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개운조사 능엄경 참조 

수능엄경(首楞嚴經) 2 10

 

阿難白佛言:世尊!如我思惟,此妙覺元與諸緣塵及心念慮非和合耶?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

세존이시여제가 사유(思惟)하여 보니,  묘각(妙覺) 근원은 모든 인연 경계인 연진(緣塵, 상분)과 마음(心, 업식)과 생각(念慮, 견분) 더불어 화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ㅡ이것은 다시 다른 하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묘각체(妙覺體)는 법계(法界)에 두루 함장되어 있는 것으로, 본래 우주법계와 다른 체(體)가 아니다. 능소(能所)가 없으니 화(化)한다, 합(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佛言:汝今又言覺非和合。吾復問汝。此妙見精非和合者,爲非明和?爲非暗和?爲非通和?爲非塞和?

若非明和,則見與明必有邊畔。汝且諦觀,何處是明?何處是見?在見在明自何爲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다시 말하기를, 각(覺) 화합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내가 다시 네게 묻겠다

 묘한 보는 정기인 견정(見精)이 화합한 것이 아니라

밝음과 화합(明和)한 것이 아닌가?

어둠과 화합(暗和)한 것이 아닌가? 

통함과 화합(通和)한 것이 아닌가? 

막힘과 화합(塞和)한 것이 아닌가?

만약 밝음과 화합(明和)한 것이 아니라, 견정(見精)과 밝음(明) 사이에 반드시 경계선인 변반(邊畔) 있어야 할 것이다

너는 자세히 살펴보아라어디까지가 밝음의 경계이며? 어디까지가 견정 경계가 되는가?

보는 주체의 견정의 경계는 어디서 시작하며? 밝음의 경계는 어디서 시작하는 것인가?

ㅡ화합(和)하였다면 같은 것이어서 경계가 없어야 할 것이고, 화합한 것이 아니라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경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은 자증분(自證分)의 본체에 속한 것이므로 합한다는 말 자체가 허구이다. 
의식을 파하면 견성(見性)이 드러나고, 견분과 상분을 파하면 장성(藏性)이 드러나며,업식을 파하면 여래장성이 드러난다. 
제법(諸法)이 상이 없음을 알면 상상(相相)이 적멸(寂滅)이며 제법이 모두 장성(藏性)임을 알면 성성(性性)이 원통(圓通)한다.

 

阿難!若明際中必無見者,則不相及,自不知其明相所在,畔云何成?彼暗與通及諸群塞,亦復如是。

아난아만약 밝은 것 가운데 반드시 보는 주체가 없다면서로가 미칠 수 없으므로 스스로 그 밝은 명상(明相) 있는 곳을 알지 못할 것인경계가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는가?

어둠의 명화(暗和)와 통함의 통화(通和)와 막힘의 색화(塞和)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又妙見精非和合者,爲非明合?爲非暗合?爲非通合?爲非塞合?若非明合,則見與明性相乖角,如耳與明了不相觸,見且不知明相所在,云何甄明合非合理?彼暗與通及諸群塞,亦復如是。

또한 묘한 견정이 화합(和)한 것이 아니라밝음과 합하지 않은(非合) 것인가? 

어둠과 합하지 않은(非合) 것인가?

통함과 합하지 않은(非合) 것인가?

막힘과 합하지 않은(非合) 것인가?

만약 밝음과 합하지 않은 것이라면보는 주체와 밝음의 성품이 서 어긋나는 것이, 마치 귀(耳)와 밝음(눈)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과 같이보아도 밝은 명상(明相) 있는 곳을 알지 못할 것인어떻게 합하고 합하지 않는 이치를 가려서 밝힐 수 있겠는가?

어둠의 비암합(非暗合)와 통함의 비통합(非通合)와 막힘의 비색합(非塞合)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ㅡ합한 것이 아닌 비합(非合)이라면, 눈과 대상 물질이 어긋나서 이미 밝음도 알지 못하고 또한 보는 주체도 나타나지 않을 것인데, 두 가지 체(體)가 이미 없거니 어디를 좇아서 합하는 것과 합하지 않는 이치를 밝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이상은 맑고 묘한 견정(見精)에 의지해서 마음의 티클을 떨어버리게 한 것이다. 

 

▷제근(諸根)과 그 대상물질에 나아가 여래장을 나타내시다.

阿難!汝猶未明一切浮塵諸幻化相,當處出生隨處滅盡,幻妄稱相,其性眞爲妙覺明體,如是乃至五陰、六入,從十二處至十八界,因緣和合虛妄有生,因緣別離虛妄名滅,殊不能知生滅去來,本如來藏常住妙明,不動周圓妙眞如性,性眞常中求於去來、迷悟、死生,了無所得。

아난아너는 오히려 아직도 실속 없이  경계의 일체의 부진(浮塵)과 모든 환술(幻術)과 같이 변화하는 온갖 모양(相)이, 곳을 따라 생겨났다가  곳을 따라 사라져버리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허망한 환영의 환망(幻妄) 모양(相)이라고 하지만 성품은 진실 그대로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본체인 묘각명체(妙覺明體)이니라.

이와 같이 내지 5(陰, 오온) 6(六) 12(十二處, 육근+육경)에서 18(十八界, 육근+육경+육식) 이르기까지도 인연이 화합하여 허망하게 생겨나는 것이며

인연이 흩어지면 허망하게 멸하는 것이니,

 생기고 멸하고 가고 오는 것 본래는 여래장(如來藏)이라, 항상 상주(常住)하는 것이며,

묘하게 밝은 묘명(妙明)한 것이고, 부동하여 두루 원만하고 미묘한 진여 변함없는 성품인 묘진여성(妙眞如性)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구나!

 성품의 진실하고 상주(常住)하는 가운데서는 가고 옴과 미혹함과 깨달음과 나고 죽음을 찾아보아도 찾을  없느니라.

ㅡ명암통색(明暗通塞)이 합하고 합하지 않는 것의 이치가 모두 부진(浮塵)이요 환상이다. 

화합(和合)으로 인하여 허망하게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므로 환상(幻相)이고, 곳을 따라 생기고 곳을 따라 없이진다고 한 것이다. 

여래장(如來藏)이란, 당사자의 법신의 묘한 본성으로, 과(果)에 의해 일컫는 것이 여래(如來)이고, 모든 덕을 포함하고 있어서 장(藏)이라 하고,

애초에 가고 옴이 없으므로 상주(常住)라 하고, 능히 어둡게 할 수 없으므로 묘명(妙明)이라 하고, 생멸을 따라 가지 않는 것이므로 부동(不動)이라 하고, 두루 만족되지 않음이 없는 것을 두루 원만하다 하고, 묘하여 지극히 신비하며 일체의 성품으로서 서로 차이가 없음을 미묘한 진여의 성품인 묘진여성(妙眞如性)이라 한다. 

 

ㅡ제법이 와도 본래 온 곳이 없으므로 당처출생(當處出生)이라 하고,

가도 간 곳(흔적)이 없으므로 수처멸진(隨處滅盡)이라 한다.

​여래장이란 중생 모두가 함께 갖추고 있는 본각의 성체(性體)이다. 이 성체는 숨어서 드러나지 않고 중생심 안에 함장되어 있어서 여래장이라 한다. 상주하고 불가사의하게 밝고 움직이지 않으며 두루 원만함이 여래장의 덕상(德相)이다. 

 

▷오음을 밝히시다.

阿難!云何五陰本如來藏妙眞如性?阿難!譬如有人以淸淨目觀晴明空,唯一精虛迥無所有,其人無故不動目睛瞪以發勞,則於虛空別見狂花,復有一切狂亂非相;色陰當知亦復如是。

아난아, 어째서 5음(陰)을 본래의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인 묘진여성(妙眞如性)이라 하는 것인가?

아난아,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청정한 눈으로 맑게 개인 밝은 하늘을 볼 때에는, 오직 하나의 맑은 하늘일 뿐이라서 저 멀리 아무것도 없거늘, 그 사람이 까닭 없이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오랫동안 똑바로 보고 있다가 눈이 피로하여지면, 허공에 따로 어물거리는 광화(狂花)를 보기도 하고, 다시 일체의 어지럽게 날 뛰는 헛된 모양을 보기도 하는 것과 같이, 색음(色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ㅡ색수상행식의 5 가지가 체(體)를 이루어 묘진여성을 덮어서 가리는 것을 오음(五陰)이라 한다. 

'청정한 눈으로 맑게 개인 밝은 하늘을 보는 것'은 맑은 지헤로 묘한 성품을 보는 것을 비유한 까닭에 '멀리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고, 

'눈이 피로하여서 광화를 보는 것'은 허망한 인(因)으로 색(色)에 연하는 것이다. 

'허공에 따로 어물거리는 광화(狂花)'는 색음(色陰)을,

헛된 모양의 광상(狂相)은 색경(色境)을 비유한 것이다.

 

▷색음(色陰)

阿難!是諸狂花,非從空來,非從目出. 如是,阿難!若空來者,旣從空來還從空入,若有出入卽非虛空,空若非空,自不容其花相起滅,如阿難體,不容阿難。

아난아, 이 모든 어물거리는 광화(狂花)는 허공에서 온 것도 아니고 눈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약 허공에서 온 것이라면, 허공에서 왔으니 다시 허공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니,

만약 드나듦의 출입(出入)이 있다면 (실체가 있는 것이므로) 곧 허공이 아닐 것이며,

허공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그 광화의 모양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허용할 수 없으니,

마치 아난의 몸에 다른 아난을 허용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ㅡ광화가 허공을 인한 것이 아님이 색음(色陰)이 대상경계로 인하여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若目出者,旣從目出還從目入,卽此花性從目出故,當合有見。若有見者,去旣花空旋合見眼;若無見者,出旣翳空,旋當翳眼。又見花時,目應無瞖,云何晴空號淸明眼?是故當知色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만약 눈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미 눈에서 나왔으니 다시 눈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 광화의 성품이 눈에서 나온 것이므로, 당연히 보는 작용에 합(合)해야 할 것이며,

만약 보는 작용이 있다면 나갈 때에 이미 허공의 꽃을 보았으니, 돌아 올때에도 반드시 눈을 보아야 할 것이며, 

만약 보는 작용이 없다면 나갈때 이미 허공을 가렸으니, 돌아올 때에도 당연히 눈을 가려야 할 것이며,

또 광화를 볼 때에도 눈에는 당연히 가리움이 없는데, 어찌하여 청정하고 맑은 허공이라야만 청정하고 맑고 밝은 눈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색음(色陰)은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성품이니라.

ㅡ곧 색음이 눈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광화가 눈에서 나온 것이라면 눈의 성품을 얻어서 응당 보는 것이 있을 것이나, 돌아올 때 눈을 보지 못하며, 또한눈을 가리지도 않으므로 눈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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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개운조사 능엄경 참조

수능엄경(首楞嚴經) 2 9

 

▷법합(法合)

阿難!吾今爲汝以此二事進退合明。

아난아, 내가 이제 너를 위하여   가지의 이사(二事)를 앞(進)뒤(法)로 맞추어 가면서 밝혀주리라. 

ㅡ두 가지의 이사(二事)란, 별업의 눈병으로 보는 것과, 동업으로 느끼는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 법(法)과 비유를 서로 맞추어 가면서 밝힌다고 한 것이며,

여기에서 '진(進)'은 법(法)을 말하고, 퇴(退)는 비유를 말하는 것이다.

 

阿難!如彼衆生別業妄見,矚燈光中所現圓影雖現似境,終彼見者目眚所成,

眚卽見勞非色所造,然見眚者終無見咎。

아난아,  중생이 개별로 지은 업으로 허망하게 보는 별업망견(別業妄見)으로, 등불의 빛에 나타난 원영(圓影)의 등무리가 비록 대상의 경계와 비슷하 나타날지라도, 결국에는  보는 사람의 눈병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병은 곧 보는 주체가 피로하여 나타난 모습일 뿐,  자체에서 만들어진  아니다.

그러나 마침내 눈병 그 자체를 보게 된다면, 그 보는 체의 허물이 없는 것이다. 

ㅡ이것은 별업의 업장으로 망령되게 보는 것은 그 허물이 눈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등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비유한 것이다.  즉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2분은 자증분(自證分)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속한다. 경계에 의한 여환(如幻)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 아니니, 마치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우리가 외계사물을 직접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식상(識上)의 형상을 인식한다고 본다. 이것은 곧 하나의 인식이 성립될 때, 식이 주관과 객관으로 이분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상분(相分)은 객관으로서의 식, 즉 식상(識上)의 영상(影像)으로서 소취분(所取分)ㆍ소량(所量)ㆍ사경상(似境相)ㆍ유상식(有相識)이라고도 하며,

견분(見分)은 주관으로서의 식, 즉 상분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작용으로서 능취분(能取分)ㆍ능량(能量)ㆍ능취상(能取相)ㆍ유견식(有見識)이라고도 하며,

자증분(自證分)은 이분화 되기 이전의 식 자체로서 견분과 상분에 의한 인식작용의 결과를 확인하는 인식체의 역할을 한다. -무착(無着)의 섭대승론(攝大乘論) 상권 6]

 

▷정합(正合)

例汝今日以目觀見山河國土及諸衆生,皆是無始見病所成。

見與見緣似現前境,元我覺明見所緣眚,覺見卽眚 本覺明心,覺緣 非眚

예컨데 네가 지금 눈으로 산과 강과 국토와 중생들을 보는 것이 모두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보는 주체가 병에 걸림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니라.

보는 주체(작용, 見, 능견)과 보이는 대상 물질인 견연(見緣, 상견)이 마치 눈 앞의 경계와 같이 나타나나,

본래 나의 깨달음의 밝음인 각명(覺明, 묘심명체)이 허망한 대상을 깨닫는 것은 눈병이 아니니라.  

ㅡ'지견(知見)에 알음알이가 성립되면, 그것이 곧 무명(無明)의 근원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이것은 다만 각명(覺明)의 허물일 뿐, 본각(本覺)의 잘못이 아닌 까닭에 '각명(覺明)으로 허망한 대상을 깨닫는 것은 눈병이 아니니라.'라고 한 것이다. 

이 가운데 법(法)과 비유한 대의(大意)는 눈(目)은 제 7식, 눈병은 사람과 법에 대한 2 가지의 집착을, 

등불은 제 8식에 비유한 것이다. 

등불을 식(識)에 비유한 것은, 등불이 기름과 결합하여 계속 타는 것과 같이, 식(識)도 탐욕과 애욕에 의해서 생사가 끊어지지 않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은 눈병과 같아서, 경계에 오취(五聚)에 차별이 있으므로, 각각 지은 별업이라 하였다.

눈병이 없으면 다만 등불만 보일 것이고, 집착이 없는 사람은 다망 유식(唯識)만 볼 것이다. 

 

覺所覺 眚 覺非眚中(?) (性覺明元 卽非眚中, 누락된 듯) 此實見見。云何復名覺聞知見?

깨달아야 할 대상인 소각(所覺)을 깨닫는  것은 눈병이지만,

깨닫는 성품인 성각 밝은 근본인 성각명원(性覺明元)은 눈병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이는 보는 주체를 보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또 다시 깨달으며(覺), 들으며(聞), 알고(知), 본다(見)고 이름하겠는가? 

깨달아야 할 대상인 소각(所覺)은, 곧 볼 수 있는 일체의 대상 경계이니, 대상 경계를 분별하는 것은 눈병이지만, 각성(覺性)은 눈병이 아니므로 볼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성각(性覺), 진여의 본체는 본래 자명(自明)한 것이므로 성각이라고 하였다. 

전심법요(傳心法要)에 이르기를 “세인(世人)은 진성(眞性)을 깨닫지 못해서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마음이라 오인하여 견문각지에 덮여서 정명본체(精明本體)를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

 

是故汝今見我及汝幷諸世閒十類衆生,皆卽見眚;非見眚者,彼見眞精性 非眚者故不名見。

그러므로 네가 지금 나를 보고, 너를 보고, 모든 세간의 10 종류의 중생을 볼지라도, 그것은  보는 주체(작용)이 눈병에 걸린 것이지,병을 보는 진실한 주체는 아닌 것이다. 

 보는 주체(작용)의 정밀하고 참된 성품의 진정성(眞精性)병이 아니기 때문에 ‘보는 주체(작용)’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ㅡ'보는 주체(작용)이 눈병에 걸린 것이지 눈병을 보는 진실한 주체가 아닌 것이다'란, 볼 수 있는 법은 모두 눈병이지 보는 주인공의 본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성(自性)이 불변수연(不變隨緣)하고, 수연불변(隨緣不變)하는 것이라, 견분과 상분이 의지할 수 있으나, 견상(見相)이 변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생망(眚妄)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비생(非眚)이라 하였다.

 

▷합동업(合同業)

阿難!如彼衆生同分妄見,例彼妄見別業一人,一病目人同彼一國,彼見圓影眚妄所生,此衆同分所現不祥,同見業中瘴惡所起,俱是無始見妄所生。

아난아,  중생들이 본 공동으로 허망하게 보는 동분망견(同分妄見)과,

따로 지은 업장으로 망령되게 지은 별업망견(別業妄見)한 사람을 예로 들어 비유로 밝혀 보리니,

눈병에 걸린 한 사람은  나라와 같으며, 또 그가 보는 등불의 원영(圓影)은 눈병으로  허망하게 생긴 것이며, 

 공동의 무리인 중동분(衆同分, 동업)이 다 같이 불길한 불상(不祥)을 보는 것은 같은  업장 가운데 나쁜 기운의 장악(瘴惡)으로 생긴 것이니, 모두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보는 주체(작용)의 허망된 망견(妄見)에서 생긴 것이니라.

ㅡ망견을 일진일퇴(一進一退)의 비유로 밝히는 것이다. 망업(妄業)은 비록 다르나, 망본(妄本)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정합(正合)

例閻浮提三千洲中,兼四大海娑婆世界,幷洎十方諸有漏國及諸衆生,同是覺明無漏妙心,見聞覺知虛妄病緣,和合妄生、和合妄死。若能遠離諸和合緣及不和合,則復滅除諸生死因,圓滿菩提不生滅性淸淨本心本覺常住。

염부제(閻浮提)의 3천개 섬(洲) 가운데 사방의 대해(大海)와 사바세계(娑婆世界)와 아울러 시방(十方)의 모든 번뇌가 있는 유루(有漏)의 중생들이 살고 있는 나라인 유루국(有漏國)들과 중생들을 견주어 예를 들면, 

이 모두가 깨달음이 밝고 번뇌가 없는 묘한 마음의 각명무루묘심(覺明無漏妙心)이, 보고(見) 듣고(聞) 깨닫고(覺) 아는(知)것의 허망한 병의 인연으로, 화합하여 허망하게 나고(生), 허망하게 죽는(死) 것이니라.

만약 능히 모든 화합하는 화합연(和合緣)과 화합하지 않는 불화합연(不和合緣)을 멀리 벗어날  있다면, 곧 생사의 원인을 멸하게 되어서  원만한 보리의 생멸을 떠난 성품을 원만하게 이루어서, 청정한 본심(本心)에 본각(本覺)이 항상 상주하게 될것이니라.

ㅡ앞에서는 한 사람으로 한 나라를 비유하였고, 여기에서는 한 나라를 대천세계에 비유하여서, 기계(器界)와 근신(根身) 모두가 보는 주체의 병과 하합하여 아집으로 부질없이 오도에서 생멸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밝히셨다. 

화합연(和合緣)이란, 대상 경계로 인하여 생기는 아집의 거친 생각의 추상(麤想)이며, 그것이 번뇌장(煩惱障)이며

불화합연(不和合緣)이란, 대상 경계를 여의고 홀로 집착하는 법집(法執)의 미세한 생각으로, 소지장(所知障)이다

이러한 이장(理障)이 생사를 이어가며 바른 지견을 가로 막는 나쁜 인(因)이 되어서 보리(菩提)를 없애는 것이다.

 

▷다시 밝히시다.

阿難!汝雖先悟本覺妙明性非因緣、非自然性,而猶未明如是覺元,非和合生及不和合。

아난아, 네가 비록 본각의 묘하고 밝은 성품의 묘명성(妙明性)이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님을 깨달았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이러한 깨달음의 근원은 서로 화합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서로 화합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치를 밝히지 못하였느니라.

ㅡ도를 증(證)하는 성품은 화합으로도 불화합으로도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아직 알지못하는 것이니, 이는 공부하는 마음에 남아 있는 번뇌의 찌꺼기 이므로 다시 바르게 깨우쳐 주어 밝고 맑게 되도록 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정(淨)을 밝히시다

阿難!吾今復以前塵問汝。汝今猶以一切世閒妄想,和合諸因緣性,而自疑惑。證菩提心和合起者,則汝今者妙淨見精,爲與明和?爲與闇和?爲與通和?爲與塞和?

아난아, 내가 이제   경계의 미진을 들어 너에게 묻겠으니,

너는 아직까지 오히려 일체 세간의 망상으로 화합하는 모든 인연성(因緣性)으로 인하여 스스로 의혹을 가지기를, 보리심를 증득하는 마음도 화합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여기는구나.

지금 너의 묘하고 깨끗한 보는 견정(見精)은 밝음(明)과 화합한 것인가? 어둠(闇)과 화합한 것인가?

통함(通)과 화합한 것인가? 막힘(塞)과 화합한 것인가?

'화(和)'라고 한 것은 섞여서 분별하기 어려운 것이고, 

'합(合)'이라는 것은 집착하여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若明和者,且汝觀明,當明現前,何處雜見?見相可辨,雜何形像?

만약 밝음(明)과 화합하였다면, 네가 밝음을 보는 관명(觀明)할 때에 마땅히 밝음이 나타날 것이니, 어느 곳에 보는 것이 섞여있는 것인가?  보는 것과 상(相)은 분별할 수 있지만, 섞인 것은 어떠한 형상인가?

ㅡ보는 것과 상(想)이란, 보는 것과 밝은 상(相)을 말하는 것이다.

 

若非見者,云何見明?若卽見者,云何見見?必見圓滿,何處和明。若明圓滿,不合見和,

만약 보는 주체(작용)가 아닌 비견(非見)이라면, 어떻게 밝음을 보겠으며?

만약 보는 주체(작용)라면, 어떻게 보는 주체를 본다고 하겠는가? 

반드시 보는 주체(작용)가 원만하다면, 어디에서 밝음과 화합할 것이며

만약 밝음이 원만하다면 보는 주체(작용)와 화합하여 어울리지 못할 것이다.

ㅡ화합한 것이라면, 그 사이사이에 섞인 것이라서 원만하지 못할 것이며, 원만하다면 서로 화합하지 못할 것이다.

 

見必異明;雜則失彼性明名字。雜失明性,和明非義,彼暗與通及諸群塞亦復如是。

보는 주체(작용)은 반드시 밝음과는 다른 것이므로, 섞이었다면  본성 밝다는 명분을 잃게 될 것이니,

섞임으로 인해서 밝은 본성 잃어버린다면, 밝음과 화합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니, 

어둠(闇)과 통함(通)과 막힘(塞)의 경우도 역시 그러할 것이니라.

 

復次,阿難!又汝今者妙淨見精,爲與明合?爲與暗合?爲與通合?爲與塞合?

다시 아난아, 네가 지금 묘하고 맑은 묘정견정(妙淨見精)은 밝은(明) 것과 합(合)한 것인가?

어두운(闇) 것과 합한 것인가? 통한(通) 것과 합한 것인가? 막힌(塞) 것과 합한 것인가?

ㅡ홥한 것이 있으며, 곧 망진(妄塵)과 관련된 것이라서, 묘하고 맑은 묘정(妙淨)이라고 할 수 없다.

 

若明合者,至於暗時明相已滅,此見卽不與諸暗合。云何見暗?

만약 밝음과 합한 것이라면, 어두울 때에는 밝은 모양의 명상(明相)은 이미 없어졌을 것이니, 저 보는 주체(작용)가 어두움과는 합하지 못할 것인 즉, 어떻게 어두움을 본다고 하겠는가?

ㅡ합하였으면,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명상(明相)이 없을 때에는 보는 주체(작용)도 따라서 없어질 것이니, 어두움과 합한 것도 아닐 것이다.

 

若見暗時不與暗合,與明合者應非見明,旣不見明云何明合?了明非暗彼暗與通,及諸群塞,亦復如是。”

만약 어두움을 볼  어둠과 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합한 명합(明合)의 경우에도 마땅히 밝음을 보지 못해야 할 것이다. 

이미 밝음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밝음과 합하였다고 할 것이며, 밝은 것이 어둠이 아닌 것을 알 수 있겠는가?

그 밖의 어둠(闇)과 통함(通)과 막힘(塞)의 경우 경우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니라.

ㅡ만약 어두움과 합하지 않고서도 어두움을 능히 볼 수 있다면, 밝음과 합할 때에도 마땅히 밝음을 보지 못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밝음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밝음과 합하였다고 하겠으며, 어떻게 밝은 것은 어두운 것이 아님을 안다고 하겠는가? 합하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으면, 보리심을 증득하는 마음이 화합으로 생기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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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개운조사 능엄경 참조

수능엄경(首楞嚴經) 2 8

 

阿難白佛言:世尊!如佛世尊爲我等輩宣說因緣及與自然,諸和合相與不和合,心猶未開;而今更聞見見非見,重增迷悶。伏願弘慈施大慧目,開示我等覺心明淨。作是語已,悲淚頂禮,承受聖旨。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

세존이시여부처님께서 저희들을 위하여 인연과 자연과 모든 화합상(和合相)과 화합하지 않는 불화합(不和合)의 이치를 말씀해주셨으나여기에 제 마음이  열리기도 전에, 다시 ‘진견(眞見)이 견분(見分)을 볼 때, 진견(眞見)은 견정(見精)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들으니지금 더욱 미혹하여 답답할 뿐입니다

바라오니 부디 넓으신 사랑으로  지혜의 눈을 베푸셔서 저희들에게 깨달음의 각심(覺心) 밝혀서 맑게하는 법을 깨우쳐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난은 슬피 울며 땅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성스러운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ㅡ견견비견(見見非見), 묘각성(妙覺性)은 상분(相分)과 화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견분(見分)과도 화합하지 않고 생멸과 불생멸의 화합체인, 제8식의 정명체(精明體)와도 화합하지 않는다. 


화합상(和合相)이란, 해와 달과 등불에 인하여 보는 것이 있다고 말한 것이고,

불화합(不和合)이란, '밝음도 아니고, 어두움도 아니고, 통함도 아니고, 막힘도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爾時,世尊憐愍阿難及諸大衆,將欲敷演大陁羅尼諸三摩提妙修行路,告阿難言:汝雖强記,但益多聞;於奢摩他微密觀照心猶未了。汝今諦聽,吾今爲汝分別開示,亦令將來諸有漏者獲菩提果。

이때 세존께서는 아난과 대중들을 가엾게 여기시고장차 대다라니(大陀羅尼, 총지문) 모든 삼마제(三摩提, 삼매) 묘한 수행의 묘수행로(妙修行路)를 설하시고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기억력이 좋을지라도 단지 많이 듣는 다문(多聞)으로 아는 지식만 채웠을 사마타(奢摩他)미세하고 비밀스러운 관조의 미밀관조(微密觀照)를 아직 마음속 깊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내가 지금 너를 위하여 분별하여 열어 보여 줄것이며또한 장래의 번뇌에 얽힌 유루(有漏)의 중생들도 깨달음의 과위인 보리과(菩提果) 얻게 하고자 하느니.

 

*대다라니(大陀羅尼), 총지(總持), 총지(總持) · 능지(能持) · 능차(能遮)라고도 번역하며, 일체법을 총섭하고 무량한 뜻을 지닌다, 또는 신ㆍ구ㆍ의 삼업이 청정함을 총섭하고 계ㆍ정ㆍ혜 세 무루학의 정진을 수지한다는 뜻이다. 

*미밀관조(微密觀照), 능견(能見)의 견(見)을 직관하여서 전상(轉相)을 파하고, 업상(業相)을 살피는 것이 바로 묘미밀성정명심(妙微密性淨明心)을 얻는 길이다.

*관조(觀照), 회광반조(廻光觀照)의 준말, 관조는 사물을 밝게 비추어 보는, 즉 사물을 보고 관하여서 사물의 실체가 없음을 확연히 알아 가는 것을 말하고, 반면에 명상은 생각이나 의식을 관하여 그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동업(同業)과 별업(別業)

阿難!一切衆生輪迴世閒,由二顚倒分別見妄,當處發生當業輪轉。

云何二見?一者衆生別業妄見;二者衆生同分妄見。

아난아일체 중생이 세상에서 윤회하는 것은  가지의 뒤바뀐 이전도(二顚倒)로 말미암아 분별하고 허망하게 보는 작용으로 말미암아, 바로 그 장소를 따라 발생하는 당처발생(當處發生)하며, 바로  업보를 따라 바퀴   굴러가는 당업윤전(當業輪轉)하는 까닭이니라.

 가지 보는 작용의 이견(二見)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중생 개별의 별업(別業)으로 인하여 허망하게 보는 망견(妄見)이요

둘째는 중생 공동의 동업(同業)으로 인하여 허망하게 한 보는  동분망견(同分妄見)이니라.

ㅡ별업(別業)이란 미혹이 일어나는 것이 서로 다름을 말한 것으로, 허망하게 대상의 그림자를 따라 정견(正見)을 잃어버린 것이고, 

동업(同業)이란, 망견(妄見)의 느낌이 서로 같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허망하게 생사를 따라서 본래의 깨달음인 본각(本覺)을 잃어 버린 것이다.

이 허망한 견(見)으로 인하여 망업을 짓게 되므로, 장소를 따라 발생하는 당처발생(當處發生)이라 한 것이며, 

그 업을 따라 제취의 보(報)를 받으므로 업보를 따라 유전하는 당업윤전(當業輪轉)이라 한 것이다.

 

*당처발생(當處發生), 본처(本處), 즉 진심을 떠나지 않고 발생하는 것이다. 망심은 진심을 떠날 수 없으며, 진심이 있어서 망심이 일어나고, 망심으로 인하여 미혹하여 지며, 미혹하여서 업을 짓고 또 그 과보를 받는 것이다.

*두 가지 보는 작용의 이견(二見), 견분이 상분을 취하여서 두 가지의 망견을 연출하는데, 이것이 분단과 변역의 두 생사의 근본이며 보리와 열반 등 2과(二果)의 근본이다. 이 두 망견은 무명 업식이 변현(變現)되어 일으키는 것이다.  

*분단생사(分段生死), 생(生)과 사(死)를 서로 떨어진 분단(分段)의 세계로 생각하는 생사관으로, 분단생사관에서 보면 생사가 서로 격절돼 있어서 죽음은 엄청난 공포다. 우리 범부중생이 생로병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바로 분단생사(分段生死)를 받아들인 까닭에 생긴 것이다. 삼계(三界)에서 생사를 되풀이 하는 범부 각자는 과거에 지은 업(業)에 따라 신체의 크고 작음과 목숨의 길고 짧음이 구별된다고 해서 분단(分段)이라 한다.  

*변역생사(變易生死), 생사가 서로 격절된 세계가 아니고 단지 몸만 바뀌어 변화된 세계라고 보는 생사관이다. 생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의 변화라고 생각하게 된다. 낮이 생이라면 밤은 작은 죽음이다. 밤과 낮은 고정돼 있지 않고 끝없이 변화한다. 이처럼 생사관을 넘어선, 즉 생사에 대한 집착을 넘어선 경지가 변역생사이다. ㅡ아미산

 

▷별업(別業)을 밝히다.

云何名爲別業妄見?阿難!如世閒人目有赤眚,夜見燈光別有圓影五色重疊。

眚 눈에 백태낄 생, 흐릴 생

어떠한 것이 개별의 별(別業)으로 말미암아 허망하게 보는 것인가?

아난아세상 사람들 가운데 눈에 붉은 백태가 끼는 적생(赤眚)의 눈병 있는 사람은 밤에 등불을 볼 때에 오색의 둥근 영상이 중첩되어 겹쳐지는 등의 그림자인 등무리를 보게 되느니라.

ㅡ눈병으로 인하여 중첩된 빛을 보는 것과 같이 마음에 집착이 있는 까닭에 경계를 따라 차별된 의혹이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란, 일체 중생을 비유하고, 눈(目)은 칠식(七識)을 비유하며, 등불은 팔식(八識)을 비유하고, 

둥근 영상은 허망한 경계를 비유한 것이다. 

오색(五色)이란, 대상 경계, 즉, 오음이 있으므로 오색이라 한 것이다. 

또한 눈(目)은 묘각명심에 비유한 것이며, 허망하게 한 번 움직이면 무명망심으로 바뀌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於意云何?此夜燈明所現圓光,爲是燈色爲當見色?阿難!此若燈色,則非眚人何不同見,而此圓影唯眚之觀?若是見色,見已成色,則彼眚人見圓影者名爲何等?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밤에 등불을 밝힘에 따라 나타나는 둥근 영상의 원광(圓光)을 등불의 색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는 작용의 색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난아만약 그것 등불의 색이라면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오색의 둥근 영상인 원영(圓影)을 보지 못하거늘어찌하여 오직병에 걸린 사람만이 오색의무리를 보는 것인가!

만약 보는 작용의이라면, 보는 작용은 이미 되었거늘, 병에 걸린 사람이 보는 둥근 영상인 원영(圓影)을 무엇이라 해야 하겠는가?

ㅡ이는 차별하는 망견이 대상 경계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도 아니고, 또한 눈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중생들의 보는 주체가 병이 들어서 생긴 망견인 것이다. 

'오직 눈병에 걸린 사람만이 오색의 무리를 보는 것'이란, 오직 눈병에 걸려야만 볼 수 있다는 것이며, 

'무엇이라 해야 하겠는가?'는, 만약 색이 눈에 있다면 등불의 원영(圓影)을 색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復次,阿難!若此圓影離燈別有,則合傍觀屛帳几筵有圓影出;離見別有,應非眼矚,云何眚人目見圓影?

또한 아난아만약 이 원영(圓影)이 등불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라면옆자리의 병풍이나 휘장이나 책상이나 돗자리를  때에도당연히 원영(圓影)이 있어야 할 것이

보는 작용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라면, 응당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데어찌하여 눈병에 걸린 사람에게만이 원영(圓影)이 보이는 것인가?

 

▷허망한 근원을 결론지어 나타내시다.

是故當知 色實在燈,見病爲影,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빛은 실제로 등불에 있는 것으로, 보는 작용이 병이 들어 등무리가 된 것이니라.

ㅡ등불에 빛은 있으나 원영(圓影)은 없는 것으로, 그 원영은 눈병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인식(認識)이 대상 경계를 변화 시키는 허물이 없으나, 아집으로 말미암아 허물이 있는 것이다.

빛은 실제로 등불에 있는 것의 색실재등(色實在燈)이란, 성공진색(性空眞色)이 본래 일체법성(一切法性)을 갖추고 있는 것을 뜻한다.

 

影見俱眚,見眚非病。終不應言是燈是見,於是中有非燈非見。如第二月,非體非影。

何以故?第二之觀,捏所成故。諸有智者不應說言,此捏根元是形非形離見非見;

등무리와 보는 작용이  병이지만, 눈병을 보는 자체는 병이 아니니, 종내에는 '등무리의 탓이다, 보는 작용의 탓이다'라고 말할 것이 못 되며, 또한  가운데에서 등불의 탓도 아니요, 보는 작용의 탓도 아니라고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마치 제이(第二)의 달(月)이 달 자체도 아니고, 달의 그림자도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니, 

왜냐하면 제2의 달은 눈을 비벼서 생긴 것이 때문이다. 

지혜가 있는 모든 이들은 눈을 비벼서 생긴 제2의 달의 근원을 두고 ‘달의 모양이다, 달의 모양이 아니다’라고 하거나, ‘보는 작용이다, 보는 작용이 아니다'라고 하는 등의 말을 하지 않느니라.

ㅡ그림자가 보는 이의 눈병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는 것을 알면, 그림자와 보는 작용 모두가 눈병일 뿐, 그 눈병을 보는 그 주인공은 병이 든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 눈병을 보는 것을 곧 보는 본체이고, 보는 본체는 병이 없는 것이니, 중생의 능견소견(能見所見)은 망혹(妄惑)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원영(圓影)은 제2의 달을 말하고, 본체는 참 달을 말한다.

 

此亦如是,目眚所成,今欲名誰是燈是見,何況分別非燈非見。

 등무리 역시 그와 같이 눈병으로 생긴 것인데, 지금 무엇을 이름하여 '등불의 탓이다, 보는 작용의 탓이다'라고 하겠으며, 더더욱, ‘등불의 탓이 아니다 보는 탓이 아니다’라고 분별하는 것이겠는가!
ㅡ묘각명심의 진견(眞見)이 무명망심의 망견(妄見)을 볼 때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진견은 유무시비(有無是非)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니, '등(燈)이다 견(見)이다' 말할 수 없거늘,

'등(燈)이 아니다, 견(見)이 아니다'라고 분별하겠는가? 
 

▷동업(同業)을 밝히시다.

云何名爲同分妄見?阿難!此閻浮提除大海水,中閒平陸有三千洲,正中大洲東西括量,大國凡有二千三百,其餘小洲在諸海中,其閒或有三兩百國,或一或二,至于三十、四十、五十。

동분(同分, 동업)의 허망한 망견(妄見)이란 무엇이겠는가?

아난아,  남섬부주(南贍部洲, 염부제)에는 대해(大海) 제외한 중간의 육지에 3천 개의 섬(洲)이 있으니,

  가운데에 있는 큰 섬인 대주(大洲)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과 서쪽 모두를 다 헤아려 보면 2천 3백 개의  나라가 있느니라. 

 나머지 작은 섬인 소주(小州)들이 여러 바다에 가운데에 있는데,  가운데에는 혹 3백의 나라, 혹 2백의 나라가 있기도 하고, 또한 한 나라나 두 나라에서부터 30의 나라, 40의 나라, 50의 나라가 있기도 하느니라.

 

▷국지(局地)적 비유

阿難!若復此中有一小洲只有兩國,唯一國人同感惡緣,則彼小洲當土衆生,睹諸一切不祥境界。

或見二日或見兩月,其中乃至暈蝕珮玦彗勃飛流,負耳虹蜺種種惡相,但此國見;彼國衆生,本所不見亦復不聞。

暈 무리 훈, 무리 운, 어지러울 운

 

아난아, 또다시 그 가운데에 있는 어느 하나의 작은 섬에는 2개의 두 나라만이 있는데,

오직 한 나라의 사람들만이 공동으로 악연(惡緣)을 함께 느끼게 되면, 그 작은 섬의 해당 국토의 중생은 온갖 상서롭지 못한 경계를 보게 되나니, 혹 두개의 해를 보기도 하고, 두개의 달을 보기도 하며, 내지 햇무리의 훈(暈), 월식과 일식, 해의 귀걸이인 패결(珮玦), 혜성(彗星), 사방으로 뿔 돋친 별의 패성(孛星), 빗겨 나는 별똥 별의 비성(飛星), 아래로 흐르는 별똥 별의 유성(流星), 해를 등진 무지개의 부이(負耳), 암수의 쌍무지개의 홍예(虹蜺) 등의 등 가지가지 나쁜 모양을 보느니라.

이러한 모습들은 다만 이쪽 나라의 중생들만 볼 수 있을 뿐, 저쪽 나라의 중생들은 보지도 못하고 들은 바도 없느니라.

ㅡ 업력(業力)은 불가사의하며, 오탁악세(五濁惡世)도 중생의 공공업력(公共業力)이 조성한 것이다. 탐(貪) 진(瞋) 치(癡)의 삼독(三毒)이 살(殺) 도(盜) 음(淫 )의 삼악업(三惡業)을 지으니, 중생들이 이러한 동업(同業)으로 인하여, 그 악이 옳지 않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미혹하여서 업을 지어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적패결(適珮玦)은 해와 달에서 뻗어나는 기운으로, 훈(暈)은 수레바퀴처럼 둥근 것이고, 적(適)은 일식이나 월식을 하기전에 생기는 검은 기운이고, 패(珮)는 모습이 배(背)자 처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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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7

 

▷과거사를 인용하여 다시 밝히시다.

阿難白佛言:“世尊!必妙覺性非因非緣。世尊云何常與比丘,宣說見性具四種緣,

所謂因空、因明、因心、因眼。是義云何?”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기필코 이 미묘한 깨달음의 성품인 각성(覺性)이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라면,

세존께서는 어찌하여 비구들에게 항상 말씀하시기를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은 네 가지의 연(緣)을 갖추고 있으니,

이른바 '공(空)을 인(因)하고 밝음(明)을 인하고 마음(心)을 인하고 눈(眼)을 인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이러함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아난 존자는 견정(見精)을 묘각성(妙覺性)으로 잘못 알고 있다. 
공명(空明)한 심안(心眼)은 空明心眼의 4종류의 연(緣)으로 식(識)을 낼 수 있지만,

묘각성(妙覺性)은 공명심안(空明心眼)을 떠난 불변의 진체(眞體)이다. 

 

(緣)이 생기는 법은 공(空)을 인(因)하여 있으며(有), 밝음을 인(因)하여 나타나며(現), 마음을 인(因)하여 알며(覺), 눈을 인(因)하여 보는(見) 이니, 이것이 곤 세간의 명상(名相)이므로, 제일의에 있어서는 모두 실없는 논리일 뿐이다. 

견성이 자연이라면 인연 중에는 견성이 없고, (견성이) 인연이라면 자연 중에는 없다. 
인연의 용(用)이 없으면 자연의 체가 드러나지 않고, 자연의 체가 없으면 인연의 용(用)이 생기지 않는다. 
일체상(一切相)과 일체법(一切法)은 단지 사량(思量)하고 분별(分別)함이며 상(相)에 미혹함일 뿐, 견성이 아니다.

 

*제일의(第一義), 성지(聖智)로써 얻어지는 일승묘법(一乘妙法)으로 최상의 진리이다. 

 

佛言:“阿難!我說世閒諸因緣相,非第一義。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세간의 인연상(因緣相)을 설한 것으로, 가장 뛰어난 제일의(第一義)를 설한 것이 아니니라.

ㅡ모든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에는 2제(二諦)에 의거하시는 것으로,  
세제(世諦)에 의거함을 정서(情緖)에 따른 설법이라 하고, 
제일의(第一義)에 의거함을 지혜(智慧)에 따른 설법이라 한다.

 

▷왜곡됨을 밝히시다.

阿難!吾復問汝。諸世閒人說我能見。云何名見?云何不見?

아난아, 너에게 다시 묻겠으니,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나는 능히 볼 수 있다(能見)’고 하는데,

어떠한 것을 보는(見) 것이라 하고, 어떠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不見) 하는가?”

ㅡ여기에서 설하는 인연과 앞에서 설하는 인연은 다른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진여가 연(緣)을 따른다고, 자연에 대한 집착을 파하셨고, 여기에서는 진여는 불변이라고 하셨다.

비단 묘각성(妙覺性)만이 인연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견정도 인연에 속하지 않는다.

밝을 때는 밝음을 보고 어두울 때는 어두움을 본다. 명암(明暗)은 경계에 속하여 변하지만 견성은 변화가 없다.

 

阿難言:“世人因於日、月、燈光見種種相,名之爲見;若復無此三種光明,則不能見。”

아난 존자가 말씀 드렸다.

“세상 사람들은 햇빛과 달빛과 등불 빛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상(相)이 보이면 보는(見) 것이라고 하며,

햇빛과 달빛과 등불 빛이 없으면 볼 수(不見) 없다고 합니다.”

ㅡ위의 3 가지의 빛으로 인하여야만 능히 볼 수 있는 것은 화합상(和合相)이라 이름 할 수 있는 것으로, 참된 견체(見體)는 아니다. 참된 견체는 화합상이 아니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니, 그것은 연(緣)을 따라 생기는 것도 아니며, 대상 경계를 따라 없어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 

 

“阿難!若無明時名不見者,應不見暗;若必見暗,此但無明云何無見?

阿難!若在暗時,不見明故名爲不見;今在明時不見暗相,還名不見。

如是二相俱名不見。若復二相自相𣣋奪,非汝見性於中暫無,如是則知二俱名見,云何不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약 밝음이 없을 때에는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당연히 어둠도 볼 수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어둠을 분명히 본다고 한다면, 이것은 단지 밝음이 없는 것일 뿐이니, 어찌 보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난아, 만약 어두울 때에는 밝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과 같이 밝은 때에 어두운 상(相)을 볼 수 없는 것도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밝고 어두운 이상(二相) 모두를 다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라.

비록 밝음과 어둠이 서로 번갈아 능멸하여 빼앗아 바뀐다고 할지라도, 너의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 상주진심)은 밝음과 어두움 가운데에서 잠시도 떠난 적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두 가지 경우의 모두를 본다고 말해야 할 것인 즉, 어찌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ㅡ이것이 곧 연(緣)을 따라 생기지도 않으며, 대상을 따라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연(緣)을 여의야 한다.

是故阿難!汝今當知,見明之時,見非是明;見暗之時,見非是暗;見空之時,見非是空;

見塞之時,見非是塞,四義成就。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지금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밝음을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 보는 주체)은 밝은 것이 아니요,

어둠을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 보는 주체)은 어두운 것이 아니며,

허공(空)을 볼 때에도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 보는 주체)은 빈것이 아니요,

막힘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 보는 주체)은 막힌 것이 아닌 것이니, 

이러한 것이 네 가지의 뜻이니라.

ㅡ밝음, 어두움, 허공, 막힘 모두는 연진(緣塵)에 속하는 것이며, 보는 주체는 아니다. 보는 주체는 참된 지혜를 증명하는 것으로 연에서 벗어난 것이고, 보이는 대상은 참된 이치를 증명하는 것으로 상(相)에서 벗어난 것이다.

 

▷상(相)을 여의야 한다.

汝復應知,見見之時,見非是見;

다시 네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보는(見) 것이 견정을 볼 때, 보는(見) 것은 견정이 아니니라.

ㅡ묘각심(견성)이 이 견분을 비추어보는 견견지시(見見之時)에 견정은 견성의 묘각지가 아닌 견비시견(見非是見)이다.
상분이 견분과 화합하지도 않으며, 견분이 묘각지와 화합하지 못하므로 견정은 묘각지를 볼 수 없다. 

 

진견(眞見)이 홀연 망견(妄見)을 볼 때, 진견은 자체 중의 일분망견(一分妄見)을 여의어 망에 떨어지지 않는다. 
혹은 능견(能見)의 진견이 소견(所見)의 망견(妄見)을 볼 때, 이 진견은 망견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즉, 밝고 어두움이 보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비록 견체(見體)가 연(緣)을 벗어났음을 깨달았을지라도 견체를 볼 수 없지만, 보는 주체를 볼 때에 보는 것은 보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견체가 상(相)을 여의었음을 깨달아서 참된 견체를 보게 된다. 

 

見性微妙 猶且離見,見不能及。云何復說因緣、自然及和合相?

견성은 미묘하여서 오히려 보는(見) 것을 떠난 것이니, 보는(見) 것도 능히 미칠 수가 없거늘 어떻게 다시 인연이다 자연이다 화합상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ㅡ그래서 견정은 견성을 볼 수 없는 견불능견견(見不能見見)이며, 
견정이 견성에 미칠 수 없는 견불능급야(見不能及也)이다

진견(眞見)은 오히려 보는 정기를 떠나 있어서, 보는 정기로도 미칠 수 없는데, 어떻게 인연이니 자연이니 화합상(和合相)이라고 하겠는가!

 

*見猶離見, 見不能及이란?, 진견은 견정(見精)의 자상을 여의고, 진견이 드러나면 망견(妄見)이 사라져서 견정(見精)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견(眞見)이 망견(妄見)에 응함을 견정(見精)이라 하고, 견정이 망견을 여의면 진견(眞見)이라 한다.

 

汝等聲聞狹劣無識,不能通達淸淨實相,吾今誨汝,當善思惟,無得疲怠妙菩提路。”

너희 성문들은 소견이 좁고 낮아서 아는 것이 없어서 청정한 실상(實相)을 능히 통달하지 못한 것이니,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리니, 마땅히 잘 생각하여서 묘한 보리(菩提)의 길에서 피곤해 하거나 게으르지 않도록 하여라.”

앞에서는 상분(相分)을 파하였고, 이 단에서는 견분(見分)을 파하였다. 
견성(見性)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닌, 자기 업식이 변현된 것이다. 
묘각지(妙覺智)와는 더욱 거리가 있어서, 묘각지가 이 견성을 비추어 볼때, 업상(業相)과도 화합하지 않는데, 업상이 일으킨 전상(轉相)이나 현상(現相)과 화합할 리가 없다. 
상분(相分)이 견분(見分)과 화합할 수 없고, 견분이 묘각지와 화합할 수 없으며, 견분은 묘각지를 볼 수 없다. 
묘각지는 견문(見聞)이 다다를 수 없으며, 사의(思議)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견정(見精)은 현량(現量)과 연하는 성경(性境)으로, 서로 뒤섞이지는 않지만 아직 능소(能所)가 있다. 
만약 묘각지가 진여경(眞如境)을 연(緣)하면 여여리(如如理)와 여여지(如如智)가 하나가 되어 능소가 없다. 
이 경지에 견정(見精)은 미치지 못하므로, 따라서 이 견정을 파하여 능소(能所)에 떨어지지 않아야 묘각에 바로 들어간다. 
이것이 진정하고 묘한 보리로(菩提路)이다. 

앞에서 10회에 걸쳐 견성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십번현견(十番顯見), 열 번에 걸쳐 견성을 밝힌 것이다.
상주진심(常住眞心)의 상(常)은 변화가 없어 항상함이요,
주(住)는 오고 가지 않으며  '하나'에 머묾이고,
진(眞)은 틀림이 없고 잡스러움이 없는,
심(心)은 둘이 없는 참 마음의 뜻이다.
상주진심은 불변의 청정한 마음으로 견성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능엄경' 견도분의 초반에 일체중생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상주진심(묘정명심, 견성)을 모르고, 색성향미촉 등 눈앞에 다가오는 다섯 상황이 조건(緣)이 되고, 수만 생을 통하여 쌓아온 업의 종자(因)가 서로 반응하여 실상과 거리가 있는 환상(幻相)을 조작해내는 반연심이 상주진심인 줄 알고, 그 반연심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도적을 자식인줄 알고 애지중지하다가 자산(진여자성)을 탈탈 털리는 것과 같다고 일깨웠다.
환상이란 헛것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눈병이 들었을 때 손으로 눈을 누르고 있다가 땔 때, 허공에 꽃이 보이거나 달이 두 개로 보이는데, 이들은 모두 허상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앞의 다섯 경계와 스스로의 업식 종자가 조작해 낸 허구를 진실한 인식이라 믿으며 서로 자신이 인식한 것이 옳다고 우긴다. 이것이 번뇌이며 다툼의 시작이며 세계평등평화를 해치는 근본 원인이며 육도윤회를 계속하는  씨앗이다.
'능엄경'에서의 정의에 의하면, 견성은 묘각성(妙覺性)으로 불변(不變)의 체(體)이며 진공(眞空) 수연(隨緣)의 용(用)이 있다묘유(妙有)진공의 체와 묘유의 용을 함유하지만 능소가 없다.
화엄의 '법성게(法性偈)의 첫 게(偈)인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의  법성(法性)에 해당된다.
이 견성은 무소부지(無所不知),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무소불지(無所不至), 미치지 못하는 바가 없으며

무소불능(無所不能), 할 수 없는 바가 없고, 무소불조(無所不照), 비추어 밝히지 못하는 바가 없는,

전지전능한 공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묘정명심(妙淨明心) 혹은  묘각성(妙覺性)이라 한다.
또한 견성인 묘각지(妙覺智)는 견문각지(見聞覺知)가 미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사의(思議)가 도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말을 여의고 상이 끊어진 이언절상(離言切相)이며, 언어가 밝힐 대상이 아닌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그러면, 견성과 견정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견정(見精)이란 연생(緣生)하는 것이 아닌, 즉 색성향미촉의 다섯 경계에 꺼둘리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업식(業識)이 변현한 것으로, 자증분(自證分)에 배대시킬 수 있으나 묘각지(妙覺智, 견성)와는 한 층의 격차가 있다.
업식이 변현한 것이라면, 아직 업상이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며, 소위 업장소멸(業障銷滅)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업상이 있으면 자연적으로 '나'가 있다는 전상이 있고, 내가 있으면 견문각지하는 대상이 있게 되므로, 주관인 '나'와 객관인 '대상' 즉 능소(能所)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과 견정은 한 층의 격차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중생들은 상분(相分, 색성향미촉)을 파한 다음 견분(見分, 색수상행)을 파하나, 자증분(自證分)을 파하기는 어렵다.
상분이란 명암색공(明暗塞空) 등이며, 견분이란 견문각지(見聞覺知) 등이다.
이들 상분과 견분은 자증분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이들 상분과 견분에 집착하여, 이들 상분과 견분이 진실하다고 오인하면 안된다.
묘각심(견성)이 이 견분을 비추어보는 견견지시(見見之時)에 견정은 견성의 묘각지가 아닌 견비시견(見非是見)이다.
상분이 견분과 화합하지도 않으며, 견분이 묘각지와 화합하지 못하므로 견정은 묘각지를 볼 수 없다. 
그래서 견정은 견성을 볼 수 없는 견불능견견(見不能見見)이며, 
견정이 견성에 미칠 수 없는 견불능급야(見不能及也) 라고 하였다.ㅡ한울림의 견성(見性)과 견정(見精)에 관한 글을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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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6

 

▷아난 존자가 총합하여 논함

阿難白佛言:“世尊!誠如法王所說,覺緣遍十方界,湛然常住性非生滅,與先梵志娑毘迦羅所談冥諦,及投灰等諸外道種說有眞我遍滿十方,有何差別?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진실로 법왕의 말씀과 같아서, ‘깨달음의 인연인 각연(覺緣)이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하여서, 고요한 가운데 상주(常住)하는 것으로, 그 성품은 생멸하는 것이 아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것을 앞에 나온 범지(梵志)인 사비가라(娑毗迦羅)가 말하는 ‘명제(冥諦)’나, 또는 재에 몸을 던지는 투회(投灰) 외도 등과 같은 일체 외도의 무리들이 말하는 ‘참 나인 진아(眞我)가 시방에 두루 원만하다’는 뜻과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ㅡ외도들은 성품(性)의 참됨은 보지 못하고 다만 아뢰야식에 의지하여서 망령되게 진실한 것으로 혼란한 까닭에 부처님께 여쭈어서 분별하여 주시기를 바란 것이다. 

범지(梵志)란 외도들을 통칭한 것이고, 투회(投灰)란 고행하는 외도를 말한다.

 

각연(覺緣), 깨달음의 인연인 견(見)을 말한다. 각(覺)은 반야(般若) 관조(觀照) 지혜(智慧)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견(見)과 같은 뜻이다. 아난 존자가 지금까지 보는 성품인 견(見)이 무엇인지 몰랐다가 알게 된 것이 각(覺)이고 이것은 잠들지 않고 늘 깨어있는 것으로 각연, 각성(覺性)인 것이다. 각연(覺緣)은 견성(見性)을 가르킨다. 견성(見性)에 의지하여 능연(能緣)의 공능(功能)이 있기 때문에 각연(覺緣)이라 한다.

 

▷문답으로 의심점을 밝힘 - 첫 번째의 의혹

世尊亦曾於楞伽山,爲大惠等敷演斯義,彼外道等常說自然,我說因緣非彼境界。

세존께서는 이전에 능가산(楞伽山)에서 대혜(大慧)보살 등을 위하여 이 뜻을 펼쳐 말씀하시기를 ‘저 외도들은 항상 자연(自然)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가 말한 인연은 그들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ㅡ'그들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외도들의 소견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진여의 불성은 비교하여 따지면 곧 어긋나고, 계교하여 헤아리면 곧 뒤섞인다

 

我今觀此覺性自然非生非滅,遠離一切虛妄顚倒,似非因緣與彼自然,云何開示不入群邪,獲眞實心妙覺明性?”

제가 지금 살펴보건데, 깨달음의 성품인 각성(覺性)은 자연 그대로의 것으로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며, 일체 허망한 전도에서 멀리 벗어났으므로, 아마도 인연이 아닌 듯하며, 마치 저들이 주장하는 자연과 같은 듯합니다.

그러니 저들이 주장하는 자연과 어떻게 가려내어야, 일체의 사견(邪見)에 빠지지 않고, 진실한 마음의 묘하게 깨닫는 밝은 성품의 묘각(妙覺)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ㅡ아난 존자의 생각으로는 깨닫는 성품의 각성(覺性)이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자연과 같고, 이미 자연이 아니라면 이는 인연과 같은 것이니, 말학(末學)들이 이를 잘못 해석할 것을 염려하여 질문한 것이다.

 

견성은 모든 경계에 따라 응화하여 분별없이 상주하는 불생멸체이므로 묘정명체(妙精明體)라 한다. 
수연(隨緣)하면서도 그 불변의 체(體)를 잃지 않으며, 불변하면서도 수연의 용(用)이 있다. 
자연 중에 인연이 있고, 인연 중에 자연이 있어서 서로 여의지 않는다.
외도들이 이야기 하는 “신아(神我)는 시방계에 편만(遍滿)한다.”와 여래께서 설하신 “각연(覺緣)은 시방계에 편만(遍滿)한다.”와 차이점이 무엇인지, 또 외도가 항상 주장하는 자연을 여래께서 능가산에서 인연법으로 이를 파하셨는데, 이 자연과 여래께서 설하신 인연은 상반된다. 
여래설 자연과 외도설 자연의 차이를 존자가 모르기 때문에 청문하고 있다. ㅡ한울림 

 

▷부처님께서 의혹을 풀어주심.

佛告阿難:“我今如是開示方便,眞實告汝,汝猶未悟,惑爲自然。阿難!若必自然,自須甄明有自然體。汝且觀此妙明見中,以何爲自?此見爲復以明爲自?以暗爲自?以空爲自?以塞爲自?阿難!若明爲自,應不見暗;若復以空爲自體者,應不見塞。如是乃至諸暗等相以爲自者,則於明時見性斷滅,云何見明?”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방편으로 설명하여 진실하게 너에게 알려주었거늘, 너는 오히려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자연인가 하고 의심을 하는것인가!

아난아,만약 틀림없이 자연이라고 한다면 ‘저절로의 자(自)’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어서 자연의 본체인 자연체(自然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너는 또 이것을 살펴보아라. 이 묘하고 밝은 견(見) 가운데에서 무엇을 자연(自然)이라 하겠는가!

이 견(見)이 밝음을 자(自)로 삼겠는가? 어둠의 암(暗)을 자(自)로 삼겠는가?

허공의 공(空)을 자(自)로 삼겠는가? 막힘의 색(塞)을 자(自)로 삼겠는가? 

아난아, 만약 밝음으로 자(自)로 삼는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의 공(空)을 자(自)로 삼는다면 당연히 막힘의 색(塞)을 볼 수 없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나아가서, 일체의 어두움 등의 상(相)을 자(自)로 삼는다면, 밝을 때는 보는 성품이 끊어져서 없어야 할것이니, 어떻게 밝음을 보겠는가?”

ㅡ자연이 아님을 해석한 것으로, 자연이란, 자체가 본래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체가 본래 그러하다면, 경계를 따라서 변하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 모두 경계를 따라 변하고 있으므로 자연이 아닌 것이다. 

명암통색(明暗通塞) 중에서 자연의 체가 무엇인가? 만약 밝음이 자연체라면 견성은 단지 밝음을 보는것만 합하고 ​
어둠을 보는 것과는 합하지 않는다. 
만일 공(空)이 자연체라면 견성은 단지 공만 볼 수 있지 막힌 곳은 볼 수 없다.

그러나 밝음이 오면 밝음을 보고 어둠을 오면 어둠을 본다. 즉 이 각성은 자연의 체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阿難言:“必此妙見性非自然。我今發明是因緣性,心猶未明,諮詢如來是義云何合因緣性?”

아난 존자가 말씀드렸다.

“이 묘하게 보는 성품의 견성(見性)이 분명 자연이 아니라면, 제가 지금 인연의 성품인 인연성(因緣性)으로 생긴다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만, 제 마음이 아직까지 명확하지 못하여서 여래께 여쭙니다.

이 뜻을 어찌하여야 인연의 성품인 인연성(因緣性)에 부합할 수 있겠습니까?”

ㅡ자연을 버리고 인연이라 계탁하는, 즉 하나를 버리고 다시 다른 하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佛言:“汝言因緣,吾復問汝。汝今同見,見性現前,此見爲復因明有見?因暗有見?因空有見?

因塞有見?阿難!若因明有,應不見暗;如因暗有,應不見明。如是乃至因空、因塞,同於明暗。

復次,阿難!此見又復緣明有見?緣暗有見?緣空有見?緣塞有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인연이라고 했으니 네게 묻겠다. 너는 지금 보(見)는 것으로 인(因)하여 보는 성품이 눈앞에 뚜렷이 나타나나니, 이 보(見)는 성품은 밝음으로 인해서 보(見)는 것이 있는 것인가? 어둠으로 인하여 보(見)는 것이 있는 것인가?

공(空)으로 인하여 보(見)는 것이 있는 것인가? 막힘의 색(塞)으로 인하여 보(見)는 것이 있는 것인가?

아난아, 만약 밝음으로 인하여 보(見)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어둠으로 인하여 보(見)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밝음을 볼 수 없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나아가 공(空)과 막힘의 색(塞)으로 인한 경우도 밝음과 어둠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다시 아난아, 이 보(見)는 것은 또 밝음을 연(緣)하여 보는 것이 있는 것인가?

어둠을 연(緣)하여 보는 것이 있는 것인가?

공(空)을 연(緣)해서 보(見)는 것이 있는가? 막힘의 색(塞)을 연(緣)해서 보(見)는 것이 있는가?

ㅡ인연(因緣)이 아님을 해석한 것으로, 물질을 가탁하는 것이 인(因)이고, 

물질을 따르는 것이 연(緣)이다. 이미 정해진 뜻이 없으므로 인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듭하여 보여주시다.

阿難!若緣空有,應不見塞;若緣塞有,應不見空。如是乃至緣明、緣暗,同於空塞。

아난아, 만약 공(空)을 연(緣)해서 보(見)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막힘을 보지 못해야(不見) 할 것이며,

만약 막힘의 색(塞)을 연(緣)을 연해서 보(見)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공(空)을 보지 못해야(不見) 할 것이니,

이와 같이 나아가, 밝음과 어둠을 연(緣)하는 경우도 공(空)과 색(塞)의 예와 같으니라.

 

當知如是精覺妙明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와 같이 정밀한 깨달음의 정각(精覺)의 묘한 밝음은 

 

①非因非緣,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며,

진심은 불변하는 것이므로 인연이 아니고, 수연(隨緣)하는 것이므로 자연도 아니다.

인도 연도 자연도 아니라는 것은 쌍차쌍파(雙遮雙破)로써,

자연에 집착하는 것은 수연(隨緣)을 이해하지 못함이요, 
인연에 집착함은 불변(不變)을 이해하지 못함이다. 

 

②亦非自然非不自然,자연(自然)도 아니고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며, 

ㅡ인연이 아닌 것도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님은 쌍조쌍립(雙照雙立)이다. 
견성이 만약 자연이라면 인연 중에는 견성이 없어야 하고, 
견성이 만약 인연이라면 자연 중에는 견성이 없어야 한다. 

 

③無非不非 인연과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고, 인연과 자연이 아니라는 것이 아닌 것도 없으며, 

ㅡ불변하지만 수연(隨緣)하고, 수연(隨緣)하지만 불변한다. 

 

④無是非是 인연과 자연이란 것도 없고, 인연과 자연이란 것이 아니란 것도 없는

ㅡ전체적으로 시(是)도 비(非)도 없다. 
인연의 용(用)을 여의면 자연의 체(體)를 드러낼 수 없고, 자연의 체(體)가 없이는 인연의 용(用)을 발휘할 수 없다. 
즉용즉체(卽用卽體)이며, 즉체즉용(卽體卽用)이다.
정각묘명(精覺妙明)은 인연에도 자연에도 속하지 않으며, 비인연(非因緣)에도 비자연(非自然)에도 속하지 않으며, 
일체상(一切相)을 여의고 일체법(一切法)에 즉(卽)한다.

 

離一切相卽一切法。

이러한 가운데에서 일체의 상(相)을 떠나서 일체의 법에 나아가느니라. 

ㅡ4 번에 걸쳐 인연(因緣)도 아니고 자연(自然)도 아니라 하였다. 

정밀한 깨달음의 정각(精覺)의 모든 망령된 마음으로 분별이 없으므로 묘한 밝음이고, 일체의 상을 떠났으므로 온갖 계량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아난 존자가 수연불변(隨緣不變)의 뜻을 몰라서 견성이 인연으로 있는 것이라는 미혹을 파하고 있다. 
특히 아난 존자는 인(因)하는 바가 있음도 연(緣)하는 바가 있음도 모두 의타기성임을 알지 못하는 데에서 나오는 착각이라는 것을 모른다. 

 

汝今云何於中措心,以諸世閒戲論名相而得分別?如以手掌撮摩虛空,只益自勞!虛空云何隨汝執捉?”

너는 지금 어느 가운데에 마음을 두고 세상에서 희론(戱論)과 명상(名相)으로 분별하려는 것인가?

이렇게 분별하는 것은 마치 손으로 허공을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 허공이 어떻게 너의 손에 잡히겠는가?”

ㅡ정밀한 깨달음의 정각(精覺)에 마음을 둘 수 없는 것이, 마치 허공을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난 존자가 미혹하여 인연이라 한 것은, 견성(見性)이 인연으로 생긴다고 오인하여서, 특히 인(因)하는 바와 연(緣)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 모두 의타기성(依他起成)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외경이 없으면 의타기성은 없지만, 견성은 불변의 체로서 외경을 따라 생멸하지 않는다. 
정각(精覺)이란 정순(精純)하고 잡(雜)스럽지 않으므로 불변(不變)이다. 
묘명(妙明)은 불가사의하면서 밝은 수연(隨緣)의 뜻이 있다. 
각성(覺性)은 수연불변(隨緣不變)하여 마주함도 끊고 정량(情量)도 초월함을 드러낸다. 
'종경록'에서 “因緣自然 皆是世間言論. 인연과 자연은 모두 세간의 언론이고
有無眞俗 悉是分別識心 진과 속이 있다 없다는 식심의 분별일 뿐
妙覺性中 不許有一絲毫妄念停留 묘각성 중에는 한 터럭 망념이 머물 수 없는데
云何汝等於覺性上 措心作意也.어찌 너희들은 각성에 마음을 두고  뜻을 조작하느냐?” 라 하였다.ㅡ한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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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5

 

阿難言:我今於此重閣講堂,遠恒河上觀日月,擧手所指縱目所觀,指皆是物無是見者。

世尊!如佛所說,況我有漏初學聲聞,乃至菩薩亦不能於萬物象前剖出精見,離一切物別有自性

아난 존자가 말씀드렸다.

제가 지금 층의 전각 강당에서 멀리 항하의 강까지와 위로는 해와 달을 보면서손으로 가리킬  있는 것과 눈이 가는 대로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 모두는 물체일 , 견(見)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는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루(有漏) 초학(初學)의 성문이라서 그렇다고심지어 보살들의  지혜로도 일체의 물상에서 일체의 물상 앞에서 정견(精見)을 쪼개어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니, 모든 물상을 떠나야만 별도로 성품의 자성(自性)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ㅡ만약 물상을 떠나서 따로 정밀하게 보는 정견이 있다면, 그 보는 주체가 도리어 물상과 같아서 실제로 그 본체가 있을 것이므로 가리켜 낼 수가 있겠지만, 비록 대성이라 할지라도 일체 물상 앞에서 물상을 제거해 버리고 하나의 물상이 아닌 정견을 가려 낸다면, 물상이 보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물상을 보건대 이는 본래 허망한 것이므로 가리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일체물별유자성(離一切物別有自性), 자성(自性)은 모든 존재가 지닌 변하지 않는 본질이며 공성(空性)이다. 주관의 마음인 견분(見分)과 객관의 마음인 상분(相分)도 내 마음이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을 보는 상태는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다. 주객을 떠나 있는 견(見)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참마음이고 진짜 '나'인 것이나, 견(見) 아닌 것이 없다.
물상과 허공은 견(見)이 아니다. 물상은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사물을 빠짐없이 골고루 보는 것이므로, 따라서 견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물상과 허공 자체는 견이 아니므로, 물상의 입장에서는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보는 입장에서는 견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佛言:如是,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변물무비견(辯物無非見)

佛復告阿難:“如汝所言,無有精見,離一切物別有自性,則汝所指是物之中無是見者。

今復告汝!汝與如來坐祇陁林更觀林苑,乃至日月種種象殊,必無見精受汝所指;汝又發明此諸物中何者非見?”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말대로 정견(精見)을 가려낼 수 없고 일체 물상을 떠나야만 별도로 정밀하게 보는 자성(自性) 있다면, 네가 가리키는  물상 안에는 보는 주체의 견정(見精)이 없어야 하리라. 

너에게 한   말하나니, 네가 지금 여래와 함께 앉아있는 기타림(祇陀林)에서, 다시 수풀과 동산에서부터 해와 달까지 살펴보아라. 가지가지의 다른 모습에서 네가 가리켜  수 있는 견정(見精)이 없다면, 

너는 다시  일체의 물상 가운데에서 무엇이 보는 것이 아닌지를 밝혀보아라.”

ㅡ만물은 상분(相分)으로, 견분(見分)을 떠나서는 상분이 드러나지 않는다. 여래께서는 아난 존자에게 상분 중에 견분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물상과 허공은 견(見)이 아니지만, 견이 빠짐없이 골고루 있어서, 우리가 사물을 본다. 따라서 견 아닌 것이 없다. 물상의 입장에서는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보는 입장에서는 견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阿難言:“我實遍見此祇陁林,不知是中何者非見?何以故?若樹非見,云何見樹?若樹卽見,復云何樹?如是乃至若空非見,云何爲空?若空卽見,復云何空?我又思惟是萬象中,微細發明無非見者。”

아난 존자가 말씀드렸다.

“저는 실재로  기타림을 두루 보고 있으나,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보는 것이 아닌지를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나무가 보는 것이 아닌 비견(非見)이라면 어떻게 나무를 본다고 하겠으며, 

만약 나무가 보는 주체라고 한다면, 어 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나아가 만약, 허공이 보는 주체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허공을 보겠으며, 

만약, 허공이 보는 주체라면 어찌 허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다시 사유(思惟)하여 보니,  일체의 물상 가운데에서 세밀하게 밝힌다면, 보는 주체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佛言:“如是,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

 

▷초학 망착(罔措)

茫然不知是義終始,一時惶悚失其所守。

그러자 대중 가운데 무학(無學)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초학의 제자들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아득하여서,  뜻의 나중과 처음을 몰라서 모두 놀라, 어느 뜻을 지켜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였다.

ㅡ부처님께서 대답하신 2가지의 이치가 정함이 없음을 의심한 까닭에 지키던 것을 잃은 듯하였다.

 

如來知其魂慮變慴,心生憐愍,安慰阿難及諸大衆:“諸善男子!無上法王是眞實語,如所如說不誑不妄,非末伽梨四種不死矯亂論議,汝諦思惟無忝哀慕。”

여래께서 그들의 넋이 변하여 놀란 아시고 가련하게 여기시어, 아난 존자와 대중들을 달래면서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이여, 무상법왕(無上法王, 부처님)의 말은 진리그대로 설하는 진실어(眞實語)이며, 속이지 않는 불광어(不誑語)이며, 거짓이 없는 불망어(不妄語)이니, 말가리(末伽黎, 외도) 등이 죽지 않는다고 교란하는  가지 희론인 사종불사교란논의(四種不死矯亂論議)가 아니니라. 

너희들은 자세히 사유하여 법을 원하는, 간절히 애모(哀慕)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라.”

 

ㅡ부처님은 아난존자가 적상심성(寂常心性)을 물은 후에 여러 가지 예를 들어 견성(見性)에 대하여 밝히셨다. 
①전진(前塵)은 스스로 어두워도 견성은 훼손되지 않음을 들어서 견성이 바로 마음임을 밝히셨고, 
②손은 스스로 쥐고 펴지만,  견성은 펴거나 쥐거나 하지 않음을 들어  견성은 움직이지 않음을 밝히셨고, 
③펴지고 오그라드는, 서축(舒縮)하는 것은 변하는 것이고, 서축(舒縮)하지 않는 것은 변하는 것이 아님을 들어 견성은 멸하지 않음을 밝히셨고, 
④신심(身心)은 모두 묘하게 비추고 밝고 상적(常寂)한 진심이 드러낸 물상임을 들어 견성은 잃지 않는 것임을 밝히셨고, 
⑤돌려보낼 수 있는 것은 아난이 아니고 돌려보낼 수 없는 것은 바로 아난임을 들어 견성은 돌려보낼 수 없음을 밝히셨으며,  
⑥사물은 차별이 있지만 견성은 차별이 없음을 들어 견성은 뒤섞이지 않음을 밝히셨다. ㅡ 한울림  

 

▷문수보살께서 밝혀 주시기를 청함

是時,文殊師利法王子愍諸四衆,在大衆中卽從座起,頂禮佛足合掌恭敬而白佛言:

“世尊!此諸大衆,不悟如來發明二種精見色空,是非是義。世尊!若此前緣色空等象,若是見者應有所指;若非見者應無所矚。而今不知是義所歸故有驚怖,非是疇昔善根輕尟,唯願如來大慈,發明此諸物象與此見精元是何物,於其中閒無是非是。”

그 때에 대중 가운데 있던 문수사리 법왕자(法王子)가 사부대중(四部大衆)을 가련하게 여기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합장하여 공손하게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대중은 여래께서 밝혀주신 정밀하고 밝게 보는 정명(精明)과 보는 근원의 견원(見元)과, 전연(前緣)의 물질(色)과 공(空)에 대하여 이것(是)인지, 이것이 아닌(非是)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 전연(前緣)의 물질의 형상인 색(色像)과 공(空像)이 보는 주체라면, 마땅히 손으로 가리킬 대상이 있어야 할 것이며, 

만약 보는 주체가 아니라면, 당연히 볼 대상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의 대중들은 지금 이 이치가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놀라고 있을 뿐으로, 옛날부터 바른 근성의 선근(善根)이 모자란 탓은 아닙니다. 

부디 여래께서는 대자(大慈)를 베푸셔서,  일체의 물상(物象)과 보는 정기의 견정(精見)은 본래 무엇이라서,  중간에 그렇다고 하는 시(是)라고도 할  없고, 그렇지 않다는 비시(非是)라고도   없는지에 대하여 밝혀주시옵소서.”

ㅡ대중이 불즉불리(不卽不離)의 묘리(妙理)를 몰라서 망연해 하자 문수보살이 대중을 대신해서 청문한 것이다.
색(色)과 공(空)이 견성이라면, 만상을 마주하는 능견(能見)의 견성을 가려낼 수 있어야 하고, 
만약 색공이 견성이 아니라면 만상을 마주해도 보여지는 물건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뜻을 모른다. 
이승보살(二乘菩薩)은 미세한 법집(法執)을 파하지 못하고고 상(相)을 여의어 견정을 깨달았으므로, 불즉불리(不卽不離)의 뜻을 모르고, 견분(見分)은 내분(內分)에 속하여 볼 수 없는데 법성(法性)에 들지 못한 사람은 외상(外相)만 파하고 내견(內見)을 볼 수 없어서 이 이치를 모르는 것이다. 물상과 견정이 마주할 때 그 중간에 견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밝혀달라고 청문한 대목이다.ㅡ 한울림 

 

견정(見精)과 색공(色空)이 같은 것의 시(是)인가? 다른 것의 비시(非是)인가?

견정(안근/主)이 색공(색진/客)을 보고 안식이 생긴다. 그러면 견정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면 견정이 없는 것인가? 견정이 없으면 색공이 보일 리가 없다.

그러면 견정이 있는 것인가? '있다'고 한다면 견정을 찾아낼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것이 견정인지 알 수가 없으니, 따라서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없다'고 한다면 색공을 볼 수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볼 수 있으니 견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견정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견정과 색공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사물 자체는 견이 아니지만,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것은 견(見)이 빠짐없이 골고루 있기 때문이다.ㅡ향적법진

 

▷본체는 하나의 동체(同體)라는 것을 보이시다.

佛告文殊及諸大衆:“十方如來及大菩薩,於其自住三摩地中,見與見緣幷所想相,如虛空花本無所有。

此見及緣元是菩提妙淨明體,云何於中有是非是?文殊!吾今問汝,如汝文殊,更有文殊是文殊者?爲無文殊?”

부처님께서 문수 보살과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시방의 여래와 뛰어난보살들이 스스로 머무시는, 자주삼마지(自住三摩地) 가운데에서의 견(見)과 견의 경계(대상)의 견연(見緣)과 그리고 생각하는 모습의 상상(想相)들은 마치 허공의 꽃과 같은 것으로, 본래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無所有)이니라. 

견(見)과 견의 경계(대상)의 견연(見緣)은 본래 보리의 묘하고 맑고 밝은 본체인 보리묘정명체(菩提妙淨明體)이거늘, 

어찌 이러한 가운데에서  '이것(是)이다 이것이(非是) 아니다'라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문수여, 너에게 묻겠으니,

 그대로가 문수인데, 다시 문수가 있다고 하여서 이것은 문수이다, 문수가 아니다라고   있겠는가?”

견(見)이란 근(根)이고, 견연은 경계(境, 대상)이고, 생각하는 모습의 상상(想相)은 식(識)이다. 근경식, 3가지가 만법을 다 포섭하고 있어서, 모든 인연법이 원래 하나의 보각이므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 없음을 안다면, 모든 의심이 가시는 것이다. 즉 모양(相)을 보는 것이 망령된 것이므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 없고, 성품을 보면 본래가 참된 것이므로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자주삼마지(自住三摩地), 자성(自性)의 수능엄의 바른 선정인 수능정정(首楞正定)이다. 이 선정은 권교(權敎)와 소승의 출입이 있는 선정과 같지 않은 것이라서 자주(自住)라 하였다. 즉, 자주본지풍광(自住本地風光)은 닦아서 조작되는 것이 아니다.

*여허공화본무소유(如虛空花本無所有), 허공의 꽃과 같은 것으로, 본래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니라.;

부처님과 원돈(圓頓)보살은 변계소집(徧計所執)된 육식(六識)은 본래 공(空)이고 대상에 의존하는 근진(根塵)은 환(幻)과 같아서, 마치 눈병 걸린 사람이 보는 허공의 아른거리는 꽃과 같으며, 연(緣)에서 나와 그 본성(本性)이 없는 것니 본래 있지 않음과 같다는 것이다.

*운하어중유시비시(云何於中有是非是),능견(能見)인 견분(見分)과 연하는 상분(相分)을 요달(了達)하는 당체(當體)가 바로 진(眞)이다. 근(根)은 능연(能緣)이고 진(塵)은 소연(所緣)이며 식(識)은 연(緣)으로 생긴다.

*원시보리묘정명체(元是菩提妙淨明體), 원래 보리의 묘하고 맑고 밝은 본체인 보리묘정명체이다;

‘원(元)’이란 보리는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묘(妙)란 법신덕(法身德)으로 유(有)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라는 말이며,

정(淨)이란 해탈덕(解脫德)으로 처염불변(處染不変)이라는 말이고,

명(明)이란 반야덕(般若德)으로 영광독요(靈光獨耀)라는 말이다.

즉 보리란 이 삼덕(三德)을 깊이 간직한 체(體)로서 시비(是非)를 초월한 것이다.-능엄경강의

 

*자주삼마지(自住三摩地)는 진견(眞見)과 전상(轉相)인 견분(見分)이 서로 깊게 연이 된다. 
이렇게 망립(妄立)된 것이 망능(妄能)을 일으킨다. 
능견의 견분과 외진(外塵)인 상분(相分)이 서로 연(緣)하는 것에 비록 깊고 얕음이 있을지라도 모두가 허망(虛妄)한 상상(想相)인 것으로, 견정과 견연의 근본을 끝까지 찾아보면 모두가 묘정명체에서 발원한 것이다. 
불보살님께서 삼매정정(三昧正定)에 머물며, 제8식을 돌려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이루어서 8식이란 이름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8식 중의 견분을 논하겠는가? 
견분이 이미 없으니 상분이 성립될 수 없다. 견상의 2분은 원래 묘정명체(妙精明體)인 진심으로 시시비비(是是非非)의 희론법이 아닌 것이다. ㅡ한울림

 

“如是,世尊!我眞文殊,無是文殊。何以故?若有是者,則二文殊。然我今日非無文殊,於中實無是非二相。”

문수 보살이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가 실제 문수인데, '이것이 문수이다'라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것(是)이 '문수이다'라고 한다면, 바로  개의 문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저는 없는 문수가 아니오니, 가운데에서는 참으로 '이것(是)이다 이것이(非是) 아니다'라 이상(二相) 있을  없습니다.”

ㅡ일진법계(一眞法界)는 본래 시(是)와 비(非)의 두 상이 없음을 밝힌 것으로, 유(有)와 무(無), 시(是)와 비(非)의 이상(二相)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합현(合顯)

佛言:“此見妙明與諸空塵亦復如是,本是妙明無上菩提淨圓眞心,妄爲色空及與聞見,如第二月,誰爲是月?又誰非月?文殊!但一月眞,中閒自無是月非月。是以汝今觀見與塵,種種發明名爲妄想,不能於中出是非是,由是精眞妙覺明性,故能令汝出指非指。”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는 견(見)의 미묘한 밝음의 묘명(妙明)과 모든 공(空)과 육진 경계(色)도 역시 이와 같이 본래 묘하고 밝은 무상보리의 맑고 원만한 참 마음의 보리정원진심(菩提淨圓眞心)이니라.

이 참 마음이 허망하게 물체(色)와 공(空)과 보고(見)과 듣는 문(聞)으로 변하여서, 마치 제이의 달(第二月)과 같이 되었으니, 어느 것이 달이고, 어느 것이 달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문수여, 단지 하나의 달만이 참된 달이라 한다면, 그 중간에 '달이다 달이 아니다'라고  까닭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보는 주체인 견(見)과 대상 경계인 진(塵)을 살펴서 가지가지로 밝히는 것은 허망한 망상(妄想)이라 이름하나니, 그 가운데에서  '이것(是)이다 이것이(非是) 아니다'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진실하고 정밀하고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을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너로 하여금 '가리켜 밝히고, 가리켜 밝힐 수 없다'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ㅡ이 문답 가운데에서 각각 셋으로 

질문의 3 가지는 '네가 문수인 것과 같이'와, '다시 문수라고 할 문수가 있는가?'와, '그러한 문수가 없는가'의 셋이고, 

그 3 가지의 대답은 '제가 참 문수 입니다'라고 한 것은 보리정명체를 성립시킨 것이고, 

'그러한 문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것은 공과 색이 곧 견임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나 현재 저는 없는 문수가 아니오니'라고 한 것은 공과 색이 견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보는 작용의 미묘한 밝음의 묘명(妙明), 견성은 바로 진심으로, 무시이래로 망상과 혼재해 있는 것이나, 망상이 견성의 광명을 영원히 차폐할 수 없는 것이라서 묘명이라 하는 것이다.

*본래 묘하고 밝은 본시묘명(本是妙明), 원래 그러한 것으로, 수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보리의 맑고 원만한 참 마음의 보리정원진심(菩提淨圓眞心), 무시이래로 진심은 천변만화하는 망상 중에 있으나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맑은 정(淨)’이라 하고, 이 진심이 변화하지는 않지만 천변만화하는 망상을 따라 끝없이 많은 작용을 나타내는 까닭에 원만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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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4

 

▷견성(見性)은 대소(大小), 내외(內外), 서축(舒縮), 명암(明暗), 통하고 막힘의 통색(通塞) 등에 있지 않다. 

佛告阿難:一切世閒大小內外諸所事業各屬前塵,不應說言見有舒縮。譬如方器,中見方空,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세간의 크거나 작다는 대소(大小)나, 안이나 밖이라는 내외(內外)의 여러가지 작용인 사업(事業) 각각의 앞의 경계인 전진(前塵)에 달려 있을 뿐이니보는 성품이 펴지고 움츠려드는, 서축(舒縮)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느니라. 

비유하자면, 모난 그릇 속에서 모난 허공을 보는  같은 것이다.

ㅡ일체세간은 중생과 기계(器界), 대소(大小)와 내외(內外)는 한 세계, 한 집안 등이며,  여러가지 사업은 펼쳐지고 움츠러들며, 좁고 단절되는 등의 유(類)를 말한다. 이것은 만법이 다 전진(前塵)에 속하여서 나의 영각(靈覺)과는 관계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진은 크고 작음이 있지만 보는 주체는 서축(舒縮)하지 않다는 것이다. 

 

吾復問汝,此方器中所見方空,爲復定方?爲不定方?若定方者,別安圓器空應不圓;若不定者,在方器中應無方空。汝言不知斯義所在,義性如是云何爲在。

내가 다시 너에게 묻겠으니, 모난 그릇에서 보는 모난 허공은 모나게 정해진 정방(定方) 이겠는가?

모나게 정해지지 않은 부정방(不定方) 이겠는가?

만약 정해진 모남의 정방(定方)이라면, 둥근 그릇에 담을지라도  허공은 반드시 둥글지 않아야 할 것이며,

만약 정해진 모남이 아닌 부정방(不定方)이라면, 모난 그릇 속에 있을지라도 당연히 모난 허공이 없어야 할 것이

네가 말한 ‘그 뜻이 있는 곳을 모른다 뜻의 내용인 의성(義性) 이러한 것이니,

능히 보는 견성(見性)이 큰 곳에 있다고 하겠는가?  
작은 곳에 있다고 하겠는가?  

그릇은 전진(前塵)을 비유한 것이고, 허공은 보는 주체를 비유한 것이다. 

견성(見性)은, 만유의 본체로써 변함이 없는 것이지만 인연에 의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것으로, 일체가 평등하고 불생불멸하여 변화가 없는, 수연불변(隨緣不變)이며,  
연(緣)을 따라 일(事)을 일으키는 동작이 있는 불변(不變)의 진여(眞如)는 그 자체가 변치 않는 것이지만, 외연(外緣)을 만나면 만유를 내는 불변수연(不變隨緣)으로,
이러한 수연불변(隨緣不變)과  불변수연(不變隨緣)의 두 가지 공능이 있음을 밝혔다

 

阿難!若復欲令入無方圓,但除器方空體無方,不應說言更除虛空方相所在。

아난아만약 둥글고 모남이 없는 무방원(無方圓)으 들어가게 하려면단지 모난 그릇만 없애 될 것이지만,

허공 자체는 모남이 없으니 이상 허공에 있는 모남 없애 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하나니,

 

▷생각을 버림

若如汝問,入室之時縮見令小,仰觀日時汝豈挽見齊於日面?若築牆宇能夾見斷,穿爲小竇寧無竇迹?是義不然。

네가 질문한 대로, 방에 들어갔을  보는 성품이 움츠러져 작아지는 것이라면

고개를 들어 해를 바라  때에는, 그 보는 성품을 늘려서 해에 맞추어야 할 것이다.

만일 담장이나 지붕에 끼어서 보는 작용이 끊어진다면

벽에 작은 구멍을 뚫었을 때에는 어찌하여 이은 흔적이 없는 것인가?

네가 말한 뜻은 그렇지 않느니라.

ㅡ마음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다.

 

ㅡ결론지어 나타내다.

一切衆生從無始來迷己爲物,失於本心爲物所轉,故於是中觀大觀小;

일체 중생들이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스스로 물체로 미혹하여, 본래의 본신(本心) 잃고 물체를 따라 굴러 온 까닭에, 것을 보고 작은 것을 보는 것이니라

ㅡ일체 중생들이 무시로부터 자신을 모르고 불질을 자기라고 여겨서, 즉 마음 속의 의식이 마치 밖의 물질처럼 나타나는 자신의 마음을 밖의 물질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밖에 있는 의식의 대상이 되는 물질은 오직 마음 속의 의식이 나타난 것이다'라고 무성섭론(無性섭攝論)에서 말하였다. 그러나 인식하는 성품은 허망한 것이고 오직 하나의 마음일 뿐이니, 이것이 참다운 자기(自己)이다. 

 

마음은 상주진심(常住眞心)이고청정해서 모양이 없고 공적해서 허공과 같은 성정명체(性淨明體)이다.

그릇() 육진경계이고허공()   아는 성품인 견성(見性) 비유하고 있다.

허공이 네모 또는 둥근 모양이 없듯이 견성도 모양이 없다.

허공은 모양이 없으므로 축소되거나 늘어나지 않는다

아난은 (眼根) 견정(見精)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 크기를 말하고 있다

눈은 카메라 렌즈와 같은 기관일 뿐이고보고 아는 것은 마음이다.

따라서 견성(見性) 크기가 없으나견정(見精) 시력과 관계가 있다.

인간의 눈에는 380nm~780nm 사이의 가시광선만 보인다고 한다. 향적법진

 

若能轉物則同如來,

만약, 물체를 굴릴  있다면여래와 같아서, 

ㅡ약능전즉동여래(若能轉物則同如來), 물체를 굴리는 전물(轉物)의 공은 반드시 묘지(妙智)에 의지하여서 원만한 이치​를 깨닫고, 법집(法執)을 파하고, 마음 밖에 한 법(法)도 없는, 법법(法法)이 유심(唯心)이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는 것이다. 
만물을 자기로 돌려 천지와 내가 동근(同根)으로, 만물이 모두 나와 한 몸임을 아는 것이 사법계(事法界)에서 깨달아, 이법계(理法界)로 들어가는 것이다.

 

身心圓明不動道場,於一毛端遍能含受十方國土。

신심(身心) 뚜렷이 밝고 원만하여서, 부동(不動)의 도량에서,

하나의 털 속에 시방국토를 두루 머금어 들일  있느니라.”

ㅡ이것은 체자재(體自在)를 밝힌 것으로,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에 속한다. 
이미 만물을 운전하여서 몸은 법성신(法性身)으로 두루 비추고 임하며, 마음은 묘명심(妙明心)으로 영명통철(靈明洞徹)하여서 만물과 신심이 본래 하나의 체(體)이니, 즉 신심(身心)이 바로 법계(法界)로써, 부동(不動)의 도량(道埸)인 것이다.

  

*견성이 사각형에 있으면 사각형이고, 원형에 있으면 원형이 되는 이것이 불변수연(不變隨緣)의 뜻이다.
사각형의 안도 허공이고 원형의 안도 허공이다. 사각과 원은 다르지만 허공은 다르지 않은 이것이 수연불변(隨緣不變)의 뜻이다.
허공은 원래 방원이 없으나 용기(用器)를 따라 방원(方圓)이 있어지는 것이니, 용기를 없애면 허공은 본래의 허공으로 돌아간다. 방에 들어갈 때 방이 작다고 할 수 있지만, 견성이 작다고 할 수 없으나, 일체중생이 무시래(無始來)로 본래 광대하고 원명하고 묘한 마음을 모르고, 맑음에 따라 견정(見精)을 이루고 색을 취하여서 근(根)을 이루어 분주한 것이니,
이렇게 하여서 안으로는 부진근(浮塵根)에 막히고, 밖으로는 기계(器界)에 갇힌다.
업식(業識)을 따라 오음과 4대(四大)가 화합한 것이 분단신(分段身)이다.
묘하고 밝은 진성(眞性)은 갇히고 나뉘어서 안으로 몸이 되고 밖으로는 경계가 된다.
만약 진성이 법계에 변만(遍滿)함을 깨달으면 안으로의 심신에서 해탈하고 밖으로의 세계에 꺼둘리지 않는다. 
묘성은 원통(圓通)하고 육근이 호용(互用)하고, 부진(浮塵)과 세계(世界)는 하나의 법계를 이룬다. 
몸은 법성신(法性身)이고 원명(圓明)한 앎은 무상지각(無上知覺)이다.
부동도량(不動道場)인 몸은 시방에 편재(遍在)하고, 한 터럭 끝에 무변(無邊)의 국토를 머금고 있으나,
일체중생은 자기의 참된 견성을 모르고 밖으로 대소방원(大小方圓)에 분망할 뿐이다.ㅡ 한울림

 

▷보는 주체가 대상 경계와 함께 묘체(妙體)이다. 

阿難白佛言:世尊!若此見精必我妙性,令此妙性現在我前,見必我眞,我今身心復是何物?而今身心分別有實,彼見無別分辨我身,若實我心令我今見,見性實我,而身非我,何殊如來先所難言:‘物能見我?’唯垂大慈開發未悟。”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만약  보는 정기의 견정(見精)이 틀림없는 저의 미묘한 성품의 묘성(妙性)이라면 묘성(妙性, 견정) 지금 바로  앞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앞에 있는 보는 정기(견정)가 분명한 저의 진실한 성품이라면지금의  몸과 마음은 어떠한 것입니까?

지금  몸과 마음은 분별하는 실체가 있는 실유(有實)이나

저의 견정(見精)은 따로이  몸을 구분하여 가려내지 못합니다.

만약, 참으로 앞에 있는 견정(見精)이  마음이라면저로 하여금 지금 보게 하셨으니

견성(見性) 실제로 '나'이나 몸은 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래께서  전에 ‘물체도 나를   있으리라 힐난하신 말씀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부디 대자(大慈)로써 깨닫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옵시소서.”

 

ㅡ묘성은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라서 몸 과 마음과는 다른 것이다. '지금 이 몸과 마음은 분별하는 실체가 있는 실유(有實)이다'라고 한 것은, 마음은 분별함이 있겠지만 보는 주체는 분별함이 없어서 몸과는 분리되어 다른 물상을 이루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보는 주체가 물상에 있고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물상이 나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한 것이니, 이는 미혹한 마음으로 깨닫기 어렵다는 말이다. 

 

견성실아(見性實我), 이신비아(而身非我),

견성(見性)이 진실로 '나'라고 한다면, 몸은 내가 아니고 하나의 물건이 된다.

물능견아(物能見我), 견성(見性)이 만약 물건이라면, 물건은 마땅히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나 물건은 볼 수가 없다.
견(見)은 대상이 아니다
의식(意識, 마음)은 항상 주객(主客)으로 나누어지고, 주관이 객관을 본다.

주관의 마음인 견분(見分), 견식(見識), 주(主) → 객관의 마음인 상분(相分), 상식(相識), 객(客)이니,

따라서 보는 것도 마음이고, 보이는 것도 마음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는 상태는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니, 마음이 주객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구경각(究竟覺)의 상태를 말할 때, 각심초기(覺心初起) 심무초상(心無初相)을 말한다.

마음에서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을 알고 보니, 마음에는 처음의 모습이 없더라.

만약 처음의 초상(初相)이 있다면, 견분(주)이 상분(객)을 보듯이, 보는 마음과 보이는 마음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구경각은 주객이 없는 상태라야 한다.
참선요지(參禪要旨)에서는 오온(五蘊)이 공(空)함을 보는 것을 각조(覺照)라고 한다.

마음이 공(空)을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두 가지의 경계가 사라진다. 보는 마음과 대상인 공성이 하나가 되고, 이를 분명하게 항상 아는 마음인 요료상지(了了常知)라고 한다. 이 앎은 주객이 없는 상태, 이것이 진짜 '나'이다.ㅡ향적법진

 

▷비실(非實)임을 밝히시다.

佛告阿難:今汝所言:見在汝前是義非實。若實汝前,汝實見者,則此見精旣有方所非無指示。且今與汝坐祇陁林,遍觀林渠及與殿堂,上至日月前對恒河,汝今於我師子座前,擧手指陳是種種相,陰者是林,明者是日,㝵者是壁,通者是空,如是乃至草樹纖毫大小雖殊,但可有形無不指著。若必有見現在汝前,汝應以手礭實指陳何者是見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지금 네가 말한 견정(見精)이  앞에 있다고  뜻은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참으로  앞에 있어서 네가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이라면, 그 견정(見精)은 장소가 있는 것일테이니 장소를 가리켜 보일  있으리라

나는 지금 너와 함께 기타림(祇陀林) 앉아서, 수풀과 냇물과 법당과 위에 있는 해와 달과 앞에 마주한 항하 강을 두루 보고 있으니너는 이제  사자좌(師子座앞에서 손을 들어  가지가지 모양을 가리켜 보아라

그늘진 것은 숲이고, 밝은 것은 해이며막힌 것은 벽이고, 통한 것은 허공이다

이렇게 풀과 나무와 티끌과 먼지에 이르기까지 비록 크고 작음은 다를지라도모양이  만한 것은 가리키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

만약, 견정(見精)이 분명히  앞에 있다면, 너는 손으로 확실하게 가리켜 보아라어느 것이 견정(見精)인가?

ㅡ아난 존자가 견성(見性)과 신심(身心)이 다른 각체(各體)라고, 잘못되게 집착하여서 견성이 앞에 있다고 의심하는 것에 대하여, 신심(身心)과 견성(見性)이 둘이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


阿難!當知若空是見,旣已成見,何者是空?若物是見,旣已是見,何者爲物?汝可微細披剝萬象,析出精明淨妙見元,指陳示我,同彼諸物分明無惑。

아난아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만약 허공을 견정(見精)이 한다면, 허공은 이미 견정(見精)이 되었거늘어느 것을 허공이라고 하겠느냐? 

만약 물상을 견정(見精)이 한다면, 물상은 이미 견정(見精)이 되었거늘어느 것을 물상이라고 하겠느냐?

너는 세밀하게 만상(萬象) 헤치고 벗겨서밝고 깨끗하고 정밀하고 미묘한 보는 작용의 근원을 쪼개고 골라내어 일체의 물상들을 분명하게 지적하여 보여서 저 물상과 같이 분명하게 의혹이 없도록.”

ㅡ처음에 견정(見精)을→ 다음에 보는 근원의 견원(見元)을→ 나중에 정밀하게 보는 주체인 정견(精見)을 말하였다  

이것은 모는 주체가 미묘하고 정밀하게 밝은 정명심(精明心)에 근본하였으므로 총합하여 '정(精)'이라 하였으며, 마음으로부터 처음 나오는 것이므로 보는 근원인 '견원(見元)'이라 하시고, 작용에 의한 응용본체(應用本體)를 가르키는 것이므로 보는 정기의 '견정(見精)'이라 하였으며, 본체에 의하여 쓰임을 가리켜서 정밀하게 보는 '정견(精見)'이라 한 것이다.

 

만상(萬象)을 풀어헤쳐서 분석하여서 이 정명정묘(精明淨妙)한 견원(見元)을 골라내어 보아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靜•明•淨•妙은 견원의 모습은, 즉 본각(本覺)이 갖추고 있는 성(性)의 공덕상(功德相)이다. 
정(精)은 만상이 혼탁하게 할 수 없음이고, 
명(明)은 덮을 수 없음이며, 
정(淨)은 오염시킬 수 없음이고, 
묘(妙)는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므로 견원(見元)이라 하는 것이다. 
견원(見元)을 견정(見精), 견성(見性)이라고도 하며, 중생의 식정원명(識精元明)과 같은,

두 근본 중에 진본(眞本)은 물상(物象)과 동체(同体)인 것이다.ㅡ한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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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3

 

▷모든 물상에 임하여서 진성을 결택(決擇)하다

阿難言:“我雖識此見性無還,云何得知是我眞性?”

아난 존자가 말씀드렸다.

“제가 비록  보는 성품의 견성(見性)은 돌려보낼 곳이 없다는 것을 알지라도, 

어떻게 하여  견성(見性) 저의  성품인 진성(眞性)이라는 것을   있겠습니까?”

ㅡ비록 견정(見精)을 돌려보낼 곳이 없음을 알면서도 현재 사물과 섞여 있으므로 밝게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아난 존자는 아직 반연심(攀緣心)을 버리지 못한 상태로써, 비록 견성이 돌아갈 곳이 없음을 알지만, 외경과 분별할 수 없어서 어느 것이 망경(妄境)이고 어느 것이 진성(眞性)인가를 모르는 것이다. 


佛告阿難:“吾今問汝,今汝未得無漏淸淨,承佛神力,見於初禪得無障㝵;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에게 묻겠으니, 너는 아직 번뇌가 없는 청정한 경지인 무루청정(無漏淸淨)을 얻지 못하였으나, 

나의 신통력인 신력(神力)으로 초선천(初禪天)을 걸림 없이 보았느니라.

ㅡ아난 존자는  아라한의 지위인 초과(初果)를 얻어서 견혹을 끊고 장애(障礙)에서 벗어났으나, 아직 무루청정(無漏淸靜)은 얻지 못하였다. 

 

而阿那律見閻浮提,如觀掌中菴摩羅菓;諸菩薩等見百千界;十方如來窮盡微塵淸淨國土無所不矚。衆生洞視不過分寸。

아나률(阿那律, 아니룻다, 십대제자이며 천안제일)은 염부제(閻浮提, 사바세계)를 손안의 암마라(菴摩羅, 망고) 열매처럼 볼 수 있으며, 보살들은  천의 세계를 볼 수 있으며, 

시방의 여래는 미진(微塵)과 같이 많은 청정국토를 남김없이    있으나,

중생은 아무리 환하게 본다고 할지라도 분촌(分寸, 한 치, 우리가 사는 세계)에 지나지 않느니라.

아나률(阿那律, Aniruddha, 아니룻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의 한 사람이며, 부처님의 6촌 동생으로서 잠이 너무 많아서 부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7일 동안 무리하게 자지 않아서 두 눈을 잃었으나 후에 수행하여 천안통(天眼通)을 이루어 천안제일이 되었다.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 성으로 돌아오시고, 난타(난다), 라훌(라후라)를 시작으로 석가족의 청년 5백 명이 출가하게 되었는데, 아나률은 형을 대신해서 출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층 계급인 수드라 출신으로 이발사였던 우파리가 왕자인 아나률보다 먼저 출가했는데, "먼저 제자가 된 사람에게 예경해야 한다"는 부처님 교단의 의례에 따라 아나률 등 왕자들이 우파리에 예배하였고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잘해냈다. 석가족의 교만한 마음을 멸하였도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아나률은 부처님의 입멸에 통곡하며 비탄하는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고, 아난 존자에게 지시해서 쿠시나가라의 맛라(Mahla)족에게 부처님의 장의 준비를 시켰다고도 설해진다.

 

*여기에서는 견정(見精)이 보는 한계를 반연(攀緣)하는 경계를 말하고 있다. 
초선천(初禪天), 색계의 탐욕을 벗어난 천계을 보는 것은 유학인(有學人)의 혜안(慧眼)이 볼 수 있고, 
염부제를 보는 것은 무학인(無學人, 벽지, )의 천안(天眼)을 닦아서 대천세게를 볼 수 있고, 
백천계(百千界)를 보는 것은 보살의 법안(法眼)의 견량(見量)이고, 
미진국(微塵國)을 보는 것은 여래의 불안(佛眼)의 견량(見量)이고,   
종이 한 장이 막힌 것도 볼 수 없는 분촌(分寸)만을 보는 것은 중생의 육안(肉眼)의 견량(見量)이다. 

 

阿難!且吾與汝觀四天王所住宮殿,中閒遍覽水陸空行,雖有昏明種種形像,無非前塵分別留㝵,汝應於此分別自他。今吾將汝擇於見中,誰是我體?誰爲物象?

아난아, 내가 너와 함께 사천왕(四天王, 수미산의 제석천을 호위하는 동서남북의 4 호법신)이 머무는 궁전을 보고, 중간에 물과 육지와 허공을 다니는 것들을 두루  보았을 때,

비록 어둡고 밝은 갖가지의 형상이 있었으나, 그러한 것들은 눈 앞의 대상으로서, 구분되고 걸리고 장애되는 것이 없었으니, 너는 거기에서 나(自)와 내가 아닌 타(他)를 분별해 보아라. 

나는 지금 너에게 보는 작용 가운데 무엇이 나(自)의 자체인, 아체(我體)이고,

무엇이 다른(他) 것 물상인지를 가려내리라.

 

사천왕(四天王)은 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라고도 하며,

비파를 들고 있으며, 동쪽을 수호하는 동방지국천왕은 황금타(黃金埵)에 살며,   
검을 들고 있으며, 남쪽을 수호하는 남방증장천왕은 유리타(琉璃埵)에 살며, 
용과 영의주를 들고 있으며, 서쪽을 수호하는 서방광목천왕은 백은타(白銀埵)에 살며, 
왼손에는 우산 오른 손에는 보탑을 들고 있으며, 북쪽을 수호하는 북방다문천왕은 수정타(水晶埵)에 산다. 

 

▷즉물결택(卽物決擇)

阿難!極汝見源,從日月宮,是物非汝;至七金山周遍諦觀,雖種種光亦物非汝;

漸漸更觀雲騰、鳥飛、風動塵起、樹木山川、草芥人畜,咸物非汝。

아난아, 너의 보는 주인공의 근원을 끝까지 추구해 보아라! 일월궁(日月宮)까지도 이것은 물체(他, 물상)일  네(自)가 아니니라. 

또한 칠금산(七金山, 금산)에 이르기까지도 두루 살펴보아라. 비록 갖가지로 광채가 다를 뿐, 역시 물체(他, 물상)일  네(自)가 아니니라. 

다시 이렇게 점점 나아가, 뜬구름과 나는 새들과 부는 바람과 날리는 먼지와 숲과 나무와 산과 내와 풀과 지푸라기와 사람과 짐승들을 보아라. 모두  물체(他, 물상)일  네(自)가 아니니라.

일월궁의 아래에 지쌍산(持雙山), 지축산(持軸山), 담목산(擔木山), 선견산(善見山), 마이산(馬耳山), 상비산(象鼻山), 어취산(魚嘴山)의 7개의 산이 있는데, 모두 금으로 되었며 수미산을 둘러싸고 있고, 그 사이에 향수해가 있다.

 

▷견성을 바로 보이시다.

阿難!是諸近遠諸有物性,雖復差殊,同汝見精淸淨所矚,則諸物類自有差別,見性無殊,此精妙明誠汝見性。

아난아,  멀고 가까운 모든 물체의 물성(物性)이 비록 여러가지로 다를지라도, 너의 보는 견정(見精)이 한결같이(同) 청정하게 보는 것이니라. 

여러 종류의 물체에 자연히 스스로의 차별이 있을지라도, 너의 보는 성품은 차별이 없으니,  보는 견정(見精) 묘한 밝음이 진실한 너의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이니라.

진성(眞性)이 추하고 흐린 것을 보아도 섞이지 않는 것을 '정(精)'이라 하고, 일체의 다른 것들을 모두 거치면서도 달라지지 않는 것을 '묘(妙)'라 하며, 멀거나 가깝거나 한 가지로 보는 것을 '명(明)'이라 한다. 

현량(現量) 중의 견정(見精)을 밝힌 것으로, 보고 분별하는 것은 모두 망심(妄心)이고,

보고도 분별하지 않는 것이 견정(見精)이다. 
원근의 크고 작은 물상은 다르지만, 견성은 차별이 없으며,
분별하는 것을 되돌아 보고 보이는 물상과 섞이지 않는 것이 견정이다. 
견성(見性)은 법계에 두루 주변(周徧)한 것으로, 거울이 항상 밝게 비추는 것에 비유된다.
 

▷보는 것은 물상이 아님을 밝힘 - 사약장(四若章)

①若見是物,則汝亦可見吾之見?

만약 보는 주체가 곧 물(物)이라면, 너 또하 내가 보는 주체를 볼 수 있어야 하리라.

ㅡ물상이라면 당연히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앞에서 '모두가 물상이지 네가 아니다'라고 한 것을 이어서 거듭 밝히는 것이다.

 

②若同見者名爲見吾;吾不見時,何不見吾不見之處?

만약 함께 보는 동견(同見)을 나의 보는 작용(見)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보지 못하는 불견(不見)일 때에는 어찌하여 내가 보지 못하는 곳을 너는 보지 못하는 것인가?

ㅡ'함께 본다는 동견(同見)'은 물상에 의한 자취이고, '보지 못한다'는 것은 물상에서 벗어난 실체(體)이다. 만약 나와 네가 같이 한 물상을 보는, 이것을 나의 보는 주체를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다만 자취일 뿐이니, 마땅히 내가 물상을 벗어나서 보지 못할 때에는 그 실체가 어디에 있는가? 이미 없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응당 이것은 물상이 아닌 것이다.


③若見不見,自然非彼不見之相;

만약 보지 못하는 견불(見不)을 본다고 한다면, 자연 저것은 보지 못할 불견(不見)의 상(相)이 아닌 것이니라.

ㅡ비록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능히 본다고 한다면, 마침내 '자연히 보지 못할 상이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대개 볼 수 없는 상을 보는 것으로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보지 않는 곳을 아난이 본다면 그것은 보이는 물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견성은 보이는 물상이 아니다. 나의 마음을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과 같이, 아난의 견성을 부처님이 볼 수 없고, 부처님의 견성을 아난이 볼 수 없다. 그 자리는 물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아난도 물상은 볼 수 있지만, 물상을 보는 주체인 견성은 보지 못한다. 견성은 마음이지 물상이 아니다. 물상은 서로가 볼 수 있으나 견성 그 자체는 볼 수 있는 물상이 아니므로 서로가 보지 못하는,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인 것이다.ㅡ향적법진 

 

④若不見吾不見之地,自然非物,云何非汝?

만약 내가 보지 못하 것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자연 물상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네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ㅡ보는 것이 이미 물상이 아니므로 이는 곧 진실한 너의 성품이라는 것이다.

ㅡ만약 네가 나의 보지 않는 자리를 못 본다면, 이 보는 견성은 자연히 보여지는 물체가 아닌 것이니, 어찌 너 자신이 아니겠느냐?ㅡ한울림

만약 내가 보지 못하는 곳을 네가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연히 물상이 아닌데, 

그렇다면 그것이 네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견성은 물상이 아니다. 견성이 너의 마음이다.ㅡ향적법진   

 

사약장(四若章)으로, 만약의 약(若)이라는 글자가 네 번 나오면서, 견성(見性)이 물상(物象)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견성(見性)은 물체를 보지만 견성(見性)은 보지 못한다. 물체는 상도 있고 있는 곳도 있지만, 견성(見性)은 상도 처소도 없어서 견성(見性)을 못 보는 것이다. 
체성(體性)은 존재의 참모습으로서, 유정(有情)의 체성은 견(見)이고, 무정(無情)의 체성은 물상(物象)이다. 

네가 지금 물상을 볼 때, 네가 이미 물상을 보고 있고, 물상도 또한 너를 본다면, 둘의 체성이 분란하고 혼잡하게 된다. 체성이 분란하고 혼잡하면 견성과 물상이 뒤섞여서 분명하지 못하게 된다. 물상이 혼잡하면 유정물과 무정물을 구분할 수 없고, 또 사람이 혼잡하면 너의 견과 나의 견을 분간할 수가 없다. ㅡ향적법진   

 

又則汝今見物之時,汝旣見物物亦見汝,體性紛雜,則汝與我幷諸世閒不成安立。

또한 네가 이제 물상을 볼 때에 네가 이미 물상을 보았으면, 물상 또한 너를 보아야 할 것이리라. 

그러면 보는 자체(體)와 성품(性), 즉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이 어지럽게 뒤섞여서, 너와 나와 모든 세상은 제자리의 질서의 안립(安立)을 이루어서 성립하지 못할 것이니라.

ㅡ보는 주체가 물질이 아님을 밝힌 것으로, 만약 보는 주체가 곧 물질이라면, 물질이 응당 볼 수 있어서 정(情)이 있는 것과 정이 없는 것과의 실체(體)와 성품(性)이 뒤섞여서 분별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보는 주체는 물질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모든 세간의 제세간(諸世閒)은 중생과 기계(器界)를 말하는 것으로, 정이 있는 것과 정이 없는 것을 통틀어 가리키는 것이다.

 

▷결답(結答)

阿難!若汝見時是汝非我,見性周遍非汝而誰?云何自疑汝之眞性,性汝不眞取我求實。”

아난아, 만약 네가 물상을 볼 때, 그 보는 것이 바로 네 자신일 뿐, 내가 아니거늘,

보는 성품의 견성(見性)이 두루 원만한 자체가  자신이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

어찌하여 너의 진실한 성품의 진성(眞性)이 너의 참된 성품으로서 진실하지 않다고 의심하여서, 나를 상대로 진실을 찾으려는 것인가?”

 

▷명견진체(明見眞體)는 무량한 것이다.
阿難白佛言:“世尊!若此見性必我非餘,我與如來觀四天王勝藏寶殿居日月宮,此見周圓遍娑婆國;退歸精舍只見伽藍,淸心戶堂但瞻簷廡。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저의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이 틀림없이  자신일 뿐,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이전에 제가 여래와 함께 사천왕의 승장보전(勝藏寶殿)과 일월궁(日月宮, 일궁과 월궁)을 볼 때에는, 그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이 두루 원만해서 사바세계(一界일계)에 두루 퍼졌다가, 

정사(精舍)로 돌아왔을 때에는 단지 가람(伽藍)만 보였을 뿐이며, 

마음을 닦는 청심호당(淸心戶堂)에 있을 때에는 처마 끝과 행랑만 보였습니다.

*승장보전(勝藏寶殿), 사천왕궁은 진보(珍寶)를 저장하는 곳으로, 부처님께서 사천왕이 부처님께 전법륜하여 주시기를 청하였을 때, 아난 존자가 부처님을 따라 가서 사천왕궁을 보았다.

*일천 세계= 1소천세계, 1천 소천세계= 1중천세계, 1천 중천세계= 1 대천세계. 
1대천세계가 1불국토 또는 사바세계이며, 한 세계마다 한 사천왕천이 있다. 
여기에서 먼저 사천왕천을 함께 본 후, 사바국에 두루 임하였다고 한 것으로, 여기에서의 사바국은 대천세계가 아닌 한 세계를 뜻한다.

*청심호당(淸心戶堂), 스님들이 도(道)를 닦는 곳.

 

世尊!此見如是,其體本來周遍一界,今在室中唯滿一室,爲復此見縮大爲小?

爲當牆宇夾令斷絕?我今不知斯義所在,願垂弘慈爲我敷演。”

세존이시여,  보는 성품은 이와 같이  자체가 본래 일계(一界,  세계)에 두루 원만하다가,

지금 이 방안에서는 오직 이 방에만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까?

 보는 성품이  것을 작게 축소하여서 작아지게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담장이나 지붕에 끼이거나 막혀서 단절 되거나 끊어진 것입니까?

저는 지금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부디 광대한 자비를 내리시어 설하여주옵소서.”

 

여래께서 견성이 주변(周徧)한 것을 들어서 진성(眞性)이 원만함을 밝히셨다. 
이에 아난존자는 견성이 이미 물체와 뒤섞이지 않는 불변의 체(體)이거늘, 어찌하여 한 나라에 있으면 한 나라만 보고, 한 집에 있으면 한 집만 보고, 방 안에 있으면 방만 보게 이유를 모르는 까닭에, 

어떻게 견성은 물체의 크고 작음에 따라 방원(方圓)이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한 것이다. 
이는 물체는 대소와 방원이 있으나, 견성(見性)은 대소방원(大小方圓)이 없음을 모르는 까닭에 의심하는 것이다. 
정명(精明)한 견성(見性)은 물체가 오면 모양이 드러나고 물체가 가면 사라진다. 
물체를 따라 상(相)이 드러나나, 물체와 뒤섞이지 않는, 불변(不變)의 이체(理體)이며, 묘명정견(妙明精見)인 것이다. 
이는 상분(相分)도 견분(見分)도 아니며,
반연(攀緣)된 월영(月影)을 마음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니,

제2월인 견정(見精)도 모르면서 어찌 식정원명(識精元明)한 진체(眞體)를 알겠는가? 
그래서 다시 큰 자비를 내려서 묘리(妙理)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ㅡ한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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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2

*제법(諸法)은 유심(唯心)의 소현(所現)이다.

 

阿難卽從座起禮佛,合掌長跪白佛:

“世尊!若此見聞必不生滅,云何世尊名我等輩遺失眞性顚倒行事?願興慈悲洗我塵垢。”

아난 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하고, 장궤합장(長跪合掌)을 하고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보고 듣는 마음이 결코 생멸(生滅)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저희들에게 ‘참 성품의 진성(眞性)을 잃어버리고 거꾸로 된 전도사(顚倒事)를 행하는가!’라고 꾸짖으셨습니까?

자비를 내리시어 저희들의 번뇌인 진구(塵垢)를 씻어주시옵소서!”

ㅡ부처님과의 문답으로 인하여 도리어 의심이 일어나서, '진성이 나고 죽음이 있는 것이라면, 진정 잃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미 나고 죽음이 없는 것이라면, 무엇을 잃었다고 말하겠습니까?' 라고 질문 한 것이다. 

 

장궤(長跪), 몸을 똑바로 세운 채 오른쪽 무릎을 꿇거나 혹은 두 무릎을 대고 허리를 세운 채 꿇어앉는 것.

 

▷비류(比類)
卽時,如來垂金色臂,輪手下指示阿難言:“汝今見我母陁羅手爲正爲倒?”

그러자 여래께서 황금색 팔(금색비 金色臂)을 내리시고, 손으로 아래쪽을 가리키시면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모다라(母陀羅: 印手 인수)의 손을 보아라. 

지금의 이 ‘바로인 정(正)’이라 하겠는가?

‘거꾸로인 도(倒)’라고 하겠는가?”

ㅡ이는 제불과 중생들이 동일한 체성이라서, 진실로 잃은 것이 없지만, 다만 거꾸로 봄으로 인하여 잃었다고 말한 것이다. 근본으로부터 관찰해 본다면 처음부터 잃은 것이 없으며, 처음부터 바르고 거꾸로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바른 것이고, 어느 것이 거꾸로 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 것이다

*모다라(母陀羅), 인상(印相), 상인(相印), 밀인(密印), 계인(契印), 수인(手印), 인계(印契), 인(印)이라고도 하며, 모다라(母陀羅, 半陀羅)라고 음역한다.


阿難言:“世閒衆生以此爲倒,而我不知誰正誰倒。”

아난 존자가 말씀 드리기를,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거꾸로인 도(倒)’라고 할 것입니다만,

저는 ‘바로’인지 ‘거꾸로’인지를 모르겠습니다.”


佛告阿難:“若世閒人以此爲倒,卽世閒人將何爲正?”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거꾸로인 도(倒)’라고 한다면, 

어떠한 것을 ‘바로인 정(正)’이라 하겠는가?”


阿難言:“如來豎臂,兜羅緜手上指於空,則名爲正。”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여래께서 팔을 세우셔서 도라면(兜羅綿)의 손을 위로 올리시고 허공을 가리키신다면 ‘바로’라고 할 것입니다.”


佛卽豎臂,告阿難言:“若此顚倒首尾相換,諸世閒人一倍瞻視,

부처님께서  팔을 세우시고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러한 뒤바뀜의 전도(顚倒)는 머리와 꼬리가 서로 바뀐 전도수미상(顚倒首尾相)일 뿐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시    잘못 보는 일배첨시(一倍瞻視)가 되는 것이니라. 

 

▷전도의 소재를 물음

則知汝身與諸如來淸淨法身比類發明,如來之身名正遍知,汝等之身號性顚倒,

분명히 알아야 하나니, 너의  몸을 여래의 청정한 법신(法身)과 비교하여 밝힌다면, 

여래의 몸을 바르게 두루  아는 지혜의 정변지신(正遍知身)이라 하고, 

너희들의 몸을 성품이 뒤바뀐 성전도신(性顚倒身)이라 하는 것이다. 

ㅡ팔과 몸은 본래 하나인데, 마음의 집착으로 말미암아 망령되게 분별하며, 법신은 본래 같지만, 바로 또는 거꾸로 된 것으로 말미암아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마음의 집착을 잊고 바로 또는 거꾸로 되었다고 하는 것을 버린다면, 팔과 몸은 자연 그대로이고, 법신도 둘이 아닐 것이다.

 

▷한 배나 더 전도된 것과 합해짐

隨汝諦觀汝身佛身,稱顚倒者名字何處號爲顚倒?”

于時,阿難與諸大衆瞪瞢瞻佛目精不瞬,不知身心顚倒所在。

 몸을 자세히 살펴보아라. 너의 몸을 여래의 몸에 비교하여서 뒤바뀌었다고 하는 말은 어디를 두고 뒤바뀌었다고 하는 것인가?”

그러자 아난 존자와 대중들은 몸과 마음의 뒤바뀐 곳이 어디인가를 몰라서 눈을 치켜 뜬채 깜박이지도  멍하게 부처님을 바라볼 뿐이었다.

ㅡ전도된 근본을 추구하고 궁구하여서 깨닫기를 바랐으나, 대중들이 혼미하여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佛興慈悲哀愍阿難及諸大衆,發海潮音遍告同會:

“諸善男子!我常說言:‘色心諸緣及心所使諸所緣法,唯心所現。’

부처님께서 자비심을 내시어서 아난 존자와 대중을 가엾게 여기시어, 바다의 조수(潮水)와 같은 음성으로 두루 법회 대중에 응하여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이여, 나는 항상 ‘물질과 마음의 색심(色心) 모든 인연의 제연(諸緣) 마음에 딸린 모든 생각의 심소사(心所使)와 일체 인연의 경계 법인 소연법(所緣法) 유심(唯心)에서 나타난 것의 유심소현(唯心所現)이라고 설하였느니라.

 

유심(唯心), 우주의 종극적 실재는 마음 뿐인 것으로, 외계(外界)의 사물은 마음의 변현(變現)이다.

유식종(唯識宗)에서는, 만유의 현상에 속한 심식(心識)에 대하여 입론(立論)하서, 심식의 식(識)을 네 가지로 세웠다.

우리들이 인식하는 대경(對境)의 객관은 인식 작용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경(實境)이 아니고,

견분(見分)에 의하여 마음 속에 비틴 상분(相分), 곧 본질을 연(緣)으로 인하여 생긴 영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제8 아뢰야식에 함장(含藏)된 종자로부터 생긴 것이므로 마음으로 만든 것이다.

일체의 사물은 모두 심식으로 변현한 것으로, 3계(界)는 유식만이 종극의 실재요, 그밖에 별법(別法)이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기신론(起信論)'과 '화엄종' 등에서는 만유의 본체인 진여심(眞如心)으로서, 만유는 모두 일심진여(一心眞如)가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진여심에는 수연(隨緣)과 불변(不變)이 있어서, 진여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불변(不變)하는 것이지만,

염정(染淨)의 연을 따라서 갖가지의 차별된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 수연(隨緣)이다.

그러므로 만상은 일심진여의 현현으로서, 그 체(體)는 진여를 여읜 것이 아니다. ㅡ참고 마음공부도량 붇다사

*해조음(海潮音), 바다의 조수(潮水)와 같은 음성. 요청을 받지 않고도 교화할 시기를 놓치지 않고 적시에  설법하는 것이 마치 조수가 때를 어기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에 비유한 것.

 

汝身汝心皆是妙明眞精妙心中所現物,云何汝等遺失本妙圓妙明心寶明妙性,認悟中迷

 몸(身)과 마음(心)은 이렇게 묘하고 밝은 묘명(妙明)한 것이고, 진실하고 정밀한 진정(眞精)하며, 심오한 묘심(妙心)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거늘,

너희들은 어찌하여 본래의 묘하고 원만하고 밝은 마음의 본묘원묘명심(本妙圓妙明心)의 보배와 같이 밝고 묘한 성품의 보명묘성(寶明妙性)을 잃어버리고, 깨달음을 미혹(迷惑)으로 잘못 아는 것인가!

ㅡ마음(心)이란 육식과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팔식을 말하는 것이다.

묘한 마음은 하나인데, 명칭이 많고 다른 것은 법(法)에 의지하여서 따라서 작용하는(用)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밝은 마음에 나타난 물질이 거울과 같은 까닭에 묘명진정(妙明眞精)이라 한 것이고, 또한 근본을 모르고 끝을 따라 가는 것을 밝힌 까닭에 본묘명심(本妙明心)이라 한 것으로, 본묘(本妙)란 본래 스스로 묘해서 닦을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한다. 

마음(心)과 성품(性)은 체(體)와 용(用)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은 묘함으로부터 밝음을 일으켜, 원만하게 밝고 나아가 묘하여서 마치 거울의 본체와 같으므로 보명묘성(寶明妙性)이라 한 것이다.

 

晦昧爲空,空晦暗中結暗爲色,色雜妄想想相爲身,聚緣內搖趣外奔逸,昏擾擾相以爲心性。

미혹한 회매(晦昧)와 어둠의 회암(晦暗)이 허공으로 변하고, 

허공의 미혹한 어둠의 회암(晦暗) 가운데에서 어둠이 맺혀 색(色, 색진)이 되고, 

색이 망상과 섞이니, 망상으로 나타난 상(相) 몸(身)으로 여기며, 

인연을 모아 안으로 흔들리고, 경계를 좇아 밖으로 달리며, 어둡고, 흔들리고, 시끄러운 심성(心性)으로 삼는 것인가!

ㅡ반야에 미한 까닭에 회매(晦昧)라 하며, 무명으로 말미암아 미망함에 집착하여서 허공이 생긴다는 것이며, 

변화되는 집착과 변화시키는 무명의 두 법이 화합하여 4대의 의보인 외경의 물질을 이루는 까닭에 '어둠이 맺혀 색진이 된다'고 한 것으로, 이른바 생각이 엉켜서 국토를 이룬다는 것이다

 

색(色, rūpa)

(1) 심법(心法)에 대하여 물질을 색법이라 하며, 변괴(變壞)ㆍ질애(質礙)의 두 가지 뜻이 있는 물질의 총칭이다.

5위(位), 5온(蘊)의 하나이며, 구사론(俱舍論)에서는 5근(根)ㆍ5경(境)ㆍ무표색(無表色)의 11로 나누고,

유식종에서는 5근(根)ㆍ5경(境)ㆍ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의 11로 나눈다.

(2) 최근의 해석으로는 형상과 색채를 합한 것으로서 감각적 직관적인 일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곧 정신적 요소에 대립한 물질이 아니고, 존재하는 한 방면인 물질적 성질을 가리킨다.

 

一迷爲心,決定惑爲色身之內,不知色身外洎山河虛空大地,咸是妙明眞心中物。譬如澄淸百千大海,棄之,唯認一浮漚體,目爲全潮窮盡瀛渤。汝等卽是迷中倍人,如我垂手等無差別,如來說爲可憐愍者。”

瀛 바다 영, 渤 바다 이름 발, 발해 발

이렇게 한번 미혹하여서 마음으로 여기는 일미위심(一迷爲心)은, 현혹되게 몸의 색신(色身) 속에 있다고 결정하고는, 

색신(色身)과 밖의 산과 강과 허공과 대지 모두가 다 묘하고 밝은  마음의 묘명진심(妙明眞心) 가운데의 사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나니, 

비유하자면, 맑고 깨끗한 백천대해(百千大海)를 버리고, 오로지 하나의 물거품인 일부구체(一浮漚體)만을 인정하여서, 바닷물 전체의 전조(全潮)로 지목하고, 넓은 바다인 영발(瀛渤)을 끝끝내 물거품으로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니라. 

이와 같이 너희들은 내가 손을 아래로 향한 것과 다름없이 미혹한 가운데에서 한   미혹한, 미중배인(迷中倍人)의 사람들이니, 

 여래는 너희들을 가련한 자라고 하는 것이니라.”

 

▷혼탁함을 분별함
阿難承佛悲救深誨,垂泣叉手而白佛言:“我雖承佛如是妙音,悟妙明心元所圓滿常住心地;而我悟佛現說法音,現以緣心允所瞻仰,徒獲此心未敢認爲本元心地。願佛哀愍宣示圓音,拔我疑根歸無上道。”

아난 존자는 부처님께서 가련하게 여겨서 구해주시는 깊은 가르침의 심회(深誨)을 받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두 손을 마주잡는, 차수(叉手)하고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제가 비록 부처님의 이와 같은 묘음(妙音)을 받들어서 묘하고 밝은 마음의 묘명심(妙明心)이 원래 원만한 것으로, 영원히 변치 않는 원만상주(圓滿常住)가 항상 머무는 마음자리인 상주심지(常住心地)라는 것을 깨달았으나, 

제가 지금 부처님의 설법하시는 설법음(說法音)을 깨달았을지라도, 그것은 현재에서 인연하는 마음의 연심(緣心)이며, 진실로 우러러 볼지라도 단지  마음을 얻을 뿐이니, 아직은 감히 본원(本元)의 심지(心地)를 안다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희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원만한 법음의 원음(圓音, 범음 梵音  일음 一音)을 베푸시어,  의혹의 뿌리를 뽑아주시고, 더없이 높고 바른 무상도(無上道)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ㅡ법음을 들음으로 인하여 묘하고 밝은 마음이 본래 원만하여 전혀 유실됨이 없음을 깨달은 까닭에 '항상 머무는 마음자리인 상주심지(常住心地)'라 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밝지 못하여서, 들음으로 반연하는 마음을 본성(本性)을 깨달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이는 평소의 생각에 혼탁한 의혹들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뽑아 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부처님께 뽑아 주시기를 희망한 것이다.

원음(圓音)은 범음(梵音) 또는 일음(一音)이라고도 하며, 가르침을 말하는 사람, 즉 부처님의 소리를 말합니다.

 

▷반연하는 것을 인정하여 참된 것을 잃음
佛告阿難:“汝等尚以緣心聽法,此法亦緣非得法性。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오히려 인연하는 마음의 연심(緣心, 반연심)으로 법을 듣고 있으니,  법도 인연인 연법(緣法)일 뿐, 법의 본성을 얻은 것이 아니니라. 

ㅡ음성으로 인하여 분별하는 것은 연심(緣心)이지 참마음이 아니며, 대상 경계를 인하여 망령되게 보는 것은 연법(緣法)이지 법성은 아니다. 

 

如人以手指月示人,彼人因指當應看月;若復觀指以爲月體,此人豈唯亡失月輪,亦亡其指。何以故?以所摽指爲明月故。豈唯亡指,亦復不識明之與暗。何以故?卽以指體爲月明性,明暗二性無所了故。

어떤 사람이 손으로 달을 가리키면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면,  사람은 당연히 손가락을 따라 달을 보아야 할것이니, 만약 손가락을 보고  그 자체로 여긴다면,  사람은 어찌 달만 잃은 것이겠는가! 손가락도 잃은 것이니라!

왜냐하면 가리킨 손가락을 밝은 달로 여긴 까닭이니라. 

어찌 손가락만 잃었다고 하겠는가. 밝음과 어둠도 모른다고 해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손가락 자체를 달의 밝은 성질의 월명성(月明性)으로 여겨서, 밝고 어두운 명암(明暗)의  성질을 알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ㅡ대상 경계로 인하여 잘못 인식하면 점점 미혹하게 되어서 더더욱 참됨을 잃는다. 

 

▷반연하는 것은 무성(無性)이다.

汝亦如是,若以分別我說法音爲汝心者,此心自應離分別音有分別性。譬如有客寄宿旅亭,暫止便去終不常住,而掌亭人都無所去名爲亭主;此亦如是,若眞汝心則無所去。云何離聲無分別性?

너희도 역시 이와 같으니, 만약 나의 설법소리인 법음(法音)을 분별하여서 네 마음으로 삼는다면,  마음은 마땅히 소리를 분별하는 것을 떠나서 다시 분별하는 성품의 분별성(分別性)이 있어야 할 것이니,

비유하자면, 여정(旅亭, 여관)에 기숙(寄宿)한 나그네는 잠시 머물었다가는 이내 떠나서 끝내 상주(常住)하지 않으나, 

여정을 맡은 사람은 전혀  곳이 없으니 여정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것 또한 마찬가지로, 만약 진실한  마음인 진심(眞心)이라고 한다면,  곳이 없어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소리(聲)를 떠나서는 분별하는 성품이 없는 것인가?

ㅡ분별하는 연심(緣心)은 물질을 여읜다면 성품이 없으니, 나그네와 같은 것이고, 상주하는 진심은 갈 곳이 없으니 여관의 주인과 같은 것이다.

 

斯則豈唯聲分別心,分別我容離諸色相無分別性,如是乃至分別都無非色非空。拘舍離等昧爲冥諦,離諸法緣無分別性,則汝心性各有所還,云何爲主?”

어찌 소리를 분별하는 마음의 성분별성(聲分別性)만 그러하겠는가!

나의 모습을 분별하는 마음의 상분별성(相分別性)도 일체의 색상(色相, 부처님의 32상 80종호)을 떠나서는 분별하는 성품이 없느니라. 

이렇게 나아가 분별이 전혀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면,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므로, 구사리(拘舍離, 외도)들은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명제(冥諦, 본성)라고 하는 것이니라.

제법의 인연을 떠나서 분별하는 성품이 없다면, 너의 심성(心性)은 각각 인연을 따라 돌아갈 자리가 있는 것이 될것이니, 어떻게 주인이 되겠는가?

ㅡ음성을 분별하는 마음이란 음성의 반연으로 생긴 연심(緣心)을 말하며, 일체는 없는 것이므로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나' 외도만이 어두워서 명제라고 한다. 

명제(冥諦), 수론외도(數論外道)가 내세운 25가지 제(가운데 첫 번째를 물질적 본체. 이것은 만물의 근원으로서 명막무제(冥漠無際)한 것이므로 명초(冥初) · 명성(冥性)이라고도 한다. 또 만물의 모든 법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므로 자성(自性) · 본성(本性) · 승성(勝性)이라고도 하며, 또 이것이 모든 법의 시초이므로 명초(冥初)라고도 한다.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명()과 혼돈(混沌)이라는 말은 겁()의 한계에 부딪힌 모습입니다. 

 

▷팔경(八境)에 의하여 견성(見性) 돌아갈 곳이 없음을 보이다.
阿難言:“若我心性各有所還,則如來說妙明元心云何無還?唯垂哀愍爲我宣說。”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만약  심성(心性)이 돌아갈 곳이 있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묘하고 밝은 본래의 마음인 묘명원심(妙明元心)은 어찌하여 돌아갈 곳이 없는 것입니까?

저를 가엾게 여기시어  이치를 설하여 주시옵소서!”

 

ㅡ묘명원심(妙明元心)은 곧 보는 정기의 견정(見精)이다.
佛告阿難:“且汝見我見精明元,此見雖非妙精明心,如第二月非是月影,汝應諦聽,今當示汝無所還地。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보는 정기의 견정(見精)은 밝은 근원의 견정명원(見精明元)이다. 

 견정(見精)이 비록 미묘하고 정밀하고 밝은 마음의 묘정명심(妙精明心)이 아닐지라도, 

눈을 비비면서 달을 보면 두 개의 달이 보이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가 아닌 것이다. 

너는 자세히 듣거라! 이제 너에게 돌려보낼 자리가 없는 까닭을 보여 줄것이니라.

ㅡ묘한 마음과 견정은 본래 두 개의 상이 없다. 진실한 달은 묘정명심(妙精明心)을 비유한 것이고,

제 2의 달은 견정명원(見精明元)을 비유한 것이며, 물 속의 달은 연진의 분별을 비유한 것으로, 즉 진심은 알기가 어려운 까닭에 견정을 가탁해서 방편으로 보여준 것이다. 

 

阿難!此大講堂洞開東方,日輪昇天則有明耀,中夜黑月雲霧晦暝則復昏暗,戶牖之隙則復見通,牆宇之閒則復觀擁,分別之處則復見緣,頑虛之中遍是空性,鬱𡋯之象則紆昏塵,澄霽斂氛又觀淸淨。

隙 틈 극, 鬱 답답할 울, 울창할 울, 紆 굽을 우

아난아,   강당의 문이 동쪽으로 활짝 열려 있을 때, 하늘에 해가 뜨면 밝은 (明) 보고, 

그믐의 한밤중에 구름이 잔뜩 끼면 캄캄한 어둠의 암(暗) 보며, 

문과 창틈으로 (通)함을 보고, 담과 지붕에서는 막힘의 색(擁) 보며, 

분별하는 곳에서는 여러 인연의 연(緣) 보고,   곳에서는 두루 (空)함의 공성(空性)을 보며, 

안개에 묻혀 내리는 흙비의 모양에서는 어둠에 쌓인 티끌의 혼진(昏塵)의 울(鬱) 보며, 

날씨가 맑게 개어서, 먼지와 안개가 걷히고 나면 다시 맑음의(淸) 볼 것이니라.

 

*팔환변견(八還辨見), 밝은(明), 어둠(暗), 통(通), 막힘(擁), 인연(緣), 허공(空), 티끌의 울(鬱), 청(淸)의 여덟 가지


阿難!汝咸看此諸變化相,吾今各還本所因處。云何本因?

阿難!此諸變化明還日輪。何以故?無日不明,明因屬日,是故還日;暗還黑月;通還戶牖;擁還牆宇;緣還分別;頑虛還空;鬱𡋯還塵;淸明還霽。則諸世閒一切所有,不出斯類。

아난아, 너는  변화하는 변화상(變化相)들을  보고 있으니, 

나는 이제 그것들을 본래의 원인한 자리인 본소인처(本所因處)로 각각 돌려보내리라.

본래 원인하였던 자리인 본소인처(本所因處)는 어느 곳이겠는가?

아난아,  여러 변화하는 변화상(變化相)들 가운데, 밝음은 해로 돌려보내는 명환일륜(明還日輪)하나니,  까닭은 해가 없으면 밝지 않기 때문이다. 

밝은 원인은 해에 속한 것이니, 해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어둠은 그믐의  밤중에 돌려보내고, 통(通)함은 문과 창틈으로 돌려보내며, 

막힘(擁)은 담과 지붕으로 돌려보내고, 여러 인연(緣)은 분별로 돌려보내며, 

 빈곳은 허공(空)으로 돌려보내고, 안개 쌓인 흙비는 티끌(塵)로 돌려보내며, 

맑은 기운은 개인 날씨의 청정(淸淨)으로 돌려보내리라.

 세상의 모든 변화는 밝은(明), 어둠(暗), 통(通), 막힘(擁), 인연(緣), 허공(空), 티끌의 울(鬱), 맑음 청(淸)여덟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라.


汝見八種,見精明性當欲誰還?何以故?若還於明,則不明時無復見暗,雖明暗等種種差別,見無差別;諸可還者自然非汝,不汝還者非汝而誰?則知汝心本妙明淨。汝自迷悶喪本受輪,於生死中常被漂溺,是故如來名可憐愍。”

너는 이러한 여덟 가지의 팔종(八種)을 두루 보나니, 그 두루 다 보는 견정(見精)의 밝은 성품은 어디로 돌려보내겠는가?

만약 밝음(明)으로 돌려보낸다면 밝지 않을 때는 어둠(暗)을 보지 못해야 할 것이니,

비록 밝고 어두운 명암(明暗) 등에는 가지가지의 차별이 있으나, 보는 정기의 견정(見精)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돌려보낼 수 있는 것들은 자연히 네가 아니지만, 네가 돌려보내지 못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분명히 알아야 하나니, 네 마음은 본래 묘하고 밝고 깨끗한 본묘명정(本妙明淨)인 것이나,

네 스스로가 미혹하여서 본성을 잃고 윤회하면서 항상 생사 가운데에 빠져서 흘러 다니는 것이니,

그래서 여래는 불쌍하다고 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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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2 1

*팔환변견(八還辨見)을 밝힘

 

▷경가가 그 뜻을 서술함

爾時,阿難及諸大衆聞佛示誨身心泰然,念無始來失卻本心,妄認緣塵分別影事,今日開悟如失乳兒忽遇慈母,

이때 아난 존자와 대중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몸과 마음이 태연하여져서 생각해 보았다.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본심(本心)을 잃어버리고 인연 경계를 따라 분별하는 그림자인 분별영사(分別影事)를 본심으로 잘못 알고 있다가, 이제서야 여래를 만나 깨닫게 되었으니, 마치  먹이 아기가 잃어버린 자애로운 어머니를 다시 만난 것과 같이 기뻤다. 

 

*연진(緣塵), 대상 물질인 색성향미촉법 등의 육진(六塵)을 반연하여서 진성(眞性)이 현혹되기 때문에 연진(緣塵)이라 한 것이다.

*분별영사(分別影事), 나누는 분(分) 분별하는 별(別)하여서 그림자 즉 사물이 영사(影事)이다.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나누어져 있지 않고 상호의존의 관계로 존재하며, 상호의존한다는 것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며, 그러한 것을 나누고 구별하여서 보는 것은 잘못 보는 것으로 이렇게 구별하여 보았을 때 나타나는 현사을 영사(影事)라 한다 
분별(分別)이란 구분해서 식별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진짜 마음이 아니고, 망상(妄想)이고, 반연심(攀緣心)이고, 분별영사(分別影事)이다. 이 마음은 늘 변한다. 분별은 가지가지로 일어나지만, 항상 아는 놈은 진짜 내 마음이다. 진짜 마음이라면 변하지 않고 항상 있는 상주진심(常住眞心)이어야 한다.  

 

合掌禮佛,願聞如來顯出身心眞妄虛實 現前生滅與不生滅二發明性。

아난 존자는 대중과 함께 합장하여 예를 올리고는, 

부처님께서 이 몸과 마음의 신심(身心)에서 진실한 실(實)과 망상의 허(虛)와 지금 눈앞에 있는 생멸(生滅)과 불생멸(不生滅)의 이치를 드러내시어서, 이러한  가지의 바른 뜻을 분명하게 밝혀주시기를 원하였다.

ㅡ앞에서는 '움직이는 것을 몸으로 여기고, 움직이는 것을 대상 물질로 여겨서, 생각마다 생겨나고 없어지고 하여서 진성(眞性)을 잃는다'고 하였는데,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과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그 두 가지를 분별할 능력이 없으므로 두 가지 뜻을 나타내어 분명하게 밝혀 주시기를 원한 것이다. 

 

▷몸은 변화하여 달라지지만, 생멸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밝힘

波斯匿王起立白佛:“我昔未承諸佛誨勅,見迦旃延毘羅胝子,咸言:‘此身死後斷滅,名爲涅槃。’我雖値佛今猶狐疑,云何發揮證知此心不生滅地?今此大衆諸有漏者咸皆願聞。”

이때 바사닉왕(波斯匿王, prasenajit)이 일어서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기 전에 가전연(迦旃延)과 비라지자(毗羅胝子)를 만났는데, 그들은 ‘이 몸이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는 단멸(斷滅)을 열반’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부처님을 만났으나 지금도 오히려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여 이러한 의심을 해결하여서 불생멸의 경지(地) 확실하게 증지(證知)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대중 가운데의 번뇌가 있는 모든 이들이 듣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바사닉왕(波斯匿王, prasenajit)로 승군왕(勝軍王)이라는 뜻이다. 석존과 같은 시대의 슈라바스티(śrāvastī, 舍衛國사위국)의 열여섯 대국왕 가운데의 왕이며, 이름이 월광(月光)이었다. 

*여기에서의 가전연(迦旃延)은 나형외도로 외도육사(外道六師, 육사외도)이며, 오늘날의 자이나교도입니다. 니간타 나타풋타(Nirgrantha Jnātiputra)는 자이나교의 개조인 마하비라(Mahāvīra)이며, 오래전부터 있던 교단의 명칭이었으나, 그가 이 파로 들어간 뒤에 자이나교를 성립하였다.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부정주의(不定主義) 또는 상대주의(相對主義)를 내세우고,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엄격한 고행(苦行)의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죽이지 말고 훔치지 말고 음행하지 말고 거짓말 하지 않고 소유하지 말라고 하는 오대서(五大誓)를 제정하였다

*비라지자(毗羅胝子)는 외도육사(外道六師, 육사외도)이며, 닦아 익히되 공(空)을 집착하여 도(道)로 삼고 몸은 멸하면 체(體)가 없고 죽음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법을 득도(得道)라고 말하느니라.

*호의(狐疑), 의혹을 뜻하며, 여우는 의심이 많은 짐승이므로 의심하여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일컫는 말.

 

▷문답(問答)으로 환망(幻妄)을 분별함
佛告大王:“汝身現存,今復問汝,汝此肉身爲同金剛常住不朽?爲復變壞?”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네 몸이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있으니, 내가 다시 너에게 물어보리라. 

대왕, 그대의 육신은 금강과 같이 견고한 것으로, 영원히 머물 것이며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변하여 무너진다고 생각하는가?”


“世尊!我今此身終從變滅。”

대왕이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의  몸이 끝내에는 변하여 무너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佛言:“大王!汝未曾滅,云何知滅?”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의 몸이 이전에 몸이 멸한 적이 없을 것이거늘, 어찌하여 멸한다는 것이라고 아는 것인가?”


“世尊!我此無常變壞之身雖未曾滅,我觀現前念念遷謝新新不住,如火成灰漸漸銷殞殞亡不息,決知此身當從滅盡。”

왕이 말씀드리기를, 

“저의  무상(無常)하게 변하여 무너지는 몸이 비록 이전에 멸한 적은 없으나, 생각생각마다 옮겨가면서 달라지고, 계속 새롭게 새롭게 변하여 멈추지 않으며, 불에 타는 땔감이 재가 되듯이 점점 사그라지면서 쉬지않고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며서, 장차  몸은 결국에는 멸하여 사라질 것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佛言:“如是,大王!汝今生齡已從衰老,顏貌何如童子之時?”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합니다. 대왕이여! 지금 그대는 나이가 들어 이미 쇠약한 늙은이가 되었는데, 얼굴의 모습은 동자 때와 얼마나 다른 것인가?”


“世尊!我昔孩孺膚腠潤澤,年至長成血氣充滿,而今頹齡迫於衰耄,形色枯悴精神昏昧,

髮白面皺逮將不久,如何見比充盛之時。”

왕이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에는 피부부(膚)와 살갗주(腠)이 부드럽고 윤택하였으며, 

그 보다 조금 더 자랐을 때에는 혈기가 왕성하고 힘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너진 나이로 거의 쇠약한 늙은이의 쇠모(衰耄)가 되어서, 형색은 말라서 초췌한 고췌(枯悴)하게 되었으며, 정신은 멍하여 혼미하며, 머리는 하얗게 변하였고, 얼굴은 쭈그러져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거늘, 어떻게 혈기 충만한 젊은 시절과 비교할  있겠습니까!”

해(孩), 뼈가 겨우 생긴 것,

유(孺), 사람의 양육을 필요로하는 아기,

부(膚), 피부의 표면, 

주(腠), 살결 퇴(頹), 해가 기울어지는 것과 같은, 늙으막을 의미한다.


佛言:“大王!汝之形容應不頓朽。”
朽 썩을 후, 썩은 냄새 추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몸과 얼굴은 일시에 한꺼번에 쇠약한, 돈추(頓朽)하지 않았으리라.”


王言:“世尊!變化密移我誠不覺,寒暑遷流漸至於此。

何以故?我年二十雖號年少,顏貌已老初十年時;三十之年又衰二十;于今六十又過于二;觀五十時宛然强壯。

왕이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변하여 달라짐이 은밀하게 가만히 옮겨 간 것이니, 참으로 제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한서(寒暑, 세월)의 옮겨가는 흐름과 함께 점차로 이렇게 늙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은,  나이 스무  때에는 비록 젊은 나이라고 하였으나, 저의 안모(顏貌, 얼굴)는 이미 이전의 열 살이었을 때보다 늙었으며, 서른이 되었을 때에는 스무 살이었을 때보다 늙었으며, 

지금의 예순두 해를 보낸 나이이니, 쉰  때를 돌아보건데,   이었을 때가 훨씬 건장하였습니다.


世尊!我見密移雖此殂落,其閒流易且限十年,若復令我微細思惟,其變寧唯一紀二紀,實爲年變;豈唯年變,亦兼月化;何直月化,兼又日遷;沈思諦觀剎那剎那,念念之閒不得停住,故知我身終從變滅。”

殂 죽을 조

세존이시여, 저는 가만히 은밀하게 바뀌어  대강 보고, 비록 이렇게 폭삭 늙었다고 한 것으로, 

 동안 흘러 바뀌어  기간을 그저 10년씩 잡은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자세히 사유하여 본다면,  변함이 어찌 일기(一紀, 12년), 이기(二紀, 24년)뿐 이었겠습니까! 

사실, 해마다 변하여 왔습니다. 

어찌 오직 해마다 변할 뿐이었겠습니까! 실은 매달 변하여 온 것입니다. 

어찌 다만 매달 변할 뿐이었겠습니까! 실은 매일 변하여 온 것입니다. 

더욱 더 세밀하게 곰곰이 살펴보면, 찰나찰나(剎那剎那)마다,

생각생각의 염념(念念)마다 변하여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몸이 마침내에는 변하여 없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조락(殂落),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나, 여기에서는 폭삭 늙은 것을 뜻하였다. 

일기(一紀), 12년을 한 단위로 함.

찰나(剎那), 지극히 짧은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떨어지는 가랑잎이 땅에 닿기 직전의 땅과 종이 한 장 사이의 짧은 시간을 말한다.

 

▷환상으로 인하여 진(眞)이 있음을 밝힘
佛言:“大王!汝見變化遷改不停,悟知汝滅;亦於滅時,知汝身中有不滅耶?”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는 ‘변화(變化)하고, 옮기면서 바뀌어 달라지는 천개(遷改)하여서 멈추지 않는 것을 보고는,

 몸이 끝내에는 멸한다는 것을 안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멸하는 가운데에서도  가운데 멸하지 않는 이치가 있다는 것을 아는가?”


波斯匿王合掌白佛:“我實不知!”

바사닉왕이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그러한 이치를 참으로 모르고 있습니다.”


佛言:“我今示汝不生滅性。大王!汝年幾時見恒河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불생멸의 성품인 불생멸성(不生滅性) 보여주리라! 

대왕이여, 그대가 몇 살때 처음으로 항하의 강물을 보았는가?”


王言:“我生三歲,慈母攜我謁耆婆天,經過此流。爾時卽知是恒河水。”

왕이 말씀드리기를, 

“제 나이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데리고 기바천(耆婆天)의 사당(祠堂)을 참배(알 謁)하러 가실 때, 

 강물을 건너게 되어서, 그것이 바로 항하의 강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바천사당(耆婆天祠堂), 기바천(耆婆天)은 장수천(長壽天)으로, 기바천에 가서 아이를 위하여 빌면 장수한다고 하여서 인도에는 사당이 많다.


佛言:“大王!如汝所說,二十之時衰於十歲,乃至六十,日月歲時念念遷變,則汝三歲見此河時,至年十三其水云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말하기를 ‘스무  때에는   때보다 늙었었고, 또한 예순 살은  살보다 늙었으며,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때마다, 찰나마다, 생각마다 옮기고 변하는 천변(遷變)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대가    처음   강물을 열세 살이 되어서   강물과 비교한다면 어떻게 다른가?”


王言:“如三歲時,宛然無異,乃至于今年六十二,亦無有異。”

왕이 말씀드리기를, 

“세  때 본 것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며, 예순  살이 된 금년에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ㅡ어리고 장성하고 늙음의 갖가지로 변화하여도 보는 주체는 달라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곧 생멸하는 가운데에서 생멸하지 않는 것이다.


佛言:“汝今自傷髮白面皺,其面必定皺於童年,則汝今時觀此恒河,與昔童時觀河之見有童耄不?”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지금 스스로 하얀 머리의 백발(白髮)과 쭈그러진 얼굴의 면추(面皺)를 스스로 서럽게 여기고 있으며, 

분명히 그대의 얼굴도 동자 때보다 훨씬 쭈그러져 있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강물을 보는(觀) 것과 예전의 동자 때에 강물을 본(觀) 것에,

따로이 동자와 늙은이의 봄에 다름이 있는가?”


王言:“不也,世尊!”

왕이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佛言:“大王!汝面雖皺,而此見精性未曾皺,皺者爲變、不皺非變,變者受滅、彼不變者元無生滅,云何於中受汝生死,而猶引彼末伽梨等都言此身死後全滅?”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의 얼굴이 비록 쭈그러졌을지라도,  보는 정기의 성품인 견정성(見精性)은 일찍이 쭈그러진 적이 없었느니라! 

쭈그러지는 추(皺)는 변하는 것일지라도, 쭈그러지지 않는 불추(不皺)의 것은 변하지 않느니라! 

변하는 것은 변하여 없어질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본래 생멸이 없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그대는 그러한 가운데에서 생사를 받아들이고는, 오히려  말가리(末伽梨)들이 주장하는 ‘이 몸이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신사후전멸(身死後全滅)이다’라는 주장을 받아 들였던 것인가!


王聞是言,信知身後捨生趣生,與諸大衆踊躍歡喜得未曾有。

왕은 이 말씀을 듣고는, 이 몸이 죽게 되면 이 생을 버리고 다음 생에 태어난다는 이치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으며,

대중들과 함께 이전에 들어 본적이 없는 미증유(未曾有)의 법을 얻어서 크게 뛸 듯이 기뻐하였다.

 

*견성(見性)은 진심(眞心)이 가지는 본래의 능력으로서 자성본용(自性本用)이다. 모든 중생은 견문각지(見聞覺知) 할 줄 아는 자성본용을 가지고 있는 즉, 볼 것이 없어도 볼 줄 아는 성능을 말한다. 

거울이 모든 것을 비추는 허명(虛明)한 성질과 같은 것이다.

견정(見精)은 인연에 따라 나타나는 능력으로서 수연응용(隨緣應用)이다. 사람이 볼 수 있는 범위와 동물이 보는 범위는 다르다. 거울의 모양(오목·볼록) 에 따라 비추는 것이 다른 것과 같다.
견성(見性)은 견정(見精)의 자상을 여의고, 진견이 드러나면 망견(妄見)이 사라져서  견정(見精)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견(眞見)이 망견(妄見)에 응하는 것을 견정(見精)이라 하고 견정이 망견을 여의면 진견(眞見)이라 한다.
그러므로 견성(見性)은 견정(見精)이 아니다
① 견성(見性) - 진심(眞心) - 자성본용(自性本用) - 무연지(無緣知) 
② 견정(見精) - 망심(妄心) - 수연응용(隨緣應用) - 반연심(攀緣心) 
견성(見性) → 견정(見精) → 견망(見妄)
견문각지는 전부 성(性)이 있는 육성(六性)으로, 사람의 몸을 타고 났으니 정(精)이 있는 육정(六精)이며,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망(妄)이으로, 즉 육망(六妄)이 된다. 그러므로 육망(六妄)이 우리 중생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견성과 견정은 볼 줄 아는 지(知)의 면에서는 그 성질이 똑같으나, 견성은 인연이 없어도 존재하는 상주진심(常住眞心)이고, 견정은 인연 따라 나타나는 수연응용(隨緣應用)으로서 망심(妄心)이다.
진심(무연지)과 망심(유연지)은 24시간 항상 작용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그 작용하는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진심(무연지)은 인연이 없는 것이므로 바뀌지 않으나,

망심(유연지)은 인연 따라 일으키는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빨간 것을 볼 때와 파란 것을 볼 때, 볼 줄 아는 것은 같지만, 생각이 달라지니 망심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망심(妄心)을 묘용(妙用)이라 하며, 우리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수연응용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항상 변하지 않는 진심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견견지시(見見之時) 견비시견(見非是見)
①견정으로 시각현상(견정-육진-안식)을 볼 때에
②시각 현상을 보는 것을 아는 견성은 견정이 아니다
보는 것은 밝음과 어두움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견(見)은 명과 암을 인하여 보는 것이 아니다.

영광독요(靈光獨耀) 마음자리(견성)는 홀로 밝아서 형탈근진(迥脫根塵) 육근(눈)과 육진(명암 등 대상)과 상관없다
능탈(陵奪)은 서로 충돌하는 상극(相剋)으로, 해가 뜨면 달빛이 안 보이는 것과 같이 해와 달은 서로 상극이다.ㅡ참고 향정법진과 한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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