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대승론(攝大乘論) 상권 7
아 승 가(阿 僧 伽, 무착) 지음. 불타선다(佛陀扇多) 한역. 김묘주 번역
唯彼意識,種種行故得彼名,亦如身口等。餘者行一切身中,如畫師二種現相行:唯彼塵現相故,及分別現相故。一切處觸現相故,行色塵身依故,彼意識彼餘色相身依故。
是中有偈:
오직 그 의식(意識)이 여러 가지로 전전함으로써 그들의 명칭을 얻나니, 역시 신업(身業)과 구업(口業) 등으로 이름하는 것와 같으며,
모든 의지처(身)을 전전함에 있어서 마치 화사(畫師, 화가)와 같이 견분(見分, 주관)과 상분(相分, 객관)의 두 가지가 갖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전전하는 것이니, 오직 그 대상(塵)이 나타내는 상의 진현상(塵現相)과 분별현상(分別現相)일 뿐인 것이다.
또한 일체의 모든 곳에서도 접촉하는 촉현상(觸現相)이 전전하나니, 색계에서 그 의식은 몸(身)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그 나머지 감각기관이 몸(身)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遠至獨行故, 無身窟所依, 能調不調心, 我說爲淨行。
멀리 작용하거나 홀로 작용하는 까닭에, 몸이 없는 무신(無身)의 동굴을 의지처로 삼으니,
나는 조복하기 어려운 마음을 능히 조복하는 것을 청정한 정행(淨行)이라 말한다네.
如說此諸五根,意識境界緣受成。然是彼者,意是依止爾。復如說十二入經中,六種識種識是意入爾。
또한 경전에서 설한 바와 같이 이 5근(根)의 경계를 의식(意識)이 반연하여 수용하나니, 의식은 그것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며,
또한 경전에서 설한 바와 같이 12입설(入說)에서는 육식(六識)을 의근의 포섭처인 의입(意入)이라 하였다.
若有阿犂耶識識塵識分別安是中, 諸餘一切識彼念想識, 唯意識識同身彼見應知,
彼如是唯念想諸識彼見生因故, 如塵現相見彼生同依作事成。如是此諸識唯識住事成。
만약 아리야식의 식을 대상의 식인 진식(塵識)으로 분별하여 안립한다면, 나머지 모든 식은 그 상분의 식인 염상식(念相識이나, 오직 의식(意識)의 식과 의지처는 그 견분의 식이며,
이와 같은 그 상분(객관)의 염상식의 제식(諸識)이 견분(주관)의 색이 생기게 하는 생인(生因)인 까닭에
대상(塵)을 현상으로 나타 낼 때, 그 견분의 식이 생기하는 의지처가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이 모든 식은 유식에 머무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다.
云何有見塵而說無有義成?如佛所說: 菩薩成就四法,一切諸識解通無義事:
대상(塵)을 볼 수 있음에도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어떻게 성립되는 것인가?
부처님께서 “보살이 사법(四法)을 성취하면, 일체가 모두 식으로서, 대상의 비존재성에 통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ㅡ네 가지의 지혜를 성취한 보살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 네 가지 내용은 외적인 사물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相違識相智故,亦如餓鬼`畜生`人及諸天等,同事中見旣別。
첫째는, 다른 자의 식상(識相)에 대한 지혜인 상위식상지(相違識相智)이기 때문이니, 역시 아귀ㆍ축생ㆍ사람 및 여러 하늘인 제천(諸天)과 같이 동일한 사물에 대해서 보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며,
상위식상지(相違識相智), 같은 사물에 대해서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다르면, 그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같은 물에 대해서도 아귀는 고름이나 피가 가득한 강으로 보고, 고기는 살아가는 장소나 통로로 본다. 하늘세계 사람들은 보석으로 장식한 땅으로 보고, 인간은 깨끗한 물 또는 파도로 보는 등 제각기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만약 외적인 사물이 실재한다면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不念見覺識故,亦如過去`未來夢現相念故。
둘째는, 대상이 없음에도 인식하는 불념견각식(不念見覺識)하기 때문이니, 과거ㆍ미래ㆍ꿈에서 나타난 모습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불념견각식(不念見覺識), 실재하지 않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이 현실적으로 있음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과거나 미래의 일, 꿈속의 대상, 물이나 거울에 비친 영상 등은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는데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加意中間顚倒同順智故,所謂有塵念,彼念識不顚倒,應得不加眞智。
셋째는, 노력하는 중간과 뒤바뀜의 전도(顚倒)가 똑같이 따르게 된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가의중간전도동순지(加意中間顚倒同順智)이기 때문이니, 어떤 대상 중에 그 대상을 반연하는 식과 같이 마땅히 전도됨이 없음이 노력에 의하지 않고도 진실한 지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의중간전도동순지(加意中間顚倒同順智), 의식적인 노력인 공용(功用), 즉 수행하지 않고서 오류가 없는 무전도(無顚倒)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만약 인식대상이 인식되는 것과 같이 실재한다면 범부도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노력이나 정진을 하지 않고서도 자연히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及隨順三種智知故.
넷째는, 세 가지 지혜에 수순함을 아는 수순삼종지(隨順三種智知)이기 때문이다.
수순삼종지(隨順三種智知), 다음 세 가지 지혜를 따라 인식대상이 갖가지 존재로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如是諸菩薩及得禪定者,得心自在憶持力故,現如是事;及得舍摩他,諸行人觀法順故,唯憶念現見故;
及得無分別智,彼處住已現一切義。如是此三種智隨順義故,彼義本四諸相釋成無有義。
이와 같이 보살로서 선정을 얻고 마음의 자재를 얻은 이는 생각하여 지니는 힘에 의해 이와 같이 사물을 현현시키기 때문이며,
사마타(舍摩他, 지止ㆍ정定)를 얻어서 법의 관찰을 수행하는 이는 오직 생각하면 곧 대상이 현현하기 때문이며,
무분별지혜를 얻은 이는 그곳에 안주하여 일체를 나타내나니, 이와 같은 세 가지 지혜에 수순하기 때문이며,
그러한 의미의 네 가지를 바탕으로 해서 모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무유(無有)의 뜻이 성립되는 것이다.
若是唯識義現見依者,他性相云何?他性以何義故,說爲他性?自習種子生故,緣他性 生已剎那後自不住,有力故說他性。
만약 오직 식뿐인 유식(唯識)이 대상을 사현(似現)하는 의지처라면 의타성이 어떻게 의타기를 이루며?
어떠한 의미로써 의타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스스로의 훈습인 자습(自習)의 종자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고, 다른 것을 반연하는 성품인 연타성(緣他性)이며, 생겨난 찰나 후에는 스스로 머물지 않으며, 공능이 있기 때문에 의타성이라 하는 것이다.
ㅡ현장의 역본은 “생겨난 찰나 후에는 작용의 힘이 없고 자연히 머물기 때문에 의타기라 하는, 생찰나후무유공능자연주고 명의타기(生刹那後無有功能自然住故名依他起)”라 하였다.
본 불타선다의 역본은 “생겨난 찰나 후에는 스스로 머물지 않고 공능이 있기 때문에 의타성이라 하는, 생이찰나후자주유력고설타성(生已刹那後自住有力故說他性)이라 하여 현장 역본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彼是妄想分別,非性非所依,未曾有塵見故。彼云何妄分別?以何義故,彼名爲妄分別?無量相妄分別,顚倒相生故。妄分別者,無自相,唯妄見故,說爲妄相。
그 허망된 생각의 분별이 자성(의타성)을 의지처로 하여 일찍이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대상으로 사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허망되게 분별하는 것이며? 무슨 까닭에 그것을 허망된 분별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무량한 인식작용인 상(相)은 허망한 분별의 전도된 상(相)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허망된 분별이라고 이름하며,
자상(自相)은 존재하지 않으나, 오직 허망된 망견(妄見)이기 때문에 허망된 망상(妄相)이라 말하는 것이다.
若是成就相者,彼永無自性相,彼云何成就?以何義故,說爲成就?不以義故,說爲成就,緣淨念一切善根妙義因故,亦是上義故,名爲成就。
만약 성취상(成就相, 원성실상)이 영원히 분별성의 자성이 없다면, 그것은 어떻게 성취성을 이루는 것이며?
무슨 인연으로 성취성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변이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성취성을 이루고, 청정한 정념(淨念)을 반연하여 모든 선근의 승묘함의 원인인 묘의인(妙義因)이기 때문이며, 또한 최상의 의미이기 때문에 성취상(成就相, 원성실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復有分別及無分別,說分別性。是中何者分別?何等分別?何等分別性?意識分別,以能分別。然彼自語言習種子及一切識語言習種子故,是無量諸相分別故,行一切處分別,妄想分別故,說爲分別。
또한 분별과 분별되어지는 것이 있어서 분별성을 말하는 것이니,
이러함에서 무엇이 분별이며? 무엇이 분별되어지는 것이며? 무엇이 분별성인 것인가?
의식(意識)이 분별이니, 능히 분별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자신의 언어훈습을 종자로 삼고, 모든 식의 언어훈습을 종자로 삼기 때문이며, 그것은 무량한 인식작용으로 제상(諸相)을 분별하기 때문이며, 일체의 모든 곳을 전전하면서 분별하고 허망된 망상(妄想)으로 분별하기 때문에 분별이라 말하는 것이다.
復他性妄想念,隨所有性。他性妄想者,是彼處妄想自性。以何相?以何義故?先已釋。
云何復妄分別?以何分別?以何念?以何念取?以何慢?以何假名?以何安義名?
以念故,他性中彼念取見,彼慢分別起口業。見等四種世閒行故,非有義而言有安故,分別妄想。
또한 의타성(成就相, 원성실상)을 허망된 생각의 망상(妄想)이라 하나니, 반연된 모든 대상의 자성을 따른 타성(他性)의 허망된 망상(妄想)이고, 그 곳이 망상(妄想)의 자성인 것이다.
어떠한 상(相) 때문이며? 어떠한 의미 때문인가? 이것은 앞에서 이미 해석하였다.
또한 무엇이 허망되게 분별하는 것이며? 무엇을 분별하는 것인가?
어떠한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며? 어떠한 상을 취하는 것인가?
무엇에 의지해서 집착하는 것이며? 무엇에 의지해서 명칭을 가립(假立)하는 것이며?
무엇에 의지해서 대상과 명칭을 안립하는 것인가?
생각(念) 때문에 타성(他性) 중에서 그 생각(念)으로써 견해를 취하며, 그로 인하여 분별하여 구업을 일으키며,
보는 것 등의 네 가지 세간의 행 때문에 비존재인 비유(非有)에 대해서 존재한다고 말하여 안립한 까닭에 분별된 망상(妄想)을 하는 것이다.
此諸三性,爲同行? 爲別行? 爲別不別? 應說傍義故,他性相,他性傍義故。彼亦是妄分別傍義故,彼亦是成就。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상), 망분별상(妄分別相, 변계소집상), 성취상(成就相, 원성실상)의 이러한 세 가지 자성은 같이 작용하는 것인가? 다르게 작용하는 별행(別行)인 것인가?
다르게도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닌 별부별(別不別)인 것인가?
다른 의미로 인하여 의타성은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상)을 이루고,
다른 의미로 인하여 그것은 역시 허망된 분별성의 망분별상(妄分別相, 변계소집상)을 이루며,
다른 의미로 인하여 그것은 역시 성취상(成就相, 원성실상)을 이루는 것이다.
有何傍名義?是以他性?他性習種子,生他性因故。有何傍名義?以是彼如是妄分別,及妄分別, 及諸分別因故。有何義故,隨彼如是妄分別, 如所分別,如是彼永無義故。
다른 어떤 의미로 인하여 의타성이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상)을 이루는 것인가?
타성(他性)의 훈습의 종자가 의타성의 원인을 일으키는 원인(因)이기 때문이며,
다른 어떤 의미로 인하여 그것이 이처럼 허망된 분별성의 망분별상(妄分別相, 변계소집상)을 이루는 것인가?
이는 그것의 그러한 여시망분별(如是妄分別)과 망분별(妄分別)과 모든 분별의 원인(因)이기 때문이니, 어떠한 뜻이 있는 것인가?
그것을 따라 그와 같은 여시망분별(如是妄分別)을 하나, 그 분별의 대상과 같이 그 망분별은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즉 뜻이 없는 영무의(永無義)이기 때문이다.
有幾種他相?略有二種:一薰種子他相`二染淨性不成他相。如是此二種他相故,說爲他相。
妄分別性亦有二種:一者性分別`二者勝分別故。以爲分別,成就性,亦有二種:一者性成就故`二者淨成就故。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상)에 몇 가지가 있는 것인가? 의타상에 대략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훈습된 종자의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상)이고,
둘째는 잡염과 청정의 성품이 성립되지 않는 의타상(依他相, 의타기상)이니,
이와 같이, 이러한 두 가지의 의타상 때문에 의타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망분별상(妄分別相, 변계소집상)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의 분별인 성분별(性分別)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차별의 분별인 승분별(勝分別)이기 때문이니, 이로 인하여 분별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성취성의 성취상(成就相, 원성실상)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의 성취인 성성취(性成就)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청정의 성취인 정성취(淨成就)이기 때문이다.
分別復有四種:一者性分別`二勝分別`三覺分別`四不覺分別。覺分別者,解義事善巧故。不覺分別者,不解義事不善巧故。
분별(分別)에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의 분별인 성분별(性分別)이고, 둘째는 차별의 분별인 승분별(勝分別)이며,
셋째는 각분별(覺分別)이고, 넷째는 불각분별(不覺分別)이니,
각분별(覺分別)은 의미를 훌륭하게 이해하기 때문이고, 불각의 분별은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復有五種:一名所依義分別,所謂此名有是義爾;二義所依名性分別,所謂此義有此名爾;三名依名性分別者,所謂不決定義名分別故;四所依義性分別者,未決定名義分別故。彼二依彼分別,所謂此義,如是身如是名爾,攝一切義故。
다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명칭에 의지해서 대상(義)을 분별하는, 명소의분별(名所依義分別)이니, 이러한 명칭에 이러한 대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둘째는 대상에 의지해서 명칭의 자성을 분별하는, 의소의명성분별(義所依名性分別)이니, 이러한 대상에 이러한 명칭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명칭에 의지해서 명칭의 자성을 분별하는, 명의명성분별(名依名性分別)이니, 결정하지 않은 대상의 명칭을 분별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대상에 의지해서 대상의 자성을 분별하는 소의의성분별(所依義性分別)이니, 아직 결정하지 못한 명칭의 대상을 분별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두 가지에 의지해서 두 가지의 자성을 분별하는, 이의피분별(二依彼分別)이니, 이러한 것은 이러한 명칭이며, 이와 같이 모든 뜻을 포섭한다고 분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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