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意識(의식)

復次言意識者(부차언의식자) 卽此相續識(즉차상속식)

또한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곧 상속식에 의지하여 있는 것이니, 

依諸凡夫(의제범부) 取著轉深(취착전심)

모든 범부가 취하고 집착함에 따라 점점 깊어져,

計我我所(계아아소) 種種妄執(종종망집) 隨事攀緣(수사반연)

나와 나의 것을 헤아려 따지고, 갖가지 허망한 집착으로 사물에 따라 반연하여 

分別六塵(분별륙진) 名爲意識(명위의식)

육진 경계을 분별하므로 이에 이름하여 의식이라고 한다.

 

의식(意識)= 분별사식, 사물을 분별하는 거친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의식은 마음 안팎의 사물을 분별하는 것이어서, 분별사식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유식설의 제6식인 의식과 구별하여야 한다.

의식이 바로 상속식이다= 진제의 오역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전종식 대승기신론에 대한 원효주석의 비판적연구, 대승기신론 연구외 참조 바람.

반연(攀緣)= 망념이 대상에 집착하여 여러 가지로 활동하는 것.

 

[計我我所(계아아소) : 나와 내것을 헤아림.

隨事攀緣(수사반연) : 반연이란 대상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 事(사)는 보통 말하는 일이 아니라 인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유무형의 것.

* 憨山 : 여기에서는 의식이 바로 앞의 상속식이지만 단지 범부가 외부의 육경(六境)을 취하여 나와 내것으로 집착하고 육진을 반연하여 나의 수용(受用)으로 삼는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므로 사고가 계속해서 분별한단 뜻에서 意의 識이라고 명칭하였다.

대체로 이 의식은 상속식을 근본 뿌리로 삼는다. 때문에 상속하는 분별로 아애(我愛)를 깊이 집착하여 견사이혹(見思二惑)을 일으키고, 삼업을 짓는 것은 바로 의식일 뿐이다. 이는 육추상 가운데 집취상(執取相)과 계명자상(計名字相)에 해당한다.- 물처럼바람처럼]

 

[‘言意識者 卽此相續識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상속식이다’ 의식(意識)을 설한 본문에 대하여 필자(전종식)은 논문을 발표함과 동시에 상당한 이론을 전개하여, 이것이 바로 진제의 오역(誤譯)에 기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것은 앞에서 이미 의(意)의 오식(五識)에서 설명되고 분류된 아뢰야식(阿賴耶識) 성격의 상속식(相續識)에 대하여 이를 제7식(말나식) 성격의 의식에 해당시켰기 때문이다. 상속식은 삼세육추의 상속상(相續相)에서 설하였듯이, 본문의 설명과는 상치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본문의 의식을 상속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기신론의 정연한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이치에 맞지 않으며, 이는 진제(眞諦)의 오역(誤譯)에 기인 된 것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현재 기신론의 원전이 상존하지 않고, 두 종류의 번역본만이 현존하는 입장에서 이 부분에 대한 실차난타(實叉難陀)의 신역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것이 오역(誤譯)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의식을 상속식이 아닌 상속식을 의지하여 나타난 분별사식(分別事識)으로 보고 본문을 해석해 가면 혼란에서 벗어난, 정연한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본문에서 ‘의식이 바로 상속식’의 부분을 신역의 내용에 맞추어 ‘의식은 상속식을 의지해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분문에서 의식을 다른 이름으로 분리식(分別識) 또는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 역시 상속식과는 거리가 먼 타당한 이름들이다.-전종식]

 

亦名分離識(역명분리식) 又復說名分別事識(우부설명분별사식)

또한 분리식이라고도 이름하며, 다시 사물을 분별하는 식=分別事 識이라고도 이름하나니, 

此識依見愛煩惱增長義故(차식의견애번뇌증장의고)

이 식이 견번뇌와 애번뇌=見愛煩惱에 따라 증가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견애번뇌(見愛煩惱)= 번뇌는 견(見)과 애(愛)의 두 가지로 나눈다. 도리에 미(迷)한 번뇌를 견혹(見惑)이라 하고, 정서적으로 애착하고 탐하는 등의 번뇌를 수혹(修惑)이라 한다

 

[물처럼바람처럼- 見愛煩惱(견애번뇌) : 견번뇌와 애번뇌라는 뜻으로 견번뇌는 이치에 어두워 일어나는 번뇌이며 상사각에서 끊어진다. 애번뇌는 애착으로 인한 번뇌로서 생존욕이나 생식욕 같은 선천적인 것으로 이치를 안다고 해서 끊어지지는 않는다. 견번뇌는 견혹(見惑)으로 인한 것이고, 애번뇌는 생활상의 애착을 버리지 못한 것이므로 수혹(修惑)으로 인한 번뇌이다.

* 元曉 : 분리식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육근에 의해 각각 육진을 취하는 것이니, 이는 말나식이 각각의 근에 의하지 않는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분리식이라 이름한 것이다. 또 과거와 미래, 안과 밖의 여러 가지 사상(事相)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분별사식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依見愛煩惱增長義故라는 것은 분별사식의 뜻을 해석한 것이니, 왜냐하면 견수번뇌(見修煩惱=見愛煩惱)가 증장됨에 따라 여러 가지의 일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섭불교- 그래서 삼계(三界)는 허망한 것이며,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의 경계도 사라지게 된다. 일체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망령으로 생겨난 것이니 일체의 분별은 곧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한 것이며,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 기에 모양을 가히 얻을 수 없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중생의 무명의 허망한 마음에 의지하여 머무름을 얻는다. 그러므로 일체 법은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본체를 가히 얻을 수 없고 오직 마음일 뿐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 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의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식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의식을 통하여 제 육식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상속식은 의식이며, 제 육식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상속식을 제 육식이라고도 합니다. 

“의식의 유전함을 밝히다. 또한 의식(意識)이라는 것은 곧 상속식이니 범부의 취착함이 점점 깊어져서 나[我]와 나의 것[我 所]을 따지고 여러 가지 허망된 집착으로 일을 따라 반연하여 육진(六塵) 경계를 분별하므로 의식이라고 말한다. 또한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이름하고 다시 분별사식(分別事識: 사물을 분별하는 식)이라고도 하며, 이 식이 견애번뇌(見愛煩惱)를 의지하여 증장한다는 뜻이다.” 이 상속식이 구체적으로 TV에서 김태희를 보는 순간 내 속에 내재되어 있는 티끌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하여(업식) 어렴풋한 형체를 이루고(전식) 더욱 뚜렷한 형체로 완성되며(현식), 이것이 거울에 투영되어 분별을 하게 되고(지식), 분별한 것이 연속적으로 의식화되며(상속식), 이것이 구체적으로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의식). 이러한 마음으로 상대방과 감정을 교감하면서 원망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마음이 증장되어 다른 형태의 원망하는 마음이 지식에 저장 되며, 이 마음이 거울에 투영되듯 현식화 되며, 어렴풋한 전식을 거쳐 무명 업식으로 아뢰야식에 저장되게 됩니다.

일체 범부의 심적 작용에는 집착심이 강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그 집착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에 대한 집착’과 ‘내 것에 대한 집착’이 있다. 범부의 자아의식은 아집에 사로잡혀 아애(我愛), 아만(我慢), 아견(我見), 아치(我癡) 등의 번뇌와 함께 생성되고 있다. 여기에서 탐욕(貪) 노여움(瞋)과 치심(痴)등의 강력한 번뇌가 일어난다. 범부중생의 자아(自我)인식과 아집에는 이것들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아소(我所)는 내 것에 대한 집착이지만 또한 ‘내 것이 아닌 것’과의 두 가지 모습으로 인식하는 것이 범부중생이다. 이처럼 우리 범부는 아(我)와 아소(我所)를 분별하고, 여러 가지 맹목적 집착과 인식대상에 따른 색성향미촉법 등의 육경(六境)을 총체적 상으로 분별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식이라 불린다. 이 의식은 육진(六塵)의 개별적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므로 분리식(分離識)이라 하며,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 불리는 것은, 개개의 사물을 대상별로 분별하여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집을 기초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의식이라 하고, 육근(六根)을 기초로 개별적 경계를 인식하는 것을 분리식(分離識)이라 한다.

此識依見愛煩惱增長 이 식이 견애에 의하여 번뇌가 증장한다’는 두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는 번뇌, 즉 견혹(見惑)과 수혹(修惑)에 의하여 번뇌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인식이 종교적 차이나 사상적 차이에 의하여 애착이나 미움이 발생하고 있으나, 그러한 이데올로기 때문에 집착을 일으키는 것도 견혹의 하나이다. 소유욕에 의하여 대립과 미움이 깊어지는 탐욕은 수혹의 하나이며, 이데올로기의 주장이나 소유욕의 근저에는 항상 자아에의 집착이 있다. 그렇다면 자아의식에 수반되지 않는 상속식을 본문의 의식이라고 번역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갑작스런 위험에 처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몸을 피하는 등의 본능적 인식은, 자아의식이 수반되지 않은 상속시의 작용이며, 예측하지 못한 난데없는 발견이나 신비적 체험, 일상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 등은, 연후에 자아의식과 연결되는 것이므로 이 또한 자아의식이 동반되지 않는 상속식의 작용이다.

상속식은 지나간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고 생각해 낸다던가, 살생이나 도둑질 등의 악업을 마음의 상처로서, 무의식의 영역에 보존시키고, 더욱 그 업을 성숙시켜 고락의 과보를 받게 하는 것이다. 또한 밀에 어떤 일을 하겠다고 갑자기 생각나게 하는 것도, 자아의식을 초월한 상속식의 작용이며, 유식설(唯識說)에서는 이와 같은 작용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설해지고 있다.

이상과 같은 자아의식이 수반되지 않은 상속식을 자아의식이 가장 강한 본문의 의식에 연관시킨다면 이는 기신론의 정론에 어긋나는 것이다. 의식은 본래부터 추대분별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이 추대분별 자체도 상속식에 저장하고 윤생하는 것이므로, 상속식은 말 그대로 상속과 재생의 기능일 뿐 분별의 기능은 없는 것이다.]

 

[견혹(見惑)견도소단혹(見道所斷惑, 산스크리트어: darśana-mārga-prahātavyānuśaya)의 줄임말로, 문자 그대로는, 견도(見道)에서 끊어지는 번뇌를 뜻한다. 의미상으로는, 진리 즉 4성제에 대해 미혹하게 하는 번뇌로, 이지(理智)적인 번뇌를 말한다. 한편, 견혹과 대비하여, 수도(修道)에서 끊어지는 번뇌를 수혹(修惑)이라 하는데, 수혹은 삼라만상의 사물의 진실한 모습에 대해 미혹하게 하는 번뇌로, 정의(情意)적인 번뇌를 말한다. 견혹은 견번뇌(見煩惱) · 견장(見障) 혹은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라고도 한다.
견혹을 다른 말로는 견소단(見所斷) · 견도소단(見道所斷) 또는 견단(見斷)이라고 하는데, 4성제의 이치[理]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번뇌로서 견도의 계위에서 끊어지는 번뇌를 뜻한다. 이에 대해 수혹을 수소단(修所斷) · 수도소단(修道所斷) 또는 수단(修斷)이라고 하며, 현상의 사물[事]에 미혹한 번뇌로 수도의 계위에서 끊어지는 번뇌를 뜻한다.
또한 견혹을 다른 말로는 미리혹(迷理惑)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이치[理]에 미혹한 번뇌'로, 이지적인 번뇌, 즉, 이성 즉 견해에 관련된 번뇌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수혹을 다른 말로는 미사혹(迷事惑)이라 하며,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뜻은 '사물[事]에 미혹한 번뇌'로, 현상의 사물의 참된 모습[實相]을 알지 못하는 알지 못하는 번뇌를 뜻하는데, 정의적인 번뇌, 즉, 마음에 관련된 번뇌 또는 감정과 의지에 관련된 번뇌를 가리킨다.
부파불교와 대승불교 등 불교 일반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불교의 수행 계위로, 견도 · 수도 · 무학도(無學道)의 3도(三道)가 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수행자는 이지적인 번뇌 즉 견소단을 극복하는 견도의 단계를 먼저 거쳐 견해가 바르게 선 후, 계속하여 노력하여 정의적인 번뇌 즉 수소단을 극복하는 수도의 단계를 거쳐 사물의 실상에 대해 바르게 알게 되고,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한다. 이와 같이 견소단 · 수소단, 즉, 견혹 · 수혹의 번뇌 분류는 불교의 수행계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실천적인 분류로, 견혹과 수혹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가지는 것은 견도의 단계를 통과하는데 도움이 된다.-위키백과]

 

* 緣起(연기)의 深奧(심오)

依無明熏習(의무명훈습) 所起識者(소기식자) 非凡夫能知(비범부능지)

무명의 훈습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식이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亦非二乘智慧所覺(역비이승지혜소각)

이승의 지혜로도 깨닫는 바도 아니다.

謂依菩薩(위의보살) 從初正信(종초정신) 發心觀察(발심관찰)

이는 보살이 처음의 바른 믿음=從初正信으로부터 발심하여 관찰함을 의지하여 

若證法身(야증법신) 得少分知(득소분지)

법신을 증득하면 조금 알 수 있게 되며, 

乃至菩薩究竟地(내지보살구경지) 不能盡知(불능진지) 唯佛窮了(유불궁료)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에 이른다 하여도 다 알 수는 없고, 오직 부처님만이 궁극까지 모두 아신다.

 

훈습(熏習)= 꽃향기가 옮겨 배는 것처럼, 세력이 간한 것이 다른 것에 미치어 자기의 힘을 옮겨 붙게 하는 것. 무명이 진여에 훈습하여 무명의 힘에 진여가 동화되어 생멸심이 된다

처음 정신(初正信)= 보살의 최하위, 십신의 만위에 이르러 믿음이 완성되면 정신을 일으킨다.여기서는 그 위 십주(十住), 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의 삼현위(三賢位) 보살을 일컫는다.

법신(法身)= 초지이상이 되면 불의 법신을 깨닫는다. 연기의 법은 우주에 편만되어 있어서 이(理)와 합체된 불(佛)이 법신이다.

보살 구경지(菩薩究竟地)= 보살의 최상위, 십지의 만심(滿心)

 

[正信(정신) ; 보살 십신(十信)의 첫 단계.

究竟地(구경지) : 보살의 마지막 단계인 법운지(法雲地)

元曉[별기] : 이 마음은 체가 깨끗하면서도 물들어 있고, 마음이 움직이면서도 고요하니 염정(染靜)의 두 가지가 없으며, 동정(動靜)의 구별이 없다. 염정이 두 가지가 아니며, 동정의 구별이 없지만 또한 하나도 아니다. 이 같이 절묘하므로 알기가 어렵다]

 

何以故(하이고) 是心從本已來(시심종본이래) 自性淸淨(자성청정)

왜냐하면 이 마음은 본래부터 자성은 청정하지만 

而有無明(이유무명) 爲無明所染(위무명소염) 有其染心(유기염심)

무명이 있어, 무명에 의하여 물듦이 되어 물든 마음=染心이 있는 것이다.

 

염심(染心)= 번뇌에 오염된 마음. 무명에 의하여 생멸심이 된 마음

 

[여기서 心(심)은 아리야식을 말한다. 

自性淸淨 而有無明은 무명에 의해 물들어 있지만 본성은 변하지 않으니, 즉 바람에 의해 물결이 일지만, 그 물결이 물의 성품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다.]

 

雖有染心(수유염심) 而常恒不變(이상항불변) 是故此義唯佛能知(시고차의유불능지)

비록 물든 마음이 있으나 항상 불변하니, 그러므로 이 뜻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본래 청정한데도 물듦이 있고, 진여 본체의 작용은 물듦이 있으나 본체 자체는 항상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치는 워낙 심오하여 범부나 이승은 알 수 없고, 법신을 증득한 보살은 조금 알 수 있으며, 부처만이 온전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물론 설명을 들으면 이해는 할 수 있으나, 증득하지는 못한다.]

 

[ “인연의 체상을 설하다. 인연의 깊은 도리, 인연의 차별된 상태이다.” 인연의 체상은 깊은 도리와 차별된 상태입니다. 인과 의 뿌리는 얼마나 깊은지 모릅니다. 인연의 차별된 상태는 다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몸받아 살아가는 모든 인연은 각각 뿌리에 깊은 도리가 있습니다.

“인연의 깊은 도리를 밝히다. 무명의 훈습에 의지하여 일어 나는 식(識)은 범부가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승( 二乘)의 지혜로 깨닫는 것도 아니다. 이는 보살이 처음 바른 믿음을 발심하여 관찰함을 의지하여 법신(法身)을 증득해도 조금 알게 되며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 이른다 하더라도 다 알 수 없으며 오직 부처만이 다 알 수가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진여가 무명에 오염된 상태입니다. 식(識)은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생각을 말합니다. 이 속에 든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는데 생각을 자꾸 일으켜 경계에 부딪히면 알게 됩니다. 이것은 이승(二乘) 정도라도 모릅니다. 성문, 연각, 보살, 부처 중 성문, 연각 단계에서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연기를 깨친 연각승도 깊은 인연의 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신통 제일인 목건련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신통력으로도 돌아가신 어머니가 어느 지옥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태어난지 본질적으로는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사소하게 일어나는 것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경우 원인을 알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암에 대해 살펴봅시다. 이것은 주로 스트레스가 원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끝도 없는 조화입니다. 정신이든 육체든 조화가 깨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포가 일정한 속도로 분열해야 하는데 스트레스에 의해 혼자서 매우 빠른 속도로 분열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덩어리 같은 것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것이 암이 되는 것입니다. 

법신을 증득했다는 말은 견성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말입니 다. 보살 초지도 여기에 해당함으로 견성입니다. 부처가 된 상 태가 시작된 것입니다. 인연의 깊은 도리는 보살의 구경지에 이르러도 다 알 수 없고 오로지 부처가 되어야만 다 알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부분적으로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연의 깊고 깊은 도리는 부처가 되어야만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

 

[불생불멸의 심성이 어찌하여 근본무명(根本無明)의 훈습에 의하여 아리야식이 되는 것인지, 이것은 범부뿐만 아니라 성문, 연각 등 이승의 지혜로도 깨닫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타만이 아는 경지란, 이 마음은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청정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무명이 있고, 이 마음은 무명에 오염되어 염심이 되고 있다는 것을 불타는 구경지의 만위에 이르러 일념이 상응하여 최후의 업식 즉 근본업불상응염이 이탈하면서 무명에 의한 최초의 생상(生相)을 보고(본다는 것은 깨달아 안다는 의미), 사라지는 무명의 구조를 알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오명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 마음의 본성은 항상 맑고 고요한 그대로이어서 변하지 않는 상항불변(常恒不變)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범부들이 이 같이 영원불변의 자성청정심이 객진번뇌(客塵煩惱)에 의하여, 어찌하여 오염되는 것인가의 연기의 깊은 이치에 대하여 무엇인가 이해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본론의 취지이다. 이와 같이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는 여래지(과지果地)에 이른 불타와 구경지의 만위에 이른 대력의 보살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범부는 불타가 말하는 것을 믿을 뿐인 것이다. 여기서 필자(전종식)가 대력 보살을 불타와 같은 지위로 보는 것은 인지(因地)의 극위에 이른 보살은, 등각(等覺)보살로서 과위(果位)의 묘각(妙覺) 불타와 그 경지는 같기 때문이다.]

 * 三界唯心(삼계유심)

是故三界虛僞唯心所作(시고삼계허위유심소작)

離心則無六塵境界(리심즉무육진경계)

그러므로 삼계(일체법)는 허위로써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 허망한 것이며, 마음을 여의면 육진 경계도 사라지게 된다.

 

삼계(三界)= 욕계(欲界)는 남녀의 구별이 있고 탐욕과 성욕이 있는 세계  

색계(色界, 몸이 있는 세계)는 욕망을 떠나 선정에 들어간 세계로서, 마음이 통일되어 외계의 인식이 없어지고 신체의 안락을 받는 세계이다.   

무색계(無色界, 몸이 없고 마음만 있는 세계)는 선정체험이 심화되어 육체의 인식이 사라지고 마음 만을 경험하는 세계이다. 그와 같은 세 가지 세계(三界)가 있다고 보고, 여기에는 우주, 일체의 생물의 세계가 모두 포함된 것으로 파악한다.  

허위(虛僞)= 실재가 아니고 마음을 통하여 만들어진다는 의미

육진(六塵)= 색성향미촉법의 여섯 경계

 

[三界(삼계) : 탐욕의 세계인 욕계(欲界), 탐욕을 벗어났지만 물질적인 속박이 있는 색계(色界), 물질적인 속박을 벗어난 정신적인 세계인 무색계(無色界).

元曉 : 是故 아래는 세 번째 ‘마음에 의한다’는 뜻을 결론 맺어 밝혔다. … 처음에 是故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다섯 가지 식(業識 ~ 相續識) 등이 마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니, 이런 뜻이므로 삼계는 모두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며, ≪십지경(十地經)≫에서 “불자야. 삼계는 다만 일심이 지은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물처럼바람처럼]

 

[삼계(三界)는 허망한 것이며,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의 경계도 사라지게 된다. 일체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망령으로 생겨난 것이니 일체의 분별은 곧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한 것이며,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기에 모양을 가히 얻을 수 없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중생의 무명의 허망한 마음에 의지하여 머무름을 얻는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본체를 가히 얻을 수 없고 오직 마음일 뿐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 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의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통섭불교]

 

[기신론에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인식의 세계를 업식, 의식(意識) · 전식(轉識) · 현식(現識) · 지식(智識) · 상속식(相續識)의   다섯 가지 식(識)이 각기 독립된 체(體)가 있는 것이라고 보지 않고, 그것들은 모두가 무명의 활동결과로 본다. 따라서 자기가 인식하여 판단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마음속의 일에 불과한 것이며, 일심이 무명에 따라 바뀌어 움직인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에 비친 삼계는 허위, 허망이며 일심이 만들어 낸 것이므로, 이 마음을 떠나면, 육진(六塵) 육경(六境)으로서의 마음에 나타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망심(妄心)으로 나타난 세계로서, 있는 그대로의 외계의 실재를 나타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범부의 인식세계는 망심에 의한 것이므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닌 망상의 세계이지만, 불타가 인식하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를 비추이는 세계이므로, 실재이다, 

그러나 삼계가 모두 허위라고 하지만, 우리의 외계에 대한 인식에는 객관성이 있어 일상적으로 연속성이 있으며, 과거의 경험이나 기억을 새로운 사물에 적용시킨다 하더라도 타당성이 있다. 이성의 판단으로도 확실성이 있고 타인과의 관계나 상호 이해에도 연대성이 있다면, 이와 같은 일상적 경험까지도 어찌하여 마음이 만들어 내는 ‘유심소작(唯心所作)’일 것인가? 유심(唯心)이라 하더라도 외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불타가 인식하는 실재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유심소작(唯心所作),삼계허망(三界虛妄)’은 단지 범부가 경험하는 내용을 범부의 마음이 나타내는 것일 뿐,실재의 외계 그 자체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필자(전종식)의 견해로는 망심소작(妄心所作)의 의미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離心則無六塵境界 마음을 떠나면 곧 육진의 경계가 없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의미로서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외계는 경계상(境界相)이 현식(現識)에 비쳐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식에 외계를 비치는 힘이 없어진다면, 예를 들어 안근()이 손상되어 없다면 빛깔이 없듯이, 자기에 있어서의 외계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외계는 자기의 마음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우리의 경험으로, 마음으로 보는 외계에 공통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각자의 현식의 능력에 따른 것으로서의, 타인이 인식한 그대로의 인식은 있을 수 없다. 붉은 색을 본 여러 사람이 동일한 붉은 색을 보았다 하더라도 시력의 차이에서 차별이 있고 색맹이 본 붉은 색은 다른 사람이 본 붉은 색과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전종식]

 

此義云何(차의운하) 以一切法(이일체법) 皆從心起(개종심기)

妄念而生(망념이생) 一切分別(일체분별) 卽分別自心(즉분별자심)

心不見心(심불견심) 無相可得(무상가득)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일체의 법은 모두 마음따라 일어나, 망령으로 생겨난 것이니, 일체의 분별은 곧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며,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기에 가히 얻을 수 있는 상이 없는 것이다.

 

[一切分別 卽分別自心 : 모든 분별은 곧 자기 마음을 분별한 것이다. 경계상이라는 것도 마음이 무명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낸 것이며, 무엇인가 보았다면 그것은 모두 마음을 분별한 것이 된다. 그런데 마음이 마음을 볼 수 없거니와 그 본체가 공하여 무엇을 보았다면 그것은 모두 망념이다.

心不見心 無相可得 :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다. 일체의 분별이 자기 마음을 분별한 것이므로 본래 볼 수 없는 것을 분별한 것이다. 그러므로 얻을 수 있는 모습 또한 없는 것이다.

元曉 : 此義云下 이하는 널리 해석한 것인데 그 중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제법이 없지 않지만 있지 않음을 밝혔고, 나중에 제법이 있지 않지만 아주 없지는 않음을 밝혔다. 처음에 以一切法 皆從心起 妄念而生이란 모든 법이 나타남이 없지 않음을 밝힌 것이고, 一切分別 卽分別自心 心不見心 無相可得이라 한 것은 모든 법이 있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 만약 꿈 가운데 보는 모든 일처럼, 이와 같은 소견(所見)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능견과 소견의 두 가지 상이 있을 것이나, 그 꿈 가운데에는 실로 두 가지 법이 없다. 삼계의 모든 마음이 다 이 꿈과 같으니 마음을 떠난 밖에는 분별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一切分別 卽分別自心이라 한 것이다. 또한 자심에 나아가 스스로 볼 수 없는 것이 칼이나 손가락 같은 것이 (칼) 스스로를 자르거나 (손가락 스스로를) 가리키지 못함과 같기 때문에 心不見心이라 한 것이다. 이미 볼 만한 대상이 없으며, 또한 스스로 볼 수 없으니, 소견이 없기 때문에 능견도 성립하지 못하는 것이다. 능과 소의 두 가지 상이 모두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無相可得이라 한 것이다.]

 

[‘以一切法 皆從心起 일체법은 모두 마음 따라 일어나고, 妄念而生 망념으로 생기며, 一切分別 일체의 분별은 바로 卽分別自心 스스로의 마음이 분별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외계의 삼라만상이 현식에 반영되는 것은 무명망념(無明妄念)의 작용에 의한 결과이지만, 이것은 다시 지식(智識)에 의하여 호오(好惡), 애증(愛憎), 희비(喜悲) 등의 분별세계가 전개된다.

일체의 분별은 무명이 그 원인이기 때문에 무명이 없어지면, 분별이 없는 일심(一心)의 세계가 실현된다. 

一切分別 卽分別自心 일체의 분별은 바로 스스로의 마음이 분별하는 것’이므로 ‘心不見心  마음으로 하여금 마음을 보지 않게 되면’ 이는 보려는 주관의 마음과 보이는 객관의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므로 일심의 전식(轉識)과 현식(現識)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바로 법계일상(法界一相)의 마음의 세계가 성립되어 ‘無相可得 얻어질 수 있는 상이 없어지는 것’이다.]

 

當知世間一切境界(당지세간일체경계) 皆依衆生無明妄心(개의중생무명망심) 而得住持(이득주지)

마땅히 알라. 세간의 모든 경계는 모두 중생들의 무명의 허망한 마음에 의지하여 머물러 있게 된다.

是故一切法(시고일체법) 如鏡中像無體可得(여경중상무체가득) 唯心虛妄(유심허망)

그러므로 일체법은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본체(실체) 가히 얻을 없는 것처럼, 오직 마음의 헛된 망상일 뿐이다.

以心生則種種法生(이심생즉종종법생) 心滅則種種法滅故(심멸즉종종법멸고)

마음이 생겨 나면 갖가지의 법이 생겨 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의 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거울 속의 그림자처럼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지만, 현상으로 없는 것도 아니다.

* 憨山 : 실로 진여일심은 본래 생멸이 없지만, 최초의 일념무명이 망심으로 요동하기 때문에 이윽고 광대하여 차별적인 모습 없는 진여일심이 삼계의 허망한 차별법으로 되었다. 이야말로 삼계의 모든 허망한 법이 일심에서 일어나 망념을 따라 나온 것이다. - 중략 - 이 논서는 일심이 곧바로 진여임을 지적하여 견성성불을 하게하였다. 다만 일념무명의 실재하는 세상이 없음을 오해(悟解)하기만 하면 바로 불지가 발현하리라. 이는 이른바 “무념임을 관찰할 수만 있다면 불지를 향한다.”고 했던 경우에 해당한다.

* 元曉 : 當知 이하는 있지 않으나 없지도 않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當知世間 ~ 無體可得 唯心虛妄은 있지 않음을 밝힌 것이고,

以心生則法生 이하는 없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무명의 힘에 의해 불각하여 마음이 움직이고, 내지 일체의 경계 등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心生則種種法生고 한 것이다. 만약 무명의 마음이 사라지면 경계가 따라서 사라지며, 모든 분별심이 모두 따라서서 사라지게 되기 때문에 心滅則種種法滅이라고 말한 것이니 찰나를 기준으로 생멸을 밝힌 것이 아니다.]

 

[법장은 심불견심(心不見心)을 마음으로 하여금 마음을 보지 않게 되면’이라는 것은 이미 경계의 모습이 없어지고 식(識)도 스스로의 연(緣)이 없어져, 그 때문에 ‘경계가 없다’는 것이고 식(識)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라 말하고, 능소(能所) 즉 보려는 마음(망념)과 보이는 마음(진심)이 모두 고요해지기 때문에 ‘얻어질 상이 없게 된다’고 하여, 심불견심의 경계를 능소(能所) 즉 주관과 객관이 사라진 경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음에는 ‘보려는 마음’ 그것은 망심이고 그 망심이 끝내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바로 불심이고 진심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진심, 불심을 보려고 수행을 계속해서, 어느 시점에 이르러 ‘그 마음(망심)으로 하여금 마음(진심)을 보지 않게 되는 경지에 이르며, 그는 이미 보려는 주관과 보이는 객관이 사라진 것이므로 불타의 경계에 들어 선 것이다.

기신론에 따르면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이 정확한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마음의 본성을 보려고 하는 한 영원히 성불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여금 그 마음(본성)을 보지 않게 되는 경지에 이르러야; 성불할 수 있는, 반드시 주관과 객관이 사라져야 만이 성불할 수 있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그 마음은 보려는 의지가 없다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외계가 바로 그 마음에 그대로 비치는 것이나, 우리 중생심은 그와 다르기에 세간의 일체 경계가 망심에 의하여 변형(變形) 유지(維持)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일체 경계는 개개인의 마음 그 자체에 나타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지속되는 경계에 대한 분별에 의하여 외계의 인식이 연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법은 거울 속에 비쳐진 허상(虛像)과 같이 실체가 아닌 것이며, 오직 마음이 만들러 낸 허망에 의하여 보는 것이다. 현식(現識)에 비치어 경험하고 있는 일체는, 실체같이 나타날 뿐, 실체가 아닌 것이며, 마음에 나타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以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故 마음에서 생기면 바로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에서 멸하면 바로 여러 가지 법이 멸하는 것’이라고 본문이 설하는 것이다.-전종식]

② 生滅(생멸)의 因緣(인연)

  * 五意(오의)와 轉起(전기)

復次生滅因緣者(부차생멸인연자)

所謂衆生依心(소위중생의심) 意意識轉故(의의식전고)

또한 생멸하는 인연=生滅因緣이란, 이른바 중생은 마음=心에 의지하여 의(뜻)와 의식이 바뀌는=전변하기 때문이다.

 

생멸인연(生滅因緣)= 생멸심을 일으키는 연기,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며, 진여는 불변의 성질이지만 동시에 수연기동(隨緣起動)하여 자성을 지키지 못하는 성질이 있다. 이는 수연진여를 인으로 하고, 근본무명을 연으로 하여 생멸심(生滅心), 즉 아리야식이 생기는 것이 첫째이다. 이것은 진에서 망(妄)으로의 연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는 무명을 인으로 하고, 색성향미촉법의 외연(外緣)을 연으로 하여, 이 인연으로 아리야식으로부터 경험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것은 망과 망 사이에서의 연기이다. 첫째는 생멸심이 성립되는 연기를 말하고, 둘째는 생멸심이 주관과 객관으로 대립, 개인적 경험세계로 변화하는 연기를 말한다.

의(意)= 여러 가지 내용이 있으나, 여기서는 마음의 미세한 작용을 의(意)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오의(五意)’하고 하여 의는 의식(意識) · 전식(轉識) · 현식(現識) · 지식(智識) · 상속식(相續識) 등 오식으로 분화한다고 말한다.

의식(意識)= 여기서는 제6식의 의식이 아니고, 의(意)를 기초로 하여 일어나는 거칠고 큰 번뇌의 마음을 말하며,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고도 한다.

 

[인연이란 직접적 원인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간접적 원인을 말한다. 여기서는 생멸이 일어나게 된 인과 연을 밝혔다.

元曉 : 처음 가운데에 ‘인연’이란 것은 아리야식의 심체가 모든 법을 변작(變作)하는 것이니 이것이 생멸인(生滅因)이고, 근본무명이 심체를 훈습하여 움직이게 하니 이것이 생멸연(生滅緣)이다. 

무명주지(無明住地)는 모든 염법의 근본으로 모든 생멸을 일으키기 때문에 인(因)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육진의 경계는 칠식의 물결의 생멸을 요동시키니 이것이 생멸연이며, 이 두 가지의 뜻에 의하여 인연이 나타난다.

* 憨山 : 일심 생멸은 진여 본각과 망상의 불각이 서로가 인(因)과 연(緣)이 됨을 밝혀 아리야식이 일체법을 냄을 밝혔다.-물처럼바람처럼]

 

[생멸인연(生滅因緣)이라는 것은 이른바 중생은 마음[心]에 의지하여 의(意)와 의식(意識)이 전변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몸을 받아 살아가는 모든 것은 생멸인연입니다. 의식은 경계에 부딪혀 일으키는 생각 제6식이고, 의(意)는 의지대로 하려는 마음 제7식입니다. 심(마음)은 일으키는 식의 총집합체로 아뢰야식 제8식입니다. 마음(심), 의, 식이 전변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심(마음), 의, 식을 알면 부처고 모르면 중생입니다. 우리의 삶은 의(意)에 의해 살아갑니다. 내가 갖는 업이 삶을 결정합니다. 이 의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분별하고 판단 하는데 이것이 우리 삶의 연속이 됩니다.

심, 즉 마음에 의지함이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무명이 있다고 설한다. 마음의 통이 아뢰야식인데, 불이 켜져 밝을 수도 있고(견성, 성품을 본다), 어두운 상태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밝을 때는 아뢰야식을 본 것이고, 어두울 때는 아뢰야식을 보지 못한 상태인 무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아뢰야식이 밝아 훤하게 보이면 각이고, 아뢰야식이 어두워 보이지 않으면 불각입니다. 원래 아뢰야식뿐인데, 아뢰야식이 밝아 각을 이룬 상태를 제 9식 아말라식이라고도 합니다. 식은 원래 8식까지 뿐입니다.-통섭불교]

 

[심생멸문(心生滅門)은 심생멸(心生滅), 생멸인연(生滅因緣) 및 생멸상(生滅相)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해지고 있다. 여기서 밝히는 생멸인연(生滅因緣)의 인연(因緣)은 연기(緣起)의 의미이다. 즉 아리야식의 경험적 세계에 대한 연기적 구조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들 범부가 경험하는 세계는, 어찌하여 마음이 번뇌로 말미암아 오염되어 활동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무명(無明)으로부터 일어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것이며, 그렇게 전개되는 심식(心識)을 의(意)와 의식(意識)으로 설명하고 있다. 의(意)는 오식(五識)으로 구별하여, 그 작용을 나타냄으로서, 우리의 경험적 세계가 오직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유심소현(唯心所現)’의 내용을 밝히고 있다. 이 심식(心識)의 연기적 구조는 삼세 육추(三細六麤)와는 조직면에서는 동일하나 그 입장이 달라, 식(識)의 작용을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다. 삼계는 허위로서 유심(唯心)의 소작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며, 범무는 물론, 보살에 이르기까지도 무명의 근거를 알 수는 없으며, 오직 불타만이 알 수 있는 것이하고 설하여 무며의 홀연염기(忽然念起)를 밝히고, 의(意)와 의식(意識)의 세계를 염심(染心)으로 규정짓고, 여섯으로 나누어 육염심(六染心)을 설하고 있다.-전종식]

 

此義云何(차의운하) 以依阿梨耶識(이의아리야식) 說有無明(설유무명).

이 뜻이 무엇인가? (마음에 의지함이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무명이 있음을 말한다. 

不覺而起(불각이기) 能見能現(능견능현) 能取境界(능취경계)

起念相續(기념상속) 故說爲意(고설위의)

불각이 일어남에 능히 보고, 능히 나타내며, 능히 경계를 취하며,

망념(생각)을 일으켜 상속하기에  그러므로 ‘의’라고 말한다. 

 

[以依阿梨耶識 說有無明= 아리야식이란 진여에 무명이 작용하여 생긴 마음이 작용이다. 그러므로 아리야식을 말하면 저절로 무명을 말하게 된다.

* 무명으로 인하여 불각이 있고, 불각으로 인하여 망견(妄見)이 일어나며, 이로 인해 경계가 나타나고 이로 인해 대상에 집착한다. 그리고 망념이 끊이지 않는다.

* 元曉 : 처음에 아리야식(阿黎耶識)이라고 말한 것은 위에서 말한 心(所謂衆生依心의 心)이니, 곧 생멸의 인이고,

說有無明이라 한 것은 무명이 아리야식에 있는 것이니 곧 생멸의 연이다. 이 인연에 의해 의(意)와 의식(意識)이 전변함을 밝히고자 했기 때문에 以依阿黎耶識 說有無明이라고 한 것이다.

* 元曉不覺而起라는 것은 소의(所依)인 심체가 무명의 훈습으로 말미암아 전체가 일어나 움직이는 것으로, 이것이 업식(業識)이다.

能見이라고 한 것은 곧 심체가 다시 능견(能見)을 이룬 것이니 곧 전식(轉識)이다.

能現이라고 한 것은 곧 심체가 능현을 이루는 것이니 곧 현식(現識)이다.

能取境界라고 한 것은 현식이 나타낸 경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니 곧 지식(智識)이다.

起念相續이라 한 것은 취한 경계에 대하여 모든 추념(麤念)을 일으킨 것이니 상속식이다.]

 

[생멸인연은 마음에 의하여 의(意)와 의식(意識)이 활동하는 것을 말하며, 여래장은 여래의 법신이 중생의 번뇌에 씌워져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있는 그대로의 진여가 무명에 에워싸여 있는 중생의 마음으로서, 불생불멸의 진여(眞如)가 무명의 훈습(薰習)에 의하여 자성(自性)을 지키지 못하고 수연기동(隨染起動)하여 아리야식이 된다. 따라서 아리야식은 여래장심(如來藏心)이 인(因)이고, 무명을 연(緣)으로 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以依阿梨耶識 說有無明 아리야식에 의하여 무명이 있다고 설한다’는 무명의 활동 장소가 아리야식임을 설명하는 것으로, 무명이 아리야식에서 생긴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명은 시원(始原)이 없는 것으로 범부가 경험하는 세계를 성립시키는 원인이다. 아리야식에서의 무명의 활동(不覺而起)에 의하여 일심(一心)이 능히 보는 주관과 능히 나타나는 대상의 객관으로 분열하여 성립된다. 마음이 객관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능현(能現), 아리야식은 주관적인 내가 보는 능견(能見), 객관적인 너를 보는 능현이 불각의 마음, 즉 무명의 활동에 의하여 성립되기 때문에 마음이 분열하여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경계상이 나타나고, 그것이 마치 진실한 외계라고 망상(妄想)하는 식(識)의 작용을 일으킨다. 그래서 ‘能取境界 능히 경계를 취한다’고 하는 지식(智識)을 일으키고, 이 지식의 심작용을 계속하여 상속해 가는 식(識)이 ‘염을 일으켜 상속한다’는 상속식(相續識)이다.

다섯 단계 ①. 무명에 의하여 마음이 움직이는 불각이기(不覺而起) ②. 주관의 능견(能見) ③. 객관의 능현(能現) ④. 염정(染淨)의 법을 분별하는 지식(智識) 5. 이의 상속 등을 주체적으로 표현하여 ‘의(意)’라고 부른다. 이 의(意)는 단순한 인식(認識)의 의미가 그 주된 기능이다.

이 의를 다섯 가지 측면에서 보아서 業識(업식) · 전식(轉識) · 현식(現識) · 지식(智識) · 상속식(相續識) 을 말한다.]

 

此意復有五種名(차의부유오종명) 云何爲五(운하위오)

이러한 뜻에는 다섯 가지 이름이 있으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此意를 위의 此義와 같이 보아, ‘이러한 뜻’에는 이라고 해석하면 원효의 해설이 맞다.

* 이기영 : 원효의 해설을 설명하면서 意(의)는 심(心), 의(意), 의식(意識)의 意(의)가 아니라, ‘이 뜻’에는 다섯 가지 이름이 있다고 해석함이 옳다고 함.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원효의 해설 팔식에 따른 분류
業識 本識, 心 아리야식(제8식)
轉識
現識
智識 제7식, 意 말나식(제7식)
相續識 生起識의 첫째, 意識 의식(제6식)

* 憨山 : 논서에 의(意)를 생멸하는 주체로 삼고 칠식과 팔식을 통체적으로 의(意)라고 몀칭하였다. 그 때문에 다음 문장에서 의(意)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一者(일자) 名爲業識(명위업식) 謂無明力(위무명력) 不覺心動故(불각심동고)

첫째는 업식이라 이름하니, 무명의 힘으로 불각의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진여가 무명의 영향으로 처음으로 움직이는 것을 업식이라고 한다.

* 元曉 : 不覺心動이라 한 것은 업의 뜻을 해석한 것이니, 일어나 움직임(起動)의 뜻이 업의 뜻이기 때문이다.]

 

[의(意)을 이름하며 업식(業識)이라 한다.무명에 의하여 불각의 마음이 움직이어 생멸심이 일어나는 점이 업(業)의 시작이다. 일심(一心)은 불생불멸이며 법(法)이고 진리이지 업(業)이 아니다. 따라서 업은 인과(因果)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므로, 불생불멸의 일심(인因)이 무명의 연(緣)에 의하여 기동하여 생멸심(生滅心)의 과(果)가 일어나는 그 시점이 업의 시초이다. 즉 업식은 불각(不覺)에 의하여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며, 삼세육추의 지말불각으로 설명하면 무명업상(無明業相)에 해당된다.]

 

[업식(業識), 무명의 힘으로 불각의 마음이 움직인 까닭이다.” 의는 제7식인 말라식을 말합니다. 말라식이 형성되어 나타나는 과정에는 업식, 전식, 현식, 지식, 상속식이 있습니다. 말라식의 핵심은 지식(智識)입니다. 끝없는 우주에 티끌 하나 떨어지는 것이 업식입니다. ]

 

二者(이자) 名爲轉識(명위전식) 依於動心(의어동심) 能見相故(능견상고)

둘째는 전식이라 이름하니, 움직인 마음=불각심에 의지하여 능히 볼 수 있는 모양=相이기 때문이다.

 

[元曉 : 依於動心 能見相故라고 한 것은 앞의 업식의 움직임에 의해 능견의 상을 바꾸어 이루는 것이다.]

 

[전식(轉識), 움직인 마음에 의지하여 능히 보는 모양인 까닭이다.” 티끌 하나가 어렴풋한 모양을 갖추는 단계가 전식입니다. 원망하는 요소들을 모아서 어렴풋한 모양이 형성되는 단계입니다. ]  

 

[의(意)를 이름하여 전식(轉識)이라 한다. 생멸심이 주객으로 분화하여 주관의 작용으로 활동하는 마음이다.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곧 분별한다는 것이며, 주관적인 작용이 거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이러한 주관적인 작용을 전식(轉識)이라 한다]

 

三者(삼자) 名爲現識(명위현식) 所謂能現一切境界(소위능현일체경계)

셋째는 현식이라 이름하니, 이른바 일체의 경계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猶如明鏡現於色像(유여명경현어색상) 現識亦爾(현식역이) 隨其五塵(수기오진)

對至卽現(대지즉현) 無有前後(무유전후) 以一切時(이일체시)

任運而起(임운이기) 常在前故(상재전고)

마치 밝은 거울에 물체의 빛깔과 모양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현식 또한 그러하여 그 다섯 가지 경계=五塵을 따라서 대상이 부딪치면(이르러면) 곧 나타나지만 전후가 없는 것이다. 언제든지=一切時 임의로 일어나 항상 바로 앞에 있기 때문이다.

 

임운(任運)= 의지로 하지 않고 저절로 일어나는 작용

五塵(오진) :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 진(塵)은 경(境)의 구역(舊譯)이다.

[현식(現識)은 대상을 대하면 저절로 그 대상을 나타낸다. 의지와 관계없이 그러하며, 바로 나타내므로 시간의 전후가 없이 항상 그러하다.

* 元曉 : 업식, 전식, 현식은 시간적 단멸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아리야식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元曉 : 能現一切境界라고 한 것은 앞의 전식의 견(見)에 의해 능현의 작용을 일으킨 것이니, 위의 글(‘不覺’)에서 以依能見故境界妄現이라고 한 것과 같다. 현식은 전식에 의하지만 능견의 작용이 곧 능현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앞에서 能見能現이라고 한 것이다...以一切時 任運而起 常在前故라고 한 것은 제육식과 칠식 사이에 단멸이 있는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현식(現識), 일체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 마치 밝은 거울이 물체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현식도 그러하여 다섯 가지 경계를 따라서 대상이 부딪히면 곧 나타난다. 앞뒤가 없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임의로 일어나서 항상 앞에 있기 때문이다.” 원망하는 조각들이 모여 원망하는 분명한 모양을 갖추는 단계가 현식입니다. 여기까지는 불각의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  

 

[현식(現識)은 삼세육추(三細六麤)의 경계상(境界相)이다. 즉 객관적 작용으로서 나타나는 마음이다. 현(現)이라 함은 나타낸다는 의미로서 앞에서의 전식(轉識)에 대응하여 아리야식 가운데 객관적 세계가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객관적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식(識)의 작용이다. 식(識)이 아닌 것은 식(識)으로 알려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육경(六境)등 객관적 세계인 경계는 원시불교에서는 외계의 실제적 존재로 보고 있으나 유식설(唯識說)이나 여래장 사상 등 본론에서는 이를 마음속의 식(識)에 나타나는 객관으로 보고 있다. 현식은 일체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마치 밝은 거울이 색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현식이 외계의 오진(五塵)에 대해지면 물건이 거울에 비추어 나타나듯,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시간적 전후 없이, 즉시 외계가 현식에 비치어, 항상 눈앞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오진(五塵)은 다석 감각인 오근(五根)에 의하여 개별적으로 지각(知覺)되는, 단순한 현량(現量)일뿐, 이것들에 대한 분별은 각개의 지각이 얻은 인식의 결과를 의식(意識)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의식(意識)은 유식설 등에서 말하는 제6식의 의식으로서 뒤에 설하는 의식(意識) 즉 분별사식(分別事識)과 구별되어야 한다. 의식의 대상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오식(五識)이 인식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인식한 외계는 외계 바로 그것이 아니고, 그 외계를 현식이 내재시켜 마음 속에 나타낸 오경(五境)이라는 것이다. 현식은 시간적으로 중단함이 없이 항상 외계를 반영하고 있지만, 안식에서 의식까지의 육식은 시간적으로 인식의 단멸(斷滅)이 있다. 예를 들면 안식이 쉴 때는 보는 작용이 없으므로 중단 없이 보는 현식이 나타내는 외계의 모습은 이미 아리야식에 함장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눈으로 보는 것이 바로 외계(外界) 그 자체가 아니다. 그렇게 잘못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四者(사자) 名爲智識(명위지식) 謂分別染淨法故(위분별염정법고)

넷째는 지식이라 이름하니, 염법과 정법을 분별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분별하는 주체가 의식하게 된다. 비록 미세하기는 하지만, 좋아하고 싫어함이 있고, 그렇게 하는 자아를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 말나식이라고 한다. 위의 아리야식은 주관이 생겨나고 이와 동시에 대상을 나타내지만, 이를 의식하지는 않는다.

元曉 : 지식(智識)이라는 것은 제칠식이요…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의 과보를 염정법이라고 이름하니, 저 염정법을 분별하여 아와 아소라고 계탁하기 때문에 分別染淨法이라고 한 것이다.]

 

[지식(智識), 현식이 거울에 투영되듯 나타나는 것이 지식이며, 거울에 투영된 모양에 대해 구체적인 분별을 일으키는 단계가 지식의 단계입니다. 제7식 말라식이 대표적인 단계입니다. 삼계(三界)는 허망한 것이며,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의 경계도 사라지게 된다. 일체법이 모 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망령으로 생겨난 것이니 일체의 분별은 곧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한 것이며,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기에 모양을 가히 얻을 수 없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중생의 무명의 허망한 마음에 의지하여 머무름을 얻는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본체를 가히 얻을 수 없고 오직 마음일 뿐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의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식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의식을 통하여 제 육식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상속식은 의식이며, 제 육식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상속식을 제 육식이라고도 합니다. ]  

 

[지식(智識), 삼세육추(三細六麤)로 말하면 지상(智相)이다. 앞의 업식, 전식, 현식의 삼식의 작용은 아리야식 속에 있다고 원효와 법장이 설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현식이 나타내고 있는 외계를 마음밖에 있는 실재라고 생각하고, 개개의 경계에 대하여 망분별을 일으키는 것이 지식이다. 지상(智相)에서는 ‘애(愛)와 불애(不愛)을 분별한다’고 하고 있고, 지식(智識)은 ‘염정(染淨)의 법(法)을 분별한다고’고 설명하고 있으나, 이것은 법집(法執)의 분별이다. 요컨대 외계의 대상이 실재라고 판단하여 그에 대하여 호오(好惡)나 선악(善惡)을 분별하는 것이며, 아집의 분별은 뒤에 나오는 의식 즉 분별사식이 담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전종식)는 이 지식(智識)을 유식설의 제 7식의 말나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집이 아닌 법집이므로 제6식으로 본다.]

 

五者(오자) 名爲相續識(명위상속식) 以念相應不斷故(이념상응불단고)

다섯째는 상속식이라 이름하니, 망념이 서로 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까닭이며,

住持過去無量世等(주지과거무량세등) 善惡之業(선악지업) 令不失故(영불실고)

과거의 한량없는 세상들에서의 선업과 악업을 간직하여 잃지 않는 까닭이며,

復能成熟現在未來苦樂等報(부능성숙현재미래고락등보) 無差違故(무차위고)

또 현재와 미래의 괴로움과 즐거움=苦樂 등과 같은 업보(과보)를 성숙시켜 어긋남이 없는 까닭으로,

能令現在已經之事(능령현재이경지사) 忽然而念(홀연이념)

未來之事(미래지사) 不覺妄慮(불각망려)

현재에서 이미 겪고 지나간 일을 문득 생각하게 하고 미래의 일을 알지도 못하면서 망령되게 염려하게 한다.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며 끊임없이 헛된 생각이 이어지므로 상속식이라고 한다.

원효상속식이 미세한 분별식인 지식(智識)과 다른 거친 분별이므로 의식(意識)에 속한다고 하였다.

元曉 : 상속식(相續識)이라는 것은 의식(意識)이니 … 念相應不斷故라고 한 것은 법집이 상응하여 오래 상속하게 되는 것이니, 여기서는 자체가 끊어지지 아니함에 의하여 상속의 뜻을 풀이한 것이고, 住持이하는 공능(功能)에 의하여 상속의 뜻을 풀이하였다.]

 

[의식의 유전함을 밝히다. 또한 의식(意識)이라는 것은 곧 상속식이니 범부의 취착함이 점점 깊어져서 나[我]와 나의 것[我 所]을 따지고 여러 가지 허망된 집착으로 일을 따라 반연하여 육진(六塵) 경계를 분별하므로 의식이라고 말한다. 또한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이름하고 다시 분별사식(分別事識: 사물을 분별하는 식)이라고도 하며, 이 식이 견애번뇌(見愛煩惱)를 의지하여 증장한다는 뜻이다.” 이 상속식이 구체적으로 TV에서 김태희를 보는 순간 내 속에 내재되어 있는 티끌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하여(업식)→ 어렴풋한 형체를 이루고(전식)→ 더욱 뚜렷한 형체로 완성되며(현식)→ 이것이 거울에 투영되어 분별을 하게 되고(지식)→ 분별한 것이 연속적으로 의식화되며(상속식)→ 이것이 구체적으로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의식). 이러한 마음으로 상대방과 감정을 교감하면서 원망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마음이 증장되어 다른 형태의 원망하는 마음이 지식에 저장되며, 이 마음이 거울에 투영되듯 현식화 되며, 어렴풋한 전식을 거쳐 무명 업식으로 아뢰야식에 저장되게 됩니다.]

 

[상속식(相續識), 육추에서 상속상(相續相)에 해당되지만, 거기에서는 ‘지(智)에 의하기 때문에 고락을 아는 마음(각심覺心)이 생기게 하고, 망념(妄念)을 일으켜 상응하여 끊지 못한다’고 설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상속(相續)의 의미를 보다 상세히 설하고 있다.

以念相應不斷故 염이 상응하여 끊지 못하기 때문’에 상속식이라 불린다는 염(念)은 망념을 말하고, 식(識)이 지속해 가는 것을 말한다. 무한한 과거로부터 선악의 업을 유지해 상속식에 보존하는 것이다.

원효와 법장은 ‘능히 애취번뇌(愛取煩惱)를 일으키는 까닭에 오랜 과거에 지은 모든 어리석은 행위의 결과를 현재까지 계속 유지하게 하며, 또 이 식은 능히 하나의 번뇌가 또 다른 번뇌를 더 조장 번식시켜 가는 그러한 번뇌(윤생번뇌(潤生煩惱) 또는 윤업번뇌(潤業煩惱)를 일으키어 업에 대한 과보를 계속 일으켜 조금도 어김없게 하는 식(識)으로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하여, 인과가 유전하여 끊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상속식은 이와 같이 무한한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이를 지속하면서 상속해 가는 것이므로, 유식설에서는 이 역할을 제8식인 아뢰야식이 담당하고 있다고 설한다. 이 상속식은 일상적 경험은 물론, 제7식이 행하는 자아에 대한 집착까지도 저장하므로, 이것 역시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역할인 저장 및 재생기능을 기신론에서는 상속식이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기신론의 아리야식(阿梨耶識)의 성격은 유식설의 그것과는 비교가 어렵지만 원효와 법장 등은 이를 유식설과 여러 가지로 배대하고 있다.

필자(전종식)는 지식(智識)을 유식설의 제6식에 배당하고 상속식을 제8식(아뢰야식)에 배당하였으나, 본래 기신론의 아리야식은 유식설의 아뢰야식과는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기신론을 유식설과 비교하는 자체가 적절치 못한 것이다. 여래장은 여래의 법신이 무명번뇌에 가리워져 있는 상태이고, 기신론에서의 아리야식은 그 여래의 법신인 진여가, 무명번뇌의 연(緣)을 만나 기동하여 나타난 식이다. 다시 말하면 아리야식은 여래장의 수연진여(隨染眞如)가 인(因)이고 무명을 연(緣)으로 하여 아리야식이 과(果)로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아리야식은 근본무명으로 말미암아 진여의 체를 들고 망(妄)이 된 것이어서 하나의 본체가 진망(塵妄)으로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번뇌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중생의 마음은 항상 진망(塵妄), 염정(染淨), 본각과 불각, 진여와 무명 등 이들 둘이 항상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래장이 번뇌와 지혜법신이 혼합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번뇌에 에워싸여 있지만, 그 번뇌에 오염됨이 없이 자성은 청정한 심성(心性)으로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위에서 함께 있다고 말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염되지 않은 의미로 함께 있다는 말이 된다.

본론에서 정의하는 아리야식(阿梨耶識)은 불생불멸과 생멸이 화합하여 하나도 아니요 다르지도 않는 비일비이(非一非異)의 것을 이름 한다고 하였다.

유식설에서 장식 또는 종자식(種子識) 등으로 번역되는 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영원한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에까지 일체를 지속 보존 재생하는 것이 그 역할이듯, 여기에서 설하는 상속식(相續識)도 바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전종식)은 이 상속식을 제8식의 아뢰야식으로 보는 것이 그래도 유식설과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니가 생각한다.]

 

업식(業識)= 무명에 의하여 불생불멸의 일심이 기동하여 생멸심으로 바뀐 것.

전식(轉識)= 생멸심이 주객으로 분화하여, 주관의 작용으로 활동하는 마음
현식(現識)= 객관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마음, 경계상.
지식(智識)= 현식의 경계상을 외계(外界)라고 망상하여 그것을 여러 가지로 분별하는 마음작용
상속식(相續識)= 지식의 결과를 유지하고 마음의 작용을 지속시켜 가는 식(識), 과거의 업을 간직하고 과보로 성숙시켜 기억을 유지하는 등의 작용

[차별없는 참사람, 펼치면 우주 만물을 덮고, 접으면 터럭 하나도 그 위에 놓지 못한다. 홀로 밝히는 빛이지만 온 우주를 비추고도 부족함이 없다. 눈에도 안 보이고 귀에도 안 들리니, 이를 무엇이라 이름하겠는가?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는다(육조 혜능)>는 옛 스승의 말 그대로다. 그러니 어찌하겠느냐. 스스로 들여다보는 수밖에.”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는다.”는 육조 혜능과 남악 회양의 선문답입니다. 남악 회양이 혜능을 찾아가 ‘부처가 무엇인가’ 하고 물을려고 했는데 혜능이 먼저 묻습니다. “어떤 한 물건이 왔는가?” 남악은 여기서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8년 동안 도대체 한 물건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화두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깨우치고 보니 한 물건이라 해도 맞는 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리나케 혜능을 찾아가서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고 말하자 혜능이 “ 알았으면 됐지. 뭣하러 찾아왔는고.” 라고 했습니다. 

왜 공부해야 하는가. 스스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의 묘한 진리는 내가 아는만큼 내 세상입니다. 진리를 깨우치고 여유작작하게 걸어가는 그 모습이 바로 화엄입니 다. 공부를 해야 압니다.-통섭불교]

 

 • 覺(각)과 不覺(불각)의 同相(동상)과 異相(이상)

復次覺與不覺(부차각여불각) 有二種相(유이종상)

云何爲二(운하위이) 一者同相(일자동상) 二者異相(이자이상)

또 다시 각과 불각에는 두 가지 모습=二種相이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첫째는 같은 모양=同相이고, 둘째는 다른 모양=異相이다.

 

[동상이상(同相異相)= 동상은 진여문이고, 이상은 생멸문이다. 진여문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는 평등하고 동일하여 동상이나, 생멸문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법은 각기 인연에 의하여 성립되고 있으므로 각기 다른 이상이다.

또 각이라는 것이 어떤 볼 수 있는 물질이나 형상이 아닌 것이지만, 불타와 같은 어떤 색상(色相)을 볼 수 있는 것은, 불타가 오로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중생의 번뇌심에 따라 속세에 나타난 것일 뿐이며, 이 지혜는 물질적 성질의 것이 아니고, 또한 그 불타의 색신 색상은 진실한 지혜 자체가 아니므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각과 불각이 다르다고 하는 까닭은 마치 토기의 모양이 각각 같지 않음과 같이, 무루의 결함 없는 각과 무명의 불각은 속세 인간의 염법(染法)에는 제각기 차별이 있는 것이므로 그에 따라 각(覺)이 수염환(隨染幻)의 차별 즉 중생의 번뇌심에 따라 불신이 나타나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는 것이며, 불각(不覺)은 본래부터 근본무명과 지말무명이 차별이 있기 때문에 성염환(性染幻)의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각과 불각은 진여문(眞如門)의 입장과 생멸문(生滅門)의 입장에서 각기 동상(同相)과 이상(異相), 다시 말하자면 동일한 면과 상이한 면을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과 얼음과 수증기의 동상은 화학기로호 H2O이다. 그러나 그 순수 H2O의 이상은 물과 얼음과 수증기로 차별되는 물리적 삼태(態)이지만, 이 세 가지 형상도 청차만별의 이상(異相)이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상은 H2O의 순수가 생멸문의 인연 화합으로 물과 얼음, 수증기가 되듯이 각과 불각은 다 같이 진여일 따름이다.-전종식]

 

 [각과 불각의 동이(同異)를 설하다. 각(覺)과 불각(不覺)에는 두 가지 모양의 상(相)이 있다. 첫째는 같은 모양=同相이고 둘째는 다른 모양=異相이다.” 각과 불각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 니다. 일심 속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불각에서부터 진여의 세계까지 모두 있는 것이 대승기신론입니다. 깨닫지 못한 우리도 일심 속에 있으며 진여가 같이 들어있습니다. 단지 오염되어 있으면 불각이고 오염되어 있지 않은 진실은 각일 뿐입니다. 나의 삶도 각과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하루의 삶은 부처의 삶인 것입니다.] 

 

    - 同相(동상)

同相者(동상자) 譬如種種瓦器(비여종종와기) 皆同微塵性相(개동미진성상)

같은 모양=同相이란, 비유하자면 여러 가지의 질그릇(도자기)이 모두 같은 미진(먼지)로 되어 있는=性相인 것처럼 

 

성상(性相)= 성은 체를 말하고 성질을 말한다. 도자기의 성은 흙이고 상은 점토의 접착력이나 구우면 단단해지는 등의 성질을 말한다.

 

[질그릇은 모양이 다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먼지(가루)로 만들어진다.-물처럼바람처럼]

 

[각과 불각은 같다고 말할 수도 있고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같다고 말하는 이유는 마치 여러 가지 토기가 모두 한결같이 흙으로 만들어진 것과 같이 완전무결한 각(覺)과, 무명으로 생긴 여러 가지 환상적 불각(不覺)은, 모두가 한결같이 진여(眞如)를 본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전에도 말하기를 ‘이런 의미에서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열반에 들어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각(覺)이라는 것이 ‘닦아야 할 그 무엇이나, 만들어 내는 그 무엇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얻어지는 어떤 목적물이 아닌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如是無漏無明(여시무루무명) 種種業幻(종종업환) 皆同眞如性相(개동진여성상)

이와 같이 샘이 없는=無漏와 무명과 여러 가지의 업환이 다 같이 진여성의 모습인 것이다.

 

무루(無漏)=루는 마음이 객관의 대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허물을 누출시킨다는 뜻으로서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무루는 번뇌가 없다는 것으로서 깨달음의 지혜. 여기서는 각(覺)을 말한다.

업환(業幻)= 업은 행동이고 환은 허깨비와 같이 실체가 없는 작용을 말한다

 

[같은 모양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상의 질그릇이 같은 흙으로 빚어졌듯이, 각과 불각의 무루와 무명과 여러 가지 업환도 진여의 성품인 것이다.

* 원효 : 무루(無漏)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여러 각(覺)을 말하며, 무명(無明)은 근본불각(根本不覺)과 지말불각(枝末不覺)의 불각(不覺)을 말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업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業幻이라고 말한 것이다.]

 

[동상, 같은 모양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상의 질 그릇이 같은 흙으로 빚어졌듯이 각과 불각과 무루와 무명과 여러 가지 업환도 진여의 성품인 것이다.” 모양은 다르고 종류가 다양한 질그릇이지만 같은 흙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빚고 나니 둥근 것도 있고 각진 것도 있고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불각이나 번뇌가 없는 무루나 번뇌 의 근원인 무명도 모두 진여의 성품 안에 있는 같은 것입니다. 동상은 우리의 근본 성품, 오염되기 전의 하나=一心을 말합니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소재는 같듯이, 물들어 있는 것을 없애고 근본으로 가면 같은 진여입니다. 바로 그것이 동상을 밝 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진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우치면 일심(一心)이 되고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하나인 상황에서는 어떤 행동을 하건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합니다. 그에게는 어떠한 사심도 없습니다. 우리는 남에게 너를 위해서 했다고 자주 말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마음과 계산이 깔려있습니다. 가장 일심에 가까운 것이 어머니가 자식을 위한 마음일 것입니다.]

 

是故修多羅中(시고수다라중) 依於此義說(의어차의설)

一切衆生(일체중생) 本來常住(본래상주) 入於涅槃(입어열반)

그러므로 경에서 이 진여의 뜻에 따라 말하는 까닭은

일체의 중생이 본래 항상 머물러 있어 열반에 들어 있으며, 

菩提之法(보리지법) 非可修相(비가수상) 非可作相(비가작상) 畢竟無得(필경무득)

보리의 법은 닦을 수 있는 모양=相이 아니며, 지을 수 있는 모양=相도 아니고 끝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한다.

 

[일체 중생은 진여를 성(性)으로 하고 있어, 그 관점에서 본다면, 일체 중생은 본래 상주하는 것으로서 생사를 거듭하면서 윤회한다 하더라도, 그 본성은 하등의 변화가 없는 것이다. 이미 성(性)과 체(體)는 영원한 과거로부터 열반에 들어 있는 것이므로 그 점에서 모든 부처와 동일한 것이다.

부처가 깨닫는다고 하는 것도 수행을 원인으로 하여 그 수행의 결과로서 보신(報身)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열반은 이미 상주하고 있는 것이므로 수행을 원인으로 하여 나타나는 것이나, 수행으로 새로이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다. 보리는 본래대로 있는 것이므로 수행을 원인으로 하여 결과로 나타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열반이나 보리는 본래대로 있는 것이므로 수행 결과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닌 필경무득(畢竟無得)이며, 본래 있던 열반이 저절로 나타날 뿐이다.]

 

 [무명 때문에 원래 열반적정인지 모르고 끝없이 번뇌망상을 일으킵니다. 번뇌망상 속에 열반적정이 들어앉아 있는 것입니다. 보리의 법은 깨달음, 본래 성품을 말합니다. ‘끝내 얻을 수 없다.’는 말은 원래 갖고 있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처임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절박함을 더하기 위해 부처가 되자고 말하지만 우리는 원래 부처입니다. 오염이 되어 부처임을 모르는 것 뿐 입니다. 공부하는 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모양이나 형태는 오염된 상태에는 있지만 깨달은 상태, 진여의 상태에서는 없습니다. 그래서 ‘색상을 볼 수 없다.’고 말한 것 입니다. 이것은 진여가 무엇인지 표현한 말입니다.]

 

亦無色相可見(역무색상가견)

而有見色相者(이유견색상자) 唯是隨染業幻所作(유시수염업환소작) 

또한 색상을 볼 수 있는 것이 없으나, 색상을 보는 것은 오직 오염된 업환=染業幻에 따라 지은 것=所作이며

非是智色不空之性(비시지색불공지성) 以智相無可見故(이지상무가견고)

지혜에는 색의 불공의 성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지상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라고 하였다.

 

수염업환(隨染業幻)= 불타가 중생의 염심(번뇌에 오염된 마음)에 순응하여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색불공(色不空)= 물질이나 형상에는 질량(質量)이 있어 색불공(色不空)이라 한다

지상(智相)= 여기서의 지상은 본각의 지혜를 말한다.

 

[그러나 색상을 보는 것은 오직 오염된 업환(業幻)에 따라 지은 것이며 지색의 불공[智色不空]의 성질이 아니므로 ‘지상(智 相)을 볼 수 없는 까닭이다.’고 하였다.” 지(智)는 지식으로 제7식 말라식에 해당합니다. 색은 우리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계명자상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불공(不空)이란 공(空)보다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불공은 공이 아닌 것이 아니라 공을 넘어선 것으로 ‘공 조차도 아니다’는 뜻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공의 성질이 아니다’는 것은 진여의 성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상(智相)은 제7식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것입니다. 진여가 아니므로 업을 전부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원효 : 本來常住 入於涅槃 菩提之法이란  ≪대품경≫에서 “이 지혜로써 모든 번뇌를 끊고, 무여열반에 들어가며, 본래 이것은 세속법이지 제일의제는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공 가운데는 멸함이 없고, 또한 멸하게 하는 것도 없으니, 모든 법이 결국 공한 것이며, 곧 이는 열반이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어떤 뜻이 보리인가? 공의 뜻이 보리의 뜻이며, 여(如)의 뜻과 법성의 뜻과 실제의 뜻이 보리의 뜻이며, 또한 모든 법의 실상이 거짓되지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 이것이 보리의 뜻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非可修相이란 인행(因行)이 없기 때문이고, 非可作相이란 일어남이 없기 때문이며, 畢竟無得이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얻을 때도 없고 얻을 곳도 없기 때문이다.

* 覺이나 不覺이나 진여를 본성으로 한다. 모든 그릇이 가루로 만들어져 있듯이, 갖가지 상을 띄지만 모두가 진여가 작용한 모습이다. 그래서 모든 중생이 열반에 상주하고 있다고 하였다. 진여는 본래 공성이므로 닦으려 해도 닦을 것이 없다. 망념만 여의면 바로 진여가 드러난다. 드러난다고 하지만 드러날 만한 것은 없다.

* 《金剛經》 <無得無說分>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법을 설한 바가 있느냐?”수보리가 말하였다.“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할 것 같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만한 일정한 법이 없으며, 또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만한 일정한 법이 없습니다.”

* 《維摩經》에도 “일체 중생의 무명 불각의 모습이 바로 모든 부처님이 증득하신 열반의 모습이므로 증득했다고 해서 새삼스레 무명이 사라지진 않는다.”하였다.]

 

[경전에서 ‘진여가 일체중셍에게 본래부터 상주하고 있어 열반에 든다’고 하고 있으나, 열반과 보리가 수행의 결과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상주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본각(本覺)만을 인정하고 시각(始覺)의 수행을 상실하는 논법이 될 것이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동상으로서의 이체(異體) 열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행 중인 이상(異相)의 중생의 입장이 아닌 것이므로 문제가 안되는 것이다. 번뇌와 보리는 동일한 체(體)를 가체(假體)와 본체(本體)로 하고 있는 것이므로, 여기서의 동상(同相)은 그 체성의 상주(常住)를 강조하는 것이 되고, 시각(始覺)의 수행은 이상(異相)의 수행자가 이지불리(理智不利)의 지체(智體)를 발견하기 위한 방편이고, 그 방편의 결과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나타난다는 의미이므로 동상의 설명으로서는 무리가 없는 것이다. 이지불이(理智不利)의 이체(異體)는 여실공(如實空)이고 지체(智體)는 여실불공(如實不空)으로서 이는 본래 불리(不二)의 관계속에 있다. 본각(本覺)을 향한 시각(始覺)의 수행은 자력문(自力門)으로서의 수행방편이다.

기신론이 열어놓고 있는 타력문(他力門) 즉 본론의 일곱 번째 저술 이유인 타력문은 열(劣)근기의 사람이 아미타신앙 등 염불을 통한 쉬운 방편으로 신심이 성숙되고 그에 따라 마음이 정화되어 진여를 발견, 불성의 자각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자력문으로서의 시각(始覺) 수행과는 별도로 타력문도 결과적으로 궁극적 본체에 귀일되는 것이 될 것이다.]

 

   - 異相(이상)

異相者(이상자) 如種種瓦器(여종종와기) 各各不同(각각부동)

다른 모양=異相이라고 한 것은 여러 가지 질그릇(도자기)이 각각 같지 않은 것처럼  

如是無漏無明(여시무루무명) 隨染幻差別(수염환차별) 性染幻差別故(성염환차별고)

이와 같은 무루와 무명은 오염된 환영=染幻을 따르는 차별이며, 오염된 환영의 차별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른 모양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상의 질그릇이 모두 흙으로 빚어졌지만 각각 다른 인연에 따라 다른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隨染幻差別(수염환차별) : 각(覺)은 남아 있는 染의 정도에 따라 차별이 생긴다.

* 性染幻差別(성염환차별) : 불각(不覺)은 무명이 본래 평등성을 어긴 것이므로 차별이 있다.]

 

수염환(隨染幻)= 무루의 본각은 본래 차별이 없는 것이지만 염법(중생의 번뇌심)에는 각기 차별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순응하여 차별이 있는 것 같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성염환(性染幻)= 이에 대하여 무명에 의한 근본지말불각은 그 성질상 차별이 있다. 그러나 무명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명염법의 차별도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이상(異相), 다른 모양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상 의 질그릇이 모두 흙으로 빚어졌지만 각각 다른 인연에 따라 다른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각기 그릇의 모양은 다 다릅니 다. 물든 것을 넘어서 본래 성품을 보니까 하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업에 물들어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업에 물들기 전의 성품은 같습니다. 동상은 진여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니까 전부다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은 뿌리는 같은데 나뭇가지는 다 다른 것입니다. 뿌리인 일심은 다 같은데 열린 업들은 다 다릅니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는 말(보리즉번뇌, 번뇌즉보리)에 서 같기도 하다는 것은 진여에 뿌리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다 르기도 하다는 것은 업을 받아서 나타나는 각기 다른 모양을 말 한 것입니다. 업에 의해 각자 다른 모양을 가지는 것입니다. ‘보리즉번뇌, 번뇌즉보리’에서 번뇌즉보리는 동상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고 보리즉번뇌는 이상의 관점에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 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지만 같은 것은 본래 성품입니다. 혜 능이 말했던 질문 ‘어떤 한 물건이 왔는가?’는 진여의 상태에서 답을 하면 맞는 것이 되고 분별심으로 답을 하게 되면 다른 것 입니다.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다 맞는 것 같은데 아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맞고 틀린 것이 명확하게 분간됩니다. 알면 눈빛만 보아도 알 듯이 던지는 말도 본래 어떤 마음에서 던진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물들기 전의 진여는 하나입니다. 하나의 그 마음에서 일으키는 모든 것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 밖에 없습 니다. 위하고 원하는 마음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 광명, 깨달음은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끝없는 자비를 베풉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성품은 자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마음밖에 없는 것이 본래 성품입니다. ]

 

[각(覺)은 색상(色相)이 없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때로는 응신(應身)으로 나타난 석가모니 부처가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의 색상을 갖추고 있고, 우리가 그 색상을 볼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오로지 부처가 중생 구제를 위하여 그 중생의 오염된 번뇌심에 따라 색상을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이며, 이를 수염업환(隨染業幻)이 만든 바=소작(所作)이라 하였다.

그러나 모든 부처가 중생의 제각기의 번뇌심에 따라 나타낸 것이므로 그것이 불타의 열반과 보리 그 자체는 아니며, 중생의 눈으로 보는 자심소작(自心所作)의 부처에 불과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늘에 떠있는 달이 만 가지의 물에 비추어질 때, 그 달은 큰 바다에 비추어진 것이나, 작은 그릇에 비추어진 것이나, 때를 막론하고 그 비추어진 달은 동일한 달임에 틀림없는 것이지만, 그 달은 제각기의 물에 따라 비추어진 상태는 다른 것이다.

그와 같이 중생 구제를 위하여 나타난 불(佛)의 모습도 실제로는 자기의 그릇으로 만들어 보는 부처의 모습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불타의 지혜는 색불공(色不空)의 물질적 성질의 것이 아니다. 색불공(色不空)에서 이미 의언진여(依言眞如)의 여실불공(如實不空)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진여 속에는 항하사만큼의 무한한 지혜 등 성공덕이 가득 차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여기서는 불타의 지혜가 어떠한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불타가 색신을 나타냈다 하더라도 그 불신(佛身)은 지혜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불타의 지혜에는 색상의 성질이 없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타의 색상을 보는 것으로는, 진실한 본각의 지혜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枝末不覺(지말불각)의 六麤(육추)

以有境界緣故(이유경계연고) 復生六種相(부생육종상) 云何爲六(운하위육)

경계의 연이 있기 때문에 다시 여섯 가지의 모양을 내나니, 무엇이 그 여섯인가?

 

[세(細)라고 하는 이유는 아리야식이 아주 미세하여 범부와 이승(二乘)으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추(麤)는 그 작용이 거칠어 관심을 기울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麤 거칠 추

* 元曉 : 以有境界緣故 生六種相라고 한 것은 앞의 현식이 나타낸 경계에 의하기 때문에 칠식 가운데 여섯 가지 추상을 일으킨 것이니 이것은 '능가경'에서 말한 “경계의 바람에 의해 움직여서 칠식의 물결이 전전한다.”는 뜻을 풀이한 것이다.-물처럼바람처럼]

 

一者(일자) 智相(지상) 依於境界(의어경계) 心起分別愛與不愛故(심기분별애여불애고)

첫째는 지상이니, 경계상에 의지하여 마음이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음의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지상(智相)= 육추(六麤)의 첫 번째. 지(智)는 지혜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안다, 판단한다는 정도의 세속적 지혜이다. 대상의 존재물에 대하여 호오(好惡)를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경계상이 확립되어 있다. 지상은 이 경계상이 외계의 사물(事物)이라고 망상하여 그에 대하여 ‘애(愛)와 불애(不愛)’를 분별하는 것이다.

 

[元曉 : 처음 한 가지 상(智相)은 제 칠식이고, 다음 네 가지는 생기식(生起識)에 있으며, 나중 한 가지상(業繫苦相)은 저것들이 낸 과보이다. 처음에 지상이라고 한 것은 제 칠식이다. 비로소 혜수(慧數)가 있어서 이것이 아(我)와 진(塵)을 분별하기 때문에 지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갖추어 말한다면 본식을 반연하여 아(我)라고 계탁하고 본식이 나타낸 경계를 반연하여 아소(我所)라고 계탁하지만, 이제 이 가운데서는 추상에 의하여 나타내기 때문에 依於境界 心起라고 하였다. … 이제 칠식은 바로 안으로 향하여 아와 아소를 계탁하지만 마음 밖에 경계가 있음을 계탁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도리어 저 식을 반연한다고 말하였다.

* 지운 : (원효스님의 해설을 빌어) 경계상이 진여에 영향을 주어 지상(智相)으로 나타난다. 지상은 말나식(末那識)이라고 하며, 자아의식이다. 지상은 아리야식의 업식와 전식을 나라고 생각하고, 경계상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효스님은 경계상을 경계상과 현식으로 나누어 경계상을 떠올리는 것을 현식, 떠올려지는 것을 경계상이라고 보았으며, 지상은 이 현식도 나라고 본다고 하였다. 유식에서는 말나식을 잠재의식이라고 보고 아리야식을 무의식이라고 보지만, 아비달마에서는 합하여 잠재의식이라고 본다.]

 

[지상(智相)을 밝히다. 제7식 말라식이며 유부무기 입니다. 하나의 점이 점점 진해져서 형상을 이루고 완벽한 형상을 이루게 됩니다. 이런 완벽한 형상을 이루게 된 상태가 경계상입니다. 그것이 투영되는 것이 제7식입니다. 여기서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분별하는 마음이 생겨서 물들어 있는 상태가 됩니다. 우리의 분별심은 모두 물든 유부의 상태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내가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쌓았던 업이 좋아하면 좋아한대로 물들어 저장되고, 싫어하면 싫어한대로 물들어 저장되어서 이 생에 좋아하는 쪽으로 부딪히면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싫어하는 쪽으로 부딪히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똑같은 사람을 보고 다른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이러한 것은 상대방 때문이 아니라 자기 속의 업 때문에 일어납니다. 자신의 업의 작용에 의해 다른 사람을 보고 마음에 들거나 이야기를 해보고 마음에 들기도 합니다. 부처님 공부를 하고 수행하자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내는 것은 그에 대한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전생에 공부했던 흔적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라식을 넘으면 색수상행식 오온이 나옵니다. 오온은 불교에서 중요한 내용입니다. 색(色)은 루파이며, 변할 가능성이 있 는 것을 보고 변하지 못하도록 집착하는 것입니다. 무지, 아집, 즉 근본적인 집착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지 만 변하지 않는다고 착각합니다. 여기서 변하지 못하도록 집착하게 하는 것이 아집이며 색입니다. 수(受)는 뒤바뀌려는 느낌, 감수작용입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변하지 않는다고 착각해서 변하면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집에서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변화를 못 보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늙지 않는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을 날이 멀었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하지 않지만, 내가 내일 죽는다고 가정해보시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오온에서 불 안과 공포는 근본적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견성해서 진여를 본 순간 없어집니다. 진여를 보면 우리는 변화 속에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아집에 휘둘리면 자기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상을 보면 변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 적으로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것들을 갖다 붙힙니다. 변하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자신과 주변을 하나로 만들어서, 대상도 변하지 않는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이 자기화입니다. 모든 세포가 자기복제이듯이 우리 생각도 자기복제를 끝없이 합니다. 생각하고 분 별하고 판단하면서 정신적으로 복제를 합니다. 자기화하는 과정에서 내가 갖고 있는 업만큼 육신을 만들어 냅니다. 나의 형 상이 바로 내 업의 형상입니다. 만약 다음 생애에 잘 생겨지려면 선업을 쌓아야 하고 악업을 줄여야 합니다.

상(想)은 뒤 바뀌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으로 표상작용입 니다. B는 B, A는 A인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은 samjna(상즌냐)로 이 말은 합쳐서 판단하다, 하나로 판단하다는 뜻입니다. sam이 ‘하나로’ jna가 ‘판단하다’는 뜻입니다. 나 와 대상이 분리되어 있던 것을 하나로 합쳐서 판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상, 행, 식 이런 것들의 끝없는 작용이 우리의 분별, 생각을 만들어냅니다.

행(行)은 상스카라로 이것은 ‘하나로 만들어진’이란 뜻입니 다. 상은 ‘하나로’, 스카라는 ‘만들다’는 뜻입니다. 행은 하나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일으킨 뒤에 실제로 행동을 일으켜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행위작용입니다. 결합생성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존재를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하셨습니다. 위(爲)는 서로 다른 B와 A를 하나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상(想)은 하나로 만들려고 생각하는 것이고 행(行)은 움직여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로 만들어진 것이 우리의 의식으로 나타납니다.

식(識)은  뷔즌야나(Vijnana)로  Vi는  ‘다르게’라는  뜻이고 jnana는 ‘알다’는 뜻입니다. 식은 변화의 전후법을 다르게 인식 하는 것으로 분별작용입니다. A법과 B법이 한몸이 됨으로써 이 전의 구조와 차이를 보이게 되는데 B를 중심으로 A를 끌어붙입 니다. 이것이 ‘떠올라버림’이 되고 ‘나’가 됩니다. ‘나’를 중심으 로 끌어모으는 것을 오취온이라고 합니다. 취는 끌어모으려는 힘입니다. 그래서 이 몸이 업만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색수상 행식의 덩어리를 오취온이라고 합니다. 식이 분화되어 6식, 7 식, 8식으로 나눈 것입니다.- 통섭불교]

 

[여섯 가지의 거친 번뇌, 즉 육추(六麤)의 지말불각(枝末不覺)에 대한 설명으로,

첫 번째에 속하는 지상(智相)은 대상의 존재에 대하여 호오(好惡)를 분별하는 것이다. 지(智)는 분별지(分別智)로서 본론에서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분별한다’고 설하고 있다. 지상(智相)은 이성적(理性的) 지혜가 아니라 호오(好惡)를 결정하는 실천적인 판단, 즉 분별지(分別智)에 불과하다.

원효는 이 지상을 유식설(唯識說)의 제7식 말나식(第七末那識)에 적용하고 있다-전종식]

 

[말나식(末那識, 산스크리트어: manas의 意, manas-vijñāna 의식)은 유식유가행파를 비롯한 대승불교에서 마음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8식(八識: 8가지의 식) 가운데 하나로 제7식(第七識), 제7말나식(第七末那識) 또는 말나(末那)라고도 한다. 말나는 산스크리트어 마나스(manas: 意) 또는 마나스 비즈냐나(manas-vijñāna: 意識)를 음역한 것으로 의(意)라고도 의역된다.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 mano-vijñāna)과 구별하기 위해서 의역인 의(意)라고 하지 않고 음역을 사용하여 말나(末那)라고 하는데, 《유가사지론》 · 《현양성교론》 등의 유식유가행파의 초기 논서와 진제삼장의 번역에서는 의(意)가 사용되고 있기도 한다.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에 따르면 말나식은 제8 아뢰야식을 소의(所衣)로 하여 성립된 식이며 또한 제6 의식(第六意識: 6번째 식)의 성립에 있어서 소의가 되는 식으로, 본질적인 성질은 끊임없는 사량(思量)이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를 이끌어 내어 현행하게 함으로써 현재적인 인식이 이루어지게 하고 생각과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말나식은 아뢰야식과 6식(六識: 6가지 식)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여 끊임없이 6식이 일어나게 하는 작용을 하는 마음이다.
말나식의 본질적인 성질인 사량(思量)은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긍정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전의(轉依: 질적 전환)를 득하지 못한 상태 즉 번뇌에 물들어 있는 상태의 염오식(染汚識)으로서의 말나식에서 사량은 오염된 자아의식 즉 자기중심주의로 나타나고, 반면 전의를 득한 상태 즉 번뇌가 정화된 상태의 청정식(淸淨識)으로서의 말나식에서 사량은 나와 남을 평등하게 보는 평등심(平等心)과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나타난다.
전의를 득하지 못한 상태 즉 아직 번뇌에 물들어 있는 상태의 염오식으로서의 말나식의 3성의 관점에서의 성질은 유부무기(有覆無記)로, 아뢰야식의 견분(見分: 의식작용)을 끊임없이 자신의 내적 자아[自內我]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오염된 자아의식으로 작용한다. 구체적으로는, 염오식으로서의 말나식은 항상 아치(我痴)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4번뇌 즉 4가지의 근본적인 번뇌성의 마음작용과 함께 일어나며, 이들 4번뇌 외에도 함께 일어나는 마음작용으로는 변행심소에 속한 5가지 마음작용 모두와 별경심소에 속한 혜(慧) 그리고 대수번뇌심소에 속한 8가지 마음작용이 있다. 이들과 4번뇌를 합하면 총 18가지의 마음작용이 염오식으로서의 말나식과 상응하여 언제나 함께 일어난다.
반면, 전의를 득한 상태의 말나식은 평등성지(平等性智, samatā-jñāna)로 질적 전환이 되어 차별심을 떠나서 나와 남을 평등하게 보고 대자비심을 일으킨다. 유식유가행파의 수행론에 따르면, 5위 중 제3위인 통달위에서 평등성지의 일부분이 증득되고 제5위인 구경위에서 불과(佛果)를 증득할 때 즉 성불(成佛)할 때 그 전체가 증득된다.-위키백과]

 

二者(이자) 相續相(상속상) 依於智故(의어지고) 生其苦樂(생기고락)

覺心起念相應不斷故(각심기념상응부단고)

둘째는 상속상이니, 지상에 의지하기 때문에 괴롭고 즐거음=苦樂을 느끼는 마음을 내어 생각(망념)을 일으켜 서로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속상(相續相)=앞의 지상을 바탕으로 애(愛)의 대상에 대하여서는 락수(樂受)를, 불애의 대상에 대하여서는 고수(苦受)를 일으켜, 이 인식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元曉 : 상속상이라는 것은 생기식(生起識)이요 식온(識薀)이다. 이것은 추분별이므로 모든 법을 두루 계탁하여 길이 상속하게 된다. 그리고 능히 애취(愛取)를 일으켜서 과거의 모든 행위를 인지(引持)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며, 윤생(潤生)을 얻게 한다. 이런 뜻으로 상속상이라고 한 것인데 이는 앞서 말한 상속심과는 다르다.

依於智란 것은 앞의 지상이 바탕이 되어 생기기 때문이다. 의지하는 바는 세상(細相)인지라 오직 사수일 뿐이나 능의(能依 ; 상속상-상속상이 지상에 의지하므로 상속상은 능의이고 지상은 소의이다)는 추상인지라 고락을 함께 일으키니 그 때문에 生其苦樂覺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소의인 지상은 안으로 반연하며 머물며 바깥 경계에는 계탁하지 않으므로 잠자는 것 같지만, 이 상속식은 안팎으로 두루 계탁하여 각관(覺觀)하여 마치 깨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覺心起念고 말한 것이니, 망념을 일으킨다는 것은 곧 법집분별(法執分別)이다.

* 心起念相應不斷故(심기념상응부단고) : 마음에 망념이 일어나 그 망념들이 서로 응하여 끊어지지 않음. 이는 경계(境界)가 실재라고 생각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니 지상(智相)에 의지하기 때문에 고락(苦樂)을 느끼는 마음을 내어 생각을 일으켜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제6식, 의식)” 우리는 분별, 생각을 끝없이 일으킵니다. 상속하지 않는 순간 우리의 육체는 죽은 것입니다. 끝없이 일어나는 이것을 의식이라고 합니다.]

[상속상은 ‘지(智)에 의하기 때문에 고락을 아는 마음(각심覺心)이 생긴다’고 설하고 있으므로 이는 분별지(分別智)를 기초로 하여 좋아하는(애愛) 대상에 대하여는 즐거움을 일으키고 좋아하지 않는(불애不愛) 대상에 대하여는 고통을 일으키는 그러한 인식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므로, 이를 상속상이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호오의 분별이나 고락의 수용(受容)은 그 각심(覺心) 즉 ‘알고 있는 마음’이 먼저 있으며, 대상의 명확한 인식은 그 뒤에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은 대상을 확실히 인식하기 전에 경험으로 축적된 경계심이 먼저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한적한 밤길을 홀로 거닐 때, 인식 대상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축적된 경험에 의하여 두려움(고수苦受)을 느끼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상속상의 작용 때문이다. 우리들의 인식은 먼저 대상을 확실히 인식한 뒤에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경험에 의하여 주관적으로 자기가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의 형태가 지속되어 온 것이다. 이와 같이 상속상은 인식되는 고락을 수용하여 이를 상속시키는 것으로서, 이를 ‘마음이 염(念)을 일으켜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염(念)은 망념을 말하는 것이지만 기억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며, 경험이 기억의 마음에 축적되는 것을 말하여 상속상이라 일컫는다.

이 상속상에 대하여 원효와 법장 모두가 상당한 혼선을 빚고 있는 것 같다. 원효는 이를 제7말라식으로 해석하고 있고, 법장도 여기서 7식이라는 말은 쓰고 있지 않지만, 뒤에 나오는 의식자 즉차 상속식(相續識)이라는 기신론의 의식(意識)부분에서 진체(眞體)의 오역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상속식을 인용하여 이를 나와 내 것을 분별하는 집취상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三者(삼자) 執取相(집취상) 依於相續(의어상속) 緣念境界(연념경계)

住持苦樂(주지고락) 心起著故(심기착고)

셋째는 집취상이니, 상속상에 의지하여 경계를 반연하여 생각하고,

애착을 일으켜 괴로움과 즐거움에 빠져 마음에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위의 상속상에 의해 일으킨 고와 락에 집착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는 좋아하는 것을 가지려 하는 것(貪)과 싫어하는 것을 버리려 하는 것(瞋)을 모두 포함한다.

* 著(착) : 着과 같음.

* 元曉 : 집취상(執取相)이라는 것은 곧 수온(受蘊)이니 식온에 의해 어기고 따르는 것을 분별하여 고락(苦樂)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依於相續 내지 住持苦樂이라고 한다.]

 

[집취상(執取相)을 밝히다. 상속상에 의지하여 경계를 반연하여 생각하고 고락에 머물러서 마음에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 다.(수受)” 이것은 느낌에 대한 설명으로 집취상은 느낌(수)을 모으는 것입니다. 애욕을 일으키는 첫 출발이 느낌(수)입니다. 색수상행식은 마음 작용의 근본 바탕을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느낌이 좋은 것은 계속 하려 하고 느낌이 안 좋은 것은 밀어내려고 하는, 이것이 애욕입니다. 애욕은 느낌(수)로부터 출발하여 모으려고 합니다. 수 다음에 취가 옵니다. 취는 좋으니까 모아서 내 곁에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

 

[집취상(執取相)은 앞에서 설명한 호오와 고락의 인식에 대하여, 즐거움의 대상은 지속시키려 집착하고, 고통의 대상은 피하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에서 ‘경계를 연염(緣念)한다’고 하는 것은 경계를 연으로 하여 망념을 일으켜 대상을 기억해 내는 것을 말한다. 원효는 이를 오온(五蘊)가운데 수온(受蘊)에 해당 시키고 있다. 고락을 유지시켜서 떼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四者(사자) 計名字相(계명자상) 依於妄執(의어망집)

分別假名言相故(분별가명언상고)

넷째는 계명자상(計名字相)이니, 허망한 집착에 의지하여 거짓 이름과 언설의 모양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계명자상(計名字相)=앞의 고락의 경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름과 말을 붙여 분별하고 그릇되게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위의 집취(執取)에 의해 일으킨 것을 진실로 믿고 거기에 시비(是非), 장단(長短), 호오(好惡), 미추(美醜) 등등의 이름을 짓고 분별하는 것.

* 元曉 : 계명자상(計名字相)이라는 것은 곧 상온(想蘊)이니, 앞의 수온에 의해 어기고 따르는 명언(名言)의 상을 분별하기 때문에 依於妄執 내지 名言相故라고 말한 것이다.]

 

[계명자상(計名字相)을 밝히다. 허망한 집착에 의지하여 가짜 명칭과 언설의 모양을 분별하기 때문이다.(상)” 수에 의해 이름과 모양을 만드는 것이 계명자상입니다. 어떤 느낌이 생기면 느낌에 의해서 이름도 만들고 모양도 만드는데 이것이 상입니다.]

 

[계명자상(計名字相)은 받는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하여 즐거움에는 집착을 일으키고, 괴로움에는 혐오를 일으키나, 그와 같은 경계에 대하여 망집으로 여러 가지의 이름과 말을 적용하고 이를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망집에 의하여 헛된 명자어구(名字語句)를 붙여 더욱 조잡한 아집을 일으켜 ‘이것이 산이다’ ‘저것이 강이다’라고 이름을 붙여 집착한다. 그러나 그렇게 집착해 보아도, 그렇게 이름 붙여진 산이나 강이 하나도 동일한 산과 강은 있을 수 없으며, 천차만별의 산과 강이 집착에 의하여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 이름 자체가 그 산과 강의 실상(實相)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산과 강’이라는 동일한 개념을 모든 산과 강에 적용할 뿐만 아니라 그 ‘산이나 강’ 이라는 이름과 개념이 그 산이나 강의 실체가 아닌 것이며, 단지 가명(假名)이기 때문에, 이를 본문에서 ‘망집(妄執)에 의하여 헛된 이름과 말의 상(相)을 분별한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원효는 이를 상온(想蘊)에 해당시키고 있다.]

 

五者(오자) 起業相(기업상) 依於名字(의어명자) 尋名取著(심명취착) 造種種業故(조종종업고)

다섯째는 기업상이니 계명자상에 의지하여 이름을 따라 가면서 집착하여 여러 가지의 업을 짓기 때문이다. 

 

기업상(起業相)=대상에 대하여 일상적인 행위를 일으키는 것으로, 계명자상이 의업(意業)임에 대하여 기업상은 신업과 구업이다. 이 업의 근저에는 번뇌가 있다 번뇌에 의해서 없을 일으키는 것이다.

 

[위의 계명자상(計名字相)에서 지어진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고 한정시켜 행위를 하여서 업을 일으키는 것.

* 元曉 : 기업상(起業相)은 곧 行蘊이니 상온이 취한 바의 명상(名相)에 의해 사수(思數)를 일으켜 선과 악을 만들기 때문에 依於名字 내지 造種種業故라고 말한 것이다.]

 

[기업상(起業相), 계명자상에 의지하여 이름을 따라 가면서 집착하여 여러 가지의 업을 짓기 때문이다.(행) 업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것들이 움직이고 활동하기 시작 하는 것입니다.]

 

[기업상(起業相)은 경계 대상에 대하여 일상적인 행위를 일으키는 것이다. 계명자상(計名字相)이 의업(意業)인 것에 대하여, 기업상은 신구(身口)의 두 업을 말한다. ‘명자(名字)에 의하여 이름을 찾고, 취착하여 여러가지 업을 만든다’라고 본문은 설명한다. ‘尋名取著=이름을 찾는다’는 것은 말로 표현된 대상을 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업(業)을 만든다’고 한 것은 말(口業)과 몸(身業)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六者(육자) 業繫苦相(업계고상) 依於業受報(의어업수보) 不自在故(부자재고)

여섯째는 업계고상으로, 업에 의한 괴로움에 얽매이 는 상이니,

기업상에 의지하여 과보를 받아 자재하지 못하기 때 문이다.

 

업계고상(業繫苦相)= 앞의 선악의 업에 의하여 계박(繫縛)되어 고락의 과보를 받는 것이지만, 특히 고(苦)를 받기 때문에 고상이라 한다.

 

[위의 기업상(起業相)에서 일으킨 행위 때문에 마음과 몸이 속박되어 자유롭지 못한 것.

* 元曉 : 업계고상(業繫苦相)이라는 것은 앞의 행온이 만든 업에 의해 삼유(三有 : 三界)와 육취(六趣)의 고통의 과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依業受報 不自在故라고 한 것이다.]

 

 [업계고상(業繫苦相),업에 의한 괴로움에 얽매이는 상이니, 기업상에 의지하여 과보를 받아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색) 각자의 모양이 만들어지는 것이 색입니다. 자기의 모양을 끝도 없이 만들어냅니다.

이와 같은 3세와 6추의 설명은 아뢰야식과 말라식, 의식, 오온에 대한 것입니다.]

 

[업계고상(業繫苦相)은 기업상(起業相)에서 업을 일으키면 그것을 원인으로 하는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결과가 나타난다. 그러한 업의 결과는 우리를 고통 속에 속박하여, 마음은 자유를 얻을 수 없게 된다.]

 

當知(당지) 無明能生一切染法(무명능생일체염법)

以一切染法皆是不覺相故(이일체염법개시불각상고)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무명이 능히 모든 염법을 내나니, 왜냐하면 모든 염법은 불각의 모양=不覺相이기 때문이다.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을 총결하다. 무명이 모든 염법을 내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염법은 불각(不覺)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12연기에서 무명이 일어나는 첫 움직임입 니다. 허공에 한 생각 일어나는 무명이 모든 것을 내는데 이것 이 12연기의 첫 회전입니다.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을 나누어서 설명했지만 근본적으로 무명으로 총결됩니다. 무지, 아집에 대해 알면 부처고 이것을 모르면 중생입니다. 우리는 무지하기 때문에 끝없는 아집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나(중생)입니다. 중생이나 부처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일심(一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존재하는 그대로 부처 세상입니다. 어두운 곳에 불을 켜면 밝아집니다. 밝음과 어두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같은 것입니다. 불이 있으면 밝았다가 불이 없으면 어두운것 뿐입니다. 그래서 관점에 따라 이 세상은 부처세계이기도 하고 지옥이기도 합니다. 있는 것은 그냥 그대로 존재 합니다. 이왕이면 부처세계에서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진리를 알면 우리가 걷는 한 발자국이 그 의미가 달라지고, 그 자체가 거룩해지고 어마어마해집니다. 무명을 깨트리고 거룩한 생각을 하는 순간 이 세상은 바뀌어집니다.]

 

[이상에서 삼세 육추를 설명하였으나, 결론적으로 이는 모두 염법(染法)의 상(相)이며, 이 염법의 원인을 근본무명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인간만사는 이 삼세 육추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결국 근본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이점을 ‘무명은 능히 일체의 염법을 낳는다. 일체의 염법은 모두 이 불각의 상이기 때문’이라고 설하고 있다]

* 不覺

不覺 根本 不覺
枝末 不覺
無明業相 무명으로 인해 마음이 동요함 아리야식
能見相 인식 작용이 있게 됨.
境界相 인식 작용 때문에 경계가 있음.

智相 애증, 염정, 선악의 분별 말나식
相續相 분별지에 따라 괴롭고 즐거운 느낌이 상속
執取相 경계에 애착을 일으킴.
計名字相 개념이나 관념을 만들어 분별함.
起業相 계명자상에 의해 의미부여, 한정시켜 행위
業繫苦相 업 때문에 제한이 있고 고를 받음.

 

- 枝末不覺(지말불각)의 三細(삼세)

復次依不覺故(부차의불각고) 生三種相(생삼종상) 與彼不覺(여피불각)

相應不離(상응불리) 云何爲三(운하위삼)

다시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세 가지 모양=相을 내어서,

근본 불각과 상응하여 여의지 않는다. 무엇을 그 셋이라 하는가?

 

[위의 근본불각에서는 불각과 각을 설명하였고, 여기서부터는 무명으로 인하여 마음이 동요하여 여러 심식 작용이 일어나서 업을 짓고 괴로움을 받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물처럼바람처럼]

 

[ “지말불각을 설하다. 삼세를 밝히다. 아뢰야식은 다시 불각( 不覺)에 의지하기 때문에 무명업상, 능견상, 경계상의 세 가지의 모양이 생겨서 불각과 더불어 상응하여 여의지 않는다. 육추를 밝히다. 말라식과 의식은 경계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 다시 여섯 가지의 모양을 낸다. 지상, 상속상, 집취상, 계명자상, 기 업상, 업계고상이다.”
처음 일으키는 그 마음, 그 상태를 아뢰야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아뢰야식이 처음 생기는 것이 무명업상, 능견상, 경계 상입니다. 근본불각에 어떤 불순한 오염된 망념이 일어나면 불각과 상응하여 무명업상, 능견상, 경계상 이런 것들이 생겨납니다. 이것들을 바탕으로 또 육추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이 지상, 상속상, 집취상, 계명자상, 기업상, 업계고상입니다. 이것들 이 제8식 아뢰야식, 말라식, 의식, 오온에 대한 설명이 됩니다.-통섭불교]

 

一者(일자) 無明業相(무명업상) 以依不覺故心動(이의불각고심동)

說名爲業(설명위업)

첫째는 무명업상이니, 깨닫지 못함=不覺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으로,

이를 업이라고 한다.

覺則不動(각즉부동) 動則有苦(동즉유고) 果不離因故(과불리인고)

깨달으면 움직임이 없지만, 움직이면 괴로움이 따르나니, 결과가 원인을 여의지 않는 까닭이다. 

 

 [“무명업상(無明業相)을 밝히다.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므로 업상이라고 한다. 깨달으면 움직이지 않고 움 직이면 괴로움이 있게 되니, 결과가 원인을 여의지 않는 까닭이다.” 제8식 아뢰야식의 첫째 단계이며 유식에서 무부무기(無覆無記)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끝없는 허공에 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제8식 아뢰야식의 첫 출발점입니다. 끝없는 허공 속에 하나의 망념이 일어

나는 것이 바로 무명업상입니다. 깨닫고 알면 성성적적하지만 모르면 움직이고 요동합니다. 마음이 끝없이 요동하는 것은 무명, 무지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끝없는 번뇌망상을 일으킵 니다. 움직임으로부터 생노병사가 일어납니다. 깨닫고 움직이지 않으면 생노병사를 아는 것이고 모르고 움직이면 끝없는 생노병사 속에서 고통받으며 헤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각으로 부터 출발해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무명이라는 점을 찍었기 때문에 괴롭고 생노병사를 끝없이 되풀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허공에 첫 망념이 일어나는 것이 무명업상입니다. 처음에 무엇인가 움직임이 있기 시작하는 그 무명이며 제8식 아뢰야식의 첫째 단계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식에서 제8식을 무부무기라고도 합니다. 제8식 아뢰야식을 감지하는 것이 견성입니다. 마음의 미세한 움직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은 공부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본각 또는 진여는 움직임(흔들림)이 없다. 진여를 여실히 본 사람 또한 움직임이 없으나 무명으로 인하여 심식이 움직이게 된다. 동(動)이란 심식이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12연기로 본다면 무명으로 인하여 행(行)이 있는 것이다. 아직은 주․객이 분화되지 않는 상태이다. 업상(業相)

* 果不離因(과불리인) : 각(覺)과 부동(不動), 동(動)과 유고(有苦)는 각각 인(因)과 과(果)를 이룬다.

* 元曉 : 움직임을 일으킨다는 뜻이 바로 업(業)의 뜻이니, 心動 說名爲業이라고 한 것이다. 覺則不動이란 반대를 들어서 나타낸 것이니, 시각을 얻을 때는 곧 동념(動念)이 없는 것이다. … 動則有苦란 것은 적정(寂靜)을 얻으면 곧 극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움직이면 곧 고통이라고 한 것이다.]

 

二者(이자) 能見相(능견상), 以依動故能見(이의동고능견) 不動則無見(부동즉무견)

둘째는 능견상이니, 움직임에 의지하기 때문에 능히 볼 수 있게 되며,

움직이지 않으면 보이는 것이 없다. (봄이 없다.)

 

[이를 12연기에서는 식(識)이라고 한다. 이는 주관이다. 견상(見相), 전상(轉相)

* 元曉 : 능견상이라는 것은 곧 전상(轉相)이니, 앞의 업상에 의해 점차로 능연(能緣)을 이루기 때문에 以依動能見이라고 한 것이다. 성정문(性靜門)에 의한다면 능견이 없기 때문에 不動則無見이라고 말한 것이니, 도리어 능견이 움직임에 의지하여야 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이 전상이 비록 능연이 있으나 반연하는 바의 경계상을 아직 나타낼 수 없으니, 이는 다만 밖으로 향하는 것일 뿐, 경계에 의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憨山 : 능견상을 전상(轉相)이라 하는 이유 - 진여를 본각의 실지로 관조한다면 본래 주관인 능견상과 객관인 경계상의 대립 의존이란 없다. 그런데 지금 실지(實智) 자체인 일심진여를 불각심으로 미혹하여 진여가 무명으로 전변하여 허망한 견해의 모습[능견상]이 되었고 이 때문에 허망한 견해로 보는 모습[경계상]이 있게 되었다. 일심진여가 무명으로 인해 전변한다는 뜻에서 전상이라고 하였다.]

 

[“능견상(能見相)을 밝히다. 움직임에 의지하기 때문에 능히 볼 수 있게 되며, 움직이지 않으면 보이는 것이 없다.” 제8식 아 뢰야식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무명업상은 나와 대상,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기 전의 상태입니다. 그 다음 주체적으로 생각을 일으키게끔 주체적인 형상을 만들게 하는 것이 능견상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적적하면 눈에 안띄이는데 움직이면 보입니다. 이 능견상은 움직임에 의지하기 때문에 보입니다. 모든 것은 움직여야 보이는데 성성적적한 삼매에 들면 그 무엇이라도 볼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귀신이나 저승사자같은 초자연적 존재들이 그것을 감지할지도 모릅니다. 삼매에 들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되고 이러한 상태가 견성입니다.]

 

三者(삼자) 境界相(경계상) 以依能見故(이의능견고)

境界妄現(경계망현) 離見則無境界(이견즉무경계)

셋째는 경계이니, 봄 때문=능견상에 의지하기 때문에 경계가 허망하게 나타나므로

봄=能見을 여의면 경계가 없어지게 된다. 

 

[元曉 : 경계상이라는 것은 곧 현상(現相)이니 앞의 전상에 의해 경계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能見故 境界妄現이라고 말한 것이다.

* 봄의 대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12연기의 名과 色이며, 객관이다. 이는 객체 그 자체가 아니라, 주관에 의해 물든 상태로 나타난다. 현상(現相)]

 

[“경계상(境界相)을 밝히다. 능견상(能見相)에 의지하기 때문에 경계가 허망하게 나타나므로 능견(能見)을 여의면 경계가 없어지게 된다.” 제8식 아뢰야식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여기서는 주관에 의해 대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주체가 삼매에 들면 대상은 없어지게 됩니다. 나의 마음이 움직이면 세상도 따라 존재하지만 내가 삼매에 들어 능견을 여의게 되면 보이는 모든 대상, 경계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들은 근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근본의 마음에서도 이 세상에 보이는 세계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근본불각을 말하며, 불각이 발생한 그 자체를 말하며, 불각이 어찌하여 생기는 가를 밝히고 있다.
불각의 기원에 대하여 본문은 ‘있는 그대로의 진여가 하나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 그러한 망념이 있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한 망념’에서 ‘그러한’이란 불각을 말하는 것이므로 망념은 바로 불각이다. 망념은 바로 ‘나와 너’를 분별하는 것이므로 마음이 주관과 객관으로 나뉘어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진여의 법이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서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에서 마음은 불각이지만 ‘진여의 법이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 근원자체’는 불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불각을 일으키는 힘은 불각과 같은 성질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불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것까지 불각으로 삼는다면 그 힘의 또 다른 근본까지를 불각으로 삼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각과 그 이전의 관계는 마치 잠자고 있는 사람이 눈을 뜰 때와의 관계로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눈을 뜨는 힘은 이미 잠자는 사람 속에 있기 때문에 눈을 뜨는 것이다. 그러나 ‘잠을 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잠을 깬 다음의 문제이다. 이와 같이 불각도 마음의 활동이기 때문에, 망념이 일어난 순간부터가 불각이다. 우리가 매일 아침 눈을 뜨지만 눈 뜨기 전의 마음의 작용은 알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망념은 불각이지만, 그러나 망념을 만든 힘은 불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불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불각적인 힘을 기신론에서는 무명이라고 한다. 그러면 불각의 시원(始原)을 넓은 뜻으로는 무명도 불각이지만, 그러나 무명은 불각의 시원으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기신론에서는 불각을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근본불각은 지금까지 설명한 불각 그 자체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며, 지말불각은 불각이 어떠한 순서로 전개되어, 우리의 인식 세계가 성립하는가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점도 기신론의 특색으로 꼽히는 한 구절이다.
각과 불각의 의미를 살펴보면, 각은 그 심체(心體)인 진여에서 망념이 떠나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면, 불각은 진여(眞如)의 법이 하나라는 것을 여실(如實)히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데서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심진여(心眞如)는 일상(一相)으로서 보는’ 주관과 ‘보이는’ 객관의 분별이 없는 것이지만 무명의 작용에 의하여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실히 알지 못한다’는 말은 무명의 작용으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무명은 시작이 없는 영원 속에서 본각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무명은 체(體)가 없는 것이므로 그 무명을 시원(始原)으로 나타난 망념도 체가 없어 본각을 의지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염(念)에는 스스로의 상이 없어 본각을 떠나지 못한다’고 설하여, 망념의 존재가 본각을 의지하여 함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불각의 작용은 본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본론에서 이 관계를 길 잃은 사람과 미리 정해진 길의 방향과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그와 같이 중생에는 깨우치는 각이 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불각이 있는 것이다. 이 각성(覺性)을 떠나서는 불각 역시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불각은 각의 본성을 떠나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참된 깨달음(진각眞覺)을 말하는 것은 불각의 망상심, 즉 망념이 있기 때문에, 이 불각과의 관계 아래에서 비로소 말해지는 것이다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진여의 이름과 의미를 알고 진여본각(眞如本覺)을 설명할 수가 있다. 만일 불각의 마음이 없다면, 진여본각의 의미를 나타내지도 못할 것이다. 진여본각은 절대적인 것이므로 그것 자체로서는 자상(自相)을 설할 수 없는 것으로서, 불각과 비교하여 비로로 각의 존재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각에 의하여 각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은, 불각이 수연(隨緣)진여에 의하여 일어나며, 불각에는 별도의 체가 없는 것이므로 불각을 고찰함으로서 그것으로 진여를 밝히는 것이 된다.- 전종식]

 

[ 불각 개념의 독특성
대승기신론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아뢰야식을 기능(義, function)으로 나눌 때, 깨달음(覺, 이하 각)과 동급으로 깨닫지 못함(不覺, 이하 불각)을 제시하고 설명한다는 점이었다. 불각이 설명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일반 상식과 배치되는 면이 있다. 세간에서 불교에 대해서는 윤회, 열반, 깨달음, 또는 불성 같은 개념들이 이야기 되고 소비된다. 즉 어떻게 하면 불교적 이상을 달성할 수 있는지가 불교에 대한 논의의 주제인 경우가 많다. 반면 그런 종교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반대되는 행위는, 바람직한 행위의 부재라는 반(anti)-개념으로만 제시되곤 한다. 다른 종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사상적으로도 반-개념의 지위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악이란 선의 부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선의 부재인 악은 그 자체로서 어떤 기능을 할 수 없다. 선의 부재는 한시라도 빨리 종교적 선으로 채워저야 할 대상일 뿐이다. 혼란은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를 가진다기보다, 신의 선한 뜻에 따라 바로잡아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의 본론에서는 불각을 각과 동일한 수준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상식이나 여타 종교와도 구분되는 독특성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불각은 각과 단순히 동급일 뿐 아니라, 각과 함께 모든 다르마를 포섭하고 생성한다(攝一切法生一切法). 각만으로는 모든 다르마를 포섭하거나 생성할 수 없다. 따라서 불각은 단순한 각의 부재일 수 없으며, 능동성을 지닌 개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sookiwi]

• 不覺(불각)

[되새김=진여(眞如),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여래장(如來藏), 각(覺) =이들은 동일한 것을 일컫는 말이지만 있는 자리가 달라서 명칭을 달리한다.

진여(眞如)는 심(心)진여이므로 마음을 떠난 것은 아니지만 진여는 이(理)의 뜻이 강한 진리의 자리로 표현되고 있고,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은 진여를 인격화한 것으로, 인격으로 나타나 진여이다. 심진여는 마음의 본성이므로 그것을 개인적인 마음의 차원에서 고찰하면 그 본성이 청정하므로 자성청정심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음의 본성이 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진여라고 하면 이(理)의 측면이 강하지만 마은은 지(智)의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기신론에서는 이(理)와 지(智)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입장에서 설하고 있다. 이(理)가 지(智)로서 활동한다고 보는 것이 기신론의 특색이다. 지(智)는 이(理)의 발현이므로, 깨달음의 지(智)즉 불지(佛智)가되고 여래의 법신(法身)이 된다.

심진여에서 자성청정심으로 생각을 진전해 가면 이와 같은 이(理)의 인격화, 이(理)가 지(智)로서 활동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마음의 차원이지만 또한 마음의 본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여기서는 번뇌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있어서 ‘여래의 법신’이라 불리는 것이다. 순수 청정한 입장에서 마음을 보고 설하는 것이다.

여래장(如來藏)번뇌에 에워싸인 상태의 자성청정심이다. 그래서 비일비이(非一非異)의 아리야식을 설하게 된다.

기신론의 아리야식(阿梨耶識)은 유식설의 아뢰야식(阿賴耶識)과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유식설은 처음 출발점을 아뢰야식부터 설정하고 진여가 결론으로 되어 있으나, 기신론은 진여가 출발점이 된다. 기신론의 아리야식은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으로서 망심(妄心) 망념(妄念)이면서 그 본성은 자성청정심이다. 진망화합식이라 하더라라도 이원론(二元論)이 아니고 전체가 망식(妄識)이면서 동시에 그 전체가 심성(心性)으로는 청정한 것이다. 이것은 식(識)이므로 주체적이고 자각적으로 인식하는 생활의 주체로서 마음을 보게 된다. 자성청정심이나 여래장은 인격적이기는 하지만 아직 주체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자기의 인식을 문제로 할 때는 심성(心性)보다 번뇌가 표면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아집(我執)과 아견(我見)을 중심으로 한 자기가 주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자성청정심이 아리야식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주체(主體)라는 입장에서 심성을 생각하여 각(覺)과 불각(不覺)의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각과 불각은 자각(自覺)적인 것이고 주체적인 것이다. 현재의 미혹으로부터 탈출하는 관점에서 자성청정심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문제로 하여 각과 불각의 문제가 있게 된다. 현실에 있는 미혹의 자기는 불각의 자리에 있는 것이나 그 불각 속에서 그 불각을 부정하는 각(覺)의 활동이 자각되기 때문에 수행의 문제로서 시각이 설해지는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각의 바탕에 본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불각(不覺)은 아리야식의 두 가지 뜻 가운데 하나이다. 아리야식을 미망(迷妄)의 측면에서 보면 전체가 미망이고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불각의 아리야식이다. 그러나 이 아리야식 속에는 그 불각을 때뜨리려는 각(覺)의 힘이 있는 것이니, 환멸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아리야식은 깨달음을 위한 주체(主體)가 된다.

불각은 바로 우리 인식의 세계이며, 그 인식의 미망(迷妄)성 그리고 아집을 기초로 한 인식을 불각이라고 이름한다. 여기에서 인식이라고 하면 각과 불각이지만 존재로서는 아리야식이므로, 그 아리야식의 성격으로서 각과 불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각과 불각은 마음의 활동이다. 무명에 의하여 망념이 일어난 시점이 바로 불각이지만, 그것은 바로 각의 시점이기도 한 것이다.

불각에는 근본불각(根本不覺)과 지말불각(枝末不覺)으로 나누어지며, 근본불각은 불각이 생긴 근본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 불각이 근본무명에 의한 것이므로 근본무명은 불각의 시원(始原)이 된다. 넓은 의미에서는 근본불각을 근본무명이라고도 한다. 지말불각은 불각자체인 근본불각이 어떠한 순서로 전개되어, 우리의 인식 세계가 성립하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며, 근본무명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설해지고 있는 근본불각은 불각의 체(體)를 밝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불각에는 각과 동일한 의미로서의 체(體)는 없는 것이다. 각의 체(體)는 진여이고 자성청정심으로서, 각이 귀일(歸一)하는 체가 있으나, 불각은 무명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므로 무명이 본래 체가 없다면 불각 역시 체가 없는 것이다. 무명과 불각은 각의 체인 진여를 가체(假體)로 하여 무시이래 화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근본 불각은 불각이 생긴 자체를 말하고 지말불각은 그로부터 나타나는 불각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전종식]

 

  - 根本不覺(근본불각)

所言不覺義者(소언불각의자) 謂不如實知眞如法一故(위불여실지진여법일고)

不覺心起(불각심기) 而有其念(이유기념) 念無自相(념무자상) 不離本覺(불리본각)

이른바 불각의 뜻이란 진여법이 하나임을 참답게 알지 못하는 것으로 이로써 불각심이 일어나 망념이 있는 것을 말하며,

그 생각(망념)이란 독립된 모습=自相이 없어서, 본각과 여의지 않으며, 

 

[앞에서 무명의 바람이 불어 자성청정심이 작용을 일으켜 심식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파도가 바닷물을 떠나 존재할 수 없듯이, 망념 또한 진여를 떠나 독립된 모습이 없다.-물처럼바람처럼]

 

猶如迷人(유여미인) 依方故迷(의방고미) 若離於方(약리어방) 則無有迷(즉무유미)

마치 방향을 잃은 혼미한 사람은, 방향에 의지하기 때문에 혼란스런 것과 같으니, 만약 방향을 여읜다면 혼미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元曉 : 옳다고 주장하는 동쪽의 개념을 여읜다면 다시 잘못된 서쪽의 개념도 없다. 그러므로 念無自相 不離本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衆生亦爾(중생역이) 依覺故迷(의각고미) 若離覺性(약리각성) 則無不覺(즉무불각)

중생 또한 그와 같아서, 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미혹었지만, 만약 각의 성질=覺性을 떠나면 불각은 없어지게 된다.

 

以有不覺妄想心故(이유불각망상심고) 能知名義(능지명의) 爲說眞覺(위설진각)

若離不覺之心(약리불각지심) 則無眞覺自相可說(즉무진각자상가설)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명칭과 의의=名義를 알아서 진각을 말하게 되는 것이며,

만약 불각의 마음을 떠나면 진각이라고 말할 만한 자체 모습=自相도 없게 된다.

 

[能知名義(능지명의) : 말과 뜻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망상과 망념을 쉬면된다. 그런데 망상의 마음 때문에 따로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깨달음이라는 이름과 그 뜻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참다운 깨달음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설명을 하게 된다.

* 앞에서 모든 심식(心識)이 다 무명이라고 하였다. 바른 방향이 무엇인가라는 분별심을 놓아버리면 잘못된 방향이 없는 것처럼 분별 망상심을 떠나면 그대로 진여본각이 된다. 그런데 진여란 여실공(如實空)이어서 뭐라고 말한 만한 것이 없다.

* 元曉 : 본각도 불각을 기다린다다는 것을 밝혔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에

以有不覺妄想心故은 무명이 일으킨 망상의 분별이니, 이 망상으로 말미암아 명의(名義)를 알기 때문에 언설(言說)을 두어 진각(眞覺 )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진각이라는 이름이 망상에 상대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만약 불각을 여의면 설명할 만한 진각의 자체 모습은 없는 것이니, 이것은 진각이라고 말하는 바가 반드시 불각에 상대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만약 상대하지 않는다면 자상이 없으며 다른 것을 기다려서 있는지라 또한 자상이 아니니, 자상이 이미 없는데 어찌 타상(他相)이 있겠는가?

* 憨山 : 이 불각은 바로 진여각성이 전체로 성립한 모습이기 때문에 만약 불각의 망상심을 떠난다면, 불각에 상대되는 개념인 진여 각성의 그 자체 모습을 따로 설명할 수 없다. 이 무명 불각이 바로 본각과 분리하지 않는 상즉관계이기 때문에 중생이 일념에 본각의 광채로 돌이키기만 하면 즉시 본래 지녔던 본각과 동일하다. 그 본각이 무념임을 알면 즉시 진여법신을 증득하게 된다.]

 

[일심 속에는 깨달음의 진여의 세계와 깨닫지 못한 생멸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고 있는 그대로가 부처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우리가 추구하는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형태 그대로가 부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선한 마음 70 악한 마음 30을 내면 70 만큼의 부처가 됩니다.
깨달음의 세계도 있지만 깨닫지 못한 세계도 있습니다. 깨닫지 못한 이 세계(불각의)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요. 근본불 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의 첫 출발점은 바로 무명입니다. 무명이 중생들의 삶에 스며들어 모든 중생은 지말불각의 삼세와 육추의 형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을 총결해서 말하면 진여가 무명에 오염되면 생멸심이라는 것입니다.
학문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주어진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면 공부하기 수월합니다. 세상은 나와 나 이외의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관이면 대상은 객관이 되고, 내가 주체면 대상은 객체가 되고, 내가 견분이면 대상은 상분이 되고, 내가 능견이면 대상은 소견이 되고, 내가 능변이 되면 대상은 소변이 되고, 내가 능의가 되면 대상은 소의가 되고, 내가 능취가 되면 대상은 소취가 되고, 내가 능연이 되면 대상은 소연이 됩니다. 나를 주체로 할 때는 주, 견, 능이고 대상을 주체로 할 때는 객, 상, 소가 됩니다. 어느 학문을 하건 주체와 객체의 개념은 다 같습니다.
앞서 불각에는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말불각에는 3세(細) 6추(麤)가 있으며 3세에는 업상(業相, 主客 未分), 능견상(能見相, 주관), 경계상(境界相, 객관)이 있고 6추에 는 지상(智相), 상속상(相續相), 집취상(執取相), 계명자상(計名 字相), 기업상(起業相), 업계고상(業繫苦相)이 있습니다. 3세 부분은 제8식 아뢰야식의 내용입니다. 6추, 거친 것에는 지상(智相)이 있는데, 이 지상은 아뢰야식을 바탕으로 내 생각, 분별심의 뿌리인 제7식 말라식에 해당합니다. 나머지 5개의 거친 것은 전오식, 생기식(生起識), 제6식 의식에 해당합니다. 상속상은 현재 의식을 가리킵니다. 집취상은 수, 계명자상은 상, 기업상은 행, 업계고상은 색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오온(五蘊)입니다. 유식에서는 색수상행식이었는데 여기서는 순서가 약간 다릅니다.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문제입니다.
불교에서 시간적인 관점에서 존재에 대한 속성은 무상이었고, 공간에 대한 존재에 대한 속성은 무아였습니다. 공간에서 모 양이 생기는 것들은 전부 다 오온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불각에 대한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라 유식의 오온, 제6 식, 제7식, 제8식에 대한 설명들입니다.

유식에서는 안혜 논사, 난타 논사, 진나 논사, 호법 논사의 견해를 통해 아뢰야식을 어떻게 분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안혜 논사는 아뢰야식을 일분(견분) 하나 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난타 논사는 아뢰야식을 견분, 상분이라고 주장했고, 진나 논사는 아뢰야식을 견분, 상분, 자증분이라고 설명했고, 호법 논사 는 견분, 상분, 자증분, 증자증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가운데 안혜 논사와 호법 논사의 견해가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3세 가운데 능견상, 경계상은 업상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안혜 논사는 일분 즉, 하나라고 주장했습니다. 빅뱅 이후 우주가 생겨났다고 이야기하듯이 처음 분리되기 이전의 점을 업상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기 전입니다. 난타 논사는 객관과 주관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상태에 주목했기 때문에 견분, 상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진나 논사는 여기서 더 나아가 견분과 상분 사이에서 둘을 조정, 관리하는 자증분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병에 걸렸을 때 무언가를 먹어도 낫지 않는 경우가 있습 니다. 여기서 먹는 것을 중지하면 스스로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작용을 하는 것이 자증분입니다. 호법 논사는 이 세 가지 를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적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증자증분의 개념을 추가합니다. 자증분의 자가 치유 능력이 한 부분에 해당한다면 증자증분은 전체 시스템에서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낙동강의 원천을 알아 보니 태백시 매동산 너덜샘에서 발원하여 황지연못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이 흘러 흘러 제 7식을 만들고 우리의 삶을 만들어냅니다. 우리에게는 큰 강과 같이 수많은 업들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업들의 출발점이 아뢰야식입니다.
 “근본불각을 설하다. 불각(不覺)의 뜻은 진여법(일심)이 하나 임을 여실히 알지 못해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서 망념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망념은 자상(自相)이 없어서 본각을 여의지 않지만, 방향을 잃은 사람은 혼미하게 된다. 만약 방향을 여읜다면 혼미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와 같아서 각(覺)에 의지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지만, 만약 각의 성질을 여의면 불각은 없어지게 된다.” 무명에 물들면 불각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망념이란 이 무명에 의해 일어나는 생각들입니다. 이것들이 진여의 세계에서 불각의 세계로 넘어오게 만듭니다. 망념은 자상(自相)이 없다는 뜻으로 주체적인 모양이 없다는 말입니다. 망념은 기생해서 사는 형태입니다. 본각(일심)이 물들면 불각이 되지만 본각 자체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각을 여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망념 자체는 주체적인 모양이 없기 때문에 본각과 같은 주체적인 하나의 모양이 없습니다. 원래 본각 하나 밖에 없습니다. 무명이 무엇인지 알고 깨우쳐버리면 본각이고 이것을 모르고 무명에 물들어 있으면 불각인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알든 모르든 중생도 부처의 세계에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내가 물들어 있지만 본각을 여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그냥 본각이 있는 것 입니다. 우리가 중생마음을 일으키지만 그것의 원래 모양은 본각이며 진여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방향을 잃은 사람은 혼미하게 된다. 만약 방향을 여읜다면 혼미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이 말을 비유해서 설명하면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있어 이 음식도 먹고 싶고 저 음식도 먹고 싶어 방향을 잃고 혼미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식 자체가 없어지면 혼미함도 없어집니다. 방향이 있으면 방향을 잃을 수 있지만 방향이 없으면 방향을 잃을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망념이 이러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각을 생각할 때 그 대상이 되는 불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각과 불각 자체를 생각하지 않으면 불각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견성이나 진여와 같은 각을 생각하지만 사실은 있는 자체가 각이며 불각인 것입니다. 각과 불각은 원래 일심으로 하나다라는 생각을 하면 불각에 의해 혼미해지는 일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명칭과 의의[名義]를 알아서 진각(眞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만약 불각의 마음을 여읜다면 진각의 자상(自相)도 없게 된다.” 우리는 불각이라는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명칭과 의의에 의해 진각이라고 말합니다. 불각이 있기 때문에 불각에 대응하는 진각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불각이 없어지면 우리가 진각이라고 설정하는 형태도 같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분법(二分-法)의 논리가 아니라 똑같이 하나라는 말입니다. 만약 내가 견성한다는 다른 하나를 설정하면 견성과 불각이 두 개로 나누어집니다. 하지만 원래 존재하는 것은 일심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분리된 이원의 세계가 아니라 오직 하나로써 모든 것이 회통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통섭불교]

 

[불각에 대한 원효 해석의 타당성
원효의 불각에 대한 해석의 핵심적 전략은 불각을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 전략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본문의 해석을 돕는다. 첫 번째로는 본각, 시각, 불각의 모호한 관계를 깔끔하게 도식화 시켜준다. 근본불각을 본각과 짝짓고 지말불각을 시각과 짝지어 앞에서 소개한 것 처럼 해석한다면 명쾌해진다고 보는 것 같다. 두 번째로는 불각으로 인한 현상을 지말불각으로 정의하여 불각의 일부로 포함시킬 수 있다. 이러한 사고의 기저에는 불각의 현상 또한 불각으로 불러야 합당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깨닫지 못함이라고 말할때는, 실제로 특정 대상을 아직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한다. 따라서 일상적 용법에서의 불각은 현상에 보다 가깝다. 하지만 대승기신론에서 불각을 그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원리로 승격시켜 전개하기에 독자가 읽으며 혼란스럽기 쉬운 문제가 있다. 따라서 원효는 일반적으로 불각이라고 불리는 불각에 의한 현상 또한 불각의 정의에 포함될 수 있다고하여, 철학적 개념의 재정의가 가질 수 있는 혼란을 축소하려는 시도를 한 것 같다.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뢰야식 하에서 본각, 시각, 그리고 불각의 관계를 정의하는 부분에서 불각은 아뢰야식의 기능을 각과 함께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원효가 볼 때 각 자체가 어떤 현상이라기보다 깨달음을 얻는 원리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불각 또한 그에 걸맞는 추상적 원리로서의 지위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불각은 단순히 각의 부재가 아니라, 각과 함께 현상을 낳는 원리로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각의 원리적 해석에 의해, 각과 불각은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성립될 수 있으며 다음의 본문이 해석 가능해진다. “依覺故迷若離覺性則無不覺 (…) 若離不覺之心則無真覺自相可說”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각을 단순히 원리적 개념으로만 두게 되면 그 이후에 나오는 본문이 완전히 해석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원효는 생각하였던 것 같다. 불각에 의해 발생하는 세가지 마음의 상태(依不覺故生三種相)를 원효는 지말불각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일상적 개념으로 보았을때 깨닫지 못함 그 자체이다. 움직이는 마음이 카르마로 인함을 깨닫지 못하고, 그러한 마음이 있다고 잘못 인지해버려 깨달음에서 멀어지고, 인지된 마음에 의거해 인지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오류를 범해 또다시 깨닫는 것이 요원해진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흔히 깨닫지 못함, 즉 불각으로 부르게 된다. 하지만 대승기신론에서의 불각은 보다 상위의 원리적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혼란을 피하고자 원효는 이러한 마음을 지말불각으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원효의 이런 친절이 과도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원효의 해석을 떼어놓고 본문만 보았을 때, 본문은 불각이라는 용어를 중복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 보다 불각은 각에 대응되는 개념으로서, 원리적인 의미로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다. 불각으로 인한 세가지 마음의 상태를 언급할 때, 본문은 분명히 그것들이 불각에 의존하고 불각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지, 불각 그 자체라고 말한 적이 없다(依不覺故生三種相). 만약 원효가 주장하는 것 처럼 세가지 마음의 상태가 (지말)불각이라면, 의존한다(依)와 생겨났다(生)는 동사가 같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의존한다는 것, 생겨난다는 것은 의미적으로 적어도 두 가지의 구분된 존재를 상정할 수 있게 한다. 의존의 주체와 객체, 생겨나는 것의 주체와 객체는 보통은 다르며, 조금 양보해보아도 반드시 같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불각, 시각, 본각의 관계를 지말불각의 도입이 보다 명확하게 도식화하는 것도 같지만, 굳이 지말불각 없이도 세 개념의 관계는 도식화될 수 있다. 불각과 본각이 서로 상호 대립적이지만 의존적인 관계라는 것은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개념이 단어의 의미적으로 완전히 구분되어 공통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두 개념이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고 할 때, 한 개념이 다른 개념에 의존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나아가 그러한 두 개념이 합쳐저 하나의 아뢰야식의 기능을 이룬다는 것이 가능한가? 어떤 두 가지가 상호작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공간, 시간, 속성, 본질 등)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 시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시각이 두 개념을 잇는 다리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불각은 시각을 통해 본각에 의존하며, 본각은 시각을 통해 불각에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각 자체가 불각과 본각을 연결하기 위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시각은 불각과 본각에 의존적이다. 이런 해석 하에서도 세 개념은 상호의존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개념의 구조적 설명력을 높인다는 목적으로 시각과 지말불각을 도식적으로 짝지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원효가 지말불각과 근본불각을 구분한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지말불각이 굳이 도입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되었다. 본문은 불각을 원리적인 의미로만 명확히 사용하며, 현상에 대해 이야기 할때는 불각으로 인한 것이라는 표현을 분명히한다. 그리고 지말불각 없이도 본각, 시각, 불각의 관계는 이미 충분히 구조적으로 의존적일 수 있다. 따라서 원효의 개념적 구분이 오히려 대승기신론 본문의 불각의 개념을 보다 어렵게하는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여지는 있을 것이다.- sookiwi]

三者(삼자) 法出離鏡(법출리경) 謂不空法(위불공법)

出煩惱礙智礙(출번뇌애지애) 離和合相(리화합상) 淳淨明故(순정명고)

셋째, 법에서 멀리 떠난 거울=法出離鏡이니, 말하자면 비지 않는 법=不空의 법을 말함이다.

이는 번뇌애와 지애를 벗어나 생멸의 화합상을 여의어, 순전히 깨끗하고 밝은 때문이다.

Thirdly, it is the mirror that is absolutely free from the two impediments, the Pure nature of suchness, is the law of the Absolute and Pure wisdom.
It is free from the concepts of birth and death by being out of the two impediments, which one is the attachment to 'I' as an immortal, and the other is misconception about substance, therethrough to be pure and clean.

 

[법출리경(法出離鏡)= 법을 여기서는 번뇌에서 벗어난 법, 즉 진여를 말한다. 체대와 상대를 합한 법신을 의미한다. 번뇌장(煩惱障)과 지장(知障)을 출리(出離)시킨 본각을 거울에 비유한 것. 따라서 앞에서의 지정상(智淨相)과 같은 것이다.

번뇌애(煩惱碍) 지애(知碍)= 번뇌장과 지장. 지장(知障)을 소지장(所知障)이라고도 한다. 기신론에서는 번뇌애는 근본업불상염 등 육염(六染)을 말하고 지애(知碍)는 육염(六染)의 의지처인 무명(無明)을 말한다.

화합상(和合相)=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智識) 상속식(相續識) 등 진망화합식의 상을 말함.

 

소지장: 사물의 참모습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하는 장애.

번뇌장 (煩惱障)= 인간의 몸은 5온 (五蘊)이 화합한 존재에 불과한 것인데 영구성 (永久性)있는 ‘나’하고 집착하는 번뇌. 128근본번뇌와 20수번뇌.

 

[煩惱礙(번뇌애) : 번뇌장(煩惱障) 같은 말이다. 아집으로 인해 인식 주관을 어지럽혀 열반을 방해하는 번뇌이다.

智礙(지애) : 소지장(所知障) 같은 말이다. 인식된 현상에 집착하여 일어나 보리를 방해하는 번뇌.

和合相(화합상) : 아리야식을 말한다.-물처럼바람처럼]

 

[법출리경(法出離鏡)은 법에서 멀리 떠나는 거울이니 공하지 않는 법이다. 불공법(不空法)이 번뇌애(煩惱礙)와 지애(智礙)를 벗어나고 화합상을 여의어 순박하고 깨끗하고 밝은 까닭이다.”  인(因)에 의해 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훈습경에 의해서 인이 많이 훈습되었습니다. 그래서 법에서 멀리 벗어나며, 법에서 멀리 떠났으니까 이 세상에 이런 모양을 갖고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입니다. 법에서 멀리 떠났기 때문에 진여 자체의 모양이 아닙니다. 즉 금이 아니라 금목걸이의 모양을 갖추어가는 것입니다. 물들고 멀리 떠나 공하지 않지만 체 자체는 깨끗하고 순박하고 밝습니다. 중생 속에 있지만 중생의 삶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원효나 유마와 같은 사람들이 법출리경에 해당된다 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형상화되는 과정이 법출리경입니다.-통섭불교]

 

[세 번째 거울에 비유한 성정본각의 성격은 법출리경(法出離鏡)이다. 이는 무명번뇌로부터 벗어난 본각(本覺)을 거울에 비유한 것이므로 이를 정경(淨鏡)이라 하기도 한다. 즉 영원한 무루의 성공덕(成功德)을 갖추고 있는 불공(不空)의 본각은 온갖 번뇌의 장애와 그 번뇌의 근본인 무명의 지장(知障)에서 벗어나, 아리야식의 진망(塵網) 화합의 상을 떠남으로서, 본각의 덕이 나타나고, 순수 청정한 지혜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는 수염본각(隨染本覺)의 지정상(智淨相)을 성정본각(性淨本覺)의 입장에서 나타낸 것이다.

법장은 ‘앞에서는 수염본각의 입장이기 때문에 청정심으로 환원된 환정(還淨)의 경지를 설명한 지혜여서, 바로 지()와 용(用)을 함께 밝혀 시각(始覺)의 입장에서 설명한 것이며, 여기서는 자성(自性)의 입장이기 때문에 장애를 벗어난 법의 체를 나타냄으로서, 바로 법과 용을 함께 밝혀 법체의 입장에서 설명한 것이다. 때문에 앞에서는 지(智)라 하였고, 여기서는 법(法)이라 하였으며, 또한 앞에서는 업(業)이라 하였고, 여기서는 연(緣)이라 한것이다.’고 하였다.-백련 전종식]

 

四者(사자) 緣熏習鏡(연훈습경) 謂依法出離故(위의법출리고)

遍照衆生之心(편조중생지심) 令修善根(영수선근) 隨念示現故(수념시현고)

넷째, 연을 훈습하는 거울=緣熏習鏡이니, 법을 멀리 떠난=法出離를 의지하므로

중생의 마음을 고루 비추어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닦게 하며,

생각에 따라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Fourthly, the mirror that makes to arise the wisdom of just attained enlightenment, so to say it is the  exterior cause,whichis free from the law of the two impediments, and supports the mind of each life,  and leads them to practice the root of good virtue, and also makes them to see Buddha’s appearance in accordance with their thoughts.

 

[연훈습경(緣熏習鏡)= 본각이 밖에서 중생의 연으로 작용하여 시각(始覺)의 지(智)를 일어나게 하는 것, 즉 외연(外緣)의 활동을 말한다.

염(念)=중생의 생각, 망념이지만 부처를 생각하는 염이다.]

 

[法出離(법출리) : 위의 셋째에서 본각이 번뇌애와 지애를 벗어나고 화합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들의 마음을 비추어 선근을 수행하게 하고, 중생들의 생각에 따라 나타내 보이게 된다.

* 연훈습(緣熏習)이라 한 것은 밖으로 중생들을 발심수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 법출리경(法出離鏡)과 연훈습경(緣熏習鏡)은 시각이 본각과 일치된 상태를 설명한 것이며, 수행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된 자는 번뇌와 화합상을 떠나 자유롭다. 또한 중생들을 가르쳐 번뇌를 떠나게 하므로, 수행자로 볼 때는 밖으로부터의 조력이 된다. 그래서 연훈습이라고 하였다.]

 

[성정본각의 의미는 연훈습경(緣熏習鏡)이다. 연의 의미는 본각으로서의 불타가 중생을 위한 연(緣)이 되어 중생이 가지고 있는 각(覺)의 지혜를 깨우쳐 주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하여 외부에서 중생에게 작용하는 것을 훈습(熏習)이라 한다. 따라서 연훈습경은 이와 같이 본각이 외연(外緣)의 힘이 되어 중생에게 시각(始覺)의 지(智)을 일으켜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앞서 법출리(法出離) 즉 번뇌로부터 빠져나온 본각의 지혜가 순정이 되어 불타로서의 활동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타의 활동이 외부로부터 일체중생의 마음에 두루 미치어, 그 중생의 근기와 능력, 소질에 따라 법을 설하고 교화하여, 선근을 닦게 하고 그들의 사념(思念)에 응하여 여러가지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 외연의 힘이 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릇 따라 받아 쓸 뿐이므로 수용경(受用鏡)이라는 이름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수염본각(隨染本覺)의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에 상당하는 것으로, 성정본각(性淨本覺)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이상은 성정본각의 뜻을 네 가지 거울에 비유하여 설명한 것이지만, 원효와 법장은 상당한 이견(異見)을 나타내고 있다.

원효는 첫째의 여실공경(如實空境) 부분에서 ‘일체의 마음에는 경계상이 떠나 있다’고 한데 반하여 ‘열반경’의 제일의공(第一義空)을 인용하고, ‘망법이 타날 수 없다’는 데에 대하여 ‘공과 불공을 보지 못한다’고 해석하면서, 둘째의 인훈습경 부분에서 ‘일체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난다’는 부분에 대하여도 역시 ‘열반경’을 인용하여 ‘이는 공과 불공으로 본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인훈습경의 핵심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공을 생사로 본다든가, 불공을 대열반으로 보는 것은 기신론의 이론과는 상반되는 것으로서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계속하여 불출불입(不出不入) 부분에 대하여서도 생사의 경계를 나타낸 것은 이미 거울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석하고 그러나 오염되지 않은 거울이기 때문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여 역시 그 뜻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거울로 비유한 성정본각을 다시 요약하면;

첫째의 여실공경(如實空境)은 여실한 진여에는 망념의 번뇌가 물들어질 수 없는, 번뇌 공무(空無)의 본각을 거울에 비유한 것이며

둘째의 인훈습경(因熏習鏡)은 여실불공의 내부적 작용으로서 번뇌 없는 진여에는 지혜광명 등 성공덕이 가득 차 있어, 그 힘을 인(因)으로 하여 내부에서 훈습으로 작용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불도를 구하게 하고 지혜를 완성케 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일체 세간의 경게가 또한 그 안에 나타나는 것이지만, 본체인 본각은 불출(不出), 불입(不入), 불실(不失), 불괴(不壊)하는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명망념의 연(緣)을 기다려 나타나게 할 뿐인 것이다.

이상의 두 거울은 재전위(在轉位) 즉 번뇌 속에 있는 본각의 성정(性淨)을 나타내는 것이다.

셋째의 법출리경(法出離鏡)은 여실수행의 결과에 의하여 모든 장애가 본각진여로부터 떨어져 퇴출됨으로서 순정지혜만이 남은 본각을 정경(淨鏡)으로 비유한 것이다.

넷째의 연훈습경(緣熏習鏡)은 위와 같이 지혜를 완성한 불타의 본각이 외부의 훈습으로 연이 되어 중생이 가지고 있는 각의 지혜를 깨우쳐 주는 것이다.

이상의 법출리경과 연훈습경 두 거울은 출전위(出轉位), 즉 번뇌에서 벗어난 본각의 체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두 번째의 인훈습경은 진여의 내훈을 나타내고, 네 번째의 연훈습경은 진여의 외훈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들 둘은 진여의 뛰어난 작용을 나타내고 있는데 대하여, 첫째의 여실공경과 셋째의 법출리경은 본각진여의 체를 나타낸 것이다.]

 

 [연훈습경(緣熏習鏡)은 연을 훈습하는 거울이니 법을 멀리 떠나 의지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서 선근을 닦게하여 생각에 따라 나타나는 까닭이다. 연훈 습경은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양을 훈습하는 거울입니다. 각각 중생의 모양대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연훈습경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은 진여 세계의 것이 물들고 물들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정본각의 네 가지 단계는 진여가 물들고 물들어 지금 이 모양으로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 모양이 투명해지면 바로 진여의 모습입니다. 결국 진여가 중생들의 삶과 같은 것입니다.

빛에 계속 충격을 주면 전자가 두 개로 나누어집니다. 전자를 살펴보면 마이너스 전자가 있고 플러스 전자가 있습니다. 이 두 전자를 붙여버리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원래 없던 것에서 힘(충격)을 주어 두 개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형상이란 오염을 벗겨 버리면 진여 세계의 그 모양이 됩니다. 일심이란 것도 뭉뚱그려 하나로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 모양을 갖고 있는 것이 일심입니다. 이 모양을 나타내는 그대로가 진여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물들어 오염된 것에서 벗어나면 진여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호수에 큰 산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  그 안에 산이 없더라도 산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속에 산이 없어도 산이 있는 것입니다. 진여의 세계도 똑같습니다.

“불각의입니다. 첫 번째 근본불각은 무명이고 두 번째 지말불각은 삼세와 육추이고 세 번째 마지막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의 총결은 무명의 오염입니다.” 불각의부터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근본불각은 모든 것의 출발점. 무명입니다. 지말불각에는 삼세와 육추가 있는데 이것은 아뢰야식, 말라식, 육식, 의식, 색수상행식 등을 가리킵니다. 이 근본불각과 지 말불각은 모두 다 무명의 오염으로부터 옵니다.]

 

[元曉 : 네 종류의 뜻 중에 첫째와 셋째는 때를 없앤다는 뜻에 의해 맑은 거울에 비유하였고, 둘째와 넷째는 형상을 나타낸다는 뜻에 의해 역시 맑다는 뜻을 둔 것이다. 이 중 앞의 둘은 인성(因性)에 있고 뒤의 두 가지는 과지(果地)에 있다.

앞의 두 가지는 공(空)과 지(智)를 밝혔으니 이는 ≪열반경≫에서 “불성이란 제일의공이며, 제일의공을 지혜라고 이른다. 지혜란 공과 불공을 나타내고, 어리석음이란 공과 불공을 나타내지 않는다.”라고 널리 설명한 것과 같다.

처음에 遠離一切心境界相이라고 한 것은 ≪열반경≫의 제일의공을 나타낸 것이고, 無法可現 非覺照義故라고 한 것은 공과 불공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을 해석한 것이다.

둘째에 一切世間境界 悉於中現이라 한 것은 저 경의 “지혜란 공과 불공을 나타낸다”고 한 것을 풀이한 것이니, 이는 ≪열반경≫에서 “공이라는 것은 일체의 생사이고, 불공이라는 것은 대열반에 이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며, 여기서는 다만 생사 경계를 나타낸 것이다.

이미 거울에 나타냈기 때문에 不出이라고 하였고, 거울을 더럽히지 않았기 때문에 不入이라고 하였다. 곳에 따라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본각의 양능과 같아서 허공계와 같고, 삼세에 두루하기 때문에 생각생각마다 잃음이 없으며, 다 멸하여 파괴됨도 없기 때문에 不失不壞常住一心이라고 하였다.

셋째에서 ‘두 가지 장애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맑고 밝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앞서 말한 인훈습경이 번뇌에서 벗어났을 때 법신이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넷째에서 依法出離故 遍照衆生之心라고 한 것은 곧 저 본각이 밝게 나타날 때 중생의 근기를 똑같이 비추어 온갖 교화를 나타낸 것이니, 그러기에 隨念示現라고 한 것이다.]

 

本覺 - 高淳豪의 《大乘起信論》
隨染本覺 智淨相 본각의 內熏(因) ⟶ 시각=본각(果) 體의 면, 근본지
법신
불보살의 外(緣)
不思議業相 智淨相(因) ⟶ 중생 교화(果) 용의 면, 후득지,
응신
중생의 감응(緣)
性淨本覺 如實空境 여실공경의 면 자성이 청정함
因熏習境 여실불공의 면. 內熏의 기능
法出離境 번뇌를 떠난 면 번뇌를 떠나 청정 함
緣熏習境 번뇌를 떠나 示現하는 면, 外緣의 기능

* 이기영은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별기》를 해설하면서 ① 티 없는 거울(如實空境) ②지혜롭게 비치는 거울(因熏習境) ③ 자유의 거울(法出離境) ④ 잘 보이게 하는 거울(緣熏習境)라고 하였으며, ①②는 因으로 ③④는 果로 보았다.

 

[부처님 십대 제자 가운데 두타 제일 가섭 존자는 바라문 출신으로 왕사성에서 가장 부유한 집의 외동아들이었습니다. 가섭은 수행자로 사는 것이 소원이 었으나 부모들은 장가를 보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그려 이 여자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상대를 찾는 것이나 다름 없었으나 놀랍게도 그의 부모는 그림과 똑같이 생긴 여자를 찾아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되었지만, 아내에게 결혼은 했지만 수행자처럼 살자고 하여, 아내도 동의했습니다. 그 후 결혼해서 12년 동안 낮에는 평범한 부부와 같이 지내고 밤에는 수행을 하면서 살았으며,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 출현의 소식을 듣고 출가하게 됩니다. 가섭의 부인은 다른 곳으로 출가합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부처님께 왜 저렇게 가섭이 공부를 잘하느냐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가섭의 전생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가섭은 전생에 파라나성에 살았던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흉년이 든 파라나성에 벽지불 수행자(연기의 이치를 혼자서 터득하여 스스로 깨달은 사람, 성문, 연각, 보살의 단계에서 연각과 같습니다.)가 걸식을 하는데 빈 그릇을 들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벽지불이 빈 그릇을 들고 돌아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자신이 먹으려고 한 피밥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벽지불이 발우에 피밥을 받아 돌아가는 뒷모습이 너무나 성스러워서 가난한 사람은 합장을 하며 원을 세웠는데, “원하옵건대 앞으로 뛰어난 벽지불을 만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받들어 나도 벽지불과 같이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옵니다. 또한 세세생생 지옥이나 악도에 떨어지지 않기를 원하옵니다.” 그 가난한 사람이 바로 가섭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그 벽지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이었습니다. 가섭은 전생에 순수한 마음으로 원을 세웠기 때문에 공부를 잘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전생의 인연 덕분에 그 생에서도 부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어떤 인과도 피해갑니다. 지극한 마음, 거룩한 마음을 내면 세상은 그에 따라 바뀌어 갑니다. 가섭의 두타행을 보면 가섭이 평생 어떻게 수행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섭은 평생 세 벌 이상의 옷을 갖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버린 옷을 주워다 기워서 만든 분소의를 평생 입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가섭에게 분소의를 입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자, 가섭은 “부처님 이시여. 저는 이 생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소신이 있습니다. 

분소의를 입는 것은 수행자의 바른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누가 버린 옷이지만 기워서 이렇게 입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부처님은 그것을 허락해주시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섭은 수행자가 된 이후로 한번도 등을 바닥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가섭과 같은 위대한 제자들을 보면 부처님에 버금가는 위대함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교단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을 따라 수행했던 수행자들의 삶이 부처님 못지않게 버금가는 삶이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一者(일자) 如實空鏡(여실공경) 遠離一切心境界相(원리일체심경계상)

無法可現(무법가현) 非覺照義故(비각조의고)

첫째, 여실공경으로, 일체의 마음에는 경계의 상이 멀리 떠나 있어 법이 나타날 수 없으니

각은 비추어 주는=관조한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Firstly, it is the lucid wisdom of transparency that is absolutely free from earthly desires like mirror.
There is nothing to reflect or to be reflected in the mirror of the Suchness of mind of the ultimate truth itself, since it is perfectly free from the delusive falsity conception of tainted thoughts and is as air like a pure mirror.

 

[작용이 일어나기 전의 본각 그 자체는 거기에 나타낼 만한 무엇이 없다. 비어 있기만 할 뿐이다.]

[여실공경(如實空鏡)= 본각진여에 번뇌가 없는 것. 공(空)은 앞의 ‘의언진여( 依言眞如)’에서 ‘여실공(如實空)’을 설한 것과 같은 의미로서 번뇌가 본래 공(空)이라는 의미이다. 여실(如實)은 진여를 의미한다. 바로 본각은 번뇌가 완전히 공하여 맑은 거울과 같이 지혜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법(法)= 여기서는 망법을 의미. 망법이 공하므로 본각의 밝은 거울에는 비추이지 못한다는 것. 망법은 본각에 반대되는 것이므로 각조(覺照)의 뜻이 없는 것이다.]

 

 [여실공경(如實空鏡)은 여실히 공한 거울이니 모든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여의어 나타낼 만한 법이 없기에 깨닫고 비추는 뜻이 아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나오거나 뒤에 나옵니다. 여기서는 가장 먼저 나옵니다. 인과를 말할 때 인은 뿌리이고 과는 나무 열매입니다. 과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고 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인과와 체상용을 알면 안보이던 것들이 보입니다. 이것만 보이면 공부는 쉽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느 정도 했는지 모를 때는 공부 하기가 싫어지지만 그것을 알면 성취에 의해 공부가 신나게 됩니다.

인은 본질에 더욱 가깝습니다. 앞의 둘은 진여에 더 가까운 모양을 나타내고 뒤의 둘은 진여의 작용에 가깝습니다. 여실 공경은 허공과 같은 깨끗한 거울입니다. 여실공경은 허공과 깨끗한 거울을 들어 가장 본질에 가까운 내용들을 나타 내고 있습니다. 오염되어 일으키는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떠나, 나타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거울에 비치고 할 것이  없습니다. 본질을 알고 공을 체득하면 비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오염이 되면 비칩니다.-통섭불교]

 

[여실공경(如實空鏡)은 여실공(如實空) 즉 번뇌가 전혀 없는, 번뇌가 공무(空無)한 ‘진여의 이체(理體)’만을 거울에 비유한 것이다

본각은 번뇌 속에 있으면서도 그 번뇌에 오염되는 일이 없다. 중생의 마음과 경계의 상(相)은 모두 망념이 일으키는 세계이며, ‘나’라는 주관과 ‘너’라는 객관 모두는 망심(妄心)의 소산이며 이 같은 망념이 일으키는 일체의 심경계상(心境界相)은 본각 자체에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망법(妄法)은 본각 자체에는 애당초 없기 때문에 비추어질 것이 없는 것이다.

법장은 ‘있는 것이지만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망법은 진리(眞理)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다. 거울이 나타낼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단지 토끼의 뿔이 없기 때문에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본문에서는 ‘각(覺)이 비쳐주는 뜻이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다-백련 전종식]

 

二者(이자) 因熏習鏡(인훈습경)

둘째, 인훈습경은 인을 훈습하는 거울이니, 

Secondly, figuratively compared the Pure nature of ultimate enlightenment to the mirror, it is the mirror that reflects the endless virtue of the Pure nature of ultimate enlightenment and it causes (or lead) us to seek the absolute truth and be enlightened.

 

[두 번째 거울에 비유한 성정본각(性淨本覺)의 성격은 인훈습경(因熏習鏡)이다. 이는 불공경(不空鏡)의 의미로서 여실불공(如實不空)에서 설명하였듯이 무량한 성공덕이 가득 차 있어서, 그 거울에는 무량한 공덕이 그대로 비추어 진다는 것이다.

불공경(不空鏡)을 인훈습경(因熏習鏡)이라 부르는 것은 진여를 원인으로 하여 그 진여가 중생의 내부에서 내훈(內熏)으로 활동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불도를 구하게 하고 시각(始覺)의 지(智)을 완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훈습경(因熏習鏡)= 본각이 현재의 온갖 인(因)이 된다는 것, 본각이 안에서 작용하여 내훈의 인이 되기 때문이다.]

 

謂如實不空(위여실불공) 一切世間境界(일체세간경계) 悉於中現(실어중현)

不出不入(불출불입) 不失不壞(부실불괴) 常住一心(상주일심)

以一切法卽眞實性故(이일체법즉진실성고)

여실하여 공하지 않음을 말하니,

일체 세간의 경계 모두가 그 중에 나타나되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으며,

잃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아서 항상 일심에 머무니,

일체법이 곧 참다운 성품=眞實性이기 때문이다.

Therefore, I say that the vividness and richness of the Pure nature of suchness is not empty,
but the seed of habitual delusions and illusions are always actively alive in there, which will come out of the mind by causes.

Those minds or thoughts are not directly produced from the Pure nature of suchness itself, but they are the products of the relatively connected causes, on that ground I say that is 'Not going out'.

Those ignorance, delusions and illusions, cannot exist without the Pure nature of suchness, so they also are be one of the power or abilities of the Pure nature of suchness, on that ground I say that is 'Not coming'.

The law of the whole came into the actual being by the power of the Pure nature of suchness which is the cause and effect, but the Pure nature of suchness, is as it is, never moved or changed. on that ground I say that is 'No loss'.

The law of the whole is a transformation of the Pure nature of suchness, is an outcome of the cause and effect, and it cannot be destroyed, therefore, I say that is 'Unbreakable'.

The law of the whole that rooted in the Pure nature of suchness does not exist with its own true character.
It is the oneness of mind since the Pure nature of suchness is permanently settled in the mind, therefore the law of the whole itself is equal with the Pure nature of suchness. In other words, the law of the whole can be said as the most integral truth.

 

[진여는 만법(萬法)을 일으키는 인(因)이지만, 진여만으로는 만법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에 무명의 망법훈습(妄法熏習)이 활동함으로서 연기(緣起)의 만법(妄法)이 오로지 마음의 세계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일체세간의 경계가 모두 안에서 나타난다(一切世間境界 悉於中現)’라고 표현하고 있다. 일체세간의 경계가 안에서 나타난다고 하여도 그것이 영원한 불생불멸의 진여에서 직접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명의 훈습을 기다려 생기는 것이므로 불출(不出)이라 하였고, 무명 역시 마음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닌, 만법 자체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마음이 바로 진여의 힘이어서, 그것이 무명의 연으로 생기는 것이므로 불입(不入)이라 설한다.

이들 제법은 연기에 의하여 성립된 실재이고 진여의 힘에 의하여 무명의 연(훈습)을 만나면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여 본성을 잃는 것이 아니므로 불실(不失)이라 하였고

진여가 변형되어 나타난 연생(緣生)의 만법이므로 진여가 파괴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불괴(不壞)라 설한다

본각진여 속에 나타나는 제법은, 진여와 별개의 체성(體性)이 있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본각을 떠나 존재할 수는 없다. 제법은 제법으로서 성립하는 것이지만, 본성은 하나라서 상주(常住)하는 일심(一心)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그대로 진여와 동일한 진실이다.] 

 

[不出不入 不失不壞: 본각에는 모든 세간 경계가 나타나며, 그것은 본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또한 밖에서 들어가 본각을 더럽히는 것도 아니다. 세간 경계가 여실히 비추므로 잃지도 않고 깨지지도 않는다.

* 一切法卽眞實性故 : 일체법이 그대로 비추니 곧 진실성이다.]

 

[여실불공(如實不空)= 본각진여에는 무루의 성공덕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앞의 의언진여(依言眞如)에서 설한 여실불공(如實不空)과 같다.

불출(不出)= 세간의 경계가 나오려면 본각이 인(因)이지만 무명의 망훈습에 의하기 때문에 ‘불출’이라 한다.

불입(不入)= 무명은 본각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간법도 밖에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것.
불실(不失)=모든 법은 연기된 것이기 때문에 무가 아니고 진여의 힘이 본래 있는 것이므로 그 힘에 의하여 무명의 연(훈습)을 만나면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
불괴(不壞)= 연기된 제법은 진여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지체(智體)= 본각의 진여의 체

 

又一切染法(우일체염법) 所不能染(소불능염) 智體不動(지체부동)

具足無漏(구족무루) 熏衆生故(훈중생고)

또 일체의 염법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며, 지혜 자체=智體가 움직이지 않고

샘이 없는=無漏를 구족하여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And it is the true wisdom itself filled with the good virtue which cannot be tainted and shook by the law of the whole defilement, and it makes it possible to discipline the enlightenment steadfastly and rigorously.

 

[무루(無漏)란 번뇌가 없음이다. 비록 오염되었다고 하나 진여 자체는 오염될 수 없다. 지혜의 본체가 무루를 구족하였으므로 중생으로 하여금 수행하여 진여를 회복하게 훈습한다. 즉, 모든 중생도 본각 자체는 늘 청정하므로 이것이 중생을 훈습하여 수행하게 한다.

* 여실공경(如實空境)과 인훈습경(因熏習境)은 진여 그 자체를 깨달음이라는 측면에서 설명하였다. 그래서 본각이라고 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스스로 중생들이 비록 물들어 있어도 깨달음을 생각하게 되니, 그래서 깨달음의 내적 원인이라고 한다.

* 憨山 : 이 각성은 중생의 무명 오염 가운데 있다고 해도 오염되지 않고 항상 청정함을 말한다. 그 때문에 일체의 염법이 오염시키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각성인 지체(智體)는 무명망념에 의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성엔 항하사와 같은 무루의 정덕(淨德)을 갖추었기 때문에 모든 중생과 함께 내훈의 종자가 된다.]

 

 [“인훈습경(因熏習鏡)은 인을 훈습하는 거울이니 여실히 공하지 않다.[如實不空]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도 나가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으며, 잃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아서 항상 일심에 머무니 일체법이 곧 진 실성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염법으로 오염시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 자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무루(無漏)를 구족하여 중생을 훈습하는 까닭이다.” 오염되면 무엇인가 점점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나타날 수 있게 하는 뿌리가 바로 인훈습경입니다. 인(因)을 자꾸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원래 진여는 여실공경인데 인을 훈습하여 물이 들었기 때문에 여실히 공하지 않게 됩니다. 점점 물들며 나타나는 것입니다. 뿌리에서 가지로 올라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이런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진여가 투영된 것 입니다. 마치 투명인간에 색을 칠한 것과 같습니다. 나는 이 모양으로 세상에 작용합니다. 하지만 모양을 만들기 전에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구조(3D 프린트처럼)가 있고 투명인간에 색을 칠하면 이 모양처럼 됩니다. 투명인간을 만들기까지가 진여의 4가지 단계인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이런 모양을 나타내는 것은 진여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을 오염 시켜서 나타나게 한 것입니다. 제7식 말라식부터는 형상을 갖고 나타나는 세계입니다. 아뢰야식 이전까지는 진여의 세계로 모두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인훈습경이란 이 세상에 뭔가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因)을 덧붙여가는 것입니다. 모두 투명인간이 되어 모양이 없지만 나타나면 똑같습니다. 인훈습경을 오염시키면 형상을 갖고 이 세상에 작용을 하게 됩니다. 진여의 세계는 나타나지 않는 세계인데 중생의 세계로 넘어오면 진리의 세계에서 있던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신이 어떻게 생긴지 모르지만 우리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우리같은 모양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우리는 오염된 중생심을 일으키지만 진여심도 똑같은 형상을 갖고있지 않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형상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성정본각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인훈습경은 원인까지 만들어냅니다.]

 

[본각은 지체(智體)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본성은 항상 청정한 것이므로 오염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청정한 무루의 성질을 갖추고 있는 본각의 지체는 끊임없이 중생에 훈습하여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므로, 이 같은 훈습의 인(因)이 된 성정본각의 성격을 비유하여 인훈습경(因熏習鏡)이라고 한 것이다.

이상은 연기된 일체법을 중심으로 설명한 것이지만, 맑은 거울로 비유된 본체적 성정본각의 입장에서 이를 달리 설명해 볼 수 있다. 인훈습경은 무루성공덕(無漏性功德)이 가득찬 여실불공경(如實不空鏡)의 의미이므로 지체(智體)인 이 본각은 내부에서 끊임없이 훈습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를 완성케 하고 일체세간의 모든 경계가 그 안에 비추어 나타나게 하지만 거기에 나타난 일체법은 진여와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로 함께 하고 있는 것이어서 바로 진실 그대로이며, 따라서 그대로의 진실한 성품인 진여는 본래대로 있는 것이어서 어디에서 나왔다거나(不出) 어디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不入), 그렇다고 없어지거나(不失) 부서지지도 않는(不壞)영원히 상주하는 일심일 따름이다. 어찌 거기에 일체염법이 물들여질 수 있는 것인가. 지체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무량한 무루의 지혜공덕이 그 안에 가득하여 그것을 원인으로 하여 끊임없이 중생에 훈습하면서 보리심을 일으키게 할뿐인 것이다.]

②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 - Incomprehensibly altruistic activity of saving sentient beings.

如是衆生(여시중생) 自性淸淨心(자성청정심) 因無明風動(인무명풍동

이와 같이 중생의 자성 청정심이 무명의 바람으로 인하여 움직이니,

Like so the one's original pure mind is moved by the waves of ignorance,

心與無明(심여무명) 俱無形相(구무형상) 不相捨離(불상사리) 

마음과 무명이 모두 형상이 없으며 서로 버리고 떠나 있을 수 없으나,

Neither the original pure mind nor ignorance can stand alone without each other, nor have any configured form.

而心非動性(이심비동성) 若無明滅(약무명멸) 相續則滅(상속즉멸)

마음은 움직이는 성품이 없으며, 만약 무명이 사라지면 상속함도 곧 사라지니,

智性不壞故(지성불괴고)

지혜의 성품은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Since the nature of the wisdom in one's original pure mind is immutable and nondistructible,
if the ignorance has been removed from the original pure mind, then there will be no more succession (flow) of delusional and illusional thoughts of the mind.

 

[일체의 심식이 무명이라고 하였으나, 심식은 진여와 무명 둘 다를 떠날 수 없다. 무명으로 인하여 진여가 작용하는 것이 바로 심식이다. 그러므로 무명의 바람이 자면 곧 심식도 사라져 진여가 된다. 그러하기 때문에 심식은 그 본체인 진여와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 무명과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진여는 본래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며, 다만 무명에 의해 동요되나 진여의 성품이 파괴된 것이 아니므로, 무명이 자면 진여는 본래의 부동이 된다.

* 憨山 : 앞에서 “불생불멸의 진여자성이 무명의 생멸과 화합하여 아리야식이 성립하였다.”고 했었다. 이 문제를 의심하는 자가 “그렇다면 이 아리야식의 생멸이 무명으로 상속하는 마음인데, 지금 상속하는 마음이 소멸하였다면 무명이 의지한 불생불멸의 진여 자체마저 함께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어찌 단멸공에 떨어짐이 아니랴.”라고 이해할까봐 염려하였다.-물처럼바람처럼]

 

不思議業相者(불사의업상자) 以依智淨相(이의지정상)

불사의업상이라는 것은 지혜가 청정함=智淨相에 의지함으로써

能作一切勝妙境界(능작일체승묘경계),

능히 일체의 뛰어나고 오묘=勝妙한 경계를 만들어내나니,

When one has obtained the nature of a pure mind, then it is possible to be the 'Incomprehensibly altruistic activity of saving sentient beings', where one can be the most benevolence and excellent in practicing it.

It can be described as Buddha's infinite virtue and goodness.

 

所謂無量功德之相(소위무량공덕지상) 常無斷絶(상무단절)

이른바 한량없는 공덕의 모습은 항상 단절됨이 없이

隨衆生根(수중생근) 自然相應(자연상응) 種種而現(종종이현)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갖가지로 나타나 

得利益故(득리익고)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The one with Buddha's infinite virtue and goodness brings endless and ceaseless benefits to all others in accordance with everyone's nature.

('Buddha's infinite virtue and goodness' and 'Incomprehensibly altruistic activity of saving sentient beings' can be explained as all of our mental and intelligent interaction during life.)

 

[根=근기= 능력, 중생의 능력에 응하여 불타가 교화할 수 있다]

 

[不思議業相: 짐작할 수 없는 놀라운 작용의 모습이란, 지정상(智淨相)이 내인(內因)이 되어 갖가지 밖으로 좋은 작용을 하는 것을 말한다. 지정상이 수행하여 해탈에 이르게 하고 중생을 교화하게 한다. 種種而現 得利益故도 이와 같다.

* 元曉 : 依智淨이라고 한 것은 앞의 수염본각의 마음이 맑고 깨끗해진 것을 말하니, 이 것은 시각의 지혜이다. 이 지혜의 힘에 의해 응화신을 나타내므로 無量功德之相이라고 한 것이다.

* 지운 : 지정상이나 불사의업상은 모두 진여의 불공(不空)의 모습이다. 진여불공의 지정상이 번뇌를 만나면 법력으로 작용하며 이는 지혜이다. 중생을 만나면 중생 구제로 나타나니 즉 자비이다.]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은 본각의 지(智)가 청정해짐으로서 범부는 알 수 없는 신비한 업상(業相)이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에서 무명이 사라져 본각의 지혜가 정화되어 지정상(智淨相)에 이르면 그 지혜가 중생구제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부사의업상’이라 한다. 이는 불타의 지(不思議業相), 지정상을 기초로하여 불(佛)이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이 되어 중생을 구제하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한 불타의 활동을 ‘能作一切勝妙境界-능히 일체의 승묘한 경계를 만든다’고 하고 있다.

원효는 ‘지혜의 힘에 의하여 응화신(應化身)을 나타내기 때문에 무량한 공덕의 모습(無量功德之相 )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이 나타나는 상은 무시무종(無始無終) 상속부절(相續不絶)이기 때문에 항상 단절됨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백련 전종식]

[지금 우리가 일으키는 마음은 알기 쉽지만 견성하고 깨쳐야 볼 수 있는 본질, 진여는 알기 어렵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성질, 성품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될 것입니다. 선불교는 깨침을 화두로 주고받을 뿐이지 깨달음 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여기 대승 기신론에서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라는 것은 지정상(智淨相)인 지혜가 깨끗한 모양에 의지하여 일체의 수승 하고 미묘한 경계를 짓는 것이다. 그래서 한량없는 공덕의 모양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갖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작용하는 모든 것이 부사의업상으로 표현됩니다. 살아가면서 일으키는 모든 작용이 부사의업상입니다.-통섭불교]

 

② 性淨本覺(성정본각) - The pure nature of the Ultimate enlightenment.

復次覺體相者(부차각체상자) 亦四種大義(역사종대의)

또한 각의 본체 모습=體相에는 네 가지 큰 뜻이 있으며,

與虛空等(여허공등) 猶如淨境(유여정경) 云何爲四(운하위사)

허공과 같고 맑고 깨끗한 거울과 같으니 무엇을 넷이라고 하는가?

The pure nature of the of the Ultimate enlightenment can be fully explained in four main meanings,
of which they are immutable and absolute truth and are as clean as a mirror, that is without manipulation and deception.

What are they?

 

[元曉 : 처음에 與虛空等이라고 한 것은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고, 

猶如淨境이라고 한 것은 때를 없애 그림자를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 앞의 수염본각(隨染本覺)은 염오(染汚)에 따른 본각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의 성정본각(性淨本覺)은 본각 그 자체를 설명한 것이다.]

 

[성정본각(性淨本覺)을 밝히다. 각체상(覺體相: 성정본각의 체가 지니는 상)에는 네 가지의 큰 뜻이 허공과 같으며, 마치 깨끗한 거울과 도 같다.” 이제는 작용이 아니라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진여의 모양이나 깨달음의 모양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열심히 참선해서 깨쳐야 각체상의 감이 잡힐 것입니다. 여기서는 깨달아 부처님같은 마음으로 진여의 세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세분화해놓았습니다. 대부분 경전에서 본질을 표현할 때 허공이란 표현을 많이 씁니다. 우리가 상상할 때 허공이란 어떻게 조작을 해도 그냥 허공입니다. 아무리 변화시켜도 허공은 그대로이고, 어떤 행위를 하여도 여여 (如如)한 것이 허공입니다. 그리고 깨끗한 거울이라고 합니다. 깨끗한 거울은 뭔가 보이면 있는 그대로 비춥니다. 다르지만 똑 같은 성격입니다. 아무리 해도 바뀌지 않는 것이 허공이라면 조작과 속임이 없는 것이 깨끗한 거울입니다. 진여의 세계를 잘 표현한 것입니다. 불교가 갖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구조는 원인과 결과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에 따라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로 진여의 세계와 같습니다. 깨달음 속에서 보는 진여의 세계도 원인과 결과가 작용합니다. 성정본각은 구체적으로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 데 여실공경, 인훈습경, 법출리경, 연훈습경으로 나눌 수 있습니 다. 여기서 여실공경, 인훈습경은 원인에 해당하고 법출리경, 연훈습경은 결과에 해당합니다. 금으로 금목걸이를 만듭니다. 금목걸이를 만들면 가격이 매겨집니다. 금은 체이고 금목걸이는 상이고 가격이 매겨지는 것은 용입니다. 이것은 내가 어떤 행위 를 하든지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잘하려면 체상용의 관계를 잘 생각해보면 됩니다.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들은 밤을 새며 공부했지만 성적은 좋지 않습니다. 체상용을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본질의 구조와 작용을 잘 알아야 합니다. 머리로 생각해봐야 알지 무턱대고 움직여서는 잘 할 수 없습니다. 기도나 참선도 그렇습니다. 지금 필요 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나 참선을 통해 뭔가 잘될 수 있는 방편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작용을 일으키려면 모양을 제대로 알아야겠고 모양은 본질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원효와 사복의 일화를 봅시다. 어떤 과부가 남편도 없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은 아이가 바로 사복입니다. 아이는 12살이 넘도록 말을 못했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말을 하게 됩니다. 사복은 고선사에 있는 원효를 찾아 가서 원효에게 말했습니다. “옛날 그대와 내가 함께 불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는데 장사를 지내주자.”고 하니 원효가 좋다고 합니다. 사복이 말한 암소가 바로 환생한 사복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사복이 원효더러 천도법문을 하라고 하니 원효는 법문을 해줍니다. “태어나지 말지니 죽는 것이 괴롭구나. 죽지 말지니 태어나는 것이 괴롭구나.” 이렇게 법문하니까

사복이 “무슨 법문이 그렇게 긴가.” 그러자 원효가 다시 법문을 해줍니다. “죽고 사는 것이 괴롭구나.” 재가 끝나고 사복은 “석가 부처님처럼 나도 이제 연화장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네.”라고 하였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연화장 세계의 문이 열리더니 사복은 그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구에서 팔지보살의 경지까지 이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원효 대사가 팔지보살의 경지인데 사복은 공덕이 그와 비슷했던 것입니다. 사복은 원효에게 계급장을 다 떼고 말합니다. 본질, 진리, 깨달음에 대한 세계를 대화로서 풀어내고 보여준 것입니다. 진여의 세계가 사복이 들어간 연화장의 세계일지도 모릅니다.]

 

[성정본각(性淨本覺)이라는 말은 원효(해동소,海東疏)가 창안한 용어를 법장(의기, 義記)도 따라 쓴 용어로서, 기신론의 해당부분에서 주제(主題)로 활용되고 있다. 성정본각은 본각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각의 본성이 청정한 것이므로 그렇게 이름하게 된것이다.

여기에서는 본각의 체(體)와 상(相)을 밝은 거울에 비유하고 있다. 거울은 외계에 있는 삼라만상을 그대로 비추어 주는 것으로서 호오(好惡)를 구별하지 않는다. 본각의 진리성은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그 지혜는 세상만사를 분별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기 때문에 밝고 맑은 거울로 비유하는 것이다.

본각의 체상(體相)을 거울과 비유하여 공경(空鏡), 불공경(不空鏡), 정경(淨鏡) 수용경(受容鏡) 등 네 가지 뜻을 담고 있다. 즉 체(體)와 상(相), 또는 체대(體大)와 상대(相大)가 동시에 있는 것이므로, 본론에서 체대는 곧 진여이며, 상대는 그 진여의 ‘무량한 공덕’을 의미하고, 이 둘이 합하여 불(佛)의 법신(法身)을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각은 불의 법신일 뿐이며, 이 본각, 법신은 허공과 같아서 세상 어디에나 두루 퍼져 있으며, 그 지혜(지智)는 발고 맑은 거울과 같은 것이다.

본각의 네 가지 의미 중 첫째는 여실공경으로, 여실 공경은 여실공 즉 번뇌가 전혀 없는, 번뇌가 공무(空無)한 ‘진여의 이체(理體)’만을 거울에 비유한 것이다. 본각은 번뇌 속에 있으면서도 그 번뇌에 오염되지 않는다. 중생의 마음 속에는 희로애락(喜怒愛樂)의 심상(心想)이 있고, 그에 따라 일어나는 천차만별의 대상세계가 있지만, 본각은 그와 같은 일체의 마음과 경계의 상(相)을 멀리 떠나 있는 것이다. 중생의 마음과 경계의 상(相)은 모두가 망념이 일으키는 세계이며, ‘나’라는 주관과 ‘너’라는 객관 모두는 망심(妄心)의 소산이며, 이 같은 망념이 일으키는 일체의 심경계상(心境界相), 즉 망법은 본각자체에는 없다.

법장은 ‘있는 것이지만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망법은 진리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다. 거울이 나타낼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단지 토끼의 뿔이 없기 때문에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본문에서는 ‘각(覺)이 비쳐주는 뜻이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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