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의 상(相)

復次信成就發心者(부차신성취발심자) 發何等心(발하등심)

다시, 신성취발심이란 어떤 마음을 발하는 것인가?

略說有三種(략설유삼종) 云何爲三(운하위삼).

간략하게 말하면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세 가지인가?

一者直心(일자직심) 正念眞如法故(정념진여법고)

첫째, 직심이니, 진여법을 올바로 생각하는=正念이기 때문이며,

二者深心(이자심심) 樂集一切諸善行故(낙집일체제선행고)

둘째, 심심이니, 일체 모든 선행을 즐겨 모으기 때문이며,

三者大悲心(삼자대비심) 欲拔一切衆生苦故(욕발일체중생고고)

셋째, 대비심이니, 일체중생을 고통에서 구해 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元曉 : 직심(直心)의 직(直)은 불곡(不曲), 구부러지지 않음이니 제법의 본성을 그대로 안다는 뜻.

심심(深心)의 심(深)은 궁원(窮源) 즉, 마음의 근원을 드러내는 것으로 마음의 근원에는 선(善)만이 있으므로 선행으로 그러한 마음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대비심(大悲心)은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다.

* 지운 : 직심(直心)은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심심(深心)은 자리(自利)가, 대비심(大悲心)에는 이타(利他)의 마음이 있다.

* 憨山 : 직심(直心)은 마음이 활줄처럼 곧아야만 도에로 깨달아 들어간다고 한 데에 해당한다. 이는 비틀리고 치우치고 빗나간 모습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이로 인해 진여법을 올바르게 사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여삼매이다. 왜냐하면 진여로써 자리이타수행의 근본을 삼기 때문이다. 즉 진여에는 무루의 공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것이 자리행의 근본이 되고, 중생의 성품이 동일한 진여임을 관찰하기 때문에 이타행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진여 자체엔 모든 덕상이 갖추었음을 알기 때문에 일체의 선행을 즐겨 수행하긴 하나 닦아도 닦는 모습에 집착이 없이 낱낱의 수행이 진여 자성에 걸맞게 된다. 그 때문에 심심(深心)이 되고, 이 마음이 자리행의 근본이 된다. 진여 자체는 모두가 동일한 데서 일으킨 동체대비로써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광대하게 구제하여 보리 열반을 얻게 하므로 이타행의 근본이 된다.

* 앞뒤의 글을 연결하여 본다면 직심(直心)은 진여법을 일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심심(深心)은 좋은 방편을 수행하려는 것이며, 대비심(大悲心)은 본래 발심을 하는 것이 생사고를 싫어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자기의 생사고를 생각한다면 저절로 중생들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一切諸善行(일체제선행)이라 한 것은 부처님께서 이루신 도(道)로 나아가는 모든 방편을 말한다.-물처럼바람처럼]

 

[신심(信心)을 성취하고 결심을 발하게 하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직심(直心)이요 둘째는 심심(深心)이요 셋째는 대비심(大悲心)이다. 말하자면 발심(發心)의 모습을 밝히는 것이다.
첫째의 직심(直心)은 바르게 진여(眞如)를 염(念)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에는 돌아갈 갈림길이 없는 것이므로 직심이라고 한다. 발심한 보살은 항상 진여를 염하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된다. 이 마음이 바로 심심(深心)과 대비심(大悲心)의 근본이 되는 자리이다. 직심은 사물의 본성을 직관으로, 있는 그대로 알고, 그것에 직결되는 마음이다.
원효(元曉)는 '직심은 구부러지지 않는 불곡(不曲)의 뜻이니 만약 진여를 염하면, 그것이 바로 심평등(心平等)이요, 다시 이것저것 분별이 없어지는 것이니 어찌 거기에 우여곡절[廻曲]이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본문에서 진여의 법을 정념(正念)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두 행(行)의 근본이다 (直心是不曲義, 若念眞如則心平等, 更無別岐, 何有廻曲. 故言'正念眞如法故' 卽是二行之根本也)'라고 말하고 있다.
둘째 심심(深心)이란 일체의 선행(善行)을 즐겨 모으는 마음이다. 진여는 무루(無漏)의 성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므로 그에 수순(隨順)하여 크고 작은 선행을 실천하고 마음의 원천인 심원(心源)의 성덕에 귀향(歸向)코저하는 것이 심심이다. 따라서 심심은 자리행(自利行)의 근본이며, 일체의 선(善)을 실행코저하는 결심을 말한다.
원효는 '심심(深心)'이란 궁극적 마음의 근원 즉 심원(心源)의 뜻이다. 만약 한 가지 선(善)이라도 갖추지 못하면, 마음의 근원에 귀향하지 못한다. 심원에의 귀향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반드시 모든 선행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즐겨 일체의 모든 선을 모으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즉 이것은 자리행(自利行)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深心者, 是窮原義, 若一善不備, 無由歸原, 歸原之成 必具萬行, 故言,「樂集一切諸善行故」, 卽是自利行之本也).'라고 말하고 있다.
셋째의 대비심(大悲心)이란 널리 일체중생의 고통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즉 이타행(利他行)의 근본이다.
원효는 대비심(大悲心)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겠다는 뜻을 가진 마음으로서 본문에서 말하기를「중생의 고통을 뽑아내고자 하는 까닭에」라고 하였고, 바로 이타행의 근본이라(大悲心者, 是普濟義, 故言「欲拔衆生苦 卽利他行之本也」)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발심을 직심, 심심 및 대비심의 셋으로 구분 설명한데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위에서는 법계일상(法界一相)이고 불체무이(佛體無二)를 설한 바 있는데 어찌하여 진여만을 염(念)하지 아니하고 다시 모든 선행을 수행하고 중생구제의 행을 하라는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각(覺)의 설명에서 망념을 떠난 '이념(離念)의 상은 허공계와 동등하여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라고 설한 바 있고, '바로 이것은 여래의 평등법신'이라고 설하여 진여는 평등하여 불체(佛體)는 무이(無二)임을 설했으므로 진여(眞如)만을 염하는 직심(直心)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어찌하여 심심(深心)과 대비심(大悲心)까지 설하여 모든 선행과 중생구제행을 행하라 하는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전종식]

 

[앞에서는 발심(發心)을 하게 된 인연만을 밝혔고, 여기서는 발현한 마음의 모습을 직접 밝혔습니다. 신성취발심이란 요약하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진여의 이치로 향하는 마음에 다른 길이 없는 직심(直心)입니다. 왜냐하면 곧은 마음으로 진여법을 올바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덕상을 빠짐없이 갖추고 일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심심(深心)입니다. 왜냐하면 심오한 마음으로 일체 모든 자리행의 근본적인 선행을 기꺼이 모으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광대하게 구제하여 그들이 보리열반을 얻게 하는 대비심(大悲心)입니다. 왜냐하면 대비의 마음으로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의 직심(直心)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믿는 것이요, 둘째의 심심(深心)은 의심이 없는 깊은 신심을 가지는 것이며, 셋째의 대비심(大悲心)은 부처님의 마음을 일으켜 일체중생의 고통을 구제하여 보리열반을 얻게 하므로 이타행의 근본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리이타의 오묘한 수행이 광대하긴 하나 이상의 세 마음으로 총괄하여 수습할 수 있기 때문에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하였습니다.-수선]

 

問曰(문왈) 上說法界一相佛體無二(상설법계일상불체무이)

묻나니, 위에서 법계는 하나의 모습=一相이며, 불의 본체=佛體는 둘이 아니라고 설명하였으나,

何故不唯念眞如(하고불유념진여) 復假求學諸善之行(부가구학제선지행)

무엇 때문에 오직 진여만을 생각=念하지 않고, 다시 모든 선행=諸善의 행을 구하고 배움을 빌려야 하는가?

答曰(답왈) 譬如大摩尼寶體性明淨(비여대마니보체성명정) 而有鑛穢之垢(이유광예지구) 

답하나니, 비유하면 대마니 보주의 보배의 자체의 성품=體性은 밝고 깨끗하지만, 그러나 광석의 더러운 때=鑛穢가 있는 것과 같다.

若人雖念寶性(약인수념보성) 不以方便種種磨治(불이방편종종마치) 終無得淨(종무득정)

만약 어떤 사람이 비록 보배의 성품을 생각할지라도, 갖가지 방편으로 갈고 닦지 않으면 끝내 맑음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이,

 

[若人雖念寶性은 위의 직심(直心)을 말한다. 아무리 진여법을 일념으로 생각해도 선법(善法)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그것을 증득할 수 없다.

* 憨山 : 진여자체만을 올바르게 사념하면 만족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모든 선행의 모습을 빌려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중생들의 번뇌혹이 여러 가지로 많기 때문에 모든 선행을 꼭 닦아야만 한다. 진여의 이치에 걸맞게 모든 선행을 닦기 때문에 밖으로는 허망한 번뇌의 오염을 청정히 하고, 안으로는 진여법을 순종한다. 방편은 관행(觀行)이다.]

 

[이상과 같이 발심을 직심, 심심 및 대비심의 셋으로 구분 설명한데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위에서는 법계일상(法界一相)이고 불체무이(佛體無二)를 설한 바 있는데 어찌하여 진여만을 염(念)하지 아니하고 다시 모든 선행을 수행하고 중생구제의 행을 하라는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각(覺)의 설명에서 망념을 떠난 '이념(離念)의 상은 허공계와 동등하여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라고 설한 바 있고, '바로 이것은 여래의 평등법신'이라고 설하여 진여는 평등하여 불체(佛體)는 무이(無二)임을 설했으므로 진여(眞如)만을 염하는 직심(直心)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어찌하여 심심(深心)과 대비심(大悲心)까지 설하여 모든 선행과 중생구제행을 행하라 하는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진여의 이치는 하나이나 번뇌의 미혹이 다르므로 모든 선행을 닦아야 한다는 것을 문답으로 밝혔습니다. 즉, 법계가 일심의 진여인 한 모습이므로 본래 깨달음 자체인 진여의 본체는 법계와 상대적인 두 모습이 없다고 앞에서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진여만을 올바로 염하지 않고 다시 모든 선행을 구하여 배워야 하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如是衆生眞如之法體性空淨(여시중생진여지법체성공정)

이처럼 중생의 진여의 법의 자체성품은 공적하고 청정=空淨하지만 

而有無量煩惱染垢(이유무량번뇌염구) 若人雖念眞如(약인수념진여) 

한량없는 번뇌에 물든 때=煩惱染垢가 있어서, 만약 어떤 사람이 비록 진여를 생각한다 해도 

不以方便種種熏修(불이방편종종훈수) 亦無得淨(역무득정)

갖가지 방편으로써 훈습하고 수행하지 않는다면 역시 청정함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以垢無量遍一切法故(이구무량편일체법고) 修一切善行(수일체선행) 以爲對治(이위대치)

때가 한량이 없어서 일체법에 두루하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선행을 닦아 이로써 대치하여야 한다. 

若人修行一切善法(약인수행일체선법) 自然歸順眞如法故(자연귀순진여법고)

만약 어떤 사람이 일체의 선법을 닦아 행하면 자연히 진여의 법으로 돌아가 따르는=歸順하기 때문이다.

 

[대답하여 말한다. 비유컨대 큰 보석인 마니보주(摩尼寶珠)는 그 체 자체는 아름답고 밝고 맑은 것이지만, 그러나 자연 그대로의 상태는 표면이 더러운 광석의 때가 덮여 있으며, 비록 사람이 그 마니보(摩尼寶)의 깨끗한 본성만을 염한다 할지라도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을 써서 연마하고 닦지 않으면, 끝내 그 보석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중생의 진여법도 그러한 것이다. 중생의 진여법이 그와 같이 체성(體性)에 번뇌는 전혀 포함되지 아니한 본래 공정(空淨)하여 청정하다 할지라도, 현실적으로는 한량없는 번뇌에 오염된 때가 부착되어 있다. 만약 사람이 진여의 청정성을 염하는 것만으로는 그 오염된 때를 씻어낼 수가 없는 것이며, 실재로는 여러 가지 훈습이나 수행 방법을 통하여 이를 정화(淨化)시키려는 노력 없이는 진여 본연의 정덕(淨德)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번뇌의 때는 무량무변하여 일체법에 두루 침투하고 있으므로, 그 오염된 때를 벗겨내기 위해서는 일체 선행(善行)으로 치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사람이 직심(直心)을 바탕으로 일체의 선법을 수행한다면, 심심(深心)과 대비심(大悲心)이 일어나, 밖으로는 온갖 염법(染法)이 제거되고, 안으로는 진여의 정덕에 자연히 귀순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심심(深心)에 의하여 크고 작은 선행으로 자리행(自利行)을 하고, 대비심(大悲心)에 의하여 중생구제의 이타행(利他行)을 구한다면 번뇌의 때는 씻기어 직심(直心)에 의하여 진여에 도달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즉 '이 세 가지 마음을 발하여, 악(惡)을 떠나지 않음이 없고, 선(善)을 닦지 않음이 없으며, 하나의 중생까지도 제도하지 않는 바 없는 것을 일컬어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이라고 한다 (發此三心, 無惡不離 無善不修, 無一衆生所不度者, 是名無上菩提心也.) '고 말하였다.]

 

[이 질문에 대해 비유와 함께 그 이치를 답변하길, 먼저 큰 마니주의 보배가 자체의 성품은 밝고 깨끗하나 광석의 더러운 때가 있다면 마니보배의 밝고 청정함이 드러나지 못하는 것처럼, 가령 어떤 사람이 마니보배의 밝고 깨끗한 성품을 생각한다 해도 갖가지 방편으로써 문질러 닦아 관리하지 않는다면 끝내 그 밝고 깨끗한 성품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생들의 진여법도 본체의 성품엔 번뇌가 공적하고 청정하지만 한량없는 번뇌에 오염된 때가 있기에, 가령 어떤 사람이 번뇌가 공적하여 청정한 진여법을 생각한다 해도 갖가지 방편으로 훈습하고 수행하지 않는다면 역시 청정함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뇌에 오염된 때가 한량이 없어 일체법에 두루하기 때문에 일체의 선행을 닦는 수행으로써 대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밖으로 허망한 생각의 오염을 어기고 안으로 진여법을 따르는 일체의 선법을 수행한다면 자연히 진여법으로 귀순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번뇌에 오염된 일체법을 대치하기 위해 일체의 선행을 닦는 네 가지 방편을 논합니다.]

 

   ③ 眞如(진여)에 歸順(귀순)하는 方便(방편)

略說方便(약설방편) 有四種(유사종) 云何爲四(운하위사)

간략히 방편을 말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一者(일자) 行根本方便(행근본방편) 謂觀一切法自性無生(위관일체법자성무생)

첫째, 수행의 근본방편=行根本方便이니, 이른바 일체법이 자성이 남이 없음=無生임을 관하여,

離於妄見(리어망견) 不住生死(부주생사) 

망견을 떠나 생사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며, 

觀一切法因緣和合(관일체법인연화합) 業果不失(업과불실)

일체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업과 과=業果를 잃지 않음을 관찰하여

業果不失 :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 과보가 있다는 것.

起於大悲修諸福德(기어대비수제복덕) 攝化衆生(섭화중생) 不住涅槃(부주열반)

대비심을 일으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들을 포섭=攝化하고 교화하며 열반에 안주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以隨順法性無住故(이수순법성무주고)

이는 법성의 머묾이 없음=無住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생사는 무명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며 그 자성이 없음을 알면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열반에만 머물려 하는 것도 역시 머묾이다. 이는 진여성품이 무한한 공덕이 있어서 대상을 만나면 공덕을 낸다는 것과 같다.

* 위의 발심의 모습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 것에서 직심(直心)에 대한 설명이다.]

 

[앞에서 여러 가지 방편을 가지고 훈습(熏習)이나 수행방법을 통하여 번뇌의 오염된 때[垢]를 정화(淨化)시키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다면, 진여의 청정성(淸淨性)을 염하는 것만으로는 진여 본연의 정덕(淨德)을 나타내지 못한다고 설한 바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방편을 가지고 수행함으로써 진여에 귀순할 수 있다는 것을 설한 것이다.
본절에서는 그에 따른 네 가지 방편(方便)을 설하고 있다. 방편이란 법성(法性) 즉 진여(眞如)에 수순(隨順)하는 방법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법성은 진여(眞如)를 의미하는 것이다. 앞절 끝 부분에서 '만약 사람이 일체 선법을 수행하면 자연히 진여법에 귀순하다'고 설한 것에 대한 방편인 것이다.
본절의 네 가지 방편에서 수순(隨順)하는 진여의 본성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 무주(無住) 생사·열반
□ 능지방편(能止方便), 이제과(離諸過), 능지악법(能止惡法)
□ 발기선근증장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 이치장(離癡障), 구공덕 (具功德)
□ 대원평등방편(大願平等方便), 무단절(無斷絶), 평등(平等), 적멸(寂滅)
첫째는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이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등 온갖 행의 근본에 있는 방편을 말한다.  '일체법의 자성은 무생(無生)이라고 관하면 망견(妄見)을 떠날 수 있고, 생사(生死)에 주(住)하지 아니하며, 일체법은 인연화합이고, 업(業)의 과보는 소실되는 것이 아니라고 관하면 대비심(大悲心)이 일어나 온갖 복덕을 닦게 되고, 중생을 섭화하여 열반에도 주하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즉 행근본방편은 본체와 현상의 두 가지 측면에서의 관법(觀法)에 의하여 일체법을 관찰함으로써 생사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대비심이 일어나 열반에도 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법의 한 측면은, 일체법의 자성(本體)은 무생(無生) 즉 생하는 것이 아닌 불생불멸의 영원한 것이라고 관하면, 망념으로 보는 그릇된 견해가 사라져, 현상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생사(生死)에 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관법의 다른 측면은 현상으로 나타난 일체법은 모두가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업과(業果)는 소실되지 않는다는 것을 관하면, 거기에서 대비심(大悲心)이 일어나,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誓願)이 생기고, 따라서 선행(善行)을 행하고 복덕을 닦아 중생을 섭화(攝化) 인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계는 한이 없는 무변(無邊)인 것이므로 섭화중생의 행이 끝날 날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보살은 '열반에도 주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사가 있는 현상의 세계에서는 중생구제에 전심(專心)하는 일이 바로 형태를 바꾼 열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다. 따라서 첫째의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은 무주처열반 속에서 영원히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행을 행하여 나아가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무주(無住)라고 하는 성격에 수순하는 것이다. 진여는 법계일상(法界一相)으로서 무주를 본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신론'이 현시정의(顯示正義)와 대치사집(對治邪執) 등을 통하여, 바른 뜻을 나타내는 것이 무엇이고, 그릇된 견해를 어떻게 고쳐 나가야 할 것인가를 거듭 강조해 온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치사집에서 누누이 강조된 그릇된 견해는, 본체에 대한 정의(正義)를 현상적 생멸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일체법을 해석함에 있어, 그것이 본체적 측면에서 설해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현상적 입장에서 설해진 것인가를 먼저 파악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즉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구분하여 관찰할 수 있다면 그릇된 견해는 사라져갈 것이다.]

 

[세 가지 발심을 의지한 모든 선행의 4가지 방편 가운데, 먼저 수행의 근본적인 방편을 논한 것입니다. 이른바 일체법의 자성은 생멸이 없다는 것을 관찰하여 나고 멸하는 허망한 견해를 여의고 생사의 업식에 안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체법은 원인과 조연이 화합하여 악업과 고과(苦果)를 잃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하여 대비심을 일으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포섭하여 받아들이어 교화하면서 열반에도 안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여의 진리성은 본래 실제로 있지 않으므로 지금 생사에 안주하지 않으며, 생사는 본래 실제로 없지도 않으므로 중생을 포섭하여 교화하기 위해 열반에도 안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진여법성을 따라서 생사와 열반 어느 쪽에도 집착하여 안주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여의 법성을 의지하여 수행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것이 유익한 수행의 근본이 됩니다. 진여법성은 본래 생멸하는 현상이 없으므로 생멸하는 허망한 견해를 여의었습니다. 진여인 대지(大智)에 의지하여 번뇌를 끊었으므로 생사에 안주하지 않으며, 다시 일체법은 인연으로 화합하여 악업과 그에 따른 괴로운 과보를 잃지 않는 것을 관찰하고 대비심을 의지합니다. 그 때문에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면서 열반에도 안주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진여의 본성이 텅 빈 열반과 생사의 거짓 존재인 이 둘 어느 쪽에도 안주하지 않고 자리이타의 이로운 수행을 일제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에 집착하지 않고 실천하는 무주행(無住行)이라고 이름합니다. 진여법성은 본래 생사와 열반 어느 쪽에도 안주함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진여인 법성을 따라서 이로운 수행을 닦는 것입니다.]

 

二者(이자) 能止方便(능지방편) 謂慙愧悔過(위참괴회과) 能止一切惡法(능지일체악법)

두 번째는 중지할 수 있는 방편=能止方便이니, 이른바 참괴하고, 과거를 참회하는=悔過하며 

慙愧(참괴) : 자기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을 참(慙)이라고 하고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을 괴(愧)라고 한다.

不令增長(불령증장) 以隨順法性離諸過故(이수순법성리제과고)

일체의 악법을 중지하여 더 증장하지 않게 하며, 법성에 수순하여 모든 허물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발심의 세 가지 모습에서 심심(深心)이다. 악법이란 선법에 반하는 것으로 진여로부터 멀어지는 일체 행위이다.]

 

[둘째의 능지방편(能止方便)으로, 능지(能止)라고 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악(惡)을 끊고 버리는 것이다. 악을 끊는 힘은 참( 慙)과 괴(愧)이다. '참'은 자기의 양심에 대한 부끄러움이며, '괴'는 사회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따라서 참괴(慙愧)의 마음이 강할 때 악(惡)을 떠날 수가 있다. 그러나 악의 유혹에 빠져 악행(惡行)을 저질렀을 때는 즉시 그것을 참회하는 것이다. 그것을 회과(悔過)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잘못을 본능적으로 감추려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과오를 남에게 고백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는 기분을 갖고 있다. 악을 고백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본론은 이 참괴(慙愧)와 회과(悔過)에 의하여 '능히 일체 악법을 끊고, 증장시키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참괴(慙 愧)는 악법을 끊는 것이고, 회과(悔過)는 악법을 증장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방편으로 법성진여(法性眞如)는 온갖 허물에서 떠나 있어 이를 '이제과(離諸過)'라 하고 있다.]

 

三者(삼자) 發起善根增長方便(발기선근증장방편)

셋째, 선근을 발기하여 증장하는 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이니, 

謂勤供養禮三寶(위근공양예삼보) 讚歎隨喜(찬탄수희) 勸請諸佛(권청제불)

이른바 불법승=삼보를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찬탄하고 따라서 기뻐하는=隨喜하며, 권하고 청하는=勸請으로,

勸請(권청) : 빌고 청함.

以愛敬三寶(이애경삼보) 淳厚心故(순후심고) 信得增長(신득증장)

삼보를 사랑하고 공경=愛敬하는 순후한 마음 때문에 믿음이 증장될 수 있으며,

乃能志求無上之道(내능지구무상지도) 又因佛法僧力所護故(우인불법승력소호고) 

나아가 능히 위없는 진리=無上道를 구할 수 있으며, 또한 불법승의 힘으로 보호받는=因 때문에,

能消業障(능소업장) 善根不退(선근불퇴) 以隨順法性(이수순법성) 離痴障故(리치장고)

능히 악업의 장애=業障을 소멸하고, 선근에서 물러나지 않아, 법성을 수순하여 어리석음의 장애=離痴를 여의기 때문이다.

발심의 세 가지 모습에서 심심(深心)이다.

 

[셋째의 발기선근증장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이다. 이것은 선(善)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즉 선근(善根)의 힘을 강화증대(强化增大)시키는 방편이다. 자리행중에서 지덕(智德)을 말하는 것으로서 선(善)을 되풀이함에 따라 달성되는 것이다.
본론에서 말하는 선행이란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공양하고 예배하는 것, 제불(諸佛)을 찬탄(讚嘆), 수희(隨喜), 권청(勸請)하는 것이다. 찬탄은 모든 불타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것이고, 수희는 타인이 선을 행할 때 그것을 기뻐하고 도우는 것이며, 권청은 지성으로 불타의 가르침을 청하고, 언제까지나 이 세상에 머무르기를 청하는 것이며, 또한 법회(法會)시에 불보살의 내림(來臨)을 간청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보의 공양예배와 찬탄, 수희, 권청 등은 쉬운 방편으로 선행을 권하는 것이 된다. 아직 십신(十信)에 있는 수행보살이기 때문에 난행(難行)의 힘이 없는 것이므로 그같은 이행(易行)의 방편을 쓰는 것이다.  '삼보를 애경(愛敬)하는 순후심(淳厚心)'은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친애하고 공경하는 순수하고 인정 두터운 마음으로서, 그러한 마음에 의하여 믿음이 증장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불타의 행적을 배워 스스로 무상도(無上道)를 지구(志求)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불법승 삼보의 가호(加護)력 때문에 업장(業障)이 해소되고, 선근(善根)이 퇴실하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불법승 삼보에 대한 순후심(淳厚心)은 내부로부터의 진여의 훈습력이 작용하고 외부로부터는 삼보의 외훈(外熏)이 작용하여 악을 끊고 선을 행하겠다는 마음이 항상 일고 있어, 악의 업장이 소멸한다는 것이다. 악의 업장이라 하여도 이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므로 그 마음이 믿음의 기쁨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 업장은 저절로 사라져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선근은 더욱더 증장되는 것이다. 이같은 선근 발기(發起)가 방편이 될 수 있는 것은, 법성진여가 바로 법신지신(法身智身)이므로 그 속에서는 치장(癡障) 즉 무명번뇌가 사라질 수 있는 성질을 본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의 두 방편은 심심(深心)을 의지하여 악법을 그치는 지지문(止持門)과 선법을 일으키는 작지문(作持門)의 방편을 닦는 것입니다. 먼저 이미 일으켰던 악을 끊어서 계속되지 않게 하며, 아직 일으키지 않은 악은 일으키지 않고 중지할 수 있는 방편인 능지방편(能止方便)입니다. 이는 아직 짓지 않은 악을 부끄러워하고, 이미 지은 악법은 그 허물을 뉘우치고 일체의 악법을 중지하여 더욱 자라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여법성을 수순하여 모든 허물을 여의는 수행을 하기 때문에 이것을 지지문(止持門)이라 하겠습니다. 


  다음에 이미 일으킨 선업은 닦아서 더욱 자라나게 하고, 아직 일으키지 않은 선업은 수행하고 선근을 발기하여 더욱 자라나게 하는 방편입니다. 이는 삼보에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찬탄하고 따라서 기뻐하며, 모든 부처님께 권청(勸請)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삼보를 사랑하면서도 공경하고 순수함이 두터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즉, 삼보를 믿는 마음이 더욱 자라나야만 위없는 도를 구하는 데에 뜻을 두게 되며, 또 불법승의 위신력에 보호받기 때문에 악업의 장애를 소멸하고 선근에서 물러나지 않아 진여의 법성을 수순하여 어리석음의 장애를 여의기 때문에 이것을 작지문(作持門)이라 하고, 이상이 자리행입니다. 참고로 "예배"는 어리석은 아만(我慢)의 장애를 여의고, "찬탄"은 삼보를 훼방하는 어리석은 장애를 여의며, "따라서 기뻐함"은 다른 사람을 질투하는 장애를 여의게 하는 것입니다.]

 

四者(사자) 大願平等方便(대원평등방편) 所謂發願(소위발원) 盡於未來(진어미래)

넷째 대원이 평등한 방편=大願平等方便이니, 이른바 발원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化度一切衆生(화도일체중생) 使無有餘(사무유여) 皆令究竟無餘涅槃(개령구경무여열반)

일체 중생을 교화, 제도=化度하여 남김없이 모두가 구경에 무여의 열반에 들게 하려는 것이니,

以隨順法性(이수순법성) 無斷絶故(무단절고) 法性廣大(법성광대) 遍一切衆生(편일체중생)

법성은 단절이 없다는 것에 수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법성은 광대하여 일체 중생에 두루 미치고,

平等無二(평등무이) 不念彼此(불념피차) 究竟寂滅故(구경적멸고)

평등하여 둘이 없으므로 남과 나=彼此를 생각하지 않고, 구경에 적멸하기 때문이다.

발심의 세가지 중 대비심(大悲心)이다.

 

[넷째의 대원평등방편(大願平等方便)이다. 큰 서원(大誓願)을 일으켜, 평등하게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결의가 진여에 수순하는 방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타행(利他行)이다. 중생구제에는 시한이 없다.
따라서 미래가 다할 때까지 일체중생을 교화제도(敎化濟度)하겠다는 보살의 발원이 계속되는 것이며, 유여(有餘)없이 평등하게 일체중생을 구제하여, 궁극적으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려는 것이다. 무여열반은 유여열반(有餘涅槃)에 대(對)한 것으로서 불타가 보리수 밑에서 번뇌를 멸하고 깨달음이 열리었을 때의 열반은 육체가 남아있는 유여열반이며, 무여열반은 육체를 버린 영원의 세계에서의 열반이다. 보살의 서원은 일체중생을 이 무여열반에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이 대원평등방편이 법성진여에 수순하는 방편이 될 수 있는 것은 법성진여 자체가 무단절(無斷絶)을 본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여열반은 단절없는 영원한 세계이다. 법성진여는 광대무변하여, 일체중생 어디에나 두루 미쳐있다. 평등무이(平等無二)하고 진여일상(眞如一相)이다. 그러므로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피차(彼此)를 염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여는 평등무이(無二)한 것이므로 구경적멸(究竟寂滅)이어서, 무여열반 바로 그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방편속에 나타난 찬탄 참회 권청 수희 회향(넷째 첫째 방편과 관련) 등은 오늘날의 불교의식에도 나타나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5, 6 세기경 불교의식으로 기초된 것이다.]

 

[대원이 평등한 방편을 통해 시공을 초월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대비심을 논하였습니다. 즉, 대원이 평등한 방편이란 먼저 미래제가 다하도록 시간을 초월해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여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가 구경에 무여열반에 들게 하리라고 발원한 것입니다. 다음에 진여의 법성을 따라서 단절함이 없기 때문에, 법성은 광대하여 일체중생에게 두루하고 평등하여 둘이 없어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끝내 번뇌가 사라진 적멸이기 때문에 공간을 초월해 중생을 구제하는 제일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비의 평등한 방편에 편승하면 비록 공간적으로 광대하고 시간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친 수행일지라도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자내증(自內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진여에 의지하는 네 가지 방편을 종합하면 근본방편은 수행의 근본방편이요, 자신을 이롭게 하는 방편은 능히 모든 번뇌를 중지하는 단덕(斷德)과 보리심을 발하여 선근을 증장하는 지덕(智德)이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방편은 대원이 평등하고 원만하여 시공을 초월해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비덕(悲德)을 갖춘 것입니다. 이는 진여법성에 의지하여 직심(直心)과 심심(深心)·대비심(大悲心)을 닦아 단덕(斷德)·지덕(智德)·비덕(悲德)으로 승화시긴 원덕(圓德)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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