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대승론(攝大乘論) 상권 2

아 승 가(阿 僧 伽, 무착) 지음. 불타선다(佛陀扇多) 한역. 김묘주 번역

 

彼以何義故名阿陁那識? 依一切色相故,及取一切依身事故。

如是彼依諸色等根不壞者,乃至命不盡,隨順故,未來取身。彼能生取身,是故彼名阿陁那識。

무슨 뜻으로 그것을 아타나식(阿陀那識, 제8식)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모든 감각기관을 유지하기 때문이고, 모든 의지처의 자체를 취하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그것에 의지해서 모든 감각기관이 파괴되지 않고, 나아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수순하기 때문이며,  

미래의 몸(身)을 취하나니, 그것이 능히 생기해서 몸을 취하는, 취신(取身)을 하는 것이므로 아타나식이라 하는 것이다.

 

아타나(阿陀那)는 범어 ādāna의 음역으로서 유지ㆍ보존의 뜻이다. 제8식이 신체와 종자를 유지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彼亦名心, 如佛所說心意識爾。

그것을 또한 심(心)이라 이름하나니, 부처님께서 심(心)ㆍ의(意)ㆍ식(識)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ㅡ이하는 ()ㆍ의()ㆍ식() 명칭을 해석한다.

 

是中意有二種:依近作緣事故,近滅識依,與意識作生因。

여기에서 의(意)에  가지 의지처가 있으니,

첫째는 근작연(近作緣) 성품이니, 가까이에서 멸한 식과 의식이 생기하는 의식생인(意識生因)의 의지처이며,

ㅡ급다의 역본과 진제의 역본에는 차제연(次第緣)으로, 현장의 역본에는 등무간연(等無間緣)으로 되어 있다.

 

第二意雜四種煩惱,常共同身見`我慢`愛身及無明,彼是依識所染生。

若以一身所生識,第二是染境界,識義故`取近義故,及不分別義故,明二意。

 번째 의(意)는  가지 번뇌인 신견(身見)ㆍ아만(我慢)ㆍ애신(愛身)ㆍ무명(無明)과 항상 함께 하나니, 그것은 식이 잡염되어 생기하는, 식염생(識染生)의 의지처인 것이다. 

식(識)은  번째는 몸을 의지처로하여 생기하는 신소생(身所生)이며,

 번째로는 잡염된 경계의 염경계(染境界) 의미이니, 가까운 대상을 취하기 때문이며, 대상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가지로 이의(二意)를 밝히는 것이다.

ㅡ급다 역본과 진제 역본, 현장 역본에는 어째서 염오의(染汚意) 있는가에 대하여 문답 형식의 설명이 있으나, 역본에서는 부분이 없이 바로 게송으로 이어지고 있다.

 

是中有偈:

이러함에 게송이 있으니, 

 

雜染障無明, 同法及諸五, 三昧或勝事, 說中應誠患。

잡염된 장애의 무명인 잡염장무명(雜染障無明)과 같은 법인식(五識),

삼매 혹은 뛰어난 승사(勝事)설하는 가운데에서 마땅히 근심 이루네.

 

잡염장무명(雜染障無明), 급다의 역본과 진제의 역본에는 독행무명(獨行無明)으로, 현장의 역본에는 불공무명(不共無明)으로 되어 있다. 무명은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무명(相應無明)으로 나누며,

불공무명은 독두무명(獨頭無明)ㆍ독행무명(獨行無明)이라고도 하며, 탐욕(貪)ㆍ성냄(瞋)ㆍ어리석음(癡)과 상응하지 않고 단독으로 생기하여 진지(眞智)를 장애하는 근본적인 무명이다.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癡)의 무명으로서, 제7식에만 상응하고 다른 식에는 수반되지 않는다. 

상응무명은 6식(識)에 상응하는 무명으로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번뇌와 상응하는 무명이다.


無想而起我, 生順行無窮, 近順起我相, 一切是不成。

무상천에서 아상을 일으켜서, 태어남이 계속되어 끝이 없으니, 

가까이 수순해서 아상(我相)을 일으켜서 일체가 성립되지 않네.


離染無心事, 二三是相違, 彼無一切處, 執成我等義。

염오의 마음의 성품인 심사(心事)가 없으면

불공무명과 오식(五識)의 두 가지가 없고, 

해석하는 말, 두 가지 선정의 차이, 무상천의 생에 아집이 항상 따르는 것의 세 가지가 상위(相違)하나니, 

그것이 없다면, 일체의 모든 곳에서 아집을 이루는 등의 뜻이 없을 것이네.


心順正義故, 常順不相違, 一切是同行, 說無明不離。

마음이 정의(正義) 수순하는 까닭에 항상 수순하여 위배되지 않으니, 

모든 부분과 함께 작용하므로, 무명이 떠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心及身`第三,離阿犂耶識更餘處無。以是義故,釋成阿犂耶識是心事。隨種子行彼意及意識。以何義故,說爲心?種種法種子習薰聚義故。

 번째로 심(心)의 자체는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다시 다른 곳에 없으니,

이러한 뜻으로 아리야식이 심사(心事)를 이룬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심사(心事)를 종자로 삼아서  의(意)와 의식(意識)이 작용하나니,

무슨 까닭에 심(心)이라고 하는 것인가? 갖가지 법의 종자가 훈습하여 쌓이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佛以何義故,『小乘經』中,彼心不說爲阿犂耶識及阿陁那識?攝甚微細智義故。彼諸聲聞不修學,行一切智人智故,是故彼中閒釋說智,復說釋成解脫,故不說。諸菩薩者,修行一切智人智故,爲彼說此識;若不說者,離彼識不得解行一切智人智。

부처님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소승경전에서  심(心)을 아리야식이나, 아타나식이라고 말하지 않으신 것인가?

심오하고 미세한 지혜의 경계에 포섭되기 때문이요,

 모든 성문은 일체지(一切智)를 성취하신 분의 지혜를 배우고 닦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지혜를 풀어서 말하고, 다시 해탈을 말하여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말하지 않았으나,

일체지를 성취하신 분의 지혜를 수행하는 여러 보살들을 위해서는  식(識, 아리야식)을 설하셨다.

만약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식을 부정한다면, 일체지를 성취하신 분의 지혜를 알고 행하기 어려우리라.

ㅡ성문승에도 다른 부문의 비밀스런 뜻으로써 8식을 말함을 밝히는 가운데, 우선 대승과 소승이 다른 이유를 말한다.


然復異名,『小乘經』說彼識,如『增一阿含』中說:喜樂阿犂耶世閒;及著阿犂耶,阿犂耶所成,幷求阿犂耶
;滅阿犂耶故,說法時親近正聽,起隨順心許,取法及次法。

또한 소승경전에서는 다른 명칭으로  식(識, 아리야식)을 말하였으니,

'증일아함경'에서 “세간에서는 아리야(阿犁耶)를 즐기고, 아리야와 아리야로 이루어진 것에 집착하며, 아리야를 구한다”고 말한 것이다. 

아리야를 단멸하기 위해서 법을 말할  친근(親近)하고 바르게 들어서 수순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법을 구하고 법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번째로 성문승에 이미 다른 부문의 비밀스런 뜻으로써 8식을 말하는 것을 밝힌다.


如來出世閒時,世閒說此希有法故。『如來出思益經』中說,以此義故,『小乘經』亦異名說此阿犂耶識。大僧祇『增一阿含經』中,亦說彼爲根本,如樹依根住故。彌沙塞僧中亦說言:乃至世閒陰不斷。如是異名,亦說彼識。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실  세간에서  희유한 법을 말씀하셨으니, '여래출사익경(如來出思益經)'에서 이러한 뜻을 말한 것이며, 

소승경전에서도 역시 다른 명칭으로  아리야식(阿犁耶識)을 말씀하셨으니, 대중부의 '증일아함경'에서도 역시 그것을 근본식(根本識)이라 이름한 것으로, 마치 나무가 뿌리에 의지해서 머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화지부(미사새부彌沙塞部)에서도 역시 말씀하셨으니, 세간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는 5음, 즉 내지세간음부단(乃至世間陰不斷)이라 하신 것이다.

ㅡ내지세간음부단(乃至世間陰不斷), 급다의 역본에는 궁생사취(窮生死聚), 진제의 역본에는 궁생사음(窮生死陰)으로, 현장의 역본에는 궁생사온(窮生死蘊)으로 되어 있다.

 

如是異名,亦說彼識。

이와 같이 다른 명칭으로 역시  식(識, 아리야식)을 말씀하신 것이다.


或有時節中,色及心斷時,非阿犂耶識有斷義。彼是種子,是故所有彼智所依,阿陁那識事`心事 阿犂耶事`根本識事,乃至世閒陰事,說彼阿犂耶識。此阿犂耶識轉明勝,如王大道。

혹 어떤 때에는 물질(色)과 마음(心)이 단절될지라도 아리야식에는 단절의 의미가 없으니, 그것이 종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의지처인 지소의(智所依)는 아타나식의 체성인 아나타식사(阿陁那識事)이고, 심의 체성인 심사(心事)이며, 아리야식의 체성인 아리야사(阿犂耶事)이고, 근본식의 체성인 근본식사(根本識事)이며, 세간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는 5음의 체성인 오음사(五陰事)이니, 그것은 아리야식을 말하는 것이다.

 아리야식의 흐름은 분명하게 뛰어나서 마치 대왕의 길과 같은 것이다.


餘者復作是言:心意識是一義,唯文異。然彼義不成,意及識中,義有見異故,是放逸心亦應有異義成。

또한 다른 부류들이 말하기를, 심의식(心意識)은 하나의 의미이고 다만 글자가 다를 뿐이라 하였다

그러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니, 의(意)와 식(識)에 의미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心)도 마땅히 다른 의미가 있음이 성립되는 것이다.


復有餘者言:如來阿含中所說,喜樂阿犂耶世閒,如是等句者,謂五陰是阿犂耶。

餘者復言:同貪等樂受是阿犂耶識。或復言:身見是阿犂耶。然彼於阿犂耶識, 迷癡故,或從聞及解釋故,

作如是說,依小乘經教分別安故。然彼者此分別安事不成,彼愚癡故。

如是分別已, 阿犂耶識轉勝,成如是差別說故。

다시 다른 부류는 여래께서 '아함경'에서 말씀하신  “세간은 아리야를 즐기고……” 등의 문구는 5음을 아리야라고 말한다고 하였으며,

다시 다른 부류는 탐욕 등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감수작용인 낙수(樂受)가 아리야라고 말하였으며,

 다시 말하기를 신견(身見)이 아리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리야식에 대해서 미혹하기 때문이고, 혹은 듣거나 해설한 것에 의거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니, 소승경전과 분별에 의지해서 안립한 때문이다. 

그들의 이러한 분별로 안립한 것은 성립되지 않으니, 그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이렇게 분별한 것이다.

이렇게별해서 아리야식을 말한다면 뛰어난 것이 되는 것이다.

ㅡ대승이 안립한 명의(名義) 가장 뛰어난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云何轉勝? 明如是彼五陰, 於惡道生處, 一向受苦時厭成 ,彼旣是一向厭故, 不成有厭樂事, 如是彼常求厭離。

同貪樂受者, 從四禪已上無, 復成厭離, 如是彼衆生中, 依止事不成 身見亦同,

此法中信無我者厭離成,是故此亦彼者,依止不成。然阿犂耶識至內身許事受。

어째서 뛰어나게 전승(轉勝)하는 것인가? 

그것이 5음이라면 살기 괴로운 악도(惡道)에 태어난 곳에서는 한결같이 괴로움을 받을  혐오하게 되며, 이미 한결같이 혐오하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일은 성립되지 않으며, 이와 같이 항상 싫어해서 떠나기를 구하는 것이다.

만약 아리야식이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감수작용인 동탐낙수(同貪樂受)라면, 제4선(禪) 이상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니,  역시 싫어해서 떠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생 가운데에서의 의지처는 성립되지 않으며, 신견 역시도 마찬가지이니,  

  가운데 무아를 믿는 자는 혐오해서 떠나게 되기 때문이며, 이것 역시도 그러해서  의지처가 성립되지 않으나,  

그러나 아리야식이 내면의 의지처가 된다는 것 인정되는 것이다.


一向苦道處,生者及苦陰幷求解脫者,阿犂耶識中,皆自身相,彼解脫不應有。從第四禪以上生者,雖有同貪樂厭離,阿犂耶識起我相愛等。如是此諸同法,信無我者,雖有厭離身見,而阿犂耶識作愛自身相。如是分別阿犂耶識已,轉勝明智。是阿犂耶說,傍名及異名,分別安事。

한결같이 괴로움을 받는 세계에 태어나는 자는 괴로움의 5음에서 해탈하기를 구하지만, 

아리야식에 대해서 자아로 보는 상이 있어서  해탈이 상응하지 않으며,

제4선 이상에 태어나는 자는 비록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동탐락(同貪樂)을 혐오하지만, 아리야식에 대해서 아상(我相)과 아애(我愛) 등을 일으키며,  

이와 같이 이 법에 대해서 무아를 믿는 자는 비록 신견을 혐오하지만 아리야식에 대해서 아애(我愛)를 짓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아리야식을 분별해서 뛰어난 밝은 지혜의 승명지(勝明智)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아리야식의 비슷한 이름과 다른 명칭들을 분별하여 안립한 것이다.


然復此相分別事云何得知?彼略有三種:一自相差別處`二因事差別相`三果差別相。

是中阿犂耶識自相義者,依一切染等法習故,彼有生因相,種子攝取義故。

是中因事差別義者,還彼染等諸法中,彼阿犂耶識,如是一切種子,一切時作因事現成。

是中果差別者,阿犂耶識中所有,彼諸染法,依無始以來習生事。

또한 이것의 상(相)을 분별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그것에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체의 자상(自相)을 차별하고,

둘째는 원인의 인상(因相)을 차별하며,

셋째는 결과의 과상(果相)을 차별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아리야식의 자체의 자상(自相)의 의미(義)란, 모든 잡염법의 훈습에 의지함으로써, 그것이 생겨나는 원인의 인상(因相)과 종자를 거두어 지니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원인의 인상(因相)을 차별하는 의미(義)란, 그 모든 잡염법에 대해서 그 아리야식이 일체 종자로서 언제나 원인이 되어 현전하게 하는 것을 말하며,

이 중에서 결과의 과상(果相) 차별이란, 아리야식 중에서 그 모든 잡염법이 아득한 옛적부터의 훈습(熏習)에 의지해서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ㅡ아리야식의 상(相)에 관한 장이다.

 

何者是習?而以習名說?此有何義? 依彼法同生滅故, 所有彼生相事,此是說。

所謂如華薰胡麻同生滅,胡麻故生彼香,因事故生。或多貪欲者有貪習,貪等同生滅,有彼心故,彼因相似生。

或復多聞者有多聞習,彼聞憶念已同生滅,心中彼說因相事生故。

是以有此習義故,說爲法器,亦名持法。如是阿耶識中亦如是。

무엇을 훈습이라 하는 것이며? 이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 법에 의지해서 함께 생멸함으로써 그것이 생겨나는 성품인 생상사(生相事)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른바 꽃이 호마(胡麻, 참깨)를 훈습하고 호마와 함께 생멸함으로써 그 향기의 원인의 성품으로 생겨남과 같은 것이다.

혹은 탐욕이 많은 자는 탐욕의 훈습이 있으며, 그것이 탐욕 등과 함께 생멸하며서 그 마음이 그 원인의 인상(因相)으로 생기하며,

혹은 많이 듣는 다문자(多聞者)는 많이 듣는 다문(多聞)의 훈습이 있고, 그렇게 들어서 지니는 생각과 함께 생멸하나니, 마음에서 그 원인의 인상(因相)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훈습의 의미 때문에, 마치 법의 그릇인 법기(法器)를 법을 지니는 것이라고 이름하듯이 아리야식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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