체 경계가 오직 마음일 뿐인데 허망하게 일어나 짐짓 존재하는 듯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마음이 허망하게 준동하지 않으면 곧 일체 경계도 모두 사라져서 오직 하나의 진실한 마음만이 우주법계에 충만하여 두루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여래의 광대한 성지(性智)인 구경의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망정으로 존재하는 허망한 법으로 있는 허공의 모습과는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二者(이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世間諸法畢竟體空(세간제법필경체공) 

둘째는 경=修多羅에서 '세간의 모든 법=諸法은 필경 본체가 공한=體空이며, 

乃至涅槃眞如之法(내지열반진여지법) 亦畢竟空(역필경공)

나아가 열반의 진여의 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필경에 공적하고, 

從本已來(종본이래) 自空離一切相(자공리일체상)

본래부터 스스로 공적=自空하여 일체의 색상을 여의었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以不知爲破著故(이불지위파착고) 卽謂眞如涅槃之性(즉위진여열반지성)

그것은 집착을 타파하기 위함인 줄 모르기 때문에, 곧 진여열반의 본성은 

唯是其空(유시기공) 云何對治(운하대치) 

오직 공적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니,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明眞如法身自體不空(명진여법신자체불공) 具足無量性功德故(구족무량성공덕고)

진여의 법신은 자체가 공적하지 않은=不空임을 밝히나니, 한량없는 본성의 공덕=性功德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唯是其空 : 오직 공하기만 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절대무(絶對無)에 떨어지게 된다. 공이란 번뇌가 없으며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며, 영향을 받으면 언제든 작용하는 힘을 갖추고 있어서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고 있다. 진여는 여실공[不變]과 여실불공[隨緣]을 모두 갖추고 있다.

* 憨山 : (어떤 사람은) 진여와 열반을 단멸의 공으로 헤아린다.… 그러나 진여법신의 자체는 여실하게 공적하지 않음을 밝혀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무루의 심공덕을 빠짐없이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의 그릇된 견해는 경전에 '세간의 존재는 모두가 체공(體空)이다. 온갖 존재의 본성이 공(空)이며, 열반(涅槃)도 진여(眞如)도 필경공(畢竟空)이다. 법(法)은 본래부터 그 본성이 스스로 공(空)인 것이며 일체의 상을 떠나 무상(無相)이다'라고 설하는 것을 듣고, 그것이 집착을 파하기 위한 것임을 모르고, 진여열반(眞如涅槃)의 본성이 아무것도 없이 텅빈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본론에서는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라고만 설하고 있을 뿐 어떠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인가를 설하고 있지 않지만 '대승기신론'의 한결같은 논지로 보아 그 집착은 현상세계에서 범부가 경험하는 상대적 차별의 인식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세간(世間)의 일체가 체공(體空)이라고 설하는 것은 본체가 공이라는 것으로서 반야경(般若經)에서 나오는 일체개공(一切皆空) 및 색불이공(色不異空) 등의 이치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온갖 존재에 집착하는 세간의 범부들에게 그것의 본체는 그 성품이 본래 공(空)임을 설해오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텅빈, 아무도 없는 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열반이나 진여(眞如)마저 아무것도 없는 공무(空無)로 설하는 것이 아님에도 문자 그대로 공무(空無)로 잘못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 차별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세간(世間)의 범부들은 '열반'이나 '진여'를 이해함에 있어 그것이 별도의 '상대적 존재'인 것같이 인식하는 오해를 깨뜨리기 위하여 필경공(畢竟空)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설하는 체공(體空)이나 필경공(畢竟空)은 세간에서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존재를 초월하여 절대적 실재를 설하고 있으며, 상대적 차별의 세계에 살고 있는 범부들에게 부득이 상대적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을 뿐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앞에서 나온 세간의 온갖 존재는 본체가 공이라는 체공(體空)은 상대적 용어를 빌린다면 그것이 바로 진여(眞如)이고 열반(涅槃)인 것이며, 뒤에 나온 필경공(畢竟空)의 의미는 그 진여나 열반 속에는 번뇌 망상이나 망념 따위가 전혀 없다는 여실공(如實空)을 의미하는 것이지 진여(眞如) 그 자체가 아무것도 없는 빈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심진여문(心眞如門)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대치(對治)할 것인가. 이미 심진여문(心眞如門)에서 설명하였듯이 진여법신 그 자체에는 일체의 성공덕이 갖추어져 있다는 여실불공(如實不空)으로 해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원효(元曉)는 그의 '기신론소'에서 이와 같은 그릇된 견해가 왜 생겼는가에 대하여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에서 '열반은 여환여몽(如幻如夢)이니 약당유법승열반자(若當有法勝涅槃者)면 아설역부여환여몽(我說亦復如幻如夢)이니라'라고 한 말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설명하면 대품반야경에 '열반은 환상과 같고 꿈과 같은 것이니, 만약 열반 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또다시 말하여 환상과 같고 꿈과 같다고 할 것이다......'라고 한데서 '열반과 진여의 법이 역시 필경공'이라 한 말을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환상과 같고 꿈과 같다'고 열반을 설명한 반야경은 열반이 그대로 환상과 꿈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말로서는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을, 분별의 세계인 세간의 범부가 말 그대로 오해한 데 원인이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같은 오해는 진여법신(眞如法身)이 불공(不空)이라는, 즉 무량한 성공덕(性功德)이 완전히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설하여 이를 시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본론에서 진여법신(眞如法身)이 갖추고 있는 성공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해왔음을 다시 환기시키고자 한다. 그렇다고 그 성공덕이 세속적 분별의 의미에서 설해진 것이 아니고 본래의 성품이 있는 그대로 그러한 것이지만 차별의 세계에 사는 중생에게는 부득이 차별적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미 설해온바 있다.
진여법신(眞如法身)의 성공덕(性功德)으로 '기신론'에는 다음 여섯 가지를 들고 있다.
①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
② 그것이 법계에 두루 퍼져 비추어주고 있다는 것.
③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아는 힘이 그 안에 있다는 것.
④ 스스로의 성품인 청정한 자성청정심이 바로 진여법신의 인격화된 본성이라는것.
⑤ 영원하고 지복(至福)하고 자유자재하며 맑고 깨끗한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것.
⑥ 스스로 청량불변의 존재로 있다는 것 등이다.
진여법신에는 이상과 같은 무량한 성공덕이 갖추어진 여실불공(如實不空)을 설하여 진여법신(眞如法身)이 텅빈, 아무것도 없다는 그릇된 견해를 시정하는 것이다.]

 

[진여열반을 단멸(斷滅)의 공으로 여기는 집착을 타파한 것입니다. 즉, 세간과 출세간법은 거짓 명칭일 뿐이고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은 정말로 있다고 헤아리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내 그 자체인 진여의 법신자체 모두가 공적하다고 말하여 그들의 변계를 타파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자들은 집착을 타파한 말인 줄 모릅니다. 이윽고 그 말에 집착하여 진여열반은 단멸의 공이라고 허망하게 헤아립니다. 이를 대치하는 방법은 진여법신의 자체는 여실하게 공적하지 않다는 것을 밝혀 주어야만 단멸(斷滅)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루(無漏)의 본성공덕을 빠짐없이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는 허공을 진여법신이라고 잘못 집착하였고, 여기에서는 영원히 생명이 끊어진 법신은 단멸(斷滅)한 공이라고 집착한 것입니다. 이 모두는 공견(空見)에 떨어진 자들입니다.]

* 생멸문(生滅門)으로부터 진여문(眞如門)에의 귀입(歸入)

 

[그 동안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에 대한 설명을 진행하여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릴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그 두 문(門)을 반성하고, 생멸문(生滅門)이 본래의 진여문(眞如門)에 귀입(歸入)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심생멸문(心生滅門)은 마음의 시간적 존재로서,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이 대립된 분별(分別)의 세계이다. 분별의 망념(妄念)이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의 생멸이 있으며, 시간적(時間的)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생멸의 세계에서 중생이 추구하는 것은 색심(色心)으로 구성된 오음(五陰)이다. 오음(五陰)은 오온(五蘊)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으며, 육체와 마음을 나타내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한다.
여기에서 색(色)은 육체를 말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정신적 작용인 마음(心)이라고 주석되고 있다. 수(受)는 감수(感受), 상(想)은 표상(表象), 행(行)은 의지(意志)의 작용, 기타 심리적, 생리적 힘을 말하고, 식(識)은 판단(判斷)작용을 말한다.
인간의 존재는 원시불교이래 이 오음(五陰)으로 심신(心身)을 나타내고 있다.

생멸(生滅)의 세계에 있어, 자기자신은 전존재(全存在)이고, 항상 색심(色心)의 대립을 보는 것이 우리의 경험세계이다. 그러나 오음(五陰)으로 설해지는 색심(色心)을 음미해보면 그와 같은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신론'의 입장이고, 본 절의 취지이다. 객관으로 나타나 있는 육진경계(六塵境界)는 마음밖에 실재하는 대상계(對象界)가 아니라, 마음 그 자체라고 보는 것이 '기신론'의 입장이다.-전종식]

 

復次顯示從生滅門卽入眞如門(부차현시종생멸문즉입진여문)

다시 다음에 생멸문으로부터 곧 진여문에 들어감을 나타내 보이나니,

所謂推求五陰(소위추구오음) 色之與心(색지여심)

이른바 오음을 추구해 보면 색 그것은 심과 더불어 존재하며,

五陰 色之與心: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오음이며, 이중 색(色)이외의 수상행식(受想行識)을 마음으로 본 것이다.

六塵境界畢竟無念(륙진경계필경무념) 以心無形相(이심무형상)

육진의 경계에는 필경 생각이 없는=無念이며, 마음에도 형상이 없으니, 

六塵境界 畢竟無念 :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경계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므로 마음을 떠나 따로 생각할 만한 독립된 형상이란 없다.

十方求之(시방구지) 終不可得(종불가득)

시방으로 구해도 마침내 얻을 수 없다.

十方 : 동서남북과 그 간방(間方)과 상하

 

[마음을 떠나서, 마음 밖에서 염(念)할 대상은 없는 것이기 때문에 '六塵境界畢竟無念 육진(六塵)의 경계는 필경 무념(無念)'이라고 설해지고 있다. 유식(唯識)의 이치에 통달하면 외계(外界)가 있다는 망념(妄念)은 소멸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재적 진여(眞如)가 아닌 망념(妄念)일 뿐이고, 이 망념은 유식의 이치에 통달함으로써 소멸되는 것이다.

진심(眞心, 眞如)을 '물'이라 한다면 망념(妄念)은 이른바 '파도'와 같은 것이다. 파도는 천태만상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떠한 고정적 실재를 나타내지 못하는 허망한 분별일 따름이고, 이와 같은 망분별(妄分別)로서의 마음은 실재성이 없어 파악할 수 없는 것이 된다.]

 

如人迷故(여인미고) 謂東爲西(위동위서) 方實不轉(방실부전)

마치 사람이 미혹한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나, 방향은 실제로 바뀌지 않는 것과 같이,

 

[따라서 '以心無形相 十方求之 終不可得, 마음에는 형상(形相)이 없어 시방(十方)으로 그것을 구해도 끝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망념으로서의 마음은 파악될 수 없는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실재로 알게 될 때, 그 망념은 소멸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색심(色心)의 망념과 무념(無念)의 관계를 방향을 예로 들어 해명하고 있다. 사람이 방향을 잃고 동쪽을 서쪽이라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쪽이 서쪽으로 그 방향이 바뀐 것은 아닌 것과 같이, 우리 마음의 본성은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로서 불변이지만, 중생은 무명의 미혹 때문에 마음을 염(念)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찰나찰나 생멸하고 있는 염(念)이 마음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 염이 참마음(眞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본래 움직이지 않는 부동(不動)의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 점을 깊이 관찰하여, 항상 동요하는 망념(妄念)의 깊은 곳에, 동요하지 않는 부동(不動)의 심성(心性)을 발견하고, 마음은 곧 무념(無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생멸문(生滅門)을 떠나 진여문(眞如門)에 들어갈 수가 있다.]

 

衆生亦爾(중생역이) 無明迷故謂心爲念(무명미고위심위념) 心實不動(심실부동)

중생 또한 그러하여 무명의 미혹 때문에 마음=心을 일러 염이라고 하나 마음=心은 실제로 움직이지 않으니,

若能觀察(약능관찰) 知心無念(지심무념) 卽得隨順入眞如門故(즉득수순입진여문고)

만약 능히 관찰하여 심에 념이 없음=無念임을 알면 곧 수순하여 진여문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心(심)은 진여이고 念(념)은 망념이다. 중생들은 망념을 진여라고 착각하나, 심에는 망념이 없다.

* 憨山 : 최초의 일념이 없었다면 생상(生相)이 없고, 무명망념의 생상이 없다면 중생이란 본래 없다. 그 때문에 무명을 직관하도록 가르쳐 바로 그 자리에서 일심 진여문으로 단박에 깨달아 들어가게 하였던 것이다.-물처럼바람처럼]

 

* 지운 스님의 설명

    꿈에 비유(流轉緣起, 流轉門) 還滅門
本覺   깨어 있어서 부유한 집에 있으면서 그것을 자각 究竟覺, 覺心初起 心無自性
不覺 根本無明   근본무명이 사라짐⇧
業相 阿梨耶識 꿈이 생김 업상이 사라짐 10지보살⇧
能見相 阿梨耶識 꿈 속에서 봄. 주관을 버림 9지보살⇧
現相 阿梨耶識 꿈 속에서 대상이 나타남. 객관을 버림, 무념 8지보살⇧
智相 末那識 꿈 속의 사물에 집착[法執] 법집을 버림, 隨分覺⇧
相續相 意識 꿈 속의 빈곤한 몸을 인정[我執] 아집을 버림, 相似覺⇧
執取相 感覺, 受 꿈 속에서 탐진치를 일으킴. 凡夫覺⇧
計名
字相
꿈 속의 사실에 의미를 부여 佛法 학습⇧
起業相 꿈 속에서 업을 지음. 선악의 행위 내적 관찰⇧
業繫
苦相
업에 의해 고통스러워하거나 선행에 대한 보상을 받음. 괴로움을 자각하고 보리심을 일으킴. 始覺⇧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논해온 이론의 궁극, 즉 생멸엔 본래 생멸이 없는 진여임을 관찰하게 하여 생멸문로부터 진여문으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이에 먼저 생멸문에서 그 실제를 명확하게 제시하여 바로 불생불멸의 진여문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이른바 중생을 이루고 있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을 추구해 보았더니 색법은 심법과 더불어 존재하는데,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으로 구성된 색법인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 등의 경계는 필경에 자체가 무념(無念)이고, 심법이란 심식(心識)을 떠나 밖으로 분별할 만한 허망한 생각의 모습이란 애초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시방세계에서 그것을 구해 보았으나 끝내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비유하여 마치 사람이 미혹했기 때문에 동쪽을 두고 서쪽이라고 말하지만 방향은 실제로 미혹을 따라서 전변하지 않는 것과 같이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에 미혹했기 때문에 진심을 생각이라고 말하나 움직이는 생각을 추구해 보았더니 허망한 생각이 이미 사라진 과거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 잠시도 머묾이 없는 현재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참 마음은 머묾이 없기 때문에 허망한 생각의 양태로 일어나지 않기에 실제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만일 이를 수행방편으로 관찰해보면 진심엔 요동하는 허망한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곧 진심을 수순하여 관찰하여 무념(無念)인 줄 알면 진여문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무념(無念)이 무심(無心)이고 진심(眞心)·진인(眞人)·원각(圓覺)입니다.-수선]


[이상으로 현시정의(顯示正義)에 있어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에 대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우리 중생심은 일심(一心)으로서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의 두 문이 있다.
심진여문에는 언설을 떠난 이언진여(離言眞如)와 언설로 표현하는 의언진여(依言眞如)가 있으며, 의언지여에는 번뇌망상이 완전히 사라진 여실공(如實空)과 그 여실공(如實空) 속에는 지혜광명(智慧光明)과 상락아정(常樂我淨) 등의 무량한 성공덕이 갖추어진 여실불공(如實不空)이 있다는 것을 살펴본 바 있다. 심생멸문(心生滅門)안에는 염정생멸(染淨生滅)과 염정훈습(染淨熏習) 및 체대(體大), 상대(相大), 용대(用大)의 삼대(三大)가 있다는 것도 살펴본 바 있다.
현시정의(顯示正義)의 설명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 표와 같다.-전종식]

*머리 식히는 이야기

제프리 아이븐슨 블록샴의 저서 『전생의 나를 찾아서』라는 책을 보면 전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블록샴은 1890년대 태어난 사람으로 최면을 통해 사람들의 전생을 기억하게 하여, 20년 동안 400명의 전생의 기억을 기록합니다.

책에는 제인 에반스 부인의 일곱 생의 전생이 나옵니다. 그녀는 로마 제국 통치하의 영국에서 교사의 아내로 살았습니다. 이 것은 서기 약 286년 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전생은 영국 요크에서 유대인 여성으로서 살았습니다. 서기 1190년 경에 사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전생은 프랑스 대부호 자크 꿰르란 사람의 하녀로서 살았고 1451년에 사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스페인 캐서린 공주시대 하녀로서 살았고, 그 다음은 앤 여왕 재위 시 런던의 바느질 품팔이 소녀로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은 미국의 메릴랜드 주 수녀로서 살았고 1920년 경에 사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1939년 현생으로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전생의 이야기를 할 때 그 당시의 언어로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전생에서 기억이 역사적 사실과 흡사한 부분이 많았고 역사적으로 고증이 안 된 것도 사학자들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인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전생에 유대인 부인이었던 어느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블록샴이 최면을 걸자 그 여인은 말합니다. “나는 12세기 어느 유대인의 부인 레베카이다. 남편은 값비싼 법복을 입지만 그 옷이 비싼 것처럼 보이면 안된다. 사람들은 우리집을 탐내고 유대인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가슴에 원형의 노란색 뱃지를 달아야 한다.” 그 말을 듣고 블록샴이 가슴에 뱃지를 달아야 하니 불쾌하지 않느냐고 묻자 여인은 불쾌하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전생에 중세 프랑스의 하녀였던 아리송이라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아리송은 최면을 걸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아직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매우 흥분해 있다.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라고 한다.” 블록샴이 그 미인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러자 아리송은 “사람들은 그녀가 프로망 트(Fromenteau)에서 왔다고 한다.” 블록샴이 그녀는 특별한 손님이냐고 묻자 아리송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블록샴이 왜 특별한 손님이냐고 묻자 아리송은 그녀가 왕의 정부라고 말합니다. 블록샴은 어느 왕의 정부냐고 묻자 아리송은 잠시 말이 없다가 망설이듯 ‘샤를’(샤를 7세)이라고 말합니다. 블록샴이 프랑소와냐고 묻자 아리송은 “아니다. 샤를 발루아이다. 그는 아네스 소렐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블록샴이 확인차 “아네스 다음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리송은 “소렐이다. 아네스 소렐은 프로망트의 아가씨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어 아리송은 아네스 소렐에 대해 묘사합니다. “그녀는 참 아름답다. 그리고 그녀는 고운 옷을 입었다.” 블록샴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반달과 별무늬가 있는 초록색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와 가장자리를 모피로 장식한 융단으로 된 외투를 입고 머리채를 썼다. 그녀는 왕을 대신해서 우리 주인에게 돈을 빌리러 왔다고 했다.”고 아리송이 대답했습 니다. 그 말을 듣고 블록샴이 “당신 주인은 왕에게 돈을 빌려주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리송이 “그렇다. 주인은 전 에도 왕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블록샴은 그 말을 듣고 “당신 주인은 작위가 있는 귀족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아리송은 “그저 대상인 퀘르라고 부른다.”라고 대답했고, 블록샴은 “왕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빌려주었는가?”라고 묻자 아리송은 “2000 에퀴돌을 빌려주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에퀴돌은 1395년부터 프랑스에서 통용되었던 금화입니다. 샤를 7세의 생년이 1403년이고 재위 기간이 1422년부터 1461년까지이기 때문에 시기적으로도 맞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믿기 힘든 전생이지만 내가 직접 체험해보면 그것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통섭불교]

* 다시 밝히는 응신(應身)과 보신(報身) 

 

[앞에서 응신(應身)은 범부(凡夫) 이승(二乘)이 보는 불신(佛身)이고, 보신(報身)은 보살(菩薩)이 보는 불신임을 설한바 있다. 그러한 응신(應身)과 보신(報身)을 여기에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보고 보이는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이승(二乘)이 보는 응신은 별도의 특별한 설명이 없으나, 범부(凡夫)가 보는 응신(應身)은 범부가 육도(六道)로 윤회된 상태에서 보는 것이므로 거기에서 보는 응신은 그만큼 차이가 있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처(生處)와 관련된 거친 몸으로 보인다 하여 추색(序色)의 응신(應身)이라 한다. 성문(聲聞) 연각(緣覺) 등 이승(二乘)은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것이므로 거기에서 보는 응신불(應身佛)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나 범부는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육도에 윤회하는 것이므로,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 등 삼악도(三惡道)에 태어난 중생은 그에 상응한 응신불(應身佛)을 본다. 따라서 축생이 보는 응신은 축생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 응신은 인간이 생각하는 인상의 불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범부가 생처(生處)에서 보는 응신(應身)은 거칠고 조잡한 몸인 추색(序色)일 수밖에 없다.
이를 본문에서는 '범부가 보는 바는 추색이며, 육도에 따라 각기 보는 바가 같지 않고, 여러 가지 다른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다. 따라서 지옥에 나타나는 응신(應身)은 지옥의 고통을 벗어날 수가 없고, 인간으로 태어난 석가불(釋迦佛)조차도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응신불(應身佛)은 즐거움만을 받는 수락상(受樂相)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범부가 보는 응신(應身)은 추색(序色)이고, 육도(六道)에 따라 나타나는 모습이 다르며, 수락상(受樂相)이 아닌 고(苦)도 있다는 것으로서, 이 불(佛)을 응신(應身)이라고 부른다.-전종식]

 

復次初發意菩薩等所見者(부차초발의보살등소견자)

다시 다음에 초발의보살 등이 보는 것은 

以深信眞如法故(이심신진여법고) 少分而見(소분이견)

진여법을 깊이 믿기 때문에 약간의 분야를 보아,

 

[元曉 : 以深信眞如法故 少分而見이란 십해 중에 인공문(人空門)에 의하여 진여의 이치를 보는 것과 같다. 이는 비슷하게 안 것이므로 少分而見이라 하였다.

* 지운 : 십해(十解)의 보살의 경지에 든 사람은 인공문(人空門)에 들어서 조금만 본다.-물처럼바람처럼]

 

[보신(報身)도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 지전(地前)의 보살이 보는 보신과, 초지(初地)에서 십지(十地)까지의 지상(地上)의 보살이 보는 보신(報身)과의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십주위(十住位)에 있는 초발의보살을 비롯하여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등 삼현위(三賢位)에 있는 보살이 보는 보신(報身)은 신(信)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그들은 자기의 본성이 진여(眞如)이고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을 기초로 하여 진여를 유추(類推)하여 보기 때문에 그들은 그 진여를 소분(少分)본다=少分而見이라 말한다. 그들은 유식(唯識)의 이(理)를 이론(理論)으로는 알고 있기 때문에 긴 수행(修行)을 통하여 보신불(報身佛)을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는 보신은 신체의 색상이나 장엄 등 모든 것들이 상주(常住)하고 있는 진여를 바탕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無來無去=온다거나 간다'고 하는 것들이 아니고, 또한 보신의 색신(色身)은 그 크기에 있어서 한이 없는 것이므로 '離於分齊=분재(分齋)를 떠나 있다고 말한다. 그 보신(報身)은 唯依心現=보살의 마음에 의지하여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것이 不離眞如=진여(眞如)를 떠나있는 것이 아님을 그들은 알고 있다.]

 

知彼色相莊嚴等事(지피색상장엄등사) 無來無去離於分齊(무래무거리어분제)

그 보신의 색상과 장엄 등의 현상이 옴도 없고, 감도 없어, 분제를 여의어, 

唯依心現不離眞如(유의심현불리진여)

오직 마음의 분별에 의지하여 나타났을 뿐, 진여를 여의지 않았음을 안다.

然此菩薩猶自分別(연차보살유자분별) 以未入法身位故(이미입법신위고)

그러나 이 보살은 오히려 스스로 분별할 뿐이지 아직은 법신의 계위(지위)에는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然此菩薩猶自分別 以未入法身位故=그러나 이들 보살은 아직 분별이 남아있어 초지(初地) 이상에서 보는 법신(法身)의 위(位)에는 들어가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동일하게 보신을 보는 것이지만 그 보신(報身)은 지상(地上)의 보살이 보는 보신과는 뒤떨어진다.] 

 

[憨山 : 이 보살은 삼해초심(三解初心)으로부터 본각 진여로 업식을 훈습하여 유식관을 닦는다. 그래서 삼현십지를 지나 보살의 구경삼매심 가운데서 보이는 불신이 보신의 미세한 모습인 것이다. 이는 실로 업식심으로 나타났을 뿐 마음 밖의 외진으로부터 찾아온 것이 아니다. … 어떤 사람은 이 문제를 두고 ‘부처님이 중생이 처한 상황을 따라 불신을 나타낸다.’고 하나, 이 의미는 아닌 것이다.]

 

若得淨心(약득정심) 所見微妙(소견미묘) 其用轉勝(기용전승)

만약 정심지를 체득하며, 보는 바가 미묘하고, 그 작용은 더욱 수승해지며,

乃至菩薩地盡見之究竟(내지보살지진견지구경)

나아가 보살지가 다하여 보는 것이 구경이다.

 

[만일 보살이 초지(初地)인 정심지(淨心地)에 들어가면 불(佛)의 법신을 보게 되는 것이므로 신(信)의 위치에서 증(證)의 위치에 나아가는 것이 되고 거기에서 보이는 보신은 한층더 미묘해진다. 따라서 그 보신의 작용도 신위(信位)에서 보는 것보다는 더욱 뛰어난 것이므로 '전승(轉勝)'하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초지인 정심지로부터 제 10지인 보살진지(菩薩盡地)에 이르는 동안 보는 바 보신(報身)은 더욱더 수승(殊勝)해지고 마침내 최후의 제 10지를 넘어서면서 궁극적 보신(報身)을 보게 된다.] 

 

若離業識則無見相(약리업식즉무견상) 

만약 업식을 여의면 볼 만한 모습이란 없는 것이니, 

 

[궁극적 보신을 본다는 것은 마침내 성불(成佛)하게 된 것을 의미하므로 업식(業識)이 완전히 소멸되어 진체(眞體)에 귀입(歸入)한 것이어서 전식(轉識)과 현식(現識) 또한 소멸된다. 그렇게 되면 보는 주관도 보이는 객관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므로 견상(見相)이란 있을 수 없다.]

 

以諸佛法身(이제불법신) 無有彼此色相迭相見故(무유피차색상질상견고)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이런 저런 현색의 모습으로 상견함이 없기 때문이다.

無有彼此色相迭相見故 : 피차(彼此)라고 한 것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분리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상대하여 봄이 있다는 것.

* 元曉 : 若得淨心 이하는 지상에서 보는 바를 나타낸 것이며, 若離業識則無見相은 업식에 의하여야 전상과 현상이 있기 때문에, 업식을 여의면 곧 보는 상이 없는 것이다.

 

* 지운 스님의 설명

부처 법신으로 보임
보살, 연각, 성문 보신으로 보임(수행 정도에 따라 보임)
천상,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 응신으로 보임

* 위의 표에서 연각과 성문은 아래 칸인 응신에 대응하도록 되어야 함.

* 《金剛經》威儀寂靜分第二十九에서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며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설한 바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라는 것은 온 바도 없거니와 간 바도 없으므로 여래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지운 :《圓覺經》普眼菩薩章 第三 : 몸 소멸 ⟶ 마음 소멸 ⟶경계소멸(아리야식 경계상 소멸) ⟶ 경계가 소멸했다는 생각 소멸(아리야식 능견상 소멸) ⟶ 비환불멸(非幻不滅:원각, 적멸)]

 

問曰(문왈) 若諸佛法身離於色相者(약제불법신리어색상자)

묻나니, 만약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색상을 떠난 것이라면, 

云何能現色相(운하능현색상)

어떻게 색상을 나타낼 수 있는가?

 

[고순호 : 色相을 보신과 응신이라고 보았다. “법신은 색상을 떠난 것인데 어떻게 색상인 보신과 응신으로 나타낼 수 있는가?”라는 뜻이다.]

 

[제불(諸佛)의 법신(法身)은 평등한 진여이므로 다불(多佛)이면서 동시에 일불(一佛)이고, 따라서 법신이 피차(彼此)의 색상을 서로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그와 같이 제불(諸佛)의 법신이 색상(色相)을 떠나있어 서로 볼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어찌하여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이 색상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答曰(답왈) 卽此法身是色體故(즉차법신시색체고) 能現於色(능현어색)

답하나니, 이 법신이 곧 색상의 본체=色體이기 때문에 능히 색상=色을 나타낼 수 있다.

 

[고순호 : 법신이 보신과 응신의 본체이기 때문에 능히 보신과 응신으로 나타낸다는 뜻이다.]

 

[그에 대하여 본문은 '이 법신은 색상의 본체이기 때문에 능히 색상을 나타낸다'고 대답한다. 여기에서 색심불이(色心不二)의 진리를 설하게 된다. 몸과 마음은 본래부터 구별되는 둘이면서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색심불이(色心不二)라는 불이(不二)는 둘을 인정하면서, 그 둘을 초월하는 것이다. 단순한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와 같이 법신(法身)은 색상을 떠나 있으면서, 보신(報身) 응신(應身)의 색상을 나타내는 이유는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법신 그 자체가 보신, 응신의 본체이고 본래부터 색심불이(色心不二)이기 때문이다.]

 

所謂從本已來(소위종본이래) 色心不二(색심불이)

이른바 본래부터 색과 심이 둘이 아니며, 

以色性卽智故色體無形(이색성즉지고색체무형) 說名智身(설명지신)

색의 본성(자성)이 곧 지혜=智이기 때문에 색상의 본체=色體는 형상이 없는=無形임을 설하여 지신이라 이름한다.

 

[고순호 : 色心不二는 일반적으로 색법과 심법이 본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니 유심(唯心)과도 같은 뜻의 말인데, 여기에서의 色心不二(색심불이)는 흐름으로 보아 색은 보신과 응신을 말하고 심(心)은 일심진여인 법신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심의 작용을 지(智)라고 하면 색성(色性)이 곧 지(智), 색성즉지(色性卽智)가 된다.]

 

[더 나아가 진여(眞如)의 본성은 지(智)이고, 이 지(智)가 바로 색의 본성이므로 '색성(色性)이 곧 지(智)'라고 설하는 것이다. 보응(報應) 두 색신(色身)의 본성이 법신(法身)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색즉심(色卽心)이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色體無形 說名智身, 색(色)의 체(體)가 무형(無形)임을 설하여 지신(智身)이라 이름한다.' 이것은 보응이신(報應二身)이 나타나는 근거가 바로 지신(智身)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법신(法身)은 일체처에 두루하고 있으므로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이 나타나는 본체에는 항상 지신(智身)이 있다. 그러므로 '지성(智性)이 바로 색(色)'이라고 설해진다.]

 

[문답을 통해 다시 진여법신의 색심불이(色心不二)의 궁극적인 양태와 관계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즉, 법신진여(法身眞如)가 색상을 여의면 모습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묻고 답한 것입니다. 묻길,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색상을 여의었다면 어떻게 보신(報身)과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의 색상을 나타낼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이에 답하길, "바로 이 법신이 색상자체이기 때문에 색상을 나타낼 수 있다"고 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색법(色法)과 심법(心法)이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색법의 자성이 법신의 본각지(本覺智)에 서로 맞붙어 있어서 색상의 자체인 법신의 본각지엔 보신과 화신인 색상의 형상이 없기 때문에 이를 智身=지혜의 몸이라 설명하였습니다.-수선]

 

智性卽色故(이지성즉색고) 說名法身遍一切處(설명법신편일체처)

지의 성질=智性이 바로 색인 까닭에. 설하여 법신이 모든 곳=一切處에 두루 한다고 이름한다.

所現之色無有分齊(소현지색무유분제) 隨心能示十方世界(수심능시시방세계)

나타내는바 색상=色은 분제가 없기에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능히 시방세계의 

無量菩薩(무량보살) 無量報身(무량보신) 無量莊嚴(무량장엄)

무량한 보살과, 무량한 보신, 무량한 장엄을 나타내고, 

各各差別(각각차별) 皆無分齊(개무분제) 而不相妨(이불상방)

각각의 차별이 다 분제가 없으며, 더욱이 서로가 방해하지 않는다.

此非心識分別能知(차비심식분별능지) 以眞如自在用義故(이진여자재용의고)

이는 심식의 분별로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여의 자재한 작용=用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체처에는 법신이 두루 미치고 있으므로 그에 의하여 나타나게 되는 색신(色身)은 유한(有限)하지 않는, 분재(分齋)가 없는 것이지만, 범부는 그것을 유한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와 같이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유한, 무한의 모습으로 법신이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나타나는 것이지만, 거기에서 무량한 보살(菩薩)과 무량한 보신불(報身佛), 그리고 무량한 정토(淨土)의 장엄(莊嚴)을 나타내게 되고, 각각 차별이 있으나, 그것이 어떠한 고정적인 구별이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크기에 제한이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것들이 서로 방해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이같은 보응(報應) 이신(二身)이 나타나는 신비한 작용은 범부의 차별적 망분별(妄分別)의 심식(心識)으로는 능히 알 수가 없는 것이며, 그것은 모두가 진여(眞如)의 자재(自在)한 작용이기 때문이다.]

 

[또 지성(智性)이 색상에 서로 맞붙어있기 때문에 법신은 그 작용인 보신과 화신의 색상이 일체의 모든 곳에 두루 가득할 때 마치 물이 널리 가득하게 모든 파도 가운데 있는 것처럼 일체의 처소에 두루 하다고 하였습니다. 법신인 진심이 색상의 차별에 걸림이 없이 두루 충만하므로 그 진심의 작용으로 나타난 색상도 역시 원융무애하여 색상과 진심이 상대적으로 나뉘는 분야의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 마음을 따라서 시방세계의 한량없는 보살과 한량없는 보살이 감득하는 한량없는 보신과 한량없는 국토의 장엄을 나타내는 이 모든 색상이 각각의 차별이 있지만 모두가 상대적으로 나뉘는 분야의 한계가 없어 서로가 방해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망상의 심식(心識)으로 분별해서 알 수 있는 경지는 아니고 일심진여가 자유자재하게 차별의 색상으로 작용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대승의 정의를 명확하게 제시한 가운데 큰 문단의 과목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처음엔 생멸의 동요와 진여의 고요함이 한결같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어 고요한 일심진여에서 생멸의 동요를 일으켜, 여기 진여생멸의 두 문에 이르러서 그 분별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다음 두 번째는 생멸의 색상을 하나로 화합하여 실제의 진여로 들어가 동(動)과 정(定)이 둘이 아님을 나타내어 논합니다.]

 

삼대(三大)의 내용-전종식

* 用(용)의 二種(이종), 應身(응신)과 報身(보신)

此用有二種(차용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작용=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일자) 依分別事識(의분별사식) 凡夫二乘心所見者(범부이승심소견자)

첫째는 분별사식을 의지하여 범부와 이승의 마음에 보이는 것을 

名爲應身(명위응신) 以不知轉識現故(이불지전식현고)

이름하여 응신이라 하니, 전식의 나타냄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見從外來(견종외래) 取色分齊(취색분제) 不能盡知故(불능진지고)

밖으로부터 온 것이라 보고, 색상의 한계=色分齊를 취하지만, 능히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色分齊 : 보이는 차별상의 내용이나 정도.

 

[지운 : 기도나 수행 중에 부처나 보살이 나타나면 범부나 이승은 그것이 부처님의 진여가 아리야식의 전식으로 나타난 것인 줄 모르고 밖에 따로 있어서 온 줄 안다. 이를 응신이라고 한다.

* 元曉 : 依分別事識이란 범부와 이승은 오직 식(識)뿐임을 알지 못하고 바깥의 경계에 있다고 계탁하는 것이다. 불신을 보고서 마음 밖에 있다고 생각함은 의식(意識)의 뜻에 따르는 것이니 그래서 분별사식에 의해 본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전식에 의해 색상을 나타낸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以不知轉識現故 見從外來라고 한 것이다.

* 達磨 : 《少室六門》<悟性論> - 붓다에는 삼신이 있는데, 화신과 보신과 법신이다. 만약 중생이 늘 선근을 실천하면 화신이 나타나고, 지혜를 닦으면 보신이 나타나고 무위를 깨치면 법신이 나타난다. … 하급이 지혜를 가진 사람은 무릇 복력을 일으켜 화신불만 보고, 중급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번뇌를 단제하여 무릇 보신불만 보고, 상급이 지혜를 가진 사람은 보리를 증득하여 법신불만 보지만, 상상(上上)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안으로 원적의 경지를 비추어보아 본래 마음이 곧 붓다임을 발명한 까닭에 분별 마음을 통해서 붓다를 터득하지 않는다.

* 憨山 : 범부와 이승은 삼계만법이 심식의 그림자임을 모르고 마음 밖에서 외진(外塵)을 헤아린다. 이는 내 마음의 육식의 분별이다. 그래서 부처를 보는 것도 역시 외진으로 찾아오게 되니, 칠식의 분별지상에서 나타난 미세한 모습인 보신임을 모르기 때문에 쉽게 감지할 수 있는 부처의 모습인 응신만을 보게 된다.-물처럼바람처럼]

 

[불타는 법신(法身)과 보신(報身) 그리고 응신(應身) 등 세 가지 몸이 갖추어져 있다고 설해진다. 진여(眞如)의 자체상(自體相)은 인격화(人格化)된 법신(法身)을 의미한다고 설명한 바 있으며, 그중 체대(體大)는 법신의 본질 그 자체, 즉 진여이고 상대(相大)는 법신이 갖추고 있는 덕성, 즉 진여의 지(智)를 말한다. 따라서 제불여래(諸佛如來)의 실재(實在)는 법신지신(法身智身)뿐으로서, 거기에는 세간의 경계는 없는 것이지만, 진여를 깨달은 불타가 세간(世間)속에 서게 될 때는 제1의제(第一義諦)인 법신의 입장으로는 있을 수가 없다. 자타(自他)를 구별하는 중생을 상대로 할 때는 그것을 인정한 위에서 진리를 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중생의 상황, 즉 중생의 견문(見聞)에 따라 그들 속에 나타날 때는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본 절에서는 이것을 상설(詳說)하는 부분이다.

제불(諸佛)의 용대(用大)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중생의 분별사식(分別事識)으로, 보고 듣는 불신(佛身)이다. 분별사식은 이미 설명한 의식(意識)의 다른 이름으로서, 외계(外界)가 보이는 바와 같이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분별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범부의 일상적 판단과 인식을 말한다. 이러한 분별사식(分別事識)의 입장에서, 자기의 인식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범부와,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등 이승(二乘)이다. 그들이 보는 불타를 응신불(應身佛)이라 일컬은다. 응신(應身)은 중생의 능력에 따라 모습을 나타내는 불신(佛身)이다. 화신(化身; Nirmana-kaya)이라고도 말한다.

범부, 이승은 유식(唯識)의 이(理)를 알지 못하므로 자기가 인식하는 대상 모두가 마음의 심층(深層) 작용인 전식(轉識)이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전식(轉識)은 이미 오의(五意)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가운데의 하나로서 마음이 무명(無明)에 의하여 기동(起動)하여 주객(主客)으로 분극화(分極化)한 때의 주관적 식(識)작용을 말한다. 이것이 분별사식(分別事識)이 보는 불신(佛身)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응신(應身)은, 주관(主觀)적 전식(轉識)이 보는, 객관(客觀)적 현식(現識)이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범부, 이승(二乘)은 전식(轉識)이 인식한 외계(外界)가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색분재(色分齋), 즉 불신(佛身)의 크기를 정하고, 32상(相) 80종호(種好) 등과 같은 불타의 상호(相好)를 주관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불타가 외계에 실재로 존재하여, 불타에 의하여 자기가 인도(引導)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진여의 무차별적 큰 작용인 용대(用大)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전종식]

 

[앞에서 말한 용대(用大)는 부처님의 입장에서 논한 것이고, 여기서는 중생의 입장에서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을) 둘로 나누어 논하였습니다. 먼저 본래 법신(法身)의 작용은 오직 식(識)일뿐임을 모르고서 밖의 육진(六塵)이 실제로 있다고 헤아리는 분별사식을 의지하여 범부와 이승(二乘)의 사람이 마음으로 보는 법신의 작용이 있는데, 이를 분별사식의 분별로 보는 응화신(應化身)이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보신의 미세한 모습은 전식(轉識)에서 나타난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마음 밖의 육진에서 온 것으로 보고 나타난 색의 한정된 경계를 취합니다. 그 이유는 몸과 마음은 부분적인 한계가 없다는 것을 끝까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수선]

 

二者(이자) 依於業識(의어업식) 謂諸菩薩從初發意(위제보살종초발의)

두 번째는 업식을 의지한 것으로, 이른바 모든 보살이 처음 뜻을 발함=初發意로부터 

乃至菩薩究竟地心所見者(내지보살구경지심소견자) 名爲報身(명위보신)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보이는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라고 하며,

身有無量色(신유무량색) 色有無量相(색유무량상) 相有無量好(상유무량호)

몸에는 한량없는 색신이 있고, 색신에는 한량없는 모습(형상)이 있으며, 모습(형상)에는 한량없는 상효=好가 있다.

 

[은정희 : 相好(상호) - 부처가 갖추고 있는 여러 가지 신체적 특징들이다. 相은 몸에 특별히 잘생긴 것을 말하고, 好는 相 중에 자세한 모습이다. 이 상호(相好)가 완전하여 하나도 모자람이 없는 것을 불신(佛身)이라고 한다.

* 元曉 : 依於業識이란 십해 이상의 보살은 오직 마음일 뿐 바깥의 경계가 없는 뜻을 잘 알아서 업식의 뜻을 따라 불신을 보기 때문에 업식에 의해 본다고 한다. 그러나 이 보살은 그 분제(分齊)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곳에 따라 한계가 없으며… 훼손하지도 않고 잃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장애 없는 불사의한 일이 모두 육도의 심행의 훈습 및 진여의 불사의훈(不思議熏)으로 말미암아 성취한 것이므로 이런 뜻이므로 보신이라 하며, 그러므로 (아래 문장에서) 具足無量樂相故 說爲報이라 하였다.]

 

[둘째는 업식(業識)이 보는 불신, 즉 보신(報身)이다. 업식은 무명에 의하여 일심(一心)이 움직인 가장 미세한 식(識)이다. 거기에는 아직 전식(轉識)과 현식(現識)의 분극(分極)이 일어나지 않은 그 이전의 식작용(識作用)이다. 이것이 업식이라 불리는 것은 과거의 업에 의한 순수 경험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깊은 심층(心層)에서 불신을 보는 것은 보살(菩薩)이다. 초발의 (初發意)에서 보살진지(菩薩盡地)까지의 보살들은 모두가 유심(唯心)의 이(理)를 알고 있어, 자기가 보는 것은 오직 마음의 인식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식(轉識) 현식(現識)작용 그 이전에서 불신(佛身)을 보는 것이다. 이들 보살이 보는 불신을 보신(報身; Sambhoga-kaya)이라 한다.
이같이 보신은 보살시 십지(十地) 수행의 결과 번뇌를 끊고 깨달음의 지혜를 얻은 결과로서 나타난 불신이므로 성불(成佛)의 행을 완성한 불타라는 의미이다.
주관과 객관이 대립된 인식에서 보이는 불타는 유한(有限)의 불타이지만, 이같은 주객의 대립이 사라진 업식(業識)에 반영되는 불타는 온갖 공덕을 갖추고, 그 공덕에 의하여 장엄되어 있는 불타이다. 따라서 이 보신(報身)은 무량한 색(色)이 있어, 크기에 한정이 없으며, 32상(相) 80종호(種好) 같은 유한한 모습으로 한정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보신불(報身佛)의 '무한한 신체(色)'에는 또한 '무량한 상(相)'이 있고 '무량한 호(好)'가 있다. 따라서 응신불(應身佛)에서 설해지는 유한(有限)한 신체의 크기나, 32상(相), 80종호(種好)와 같은 유한한 색(色)과 상(相)과 호(好)와는 달리, 보신불(報身佛)은 무량색(無量色), 무량상(無量相), 무량호(無量好)의 한량없는 불(佛)이다. 

호(好)는 신체에 갖추어져 있는 부수적 장업(莊嚴)을 의미한다. 즉 손톱의 색이 적동색(赤銅色)이라던가 손가락이 풍만하다는 등의 부수적 상(相)을 말한다. 32상(相)은 머리에 가마가 있다던가 두발이 오른쪽으로 감겨 있다던가, 미간(眉間)에 백호(白虎)가 있다던가 하는 것이다. 범부나 이승(二乘)이 보는 불타는 유한한 색(色)과 상호(相好)를 갖추고 있으나, 보신(報身)은 그들이 볼 수 없는 무량한 색(色)과 상(相)과 호(好)를 갖춘 불타이다. 그래서 보신불(報身佛)이 사는 바 정토(淨土)도 한량이 없으며, 무량한 여러 가지 장엄으로 장식되어 있다. 화엄경에서 나오는 비로자나 불(佛)의 정토인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가 바로 그것이라고 정영소(淨影疏)가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보신불(報身佛)은 우주법계에 가득한 무량한 불타이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고, 따라서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시간에 나타나는 그러한 불타가 아니다. 보신불(報身佛)은 보살(菩薩)이 관(觀)하는 바에 따라 나타나기 때문에 유한(有限)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것이며,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도 다하여 없어지는 일이 없는, 분재(分齋)의 상(相), 다시 말하면 유한(有限)한 상(相)을 떠나 있어, 보살의 기(機)에 응하여 끊임없이 나타나 상주하고 있으므로, 훼손되거나 소실(消失)되는 일이 없는 불타이다.
보신불(報身佛)이 이와 같이 보살의 기(機)에 응하여 끊임없이 나타나는 무한(無限)의 상(相)이 있는 것은, 번뇌를 완전히 차단한 무루청정(無漏淸淨)의 바라밀(波羅蜜)을 행한 불타의 훈습력에 의하여, 그 공덕이 이 보신불(報身佛)을 보는 보살에게 시각(始覺)의 내훈(內熏)으로 작용하고, 동시에 본각(本覺)으로부터 나오는 신비하고 부사의(不思議)한 훈습력이 함께 합하여, 성취되어 나타나는 불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불타는 순수선(純粹善)의 수행결과 얻어지는 무량한 안락(安樂)의 상을 갖추고 있으며, 그 때문에 이 불타를 과거의 수행 결과, 과보로 나타나는 불타라 하여 보신(報身)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십해(十解) 이후로 법신보살이, 심식(心識)일 뿐 외진의 색상(色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업식(業識)에 의지하여 보는 불신의 작용입니다. 이는 모든 법신보살들이 처음 뜻을 발한 십해(十解)로부터 보살의 구경지인 법운지에 이르기까지 허망한 마음으로 보는 불신의 모습을 보신(報身)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물질과 불이(不二)인 법신(法身)은 한량없는 색신(色身)이 있고, 법신(法身)을 의지한 색신은 한량없는 공덕상(功德相)을 갖추었으며, 그러한 공덕상엔 한량없는 32상(相)과 80종호(種好)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正報)의 삶의 주체인 불신(佛身)이 안주하여 의지하는 과보토(果報土)의 의보(依報)인 삶의 환경도 한량없는 갖가지 공덕으로 장엄(莊嚴)되었다는 것입니다.]

 

所住依果(소주의과) 亦有無量種種莊嚴(역유무량종종장엄)

머무는 의보의 과보도 또한 한량없는 갖가지 장엄이 있으며,

隨所示現(수소시현) 卽無有邊(즉무유변) 不可窮盡(불가궁진) 離分齊相(리분제상)

나타나는 바에 따라 곧 끝이 없어 궁극에 다할 수가 없고, 한정된 모습=分齊相을 여의었기에

隨其所應(수기소응) 常能住持(상능주지) 不毁不失(불훼불실)

그 상응함을 따라 항상 주지하면서 훼손하지도 않고 퇴실하지도 않는다.

如是功德(여시공덕) 皆因諸波羅蜜等無漏行熏(개인제바라밀등무루행훈)

이와 같은 공덕은 다 모든 바라밀 등의 무루한 수행의 훈습에 의한 것이며, 

及不思議熏之所成就(급불사의훈지소성취) 具足無量樂相故(구족무량락상고) 說爲報(설위보)

불가사의한 훈습으로 인해서 성취한 것으로 한량없는 안락한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에 설하여 보신이라고 한다.

又爲凡夫所見者(우위범부소견자) 是其麤色(시기추색) 隨於六道(수어륙도)

또 범부에게 보여지는 이것은 바로 그 거친 현색(대상)으로 육도를 따라서

各見不同(각견불동) 種種異類(종종리류) 非受樂相(비수락상) 故說爲應(고설위응)

각각 보는 것이 동일하지 않아, 갖가지 다른 무리가 안락한 모습을 수용하지 못하므로 설하여 응신이라고 한다.

 

[보이는 대상은 불신(佛身)이다. 범부는 여실히 보지 못하고 육도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며, 다 같이 낙상(樂相)을 받는 것이 아니며, 보는 자에 응하여 다르게 나타나므로 응신이라고 한다.

부처가 보이는 것은 보는 사람의 식(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일 뿐 여래 법신은 늘 안주하여 훼손되거나 잃는 것이 없다. 보신불로 보이는 것도 수행자의 수행의 결과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므로 보신이라고 한다.

* 元曉 : ≪攝論≫의 주장에 의하면 지전(地前 : 10지 전)에서 보는 것을 변화신이라 하고, 지상에서 보는 것을 수용신(受用身)이라 하였다. 이제 이 론에서는 범부와 이승이 보는 육도 차별의 상을 응신이라고 하고, 십해 이상의 보살이 보는 분제를 여읜 색을 보신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같지 않은 것은 법문이 한량없어 오직 한 길만이 아니므로 곳에 따라 시설(施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攝論≫ 에 지전의 흩어진 마음으로 보는 분제가 있는 상을 말하기 때문에 화신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 론에서는 보살의 삼매로 보는 분제를 여읜 상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보신에 속하는 것이니 이런 도리가 있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 은정희 : 변화신 - 3신(자성신, 수용신, 변화신) 중의 하나. 이승과 범부를 교화하기 위해 성소작지의 힘에 의해 화현한 불신(佛身)]

 

[이상의 설명에서 응신(應身)과 보신(報身)을 요약하면, 응신(應身)은 범부, 이승(二乘)의 전식(轉識)에 의하여 분별사식(分別事識)으로 유한(有限)한 불타를 보는 것이 되고, 보신(報身)은 보살(菩薩)이 그들의 수행의 결과로서 업식(業識)에 의하여, 과거의 순수 경험적 인식으로 보는 무한(無限)한 불타가 된다.
이와 같이 '기신론'이 설하는 응신(應身)과 보신(報身)은 중생의 망심(妄心)에 나타나는 불타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에 대응하는 객관적 실재(實在)로서의 응신과 보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객관적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은 진여(眞如)의 용대(用大) 뿐이며 그것은 상이 없는 무상(無相)일 따름이다.
이에 대하여 법장(法藏)의 의기(義記)에는 '만약 이 해석에 의한다면, 용대(用大)는 스스로 마음속에 있는 진여의 작용에 불과하다. 어찌하여 이것을 불(佛)의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이라고 말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답하여, '중생의 진심(眞心) 그것이 제불(諸佛)의 체(體)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이상의 해석을 확인하고 있다. '기신론'에서는 중생의 진심(眞心)과 불타의 체(體)는 평등무이(平等無二)이고, 일체가 진여(眞如)라고 보고 있는 것이므로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보살을 따라 나타내는 불신이 바로 끝없어 끝까지 다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이 보살은 색(色)·심(心)이 나뉘는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업행(業行)을 따라서 불신이 감응하여 항상 머물면서 삼재(三災, 불의 재난·물의 재난·바람의 재난에 초선천 또는 제삼선천이 무너지는 것)에도 무너지지 않고 유실되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은 정보(正報)와 의보(依報)의 공덕상은 다 온갖 육바라밀 등의 번뇌가 없는 청정한 진리를 수행한 훈습(熏習)과 불가사의한 본래 깨달은 내훈(內熏)으로 성취하여 한량없는 안락한 공덕의 모습을 빠짐없이 만족하였기에 보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범부가 보는 불신은 거친 물질의 현상으로 육도(六道)의 중생이 각기 보는 것이 같지 않아서 그것을 따라서 갖가지 다른 종류의 중생이 안락함을 받지 못하는 불신의 모습으로 감응하기 때문에 이를 응신(應身)이라고 하였습니다.]

 

쉬어가는 곳;

업의 작용은 어떻게 일어날까요?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 당시 코살라국의 왕이었습니다. 파세나디왕은 부처님의 후원자 였 습니다. 그는 왕으로서의 권력과 쾌락을 즐겼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보시와 지계 그리고 다른 공덕을 닦은 결과였습니다. 그는 과거에 지은 공덕으로 부처님을 만났고 부처님의 후원자가 됩니다. 하지만 지혜를 닦는 통찰명상을 하지 않았으므로 지혜가 충분하지 않아서 확실하게 법을 볼 수가 없었는데, 그는 도과의 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분입니다. 비록 경전에는 부처님과 법에 관하여 토론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그것은 단지 개념적 수준에 불과한 피상적인 토론이었을 뿐입니다.

통찰명상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하는 것으로 정념 정정입니다.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 옆에서 많은 후원을 했음 에도 불구하고 지혜를 닦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도과도 얻지 못했습니다.

  아자타삿뚜 왕은 예류자[수다원]로 부처님과 승가에 아주 큰 후원자였던 빔비사라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기 위하여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밤에 부처님을 찾아오자, 부처님께서는 수행과경이라는 위대한 가르침을 설하였습니다. 왕은 그의 아버지처럼 예류를 얻기 위해 필요한 바른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지만 이번 생에서 공덕을 닦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과보로 내생에 지 옥에 태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자타삿뚜 왕은 도과를 성취할 수 없었고 범부로서 생을 마쳤습니다.

  사띠 비구의 이야기는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과거에 지은 공덕 덕분에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비구로서 계를 받고 계, 정, 혜 삼학을 닦았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과거 생에 대하여 비구들에게 설하실 때 사띠 비구는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한 생이 끝나면 다음 생으로 마음이 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과거의 해롭고 유익한 업의 과보를 경험한 어떤 마음이 생에서 생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충분히 닦지 않았기 때문에 법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현명한 비구들이 자기 주변에 많이 있고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침을 주신다고 해도 사띠 비구는 12연기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하다나 영주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도 봅시다. 그는 바라나 시의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주 부유한 집안의 처녀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를 지키지 않고 전 재산을 마시고 치장하고 향수와 노래, 음악과 춤에 탕진하여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는데 그와 그의 부인은 이미 늙은 몸이었습니다. 그들은 늙은 나이로 이시빠타나 수도원에 음식을 구걸하러 갔다가 불교를 접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아난 존자에게 만약 그가 젊었을 때 사업을 열심히 했다면 지금은 바라나시의 재정관이 되었을 것이고, 젊었을 때 수행을 했다면 지금은 아라한 과를 얻었을 것이며 그의 부인은 불환자[아나함]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밀린다왕문경에서도 밀린다 왕이 묻습니다. “당신들 수행자들이 젊었을 때부터 수행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왜 그런 가?” 그러자 나가세나 비구가 대답합니다. “왕이시여. 전쟁에서 이기는 비결이 뭡니까?”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군량을 비 축해놓고 성을 쌓아놓고 군대를 미리 훈련시켜 놓는 것이다. 갑자기 적이 공격해 와도 이길 수 있다.” “수행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항상 준비가 되어 있으면 언제 죽음이 찾아와도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젊어서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철학자 사짜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 지은 공덕 때문에 부처님을 만나서 법에 대하여 토론하고 부처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혜를 닦음이 불충분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에게 귀의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스승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부처님을 만나 법에 관한 토론을 하는 예가 많습니다. 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수승하다고 인정하지만 자기가 갖고 있는 견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열심히 해야 합니다-통섭불교]

② 用大(용대)

 

[용대(用大)는 진여의 작용을 말한다. 진여의 활동이 위대하기 때문에 용대라고 이름한다.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진여의 작용이므로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으로서의 불타의 모습을 갖는다. 앞에서 설명한 체상(體相) 이대(二大)는 불타의 법신이므로 범부는 이를 직접 보지 못한다. 더욱이 그것이 자기의 본성인 자성청정심이지만 불각(不覺)을 자성(自性)으로 하고 있는 범부가 그것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범부가 진여를 알게 되는 것은 불타의 중생 구제 활동 즉 용대(用大)를 통해서만 이다. 그렇다고 범부가 불타의 활동을 직접 아는 것이 아니라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중생의 망심(妄心)속에 비쳐진 불타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은 마치 얼룩진 거울에 비쳐진 불상과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불타는 중생의 능력이나 그 그릇에 따라, 때로는 보신(報身)으로, 때로는 응신(應身)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범부는 그 응신을 자기의 망심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그 응신은 응신 그 자체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응신(應身)이나 보신(報身)이 특별한 부처로서, 특정한 장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중생이 부처를 구하면 그에 따라, 거기에 응해서 곧 그 중생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불타의 위대한 작용(作用)이 나타나는 근거는, 모든 부처가 성불(成佛)하기 이전의 위치[因地]에 있을 때, 즉 보살로 있을 때,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보고 큰 자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구제하여야 한다는 큰 서원(誓願)을 세운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불타는 이 서원을 완성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성불한 다음에는 저절로 중생 구제의 활동이 나타나는, 이것이 용대(用大)이다.-전종식]

 

  * 用(용)의 原理(원리)

復次眞如用者(부차진여용자) 所謂諸佛如來(소위제불여래) 本在因地(본재인지)

다시 다음에 진여의 작용이란 이른바 제불 여래께서 본래 인지에 계시면서

發大慈悲(발대자비) 修諸波羅蜜(수제바라밀) 攝化衆生(섭화중생)

대자비심을 발하시어 모든 바라밀을 닦아 중생을 포섭하여 교화하시고, 

因地 : 수행하는 지위, 과지(果地)의 상대어로서 과지는 성불이다.

立大誓願(입대서원) 盡欲度脫等衆生界(진욕도탈등중생계)

대서원을 세워 중생계를 다 평등하게 제도하여 해탈시키고자 하시고, 

亦不限劫數盡於未來(역불한겁수진어미래)

또한 한정 없는 겁수로 미래를 다하며, 

以取一切衆生如己身故(이취일체중생여기신고) 而不取衆生相(이불취중생상)

일체의 중생을 자기 몸과 같이 취하기 때문이나, 그러나 중생의 모습=衆生相을 취하지는 않음이다.

 

[지운 : 본행(本行)과 본원(本願)과 방편(方便)을 용대(用大)라고 한다.

* 인지(因地)에서 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을 본행(本行)이라고 하고, 모든 중생을 차별 없이 다 제도하고 한 것을 본원(本願)이라고 한다. 그 방편이 지혜와 자비이다.

*元曉 : 諸佛如來 ~ 攝化衆生이라 한 것은 본행(本行)을 든 것이며,

立大誓願 ~ 盡於未來이란 본원(本願)을 든 것이다.

*은정희 : 衆生相(중생상) - a. 사상(四相)의 하나로서 중생들의 잘못된 소견으로 자기 몸은 오온이 임시로 화합하여 생겨난 것이라고 고집하는 견해 b. 중생이 이미 열반의 이치를 증오(證悟)하였으나 증오했다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는 것. 여기서 중생상은 b의 뜻임.

* 憨山 : 무엇 때문에 중생상을 취하지 않는가? 중생이 자기와 평등하다는 것을 여실히 알기 때문인데, 이는 제일의 마음(第一心)이다. 그 때문에 논서에서 말하기를 ‘광대한 제일심은 장구하여 그 마음이 전도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모든 부처님의 수행인지의 마음이다.

* 지운 : 이 부분은 방편을 나타낸 것이다. “자기 몸처럼 본다.”는 것은 비(悲)이며, “중생상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智)이다.-물처럼바람처럼]

 

[용대(用大)라는 불타의 중생 구제 작용은 보살재위(在位)시의 대자비심(大慈悲心)과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수행 사섭(四攝)에 의한 중생의 섭화(攝化), 영원토록 중생을 구제코자 하는 대서원(大誓願) 등을 원인으로 하여 불타가 된 후에 그 결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불(諸佛)이 성불 이전의 인위(因位), 즉 보살시에 대자비심을 일으켜,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등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수행과,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 등의 사섭법(四攝法)에 의한 중생섭화(攝化)로, 중생구제(救濟)의 대서원(大誓願)을 세우고, 중생세계에 있는 온갖 중생 모두를,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고통에서 해탈시키고자 결심한 것이다.]

 

此以何義(차이하의)

이것이 무슨 뜻인가? 

謂如實知一切衆生及與己身(위여실지일체중생급여기신)

이른바 여실히 일체중생과 더불어 자기 몸이 

眞如平等(진여평등) 無別異故(무별이고)

진여로 평등하여 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중생은 미혹에 빠져 있을 뿐 그 성품은 다 평등하다. 이를 진여평등(眞如平等)이라고 한다. 이렇게 아는 것을 지혜롭게 안다고 한다. 그러므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차별상을 가지고 있지만 깨달은 사람은 중생과 차별상을 가지지 않는다.

* 元曉以取一切衆生如己身故 ~ 眞如平等라 한 것은 지(智)와 비(悲)의 방편을 든 것이다.]

 

[시간을 초월한 무한한 미래영겁(未來永劫)을 통하여 일체 중생을 사랑함이, 마치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한 것이다. 또한 모든 중생 보기를 자기 몸과 같이 보기 때문에 번뇌속에 사는 중생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제불여래는 모든 중생과 자기 자신이 별도라는 생각을 갖지 아니하고 평등하다는 마음을 갖고 일체 중생을 보기 때문에 불타는 중생의 상(相)을 취하지 않는다. '불타가 자타평등(自他平等)의 마음을 세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의문에 대하여, 그것은 일체(一切)는 모두가 진여(眞如)를 본체(本體)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체 중생과 자기는 유일한 진여로부터 나타난 체현(體現)으로서, 일체 중생과 자기의 진여(眞如)는 평등하고, 거기에는 하등의 구별이 없다는 사실을 여실(如實)히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진여평등(眞如平等)을 여실히 아는 여실지(如實知)가 '기신론'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된다.-전종식]

 

[여기서는 진여의 작용을 논한 것입니다. 모든 존재에 본체와 양태가 있다면 그 작용도 있습니다. 즉, 마치 흙이 모든 물건의 형태를 이루는 바탕이라면, 그 흙에 의해서 이루어진 모습이 있고, 그것이 작용하는 기능이 있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여의 작용도 이것을 인격화해서 제불여래의 오묘한 지혜의 작용을 논하고 있습니다. 이는 불교가 이론에만 치중하는 철학과는 달리 종교적인 측면에서 실천수행을 논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여에 대해서 다른 종교에서는 우주의 실상을 본체와 양태의 관계를 현상적인 실재에 드러난 우주삼라만상의 미묘한 작용을 인격화해서 신으로 표현하는데, 불교에서는 이를 제불여래의 지혜와 자비의 작용으로 본 것입니다.-수선]

  

以有如是大方便智(이유여시대방편지) 除滅無明(제멸무명)

이와 같은 대방편지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제거하여 소멸하고 

見本法身(견본법신) 自然而有不思議業(자연이유불사의업) 種種之用(종종지용)

본래의 법신을 보아, 저절로 자연스럽게 불가사의한 업의 갖가지 작용이 있다.

 

[이와 같은 갖가지 작용이 있으므로 용대(用大)라고 한다.

* 元曉 : 이 부분은 두 번째 果를 드러낸 것으로 세 가지가 있다.

① 以有如是大方便智는 전인(前因)을 든 것.

② 除滅無明 見本法身은 자리(自利)의 果.

③ 自然而 이하는 작용의 모습을 나타낸 것.]

 

[이상과 같이 보살은 대자비(大慈悲), 바라밀(波羅蜜), 사섭(四攝), 대서원(大誓願) 등 큰 방편의 지혜=大方便智, 즉 깨달음을 실현시킬 수 있는 수단적(手段的)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무명을 제거 소멸시켜,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타의 법신(法身)을 발견하게 되고 성불(成佛)의 행(行)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인위(因位)시에 맹세한 큰 서원의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저절로 중생구제를 위한 신비하고 부사의(不思議)한 활동이 나타나고, 그 활동을 위한 여러 가지 방편적 작용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타의 중생구제작용은 범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작용이므로 '부사의(不思議)'라 말하고, 이같은 부사의업(業)은 의도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자연업(自然業)'이라고 일컬어진다. 이와 같이 진여(眞如)의 용(用)이, 부사의(不思議)하고 자연적인 것은, 그것이 바로 진여 그 자체의 활동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바로 진여 그 자체와 같은 것이다.] 

 

卽與眞如等(즉여진여등) 遍一切處(편일체처) 又亦無有用相可得(우역무유용상가득)

곧 진여와 더불어 평등하여 일체처에 두루 미치되, 또한 얻을 수 있는 작용의 모습=用相도 없다. 

 

[진여는 일체처(一切處)에 두루 비쳐지고 있으며, 중생의 진여가 중생자신의 안에서 내적 훈습(內熏)으로 자신에게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으나 중생은 그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중생은 그 진여에 반(反)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아 스스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가 진여(眞如)이기 때문에, 특정한 부처가 있어 미망(迷妄)의 중생에게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여의 용(用)을 부사의업(不思議業), 자연업(自然業)이라 일컫는 것이다. 또한 이 진여는 그 어느 곳이나 두루 충만되어 있으므로 어떠한 용상(用相), '이것이 진여의 용상'이라고 지적할 수도 없는 것이며, 특별히 파악할 수 있는 용상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亦無有用相可得 얻을 수 있는 용상(用相)이 없다'고 설해지고 있다.]

 

何以故(하이고) 謂諸佛如來(위제불여래) 唯是法身智相之身(유시법신지상지신)

왜냐하면 이른바 제불여래는 오직 법신지상의 몸일 뿐이며,

 

[이와 같이 진여의 용대(用大)는 일체처에 가득 차있는 것이지만, 그 용상(用相)을 파악할 수 없는 이유는, 제불여래(諸佛如來)가 바로 법신(法身) 그것이고, 동시에 지신(智身)이며 진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진여의 어느 특정 부분이 부처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불타의 중생구제행만이 진여의 용(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용대(用大)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진여의 용대는 법신(法身)으로서 우주 가득히 그 어느 곳이나 충만되어 있으므로, 행자(行者)의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진여의 용(用)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구하는 행자 자신 속에 불타의 용대(用大)가 내포되어 있어 바로 수행자 자신이 용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서 별도의 특정한 불타의 용대에 의하여 구제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때 불타의 응신(應身)은 바로 자기자신이 된다. 불타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의 삼신(三身)으로 설해지는 것이나, 여기에서는 법신(法身)이 설해지고 있다. 법신은 평등한 진여 그 자체이고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은 방편신(方便身)이다.]

 

第一義諦(제일의제) 無有世諦境界(무유세제경계) 離於施作(이어시작)

제일의제로서 세간의 경계가 없으며 베풀고 만드는 것을 떠난 것이니, 

第一義諦 진제(眞諦), 진여 본체의 진리를 말한다.

離於施作 제불의 법신은 의도적으로 베풂이 없지만, 중생이 보고 들음에 따라, 모든 중생에 평등하게 작용하여 이익을 얻게 한다.

 

[진제(眞諦)인 제일의제(第一義諦)로 말한다면, 평등한 진여(眞如)만이 실재(實在)인 것이므로, 따라서 법신(法身)만이 실재이다. 거기에는 속제(俗諦)인 '세제(世諦)의 경계(境界)'는 없는 것이다.
진여는 자타평등(自他平等)의 세계이며,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그러나 진여를 깨달은 불타가 세상 속에 나올 때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인 법신으로서는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나와 너」를 구별하는 중생 세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자타(自他)의 구별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진리를 열지 않으면 안된다. 이 진리는 미망속에 물들여진 세간(世間)의 진리이기 때문에 세속제(世俗諦)라 불리운다. 그것은 진제(眞諦) 속의 절대적 진리는 아니지만, 그러나 미망의 중생을 상대할 때는 그것이 바로 진리가 된다. 그것은 바로 상대적 진리이므로 대상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평등의 진여를 자기의 대상(對象)으로 삼는 것이므로 그 입장은 이미 불평등(不平等)이다. 그러나, 이 일은 오염된 세간 속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여하튼 본체(本體)인 제일의제(第一義諦)속에는 상대적 대상계(對象界)인 세제(世諦)의 경계(境界)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중생을 진리에 인도하기 위한 시작(施作) 즉 여러 가지 방편과 수단이 있을 수 없다.]

但隨衆生見聞(단수중생견문) 得益故說爲用(득익고설위용)

다만 중생이 듣고 봄에 따라 이익을 얻게 할 뿐이기 때문에 용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여 자체에는 특정한 용(用)이 없는 것이지만, 중생이 세속의 불각(不覺)속에서 생사의 고(苦)에 눈을 뜨고, 불도(佛道)를 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면, 이 중생은 그의 망심(妄心)의 한계 속에서, 그가 구하는 불(佛)을 보고 불(佛)의 소리를 듣기 때문에, 그때에 중생이 얻는 이익을 용(用)이라고 설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 불(佛)을 구하면, 진여의 용(用)은 일체처에 가득히 두루하고 있으므로, 그 중생의 지혜와 능력에 따라 서로 감응(感應)하며, 중생이 불도의 이익을 지력(智力)만큼 얻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생의 망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것은 망용(妄用)이지만, 거기에는 수염본각(隨染本覺)이 활동하고 있어, 그 망용(妄用)은 형태를 바꾼 진여(眞如)의 용(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용대(用大)는 이상과 같은 의미의 것이므로 중생이 불(佛)을 구하면, 불(佛)은 즉시 그에 응한다. 그리하여 그 중생의 지력(智力)에 따라, 때로는 보신(報身)으로, 때로는 응신(應身)으로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특정한 부처를 어딘가 특정한 장소에서 구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방식이 아니며, 따라서 그러한 구도(求道) 방식으로는 진정한 불(佛)의 용(用)에 접촉할 수 없다는 것이 '기신론'의 입장이다.
법신(法身)에는 세제(世諦)의 경계가 없는 것이며, 중생이라는 상(相)도 없고, 인도하고 인도되는 구별도 없으며, 따라서 인도하기 위한 하등의 시작(施作)도 없다. 다만 중생이 자기 자신의 지력(智力)에 따라 보고 들어, 불도의 이익을 얻어갈 뿐이라는 것이, 불(佛)의 용(用)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중생은 오직 그릇 따라 그릇의 용량만큼 얻어갈 뿐이다(衆生隨器得利益 : 法性偈).]

 

[모든 부처님 즉 여래께서는 부처가 되는 근본 요인을 닦는 보살이 되었을 때에 대자비심을 내어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여 일체중생을 포섭하여 교화하고, 부처의 경지에 이르도록 원대한 서원을 세워 겁수(劫數)를 한정하지 않고 미래의 궁극까지 시방삼세의 모든 중생을 다 평등하게 자기 몸과 같이 여기시어 제도하여 해탈시키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몸을 취하는 않는데, 그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의 세계는 일체중생과 더불어 부처님의 몸이 진여로 평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대한 방편의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근본무명을 소멸하여 본래적인 진리의 몸을 보고 증득하여 자연스럽게 불가사의한 지혜의 작용을 발휘한다고 논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여와 더불어 평등하여 일체의 우주법계삼라만상에 빠짐없이 존재하면서 작용하지만 그 작용의 양태는 얻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를 갖춘 진리의 몸으로 일정한 형태가 없기 때문이고, 제일의제(第一義諦)인 열반·진여·실상·중도·법계·진공의 심오한 일정한 형태가 없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일정한 모습이 없는 찰라적으로 있는 세제(世諦)의 경계가 없어서 무위(無爲)로 작용을 삼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에 상응하여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에 지혜의 작용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은 삼대(三大)의 원론적인 이론이고, 다음에는 삼대의 구체적인 설명으로 불신(佛身)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수선]

 

三大
體大 如實空, 범부부터 부처까지 누구나 평등. 증감이 없이 항상함. 法身 업식을 여의면 불신(佛身)은 볼 수 있는 모습이 없음을 깨닫게 됨.
相大 如實不空, 무량한 공덕,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업식에 따라 차별이 있음.
用大 如實不空, 진여의 작용. 報身 응신이 전식의 작용임을 알아 따로 한정된 모습이 아님을 알지만, 업식에 의존하여 무량한 색신과 모습과 상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함.
應身 분별사식에 의해 부처가 따로 밖에 있어 온 것으로 생각함.

 

* 眞如(진여)의 自體相(자체상)을 거듭 밝힘

問曰(문왈) 上說眞如其體平等(상설진여기체평등) 離一切相(리일체상)

물음, 위에서 설명하기를, "진여 그 자체=其體는 평등하여 일체의 모습을 떠났다"고 하였으나, 

云何復說體有(운하부설체유) 如是種種功德(여시종종공덕)

어찌하여 다시 자체에 이와 같은 갖가지 공덕이 있다고 설하는가?

答曰(답왈) 雖實有此諸功德義(수실유차제공덕의)

답함, 비록 실로 이 모든 공덕의 의미(뜻)가 있지만,  

而無差別之相(이무차별지상) 等同一味(등동일미) 唯一眞如(유일진여)

차별의 모습이 없고, 평등하고 동일한 한 가지 맛으로, 유일한 진여일 뿐이다.

此義云何(차의운하) 以無分別離分別相(이무분별리분별상) 是故無二(시고무이)

이 의미가 무엇인가? 분별이 없으므로 분별의 대상을 여의었으니, 그러므로 둘이 아니다.

 

[진여의 공덕은 한 맛으로 같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중생들의 업식 때문에 다르게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무이(無二)라고 하였다. 

* 고순호 : 진여는 온갖 相을 떠났다고 하면서 다시 여러 차별적인 공덕의 상을 설하니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상을 떠났다는 것은 여실공의 면이며, 공덕이 있다는 것은 여실불공의 면을 이른 것이니, 이런 문답은 이를 회통시키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물처럼바람처럼]

 

[앞에서 진여의 덕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여 질문을 한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여 해명한다. 일체가 진여이고, 진여 아닌 것은 없는 것이므로 진여에 대비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일 진여에 대비되는 것이 있다면, 진여는 상대적 존재가 되어, 그것과 비교하여, 진여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설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체가 진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진여는 비교를 절(絶)한 것이 되어, 진여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다. 그 점을 설하여 '평등진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여를 아무것도 없는 무내용(無內容)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진여는 비교가 끊긴 자리이지만, 그러나 무한히 풍부한 내용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말로서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진여는 무한히 풍부한 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상대적 존재가 아닌 것이므로 '차별의 상'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평등일미(平等一味)이고 오직 하나의 진여(唯一眞如)라고 말하는 이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진여는 어떠한 별개의 것과 비교하여 설한다면, 진여에 무한히 풍부한 공덕을 꺼내어 나타낼 수가 있으나, 진여 그 자체에 대하여 설한다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라든가 평등진여(平等眞如) 또는 일심(一心)이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이다.-전종식]

 

[여기서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입장에서 진여의 작용을 자문자답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물음으로 앞에서 설명하길, "진여 그 자체는 평등하여 일체의 차별적인 모습을 떠났다고 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다시 진여의 자체에 이와 같은 갖가지 공덕의 차별적인 모습이 있다고 하는가"라고 자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답하길, 비록 실제로 이러한 모든 공덕의 모습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텅 빈 진여(眞如)의 자체에는 차별적인 모습이란 없고 평등하고 한결같은 진여일 뿐이라고 간결하게 답하고서 다시 의문을 제기 하면서 답하였습니다. 이 의미가 무엇인가? 허망하게 분별하는 주관적인 허망한 마음이 없기 때문에 분별할 객관의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주관·객관의 상대적인 의존관계가 없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진여자체와 그 공덕상은 두 모습이 없다고 제기한 의문에 답하였습니다.-수선]

 

復以何義(부이하의) 得說差別(득설차별) 以依業識生滅相示(이의업식생멸상시)

다시 무슨 의미로서 차별하여 설할 수 있는가? 업식의 생멸하는 모습에 의지하여 나타낼 수 있다. 

 

[元曉 : 以依業識生滅相示 - 생멸상 내에 모든 허물이 있지만, 다만 그 근본만을 들었기 때문에 업식(業識)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런 허물에 대하여 모든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此云何示(차운하시) 以一切法(이일체법) 本來唯心(본래유심) 實無於念(실무어념)

이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일체법이 본래 오직 마음일 뿐, 실제론 망념이 없지만, 

而有妄心(이유망심) 不覺起念(불각기념) 見諸境界(견제경계) 故說無明(고설무명)

망심이 있어서, 깨닫지 못하여 망념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보므로, 그러므로 설하여 무명이라고 한다. 

 

[本來唯心 實無於念 而有妄心 :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본래 허망한 생각이라는 것도 없지만, 허망한 생각이 있어서---’ 허망한 생각도 꿈과 같은 것이고, 그것이 지어낸 경계도 역시 꿈과 같은 것이다.]

 

[본래 마음은 망념이 없는 무념(無念)이지만, 현실세계의 우리의 마음은 망심(妄心)이며, 무명에 의하여 발동되어, 불각에서 염(念)을 일으켜, 분별의 인식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인식계가 실재라고 망상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무명(無明)'이라고 말한다.]

 

心性不起(심성불기) 卽是大智慧光明義故(즉시대지혜광명의고)

심성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음의 본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그것이 대지혜광명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성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은 본래의 힘을 발휘하여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성격을 나타낸다.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인식계가 '대지혜광명'이다. 이것은 범부가 외계를 보려하는 전식(轉識)의 작용과 대비(對比)되는 불타의 인식계이다.]

 

若心起見(약심기견) 則有不見之相(즉유불견지상)

만약 마음이 견을 일으키면 보지 못하는 모습=不見이 있는 것이나, 

 

[그러나 범부의 마음에는 망념이 일어나 보려고 하는 능견상(能見相)이 있어, 이 보려고 하는 능견상 자신은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불견(不見)의 상(相)'으로 남아, 그것이 마음의 암흑(暗黑) 부분이 된다. 마치 보고 있는 눈이 보는 눈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진여의 자체와 그 지닌 공덕상이 둘이 아니라면 다시 무슨 의미 때문에 차별적인 공덕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업식의 생멸하는 모습에 의지하여 그것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진여는 본래 허망한 생각으로 요동하지 않아 차별적인 모습이란 없는데도 공덕의 모습인 이 의미는 무엇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일체법이 본래 오직 마음인 유심(唯心)일 뿐, 실제론 허망한 생각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허망한 업식심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무명의 불각(不覺)으로 인하여 허망한 생각을 일으켜 모든 차별적인 경계를 주관이 보기 때문에 이를 무명의 업식심이라고 설명하지만, 마음의 본질에서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바로 그것이 대지혜광명의 의미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심성에서 허망한 견해를 일으킨다면 보지 못하는 모습도 있겠지만, 심성이 허망한 견해를 여읜다면 바로 법계를 두루두루 관조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무명의 망심인 염법을 의지하여 진여정법에 상반되었으므로 진여엔 망심의 상대인 대지혜광명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허망한 마음으로 요동하면 진실하게 식별하여 아는 것은 아니며, 허망한 마음으로 움직이는 염법은 자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망상으로 요동하면 망상이며 망상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망상은 실제의 자성은 없이 움직였다 하면 생멸염법의 인연을 따릅니다. 그러므로 알 수 있는 것은 망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진실하게 식별하고 알아 염법을 여읜 진여정법이라는 점입니다.]

 

心性離見(심성리견) 卽是遍照法界義故(즉시편조법계의고)

마음의 성품(본성)이 견을 여의면 이것이 곧 법계를 두루 비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망견으로 보면,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는 것 같지만, 실은 허깨비와 같은 것을 본다. 이를 여의었을 때 실상을 볼 수 있다.]

 

[진여에는 보려는 주관과 보이는 객관이 없는, 다시 말하면 주객(主客) 분열이 없다함은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으나, 그렇다고 심진여의 상(相)에 인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여의 인식은 마치 거울이 사물을 반영하듯이 보려는 욕망 없이도 자연의 업(業)으로 있는 그대로의 인식(認識)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심진여(心眞如)는 일체의 상을 떠나 있어 상대적 의미로서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지만, 이를 상대적 미망(迷妄)의 인식세계에 살고 있는 중생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서는, 부득이 차별이 있는 것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이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범부는 여래장의 무명이 발동하여 아리야식이 되고, 여기에서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지식(智識) 상속식(相續識) 등 미망의 인식세계가 성립되어, 마음에 찰나(刹那)의 생멸이 일어나고 상대적 인식세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범부에게 진여를 설하기 위해서는 '평등의 진여'를 부득이 '차별의 방법'으로 설하는 것으로서, 망심(妄心)에 대하여 진여의 덕(德)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차별상'에 의하는 것이지만, 진여 자체에는 차별상이 없다는 것은 앞에서도 설명한바 있다. 우리들의 인식세계는 '자기'와 '대상 세계'가 인식되고, 일체법이 있으나, 그것은 모두가 마음에 귀착되는 것으로서, 오직 마음만인 유심(唯心)인 것이다.]

 

若心有動(약심유동) 非眞識知(비진식지) 無有自性(무유자성)

만약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참답게 식별하여 아는 것이 아니며, 자성이 없어서,

非常非樂(비상비락) 非我非淨(비아비정) 熱惱衰變(열뇌쇠변)

항상함도 아니고=非常, 즐거움도 아니며=非樂, 아도 아니고=非我, 청정함도 아니며=非淨, 뜨거운 번뇌로 쇠잔하고=熱惱衰, 변하면=變, 

 

[그러나 이같은 보고자 하는 '능견(能見)'의 집착을 떠나면 암흑이 사라져 온갖 사물이 바르게 보여, 보는 힘이 법계(法界)를 두루 비치는 것이다. 이것은 불타가 보는 '진실의 세계'로서 범부가 보는 경계상(境界相)인 현식(現識)의 작용과 대비된다. 여래(如來)의 마음은 적정(寂靜)이지만 범부의 마음에는 망념의 동상(動相)이 있다. 그러므로 진실을 진실 그대로 판단하지 못하여 피아대립(彼我對立)의 일상적 인식이 있고, 선악의 판단 또한 바르지 못하다. 즉 '진(眞)의 식지(識知)'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 진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불타의 '진실식지(眞實識知)'는 범부가 본능적으로 분별하는 '지식(智識)'의 작용과 대비된다. 불타의 본성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지만 범부의 마음은 망심으로서, 탐욕과 노여움, 어리석음 등의 번뇌에 오염되어 청정한 자성(自性)을 갖지 못하고 있다. 불타의 '자성청정심'은 범부가 망분별을 상속시켜 오염시키는 상속식(相續識)과 대비된다. 그 때문에 범부의 마음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성질이 없으며,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에 오염되고, 번뇌와 고뇌에 태워지고 힘을 잃어, 쇠진(衰盡)해간다. 불타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은 범부가 고락에 대하여 벗어나려하고 유지하려는 집착의 집취상(執取相)과 대비된다.]

 

[나아가 상(常)도 아니고 낙(樂)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고 정(淨)도 아닌 심성을 태우는 삼독의 뜨거운 네 가지 전도(顚倒)된 번뇌가 망염으로 천류하면서 쇠잔하며 변하면서 업에 속박되어 자유자재하질 못하게 됩니다. 이 염법에서 진여로 다시 돌이킨다면 진여자체엔 네 가지 전도(顚倒)된 번뇌의 반대인 진상(眞常)·진락(眞樂)·진아(眞我)·진정(眞淨)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나아가서는 항하사를 능가하는 허망한 오염의 의미를 갖추고 있는데, 이 의미를 상대적으로 마주하기 때문에 심성이 허망한 생각으로 요동하지 않으면 항하사를 능가하는 모든 청정한 공덕상(功德相)의 의미로서 나타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허망한 마음을 일으킴이 있어 허망한 생각으로 분별할 만한 목전의 법을 다시 본다면 진여의 본성공덕에 부족한 오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법의 한량없는 공덕은 바로 일심(一心)이므로 다시 일심 밖에서 허망한 생각으로 분별할 만한 대상의 세계란 본래로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심에 청정한 공덕상이 빠짐없이 만족한 것입니다. 이를 법신여래를 간직한 곳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앞의 여실공(如實空)의 진여자체만을 집착하여 여실불공(如實不空)인 그 공덕상을 의심하며 따져 물었던 것입니다]

 

則不自在(즉부자재) 乃至具有過恒沙等妄染之義(내지구유과항사등망염지의)

곧 자재하지 않으며=不自在, 나아가 갠지스강 모래들=恒沙보다 많은 헛된 물듦=妄染의 뜻을 갖추고 있어서,

對此義故(대차의고) 心性無動(심성무동)

이 뜻을 대비하기 때문에 마음의 성품=심성이 동하지 않으면 

則有過恒沙等諸淨功德相義示現(즉유과항사등제정공덕상의시현)

갠지스강 모래=恒沙보다 많은 모든 청정한 공덕의 상=功德相의 의미로서 나타냄=示現할 수 있으나,

若心有起(약심유기) 更見前法可念者(갱견전법가념자) 則有所少(즉유소소)

만약 마음이 일어나 다시 목전의 법을 보아 생각을 하는 자는 곧 부족한 것이 있을 것이다.

如是淨法(여시정법) 無量功德(무량공덕) 卽是一心(즉시일심)

이와 같은 청정한 법=淨法의 한량없는 공덕은 곧 일심이므로,

更無所念(갱무소념) 是故滿足(시고만족) 名爲法身如來之藏(명위법신여래지장)

다시 생각할 바가 없으니, 이런 까닭으로 원만한 구족이기에 이를 이름하여 법신여래의 장=法身如來之藏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불타의 공덕은 망심, 망념에 의한 번뇌로 말미암아 '청량불변자재(淸凉不變自在)'의 세계가 오염되고 생멸이 있어 쇠변(衰變)하고 번뇌에 속박되어 있어 자재(自在)를 잃고 있는 것이다. 불타의 청량불변은 범부가 이름붙여 헤아리는 계명자상(計名字相)과 대비되고, 자재(自在)는 업을 지어 고통받아 부자재한 기업상(起業相)과 업계고상(業繫苦相)과에 대비된다.
이상과 같이 범부의 망심에는 간지스강의 모래보다도 더 많은 무량한 망염(妄染)의 뜻이 있다. 그러나 이 무량한 망염은 심성이 가동하지 않으면, 역으로 무량무변의 청정한 공덕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마음에 망염이 일어나, 조금이라도 마음밖에 무엇이 실재한다고 인식한다면 그것은 청정한 공덕에 결함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 미세한 염(念)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불타의 청정한 무량공덕은 부동(不動)의 일심(一心)에서 성립되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어떠한 망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심성에 무량한 정공덕(淨功德)이 가득 구족하고 있을 때, 그것을 이름하여 법신(法身) 또는 여래장(如來藏)이라 부른다.

이상에서 체(體)와 상(相)의 이대(二大)를 자체상(自體相)으로 결합 설명하였으므로 다음에는 진여의 용대(用大)에 대하여 설명한다.]

 

[머리 식히기;

어느  누군가 부처님께 우바리는 전생에 무엇을 했기에 저렇게 수행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그러자 부처님께서 우바리의 전생 이야기를 해줍니다옛날 바라나 성에 범덕왕이 있었는데 대지가 겁게 불타고 있는 여름  그는 왕궁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사나이가 왕궁 근처를 지나가며 음탕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혼자서 빈둥거리며 음탕한 래를 부르고 있으니 풍속을 해칠  같아 왕은 신하에게 명하 그를 잡아오게 하여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며 어떤 일을 하길래 한낮에 그런 음탕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그러 사나이가 말했습니다. “저는 우바가라고 하오며 친구에게 려준 금화  닢을 받으러 가는 중입니다.” 왕은 저렇게 내버려 두면 사방에 음탕한 노래를 퍼트릴  같아 말합니다. “우바가 내가 그대에게 금화  닢을 줄테니 가지 말고 여기에 있거 .” “훌륭하십니다대왕이시여 닢을 주실 바에 이왕   더해  닢을 주시옵소서그럼 저는 마을에  빌려준   받고 금화  잎으로 저의 부인과 함께 오욕락을 즐기겠습니.” 그러자 범덕왕이 마을에 가지말고 자신과 함께 있으면  여덟 닢을 주겠다고 합니다그러자 우바가가 왕에게 말했습니다. “착하신 대왕이시여크게 기뻐하소서저는 다시  닢을  원하옵니다그러면 아홉 닢이 되고 저는 마을에 내려가  닢을 받아  닢으로 부인과 함께 오욕락을 즐기겠습니다.”  우바가란 인물에 대해 흥미가 점점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계속되어 금화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결국 범덕왕은 우바가에게 마을에 가지말고 자신과 함께 있으면  고을 주겠다고까지 합니다그제서야 우바가는 승낙하고  고을 다스리게 되자 일찍 일어나고 늦게까지 부지런히 일하며 심으로 대왕을 섬겼습니다대왕은 우바가를 진심으로 믿고 라의 반을 다스리게 하였고 왕궁 창고의 반도 우바가에게 주었습니다하루는 범덕왕이 우바가의 무릎을 베고 자고 있었는데 우바가가 생각을 합니다. ‘어찌  나라에  임금이 있을  는가내가 그를 죽이면 왕위를 취하여 혼자서  나라를 다스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칼을 빼려고 하다가 대왕이 지금까지 베풀어준 은혜를 생각하자 마음을 돌려먹었습니다그렇  번이나 망설이다 우바가는 마침내  소리로 울었습니다대왕이 잠에서 깨어 이유를 물었습니다우바가는 자신이 나쁜 마음을 먹고 대왕을 해칠 생각을 하였다고 고백을 했습니다바가는 나쁜 마음을 참회하고 출가 수행자가 되었습니다은혜 생각 못하고 악한 마음이 일어났다는 것에 견디지 못해 출가  우바가는 결국 수행 끝에 벽지불 연각의 단계를 이루게 됩니 그렇게 도를 이루게 되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범덕왕의 이발사인 항가바라가 있었습니다그는 매우 성실하여 우바가가 떠난  대왕의 관심은 항가바라에게 쏠렸습니다대왕은 그를 매우 좋아해 많은 재산을 준다고 하였지만 항가바라는 모두 거절하였습니다오히려 우바가에게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항가바라가 여러 차례 청한 끝에 결국 범덕왕은 항가바라의 출가를 허락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벗들이여 들어라  우바가가 지금의 나이며범덕왕은 나의 부친이신 정반왕의 전생이우바가 밑에서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며 수행정진한 항가바라는 우바리의 전생이다이러한 인연으로 우바리는 오백 대신 들과 정반왕의 예배를 받았느니라또한 비구들이여나의 제자 중에서 계율을 갖는데 가장 으뜸인 사람은 우바리 비구임을 알지니라그는 혼란과 암흑이 난무하는 시대일 수록 더욱  빛날 것이니라계율은 인내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무적이니.” 규칙적이고 질서 있는 매일매일의 삶이 계율입니다수행 이란  규칙적인 삶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과연  생에 어떻게 하는 것이 위대한 삶일까요독일 철학자 칸트는  1초의 시간도 어긋남 없이 살았습니다우리는 항상 흩어진 생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계율을 지키는  만큼 빠른 길은 없을 것입니다계율은 출가 수행자만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중생도 계율을 지키며 질서있게 산다면  좋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흐트러진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계율이 필요합니다.-통섭불교]

 • 染法․淨法(염법정법)의 斷․不斷(단부단)

復次染法(부차염법) 從無始已來(종무시이래) 熏習不斷(훈습부단)

다시 염법은 시작 없는 때로부터 오면서, 훈습하여 끊어짐이 없으니, 

乃至得佛後則有斷(내지득불후즉유단)

나아가 불과를 체득한 후에 (깨달은 뒤에야) 곧 단절한다.

淨法熏習(정법훈습) 則無有斷(즉무유단) 盡於未來(진어미래) 此義云何(차의운하)

정법의 훈습은 단절함이 없이, 미래에 있어서도 다하여 가니, 이 뜻이 무었인가?

以眞如法常熏習故(이진여법상훈습고) 妄心則滅(망심즉멸)

진여법으로 항상 훈습하기 때문이다. 허망한 마음=妄心이 곧 사라지면 

法身顯現(법신현현) 起用熏習故無有斷(기용훈습고무유단)

법신이 나타나 용훈습을 일으키기 때문에 단절함이 없다. 

 

[염법은 무시이래로 끊어짐이 없이 이어져오지만 결국은 끊어진다. 그러나 정법은 무시이래로 이어져 미래에도 다함이 없다. 그것은 불생불멸이다.-물처럼바람처럼]

 

[여기에서는 염법훈습(染法熏習)과 정법훈습(淨法熏習)이 언제까지 계속되는가를 살펴보면, 근본무명을 바탕으로 한 염법훈습은 성불될 때까지는 무시이래(無始以來) 그 훈습이 단절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진여의 훈습력은 영원히 미래를 다하여서도 단절됨이 없다. 다시 말하면 염법훈습은 영원한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 훈습이 끊임이 없이 계속되다가 깨달아 부처가 되면 즉시 단절되는 것이지만, 진여훈습은 부처가 된 후에도 끊임없이 영원히 계속된다. 여기에서 진여훈습도 성불이 목적이었다면 성불한 후에는 단절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미망(迷妄)이 있을 때는 그 미망을 파(破)하기 위하여 깨달음의 지혜가 일어난다.
정법훈습은 정화(淨化)시키는 힘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 힘은 무명(無明)이 존재하는 한, 그 무명을 파하기 위하여 작용하는 것이지만, 무명이 소멸된 후에까지 무슨 이유로 정법훈습(淨法熏習)이 계속되어야 하는가의 의문이다. 그 이유에 대하여 '기신론'은 무명이 소멸되어 성불하였다 하더라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정법훈습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명이 멸하여, 불타의 근본무분별지가 완성된 후에는 후득지(後得智)가 일어나 보신(報身)이나 응신(應身)의 모습으로 중생 구제 활동을 행하는 것이다. 중생 구제 활동은「기신론」의 용어로서는 용훈습(用熏習)이다. 중생 구제를 위하여 후득지(後得智)가 활동하려면, 내부에는 항상 무분멸지(無分別智)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진여의 내훈(內熏)은 무명이 소멸된 후에도 끊임없이 계속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염법(染法)에는 단절이 있으나, 정법(淨法)에는 단절이 없는 것이다.
본론에서는 이를 '眞如法常熏習故 진여의 법은 항상 훈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망심(妄心)이 소멸하여 불타의 법신(法身)이 나타나기 위하여서는 끊임없는 진여(眞如)의 내훈(內熏)과 외부로부터 제불(諸佛) 보살의 인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타난 불(佛)의 법신(法身)은 중생 구제의 용훈습(用熏習)을 일으켜, 보신(報身) 응신(應身)의 모습으로 미래를 다하여 중생 구제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다.-전종식]

 

[여기서는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의 훈습이 단절하고 단절하지 않는 의미를 총괄하여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염법의 훈습은 시작은 없어도 그 끝남이 있지만 진여정법의 훈습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명염법의 종자인 근본무명은 진여를 의지해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여는 시작이 없는 것이고 끝도 없게 됩니다. 이러한 무시무종(無始無終)인 진여의 청정한 진리의 훈습 때문에 무명이 끊겨 다하면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홀연히 일어난 한 생각의 무명이 사라져 다할 때 진여(眞如)인 진리의 몸이 환하게 나타나 그 자체에서 불가사의한 위대한 정법에 배어들어 익혀짐이 다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생멸문(生滅門) 가운데 이 망심(妄心)이 생멸(生滅)하는 인연의 양태라는 "시심생멸인연상(是心生滅因緣相)"에 대해 풀이하여 마쳤습니다. 이후부터 일심(一心)의 체(體)와 상(相)과 용(用) 삼대(三大)의 의미를 논서의 처음에 나타낸 이 마음이 생멸로 인연하는 모습에서 마하연(摩訶衍, 대승)의 자체와 모습과 그 작용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시심생멸인연상(是心生滅因緣相) 능시마하연자체상용고(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에 대해서 풀이하게 됩니다.-수선]

 

[염훈은 오염된 훈습이고 정훈은 맑고 깨끗한 훈습입니다. 진여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염훈을 단절시키고 정훈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보살, 부처의 삶이나, 중생은 이와 반대입니다. 염법은 탐진치, 번뇌망상에 오염된 것으로, 제7식에 우리의 행위가 저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오염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끊임 없이 오염된 것을 쓰게 됩니다. 이 염법은 내 속에 훈습되어 끊어지지 않다가 부처가 된 후에야 끊어집니다. 견성을 해서 내 본래 성품을 봐야 끊어집니다. 무명이 타파되어야 끊어집니다. 중생은 오염된 제7식 말라식을 평생 씁니다. 선정삼매에 드는 것은 무명을 타파하고 본래성품으로 가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선정삼매에 들며 끝없이 공부하고 수행하면 본래성품으로의 길이 열립니다. 그렇게 되면 물들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본래 성품을 꺼내 쓸 수 있게 됩니다. 정훈이 상속되는 것입니다. 결국 공부를 해서 그 마음을 쓰자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발달해도 모든 것을 이롭게 하는 마음은 오염 되지 않는 깨끗한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부처가 되면  청정한 법의 훈습밖에 없으며 이 청정법이 끊어짐 없이 이어지게 됩니다. 무명이 타파되어 정훈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원력으로 몸을 받아도 정훈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시 공부를 하여 견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목적은 염훈을 단절하고 정훈을 상속하는 것이며, 내 속에 충족된 진여를 끝없이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여를 터득해서 진여의 마음을 갖고 진여로 살아야 하며, 더 나아가 부처와 같이 세상을 진여로 물들여야 합니다.-통섭불교]

 

(4) 三大(삼대)

 

[이미 근본사상을 제시한 입의분(立義分)에서 체상용(體相用) 삼대(三大)에 대한 내용을 총론적으로 설한바 있다. 입의분에서 세운 근본사상은 법(法)과 의(義)로서, 법은 대승(大乘)의 체(體)이며 바로 우리의 중생심이다. 그렇다면 이 중생심이 어찌하여 대승인가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의(義)이며, 이 대승의 의(義)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 바로 생멸문(生滅門)에서 나타내는 체대(體大)·상대(相大)·용대(用大)의 삼대(三大)이다.
이중 체대(體大)는 일체법의 진여(眞如)로서 그것은 중생심의 본체이면서 불타의 본체이며, 모두가 평등하고 증감이 없다는 것을 이미 밝힌바 있다. 또한 상대(相大)는 진여에 무량한 성공덕(性功德)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과 용대(用大)는 그와 같이 여래(如來)가 갖추고 있는 성공덕의 활동이 위대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지불이(理智不二)의 체대와 상대는 여래의 법신(法身)이며 세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하는 불타의 용대(用大)는 바로 불타의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는 위와 같이 입의분(立義分)에서 총론적으로 제시한 삼대(三大)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된다.]

 

  ① 體大 相大(체대 상대)

    * 眞如(진여)의 自體相(자체상)

復次眞如自體相者(부차진여자체상자)

다시 다음에 진여의 자체의 모습=眞如自體相이라는 것은 

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일체범부성문연각보살제불) 無有增減(무유증감)

일체 모든 범부, 성문, 연각, 보살과 모든 부처가 더하거나 뺄 것=增減이 없으며, 

非前際生(비전제생) 非後際滅(비후제멸) 畢竟常恒(필경상항)

이전에 나지도 않았고, 이후에 소멸하지도 않으며, 필경에 영원하고 항상하여

 

[진여의 체(體)를 설명하였다. 진여 자체는 누구에게나 평등하며, 늘거나 줄지 않으며, 늘 그러하다. 부처라고 해서 더 크거나, 범부라고 해서 더 작지도 않다. 과거에 생겨난 바도 없으며 미래에 사라질 것도 없어서 늘 그러하다.]

 

[삼대(三大) 가운데 먼저 진여(眞如)의 자체와 모습과 작용인 공능(功能)을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진여의 본질인 체대(體大)와 그 모습인 상대(相大)입니다. 일체 범부·성문·연각·보살·모든 부처님이 수행하여 증오(證俉)한 정도에 따라서 증감이 없는 것이므로 상주하여 범부 이전에 나오지도 않았고, 항구하여 불과위(佛果位)의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필경(畢竟)에 영원히 머물고 항구불변하여 원래부터 자성에 일체 공덕의 모습을 만족한다고 하였습니다. 십법계(十法界)인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불 등의 전체가 진여(眞如)로써 그 자체와 모습을 삼고 있습니다. 이는 즉 본 논서의 첫 부분에서 언급했던 "일법계(一法界)인 대총상(大總相)의 법문체(法門體)"입니다. 이러한 법문체인 진여는 범부와 성인이 균등하게 타고나 미혹과 깨달음의 차별 어느 쪽에도 소속하지 않기 때문에 성인의 깨달음을 따라 증가하지 않고, 범부의 미혹을 따라 감소하지도 않습니다. 진여는 본래 저절로 허망하지 않고 불변의 영원한 진리로 무명업식을 따라 제법의 차별로부터 나오는 것도 없는 불생(不生)이고, 인연의 부분적인 진리를 따라서 사라지는 것도 없는 불멸(不滅)입니다. 그리하여 광대하게 십법계를 포용하여 서로 걸림이 없이 융합하고 소통합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공덕을 만족하게 갖추었다"고 하였습니다.]

 

從本已來(종본이래) 性自滿足一切功德(성자만족일체공덕)

본래부터 성품(본성) 자체가 일체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었으니,

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소위자체유대지혜광명의고)

이른바 자체에 광대한 지혜광명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며, 

遍照法界義故(편조법계의고) 眞實識知義故(진실식지의고)

법계를 두루 비추는 의미이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분별하여 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며, 

 

[진여 또는 여래의 자성이 갖춘 공덕의 양상을 말한 것입니다. 즉, 자성의 본각(本覺)에는 항상 광채가 빛나 관조하여 미혹되고 오염된 어두움이 어둡게 하지 못한다는 여실한 공(空)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체에 대지혜광명이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비로자나(毘盧蔗那)인 법신진여의 본질입니다. 본각의 참다운 지혜로 진여법계의 이치를 관조하여 그 이치를 끝까지 사무치지 않는 것이 없고, 방편의 지혜로 사물이 처해 있는 상황을 조감하여 사물의 작용마다 끝까지 추궁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물의 상황에 따라 완전하게 관조하면서도 생멸(生滅)의 인연을 잊고, 모든 육근(六根)을 의지해서 발현한 육경(六境)을 분별로 인식하는 망상을 여읩니다. 그러므로 "眞實識知義 진실하게 분별하여 안다"고 하였습니다.]

自性淸淨心義故(자성청정심의고) 常樂我淨義故(상락아정의고)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며, 상·락·아·정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여래장의 성품은 이혹(二惑)과 육염(六染)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自性淸淨 자성청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시간적으로 과거·현재·미래가 다하도록 변함이 없는 것을 상(常)이라 말하고, 중생의 괴로움 속에 있어도 그 괴로움이 간여하지 않는 것을 낙(樂)이라 하며, 생사에 처하여도 그 생사에 구속되지 않는 것을 아(我)라 하고, 삼세육추의 생멸하는 모습으로 편력하면서도 오염되지 않는 것을 정(淨)이라고 합니다. 불타는 뜨거운 탐진치(貪瞋癡)의 번뇌를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청량(淸凉)이고, 생(生)·주(住)·이(異)·멸(滅)이란 일심의 사상(四相)으로 번뇌가 옮길 수 없기 때문에 불변(不變)이며, 악업이 얽어매지 못하므로 자재(自在)라고 합니다.] 

 

淸凉不變自在義故(청량불변자재의고)

청량하고 불변하며 자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진여의 공덕을 설명하였다. 진여는 공이요, 모습이 없다. 그러나 중생과 관계[因緣]가 이루어지면, 중생을 제도하려는 모습(相)을 나타낸다. 이를 공덕이라고 한다.]

 

[다음에 진여의 체대(體大)에 대한 공능(功能)입니다. 이른바 자체에 근본지(本覺智)의 밝음에 광대하고 원만한 지혜광명의 의미이기 때문이고, 진여(眞如)의 본각(本覺)은 법계를 두루두루 보편(普遍)하게 관조할 수 있게 비추는 공능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관조하는 작용을 일으킬 땐 진실하게 분별하여 아는 의미이기 때문이고, 견사(見事)의 이혹(二惑)과 육염(六染)을 여읜 자성은 자성청정심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자성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란 열반의 사덕(四德)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공능의 의미이기 때문이고, 자성의 덕은 옮겨 유전함이 없이 청량하고 변치 않고 자유자재한 공능의 의미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항하사를 능가하는 본성의 공덕을 빠짐없이 만족하게 갖추어서 진여의 자체를 여의지 않고, 시작이 없는 옛적부터 상속하면서 단절하지 않았으며, 진여의 자체와 한결같아서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진여의 자체에 상즉(相卽)하여 있는 항하사와 같은 성덕의 불가사의한 불법을 원만하게 갖춘 데에 이르기까지 이르러 조금도 부족함이라곤 없는 의미의 공능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이라 명칭하며, 또는 여래법신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운 : 眞實識知(진실식지)는 선가에서 말하는 공적영지(空寂靈知)이며 반야(般若)이다.

* 지운 : 진여훈습에 의해 왼쪽이 타파되어 오른쪽의 것이 나타남
진여훈습 대상 진여훈습 결과
計名字相, 起業相 淸凉不變常住
執取相 常樂我淨
相續識 自性淸淨
智識 眞實識知
現識 遍照法界
轉識 大智慧光明
業識 如來法身

 

* 常樂我淨 :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염(染)에 대응하는 말이다. 염법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이고 물든 것이지만, 진여는 늘 즐겁고, 무가 아니며, 청정하다. 진여는 공이다. 그러므로 변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常이며, 번뇌가 없으므로 樂이며, 텅빈 그 모습이 나의 본 모습인 我이며, 진여 자체는 물들지 않으므로 淨이다.

* 憨山 :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다하도록 변함이 없음을 이라하고, 중생의 괴로움 속에 있어도 그 괴로움이 관여하지 않음을 이라 하고, 생사에 처하여도 생사에 구속되지 않음을 라 하고, 삼세육추의 생멸하는 모습을 편력하면서도 오염되지 않음을 이라고 한다.]

 

具足如是過於恒沙(구족여시과어항사) 不離不斷(불리부단)

이와 같이 항하사(갠지스강의 모래)보다 많은 수를 지나도록 여의지 않고, 단절되지 않으며,

 

[진여 자체(自體)에는 항하(恒河)의 모래보다 많은 성덕(性德)을 갖추고 있고, 이 성덕이 진체(眞體)를 떠나지 않는 것이어서 '불리(不離)'라고 말하고, 무시이래(無始以來) 상속되어 끊임이 없기 때문에 '부단(不斷)'이라 하며, ]

 

不異不思議佛法(불이불사의불법) 乃至滿足(내지만족) 無有所少義故(무유소소의고)

다르지 않으며, 불가사의한 불법을 원만하게 갖춤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의미이기 때문에

 

[자체(自體)와 함께 있어 동미(同味)이므로 '불이(不異)'라고 말한다. 또한 항하의 모래보다도 더 많은 뜻이 있어 '부사의(不思議)'라 말하고, 불타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이라 한다.]

 

[항하의 모래와 같은 성스러운 덕상(德相)이 진여자체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불리(不離)라 하였고, 시작이 없는 이래로 상속하기 때문에 부단(不斷)이고, 진여와 더불어 평등하여 한결같기 때문에 불이(不異)이며, 자성과 그 지닌 덕상이 융합하고 융통하여 일다(一多)가 걸림이 없고 이사(理事)가 교대로 사무쳐서 염법(染法)·정법(淨法)이 상대적인 둘로 나뉘지 않기 때문에 불가사의(不可思議)라 하였습니다.] 

 

名爲如來藏(명위여래장) 亦名如來法身(역명여래법신)

이름하여 여래장이라 하며, 또는 이름하여 여래법신이라고도 한다.

 

[만일 진여의 체(體)에 이같은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성덕(性德)이 없다면, 여래(如來)가 이를 증득하여 덕을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진여에는 이같은 공덕이 가득히 구족하고 있어 조금도 결함이 없다 함은 자명한 일로서 이 진여로부터 여래가 탄생하는 것이므로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하고, 또한 이름하여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고 한다.]

 

[이러한 자성의 덕성은 모든 중생들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지만, 이를 깨달은 부처만이 끝까지 증득하기 때문에 불법이고, 제법을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어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에 만족이며, 한량없는 성덕을 함용하고 포섭할 수 있기 때문에 여래장이고 또는 여래법신이라고 명칭하였습니다. 또한 본 논서의 첫 부분에서 여래장심은 대총상대법문체(大總相大法門體)라고 하였기에 여래장심(如來藏心)으로 귀결한 것입니다. 다음에 이를 문답으로 거듭 밝힙니다.-수선]

 

[대승의 의(義) 즉 마음 스스로의 체상용의 의미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는 부분이다.
제2장 입의분(立義分)에서 대승의 의미를 나타내어, '이 마음의 생멸인연의 상은 능히 마하연 스스로의 체와 상과 용을 나타내기 때문에 (是心生滅因緣相, 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라고 정의한 것에 따르는 것이다. 심진여문(心眞如門)에서는 대승의 체(體)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심생멸문(心生滅門)에서는 진여(眞如)가 자성청정심으로서 인격화(人格化)되어 있어, '자(自)'라는 용어가 붙어 자체(自體)라 하고있음을 상기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심진여문에서의 진여는 그대로 체(體)라고 부르지만, 심생멸문에서의 진여는 자(自)를 붙여 자체(自體)라 하는 것에 주의하여야 한다.
심생멸문에서 대승의 의미는 인격화된 체상용(體相用) 삼대(三大)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격화된 진여의 체와 상을 법신(法身)이라 부르고, '기신론'에서는 체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므로 속성인 상(相)이 되는 것이지만 체(體)를 떠난 상(相)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체와 상을 합하여 일체(一體)로 보고, 체대(體大)와 상대(相大)를 합하여 설하는 것이다. 체대(體大)는 법신의 본질(本質) 즉 진여(眞如)를 말하며, 상대(相大)는 법신(法身)이 갖추고 있는 덕(德) 즉 지(智)를 말한다. 이 진여와 그 덕성(德性)은 영원한 것이므로 범부에 있어서나 여래(如來)에 있어서나 증감(增減)이 없는 것이다. 범부로 있을 때는 공덕이 적고, 불타가 되면 증대된다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과거에 생긴 것이 아니며, 또한 미래에 멸하는 것도 아니며, 시공(時空)을 통하여 영원불변의 것이다. 이것이 진여로서 법신의 존재 방식이다. 이 진여에는 당초부터 그 자체에 일체의 공덕을 갖추고 있으며, '기신론'에서는 이를 여섯 종류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설하고 있다.

(1)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의미

(2) 편조법계(편照法界)의 의미
(3) 진실식지(眞實識知)의 의미
(4)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의미
(5)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의미
(6) 청량불변자재(淸凉不變自在)의 의미

이상과 같이 진여 자체(自體)에는 여섯 가지의 뛰어난 성질[功德]이 있다는 것이다. 즉 진여인 체대(體大)에는 여섯 종류의 의미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대(相大)이다. 이 여섯 가지 의미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상대(相大)는, '지혜'자체와 그 지혜의 활동으로 표현되어있다.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은 본각(本覺) 그것으로서, 그 지혜광명이 법계(法界)를 두루 비추어 제법(諸法)을 밝히는 것이다.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가 불타의 일체지(一切智)에 의하여 개현(開顯)되는 것이다. 진실식지(眞實識知)는 그렇게 하여 밝혀진 제법에 대한 이해(理解)가 모두 진리(眞理)와 합치하는 것으로서, 일체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여의 자체상(自體相)은 불타의 지혜임과 동시에, 순수청정하고 선(善)의 성질을 가진 마음이어서, 이를 인격화된 의미로서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이 자성청정심은, 열반경에서 불(佛)의 성질로 일컬어지는 열반의 네 가지 덕성, 즉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성질을 간직하고 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은 '승만경'에서는 여래장(如來藏)의 성질로서 설해지고 '열반경'에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불성의 성질로서 설해지고 있다. 미망(迷妄)의 세계가 무명의 망염(妄染)에 의하여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무아(無我)이고 무정(無淨)인데 대하여 진여(眞如)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덕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여섯 번째의 상대(相大)의 의미인 청량불변자재(淸凉不變自在)라 함은, 진여는 순수청정하여 번뇌가 없으므로 청량(淸凉)이라 하고, 생멸(生滅) 증감(增減)의 변화가 없으므로 불변(不變)이라 말하며, 번뇌에 속박됨이 없이, 자유로운 스스로의 존재이므로 자재(自在)라고 말한다.
이상의 여섯 가지 내용은 상대(相大)의 의미이지만 이는 스스로의 체와 상을 합하여 이지불의(理智不二)의 법신(法身)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체상용(體相用) 삼대(三大) 중 용대(用大)에서는 보신(報身)과 응심(應心)의 이신(二身)을 설하게 된다.
이지불이(理智不二)는, 진여(眞如)와 지혜(智慧)가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서 진여의 본성이 지혜이며 자성청정심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진여에서 무명이 제거되면 진여의 본성인 지혜가 자연히 나타나는 것이므로 진여와 지혜는 불가분(不可分)의 것으로서, 이 전체가 불(佛)의 법신(法身)이 된다.
이상에서 보아온 여섯 가지 덕성은 언뜻 보아 세속적인 의미의 덕성인 것 같으나, 이는 본체 자체의 상을 설명한 것으로서, 일반사람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서 차별적 용어로 설명한데 불과한 것이다.
범부의 인식세계는 모두가 상대적인 것이므로, 여기서 진여를 설하기 위해서는, 평등의 진여를, 마치 차별이 있는 것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망심에 사로 잡혀 있는 중생에게 진여의 덕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차별상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진여 자체에는 차별상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평등 무차별의 본체에 대하여, 상(相) 즉 그 속성을 차별적 용서로 말하는 것이 되어,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어, 본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해명해가고 있는 것이다.-전종식]

 

쉬어가는 쉼터= *열반경의 설산동자 이야기, 히말라야 산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어떤 젊은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매우 열심히 수행하기에 제석천왕도 그의 정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고 나찰로 변신하여 그를 시험합니다. 나찰이 된 제석천왕은 수행자의 반대편 나무 위에 앉아 게송 한 구절을 읊습니다.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끊임없이 생겼다가 없어지나니.[諸行無常 是生滅法]” 이 게송을 듣자마자 수행자는 마음에서 환희심이 일어나서, 그 게송을 읊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나찰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찰에게, “당신이 읊었소?” 나찰이 그렇다고 말하자, 수행자가, “나머지 구절도 들려주시오.” 그러자 나찰이 “그렇다면 네가 가진 무언가를 내놓아라.”라고 말합니다. 수행자는 “나는 지금 가진 것이 하나도 없소.”라고 하니 나찰은 “그렇다면 너의 몸이라도 내놓거라.”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자 수행자는 나머지 구절을 들려주면 내 몸을 던져 너의 밥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찰이 뒷 구절을 말해줍니다. “생겨나고 없어지는 법 깨닫고 나면 진리의 바다 끝없이 고요하여 즐거우리라.[生滅滅已 寂滅爲樂]” 이 말을 들은 수행자는 환희로움에 겨워 자신의 몸을 던집니다. 그러자 제석천왕은 수행자를 살려주고 너를 시험한 것이라고 말하고 떠납니다.
* 우바리의 전생 이야기. 우바리는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 계율, 지계 제일이라고 일컬어지던 수행자입 니다. 부처님의 집안에서는 64명이 출가를 했습니다. 부처님이 아버지 정반왕을 찾아가 설법을 하자 모두 다 출가합니다. 우바리는 그 나라의 이발사였는데 왕족들을 따라 같이 출가를 합니다. 왕자들은 함께 준비하느라 출가가 늦었지만 우바리는 일찍 출가 준비를 마치고 혼자 부처님을 찾아갑니다. 당시 부처님 교단에서는 인도의 네 가지 신분제도를 타파하였기 때문에 출가한 순서에 따라 형님, 동생이 정해졌습니다. 우바리가 사형이 되니까 부처님의 친척들이었던 왕자들이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3개월 후 가섭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되새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제자들을 소집합니다. 이 때 1차 결집이 일어납니다. 당시 집결 장소는 칠엽굴이었는 데 아라한과를 터득한 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인 500제자 가운데 499명은 들어갔는데 다문 제일 아난만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아난은 부처님의 법을 많이 듣기만 했지 문사수를 실천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난은 7일 동안 용맹정진하여 결국 아라한과를 터득해 칠엽굴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차 결집 때는 책으로 기록을 한 것이 아니라 누가 선창을 하면 따라서 후창을 하는 송의 형식이었습니다. 그 때 가섭이 의장을 하고 다문 제일, 기억력이 좋았던 아난이 법을 송출하고 지계 제일이었던 우바리가 계율을 선창합니다. 단체를 가만히 놔두면 혼란스럽게 되기 때문에 계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부처님 제자들은 그 법과 계율들을 기억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바리와 같이 이발사였으면 전생에도 이발사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과는 연 속성과 보복성을 갖습니다. 기존에 행동했던 것을 계속하려고 하는 연속성과 무언가 상대방에게 작용을 했을 때 상대방도 나에게 작용을 하는 보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기 위해서는 베풀어야 합니다. 베풀지 않으면 그것이 돌아오지 않으니 빈곤하게 됩니다. 내가 행한 만큼, 내가 베푼 만큼 내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베푼 사람은 큰 돈을 담을 그릇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돈이 모여 큰 돈이 쌓이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설령 큰 돈을 벌어도 어느새 다 사라져버리고 자신의 손을 떠납니다. 선을 베풀고 자비가 가득찬 사 람은 세상 어디에 가도 살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해꼬지를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불안한 것은 전생에 지은 잘못 때문입니다. 내가 당당하면 어떤 상황에도 불안함이 일어나지 않습니다.-통섭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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