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修行信心分(수행신심분)
已說解釋分(이설해석분) 次說修行信心分(차설수행신심분)
이미 解釋分(해석분)을 설하였으니, 다음으로 수행신심분을 설할 것이다.
是中(시중) 依未入正定衆生故(의미입정정중생고) 說修行信心(설수행신심)
이 가운데 아직 정정취로 들어가지 못한 중생을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신심분을 설한다.
[元曉 : 위의 발취도상을 말하는 중에서는 부정취중생에 의한다고 말하고, 이제 여기에서는 아직 정정취에 들어가지 않은 중생에 의한다고 말하였으니, 이 또한 부정취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부정취 내에도 열등한 이와 수승한 이가 있으니, 수승한 이는 더욱 나아가고 열등한 이는 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저 수승한 이를 위하기 때문에 발취를 말하였으니, 소위 신성취발심으로부터 증발심 등은 수승한 이로 하여금 차례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요, 그 중에 열등한 이를 위한 까닭에 믿음을 닦을 것을 말하니 소위 네 가지 신심과 오문(五門)의 행 등은 저 열등한 이로 하여금 퇴전치 않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 만약 열등한 이가 믿음이 성취되면 다시 발취분 중의 세 가지로 발심에 의하여 나아가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분(二分;해석분과 수행신심분)의 하는 일이 다름이 있으나 그 나아가는 도리는 다름이 없다.
* 앞에서 이미 삼심(三心)과 네 가지 방편행(方便行)을 설명하였는데 여기서 다시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근기가 약한 사람, 즉 정정취(正定聚)에 들지 못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근기가 약한 사람은 방편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종신심(四種信心)과 오종방편문(五種方便門)을 설하고 있다. 근기가 약한 사람 중에도 하열(下劣)한 사람이 있고 수승(殊勝)한 사람이 있는 바, 여기의 수행신심분은 하열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대승기신 중 신심을 일으키는 기신(起信)을 설하는 부분으로, 신심에는 네 가지가 있는 사신(四信)과 수행에는 오문(五門) 의 오행(五行)에 의하여 수행과 신심을 이루도록 설하고 있다.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에서 보살의 수행과정을 세 가지 발심의 모습을 해명한 바 있었으나, 어떻게 신심을 얻을 수 있는가 라는 구체적인 해명이 없었으므로 여기에서 ① 신심이란 무엇인가 ② 신심을 수행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과제를 바탕으로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설하는 것이다. 수행신심분은 아직 정정취(正定聚)에 들지 못한 중생을 위하여, 그들위 신심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사신(四信)과 오행(五行)을 설하는 것이다]
[수행신심분이 해석분의 다음에 오게 된 의도는 위에서 입의분에 수립했던 대승의 정의를 해석함으로써 대승의 올바른 의미를 밝혔고, 여기 수행신심분에서는 해석된 대승에 대한 신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를 밝힙니다. 그리하여 아직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지 못한 중생을 발기하여 대승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앞의 두 가지 부정취(不定聚) 중생 가운데 수행한 신심이 아직 십신(十信)에 가득 차지 못한 하열한 근기자가 그 발심이 결단적이지를 못하여 이승에 떨어질까 염려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의 편에 의지하여 신심을 수행하는 방편을 설하고 그가 큰 신심을 일으켜 정정취로 나아가게 합니다.
해석분의 설명이 이미 끝났고 여기서 수행신심분을 설명합니다. 이종(二種)의 부정취(不定聚) 중생들 가운데 수행의 신심이 아직 원만하지 못하여 정정취로 아직 들어가지 못한 근기가 하열한 중생을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신심분을 설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공부는 믿음으로 시작됨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수행의 바탕이 되면서 도를 성취하는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 결정적인 믿음을 가질 때에 바로 불교공부에 들어선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무엇을 믿을 것인가? 이에 대해 여기에서는 앞의 문장을 결론짓고 뒷 문장의 단서를 달았습니다.]
[대승기신론의 내용은 크게 일심(一心, one mind), 이문(二 門, two aspects), 삼대(三大, three greatnesses), 사신(四信, four faiths), 오행(五行, five practices)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은 삼대까지입니다. 이제부터 공부할 것은 사신과 오행입니다. 사신은 우리가 믿어야할 네 가지로 근본, 불, 법, 승입니다. 오행은 부처가 되기 위해 행할 다섯 가지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관입니다.
“수행신심분. 부정취 중생에게 설하다. ‘이 중에 아직 정정취( 正定聚)에 들지 못한 중생이 있기 때문에 신심을 수행함을 설한다. 무엇이 신심이며, 어떻게 수행하는가?’” 정정취, 부정취, 악취가 있습니다. 우리가 육도윤회를 하는데 제일 바닥에 지옥이 있습니다. 악취는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합니다. 정정취는 육도 윤회 가운데 인간과 천상을 말합니다. 부정취는 어디에 태어날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이 내용의 목적은 부정취 중생들에게 수행신심분을 설하여 제대로 수행하게 하여 정정취에 들게 하려는 것입니다. 부정취에서는 공부에 확신이 없지만 공부에 확신이 서면 정정취에 들어갑니다. 세세생생 이 공부에서 물러나지 않게 됩니다.-통섭불교]
1) 四信(사신)
何等信心(하등신심) 云何修行(운하수행)
어떤 것들이 신심이고, 어떻게 수행하는가?
略說信心(략설신심) 有四種(유사종) 云何爲四(운하위사)
신심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 진여법과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을 설명하고 있다.
[앞의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에서 네 가지의 수행방편을 설명하여 수행해 나아가고 닦아 증득하는 것을 빠짐없이 밝혔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어떤 신심을 어떻게 수행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대승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일으킨 자는 삼심(三心)과 네 가지 방편행(方便行)을 설하여 진여에 대한 신심은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바로 진취하여 진여를 수증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근기가 하열한 중생은 번뇌의 장애가 지중하여 반드시 많은 종류의 방편을 빌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종신심(四種信心)과 오종방편문(五種方便門)을 설하여 그들을 길들이고 대치하는 방편을 삼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오종방편문으로 하열한 이들을 인도하여 포섭하는 것이지 중복된 설명은 아닙니다.-수선]
一者(일자) 信根本(신근본) 所謂樂念眞如法故(소위락념진여법고)
첫째는 근본을 믿는 것이니, 이른바 진여법을 즐겨 생각=念하기 때문이다.
[근본(根本)= 진여를 말함. 원효와 법장은 진여의 법은 모든 부처가 귀일하는 곳(법장은 스승으로 표현)이며, 온갖 수행의 근원이므로 이를 근본이라 한다’고 설명함.
일체지(一切智)=일체법을 아는 지혜, 불지(佛智)를 말함-전종식]
[憨山 : 앞에서 이종의 부정취중생들 가운데 신심의 수행이 십신에 가득 찬 수승한 근기의 중생은 이미 진여법을 믿었으므로 단지 직심으로 진여법을 올바로 사념한다[直心正念]라고만 말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십신의 수행이 아직 가득 차지 못한 하열한 근기의 부정취중생은 대승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아직 발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즐겨 사념한다[樂念]라고 말하였다.
* 지운 : 念은 不忘의 뜻이 있음.-물처럼바람처럼]
[첫째, 근본(根本)을 믿는 것이다. 근본이란 바로 진여법(眞如法)을 말하며, 진여는 온갖 부처가 귀일()하는 근원이므로 ‘근본’이라 설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근본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가기의 본성이 진여(眞如)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신심의 첫 번째이며, 이를 기쁘고 즐거이 염(念), 즉 정념(正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전종식]
[첫째는 우주 만물과 모든 수행의 근원인 진여법을 믿을 뿐만 아니라 진여법을 즐겨 염하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의 내용은 크게 일심(一心, one mind), 이문(二 門, two aspects), 삼대(三大, three greatnesses), 사신(四信, four faiths), 오행(五行, five practices)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은 삼대까지이고, 이제부터는 사신과 오행입니다. 사신은 우리가 믿어야할 네 가지로 근본, 불, 법, 승입니다. 오행은 부처가 되기 위해 행할 다섯 가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관입니다.
육도윤회의 제일 바닥에 지옥이 있는데, 악취는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합니다. 정정취는 육도 윤회 가운데 인간과 천상을 말합니다. 부정취는 어디에 태어날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내용의 목적은 부정취 중생들에게 수행신심분을 설하여 제대로 수행하게 하여 정정취에 들게 하려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신심의 네 가지를 설하다. 근본에 대한 믿음이며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며 불법에 대한 믿음이며 승가에 대한 믿음이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은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고, 불법에 대한 믿음은 깨닫는 법에 대한 믿음이고, 승가에 대한 믿음은 수행자에 대한 믿음입니다. 근본에 대한 믿음은 이 세상에 일심, 진여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근본을 믿는 것이니 진여법을 즐겨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신론소에서)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 진여한 마음은 다 그곳으로 귀일하는 바이며, 모든 행위가 바로 그곳으로부터 나오는 근원이기 때문에 근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심, 진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중생은 물들어서 본연의 모습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물들기 전의 본래 성품, 청정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볼 수 있는 세계가 있는 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진리, 진여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 근본 목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습니다. 원효스님의 해설에서 '오염된 중생의 마음은 이기적인 생각에 의해 수시로 무상하고 바뀝니다.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생각은 제6식에서 일어납니다. 그 근본이 제7식 말라식이고 말라식의 바탕이 되는 것이 제8식 아뢰야식입니다. 근본 에 해당하는 제8아뢰야식을 이해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선 근본, 즉 진여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통섭불교]
二者(이자) 信佛有無量功德(신불유무량공덕) 常念親近供養恭敬(상념친근공양공경)
두 번째는 부처님에게는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니, 항상 친근해서 공양하고 공경하기를 염하면서
發起善根(발기선근) 願求一切智故(원구일체지고)
선근을 일으키어 일체지 구하기를 발원하기 때문이다.
[고순호 : 一切智(일체지) - 모든 것을 아는 지혜. 성문과 연각의 지혜도 일체지라고 하고, 이와 구분하기 위해 부처의 지혜을 일체지지(一切智智)라고 하니, 여기의 일체지는 일체지지를 말한다.]
[둘째는 부처님에겐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는 것을 믿으므로 항상 부처님의 공덕을 염하면서 가까이 하고 공양을 올리고 공경을 하면서 선근을 발기하여 일체지를 구하고 모든 선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부처를 믿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대비 즉 끝없는 자비로, 한량없는 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일체의 지혜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일체의 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얻어지는 지혜가 아닌, 분별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분별지를 포용하고 뛰어넘는 무분별지입니다.
참고로 귀명삼보에서 “목숨을 거두어 돌아가나이다. 어디에서나 어느 때에나 가장 훌륭한 일을 하시며, 두루 모르시는 바 없이 다 아시며, 그 인간성이 자유자재하시고 세상을 구하고자 큰 자비를 베푸는 자이시여.” 귀명삼보란 삼보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삼보는 앞에서 말했듯이 ‘불, 법, 승’입 니다. ‘목숨을 거두어 돌아간다’는 말은 목숨을 걸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겠다는 말입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수행을 하고 부처를 보는 것입니다. 훌륭한 일이란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6 신통이 생기는데 그 영향으로 두루 모르는 바가 없게 됩니다. 숙명통이란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전생까지 다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허황된 소리가 아닙니다. 과학에서 DNA를 보면 전생부터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DNA를 풀어보니 단세포 생물이 35억년 동안 살았던 삶의 흔적들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도를 닦아서 알아야 합니다. 모두 막혀 있는데 식이 맑아지면, 제8아뢰야식, 6추 3세의 3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미세한 것도 알 수 있는 상태가 바로 적멸이고, 적멸하니 미세한 것도 알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견성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죽으면, 상태가 변합니다. 나의 상(형태)이 다 깨어집니다. 그래서 과거의 흔적들을 기억을 못합니다. 하지 만 공부하고 수행을 하면 식이 덜 깨어집니다.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식이 덜 깨어진 사람들입니다. 공부하면 잘 알고 암기를 잘 하는 것도 식이 맑아서 입니다. 식이 맑아지면 나의 저장창고에 담긴 내용들을 다 알게 됩니다. 이것이 다름이 아니라 전생을 아는 것입니다. 목숨을 거두어 돌아간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진리를 대하는 마음은 진지하고 지극해야 합니다. ]
三者(삼자) 信法有大利益(신법유대리익) 常念修行諸波羅蜜故(상념수행제파라밀고)
세 번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니,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길 염하기 때문이다.
[부처님 법을 믿는 것에 큰 이익이 있다고 하는 이유는 그 법이 바라밀 법이기 때문이다. 바라밀이란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즉 번뇌와 괴로움으로 가득한 상태에서 이를 여읜 열반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부처님이 증득하신 진여의 공덕을 말한 교법에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믿으므로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길 염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믿는 것은 부처님께서 깨친 내용을 믿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법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법칙이 있더라는 것으로, 그것이 연기입니다. 세상에는 법칙이 많아서, 수학의 법칙들, 물리의 만유인력의 법칙, 운동의 법칙, 관 성의 법칙, 상대성 이론 등 이런 것들이 모두 법칙입니다. 이 법칙들은 생명, 무생물이 구분되어 적용되지만 연기의 법칙은 생물, 무생물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무생물은 의지가 없어서,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하면 그대로 결과가 나옵니다. 하지만 생물은 의지가 있기 때문에 어떤 조건에서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돈을 그냥 준다고 한다면 돈이 많은 사람도 기분 나쁠리가 없습니다. 반대로 아무 이유 없이 따귀를 맞으면 기분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의지가 있어도 좋은 행위를 할 때 좋은 결과가 오고 나쁜 행위를 할 때 나쁜 결과가 오는 원칙은 바뀌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베푸는 행위를 많이 했는데도 나쁜 결과가 나오고 어떤 사람은 악행만 하는데 부유하게 사는 것은 과보가 어느 정도 수준까지 익어야 정확하게 결과로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결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아보가드로수만 넘으면 통계의 법칙, 확률의 법칙을 따릅니다. 불교 경전을 보면 어마어마한 수나 공간들이 등장합니다. 이것들은 통계와 확률을 바탕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착한 일을 하면 바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한 일을 하면 언젠가 그 과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기의 법칙이고 인과응보입니다. 이 생에서 받고 있는 모든 것이 인과응보입니다. 세상에 절대로 공짜는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보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푼 것이 자기에게 돌아오지, 베풀지 않은 것이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귀명삼보의 법 부분에서, “목숨을 거두어 돌아가나이다. 그 (지혜롭고 자비로운 자의) 몸이여, 그 몸의 모습이여, 참되고 영원함이 저 바다와 같은 진리여.” 법은 체상용의 상에 해당합 니다. 부처님께서 연기의 법칙을 깨치셨지만 최초로 설법하신 내용은 사성제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전 마지막에 설법하신 내용도 사성제, 팔정도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성제와 팔정도 이외의 도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누군가가 도를 이루려면 사성제와 팔정도를 행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성제는 고집멸도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상하기 때문에 생멸을 하고 이것이 반복되는 것이 윤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는 삶의 현상 그 자체인 것입니다. 집은 이유, 원인으로 부처님께서는 일이 일어난 원인만 알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해결된 상태가 멸입니다. 해결하는 방법이 도입니다. 사성제는 삶의 모습과 나아가야할 길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연기를 풀어쓰면 고집멸이 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집) 생겼으며(고), 원인이 소멸되면(도), 없어진다(멸). 이것이 연기입니다.
과학도 원인 규명입니다. 어떤 현상이 있다면 그 현상에 합당한 원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원인을 아는 것은 보편성이 있 는 것입니다. 원인을 모르면 특수한 경우에는 적용될 수 있어도 모든 경우에 적용이 안 됩니다. 원인을 알면 응용이 가능해 지고 보편성을 갖게 됩니다. 이것도 결국은 사성제입니다. 우리는 사성제를 통해 연기의 법칙을 알고 터득하여 삶을 변화시켜 갈 수 있습니다.]
四者(사자) 信僧能正修行自利利他(신승능정수행자리리타)
네 번째는 스님은 능히 올바른 수행을 하면서 자리이타를 행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常樂親近諸菩薩衆(상락친근제보살중) 求學如實行故(구학여실행고)
항상 즐거이 모든 보살대중을 친근해서 참다운=如實한 수행을 구하여 배우기 때문이다.
[僧能正修行自利利他(승능정수행자리리타) : 스님들이 자기를 이익 되게 하고 남을 이익 되게 한다고 함은 스스로 수행하여 성불의 길을 나아감이 자기를 이익되게 하는 것이며, 불법을 유지하고 전함이 남을 이익 되게 하는 핵심이다. 물론 보시를 행하여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 사회의 문제점을 바로 잡으려 하는 것도 이타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불법을 유지하고 바르게 전하는 것이다.
* 憨山 : 진여법을 믿고 즐겼던 것은 내인의 훈(內因熏)이 수승한 것이며, 여기에서 삼보에 대한 신심은 외연의 자훈(外緣資熏)이 수승한 것이다. 내인훈과 외연자훈이 함께 수승하기 때문에 항상 즐기고 항상 사념하면서 마음에 잊지 않게 된다면 내인과 외연이 교대로 훈습하기 때문에 사종신심을 신속하게 성취하게 된다. 이로써 앞에서 이승의 경지로 퇴전하여 떨어진 자는 내인과 외연이 함께 하열하였기 때문이었음을 나타냈다.
* 고순호 : 僧(승) - 범어 samgha의 음역인 승가(僧伽)의 준말이며, 이는 단체를 뜻하는 말이기에 중(衆)이라 번역하고 불과 법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모인 화합된 단체이므로 그 의미를 살려 화합중(和合衆)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승에서는 수행자의 호칭을 모두 보살이라고 하였고, 보살의 집단인 경우는 bodhisattvagana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에서의 승(僧)은 보살중(菩薩衆)이란 말과 함께 쓰였으니 재가와 출가를 막론한 보살들을 지칭하는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이 논(論)의 성격상 결코 비구승가(比丘僧伽;bhiksusamgha)나 비구니승가(比丘尼僧伽;bhiksunisamgha를 말한 것으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넷째는 스님들이 올바른 수행을 하면서 자기도 이롭고 다른 이도 이롭게 하는 믿음으로 자리이타의 올바른 수행을 항상 즐기면서 모든 보살들을 친근히 하고 진여 실제의 수행을 배우길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여로써 신심과 모든 수행의 근본을 삼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즐겨 염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두 가지 부정취(不定聚) 중생들 가운데서 신심의 수행이 십신에 원만한 수승한 근기의 중생은 이미 진여법을 믿었으므로 단지 "곧은 마음으로 진여법을 올바로 염한다"고만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는 십신의 수행이 아직 원만하지 못한 하열한 근기의 부정취중생은 대승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아직 발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즐겨 염한다"고 하였습니다.
위에서 진여법을 믿고 즐겼던 것은 내인(內因)의 훈습이 수승한 것이며, 여기에서 삼보에 대한 신심은 외연(外緣)의 자훈(資熏)이 수승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인훈과 외연자훈을 함께 수승하기 때문에 항상 즐기고 항상 생각하면서 생각생각에 잊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인과 외연이 교대로 훈습하기 때문에 사종신심을 신속하게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앞에서 이승의 경지로 퇴전하여 떨어진 자는 내인과 외연이 함께 하열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논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말법시대에 수행을 하면서 이 내인과 외연을 버린다면 대승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낼 수는 없습니다. 이를 쉽게 말하면 수행의 주체인 자기의 굳은 믿음과 물러나지 않는 수행, 그리고 부처님과 보살님의 자비로운 도움이 함께 어우러져 수행을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 “승가를 믿다. 승가는 수행을 열심히 잘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승가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개인이 아닌 집단, 즉 수행하고 공부하는 집단입니다. 진리를 추구 하는 모임입니다.
귀명삼보 승 부분으로, “목숨을 거두어 돌아가나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의 씨앗이여. 있는 그대로 그리고 모든 것 속에서 생활하는 그 숱한 구도자들이여.” 목숨을 거두어 진리로 돌아가는 이 사람들이 수행자, 승가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법에 맞게, 즉 사성제에 맞게 살아가는지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삶은 알고 시작하는 순간 달라집니다. 나를 되돌아보지 않으면 똑같은 삶만 되풀이할 뿐입니다. 진리를 추구 하고 진리를 논하고 실천해야 승가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부처님과 같이 자비심이 많아야 합니다. 집단 이기심이 강해지면 그것은 진정한 승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즘 종교들은 집단 이기심이 매우 강합니다. 집단 이기심은 국가나 정치에서도 강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법을 믿고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집단은 종교 수행집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도 진리를 추구하는 곳입니다. 대학도 일종의 승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대학은 시스템이 체계화되어 있고 종교 수행 단체는 계율은 있지만 비교적 덜 체계적이고 자율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이렇게 불교만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세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공부하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소중하게 됩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면 화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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