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대승론(攝大乘論상권 5

  (  무착지음불타선다(佛陀扇多한역김묘주 번역

 

彼所有彼聞習,彼爲是阿犂耶識性`爲不?若是阿犂耶識性者,是中云何彼對治種子成?若是非如是性者,是以彼聞習種子有何依身可見?

 모든 문훈습은 아리야식의 자성인가? 자성이 아닌 것인가?

만약 아리야식의 자성이라면,  중에서 어떻게  다스림의 대치종자(對治種子) 이루어지겠는가? 

만약 이와 같은 자성이 아니라면, 그 문훈습의 종자는 어떠한 의지처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인가?


諸佛得菩提已,所有彼聞習,隨心身現,彼共同事,報識中行亦如乳水,然非彼阿犂耶識,彼對治種子故。是中依微習故,生中習,依中習故,上習生,多以聞思修順義故。

모든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보리(菩提)를 증득하심에 이르기까지,  문훈습은 몸과 마음의 심신(心身)을 좇아서  공통된 성품의 공동사(共同事)를 나타내고, 보식(報識, 과보식) 중에서의 작용도 역시 그러하였으니, 마치 물과 우유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문훈습(聞熏習)은 아리야식이 아닌, 그 다스림의 대치종자(對治種子)이기 때문이며,  

 중에서 미약한 훈습의 미습(微習)에 의지해서 중품의 훈습인 중습(中習)이 생겨나게 되고, 중품의 훈습인 중습(中習)에 의지해서 상품의 훈습인 상습(上習)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니,

많이 듣고 사유하며 닦음의 문사수(聞思修)에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然彼聞思修種子,雖微中上,然是法身種子,應知阿犂耶識相違,非阿犂耶識所攝,出世閒善淨法界因氣事故世閒,及出世閒心作種子。

또한  듣고 사유하며 닦음의 문사수(聞思修) 종자의 미약함ㆍ중품ㆍ상품은 법신의 종자로서 아리야식과 서로 다른 것으로, 아리야식에 포섭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출세간의 매우 청정한 법계를 원인으로 하는 기운의 성품(事)이기 때문에, 세간이지만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의 종자인 것이다.


然彼未得出世閒心時,現氣煩惱對治`隨惡道對治,消滅作一切惡對治,隨順親近諸佛菩薩。世閒亦諸新學者法身所攝,應知諸菩薩;解脫身所攝,聲聞`緣覺。彼阿犂耶識,法`解脫身所攝。

또한  출세간의 마음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 기운을 나타내서 번뇌를 다스리고, 괴로움의 세계를 다스리며, 모든 악업을 소멸하여 다스리며, 

또한 모든 불보살에게 수순하고 가까이하는 것은 세간이긴 하지만, 처음 수행하는 여러 신학(新學)의 보살들은 역시 법신에 포섭된다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고, 모든 성문과 독각은 해탈신에만 포섭되나니,

 아리야식은 법신과 해탈신에 포섭되는 것이다.


隨所隨所微中上,漸次增長,如是如是,報識亦微劣身,亦轉明,一切時身亦轉明。一切時轉身已,彼報識一切種子離種子成。及一切時滅已,彼復云何阿犂耶識如乳水?若爾,非阿犂耶識同事而行一切時壞,如鵝水中飮乳。或入世閒厭,或入定習滅故,入定習增長,如轉身。

처소에 따라 미약함ㆍ중품ㆍ상품으로 점차 증장하면서, 이러하고 이러하게 보식(報識, 과보식) 미약하고 열등한 의지처(身)가 점차 지혜로 전환되는 전명(轉明)을 이루나니, 일체시에 의지처가 지혜로 전환되며, 일체시에  의지처의 전환을 이룬 뒤에는 그 보식(報識, 과보식) 일체 종자식은 종자를 여의고 영원히 단멸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아리야식은 마치 물과 우유와 같은 것이니, 어떻게 아리야식이 아닌 것과 동일한 성품으로 작용하겠는가? 

일체시에 멸하였으니, 마치 거위가  속에서 우유를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혹은 세간을 혐오함에 들어가고, 혹은 선정의 훈습이 멸(滅)함에 들어가고, 혹 선정의 훈습이 증장함에 들어감으로써 의지처의 전환인 전신(轉身)을 얻음과 같은 것이다.


及入諸滅盡定,雖不著識,故彼中唯執不離成,非滅盡定彼對治可取生。

非彼起已更復生,報識已斷,非餘處可取順成。若復計言:滅盡定有心,彼亦是心善不善,彼無記事故不生成,彼亦不成。

또한, 모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서 비록 식(識)에 집착하지 않을지라도 그 식은  안에서 떠나지 않음이 성립되나니,  멸진정은 그 아리야식을 다스리기 위해서 생기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 멸진정에서 나와서도 다시 생기하지 않으니, 보식(報識, 과보식)이 중단되면 다른 곳에서 취해서 수순할  없는 것이다.

만약 헤아려서 멸진정에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역시 선ㆍ불선ㆍ무기의 성품이 생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므로, 그것 역시도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ㅡ도리에 수순함에 관한 장이다.

 

若復言:色心後生者,諸法種子事分別前未生,亦不生色`無色。滅已及從滅盡定起,彼不成。及阿羅漢後心,亦不成。除唯次第緣事可成。

만약 “신체의 물질과 마음인 색심(色心)이 나중에법의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고 말한다면, 역시 생겨나지 않음을 앞에서 분별하였으며,

또한 색계나 무색계에서 죽거나 멸진정에서 나오는 것이 성립되지 않으며,

또한 아라한 이후의 마음 역시도 성립되지 않으나,

오직 차제연(次第緣)만이 성립될  있을 뿐인 것이다.

ㅡ신체의 물질과 마음이 중단됨이 없이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는 견해를 논파한다.


如是一切種子報識中閒無染無淨成。是故釋成彼無,及隨所相說。是中說偈:

이와 같이 일체 종자의 보식(報識, 과보식) 떠나서는 잡염도 없고 청정도 없으므로, 따라서  해석과 상의 설명이 성립되는 것이니, 여기에서 게송으로 설한다.


菩薩淨心, 離諸五識, 離餘轉事, 心云何作?

보살은 청정한 정심(淨心)으로 5식(五識)을 여의네.

마음이 어떻게 나머지를 여의는 전의를 이루는 것인가?


對治迴轉, 無量不成, 因果分別, 彼滅應順。

다스림의 대치(對治)로써 전의하는 것이면, 무량한 것이므로 성립되지 않으며, 

원인과 결과를 분별한다면, 마땅히 멸함을 수순해야 하네.

 

離子非事, 若取轉事, 彼事二無, 轉事不成。

종자를 여의고서는 자체가 없음을 인정해서 만약 전의로 삼는다면

  가지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전의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네.


何者復此阿犂耶識差別事?

어떠한 것이 이 아리야식의 차별인가?

아리야식의 품류의 차이에 관하여 논한다.


略有三種及四種應知。是中三種者,以三種習差別故,一言說習差別`二身見習差別`三因緣習差別。

간략하게 말한다면  가지 혹은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하나니,

여기서  가지란  가지 훈습의 차별 때문이니,

첫째는 언설훈습인 언설습(言說習)의 차별이고, 

둘째는 신견훈습인 신견습(身見習)의 차별이며, 

셋째는 인연훈습인 인연습(因緣習)의 차별이다.

ㅡ현장의 역본은 명언훈습(名言熏習)ㆍ아견훈습(我見熏習)ㆍ유지훈습(有支熏習)으로 되어 있다.

 

四種習差別,一取時差別`二報差別`三念事差別`四相差別。

 가지 훈습의 차별이란,

첫째는 취하는 시기인 취시차별(取時差別)이고, 

둘째는 과보의 보차별(報差別)이며, 

셋째는 자체를 반연하는 염사차별(念事차差別)이고, 

넷째는 양상의 상차별(相差別)이다. 

ㅡ현장의 역본은 인발차별(引發差別)ㆍ이숙차별(異熟差別)ㆍ연상차별(緣相差別), 상모차별(相貌差別) 되어 있다.


是中取時差別者,所有諸習生。彼無故,行緣識及取緣有不成。

是中報差別者,所有行有緣故。諸道受報,彼無故無子後生,諸法生事不成。

念事差別者,所有彼意我相念事。彼意無,己身念取事不成。

是中相差別者,所有彼同相`不同相`離受生種子相`同受生種子相。

 중에서 취하는 시기의 취시차별(取時差別) 모든 훈습이 생겨남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없으면 행의 지분이 식의 지분에 조건이 되는 행연식(行緣識)과 취(取)의 지분이 유(有)의 지분에 조건이 되는 취연유(取緣有)가 성립되지 않는다.

과보의 보차별(報差別) 행과 유의 지분을 조건으로 삼아서 모든 윤회세계에서 과보를 받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없으면 종자가 없게 되며, 다음 존재인 후생의 모든 법이 생겨나는 일이 성립되지 않는다.

자체를 반연함의 염사차별(念事차差別)이란  염오의(意)가 아상(我相)을 반연하는 것으로, 이 의(意)가 없으면  염오의가 자아라고 반연하여 집착하는 일이 성립되지 않는다. 

양상의 상차별(相差別)  공통된 동상(同相)과 공통되지 않은 부동상(不同相), 감각ㆍ지각작용이 없는 종자의 상(相)과 감각ㆍ지각작용이 있는 종자의 상(相) 등이다.


同,所有器世閒種子。不同者,所有內入種子。所有同者,彼離受生種子。對治生,不同者障滅。及同者,他所妄想分別取見淨。諸行人一事中種種信,如種見得。 是中偈:

공통된 동상(同相)은 자연계인 기세간(器世間)의 종자이고, 

공통되지 않은  부동상(不同相) 내부의 종자이며,

공통된 동상(同相) 감각ㆍ지각작용이 없는 종자이고, 

공통되지 않은 부동상(不同相) 감각ㆍ지각작용이 있는 종자이다. 

다스림의 대치(對治)가 생겨나면 공통되지 않은 부동상(不同相) 장애가 멸하고,

공통된 동상(同相) 다른 망상 분별을 취하여서 청정만을 보나니, 

관행을 닦는 사람들이 하나의 사물 중에서 갖가지의 믿음과 갖가지의 소견을 얻음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難滅證縛, 說爲同事, 行人亂心, 自念外壞。

단멸하거나 증득하기 어려운 속박을 공통된 성품의 동사(同事)라하네.

관행을 닦는 사람은 산란된 마음으로, 스스로 외부를 반연하여 무너뜨리며,


淨不相違, 眞實見淨, 佛戒淸淨, 諸佛見淨。

청정한 사람은 위배되지 않아서, 진실로 청정을 보나니, 

부처님의 계율은 청정한 것이라서 모든 부처님이 청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所有不同,彼同受生種子。彼無故,器世閒衆生世閒順勝事不成。復麤澀相`安相。麤澀相者,所有煩惱及使種子。安相者,有漏善法種子。彼無故,報作不作勝身中不成。

그것과 공통되지 않은 부동상(不同相)ㆍ공통된 동상(同相)ㆍ감각 지각작용이 있는 종자, 그러한 것이 없으면 자연계와 중생 세간이 수순하는 차별이 성립되지 않으며, 

또한 거칠고 껄끄러운 추삽상(麤澀相)과 평안함의 안상(安相) 있으니,

거칠고 껄끄러운 추삽상(麤澀相) 번뇌와 수번뇌의 사종자(使鍾子)이고,

평안함의 안상(安相) 유루 선법의 종자이니,  

그것이 없다면 과보를 지음과 짓지 않음의 의지처의 차별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復受`不受相。受相者,所有熟報善不善種子。不受相者,所有言道習種子,無量分別順種子故。彼無者,作不作善惡業得時,不受用義不成;新語言習生事不成。

또한 수용하는 수상(受相)과 수용하지 않음의 불수상(不受相)이 있으니,

수용의 수상(受相)은 이숙보(異熟報)의 선ㆍ불선의 종자이고,

수용하지 않음의 불수상(不受相)은 언어로 훈습된 종자이니, 무량한 분별에 수순하는 종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으면 짓거나 짓지 않은 선악업의 과보를 받을 때 수용하지 않는 불수(不受)의 뜻이 성립되지 않으며,

또한 새로운 언어훈습이 생기하는 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수용의 수상(受相)이란 종자의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을 다 수용해서 남음이 없음을 말하며, 선ㆍ불선의 과거의 업종자는 이숙(異熟)의 과보를 초감하기 때문에 남는 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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