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9 9


四微細煩惱現行障,謂所知障中俱生一分,第六識俱身見等攝,最下品故,不作意緣故,遠隨現行故,說名微細。彼障四地菩提分法,入四地時便能永斷。彼昔多與第六識中任運而生執我見等同體起故,說煩惱名,今四地中旣得無漏菩提分法,彼便永滅,此我見等亦永不行。

제4는 미세한 번뇌가 현행하는 장애인 미세번뇌현행장(微細煩惱現行障)이니 제4의 염혜지(焰慧地)에서 단멸되는 것이다.

소지장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俱生) 일부분이 제6식과 함께하는 아견 등에 포함되는 것을 말하며, 최하품이기 때문이고,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임운기(任運起)이기 때문에 작의(作意)하지 않고 반연하기 때문이며, 아득한 무시로부터 따라서 현행한 것이기 때문에 미세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 장애는 제4지의 보리분법을 장애하나, 제4지에 들어갈 때, 능히 영원히 단멸되는 것이며, 

그 장애는 대부분 제6식(第六識) 가운데에서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임운기(任運)로서 자아에 집착하는견(我見) 등과 동체(同體)로서 일어나기 때문에 번뇌라 이름하며,

제4지(염혜지) 중에서 무루의 보리분법을 증득하였을 때, 그 소지장이 영원히 영멸(永滅)하며,

이 소지장(所知障)과 동체(同體) 번뇌인 아견(我見) 등도 역시 영원히 작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初二三地行施戒修相同世間,四地修得菩提分法方名出世,故能永害二身見等。

초지(극희지)ㆍ제2지(이구지)ㆍ제3지(발광지)에서는 보시ㆍ지계의 행을 실천하므로 상(相)이 세간과 같으나,

제4지(염혜지)에서는 보리분법을 닦아 증득하므로 비로소 출세간이라고 이름할 수 있으니, 따라서 능히 아견 등의 이견(二見)을 영원히 없애는 것이다.

ㅡ처음 견도(見道)에서 이미 6 중의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아견인 유신견(有身見) 여의고, 지금 4지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아견(유신견)을 모두 여의었므로  가지 아견을 없앤다고 말하는 것이다.

 

寧知此與第六識俱?第七識俱執我見等與無漏道性相違故,八地以去方永不行,七地已來猶得現起,與餘煩惱爲依持故。此麤彼細,伏有前後,故此但與第六相應。

정녕 알아야 하나니, 이것은 제6식과 함께하고 제7식과 함께하는 것으로서, 

자아로 집착하는 등은 제6식의 아공무루(我空無漏)의 도와 체성이 다르기 때문에 제8지에서 부터 비로소 영원히 작용하지 않게 되며,

7지 이후에서는 아직 현행하여 일어남이 있어서 나머지 번뇌인 탐욕ㆍ성냄 등의 의지처가 되며,

이 제6식과 함께하는 아견은 두드러지고, 그 제7식과 함께하는 아견은 미세한 것으로, 조복함에 있어서 앞뒤가 있으니, 두드러진 것을 먼저 조복하고 미세한 것을 나중에 조복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다만 제6식과 상응하는 것이다.


身見等言亦攝無始所知障攝定愛法愛,彼定法愛三地尚增,入四地時方能永斷,菩提分法特違彼故。

아견(유신견) 등이라는 말에는 역시 아득한 무시로부터의 소지장에 포섭된 선정의 애착과 법의 애착도 포함하나니, 그 선정의 애착과 법의 애착은 제3지(발광지)에서는 아직 증성하나, 제4지(염혜지)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영원히 단멸할  있으니, 특히 보리분법이 그것에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由斯四地說斷二愚及彼麤重:一等至愛愚,卽是此中定愛俱者;二法愛愚,卽是此中法愛俱者。

所知障攝二愚斷故,煩惱二愛亦永不行。

그러므로 제4지(염혜지)에서  가지 어리석음인 이우(二愚)와 그것의 추중을 단멸할 수 있다.

첫째는 삼마지에 애착하는 어리석음인 증지애우(等至愛愚)이니,   가운데에서 선정의 애착과 함께하는 것이며,

둘째는 법에 애착하는 어리석음인 법애우(法愛愚)이니,   가운데에서 법의 애착과 함께하는 것이다. 

소지장에 포섭되는  가지 어리석음인 이우(二愚)가 단멸되기 때문에,  가지의 번뇌 애착 역시도 영원히 작용하지 않는 것다.


五於下乘般涅槃障,謂所知障中俱生一分,令厭生死樂趣涅槃,同下二乘厭苦欣滅。

彼障五地無差別道,入五地時便能永斷。

제5는 하위의 교법에서 반열반(涅槃障)하고자 하는 장애이며, 제5 극난승지(極難勝地)에서 단멸 되는 것으로, 

소지장 중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俱生) 일부분이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에 즐겨 나아가서, 하위의 2승(乘)이 괴로움을 싫어하고 적멸을 좋아하는 것과 같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5지(난승지)의 차별이 없는 무차별도(無差別道)를 장애하며, 제5지에 들어갈  문득 능히 영원히 단멸되는 것이다.


由斯五地說斷二愚及彼麤重:一純作意背生死愚,卽是此中厭生死者;二純作意向涅槃愚,卽是此中樂涅槃者。

그러므로 제5지의 난승지에서  가지 어리석음인 이우(二愚)와 그것의 추중을 단멸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순전히 작의(作意)해서 생사를 등지는 어리석음이니, 즉  가운데에서 생사를 싫어하는 것을 말하며,

둘째는 순전히 작의해서 열반에 향하는 어리석음이니,   가운데에서 열반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六麤相現行障,謂所知障中俱生一分,執有染淨麤相現行。彼障六地無染淨道,入六地時便能永斷。

제6은 구체적인 모습의 추상(麤相)이 현행하는 장애이며, 제6 현전지(現前地)에서 단멸되는 것이다.

소지장 중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俱生)의 일부분이 잡염과 청정의 구체적인 추상(麤相) 있다고 집착해서 현행함을 말하며, 그것은 제6지(현전지)의 잡염과 청정이 없는 도(道)를 장애하는 것이나, 제6지에 들어갈  문득 능히 영원히 단멸되는 것이다.


由斯六地說斷二愚及彼麤重:一現觀察行流轉愚,卽是此中執有染者,諸行流轉,染分攝故;二相多現行愚,卽是此中執有淨者,取淨相故,相觀多行,未能多時住無相觀。

그러므로 제6지(현전지)에서의  가지 어리석음인 이우(二愚)와 그것의 추중을 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현재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의 생멸하는 유위법(行)의 유전을 관찰하는 어리석음으로,   가운데에서 잡염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유위법의 유전은 잡염분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멸제(滅諦)와 도제(道諦)의 청정한 상이 많이 현행하는 어리석음으로,   가운데에서 청정함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청정한 상을 취하기 때문에 형상이 있는 관법인 상관(相觀)을 많이 행하는, 즉 후득지(後得智)가 형상이 있는 청정관법인 유상정관(有相淨觀)을 짓는 것으로, 아직 형상이 없는 관법인 무상관(無相觀)에 많이 머물지 못한다.


七細相現行障,謂所知障中俱生一分,執有生滅細相現行。彼障七地妙無相道,入七地時便能永斷。

제7은 미세한 세상(細相) 현행하는 장애이니, 제7 원행지(遠行地)에서 단멸되는 것이다.

소지장 중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俱生)의 일부분이 생겨나고 멸함의 미세한 생멸세상(生滅細相) 있다고 집착해서 현행하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제7지(원행지)의 형상이 없는 승묘한 묘무상도(妙無相道)를 장애하나, 제7지에 들어갈 때에 능히 영원히 단멸되는 것이다.


由斯七地說斷二愚及彼麤重:一細相現行愚,卽是此中執有生者,猶取流轉細生相故;二純作意求無相愚,卽是此中執有滅者,尚取還滅細滅相,故純於無相作意勤求,未能空中起有勝行。

그러므로 제7지에서  가지 어리석음인 이우(二愚)와 그것의 추중을 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미세한 모습이 현행하는 어리석음인 세상현행우(細相現行愚)이니,   가운데에서 생(生)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아직 유전(流轉)의 미세하게 생겨나는 세생상(細生相)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순전히 작의해서 형상이 없음을 구하는 어리석음인 순작의구무상우(純作意求無相愚)이니,   가운데에서 멸(滅)함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환멸(還滅)의 미세한 상에 집착해서, 오로지 무상(無相)에 관심을 기울이고 부지런히 구하므로, 아직 공(空) 가운데에서 상이 있는 관법의 뛰어난행(勝行)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八無相中作加行障,謂所知障中俱生一分,令無相觀不任運起。前之五地有相觀多無相觀少,於第六地有相觀少無相觀多,第七地中純無相觀,雖恒相續而有加行。由無相中有加行故,未能任運現相及土。如是加行障八地中無功用道,故若得入第八地時便能永斷,彼永斷故,得二自在。

제8은 무상(無相)의 관법 속에서 가행을 짓게 하는 장애이니, 제8부동지(不動地)에서 단멸되는 것이다.

소지장 중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俱生)의 일부분이, 무상관(無相觀)으로 하여금 자연적으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불임운기(不任運起)를 말하는 것이며, 

앞의 5지(난승지)에서는 형상이 있는 관법인 유상관(有相觀)은 많고, 형상이 없는 무상관(無相觀) 적으며,

제6지(현전지)에서는 형상이 있는 유상관(有相觀)은 적으나, 형상이 없는 무상관(無相觀)은 많으며,

제7지(원행지) 중에서는 오로지 형상이 없는 무상관(無相觀) 항상 상속하지만, 아직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행이며, 무상관(無相觀)에 가행이 있기 때문에 아직 자재하게 형상과 국토를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행은 제8지(부동지)에서 작용이 없는 무공용도(無功用道)를 장애하나, 제8지에 들어갈 때에 문득 능히 영원히 단멸되며, 그것이 영원히 단멸된 까닭 형상과 국토의  가지 자재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ㅡ제8지에 이르면 자신이 바라는 바 따라, 크고 작은 국토와 금ㆍ은 등의 형상을 나타낼  있게 된다.


由斯八地,說斷二愚及彼麤重:一於無相作功用愚,二於相自在愚。令於相中不自在故,此亦攝土相一分故。

그러므로 제8지(부동지)에서  가지 어리석음인 이우(二愚)와 그것의 추중을 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형상이 없는 것에 대해서 작용을 짓고자 하는 어리석음인 무상작공용우(無相作功用愚)이며,

둘째는 형상에 대해 자재하는 어리석음인 상자재우(相自在愚)이니, 상에서 자재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며, 이것 역시도 상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국토를 포함한다. 


八地以上純無漏道任運起故,三界煩惱永不現行。第七識中細所知障猶可現起,生空智果不違彼故。

제8지(부동지) 이상에서는 순전히 무루도가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임운기(任運起)이기 때문에, 삼계의 번뇌가 영원히 현행하지 않으나, 제7식 중의 미세한 소지장만은 아직 현행할  있으니, 즉 제6식의 아공(我空)의 정체지(正體智)와 후득지의 결과가 제7식의 법집(法執)에서 단멸되기 때문에 제7식의 법집에 거스르지 않기 때문이다.


九利他中不欲行障,謂所知障中俱生一分,令於利樂有情事中不欲勤行,樂修己利。彼障九地四無閡解。入九地時便能永斷。由斯九地說斷二愚及彼麤重:一於無量所說法無量名,句字後後慧辯陁羅尼自在愚。

제9는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利他) 중에서 실천하지 않고자 하는 장애이니, 선혜지(善慧地)에서 단멸되는 것이다. 

소지장 중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俱生) 일부분이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일을 부지런히 실천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즐겨서 닦게 하는 것이니, 그러함은 제9지(선혜지) 중의  가지 걸림 없는 사무애해(四無礙解)를 장애하나, 제9지(선혜지)에 들어갈 때에 능히 영원히 단멸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9지에서  가지 어리석음인 이우(二愚)와 그것의 추중을 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첫째는 설해진 무량 법문ㆍ무량명(無量名)ㆍ문구ㆍ글자ㆍ세 번째 지혜인, 후후혜변(後後慧辯)의 다라니(陀羅尼)에 자재(自在)한 어리석음이다.


於無量所說法陁羅尼自在者,謂義無閡解,卽於所詮摠持自在,於一義中現一切義故。於無量名句字,陁羅尼自在者;謂法無閡解,卽於能詮摠持自在,於一名句字中現一切名句字故。

설해진 수많은 법문인 무량소설(無量所說)의 법을 지녀서 자재하다는 것은 일체 교법의 의미에 걸림 없는 의무애해(義無礙解)를 말하는 것이니, 곧 소전(所詮)을 모두 지녀서 자재한 것으로, 하나의 의미에서 일체의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무량명(無量名)ㆍ문구ㆍ글자를 모두 지녀서 자재하다는 것은 법무애해(法無礙解)를 말하는 것이니, 곧 능전(能詮)을 모두 지녀서 자재한 것으로, 하나의 명칭ㆍ문구ㆍ글자 중에서 무량명ㆍ문구ㆍ글자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於後後慧辯,陁羅尼自在者,謂詞無閡解,卽於言音展轉訓釋摠持自在,於一音聲中現一切音聲故。

 번째 지혜인, 후후혜변(後後慧辯)의 언어를 모두 지녀서 자재하다는 것은 일체 언설에 걸림이 없는 사무애해(詞無礙解)를 말하는 것으로, 곧 음성이 전전하여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모두 지녀서 자재한 것이니, 하나의 음성 속에서 모든 음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二辯才自在愚。辯才自在者,謂辯無閡解,善達機宜巧爲說故。愚能障此四種自在,皆是此中第九障攝。

둘째는 변재가 자재한 것의 어리석음인 변재자재우(辯才自在愚)이니, 변재가 자재한 것이란 법을 설하는 데 걸림 없는, 변무애해(辯無礙解)를 말하는 것으로, 근기의 적절함을  통달해서 그에 따라 훌륭하게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이 능히   가지 자재함을 장애하기 때문에 모두 제9의 장애에 포섭하는 것이다.


十於諸法中未得自在障,謂所知障中俱生一分,令於諸法不得自在。

彼障十地大法智雲及所含藏所起事業,入十地時便能永斷。

제10의 법운지는 제법 속에서 아직 자재함을 얻지 못하게 하는 장애이니, 제10법운지(法雲地)에서 단멸되는 것이다.

소지장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俱生)의 일부분이 제법에 대해서 자재함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 말하며, 그것은 제10지의  법의 지혜 구름인 법운(法雲, 진여)  함장된 다라니문(陀羅尼門)과 삼매문(三昧門)과, 지혜가 일으키는 사업을 장애하는 것이나, 제10지에 들어갈 때에 문득 능히 영원히 단멸되는 것이다.

ㅡ큰 법의 대법(大法) 진여(眞如) 말하는 것으로, 진여를 반연하는 지혜는  구름과 같기 때문에법의 지혜 구름인 법운(法雲)이라 한다.


由斯十地說斷二愚及彼麤重:一大神通愚,卽是此中障所起事業者,二悟入微細秘密愚,

卽是此中障大法智雲及所含藏者。

그리므로 제10지(법운지)에서  가지 어리석음의 이우(二愚) 그것의 추중을 끊는다고 말하나니,

첫째는  신통의 어리석음이니,   가운데에서 일으켜지는 사업을 장애하는 것을 말하고,

둘째는 미세하고 비밀한 것을 깨달아 들어가는 것의 어리석음이니,   가운데에서 대법 지혜 구름  함장된 것을 장애하는 것을 말한다.


此地於法雖得自在,而有餘障,未名最極,謂有俱生微所知障及有任運煩惱障種。

金剛喩定現在前時彼皆頓斷,入如來地。

 지위, 제10지에서는 법총지(總持)ㆍ선정ㆍ업에 자재함을 얻지만, 남아 있는 장애가 있으므로 아직 최극(最極)이라고 이름하지 않으니,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俱生)의 미세한 소지장이 있고, 자연히 일어나는 임운(任運)의 번뇌장의 종자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강유정(金剛喩定)이 현전할 때, 그러한 것 모두를 단박에 끊고 여래지(如來地)에 들어 가는 것이다.


由斯佛地說斷二愚及彼麤重:一於一切所知境極微細著愚,卽是此中微所知障;二極微細㝵愚,卽是此中一切任運煩惱障種。故集論說得菩提時,頓斷煩惱及所知障,成阿羅漢及成如來,證大涅槃大菩提故。

그러므로 불지(佛地)에서 두 가지 어리석음인 이우(二愚)와 그것의 추중을 끊는다고 말하나니,

첫째는 모든 인식대상인 소지경(所知境)에 대해서 매우 미세하게 집착하는 어리석음이니, 곧 미세한 소지장이며,

둘째는 매우 미세하게 장애하는 어리석음이니, 곧 자연히 일어나는 일체의 임운번뇌장(任運煩惱障)의 종자이다.

따라서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4권에서 “보리를 증득할 때에 단박에 번뇌장과 소지장을 단멸하여 아라한이 되고, 여래가 된다”고 말하였으니, 대열반과 대보리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成唯識論卷第九 終 성유식론 제 9권을 마침.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9 8

 

此十位者,五位皆具,修習位中,其相最顯。然初二位頓悟菩薩種通二種,現唯有漏,漸悟菩薩若種若現俱通二種,已得生空無漏觀故。通達位中種通二種,現唯無漏。於修習位七地已前種現俱通有漏、無漏,八地以去種通二種,現唯無漏。究竟位中若現若種俱唯無漏。

 10바라밀과 5위(位)의 포섭관계는, 다섯 가지 지위인 오위(五位)에서 모두 갖추나니,

수습위에서  양상이 가장 현저하지만 처음의  지위에서 돈오(頓悟) 보살은 10바라밀의 종자가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둘 통하나, 현행은 오직 유루일 뿐이며,

점오(漸悟) 보살은 종자이든 현행이든 둘, 모두에 통하나니, 이미 아공의 무루관법을 얻었기 때문이며,

통달위에서 종자는  가지에 통하고, 현행은 오직 무루일 뿐이며,

수습위에서 7지(地) 이전에는 종자와 현행 모두가 유루ㆍ무루에 통하고,

8지부터 종자는  가지에 통하나 현행은 오직 무루일 뿐이며,

구경위 중에서는 현행이든 종자든 모두 오직 무루일 뿐이다.

ㅡ10바라밀과 5() 포섭관계를 판별한, 제십이오위현종상섭문(第十二五位現種相攝門).

 

此十因位有三種名:一名遠波羅蜜多,謂初無數劫,爾時施等勢力尚微,被煩惱伏未能伏彼,由斯煩惱不覺現行;

 10바라밀이 수행 기간인 인위(因位)  가지 명칭이 있으니,

첫째는 바라밀(波羅蜜)이라고 이름하나니, 제1의 무수한 겁(劫)을 말하는 것으로, 이 기간에는 하나의 행(行) 중에서 하나의 행을 닦으며, 그 때의 보시바라밀 등은 세력이 미약하여 오히려 번뇌에 절복당하여서 아직 그것을 조복시킬  없으므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번뇌를 현행하게 되며, 

ㅡ10바라밀의 인위(因位)에서의 명칭을 판별한, 제십삼분위분별문(第十三分位分別門).


二名近波羅蜜多,謂第二無數劫,爾時施等勢力漸增,非煩惱伏而能伏彼,由斯煩惱故意方行;

둘째는 근바라밀(近波羅蜜)이라고 이름하나니, 제2의 무수한 겁을 말하는 것으로, 이 기간에는 하나의 행 중에서 일체의 행을 닦으며, 그 때에 보시바라밀 등의 세력이 점차 증성해서 번뇌에 조복당하지 않고, 능히 번뇌를 조복시킨다.

그리하여 번뇌를 임의로 비로소 일어나게 하는 의방행(意方行)을 할 수 있으며, 


三名大波羅蜜多,謂第三無數劫,爾時施等勢力轉增,能畢竟伏一切煩惱,

由斯煩惱永不現行,猶有所知微細現種及煩惱種,故未究竟。

셋째는 대바라밀(大波羅蜜)이라 이름하나니, 제3의 무수한 겁을 말하는 것으로, 이 기간에는 일체의 행 중에서 일체의 행을 닦으며, 그 때의 보시바라밀 등은 세력이 날로 증성해서 능히 궁극적으로 모든 번뇌를 조복시킨다. 

그리하여 번뇌를 영원히 현행하지 않게 하나, 소지장의 미세한 현행과 종자  번뇌장의 종자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구경에 이른 것이 아니다.


此十義類差別無邊,恐厭繁文,略示綱要。十於十地雖實皆修,而隨相增,地地修一。

雖十地行有無量門,而皆攝在十到彼岸。

 10바라밀의 뜻에 무변한 차이가 있지만, 번쇄한 문장을 싫어할까 염려되어 간략한 요점인 강요(綱要)만을 보이는 것이니, 10바라밀을 10지(地)에서 실로 모두 수행하지만, 상의 증성함을 따라  지(地)마다 하나의 바라밀을 닦는다고 말하는 것이며, 10지의 수행에 수 많은 부문의 무량문(無量門)이 있지만, 모두 10바라밀에 포섭되는 것이다.


十重障者:一異生性障,謂二障中分別起者,依彼種立異生性故。二乘見道現在前時,

唯斷一種名得聖性,菩薩見道現在前時,具斷二種名得聖性。

‘열 가지 무거운 장애인 십중장(十重障)’이란,

제1은 중생 성품의 장애인 이생성장(異生性障)으로, 이 장애는 극희지(極喜地)에서 단멸하는 것으로,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이장(二障) 중에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그것의 종자에 의지해서 중생의 성품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2승의 견도가 현전할 때에는 오직 번뇌장, 하나의 종자만을 단멸함으로써 성인의 성품을 얻는다고 이름하며,

보살의 견도가 현전할 때에는 번뇌장과 소지장의  가지 종자를 모두 단멸함으로써 성인의 성품을 얻는다고 이름한다.

ㅡ열 가지 무거운 장애인 십중장(十重障) 관하여 자세히 해설하는 것으로, 먼저 체성을 나타낸다.

 

二眞見道現在前時,彼二障種必不成就,猶明與闇定不俱生,如秤兩頭低昂時等,

諸相違法理必應然,是故二性無俱成失。

범부와 성인의 두 가지 품류의 진견도(眞見道)가 현전할 때에는,  이장(二障) 종자 모두가 반드시 성취되지 않으니,

비유하자면 밝음과 어둠이 반드시 함께 생겨나지 않음과 같고, 저울의 양쪽 머리가 하나는 내려가고 다른 하나는 올라갈  등과 같은 것이다. 

서로 위배되는 상위법(相違法)의 이치 모두가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것이니, 따라서 이 두 성품을 함께 성취한다는 과실이 없는 것이다.

 () 장애의 함께하고 함께하지 않음을 밝힌 것으로,

미혹함과 성도(聖道)가 함께하지 않는 것이, 오직 분별의 이장 종자에 의지해서 중생의 성품인 이생성(異生性) 건립하며,  종자는 반드시 견도(見道) 함께하지 않는 것이니, 어떻게 범부와 성인이 함께 성취되는 과실이 있겠는가!

이것은 또한 설일체유부의 비판을 회통한 것이다.


無閒道時,已無惑種。何用復起解脫道爲?

무간도(無閒道)의 시기에는 이미 미혹의 종자인 혹종(惑種)는 없거늘, 어떻게 다시 해탈도를 일으키는 작용이 있게 되는 것인가?

무간도(無間道) 해탈도(解脫道) 별도로 해설하는 것으로, 먼저 소승(小乘) 비판하여 묻는 것이다.

 

斷惑證滅期心別故,爲捨彼品麤重性故,無閒道時雖無惑種,而未捨彼無堪任性,爲捨此故起解脫道,及證此品擇滅無爲。

미혹을 끊고 적멸을 증득하는 기간의 마음이 다른 까닭에 그 품류(중생)의 추중(麤重)인 번뇌장과 소지장의 습기를 버리기 때문이며,  

무간도의 시기에 미혹의 종자는 없지만, 아직 그 습기의 자재하지 못하게 하는 성품을 버리지 않으니, 이것을 버리기 위해서 해탈도를 일으켜서  품류, 즉 성인의 택멸무위(擇滅無爲)를 증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ㅡ논주(論主) 답변으로, 무간도에서는 미혹을 끊고, 해탈도에서는 적멸을 증득한다. 

무간도에서는 이미 미혹의 종자가 없지만,  무위(無爲) 증득하고자 해서  작용이 다르기 때문에 해탈도를 일으키는 것이다.


雖見道生亦斷惡趣諸業果等,而今且說能起煩惱,是根本故。由斯初地,說斷二愚及彼麤重:

一執著我法愚,卽是此中異生性障;二惡趣雜染愚,卽是惡趣諸業果等。

견도가 일어날 때에는 역시 악취(惡趣)의 여러 업의 과보 등도 단멸하지만, 지금은 잠시 일으키는 주체인 번뇌만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의거해서 초지(初地)에서  가지 어리석음의 현행  그것의 추중(종자)을 단멸한다고 '해심밀경' 제4권에서와 '유가사지론' 제78권에서 말씀하셨으니, 

첫째는 자아와 법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의 집착아법우(執著我法愚)이니, 곧  중생성품의 장애인 이생성장(異生性障)이라 하는 것이며,

둘째는 악취 잡염의 어리석음인 악취잡염우(惡趣雜染愚)이니,  악취의 여러 업과(業果) 등이라고 말한다.

 

應知愚品摠說爲愚,後准此釋。或彼唯說利鈍障品俱起二愚。彼麤重言顯彼二種,或二所起無堪任性。如入二定說斷苦根,斷苦根雖非現種而名麤重,此亦應然,後麤重言例此應釋。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어리석음의 품류인 우품(愚品)이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어리석음(愚)이라 말한다.

어째서 업의 과보 등도 역시 어리석음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하면, 제업의 과보 등은 자체가 어리석음이 아니지만, 업은 어리석음이 일으키고, 과보는 업이 초감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것, 즉 제2지(第二地)부터의 여러 지(地)에서 어리석음과 그것의 추중(종자)을 단멸하는 것도 이러한 초지(初地)에서 자아와 법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의 집착아법우(執著我法愚)와 악취 잡염의 어리석음인 악취잡염우(惡趣雜染愚) 두 가지의 어리석음과 그것의 추중(종자)을 단멸하는 것에 견주어서 해석해야 하나니,

 그곳에서 오직 예리한 번뇌인 이사(利使)와 둔한 번뇌인 둔사(鈍使)의 장애와 함께 일어나는  가지 어리석음만을 말하는 것은, 거기서 추중이라는 말은 이사(利使)와 둔사(鈍使),  가지의 종자를 나타내는 것이며,

혹은 범부와 성인의  가지 품류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자재하지 못하게 하는 성품의 무감임성(無堪任性)이니, 두 가지 선정에 들어갈 때에 고근(苦根)을 단멸시킨다고 말하고, 단멸된 고근은 현행도 종자도 아니지만 추중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이, 이것 역시도 그러해야 하는 것이니, 이후의 추중이라는 말도 이것에 견주어서 해석해야 한다.

 

번뇌인 이사(利使)는 진리를 알지 못하여 일어나는 번뇌로서, 그 체성이 예리하며 중생의 몸과 마음을 구사(驅使)하여 핍박케 하는 것으로, 이에 아견인 유신견(有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이 있다.

둔한 번뇌인 둔사(鈍使)는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여 일어나는 번뇌로서 그 체성이 둔한 것으로, 이에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ㆍ거만ㆍ의심이 있다.


雖初地所斷實通二障,而異生性障意取所知,說十無明非染污故,無明卽是十障品愚。二乘亦能斷煩惱障,彼是共故,非此所說。又十無明不染污者,唯依十地修所斷說。雖此位中亦伏煩惱斷彼麤重,而非正意,不斷隨眠,故此不說。

초지(初地)에서 단멸되는 것은 실로 이장(二障) 통하지만, 중생 성품인 이생성(異生性)의 장애라는 의미는 소지장을 취하나니, 여기에서  가지의 무명은 염오성이 아니라고 세친의 '섭대승론석' 제7권에서 말한 때문이며,

무명은  가지 장애 품류의 어리석음인 십장품우(十障品愚)이니, 2승도 역시 능히 번뇌장을 단멸하며, 번뇌장을 끊는 것은 공통된 것이기 때문이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소지장(所知障)이 아니다.

또한  가지 무명이 염오성이 아니라는 것은, 오직 10지의 수도(修道)에서 단멸되는 소지장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니,

ㅡ세친의 '섭대승론석' 7권에서  가지 무명(無明) 2() 배대하여 염오성이 아니라고 말한 때문에, 만약 번뇌장을 취한다면   가지 무명은 염오성에 통해야 하므로 여기서는 번뇌장을 취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수습위(修習位)에서 역시 번뇌장을 조복하고 그것의 추중(종자)을 단멸하지만 진정한 뜻이 아닌 비정의(非正意)이니, 수면을 단멸하지 않기 때문에 이 번뇌장을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ㅡ10 보살은 번뇌장을 남겨 두어서 원력을 도와 태어나기 때문에 진정한 뜻의 정의(正意)가 아닌 것이.


理實初地修道位中亦斷俱生所知一分,然今且說最初斷者,後九地斷准此應知。

실로써 말한다면, 초지의 수도위 중에서 역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소지장의 일부분도 단멸하지만, 지금은 다만 초지(初地)에서 단멸하는 중생성품의 장애인 이생성장(異生性障) 말하는 것이며,

이후의 9지(地)에서 단멸하는 것도 이것에 견주어서 알아야 한다.


住滿地中時旣淹久,理應進斷所應斷障,不爾,三時道應無別。故說菩薩得現觀已,復於十地修道位中唯修永滅所知障道,留煩惱障助願受生,非如二乘速趣圓寂,故修道位不斷煩惱,將成佛時方頓斷故。

머물거나 원만히 마치는 지위인 주만지(住滿地)에서 대개 오래 머무나니, 따라서 이치적으로 응당 나아가서 끊어야  장애를 끊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입(入)ㆍ주(住)ㆍ만(滿)의  가지 시기인 삼시(三時)의 도(道)가 다르지 않아야 하는 것이므로 보살은 현관(現觀)을 얻은 후에 다시 10지의 수도위 중에서 오직 소지장을 영원히 단멸하는 도를 닦는 것이다. 

번뇌장은 남겨 두었다가 서원을 도와 태어나는 것이니,  2승이 속히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과는 다르다고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4권의 문장을 증거문장으로 삼아서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도위에서는 번뇌장을 단멸하지 않는 것이니, 성불할 때에 비로소 단박에 단멸하는 돈단(頓斷)이기 때문이다.


二邪行障,謂所知障中俱生一分及彼所起悞犯三業。彼障二地極淨尸羅,入二地時便能永斷。由斯二地說斷二愚及彼麤重:一微細悞犯愚,卽是此中俱生一分;二種種業趣愚,卽彼所起悞犯三業。或唯起業不了業愚。
悞 그릇될 오 

제2는 삿된 행의 장애인 사행장(邪行障)으로, 이는 제2이구지(離垢地)에서 단멸되는 것이며,

소지장 중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것의 일부분과, 거기에서 일으켜지는 것이며, 탐닉해서 범하는  가지의 삼업(三業)을 말한다. 

그것은 제2지의 매우 청정한 계율을 장애하나니, 제2지에 들어갈 때에 문득 능히 영단(永斷)하는 것이며,

이것에 의거해서 제2지에서 자아와 법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의 집착아법우(執著我法愚)와 악취 잡염의 어리석음인 악취잡염우(惡趣雜染愚)인 이우(二愚)와

그것의 추중(麤重)인 이사(利使)와 둔사(鈍使)를 단멸한다고 '유가사지론' 제78권에서 말하였으니,

첫째는 미세하게 탐닉해서 범하는 어리석음의 미세오법우(微細悞犯愚)이니,  소지장 가운데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것의 일부분이며,

둘째는 갖가지 업취의 어리석음인 종종업취우(種種業趣愚)이니, 곧 거기서 일으켜지며 탐닉해서 범하는  가지의 삼업(三業), 혹은 오직 업을 일으키는 기업(起業)의 어리석음과, 업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三闇鈍障,謂所知障中俱生一分,令所聞思修法忘失。彼障三地勝定摠持及彼所發殊勝三慧,入三地時便能永斷。

제3은 우둔함의 장애인 암둔장(闇鈍障)이니, 제3의 발광지(發光地)에서 단멸되는 것이며,

소지장 중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것의 일부분이 듣고 사유하고 닦은 문사수(聞思修)의 법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제3지의 뛰어난 선정의 수혜(修慧)를 일으킴과 총지(總持, 네 가지 다라니 중에서 법다라니ㆍ의다라니) 및 거기서 일으켜진 뛰어난 삼혜(三慧)를 장애하나, 제3지에 들어갈 때에 문득 능히 영원히 단멸하는 것이다.

 

由斯三地說斷二愚及彼麤重:一欲貪愚,卽是此中能障勝定及修慧者。彼昔多與欲貪俱,故名欲貪愚,今得勝定及修所成,彼旣永斷欲貪隨伏,此無始來依彼轉故。二圓滿聞持陁羅尼愚,卽是此中能障摠持聞思慧者。

그러므로 제3의 발광지(發光地)에서 집착아법우(執著我法愚)와 악취잡염우(惡趣雜染愚)인 이우(二愚)와 그것의 추중이사(利使)와 둔사(鈍使)를 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첫째는 탐욕의 어리석음인 욕탐우(欲貪愚)이니,  이러한 것이 능히 뛰어난 선정의 승정(勝定)과 수혜(修慧)를 장애하나니, 일찍이 그것이 대부분 탐욕과 함께하기 때문에 욕탐우(欲貪愚)라 이름 하는 것으로,

지금의 제3지에서는 뛰어난 선정의 승정(勝定)과 수혜(修慧)를 증득하므로  소지장(所知障)이 영원히 단멸되며, 따라서  탐욕도 복되는 것이니, 이 탐욕은 아득한 무시(無始)로부터 그 소지장에 의지해서 전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원만히 듣고 지니는 것과 다라니를 장애하는 어리석음인 원만문지다라니우(圓滿聞持陁羅尼愚)이니,  이러함이  능히 총지(總持)  문혜(聞慧)ㆍ사혜(思慧)를 장애하는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9 7

 

此十相者,要七最勝之所攝受方可建立波羅蜜多。一安住最勝,謂要安住菩薩種性。二依止最勝,謂要依止大菩提心。三意樂最勝,謂要悲愍一切有情。

이러한  가지의 체상인 십상(十相) 말한다면, 모름지기 일곱 가지의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 섭수되어야만 비로소 바라밀로 건립할  있으니,

1의 극희지(極喜地)는 안주함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반드시 보살종성에 안주해야며,

2의 이구지(離垢地) 의지처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반드시 대보리심에 의지해야 하며,

3의 발광지(發光地)는 마음에 즐거워함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반드시 모든 유정을 연민히 여겨야 하며, 

10바라밀의 상을 밝힌, 제삼명상문(第三明相門).


四事業最勝,謂要具行一切事業。五巧便最勝,謂要無相智所攝受。六迴向最勝,謂要迴向無上菩提。七淸淨最勝,謂要不爲二障閒雜。

제4의 염혜지(焰慧地)는 사업이 가장 뛰어난 것이니, 반드시 모든 사업을 갖추어 행하여야 하며,

제5의 난승지(難勝地)는 방편이 가장 뛰어난 것이니, 반드시 차별상이 없는 지혜에 섭수되어야 하며,

제6의 현전지(現前地)는 회향이 가장 뛰어난 것이니, 반드시 최상의 깨달음에 회향해야 하며,

제7의 원행지(遠行地)는 청정이 가장 뛰어난 것이니, 반드시 두 가지 장애에 잡란되지 않아야 하며, 


若非此七所攝受者,所行施等非到彼岸。由斯施等十對波羅蜜多一一皆應四句分別。此但有十不增減者,謂十地中對治十障證十眞如無增減故。復次前六不增減者,爲除六種相違障故,漸次修行諸佛法故,漸次成熟諸有情故,此如餘論廣說應知。

만약 이 7 가지에 섭수되지 않는다면, 실천하는 보시 등이 참다운 바라밀인 도피안(到彼岸)이 아닌 것이니, 이에 의거해서 보시 등의 열 가지를 바라밀에 배대해서 각각의 하나하나 모두에 4구(句)로써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만 10 가지만 있고 증가나 감소되지 않는 것은 10지 가운데에서 열 가지의 십장(十障)을 다스리고,

열 가지의 십진여(十眞如)를 증득하므로 증가나 감소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앞의 6 가지가 증가나 감소되지 않는 것은, 6 가지가 서로 다른 장애, 즉 인색ㆍ범계(犯戒)ㆍ성냄ㆍ게으름ㆍ산란ㆍ악혜(惡慧)를 없애기 위해서이며, 점차 모든 불법을 수행하기 때문이며, 점차 많은 유정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논서, 즉 무성(無性)의 '섭대승론석' 제7권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이 알아야 하는 것이다.

ㅡ뛰어난 수행이 10바라밀로서  가지만 있고 증감(增減) 없는 이유를 밝힌, 제사불증감문(第四不增減門).


又施等三增上生道,感大財體及眷屬故。精進等三決定勝道,能伏煩惱成熟有情及佛法故,諸菩薩道唯有此二。

또한 보시바라밀 등의 세 가지는 더욱 상생(上生)하는 도(道)이니,

보시바라밀은 그 공덕으로 큰 재물을 초감(招感)하기 때문에 큰 재물인 대재(大財)와

계율을 지키면 선취(善趣)에 태어나서 존귀한 신체와

인욕을 실천하는 사람은 모든 유정에게 다 귀속(歸屬)하기 때문에 권속을 초감하며,

정진바라밀 등의 세 가지는 결정적으로 뛰어난 승도(勝道)이니, 정진바라밀은 번뇌를 능히 항복시켜서 유정을 성숙시키고,

지혜바라밀은 유정에게 불법(佛法)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도는 더욱 상생하는 증상상생도(增上生道)와 결정적으로 뛰어난 결정승도(決定勝道)의 오직 이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又前三種饒益有情,施彼資財,不損惱彼,堪忍彼惱而饒益故。精進等三對治煩惱,雖未伏滅,而能精勤修對治彼諸善加行永伏永滅諸煩惱故。

또한 앞부분의 세 가지는 유정을 넉넉히 이롭게 하며, 그들에게 재물을 베풀고 그들을 괴롭히지 않으며, 그들로부터 괴롭힘을 받는 것을 참아내면서 그들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며,

정진바라밀 등 세 가지는 번뇌를 다스나니, 아직 번뇌를 조복해서 단멸시키지는 못하였지만  정진에 의거함으로써 능히 그것을 다스리는 모든 선(善)의 가행을 닦으며,

선정바라밀에 의거함으로써 모든 번뇌를 영원히 절복(折伏) 시키고,

반야바라밀에 의거함으로써 수면(隨眠)을 영원히 단멸시키기 때문이다.

 

又由施等不住涅槃,及由後三不住生死,爲無住處涅槃資糧,由此前六不增不減。後唯四者,爲助前六令修滿足不增減故。方便善巧助施等三,願助精進,力助靜慮,智助般若,令修滿故。如'解深密'廣說應知。

또한 보시바라밀 등에 의거해서 열반에 안주하지 않고, 나머지  가지에 의거해서 생사에 머물지 않아서 무주처열반의 자량(資糧) 되나니, 이것에 의거해서 앞의 여섯 가지는 증가나 감소되지 않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며,

뒷부분에 오직  가지만 있는 것은 앞의 여섯 가지를 도와서 닦는 것을 만족시키는 것으로서, 부증불감이 때문이다.

어떻게 여섯 가지를 돕는 것인가?

방편선교바라밀은 보시바라밀 등의  바라밀을 돕고, 서원바라밀은 정진바라밀을 도우며,

바라밀은 선정바라밀을 도우며, 지혜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을 도와서 닦음이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니,

'해심밀경' 제4권에서 자세히 말씀한  같다는 것으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十次第者,謂由前前引發後後,及由後後持淨前前。又前前麤後後細故,易難修習,次第如是。釋摠別名如餘處說。

십바라밀의 순서를 말한다면, 앞의 앞인, 전전(前前)의 것에 의거해서 다음다음의, 후후(後後)를 이끌어 내나니, 보시바라밀 등에 의거함으로써 지계ㆍ인욕바라밀 등을 이끌어 내는 것이며,

다음다음의 후후(後後)에 의거해서 앞의 앞인, 전전(前前)의 것을 청정하게 지니나니, 지계바라밀이 능히 보시바라밀을 집지(執持)하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이 능히 선정바라밀을 집지하는 것이며,

또한 앞의 앞인, 전전(前前)의 것은 두드러지는 추(麤)이고 다음다음의 의 후후(後後)의 것은 미세한 세(細), 즉 보시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두드러지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보시를 실천하는 것보다 미세한 것이니, 다른 것도 이것에 견주어서 알아야 하는 것으로, 쉽고 어려움으로써 닦아 익히는 순서는 이와 같으며, 

총체적인 명칭과 개별적인 명칭을 해석하는 것은 다른 곳, 즉 '해심밀경' 제4권에서와 '유가사지론' 제78권에서 말한 바와 같다.

 10바라밀의 순서를 밝힌, 제오명차제문(第五明次第門)과 바라밀의 명칭을 해석한, 제육석명문(第六釋名門).


此十修者,有五種修:一依止任持修,二依止作意修,三依止意樂修,四依止方便修,五依止自在修。依此五修修習十種波羅蜜多皆得圓滿,如'集論'等廣說其相。

이 열 가지를 수행함에 있어서, 다섯 가지의 오종수행(依止五種修行)이 있으니,

제1은 임지에 의지해서 수행하는 임지수(依止任持修)이며,

제2는 작의에 의지해서 수행하는 작의수(依止作意修)이며,

제3은 마음의 즐거움에 의지해서 수행하는 의지의낙수(依止意樂修)이며,

제4는 방편에 의지해서 수행하는 의지방편수(依止方便修)이며,

제5는 자재함에 의지해서 수행하는 의지자재수(依止自在修)이다.

이 다섯 가지의 오수(五修)에 의지해서 십 바라밀을 닦아 익혀서 모두 원만하게 할 수 있으니,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2권에서와 무성의 '섭대승론석' 제7권에서 그 상을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ㅡ10바라밀의 수행의 종류를 밝힌, 제칠명수문(第七明修門).


此十攝者,謂十一一皆攝一切波羅蜜多,互相順故。

이러한 10바라밀의 열 가지를 포섭하는 것을 말한다면, 열 가지 각각의 하나하나가 다 모든 바라밀을 포섭하는 것이니, 서로 수순하기 때문이며, 

ㅡ10바라밀이 서로 포섭하는 관계를 밝힌, 제팔섭문(第八攝門).

 

依修前行而引後者,前攝於後,必待前故。

앞의 행을 닦아서 뒤의 것을 이끄는 것에 의해서 말한다면, 앞의 것이 뒤의 것을 포함하나니, 반드시 앞의 것을 기다리기 때문이며,

이후의 () 반드시 이전의 행을 기다려서 바야흐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後不攝前,不待後故。依修後行持淨前者,後攝於前,持淨前故。

前不攝後,非持淨故。若依純雜而修習者,展轉相望應作四句。

뒤의 것은 앞의 것을 포함하지 않으니, 뒤의 것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며,

위의 행을 닦아서 앞의 것을 청정하게 지니는 것에 의한다면, 뒤의 것은 앞의 것을 포섭하나니, 앞의 것을 청정하게 지니기 때문이며,

잎의 것은 이후의 것을 포섭하지 않으니, 청정하게 지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만약 순수하거나 섞인 순잡(純雜)을 닦아 익히는 것에 의거해서 말한다면, 전전(展轉)하여 서로 배대하는 것으로 마땅히 4구(句)를 지어야 한다.

 

此實有十而說六者,應知後四第六所攝。開爲十者,第六唯攝無分別智,後四皆是後得智攝。緣世俗故。

바라밀은 실로는 10 가지가 있지만 6 가지로 말하는 것은, 뒷부분의 네 가지는 제6의 반야바라밀에 포함되기 때문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며,

펼쳐서 10 가지로 하는 것은, 제6은 오직 무분별지혜에 포함되고, 그 뒤의 4 가지 모두는 후득지에 포함되기 때문이며, 세속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ㅡ10바라밀을 열고 합하는 것을 문답한, 제구문답개합문(第九問答開合門).


此十果者,有漏有四,除離繫果。

이 10 가지의 과(果, 결과)를 말한다면, 유루의 4 가지가 있으니, 이계과(離繫果)를 제외한 이숙과(異熟果)ㆍ등류과(等流果)ㆍ사용과(士用果)ㆍ증상과(增上果)이며,

ㅡ10바라밀의 결과를 판별한, 제십오과문(第十五果門).

5(), 이숙과(異熟果)ㆍ등류과(等流果)ㆍ이계과(離繫果)ㆍ사용과(士用果)ㆍ증상과(增上果)

 

無漏有四,除異熟果。而有處說具五果者,或互相資,或二合說。

무루의 4 가지가 있으니, 이숙과(異熟果)를 제외한, 등류과(等流果)ㆍ이계과(離繫果)ㆍ사용과(士用果)ㆍ증상과(增上果)이다.

그러나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2권에서 다섯 가지 결과인 오과(五果)를 갖춘다고 말한 것은, 혹은 서로 돕기 때문이고, 혹은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두 가지를 합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ㅡ앞의 내용과 '대승아비달마잡집론' 12권에서의 내용이 다른 것을 회통하였다


十與三學互相攝者,戒學有三:一律儀戒,謂正遠離所應離;二攝善法戒,謂正修證應修證法;三饒益有情戒,謂正利樂一切有情。此與二乘有共不共,甚深廣大,如餘處說。

10바라밀과 3학(三學)의 포섭관계로서는, 계학(戒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율의계(律儀戒)로서, 진정으로 버려야 할 법을 멀리 버리는 것을 말하며,

둘째는 섭선법계(攝善法戒)로서, 바르게 수행하고 증득해야 할 법을 바르게 수행하고 증득하는 것을 말하며,

셋째는 요익중생계(饒益衆生戒)로서,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2승과 공통된 공(共)과 공통되지 않음의 불공(不共)이 있으며,

매우 심오한 심심(甚深)하고 광대(廣大)하다는 것은 세친(世親), '섭대승론석' 제8권에서와 무성(無性)의 '섭대승론석' 제7권에서 말한 것과 같다.

ㅡ10바라밀과 3() 포섭관계를 판별한, 제십일삼학상섭문(第十一三學相攝門)으로, 먼저학의 명칭과 체성을 밝혔다.

 

定學有四:一大乘光明定,謂此能發照了大乘理、教行、果智光明故;二集福王定,謂此自在集無邊福如王勢力無等雙故;三賢守定,謂此能守世、出世閒賢善法故;四健行定,謂佛菩薩大健有情之所行故。此四所緣、對治、堪能、引發、作業如餘處說。

정학(定學)에 4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대승의 광명과 같은 지혜를 일으키는 선정의 대승광명정(大乘光明定)으로, 이것이 능히 대승의 도리ㆍ교법ㆍ수행ㆍ증과를 비추어 알게 하는 지혜의 광명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둘째는 복덕을 쌓음이 왕과 같은 선정의 집복왕정(集福王定)으로, 이것이 능히 자재하게 무변한 복을 쌓는 것이 왕의 세력과 같아서 비등하게 상대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며,

셋째는 현선(賢善)을 지키는 선정의 삼현수정(三賢守定)으로, 이것이 능히 세간과 출세간의 현선의 법을 지키기 때문이며,

넷째는 행을 굳세게 하는 선정의 건행정(健行定)으로, 불보살이 유정의 행하는 바의 소행(所行)을 크고 굳세게 하기 때문이다.

이 4 가지의 대승법(大乘法)으로써의 소연(所然, 인식대상)ㆍ진여를 반연하는 지혜인 대치(對治)ㆍ자재함의 감능(堪能)ㆍ선정의 즐거움에 안주하여 바라는 바를 따라 태어나는 수행(受生)이기 때문에 이끌어냄의 인발(引發)ㆍ걸림 없는 신통을 이끌어 내기 때문인 작업(作業, 18변)은 다른 곳에서 말한 바와 같다.

 

18변(變), 즉 불보살이 나타내는 열여덟 가지 부사의(不思議)한 신통변이(神通變異)를 말하는 것으로, 진동(震動)ㆍ치연(熾然)ㆍ유포(流布)ㆍ시현(示現)ㆍ전변(轉變)ㆍ왕래(往來)ㆍ권(卷)ㆍ서(舒)ㆍ중상입신(衆像立身)ㆍ동류왕취(同類往趣)ㆍ은(隱)ㆍ현(顯)ㆍ소작자재(所作自在)ㆍ제타신통(制他神通)ㆍ능시변재(能施辯才)ㆍ능시억념(能施憶念)ㆍ능시안락(能施安樂)ㆍ방대광명(放大光明)이 있다.


慧學有三:一加行無分別慧,二根本無分別慧,三後得無分別慧。此三自性、所依、因緣、所緣、行等如餘處說。

혜학(慧學)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가행의 무분별지혜인 가행무분별혜(加行無分別慧)이고,

둘째는 근본적인 무분별지혜인 근본무분별혜(根本無分別慧)이며,

셋째는 증득되는 무분별지혜인 후득무분별혜(後得無分別慧)이다.

이 세 가지는 5상(相)을 떠난 자성(自性)ㆍ지혜의 소의(所依, 의지처)ㆍ문훈습(聞熏習)의 인연(因緣)ㆍ소연(所緣, 인식대상)ㆍ행상(行相, 인식작용) 등은 무성의 '섭대승론석' 제8권에서 말한 바와 같다.


如是三慧,初二位中種具有三,現唯加行。於通達位現二,種三,見道位中無加行故。於修習位七地已前若種若現俱通三種,八地以去現二種三,無功用道違加行故,所有進趣皆用後得,無漏觀中任運起故。究竟位中現種俱二,加行現種俱已捨故。

이와 같은 세 가지 지혜인 삼혜(三慧)를 처음의 두 가지 지위인 자량위(資糧位)와 가행위(加行位)에서는 종자라면, 가행ㆍ근본ㆍ후득의 무분별지혜의 세 가지를 갖추나, 현행이라면 오직 가행의 무분별지혜일 뿐이며,

통달위에서는 현행이라면 근본과 후득의 무분별지혜의 두 가지이나, 종자라면 세 가지이다.

견도위에서는 가행이 없기 때문이며,

수습위에서 7지(地) 이전에는 종자이든 현행이든 모두 세 가지에 통하며,

8지부터는 현행이라면 두 가지이나, 종자라면 세 가지이다.

작용이 없는 무공용도(無功用道)는 가행에 거스르기 때문이며,

모든 승진에서는 모두 후득의 무분별지혜를 사용하여서 무루의 관법 중에서 자연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며,

구경위 중에서는 현행에서도 종자에서도 모두 두 가지이니, 가행의 현행과 종자를 모두 이미 버린 때문이다.

ㅡ가행ㆍ근본ㆍ후득의  가지 무분별지혜를 5() 중에서 판별한 것이다.


若自性攝,戒唯攝戒,定攝靜慮,慧攝後五。若幷助伴,皆具相攝。

자성에 의한 포섭관계인 성섭(性攝)은, 계학(戒學)에는 오직 지계바라밀을 포함하고,

정학(正學)에서는 오직 선정바라밀을 포섭하며,

혜학(慧學)은 반야ㆍ방편ㆍ서원ㆍ힘ㆍ지혜의 뒤의 다섯 바라밀을 포섭하며,

만약 도우면서 수반되는 것을 아울러서 말한다면 3학(學)에 모두 10바라밀 모두를 갖추어서 서로 포섭해야 하는 것이다.

10바라밀과 3학(學)을 자성에 의해 포섭관계를 밝혔다.

 

若隨用攝,戒攝前三,資糧、自體、眷屬性故。定攝靜慮,慧攝後五,精進三攝,遍策三故。

작용에 따르는 포섭관계인 용섭(用攝)으로는, 계학(戒學)에 앞부분의 세 가지를 포섭하는, 즉 보시바라밀은 지계바라밀의 자량(資糧)이 되고, 지계바라밀은 계(戒)의 자체이며, 인욕바라밀은 지계바라밀의 권속이 되는 것으로, 자량(資糧)ㆍ자체ㆍ권속의 속성이기 때문이며,

정학(定學)은 선정바라밀을 포섭하고, 혜학(慧學)은 뒷부분의 다섯 가지 바라밀을 포섭하며,

정진바라밀은 3학에 포섭되나니, 3학을 두루 책려하기 때문이다.

若隨顯攝,戒攝前四,前三如前及守護故,定攝靜慮,慧攝後五。

나타내는 것에 따르는 포섭관계인 현섭(顯攝)은, 계학(戒學)에는 앞부분의 네 바라밀을 포섭하며, 앞부분의 세 가지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정진바라밀이 계학(戒學)을 수호하기 때문이며,

정학(定學)에서는 선정바라밀을 포섭하고, 혜학에는 뒷부분의 다섯 가지 바라밀을 포섭한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9 6

 

次修習位其相云何?頌曰:

다음으로 수습위(修習位)의 상은 어떠한 것인가?'삼십송'의 제29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ㅡ5()  4위인 수습위(修習位),  수도(修道) 관한 해설.

 

無得不思議 是出世間智, 捨二麤重故 便證得轉依。

얻는 바가 없는 무득(無得)이고, 사량하고 분별할 수도 없는 그것은 출세간의 지혜라네.

 가지의 번뇌장과 소지장의 추하고 무거운 추중(麤重)을 을 버림으로써, 문득 전의(轉依, 열반)를 증득하네.

 

추중(麤重),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유루종자(有漏種子)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중(麤重)이란 유루종자라는 뜻으로, 그것들이 강강(强剛)해서 조유(調柔)하지 않으므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전의(轉依)에서 전(轉)은 전사(轉捨)와 전득(轉得), 즉 변계소집성을 전사하고 원성실성을 전득하는 것이고,

의(依)는 변계소집성과 원성실성의 소의(所依)가 되는 의타기성을 말하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7식의 근본적인 소의이며 지종의(持種依)인 제8식이 완전한 정화를 통해 전환됨으로써 번뇌장ㆍ소지장의 종자를 전사하여 열반ㆍ보리를 전득하는 것이다.


論曰:菩薩從前見道起已,爲斷餘障證得轉依,復數修習無分別智。

此智遠離所取、能取,故說無得及不思議。或離戲論說爲無得,妙用難測名不思議。

▷논하여 말한다; 보살은 이전의 견도로부터 일어나서 나머지 장애를 끊고 전의(轉依)를 증득하기 위해서 다시 거듭 무분별지혜를 닦아 익히나니,

 지혜는 소취(所取)ㆍ능취(能取)를 멀리 떠났기 때문에 “얻는 바가 없는 무득(無得)이고 사량하고 분별할  없다”고 말하며,

혹은 희론을 떠났기 때문에 “얻는 바가 없는 무득(無得)이다”고 하고, 

신통한 작용이 측량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량하고 분별할  없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是出世閒無分別智,斷世閒故名出世閒,二取隨眠是世閒本,唯此能斷獨得出名。

或出世名依二義立,謂體無漏及證眞如。此智具斯二種義故獨名出世,餘智不然,卽十地中無分別智。

이것은 ‘출세간의 무분별지혜’이니, 세간, 즉 2취(取)의 수면(隨眠)을 끊었기 때문에 출세간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2취(取)의 수면은 세간의 근본으로, 오직 이것을 능히 끊음으로써 홀로 출세간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며,

혹은 출세간이라는 명칭은  가지의 뜻에 의해 건립되는 것이니, 체(體)가 무루인 것과 진여를 증득하는 것을 말하며,

 지혜만이 이러한  가지의 뜻을 갖추기 때문에 홀로 출세간이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나머지 지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10지(地) 중에서의 무분별지혜이다.


數修此故,捨二麤重。二障種子立麤重名,性無堪任違細輕故。

令彼永滅,故說爲捨。此能捨彼二麤重故,便能證得廣大轉依。

이러한 10지(地) 중에서의 무분별지혜를 거듭 닦음으로써 ‘종자와 종자가 아닌 습기(習氣) 두 가지의 이추중(二麤重)’을 버리나니, 이장(二障)의 종자에 추중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다.  

체성이 자재하지 못한 무감임(無堪任)으로서 미세함과 가벼움에 거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영원히 소멸시키기 때문에 게송에서 ‘버릴 사(捨)’라고 하는 것이며,

이로써 능히 이추중(二麤重) 버리므로 문득 광대한 ‘전의(轉依)’를 증득할  있는 것이다.

 

이추중(二麤重)은 종자ㆍ종자가 아닌 습기(習氣)를 말한다. 유식 교의에서 습기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

첫째는 훈습(熏習)의 기분(氣分)의 뜻으로서 종자에 사용되는 것이고,

둘째는 관습(慣習)의 기분의 뜻으로서, 번뇌의 체(體)가 이미 다한 이후에 그 습관성이 남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후자(後者)인, 습관성이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소지장(所知障)의 종자인 추중과 종자가 아닌 습기의 추중은 10지(地)의 각 지위에서 별도로 단멸하며,

번뇌장의 종자의 추중은 금강심(金剛心)에서야 비로소 없애고, 종자가 아닌 습기의 추중은 역시 각 지위에서 단멸한다.


依謂所依,卽依他起,與染淨法爲所依故。染謂虛妄遍計所執,淨謂眞實圓成實性,轉謂二分:轉捨、轉得。由數修習無分別智斷本識中二障麤重,故能轉捨依他起上遍計所執,及能轉得依他起中圓成實性。由轉煩惱得大涅槃,轉所知障證無上覺,成立唯識意爲有情證得如斯二轉依果。

‘의(依)’는 의지처인 소의(所依)를 말하는 것으로, 곧 의타기성이니, 잡염법과 청정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며,

잡염법이란 허망한 변계소집성을 말하는 것이고, 청정법이란 진실한 원성실성을 말하는 것이다. 

‘전(轉)’이란 잡염분과 청정분의 이분(二分)을 전환해서 버리는 전사(轉捨)하고, 전환해서 얻는 전득(轉得)을 말하는 것으로, 거듭 무분별지혜를 닦아 익혀서 근본식 중의  가지 장애의 이장추중(二障麤重)을 끊음으로써, 능히 의타기성 위의 변계소집성을 전환해서 버리고, 의타기성 위의 원성실성을 전환해서 증득하는 것이다.

번뇌를 전환함으로써 대보리를 얻고, 소지장을 전환해서는 최상의 깨달음을 증득하나니,

유식(唯識)의 도리를 성취하는 의의는 유정에게 이러한  가지 전의의 증과인 이전의과(二轉依果)를 증득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ㅡ전의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인 이설(異說)을 서술한 것으로 먼저 1(第一師) 견해를 서술하였다.


或依卽是唯識眞如,生死涅槃之所依故。愚夫顚倒迷此眞如,故無始來受生死苦。

聖者離倒悟此眞如,便得涅槃畢竟安樂。

 ‘의(依)’는  유식의 진여이니, 생사와 열반의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범부는 전도(顚倒)되어서 이 진여에 미혹한 까닭에 아득한 무시(無始)로부터 생사의 고통을 받으나,

성자는 전도됨을 떠나서  진여를 깨달음으로써 문득 열반을 얻고 궁극에 이르러 안락한 것이다.

2(第二師) 견해를 서술하였다.


由數修習無分別智斷本識中二障麤重,故能轉滅依如生死及能轉證依如涅槃,此卽眞如離雜染性。如雖性淨而相雜染,故離染時假說新淨,卽此新淨說爲轉依,修習位中斷障證得。

거듭거듭 무분별지혜를 닦아 익혀서 근본식 중의  가지 장애의 이장추중(二障麤重)을 끊음으로써,

능히 진여에 의지하는 생사를 전환하여 단멸하고, 능히 진여에 의지하는 열반을 전환하여 증득하나니, 이것은  진여가 잡염을 떠난 성품임을 말하는 것이다. 

진여의 성(性)은 청정하지만 상(相) 잡염이기 때문에, 잡염을 버린 때를 가정적으로 새롭게 청정하게 하는 신정(新淨)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신정(新淨) ‘전의(轉依)’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수습위 중에서 장애를 끊고 증득하는 것이다. 

ㅡ이 지위에서 장애를 끊고 금강심(金剛心) 이후에 불과(佛果) 증득하는 것으로,  지위에서  증득하는 것은 아니다.

 

雖於此位亦得菩提,而非此中頌意所顯,頌意但顯轉唯識性,二乘滿位名解脫身,在大牟尼名法身故。

 지위에서 역시 보리를 증득하지만,  부분의 게송이 의미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니, 게송의 의미는 다만 유식성을 전환하는 것만을 나타낸 것으로, 

2승의 만위(滿位)를 해탈신이라고 이름하고, 대모니(大牟尼)에 있는 것을 법신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대모니(大牟尼), 진여(眞如)ㆍ유식성(唯識性)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니(牟尼, muni)를 적묵(寂黙)으로 번역하는 것은, 모든 잡염을 적정하게 그치는 적지(寂止)한 고요함의 묵정(黙靜)이기 때문이다.


云何證得二種轉依?謂十地中修十勝行,斷十重障,證十眞如,二種轉依由斯證得。

어떠한 것이  가지의 전의(轉依)를 증득하는 것인가?

10지(地) 중에서  가지의 뛰어난 수행인 십승행(十勝行)을 닦고,  가지 무거운 장애인 십중장(十重障)를 끊어서  가지의 십진여(十眞如)를 증득하나니, 두 가지의 전의를 이것에 의거해서 증득하는 것이다.

ㅡ삼십송』의 29게송을  부문으로 나누어 자세하게 해설한 것이다.

 

10지(地)는 경유하는 지위(地位)이고, 십승행(十勝行)은 닦는 원인(因)이며,

십중장(十重障)은 단멸하는 법이고, 십진여(十眞如)는 관조하는 법이다. 

이러한 10지(地), 십승행(十勝行), 십중장(十重障), 십진여(十眞如)의 네 가지 원인(因)에 의거해서 두 가지 전의(轉依)의 뛰어난 증과인 묘과(妙果)를 얻는 것이다.

10지(十地), 십승행(十勝行)은 삼십송 제29게송의 처음 2구(句)를 자세히 해설하는 것이고,

십중장(十重障)은 제3구를, 십진여(十眞如)는 제4구를 해설한 부분이다.


言十地者:一極喜地,初獲聖性,具證二空,能益自他,生大喜故。
二離垢地,具淨尸羅,遠離能起微細毀犯,煩惱垢故。三發光地,成就勝定大法摠持,能發無邊妙慧光故。

10지(十地)’는 다음과 같으니, 제1은 극희지(極喜地)로, 처음으로 성인의 성품을 얻고 아공과 법공의 이공(二空)을 모두 증득해서 능히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여  기쁨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제2는 이구지(離垢地)이니, 청정한 계율을 구족하여서 미세한 훼범을 일으키는 번뇌의 오염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제3은 발광지(發光地)이니, 뛰어난 선정과  교법의 총지(總持)를 성취해서 가없는 미묘한 지혜인 묘혜(妙慧)의 광명 내기 때문이다.

 

총지(總持, dhāraṇī)는 선법(善法)을 호지(護持)하여 흩어지지 않게 하고, 악법(惡法)을 억눌러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이에는 법(法)ㆍ의(意)ㆍ주(呪)ㆍ인(忍)의 4다라니(四陀羅尼)가 있으며,

법다라니(法陀羅尼)는 부처님의 교법을 듣고 지녀서 잊지 않는 것이고,

의다라니(意陀羅尼)는 일체법의 의취(意趣)를 총지(總持)하여 잊지 않는 것이며,  

주다라니(呪陀羅尼)는 주문(呪文)을 총지하여 잊지 않으며, 불가사의한 주술을 일으켜서 타인을 구제하는 것이며, 

인다라니(忍陀羅尼)는 일체법의 실상(實相)을 깨닫고 인지(忍持)하여 잊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삼혜(三慧), 듣고서 얻는 지혜인 무소성혜(聞所成慧), 사유해서 얻는 지혜인 사소성혜(思所成慧), 선정 수행으로 얻는 지혜인 수소성혜(修所成慧)이다.

 

四焰慧地,安住最勝菩提分法,燒煩惱薪,慧焰增故。五極難勝地,眞、俗兩智行相互違,合令相應,極難勝故。六現前地,住緣起智,引無分別最勝般若,令現前故。

제4는 염혜지(焰慧地)이니, 가장 뛰어난 보리분법(菩提分法)에 안주하여서 번뇌의 땔나무를 태워 버리 듯 무분별지혜을 증장하기 때문이며,

제5는 난승지(難勝地)이니, 세속의 저술(書)이나 주장(論) 등을 아는 세속지혜의 작용이 서로 위배되는 것을 화합하여 상응하게 하는 것이 매우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제6은 현전지(現前地)이니, 12 연기법에 안주하는 지혜인 후득지가 분별이 없는 가장 뛰어난 지혜인 반야(般若)를 이끌어내어서 현전하게 하기 때문이다.


七遠行地,至無相住功用後邊,出過世閒二乘道故。八不動地,無分別智任運相續,相用煩惱不能動故。九善慧地,成就微妙四無閡解,能遍十方善說法故。

제7은 원행지(遠行地)이니, 집착없이 머무는 작용의 최후에 이르러서 세간과 2승의 도를 멀리 벗어나기 때문이며,

제8은 부동지(不動地)이니, 무분별지혜가 자연히 상속하여 상(相, 형상)ㆍ용(用, 작용)ㆍ번뇌에 동요되지 않기 때문이며,

제9는 선혜지(善慧地)이니, 미묘한  가지의 걸림이 없는 사무애지(四無碍智)를 성취하여, 능히 시방으로 두루하게 법을 하기 때문이다.

 

사무애지(四無碍智), 여래에게 있는 네 가지의 걸림 없는 지해인 사무의해(四無礙解)로서 4무애변(無礙辯) 혹은 4무애지(無礙智)라고도 한다. 

법무애해(法無礙解)는 일체의 교법에 통달한 것이고, 의무애해(義無礙解)는 일체 교법의 의리(義理)에 통달한 것이고, 사무애해(辭無礙解)는 모든 언어에 통달한 것이고, 변무애해(辯無礙解) 또는 낙설무애해(樂說無礙解)는 유정이 좋아하는 바를 따라 법을 설함에 있어서 자재한 것을 말한다.


十法雲地,大法智雲,含衆德水,蔽如空麤重,充滿法身故。如是十地摠攝有爲、無爲功德以爲自性,與所修行爲勝依持,令得生長,故名爲地。十勝行者,卽是十種波羅蜜多。

제10은 법운지(法雲地)이니, 큰 교법의 지혜의 구름이 많은 덕의 물인 덕수(德水)를 함유하고서 허공과 같은 모든 추중을 가리고 법신에 충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10지의 체성(體性)을 밝히자면, 전체적으로 유위ㆍ무위의 공덕을 포함해서 자성으로 삼으며,

닦은 수행에 대하여 뛰어난 의지처인 승의(勝依)가 되어서 생겨나고 성장할  있도록 하기 때문에 지(地)라고 이름하는 이유이며,

 가지의 뛰어난 수행인  십승행(十勝行)’이란   가지 바라밀인 십바라밀(十波羅蜜) 말하는 것이다. 

 

ㅡ이하는  가지 뛰어난 수행인 십승행(十勝行) 관하여 열세 가지 부문으로 나누어 자세히 해설한, 제분분별(諸門分別)으로, 먼저 열 가지 바라밀 각각의 종류를 판별한, 제일십도상섭문(第一十度相攝門)이다.

施有三種,謂財施、無畏施、法施。戒有三種,謂律儀戒、攝善法戒、饒益有情戒。忍有三種,謂耐怨害忍、安受苦忍、諦察法忍。精進有三種,謂被甲精進、攝善精進、利樂精進。

보시바라밀  가지가 있으니, 재물을 베푸는 재시(財施), 두려움이 없게 하여 주는 무외시(無畏施), 법을 가르쳐 주는 법시(法施)이며,

지계바라밀  가지가 있으니, 율의계(律儀戒, 섭율의계), 온갖 선법을 닦는 섭선법계(攝善法戒), 널리 중생을 넉넉히 이롭게 하는 요익중생계(饒益衆生戒)이,

인욕바라밀  가지가 있으니, 원한을 참는 원해인(怨害忍), 고통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안수고인(安受苦忍), 법을  관찰하는 제찰법인(諦察法忍)이며,

정진바라밀  가지가 있으니, 데 서원을 일으키는 피갑정진(被甲精進), 모든 선법을 닦는 섭선정진(攝善精進), 중생을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하는 이락정진(利樂精進)이다.

 

삼취정계(三聚淨戒), 대승보살이 닦는 계법으로,  

‘취(聚)’는 모았다는 뜻으로, 계율의 근본취지를 셋으로 묶어 모았다는 말
대승과 소승의 모든 계법 모두가  가운데 속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이라고 하고,

 계법의 자성이 청정하므로 ()이라고 한다.

율의계(律儀戒), 섭율의계(攝律儀戒)의 준말이며 별해탈계(別解脫戒)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라고도 하며, 수계(受戒)하는 작법(作法)에 의해 5계ㆍ10계ㆍ구족계 등을 받아 지니며, 몸이나 입으로 짓는 악업을 따로따로 해탈하는 계법이다.

섭선법계(攝善法戒), 일체의 선(善)을 모두 하나하나 실행하는 것을 계(戒)로 삼아서 일체의 선(善)을 닦는 계(戒)로써, 작선문(作善門), 작지계(作持戒)라고도 한다. 
요익중생계(饒益衆生戒) 또는 섭중생계(攝衆生戒) 선을 쌓아가면서 중생에게 선을 베풀고 이타문(利他門)으로 일체의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靜慮有三種,謂安住靜慮、引發靜慮、辦事靜慮。般若有三種,謂生空無分別慧、法空無分別慧、俱空無分別慧。方便善巧有二種,謂迴向方便善巧、拔濟方便善巧。願有二種,謂求菩提願、利樂他願。力有二種,謂思擇力、修習力。智有二種,謂受用法樂智、成熟有情智。

선정바라밀  가지가 있으니, 현전법(現前法)의 즐거움에 편안히 머무는 안주정려(安住靜慮, 안주선정), 여섯 가지 신통을 이끌어 내는 인발정려(引發靜慮, 인발선정), 유정을 이롭게 하는 사업을 판별하는 변사정려(辦事靜慮, 변사선정)이며,

반야바라밀  가지가 있으니, 아공(我空)을 체득한 생공무분별지혜(生空無分別慧), 법공을 체득한 법공무분별지혜(法空無分別慧), 아공ㆍ법공을 체득한 구공무분별지혜(俱空無分別慧)이며,

방편선교바라밀(방편바라밀)  가지가 있으니, 닦은 모든 선근을 유정에게 회향하여 함께 깨달음을 구하게 하는 회향의 방편을  통달한 회향방편선교(向方便善巧)와 중생제도의 방편을  통달하는 구제방편선교(拔濟方便善巧)이며,

서원바라밀(원바라밀)  가지가 있으니, 깨달음을 구하는 구보리원(求菩提願) 남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고자 하는 이락타원(利樂他願)이며,

역바라밀  가지가 있으니, 사유해서 결택하는 사택력(思擇力) 닦아 익히는 수습력(修習力)이며,

지혜바라밀  가지가 있으니, 법의 즐거움을 수용하는 수용법락지(受用法樂智) 유정을 성숙하게 하는 성숙유정지(成熟有情智)이다.

 

此十性者,施以無貪及彼所起三業爲性,戒以受學菩薩戒時三業爲性,忍以無瞋、精進、審慧及彼所起三業爲性,精進以勤及彼所起三業爲性,靜慮但以等持爲性,後五皆以擇法爲性,說是根本、後得智故。有義第八,以欲、勝解及信爲性,願以此三爲自性故。

이러한 열 가지의 자성인 십성(十性)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으니,

보시바라밀은 탐욕이 없는 무탐(無貪)  탐욕에 일으켜진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의 삼업을 자성으로 삼으며,

지계바라밀은 보살계를 닦을 때의  가지업을 자성으로 삼으며,

인욕바라밀은 성내지 않는 무진(無瞋)과 정진(精進), 살펴서 판단하는 심혜(審慧)  그러한 것으로부터 일으켜진업을 자성으로 삼으며,

정진바라밀은 부지런함  그러함으로서 일으켜진업을 자성으로 삼으며,

선정바라밀은 다만 삼마지를 자성으로 삼을 뿐이며,

나머지 다섯 가지는법을 간택(揀擇)하는 것을 자성으로 삼는다. 

제6의 반야바라밀은 근본지(根本智)와 방편ㆍ서원ㆍ힘ㆍ지혜의 바라밀 후득지(後得智)라고 무성의 '섭대승론석' 제7권에서 말한 때문이며,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제8의 서원바라밀은 욕구ㆍ승해(勝解)ㆍ믿음을 자성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니, 서원바라밀은   가지를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ㅡ10바라밀의 자성을 밝힌, 제이출체문(第二出體門).


此說自性,若幷眷屬,一一皆以一切俱行功德爲性。

이상의 것들은 자성(自性)을 말한 것으로, 만약 권속을 아울러서 말한다면, 그 하나하나 모두가 일체의 함께 작용하는 구행공덕(俱行功德)을 자성으로 삼는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9 5

 

二緣安立諦,有十六心,此復有二:

다른 하나의 이연(二緣)은 안립제를 반연하는 것으로서, 16 가지의 십육심(十六心)이 있으며, 이에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상견도(相見道) 안립제관(安立諦觀)으로서 16() 밝힌 것으로, 16심을 지어서 안립제의 대상을 반연하는 것을 16심상견도(心相見道)라고 이름한다.

 

一者依觀所取、能取,別立法類十六種心。

첫째는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인식주체인 능취(能取)를 관찰하는 것에 의거해서 별도로 법(法)ㆍ유(類, 부류)의 16 가지 마음을 건립한 것이다.

 

십육심(十六心),

고제(苦諦)에 고법지인(苦法智忍)ㆍ고법지(苦法智)ㆍ고류지인(苦類智忍)ㆍ고류지(苦類智)의 4심(心),

집제(集諦)에 집법지인(集法智忍)ㆍ집법지(集法智)ㆍ집류지인(集類智忍)ㆍ집류지(集類智)의 4심,

멸제(滅諦)에 멸법지인(滅法智忍)ㆍ멸법지(滅法智)ㆍ멸류지인(滅類智忍)ㆍ멸류지(滅類智)의 4심,

도제(道諦)에 도법지인(道法智忍)ㆍ도법지(道法智)ㆍ도류지인(道類智忍)ㆍ도류지(道類智)의 4심(心)이다.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인식주체인 능취(能取)를 관찰함에 의거하여 4성제를 법(法)과 유(類, 부류)로 나누고, 이것을 다시 인(忍, 인가)와 지(智, 지혜)로 나눈 것을 합한 것이 16심(心)이다. 

인(忍, 인가)은 소득(所得)의 미혹을 바르게 단멸하는 무루지혜의 작용이고

지(智, 지혜)는 멸제의 도리인 멸리(滅理)를 바르게 증득하는 무루지혜의 작용이다. 

 인(忍, 인가)은 단멸의 작용이고, 지(智, 지혜)는 증득의 작용이다. 

법인(法忍)과 법지(法智)는 진리인 제리(諦理)를 반연하는, 즉 인식대상을 관찰하는 것이고,

유인(類忍)과 유지(類智)는 이전의 지혜인 지품(智品)을 반연하는, 즉 인식주체를 관찰한다.


謂於苦諦有四種心:一苦法智忍,謂觀三界苦諦眞如,正斷三界見苦所斷二十八種分別隨眠;

고제(苦諦)에 고법지인(苦法智忍)ㆍ고법지(苦法智)ㆍ고류지인(苦類智忍)ㆍ고류지(苦類智)의 사심(四心)이 있으니,

제1은 고제의 법을 관찰하는 지혜를 인가하는 고법지인(苦法智忍)으로, 삼계의 고제의 진여를 관찰해서 실로 삼계의 고제를 관찰함으로써 단멸되는 28 가지의 분별수면을 끊는 것이며,

욕계의 고제(苦諦) 밑의 10 가지 미혹과, 색계와 무색계에서 진(瞋) 제외한 나머지 각각 9 가지씩을 합하여 28 가지이다.

 

二苦法智,謂忍無閒觀前眞如,證前所斷煩惱解脫;

제2는 고제의 법을 관찰하는 지혜인 고법지(苦法智)이니, 고제의 법을 관찰하는 지혜를 인가하는 것의 바로 다음 찰나에 이전의 진여를 관찰하여서 이전에 끊은 번뇌의 해탈을 증득하는 것이며, 

 

三苦類智忍,謂智無閒無漏慧生,於法忍智各別內證,言後聖法皆是此類;

제3은 고제의 부류를 관찰하는 지혜를 인가하는 고류지인(苦類智忍)이니, 고제의 법을 관찰하는 지혜의 바로 다음 찰나에 무루의 지혜가 생겨나서, 고제의 법을 관찰하는 지혜를 인가하는 것과 고제의 법을 관찰하는 지혜에 대하여 각각 별도로 내면적으로 증득한다. 이후의 성스러운 법은 모두 이것의 유(類, 부류)라 말하는 것이다.

 

四苦類智,謂此無閒無漏智生,審定印可苦類智忍。如於苦諦有四種心,集、滅、道諦應知亦爾。

此十六心八觀眞如,八觀正智。法眞見道無閒解脫見自證分,差別建立,名相見道。

제4는 고제의 부류를 관찰하는 지혜인 고류지(苦類智)이니,

제3심心인 고류지인(苦類智忍)의 바로 다음 찰나에 무루의 지혜가 생겨나서 고제의 유(類, 부류)를 관찰하는 지혜를 인가하는 것을 살피고 결정해서 인가하는 것이다.

고제에 고법지인(苦法智忍)ㆍ고법지(苦法智)ㆍ고류지인(苦類智忍)ㆍ고류지(苦類智)의 4심(心)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집제ㆍ멸제ㆍ도제에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며,

이  십육심(十六心) 있어서, 4성제 각각의 법인(法忍)과 법지(法智)를 합한 8 가지는 진여를 관찰하는 것은 팔관진여(八觀眞如)이고,

부류를 인가하는 유인(類忍)과 부류를 관찰하는 지혜인 유지(類智)를 합한 8 가지는 근본지혜를 관찰하는 것은 팔관정지(八觀正智)이며,  

진견도의 무간도ㆍ해탈도의 견분ㆍ자증분에 법칙함으로써 구분해서 건립하여 상견도(相見道)라 이름하는 것이다.

 

상견도(相見道),법인(法忍) 이전의 진견도(眞見道) 무간도(無間道) 견분에 법칙하고,

법지(法智) 해탈도(解脫道) 견분에 법칙한다. 

또한 부류를 인가하는 유인(類忍) 무간도의 자증분(自證分) 법칙하고,

부류를 관찰하는 지혜인 유지(類智) 해탈도의 자증분에 법칙한다.

 

八觀眞如(팔관진여), 고법지인(苦法智忍)ㆍ집법지인(集法智忍)ㆍ멸법지인(滅法智忍)ㆍ도법지인(道法智忍)

고류지인(苦類智忍)ㆍ집류지인(集類智忍)ㆍ멸류지인(滅類智忍)ㆍ도류지인(道類智忍) 

팔관정지(八觀正智),  고법지(苦法智)ㆍ집법지(集法智)ㆍ멸법지(滅法智)ㆍ도법지(道法智)

고류지(苦類智)ㆍ집류지(集類智)ㆍ멸류지(滅類智)ㆍ도류지(道類智)

 

二者依觀下上諦境別立法類十六種心。

둘째는 하지(下地, 욕계)와 상지(上地, 색계와 무색계)의 4제(諦)의 대상을 관찰함에 의거해서 별도로 법(法)ㆍ유(類, 부류) 십육심(十六心) 건립하나니,

ㅡ하지(下地, 욕계)와 상지(上地, 색계와 무색계) 4성제를 관찰함에 있어서, 4성제를 () 유(類, 부류) 나누고, 그것을 다시 인가하는 인(忍) 지(智, 지혜) 나누어 16심이 되며, 그 16심의 명칭은 앞에서와 같다.

 

謂觀現前不現前界苦等四諦各有二心:一現觀忍,二現觀智。

如其所應,法眞見道無閒解脫見分觀諦,斷見所斷百一十二分別隨眠,名相見道。

현전하는 세계(욕계)와 현전하지 않는 세계(색계와 무색계)의 고제 등의 4성제를 관찰하는 데에 각각  가지의 마음이 있으니, 하나는 현관인(現觀忍)이고, 다른 하나는 현관지(現觀智)이니,  

 상응하는 바와 같이 진견도의 무간도와 해탈도의 견분이 4성제를 관찰하는  법칙하여, 견도에서 단멸되는 미혹인 112가지의 분별수면을 끊는 것을 상견도(相見道)라 이름하는 것이다.

ㅡ욕계의 4성제에 40 가지 견혹(見惑)과, 색계와 무색계에 각각 36 가지씩(성냄을 제외함있으므로, 이들을 합하여 112가지가 된다.

 

若依廣布聖教道理,說相見道有九種心。此卽依前緣安立諦二十六種止觀別立。謂法類品忍智合說各有四觀卽爲八心,八相應止摠說爲一。雖見道中止觀雙運,而於見義觀順非止,故此觀止開合不同,由此九心名相見道。

만약 성스러운 가르침을 널리 펴는 도리에 입각해서 상견도를 말한다면, 9 가지의 구심(九心)이 있으니, 이것은  앞에서 말한 안립제를 반연하는  종류의 16심 의거해서 지(止, 사마타)와 관(觀, 위빠사나)을 별도로 건립하며, 

법을 인가하는 법인(法忍)과 제법을 관찰하는 지혜힌 법지(法智)와 부류의 인가인 유인(類忍)과 부류를 관찰하는 지혜인 유지(類智) 모두를 합쳐서 말한다면, 각각  가지의 관찰이 있으므로  여덟 가지의 팔심(八心)이 되고,

이 팔심과 상응하는 사마타를 총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가 되며,

견도 중에서는 지(止, 사마타)와 관(觀, 위빠사나)을 함께 수행하지만, 견도의 의미에 있어서는 관(觀, 위빠사나)에만 수순하고 지(止, 사마타) 아니다. 

따라서  관(觀, 위빠사나)과 지(止, 사마타) 열고 합하는 것이 같지 않으니, 이에 의거해서 지(止, 사마타)의 일심과 관(觀, 위빠사나)의 팔심을 합하여서 9 가지의 구심(九心)을 상견도(相見道)라 이름하는 것이다.

경론의 가르침에 나오는 상견도(相見道) 판별한 것으로, 보살 등은 견도 등에서 이러한 관법을 닦지는 않지만, 다만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차별을 말하는 것이다.

 

諸相見道依眞假說世第一法無閒而生及斷隨眠,非實如是。

眞見道後方得生故,非安立後起安立故,分別隨眠眞已斷故。

모든 상견도는 진실에 의지하여 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므로 세제일법(世第一法)의 바로 다음 찰나에 생겨나며, 수면을 단멸한다고 하나, 실 이와 같은 것은 아니니, 진견도(眞見道) 이후에 비로소 생겨날  있기 때문이며,

비안립제(非安立諦) 이후에 안립제(安立諦)를 일으키기 때문이며,

분별수면을 참으로 이미 끊었기 때문이다.

 

前眞見道證唯識性,後相見道證唯識相,二中初勝,故頌偏說。前眞見道根本智攝,後相見道後得智攝。

이전의 진견도(眞見道)에서는 유식성(唯識性)을 증득하고, 이후의 상견도에서는 유식상(唯識相)을 깨닫는 것이니,

이러한 두 가지 중에서 앞의 유식성 뛰어나기 때문에 '유식삼십송'의 제28 게송에서 그것에 비중을 두어 말한 것이며,

이전의 진견도를 근본지(根本智)에 포함시키고 이후의 상견도를 후득지(後得智)에 포함시킨다.

 

諸後得智有二分耶?有義俱無,離二取故。有義此智見有相無,說此智品有分別故。

聖智皆能親照境故,不執著故說離二取。

모든 후득지에는 상분과 견분의  가지 심분인 이분(二分)이 있는 것인가? 

안혜의 같은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분(二分) 모두가 없으니, 2취, 즉 능취(能取)를 떠나기 때문이라 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 지혜에는 견분은 있고 상분은 없으니,  지혜에는 분별이 있다고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말한 때문이며, 성자는 모두 직접 대상을 관조할  있기 때문이며,

견분(見分)이 있다고 말하는 것.  

 

집착하지 않아서 기 때문에 2취(取)를 떠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상분(相分)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경론에서 2() 떠난다고 말한 것은 2() 집착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견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有義此智二分俱有,說此思惟似眞如相,不見眞實眞如性故。

又說此智分別諸法自、共相等,觀諸有情根性差別而爲說故。

호법의 정의로써는 다음과 같으니, 이 지혜에는 상분과 견분의  가지 심분인 이분(二分)이 모두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사현된 진여상(眞如相)을 사유하고, 참다운 진여성(眞如性)을 보지 않는다고 '유가사지론' 제73권에서 말한 때문이며,

또한  지혜는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 등을 분별하며, 모든 유정의 근성(根性, 근기)의 차이를 관찰한다고  '불지경론(佛地經論)' 제3권과 무성(無性)의 '섭대승론석' 제6권에서 말한 때문이며,

ㅡ이것은 후득지(後得智) 견분(見分)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앞에서 말한 1(第一師),  안혜(安慧) 등의 견해를 논파하는 것이다.

 

又說此智現身土等爲諸有情說正法故。

또한  지혜는 신체와 국토인 신토(身土) 등을 나타내어 모든 유정을 위해서법을 설한다고  '불지경론' 제3권에서 말한 때문이다.

후득지에 상분(相分)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2(第二師) 견해를 논파한 것이다.

 

若不變現似色、聲等,寧有現身說法等事?轉色薀依不現色者,轉四蘊依應無受等。

만약 사현된 색(色)ㆍ성(聲) 등을 반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몸을 나투고 법을 설하는 등의 일이 있겠는가?

색온(色蘊)의 의지처를 전변하므로 색법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사온(四蘊)의 의지처를 전변하므로 수(受) 등도 없어야 할 것이며, 

 

又若此智不變似境,離自體法應非所緣,緣色等時應緣聲等。

又緣無法等應無所緣緣,彼體非實無緣用故,由斯後智二分俱有。

또한 만약 이 지혜는 전변하여 대상으로 사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자체를 떠난 법은 소연(所緣, 인식대상)이 아니어야 할 것이며,

색(色, 빛깔)과 형상 등을 반연할 때에도 당연히 성(聲, 소리) 등을 반연해야 할 것이며,

또한 존재하지 않는 무법(無法) 등을 반연할 때에는 인식대상인 소연연(所緣緣)이 없어야 할 것이니, 그것은 자체가 실재가 아니므로 연(緣)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함에 의거해서 후득지에는 상분과 견분의 두 가지 심분인 이분(二分) 모두가 있는 것이다.

 

此二見道與六現觀相攝云何?六現觀者:一思現觀,謂最上品喜受相應思所成慧。

此能觀察諸法共相,引生煖等,加行道中觀察諸法,此用最猛,偏立現觀。

煖等不能廣分別法,又未證理,故非現觀。

진견도(眞見道)와 상견도(相見道)의 두 가지 견도와 여섯 가지의 육현관(六現觀)의 포섭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육현관(六現觀)은 다음과 같으니, 제1은 사유의 현관인 사현관(思現觀)으로, 최상품의 희수(喜受)와 상응하는 사혜(思慧)를 말하며, 이것이 능히 일체법의 공상(共相)을 관찰하여 난위(煖位) 등을 이끌어 내며, 가행도(加行道)에서 제법을 관찰함에 있어서 이것의 작용이 가장 강하므로 그것에 비중을 두어 현관을 건립하는 것이니, 난위 등은 널리 법을 분별할 수 없고, 또한 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현관이 아닌 것이다.

현관(現觀) 현전(現前) 명료하게 현경(現境) 관찰하는 것이다.

 

二信現觀,謂緣三寶世、出世閒決定淨信,此助現觀。令不退轉,立現觀名。

三戒現觀,謂無漏戒,除破戒垢,令觀增明,亦名現觀。

四現觀智諦現觀,謂一切種,緣非安立,根本後得無分別智。

五現觀邊智諦現觀,謂現觀智諦現觀後,諸緣安立世、出世智。六究竟現觀,謂盡智等究竟位智。

제2는 믿음의 현관인 신현관(信現觀)이다. 삼보(三寶)를 반연하는 세간과 출세간의 결정적이고 청정한 믿음으로, 이것이 현관을 도와서 퇴전치 않게 하므로 역시 현관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제3은 계율의 현관인 계현관(戒現觀)이니, 무루의 계율을 말하는 것으로, 파계의 더러움을 제거해서 관찰을 더욱 지혜롭게 하므로 역시 현관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제4는 현관지제현관(現觀智諦現觀)으로, 모든 종류의 비안립제를 반연하는 근본지와 후득지의 무분별지혜이며,

제5는 현관변지제현관(現觀邊智諦現觀)으로, 현관지제현관 다음에 모든 안립제를 반연하는 세간ㆍ출세간의 지혜이며,

제6은 구경현관(究竟現觀)으로, 진지(盡智)등의 구경위(究竟位)의 지혜를 말한다.

 

진지(盡智), 10지(智) 중의 하나로서, 일체의 번뇌를 끊었을 때에 내가 이미 고제(苦諦)를 알고, 고통의 원인을 끊었으며, 멸제(滅諦)를 증득하려고 도를 수행했다고 아는 지혜이다.

구경위(究竟位)의 지혜, 5위(位) 중의 구경위(究竟位)에서의 십지(十智), 즉 세속지(世俗智)ㆍ법지(法智)ㆍ유지(類智)ㆍ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멸지(減智)ㆍ도지(道智)ㆍ타심지(他心智)ㆍ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이다.


此眞見道攝彼第四現觀少分,此相見道攝彼第四第五少分。彼第二三雖此俱起,而非自性,故不相攝。
이 진견도(眞見道)에서는,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 중에서 오직 근본지만을 취하는 제4의 현관지제현관(現觀智諦現觀)의 일부분을 포섭하며,

상견도에서는, 제4의 현관지제현관(現觀智諦現觀)은 후득지(後得智)만을 취하고, 제5의 현관변지제현관(現觀邊智諦現觀)은 수도(修道)에 통하기 때문에 일부분을 포섭하며, 

그 제2의 신현관(信現觀)과 제3의 계현관(戒現觀)은 이것과 함께 일어나지만, 자성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포섭하지 않는 것이다.

 

菩薩得此二見道時生如來家。住極喜地,善達法界,得諸平等。

보살이 진견도(眞見道)와 상견도(相見道)의 두 가지 견도를 얻은 때에는 여래가(如來家)에 태어나고 극희지(極喜地)에 안주하며, 법계를 잘 통달하고 모든 평등을 얻으며,

ㅡ모든 평등을 얻는 득제평등(得諸平等)이란, '불지경론(佛地經論)' 2권에서 평등성지(平等性智) 상응하는 심품에서 10상평등성(相平等性) 얻는다고 하였으며, 

또한 '섭대승론석' 6권에서 모든 유정과 모든 보살  모든 여래의  가지 평등한 심성을 얻기 때문이라고 하였.

 

常生諸佛大集會中,於多百門已得自在,

항상 모든 부처님의 대집회(大集會) 중에 태어나고, 여러 백 가지 부문의 백문(百門)에 대해서 이미 자재를 얻었으며,

ㅡ유가사지론 47권에서  찰나 사이에  가지 삼마지(三摩地) 증득하고, 청정한 천안(天眼)으로써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보며, 백의 부처님을 친견하고, 백의 세계를 움직이는  등으로 말함을 가리킨다.

 

自知不久證大菩提,能盡未來利樂一切。 
머지않아 대보리를 증득하고, 미래세가 다하도록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9 4

 

此加行位未遣相縛,於麤重縛亦未能斷,唯能伏除分別二取,違見道故。

於俱生者及二隨眠有漏觀心有所得故,有分別故,未全伏除,全未能滅。

 가행위에서는 아직 상박(相縛, 인식적인 속박)을 버리지 못하고, 추중박(麤重縛, 존재적인 속박)에 대해서도 역시 아직 끊을  없으나, 오직 분별의 2취(取)만을 조복하고 제거할  있는 것은 견도와 다르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俱生)  이수면(二隨眠, 번뇌장과 소지장) 대해서는 유루(有漏)로서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소득이 있기 때문이며, 분별이 있기 때문에 아직 완전히 조복하여서 제거한 것이 아니므로, 완전히 소멸시킬  없는 것이다.

ㅡ인식적인 속박인 상박(相縛) 존재적인 속박인 추중박(麤重縛)  가지 계박을 끊는 지위를 밝힌, 제육단이박위(第六斷二縛位)

 

상박(相縛)은 ‘인식적인 속박’, 즉 상분(相分)이 견분(見分)을 속박하는 것, 인식 체계의 원초적인 속박이다.

추중(麤重)은 잠재적으로는 아뢰야식에 내재하는 유루종자이고, 현재적(顯在的)으로는 몸과 마음의 부자유성이다. 이런 추중에 의한 속박인 추중박(麤重縛)은 ‘존재적인 속박, 즉 존재의 원초적인 속박이다.

 

此位菩薩於安立諦非安立諦俱學觀察,爲引當來二種見故,及伏分別二種障故,非安立諦是正所觀,非如二乘唯觀安立。

 지위의 보살은, 차별의 명칭을 세운 진리인 안립제(安立諦) 우주 본체의 진여인 비안립제(非安立諦) 대해서 모두 배우고 관찰하나니, 장차 상견도(相見道)와 진견도(眞見道)의  가지의 견도를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며,

분별의 두 가지 장애 조복하기 때문이다. 

비안립제는 진정으로 관찰할 바이니, 2승(乘)이 오직 안립제만을 관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ㅡ관찰되는 대상을 밝힌, 제칠명소관경점(第七明所觀境漸)

 

안립제(安立諦)는 차별의 명칭을 세운 진리이다. 즉 생각과 말이 미치지 못하는 진여(眞如)를 가설(假說)로 차별과 명목을 세워서 일곱 가지 진여인 칠진여(七眞如) 등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기신론'에 나오는 의언진여(依言眞如)나, '승만경'에 나오는 작위(作爲)가 있는 4성제인 유작사제(有作四諦)가 이에 해당된다.

비안립제(非安立諦)는 우주 본체의 진여를 말한다. 진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이렇게 이름한다. 곧 이언진여(離言眞知)이다. 또한 비안립제는 차별의 명칭이 없는 진리라는 뜻으로, '승만경'에 나오는 작위가 없는 4성제인 무작사제(無作四諦)도 이에 해당된다.

 

▷답한다; 일곱 가지의 칠진여(七眞如)는 다음과 같으니,

제1은 유전진여(流轉眞如)로써, 유위법의 유전하는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2는 실상진여(實相眞如)이니, 두 가지의 이무아(二無我)에 나타난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3은 유식진여(唯識眞如이니, 잡염ㆍ청정법이 오직 식(識)이라는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4는 안립진여(安立眞如)이니, 고제(苦諦)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5는 사행진여(邪行眞如)이니, 집제(集諦)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6은 청정진여(淸淨眞如)이니, 멸제(滅諦)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7은 정행진여(正行眞如)이니, 도제(道諦)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한다. - 성유식론(成唯識論) 제 8권 9

 

菩薩起此煖等善根,雖方便時通諸靜慮,而依第四方得成滿,託最勝依入見道故。

보살이  난위(煖位) 등의 선근을 일으키는 것은, 난위(煖位)와 정위(頂位) 및 하인(下忍)과 중인(中忍)의 두 가지 인위(忍位)의 방편시(方便時)에는 모든 선정에 통하지만, 

 번째의 제 4 선정에 의지해서 원만히 이룰  있는, 즉 상인(上忍)과 세제일법(世第一法)의 최후에 들어갈 때에는 오직 제4선정에 의지해서 이룰 수 있으니, 가장 뛰어난 의지처에 의탁해서 견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ㅡ가행위의 의지처를 판별한, 제팔변소의처(第八辨所依處).

 

唯依欲界善趣身起,餘慧厭心非殊勝故,

오직 욕계의 살기 좋은 세계인 선취신(善趣身)에 의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니, 다른 계(界)는 지혜의 마음인 혜심(慧心)과 염오의 마음인 염심(厭心)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가행위가 어떠한 세계의 신체에 의지하는가를 판별한, 제구계취분별(第九界趣分別)이며,

욕계의 선취(善趣, 인간ㆍ천상) 몸(身)으로서 견도(見道) 들어가는 것으로, 다른 세계는 염오의 마음인 염심(厭心) 미약하고, 다른 세계의 취(趣) 지혜의 마음인 혜심(慧心) 미약하기 때문이다.

 

此位亦是解行地攝,未證唯識眞勝義故。

 단계도 역시 승해행지(勝解行地)에 포함되나니, 아직 유식의 참다운 승의(勝義)를 증득하지 못한 때문이다.

ㅡ열 가지 분야 중에서 마지막으로 7() 대해서 판별한, 제십칠지분별(第十七地分別).

 

次通達位其相云何?頌曰:

다음으로 통달위(通達位)의 상은 어떠한 것인가? '삼십송'의 제28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으니, 

5()  3위인 통달위(通達位),  견도(見道) 관하여 해설한다.


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 爾時住唯識 離二取相故。

어떤 때, 즉 근본무분별지가 발하여 지(智)가 이(理)를 관조할 때에는 인식대상인 소연(所緣, 유식성 진여)에 대해서

지혜(智慧, 진여를 증오證悟하는 무분별지ㆍ근본지)를 전혀 얻는 바가 없는 도무소득(都無所得)이니, 

ㅡ진여를 증오(證悟) 때, 이지명합(理智冥合)해서 소득상(所得相) 전혀 없음을 말한다.

 

그 때에 유식의 성품에 안주하나니,

ㅡ능관지(能觀智) 소관리(所觀理) 명합(冥合)하는 경지.

 

2취(取)의 상(相)을 떠났기 때문이다.

ㅡ능취집(能取執) 소취상(所取相) 여의는 것을 말한다.


論曰:若時菩薩於所緣境無分別智都無所得,不取種種戲論相故。

▷논하여 말한다; 어느 때의 약시(若時)에 보살이 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에 무분별 지혜가 전혀 얻는 바가 없는 도무소득(都無所得)이니, 갖가지 희론의 상(相)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보살의 무루지혜가 진여를 반연함에 있어서, 후득지(後得智) 상분(相分) 세워서 관하므로 유소득관(有所得觀, 상견도相見道)이라 한다. 

지금 그것을 가려내어(簡) 진견도(眞見道) 근본무루지혜가 진여를 반연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므로 ‘어느 때인 약시(若時)’라고 하는 것이다.

 

爾時乃名實住唯識眞勝義性,卽證眞如,智與眞如平等平等俱離能取、

所取相故,能、所取相俱是分別,有所得心戲論現故。

그 때에 참으로 유식의 참다운 승의성(勝義性)에 안주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니, 곧 진여를 증득한 지혜와 진여가 평등하고 평등해서, 모든 인식주체인 능취(能取)와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의 상(相) 떠났기 때문이다. 

인식주체인 능취(能取)와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의 상(相)은 모두 분별이니, 얻는 바가 있는 유소득(有所得)의 마음에만 희론이 현현하기 때문이다.

ㅡ平等平等(평등평등), 마음과 대상이 서로 칭합(稱合)하고, 진여와 지혜가 명합(冥合)해서 모두 인식의 주체인 능취(能取) 인식대상인 소취(所取) 구별을 떠나고, 모든 희론(戱論) 끊었기 때문에 평등하고 평등하다고 하는 것이다.


有義此智二分俱無,說無所取、能取相故。

다음과 같은 제1사(第一師)의 견해가 있으니,  근본무분별지혜에는 상분과 견분의 이분(二分) 모두가 없으니,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과 인식주체인 능취(能取)의 상이 없다고 무성(無性)의 '섭대승론석' 제26권에서 말한 때문이며, 

ㅡ본 게송을  가지 부문으로 자세히 해설한.  

 

有義此智相、見俱有,帶彼相起名緣彼故。若無彼相名緣彼者,應色智等名聲等智。若無見分,應不能緣。寧可說爲緣眞如智?勿眞如性亦名能緣,故應許此定有見分。

제2사(第二師)의 견해는 다음과 같으니, 이 근본무분별지혜에는 상분과 견분 모두가 있으니, 그것의 상(相) 띄우고(帶) 일어나는, 즉 인식대상인 소연연(所緣緣)은 반드시 상을 띄우고(帶) 일어나는 것에 의하며, 그것을 반연한다고 이름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만약 그것의 상이 없어도 그것을 반연하는 것으로 이름한다면, 색경(色境)을 반연하는 지혜 등은 마땅히 소리 등을 반연하는 지혜로 이름해야 할 것이며, 만약 견분이 없다면, 능히 반연하는 것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진여를 반연하는 지혜로 삼을  있겠는가? 

진여의 성품 또한 능히 반연하는 것으로 이름해서는  되기 때문에 여기에는 반드시 견분도 있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ㅡ만약 대상에 사현(似現) 모습이 없어도 그것을 반연하는 것으로 이름한다고 말한다면, 색경(色境) 반연하는 지혜인 색지(色智) 소리(聲) 상이 없어도 소리를 반연하는 것으로 이름해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有義此智見有相無,說無相取不取相故。雖有見分而無分別,說非能取,非取全無。雖無相分,而可說此帶如相起,不離如故。

호법의 정의는 다음과 같으니, 이 근본무분별지혜에 견분은 있고 상분은 없으니, 상분없이 취하고 상분을 취하지 않는다고 '유가사지론' 제73권에서 말한 때문이다.

견분은 있지만 무분별이므로 능취(能取)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 뿐, 취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며, 상분은 없지만 이 무분별지혜이 진여의 상(相) 띠고 일어난다고 말할  있으니, 진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여를 반연하는 지혜는 진여의 체상(體相) 일어나기 때문에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으로 이름하는 것으로, 그것의 상분인 영상을 일어나기 때문에 진여를 반연한다고 이름하는 것이 아니다.

 

如自證分緣見分時不變而緣,此亦應爾。變而緣者便非親證,如後得智應有分別。故應許此有見無相。

자증분(自證分)이 견분을 반연할 때, 변현하지 않고서 반연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역시 그러해야 하는 것으로, 변현해서 반연한다면 직접 증명하는 것이 아닌 것이니, 후득지와 같이 분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에는 견분만 있고 상분은 없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加行無閒此智生時體會眞如,名通達位。初照理故,亦名見道。

가행위(加行位)의 바로 다음 찰나에  지혜가 생겨날 때에 진여을 체득(體得)해서 알기 때문에 통달위(通達位)라 이름하나니, 처음으로 도리를 비추기 때문에 또한 견도(見道)라고도 이름한다.

 

견도에서 ‘견(見)’은 무루정지(無漏正智)가 비로소 조리(照理)함을 의미하고,

‘도(道)’는 수행인이 견리(見理)한 것을 원인으로 하여 극과(極果)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然此見道略說有二:一眞見道,謂卽所說無分別智。實證二空所顯眞理,實斷二障分別隨眠,雖多剎那事方究竟,而相等故,摠說一心。

그런데  견도에 대략  종류가 있으니, 

ㅡ진견도(眞見道) 상견도(相見道) 차이를 판별한 것으로, 견도의 지혜에 정체지(正體智) 후득지(後得智) 있다. 

정체지(正體智),  근본무루지혜는 무차별을 관조하는 참다운 지혜인 실지(實智)이고,

후득지는 차별을 관조하는 권지(權智)이다. 

참다운 지혜가 먼저 진여(理) 관조하고, 이에 권지(權智) 일어나는 것이며,

참다운 근본무루지를 진견도(眞見道)라고 하고, 권지(權智) 상견도(相見道)라고 한다.

 

첫째는 진견도(眞見道)로써, 곧 앞에서 말한 무분별지혜이니, 실로 아공과 법공의 이공(二空)에서 나타나는 진리를 증득하며, 한다. 분별과 수면(종자)의 이장(二障)을 단멸하며, 많은 찰나에 비로소 궁극에 이르지만, 상이 같은 상등(相等)이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일심진견도(一心眞見道)라 말하는 것이다.

 

진견도(眞見道) 또는 일심진견도(一心眞見道)라고 한다. 무분별의 정체지(正體智)가 아공ㆍ법공에서 나타난 진여인 이공소현진여(二空所顯眞如)의 도리를 인식대상인 소연으로 하여서 갖가지 희론의 상을 전혀 취하지 않고 유식(唯識)의 참다운 승의(勝義)의 성품에 계합한다. 그리하여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인 진여와 인식주체인 능연(能緣)의 지혜가 평등하고 평등해서 모두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상을 떠난다. 

비록 진여를 인식대상인 소연으로 할지라도 상분을 띄고 반연하는 것이 아니라, 곧 진여의 체상(體相)을 띄고서 반연하는 것으로, 진여의 자체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인식대상인 소연의 상이 없고, 인식 주체인 견분 또한 분별이 없으니, 

진여와 무분별지혜가 완전히 계합하여 평등한 것이다.

일심진견도(一心眞見道), 무간도(無間道)에서 미혹의 종자의 자체를 단멸하고, 해탈도에서 그 습기를 버려서 택멸(擇滅)의 도리를 증득한다. 

이와 같이 많은 찰나에 걸쳐 있지만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그 상이 같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일심진견도(一心眞見道)라고 한다.


有義此中二空二障漸證漸斷,以有淺深麤細異故。

다음과 같은 제1사(第一師)의 견해가 있으니, 이 가운데에서는 아공과 법공의 이공(二空)과 번뇌장과 소지장의 이장(二障)을 점진적으로 증득하고 끊는 것이라 하였으니,

도리에 얕고 깊음과 장애와 지혜의 행에 두드러짐과 미세함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ㅡ제 1사의 견해에 의하면  가지 (아공ㆍ법공)  가지 장애(번뇌장ㆍ소지장) 점진적으로 증득하고 끊는다고 한다.

 

有義此中二空二障頓證頓斷,由意樂力有堪能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가운데에서는  아공과 법공의 이공(二空)과 번뇌장과 소지장의 이장(二障)을 단박에 깨닫고 단박에 끊는 것이니, 즐거워하는 의지의 힘이 능히 감당하는  의거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ㅡ이것을 정의(正義) 삼는다이에 의하면(二) 단박에(돈頓) 증득하고, 이장을 단박에(돈頓) 끊는다고 한다.


二相見道。此復有二:一觀非安立諦,有三品心:一內遣有情假緣智能除軟品分別隨眠。

둘째는 상견도(相見道)이며, 이것에 다시  비안립제(非安立諦)와 안립제(安立諦)의  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안립제를 관찰하는 것으로, 세 가지 품류의 마음인 삼품심(三品心)이 있으니,

첫째는 내면적으로 유정의 허망함을 버려서 반연하는 지혜, 즉 생공진여(生空眞如)를 반연하는 지혜이며, 능히 하품(下品)의 분별수면(分別隨眠, 번뇌장의 종자)을 없애며,

ㅡ내심(內心) 반연하여 유정(有情) 임시적 존재인 가(假)라고 버리는 유거(遣去)하는 것으로서,  생공진여(生空眞如) 반연하는 지혜이다.

 

二內遣諸法假緣智能除中品分別隨眠。三遍遣一切有情諸法假緣智能除一切分別隨眠。

둘째는 내면적으로 일체법의 허망함을 버려서 반연하는 지혜, 즉 내심(內心)을 반연하여 일체법은 임시적 존재라고 버리는 법공진여(法空眞如)를 반연하는 지혜이니

중품(中品)의 분별수면(分別隨眠, 소지장의 종자)을 없애며,

셋째는 두루 모든 유정과 일체법의 허망함을 버려서 반연하는 지혜, 즉 아공(我空)ㆍ법공(法空)의 이공진여(二空眞如)를 반연하는 지혜이니, 모든 분별의 수면을 끊을  있는 것이다.

 

상견도(相見道)는 진견도(眞見道) 이후에 분별지(分別智)로써 유식상(唯識相)을 반연한다. 

여기서는 상분과 견분이 있으므로, 진견도의 무분별지혜가 직접 유식성(唯識性)을 반연하는 것과는 같지 않으며, 상견도(相見道)에는 이공진여(二空眞如)를 반연하는 비안립제(非安立諦)의 관(觀)과, 4성제를 반연하는 안립제(安立諦)의 관(觀) 두 가지가 있다.

 

前二名法智,各別緣故。第三名類智,摠合緣故。法眞見道二空見分自所斷障無間解脫別摠建立,名相見道。

앞의  가지는 법지(法智)라 이름하나니, 각각 별도로 반연하기 때문이며,

 번째의 것은 유지(類智)라 이름하나니, 총합해서 반연하기 때문이다. 

진견도에서 이공(二空) 견분이 자신이 끊은 장애에 대해서 무간도(無間道)와 해탈도(解脫道)에 법칙(法則)함을 개별적ㆍ총합적으로 건립하여 상견도(相見道)라 이름하는 것이다.

무간도(無間道)에서 단멸되는 것에 차별이 있으므로 개별적인 별(別)이라 하며,

해탈도(解脫道)에서 증득된 것은 오직 일미(一味)이므로 총합적인 총(總)이라 이름한다.

 

법지(法智), 일체법의 진리인 제리(諦理) 증지(證知)하므로 법지(法智) 이름하며, 이는  인식대상인 소취(所取)를 관찰한다.

유지(類智), 이후의 대상과 지혜는 이전의 욕계(欲界)와과 비슷하한 상사(相似) 또는 유사(類似)이기 때문에 부류(類)라 이름한다. 부류를 관찰하는 지혜인 유지(類智)는 이전의 지혜 품류인 지품(智品)을 관찰하므로, 곧 인식주체인 능취(能取)를 관찰하는 것이다.

ㅡ번뇌를 끊는 수행에 가행도ㆍ무간도ㆍ해탈도ㆍ승진도의 네 단계가 있어서,

가행도(加行道)는 번뇌를 끊는 지위의 예비로서 수행에 힘을 가(加)하는 기간이고,

무간도(無間道)는 근기가 성숙하여 참으로 번뇌를 끊고자 하는 단계이며,

해탈도(解脫道)는 무명(無明) 번뇌를 여읜 곳에 나타나는 진여를 얻고자 하는 찰나이며,

승진도(勝進道)는 다시 정진을 계속하여 열반에 나아가는 기간이다.


有義此三是眞見道,以相見道緣四諦故。有義此三是相見道。以眞見道不別緣故。

앞에서 점진적으로 증득하고 끊는다고 주장한 제1사(第一師)의 견해로는, 이러한  가지는 진견도인 것으로, 상견도는 4성제를 반연하기 때문이라 하였고,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러한 3 가지는 상견도이니, 진견도는 별도로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정의로 한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9 3

 

復有二種,謂利自他,所修勝行隨意樂力,一切皆通自他利行。依別相說,六到彼岸、菩提分等自利行攝,四種攝事、四無量等,一切皆是利他行攝。如是等行差別無邊,皆是此中所修勝行。此位二障雖未伏除,修勝行時有三退屈,而能三事練磨其心,於所證修勇猛不退。

다시  종류가 있으니, 자신을 이롭게 하는 자리(自利)와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利他)이니,

뛰어난 수행의 승행(勝行)을 닦는 의지의 즐거움인 의락(意樂)의 따라 일체 모두가 자리행과 이타행에 통하는 것이며, 

개별적인 별상(別相) 의해서 말한다면, 6바라밀과 보리분(菩提分, 37조도품) 등은 자리행에 속하며,

4섭법(四攝法)과 4무량심(四無量心) 등은 모두 이타행에 포섭되는 것으로,

이와 같은 등의 수행의 차이가 수없이 많으나, 이 모두가  지위에서 닦는 뛰어난 수행의 수승행(修勝行)인 것이다. 

 지위에서는 이장(二障)을 아직 조복하여 제거하지 못하였므로 승행(勝行)을 닦   가지의 퇴굴심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삼퇴굴(三退屈)로써  마음을 연마함으로써 닦고 증득한 것에 대해서 용맹하게 퇴전하지 않는 것이다.

 

37 조도품(助道品), 4념주(念住)ㆍ4정단(正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正道).

4섭법(攝法)은 보살이 중생을 불도(佛道)로 인도하는 네 가지 방법으로서, 보시섭(布施攝)ㆍ애어섭(愛語攝)ㆍ이행섭(利行攝)ㆍ동사섭(同事攝)이 있다.

4무량심(四無量心)은 자무량심(慈無量心)ㆍ비무량심(悲無量心)ㆍ희무량심(喜無量心)ㆍ사무량심(拾無量心)이 있다.


一聞無上正等菩提廣大深遠心便退屈,引他已證大菩提者練磨自心,勇猛不退;

첫째, 최상의 바른 깨달음인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는 광대하고 심원하다는 말을 듣고서 문득 마음이 퇴굴할 때, 다른 이가 이미 대보리를 증득한 것을 상기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연마하여서 용맹심으로써 퇴전하지 않는 것이며, 


二聞施等波羅蜜多甚難可修心便退屈,省己意樂能修施等練磨自心,勇猛不退;

둘째, 보시  바라밀행은 닦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을 듣고서 문득 마음이 퇴굴할 때, 스스로의 의지로 보시 등을 닦고자 즐거워한 것을 회상하여서 스스로의 마음을 능히 연마하여 용맹심으로써 퇴전하지 않는 것이며, 


三聞諸佛圓滿轉依極難可證心便退屈,引他麤善況己妙因練磨自心,勇猛不退。

셋째, 부처님의 원만한 전의(轉依, 전식득지) 증득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을 듣고서 문득 마음이 퇴굴할 때, 다른 이의 드러나는 선행, 즉 보시 등을 행할 때에 드러나는 장애가 있는 유장선(有障善) 상기하면서 스스로 승묘한 수행을 비교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연마하여 용맹으로써 퇴전하지 않는 것이다. 

 

전의(轉依, 전식득지)란 유식학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원리를 전식득지(轉識得智), 즉 현상계의 허망한 식(識)을 진여의 무분별지(無分別智)로 전환시키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전식득지는 전의(轉依)로써 이루어지며, 전의(轉依, āśraya-parāvṛtti)에서

‘전(轉)’은 ‘전사전득(轉捨轉得)’, 즉 번뇌장과 소지장의 종자를 전사(轉捨)하고 열반과 보리(菩提)를 전득(轉得)하는 것이며,

‘의(依)’는 전사전득(轉捨轉得)의 의지처인 소의(所依), 즉 의타기성인 8식 특히 7식의 근본적인 소의(所依)이며 지종의(持種依)인 제8식을 가리킨다.

자기 존재의 기체(基體)를 허망한 상태인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부터 진실한 상태인 원성실성(圓成實性)으로 질적(質的)인 전환을 함으로써 8식이 네 가지 지혜로 전환되는 것으로,

아뢰야식이 대원경지(大圓鏡智)로, 말나식이 평등성지(平等性智)로, 의식이 묘관찰지(妙觀察智)로, 5식이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전환되는 것이다.

 

由斯三事練磨其心堅固熾然修諸勝行。次加行位其相云何?頌曰:

이러한 삼사(三事) 의해  마음을 연마하여 여러 뛰어난 수행의 승행(勝行)을 견고하고 치열하게 닦는 것이다.

다음으로, 가행위의 상(相)은 어떠한 것인가?'유십송'의 27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으니, 

ㅡ5( 2위인 가행위(加行位) 관하여 해설한다.


現前立少物 謂是唯識性, 以有所得故 非實住唯識。

현전에 작은 사물인 소물(少物)을 건립하여서 유식성(唯識性)이라 말한다면

얻는 바가 있는 유소득(有所得), 즉 진여가 아니라 심소변(心所變)의 상(相)으로서 대상유소득(帶相有所得)의 관심(觀心)이기 때문에

진실로 유식성(唯識性)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

ㅡ작은 사물인 소물(少物) ‘불원만(不圓滿’의 뜻으로서, 진여와 비슷한 () 의미한다. 

진여는 주변법계(周遍法界)하는 묘체(妙體)이나, 가행지(加行智) 변상(變相) () 협소하고 불원만하므로  체가 본체와 같지 않음을 ‘소물(少物)’이라 표현한 것이다.

 

論曰:菩薩先於初無數劫善備福德智慧資糧,順解脫分旣圓滿已。

爲入見道住唯識性,復修加行伏除二取,謂煖、頂、忍、世第一法。

▷논하여 말한다; 보살은 먼저 처음의 무수겁(無數劫) 동안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비축하여 순해탈분을 이미 원만하게 마쳤으나, 견도에 들어가서 유식성에 안주하기 위하여 다시 가행을 닦아서 2취(取)를 조복하고 제거하나니, 곧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을 말하는 것이다. 

ㅡ가행위에 관한  게송의 장행석(長行釋) 10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에서, 먼저  지위의 연유를 나타낸, 제일현위소유(第一顯位所有)이다.

 

가행위(加行位)는 초아승기겁(初阿僧祗劫)의 만심(滿心)에서 닦아 익히는 지위로써, 곧 제10회 회향에서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의 네 가지 선근(善根)을 닦는 것이다.


此四摠名順決擇分,順趣眞實決擇分故。近見道故立加行名,非前資糧無加行義。

4 가지를 총체적으로 순결택분(順決擇分)이라 이름하나니, 참다운 결택분에 수순해서 나아가기 때문이다. 

견도에 가까우므로 가행위라는 명칭을 건립하는 것이나, 이전의 자량위에서의 가행의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위의 총체적인 명칭을 해설한, 제이석위총명(第二釋位總名)으로, 

앞의 자량위(資糧位) () 배가해서 행하는 면에 있어서는 가행(加行)이라 이름할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견도(見道) 가까운 측면에서 오직  지위만을 가행위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煖等四法依四尋思、四如實智初後位立。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 등의 4 가지 법은  가지 심사관인 사심사관(四尋思觀)과  가지 여실지관인 사여실지관(四如實智觀)의 처음과 나중의 지위에 의거해서 건립하나니, 

ㅡ가행위에서 닦는 법을 밝힌, 제삼출위소수법(第三出位所受法).

 

四尋思者,尋思名、義、自性、差別,假有實無。

 가지의 사심사관(四尋思觀)은 명(名)ㆍ의(義, 대상)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 가유(假有)로서 실제는 비존재라고 추구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ㅡ명() 능전(能詮) 명칭ㆍ언어이고, () 소전(所詮) 대상을 말한다. 

 명칭과 대상에 각각 자성과 차별이 있으며,

자성(自性) 법체(法體) 자상(自相),  색법과 심법 등의 체성(體性)이고,

차별은  체성의 무상(無常)ㆍ고() 등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다. 

 명(名)ㆍ의(義, 대상)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은 취하는 모든 인식대상인 소취경(所取境)이며, 이 4 가지에 일체법을 포함하는 것이다.

 

如實遍知此四離識及識非有,名如實智。

  가지도 식(識)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고, 식(識)도 아니고 실재도 아님을 사실 그대로 두루 아는 것을 여실지(如實智)라고 이름하나니, 

ㅡ명(名)ㆍ의(義, 대상)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 소취(所取)의 네 가지 법이 식(識)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깊이 인정하는 인인(印忍)할 뿐만 아니라, 능취() 식(識)도 역시 비실재라고 인가(忍可)하는 것을 여실지(如實智) 이름한다.

 

名、義相異,故別尋求,二二相同,故合思察。

명(名)ㆍ의(義, 대상)은 상(相)이 다르기 때문에 별도로 추구하며, 명(名)과 의(義, 대상)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은 상이 같기 때문에 함께 사유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ㅡ명(名)과 의(義, 대상) 이상관(離相觀)이고, 자성과 차별은 합상관(合相觀)이다.


依明得定發下尋思觀無所取,立爲煖位,謂此位中創觀所取名等四法,
皆自心變,假施設有,

實不可得。初獲慧日前行相故立明得名,卽此所獲道火前相,故亦名煖。

명득정(明得定)에 의지하여 하품(下品)의 심사관(尋思觀)을 일으켜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비실재라고 관찰하는 것을 난위(煖位)라고 건립하나니,

 단계에서는 처음으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의 명(名)ㆍ의(義, 대상)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 등의  가지 법은 모두 스스로의 마음이 전변된 것으로서,

가정적으로 시설해서 존재하는 유(有)이며, 실로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며,

처음으로 지혜의 태양이 현전에서 작용하는 행상(行相)을 얻기 때문에 명득정(明得定)이라는 명칭을 건립하는 것이니, 여기에서는 도(道)를 획득하는 불꽃이 현전해 있는 상이기 때문에 난위(煖位, 명득정)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ㅡ네 가지 선근(善根) 명칭을 해설한, 제사석사지명(第四釋四地名).

 

명득정(明得定), 무루지혜의 태양인 혜일(慧日)을 광명과 같은 지혜의 명(明)이라 이름하며, 난위(煖位)에서 처음으로 이 무루지혜의 태양이 현전(現前)에서 작용하는 상을 얻기 때문에, 광명과 같은 지혜를 얻는 선정의 명득정(明得定)이라 이름한다.


依明增定,發上尋思觀無所取,立爲頂位,謂此位中重觀所取名等四法,皆自心變,假施設有,

實不可得,明相轉盛,故名明增。尋思位極,故復名頂。

명증정(明增定)에 의지하여 상품(上品)의 심사관(尋思觀)을 일으켜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비실재(無)라고 관찰함을 정위(頂位)라고 건립하나니,

 단계에서 거듭하여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의 명(名)ㆍ의(義, 대상)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 등의  가지 법은 모두 스스로의 마음이 전변한 것으로서 가정적으로 시설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실로 실로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라고 관찰한다. 

광명과 같은 지혜인 명(明)의 상이 점차 증성하기 때문에 명증정(明增定)이라 이름하며,

심사관 단계의 끝이기 때문에 또한 정위(頂位, 명증정) 이름하는 것이다.


依印順定,發下如實智,於無所取決定印持,無能取中亦順樂忍。旣無實境離能取識,寧有實識離所取境?所取、能取相待立故。印順忍時摠立爲忍,印前順後立印順名,忍境識空,故亦名忍。

인순정(印順定)에 의지하여 하품을 여실 그대로 아는 지혜인 여실지(如實智)를 일으켜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비실재(無)임을 결정적으로 인가하여 지니는 인지(印持)하고, 인식의 주체인 능취(能取)도 비실재인 이치에 수순해서 즐겁게 인가하나니,

인식의 주체인 능취(能取)의 식(識)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대상인 실경(實境)이란 없거늘, 어찌 인식대상인 소취(所取)를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의 식(識)이 있겠는가?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인식의 주체인 능취(能取)는 서로 배대하여 건립하기 때문이다. 

인가(印可)와 수순(隨順)함을 인정하는 시기를 총체로 인위(忍位)라고 건립하나니,

이전의 하품의 하인(下忍), 즉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비실재(無)라고 깊이 인정하는 인인(印忍) 인가하고,

이후의 상품의 상인(上忍), 즉 인식의 주체인 능취(能取)인 식(識)도 비실재인 무(無)라고 인순(印順) 수순하므로 인순정(印順定)이라는 명칭을 건립한 것으로,

대상(境)도 식(識)도 공(空)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또한 인위(忍位, 인순정)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依無閒定發上如實智,印二取空,立世第一法。謂前上忍唯印能取空,

今世第一法二空雙印,從此無閒必入見道,故立無閒名。異生法中此最勝故,名世第一法。

무간정(無間定)에 의지하여 상품의 여실지를 일으켜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인식주체인 능취(能取)의 공(空)함을 인정하는 것을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고 건립하나니,

이전의 상인(上忍)에서는 오직 인식 주체인 능취(能取)가 공한 것만을 인가하였으나, 지금의 세제일법에서는  가지 공을 다같이 인가하는 것이니, 여기서부터 바로 다음 찰나에 반드시 견도(見道)에 들어가기 때문에 무간정이라는 명칭을 건립한 것이며, 중생의  중에서 이것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세제일법(世第一法, 무간정)이라 이름한 것이다.


如是煖、頂依能取識觀所取空,下忍起時印境空相,中忍轉位於能取識如境是空順樂忍可,

上忍起位印能取空,世第一法雙印空相。

이상과 같이 난위(煖位)와 정위(頂位)에서의 인식의 주체인 능취(能取)의 식에 의지해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공(空)이라고 관찰하나니,

하품의 인가인 하인(下忍)이 일어나는 때에는 대상(境)의 공한 공상(空相) 인가하며,

중품의 인가인 중인(中忍)이 전전하는 단계에서는 인식 주체인 능취(能取)의 식에 대해서 대상과 같이 공한 것으로 수순하여 인가함을 즐거워하며,

상품의 인가인 상인(上忍)이 일어나는 단계에서는 인식 주체인 능취(能取)가 공함을 인가하나니,

세제일법에서는 겹으로 공의 양상을 인가하는 쌍인공상(雙印空相)인 것이다.


皆帶相故未能證實,故說菩薩此四位中猶於現前安立少物,謂是唯識眞勝義性。

以彼空、有二相未除,帶相觀心有所得故,非實安住眞唯識理,彼相滅已方實安住。依如是義故有頌言:

그런데 모두가 현전에 공(空)이라는 상을 띄고 있 때문에 아직 능히 참다운 성품을 증득할  없으므로 보살이   가지 단계인 사위(四位) 중에서 아직 현전에 작은 사물인 소물(少物)을 안립해서 이것이 유식의 참다운 승의(勝義)의 성품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공(空)과 유(有, 실재)의  가지 상, 즉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을 없애지 못하였으므로 가지고 마음을 관찰하는 것은 얻는 바가 있는 유소득(有所得)이기 때문에, 진실로 참다운 유식의 도리인 유식리(唯識理)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 

상을 없애고 나서 비로소 참으로 안주하게 되나니, 이상과 같은 뜻에 의거하기 때문에 어떤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륵(彌勒의 '분별유가론(分別瑜伽論)' 게송으로, 무착(無着) '섭대승론(攝大乘論)' 인용되어 있다.


菩薩於定位 觀影唯是心, 義相旣滅除 審觀唯自想。

보살은 정위(定位)에서 영상(影)은 오직 마음뿐인 유심(唯心)이라고 관찰하나니, 

ㅡ마음 내부의 대상인 영상(影像) 관찰하여서,  영상은 오직 내부의 마음일 뿐, 외부에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삼는 것으로, 이것은 난위(煖位)이다.

 

대상의 표상(변계소집성인 마음 밖의 대상의 상)을 이미 소멸시켜 멸제(滅除)하고

확실하게 오직 스스로 표상일 뿐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다.(오직 내부의 마음만이 존재한다고 관찰한다)

 

정위(定位)는 가행위가 산위(散位)가 아님을 나타내며, 자량위는 외문(外門)에 많이 안주하지만, 가행위에서는 대부분 선정의 내문(內門)에서 수행하기 때문이다.


如是住內心 知所取非有, 次能取亦無 後觸無所得。

이와 같이 내심(內心)에 안주하여, 인식대상인 소취(所取)는 실재가 아닌 비유(非有)라는 것을 알며, 

다음에 인식주체인 능취(能取) 역시도 비실재인 무(無)라는 것을 알며

그러한 다음에야 무소득(無所得)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무성(無性)의 '섭대승론석' 6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9 1

 

何謂悟入唯識五位?一資糧位,謂修大乘,順解脫分;二加行位,謂修大乘順決擇分;

三通達位,謂諸菩薩所住見道;四修習位,謂諸菩薩所住修道;五究竟位,謂住無上正等菩提。

▷묻습니다; 무엇을 이름하여 유식을 깨달아 들어가는 다섯 단계의 오위(五位)라고 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첫째는 자량위(資糧位)이니, 대승의 순해탈분(順解脫分)을 닦는 것을 말하며,

둘째는 가행위(加行位)이니,  대승의 순결택분(乘順決擇分)을 닦는 것을 말하며,

셋째는 통달위(通達位)이니, 모든 보살이 머무는 견도(見道)를 말하며,

넷째는 수습위(修習位)이니, 모든 보살이 머무는 수도(修道)를 말하며,

다섯째는 구경위(究竟位)이니, 최상의 바른 깨달음인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에 안주하는 것을 말한다.

ㅡ 두 번째의 경유(經由)하 단계를 밝혔다.

 

순해탈분(順解脫分), 해탈은 열반(涅槃), 분(分)은 원인의 인(因)의 뜻으로, 자량위(資糧位)는 열반에 순응하고 또한 그것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순해탈분(順解脫分)이라고 하며 3현위(賢位)를 말한다. 

대승불교의 3현위는 십신(十信)을 포함한 십주ㆍ10행ㆍ10회향이고,

부파불교의 3현위는 5정심관(停心觀)ㆍ별상념주(別相念住)ㆍ총상념주(總相念住)의 경지이다.

순결택분(順決擇分)은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의 네 가지 선근(善根)의 지위이며, 가행위(加行位)는 견도(見道)에 수순하고, 그것을 이끌어 내는 단계이므로 순결택분이라고 이름한다.


云何漸次悟入唯識?

謂諸菩薩於識相性資糧位中能深信解,在加行位能漸伏除所取、能取引發眞見,在通達位如實通達,修習位中如所見理數數修習伏斷餘障,至究竟位出障圓明,能盡未來化有情類復令悟入唯識相性。初資糧位其相云何?頌曰:

묻습니다; 유식을 어떻게 점차 깨달아 가는 것입니까?

답한다; 모든 보살은 유식상(唯識相)과 유식성(唯識性)에 대하여 자량위(資糧位) 중에서는 깊이 믿고 이해하며,

가행위(加行位)에 있어서는 능히 점차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조복하고 제거하여 통달위의 참다운 견해인 진견(眞見)을 이끌어 내며,

통달위(通達位)에 있어서는 사실 그대로 여실(如實)하게 통달하며,

수습위(修習位) 중에서는 관찰한 진리 그대로 반복해 닦아 익혀서 나머지 장애, 즉 견도에서 단멸되지 않은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조복하고 단멸하며,

구경위(究竟位)에 이르러 장애를 벗어나 원만한 최상의 지혜를 갖추는 것으로, 능히 미래세가 다하도록 유정의 무리를 교화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또한 유식상(唯識相)과 유식성(唯識性)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먼저 자량위의 상(相)은 어떠한 것인가? 

'삼십송'의 제26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ㅡ세 번째 문답으로서 유식을 깨달아가는 방편을 밝혔으며, 

5위(位)를 다섯 분단으로 나눈 가운데에서 두 번째의 바르게 말하는 분단의 제이정설단(第二正說段)이며, 1단은 자량위(資糧位) 관하여 해설한 것이다.


乃至未起識 求住唯識性, 於二取隨眠 猶未能伏滅。

보리심을 일으킨 이후에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식(識)을 일으켜서

유식성(唯識性)에 안주함을 구하지 않을 때까지는

번뇌장과 소지장의 2취(二取, 번뇌장과 소지장)의 수면(隨眠, 종자)를 아직 조복하거나 단멸할 수 없도다.

 

ㅡ유식성(唯識性)에 안주함이란, 통달위에서 진여 체득하는 것, 즉 능관지(能觀智)가 소관리(所觀理)에 명합(冥合)하는 것을 의미한다.

ㅡ 2취(二取)란, 여기서는 변계(遍計)의 2취(取), 즉 번뇌장과 소지장을 가리키며,

참고로 변계의 2취에는 집취(執取)가 있으며, 의타(依他)의 2취(能取, 견분見分과 소취所取인 상분相分)는 비집(非執)이다.

ㅡ수면(隨眠)은 종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종자가 중생을 수축(隨逐)해서 제8식에 면복(眠伏)하다가 다음 현행의 원인이 되는 까닭에, 종자를 수면이라고도 한다.


論曰:從發深固大菩提心,乃至未起順決擇識,求住唯識眞勝義性,齊此皆是資糧位攝。

爲趣無上正等菩提,修集種種,勝資糧故。爲有情故勤求解脫,由此亦名順解脫分。

▷논하여 말한다. 깊고 견고한 대보리심을 일으키고 나서부터 이에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식(識)을 일으켜서 유식의 참다운 승의성(勝義性, 진여)에 안주하기를 더이상 구하지 않을 때까지는, 이러한 것을 모두를 갖추는 것을 자량위에 포함시키는 것이니,  최상의 바른 깨달음인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에 나아가기 위해서 갖가지의 뛰어난 자량을 닦고 쌓기 때문이며, 

유정을 위하여 부지런히 해탈을 구하는 것이니, 이러함으로써 순해탈분이라고도 이름한다.


此位菩薩依因、善友,作意資糧四勝力故,於唯識義雖深信解,而未能了能、所取空,多住外門修菩薩行。

故於二取所引隨眠,猶未有能伏滅功力,令彼不起二取現行。

이 단계의 보살은 본성주종성(本性住種姓)과 습소성종성(習所成種姓)의 원인과

훌륭한 선지식인 선우(善友)와 견고한 승해력(勝解力)의 작의(作意)와 자량(資糧), 네 가지의 뛰어난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유식의(唯識義)에 대해서 깊이 믿고 이해하지만, 아직 능취와 소취가 공(空)이라는 것을 요달하지 못하였으며,

대부분 외부를 향한 외문(外門)에 머물러 보살행을 닦으니, 

그러한 까닭에 2취(二取)는 수면(隨眠)을 이끌어내는 것이나, 아직 2취(二取)의 현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능히 억제할 수 있는 공력이 없는 것이다.  

 

ㅡ선우(善友), 여러 불보살을 만나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악우(惡友)의 연(緣)을 가려낸 것이다.

ㅡ작의(作意), 견고한 승해력(勝解力)을 말하는 것으로, 악우(惡友) 등의 거스르는 위연(違緣)을 만날지라도 결정적인 승해(勝解)로써 작의(作意)하여서 기울어지거나 파괴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ㅡ자량(資糧), 여러 선근의 복덕과 지혜의 공덕을 적집하는 것을 말하며, 열등한 자량을 가려낸 것이다.

ㅡ외문(外門), 객관계의 사상(事相)을 향한 산란된 마음.

 

此二取言顯二取取,執取能取、所取性故。

二取習氣名彼隨眠,隨逐有情眠伏藏識,或隨增過,故名隨眠,卽是所知、煩惱障種。

2취(二取)라는 말은 2취의 집취(執取)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능취와 소취의 성품을 집취하기 때문이며,

2취의 습기를 그것의 수면(隨眠)이라고 이름하나니, 유정을 따라 장식(藏識, 아뢰야식)에 잠복하고 있는 까닭에

혹은 따라서 허물을 더하게 하므로 수면이라 하는 것이니, 곧 소지장(所知障)과 번뇌장(煩惱障)의 종자인 것이다.

 

ㅡ집취(執取), 오직 2취(取)만을 2취(取)라고 이름한다고 말한다면, 집착이 아닌 2취(取)의 종자가 있는 것을 어찌 복멸(伏滅)해야 하는가? 또한 상분(相分) 같은 것은 반드시 복멸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니, 여기서는 오직 2취(取)에 집착하여서 실유(實有)로 삼아서 취(取)하는 것을 2취라고 이름한 것이다.


煩惱障者,謂執遍計所執實我薩迦耶見而爲上首百二十八根本煩惱,及彼等流諸隨煩惱。

此皆擾惱有情身心,能障涅槃,名煩惱障。

번뇌장(煩惱障)이란 두루 계탁(計度)하여 집착하는 변계소집으로, 아견의  5취온(五取蘊)을 실아(實我)라고 집착하는 살가야견(薩迦耶見, 유신견)을 첫째로 하는 128가지의 근본번뇌 및 그것의 등류인 모든 수번뇌(隨煩惱)를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모두가 유정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괴롭혀서 능히 열반을 장애하는 것을 번뇌장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ㅡ번뇌장과 소지장의  가지 장애를 자세히 해설한 것으로, 먼저 번뇌장의 자체를 드러낸, 제일출체(第一出體)

 

ㅡ번뇌장(煩惱障)은 5취온(取蘊)에 대해서 실아(實我)라고 집착하는 번뇌를 말하며, 이에 128가지 근본번뇌와 20 가지 수번뇌가 속하며, 이것은 유정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괴롭혀서 열반을 장애하고, 생사에 유전하게 하는 것이므로 번뇌장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견혹(見惑)이 욕계에서 40 가지, 색계와 무색계에서 각각 36 가지씩 있으며, 수혹(修惑)의 16 가지를 합한 것이다.


所知障者,謂執遍計所執實法薩迦耶見而爲上首見、疑、無明、愛、恚、慢等,覆所知境無顚倒性,

能障菩提,名所知障。

소지장(所知障)이란, 두루 계탁(計度)하여 집착하는 실법의 변계소집으로, 아견을 첫째로 하는 악견(惡見)ㆍ의(疑)ㆍ무명ㆍ탐ㆍ진(瞋)ㆍ만(慢) 등이며,

인식의 대상인 소지경(所知境, 유위법과 무위법)과 전도됨이 없는 본성인 무전도성(無顚倒性, 진여)을 덮어서 능히 깨달음을 장애하는 것을 소지장이라 이름하며,

 

ㅡ소지장(所知障)의 체를 드러낸 것으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인식 대상인 소지(所知)의 참다운 상인 법공(法空)을 그대로 알지 못하게 하므로, 이들 번뇌를 소지장(所知障)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참다운 지혜가 발현하는 것을 장애하는 점에서 지장(智障)ㆍ보리장(菩提障)이라고도 하며,

소지장에는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분별기(分別起)와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기(俱生起)가 있다.

소지장(所知障)의 수(數)도 번뇌장과 같은 것은 번뇌장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소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번뇌장은 두드러진 추(麤)로서 많은 품류(品類)가 있어서 알기 쉽기 때문에 2승(乘)도 역시 단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만 불선(不善)이고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므로 앞에서 숫자를 나타내 보인 것이나,

소지장은 미세한 것으로서 품류가 많지 않으며, 매우 알기 어렵기 때문에 오직 보살만이 단멸할 수 있는 것이다.

 

此所知障決定不與異熟識俱,彼微劣故,不與無明、慧相應故,法空智品與俱起故。

이 소지장은 반드시 이숙식과는 함께하지는 않는 것이니,

그 이숙식(異熟識)의 인식작용이 미세하고 열등하기 때문이며,

무명ㆍ혜(慧)심소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보살의 법공지품(法空智品)이 제8식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ㅡ소지장이 8식과 함께하거나 함께하지 않음을 판별한 것으로, 소지장은 제8식과는 반드시 함께하지 않는 것은, 제8식은 인식작용이 미세하고 열등한 것에 비하여 이 법집(法執)은 두드러지고 강하기 때문이며,. 

또한 제8식은 무명과 혜(慧)에는 상응하지 않는 것으로, 이 법집은 무명과 혜(慧)에 반드시 함께하기 때문이며, 

또한 보살의 법공지품(法空智品)은 제8식과 함께 일어난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七轉識內隨其所應或少或多,如煩惱說,眼等五識無分別故,法見、疑等定不相應,餘由意力皆容引起。此障但與不善、無記二心相應,論說無明唯通不善、無記性故,癡、無癡等不相應故。

7전식(七轉識) 안에서는 그 상응하는 것을 따라 적기도 하고 많기도 하나, 번뇌장과 같이 말하나니, 즉 소지장의 체(體)를 계산하는 것은 번뇌장과 같은 것이다.

안식 등 5식(五識)은 분별작용이 없으므로 법에 대한 악견인 법견(法見)ㆍ의(疑) 심소 등에 반드시 상응하지 않으나, 탐욕ㆍ성냄 등의 나머지를 의지력에 의해 모두 일으킨다고 인정되나니,

이 장(障)은 다만 불선과 무기의 두 가지 심왕과 상응하는 것이다.

논서, '유가사지론' 제59권에서 무명은 다만 불선과 무기의 성품에 통한다고 말하였으니, 치(癡)ㆍ불치(不癡) 심소 등에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소지장의 3() 분별한다. 

 

ㅡ제7식에서는 근본번뇌 4 가지와 수번뇌 8 가지 및 혜(慧)의 심소의 13 가지가 있고,

제6식에서는 모두 있으며, 5식에서는 근본번뇌 3 가지와 수번뇌 10 가지 등 모두 13 가지가 있다.

 

煩惱障中此障必有,彼定用此爲所依故。

번뇌장 중에는 이러한 장애가 반드시 있으니, 그 소지장은 반드시 이 번뇌장을 이용해서 의지처로 삼기 때문이다.

ㅡ번뇌장의 자체는 협소하고 오직 두드러진 것이며, 소지장의 자체는 포괄적이고 두드러짐과 미세함에 통한다.

 

體雖無異,而用有別,故二隨眠隨聖道用,有勝有劣,斷或前後。此於無覆無記性中是異熟生,非餘三種,彼威儀等勢用薄弱,非覆所知障菩提故。此名無覆望二乘說,若望菩薩亦是有覆。

체(體)는 다르지 않지만 작용에 차이가 있으니, 따라서 번뇌장과 소지장, 두 가지 수면(隨眠)은 성스러운 성도(聖道)의 작용이 뛰어나거나 열등함을 따라 미혹을 단멸함에 있어서 앞뒤가 있다.

이것은 무부무기성에 있어서는 이숙생(異熟生)이며,

4 가지 무기(無記) 중에서 이숙무기(異熟無記)를 제외한 나머지의 위의(威儀)ㆍ공교(工巧)ㆍ변화(變化)의 3가지 무기가 아니니, 

그 위의무기(威儀無記) 등은 세력이 약해서 인식의 대상을 덮거나 깨달음을 장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무부무기라고 이름하는 것은 2승(乘)에 배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만약 보살에 배대한다면 역시 유부무기인 것이다.

 

이숙무기(異熟無記)는 선ㆍ악의 업종자를 증상연(增上緣)으로 해서 얻는 과보를 말한다. 그런데 소지장은 이숙식을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이숙생(異熟生)이며, 업의 과보인 업과(業果)는 아니며,

이숙생은 세력이 강하고 두터우며, 공통적으로 작의(作意)심소로써 일어나고, 계탁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능히 소지장을 조복하고 보리(菩提)를 장애한다.

위의(威儀)무기는 앉고 서는 등의 동작을 일으키는 마음의 성품이 선(善)도 악도 아닌 것을 말하고,

공교(工巧)무기는 그림을 그리고 물건을 만드는 신공교(身工巧)와 노래 부르는 등의 어공교(語工巧)를 일으키는 마음의 성품이 선도 악도 아닌 것을 말하며,

변화(變化)무기는 선정의 힘으로 여러 가지를 변화시켜 만드는 마음이 선도 악도 아닌 것을 말한다.


若所知障有見、疑等,如何此種契經說爲無明住地?無明增故,摠名無明,非無見等。

如煩惱種立見一處、欲、色、有愛四住地名,豈彼更無慢、無明等?

如是二障分別起者見所斷攝,任運起者修所斷攝。

만약 소지장에 악견과 의심 등이 있다고 말한다면, 어째서 이것의 종자를 경전,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에서 무명주지(無明住地)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무명이 증성하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무명으로만 이름한 것일 뿐, 소지장 등에는 악견 등이 없다는 것이 아니며,

번뇌의 종류에 대해서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ㆍ애욕주지(愛欲住地)ㆍ색애주지(色愛住地)ㆍ유애주지(有愛住地)의 명칭을 건립하는 까닭이니, 어찌 그것에 다시 만(慢)ㆍ무명 등이 없는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상과 같은 두 가지 장애에서 분별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은 견소단혹(見所斷惑)에 포섭되고,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수소단혹(修所斷惑)에 속한다.

ㅡ두 가지 장애인, 견소단(見所斷) 수소단(修所斷) 판별한, 제이견수분별(第二見修分別).

 

견혹(見惑)ㆍ사혹(思惑)ㆍ무명(無明)의 번뇌를 다섯 가지로 분류한 5주지번뇌인 오주지혹(五住地惑)으로, 

①무명주지(無明住地), 무명은 우치한 마음의 자체로서 일체번뇌의 근본이고, 주지(住地)는 일체 번뇌의 의지가 되어서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②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에서 견(見)은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견혹(見惑)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지적(智的)인 미혹으로서 견도(見道)에 들어갈 때 일시에 끊어지므로 견일처(見一處)라고 한다.  

③애욕주지(愛欲住地), 욕(欲)은 욕계(欲界)이고, 애(愛)는 탐애 곧, 사혹(思惑)이다. 사혹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ㆍ거만의 네 가지에 통하는 것으로, 탐욕이 다음 생(生)을 받는 뜻이 가장 강하므로 탐욕으로써 사혹을 나타낸다.

④색애주지(色愛住地)에서 색(色)은 색계(色界)이고, 애(愛)는 탐애(貪愛) 곧 사혹(思惑)으로, 곧 색계의 사혹을 말한다.

⑤유애주지(有愛住地)에서 유(有)는 무색계로서, 곧 무색계의 사혹(思惑)을 말한다.


二乘但能斷煩惱障,菩薩俱斷。永斷二種唯聖道能,伏二現行通有漏道。

2승(乘)은 다만 번뇌장만을 단멸할 수 있으나, 보살은 모두 단멸시키며,

ㅡ2() 보살이  가지 장애를 단멸하는 상을 판별한, 제삼약인분별(第三約人分別).

 

두 가지 장애의 종자를 영원히 단멸하는 것은 오직 성도(聖道)에서만 가능하며, 두 가지의 현행을 조복하는 것은 유루도에도 통한다.

ㅡ유루도와 무루도에서  가지 장애를 조복 단멸하는 상을 판별한, 제사유무루도복단분별(第四有無漏道伏斷分別).


菩薩住此資糧位中,二麤現行雖有伏者,而於細者及二隨眠止觀力微,未能伏滅。

보살은 이 자량위(資糧位)에 안주하여 번뇌장과 소지장, 두 가지의 두드러진 현행을 조복하지만, 미세한 것 및 두 가지 수면에 대해서는 지관 수행의 힘이 미약하므로 아직 조복하거나 단멸할 수 없다.

ㅡ결론 맺으면서  게송으로 돌아가는 제오결귀본송(第五結歸本頌)

 

此位未證唯識眞如,依勝解力修諸勝行,應知亦是解行地攝。

이 지위에서는 아직 유식의 진여를 증득하지 못하였고, 승해(勝解)의 힘에 의지해서 여러 가지 뛰어난 수행을 닦나니,

마땅히 알라. 역시 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등의 승해행지(勝解行地)에 포섭되는 것이다.

ㅡ자량위(資糧位) 지위(位) 수행을 판별하였다.

 

所修勝行其相云何?略有二種,謂福及智,諸勝行中慧爲性者皆名爲智,餘名爲福。

닦은 바의 뛰어난 수행의 승행(勝行)의 상(相)은 어떠한 것인가?대략 두 종류가 있으니, 곧 복덕과 지혜이다.

여러 가지 뛰어난 수행 중에서 혜(慧)를 체성으로 하는 것을 모두 지혜라 이름하고,

그 나머지는 복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자량위에서 닦는 수행을 판별하였다.

 

오직 지혜일 뿐, 복덕이 아닌 것은 10력(力)ㆍ일체지(一切智) 등이고,

오직 복덕일 뿐, 지혜가 아닌 것은 모든 상호(相好)ㆍ대비(大悲) 등이다. 

지혜와 복덕 양쪽인 것은 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성도지(聖道支) 등이다.


且依六種波羅蜜多,通相皆二。別相,前五說爲福德,第六智慧。或復前三唯福德攝,後一唯智,餘通二種。

또한 6바라밀에 의해서 말한다면, 공통적인 통상(通相)은 복덕과 지혜 두 가지이며,

개별적인 별상(別相)으로서는 앞의 보시ㆍ지계(持戒)ㆍ인욕ㆍ정진ㆍ선정의 다섯 가지는 복덕이라고 말하고, 여섯 번째의 반야바라밀은 지혜이다.

혹은 다시 앞의 세 가지인 보시ㆍ지계(持戒)ㆍ인욕은 오직 복덕에만 포함되고 마지막 하나인 반야는 오직 지혜이며, 그 나머지는 두 종류에 공통되는 것이기도 하다.

ㅡ지혜와 함께 작용하여 지혜의 업을 도우므로 모두 지혜라고 이름하며, 또한 복덕과 함께 작용하여 복덕의 업을 도우므로 모두 복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9 1

 

若有三性,如何世尊說一切法皆無自性?頌曰:

만약 원성실자성, 의타기자성, 변계소집자성의 삼성(三性) 있다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세존께서 '해심밀경(解深密經)' 제2권에서와 여러 반야경전 등에서 일체법 모두에는 자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삼십송'의 제23ㆍ제24ㆍ제25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으니,

ㅡ세 가지 무자성인 삼무자성(三無自性),  상무자성(相無自性)ㆍ생무자성(生無自性)ㆍ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 관하여 해설한다.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삼성(三性) 의해서,  가지의 삼무자성(三無自性)을 건립하는 것으로,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로써, 제법은 자성이 없는 무성(無性)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유식위교(唯識違敎) 2() 중에서  번째의 힐난에 대한 해설이다. 

반야경전 등에서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 말씀하신 것은 의타기성ㆍ원성실성의 법체(法體) 공이 아닌 것을 말하지 않은 것으로,  여환공적(如幻空寂) 점에만 의거해서 그것을 변계소집의 체상도무(體相都無) 함께 모두 제법개공이라 말한 정도이기 때문에 미요의(未了義) 교설이라는 것이다.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처음의 변계소집성은  상무자성(相無自性)이고

다음의 의타기성은 무자연성(無自然性)이며

나중의 원성실성은 앞의 변계소집성에 집착된

자아(我)와 법(法)을 멀리 떠난 것에 의거하는 자성을 말하느니라.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常如其性故 卽唯識實性。

이 원성실성은 제법의 승의(勝義)이며, 또한 곧 진여이니, 
항상 여여하게 그것의 자성이기 때문에, 곧 유식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이다.

ㅡ유식학의 3대단(三大段)인 유식상(唯識相)ㆍ유식성(唯識性)ㆍ유식위(唯識位) 중에  번째의 유식성을 밝힌 것이다.

 

論曰:卽依此前所說三性,立彼後說三種無性。謂卽相、生、勝義無性。

故佛密意說,一切法皆無自性,非性全無。

▷논하여 말한다.; 곧 앞에서 말한  가지의 상섬(三性)에 의거해서  다음에 말한  가지의 삼무자성(三無自性)을 건립하는 것이니, 곧 상무자성(相無自性)ㆍ생무자성(生無自性)ㆍ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로써 일체법은 모두 자성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일 뿐, 자성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ㅡ삼십송의 23게송의 총체적인 답변의 뜻을 해설한 것이다.


說密意言顯非了義,謂後二性雖體非無,而有愚夫於彼增益妄執實有我、法自性,此卽名爲遍計所執。

爲除此執,故佛世尊於有及無摠說無性。

‘밀의(密意)’라는 말은 요의(了義)가 아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뒷부분의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 이성(二性) 자체가 없지는 않지만, 어리석은 우부(愚夫) 그것에 대하여 증익(增益)하여서 망령되게 집착하여서 참으로 자아(我)와 법(法)의 자성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니, 이를 곧 변계소집성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 세존께서 실재(有)와 비실재(無)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무자성, 즉 무성(無性)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云何依此而立彼三?謂依此初遍計所執立相無性,由此體相畢竟非有,如空華故。

어떻게 이 상섬(三性)에 의거해서   가지의 삼무자성(三無自性) 건립하는 것인가?

처음의 변계소집성에 의거해서는 상무자성(相無自性)을 건립하나니, 이것의 체상이 궁극적으로 실재가 아닌 비유(非有)이고, 허공 꽃인 공화(空華)와 같은 것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며,

상무자성(相無自性, lakṣaṇa-niḥsvabhāva)은 변계소집자성, 즉 언어에 의해 파악되는 경험세계의 사물은 모두 비실재임을 말한다.

여기에서 상(相, lakṣaṇa)은 사물의 형상 내지 특질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갖가지 표상(表象)을 마음에 떠올리고, 그것에 산ㆍ강ㆍ나무 등을 언어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는 사물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 자상(自相)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므로, 따라서 언어로써 표현되는 사물인 변계소집성에는 공화(空華)와 같이 자성이 없으므로 상무자성(相無自性)이라 하는 것이다.

 

依次依他立生無性,此如幻事託衆緣生,無如妄執自然性故,假說無性,非性全無。

그 다음의 의타기성에 의거한 것은 생무자성(生無自性)을 건립하나니, 이것은 환술과 같이 여러 연(緣)에 의탁해서 생겨나는 것으로, 허망되게 집착하듯이 자연적인 자성이 없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무성(無性)이라 말하는 것이나, 자성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생무자성(生無自性, utpatti-niḥsvabhāva)은 의타기자성의 존재성 부정이다.

의타기자성, 즉 현재의 심식(心識)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업의 습기와 현재의 여러 가지 연(緣)의 세력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생무자성(生無自性)이라 한다.

 

依後圓成實立勝義無性,謂卽勝義,由遠離前遍計所執我、法性故,假說無性,非性全無,

如太虛空雖遍衆色,而是衆色無性所顯。

나중의 원성실성에 의거해서는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을 건립하나니, 곧 승의(勝義)는 앞에서 말한 변계소집성의 자아(我)와 법(法) 멀리 떠난  의거하는 자성이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무성(無性)이라 하는 것이며, 자성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마치 큰 허공인 태허(太虛)는 갖가지 색법에 두루하지만, 갖가지 색법의 무성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24게송의 3무자성(無自性) 자세히 해설하였다.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 paramārtha-niḥsvabhāva)은 ‘승의(勝義)이며 무자성인 것’의 의미이다. 원성실자성(완성된 진여眞如)이 모든 존재 중에서 최고의 존재, 즉 승의(勝義)이고 일체법의 법무아성(法無我性)이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雖依他起非勝義故,亦得說爲勝義無性,而濫第二,故此不說。

此性卽是諸法勝義,是一切法勝義諦故。

의타기성도 승의가 아니기 때문에 역시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이라고 말할  있지만, 

ㅡ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에서 () () 뜻으로서,  의타기자성은 승의가 아닌 자성이라는 의미이다.

 

 번째의 것과 에 혼동되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지 않으며,

ㅡ의타기성의 승의무자성에 대하여, 원성실성의 승의무자성을 2 승의무자성이라 한다.

 

제25게송에서 ‘이것’의 원성실성의 승의무자성 법의 승의이니, 제법의 승의제(勝義諦)이기 때문이다.

ㅡ제25게송의 유식성(唯識性) 해설한 것이다.


然勝義諦略有四種:一世閒勝義,謂薀、處、界等;二道理勝義,謂苦等四諦;

三證得勝義,謂二空眞如;四勝義勝義,謂一眞法界。

그러나 승의제(勝義諦)에 대략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승의제(世閒勝義諦)로써, 5온ㆍ12처ㆍ18계 등을 말하는 것이며,

둘째는 도리승의제(道理勝義諦)로써, 고제 등의 4성제를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증득승의제(證得勝義諦)로써, 아공과 법공의 이공(二空)에서 나타난 진여를 말하는 것이며,

넷째는 승의승의제(勝義勝義諦)이니, 참다운 하나의 법계인 일진법계(一眞法界)를 말하는 것이다.


此中勝義依最後說,是最勝道所行義故。爲簡前三故作是說:此諸法勝義,亦卽是眞如。

 가운데에서 ‘승의(勝義)’라는 것은 최후의 것에 의거해서 말하는 것으로,

가장 뛰어난 도(道), 근본지(根本智)가 행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며,

앞의  가지를 가려내기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며,

이 원성실성의 승의무자성은 일체법의 승의이고, 또한  진여(眞如)라고 말하는 것이다. 

 

진여(眞如, tathatā)는 우주 만유에 보편적인 상주불변하는 본체이며, 이것은 진실한 경계로서 오직 성품을 증득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진(眞)은 진실이라는 의미로서 허망한 유루제법(有漏諸法)을 가려내고(簡),

여(如)는 여상(如常)이라는 뜻으로서 변천하는 유위무루법(有爲無漏法)을 가려낸다.

만유제법(萬有諸法) 이체(理體) 동일 평등하므로 ()이고, 하나의 () 일법계만차(一法界萬差) 일체법을 갖추어 어느 것이나 자체(體) 말한다면 ()인 것이다.

 

眞謂眞實,顯非虛妄。如謂如常,表無。謂此眞實於一切位常如其性,故曰眞如,卽是湛然不虛妄義。

진(眞)이란 진실로써, 허망한 것이 아님을 나타내며,

여(如)라는 것은 여여하게 상주하는 여상(如常)을 말하는 것으로, 변하여 바뀌어가는 변이(變易)가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진실한 것이고, 모든 지위에서 상주하고 평등한 상여(常如)이면서, 그것의 자성이기 때문에 진여라고 말하는 것이니, 곧 가득찬 담연(湛然)한 것과 같아서 허망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亦言顯此復有多名,謂名法界及實際等,如餘論中隨義廣釋。此性卽是唯識實性。

제25게송에서 ‘또한의 역(亦)’이라는 말은 이것에 다시 많은 명칭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법계  실제(實際) 등으로 이름하는 것을 말하며,

다른 논서, 즉 '대승아비달마잡집론'의 제2권에서 뜻에 따라 일곱 가지의 명칭이 있다고 자세하게 해석하였으며,

이 자성(性)은  유식의 참다운 성품인 유식실성(唯識實性)인 것이다. 

 

謂唯識性略有二種:一者虛妄,謂遍計所執;二者眞實,謂圓成實性,爲簡虛妄說實性言。

유식의 성품인 유식성(唯識性)에 대략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허망한 유식의 성품인 허만성(虛妄性)으로, 변계소집성을 말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진실한 유식의 성품인, 진실성(眞實性)으로, 원성실성을 말하는 것이다. 

허망한 것을 가려내기 위해서 참다운 성품의 실성(實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復有二性:一者世俗,謂依他起;

다시  가지의 성품이 있으니,

하나는 세속의 유식성으로, 의타기성을 말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승의의 유식성으로, 원성실성을 말하며,  

세속을 가려내기 위해서 참다운 성품의 실성(實性)이라 말하는 것이다.

 

二者勝義,謂圓成實,爲簡世俗故說實性。

다시  가지의 성품이 있으니,

하나는 세속의 유식성으로, 의타기성을 말하며,

다른 하나는 승의의 유식성으로, 원성실성을 말하는 것으로,

세속을 가려내기 위해서 참다운 성품의 실성(實性)이라 말하는 것이다.


三頌摠顯諸契經中說無性言非極了義,諸有智者不應依之摠撥諸法都無自性。

앞에서 말한  가지 게송은 총체적으로 여러 경전 중에서 말씀하신 무자성의 무성(無性)이라는 말이 지극한 요의(了義)가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니, 지혜 있는 자라면 그것에 의거해서 총체적으로 일체법이 모두 자성이 없는 것이라고 부정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경계하여야 하는 것이다.

 

如是所成唯識相性,誰於幾位如何悟入?謂具大乘二種姓者,略於五位漸次悟入。

이상과 같이 설명된 유식의 양상인 상(相)과 성품의 성(性)을 어떠한 이  가지 단계에서 어떻게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대승의  가지 종성을 갖춘 자가 대략 다섯 단계인 오위(五位)의 과정으로 점차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ㅡ정종의교광성분(正宗依敎廣成分) 중에서  가지  분단인 삼대단(三大段)으로 나눈 가운데에서 3대단(第三大段)으로서 유식위(唯識位) 밝힌 것이다. 

이것은 다시  분단으로 나뉘어서,

①먼저 깨달아 들어가는 주체인 사람과경유(經由)하 단계,깨달아 들어가는 방편을 묻는  가지 질문이 있다.


何謂大乘二種種姓?

▷묻습니다; 무엇을 대승의 두 가지 종성인 이종종성(二種種姓)이라 하는 것입니까?

ㅡ세 가지 질문 중에서 처음에 깨달아 들어가는 주체인 사람에 관하여 묻는 것이다.

 

一本性住種姓,謂無始來依附本識法爾所得無漏法因:二習所成種姓,謂聞法界等流法已聞所成等熏習所成。要具大乘此二種姓,方能漸次悟入唯識。 

 

▷답한다; 하나는 본성에 머무는 본성주종성(本性住種姓)으로, 아득한 옛적부터 근본식에 의탁해서 본래부터 있는 무루법의 원인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훈습으로 이루어진 습소성종성(習所成種姓)으로써, 법계로부터 평등하게 흘러나오는 법을 듣고 나서 문혜(聞慧) 등의 훈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반드시 대승의 이 두 가지 종성을 갖춘 사람이 바야흐로 능히 점차 유식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본성주종성(本性住種姓)은 아득한 옛적부터 근본식 중에 본래부터 있는 법이(法爾)의 무루종자를 갖추고, 아직 발심하지 않은 지위에 있으므로 정법(正法)을 들은 일이 없으므로, 따라서 훈습에 의해 그 종자를 증장(增長)시키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습소성종성(習所成種姓)은 이미 발심한 이후에 만약 부정성(不定姓)인 경우는 대승으로 전향한 회심향대(迴心向大) 이후에, 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의 힘에 의해 유루선(有漏善)의 종자를 훈습하고, 본유무루종자를 증장시켜가는 경우이다.

들어서 얻는 지혜인 문소성혜(聞所成慧), 사유하여 얻은 지혜인 사소성혜(思所成慧), 선정 수행으로 얻은 지혜인 수소성혜(修所成慧)의 세 가지 지혜를 문사수(聞思修) 삼혜(三慧)라고 말한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8 10

 

又聖教中說有五相,此與三性相攝云何?

所詮、能詮各具三性,謂妄所計屬初性攝,相、名、分別隨其所應,所詮、能詮屬依他起,眞如正智隨其所應,所詮能詮屬圓成實,後得變似能詮相故。二相屬相唯初性攝,妄執義名定相屬故。

또한 성스러운 가르침의 '현양성교론' 제16권 등에서

표현의 주체인 능전(能詮)ㆍ표현의 대상인 소전(所詮)ㆍ상속(相屬)ㆍ집착(執着)ㆍ집착하지 않는 불집착(不執着)의 오상(五相)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 오상(五相)과 원성실성, 의타기성, 변계소집성인 삼성(三性)의 포섭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소전(所詮)과 능전(能詮)에는 각각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을 갖추고 있으니,

허망하게 계탁한 것은 초성(初性)인 변계소집성에 속하고,

상(相, 형사)ㆍ명(名, 명칭)ㆍ분별(分別)은  상응한 것을 따라 소전에도 있고 능전에도 있으며, 의타기성에 속하며,

바른 지혜의 정지(正智)와 진여의 여여(如如)는  상응한 것을 따라 소전에도 있고 능전에도 있으며, 원성실성에 속하는 것으로, 후득지가 전변하여 능전의 상으로 사현하기 때문이며,  

능전(能詮)과 소전(所詮), 두 가지가 서로 포함하는 상은 오직 초성(初性)인 변계소집성 포함되나니,

의(義, 뜻)과 명(名, 명칭) 반드시 서로 포함한다고 망령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ㅡ제2 5(五)와의 포섭관계를 판별한 것이다.

 

경전의 뜻과 이치를 능히 풀이해 드러낼 수 있다고 해서 능전(能詮)이라 하고, 이에 비해서 해석되어서 드러내어지는 뜻과 이치를 소전(所詮)이라 한다.
즉, 문자가 뜻을 발생하는 것을 능전(能詮)이라 하고, 문자에 의해 나타나는 뜻을 소전(所詮)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주관 ․ 객관’이라 하지 않고, 능(能-주된 것)과 소(所-객인 것)라는 말을 많이 쓴다.

모든 경전에서는 법(法)과 의(義)를 통해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는데, 법은 언설로 표현되는 것이라면 의는 언설의 표현을 통해 전달하는 근본 뜻이다. 따라서 법 없이는 뜻이 드러나지 않고, 뜻이 없는 법은 단순한 음향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법(法)은 가르침 내지 진리를 설명하는 주체이므로 능전(能詮)이라 하고, 의(義)는 법을 통해서 드러나는 객체라서 소전(所詮)이라 한다.- 아미산


彼執著相唯依他起,虛妄分別爲自性故。不執著相唯圓成實,無漏智等爲自性故。

又聖教中說四眞實,與此三性相攝云何?世閒、道理所成眞實依他起攝,三事攝故。

二障淨智所行眞實圓成實攝,二事攝故。

 집착상(執著相)은 오직 의타기성이니, 허망분별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며,

집착하지 않는 불집착상(不執著相) 오직 원성실성이니, 무루의 지혜 등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며, 

또한 성스러운 가르침 중에서  가지 진실인 사진실(四眞實)을 말하였는데,  삼성(三性)과의 포섭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세간에서 이루어진, 세간소성진실(世間所成眞實)과 도리에서 이루어진, 도리소성진실(道理所成眞實) 의타기성에 포함되나니, 상(相, 형사)ㆍ명(名, 명칭)ㆍ분별(分別)의 삼사(三事)에 포함되기 때문이며,

번뇌장과 소지장인 이장(二障)의 청정한 지혜가 행한 진실은 원성실성에 포함되며,

정지(正智)와 여여(如如)의 이사(二事) 포함되기 때문이다.

ㅡ3자성과  가지 진실과의 포섭관계를 판별한, 제오사법상섭문(第五四法相攝門).

 

사진실(四眞實), ①세간에서 이루어진 진실인 세간소성진실(世間所成眞實)

②도리에서 이루어진 진실인 도리소성진실(道理所成眞實)

③번뇌장의 청정한 지혜가 행한 진실인 번뇌장정지소행진실(煩惱障淨智所行眞實),

④소지장의 청정한 지혜가 행한 진실인 소지장정지소행진실(所知障淨智所行眞實)이다.


'辯中邊論' 說初眞實唯初性攝,共所執故,

第二眞實通屬三性,理通執、無執、雜染、淸淨故,後二眞實唯屬第三。

'변중변론'의 중권에서의  번째의 세간소성진실(世間所成眞實) 오직  번째의 자성인 변계소집성포함된다고 하나니, 모두 집착된 것인 까닭이며,

제2의 도리소성진실(道理所成眞實) 공통적으로  가지 자성에 속하나니, 도리의 이(理)는 집착ㆍ집착이 없음ㆍ잡염ㆍ청정에 통하기 때문이며,

후의 번뇌장정지소행진실(煩惱障淨智所行眞實)과 소지장정지소행진실(所知障淨智所行眞實)의 두 진실은 오직 제3의 자성인 원성실성(圓成實性)에만 통한다고 하였다.

 

三性四諦相攝云何?四中一一皆具三性。且苦諦中無常等四各有三性。

無常三者:一無性無常,性常無故;二起盡無常,有生滅故;三垢淨無常,位轉變故。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과 4성제의 포섭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사제(四諦) 중의 하나하나에 모두  가지 자성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고성제 중의 무상(無常)   가지에는 각각  가지 자성이 있으니, 무상의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자성이 없는 무성무상(無性無常)이니, 자성이 항상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일어나고 다함의 기진무상(起盡無常)이니, 생멸이 있는 때문이며,

셋째는 더러움과 청정함의 구정무상(垢淨無常)이니, 지위가 전변하기 때문이다.

ㅡ3자성과 4성제의 포섭관계를 판별한, 제육사제상섭문(第六四諦相攝門).


苦有三者:一所取苦,我、法二執所依取故;二事相苦;三苦相故;三和合苦,苦相合故。

괴로움의 고(苦)에  가지는 다음과 같으니,

첫째는 취착되는 것의 괴로움인 소취고(所取苦)이니, 아집과 법집의 의지처로서 취해지기 때문이며,

둘째는 양상의 괴로움인 상고(相苦)이니,  가지 괴로움인 삼고(三苦)의 상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화합의 괴로움인 화합고(和合苦)이니, 괴로움의 상과 화합하기 때문이다.


空有三者:一無性空,性非有故;二異性空,與妄所執自性異故;三自性空,二空所顯爲自性故。

공(空)의  가지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첫째는 자성이 없는 무성공(無性空)이니, 자성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다른 자성의 공인 이성공(異性空)이니, 허망하게 집착된 것의 자성과 다르기 때문이며,

셋째는 자성공(自性空)이니, 이공(二空, 아공과 법공)에서 나타난 것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無我三者:一無相無我,我相無故;二異相無我,與妄所執我相異故;三自相無我,無我所顯爲自相故。

무아(無我)의  가지는 다음과 같으니,

첫째는 체상이 없는 무상무아(無相無我)이니, 자아의 체상인 아상(我相)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체상이 다른 이상무아(異相無我)이니, 허망하게 집착된 자아의 아상 다르기 때문이며,

셋째는 자상무아(自相無我)이니, 무아에서 나타난 무아의(無我) 소현所顯) 자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集諦三者:一習氣集,謂遍計所執自性執習氣,執彼習氣假立彼名;二等起集,謂業煩惱;

三未離繫集,謂未離障眞如。

집제(集諦)의  가지는 다음과 같으니,

첫째는 습기의 집제인 습기집(習氣集)이니, 변계소집자성이 집착하는 습기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에 집착하는 습기이므로 가정적으로  명칭을 건립한 것이며,

둘째는 같이 일어나는 집제인 등기집(等起集)이니, 업과 번뇌를 말하며,

셋째는 계박을 떠나지 않은 집제인 미리계집(未離繫集)이니, 아직 장애를 못한 진여를 말한다.


滅諦三者:一自性滅,自性不生故;二二取滅,謂擇滅二取不生故;三本性滅,謂眞如故。

멸제(滅諦)의  가지는 다음과 같으니,

첫째는 자성의 멸제인 자성멸(自性滅)이니, 자성은 생멸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는 2취(取)의 멸제인 이취멸(二取滅)이니, 택멸을 말하는 것으로,  2취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는 본성의 멸제인 본성멸(本性滅)이니, 진여이기 때문이다.


道諦三者:一遍知道,能知遍計所執故;二永斷道,能斷依他起故;三作證道,能證圓成實故。

然遍知道,亦通後二。

도제(道諦)의 세 가지는 다음과 같으니,

첫째는 두루 아는 도제인, 편지도(遍知道)이니, 능히 변계소집성을 알기 때문이며,

둘째는 영원히 단멸하는 도제인 연단도(永斷道)이니, 능히 의타기성의 잡염분을 단멸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증득을 이루는 도제인 작증도(作證道)이니, 능히 원성실성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루 아는 편지도(遍知道)는 역시 뒤의 둘에도 통하는 것이다.

 

七三三性,如次配釋。今於此中所配三性或假或實,如理應知。

이상은 각각  가지씩 있는 일곱 종류를성(三性)에 순서대로 배대하여 해석한 것으로,

여기에서 배대한 삼성 비실재인 가(假)이기도 하고 실재인 실(實)이기도 한 것이니,

논리에 맞추어 바로 알아야다.


三解脫門所行境界,與此三性相攝云何?理實皆通,隨相各一,空、無願、相如次應知。

삼해탈문(三解脫門)이 행하는 경계와 성의 포섭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진실로써 말한다면 모두 통하는 것이나, 상(相)을 따라 말한다면 각각 하나이니,

공해탈문ㆍ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ㆍ무상해탈문의 순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ㅡ3자성(三自性)  가지 해탈문의 포섭관계를 판별한, 제칠삼법상파문(第七三法相擺門).

 

삼해탈문(三解脫門)은 해탈을 얻는 세 가지 방법으로서, 

①공해탈문(空解脫門)은 일체가 다 공하다고 관찰하는 것이고,

②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은 일체를 구할 것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며,

③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은 상대적인 차별상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緣此復生三無生忍:一本性無生忍,二自然無生忍,三惑苦無生忍。如次此三是彼境故。

이 삼성을 반연하여 다시  가지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일으키나니,

첫째는 본성의 무생법인인 본성무생인(本性無生忍)이고, 

둘째는 자연의 무생법인인 자연무생인(自然無生忍)이며, 

셋째는 미혹ㆍ괴로움의 무생법인인 혹고무생인(惑苦無生忍)이니, 순서대로   가지는 그것 대상이기 때문이다.


此三云何攝彼二諦?應知世俗,具此三種,勝義唯是圓成實性。

世俗有三:一假世俗,二行世俗,三顯了世俗。如次應知卽此三性。

삼성가 어떻게  가지인 이제(二諦)를 포섭하는 것인가? 

마땅히 알라. 세속제(世俗諦)는   종류를 갖추고, 승의제는 오직 원성실성뿐이며,

세속제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허망한 것의 세속제인 가세속(假世俗)이고, 

둘째는 수행의 세속제인 행세속(行世俗)이며, 

셋째는 현료(顯了)의 세속제인 현료세속(顯了世俗)이니, 곧 순서대로의 삼성이라고 알아야 한다.

ㅡ3자성과 진속이제(眞俗二諦) 포섭관계를 판별한, 제팔이법상파문(第八二法相擺門).


勝義有三:一義勝義,謂眞如,勝之義故;二得勝義,謂涅槃,勝卽義故;

三行勝義,謂聖道,勝爲義故。無變無倒,隨其所應,故皆攝在圓成實性。

승의제(勝義諦)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도리 승의제인 의승의(義勝義)이니, 진여를 말하는 것으로, 뛰어난 지혜인 승지(勝智)의 경계인 의(義)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증득의 승의제인 득승의(得勝義)이니, 열반을 말하는 것으로, 뛰어난 과보인 승과(勝果)가  경계인 의(義)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수행의 승의제인 행승의(行勝義)이니, 성도(聖道)를 말하는 것으로, 뛰어난 승(勝)으로써 경계인 의(義)를 삼기 때문이다. 

변함이 없는 무변(無變)이고, 전도됨이 없으며,  상응한 것에 따르기 때문에 모두 원성실성에 포함된다.


如是三性,何智所行?遍計所執都非智所行,以無自體,非所緣緣故。

愚夫執有,聖者達無,亦得說爲凡聖智境。依他起性二智所行,圓成實性唯聖智境。

이와 같은성은 어떠한 지혜가 작용하는 것인가?

변계소집성은 전혀 지혜의 행하는 경계가 아니니, 자체가 없으므로 인식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며,

어리석은부(愚夫)는 실재하는 유(有)이라고 집착하고, 성자는 비실재인 무(無)에 통달하였으므로 역시 범부와 성인의 지혜의 경계가 된다고 말할  있으며,

의타기성은 범부와 성인 지혜가 행하는 경계이며, 원성실성은 오직 성인의 지혜의 경계일 뿐이다.

ㅡ범부와 성인의 지혜의 경계를 서술한, 제구범성지경문(第九凡聖智境門).


此三性中幾假幾實?遍計所執妄安立故可說爲假,無體相故非假非實。依他起性有實有假,聚集、相續、分位性故說爲假有,心、心所色從緣生故說爲實有。若無實法,假法亦無,假依實因而施設故。圓成實性唯是實有,不依他緣而施設故。

삼성 중에서  가지가 허망한 가(假)이고, 몇 가지는 참된 실(實)인가?

변계소집성은 허망하게 안립한 이유에서는 허망한 것이라고 말할  있으니, 체상이 없는 이유에서는 허망한 가(假) 아니고 참된 실(實) 아니며,

의타기성에는 참된 실(實) 있고 허망한 가(假) 있으니, 쌓여서 모인 취집(聚集)과 상속과 분위의 속성이기 때문에 가유(假有)라고 말할 수 있으며,

심왕ㆍ심소ㆍ색법은 연(緣)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실유(實有)라고 말할 수 있으나,

만약 실법(實法)이 없다면, 가법(假法) 역시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가유(假有)는 실체의 원인인 실인(實因)에 의거해서 시설하는 까닭에 원성실성은 오직 실유일 뿐이며, 다른 연(緣)에 의거해서 시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3자성의 가실(假實)판별한, 제십가실분별문(第十假實分別門).

 

취집(聚集), 병(甁) 등과 같이 여러 분자(分子)가 모이고 쌓여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此三爲異爲不異耶?應說俱非,無別體故,妄執、緣起、眞義別故。如是三性義類無邊,恐厭繁文,略示綱要。

이 세 가지는 다른 이(異)인가? 다르지 않은 불이(不異)인가?

마땅히 함께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개별적인 체가 없기 때문이며,

허망하게 집착하는 망집(妄執)과 연기(緣起)하는 것은 참다운 대상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삼성의(三性義)의 종류가 끝이 없으나, 번쇄한 문장을 싫어할까 염려되어 간략히 강요(綱要)를 보였다.

3자성의 다르거나 다르지 않음을 배대하여 판별한, 제십일삼성대변이불이문(第十一三性對辦異不異門).

 

成唯識論卷第八 終 성유식론 제 8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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