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3 7

 

▷18계(十八界)의 의식계(意識界, 의법계 意法界)  

阿難!又汝所明,意法爲緣生於意識。此識爲復因意所生,以意爲界?因法所生,以法爲界?

“아난아,  네가 밝힌 바와 같이 뜻(意, 의근意根)과 법이 연이 되어 뜻의 인식인 의식(意識)이 생기는 것이라면, 

 의식(意識)은 뜻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므로, 뜻으로 경계를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법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법으로 계(界)를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阿難!若因意生,於汝意中必有所思,發明汝意。若無前法,意無所生,離緣無形,識將何用?

아난아, 만약 뜻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면, 네 의중(意中)에는 반드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너의 뜻을 나타나게 할 것이나, 만약 앞의 법이 없다면 뜻이 생길 곳이 없을 것이다.

연(緣)을 여의고서는 형상이 없을 것이니, 장차 식(識)을 어디에 쓰겠는가?

ㅡ'지금 너의 의중(意中)에 반드시 생각하는 바 법(法)이 있어서 그로 인해 발명(發明)하는 것이 바로 너의 뜻이다.

그러나 그 뜻은 다만 법진(法塵)을 인연하여 의근(意根)이 있는 듯한 것으로, 만약 앞의 법진이 없다면 뜻 또한 생길 수 없을 것이며, 또 그림자(緣形)를 여읜다면 뜻이 어떤 모양이 되겠는가?

뜻은 스스로 실체가 없는 것이니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경전의 뜻은 이러한 것이다. 

의(意)는 의지할 대상이고, 식(識)은 의지하는 주체이다.

생각해서 헤아리는 것을 의(意)라 이름 하는 것이니, 그 의(意)가 곧 근간(根幹)이 되고,

분별하여 밝히는 것을 식(識)이라 하는 것이니, 이는 의(意)의 식(識)인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전육식(前六識)은 간간히 끊어지는 것이니, 의지함으로 해서 이름을 얻은 것이고, 

칠식(七識)과 팔식(八識)은 항상한 것이니, 당체(當體)로서 이름을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사실 제 칠식(七識)인 말나식(末那識)은 제 육식인 의식(意識)의 근간(根幹)인 것이다.

 

又汝識心與諸思量,兼了別性,爲同爲異?同意卽意,云何所生?異意不同,應無所識。若無所識,云何意生?若有所識,云何識意?唯同與異,二性無成,界云何立?

 너의 식심(識心)과 모든 사량(思量, 의근 意根)과 아울러 분명하게 분별하는 성품인 요별설(了別性)이 같다고 생각하는가?

뜻(意)과 같은 것이라면, 곧 그대로 뜻(意)일 것이니, 어떻게 생길 것이며?

뜻과 다르다면, 같지 않은 것이므로 당연히 식(識)이 없어야 하리라. 

만약 식(識)의 대상이 없다면 어떻게 뜻(意)에서 생긴다고 하겠으며, 

만약 식(識)의 대상이 있다면 어떻게 의식(意識)이라고 하겠는가?

오직 같거나 다른 것의 한 두가지 성품이 성립될 수 없을 것이거늘, 계(界)가 어떻게 성립되겠는가?

ㅡ근(根)과 식(識)이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를 묻고 있는 즉, 근(根)과 식(識)이 섞여서 인계(因界)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식심(識心)은 의식(意識)이고, 사량은 의근(意根)이고, 요별성(了別性)은 제7 말나식이다.

분명하게 분별하는 것이 식(識)의 전체적인 작용이니, 겸(兼)이라 글자를 사용하였으므로, 마땅히 분별해서 구분지어야 할 것이다. 

법상(法相)에서 이르기를 '팔식(八識)이 모두 확실하게 분별하는 작용이 있으므로, 확실하게 분별하는 것을 식(識)이라고 한다. 오직 이것은 육식(六識)에 속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이 경에서의 뜻은 '너의 제육 식심(識心)과 제칠 의근(意根)이 생각하여 헤아리는 것과 모든 식(識)의 분별을 겸해서 총괄함이 같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은 것이다. 

같다면, 주체와 대상이 없을 것이고, 

다르다면 식(識)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니,

두 가지가 이미 섞여서 자성(自性)이 없어지고 나면 계(界) 성립 될 곳이 없을 것이다. 

 

若因法生,世閒諸法不離五塵。汝觀色法,及諸聲法、香法、味法,及與觸法,相狀分明以對五根,非意所攝。汝識決定依於法生,汝今諦觀法法何狀?若離色空、明暗 動靜、通塞、恬變 合離、生滅,越此諸相終無所得。生則色空諸法等生,滅則色空諸法等滅,

만약 법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라면 세간(世閒)의 모든 법이 다섯 경계의 오진(五塵)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너는 색법(色法)과 성법(聲法)과 향법(香法)과 미법(味法)과 촉법(觸法)을 살펴 보아라. 

그 모양의 상상(相狀)이 분명하여서 제각각 오근(五根)을 대할지언정 뜻(意)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이니,  

너의 식(識)이 결정코 법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라면, 너는 지금 자세히 살펴보아라. 

법의 경계인 법진(法塵)이라는 그 법(法) 어떠한 모양인가?

만약 밝고 어두운 명암(明暗), 움직이고 고요한 동정(動靜), 통하고, 막힌 통색(通塞), 그대로 있거나 변하는 염변(恬變), 합하거나 떨어지는 이합(離合)을 벗어난다면, 이러한 여러가지의 상(相)을 뛰어 넘어서는 종내에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일 것이니,

생긴다면, 색(色)이나 공(空) 등의 제법이 생겨날 것이고,

멸한다면, 색(色)이나 공(空) 등의 제법이 멸할 것이다.

ㅡ이는 의근(意根)의 대상이 되는 법진(法塵)의 법을 밝힌 것이다.

만약 너의 의식이 반드시 법진으로 인하여 생긴다면, 오근이 대하는 바 오종(五種)의 법진 밖에 어떠한 것이 의근이 상대하는 바의 법진이라는 법의 모양인 법상상(法相狀)인가?

법진이라는 법이기 때문에 '법진이라는 법'이라 한 것으로, 더듬어 기억해 내는 것이 생(生)기는 것이고, 잊어버리는 것이 멸(滅)하는 것인데, 의근(意根)으로 인하면 형상이 있고, 의근을 여의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所因旣無,因生有識作何形相?相狀不有界云何生?

인(因)하는 바가 이미 없거니 인(因)으로해서 생기는 의식(意識)이 어떤 형상이 되겠는가?

상상(相狀)이 없다면 계(界)가 어떻게 생기겠는가?

ㅡ식계(識界)가 만약 뜻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라면, 뜻은 실체가 없고, 

만약 법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라면 법은 실상(實狀)이 없는 것이니, 

인(因)하는 바의 의근(意根)과 그 대상인 경계가 이미 없는 것이거늘,

인(因)으로 해서 생기는 의식(意識)이 어떤 형상이 되겠는가?

형상이 없으면 계(界) 또한 없을 것이다.

즉, 만약 의식이 법진(法塵)으로부터 생겼다면, 법진의 법(法)은 어떤 상상(相狀)인가? 
법진의 상상(相狀)도 얻을 수 없거늘, 무엇을 계(界)로 하여 의식이 일어나는가? 
의근과 법진이 연(緣)하여 의식계를 생한다는 삼계(三界)는 없는 것이다.

만법(萬法)은 오직 마음이 드러낸 것의 유심소현(唯心所現)으로 청정심체(淸淨心體)에는 아무런 걸림도 없는 것이다.

 

是故當知意法爲緣生意識界,三處都無,則意與法及意界三,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뜻과 법이연이 되어서 뜻의 인식하는 경계인 의식계(意識界)가 생긴다고 하는 삼처(三處) 모두는 없는 것이므로, 뜻(意)과 법(法)과계(意界)의 셋 모두는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3 6

 

▷18계(十八界)의 설식계(舌識界, 설미계 舌味界)  

阿難!又汝所明,舌味爲緣生於舌識。此識爲復因舌所生,以舌爲界?因味所生,以味爲界?

아난아, 네가 밝힌 바로는, '혀와 맛이 인연이 되어서 설식(舌識)이 생긴다'고 하였으니,

그 설식(舌識)은 혀(舌)로 인하여 생긴 것이므로, 혀로서 계(界)를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맛으로 인하여 생긴 것으므로, 맛(味)으로서 계(界)를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阿難!若因舌生,則諸世閒甘蔗、烏梅、黃連、石鹽、細辛、薑桂都無有味。汝自嘗舌爲甜爲苦?

아난아! 만약 혀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면, 모든 세간의 감자(甘蔗)와 오매(烏梅)와 황련(黃連, 약초)과 석염(石鹽)과 세신(細辛, 족두리풀, 매운 맛)과 생강(薑)과 계피(桂)등의 오미(五味)는 모두 맛이 없는 것이리라. 

스스로 네 혀를 맛보아라. 단맛인가? 쓴맛인가?

 

若舌性苦,誰來嘗舌?舌不自嘗,孰爲知覺?舌性非苦,味自不生,云何立界?

만약 혀의 성품인 설성(舌性)이 쓴 것이라면, 누가 와서 혀를 맛보겠는가?

혀는 스스로 맛보지 못해야 할 것이거늘, 누가 알아 깨닫는 지각(知覺)을 하는 것인가?

혀의 성질이 쓴 것이 아니라면, 맛이 저절로 생기지 않았을 것이니, 어떻게 경계(界)를 성립하겠는가?

ㅡ맛은 혀가 맛보는 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니, 만약 혀가 본래부터 쓴 것이라면, 능히 맛을 보는 이가 없는 것인데, 무엇이 식체(識體)가 되겠는가? 

만약 혀가 본래 담담한 것이라면, 대상 경계를 인하지 않을 것이므로 맛이 생긴 곳이 없을 것이니, 맛과 대할 것이 없는데 어디로 부터 계가 성립 되겠는가?

계(界)가 혀로 인하여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을 파(破)하는 것이다.

 

若因味生,識自爲味,同於舌根應不自嘗,云何識知是味非味?

만약 맛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면, 식(識)이 스스로 맛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곧 혀의 설근(舌根)과 같아서 당연히 스스로 맛보지 못할 것이거늘,

어떻게 맛인지 맛이 아닌지를 인식(識)하여 알겠는가?

ㅡ'설식(舌識)이 스스로 맛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설식이 곧 맛임을 말하는 것이고, '설근(舌根)과 같다'고 한 것은 설식이 스스로 맛보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又一切味非一物生,味旣多生識應多體,識體若一體必味生。鹹淡甘辛和合俱生,諸變異相同爲一味應無分別,分別旣無則不名識,云何復名舌味識界?不應虛空生汝心識。

또한 일체의 맛이  물건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맛은 여러가지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그 식(識)도 당연히 여러 개의 체()가 되어 할 것이며,

인식의체(識體)가 만약 하나이고, 그 체는 반드시 맛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짠맛과 담담한 맛과 단맛과 신맛과 매운 맛이 화합된 것과 함께 생기는 구생(俱生, 본래의 맛) 여러 가지로 변하여 달라진 맛의 변이(變異)의 상(相)이 동일한 맛이 되어서 당연히 분별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분별이 없어졌다면 식(識)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어떻게 혀로 인식하는 경계의 설미식계(舌味識界)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허공이 너의 마음에 심식(心)이 생기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ㅡ설식이 맛으로 인하여 생긴다면, 즉 맛이 여러 가지이면 인식하는 것도 당연히 많아야 할 것이며, 인식하는 것이 하나이라면, 맛도 당연히 하나이어야 할 것이다.'체(體)는 반느시 맛에서 생긴다'고 한 것은 식(識)이 맛으로 인하여 생긴다는 것을 거듭 결론 내린 것이며, '짠맛과 담담한 맛과 단맛과 신맛과 매운 맛이 화합된 것과 함께 생기는 구생(俱生)으로 동일한 맛이 된다'는 것은 결속(結束)하여서 '식을 이루는 것이 하나이면 맛도 당연히 하나이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다른 식이 이미 하나이며, 다른 맛이 이미 같으면 분별이 없을 것이니, 분별이 없으면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면 계(界)가 없을 것이니, 이는 '계(界)가 맛으로 인하여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을 파한 것이다.여러가지의 맛을 화합(和合)이라 하고 본래의 맛을 구생(俱生)이라 하며, 변한 맛을 변이(變異)라고 한다. 

 

舌味和合,卽於是中元無自性,云何界生?

혀와 맛이 화합하면, 곧 그 가운데에는 본래 자성이 없는 원무자성(元無自性)일 것인데, 어떻게 계(界)가 생기겠는가?

ㅡ설근(舌根)과 그 대상이 혼합하면, 자성이 정해진 것이 없을 것이니, 무엇으로부터 계(界)가 생기겠는가?

 

是故當知舌味爲緣生舌識界,三處都無,則舌與味及舌界三,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혀(舌)와 맛(味)이연이 되어서 혀가 인식하는 경계의  설식계(舌識界)가 생긴다고 하나, 그 세 가지의 삼처(界三) 모두는 없는 것이므로,

혀(舌)와 맛(味)과 설계(舌界)이 세 가지는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18계(十八界)의 신식계(身識界, 신촉계 身觸界)  
阿難!又汝所明,身觸爲緣生於身識。此識爲復因身所生,以身爲界?因觸所生,以觸爲界?

아난아,  네가 밝힌 바와 같이, '몸(身)과 닿임(觸)이연이 되어서 몸의 인식인 신식(身識)이 생긴다'고 한다면, 

 인식은 몸(身)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므로 몸으로 계(界)를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닿임(觸)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므로, 닿임으로 계(界)를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阿難!若因身生必無合離,二覺觀緣身何所識。

아난아, 만약 몸으로 인한 인신(因身)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라면, 반드시 합하고 나우어지는 이합(合離)의 두 가지를 깨닫게 하는 조건의 각관(覺觀)이 없을 것이니, 몸이 어떻게 알겠는가?  

ㅡ'깨단는 각관(覺觀)'이라는 것은 곧 몸이 인식하는 신식(身識)을 말하는 것으로, 닿이고 떨어지는 대상으로 인연을 삼는다

 

若因觸生必無汝身,誰有非身知合離者?

만약 감촉으로 인한, 인촉(因觸)으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너의 몸이 없어야 할 것이니,

몸도 아닌 것이 어떻게 합하고 나누어지는 이합(合離)을 알겠는가?

ㅡ몸이 없는 무신(無身)이라면 합하고 나우어지는 것을 모를 것이니, 이는 몸으로 인한 것일 뿐, 대상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阿難!物不觸知,身知有觸;知身卽觸,知觸卽身。卽觸非身,卽身非觸,身觸二相元無處所,合身卽爲身自體性,離身卽是虛空等相,內外不成中云何立?中不復立內外性空,卽汝識生從誰立界?

아난아, 물체(物)는 접촉하여도 알지 못하고, 몸이라야 접촉이 있음을 아는 신지(身知)이니,

몸을 아는 것이 곧 접촉하는 주체이며, 접촉함을 아는 지촉(知觸)이 곧 몸이니,

그렇다면, 곧 접촉하는 주체라면 곧 몸이 아닐 것이고

몸이라면, 곧 접촉하는 주체가 아닐 것이다.

몸과 접촉하는 신촉(身觸)의 주체, 이 두 가지의 이상(二相)은 본래 처소가 없는 것으로, 

몸에 합하면 곧 몸 자체의 성품인 자체성(自體性)이 될 것이고, 

몸에서 떠나면 곧 허공와 같은 상(相)이 될 것이므로, 안과 밖이 성립되지 않으니, 중간이 어떻게 성립되겠는가?

중간이 다시 성립되지 않으면, 안과 밖의 내외성(內外性)이 공(空)한 것일테니, 너에게 식(識)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어디를 좇아서 계(界)가 성립되겠는가? 

ㅡ신근(身根)이 대하는 진(塵)은, 색진(色塵) 등의 물질(物)이 와서 몸에 합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곧 몸의 느낌인 촉각(觸覺)으로 껄끄럽고, 매끄럽고, 차고, 따뜻함을 분별하여 아는 것을 촉감이라 한다.

만약 두 물질만이 서로 접촉한다면, 어떻게 능히 지각(知覺)이 생기겠는가?

그러므로 '물질(物)은 접촉해도 알지 못하고, 몸이라야 접촉이 있음을 안다'고 한 것이다

한갖 물질만으로는 능히 접촉하는 것을 느낄 수 없는 것이므로, 몸으로 접촉해야만 스스로 접촉을 느낄 수 있다.

'몸으로 아는 신지(身知)'가 곧 접촉하는 주체이며, 접촉함을 아는 지촉(知觸)이 곧 몸이다.'라고 한 것은 만약 접촉하는 주체가 몸에 속한다면, 마땅히 몸이 접촉하는 주체일 것이고, 접촉하는 주체가 곧 몸임을 알아야 할 것이며, 

'접촉하는 주체라면 곰 몸이 아니고, 몸이라면 곧 접촉하는 주체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만약 몸과 접촉하는 주체가 하나로 합해졌을 경우에 접촉하는 주체라고 하면 몸이 아니고, 몸이라고 한다면, 접촉하는 주체가 아닐 것인데, 몸과 접촉하는 주체가 서로 빼앗아서 둘다 없어지게 될 것이므로 '본래 처소가 없다'고 한 것이다.

'몸에 합하면 곧 몸 자체의 성품인 자체성(自體性)이 되고, 몸을 떠나면 곧 허공과 같은 상이 된다'고 한 것은 만약 접촉하는 주체가 몸에 합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다만 신근의 성품일 뿐으로, 상대하는 경계가 없을 것이고, 

만약 접촉하는 주체가 몸에서 떠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완전히 공색상(空色相)일 것이므로 신근의 대상 물질(塵)이 아닌 것이다.

'허공과 같다'는 것은 온갖 물질과 같다는 것이고,

'중간이 성립되지 않으면, 내외성(內外性)이 공할 것이다'라고 한 것은 위에서 말한 합변(合邊)의 뜻을 거듭 밝혀서 식계(識界)가 실상이 없음을 결론지어 밝힌 것이다.

그러면 안과 밖, 중간의 위치 모두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니, 비록 식(識)이 감촉으로 인하여 생긴다고 할지라도 무엇으로 해서 계(界)가 성립되겠는가?

 

是故當知身觸爲緣生身識界,三處都無,則身與觸及身界三,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몸(身)과 닿음(觸)이연이 되어서 몸의 인식하는 경계인 신식계(身識界)가 생긴다고 하나, 삼처(三處) 모두는 없는 것이므로,  몸(身)과 닿음(觸)  경계의 신계(身界)의 셋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3 5

 

▷18계(十八界)의 이식계(耳識界, 이성계 耳聲界)  

阿難!又汝所明,耳聲爲緣生於耳識。此識爲復因耳所生,以耳爲界?因聲所生,以聲爲界?

아난아! 네가 밝힌 바와 같이 '귀와 소리가 인연이 되어서 이식(耳識)이 생긴다'고 하였는데, 

그 이식(耳識)은 귀로 인하여 생긴 것이므로, 귀로써 경계(界)를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소리(聲)로 인하여 생긴 것이므로, 소리로써 경계(界)를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阿難!若因耳生,動靜二相旣不現前,根不成知,必無所知;知尚無成,識何形貌?若取耳聞,無動靜故,聞無所成。云何耳形雜色觸塵,名爲識界,則耳識界復從誰立?

아난아, 만약 귀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면,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의 가지 현상의 이상(二相)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귀의 이근(耳根)이 앎을 이루지 못할 것이며,

분명히 아는 것이 없다면, 안다는 것 오히려 성립될  없을 것이니, 식(識) 어떤(相)이겠는가?

만약 귀의 듣는 것이라고 고집한다, 소리의 움직임(動)과 고요함(靜) 없기 때문에 듣는 주체(작용)도 성립될  없을 것이니, 어떻게 귀와 형상의 이형(耳形)이 물질의 (色)과 감촉의 촉진(觸塵)으로 섞인 것을 식계(識界)라고 이름할 수 있겠으며?

귀로 인식하는 경계인 이식계(耳識界)가 다시 무엇을 따라서 성립될 수 있겠는가?

ㅡ이식(耳識)이 분별하여 아는 것을 '지(知)'라 하고, 이형(耳形)이 소리와 접촉하는 것을 듣는 '문(聞)'이라 하는 것이니, 모두 동(動)과 정(靜)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으로, 만약 동과 정이 없다면, 각각 이루어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안다는 지(知)'는 곧 식(識)의 본체이므로, 안다는 지(知)만 식계(識界)가 이근(耳根)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다만 이근(耳根)에 의해 생겨나서 동과 정으로 인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듣는 것이 성립될 수 없다'고 한 것인데,

만약 들음이 없다면, 부근(浮根)은 다만 사진(四塵, 색향미촉色香味觸)에 섞여서 그 상이 마치 권이(卷耳)라는 식물의 잎사귀와 같을 뿐이니, 어떻게 식계(識界)라고 할 수 있겠는가?

 

*권이(卷耳), 점나도나물, 점나도나물, 전국 각지에서 자하는 두해살이풀이며, 높이가 15-25cm로 자란다. 잎은 마주나기하며 엽병이 거의 없고 길이 1~4cm, 폭 4~12mm로서 달걀모양 또는 난상 피침형이며 자루가 없고 가장자리는 밋밋하고 양끝이 좁으며 잔털이 퍼져 있다.


若生於聲,識因聲有,則不關聞,無聞則亡聲相所在;識從聲生,許聲因聞而有聲相,聞應聞識不聞非界,

만약 소리에서 생긴 것이라면, 이식(耳識)은 소리로 인하여 있는 것이므로, 듣는 것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며, 

듣는 주체(작용)가 없다면, 소리의 성상(聲相) 소재가 없을 것이니,

식(識)이 소리에서 생기고, 소리는 듣는 것으로 인하여 소리의 성상(聲相)이 생긴다고 인정한다면, 들을 때에 마땅히 인식하는 것을 듣는 이식(耳識)이라 해야 할 것이며,

듣지 못한다면 이식계(耳識界)가 아닐 것이니라.

ㅡ만약 식(識)이 소리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그 식은 대상 경계로 인하여 있는 것이므로 자연히 이근(耳根)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귀를 통해서 듣지 않으면 어떻게 소리의 소재(所在)를 알 수 있겠는가? 

'소리는 듣는 것으로 인하여 인정한다'고 한 것은 소리는 듣는 것으로 인(因)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식이 소리를 따라 생기는 것이라면 소리가 곧 식(識)일 것이니,

그렇다면 들을 때에 당연히 인식하는 것을 들어야 할 것이고,

가령 듣지 못한다면 또한 이식계(耳識界)의 의미가 아닐 것이니, 둘다 옳지 않은 것이다. 

 

聞則同聲,識已被聞誰知聞識,若無知者終如草木。

듣는 것이 소리와 같은 것이라서 식(識)이 이미 들음을 당했으니, 누가 식(識)을 듣는 것이라고 알겠는가?

만약 앎이 없다면 결국에는 초목과 같을 것이다 

ㅡ식(識)은 듣는 주체이고, 소리는 들리는 대상이다. 만약 식을 듣는다면 식은 곧 소리와 같은 것이라서, 들어지는 대상이 되는데, 무엇이 또 듣는 주체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누가 식을 듣는 것이라고 알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듣는 주체가 앎이 없다면 초목과 같을 것이므로 또한 옳지 않다는 것이다. 

 

不應聲聞雜成中界,界無中位,則內外相復從何成?

당연히 소리와 듣는 것이 섞여서 중간의 경계(界)를 이루지 않을 것이니, 

경계(界)의 중간에 자리가 없다면 내외(內外)의 상(相)이 다시 어디로부터 어떻게 이루어 지겠는가?

ㅡ이근(耳根)이나 대상인 경계(界)에 의하여 하나만 가지고 논하는 것도 잘못이고,

두 가지가 합하여서 식계(識界)를 이루어서 중간에 위치하는 것도 아니니,

중간에 위치하지 않은 것이라면 변계(邊界)가 어떻게 성립되겠는가?

 

是故當知耳聲爲緣生耳識界,三處都無,則耳與聲及聲界三,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귀와 소리가 반연하여서 귀로 인식하는 경계인 이식계(耳識界) 생긴다고 하나, 귀(耳)와 소리(界)와 소리 경계인 성계(聲界)의  곳은 그 처소가 모두 없는 것이므로,

귀(耳)와 소리(界)와 소리 경계인 성계(聲界)의 셋은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18계(十八界)의 비식계(鼻識界, 비향계鼻香界)  

阿難!又汝所明,鼻香爲緣生於鼻識。此識爲復因鼻所生,以鼻爲界?因香所生,以香爲界?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바와 같이 '코와 냄새(香)가 인연이 되어 코의 인식인 비식(鼻識)이 생긴다'는 것은 그 식(識)은 코로 인하여 생긴 것이므로, 코를 경계(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냄새(香)로 인하여 생긴 것이므로 냄새(香)를 경계(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阿難!若因鼻生,則汝心中以何爲鼻?爲取肉形雙爪之相?爲取嗅知動搖之性?

아난아, 만약 '코'를 인하여 생긴 것이라면, 네 마음 속에 그 무엇을 '코'라고 하겠는가?

살(肉)로 된 한 쌍의 오이 모양이라고 생각하는가?

냄새를 맡아 아는 움직이는 성품이라고 생각 하는가?

ㅡ움직이면서 냄새를 맡는 것은 코의 성품이다.

 

若取肉形,肉質乃身,身知卽觸,名身非鼻,名觸卽塵,鼻尚無名 云何立界?

만약 살로 된 형상의 육형(肉形)이라고 여긴다면, 살로 된 본질은 곧 몸이고, 몸이 느끼는 것은 곧 감촉이니,

몸이라고 이름하면 코가 아니고, 감촉이라고 한다면 곧 대상인 물질(塵)일 것이다.

코도 이름할 수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계(界)가 성립되겠는가?

ㅡ몸이라고 하면 '코'가 아니고, 감촉이라 한다면 대상 물질(塵)에 속하기 때문에 '코'라고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

 

若取齅知,又汝心中以何爲知?以肉爲知,則肉之知元觸非鼻;以空爲知,空則自知肉應非覺,如是則應虛空是汝,汝身非知,今日阿難應無所在;齅 냄새 맡을 후

만약 냄새를 맡다서 아는 후지(齅知)를 '코'라고 한다면, 너는 마음속에서 무엇이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살(肉)이 아는 육지(肉知)라고 한다면, 살(肉)이 아는 것은 본래가 감촉인 원촉(元觸)이므로 코가 아닐 것이며,

허공이 아닌 공지(空知)라고 한다면, 허공이 곧 스스로 아는 것이라서 살(肉)은 당연히 느끼지 못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허공이 곧 너이고, 네 몸은 앎이 없기 때문에 오늘의 아난은 마땅히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ㅡ이것은 비식(鼻識)이 코로 인해서 생긴다고 여기는 것이 망령된 생각임을 말하는 것이다.

 

以香爲知,知自屬香,何預於汝?若香臭氣必生汝鼻,則彼香臭二種流氣,不生伊蘭及栴檀木,二物不來,汝自嗅鼻爲香爲臭。

냄새가 아는 향지(香知)라고 한다면 아는 그 자체가 냄새(香)에 속하는 속향(屬香)일 것이거늘, 너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만약 향기와 구린 냄새가 반드시 너의 코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그 향기와 구린내의 두 가지 냄새는 이란(伊蘭)이나 전단목(栴檀木)에서 생긴 것이 아닐 것이다.

이 두가지 물질이 오지 않았을 때, 네가 스스로 네 코로 냄새를 맡아 보아라, 향기로운가? 구린가?

ㅡ만약 아는 것이 향기에 속한다면, 코는 아는 것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아는 것은 향기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만약 향기가 코에서 생긴 것이라면, 나무는 당연히 향기가 없어야 할 것이다.

또 이란의 냄새와 전단의 향기, 이 두 가지 물질이 코에서 오지 아니함에 무슨 냄새가 생기겠는가? 

그렇다면 향기가 코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비식(鼻識)이 향기로 인하여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이 허망한 것이라는 것이다.*이란(伊蘭)의 냄새는 조개가 썩는 냄새와 같으며 40유순까지 풍긴다고 하며, 그것은 붉은 색으로 매우 아름다우나 만약 먹는다면, 발광(發狂)하여 죽는다고 한다.

 

臭則非香,香應非臭,若香臭二俱能聞者,則汝一人應有兩鼻,對我問道有二阿難,誰爲汝體?

구린 냄새는 향기가 아닌 취비향(臭非香)이며, 향기는 당연히 구리지 않으니,

만약 향기와 구린내의 향취(香臭)의 두 가지를 함께 같이 맡을 수 있다면, 너 한 사람이 마땅히 두 개의 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나에게 도(道)를 물을 때, 두 아난이 있어야 할 것이니, 어느 것이 너의 본체(本體)이겠는가?

ㅡ대상이 둘이라면, 비근(鼻根)도 당연히 둘이어야 할 것이니, 이는 모두 인식하는 마음의 식심(識心)이 분별하고 헤아리는 것을 쫓아 버리는 것이다. 

 

若鼻是一,香臭無二,臭旣爲香香復成臭,二性不有,界從誰立?

만약 코가 하나라면, 향기와 구린내, 이 둘이 없어야 할 것이니, 구린내가 이미 향기가 되는 취기향(臭旣香)이 될 것이며, 향기가 다시 구린내가 되는 향성취(香成臭)가 되어서 두 성분의 이성(二性)이 있지 않을 것이니,

계(界)가 무엇으로 인하여 성립 될 것인가?

ㅡ비근(鼻根)이 하나의 경계라면, 그 경계와 본성이 서로 빼앗을 것이니, 무엇으로 인하여 계(界)가 성립되겠는가?

 

若因香生識因香有,如眼有見不能觀眼,因香有故應不知香,知則非生,不知非識。

만약 향기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면, 식(識)은 향기로 인하여 있는 것이 될것이니,

이는 마치 눈이 다른 것은 볼 수 있으면서도 눈은 능히 보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향기로 인한 인향(因香)으로 있는 것이므로 당연히 향기를 알지 못해야 할 것이다.

만약 안다면, 향기에서 생긴 것이 아닐 것이고, 

알지 못한다면, 이는 비식(鼻識)이 아닐 것이다.

ㅡ안식(眼識)이 눈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지만 눈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비식(鼻識)이 향기로 인하여 있는 것이므로 당연히 향기를 느끼지 못해야 할 것이다. 

만약 능히 아는 능지(能知)라고 할지라도 이는 향기에서 생긴 것이 아니며, 

만약 알지 못하는 불지(不知)라면, 곧 비식(鼻識)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니, 모두 옳지 않은 것이다.

 

香非知有,香界不成;識不知香,因界則非從香建立,

냄새가 앎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 아니며, 향계(香界)가 성립되지 못하고, 식(識)이 냄새를 느끼지 못하면 인계(因界)가 곧 냄새를 좇아서 건립(建立)되는 것이 아니니라. 

ㅡ냄새가 비근(鼻根)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향계(香界)가 성립되지 못하고, 

식(識)이 냄새를 알지 못한다면 식계(識界)가 성립되지 못할 것이다.

 

旣無中閒不成內外,彼諸聞性畢竟虛妄。

이미 중간(中閒, 식계)이 없다면, 안과 밖의 내외(內外, 비계와 향계)도 성립되지 못할 것이니, 

저 모든 냄새를 맡는 성품이 마침내 허망한 것이다.

ㅡ중간은 인식하는 경계의 식계(識界)이고, 

내외(內外)는 비계(鼻界)와 향계(香界)이다.

 

是故當知鼻香爲緣生鼻識界,三處都無,則鼻與香及香界三,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코와 냄새가 반연이 되어서 코로 인식하는 경계인 비경계(鼻識界)가 생긴다고 하는 세 가지 처소인 삼처(三處)는 모두 없는 것이므로

코(鼻)와 냄새(香), 그리고 냄새 경계인 향계(香界)의 세 가지는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개운조사 능엄경 참조

수능엄경(首楞嚴經) 3 4

 

▷6내처(六內處)의 신처(身處) - 촉진(觸塵)

阿難!汝常晨朝以手摩頭。於意云何,此摩所知,誰爲能觸。能爲在手?爲復在頭?

아난아, 너는 새벽마다 항상 손으로 머리를 만지나니,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져서 느끼는 것은 누가 능히 감촉의 수능촉(誰能觸)을 느끼는 것인가? 

 느끼는 것이 손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머리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루에 세 번씩 머리를 문지르라고 하셨다. 

 

若在於手,頭則無知,云何成觸?若在於頭,手則無用,云何名觸?

만약 손에 있는 것이라면, 머리는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인데, 어떻게 감촉을 느끼는 것이며?

만약 머리에 있다면 손은 쓸모가 없을 것이니, 어찌 감촉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ㅡ감촉은 감감기관과 대상 물질로 인해 주관하는 것의 능(能)과 그 대상인 소(所)가 서로 느끼는 것이다.

유독 근(根)에 의해서만 밝힌 것은 만법이 한 몸의 일체(一體)이나, 망령되게 분별하는 주체와 그 대상을 연유하는 까닭에 허망한 감촉인 망촉(妄觸)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며, 근(根)과 그 대상이 서로 나타나야만 감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若各各有,則汝阿難應有二身。若頭與手一觸所生,則手與頭 當爲一體,若一體者觸則無成;

若二體者,觸何爲在?在能非所,在所非能。不應虛空與汝成觸。

만약 각각 따로 있는 것이라면  아난은 당연히 두 개의 몸인 이체(二體)라야 할 것이며,  

만약 머리와 손이 한 번의 접촉으로 생기는 것이라면, 곧 손과 머리가 마땅히 한 몸의 일체(一體)가 되어야 할 것이며,

만약 한 몸의 일체라면 촉감이 성립되지 않을 것이며,

만약 두 개의 몸인 이체(二體)라면 촉감이 어느 쪽에 있는 것인가?

손(能)에 있다면 닿는 머리(所)는 느끼지 못해야 할 것이며, 

닿는 머리(所)에 있는 것이라면 만지 손(能)은 몰라야 할 것이니,

허공이 너와 더불어 감촉이 이루어 지지 않을 것이다. 

ㅡ신처(身處)와 촉처(觸處) 두 가지를 합하여 밝히는 것으로,

'촉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감촉은 두 개의 물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하나로서는 감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며, 

'머리(所)도 아니고 손(能)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능소(能所) 모두가 처소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是故當知 覺觸與身 俱無處所,卽身與觸二處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촉감을 느끼는 것과 몸은 모두 처소가 없는 것으로, 

몸과 촉감, 이 두 가지는 허망한 것이라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6내처(六內處)의 의처(意處) - 법처(法處)

阿難!汝常意中所緣善、惡、無記三性,生成法則。此法爲復卽心所生?爲當離心別有方所?

아난아, 네가 항상 의중(意中)에 반연하는 것은 선성(善性), 악성(惡性) 무기성(無記性)의 세 가지 삼성(三性)이 생성하는 것이니,

이 법칙은 마음에 의해서 생기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을 떠나서 별도로 방소(方所)가 있는 것인가?

ㅡ선과 악은 반연하여 생각하는 마음이고, 무기는 혼미하게 머무는 마음이니, 의중(意中)에 반연하는 것이 이 삼성을 벗어나지 못해서 내진(內塵)을 흡수해 들여서 반연하는 법진(法塵)을 일으키므로 '법칙을 생성한다'고 한 것이다.

*법진(法塵), 육진의 하나이며, 일체의 정식(精識)을 물들게 하는 것이므로 진(塵)이라 한다.

 

阿難!若卽心者,法則非塵,非心所緣,云何成處?

아난아, 만약 마음에 의한 것이라면, 법은 경계의 진(塵)이 아니므로 마음의 반연하는 대상이 아닐 것이거늘, 어떻게 처소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ㅡ법(法)이 마음에 의한 것이라면, 진(塵)에 속하지 않는 것이므로 반연하는 대상이 아니라서 법처(法處)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若離於心別有方所,則法自性爲知?非知?知則名心,異汝非塵,同他心量卽汝卽心,云何汝心更二於汝?

若非知者,此塵旣非色、聲、香、味、離合冷煖及虛空相,當何爲在?

今於色空都無表示,不應人閒更有空外,心非所緣,處從誰立。

만약 마음을 벗어나서 따로 장소(方所)가 있는 것이라면 법의 자성(自性)은 앎이 있는 것인가? 앎이 없는 것인가?

만약 앎이 있다면 마음이라 할 수 있겠지만, 너와는 상관이 없을 것이며,

그렇다고 대상 물질(塵)도 아닌 것이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인 심량(心量)과 같을 것이니,

너에 의한 것이며 마음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네 마음이 너에게서 다시 둘이 되는 것인가?

만약 앎이 없다면, 이 대상 물질(塵)은 빛깔(色)ㆍ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와

떨어지고 합하는 이합(離合)과 차고 따뜻한 냉온(冷煖)과 허공의 상(相)도 아닐 것이니, 어디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색(色)과 공(空)에 전혀 표시할 수가 없으니, 당연히 인간은 다시 허공밖에 있지 않느니라.

마음이 반연하는 것이 아니라면 법처(法處)가 무엇을 좇아서 이루어지겠는가?

ㅡ법진(法塵)은 상(相)이 없는 것이며, 의식의 느낌으로 인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앎이 있는가? 앎이 없는가?'라고 물은 것이다.

앎이 있다면 마음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따로 그 처소가 있어서 그 체가 너와는 다른 것이고, 또 대상 물질(塵)도 아니므로 '다른 사람의 심량과 같다'고 한 것이다. 

가령 느낌이 없다고 할지라도 이 법진(法塵)은 표현할 대상이 없는, 곧 마음의 반연인 것이나 법진의 처소는 없는 것이다.

법진(法塵)은 색성향미촉의 오진(五塵)과 다른 것으로, 오진(五塵)과 허공은 모두 양(量)으로 대상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자연히 오근에 속하는 것이고 이합(離合)과 냉온(冷煖)도 촉진(觸塵)인 것이다. 

능상(能想)의 의지근(意知根, 주체)과 소상(所想)의 법진(法塵, 객체)도 단지 허망한 인연을 따라 생긴 것으로 여래장의 체성(體性)을 벗어나지 못함을 가르친다. 

*오진(五塵), 빛깔(色)ㆍ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의 오경(五境)으로, 이것이 진성(眞性)을 더럽혀서 번뇌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므로 진(塵)이라 한다. 
 

是故當知法則與心俱無處所,則意與法二俱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법과 마음은 모두 처소가 없는 것이니, 마음과 법, 이 두 가지는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18계(十八界)가 여래장임을 밝힘.
復次,阿難!云何十八界本如來藏妙眞如性?

또한 아난아, 어찌하여 18계(界)를 본래 여래장의 묘진여성(妙眞如性)이라 하는 것인가?

ㅡ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진六塵) 육식(六識)에서 안과 밖 그리고 중간으로 나누어서 계(界)라 한다 

*계(界), 인(因)한다는 뜻으로, 근(根) 경(境, 진塵) 식(識)의 셋은 서로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계(界)는 피차(彼此)의 사물이 차별되어 이루어지는 체성의 구별을 뜻한다.

*인(因)은 사물을 성립시키는 근원, 즉 어떤 사물이 생기게 되는 계기가 이루어지는 원인을 뜻한다.

 

▷18계(十八界)의 안식계(眼識界)

阿難!如汝所明,眼色爲緣生於眼識,此識爲復因眼所生,以眼爲界?因色所生,以色爲界?

아난아, 네가 밝힌대로, 눈(眼)과 물질(色)이 연(緣)이 되어서 눈의 안식(眼識)이 생긴다면, 

식(識)은 눈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므로 눈으로써 경계(界)를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색(色)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므로 색진으로써 경계(界)를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ㅡ안색(眼色)이란, 눈(眼)과 물질(色)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에 대해 묻기에 이르기까지 '식(識)이 그 가운데에서 생기는 것이 곧 마음이 있는 곳이다' 라고 한 것을 말미암아 '네가 밝힌 바와 같이'라고 하였다.

'네가 밝힌 바와 같이'이란 소승에서 해석한 것으로, 인연을 따라 법이 생기는 것 모두가 실상으로서 진공을 요달하지 뭇한 까닭이다. 


阿難!若因眼生,旣無色空無可分別,縱有汝識欲將何用?汝見又非靑黃赤白,無所表示從何立界?

아난아, 만약 눈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라면, 이미 물질(色)과 허공이 없으면 분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너의 식(識)이 있다고 하여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너의 보는 주체가 또한 청(靑) 황(黃) 적(赤) 백(白)이 아니라서 표시할 수가 없거늘, 무엇을 좇아서 계(界)가 성립되겠는가?

ㅡ만약 눈에만 원인(因)한 것이라면, 물질(色)과 허공이 없으면, 식(識)이 반연할 곳이 없고, 보는 주체도 표시할 수 없으며, 계가 성립될 수 없으니, 눈을 원인(因)한 것도 아니다.

 

若因色生,空無色時汝識應滅,云何識知是虛空性?若色變時,汝亦識其色相遷變,汝識不遷,界從何立?

만약 물질(色)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면, 물질(色)이 아닌 허공일 떼에는 너의 식(識)도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이니, 어떻게 그것이 허공의 성품인 허공성(虛空性)이라는 것을 알 것이며, 만약 물질이 변할 때, 너 또한 그 물질의 색상(色相)이 변하는 것을 안다면, 너의 식은 변하지 않는 것인데 계(界)가 어디를 따라 성립될 수 있겠는가?

ㅡ만약 물질(色)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라면, 마땅히 그 물질(色)을 따라 생겼다 없어졌다 해야 할 것이니,

물질(色)이 없어지고 허공이 나타날지라도 당연히 분명하게 알지 못해야 할 것이나, 만약 분명하게 안다고 한다면 이는 곧 물질의 색상(色相)은 변하여도 너의 식(識)은 홀로 남아있는 것이다.

만약 홀로 남아 있다면, 이웃이 없는 것인데, 계(界)가 무엇을 따라 성립 되겠는가? 라고 힐난하신 것이다.


從變則變,界相自無;不變則恒。旣從色生,應不識知虛空所在。

따라서 변하는 것이라면, 곧 변하기 때문에 경계의 계상(界相)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며,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곧 항상하다 할지라도 이미 물질을 따라 생겼으므로 당연히 허공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해야 할 것이다. 

ㅡ변하는 것은 본체가 없기 때문에 경계의 계상(界相)이 없는 것이며, 

만약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식성(識性)이 마땅히 빛(色)에만 한결 같아서 당연히 허공을 알지 못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치가 그렇지 않은 것이므로, 물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닌 것이다.

 

若兼二種眼色共生,合則中離,離則兩合,體性雜亂云何成界?

만약 두 가지를 겸해서 눈(眼)과 물질(色)이 함께 생긴 것이라고 한다면, 합하였을 때에는 그 중간이 나누어질 것이고,

만약 서로 나누어진 것이라면, 둘이 합해지는 것으로, 그 체성(體性)이 섞여서 혼란할 것이니, 어떻게 계(界)를 이루겠는가?

ㅡ만약 눈(眼)과 물질(色), 두 가지가 합해서 식계(識界)를 생기게 한 것이라면 당연히 반은 알겠지만, 반은 모를 것이기 때문에 '그 중간이 나누어 진다'고 하신 것이다.

만약 가운데가 나뉘어진다면 반은 안근(眼根)과 합할 것이고, 반은 색진(色塵)과 합할 것이기 때문에 '둘이 합해진다'고 하신 것이니, 이 두 가지의 이치 모두 계(界)를 성립하지 못하는 것이다.

 

是故當知眼色爲緣生眼識界,三處都無,則眼與色及色界三,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눈(眼)과 물질(色)이 인연이 되어서, 눈으로 모아 아는 경계인 안식계(眼識界)를 생기게 한다고 하는 그 세 가지 모두는 처소가 없는 것이라서,

눈(眼)과 물질(色) 그리고 색계(色界), 이 세 가지는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ㅡ이게 계(界)가 눈으로 인한 것도 아니고 물질로 인한 것도 아니니, 이러한 모든 허망함이 모두 제거되어야 장성(藏性)이 스스로 나타날 것이다.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개운조사 능엄경 참조

수능엄경(首楞嚴經) 3 3

 

▷12처(十二處)에 나아가 여래장을 밝힘.

復次,阿難!云何十二處本如來藏妙眞如性?

 아난아, 어찌하여 12처(十二處)가 본래 여래장인 진여성(妙眞如性)이라고 하는 것인가?

ㅡ12처에서 처(處)는 들어오는 곳으로, 육근과 육진(육경)을 합한 것이다. 

육근(六根)ㅡ안, 이, 비, 설, 신, 의ㅡ6내처(六內處)  
육경(六境)ㅡ색, 성, 향, 미, 촉, 법ㅡ6외처(六外處)  

 

▷6내처(六內處)의 안처(眼處) - 색진(色塵)

阿難!汝且觀此祇陁樹林及諸泉池。於意云何,此等 爲是色 生眼見 眼生色相

아난아, 너는   기타원(祇陀園)의 숲과 온갖 샘물과못들을 보아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러한 것들은 색상(色相)이 안견(眼見)을 생기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눈(眼)이 색상(色相)을 생기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ㅡ기타림과 온갖 샘과 연못은 물징의 색상(色相)으로,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은 눈(眼)이다.

*색상(色相),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 물체의 객관적인 형상.

*안견(眼見), 색상을 볼 수 있는 안식(眼識)의 작용. 


阿難!若復眼根生色相者,見空非色,色性應銷,銷則顯發一切都無,色相旣無,誰明空質?空亦如是。

아난아, 만약 안근(眼根)이 색상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라면, 허공을 볼 때에는 색상이 아니므로 색성(色性)이 반드시 사라질 것이다.

색성(色性)이 사라지면 나타나는 일체가 모두 없어질 것이니, 색상이 이미 없어지면 어떻게 허공의 본질을 밝힐 수 있겠는가!

허공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ㅡ눈이 색상을 생겨나게 한다면 눈이 색성(色性)이 된다. 그러나 허공을 볼 때에는 이미 색상이 없으므로 색성이 마땅히 사라질 것이니, 눈 속에서 색성이 이미 없어지면 나타나는 일체가 모두 색상이 없어야 할 것이다. 

또 색과 공 두 법은 상대를 기다려서 나타나는 것이니 색상이 이미 없어졌다면, 허공을 나타낼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호공의 본질을 밝히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눈이 색처를 생겨나게 한다는 것은 허망한 생각이다.

'허공도 역시 그러하다'고 한 것은 색으로 인하여 허공도 역시 일정한 처소가 없음을 예시한 것이다.

또한 나무와 숲과 샘과 연못 등은 모두 조건과 상황에 따라 생긴,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으로 모두가 환화상(幻化相)일 뿐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 색처(色處), 안식(眼識)의 소의가 되가 하는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 등의 대상체를 말한다.

 

若復色塵生眼見者,觀空非色,見卽銷亡,亡則都無,誰明空色?是故當知,見與色空俱無處所,卽色與見二處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만약 물질인 색진(色塵)이 눈으로 보는 안견(眼見)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허공을 볼 때에는 색상(色相)이 아닐 것이므로, 보는 견(見)이 곧 사라질 것이다.

사라져 없어지면 모든 것이 없어질 것이니, 어떻게 허공인지 색상인지를 밝힐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보는 주체(見)와 대상인 물질(色)공은 모두 처소가 없는 것으로, 보는 주체(見)와 물질(色)의 두 가지는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ㅡ색이 능히 보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허공을 볼 때에는 보는 주체가 생길 곳이 없으므로 '사라진다'고 한 것이다. 없어지면 곧 보는 주체도 없을 것인데, 누가 허공과 물질을 밝히겠는가? 그렇다면 물질이 안처(眼處)에서 생기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망령된 생각인 것이다. 


阿難!汝更聽此祇陁園中,食辦擊鼓、衆集撞鍾,鍾鼓音聲前後相續。於意云何,此等爲是聲來耳邊?耳往聲處?

아난아, 너는 다시  이 기타원(祇陀園)에서 공양이 마련되면 북을 치고, 대중들을 불러 모을 때에는 종을 치는데, 그 종 소리와 북소리가 앞과 뒤로 서로 이어지는 것을 들어 보아라! 너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 소리가 귓가에서 온 것인가?

아니면 귀가 소리 있는 곳으로 간 것인가?

ㅡ오고 가는 것을 분별해야만 진실한 처소가 있을 것이니, 이는 종소리와 북소리를 듣는 것에 의하여 귀와 소리의 실상을 파헤치는 것이다. 

 

阿難!若復此聲來於耳邊,如我乞食室羅筏城,在祇陁林則無有我;此聲必來阿難耳處,目連、迦葉應不俱聞,何況其中一千二百五十沙門,一聞鍾聲同來食處。

아난아, 만약 그 소리가 귓가에서 오는 것이라면, 내가 실라벌성(室羅筏城)에서 걸식(乞食)을 할 때에는 기타림(祇陀林)에는 내가 없는 것과 같이, 그 소리가 반드시 아난의 귓가에서 온 것이라면, 목련과 가섭은 당연히 듣지 못해야 할 것이거늘, 어떻게 1,250 사문(沙門)이 한꺼번에 종소리를 듣고 다같이 공양할 곳으로 오는 것인가?

ㅡ'내가 실라벌성(室羅筏城)에서 걸식(乞食)을 할 때에는 기타림(祇陀林)에는 내가 없는 것'이란, 소리가 귓가에서 나온 것이라면 다른 곳에는 소리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若復汝耳往彼聲邊,如我歸住祇陁林中,在室羅城則無有我;汝聞鼓聲,其耳已往擊鼓之處,鍾聲齊出應不俱聞,何況其中象馬牛羊種種音響。

만약 너의 귀가 소리 나는 곳으로 가는 것이라면, 내가 기타림(祇陀林)에 돌아와 머물고 있을 때에는 실라벌성(室羅筏城)에는 내가 없는 것과 같이, 네가 북소리를 들을 때에는 귀가 이미 북을 치는 곳으로 갔으므로, 종소리가 함께 날지라도 마땅히 한꺼번에 듣지 못해야 할 것이며,

더욱이 어떻게 코끼리와 말과 소와 양 등의 여러 가지 소리들을 한꺼번에 다 들을 수 있는 것인가?

ㅡ'내가 기타림(祇陀林)에 돌아와 머물고 있을 때에는 실라벌성(室羅筏城)에는 내가 없는 것'이란, 귀가 소리 나는 곳으로 간다면, 다른 곳에는 귀가 없을 것이나, 다른 소리도 다 듣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귀가 간 것을 아니다.

 

若無來往,亦復無聞。是故當知聽與音聲俱無處所,卽聽與聲二處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만약 오고 감이 없다 할지라도 역시 들음마저도 없을 것인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듣는 주체(작용)와 소리는 모두 처소가 없는 것이니 듣는 주체(작용)와 소리의 두 처소는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견성(見性)과 색(色)과 공(空)이 실처(實處)가 없는 환망상(幻妄相)이며 인연도 자연도 아니다. 
미혹하면 색과 공이 서로 허망상(虛妄相)을 내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지만, 
깨달으면 정밀하게 보는 묘한 밝음의 정견모명(精見妙明)인 여래장성(如來藏性)인 것이다.


▷6내처(六內處)의 비처(鼻處) - 향진(香塵)

阿難!汝又嗅此鑪中栴檀,此香若復然於之一銖,室羅筏城四十里內同時聞氣。於意云何,此香爲復生栴檀木?生於汝鼻?爲生於空?

아난아, 너는 또 이 향로의 전단향기를 맡아보아라. 이 향기는 비록 1수(銖)만 태울지라도 실라벌성의 40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니라.

너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 향기는 전단나무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너의 코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허공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阿難!若復此香生於汝鼻,稱鼻所生當從鼻出,鼻非栴檀,云何鼻中有栴檀氣?稱汝嗅香當於鼻入,鼻中出香說嗅非義。

아난아, 그 향기가 너의 코에서 생긴 것이라서 코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코에서 나왔어야 할 것이거늘, 코는 전단 나무가 아니거늘, 어떻게 코 속에 전단의 냄새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네가 향기를 맡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코로 들어가야 할 것인데, 콧속에서 향기가 나오는 것이라면 냄새를 맡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니라.

 

若生於空,空性常恒,香應常在,何藉鑪中爇此枯木?

만약 허공에서 생긴 것이라면, 허공의 성품은 한결같이 변함이 없는 것이니 향기도 항상 있어야 할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향로에 고목을 태워야만 향기가 생기는 것인가?

 

若生於木,則此香質因爇成煙,若鼻得嗅合蒙煙氣,其煙騰空未及遙遠,四十里內云何已嗅?

是故當知香鼻與嗅俱無處所,卽嗅與香二處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만약 전단나무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이 향의 본질은 태움으로 인하여 연기가 되는 것이므로, 만약 코가 향내를 맡을 때에는 당연히 연기가 코로 들어가야 할 것이거늘, 그 연기가 허공으로 올라가서 채 멀리 퍼지기도 전에 40리 이내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 향내를 다 맡게 되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향기와 코와 냄새를 맡는 향비후(香鼻嗅)는 다 함께 처소가 없는 것이니,

냄새를 맡는 것과 향기나는 곳의 두 처소는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6내처(六內處)의 설처(舌處) - 미진(味塵)
阿難!汝常二時衆中持鉢,其閒或遇油餠蜜飯 名爲上味。於意云何,此味爲復生於空中?生於舌中?爲生食中?

아난아, 네가 매일 두 때에 대중과 함께 발우를 가지고 걸식하는데, 그 사이에 간혹 유병(油餠)과 밀반(蜜飯)을 만나게 되면 최고의 맛이라 하나니,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맛은 허공에서 생기는 것인가?

혀에서 생기는 것인가? 음식에서 생기는 것인가?

ㅡ유병(油餠), 참깨, 들깨, 콩 따위의 재료 또는 밀가루를 부친 부침개.

밀반(蜜飯), 약반, 밀과 또는 약과


阿難!若復此味生於汝舌,在汝口中 秖有一舌,其舌爾時 已成飴味,遇黑石蜜 應不推移,若不變移 不名知味,若變移者舌非多體,云何多味一舌知之?

아난아, 만약 이 맛이 너의 혀에서 나온 것이라면 네 입 속에는 혀가 하나뿐이니, 그 혀가 조금 전에 단 맛이 되었을 것이므로, 흑석밀(黑石蜜, 매우 딱딱한 사탕)을 먹게 될지라도 달라지지 않아야 할 것이니,

만약 맛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맛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고,

만약 달라진다면 혀는 여러 개가 아닌데 여러 가지의 맛을 한 개의 혀로 알 수 있는 것인가?

 

若生於食,食非有識,云何自知?又食自知,卽同他食,何預於汝,名爲知味?

만약 음식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음식은 아는 작용의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닌 비유식(非有識)이니, 어떻게 제 스스로 맛을 알겠으며?

또 음식이 스스로 맛을 아는 식자지(食自知)라면 곧 다른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을 것이니, 너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맛을 안다고 하겠는가?

ㅡ음식이 스스로 맛을 아는 것이 아니고 혀를 통해야 맛을 아는 것이니, 비록 음식이 맛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 앎이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서, 다른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을 것이니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맛을 안다고 하겠는가? 이치가 그렇지 않으므로 맛은 음식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若生於空,汝噉虛空 當作何味?必其虛空 若作鹹味,旣鹹汝舌 亦鹹汝面,則此界人同於海魚;旣常受鹹 不了識淡,

若不識淡 亦不覺鹹,必無所知,云何名味?是故當知味舌與嘗俱無處所,卽嘗與味二俱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만약 허공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너는 허공을 씹어 보아라. 어떤 맛이든가?

기필고 그 씹은 허공이 짠맛이라면, 이미 너의 혀를 짜게 하였을 것이므로 네 얼굴도 짜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은 바다의 고기와 같이 언제나 짠 것만을 느껴왔으므로 담담한 맛은 느끼지 못해야 하리라.

만약 담담한 맛을 모른다면 짠맛 역시도 느끼지 못해야 할 것이니, 아무 맛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맛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맛과 혀와 맛을 보는 것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맛보는 것과 맛은 둘 다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개운조사 능엄경 참조

수능엄경(首楞嚴經) 3 2

 

설입(舌入)
阿難!譬如 假令有人以舌舐吻熟舐令勞,其人若病 則有苦味,無病之人微有甜觸,由甜與苦顯此舌根,不舐之時淡性常在。兼舌與勞同是菩提,瞪發勞相. 舐 핥을 지, 

아난아, 가령 어떤 사람이 혀로 입술을 핥아서, 그렇게 핥기를 오랫동안 하여서 피로하여졌을 때,

만약 그 사람에게 병이 있으면, 곧 쓴 맛을 느낄 것이고, 병이 없는 사람이라면 약간 단 촉감을 느낄 것이다.

이렇게 달고 쓴 것으로 인하여 이 설근(舌根)이 드러날 것이고, 핥지 않을 때에는 담담한 성품이 항상 있을 것이니,

혀와 피로는 다 같은 보리(菩提)로서 똑바로 보다가 피로하여져서 생기는 현상과 같은 것이다. 

단맛과 쓴맛으로 혀의 감각이 나타나고, 혀를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항상 담담한 맛이 있는 것은 혀와 피로를 겸하여 보리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이니라.

ㅡ입술이 달고 쓴 것이 아닌데, 피로와 허망함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에 핥지 않을 때에는 담담한 성품이 항상 있을 것이니, 설입(舌入)의 허망함이 이러한 것이다.

달고 쓴 2종 허망은 모두 인연으로 생긴 망법으로 보리심 중에서 발한 피로한 모습이다. 
맛을 아는 지미성(知味性)이 필경에 처소(處所)가 없는데, 달고 쓰고 담담함을 사람들은 혀의 체(體)라고 잘못 알고 있다. 
혀가 달고 쓴 2진(塵)을 서로 느낄 때, 그 앎이 발하는 중에 머물며, 진상(塵象)을 흡취하는 것을 지각성(知覺性)이라 하는데 그 지각성은 혀로부터 드러나는 것이지만, 혀의 체인 성체(舌體)는 본래 지각(知覺)이 없는 것이다. 

 

甜苦及淡 二種妄塵,發知嘗居中吸此味像,名知味性,此知味嘗覺性 離彼甜苦及淡二塵,畢竟無體嘗 맛볼 상

달고 쓴맛과 담담한 맛의  가지 허망한 대상 물질인 망진(妄塵)으 인하여맛을 아는 것이 생겨서 그 가운데에서 이 미상(味像)을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맛을 깨닫는 성품의 상각성(嘗覺性)이라 하나니,

그 맛을 아는 주체가 달고 쓴 맛과 담감한 두 가지 대상 물질을 의읜다면, 필경에는 맛이라는 그 실체가 없어질 것이다.

ㅡ맛으로 인해 맛을 느끼는 것이 생겨나고, 혀로 인해서 대상 물질을 흡수하여 들이므로 설입(舌入)의 허망함이 생기는 것이다.

 

如是,阿難!當知 是嘗覺性 非淡味來,非於舌生,不於空出。何以故?若甜苦來,淡卽知亡,云何嘗淡?若從淡來,卽知亡,甛苦卽隨亡, 復云何嘗其 甜苦 二相?若從舌生,必無甛苦及淡 如是嘗精 本無自性。若從空出,有嘗成性 卽非虛空

又空自知,何關汝入。是故當知舌入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맛을 느끼는 성품인 상각성(嘗覺性)은 달고 쓴 것에서 온 것이 아니고, 담담한 맛에서 온 것도 아니며, 혀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왜냐하면, 만약 달고 쓴맛에서 온 것이라면 담담한 맛일 때에는 곧 따라서 없어질 것이니, 어떻게 담담한 맛을 알겠으며,

만약 담담한 맛에서 온 것이라면, 달고 쓴맛을 따라 곧 없어질 것이 어떻게 그 달고 맛을 알 것이며,

만약 혀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달거나 쓰거나 담담한 맛이 없으면 이와 같이 맛을 보는 정기가 본래 자성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맛을 보는 상성(嘗性)이 자성을 이룰 것이니, 곧 허공이 아닐 것이요

또한 허공이 스스로 맛보는 것이니, 그것이 너의 설입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맛을 보아 인식하는 설입(舌入) 허망한 것이라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진여성이니라.

ㅡ진여성에는 본래 능소(能所)가 없다. 상황과 조건을 따라 각종 인연법을 발현(發現)하지만, 스스로의 체성(體性)은 떠나지 않는다.

만약 달고 쓰고 담담함이 올 때 생기는 객체가 있다고 집착한다면, 인연이 만드는 법에 미혹하게 되는 것이요, 
만약 달고 쓰고 담담함이 올 때 생하는 주체가 있다고 집착한다면, 자연의 능생법(能生法)에 미혹하게 되는 것이다.

 

▷신(身)

如是 阿難!譬如 假令 有人以一冷手觸於熱手,若冷勢多 熱者從冷,若熱勢多 冷者從熱,如是以此合覺之觸顯於離知,涉勢若成因于勞觸。兼身與勞 同是菩提,瞪發勞相

아난아, 가령 어떤 사람이 차가운 한 쪽의 손으로 다른 쪽의 더운 손을 잡았을 때, 만약 차가운 기운이 많으면 더운 손이 차가워지고, 만약 더운 기운이 많으면 찬 손이 더워 질 것이다. 

이와 같이 두 손이 합해 졌을 때 느끼게 되는 감촉의 각촉(覺觸)이 서로 떨어져도 느낌이 남아 있나니,

서로 교섭하는 세력이 만약 이루어진다면, 접촉으로 인한 피로 때문일 것이다.

몸과 피로는 다 같은 보리(菩提)로써 똑바로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피로하여져서 생기는 현상과 같은 것이니라.

ㅡ신입(身入)은 접촉으로 인한 것이나, 접촉에 자성이 없는 것이 차고 더운 손이 서로 교섭하는 것과 같아서 정해진 형세가 없는 것으로 역시 망령된 것이다.

손이 스스로 접촉하는 것이 아니고 합쳐짐으로 인하여 접촉함을 느끼기 때문에 합해졌을 때 느끼는 감촉의 합각촉(合覺觸)이라 한 것이고, 합쳐지는 것은 떨어짐으로 인하여 합쳐지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서로 떨어져도 느낌이 남아 있다고 한 것이다. 

 

因于離合 二種妄塵,發感居中 吸此觸像,名感覺性。此感覺體,離彼離合違順二塵,畢竟無體。

떨어지고 합하는 이 두 가지의 허망한 대상 물질인 망진(妄塵)으로 인하여 촉감이 생긴 그 가운데에 있으면서 촉상(觸像)을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느껴 깨닫는 성품의 감각성(感覺性)이라고 하나니,

그 느낌이 떨어지고 합하는 것과 어기고 순종하는 두 가지의 대상 물질을 여의면 필경에는 느끼는 실체가 없어질 것이니라.

ㅡ접촉으로 인하여 느낌이 생기고, 몸(根)으로 인하여 대상 물질을 흡수하여 들이므로 신입(身入)의 허망함이 생기는 것이다.

 

如是,阿難!當知 是感覺性,非離合來,非違順來,非於身生,又非空生。

何以故?若從離來,合卽隨亡,云何感合 若從合來 離即隨亡 云何感離 違順二相,亦復如是。

若從身生,必無離合違順(四相)。如是感精 本無自性。

若從空出,空自知覺,何關汝入 有感成性 卽非虛空 又空自知。是故當知身入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느껴 깨닫는 성품의 감각성(感覺性)은 떨어지거나 합함에서 온 것도 아니고, 어기거나 순종하는 것에서 온 것도 아니며, 몸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만약 떨어지는 것에서 온 것이라면, 합할 때에는 곧 따라 없어질 것이거늘, 어떻게 합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만약 합하는 것에서 온 것이라면 떨어지면 곧 따라서 없어져야 할 것이니, 어떻게 떨어짐을 느끼겠는가!

어기고 순종하는 두 가지 현상도 역시 그러한 것이며, 만약 몸에서 나온 것이라면 반드시 떨어지고 합해지고 어기고 순종하는 것이 없으면 이와 같이 느끼는 정기가 본래 자성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느끼는 것이 있으면 자성을 이룰 것이니, 곧 허공도 아닐 것이고, 또 만약 허공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라면, 그것이 너의 입(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몸으로 느끼는 신입(身入)은 허망한 것이라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여래장의 묘한 진여성이니라.

ㅡ각촉성(覺觸性)은 본래 법계(法界)에 임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떨어지고 합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만약 떼고 합함이 있다고 집착한다면, 인연으로 생긴 것에 떨어진 것이며,

만약 뗄 수 있고 합할 수 있다고 집착한다면, 자연의 체성(體性)을 모르는 것이다. 
인연은 임시적인 가명이며 자연은 체성(體性)이 없는 것이니, 그래서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라고 한다. 
만약 인연이 바로 중도리체(中道理體)가 발현한 용(用)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환신(幻身)이 바로 천백억의 화신(化身)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의(意)

阿難!譬如 假令有人勞倦則眠睡熟便寤,攬法斯憶失憶爲忘,是其顚倒生住異滅,吸習中歸 不相踰越,稱意識根。兼意與勞同是菩提,瞪發勞相.  攬 잡을 람,

아난아, 어떤 사람이 피곤하고 나른하여 잠이 들어서,  자고는 문득 깨어서 대상인 법(法)을 더듬어 보고 기억하는 남억(攬憶)하며, 그 기억이 사라지면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뒤바뀌게 전도(顚倒)되어서 생겨나는 생(生), 머무르는 주(住), 변하는 이(異) 사라지는 멸(滅)의 것이니라.

습기를 흡수하여 들여서 가운데로 돌아가되 서로 뛰어넘지 아니하는 것을 의식근(意識根)이라 하나니,

의식과 피로는 다 같은 보리(菩提)로써 똑바로 바라보다가 피로하여 져서 생기는 현상과 같은 것이니라.

ㅡ의입(意入)은 기억해서 아는 것을 주재하고, 기억했던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깨고 자는 것에서 생기기 때문에 잠자고 깨는 것으로 예를 들어 밝힌것이다. 

더듬어 기억하는  남억(攬憶)이 생(生)이고, 망각하는 것이 멸(滅)이니, 머무름의 주(住)와 변함의 이(異),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이미 더듬어 기억하였다가 곤 사라져서 망각하는 것을 전도(顚倒)라 한 것이니, 습관이 허망한 대상 물질의 망진(妄塵)을 흡수해서 중간의 의근(意根)으로 돌아 갔으나 앞의 생각과 뒤의 생각이 차례로 상속(相續)되는 것이므로 '서로 뛰어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의입의 현상인 것이다.

ㅡ의지근(意知根)은 제8식 심왕(心王)으로 51 가지의 심소(心所)를 모두 포섭하며, 제7말나식을 취하여 깊이 사량(思量)하는 것을 체성(體性)으로 삼는다.

 

因于生滅 二種妄塵,集知居中 吸撮內塵,見聞逆流 於五根流不及之地,名覺知性。此覺知性,離彼寤寐生滅二塵,畢竟無體。

생멸(生滅)하는 두 가지의 허망한 대상 경계(妄塵)으로 인하여 모아진 앎(知)이 그 중간에 있으면서 내진(內塵, 곧 法塵)을 흡수하여 들여서, 보고 듣는 견문(見聞)이 오근(五根)의 흐름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거꾸로 흐르는 역류(逆流)하는 것을 알아서 깨닫는 성품의 지각성(知覺性)이라 하나니,

그 앎이 생멸하는 것과 잠자고 깨어나는 두 가지 대상 물질을 여읜다면, 필경에 그 앎의 실체가 없는 것이니라.

ㅡ의(意)는 알고 깨닫는 성품의 지각(知覺)을 주재하고,근(根)은 몸 속에 숨어 있으므로 '모아진 앎이 그 중간에 있다'고 하였으며, 그 의근이 법진(法塵)을 집착하여 생각하는 현상이 안에서 생기는 까닭에 '내진을 흡수하여 들인다'고 한 것이다. 문수 보살이 말하기를 '법(法)을 내진이라고 한다'고 한 것은, 곧 과거 제법의 영상을 말한 것으로 낙사진(落謝塵)이라고도 하고, 또 무표색(無表色)이라고도 한다.'역류(逆流)'한다는 것은 돌이켜 반연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의근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을 총괄하기 때문에 견문이라 한 것이다. 즉 전5진이 멸한 후에 그 잔영이 의지(意地)에 머무는 것을 법진의 역류라 하는 것으로, 전5진이 반복하여 드러나지만 의지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 오근은 다만 나타나는 대상을 따라 순하게 반연할 뿐이지만, 오직 의근만은 오근이 반연하여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돌이켜 반연하나니, 그것은 추억이나 꿈 같은 것들이다.*근(根), 어떤 작용을 발휘할 수 있는 각각의 감각 기관의 기능을 뜻한다.*낙사진(落謝塵),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의 오진(五塵)은 그 작용을 쉬고, 제6식(意識)으로 과거를 반연하는 영상을 뜻한다. 

*무표색(無表色), 색법 중에서 다른 이에게 나타낼 수 없는 것, 즉 어떤 원인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무형무상한 사물을 뜻한다.

*반연(攀緣), 칡넝쿨이 나무에 의지하여 감고 올라가듯이, 마음도 눈 앞에 전개되는 사물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반연이 바로 일체 번뇌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如是,阿難!當知 是知覺性,非生滅來,非寤寐來 非於身生,亦非空出。

何以故?若從生來,滅即隨亡,令誰知滅 若從滅來 生即隨亡 云何知生 寤寐二相 亦復如是 若從意生 必無生滅寤寐 如是知精 本無自性 若從空出 有知成性 卽非虛空 又空自知 何關汝入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알고 깨닫는 성품의 지각성(知覺性)은 생멸에서 온 것이 아닌고, 잠자고 깨어남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몸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니,  

왜냐하면, 만약 생(生)에서 온 것이라면, 소멸되면 곧 따라서 없어질 것이니, 무엇으로 하여금 멸하는 것을 알 게 할 것이며,

만약 멸(滅)하는 것에서 온 것이라면, 생겨나면 곧 따라서 없어질 것이니, 무엇으로 하여금 생기는 것을 알게 하겠는가!

잠자고 깨어나는 두 가지의 이상(二相) 역시도 그러한 것이니,

만약 의근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생멸하고 잠자고 깨어나는 것이 없으면 이와 같은 아는 정기의 지정(知精)은 본래 자성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느끼(知)는 것이 있으면 자성을 이룰 것이니, 곧 허공도 아닐 것이고, 또 허공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니, 너의 의입(意入)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ㅡ여래장의 묘각명심(妙覺明心)은 생멸이 없지만, 무명의 정(精)에 나쁜 습성에 훈습되어서 생멸하는 의식과 화합해서 서로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지관(止觀)을 부지런히 닦아서 본각으로써 무명을 훈습하여 음(陰)을 없애고 양(陽)이 생겨나게 하는 것을 시각(始覺)이라 한다. 처음에는 지말무명부터 끊고, 점점 더 정진하여서 양(陽)만 순수하게 되는 진각(眞覺)이 되어야 비로소 근본무명이 끊어지는 것이다. 

식(識)의 성품인 밝게 아는 성식명지(性識明知)는 법계에 두루한 것이다.
만약 인연으로 난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소생(所生)에 떨어지므로 비인연이라 하고, 
만약 자연에서 난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능생(能生)에 떨어지므로 비자연이라 한다. 
이 성식명지(性識明知)는 의지근(意知根)과 비교가 안 되는, 알음알이의 앎이 아니다. 
알음알이는 능지장(能知障)에 떨어지고, 의지근은 모든 곳을 분별한다. 
분별을 넘어서서 초연할 때 무상지각(無上知覺)이 나타나나니, 이것이 성식명지(性識明知)인 것이다.

 

是故當知意入 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뜻으로 인하여 느끼는 의입(意入)은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3 1

▷육입(六入)에 나아가 여래장(如來藏)을 밝힘.

“復次,阿難!云何六入本如來藏妙眞如性?

다시 아난아, 어찌하여 6입(入)이 본래 여래장의 묘한진여성(妙眞如性)이라 하는가?

ㅡ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흡수하여 받아 들이는 것이 입(入)이다. 

 

▷안입(眼入)

阿難!(假令有人 不動目晴 瞪久發勞 則於虛空 別見狂華) 卽彼目精瞪發勞者,兼目與勞同是菩提,瞪發勞相

아난아, 가령 어떤 사람이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서 오랫동안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가 눈이 피로하여지면 곧 허공에 광화가 보일 것이니, 그 눈과 피로는 다같이 보리(菩提)로써 똑바로 보다가 눈이 피로하여져서 생긴 상이니라.

ㅡ눈은 곧 부근(浮根)이다. 

 

因于明暗二種妄塵,發見居中吸此塵像,名爲見性,此見離彼明暗二塵,畢竟無體。

밝음과 어두운 것의  가지 허망한 대상 경계(물질)로 인하여 보는 작용이 생기고,  가운데 있으면서  경계의 진상(塵像, 색상)을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보고 깨닫는 견각성(見覺性)이라 하나니,  보는 주체(작용) 밝음과 어두움의 두 대상 경계인 이진(二塵, 물질)를 여읜다 필경에 본다는 실체가 없는 무체(無體)이니라.

ㅡ색(色)으로 인하여 보는 것이 생기고 눈(眼)으로 인하여 대상 물질(塵)을 흡수하여 들이므로 안입(眼入)이 생기는 것이다.

색상(色像)은 외부로 들어나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 물체들. 


如是,阿難!當知是見非明暗來,非於根出
眼生,不於空生。何以故?若從明來,暗卽隨滅
,應非見暗。若從暗來,明卽隨滅,應無→見明。若從根生,必無明暗。如是見精,本無自性 若於從空出。若於空出,前矚塵象歸當見根;又空自觀,何關汝入。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보고 깨닫는 견각성(見覺性) 밝음이나 어두움에서 온 것도 아니고, 눈(根)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허공에서 생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밝음에서 온 것이라면, 어두워지면 곧 따라 사라져서 어둠을   없어야 할 것이고, 

만약 어두움에서 온다면, 밝아지면 곧 따라 사라져서 밝음을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눈에서 나온 것이라면 밝고 어두움이 없으면 이와 같이 보는 정기(精)가 본래 자성이 없을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보는 것이 있으면 자성(自性)을 이룰 것이니, 그렇다면 곧 허공이 아닐 것이요, 또한 허공이 스스로를 볼 것이니, 너의 안입(眼入)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是故當知眼入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눈의 보고 인식하는 안입(眼入)은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성이니라.

ㅡ여래장은 6근(六根)을 벗어나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다. 
근(根)은 능입(能入)이며, 진(塵)은 소입(所入)으로, 6근이 6진을 흡수하여 취할 수 있으므로  6근만을 6입(入)이라 한다. 
안근(眼根)은 색을 분주히 흘러들이고, 이근(耳根)은 소리를 분주히 흘러 들이므로, 능입(能入)이라 하며,   
범부는 3계의 6진(六塵)에 들어가고, 이승(二乘)은 진제(眞諦)에 들어가고, 보살은 속제(俗諦)에 들어가고, 부처는 중제(中諦)에 들어가므로, 모두 입(入)이라 하며, 모두가 일진법계(一眞法界)를 벗어나지 않으므로, 6입이 본래 여래장의 묘진여성(妙眞如性)이라 한다.

'안입허망(眼入虛妄)'이란 인연의 가명(假名)으로, 인연이 화합하여서 허망한 존재가 생기지만, 와도 온 곳이 없으며, 인연이 흩어지면 허망하게 멸한다고 하나, 가도 간 곳이 없다. 

인연은 바로 중(中)이며, 묘각명체(妙覺明體)요, 본여래장이다. 인연에 집착해서도 자연에 집착해서도 안되는 것이니, 만약  견성이 보이는 상(相)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바로 인연에 떨어지고 
만약 견성이 능히 보는 근(根)에서 생긴다고 집착하면 바로 자연에 떨어진다. 
상분과 견분은 모두 자증분(自證分)이 변화한 것으로 합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것이니, 합하지도 분리하지도 못하는 것이라면,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것이다.
 

▷이입(耳入)

阿難!譬如有人以兩手指急塞其耳,耳根勞故頭中作聲,兼耳與勞同是菩提。瞪發勞相

아난아, 만약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급히 귀를  막고 오랫동안 있는다면, 귀의 감관인 이근(耳根)이 피로하여져서 머리 속에서 어떤 소리(헛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귀와 귀의 피로는 보리로써 피로하여서 일으키는 상이니라.

 

因于動靜二種妄塵,發聞居中吸此塵象(聲像),名聽(覺)性,此(聽)離彼動靜二塵,畢竟無體。

움직이는 것과 고요한 것, 이  가지 허망한 경계의 망진(妄塵)으로 인하여, 듣는 작용을 일으키고  가운데 있으면서 경계의 성상(聲像)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듣고 깨닫는 청각성(聽覺性)이라 하며,  듣는 주체가 움직이는 것과 고요한 것의 두 가지 대상 경계(망진)를 떠나면 필경에 듣는다는 그 실체가 없느니라.

ㅡ소리로 인하여 듣는 것이 생기고, 귀로 인하여 대상 물질을 흡수하여 들이므로 이입(耳入)의 허망함이 있는 것이다. 

동(動)과 정(靜)의 2진(二塵)은 모두 무명(無明) 업식(業識) 중에서 환출(幻出)된 것이다. 
동정이진(動靜二塵)은 이근(耳根)에서 나오고, 이근(耳根)이 이 두 망진(妄塵)을 받아들이는 것을 청각성(聽覺性)이라 한다. 그러나 동(動)과 정(靜)의 2진(二塵)은 모두 생멸법(生滅法)으로, 잠시 있다가 순식간에 없어져서 터럭만큼의 실체(實體)도 없는 무생(無生)이다. 어떻게 무생(無生)의 허망(虛妄)한 법을 청각성(聽覺性)이라 하겠는가?

 

阿難! 當知 是聽覺性 非動靜來 非於 非於耳生 非於空出. 何以故?若從(動)來,動卽隨(亡),應非聞動(應不聽動)。若從動來,靜卽隨(亡),應無覺靜。若從(耳)生,必無動靜。如是聞體(聽靜),本無自性。若於(從)空出,有(聽)成性卽非虛空;又空自(聽),何關汝入。是故當知耳入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듣고 깨닫는 청각성(聽覺性)은 움직임이나, 고요함의 동정(動靜)에서 온 것이 아니며, 귀(耳)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온 것 아니다.

왜냐 하면, 만약 움직임에서 온 것이라면, 고요하여지면 곧 따라 없어질 것이니, 당연히 고요함을 느끼지 못해야 할 것이며,

만약 고요함에서 온 것이라면 움직이면 곧 따라 없어질 것이니, 당연히 움직이는 소리를 듣지 못해야 할 것이고,

만약 귀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으면 이와 같이 듣는 정기의 청정(聽靜)이 본래 자성(自性)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듣는 것이 있으면 자성을 이룰 것이니, 그렇다면 곧 허공이 아닐 것이요, 또한 허공이 스스로 듣는 것이니, 너의 이입(耳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듣고서 인식하는 이입(耳入)은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ㅡ듣는 것이 있으면 자성을 이룬다는 것은, 듣는 것이 있으면 자성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문성(聞性)은 비록 동정(動靜)은 아니지만, 동정(動靜)을 떠나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만약 관음(觀音)의 입리일문(入理一門)에서 초입(超入)하면, 동정 2진은 일어나지 않으며, 들어가는 이근(耳根) 역시 적연(寂然)하여 머무는 바가 없다. 
따라서 인연이 일어나는 것은 허망법(虛妄法)이며, 자연이 생김은 허망체(虛妄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연과 자연 모두가 가명(假名)으로 실법(實法)이 아니고, 진문성(眞聞性)은 허공에 꽉 차서 없는 곳이 없는 무소부재(無所不在)인 것이니, 그래서 인연도 아니요 자연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비입(鼻入)

阿難!譬如 (假令)有人急(搐)其鼻 (搐)久成勞,則於鼻中 (嗅)有冷觸,因觸分別通塞虛實,如是乃至諸香臭氣,兼鼻與勞同是菩提。瞪發勞相

아난아, 가령 어떤 사람이 코로 급하게 숨을 들이켜서, 그렇게 들이쉬기를 오랫도록 함으로 인하여 피로하여지면, 코 속에서 차가운 촉감이 있음을 느낄 것이니, 그 촉감으로 인하여 트이고 막힘의 통색(通塞)과 허하고 실함의 허실(虛實)한 것을 분별한다면,

그와 같이 모든 향기와 구린 냄새까지도 맡는 것이니, 그 코와 피로는 다 같은 보리(菩提)이니 똑바로 보다가 눈이 피로하여져서 생긴 현상인 것이니라.

 

因于通塞 二種妄塵,發(嗅)居中吸此(香像),名嗅(覺)性,此(嗅)離彼通塞二塵,畢竟無體。 

통함과 막힘의 통(通)과 색(塞)의  가지 허망한 대상 물질인 망진(妄塵)으 인하여 냄새 맡는 것이 생겨서  가운데에서 이 향상(香像)을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냄새를 맡아 깨닫는 후각성(嗅覺性)이라 하나니, 그 냄새를 맡는 주체가 트임의 통(通)과 막힘의 색(塞)의 2 가지 대상 물질을 여의면, 필경에 냄새라는 그 실체가 없어질 것이니라.

ㅡ냄새(香)로 인하여 냄새를 맡는 것이 생겨나고, 코로 인하여 대상 물질(塵像)을 흡수하여 들이므로 비입(鼻入)의 허망함이 생기는 것이다. 

통색(通塞)의 두 가지 망진(妄塵)이 코끝에 닿으면, 코끝이 망진(妄塵)을 받아들이는 것을 후문성(齅聞性)이라 하며, 통색(通塞)은 모두 실성(實性)이 없다. 
냄새 맡는 중에 있다는 것은 모두 허망한 인연으로 생긴 것으로 실은 무생(無生)인 것이니, 어떻게 통색(通塞)의 허망법(虛妄法)을 후문성(齅聞性)이라 할 수 있겠는가?

 

阿難! 當知 是聞(是嗅覺性) 非通塞來,非於(鼻)出,不於空生(非於空出)。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냄새 맡아 깨닫는 후각성(嗅覺性)은 통함(通)과 막힘(塞)에서 오지도 않고, 코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何以故?若從通來,塞自隨
(亡),應不嗅塞 云何知塞 (若從塞來 通自隨亡) 如因塞有(應不嗅通) ,通則無聞,若從根生(鼻生) 必無通塞 如是聞體(嗅精) 云何發明香臭等觸?若從根生,必無通塞。如是聞體,本無自性。若從空出,是聞自當迴嗅汝鼻,空自有聞,(有嗅成性 卽非虛空又空自嗅) 何關汝入。是故當知鼻入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왜냐하면, 만약 통한 데서 온 것이라면 막히면 곧 따라 없어질 것이니, 당연히 막힘을 느끼지 못해야 할 것이고,

만약 막힘에서 온 것이라면, 통하면 곧 따라 없어질 것이니, 당연히 통함을 느끼지 못해야 할 것이다.

만약 코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통함과 막힘이 없으면 이와 같은 맡는 정기의 후정(嗅精)이 본래 자성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맨새를 맡는 것이 있으면 자성을 이룰 것이니, 그렇다면 곧 허공이 아닐 것이요, 또한 허공이 스스로 냄새를 맡을 것이니, 그것이 너의 비입(鼻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맡아서 인식하는 비입(鼻入)은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11

 

▷수음(受陰)

5온설의 2번째 요소인 수온(受蘊, vedanā-skandhāh, aggregates of sensation, aggregates of feeling)은 지각(知覺)의 적집, 집합 또는 무더기라는 뜻으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의 여러 작용 중 감수작용(感受作用)과 그 세력을 뜻한다.
지각(知覺)의 대상이라는 면에서 볼 때, 수온(受蘊)은 전5식을 통해 육체적 · 물질적 대상을 지각(知覺, 즉 受, 즉 느낌)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제6식(부파불교의 경우) 또는 후3식(대승불교의 경우)을 통해 정신적 대상을 지각(知覺, 즉 受, 즉 느낌)하는 것도 함께 의미한다.ㅡ위키

 

阿難!譬如有人手足宴安百骸調適,忽如忘生性無違順,其人無故以二手掌於空相摩,於二手中妄生澀滑冷熱諸相;受陰當知亦復如是

아난아,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수족(手足) 편안하고  뼈마디가 고루 화평할 때에는 홀연히 살아 있다는 것도 잊은 듯, 마음에 거스리거나 순응하 일이 없다가,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두 손바닥을 허공에서 마주 비빈다면,   사이에 난데없이 껄끄럽거나 매끄럽거나 차갑거나 따뜻한 여러 현상이 생기는 것과 같이, 수음(受陰)도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ㅡ대상 경계에 마음이 접촉하고 마음으로 그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느낌의 수(受)라 한다.

'유인(有人)'은 중생의 일심본원(一心本源)을 비유한 것이고,

수족연안(手足宴安)은 진여부동(眞如不動)에 비유한 것이고

'손바닥을 허공에서 마주 비비면 난데없이 껄끄럽거나 등의 현상이 생긴다'는 것은 환망으로 생긴 접촉이  허망한 세 가지 미세한 식과 여섯가지 거친 식을 일으키는 것을 비유하였으며, 

'살아 있다는 것도 잊은 듯하다'는 것은 지극히 순조로움을 뜻한다.

 

阿難!是諸幻觸,不從空來,不從掌出。如是,阿難!若空來者,旣能觸掌,何不觸身?不應虛空選擇來觸。若從掌出,應非待合。

아난아,  모든 허망한 촉감은 허공에서 온 것도 아니고, 손바닥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약 허공에서 온 것이라 이미 손바닥은 접촉하였는데 어찌 몸에는 촉감이 없는 것인가?

응당 허공이 닿을 곳을 가려서 선택하여 닿게 하지는 않는 것이며, 

만약 손바닥에서 나왔다면 당연히 두 손바닥이 합해지기를 기다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허공의 체(體)는 항상 가득한 것이라서 응당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만약 손바닥에서 나온 것이라면, 당연히 있음을 기다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수음은 허망하며 인연의 가명(假名)이다. 인연이 화합하면 허망한 유(有)가 생기고, 인연이 흩어지면 허망한 이름이 사라진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다’는 수음은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며 불가사의하고 밝게 아는 체성(體性)이라는 뜻이다.


又掌出故,合則掌知,離卽觸入,臂腕骨髓應亦覺知入時蹤迹,必有覺心知出知入,自有一物身中往來,何待合知要名爲觸?

 손바닥에서 나왔으므로 합칠 때 손바닥이 느낀다고 한다면, 뗄 때에 촉이 들어가서 손목과 팔목의 골수(骨髓)들도 마땅히 들어갈 때의 종적(蹤迹)을 또한 깨닫고 알아야 할 것이니라.

반드시 깨닫는 각심(覺心, 마음)이 있어서 나오고 들어가는 것을 안다면, 저절로  물건이  속을 오고 가야 할 것이니, 어찌하여 손바닥이 마주 합하여지기를 기다려서 알게 되는 것을 접촉이 하겠는가?

ㅡ만약 손바닥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이 없는 것이므로 오로지 허망할 뿐인 것이다. 

 

是故當知受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수음(受陰)은 허망한 것이라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성이니라.  

 

▷상음(想陰)
阿難!譬如有人談說醋梅口中水出,思踏懸崖足心酸澀;想陰當知亦復如是。

아난아,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매실을 말하면 입에서 침이 나오고, 높은 낭떨어지에 서 있는 것을 생각하면 발바닥이 짜릿해지는 느낌이 생기는 것과 같이, 상음(想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ㅡ생각은 실상이 없어서 마음으로 말미암마 상(相)을 이루는 것이다.

'유인(有人)'은 상음을 다하지 못한 중생이고, 매실과 낭떨어지를 생각하는 것은 실상이 없는 것이고, 입에 침이 생기고 발바닥이 짜릿해 지는 것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상(相)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상음(想陰) 역시 인연(因緣)이 만들어 낸 허망한 상상이다. 기억하고 잊음이 상(想)의 변제(邊際)이다.
유념(有念)을 기(記)라 하고, 무념(無念)을 망(忘)이라 한다. 기(記)와 망(忘)을 떠나서는 상음이 드러나지 않는다. 
경계에 의지하여 상상하는 것을 연경(緣境)이라 하고 경계를 떠나서 상상하는 것을 연영(緣影)이라 한다.
상(想)은 외인(外因)과 외연(外緣)을 의탁하여 생긴다. 다시 말해 의타이기(依他而起)란 말이다. 
만약 식초라는 말이 없고, 낭떠러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상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상음이 비록 외경을 따라 생멸하지만, 선(善)도 악(惡)도 생각하지 않고, 생각이 다하여 환원할 때, 하나의 불생불멸성(不生不滅性)로 돌아가 있다. 그래서 본래는 인연이 아니라고 한다. 
상음은 경계를 따라 기멸(起滅)하므로 진실성이 아니고, 그래서 자연성도 아니다. 
진성은 인연도 자연도 아니며 수연불변(隨緣不變)의 체(體)가 드러난 성품이다.

 

阿難!如是醋說,不從梅生,非從口入。如是,阿難!若梅生者,梅合自談,何待人說?若從口入,自合口聞,何須待耳!若獨耳聞,此水何不耳中而出?

아난아! 이와 같이 시다(醋)는 말이 매실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입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라.

아난아, 만약 매실에서 생긴 것이라 당연히 매실 스스로가 말을 해야 할 것이거늘, 어찌 사람이 말하기를 기다리며, 

만약 입으로 들어갔다면 마땅히 입이 들어야 할 것이니, 어찌 귀를 기다려 듣겠는가?

만약 오로지 귀만이 그 말을 듣는다면,  침이 어째서 귀속에서 나오지 않는 것인가?

 

想踏懸崖與說相類。是故當知想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높은 낭떨어지에 서 있다는 생각도 매실을 말하는 것과 서로 비슷한 것이니,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냐 하나니, 상음(想陰)은 허망한 것이라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성이니라.

 

▷행음(行陰)
阿難!譬如暴流波浪相續,前際後際不相踰越;行陰當知亦復如是。

아난아, 비유하자면 세차고 급하게 흐르는 물결이 서로 이어져서 앞과 뒤의 순서를 서로 뛰어넘지 않는 것과 같이, 행음(行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ㅡ묘하게 맑은 묘정(妙淨)한 것이 망령되게 움직여서 경계를 따라 옮겨 가면, 생각마다 옮겨지면서 머물지 않기 때문에 행음이며, 이것을 급하게 흘러가는 물에 비유한 것이다. 

행음(行陰), 역시 인연이 만들어낸 허망한 생멸상(生滅相)으로, 행(行)은 천류라는 뜻이다. 
생(生)과 멸(滅)이 행(行)의 변제(邊際)이며, 외상(外相)의 생멸(生滅)을 색진생멸(色塵生滅)이라 하고, 내심(內心)의 생멸(生滅)을 법진생멸(法塵生滅)이라 한다. 

 

阿難!如是流性,不因空生,不因水有;亦非水性,非離空水。如是,阿難!若因空生,則諸十方無盡虛空成無盡流,世界自然俱受淪溺。若因水有,則此暴流性應非水,有所有相今應現在。若卽水性,則澄淸時應非水體。若離空水,空非有外水外無流。

아난아, 이와 같이 흐르는 성품이 허공으로 인하여 생기지도 않았고, 물로 인하여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물의 성품도 아니고, 허공과 물을 떠나서 있는 것도 아니니라.

이와 같아서 아난아, 만약 허공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면, 시방의 끝없는 허공에 끝없는 흐름을 이루어서 세계는 자연히 온통  속에 빠져 잠기게 될 것이며, 

만약 물로 인하여 있는 것이라면,  세차고 급하게 흐르는 물의 성품은 당연히 물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능유(能有, 물)와 소유(所有, 흐름)의 상(相)이 마땅히 지금 눈앞에 뚜렷이 나타나야 할 것이며,

만약 흐름이 물의 성품이라면, 맑고 고요할 때에는 응당 물의 체성이 아닐 것이며,  

만약 허공과 물을 모두 떠나서 있는 것이라면, 허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며, 물을 떠난 물 밖에서는 흐름이 없어야 할 것이니라.

ㅡ능유(能有)는 물이고, 소유(所有)는 흐름을 가리킨 것으로, 흐름이 물을 떠나서 다른 체상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며, 행음은 생긴 자리에서 찰나에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라서, 진상부동심체(眞常不動心體)에서 구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행음은 인연이 화합하면 허망하게 생기고, 인연이 흩어지면 허망하게 사라지므로 행음허망(行陰虛妄)이라 하며,   
행음은 모두 여래장으로부터 일어난다. 비록 연(緣)을 빌려 생기나 그 체는 항상한 불변이다.

파도(물)는 바람으로 인하여 잠시 움직이나 그 잠성(潛性)은 파괴되지 않으므로, 그래서 본래 인연이 아니라고 한다. 
미(迷)하면 허망한 행음이요, 깨달으면 불변의 진여체(眞如體) 중에 생기는 큰 쓰임이다.

 

是故當知行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행음(行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성이니라.

 

▷식음(識陰)

阿難!譬如有人取頻伽甁,塞其兩孔滿中擎空,千里遠行用餉他國;識陰當知亦復如是。

아난아,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빈가병(頻伽甁)의 양쪽 구멍을 막아서 그 가운데에 허공을 가득히 담아서 천리의 먼 길의 다른 나라에 가서, 그 허공을 꺼내 놓는 것과 같으니, 식음(識陰)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ㅡ유인(有人)은 식음을 파하지 못한 삼계의 중생에 비유한 것이고,

빈가병(頻伽甁), 가릉빈가의 새 모양으로 만든 병으로, 형태는 있지만 실상이 없음을 중생들의 허망한 몸인 업보신(業報身)에 비유한 것이다.

병에 가득담은 허공은 식음을 비유한 것으로, 빈 성품이 공한 진각(眞覺)은 법계에 두루 가득하거늘, 한 번 미혹하여 의식이라고 여기는 것이므로, 허망한 몸 안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마치 병 속에 든 허공과 같은 것이다. 

비어 있다는 공(空)이란 본성과 의식이 일체(一體)임을 비유한 것이고, 

'양쪽 구멍을 막은 것'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2장(二障)을 비유한 것이고, 

'천리의 먼 길의 다른 나라에 가서, 그 허공을 꺼내 놓는' 것은 본성은 생멸이 없으며 취하고 버릴 것이 없는데 환망한 몸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형태를 벗어나 저쪽에서 생(生)을 의탁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본성을 모르고 허망하게 식(識)을 일으켜서 유전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阿難!如是虛空,非彼方來,非此方入。

아난아, 이와 같이 허공은 저 곳에서 온 것도 아니고, 이 곳에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라.

ㅡ성품(性品)은 가고 옴이 없으며, 들고 남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如是,阿難!若彼方來,則本甁中旣貯空去,於本甁地應少虛空。若此方入,開孔倒甁應見空出。是故當知識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이와 같이 아난아, 만약 저 곳에서 온 것이라면, 본래 병 가운데에 이미 허공을 담아서 가지고 갔으므로 본래의  그 병이 있었던 곳에는 허공이 마땅히 조금 줄어들었어야 할 것이며,

만약 이 곳으로 들어온 것이라면 뚜껑을 열고 병을 기울일 때에는 당연히 허공이 나오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식음(識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성이니라.

ㅡ몸과 마음과 반법, 곧 근(根), 진(塵), 처(處), 계(界)가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大佛頂萬行首楞嚴經卷第二 終 대불정만행수능엄경 제 2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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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10

 

阿難白佛言:世尊!如我思惟,此妙覺元與諸緣塵及心念慮非和合耶?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

세존이시여제가 사유(思惟)하여 보니,  묘각(妙覺) 근원은 모든 인연 경계인 연진(緣塵, 상분)과 마음(心, 업식)과 생각(念慮, 견분) 더불어 화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ㅡ이것은 다시 다른 하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묘각체(妙覺體)는 법계(法界)에 두루 함장되어 있는 것으로, 본래 우주법계와 다른 체(體)가 아니다. 능소(能所)가 없으니 화(化)한다, 합(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佛言:汝今又言覺非和合。吾復問汝。此妙見精非和合者,爲非明和?爲非暗和?爲非通和?爲非塞和?

若非明和,則見與明必有邊畔。汝且諦觀,何處是明?何處是見?在見在明自何爲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다시 말하기를, 각(覺) 화합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내가 다시 네게 묻겠다

 묘한 보는 정기인 견정(見精)이 화합한 것이 아니라

밝음과 화합(明和)한 것이 아닌가?

어둠과 화합(暗和)한 것이 아닌가? 

통함과 화합(通和)한 것이 아닌가? 

막힘과 화합(塞和)한 것이 아닌가?

만약 밝음과 화합(明和)한 것이 아니라, 견정(見精)과 밝음(明) 사이에 반드시 경계선인 변반(邊畔) 있어야 할 것이다

너는 자세히 살펴보아라어디까지가 밝음의 경계이며? 어디까지가 견정 경계가 되는가?

보는 주체의 견정의 경계는 어디서 시작하며? 밝음의 경계는 어디서 시작하는 것인가?

ㅡ화합(和)하였다면 같은 것이어서 경계가 없어야 할 것이고, 화합한 것이 아니라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경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은 자증분(自證分)의 본체에 속한 것이므로 합한다는 말 자체가 허구이다. 
의식을 파하면 견성(見性)이 드러나고, 견분과 상분을 파하면 장성(藏性)이 드러나며,업식을 파하면 여래장성이 드러난다. 
제법(諸法)이 상이 없음을 알면 상상(相相)이 적멸(寂滅)이며 제법이 모두 장성(藏性)임을 알면 성성(性性)이 원통(圓通)한다.

 

阿難!若明際中必無見者,則不相及,自不知其明相所在,畔云何成?彼暗與通及諸群塞,亦復如是。

아난아만약 밝은 것 가운데 반드시 보는 주체가 없다면서로가 미칠 수 없으므로 스스로 그 밝은 명상(明相) 있는 곳을 알지 못할 것인경계가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는가?

어둠의 명화(暗和)와 통함의 통화(通和)와 막힘의 색화(塞和)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又妙見精非和合者,爲非明合?爲非暗合?爲非通合?爲非塞合?若非明合,則見與明性相乖角,如耳與明了不相觸,見且不知明相所在,云何甄明合非合理?彼暗與通及諸群塞,亦復如是。

또한 묘한 견정이 화합(和)한 것이 아니라밝음과 합하지 않은(非合) 것인가? 

어둠과 합하지 않은(非合) 것인가?

통함과 합하지 않은(非合) 것인가?

막힘과 합하지 않은(非合) 것인가?

만약 밝음과 합하지 않은 것이라면보는 주체와 밝음의 성품이 서 어긋나는 것이, 마치 귀(耳)와 밝음(눈)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과 같이보아도 밝은 명상(明相) 있는 곳을 알지 못할 것인어떻게 합하고 합하지 않는 이치를 가려서 밝힐 수 있겠는가?

어둠의 비암합(非暗合)와 통함의 비통합(非通合)와 막힘의 비색합(非塞合)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ㅡ합한 것이 아닌 비합(非合)이라면, 눈과 대상 물질이 어긋나서 이미 밝음도 알지 못하고 또한 보는 주체도 나타나지 않을 것인데, 두 가지 체(體)가 이미 없거니 어디를 좇아서 합하는 것과 합하지 않는 이치를 밝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이상은 맑고 묘한 견정(見精)에 의지해서 마음의 티클을 떨어버리게 한 것이다. 

 

▷제근(諸根)과 그 대상물질에 나아가 여래장을 나타내시다.

阿難!汝猶未明一切浮塵諸幻化相,當處出生隨處滅盡,幻妄稱相,其性眞爲妙覺明體,如是乃至五陰、六入,從十二處至十八界,因緣和合虛妄有生,因緣別離虛妄名滅,殊不能知生滅去來,本如來藏常住妙明,不動周圓妙眞如性,性眞常中求於去來、迷悟、死生,了無所得。

아난아너는 오히려 아직도 실속 없이  경계의 일체의 부진(浮塵)과 모든 환술(幻術)과 같이 변화하는 온갖 모양(相)이, 곳을 따라 생겨났다가  곳을 따라 사라져버리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허망한 환영의 환망(幻妄) 모양(相)이라고 하지만 성품은 진실 그대로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본체인 묘각명체(妙覺明體)이니라.

이와 같이 내지 5(陰, 오온) 6(六) 12(十二處, 육근+육경)에서 18(十八界, 육근+육경+육식) 이르기까지도 인연이 화합하여 허망하게 생겨나는 것이며

인연이 흩어지면 허망하게 멸하는 것이니,

 생기고 멸하고 가고 오는 것 본래는 여래장(如來藏)이라, 항상 상주(常住)하는 것이며,

묘하게 밝은 묘명(妙明)한 것이고, 부동하여 두루 원만하고 미묘한 진여 변함없는 성품인 묘진여성(妙眞如性)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구나!

 성품의 진실하고 상주(常住)하는 가운데서는 가고 옴과 미혹함과 깨달음과 나고 죽음을 찾아보아도 찾을  없느니라.

ㅡ명암통색(明暗通塞)이 합하고 합하지 않는 것의 이치가 모두 부진(浮塵)이요 환상이다. 

화합(和合)으로 인하여 허망하게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므로 환상(幻相)이고, 곳을 따라 생기고 곳을 따라 없이진다고 한 것이다. 

여래장(如來藏)이란, 당사자의 법신의 묘한 본성으로, 과(果)에 의해 일컫는 것이 여래(如來)이고, 모든 덕을 포함하고 있어서 장(藏)이라 하고,

애초에 가고 옴이 없으므로 상주(常住)라 하고, 능히 어둡게 할 수 없으므로 묘명(妙明)이라 하고, 생멸을 따라 가지 않는 것이므로 부동(不動)이라 하고, 두루 만족되지 않음이 없는 것을 두루 원만하다 하고, 묘하여 지극히 신비하며 일체의 성품으로서 서로 차이가 없음을 미묘한 진여의 성품인 묘진여성(妙眞如性)이라 한다. 

 

ㅡ제법이 와도 본래 온 곳이 없으므로 당처출생(當處出生)이라 하고,

가도 간 곳(흔적)이 없으므로 수처멸진(隨處滅盡)이라 한다.

​여래장이란 중생 모두가 함께 갖추고 있는 본각의 성체(性體)이다. 이 성체는 숨어서 드러나지 않고 중생심 안에 함장되어 있어서 여래장이라 한다. 상주하고 불가사의하게 밝고 움직이지 않으며 두루 원만함이 여래장의 덕상(德相)이다. 

 

▷오음을 밝히시다.

阿難!云何五陰本如來藏妙眞如性?阿難!譬如有人以淸淨目觀晴明空,唯一精虛迥無所有,其人無故不動目睛瞪以發勞,則於虛空別見狂花,復有一切狂亂非相;色陰當知亦復如是。

아난아, 어째서 5음(陰)을 본래의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인 묘진여성(妙眞如性)이라 하는 것인가?

아난아,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청정한 눈으로 맑게 개인 밝은 하늘을 볼 때에는, 오직 하나의 맑은 하늘일 뿐이라서 저 멀리 아무것도 없거늘, 그 사람이 까닭 없이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오랫동안 똑바로 보고 있다가 눈이 피로하여지면, 허공에 따로 어물거리는 광화(狂花)를 보기도 하고, 다시 일체의 어지럽게 날 뛰는 헛된 모양을 보기도 하는 것과 같이, 색음(色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ㅡ색수상행식의 5 가지가 체(體)를 이루어 묘진여성을 덮어서 가리는 것을 오음(五陰)이라 한다. 

'청정한 눈으로 맑게 개인 밝은 하늘을 보는 것'은 맑은 지헤로 묘한 성품을 보는 것을 비유한 까닭에 '멀리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고, 

'눈이 피로하여서 광화를 보는 것'은 허망한 인(因)으로 색(色)에 연하는 것이다. 

'허공에 따로 어물거리는 광화(狂花)'는 색음(色陰)을,

헛된 모양의 광상(狂相)은 색경(色境)을 비유한 것이다.

 

▷색음(色陰)

阿難!是諸狂花,非從空來,非從目出. 如是,阿難!若空來者,旣從空來還從空入,若有出入卽非虛空,空若非空,自不容其花相起滅,如阿難體,不容阿難。

아난아, 이 모든 어물거리는 광화(狂花)는 허공에서 온 것도 아니고 눈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약 허공에서 온 것이라면, 허공에서 왔으니 다시 허공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니,

만약 드나듦의 출입(出入)이 있다면 (실체가 있는 것이므로) 곧 허공이 아닐 것이며,

허공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그 광화의 모양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허용할 수 없으니,

마치 아난의 몸에 다른 아난을 허용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ㅡ광화가 허공을 인한 것이 아님이 색음(色陰)이 대상경계로 인하여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若目出者,旣從目出還從目入,卽此花性從目出故,當合有見。若有見者,去旣花空旋合見眼;若無見者,出旣翳空,旋當翳眼。又見花時,目應無瞖,云何晴空號淸明眼?是故當知色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만약 눈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미 눈에서 나왔으니 다시 눈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 광화의 성품이 눈에서 나온 것이므로, 당연히 보는 작용에 합(合)해야 할 것이며,

만약 보는 작용이 있다면 나갈 때에 이미 허공의 꽃을 보았으니, 돌아 올때에도 반드시 눈을 보아야 할 것이며, 

만약 보는 작용이 없다면 나갈때 이미 허공을 가렸으니, 돌아올 때에도 당연히 눈을 가려야 할 것이며,

또 광화를 볼 때에도 눈에는 당연히 가리움이 없는데, 어찌하여 청정하고 맑은 허공이라야만 청정하고 맑고 밝은 눈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색음(色陰)은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성품이니라.

ㅡ곧 색음이 눈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광화가 눈에서 나온 것이라면 눈의 성품을 얻어서 응당 보는 것이 있을 것이나, 돌아올 때 눈을 보지 못하며, 또한눈을 가리지도 않으므로 눈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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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9

 

▷법합(法合)

阿難!吾今爲汝以此二事進退合明。

아난아, 내가 이제 너를 위하여   가지의 이사(二事)를 앞(進)뒤(法)로 맞추어 가면서 밝혀주리라. 

ㅡ두 가지의 이사(二事)란, 별업의 눈병으로 보는 것과, 동업으로 느끼는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 법(法)과 비유를 서로 맞추어 가면서 밝힌다고 한 것이며,

여기에서 '진(進)'은 법(法)을 말하고, 퇴(退)는 비유를 말하는 것이다.

 

阿難!如彼衆生別業妄見,矚燈光中所現圓影雖現似境,終彼見者目眚所成,

眚卽見勞非色所造,然見眚者終無見咎。

아난아,  중생이 개별로 지은 업으로 허망하게 보는 별업망견(別業妄見)으로, 등불의 빛에 나타난 원영(圓影)의 등무리가 비록 대상의 경계와 비슷하 나타날지라도, 결국에는  보는 사람의 눈병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병은 곧 보는 주체가 피로하여 나타난 모습일 뿐,  자체에서 만들어진  아니다.

그러나 마침내 눈병 그 자체를 보게 된다면, 그 보는 체의 허물이 없는 것이다. 

ㅡ이것은 별업의 업장으로 망령되게 보는 것은 그 허물이 눈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등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비유한 것이다.  즉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2분은 자증분(自證分)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속한다. 경계에 의한 여환(如幻)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 아니니, 마치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우리가 외계사물을 직접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식상(識上)의 형상을 인식한다고 본다. 이것은 곧 하나의 인식이 성립될 때, 식이 주관과 객관으로 이분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상분(相分)은 객관으로서의 식, 즉 식상(識上)의 영상(影像)으로서 소취분(所取分)ㆍ소량(所量)ㆍ사경상(似境相)ㆍ유상식(有相識)이라고도 하며,

견분(見分)은 주관으로서의 식, 즉 상분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작용으로서 능취분(能取分)ㆍ능량(能量)ㆍ능취상(能取相)ㆍ유견식(有見識)이라고도 하며,

자증분(自證分)은 이분화 되기 이전의 식 자체로서 견분과 상분에 의한 인식작용의 결과를 확인하는 인식체의 역할을 한다. -무착(無着)의 섭대승론(攝大乘論) 상권 6]

 

▷정합(正合)

例汝今日以目觀見山河國土及諸衆生,皆是無始見病所成。

見與見緣似現前境,元我覺明見所緣眚,覺見卽眚 本覺明心,覺緣 非眚

예컨데 네가 지금 눈으로 산과 강과 국토와 중생들을 보는 것이 모두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보는 주체가 병에 걸림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니라.

보는 주체(작용, 見, 능견)과 보이는 대상 물질인 견연(見緣, 상견)이 마치 눈 앞의 경계와 같이 나타나나,

본래 나의 깨달음의 밝음인 각명(覺明, 묘심명체)이 허망한 대상을 깨닫는 것은 눈병이 아니니라.  

ㅡ'지견(知見)에 알음알이가 성립되면, 그것이 곧 무명(無明)의 근원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이것은 다만 각명(覺明)의 허물일 뿐, 본각(本覺)의 잘못이 아닌 까닭에 '각명(覺明)으로 허망한 대상을 깨닫는 것은 눈병이 아니니라.'라고 한 것이다. 

이 가운데 법(法)과 비유한 대의(大意)는 눈(目)은 제 7식, 눈병은 사람과 법에 대한 2 가지의 집착을, 

등불은 제 8식에 비유한 것이다. 

등불을 식(識)에 비유한 것은, 등불이 기름과 결합하여 계속 타는 것과 같이, 식(識)도 탐욕과 애욕에 의해서 생사가 끊어지지 않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은 눈병과 같아서, 경계에 오취(五聚)에 차별이 있으므로, 각각 지은 별업이라 하였다.

눈병이 없으면 다만 등불만 보일 것이고, 집착이 없는 사람은 다망 유식(唯識)만 볼 것이다. 

 

覺所覺 眚 覺非眚中(?) (性覺明元 卽非眚中, 누락된 듯) 此實見見。云何復名覺聞知見?

깨달아야 할 대상인 소각(所覺)을 깨닫는  것은 눈병이지만,

깨닫는 성품인 성각 밝은 근본인 성각명원(性覺明元)은 눈병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이는 보는 주체를 보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또 다시 깨달으며(覺), 들으며(聞), 알고(知), 본다(見)고 이름하겠는가? 

깨달아야 할 대상인 소각(所覺)은, 곧 볼 수 있는 일체의 대상 경계이니, 대상 경계를 분별하는 것은 눈병이지만, 각성(覺性)은 눈병이 아니므로 볼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성각(性覺), 진여의 본체는 본래 자명(自明)한 것이므로 성각이라고 하였다. 

전심법요(傳心法要)에 이르기를 “세인(世人)은 진성(眞性)을 깨닫지 못해서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마음이라 오인하여 견문각지에 덮여서 정명본체(精明本體)를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

 

是故汝今見我及汝幷諸世閒十類衆生,皆卽見眚;非見眚者,彼見眞精性 非眚者故不名見。

그러므로 네가 지금 나를 보고, 너를 보고, 모든 세간의 10 종류의 중생을 볼지라도, 그것은  보는 주체(작용)이 눈병에 걸린 것이지,병을 보는 진실한 주체는 아닌 것이다. 

 보는 주체(작용)의 정밀하고 참된 성품의 진정성(眞精性)병이 아니기 때문에 ‘보는 주체(작용)’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ㅡ'보는 주체(작용)이 눈병에 걸린 것이지 눈병을 보는 진실한 주체가 아닌 것이다'란, 볼 수 있는 법은 모두 눈병이지 보는 주인공의 본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성(自性)이 불변수연(不變隨緣)하고, 수연불변(隨緣不變)하는 것이라, 견분과 상분이 의지할 수 있으나, 견상(見相)이 변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생망(眚妄)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비생(非眚)이라 하였다.

 

▷합동업(合同業)

阿難!如彼衆生同分妄見,例彼妄見別業一人,一病目人同彼一國,彼見圓影眚妄所生,此衆同分所現不祥,同見業中瘴惡所起,俱是無始見妄所生。

아난아,  중생들이 본 공동으로 허망하게 보는 동분망견(同分妄見)과,

따로 지은 업장으로 망령되게 지은 별업망견(別業妄見)한 사람을 예로 들어 비유로 밝혀 보리니,

눈병에 걸린 한 사람은  나라와 같으며, 또 그가 보는 등불의 원영(圓影)은 눈병으로  허망하게 생긴 것이며, 

 공동의 무리인 중동분(衆同分, 동업)이 다 같이 불길한 불상(不祥)을 보는 것은 같은  업장 가운데 나쁜 기운의 장악(瘴惡)으로 생긴 것이니, 모두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보는 주체(작용)의 허망된 망견(妄見)에서 생긴 것이니라.

ㅡ망견을 일진일퇴(一進一退)의 비유로 밝히는 것이다. 망업(妄業)은 비록 다르나, 망본(妄本)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정합(正合)

例閻浮提三千洲中,兼四大海娑婆世界,幷洎十方諸有漏國及諸衆生,同是覺明無漏妙心,見聞覺知虛妄病緣,和合妄生、和合妄死。若能遠離諸和合緣及不和合,則復滅除諸生死因,圓滿菩提不生滅性淸淨本心本覺常住。

염부제(閻浮提)의 3천개 섬(洲) 가운데 사방의 대해(大海)와 사바세계(娑婆世界)와 아울러 시방(十方)의 모든 번뇌가 있는 유루(有漏)의 중생들이 살고 있는 나라인 유루국(有漏國)들과 중생들을 견주어 예를 들면, 

이 모두가 깨달음이 밝고 번뇌가 없는 묘한 마음의 각명무루묘심(覺明無漏妙心)이, 보고(見) 듣고(聞) 깨닫고(覺) 아는(知)것의 허망한 병의 인연으로, 화합하여 허망하게 나고(生), 허망하게 죽는(死) 것이니라.

만약 능히 모든 화합하는 화합연(和合緣)과 화합하지 않는 불화합연(不和合緣)을 멀리 벗어날  있다면, 곧 생사의 원인을 멸하게 되어서  원만한 보리의 생멸을 떠난 성품을 원만하게 이루어서, 청정한 본심(本心)에 본각(本覺)이 항상 상주하게 될것이니라.

ㅡ앞에서는 한 사람으로 한 나라를 비유하였고, 여기에서는 한 나라를 대천세계에 비유하여서, 기계(器界)와 근신(根身) 모두가 보는 주체의 병과 하합하여 아집으로 부질없이 오도에서 생멸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밝히셨다. 

화합연(和合緣)이란, 대상 경계로 인하여 생기는 아집의 거친 생각의 추상(麤想)이며, 그것이 번뇌장(煩惱障)이며

불화합연(不和合緣)이란, 대상 경계를 여의고 홀로 집착하는 법집(法執)의 미세한 생각으로, 소지장(所知障)이다

이러한 이장(理障)이 생사를 이어가며 바른 지견을 가로 막는 나쁜 인(因)이 되어서 보리(菩提)를 없애는 것이다.

 

▷다시 밝히시다.

阿難!汝雖先悟本覺妙明性非因緣、非自然性,而猶未明如是覺元,非和合生及不和合。

아난아, 네가 비록 본각의 묘하고 밝은 성품의 묘명성(妙明性)이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님을 깨달았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이러한 깨달음의 근원은 서로 화합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서로 화합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치를 밝히지 못하였느니라.

ㅡ도를 증(證)하는 성품은 화합으로도 불화합으로도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아직 알지못하는 것이니, 이는 공부하는 마음에 남아 있는 번뇌의 찌꺼기 이므로 다시 바르게 깨우쳐 주어 밝고 맑게 되도록 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정(淨)을 밝히시다

阿難!吾今復以前塵問汝。汝今猶以一切世閒妄想,和合諸因緣性,而自疑惑。證菩提心和合起者,則汝今者妙淨見精,爲與明和?爲與闇和?爲與通和?爲與塞和?

아난아, 내가 이제   경계의 미진을 들어 너에게 묻겠으니,

너는 아직까지 오히려 일체 세간의 망상으로 화합하는 모든 인연성(因緣性)으로 인하여 스스로 의혹을 가지기를, 보리심를 증득하는 마음도 화합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여기는구나.

지금 너의 묘하고 깨끗한 보는 견정(見精)은 밝음(明)과 화합한 것인가? 어둠(闇)과 화합한 것인가?

통함(通)과 화합한 것인가? 막힘(塞)과 화합한 것인가?

'화(和)'라고 한 것은 섞여서 분별하기 어려운 것이고, 

'합(合)'이라는 것은 집착하여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若明和者,且汝觀明,當明現前,何處雜見?見相可辨,雜何形像?

만약 밝음(明)과 화합하였다면, 네가 밝음을 보는 관명(觀明)할 때에 마땅히 밝음이 나타날 것이니, 어느 곳에 보는 것이 섞여있는 것인가?  보는 것과 상(相)은 분별할 수 있지만, 섞인 것은 어떠한 형상인가?

ㅡ보는 것과 상(想)이란, 보는 것과 밝은 상(相)을 말하는 것이다.

 

若非見者,云何見明?若卽見者,云何見見?必見圓滿,何處和明。若明圓滿,不合見和,

만약 보는 주체(작용)가 아닌 비견(非見)이라면, 어떻게 밝음을 보겠으며?

만약 보는 주체(작용)라면, 어떻게 보는 주체를 본다고 하겠는가? 

반드시 보는 주체(작용)가 원만하다면, 어디에서 밝음과 화합할 것이며

만약 밝음이 원만하다면 보는 주체(작용)와 화합하여 어울리지 못할 것이다.

ㅡ화합한 것이라면, 그 사이사이에 섞인 것이라서 원만하지 못할 것이며, 원만하다면 서로 화합하지 못할 것이다.

 

見必異明;雜則失彼性明名字。雜失明性,和明非義,彼暗與通及諸群塞亦復如是。

보는 주체(작용)은 반드시 밝음과는 다른 것이므로, 섞이었다면  본성 밝다는 명분을 잃게 될 것이니,

섞임으로 인해서 밝은 본성 잃어버린다면, 밝음과 화합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니, 

어둠(闇)과 통함(通)과 막힘(塞)의 경우도 역시 그러할 것이니라.

 

復次,阿難!又汝今者妙淨見精,爲與明合?爲與暗合?爲與通合?爲與塞合?

다시 아난아, 네가 지금 묘하고 맑은 묘정견정(妙淨見精)은 밝은(明) 것과 합(合)한 것인가?

어두운(闇) 것과 합한 것인가? 통한(通) 것과 합한 것인가? 막힌(塞) 것과 합한 것인가?

ㅡ홥한 것이 있으며, 곧 망진(妄塵)과 관련된 것이라서, 묘하고 맑은 묘정(妙淨)이라고 할 수 없다.

 

若明合者,至於暗時明相已滅,此見卽不與諸暗合。云何見暗?

만약 밝음과 합한 것이라면, 어두울 때에는 밝은 모양의 명상(明相)은 이미 없어졌을 것이니, 저 보는 주체(작용)가 어두움과는 합하지 못할 것인 즉, 어떻게 어두움을 본다고 하겠는가?

ㅡ합하였으면,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명상(明相)이 없을 때에는 보는 주체(작용)도 따라서 없어질 것이니, 어두움과 합한 것도 아닐 것이다.

 

若見暗時不與暗合,與明合者應非見明,旣不見明云何明合?了明非暗彼暗與通,及諸群塞,亦復如是。”

만약 어두움을 볼  어둠과 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합한 명합(明合)의 경우에도 마땅히 밝음을 보지 못해야 할 것이다. 

이미 밝음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밝음과 합하였다고 할 것이며, 밝은 것이 어둠이 아닌 것을 알 수 있겠는가?

그 밖의 어둠(闇)과 통함(通)과 막힘(塞)의 경우 경우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니라.

ㅡ만약 어두움과 합하지 않고서도 어두움을 능히 볼 수 있다면, 밝음과 합할 때에도 마땅히 밝음을 보지 못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밝음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밝음과 합하였다고 하겠으며, 어떻게 밝은 것은 어두운 것이 아님을 안다고 하겠는가? 합하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으면, 보리심을 증득하는 마음이 화합으로 생기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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