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止(지)의 功能(공능) → 一行三昧(일행삼매)

復次依是三昧故(부차의시삼매고) 則知法界一相(즉지법계일상)

다시 다음에 이 삼매를 의지하기 때문에 곧 법계가 일상임을 알게 되니, 

[法界(법계) : 10법계가 있으니 지옥, 축생, 아귀, 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부처. 법계는 다른 말로 하면 연기(緣起)이며, 분리되어 있지 않다. ]

謂一切諸佛法身(위일체제불법신) 與衆生身平等無二(여중생신평등무이)

이른바 일체 제불의 법신이 중생의 몸과 더불어 평등하여 둘이 없음으로,

卽名一行三昧(즉명일항삼매)

곧 이름하여 일행삼매라고 한다. (평등무이를 아는 것이 일행삼매)

當知眞如是三昧根本(당지진여시삼매근본) 若人修行(야인수행)

마땅히 알라, 진여는 삼매의 근본이니, 만약 어떤 사람이 수행하면,

漸漸能生無量三昧(점점능생무량삼매)

점점 능히 한량없는 삼매를 낼 수 있다.

 

 魔事(마사)

或有衆生(혹유중생) 無善根力(무선근력)

혹 어떤 중생이 선근의 힘이 없으면

則爲諸魔外道鬼神之所惑亂(즉위제마외도귀신지소혹란)

곧 모든 천마=魔와 외도와 귀=堆惕鬼(퇴척귀)와 신=精魅神(정미신)에 의해 미혹되고 어지럽게 되니,

[사마(四魔) ① 번뇌마(煩惱魔) - 탐진치로 인한 마 ② 오음마(五陰魔) - 오온이 나라고 생각하거나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견(常見). ③ 사마(死魔) -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고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하는 단견(斷見). ④ 천자마(天子魔) - 귀신]

若於坐中現形恐怖(약어좌중현형공포) 或現端正男女等相(혹현단정남녀등상)

혹 앉아 있는 중에 형상을 나타내어 두렵게 하거나, 혹은 단정한 남녀 등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나니, 

[或現端正男女等相 단정하다는 것은 잘 생겼다는 뜻으로 이것은 주관적이다. 수행하는 사람에게 멋있게 보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유혹하며 수행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뜻]

當念唯心(당념유심) 境界則滅(경계즉멸) 終不爲惱(종불위뇌)

마땅히 오직 마음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경계가 곧 사라지고 마침내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當念唯心 境界則滅은 외부의 마군이 뒤흔든다 해도 실제로는 자신에게 있었던 악한 습기를 따라서 그것이 선정으로 인해 훈습으로 발현했음을 두고 한 말이다. 만약 마음일 뿐임을 관찰한다면 마군의 경계는 저절로 사라진다]

或現天像菩薩像(혹현천상보살상) 亦作如來像相好具足(역작여래상상호구족)

혹은 천인의 모습=天像이나 보살상을 나타내기도 하며, 또는 여래의 모습인 상호를 갖추어서

若說陀羅尼(약설다라니) 若說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약설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혹은 다라니를 설하기도 하며, 혹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를 설하기도 하며,

或說平等(혹설평등) 空無相無願(공무상무원) 無怨無親(무원무친)

혹은 평등, 공, 무상, 무원, 무원, 무친, 

[空無相無願= 삼삼매(三三昧). ① 공삼매(空三昧) - 모든 것은 실체가 없어 공하다는 삼매. ② 무상삼매(無相三昧) - 이미 공하니 상이 없다고 관하는 삼매. ③ 무원삼매(無願三昧) - 위와 같이 관하고 무언가 하나도 원구(願求)할 것이 없다고 관하는 삼매. 공에 치우친 면에서 말한 것]

無因無果(무인무과) 畢竟空寂(필경공적) 是眞涅槃(시진열반)

무인, 무과하여 필경에 공적함을 설하고, 또한 이것이 진실한 열반이라고 설하며,

或令人知宿命過去之事(혹령인지숙명과거지사) 亦知未來之事(역지미래지사)

혹은 사람으로 하여금 숙명통=知宿命으로 과거의 일을 알게 하고, 또 미래의 일=知未來를 알게 하기도 하며,

得他心智(득타심지) 辯才無碍(변재무애) 

타심통의 지혜=他心智를 얻어 말재주=辯才가 걸림이 없게 하기도 하며, 

能令衆生(능령중생) 貪著世間名利之事(탐착세간명리지사)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의 명예와 이익=名利에 탐하고 집착=貪著하게 하기도 한다.

 

又令使人數瞋數喜(우령사인삭진삭희) 性無常準(성무상준)

또 사람으로 하여금 자주 화를 내게 하고, 자주 기뻐하게 하며, 성품에 일정한 기준이 없게 하며, 

或多慈愛(혹다자애) 多睡多病(다수다병) 其心懈怠(기심해태)

혹은 자애가 많게 하기도 하고, 졸음(잠)이 많고 병이 많게 하며, 그 마음이 게으르게 하기도 한다.

或卒起精進(혹졸기정진) 後便休廢(후편휴폐) 生於不信(생어불신)

혹은 갑자기 정진을 일으키다가, 후에 문득 그만두기도 하며, 불신하는 마음을 내어 

多疑多慮(다의다려) 或捨本勝行(혹사본승행) 更修雜業(갱수잡업)

의심이 많고 생각이 많게 하며, 혹은 본래의 수승한 수행을 버리고 다시 잡된 행위를 닦기도 하며,

若著世事種種牽纏(약착세사종종견전)

혹은 세상(세간)의 갖가지 일에 이끌리어 얽매이기도 하며,  

亦能使人得諸三昧(역능사인득제삼매) 少分相似(소분상사)

또는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삼매를 얻게 하여 약간의 분야에서 서로 비슷하게 하기도 하나,

皆是外道所得(개시외도소득) 非眞三昧(비진삼매)

이것은 다 외도가 얻은 것일 뿐, 진실한 삼매는 아니다. 

[이것은 번뇌 마군.]

或復令人若一日若二日若三日(혹부령인약일일약이일약삼일)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혹 하루, 혹 이틀, 혹 사흘에서

乃至七日住於定中(내지칠일주어정중) 得自然香美飮食(득자연향미음식)

나아가 칠일에 이르기까지 선정 속에 안주하면서 저절로 향기롭고 맛있는 음식을 얻게 하여

身心適悅(신심적열) 不飢不渴(불기불갈) 使人愛著(사인애착)

몸과 마음이 쾌적하고 기뻐서,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상태에 애착을 가지게 하며, 

或亦令人食無分齊(혹역령인식무분제) 乍多乍少(사다사소) 顔色變異(안색변이)

혹은  또 사람으로 하여금 음식에 일정한 한계가 없게 하여, 갑자기 많이 먹었다가 갑자기 적게 먹게 하기도 하여 안색이 다르게 변하게 하기도 하니, 

以是義故(이시의고) 行者常應智慧觀察(행자상응지혜관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수행자는 마땅히 항상 지혜로 관찰하고,

勿令此心墮於邪網(물령차심타어사망) 當勤正念(당근정념)

하여금 이 마음이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여야 하며, 마땅히 정념으로 부지런히 닦아 

不取不著(불취불착) 則能遠離是諸業障(즉능원리시제업장)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면 곧 능히 이러한 모든 업장을 멀리 여읠 수 있다.

[이것은 욕심의 마군]

 

4. 外道三昧(외도삼매)와 眞如三昧(진여삼매)의 차이

應知外道所有三昧(응지외도소유삼매) 皆不離見愛我慢之心(개불리견애아만지심)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외도에게 있는 삼매는 모두가 아견=見, 아애=愛, 아만의 마음을 여의지 못하였으니,

貪著世間名利恭敬故(탐착세간명리공경고)

세간의 명예와 이익=名利와 공경을 탐내고 집착=貪著하기 때문이다. 

 

眞如三昧者(진여삼매자) 不住見相(불주견상) 不住得相(불주득상)

진여삼매라는 것은 상을 봄=見相에 안주하지 않으며, 상을 얻음=得相에도 안주하지도 않으며,

乃至出定亦無懈慢(내지출정역무해만) 所有煩惱漸漸微薄(소유번뇌점점미박)

나아가서는 선정에서 나와도 역시 게으름과 아만이 없어, 가지고 있던 번뇌가 점점 微薄=희미하게 엷어진다. 

若諸凡夫(약제범부) 不習此三昧法(불습차삼매법) 得入如來種性(득입여래종성)

만일 모든 범부가 이 진여삼매법을 닦지 않고 여래종성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無有是處(무유시처) 以修世間諸禪三昧(이수세간제선삼매) 多起味著(다기미착)

옳다고 할 수 없으며, 세간의 모든 선정삼매=禪三昧를 닦음으로써 다분히 선미(禪味)의 집착을 일으키어

依於我見繫屬三界(의어아견계속삼계) 與外道共(여외도공)

아견에 의지하여 삼계에 얽매이고 속박되어 외도와 더불어 함께 하나니,

若離善知識所護(약리선지식소호) 則起外道見故(즉기외도견고)

만일 선지식의 보호=護念하는 바를 떠난다면, 곧 외도의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5. 奢摩他 수행의 이익 →他의 이익

復次精勤專心修學此三昧者(부차정근전심수학차삼매자)

다시 다음에 정성으로 부지런히 정진하는 마음으로 오로지 집중하여, 이 삼매를 닦아 배우는 자는

現世當得十種利益(현세당득십종리익) 云何爲十(운하위십)

현세에 마땅히 열 가지 이익을 얻을 것이니,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一者(일자) 常爲十方諸佛菩薩之所護念(상위시방제불보살지소호념)

하나, 항상 시방의 모든 부처와 보살이 보호하고 염려해주시는 바가 되며,

[이는 불보살에 의한 가호의 이익을 얻게 되기 때문.]

二者(이자) 不爲諸魔惡鬼所能恐怖(불위제마악귀소능공포)

둘, 모든 천마와 악귀들이 공포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며,  

[천마악귀(天魔惡鬼) 등의 모습이 나타나는 등의 마사(魔事)가 없어진다.]

三者(삼자) 不爲九十五種外道鬼神之所惑亂(불위구십오종외도귀신지소혹란)

셋, 95종의 외도와 귀신이 미혹하여 산란하게 하지 못하며,

[둘째와 셋째는 외부로부터 받는 악념(惡念)의 장애에서 떠날 수 있는 이익]

四者(사자) 遠離誹謗甚深之法(원리비방심심지법) 重罪業障漸漸微薄(중죄업장점점미박)

넷, 매우 심오한 법을 비방함을 멀리 여의고, 중죄의 업장이 점점 미세하게 엷어지며,

五者(오자) 滅一切疑諸惡覺觀(멸일체의제악각관)

다섯, 일체의 의심과 모든 그릇된 각과 관=覺觀을 소멸하며,  

[일체의 의심과 사악(邪惡)한 관찰사유(觀察思惟)의 그룻된 수행(修行)을 멸할 수 있게 된다.]

六者(육자) 於如來境界信得增長(어여래경계신득증장)

여섯, 여래의 경계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신심이 더욱 증장하며, 

[이는 본체 즉 여래의 법신에 대한 신심을 증장시키는 이익이 있다.]

七者(칠자) 遠離憂悔(원리우회) 於生死中勇猛不怯(어생사중용맹불겁)

일곱, 근심과 후회를 멀리 여의어, 생사 가운데에서 용맹하여 겁약하지 않으며, 

[이는 오염된 세계에서도 생사를 겁내지 않는 이익이 있게 되는 것]

八者(팔자) 其心柔和(기심유화) 捨於驕慢(사어교만) 不爲他人所惱(불위타인소뇌)

여덟, 그 마음이 유연해지고 조화로우며, 교만을 버리므로 다른 사람의 괴롭힘=惱亂하는 바가 되지 않으며, 

[이것은 악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익을 얻게 되는 것]

九者(구자) 雖未得定(수미득정) 於一切時一切境界處(어일체시일체경계처)

아홉, 비록 선정을 얻지 못하였지만, 일체의 시간과 어떤 경계에 처해서도, 

則能減損煩惱(즉능감손번뇌) 不樂世間(불락세간)

곧 번뇌를 줄이는=損減시켜, 세간을 즐기지 않으며, 

[이는 세속적인 재미를 버릴 수 있는 이익이 있게 되는 것]

十者(십자) 若得三昧(약득삼매) 不爲外緣一切音聲之所驚動(불위외연일체음성지소경동)

열, 만일 삼매를 얻으면 외연의 일체 음성에 놀라거나 요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깊은 선정을 얻은 이익]

 

(2) 觀門(관문)

復次若人唯修於止(부차약인유수어지) 則心沈沒(즉심침몰) 或起懈怠(혹기해태)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지만을 닦는다면, 곧 마음이 가라앉아 혹은 게으름을 일어나며,

不樂衆善(불락중선) 遠離大悲(원리대비) 是故修觀(시고수관)

여러 선함을 즐겨 행하지 않으며, 대비심을 멀리 여의게 되므로, 그러므로 관을 닦아야만 한다.

 

① 法相觀(법상관)

修習觀者(수습관자) 當觀一切世間有爲之法(당관일체세간유위지법)

관을 수습하는 자는 마땅히 일체 세간의 유위의 법은 오래 머물 수 없어, 

[유위법이란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것, 모든 사물을 말한다. 인연에 관계없는 열반과 같은 것은 무위법]

無得久停須臾變壞(무득구정수유변괴)  → 무상(無常)을 관함

순간순간 변하고 무너지며,

一切心行念念生滅(일체심행념념생멸) 以是故苦(이시고고) →고(苦)를 관함.

일체 마음의 진행=心行이 생각 생각에 생멸하니, 이러한 때문에 괴롭다는 것을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應觀過去所念諸法恍惚如夢(응관과거소념제법황홀여몽)

과거에 생각했던 모든 법은 황홀한 꿈과 같다고 마땅히 관찰해야 하며,

應觀現在所念諸法猶如電光(응관현재소념제법유여전광)

현재에 생각하는 모든 법도 마치 번개 불과 같다고 마땅히 관찰해야 하며, 

應觀未來所念諸法猶如於雲忽爾而起(응관미래소념제법유여어운홀이이기)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도 마치 구름이 홀연히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마땅히 관찰해야만 한다. → 무아(無我)를 관함.

應觀世間一切有身悉皆不淨(응관세간일체유신실개부정)

마땅히 세간의 일체 존재의 몸은 모두가 청정하지 않아 

種種穢汚無一可樂(종종예오무일가락) → 부정(不淨)을 관함.

갖가지 더러움으로 오염되었기에 한 가지도 즐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이는 사념처관(四念處觀), 이 네 가지 법상관(法相觀)은 범부들의 네 가지 전도(顚倒)된 견해인 상(常)·낙(樂)·아(我)·정(淨)에 집착하는 망상을 제거는 것 ]

 

② 대비관(大悲觀)

如是當念(여시당념) 一切衆生從無始世來(일체중생종무시세래)

다음과 같이 마땅히 생각해야 하나니, 일체중생은 시작이 없는 세월로부터 흘러오면서

皆因無明所熏習故(개인무명소훈습고) 令心生滅(령심생멸)

모두가 무명으로 인해서 훈습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생멸하게 되었으니,

已受一切身心大苦(이수일체신심대고) 現在卽有無量逼迫(현재즉유무량핍박)

이미 일체 몸과 마음의 큰 괴로움을 받았고,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未來所苦亦無分齋(미래소고역무분재) 難捨難離(난사난리)

미래에도 괴로움을 받을 것이 한계=分齊가 없을 것이니, 버리기도 어렵고 여의기도 어려우나, 

而不覺知(이불각지) 衆生如是(중생여시) 甚爲可愍(심위가민)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중생이 이와 같이 매우 불쌍하게 되었다.  

[법상관(法相觀)을 바탕으로 하여, 중생의 존재를 불쌍히 여기는 대비관(大悲觀)]

 

③ 대원관(大願觀)

作此思惟(작차사유) 卽應勇猛立大誓願(즉응용맹립대서원)

이와 같이 사유하여, 곧 마땅히 용맹하게 큰 서원을 세워야 하나니,

願令我心離分別故(원령아심리분별고)

하여금 나의 마음이 분별을 여의도록 원하였기 때문에 

遍於十方修行一切諸善功德(편어시방수행일체제선공덕)

시방에 두루하여 일체 모든 좋은 공덕=善功德을 수행하고

盡其未來(진기미래) 以無量方便(이무량방편) 救拔一切苦惱衆生(구발일체고뇌중생)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써 일체 고뇌하는 중생을 구해내어 

令得涅槃第一義樂(령득열반제일의락)

하여금 열반의 제일의 즐거움=第一義을 얻게 해야 하나니,  

[대비관(大悲觀)을 바탕으로 하여 중생구제의 대서원(大誓願)을 세우는 것]

 

④ 정진관(精進觀)

以起如是願故(이기여시원고) 於一切時一切處所有衆善(어일체시일체처소유중선)

이와 같은 원을 일으켰으므로, 일체의 시간과 일체의 처소에 있는 여러 선행을 

隨己堪能(수기감능) 不捨修學(불사수학) 心無懈怠(심무해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대로 닦고, 배움을 버리지 않아 마음에 게으름이나 태만함이 없어야 하나니,

唯除坐時專念於止(유제좌시전념어지)

오직 좌선할 때 지에 전념하는 것만은 제외하며,

若餘一切悉當觀察應作不應作(약여일체실당관찰응작불응작)

나머지 모든 것에서는 응당 지어야 할 것과 응당 짓지 않아야 할 것을 관찰해야 한다.

[중생구제를 위한 대서원(大誓願)을 세웠으므로 이 대원(大願)을 어디까지 실행할 것인가의 정진(精進)을 일으키는 것이다. 정진은 언제, 어디서나(一切時, 一切處)에서 실행하는 것이며, 세상에 있는 온갖 선(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힘이 미치는 한 모두 실행하여야 하며, 한 순간도 버리지 않고, 게을리 하는 마음을 일으킴이 없이 수행하는 정진관(精進觀)이다.]

 

3. 지관구행(止觀俱行) - 止觀雙修(지관쌍수)를 권함

[지(止)는 비유(非有)이고 관(觀)은 비무(非無)로서「비유즉비무(非有卽非無)」는 지(止)를 버리지 아니하고, 더불어 관(觀)을 수행하는 것. 지(止)는 진여문, 관(觀)은 생멸문의 입장이며, 지(止)는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 관(觀)은 후득지(後得智), 지(止)는 평등관, 관(觀)은 차별관, 지(止)는 공관(空觀), 관(觀)은 유관(有觀).

지(止)는 범부의 세간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치유하는 것이며, 동시에 관(觀)은 보살로서 세간을 버리지 않는 대비심(大悲心)을 갖게 하는 것으로, 지관구행(止觀俱行)의 실천을 보게 된다. ]

若行若住若臥若起(약행약주약와약기) 皆應俱行(개응구행)

혹 다니거나, 혹 머물거나, 혹 눕거나, 혹 일어남에 모두 마땅히 지관(止觀)을 함께 수행해야 하나니,

所謂雖念諸法自性不生(소위수념제법자성불생) 而復卽念因緣和合(이부즉념인연화합)

이른바 비록 제법의 자성이 나지 않음을 생각하나, 다시 곧 인연으로 화합한

[雖念諸法自性不生이란 것은- 비유문(非有門)에 의해 지행(止行)을 닦는 것. 而復卽念因緣和合이란 것은 비무문(非無門)에 의해 관행(觀行)을 닦는 것]

善惡之業(선오지업) 苦樂等報(고락등보) 不失不壞(불실불괴)

선악의 업과 고와 락 등의 과보가 잃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음을 생각해야 하며,

雖念因緣善惡業報(수념인연선오업보) 而亦卽念性不可得(이역즉념성불가득)

비록 인연이 화합한 선악업보를 생각한다 하여도, 그러나 또한 생각하는 자성=念性은 얻을 수 없음이니,

[앞부분은 관행(觀行)이며, 뒷부분은 지행(止行).]

若修止者(약수지자) 對治凡夫住著世間(대치범부주착세간)

만약 지(止)를 수행하는 자라면, 범부가 세간에 머물고 집착하는 것을 대치할 수 있으며, 

能捨二乘怯弱之見(능사이승겁약지견)

능히 이승의 겁내고 약한 견해=怯弱之見을 버릴 수 있다.

 

若修觀者(약수관자) 對治二乘不起大悲狹劣心過(대치이승불기대비협열심과)

만약 관을 수행하는 자는 이승이 대비를 일으키지 않는 편협하고 용렬한 마음의 허물을 대치할 수 있으며,

遠離凡夫不修善根(원리범부불수선근)

범부가 선근을 수행하지 않는 것을 멀리 여의게 되니, 

 

以此義故(이차의고) 是止觀二門(시지관이문) 共相助成(공상조성) 不相捨離(불상사리)

이런 뜻(의미)이므로 이 지와 관의 두 문은 함께 서로 도와 이루며,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니,

若止觀不具(약지관불구) 則無能入菩提之道(약무능입보리지도)

만약 지와 관을 갖추지 않으면 보리의 도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4. 道(도)에서 물러나지 않는 방편

復次衆生初學是法(부차중생초학시법) 欲求正信(욕구정신) 其心怯弱(기심겁약)

다시 다음에 중생이 처음으로 이 법을 배워 바른 믿음을 구하고자 하나, 그 마음에 겁이 많고 약한=怯弱하여 

以住於此娑婆世界(이주어차사바세계) 

이 사바세계에 머묾으로써 

自畏不能常値諸佛親承供養(자외불능상치제불친승공양)

스스로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몸소 받들고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懼謂信心難可成就(구위신심난가성취) 意欲退者(의욕퇴자)

두려워서 말하길, "신심은 성취하기 어렵다"라고 하면서 의욕이 물러나고자 하는 자라면,

當知如來有勝方便(당지여래유승방편) 攝護信心(섭호신심)

여래께서는 수승한 방편이 있어 신심을 거두어 보호하심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謂以專意念佛因緣(위이전의념불인연) 隨願得生他方佛土(수원득생타방불토)

이른바 뜻을 하나로 하여=專一하게 하여 염불한 인연으로 원을 따라 다른 불국토에 태어나서,

常見於佛(상견어불) 永離惡道(영리악도)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고, 악도를 영원히 떠남을 말한다. 

如修多羅說(여수다라설) 若人專念西方極樂世界阿彌陀佛(약인전념서방극락세계아미타불)

수다라(경)에서 설하신 것처럼 만약 어떤 사람이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오로지 생각=專念하고 

所修善根廻向(소수선근회향) 願求生彼世界(원구생피세계) 卽得往生(즉득왕생)

닦은 선근을 회향하며, 저 세계에 왕생하기를 구한다면, 곧 왕생하여 

常見佛故(상견불고) 終無有退(종무유퇴)

항상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침내 물러남이 없으며, 

若觀彼佛眞如法身(약관피불진여법신) 常勤修習畢竟得生(상근수습필경득생)

만약 저 부처님의 진여의 법신을 관찰하고 항상 부지런히 수습한다면 필경에 왕생하여 

住正定故(주정정고)

정정취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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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修行信心分(수행신심분)

已說解釋分(이설해석분) 次說修行信心分(차설수행신심분)

이미 解釋分(해석분)을 설하였으니, 다음으로 수행신심분을 설할 것이니,

是中(시중) 依未入正定衆生故(의미입정정중생고) 說修行信心(설수행신심)

이 가운데 아직 정정취로 들어가지 못한 중생(부정취)을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신심분을 설한다.

 

1) 四信(사신)

何等信心(하등신심) 云何修行(운하수행)

어떤 것들이 신심이고, 어떻게 수행하는가? 

略說信心(략설신심) 有四種(유사종) 云何爲四(운하위사)

신심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一者(일자) 信根本(신근본) 所謂樂念眞如法故(소위락념진여법고)

첫째는 근본(진여)을 믿는 것이니, 이른바 진여법을 즐겨 생각=念(잊지 않음)하기 때문이다.

二者(이자) 信佛有無量功德(신불유무량공덕) 常念親近供養恭敬(상념친근공양공경)

두 번째는 부처님에게는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니, 항상 친근해서 공양하고 공경하기를 염하면서

[부처를 믿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믿는다는 것]

發起善根(발기선근) 願求一切智故(원구일체지고)

선근을 일으키어 일체지(불지, 무분별지) 구하기를 발원하기 때문이다. 

三者(삼자) 信法有大利益(신법유대리익) 常念修行諸波羅蜜故(상념수행제파라밀고)

세 번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니,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길 염하기 때문이다.

[불법을 믿는 것은 부처님께서 깨친 내용을 믿는 것. 연기를 풀어쓰면 고집멸도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집) 생겼으며(고), 원인이 소멸되면(도), 없어진다(멸).]

四者(사자) 信僧能正修行自利利他(신승능정수행자리리타)

네 번째는 스님은 능히 올바른 수행을 하면서 자리이타를 행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니,

常樂親近諸菩薩衆(상락친근제보살중) 求學如實行故(구학여실행고)

항상 즐거이 모든 보살대중을 친근해서 참다운=如實한 수행을 구하여 배우기 때문이다.

[진여법을 믿고 즐겼던 것은 내인(內因)의 훈습이며, 여기에서 삼보에 대한 신심은 외연(外緣)의 자훈(資熏)]

 

2) 五門(오문)

修行有五門(수행유오문) 能成此信(능성차신) 云何爲五(운하위오)

수행에는 다섯 가지 문이 있어서, 능히 이 신심(사신)을 성취할 수 있으니, 무엇이 그 다섯 가지인가?

一者施門(일자시문) 二者戒門(이자계문) 三者忍門(삼자인문)

첫째는 보시문=施門이고, 두 번째는 계문=持戒門이며, 세 번째는 인문=忍辱門이고, 

四者進門(사자진문) 五者止觀門(오자지관문)

네 번째는 진문=精進門이며, 다섯 번째는 지관문(선정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이다.

[앞의 네 가지 신심 모두가 대승을 발기하는 내적인 요인이라면, 이 다섯 가지 방편문을 닦는 것은 내적인 요인을 도와 성취시키는 외연]

⑴ 施門(시문) - 布施(보시)

云何修行施門(운하수행시문)

어떻게 시문=布施門을 수행하는가?

若見一切來求索者(약견일체래구삭자) 所有財物(소유재물) 隨力施與(수력시여)

만약 모든 사람이 와서 찾아와서 구하는 이를 보거든, 소유한 재물을 자기의 능력에 따라 베풀어주고

以自捨慳貪(이자사간탐) 令彼歡喜(령피환희)

자신의 아끼고 탐하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며,→ 재시(財施, 무위의 마음) 

若見厄難(약견액난) 恐怖危逼(공포위핍) 隨己堪任施與無畏(수기감임시여무외)

만약 재앙이나 어려움=厄難에 빠졌거나, 두려워하거나, 위험에 빠지거나 핍박 받는 것을 보면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따라서 두려움을 없애주는것이며,    →무외시(無畏施, 공 무아의 실현) 

若有衆生來求法者(약유중생래구법자) 隨己能解方便爲說(수기능해방편위설)

만약 어떤 중생이 와서 법을 구하는 자가 있거든, 자기가 알 수 있는 방편을 따라 설하되, → 법시(法施, 깨달음의 실현) 

不應貪求名利恭敬(불응탐구명리공경)

마땅히 명예나 이익과 공경 받기를 구하지 않아야 하니,

唯念自利利他(유념자리리타) 廻向菩提故(회향보리고)

오직 자리이타만을 생각하여 보리에 회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시, 무외시 등은 오직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정신에 의하여 베푸는 것으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베풀었는가의 세 가지를 잊어버리는 보시가 참된 보시이며, 이것이 바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을 염하여 보리(菩提)에 회향하는 보시이기 때문이다]

 

  ⑵ 戒門(계문) - 지계(持戒) -십선계(十善戒)

云何修行戒門(운하수행계문)

어떻게 지계문=戒門을 수행하는가?(자기자신을 잘 지키는 것이 지계)

所謂不殺(소위불살) 不盜不婬(불도불음) 不兩舌不惡口(불양설불악구)

이른바 살생하지 않음=不殺, 도둑질하지 않음=不盜, 음행하지 않음=不婬과 두 말 하지 않음=不兩舌, 헐뜯는 말하지 않음=不惡口이며, 

不妄言不綺語(불망언불기어) 遠離貪嫉欺詐諂曲瞋恚邪見(원리탐질기사첨곡진에사견)

꾸미는 말하지 않음=不綺語, 허망한 거짓말하지 않는=不妄言이다. 탐욕=貪, 질투=嫉, 속임수=欺詐, 아첨=諂曲, 성냄=瞋恚, 사견=邪見을 멀리 여의어야 하며,

若出家者爲折伏煩惱故(약출가자위절복번뇌고) 亦應遠離憒鬧(역응원리궤료)

만일 출가한 자라면 번뇌를 꺾어 항복=調伏받아야 하기 때문에 또한 마땅히 심난하고 시끄러운 곳을 멀리 떠나

憒 심란할 궤, 鬧 시끄러울 뇨, 시끄러울 료

常處寂靜(상처적정) 修習少欲知足頭陀等行(수습소욕지족두타등행)

항상 고요한 곳에 머물며, 욕심을 적게 하고=少欲 만족할 줄 아는 두타행 등의 수행을 닦아 익혀야 하며,

乃至小罪心生怖畏(내지소죄심생포외) 慙愧改悔(참괴개회)

나아가서는 적은 죄라 할지라도 마음에 공포와 두려움을 내어=生怖畏, 뉘우치고=慙, 부끄러워하며=愧, 고치고=改, 후회하여=悔

不得輕於如來所制禁戒(불득경어여래소제금계)

여래께서 제정하신 금하고 경계하신 바=禁戒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하며, 

當護譏嫌(당호기혐) 不令衆生妄起過罪故(불령중생망기과죄고)

마땅히 꾸짖음이나 혐의를 받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나니, 중생들로 하여금 허망하게 허물과 죄를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계율은 삼취정계(三聚淨戒)로 포섭할 수 있다. 삼취정계란 섭율의계(攝律儀戒), 섭선법계(攝善法戒), 섭중생계(攝衆生戒)]

 

⑶ 忍門(인문)

云何修行忍門(운하수행인문)

어떻게 인욕문=忍門을 수행해야 하는가?

所謂應忍他人之惱(소위응인타인지뇌) 心不懷報(심불회보)

이른바 마땅히 다른 사람이 뇌란시키는 (번뇌) 것을 참고, 보복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으며,

亦當忍於利衰毁譽稱譏苦樂等法故(역당인어리쇠훼예칭기고락등법고)

또한 마땅히 재물의 이익과 손해=利衰과 훼방함과 찬탄함=毁譽(뒤에서 비방함)과 칭찬함과 나무람=稱譏(직접적인 칭찬과 나무람)과 괴로움과 즐거움=苦樂 등의 법도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위의 역경과 순경을 합하여 팔풍(八風). 인(忍)에는 타불요익인(他不饒益忍)과 안수인(安受忍)의 2 가지가 있다. 타불요익인(他不饒益忍)은 다른 사람이 가하는 불이익을 참는 것이며, 안수인(安受忍)은 역경(逆境)이나 순경(順境)을 막론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

인(忍)의 세 종류= 생인(生忍)·무생인(無生忍)·적멸인(寂滅忍). 중생이 역순의 경계를 참아야 하는 것이 생인(生忍), 애초에 남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무생인(無生忍), 사선(四禪)·팔정(八定)·구차제정(九次第定)의 수행에서 얻어진 열반이 적멸인(寂滅忍)]

 

⑷ 進門(진문)

云何修行進門(운하수행진문)

어떻게 정진문=進門을 닦아야 하는가?

所謂於諸善事(소위어제선사) 心不懈退(심불해퇴) 立志堅强(입지견강) 

이른바 모든 좋은 일 (착한 일)에 마음이 게을러 물러남이 없으며, 뜻을 굳고 강하게 세우며,  

遠離怯弱(원리겁약) 當念過去久遠已來(당념과거구원이래)

겁내거나 약한 마음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 구원한 시간 이래로 

虛受一切身心大苦(허수일체신심대고) 無有利益(무유리익)

일체 신심의 큰 고통을 부질없이 받아들이면서 이익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며, (잊지 않으며) 

是故應勤修諸功德(시고응근수제공덕) 自利利他(자리리타) 速離衆苦(속리중고)

그러므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면서, 모든 괴로움을 신속히 여의어야만 하며, 

復次若人雖修行信心(부차약인수수행신심) 以從先世來(이종선세래)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을 수행하긴 하나 먼저 세상으로부터 

多有重罪惡業障故(다유중죄악업장고) 爲魔邪諸鬼之所惱亂(위마사제귀지소뇌란)

무거운 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사악한 마군과 귀신에 의한 번뇌와 어지럽힘=惱亂을 당하거나,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혹위세간사무종종견전) 或爲病苦所惱(혹위병고소뇌)

혹은 세간의 사무 (세간의 일) 들에 갖가지로 이끌려 얽매이기도 하며, 혹은 병고로 인해 근심하는 바가 되며, 

牽 끌 견, 이끌 견, 纏 얽힐 전, 얽을 전

有如是等衆多障碍(유여시등중다장애) 是故應當勇猛精勤(시고응당용맹정근) 

이러한 등등의 여러 가지 많은 장애가 있으므로, 응당 용맹하게 부지런히 정진하여야 하며,

晝夜六時禮諸佛(주야륙시예제불) 誠心懺悔(성심참회) 勸請隨喜(권청수희) 

밤낮 육시에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면서 성심으로 참회하고, 권청하며, 따라서 기뻐하고

[晝夜六時(주야육시) : 하루를 여섯으로 나눈 것, 신조(晨朝), 일중(日中), 일몰(日沒), 초야(初夜), 중야(中夜), 후야(後夜)]

廻向菩提(회향보리) 當不休廢(당불휴폐) 得免諸障善根增長故(득면제장선근증장고)

깨달음=菩提에 회향하여, 마땅히 쉬거나 그만둠=廢하지 않아야 하나니, 모든 장애을 면하고 선근이 더욱 자라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元曉 : 네 가지 장애가 있으니, ① 나쁜 업으로 인한 장애인데 이는 참회를 통해 없앤다. ② 바른 법을 헐뜯는 장애가 있으니 이는 법을 청하여 듣는 것으로 없앤다. ③ 다른 사람의 훌륭한 점을 시기하는 장애가 있으니 이는 따라서 함께 기뻐함으로써 없앤다. ④ 삼계의 괴로움을 모르고 집착하는 장애가 있으니 이는 공덕을 세워 회향함으로써 없앤다.]

 

⑸ 止觀門(지관문) - 진문(進門)

云何修行止觀門(운하수행지관문) 所言止者(소언지자)

어떻게 지관문을 수행해야 하는가? 말한 바 지=止라고 하는 것은 

謂止一切境界相(위지일체경계상) 隨順奢摩他觀義故(수순사마타관의고)

이른바 일체 경계의 현상=境界相(망분별)을 멈추는 것을 말하니, 사마타(공관)란 관의 뜻을 따르는=隨順하기 때문이다.

[止一切境界相=분별함에 의해 모든 바깥 경계를 짓다가 각혜(覺慧)로써 바깥 경계의 상을 깨뜨리는 것이니, 경계상이 그치면 분별할 바가 없기에 ‘지(止)’라고 하는 것]

所言觀者(소언관자) 謂分別因緣生滅相(위분별인연생멸상)

말한 바 관이라는 것은, 이른바 인연으로 생멸하는 현상=因緣生滅相을 분별하는 것을 말하며,

[分別因緣生滅相이란 생멸문에 의하여 법상(法相)을 관찰하기 때문에 분별한다고 말한 것]

隨順毘鉢舍那觀義故(수순비바사나관의고)

위빠사나=毘鉢舍那란 관찰의 뜻에 따르기 때문이다. 

云何隨順(운하수순) 以此二義漸漸修習(이차이의점점수습)

어떻게 수순해야 하는가? 이는 두 가지의 뜻으로써 점차 닦아 익혀서=修習하여 

不相捨離(불상사리) 雙現前故(쌍현전고)

서로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 두 가지=雙으로 목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① 止門(지문) - 지(止)의 수승한 공능을 밝힘

若修止者(약수지자) 住於靜處(주어정처) 端坐正意(단좌정의) 不依氣息(불의기식)

만일 지를 수행하는 자라면, 고요한 곳에 안주하여 단정히 앉아 의식을 바르게 해야 하고, 호흡을 의지하지 말며,

[천태의 '소지관(小止觀)', 端坐= 조신(調身), 正意= 마음을 고르게 하는 조심(調心). 不依氣息=조식(調息)]

不依形色(불의형색) 不依於空(불의어공) 不依地水火風(불의지수화풍)

형상과 색상(부정관과 골쇄관)에 의지하지 말며, 허공을 의지하지 말며, 지·수·화·풍을 의지하지도 말며,

["호흡과 형체와 색상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육신의 집착을 여읜 것이고, "오대(五大)인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의 집착을 여읨.]

乃至不依見聞覺知(내지불의견문각지)

나아가서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見聞覺知에도 不依=의지하지 않는(벗어남) 것이다.

[不依見聞覺知= 마음마저 여읜 것]

一切諸想(일체제상) 隨念皆除(수념개제) 亦遣除想(역견제상)

일체 모든 상념을 생각을 따라 모두 제거하되, 역시 제거한다는 일념마저도 버려야 하며,

[隨念皆除 亦遣除想상념을 제거하는 주관적인 일념까지도 버리는 것

以一切法本來無相(이일체법본래무상) 念念不生(념념불생) 念念不滅(념념불멸)

일체법은 본래 상념이 없어서 생각 생각이 나지 않으며, 생각 생각이 사라지지도 않으니,

亦不得隨心外念境界(역불득수심외념경계) 後以心除心(후이심제심)

또한 마음이 밖으로 경계를 생각하는 것을 따르지 않은 뒤, 마음으로써 마음을 제거하려고 하지도 않아야 한다.

[以心除心(이심제심) - 뒤의 마음은 동요하는 마음이고, 앞의 마음은 바르게 하는 마음으로, 正知의 힘으로 동요하는 마음을 제거하는 것]

心若馳散(심약치산) 卽當攝來(즉당섭래) 住於正念(주어정념)

만약 마음이 치달아 흩어진다면, 마땅히 당장에 거두어 들여 정념에 안주해야 하며,(상속하는 분별심을 끊는 것)

是正念者(시정념자) 當知唯心無外境界(당지유심무외경계)

이 정념이란 것은 오직 마음일 뿐, 외부의 경계란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하나니,

旣復此心亦無自相(기부차심역무자상) 念念不可得(념념불가득)

곧 다시 이 마음까지도 또한 자체의 모습이 없으므로 생각 생각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若從坐起(약종좌기) 去來進止(거래진지) 有所施作(유소시작)

만약 앉은 곳에서 일어나 가고 오며, 나아가고 멈추며, 행하는 바가 있다면, 

於一切時(어일체시) 常念方便(상념방편) 隨順觀察(수순관찰)

일체의 시간에 항상 방편을 생각하여, 수순하고 관찰하여

久習淳熟(구습순숙) 其心得住(기심득주)

오랜 동안 익혀 익숙하여지면 그 마음이 안주할 수 있다.

以心住故(이심주고) 漸漸猛利(점점맹리) 隨順得入眞如三昧(수순득입진여삼매)

그 마음이 안주할 수 있기 때문에 점점 맹렬하게 날카로워져서, 수순하여 진여삼매에 들어갈 수가 있으니,

深伏煩惱(심복번뇌) 信心增長(신심증장) 速成不退(속성불퇴)

번뇌를 깊이 조복받고, 신심이 더욱 자라나 신속하게 불퇴전을 성취한다.

唯除疑惑(유제의혹) 不信誹謗(불신비방) 重罪業障(중죄업장)

오직 의혹하는 것과 불신하는 비방과 중죄업장과 

我慢懈怠(아만해태) 如是等人(여시등인) 所不能入(소불능입)

아만, 게으름하는 사람은 제외하니, 이와 같은 사람은 능히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疑惑(의혹)= 과연 그럴까 하는 不信(불신), 이러한 도리를 믿지 않는 것. 誹謗(비방) =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고 비방하는 것, 즉 외도. 我慢(아만) = 자기 생각과 배운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교만한 것, 懈怠(해태) = 게을러서 미루거나 정진하지 않는 것. 이 모두가 자질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수행을 하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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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發心(발심)의 利益(이익)

菩薩發是心故(보살발시심고) 則得少分見於法身(즉득소분견어법신)

보살이 이 마음을 발하였기 때문에 곧 약간의 분야에서 법신을 볼 수 있으니,

[是心= 직심(直心), 심심(深心), 대비심(大悲心)
元曉 : 이것은 자리(自利)의 공덕을 밝힌 것이니, 이는 상사견(相似見)이므로 조금(少分)이라고 말한 것]

以見法身故(이견법신고) 隨其願力(수기원력) 能現八種利益衆生(능현팔종리익중생)

법신을 보기 때문에 그 원력에 따라 능히 여덟 가지의 모습을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하나니,

所謂從兜率天退(소위종도솔천퇴) 入胎住胎出胎(입태주태출태)

이른바 도솔천(지족천)으로부터 물러나 入胎=모태에 들어가고, 住胎=모태에 머물다가 出胎=모태에서 출생하고,

出家成道(출가성도) 轉法輪入於涅槃(전법륜입어열반)

출가하여 成道=도를 이루고, 轉法輪=법륜을 굴리다가 入涅槃=열반에 드시니,

[元曉 : 이것은 이타(利他)의 덕을 나타낸 것]

然是菩薩未名法身(연시보살미명법신)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법신보살이라 이름하지 못하는 것은, 

以其過去無量世來(이기과거무량세래) 有漏之業未能決斷(유루지업미능결단)

그는 과거 한량없는 세상으로부터의 유루의 업을 아직 결연히 끊지는 못하여,

隨其所生(수기소생) 與微苦相應(여미고상응) 亦非業繫(역비업계)

그가 태어날 곳을 따라서 미세한 괴로움과 상응하긴 하지만, 역시 업에 얽매이진 않으니,

以有大願自在力故(이유대원자재력고)

대원의 자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업을 따르는 변역생사가 있으므로 아직은 법신보살이 아니며, 대원력을 지녀 수명의 길고 짧음을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범부가 혹업에 얽매여 받는 분단생사도 아닌 것. 유루의 업을 아직은 결연히 끊지를 못하여 태어날 곳을 따르는 이 점에서 법신보살과는 다름]

如修多羅中(여수다라중) 或說有退墮惡趣者(혹설유퇴타악취자)

수다라=경에, 혹은 "혹 어떤 이가 물러나 악한 세계로 떨어진다"고 설하는 것 같은 것은,

["본업경(本業經)"에서, "십주위 가운데 칠주(七住)보살위의 이전을 수행지에서 퇴전하는 퇴분(退分)이라고 말한다]

非其實退(비기실퇴) 但爲初學菩薩(단위초학보살) 未入正位(미입정위)

그것은 실제로 물러난 것=實退가 아니고, 초학의 보살이 아직 정위에 들지도 못하고서

而懈怠者恐怖(이해태자공포) 令使勇猛故(령사용맹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를 위해, 두렵게 하여 하여금 용맹하게 정진하게 하려는 까닭이다.

又是菩薩一發心後(우시보살일발심후) 遠離怯弱(원리겁약)

또한 이 보살은 한번 발심한 후에는 겁약함을 멀리 여의고

畢竟不畏墮二乘地(필경불외타이승지)

필경에 이승의 지위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若聞無量無邊阿僧祇劫(약문무량무변아승기겁) 勤苦難行(근고난행)

만약 무량무변의 아승기겁토록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부지런히 고행=勤苦難行을 하여서, 

乃得涅槃(내득열반) 亦不怯弱(역불겁약)

이에 열반을 얻는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역시 겁약하지 않으니,  

以信知一切法(이신지일체법) 從本已來(종본이래) 自涅槃故(자열반고)

일체의 법은 본래부터 스스로 열반이라고 믿어 알기 때문이다.

[自涅槃-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을 의미하는 것, 열반은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清淨涅槃) ·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의 4종열반(四種涅槃)이 있음]

 

(3) 解行發心(해행발심) -십주와 십행이 원만하여 십회향에서 발심

解行發心者(해행발심자) 當知轉勝(당지전승)

해(解)와 행(行)의 발심=解行發心이라는 것은, (신성취발심보다) 더욱 수승하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하나니,

[해행발심(解行發心)은 십주(十住)에서 십행(十行)의 자리에 나아가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행을 닦는 발심]

以是菩薩從初正信已來(이시보살종초정신이래)

이 보살은 처음 바른 믿음=初正信을 따른 이래, 

於第一阿僧祇劫將欲滿故(어제일아승기겁장욕만고) 

제1의 아승기겁에서의 (수행이) 장차 원만하게 다 채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於眞如法中(어진여법중) 深解現前(심해현전) 所修離相(소수리상)

진여법 가운데서 깊은 이해가 앞에 나타나고, 닦은 바 수행이 그 모습=相을 여읜 것이다. 

以知法性體無慳貪故(이지법성체무간탐고) 隨順修行壇波羅蜜(수순수행단바라밀)

법성의 자체는 아끼거나 탐함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단바라밀=보시바라밀을 수행하며, 

以知法性無染(이지법성무염) 離五欲過故(리오욕과고) 隨順修行尸波羅蜜(수순수행시바라밀)

법성은 오염됨=染이 없어, 오욕의 허물에서 떠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시바라밀=지계바라밀을 수행하며,

[五欲(오욕) 재물욕(財物慾), 색욕(色慾),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欲), 명예욕(名譽欲). 계(戒)라 함은 악행(惡行)을 제어하는 것으로, 신구의(身口意) 삼업의 악행을 제어하고 십선(十善)을 행하는 것] 

以知法性無苦離瞋惱故(이지법성무고리진뇌고) 隨順修行羼提波羅蜜(수순수행찬제바라밀)

법성에는 괴로움=苦가 없어, 성냄의 번뇌=瞋惱를 떠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찬제바라밀=인욕바라밀을 수행하며,

以知法性無身心相(이지법성무신심상) 離懈怠故(리해태고)

법성에는 신심의 모습=상이 없어 게으름=懈怠를 떠나 있음을 알기 때문에, 

隨順修行毘黎耶波羅蜜(수순수행비리야바라밀)

수순하여 비리야바라밀=정진바라밀을 수행하며,

以知法性常定體無亂故(이지법성상정체무란고) 隨順修行禪波羅蜜(수순수행선바라밀)

법성은 항상 안정되어 그 자체=體에 산란함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선바라밀=선정바라밀을 수행하며,

以知法性體明離無明故(이지법성체명리무명고) 隨順修行般若波羅蜜(수순수행반야바라밀)

법성의 자체=體는 밝아 무명을 여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4) 證發心(증발심)- 진여를 증득하여, 그 증득한 진여의 지(智)를 바탕으로 일으키는 발심

  ① 發心(발심)의 因緣(인연)

證發心者(증발심자) 從淨心地(종정심지) 乃至菩薩究竟地(내지보살구경지)

증발심이라함은 정심지(환희지)로부터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법운지)에 이르기까지이니,

證何境界(증하경계) 所謂眞如(소위진여) 以依轉識(이의전식) 說爲境界(설위경계)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이른바 진여이다. 전식을 의지하는 것으로, 설하여 경계(경계상)로 삼는다.

而此證者(이차증자) 無有境界(무유경계) 唯眞如智(유진여지) 名爲法身(명위법신)

그러나 이러한 증득에는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진여의 지혜=眞如智일 뿐이므로 이름하여 법신이라고 한다.

[진여를 아는 것은, 아는 지(智)와 알게되는 진여와의 사이에 주객(主客)의 분열이 없는 전체적 직관(直觀)이며,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법신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 진여지(智)는 곧 진여이다. 진여는 이(理)이지만 이지(理智)는 합일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근본지(根本智),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이다. 진여(眞如)는 이(理)이면서 본성이 지(智)이고, 그것이 바로 범부의 본성이며, 동시에 불(佛)의 본성인 법신(法身)이다. 법신은 바로 지신(智身)이다.]

是菩薩於一念頃(시보살어일념경) 能至十方無餘世界(능지시방무여세계)

이 보살은 한 찰나=一念頃에 능히 시방의 남김이 없는 세계=無餘世界에 이르러

供養諸佛請轉法輪(공양제불청전법륜)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진리의 바퀴=法輪을 굴리시기를 청하며,

[진여를 인식의 대상으로 관(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바로 진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진여를 자기의 인식대상으로 관하는 것은 지전(地前)의 보살]

唯爲開導利益衆生(유위개도리익중생) 不依文字(불의문자)

오직 중생을 개도하여, 이익되게 하기 위할 뿐이며, 문자에 의존하지 않으며,

或示超地速成正覺(혹시초지속성정각) 以爲怯弱衆生故(이위겁약중생고)

혹은 경지=地를 초월하여 속히 정각을 이룸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니, 이는 겁이 많고 약한 중생을 위한 까닭이며,

說我於無量阿僧祇劫(설아어무량아승기겁) 當成佛道(당성불도)

혹은 아=我는 무량아승기겁에서 마땅히 불도를 성취하게 된다고 설하기도 하는 것은,

以爲懈慢衆生故(이위해만중생고) 能示如是無數方便(능시여시무수방편) 不可思議(불가사의) 

게으르고 교만한 중생을 위한 까닭이며, 능히 이와 같은 무수한 방편을 보이는 것이 불가사의하나,

而實菩薩種性根等(이실보살종성근등) 發心則等(발심즉등) 所證亦等(소증역등)

그러나 실은 보살의 종성은 뿌리(근기)가 같고, 발심 또한 같으며, 증득하는 바도 역시 같아서,

[種性根等(종성과 근기가 같음)- 성불할 근기가 같다는 말. 發心則等(발심이 같음)- 모든 보살이 성불하려는 발심을 하기 때문.所證亦等(증득한 것이 같음)은 모든 보살이 경계와 주관이 없음을 증득하였음을 말한다. ]

無有超過之法(무유초과지법) 以一切菩薩皆經三阿僧祇劫故(이일체보살개경삼아승기겁고)

초월해서 능가할 만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니, 일체의 보살은 모두 삼아승기겁을 경유했기 때문이다.

[無有超過之法(이를 넘어서는 법이 없음)은 보살들을 뛰어넘는 법이 없음]

但隨衆生世界不同(단수중생세계부동) 所見所聞(소견소문)

다만 중생의 세계는 한결같지 아니하여, 보는 바도, 듣는 바도, 

根欲性異故(근욕성리고) 示所行亦有差別(시소행역유차별)

근기=根와 바라는 바=欲과 성품=性이 다르기 때문에 수행하는 바를 나타내는 것도 역시 차별이 있는 것이다.

[진여와 그가 지닌 덕상과 작용에 의지하여 권지(權智)와 실지(實智)의 수행을 나타내었음. 증발심(證發心)의 보살의 이와 같은 방편은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를 증득한 보살이 나타내는 후득지(後得智)로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뛰어난 작용이다. 후득지는 근본지의 뒤에 일어나는 지혜라고 해서 후득지라고 한다.]

 

② 증발심(證發心)의 상(相) 

又是菩薩發心相者(우시보살발심상자) 有三種心微細之相(유삼종심미세지상)

또한 이 보살의 발심상에는 세 가지 마음의 미세한 상이 있으니, 무엇을 그 셋이라 하는가?

云何爲三(운하위삼) 一者眞心(일자진심) 無分別故(무분별고) 

첫째는 진심으로, 분별이 없기 때문이며, (眞心(진심) - 무분별지(無分別智))

二者方便心(이자방편심) 自然遍行利益衆生故(자연편행리익중생고)

두 번째는 방편심으로, 자연스럽게 두루 수행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며,(方便心(방편심) - 후득지(後得智))

三者業識心(삼자업식심) 微細起滅故(미세기멸고)

셋째는 업식심으로, 미세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起滅하기 때문이다.

[業識心(업식심) - 두 가지의 지혜에 의거하는 아리야식. 사실을 말한다면 또한 전식과 현식이 있는 것이지만 다만 지금은 근본의 세상(細相)만을 대략 든 것]

 

③ 증발심(證發心)의 공덕성만(功德成滿)의 상(相) 

又是菩薩功德成滿(우시보살공덕성만) 於色究竟處(어색구경처)

또한 이 보살의 수행공덕이 원만하게 성취되어, 색구경처에서

示一切世間最高大身(시일체세간최고대신)

모든 일체 세간의 가장 큰 몸을 나타내 보이나니,

謂以一念相應慧(위이일념상응혜) 無明頓盡(무명돈진) 名一切種智(명일체종지)

이른바 일념이 상응하는 지혜로써 무명이 단박에 다하는 것을 이름하여 일체종지라고 하니,

[일념상응혜(一念相應慧), 시각(始覺)의 마지막 찰나의 지혜가 본각(本覺) 진여의 근본지(根本智)와 합일되어, 심원(心源)을 각(覺)하는 지혜로서 여기서 망념이 모두 없어지는 것. 일체종지(一切種智), 일체제법의 본질[理]에 통달한 지혜로서 차별(差別)과 평등(平等)의 양자를 포함하는 지혜]

自然而有不思議業(자연이유불사의업) 能現十方(능현시방) 利益衆生(이익중생)

자연스럽게 불가사의한 업이 있어, 능히 시방에 나타나서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

 

④ 一切種智(일체종지)

問曰(문왈) 虛空無邊故世界無邊(허공무변고세계무변)

묻나니, 허공이 끝이 없기 때문에 세계가 끝이 없으며,

世界無邊故衆生無邊(세계무변고중생무변)

세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중생이 무변하며,

衆生無邊故心行差別亦復無邊(중생무변고심행차별역부무변)

중생이 끝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작용=心行의 차별도 또한 끝이 없다.

如是境界不可分齊(여시경계불가분제) 難知難解(난지난해) 若無明斷(약무명단)

이와 같이 경계는 한계 지음=分齋할 수 없으니, 難知=알기 어렵고 難解=이해하기 어려우니, 만약 무명이 끊어지면 

無有心想(무유심상) 云何能了名一切種智(운하능료명일체종지)

심상이 있지 아니할 것이나, 어떻게 능히 알아 일체종지라고 이름하는가.

[일체제법의 본질을 안다는 점에서는 근본지(根本智)이고, 동시에 일체의 차별상을 조견(照見)하는 점에서는 후득지(後得智)]

答曰(답왈) 一切境界本來一心(일체경계본래일심) 離於想念(리어상념)

답하여 말하나니, 일체경계는 본래 일심으로서, 상념을 떠나 있으나,

[一切境界本來一心 離於想念이란 도리를 세운 것이다. 모든 경계는 일심을 벗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며 끝이 없지 않기 때문에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닌 때문에 상념을 여의었다고 하는 것]

以衆生妄見境界故(이중생망견경계고) 心有分齊(심유분제) 以妄起想念(이망기상념)

중생이 망상으로 경계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한계=分齊가 있는 것이다.

[以衆生妄見境界故 心有分齊란 보는 바가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있음을 밝힌 것]

不稱法性故(불칭법성고) 不能決了(불능결료)

허망하게 상념을 일으킴으로써, 법성에 稱合=맞지 않기 때문에 결코 요해하지 못하지만,

諸佛如來(제불여래) 離於見想(리어견상) 無所不遍(무소불편) 心眞實故(심진실고)

제불여래는 견해의 모습=見想을 여의었기 때문에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마음은 진실한 것이기 때문에,

[離於見想 無所不遍- 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없음을 밝힌 것. 心眞實故 卽是諸法之性- 불심은 망상을 여의어 일심의 근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니, 망상을 여의었기 때문에 마음이 진실하다고 한 것. ]

卽是諸法之性(즉시제법지성) 自體顯照一切妄法(자체현조일체망법) 

바로 이것이 제법의 본성=性이며, 자체가 일체의 허망한 제법=妄法을 환하게 비추고,

[일체종지(一切種智)는 중생의 일체망법이 불심(佛心)에 비치어 나타나게된 것으로서 이를 자체현조(自體顯照)라 한다.]

有大智用(유대지용) 無量方便(무량방편) 隨諸衆生所應得解(수제중생소응득해)

대지의 작용과 무량한 방편이 있어서, 온갖 중생이 응하는 것을 따라, 이해=得解하는 바에 따라,

皆能開示種種法義(개능개시종종법의) 是故得名一切種智(시고득명일체종지)

모두 능히 여러 가지 법의 뜻=法義를 열어 나타내니, 그러므로 일체종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④ 世間(세간)에서 부처를 보지 못하는 이유
又問曰(우문왈) 若諸佛有自然業(약제불유자연업)

또 묻나니, 만약 모든 부처님에게 자연업이 있어서,

能現一切處利益衆生者(능현일체처리익중생자)
일체의 모든 곳에 나타나시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분이라면,
一切衆生(일체중생) 若見其身(약견기신) 若覩神變(약도신변) 若聞其說(약문기설) 

모든 중생이 그 몸을 보거나 신통변화를 보거나, 그 설법을 듣는다면

無不得利(무부득리) 云何世間多不能見(운하세간다불능견)

이익을 얻지 않음이 없을 것이나, 어찌하여 세간에서는 보지 못함이 많은가?
答曰(답왈) 諸佛如來(제불여래) 法身平等遍一切處(법신평등편일체처) 

답하나니,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지만, 

無有作意故(무유작의고) 而說自然(이설자연)
의도를 지음=作意가 없기 때문에 자연이라고 설하나니,

但依衆生心現(단의중생심현) 衆生心者猶如於鏡(중생심자유여어경)

다만 중생의 마음에 의지하여 나타낼 뿐이니, 중생의 마음이라는 것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鏡若有垢色像不現(경약유구색상불현) 如是衆生心(여시중생심)

만약 거울에 때가 끼어 있으면 색상이 나타나지 않으니, 이처럼 중생의 마음도 

若有垢法身不現故(약유구법신불현고)

만약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제불여래인 진여법신의 위대한 작용인 보신과 화신은 항상 여여하지만 단지 중생이 처한 상황에 밝음과 어두움이 있을 뿐임을 문답으로 밝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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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法我見(법아견) - 현상세계의 제법이 고정적 실체가 있다고 보는 그릇된 견해

法我見者(법아견자) 依二乘鈍根故(의이승둔근고)

법아견이라 함은 이승의 둔한 근기=鈍根을 의지하기 때문에

如來但爲說人無我(여래단위설인무아) 以說不究竟(이설불구경)

여래께서 단지 인무아만을 설하고 구경을 설하지 않아,

見有五陰生滅之法(견유오음생멸지법) 怖畏生死(포외생사)

오음이 생멸하는 법이 있다고 보고, 생사를 두려워하여 

[五陰法(오음법)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妄取涅槃(망취열반) 云何對治(운하대치) 

헛되게 열반을 취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가? 

以五陰法(이오음법) 自性不生(자성불생) 則無有滅(즉무유멸) 本來涅槃故(본래열반고)

오음법의 자성은 생겨남이 없는=不生이라면, 멸함도 없어서, 본래 열반이기 때문이다.

[불타는「오온(五蘊)은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라는 삼법인(三法印)을 설하고 인간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으로 분석하여, 거기에는 고정적 자아(自我)는 없는, 무상(無常)한 현상(現象)적 모습만을 설하고 궁극적 본체를 설하지 않아서 성문(聲聞) 연각(緣覺) 등 둔근(鈍根)의 이승(二乘)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영원한 불변의 진여(眞如)를 알지 못하고 오온(五蘊)의 인간은 실재로 생멸(生滅)하는 실체적 법이라고 그룻 생각하고, 생사(生死)의 고(苦)를 두려워하여, 이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생사(生死)의 세계에서 열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 밖에서 별도의 열반을 구하려하기 때문에 그 열반은 진실한 열반이 아니라 허망의 열반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③ 究竟(구경)에 妄執(망집)을 여읨을 밝힘

復次究竟離妄執者(부차구경리망집자)

또한 구경으로 허망한 집착=妄執을 여읜다는 것은,

當知染法淨法皆悉相待(당지염법정법개실상대) 無有自相可說(무유자상가설)

마땅히 알라, 염법과 정법 모두는 다 상대하는 것으로, 자상을 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染法淨法皆悉相待 : 염법과 정법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

是故一切法(시고일체법) 從本以來(종본이래) 非色非心(비색비심)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색법=色도 아니고, 심법=心도 아니며, 

非智非識(비지비식) 非有非無(비유비무) 畢竟不可說相(필경불가설상)

지혜=智도 아니고, 업식=業도 아니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필경에는 설명할 수 있는 상이 아니다.

而有言說者(이유언설자) 當知如來善巧方便(당지여래선교방변)

그러나 설명한 언어의 설명=言說이 있는 것은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여래께서 좋은 방편=善敎方便으로 

假以言說引導衆生(가이언설인도중생)

언설을 빌어 설명하여, 중생을 인도한 것이니,

其旨趣者(기지취자) 皆爲離念歸於眞如(개위리념귀어진여)

그 종지의 취지는 모든 허망한 생각=망념을 떠나 진여로 돌아가게 함=歸眞如하기 위함이니 

以念一切法(이념일체법) 令心生滅(영심생멸) 不入實智故(불입실지고)

일체법을 생각=念함으로써 마음이 생멸하여, 진실한 지혜=實智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언설로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설로서 표현하자면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상대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4) 分別發趣道相(분별발취도상)- 해석분(解析分)의 마지막 절(節)로서, 일체 제불이 증득한 진여의 이치를, 일체 보살도 발심수행하여 그것을 이루고자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설하는 부분

  ⑴ 總說(총설)

分別發趣道相者(분별발취도상자) 謂一切諸佛所證之道(위일체제불소증지도)

분별발취도상이라 함은, 이른바 일체 제불이 증득하신 도이며,

[分別發趣道相 - 도(道)란 부처님께서 증득한 경지를 말하며, 그 경지로 나아가는 모습을 나눈다는 뜻. 수행의 방법은 본래 信· 解· 行· 證, 네 가지]

一切菩薩發心修行趣向義故(일체보살발심수행취향의고)

일체보살이 발심하고 수행하여, 취향하는 뜻이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다.

略說發心(약설발심) 有三種(유삼종) 云何爲三(운하위삼)

발심(발보리심)을 간략히 말하면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그 셋이라 하는가?

一者信成就發心(일자신성취발심) 二者解行發心(이자해행발심) 三者證發心(삼자증발심)

첫째는 신성취발심이요, 둘째는 해행발심이요, 셋째는 증발심이다.

 

 ⑵ 信成就發心(신성취발심)-신심(信心)을 성취완성하고 그 신심을 바탕으로 하여 성불(成佛)을 향한 결의를 일으키는 것

① 發心(발심)의 因緣(인연)

信成就發心者(신성취발심자) 依何等人(의하등인)

신성취발심이라 함은, 어떤 사람에 의지하여, 

[신심(信心)은 본래 심징정(心澄淨)이라 하여  '마음을 정화(淨化)시키는 힘']

修何等行(수하등행) 得信成就(득신성취) 堪能發心(감능발심)

어떻게 수행을 닦아야만, 믿음=信의 성취를 증득하여 능히 발심을 감당할 수 있는가?

(어떻게 믿음을 가지고 발심하게 할 수 있는가?)

[불교에서의 신(信)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근본의 진리를 바탕으로 한 이성(理性)적 믿음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네 가지 믿음(四信)으로 ① 마음의 근본인 진여의 법을 믿는 것, ② 불(佛)에는 무량한 공덕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 ③ 법(法)에는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 ④ 승(僧)은 능히 올바른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수행을 행한다고 믿는 것]

所謂依不定聚衆生(소위의부정취중생) 有熏習善根力故(유훈습선근력고)

이른바 부정취의 중생에 의하는 것이니, 과거에 훈습한 선근의 힘이 있기 때문에,

信業果報(신업과보) 能起十善(능기십선) 厭生死苦(염생사고)

업의 과보를 믿고, 능히 십선을 일으켜, 생사의 고를 싫어하고 

欲求無上菩提(욕구무상보리) 得値諸佛(득치제불) 親承供養(친승공양)

위없는 깨달음=無上菩提을 구하고자, 모든 부처님을 만나 친히 받들어 공양하고 

修行信心(수행신심) 經一萬劫(경일만겁) 信心成就故(신심성취고)

신심을 닦아 행하니, 일만 겁을 지나야 신심을 성취하기 때문이니,

諸佛菩薩敎令發心(제불보살교령발심) 或以大悲故(혹이대비고) 能自發心(능자발심) 

제불과 보살이 가르쳐 발심케하고, 혹은 대비심을 가진 때문에 능히 스스로 발심하기도 하며,

或因正法欲滅(혹인정법욕멸) 以護法因緣(이호법인연) 能自發心(능자발심)

혹은 정법이 소멸하려 함=因으로 인해서 정법을 보호=護法하려는 인연 때문에 능히 스스로 발심하기도 한다.

如是信心成就得發心者(여시신심성취득발심자) 入正定聚(입정정취)畢竟不退(필경불퇴) 

이와 같은 신심을 성취하여 발심한 사람은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 필경에 물러나지 않으니,

名住如來種中(명주여래종중) 正因相應(정인상응)

이름하여 여래종 가운데 안주함이라고 하나니, 정인(진여)이 서로 호응=相應함이라고 한다.

[삼취(三聚)- 중생들을 수행의 정도에 따라 나눈 사정취(邪定聚) 부정취(不定聚) 정정취(正定聚)의 세 부류

정인(正因)- 누구에게나 내재되어 있는 진여]

若有衆生(약유중생) 善根微少(선근미소) 久遠已來(구원이래) 煩惱深厚(번뇌심후)

만약 어떤 중생이 선근이 작고 적어=微少하여, 오랜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번뇌가 깊고 두터워서,

雖値於佛(수치어불) 亦得供養(역득공양) 然起人天種子(연기인천종자)

비록 부처를 만나고 또한 공양을 올리더라도,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날 종자=人天種子를 일으키거나 

或起二乘種子(혹기이승종자)

혹은 이승의 종자를 일으키기도 하니,

設有求大乘者(설유구대승자) 根則不定(근즉불정) 若進若退(약진약퇴)

설사 대승을 구하는 자가 있다 하여도, 근기가 일정하지 않아, 혹 정진하기도 하고 혹 퇴실하기도 하며,

或有供養諸佛(혹유공양제불) 未經一萬劫(미경일만겁) 於中遇緣(어중우연)

혹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이 있으되, 아직 일만 겁을 지나지 않아, 그 중간에 연=外緣을 만나면 

亦有發心(역유발심) 所謂見佛色相(소위견불색상) 而發其心(이발기심) 

또한 발심하기도 하나니, 이른바 부처님의 색상을 보고 그 마음을 발하기도 하며, 

或因供養衆僧(혹인공양중승) 而發其心(이발기심)

혹은 여러 스님들=衆僧께 공양함으로 인해서 그 마음을 발하기도 하며, 

或因二乘之人敎令發心(혹인이승지인교령발심) 或學他發心(혹학타발심)

혹은 이승인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마음을 발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사람에게 배워서 마음을 발하기도 하나니,

如是等發心(여시등발심) 悉皆不定(실개불정)

이와 같은 등등의 발심은 전혀 모두가 일정하지 않기에,

遇惡因緣(우악인연) 或便退失(혹편퇴실) 墮二乘地(타이승지)

나쁜 인연을 만나면 혹 다시 물러서고 잃음=退失하여 이승의 지위로 떨어진다.

 

②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의 상(相) - 직심(直心), 심심(深心), 대비심(大悲心)

復次信成就發心者(부차신성취발심자) 發何等心(발하등심)

다시, 신성취발심이란 어떤 마음을 발하는 것인가?

略說有三種(략설유삼종) 云何爲三(운하위삼).

간략하게 말하면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세 가지인가?

一者直心(일자직심) 正念眞如法故(정념진여법고)

첫째, 직심이니, 진여법을 올바로 생각하는=正念이기 때문이며,

[직심(直心)의 직(直)은 불곡(不曲), 구부러지지 않음이니 제법의 본성을 그대로 안다는 뜻= 자리이타(自利利他)]

二者深心(이자심심) 樂集一切諸善行故(낙집일체제선행고)

둘째, 심심이니, 일체 모든 선행을 즐겨 모으기 때문이며,

[심심(深心)의 심(深)은 궁원(窮源) 즉, 마음의 근원을 드러내는 것으로 마음의 근원에는 선(善)만이 있으므로 선행으로 그러한 마음을 드러낸다는 뜻=자리(自利)]

三者大悲心(삼자대비심) 欲拔一切衆生苦故(욕발일체중생고고)

셋째, 대비심이니, 일체중생을 고통에서 구해 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대비심(大悲心)은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이타(利他)의 마음] 

 

問曰(문왈) 上說法界一相佛體無二(상설법계일상불체무이)

묻나니, 위에서 법계는 하나의 모습=一相이며, 불의 본체=佛體는 둘이 아니라고 설명하였으나,

何故不唯念眞如(하고불유념진여) 復假求學諸善之行(부가구학제선지행)

무엇 때문에 오직 진여만을 생각=念하지 않고, 다시 모든 선행=諸善의 행을 구하고 배움을 빌려야 하는가?

答曰(답왈) 譬如大摩尼寶體性明淨(비여대마니보체성명정) 而有鑛穢之垢(이유광예지구) 

답하나니, 비유하면 대마니 보주의 보배의 자체의 성품=體性은 밝고 깨끗하지만, 그러나 광석의 더러운 때=鑛穢가 있는 것과 같다.

若人雖念寶性(약인수념보성) 不以方便種種磨治(불이방편종종마치) 終無得淨(종무득정)

만약 어떤 사람이 비록 보배의 성품을 생각할지라도, 갖가지 방편으로 갈고 닦지 않으면 끝내 맑음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이,

[若人雖念寶性은 위의 직심(直心)을 말한다. ]

如是衆生眞如之法體性空淨(여시중생진여지법체성공정)

이처럼 중생의 진여의 법의 자체성품은 공적하고 청정=空淨하지만 

而有無量煩惱染垢(이유무량번뇌염구) 若人雖念眞如(약인수념진여) 

한량없는 번뇌에 물든 때=煩惱染垢가 있어서, 만약 어떤 사람이 비록 진여를 생각한다 해도 

不以方便種種熏修(불이방편종종훈수) 亦無得淨(역무득정)

갖가지 방편으로써 훈습하고 수행하지 않는다면, 역시 청정함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以垢無量遍一切法故(이구무량편일체법고) 修一切善行(수일체선행) 以爲對治(이위대치)

때가 한량이 없어서 일체법에 두루하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선행을 닦아 이로써 대치하여야 하나니, 

若人修行一切善法(약인수행일체선법) 自然歸順眞如法故(자연귀순진여법고)

만약 어떤 사람이 일체의 선법을 닦아 행하면 자연히 진여의 법으로 돌아가 따르는=歸順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직심(直心)을 바탕으로 일체의 선법을 수행한다면, 심심(深心)과 대비심(大悲心)이 일어나, 밖으로는 온갖 염법(染法)이 제거되고, 안으로는 진여의 정덕에 자연히 귀순하게 되는, 즉 심심(深心)에 의하여 크고 작은 선행으로 자리행(自利行)을 하고, 대비심(大悲心)에 의하여 중생구제의 이타행(利他行)을 구한다면 번뇌의 때는 씻기어 직심(直心)에 의하여 진여에 도달된다는 것]

 

③ 眞如(진여)에 歸順(귀순)하는 4가지 方便(방편)

略說方便(약설방편) 有四種(유사종) 云何爲四(운하위사)

간략히 방편을 말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一者(일자) 行根本方便(행근본방편) 謂觀一切法自性無生(위관일체법자성무생)

첫째, 수행의 근본방편=行根本方便이니, 이른바 일체법이 자성이 남이 없음=無生임을 관하여,

離於妄見(리어망견) 不住生死(부주생사) 

망견을 떠나 생사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며, 

觀一切法因緣和合(관일체법인연화합) 業果不失(업과불실)

일체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업과 과=業果를 잃지 않음을 관찰하여

起於大悲修諸福德(기어대비수제복덕) 攝化衆生(섭화중생) 不住涅槃(부주열반)

대비심을 일으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들을 포섭=攝化하고 교화하며 열반에 안주하지 않는 것을 말하나니,

以隨順法性無住故(이수순법성무주고)

이는 법성의 머묾이 없음=無住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성은 진여(眞如)를 의미하는 것]

二者(이자) 能止方便(능지방편) 謂慙愧悔過(위참괴회과) 能止一切惡法(능지일체악법)

두 번째는 중지할 수 있는 방편=能止方便(자기를 이롭게 하는 방편)이니, 이른바 자기에게 부끄러워하는=참(慙)하고, 남에게 부끄러워하는=괴(愧)하며, 과거를 참회하는=悔過하며, 일체의 악법을 중지하여

[능지(能止)- 자발적으로 악(惡)을 끊고 버리는 것, 악법- 선법에 반하는 것으로 진여로부터 멀어지는 일체 행위, 참괴(慙 愧)는 악법을 끊는 것, 회과(悔過)는 악법을 증장시키지 않는 것]

不令增長(불령증장) 以隨順法性離諸過故(이수순법성리제과고)

더 增長하지 않게 하며, 법성에 수순하여 모든 허물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三者(삼자) 發起善根增長方便(발기선근증장방편)

셋째, 선근을 발기하여 증장하는 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이니, 

謂勤供養禮三寶(위근공양예삼보) 讚歎隨喜(찬탄수희) 勸請諸佛(권청제불)

이른바 불법승=삼보를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찬탄하고 따라서 기뻐하는=隨喜하며, 권하고 청하는=勸請으로,

以愛敬三寶(이애경삼보) 淳厚心故(순후심고) 信得增長(신득증장)

삼보를 사랑하고 공경=愛敬하는 순후한 마음 때문에 믿음이 증장될 수 있으며,

乃能志求無上之道(내능지구무상지도) 又因佛法僧力所護故(우인불법승력소호고) 

나아가 능히 위없는 진리=無上道를 구할 수 있으며, 또한 불법승의 힘으로 보호받는=因 때문에,

[불법승 삼보에 대한 순후심(淳厚心)은 내부로부터의 진여의 훈습력이 작용하고 외부로부터는 삼보의 외훈(外熏)이 작용하여 악을 끊고 선을 행하겠다는 마음이 항상 일고 있어, 악의 업장이 소멸한다는 것]

能消業障(능소업장) 善根不退(선근불퇴) 以隨順法性(이수순법성) 離痴障故(리치장고)

능히 악업의 장애=業障을 소멸하고, 선근에서 물러나지 않아, 법성을 수순하여 어리석음의 장애=離痴를 여의기 때문이다.

[발기선근증장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은 선(善)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즉 선근(善根)의 힘을 강화증대(强化增大)시키는 방편]

四者(사자) 大願平等方便(대원평등방편) 所謂發願(소위발원) 盡於未來(진어미래)

넷째 대원이 평등한 방편=大願平等方便이니, 이른바 발원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化度一切衆生(화도일체중생) 使無有餘(사무유여) 皆令究竟無餘涅槃(개령구경무여열반)

일체 중생을 교화, 제도=化度하여, 남김없이 모두가 구경에 무여의 열반에 들게 하려는 것이니,

以隨順法性(이수순법성) 無斷絶故(무단절고) 法性廣大(법성광대) 遍一切衆生(편일체중생)

법성은 단절이 없다는 것에 수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법성은 광대하여 일체 중생에 두루 미치고,

平等無二(평등무이) 不念彼此(불념피차) 究竟寂滅故(구경적멸고)

평등하여 둘이 없으므로 남과 나=彼此를 생각하지 않고, 구경에 적멸하기 때문이다.

[진여는 평등무이(無二)한 것이므로 구경적멸(究竟寂滅)이어서, 무여열반 바로 그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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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用大(용대) - 본행(本行)과 본원(本願)과 방편(方便), 진여의 작용

 ㄱ. 用(용)의 原理(원리)

復次眞如用者(부차진여용자) 所謂諸佛如來(소위제불여래) 本在因地(본재인지)

다시 다음에 진여의 작용이란 이른바 제불 여래께서 본래 수행하는 지위=因地(보살 재위시)에 계시면서

發大慈悲(발대자비) 修諸波羅蜜(수제바라밀) 攝化衆生(섭화중생)

대자비심을 발하시어 모든 바라밀을 닦아 중생을 포섭하여 교화하시고, 

[諸佛如來 ~ 攝化衆生이라 한 것은 본행(本行)을 든 것]

立大誓願(입대서원) 盡欲度脫等衆生界(진욕도탈등중생계)

대서원을 세워 중생계를 평등하게 다 제도하여 해탈시키고자 하시고, 

亦不限劫數盡於未來(역불한겁수진어미래)

또한 한정 없는 겁수로 미래를 다하며, 

[立大誓願 ~ 盡於未來이란 본원(本願)을 든 것]

以取一切衆生如己身故(이취일체중생여기신고) 而不取衆生相(이불취중생상)

일체의 중생을 자기 몸과 같이 취하기 때문이나, 그러나 중생의 모습=衆生相을 취하지는 않음이다.

 

此以何義(차이하의)

이것이 무슨 뜻인가? 

謂如實知一切衆生及與己身(위여실지일체중생급여기신)

이른바 여실히 일체중생과 더불어 자기 몸이 

眞如平等(진여평등) 無別異故(무별이고)

진여로 평등하여 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중생은 미혹에 빠져 있을 뿐 그 성품은 다 평등하다. 이러한 진여평등(眞如平等)을 여실히 아는 여실지(如實知)가 '기신론'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

 

ㄴ. 大方便智(대방편지)와 法身(법신)의 작용

以有如是大方便智(이유여시대방편지) 除滅無明(제멸무명)

이와 같은 대방편지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제거하여 소멸하고 

[以有如是大方便智는 전인(前因)을 든 것. 除滅無明 見本法身은 자리(自利)의 果. 自然而 이하는 작용의 모습을 나타낸 것]

見本法身(견본법신) 自然而有不思議業(자연이유불사의업) 種種之用(종종지용)

본래의 법신을 보아, 저절로 자연스럽게 불가사의한 업의 갖가지 작용이 있으니,

卽與眞如等(즉여진여등) 遍一切處(편일체처) 又亦無有用相可得(우역무유용상가득)

곧 진여와 더불어 평등하여 일체처에 두루 미치되, 또한 역시 얻을 수 있는 작용의 모습=用相도 없다. 

何以故(하이고) 謂諸佛如來(위제불여래) 唯是法身智相之身(유시법신지상지신)

왜냐하면 이른바 제불여래는 오직 법신지상의 몸일 뿐이며,

第一義諦(제일의제) 無有世諦境界(무유세제경계) 離於施作(이어시작)

제일의제(진제(眞諦), 진여 본체의 진리)로서 세간=世諦의 경계가 없으며, 베풀고 만드는 것을 떠난 것이니, 

但隨衆生見聞(단수중생견문) 得益故說爲用(득익고설위용)

다만 중생이 듣고 봄에 따라 이익을 얻게 할 뿐이기 때문에 용이라고 설하는 것이다.(이와 같은 갖가지 작용이 있으므로 용대(用大)라고 한다.)

[특정한 불타의 중생구제행만이 진여의 용(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용대(用大)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진여의 용대는 법신(法身)으로서 행자(行者)의 내부, 외부에서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구하는 행자 자신 속에 불타의 용대(用大)가 내포되어 있어 바로 수행자 자신이 용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서 별도의 특정한 불타의 용대에 의하여 구제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때 불타의 응신(應身)은 바로 자기자신이 된다. 법신(法身)은 평등한 진여 그 자체이고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은 방편신(方便身)이다.]

 

ㄷ. 用(용)의 二種(이종) - 應身(응신)과 報身(보신)

此用有二種(차용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작용=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일자) 依分別事識(의분별사식) 凡夫二乘心所見者(범부이승심소견자)

첫째는 분별사식을 의지하여 범부와 이승의 마음에 보이는 것을 

[依分別事識이란 범부와 이승은 오직 식(識)뿐임을 알지 못하고 바깥의 경계에 있다고 계탁하는 것, 범부의 일상적 판단과 인식]

名爲應身(명위응신) 以不知轉識現故(이불지전식현고)

이름하여 응신이라 하니, 전식의 나타냄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응신(應身)은 주관(主觀)적 전식(轉識)이 보는 객관(客觀)적 현식(現識)]

見從外來(견종외래) 取色分齊(취색분제) 不能盡知故(불능진지고)

밖으로부터 온 것이라 보고, 색상의 한계=色分齊를 취하지만, 능히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色分齊 : 보이는 차별상의 내용이나 정도. 즉 불신(佛身)의 크기를 정하고, 32상(相) 80종호(種好) 등과 같은 불타의 상호(相好)를 주관적으로 결정하는 것]

二者(이자) 依於業識(의어업식) 謂諸菩薩從初發意(위제보살종초발의)

두 번째는 업식을 의지한 것으로, 이른바 모든 보살이 처음 뜻을 발함=初發意로부터 

乃至菩薩究竟地心所見者(내지보살구경지심소견자) 名爲報身(명위보신)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보이는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라고 하며,

[업식(業識)이 보는 불신, 즉 보신(報身) 주객의 대립이 사라진 업식(業識)에 반영되는 불타, 보살이 깊은 심층(心層)에서 불신을 보는 것]

身有無量色(신유무량색) 色有無量相(색유무량상) 相有無量好(상유무량호)

몸에는 한량없는 색신이 있고, 색신에는 한량없는 모습(형상)이 있으며, 모습(형상)에는 한량없는 상효=好가 있다.

[相은 몸에 특별히 잘생긴 것을 말하고, 好는 相 중에 자세한 모습]

所住依果(소주의과) 亦有無量種種莊嚴(역유무량종종장엄)

머무는 의보의 과보도 또한 한량없는 갖가지 장엄이 있으며,

隨所示現(수소시현) 卽無有邊(즉무유변) 不可窮盡(불가궁진) 離分齊相(리분제상)

나타나는 바에 따라 곧 끝이 없어, 궁극에 다할 수가 없고, 한정된 모습=分齊相을 여의었기에

隨其所應(수기소응) 常能住持(상능주지) 不毁不失(불훼불실)

그 상응함을 따라 항상 주지하면서 훼손하지도 않고, 퇴실하지도 않는다.

如是功德(여시공덕) 皆因諸波羅蜜等無漏行熏(개인제바라밀등무루행훈)

이와 같은 공덕은 다 모든 바라밀 등의 무루한 수행의 훈습에 의한 것이며, 

及不思議熏之所成就(급불사의훈지소성취) 具足無量樂相故(구족무량락상고) 說爲報(설위보)

불가사의한 훈습으로 인해서 성취한 것으로, 한량없는 안락한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에 설하여 보신이라고 한다.

又爲凡夫所見者(우위범부소견자) 是其麤色(시기추색) 隨於六道(수어륙도)

또 범부에게 보여지는 이것은 바로 그 거친 현색(대상)으로 육도를 따라서

各見不同(각견불동) 種種異類(종종리류) 非受樂相(비수락상) 故說爲應(고설위응)

각각 보는 것이 동일하지 않아, 갖가지 다른 무리가 안락한 모습을 수용하지 못하므로 설하여 응신이라고 한다.

[응신(應身)은 범부, 이승(二乘)의 전식(轉識)에 의하여 분별사식(分別事識)으로 유한(有限)한 불타를 보는 것, 보신(報身)은 보살(菩薩)이 그들의 수행의 결과로서 업식(業識)에 의하여, 과거의 순수 경험적 인식으로 보는 무한(無限)한 불타. '기신론'이 설하는 응신(應身)과 보신(報身)은 중생의 망심(妄心)에 나타나는 불타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에 대응하는 객관적 실재(實在)로서의 응신과 보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객관적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은 진여(眞如)의 용대(用大) 뿐이며 그것은 상이 없는 무상(無相)일 따름이다.]

 

③ 다시 밝히는 응신(應身)과 보신(報身) 

復次初發意菩薩等所見者(부차초발의보살등소견자)

다시 다음에 초발의보살 등이 보는 것은 

以深信眞如法故(이심신진여법고) 少分而見(소분이견)

진여법을 깊이 믿기 때문에 약간의 분야를 보아,

[以深信眞如法故 少分而見- 십해 중에 인공문(人空門)에 의하여 진여의 이치를 보는 것과 같다. 비슷하게 안 것이므로 少分而見이라 하였다.]

知彼色相莊嚴等事(지피색상장엄등사) 無來無去離於分齊(무래무거리어분제)

그 보신의 색상과 장엄 등의 현상이 옴도 없고, 감도 없어, 분제를 여의어, 

[그들이 보는 보신은 신체의 색상이나 장엄 등 모든 것들이 상주(常住)하고 있는 진여를 바탕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無來無去, 또한 보신의 색신(色身)은 그 크기에 있어서 한이 없는 것이므로 '離於分齊 ]

唯依心現不離眞如(유의심현불리진여)

오직 마음의 분별에 의지하여 나타났을 뿐, 진여를 여의지 않았음을 안다.

然此菩薩猶自分別(연차보살유자분별) 以未入法身位故(이미입법신위고)

그러나 이 보살은 오히려 스스로 분별할 뿐이지, 아직은 법신의 계위(지위)에는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보신을 보는 것이지만 그 보신(報身)은 지상(地上)의 보살이 보는 보신과는 뒤떨어진다.]

若得淨心(약득정심) 所見微妙(소견미묘) 其用轉勝(기용전승)

만약 정심지를 체득하며, 보는 바가 미묘하고, 그 작용은 더욱 수승해지며,

乃至菩薩地盡見之究竟(내지보살지진견지구경)

나아가 보살지가 다하여 보는 것이 구경이다.

若離業識則無見相(약리업식즉무견상) 以諸佛法身(이제불법신)

만약 업식을 여의면, 볼 만한 모습이란 없는 것이니, 

無有彼此色相迭相見故(무유피차색상질상견고)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이런 저런 현색의 모습으로 번갈아 드는 모습=迭相함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 보신을 본다는 것은 마침내 성불(成佛)하게 된 것을 의미하므로 업식(業識)이 완전히 소멸되어 진체(眞體)에 귀입(歸入)한 것이어서 전식(轉識)과 현식(現識) 또한 소멸된다. 그렇게 되면 보는 주관도 보이는 객관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므로 견상(見相)이란 있을 수 없다.]

 

問曰(문왈) 若諸佛法身離於色相者(약제불법신리어색상자)

묻나니, 만약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색상을 떠난 것이라면, 

云何能現色相(운하능현색상)

어떻게 색상을 나타낼 수 있는가?

答曰(답왈) 卽此法身是色體故(즉차법신시색체고) 能現於色(능현어색)

답하나니, 이 법신이 곧 색상의 본체=色體이기 때문에 능히 색상=色을 나타낼 수 있다.

所謂從本已來(소위종본이래) 色心不二(색심불이)

이른바 본래부터 색과 심이 둘이 아니며, 

[색심불이(色心不二)- 불이(不二)는 둘을 인정하면서, 그 둘을 초월하는 것. 단순한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와 같이 법신(法身)은 색상을 떠나 있으면서, 보신(報身) 응신(應身)의 색상을 나타내는 이유는 법신 그 자체가 보신, 응신의 본체이고 본래부터 색심불이(色心不二)이기 때문이다. 유심(唯心)과도 같은 뜻]

以色性卽智故色體無形(이색성즉지고색체무형) 說名智身(설명지신)

색의 본성(자성)이 곧 지혜=智이기 때문에, 색상의 본체=色體는 형상이 없는=無形임을 설하여 지신이라 이름한다.

[色體無形 說名智身- 보응이신(報應二身)이 나타나는 근거가 바로 지신(智身)이라는 것을 의미]

智性卽色故(이지성즉색고) 說名法身遍一切處(설명법신편일체처)

지의 성질=智性이 바로 색인 까닭에, 설하여 법신이 모든 곳=一切處에 두루 한다고 이름한다.

[진여(眞如)의 본성은 지(智)이고, 이 지(智)가 바로 색의 본성이므로 '색성(色性)이 곧 지(智)'라고 설하는 것]

所現之色無有分齊(소현지색무유분제) 隨心能示十方世界(수심능시시방세계)

나타내는 바 색상=色은 분제가 없기에,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능히 시방세계의 

無量菩薩(무량보살) 無量報身(무량보신) 無量莊嚴(무량장엄)

무량한 보살과, 무량한 보신, 무량한 장엄을 나타내고, 

各各差別(각각차별) 皆無分齊(개무분제) 而不相妨(이불상방)

각각의 차별이 다 분제가 없으며, 더욱이 서로가 방해하지 않는다.

此非心識分別能知(차비심식분별능지) 以眞如自在用義故(이진여자재용의고)

이는 심식의 분별로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여의 자재한 작용=用의 뜻이기 때문이다.

 

④ 생멸문(生滅門)에서 진여문(眞如門)으로 귀입(歸入)

復次顯示從生滅門卽入眞如門(부차현시종생멸문즉입진여문)

다시 다음에 생멸문으로부터 곧 진여문에 들어감을 나타내 보이나니,

所謂推求五陰(소위추구오음) 色之與心(색지여심)

이른바 오음(色受想行識)을 추구해 보면, 색 그것은 심과 더불어 존재하며,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오음이며, 이중 색(色)이외의 수상행식(受想行識)을 마음으로 본 것]

六塵境界畢竟無念(륙진경계필경무념) 以心無形相(이심무형상)

육진의 경계에는 필경 생각이 없는=無念이며, 마음에도 형상이 없으니, 

十方求之(시방구지) 終不可得(종불가득)

시방으로 구해도 끝내 얻을 수 없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경계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므로 마음을 떠나 따로 생각할 만한 독립된 형상이란 없다]

如人迷故(여인미고) 謂東爲西(위동위서) 方實不轉(방실부전)

마치 사람이 미혹한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나, 방향은 실제로 바뀌지 않는 것과 같이,

衆生亦爾(중생역이) 無明迷故謂心爲念(무명미고위심위념) 心實不動(심실부동)

중생 또한 그러하여, 무명의 미혹 때문에 마음=心을 일러 염이라고 하나 마음=心은 실제로 움직이지 않으니,

若能觀察(약능관찰) 知心無念(지심무념) 卽得隨順入眞如門故(즉득수순입진여문고)

만약 능히 관찰하여 심에 념이 없음=無念임을 알면, 곧 수순하여 진여문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이 점을 깊이 관찰하여, 항상 동요하는 망념(妄念)의 깊은 곳에, 동요하지 않는 부동(不動)의 심성(心性)을 발견하고, 마음은 곧 무념(無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생멸문(生滅門)을 떠나 진여문(眞如門)에 들어갈 수 있다.]

[이상으로 현시정의(顯示正義)에 있어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에 대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제 2 절 對治邪執(대치사집) - 그릇된 견해와 고집을 정론(正論)으로 치유하는 것

  (1) 二種 邪執(이종 사집)

對治邪執(대치사집) 一切邪執(일체사집) 皆依我見(개의아견)

삿된 집착을 대치하는 것은, 일체 삿된 집착 모두가 아견을 의지하므로, 

[我에 대한 견해가 아견(我見), 見이란 정견(正見)을 벗어난 잘못된 견해,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을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널리 해석하여 '고정적으로 보는 견해'] 

若離於我(약리어아) 則無邪執(즉무사집)

만약 '나'라는 아견을 여읜다면, 삿된 집착이 없을 것이다.

是我見有二種(시아견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러한 아견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두가지인가? 

一者人我見(일자인아견) 二者法我見(이자법아견)

첫째는 인아견이고 둘째는 법아견이다.

[인아(人我)란 개별적인 인간의 실체를 말한 것이며, 법아(法我)는 모든 사물의 실체를 말한다.

인아견(人我見)은 일반적으로 자아(自我)를 고정적 불변의 실체로 보는 것, 법아견(法我見)은 모든 현상을 구성하는 요소[法]를 또한 고정적 실체로 보는 견해]

 

① 人我見(인아견)

人我見者(인아견자) 依諸凡夫(의제범부) 說有五種(설유오종) 云何爲五(운하위오)

인아견이란 모든 범부들에 따라 설명하면, 다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다섯 가지인가?

 

一者(일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如來法身畢竟寂寞(여래법신필경적막)

첫째, 경전=修多羅에서, '여래의 법신은 궁극적으로 적막하여 

猶如虛空(유여허공) 以不知爲破著故(이불지위파착고) 卽謂虛空是如來性(즉위허공시여래성)

허공과 같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그것이 집착을 파하기 위한 것임을 모르고, 허공이 곧 여래의 본성(성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如來法身畢竟寂寞 猶如虛空- 여래의 본체를 설한 것인데, 범부는 현상계에 모습을 나타낸 불타의 본성을 상(相)으로 보고, 육신(肉身)이나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그릇된 견해]

云何對治(운하대치) 明虛空相是其妄法(명허공상시기망법) 體無不實(체무불실)

어떻게 다스려 대치해야 하는가? 허공의 모습=虛空相 또한 허망한 것=妄法이어서, 자체(본체)=體가 없고 실제=實이 아니며, 

以對色故有(이대색고유) 是可見相(시가견상) 令心生滅(영심생멸)

그것이 색에 대비하기 때문에 있다고 한것을 밝히며, 이것은 역시 볼 수 있는 모습=相이며,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하게 하지만,

以一切色法本來是心(이일체색법본래시심) 實無外色(실무외색)

일체의 색법은 본래 마음이기 때문에 실제로 밖의 색=外色은 없는 것이다. 

[범부가 허공이라고 눈으로 보는 것은 색(色)이므로 범부가 그렇게 인식하는 색(色)은 범부의 분별사식(分別事識)에 의한 것]

若無色者(약무색자) 則無虛空之相(즉무허공지상)

만약 색이 없는 것이라면 곧 허공의 모습=相 또한 없는 것이니,

所謂一切境界(소위일체경계) 唯心妄起故有(유심망기고유)

이른바 일체의 경계는 오직 마음으로서, 허망하게 망을 일으키기 때문에 있는 것이며, 

若心離於妄動(약심리어망동) 則一切境界滅(즉일체경계멸)

만약 마음이 헛된 움직임=妄動을 떠나면, 일체의 경계도 곧 사라지고(멸하여), 

唯一眞心無所不遍(유일진심무소불편)

오직 하나의 참된 마음=唯一眞心만이 두루 하지 않음이 없는 것으로,

此謂如來廣大性(차위여래광대성) 智究竟之義(지구경지의)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광대한 성품과 지혜=廣大性智의 궁극적 의미이며,

非如虛空相故(비여허공상고)

허공의 모습=虛空相과 같지 않다고 하는 까닭이다.

[如虛空- 여래(如來)의 광대한 본각(本覺)의 지혜이고 궁극적인 여래의 성품인 것이다. 따라서 如虛空'은 현상의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인식되는 허공이 아니라 본체의 세계에서 여래의 광대한 지혜가 일체처에 두루한 여실공(如實空) 여실불공(如實不空)을 의미하는 것]

二者(이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世間諸法畢竟體空(세간제법필경체공) 

둘째는 경=修多羅에서 '세간의 모든 법=諸法은 필경 본체가 공한=體空이며, 

乃至涅槃眞如之法(내지열반진여지법) 亦畢竟空(역필경공)

나아가 열반의 진여의 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필경에 공적하고, 

從本已來(종본이래) 自空離一切相(자공리일체상)

본래부터 스스로 공적=自空하여 일체의 색상을 여의었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以不知爲破著故(이불지위파착고) 卽謂眞如涅槃之性(즉위진여열반지성)

그것은 집착을 타파하기 위함인 줄 모르기 때문에, 곧 진여열반의 본성은 

唯是其空(유시기공) 云何對治(운하대치) 

오직 공적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니,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明眞如法身自體不空(명진여법신자체불공) 具足無量性功德故(구족무량성공덕고)

진여의 법신은 자체가 공적하지 않은=不空임을 밝히나니, 한량없는 본성의 공덕=性功德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唯是其空 이렇게 생각하면 절대무(絶對無)에 떨어지게 된다. 공이란 번뇌가 없으며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며, 영향을 받으면 언제든 작용하는 힘을 갖추고 있어서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고 있다. 진여는 여실공[不變]과 여실불공[隨緣]을 모두 갖추고 있다.]

三者(삼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如來之藏無有增減(여래지장무유증감)

세 번째, 수다라에서 말씀한, '여래의 장=如來藏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減, 

體備一切功德之法(체비일체공덕지법) 以不解故(이불해고) 

일체 공덕의 법을 갖추고 있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卽謂如來之藏(즉위여래지장) 有色心法自相差別(유색심법자상차별) 云何對治(운하대치) 

곧 여래장에는 색법과 심법이 있어 자체의 모습=自相을 차별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以唯依眞如義說故(이유의진여의설고) 因生滅染義(인생멸염의) 示現說差別故(시현설차별고)

오직 진여의 뜻에만 의지하여 설명한 때문이니, 생멸의 물듦의 뜻으로 인하여 나타내 보여 차별을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여래장의 본성이 색법(色法)이 심법(心法)과 동일하다고 생각한 잘못된 집착을 타파한 것, 중도(中道)의 실상을 나타낸 설명 ]

四者(사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一切世間生死染法(일체세간생사염법)

네 번째는 수다라에서, '일체 세간의 생사하는 염법이 

皆依如來藏而有(개의여래장이유) 一切諸法不離眞如(일체제법불리진여)

모두 여래장에 의지하여 있는 것이며, 일체제법은 진여를 여의지 않고 있다.' 라고 설하는 것을 듣고

以不解故(이불해고) 謂如來藏(위여래장)

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른바 여래장 자체에 

自體具有一切世間生死等法(자체구유일체세간생사등법) 云何對治(운하대치) 

일체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인,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가?

[본체를 의지(依持)하는 것과 본체에 그대로 갖추어져 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인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以如來藏(이여래장) 從本已來(종본이래)  唯有過恒沙等諸淨功德(유유과항사등제정공덕)

여래장에는 본래부터 오직 항하의 모래 등을 능가하는 모든 청정한 공덕=淨功德이 있어서, 

不離不斷不異眞如義故(불리부단불리진여의고)

진여의 뜻을 여의지도 않고, 끊지도 아니하여 그(진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以過恒沙等煩惱染法(이과항사등번뇌염법) 唯是妄有(유시망유) 性自本無(성자본무)

항하의 모래 수보다 많은 번뇌의 염법은 오직 허망한 존재일 뿐, 본래부터 성품이 없는 것이어서 

從無始世來(종무시세래) 未曾與如來藏相應故(미증여여래장상응고)

시작이 없는 때부터 일찍이 여래장과 더불어 상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若如來藏體有妄法(야여래장체유망법) 而使證會永息妄者(이사증회영식망자)

만약 여래장의 체에 망령된 법=妄法이 있다면, 진여를 증득하고 이해=證會하여 망령됨을 영원히 끊는다는 것은

則無有是處故(즉무유시처고)

바로 근거=處가 없기 때문이다.

 

五者(오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다섯째는 수다라에서 

依如來藏故有生死(의여래장고유생사) 依如來藏故得涅槃(의여래장고득열반)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사법이 있고,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열반을 체득한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以不解故(이불해고) 謂衆生有始(위중생유시) 以見始故(이견시고)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생은 시작이 있다'고 하며, 시작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復謂如來所得涅槃(부위여래소득열반) 有其終盡還作衆生(유기종진환작중생)

다시 '여래가 체득한 열반에도 그 끝이 다함이 있어, 도리어 되돌아 가 중생이 된다'고 말한다.

云何對治(운하대치)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가?

以如來藏無前際故(이여래장무전제고) 無明之相亦無有始(무명지상역무유시)

여래장은 시간적으로 과거=前際가 없기 때문에 무명의 상도 시작이 있는 것이 아니며,

若說三界外(약설삼계외) 更有衆生始起者(갱유중생시기자) 卽是外道經說(즉시외도경설)

만약 삼계 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것은 외도 경전=外道經의 설명이 된다.

又如來藏無有後際(우여래장무유후제) 諸佛所得涅槃與之相應(제불소득열반여지상응)

또한 여래장에는 미래=後際가 있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깨서 체득하신 열반도 그것과 더불어 상응하여,

卽無後際故(즉무후제고)

바로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첫째, 둘째는 공(空)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서
(1) 본체의 공(空)을 현상계의 사공(事空) 즉 허공(虛空)으로 보는 것
(2) 본체 진여에는 번뇌가 없다는 여실공(如實空)을 본체마저도 아무것도 없는 공 무(空無)로 보는 것이며,
셋째, 넷째, 다섯째는 유(有)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서
(3) 본체의 여래장진여에 갖추어진 성공덕을 현상계의 차별있는 색심(色心)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
(4) 본체의 청정한 여래장진여에 염법(染法)이 있다고 보는 것
(5) 시원(始源)이 없는 생사(生死)와 열반에 시작과 끝이 있다고 보는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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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眞如熏習(진여훈습) - 진여(眞如) 본래의 작용인 정화(淨化)시키는 힘

ㄱ. 자체상(自體相)의 훈습(熏習)의 작용

眞如熏習義有二種(진여훈습의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진여가 훈습하는=眞如熏習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自體相熏習(일자자체상훈습) 二者用熏習(이자용훈습)

첫째는 자체상훈습이며, 둘째는 용훈습이다.

自體相熏習者(자체상훈습자) 從無始世來具無漏法(종무시세래구무루법)

자체상훈습이란 비롯함이 없는(시작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무루의 법(번뇌가 없는 부동의 공)을 갖추어서 

[체대(體大)와 상대(相大)를 합친 작용이 자체상(自體相)훈습, 진여는 부사의업(不思議業)과 경계(境界)의 두 성품의 존재로서 중생에 훈습하고 있다.]

備有不思議業(비유불사의업) 作境界之性(작경계지성)

불가사의한 업을 갖추어 경계의 성품을 짓는다.(시각)

[여실불공의 힘이 중생의 망심에 나타나 시각(始覺)의 지(智)가 되는 것이 부사의업(不思議業), 여실공문의 경계, 이러한 본래 가지고 있는 경지(境智)의 힘에 의하여 암암리에 망심을 훈습하여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는 마음 등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作境界之性]

依此二義(의차이의) 恒常熏習(항상훈습) 以有力故(이유력고)

이 두 가지 뜻에 의지하여 항상 훈습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能令衆生(능령중생) 厭生死苦(염생사고) 樂求涅槃(락구열반)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게 하고, 열반을 구하게 하며,

自信己身有眞如法(자신기신유진여법) 發心修行(발심수행)

스스로 자기 몸에 진여의 법이 있음을 믿어, 발심하여 수행하게 한다.

 

ㄴ. 無量差別(무량차별)의 無明(무명)

問曰(문왈) 若如是義者(약여시의자) 一切衆生悉有眞如(일체중생실유진여)

묻나니, "만약 이와 같은 의미가 있다면 일체 중생이 다 진여가 있을 것이므로 

等皆熏習(등개훈습) 云何有信無信(운하유신무신) 無量前後差別(무량전후차별)

평등하게 다 같이 훈습을 할 것인데, 어찌하여 믿음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한량없이 차별하고 전후 차이가 있는가?

皆應一時(개응일시) 自知有眞如法(자지유진여법) 勤修方便(근수방편) 等入涅槃(등입열반)

모든 것은 마땅히 다 일시에 진여법이 있음을 스스로 알아, 방편을 부지런히 수행하여 열반의 도를 평등하게 깨달아 들어가야만 하리라."  

答曰(답왈) 眞如本一(진여본일) 而有無量無邊無明(이유무량무변무명)

답하나니, 진여는 본래 하나이나, 중생에게는 한량없고 가이없는 무명이 있음으로 해서,

從本已來(종본이래) 自性差別(자성차별) 厚薄不同故(후박불동고)

본래로부터 자성에 차별이 있게 되었으니, 두텁고 엶음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自性差別은 모든 중생들이 갖추고 있는 진여성품이 차별이 있다는 말이 아닌, 厚薄不同故 무명에 물든 정도가 다르다는 말]

過恒沙等上煩惱(과항사등상번뇌) 依無明起差別(의무명기차별)

갠지스 강(항하강)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상의 번뇌(소지장)가 무명을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며,

我見愛染煩惱(아견애염번뇌) 依無明起差別(의무명기차별)

아견과 아애의 물든 번뇌(번뇌장)가 무명에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니, 

如是一切煩惱(여시일체번뇌) 依於無明所起(의어무명소기)

이와 같이 일체의 번뇌는 무명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前後無量差別(전후무량차별) 唯如來能知故(유여래능지고)

전후의 한량없는 차별을 오직 여래만이 능히 알수 있기 때문이다.

 

ㄷ. 內熏(내훈)과 外熏(외훈)의 작용

又諸佛法(우제불법) 有因有緣(유인유연) 因緣具足(인연구족) 乃得成辦(내득성판)

그리고 또 모든 불법은 인=正因이 있고, 연=緣熏이 있으니, 인연이 모두 구족하여야 나아가 판별할 수 있으니,

[有因有緣 : 인(因)은 진여에 의한 훈습이다. 연(緣)은 선지식을 만남.]

如木中火性(여목중화성) 是火正因(시화정인) 若無人知(약무인지)

이는 마치 나무 가운데 불의 성품이 있는 것이 불의 정인이지만,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여 

不假方便(불가방편) 能自燒木(능자소목) 無有是處(무유시처)

방편을 빌리지 못한다면, 저절로 나무가 탈수 있다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衆生亦爾(중생역이) 雖有正因熏習之力(수유정인훈습지력)

중생도 그와 같아서, 비록 정인으로 훈습하는 힘이 있다 하여도,

若不遇諸佛菩薩善知識等(야불우제불보살선지식등) 以之爲緣(이지위연)

만약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 등을 만남으로서, 그 인연을 삼지 않으면, 

能自斷煩惱入涅槃者(능자단번뇌입열반자) 則無有是處(즉무유시처)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든다는 것은 옳다고 긍정할 곳이 없다.

若雖有外緣之力(약수유외연지력) 而內淨法(이내정법) 未有熏習力者(미유훈습력자)

만약 비록 밖으로의 연=外緣이 있다 하여도, 안으로 정법이 훈습하는 힘이 아직 있지 않은 자는, 

亦不能究竟(역불능구경) 厭生死苦(염생사고) 樂求涅槃(락구열반)

역시 구경에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의 도를 즐겨 구하지 못할 것이다.

若因緣具足者(약인연구족자) 所謂自有熏習之力(소위자유훈습지력)

만약 인과 연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른바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고, 

又爲諸佛菩薩等慈悲願護故(우위제불보살등자비원호고)

또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자비와 원력과 보호함이 되기 때문에,

能起厭苦之心(능기염고지심) 信有涅槃(신유열반) 修習善根(수습선근)

능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선근을 닦아 수습할 수 있으며, 

以修善根成熟故(이수선근성숙고) 則値諸佛菩薩示敎利喜(즉치제불보살시교리희)

선근을 수습하여 성숙한 까닭에, 곧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교법의 이익과 기쁨을 만나, 

乃能進趣向涅槃道(내능진취향열반도)

이에 승진하여 열반의 도로 나아갈 수 있다.

[나무에 있는 불의 성품은 중생불성의 정인에 비유하였고, 사람의 힘으로 나무를 비벼서 불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연인에 비유하였으며, 불이 붙어 나무를 태우는 것은 번뇌를 끊고 열반도를 증득하는 요인에 비유]

 

用熏習(용훈습)

用熏習者(용훈습자) 卽是衆生外緣之力(즉시중생외연지력)

용훈습(용대의 작용)이라는 것은 곧 중생의 외연적인 힘이니, 

如是外緣(여시외연) 有無量義(유무량의) 略說二種(략설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와 같은 외연에는 한량없는 뜻이 있지만, 간략히 말하면 두 가지이니,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一者差別緣(일자차별연) 二者平等緣(이자평등연)

첫째는 차별적인 조연=差別緣이고 둘째는 평등한 조연=平等緣이다.

[차별연은 개인별로 제각기 상이한 외연(外緣), 평등연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작용하는 외연(外緣)]

 

ㄱ. 差別緣(차별연) - 갖가지 응화신을 나타내는 것

差別緣者(차별연자) 此人依於諸佛菩薩等(차인의어제불보살등)

차별적인 조연=차별연이란 이 사람이 모든 불보살 등을 의지하여 

從初發意始求道時(종초발의시구도시) 乃至得佛(내지득불)

처음으로 뜻을 내어 불도를 구함=求道를 시작할 때부터 나아가 불과를 얻기까지(성불할 때까지),

於中若見若念(어중약견약념) 或爲眷屬父母諸親(혹위권속부모제친)

그 도중에 혹 보기도 하며, 혹 염(생각)하기도 하며, 혹은 권속, 부모와 여러 친척이 되기도 하며, 

或爲給使(혹위급사) 或爲知友(혹위지우) 或爲怨家(혹위원가) 或起四攝(혹기사섭)

혹은 급사가 되기도 하며, 혹은 자기를 알아주는 벗이 되기도 하고, 혹은 원수의 집이 되기도 하며, 혹은 사섭법을 일으키기도 한다.

乃至一切所作無量行緣(내지일체소작무량행연)

나아가 일체 짓는 바 모든 한량없는 수행의 연=行緣에 이르기까지, 

以起大悲熏習之力(이기대비훈습지력) 能令衆生增長善根(능령중생증장선근)

대비의 훈습하는 힘을 일으켜,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증장케 하여 

若見若聞得利益故(약견약문득리익고)

혹은 보기도 하고, 혹은 듣기도 하면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此緣有二種(차연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외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近緣(일자근연) 速得度故(속득도고)

첫째는 가까운 인연=近緣이니, 빨리 제도를 얻는 까닭이며, 

二者遠緣(이자원연) 久遠得度故(구원득도고) 是近遠二緣分別(시근원이연분별)

둘째는 먼 인연=遠緣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제도를 얻는=得度하는 까닭이니, 이것이 가깝고 먼 두 가지 외연의 분별이다.

復有二種(부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근원과 원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고 하는가? 

一者增長行緣(일자증장행연) 二者受道緣(이자수도연)

첫째는 수행을 증장시키는 연=增長行緣이고, 둘째는 도를 수지하는 연=受道緣이다.

[增長行緣- 보시, 지계 등의 모든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受道緣- 문·사·수(聞思修)를 들어 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ㄴ. 平等緣(평등연) - 승응신(勝應身)을 나타내어 평등하게 감응해 주는 것

平等緣者(평등연자) 一切諸佛菩薩(일체제불보살)

평등한 조연= 평등연이라는 것은 일체 부처님과 보살 모두가 

皆願度脫一切衆生(개원도탈일체중생) 自然熏習恒常不捨(자연훈습항상불사)

일체 중생을 해탈=度脫하기를 원하셨기에, 자연스럽게 훈습하시면서 항상 (중생들을) 버리지 않으시며

以同體智力故(이동체지력고) 隨應見聞(수응견문) 而現作業(이현작업)

동체지의 힘으로 (중생의) 보고 들음을 따라 출현하시어 업을 지으심을 나타내나니,

所謂衆生依於三昧(소위중생의어삼매) 乃得平等見諸佛故(내득평등견제불고)

이른바 중생들이 삼매에 의지하여 평등하게 모든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體用熏習(체용훈습) - 본체와 작용을 종합한 해설(진여 내훈(內熏)인 체훈습과 불보살의 외연(外緣)인 용훈습을 수행자의 입장에서 함께 설하는 것)

此體用熏習分別(차체용훈습분별) 復有二種(부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자체=體와 작용=用 훈습의 분별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일자) 未相應(미상응) 謂凡夫二乘初發意菩薩等(위범부이승초발의보살등)

첫째는 아직 서로 상응(호응)하지 못함이니, 범부와 이승, 초발의 보살 등이 

[미상응(未相應)은 지(智)가 진여와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아직 분열되고 있는 상태] 

以意意識熏習(이의의식훈습) 依信力故而能修行(의신력고이능수행)

의와 의식으로 훈습하면서 믿는 힘=信力에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할 수는 있지만,

未得無分別心與體相應故(미득무분별심여체상응고)

아직 무분별심이 자체=體와 더불어 서로 호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수행자의 지(智)와 진여의 체(體)가 아직 서로 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未得自在業修行與用相應故(미득자재업수행여용상응고)

아직 자재한 업=自在業을 얻지 못하여 수행과 작용이 더불어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二者(이자) 已相應(이상응) 謂法身菩薩(위법신보살)

두 번째는 이미 서로 상응(호응)함이니, 이른바 법신보살(십지 보살)이 

[이상응(已相應)은 행자의 지(智)가 진여에 일치하여 무분별지(無分別智)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

得無分別心與諸佛智用相應(득무분별심여제불지용상응)

무분별심을 체득하여(체와 더불어 상응하여) 모든 부처님의 지혜=佛智의 작용=用과 더불어 상응함을 말한다.

唯依法力(유의법력) 自然修行(자연수행) 熏習眞如(훈습진여) 滅無明故(멸무명고)

오직 법력만을 의지하여 자연히 수행하며,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5. 染法․淨法(염법정법)의 斷不斷(단부단)의 의미

復次染法(부차염법) 從無始已來(종무시이래) 熏習不斷(훈습부단)

다시 염법은 시작 없는 때로부터 오면서, 훈습하여 끊어짐이 없으니,

[염법은 탐진치, 번뇌망상에 오염된 것, 제7식에 우리의 행위가 저장되어 있는 것]

乃至得佛後則有斷(내지득불후즉유단)

나아가 불과를 체득한 후에 (깨달은 뒤에야) 곧 단절한다.

[근본무명을 바탕으로 한 염법훈습은 성불될 때까지는 무시이래(無始以來) 그 훈습이 단절되지 않지만, 진여의 정법훈습은 부처가 된 후에도 끊임없이 영원히 계속된다]

淨法熏習(정법훈습) 則無有斷(즉무유단) 盡於未來(진어미래) 此義云何(차의운하)

정법의 훈습은 단절함이 없이, 미래에 있어서도 다하여 가니, 이 뜻이 무었인가?

以眞如法常熏習故(이진여법상훈습고) 妄心則滅(망심즉멸)

진여법으로 항상 훈습하기 때문이며, 허망한 마음=妄心이 곧 사라지면 

法身顯現(법신현현) 起用熏習故無有斷(기용훈습고무유단)

법신이 나타나 용훈습을 일으키기 때문에 단절함이 없다. 

 

(5) 三大(삼대) - 입의분에서 세운 근본사상은 법(法)과 의(義)로서, 법은 대승(大乘)의 체(體)이며 바로 우리의 중생심이다. 그렇다면 이 중생심이 어찌하여 대승인가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의(義)이며, 이 대승의 의(義)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 바로 생멸문(生滅門)에서 나타내는 체대(體大)·상대(相大)·용대(用大)의 삼대(三大)이다.

① 體大 相大(체대 상대)

 ㄱ. 眞如(진여)의 自體相(자체상)

復次眞如自體相者(부차진여자체상자)

다시 다음에 진여 자체의 모습=眞如自體相이라는 것은

[체대(體大)는 일체법의 진여(眞如)로서 그것은 중생심의 본체이면서 불타의 본체이며, 모두가 평등하고 증감이 없는 것]

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일체범부성문연각보살제불) 無有增減(무유증감)

일체 모든 범부, 성문, 연각, 보살과 모든 부처님이 더하거나 뺄 것=增減이 없으며, 

非前際生(비전제생) 非後際滅(비후제멸) 畢竟常恒(필경상항)

이전에 나지도 않았고, 이후에 소멸하지도 않으며, 필경에 영원하고 항상하여

從本已來(종본이래) 性自滿足一切功德(성자만족일체공덕)

본래부터 성품(본성) 자체가 일체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었으니,

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소위자체유대지혜광명의고)

이른바 자체에 광대한 지혜광명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며, 

遍照法界義故(편조법계의고) 眞實識知義故(진실식지의고)

법계를 두루 비추는 의미이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분별하여 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며, 

自性淸淨心義故(자성청정심의고) 常樂我淨義故(상락아정의고)

자성이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며, 상·락·아·정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시간적으로 과거·현재·미래가 다하도록 변함이 없는 것을 상(常), 중생의 괴로움 속에 있어도 그 괴로움이 간여하지 않는 것을 낙(樂), 생사에 처하여도 그 생사에 구속되지 않는 것을 아(我), 삼세육추의 생멸하는 모습으로 편력하면서도 오염되지 않는 것을 정(淨).]

淸凉不變自在義故(청량불변자재의고)

청량하고 불변하며, 자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불타는 뜨거운 탐진치(貪瞋癡)의 번뇌를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청량(淸凉)이고, 생(生)·주(住)·이(異)·멸(滅)이란 일심의 사상(四相)으로 번뇌가 옮길 수 없기 때문에 불변(不變)이며, 악업이 얽어매지 못하므로 자재(自在).] 

具足如是過於恒沙(구족여시과어항사) 不離不斷(불리부단)

이와 같이 항하사(갠지스강의 모래)보다 많은 수를 지나도록 여의지 않고, 단절되지 않으며,

[진여 자체(自體)에는 항하(恒河)의 모래보다 많은 성덕(性德)이 진체(眞體)를 떠나지 않는 것이어서 '불리(不離)', 무시이래(無始以來) 상속되어 끊임이 없기 때문에 '부단(不斷)']

不異不思議佛法(불이불사의불법) 乃至滿足(내지만족) 無有所少義故(무유소소의고)

다르지 않으며, 불가사의한 불법을 원만하게 갖춤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의미이기 때문에

[자체(自體)와 함께 있어 동미(同味)이므로 '불이(不異)', 또한 항하의 모래보다도 더 많은 뜻이 있어 '부사의(不思議)', 불타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불법(佛法)'.]

名爲如來藏(명위여래장) 亦名如來法身(역명여래법신)

이름하여 여래장이라 하며, 또는 이름하여 여래법신이라고도 한다.

[이 진여로부터 여래가 탄생하는 것이므로 여래장(如來藏), 또한 이름하여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고 한다.]

 

ㄴ. 眞如(진여)의 自體相(자체상)을 거듭 밝힘

問曰(문왈) 上說眞如其體平等(상설진여기체평등) 離一切相(리일체상)

묻나니, 위에서 설명하기를, "진여 그 자체=其體는 평등하여 일체의 모습을 떠났다"고 하였으나, 

云何復說體有(운하부설체유) 如是種種功德(여시종종공덕)

어찌하여 다시 자체에 이와 같은 갖가지 공덕이 있다고 설하는가?

答曰(답왈) 雖實有此諸功德義(수실유차제공덕의)

답하나니, 비록 실로 이 모든 공덕의 의미(뜻)가 있지만,  

而無差別之相(이무차별지상) 等同一味(등동일미) 唯一眞如(유일진여)

차별의 모습이 없고, 평등하고 동일한 한 가지 맛으로, 유일한 진여일 뿐이다.

[평등일미(平等一味)이고 유일진여(唯一眞如)- 진여는 어떠한 별개의 것과 비교하여 설한다면, 진여에 무한히 풍부한 공덕을 꺼내어 나타낼 수가 있으나, 진여 그 자체에 대하여 설한다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라든가 평등진여(平等眞如) 또는 일심(一心)이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

此義云何(차의운하) 以無分別離分別相(이무분별리분별상) 是故無二(시고무이)

이 의미가 무엇인가? 분별이 없으므로 분별의 대상을 여의었으니, 그러므로 둘이 아니다.

[진여의 공덕은 한 맛으로 같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중생들의 업식 때문에 다르게 보일 뿐이므로 무이(無二)] 

復以何義(부이하의) 得說差別(득설차별) 以依業識生滅相示(이의업식생멸상시)

다시 무슨 의미로서 차별하여 설할 수 있는가? 업식의 생멸하는 모습에 의지하여 나타낼 수 있으니, 

[以依業識生滅相示 - 생멸상 내에 모든 허물이 있지만, 다만 그 근본만을 들었기 때문에 업식(業識)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런 허물에 대하여 모든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此云何示(차운하시) 以一切法(이일체법) 本來唯心(본래유심) 實無於念(실무어념)

이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일체법이 본래 오직 마음일 뿐, 실제로는 망념이 없지만, 

而有妄心(이유망심) 不覺起念(불각기념) 見諸境界(견제경계) 故說無明(고설무명)

망심이 있어서, 깨닫지 못하여 망념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보므로, 그러므로 설하여 무명이라고 한다. 

[본래 마음은 망념이 없는 무념(無念)이지만, 현실세계의 우리의 마음은 망심(妄心)이며, 무명에 의하여 발동되어, 불각에서 염(念)을 일으켜, 분별의 인식세계를 만들어내어서 자기의 인식계가 실재라고 망상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무명(無明)'이라고 말한다.]

心性不起(심성불기) 卽是大智慧光明義故(즉시대지혜광명의고)

마음의 본성=心性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그것이 대지혜광명의 뜻이기 때문이다.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인식계가 '대지혜광명'이다. 이것은 범부가 외계를 보려하는 전식(轉識)의 작용과 대비(對比)되는 불타의 인식계이다.]

若心起見(약심기견) 則有不見之相(즉유불견지상)

만약 마음이 견을 일으키면 보지 못하는 모습=不見이 있는 것이나, 

[범부의 마음에는 망념이 일어나 보려고 하는 능견상(能見相)이 있어, 이 보려고 하는 능견상 자신은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불견(不見)의 상(相)'으로 남아, 그것이 마음의 암흑(暗黑) 부분이 된다. 마치 보고 있는 눈이 보는 눈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心性離見(심성이견) 卽是遍照法界義故(즉시편조법계의고)

마음의 성품(본성)이 견을 여의면, 이것이 곧 법계를 두루 비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若心有動(약심유동) 非眞識知(비진식지) 無有自性(무유자성)

만약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참답게 식별하여 아는 것이 아니며, 자성이 없어서,

[불타의 '진실식지(眞實識知)'는 범부가 본능적으로 분별하는 '지식(智識)'의 작용과 대비된다.]

非常非樂(비상비락) 非我非淨(비아비정) 熱惱衰變(열뇌쇠변)

항상함도 아니고=非常, 즐거움도 아니며=非樂, 아도 아니고=非我, 청정함도 아니며=非淨, 뜨거운 번뇌로 쇠잔하고=熱惱衰, 변하면=變, 

[불타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은 범부가 고락에 대하여 벗어나려하고 유지하려는 집착의 집취상(執取相)과 대비]

則不自在(즉부자재) 乃至具有過恒沙等妄染之義(내지구유과항사등망염지의)

곧 자재하지 않으며=不自在, 나아가 갠지스강 모래들=恒沙보다 많은 헛된 물듦=妄染의 뜻을 갖추고 있어서,

對此義故(대차의고) 心性無動(심성무동)

이 뜻을 대비하기 때문에 마음의 성품=심성이 동하지 않으면 

則有過恒沙等諸淨功德相義示現(즉유과항사등제정공덕상의시현)

갠지스강 모래=恒沙보다 많은 모든 청정한 공덕의 상=功德相의 의미로서 나타냄=示現할 수 있으나,

若心有起(약심유기) 更見前法可念者(갱견전법가념자) 則有所少(즉유소소)

만약 마음이 일어나 다시 목전의 법을 보아 생각을 하는 자는 곧 부족한 것이 있을 것이다. 

如是淨法(여시정법) 無量功德(무량공덕) 卽是一心(즉시일심)

이와 같은 청정한 법=淨法의 한량없는 공덕은 곧 일심이므로,

更無所念(갱무소념) 是故滿足(시고만족) 名爲法身如來之藏(명위법신여래지장)

다시 생각할 바가 없으니, 이런 까닭으로 원만한 구족이기에 이를 이름하여 법신여래의 장=身如來之藏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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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生滅(생멸)의 相(상)

復次分別生滅相者有二種(부차분별생멸상자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또한 생멸의 양상=生滅相을 분별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생멸상(緣滅相)이란 마음의 인식에 의하여 생멸하는 ‘모습’]

一者麤(일자추) 與心相應故(여심상응고)

첫째는 거친 번뇌=麤이니, 이러한 추와 더불어 마음이 상응하는 때문이며, 

[마음과 서로 대응하는 생멸의 모습, 지상(智相)·집취상(執取相)·계명자상(計名字相) 등 세 가지 거친 양상은 외경(外境)이 있어 심법(心法)과 상대적으로 호응하기 때문에 거친 분별의 생멸하는 양상]

二者細(이자세) 與心不相應故(여심불상응고) 

둘째는 미세한 번뇌=細이니, 이러한 미세한 것과 더불어 마음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불상응염심(不相應染心)은 심법(心法)과 외경(外境)이 아직 나뉘어지지 않아 외경이 심법과 더불어 아직은 상대적으로 호응하지 않기 때문에 미세한 생멸양상]

又麤中之麤(우추중지추) 凡夫境界(범부경계)

또 거친 가운데의 거친 번뇌는 범부의 경계이며, 

麤中之細(추중지세) 及細中之麤(급세중지추) 菩薩境界(보살경계)

거친 가운데에서의 미세한 번뇌와 미세한 가운데의 거친 번뇌는 보살의 경계이며,

細中之細(세중지세) 是佛境界(시불경계)

미세한 가운데의 미세한 번뇌는 바로 부처의 경계이다.

 

此二種生滅(차이종생멸) 依於無明熏習而有(의어무명훈습이유)

이 두 가지 생멸은 무명의 훈습에 의지해서 있는 것으로, 

所謂依因依緣(소위의인의연)

이른바 인에 의지하고 연에 의지한다.

依因者(의인자) 不覺義故(불각의고) 依緣者(의연자) 妄作境界義故(망작경계의고)

인에 의지한다는 것은 불각(무명)의 뜻이고, 연에 의지한다는 것은 망령되게 경계를 짓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若因滅則緣滅(야인멸즉연멸) 因滅故(인멸고) 不相應心滅(불상응심멸)

만약 인(무명인)이 멸하면 연(경계인)도 멸하는 것이니, 인이 멸하였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 마음=不相應心이 멸하고, 

[불상응심이 멸한다고 하는 것은 제8식 아뢰야식을 알아서 견성 하는 것]

緣滅故(연멸고) 相應心滅(상응심멸)

연이 멸하였기 때문에 상응하는 마음=相應心이 멸하는 것이다. 

[인(因)은 주체적인 원인이라면 연(緣)은 비교적 부수적인 것, 인이 멸하면 제8식 불상 응심이 없어지며, 멸한다는것은 결국 아는것과 같은 말.]

問曰(문왈) 若心滅者(약심멸자) 云何相續(운하상속)

문나니, 만약 마음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며? 

若相續者(약상속자) 云何說究竟滅(운하설구경멸)

만약 상속한다면, 마침내 어떻게 멸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答曰(답왈) 所言滅者(소언멸자) 唯心相滅(유심상멸) 非心體滅(비심체멸)

답하나니, 멸한다고 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현상=心相이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지, 마음의 본체=心體가 멸하는 것이 아니다.

[심상(心相)은 마음이 갖고 있는 모양, 심체(心體)는 마음의 체로 뿌리에 해당]

如風依水而有動相(여풍의수이유동상)

(이를 비유하면) 마치 바람이 바닷물에 의지하여 (파도를) 움직이는 현상이 있는 것처럼,

若水滅者(약수멸자) 則風相斷絶(즉풍상단절) 無所依止(무소의지) 以水不滅(이수불멸)

만약 바닷물이 없어지면 바람의 모습도 끊어져서(사라지니) 의지할 바가(대상이) 없어서 그치겠지만 (파도는 없어지지만), 바닷물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風相相續(풍상상속) 唯風滅故(유풍멸고) 動相隨滅(동상수멸) 非是水滅(비시수멸)

바람의 모습이 상속되는 것이다. 오직 바람이 멸하였기 때문에 (물의) 움직임도 따라서 멸하였지만 바닷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無明亦爾(무명역이) 依心體而動(의심체이동)

무명(근본무명) 또한 그와 같아서 심의 본체=心體에 의지하여 움직이지만, 

若心體滅(약심체멸) 則衆生斷絶無所依止(중중생단절무소의지)

만약 심체가 사라지면 중생도 단절되어 의지할 바 대상이 없지만, 

以體不滅(이체불멸) 心得相續(심득상속)

심체는 멸하지 않으므로 마음이 상속하는 것이며, 

唯癡滅故(유치멸고) 心相隨滅(심상수멸) 非心智滅(비심지멸)

오직 어리석음(무명)만 멸하였기 때문에 마음의 현상=心相도 따라서 멸할지언정, 마음의 지혜=心智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4. 染淨熏習(염정훈습)

㉮ 染淨熏習(염정훈습)의 四法(사법)

復次有四種法(부차유사종법) 熏習義故(훈습의고)  

다시 다음에 네 가지 법의 훈습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染法淨法(염법정법) 起不斷絶(기부단절) 云何爲四(운하위사)

염법과 정법이 일어나 단절되지 않으니, 무엇이 그 넷인가?

一者淨法(일자정법) 名爲眞如(명위진여)

첫째 청정한 법=淨法이니, 진여(진여 훈습)라고 하며,

二者一切染因(이자일체염인) 名爲無明(명위무명)

둘째 모든 물듦=一切染의 원인이니, 무명(무명 훈습)이라고 하며,

三者妄心(삼자망심) 名爲業識(명위업식)

셋째 허망한 마음=妄心이니 업식(업식 훈습)이라고 하며,

四者妄境界(사자망경계) 所謂六塵(소위륙진)

넷째 허망한 경계=妄境界이니, 이른바 육진(육진 훈습)이라고 한다.

[근본 무지인 무명이 훈습되는 무명훈습과 제8식 아뢰야식에 물드는 업식 훈습과 안이비설신의 육근의 대상인 육진[색성향미촉법]이 훈습되는 육진훈습이 있습니다. 육진훈습은 대상에 의해 물드는 것입니다. 내 눈을 통해 무언가를 보면 물들고, 귀를 통해 무언 가를 들으면 물듭니다. 제6식, 제7식 훈습이 육진훈습, 제8식 훈습이 업식훈습이 되어 그 뿌리가 무명훈습]

 

㉯ 熏習(훈습)의 뜻

熏習義者(훈습의자) 如世間衣服(여세간의복) 實無於香(실무어향)

훈습의 뜻이란, 마치 세간의 의복과 같아서, 실제로는 향기가 없지만,

若人以香而熏習故(야인이향이훈습고) 則有香氣(즉유향기)

만약 사람이 향기를 쐬면(향기를 훈습하면), 곧 향기가 있는 것과 같다.

此亦如是(차역여시) 眞如淨法(진여정법) 實無於染(실무어염)

이 또한 그와 같아서, 진여 정법에는 실로 물듦(염법)이 없지만, 

但以無明而熏習故(단이무명이훈습고) 則有染相(즉유염상)

다만 무명으로서 훈습한 까닭에 물든 현상=染相이 있게 된다.

 

無明染法實無淨業(무명염법실무정업)

무명의 염법에는 실제로 정화시키는 활동력=정업이 없지만

但以眞如而熏習(단이진여이훈습) 故則有淨用(고즉유정용)

다만 진여로써 훈습한 까닭에 곧 청정한 작용=淨用(정업의 작용)이 있다.

[훈습(熏習)= 자기의 힘을 다른 상대에게 옮겨 실어주는 것으로, 상대를 자기와 동화시키는 작용. 일반적으로 ‘냄새가 옷에 밴다.’, ‘꽃을 만진 손에는 꽃향기가, 마늘을 만진 손에는 마늘 냄새가 밴다.’ 등의 비유를 통해서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지금까지 없었던 습성(習)이 계속 되풀이함에 따라 자기의 습성이 되어 영향을 주는 것. 경험을 되풀이하면 습관성이 된다. 그 습관성을 외래적인 것으로 보고 훈습이라고 한다.]

 

㉰ 染法熏習(염법훈습)

云何熏習(운하훈습) 起染法不斷(기염법부단)

어떻게 훈습하여 염법을 일으켜 단절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所謂以依眞如法故(소위이의진여법고) 有於無明(유어무명)

이른바 진여법에 의지하기 때문에 무명이 있고, 

以有無明染法因故(이유무명염법인고) 卽熏習眞如(즉훈습진여)

무명에 염법의 원인=染法因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며, 

[무명염법인(無明染法因)= 무명이라는 염법의 인(因). 무명이 다른 염법의 인(因)이 되는 것으로서, 이 활동이 무명훈습이다.]

以熏習故則有妄心(이훈습고즉유망심)

훈습하기 때문에 곧 허망한 마음=妄心이 있게 된다.

[여기서 망심이란 업식을 말하니 아리야식이 일어남을 말한다.] 

以有妄心(이유망심) 卽熏習無明(즉훈습무명)

망심이 있음으로 해서 곧 무명을 훈습하며, 

不了眞如法故(불료진여법고) 不覺念起(불각념기) 現妄境界(현망경계)

진여법을 완전히 알지 못하기=不了 때문에 불각의 망념(轉識)을 일으켜 허망한 경계=妄境界(경계상)를 나타낸다.

[무명은 훈습을 가하는 능훈(能熏)이고, 진여는 훈습을 받는 소훈(所熏)이며, 그 결과는 망심(妄心)]

以有妄境界染法緣故(이유망경계염법연고) 卽熏習妄心(즉훈습망심)

허망한 경계의 염법의 반연이 있기 때문에 곧 허망한 마음을 훈습하여, 

令其念著造種種業(령기념착조종종업) 受於一切身心等苦(수어일체신심등고)

그것으로 하여금 생각하고 집착하게 하여(제7식을 일으키어), 갖가지 업(의식)을 지으며, 일체 몸과 마음=身心의 괴로움(과보)을 받게 된다.

[令其念著 제칠식을 일으키는 것, 造種種業은 의식을 일으키는 것, 受於一切身心等苦란 과보를 받는 것]

 

 ㄱ. 妄境界熏習(망경계훈습)

此妄境界熏習義(차망경계훈습의) 則有二種(즉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허망한 경계=妄境界 훈습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一者增長念熏習(일자증장념훈습) 二者增長取熏習(이자증장취훈습)

첫째 망령된 생각을 증장하는 훈습=增長念熏習이며, 둘째 집착심을 증장하는 훈습=增長取熏習이다

[증장념훈습=망경계의 힘에 의하여 지식(智識)과 상속식(相續識)의 세력을 강화하여, 법집의 분별의 념을 증장시키는 것.
증장취훈습=망경계의 힘에 의하여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의 아집의 힘을 강화하여, 취착(取著)을 증장시키는 것]

 

 ㄴ. 妄心熏習(망심훈습)

妄心熏習義(망심훈습의) 則有二種(즉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망심이 훈습한다는=妄心熏習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망심(妄心)= 업식(業識) 등의 삼세(三細)와 지식, 상속식 등의 의(意)와 의식(意識, 분별사식) 등 모든 식]

一者(일자) 業識根本熏習(업식근본훈습)

첫째 업식근본훈습이니, 

能受阿羅漢(능수아라한) 辟支佛一切菩薩生滅苦故(벽지불일체보살생멸고고)

능히 아라한과 벽지불과 일체의 보살이 생멸의 괴로움을 받는 때문이며,

二者(이자) 增長分別事識熏習(증장분별사식훈습) 能受凡夫業繫苦故(능수범부업계고고)

둘째 증장분별사식훈습이니, 능히 범부가 업에 얽매여 괴로움을 받기 때문이다.

[業識根本熏習 : 업식이 무명을 훈습하여 전상(轉相)과 현상(現相)을 일으키는 것(아리야식).
增長分別事識熏習 : 망경계가 지말무명(枝末無明)을 훈습하여 말나식과 의식을 일으켜, 견사이혹(見思二惑)을 일으키고 심업(心業)과 신업(身業)·구업(口業)의 갖가지 업(業)을 지어 육도의 범부가 그 업에 얽매어 분단생사(分段生死)의 괴로움을 받는다. 견사이혹이란 사물의 이치를 몰라 일어나는 견혹(見惑)과 대상에 집착하는 사혹(思惑)을 말한다

여기서는 증장(增長)을 훈습(熏習)으로 표현한 것]

 

 ㄷ. 無明熏習(무명훈습)

無明熏習義(무명훈습의) 有二種(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는=無明熏習의 뜻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一者(일자) 根本熏習(근본훈습) 以能成就業識義故(이능성취업식의고)

첫째 근본훈습이니, 능히 업식을 이루게 한다는 뜻인 까닭이며. (업식으로 成就한다는 뜻인 까닭이며)

[근본무명불각이 진여를 훈습하는 근본훈습(根本薰習)으로 인해 진여를 움직여 업식을 이루게 한다.]

二者(이자) 所起見愛熏習(소기견애훈습) 以能成就分別事識義故(이능성취분별사식의고)

둘째 소기견애훈습=견애훈(見愛熏)이니, 능히 분별사식을 이룬다=成就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淨法熏習(정법훈습) - 본훈(本熏)=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는 것. 본훈(本熏)=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는 것

云何熏習(운하훈습) 起淨法不斷(기정법부단)

어떻게 훈습하여 청정한 법=淨法을 일으켜 끊어지지 않게 하는가?

所謂以有眞如法故(소위이유진여법고) 能熏習無明(능훈습무명)

이른바 진여법이 있기 때문에 진여가 능히 무명을 훈습하는 것이며, 

以熏習因緣力故(이훈습인연력고) 則令妄心厭生死苦(즉령망심염생사고) 樂求涅槃(요구열반)

훈습한 인과 연의 힘에 의하여 곧 허망한 마음=妄心으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게 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게 한다.

 

以此妄心有厭求因緣故(이차망심유염구인연고) 卽熏習眞如(즉훈습진여)

이 허망한 마음=망심에 (생사를) 싫어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열반을 구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여, 

[염구심(厭求心)은 훈습을 가하는 능훈(能熏)이고 진여는 훈습을 받는 소훈(所熏)이며, 그 결과는 수행(修行)이다]

自信己性(자신기성) 知心妄動無前境界(지심망동무전경계) 修遠離法(수원리법)

스스로 자기 성품(본성)을 믿어, 마음이 헛되게 움직이는=妄動하지만, 목전의 경계가 없음을 알아, 멀리 여의는 법을 닦아 행한다.

[以此妄心有厭求因緣故~自信己性이라는 것은 십신위 중의 신(信), 知心妄動無前境界 修遠離法이라 한 것은 삼현위 중의 수행을 나타낸 것이다. (三賢 : 십주, 십행, 십회향).]

以如實知無前境界故(이여실지무전경계고) 種種方便起隨順行(종종방편기수순행)

목전에 나타나는 경계가 없음을 여실히 알기 때문에 갖가지 방편에 수순하여 수행을 일으켜,

[ 以如實知無前境界故는 초지의 견도(見道)에서 유식관이 이루어짐을 밝힌 것, 種種方便起隨順行 ~ 久遠熏習力故는 십지의 수도위 중에서 만행(萬行)을 닦음을 나타낸 것]

不取不念(불취불념) 乃至久遠熏習力故(내지구원훈습력고) 無明則滅(무명즉멸)

취하지도 않고, 망념을 내지도 않으며, 나아가 오랫동안 훈습한 힘에 의하여 무명이 곧 사라지게 된다.

[無明則滅이하는 다섯 번째 과지에서 열반을 증득함을 나타낸 것]

以無明滅故(이무명멸고) 心無有起(심무유기) 以無起故(이무기고) 境界隨滅(경계수멸)

무명이 멸하였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 없으며,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경계가 따라서 멸하며, 

以因緣俱滅故(이인연구멸고) 心相皆盡(심상개진) 名得涅槃成自然業(명득열반성자연업)

인과 연이 함께 멸하였기 때문에 마음의 모양=心相이 모두 다하여, 열반을 얻게 되어 자연업(부처의 행)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불과위(佛果位)에서 무명을 끊어 가는 차제를 밝혔음]

 

ㄱ. 妄心熏習(망심훈습) - 망심에 대한 진여(眞如)의 정화작용, 즉 정용(淨用)이 나타나는 것

妄心熏習義有二種(망심훈습의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망심훈습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一者(일자) 分別事識熏習(분별사식훈습) 依諸凡夫二乘人等(의제범부이승인등)

첫째는 분별사식훈습이니, 모든 범부와 이승의 사람들이 

[분별사식은 의식(意識)의 이명(異名), 이 식(識)은 마음에 인식되는 어느 개체가 그대로 외계의 실재라고 분별하는 것, 분별이란 제7식 말라식]

厭生死苦(염생사고) 隨力所能(수력소능) 以漸趣向無上道故(이점취향무상도고)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능력에 따라 수행할 수 있는 한도 내에 의지해서 점차 무상의 도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二者(이자) 意熏習(의훈습) 謂諸菩薩發心勇猛速趣涅槃故(위제보살발심용맹속취열반고)

둘째, 의훈습(업식훈습)이니, 이른바 모든 보살들이 발심하여 용맹하고 신속히 열반에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까닭이다.

[의(意)는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 지식(智識) 및 상속식(相續識)의 오식(五識)을 말하는 것으로서, 의훈습(意熏習)은 이 5식에 가해지는 진여의 정화작용(淨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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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覺(각)과 不覺(불각)의 同相(동상)과 異相(이상)

復次覺與不覺(부차각여불각) 有二種相(유이종상)

또 다시 각과 불각에는 두 가지 모습=二種相이 있으니, 

云何爲二(운하위이) 一者同相(일자동상) 二者異相(이자이상)

무엇이 그 둘인가? 첫째는 같은 모양=同相(진여문)이고, 둘째는 다른 모양=異相(생멸문)이다.

 

㉮ 同相(동상)

同相者(동상자) 譬如種種瓦器(비여종종와기) 皆同微塵性相(개동미진성상)

같은 모양=同相이란, 비유하자면 갖가지의 질그릇(도자기)이 모두 같은 미진(먼지)로 되어 있는=性相인 것처럼 

如是無漏無明(여시무루무명) 種種業幻(종종업환) 皆同眞如性相(개동진여성상)

이와 같이 샘이 없는=無漏(번뇌가 없는 각)와 무명과 여러 가지의 업의 환영=업환(실체가 없는 작용)이 다 같이 동일한 진여의 본성=진여성의 모습인 것이다.

是故修多羅中(시고수다라중) 依於此義說(의어차의설)

그러므로 경(수다라)에서는 이 진여의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一切衆生(일체중생) 本來常住(본래상주) 入於涅槃(입어열반)

일체의 중생이 본래 항상 常住=머물러 있어 열반에 들어 있으며, 

菩提之法(보리지법) 非可修相(비가수상) 非可作相(비가작상) 畢竟無得(필경무득)

보리의 법은 닦을 수 있는 모양=可修相이 아니며, 지을 수 있는 모양=可作相도 아니고 끝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畢竟無得(본래 있는 것이라서 얻는 것이 아님)것이라고 설한다.

 

亦無色相可見(역무색상가견) 而有見色相者(이유견색상자) 

또한 색상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색상을 보는 것은 

唯是隨染業幻所作(유시수염업환소작) 

오직 오염된 업의 환상=染業幻에 따라 지은 것=所作일 뿐이며

[불타가 중생의 염심(번뇌에 오염된 마음)에 순응하여 나타나는=隨染業幻]

非是智色不空之性(비시지색불공지성) 以智相無可見故(이지상무가견고)

지혜에는 색의 불공의 성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지상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라고 하였다.

[물질이나 형상에는 질량(質量)이 있어 색불공(色不空)]

 

 異相(이상)

異相者(이상자) 如種種瓦器(여종종와기) 各各不同(각각부동)

다른 모양=異相이라고 한 것은 여러 가지 질그릇(도자기)이 각각 같지 않은 것처럼

如是無漏無明(여시무루무명) 隨染幻差別(수염환차별) 性染幻差別故(성염환차별고)

이와 같은 무루와 무명은 오염된 환영=染幻을 따르는 차별이며, 오염된 환영의 차별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수염환(隨染幻)= 무루의 본각은 본래 차별이 없는 것이지만 염법(중생의 번뇌심)에는 각기 차별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순응하여 차별이 있는 것 같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성염환(性染幻)= 이에 대하여 무명에 의한 근본지말불각은 그 성질상 차별이 있다. 그러나 무명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명염법의 차별도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2. 生滅(생멸)의 因緣(인연)

 (1) 五意(오의)와 轉起(전기)

復次生滅因緣者(부차생멸인연자) 所謂衆生依心(소위중생의심) 意意識轉故(의의식전고)

또한 생멸하는 인연=生滅因緣(생멸심을 일으키는 연기)이란, 이른바 중생은 마음=心에 의지하여 의(뜻)와 의식이 轉變=바뀌기 때문이다.

此義云何(차의운하) 以依阿梨耶識(이의아리야식) 說有無明(설유무명).

이 뜻이 무엇인가? (마음에 의지함이란) 아뢰야식(무명)에 의지함으로써 무명이 있음을 말하며, 

[인연에 의해 의(意)와 의식(意識)이 전변함을 밝히고자 했기 때문에 以依阿黎耶識 說有無明]

不覺而起(불각이기) 能見能現(능견능현) 能取境界(능취경계)

불각이 일어남에 능히 보고=能見(전식), 능히 나타내며=能現(현식), 능히 경계를 취하여=能取境界(지식),

起念相續(기념상속) 故說爲意(고설위의)

망념(생각)=念을 일으켜 상속하는=起念相續(상속식)이므로 ‘의’라고 말한다. 

 

此意復有五種名(차의부유오종명) 云何爲五(운하위오)

이러한 뜻에는 다섯 가지 이름(명칭)이 있으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一者(일자) 名爲業識(명위업식) 謂無明力(위무명력) 不覺心動故(불각심동고)

첫째는 업식이라 이름하니, 이른바 무명의 힘으로 불각의 마음(망심, 생멸심)이 움직이기 때문이요,

[진여가 무명의 영향으로 처음으로 움직이는, 생멸심이 일어나는 점이 업(業)의 시작]

二者(이자) 名爲轉識(명위전식) 依於動心(의어동심) 能見相故(능견상고)

둘째는 전식이라 이름하니, 움직인 마음=불각심에 의지하여 능히 볼 수 있는 모양=能見相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곧 분별한다는 것이며, 주관적인 작용이 거기에 나타나는 것,  티끌 하나가 어렴풋한 모양을 갖추는 단계]

三者(삼자) 名爲現識(명위현식) 所謂能現一切境界(소위능현일체경계)

셋째는 현식이라 이름하니, 이른바 일체의 경계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대상을 대하면 저절로 의지와 관계없이 대상을 바로 나타내므로 시간의 전후가 없이 항상 그러하다.]

猶如明鏡現於色像(유여명경현어색상) 現識亦爾(현식역이) 隨其五塵(수기오진)

마치 밝은 거울에 물체의 빛깔(색상)과 모양(형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현식 또한 그러하여 그 다섯 가지 경계=五塵을 따라서

對至卽現(대지즉현) 無有前後(무유전후) 以一切時(이일체시)

대상이 부딪치면(이르러면) 곧 나타나지만 전후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든지=一切時에

任運而起(임운이기) 常在前故(상재전고)

임의로 운행하여 일어나, 항상 바로 목전에 있기 때문이다.

 

四者(사자) 名爲智識(명위지식) 謂分別染淨法故(위분별염정법고)

넷째는 지식이라 이름하니, 염법과 정법을 분별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분별하는 주체가 의식하게 되는 제7식, 말나식. 현식이 거울에 투영되듯 나타나는 것이며, 거울에 투영된 모양에 대해 구체적인 분별을 일으키는 단계가 지식의 단계]

五者(오자) 名爲相續識(명위상속식) 以念相應不斷故(이념상응불단고)

다섯째는 상속식이라 이름하니, 망념=念이 서로 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상속식(相續識)= 의식(意識), 허망된 집착으로 일을 따라 반연하여 육진(六塵) 경계를 분별하므로 의식이라고 말한다. 또한 분리식(分離識) 또는 분별사식(分別事識: 사물을 분별하는 식)] 

住持過去無量世等(주지과거무량세등) 善惡之業(선악지업) 令不失故(영불실고)

과거의 한량없는 세상들에서의 선업과 악업을 간직하여 잃지 않는 까닭이며,

復能成熟現在未來苦樂等報(부능성숙현재미래고락등보) 無差違故(무차위고)

또 현재와 미래의 괴로움과 즐거움=苦樂 등과 같은 업보(과보)를 성숙시켜 어긋남이 없는 까닭으로,

能令現在已經之事(능령현재이경지사) 忽然而念(홀연이념)

현재와 이미 겪고 지나간 일을 문득 생각하게 하고 

未來之事(미래지사) 不覺妄慮(불각망려)

미래의 일을 알지도 못하면서 망령되게 염려하게 한다.

[업식(業識)= 무명에 의하여 불생불멸의 일심이 기동하여 생멸심으로 바뀐 것.
전식(轉識)= 생멸심이 주객으로 분화하여, 주관의 작용으로 활동하는 마음
현식(現識)= 객관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마음, 경계상.
지식(智識)= 현식의 경계상을 외계(外界)라고 망상하여 그것을 여러 가지로 분별하는 마음작용
상속식(相續識)= 지식의 결과를 유지하고 마음의 작용을 지속시켜 가는 식(識), 과거의 업을 간직하고 과보로 성숙시켜 기억을 유지하는 등의 작용]

 

 (2) 三界唯心(삼계유심)

是故三界虛僞唯心所作(시고삼계허위유심소작) 離心則無六塵境界(리심즉무육진경계)

그러므로 삼계(일체법)는 실재가 아니고 마음을 통하여 만들어진, 허위로써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 허망한 것이며, 마음을 여의면 색성향미촉법의 육진 경계도 사라지게 된다.

此義云何(차의운하) 以一切法(이일체법) 皆從心起(개종심기) 妄念而生(망념이생)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일체의 법은 모두 마음따라 일어나, 망령된 생각으로 생겨난 것이니, 

一切分別(일체분별) 卽分別自心(즉분별자심) 心不見心(심불견심) 無相可得(무상가득)

일체의 분별은 곧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며,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기에  (애초에 없는 자기 마음의) 모습은 가히 얻을 수 없는 것이다.

[一切分別 卽分別自心 : 모든 분별은 곧 자기 마음을 분별한 것, 心不見心 無相可得 :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다.]

當知世間一切境界(당지세간일체경계) 皆依衆生無明妄心(개의중생무명망심) 

而得住持(이득주지)

마땅히 알라. 세간의 모든 경계는 모두 중생들의 무명의 허망한 마음=無明妄心에 의지하여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니,

是故一切法(시고일체법) 如鏡中像無體可得(여경중상무체가득) 唯心虛妄(유심허망)

그러므로 일체법은 마치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본체(실체) 가히 얻을  없는 것으로 오직 마음의 헛된 망상일 뿐이다.

以心生則種種法生(이심생즉종종법생) 心滅則種種法滅故(심멸즉종종법멸고)

왜냐하면, 마음이 생겨 나면 갖가지의 법이 생겨 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의 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3) 意識(의식)

復次言意識者(부차언의식자) 卽此相續識(즉차상속식)

또한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곧 상속식에 의지하여 있는 것이니, 

[의식(意識)= 분별사식, 사물을 분별하는 거친 마음의 작용. 의식은 마음 안팎의 사물을 분별하는 것이어서, 분별사식이라고도 하며 유식설의 제6식인 의식과 구별하여야 한다.]

依諸凡夫(의제범부) 取著轉深(취착전심)

모든 범부가 취하고 집착함에 의지하여 더욱 깊어져서,

計我我所(계아아소) 種種妄執(종종망집) 隨事攀緣(수사반연)

나=我와 나의 것=我所를 헤아려 따지고, 갖가지 허망한 집착으로 사물에 따라 반연하여 

[반연(攀緣)= 망념이 대상에 집착하여 여러 가지로 활동하는 것.]

分別六塵(분별륙진) 名爲意識(명위의식)

육진 경계을 분별하므로 이에 이름하여 의식이라고 한다.

亦名分離識(역명분리식) 又復說名分別事識(우부설명분별사식)

또한 분리식이라고도 이름하며, 다시 사물을 분별하는 식=分別事識이라고도 이름하나니, 

此識依見愛煩惱增長義故(차식의견애번뇌증장의고)

이 식(아리야식)이 견번뇌와 애번뇌=見愛煩惱에 의지하여 증가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견애번뇌(見愛煩惱)= 번뇌는 견(見)과 애(愛)의 두 가지로 나눈다. 도리에 미(迷)한 번뇌를 견혹(見惑)이라 하고, 정서적으로 애착하고 탐하는 등의 번뇌를 수혹(修惑)이라 한다. 즉 견혹(見惑)과 수혹(修惑)에 의하여 번뇌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4) 緣起(연기)의 深奧(심오)함

依無明熏習(의무명훈습) 所起識者(소기식자) 非凡夫能知(비범부능지)

무명의 훈습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식이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亦非二乘智慧所覺(역비이승지혜소각)

역시 이승의 지혜로도 깨닫는 바도 아니다.

謂依菩薩(위의보살) 從初正信(종초정신) 發心觀察(발심관찰)

이는 보살이 처음의 바른 믿음=從初正信으로부터 발심하고 관찰함을 의지하여

[처음 정신(初正信)= 보살의 최하위, 십신의 만위에 이르러 믿음이 완성되면 정신을 일으킨다.여기서는 그 위 십주(十住), 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의 삼현위(三賢位) 보살]

若證法身(야증법신) 得少分知(득소분지)

법신을 증득하면 조금 알 수 있게 되며, 

[법신(法身)= 초지이상이 되면 불의 법신을 깨닫는다. 연기의 법은 우주에 편만되어 있어서 이(理)와 합체된 불(佛)이 법신이다.]

乃至菩薩究竟地(내지보살구경지) 不能盡知(불능진지) 唯佛窮了(유불궁료)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에 이른다 하여도 다 알 수는 없고, 오직 부처님만이 궁극까지 모두 아신다.

[보살 구경지(菩薩究竟地)= 보살의 최상위, 법운지, 십지의 만심(滿心)]

何以故(하이고) 是心從本已來(시심종본이래) 自性淸淨(자성청정)

왜냐하면 이 마음(무명)은 본래부터 자성이 청정하지만 

而有無明(이유무명) 爲無明所染(위무명소염) 有其染心(유기염심)

무명이 있어, 무명에 의하여 물듦이 되어, 물든 마음(생멸심)=染心이 있는 것이다.

[염심(染心)= 번뇌에 오염된 마음. 무명에 의하여 생멸심이 된 마음, 여기서 心(심)은 아리야식]

雖有染心(수유염심) 而常恒不變(이상항불변) 是故此義唯佛能知(시고차의유불능지)

비록 물든 마음이 있으나 항상 불변하니, 그러므로 이 뜻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5) 無明(무명)의 忽然念起(홀연염기)

所謂心性常無念故(소위심성상무념고) 名爲不變(명위불변)

이른바 마음의 본성=心性(마음의 본성, 심진여)은 항상 그러하여 망념이 없는=無念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불변하다고 하며,

以不達一法界故(이부달일법계고) 心不相應(심불상응)

하나의 법계=一法界(심진여 또는 일심)를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본성에) 상응하지 못하여

[불상응(不相應)=마음이 주관과 객관의 대응관계로 활동하기 직전의 상태.]

忽然念起(홀연념기) 名爲無明(명위무명)

홀연히 망념을 일으킨 것을 이름 하여 무명이라고 한다.

 

(6) 有染心(유념심)

㉮ 枝末無明(지말무명)의 여읨

染心者(염심자) 有六種(유육종) 云何爲六(운하위육)

염심이라는 것은 여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여섯이라 하는가?

一者(일자) 執相應染(집상응염) 依二乘解脫(의이승해탈) 及信相應地遠離故(급신상응지원리고)

첫째 집착으로 상응하는 오염=執相應染이니, 성문 연각의 이승의 해탈과 믿음에 상응하는 경지=信相應地에 의지하여 멀리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며,

[집상응염(執相應染)= 집(執)은 집착을 일컬음, 아집과 법집이 있다. 여기서는 아집을 말하며, 앞에서의 집취상(執取相), 계명자상(計名字相) 즉 의식(분별사식分別事識)의 집착을 말한다.
신상응지(信相應地)= 십주, 십행, 십회향의 삼현위(三賢位). 십주이상은 신심이 순후해재고 신근이 성취되어 후퇴하는 일이 없으므로 그들을 신상응지 사람이라고 한다.]

二者(이자) 不斷相應染(불단상응염) 依信相應地(의신상응지)

둘째, 끊어지지 않고 상응하는 오염=不斷相應染이니, 신상응지를 의지하여 

修學方便(수학방편) 漸漸能捨(점점능사) 得淨心地(득정심지) 究竟離故(구경리고)

방편을 수행하고 배워, 점점 버릴 수 있으며, 정심지에 이르러서 완전히 여읠 수 있기 때문이며,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 부단은 단절되지 않고 연속하여 일어나는 것. 망념이 단절되지 않고 더욱이 법집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번뇌. 상속상(相續相), 상속식(相續識)에서의 염심을 말한다.]

三者(삼자) 分別智相應染(분별지상응염) 依具戒地漸離(의구계지점리)

셋째 분별하여 알아 상응하는 오염=分別智相應染이니, 구계지를 의지하여 점차 여의게 되며,

乃至無相方便地(내지무상방편지) 究竟離故(구경리고)

나아가 무상방편지에 이르러야 완전히 여읠 수 있기 때문이며,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은 지상(知相)의 지식(智識)이 일으키는 번뇌, 지식은 애(愛)와 불애(不愛), 호(好)와 악(惡), 염(染)과 정(淨) 등을 분별하는 분별지(分別智)의 번뇌이다.]

四者(사자) 現色不相應染(현색불상응염) 依色自在地能離故(의색자재지능리고)

넷째, 현색에 상응하지 않는 오염=現色不相應染이니, 색자재지에 의지하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며,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 현색(現色)이란 밝은 거울에 색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근본무명에 의하여 성립된 염심(染心)에 대상의 세계가 반영되는, 현식(現識)의 작용. 염심에 반영된 현색(現色)의 경계상(境界相)은 근본무명에 의하여 성립되어 동시에 능견상(能見相)의 전식(轉識)과 서로 대응관계없이, 단독으로 경계가 현식(現識)에 반영되는 것.]

五者(오자) 能見心不相應染(능견심불상응염) 自心在地能離故(자심재지능리고)

다섯째, 능견의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 오염=能見心不相應染이니, 심자재지에 의지하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며,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 능견심(能見心)은 전식(轉識)의 작용으로서, 망념이 외계를 보려는 주관적 부분.]

六者(육자) 根本業不相應染(근본업불상응염)

여섯째, 근본업에 상응하지 않는 오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依菩薩盡地(의보살진지) 得入如來地能離故(득입여래지능리고)

보살지의 다함=菩薩盡地에 의지하여 부처의 경지에 들어 여래지에서만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 무명업상(無明業相)에서의 염심(染心). 무명의 힘에 의하여 불각의 마음이 기동하는 것으로, 현실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우리의 분별심, 즉 망념의 근본이므로 근본업이라 하고, 일심에 상응하지 못하고 불각의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에 불상응염.]

 

㉯ 根本無明(근본무명)의 여의어 끊음

不了一法界義者(불료일법계의자) 從信相應地(종신상응지)

일법계의 뜻을 不了=분명히 알지 못하는 자는, 신상응지로부터 

[불료일법계(不了一法界)= 근본무명을 말함. 신진여의 일법계를 통달하지 못한 것.]

觀察學斷(관찰학단) 入淨心地(입정심지) 隨分得離(수분득리)

관찰하여 배우고 끊으며, 정심지에 들어가면 (수행하는) 분수에 따라 여의게 되며, 

乃至如來地(내지여래지) 能究竟離故(능구경리고)

나아가 여래지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여의게 되기 때문이다. 

言相應義者(언상응의자) 謂心念法異(위심념법이)

상응한다는 뜻=相應義는 심(마음)=心法과 염법(心所)이 다른 것을 말하며, 

[心念, 마음과 염법= 심법과 염법을 말함. 심법은 심왕(주관)이고 염법은 심소(객관)의 뜻으로 그 사이에 서로 대응관계가 있다는 것. 心念法異 : 마음 작용의 주체를 심왕(心王), 마음 작용을 심소(心所). 심왕과 심소는 다르다.]

依染淨差別(의염정차별) 而知相緣相同故(이지상연상동고)

물듦=染과 청정함=淨에 의지하여 차별이 있으나, 지상과 연상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지상(知相)은 능연(能緣)의 주관이고, 연상(緣相)은 소연(所緣)의 객관을 말한다.]

不相應義者(불상응의자) 謂卽心不覺(위즉심불각)

상응하지 않는다는 뜻=不相應義은 심(마음)에 즉(卽)한 불각임을 말하며, 

常無別異(상무별이) 不同知相緣相故(부동지상연상고)

항상 다름(차이)이 없어서, 지상과 연상이 같지 않음=不同을 말하기 때문이다.

[상응의(相應義)= 심(心)과 염법(念法)이 달라서 물듦과 깨끗함[染淨]의 차별을 의지하여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같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지상과 연상이 같다는 말은 내 속에 든 것과 나타나는 것이 같음을 말한 것입니다.]
불상응의(不相應義)= 마음의 불각(不覺)이라 항상 차별의 다름이 없어서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같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진여나 제8식은 우리의 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상과 연상이 같지 않습니다. 즉 내 속에 든 것과 나타나는 것이 같지 않습니다. ]

又染心義者(우염심의자) 名爲煩惱礙(명위번뇌애) 能障眞如根本智故(능장진여근본지고)

또 염심(육염심의 번뇌)이란 뜻은, 이름하여 번뇌애라고 하나니, 능히 진여의 근본지=眞如根本智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번뇌애(煩惱礙)= 번뇌가 지혜를 장애하는 것을 말함.
진여근본지(眞如根本智)= 번뇌는 마음의 적정을 장애하기 때문에 일심의 무념을 어지럽히는 점을 진여의 근본지를 막는다고 말한다. 진여근본지는 진여의 이(理)를 증득한 근본무분별지를 말한다]

無明義者(무명의자) 名爲智礙(명위지애) 能障世間自然業智故(능장세간자연업지고)

무명의 뜻이란, 이름하여 지애(소지장)라고 하나니, 능히 세간의 자연업지(후득지)를 장해하는 까닭이다. 

此義云何(차의운하) 以依染心(이의염심) 能見能現(능견능현)

이 뜻이 무엇인가? 염심에 의하여 能見(能見相, 전식-아리야식)=볼 수 있고, 能現(境界相, 현식-아리야식)=나타낼 수 있으며, 

妄取境界(망취경계) 違平等性故(위평등성고)

妄取境界(지식-말나식)=망령되이 경계를 취하여 평등한 본성=平等性을 어기기 때문이다.

 

以一切法(이일체법) 常靜無有起相(상정무유기상)

일체법은 항상 고요하여 상을 일으킴=起相이 없으나, 

無明不覺妄與法違故(무명불각망여법위고)

무명의 불각이 망념(妄念)과 더불어 법(진여의 법)과 어긋나기 때문에, 

不能得隨順世間一切境界種種智故(불능득수순세간일체경계종종지고)

세간의 일체 모든 경계를 따르는 갖가지 지혜를 능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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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本覺의 意味

1. 隨染本覺(수염본각)  

復次本覺(부차본각) 隨染分別(수염분별) 生二種相(생이종상) 

또 다음에 본각이 물듦(세속)=染에 따라 분별하면, 두 가지 상을 내나니 

與彼本覺(여피본각) 不相捨離(불상사리) 云何爲二(운하위이) 

그 둘은 본각과 더불어 서로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니,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一者智淨相(일자지정상) 二者不思議業相(이자불사의업상)

첫째는 지정상이며, 둘째는 불사의업상이다.

 

① 智淨相(지정상) 

智淨相者(지정상자) 謂依法力熏習(위의법력훈습) 如實修行(여실수행)

(본각이 오염된 번뇌를 떠나 본래의 본각에 귀환하는) 지정상이라는 것은 법력의 훈습(내훈력과 외훈력)에 의하여 참답게 수행하여

滿足方便故(만족방편고) 破和合識相(파화합식상)

방편을 만족(십지의 만신, 깨달음의 수행이 완성)하였으므로, 화합한 식상=화합식(아리야식이라 일컫는 진망화합식의 상)의 모습을 깨뜨리고, 

滅相續識相(멸상속식상) 顯現法身(현현법신) 智淳淨故(지순정고)

망념이 이어지는=상속심의 모습을 멸하여, 법신을 나타내는 것은 지혜가 맑고 청정하기 때문이니,

此義云何(차의운하) 以一切心識之相(이일체심식지상) 皆是無明(개시무명)

이 뜻이 무엇인가? 일체의 심식의 모습(아리야식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식, 즉 업식, 전식, 현식, 지식, 상속식 등)은 모두 무명이며, 

無明之相(무명지상) 不離覺性(불리각성) 非可壞非不可壞(비가괴비불가괴)

무명의 모습은 깨어있는 성품=覺性(본각)을 떠나지 않으니, 파괴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파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如大海水(여대해수) 因風波動(인풍파동) 水相風相(수상풍상) 不相捨離(불상사리) 

마치 큰 바닷물이 바람으로 인하여 파도가 치며, 물의 모습과 바람의 모습이 서로 버리거나 뗄 수 없는 것이나,

而水非動性(이수비동성) 若風止滅(약풍지멸) 動相則滅(동상즉멸)

물은 움직이는 성질=動性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만일 바람이 그치면 물의 움직임도 사라지지만

濕性不壞故(습성불괴고)

(물의) 젖은 성질=濕性은 파괴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如是衆生(여시중생) 自性淸淨心(자성청정심) 因無明風動(인무명풍동

이와 같이 중생의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 무명의 바람으로 인하여 움직이나,

心與無明(심여무명) 俱無形相(구무형상) 不相捨離(불상사리) 

마음과 무명이 모두 형상이 없으서 서로 버리고 떠나 있을 수 없으니,

而心非動性(이심비동성) 若無明滅(약무명멸) 相續則滅(상속즉멸)

마음은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어서, 만약 무명이 사라지면 상속하는 마음도 곧 사라지니,

智性不壞故(지성불괴고)

지혜의 성품은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②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  

不思議業相者(불사의업상자) 以依智淨相(이의지정상)

불사의업상(지정상이 내인이 되어 갖가지 밖으로 좋은 작용을 하는)이라는 것은 지혜의 깨끗함=智淨相에 의지함으로써

能作一切勝妙境界(능작일체승묘경계) 所謂無量功德之相(소위무량공덕지상) 

능히 일체의 뛰어나고 오묘=勝妙한 경계를 만들어내나니,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모습은 

常無斷絶(상무단절) 隨衆生根(수중생근) 自然相應(자연상응) 

항상 단절됨이 없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서로 상응하여 

種種而現(종종이현) 得利益故(득리익고)

갖가지로 나타나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2. 性淨本覺(성정본각)  

復次覺體相者(부차각체상자) 亦四種大義(역사종대의)

다시 또한 각의 본체 모습=體相(본각 그 자체)에는 네 가지 큰 뜻=大義가 있으며,

與虛空等(여허공등) 猶如淨境(유여정경) 云何爲四(운하위사)

허공같이 맑고 깨끗한 거울과 같으니, 무엇을 넷이라고 하는가?

一者(일자) 如實空鏡(여실공경) 遠離一切心境界相(원리일체심경계상)

첫째는 본각진여에 번뇌가 없는=如實空鏡이다. 일체 마음의 경계의 모습=境界相을 멀리 떠나 있어

無法可現(무법가현) 非覺照義故(비각조의고)

어떠한 법도 나타날 수 없으니, 각은 비추어 주는=覺照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二者(이자) 因熏習鏡(인훈습경) 謂如實不空(위여실불공)

둘째, 인을 훈습하는 거울=因熏習鏡(무량한 성공덕이 가득 차 있는 그 거울에는 무량한 공덕이 그대로 비추어 지는)이니, 여실하여 공하지 않음을 말하니,

一切世間境界(일체세간경계) 悉於中現(실어중현) 不出不入(불출불입) 

일체 세간의 경계 모두가 그 가운데 나타나되, (진여에서 직접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명의 훈습을 기다려 생기는 것이므로) 불출이며,  (마음이 바로 진여의 힘이어서, 그것이 무명의 연으로 생기는 것이므로) 불입이며,

不失不壞(부실불괴) 常住一心(상주일심) 以一切法卽眞實性故(이일체법즉진실성고)

(진여 본성을 잃는 것이 아니므로) 불실이며, (진여가 변형되어 나타난 연생의 만법이므로 진여가 파괴되지 않는) 불괴이며, (본성은 하나라서) 항상 일심에 머무니, 일체법이 곧 참다운 성품=眞實性이기 때문이다.

又一切染法(우일체염법) 所不能染(소불능염) 智體不動(지체부동)

또 일체의 오염된 법=染法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며, 지혜 자체=智體(본각의 진여의 체)가 움직이지도 않고

具足無漏(구족무루) 熏衆生故(훈중생고)

샘이 없는=無漏(번뇌가 없음)를 구족하여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三者(삼자) 法出離鏡(법출리경) 謂不空法(위불공법)

셋째, 법에서 멀리 떠난 거울=法出離鏡(번뇌에서 벗어난 법, 진여로써 체대와 상대를 합한 법신)이니, 말하자면 비지 않는 법=不空의 법을 말함이니,

出煩惱礙智礙(출번뇌애지애) 離和合相(리화합상) 淳淨明故(순정명고)

이는 번뇌의 장애=煩惱礙(번뇌장)와 지혜의 장애=智礙(지장)를 벗어나, 생멸의 화합상(업식 전식 현식 상속식 등 진망화합식의 상)을 여읜, 순전히 깨끗한=淳淨하고 밝은 때문이다.

 

四者(사자) 緣熏習鏡(연훈습경) 謂依法出離故(위의법출리고)

넷째, 연을 훈습하는 거울=緣熏習鏡(본각이 밖에서 중생의 연으로 작용하여 시각의 지를 일어나게 하는, 외연의 활동)이니, 이른바 법을 멀리 떠난=法出離(본각이 번뇌애와 지애를 벗어나고 화합상을 떠난 것)를 의지하므로

遍照衆生之心(편조중생지심) 令修善根(영수선근) 隨念示現故(수념시현고)

두루 중생의 마음을 고루 비추어서,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닦게 하며, 생각=念에 따라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5) 不覺(불각)의 의미

根本不覺(근본불각) - 불각이 생긴 자체

所言不覺義者(소언불각의자) 謂不如實知眞如法一故(위불여실지진여법일고)

이른바 불각의 뜻이란 있는 그대로 진여의 법이 하나임을 참답게 알지 못하는 때문에 

不覺心起(불각심기) 而有其念(이유기념) 念無自相(념무자상) 不離本覺(불리본각)

이로써 깨닫지 못한 마음=不覺心이 일어나, 분별(망념)=念이 있는 것이며,

그 분별(망념)=念이란 독립된 모습=自相(망념 또한 진여를 떠나 독립된 모습)이 없어서 본각을 여의지 않으니, 

猶如迷人(유여미인) 依方故迷(의방고미) 若離於方(약리어방) 則無有迷(즉무유미)

마치 방향을 잃어 혼미한 사람은 방향(방위)에 의지하기 때문에 미혹된 것과 같으니, 만약 방향(방위)을 여읜다면 혼미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衆生亦爾(중생역이) 依覺故迷(의각고미) 若離覺性(약리각성) 則無不覺(즉무불각)

중생 또한 그와 같아서, 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미혹하였지만, 만약 각의 성질=覺性을 여읜다면 깨닫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以有不覺妄想心故(이유불각망상심고) 能知名義(능지명의) 爲說眞覺(위설진각)

왜냐하면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명칭과 의의=名義만으로 알기에 진각을 설하게 되며,

若離不覺之心(약리불각지심) 則無眞覺自相可說(즉무진각자상가설)

만약 불각의 마음만 떠나면, 진각의 자체 모습=自相이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 枝末不覺(지말불각)의 三細(삼세)

復次依不覺故(부차의불각고) 生三種相(생삼종상)

다시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세 가지 모양=三種相을 내어서,

與彼不覺(여피불각) 相應不離(상응불리) 云何爲三(운하위삼)

근본 불각과 상응하여 여의지 않으니, 무엇을 그 셋이라 하는가?

 

一者(일자) 無明業相(무명업상) 以依不覺故心動(이의불각고심동) 說名爲業(설명위업)

첫째는 무명업상(제8식 아뢰야식의 첫 출발점)이니, 깨닫지 못함=不覺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心動 (심식이 움직이는)으로, 이를 업이라고 하니,

覺則不動(각즉부동) 動則有苦(동즉유고) 果不離因故(과불리인고)

깨달으면 곧 움직임이 없지만, 움직이면 곧 괴로움이 따르나니, 결과=果가 원인=因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각(覺)과 부동(不動), 동(動)과 유고(有苦)는 각각 인(因)과 과(果)를 이루는 과불리인)

 

二者(이자) 能見相(능견상), 以依動故能見(이의동고능견) 不動則無見(부동즉무견)

둘째는 주체적으로 생각을 일으켜, 주체적인 형상을 만드는=능견상(전상)이니, 앞의 움직임에 의지하기 때문에 능히 볼 수 있으며, 움직이지 않으면 곧 볼 수 없다. 

 

三者(삼자) 境界相(경계상) 以依能見故(이의능견고)

셋째는 앞의 전상에 의해 경계를 나타내는=경계상(현상)이니, 능견상에 의지하기 때문에 

境界妄現(경계망현) 離見則無境界(이견즉무경계)

(나와 너를 분별하는) 경계가 허망하게 나타나지만, 봄=能見(경계상)을 여의면 경계도 없다. 

 

㉰ 枝末不覺(지말불각)의 六麤(육추)

以有境界緣故(이유경계연고) 復生六種相(부생육종상) 云何爲六(운하위육)

왜냐하면 경계의 반연=緣이 있기 때문에 다시 여섯 가지의 모양을 내나니, 무엇이 그 여섯인가?

 

一者(일자) 智相(지상) 依於境界(의어경계) 心起分別愛與不愛故(심기분별애여불애고)

첫째는 안다, 판단한다는 정도의 세속적 지혜=지상이니, 경계상에 의지하여 마음이 일어나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음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二者(이자) 相續相(상속상) 依於智故(의어지고) 生其苦樂(생기고락)

둘째는 (앞의 지상을 바탕으로 애의 대상에 대하여서는 락수를, 불애의 대상에 대하여서는 고수의 인식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는) 상속상이니, 지상에 의지하기 때문에 괴롭고 즐거음=苦樂을 느끼는 마음을 내어

覺心起念相應不斷故(각심기념상응부단고)

생각(망념)을 일으켜 서로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三者(삼자) 執取相(집취상) 依於相續(의어상속) 緣念境界(연념경계)

셋째는 (좋아하는 것을 가지려 하는=貪과 싫어하는 것을 버리려 하는=瞋)집취상이니, 상속하는 마음=상속상에 의지하여 경계를 반연하여,

住持苦樂(주지고락) 心起著故(심기착고)

생각해서 (애착을 일으켜) 괴로움과 즐거움에 빠져 마음에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四者(사자) 計名字相(계명자상) 依於妄執(의어망집) 分別假名言相故(분별가명언상고)

넷째는 (앞의 고락의 경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름과 말을 붙여 분별하고 그릇되게 헤아리는=의업(意業))계명자상이니, 허망한 집착에 의지하여 거짓 이름=假名과 언설의 모양=言相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五者(오자) 起業相(기업상) 依於名字(의어명자) 尋名取著(심명취착) 造種種業故(조종종업고)

다섯째는 (신업과 구업) 기업상이니, 계명자상에 의지하여 이름을 따라 취하고, 집착하여 여러 가지의 업을 짓기 때문이다. 

 

六者(육자) 業繫苦相(업계고상) 依於業受報(의어업수보) 不自在故(부자재고)

여섯째는 앞의 선악의 업에 의하여 계박되어, 특히 고를 받는 상=業繫苦相이니, 기업상에 의지하여 과보를 받아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當知(당지) 無明能生一切染法(무명능생일체염법)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무명이 능히 모든 오염된 법=염법을 내나니,

以一切染法皆是不覺相故(이일체염법개시불각상고)

왜냐하면 모든 염법은 불각의 모양=不覺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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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解釋分(해석분) - 근본 사상의 해설

  1) 總說(총설) 

已說立義分(이설입의분) 次說解釋分(차설해석분)

이미 입의분은 설명하였으니, 다음은 해석분을 설명하겠다.

解釋分有三種(해석분유삼종) 云何爲三(운하위삼)

해석분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셋인가?

一者顯示正義(일자현시정의) 

첫째, 바른 뜻을 드러냄=顯示正義이며,

二者對治邪執(이자대치사집) 

둘째, 그릇된 집착=집착을 다스려 바로 잡는 =對治邪執이며,

三者分別發趣道相(삼자분별발취도상)

셋째 마음을 내어 깨달음에로 나아가는 발심과 수행의 길을 분석 분별하는=分別發趣道相이다.

 

2) 顯示正義(현시정의)  

㉮ 二門(이문)  

顯示正義者(현시정의자) 依一心法(의일심법) 有二種門(유이종문) 云何爲二(운하위이)

바른뜻을 나타냄=顯示正義는 일심법(전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유심)에 의하는 것으로서 두가지의 문이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心眞如門(일자심진여문) 二者心生滅門(이자심생멸문)

첫째는 (생멸변화가 없는 영원한 측면에서의) 심진여문이며, 둘째는 (마음이 생멸변화하는 현상적 측면에서의) 심생멸문이다.

是二種門(시이종문) 皆各總攝一切法(개각총섭일체법)

이 두가지의 문은 모두 각각 일체법을 총섭하니,

此義云何(차의운하) 以是二門(이시이문) 不相離故(불상리고)

이 뜻이 무엇을 말하는가? 이 두 문=二門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2) 心眞如門(심진여문)  

   ① 離言眞如(이언진여)  

心眞如者 卽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심진여자 즉시 일법계 대총상법문체).

심진여라는 것은 곧 (생멸을 초월하여 일체 제법을 수용하는 총체적 모습인) 하나의 법계=一法界로서, 대총상 법문의 본체이다.

所謂心性(소위심성) 不生不滅(불생불멸) 諸法唯依妄念(제법유의망념)

이른바 (마음의 본성, 본체로서, 일컬어 심진여인 )심성이란 남도 없고 멸함도 없는=不生不滅이나, 오직 (무명의) 망념에 의하여 차별이 있는 것이니,

而有差別(이유차별), 若離妄念(약리망념) 則無一切境界之相(즉무일체경계지상)

만약 (마음의 분별을 일으키는 무명) 망념=心念을 떠나면 곧 일체경계의 모습=相이 없어지느니라.

是故一切法(시고일체법) 從本已來(종본이래) 離言說相(이언설상)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언설의 상=言說相을 떠나 있으며, 

離名字相(이명자상) 離心緣相(이심연상) 畢竟平等(필경평등) 

명자의 상=名字相을 떠나 있으며, 심연의 상=心緣相을 떠나 있어 필경에는 평등하느니라.

不可破壞(불가파괴) 唯是一心(유시일심) 故名眞如(고명진여)

변하거나 달라짐이 있지 아니하고, 파괴될 수 없으며, 이것은 오직 일심(한 마음)이기 때문에 진여라고 이름한다.

以一切言說(이일체언설) 假名無實(가명무실) 但隨妄念(단수망념) 不可得故(불가득고)

모든 언설은 임시의 이름=假名일 뿐, 실제가 없으며, 다만 망념에 따를 뿐, 그 실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言眞如者(언진여자) 亦無有相(역무유상) 謂言說之極(위언설지극) 因言遣言(인언견언)

진여라고 말하는 것 역시 상이 있는 것이 아니며, 언설의 극을 이르는 것으로서, 말로서 말을 버리는 것이다.

此眞如體(차진여체) 無有可遣(무유가견) 以一切法悉皆眞故(이일체법실개진고)

이 진여의 본체는 버릴 것이 있지 않으니, 일체의 법은 모두 참된=眞이기 때문이다.  

(진여라고 하는 것은 일체법과 독립하여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일체의 법이 모두 참되고 일체의 법이 같기 때문)

亦無可立(역무가립) 以一切法皆同如故(이일체법개동여고)

또한 따로 세울 수 있는 것=無可立이 아니니, 일체의 법이 모두 그대로 같은 때문이다.

當知一切法(당지일체법) 不可說不可念(불가설불가념) 故名爲眞如(고명위진여)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일체법은 언설로 설할 수 없으며,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으니, 그러므로 이름하여 진여라고 한다.

 

問曰(문왈) 若如是義者(약여시의자) 諸衆生等(제중생등) 

물어 말하나니, 만약 이와 같은 뜻이라면 모든 중생들이, 

云何隨順(운하수순) 而能得入(이능득입)

어떻게 수순하고 또한 능히 득입할 수 있는가? 

 

答曰(답왈) 若知一切法(약지일체법) 雖說無有能說可說(수설무유능설가설) 

답하여 말하나니, 만약 일체법을 비록 설할 지라도, 설하는 자기라는 주관=能說과 설하는 바 (일체법이라는) 대상=可說이 있는 것이 아니며,

雖念亦無能念可念(수념역무능념가념) 是名隨順(시명수순),

비록 생각할지라도 역시 (일체법을) 생각하는 자기라는=能念과 생각하는 대상=可念이 없다는 것을 알면, 이것을 수순이라 이름한다.  

若離於念(약리어념) 名爲得入(명위득입)

만약 망념을 떠나면, 이름하여 체득하여 들어 감=得入이라 한다.

 

② 依言眞如(의언진여)  

復次(부차) 此眞如者(차진여자) 依言說分別(의언설분별)

또 이 진여라는 것을 말(언설)에 의하여 분별하면

(여기서 분별이라 함은 생각으로 진여를 추측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깨달은 것을 말로써 나타낸다는 뜻)

有二種義(유이종의) 云何爲二(운하위이)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무엇이 둘이 되는가?

一者(일자) 如實空(여실공) 以能究竟顯實故(이능구경현실고)

첫째는 여실히 공함=如實空(염법인 무명번뇌가 없는 여실공)이니, 능히 궁극적으로 실상=實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며,

二者(이자) 如實不空 (여실불공) 以有自體具足(이유자체구족) 無漏性功德故(무루성공덕고)

둘째는 여실히 공하지 않음=如實不空(심진여는 실재로서 번뇌를 떠난 청정불변의 공덕을 갖추고 있는 여실불공)이니, 스스로 체=自體가 있어 번뇌가 없는=無漏의 성공덕을 갖춤=具足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여실공(如實空)  

所言空者(소언공자) 從本已來(종본이래) 一切染法(일체염법) 不相應故(불상응고)

이른바 공이라는 것은 본래 일체의 미망과 번뇌=染法(무명으로 인해 생멸하는 차별적인 세계)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謂離一切法差別之相(위이일체법차별지상), 以無虛妄心念故(이무허망심념고)

일체법의 차별의 모습=差別相(대상으로서의 모습=所取相을 떠난)을 떠난 것을 말하니, 허망한 분별망상=心念(주관적 견해=能取見을 떠난)이 없기 때문이다.

當知眞如自性(당지진여자성) 非有相(비유상) 非無相(비무상),

마땅히 알라. 진여의 자성은 모양이 있는=유상도 아니고 모양이 없는=무상도 아니며, 

非非有相(비비유상), 非非無相(비비무상),

모양이 있지 않는 것=非有相도 아니고, 모양이 없지 않는 것=非無相도 아니며, 

非有無具相(비유무구상), 非一相非異相(비일상비이상),

유와 무가 함께 있는 상도 아니며, 동일한 모양(하나의 상)=一相도 아니오 다른 상=異相도 아니며, 

非非一相(비비일상), 非非異相(비비이상), 非一異俱相(비일이구상).

일상이 아닌 것도 아니며, 이상이 아닌 것도 아니며, 일상과 이상이 함께 한 상도 아니다.

(진여는 절대 평등한 상이기 때문에 일상(一相)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또한 진여는 연(緣)에 따라 여러가지 상을 나타내는 덕성(德性)이 있기 때문에, 단적으로 다른 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일상(一相)과 이상(異相)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유(有)와 무(無)라는 인식은 주관과 객관의 분열된 상대적 인식계(認識界)에서 인식되는 존재 방식이므로 진실한 인식이 아니며, 따라서 이 같은 상대적 차원에서 주장하는 비유(非有), 비무(非無), 역유(亦有), 역무(亦無), 비비유(非非有), 비비무(非非無) 등이 정당한 인식이 아님은 명백한 이치)

乃至總說(내지총설) 依一切衆生(의일체중생) 以有妄心念念分別(이유망심념념분별)

나아가 총체적으로 말하여, 일체의 중생은 허망한 마음=妄心이 있어서 생각 생각=念念으로 분별분별하는 것을 의지하기에

皆不相應(개불상응) 故說爲空(고설위공) 若離妄心(약리망심) 實無可空故(실무가공고)

모두 서로 응하지 않는=不相應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설하여 공이라 하나니,  만약 망심을 떠나면 실로 공이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진여의 세계는 상대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므로 차별의 상에 기인한, 허망한 신념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경계)

 

  여실불공(如實不空)  

所言不空者(소언불공자) 已顯法體空無妄故(이현법체공무망고) 卽是眞心(즉시진심) 

이른 바 불공이라 함은 이미 법체가 공하여 허망= 이 없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것이 곧 진심이며,

[망심(妄心)이 없어진 여실공(如實空)의 인식계, 다시 말하면 불지(佛智)로서의 심진여(心眞如)이므로 거기에는 무루(無漏)의 성공덕(性功德)을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여실불공]

常恒不變(상항불변) 淨法滿足(정법만족) 故名不空(고명불공), 

(이 진심은) 항상하여 변치않아 정법을 만족하므로 불공이라 이름하지만, 

亦無有相可取(역무유상가취) 以離念境界(이리념경계) 唯證相應故(유증상응고)

역시 형상=相을 취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허망한 생각=망념을 떠난 경계는 오직 증득하여야 상응하기 때문이다.

 

(3) 心生滅門(심생멸문)  

① 心生滅(심생멸)  

㉮ 여래장(如來藏)과 아리야식(阿梨耶識)  

心生滅者(심생멸자) 依如來藏故(의여래장고) 有生滅心(유생멸심),

심생멸이라는 것은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멸하는 마음=生滅心이 있는 것이다. 

[如來藏(여래장)이란 진여가 무명에 덮여 있는 것]

所謂不生不滅與生滅和合(소위불생불멸여생멸화합) 非一非異(비일비이)

名爲阿梨耶識(명위아리야식),

이른바 불생불멸과 생멸이 더불어 화합하여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니, 이름하여 아리야식(제8식)이라 한다.

此識有二種義(차식유이종의) 能攝一切法(능섭일체법) 生一切法(생일체법)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식에는 두 가지 의미(뜻)가 있으니, 능히 일체법을 섭하여 거두고, 일체법을 낳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覺義(일자각의) 二者不覺義(이자불각의)

첫째는 깨달음=覺의 뜻이며, 둘째는 깨닫지 못함=不覺의 뜻이다.

 

(2)  각(覺)의 의미 

㉮ 本覺(본각)과 始覺(시각)

所言覺義者(소언각의자) 謂心體離念(위심체리념)

말하는 바 각의 뜻=覺義이라는 것은 마음의 본체=心體에서 망념=念이 떠난 것을 말하며,

離念相者(이념상자) 等虛空界(등허공계) 無所不遍(무소불편)

離念=망념을 떠난 相=모습이란 허공계와 같은 것으로, 두루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法界一相(법계일상) 卽是如來平等法身(즉시여래평등법신),

법계가 한 모습=法界一相이며, 즉 이것이 바로 여래의 평등법신이니, 

依此法身(의차법신) 說名本覺(설명본각).

이 법신에 의지하여 설하니, 본각(진여)이라 이름한다.  

何以故(하이고) 本覺義者(본각의자) 對始覺義說(대시각의설)

왜냐하면, 본각의 뜻이란 시각(깨달아 가는 각)의 뜻에 상대(배대)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以始覺者(이시각자) 卽同本覺(즉동본각)

시각이란 곧 본각과 같음이다,

 

(3)  시각(始覺)의 의미  

㉮ 시각(始覺)  

始覺義者(시각의자) 依本覺故(의본각고) 而有不覺(이유불각)

시각(번뇌의 망염을 깨면서 깨달음의 지혜가 나타나는 단계)의 뜻이란 본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각(진여가 미혹에 덮여 있는 불각)이 있게 되며,

依不覺故(의불각고) 說有始覺(설유시각)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시각이 있다고 설하며,

[시각(始覺)의 정의(定義)를 본각(本覺)과 불각(不覺)의 삼자(三者) 관계에서 찾고 있으며, 불각(不覺)과 시각(始覺)은 명확한 구별이 없다]

又以覺心源故(우이각심원고) 名究竟覺(명구경각)

또 마음의 근원=心源을 깨달았으므로 구경각이라고 이름하며,

不覺心源故(불각심원고) 非究竟覺(비구경각).

마음의 근원=心源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구경각이 아니라고 한다.

[시각(始覺)이 완전한 각(覺)에 이르러 전각(全覺)이 되면, 그것은 불타의 지혜가 되어, 그 이상의 시각(始覺)은 없는 것이므로 이것을 궁극적 깨달음인 구경각(究竟覺)]

 

㉯  불각(不覺)  

此義云何(차의운하) 如凡夫人(여범부인) 覺知前念起惡故(각지전념기악고)

이 뜻은 무엇인가? 범부같은 사람은 앞의 생각=前念이 악을 일으킨다는 것을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能止後念(능지후념) 令其不起(영기불기)

나중 생각=後念을 멈추어 악으로 하여금 일어나지 않게 하며,

雖復名覺(수부명각) 卽是不覺故(즉시불각고)

비록 다시 각이라고 이름할지라도 바로 이것은 불각이기 때문이다.

 

㉰  상사각(相似覺)  

如二乘觀智(여이승관지) 初發意菩薩等(초발의보살등) 覺於念異(각어념이)

이승의 사리를 관하는 지혜=觀智와 처음 뜻을 낸 보살들이라면 생각의 변화를 깨달아 (망념의 다른 모습(나와 나의 것)=異相을 깨닫고,)

念無異相(념무이상) 以捨麤分別執著相故(이사추분별집저상고) 名相似覺(명상사각)

망념의 나와 나의 것=異相이 없으니, 거친 분별의 집착상=麤分別執著相을 버렸으므로 상사각이라 이름한다.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이승(二乘)의 경지 즉, 이승의 수행의 지혜[觀智]와 처음 보리심을 낸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의 단계를 각(覺)에 유사한 단계라 하여 상사각(相似覺)]

 

 수분각(隨分覺)  

如法身菩薩等(여법신보살등) 覺於念住(각어염주) 念無住相(념무주상)

법신보살 등의 경지에 있는 이는 망념=念이 경계에 집착함(머무름)을 깨달아, 생각에 머무는 모습=住相이 없으니,

以離分別麤念相故(이이분별추념상고) 名隨分覺(명수분각)

분별하는 거친 망념의 모습=麤念相을 떠났기 때문에 수분각(수행한 만큼 진여를 깨닫는 수분각)이라 이름한다.

[법신보살은 이들 망념이 마음에서 사라진 것이지만, 아직도 최후의 근원인 생상(生相)이 남아있어 수분각(隨分覺)이라 부르는 것]

 

㉲  구경각(究竟覺) 

如菩薩地盡(여보살지진) 滿足方便(만족방편) 一念相應(일념상응)

보살의 경지(법운지)가 다하여 방편이 만족하여 일념이 상응(일념이 진여 즉 본각과 하나가 됨)하며,

覺心初起(각심초기) 心無初相(심무초상) 以遠離微細念故(이원리미세념고)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상=初起을 깨달아,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상=初相이 없으니, 미세한 망념=微細念을 멀리 여읜 때문에,

得見心性(득견심성) 心則常住(심즉상주) 名究竟覺(명구경각)

마음의 본성= 心性을 볼 수 있게되어, 마음이 늘 如如하여 변함없음=심즉상주하니 구경각이라 이름한다. 

[구경각(究竟覺)은 각(覺)의 최고 단계로서 마음의 본체에 있어서의 영원 불변의 원리와 현상계에 있어서의 생멸변화하는 원리를 완전히 통달한 경지, 망념이 없는 무념의 세계, 화엄경의 해인삼매]

 

㉳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의 관계

是故修多羅說(시고수다라설) 若有衆生(약유중생)

그러므로 경에서 설하되, 만약 어떤 중생이 

能觀無念者(능관무념자) 則爲向佛智故(즉위향불지고)

무념을 관할 수 있으면, 부처의 지혜=佛智에 향하게 된다고 하였다.

又心起者(우심기자) 無有初相可知(무유초상가지)

또한 마음이 일어남=心起라는 것은 그 처음 모습=初相을 알수 없으나,

而言知初相者(이언지초상자) 卽謂無念(즉위무념)

'초상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무념을 말하는 것이다.  

是故一切衆生(시고일체중생) 不名爲覺(불명위각) 以從本來(이종본래) 

이러한 까닭에 일체 중생을 깨달음이라 이름하지 못하는 것은, 본래부터 

念念相續(념념상속) 未曾離念(미증이념) 故說無始無明(고설무시무명).

생각과 생각이 서로 망념으로 이어져=相續하여, 일찍이 그 망념을 떠난 적이 없는 까닭에, 시작도 없는 무명이라 설하는 것이다.

若得無念者(약득무념자) 則知心相生住異滅(즉지심상생주이멸)

만약 망념이 없는=無念을 얻게 되면, 심상의 생주이멸을 알게 되는 것이며,

以無念等故(이무념등고) 而實無有始覺之異(이실무유시각지이)

그것은 무념과 같은 것으로, 실로 시각에 차이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以四相俱時而有(이사상구시이유) 皆無自立(개무자립)

생주이멸의 사상 동시에 함께하여 자립할 수 없으니, 

本來平等(본래평등) 同一覺故(동일각고)

본래 평등하여 동일한 각이 때문이다

[마음이 일어나고 머물며 변하고 사라지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이 본체가 아님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념(無念)과 같다. 마음에서 망념이 일어나는 최초의 모습인 초상(初相)을 볼 수 있다면 거기에는 망념이 일어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이 초상(初相)을 안다면 이는 곧 무념(無念)을 아는 것이 된다. 따라서 망념의 초상(初相)을 안다는 것은 초각(初覺)으로서의 지혜의 완성을 의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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