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대승론(攝大乘論 11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


然復彼諸佛法界,一切時作五種作事應知:防護衆生諸難事,見者離聾盲瘖啞顚狂等,諸難作事故。救濟防護諸惡道作事,於不善處,勸令安住善處故。無方便防難作事,諸外道無方便,行解脫處,毀令住佛法故。親同見防難作事,過三界助道行故。乘防難作事,諸菩薩住異乘,及不定諸聲聞,令修行住大乘故。此諸五種作事中,一切諸佛等作事應知。是中說偈:

또한  모든 부처님의 법계는 언제나 5 가지의 불사를 짓는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중생의 모든 재난을 구제하는이니, 보기만 해도 귀먹은 이ㆍ장님ㆍ벙어리ㆍ미친  등의 모든 재난을 없애게 되며,

둘째는 모든 살기 괴로운 세계에서 구제하는 것이니, 불선의 장소로부터 선한 장소에 안주하게 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방편이 아닌 것을 구제하는이니, 모든 외도로 하여금 방편이 아닌 행을 버리고 해탈을 구해서 불법에 안주하게 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친동견(親同見, 아견)을 구제하는이니, 삼계를 벗어나는 수도를 돕는 행이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교법을 구제하는이니, 다른 교법에 머무는 보살들과 부정종성의 성문들로 하여금 대승에 머물러 수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5 가지 불사가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등작사(等作事)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因身作事差別故, 及說諸行差別事, 彼差力故諸世閒, 非彼無故諸如來。

원인(因)ㆍ의지신(依止身)ㆍ작사(作事)가 다른 까닭에, 모든 행의 차별됨을 말하는 것이라.

그러한 차이의 차력(差力)이 있는 까닭에 모든 세간이 있는 것이나, 그것이 없으므로 모든 여래는 그렇지 않다네.


若是不共聲聞緣覺`同諸佛法身成就如是功德勢者,彼以何意故,說爲一乘?
是中說偈:

만약 성문이나 연각과 같지 않고,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성취한 이러한 공덕의 세력과 함께 한다면, 

 분(부처님)은 어떠한  취지로써 일승을 말씀하신 것인가?

여기에서 게송으로 설하나니, 


別取有餘者, 及持有餘故, 爲不定者說, 諸佛一乘理。

별도로  부류를 섭수하고, 나머지를 맡아 지니기 위함이시니, 

부정종성(不定種姓)을 위해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일승의 도리를 말씀하셨다네.

 

오성(五姓)= 五種姓(오종성)은 菩薩定姓(보살정성, 定性菩薩정성보살) · 獨覺定姓(독각정성, 定性緣覺정성연각) · ③聲聞定姓(성문정성, 定性聲聞정성성문) · ④三乘不定姓(삼승불정성, 不定種性부정종성) · ⑤無姓有情(무성유정, 無種性무종성)의 다섯으로,

② ③은, 각각 佛果(불과 · 辟支佛果벽지불과) · 阿羅漢果아라한과)를 얻는 것에 정해진 決定性(결정성),

② ③을 합쳐서 定性二乘(정성이승)이라하고, 

④는 보살 및 독각 · 성문의 三類(삼류)의 本有種子(본유종자)를 아울러 갖추고, 二乘(이승)의 수행을 한 뒤 大乘(대승)에 轉向(전향)해서 佛果(불과)를 깨닫는 등, 果(과)가 결정적이 부정종성(不定種性)이다.  

⑤의 무성유정은 영원히 迷界(미계)에 빠져서 苦(고)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고, 겨우 五戒(오계) · 十善(십선)의 善因(선인)을 닦아서 사람이나 天(하늘)에 태어날 수가 있게 되는 무종성(無種性)이다.

이 五姓各別(오성각별)의 說(설)은 楞伽經(능가경) 권二와 解深密經(해심밀경) 권二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이 입장에서 보면, 법화경 등과 같이 모든 중생이다 成佛(성불)할 수 있다는 說(설)에 대하여, 그것은 不定性(부정성)인 사람을 인도하여 大乘(대승)에 들어가게 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 說(설)이라고 해석한다. 


信於法無我, 等有性差別, 深心應化故, 盡處唯一乘。

법무아(法無我)를 믿고, 종성의 차별이 평등하게 있으며,

심오한 심심(深心)으로 화현하시는 까닭에 궁극적으로는 오로지 일승이라네.


以何義故,一切諸佛如來等同法身,而說多佛事故? 於中說偈:

모든 부처님께서는 평등한 법신이시거늘, 무슨 까닭으로 많은 부처님의 불사를 말하는 것인가?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一界無有二, 常同有作事, 次行不順故, 釋成多佛事。

 세계에  분이 계시지 않으시나, 언제나 동시에 불사를 지으시니, 

순서대로 행함에 따르지 않는 까닭에 많은 부처님의 불사가 있게 되었네.


法身諸佛,云何不永涅槃?非不永涅槃應知。是中說偈: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어찌하여 궁극적으로 열반에 들지 않으시는 것이며?

또한 궁극적으로 열반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인가?

여기에서 게송으로 설하나니, 


遠離一切障, 及作事不盡, 諸佛永已滅, 亦是不名滅。

모든 장애를 멀리 여의신 때문이며, 하셔  바가 끝이 없기 때문이니, 

부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에 드시나, 또한 열반에 드시지 않는다고 말한다네.


何故報身不名具眞身成?有六種相故,示現色身故;及無量佛世界中,分別現故;隨信現故;不定見眞實,異種種見故;現同生事,菩薩`聲聞`天等種種衆雜見故;及阿犂耶識等轉身現故,唯成報身不名眞身。

어째서 보신(報身)은 진신(眞身)을 구족해서 이룬다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6 가지의 상(相)이 있기 때문이니,

첫째는 색신(色身)을 시현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무량한 불세계에서 분별하여 시현하나니, 믿음을 따라 시현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일정하지 않게 보는 부정견(不定見) 진실에 대하여 다르게 보기 때문이며,

넷째는 여러 가지로 보기 때문에 같은 중생의 업(事)을 나타내는 것이며,

다섯째는 보살ㆍ성문ㆍ하늘 등의 갖가지 법회에 섞어서 보기 때문이고,

여섯째는 아리야식 등의 의지처의 전환인 전신(轉身)이 나타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오직 보신(報身)을 이루는 것일 뿐, 진신(眞身)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ㅡ보신이 진신과 다른 점을 여섯 가지로 말하였다.


有何義故,唯是應身不名眞身?有八相故。諸菩薩遠時,得不動三昧,兜率天中`人中生事不成。宿命知者,書數筭印工巧論,受欲行餘事中,無知不成。不善說及善說法中知已,往親近外道處不成。善知三乘行故,苦行不成。

어떠한 뜻으로, 오직 응신(應身)이라고 할 뿐, 진신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8 가지의 상(相) 있기 때문이니,

첫째는 모든 보살이 아득한 옛적에 부동삼매를 얻었다면 도솔천과 인간세계에서 태어나는 것이 성립되지 않으며,

둘째는 과거세를 아는 숙명지(宿命知)의 이가 글씨(書)ㆍ산술(數)ㆍ조각(印)ㆍ공예(工) 기술과 욕락을 수용하는  등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으며,

셋째는 잘못 말했거나 훌륭하게 말하여진 법을 알고서도 외도의 처소에 가서 가까이하는 일은 성립되지 않으며,

넷째는 삼승의 수행을  알기 때문에 고행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으며, 


捨百億閻浮提,一閻浮地中,成正覺轉輪不成。中閒成正覺示方便,餘處應化身作佛事,彼唯兜率天中成正覺,何故不一切閻浮提中,同時成正覺事?知此知中,無阿含證,復無餘義可解釋成。復無二佛同時一世界中現,有相違故,彼多化故,攝取四方世閒,及如無二轉輪聖王同時生故。是中說偈:

다섯째는 백억의 염부제를 버리고 다만 하나의 염부제에서 정각을 이루고 법륜을 굴힌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으며,

여섯째는 중간에 정각을 이루고 방편을 보이며 다른 곳에서 화신을 나투어 불사를 짓는다면, 그는 오직 도솔천에서 정각을 이루어야 하거늘, 어찌해 모든 염부제에서 동시에 정각을 이루지 않는 것인가? 여기에는 아함의 증명도 없고, 또한 이해할  있는 다른 해석도 없으며,

일곱째는  분의 부처님께서 동시에 하나의 세계에 출현하지 않는 것에 위배되기 때문이니,  분은 화신을 많이 나툼으로써 시방 세계를 섭수하시는 것이 마치  분의 전륜성왕이 동시에 출현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게송으로 설하나니, 

 

諸佛未應化, 同至多藏故, 一切相成覺, 見故而能行。

모든 부처님께서 아직 화신(化身)을 나투지 않았을 때에는 마찬가지로 대부분 모태에 있으신 것이니, 

일체상(一切相)의 정각을 이루는 것을 보시기 때문에 능히 행하시는 것이라네.


一切衆生利益事,萬行修集大菩提,永入涅槃,不成願行,徒修無報故。

여덟째는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일체의 행을 하여서 대보리를 닦고 궁극에 열반에 든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으니, 서원을 행하고 애써서 수행함에 결과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응신이 진신과 다른 점을 여덟 가지로 설명하였다.


報身`應身無常故,云何諸佛常身?依常法身故,於諸因身,應身報不定故。

復應身者,視現功德,如常受樂,及如常勢故,常事應知。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은 무상하거늘, 어찌하여 모든 불신(佛身)은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상주하는 법신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모든 원인의 의지신인 인신(因身)에 대하여 응신의 과보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응신이 공덕을 시현함이 마치 세간이 항상 즐거움을 수용하고, 항상 세력이 있음과 같다.


諸佛法身,雖無量無邊,時諸佛義處,無有假用作事。於中說偈:

모든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무량하고 아득한 옛적부터 있어 온 것이지만,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의식적인 노력인 유가용(有假用)으로 불사를 짓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게송으로 설하나니, 


諸佛德勝無異無量, 衆生因弱彼不失者, 得已得彼一切無因, 有斷彼不應順成。
 

부처님의 공덕은 뛰어나고 차별이 없는 무이(無異)이며 무량하나니,  

중생의 원인이 미약할지라도 그것을 잃지 않으며, 

증득하고 증득함의 득이득(得已得)에 일체의 원인이 없는 무인(無因)이니

그것을 단멸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攝大乘論卷下 終 섭대승론 하권을 마침.

섭대승론(攝大乘論 1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  

 

復有餘性`因`果`業`順行`功德,是故諸佛如來法身,名爲無上功德應知。

是中說偈:

다시 나머지 자성(性)ㆍ원인(因)ㆍ결과(果)ㆍ업(業)ㆍ수순(順)ㆍ작용(行)의 공덕이 있으므로, 

모든 여래의 법신을 무상공덕(無上功德)이라 이름한다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게송으로 설하나니, 

 

成就諸眞實, 超過一切地, 到一切衆上, 度脫一切衆。

모든 진실을 성취하시고, 일체의 모든 지위를 초월하셨으니,

모든 중생의 앞에 이르시어, 일체 중생을 해탈시키시네.

 

具無量無邊, 世閒見功德, 世界不可見, 一切諸人天。

무량하고 무변한 공덕을 갖추시어, 세간에서 공덕을 친견할  있으니, 

세계에서 보지 못하는 것은 모든 인간과 하늘이라네.

 

然復甚深最甚深。諸佛法身彼甚深事云何知?

是中說偈:

또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매우 심심(甚深)한 가운데에서도 가장 심심(甚深)한 것이니,

 매우 심오한 최심심(最甚深)한 것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서 게송으로 설하나니, 

ㅡ이하는 법신의 매우 심오한 심심상(甚深相)을 12가지로 설명한 것이다.  

無生生諸佛, 不住而善住, 一切自然事, 食爲四種食。

모든 부처님께서는 태어남이 없는 무생(無生)이시나, 태어나시고

머무르지 않는 불주(不住)이시나,  머무는 선주(善住)이시니, 

모든 불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4종식(種食)의 식식(識食)을 음식으로 삼으시네.

 게송은 태어남ㆍ머묾ㆍ업ㆍ의지하여 머무는 것의 최심심(最甚深) 나타낸 것이며, 

4종식(種食, 4식)은 단식(段食)ㆍ촉식(觸食)ㆍ의사식(意思食)ㆍ식식(識食)  

 

不破及無量, 無量同一業, 不見及見業, 諸佛三身成。

파괴하지 않는 불파(不破)이시나, 무량하고, 무량하면서도 동일한업(一業)이시니, 

보이지 않는 업과 보이는 업으로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3신(身)을 성취하셨네.

 게송은 안립ㆍ숫자ㆍ업의 최심심(最甚深) 말한다.

 

無有成正覺, 非一切非佛, 念念不可量, 事非事所顯。

존재하지 않는 무유(無有)이시나 정각을 이루시어, 일체가 부처가 아님이 없으며, 

염염(念念)마다 헤아릴 수 없는 불가량(不可量)이시니, 존재(事)와 비존재(非事)를 나타내심이라네.

정각을 현현함의 최심심(最甚深) 관한 내용이다.

 

不染及至染, 幷染有所依, 非染非染已, 入眞正法體。

잡염이 아닌 불염(不染)이시나 잡염에 이르고, 잡염에 의지처가 있으니, 

잡염은 잡염이 아니라고 안다면, 진정한 법체(法體)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네.

탐욕을 벗어남의 최심심(最甚深) 관한 것이.

 

諸佛過諸陰, 住於正陰中, 彼非餘非卽, 彼捨中善滅。

모든 부처님께서는 5음을 초월하셨으나, 5음 가운데 안주하시니, 

그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니, 버리지 않고서도 참으로 고요한 선멸(善滅)이라네.

ㅡ5음을 단멸함의 최심심(最甚深) 대한 내용이다. 

 

一切是雜業, 唯離大海水, 作事竟復作, 益他無有念。

모든 불사가 서로 섞임이 오직  바다의 물과 같으니, 

남을 이롭게 함에 있어서 불사를 한다, 불사를 마쳤다, 다시 불사를 한다라는 생각이 없으시네.

성숙의 최심심(最甚深) 나타낸다. 

 

不見衆生過, 如破器中月, 遍一切世閒, 彼法光如日。

보지 않음은 중생의 과실이니, 파손된 그릇 안에 비친 달과 같은 것이라.

모든 세간에 두루하시나니,  법의 광명이 태양과 같으시다.

현현의 최심심(最甚深) 대하여 말하였다.

 

或時成正覺, 或涅槃如火, 無時而彼無, 諸佛常住身。

혹 어느 때에는 정각을 이루시고, 혹 어느 때에는 열반에 드시는 것이 불(火)과 같으니, 

 분은 존재하지 않는 때가 없으시나, 모든 불신(佛身)은 상주하시도다.

정각과 열반을 시현함의 최심심(最甚深)에 대한 내용이다. 

 

諸佛非正法, 諸人趣惡道, 非梵行法中, 眞實身處行。

부처님께서는 바르지 않은 비정법(非正法), 인간세계인 인취(人趣), 살기 괴로운 세계인 악도(惡道),

청정한 행이 아닌 비범행(非梵行)의  가운데에서 진실체(眞實身)로 처하여 안주하시네.

안주의 최심심(最甚深)을 나타낸다.

 

彼一切處行, 及以無處行, 見一切身中, 一切根無境。

 분은 일체의 모든 곳에서 행하시나,  곳에서도 행하시지 않는 것이니, 

일체의 불신을 나투어도 일체의 감각기관(根)의 경계가 아니라네.

자체의 최심심(最甚深).

 

除滅諸煩惱, 如呪禁毒藥, 煩惱到及盡, 諸佛一切智。

모든 번뇌를 제멸(除滅)하여 없애는 것이, 마치 주문으로 독약을 없애는 것과 같으시니, 

번뇌의 다함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께서는 일체를 아시는 일체지(一切智) 증득하셨도다.

번뇌를 단멸함의 최심심(最甚深).

 

煩惱到道處, 世閒寂滅處, 是故大方便, 諸佛不思議。

번뇌가 수도에 이르고, 세간이 적멸에 이르니, 

 방편을 갖추었으므로, 모든 부처님은 사량하기 어려운 불사의(不思議)로다.

ㅡ불가사의(不可思議) 최심심(最甚深).

 

然此甚深有十二種應知,所謂生成業住甚深`差別筭數業甚深`成正覺甚深`厭離甚深`滅陰甚深`教化甚深`時現甚深`成正覺示現涅槃甚深`行甚深`示現己身甚深`滅煩惱甚深`不思議甚深義法身。

그러므로, 이 매우 심오한 최심심(最甚深)에 12가지가 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태어남(生)ㆍ성장ㆍ업ㆍ안주(住)함의 깊은 심심(甚深)이고, 

차별ㆍ산수(筭數)ㆍ업의 깊은 심심(甚深)이며, 정각을 이루심에 깊은 심심(甚深)이고,  

혐오를 여의는 이염(厭離)에 깊은 심심(甚深)이며, 5음을 단멸함에 깊은 심심(甚深)이며, 

교화함에 깊은 심심(甚深)이고, 때때로 나투심에 깊은 심심(甚深)이며, 

정각을 이루고 열반을 시현하심에 깊은 심심(甚深)이며, 행의 깊은 심심(甚深)이며, 

불신을 나타내 보이심에 깊은 심심(甚深)이고, 번뇌를 단멸함에 깊은 심심(甚深)이며, 

이러한 불가사의의 깊은 심심(甚深)의 뜻이 법신(法身)인 것이다.

 

諸菩薩憶念諸佛時,有何等念所念?略說:菩薩以七種相,隨念諸佛。

一切諸佛是得時,法自在故,修念諸佛,得一切世界無障㝵神通。是中說偈:

보살이 부처님을 생각할 때 어떠한 마음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간략히 말한다면 보살은 7 가지의 상으로 모든 부처님을 생각해야 하나니,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에 대하여 자재함을 얻으신 까닭에 일체 세계에 걸림이 없는 무장애신통(無障㝵神通)을 얻으셨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게송으로 설한다.

 

障中闕少因, 衆生界中遍, 諸佛無自在, 定二隨順者。

장애에 대하여 작은 원인의 소인(少因)도 없이 중생세계에서 두루하시며, 

모든 부처님께서는 자재가 없는 무자재(無自在)이시나, 결정적인 두 가지에 수순하신다네.

 

諸如來常身者,眞如無閒垢解脫故。諸佛如來最微惡者,遠離一切煩惱智障故。諸佛自然者,自然作一切佛事無休息故。諸佛大勢者,佛世界淸淨,受大勢樂故。諸佛無染者,世閒生而一切世閒法不能染故。諸佛如來大義者,示現成正覺及涅槃,未化衆生令化`已化者爲得解脫故。

是中說偈:

둘째는 모든 여래께서는  불신 상주하는 상신(常身)이시니, 진여는 끊임없이 번뇌에서 해탈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는 아주 작은 최미악(最微惡)마저 없다고 생각해야 하나니, 모든 번뇌장(煩惱障, 아집)과 지장(智障, 법집)을 멀리 여의신 때문이며,

넷째는 모든 부처님께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자연(自然)적이라고 생각해야 하나니, 자연스럽게 모든 불사를 지으심에 쉬지 않으시 때문이며,

다섯째는 모든 부처님께서는  세력의 대세(大勢)를 지닌다고 생각해야 하나니, 불세계는 청정하고  세력의 즐거움인 대세락(大勢樂)을 수용하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모든 부처님께서는 잡염이 없다고 생각해야 하나니, 세간에 계실지라도 모든 세간법이 능히 오염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며,

일곱째는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는 대의(大義) 지닌다고 생각해야 하나니, 정각을 이루시고 열반을 시현하여, 아직 교화되지 않은 중생은 교화하시고, 이미 교화된 중생은 해탈을 얻게 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게송으로 설하나니, 

 

唯在於己心, 常勢淨所顯, 不爲而大法, 報身故所得。

오직 스스로의 마음에 있을 뿐이니, 상주(常)ㆍ세력(勢)ㆍ청정(淨)으로 나타는 것이며, 

의식적인 노력 없이 대법(大法)보신(報身)으로 증득하신 것이라네.

 

不急而能行, 現彼復多生, 一切一切佛, 智者彼應憶。

조급하지 않으면서 능히 행하시고, 다시 많은 생을 시현하시나니,

일체의 모든 부처님에 대하여, 지혜로운 이는 마땅히 그렇게 생각해야 하리라.

 

諸佛世界淸淨事復云何?如佛十萬偈修多羅菩薩藏序分中說.

또한 모든 불세계의 청정은 어떠한 것인가?

'불십만게수다라보살장(佛十萬偈修多羅菩薩藏)'의 서분(序分)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ㅡ진제의 역본인 진본(陳本) '섭대승론석'에서는 보살장 가운데 '정토경'의  종류, 또는 '화엄경'에서 정토상을 광설하는 문장이라고 되어 있지만,  경문에서는 '불지경(佛地經)'의 서품ㆍ'해심밀경'의 서품 나온다.

 

청정한 불국토의 양상을 18가지의 원만상으로 나타낸다.

如來最光明七寶莊嚴,遍無量世界,放大光明,無量善分別住處中閒住故,不可差別界過三界境界,過出世閒上善根所生,善淨自在識相處。

“여래께서는 다음과 같은 궁전에 머무셨으니, 그곳은 가장 빛나는 7보 장엄의 대광명이 널리 수많은 세계를 비추니,

무량한 선(善)으로 분별한 안주처에서 머물기 때문이며, 차별할  없는 세계이며, 삼계의 경계를 벗어났으며, 

뛰어난 출세간의 선근을 일으킨 곳이며, 매우 청정한 자재식을 상처(相處) 삼는 곳이다.

ㅡ여래께서 삼매 속에서 현현한 정토의 광경을 18가지 측면에서 서술한다. 이러한 18가지의 원만상은 세존께서 과거 보살로서 오랜 세월 동안 이타행을 펼치신 선근에 의해 이루어진 보토(報土)인 것이다.


如來加持處,大菩薩住處,無量天`龍`夜叉`乾闥婆`阿修羅`迦樓羅`緊那羅`摩睺羅伽`人`非人行處,大法味愛樂所潤處,現一切衆生作一切事處,離一切煩惱所惱處,離一切魔處,過一切莊嚴如來莊嚴加持處,過大念意至處,大奢摩他毘婆舍那乘處,入大空無相無願處,無量劫莊嚴大蓮華王處,大妙堂中住處爾。

여래께서 지니는 가지처(加持處)이며, 대보살들이 머무는 주처(住處)이며, 

수많은 천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  사람(人)인  사람 아닌, 비인(非人)들이 행하는  행처(行處)이며,

대법(大法)의 맛을 기쁘고 즐겁게 지니는 소윤처(所潤處)이며,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곳이며, 

모든 번뇌의 오염을 여읜 곳이고, 모든 마(魔)를 여읜 곳이며, 보살 등의 모든 장엄을 초월한 여래 장엄의 의지처이며,

대념(大念)으로 뛰어나게 기억하고 사색하며 궁극에 이르는 곳이며,  사마타ㆍ비바사나를 교법으로 삼는 곳이며, 

대공(大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해탈으로 들어가는 곳이며,

무량한 겁 동안 공덕으로 장엄한 대연화왕처(大蓮華王處)이며, 대묘당(大妙堂) 중에 머무는 곳이다.”


是此佛世界淸淨中,明色世狀勢量,施處施因施果勢,諸勢`伴勢`眷屬勢`益勢`業作勢`潤勢`無畏勢`住處勢`行勢`乘勢`持勢`門勢及說家勢。然彼佛世界淸淨中色勢,一向淸淨`一向樂`一向不惡`一向自在。

 불세계의 청정에서 빛깔(明)과 형체(色)의 세력(여기서 세력은 원만의 의미)의 양과,

보시의 시처(施處)와 보시의 원인인 시인(施因)과, 보시의 결과인 시과(施果)의 세력(원만)과  

주(主)의 모든 세력(원만), 수반의 세력(원만), 권속의 세력(원만), 익의 세력(원만), 업의 세력(원만), 

청정의 세력(원만), 두려움이 없음의 세력(원만), 머무는 곳의 세력(원만), 행(行)의 세력(원만), 

교법의 세력(원만), 의지의 세력(원만), 문(門)의 세력(원만)과 가(家) 세력(원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세계의 청정함 가운데 색(色) 세력(원만)은 한결같이 청정하고, 한결같이 즐거우며, 한결같이 악이 없고, 한결같이 자재한 것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 9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  

 

有幾處意身法身?應知略說三種身,種種佛身行依故。
是中說偈:

법신은  가지 처소의 의지처가 되는 것인가? 대략 3 가지의 의지신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불신(佛身)의 갖가지 행의 의지처인 행의(行依)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게송으로 설하나니, 


得五種愛身, 諸佛得自己, 利愛彼所得, 是彼義求得。

다섯 가지의 기쁨의 의지신인 오종애신(五種愛身)을 증득하셨나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스스로를 증득하셨으니, 이익과 기쁨은  얻으셨으니,

(義)을 구하고자 하는 이는 얻는다네.


所作無能障, 法微義通得, 得無非最愛, 佛常不盡見。

해야  바의 소작(所作)에 능히 장애가 없으며, 법의 맛과 의미를 통달해서 얻으시고, 

증득하신는 바에 최상의 기쁨이 아님이 없으시니,

부처님께서는 항상 다하지 않는 상불진(常不盡)을 보시기 때문이라네.


受種種報依身,化諸菩薩故。種種應身依故,多以化聲聞。

둘째는, 갖가지 보신(報身)의 의지처이니, 모든 보살을 교화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갖가지 응신(應身)이 의지하기 때문이니, 많은 성문을 교화하기 위함이로다.


法身有幾種佛法所攝應知?

법신은 몇 가지 불법에 섭지된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가? 

법신은 청정ㆍ과보ㆍ작용ㆍ자재ㆍ가설ㆍ구제의 6 가지의 법에 의해 섭지(攝持)됨을 설명한다.


一者淨,轉阿犂耶識得法身故;報者,轉色根得報智故;行者,轉行欲得無量智行故;自在者,轉種種業所攝自在,得一切世界無障㝵,神通智自在故;假用者,一切見聞解知,轉假名,得悅一切衆生,智說自在故;去遣者,轉一切諸難,遣得一切衆生一切難,去遣智故。如是六種佛法故,諸佛法身所攝應知。

첫째는 청정(淨)이니, 아리야식을 전환하여 법신을 증득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과보(報)이니, 색근(色根, 감각기관)을 전환해서 과보의 지혜를 얻기 때문이며,

셋째는 작용의 행(行)이니, 탐욕의 작용을 전환해서 무량한 지혜의 지행(智行)을 얻기 때문이며,

넷째는 자재(自在)이니, 갖가지의 업에 소속되는 자재를 전환하여 일체 세계에 걸림이 없는 신통 지혜의 자재를 얻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가설의 가용(假用)이니, 일체의 보고 듣고 이해하고 아는, 견문해지(見聞解知)를 가설의 가명(假名)으로 전환하여서 모든 중생에게 기쁘게 설하는 지혜의 자재를 얻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구제의 거견(去遣)에 의해서이니, 모든 어려움을 전환해서 일체 중생의 모든 재난을 구제하는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의 육종불법(六種佛法)에 의해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섭지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所有此諸佛法身,彼爲雜`爲不雜?

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섞여 있는 잡(雜)인가? 섞여 있지 않은 불잡(不雜)인가?

ㅡ모든 부처님 법신의 불일불이성(不一不異性) 말한다.

 

身心業差別故不雜,視無量處,成正覺故雜。如法身,報身亦爾,心業差別故不雜,非身差別,以轉無量身故。

應身者,亦如報身應知。

의지신(身)ㆍ마음(心)ㆍ업(業)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섞여 있지 않은 불잡(不雜)이며,

무량한 곳에서 정각을 이룸을 보이시기 때문에 섞여 있는 잡(雜)이니, 법신과 마찬가지로 보신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마음(心)과 업(業)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섞여 있지 않은 불잡(不雜)이며,

의지처(身)에 차별이 없고 무량한 의지신의 무량신(無量身)을 전전하시는 까닭에, 응신 역시도 보신과 같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法身具幾種功德應知?善淨四種無量解脫,及諸有退遍`淨處`無諍`願知`四無㝵`六通`三十二相八十種好`四種一切相淨`十力`四無所畏`三不護`四念處`滅習`不忘法`大悲`十八不共佛法,及一切相具智故。
是中說偈:

법신은 몇 가지의 공덕을 구족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가?

매우 청정한 4 가지의 무량해탈(無量解脫)과 두루하는 변처(遍處)ㆍ청정한 곳의 정처(淨處, 승처勝處)ㆍ

번뇌가 없는 무쟁(無諍)ㆍ서원대로 아는 원지(願知)ㆍ네 가지 걸림없는 변재의 4무애변(無碍辯)ㆍ

육신통ㆍ32 상호(相好)ㆍ80 종호(種好)ㆍ의지처, 인식대상, 마음, 지혜의4 가지의 일체상의 청정)ㆍ

십력ㆍ네 가지 두려움이 없음의 사무소외(四無所畏)ㆍ

여래의 신업과 구업과 의업은 청정하여 과실이 없기 때문에, 다른 이처럼 감추어 지킬 필요가 없는 삼불호(三不護)ㆍ

사념처(四念處)ㆍ습기를 없애는 멸습(滅習)ㆍ법을 잃어버리지 않는 불망법(不忘法)ㆍ

대비ㆍ18 불공법 등과 함께 일체의 상(相)을 구족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으로 설하나니, 

 

변처(遍處)는 변입(遍入)ㆍ일체입(一切入)ㆍ변처정(遍處定)이라고도 하며, 구체적으로 지(地)ㆍ수(水) ㆍ화ㆍ풍ㆍ청ㆍ황ㆍ적ㆍ백ㆍ공(空)ㆍ식(識)의 열 가지 법이 일체 장소에 널리 퍼져서 틈이 없다고 관찰하는 열 가지 관법(觀法)ㆍ관상(觀想)이며, 각각기 지변처(地遍處)ㆍ수변처(水遍處) 등으로 말하며,

이 관법은 8해탈ㆍ8승처를 닦은 다음에 행하는 것이다.

정처(淨處), 현장 역본에서는 승처(勝處)로 한역하고 있으나, 정처가 승처를 의미하는 지는 분명치 않다.

무쟁(無諍), 여기서 쟁(諍)은 다툰다는 의미로서 번뇌의 이명(異名)이다. 무쟁은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탐욕ㆍ성냄 등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지혜이다. 또한 남의 번뇌를 쉬게 하는 힘이므로 부처님과 아라한만이 갖고 있을 뿐, 다른 이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뛰어난 덕력(德力) 중의 하나이다.

원지(願知), 서원대로 대상을 구석구석까지 빠짐없이 아는 것이다.

세속지(世俗智)를 그 본성으로 하고 제4정려(靜慮)에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힘으로써 일어난다고 한다.

4무애지(無碍智) 또는 4무애변(無碍辯), 마음의 측면에서는 지(智)ㆍ해(解), 입의 방면에서는 변(辯)이라고 한다.

첫째는 모든 교법에 통달한 법무애(法無碍),

둘째는 모든 교법의 요의(要義)를 아는 의무애(義無碍),

셋째는 여러 가지 말을 알아서 통달하지 못함이 없는 사무애(辭無碍),

넷째, 일체 교법을 말하는 데 자재한 요설무애(樂說無碍)이다.


愍念諸衆生, 順利及諸心, 不利世樂心, 歸命彼益事。

모든 중생을 연민히 여기시어, 수순해서 이롭게 함이 모두의 마음에 미치고

세간을 즐기는 세락심(世樂心)은 도모하지 않으시니, 그 이롭게 하여 주심에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게송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4무량심(無量心) 나타낸 것이다.

 

歸命(귀명) 목숨을 바쳐서 진여법성과 삼보에 의지 한다는 뜻으로, 귀의이며 南無(나무)의 역어이다.   

 

得離一切障, 牟尼退世閒, 智所知遍處, 歸命心解脫。

모든 장애를 여의신 모니는 세간에서 뛰어나시니,

지혜는 알아야 할 바에 두루하며, 심해탈(心解脫)을 이루신 분께 목숨 바쳐 귀의합니다.

게송은 해탈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 나타낸 것이다.


無餘一切衆, 滅一切煩惱, 不雜滅煩惱, 歸命有高處。

일체 중생의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남음이 없게 하시니,

잡염되지 않고 번뇌를 소멸하시어, 높은 곳에 계신 분께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게송은 무쟁(無諍) 나타낸다.


自然無有障, 不退常入定, 一切諸難中, 歸命能釋者。

자연히 장애가 없으시고, 불퇴전으로 항상 선정에 드시며, 

모든 질문과 비판을 능히 해석하시는 분께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ㅡ이 게송은 서원대로 아는 원지(願智)를 나타낸다.


身及所依處, 言智及說者, 心常無有退, 歸命善說者。

의지하는 것과 의지처의 지혜를 말씀하시니,

마음에 항상 걸림없이 잘 말씀하시는 분께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ㅡ이 게송은 법무애(法無礙), 의무애(義無礙), 사무애(辭無礙), 요설무애(樂說無礙)의사무애해(四無碍解) 밝힌 것이다.


往知彼語言, 來往知他心, 衆生無實中, 歸命善教誨。

그들의 언어와 가고 오는 내왕(來往)을 잘 아시고, 남의 마음을 잘 아시니,

중생이 진실하지 않아도 잘 가르쳐 주시는 분께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ㅡ이 게송은 신족통(神足通) · 천안통(天眼通) · 천이통(天耳通) · 타심통(他心通) · 숙명통(宿命通) · 누진통(漏盡通)의 육신통을 나타낸 것이다.


讚取丈夫法, 一切生見聖, 見已卽生敬, 歸命分別者。

대장부의 법을 찬탄하고 받아들여서, 모든 중생이 성인을 친견하며, 

뵙게 되면 곧 존경심을 일으키게 되나니, 잘 분별하시는 분께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ㅡ이 게송은 32상호와 80종호를 갖춘 분임을 밝힌 것이다.


取處及諸勢, 應身幷願中, 三昧智自在, 歸命得彼岸。

섭수(取)ㆍ처소(處)ㆍ모든 세력의 제세(諸勢)ㆍ몸을 나투는 응신(應身)ㆍ서원ㆍ삼매ㆍ지혜ㆍ자재하시며, 

피안을 증득하신 분께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ㅡ이 게송은  가지 모든 상의 청정을 밝힌 것이다.


方便歸依淨, 令利諸衆生, 大乘出世利, 歸命魔降伏。

방편ㆍ귀의ㆍ청정ㆍ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시며 대승의 출세간의 이익으로

마군의 항복을 받으신 분께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게송은 10() 밝힌 것이다.


智滅及出事, 作障幷演說, 自他及外道, 歸命不可退。

지혜(智)ㆍ단멸(滅)ㆍ벗어남의 출사(出事)ㆍ장애가 되는 작장(作障)을 잘 설하시어, 

자신과 타인ㆍ외도에게 조복되지 않으시는 분께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게송은  가지 두려움이 없음의 사무소외(四無所畏)를 밝힌 것이다.

 

부처님의 사무소외는;
① 일체지무소외(一切智無所畏), ② 누진무소외(漏盡無所畏)
③ 설장도무소외(說障道無所畏), ④ 설출도무소외(說出道無所畏) 
보살의 사무소외는; 
① 능지무소외(能持無所畏), ② 지근무소외(知根無所畏)
③ 결의무소외(決疑無所畏), ④ 답보무소외(答報無所畏) 


諸衆善能說, 遠離二種染, 無護不可忘, 歸命將諸衆。

모든 대중에게 능히 잘 말씀하시어, 두 가지 잡염을 멀리 여의게 하시며

보호함이 없으나 잃어버림이 없이, 모든 대중을 섭수하시는 분께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ㅡ이 게송은 신불호(身不護), 어불호(語不護), 의불호(意不護)의  가지를 보호할 필요가 없는 삼불호(三不護)와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의 사념처(四念處)를 밝힌 것이다


修行一切行, 無有聖不知, 一切時悉知, 歸命眞實義。

모든 행을 수행하신 성인은 모르는 것이 없으시며, 

언제나 진실한 의미를 모두 아시는 분께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ㅡ이 게송은 습기를 제거함을 밝힌 것이다.

 

衆生所作中, 聖視不相違, 作事無暫停, 歸命不妄者。

중생을 이롭게 하에 있어서 성인이 보시는 것은 위배되지 않으니, 

지으시는 작사(作事)를 잠시도 쉬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분께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ㅡ이 게송은 잃어버림이 없는 무망실법(無忘失法) 밝힌 것이다.

 

一日一夜中, 六時觀衆生, 成就大慈悲, 歸命益心者。

밤낮으로 여섯 번 중생을 관찰하시어 대자비를 성취하셨나니

대자비를 성취하신 분께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ㅡ이 게송은 대비(大悲) 밝힌 것이다.


行至及與得, 智慧幷諸業, 諸聲聞緣覺, 歸命最上者。

수행과 증득의 행지(行至)와 지혜와 모든 불사에 있어서, 

모든 성문과 연각보다 뛰어나신 분께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게송은 18가지 공통되지 않는 18불공법(十八不共法) 밝힌 것이다.


三身大菩提, 具得一切相, 遍處一切衆, 歸命決疑者。
.

삼신(三身)과 큰 깨달음의 대보리로 일체의 모든 상(相)을 구족하셨나니

일체의 모든 곳에서 일체 대중의 의심을 풀어주시는 분께 목숨바쳐 귀의합니다.  

ㅡ이 게송은 모든 승묘한 지혜를 밝힌 것이다.

 

諸佛法身成就如是諸功德,

모든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이상과 같은 모든 공덕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섭대승론(攝大乘論 8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  

 

諸菩薩於微小迴中,有何患?捨衆生益果`菩薩法離已,共諸小乘等同解脫是患。

菩薩上迴中,有何利益?世閒法中,自身及他身得自在故,一切道一切衆生視己身故,多以三乘中,

種種善巧方便,化衆生令住故。是中說偈:

모든 보살이 미약하고 작은 전환인 미약증회(微弱益迴)에 머물면 어떠한 과실이 있는 것인가? 

중생을 이롭게 하는 증과를 버리고, 보살법을 떠나며, 소승들과 함께 해탈을 같이하게 되나니, 이러한 과실이 있게 된다.

보살이 최상의 전환인 상회(上迴)에 머물면 어떠한 이익이 있는 것인가? 

세간법 가운데에서 자신과 타인의 자재를 얻으며, 일체의 윤회세계인 일체도(一切道)에서 모든 중생의 신(身)을 나타내며, 삼승에서 갖가지 뛰어난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안주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게송으로 설하나니, 


正覆迷凡夫, 不正一切現, 諸菩薩常正, 不假自然行。

미혹한 범부는 진실을 덮고 가려서 바르지 않은 모든 것이 현현하나, 

모든 보살은 항상 바르고 거짓되지 않은 것을 자연스럽게 행하네.


不說而說知, 非義正義故, 彼身有轉事, 正說爲解脫。

말하지 않음의 불설(不說)과 말함의 설(說)은, 

진정하지 않은 대상의 비의(非義)와 진정한 대상인 정의(正義)이니, 

 의지처(身)에 전환이 있음을 바르게 말하여, 해탈이라 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리라.


世閒及涅槃, 若生現智者, 爾時彼世閒, 卽說爲涅槃。

세간과 열반에 대해서, 만약 평등하게 보는 지혜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 때에는 세간을  열반이라 말한다네.


不捨非不捨, 善知世閒故;無利無有衰, 善知涅槃故。

세간을 잘 아는 까닭에 버리지 않고, 버리지 않음도 아니니,  

이익도 없고 쇠퇴함도 없는 것으로 곧 증득함도 아니고 증득하지 않음도 아니니, 

열반을  알기 때문이라네.

ㅡ이상의 게송들은 전의를 나타낸 것이다.

 

如是說滅勝已。

이상과 같이 멸의 뛰어남인 멸승(滅勝)을 설명하였다.


智勝云何知?以三種佛身故,說智勝事,一眞身`二報身`三應身。是中諸佛眞身者,謂法身,依一切法得自在故。

報身,若以種種諸佛衆會中,顯明法身,所依佛世界淸淨依,受大乘法樂故。

所有依法身者,從兜率天中,託身生,受欲出家,親近外道,苦行成道,轉法輪,示大涅槃。是中說偈:

지혜의 뛰어남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 것인가?

3 가지의 불신으로써 지혜의 뛰어난 승사(勝事)를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진신(眞身, 법신)이고, 둘째는 보신(報身)이며, 셋째는 응신(應身)이다. 

 중에서 모든 부처님의 진신(眞身)은 법신(法身) 말하는 것이니, 일체법에 대하여 자재를 얻는 의지처이기 때문이며,

보신(報身) 갖가지 법회에 모든 부처님의 나타내는 것이니, 법신을 의지처로 삼고, 불세계의 청정한 의지처로서 대승의 법락을 향수(享受)하기 때문이다.

응신(應身)은 법신에 의지하고, 도솔천으로부터 탁태(託胎)하여 태어나며, 욕락을 수용하고, 출가하여 외도를 가까이하고, 고행하여 도를 이루며, 법륜을 굴리고 대열반을 보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게송으로 설하나니, 

증과인 지혜의 뛰어남을 진신ㆍ보신ㆍ응신의 3() 의거해서 설명한다.


得相自在事, 以攝受身故, 分別甚深德, 諸佛作念事。

증득(得)ㆍ상(相)ㆍ자재(自在)ㆍ섭수(攝受)ㆍ의지신(身)에 의하며, 

분별(分別)ㆍ매우 심오한 심심(甚深)ㆍ덕(德)ㆍ생각(念)으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불사를 하시네.


諸佛如來法身有何相?略有五種應知。

모든 부처님 여래의 법신에는 어떤 상(相)이 있는 것인가? 

대략 다섯 가지의 오종상(五種相)이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ㅡ법신의 상을 의지처의 전환인 전신(轉身)ㆍ청정법의 백법(白法)ㆍ무이(無二)ㆍ상주(常住)ㆍ불가사의(不可思議)의 5 가지로 설명한다.


一轉身相,一切煩惱障分他相性迴轉中,一切障得解脫,現法自在處,淨分依轉,迴他相性故。

첫째는 의지처의 전환인 전신(轉身)의 상(相)이니,

모든 번뇌의 장애 부분의 의타상을 전환하여 모든 장애를 해탈하고,

현전법에 자재하며, 의타상을 전환하여 청정분의 의타상이 현전하기 때문이다.


白法體相,能滿十波羅蜜,得十自在故。是中命自在`心自在及資用自在者,爲滿檀波羅蜜故。

業自在及生自在者,爲滿尸羅波羅蜜故。信自在者,爲滿羼提波羅蜜故。

願自在者,爲滿毘離耶波羅蜜故。五通所攝如意通者,爲滿禪波羅蜜故。

智自在及法自在者,爲滿般若波羅蜜故。

둘째는 청정법의 백법(白法)을 자체로 하는 상이니, 능히 10 바라밀을 원만히 하여 10 가지의 자재를 얻기 때문이니,

이 중에서 수명의 명자재(命自在)ㆍ마음의 심자재(心自在)ㆍ도구의 자용자재(資用自在)는 단(檀, 보시)바라밀을 원만히 하기 때문이고,

업자재(業自在)ㆍ태어남의 생자재(生自在)는 시라(尸羅, 지계)바라밀을 원만히 하기 때문이며,

믿음의 신자재(信自在)는 찬제(羼提, 인욕)바라밀을 원만히 하기 때문이며,

서원의 원자재(願自在)는 비리야(毘離耶, 정진)바라밀을 원만히 하기 때문이며,

오신통을 포함하는 여의통(如意通)은 선정바라밀을 원만히 하기 때문이고,

지혜의 지자재(智自在)ㆍ법자재(法自在者)는 반야바라밀을 원만히 하기 때문이다.


不二相,事非事二相故,依一切法非事故,有爲`無爲不二相。業煩惱無,爲有現相時現得自在故。別`不別是一不一相,是中一切諸佛不異身故,無量身心故,示現成佛。於中說偈:

셋째는 두 가지가 없음의 불이상(不二相)이니, 존재와 비존재의 사(事)와 비사(非事)의 두 가지의 상이 없기 때문이며,

일체법에는 유(有)와 무위(無爲)의 두 가지가 없는 불이(不二)의 상이며,

업의 번뇌가 짓는 바가 아니고 유위법의 상을 시현함이 자재하기 때문이며,

다른 성품과 동일 성품의 별(別)과 불별(不別)의 두 가지가 없는 상이며, 

이 중에서 모든 부처님의 의지처는 차별이 없는 불이신(不異身)이기 때문에 무량신(無量身)으로 성불을 시현하는 것이다.

여기에 게송으로 설하나니, 


自稱無我故, 離別無有身, 是彼本順故, 分別得立名。

스스로 무아에 계합하니, 별도의 의지신(身)이 없음이요, 

그 근본에 수순하니, 분별하여 명칭을 안립하였네.


性差別無異, 具足及無始, 不分別一佛, 或多依久處。

종성의 차별은 다르지 않은 무이(無異)이니, 구족하여 시초가 없는 무시(無始)이기 때문이라.

아득한 무시(無始)로부터 한 분의 부처님 혹은 많은 의지신을 분별하지 않으시네.


常相,依眞如淨相,本願力取作事不盡故。

넷째는 상주(常住)의 상이니, 진여의 청정함에 의지하는 상이고,

본원력으로 취하며, 지어야 할 불사가 다하지 않은 때문이며, 

 

不思議相,彼眞如淨中,唯內所證知,世閒餘未曾有,及非測量境界。

다섯째,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상이니, 그 진여의 청정함 가운데에서 오로지 내면에서 증득하는 지혜이기 때문이고,

세간에는 일찍이 없는 미증유(未曾有)이며, 사량하여 측량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닌 것이다.


云何復此法身 見覺觀故,彼初得? 暫念大乘無分別`藉彼得智,五種相善修故,一切諸地中,善集助道行,微小難壞障,能令壞故,如金剛三昧,彼三昧中,閒壞一切障故,依彼身轉故得。

또한 이 법신을 어떻게 각관(覺觀, 심사尋伺)을 하여서 최초로 증득하는 것인가?

대승법을 반연하는 무분별지혜와 후득지혜를 5 가지의 오종상(五種相)으로 잘 닦음으로써 모든 지위에서 자량의 조도행(助道行)을 잘 쌓고, 미세하여 파괴하기 어려운 장애를 능히 없애기 때문이다.

마치 금강삼매와 같이, 삼매에서 모든 장애를 없애기 때문이고, 그 신(身, 의지처)가 전환됨으로써 증득하는 것이다.

 

각관(覺觀), 거친 마음으로 처음 생각하는 것을 각(覺)이라 하고, 세밀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을 관(觀)이라 한다.
각관(覺觀)은 심사(尋伺)이며, 심(尋)은 찾아 헤매는 마음과 사물에 대한 개략적인 사고 작용, 사(伺)는 그보다 세심한 분별 작용을 가리킨다. 번뇌에 수반되는 수번뇌(隨煩惱)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선정=定도 무의식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생각하고 살피는 작용이 있다. 그러나 심사와 다른 점은 선정은 '바르게' 생각하고 살피는 것이고 심사는 바르지 못한 것이며, 이 각관(覺觀), 즉 심사(尋伺)버려야 2선으로 들어갈 수 있다.  

 

復有幾種自在故,法身得名爲自在?略說五種:世界`身相好`無分別無邊聲響音`不可觀頂自在故,轉色陰。

上妙無量最樂行自在,轉迴受陰故。說一切名身`句身`字身自在,轉迴想陰故。應身願顯引衆攝
取白法自在事,轉迴行陰故。如鏡觀見作事憶持智自在事,轉迴識陰故。

또한 몇 가지 자재로써 법신이 자재를 얻는다고 말하는 것인가? 대략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 불국토(世界)ㆍ자신(身)ㆍ상호(相好)ㆍ분별이 없고, 가없이 무변한 음성ㆍ머리를 볼 수 없이 높은 불가관정(不可觀頂)의 자재이기 때문이니, 물질의 색음(色陰)를 전환함에 의한 것이며,

둘째, 승묘(勝妙)하고 무량하며, 최상의 즐거움의 행의 자재이니, 감수작용의 수음(受陰)을 전환함에 의한 것이며,

셋째, 일체의 모든 명칭의 명신(名身)ㆍ문구의 구신(句身)ㆍ글자의 자신(字身)에 대한 자재이니, 표상작용의 상음(想陰)을 전환함에 의한 것이며,

넷째, 몸을 나투는 응신(應身)ㆍ서원ㆍ현현ㆍ대중을 포섭함ㆍ청정법한 백법(白法)을 포섭함에 있어서의 자재이니, 결합작용의 행음(行陰)을 전환함에 의한 것이며,

다섯째, 거울과 같은 지혜ㆍ평등하게 보는 지혜ㆍ관찰의 지혜ㆍ할 바를 이루는 지혜의 자재이니, 식별작용의 식음(識陰)을  전환함에 의한 것이다.

ㅡ법신이 5() 의지처를 전환하여 5 가지 자재를 얻음을 밝힌 것이다.

 

'The Awakening of Faith' by Ashvagosha.

The faculty of thought. The consciousness of self and of environment and all the imperfect ideas arising from these, trying to distinguish between all the objects of the senses, is called thought, as well as the faculty of distinguishing things. This increases with the senses, with desires, and with their sorrows. 생각의 능력, 즉 상음(想陰), 이것은 자아(我)와 주변 환경에 대한 의식적인 인식(분별)로 부터 모든 불완전한(오염된) 관념을 일으키는 것이며, 감각을 따라 모든 대상들을 구별하는 능력, 이것을 생각이라 한다. 이 상음은 모든 감각, 욕구(욕망)과  그 슬픔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 7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  

 

是中無分別功用行有三種,因現相取`生差別故。無分別智,亦有三種:少欲知足`不顚倒`無分別無謗故。

藉彼得智,亦有五種:證得`憶念`差別`雜成就 時現分別故。

 중에서 의식적인 노력을 행하는 공용행(功用行)의 무분별지혜에 3 가지가 있으니,

인연(因), 모습을 나타내는 현상(現相), 취함의 취(取)로 생겨나는 차별이며,  

무분별지혜에도 역시 3 가지가 있으니,

적은 것으로 만족을 아는 소욕지족(少欲知足), 전도되지 않음의 불전도(不顚倒), 

분별이 없고 비방이 없는 무분별무방(無分別無謗)이며, 

후득의 무분별지혜에도 역시 5 가지가 있으니,

증득(證得)ㆍ생각하여 지니는 억념(憶念)ㆍ차별(差別)ㆍ여러가지의 성취인 잡성취(雜成就)ㆍ때때로 나타냄의 시현분별(時現分別)이다.

ㅡ증상혜학의 중에서 다시 3 가지 무분별지혜의 차이를 말하였다.


釋成無分別智義故,復說餘偈:

무분별지혜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 다시 나머지 게송을 설하나니, 


餓鬼畜生人, 諸天如羅漢, 等同意差別, 得成諸塵義。

아귀ㆍ축생ㆍ인간ㆍ하늘세계가 아라한과 같이 평등하나, 마음이 다른 의차별(意差別)이므로

모든 대상의 진의(塵義)가 성립되는 것이네.


過去如夢等, 無差亦有二, 非有而作念, 彼念順義故。

과거ㆍ꿈 등과 같으며, 차별이 없으니, 역시  가지는 없는 것이라.

존재하지 않는 비유(非有)이면서 생각 속의 대상(念)을 이루나니

 생각 속의 대상(念)이 외부의 대상에 수순하기 때문이라네.


義及成就義, 彼智無分別, 彼無卽無佛, 得事卽不成。

대상(義)로서 대상(義)을 성취한다면, 그 지혜는 무분별이라.

그것이 없다면 부처님도 없는 것이며, 증득 됨도 성립되지 않는다네.


菩薩得神通, 彼以信力故, 地等如是無, 隨善者覺見。

보살이 신통을 얻음은 믿는 신력(信力) 의한 것이라.

 등은 이와 같이 존재하지 않는 무(無)이나, 착한 선자(善者) 인식하여 보는 것에 따를 뿐이네.


成就此智慧, 勇健得禪定, 一切法正依, 及見如是義。

 지혜를 성취하여 용맹하게 선정을 얻으면,

일체법의 바른 의지처인 정의(正依)이니, 이와 같은 의미(義)를 보는 것이네.


智行分別中, 及現一切義, 應知無義事, 彼記永所無.

지혜가 분별을 행하는 가운데에서는 모든 대상이 나타나나,

마땅히 알아야 할지니 대상이 존재하지 않고,  식도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般若波羅蜜中,無分別智及無優劣,如『大品經』說:菩薩住般若波羅蜜中,以不住故,能滿修行。

반야바라밀과 무분별지혜에 우열이 없으니,

'대품반야경'에서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무나, 안주하지 않음으로써 능히 수행이 원만하여진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으나, 


彼云何以不住故,能滿諸波羅蜜? 捨無種處故`捨離外道我見處見故` 捨離未得正諸菩薩妄念分別處故`

捨離世閒涅槃二邊處故`捨離唯滅煩惱障處喜故`捨離衆生益捨離無餘涅槃界處。

보살이 어떻게 안주하지 않음으로써 능히 모든 바라밀을 원만하게 하는 것인가? 

다섯 가지 처소인 사오종처(捨五種處)를 여의기 때문이니,

외도의 아견처(我見處)를 여의기 때문이고, 

아직 정법을 증득하지 못한 보살이 허망된 생각으로 분별하는 망념분별처(妄念分別處)를 여의기 때문이며, 

세간과 열반의  가지 극단적인 이변처(二邊處) 여의기 때문이고, 

오직 번뇌장을 소멸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유멸번뇌장처(唯滅煩惱障處) 여의기 때문이며, 

중생의 이익을 원하지 않고 무여열반세계에 안주하는 무여열반계처(無餘涅槃界處) 여의기 때문이다.

ㅡ원문의 사무종처(捨無種處) 사오종처(捨五種處) 오자로 보아야.


聲聞乘及菩薩乘中,有何勝?差別有五種相勝故。無分別勝故,唯陰等法無分別故;

非有方勝,證正一切相知,及依一切衆生方故;不住勝因不住涅槃故;

永勝無餘,涅槃界中,住到無量故;及上勝果,此經無乘有上勝故。 是中有偈:

성문승과 보살승에는 어떤 뛰어난 차이(勝)가 있는 것인가? 5 가지 상의 뛰어남인 상승(相勝)이 있기 때문이니,

첫째는 무분별의 뛰어남인 무분별승(無分別勝)으로, 5음 등의 법에 대해서 오직 분별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있음이 이어지는 것 아닌 것의 뛰어남인 비유방승(非有方勝)으로, 진여를 증득함과 일체상 대해서 증득하는 것과 일체 중생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며,

셋째는, 머물지 않음의 뛰어난 원인인 불주승인(不住勝因)으로, 열반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며,

넷째는, 궁극의 뛰어남인 영승(永勝)으로, 무여(無餘) 열반세계 중에서 무량함에 이르러 안주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최상의 뛰어난 결과인 상승과(上勝果)이니, 이 경보다 뛰어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五種勝義故, 慈悲以爲身, 世閒出世勢, 不久當得現。

다섯 가지의 뛰어난 의미인 승의(勝義)인 까닭에 자비를 의지처로 삼으니, 

세간과 출세간의 힘이 장차 머지않아 나타나리라.


若諸菩薩成就如是增上戒`增上心`增上慧功德,得自在於衆生益處;

何故復有諸衆生,而復有苦縛者? 示彼衆生有彼衆生業障對故,諸善法受彼助得勢;

示現於彼生善起障故`示現開現故`示現還受,彼受用勢時,現彼不善法益因事故;

助受彼勢時,還彼餘衆多衆生,示現有障因故,而見衆生衆生衆事有縛。是中說偈:

만약, 모든 보살들이 이와 같은 매우 높은 계율의 증상계(增上戒), 매우 높은 마음의 증상심(增上心), 매우 높은 지혜의 공덕인 증상혜공덕(增上慧功德)을 성취한다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에 자재를 얻게 된다.

그러나 어찌하여 많은 중생들이 있고, 또한  중생들에게 고통의 속박이 있는 것인가? 

 중생들에게는 그 각각의 업의 장애가 있기 때문이나, 그들에게 여러 선법을 주어서 힘을 얻게 되 장애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수용할  그들의 불선법의 원인을 보는 이익이 되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힘을 주면, 나머지의 많은 중생들에게 장애되는 것에 되돌려 돕는 원인을 짓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중생 중생 중생들에게는 갖가지로 속박이 있음을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게송으로 설하나니, 


現煩惱障故, 患目不正視, 諸衆生菩薩, 不得諸勢義。

안질이 있는 눈으로는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번뇌의 장애가 있는 까닭에, 

모든 중생들은 보살의 많은 이익을 얻지 못한다네.


如是說增上慧勝事已。滅勝事復云何?菩薩滅者,諸不著不住涅槃,彼相者捨;同諸煩惱染,不捨世閒。偈中轉身,是中世閒是他相性,是煩惱染分`涅槃彼亦是淨分`身者彼是二分。他相性者,轉身,還彼他相性中得對治,所染分中轉淨分中護。

이상과 같이 매우 높은 증상혜(增上慧) 뛰어난 승사(勝事)를 설명하였으니,

단멸의 뛰어난 멸승(滅勝)의 것 어떠한 것인가? 보살의 멸(滅)이란, 열반에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는 것으로,

상은 모든 번뇌의 잡염을 버리지만 세간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

게송에서 의지처를 전환하는 전신(轉身) 한다고 말한 것이며, 여기서 세간은 의타상으로,  번뇌의 잡염분이며, 열반은 역시 그 의타성, 즉 8식의 청정분이며,

의지처는 그것의  부분인 의타상(의타기성)이며, 의지처의 전환인 전신은  의타상에서의 다스림의 대치(對治)가 이루어져서 잡염분을 전환하고 청정분을 보호하는 것이다.

ㅡ증과인 단멸의 뛰어난 양상,  구경도에서 의지처의 전환인 전신(轉身) 의해 대열반과 대보리를 성취함에 관한 것이다.

 

전신(轉身), 이 역본에서 전신(轉身)ㆍ전회(轉廻)는 전의(轉依)의 의미이다. 

급다ㆍ진제ㆍ현장의 역본에는 전의(轉依)로 되어 있으며, 전의(轉依, āśraya-parivṛtti)는 ‘소의(所依, 의지처)를 전환시켜서 얻어진 것’이란 의미이다. 여기서 의지처는 제8식을 기반으로 하는 8식을 가리킨다.

전환은 전사전득(轉捨轉得), 즉 번뇌장ㆍ소지장(所智障)의 종자를 전사하고, 보리와 열반을 전득함을 말한다. 따라서 전의는 소의(所依)인 자기 존재의 기체(基體)를 허망한 상태(변계소집성)에서 진실한 상태(원성실성)로 변혁시키는 과정, 또는 그 과정의 결과로 증득된 보리와 열반을 가리킨다.


然彼迴略有六種:作微弱益迴,以信力故`住聞習故,依有慚愧煩惱行不行故。

得證迴,入地諸菩薩現正`不正現處故,乃至六地, 修轉,不現有障念相,現善淨正意故,乃至十地中。

滿果迴,現無障一切相念,得一切相念。自在微小迴,小乘已證衆生無我故,一向背世閒故,一向捨世閒。

上迴,諸菩薩已證法無我故,還彼處見寂靜,滅諸煩惱使等,而不捨彼故。

그러나, 그 전환에 대략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미약하게 하고 증익시키는 전환인 미약증회(微弱益迴)이니, 믿음의 신력(信力)에 의하고 문훈습(聞薰習)에 안주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함의 참괴(慚愧) 번뇌가 미약하게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통달의 전환인 득증회(得證迴)이니, 입지(入地)한 보살들이 진실이 현현하고 진실 아닌 것이 현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니, 나아가 제6지까지인 것이다.

셋째는, 수습의 전환인 수전(修轉)이니, 아직 장애가 있으나, 생각 속의 차별된 대상은 현현하지 않으며 매우 청정하고 바른 대상이 현현하는 것이니, 나아가 제10지까지인 것이다.

넷째는, 원만한 증과의 전환인 만과회(滿果迴)이니, 장애가 없고 일체의 생각 속의 모든 차별된 대상이 현현하지 않으며, 모든 차별상에 대하여 자재함을 얻은 것이며,

다섯째는, 미약하고 작은 전환인 자재미소회(自在微小迴)이니, 소승은 오직 중생의 무아를 통달하기 때문이고, 한결같이 세간을 등지기 때문에 한결같이 세간을 버리는 것며,

여섯째는 최상의 전환인 상회(上迴)이니, 모든 보살이 법무아를 통달함으로써 그 생사의 세계를 적정한 곳으로 보고 모든 번뇌를 단멸하나 그것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 6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  

 

增上勝慧復云何知?無分別智中,性處`身處`因處`念處`相處`持處`伴處`報處`因氣處`出處`盡至處,

藉彼無分別功用行等處`差別處`藉無分別得處`餘處`持自然作事處`甚深處意,無分別智增上慧勝知。

매우 높은 지혜의 뛰어남의 증상승혜(增上勝慧)를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무분별지혜 가운데 자성의 처소인 성처(性處)ㆍ의지신의 처소인 신처(身處)ㆍ인연의 처소인 인처(因處)ㆍ

인식대상의 처소인 염처(念處)ㆍ인식작용의 처소인 상처(相處)ㆍ맡아 지님의 처소인 지처(持處)ㆍ

반려의 처소인 반처(伴處)ㆍ과보의 처소인 보처(報處)ㆍ원인의 능력의 처소인 인기처(因氣處)ㆍ

벗어남의 처소인 출처(出處)ㆍ궁극에 이르는 것의 처소인 진지처(盡至處)ㆍ

후득지혜와 무분별지혜와 의식적인 노력의 있는 무분별공용행 등의 처소ㆍ차별처(差別處)ㆍ

후득지혜와 무분별지혜의 처소인 차무분별득처(藉無分別得處) ㆍ의식적인 노력없이 짓는 사업의 처소ㆍ

매우 심오함의 처소인 심심처(甚深處)로,

무분별지혜를 매우 높은 지혜의 뛰어남의 증상승혜(增上勝慧)라고 아는 것이다.

 

是中離五種相,無分別性智故,意離念故`果離有覺有觀地故`離想受滅定`捨離色性故`眞實處捨種種相故。

彼無分別智,離如是五種相應知。此如所說無分別智性差別安立中。說偈:

이 중에서 5 가지의 상을 여의는 것이 분별이 없는 성품의 지혜인 무분별성지(無分別性智)이기 때문이니,

첫째는 생각을 여의는 의이염(意離念)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과위(果位)가 대략적 인식의 유각(有覺)과 세밀한 인식의 유관(有觀)의 심소가 있는 지위를 여의기 때문이며,

셋째는 표상작용과 감수작용의 심소가 멸한 선정인 상수멸정(想受滅定)을 여의기 때문이고,

넷째는 물질의 자성을 여의는 사이색성(捨離色性)이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진실한 곳에서 갖가지 양상을 버리는 진실처사종종상(眞實處捨種種相)이기 때문이다.

그 무분별지혜는 이러한 5 가지의 상을 여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말한 바와 같은 이 무분별지혜의 자성(性)과 차별의 안립에 대하여 게송으로 설하였다.

 

諸菩薩眞實, 遠離五種相, 無分別智處, 眞中種種名。

모든 보살의 진실은 5 가지의 상을 멀리 여의었으니, 

이것이 무분별지혜의 처소이나, 진실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이름하는 것이네.

 

諸菩薩身者, 善心正是心, 無分別智中, 義心眞實說。

모든 보살의 의지처는, 착한 선심(善心), 바로 이 마음이니,

무분별지혜 가운데에서 이롭게 하는 마음인 의심(義心)의 진실한 말씀이라네.

ㅡ이 게송은 무분별지혜의 소의(所依, 의지처) 관한 내용.

 

諸菩薩因者, 同言聞習故, 無分別智中, 意行同思惟。

모든 보살의 인연은 말을 듣고 훈습되는 문습(聞習)이기 때문이니

무분별지혜 가운데, 의식의 작용의 의행(意行) 그대로 사유한다네.

ㅡ무분별지혜의 인연에 대한 것이.

 

諸菩薩念者, 諸法無詮事, 無分別智中, 無我及眞如。

모든 보살의 인식(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제법의 성품(事)이니, 

무분별지혜 가운데 무아성(無我性)의 진여라네.

무분별지혜의 인식대상에 관한 내용이다.

 

諸菩薩相者, 於彼正念處, 無分別智中, 智處無諸相。

모든 보살의 인식된 상(相)은 그 바른 인식대상의 처소인 정념처(正念處)이니

무분별지혜 가운데 지혜의 처소는 모든 형상이 없는 무상(無相)이라네.

 

隨順眞實義, 分別無有異, 迭共隨順故, 彼義順和成。

수순함은 진실의 의미이고, 분별은 다름이 없는 무이(無異)이니, 

함께 수순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수순하여 성립되는 것이라.

 

離智無言說, 說中有所行, 以說相違故, 彼說無有言。

지혜는 언설이 없음을 여의고, 언설 가운데 행하는 바가 있으니, 

언설은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라네.

위의  게송에서는 무분별지혜의 인식작용에 대하여 말하였.

 

諸菩薩持者, 彼智無分別, 藉彼得彼行, 彼到增長處。

모든 보살이 맡아 지니는(持) 것과 그 지혜에 분별이 없으니, 

후득지혜의 행은 그것이 증장하는 곳에 이르게 한다네.

ㅡ무분별지혜의 맡아 지니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諸菩薩伴者, 說爲二種行, 無分別智中, 五波羅蜜性。

모든 보살의 돕는 짝(伴)을 두 가지의 행이라고 말하나니, 

무분별지혜 가운데, 5 가지 바라밀의 성품이라네.

ㅡ무분별지혜의 돕는 조반(助伴) 대한 것이.

 

諸菩薩報者, 諸佛二界中, 無分別智處, 以得順行故。

모든 보살의 과보는 부처님의 이계(二界) 중에 있으니, 

무분별지혜의 처소로서의 증득과 수순의 행에 의한 것이라네.

ㅡ무분별지혜의 과보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諸菩薩因者, 上上諸生處, 無分別智中, 勝到故正說。

모든 보살의 원인(因)은 상상(上上) 지위의 모든 생의 처소인 생처(生處)이니

무분별지혜 가운데에서 뛰어나게 도달하게 되는 것이므로 바르게 말하는 것이네.

ㅡ무분별지혜의 등류인 진액(津液) 대한 내용이다.

 

諸菩薩出事, 爲得順義故, 無分別智中, 解知諸十地。

모든 보살의 벗어나는 출사(出事)는 증득과 수순의 의미이기 때문이니, 

무분별지혜 가운데 10지라고 이해하여야 하리.

ㅡ무분별지혜의 벗어남의 출리(出離) 대한 것이.

 

菩薩盡至, 因三淨身得, 無分別智中, 得上神通故。

모든 보살은 궁극에 이르러 청정한 3신(身)을 증득하게 되나니, 

무분별지혜 가운데에서 최상의 신통을 얻는다네.

무분별지혜의 궁극에 이른 것에 대한 내용이다.

 

如空無有染, 彼智無分別, 衆惡種種上, 唯信欲爲正。

허공과 같이 잡염됨이 없으니, 그 지혜는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이고, 

갖가지의 중악(衆惡) 중에서 오직 믿음과 의욕을 근본으로 삼는다네.

ㅡ가행의 무분별지혜가 악도(惡道) 업을 능히 다스리는 것을  공덕으로 하는 것 나타낸 것이다.

 

如空無所染, 彼智無分別, 遠離一切障, 得順成就故。

허공과 같이 잡염됨이 없으니, 그 지혜는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이라.

모든 장애를 멀리 여의고, 증득과 성취에 수순하는 것이네.

ㅡ근본의 무분별지혜가 모든 장애를 다스리는 공덕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如空無有染, 彼智無分別, 常行世閒故, 而世法不染。

허공과 같이 잡염됨이 없으니, 그 지혜는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이라.

세간에서 항상 행할지라도 세간법에 오염되지 않는다네.

ㅡ위의  게송은  가지 무분별지혜의 뛰어난 이익에 대한 것이.

 

啞義隨順故, 如啞所覺義, 非如不啞用, 說爲三種智。

벙어리가 대상에 수순함과 같기 때문에, 벙어리가 인식한 대상과 같고, 

벙어리가 아닌 사람이 수용함과 같은 것이니, 3 가지 지혜를 말하는 것이라네.

 

如癡所用受, 如癡所覺知, 非如癡所用, 說爲三種智。

어리석은 사람이 수용함과 같고, 어리석은 사람이 인식한 바와 같고,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 수용함과 같은 것이니, 3 가지 지혜를 말하는 것이라네.

 

解通五種義, 如達五種事, 如意識所知, 說爲三種智。

5식이 대상을 이해함과 같고, 5식이 대상을 통달함과 같으며

의식(意識)이  것과 같으니, 3 가지 지혜를 말하는 것이라네.

 

不通論修論, 如通法義解, 如是漸次知, 知爲行創首。

논의를 통달하지 못함과 논의를 수행함과 법의(法義) 통달함과 같으니, 

이와 같은 순서로 알게 되는 것이니, 수행의 첫머리가 되는 지혜라네.

ㅡ위의 게송은 가지 무분별지혜의 차이를 설명한 것이다.

 

如人蔽諸目, 彼智無分別, 彼後得開目, 彼智藉所得。

사람이  눈을 감는 것과 같은 것이니,  지혜는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이나, 

그가 나중에 눈을 뜨니,  지혜가 착소득(藉所得)의 후득지라네.

 

如空智亦爾, 彼智無分別, 彼處色現相, 彼智藉所得。

허공과 같이 지혜 역시 그러한 것이니,  지혜는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이라네.

그곳에서 물질의 모습인 색상(色相)을 나타내나니,  지혜가  착소득(藉所得)의 후득지라네.

ㅡ위의  게송은 근본지와 후득지의 차이를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如珠伎樂等, 作事無分別, 如是離住故, 諸佛業莊嚴。

여의주와 하늘의 기악 등과 같이, 일을 짓는 작사(作事)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이니, 

이과 같이 머무는 것을 여의었으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사업으로 장엄하신다네.

ㅡ무분별지혜에 의거해서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으로 짓는 사업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非彼及餘處, 有智及無智, 彼智無差別, 是智無分別。

그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니, 지혜가 있는 유지(有智)이나, 지혜가 없는 무지(無智)로다.

 지혜는 차별이 없으므로, 이것이 무분별지혜라는 것이네.

 

體性無分別, 明識一切法, 衆生中分別, 彼智無分別。

체성에 무분별이나, 일체법을 밝게 알며,  

중생에는 분별이 있으나, 그 지혜에는 분별이 없는 무분별(無分別)이라네.

ㅡ증상혜학(增上慧學)  중에서 끝으로 무분별지혜의 매우 심오함에 관하여 설명한다.

 

섭대승론(攝大乘論 5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  

 

如是說因果,修差別已 是中云何增上戒勝事知?如菩薩地持中說。

受菩薩戒品中,略復有四種勝故,勝事應知:差別勝`同不同戒勝`上勝及甚深勝。

이상과 같이 원인과 결과의 인과(因果)와 수행의 차이를 말하는 중에서 매우 높은 계율의 뛰어난 승사(勝事)를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의 '수보살계품(受菩薩戒品)'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또한, 대략 네 가지 뛰어남의 사종승(四種勝)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뛰어난 차별의 차별승(差別勝)이고,

둘째는 공통되거나 공통되지 않는 계율의 뛰어남인, 동부동계승(同不同戒勝)이며,

셋째는 최상의 뛰어남인 상승(上勝)이고,

넷째는 매우 심오함의 뛰어남인, 심심승(甚深勝)이다.

ㅡ3() 가운데 매우 높은 계율의 수행에 관하여 설명한다. 보살의 삼학 수행은 성문등과 그 차원이 다르므로 3학의 명칭 앞에 증상(增上)이란 수식어를 붙인다.

 

是中差別勝者,謂受戒`攝善法戒`作衆生益戒故。是中上戒者,二種戒住義故知:

攝善法戒,集佛法住義故;作衆生益戒者,教化衆生住義故知。

 중에서 뛰어난 차별의 차별승(差別勝)이란, 계율을 받는 수계(受戒, 율의계, 섭률의계), 

선법을 포섭하는 계율의 섭선법계(攝善法戒), 중생을 이롭게 하는 계율의 작중생익계(作衆生益戒)의 대승보살이 닦는 계법인 3취정계(聚淨戒)이다.

여기에서 받은 계율의 수계(受戒, 율의계, 섭률의계)는 두 가지 계율에 안주하는 뜻으로, 수계를 근본으로 해서 섭선법계와 작중생익계를 건립하기 때문이며, 

선법을 포섭하는 섭선법계(攝善法戒) 법계가 불법을 쌓음에 안주하는 뜻이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작중생익계(作衆生益戒) 중생을 교화함에 안주하는이다.

 

수계(受戒), 현장의 역본은 율의계(律儀戒)로 한역하고 있다. 율의계는 섭률의계(攝律儀戒)의 준말이다.

수계작법(受戒作法)에 의해 5계ㆍ10계ㆍ구족계 등을 받아 지녀서 몸이나 입으로 짓는 악업을 따로따로 해탈케 하는 계율이므로 별해탈계(別解脫戒)라고도 한다.

진제의 역본인 진본(陳本)에는 섭정호계(攝正護戒)로, 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역본[隋本]에는 수호계(守護戒)로 되어 있다.

3취정계(聚淨戒), 대승과 소승의 모든 계법이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취(聚)라고 하고, 그 계법의 자성이 청정하므로 정(淨)이라고 한다.


聲聞同戒,諸菩薩性重不同行。不同戒者,制重同行故,彼戒中隨所聲聞犯,於中菩薩不犯戒;隨所菩薩犯戒,是中聲聞不犯戒。

성문은 공통된 계율의 동계(同戒)이고, 모든 보살의 자성죄인 성중(性重, 성죄性罪)은 공통되지 않은 부동계(不同戒)이니,

부동계(不同戒)란 가벼운 죄인 제중(制重, 차죄)과 함께 현행하기 때문이다. 

 계율 중에서 성문에게는 범하는 것이 되지만 보살에게는 범하는 것이 아닌 계율이 있고,

보살에게는 범하는 것이 되지만 성문에게는 범하는 것이 아닌 계율이 있다.

 

성중(性重), 현장의 역본은 성죄(性罪)로 한역하였다. 성죄(性罪)는 자성죄(自性罪)ㆍ실죄(實罪)라고도 하며, 살생ㆍ도둑질ㆍ사음 등은 어떠한 환경에서 행하여도 본질적으로 죄악의 행위이기 때문에 성죄라고 하며, 

성죄에 대한 금계(禁戒)를 성계(性戒)ㆍ성중계(性重戒)ㆍ주계(主戒)ㆍ구계(舊戒)라고 한다.

제중(制重, 차죄), 현장의 역본은 차죄(遮罪)로 한역하였다. 차죄는 제죄(制罪)ㆍ차제(遮制)라고도 하며, 여러 가지 과실을 수반하기 때문에, 또 세간의 비방을 피하기 위해서 석존이 제정한 계를 범하는 가벼운 죄를 말한다.

음주는 대개 차죄라고 하며, 차죄에 대한 금계를 차계(遮戒)ㆍ이악계(離惡戒)ㆍ객계(客戒)ㆍ신계(新戒)라고 한다.

성계가 제정되지 않더라도 성죄는 죄이기 때문에 범해서는 안 되지만, 차죄는 차계가 제정되어야 비로소 죄가 된다.


菩薩防身口心戒,聲聞唯防身口,是故菩薩起心犯戒,非諸聲聞。略說所有一切衆生惡,而有益身口意業,彼一切菩薩應行,及彼中學,如是共不共勝應知。

보살은 신(身)ㆍ구(口)ㆍ심(心)을 막는 계율을 갖추지만, 성문은 오직 신(身)ㆍ구(口) 만 막는 계율만 있으니,

보살은 마음(心)으로 범하는 계율이 있지만 성문은 그렇지 않은 까닭이다. 

말하자면,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신업ㆍ구업ㆍ의업을  모든 보살은 마땅히 행야 하고 닦아야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공통되거나 공통되지 않음의 뛰어남(勝)인, 동부동계승(同不同戒勝)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上勝復有四種上故:種種無量戒上故;攝取無量功德上故;一切衆生助益樂心眷屬上故;

阿耨多羅三藐三菩提住上故,及得無量功德`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최상의 뛰어남인, 상승(上勝) 또한  가지가 최상이기 때문이니,

갖가지의 무량한 계율이 최상이기 때문이고, 무량한 공덕을 섭수함이 최상이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의 이익과 안락의 그 마음과 권속을 돕는 것이 최상이기 때문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안주함이 최상이기 때문에 무량한 공덕을 얻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다.


是中甚深。若菩薩如是方便善巧故,殺生等十種業修行,是以不惡成,得無量功德,速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或應化身業`口業,是甚深戒應知。

이 중에서 매우 심오함의 심심(甚深)은 다음과 같으니,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은 훌륭한 방편에 의해서 살생(殺生) 등의 10 가지 업을 행할지라도 죄악이 되지 않으며, 무량한  공덕을 이루어서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며, 또한 변화로 신업과 구업을 나타내나니, 이러한 것이 매우 심오한 계율의 심심승(甚深勝)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是以作國王,治國計,種種示衆生惱事。是以化衆生安置善處,示種種生惱,餘衆生示餘益,餘者令心以發,發已先化,化已心迴。此是菩薩戒甚深勝事。如是四種勝事,略說菩薩上戒勝事應知。如是分別,復有菩薩戒差別無量,亦如比尼響方廣修多羅中。如是說增上戒勝已。

이러한 까닭에 혹은 국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중생을 괴롭히는 갖가지 일들을 시행하나니, 이는 중생을 교화하여 계율에 편안히 두기 위해서이며,

중생을 괴롭히는 갖가지 일들을 보이지만, 진정으로는 그 나머지 중생들에게 이로움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니, 나머지 중생으로 하여금 마음을 일으키게 하여서 우선 교화되게 하고, 교화된 후에는 마음을 전환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보살이 갖는 계율의 매우 심오하고 뛰어난 심심승사(甚深勝事)인 것이다.

이러한  가지의 뛰어난 4승사(四勝事)로서 보살의 최상 계율의 뛰어남을 대략 분별한 것이라고 알아야 하며,

또한 보살계의 차별은 무량한 것이니, 율(律)의 집대성인 '비니향방광수다라(比尼響方廣修多羅, 비나야구사Vinayakośa)'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이상과 같이 매우 높은 계율의 상계(上戒)의 승사(勝事)를 설명하였다.

ㅡ비니향방광수다라(比尼響方廣修多羅, 비나야구사Vinayakośa) 중국에 전역(傳譯)되지 않은 것이다.


增上心勝事復云何知?略有六種差別應知:念差別`種種差別`業作事差別`現氣差別`業差別。

매우 높은 마음의 증상심(增上心)의 뛰어난 승사(勝事)를 어떻게 알아야 하는 것인가?

대략 6 가지의 차이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인식대상의 차이인 염차별(念差別), 

여러 가지의 종종차별(種種差別), 짓는 업작사차별(業作事差別), 

현현의 현차별(現差別), 능력의 차별인 기차별(氣差別), 업차별(業差別)이다.

ㅡ매우 높은 선정의 증상심학(增上心學) 관한 설명이다. 


念大乘法故。大乘光明,一切功德積聚三昧,三昧王現護,首楞嚴等三昧無量種種故。

인식대상의 차이인 염차별(念差別)은 대승법을 반연하기 때문이고, 

여러 가지의 종종차별(種種差別)은 대승광명삼매ㆍ일체공덕적취삼매(一切功德積聚三昧)ㆍ삼매왕현호삼매(三昧王現護三昧)ㆍ수릉엄삼매 등의 삼매가 여러 가지로 무량한 때문이며,

ㅡ진제 역본인 진본(陳本)에서는 이들 삼마지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一切法雜念智顯順故,阿犂耶識一切障諸惡使令除故。禪定樂行已,隨所生故。處生故,一切世界無障。神通現故。

일을 짓는 업작사차별(業作事差別)은 일체법의 총체적인 상을 반연하는 지혜인 일체법잡염지(一切法雜念智)에 수순함으로써 아리야식에 장애되는 모든 악의 번뇌인 악(惡)을 제거하기 때문이며,

현현의 의 현기차별(現氣差別)은, 선정의 즐거움인 선정락(禪定樂)을 행하여 태어나고자 하는 바를 따라 생을 받기 때문이며,

능력의 차별인 기차별(氣差別)은 모든 세계의 걸림이 없는 무장(無障) 신통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動`放光`遍視`異事作`來往`略廣,一切色身入同行,往上下作,自在隱蔽他,神現念與樂,放光現大神通故。

업차별(業差別)은 움직이고 빛을 내며, 두루 가득하게 나타내 보이며, 변화하고 왕래하며, 간략히 하고 광대하게 하며, 모든 색신에 들어가며, 동행(同行)하여 위로 나타나거나 아래로 숨는 등의 하는 바가 자재하여서 다른 이의 신통을 조복하고, 생각하여 지니는 즐거움을 베풀며, 광명을 놓는   신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攝一切苦行,現十種苦行故。十種苦者,所謂受許苦行,菩提願許故。不退苦行,世閒諸苦不退故。不背向苦行,一切衆生惡行苦行中,彼現現事故。現苦行,作惡衆生中,作一切利益義現故。不染苦行,世閒生,以世閒法不染故。

또한 모든 고행을 포섭하는 10 가지 고행을 나타내나니, 열 가지 고행의 십종고(十種苦)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받아들여서 맹세함의 수허고행(受許苦行)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소원을 맹세하는 때문이며,

둘째, 퇴전하지 않음의 불퇴고행(不退苦行)은 세간의 모든 고통으로 인하여 퇴전하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며,

셋째, 등지지 않음의 불배향고행(不背向苦行)은 모든 중생의 악행과 고행에 현재를 나타나기 때문이며,

넷째, 현전의 현고행(現苦行)은 악행을 하는 중생에 대해서도 모든 이익되는 나타내기 때문이며,

다섯째, 오염되지 않음의 불염고행(不染苦行)은 세간에 머무르나 세간법에 오염되지 않기 때문이다.


信苦行,於大乘雖無解,一切甚大事信故。證苦行,衆生法無我證故。順覺知苦行,諸如來甚深密語所說順覺知故。

不寂靜不染苦行,不捨世閒,彼不染故。行苦行,住一切障解脫諸佛如來乃至世閒衆生際,自然作一切衆生一切義行故何者。復順覺知苦行,所有諸佛密語說,若隨彼所覺。

여섯째, 믿음의고행(信苦行)은 비록 대승에 대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대승의 심오하고  성품을 믿기 때문이며,

일곱째, 통달의 증고행(證苦行)은 중생과 법무아를 증득하기 때문이며,

여덟째, 수순하여 깨달음의 순각지고행(順覺知苦行)은 모든 여래의 매우 심오하고 비밀스러운 심심밀어(甚深密語) 수순하여 깨달아 알기 때문이며,

아홉째, 고요하지 않고 잡염되지 않은 불적정불염고행(不寂靜不染苦行)은 세간을 버리지 않으나 그것에 오염되지도 않기 때문이며,

열째, 가행의 행고행(行苦行)은 일체장애해탈에 머물러서 모든 부처님과 세간의 중생계를 다하며,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모든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또한 수순하여 깨닫는 순각지고행(順覺知苦行)은 모든 부처님의 비밀스런 말씀의 제불밀어(諸佛密語)에 대하여 수순하여 깨닫는 것이다.


所謂云何菩薩布施成?若使無所布施,而彼無量十方世界,作布施成。云何布施喜心成?若一切布施不喜樂。

云何布施信成?若使諸如來信不去。云何布施與意成?若使自身令與布施。云何樂布施成?若使一切時,無所布施。

이른바 보살은 어떻게 보시를 행하는 것인가? 시방의 무량한 세계에서 보시를 행하나, 보시하는 바가 없음이며,

어떻게 기쁜 마음으로 보시를 행하는 것인가? 일체의 보시에 대해서 기쁘고 즐거워하는 바가 없음이며,

어떻게 보시의 믿음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모든 여래의 믿음을 받지 못할지라도 보시를 행하는 것이며,  

어떠한 마음을 보시에 두는 것인가? 다른 이들에게 스스로 보시를 하게 하는 것이며,

보시에 대해서 어떻게 즐거워 하는 것인가? 항상 보시하는 바가 없음으로써 이다.


云何布施大事成?若於布施起不堅相。云何布施增長成?若使起妒心。云何布施盡意成?若使不住於盡法時。

云何布施自在成?云何布施無量成?若不住無盡故。如布施,如是持戒等乃至般若波羅蜜,隨順應知。

보시에 대해서 어떻게 대사(大事)를 이루는 것인가? 보시가 견고하지 못하다는 상(相)을 일으키는 것이며,

보시에 대해서 어떻게 증장(增長)을 이루는 것인가? 질투하는 투심(妒心) 일으키는 것이며,

보시에 대해서 어떻게 궁극에 이르는 것인가? 궁극에 이른, 진법시(盡法時)에 머물지 않으며,

어떻게 보시의 자재함을 이루는 것인가? 어떻게 보시의 무량함 이루는 것인가? 

머물지 않는 불주(不住)이고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이기 때문이니, 

이러한 보시와 같이 지계바라밀에서부터 반야바라밀에 이르기까지도 수순하는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云何殺生成?若使衆生世閒害。云何偸盜成?若使餘者未與衆生而自取之。云何邪婬成?若使婬邪而行。

云何妄語成?若使如妄語作妄語說。云何綺語成?若使常以空門行而行。

살생(殺生)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중생의 세간을 끊어지게 하는 것이며,

도둑질의 투도(偸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다른 이가 주지 않는 것을 중생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며,

삿된 음행의 사음(邪淫)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삿된 음행을 행하는 것이며,

거짓말의 망어(妄語)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거짓되게 말을 하는 것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교묘하게 꾸미는 기어(綺語)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항상 공문(空門)의 행으로 행하는 것이며


云何惡口成?若使到智彼岸。
云何兩舌成?若使善知諸法而能詮說。

云何貪成?若使常與無常,禪定法令得故修行。

云何瞋心成?若使一切煩惱心中取行。云何邪見成?若使一切處,到一切事,如實邪見。

욕설의 악구(惡口)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지혜의 피안에 잘 이르게 하는 것이며, 

이간질하는 말의 양설(兩舌)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법을  알고 능히 나타내어서 말하는 것이며,

어떻게 탐욕(貪慾)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상주ㆍ무상ㆍ선정법을 증득하고자 수행하는 것이며,

어떻게 성냄의 진심(瞋心)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모든 번뇌심(煩惱心) 가운데에서 취하여 행하는 것이며,

어떻게 삿된 견해의 사견(邪見)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모든 곳에서 일체의 삿된 성품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經明甚深佛法,何等法而說甚深?是中有此說:常法佛法,依法身常故。斷見法佛法,滅一切障故。

生法佛法者,能生應身故。有覺法佛法者,八萬四千衆生行有對治故。

어떠한 법을 경전에서 밝히는 매우 심오한 심심불법(甚深佛法)으로써 매우 심오한 심심(甚深)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상주하는법(常法)의 불법은 법신이 의지하여 상주하기 때문이며, 

또한 단멸하는 단견법(斷見法)의 불법은 모든 장애를 단멸하기 때문이며,

또한 생기하는 생법(生法)의 불법은 능히 응신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또한 깨침이 있는법(覺法)의 불법이니, 8만 4천 가지 중생의 행과 그에 대한 다스림의 대치(對治)가 있기 때문이다.


有貪法佛法者,有貪衆生取如己故。如是有瞋法佛法`有癡法佛法`見有凡夫法佛法`無染法佛法,眞如成就已,一切障不能染故。離染法佛法者,生世閒而世閒法,不能染故。以是義故,名爲甚深佛法。

또한 탐욕이 있는 탐법(貪法)의 불법은 탐욕이 있는 중생을 자신과 같이 섭수하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성냄이 있는 진법(瞋法)의 불법이고, 어리석음이 있는법(癡法)도법이며,

또한 범부의 범부법(凡夫法)을 불법으로 보며,

잡염이 없는 무염법(無染法)도 불법이니, 진여가 성취되어 모든 장애가 오염시킬  없기 때문이며,

잡염을 여읜 이염법(離染法)이 불법이니, 세간에 머물지라도 세간법이 오염시킬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매우 심오한 심심불법(甚深佛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修諸波羅蜜化衆生,令佛國淸淨,現一切佛法故,諸菩薩三昧作事差別應知。如是說增上勝心已。

또한 모든 바라밀을 닦아서 중생을 교화하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함은 모든 불법을 나타내기 때문이니,

이러함은 모든 보살의 삼매에서의 차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매우 높고 뛰어난 마음의 증상승심(增上勝心)을 설명하였다.

섭대승론(攝大乘論 4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김묘주 번역

 

云何此諸波羅蜜有益事可知?世閒行時,勢力所攝`同生所攝`眷屬所攝`大作事行成吉所攝`不惱少塵所攝`一切工巧諸論呪術處細意所攝。增長是無惡,乃至坐道場,一衆生現一切義作事,是名菩薩益。

 모든 바라밀에 이익됨이 있음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세간에서 행할  그 힘 포섭되고, 훌륭한 삶에 포섭되며,  권속에 포섭되고, 

광대한 가행의 성취에 포섭되며, 고뇌가 없고 번뇌가 미약함에 포섭되고, 

공예ㆍ기술  모든 학문과 주술의 미세한 취지에 포섭되며, 성장함에 악함이 없으며, 

나아가 보리도량에 앉아서 중생에게 일체의 이익된 것들 나타내나니, 이러함을 보살의 이익이라 하며, 


云何此諸波羅蜜迭共決定分別事知?或有處一切六波羅蜜布施聲說`或有持戒聲`或有忍辱聲`或有精進聲`或有禪定聲`或有智慧聲說。是中有何意趣?一切波羅蜜行中,彼一切同助至故。是意如是。說入因相果已。

 모든 바라밀을 결정적으로 분별하는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어느 곳에서는 일체의 6바라밀을 보시의 이름으로 말씀하시고, 

혹 어느 곳에서는 계율의 이름으로 말씀하시며, 

혹 어느 곳에서는 인욕의 이름으로 말씀하시고, 혹 어느 곳에서는 정진의 이름으로 말씀하시며, 

혹 어느 곳에서는 선정의 이름으로 말씀하시고, 혹 어느 곳에서는 지혜의 이름으로 말씀하셨으니,

이러함에 어떠한 취지가 있는 것인가? 

모든 바라밀을 행함에 있어서  모든 바라밀이 서로 함께 도와서 궁극에 이르게 하는, 이러한 취지가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깨달아 들어감의 원인의 인상(因相) 결과(果)를 설명하였다.


云何彼修差別事知?謂十菩薩地。何等?歡喜`離垢`明`作焰`難勝`現前`遠行`不動`善慧及法雲。

 수행의 차별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보살의 10지를 말하는 것이니,

무엇이 10지인가? 환희지(歡喜地)ㆍ이구지(離垢地)ㆍ명작지(明作地, 발광지)ㆍ염지(焰地, 염혜지)ㆍ난승지(難勝地)ㆍ현전지(現前地)ㆍ원행지(遠行地)ㆍ부동지(不動地)ㆍ선혜지(善慧地)ㆍ법운지(法雲地)이다.

 

云何此諸地十事差別?應知十種無明障對治故。如是十種相智中,及法界十種障住故。云何?十種相智法界?

이러한 십지(十地)의  가지 차이를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가지 무명의 장애를 다스리는 것이니,

이와 같은  가지 지혜의 상(相)과 법계에  가지의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가지 상(相) 지혜와 법계인가?


一切處義故。初地中,上義故;第二地中,因上義故;第三地中,無所取義故;第四地中,身心無差別義故;

第五地中,無煩惱淨義故;第六地中,種種法無差別義故;第七地中,無勝無劣義故;

第八地中,相自在身義故,及世界自在依義故;第九地中,依智自在義故;

第十地中,依業自在義故`依陁羅尼三昧門自在義故。是中有偈:

초지(환희지)에서는 모든 곳에서 행하는 의미이고,

제2지(이구지)에서는 최상을 원인으로 하는 의미이며, 

제3지(명작지, 발광지)에서는 취착된 인식대상이 없다는 의미이며,

제4지(염지, 염혜지)에서는 신체와 마음에 차별이 없다는 의미이며,  

제5지(난승지)에서는 번뇌가 없는 청정의 의미이며, 

제6지(현전지)에서는 갖가지 법의 차별이 없는 의미이며, 

제7지(원행지)에서는 뛰어남도 없고 열등함도 없다는 의미이며,  

제8지(부동지)에서는 상호가 자재한 의지처이의 의미이고, 세계가 자재한 의지처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제9지(선혜지)에서는 지혜가 자재한 의지처의 의미이며,

제10지(법운지)에서는 업이 자재한 의미이며, 다라니문과 삼매문이 자재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上義及因上義故, 不攝義及身相續, 無煩惱染淨義故。

최상의 뜻과 최상을 원인으로 하는 뜻이기 때문이며, 

포섭되지 않음의 뜻과 의지신 상속인 신상속(身相續)의 뜻이며, 

번뇌의 잡염과 청정이 없다는 뜻이라네.


乃至不異義, 不勝無劣義, 依第四自在, 法界中無明, 二種及以十, 十地有障故, 對治說諸地。

나아가 차별이 없는 뜻과 뛰어남도 없고 열등함도 없는 뜻이며,  가지의 자재한 의지처이니, 

법계 안에서 무명의  가지와 열 가지의 10지에 장애가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지위에서 다스림을 말하는 것이네.


然此無明,諸聲聞不雜,諸菩薩中雜。

그러나, 이러한 무명이 모든 성문에게는 잡염이 아니나, 보살에게는 잡염인 것이다.

ㅡ10() 수행에 관하여,  수행의 차이를 대치장(對治章)ㆍ입명장(立名章)ㆍ득상장(得相章)ㆍ수상장(修相章)ㆍ수시장(修時章) 다섯 부문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①다스림의 대치장(對治章)과 ②입명장(立名章)

何故初地名爲歡喜?彼初故自益他益,堪能成德義故。何故第二地名爲離垢?破戒垢令遠作故。

何故第三地名爲明作?不動三昧三摩跋提依故`大法光依故。何故第四地名爲焰?菩提分法燒一切障故。

何故第五地名爲難勝地?超菩提分故,由眞諦智與世閒智,更互相違,合此難合令相應故。

 초지를 환희지(歡喜地)라 이름하는 것인가? 최초로 자신과 남의 이익을 감당하는 능력의 덕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제2지를 이구지(離垢地)라고이름하는 것인가? 계율을 범하는 과실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제3지를 명작지(明作地, 발광지)라 이름하는 것인가? 움직임이 없는 부동삼매(不動三昧, samādhi)ㆍ삼마발제(三摩跋提, samāpatti)의 의지처이기 때문이고,법의 광명의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제4지를 염지(焰地, 염혜지)라 이름하는 것인가? 보리분법(菩提分法, 37 조도품)이 모든 장애를 태워 없애기 때문이다.

 제5지를 난승지(難勝地)라 이름하는 것인가? 보리분법(菩提分法, 37 조도품)을 초월하기 때문이고, 진제(眞諦)의 지혜와 세간지(世閒智, 세간의 지혜)는 서로 위배되는 것이니, 이러한 합하기 어려운 것을 합해서 상응하게 하기 때문이다.

 

부동삼매(不動三昧, samādhi), 일반적으로 삼마지(三摩地)ㆍ삼매(三昧)라는 음역어를 사용한다.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해서 망념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하며, 정위(定位)ㆍ산위(散位)와 유심위(有心位)에만 통하고 무심위(無心位)에는 통하지 않는다.

삼마발제(三摩跋提, samāpatti), 삼마발저(三摩鉢底)로 음역된다. 몸과 마음의 평등에 이른다는 뜻이다. 정(定)의 일곱 가지 이명(異名) 중의 하나이다.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의 2정(定)에 통하며 산위(散位)에는 통하지 않는다.

37도품(道品), 즉 4념처(念處)ㆍ4정근(正勤)ㆍ4여의족(如意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분(正道分)이다.


何故第六地名爲現前?因緣智依,般若波羅蜜行現作故。何故第七地名爲遠行?有功用行盡至故。

何故第八地名爲不動?一切相不動故。何故第九地名爲善慧?得上辯才智故。

何故第十地名爲法雲?雜念一切法智,一切陁羅尼三昧門藏故,如雲`如虛空,上煩惱障滅故`法身滿故。

 제6지를 현전지(現前地)라 이름하는 것인가? 연기(緣起)의 인연지(因緣智) 의지처로 삼아서 반야바라밀을 현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제7지를 원행지(遠行地)라 이름하는 것인가? 의식적인 노력의 유공용행(有功用行)이 다하였 때문이다.

 제8지를 부동지(不動地)라 이름하는 것인가? 모든 상(相)이 동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9지를 선혜지(善慧地)라 이름하는 것인가? 최상의 변재의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제10지를 법운지(法雲地)라 이름하는 것인가? 일체법을 총체적으로 반연하는 지혜를 얻고 모든 다라니문과 삼매문을 함장하기 때문이니, 마치 구름과 같고 허공과 같아서 번뇌의 장애를 덮어서 단멸하기 때문이며, 또한 법신을 원만히 성취하기 때문이다.

 

③ 증득하는 득상장(得相章)
云何此諸地得智?有四種相:得信地,信地行。得順地,十種法行得故。

證得,初地中證法界,證一切地故。成就得,此諸地修盡至故。

이러한 모든 지위의 증득함을 어떻게 아는 것인가?  가지의 사종상(四種相)이 있으니,

첫째, 믿음의 신지(信地)를 증득하는 것은 모든 지위에서 믿기 때문이며,

둘째, 행을 증득하는 순지(順地)는 모든 지위와 수순하는  가지 법의 십종법행(十種法行)을 얻기 때문이며,

셋째, 통달의 증득(證得)은 초지에서 법계를 통달하여 모든 지위에 통달하기 때문이며,

넷째, 성취의 증득인 성취득(成就得)은  모든 지위의 수행이 궁극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십종법행(十種法行), 경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열 가지 행법을 말한다.

① 서사(書寫) : 경ㆍ율ㆍ논 3장을 기록해서 오래 보존케 함.

② 공양 : 경전이 있는 곳을 부처님의 탑묘(塔廟)처럼 공양 존중함.

③ 시타(施他) : 다른 이를 위해 바른 법을 말하거나 경전을 남에게 주어서 널리 교화함.

④ 제청(諦聽) : 다른 이가 경을 읽거나 강의하는 것을 지극한 마음으로 경청함.

⑤ 피독(披讀) : 경전을 독송하고 외우는 것.

⑥ 수지(受持) : 부처님의 교법을 받아 지님.

⑦ 개연(開演) : 불법을 말해서 다른 이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함.

⑧ 풍송(諷誦) : 소리를 내어 경전과 게송 등을 읽어서 다른 이로 하여금 좋아하는 마음을 내게 함.

⑨ 사유(思惟) :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의 뜻을 생각하고 헤아리며 기억해서 잊지 않음.

⑩ 수습(修習) :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몸소 수행해서 물러남이 없는 것.

 

④ 수행의 수상장(修相章)
云何此諸地修事知?此菩薩地地中,修舍摩他`毘婆舍那已,有五種相修。

何等五種?所謂雜修`無相修`無功用修`轉明修`轉轉修。

이러한 모든 지위의 수행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 것인가? 

 보살이 각각의 모든 지위에서 사마타(舍摩他, 지止)와 비바사나(毘婆舍那, 관觀)를 닦음에 있어서 다섯 가지 상(相)의 수행이 있으니, 무엇이 그 다섯 가지 상인가? 

이른바 총체적인 수행의 잡수(雜修), 수상을 수행하는 무상수(無相修),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수(無功用修), 전전히 밝히는 수행의 전명수(轉明修), 계속하여 나아가는 수행의 전전수(轉轉修)이다. 

 

如是此菩薩,此五種修已得五種果,所謂除一切惡,身種種想離得樂法意,一切處無量,不作畔在相,法光明現相,知淨分別相。彼諸分別念同行,爲滿法身及成就故,上`中`上因作攝故名。

이와 같이  보살은 이러한 다섯 가지 수행인 오종수(五種修)에 의해서 다섯 가지의 오종과(五種果)를 성취하나니,

이른바 모든 악의 의지처를 제거하는 제일체악(除一切惡), 갖가지 생각을 여의어서 법의 즐거움을 얻으며, 일체저에서 무량하고 한정된 상이 없는 법의 광명을 나타내며, 청정분의 분별상을 알고  모든 분별의 마음이 함께 현행하며, 법신을 원만히 성취하기 위해서 최상의 상중상(上中上)의  원인인 인(因)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以十地中十波羅蜜修事成,六中六隨所說有四:方便波羅蜜,六波羅蜜所集善根,彼一切衆生共故,發願願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作願故。願波羅蜜者,未來種種願現相故,波羅蜜緣牽將故。力波羅蜜者,能修力等六波羅蜜,不斷同行故。智波羅蜜者,六波羅蜜差別智,法同受報化衆生故

10지 중에서  가지 바라밀의 수행이 성취되나니, 앞 부분의 여섯 지위에서 닦는 6 바라밀은 설명한 바와 같으며, 뒤의 4 바라밀은 다음과 같으니,

방편(方便)바라밀은 앞 부분의 6바라밀로 적집한 선근을 모든 중생과 함께 함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원을 세우기 때문이며,

서원(誓願)바라밀은 미래의 갖가지 서원을 일으켜서 바라밀의 여러 연(緣, 조건)들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며,

역(力)바라밀은 능히 수행하는 힘으로 앞 부분 6바라밀을 끊임없이 현행시키기 때문이며,

지(智)바라밀은 앞 부분의 6바라밀의 차별된 차별지(差別智) 이루고, 법을 함께 수용하며,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然此四波羅蜜,般若波羅蜜無分別智藉得智所攝。然復一切諸地,一切波羅蜜非不修成, 波羅蜜藏所攝此法門,

그러나, 이 4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의 무분별지혜와 후득지혜에 포섭되며,

또한 모든 지위에서 모든 바라밀을 반드시 닦아서 이루나니, 이와 같은 법문은 바라밀의 장(藏)에 포섭되는 것이다.

 

⑤ 수행의 기간에 관한 수시장(修時章)
幾時此諸地修事滿成?有五種衆生,三阿僧祇劫。信行人,初阿僧祇。淨深心行`無相行及有相行,有六地及七地。第二阿僧祇還,彼不現相人,自此以上乃至十地。第三阿僧祇,修道滿足成。是中有偈: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하여야  모든 지위의 수행이 원만히 성취되는 것인가?

다섯 부류의 중생이 있어서 3 아승기겁을 경과하나니,

믿고 행하는 신행인(信行人) 하나의 아승기겁을 경과하며,

청정하고 심오한 마음의 정심심행인(淨深心行人)과 형상이 무상행인(無相行人)과 형상이 유상행(有相行)의 중생은 초지에서의 제 6지 제7지에서 2 아승기겁을 경과하며,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불현행(不現相, 무공용행)의 사람은 이로부터 제10지에 이르기까지 3 아승기겁을 경과하여 수도가 원만히 성취된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아승기(阿僧祇, asaṃkhya), 무수(無數)ㆍ무앙수(無央數)로 번역되며, 124대수(大數) 중 제105의 숫자라고 한다.

유상행(有相行), 제6지 이전에 관찰되는 대상은 형상이 있다. 

전5지(前五地)에서는 유상관(有相觀)이 많고 무상관(無相觀)이 적으며, 

제6지에서는 무상관이 많고 유상관이 적으며,  

제7지 이후에는 순전한 무상관이다.

무상행(無相行), 제7지에 이르러 관찰되는 대상은 형상이 없다.

불현행(不現相, 무공용행), 현장의 역본은 무공용행(無功用行)으로 한역하고 있다. 공용은 몸ㆍ입ㆍ뜻으로 짓는 동작ㆍ말ㆍ생각을 가리키며, 공용지(功用地)는 보살의 10지 가운데 초지(初地)에서 제7지까지이다. 이 지위에 있는 보살은 이미 진여를 깨달았으나 아직 가행(加行)의 공을 쌓아야 하므로 그렇게 부르며,

무공용은 보살이 제8지 이상의 경지가 되면 의도적으로 수행을 닦지 않더라도 자연히 진여에 계합하는 것을 말한다.


勝上力故, 堅心勝智, 菩薩三祇, 發行盡至。如是說因果,修差別已。

뛰어나고 높은 승상력(勝上力)과 견고한 마음의 견심(堅心)과 뛰어난 승지(勝智) 의해서

보살이 3 아승기겁 동안 행을 일으켜서 궁극에 이르게 되네.

이상과 같이 원인과 결과의 인과(因果)와 수행의 차이를 말하였다.

섭대승론(攝大乘論 3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김묘주 번역

 

如是說入智相已。彼因果說云何知?六種波羅蜜故,謂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故。

云何此諸六波羅蜜唯記入成?云何彼入果六波羅蜜成?

이상과 같이 지상(智相)에 들어가는 것을 설명하였으니, 그것의 원인(因)과 결과(果)를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바라밀이니, 이른바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이다. 

어떻게  6바라밀에 의하여 유식에 깨달아 들어가게 되는 것이며? 

또한 6바라밀은 어떻게 그것에 들어가는 결과(果)를 이루는 것인가?

ㅡ지상에 깨달아 들어가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으로, 바라밀의 수행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설명한다.


是中菩薩於世不著`於戒不毀`於苦不瞋`於修不懈怠,如是此諸亂因不行故。因不行故,一向已寂靜思惟諸法,入唯記已,依六波羅蜜,及入唯記故,菩薩淨深心所攝故,得六波羅蜜。是以中閒六波羅蜜行順說信故`樂求隨喜故,得利潤離忍,菩薩自大乘中,說甚深大,唯分別正覺,得無分別智。

여기에서 보살은 보시에 집착하지 않고, 계율을 범하지 않으며, 괴로움에 있어서 성내지 않고, 수행에 있어서 게으르지 않으니, 이와 같은 모든 산란된 난인(亂因) 작용하지 않게 된 까닭이다.

난인(亂因)이 작용하지 않으므로, 한결같이 적정하게 일체법을 사유하여 유식의 도리에 깨달아 들어가나니, 

이미 6바라밀에 의지해서 유식에 들어간 까닭에, 보살의 청정하고 심오한 마음에 포섭된 까닭에, 6바라밀을 증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간에 6바라밀의 가행을 여읠지라도 설하신 바를 따라 믿기 때문에 즐거이 구하고, 수순하고, 기뻐하여 이익이 증대하며, 또한 보살 스스로 대승의 말씀이 매우 심오하고 광대함을 알고 정각을 이루어 무분별지혜를 증득하는 것이다.


欲信淨心明, 本彼覺法流, 十地近菩提, 不假自然得。

의욕(欲)ㆍ믿음(信)ㆍ청정한 정심(淨心)으로 밝혀서, 근본과  깨달음의 각법(覺法)의 흐름에서

10지의 보리(菩提, 깨달음)에 가까워지나니, 자연스럽게 증득하게 된다네.


有何義故,唯說六波羅蜜?障對治差別安故,一切佛法集句處故,及隨順化一切衆生故。不動相對治故,說檀波羅蜜及尸羅波羅蜜。不動相,謂世不著及家不著。動者迴相,對治故說,謂羼提波羅蜜及毘離耶波羅蜜。迴因相者,世閒衆生作惡行長受苦,及於修善行法中,生疲倦。

어떠한 연고로 오직 6바라밀만을 말하는 것인가?

장애에 대치(對治)해서 안립하는 까닭이며, 모든 불법을 쌓는 문구의 처소인 까닭이며, 

수순하여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까닭이니,

다스려진 부동(不動)의 상(相)으로, 단(檀, 보시)바라밀과 시라(尸羅, 지계)바라밀을 말하는 것이니,

부동(不動)의 상(相)은 세간에 집착하지 않고 가정에 집착하지 않음을 말하는것이다.

움직여 나아가는 동(動)이란, 물러나는 회상(迴相) 다스리기 위해서 찬제(羼提, 인욕)바라밀과 비리야(毘離耶, 정진)바라밀을 말하는 것이며,

물러나는 원인의 회인상(迴因相) 세간의 중생이 악행을 지어서 오랫동안 받는 고통에서 피로하여 싫증이 나는 피권(疲倦)이다.

ㅡ바라밀의 숫자를 여섯 가지로 안립하는 이유를 밝혔다.


以發不迴失相對治故,謂闍那波羅蜜及般若波羅蜜。失相者,亂心及無智。如是障對治數差別故,四波羅蜜不散相,一波羅蜜不散相成。以散依故,如實法正覺集諸佛法,如是集一切佛法。句處故,數差別。

발심해서 퇴전하지 않을지라도 잃어버리는 실상(失相) 다스리기 위해서 도타(闍那, 선정)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말하나니, 잃어버리는 실상(失相) 산란된 마음의 난심(亂心)과 지혜가 없는 무지(無智)이니,

이와 같은 장애를 다스리기 위해서 숫자를 차별하여 안립한 것이다.

앞의 네 가지 바라밀은 산란되지 않는 불산상(不散相)이고, 뒤의 바라밀은 산란되지 않음을 성취하는 것이며,

산란됨의 의지처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여실법(如實法)을 바르게 깨닫고 모든 불법을 쌓아 모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모든 불법의 의지처를 쌓는 까닭에 숫자의 차별이 있는 것이다.


以檀波羅蜜益衆生,尸羅波羅蜜不作惡,能忍毘離耶波羅蜜,作事盡至故,如是益相化衆生,化以故調伏,於後不入定心爲令入定心`已入定心爲得解脫故,數勸故得解脫。如是化一切衆生,句處故數差別應知。

단(檀, 보시)바라밀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고, 시라(尸羅, 지계)바라밀에 의지해서 악을 짓지 않으며,

찬제(羼提, 인욕)바라밀에 의지해서 능히 참으며,

비리야(毘離耶, 정진)바라밀에 의지해서 해야  일을  이루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이롭게 하여서 중생을 교화하고, 교화함으로써 조복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다음에 마음이 아직 선정에 들지 않은 자는 그 마음이 선정에 들게 하고, 

마음이 이미 선정에  자는 해탈을 얻게 하나니, 자주 권하는 삭권(數勸)으로써 해탈을 얻게 하며,

이렇게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문구이기 때문에 숫자의 차별이 있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然此諸波羅蜜相云何知?以六波羅蜜身最依菩薩心故。彼以最故,遍行不斷增上意,一切衆生助樂故。方便善巧最故,所有無分別知攝取故。發願最者,阿耨多羅三藐三菩提,作願故。淨最煩惱`智障,修集無障故。

그러나, 이러한 모든 바라밀의 상(相)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여섯 가지의 육바라밀은 최상에 의지처에 의하는 것이니,

첫째는 보리심을 의지처로 삼으니, 그것이 최상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두루 행하는 변행(遍行)하여 단멸되지 않으니, 매우 뛰어난 의욕인 증상의(增上意)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일체 중생을 도와서 즐겁게 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최상의 훌륭한 방편이니, 무분별지혜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최상의 발원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원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최상의 청정은 번뇌장과 지장이 수행에 장애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所有布施,彼亦名波羅蜜。所言波羅蜜,布施非波羅蜜。如是四句如布施中,如是諸餘波羅蜜中,皆有四句,如順應知。此諸波羅蜜以此何義故,有此漸次說?前波羅蜜`後波羅蜜,隨順生故。

모든 보시를 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혹은 바라밀이 보시인 것인가? 

보시이면서 바라밀이 아닌 것이 있으므로 이와 같은 네 개의 문구를 짓는 것이니, 

보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머지 바라밀에 있어서도 모두  개의 문구를 수순하여 알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바라밀은 무슨 뜻으로 이러한 순서로써 말하는 것인가?

앞의 바라밀에서 그 뒤의 바라밀이 수순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彼復釋,云何知?一切世閒`聲聞`緣覺`布施等善根中,增上到彼岸故。波羅蜜者,妒悋貧窮破除故`令得大勢功德故。布施 `持戒`滅惡道,令得善道。三昧戒,瞋恨滅除故。他者防佯住忍,懈怠及諸惡不善法令遠離故,增長無量善法出故。精進破亂想,內心住將來故。禪定一切見無。智滅除眞故,及相別故,知諸法故名智。

또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여 알아야 하는 것인가?

모든 세간ㆍ성문ㆍ연각은 보시 등의 선근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써 피안에 이르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하며,

인색과 빈궁을 없애기 때문이며, 큰 세력의 공덕을 얻게 하기 때문에 보시바라밀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계율을 지녀서 살기 괴로운 악도(惡道) 멸하고, 살기 좋은 선도(善道) 삼매를 얻게 하므로 지계바라밀이라 하며,

성냄과 원한을 없앰으로써 타인을 편안하게 하는 것에 안주하므로 인욕바라밀이라 이름하며,

게으름ㆍ모든 악(惡)ㆍ불선법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무량한 선법을 생겨나게 하고 증장시키므로 정진바라밀이라 하며,

산란된 생각을 없애고, 내심(內心)에 아주하게 하기 때문에 선정바라밀이라 하며,

일체의 잘못된 견해가 없고 악한 지혜를 제거하여, 진실과 개별적인 상을 따라 일체법을 알기 때문에 지혜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다.


云何此諸波羅蜜有修事可知?略有五種修事應知:習行因行修事`信欲修事`心正念修事`方便善巧修事`所作事憶持修事。是中四種事如前所作。憶持事修事者,所有諸佛自然作佛事,不斷不休息,修諸波羅蜜令滿滿已,心念修喜樂隨喜憶念等心,六種心所攝故。修廣心`不斷心`喜心`作益心`大心及眞心。

 모든 바라밀을 어떻게 수행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는가?

대략 다섯 가지 수행이 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닦아 익혀서 현행하는 가행의 수행이고, 믿음과 의욕의 수행이며, 마음으로 바르게 생각하는 수행이고, 

훌륭한 방편의 수행이며, 해야 할 소작사(所作事)를 생각하여 지니는 수행이다.

이러한 중에서  가지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해야  소작사(所作事)를 생각하여 지니는 수행은 다음과 같으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불사를 지으시며, 중단하거나 휴식하지 않고 모든 바라밀을 닦아서 원만하게 하시며,

또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수행은 기쁘고 즐거워하는 희락(喜樂)ㆍ따라서 기뻐하는 수희(隨喜)ㆍ생각하여 지니는 억념(憶念) 등의 여섯 가지 마음의 육종심(六種心)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 마음의 육종심(六種心)은 광대한 마음의 광심(廣心)ㆍ단절되지 않는 마음의 부단심(不斷心)ㆍ기뻐하는 마음의 희심(喜心)ㆍ이롭게 하는 마음의 작익심(作益心)ㆍ큰 뜻의 마음의 대심(大心)ㆍ진실한 마음의 진심(眞心)이다.


所有菩薩隨所阿僧祇劫,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如是等時念念中,捨一切自身及恒河沙等世界七寶令滿已,施諸佛如來,乃至未坐道場,而菩薩行布施心無厭足。

모든 보살이 약간의 아승기겁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고, 그러한 시기를 경과하는 순간순간 찰나마다 모든 신명을 버리고,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를 7보로써 원만히 장엄하여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나아가 보리도량에 앉았을지라도, 이러한 보살은 보시를 행하는 마음에 싫어함이 없는 것이다.


如是等時念念中,三千大千世界滿中火時,現四種威儀,雖少一切資用而現作,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心,乃至坐道場。如是菩薩不厭修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等心,此是菩薩廣心。

그러한 시기를 경과하는 낱낱의 찰나마다 삼천대천세계를 타오르는 불로써 가득히 채우고, 사위의(四威儀)에서 비록 삶을 돕는 여러 도구가 부족할지라도 계율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의 마음이 현행하며, 

나아가 보리도량에 앉았을지라도 이러한 보살은 계율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를 닦는 마음에 싫어함이 없으니,

이것이 보살의 광대한 마음의 광심(廣心)인 것이다.


所有彼菩薩此無厭足心,乃至坐道場,不斷及不捨,是名此身。若彼菩薩喜心故,彼六波羅蜜所作衆生益,非彼衆生以得此益故,此是菩薩喜心。若彼菩薩作益衆生,於六波羅蜜,作益攝取,見如己身,自身見如衆生,此是菩薩作益心。

또한  보살은 싫어함이 없는 마음으로 나아가 보리도량에 앉아서, 중단하거나 버리지 않으니, 이것을 의지처(身)라고 이름하며,

 보살이 기뻐하는 희심(喜心)으로써  6바라밀로 중생을 이롭게 할지더라도,  중생이  이익을 얻음을 보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보살의 환희의 희심(喜心)인 것이다. 

만약  보살이 6바라밀로써 중생을 이롭게 한다면, 중생은 보살로부터 이익을 얻는다고 보지만, 보살 스스로는 중생처럼 보지 않으니 이것이 보살의 이익을 짓는 마음의 작익심(作益心)이며, 


若彼菩薩彼如是六波羅蜜所集善根迴發願,令一切衆生得愛果報,此是菩薩大心。若彼菩薩彼如是六波羅蜜修集善根,與一切衆生同,發願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此是菩薩眞心。如是六種心所攝故,修樂喜心。

또한  보살은 이와 같은 6바라밀로 쌓은 선근을 회향하고 발원하여 모든 중생이 사랑할 만한 과보를 얻게 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뜻의 대심(大心)이며,

또한  보살은 이와 같은 6바라밀로 쌓은 선근을 모든 중생에게 베풀어서 함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발원하나니,  이것이 보살의 진실한 마음의 진심(眞心)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의 육종심(六種心)에 포섭되기 때문에 기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닦는 것이다.


若彼菩薩六種修心行行者,彼餘無量諸菩薩彼善根令隨喜,如是菩薩六心所攝隨喜心令修。若彼菩薩一切衆生六種心所攝,六波羅蜜修事,希求如記,六心所攝,六波羅蜜修不離者,乃至坐道場,如是菩薩六種心所攝,希求意行修。

또한  보살은 다른 보살들이 여섯 가지 마음의 육종심(六種心)을 수행하는 무량한 선근을 따라 기뻐하나니,

이렇게 해서 보살은 의 육종심(六種心) 포섭되는 바를 따라서 기뻐하는 수희심(隨喜心) 닦는 것이며, 

또한  보살은 일체 중생이 육종심에 포섭되는 6바라밀을 수행할 것을 희구하나니,

육종심에 포섭되는 6바라밀의 수행을 여의지 않고, 나아가 보리도량에 앉을 것을 희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보살은 육종심에 포섭되는 바의 희구(希求)하는 마음을 닦는 것이다.


若此六種心所攝,菩薩心修故,聞已發一好心,彼功德量等功德,及一切惡作障消滅,何況菩薩。

만약  육종심 포섭되는 보살심의 수행을 들은 후에 다만  순간이라도 좋아하는 호심(好心)을 일으켰다면,  공덕이 무량하고, 모든 악업의 장애를 소멸할  있거늘, 하물며 보살이겠는가?


云何此諸波羅蜜有差別?以三種相應知。法施`財施及無畏施。止戒`攝善法戒`作衆生益戒。作惡忍羼提`忍苦羼提`法思惟忍苦羼提。勇猛精進`行精進`不怯弱不瞋恨喜精進行。現相`作憶持`無分別方便行。無分別及有分別及藉彼得智。

 모든 바라밀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가지의 삼종상(三種相)이 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보시의  가지는, 법의 보시인 법시(法施), 재물의 보시인 재시(財施), 두려움을 없애 주는 보시인 무외시(無畏施)이며,

계율의  가지는, 지계(止戒), 선법을 포섭하는 섭선법계(攝善法戒), 중생을 이롭게 하는 작중생익계(作衆生益戒)이며,

인욕의  가지는, 원한을 참는 인욕의 악인찬제(惡忍羼提), 고통을 참는 인욕의 인고찬제(忍苦羼提), 법을 사유함을 참아내는 인욕의 법사유인고찬제(法思惟忍苦羼提)이며, 

정진의  가지는, 용맹정진(勇猛精進), 가행정진의 행정진(行精進), 두려움이 없고 성냄이 없으며 만족함이 없는 정진이며,

선정의  가지는, 모습을 나타냄의 현상(現相) 선정, 지음의 작(作) 선정, 생각하여 지니는 억지(憶持) 선정이며,

지혜의  가지는, 무분별 방편행의 지혜, 무분별의 지혜, 분별이 있는 후득지혜인, 차득지(藉得智)이다.


云何此諸波羅蜜攝事應知?此諸波羅蜜攝一切善根,彼相`彼隨順及彼因氣故。

 모든 바라밀이 포섭하는 어떠한 것인가?  모든 바라밀은 일체의 선근을 포섭한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것 자체의 상(相)이며, 그것에 수순하며, 그것을 원인으로 하는 기운이기 때문이다.


云何此諸波羅蜜,諸障一切煩惱攝事知?彼相`彼因及彼果。

이 모든 바라밀의 장애가 모든 번뇌를 포섭하는 것인가?

그것의 자체의 상(相)이고, 그것의 원인(因)이며, 그것의 결과(果)인 것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 2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김묘주 번역

 

佛以何義故,入彼唯記處?離法念彼出世閒定慧智,藉得種種相,記智同相。

一切阿犂耶識因種子滅故,法觸種子增長已轉身,一切佛法集故,入一切智智。

부처님께서는 어떤 의미로 그 유식성에 들어가신 것인가? 

법념(離法)을 떠난 출세간의 정혜지(定慧智)와, 차득(藉得, 후득)의 갖가지의 종종상(種種相) 지혜와 같이함에서이다. 

일체 아리야식의 원인인 인종자(因種子)를 멸한 때문이고, 법신에 이르는 종자를 증장하였며,

의지처인 소의식(所依識)을 전환하여 반야의 지혜를 이루는 전의(轉依)하였으며,

모든 불법을 적집함으로써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지(一切智智)에 깨달아 들어가신 것이다.


藉彼所得智,一切阿犂耶識相處,如幻等見故,性不顚倒行。是故彼菩薩如幻師所作,義處相同因果,唯有說,一切時,不顚倒成。

차득(藉得, 후득)의 지혜는 아리야식이 일으키는 모든 상에 대해서 마치 요술 등의 성품으로 보기 때문에 성전도(性顚倒)되지 않고 작용하므로,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마치 요술쟁이가 요술로 일으킨 대상과 같이 상(相)과 인과를 말함에 있어서 항상 전도됨이 없는 것이다.

 

彼以記入中,四種禪定所依四種攢相法云何知?

 유식성에 깨달아 들어감에 있어서  가지의 사종선정(四種禪定)의 소의(所依, 의지처)가 있으니, 네 가지 상의 법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 것인가?

ㅡ현장의 역본에는 순결택분(順決擇分)이라 하였다.

순결택분을 현장의 역본의 언어로 말하면, 난위(煖位)ㆍ정위(頂位)ㆍ인위(忍位)ㆍ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  가지 선근의 지위이다.

5(位), 자량위(資糧位)ㆍ가행위(加行位)ㆍ통달위(通達位)ㆍ수습위(修習位)ㆍ구경위(究竟位) 에서

가행위는 통달위(見道) 수순하고 그것을 이끌어내는 단계이므로 순결택분이라 이름한다.

또한 진실결택분에 수순하고, 또한 무루의 지혜가 생겨나서 진리를 보는 통달위에 가까이 준비하기 때문이.


四種求故,非不身無義無忍中,得光明三昧,暖相依增。

 가지 사색의 사종구(四種求)에 의해서이니, 의지신은 존재하며 외부 대상이 비존재임을 인가하는 득광명삼매(得光明三昧)가 있으니, 이것은 난상위(煖相位)의 의지처이며, 

득광명삼매(得光明三昧), 보통 명득정(明得定)이라고 부른다. 4선근위(善根位) 중의 난위(煖位)에서 하품(下品)의 사색관인 구관(求觀)을 일으켜서 취할 대상의 경계가 공함을 관찰하는 선정이다.  선정에 의해서 처음으로 무루지혜의 전상(前相)을 얻으므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난상위(煖相位), 난(煖) 따뜻함을 느끼는 것처럼 견도무루지화(見道無漏智火)의 전상(前相)으로 뛰어난 유루의 지혜가 일어남을 말하는 것으로, 지혜를 증득하고자 준비하는 단계이다.

사종구(四種求, 사구관四求觀), 명(名, 명칭)ㆍ의(義, 대상)ㆍ성(性, 자성)ㆍ승(勝, 차별)

 

忍中光明增長三昧,上依。

외부 대상의 비존재를 뛰어나게 인가하는 중에 광명증장삼매(光明增長三昧)가 있으니, 이것은 상위(上位)의 의지처이며, 

광명증장삼매(光明增長三昧), 현장 역본은 명증정(明增定)이라고 하였으며, 상위(上位) 즉 정위(頂位)에서 상품(上品)의 심사관을 발하여 취할 대상의 경계가 공함을 관찰하는 선정이다.

 선정에서 지혜의 밝은 양상이 점점 더해지므로 명증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상위(上位), 현장 역본은 정위(頂位)라고 한역하였다.

 가지 선근 중에서 난위ㆍ정위를 동선(動善)이라 하고

인위ㆍ세제일위를 부동선(不動善)이라고 한다.

정위는 동선 중에서 최극위(最極位)이므로 마치 사람의 정수리와 같다고 해서 정위라고 부르는 것이다.

 

四種中如實觀知入唯記中,以無義決定心,眞實中入一切三昧,依順諦忍。

 가지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관찰하는 여실관지(如實觀知) 의지해서 유식성에 깨달아 들어가나니,

외부 대상의 비존재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알고, 대상의 진실성에 들어가는 모든 삼매가 있으니,  

이것이 진리에 수순하여 인가함의 순제인(順諦忍)의 의지처이며,

순제인(順諦忍), 보통 인위(忍位)라고 한다. 보살이 인순정(印順定)으로부터 하품의 여실변지(如實遍智)를 내어서 능취(能取)가 공함을 관찰하여 인가 결정하는 지위이므로 인위라고 부른다.

 

自此後唯記相思量彼,是次第三昧依世閒上法見故.

이로부터 다음 찰나에 유식의 표상작용을 사량하는 차제삼매(次第三昧)가 있으니, 

세간에서 최상의 법인 세간상법(世間上法)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세간상법(世間上法), 현장의 역본에서는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한역하였다. 보살의 수행계위인 52위(位) 가운데 10회향의 만심(滿心)에서 무간정(無間定)에 의해 상품의 네 가지 여실변지(如實遍智)를 내어서, 인식의 대상뿐만 아니라 관하는 식 그 자체를 공무(空無)라고 분명하게 결택한다. 이 지위에서 일어나는 선근은 유루법 가운데엣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세제일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此諸三昧近入地應知,

이러한 모든 삼매는 깨달아 들어가는 것에 가까운 지위인 근입지(近入地)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ㅡ하품(下品)의 심사관(尋思觀)인 난위에서 대상이 공함을 관찰하고,

상품의 심사관인 정위에서는 대상이 공함을 확실하게 관찰한다.

인위에서는 대상이 공함을 인가하고, 나아가 하품의 여실지관인에서는 인식주체도 공함을 관찰하여 인가하며,

세제일위에서는 대상과 주체가 공함을 ()으로 인가하는 것이다.

 

如是入地得見諦道。菩薩唯入記.

이렇게 10지(地) 중에 들어가서 견도, 견제도(見諦道)를 얻은 보살은 유식의 이치에 들어가는 것이다.

5 중에서 견도와 수도의 수행을 설명한다.

 

견도, 견제도(見諦道)는 무루(無漏)의 근본지혜인 정지(正智)가 처음으로 진리를 관조하는 시기로서 초지(初地)의 입심(入心)이다.

 

云何行修道?隨所分別說十地,攝一切修多羅現事住故。以雜念出世閒,及藉彼得定慧智故`無量百千億習故,如是身轉已。爲得三種佛身,爲得故修行。

수도(修道)에서는 어떻게 수행하는가? 

분별해서 말한 10지에 수순하여 모든 경전을 포섭(이해)해서 현전하여 안주하기 때문이고, 

총체적으로 반연하는 출세간의 후득의 정혜지(定慧智) 때문이며,

무랴한 백천억  동안 닦아 익힌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의지처를 전환하여  가지 삼종불신(삼三種佛身)을 증득하기 위해서 수행하는것이다.


所有諸聲聞證道法,及此諸菩薩,此二有何差別。勝聲聞證入中,菩薩證入有十一種勝事應知。

모든 성문이 도를 증득하는 법과 모든 보살이 도를 증득하는 법의  가지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성문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과 보살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은 11가지의 차이가 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성문과 보살의 현관(現觀) 차이를 11가지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10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현장 역본에서도 6 7 묶어서 말하고 있다.


一者念勝,念大乘法故;二者淳至勝,大功德助集淳至故;三者證勝,衆生法無我證故;四者涅槃勝,攝取不住涅槃故;五者地勝,十地盡至故.

첫째는 승념(念勝)으로써, 인식대상의 차이이니, 대승법을 반연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순지승(淳至勝)으로써, 순수함에 이르는 것의 차이이니,  공덕을 쌓아서 순수함에 이르기 때문이며,

셋째는 증승(證勝)으로써, 통달의 차이이니, 중생과 법무아(法無我)에 통달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열반승(涅槃勝)으로써, 열반의 차이이니, 생사와 열반에 머무름이 없는 불주열반(不住涅槃)을 섭수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지승(地勝)으로써, 지위의 차이이니, 10지로써 궁극에 이르기 때문이다.


六者淨勝,煩惱習滅,佛世界令淸淨故;七者一切衆生同得記心勝,化衆生行不斷絕故;八者生勝,生如來家故;九者取生勝,佛世界會中,一切時取生故;十者果勝,十力`四無畏`十八不共佛法無量功德成就故。
是中有偈:

여섯째는 정승(淨勝)으로써, 청정의 차이이니, 번뇌와 습관이 멸하여 불세계를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며,

일곱째는 득기심승(得記心勝)으로써, 모든 중생이  같이 평등한 마음을 얻는 것의 차이이니, 중생을 교화하는 행이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며,

여덟째는 생승(生勝)으로써, 태어남의 차이이니, 여래가(如來家)에 태어나기 때문이며,

아홉째는 취생승(取生勝)이니, 생을 받는 차이로써, 언제나 불세계의 법회에서 생을 받기 때문이며,

열째는 과승(果勝)으로써, 증과의 차이이니, 10력(十力)ㆍ사무외(四無畏)ㆍ18불공법(十八不共法)인 부처님법의 무량한 공덕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10력(十力), 부처님만이 갖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 지혜의 힘으로, 

첫째는 바른 도리와 그렇지 않은 도리를 변별하는 지혜의 힘. 둘째는 선악업과 그 과보를 여실하게 아는 지혜의 힘.

셋째는 4선(禪)ㆍ8해탈(解脫)ㆍ3삼매(三昧)ㆍ8등지(等持) 등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넷째는 중생의 근기의 고하(高下) 우열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다섯째는 중생의 여러 가지 의욕 성향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여섯째는 중생계와 그 성류(性類)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일곱째는 어떤 수행에 의해서 어떤 도에 나가는가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여덟째는 중생의 숙명(宿命)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아홉째는 중생의 미래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열째는 모든 번뇌가 다한 것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사무외(四無畏), 부처님께서 10력(力)을 갖추셨으므로 다음과 같이 두려움이 없음을 말한다.

① 모든 것을 아는 분[一切智者]으로서의 자신감, ② 모든 번뇌를 극복했다는 자신감, ③ 수행에 장애되는 길을 말할 수 있는 자신감(모든 장애를 극복했기 때문), ④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말할 수 있는 자신감(모든 괴로움이 소멸되었기 때문)

18불공법(十八不共法), 불공법(不共法)이라 함은 범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라한ㆍ벽지불 또는 보살과 공통되지 않는 부처님 특유의 법이란 뜻으로,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3염주(念住)ㆍ대비(大悲)의 18가지가 있다.


迭互作客事, 於事名所求, 唯求彼諸事, 分別二所安。

서로 객관이 되나니, 사물과 명칭에 대해서 그렇게 사색해야 하네.

오직  모든 사물을 사색해 보건데, 분별하여  가지가 안립된 것일 뿐이네.


如實知見故, 離義分別三, 見彼是非事, 彼無二所執。

진리 그대로 여실하게 보기 때문에, 대상을 여읜 세 가지의 분별이 있으나,

그것이 비존재라고 본다면, 두 가지의 집착이 없네.

현장 역본은 3()으로 되어 있으며, 진제 역본인 진본(陳本)이나 급다(笈多)ㆍ행구(行矩) 역본인 수본(隋本)에서는 3무성(無性)으로 되어 있다.


喩若順分別, 復有教授偈.

비유를 말한다면 '분별론(분별유가론)'에서 다시 가르침의 게송이 있으니, 

 

鏡像意於後, 菩薩在諸定, 迴彼義想已, 憶持自想事。

거울의 영상과 같은 마음임을 알고 나서, 보살은 여러 선정에 머물면서

 대상의 표상이 곧 스스로 표상의 성품인 자사(自事)라고 생각하네.

 

住心如是內, 知無所可取, 於後無能取, 無分別知爾。

이렇게 내면의 마음에 안주하면, 인식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무소가취(無所可取)라는 것을 알며, 

다음에 인식주체도 비존재이니 무능취(無能取)임을 아나니, 무분별지혜가 그러한 것이네.

 

更復有證道偈,所謂『大綖莊嚴論』中說:

다시 도를 증득하는 게송이 있으니 '대승경장엄론'에서 설하기를, 

ㅡ제2 진실품의 게송에 상당하는 5() 게송으로 되어 있다.

 

助集無邊行, 功德智菩薩, 法思善決定, 語言達義盡。

공덕과 지혜의 가없는 무변행(無邊行)을, 보살은  적집하네.

법을 사유하여  결택하니, 언어에 통달하여 의미의 궁극에 이르네.

ㅡ이 게송은 자량도에 대한 것이.


彼知正義已, 說住彼定心, 法界現意故, 是以離二相。

그가 진실한 대상을 알면, 그것은 결정코 그 마음인 정심(定心) 안주하며, 

ㅡ이  문구는 방편도에 대한 것이다.

법계를 현전에 증득하므로,  가지의 이상(二相)을 여의네.

ㅡ이 두 문구는 견도(見道) 관한 내용이다.

 

離心無有餘, 善知心亦無, 知二旣是無, 正住於法界。

마음을 떠나서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 마음 역시도 비존재인 무(無)라는 것을  아네.

그 두 가지가 비존재임을 통달하여서 법계에 바르게 안주하네.

ㅡ견도(見道) 관한 내용이다.

 

不分知力故, 同時常同行, 彼身窟聚患, 如象滅諸毒。

무분별지혜의 힘에 의해서, 항상 동시에 함께 행하니, 

 의지처의 동굴에서 과실의 덩어리를, 마치 코끼리가 모든 독을 없애듯이 하네. 

게송은 수도(修道) 대한 것이다.


牟尼說善法, 善住意思量, 根本法界處, 念至知意故, 唯分別正取, 速得功德處。

모니께서 말씀하신 선법은 사량에 잘 안주하고, 근본 법계처에 잘 안주하네.

생각(念)이 지혜의 취지인 지의(知意)에 이르러서, 오직 분별이라는 것을 바르게 취하여 조속히 공덕처를 증득하네.

ㅡ이 게송은 구경도에 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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