何以故(하이고) 是心眞如相(시심진여상) 卽示摩訶衍體故(즉시마하연체고)

是心生滅因緣相(시심생멸인연상) 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능시마하연자체상용고)

왜냐하면, 이 마음의 진여상은 마하연(대승)의 본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며,

이 마음의 생멸인연의 상은 능히 마하연 스스로의 체(體)와 상(相)과 용(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Here is the reason, as the mind has two aspects, one is the suchness itself (thusness, Bhtatathata) that attributes the substance of Mahayana, and the other, the mind, is the phenomenal of birth-and-death (Samsara) which attributes itself of the substance, the form and the function.

 

[元曉 : 심법(心法)은 하나이지만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진여문 중에 대승의 체가 있고, 생멸문 중에 체의 상(相)과 용(用)이 있다고 하였다. 대승의 뜻이 이 세 가지에 지나침이 없기에 일심에 의해 대승의 뜻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能示摩訶衍自體'라 한 것은 바로 생멸심 내의 본각심이니 생멸의 체와 생멸의 인이며, 그러므로 생멸문 내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여문 중에서는 摩訶衍體라고 말하고, 생멸문 중에서는 自體라고 한 것은 깊은 까닭이 있다.

* 여래나 중생이나 그 본체는 같다. 이를 진여상이라고 한다. 출세간법이다. 세간법은 그 진여가 나타난 현상과 작용이니 이는 여래와 중생이 다르다. 대승법이라고 한 것은 중생심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지, 진여문에서는 차별상이 없으므로 대승법이라고 할 것도 없다. 즉, 크다 작다는 말이 필요 없다.-물처럼바람처럼]

 

[중생심의 진여의 상은 그것이 바로 대승의 본체이며, 중생심의 생멸 인연의 상은, 대승 스스로의 체상용(體相用)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심진여상(心眞如相)은 중생심의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진여는 실재(實在)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진여는 tatathâ의 의역(意譯)이며,  마음의 진실한 실재라 함은 마음에서 무명(無明, 染)이 멸하여 불타의 마음이 된 상태를 말한다.  중생심에 있어서는 무명은 실체가 없는 것이며, 진여에 의지하여 있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이를 멸할 수 있는 것이다.  불타의 마음은 열반과 합일되어 영원한 상으로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중생구제의 자비행을 행하고 있어 시간적인 면과, 시간을 초월한 면 등 두 면을 가지고 있다.  
심진여상(心眞如相)은 이 시간을 초월한 면을 말하는 것으로서 여기에서 대승의 체(體)가 표시되는 것이다.  이것이 심진여문(心眞如門)이다.  심법(心法)은 하나 이지만 두 문〔二門〕이 있는데 그 두번째가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중생심의 생멸인연(生滅因緣)의 상은 마음이 연기(緣起)의 도리로, 즉 연을 만나면 생멸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진여의 상은 마음의 영원한 모습으로서, 마음의 실재성(實在性)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적 비교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대승의 체(體)만을 일컫는다.  체에 대비된 상(相)과 용(用)을 들지 않는다.  마음 그 자체는 염정(染淨)의 양면을 가지고 있으나, 심진여상(心眞如相)은 정(淨)만을 말한다.  염(染)은 영원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혹은 마침내 멸하기 때문이다.  진여는 영원한 존재이지만 그러나 작용(作用)을 가지고 활동한다.  진여는 무위(無爲)이고 영원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동(動)을 떠난 정(淨)이 아니며 동(動)에 포함된 정(淨)인 것, 즉  유위(有爲)와 하나로 된 무위(無爲)이다.  
진여는 인격을 초월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인격에 상즉(相卽)하고 있다.  

마음의 생멸인연상은 대승 자체(自體)의 체상용(體相用)으로 표시하여 설해진 것으로서 이것은 시간적 세계 즉 현상의 세계에서의 중생심의 존재를 일컫는 것이다.  생멸문(生滅門)은 절대(絶對)가 배후에 숨어 있으며, 상대(相對)가 표면에 나타난 존재 형태이다.  이 생멸문의 체는 상대적이기 때문에「자체(自體)」라고 말한다.  심진여문에서는 여래장을 「부화합(不和合)」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지만, 그러나 여래장은 염심(染心)속에 있으므로 화합(和合)을 갖고 있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생멸문에서의 여래장심은 인격이 표면에 나타나 있으므로, 그 체(體)에 대하여 상(相)과 용(用)이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스스로의 체와 상과 용을 나타낸다」라고 설해진 것이다.  이 경우의 체는 생멸문 속에 있는 본각(本覺)이며, 이 본각은 고뇌와 화합되어 있으면서 번뇌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청정한 성질이 있다.  이것이 정(淨)이라고 일컬어지는 상(相)이다.  또한 이 본각에는 수염(隨染)의 업용(業用)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용(用)이다.  다시 말하면 번뇌와 화합하여, 또는 불타가 중생을 구제하는 활동, 그 작용이 수염(隨染)의 업용(業用)이다.
이상은 본문의 내용을 해설한 것이지만 본란의 목적은 입의분(立義分)에서 세우는 법(法)과 의(義)에 대하여 중생심의 진여상(眞如相)과 생멸인연상(生滅因緣相)을 해명함으로서, 대승을 중생심이라고 정의한데 대한 이유를 밝히는데 있다.
본란은 그 이유에 대하여「이 중생심의 진여상(眞如相)은 마하연[대승]의 체(體)를 나타내는 것」이고, 이어서「이 마음의 생멸인연상(生滅因緣相)은 대승 스스로의 체상용(體相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상의 설명에 의하여 지금까지 전통적 주석가들은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의 이문(二門)을 모두 대승의 법(法)으로 배당하고, 대승의 의(義)에 대하여는「말하는바 의(義)라고 하는 것은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체대(體大)로서 일체법의 진여(眞如)를 말한다..... 둘째는 상대(相大)로서 여래장(如來藏)을 말한다..... 셋째는 용대(用大)로서.....」라는 구절에 따라 심생멸문 중 삼대의(三大義)만을 대승의 의(義)에 배당시키고 있어 초학자(初學者)로서는 법(法)과 의(義)를 구별하는데 다소 혼란스러운점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전종식]

 

[The mind as suchness;

What is meant by the mind as suchness(bhutatathata) is the oneness of the totality of things (dharmadhatu), the great all-including whole, the quintessence of the Doctrine. For the essential nature of the mind is uncreate and eternal.

진여심(bhutatathatata)이 의미하는 것은 사물의 전체성 (dharmadhatu)의 단일, 모든 전체를 포함하는 위대한 것, 교리의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중요한 본성(진여)은 창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All things, simply on account of our confused subjectivity (smrti), appear under the forms of individuation. If we could overcome our confused subjectivity, the signs of individuation would disappear, and there would be no trace of a world of (individual and isolated) objects.

모든 것은, 단순히 우리의 혼란된 주관성(smrti) 때문에, 개별화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만약 우리가 혼란스러운 주관성을 극복할 수 있다면 개성화의 흔적은 사라질 것이고, (개별적이고 고립된) 사물의 세계는 흔적도 없을 것입니다.

Therefore all things in their fundamental nature are not namable or explicable. They cannot be adequately expressed in any form of language. They are without the range of apperception. (They are universals.) They (things in their fundamental nature) have no signs of distinction. (They are not particulars.) They possess absolute sameness (samata). (They are universals) They are subject neither to transformation, nor to suchness is another designation. Therefore they cannot be (fully) explained by words or exhausted by reasoning.

그러므로 그들의 근본적인 본성에 있는 모든 것들은 명명 할 수 없고 설명 할 수도 없다. 그들은 어떤 형태의 언어로도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으며, 통각의 범위가 없다. (그들은 보편적인 것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근본적인 본성에 있는 것들) 구별의 흔적이 없다. (그들은 상세한 사항들이 아니다.) 그들은 절대적인 동일성 (사마타)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보편적이다) 그들은 변형의 대상이 아니며, 그러한 것은 또 다른 명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완전히) 말로 설명하거나 추론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While all words and expressions are nothing but representations and not realities, and their existence depends simply on our confused subjectivity, suchness has no attribute (of particularity) to speak of. But the term suchness is all that can be expressed in language, and through this term all other terms may be disposed of. The essence of suchness, there is neither anything which has to be excluded, nor anything which has to be added.

모든 언어적인 표현은 현실이 아니라 묘사일 뿐인 동시에, 그 (언어적 표현) 존재는 단순히 우리의 혼란스러운 주관성에 달려 있고, 진여는 설명할 수 있는 (특수성의) 속성이 없다. 그러나 진여는 언어로 표현 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그 조건을 통해 다른 모든 용어는 폐기 될 수 있습니다. 진여의 본질에는 배제되어야 할 어떠한 것이나, 추가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There is a twofold aspect in suchness if viewed from the point of its explicability. The first is 'Trueness as negation' (cunyata), in the sense that it is completely set apart from the attributes of all things unreal, that it is the real reality. The second is 'Truness as affirmation (acunyata), in the sense that it contains infinite merits, that it is self-existent.

그것의 설명 가능성의 관점으로 본다면 진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비현실적인 모든 것의 속성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부정으로서의 진실성'(cunyata)이다. 두 번째는 '긍정으로서의 진실(아쿠냐타)'인데, 무한한 장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 존재라는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And again by 'Trueness as negation' we mean that in its (metaphysical) origin it has nothing to do with things defiled (i.e., conditional), that it is free from all signs of distinction existing among phenomenal objects, that it is independent of unreal, particularising consciousness.더욱 '부정으로서의 진실성'을 그것의 (형이상학적) 기원에서 그것이 오염된 것들 (즉, 조건적인 것)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존재하는 현상적인 대상들 사이에서 구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며, 그것은 비현실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의식과는 독립적이다.Thus we understand that suchness (bhutatathata) is neither that which is existence, nor that which is not-existnce, nor that which is at once existence and non-existence, nor that which is not at once existence ant non-existence; that it is neither that which is unity, nor that which is plurality, nor that which is at once unity and plurality, nor that which is not at once unity and plurality.

따라서 진여 (bhutatathata)는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동시적이지 않게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하며; 그것은 단일성도 아니고 복수성도 아니며, 동시적인 단일성과 복수성도 아니며 동시적이지 않은 단일성이나 복수성도 아닙니다.

In a word, as suchness cannot be comprehended by the particularising consciousness of all being, we call it the negation (or nothingness, cunyata).

한 마디로, 진여는 모든 존재의 고정된 사고방식에 의해 이해 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부정 (또는 무, cunyata)이라고 부릅니다.

The truth is the subjectivity does not exist by itself, that the negation (cunyata) is also void (cunya) in its nature, that neither that which is negated (viz., the external world ) nor that which negates (viz., the mind) is an independent entity.

진실 그 자체는 주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부정적인 (cunyata) 것 또한 본질적으로 공허한 것 (cunya)이며, 부정된 것 (즉, 외부 세계)도 부정하는 것 (즉, 마음)도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By the so-called trueness as affirmation, we mean that (as soon as we understand) subjectivity is empty and unreal, we perceive the pure soul manifesting it self as eternal, permanent, immutable and completely comprising all things that are pure. on that account we call it affirmation (or reality, or nenemptiness, acunyata). Nevertheless, there is no trace of affirmation in it, because it is not the product of a confused subjectivity, because only by transcending subjectivity (smrti) can it be grasped. - Teitaro Suzuki

소위 "진실"을 단정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바로 이해하는 그 즉시) 주관성이란 비어 있는 비현실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순수한 영혼 그자체는 영원하고, 영구적이며, 불변하며, 순수한 모든 것을 완전히 포함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확언(또는 현실, 또는 공허함, acunyata)이라고 부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긍정의 흔적이 없는 것은, 그것이 혼란스러운 주관성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주관성(smrti)을 초월해야만 그것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立義分(입의분) - 본론의 근본 사상

Establishment of Fundamental Mahāyāna Doctrine

 

  1) 法과 義 - 대승의 두 가지

已說因緣分(이설인연분) 次說立義分(차설입의분)

이미 인연분을 설하였으니, 다음에는 입의분을 설한다.

Having already explained the reason for writing this treatise, 

摩訶衍者(마하연자) 總說有二種(총설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一者法(일자법) 二者義(이자의)

마하연이라 함에는, 총설하여 두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두가지인가? 

첫째는 법이요, 둘째는 뜻=義이다. 

The Mahayana can be briefly expounded as two aspects, that is to say, What is the suchness of the Mayahana (eternal law (nature) of the universe), and what are its attributes.

 

[法과 義 : 법이라고 한 것은 대승의 본질을 법이라는 말로 대승의 본질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며,

義라고 한 것은 대승이라는 말dp 어떤 뜻이 있는가를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즉 왜 크다고 했는가의 뜻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물처럼바람처럼]

 

[입의분(立義分)은 본론이 담고 있는 대승(大乘) 즉 위대한 마음에 대한 기본사상을 총괄적으로 법(法)과 의(義)의 두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역문의 마하연(摩訶衍)은 Mahāyāna를 음역(音譯)한 것으로서 대승(大乘)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소승(小乘)과 대비되는 대승의 의미가 아니라「위대한 마음의 진리」라는 의미의 대승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대하여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소승(小乘)과 대비되는 대승(大乘)의 교의(敎義)를 나타내기 위하여 설해진「대승경전 가운데의 하나」라는 의미로 파악하는 학자도 있다.  물론 그러한 의미를 부정할 수 없는 내용들이 본론에 제시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대승기신론」이 중생의 마음 구조를 세밀히 분석하면서 그 마음이 여래지(如來地)를 향하여 매진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는 논서(論書)임이 분명하다고 볼때, 이를 소승(小乘)과 대비되는 대승(大乘)의 의미로 파악해 가려는 것은 본론이 중생심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대승의 의미와 그 견해가 상반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회통(會通)의 묘미를 찾아야 할 화쟁(和淨)의 교법(敎法)을 논쟁의 교법으로 오도(誤導)할 우려가 있는 견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본론은 대승(大乘)을 법(法)과 의(義)의 두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하면서 대승의 법(法)을 중생심(衆生心)이라고 분명히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승의 법(法)은 바로 우리의 중생심이고, 그 중생심의 내용과 의미를 설하는 대승의 의(義)에는 그 중생심 자체에 체(體), 상(相), 용(用)의 세가지 위대한 뜻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법(法)과 의(義)의 두가지 측면에서 설해지는 대승에 대하여,

법(法)은 대승의 법체(法體) 즉 중생심의 본체를 말하고,

의(義)는 대승이라 일컬어지는 의미, 즉 중생심의 법체 자체가 포함하고 있는 의의(意義)를 말한다.  

법은 자체의 성질이 변하지 않는,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는, 마음의 본체(本體)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논에서는 이를 중생심(衆生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중생심이라고 일컬어지는 법이, 어찌 대승인가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의(義)」의 의미이다.
대승의 의미인 의(義)에 대하여 본론은 체․상․용(體․相․用) 삼대(三大)를 세우고 있다.  

체대(體大)는 중생심 속에 자리하고 있는 진여(眞如)인 불위(佛位) 자체를 말하며,

상대(相大)는 그 진여가 간직하고 있는 속성(屬性), 즉 불타의 지혜와 자비 등의 무량한 덕성(德性), 그리고

용대(用大)는 그 무량공덕(無量功德)이 나타나 중생을 구제하는 불타의 활동을 말한다.  

이 사상은「법화경(法華經)의 일승(一乘)사상에서 유래되어 승만경(勝鬘經)등을 통하여 기신론에 계승된 것으로서, 여기에서 설해지는 대승의 법(法)은 중생심, 인간의 심성으로서의 법신․여래장(法身․如來藏)을 말하는 것이 된다.  이 법신․여래장을 대승이라 부르는 사상은「승만경」에 보이는 것이지만, 그 근원은「화엄경」의 심․불․중생(心․佛․衆生) 셋이 차별이 없다는 설에 근거하고 있는 것 같다.  중생이라는 것은 그것이 중생이라 하더라도 그 마음에는 무한히 풍부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 객관의 세계를 무한 광대하고 깊이 개척할 수 있는 것이며, 그 본성은 영원히 변치 않는 순수 청정한 자리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범부(凡夫)에는 번뇌가 있고,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은 그 번뇌에 의하여 오염되어 있다.  이 자성청정심과 번뇌와의 관계를 체계화한 것이「여래장경(如來藏經)」「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승만경(勝鬘經)」등의 여래장 계통 경전이다.  이 여래장 사상은 한쪽으로서는「보성론(寶性論)」에서 조직화되었으나 다른 한 쪽으로는「기신론(起信論)」에서 유식(唯識) 사상과 잘 종합되어 체계화된 것이다.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과의 결합은「능가경(愣伽經)」에서 나타나 있으나「기신론」은 이 사상을 받아 그것을 일보 전진시킨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 전종식]  

 

[What is the Mahayana? It is the soul of all sentient beings, that constitutes all things in the world, Phenomenal and supra-phenomenal; and through this sould we can disclose what the Mahayana signifies.

대승은 무엇인가?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구성하는 모든 지각있는 존재의 영혼이며, 현상적이고 경이로운 것입니다.이 영혼을 통해 우리는 대승이 의미하는 바를 밝힐 수 있습니다.

Because the soul in itself, involving the quintessence of the Mahayana, is suchness, but it becomes (in its relative or transitory aspect, through the law of causation) birth-and-death in which are revealed the quintessence, the attributes, and the activity of the Mahayana.-Teitaro Suzuki

대승의 본질을 포함하는 영혼 자체, 내재적인 본질,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은 (인과 관계의 법칙을 통해 상대적이거나 일시적인 측면에서) 출생과 죽음이 되어 본질, 속성 및 대승의 활동을 드러낸다]

 

2) 一心二門(일심이문) - 大乘(대승)의 法(법)

The quintessence of Mahayana, a thought(soul, mind) has two attributes of aspects

所言法者(소언법자) 謂衆生心(위중생심) 是心則攝一切世間法出世間法(시심즉섭일체세간법출세간법)

법이라 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 마음은 일체의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괄한다.

The quintessence of Mahayana, named as 'Law', means the suchness (mind) of sentient beings,
and this mind encompasses the law of mundane secular world and the law of sacred supermundane.

 

依於此心(의어차심) 顯示摩訶衍義(현시마하연의)

이 마음에 의지하여 마하연(대승)의 뜻을 나타내 보인다.

In the reliance on these minds, evince the quintessence of Mahayana.

 

[元曉 : 所言法者 謂衆生心이라고 한 것은 자체를 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이제 대승 중에 일체의 모든 법이 다 별다른 체가 없고 일심(一心)으로 체를 삼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是心則攝一切世間法出世間法라고 한 것은 대승법과 소승법이 다름을 나타내니, 참으로 이 마음이 모든 법을 통섭하며 모든 법의 자체가 오직 일심이기 때문이다. 이는 소승에서 일체의 모든 법이 각각 체가 있는 것과는 다르다.

* 憨山 : 《능가경》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중생의 참모습인 여래장이 여래의 삼십이상을 전변하여 일체 중생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이 의미를 구체적으로 부연해 보자. 본래 불생불멸이니 여래장이 중생의 생멸하는 허망한 마음과 하나로 화합하여 성립된 것을 아뢰야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뢰야식의 자체는 원래 여래장의 진여이며, 이를 또한 본각(本覺)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본각은 근본적으로 생멸하는 심의식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무명으로 불각하여 청정한 여래장이 진심이 무명으로 요동하여 생멸식이 있게 되었다. 그 때문에 아뢰야식을 무명의 업으로 이루어진 업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업식의 중생심이 본래는 여래장인 진여이기 때문에 진여문에서는 출세간의 사성법(四聖法)을 포섭하고, 생멸하는 업식에 의존한다면 생사법이 있게 된다. 그 때문에 생멸문에서는 육도범부(六道凡夫)를 포섭하게 된다.]

 

[중생심은 바로 우리 범인의 마음이다.  이 마음에는 무량무변(無量無邊)의 뛰어난 성질을 갖추고 있어 이 마음을 대승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 중생심은 이 논의「해석분」에서「일심의 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門)이 있다」고 설하는 바와 같이 이 중생심을 일심(一心)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 마음이 일체의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을 간직한다는 것이다.  
세간(世間)이라함은 생사의 세계, 미혹의 세계 즉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現象)의 세계를 말하며,

출세간(出世間)은 생사를 초월한 깨우침(悟)의 세계 즉 본체(本體)의 세계를 말한다.  

여기서 법(法)은 마음의 존재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중생심에는 생사의 세계에서의 존재[染法]와 깨우침의 세계에서의 존재〔淨法〕가 동시에 함장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淨과 染]이 구별될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로 화합되어 인격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일심(一心)이라 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염(染)과 정(淨)은 불이(不二)이면서 또한 따로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범부의 중생심은 염(染)과 정(淨)이 함께 있으나 깨우쳐 불타가 되면, 염법(染法)은 사라져 없으므로, 선악이 함께 있는 중생심은 그 근본의 본성이 자성청정(自性淸淨)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 자성청정심이 번뇌와 함께 있는 것을 여래장(如來藏)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의 중생에는 불타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심에는 세간법[染]과 출세간법[淨]이 화합된 상태와 세간법이 멸하여 출세간법만이 남는 상태의 두가지의 존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출세간법만이 남는 후자를 마하연(摩訶衍)의 체(體)로 표시하는 것이고, 염정(染淨)이 함께 있는 전자를 마하연의 의(義)로 표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인식되는 것은 '자기와 객관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범부가 생각하는 '자기와 객관의 세계'는 현상의 세계인 세간법(世間法)만을 의미하게 된다.  세간법에서는 그것이 선(善)이라 하더라도 번뇌에 오염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불각(不覺)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그 깊은 곳에는 본체인 순수청정한 출세간법(出世間法)이 있다.  이와 같이 자성청정심으로서 인간은 세간과 출세간, 염(染)과 정(淨)이 함께 자리하고 있으나, 중생심의 본성에는 청정한 본각(本覺)이 있으므로 이것에 의하여 대승의 뜻(義)이 말해지는 것이다.  망법(妄法)이 사라지면 그것이 곧 진여의 세계로서, 그것은 영원한 세계이며, 여기에서 대승의 체(體) 즉 본체가 나타나는 것이다.-전종식]

 

[The quintessence of the Mahayana as suchness exists in all things, remains unchanged in the pure as well as in the defiled, is always one and the same, neither increases nor decreases, and is void of distinction.

대승의 본질은 모든 사물에 존재하며, 더럽혀진 것뿐만 아니라 순수한 것에서 변하지 않고, 항상 하나이며 동일하며,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으며, 구별이 없다.]

七者(칠자) 爲示專念方便(위시전념방편) 生於佛前(생어불전)

必定不退信心故(필정불퇴신심고)

일곱째는 염불에 전념하는 방편을 나타내 보여, 불전에 왕생하여, 물러섬이 없는 신심을 반드시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Seventh, by showing the means of devotion on Mahayana to the all sentient being, to acquire absolute immovable Mahayana faith, and let them be reborn in the pure Buddha land.  

 

[일곱째 이유는, 아둔한 열근기(劣根機)의 사람 가운데에서도, 상품(上品)의 사람들은 자력으로 깨달을 이근(利根)은 없으나, 악의 업장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애당초 아미타불을 전념(專念)하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방편을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아미타불(阿彌陀佛) 앞에 반드시 태어나, 구원받는 몸이 된다는 것을 확신시켜, 물러서지 않는 신심을 획득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부분은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중 최후의 염불왕생(念佛往生), 불퇴방편(不退方便) 부분을 설하는 이유를 나타낸다.-전종식]

 

八者(팔자) 爲示利益(위시이익) 勸修行故(권수행고)

여덟째 이익을 나타내 보여 수행을 권유하기 위한 까닭이다. 

Eighth, by disclosing the benefits of believing in the Mayahaya, to encourage all sentient beings to practice Mahayana

 

有如是等因緣(유여시등인연) 所以造論(소이조론)

이와 같은 인연 등이 있으므로 논을 짓는 것이다.

These are the reasons for writing this treatise. 

 

[여덟 번째의 이유는, 이 대승의 법[一心 : 인간 심성의 위대성]을 믿으면, 그에 따른 이익이 광대함을 표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수행을 권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 5장「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을 설하는 이유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이 논을 저술하는 것이지만 이는 본론을 저술하는 이유를 열거함과 동시에, 뒤에 계속되는 논설의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부터 여덟째까지의 자세한 내용들이 이후부터 전개되는 이 기신론의 내용들이다.-물처럼 바람처럼]

 

2) 論(논)의 특색 Characteristic of the treatise

問曰(문왈) 修多羅中(수다라중) 具有此法(구유차법) 何須重說(하수중설)

물어 말하나니, 수다라 경에 이 법이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하여 거듭 설해야 는가?

Asking, if all of these doctrines are sufficiently written in the Mahayana Sutras, what is the reason for repeating it yet again?

 

[修多羅(수다라:sutra)= 경전.

* 이 기신론에서 설명하는 모든 것들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에 다 설해져 있다. 그런데 왜 다시 이 기신론이 필요한가 하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

 

答曰(답왈) 修多羅中(수다라중) 雖有此法(수유차법)

以衆生根行不等(이중생근행부등) 受解緣別(수해연별)

대답하여 말하나니, 수다라(경)에 이 법이 있을지라도, 중생의 근기와 수행이 같지 아니하며,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인연(조건)이 다르니,  

Answering, even though these doctrines have fully been expounded in the Sūtra,

yet as the predispotion and levels of self-discipline are various, and their terms of acceptance and understanding are various.

 

所謂(소위) 如來在世(여래재세) 衆生利根(중생이근) 能說之人(능설지인)

이른바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在世에는, 중생의 근기도 뛰어난=利根으로서, 

At the time of the Tathagata, predispositions and inclinations of people were excellent,

色心業勝(색심업승) 圓音一演(원음일연)

능히 설하는 사람=부처님은, 색신과 마음=色心의 업이 뛰어나서, 원만한 말씀=圓音으로 설하시면, 

Buddha, as the one who is transcendent in both mind and body, as an adept eloquent orator made an eloquent speech in his harmonious tone,

異類等解(이류등해) 則不須論(즉불수론)

서로 다른 사람=異類가 다 같이 해득하였으므로 논이 필요하지 않았느니라.

All different from each other who could easily grasped the noble meanings, therefore there was no need of writtings in Sutra.

 

[衆生利根(중생이근) : 利는 예리하다는 뜻이다. 즉 중생들의 근기가 둔한 것이 아니라 뛰어나다는 뜻이다.

* 能說之人(능설지인) : 설하는 사람이므로 여기서는 부처님을 가리킨다.

* 圓音一演(원음일연) : 원만한 소리(圓音)는 그 말씀이 원만하여 누구나 이해하기 좋다는 뜻이다.

* 異類等解(이류등해) : 듣는 사람들의 수준이 서로 달랐지만=異類, 부처님의 설법이 뛰어나 다 같이 이해했다=等解.

* 元曉[요약] : 원음(圓音)은 일음(一音)이니, 여기에 대한 여러 논사들의 설이 있다.

㉮.부처는 제일의신(第一義身)이니 만상(萬像)을 영원히 끊어 형체와 소리가 없으나 다만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한량없는 형체와 소리를 나타낸다. 부처의 입장에서 보면 소리가 없으니 일음이지만 중생의 편에서 보면 근기에 따라 하나가 아니다. 이는 경에 ‘그 무리들의 음에 따라 중생에게 널리 알려준다.’고 한 것과 같다.

.부처님 편에서 말한다면 실로 형체와 소리가 있으며 그 소리가 다름이 없이 일음이며, 원만하여 두루 하지 않음이 없다. 이 원음이 증상연(增上緣)이 있기 때문에 근기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 소리로 나타난다. 이는 ≪유마경≫에 ‘부처가 일음으로 법을 연설할 때에는 중생이 무리에 따라 각각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고 한 것과 같다.

㉰. 여래가 실로 많은 음성이 있어서 모든 중생이 가진 언음(言音)이 여래의 법륜의 음성에 포섭되지 않음이 없다. 그런데 부처의 음성은 장애가 없어서 하나가 곧 일체이며, 일체가 곧 하나이다. 일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일음이라 하고, 하나가 곧 일체이기 때문에 원음이라고 한다. 이는 ≪화엄경≫의 ‘일체 중생의 말하는 법을 여래가 한 말로 연설하여 다하여 남음이 없다. 모두 정밀한 음을 알아듣게 하고자 하시니, 보살이 이로 인하여 처음 발심하기 때문이다.’고 한 것과 같다.

* 增上緣(증상연:Adhipati-pratyaya) -은정희 해설 - 네 가지 연의 하나. 다른 것이 생겨나는 데 힘을 주어 돕는 여력증상연(與力增上緣)과 다른 것이 생겨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부장증상연(不障增上緣)의 2종이 있다.]

 

[앞에서 논을 짓는 여덟 가지 이유를 표시하였으나, 다시 본론의 특색인「짧은 글(論)속에 많은 의미를 포함한」점을 문답(問答)체로 밝히고 있다.
물어 말하기를「불타가 설한 경전(수다라 Sūtra의 음역) 가운데에는 이 논이 설하고 있는 법(法) 즉 여래장설등 모두 설해져 있다. 그럼에도 왜 다시 설하려 하는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확실히 여래가 설한 경전 속에는 모두 이 법이 설하여져 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받는 중생의 근기(根機)에는, 이둔(利鈍)의 구별이 있고, 수행 방법도 각기 차이가 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누구로부터 받는가의 기연(機緣) 또한 같지가 않다.  수행자의 희망이나 기호도 각기 다르다.  
따라서 설하는 내용은 같으나, 설하는 방법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하면, 석가세존 재세시에는, 중생의 능력과 소질도 뛰어났으며, 거기에다가 설법자는 불타이고, 가르침을 설하는 여래의 신체나 마음의 활동이 뛰어나, 불타의 완전한 설법이 한 번 이루어지면 한 목소리(圓音)로도,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동일하게 해득하였기 때문에, 한번의 가르침으로 그 이상 논을 설할 필요가 없었다.]

 

1. 若如來滅後(약여래멸후) 或有衆生(혹유중생)

能以自力(능이자력) 廣聞而取解者(광문이취해자)

여래께서 입멸하신 뒤라면, 혹 어떤 중생은 능히 자력으로 널리 듣고 알 수 있는 중생도 있고,

After the Nirvana of the Buddha, some have excellent intellectual abilities of grasping the noble meanings only after broadly reading and studying.

[元曉 : 널리 경을 들음으로써 부처의 뜻을 알게 되어 논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

 

2. 或有衆生(혹유중생) 亦以自力(역이자력) 少聞而多解者(소문이다해자)

혹 어떤 이는 역시 자력으로서 조금 듣고서 많이 이해하며. 

Others, who also have excellent intellectual abilities of grasping the noble meanings even though their reading and studying is less than others.

 

[元曉 : 널리 경을 듣지 않았지만 경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 역시 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3. 或有衆生(혹유중생) 無自心力(무자심력) 因於廣論(인어광론) 而得解者(이득해자)

혹 어떤 중생은 스스로의 심력이 없어, 널리 논한 것=廣論을 의지하여 해득하며,

Also, there are others who do not have their own intellectual ability to understand the meanings of sutras, but only through the assistance of elaborate commentaries.

 

[元曉 : 불경에만 의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심력이 없다고 말한 것이고 ≪지도론≫≪유가론≫ 등의 논을 들음으로써 알게 된다고 말하였다.]

 

4. 或有衆生(혹유중생) 復以廣論文多爲煩(부이광론문다위번) 心樂摠持少文(심락총지소문) 而攝多義(이섭다의) 能取解者(능취해자)

혹 어떤 중생은 또한 널리 논한=廣論의 글이 많다고 번거롭게 여기고, 다 갖춘 총지는 적은 글이지만 많은 뜻을 거두고 있음을 마음으로 즐겨 능히 해득하여 취하며,

Also, some people consider extensive commentaries as a great deal of hassle but take delight in studying and perusing Sutras that are composed of compact writings and elaborate fruitful meanings.

 

[摠持(총지:dharani) : 소리 나는 대로 번역하면 다라니(陀羅尼)이다. 부처님께서 하신 뜻과 내용 및 의리 등을 잃지 않고 다 지니고 있다고 해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는 요점 또는 핵심을 말한다.

* 元曉 : 근기가 예리하기는 하지만 번거로움을 참지 못해 오직 글이 간략하면서 뜻이 풍부한 논에 의해서만 불경에서 설한 뜻을 깊이 이해하기 때문이다.]

 

如是此論(여시차론) 爲欲總攝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위욕총섭여래광대심법무변의고) 應說此論(응설차론)

이와 같이 이 논은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의 끝이 없는 뜻을 모두 거두어 담는=총섭하는 것이므로 그에 응하여 마땅히 이 논을 설하는 것이다. 

For these reasons, this treatise embraces immensely and profoundly, Buddha's law, therefore I ought to expound it.

 

[元曉 : 此論 이하는 따로 네 번째 사람에 대한 것이니, 반드시 기신론을 지어야만 하는 뜻을 결론지어 밝힌 것이다.

즉 원효대사에 따르면 이 기신론이 필요한 사람은 네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 기신론을 읽으면 불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래의 열반 후에는, 근기가 뛰어난 사람[利根]도 있지만, 근기가 낮은 둔근(鈍根)의 사람도 있다.  누구로부터 가르침을 받는가의 수해(受解)의 연(緣)도 모두 뒤떨어지므로, 그에 따르기 위한 경(經)과 논(論)도 다함께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네 종류 사람으로 구별할 수가 있다.  
첫 번째 사람은, 자력으로 널리 경전에 있는 법을 듣고 연구하여, 불타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동일하게 자력으로 이해하는 사람이지만, 경전의 법을 조금만 들어도 많은 뜻을 이해하는 사람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경(經)에 의하여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의 일부 사람들은, 경전을 자력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이 주석해 놓은 논(論)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사람은 여러 논문을 연구하여 불법을 이해하는 사람이고,    
네 번째 사람들은, 여러 논문의 문장이 너무 길고 번잡하여, 견디기 어려운 이유로, 문장이 간단하고 내용이 풍부한 논문으로 불법을 이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 기신론은 짧은 논문으로서 글귀가 적지만, 여래의 광대미묘한 교법(敎法)의 여러 가지 의미가 총망라되어 있어 마지막 부류인 네 번째(4) 근기의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이 논을 설하는 것이다.]

Ⅱ. 正宗分(정종분)

 1. 因緣分(인연분) Reason for writing this treatise.- Introduction.  

  1) 論(논)을 짓는 인연

初說因緣分(초설인연분)

먼저 인연분을 설하다.

 Expounding the reason for writing this treatise.

 

問曰(문왈) 有何因緣(유하인연) 而造此論(이조차론)

묻는다. 어떤 인연으로 이 논을 짓는가?

Question 1. What are the reasons for writing this theory?

 

答曰(답왈) 是因緣有八種(시인연유팔종) 云何爲八(운하위팔)

답한다. 이 인연(동기, 이유)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여덟인가?

Answer, There are eight inducements to write this. What are they?

一者(일자) 因緣總相(인연총상) 所謂(소위) 爲令衆生(위령중생)

離一切苦(이일체고) 得究竟樂(득구경락) 非求世間名利恭敬故(비구세간명리공경고)

첫째는, 인연의 총상으로, 이른바 중생들로 하여금, 일체의 괴로움=苦를 떠나 궁극의 즐거움=究竟樂(열반)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며, 세속=世間의 명예와 이익=名利나 공경 받음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First, as the whole figure (In universal), induce all living beings to liberate themselves from all the sufferings and to obtain  the ultimate happiness.  It is not to seek the secular fame, benefit and reverence of this world.

 

[인연분은 이 기신론(起信論)을 저술하는 인연 즉 그 이유를 밝히는 부분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여덟 가지로 들고 있는데, 그 첫째는 총괄적 의미로서의 이유를 밝히고 있으며, 
물어 말하기를「무슨 인연으로 이 논을 지어 쓰는가」, 대답하여 말하기를「그 이유는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 이유이다. 「모든 중생에게 일체의 고통을 벗어나게 하여, 성불(成佛) 해탈(解脫)하여 열반(涅槃)의 즐거움이라고 하는 궁극적 안락을 얻게 하려고 하는 마음에서 저술하였으며, 저자가 세간의 명예나 이익, 존경을 바라고 이 논문을 저술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전종식]

 

[* 令(령) : ~하여금 ~하게하다.

* 마명보살이 이 논을 지은 것은 중생을 위한 것이지, 마명보살 자기가 명예나 이익을 얻는다든지, 세상 사람으로부터 공경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바람처럼 물처럼]

 

[六相圓融(육상원융) 화엄종에서 법계 연기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모든 존재는 여섯 가지의 상(相), 즉 총상(總相), 별상(別相), 동상(同相), 이상(異相), 성상(成相), 괴상(壞相)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육상은 서로 다른 상을 방해하지 않고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이 한 몸이 되어 원만하게 융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집에 비유하면

총상은 모든 존재는 반드시 여러 가지의 인연이 모여서 성립되는 것처럼, 기둥ㆍ서까래ㆍ대들보 등을 총괄하여 형성된 집이라는 보편성을 뜻하며,(총상은 한 존재나 집단의 전체적인 형태)

별상은 기둥ㆍ서까래ㆍ대들보 그 자체가 지닌 특수성을 말한다. (그 전체를 이루는 부분이나 개체)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전체는 개체를 떠나 있을 수 없고, 개체는 전체를 무시하고 살 수 없는 것이 人生의 현실이다. 전체는 개체가 개체다울 수 있도록 보호 육성하는 전체여야 하고 개체는 전체가 완전한 그것이기를 희망하면서 협력하는 개체여야 한다. 별상을 무시하고 總相(총상)만을 지나치게 강조했을 때 그것은 전체주의로 흐를 염려가 있고, 총상을 망각하고 別相(별상)만을 고집했을 경우 利己心(이기심)으로 들끓는 사회가 돼버리기 쉽다.

동상이란 기둥ㆍ서까래ㆍ대들보 등이 서로 힘을 합쳐 집을 조립하고 있는 유사성을 의미하며,

이상은 별상이 전체 속에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제각기 상을 잃지 않는 것처럼, 기둥은 세로로, 대들보는 가로로 있어 다른 유형이 되고 있듯이 다양성을 의미한다. 또한

성상이란 기둥ㆍ서까래ㆍ대들보 등이 각각 구조적 인연이 되어서 집을 완성시키고 있는 것처럼 통합성을 나타내며,

괴상이란 기둥ㆍ서까래ㆍ대들보 등이 집을 성립시키고 있으면서도 각기 스스로 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별상이 제각기의 개성을 지키어 총상으로 혼융되지 않는 차별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육상의 원칙은 이 우주 전체가 하나의 통일적 화합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으며, 각 상들은 서로 의존하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우주 법계의 실상임을 말해 주고 있다.]

 

二者(이자) 爲欲解釋如來根本之義(위욕해석여래근본지의)

令諸衆生正解不謬故(영제중생정해불류고)

둘째, 여래의 근본 뜻을 해석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바르게 이해하게 하고 그릇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며,

Second, unfold the origin(fundamental) teachings (doctrines or truth) of the Buddha and lead all sentient beings to have the right comprehension, not to take any erroneous paths.

 

[爲欲(위욕)= 하고자 하다. 오류.謬 그릇될 류, 그릇될 무, 그르칠 류]

 

[둘째 이유는,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인간 심성(心性)에 대한 불타의  근본적 교의(敎義), 다시 말하면 일심(一心 : 중생심) 이문(二門 : 심진여문, 심생멸문) 삼대(三大 : 體相用) 또는 여래장(如來藏)등의 참뜻을 명백히 밝혀 모든 사람에게 올바른 이해에 이르게 하여, 착오나 오해(誤解)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본론 가운데 제2장의「입의분(立義分)」과 제3장의「해석분」중「현시정의(顯示正義)」와「대치사집(對治邪執)」을 설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이 부분은 본론의 중심으로서 신심이 확립된 중생을 대상으로 한다.]

 

三者(삼자) 爲令善根成熟衆生(위령선근성숙중생) 於摩訶衍法(어마하연법)

堪任不退信故(감임불퇴신고)

셋째는 선근이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 마하연(대승)의 법을 감당하여 신심에서 물러서지 않는 믿음=不退信을 견디어 내도록 하기 위함이며,

Third, in order to lead those who have already attained full growth of good merits to endure their immovable faith in the great truth(Mahayana).

 

[셋째 이유는, 선근(善根) 즉 선을 행할 힘이 성숙된 중생에 대하여 대승(大乘)의 법(法) 즉 일심․여래장(一心․如來藏)등 인간 심성의 위대성에 대하여 이해를 깊게 하여 불퇴전(不退轉)의 신심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이 부분은「해석분」중「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 부분을 설하는 이유이다.]

 

[감임(堪任)= 임무를 감당함. 불퇴(不退)= 불퇴전(不退轉)으로 믿고 수행함에 있어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것.

善根成熟衆生(선근성숙중생) 이미 수행의 마음 자세가 갖추어져 있는 사람.]

 

四者(사자) 爲令善根微少衆生(위령선근미소중생) 修習信心故(수습신심고)

넷째, 선근이 적은=微少한 중생으로 하여금 신심을 닦아 익힘=修習하게 하기 위함이며,

Fourth, enable those who's good merits are weak and insignificant to cultivate and acquire their faith.

 

[넷째 이유는, 선근(善根)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심(信心)도 미약한 사람에 대하여,「여래장」에 대한 신심을 강화하는 수행(修行)을 시키고자 하기 위함이다.  이 부분은 제 4장「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중 최초의「네 가지 신심 (四信)」을 설하는 부분과「수행오문(修行五門)을 설한 부분중 시(施), 계(戒), 인(忍), 진(進) 등 최초의 사문(四門)을 설한 부분의 이유를 나타낸다.]

 

五者(오자) 爲示方便(위시방편) 消惡業障(소악업장)

善護其心(선호기심) 遠離癡慢(원리치만) 出邪網故(출사망고)

다섯째 방편을 나타내 보여 나쁜 업장=惡業의 장애를 없애고,

그 마음을 잘 지켜 어리석고 교만함=癡慢을 멀리 여의어, 삿된 그물=邪網에서 벗어나게 하기위한 까닭이며,

Fifth, by showing them expedient methods to lead them to eliminate all bad-karmic obstacles, and to obliterate arrogant pride by restraining their own thoughts,
and in order to make themselves to be free from their erroneous views

 

obliterate 1. 지우다 2. …을 제거하다 3. …의 흔적을 없애다 [əblítərèit]

 

[다섯째의 이유는, 수행 미숙(修行 未熟)의 중생 가운데에서도, 특히 악업(惡業)의 장애가 무거운 사람[無善根]에게는, 불타를 예배하고 지성으로 참회하는 방법을 가르쳐, 악의 업장을 지우고, 그들의 신심을 지켜, 우치(愚癡)한 마음과 자만심을 제거하여, 사견(邪見)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이 부분은「수행신심분」중 수행의 사문(四門)을 설한 최후의 결말 문장[障碍를 제거하는 방편]을 설하는 이유이다.]

 

[邪網(사망) 경을 잘못 이해하여 잘못된 견해에 걸려 있는 것.

* 憨山 : 여기서부터 여덟째 인연까지는 근기가 하열하여 수행신심에서 쉬이 물러나는 자들이 많은 방편을 의뢰해야만 한다. 그 때문에 다섯째부터 여덟째까지의 네 인연이 있게 된 것이다.]

 

六者(육자) 爲示修習止觀(위시수습지관) 對治凡夫二乘心過故(대치범부이승심과고)

여섯째, 지관을 닦아 익힘=修習함을 보여, 범부와 이승의 마음의 허물(과오)을 바로 잡도록=對治하기 위함이며,

Sixth, showing them practice in cessation of delusive mind and observe intellectual insight,
and in order to rectify those whose erroneues views of secular and Hīnayāna.

 

secular 1. 세속의 2. 속인의 3. 세속적인 [sékjulər]

rectify 1. 수정하다 2. 고치다 3. 정류하다 [réktəfài]

 

[여섯째 이유는, 총명한 이근(利根)의 사람들에게 선정(禪定)하는 마음의 지(止)와 그 안정된 마음에서의 진리의 관찰을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쳐, 범부(凡夫)와 이승(二乘)의 잘못을, 즉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버리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수행의 오문(五門)」중 최후의 지관문(止觀門)을 수습(修習)하도록 하는 것을 설하는 이유로 삼고 있다.]

 

我執(아집)자기중심적인 생각이나 좁은 소견에 사로잡힌 고집 또는 심신 중에 사물을 주재하는 상주불멸의 실체가 있다고 믿는 강한 집념
法執(법집) 법집(我執)은 존재하는 만물 각각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견해 또는 집착으로 소지장(所知障)이라고도 한다.

 

[二乘(이승)=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성문은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 아라한의 경지를 이루려는 사람들이다. 연각은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혼자 수행을 하여 연기법을 깨달아 아라한을 이루는 사람으로, 연각을 벽지불(辟支佛) 또는 독각(獨覺)이라 한다. 이승의 마음의 허물이란 이승이 자기의 번뇌를 끊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중생 구제에 관심이 없는 것을 말한다.

對治(대치) : 상대하여 다스림.]

 

[지관(止觀)= *불교에서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해 정확히 판단하고 자재(自在)로이 대처하는 것을 이르는 말.
‘지’와 ‘관’의 합성어로서 ‘지(止)’는 모든 망념(妄念)을 그치게 해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기울이는 것, 즉 정신집중으로 마음이 안정된 적정(寂靜)의 상태이며, ‘관’은 진리, 실상(實相)을 제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지관(止觀)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에 해당되고, 지와 관의 양자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 같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으며, 불교도의 중요한 실천 항목이다.- 관음사.
*선정과 지혜를 균등하게 담는 수행법으로, 지는 멈추어 모든 번뇌를 그치는 것이고, 관은 자신의 본래 마음을 관찰하고,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것을 말한다. 초기 불교부터의 수행법으로서, 특히 중국의 천태종에서 중시했다. 천태종의 개창자인 지의는 〈마하지관 摩訶止觀〉에서 지에 지식의, 정지의·대부지지의 등 3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관에 관천의·달관의·대불관관의 등 3가지 의미를 부여하며, 지관의 종류를 점차지관·부정지관·원돈지관의 3가지로 나누는 등 지관의 수행법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다움백과]

2) 述議偈(술의게) - 論(논)을 짓는 목적

爲欲令衆生(위욕령중생) 除疑捨邪執(제의사사집) 

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중생들로 하여금 의혹(의심)을 없애고

그릇된 집착을 버리게 하며, 

That all beings (sarvasattava) may rid themselves of doubt (erroneous conceptions) about the True Path, become free from evil attachment.

 

[爲欲令衆生(위욕령중생) 除疑捨邪執(제의사사집)은 ‘중생으로 하여금 의문을 풀게 하고, 그릇된 견해를 고치게 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의문을 풀어주는 除疑(제의) 부분을 기신론은 입의분과 해석분 중 顯示正義(현시정의) 부분에서 해설하고 있으며, 邪執(사집)을 버리는 捨邪執(사사집) 부분은 對治邪執(대치사집)에서 그릇된 견해를 고쳐 치유하도록 하고 있다.- 전종식]

 

[衆生(중생) : 진리를 깨달은 자를 부처라고 하고, 그렇지 못한 자를 중생이라고 한다.

除疑捨邪執(제의사사집) 의혹을 제거하고, 삿된 집착을 버림. 중생의 특징이 바로 의혹을 가짐과 그릇된 집착을 가지는 것이다.

 

元曉대사: 의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을 의심하는 것으로 이는 발심에 장애가 된다. 둘째는 교문(敎門)에 대한 의심이니 이는 수행에 장애가 된다. 법을 의심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법이 하나라면 다른 법이 없으니 중생이 없을 터인즉, 보살은 누구를 위하여 서원할 것인가? 법이 여럿이라면 상대와 내가 다를 것인데 어떻게 동체(同體) 대비(大悲)를 일으키는가? 교문을 의심한다는 것은 여래가 세운 교문이 여럿인데 어느 문에 의해 수행할 것인가?
기신론에서는 일심법을 세워서 두 가지 문을 열었다. 일심법을 세운 것은 처음 의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대승법에는 오직 일심만 있으니, 일심 밖에는 다시 다른 법이 없으나 다만 무명이 자기 일심을 미혹하여 모든 물결을 일으켜 육도에 유전함을 밝힌 것이다. 두 가지 문을 연 것은 두 번째 의심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는 여러 교문이 많지만 진여문에 의해 지행(止行)을 닦고 생멸문에 의해 관행(觀行)을 일으킨 것을 밝힌 것이다.
사집을 버린다는 것은 여기에 두 가지 사집이 있으니 법집(法執)과 인집(人執)이 그것이다. - 바람처럼 물처럼]

 

[二障義(이장의) - 법집(法執)과 인집(人執);

번뇌를 인집(人執)의 측면으로 보아 열반(涅槃)의 과(果)를 방해하는 것을 번뇌장이라 하였고, 

지식을 법집(法執)의 측면으로 보아 보리(菩提)의 과를 장애하는 것을 소지장이라 하였다.
원효가 자신의 독특한 견지에서 6단(段)으로 나누어서 논술한 것으로, ① 명의(名儀)를 해석하고, ② 체상(體相)을 논하고, ③ 장(障)의 공능(功能)을 밝히고, ④ 제문(諸門)의 상섭(相攝)을 밝히고, ⑤ 치단(治斷)을 논하고, ⑥ 총결택(摠決擇)으로 끝을 맺는다.
이 책에서 총괄적으로 정리되고 있는 장애의 문제는 일심(一心)의 원천인 본각(本覺)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제거되고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제기된다.
따라서 장애는 불각(不覺)으로서 각(覺)과는 상대되는 것이다. 원효는 각의 두 장애를 논함에 있어서 현료문(顯了門)과 은밀문(隱密門)의 범주를 가지고 분별 판단한다.
현료문에서는 ≪유가론 瑜伽論≫을 중심으로 유식법상가(唯識法相家)의 설을 종합하고 있으며, 은밀문에서는 ≪대승기신론≫을 중심으로 유식계(唯識系)에 대한 교리를 조직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문(二門)을 상호 밀접히 관련시킴으로써 이설(異說)을 원융회통(圓融會通)시켰다.
이에 따르면 현료문의 이장이 은밀문의 번뇌애(煩惱碍)에 포섭되고, 번뇌애는 지애(智碍)와 본말관계(本末關係)에 있는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장애의 근본은 지애인 무명(無明)에 귀착된다. 장애의 근원이 하나인 진리를 알지 못하는 근원적 무지성(無知性)이라는 데에서 장애가 지니는 인식적 의미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원효는 무지에 대응되는 반야지(般若智)가 단순히 실재하는 고통이나 장애를 없애는 수단이 아니라 고(苦)의 해탈이며 자유임을 확인시키고 있다.
이 책은 흔히 수행상의 문제로만 취급되는 장애를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고찰하여 그 인식적 의미를 드러내려고 노력하였는데, 이는 불교가 갖는 앎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입장을 천명하기 위함이었다.
장애의 극복이 곧 깨달음을 얻는 것이며,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동시에 성취되는 청정한 경지의 현현(顯現), 즉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원효에게 장애라는 것은 고통없는 상태인 해탈을 방해하는 것이고, 인식적 결함 또는 잘못된 견해를 포함하는 것으로, 제거되고 부정되어야 할 문제이다.
즉, 장애의 극복은 파사(破邪)요, 각의 현현은 현정(顯正)이라고 하는 파사즉현정(破邪卽顯正)의 관계 속에서 각과 장애를 함께 논의한 것이다.- 다움백과]

 

起大乘正信(기대승정신) 佛種不斷故(불종부단고)

대승에 대한 바른 믿음을 일으켜 (마하연의 바른 믿음을 일으켜),

부처의 씨앗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By awakening of the right faith of Mahāyāna (craddha),
The Buddha's real seed will be sown forever.

 

[佛種不斷故(불종부단고) 불타의 법통을 끊어지지 않게 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佛種(불종)은 Buddhavamasa의 의역으로 불타의 법통을 의미한다

귀경계는 이 논을 지으면서, 먼저 불법승의 삼보에 귀의하는 뜻을 밝힌 것이지만 기신론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전종식]

 

[佛種(불종) 성불의 씨앗,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 깨달음의 싹]

 

2. 發起序(발기서) Discourse

  ㉮ 論(논)의 이유와 구성(논의 체를 정립함)

Classification of Explanations in This Treatise

論曰(논왈) 有法能起摩訶衍信根(유법능기마가연신근) 是故應說(시고응설)

논하여 이르나니, 법이 대승(마하연)의 믿음의 뿌리=信根을 일으키므로, 그러므로 마땅히 설하는 것이다.

For the purpose of awakening in all beings a pure faith in the Mahayana,
(in order to destroy their doubts and attachment to false doctrines, and of affording them an uninterrupted inheritance of Buddha-seeds,) I write this discourse.

 

[☆摩訶衍(마하연, mahayana) 마하(摩訶)는 크다는 뜻이고 연(衍)은 탈 것이라는 뜻이다. 이를 대승(大乘)이라고 번역한다. 소승(小乘)은 수레가 작아 혼자만 탈 수 있으나, 대승은 수레가 커서 다른 사람도 태울 수 있다. 그러므로 대승은 자기만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한다.

☆元曉(원효) 법이 있다고 한 것은 일심법을 이른 것이다. 이 법을 잘 이해하면 반드시 광대한 신근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에 起摩訶衍信根이라고 하였다.…신근이 이미 섰다면 곧 불도에 들어가며, 무궁한 보배를 얻는데, 이러한 큰 이익을 논에 의하여 얻기 때문에 是故應說이라고 한 것이다.

☆憨山(감산) 有法(유법) - 여기에서는 논문의 종지와 그 근본인 일심법을 총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유법(有法)이란 논문이 의지하고 논리를 전개한 종지이며 그 근본이다. 유법을 말해보자. 우리의 일심법에는 이문(二門)과 삼대(三大)의 의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논서가 종지로 의거할 대상인 일심법을 정면으로 제시한 것이다.- 물처럼바람처럼]

 

[이 부분은 원저자의 서문(序文)으로서 본론 전체를 어떠한 구분으로 쓸 것인가를 밝히고, 위대한 일심(一心) 즉 여래장(如來藏)의 법이 능히 대승의 신근(信根)을 일으키게 한다는 뜻을 간략히 기술한 것이다.-전종식]

 

說有五分(설유오분) 云何爲五(운하위오)

설명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다섯인가?

The explanation consists of five chapters.  What are the five? 

一者因緣分(일자인연분) 첫째는 인연분(본론을 쓰는 이유를 밝힘)

The first, reason for writing this treatise.- Introduction.  

二者立義分(이자입의분) 둘째는 입의분, (본론의 근본적 의미를 밝힘)

The second, establishment of the fundamental of Mahāyāna doctrine. - General statement of principles.

三者解釋分(삼자해석분) 셋째는 해석분, (앞서 밝힌 근본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해석)

The third, detailed explanation of the Mahāyāna doctrine.- The explanation itself

[바른 뜻을 나타내는 현시정의(顯示正義)와 그릇된 견해를 치유하는 대치사집(對治邪執) 및 깨달음의 길에 나아가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 여기에 포함된다.- 전종식]

四者修行信心分(사자수행신심분) 넷째는 수행신심분,(信心과 그를 바탕으로 한 수행을 밝힘)

 The Fourth, practice of the Mahāyāna faith. - The practice of faith.

五者勸修利益分(오자권수이익분) 다섯째는 권수이익분이다.(이익을 나타내어 수행을 권함)

 The fifth, benefits of the practice of the Mahāyāna faith. - Benefits.(derived therefrom)

이것은 이 '大乘起信論'의 목차이다.

 

[Dharma(법, 법성, 본체); According to a general interpretaion of Mahayana Buddhists, Dharma means ⓛ that which exists ② the object of understanding. Dharma may therefore be rendered in the first sense by 'object', or 'thing', or 'being' including everything mental as well as physical in its broadest sense, and so sarvadharma will designate all possible existences in the universe; while Dharma in the second sense may safely be rendered by 'law' or 'doctrine' as generally understood by Western Buddhist scholars, to most of whom, however, the first significance of the term is strangely unknown.

대승불자들의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Dharma란 첫째 모든 존재들 둘째 이해의 대상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Dharma는 우선적으로 가장 광범위한 뜻의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여 '대상' 또는 '물건' 또는 '존재' 등으로 쉽게 표현할 수 있겠다. 그래서 전체의 모양(總相총상, sarvadharma)은 우주에서 가능한 모든 존재를 지칭할 수 있을 것이며; 그에 반하여, 두 번째 의미로는 서양 불교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법' 또는 '교리' 따위로 쉽게 표현될 수 있으나,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용어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Max Muller fitly remarks in his introduction to the English translation of the Vajracchedika, 'Dharma in its ordinary Buddhist phraseology may be correctly rendered by law/ Thus the whole teaching of Buddha is called the good law, Saddharma. But in our treastise Dharma is generally used in a different sense. It means for and likewise what is possessed of form, what is therefore different from other things, what is individual, in fact, what we mean by a thing or an object. This meaning has escaped most of the translators, both Oriental and Western, but if we were always to translate Dharma by law, it seems to me that treatise that the whole drift of our treatise would become unintelligible.' In this translation Dharma is rendered sometimes by 'thing' sometimes by 'law', sometimes by 'truth' or 'doctrin', according to the context. But when it is synonymous with suchness, I have retained its original Sanskrit form, capitalised.- Teotaro Suzuki

막스 밀러는 그의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의 영어 번역에서 적절하게 소개하였는데, 'Dharma는 '제법' 이라고 일반적인 불교적 용어으로 바르게 표현 될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올바른 가르침 '묘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논설에서 Dharma는 일반적으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 그것은 형태를 가진 것을 의미하는, 즉 다른 것들과 다른, 개인적인 것으로, 사실 우리가 뜻하는 것은 '대상' 또는 '물건'이다. 이러한 뜻은 동양과 서양의 대부분의 번역에서 빠져있지만, 한편 만약 우리가 항상 Dharma를 법이라고 해석한다면 논설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멀어져서 난해하게 될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Dharma를 때로는 '진리' 또는 '교리', 때로는 '제법'으로 그 문장의 흐름(내용)에 따라 표현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본성과 같은 의미일 때에는 나는 산스크리스트 원어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테오타로 스즈끼의 대승기신론]

及彼身體相(급피신체상) 法性眞如海(법성진여해)

그리고 그 불신의 체상(법보)인 법성의 진여해와 

He who is the essence of Dharma, and the substance of sentient beings and the sea of unchanging truth, 

 

[及彼身體相(급피신체상)의 及(급)은 ‘그리고’라는 뜻으로 게송의 자구를 맞추기 위해 붙여진 것

彼身(피신)은 불신을 말하며

體相(체상)은 체대 상대를 말하는 것으로 법보를 의미하고 있다

체대는 佛의 본체, 본질, 자체를 말하며, 상대는 본체가 갖고 있는 공덕 즉 지혜 등을 일컫는 것으로, 지혜의 그 내용이 법이므로 이를 法寶(법보)로 삼는 것이다.

法寶(법보)의 의미를 敎理行果(교리행과)의 네 측면에서 고찰하면

敎(교)는 교법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理法(이법)은 가르침이 나타낸 진리,

行法(행법)은 부처님의 교법을 사람이 실천하는 것으로서 성립되고

果法(과법)은 결과적으로 이법이 인격과 합일되어 불로 나타난 것을 말하며,

이 인격이 실현한 법[果法]이 참된 법보이다. – 법장

法性眞如海(법성진여해)는 불타가 갖추고 있는 본체를 법성과 진여로 표시하여 이를 바다에 비유하여 그 광대함을 나타낸 것이다

法性(법성)은 일체법의 본성, 본질, 본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법장은 법성을 불성과 구별하여, 불성은 중생의 본체이고, 법성은 사물의 본체를 의미한다고 했으나 여기서는 불성과 법성은 같은 의미로 보아도 될 것이다.

법성은 불변의 진리이므로 진여라 하지만, 緣(연)따라 染(염)과 淨(정)이 되는 것이 마치 바다에 파도가 일면 천태만상으로 변하지만 해수 자체는 불변인 것과 같은 이치로 비유된다. - 전종식]

 

[ 彼身體相(피신체상) 彼身 佛身을, 體相 본체 말하며 불신의 본체를 法身(법신)이라 한다. 부처란 진리를 깨달은 존재를 말하므로 부처가 부처되게 하는 본질은 진리에 있고,  진리를 이라 하며, 진리 자체를 가리켜 法身이라 한다.

眞如海(진여해) 法性 표현하되 없음을 이라 하였고 한결 같음을  하였고, 넓고 한량없음을  하였다.

- 물처럼바람처럼]

 

無量功德藏(무량공덕장) 如實修行等(여실수행등)

무량한 공덕장과, 여실히 수행 하시는 분들께 목숨 바쳐 귀의합니다.(歸命)

where the infinite merits(virtues) are stored.

I offer my life for the congregation of Sangha who make steady and persistent discipline   

 

[無量功德藏(무량공덕장)은 불타의 본체인 체대에 갖추어져 있는 지혜광명 등 무량한 성공덕, 즉 相大(상대)를 말하며, 불타의 법신이 무량한 공덕을 함장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공덕은 불타의 경우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지만, 중생의 경우는 감추어져 있어-悉有佛性(실유불성)-, 이를 범부의 법신인 如來藏(여래장)이라 한다.
체대와 상대를 합하여 불타의 법신으로 삼고 있는 理智不二(이지불이)를  나타낸 것이다.
如實修行(여실수행)은 승보를 나타낸 것으로 如實修(여실수)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수행한다는 뜻이며, 초지 이상 십지까의 보살행을 말한다.- 전종식]

 

[無量功德藏(무량공덕장) 법신이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였다.

如實修行等(여실수행등) 참답게 수행함을 如實修行이라 한다. 원효스님은 무량공덕장은 덕을 들어 사람을 말한 것이고, 여실수행등은  행덕을 찬탄한 것이며,  부처가 중생과 함께 하며 중생들 제도하는 것과 같은 후득지(後得知) 행으로 보았다. 如實修行等(여실수행등)은 승보(僧寶) 찬탄한 이며, 즉 불법승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及彼身(급피신) ~ 無量功德藏(무량공덕장) : 法寶,  진리에의 귀의를 나타내었다.- 바람처럼물처럼]

 

congregation 1. 신도 2. 회중 3. 집회 4. 교구 [kὰŋgrigéiʃən]

assiduously 1. 열심히 2. 근면성실하게 [əsídʒuəsli]

 

[anatman, 無我무아= 산스크리트어 anātman 또는 nirātman. 아트만(atman, 自我)에 대비되는 말로,  내가 아닌 것=非我라는 말과, 나를 소유하지 않은 것=無我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무아(無我)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나(自我)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며 무아는 연기(緣起), 공(空), 무상(無常) 등과 긴밀히 연관되는 개념으로, 연속적이며 불변의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한다.
아트만(ātman, 我)은 인도의 정통적 철학의 여러 학파에 의해 실재라고 간주된 영원불멸의 본체이고, 고정적 실체이다.
불교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무상(無常)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영원의 본체와 실체는 인식될 수 없다. 즉, 영구불변의 실체(實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주장은 다른 모든 철학사상으로부터 구별하는 특징이자 불교의 근본사상이다. 나의 존재 유무에 대한 물음에 석가모니는 대답하지 않았다는 무기설(無記說)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아는 나의 것,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집착을 배제하는 것이다.
대승에서는 무아(無我)를 공(空, śunya)라고 표현했다. 대승의 중도일승(中道一乘)과 일승원교(一乘圓敎) 등의 이론은 모두 공사상을 밑바탕으로 성립했다. 여기서의 공은 아무 것도 없는 단멸공(斷滅空)이나 물질인 색(色)이 멸(滅)해서 아무 것도 없다는 색멸공(色滅空)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색의 자성(自性)이 공하다는 색성공(色性空)을 말한다. - 도봉별곡]

 

[대승기신론은 석가세존이 열반하신 후 약 600년경에 마명보살(서천 제 12대 조사)이 저술한 논서 이며, 마명보살이 대승기신론을 저술한 동기가 소승의 수행자들이 유심(唯心)의 도리를 믿지 않고 논쟁만 일삼아, 사도(邪道)가 정법을 침범하고 훼손하므로 삿된 무리들을 제거하고 정법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唯心(유심)과 唯識(유식)의 도리를 밝혀, 수행의 바른 길을 제시하고자, 광대한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요결을 담아 전하고자 본 대승기신론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대승기신론의 大乘起信은 대승의 바른 믿음을 크게 일으킨다는 뜻이며,
大乘(대승)이란 진리의 큰 수레에 함께 타고 피안인 열반의 땅, 안락의 땅에 도달 한다는 뜻이다.  
대승기신론은 범부중생들을 비롯한 10법계는 모두 대승의 수레에 함께 타고, 大總相法門體(대총상법문체)에 귀일 되어 있으나 중생들이 미혹하여 이를 깨닫지 못하여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연고로, 중생들로 하여금 대승의 뜻을 바르게 전하고 이를 바르게 이해하여 믿음-信-을 일으키고, 一心法界(일심법계)에 契合(계합) 하도록 한것이 마명보살의 대승기신론이다. -밀양 참회사문각원]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

The Awakening of Faith.

馬鳴菩薩造 (마명보살조) 

Patriarch Ashvagosha.

梁天竺三藏法師真諦譯(양천축삼장법사진제역)

Translated by Siksananda of Yang Dynasty

 

* Ashvaghosa;馬鳴, the first expounder of the Mayanistic Buddhist patriarchs, is known to the most eminent leaders among earlier Buddhists. He was in some way or other connected with the third convocation in Kashimir, probably presided over by the Bhikshu Parcva. The date, which varies according to different authorities from three hundred to six hundred years after the Parinirvana of Buddha.

마명 보살은 초기의 불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선두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승적인 불교를 상세히 설명한 시조이다. 마명 보살은 ,아마도 비크슈 파르크바가 주관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케시미어의 세 번째 집회와 어떻게든 연관되어있었습니다. 생존 기간은 각각의 기록에 따라 다양하게 다르지만, 부처님 열반이후 300년에서 600년 사이로 보고있습니다.

 

* 아쉬바고사(Ashvaghosa;馬鳴), 부처님 입멸 후 600년경 중인도의 코살라국 쉬라바스티(Sravasti:舍衛城)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외도를 따르다가 나중에 불교에 귀의하였다. 혹자는 대승기신론의 범어본이 없음을 들어 중국에서 지은 것이 아닌가 하기도 하지만 대승불교의 시조인 아쉬바고사가 저자라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시대를 격하여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각각 번역을 한 것을 보면 당시에는 원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마명보살을 화엄종의 초조(初祖)로 본다.

 

* 논서의 한역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양(梁)나라의 파라마르타(Paramartha;眞諦;499-599)이 번역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당나라의 쉬크샤난다(Siksananda;實叉難陀;學喜;652-710)가 측천무후 시대 695-700 사이에 번역한 경전 속에 이 대승기신론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것을 신역(新譯)이라 부른다

중요시되고 있는 세 종류의 주석서는 첫째 정영사문혜원(523-592)대승기신론 소 두권’, 둘째 신라해동사문 원효(617-686)대승기신론 소 두권셋째 법장(643-712)대승기신론 의기 세권이다.

기신론은 인연분, 입의분, 해석분, 수행신심분과 권수이익분의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본론의 서론에 해당되는 인연분은 본론을 저술하는 여덞가지의 이유를 설명하고 
둘째 입의분은 본론의 기본적 사상을 총론적으로 제시하여 대승을 일심(一心 : 衆生心) 이문(二門 : 心眞如門, 心生滅門) 삼대(三大 : 體大, 相大, 用大)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셋째 해석분에서는 앞의 입의분을 해석하는 장으로 본론의 중심이며, 주로 대승을 밝히고 있으며, 또 다시 현시정의, 대치사집, 분별발취도상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넷째 수행신심분은 기신을 설하며, 신심에는 네 종류가 있고 수행에는 다섯 문이 있어, 사신은 진여, 불, 법, 승의 삼보를 믿고, 시, 계, 인, 진, 지관의 오행을 닦는 방법을 설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권수이익분에서는 대승과 기신의 결론인 유통분을 설한다

 

I. 序分(서분)

 1. 歸敬序(귀경서) Adoration

귀경게는 불 법 승 삼보께 귀의하는 뜻을 밝히면서 예배드리는 글을 게송으로 담은 것으로 해설자가 편의상 붙인 것이다. 기신론의 원 저술자가 나눈 제목은 인연분, 입의분, 해석분, 수행신심분, 권수이익분 등 다섯가지 뿐이다.  

  1) 三寶(삼보)에 귀명

歸命盡十方(귀명진시방) 最勝業偏知(최승업편지) 

다함이 없는 생명에 돌아가 귀의하며, 가장 높은 업으로 두루 아시며, 

I offer my life to the all, to all beings, and Buddha whose wisdom is infinite and transcendent,

 

歸命(귀명)은 목숨을 바쳐 진여법성, 삼보에 의지 한다는 것 → 귀의이며 南無의 역어,   
盡十方(진시방)은 귀의의 대상인 불법승이 있는 온 시방 세계을 의미  

歸命盡十方(귀명진시방)은 이들 삼보에 귀의함을 밝힌 것이다.

歸命(귀명): 범어 namas 또는 namo, 음역하면 南無, 南謨. namo의 음역어인 南無(나무)에서는 받침을 빼고 '나'로 읽는다. 이는 중국어, 일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歸命(귀명)이란 목숨을 건다는 말이다. 뒤집어 말하면 목숨을 걸지 않는 것은 거짓 약속이고 거짓 믿음이란 것이다. 인생을 바꾸겠다는 것은, 목숨(命)의 궤도 수정인데 목숨을 걸지 않고 목숨의 궤도 수정이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들 저런들 이 목숨 이대로 살겠다는 것이니까. 목숨을 걸지 않는 그런 반성과 그런 약속과 그런 믿음이란 것 거짓이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반성과 참회도 가지가지이고, 수준차가 있지만, 보통의 반성이란 것들은 관성을 이기지 못한다. 6식이라는 의식적 차원의 반성, 아주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통찰력이 있는 반성이라도 해도 관성을 이기지 못한다.  6식, 7식, 8식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목숨을 걸 때, 비로소 나라는 존재의 코어(心)에 통할 수 있는 진정성이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는 겉 다르고 속 다른, 표리부동한 모습 그대로 구차한 명을 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배영순」

 

「最勝業偏知(최승업편지)는 가장 뛰어난 중생구제 활동능력과 깨달음의 지혜를 가진 불타를 말한다.
업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불타는 업이 소멸된 분이기에 업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 이러한 경우의 없은 ‘업용’ 즉 '용대'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最勝業(최승업)은 가장 뛰어난 활동 능력, 즉 불타의 용대 활동을 말한다.
偏知(편지)는 불타의 지혜가 온 누리에 가득하다는 의미로

법장은 ‘안으로는 두루 아는 지혜가 있고 밖으로는 걸림이 없는 색신이 있다’고 하며,
원효는 ‘지혜의 바탕인 체가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면서 ‘섭대승론’을 인용하고 있다. ‘마치 허공이 일체의 물질세계에 두루 퍼져, 생기고 머물고 사라지는 변이가 없는 것처럼, 여래의 지혜도 그러하여, 알아야 할 일체의 자리에 아는 바가 두루 미치어 잘못 아는 일이나 달리 아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전종식」

 

「最勝業偏知(최승업편지) 意業(의업)이 가장 수승하시고 意業(의업)이 뛰어나 걸림 없음을 말하는 것, 범부는 진여법계의 이치를 아예 모르고, 이승(二乘)은 열반에만 치우쳐 알고, 십지 보살은 열반의 상주(常住)와 생사의 무상(無常)이 둘이 아님을 알지만, 유일하게 부처님만이 진여법계의 이치를 빠짐없이 보편하게 아신다.

일체지혜를 증득하지 못한 중생계는 뒤바뀐 생각으로 그릇되게 알고, 치우쳐 알고, 부분적으로 알거나, 온전히 알지 못하므로, 오직 實相(실상)의 지혜를 증득하신 부처님만이 밝아서 진여실상이 만물에 상응함에 契合(계합)되고, 온 우주법계에 충만한 지혜로 뚜렷이 비추어, 중생이 원하는 바와 그 근성이 미치고 미치지 못하는 바를 능히 알아서 세상을 구제한다 하였다. 세상을 구제하자면 語業(어업)이 뛰어나야 하는데,   
語業(어업)이란?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의 설법이다. 경전의 말씀으로 깨달음을 얻은 이들의 뛰어난 설법만이 세상을 구제하는 방편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 業(업)의 기틀이 달라서 듣는 이마다 이해하는 바가 다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對機說法(대기설법)과 威儀敎化(위의교화)와 無記說法(무기설법)등으로 중생의 근기에 따라 교화하기에, 대자대비의 힘(大慈大悲力)을 지니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 准提覺圓(준제원각)」

adoration 1. 숭배 2. 동경 3. 기도 [ӕdəréiʃən]

transcendent 1. 초월적인 2. 탁월한 사람 3. 이해가 안 가는 사람[trænséndənt]

 

色無礙自在(색무애자재) 救世大悲者(구세대비자)

걸림없이 자재로우신 몸(색신, 육신)이시며, 세상을 구제하시는 대자대비하신 이(부처님),  

He who is free from all obstacles and who appears everywhere at any time, who save and guard all beings with great compassion and great mercy.

 

「色無礙自在(색무애자재)는 불타의 신체가 자유자재로 활동하여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법장은 ‘화엄경’ '불사의법품'을 들어 네 가지의 걸림 없음을 말한다
첫째, 크고 작음에 걸림이 없어, 하나하나의 뿌리가 모두 법계에 두루 퍼져 있으나, 그 모든 뿌리가 파괴되지 않으며 또한 섞이지 않는다 
둘째, 상호 작용에 걸림이 없어 모든 뿌리의 모습이 서로 작용하여도 서로 걸림이 없다
셋째, 理(이)와 事(사)가 걸림이 없어, 색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지만 모든 체성의 空(공)에도 걸림이 없다. 묘한 이치는 깊어서 업용이 작용하되 모가 없어 걸리지 않는다
넷째, 근기에 따라 걸림이 없어, 시방세계 어디에도 응하여 다양한 근기에도 바로 감응한다. 몸 또한 나누지 않고도 널리 나타나며, 여기에 있어도 저기에 걸리지 않고, 저기에 있어도 여기에 걸리지 않는다, 행주좌와에도 걸리지 않는다.

救世大悲者(구세대비자)는 중생을 구제하는 불타의 대자비를 말한다. 

나와 남을 떠난 慈悲(자비)는 無緣(무연)의 자비로서 모든 자비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大悲(대비)’라- 원효. 
無緣(무연)의 大悲(대비)가 가자 수승한 까닭에 다비하고 한다-법장
‘불성론’에서 悲(비)란 잠시 구제하는 것으로, 진실한 구제는 불가능 하다고 하였으나, ‘大悲(대비)’는 능히 영구히 구제하는 것이며 항상 버리거나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전종식」

 

色無礙自在(색무애자재), 色은 色身을 말한다. 육신을 갖추고 있는 것을 색신이라고 한다. 부처는 신체가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왜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한가? 그 무엇에도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救世大悲者(구세대비자) : 세상을 구원하는 크게 자비로운 분. 즉 부처님을 가리킨다.

* 歸命(귀명) ~ 大悲者(대비자) : 부처님(佛寶)을 찬미하고 귀의할 것을 나타내었다.-준제원각」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 숭산 행원 선사

초기 형태의 佛法僧 삼보三寶는 2천5백년 전 생존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佛寶)과 그가 행하셨던 법문(法寶), 당시 승려와 신도(僧寶)를 부처 생존에 존재했던 것이라고 해서 ‘진체삼보眞體三寶’라고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삼보는 이와 다르다. 우선 부처님의 상징인 불상도 한국과 중국은 금불상이지만 스리랑카와 태국은 석고 불상이며, 일본 불상은 한국만큼 화려하지 않지만, 어쨌든 다 부처님의 형상[佛寶]이다.

8만4천 경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경전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이므로 법보이다.

또한 오늘날은 전세계에 수많은 불교 공동체가 있어,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승보이고, 또한  현재 존재하는 삼보라는 의미에서 ‘현존삼보現存三寶’라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본래 형태의 불·법·승佛法僧은 모두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본래 형태의 불·법·승은 지역마다, 나라마다, 절마다 다 다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불·법·승인가? 그 근원을 살펴 보자면,

불·법·승은 본래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에서 나왔기에 우리의 순수한 마음이 불佛이고, 우리의 마음이 순간순간 맑게 빛난다면 그것이 법法이다. 또 우리 마음이 어떤 상황에도 걸림이 없다면 그것이 승僧이다. 다시 말해 불은 순수한 마음이고, 법은 맑은 마음이며, 승은 순간순간 걸림없이 모든 중생들을 돕겠다는 행동이다. 삼보는 이처럼 하나이다. 이를 ‘일체삼보一切三寶’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순수하고 깨끗하며 걸림 없는 마음인가? 오래 전에 한 스님이 중국의 조주 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차나 마셔라."

"무엇이 법입니까?"

"차나 마셔라."

맑고 깨끗하고 걱정 없는 마음으로 차를 마신다면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불·법·승이 된다. 우리는 이것을 ‘실용삼보實用三寶’라고 한다. 즉 삼보를 실천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평상심平常心’이다.

조주 선사는 어떤 종류의 질문에도 “차나 마셔라.”고 했다. 만약 여러분 중에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장 차를 마셔라. 차가 싫으면 코카콜라를 마셔도 좋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조자 선사의 진정한 가르침, 부처님과 모든 위대한 스승들의 높은 가르침을 깨달으면 실용삼보를 얻을 수 있다.

불·법·승은 진선미眞善美와 바꿔 설명할 수도 있다. 여러분은 누구나 미스 코리아, 미스 유니버스니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각자 저마다의 잣대로 점수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여자들의 얼굴과 몸이다. 그러나 몸과 얼굴이 아름답다고 해서 행동이나 마음까지 아름다울까? 진정한 아름다움은 몸이나 얼굴에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우리의 마음은 무지의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서 좋고 싫음을 만들어 스스로를 추하게 하지만, 수행을 열심히 하면 무지가 사라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지혜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진실한 아름다움, 미美가 나타난다.

모든 사람들은 이미 마음속에 선함을 가지고 있다. 영화관에서 착한 주인공이 악당과 싸우는 장면에서 주인공이 거의 죽을 정도로 얻어맞고 악당이 결국 이길 것 같다. 주인공이 맞는 동안 관객들의 마음은 조마조마하다. 아무도 선한 주인공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결론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사람들은 안심하고 영화관을 빠져나온다.

각자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인데, 왜 모두 착한 사람에게 복을 비는 한마음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선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의가 이기기를 바라고 선행이 행해지기를 바란다. 선의란 어떤 어려운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본래의 마음은 항상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하는 심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참 나’와 우주는 결코 다르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내가 고통받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 역시 고통받기를 원치 않는다. 어떤 종교는 ‘원죄’를 얘기한다. 이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고통을 일으키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업業’일 뿐이고 ‘마음의 습관’일 뿐이다. 업을 통제할 수 있고 없앨 수도 있다. 불교는 어떠한 원죄 의식도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공空’이므로 우리의 업도 공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타고난 우리의 본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진정한 선의는 옳은 방향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을 경험하는 방법은 부처님의 계를 실천함으로써 가능하다.

어느 날 내 제자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스님은 언제나 진실과 선행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서는 마냥 착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이용만 당합니다. 그러면 더 많은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얘기하는 선행이란 ‘나, 나의 것, 나를(I, my, me)’이 아니라 나와 남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본성은 하나이므로 나와 남이 다를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면 우리 자신의 고통도 없어지고 다른 사람의 고통도 없어집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항상 슬프다. 이 세상은 늘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느낀다. 항상 다른 이의 괴로움을 경계 없이, 분별 없이 받아들인다. 이 슬픔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나의’ 슬픔이 아니다. 따라서 이 슬픔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슬픔은 결국 다른 사람을 돕는 연민의 행동으로 바뀌게 된다.

항상 여섯 개의 고리를 가진 긴 막대기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은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들어간다는 서원誓願을 세운 분이다. 여타 종교에서는 지옥에 간 사람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지만 불교에서는 지옥에 간 사람들조차 구해 내야 한다고 말한다.

지장보살은 대원본존大願本尊 지장보살이라고도 한다. ‘대원’은 큰 서원이다. 마지막 중생 한 사람이라도 부처가 될 수 없다면 결코 열반에 들지 않고, 마지막 중생까지 고통에서 건져질 때까지 세세생생 다시 태어나 그들을 구언하겠다는 위대한 서원이다.

본존’이란 본래 우리의 본성, 마음이라는 뜻으로, ‘대원본존’이란 고통에서부터 모든 생명을 구하겠다는 위대한 서원, 즉 우리의 본래 얼굴, 본성, 본체라는 뜻이다. 이 대서원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큰 약속은 이미 우리 안에 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법·승 삼보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 마음에 자유를 갖게 한다.

불·법·승 삼보는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며, 부처님의 가르침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줄 안다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순간순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아름다움 그 자체이며, 진리를 얻어 바른 길을 간다면 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모든 중생들이 이 고통의 세계에서 헤어 나올 수 있도록 걸림 없는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승가의 삶이다.

거룩한 삼보에 귀의한다고 할 때의 거룩함은 사실 거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본래 순수하고 맑은 것이 진정 거룩한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단지 이름이 없는 어떤 것을 부르기 위한 ‘말’일 뿐이다. 만물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거룩함에 대한 어떤 생각보다 낫다.- 작성자 향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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