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개운조사 능엄경 참조

수능엄경(首楞嚴經) 3 3

 

▷12처(十二處)에 나아가 여래장을 밝힘.

復次,阿難!云何十二處本如來藏妙眞如性?

 아난아, 어찌하여 12처(十二處)가 본래 여래장인 진여성(妙眞如性)이라고 하는 것인가?

ㅡ12처에서 처(處)는 들어오는 곳으로, 육근과 육진(육경)을 합한 것이다. 

육근(六根)ㅡ안, 이, 비, 설, 신, 의ㅡ6내처(六內處)  
육경(六境)ㅡ색, 성, 향, 미, 촉, 법ㅡ6외처(六外處)  

 

▷6내처(六內處)의 안처(眼處) - 색진(色塵)

阿難!汝且觀此祇陁樹林及諸泉池。於意云何,此等 爲是色 生眼見 眼生色相

아난아, 너는   기타원(祇陀園)의 숲과 온갖 샘물과못들을 보아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러한 것들은 색상(色相)이 안견(眼見)을 생기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눈(眼)이 색상(色相)을 생기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ㅡ기타림과 온갖 샘과 연못은 물징의 색상(色相)으로,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은 눈(眼)이다.

*색상(色相),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 물체의 객관적인 형상.

*안견(眼見), 색상을 볼 수 있는 안식(眼識)의 작용. 


阿難!若復眼根生色相者,見空非色,色性應銷,銷則顯發一切都無,色相旣無,誰明空質?空亦如是。

아난아, 만약 안근(眼根)이 색상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라면, 허공을 볼 때에는 색상이 아니므로 색성(色性)이 반드시 사라질 것이다.

색성(色性)이 사라지면 나타나는 일체가 모두 없어질 것이니, 색상이 이미 없어지면 어떻게 허공의 본질을 밝힐 수 있겠는가!

허공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ㅡ눈이 색상을 생겨나게 한다면 눈이 색성(色性)이 된다. 그러나 허공을 볼 때에는 이미 색상이 없으므로 색성이 마땅히 사라질 것이니, 눈 속에서 색성이 이미 없어지면 나타나는 일체가 모두 색상이 없어야 할 것이다. 

또 색과 공 두 법은 상대를 기다려서 나타나는 것이니 색상이 이미 없어졌다면, 허공을 나타낼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호공의 본질을 밝히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눈이 색처를 생겨나게 한다는 것은 허망한 생각이다.

'허공도 역시 그러하다'고 한 것은 색으로 인하여 허공도 역시 일정한 처소가 없음을 예시한 것이다.

또한 나무와 숲과 샘과 연못 등은 모두 조건과 상황에 따라 생긴,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으로 모두가 환화상(幻化相)일 뿐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 색처(色處), 안식(眼識)의 소의가 되가 하는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 등의 대상체를 말한다.

 

若復色塵生眼見者,觀空非色,見卽銷亡,亡則都無,誰明空色?是故當知,見與色空俱無處所,卽色與見二處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만약 물질인 색진(色塵)이 눈으로 보는 안견(眼見)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허공을 볼 때에는 색상(色相)이 아닐 것이므로, 보는 견(見)이 곧 사라질 것이다.

사라져 없어지면 모든 것이 없어질 것이니, 어떻게 허공인지 색상인지를 밝힐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보는 주체(見)와 대상인 물질(色)공은 모두 처소가 없는 것으로, 보는 주체(見)와 물질(色)의 두 가지는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ㅡ색이 능히 보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허공을 볼 때에는 보는 주체가 생길 곳이 없으므로 '사라진다'고 한 것이다. 없어지면 곧 보는 주체도 없을 것인데, 누가 허공과 물질을 밝히겠는가? 그렇다면 물질이 안처(眼處)에서 생기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망령된 생각인 것이다. 


阿難!汝更聽此祇陁園中,食辦擊鼓、衆集撞鍾,鍾鼓音聲前後相續。於意云何,此等爲是聲來耳邊?耳往聲處?

아난아, 너는 다시  이 기타원(祇陀園)에서 공양이 마련되면 북을 치고, 대중들을 불러 모을 때에는 종을 치는데, 그 종 소리와 북소리가 앞과 뒤로 서로 이어지는 것을 들어 보아라! 너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 소리가 귓가에서 온 것인가?

아니면 귀가 소리 있는 곳으로 간 것인가?

ㅡ오고 가는 것을 분별해야만 진실한 처소가 있을 것이니, 이는 종소리와 북소리를 듣는 것에 의하여 귀와 소리의 실상을 파헤치는 것이다. 

 

阿難!若復此聲來於耳邊,如我乞食室羅筏城,在祇陁林則無有我;此聲必來阿難耳處,目連、迦葉應不俱聞,何況其中一千二百五十沙門,一聞鍾聲同來食處。

아난아, 만약 그 소리가 귓가에서 오는 것이라면, 내가 실라벌성(室羅筏城)에서 걸식(乞食)을 할 때에는 기타림(祇陀林)에는 내가 없는 것과 같이, 그 소리가 반드시 아난의 귓가에서 온 것이라면, 목련과 가섭은 당연히 듣지 못해야 할 것이거늘, 어떻게 1,250 사문(沙門)이 한꺼번에 종소리를 듣고 다같이 공양할 곳으로 오는 것인가?

ㅡ'내가 실라벌성(室羅筏城)에서 걸식(乞食)을 할 때에는 기타림(祇陀林)에는 내가 없는 것'이란, 소리가 귓가에서 나온 것이라면 다른 곳에는 소리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若復汝耳往彼聲邊,如我歸住祇陁林中,在室羅城則無有我;汝聞鼓聲,其耳已往擊鼓之處,鍾聲齊出應不俱聞,何況其中象馬牛羊種種音響。

만약 너의 귀가 소리 나는 곳으로 가는 것이라면, 내가 기타림(祇陀林)에 돌아와 머물고 있을 때에는 실라벌성(室羅筏城)에는 내가 없는 것과 같이, 네가 북소리를 들을 때에는 귀가 이미 북을 치는 곳으로 갔으므로, 종소리가 함께 날지라도 마땅히 한꺼번에 듣지 못해야 할 것이며,

더욱이 어떻게 코끼리와 말과 소와 양 등의 여러 가지 소리들을 한꺼번에 다 들을 수 있는 것인가?

ㅡ'내가 기타림(祇陀林)에 돌아와 머물고 있을 때에는 실라벌성(室羅筏城)에는 내가 없는 것'이란, 귀가 소리 나는 곳으로 간다면, 다른 곳에는 귀가 없을 것이나, 다른 소리도 다 듣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귀가 간 것을 아니다.

 

若無來往,亦復無聞。是故當知聽與音聲俱無處所,卽聽與聲二處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만약 오고 감이 없다 할지라도 역시 들음마저도 없을 것인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듣는 주체(작용)와 소리는 모두 처소가 없는 것이니 듣는 주체(작용)와 소리의 두 처소는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견성(見性)과 색(色)과 공(空)이 실처(實處)가 없는 환망상(幻妄相)이며 인연도 자연도 아니다. 
미혹하면 색과 공이 서로 허망상(虛妄相)을 내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지만, 
깨달으면 정밀하게 보는 묘한 밝음의 정견모명(精見妙明)인 여래장성(如來藏性)인 것이다.


▷6내처(六內處)의 비처(鼻處) - 향진(香塵)

阿難!汝又嗅此鑪中栴檀,此香若復然於之一銖,室羅筏城四十里內同時聞氣。於意云何,此香爲復生栴檀木?生於汝鼻?爲生於空?

아난아, 너는 또 이 향로의 전단향기를 맡아보아라. 이 향기는 비록 1수(銖)만 태울지라도 실라벌성의 40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니라.

너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 향기는 전단나무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너의 코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허공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阿難!若復此香生於汝鼻,稱鼻所生當從鼻出,鼻非栴檀,云何鼻中有栴檀氣?稱汝嗅香當於鼻入,鼻中出香說嗅非義。

아난아, 그 향기가 너의 코에서 생긴 것이라서 코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코에서 나왔어야 할 것이거늘, 코는 전단 나무가 아니거늘, 어떻게 코 속에 전단의 냄새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네가 향기를 맡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코로 들어가야 할 것인데, 콧속에서 향기가 나오는 것이라면 냄새를 맡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니라.

 

若生於空,空性常恒,香應常在,何藉鑪中爇此枯木?

만약 허공에서 생긴 것이라면, 허공의 성품은 한결같이 변함이 없는 것이니 향기도 항상 있어야 할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향로에 고목을 태워야만 향기가 생기는 것인가?

 

若生於木,則此香質因爇成煙,若鼻得嗅合蒙煙氣,其煙騰空未及遙遠,四十里內云何已嗅?

是故當知香鼻與嗅俱無處所,卽嗅與香二處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만약 전단나무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이 향의 본질은 태움으로 인하여 연기가 되는 것이므로, 만약 코가 향내를 맡을 때에는 당연히 연기가 코로 들어가야 할 것이거늘, 그 연기가 허공으로 올라가서 채 멀리 퍼지기도 전에 40리 이내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 향내를 다 맡게 되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향기와 코와 냄새를 맡는 향비후(香鼻嗅)는 다 함께 처소가 없는 것이니,

냄새를 맡는 것과 향기나는 곳의 두 처소는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6내처(六內處)의 설처(舌處) - 미진(味塵)
阿難!汝常二時衆中持鉢,其閒或遇油餠蜜飯 名爲上味。於意云何,此味爲復生於空中?生於舌中?爲生食中?

아난아, 네가 매일 두 때에 대중과 함께 발우를 가지고 걸식하는데, 그 사이에 간혹 유병(油餠)과 밀반(蜜飯)을 만나게 되면 최고의 맛이라 하나니,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맛은 허공에서 생기는 것인가?

혀에서 생기는 것인가? 음식에서 생기는 것인가?

ㅡ유병(油餠), 참깨, 들깨, 콩 따위의 재료 또는 밀가루를 부친 부침개.

밀반(蜜飯), 약반, 밀과 또는 약과


阿難!若復此味生於汝舌,在汝口中 秖有一舌,其舌爾時 已成飴味,遇黑石蜜 應不推移,若不變移 不名知味,若變移者舌非多體,云何多味一舌知之?

아난아, 만약 이 맛이 너의 혀에서 나온 것이라면 네 입 속에는 혀가 하나뿐이니, 그 혀가 조금 전에 단 맛이 되었을 것이므로, 흑석밀(黑石蜜, 매우 딱딱한 사탕)을 먹게 될지라도 달라지지 않아야 할 것이니,

만약 맛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맛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고,

만약 달라진다면 혀는 여러 개가 아닌데 여러 가지의 맛을 한 개의 혀로 알 수 있는 것인가?

 

若生於食,食非有識,云何自知?又食自知,卽同他食,何預於汝,名爲知味?

만약 음식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음식은 아는 작용의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닌 비유식(非有識)이니, 어떻게 제 스스로 맛을 알겠으며?

또 음식이 스스로 맛을 아는 식자지(食自知)라면 곧 다른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을 것이니, 너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맛을 안다고 하겠는가?

ㅡ음식이 스스로 맛을 아는 것이 아니고 혀를 통해야 맛을 아는 것이니, 비록 음식이 맛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 앎이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서, 다른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을 것이니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맛을 안다고 하겠는가? 이치가 그렇지 않으므로 맛은 음식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若生於空,汝噉虛空 當作何味?必其虛空 若作鹹味,旣鹹汝舌 亦鹹汝面,則此界人同於海魚;旣常受鹹 不了識淡,

若不識淡 亦不覺鹹,必無所知,云何名味?是故當知味舌與嘗俱無處所,卽嘗與味二俱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만약 허공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너는 허공을 씹어 보아라. 어떤 맛이든가?

기필고 그 씹은 허공이 짠맛이라면, 이미 너의 혀를 짜게 하였을 것이므로 네 얼굴도 짜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은 바다의 고기와 같이 언제나 짠 것만을 느껴왔으므로 담담한 맛은 느끼지 못해야 하리라.

만약 담담한 맛을 모른다면 짠맛 역시도 느끼지 못해야 할 것이니, 아무 맛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맛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맛과 혀와 맛을 보는 것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맛보는 것과 맛은 둘 다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개운조사 능엄경 참조

수능엄경(首楞嚴經) 3 2

 

설입(舌入)
阿難!譬如 假令有人以舌舐吻熟舐令勞,其人若病 則有苦味,無病之人微有甜觸,由甜與苦顯此舌根,不舐之時淡性常在。兼舌與勞同是菩提,瞪發勞相. 舐 핥을 지, 

아난아, 가령 어떤 사람이 혀로 입술을 핥아서, 그렇게 핥기를 오랫동안 하여서 피로하여졌을 때,

만약 그 사람에게 병이 있으면, 곧 쓴 맛을 느낄 것이고, 병이 없는 사람이라면 약간 단 촉감을 느낄 것이다.

이렇게 달고 쓴 것으로 인하여 이 설근(舌根)이 드러날 것이고, 핥지 않을 때에는 담담한 성품이 항상 있을 것이니,

혀와 피로는 다 같은 보리(菩提)로서 똑바로 보다가 피로하여져서 생기는 현상과 같은 것이다. 

단맛과 쓴맛으로 혀의 감각이 나타나고, 혀를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항상 담담한 맛이 있는 것은 혀와 피로를 겸하여 보리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이니라.

ㅡ입술이 달고 쓴 것이 아닌데, 피로와 허망함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에 핥지 않을 때에는 담담한 성품이 항상 있을 것이니, 설입(舌入)의 허망함이 이러한 것이다.

달고 쓴 2종 허망은 모두 인연으로 생긴 망법으로 보리심 중에서 발한 피로한 모습이다. 
맛을 아는 지미성(知味性)이 필경에 처소(處所)가 없는데, 달고 쓰고 담담함을 사람들은 혀의 체(體)라고 잘못 알고 있다. 
혀가 달고 쓴 2진(塵)을 서로 느낄 때, 그 앎이 발하는 중에 머물며, 진상(塵象)을 흡취하는 것을 지각성(知覺性)이라 하는데 그 지각성은 혀로부터 드러나는 것이지만, 혀의 체인 성체(舌體)는 본래 지각(知覺)이 없는 것이다. 

 

甜苦及淡 二種妄塵,發知嘗居中吸此味像,名知味性,此知味嘗覺性 離彼甜苦及淡二塵,畢竟無體嘗 맛볼 상

달고 쓴맛과 담담한 맛의  가지 허망한 대상 물질인 망진(妄塵)으 인하여맛을 아는 것이 생겨서 그 가운데에서 이 미상(味像)을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맛을 깨닫는 성품의 상각성(嘗覺性)이라 하나니,

그 맛을 아는 주체가 달고 쓴 맛과 담감한 두 가지 대상 물질을 의읜다면, 필경에는 맛이라는 그 실체가 없어질 것이다.

ㅡ맛으로 인해 맛을 느끼는 것이 생겨나고, 혀로 인해서 대상 물질을 흡수하여 들이므로 설입(舌入)의 허망함이 생기는 것이다.

 

如是,阿難!當知 是嘗覺性 非淡味來,非於舌生,不於空出。何以故?若甜苦來,淡卽知亡,云何嘗淡?若從淡來,卽知亡,甛苦卽隨亡, 復云何嘗其 甜苦 二相?若從舌生,必無甛苦及淡 如是嘗精 本無自性。若從空出,有嘗成性 卽非虛空

又空自知,何關汝入。是故當知舌入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맛을 느끼는 성품인 상각성(嘗覺性)은 달고 쓴 것에서 온 것이 아니고, 담담한 맛에서 온 것도 아니며, 혀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왜냐하면, 만약 달고 쓴맛에서 온 것이라면 담담한 맛일 때에는 곧 따라서 없어질 것이니, 어떻게 담담한 맛을 알겠으며,

만약 담담한 맛에서 온 것이라면, 달고 쓴맛을 따라 곧 없어질 것이 어떻게 그 달고 맛을 알 것이며,

만약 혀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달거나 쓰거나 담담한 맛이 없으면 이와 같이 맛을 보는 정기가 본래 자성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맛을 보는 상성(嘗性)이 자성을 이룰 것이니, 곧 허공이 아닐 것이요

또한 허공이 스스로 맛보는 것이니, 그것이 너의 설입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맛을 보아 인식하는 설입(舌入) 허망한 것이라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진여성이니라.

ㅡ진여성에는 본래 능소(能所)가 없다. 상황과 조건을 따라 각종 인연법을 발현(發現)하지만, 스스로의 체성(體性)은 떠나지 않는다.

만약 달고 쓰고 담담함이 올 때 생기는 객체가 있다고 집착한다면, 인연이 만드는 법에 미혹하게 되는 것이요, 
만약 달고 쓰고 담담함이 올 때 생하는 주체가 있다고 집착한다면, 자연의 능생법(能生法)에 미혹하게 되는 것이다.

 

▷신(身)

如是 阿難!譬如 假令 有人以一冷手觸於熱手,若冷勢多 熱者從冷,若熱勢多 冷者從熱,如是以此合覺之觸顯於離知,涉勢若成因于勞觸。兼身與勞 同是菩提,瞪發勞相

아난아, 가령 어떤 사람이 차가운 한 쪽의 손으로 다른 쪽의 더운 손을 잡았을 때, 만약 차가운 기운이 많으면 더운 손이 차가워지고, 만약 더운 기운이 많으면 찬 손이 더워 질 것이다. 

이와 같이 두 손이 합해 졌을 때 느끼게 되는 감촉의 각촉(覺觸)이 서로 떨어져도 느낌이 남아 있나니,

서로 교섭하는 세력이 만약 이루어진다면, 접촉으로 인한 피로 때문일 것이다.

몸과 피로는 다 같은 보리(菩提)로써 똑바로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피로하여져서 생기는 현상과 같은 것이니라.

ㅡ신입(身入)은 접촉으로 인한 것이나, 접촉에 자성이 없는 것이 차고 더운 손이 서로 교섭하는 것과 같아서 정해진 형세가 없는 것으로 역시 망령된 것이다.

손이 스스로 접촉하는 것이 아니고 합쳐짐으로 인하여 접촉함을 느끼기 때문에 합해졌을 때 느끼는 감촉의 합각촉(合覺觸)이라 한 것이고, 합쳐지는 것은 떨어짐으로 인하여 합쳐지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서로 떨어져도 느낌이 남아 있다고 한 것이다. 

 

因于離合 二種妄塵,發感居中 吸此觸像,名感覺性。此感覺體,離彼離合違順二塵,畢竟無體。

떨어지고 합하는 이 두 가지의 허망한 대상 물질인 망진(妄塵)으로 인하여 촉감이 생긴 그 가운데에 있으면서 촉상(觸像)을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느껴 깨닫는 성품의 감각성(感覺性)이라고 하나니,

그 느낌이 떨어지고 합하는 것과 어기고 순종하는 두 가지의 대상 물질을 여의면 필경에는 느끼는 실체가 없어질 것이니라.

ㅡ접촉으로 인하여 느낌이 생기고, 몸(根)으로 인하여 대상 물질을 흡수하여 들이므로 신입(身入)의 허망함이 생기는 것이다.

 

如是,阿難!當知 是感覺性,非離合來,非違順來,非於身生,又非空生。

何以故?若從離來,合卽隨亡,云何感合 若從合來 離即隨亡 云何感離 違順二相,亦復如是。

若從身生,必無離合違順(四相)。如是感精 本無自性。

若從空出,空自知覺,何關汝入 有感成性 卽非虛空 又空自知。是故當知身入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느껴 깨닫는 성품의 감각성(感覺性)은 떨어지거나 합함에서 온 것도 아니고, 어기거나 순종하는 것에서 온 것도 아니며, 몸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만약 떨어지는 것에서 온 것이라면, 합할 때에는 곧 따라 없어질 것이거늘, 어떻게 합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만약 합하는 것에서 온 것이라면 떨어지면 곧 따라서 없어져야 할 것이니, 어떻게 떨어짐을 느끼겠는가!

어기고 순종하는 두 가지 현상도 역시 그러한 것이며, 만약 몸에서 나온 것이라면 반드시 떨어지고 합해지고 어기고 순종하는 것이 없으면 이와 같이 느끼는 정기가 본래 자성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느끼는 것이 있으면 자성을 이룰 것이니, 곧 허공도 아닐 것이고, 또 만약 허공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라면, 그것이 너의 입(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몸으로 느끼는 신입(身入)은 허망한 것이라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여래장의 묘한 진여성이니라.

ㅡ각촉성(覺觸性)은 본래 법계(法界)에 임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떨어지고 합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만약 떼고 합함이 있다고 집착한다면, 인연으로 생긴 것에 떨어진 것이며,

만약 뗄 수 있고 합할 수 있다고 집착한다면, 자연의 체성(體性)을 모르는 것이다. 
인연은 임시적인 가명이며 자연은 체성(體性)이 없는 것이니, 그래서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라고 한다. 
만약 인연이 바로 중도리체(中道理體)가 발현한 용(用)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환신(幻身)이 바로 천백억의 화신(化身)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의(意)

阿難!譬如 假令有人勞倦則眠睡熟便寤,攬法斯憶失憶爲忘,是其顚倒生住異滅,吸習中歸 不相踰越,稱意識根。兼意與勞同是菩提,瞪發勞相.  攬 잡을 람,

아난아, 어떤 사람이 피곤하고 나른하여 잠이 들어서,  자고는 문득 깨어서 대상인 법(法)을 더듬어 보고 기억하는 남억(攬憶)하며, 그 기억이 사라지면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뒤바뀌게 전도(顚倒)되어서 생겨나는 생(生), 머무르는 주(住), 변하는 이(異) 사라지는 멸(滅)의 것이니라.

습기를 흡수하여 들여서 가운데로 돌아가되 서로 뛰어넘지 아니하는 것을 의식근(意識根)이라 하나니,

의식과 피로는 다 같은 보리(菩提)로써 똑바로 바라보다가 피로하여 져서 생기는 현상과 같은 것이니라.

ㅡ의입(意入)은 기억해서 아는 것을 주재하고, 기억했던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깨고 자는 것에서 생기기 때문에 잠자고 깨는 것으로 예를 들어 밝힌것이다. 

더듬어 기억하는  남억(攬憶)이 생(生)이고, 망각하는 것이 멸(滅)이니, 머무름의 주(住)와 변함의 이(異),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이미 더듬어 기억하였다가 곤 사라져서 망각하는 것을 전도(顚倒)라 한 것이니, 습관이 허망한 대상 물질의 망진(妄塵)을 흡수해서 중간의 의근(意根)으로 돌아 갔으나 앞의 생각과 뒤의 생각이 차례로 상속(相續)되는 것이므로 '서로 뛰어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의입의 현상인 것이다.

ㅡ의지근(意知根)은 제8식 심왕(心王)으로 51 가지의 심소(心所)를 모두 포섭하며, 제7말나식을 취하여 깊이 사량(思量)하는 것을 체성(體性)으로 삼는다.

 

因于生滅 二種妄塵,集知居中 吸撮內塵,見聞逆流 於五根流不及之地,名覺知性。此覺知性,離彼寤寐生滅二塵,畢竟無體。

생멸(生滅)하는 두 가지의 허망한 대상 경계(妄塵)으로 인하여 모아진 앎(知)이 그 중간에 있으면서 내진(內塵, 곧 法塵)을 흡수하여 들여서, 보고 듣는 견문(見聞)이 오근(五根)의 흐름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거꾸로 흐르는 역류(逆流)하는 것을 알아서 깨닫는 성품의 지각성(知覺性)이라 하나니,

그 앎이 생멸하는 것과 잠자고 깨어나는 두 가지 대상 물질을 여읜다면, 필경에 그 앎의 실체가 없는 것이니라.

ㅡ의(意)는 알고 깨닫는 성품의 지각(知覺)을 주재하고,근(根)은 몸 속에 숨어 있으므로 '모아진 앎이 그 중간에 있다'고 하였으며, 그 의근이 법진(法塵)을 집착하여 생각하는 현상이 안에서 생기는 까닭에 '내진을 흡수하여 들인다'고 한 것이다. 문수 보살이 말하기를 '법(法)을 내진이라고 한다'고 한 것은, 곧 과거 제법의 영상을 말한 것으로 낙사진(落謝塵)이라고도 하고, 또 무표색(無表色)이라고도 한다.'역류(逆流)'한다는 것은 돌이켜 반연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의근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을 총괄하기 때문에 견문이라 한 것이다. 즉 전5진이 멸한 후에 그 잔영이 의지(意地)에 머무는 것을 법진의 역류라 하는 것으로, 전5진이 반복하여 드러나지만 의지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 오근은 다만 나타나는 대상을 따라 순하게 반연할 뿐이지만, 오직 의근만은 오근이 반연하여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돌이켜 반연하나니, 그것은 추억이나 꿈 같은 것들이다.*근(根), 어떤 작용을 발휘할 수 있는 각각의 감각 기관의 기능을 뜻한다.*낙사진(落謝塵),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의 오진(五塵)은 그 작용을 쉬고, 제6식(意識)으로 과거를 반연하는 영상을 뜻한다. 

*무표색(無表色), 색법 중에서 다른 이에게 나타낼 수 없는 것, 즉 어떤 원인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무형무상한 사물을 뜻한다.

*반연(攀緣), 칡넝쿨이 나무에 의지하여 감고 올라가듯이, 마음도 눈 앞에 전개되는 사물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반연이 바로 일체 번뇌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如是,阿難!當知 是知覺性,非生滅來,非寤寐來 非於身生,亦非空出。

何以故?若從生來,滅即隨亡,令誰知滅 若從滅來 生即隨亡 云何知生 寤寐二相 亦復如是 若從意生 必無生滅寤寐 如是知精 本無自性 若從空出 有知成性 卽非虛空 又空自知 何關汝入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알고 깨닫는 성품의 지각성(知覺性)은 생멸에서 온 것이 아닌고, 잠자고 깨어남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몸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니,  

왜냐하면, 만약 생(生)에서 온 것이라면, 소멸되면 곧 따라서 없어질 것이니, 무엇으로 하여금 멸하는 것을 알 게 할 것이며,

만약 멸(滅)하는 것에서 온 것이라면, 생겨나면 곧 따라서 없어질 것이니, 무엇으로 하여금 생기는 것을 알게 하겠는가!

잠자고 깨어나는 두 가지의 이상(二相) 역시도 그러한 것이니,

만약 의근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생멸하고 잠자고 깨어나는 것이 없으면 이와 같은 아는 정기의 지정(知精)은 본래 자성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느끼(知)는 것이 있으면 자성을 이룰 것이니, 곧 허공도 아닐 것이고, 또 허공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니, 너의 의입(意入)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ㅡ여래장의 묘각명심(妙覺明心)은 생멸이 없지만, 무명의 정(精)에 나쁜 습성에 훈습되어서 생멸하는 의식과 화합해서 서로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지관(止觀)을 부지런히 닦아서 본각으로써 무명을 훈습하여 음(陰)을 없애고 양(陽)이 생겨나게 하는 것을 시각(始覺)이라 한다. 처음에는 지말무명부터 끊고, 점점 더 정진하여서 양(陽)만 순수하게 되는 진각(眞覺)이 되어야 비로소 근본무명이 끊어지는 것이다. 

식(識)의 성품인 밝게 아는 성식명지(性識明知)는 법계에 두루한 것이다.
만약 인연으로 난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소생(所生)에 떨어지므로 비인연이라 하고, 
만약 자연에서 난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능생(能生)에 떨어지므로 비자연이라 한다. 
이 성식명지(性識明知)는 의지근(意知根)과 비교가 안 되는, 알음알이의 앎이 아니다. 
알음알이는 능지장(能知障)에 떨어지고, 의지근은 모든 곳을 분별한다. 
분별을 넘어서서 초연할 때 무상지각(無上知覺)이 나타나나니, 이것이 성식명지(性識明知)인 것이다.

 

是故當知意入 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뜻으로 인하여 느끼는 의입(意入)은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3 1

▷육입(六入)에 나아가 여래장(如來藏)을 밝힘.

“復次,阿難!云何六入本如來藏妙眞如性?

다시 아난아, 어찌하여 6입(入)이 본래 여래장의 묘한진여성(妙眞如性)이라 하는가?

ㅡ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흡수하여 받아 들이는 것이 입(入)이다. 

 

▷안입(眼入)

阿難!(假令有人 不動目晴 瞪久發勞 則於虛空 別見狂華) 卽彼目精瞪發勞者,兼目與勞同是菩提,瞪發勞相

아난아, 가령 어떤 사람이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서 오랫동안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가 눈이 피로하여지면 곧 허공에 광화가 보일 것이니, 그 눈과 피로는 다같이 보리(菩提)로써 똑바로 보다가 눈이 피로하여져서 생긴 상이니라.

ㅡ눈은 곧 부근(浮根)이다. 

 

因于明暗二種妄塵,發見居中吸此塵像,名爲見性,此見離彼明暗二塵,畢竟無體。

밝음과 어두운 것의  가지 허망한 대상 경계(물질)로 인하여 보는 작용이 생기고,  가운데 있으면서  경계의 진상(塵像, 색상)을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보고 깨닫는 견각성(見覺性)이라 하나니,  보는 주체(작용) 밝음과 어두움의 두 대상 경계인 이진(二塵, 물질)를 여읜다 필경에 본다는 실체가 없는 무체(無體)이니라.

ㅡ색(色)으로 인하여 보는 것이 생기고 눈(眼)으로 인하여 대상 물질(塵)을 흡수하여 들이므로 안입(眼入)이 생기는 것이다.

색상(色像)은 외부로 들어나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 물체들. 


如是,阿難!當知是見非明暗來,非於根出
眼生,不於空生。何以故?若從明來,暗卽隨滅
,應非見暗。若從暗來,明卽隨滅,應無→見明。若從根生,必無明暗。如是見精,本無自性 若於從空出。若於空出,前矚塵象歸當見根;又空自觀,何關汝入。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보고 깨닫는 견각성(見覺性) 밝음이나 어두움에서 온 것도 아니고, 눈(根)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허공에서 생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밝음에서 온 것이라면, 어두워지면 곧 따라 사라져서 어둠을   없어야 할 것이고, 

만약 어두움에서 온다면, 밝아지면 곧 따라 사라져서 밝음을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눈에서 나온 것이라면 밝고 어두움이 없으면 이와 같이 보는 정기(精)가 본래 자성이 없을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보는 것이 있으면 자성(自性)을 이룰 것이니, 그렇다면 곧 허공이 아닐 것이요, 또한 허공이 스스로를 볼 것이니, 너의 안입(眼入)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是故當知眼入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눈의 보고 인식하는 안입(眼入)은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성이니라.

ㅡ여래장은 6근(六根)을 벗어나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다. 
근(根)은 능입(能入)이며, 진(塵)은 소입(所入)으로, 6근이 6진을 흡수하여 취할 수 있으므로  6근만을 6입(入)이라 한다. 
안근(眼根)은 색을 분주히 흘러들이고, 이근(耳根)은 소리를 분주히 흘러 들이므로, 능입(能入)이라 하며,   
범부는 3계의 6진(六塵)에 들어가고, 이승(二乘)은 진제(眞諦)에 들어가고, 보살은 속제(俗諦)에 들어가고, 부처는 중제(中諦)에 들어가므로, 모두 입(入)이라 하며, 모두가 일진법계(一眞法界)를 벗어나지 않으므로, 6입이 본래 여래장의 묘진여성(妙眞如性)이라 한다.

'안입허망(眼入虛妄)'이란 인연의 가명(假名)으로, 인연이 화합하여서 허망한 존재가 생기지만, 와도 온 곳이 없으며, 인연이 흩어지면 허망하게 멸한다고 하나, 가도 간 곳이 없다. 

인연은 바로 중(中)이며, 묘각명체(妙覺明體)요, 본여래장이다. 인연에 집착해서도 자연에 집착해서도 안되는 것이니, 만약  견성이 보이는 상(相)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바로 인연에 떨어지고 
만약 견성이 능히 보는 근(根)에서 생긴다고 집착하면 바로 자연에 떨어진다. 
상분과 견분은 모두 자증분(自證分)이 변화한 것으로 합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것이니, 합하지도 분리하지도 못하는 것이라면,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것이다.
 

▷이입(耳入)

阿難!譬如有人以兩手指急塞其耳,耳根勞故頭中作聲,兼耳與勞同是菩提。瞪發勞相

아난아, 만약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급히 귀를  막고 오랫동안 있는다면, 귀의 감관인 이근(耳根)이 피로하여져서 머리 속에서 어떤 소리(헛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귀와 귀의 피로는 보리로써 피로하여서 일으키는 상이니라.

 

因于動靜二種妄塵,發聞居中吸此塵象(聲像),名聽(覺)性,此(聽)離彼動靜二塵,畢竟無體。

움직이는 것과 고요한 것, 이  가지 허망한 경계의 망진(妄塵)으로 인하여, 듣는 작용을 일으키고  가운데 있으면서 경계의 성상(聲像)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듣고 깨닫는 청각성(聽覺性)이라 하며,  듣는 주체가 움직이는 것과 고요한 것의 두 가지 대상 경계(망진)를 떠나면 필경에 듣는다는 그 실체가 없느니라.

ㅡ소리로 인하여 듣는 것이 생기고, 귀로 인하여 대상 물질을 흡수하여 들이므로 이입(耳入)의 허망함이 있는 것이다. 

동(動)과 정(靜)의 2진(二塵)은 모두 무명(無明) 업식(業識) 중에서 환출(幻出)된 것이다. 
동정이진(動靜二塵)은 이근(耳根)에서 나오고, 이근(耳根)이 이 두 망진(妄塵)을 받아들이는 것을 청각성(聽覺性)이라 한다. 그러나 동(動)과 정(靜)의 2진(二塵)은 모두 생멸법(生滅法)으로, 잠시 있다가 순식간에 없어져서 터럭만큼의 실체(實體)도 없는 무생(無生)이다. 어떻게 무생(無生)의 허망(虛妄)한 법을 청각성(聽覺性)이라 하겠는가?

 

阿難! 當知 是聽覺性 非動靜來 非於 非於耳生 非於空出. 何以故?若從(動)來,動卽隨(亡),應非聞動(應不聽動)。若從動來,靜卽隨(亡),應無覺靜。若從(耳)生,必無動靜。如是聞體(聽靜),本無自性。若於(從)空出,有(聽)成性卽非虛空;又空自(聽),何關汝入。是故當知耳入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듣고 깨닫는 청각성(聽覺性)은 움직임이나, 고요함의 동정(動靜)에서 온 것이 아니며, 귀(耳)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온 것 아니다.

왜냐 하면, 만약 움직임에서 온 것이라면, 고요하여지면 곧 따라 없어질 것이니, 당연히 고요함을 느끼지 못해야 할 것이며,

만약 고요함에서 온 것이라면 움직이면 곧 따라 없어질 것이니, 당연히 움직이는 소리를 듣지 못해야 할 것이고,

만약 귀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으면 이와 같이 듣는 정기의 청정(聽靜)이 본래 자성(自性)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듣는 것이 있으면 자성을 이룰 것이니, 그렇다면 곧 허공이 아닐 것이요, 또한 허공이 스스로 듣는 것이니, 너의 이입(耳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듣고서 인식하는 이입(耳入)은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ㅡ듣는 것이 있으면 자성을 이룬다는 것은, 듣는 것이 있으면 자성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문성(聞性)은 비록 동정(動靜)은 아니지만, 동정(動靜)을 떠나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만약 관음(觀音)의 입리일문(入理一門)에서 초입(超入)하면, 동정 2진은 일어나지 않으며, 들어가는 이근(耳根) 역시 적연(寂然)하여 머무는 바가 없다. 
따라서 인연이 일어나는 것은 허망법(虛妄法)이며, 자연이 생김은 허망체(虛妄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연과 자연 모두가 가명(假名)으로 실법(實法)이 아니고, 진문성(眞聞性)은 허공에 꽉 차서 없는 곳이 없는 무소부재(無所不在)인 것이니, 그래서 인연도 아니요 자연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비입(鼻入)

阿難!譬如 (假令)有人急(搐)其鼻 (搐)久成勞,則於鼻中 (嗅)有冷觸,因觸分別通塞虛實,如是乃至諸香臭氣,兼鼻與勞同是菩提。瞪發勞相

아난아, 가령 어떤 사람이 코로 급하게 숨을 들이켜서, 그렇게 들이쉬기를 오랫도록 함으로 인하여 피로하여지면, 코 속에서 차가운 촉감이 있음을 느낄 것이니, 그 촉감으로 인하여 트이고 막힘의 통색(通塞)과 허하고 실함의 허실(虛實)한 것을 분별한다면,

그와 같이 모든 향기와 구린 냄새까지도 맡는 것이니, 그 코와 피로는 다 같은 보리(菩提)이니 똑바로 보다가 눈이 피로하여져서 생긴 현상인 것이니라.

 

因于通塞 二種妄塵,發(嗅)居中吸此(香像),名嗅(覺)性,此(嗅)離彼通塞二塵,畢竟無體。 

통함과 막힘의 통(通)과 색(塞)의  가지 허망한 대상 물질인 망진(妄塵)으 인하여 냄새 맡는 것이 생겨서  가운데에서 이 향상(香像)을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냄새를 맡아 깨닫는 후각성(嗅覺性)이라 하나니, 그 냄새를 맡는 주체가 트임의 통(通)과 막힘의 색(塞)의 2 가지 대상 물질을 여의면, 필경에 냄새라는 그 실체가 없어질 것이니라.

ㅡ냄새(香)로 인하여 냄새를 맡는 것이 생겨나고, 코로 인하여 대상 물질(塵像)을 흡수하여 들이므로 비입(鼻入)의 허망함이 생기는 것이다. 

통색(通塞)의 두 가지 망진(妄塵)이 코끝에 닿으면, 코끝이 망진(妄塵)을 받아들이는 것을 후문성(齅聞性)이라 하며, 통색(通塞)은 모두 실성(實性)이 없다. 
냄새 맡는 중에 있다는 것은 모두 허망한 인연으로 생긴 것으로 실은 무생(無生)인 것이니, 어떻게 통색(通塞)의 허망법(虛妄法)을 후문성(齅聞性)이라 할 수 있겠는가?

 

阿難! 當知 是聞(是嗅覺性) 非通塞來,非於(鼻)出,不於空生(非於空出)。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냄새 맡아 깨닫는 후각성(嗅覺性)은 통함(通)과 막힘(塞)에서 오지도 않고, 코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何以故?若從通來,塞自隨
(亡),應不嗅塞 云何知塞 (若從塞來 通自隨亡) 如因塞有(應不嗅通) ,通則無聞,若從根生(鼻生) 必無通塞 如是聞體(嗅精) 云何發明香臭等觸?若從根生,必無通塞。如是聞體,本無自性。若從空出,是聞自當迴嗅汝鼻,空自有聞,(有嗅成性 卽非虛空又空自嗅) 何關汝入。是故當知鼻入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왜냐하면, 만약 통한 데서 온 것이라면 막히면 곧 따라 없어질 것이니, 당연히 막힘을 느끼지 못해야 할 것이고,

만약 막힘에서 온 것이라면, 통하면 곧 따라 없어질 것이니, 당연히 통함을 느끼지 못해야 할 것이다.

만약 코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통함과 막힘이 없으면 이와 같은 맡는 정기의 후정(嗅精)이 본래 자성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맨새를 맡는 것이 있으면 자성을 이룰 것이니, 그렇다면 곧 허공이 아닐 것이요, 또한 허공이 스스로 냄새를 맡을 것이니, 그것이 너의 비입(鼻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맡아서 인식하는 비입(鼻入)은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11

 

▷수음(受陰)

5온설의 2번째 요소인 수온(受蘊, vedanā-skandhāh, aggregates of sensation, aggregates of feeling)은 지각(知覺)의 적집, 집합 또는 무더기라는 뜻으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의 여러 작용 중 감수작용(感受作用)과 그 세력을 뜻한다.
지각(知覺)의 대상이라는 면에서 볼 때, 수온(受蘊)은 전5식을 통해 육체적 · 물질적 대상을 지각(知覺, 즉 受, 즉 느낌)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제6식(부파불교의 경우) 또는 후3식(대승불교의 경우)을 통해 정신적 대상을 지각(知覺, 즉 受, 즉 느낌)하는 것도 함께 의미한다.ㅡ위키

 

阿難!譬如有人手足宴安百骸調適,忽如忘生性無違順,其人無故以二手掌於空相摩,於二手中妄生澀滑冷熱諸相;受陰當知亦復如是

아난아,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수족(手足) 편안하고  뼈마디가 고루 화평할 때에는 홀연히 살아 있다는 것도 잊은 듯, 마음에 거스리거나 순응하 일이 없다가,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두 손바닥을 허공에서 마주 비빈다면,   사이에 난데없이 껄끄럽거나 매끄럽거나 차갑거나 따뜻한 여러 현상이 생기는 것과 같이, 수음(受陰)도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ㅡ대상 경계에 마음이 접촉하고 마음으로 그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느낌의 수(受)라 한다.

'유인(有人)'은 중생의 일심본원(一心本源)을 비유한 것이고,

수족연안(手足宴安)은 진여부동(眞如不動)에 비유한 것이고

'손바닥을 허공에서 마주 비비면 난데없이 껄끄럽거나 등의 현상이 생긴다'는 것은 환망으로 생긴 접촉이  허망한 세 가지 미세한 식과 여섯가지 거친 식을 일으키는 것을 비유하였으며, 

'살아 있다는 것도 잊은 듯하다'는 것은 지극히 순조로움을 뜻한다.

 

阿難!是諸幻觸,不從空來,不從掌出。如是,阿難!若空來者,旣能觸掌,何不觸身?不應虛空選擇來觸。若從掌出,應非待合。

아난아,  모든 허망한 촉감은 허공에서 온 것도 아니고, 손바닥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약 허공에서 온 것이라 이미 손바닥은 접촉하였는데 어찌 몸에는 촉감이 없는 것인가?

응당 허공이 닿을 곳을 가려서 선택하여 닿게 하지는 않는 것이며, 

만약 손바닥에서 나왔다면 당연히 두 손바닥이 합해지기를 기다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허공의 체(體)는 항상 가득한 것이라서 응당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만약 손바닥에서 나온 것이라면, 당연히 있음을 기다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수음은 허망하며 인연의 가명(假名)이다. 인연이 화합하면 허망한 유(有)가 생기고, 인연이 흩어지면 허망한 이름이 사라진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다’는 수음은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며 불가사의하고 밝게 아는 체성(體性)이라는 뜻이다.


又掌出故,合則掌知,離卽觸入,臂腕骨髓應亦覺知入時蹤迹,必有覺心知出知入,自有一物身中往來,何待合知要名爲觸?

 손바닥에서 나왔으므로 합칠 때 손바닥이 느낀다고 한다면, 뗄 때에 촉이 들어가서 손목과 팔목의 골수(骨髓)들도 마땅히 들어갈 때의 종적(蹤迹)을 또한 깨닫고 알아야 할 것이니라.

반드시 깨닫는 각심(覺心, 마음)이 있어서 나오고 들어가는 것을 안다면, 저절로  물건이  속을 오고 가야 할 것이니, 어찌하여 손바닥이 마주 합하여지기를 기다려서 알게 되는 것을 접촉이 하겠는가?

ㅡ만약 손바닥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이 없는 것이므로 오로지 허망할 뿐인 것이다. 

 

是故當知受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수음(受陰)은 허망한 것이라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성이니라.  

 

▷상음(想陰)
阿難!譬如有人談說醋梅口中水出,思踏懸崖足心酸澀;想陰當知亦復如是。

아난아,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매실을 말하면 입에서 침이 나오고, 높은 낭떨어지에 서 있는 것을 생각하면 발바닥이 짜릿해지는 느낌이 생기는 것과 같이, 상음(想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ㅡ생각은 실상이 없어서 마음으로 말미암마 상(相)을 이루는 것이다.

'유인(有人)'은 상음을 다하지 못한 중생이고, 매실과 낭떨어지를 생각하는 것은 실상이 없는 것이고, 입에 침이 생기고 발바닥이 짜릿해 지는 것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상(相)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상음(想陰) 역시 인연(因緣)이 만들어 낸 허망한 상상이다. 기억하고 잊음이 상(想)의 변제(邊際)이다.
유념(有念)을 기(記)라 하고, 무념(無念)을 망(忘)이라 한다. 기(記)와 망(忘)을 떠나서는 상음이 드러나지 않는다. 
경계에 의지하여 상상하는 것을 연경(緣境)이라 하고 경계를 떠나서 상상하는 것을 연영(緣影)이라 한다.
상(想)은 외인(外因)과 외연(外緣)을 의탁하여 생긴다. 다시 말해 의타이기(依他而起)란 말이다. 
만약 식초라는 말이 없고, 낭떠러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상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상음이 비록 외경을 따라 생멸하지만, 선(善)도 악(惡)도 생각하지 않고, 생각이 다하여 환원할 때, 하나의 불생불멸성(不生不滅性)로 돌아가 있다. 그래서 본래는 인연이 아니라고 한다. 
상음은 경계를 따라 기멸(起滅)하므로 진실성이 아니고, 그래서 자연성도 아니다. 
진성은 인연도 자연도 아니며 수연불변(隨緣不變)의 체(體)가 드러난 성품이다.

 

阿難!如是醋說,不從梅生,非從口入。如是,阿難!若梅生者,梅合自談,何待人說?若從口入,自合口聞,何須待耳!若獨耳聞,此水何不耳中而出?

아난아! 이와 같이 시다(醋)는 말이 매실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입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라.

아난아, 만약 매실에서 생긴 것이라 당연히 매실 스스로가 말을 해야 할 것이거늘, 어찌 사람이 말하기를 기다리며, 

만약 입으로 들어갔다면 마땅히 입이 들어야 할 것이니, 어찌 귀를 기다려 듣겠는가?

만약 오로지 귀만이 그 말을 듣는다면,  침이 어째서 귀속에서 나오지 않는 것인가?

 

想踏懸崖與說相類。是故當知想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높은 낭떨어지에 서 있다는 생각도 매실을 말하는 것과 서로 비슷한 것이니,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냐 하나니, 상음(想陰)은 허망한 것이라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성이니라.

 

▷행음(行陰)
阿難!譬如暴流波浪相續,前際後際不相踰越;行陰當知亦復如是。

아난아, 비유하자면 세차고 급하게 흐르는 물결이 서로 이어져서 앞과 뒤의 순서를 서로 뛰어넘지 않는 것과 같이, 행음(行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ㅡ묘하게 맑은 묘정(妙淨)한 것이 망령되게 움직여서 경계를 따라 옮겨 가면, 생각마다 옮겨지면서 머물지 않기 때문에 행음이며, 이것을 급하게 흘러가는 물에 비유한 것이다. 

행음(行陰), 역시 인연이 만들어낸 허망한 생멸상(生滅相)으로, 행(行)은 천류라는 뜻이다. 
생(生)과 멸(滅)이 행(行)의 변제(邊際)이며, 외상(外相)의 생멸(生滅)을 색진생멸(色塵生滅)이라 하고, 내심(內心)의 생멸(生滅)을 법진생멸(法塵生滅)이라 한다. 

 

阿難!如是流性,不因空生,不因水有;亦非水性,非離空水。如是,阿難!若因空生,則諸十方無盡虛空成無盡流,世界自然俱受淪溺。若因水有,則此暴流性應非水,有所有相今應現在。若卽水性,則澄淸時應非水體。若離空水,空非有外水外無流。

아난아, 이와 같이 흐르는 성품이 허공으로 인하여 생기지도 않았고, 물로 인하여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물의 성품도 아니고, 허공과 물을 떠나서 있는 것도 아니니라.

이와 같아서 아난아, 만약 허공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면, 시방의 끝없는 허공에 끝없는 흐름을 이루어서 세계는 자연히 온통  속에 빠져 잠기게 될 것이며, 

만약 물로 인하여 있는 것이라면,  세차고 급하게 흐르는 물의 성품은 당연히 물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능유(能有, 물)와 소유(所有, 흐름)의 상(相)이 마땅히 지금 눈앞에 뚜렷이 나타나야 할 것이며,

만약 흐름이 물의 성품이라면, 맑고 고요할 때에는 응당 물의 체성이 아닐 것이며,  

만약 허공과 물을 모두 떠나서 있는 것이라면, 허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며, 물을 떠난 물 밖에서는 흐름이 없어야 할 것이니라.

ㅡ능유(能有)는 물이고, 소유(所有)는 흐름을 가리킨 것으로, 흐름이 물을 떠나서 다른 체상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며, 행음은 생긴 자리에서 찰나에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라서, 진상부동심체(眞常不動心體)에서 구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행음은 인연이 화합하면 허망하게 생기고, 인연이 흩어지면 허망하게 사라지므로 행음허망(行陰虛妄)이라 하며,   
행음은 모두 여래장으로부터 일어난다. 비록 연(緣)을 빌려 생기나 그 체는 항상한 불변이다.

파도(물)는 바람으로 인하여 잠시 움직이나 그 잠성(潛性)은 파괴되지 않으므로, 그래서 본래 인연이 아니라고 한다. 
미(迷)하면 허망한 행음이요, 깨달으면 불변의 진여체(眞如體) 중에 생기는 큰 쓰임이다.

 

是故當知行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행음(行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성이니라.

 

▷식음(識陰)

阿難!譬如有人取頻伽甁,塞其兩孔滿中擎空,千里遠行用餉他國;識陰當知亦復如是。

아난아,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빈가병(頻伽甁)의 양쪽 구멍을 막아서 그 가운데에 허공을 가득히 담아서 천리의 먼 길의 다른 나라에 가서, 그 허공을 꺼내 놓는 것과 같으니, 식음(識陰)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ㅡ유인(有人)은 식음을 파하지 못한 삼계의 중생에 비유한 것이고,

빈가병(頻伽甁), 가릉빈가의 새 모양으로 만든 병으로, 형태는 있지만 실상이 없음을 중생들의 허망한 몸인 업보신(業報身)에 비유한 것이다.

병에 가득담은 허공은 식음을 비유한 것으로, 빈 성품이 공한 진각(眞覺)은 법계에 두루 가득하거늘, 한 번 미혹하여 의식이라고 여기는 것이므로, 허망한 몸 안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마치 병 속에 든 허공과 같은 것이다. 

비어 있다는 공(空)이란 본성과 의식이 일체(一體)임을 비유한 것이고, 

'양쪽 구멍을 막은 것'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2장(二障)을 비유한 것이고, 

'천리의 먼 길의 다른 나라에 가서, 그 허공을 꺼내 놓는' 것은 본성은 생멸이 없으며 취하고 버릴 것이 없는데 환망한 몸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형태를 벗어나 저쪽에서 생(生)을 의탁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본성을 모르고 허망하게 식(識)을 일으켜서 유전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阿難!如是虛空,非彼方來,非此方入。

아난아, 이와 같이 허공은 저 곳에서 온 것도 아니고, 이 곳에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라.

ㅡ성품(性品)은 가고 옴이 없으며, 들고 남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如是,阿難!若彼方來,則本甁中旣貯空去,於本甁地應少虛空。若此方入,開孔倒甁應見空出。是故當知識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이와 같이 아난아, 만약 저 곳에서 온 것이라면, 본래 병 가운데에 이미 허공을 담아서 가지고 갔으므로 본래의  그 병이 있었던 곳에는 허공이 마땅히 조금 줄어들었어야 할 것이며,

만약 이 곳으로 들어온 것이라면 뚜껑을 열고 병을 기울일 때에는 당연히 허공이 나오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식음(識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성이니라.

ㅡ몸과 마음과 반법, 곧 근(根), 진(塵), 처(處), 계(界)가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大佛頂萬行首楞嚴經卷第二 終 대불정만행수능엄경 제 2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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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10

 

阿難白佛言:世尊!如我思惟,此妙覺元與諸緣塵及心念慮非和合耶?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

세존이시여제가 사유(思惟)하여 보니,  묘각(妙覺) 근원은 모든 인연 경계인 연진(緣塵, 상분)과 마음(心, 업식)과 생각(念慮, 견분) 더불어 화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ㅡ이것은 다시 다른 하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묘각체(妙覺體)는 법계(法界)에 두루 함장되어 있는 것으로, 본래 우주법계와 다른 체(體)가 아니다. 능소(能所)가 없으니 화(化)한다, 합(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佛言:汝今又言覺非和合。吾復問汝。此妙見精非和合者,爲非明和?爲非暗和?爲非通和?爲非塞和?

若非明和,則見與明必有邊畔。汝且諦觀,何處是明?何處是見?在見在明自何爲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다시 말하기를, 각(覺) 화합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내가 다시 네게 묻겠다

 묘한 보는 정기인 견정(見精)이 화합한 것이 아니라

밝음과 화합(明和)한 것이 아닌가?

어둠과 화합(暗和)한 것이 아닌가? 

통함과 화합(通和)한 것이 아닌가? 

막힘과 화합(塞和)한 것이 아닌가?

만약 밝음과 화합(明和)한 것이 아니라, 견정(見精)과 밝음(明) 사이에 반드시 경계선인 변반(邊畔) 있어야 할 것이다

너는 자세히 살펴보아라어디까지가 밝음의 경계이며? 어디까지가 견정 경계가 되는가?

보는 주체의 견정의 경계는 어디서 시작하며? 밝음의 경계는 어디서 시작하는 것인가?

ㅡ화합(和)하였다면 같은 것이어서 경계가 없어야 할 것이고, 화합한 것이 아니라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경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은 자증분(自證分)의 본체에 속한 것이므로 합한다는 말 자체가 허구이다. 
의식을 파하면 견성(見性)이 드러나고, 견분과 상분을 파하면 장성(藏性)이 드러나며,업식을 파하면 여래장성이 드러난다. 
제법(諸法)이 상이 없음을 알면 상상(相相)이 적멸(寂滅)이며 제법이 모두 장성(藏性)임을 알면 성성(性性)이 원통(圓通)한다.

 

阿難!若明際中必無見者,則不相及,自不知其明相所在,畔云何成?彼暗與通及諸群塞,亦復如是。

아난아만약 밝은 것 가운데 반드시 보는 주체가 없다면서로가 미칠 수 없으므로 스스로 그 밝은 명상(明相) 있는 곳을 알지 못할 것인경계가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는가?

어둠의 명화(暗和)와 통함의 통화(通和)와 막힘의 색화(塞和)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又妙見精非和合者,爲非明合?爲非暗合?爲非通合?爲非塞合?若非明合,則見與明性相乖角,如耳與明了不相觸,見且不知明相所在,云何甄明合非合理?彼暗與通及諸群塞,亦復如是。

또한 묘한 견정이 화합(和)한 것이 아니라밝음과 합하지 않은(非合) 것인가? 

어둠과 합하지 않은(非合) 것인가?

통함과 합하지 않은(非合) 것인가?

막힘과 합하지 않은(非合) 것인가?

만약 밝음과 합하지 않은 것이라면보는 주체와 밝음의 성품이 서 어긋나는 것이, 마치 귀(耳)와 밝음(눈)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과 같이보아도 밝은 명상(明相) 있는 곳을 알지 못할 것인어떻게 합하고 합하지 않는 이치를 가려서 밝힐 수 있겠는가?

어둠의 비암합(非暗合)와 통함의 비통합(非通合)와 막힘의 비색합(非塞合)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ㅡ합한 것이 아닌 비합(非合)이라면, 눈과 대상 물질이 어긋나서 이미 밝음도 알지 못하고 또한 보는 주체도 나타나지 않을 것인데, 두 가지 체(體)가 이미 없거니 어디를 좇아서 합하는 것과 합하지 않는 이치를 밝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이상은 맑고 묘한 견정(見精)에 의지해서 마음의 티클을 떨어버리게 한 것이다. 

 

▷제근(諸根)과 그 대상물질에 나아가 여래장을 나타내시다.

阿難!汝猶未明一切浮塵諸幻化相,當處出生隨處滅盡,幻妄稱相,其性眞爲妙覺明體,如是乃至五陰、六入,從十二處至十八界,因緣和合虛妄有生,因緣別離虛妄名滅,殊不能知生滅去來,本如來藏常住妙明,不動周圓妙眞如性,性眞常中求於去來、迷悟、死生,了無所得。

아난아너는 오히려 아직도 실속 없이  경계의 일체의 부진(浮塵)과 모든 환술(幻術)과 같이 변화하는 온갖 모양(相)이, 곳을 따라 생겨났다가  곳을 따라 사라져버리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허망한 환영의 환망(幻妄) 모양(相)이라고 하지만 성품은 진실 그대로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본체인 묘각명체(妙覺明體)이니라.

이와 같이 내지 5(陰, 오온) 6(六) 12(十二處, 육근+육경)에서 18(十八界, 육근+육경+육식) 이르기까지도 인연이 화합하여 허망하게 생겨나는 것이며

인연이 흩어지면 허망하게 멸하는 것이니,

 생기고 멸하고 가고 오는 것 본래는 여래장(如來藏)이라, 항상 상주(常住)하는 것이며,

묘하게 밝은 묘명(妙明)한 것이고, 부동하여 두루 원만하고 미묘한 진여 변함없는 성품인 묘진여성(妙眞如性)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구나!

 성품의 진실하고 상주(常住)하는 가운데서는 가고 옴과 미혹함과 깨달음과 나고 죽음을 찾아보아도 찾을  없느니라.

ㅡ명암통색(明暗通塞)이 합하고 합하지 않는 것의 이치가 모두 부진(浮塵)이요 환상이다. 

화합(和合)으로 인하여 허망하게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므로 환상(幻相)이고, 곳을 따라 생기고 곳을 따라 없이진다고 한 것이다. 

여래장(如來藏)이란, 당사자의 법신의 묘한 본성으로, 과(果)에 의해 일컫는 것이 여래(如來)이고, 모든 덕을 포함하고 있어서 장(藏)이라 하고,

애초에 가고 옴이 없으므로 상주(常住)라 하고, 능히 어둡게 할 수 없으므로 묘명(妙明)이라 하고, 생멸을 따라 가지 않는 것이므로 부동(不動)이라 하고, 두루 만족되지 않음이 없는 것을 두루 원만하다 하고, 묘하여 지극히 신비하며 일체의 성품으로서 서로 차이가 없음을 미묘한 진여의 성품인 묘진여성(妙眞如性)이라 한다. 

 

ㅡ제법이 와도 본래 온 곳이 없으므로 당처출생(當處出生)이라 하고,

가도 간 곳(흔적)이 없으므로 수처멸진(隨處滅盡)이라 한다.

​여래장이란 중생 모두가 함께 갖추고 있는 본각의 성체(性體)이다. 이 성체는 숨어서 드러나지 않고 중생심 안에 함장되어 있어서 여래장이라 한다. 상주하고 불가사의하게 밝고 움직이지 않으며 두루 원만함이 여래장의 덕상(德相)이다. 

 

▷오음을 밝히시다.

阿難!云何五陰本如來藏妙眞如性?阿難!譬如有人以淸淨目觀晴明空,唯一精虛迥無所有,其人無故不動目睛瞪以發勞,則於虛空別見狂花,復有一切狂亂非相;色陰當知亦復如是。

아난아, 어째서 5음(陰)을 본래의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인 묘진여성(妙眞如性)이라 하는 것인가?

아난아,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청정한 눈으로 맑게 개인 밝은 하늘을 볼 때에는, 오직 하나의 맑은 하늘일 뿐이라서 저 멀리 아무것도 없거늘, 그 사람이 까닭 없이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오랫동안 똑바로 보고 있다가 눈이 피로하여지면, 허공에 따로 어물거리는 광화(狂花)를 보기도 하고, 다시 일체의 어지럽게 날 뛰는 헛된 모양을 보기도 하는 것과 같이, 색음(色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ㅡ색수상행식의 5 가지가 체(體)를 이루어 묘진여성을 덮어서 가리는 것을 오음(五陰)이라 한다. 

'청정한 눈으로 맑게 개인 밝은 하늘을 보는 것'은 맑은 지헤로 묘한 성품을 보는 것을 비유한 까닭에 '멀리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고, 

'눈이 피로하여서 광화를 보는 것'은 허망한 인(因)으로 색(色)에 연하는 것이다. 

'허공에 따로 어물거리는 광화(狂花)'는 색음(色陰)을,

헛된 모양의 광상(狂相)은 색경(色境)을 비유한 것이다.

 

▷색음(色陰)

阿難!是諸狂花,非從空來,非從目出. 如是,阿難!若空來者,旣從空來還從空入,若有出入卽非虛空,空若非空,自不容其花相起滅,如阿難體,不容阿難。

아난아, 이 모든 어물거리는 광화(狂花)는 허공에서 온 것도 아니고 눈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약 허공에서 온 것이라면, 허공에서 왔으니 다시 허공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니,

만약 드나듦의 출입(出入)이 있다면 (실체가 있는 것이므로) 곧 허공이 아닐 것이며,

허공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그 광화의 모양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허용할 수 없으니,

마치 아난의 몸에 다른 아난을 허용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ㅡ광화가 허공을 인한 것이 아님이 색음(色陰)이 대상경계로 인하여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若目出者,旣從目出還從目入,卽此花性從目出故,當合有見。若有見者,去旣花空旋合見眼;若無見者,出旣翳空,旋當翳眼。又見花時,目應無瞖,云何晴空號淸明眼?是故當知色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만약 눈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미 눈에서 나왔으니 다시 눈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 광화의 성품이 눈에서 나온 것이므로, 당연히 보는 작용에 합(合)해야 할 것이며,

만약 보는 작용이 있다면 나갈 때에 이미 허공의 꽃을 보았으니, 돌아 올때에도 반드시 눈을 보아야 할 것이며, 

만약 보는 작용이 없다면 나갈때 이미 허공을 가렸으니, 돌아올 때에도 당연히 눈을 가려야 할 것이며,

또 광화를 볼 때에도 눈에는 당연히 가리움이 없는데, 어찌하여 청정하고 맑은 허공이라야만 청정하고 맑고 밝은 눈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색음(色陰)은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성품이니라.

ㅡ곧 색음이 눈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광화가 눈에서 나온 것이라면 눈의 성품을 얻어서 응당 보는 것이 있을 것이나, 돌아올 때 눈을 보지 못하며, 또한눈을 가리지도 않으므로 눈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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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9

 

▷법합(法合)

阿難!吾今爲汝以此二事進退合明。

아난아, 내가 이제 너를 위하여   가지의 이사(二事)를 앞(進)뒤(法)로 맞추어 가면서 밝혀주리라. 

ㅡ두 가지의 이사(二事)란, 별업의 눈병으로 보는 것과, 동업으로 느끼는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 법(法)과 비유를 서로 맞추어 가면서 밝힌다고 한 것이며,

여기에서 '진(進)'은 법(法)을 말하고, 퇴(退)는 비유를 말하는 것이다.

 

阿難!如彼衆生別業妄見,矚燈光中所現圓影雖現似境,終彼見者目眚所成,

眚卽見勞非色所造,然見眚者終無見咎。

아난아,  중생이 개별로 지은 업으로 허망하게 보는 별업망견(別業妄見)으로, 등불의 빛에 나타난 원영(圓影)의 등무리가 비록 대상의 경계와 비슷하 나타날지라도, 결국에는  보는 사람의 눈병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병은 곧 보는 주체가 피로하여 나타난 모습일 뿐,  자체에서 만들어진  아니다.

그러나 마침내 눈병 그 자체를 보게 된다면, 그 보는 체의 허물이 없는 것이다. 

ㅡ이것은 별업의 업장으로 망령되게 보는 것은 그 허물이 눈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등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비유한 것이다.  즉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2분은 자증분(自證分)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속한다. 경계에 의한 여환(如幻)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 아니니, 마치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우리가 외계사물을 직접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식상(識上)의 형상을 인식한다고 본다. 이것은 곧 하나의 인식이 성립될 때, 식이 주관과 객관으로 이분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상분(相分)은 객관으로서의 식, 즉 식상(識上)의 영상(影像)으로서 소취분(所取分)ㆍ소량(所量)ㆍ사경상(似境相)ㆍ유상식(有相識)이라고도 하며,

견분(見分)은 주관으로서의 식, 즉 상분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작용으로서 능취분(能取分)ㆍ능량(能量)ㆍ능취상(能取相)ㆍ유견식(有見識)이라고도 하며,

자증분(自證分)은 이분화 되기 이전의 식 자체로서 견분과 상분에 의한 인식작용의 결과를 확인하는 인식체의 역할을 한다. -무착(無着)의 섭대승론(攝大乘論) 상권 6]

 

▷정합(正合)

例汝今日以目觀見山河國土及諸衆生,皆是無始見病所成。

見與見緣似現前境,元我覺明見所緣眚,覺見卽眚 本覺明心,覺緣 非眚

예컨데 네가 지금 눈으로 산과 강과 국토와 중생들을 보는 것이 모두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보는 주체가 병에 걸림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니라.

보는 주체(작용, 見, 능견)과 보이는 대상 물질인 견연(見緣, 상견)이 마치 눈 앞의 경계와 같이 나타나나,

본래 나의 깨달음의 밝음인 각명(覺明, 묘심명체)이 허망한 대상을 깨닫는 것은 눈병이 아니니라.  

ㅡ'지견(知見)에 알음알이가 성립되면, 그것이 곧 무명(無明)의 근원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이것은 다만 각명(覺明)의 허물일 뿐, 본각(本覺)의 잘못이 아닌 까닭에 '각명(覺明)으로 허망한 대상을 깨닫는 것은 눈병이 아니니라.'라고 한 것이다. 

이 가운데 법(法)과 비유한 대의(大意)는 눈(目)은 제 7식, 눈병은 사람과 법에 대한 2 가지의 집착을, 

등불은 제 8식에 비유한 것이다. 

등불을 식(識)에 비유한 것은, 등불이 기름과 결합하여 계속 타는 것과 같이, 식(識)도 탐욕과 애욕에 의해서 생사가 끊어지지 않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은 눈병과 같아서, 경계에 오취(五聚)에 차별이 있으므로, 각각 지은 별업이라 하였다.

눈병이 없으면 다만 등불만 보일 것이고, 집착이 없는 사람은 다망 유식(唯識)만 볼 것이다. 

 

覺所覺 眚 覺非眚中(?) (性覺明元 卽非眚中, 누락된 듯) 此實見見。云何復名覺聞知見?

깨달아야 할 대상인 소각(所覺)을 깨닫는  것은 눈병이지만,

깨닫는 성품인 성각 밝은 근본인 성각명원(性覺明元)은 눈병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이는 보는 주체를 보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또 다시 깨달으며(覺), 들으며(聞), 알고(知), 본다(見)고 이름하겠는가? 

깨달아야 할 대상인 소각(所覺)은, 곧 볼 수 있는 일체의 대상 경계이니, 대상 경계를 분별하는 것은 눈병이지만, 각성(覺性)은 눈병이 아니므로 볼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성각(性覺), 진여의 본체는 본래 자명(自明)한 것이므로 성각이라고 하였다. 

전심법요(傳心法要)에 이르기를 “세인(世人)은 진성(眞性)을 깨닫지 못해서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마음이라 오인하여 견문각지에 덮여서 정명본체(精明本體)를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

 

是故汝今見我及汝幷諸世閒十類衆生,皆卽見眚;非見眚者,彼見眞精性 非眚者故不名見。

그러므로 네가 지금 나를 보고, 너를 보고, 모든 세간의 10 종류의 중생을 볼지라도, 그것은  보는 주체(작용)이 눈병에 걸린 것이지,병을 보는 진실한 주체는 아닌 것이다. 

 보는 주체(작용)의 정밀하고 참된 성품의 진정성(眞精性)병이 아니기 때문에 ‘보는 주체(작용)’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ㅡ'보는 주체(작용)이 눈병에 걸린 것이지 눈병을 보는 진실한 주체가 아닌 것이다'란, 볼 수 있는 법은 모두 눈병이지 보는 주인공의 본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성(自性)이 불변수연(不變隨緣)하고, 수연불변(隨緣不變)하는 것이라, 견분과 상분이 의지할 수 있으나, 견상(見相)이 변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생망(眚妄)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비생(非眚)이라 하였다.

 

▷합동업(合同業)

阿難!如彼衆生同分妄見,例彼妄見別業一人,一病目人同彼一國,彼見圓影眚妄所生,此衆同分所現不祥,同見業中瘴惡所起,俱是無始見妄所生。

아난아,  중생들이 본 공동으로 허망하게 보는 동분망견(同分妄見)과,

따로 지은 업장으로 망령되게 지은 별업망견(別業妄見)한 사람을 예로 들어 비유로 밝혀 보리니,

눈병에 걸린 한 사람은  나라와 같으며, 또 그가 보는 등불의 원영(圓影)은 눈병으로  허망하게 생긴 것이며, 

 공동의 무리인 중동분(衆同分, 동업)이 다 같이 불길한 불상(不祥)을 보는 것은 같은  업장 가운데 나쁜 기운의 장악(瘴惡)으로 생긴 것이니, 모두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보는 주체(작용)의 허망된 망견(妄見)에서 생긴 것이니라.

ㅡ망견을 일진일퇴(一進一退)의 비유로 밝히는 것이다. 망업(妄業)은 비록 다르나, 망본(妄本)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정합(正合)

例閻浮提三千洲中,兼四大海娑婆世界,幷洎十方諸有漏國及諸衆生,同是覺明無漏妙心,見聞覺知虛妄病緣,和合妄生、和合妄死。若能遠離諸和合緣及不和合,則復滅除諸生死因,圓滿菩提不生滅性淸淨本心本覺常住。

염부제(閻浮提)의 3천개 섬(洲) 가운데 사방의 대해(大海)와 사바세계(娑婆世界)와 아울러 시방(十方)의 모든 번뇌가 있는 유루(有漏)의 중생들이 살고 있는 나라인 유루국(有漏國)들과 중생들을 견주어 예를 들면, 

이 모두가 깨달음이 밝고 번뇌가 없는 묘한 마음의 각명무루묘심(覺明無漏妙心)이, 보고(見) 듣고(聞) 깨닫고(覺) 아는(知)것의 허망한 병의 인연으로, 화합하여 허망하게 나고(生), 허망하게 죽는(死) 것이니라.

만약 능히 모든 화합하는 화합연(和合緣)과 화합하지 않는 불화합연(不和合緣)을 멀리 벗어날  있다면, 곧 생사의 원인을 멸하게 되어서  원만한 보리의 생멸을 떠난 성품을 원만하게 이루어서, 청정한 본심(本心)에 본각(本覺)이 항상 상주하게 될것이니라.

ㅡ앞에서는 한 사람으로 한 나라를 비유하였고, 여기에서는 한 나라를 대천세계에 비유하여서, 기계(器界)와 근신(根身) 모두가 보는 주체의 병과 하합하여 아집으로 부질없이 오도에서 생멸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밝히셨다. 

화합연(和合緣)이란, 대상 경계로 인하여 생기는 아집의 거친 생각의 추상(麤想)이며, 그것이 번뇌장(煩惱障)이며

불화합연(不和合緣)이란, 대상 경계를 여의고 홀로 집착하는 법집(法執)의 미세한 생각으로, 소지장(所知障)이다

이러한 이장(理障)이 생사를 이어가며 바른 지견을 가로 막는 나쁜 인(因)이 되어서 보리(菩提)를 없애는 것이다.

 

▷다시 밝히시다.

阿難!汝雖先悟本覺妙明性非因緣、非自然性,而猶未明如是覺元,非和合生及不和合。

아난아, 네가 비록 본각의 묘하고 밝은 성품의 묘명성(妙明性)이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님을 깨달았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이러한 깨달음의 근원은 서로 화합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서로 화합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치를 밝히지 못하였느니라.

ㅡ도를 증(證)하는 성품은 화합으로도 불화합으로도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아직 알지못하는 것이니, 이는 공부하는 마음에 남아 있는 번뇌의 찌꺼기 이므로 다시 바르게 깨우쳐 주어 밝고 맑게 되도록 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정(淨)을 밝히시다

阿難!吾今復以前塵問汝。汝今猶以一切世閒妄想,和合諸因緣性,而自疑惑。證菩提心和合起者,則汝今者妙淨見精,爲與明和?爲與闇和?爲與通和?爲與塞和?

아난아, 내가 이제   경계의 미진을 들어 너에게 묻겠으니,

너는 아직까지 오히려 일체 세간의 망상으로 화합하는 모든 인연성(因緣性)으로 인하여 스스로 의혹을 가지기를, 보리심를 증득하는 마음도 화합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여기는구나.

지금 너의 묘하고 깨끗한 보는 견정(見精)은 밝음(明)과 화합한 것인가? 어둠(闇)과 화합한 것인가?

통함(通)과 화합한 것인가? 막힘(塞)과 화합한 것인가?

'화(和)'라고 한 것은 섞여서 분별하기 어려운 것이고, 

'합(合)'이라는 것은 집착하여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若明和者,且汝觀明,當明現前,何處雜見?見相可辨,雜何形像?

만약 밝음(明)과 화합하였다면, 네가 밝음을 보는 관명(觀明)할 때에 마땅히 밝음이 나타날 것이니, 어느 곳에 보는 것이 섞여있는 것인가?  보는 것과 상(相)은 분별할 수 있지만, 섞인 것은 어떠한 형상인가?

ㅡ보는 것과 상(想)이란, 보는 것과 밝은 상(相)을 말하는 것이다.

 

若非見者,云何見明?若卽見者,云何見見?必見圓滿,何處和明。若明圓滿,不合見和,

만약 보는 주체(작용)가 아닌 비견(非見)이라면, 어떻게 밝음을 보겠으며?

만약 보는 주체(작용)라면, 어떻게 보는 주체를 본다고 하겠는가? 

반드시 보는 주체(작용)가 원만하다면, 어디에서 밝음과 화합할 것이며

만약 밝음이 원만하다면 보는 주체(작용)와 화합하여 어울리지 못할 것이다.

ㅡ화합한 것이라면, 그 사이사이에 섞인 것이라서 원만하지 못할 것이며, 원만하다면 서로 화합하지 못할 것이다.

 

見必異明;雜則失彼性明名字。雜失明性,和明非義,彼暗與通及諸群塞亦復如是。

보는 주체(작용)은 반드시 밝음과는 다른 것이므로, 섞이었다면  본성 밝다는 명분을 잃게 될 것이니,

섞임으로 인해서 밝은 본성 잃어버린다면, 밝음과 화합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니, 

어둠(闇)과 통함(通)과 막힘(塞)의 경우도 역시 그러할 것이니라.

 

復次,阿難!又汝今者妙淨見精,爲與明合?爲與暗合?爲與通合?爲與塞合?

다시 아난아, 네가 지금 묘하고 맑은 묘정견정(妙淨見精)은 밝은(明) 것과 합(合)한 것인가?

어두운(闇) 것과 합한 것인가? 통한(通) 것과 합한 것인가? 막힌(塞) 것과 합한 것인가?

ㅡ홥한 것이 있으며, 곧 망진(妄塵)과 관련된 것이라서, 묘하고 맑은 묘정(妙淨)이라고 할 수 없다.

 

若明合者,至於暗時明相已滅,此見卽不與諸暗合。云何見暗?

만약 밝음과 합한 것이라면, 어두울 때에는 밝은 모양의 명상(明相)은 이미 없어졌을 것이니, 저 보는 주체(작용)가 어두움과는 합하지 못할 것인 즉, 어떻게 어두움을 본다고 하겠는가?

ㅡ합하였으면,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명상(明相)이 없을 때에는 보는 주체(작용)도 따라서 없어질 것이니, 어두움과 합한 것도 아닐 것이다.

 

若見暗時不與暗合,與明合者應非見明,旣不見明云何明合?了明非暗彼暗與通,及諸群塞,亦復如是。”

만약 어두움을 볼  어둠과 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합한 명합(明合)의 경우에도 마땅히 밝음을 보지 못해야 할 것이다. 

이미 밝음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밝음과 합하였다고 할 것이며, 밝은 것이 어둠이 아닌 것을 알 수 있겠는가?

그 밖의 어둠(闇)과 통함(通)과 막힘(塞)의 경우 경우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니라.

ㅡ만약 어두움과 합하지 않고서도 어두움을 능히 볼 수 있다면, 밝음과 합할 때에도 마땅히 밝음을 보지 못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밝음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밝음과 합하였다고 하겠으며, 어떻게 밝은 것은 어두운 것이 아님을 안다고 하겠는가? 합하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으면, 보리심을 증득하는 마음이 화합으로 생기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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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8

 

阿難白佛言:世尊!如佛世尊爲我等輩宣說因緣及與自然,諸和合相與不和合,心猶未開;而今更聞見見非見,重增迷悶。伏願弘慈施大慧目,開示我等覺心明淨。作是語已,悲淚頂禮,承受聖旨。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

세존이시여부처님께서 저희들을 위하여 인연과 자연과 모든 화합상(和合相)과 화합하지 않는 불화합(不和合)의 이치를 말씀해주셨으나여기에 제 마음이  열리기도 전에, 다시 ‘진견(眞見)이 견분(見分)을 볼 때, 진견(眞見)은 견정(見精)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들으니지금 더욱 미혹하여 답답할 뿐입니다

바라오니 부디 넓으신 사랑으로  지혜의 눈을 베푸셔서 저희들에게 깨달음의 각심(覺心) 밝혀서 맑게하는 법을 깨우쳐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난은 슬피 울며 땅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성스러운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ㅡ견견비견(見見非見), 묘각성(妙覺性)은 상분(相分)과 화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견분(見分)과도 화합하지 않고 생멸과 불생멸의 화합체인, 제8식의 정명체(精明體)와도 화합하지 않는다. 


화합상(和合相)이란, 해와 달과 등불에 인하여 보는 것이 있다고 말한 것이고,

불화합(不和合)이란, '밝음도 아니고, 어두움도 아니고, 통함도 아니고, 막힘도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爾時,世尊憐愍阿難及諸大衆,將欲敷演大陁羅尼諸三摩提妙修行路,告阿難言:汝雖强記,但益多聞;於奢摩他微密觀照心猶未了。汝今諦聽,吾今爲汝分別開示,亦令將來諸有漏者獲菩提果。

이때 세존께서는 아난과 대중들을 가엾게 여기시고장차 대다라니(大陀羅尼, 총지문) 모든 삼마제(三摩提, 삼매) 묘한 수행의 묘수행로(妙修行路)를 설하시고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기억력이 좋을지라도 단지 많이 듣는 다문(多聞)으로 아는 지식만 채웠을 사마타(奢摩他)미세하고 비밀스러운 관조의 미밀관조(微密觀照)를 아직 마음속 깊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내가 지금 너를 위하여 분별하여 열어 보여 줄것이며또한 장래의 번뇌에 얽힌 유루(有漏)의 중생들도 깨달음의 과위인 보리과(菩提果) 얻게 하고자 하느니.

 

*대다라니(大陀羅尼), 총지(總持), 총지(總持) · 능지(能持) · 능차(能遮)라고도 번역하며, 일체법을 총섭하고 무량한 뜻을 지닌다, 또는 신ㆍ구ㆍ의 삼업이 청정함을 총섭하고 계ㆍ정ㆍ혜 세 무루학의 정진을 수지한다는 뜻이다. 

*미밀관조(微密觀照), 능견(能見)의 견(見)을 직관하여서 전상(轉相)을 파하고, 업상(業相)을 살피는 것이 바로 묘미밀성정명심(妙微密性淨明心)을 얻는 길이다.

*관조(觀照), 회광반조(廻光觀照)의 준말, 관조는 사물을 밝게 비추어 보는, 즉 사물을 보고 관하여서 사물의 실체가 없음을 확연히 알아 가는 것을 말하고, 반면에 명상은 생각이나 의식을 관하여 그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동업(同業)과 별업(別業)

阿難!一切衆生輪迴世閒,由二顚倒分別見妄,當處發生當業輪轉。

云何二見?一者衆生別業妄見;二者衆生同分妄見。

아난아일체 중생이 세상에서 윤회하는 것은  가지의 뒤바뀐 이전도(二顚倒)로 말미암아 분별하고 허망하게 보는 작용으로 말미암아, 바로 그 장소를 따라 발생하는 당처발생(當處發生)하며, 바로  업보를 따라 바퀴   굴러가는 당업윤전(當業輪轉)하는 까닭이니라.

 가지 보는 작용의 이견(二見)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중생 개별의 별업(別業)으로 인하여 허망하게 보는 망견(妄見)이요

둘째는 중생 공동의 동업(同業)으로 인하여 허망하게 한 보는  동분망견(同分妄見)이니라.

ㅡ별업(別業)이란 미혹이 일어나는 것이 서로 다름을 말한 것으로, 허망하게 대상의 그림자를 따라 정견(正見)을 잃어버린 것이고, 

동업(同業)이란, 망견(妄見)의 느낌이 서로 같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허망하게 생사를 따라서 본래의 깨달음인 본각(本覺)을 잃어 버린 것이다.

이 허망한 견(見)으로 인하여 망업을 짓게 되므로, 장소를 따라 발생하는 당처발생(當處發生)이라 한 것이며, 

그 업을 따라 제취의 보(報)를 받으므로 업보를 따라 유전하는 당업윤전(當業輪轉)이라 한 것이다.

 

*당처발생(當處發生), 본처(本處), 즉 진심을 떠나지 않고 발생하는 것이다. 망심은 진심을 떠날 수 없으며, 진심이 있어서 망심이 일어나고, 망심으로 인하여 미혹하여 지며, 미혹하여서 업을 짓고 또 그 과보를 받는 것이다.

*두 가지 보는 작용의 이견(二見), 견분이 상분을 취하여서 두 가지의 망견을 연출하는데, 이것이 분단과 변역의 두 생사의 근본이며 보리와 열반 등 2과(二果)의 근본이다. 이 두 망견은 무명 업식이 변현(變現)되어 일으키는 것이다.  

*분단생사(分段生死), 생(生)과 사(死)를 서로 떨어진 분단(分段)의 세계로 생각하는 생사관으로, 분단생사관에서 보면 생사가 서로 격절돼 있어서 죽음은 엄청난 공포다. 우리 범부중생이 생로병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바로 분단생사(分段生死)를 받아들인 까닭에 생긴 것이다. 삼계(三界)에서 생사를 되풀이 하는 범부 각자는 과거에 지은 업(業)에 따라 신체의 크고 작음과 목숨의 길고 짧음이 구별된다고 해서 분단(分段)이라 한다.  

*변역생사(變易生死), 생사가 서로 격절된 세계가 아니고 단지 몸만 바뀌어 변화된 세계라고 보는 생사관이다. 생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의 변화라고 생각하게 된다. 낮이 생이라면 밤은 작은 죽음이다. 밤과 낮은 고정돼 있지 않고 끝없이 변화한다. 이처럼 생사관을 넘어선, 즉 생사에 대한 집착을 넘어선 경지가 변역생사이다. ㅡ아미산

 

▷별업(別業)을 밝히다.

云何名爲別業妄見?阿難!如世閒人目有赤眚,夜見燈光別有圓影五色重疊。

眚 눈에 백태낄 생, 흐릴 생

어떠한 것이 개별의 별(別業)으로 말미암아 허망하게 보는 것인가?

아난아세상 사람들 가운데 눈에 붉은 백태가 끼는 적생(赤眚)의 눈병 있는 사람은 밤에 등불을 볼 때에 오색의 둥근 영상이 중첩되어 겹쳐지는 등의 그림자인 등무리를 보게 되느니라.

ㅡ눈병으로 인하여 중첩된 빛을 보는 것과 같이 마음에 집착이 있는 까닭에 경계를 따라 차별된 의혹이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란, 일체 중생을 비유하고, 눈(目)은 칠식(七識)을 비유하며, 등불은 팔식(八識)을 비유하고, 

둥근 영상은 허망한 경계를 비유한 것이다. 

오색(五色)이란, 대상 경계, 즉, 오음이 있으므로 오색이라 한 것이다. 

또한 눈(目)은 묘각명심에 비유한 것이며, 허망하게 한 번 움직이면 무명망심으로 바뀌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於意云何?此夜燈明所現圓光,爲是燈色爲當見色?阿難!此若燈色,則非眚人何不同見,而此圓影唯眚之觀?若是見色,見已成色,則彼眚人見圓影者名爲何等?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밤에 등불을 밝힘에 따라 나타나는 둥근 영상의 원광(圓光)을 등불의 색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는 작용의 색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난아만약 그것 등불의 색이라면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오색의 둥근 영상인 원영(圓影)을 보지 못하거늘어찌하여 오직병에 걸린 사람만이 오색의무리를 보는 것인가!

만약 보는 작용의이라면, 보는 작용은 이미 되었거늘, 병에 걸린 사람이 보는 둥근 영상인 원영(圓影)을 무엇이라 해야 하겠는가?

ㅡ이는 차별하는 망견이 대상 경계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도 아니고, 또한 눈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중생들의 보는 주체가 병이 들어서 생긴 망견인 것이다. 

'오직 눈병에 걸린 사람만이 오색의 무리를 보는 것'이란, 오직 눈병에 걸려야만 볼 수 있다는 것이며, 

'무엇이라 해야 하겠는가?'는, 만약 색이 눈에 있다면 등불의 원영(圓影)을 색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復次,阿難!若此圓影離燈別有,則合傍觀屛帳几筵有圓影出;離見別有,應非眼矚,云何眚人目見圓影?

또한 아난아만약 이 원영(圓影)이 등불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라면옆자리의 병풍이나 휘장이나 책상이나 돗자리를  때에도당연히 원영(圓影)이 있어야 할 것이

보는 작용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라면, 응당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데어찌하여 눈병에 걸린 사람에게만이 원영(圓影)이 보이는 것인가?

 

▷허망한 근원을 결론지어 나타내시다.

是故當知 色實在燈,見病爲影,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빛은 실제로 등불에 있는 것으로, 보는 작용이 병이 들어 등무리가 된 것이니라.

ㅡ등불에 빛은 있으나 원영(圓影)은 없는 것으로, 그 원영은 눈병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인식(認識)이 대상 경계를 변화 시키는 허물이 없으나, 아집으로 말미암아 허물이 있는 것이다.

빛은 실제로 등불에 있는 것의 색실재등(色實在燈)이란, 성공진색(性空眞色)이 본래 일체법성(一切法性)을 갖추고 있는 것을 뜻한다.

 

影見俱眚,見眚非病。終不應言是燈是見,於是中有非燈非見。如第二月,非體非影。

何以故?第二之觀,捏所成故。諸有智者不應說言,此捏根元是形非形離見非見;

등무리와 보는 작용이  병이지만, 눈병을 보는 자체는 병이 아니니, 종내에는 '등무리의 탓이다, 보는 작용의 탓이다'라고 말할 것이 못 되며, 또한  가운데에서 등불의 탓도 아니요, 보는 작용의 탓도 아니라고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마치 제이(第二)의 달(月)이 달 자체도 아니고, 달의 그림자도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니, 

왜냐하면 제2의 달은 눈을 비벼서 생긴 것이 때문이다. 

지혜가 있는 모든 이들은 눈을 비벼서 생긴 제2의 달의 근원을 두고 ‘달의 모양이다, 달의 모양이 아니다’라고 하거나, ‘보는 작용이다, 보는 작용이 아니다'라고 하는 등의 말을 하지 않느니라.

ㅡ그림자가 보는 이의 눈병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는 것을 알면, 그림자와 보는 작용 모두가 눈병일 뿐, 그 눈병을 보는 그 주인공은 병이 든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 눈병을 보는 것을 곧 보는 본체이고, 보는 본체는 병이 없는 것이니, 중생의 능견소견(能見所見)은 망혹(妄惑)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원영(圓影)은 제2의 달을 말하고, 본체는 참 달을 말한다.

 

此亦如是,目眚所成,今欲名誰是燈是見,何況分別非燈非見。

 등무리 역시 그와 같이 눈병으로 생긴 것인데, 지금 무엇을 이름하여 '등불의 탓이다, 보는 작용의 탓이다'라고 하겠으며, 더더욱, ‘등불의 탓이 아니다 보는 탓이 아니다’라고 분별하는 것이겠는가!
ㅡ묘각명심의 진견(眞見)이 무명망심의 망견(妄見)을 볼 때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진견은 유무시비(有無是非)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니, '등(燈)이다 견(見)이다' 말할 수 없거늘,

'등(燈)이 아니다, 견(見)이 아니다'라고 분별하겠는가? 
 

▷동업(同業)을 밝히시다.

云何名爲同分妄見?阿難!此閻浮提除大海水,中閒平陸有三千洲,正中大洲東西括量,大國凡有二千三百,其餘小洲在諸海中,其閒或有三兩百國,或一或二,至于三十、四十、五十。

동분(同分, 동업)의 허망한 망견(妄見)이란 무엇이겠는가?

아난아,  남섬부주(南贍部洲, 염부제)에는 대해(大海) 제외한 중간의 육지에 3천 개의 섬(洲)이 있으니,

  가운데에 있는 큰 섬인 대주(大洲)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과 서쪽 모두를 다 헤아려 보면 2천 3백 개의  나라가 있느니라. 

 나머지 작은 섬인 소주(小州)들이 여러 바다에 가운데에 있는데,  가운데에는 혹 3백의 나라, 혹 2백의 나라가 있기도 하고, 또한 한 나라나 두 나라에서부터 30의 나라, 40의 나라, 50의 나라가 있기도 하느니라.

 

▷국지(局地)적 비유

阿難!若復此中有一小洲只有兩國,唯一國人同感惡緣,則彼小洲當土衆生,睹諸一切不祥境界。

或見二日或見兩月,其中乃至暈蝕珮玦彗勃飛流,負耳虹蜺種種惡相,但此國見;彼國衆生,本所不見亦復不聞。

暈 무리 훈, 무리 운, 어지러울 운

 

아난아, 또다시 그 가운데에 있는 어느 하나의 작은 섬에는 2개의 두 나라만이 있는데,

오직 한 나라의 사람들만이 공동으로 악연(惡緣)을 함께 느끼게 되면, 그 작은 섬의 해당 국토의 중생은 온갖 상서롭지 못한 경계를 보게 되나니, 혹 두개의 해를 보기도 하고, 두개의 달을 보기도 하며, 내지 햇무리의 훈(暈), 월식과 일식, 해의 귀걸이인 패결(珮玦), 혜성(彗星), 사방으로 뿔 돋친 별의 패성(孛星), 빗겨 나는 별똥 별의 비성(飛星), 아래로 흐르는 별똥 별의 유성(流星), 해를 등진 무지개의 부이(負耳), 암수의 쌍무지개의 홍예(虹蜺) 등의 등 가지가지 나쁜 모양을 보느니라.

이러한 모습들은 다만 이쪽 나라의 중생들만 볼 수 있을 뿐, 저쪽 나라의 중생들은 보지도 못하고 들은 바도 없느니라.

ㅡ 업력(業力)은 불가사의하며, 오탁악세(五濁惡世)도 중생의 공공업력(公共業力)이 조성한 것이다. 탐(貪) 진(瞋) 치(癡)의 삼독(三毒)이 살(殺) 도(盜) 음(淫 )의 삼악업(三惡業)을 지으니, 중생들이 이러한 동업(同業)으로 인하여, 그 악이 옳지 않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미혹하여서 업을 지어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적패결(適珮玦)은 해와 달에서 뻗어나는 기운으로, 훈(暈)은 수레바퀴처럼 둥근 것이고, 적(適)은 일식이나 월식을 하기전에 생기는 검은 기운이고, 패(珮)는 모습이 배(背)자 처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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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7

 

▷과거사를 인용하여 다시 밝히시다.

阿難白佛言:“世尊!必妙覺性非因非緣。世尊云何常與比丘,宣說見性具四種緣,

所謂因空、因明、因心、因眼。是義云何?”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기필코 이 미묘한 깨달음의 성품인 각성(覺性)이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라면,

세존께서는 어찌하여 비구들에게 항상 말씀하시기를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은 네 가지의 연(緣)을 갖추고 있으니,

이른바 '공(空)을 인(因)하고 밝음(明)을 인하고 마음(心)을 인하고 눈(眼)을 인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이러함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아난 존자는 견정(見精)을 묘각성(妙覺性)으로 잘못 알고 있다. 
공명(空明)한 심안(心眼)은 空明心眼의 4종류의 연(緣)으로 식(識)을 낼 수 있지만,

묘각성(妙覺性)은 공명심안(空明心眼)을 떠난 불변의 진체(眞體)이다. 

 

(緣)이 생기는 법은 공(空)을 인(因)하여 있으며(有), 밝음을 인(因)하여 나타나며(現), 마음을 인(因)하여 알며(覺), 눈을 인(因)하여 보는(見) 이니, 이것이 곤 세간의 명상(名相)이므로, 제일의에 있어서는 모두 실없는 논리일 뿐이다. 

견성이 자연이라면 인연 중에는 견성이 없고, (견성이) 인연이라면 자연 중에는 없다. 
인연의 용(用)이 없으면 자연의 체가 드러나지 않고, 자연의 체가 없으면 인연의 용(用)이 생기지 않는다. 
일체상(一切相)과 일체법(一切法)은 단지 사량(思量)하고 분별(分別)함이며 상(相)에 미혹함일 뿐, 견성이 아니다.

 

*제일의(第一義), 성지(聖智)로써 얻어지는 일승묘법(一乘妙法)으로 최상의 진리이다. 

 

佛言:“阿難!我說世閒諸因緣相,非第一義。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세간의 인연상(因緣相)을 설한 것으로, 가장 뛰어난 제일의(第一義)를 설한 것이 아니니라.

ㅡ모든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에는 2제(二諦)에 의거하시는 것으로,  
세제(世諦)에 의거함을 정서(情緖)에 따른 설법이라 하고, 
제일의(第一義)에 의거함을 지혜(智慧)에 따른 설법이라 한다.

 

▷왜곡됨을 밝히시다.

阿難!吾復問汝。諸世閒人說我能見。云何名見?云何不見?

아난아, 너에게 다시 묻겠으니,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나는 능히 볼 수 있다(能見)’고 하는데,

어떠한 것을 보는(見) 것이라 하고, 어떠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不見) 하는가?”

ㅡ여기에서 설하는 인연과 앞에서 설하는 인연은 다른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진여가 연(緣)을 따른다고, 자연에 대한 집착을 파하셨고, 여기에서는 진여는 불변이라고 하셨다.

비단 묘각성(妙覺性)만이 인연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견정도 인연에 속하지 않는다.

밝을 때는 밝음을 보고 어두울 때는 어두움을 본다. 명암(明暗)은 경계에 속하여 변하지만 견성은 변화가 없다.

 

阿難言:“世人因於日、月、燈光見種種相,名之爲見;若復無此三種光明,則不能見。”

아난 존자가 말씀 드렸다.

“세상 사람들은 햇빛과 달빛과 등불 빛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상(相)이 보이면 보는(見) 것이라고 하며,

햇빛과 달빛과 등불 빛이 없으면 볼 수(不見) 없다고 합니다.”

ㅡ위의 3 가지의 빛으로 인하여야만 능히 볼 수 있는 것은 화합상(和合相)이라 이름 할 수 있는 것으로, 참된 견체(見體)는 아니다. 참된 견체는 화합상이 아니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니, 그것은 연(緣)을 따라 생기는 것도 아니며, 대상 경계를 따라 없어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 

 

“阿難!若無明時名不見者,應不見暗;若必見暗,此但無明云何無見?

阿難!若在暗時,不見明故名爲不見;今在明時不見暗相,還名不見。

如是二相俱名不見。若復二相自相𣣋奪,非汝見性於中暫無,如是則知二俱名見,云何不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약 밝음이 없을 때에는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당연히 어둠도 볼 수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어둠을 분명히 본다고 한다면, 이것은 단지 밝음이 없는 것일 뿐이니, 어찌 보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난아, 만약 어두울 때에는 밝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과 같이 밝은 때에 어두운 상(相)을 볼 수 없는 것도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밝고 어두운 이상(二相) 모두를 다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라.

비록 밝음과 어둠이 서로 번갈아 능멸하여 빼앗아 바뀐다고 할지라도, 너의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 상주진심)은 밝음과 어두움 가운데에서 잠시도 떠난 적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두 가지 경우의 모두를 본다고 말해야 할 것인 즉, 어찌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ㅡ이것이 곧 연(緣)을 따라 생기지도 않으며, 대상을 따라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연(緣)을 여의야 한다.

是故阿難!汝今當知,見明之時,見非是明;見暗之時,見非是暗;見空之時,見非是空;

見塞之時,見非是塞,四義成就。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지금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밝음을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 보는 주체)은 밝은 것이 아니요,

어둠을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 보는 주체)은 어두운 것이 아니며,

허공(空)을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 보는 주체)은 빈것이 아니요,

막힘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 보는 주체)은 막힌 것이 아닌 것이니, 

이러한 것이 네 가지의 뜻이니라.

ㅡ밝음, 어두움, 허공, 막힘 모두는 연진(緣塵)에 속하는 것이며, 보는 주체는 아니다. 보는 주체는 참된 지혜를 증명하는 것으로 연에서 벗어난 것이고, 보이는 대상은 참된 이치를 증명하는 것으로 상(相)에서 벗어난 것이다.

 

▷상(相)을 여의야 한다.

汝復應知,見見之時,見非是見;

다시 네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보는(見) 것이 견정을 볼 때, 보는(見) 것은 견정이 아니니라.

ㅡ묘각심(견성)이 이 견분을 비추어보는 견견지시(見見之時)에 견정은 견성의 묘각지가 아닌 견비시견(見非是見)이다.
상분이 견분과 화합하지도 않으며, 견분이 묘각지와 화합하지 못하므로 견정은 묘각지를 볼 수 없다. 

 

진견(眞見)이 홀연 망견(妄見)을 볼 때, 진견은 자체 중의 일분망견(一分妄見)을 여의어 망에 떨어지지 않는다. 
혹은 능견(能見)의 진견이 소견(所見)의 망견(妄見)을 볼 때, 이 진견은 망견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즉, 밝고 어두움이 보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비록 견체(見體)가 연(緣)을 벗어났음을 깨달았을지라도 견체를 볼 수 없지만, 보는 주체를 볼 때에 보는 것은 보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견체가 상(相)을 여의었음을 깨달아서 참된 견체를 보게 된다. 

 

見性微妙 猶且離見,見不能及。云何復說因緣、自然及和合相?

견성은 미묘하여서 오히려 보는(見) 것을 떠난 것이니, 보는(見) 것도 능히 미칠 수가 없거늘 어떻게 다시 인연이다 자연이다 화합상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ㅡ그래서 견정은 견성을 볼 수 없는 견불능견견(見不能見見)이며, 
견정이 견성에 미칠 수 없는 견불능급야(見不能及也)이다

진견(眞見)은 오히려 보는 정기를 떠나 있어서, 보는 정기로도 미칠 수 없는데, 어떻게 인연이니 자연이니 화합상(和合相)이라고 하겠는가!

 

*見猶離見, 見不能及이란?, 진견은 견정(見精)의 자상을 여의고, 진견이 드러나면 망견(妄見)이 사라져서 견정(見精)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견(眞見)이 망견(妄見)에 응함을 견정(見精)이라 하고, 견정이 망견을 여의면 진견(眞見)이라 한다.

 

汝等聲聞狹劣無識,不能通達淸淨實相,吾今誨汝,當善思惟,無得疲怠妙菩提路。”

너희 성문들은 소견이 좁고 낮아서 아는 것이 없어서 청정한 실상(實相)을 능히 통달하지 못한 것이니,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리니, 마땅히 잘 생각하여서 묘한 보리(菩提)의 길에서 피곤해 하거나 게으르지 않도록 하여라.”

앞에서는 상분(相分)을 파하였고, 이 단에서는 견분(見分)을 파하였다. 
견성(見性)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닌, 자기 업식이 변현된 것이다. 
묘각지(妙覺智)와는 더욱 거리가 있어서, 묘각지가 이 견성을 비추어 볼때, 업상(業相)과도 화합하지 않는데, 업상이 일으킨 전상(轉相)이나 현상(現相)과 화합할 리가 없다. 
상분(相分)이 견분(見分)과 화합할 수 없고, 견분이 묘각지와 화합할 수 없으며, 견분은 묘각지를 볼 수 없다. 
묘각지는 견문(見聞)이 다다를 수 없으며, 사의(思議)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견정(見精)은 현량(現量)과 연하는 성경(性境)으로, 서로 뒤섞이지는 않지만 아직 능소(能所)가 있다. 
만약 묘각지가 진여경(眞如境)을 연(緣)하면 여여리(如如理)와 여여지(如如智)가 하나가 되어 능소가 없다. 
이 경지에 견정(見精)은 미치지 못하므로, 따라서 이 견정을 파하여 능소(能所)에 떨어지지 않아야 묘각에 바로 들어간다. 
이것이 진정하고 묘한 보리로(菩提路)이다. 

앞에서 10회에 걸쳐 견성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십번현견(十番顯見), 열 번에 걸쳐 견성을 밝힌 것이다.
상주진심(常住眞心)의 상(常)은 변화가 없어 항상함이요,
주(住)는 오고 가지 않으며  '하나'에 머묾이고,
진(眞)은 틀림이 없고 잡스러움이 없는,
심(心)은 둘이 없는 참 마음의 뜻이다.
상주진심은 불변의 청정한 마음으로 견성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능엄경' 견도분의 초반에 일체중생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상주진심(묘정명심, 견성)을 모르고, 색성향미촉 등 눈앞에 다가오는 다섯 상황이 조건(緣)이 되고, 수만 생을 통하여 쌓아온 업의 종자(因)가 서로 반응하여 실상과 거리가 있는 환상(幻相)을 조작해내는 반연심이 상주진심인 줄 알고, 그 반연심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도적을 자식인줄 알고 애지중지하다가 자산(진여자성)을 탈탈 털리는 것과 같다고 일깨웠다.
환상이란 헛것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눈병이 들었을 때 손으로 눈을 누르고 있다가 땔 때, 허공에 꽃이 보이거나 달이 두 개로 보이는데, 이들은 모두 허상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앞의 다섯 경계와 스스로의 업식 종자가 조작해 낸 허구를 진실한 인식이라 믿으며 서로 자신이 인식한 것이 옳다고 우긴다. 이것이 번뇌이며 다툼의 시작이며 세계평등평화를 해치는 근본 원인이며 육도윤회를 계속하는  씨앗이다.
'능엄경'에서의 정의에 의하면, 견성은 묘각성(妙覺性)으로 불변(不變)의 체(體)이며 진공(眞空) 수연(隨緣)의 용(用)이 있다묘유(妙有)진공의 체와 묘유의 용을 함유하지만 능소가 없다.
화엄의 '법성게(法性偈)의 첫 게(偈)인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의  법성(法性)에 해당된다.
이 견성은 무소부지(無所不知),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무소불지(無所不至), 미치지 못하는 바가 없으며

무소불능(無所不能), 할 수 없는 바가 없고, 무소불조(無所不照), 비추어 밝히지 못하는 바가 없는,

전지전능한 공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묘정명심(妙淨明心) 혹은  묘각성(妙覺性)이라 한다.
또한 견성인 묘각지(妙覺智)는 견문각지(見聞覺知)가 미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사의(思議)가 도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말을 여의고 상이 끊어진 이언절상(離言切相)이며, 언어가 밝힐 대상이 아닌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그러면, 견성과 견정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견정(見精)이란 연생(緣生)하는 것이 아닌, 즉 색성향미촉의 다섯 경계에 꺼둘리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업식(業識)이 변현한 것으로, 자증분(自證分)에 배대시킬 수 있으나 묘각지(妙覺智, 견성)와는 한 층의 격차가 있다.
업식이 변현한 것이라면, 아직 업상이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며, 소위 업장소멸(業障銷滅)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업상이 있으면 자연적으로 '나'가 있다는 전상이 있고, 내가 있으면 견문각지하는 대상이 있게 되므로, 주관인 '나'와 객관인 '대상' 즉 능소(能所)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과 견정은 한 층의 격차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중생들은 상분(相分, 색성향미촉)을 파한 다음 견분(見分, 색수상행)을 파하나, 자증분(自證分)을 파하기는 어렵다.
상분이란 명암색공(明暗塞空) 등이며, 견분이란 견문각지(見聞覺知) 등이다.
이들 상분과 견분은 자증분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이들 상분과 견분에 집착하여, 이들 상분과 견분이 진실하다고 오인하면 안된다.
묘각심(견성)이 이 견분을 비추어보는 견견지시(見見之時)에 견정은 견성의 묘각지가 아닌 견비시견(見非是見)이다.
상분이 견분과 화합하지도 않으며, 견분이 묘각지와 화합하지 못하므로 견정은 묘각지를 볼 수 없다. 
그래서 견정은 견성을 볼 수 없는 견불능견견(見不能見見)이며, 
견정이 견성에 미칠 수 없는 견불능급야(見不能及也) 라고 하였다.ㅡ한울림의 견성(見性)과 견정(見精)에 관한 글을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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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6

 

▷아난 존자가 총합하여 논함

阿難白佛言:“世尊!誠如法王所說,覺緣遍十方界,湛然常住性非生滅,與先梵志娑毘迦羅所談冥諦,及投灰等諸外道種說有眞我遍滿十方,有何差別?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진실로 법왕의 말씀과 같아서, ‘깨달음의 인연인 각연(覺緣)이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하여서, 고요한 가운데 상주(常住)하는 것으로, 그 성품은 생멸하는 것이 아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것을 앞에 나온 범지(梵志)인 사비가라(娑毗迦羅)가 말하는 ‘명제(冥諦)’나, 또는 재에 몸을 던지는 투회(投灰) 외도 등과 같은 일체 외도의 무리들이 말하는 ‘참 나인 진아(眞我)가 시방에 두루 원만하다’는 뜻과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ㅡ외도들은 성품(性)의 참됨은 보지 못하고 다만 아뢰야식에 의지하여서 망령되게 진실한 것으로 혼란한 까닭에 부처님께 여쭈어서 분별하여 주시기를 바란 것이다. 

범지(梵志)란 외도들을 통칭한 것이고, 투회(投灰)란 고행하는 외도를 말한다.

 

각연(覺緣), 깨달음의 인연인 견(見)을 말한다. 각(覺)은 반야(般若) 관조(觀照) 지혜(智慧)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견(見)과 같은 뜻이다. 아난 존자가 지금까지 보는 성품인 견(見)이 무엇인지 몰랐다가 알게 된 것이 각(覺)이고 이것은 잠들지 않고 늘 깨어있는 것으로 각연, 각성(覺性)인 것이다. 각연(覺緣)은 견성(見性)을 가르킨다. 견성(見性)에 의지하여 능연(能緣)의 공능(功能)이 있기 때문에 각연(覺緣)이라 한다.

 

▷문답으로 의심점을 밝힘 - 첫 번째의 의혹

世尊亦曾於楞伽山,爲大惠等敷演斯義,彼外道等常說自然,我說因緣非彼境界。

세존께서는 이전에 능가산(楞伽山)에서 대혜(大慧)보살 등을 위하여 이 뜻을 펼쳐 말씀하시기를 ‘저 외도들은 항상 자연(自然)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가 말한 인연은 그들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ㅡ'그들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외도들의 소견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진여의 불성은 비교하여 따지면 곧 어긋나고, 계교하여 헤아리면 곧 뒤섞인다

 

我今觀此覺性自然非生非滅,遠離一切虛妄顚倒,似非因緣與彼自然,云何開示不入群邪,獲眞實心妙覺明性?”

제가 지금 살펴보건데, 깨달음의 성품인 각성(覺性)은 자연 그대로의 것으로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며, 일체 허망한 전도에서 멀리 벗어났으므로, 아마도 인연이 아닌 듯하며, 마치 저들이 주장하는 자연과 같은 듯합니다.

그러니 저들이 주장하는 자연과 어떻게 가려내어야, 일체의 사견(邪見)에 빠지지 않고, 진실한 마음의 묘하게 깨닫는 밝은 성품의 묘각(妙覺)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ㅡ아난 존자의 생각으로는 깨닫는 성품의 각성(覺性)이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자연과 같고, 이미 자연이 아니라면 이는 인연과 같은 것이니, 말학(末學)들이 이를 잘못 해석할 것을 염려하여 질문한 것이다.

 

견성은 모든 경계에 따라 응화하여 분별없이 상주하는 불생멸체이므로 묘정명체(妙精明體)라 한다. 
수연(隨緣)하면서도 그 불변의 체(體)를 잃지 않으며, 불변하면서도 수연의 용(用)이 있다. 
자연 중에 인연이 있고, 인연 중에 자연이 있어서 서로 여의지 않는다.
외도들이 이야기 하는 “신아(神我)는 시방계에 편만(遍滿)한다.”와 여래께서 설하신 “각연(覺緣)은 시방계에 편만(遍滿)한다.”와 차이점이 무엇인지, 또 외도가 항상 주장하는 자연을 여래께서 능가산에서 인연법으로 이를 파하셨는데, 이 자연과 여래께서 설하신 인연은 상반된다. 
여래설 자연과 외도설 자연의 차이를 존자가 모르기 때문에 청문하고 있다. ㅡ한울림 

 

▷부처님께서 의혹을 풀어주심.

佛告阿難:“我今如是開示方便,眞實告汝,汝猶未悟,惑爲自然。阿難!若必自然,自須甄明有自然體。汝且觀此妙明見中,以何爲自?此見爲復以明爲自?以暗爲自?以空爲自?以塞爲自?阿難!若明爲自,應不見暗;若復以空爲自體者,應不見塞。如是乃至諸暗等相以爲自者,則於明時見性斷滅,云何見明?”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방편으로 설명하여 진실하게 너에게 알려주었거늘, 너는 오히려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자연인가 하고 의심을 하는것인가!

아난아,만약 틀림없이 자연이라고 한다면 ‘저절로의 자(自)’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어서 자연의 본체인 자연체(自然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너는 또 이것을 살펴보아라. 이 묘하고 밝은 견(見) 가운데에서 무엇을 자연(自然)이라 하겠는가!

이 견(見)이 밝음을 자(自)로 삼겠는가? 어둠의 암(暗)을 자(自)로 삼겠는가?

허공의 공(空)을 자(自)로 삼겠는가? 막힘의 색(塞)을 자(自)로 삼겠는가? 

아난아, 만약 밝음으로 자(自)로 삼는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의 공(空)을 자(自)로 삼는다면 당연히 막힘의 색(塞)을 볼 수 없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나아가서, 일체의 어두움 등의 상(相)을 자(自)로 삼는다면, 밝을 때는 보는 성품이 끊어져서 없어야 할것이니, 어떻게 밝음을 보겠는가?”

ㅡ자연이 아님을 해석한 것으로, 자연이란, 자체가 본래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체가 본래 그러하다면, 경계를 따라서 변하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 모두 경계를 따라 변하고 있으므로 자연이 아닌 것이다. 

명암통색(明暗通塞) 중에서 자연의 체가 무엇인가? 만약 밝음이 자연체라면 견성은 단지 밝음을 보는것만 합하고 ​
어둠을 보는 것과는 합하지 않는다. 
만일 공(空)이 자연체라면 견성은 단지 공만 볼 수 있지 막힌 곳은 볼 수 없다.

그러나 밝음이 오면 밝음을 보고 어둠을 오면 어둠을 본다. 즉 이 각성은 자연의 체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阿難言:“必此妙見性非自然。我今發明是因緣性,心猶未明,諮詢如來是義云何合因緣性?”

아난 존자가 말씀드렸다.

“이 묘하게 보는 성품의 견성(見性)이 분명 자연이 아니라면, 제가 지금 인연의 성품인 인연성(因緣性)으로 생긴다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만, 제 마음이 아직까지 명확하지 못하여서 여래께 여쭙니다.

이 뜻을 어찌하여야 인연의 성품인 인연성(因緣性)에 부합할 수 있겠습니까?”

ㅡ자연을 버리고 인연이라 계탁하는, 즉 하나를 버리고 다시 다른 하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佛言:“汝言因緣,吾復問汝。汝今同見,見性現前,此見爲復因明有見?因暗有見?因空有見?

因塞有見?阿難!若因明有,應不見暗;如因暗有,應不見明。如是乃至因空、因塞,同於明暗。

復次,阿難!此見又復緣明有見?緣暗有見?緣空有見?緣塞有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인연이라고 했으니 네게 묻겠다. 너는 지금 보(見)는 것으로 인(因)하여 보는 성품이 눈앞에 뚜렷이 나타나나니, 이 보(見)는 성품은 밝음으로 인해서 보(見)는 것이 있는 것인가? 어둠으로 인하여 보(見)는 것이 있는 것인가?

공(空)으로 인하여 보(見)는 것이 있는 것인가? 막힘의 색(塞)으로 인하여 보(見)는 것이 있는 것인가?

아난아, 만약 밝음으로 인하여 보(見)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어둠으로 인하여 보(見)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밝음을 볼 수 없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나아가 공(空)과 막힘의 색(塞)으로 인한 경우도 밝음과 어둠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다시 아난아, 이 보(見)는 것은 또 밝음을 연(緣)하여 보는 것이 있는 것인가?

어둠을 연(緣)하여 보는 것이 있는 것인가?

공(空)을 연(緣)해서 보(見)는 것이 있는가? 막힘의 색(塞)을 연(緣)해서 보(見)는 것이 있는가?

ㅡ인연(因緣)이 아님을 해석한 것으로, 물질을 가탁하는 것이 인(因)이고, 

물질을 따르는 것이 연(緣)이다. 이미 정해진 뜻이 없으므로 인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듭하여 보여주시다.

阿難!若緣空有,應不見塞;若緣塞有,應不見空。如是乃至緣明、緣暗,同於空塞。

아난아, 만약 공(空)을 연(緣)해서 보(見)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막힘을 보지 못해야(不見) 할 것이며,

만약 막힘의 색(塞)을 연(緣)을 연해서 보(見)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공(空)을 보지 못해야(不見) 할 것이니,

이와 같이 나아가, 밝음과 어둠을 연(緣)하는 경우도 공(空)과 색(塞)의 예와 같으니라.

 

當知如是精覺妙明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와 같이 정밀한 깨달음의 정각(精覺)의 묘한 밝음은 

 

①非因非緣,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며,

진심은 불변하는 것이므로 인연이 아니고, 수연(隨緣)하는 것이므로 자연도 아니다.

인도 연도 자연도 아니라는 것은 쌍차쌍파(雙遮雙破)로써,

자연에 집착하는 것은 수연(隨緣)을 이해하지 못함이요, 
인연에 집착함은 불변(不變)을 이해하지 못함이다. 

 

②亦非自然非不自然,자연(自然)도 아니고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며, 

ㅡ인연이 아닌 것도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님은 쌍조쌍립(雙照雙立)이다. 
견성이 만약 자연이라면 인연 중에는 견성이 없어야 하고, 
견성이 만약 인연이라면 자연 중에는 견성이 없어야 한다. 

 

③無非不非 인연과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고, 인연과 자연이 아니라는 것이 아닌 것도 없으며, 

ㅡ불변하지만 수연(隨緣)하고, 수연(隨緣)하지만 불변한다. 

 

④無是非是 인연과 자연이란 것도 없고, 인연과 자연이란 것이 아니란 것도 없는

ㅡ전체적으로 시(是)도 비(非)도 없다. 
인연의 용(用)을 여의면 자연의 체(體)를 드러낼 수 없고, 자연의 체(體)가 없이는 인연의 용(用)을 발휘할 수 없다. 
즉용즉체(卽用卽體)이며, 즉체즉용(卽體卽用)이다.
정각묘명(精覺妙明)은 인연에도 자연에도 속하지 않으며, 비인연(非因緣)에도 비자연(非自然)에도 속하지 않으며, 
일체상(一切相)을 여의고 일체법(一切法)에 즉(卽)한다.

 

離一切相卽一切法。

이러한 가운데에서 일체의 상(相)을 떠나서 일체의 법에 나아가느니라. 

ㅡ4 번에 걸쳐 인연(因緣)도 아니고 자연(自然)도 아니라 하였다. 

정밀한 깨달음의 정각(精覺)의 모든 망령된 마음으로 분별이 없으므로 묘한 밝음이고, 일체의 상을 떠났으므로 온갖 계량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아난 존자가 수연불변(隨緣不變)의 뜻을 몰라서 견성이 인연으로 있는 것이라는 미혹을 파하고 있다. 
특히 아난 존자는 인(因)하는 바가 있음도 연(緣)하는 바가 있음도 모두 의타기성임을 알지 못하는 데에서 나오는 착각이라는 것을 모른다. 

 

汝今云何於中措心,以諸世閒戲論名相而得分別?如以手掌撮摩虛空,只益自勞!虛空云何隨汝執捉?”

너는 지금 어느 가운데에 마음을 두고 세상에서 희론(戱論)과 명상(名相)으로 분별하려는 것인가?

이렇게 분별하는 것은 마치 손으로 허공을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 허공이 어떻게 너의 손에 잡히겠는가?”

ㅡ정밀한 깨달음의 정각(精覺)에 마음을 둘 수 없는 것이, 마치 허공을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난 존자가 미혹하여 인연이라 한 것은, 견성(見性)이 인연으로 생긴다고 오인하여서, 특히 인(因)하는 바와 연(緣)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 모두 의타기성(依他起成)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외경이 없으면 의타기성은 없지만, 견성은 불변의 체로서 외경을 따라 생멸하지 않는다. 
정각(精覺)이란 정순(精純)하고 잡(雜)스럽지 않으므로 불변(不變)이다. 
묘명(妙明)은 불가사의하면서 밝은 수연(隨緣)의 뜻이 있다. 
각성(覺性)은 수연불변(隨緣不變)하여 마주함도 끊고 정량(情量)도 초월함을 드러낸다. 
'종경록'에서 “因緣自然 皆是世間言論. 인연과 자연은 모두 세간의 언론이고
有無眞俗 悉是分別識心 진과 속이 있다 없다는 식심의 분별일 뿐
妙覺性中 不許有一絲毫妄念停留 묘각성 중에는 한 터럭 망념이 머물 수 없는데
云何汝等於覺性上 措心作意也.어찌 너희들은 각성에 마음을 두고  뜻을 조작하느냐?” 라 하였다.ㅡ한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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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5

 

阿難言:我今於此重閣講堂,遠恒河上觀日月,擧手所指縱目所觀,指皆是物無是見者。

世尊!如佛所說,況我有漏初學聲聞,乃至菩薩亦不能於萬物象前剖出精見,離一切物別有自性

아난 존자가 말씀드렸다.

제가 지금 층의 전각 강당에서 멀리 항하의 강까지와 위로는 해와 달을 보면서손으로 가리킬  있는 것과 눈이 가는 대로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 모두는 물체일 , 견(見)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는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루(有漏) 초학(初學)의 성문이라서 그렇다고심지어 보살들의  지혜로도 일체의 물상에서 일체의 물상 앞에서 정견(精見)을 쪼개어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니, 모든 물상을 떠나야만 별도로 성품의 자성(自性)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ㅡ만약 물상을 떠나서 따로 정밀하게 보는 정견이 있다면, 그 보는 주체가 도리어 물상과 같아서 실제로 그 본체가 있을 것이므로 가리켜 낼 수가 있겠지만, 비록 대성이라 할지라도 일체 물상 앞에서 물상을 제거해 버리고 하나의 물상이 아닌 정견을 가려 낸다면, 물상이 보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물상을 보건대 이는 본래 허망한 것이므로 가리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일체물별유자성(離一切物別有自性), 자성(自性)은 모든 존재가 지닌 변하지 않는 본질이며 공성(空性)이다. 주관의 마음인 견분(見分)과 객관의 마음인 상분(相分)도 내 마음이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을 보는 상태는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다. 주객을 떠나 있는 견(見)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참마음이고 진짜 '나'인 것이나, 견(見) 아닌 것이 없다.
물상과 허공은 견(見)이 아니다. 물상은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사물을 빠짐없이 골고루 보는 것이므로, 따라서 견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물상과 허공 자체는 견이 아니므로, 물상의 입장에서는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보는 입장에서는 견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佛言:如是,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변물무비견(辯物無非見)

佛復告阿難:“如汝所言,無有精見,離一切物別有自性,則汝所指是物之中無是見者。

今復告汝!汝與如來坐祇陁林更觀林苑,乃至日月種種象殊,必無見精受汝所指;汝又發明此諸物中何者非見?”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말대로 정견(精見)을 가려낼 수 없고 일체 물상을 떠나야만 별도로 정밀하게 보는 자성(自性) 있다면, 네가 가리키는  물상 안에는 보는 주체의 견정(見精)이 없어야 하리라. 

너에게 한   말하나니, 네가 지금 여래와 함께 앉아있는 기타림(祇陀林)에서, 다시 수풀과 동산에서부터 해와 달까지 살펴보아라. 가지가지의 다른 모습에서 네가 가리켜  수 있는 견정(見精)이 없다면, 

너는 다시  일체의 물상 가운데에서 무엇이 보는 것이 아닌지를 밝혀보아라.”

ㅡ만물은 상분(相分)으로, 견분(見分)을 떠나서는 상분이 드러나지 않는다. 여래께서는 아난 존자에게 상분 중에 견분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물상과 허공은 견(見)이 아니지만, 견이 빠짐없이 골고루 있어서, 우리가 사물을 본다. 따라서 견 아닌 것이 없다. 물상의 입장에서는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보는 입장에서는 견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阿難言:“我實遍見此祇陁林,不知是中何者非見?何以故?若樹非見,云何見樹?若樹卽見,復云何樹?如是乃至若空非見,云何爲空?若空卽見,復云何空?我又思惟是萬象中,微細發明無非見者。”

아난 존자가 말씀드렸다.

“저는 실재로  기타림을 두루 보고 있으나,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보는 것이 아닌지를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나무가 보는 것이 아닌 비견(非見)이라면 어떻게 나무를 본다고 하겠으며, 

만약 나무가 보는 주체라고 한다면, 어 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나아가 만약, 허공이 보는 주체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허공을 보겠으며, 

만약, 허공이 보는 주체라면 어찌 허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다시 사유(思惟)하여 보니,  일체의 물상 가운데에서 세밀하게 밝힌다면, 보는 주체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佛言:“如是,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초학 망착(罔措)

茫然不知是義終始,一時惶悚失其所守。

그러자 대중 가운데 무학(無學)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초학의 제자들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아득하여서,  뜻의 나중과 처음을 몰라서 모두 놀라, 어느 뜻을 지켜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였다.

ㅡ부처님께서 대답하신 2가지의 이치가 정함이 없음을 의심한 까닭에 지키던 것을 잃은 듯하였다.

 

如來知其魂慮變慴,心生憐愍,安慰阿難及諸大衆:“諸善男子!無上法王是眞實語,如所如說不誑不妄,非末伽梨四種不死矯亂論議,汝諦思惟無忝哀慕。”

여래께서 그들의 넋이 변하여 놀란 아시고 가련하게 여기시어, 아난 존자와 대중들을 달래면서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이여, 무상법왕(無上法王, 부처님)의 말은 진리그대로 설하는 진실어(眞實語)이며, 속이지 않는 불광어(不誑語)이며, 거짓이 없는 불망어(不妄語)이니, 말가리(末伽黎, 외도) 등이 죽지 않는다고 교란하는  가지 희론인 사종불사교란논의(四種不死矯亂論議)가 아니니라. 

너희들은 자세히 사유하여 법을 원하는, 간절히 애모(哀慕)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라.”

 

ㅡ부처님은 아난존자가 적상심성(寂常心性)을 물은 후에 여러 가지 예를 들어 견성(見性)에 대하여 밝히셨다. 
①전진(前塵)은 스스로 어두워도 견성은 훼손되지 않음을 들어서 견성이 바로 마음임을 밝히셨고, 
②손은 스스로 쥐고 펴지만,  견성은 펴거나 쥐거나 하지 않음을 들어  견성은 움직이지 않음을 밝히셨고, 
③펴지고 오그라드는, 서축(舒縮)하는 것은 변하는 것이고, 서축(舒縮)하지 않는 것은 변하는 것이 아님을 들어 견성은 멸하지 않음을 밝히셨고, 
④신심(身心)은 모두 묘하게 비추고 밝고 상적(常寂)한 진심이 드러낸 물상임을 들어 견성은 잃지 않는 것임을 밝히셨고, 
⑤돌려보낼 수 있는 것은 아난이 아니고 돌려보낼 수 없는 것은 바로 아난임을 들어 견성은 돌려보낼 수 없음을 밝히셨으며,  
⑥사물은 차별이 있지만 견성은 차별이 없음을 들어 견성은 뒤섞이지 않음을 밝히셨다. ㅡ 한울림  

 

▷문수보살께서 밝혀 주시기를 청함

是時,文殊師利法王子愍諸四衆,在大衆中卽從座起,頂禮佛足合掌恭敬而白佛言:

“世尊!此諸大衆,不悟如來發明二種精見色空,是非是義。世尊!若此前緣色空等象,若是見者應有所指;若非見者應無所矚。而今不知是義所歸故有驚怖,非是疇昔善根輕尟,唯願如來大慈,發明此諸物象與此見精元是何物,於其中閒無是非是。”

그 때에 대중 가운데 있던 문수사리 법왕자(法王子)가 사부대중(四部大衆)을 가련하게 여기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합장하여 공손하게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대중은 여래께서 밝혀주신 정밀하고 밝게 보는 정명(精明)과 보는 근원의 견원(見元)과, 전연(前緣)의 물질(色)과 공(空)에 대하여 이것(是)인지, 이것이 아닌(非是)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 전연(前緣)의 물질의 형상인 색(色像)과 공(空像)이 보는 주체라면, 마땅히 손으로 가리킬 대상이 있어야 할 것이며, 

만약 보는 주체가 아니라면, 당연히 볼 대상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의 대중들은 지금 이 이치가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놀라고 있을 뿐으로, 옛날부터 바른 근성의 선근(善根)이 모자란 탓은 아닙니다. 

부디 여래께서는 대자(大慈)를 베푸셔서,  일체의 물상(物象)과 보는 정기의 견정(精見)은 본래 무엇이라서,  중간에 그렇다고 하는 시(是)라고도 할  없고, 그렇지 않다는 비시(非是)라고도   없는지에 대하여 밝혀주시옵소서.”

ㅡ대중이 불즉불리(不卽不離)의 묘리(妙理)를 몰라서 망연해 하자 문수보살이 대중을 대신해서 청문한 것이다.
색(色)과 공(空)이 견성이라면, 만상을 마주하는 능견(能見)의 견성을 가려낼 수 있어야 하고, 
만약 색공이 견성이 아니라면 만상을 마주해도 보여지는 물건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뜻을 모른다. 
이승보살(二乘菩薩)은 미세한 법집(法執)을 파하지 못하고고 상(相)을 여의어 견정을 깨달았으므로, 불즉불리(不卽不離)의 뜻을 모르고, 견분(見分)은 내분(內分)에 속하여 볼 수 없는데 법성(法性)에 들지 못한 사람은 외상(外相)만 파하고 내견(內見)을 볼 수 없어서 이 이치를 모르는 것이다. 물상과 견정이 마주할 때 그 중간에 견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밝혀달라고 청문한 대목이다.ㅡ 한울림 

 

견정(見精)과 색공(色空)이 같은 것의 시(是)인가? 다른 것의 비시(非是)인가?

견정(안근/主)이 색공(색진/客)을 보고 안식이 생긴다. 그러면 견정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면 견정이 없는 것인가? 견정이 없으면 색공이 보일 리가 없다.

그러면 견정이 있는 것인가? '있다'고 한다면 견정을 찾아낼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것이 견정인지 알 수가 없으니, 따라서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없다'고 한다면 색공을 볼 수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볼 수 있으니 견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견정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견정과 색공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사물 자체는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것은 견(見)이 빠짐없이 골고루 있기 때문이다.ㅡ향적법진

 

▷본체는 하나의 동체(同體)라는 것을 보이시다.

佛告文殊及諸大衆:“十方如來及大菩薩,於其自住三摩地中,見與見緣幷所想相,如虛空花本無所有。

此見及緣元是菩提妙淨明體,云何於中有是非是?文殊!吾今問汝,如汝文殊,更有文殊是文殊者?爲無文殊?”

부처님께서 문수 보살과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시방의 여래와 뛰어난보살들이 스스로 머무시는, 자주삼마지(自住三摩地) 가운데에서의 견(見)과 견의 경계(대상)의 견연(見緣)과 그리고 생각하는 모습의 상상(想相)들은 마치 허공의 꽃과 같은 것으로, 본래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無所有)이니라. 

견(見)과 견의 경계(대상)의 견연(見緣)은 본래 보리의 묘하고 맑고 밝은 본체인 보리묘정명체(菩提妙淨明體)이거늘, 

어찌 이러한 가운데에서  '이것(是)이다 이것이(非是) 아니다'라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문수여, 너에게 묻겠으니,

 그대로가 문수인데, 다시 문수가 있다고 하여서 이것은 문수이다, 문수가 아니다라고   있겠는가?”

견(見)이란 근(根)이고, 견연은 경계(境, 대상)이고, 생각하는 모습의 상상(想相)은 식(識)이다. 근경식, 3가지가 만법을 다 포섭하고 있어서, 모든 인연법이 원래 하나의 보각이므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 없음을 안다면, 모든 의심이 가시는 것이다. 즉 모양(相)을 보는 것이 망령된 것이므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 없고, 성품을 보면 본래가 참된 것이므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자주삼마지(自住三摩地), 자성(自性)의 수능엄의 바른 선정인 수능정정(首楞正定)이다. 이 선정은 권교(權敎)와 소승의 출입이 있는 선정과 같지 않은 것이라서 자주(自住)라 하였다. 즉, 자주본지풍광(自住本地風光)은 닦아서 조작되는 것이 아니다.

*여허공화본무소유(如虛空花本無所有), 허공의 꽃과 같은 것으로, 본래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니라.;

부처님과 원돈(圓頓)보살은 변계소집(徧計所執)된 육식(六識)은 본래 공(空)이고 대상에 의존하는 근진(根塵)은 환(幻)과 같아서, 마치 눈병 걸린 사람이 보는 허공의 아른거리는 꽃과 같으며, 연(緣)에서 나와 그 본성(本性)이 없는 것니 본래 있지 않음과 같다는 것이다.

*운하어중유시비시(云何於中有是非是),능견(能見)인 견분(見分)과 연하는 상분(相分)을 요달(了達)하는 당체(當體)가 바로 진(眞)이다. 근(根)은 능연(能緣)이고 진(塵)은 소연(所緣)이며 식(識)은 연(緣)으로 생긴다.

*원시보리묘정명체(元是菩提妙淨明體), 원래 보리의 묘하고 맑고 밝은 본체인 보리묘정명체이다;

‘원(元)’이란 보리는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묘(妙)란 법신덕(法身德)으로 유(有)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라는 말이며,

정(淨)이란 해탈덕(解脫德)으로 처염불변(處染不変)이라는 말이고,

명(明)이란 반야덕(般若德)으로 영광독요(靈光獨耀)라는 말이다.

즉 보리란 이 삼덕(三德)을 깊이 간직한 체(體)로서 시비(是非)를 초월한 것이다.-능엄경강의

 

*자주삼마지(自住三摩地)는 진견(眞見)과 전상(轉相)인 견분(見分)이 서로 깊게 연이 된다. 
이렇게 망립(妄立)된 것이 망능(妄能)을 일으킨다. 
능견의 견분과 외진(外塵)인 상분(相分)이 서로 연(緣)하는 것에 비록 깊고 얕음이 있을지라도 모두가 허망(虛妄)한 상상(想相)인 것으로, 견정과 견연의 근본을 끝까지 찾아보면 모두가 묘정명체에서 발원한 것이다. 
불보살님께서 삼매정정(三昧正定)에 머물며, 제8식을 돌려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이루어서 8식이란 이름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8식 중의 견분을 논하겠는가? 
견분이 이미 없으니 상분이 성립될 수 없다. 견상의 2분은 원래 묘정명체(妙精明體)인 진심으로 시시비비(是是非非)의 희론법이 아닌 것이다. ㅡ한울림

 

“如是,世尊!我眞文殊,無是文殊。何以故?若有是者,則二文殊。然我今日非無文殊,於中實無是非二相。”

문수 보살이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가 실제 문수인데, '이것이 문수이다'라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것(是)이 '문수이다'라고 한다면, 바로  개의 문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저는 없는 문수가 아니오니, 가운데에서는 참으로 '이것(是)이다 이것이(非是) 아니다'라 이상(二相) 있을  없습니다.”

ㅡ일진법계(一眞法界)는 본래 시(是)와 비(非)의 두 상이 없음을 밝힌 것으로, 유(有)와 무(無), 시(是)와 비(非)의 이상(二相)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합현(合顯)

佛言:“此見妙明與諸空塵亦復如是,本是妙明無上菩提淨圓眞心,妄爲色空及與聞見,如第二月,誰爲是月?又誰非月?文殊!但一月眞,中閒自無是月非月。是以汝今觀見與塵,種種發明名爲妄想,不能於中出是非是,由是精眞妙覺明性,故能令汝出指非指。”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는 견(見)의 미묘한 밝음의 묘명(妙明)과 모든 공(空)과 육진 경계(色)도 역시 이와 같이 본래 묘하고 밝은 무상보리의 맑고 원만한 참 마음의 보리정원진심(菩提淨圓眞心)이니라.

이 참 마음이 허망하게 물체(色)와 공(空)과 보고(見)과 듣는 문(聞)으로 변하여서, 마치 제이의 달(第二月)과 같이 되었으니, 어느 것이 달이고, 어느 것이 달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문수여, 단지 하나의 달만이 참된 달이라 한다면, 그 중간에 '달이다 달이 아니다'라고  까닭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보는 주체인 견(見)과 대상 경계인 진(塵)을 살펴서 가지가지로 밝히는 것은 허망한 망상(妄想)이라 이름하나니, 그 가운데에서  '이것(是)이다 이것이(非是) 아니다'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진실하고 정밀하고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을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너로 하여금 '가리켜 밝히고, 가리켜 밝힐 수 없다'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ㅡ이 문답 가운데에서 각각 셋으로 

질문의 3 가지는 '네가 문수인 것과 같이'와, '다시 문수라고 할 문수가 있는가?'와, '그러한 문수가 없는가'의 셋이고, 

그 3 가지의 대답은 '제가 참 문수 입니다'라고 한 것은 보리정명체를 성립시킨 것이고, 

'그러한 문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것은 공과 색이 곧 견임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나 현재 저는 없는 문수가 아니오니'라고 한 것은 공과 색이 견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보는 작용의 미묘한 밝음의 묘명(妙明), 견성은 바로 진심으로, 무시이래로 망상과 혼재해 있는 것이나, 망상이 견성의 광명을 영원히 차폐할 수 없는 것이라서 묘명이라 하는 것이다.

*본래 묘하고 밝은 본시묘명(本是妙明), 원래 그러한 것으로, 수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보리의 맑고 원만한 참 마음의 보리정원진심(菩提淨圓眞心), 무시이래로 진심은 천변만화하는 망상 중에 있으나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맑은 정(淨)’이라 하고, 이 진심이 변화하지는 않지만 천변만화하는 망상을 따라 끝없이 많은 작용을 나타내는 까닭에 원만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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