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6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5

 

▶論曰:如是菩薩,已入於地`已得見道`已入唯識,於修道中,云何修行? 於如所說,安立十地,攝一切經,皆現前中,由緣摠法出世後得止觀智故,經於無量百千俱胝那庾多劫數修習故,而得轉依.爲欲證得三種佛身,精勤修行.

▷논문; 이렇게 해서 보살은 10지(地) 중에 들어가서 견도(見道)를 얻어 유식의 이치에 들어간다.

수도(修道) 중에서는 어떻게 수행하여야 하는가? 

말한 바와 같이 안립된 10지의 모든 경전을 포섭하여 현전하는 중에서, 총체적인 총법(摠法)을 반연하는 출세의 후득지관의(後得止觀) 지혜에 의거하고, 무량한 백천 구지(俱胝, 억億) 나유다(那庾多)겁을 지나서 누누이 닦아 익힘으로써 전의(轉依)를 얻어 삼불신(三佛身)을 증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다.

5 중에서 통달위인 견도(見道) 수습위인 수도(修道) 수행을 설명하였다.

 

견도(見道)는 무루(無漏)의 바른 지혜인 정지(正智)가 처음으로 진리를 비추는 때를 말한다. 초지(初地)의 입심(入心)에서 존재한다.

구지(俱胝), 범어 koṭi의 음역어로서, 억(億)이라 번역하며, 인도에서 쓰던 숫자의 단위이다.

나유다(那庾多), 범어 nayuta의 음역으로서 매우 큰 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천만(千萬) 또는 천억(千億)이라 한다.

 

▶釋曰:於如所說安立十地者,謂於隨說安立菩薩十種地中.由緣摠法者,謂緣摠相,非分別緣.

해석한다; ‘말한 바와 같이 안립된 10지’란, '십지경(十地經)'에서 말씀하신 바에 따라 안립 보살의  가지 지위를 말하며,

‘총체적인 총법(摠法) 반연한다’는 것은 총체적인 총상(摠相)을 반연하는 것으로, 분별해서 반연하지 않는, 즉 하나하나의 상을 각각 별도로 반연하지 않고, 전체를 하나의 상으로 해서 그 공통된 상, 즉 진여를 반연하는 것이다.

 

言出世者,無分別智.後得卽是能成立智,此不應說唯是世閒,由於世閒,未積習故;亦不應說唯出世閒,由隨世閒,而

現前故,由是因緣,不可定說.而得轉依者,由緣摠智,故得轉依.爲欲證得三種佛身,精勤修行者,謂我當證三種佛身,故勤修行.

‘출세간’이란 무분별지혜를 말하고,

‘후득’은 능히 성립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즉 후득지(後得智)가 일체법의 차별상을 능히 성립하는 지혜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마땅히 오직 세간이라고 말해서는  되는 것으로, 세간에 대해서 아직 쌓아 익히지 않은 때문이며,

역시 오직 출세간이라고 말해서도  되는 것이니, 세간을 따라 현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후득지는 세간의 지혜 또는 출세간의 지혜의 어느 한 가지라고 결정적으로 말할  없는 것이다.

‘전의를 얻는다’는 것은 총체적인 총상(摠相) 반연하는 지혜에 의거함으로써 전의를 얻는 것을 말하며,

‘세 가지불신을 증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한다’는 것이란, 스스로가 장차 삼불신을 증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현관(現觀),문자 그대로의 뜻은 '앞에 있는 경계 즉 대상을 관(觀)한다'는 뜻인데, 산스크리트어 원어 아비삼마야(abhisamaya)는 아비사미(abhisami)와 동의어로, 서로에게 다가가다(approach together), 합치다 또는 합일하다(come together) 또는 만나다(meet at)를 뜻한다. 즉, 지혜와 대상이 바로 직접 만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관(現觀)은 무루의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 즉 명료한 이해(clear understanding), 각(覺, Buddh) 즉 깨달음(Buddh, realization)이라고도 정의된다.

불교에서 현관(現觀)이라고 할 때, 그 대상은 진리를 말하는데, 부파불교의 4제현관(四諦現觀)과 대승불교의 6현관(六現觀)이 있다. 

 

ㅡ이하는 성문과 보살의 현관(現觀) 차이를 11가지로 설명한다.

▶論曰:聲聞現觀`菩薩現觀,有何差別?謂菩薩現觀,與聲聞異,由十一種差別應知. 一由所緣差別,以大乘法,爲所緣故;二由資持差別,以大福智二種資糧,爲資持故;三由通達差別,以能通達補特伽羅法無我故;四由涅槃差別,攝受無住大涅槃故;五由地差別,依於十地而出離故;六七由淸淨差別,斷煩惱習,淨佛土故;八由於自他得平等心差別,成熟有情加行無休息故;九由生差別,生如來家故;十由受生差別,常於諸佛大集會中,攝受生故;十一由果差別,十力`無畏`不共佛法無量功德果成滿故.

논문; 성문의 현관(現觀)과 보살의 현관(現觀)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보살의 현관과 성문의 현관에 11가지 차이가 있으며, 이에 의한 것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번째는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의 차이에 의하는 것이니, 대승법으로써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을 삼기 때문이며,

 번째는 자량(資糧)을 지니는 것의 차이에 의하는 것이니,  복과 지혜의  가지 자량으로써 깨달음의 바탕 삼기 때문이며,

 번째는 통달의 차이에 의하는 것이니, 능히 보특가라의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에 통달하기 때문이며,

 번째는 열반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생사와 열반에 머무름이 없는 대열반을 섭수하기 때문이며,

다섯 번째는 지위의 차이에 의하는 것이니, 10지에 의지해서 벗어나기 때문이며,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는 청정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번뇌와 습관을 끊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며,

여덟 번째는 자신과 남에 대해서 평등심을 얻는 차이에 의한 것이니, 유정을 성숙시키는 가행은 휴식함이 없기 때문이며,

아홉 번째는 태어남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여래가(來家故)에 태어나기 때문이며,

 번째는 생을 받는 차이에 의한 것이니, 항상 모든 부처님의  법회에서 생을 섭수하기 때문이며,

열한 번째는 증과(果)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10력(力)ㆍ네 가지 두려움이 없음의 사무외(四無畏)ㆍ18 불공법(不共法)인 부처님법의 무량한 공덕의 증과를 원만히 이루기 때문이다.

 

십력(十力), 부처님만의 열 가지 지혜의 힘으로, 첫째, 바른 도리와 그렇지 않은 도리를 변별하는 지혜의 힘.

둘째, 선악업과 그 과보를 여실하게 아는 지혜의 힘.

셋째, 4선(禪)ㆍ8해탈(解脫)ㆍ3삼매(三昧)ㆍ8등지(等持) 등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넷째, 중생의 근기의 고하(高下) 우열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다섯째, 중생의 여러 가지 의욕 성향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여섯째, 중생계와 그 성류(性類)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일곱째, 어떤 수행에 의해서 어떤 도에 나아가는가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여덟째, 중생의 숙명(宿命)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아홉째, 중생의 미래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열째, 모든 번뇌가 다한 것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사무외(四無畏), 부처님께서 10력(力)을 갖추셨으므로 다음과 같은 두려움이 없음을 말한다.

① 모든 것을 아는 분인 ‘일체지자’로서의 자신감, ② 모든 번뇌를 극복했다는 자신감,

③ 모든 장애를 극복한 까닭에 수행에 장애되는 길을 말할 수 있는 자신감,

④ 모든 괴로움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말할 수 있는 자신감.

18 불공법(不共法)이라 함은 범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라한ㆍ벽지불 또는 보살과도 공통되지 않는 부처님 특유의 법이다. 이에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3염주(念住)ㆍ대비(大悲)의 18가지가 있다.

 

▶釋曰:由涅槃差別者,以菩薩現觀攝受無住大般涅槃,聲聞不爾.由淸淨差別者,以菩薩現觀永斷煩惱及諸習氣,能淨佛土,聲聞不爾.

해석한다; ‘열반의 차이에 의거한다’는 것은 보살의 현관은 생사와 열반에 머물지 않는 대열반을 섭수하지만 성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며,

‘청정의 차이에 의해서’란 보살의 현관은 번뇌와 모든 습기를 영원히 끊고 능히 불국토를 청정케 하지만 성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論曰:此中有二頌:

논문; 이러함에 대하여 두 게송이 있으니, 

 

“名事互爲客, 其性應尋思, 於二亦當推, 唯量及唯假.

명칭(名)과 사물(事)은 서로 객(客)이 되나니,  속성을 마땅히 심사(尋思, 사색)해야 하리니,

오로지 인식작용인 유량(唯量)과 오로지 가립인 유가(唯假)라는 둘에 대해서도 마땅히 추리해야 하네.

 

實智觀無義, 唯有分別三, 彼無故此無, 是卽入三性.”

진실된 실지(實智)는 대상의 비존재인 무의(無義)로서, 오직  가지의 분별(分別)이 있을 뿐임을 관찰하네.

저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도 없는 것이니, 이것이 성(三性)에 들어가는 것이라네.

진제 역본인 진본(陳本)이나 급다(笈多)ㆍ행구(行矩) 역본인 수본(隋本)에는 3무성(無性)으로 되어 있다.

 

▶釋曰:將入眞觀,故說二頌.名事互爲客,其性應尋思者,謂名於事爲客,事於名爲客,非稱彼體故.

해석한다; 장차 참된 관찰에 들어가기 위해서 두 개의 게송을 말하였다.

‘명칭(名)과 사물(事)이 서로 객(客)이 되니, 그 속성을 마땅히 사색해야 하네’란,

명칭(名)은 명칭에 의지해서 나타내어지는 사상(事相), 즉 사물(事)에 대해서 객(客)이 되고, 사물(事)은 명칭(名)에 대해서 객(客)이 되는 것이니, 그것의 자체에 계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명칭(名)과 사물(事)이 서로 객관이 되어 각각 다르게 떨어져 있는 것은 명칭(名)과 사물(事)이 하나의 체(體)가 아니기 때문이다.

 

由定而觀,故名尋思. 於二亦當推唯量及唯假者,應當推尋義之自性 `差別竝無,唯有識量,唯有自性`差別假立.

선정에 의거해서 관찰하기 때문에 심사(尋思, 사색)라고 하는 것이며,

‘오로지 인식작용인 유량(唯量)과 오로지 가립인 유가(唯假)라는 둘에 대해서도 마땅히 추리해야 하네.’란,

마땅히 대상의 자성과 차별도 모두 비존재인 무의(無義)이고, 오직 식의 인식작용만이 있고, 오직 자성과 차별의 가립(假立)만이 있다고 추리해야 하는 것이다.

 

言實智者,應知卽是如實遍智,謂由四種尋思爲因,發生四種如實遍智.

‘참다운 지혜의 실지(實智)’란, 곧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여실편지(如實遍知)이다.

네 가지의 심사(尋思, 사색)을 원인으로 함으로써 발생되는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네 가지의 지혜인 사여실편지(四如實遍知)인 것이다.

 

所言觀無義唯有分別三者,謂觀於義本無所有,唯有三種虛妄分別,謂名分別`自性分別`差別分別. 彼無故此無者,謂義無故,分別亦無.何以故?若有所分別義,可有能緣分別;由義無所有故,當知分別亦無.

‘대상의 비존재인 무의(無義)로서 오직 세 가지의 분별(分別)이 있을 뿐임을 관찰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대상(義)에 대해서 본래부터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오직 세 가지의 허망분별이 있을 뿐임을 관찰하는 것이니,

명칭의 분별인 명분별(名分別), 자성분별(自性分別), 차별분별(差別分別)이 그 세 가지이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도 없다’는 것은 대상(義)이 없기 때문에 분별(分別) 역시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만약 분별되는 대상(義)이 존재한다면 인식의 주체인 분별도 존재해야 하는 것이나, 대상(義)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이기 때문에 분별 역시도 없는 것이다.

 

是卽入三性者,謂於此中,悟入三性,觀見名事互爲客故,卽是悟入遍計所執性.觀見二種本無有義,唯有分別量,唯有名自性`差別假立故,卽是悟入依他起性. 亦不觀見此分別故,卽是悟入圓成實性.如是名爲悟入三性.

‘이것은 곧 세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중에서 세 가지 자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명칭(名)과 사물(事)이 서로 객(客)이 됨을 관찰함으로써 곧 변계소집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며, 

명칭(名)과 사물(事), 두 가지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고, 오직 분별의 인식작용이 있을 뿐이며, 오직 명칭의 명분별과 자성분별과 차별분별의 가립이 있을 뿐임을 관찰함으로써 곧 의타기자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며,

역시 이러한 분별도 관찰하지 않음으로써 곧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ㅡ앞에서 능히 반연하고 분별하는 식을 인정하여 명칭의 자성과 차별을 가립했는데, 다시 나아가  인식주체인 분별식마저도 보지 않는, 경식구민(境識俱泯)이면 아공ㆍ법공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세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6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4

 

是諸菩薩,所緣名類略有十種:一法名,謂眼等;二補特伽羅名,謂我等;三法名,謂十二分教;四義名,謂此十二分教所詮諸義;五略名,謂一切法,爲無爲等;六廣名,謂色受等,及虛空等;七姓名,謂阿字爲初,訶字爲後;

이러한 보살의 소연명(所緣名, 인식대상의 명칭)의 종류로서 대략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의 명칭인 법명(法名)으로, 눈 등을 말하며,

둘째는 보특가라의 명칭(名)이니, 이른바 자아의 아(我) 등이며,

셋째는 교법의 법명(法名)이니, 12분교(分敎)를 말하며,

넷째는 의미(義)의 명칭(名)이니, 이른바 이 12분교로 말해지는 모든 것의 뜻이며, 

다섯째는 대략(略)의 명칭(名)이니, 일체법ㆍ유위법ㆍ무위법 등을 말하며,

여섯째는 자세함(廣)의 명칭(名)이니, 이른바 물질(色)ㆍ감수작용(受) 등과 허공 등이며,

일곱째는 본성(性)의 뜻이니, 아자(阿字)를 최초로 삼고 하자(訶字)를 마지막으로 삼는 것이다.

ㅡ범어의 37가지 자모(字母) 중에서 최초의 a자와 최후의 자를 들고 중간은 생략하였다.

 

八不淨名,謂諸異生;九淨名,謂諸見諦;十究竟名,謂一切法摠相所緣,卽是二智所緣境界.

謂出世智及後得智, 以一切法眞如實際,爲所緣故,以一切法種種相別,爲所緣故, 如十地等.

여덟째는 부정(不淨)의 명칭(名)이니, 이른바 모든 범부이며,

아홉째는 청정(淨)의 명칭(名)이니, 진리를 본 성자들을 말하는 것이며,

열째는 구경(究竟)의 명칭(名)이니, 이른바 일체법의 총체적인 총상(摠相)의 소연(所緣, 인식대상)으로, 이것은 곧 두 가지 지혜인 이지(二智)의 소연경계(所緣境界, 인식대상의 경계)이다.

즉,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지(出世智)와 후득지(後得智)는 일체법의 진여 실제로써 소연(인식대상)을 삼기 때문이고,

일체법의 갖가지 상의 차이로써 소연(인식대상)을 삼기 때문이니, 10지(地) 등과 같은 것이다.

ㅡ10지의 관법(觀法) 중에서는 지위마다 각기 다른 법을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此中意取,於一切義摠相緣智所緣境界,如是品類,是諸菩薩,名所行別.

이러한 의취(意取)는 일체의 모든 뜻과 총상(摠相)을 반연하는 지혜의 소연경계(所緣境界, 인식대상의 경계)이며,

이상과 같은 품류가 모든 보살의 명칭(名)이 행하는 바의 차별인 것이다.

 

▶論曰:如是菩薩,悟入唯識性故,悟入所知相;悟入此故,入極喜地,善達法界,生如來家,得一切有情平等心性,得一切菩薩平等心性,得一切佛平等心性,此卽名爲菩薩見道.

▷논문; 보살은 이와 같이 유식성(唯識性)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알아야  바의 소지상(所知相) 깨달아 들어가나니,

이러함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극희지(極喜地)에 들어가게 되고, 

법계를  통달하게 되며, 여래가(如來家)에 태어나고, 모든 유정과 평등한 심성을 얻으며, 

모든 보살과 평등한 심성을 얻고,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심성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를 보살의 견도(見道)라 이름하는 것이다.

 

▶釋曰:生如來家者,由此能令諸佛種性,無斷絕故.得一切有情平等心性者,由作是思;如我自身,欲般涅槃,一切有情,亦如是故.得一切菩薩平等心性者,由得菩薩等意樂故.得一切佛平等心性者,由此位中,得佛法身,證得此故,得一切佛平等心性.

의요(意樂), 어떤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마음

해석한다; ‘여래가(如來家)에 태어난다’는 것은 이로 인하여 능히 모든 부처님의 종성이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유정과 평등한 심성을 얻는다’는 것은,  스스로가 반열반하고자 하는 것과 같이, 모든 유정들 역시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과 평등한 심성을 얻는다’는 것은 보살과 평등한 의요(意樂)를 얻는 때문이며,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심성을 얻는다’는 것은  지위에서 부처님의 법신을 얻고, 이를 증득함으로써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심성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한다.

 

又得一切有情平等心性者,謂證自他平等性故,如於自身,欲盡衆苦,於他亦爾.得一切菩薩平等心性者,謂與一切菩薩,意樂加行,皆平等故.得一切佛平等心性者,見彼法界,與己法界,無差別故.

또한, ‘모든 유정과 평등한 심성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과 남이 평등한 성품임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에게 있는 갖가지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것과 같이, 남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며,

‘모든 보살의 평등한 심성을 얻는다’는 것은, 의요(意樂)와 가행(加行)이 보살과 모두 평등한 때문이며,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심성을 얻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법계와 자신의 법계가 차이가 없음을 보기 때문이다.

ㅡ다른 뜻을 서술한 것이.

 

▶論曰:復次爲何義故,入唯識性?由緣摠法,出世止觀智故,由此後得種種相識智故. 爲斷及相阿賴耶識諸相種子`爲長能觸法身種子

논문; 또한 어떤 의미에 의거해서 유식성(唯識性)에 들어가는 것인가? 

총체적인 총법(摠法)을 반연하는 출세간의 지관(止觀)의 지혜에 의거하기 때문이고, 

후득(後得)의 갖가지 상식(相識)의 지혜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상(相)인 아뢰야식의 모든 상의 종자를 단절하기 위해서, 능히 법신에 이르는 종자를 증장하기 때문이다. 

ㅡ여기서 상(相) 아뢰야식의 삼상(三相)인 자상(自相)ㆍ고상(果相)ㆍ인상(因相) 가운데에서 원인의 인상(因相)을 말하는 것이.

 

`爲轉所依`爲欲

소의(所依,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이며,

ㅡ소의(所依, 의지처)의 식을 전환하여 반야의 지혜를 이루는 전의(轉依)인 것이다.

 

證得一切佛法`爲欲證得一切智智,入唯識性.

모든 불법을 증득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얻고자 함으로써 유식성에 들어가는 것이다.

 

又後得智,於一切阿賴耶識所生,一切了別相中,見如幻等性無倒轉.是故菩薩,譬如幻師,於所幻事,於諸相中,及說因果,常無顚倒.

또는 후득지(後得智)는 아뢰야식이 일으키는 모든 요별(了別)과 상(相) 있어서, 요술(幻) 등의 성품과 같이 전도됨이 없이 보는 것이다. 

이러함으로 인하여, 보살은 비유하면 요술쟁이가 요술로 일으킨 환사(幻事)와 같이 모든 상과 인과를 말함에 있어서 항상 전도됨이 없는 것이다.

 

▶釋曰:由緣摠法,出世止觀智故者,謂由止觀所顯智故.爲斷及相阿賴耶識諸相種子者,此中及相是及因義,於阿賴耶識中,諸雜染法種子,名阿賴耶識諸相種子.復擧相者,爲欲顯示卽彼種子,是所緣相. 如是說已,顯彼種子,因果俱斷.

해석한다; ‘총체적인 총법(摠法) 반연하는 출세간의 지관(止觀)의 지혜에 의거하기 때문’이란, 이른바 지관에서 나타나는 지혜에 의거하기 때문이며,

‘상(相)인 아뢰야식의 모든 상(相)의 종자를 단절하기 위해서’에서, ‘상(相)’은 원인의 뜻이다. 아뢰야식 안의 모든 잡염법의 종자를 아뢰야식의 모든 상의 종자라고 하는 것으로, 다시 상(相)을  것은   종자가 소연상(所緣相, 인식대상의 상)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니, 이렇게 말함으로 인해서  종자의 원인과 결과를 함께 단절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ㅡ상이란 언어에 의지해서 능훈(能熏) 결과의 상을 보이는 것이므로 다음에 종자의 원인과 결과를 함께 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若無分別智,斷一切障,證得佛法,此後得智,復何所用? 無分別智,不能宣說諸因果法,無分別故. 由是因緣,須後得智,宣說所有諸因果法,常無顚倒,譬如幻師, 於所幻事.

만약 무분별지혜에 의해 모든 장애를 끊고 불법을 증득한다면,  후득지(後得智)가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가? 

무분별지혜는 모든 인과법을 널리 말할  없는 것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후득지(後得智)가 필요로 하며, 모든 인과법을 널리 말하는  항상 전도되지 않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요술쟁이가 요술로 만든 사물과 같은 것이다.

 

於一切阿賴耶識所生者,謂阿賴耶識爲因.一切了別相中者,謂識爲因,見相分中,由後得智,見如幻等,及宣說時,皆無顚倒.

‘아뢰야식이 일으킨 모든 것’이란 아뢰야식이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모든 요별과 상에 있어서’란, 식이 원인이 되는 견분과 상분을 말하는 것으로,

후득지에 의거해서 요술 등과 같이 보며, 널리 설할 때에 전도됨이 없는 것이다.

 

▶論曰:於此悟入唯識性時,有四種三摩地,是四種順決擇分依止. 云何應知?

▷논문; 이 유식성에 깨달아 들어갈   가지의 삼마지가 있으며, 이것은  가지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의지이니, 어떻게 알아야 하는 것인가? 

 

순결택분(順決擇分),난위(煖位)ㆍ정위(頂位)ㆍ인위(忍位)ㆍ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의 네 가지 선근의 지위이며,

자량위(資糧位)ㆍ가행위(加行位)ㆍ통달위(通達位)ㆍ수습위(修習位)ㆍ구경위(究竟位)의 5위(位) 중에서 가행위(加行位)는 통달위인 견도(見道)에 수순하고 그것을 이끌어 내는 단계이므로 순결택분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진실결택분에 수순하고, 또한 무루의 지혜가 생겨나서 진리를 보는 통달위에 가까이 준비하기 때문이다.

 

應知由四尋思,於下品無義忍中,有明得三摩地,是煖順決擇分依止.於上品無義忍中, 有明增三摩地, 是頂順決擇分依止.

네 가지 사색의 4심사(四尋思)에 의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나니, 

하품(下品)의 대상이 없는 무의인(無義忍) 중에 명득삼마지(明得三摩知)가 있으니, 이것은 난위(煖位)의 순결택분의 의지이며,

상품(上品)의 대상 없는  중에 명증삼마지(明增三摩地)가 있으니, 이것은 정위(頂位)의 순결택분의 의지(依止)이다.

 

명득삼마지(明得三摩知), 보통 명득정(明得定)이라 하며, 4선근위(善根位) 중의 난위(煖位)에서 하품(下品)의 심사관(尋思觀)을 일으켜서 취할 대상의 경계가 공함을 관찰하는 선정으로, 이 선정에 의해서 처음으로 무루지혜의 전상(前相)을 얻게 되므로 명득정이라 한다.

난위(煖位), 난(煖)은 따뜻함을 느끼는 것과 같이 견도무루지화(見道無漏智火)의 전상(前相)으로 뛰어난 유루의 지혜가 일어나는 것을 말하며, 지혜를 증득하려고 준비하는 단계이다.

명증삼마지(明增三摩地), 명증정(明增定)이라 하며, 정위(頂位)에서 상품(上品)의 심사관을 발하여 취할 대상의 경계가 공함을 관찰하는 선정으로, 이 선정에서 지혜의 밝은 상이 점점 더해지게 됨으로 명증정이라 한다.

정위(頂位), 네 가지 선근 중에서 난위ㆍ정위를 동선(動善)이라 하고, 인위ㆍ세제일위를 부동선(不動善)이라고 한다. 정위는 동선 중에서 최극위(最極位)이므로 마치 사람의 정수리와 같다고 해서 정위라 한다.

 

復由四種如實遍智,已入唯識,於無義中,已得決定,有入眞義一分三摩地,是諦順忍依止.從此無閒,伏唯識想,有無閒三摩地,是世第一法依止.應知如是諸三摩地,是現觀邊.

다시  가지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4여실편지(四如實遍知)에 의거해서 유식성에 들어가나니,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에 대해서 이미 결정적으로 알고, 대상의 진실성인 진의(眞義)의 일부분에 들어가는 삼마지가 있으니, 이것이 진리의순인위(諦順忍位)의 의지(依止)이며,  

이것으로부터 다음 찰나에 유식의 표상작용인 유식상(唯識想)을 조복하는 무간삼마지(無間三摩地)가 있으니, 세제일법(世第一法)의 의지(依止)이니,  

이와 같은 여러 삼마지는 현관의 궁극인 현관변(現觀邊)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ㅡ난위에서 대상이 공함을 관찰하는 것은 하품(下品)의 심사관(尋思觀)이고, 

정위에서는 대상이 공함을 확실하게 관찰하는 것은 상품(上品)의 심사관이고,

인위에서는 대상이 공함을 인가하고, 나아가 인식주체도 공함을 관찰하여 인가하며는 하품의 여실지관이고,

세제일위에서는 대상과 주체가 공함을 ()으로 인가하는 것이다.

 

진의(眞義), 취착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를 공(空)으로 볼 뿐만 아니라, 취착된 인식주체인 능취(能取)도 공으로 보아 대상도 식도 모두 공임을 아는 것이다.

제순인위(諦順忍位), 보통 인위(忍位)라 하며, 보살이 인순정(印順定)으로부터 하품의 여실변지(如實遍智)를 내어서 능취(能取)가 공함을 관찰하여 인가(認可) 결정하는 지위이다.

세제일법(世第一法), 보살의 수행계위인 52위(位) 가운데 10회향의 만심(滿心)에서 무간정(無間定)에 의해 상품의 네 가지 여실변지(如實遍智)를 내어서, 인식의 대상뿐만 아니라 관하는 식 그 자체를 공무(空無)라고 분명하게 결택한다. 이 지위에서 일어나는 선근은 유루법 가운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세제일법이라 한다.

현관변(現觀邊), 현관(現觀)은 범어 abhisamaya의 번역어로서, 현전(現前)에서 직접 명료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현관변은 현관의 후변(後邊)에서 얻는 유루(有漏)인 세속의 지혜를 말하며, 보살이 비안립제관(非安立諦觀)에 들어가기 전의 방편이다.

 

▶釋曰:於一切處,入眞觀時,皆有四種順決擇分,故於此中,亦應顯示.是順決擇分依止者,謂決擇分因所依止義.於下品無義忍中,有明得三摩地者,謂於無義中,起下品愛樂,以其明名顯下品無義智, 三摩地名顯此無義智所依止定.

해석한다; 모든 곳에서 참된 진관(眞觀)에 들어갈 때에는, 모두  가지의 순결택분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역시 나타내는 것이니,

‘순결택분의 의지(依止)’는 결택분의 원인으로서 의지처의 의미이며,

‘하품(下品)의 대상이 없는 무의인(無義忍) 중에 명득삼마지가 있다’는 것은 하품의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無義) 가운데 애락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며, 그 명(明)의 명칭으로써 하품의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인(無義忍)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삼마지의 명칭은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인(無義忍)임을 아는 지혜의 의지처인 선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於上品無義忍中者,謂於無義中,起上品愛樂.有明增三摩地者,謂以明名顯上品無義智,三摩地名顯此無義智所依止定.諦順忍依止者,法無我理名諦,此忍順彼名諦順忍.此云何成?謂於外無中,已決定者,於無能取,亦深愛樂,應知於利順忍轉時.是現觀邊者.謂現觀時義.

‘상품의 대상이 없는 무의인(無義忍) 중에’란,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無義) 가운데 상품의 애락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며,

‘명증삼마지가 있다’는 것은 명(明)의 명칭으로써 상품의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無義)를 아는 지혜를 나타내고, 

삼마지의 명칭은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無義)를 아는 지혜의 의지처인 선정을 나타낸다.

‘진리의 순인위의 제순인(諦順忍)의 의지(依止)’는 법무아(法無我)의 이치를 진리인 제(諦)라 부르고, 이것의 인(忍)  그것에 수순함을 진리의 순인(順忍)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無義)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아는 이는 인식주체인 능취(能取)가 없음에 대해서도 역시 깊이 기뻐하는 것이다. 

지혜의 작용이 예리하고 강렬한 순인이 전전할 때가 ‘현관의 궁극인 현관변(現觀邊)’이니, 현관의 시기라는 뜻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6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3

 

▶論曰:由四尋思,謂由名`義`自性`差別,假立尋思;

及由四種如實遍智,謂由名`事`自性`差別,假立如實遍智,如是皆同不可得故.

논문; 네 가지 사색인 4심사관(四尋思觀)에 의거하는 것으로, 이른바 명칭(名)ㆍ대상(義)ㆍ자성(自性, 자체의 체성體性)ㆍ차별(差別, 모습과 작용의 차별성)에서 가립된 사색에 의거하며,  

그리고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두루 아는  가지 지혜인 사종여실편지(四種如實遍智)에 의거하나니, 이른바 명칭(名)ㆍ사물(事)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에서 가립되어 있는 그대로 두루 여실하게 아는 여실편지(如實遍知)에 의거하나니, 

이러한 것들 모두는 얻지 못하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다.

 

4심사관(四尋思觀) 인식의 대상인 명칭(名)ㆍ대상(義)ㆍ자성(자체의 체성體性)ㆍ차별(모습과 작용의 차별성)의  가지 법이 임시적인 존재인 가유(假有)이고 실무(實無)라고 심구(尋求)하여 사찰(思察)하는 관법이다.

4여실지관(四如實智觀)  가지 심사관 다음에 다시 명확히 인가(認可) 결정하고 또한 이렇게 관찰하는 마음인 능취심(能取心)까지도 가유실무(假有實無)라고 인가 결정하는 관법이다.

 

以諸菩薩,如是如實爲入唯識,勤修加行,卽於似文似義意言,推求文名唯是意言, 推求依此文名之義, 亦唯意言, 推求名義自性差別,唯是假立.若時證得唯有意言,爾時,證知若名若義, 自性`差別,皆是假立,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유식에 깨달아 들어가기 위해서 부지런히 닦고 가행함으로써  글자(文)와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는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에 대해서, 글자(文)와 명칭(名)은 오직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일 뿐이라고 추구하는 것이다. 

또한  글자(文)와 명칭(名) 의지하는 의미(義)도 역시 오직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일 뿐이라고 추구하며,

명칭(名)과 대상(義)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은 오직 가립일 뿐이라고 추구하는 것이니,

오직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득한다면, 그 때에 명칭(名)이나, 대상(義)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 모두 가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自性`差別義相無,故同不可得.由四尋思,及由四種如實遍智,於此似文似義意言,便能悟入唯有識性.

자성과 차별에는 대상(義)의 상이 없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인 것이다.

 가지 사색의 4심사(四尋思)와  가지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4여실지(四如實智) 의거해서,  글자(文)와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는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에 대해서, 오직 식(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능히 깨닫는 것이다.

ㅡ가행위에서 닦는 4심사관(四尋思觀) 4여실지관(四如實智觀) 대한 설명으로,


釋曰:如是悟入,今當顯示.由四尋思者,謂由名`義`自性等文之所顯說.及由四種如實遍智者,謂由名`事`自性`差別,假立等文之所顯說.如實遍知若名`若事`自性`差別,皆是假立,於中實義,皆不可得,是故說言,如是皆同不可得故.又先推求若名`若義`自性`差別,唯是假立,後如實知,如是眞實皆不可得, 於推求時,名爲尋思.若如實知,不可得時,卽名四種如實遍智.

해석한다; 이와 같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이제 나타내 보이겠으니,

‘4심사(四尋思)에 의거한다’는 것은 ‘명칭(名)과 대상(義)의 자성(自性) 등에 의거한다’는 문장에서 말하는 바이며,

‘4여실지(四如實智)에 의거한다’는 것은 ‘명칭(名)과 사물(事)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에 의거해서 가립한다’ 등의 문장에서 말하는 바이다.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여실지(如實智) 명칭(名)이나 사물(事)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 모두 가립으로서, 그로부터  참다운 실의(實義) 얻을 수가 없으므로, 마찬가지로 이러한 것들 모두는 얻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먼저 명칭(名)이나 대상(義)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 4심사관(四尋思觀)에 의해서 오직 가립임을 추구하고,

나중에 있는 그대로 여실한 것들은 사여실변지관(四如實遍智觀)에 의해서 참으로 무소득임을 아는 것이다.

추구하여 사색하는 때를 심사(尋思)라 하고,

무소득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을 사여실변지(四如實遍智) 이름하는 것이다.


▶論曰:於此悟入唯識性中.何所悟入?如何悟入?入唯識性,相見二性及種種性,若名`若義`自性`差別假自性差別義,如是六種義皆無故,所取`能取性現前故, 一時現似種種相義而生起故.

논문; 이 유식성 안에 깨달아 들어감에 있어서, 어느 곳에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며? 

어떻게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유식성과 상분(相分)ㆍ견분(見分)의  성품과 갖가지 성품에 들어가는 것이다. 

명칭(名)이나, 대상(義)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ㆍ가유의 자성인 가자성(假自性)ㆍ차별의 대상인 차별의(差別義),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의미는 모두 없는 무(無)이기 때문이다. 

취착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취착된 인식주체인 능취(能取)의 성품이 현전하기 때문이고,

동시에 현전하여 갖가지 상과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如闇中繩顯現似蛇,譬如繩上蛇非眞實,以無有故.若已了知彼義無者,蛇覺雖滅,繩覺猶在.若以微細品類分析,此又虛妄色`香`味`觸,爲其相故,此覺爲依繩覺當滅.

어두울 때에 노끈이 뱀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비유하자면 뱀이라고 생각한 노끈, 즉 그 뱀은 진실이 아닌 것이니, 존재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대상이 비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뱀이라는 지각은 없어졌으나 노끈의 지각은 아직 남아 있으니,  

만약 미세한 품류로써 분석한다면, 이 노끈의 상 또한 허망한 것이니, 빛깔(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을  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렇게 빛깔(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을 지각하는 것 의지처로 삼는다면, 노끈의 지각도 마땅히 멸하여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如是於彼似文似義六相意言,伏除非實六相義時, 唯識性覺,猶如蛇覺,亦當除遣,由圓成實自性覺故.

이상과 같이  문장(文)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한 여섯 가지 육상(六相)의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 속의 언어에 대해서 진실하지 못한 육상(六相)의 뜻을 조복할 때, 유식성의 지각은 마치 뱀의 지각과 같이 마땅히 없어져야 하는 것이니,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의 지각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釋曰: 今於此中,問所悟入及悟入譬. 唯識性者,唯有識性. 相見二性者,顯示有相, 有見之識, 顯現似因似所建立, 故名爲相. 種種性者,唯是一識顯現, 似有種種相生,非速疾故, 別別而現.於此悟入唯識性中,如是三種爲所悟入.

해석한다; 여기에서는 깨달아 들어가는 바의 소오입(所悟入)과 깨달아 들어감의 비유인 오입비(悟入譬)를 묻는 것이다. 

‘유식성(唯識性)’은 오직 식만이 존재하는 성품이며,

‘상분과 견분의  성품’은 유상식(有相識)과 유견식(有見識)을 나타내는 것으로, 원인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건립된 것과 비슷하게 현현하기 때문에 상이라 한다.

‘갖가지 성품’은 오직 하나의 식(識)이 현현할지라도, 존재(有)와 비슷한 갖가지  생겨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빠르게  지나가지 않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유식성(唯識性)에 깨달아 들어감에는 이와 같은  가지를 깨달아 들어가는 것으로 삼는 것이다.

 

一時現似種種相義而生起故者,謂似種種名`句`文相而生起故,及似種種依止此義而生起故.此中繩喩顯示悟入三種自性.伏除非實六相義時者,謂於遣滅六相義時,此中遣滅,名爲伏除.

‘현전에서 동시에 갖가지 상과 의미와 비슷하게 생겨나기 때문’이란, 갖가지 명칭(名)ㆍ문구(句)ㆍ글자(文)의 상과 비슷하게 현현하기 때문이고, 이것을 의지로 하는 갖가지 의미와 비슷하게 현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끈의 비유는  가지자성(三自性)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진실이 아닌 여섯 가지 육상(六相) 의미를 조복할 때’는 여섯 가지 육상(六相) 의미를 제거할 때를 말하는 것이며, 여기서 제거한다는 것은 조복하여 없애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명칭(名, nāman)은 어떤 의미를 갖는 최소단위의 단어. 명칭이라는 뜻으로, 사물을 가리키는 명칭이며, 언어표현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다.

문구(句, pada)는 단어로 구성된 문구ㆍ문장 전체를 가리키며,

문자(文ㆍ味, vyañjana)는 단어나 문구ㆍ문장을 구성하는 낱낱의 글자의 음절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이 논서는 '섭대승론석'이다”라고 할 때, ‘이’ㆍ‘논’ㆍ‘서’ 등 한 자 한 자가 글자인 문(文)이고, ‘논서’ㆍ‘섭대승론석’이 명칭(名)이며, 이들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 전체가 문구(句)인 것이다.


▶論曰:如是菩薩,悟入意言似義相故,悟入遍計所執性,悟入唯識故,悟入依他起性.云何悟入圓成實性? 若已滅除意言,聞法熏習種類,唯識之想,爾時菩薩,已遣義想,一切似義,無容得生,故似唯識,亦不得生.由是因緣,住一切義無分別名,於法界中,便得現見相應而住, 爾時菩薩,平等平等所緣能緣無分別智,已得生起,由此菩薩,名已悟入圓成實性.

논문; 이와 같이 보살은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과 비슷하게 현현한 대상(義)의 상(相)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변계소집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유식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의타기성에 깨달아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 어떻게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만약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으로 법을 들어서 훈습한 종류의 유식의 표상(想)을 없앤다면, 그때 보살은 대상의 표상인 의상(義想)을 없애어서, 모든 대상(義)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이 생겨날  없기 때문에, 오직 식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 역시도 생겨날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모든 의미의 일체의무분별지혜(一切義無分別)의 명칭에 안주하고, 

법계 안에서 문득 현전에 보는 것과 상응하여 안주할  있는 것이다. 

그때 보살은 평등하고 평등한 인식대상의 평등소연(平等所緣)과 인식주체인 능연(能緣)의 무분별지혜를 일으킬  있는 것이니, 이로 인하여 보살은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釋曰:悟入意言似義相故,悟入遍計所執性者,謂知諸義唯是遍計分別所作.由是故言悟入遍計所執自性. 悟入唯識故,悟入依他起性者,擧其唯識,卽取意言,了知一切唯意言性,由此悟入依他起性.

해석한다;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이 대상과 비슷하게 현현한 상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변계소집상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것은 이른바 모든 대상이 오직 변계의 분별이 지은 것임을는 것이니, 이로 인하여 변계소집자성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며, 

‘유식(唯識)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의타기성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것에서,  유식(唯識)이라는 말을 거론하여도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을 가리키는 것이니, 일체는 오직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 성품임을 알고, 이로 인하여 의타기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유식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하여 ‘유식’이란 말을 거론하지만, 여기서는 유식의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 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一切似義無容得生者,謂無如是品類實義可似其生.故似唯識亦不得生者,謂唯識相,亦不得起.何以故?計有識時,卽有義故.從是已後,現證眞如,此現證位,不可宣說,內自證故.

‘모든 대상(義)과 비슷하게 현현한 것이 생겨날  없다’는 것은 이와 같은 품류의 참된 대상은 그것과 비슷하게 생겨날  없기 때문이며,

‘오직 식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도 역시 생겨날  없다’는 것은 유식상(唯識相) 역시도 생겨날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식이 존재할 때에는  대상(義)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것 이후에는 진여를 현전에서 증득하는 것이니, 현전에서 증득하는 지위는 널리 말할  없는 것으로, 내면에서 스스로 증득하는 내자증(內自證)이기 때문이다.

 

爾時菩薩,平等平等所緣能緣無分別智,已得生起者,所緣謂眞如,能緣謂眞智,此二平等,譬如虛空,卽是不住所取能取二種性義.由不分別所取能取,是故說名無分別智.如是悟入圓成實性.

‘그때 보살은 평등하고 평등한 인식대상인 평등소연(平等所緣)과 인식주체인 능연(能緣)의 무분별지혜를 일으킬  있다’는 것이란,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은 진여를, 인식주체인 능연(能緣)은 근본지혜인 진지(眞智)를 말하는 것으로, 둘은  평등한 것이니, 비유하자면 허공과 같은 것이다. 

 인식대상인 소연(所緣)과 인식주체인 능연(能緣)의  가지 성품의 의미에 머물지 않는 것이니, 인식대상인 소연(所緣)과 인식주체인 능연(能緣)를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무분별지혜라 이름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論曰:此中有頌:

▷논문; 이러함에 게송이 있으니, 


“法補特伽羅, 法義略廣性, 不淨淨究竟, 名所行差別.”

법과 보특가라(윤회하는 유정)ㆍ법ㆍ의미(義)ㆍ대략(略)ㆍ자세함(廣)ㆍ본성(性)ㆍ부정(不淨)ㆍ청정(淨)ㆍ구경(究竟)은

명칭(名)이 행하는 바의 차별이라네.


▶釋曰:如前所說,住一切義無分別名,何等爲名?幾品類義?爲答此問,以頌顯示,名類差別.

해석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의미의 일체의무분별(一切義無分別)의 명칭(名)에 머문다는 것에서,

무엇을 명칭(名)으로 삼고,  가지 품류의 뜻하는 바 있는 것인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게송으로써 명칭(名)과 품류의 차별을 나타내었다.

 

此中法名者,謂色受眼耳等.補特伽羅名者,謂佛及隨信行等.又法名者,謂契經等.義名者,謂依此法義.略名者,謂有情等,廣名者,謂彼一一各別能詮.

여기에서, 존재의 구성요소라는 뜻의 법(法)의 명칭(名)은 물질(色)ㆍ감수작용(受), 눈ㆍ귀 등이고, 

보특가라의 명칭(名)은 부처님을 따라서 믿고 행하는 수신행(隨信行, 수행의 계위(階位)에서 최초의 단계를 예로 든것) 등이며,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법의 법(法)의 명칭(名)은 계경 등을 말하고, 

의미(義)의 명칭(名)은  법에 의지하는 의미를 말하며,

대략(略)의 명칭(名)은 유정 등을 말하고, 

자세함(廣)의 명칭(名)은  하나하나의 각각 다른 능전(能詮)을 말하는 것이다.

ㅡ여기서 능전은 이름(名)의 뜻으로, 유정들 사이에 각가 다른 이름이 있는 것을 말한다.

 

姓名者,謂諸字本母.不淨名者,謂諸異生.淨名者,謂有學等.究竟名者,謂一切法摠相所緣.

본성(性)은 모든 글자의 본모(本母)를 말하고, 부정(不淨)의 명칭(名)은 모든 이생(異生, 범부)를 말하며,

청정(淨)의 명칭(名)은 유학(有學) 등을 말하며,

구경(究竟)의 명칭(名)은법의 총체적인상(摠相)의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을 말한다.

 

이생(異生)은 범부라는 뜻으로, 갖가지 견해와 번뇌에 의해 여러 가지 과보를 받고 여러 세계(趣)에 태어나며, 또한 성자와 다른 생류(生類)이기 때문에 이생이라 한다.

유학(有學), 이미 4성제 등의 진리를 지견(知見)하여 자각하였지만 아직 번뇌를 다 끊지 못한 까닭에, 번뇌를 소멸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항상 계율ㆍ선정ㆍ지혜의 3학(學)을 닦는다.

성문의 4향(向)4과(果) 중에서 최후의 아라한과를 제외한 다른 단계인 수다원과ㆍ사다함과ㆍ아나함과를 유학이라 하고, 아라한과를 무학(無學)이라고 한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6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2

 

又於此中,三種練磨心者,謂諸菩薩, 善根無缺`善根力持,由此力故,則能三種練磨其心,心無退屈. 初當顯示第一練磨心,謂人趣中,無量世界,無量有情,剎那剎那,能證無上正等菩提, 云何我今獨不能證?

또한 여기서 세 가지 마음을 연마함의 삼종연마심(三種練磨心)은 모든 보살이 선근(善根)을 빠뜨리지 않고 선근력(善根力)을 지니며, 이러한 힘에 의하여 능히 세 가지로 그 마음을 연마하고, 퇴굴함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처음에는 마땅히 그 첫째의 제일연마심(第一練磨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인취(人趣, 인간세계)의 무량한 세계의 수많은 유정(有情)은 찰나찰나마다 능히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거늘,

어째서 나 혼자만이 증득하지 못하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며, 

 

次當顯示第二練磨心,謂諸菩薩,作是思惟: 我此意樂離諸障㝵, 波羅蜜多慳等障㝵, 皆無有故,不由功用,波羅蜜多,當得圓滿,此圓滿故,證佛菩提.

다음으로는 둘째로 제이연마심(第二練磨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보살이 사유하기를 “나의 이 의요는 모든 장애를 떠났으며, 바라밀다에도 인색 등의 모든 장애가 없기 때문에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功用)없이도 바라밀다가 장차 원만해질 수 있으니, 이 원만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을 증득한다”라고 하는 것이며,

 

後當顯示第三練磨心,有障善者,謂由世善而成其善.此有障善,尚命終時,卽便可愛一切自體圓滿而生,況我今者,由無障善而成其善,不當成佛無上菩提,無有是處.

다음에 마땅히 셋째로 마음을 연마함의 제3연마심(第三練磨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장애 있는 선의 유장선(有障善)’이란, 세간의 선에 의거해서 그 선을 이루는 것을 말하며,

이 장애 있는 유장선(有障善)도 오히려 목숨이 다할 때에는 사랑할 만한 모든 것을 자체에서 원만히 생겨나게 하거늘, 하물며 나는 지금 장애 없는 무장애선(無障㝵善)에 의거해서 그 선을 이루려 하나니, 장차 부처님의 위없는 깨달음의 무상보리(無上菩提)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論曰:此中有頌:

논문; 이러함에 게송이 있으니, 

 

“人趣諸有情, 處數皆無量, 念念證等覺, 故不應退屈.

인취(人趣, 인간세계)의 모든 유정은 처소도 숫자도 무량하거늘, 

생각 생각의 염념(念念)에 등각(等覺)을 증득하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퇴굴하지 않아야 하리라.

 

등각(等覺), 등각위(等覺位)라 하고,'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등각위를 무구지(無垢地)라 한다.

첫째, 등각(等覺), 완전한 깨달음은 부처님의 십호 가운데 하나이며, 또한, 성문 · 연각 · 보살의 모든 수행계위에서 최후의 단계인 부처의 깨달음 즉 구경각(究竟覺)을 말한다. 여기서의 '등(等)'은 한결같이 평등하다 또는 동등하다 또는 동일하다는 뜻으로, 모든 부처 또는 여래의 깨달음은 각자마다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평등하기 때문에 즉 모두 동등한 또는 동일한 깨달음이기 때문에 등각이라고 한다. 평등한 바른 깨달음이라는 뜻에서 등정각(等正覺) 또는 정득각(正等覺)이라고도 하며, 묘각(妙覺) ·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 불지(佛地) 또는 불지(佛智)와 동일한 지위 또는 계위이다.
둘째, 등각(等覺)은 지극히 비슷한 깨달음, 거의 같은 깨달음, 거의 동등한 깨달음은 52위 등의 보살 수행계위 즉 대승불교의 수행자 또는 보살승의 수행자의 수행계위에서 최후의 단계인 부처의 깨달음 즉 구경각 직전의 단계를 말한다. 여기서의 '등(等)'은 지극히 비슷하다 또는 거의 같다는 뜻으로, 구경각 즉 묘각과는 1등급의 차이가 있지만 그 깨달음 즉 지혜[覺]가 온갖 공덕이 원만한 부처의 지혜[覺]와 지극히 비슷하다 또는 거의 같다는 뜻에서 등각이라고 한다. 
셋째, 조선시대에 편찬된 불교대장경인 '월인석보'에서 설하고 있는 58위의 보살 수행계위에서는 구경각의 2단계 전의 계위로 보고 있다.


諸淨心意樂, 能修行施等, 此勝者已得, 故能修施等.

모든 청정한 마음의 의요(意樂)로, 능히 보시 등을 수행하네.

뛰어난 승자(勝者)는 이미 증득하였으니, 그러므로 능히 보시 등을 수행하네.


善者於死時, 得隨樂自滿, 勝善由永斷, 圓滿云何無?”

착한 선자(善者)는 죽을 때에, 기꺼이 즐거움을 따라 스스로 원만해질 수 있으니, 

뛰어난 승선(勝善)은 영원히 단절하거늘, 어찌 원만함이 없겠는가?


▶釋曰:復以伽他,顯如是義.故不應退屈者,由上因緣,策持其心,令不怯弱,謂生是心: 我不能證無上菩提.

諸淨心者,是非不善無記心義.謂或有人,以其散亂無記之心,而行施等,如是外道,以不善心,而行施等.若求無上正等菩提,是最勝善,故名淨心.

해석한다; 다시 게송으로써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었으니,

‘그러므로 마땅히 퇴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란, 위에서 말한 인연으로 인하여 그 마음을 책려하여 “나는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할 수 없다”는 이러한 겁약한 마음을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모든 청정한 마음’이란 불선이나 무기심(無記心)의 뜻이 아니다.

어떤 이는 그 산란된 무기심으로써 보시 등을 행하는 것과 같이 외도들은 불선심으로써 보시 등을 행하나,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구하는 이것이 가장 뛰어난 최승선(最勝善)이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의 정심(淨心)이라 하는 것이다.

 

此勝者已得,故能修施等者,最勝菩薩,名爲勝者,此之意樂,菩薩已得,是故能修施等諸度.卽是已得能斷慳等所治心義 等者,取始從尸羅,乃至般若波羅蜜多. 善者於死時,得隨樂自滿者,是乃至得非想非非想處義.

‘이 뛰어난 승자(勝者)는 이미 증득하였으니, 그러므로 능히 보시 등을 수행한다네’란,

가장 뛰어난 보살을 뛰어난 승자라고 부르고, 이 의요를 보살이 이미 얻었기 때문에 능히 보시 등의 여러 바라밀을 닦는 것이니, 이것은 곧 인색함 등을 능히 끊어서 다스려진 마음을 얻었다는 뜻이다.

‘등(等)’이란, 처음에 지계바라밀다로부터 나아가 반야바라밀다에 이르기까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착한 선자(善者)가 죽을 때에 기꺼이 즐거움을 따라서 스스로 원만해질 수 있네’는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얻는다는 뜻이다.

ㅡ범부가 세간의 선을 행하면 색계ㆍ무색계의 하늘나라에 태어날  있고, 나아가 무색계의 최고의 하늘인 비상비비상처에도   있다는 뜻이다.

 

勝善由永斷,圓滿云何無者,是由永斷障,而成勝善,圓滿佛果.云何無義?

‘뛰어난 승선(勝善)은 영원히 단절하거늘, 어찌 원만함이 없겠는가?’는 영원히 장애를 단절하였으므로 뛰어난 승선을 이룬 까닭에 부처님의 증과를 원만하게 하는 것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論曰:由離聲聞`獨覺作意,斷作意故.由於大乘諸疑離疑,以能永斷異慧疑故.由離所聞`所思法中,我`我所執,斷法執故.由於現前現住安立一切相中,無所作意,無所分別,斷分別故.此中有頌:

논문; 성문ㆍ독각의 작의를 떠남으로써 작의(作意)를 끊은 까닭이며,

대승에 관한 모든 의심에 대한 의심을 여읨으로써 능히 다른 견해(삿된 견해)와 의심을 영원히 끊은 까닭이며,

듣고 사유한 법 가운데에서 나(我)ㆍ나의 것(我所)이라는 집착을 여읨으로써 법집(法執)을 끊은 까닭이며,

현재 눈앞에 머물러서 안립한 모든 일체의 상(相)에 대해서 작의하는 바도 없고 분별하는 바도 없음으로써, 분별을 끊은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現前自然住, 安立一切相, 智者不分別, 得最上菩提.”

현재 눈앞에 자연히 머물러, 안립한 모든 일체의 상(相)을

지혜로운 이는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최상의 깨달음인 최상보리(最上菩提)를 얻는다네.


▶釋曰:今當顯示斷除四處. 斷作意故者,謂斷聲聞等, 諸作意故.以能永斷異慧疑故者,謂於大乘甚深廣大,能永斷除異慧及疑.此中異慧,謂鄙惡慧,於理動搖.疑謂猶預.

해석한다; 이제 마땅히 네 가지를 끊어 없애는 것을 나타내 보이겠으니,

‘작의(作意)를 끊기 때문’이란, 이른바 성문등의 모든 작의를 끊는 것이며,

‘능히 다른 견해와 의심을 영원히 끊은 때문’이란, 이른바 대승의 매우 심오하고 광대함에 대한 다른 견해와 의심을 영원히 끊어 없애는 것이니, 여기에서 다른 견해는 비루하고 잘못된 이해로서 바른 도리에 대해서 흔들리는 것이며, 의심은 결정을 미루는 것이다.

 

由於大乘諸疑離疑者, 謂於大乘,安立法相三自性教,謂若說諸法,皆無自性`無生無滅`本來寂靜`自性涅槃,諸如是等,永無異門.依遍計所執自性而說,若說諸法如幻`陽炎`夢相`光影`影像`谷嚮`水月`變化,諸如是等,虛妄異門.依依他起自性而說,若說諸法眞如`實際`無相`勝義`法界`空性.諸如是等眞實異門,依圓成實自性而說, 於此一切異慧及疑永無復轉.

‘대승에 관한 모든 의혹에 대하여서 의심을 여읜다’는 것이란, 대승에 있어서 법상(法相)의 세 가지 자성의 가르침을 안립함을 말하는 것으로, 만약 제법이 모두 무자성(無自性)으로서, 생겨남도 없고 소멸도 없는 무생무멸(無生無滅)이며, 본래 적정한 자성열반이라 말한다면, 이러한 것들은 본래부터 비존재인 까닭에 영원한 비존재의 이문(異門, 다른 견해)로서 변계소집자성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며, 

만약 제법이 요술ㆍ아지랑이ㆍ꿈의 모습ㆍ그림자ㆍ영상ㆍ메아리ㆍ물에 비친 달ㆍ변화와 같다고 말한다면, 이와 같은 것들은 허망된 다른 견해로서, 의타기자성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며,

만약, 제법이 진여ㆍ실제ㆍ무형상ㆍ승의ㆍ법계ㆍ공성이라고 말한다면, 이와 같은 것들은 진실의 다른 견해로서, 원성실자성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서 다른 견해와 의심이 영원히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이다.

 

由離所聞`所思法中,我`我所執者,此中意說斷除法執.

‘듣고 사유한 법 가운데 나(我)ㆍ나의 것(我所)이라는 집착을 여읜다’는 것은 법집을 끊어 없앰을 의미하며,

ㅡ아집이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오직 법집 끊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다.

 

斷法執故者,乃至所聞`所思法中,執我`我所,終不於彼,如實悟入. 由於現前現住安立一切相中,無所作意,無所分別者,謂加行無分別智轉時,如理作意,住一切定心,諸相作意,分別皆斷.斷分別故者.謂於現前色等現住,及骨鎖等定所安立,一切所緣,諸境界相,皆不作意,無所分別,由無分別方便能入,若異分別,終不能入.現前自然住等頌,唯顯最後所斷義.

‘법집을 끊기 때문’이란 나아가 듣고 사유한 법에 대해서 나(我)ㆍ나의 것(我所)에 집착한다면, 끝까지 진리 그대로 깨달아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눈앞에 머물러서 안립한 일체의 모든 상에 대해서 작의하는 바도 없고 분별하는 바도 없다’는 것이란,

가행하여 무분별지혜가 작용할 때, 이치 그대로 작의하여 모든 선정의 마음에 안주하고 모든 상에 대한 작의 분별도 모두 끊는 것이며,

‘분별을 끊기 때문’이란 현재 눈앞에 빛깔(色) 등이 머물고 있는 것과 같이, 산란된 마음 밖에서 현재 눈앞에 머물고 있는 모든 법과 골쇄(骨鎖, 부정관의 골쇄관) 등의 선정이 안립한 모든 소연(所緣, 인식대상)의 경계상(境界相)에 대해서 전혀 작의하지 않고 분별하는 바가 없는, 무분별의 방편에 의해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만약 다른 분별이라면, 종내 깨달아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현재 눈앞에 자연히 머물러’ 등의 게송은 오직 최후에 단절되는 소단(所斷)의 의미를 나타낼 뿐이다.

 

골쇄관(骨鎖觀), 부정관(不淨觀)의 하나로서 신체에 대한 애착을 끊기 위해서 신체가 죽어서 백골(白骨)이 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論曰:由何云何而得悟入?

논문; 무엇에 의거해서, 어떻게 깨달아 들어갈  있는가?

ㅡ제2위인 가행위에서의 수행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는 수행심을 더욱 경책하여 정진을 가행하도록 하는 단계이며, 10회향의 만심(滿心)에서 난위(煖位)ㆍ정위(頂位)ㆍ인위(忍位)ㆍ세제일위(世第一位) 가지 가행을 닦는 단계이다.

 

▶釋曰:爲顯由此如是悟入,故爲此問.

해석한다; 이것에 의거해서 이와 같이 깨달아 들어갈 수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다.

 

▶論曰:由聞熏習種類,如理作意,所攝似法 似義,有見意言.

논문; 들어서 훈습되는 문훈습(聞熏習)의 종류에 의거하는 것이니,  

이치 그대로의 여리작의(如理作意)에 포섭되는 법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대상(義)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유견(有見, 견분)의 의언(意言)이다.

유견(有見) 말하고 유상(有相) 들지 않은 것은, 관법이 내부의 식을 반연하고 외부 대상을 제외하기 때문이다.

 

▶釋曰:由此悟入,今當顯示.此中由聞熏習種類者,謂由聞熏習爲因,

卽前所說悟入任持大乘熏習等所生故,應知是圓成實自性所攝.

해석한다; 이것에 의거해서 깨달아 들어감을 이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이 중에서, ‘들어서 훈습되는 문훈습(聞熏習)의 종류에 의거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들어서 훈습되는 것을 원인으로 삼는 것에 의하는 것이니, 곧 앞에서 말한 깨달아 들어가는 오입(悟入)은 대승의 훈습 등을 보전하여 지녀서 생겨나기 때문이니, 

이것은 원성실자성에 포섭된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6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1

 

▶論曰:如是已說所知相,入所知相,云何應見?多聞熏習所依,非阿賴耶識所攝,如阿賴耶識成種子;

如理作意所攝,似法似義,而生似所取事,有見意言.

▷논문; 이와 같이 알아야  바의 상인 소지상(所知相)을 말하였으니,

알아야  바의 상에 들어가는 입소지상(入所知相)을 어떻게 보아야 마땅하겠는가? 

이는 다문훈습(多聞熏習)의 소의(所依, 의지처)이고 아뢰야식이 포섭하는 바가 아닌, 아뢰야식이 종자를 이루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치 그대로의 작의(作意)가 포섭하는 바로서, 법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며,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비슷하게 현현하고, 유견식(有見識)인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인 것이다.

ㅡ이상에서 소지상(所知相)으로서 심식론과 3성설에 관하여 설명한 것은 유식학의 이론문(理論門)이다. 이제는 그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수행문에 들어간다.

 

작의(作意),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심왕과 심소(心所, 심리작용)를 대상에 주의시켜서 인도하는 작용으로, 촉(觸) 심소(心所) 다음에 일어나며, 이로 인해서 감수작용의 수(受)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의언(意言), 뜻 속의 말, 즉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釋曰:如能悟入,如是種類所應知相,今當顯說.入所知相者,謂能悟入所知境義. 多聞熏習所依者,謂大乘法所熏自體.非阿賴耶識所攝者,謂能對治阿賴耶識故.如阿賴耶識成種子者,謂如阿賴耶識,爲一切雜染法因,此爲一切淸淨法因亦爾.如理作意所攝者,謂如理作意,爲自性.似法似義而生者,謂似法義相而生起時.似所取事者,謂似色等義.有見者,謂似於見此卽成立有相見識.

▷해석한다; 이와 같은 종류로 마땅히 알아야 할 바의 소지상(所知相)에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지금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할 바의 상에 들어간다는 입소지상(入所知相)’이란, 알아야 할 바의 대상에 능히 깨달아 들어간다는 의미이며,

‘다문훈습(多聞熏習)의 소의(所依, 의지처)’란, 대승법이 훈습된 자체이며,

‘아뢰야식이 포섭하는 바가 아니다’란, 능히 아뢰야식을 다스리기 때문이며,

‘아뢰야식이 종자를 이루는 것과 같다’는 것이란, 아뢰야식이 모든 잡염법의 원인이 되듯이, 이것이 모든 청정법의 원인이 되는 것 역시도 그러하다는 것을 말하며, 

‘이치 그대로의 작의(作意)가 포섭하는 바’란, 이치 그대로의 작의(作意)를 자성으로 삼는 것을 말하며,

‘법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다’는 것은, 법과 의미(義)의 상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때이며,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비슷하게 현현한다’는 것은, 빛깔(色) 등의 대상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을 말하며,

‘유견식(有見識)'이란, 곧 상분과 견분을 갖는 식(識)을 성립하는 것을 말한다.

 

▶論曰:此中誰能悟入所應知相?大乘多聞熏習相續,已得逢事,無量諸佛,

出現於世,已得一向決定勝解,已善積集諸善根故,善備福智資糧菩薩.

▷논문; 여기서 어떠한 사람이 알아야  바의 소지상(所知相)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대승의 다문훈습(多聞熏習)을 상속하고, 무량한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에 받들어 섬길  있으며, 

한결같이 결정적인 뛰어난 승해(勝解)를 얻고, 모든 선근을  쌓음으로써 복덕과 지혜의 자량(資糧)을  갖춘 보살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ㅡ유식학에서 보살의 수행과정인 5() 중에서 1위인 자량위(資糧位) 수행을 설명한다. 이것은 길고 수행의 도정에서 재산이 정신적인 양식을 저장하는 단계로써, 여기서 자량(資糧) 복덕과 지혜를 가리킨다. 37보리분법과 6바라밀다를 닦는 과정이다. 10주ㆍ10행ㆍ10회향(10회향의 住心)까지이다.

 

유식학에서는 보살 수행 계위 41단계(41위)를 자량위 · 가행위 · 통달위 · 수습위 · 구경위의 5위(五位)에 배대한다.
자량위(資糧位), 10주 · 10행과 10회향의 제10위인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廻向)의 주심(住心)까지,
가행위(加行位), 10회향의 제10위인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廻向)의 출심(出心)의 단계, 즉, 통달위 즉 견도(見道)에 들기 위해 닦는 난(煖) · 정(頂) · 인(忍) · 세제일(世第一)의 4선근(四善根) 즉 4가행(四加行)의 단계,
통달위(通達位), 견도위(見道位), 즉 10지의 첫 번째 계위인 초지(初地)의 입심(入心) 즉 환희지(歡喜地)의 입심(入心) 
수습위(修習位), 10지 가운데 초지(初地) 즉 환희지(歡喜地)의 주심(住心)에서 제10지 즉 법운지(法雲地)의 출심(出心)까지,
구경위(究竟位): 묘각(妙覺), 즉 부처의 지위 · 불지(佛地) · 불과(佛果) · 여래지(如來地) · 불지(佛智) · 일체지(一切智) · 대원경지(大圓鏡智)

 

▶釋曰:如是品類,如此方便,而能悟入,今當顯示. 大乘多聞熏習相續者,簡聲聞等, 所有多聞熏習相續.

已得逢事,無量諸佛,出現於世者,已得現前逢事,諸佛出現, 世閒超過數量. 已得一向決定勝解者, 謂於大乘,所得勝解,非諸惡友所能動壞,卽由無閒所說三因,已善積集諸善根故,乃得名爲善備福智資糧菩薩.

▷해석한다; 이와 같은 품류와 이와 같은 방편에 의해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지금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대승의 다문훈습을 상속한다’는 것은 성문등이 갖는 다문훈습의 상속을 가려낸 것이며,

‘무량한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에 받들어 섬길  있다’는 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현전에 세간에 출현하신다면,  받들어 섬길  있음이 수량(數量)을 초월한다는 것을 말하며,

‘한결같이 결정적인 뛰어난 이해의 승해(勝解)를 얻는다’는 것은 대승으로부터 얻는 뛰어난 승해(勝解)를 모든 악한 벗이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이니, 즉 앞에서 말한, 다문훈습(多聞熏習)과 봉사무량제불(逢事無量諸佛)과 선적집제선근(善積集諸善根)의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이미 모든 선근을  쌓은 까닭이니,  

이에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갖춘 보살이라 이름할  있는 것이다.

 

又卽如是福智資糧,云何漸次而得圓滿? 謂由因力`由善友力`由作意力`由依持力. 此中兩句,卽是二力,如數應知.

또한 이와 같은 복덕과 지혜의 자량은 어떻게 점차 원만해질  있는 것인가? 

이른바 원인의 세력인 인력(因力)에 의해서이고, 착한 벗인, 선우력(善友力)에 의해서이며, 

작의력(作意力)에 의해서이고, 의지력(依持力)에 의해서이다. 

여기서  구절은  원인의 세력인 인력(因力)과 선우력(善友力)의  가지 세력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숫자 그대로 두 세력만을 해석한다고 알아야 한다.

 

作意力者,卽是一向決定勝解.此用大乘熏習爲因`事佛爲緣,以有一向決定勝解,能修正行,修正行故,積集善根, 如是名爲由作意力善修福智二種資糧. 由此漸次善修福智二資糧故,能入大地,如是名爲由依持力.

작의력(作意力)은  한결같이 결정적인 승해이니, 이것은 대승의 훈습을 원인(因)으로 삼고, 부처님 섬기는 것을 조건(緣)으로 삼아서 한결같이 결정적인 뛰어난 이해인 일향결정승해(一向決定勝解)를 갖춤으로써 능히 바른행을 닦고, 바른행을 닦음으로써 선근을 쌓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작의력으로 인하여 복덕과 지혜의  가지 자량을  닦는다고 말하는 것이며,

점차 복덕과 지혜의  가지 자량을  닦음으로써 능히  지위인 대지(大地, 10지)에 오르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의지력에 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지(大地), 10지(地)의 지위를 가리킨다.

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역본인 수본(隋本) 및 무성석(無性釋)에서는 ‘초지(初地)에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論曰:何處能入?謂卽於彼有見似法似義意言, 大乘法相等所生起勝解行地,見道`修道`究竟道中,於一切法,唯有識性,隨聞勝解故`如理通達故`治一切障故`離一切障故.

▷논문; 어떠한 곳에 능히 들어가는 것인가? 이른바  유견식이 법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는  마음속의 생각인 의언(意言)에 대해서 대승법의 상(相)을 평등히 일을키는 승해행지(勝解行地)ㆍ견도(見道, 통달위)ㆍ수도(修道, 수습위)ㆍ구경도(究竟道)이다.

제법에 오직 식의 성품인 식성(識性)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듣고, 따라서 뛰어나게 이해한 때문이고, 

이치 그대로 통달한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다스리기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떠난 때문이다.

 

승해행지(勝解行地), 10주(住:제1주에 10신을 포함)ㆍ10행ㆍ10회향을 닦는 지위이다.

본문에서 승해행지는 곧 자량위(10주〜제10회향의 住心)와 가행위(제10회향의 滿心)에 해당된다.

 

▶釋曰:入如是類,及入行相,今當顯示.意地尋思,說名意言,如是意言,以大乘法,爲因而生,此中顯示意言差別.

▷해석한다;  이와 같은 부류에 들어가고, 수행의 상(行相)에 들어가는 것을 이제 나타내어 현시하겠으니,

명칭(名)ㆍ대상(義) 등에 의한 의식의 사유 분별인 의지심사(意地尋思)를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이라 하며,

이와 같은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은 대승법이 원인이 되어 생겨나는 것으로, 

여기서 생각 속의 언어의 차별인 의언차별(意言差別)을 나타내는 것이다. 

 

大乘法相等所生者,是此教法,爲緣生義.或有卽於勝解行地,名能悟入,由但聽聞一切諸法,

唯有識性,深生信解,故名能入.於見道中,如是悟入,

‘대승법상(大乘法相)이 평등히 일으킨 바’라는 것은  교법을 조건으로 삼아서 생겨난 생의(生義)이거나, 혹은 승해행지(勝解行地)에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만 일체법은 오직 식의 성품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들음에 의해서 깊이 믿음과 이해를 일으키는 것을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오입(悟入)이라 한다. 

 

今當顯示.如理通達故者,謂於意言,如理通達.云何於此,如理通達?謂此意言,非法非義`非所取非能取,如是通達.於修道中,如是悟入,今當顯示.治一切障故者,謂觀此意言,非法非義`非所取非能取時,便能對治一切障故. 究竟道中,如是悟入,今當顯示.離一切障故者,謂善淸淨妙智位中,最微細障,亦無有故.

견도(見道, 통달위) 중에서 이와 같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이제 나타내 보이겠으니,

‘이치 그대로 통달하기 때문’이란 생각 속의 언어에 대해서 이치 그대로 통달함을 말한다.

어떻게 이치 그대로 통달하는 것인가? 이른바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은 법이 아니고, 의미가 아니며,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아니고, 인식주체인 능취(能取)도 아니라고 통달하는 것이다. 

수도(修道) 중에서 이와 같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이제 나타내 보이겠으니,

‘모든 장애를 다스리기 때문’이란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은 법이 아니고, 의미가 아니며,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아니고, 인식주체인 능취(能取)도 아니라고 관찰할 때, 문득 능히 모든 장애를 다스리게 되기 때문이다. 

구경도(究竟道) 중에서 이와 같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 보이겠으니,

‘모든 장애를 떠난 때문’이란 이른바 매우 청정하고 승묘한 지혜의 지위에서는 가장 미세한 장애 또한 없기 때문이다.

 

견도(見道), 통달위라고 하며, 10지 중에서 초지의 입심(入心)의 수행이다. 이 지위에 오르면 무루의 지혜가 생겨나서 진여의 일분(一分)을 관찰하게 되며, 후천적인 분별기(分別起)의 번뇌는 한꺼번에 소멸되지만, 선천적인 구생기(俱生起)의 번뇌는 아직 요지부동이다. 제6 의식과 제7 말나식의 일분이 각각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수도(修道), 수습위(修習位)라고 하며, 초지의 주심(住心)부터 제10지의 끝까지의 지위이다. 견도에서 일부 증득된 진여의 도리를 반복적으로 닦아 익혀서 번뇌장과 소지장을 정화하여 나아간다.

3혜(慧)에 의해 아집과 법집을 정화하는 아공관(我空觀)과 법공관(法空觀)을 닦아서 진여의 경지에 진입하는 수행을 한다. 제7지에서 번뇌장이 정화되어 아집이 단절되고, 제10지에서 금강유정을 수행하여 소지장을 정화해서 법집이 단절된다.

 

▶論曰:由何能入?由善根力,所任持故,謂三種相練磨心故`斷四處故`緣法義境止觀恒常殷重加行無放逸故.

▷논문; 무엇으로 인하여 능히 깨달아 들어가게 되는 것인가? 선근력(善根力)을 지닌 때문이니,

이른바  가지의 삼상(三相)으로 마음을 연마하여 닦기 때문이고,  곳의 사처(四處)를 끊은 때문이며, 

법(法)과 대상(義)의 경계를 반연하여 지관(止觀)을 닦고, 항상 간절히 가행하여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釋曰:由此能入,今當顯示.由何能入?由善根力,所任持故.謂三種相練磨心故,乃至恒常慇重加行無放逸故者,謂於如是所說八句,善順相應,名善根力所任持故.言恒常者,無閒修故.言慇重者,恭敬修故.若於如是品類造修,卽於如是能無放逸.

▷해석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능히 들어감을 나타내 보이겠으니, 무엇으로 인하여 능히 들어가는가?

‘선근력을 지니기 때문이니, 이른바  가지의 삼상으로 마음을 연마하기 때문이고, 

나아가 항상 간절히 가행하여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렇게 말한 여덟 개의 구절에 대해서  수순하여 상응하는 선근력을 지닌 때문이라 말하며,

‘항상’이란 끊임없이 닦기 때문이고, 

‘간절히’란 공경하여 닦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품류에 대해서  닦아 나아가면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능히 방일하지 않는 것이니, 

즉, 구경위(究竟位)라 하는 것으로, 불과(佛果)를 증득한 지위이며, 대보리의 사지(四智)와 대열반인 무주열반(無住涅槃)을 증득하는 것이다.

 

▶論曰:無量諸世界,無量人有情,剎那剎那,證覺無上正等菩提,是爲第一練磨其心.

由此意樂,能行施等波羅蜜多,我已獲得如是意樂,我由此故,少用功力,修習施等波羅蜜多,當得圓滿,是名第二練磨其心.

若有成就諸有障善,於命終時,卽便可愛一切自體圓滿而生.我有妙善,無障㝵善,云何爾時,不當獲得一切圓滿?是名第三練磨其心.

▷논문; 무량한 세계의 수많은 인간(人)과 유정(有情)은 찰나 찰나마다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나니, 이것을 첫째로  마음을 연마하는 것으로 삼는, 제일연마심(第一練磨心)이며,  

이러한 의요로 인하여 능히 보시바라밀다 등을 행하고 “나는 이미 이와 같은 의요를 얻었다, 나는 이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의지의 노력인 공력(功力)을 가하여 보시바라밀다 등을 닦아 익힌다면, 장차 원만해질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둘째로  마음을 연마하는 제이연마심(第二練磨心)이라 하며,  

장애가 있는 모든 유장선(有障善)을 성취한 이가 있다면, 목숨이 다할 때에 문득 사랑할 만한 모든 것의 자체에서 원만하게 생겨나나니, 그리하여 “나에게 승묘한 선과 장애 없는 무장애선(無障㝵善)이 있었거늘, 어찌하여 그 때에 그 모든 원만함을 획득하지 못한 것인가?”라고 한다면, 이것을 셋째로  마음을 연마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釋曰:此中對治三種退屈心故,唯修三種練磨心.所以者何? 以諸菩薩,聞於無上正等菩提最勝甚深廣大,難可證得,心便退屈.對治此故,修第一練磨心. 又諸菩薩,聞所修行波羅蜜多最勝甚深廣大, 難可證得,心便退屈. 對治此故, 修第二練磨心. 

▷해석한다; 여기서 세 가지 퇴굴심(退屈心)을 다스리기 위해서 오직 세 가지 마음을 연마함을 닦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보살은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인,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이 가장 뛰어나고 매우 심오하며 광대하여 증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듣고서 마음이 문득 퇴굴하나니, 이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첫 번째로 마음을 연마함을 닦는 제일연마심(第一練磨心)이며, 

보살이 수행하는 바라밀다가 가장 뛰어나고 매우 심오하며 광대하여 증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듣고서 마음이 문득 퇴굴하나니, 이러한 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두 번째로 마음을 연마하는 제이연마심(第二練磨心)을 닦는다.

 

由此意樂,能行施等波羅蜜多者,此中意樂,謂信及欲.菩薩於諸波羅蜜多,眞實有性`具功德性`有堪能性,深生信解,是名爲信.深信解已樂欲修行,是名爲欲. 菩薩旣得如是信欲,自性意樂,少用功力, 修習六種波羅蜜多,當得圓滿. 又諸菩薩,於佛甚深廣大言教,思議決擇,善巧轉時,如是思量:如是無上正等菩提,難可證得,隔一念心,方可證得.心便退屈.對治此故,修第三練磨心.

‘이러한 의요로 인하여 능히 보시바라밀다 등을 행한다’는 것에서 의요(意樂)는 믿음과 욕구를 말하는 것이다.

보살은 모든 바라밀다가 진실된 진실유(眞實有)의 성품(性), 공덕을 갖춘 성품(性), 감당 능력이 있는 성품(性)에 대해서 깊이 믿음과 이해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니, 이것을 믿음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깊이 믿고 이해하고서 기쁘게 수행하고자 하는, 이것을 욕구라 한다.

보살은 이미 이와 같은 믿음과 욕구를 얻어서, 자성의 의요에 조금이라도 노력하여 6 바라밀다를 닦아 익힌다면 장차 원만해질 수 있으며,

또한 보살은 부처님의 매우 심오하고 광대한 가르침에 대해서 사색하고 결택하여 좋은 선교방편(善巧方便)을 굴릴 때, 생각하기를 ‘이와 같이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인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기란 어려우니, 한 순간 일념(一念)에 마음을 단절하여, 제10지(地)의 금강심(金剛心)의 다음 찰나에 모든 장애를 다 소멸하여서 비로소 증득할 수 있다’고 하면서, 문득 마음이 퇴굴하는 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세 번째로 마음을 연마함을 닦는, 제3연마심(第三練磨心)을 닦는 것이다.

 

我有妙善者,我有一切十種地中.妙善積集,福智資糧.無障㝵善者,謂金剛喩定,能破在骨麤重微細極難破障,此定無閒得一切障離繫轉依.

‘나에게 승묘한 선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열 가지 지위에서 모든 승묘한 선을 쌓은 복덕과 지혜의 자량이 있다는 뜻이며,

‘장애없는 무장애선(無障㝵善)’이란 이른바 금강유정(金剛喩定)이 능히 뼈에 있는 거칠고 미세하여 매우 없애기 어려운 장애를 없애고, 이 선정의 다음 찰나에 모든 장애의 속박을 떠난 전의(轉依)를 얻는 것이다.

ㅡ재골추중미세극난파장(在骨麤重微細極難破障), 번뇌의 거칠고 무거운(重), 미세(微細)함에 의해서 피부에 있는 번뇌, 살(肉) 있는 번뇌, 마음 또는 뼈에 있는 번뇌로 표현하여 나눈 것이다.

 

云何爾時,不當獲得一切圓滿者,此中意說,於障離繫,似彼命終時,一切種智,如彼體圓滿.

 

‘어찌하여 그 때에 그 모든 원만함을 획득하지 못한 것인가?’란, 장애의 속박을 떠나면 그 목숨이 다할 무렵에 모든 것을 아는 일체종지(一切種智)가 그 자체 그대로 원만해진다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5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② 6

 

▶釋曰:由義處中,於一切有情, 起利益安樂增上意樂故者, 此句義,由十六業餘句顯示.

由何等業, 顯示利益安樂增上意樂? 謂展轉加行業者,卽是令入一切智智故,謂令諸有情,入一切智智,展轉化導, 譬如一燈傳然千燈,此卽顯示利益安樂增上意樂. 如是一切所餘句中,皆應配屬利益安樂增上意樂.

▷해석한다; 의처(義處)에 의거하는 내용 중에서 ‘모든 유정에 대해서 이익과 안락을 더하고자하는 이익안락증상의락(利益安樂增上意樂) 때문에’라는 문구의 의미는 열여섯 가지 업의 다른 문구로써 나타내었다.

어떠한 업들에 의거해서 이익과 안락을 더하는 의업을 나타내는 것인가?

‘전전하여 가행하는 전전가행업(展轉加行業)’은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지(一切智智)에 들어가기 위한 까닭이니, 이른바 유정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아는 지혜에 들어가게 하고자 전전하면서 교화하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하나의 등불로 전전하여서  개의 등불을 밝히는 것과 같이, 이것은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의요를 나타낸 것이니, 이와 같이 나머지 모든 문구도 마땅히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의요에 배당해야 한다.

 

無顚倒業者,卽是自知我今何假智故. 謂或雖有利益安樂增上意樂, 仍是顚倒, 如有發起利益安樂增上意樂, 勸飮酒等. 若有正智,如實自知, 方能稱量,教導有情,非增上慢,不如實知,起饒益心,勸他令作不饒益事.

‘전도됨이 없는 무전도업(無顚倒業)’이란, 스스로가 어떤 임시적인 가지(假智)를 알기 때문이니,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의요가 있을라도 전도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의요를 일으키고서 음주 등을 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바른 지혜가 있다면 진리 그대로를 여실하게 스스로 알아서, 능히 올바른 인식에 계합해서 유정을 교화해야 하는 것이니, 이는 증상만(增上慢)이 아니며,  

진리를 여실하게 알지 못하면 남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일으켰을지라도 남에게 권할  이롭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증상만(增上慢),성도(聖道)를 얻지 못하였으나, 이미얻 었다고 잘난체하는 거만심.


不待他請,自然加行業者,卽是摧伏慢故,謂由摧伏憍慢心故,不待勸請,自爲說法.

不動壞業者,卽是堅牢勝意樂故,不以有情行邪行故,動壞菩薩利益安樂增上意樂堅固之心.

無求染業者,卽是非假憐愍故`於親非親平等心故`永作善友乃至涅槃爲後邊故.謂後三句, 釋此三句,非爲利養恭敬等因作諸有情利益安樂,是故說名無求染業

‘남이 청함을 기다리지 않고 자연히 가행하는 자연가행업(自然加行業)’이란,  거만함을 조복한 때문이니, 교만심을 조복한 까닭에 남이 청함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설법을 하는 것이다. 

‘동요하거나 무너지지 않는 부동괴업(不動壞業)’이란,  견고하고 뛰어난 의요인 까닭에, 유정이 삿된 행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보살의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의요의 견고한 마음을 동요하거나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며, 

‘잡염을 구하지 않는 무구염업(無求染業)’이란,  임시적인 연민이 아니기 때문이고, 친한 이와 친하지 않은 이에 대해서 평등한 마음이기 때문이며, 영원히 착한 벗이 되어 열반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나중의  문구는   문구를 해석한 것으로, 이익이나 공경 등을 받으려고 유정들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잡염을 구하지 않는 업이라 이름한 것이다.

 

利益安樂增上意樂.云何可知?謂由相稱語身業者,卽是應量而語故`含笑先言故. 此二句中,應量而語,及先言是語業,含笑是身業.應量語者,唯作法語.言含笑者,舒顏往來,作饒益事.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이익안락증상의락(利益安樂增上意樂)을 어떻게   있는 것인가? 

이른바 ‘서로 일치하는 구업과 신업의 상칭어신업(相稱語身業)’은 올바른 인식에 상응하여 말하는 까닭이고, 미소를 머금고 말하기 때문이다.

  문구에서 올바른 인식에 상응하여 말하는 것과 먼저 말하는 것은 구업이고, 미소를 머금는 것은 신업이며,  

올바른 인식에 상응하여 말하는 것은 오직 진리의 말을 하는 것이고, 미소를 머금는 것은 웃는 얼굴로 왕래하며 이롭게 하는 것이다.

 

於樂`於苦,於無二中,平等業者,卽是無限大悲故,無限悲者,愍三苦故,於有苦有情愍其苦苦`於有樂有情愍其壞苦`於不苦不樂有情愍其行苦,不苦不樂,故名無二.

‘즐거움에 대해서도, 괴로움에 대해서도,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것에 대해서도 평등한 업’이란  무한한 대자비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대자비는  가지 괴로움의 삼고(三苦)를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괴로움이 있는 유정에 대해서는  괴로움의 고통인 고고(苦苦)를 불쌍히 여기고, 

즐거움이 있는 유정에 대해서는  즐거움이 파괴되는 고통의 괴고(壞苦)를 불쌍히 여기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유정에 대해서는  무상하게 바뀌는 것에 대한 괴로움의 행고(行苦)을 불쌍히 여기나니,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기 때문에  가지가 없는 무이(無二)라 말하는 것이다.

 

삼고(三苦), 고고(苦苦)는 누구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고통인 생로병사의 고통을 말한다. 생로병사 중 특히 생과 사는 아직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며, 깨달음을 성취할 때까지는 배움을 위해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괴고(壞苦)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무너지는 고통"인데, 모든 것이 인과 연에 의해 발생한다는 연기의 법칙 즉 인과의 법칙과 모든 존재가 고정됨이 없이 항상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법칙에 바탕하여 일어나는 "변화하고 무너지는 고통"이다.

행고(行苦)는 오온(五蘊) 또는 오취온(五取蘊)으로 이루어진 존재인 인간 자신에 대하여 "나"라고 할 수 있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함에 의해 비롯되는 고통으로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도 한다. ㅡ위키

 

無下劣業者,卽是於所受事,無退弱故,謂不自輕,云我不能當得佛果,如此等類.無退轉業者,卽是無厭倦意故,謂勤精進修成佛因,心無厭倦.攝方便業者,卽是聞義無厭故,謂由多聞,成善巧智,饒益有情.

‘열등하지 않은 무하열업(無下劣業)’이란, 곧 수용한 대승의 교법에 대해서 약해져서 물러나지 않는 업으로, 스스로를 가벼이 여겨서 “나는 장차 불과(佛果)를 얻을  없다”고 말하지 않는, 이와 같은 부류이다. 

‘퇴전하지 않는 무퇴전업(無退轉業)’이란,  권태의 마음이 없는 까닭에 부지런히 정진하여서 성불의 원인을 닦는 것에 마음으로 권태가 없는 것이다.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는 방편의 섭방편업(攝方便業)’이란,  교의의 의미를 듣고서 싫어하지 않는 까닭에, 많이 들음으로써 훌륭한 방편의 지혜를 이루어 유정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厭惡所治業者,卽是於自作罪,深見過故,於他作罪,不瞋而誨故,由此方便,乃能如實調伏有情.無閒作意業者,卽是於一切威儀中,恒修治菩提心故.如是句義,如所行淸淨,契經廣說. 勝進行業者,卽是不悕異熟,而行施故,乃至由四攝事攝方便故.謂卽依前利益安樂增上意樂,修此加行,以爲增長趣向果因.

‘다스려지는 것을 혐오하는 염오소치업(厭惡所治業)’이란,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해서 깊이  허물을 보기 때문이고, 남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성내지 않고 가르치기 때문이니, 이러한 방편으로써 능히 진리 그대로 유정을 조복할 수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작의하는 무간작의업(無閒作意)’이란,  모든 위의(威儀) 가운데에서 항상 보리심을 닦기 때문에, 이러한 문구의 의미는 '소행청정계경(所行淸淨契經)'에서 자세히 말씀하신 바와 같으며,

‘뛰어나게 나아가는 행의 승진행업(勝進行業)’이란,  과보를 바라지 않고 보시를 행하기 때문이고, 나아가  가지 포섭하는 사섭사(四攝事)의 방편에 의하기 때문이니,  앞에서 말한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의욕에 의지해서  가행을 닦음으로써 증과에 나아가는 원인을 증장시키게 되는 것이다.

 

成滿加行業者,卽是於持戒`破戒,善友無二故,乃至親近善友故.

‘가행을 원만히 성취하는 성만가행업(成滿加行業)’이란,  계율을 지키고 계율을 파함에 있어서 착한 벗으로서  가지가 없기 때문이고, 나아가 착한 벗을 가까이하기 때문이다. 

ㅡ착한 벗으로서  가지가 없다는 것은, 이른바 계율을 지키거나 파하거나 그것을 거론하지 않고 그를 가까이해서 가르침을 받기 때문이다.

 

謂後六句, 釋此八句.若有習近,如是加行,速得成滿.以慇重心,住阿練若故者,由住此處,離惡尋思.世雜事者,謂歌儛等.

나중의 여섯 문구는  여덟 문구를 해석한 것으로, 만약 착한 벗을 가까이해서 그 가르침을 익히면, 이와 같은 가행을 빨리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간절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아련야에 머물기 때문’이란, 아련야에 머묾으로써 나쁜 분별들을 여의기 때문이며,

'세간의 번잡한 일’이란 가무 등을 말하며,

 

成滿業者,卽是恒修治四梵住故`常遊戲五神通故`依趣智故.謂後三句,釋此三句,此成滿業所有相狀.

‘원만히 성취하는 성만업(成滿業)’이란 곧 항상 네 가지 청정의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사범주(四梵住, 사무량심四無量心)에 머무름을 닦기 때문이고, 항상 다섯 가지의 오신통에서 노닐기 때문이며,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나중의 세 문구는 이 세 문구를 해석한것으로, 이것이 원만히 성취하는 성만업이 갖는 상이다.


大威力者,謂六神通.依趣智故者,謂依趣智`不依趣識,內智生故,由此內智現見相應安住於法.安立彼業者,卽是於住正行等.謂後四句,釋此四句.由利益安樂增上意樂故,安立有情利益安樂.御衆功德故者,由於破戒,亦不棄捨,安立不擯,令出不善,令住於善.

‘큰 위력(大威力)’은 여섯 가지의 육신통을 말하며,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이란 지혜에 의지하고, 식에 의지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으로, 내면의 지혜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니,  내면의 지혜에 의거해서 현재 보는 것과 상응하여 법에 안주하는 것이다.

‘그것을 안립하는 안립피업(安立彼業)’이란,  ‘바른 행에 머무는' 것 등이다. 

나중의  개의 문구는   문구를 해석한 것으로,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의요에 의거함으로써 유정의 이익과 안락을 안립하는 것이다.

‘대중을 제어하는 공덕이기 때문’이란 파계(破戒)에 대해서도 역시 버리지 않고 맞아들이고, 불선을 버리고 선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육신통(六神通), 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신족통(神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ㆍ누진통(漏盡通,

 

決定無疑教受教誡故者,由能一向與彼教勅,非自說已還復說言我言不善,由是因緣,其言威肅.財法攝一故者,由言誠諦,以法攝取,衣服等財,還如是施.無雜染心故者,由善攝受大菩提心,饒益有情,非欲自求爲給使故.云何有情,由此善故,速證無上正等菩提?如此攝受一切有情.

‘결정적으로 의혹없이 가르치고 훈계하기 때문’이란 능히 한결같이 그에게 가르침을 주고, 스스로 말하고 나서 다시 ‘나의 말은 옳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그의 말은 엄숙한 것이며, 

‘재물과 법을 하나로 포섭하는재법섭일(財法攝一)이기 때문’이란, 말이 진실하여 법으로써 중생을 거두고, 의복 등의 재물도 이처럼 베푸는 것이며,

‘잡염심이 없는 무잡염심(無雜染心)이기 때문’이란 대보리심을  섭수하여 유정을 이롭게 하며, 스스로 공양받기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정으로 하여금 속히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하게 하기 위해서, 이상과 같은 선법(善法)으로써 모든 유정을 섭수하는 것이다.


▶論曰:如說:

▷논문;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由最初句故, 句別德種類, 由最初句故; 句別義差別.”

최초의 문구로 말미암은 문구의 차이는 덕(德)의 종류이라.

최초의 문구로 말미암은 문구의 차이는 의미(義)의 차이라네.


▶釋曰:此伽他中,卽爲顯示前所說義,說如是言.

▷해석한다; 이 게송은 앞에서 설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말한 것이다.


攝大乘論釋卷第五 終 섭대승론석 제 5권을 마침.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5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② 5

 

▶論曰:說語義者,謂先說初句,後以餘句,分別顯示,或由德處`或由義處.

논문;가르침의 의미인 어의(語義)를 말함’이란, 먼저 첫 번째 구절을 말하고, 그 다음에 나머지 구절로써 분별하여 나타내는 것이니, 혹은 덕처(德處)에 의거하고, 혹은 의미의 의처(義處)에 의거하는 것이다.

▶釋曰:由說語義如所造釋,今當顯示,或攝其德`或攝其義.

해석한다; ‘가르침의 어의(語義)를 말한다’는 것은, 마땅히 본문에서 해석한 바와 같이 나타내는 것으로, 혹은 그 덕을 포섭하고, 혹은 그 의(義)를 포섭하는 것이다.

▶論曰:由德處者,謂說佛功德:最淸淨覺,不二現行 , 趣無相法,住於佛住, 逮得一切佛平等性, 到無障處, 

不可轉法,所行無㝵, 其所安立不可思議,遊於三世平等法性, 其身流布一切世界, 於一切法智無疑滯,

於一切行成就大覺, 於諸法智無有疑惑, 凡所現身不可分別, 一切菩薩等所求智, 得佛無二住勝彼岸,

不相閒雜如來解脫妙智究竟, 證無中邊佛地平等, 極於法界, 盡虛空性, 窮未來際,

▷논문; ‘덕처(德處)에 의거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니, 즉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최청정각(最淸淨覺)으로써, 번뇌장과 소지장의 두 가지가 현행하지 않으며, 

무상법(無相法, 진여)에 나아가며, 부처님께서 안주하신 바의 대비심(大悲心) 머무시며,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성품을 증득하고, 장애 없는 곳에 이르셨으며,

퇴전하지 않는 법으로서 행이 걸림이 없으시며,

중생구제를 위하여 정법을 시설하고 안립하시는 바가 불가사의하하며,

삼세를 모두 잘 아시니 평등한 법성에 노닐며,  몸은 일체의 세계에 두루하며, 

일체의 제법과 지혜에 대해서 의심과 막힘이 없으시고, 

모든 행에 있어서  깨달음을 성취하셨으니, 모든 중생의 근기에 따라 적절하게 제도하시며,

제법과 지혜에 대해서 지혜가 의혹이 없고, 

무릇 시현하시는 타수용신과 변화신의 소현신(所現身)은 분별할  없으니, 바로 모든 보살이 구하는 지혜이다. 

부처님의 둘이 없는 경지의 법신진여(法身眞如)를 증득하시어 뛰어난 피안에 안주하시며,

여래의 서로 혼잡되지 않는 해탈의 미묘한 지혜를 구경에  이루시고, 중간과 극단이 없는 부처님 지위의 평등한 성품을 증득하셨으며, 법계를 다하고, 허공의 성품을  이루며, 미래 영겁이 다하도록 중생구제의 이타활동을 하는 덕을 갖추시어, 미래 세상을 다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여래의 경계에 대해서 우선 총덕(總德)인 최청정각(最淸淨覺) 말하고 나서 21가지 별덕(別德) 들어서 원만함을 나타낸다.

 

소현신(所現身), 타수용신과 변화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타수용신(他受用身)은 10지의 보살들을 위해 법을 설하여 대승 법락(法樂)과 청정국토를 수용시키는 부처님이며,

변화신(變化身)은 이승(二乘)과 범부를 교화하기 위하여, 성소작지(成所作智)의 힘으로 화현한 불신(佛身)이다. 


最淸淨覺者.應知此句, 由所餘句分別顯示, 如是乃成善說法性 最淸淨覺者,謂佛世尊最淸淨覺,

應知是佛二十一種功德所攝.謂於所知一向無障轉功德` 於有無無二相眞如最勝淸淨能入功德`

無功用佛事不休息住功德` 於法身中所依意樂作業無差別功德` 修一切障對治功德`降伏一切外道功德`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최청정각(最淸淨覺)’이란,  구절은 나머지 구절로써 분별하고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이와 같이 법성을  말씀함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며,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최청정각(最淸淨覺)’은 부처님 세존의 가장 청정한 깨달음이니, 이에 부처님의 21가지 공덕이 포섭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알아야  바에 대해서 한결같이 장애 없이 전전하는 공덕, 

유무(有無)의 두 까지에 대하여 이상(二相)이 없는 진여의 가장 뛰어나고 청정함에 능히 들어가는 공덕,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불사(無功用佛事)를 지으심에 쉬지 않고 머무시는 공덕, 

법신의 소의(所依, 의지처)ㆍ의요(意樂)ㆍ불사(作業)에 대하여 차별이 없는 공덕, 

모든 장애의 다스림을 닦는 공덕, 모든 외도를 항복시키는 공덕, 

 

生在世閒不爲世法所㝵功德` 安立正法功德` 授記功德` 於一切世界示現受用變化身功德` 斷疑功德`

令入種種行功德`當來法生妙智功德`如其勝解示現功德`無量所依調伏有情加行功德`

平等法身波羅蜜多成滿功德 `隨其勝解示現差別佛土功德` 三種佛身方處無分限功德`

窮生死際常現利益安樂一切有情功德,無盡功德等.

세간에 머물러도 세간의 법에 걸림이 없는 공덕, 정법을 안립하는 공덕, 수기(授記)하는 공덕, 

모든 세계에서 수용신(受用身)과 변화신(變化身)을 나투는 공덕, 의심을 완전히 끊은 공덕, 

갖가지 행에 들어가게 하는 공덕, 장차 법의 승묘한 지혜를 일으키는 공덕, 

 뛰어난 이해 그대로 중생의 뜻을 따라 현현하여 시현하시는 공덕, 

무량한 의지처로서 유정을 조복하는 가행(加行)의 공덕, 평등한 법신의 바라밀다를 원만히 이루는 공덕, 

 뛰어난 승해(勝解)를 따라 다른 불국토를 나타내는 공덕, 삼불신(三佛身) 장소에 한계가 없는 공덕, 

생사를 다하고 항상 현현하여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공덕, 다함이 없는 무진공덕 등이다.

 

▶釋曰:此中不二現行者,謂二現行此中無有,是故說名不二現行.卽是於所知,一向無障轉功德,

해석한다; 이 중에서 ‘두 가지가 현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지의 여기에는 현행이 없음으므로  가지가 현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소지장에 대해서 한결같이 장애 없이 전전하는 공덕으로,  

ㅡ두 가지 장애 중에서 이승(二乘) 이미 번뇌장을 끊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소지장만을 든다.

 

非如聲聞`獨覺智,亦有障亦無障故.趣無相法者,謂淸淨眞如,

성문ㆍ독각의 지혜가 역시 소지장의 장애가 있고, 역시 번뇌장의 장애가 없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名無相法,趣謂趣入,卽是於有無,無二相眞如,最勝淸淨能入功德. 謂此眞如,非是有相, 諸法無性, 以爲相故;

亦非無相,自相有故. 於此無相眞如, 最勝淸淨能入,最勝能入故`淸淨能入故.

‘무상법(無相法)에 나아간다’는 것은 청정한 진여를 무상법이라 이름하고, 

나아간다는 취(趣)란, 향하여 나아가 들어가는 취입(趣入)의 뜻으로, 이것은  유무(有無)에 대해서  가지 상이 없는 진여의 가장 뛰어나고 청정한 것에 능히 들어가는 공덕인 것이다.

 진여는 상이 있지 않으니, 일체법의 자성 없음을 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역시 무상(無相)인 것도 아니니, 자상이 있기 때문이다. 

 무상진여의 가장 뛰어나고 청정한 최승청정(最勝淸淨)함에 능히 들어가는 것은,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에 능히 들어가기 때문이고, 청정(淸淨)함에 능히 들어가기 때문이다. 

 

住於佛住者,謂住佛所住無所住處,卽是無功用佛事,不休息住功德,謂此住中,常作佛事,無有休息.

逮得一切佛平等性者,卽是於法身中, 所依意樂作業無差別功德. 到無障處者, 卽是修一切障對治功德,

謂一切時,常修覺慧, 對治一切障故. 不可轉法者,卽是降伏一切外道功德. 所行無㝵者, 卽是生在世閒,

不爲世法所㝵功德,謂雖生世閒行,於世閒,所行之處,不爲利等世閒八法所染污故.

‘부처님의 안주하는 곳에 머문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안주하시는 바이나, 안주함이 없는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의식적인 노력없이 자연스럽게 무공용(無功用) 불사(佛事)를 짓고 휴식 없이 머무는 공덕으로, 이른바  안주하는 가운데 항상 불사를 짓고 휴식 없이 머무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성품을 증득한다’는 것은  법신의 의지처인 소의(所依)ㆍ의요(意樂)ㆍ불사(作業)에 대해서 차별이 없는 공덕이며,

‘장애 없는 곳에 이르셨다’는 것은  모든 장애의 다스림을 닦은 공덕이니, 이른바 어느 때나 항상 깨달음의 지혜를 닦아서 모든 장애를 다스리기 때문이다.

‘퇴전하지 않는 불가전법(不可轉法)’이란  모든 외도를 항복시키는 공덕이며,

‘행에 걸림없는 소행무애(所行無㝵)’란, 곧 세간에 머물러도 세간의 법에 걸림없는 공덕이니, 이른바 세간에 태어나서 세간에서 행하여지는 행할지라도 이익  세간팔법(世間八法)에 의해 오염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간팔법(世間八法), 이득(利)ㆍ손실(衰)ㆍ뒤에서 험담하는 훼(毁)ㆍ뒤에서 칭찬하는 예(譽)ㆍ면전에서 칭찬하는 칭(稱)ㆍ면전에서 비방하는 기(譏)ㆍ괴로움(苦)ㆍ즐거움(樂)의 여덟 가지 법은 세인(世人)의 마음을 동요시키기 때문에 8풍(風)이라고도 한다.


其所安立不可思議者,卽是安立正法功德,由契經等正法無量不可思議, 非諸愚夫所能解故. 由此故,名最淸淨覺,此最淸淨覺句,於句句中,皆遍相應.

‘그 안립하는 바가 불가사의하다’는 것은  정법을 안립하는 공덕으로, 계경 등의 정법은 무량하고 불가사의하므로 모든 어리석은 범부가 능히 이해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가장 청정한 깨달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구절은 구절구절마다 두루 상응하는 것이다.

가장 청정한 깨달음은 총덕(總德)이며,  구절을 해설하기 위해 21가지의 별덕(別德) 들기 때문에,  구절은  구절마다 공통적으로 해당된다는 뜻이다.

 

遊於三世平等法性者,卽是授記功德. 其身流布一切世界者, 卽是於一切世界, 示現受用變化身功德.於一切法智,無疑滯者,卽是斷疑功德.於一切行,成就大覺者,卽是令入種種行功德. 於諸法智 無有疑惑者,卽是當來,法生妙智功德, 謂知當來如是法生如來妙智.

‘삼세의 평등한 법성에 노닌다’는 것은  수기의 공덕이며,

‘그 몸은 모든 세계에 나타내 보인다’는 것은  모든 세계에서 수용신과 변화신을 시현하는 공덕이며,

‘제법과 지혜에 대해서 의심과 막힘이 없다’는 것은  의혹을 완전히 끊은 공덕이다. 

‘모든 행에 있어서  깨달음의 대각(大覺)을 성취하셨다’는 것은,  갖가지 행에 들어가게 하는 공덕이며,

‘제법과 지혜에 대한 지혜가 의혹이 없다’는 것은  장차 법에 대한 묘지(妙智)가 생겨나게 하는 공덕이니, 이른바 장차 이와 같은 법은 여래의 승묘한 묘지(妙智)가 생겨나는 것을 아는 것이다.

 

凡所現身不可分別者.卽是如其勝解示現功德.一切菩薩等所求智者,卽是無量所依調伏有情加行功德,謂無量菩薩,所依`能作調伏諸有情事, 此非諸佛已得自他平等更求此智,唯有諸佛,已作如是勝調伏事.

‘무릇 시현하는 몸은 분별할  없다’는 것은   뛰어난 승해(勝解) 그대로 시현하는 공덕이니, 무량한 중생의 뛰어난 승해(勝解)에 따라 불신(佛身)을 시현하는 것이며,

‘바로 모든 보살이 구하는 지혜’란, 무량한 의지처로서 유정을 조복하는 가행의 공덕이니, 이른바 무량한 보살의 의지처로서 능히 모든 유정을 조복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미 자타(自他)의 평등을 얻으셨기 때문에 다시 이러한 지혜를 구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부처님들만이 이와 같은 뛰어난 조복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得佛無二住勝彼岸者,卽是平等法身波羅蜜多,成滿功德.謂無二法身,名平等法身, 卽於如是,無二法身, 得善淸淨波羅蜜多.

不相閒雜, 如來解脫妙智究竟者,謂於無雜如來智中,勝解究竟. 此中勝解,名爲解脫,卽是隨其勝解, 示現差別功德.

‘부처님의 둘이 없는 경지를 증득하여 뛰어난 피안에 안주한다’는 것은  평등한 법신의 바라밀다를 원만히 성취한 공덕으로, 둘이 없는 법신, 무이법신(無二法身)을 평등법신(平等法身)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곧 이와 같은 무이법신(無二法身) 대해서 청정한 바라밀다를  증득하는 것이다. 

‘여래의 서로 혼잡되지 않는 해탈의 미묘한 지혜를  이룬다’는 것은 여래의 서로 혼잡되지 않는 지혜의 뛰어난 이해를  이루어 해탈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승해(勝解) 해탈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것은   뛰어난 이해를 따라 차별한, 각각 다른 불국토를 나타내는 공덕이다.

 

證無中邊佛地平等者,卽是三種佛身, 方處無分限功德, 謂佛法身,不可分限爾所方處, 受用變化,

亦不可說爾所世界. 極於法界者,謂極淸淨法界,是名極於法界, 卽是窮生死際, 常現利益安樂一切有情功德.

盡虛空性者,卽是無盡功德,謂佛智無盡,如虛空故. 窮未來際者,卽是究竟功德.

等言, 等此佛智究竟窮未來際無有閒斷,是故名爲最淸淨覺.

‘중간과 극단이 없는 부처님 지위의 평등한 성품을 증득한다’는 것은   가지 불신이 장소에 한계가 없는 공덕으로, 부처님의 법신은  장소를 한계 지을  없으며, 수용신과 변화신 역시도  세계를 말할  없는 것이다. 

‘법계를 다한다’는 것은 청정한 법계를 다함을 법계를 다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곧 생사를 다하고 항상 현현하여서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공덕이다. 

‘허공의 성품을  이룬다’는 것은 바로 다함이 없는 무진공덕이니, 부처님 지혜가 무진한 것이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미래 세상을 다한다’는 것은  궁극적인 구경공덕(究竟功德)이며,

‘등(等)’이라고 말하는 것이란, 부처님의 지혜는 궁극적으로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중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최청정각(最淸淨覺)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論曰:復次由義處者,如說若諸菩薩,成就三十二法,乃名菩薩,謂於一切有情, 起利益安樂增上意樂故: 令入一切智智故` 自知我今何假智故`摧伏慢故` 堅牢勝意樂故` 非假憐愍故` 於親非親平等心故`永作善友乃至涅槃爲後邊故` 應量而語故`含笑先言故`無限大悲故`於所受事無退弱故`

▷논문; ‘또한 의미의 포섭처, 의처(義處)에 의거한다’는 것이란, 보살이 32가지 법을 성취하면  보살로 이름한다고 말한 것과 같이, 모든 유정에게 이익과 안락을 더하여 주려는 의요를 일으키기 때문이며,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지(一切智智)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고,

나는 지금 어떠한 임시적인 지혜인가를 스스로 알기 때문이며, 아만을 조복하기 때문이다. 

또한 견고하고 뛰어난 승의락(勝意樂)이기 때문이며, 임시적인 연민이 아니기 때문이며,

친한 이와 친하지 않은 이에 대하여 평등한 마음이기 때문이며,

영원히 착한 벗이 되어서 열반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며,

올바른 인식에 상응하여 말하는 까닭이며, 미소를 머금고 먼저 말하기 때문이며, 

무한한 대자비이기 때문이며, 수용한 대승의 교법 대해서 약해져서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無厭倦意故`聞義無厭故`於自作罪深見過故` 於他作罪不瞋而誨故`於一切威儀中恒修治菩提心故` 不悕異熟而行施故`

권태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교의(義) 듣는 것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고,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하여 깊이  허물을 보기 때문이며, 남이 지은 죄에 대해서 성내지 않고 가르치기 때문이며,

모든 위의(威儀) 가운데 항상 보리심을 닦기 때문이고, 과보인 이숙(異熟) 바라지 않고 보시를 행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숙(異熟, vipāka) 행위(業) 대한 과보의 의미이다.

 

不依一切有趣受持戒故` 於諸有情無有恚㝵而行忍故` 爲欲攝受一切善法勤精進故` 捨無色界修靜慮故` 方便相應修般若故`由四攝事攝方便故`於持戒破戒善友無二故`以慇重心聽聞正法故`以慇重心住阿練若故`

모든 유정의 윤회세계(趣)에 의지하지 않고 계율을 수지하기 때문이며,

모든 유정에 대해서 성내지 않고 인욕을 행하기 때문이며,

모든 선법을 섭수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하기 때문이며, 무색계를 버리면서 정려를 닦기 때문이고, 

방편과 상응하여 반야를 닦기 때문이며, 사섭사(四攝事, 사섭법) 섭방편(攝方便) 의거하기 때문이며,

계율을 지키고 계율을 파함에 있어서 착한 벗으로서  가지가 없기 때문이며,

간절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법을 듣기 때문이며,

간절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아련야(阿練若) 머물기 때문이다.

 

아련야(阿練若)는 범어 ārāṇya의 음역(音譯)으로, 아란야(阿蘭若)라고도 한다. 마을에서 떨어진 고요하고 한가한 공한정처(空閑靜處)를 말하며, 세속의 번뇌ㆍ산란ㆍ투쟁 등이 이르지 않는 곳으로서 출가 구도자가 머무는 곳이다.

 

於世雜事不愛樂故`於下劣乘曾不欣樂故`於大乘中深見功德故`遠離惡友故`親近善友故`恒修治四梵住故

세간의 번잡한 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며, 열등한 교법에 대해서 일찍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며, 

대승 안의 깊은 공덕을 보기 때문이며, 나쁜 벗을 멀리하고 착한 벗을 가까이하기 때문이며,

항상 청정에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사범주(四梵住, 사무량심四無量心)를 닦기 때문이다. 

 

`常遊戲五神通故`依趣智故`於住正行不住正行諸有情類不棄捨故`言決定故`重諦實故`

大菩提心恒爲首故. 如是諸句,應知皆是初句差別,謂於一切有情,起利益安樂增上意樂.

항상 다섯 가지의 오신통(五神通)에서 노닐기 때문이며,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바른행에 머물거나 혹은 바른행에 머물지 않는 모든 유정의 무리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며,

말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며, 참다운 진리를 존중하기 때문이며, 대보리심을 항상 으뜸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문구들은 모두  번째 문구를 분별한 것으로서, 모든 유정에 대해서 이익과 안락을 더하고자하는 이익안락증상의락(利益安樂增上意樂)을 일으킨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오신통(五神通), 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신족통(神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


此利益安樂增上意樂句,有十六業差別應知.此中十六業者,一展轉加行業;二無顚倒業;三不待他請,自然加行業;四不動壞業;五無求染業,此有三句差別應知,謂無染繫故`於恩非恩無愛恚故`於生生中恒隨轉故;

이 이익과 안락을 더하고자하는 이익안락증상의락(利益安樂增上意樂)의 문구에 16가지 업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16가지 업이란,

첫 번째는 전전하여 가행하는 전전가행업(展轉加行業)이고, 두 번째는 전도됨이 없는 무전도업(無顚倒業)이며,

세 번째는 남이 청함을 기다리지 않고 자연히 가행하는 자연가행업(自然加行業)이고,

네 번째는 동요하거나 무너지지 않는 부동괴업(不動壞業)이며,

다섯 번째는 잡염을 구하지 않는 무구염업(無求染業)이니, 이에 세 가지 구절의 차별된 뜻이 있으니, 잡염의 속박이 없기 때문이고, 은혜와 은혜 아닌 것에 대해서 사랑과 성냄이 없기 때문이며, 끊임없는 윤회의 생사에 유전(流轉)하여 끝이 없는 생생(生生)을 항상 따라 유전하기 때문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六相稱語`身業,此有二句差別應知;七於樂`於苦,於無二中,平等業;八無下劣業;九無退轉業;十攝方便業;

여섯 번째는 서로 일치하는 구업과 신업의 상칭어신업(相稱語身業)이니, 이에 두 문구의 차별된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일곱 번째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괴로움에 대해서도,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무이(無二)에 대해서도 평등한 업이며,

여덟 번째는 열등하지 않은, 무하열업(無下劣業)이고, 아홉 번째는 퇴전하지 않는 무퇴전업(無退轉業)이며,

열 번째는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는 섭방편업(攝方便業)이다.


十一厭惡所治業,此有二句差別應知;十二無閒作意業;十三勝進行業,

此有七句差別應知,謂六波羅蜜多正加行故,及四攝事正加行故;

열한 번째는 다스려지는 것을 혐오하는 염오소치업(厭惡所治業)이니, 이에 두 문구의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열두 번째는 끊임없이 작의하는 무간작의업(無閒作意)이며,

열세 번째는 뛰어나게 나아가는 행의 승진행업(勝進行業)이니, 이에 일곱 문구의 차별된 뜻이 있으니, 이른바 여섯 가지 바라밀다의 바른 가행이기 때문이고, 네 가지 포섭하는 사섭사(四攝事)의 바른 가행이기 때문이다.

 

사섭사(四攝事), 4섭법(攝法)이라고도 하며, 보살이 중생을 제도할 때 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태도으로, 

첫째, 보시섭(布施攝)은 재물을 기꺼이 베풀거나 진리를 가르쳐 주며, 

둘째, 애어섭(愛語攝)은 남에게 미소띤 얼굴과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 대하며,

셋째, 이행섭(利行攝)은 신체ㆍ언어ㆍ의지의 3업에 의한 선행으로 남에게 이익을 주며,

넷째, 동사섭(同事攝)은 자타가 일심이 되어 협력하여 중생과 같이 일하면서 제도하는 것이다.

 

十四成滿加行業,此有六句差別應知,謂親近善士故`聽聞正法故`住阿練若故`離惡尋思故`作意功德故,此復有二句差別應知,助伴`功德故,此復有二句差別應知;

열네 번째는 가행을 원만히 성취하는 성만가행업(成滿加行業)이니, 이에 여섯 문구의 차별된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선지식을 가까이하기 때문이고, 정법을 청해 듣기 때문이며, 아련야에 머물기 때문이고, 나쁘게 헤아리는 생각을 여의기 때문이며, 바르게 사유하는 공덕, 즉 이승(二乘)을 버리고 대승을 구하는 작의의 공덕이기 때문이니, 이에 다시 두 문구의 차이가 있으니, 도와주는 공덕이며, 이에 다시 두 문구의 차별한 뜻이 있다고 알아야 한다.

 

十五成滿業,此有三句差別應知,謂無量淸淨故`得大威力故`證得功德故;

열다섯 번째는 원만히 성취하는 성만업(成滿業)으로, 이에  문구의 차별된 뜻이 있으니, 이른바 무량 청정하기 때문이고, 대 위력을 얻기 때문이며, 증득하는 공덕이기 때문이다.


十六安立彼業,此有四句差別應知,謂御衆功德故`決定無疑教授教誡故`財法攝一故`無雜染心故.如是諸句,應知皆是初句差別.
 

열여섯 번째는 그것을 안립하는 안립피업(安立彼業)이니, 이에 네 문구의 차별된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대중을 제어하는 공덕이기 때문이고,

결정적으로 의혹 없이 가르치고 훈계하기 때문이며,

재물과 법을 하나로 포섭하는 재법섭일(財法攝一)이기 때문이고, 잡염심이 없는 무잡염심(無雜染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문구는 모두 첫 번째 문구의 차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5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② 4

 

▶論曰:復有四種意趣,四種秘密,一切佛言,應隨決了. 四意趣者,

一平等意趣,謂如說言:我昔曾於彼時,彼分卽名勝觀正等覺者;

二別時意趣,謂如說言:若誦多寶如來名者,便於無上正等菩提,已得決定.又如說言:由唯發願,便得往生極樂世界;

三別義意趣,謂如說言:若已逢事爾所殑伽河沙等佛,於大乘法,方能解義;

四補特伽羅意樂意趣,謂如爲一補特伽羅,先讚布施,後還毀呰.如於布施,

如是尸羅,及一分修,當知亦爾.如是名爲四種意趣.

▷또한  가지 취지인 사의(四意)와  가지 비밀의 사비(四秘)가 있으니, 이는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므로, 따라서 마땅히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가지 취지의 사의(四意)란, 

첫째는 평등한 취지의 평등의취(平等意趣)이니, “내가 옛날에 있었던 그 때의 그분, 즉 과거의 나를 승관정등각자(勝觀正等覺者, 과거 7불의 한 분이신 비바시불毘婆尸佛, Vipaśyin)라고 불리웠다”고 말씀한 바와 같으며,

둘째는 다른 시기의 취지인 별시의취(別時意趣)이니, “만약 다보여래(多寶如來)의 명호를 염송하는 자는 문득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에 대해서 이미 결정할  있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으며,

또한 말씀하시기를 “오직 발원하는 것만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할  있다”고  것과 같으며,  

셋째는 별도 의미의 취지인 별의의취(別義意趣)이니, “만약 이미 그곳에서 긍가하(殑伽河, 갠지스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면, 비로소 대승법에 대해서 능히 의미를 해석할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

넷째는 보특가라(補特伽羅, 윤회하는 유정)의 의요(意樂)의 의취(意趣)이니, 이른바  보특가라를 위해서 먼저 보시를 찬탄하지만 나중에는 도리어 비방함과 같으니, 이와 같이 보시와 마찬가지로 계율  일부분의 수행인 일분수(一分修)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들을  가지 취지의 사의(四意)라 하는 것이다.

ㅡ네 가지 의미와 가지 비밀에 관한 제4 사의사비장(4 四意四秘章).

 

일분수(一分修), 일부분의 수행은 세간에서의 일반적인 수행을 말하는 것으로, 앞에서 출세간의 행으로서 6바라밀을 들었고, 다음에 세간의 일반적인 수행도 역시 그렇다는 의미이다.


四秘密者, 一令入秘密,謂聲聞乘中,或大乘中,依世俗諦理,說有補特伽羅,及有諸法自性差別;

二相秘密,謂於是處,說諸法相,顯三自性;三對治秘密,謂於是處,說行對治八萬四千;

四轉變秘密,謂於是處,以其別義,諸言諸字卽顯別義.

 가지 비밀의 사비(四秘)에서의 그 첫째는 들어가게 하는, 영입비밀(令入秘密)이니, 성문승에서 혹은 대승에서 세속제의 도리에 의지해서, 보특가라가 있고법의 자성에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둘째는 상비밀(相秘密)이니, 이곳에서법의 상(相)을 말하여서 삼자성(三自性)을 나타내며,

셋째는 다스림의 대치비밀(對治秘密)이니, 이곳에서 수행의 다스림이 8만 4천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넷째는 전변비밀(轉變秘密)의 비밀이니, 이곳에서  별도의 의미로써 모든 언어와 모든 문자에 별도의 의미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ㅡ여기서의 전변은 단어에 여러 의미를 가진 용어라는 의미에서의 전변을 말하는 것이다.

 

如有頌言:게송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覺不堅爲堅, 善住於顚倒, 極煩惱所惱, 得最上菩提.”

견고하지 않음을 깨달아서 견고함으로 삼고,

전도됨에  머물러서 지극한 번뇌에 고뇌하며 최상의 보리를 얻는다네.


▶釋曰:意趣秘密,有差別者, 謂佛世尊先緣此事,後爲他說,是名意趣.由此決定,令入聖教,是名秘密.

平等意趣者,謂如有人,取相似法,說如是言:彼卽是我.世尊亦爾,平等法身,置在心中,說言:我昔曾於彼等.非彼昔時毘鉢尸佛,卽是今日釋迦牟尼,依平等義所起意趣,作如是說.

▷해석한다; 의치(意趣, 취지)와 비밀(秘密)의 차이는, 부처님 세존께서 먼저  일을 반연하시고 나중에 남을 위해서 말씀하신 것을 의취(意趣)라 부르고,

이것의 결정으로 인하여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는 것 비밀이라 이름한다.

‘평등의취(平等意趣)’는 이른바 어떤 사람이 비슷한 법을 취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나다”라고 하는 것 같이, 세존도 역시 그러해서 평등한 법신이 마음 가운데 있기 때문에 “나는 과거에 그와 같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과거의 비바시불이  오늘날의 석가모니불인 것은 아니지만, 평등한 의미를 일으키는 의취 의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別時意趣者,謂此意趣令懶惰者,由彼彼因,於彼彼法,精勤修習,彼彼善根,皆得增長. 此中意趣, 顯誦多寶如來名因,是昇進因,非唯誦名,便於無上正等菩提,已得決定.如有說言:由一金錢,得千金錢.豈於一日? 意在別時,由一金錢,是得千因,故作此說.此亦如是,由唯發願,便得往生極樂世界,當知亦爾.

‘다른 시기의 취지인 별시의취(別時意趣)’란,  의치 게으른 자로 하여금 그러저러한 원인에 의거해서 그러저러한 법을 부지런히 닦아 익히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모든 선근이 증장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의치 다보여래의 명호를 염송하는 원인(因)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것은 승진의 원인(因)으로써, 오직 명호를 염송하는 것만으로 문득 무상정등보리에 대해서 결정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니,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의 금전으로 인하여  개의 금전을 얻는 것이 어찌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뜻이 다른 시기에 있는 것으로, 하나의 금전은  개를 얻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역시 그와 같아서 오직 발원하는 것만으로 문득 극락세계에 왕생할  있게 되는 것 역시도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

 

別義意趣中,於大乘法,方能解義者,謂於三種自性義理,自證其相. 若但解了隨名言義,是佛意者,愚夫於此亦應解了.故知此中言解義者,意在證解要由過去逢事多佛.

‘별도 의미의 취지인 별의의취(別義意趣)’ 중에서 ‘비로소 대승법에 대한 의미를 능히 해석한다’는 것은 삼자성(三自性) 의리에 대해서 스스로  상을 깨닫는 것이다. 

만약, 다만 말의 의미를 따르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라고 해석한다면, 어리석은 범부 역시도 이에 대해서 마땅히 해석할  있어야 할 것이므로, 

여기서 의미를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를 깨달아 아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것은 모름지기 과거에 많은 부처님을 받들어 섬겼어야만 가능한 것이.

 

補特伽羅意樂意趣者,謂如爲一先讚布施,後還毀呰. 此中意者,先多慳悋,爲讚布施;後樂行施,還復毀呰,令修勝行.若無此意,於一施中,先讚後毀,則成相違.由有此意,讚毀應理.於尸羅等,當知亦爾. 一分修者,謂世閒修.

‘보특가라(補特伽羅, 윤회하는 유정)의 의요(意樂)의 의취(意趣)’는  사람을 위해서 먼저 보시를 찬탄하지만, 나중에 도리어 비방하는 것과 같이, 여기서의 의취는 먼저는 인색함이 많기 때문에 보시를 찬탄하고, 나중에 보시를 행하는 것만을 즐긴다면, 도리어 다시 비방하여 뛰어난 승행(勝行)을 닦도록 하는 것이니,

만약 이러한 의취가 없다면 보시 하나에 대해서 앞에서는 찬탄하고 나중에 비방하는 것으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찬탄함도 비방함도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계율 등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일부분의 수행의 일분수(一分修)’는 세간의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令入秘密者,謂若是處,依世俗諦理,說有補特伽羅及一切法自性差別,爲令有情入佛聖教,是故說名令入秘密.

‘들어가게 하는 영입비밀(令入秘密)’이란, 만약 이곳에서 세속제의 도리에 의지해서 보특가라(윤회하는 유정)  일체법의 자성에 차별이 있다고 말한다면, 유정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이니,  

그러므로 들어가게 하는 비밀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相秘密者,謂於宣說諸法相中,說三自性.對治秘密者,謂於是處,宣說有情諸行對治,

爲欲安立有情煩惱行對治故. 轉變秘密者,謂於是處,以說餘義,諸言`諸字轉顯餘義.

‘상비밀(相秘密)’은 일체법의 상을 널리 말함에 있어서  가지의자성을 밝히는 것이며,

‘다스림의 대치비밀(對治秘密)’은 이곳에서 유정의 모든 행의 다스림을 널리 말하는 것으로, 유정의 번뇌행의 다스림을 안립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다. 

‘전변비밀(轉變秘密)’은 이곳에서 다른 것을 말함으로써 의미의 모든 언어ㆍ모든 글자가 바뀌어 다른 의미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於伽他中,覺不堅爲堅者,不堅謂定,由不剛强馳散難調,故名不堅;卽於此中, 起尊重覺,名覺爲堅.

善住於顚倒者,是於顚倒,能顚倒中,善安住義.於無常等, 謂是常等名爲顚倒, 於無常等,謂無常等是能顚倒,是於此中,善安住義.極煩惱所惱者,精進劬勞,名爲煩惱.爲衆生故,長時劬勞精進所惱,如有誦言:處生死久惱,但由於大悲.

如是等. 得最上菩提者,其義易了.

가타(伽他, 게송)에서 ‘견고하지 않음을 깨달아서 견고함으로 삼네’란,

견고하지 않음은 선정이 견고하지 않고 산란하여 조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견고하지 않다고 이름하는 것이니, 곧  가운데에서 깨달음에 대하여 존중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견고함으로 삼는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전도됨에  머문다’는 것은 전도와 능히 전도되게 하는 것에 대해서  안주한다는 의미이며, 무상 등을 항상함 등이라고 말하는 것을 전도됨이라 하며, 무상 등을 무상 등이라고 말하는 것은 능전도(能顚倒)된 것으로, 이것은  가운데  안주한다는 의미이다. 

‘지극한 번뇌에 고뇌한다’는 것이란, 애써 정진하는 것을 번뇌라 이름하나니, 중생을 위해서 오랫동안 애써 정진하여 고뇌하는 것으로, 게송에서 “생사에 머물러 오랫동안 고뇌함은 다만  자비 때문이네”라고 말함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로 인하여 ‘최상의 보리를 얻는다’는 것은  의미가 쉬운 것이다.


▶論曰:若有欲造大乘法釋,略由三相,應造其釋:一者由說緣起`二者由說從緣所生法相`三者由說語義.

논문; 만약 대승법을 해석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마땅히 간략한  가지의 삼상(三相)에 의거해서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니,

첫째는 연기를 말하는 것을 말미암은 것이며,

둘째는 조건의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법상을 말하는 것을 말미암으며,

셋째는 가르치는 말씀의 어의(語義)를 말하는 것에 말미암아야 하는 것이다.


▶釋曰:由此三相,隨其所應,應造一切大乘法釋.

해석한다; 이  가지의 삼상(三相)으로 인하여, 마땅히  상응하는 바를 따라 모든 대승법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論曰:此中說緣起者,如說:

논문; 여기서 ‘연기를 말함’이란,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言熏習所生, 諸法此從彼, 異熟與轉識, 更互爲緣生,”

언어의 훈습에서 생겨난 제법, 이것은 그것을 따르는 것이네.

이숙식(異熟識, 유부무기)과 전식(轉識, 7식)이, 다시 서로의 조건이 되어 생겨나는구나.


▶釋曰:言熏習所生諸法者,由外分別熏習在阿賴耶識中,以此熏習,爲因一切法生,卽是轉識自性.此從彼者,此分別熏習用彼諸法爲因,此卽顯示阿賴耶識與彼轉識,更互爲因.

해석한다; ‘언어의 훈습에서 생겨난법’이란, 외부 분별의 훈습은 아뢰야식 안에 저장되어 있고,  훈습의 원인으로써 제법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전식(轉識, 7식)의 자성인 것이다. 

‘이것은 그것을 따른다’는 것이라, 이 분별의 훈습은 법을 원인으로 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아뢰야식과  전식이 다시 서로 원인이 되는 것 나타낸 것이다.


▶論曰:復次彼轉識相法,有相`有見,識爲自性.又彼以依處爲相`遍計所執爲相`法性爲相,由此顯示三自性相.如說:

논문; 또한  전식(轉識)의 상법(相法)에는, 상분이 있고 견분이 있는 식(識)을 자성으로 삼으며,

또한 그것은 의타기성을 의지처로써 상을 삼고, 변계소집성으로써 상을 삼으며, 법성(원성실성)으로써 상을 삼으니, 

이로써자성(三自性)의 상을 나타내는 것이니, 게송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從有相`有見, 應知彼三相.”

상분이 있고 견분이 있음에 따라, 마땅히   가지의 삼상(三相)을 알아야 하리.


復次云何應釋彼相?謂遍計所執相,於依他起相中,實無所有,圓成實相於中實有.由此二種非有及有,非得及得`未見已見眞者同時.謂於依他起自性中,無遍計所執故,有圓成實故.於此轉時,若得彼卽不得此,若得此卽不得彼.如說:

또한  상을 어떻게 마땅하게 해석해야 하는가? 

변계소집상은 의타기상에서는 실제로 존재함이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원성실상은 실로 존재(有)하며,

이러한  가지의 비존재(非有)와 존재(有), 얻지 못함과 얻음, 아직 진실을 보지 못함과 이미 진실을 보는 것은 동시의 것이니, 이른바 의타기자성에 변계소집자성이 없기 때문이고, 원성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전할  만약 그것을 얻는다면,  이것을 얻지 못하고, 만약 이것을 얻으면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

게송에서 바와 같다.

 

“依他所執無, 成實於中有, 故得及不得, 其中二平等.”

의타기성에는 변계소집성이 없고, 원성실성은  안에 있으니, 

따라서 얻음과 얻지 못함의 두 가지는  안에서 평등하다네.


▶釋曰:彼轉識相法,有相`有見,識爲自性者,謂彼識有相`有見,以爲其體.又卽彼相,有其三種,依處爲相者,謂依他起相.由此所說三種自性,顯示彼相,

 해석한다; ‘그 전식의 상법(相法)은, 상분이 있고 견분이 있는 식을 자성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 식이 상분과 견분을 그 체로 삼기 때문이며,

또한 그 상에 세 가지가 있으니, ‘의지처를 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의타기상이니, 세 가지의 삼자성(三自性)에 의거해서 그 상을 나타낸 것이다.

 

於伽他中,卽顯此義.從有相`有見應知彼三相者,如釋顯示. 由此二種,非有及有`非得及得`未見已見眞者同時者,

遍計所執及圓成實,名爲二種.如是二種:第一非有`第二是有. 未見眞者,得遍計所執,不得圓成實.

已見眞者,卽此剎那,得圓成實,不得遍計所執. 於伽他中,卽顯此義,謂依他所執無等.

게송에서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었으니, ‘상분이 있고 견분이 있음에 따라, 마땅히 그 세 가지 양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해석에서 나타내 보인 것과 같으며,

‘이 두 가지의 비존재(非有)와 존재(有), 얻지 못함과 얻음, 아직 진실을 보지 못함과 이미 진실을 보는 것이 동시에 있다’는 것은, 변계소집성과 원성실성을 두 가지라 한 것이며,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첫 번째는 비존재(非有)이고, 두 번째는 존재(有)이다.

‘아직 진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변계소집성을 얻으면 원성실성을 얻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

‘이미 진실을 본다’는 것은 곧 이 찰나에 원성실성을 얻는다면, 변계소집성을 얻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 

가타(伽他, 게송)에서 이러한 뜻을 나타내어서 ‘의타기성에는 변계소집성이 없으며’ 등이라고 말하였다.

 

平等者,謂一剎那.其中者,謂依他起中.二者,謂未見眞者及已見眞者.故者,是由此因義.謂於依他起中,由遍計所執無故,及由圓成實有故.又諸愚夫顚倒執故,如是見轉.若諸聖者,由正見故,如是見轉.

‘평등(平等)’이란 한 찰나(一剎那)를 말하고,

‘그 안에서’란, 의타기성의 안이며,

'두 가지'는 아직 진실을 보지 못한 것과 이미 진실을 본 것을 말하며,

‘따라서’는 이러한 원인에 의거해서라는 의미이니, 이른바 의타기성 중에 변계소집성이 없기 때문이고, 원성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전도되게 집착함으로써 이러한 견해가 전전하지만,

만약 모든 성자라면 바른 견해에 의거하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가 전전하지 않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5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② 3

 

▶論曰:『阿毘達磨大乘經』中,薄伽梵說,法有三種:一雜染分`二淸淨分`三彼二分.依何密意, 作如是說?

於依他起自性中,遍計所執自性,是雜染分,圓成實自性,是淸淨分,卽依他起,是彼二分.依此密意,作如是說.

▷논문; '아비달마대승경(阿毘達磨大乘經)'에서 박가범(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잡염분(雜染分)이고, 둘째는 청정분(淸淨分)이며, 셋째는 그 두 부분의 이분(二分)이다”라고 하셨으니,

어떠한 비밀스런 뜻에 의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인가?

의타기자성 중에서 변계소집자성은 잡염분이고, 원성실자성은 청정분이며, 의타기자성은 그 두 부분이니, 이러한 비밀스런 뜻에 의지해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於此義中,以何喩顯?以金土藏,爲喩顯示.譬如世閒金土藏中,三法可得:一地界`二土`三金.

이러한 뜻에 대해서는 어떠한 비유로써 나타내는 것인가?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인 금토장(金土藏)으로 비유하여 나타내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세간의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에 세 가지의 법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첫째는 지계(地界)이고, 둘째는 흙(土)이며, 셋째는 금(金)이다.

 

於地界中,土非實有,而現可得.金是實有,而不可得.火燒鍊時,土相不現,金相顯現.又此地界,土顯現時,虛妄顯現,金顯現時,眞實顯現,是故地界,是彼二分.

지계(地界) 가운데에서 흙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현재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금은 실제로 있는 것이지만 얻을 수 없는 것이니,  불로 제련한 때에는 흙의 상은 나타나지 않고 금의 상이 현현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이 지계(地界)는 흙이 현현할 때에는 허망되게 현현하고, 금이 현현할 때는 진실되게 현현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지계는 그 두 부분이 되는 것이다.

 

識亦如是,無分別智,火未燒時,於此識中,所有虛妄遍計所執自性顯現,所有眞實圓成實自性不顯現. 此識若爲無分別智,火所燒時,於此識中,所有眞實圓成實自性顯現,所有虛妄遍計所執自性不顯現. 是故此虛妄分別識, 依他起自性,有彼二分,如金土藏中,所有地界.

식(識) 역시도 이와 같아서, 무분별지(無分別智)의 불이 아직 타지 않을 때에는, 이 식 안에 있는 허망된 변계소집자성이 현현하고, 진실된 원성실자성은 현현하지 않으나,

만약 이 식이 무분별지혜의 불에 탈 때에는, 이 식 안에 있는 진실된 원성실자성이 현현하고, 허망된 변계소집자성은 현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허망된 분별식인 의타기자성에는 그 두 가지 부분 모두가 있어서,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에 있는 지계(地界)와 같은 것이다.


▶釋曰:『阿毘達磨大乘經』中,由此密意,說有三法:一雜染分,謂遍計所執自性,是雜染故;二淸淨分,謂圓成實自性,是淸淨故;三彼二分,謂依他起自性,通彼二故.爲顯此義, 以金土藏,爲其譬喩. 此中藏者,是彼種子.

▷해석한다; '아비달마대승경'에서 이 비밀스런 뜻에 의거해서 세 가지의 삼법(三法)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첫째는 잡염분으로서, 변계소집자성을 말하는 것이니, 변계소집은 잡염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청정분으로써, 원성실자성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청정함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 두 부분 모두로써, 의타기자성을 말하는 것이니, 그 두 가지 모두에 통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금이 함장된 흙덩어리인 금토장(金土藏)으로써 그 비유를 삼은 것이다.

여기에서 저장의 장(藏)은 그것의 종자이고,

ㅡ여기서 종자라는 것은, 흙에 함장되어 있는 금의 분자(分子)로서 아직 금의 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종자라 하는 것이.

 

言地界者,是堅硬性.土之與金,是所造色.於此喩中,三法可得,謂此藏中,先時有土相貌顯現,後時金相方乃可得.爲顯金相後方可得,說火燒鍊後可得故,金眞實有.

지계(地界)는 견고함의 속성이며, 흙과 금은 지계(地界)로 만들어진 색법(色法, 물질)의 소조색(所造色)인 것이다.

이 비유에서 세 가지의 삼법(三法)을 얻을 수 있으니,

이 금토장(金土藏) 중에서 우선 흙의 모습이 현현하고, 나중에는 금의 모습을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니, 금의 모습을 나중에 비로소 얻을 수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불로 제련한 후에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따라서 금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論曰:世尊,有處說一切法常,有處說一切法無常,有處說一切法非常非無常.依何密意, 作如是說?

謂依他起自性, 由圓成實性分,是常,由遍計所執性分,是無常,由彼二分,非常非無常.依此密意,作如是說.

▷논문; 세존께서는 어떤 곳에서는 일체법은 항상한 상(常)이라 말씀하시고, 어떤 곳에서는 일체법은 무상(無常)이라 말씀하셧으며, 어떤 곳에서는 일체법이 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다고 말씀하셨으니,

어떤 비밀스런 뜻에 의지해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인가?

의타기자성은 원성실성분으로 말미암아 항상한 상(常)이고,

변계소집성분으로 말미암아서는 무상(無常)한 것이며,

그 두 부분에 모두로 인한 것은 항상함도 무상함도 아닌 것이니,

이러한 이런 비밀스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如常無常無二, 如是苦樂無二`淨不淨無二`空不空無二`我無我無二`寂靜不寂靜無二`有自性無自性無二` 生不生無二`滅不滅無二`本來寂靜非本來寂靜無二`自性涅槃非自性涅槃無二,生死涅槃無二亦爾.如是等差別一切諸佛密意語言,由三自性,應隨決了,如前說常無常等門.此中有多頌:

항상함(常)ㆍ무상(無常)함ㆍ항상함도 무상함도 아닌 것과 같이,

괴로움(苦)ㆍ즐거움(樂)ㆍ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것과,

청정ㆍ부정ㆍ청정도 부정도 아닌 것과,

공(空)ㆍ불공(不空)ㆍ공도 불공도 아닌 것과,

자아ㆍ무아ㆍ자아도 무아도 아닌 것과,

적정(敵靜)ㆍ부적정(不寂靜)ㆍ고요함도 고요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과,

자성이 있는 유자성(有自性)ㆍ자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ㆍ자성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것과,

생(生)ㆍ불생(不生)ㆍ생겨남도 생겨나지 않은 것도 아닌 것과, 소멸ㆍ불멸ㆍ소멸도 불멸도 아닌 것과,

본래 적정(敵靜)ㆍ본래 적정(敵靜)하지 않음ㆍ본래 적정함도 아니고 본래 적정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과,

자성열반ㆍ자성열반이 아님ㆍ자성열반도 자성열반이 아닌 것도 아닌 것과,

생사ㆍ열반ㆍ생사도 열반도 아닌 것 역시도 그러한 것이니,

이와 같은 차별이 모든 부처님의 비밀스런 뜻의 말씀으로서, 삼자성에 의거해서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니, 

앞에서 말한 항상함ㆍ무상함 등의 법문과 같은 것이다.

이러하다는 것에 많은 게송이 있으니, 


“如法實不有, 如現非一種, 非法非非法, 故說無二義.

법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현재 한 종류가 아닌 무량한 종류인 것과 같이,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닌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둘이 아닌 무이(無二)의 뜻을 말씀하셨네.

ㅡ법은 실재하지 않으나, 무량한 종류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依一分開顯, 或有或非有, 依二分說言, 非有非非有.

한 부분에 의해서 열어 보인다면, 혹 존재(有)이거나 혹은 비존재(非有)이나, 

두 부분에 의해서 말한다면, 존재(有)도 아니고 비존재(非有)도 아닌 것이네.


如顯現非有, 是故說爲無, 由如是顯現, 是故說爲有.

현현하듯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비유(非有)이니, 그러므로 비존재의 무(無)라 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현현하므로, 따라서 존재(有)라고 말한다네.


自然自體無, 自性不堅住, 如執取不有, 故許無自性.

자연과 자체에 비존재(無)로서, 자성이 견고히 머물지 않는 것이니, 

집착하는 것과 같이 존재하지 않는 불유(不有)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음을 인정하네.


由無性故成, 後後所依止, 無生滅本寂, 自性般涅槃.”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루어지고, 이후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니, 

생겨남도 소멸함의 생멸(生滅)도 없는, 본래 고요한 자성이 완전한 열반이라네.


▶釋曰:伽他義中,如法實不有,如現非一種者,如其次第,釋非法非非法因緣,由實不有故非法,由現非一種故非非法,以非法非非法,故說無二義.

▷해석한다; 게송의 뜻 중에서

‘법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현재 한 종류가 아닌’것이란, 법이 아닌 것ㆍ법이 아님도 아닌 것의 인연을 그 순서대로 해석한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법이 아닌 것이고, 현재 한 종류가 아니기 때문에 법 아님이 아니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에 둘이 아닌 무이(無二)의 뜻을 말한 것이다.

 

依一分者,謂依一邊.開顯者,說示也.或有或非有者,或是有性`或是無性.依二分說言,非有非非有者,取依他起,具二分性,說爲非有及非非有.如顯現非有者,如現所得,不如是有.是故說,爲無者,由此義故,說之爲無.由如是顯現者,由唯似有,相貌顯現.是故說,爲有者,卽由此義說之爲有.

‘한 부분에 의한다는 의일분(依一分)’이란, 한쪽에 의지하는 것을 말하며,

‘열어 보인다는 개현(開顯)’이란, 말로 나타내는 것이며,

‘혹은 존재이거나 혹은 비존재’란 혹은 존재의 성품이거나 혹은 비존재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며,

‘두 부분에 의해서 말하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다’라는 것은, 의타기자성이 두 부분의 성품을 갖춘, 즉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며, 

‘현현하듯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란, 현재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비존재라고 말한다’는 것이란, 이러한 의미로 인하여 그것을 비존재로 삼는 것을 말하며,

‘이와 같이 현현한다’는 것은, 오직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현현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존재라고 말한다’는 것이란, 곧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그것을 존재로 삼는 것음을 말한다.


說一切法無自性意,今當顯示.自然無者,由一切法無離衆緣自然有性, 是名一種無自性意.自體無者,

由法滅已不復更生,故無自性, 此復一種無自性意.

'일체법에 자성 없다는, 일체법무자성(一切法無自性)'의 뜻을 지금 마땅히 나타낼 것이니,

'자연의 비존재인 자연무(自然無)'란, 일체법이 여러 조건의 중연(衆緣)을 떠나서는 자연에 자성이 없으므로, 일종의 무자성(無自性)의 뜻이며,

'자체의 비존재, 자체무(自體無)'란, 법이 소멸하면 다시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자성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 역시 일종의 무자성(無自性)의 뜻이다.

 

自性不堅住者,由法纔生一剎那後 無力能住,故無自性. 如是諸法無自性理,與聲聞共. 如執取不有故,許無自性者,此無自性不共聲聞. 以如愚夫,所取遍計所執自性,不如是有,由此意故,依大乘理,說一切法皆無自性.

'자성은 견고하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법이 생겨난 한 찰나 이후에는 힘(力)이 머물 수 없기 때문에 자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을 말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일체법의 무자성(無自性)의 이치는 성문과 공통되는 것이다.

그러나 ‘집착하는 것과 같이 존재하지 않는 불유(不有)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음을 인정하네.’에서의 자성 없음은 성문과 공통되지 않은 것이니, 어리석은 범부가 취한 것은 변계소집자성이므로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로 인하여 대승의 도리에 의지해서 일체법이 다 자성이 없는 개무자성(皆無自性)이라 말하는 것이다.

 

由無性故,成者,由一切法無自性故, 無生滅等皆得成就.所以者何?由無自性故無有生,由無生故,亦無有滅,無生滅故,本來寂靜,本寂靜故,自性涅槃.後後所依止者,是後後因此,而得有義.

‘자성이 없는 무성(無性)이기 때문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란, 일체법이 자성이 없기 때문에 생겨남도 소멸함의 생멸(生滅)도 없고 불생불멸 이후의 ‘본래적정 자성열반’등이 다 성취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자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에 생겨남도 없는 무생(無生)이고, 무생이기 때문에 역시 소멸함도 없는 무멸(無滅)이며, 무생 무멸이기 때문에 본래 고요한 본적정(本寂靜)이고,

본래 고요한 본적정이기 때문에 자성이 열반인 것이다.

‘이후의 의지처인 후후소의지(後後所依止)’란, 이후에는 이것에 근거해서 존재의 의미인 유의(有義)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5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② 2

 

▶論曰:復次何緣,如經所說,於依他起自性,說幻等喩? 於依他起自性,爲除他虛妄疑故. 他復云何, 於依他起自性, 有虛妄疑? 由他於此,有如是疑: 云何實無有義,而成所行境界?爲除此疑,說幻事喩.

▷논문; 또한 무슨 까닭으로 경전에서 의타기자성에 대해서 요술(幻) 등의 비유를 말한 것인가? 

의타기자성에 대해서 다른 이들의 허망된 의심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다른 이가 의타기자성에 대하여 허망된 의심을 갖는 것인가? 

다른 이가 이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심을 갖기 때문이니,  

즉 실제로 대상이 존재하지 않거늘, 어떻게 심식(心識)이 행하여지는 소행경계(所行境界)를 이루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요술(幻) 등의 비유를 말한 것이다.

 

云何無義心`心法轉?爲除此疑,說陽炎喩. 云何無義,有愛`非愛,受用差別? 爲除此疑,說所夢喩.云何無義,淨`不淨業,愛`非愛果,差別而生?爲除此疑,說影像喩.云何無義,種種識轉?爲除此疑,說光影喩.云何無義,種種戲論,言說而轉?爲除此疑,說谷嚮喩.

云何無義,而有實取諸三摩地所行境轉?爲除此疑,說水月喩.云何無義,有諸菩薩無顚倒心,爲辦有情諸利樂事,故思受生?爲除此疑,說變化喩

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이거늘, 어떻게 심왕과 심소법이 작용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아지랑이의 양염(陽炎) 비유를 말하였으며,

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이거늘, 어떻게 사랑스럽고 사랑스럽지 못한 것의 수용(受用)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꿈(夢)의 비유를 말하였으며,

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이거늘, 어떻게 청정하고 청정하지 못함의 업과 사랑스러움과사랑스럽지 못함의 결과가 다르게 생겨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영상(像)의 비유를 들었으며,

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이거늘, 어떻게 갖가지 식이 전전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그림자의 비유를 말하였으며,

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이거늘, 어떻게 갖가지 희론과 언설이 전전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메아리의 곡향(谷嚮)의 비유를 들었으며, 

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이거늘, 어떻게 실제로 모든 삼마지에서 행하여지는 대상(境)을 취하여 전전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물에 비친 달의 비유를 말하였으며,

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이거늘, 어떻게 모든 보살은 전도됨이 없는 마음으로 유정을 이롭게 하는 일들을 애써 하기 위해서 생을 받고자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변화(化)의 비유를 말하였다.


▶釋曰:爲此義故,於依他起,說幻等喩,今當顯示.

此中虛妄疑者,謂於虛妄依他起性,所有諸疑,爲除此疑,說幻等喩顯依他起.

▷해석한다; 이러한 뜻으로 의타기자성에 대해서 요술 등의 비유를 말하는 것을 마땅히 나타내 보인 것이니,

 중에서 ‘허망된 의심의 허망의(虛妄疑)’는, 허망된 의타기성에 대해서 갖는 모든 의심을 말한 것이며,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요술 등의 비유를 말하여서 의타기성을 나타내었다.

 

若實無義,云何成境?爲治此疑,說幻事喩,顯依他起.譬如幻象,雖無實義,而成境界,義亦如是.

만약 실제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무의(無義)라면 어떻게 경계(境)를 이루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다스리기 위해서 요술의 환사(幻事) 비유를 말하여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비유하자면 환상은 실제의 대상인 실의(實義)가 없지만 경계(境界)를 이루는 것과 같이, 대상(義)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이다.

 

他復生疑:若無有義,卽無所緣,諸心心法,云何而轉?爲除此疑,說陽炎喩,顯依他起.此中陽炎,譬心`心法,水喩於義,譬如陽炎,有動搖故,雖無有義,而生水覺.諸心`心法,亦復如是,由動搖故,雖無有義,而生義覺.

다른 이가 다시 의심을 일으키기를, 만약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이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심왕과 심소법이 작용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다스리기 위해서 아지랑이의 양염(陽炎) 비유를 말하여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여기에서 아지랑이는 심왕과 심소법을 비유한 것이고, 물은 대상(義)을 비유한 것으로,

아지랑이에는 동요가 있기 때문에 대상(義)이 없지만 물이라는 지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모든 심왕과 심소법 또한 이와 같아서 동요로 말미암아 비록 대상(義)이 없을지라도,  대상(義)이라는 지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是諸愚夫,於此復疑:若無有義,諸愛`非愛,受用差別,云何可得?爲除此疑,說所夢喩,顯依他起.如於夢中,雖無實義,而見種種愛與非愛,受用差別現前可得,此亦如是.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이에 대해서 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의 모든 감각 수용의 차이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 하나니,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꿈의 비유를 말하여서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꿈속에서는 실제의 대상이 없어도 갖가지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은 감감의 수용 차이가 현전할  있는 것과 같이, 이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於此復疑:淨`不淨業,義旣實無,愛`非愛果,義云何起?爲除此疑,說影像喩,顯依他起.譬如影像,實無有義,卽於本質, 起影像覺, 然影像義,無別可得.此亦如是,應知雖無愛與非愛眞實果義,而現可得.

이에 대해서 다시 의심하기를,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은 업의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의 결과의 대상인 과의(果義)가 일어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거울면에 비친 갖가지 영상 비유를 말하여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비유하자면 거울에 비친 영상은 실제로는 대상(義)이 없지만 본질에 대해서 영상의 지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영상의 대상(義)은 별도로 없을  없는 것과 같이, 이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니,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은 참된 결과의 대상인 진실과의(眞實果義)가 없을지라도 현재에서 얻을  있는 것이다.

 

於此復疑:若無有義,云何得有種種識轉?爲除此疑,說光影喩,顯依他起.如弄影者,有其種種光影可得,雖有多種光影可得, 而光影義,實無所有.識亦如是,無種種義,而有種種義現可得.

이에 대해서 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갖가지 식이 전전할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그림자의 비유를 말하여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그림자 장난을 하는 이는, 갖가지 그림자를 얻을  있는 것과 같이, 많은 종류의 그림자를 얻을  있지만, 그림자의 대상(義)은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無所有)이며,

식 또한 이와 같아서 갖가지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아도 갖가지 대상(義)이 현재에 나타날  있는 것이다.

 

於此復疑:若無有義,無量品類,戲論言說,云何而轉?爲除此疑,說谷響喩, 顯依他起.譬如谷響, 雖無有義,而現可得,戲論言說,亦復如是,雖無實義,而現可得.

이에 대해서 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량한 품류의 희론과 언설이 전전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메아리의 비유를 말하여서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비유한 메아리에는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아도 현재 얻을  있음과 같이,

희론과 언설 역시도 이와 같아서 실제의 대상(義)이 없어도 현재에서 얻을  있는 것이다.


於此復疑:若無有義,云何世閒定心`心法,有義可得? 由說定心,能如實知`如實見故.爲除此疑,說水月喩,顯依他起.譬如水月,其義實無,由水潤滑,澄淸性故,而現可得.定心亦爾.所緣境義,雖實無有,而現可得.水喩其定,以是潤滑,澄淸性故.

이에 대해서 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간의 선정인 세간정심(世閒定心)에서 심왕과 심소법에 대상(義)이 있을  있는 것인가? 

선정의 마음인 정심(定心)은 있는 그대로를 여실하게 알고,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본다고 말하기 때문이니,

이러한 것에 대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물에 비친 달의 비유를 말하여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물에 비친 달의 비유는  대상이 실제로는 없어도 물의 부드럽고 맑고 깨끗한 성품으로 인하여 현재에 얻을  있는 것과 같이,

선정의 정심(定心) 역시 그러해서 인식대상인 소연경의(所緣境義)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현재에 얻을  있는 것이다.

물은  선정에 비유된 것으로, 이것은 부드럽고 맑으며 깨끗한 성품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於此復疑:若有情義,實無所有,云何證眞諸菩薩等,作彼利樂覺慧爲先, 彼彼趣中,攝受自體? 爲除此疑,說變化喩,顯依他起.譬如變化,實無有義,由化者力一切事成,非變化義,而不可得.應知此中亦復如是,所受自體,其義雖無,而有能作一切有情利益安樂,所受自體,義現可得.

이에 대해서 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유정이 대상(義)으로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진리를 증득한 보살들이 어떻게 유정을 이롭게 하는 깨달음의 지혜를 우선으로 삼고, 유정들의 윤회세계(趣)에서 자체를 섭수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변화의 비유를 말하여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비유한 변화는 실제의 대상(義)이 없으나, 변화자인 화자(化者)의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으로, 변화가 아니고서는 대상(義)을 얻을  없는 것과 같으니,  여기에서도 역시 그와 같아서 받는 자체에는  대상(義)이 없지만, 능히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고, 받는 자체의 대상(義)이 현재에 있을  있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復有別義,世尊意說,幻等八喩,今當顯示.此中幻喩,爲除眼等,六種內處,應知顯示眼等六處,譬如幻象,雖實非有,而現可得.說陽炎喩,爲除器世閒,由彼大故.於陽炎中,實無有水,動搖力故,似水可得.

다시 별도 의미의 세존의 취지로서 요술 등의 여덟 가지 비유인 팔유(八喩)를 말씀하신 것을 마땅히 지금 나타내 보인 것이니,

여기에서 요술의 비유는 안근처(眼根處) 등의 육내처(六內處)를 없애기 위해서  등의 여섯 가지 육처(六處) 나타낸 것으로, 비유한 환상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아도 현재에 얻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지랑이의 비유를 말한 것은 기세간(器世間, 자연계)를 없애기 위한 것이니, 그것이 광대하기 때문이니,  

실제 아지랑이에는 물이 없지만, 동요하는  때문에 물이라고 아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說所夢喩,爲除色等所受用境,顯如所夢,色等實無,而能爲因, 起愛`非愛,受用差別.說影像喩, 爲除身業果, 顯善`不善身業爲緣,而有餘色影像生起.說谷嚮喩,爲除語業果,顯語業因,感語業果,猶如谷嚮.

꿈의 비유를 말한 것은 물질(色) 등이 수용하는 경계를 없애기 위한 것으로,

꿈에서  물질(色)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능히 원인이 되어서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의 수용의 차이를 일으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에 영상의 비유를 말한 것은 신업(身業)의 결과(果)를 없애기 위한 것이니,  

선ㆍ불선의 신업을 조건으로 인하여, 다른 물질(色)의 영상이 생겨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메아리의 비유를 말한 것은 구업(口業)의 결과(果)를 없애기 위한 것으로, 구업의 원인(因)이 구업의 결과(果)를 초감하는 것을 비유하여서 골짜기의 메아리인 곡향(谷嚮)과 같다고 표현하였다.

 

意業三種:一非等引地`二等引地`三聞種類.說光影喩,爲除非等引地,諸意業果,顯此意業,所得諸果,猶如光影.說水月喩,爲除等引地,諸意業果,顯等引地,諸意業果,猶如水月.說變化喩,爲除聞種類意業,聞種類者,卽是聞`思之所熏習,此卽顯示聞種類意差別而轉,猶如變化.

의업(意業)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마음의 평정을 이끌지 못하는 비등인(非等引)으로서, 곧 욕계의 산란되게 움직이는 업을 말하는, 비등인지(非等引地)이고, 

둘째는 선정으로 마음을 집중하여 안정된 등인지(等引地)이며, 

셋째는 들어서 이루는 문혜(聞慧)와 사유해서 이루는 사혜(思慧)의 종류인 문종류(聞種類)이다. 

그림자의 비유를 말한 것은 비등인지(非等引地)의 모든 의업의 결과를 없애기 위한 것이니,  의업이 얻는 모든 결과는 마치 그림자와 같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물에 비친 달의 비유를 말한 것은 등인지(等引地)의 모든 의업의 결과를 없애기 위한 것이니, 등인지의 모든 의업의 결과는 마치 물에 비친 달과 같음을 나타낸 것이며,

변화의 비유를 말한 것은 들어서 이루는 문혜(聞慧) 종류의 의업을 없애기 위한 것이니, 들어서 이루는혜의 종류는  들어서 이루는 지혜와 사유해서 이루는 사혜 훈습한 바인 것이다. 

이는 곧 들어서 이루는 문혜 종류의 의미가 차별적으로 전전하는 것이 마치 변화와 같음을 나타낸 것이다.

 

등인(等引)은 범어 samāhita의 번역어로서 삼마혜다(三摩呬多)라 음역된다. 선정으로 마음을 집중하여 안정시켰다는 의미이며, 등(等)은 마음에 혼침(昏沈, 암매暗昧)과 들뜸의 도거(掉擧, 산란)이 평정되어 평등한 것을 말한다. 선정을 닦으면 이러한 등(等)을 일으키게 되므로 등인이라 하며, 등인지(等引地)는 적정지(寂靜地)이며, 진제 역본에는 수혜(修慧)로 말한다.

문종류(聞種類)는 들어서 이루는 지혜인 문혜(聞慧)와 사유해서 이루는 지혜인 사혜(思慧)를 의미한다.


▶論曰:世尊依何密意,於『梵問經』中說:如來不得生死`不得涅槃?於依他起自性中,依遍計所執自性,及圓成實自性,生死`涅槃,無差別密意.何以故?卽此依他起自性,由遍計所執分,成生死,由圓成實分,成涅槃故

▷논문; 세존께서는 어떠한 비밀스런 뜻에 의지해서 '범문경(梵問經)'에서 “여래는 생사를 얻지 않고 열반을 얻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의타기자성에서는 변계소집자성과 원성실자성에 의지해서 생사와 열반에 차별이 없다는 비밀스런 뜻이니,

왜냐하면  의타기자성은 변계소집분으로 인하여 생사를 이루고, 원성실분으로 인하여 열반을 이루기 때문이다.


▶釋曰:如是三種自性相法,所說契經,悉皆隨順,今當顯示.世尊,依何密意,於『梵問經』中說,如來不得生死`不得涅槃者
問, 於依他起自性中,依遍計所執自性,及圓成實自性,生死`涅槃無差別密意者,答次當廣釋.

▷해석한다; 이와 같은 삼자성의 상법(相法)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경(契經, 불경)에 모두 수순한다는 것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세존께서는 어떠한 비밀스런 뜻에 의지해서 '범문경'에서, '여래는 생사를 얻지 않고 열반을 얻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는가?’는 묻는 것이다.

‘의타기자성 중에서는 변계소집자성과 원성실자성에 의지해서 생사와 열반에 차별이 없다는 비밀스런 뜻이다’라는 것은 그 대답으로써 다음에 마땅히 자세히 해석할 것이다.

 

依他起自性,非定生死,由圓成實分,成涅槃故;亦非定涅槃,由遍計所執分,成生死故,是故不可定說一性.由此自性,若得一分,餘分不異.依此意趣,於彼經中,說如來不得生死`不得涅槃.

의타기자성은 결정적으로 생사는 아니니, 원성실분(圓成實分)으로 인하여 열반을 이루기 때문이다.

역시 결정적으로 열반은 아니닌, 변계소집분(遍計所執分)으로 인하여 생사를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정적으로 하나의 성품인 일성(一性)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니, 이 자성에 의거해서 만약 한 부분을 얻었을지라도 다른 부분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취지에 의지해서 그 경전에서 '여래는 생사를 얻지 않고 열반을 얻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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