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대승론(攝大乘論) 상권 8
아 승 가(阿 僧 伽, 무착) 지음. 불타선다(佛陀扇多) 한역. 김묘주 번역
復有十種分別:一根本分別,所謂阿犂耶識;二相分別,所謂色等識;三念現相分別,所謂同依眼識等識;
四念異分別,所謂老等`樂受貪等`他所惱時轉變等`趣及欲界等異故;
五念現相異事分別,所謂所說如是等異相彼異相,他所將分別,所謂不聞正法及聞正法者,所有分別.
또한 모든 의미를 포섭하면 열 가지 분별이 있으니,
첫째는 근본분별(根本分別)이니, 소위 아리야식을 말하는 것이며,
둘째는 형상의 분별인 상분변(相分別)이니, 소위 색식(色識) 등을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인식대상(念)의 현현하는 모습의 분별인 염현상분별(念現相分別)이니, 소위 안식 등이 함께 의지하는 식(識)이며,
넷째는 인식대상(念)이 변이하는 것의 분별인 염이분별(念異分別)이니, 소위 늙음 ㆍ 즐거움의 감수작용인 낙수(樂受) 등ㆍ 탐욕 등 ㆍ남으로부터의 핍박ㆍ시절의 전변 등ㆍ윤회의 취(趣)ㆍ욕계 등의 변이(變異)를 말하며,
다섯째는 인식대상(念)으로 나타난 모습이 변이한 염현상이사분별(念現相異事分別)이니, 앞에서 말한 변이와 같이, 그 변이한 이상(異相)을 말하는 것이며, 남이 이끄는 타소장분별(他所將分別)이니, 소위 정법을 듣지 않거나 정법을 들은 이의 분별이다.
六不寂靜思惟,所謂不聞正法者,謂諸外道;七寂靜思惟,所謂聞正法同法者;八妒分別,所謂不正意思量身見,等六十二見,同順彼分別。散分別.
여섯째는 고요하지 않은 불적정사유(不寂靜思惟)이니, 소위 정법을 듣지 않은 모든 외도를 말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고요한 적정사유(寂靜思惟)이니, 소위 정법과 같은 법을 듣는 것을 말하며,
여덟째는 집착의 분별인 투분별(妬分別)이니, 소위 바르지 않은 사량으로서 신견(身見) 등의 62 종의 국집된 삿된 견해에 수순하는 분별이며, 산란된 산분별(散分別)이다.
ㅡ현장의 역본에는 남이 이끄는 분별인 타인분별(他引分別)을 여섯째로 하여 열 가지를 들고 있으나, 본 불타선다 역본에서는 남이 이끄는 분별인 타소장분별(他所將分別)을 여섯째로 하지 않고 번호에서 제외되었으며,
현장의 역본의 일곱째를 여섯째로 하고 있으며, 아홉째, 열째 또한 명확하게 하지 않다.
謂諸菩薩有十種分別,非事相散故`事相散故`正安散故`毀謗散故`一向事散故`異事散故`性散故`隨名義散故,及隨義名散故。此諸十句散事中對治故,說無分別智 一切諸般若波羅蜜中說:如是彼障及對治,具足般若波羅蜜應知。
모든 보살에 열 가지 산란된 분별이 있으니, 비존재 양상의 비사상산(非事相散)이기 때문이고,
존재양상의 사상산(事相散)이기 때문이며, 바르게 안립함의 산란인 정안산(正安散)이기 때문이고,
비방함의 산란인 훼방산(毀謗散)이기 때문이며, 한결같은 성품의 산란인 일향사산(一向事散)이기 때문이고,
다른 성품의 산란인 이사산(異事散)이기 때문이며, 자성의 산란인 성산(性散)이기 때문이고,
명칭에 수순하는 대상의 산란인 수명의산(隨名義散)이기 때문이며,
대상에 수순하는 명칭의 산란인 숭의명산(隨義名散)이기 때문이다.
이 열 가지 십구(十句)의 산란된 성품을 대치하여 다스리기 위해서 무분별지혜를 설하며, 모든 반야바라밀 중에서 설하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지니, 이와 같은 장애에 대한 다스림의 대치(對治)가 이 반야바라밀을 구족하게 하는 것이다.
若是傍名義他性相三種性成, 云何三種性無差別不成?
隨彼傍義他性者,非彼妄分別`非成就。隨彼傍義妄分別者,非彼他性`非成就。
隨彼傍名成就者,如是非彼他性`非妄想。
만약 다른 명칭인 방명(傍名)의 뜻에 의한다면 의타성(의타기성)에 세 가지의 삼종성(三種性)이 성립되나, 어찌하여 세 가지의 삼종성(三種性)의 무차별이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그 다른 의미인 방의(傍義)에 따르면 의타성(의타기성)은 그 망분별성(변계소집성)이 아니고 성취성(원성실성)도 아니니,
그 다른 의미인 방의(傍義)에 따르면 그 망분별성(변계소집성)은 그 의타성이 아니고 성취성이 아니다.
그 다른 명칭인 방명(傍名)에 따르면 성취성(원성실성)은 이와 같이 그 의타성이 아니고 망분별성이 아닌 것이다.
云何復知如他性相,妄分別性事現故,非如是體性爾?
本名離慧故,及自滅因故`多名故`多身相違因故`不定名穢身相違因故。是中有偈:
또한 의타성(의타기성)과 같이 망분별성(변계소집성)이 현현할지라도 체성과 같지 않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본명에 지각(慧)이 없어서 스스로의 원인을 멸하는 자멸인(自滅因)이기 때문이고,
명칭이 많은 다명(多名)이라서 의지처가 많은 다신(多身)에 위배되는 원인 때문이며,
명칭이 결정적이지 않은 부정명(不定名)이라서 의지처의 잡염인 예신(穢身)에 위배되는 원인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本名無慧故, 多及不定故, 成彼自多身, 穢身相違故。
본명에 지각이 없는 무혜(無慧)이기 때문이고, 다명(多名)에 결정적이지 않은 부정(不定)이기 때문이며,
그 자체를 이룸과 의지처가 많은 다신(多身), 의지처의 잡염인 예신(穢身)에 위배되기 때문이네.
覺見諸法事, 及見染淨等, 如幻應當知, 及如虛空等。
제법 자체를 인식하며, 잡염과 청정 등을 보나니,
마땅히 알지니, 요술과 같을 뿐만 아니라, 허공 등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復以何義故,有如是所說事他性相一切事不成?彼無已成就性及無故,如是一切事不成。
他性及成就性無故,染淨無事患,應見染淨,是故非一切無。是中有偈:
또한 어떤 의미 때문에 이렇게 말한 의타성의 상(相) 일체가 전혀 비존재가 아닌 것인가?
그것이 비존재이면 성취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일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며,
의타성과 성취성이 비존재라면 잡염과 청정이 없다는 과실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나, 잡염과 청정을 보기 때문에 일체 모두가 비존재는 아닌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他性旣無, 成就一切, 無事常時, 於諸染淨。
의타성이 비존재이면, 성취성도 비존재이네.
일체가 비존재라면 잡염과 청정도 항상 없는 것이네.
所有此諸佛如來大乘,方廣中說,彼說中,云何妄分別性應知? 無傍名義說可知。他性相云何知?幻`焰`夢`鏡像`光明`響`水中月`應化等諸喩應知。成就性云何知?有四種淨法。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대승의 방광(方廣)의 가르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으니,
“망분별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명칭과 대상이 비존재라고 아는 것이며,
의타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비유하자면 요술ㆍ아지랑이ㆍ꿈ㆍ거울의 영상ㆍ그림자ㆍ메아리ㆍ물에 비친 달ㆍ변화와 같은 것이며,
성취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네 가지의 청정법이 있으니,
說中知四種淨法者,性淨故,所謂眞如`空`實際`無相`眞實義及法界是;離垢淨,所謂如是彼離一切障垢;彼得行淨,所謂一切菩提分法及波羅蜜等;彼生因念淨,所謂說大乘法。如是彼淨因故,非妄想,淨法界因氣故,非他性。如是此諸四法攝,成一切諸淨法。於中有偈:
네 가지의 청정법이란,
첫째는 자성청정한 성정(性淨)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진여ㆍ공ㆍ실제ㆍ무상(無相)ㆍ진실의(眞實義)ㆍ법계이며,
둘째는 번뇌를 여읜 청정함의 이구정(離垢淨)이니, 이와 같이 모든 장애의 번뇌를 여읜 것이며,
셋째는 그것을 증득한 청정한 수행의 행정(行淨)이니, 이른바 모든 보리분법과 바라밀 등이며,
넷째는 그것이 생기하는 원인의 청정한 인식대상의 인염정(因念淨)이니, 이른바 대승을 말하는 교법이다.
이와 같이 그 청정한 원인 때문에 허망한 망상(妄想)이 아니며, 청정한 법계를 원인으로 하는 성품이므로 의타성이 아닌 것이니, 이와 같은 네 가지의 법에 일체의 청정법이 포섭되는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幻等說故生, 妄計無有說, 於諸四淨中, 說爲眞實淨。
요술의 환(幻) 등은 생겨남을 말하는 것이고, 허망된 계탁의 망계(妄計)는 비존재의 무유(無有)라 하네.
네 가지 청정 중에서는 진실의 청정을 말하네.
淨性離垢行念故,彼淨諸攝四種義故。
자성청정의 성정(性淨), 번뇌를 여읜 청정함의 이구정(離垢淨), 수행의 청정인 행정(行淨), 인식대상의 청정인 인염정(因念淨) 때문이며, 그러한 청정 모두는 네 가지의 의미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復以何相故,他性相如所說幻等喩中明?餘者於他性相中,迴妄顚倒取意故。云何復餘者於他性相中,顚倒疑意成?如是餘者作是意:云何無此義現境界成?爲彼除疑迴義,故說爲如幻。云何無義諸心,心數順義成?迴疑義,說如焰喩。云何無此無義,而受愛不愛事?迴彼疑義故,說如夢。
또한 어떤 상(相) 때문에 경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타성을 요술 등의 비유로 밝히는 것인가?
다른 이가 의타성에 대해서 갖는 허망되고 전도된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이며,
또한 다른 이들이 어떻게 의타성에 대해서 전도된 의심을 갖는 것인가? 다른 이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때문이며,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경계가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요술의 비유를 말하는 것이며,
대상이 없는데 어떻게 심왕과 심소법이 수순하는 의미가 성립되는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아지랑이의 비유를 말하며,
대상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스럽고 사랑스럽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꿈의 비유를 말하였다.
云何無此義而有淨不淨業`愛不愛果`順不順事?迴彼疑故,說如鏡像。云何無義,而有種種識順事?迴彼疑義故,說如光。云何無此義,而有種種假名,語言順事?迴彼疑義故,說如響。云何無此義,實能取三昧境界順事?迴彼疑意義故,說如水中月。云何無此義,而諸菩薩故,取意不顚倒?作衆生益義故受生?迴彼疑意義故,如應化事。
대상이 없거늘, 어떻게 청정하고 청정하지 못함의 업과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못함의 결과가 따르고, 따르지 않음이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거울의 영상의 비유를 말하며,
대상이 없거늘, 어떻게 갖가지 식이 수순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그림자의 비유를 말하며,
대상이 없거늘, 어떻게 갖가지 명칭과 언어를 가립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메아리의 비유를 말하며,
대상이 없거늘, 어떻게 삼매의 경계를 실제로 능히 인식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물에 비친 달의 비유를 말하며,
대상이 없거늘, 어떻게 모든 보살은 전도되지 않은 마음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들을 애써 하기 위해서 생을 받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변화(化)의 비유를 말하였다.
有何義故,如『梵王經』中說:我不見世閒`不證涅槃。他相性中妄分別,及成就性因故,說世閒及涅槃事無異事故。如是彼他性相妄分別分故,說爲世閒,成就分故,說爲涅槃。
무슨 의미가 있기에 '범왕경(梵王經)'에서 “나는 세간을 보지 않고 열반을 증득하지도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의타성 가운데 망분별성과 성취성의 원인(因)이 있으므로 세간과 열반이 차이가 없는 무이사(無異事)라고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의타성은 망분별성 때문에 세간을 말하고, 성취성 때문에 열반을 말하는 것이다.
如佛阿毘曇中說:有三法,是染分`淨分`彼二分。
有何義故說?他性中妄想性是煩惱分, 成就性是淨分,還彼他性彼二分,以此義故說。
부처님께서 '대승아비담경'에서 “세 가지의 법이 있으니, 잡염분과 청정분과 그 이분(二分)이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고 하셨으니, 어떤 의미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인가?
의타성 중에서 망분별성은 번뇌분이고, 성취성은 청정분이며, 다시 의타성은 그 두 부분의 이분(二分)이니, 이러한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此義中何者說? 金藏土示現?所謂如金藏土中,有三事可見:一地塵`二土`三金。是中有地塵故,見土及見有金,若入火時不見土唯見金。地塵者,見土時非正見,見金時非如實見,是故地塵有二分。
就性事故見,妄分別性事故不見。是故所有妄分別識他性相二分成,如金藏泥地塵爾。
이러한 뜻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 것인가?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의 비유로 나타내나니, 마치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에서 세 가지 사물을 볼 수 있음과 같으니,
첫째는 지진(地塵)이고, 둘째는 흙이며, 셋째는 금이다.
이 중에서 지진이 있기 때문에 흙을 보고 금을 보게 되며, 만약 이것을 불에 넣으면 흙은 볼 수 없으나, 다만 금만 볼 수 있으니, 지진을 흙으로 본다면, 바르게 보는 것이 아니고, 금으로 보는 것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므로, 따라서 지진에 이 이분(二分)이 있는 것이다.
如是此無分別智火觸彼識已,彼識虛妄分別性事見,成就性事故不見。無分別智火觸彼識已,彼識實成
이와 같아서 이 무분별지혜의 불이 그 식(識)에 닿지 않으면 그 식의 망분별성이 나타나고 성취성이 현현하지 않으나,
무분별지혜의 불이 그 식에 닿으면, 그 식의 진실된 성취성이 현현하고 망분별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망분별식인 의타성에 이분(二分)이 있는 것이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에 있는 지진과 같다.
如來或說一切法常`或說一切法無常`或說非常非無常。以何意故說常?他性相成就,分別故說常`妄分別故非常`彼二分故非常非無常,以是意故說。
여래께서 혹은 일체법이 상주한다고 말씀하시고, 혹은 일체법이 무상하다고 말씀하시기도 하며, 혹은 일체법이 상주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다고 말씀하셨으니,
어떠한 뜻으로 상주한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의타성은 성취분에 의해서는 상주함이고, 망분별성에 의해서는 무상한 것이며, 그 두 부분에 의거해서는 상주도 무상도 아닌 것이니, 이러한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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