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者(삼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如來之藏無有增減(여래지장무유증감)

세 번째 수다라에서 말씀한, '여래의 장=如來藏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減, 

體備一切功德之法(체비일체공덕지법)

일체 공덕의 법을 갖추고 있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以不解故(이불해고) 卽謂如來之藏(즉위여래지장)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곧 여래장에는 

有色心法自相差別(유색심법자상차별) 云何對治(운하대치) 

색법과 심법이 있어 자체의 모습=自相을 차별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以唯依眞如義說故(이유의진여의설고) 因生滅染義(인생멸염의) 示現說差別故(시현설차별고)

오직 진여의 뜻에만 의지하여 설명한 때문이니, 생멸의 물듦의 뜻으로 인하여 나타내 보여 차별을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여래장이 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말을 듣고, 색법과 심법이 따로 있어서 차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여 여래장 자체는 생멸이 없다. 업식에 의해 생멸의 양상이 나타날 뿐이다. 즉, 위에서 업식에 의해 생멸상을 나타낸다고 하였으니, 진여는 차별이 없지만, 업식에 의해 차별상을 볼 뿐이다. 생멸의 인연을 여의면 색법이나 심법이나 차별이 없다.

* 憨山 : 일체법이 유일한 진여일 뿐이라면 색법과 심법이 둘이 아니어서 원래 차별이 없다. 단지 생멸상의 오염된 의미로 인해 모든 진여공덕상의 차별을 제시해서 나타냈을 뿐이다. 이는 진여가 망정으로 인해 생멸상의 오염으로 뒤집힌 것을 상대하여 진여공덕상의 차별이 있음을 설명했을지언정, 진여자성이야 어찌 생멸상인 색법과 심법의 차별이 동일하겠는가?

* 元曉 : 因生滅染義 示現~이라 한 것은 윗글에서 “업식의 생멸상에 의해 나타낸다.”고 하고, 내지 설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물처럼바람처럼]

 

[셋째는 경전에 '여래장에는 증감(增減)이 없다. 그 체(體)에는 일체의 공덕(功德)이 갖추어져 있다'라고 설하는 것을 듣고 여래장 본체를 부득이 차별적 용어로 설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래장에는 생멸법인 색심(色心)의 이치가 차별적으로 자성(自性)과 상(相)이 갖추어져 있다'고 그릇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여래장(如來藏)은 그 본체(本體)를 말하는 것으로서, 본체는 본래 증감이 없는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서 앞에서 말한 지혜광명 등 일체의 성공덕(性功德)을 있는 그대로 갖추고 있다고 설하는 것인데, 범부 중생은 그것을 본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생멸법인 현상의 세계에서 차별적으로 보는 데에서 그러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현상의 세계에서는 차별심은 모두가 망법(妄法)으로서 몸과 마음이 항상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대치하고 시정할 것인가.
여래장이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설하는 것은 본체인 진여문(眞如門)의 입장에서 설하는 것임을 밝혀야 하며, 여래장의 체(體)는 불변으로서, 그 속에는 일체의 염법(染法)의 차별상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장이 갖추고 있는 성공덕은, 부득이 차별의 세계에 살고 있는 범부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차별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 본체 그대로 갖추어져 있다는 의미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여래장의 무량한 성공덕은 늘거나 줄거나 하지 않는 절대 불변(不變)의 자리이고, 이 말을 생멸문에서의 차별적 의미로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전종식]

 

[여기서는 여래장의 본성이 색법(色法)이 심법(心法)과 동일하다고 생각한 잘못된 집착을 타파한 것입니다. 여래장의 본성자체엔 모든 공덕의 미묘한 덕상을 갖추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자체에서 일으킨 공덕이므로 그것은 본래 색법과 심법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이내 여래장은 색법과 심법을 차별하는 것이 동일하다고 잘못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장의 진제(眞諦)를 망법인 색심의 차별법과 동일하다고 잘못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대치한 법으로 일체법은 본래 차별이 없고, 오직 진여가 생멸의 인연을 의지하여 일체법이 있으므로 법마다 모두 진여(眞如)여서, 법마다 유일한 진여일 뿐임을 말한 것입니다. 일체법이 유일한 진여일 뿐이라면 색법과 심법이 둘이 아니어서 원래 차별이 없습니다. 단지 생멸하는 모습의 오염된 의미로 인해서 모든 진여의 공덕상의 차별을 제시해서 나타냈을 뿐입니다. 이는 진여가 망정으로 인해서 생멸상의 오염으로 뒤집힌 것을 상대하여 진여공덕상의 차별이 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로 진여자성이야 어찌 생멸상인 색법과 심법의 차별과 동일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상은 여래장이 색법과 심법이 동일하다고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을 타파한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중도(中道)의 실상을 나타낸 설명이라 하겠습니다.-수선]

 

四者(사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一切世間生死染法(일체세간생사염법)

네 번째는 수다라에서, '일체 세간의 생사하는 염법이 

皆依如來藏而有(개의여래장이유) 一切諸法不離眞如(일체제법불리진여)

모두 여래장에 의지하여 있는 것이며, 일체제법은 진여를 여의지 않고 있다.' 라고 설하는 것을 듣고

以不解故(이불해고) 謂如來藏(위여래장)

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른바 여래장 자체에 

自體具有一切世間生死等法(자체구유일체세간생사등법) 云何對治(운하대치) 

일체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가?

以如來藏(이여래장) 從本已來(종본이래)  唯有過恒沙等諸淨功德(유유과항사등제정공덕)

여래장에는 본래부터 오직 항하의 모래 등을 능가하는 모든 청정한 공덕=淨功德이 있어서, 

不離不斷不異眞如義故(불리부단불리진여의고)

진여의 뜻을 여의지도 않고, 끊지도 아니하여 그(진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以過恒沙等煩惱染法(이과항사등번뇌염법) 唯是妄有(유시망유) 性自本無(성자본무)

항하의 모래수보다 많은 번뇌의 염법은 오직 허망한 존재일 뿐, 본래부터 성품이 없는 것이어서 

從無始世來(종무시세래) 未曾與如來藏相應故(미증여여래장상응고)

시작이 없는 때부터 일찍이 여래장과 더불어 상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若如來藏體有妄法(야여래장체유망법) 而使證會永息妄者(이사증회영식망자)

만약 여래장의 체에 망령된 법=妄法이 있다면, 진여를 증득하고 이해=證會하여 망령됨을 영원히 끊는다는 것은

則無有是處故(즉무유시처고)

바로 근거=處가 없기 때문이다.

 

[생사의 염법이란 본래 여래장에 있지도 않는 것이 망념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다. 만약 진여에 이러한 망법이 있다면 증득한다고 해서 그것을 쉬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이 망법인 줄 알면 그것은 사라진다.

* 憨山 : 중생들이 허망으로 일어난 생사염법은 여래장진체를 의지하여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이는 여래장 진체가 허망한 생멸의 인연을 따른 의미임을 알지 못한다. 이윽고 여래장성엔 생사염법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고 집착하게 되는데, 이것은 진체(眞體)에 허망한 염법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어떻게 대치해야만 하는지 그 문제를 말해보자. 여실불공한 여래장은 원래부터 항하사를 능가하는 성공덕을 갖추어 그것은 여실불공한 진여의 자체와 다르지 않다. 모든 생사염법은 허망한 변계소집성으로 있을 뿐, 그것은 본래 자성이 없이 원래부터 여래장성과 서로 호응하지 않는다. 만일 여래장의 진체에 정말로 허망한 생사법이 있다면 진여를 증득하고 허망을 쉬게한다는 것은 옳다고 긍정할 곳이 없게 된다.]

 

[넷째는 경전에 '일체 세간의 생사염법(生死染法)은 여래장에 의하여 있고, 일체 제법은 진여를 떠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이것은 세간의 생사염법이 진여(眞如)를 의지하여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래장의 본체(本體)에 그대로 생사의 염법이 구비하고 있다고 그릇되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체를 의지(依持)하는 것과 본체에 그대로 갖추어져 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인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여는 이미 설해온 바와 같이 불변의 심진여(心眞如)와 수연(隨緣)의 심생멸(心生滅)이 있어 범부에 있어서는 진여를 의지하여 연(緣) 따라 이루어지는 생사염법이 수반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여를 의지하여 나타난 것일 뿐 불변의 여래장 자체에 생사염법이 체(體)로서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범부는 수연(隨緣)된 여래장 즉 아리야식의 염법(染法)을 불변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여래장의 자성(自性)에 체(體)로서 염(染)이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치유하는가.
그것은 여래장에 있는 무량한 정공덕(淨功德)과 무명(無明)에 의하여 수연기동(隨緣起動)하여 나타나는 생사의 염법은 그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밝혀 대치한다는 것이다.

여래장에는 본래부터 항하(恒河)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무량한 청정공덕이 갖추어져 있다. 진여의 체(體)와 이들 정공덕(淨功德)은 불리(不離) 부단(不斷) 불이(不異)한 것이다. 정공덕 바로 그것이 진여의 본체이므로 그것이 그 본체와 다르다거나, 끊어진다거나 또한 떠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본래부터 있는 것이다. 도중에 구비된다거나, 도중에 소실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생사의 염법(染法)은 그렇지가 않다. 무명의 수연기동에 의하여 망념(妄念)이 일어나는 것이며, 이같이 무량한 모든 번뇌는 그 망념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자성(自性)의 체(體)가 없는 허망(虛妄)의 존재이다. 망념은 마음의 본성이 본래 망념이 없는 무념(無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망념은 심성(心性)에 반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것에 의하여 일어나는 번뇌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인 여래장과는 본래 일치하지 못하여 상응(相應)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바람에 의하여 수연(隨緣)기동하여 천태만상의 파도가 일지만 물의 본성인 수성(水性H2O)과는 관계가 없듯이, 그 바람이 물에 의지하여 파도가 일 뿐 그 바람 자체에는 체(體)가 없듯이, 여래장은 본래부터 정공덕(淨功德)의 체(體)로서 존재하고, 그 체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불변의 것이지만 생사염법은 본래부터 여래장의 체와는 관계없이 의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번뇌는 진여를 의지처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고 허망한 존재이다. 만일 번뇌가 실재의 체(體)로서 여래장에 갖추어져 있다고 가정하면, 만일 깨달아 번뇌가 소멸될 경우에는 여래장 자체마저 소멸되는 것이 되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일 여래장이 소멸되지 않는 상주불변의 것이라면, 그 속에 실재로 있다는 번뇌 또한 상주불변이라는 이치가 성립되어, 그 번뇌를 영원히 소멸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타는 번뇌를 멸하고 있는 것이므로 생사의 염법은 망유(妄有)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여기에서는 여래장에 생사염법이 있다고 여기는 잘못된 집착을 타파한 것입니다. 경전에 일체 세간의 나고 죽는 윤회의 오염된 존재가 모두 여래장을 의지하여 있으며 일체 모든 염법이 진여를 여의지 않는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여래장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을 빠짐없이 갖추어 있다고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대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실(如實)한 불공(不空)의 여래장의 본성은 본래부터 지금까지 항하사를 지나도록 물들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지만 인연을 따라서 물들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래장은 본래 모든 공덕을 여의지도 않았고 단절하지도 않아 진여와 다름없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며, 항하사를 지나는 번뇌의 염법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의 허망으로 있는 유정(情有)일 뿐, 여래장의 본성엔 본래부터 없는 것이기에, 시작이 없는 세월로부터 아직까지 여래장과 서로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질의 이치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래장 자체에 정말로 허망한 오염된 법이 있다면 진여를 증득하여 망상을 쉬게 한다는 것은 옳다고 긍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五者(오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다섯째는 수다라에서 

依如來藏故有生死(의여래장고유생사) 依如來藏故得涅槃(의여래장고득열반)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사법이 있고,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열반을 체득한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以不解故(이불해고) 謂衆生有始(위중생유시) 以見始故(이견시고)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생은 시작이 있다'고 하며, 시작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復謂如來所得涅槃(부위여래소득열반) 有其終盡還作衆生(유기종진환작중생)

다시 '여래가 체득한 열반에도 그 끝이 다함이 있어, 도리어 되돌아 가 중생이 된다'고 말한다.

 

[다섯째는 경전에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다.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는다'고 설하고 있는 것을 듣고, 이 경의 진의(眞意)를 이해하지 못하고 중생은 시작이 있는데, 중생에 그러한 시작이 있기 때문에 중생이 열반을 얻어 여래가 되더라도 그 열반에는 끝이 있어 그 여래가 또다시 중생으로 되돌아간다는 견해가 생긴다는 것이다.]

 

云何對治(운하대치) 以如來藏無前際故(이여래장무전제고)

無明之相亦無有始(무명지상역무유시)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가? 여래장은 시간적으로 과거=前際가 없기 때문에 무명의 상도 시작이 있는 것이 아니며,

 

[여래장과 열반은 중생이 어떠한가와 관계없이 늘 갖추어져 있으나, 다만 무명에 가리어져 보지 못할 뿐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러므로 무명 또한 시작도 없다.]

 

[이와 같은 오류를 어떻게 치유하는가? 이것을 대치하는 것은 여래장이나 무명에는 시원(始源)이 없다는 것을 밝힌다는 것이다. 여래장과 진여는 영원한 실재이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하고 있어 시작이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생사(生死)의 근거인 무명(無明)도  '무시(無始)의 무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바와 같이 그 시원(始源)이 없는 것이다. 만일 윤회의 세계인 삼계(三界)밖에 중생이 따로 있어, 그것이 삼계속에 들어온 것이라면, '생사에 시작이 있고 무명에 시원(始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불교의 교설이 아니라 외도(外道)의 경설(經說)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생사윤회의 시원은 없는 것이다.]

 

若說三界外(약설삼계외) 更有衆生始起者(갱유중생시기자) 卽是外道經說(즉시외도경설)

만약 삼계 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것은 외도 경전=外道經의 설명이 된다.

 

[삼계 즉 욕계, 색계, 무색계는 무명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삼계가 없다면 무명에 물든 중생도 없다.]

 

又如來藏無有後際(우여래장무유후제) 諸佛所得涅槃與之相應(제불소득열반여지상응)

卽無後際故(즉무후제고)

또한 여래장에는 미래=後際가 있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깨서 체득하신 열반도 그것과 더불어 상응하여, 바로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고순호 : 여래장이니 열반이니 하는 것을 중생이 느끼며 사는 생멸의 세계와는 관계없이 불생불멸이요 무시무종이다. 따라서 여래장이란 시간적으로 과거가 없기에 그로 인한 무명의 모습도 시작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무명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중생세계를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라고 한다. 따라서 삼계 외에 새삼스럽게 중생을 처음 시작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외도의 경전에서나 설하는 것이지 정법인 불법에서 설하는 것을 아니라는 것이다.

열반을 얻는다는 것도 불생불멸이요 무시무종인 여래장과 합일되는 것이라 과거가 있을 리 없으니 미래도 있을 리 없어 끝남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 《圓覺經》金剛藏菩薩章 第四 : 금광을 녹여 나온 금은 다시 녹임이 없다. 이미 금이 되었다면 다시 금광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무궁한 시간이 지나도 금의 성질은 무너지지 않으며 본래 성취함이 없었다고 말할 필요가 없으니 여래의 원각도 역시 이와 같다.]

 

[다음, 열반에도 끝이 있다는 오류를 밝힌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래장은 영원한 실재이므로, 그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부처가 열반을 얻어 여래장진여(如來藏眞如)에 상응 일치하면, 역시 영원의 상(相)이므로 열반에 끝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아견(人我見)에 의한 범부중생이 범하기 쉬운 다섯 가지의 그릇된 견해와 그에 대한 치유방법을 제시한 바 있다. 이를 다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다섯 가지 중 첫째, 둘째는 공(空)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서
(1) 본체의 공(空)을 현상계의 사공(事空) 즉 허공(虛空)으로 보는 것
(2) 본체 진여에는 번뇌가 없다는 여실공(如實空)을 본체마저도 아무것도 없는 공 무(空無)로 보는 것이며,
셋째, 넷째, 다섯째는 유(有)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서
(3) 본체의 여래장진여에 갖추어진 성공덕을 현상계의 차별있는 색심(色心)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
(4) 본체의 청정한 여래장진여에 염법(染法)이 있다고 보는 것
(5) 시원(始源)이 없는 생사(生死)와 열반에 시작과 끝이 있다고 보는 것 등이다.
다음은 법아견(法我見)에 의하여 이승(二乘) 둔근(鈍根)이 범하기 쉬운 그릇된 견해에 대하여 설명한다.]

 

[여기에서는 생사의 시작과 열반의 끝이 있다고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고 있습니다. 경전에서 여래장을 의지하기 때문에 소과 소생이 있고 여래장을 의지하기 때문에 열반을 체득한다는 말씀을 듣고,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명의 시작과 원인이 여래장이 있기에 중생이 나고 죽는 고통스런 윤회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진여를 의지하여 허망한 생사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진여가 먼저이고 허망한 생사가 뒤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의 생사법은 시작이 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사의 시작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다시 여래가 얻은 열반은 그것이 끝내 다하면 다시 중생이 된다고 잘못 안다는 것입니다. 이를 대치하는 방법으로 여래장은 시간적으로 전제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의지하여 일어난 생사의 무명도 역시 시작이 없다고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삼계 밖에 중생이 있어서 생사를 일으킨다고 한다면 이것은 바로 외도의 견해이지 불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또 여래장은 후제가 없기에 모든 부처님께서 체득하신 열반도 그와 함께 상응하면 후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열반이 다할 때가 있다는 것은 오해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잘못된 아견(我見)은 범부가 불법의 말씀을 듣고 허망한 육식으로 분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말에 대한 집착을 떠나 진정한 의미를 체득하지 못하고 허망한 마음으로 언설(言說)에 집착하여 이러한 변계(遍計)를 잘못 일으켰을 뿐입니다. 다음은 법아견(法我見)에 대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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