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2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2

 

▶論曰: 如是已說阿賴耶識安立異門. 安立此相, 云何可見? 安立此相, 略有三種:

一者安立自相` 二者安立因相` 三者安立果相.

▷논문; 이와 같이 아뢰야식을 안립하는 다른 견해들을 말하였다. 

이 아뢰야식의 상(相)을 안립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아뢰야식의 상(相)을 안립함에 간략히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체의 상(自相)을 안립하는 것이고, 

둘째는 원인의 인상(因相)을 안립하는 것이며, 

셋째는 결과의 과상(果相)을 안립하는 것이다.

 

此中安立阿賴耶識自相者, 謂依一切雜染品法所有熏習, 爲彼生因, 由能攝持種子相應.

此中安立阿賴耶識因相者, 謂卽如是一切種子阿賴耶識, 於一切時與彼雜染品類諸法, 現前爲因.

此中安立阿賴耶識果相者,謂卽依彼雜染品法, 無始時來,所有熏習,阿賴耶識相續而生.

 중에서 아뢰야식의 자체의 자상(自相)을 안립한다는 것이란, 

일체의 모든 잡염품의 법이 훈습에 의해서 그것이 생겨나는 생인(生因)이 되고, 능히 종자를 거두어 지니는, 섭지종자(攝持種子)하고,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중에서 아뢰야식의 원인의 인상(因相) 안립하는 것이란, 

이와 같이 일체 모든 것의 종자인 아뢰야식이 언제 항상  잡염 품류의법이 현전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 말한다. 

 중에서 아뢰야식의 결과의 과상(果相) 안립한다는 것이란,

 잡염품의 법이 아득한 무시(無始)로부터 있어 온 훈습에 의지해서 아뢰야식이 상속하여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ㅡ아뢰야식의 상에 관하여 말하는 제4 상장(4 相章).


▶釋曰:如是已說阿賴耶識安立異門. 非說異門卽了其相, 是故次說此識自性`因性`果性.
此中安立自相者,

謂緣一切雜染品法,所有熏習,能生於彼功能差別識爲自性. 爲欲顯示如是功能, 故說攝持種子相應.

▷해석한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을 안립하는 다른 견해들을 말하였으나, 다른 견해를 말한다고 해서   상(相)을 아는 것이 아니니, 이러한 까닭 다음으로   자체의 성품인 자성(自性)ㆍ원인의 성품인 인성(因性)ㆍ결과의 성품인 과성(果性)을 말한다.

‘이 중에서 자체의 자상(自相) 안립한다’는 것은, 모든 잡염품의 법이 모든 훈습을 조건의 연(緣)으로 하고, 그것을 일으키는 특수한 작용의 공능차별(功能差別)의 식을 자성으로 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작용의 공능(功能)을 나타내기 위해서 종자를 거두어 지니는 섭지종자(攝持種子)하고 상응하는 것이다. 

 

謂依一切雜染品法, 所有熏習,卽與彼法,爲能生因. 攝持種子者,功能差別也. 相應者,是修義.是名安立此識自相.

此中安立因相者, 謂卽次前所說品類,一切種子 阿賴耶識, 由彼雜染品類諸法熏習, 所成功能差別, 爲彼生因. 

是名安立此識因相.

일체의 모든 잡염품의 법에 의지해서 모든 훈습이 있으니, 그 법이 능히 생겨나게 하는 생인(生因)이 되는 것이다. 

‘거두어 지닌 종자의 섭지종자(攝持種子)’란 특수한 작용의 힘인 공능차별(功能差別)이며,  

‘상응(相應)한다’는 것은 수행의 의미로써 이것을   자체의 자상(自相)을 안립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 중에서 원인의 인상(因相)을 안립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품류의 모든 일체 종자이니,

아뢰야식은  잡염 품류의법의 훈습으로 인해서 공능차별(功能差別, 특수한 작용의 힘)이 이루어져서 생겨나는 생인(生因)으로 삼는 것이니,

이를 이 아뢰야식의 원인의 인상(因相) 안립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此中安立果相者, 謂卽依彼雜染品法, 無始熏習, 此識續生, 而能攝持無始熏習.是名安立此識果相.

‘이 중에서 결과의 과상(果相)을 안립한다’는 것은  잡염품의 법이 아득한 무시로부터의 훈습에 의지해서  식이 상속하여 생(生)기는 것으로, 능히 아득한 무시로부터의 훈습을 거두어 지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식의 결과의 과상(果相)을 안립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此中自相,是依一切雜染品法, 無始熏習, 爲彼生因, 攝持種子識爲自性, 果性因性之所建立.

此中因相, 是彼雜染品類諸法, 熏習所成, 功能差別, 爲彼生因,唯是因性之所建立.

此中果相,是依雜染品類諸法,無始熏習,阿賴耶識相續而生,唯是果性之所建立.是三差別.

 중에서 자체의상(自相)이란, 모든 잡염품의 법이 아득한 무시로부터의 훈습에 의해서 생겨나는 생인(生因)으로, 종자식(種子識)을 거두어 지니는 것을 자성(自性)으로 삼는 것이니, 자상(自相)은 결과의 과성(果性)과 원인의 인성(因性)을 갖추는 식의 자체이기 때문이다.

 중에서 원인의 인상(因相)  잡염 품류의 제법의 훈습으로 이루어진 공능차별(功能差別, 특수한 작용의 힘)로서 그것이 생겨나는  생인(生因) 되는 것이니, 오직 인성(因性)만이 건립하는 바이며, 

 중에서 결과의 과상(果相) 잡염 품류의법이 아득한 무시로부터의 훈습에 의지해서 아뢰야식이 상속하여 생겨난 것으로, 오직 결과의 과성(果性)만을 건립하는이다.

이러함이  가지의 차이인 것이다.

 

▶論曰:復次何等名爲熏習? 熏習能詮,何爲所詮. 謂依彼法俱生`俱滅, 此中有能生彼因性,是謂所詮.

如巨勝中,有花熏習,巨勝與花俱生`俱滅, 是諸巨勝, 帶能生彼香因而生 .

▷논문; 또한 무엇을 훈습이라 하는 것인가?  훈습은 능전(能詮)의 언어이다. 

무엇을 능전(能詮)이 나타내는 의미의 소전(所詮)의 의의(意義)인 것인?

그것은 법과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는 것이니, 그 가운데에 능히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의 성품이 있는 것을 소전이라 하는 것이다. 

거승(蕂, 깨와 참깨의 총칭인, 호마胡麻) 꽃의 훈습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거승과 꽃이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는 것이니,  모든 거승은  향기를 내는 원인을 생겨나는 것이다.

ㅡ훈습에 관하여 설명의 제5 훈습장(5 熏習章).

 

설명할 전(詮)은 나타내는 것의 의미로써, 능전(能詮) 어구(語句)ㆍ문장ㆍ교법 등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에 따라 나타나는 의의(意義)와 내용을 소전(所詮)이라 한다.

 

又如所立,貪等行者,貪等熏習,依彼貪等俱生`俱滅,此心帶彼生因而生.

或多聞者,多聞熏習,依聞作意俱生`俱滅, 此心帶彼記因而生,

由此熏習,能攝持故,名持法者. 阿賴耶識熏習道理,當知亦爾.

다시, 이와 같이 탐욕 등을 행하는 자의 탐욕 등의 훈습이 그 탐욕 등과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기 때문에, 그 마음은 그것이 생겨나는 원인의 생인(生因)을 띄고 생겨나는 것이다.

혹은 많이 듣는 자의 많이 듣는 훈습은 듣는 작의(作意)와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기 때문에, 그 마음은 그것이 기억하는 원인을 띄고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훈습이란, 능히 거두어 지녀서 섭지(攝持)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을 지니는 지법자(持法者)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으니, 아뢰야식의 훈습의 도리 또한 역시 그와 같은 것으로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작의(作意),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심왕과 심소(心所, 심리작용)를 대상에 주의시켜서 인도하는 작용으로, 촉(觸) 심소(心所) 다음에 일어나며, 이로 인해서 감수작용의 수(受)가 있게 되는 것이다.

 

▶釋曰:謂依彼法俱生`俱滅, 此中有能生彼因性, 是謂所詮者. 

謂卽依彼雜染諸法俱生` 俱滅阿賴耶識, 有能生彼諸法因性,是名熏習,

▷해석한다; ‘그것은 법과 함께 생겨나는 법구생(法俱生)이고, 함께 멸하는 구멸(俱滅)이기 때문에, 능히 이 가운데에서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의 인성(因性)이 있는 것이다.

'이를 소전(所詮)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곧 그 모든 잡염법과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함으로써 아뢰야식에 능히 그 모든 법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의 성품이 있는 것으로 이것을 훈습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論曰:復次阿賴耶識中,諸雜染品法種子,爲別異住`爲無別異?

非彼種子有別實物, 於此中住,亦非不異. 然阿賴耶識如是而生,有能生彼功能差別,名一切種子識.

▷또한, 아뢰야식 안의 모든 잡염품의 법종자는 별개의 다른 것으로서 머무는 것인가?

별개의 다른 것이 아닌 것인가?

그것의 종자는 별도의 사물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니, 그 안에서 머무는 것 역시 별개의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은 이렇게 해서 생겨나고, 능히 그것을 생기게 하는 특수한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있는 것이니, 이를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ㅡ아뢰야식과 종자의 불일불이성을 논한, 제6 불일불이장(6 不一不異章).

 

▶釋曰:阿賴耶識中,雜染法種子,爲異`爲不異?

▷해석한다; 아뢰야식 안의 잡염품의 종자는 별개의 것인, 이체(異體)인가?

별개의 것이 아닌 동체(同體)인 것인가?

ㅡ아뢰야식과 종자가 동체(同體)인가, 이체(異體)인가를 묻는 것이다.

 

若爾何失?若有異者, 彼諸種子應分分別, 阿賴耶識剎那滅義, 亦不應成, 有別異故.

만약 그렇다면 무슨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인가?

만약 별개의 것이라면 그 모든 종자는 마땅히 부분마다 개별적이어야 할 것으로, 아뢰야식의 찰나멸의 뜻이 성립되지 않아야 할 것이니, 개별적이고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ㅡ아뢰야식 여섯 가지 종자의 속성인 육의(六義) 가운데 하나로써, 종자는 아뢰야식 안에서 고정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생기하고 소멸하면서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由善`不善熏習力故,種子應成善`不善性,然許無記. 若不異者, 云何有多?此不應理. 是故二說俱有過失.

선과 불선의 훈습력으로 인하여 종자는 마땅히 선과 불선의 성품을 이루어야 하는 것, 즉 종자는 선과 불선의 성질을 띄고 있지만 아뢰야식은 무기(無記)라고 인정되는 것이니,

만약 별개의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많은 종자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종자는 무수히 많이 있지만 아뢰야식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가지의 설(說) 모두에 과실이 있는 것이다.

 

非彼種子有別實物, 於此中住, 亦非不異, 乃至名一切種子識者, 爲避如前所說過失, 故不定取異及不異.

‘그것의 종자는 별도의 사물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안에서 머무는 것 역시 별개의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니, 나아가 일체종자식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과실을 피하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별개나 별개가 아님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ㅡ아뢰야식과 종자는 별개라거나 별개가 아닌, 어느 한쪽으로 결정할  없는 것으로, 불일불이(不一不異) 관계이기 때문이다.

 

如是而生者,謂由如是品類而生. 有能生彼功能差別者, 謂有能生雜染品法功能差別相應道理.

由與生彼功能相應故, 名一切種子識. 於此義中,有現譬喩,如大麥子, 於生自芽,有功能故, 有種子性.

若時陳久,或火相應, 此大麥果功能損壞,爾時麥相雖住如本, 勢力壞故, 無種子性.

阿賴耶識,亦復如是, 有生雜染諸法功能,由此功能相應故,說名一切種子識.

‘이렇게 해서 생겨난다’는 것은 이와 같은 품류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을 말하며,

‘능히 그것을 생기게 하는 특수한 작용의 힘인 공능차별(功能差別)’이라는 것은 능히 잡염품의 법을 생기게 하는 공능차별(功能差別)과 상응하는 도리가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생기게 하는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과 상응하기 때문에 일체종자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대해서 현실적인 비유가 있으니, 마치 보리와 같은 것으로, 

스스로 싹을 내는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있기 때문에 종자의 속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랜 동안 묵었거나 혹은 불(火)과 상응한다면, 이 보리는 결과를 내는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을 상실하여서, 보리의 모습은 본래와 같지만 공능(功能, 작용의 힘)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종자의 속성이 없는 것이다.

아뢰야식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니, 모든 잡염법을 생기게 하는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있으며, 이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과 상응함으로써 일체종자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論曰:復次阿賴耶識與彼雜染諸法, 同時更互爲因 ,云何可見?

譬如明燈. 焰炷生燒同時更互.又如蘆束,互相依持, 同時不倒. 應觀此中, 更互爲因,道理亦爾.

如阿賴耶識爲雜染諸法因,雜染諸法,亦爲阿賴耶識因,唯就如是安立因緣,所餘因緣,不可得故.

▷논문; 또한 아뢰야식과 그 모든 잡염법은 동시에 서로 원인이 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비유하자면, 밝은 등불의 불꽃과 심지가 생겨나고 타는 것이 동시에 서로 그렇게 이어지는 것과 같으며,

또한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동시에 함께 쓰러지지 않게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서로 다시 원인이 되는 도리 또한 그러한 것이라고 마땅히 관찰하여야 하는 것이다.

아뢰야식이 모든 잡염법의 원인이 되는 것과 같이, 모든 잡염법 역시도 아뢰야식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니,

오직 이렇게 해야만 인연을 안립할 수 있고 나머지로는 인연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ㅡ아뢰야식과 잡염품이 서로 원인ㆍ결과의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제7 갱호위인과장(7 更互爲因果章).

 

▶釋曰:復次阿賴耶識與彼雜染諸法 同時更互爲因云何可見?者, 欲以喩顯,故爲此問.

譬如明燈焰,炷生燒同時更互者,謂一剎那燈炷爲依發生燈焰, 是則燈炷, 爲焰生因;

卽此剎那焰復能燒所依燈炷,是則燈焰,爲炷燒因.餘喩亦爾.

▷해석한다; ‘또한, 아뢰야식과 그 모든 잡염법은 동시에 서로 원인이 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는 비유로써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밝은 등불의 불꽃과 심지가 생겨나고 타는 것이 서로 동시에 그렇게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니,  한 찰나의 등불의 심지를 의지해서 등불의 불꽃이 생기게 되는 것이니, 곧 등불의 심지는 불꽃이 생기는 원인이 되고, 이 찰나의 불꽃은 다시 능히 의지처인 등불의 심지를 태우는 것이니, 곧 등불의 불꽃은 심지가 타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으로, 다른 비유 역시도 그러한 것이다.

 

如是顯示有俱有因,由因現在住,卽見果生故.

이와 같이 구유인(俱有因)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니, 원인은 현재에 머물러 결과가 생기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6인(六因)은 6인(六因) · 5과(五果) · 4연(四緣)의 인과설에서의 6인(六因)은 6가지 종류의 원인이다.

①능작인(能作因) ②구유인(俱有因) ③동류인(同類因) 
④상응인(相應因) ⑤변행인(遍行因) ⑥이숙인(異熟因)

구유인(俱有因)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함께하면서 서로 인과관계를 이루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從如阿賴耶識, 爲雜染諸法因,乃至所餘因緣,不可得故者, 此言顯示阿賴耶識與雜染法,更互爲因,卽是因緣.

‘아뢰야식이 모든 잡염법의 원인이 됨과 같다’로부터 나아가 ‘나머지로는 인연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아뢰야식과 잡염법이 다시 상호의 원인이 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곧 인연인 것이다.

ㅡ여기서 인연은 광의(廣義)의 인연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인과관계만을 가리킨 것으로, 즉 4연(緣) 중의 인연으로서, 직접적인 자기 결과를 원인으로 하고, 그 원인을 연(緣)으로 함을 말한다. 이에 능생(能生)의 종자와 능훈(能熏)의 현행(現行)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2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1

 

▶論曰: 復次聲聞乘中 ,亦以異門密意, 已說阿賴耶識. 如彼『增一阿笈摩』說: 世閒衆生, 愛阿賴耶` 樂阿賴耶`

欣阿賴耶` 憙阿賴耶. 爲斷如是阿賴耶故, 說正法時,恭敬攝耳` 住求解心`法隨法行.

▷논문; 또한 성문승 중에도 역시 다른 견해의 비밀스런 뜻의 이문밀의(異門密意)으로써 이미 아뢰야식을 말하였으니,

'증일아급마(增一阿笈摩, 증일아함경 增一阿含經)'에서 “세간의 중생은 아뢰야를 사랑하고, 아뢰야를 즐기며, 아뢰야를 기뻐하고, 아뢰야를 좋아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아뢰야를 단멸하기 위해서 정법(正法)을 말씀하실 때에는 공경히 듣고,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안주하여 법을 따르고 법을 행하는 것이다. 

 

*이문밀의(異門密意), 이문(異門)은 관찰점을 달리하는 견해이고,

밀의(密意)는 본래 취지를 은밀히 해서 표면에 나타내지 않음을 말한다.

 

如來出世, 如是甚奇希有正法, 出現世閒. 於聲聞乘『如來出現四德經』中, 由此異門密意, 已顯阿賴耶識.

於大衆部阿笈摩中, 亦以異門密意, 說此名根本識, 如樹依根.

化地部中,亦以異門密意,說此名窮生死薀,有處有時,見色心斷,非阿賴耶識中,彼種有斷.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시어, 이렇게 매우 기이하고 희유한 정법이 세간에 출현하게 되었으니,

성문승의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중의 '여래출현사덕경(如來出現四德經)'에서는 이러한 이문밀의(異門密意)에 의거해서 아뢰야식을 나타내었으며, 

대중부(大衆部)의 '아함경' 중에서도 역시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나무가 뿌리에 의지하는 수의근(樹依根) 같다고 하여서, 근본식(根本識)이라 이름하였으며,

화지부(化地部) 중에서도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궁생사온(窮生死蘊)이라 이름하였으니,  

어느 곳, 어느 때에는 물질과 마음이 단절됨을 보지만 아뢰야식 안의 종자는 단절됨이 없는 것이다.

ㅡ두 번째로 성문승에 이미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제8식을 설하신 것을 밝혔다. 

 

*나무가 뿌리에 의지하는, 수의근(樹依根), 근본식의 범어는 mūla-vijāna로서, 마치 나무가 뿌리(mūla)에 의존하는 것과 같이, 이 식이 모든 식의 근본이 된다는 뜻이다.

*궁생사온(窮生死蘊)은 궁생사, 즉 생사를 거듭하는 것을 마칠 때까지, 범부의 6도 윤회나 성현의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이르기까지, 윤회하는 주체라는 뜻이다.


▶釋曰:世閒衆生,愛阿賴耶者, 是摠摽句. 如其次第, 復以餘句, 約就現在`過去`未來三時別釋.

復有別義, 謂於現在愛阿賴耶, 於過去時樂阿賴耶. 由先世樂阿賴耶故, 復於今世,欣阿賴耶.

由樂由欣阿賴耶故, 於未來世, 憙阿賴耶.

▷해석한다; “세간의 중생은 아뢰야를 사랑한다”는 것은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구절이고, 

차제(次第)의 다시 다른 구절에서는, 현재ㆍ과거ㆍ미래의 삼시(三時)를 요약하여 별도로 해석하였으며, 

다시 다른 뜻으로는, 과거에 아뢰야를 즐겼으므로 현재에서 아뢰야를 사랑하는 것이며, 

선세(先世)에서 아뢰야를 즐김으로써 다시 금세(今世)에서 아뢰야를 기뻐하고,  

이렇게 아뢰야를 즐기고 기뻐함으로써 미래세(未來世)에서도 아뢰야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차제(次第)는 순서(順序) · 차례(次例) · 단계(段階) 또는 변화하는 순서를 뜻한다.

 

法隨法行者, 如教行故. 大衆部中, 名根本識,如樹依根者,謂根本識, 爲一切識,根本因故,

譬如樹根, 莖等摠因;若離其根,莖等無有. 阿賴耶識, 名根本識,當知亦爾.

 “법을 따르고 법을 행한다”는 것은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이며, 

“대중부에서는 나무가 뿌리에 의지함과 같이 근본식(根本識)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근본식이 모든 식의 근본 원인(因)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나무의 뿌리는 줄기 등의 전체적인 원인(因)으로서, 만약  뿌리를 떠난다면, 줄기 등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 같은 것이니,  

아뢰야식을 근본식이라 이름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化地部中,異門說爲窮生死薀, 爲釋此因說有處等.言有處者, 謂無色界, 無有諸色.

言有時者,謂無想等,諸定位中,無有諸心. 非阿賴耶識中,彼種有斷者,謂阿賴耶識中,色心熏習,由此爲因,色心還有.

화지부(化地部)의 다른 견해로서는 궁생사온(窮生死蘊)이라 하였으니,

 원인(因)을 해석하기 위해서 ‘어느 곳의 유처(有處)’ 등이라 말하였다. 

‘어느 곳의 유처(有處)’라고 말하는 것은 무색계에서는 모든 물질(色)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어느 때의 유시(有時)’라 말하는 것은 무상정(無想定) 등의 여러 선정의 지위에서는 일체의 마음(心) 작용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아뢰야식 안에서 그것의 종자는 단절이 없다”는 것은 아뢰야식에서의 물질(色)과 마음(心)의 훈습은 이것이 원인이 되기 때문에 물질과 마음이 다시 있게 되는 것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신 다음 해에 마하가섭의 주재로 왕사성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제1회 결집이 열렸다. 아난(阿難)이 경(經)을 독송하고 우바리(優婆離)가 율(律)을 송출(誦出)하여, 원시불교의 기본 경전과 계율이 확립되었다. 
제1회의 칠엽굴(七葉窟)의 결집에 참여하지 못한 여러 승려들은 부루나(富樓那)의 주재로 굴외결집(窟外結集)을 열어서 이의를 제기하였는데, 이와 같이 불교 교단의 밑바닥에서는 신구의 두 경향이 대립하였다. 

입멸하신 후 약 100년이 지나서 계율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주장하는 비구들이 있어 논쟁이 일어나서, 계율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의 근본이부根本二部)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근본 분열(根本分裂)을 계기로 인도 불교는 부파불교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근본분열 후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상좌부와 대중부 모두에서 부파적 분열이 거듭되어 지말분열(枝末分裂)하여서 18부로 나뉘어서, 근본이부와 지말분열에 의한 18부를 합하여 총 20부의 부파를 소승20부(小乘二十部)라 한다. 그 후 기원 전후에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일어나서 대승불교도들은 부파불교를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폄하하여 칭하였다.

소승20부로서는 상좌부 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 설산부(雪山部) · 독자부(犢子部) · 법상부(法上部) · 현주부(贅胄部) · 정량부(正量部) · 밀림산부(密林山部) · 화지부(化地部) · 법장부(法藏部) · 음광부(飮光部) · 경량부(輕量部)의 11부와

대중부 계통의 대중부(大衆部) · 일설부(一說部) · 설출세부(說出世部) · 계윤부(鷄胤部) · 다문부(多聞部) · 설가부(說假部) · 제다산부(制多山部) · 북산주부(北山住部)의 9부의 합계 20부를 든다.  

 

▶論曰:如是所知依, 說阿賴耶識爲性`阿陁那識爲性`心爲性` 阿賴耶爲性` 根本識爲性`

窮生死薀爲性等. 由此異門, 阿賴耶識, 成大王路.

▷논문; 이와 같이 알아야  바의 의지처인 소지의(所知依)는 아뢰야식을 성(性)으로 삼고, 

아타나식을 성(性)으로 삼으며, 마음을 성(性)으로 삼고, 아뢰야를 성(性)으로 삼고, 근본식을 성(性)으로 삼으며, 

궁생사온을 성(性)으로 삼는다는 등으로 말하여 지는 것이니,  

이러한 다른 견해들로 인하여 아뢰야식은 대왕(大王)의 길을 이루는 것이다.


▶釋曰:由此異門,阿賴耶識,成大王路者,是極廣義.

▷이러한 다른 견해들로 인하여 아뢰야식이 대왕의 길을 이룬다는 것은 매우 넓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ㅡ진제 역본에는 대왕의 길이라 표현하는 이유를 가지 의미로써 자세히 설하였다.

첫째는 대왕의 길은 곧고 갈림길이 없으며,

둘째는 넓고 평탄하여 성숙하고,

셋째는 광명에 장애가 없으니, 

본식(本識)도 그러해서, 곧고 갈림길이 없다는 것은 선정이 의심할 바가 없음에 비유하고,

넓고 평탄하여 성숙하다는 것은 대승ㆍ소승이 모두 이런 의미를 널리 펴는 것에 비유한 것이며,

광명에 장애가 없다는 것은 무량한 도리를 인용함으로써 식을 증명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論曰:復有一類,謂心意識義一文異. 是義不成, 意`識兩義差別可得,當知心義亦應有異.

▷논문; 또한 어떤 다른 부류에서는, 심의식(心意識)은 하나의 뜻으로, 글자가 다르다고 하였으나, 이러한 의미는 성립되지 않는다. 

의(意)와 식(識)의  차이는 쉽게   있으며, 심(心)의 뜻에 역시 차이가 있음을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復有一類, 謂薄伽梵所說, 衆生愛阿賴耶,乃至廣說, 此中五取薀說名阿賴耶. 有餘復謂貪俱樂受, 名阿賴耶.

有餘復謂薩迦耶見,名阿賴耶.此等諸師由教 及證愚阿賴耶,故作此執.

다시 어떤 부류에서는, 박가범(薄伽梵,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생은 아뢰야를 사랑하고…등의 자세히 설명하신 것"에서는 5취온(五取薀)을 아뢰야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며,

다른 논사는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낙수(樂受, 감수작용)를 아뢰야라 이름한다고 말하였고, 

또 다른 논사는 살가야견(薩迦耶見, 유신견)을 아뢰야라 이름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들 여러 논사들은 교의와 증명에 의거해서 아뢰야에 어리석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5취온(五取薀)5온(五蘊, pañca-skandha)은 생멸 · 변화하는 모든 것, 즉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구성하고 있는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을 말한다. 이들을 각각 색온(色蘊: 육체, 물질) · 수온(受蘊: 지각, 느낌) · 상온(想蘊: 표상, 생각) · 행온(行蘊: 욕구, 의지) · 식온(識蘊: 마음, 의식)이라고도 한다.  
5온설(五蘊說)을 사유하는 것은 개인 존재인 나(我)는 이 5가지 집합적 요소로 분해되고, "나(我)"라고 할 때에는 결국 이 5가지 집합적 요소들 중의 하나 혹은 다수를 가리켜 하는 것이며, 이들 5가지 집합적 요소들 밖에 나(我)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의 이치를 깨우쳐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5온은 유루와 무루에 모두 통하고, 유루에 통한 5온을 5취온(五取蘊) 또는 5수음(五受陰)이라 하고,

무루에 통한 5온을 5무루온(五無漏蘊)이라고 한다. 즉 무루에 통한 5온은 유위 무루이며 이것은 곧 4성제 중의 도제(道諦), 즉 '열반(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如是安立阿賴耶名, 隨聲聞乘安立道理,亦不相應. 若不愚者,取阿賴耶識安立 彼說阿賴耶名, 如是安立, 則爲最勝.

云何最勝? 若五取薀,名阿賴耶,生惡趣中,一向苦處, 最可厭逆, 衆生一向, 不起愛樂, 於中執藏不應道理, 以彼常求速捨離故.

이와 같이 아뢰야라는 명칭을 안립함에 있어서 성문승에서 안립하는 도리가 있으나, 역시 상응하지 않으며,

만약 어리석지 않은 자라면 아뢰야식을 취하여  말씀을 안립하나니, 아뢰야라는 명칭을 이와 같이 안립하는 것을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으로 삼는 것이다.

어찌하여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인 것인가?

만약 5취온(五取薀)을 아뢰야라고 이름하면, 살기 괴로운 악취(惡趣) 중에서는 괴로운 악취(惡趣) 태어나는 것을 한결같이 가장 혐오해야 할 것이나, 그곳의 중생은 사랑하고 즐거운 감정을 한결같이 일으키지 않으니, 그 악취 집착한다는 도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그들은 항상 속히 떠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ㅡ대승이 안립한 명의(名義) 가장 뛰어난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若貪俱樂受,名阿賴耶, 第四靜慮以上無有, 具彼有情,常有厭逆,於中執藏 ,亦不應理.

若薩迦耶見, 名阿賴耶, 於此正法中, 信解無我者,恒有厭逆, 於中執藏,亦不應理. 阿賴耶識內我性攝,

만약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낙수(樂受, 감수작용)를 아뢰야라고 이름한다면 제 4 정려(四靜慮, 사선) 이상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니, 그 사정려를 갖춘 유정은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싫어하여서 따르지 않으니, 그러한 경지에서 집착한다는  역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만약 살가야견(薩迦耶見, 유신견)을 아뢰야라고 이름한다면,  정법에서 무아를 믿고 이해하는 자는 항상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싫어하여서 따르지 않으니, 그러한 가운데에서 집착한다는  역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아뢰야식은 내면의 자아의 성품인 아성(我性)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사정려(四靜慮), 4선(四禪)은 수행을 통해 심(尋) · 사(伺) · 희(喜) · 낙(樂) · 심일경성(心一境性)을 개발함으로써 욕계(欲界)의 번뇌, 즉, 욕계의 혼면(惛眠) · 의(疑) · 진에(瞋恚) · 도회(掉悔) · 탐욕(貪欲)의 5개(五蓋)를 일시적으로 또는 항상 조복(단멸이 아님)한 상태에서 들어갈 수 있는 색계의 네 가지 세계 또는 마음 상태를 뜻한다. 즉, 우리가 욕계와 함께하는 즉 상응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이 세계에 있듯이, 이 경지 즉 마음 상태들과 함께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4선에 든 것이다. 일시적으로라도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비록 일시적이더라도 욕계에서 색계로 들어갈 수 있다. 즉, 초선에 들어갈 수 있다.
초선 一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一 욕계를 떠남으로서 생기는 희열과 행복을 느끼는 경지
제2선 一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一 선정으로부터 생기는 희열과 행복을 느끼는 경지
제3선 一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一 희열을 떠나 마음이 안정되어 뛰어난 행복만을 느끼는 경지
제4선 一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一 행복마저도 떠나 평온(捨)하여 마음(念)이 청정하고 평등한 경지, 사무량심(捨無量心)의 경지 ㅡ위키

 

雖生惡趣,一向苦處,求離苦薀,然彼恒於阿賴耶識, 我愛隨縛,未嘗求離. 雖生第四靜慮以上, 於貪俱樂,

恒有厭逆,然彼恒於阿賴耶識,我愛隨縛. 雖於此正法, 信解無我者, 厭逆我見, 然於藏識, 我愛隨縛.

是故安立阿賴耶識,名阿賴耶,成就最勝.

비록, 한결같이 괴로운 악취(惡趣) 태어나서 괴로움의온인 고온(苦蘊)을 여의고자 하지만, 그는 항상 아뢰야식에 대한 아애(我愛)를 따라서 계박되어 있어서 여의지 않으니, 제 4 정려(四靜慮, 사선) 이상에서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싫어하여서 거스르고자 하지만, 항상 아뢰야식에 대한 아애의 계박이 따르는 것이다. 

 정법에 대해서 무아를 믿고 이해하는 자는 아견을 혐오하긴 하지만, 장식(藏識)에 대한 아애를 따라서 계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아뢰야라고 이름하여 안립하는 것이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인 것이다.


▶釋曰:不愚者者,謂諸菩薩, 彼所宣說,阿賴耶識, 理成立故. 惡趣中者,謂餓鬼`傍生及那落迦,諸惡趣中.

一向苦處者,謂一向受非愛業果處. 於彼有時,樂受生者,是等流果,生彼所受異熟果者,唯是其苦.

▷해석한다; ‘어리석지 않은 불우자(不愚者)’란 모든 보살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립된 아뢰야식의 이치를 널리 설하 때문이다. 

‘괴로움의 세계인 악취(惡趣)’는 아귀ㆍ방생(傍生, 축생)ㆍ나락가(那落迦, 지옥) 모든 괴로움의 세계인 악취(惡趣)이다. 

‘한결같이 괴로운 곳의 일향고처(一向苦處)’란 한결같이 애착하지 못할 과(業果)를 받는 곳으로, 때로는 그곳에서도 즐거움의 감수작용인 낙수(樂受)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것은 등류과의 생겨남이며, 그것이 받는 이숙과(異熟果) 오직 괴로움뿐인 것이다.

 

방(傍)은 누운 것, 생(生)은 생물이란 뜻으로서 몸을 가로 눕히고 다니는 축생을 말한다.

나락가(那落迦)는 범어 naraka의 음역으로서 지옥이며, 줄여서 나락(奈落)이라고 한다.

등류과(等流果)는 원인과 결과가 같은 부류인 것을 말한다. 지옥에서 때로는 즐거움을 초감하는 경우는 이전에 그럴 만한 같은 부류의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고, 지옥의 과보인 이숙과(異熟果) 자체는 순전히 괴로움뿐이다.

등류습기(等流習氣), 선 · 악 · 무기의 3성의 기준에서 습기(종자)의 성질과 같은 성질의 과보, 즉 등류과(等流果)를 일으키는 습기(종자)이다. 
8식과의 관련하여서는, 등류습기는 전7식의 유루와 무루의 선 · 악 · 무기의 업 즉 모든 성질의 업이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아뢰야식 내에서 생성되고 증장되는 종자로, 이 종자가 친인연(親因緣)이 되어서 해당 종자의 성질과 같은 선 · 악 · 무기의 과보 즉 선 · 악 · 무기의 현행법(現行法)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전7식에 의해 선한 업이 제8아뢰야식에 훈습되어 아뢰야식 내부에 선한 종자가 생성 및 증장된 경우, 그 선한 종자로부터 일어나는 결과는 선한 언행과 사상이 되어서 몸 · 입 · 뜻으로 표현되는 현행법(現行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숙과(異熟果), 다르게 익는, 이숙(異熟)은 선(善)이 쌓여서 그 결과 무기의 낙(樂)으로 성숙(成熟) 또는 변환되고, 불선 즉 악(惡)이 쌓여서 그 결과 무기의 고(苦)로 성숙 또는 변환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이숙(異熟)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과보가 이숙과(異熟果)이며, 전생의 선악업의 총체적인 결과물로서 현생에서 태어날 때 받은 몸과 마음이다.

 

第四靜慮以上無有者,謂卽第四靜慮及上諸地. 具彼有情者, 謂生所得.

阿賴耶識, 內我性攝者,謂諸衆生攝取此識爲內我性. 求離苦薀者, 求離苦受.

然於藏識我愛隨縛者, 謂於阿賴耶識,執我起愛隨縛不離.

“제4 정려(四靜慮, 사선)이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색계의 제4선천(禪天)과  이상의 모든 지위인 무색계의 4천(天)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을 갖춘 유정’이란 생을 받게  것을 말하며, 

‘아뢰야식은 내면의 자아의 성품인 아성(我性)에 포섭된다’는 것은 모든 중생은  식을 거두어 취하여서 내면의 자아의 성품으로 삼는 것을 말하며,

‘괴로움의 5온인 고온(苦薀)을 여읠 것을 구한다’는 것은 괴로움의 감수작용인 고수(苦受)를 여읠 것을 구한다는 것이며,

‘장식(藏識)에 대한 아애를 따라 계박되어 있는 것'이란, 아뢰야식을 자아로 집착하여 애착을 일으키고 따라서 계박되어서 떠나지 못하는 것 말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1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① 4 

 

又訓釋詞故.所以者何?能思量故,說名爲意.

此訓釋詞何所依止? 非彼六識與無閒識作所依止, 應正道理,已謝滅故.

또한 가르치고자 해석하는 말의 훈석사(訓釋詞) 때문이니, 무슨 까닭에서 인가?

능히 사량(思量)하기 때문에 의(意)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 훈석사(訓釋詞)라는 말은 무엇의 의지처인가?

육식(六識)이 전념(前念)의 6식(識)인 무간식(無間識)의 의지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당연한 바른 도리이어야 하는 것이니, 전찰나의 6식은 이미  이미 지나가서 멸한 까닭에 체(體)가 없으므로 의지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ㅡ의(意)라는 명칭을 해석하여 염오의를 성립하였다.

 

又二定別故.所以者何? 若定說有染污意者, 無想定中,卽有此意,餘定中無,故有差別.

若異此者,於二定中, 第六意識, 竝不行故, 應無差別. 又無想中生, 應無我執故.

所以者何?若彼位中,無染污意,彼一期生,應無我執.若爾,不應聖所訶厭.旣被訶厭,是故定知彼有我執.

또한 무상정과 멸진정의 이정(二定)이 다른 때문이니, 무슨 까닭에서 인가?

만약 선정에 염오의가 있다고 말한다면, 무상정에는 이 의(意)가 있는 것이고 멸진정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이것과 다르다고 한다면, 두 선정 중에서 제6의식(第六意識)은 함께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며,

또한 무상천의 생에도 아집이 당연히 없어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만약 그 지위에서 염오의가 없다면 그 한 기간의 생에도 응당 아집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그러하다면 성인이 혐오하는 바가 되지 않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혐오하는 바이기 때문에, 그 곳에는 반드시 아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ㅡ 무상정ㆍ멸진정의 차이에 의해서 염오의를 성립하였다.

 

의(意)마나스(manas)의 번역어로 말나(末那)라고도 음역하며, 사량(思量)을 뜻한다.

마나스(manas)의 어근인 만(√man)은 '생각하다'의 뜻으로 이에 따라 '사량(思量)'이라 번역한 것이다.

사량(思量)이라는 한자어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생각하고 헤아린다'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전찰나의 의근(意根), 즉 바로 직전까지 집기(集起)했던 행위의 총체, 즉 바로 직전까지의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 즉 바로 직전까지 축적된 모든 경험을 토대로 현재의 인식 대상 또는 마음작용 대상에 대해 이모저모로 생각하고 헤아리는 능력 또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능력과 그 작용을 통칭하여 사량(思量)이라고 한다.


又我執隨故.所以者何? 施等位中,亦決定有我執隨故. 此我執隨若離無明, 不應道理. 非此無明離所依止,

此所依止離染污意,無別體故, 故定應許有染污意. 若不許者,有上過失,重顯彼故, 說四伽他,

若不共無明等, 乃至廣說. 此中不共無明者, 謂於一切善`不善`無記煩惱隨煩惱位中,染污意相應,俱生無明;

彼若無者, 成大過失. 常於苦等,障㝵智生, 是其業用, 此卽顯無業用過失.

또한 아집(我執)이 따르기 때문이니, 무슨 까닭에서 인가? 보시 등을 행하는 단계에서도 반드시 아집이 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무명을 떠난다면 이 아집이 따른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 무명은 의지처인 소의지(所依止)를 떠나지 않으며, 이 의지처는 염오의를 떠나서는 별도의 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염오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인정하지 않는다면 위와 같은 과실이 있는 것이니, 거듭해서 그것을 나타내고자, 네 개의 가타(伽他, 게송)을 말하였으니, ‘만약 불공무명 등'으로 자세히 설하였다. 

이 가운데 불공무명(不共無明)은 모든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ㆍ번뇌(煩惱)ㆍ수번뇌(隨煩惱) 중에서 염오의와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무명이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큰 과실을 이루는 것이니, 항상 괴로움 등에 대하여 지혜가 생기는 것을 장애하는 이것이 그 기능인 업용(業用)이나, 곧 그 업용(業用)이 없다는 과실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五同法者, 第六意識, 與五識身, 有相似法, 彼有五根, 阿賴耶識, 爲俱有依. 此亦如是,

有染污意, 阿賴耶識 ,爲俱有依. 此五同法, 離染污意決定無有,此則顯無自性過失.

‘다섯 가지 같은 법의 오동법(五同法 , 오식五識)’이란, 제6의식(第六意識)에 5식과 비슷한 법이 있고, 그것에 5근이 있으며 아뢰야식을 구유의로 삼는다. 

이 제6의식(第六意識)의 오식도 역시 그와 같이 염오의가 있고, 아뢰야식을 구유의로 삼는다.

오동법(五同法 , 오식五識)은 염오의를 떠나서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곧 무자성(無自性)이라는 과실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訓詞若無成過失者,取所緣相,而思量故. 無閒滅時,能取境故,說名爲意. 過去已滅, 無所思量,

云何當有能思量性? 訓詞無故,成大過失.

‘가르치고자 해석하는 말의 훈석사(訓釋詞)'에 만약 과실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은, 

인식대상의 소연상(所緣相) 취하여 사량하기 때문이고, 전찰나의 식에 간격없이 멸하는 무간멸(無閒滅) 시(時)에도 능히 대상을 취하기 때문에 의(意)라 이름하며,

과거에 이미 멸하여 사량하는 바가 없다면 어떻게 장차 능히 사량하는 사량성(思量性) 있을 수 있겠는가? 

훈석사(訓釋詞)에도 없기 때문에  과실을 이루는 것이니, 의(意, manas)의 뜻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염오의가 없다면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이다. 

 

二定別者,滅盡定中, 無染污意,無想定中,有染污意. 此若無者, 如是二定差別應無, 成大過失.

又染污意,若無有者, 無想身中,應無我執, 非異生者,於相續中, 暫離我執, 應正道理.

如是諸過,離染污意,皆定應得,故應定許有染污意.

‘두 가지 선정의 다름의 이정별(二定別)’이란 멸진정 중에는 염오의가 없고, 무상정에는 염오의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다름이 없다면  선정에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고, 그러하다면  과실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또한 만약 염오의가 없다면 무상천의 생에 마땅히 아집이 없어야 할 것이나,

이생(異生, 중생)의 상속에서는 잠시도 아집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당연한 바른 도리인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과실 모두는 반드시 염오의를 떠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결정코 염오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爲顯此義故,復說言無有二等. 二者,卽是不共無明`五相似法.

三相違者, 謂訓釋詞` 二定差別` 無想生中, 我執恒隨,離染污意,如是三事皆成相違.

이러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두 가지가 없다는 무유이(無有二)’ 등으로 말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불공무명과 오동법(五同法 , 오식五識)인 것이다.

 ‘세 가지가 위배된다는 삼상위(三相違)란’는 것은, 훈석사(訓釋詞), 두 가지 선정의 다름의 이정멸(二定別), 무상천의 생에도 아집이 항상 따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염오의를 떠나서는 이와 같은  가지에 다 위배되는 것이다.

 

無此一切處,我執不應有者,離染污意, 於一切種善等位中,我執恒隨,不應得有, 故應定許有染污意.

餘文易了,不復須釋.

‘이곳에 없다면 당연히 일체처에도 아집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란, 염오의를 떠나서는 모든 종류의 선(善) 등의 지위에서 아집이 항상 따를 수 없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염오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문장은 알기 쉬우니, 다시 해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論曰:心體第三, 若離阿賴耶識, 無別可得. 是故成就阿賴耶識, 以爲心體, 由此爲種子,意及識轉.

▷논문; 세 번째로, 심(心)의 자체인 심체(心體)는 아뢰야식을 떠나서는 별도로 얻을  없는 것이므로 아뢰야식을 성취함으로써 심체(心體) 삼는 것이니, 이 심체(心體)를 종자로 삼음으로써 의(意)와 식(識)의 전변 생기하는 것이다.

ㅡ식(識)을 번째로, () 번째로 말하였고, 지금은 번째의 ()이.

 

▶釋曰: 心體第三若離阿賴耶識, 無別有性, 由此爲因, 意及轉識,皆得生起.

見取轉識, 當知亦卽取第二意. 所以者何?彼將滅時,得意名故.

▷해석한다; 세 번째로, 심체(心體) 아뢰야식을 떠나서는 별도의 체성이 없으니, 이 심체를 인(因)으로 삼음으로써 의(意)와 전식(轉識) 모두가 생기할  있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견취(見取)의 전식은 역시  번째의 의(意)를 취하나니,  왜냐하면 그 전식이 장차 멸할 때, 의(意)를 얻기 때문이다.

 

전식(轉識),8 아리야식을 제외한 일곱 가지 식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생기식(生起識)순식(順識), 이라고 한다.

과보를 수용하는 수과보(受果報, 전식)의 식(識)이니, 즉 수용식ㆍ수식(受識)이라 하며, 외부 대상을 수용하는 식이 전식(轉識)이다.

견취(見取)는 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의 5견(五見), 즉  5가지 염오견(染汚見) 중의 하나로, 그릇된 견해를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즉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등을 일으킨 후 이를 고집하여 진실하고 뛰어난 견해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견취견(見取見)이라고도 한다. 

 

▶論曰:何因緣故,亦說名心?由種種法,熏習種子,所積集故.

▷논문; 무슨 인연으로 역시 심(心)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갖가지 법에 의해서 훈습된 종자가 적집되는 이기 때문이다.


▶釋曰:復欲釋名,故作此問. 由種種法者,由各別品類法.

熏習種子者, 功能差別因. 所積集故者, 是極積聚, 一合相義.

▷해석한다; 다시 명칭을 해석하기 위해서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니,

‘갖가지 법에 의해서라는 유종종법(由種種法)’이라는 것은, 각각 다른 품류의 법으로 인한다는 것으로,

훈습된 종자는 특수한 작용의 차이인, 공능차별(功能差別)의 원인인 것이다. 

‘적집하는 곳이기 때문의 소적집고(所積集故)’란, 이것이 많이 쌓이고 모여서 하나의 화합상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공능차별(功能差別)의 범어는 śakti-viśeṣa 또는 sāmarthya-viśeṣa이다.

śakti, sāmarthya는 ‘작용을 가진 힘ㆍ세력의 뜻인 공능(功能)’이고, viśeṣa는 ‘특별하다는 뜻의 차별(差別)’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종자는 공능차별(功能差別), 즉 특수한 작용의 힘, 특수한 정신적인 에너지의 의미이다.


▶論曰:復次何故,聲聞乘中, 不說此心名阿賴耶識`名阿陁那識? 由此深細境所攝故.

所以者何? 由諸聲聞不於一切境智處轉, 是故於彼, 雖離此說, 然智得成解脫成就, 故不爲說.

若諸菩薩, 定於一切境智處轉, 是故爲說. 若離此智, 不易證得一切智智.

▷또한 어찌하여 성문승에서는  심(心)을 아뢰야식으로, 아타나식으로 이름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이것은 세간의 총명한 지혜로도 알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미세한 경계인 심세경(深細境)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문은 모든 대상에 대한 지혜인, 일체경지(一切境智)가 전전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그들에 대해서는 이것을 말하지 않아도 지혜를 이룸으로써 해탈을 성취하기 때문인 것이다. 

보살이라면 반드시 모든 대상에 대한 일체경지(一切境智)가 전전하는 까닭에 그들을 위해서는 설하는 것이니,  만약  지혜를 떠난다면,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증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ㅡ성문승에도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8식을 말하는 것을 밝힌다.  


▶釋曰:由此深細境所攝者, 謂此境界卽深細故, 名深細境.此卽深細境界中攝,難了知故.

非諸聲聞爲求一切境界智故正勤修行, 唯正希求自義利故, 彼由麤淺苦等正智, 便能永斷煩惱障故.

若諸菩薩, 爲利自他, 求斷煩惱及所知障, 正勤修行, 是故爲說.

▷해석한다; ‘이것은 매우 미세한 경계인 심세경(深細境)에 포섭되기 때문’이란, 이 경계가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심세경(深細境)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매우 미세한 경계에 포섭되어 알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니, 성문은 모든 경계를 아는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바르고 부지런히 정근(正勤)하여 수행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는 까닭에, 그들은 거칠고(麤), 얕은(淺), 괴로움(苦) 등의 바른  정지(正智), 즉 고제(苦諦) 등의 4성제(聖諦)를 거칠고 얕게 관찰하여 얻는 지혜로 인하여 능히 번뇌장(煩惱障)을 영원히 단멸하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라면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하기 위해서,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단멸하고자 바르게 부지런히 정근(正勤) 수행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는 설하는 것이다.


攝大乘論釋卷第一 終 섭대승론석 제 1권을 마침.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1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① 3

 

▶論曰:復次云何得知有染污意? 謂此若無, 不共無明, 則不得有, 成過失故.

又五同法亦不得有,成過失故.所以者何? 以五識身, 必有眼等俱有依故. 又訓釋詞亦不得有, 成過失故.

又無想定,與滅盡定,差別無有, 成過失故. 謂無想定,染意所顯, 非滅盡定;

若不爾者, 此二種,定應無差別. 又無想天,一期生中,應無染污, 成過失故, 於中若無我執`我慢.

又一切時,我執現行, 現可得故, 謂善`不善`無記心中;

若不爾者,唯不善心,彼相應故, 有我`我所煩惱現行, 非善`無記.是故若立俱有現行,非相應現行,無此過失.此中頌曰:

▷논문에서; 또한 어떻게 염오의(染汚意)가 있음을   있는 것인가? 

만약 이 염오의(染汚意)가 없다면  불공무명(不共無明)이 있을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며,  

또한 다섯 가지의 5동법(五同法, 오식), 즉 오식(五識)도 역시 있을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5식신(五識身)에는 반드시 안근 등의 구유의(俱有依, 증상연의)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가르치고자 해석하는 말의 훈석사(訓釋詞) 역시도 있을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며, 

또한 무상정(無想定, 상想이 없는 선정)과 멸진정(滅盡定, 심상心想이 멸한 적정의 선정)의 차이도 있을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니, 무상정은 염오의가 나타난 바이고, 멸진정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가지 선정에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며,

또한 무상천(無想天)의  기간, 즉 그 일기(一期)의 생(生)에서 염오가 없어야 할 것이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만약 아집ㆍ아만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느 때나 아집의 현행함이 역시 있을  있기 때문이니,

이른바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의 마음에서 인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직 불선의 마음만이 그것과 상응할 것이기 때문이나, 아집은 불선의 마음만이 아니라, 선(善)과 무기(無記)의 마음에도 있기 때문이다.

나(我)ㆍ나의 것(我所)이라는 번뇌가 현행하면 선(善)도 무기(無記)도 아니니므로, 따라서 만약 다른 미혹과 상응하지 않고 의(意)와 함께 하는 아집인, 구유현행(俱有現行)을 안립하고,

불선과 상응해서 일어나는 아집인, 상응현행(相應現行)이 아니라면 이러한 과실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게송으로 말하나니, 

 

*2무명(二無明),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무명(相應無明) 

불공무명(不共無明)은 독두무명(獨頭無明)ㆍ독행무명(獨行無明)이라고도 하며, 탐(貪)ㆍ진(瞋)ㆍ치(癡)와 상응하지 않고 단독으로 생기하여 진지(眞智)를 장애하는 근본적인 무명이다.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癡)의 무명으로서, 제7식에만 상응하고 다른 식에는 수반되지 않는다.

상응무명(相應無明)은 공무명(共無明)이라고도 하며, 6식(識)에 상응하는 무명으로서, 탐(貪) · 진(瞋) · 만(慢) · 의(疑) · 견(見, 惡見)의 5가지 근본번뇌와 상응하면서 생기(生起)하는 무명이다.

*구유의(俱有依),증상연의(增上緣依)라고도 한다. 두 가지 이상이 서로 의지하여 동일한 결과를 낼 때 동시 의존의 인과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심왕(心王)이나 심소(心所)와 동시에 있으면서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5근(根)ㆍ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을 말한다.

*증상연(增上緣)은 인연(因緣) · 등무간연(等無間緣) · 소연연(所緣緣) · 증상연(增上緣)의 4연(四緣)의 하나이다. 

증상연은 다른 유위법(有爲法)을 생기하는데 힘을 주는 적극적 원인의 유력증상연(有力增上緣)과 다른 유위법이 생기는 것을 장애하지 않는 소극적 원인의 무력증상연(無力增上緣)을 말한다. 따라서, 유위와 무위의 일체법은 그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일체의 유위법에 대해 증상연이 되는 것이다. 
증상연은 설일체유부가 주장한 능작인(能作因) · 구유인(俱有因) · 동류인(同類因) · 상응인(相應因) · 변행인(遍行因) · 이숙인(異熟因)의 6인설(六因說)에서 그 적용 범위가 가장 넓은 능작인에 해당한다.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그 자신을 제외한 유위와 무위의 다른 모든 존재(法)를 능작인으로 삼는다.

*2무심정(二無心定)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

무상정(無想定),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는 원인이 되는 선정으로, 인도의 외도가 닦는 선정이다. 그들은 상념을 생사의 근본이라 생각하고 6식의 현행을 소멸하고자 하여서, 색계의 제4선(禪)에서 닦아서, 이것을 얻으면 참열반을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

색계의 4선천 중 제4선천에 속한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날 인(因)이 되는 선정으로, 6식(六識)의 심(心) · 심소(心所)가 모두 없어져 6식(六識)의 활동, 즉 심상(心想)이 완전히 정지되게 하는 선정이다. 상(想)의 심소를 위주로 하여 멸하기 때문에 '상(想)이 없는 선정'이라는 뜻의 무상정(無想定)이라고 이름한다.

*멸진정(滅盡定),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도 하며, 진제(眞諦) 역본에는 멸심정(滅心定)으로 되어 있다. 무상정은 외도 수행자도 도달할 수 있지만 멸진정은 불교에서 말하는 뛰어난 선정이다. 무상정에서는 아직 제7 염오의(染汚意)가 작용하고 멸진정에서는 소멸된다. 멸진정은 성자가 모든 심상(心想)을 없애고 적정하기를 원하여 닦는 선정이며, 6식의 심(心)ㆍ심소(心所)와 제7식의 유루의 일분(一分)을 현행하지 못하게 하는 분위(分位)이므로, 무색계의 제4 유정천(有頂天)에 해당된다. 소승에서 불환과(不還果)와 아라한과의 성자가 닦는 멸진정은 유루정(有漏定)으로서 제7식의 아집작용까지 소멸된다. 대승의 보살이 이것을 닦는 것은 무루정(無漏定)으로서, 제7식의 법집작용까지 소멸된다.

멸진정은 성자가 모든 심상(心想)을 다 없애고 적정(寂靜)으로 닦는 선정으로, 부처와 구해탈(俱解脫)의 아라한이 그 지닌 바 역량을 바탕으로 득(得)하는 선정으로 그 경지가 거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적정(寂靜)에 비견된다.

*현행(現行, abhisaṃskara)은 어떤 법(존재)이 인연의 화합으로 나타나서 현재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일체법의 종자(種子)가 함장되어 있고 인연이 갖추어지면 그 인연을 따라 해당 종자가 전변하여 현재의 법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현행은 실체의 형태로 미래에 존재하건 혹은 종자의 형태로 아뢰야식 안에 존재하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법이 현재 시점에서 나타나는 것, 즉 생(生) · 기(起) · 발(發) · 생겨남 · 일어남 · 나타남 · 일으킴을 말한다. 끌어들여 일으킨다 또는 끌어들여 현재화시킨다는 뜻에서 인기(引起)라고도 한다. 현재 시점으로 일어난다 또는 현재 시점으로 일으킨다는 뜻에서 현기(現起)라고도 한다.


“若不共無明, 及與五同法, 訓詞二定別, 無皆成過失.

만약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癡)의 불공무명과 오동법(五同法, 오식)과

가르치고자 해석하는 말의 훈석사(訓釋詞)와

 선정(멸진정과 무상정)에 차이가 없다면 모두 과실을 이루네.


無想生應無, 我執轉成過, 我執恒隨逐, 一切種無有.

무상천의 생(生)에 아집의 유전이 없다면 과실을 이루어야 하리니, 

아집이 항상 수축(隨逐)함이 모든 종류에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라네.


離染意無有, 二三成相違, 無此一切處, 我執不應有.

염오의(離染意)를 떠나서는 불공무명과 오동법(五同法, 오식)의  가지가 없을 것이니,

가르치고자 해석하는 말의 훈석사(訓釋詞)와  두 선정의 차이와

무상천의 생에 아집이 항상 따른다는, 세 가지에 위배되는 것이라.

이러함이 없다면, 마땅히 일체처아집이 없어야 하리라.


眞義心當生, 常能爲障㝵, 俱行一切分, 謂不共無明.”

참된 의미의 진의심(眞義心)이 장차 일어나는 것에 항상 장애가 되는 것이니,

모든 부분에 함께 작용함을 불공무명(不共無明)이라 이름한다네.

 

此意染污故,有覆無記性, 與四煩惱,常共相應.如色` 無色二纏煩惱, 是其有覆無記性攝,

色無色纏爲奢摩他所攝藏故;此意一切時,微細隨逐故.

 의(意)는 염오이기 때문에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며, 사번뇌(四煩惱)와 항상 함께 상응하며,

색계ㆍ무색계의 이전(二纏)의 번뇌와 같이, 이것은  유부무기성에 포섭되며,

색계ㆍ무색계의 전(纏, 수번뇌)은 사마타가 섭장(攝藏)하는 바이니, 

 의(意)는 어느 때나 항상 미세하게 따르기 때문이다.

 

*유부무기(有覆無記)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성품이다. 제7식이 선ㆍ불선이 아니므로 무기이면서 아집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부무기성이 되는 것이다.

유부무기(有覆無記)는 '가림(覆) 또는 막음(障)이 있는 무기(無記)'로,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이지만 번뇌와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무기를 말한다. 
유부무기는 이숙과(異熟果, 현생에서 타고나는 몸과 마음)를 낳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도(聖道, 출세도, 8정도, 도제, 또는 무루지에 의한 정도)를 가리며,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이런 뜻에서 유부무기를 부정(不淨)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유부무기는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맑고 명료하게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수행에 방해가 되는 무기이다.
예를 들어, 욕계의 번뇌들 중에서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의 2가지 염오견과 상2계(上二界)의 모든 번뇌들, 즉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번뇌들이 유부무기(有覆無記)에 속한다. 상2계(上二界)의 모든 번뇌들은 번뇌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유부(有覆)이고 선정의 힘에 의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무기(無記)이다.

*전(纏)은 범어 paryavasthāna의 번역어로서 번뇌, 특히 수번뇌(隨煩惱)의 다른 이름이다. 마음을 얽어매어 선(善)을 행할 수 없게 방해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釋曰:此文復以餘道理, 成立染污意. 何等名爲成立道理? 謂此若無, 不共無明卽不得有.

不共無明其相云何? 謂未生對治, 能障眞智愚. 此於五識理不相應, 是處無容能爲障故.

若處有能治,此處有所治,亦不得在.

▷해석한다; 이 문장은 또한 다른 도리로써 염오의(染污意)를 성립하는 것이니, 무엇을 성립(成立)의 도리(道理)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만약 이것이 없으면  불공무명이 있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불공무명의 상(相)은 어떠한 것인가? 

아직 다스림을 생겨나게 하지 않은, 즉 다스리는 수도의 대치도(對治道)에 의지해서 참다운 지혜의 진지(眞智)가 생기지 않은, 미생대치(未生對治)일 때, 능히 참다운 지혜의 진지(眞智)를 장애하는 어리석음이다. 

이 불공무명은 5식에 대해서는 이치적으로 상응하지 않으니, 안근 등 5관(官)에 의지하는 5식 자체에는 장애될 만한 뜻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처소로서 능히 다스림이 있다면 이곳에는 다스려짐이 있기 때문이니, 즉 능히 대치(對治) 지혜가 생겨나는 곳에서는 반드시 다스려지는 미혹의 장애가 있으나, 5식에는 능히 다스릴 수 있는 능치(能治)가 없기 때문에 다스려지는 소치(所治)도 역시 없는 것이다.

 

染污意識, 此非有者,餘惑現行,名不成故. 若立此煩惱在染污意識, 卽應畢竟成染污性, 云何施等心得成善?

與此煩惱,恒相應故. 若說有意識與善法俱轉, 此卽與彼煩惱相應, 是染意識引生能治,不應道理.

또한, 염오의식(染污意識)에도 있을  없으니,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차비유(此非有)’라는 것은 무명이 염오의식에 없는 까닭을 밝힌 것으로, 다른 미혹이 현행하여 불공(不共)의 명칭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니,  이미 염오의식이라면 다른 미혹이 현행하여 상응함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만약 이곳에 불공무명이 있다면 그것은 불공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약  번뇌가 염오의식에 존재한다고 안립한다면, 궁극적으로 염오의 성품인, 염오성(染污性)이 되는 것이니, 어떻게 보시 등의 마음이 선(善)이   있겠는가?  번뇌와 항상 상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의식(意識)과 선법(善法)이 함께 유전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번뇌와 상응하는 것이 될 것이니, 이 염오의식이 능히 다스릴 수 있는 능치(能治)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若說染污意俱轉有善心, 卽此善心引生能治,此生彼滅,卽無過失.

又五同法故.所以者何? 譬如眼等五識,必有眼等五根,爲俱有依,如是意識亦應決定,有俱有依.

만약 염오의(染污意)와 함께 유전하는 선심(善心)이 있다고 말한다면,  선심 능히 다스릴 수 있는 능치(能治)를 이끌어내어서 이 선심이 생겨나고, 그 염오(染汚)가 멸할 것이므로  과실이 없는 것이다.

또한 오동법(五同法, 오식) 때문이니, 무슨 까닭인가? 

비유하자면 안식 등의 오식(五識)은 반드시 안근 등의 오근(五根)이 있어서 구유의(俱有依)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이 의식(意識) 역시도 반드시 구유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ㅡ5식과 비교해서 염오의(染汚意) 성립하였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1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① 2

 

如是廣慧! 由似瀑流, 阿陁那識,爲依止`爲建立故, 若於爾時, 有一眼識生緣現前,卽於此時,一眼識轉.若於爾時,乃至有五識身生緣現前,卽於此時,五識身轉.

광혜여! 이와 같이 폭포의 흐름과 비슷한 아타나식(阿陁那識)을 의지하여서 건립한 까닭에, 

만약 그 때에 안식이 일어나는 조건이 현전한다면,  안식이 일어나고, 

만약 오식 (五識)이 일어나는 조건이 현전한다면  5식이 일어나느니라.


廣慧!如是菩薩, 雖由法住智爲依止`爲建立故, 於心意識 秘密善巧.

然諸如來, 不齊於此施設彼 爲於心意識一切秘密善巧菩薩.

광혜여! 이와 같이 보살이 비록 여래의 교법에 안주하여 법문을 안립하고 시설하는 지혜인, 법주지(法住智)에 의지하여서  건립하고, 심(心)ㆍ의(意)ㆍ식(識)의 비밀한 밀의  통달한다 할지라도, 

모든 여래께서는 이것에 한하여 시설한 그를 심의식의 비밀한 뜻에  통달한 보살이라고 하지는 않느니라.

 

廣慧!若諸菩薩, 於內各別如實不見阿陁那 不見阿陁那識` 不見阿賴耶不見阿賴耶識`

不見積集不見心` 不見眼色及眼識`不見耳聲及耳識` 不見鼻香及鼻識` 不見舌味及舌識`

不見身觸及身識`不見意法及意識,是名勝義善巧菩薩. 如來施設彼,爲勝義善巧菩薩.

광혜여! 만약 모든 보살이 내면적으로 각각 다르게 여실한 그대로의 아타나(用)를 보지 않고,아타나식(體)을 보지 않으며, 

아뢰야를 보지 않고 아뢰야식을 보지 않으며, 적집을 보지 않고 심(心)을 보지 않으며, 

안근(根)과 색경(境)  안식(識)을 보지 않고, 이근(根)과 성경(境)  이식(識)을 보지 않으며, 

비근과 향경  비식을 보지 않고, 설근과 미경  설식을 보지 않으며, 신근과 촉경  신식을 보지 않고, 

의근과 법경  의식을 보지 않아야 비로소 승의(勝義)에  통달한 보살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여래께서 시설하셔서 그를 승의에  통달한 보살이라 하느니라.


廣慧!齊此名爲於心`意`識一切秘密善巧菩薩, 如來齊此,施設彼,爲於心`意`識一切秘密善巧菩薩.

광혜여! 이러함에 한하여 심ㆍ의ㆍ식의 모든 비밀한 뜻에  통달한 보살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여래께서는 이것에 한하여 시설하셔서 그를 심ㆍ의ㆍ식의 모든 비밀한 뜻에  통달한 보살이라고 하느니라.’”

 

此伽他中,重顯彼義. 阿陁那識者,所釋異名. 甚深細者,難了知故.

一切種子如瀑流者, 次第轉故,一切種子, 剎那展轉,如瀑水流, 相續轉故.

恐彼分別執爲我者, 一行相轉故,分別執可得.

가타(伽他, 게송)에서 거듭  뜻을 나타내고 있으니,

‘아타나식(阿陁那識)’은 해석되는 것의 다른 명칭이며,

‘매우 심오하고 미세한, 심심세(甚深細)’란, 분명히 알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며,

‘일체종자식은 폭포의 흐름과 같다’는 것은 차례로 전전하기 때문에 모든 종자가 찰나에 전전함은 폭포수의 흐름과 같이 상속해서 전전하기 때문이며,

‘그것을 분별하고 집착해서 자아로 삼을까 두렵기 때문’이란 하나의 행상으로서 전전하기 때문에 분별해서 집착할  있기 때문이다.


▶論曰:何緣,此識亦復說名阿陁那識? 執受一切有色根故` 一切自體取所依故.

所以者何?有色諸根,由此執受,無有失壞,盡壽隨轉. 又於相續, 正結生時, 取彼生故,執受自體.

是故, 此識亦復說名阿陁那識.

▷논문에서; 무슨 까닭에  식을 또한 아타나식(阿陁那識)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모든 감각기관의 유색근(有色根)을 집수(執受)하기 때문이요, 일체의 자체(自體)가 취하여 의지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모든 감각기관의 유색근(有色根)이 이러한 집수로 인해서 파괴되지 않고, 수명을 다할 때까지 따라서 전전하는 것인가?

또한 상속해서 생을 맺을 때, 다시  생을 취하기 때문에 자체를 집수하는 것이므로, 이 식을 아타나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아타나(阿陀那)는 범어 ādāna의 음역으로서, 유지ㆍ보존의 뜻이며, 제8식이 신체와 종자를 유지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제8식의 본질적 성질인 자상(自相)과 체성(體性)에는 여러 분위(分位), 즉 여러 성격 또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제 8식을 칭하는 명칭이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가 있다.
1.아뢰야식(阿賴耶識)   2.무몰식(無沒識)
3.장식(藏識) 또는 택식(宅識)   4.이숙식(異熟識) 또는 비파가식(毘播迦識)
5.아타나식(阿陀那識) 또는 집지식(執持識)    6.심(心)
7.소지의(所知依)    8.종자식(種子識) · 일체종식(一切種識) 또는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9.무구식(無垢識) 또는 아마라식(阿摩羅識)    10.본식(本識)
11.초식(初識) 또는 초찰나식(初剎那識)    12.초능변식(初能變識)
13.제1식(第一識)    14.식주(識主)


▶釋曰:執受一切有色諸根故者,所以者何? 有色諸根, 由此執受, 盡壽隨轉, 用此爲釋.

謂由眼等有色諸根, 阿賴耶識所攝受故, 非如死身靑瘀等位.

▷해석한다; '모든 감각기관의 유색근(有色根)을 집수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무슨 까닭에 모든 감각기관의 유색근(有色根)은  집수로 인해서 수명을 다할 때까지 따라서 전전하는가’에 대한 해석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안근 등의 여러 감각기관인 유색제근(有色諸根)은 아뢰야식의 섭수하는 바이기 때문에 시체의 푸르딩딩한 모습의 청어(靑瘀) 등과는 다른 것이다.

 

若至死時, 此捨離故, 彼卽便有靑瘀等位. 是故定知此執受故,乃至壽限, 彼不失壞.

만약 죽음에 이르게 된 때에는 이 아뢰야식을 여의기 때문에 그 감각기관들이 곧 시체의 푸르딩딩한 청어(靑瘀) 등의 단계가 있게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하나니,  집수(執受) 때문에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것이 파괴되지는 않는 것이다.

 

一切自體取所依故者, 又於相續, 正結生時, 取彼生故, 執受自體, 用此爲釋.

謂由此識, 是相續識故, 於相續正結生時, 能攝受生一期自體,亦爲此識之所攝受,

由阿賴耶識中,一期自體熏習住故. 彼體起故, 說名彼生. 受彼生故,名取彼生.

由能取故,執受自體, 以是義故, 阿賴耶識,亦復說名阿陁那識.

‘모든 것의 자체가 취하는 의지처(所依)이기 때문’이란, ‘또한 상속해서 바로 생을 받을 때,  생을 취하기 때문에 자체를 집수한다’에 대한 해석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식은 상속식(相續識)이기 때문에, 상속해서 바로 생을 맺을  능히 그 생의 한평생의 자체를 섭수하는 것 역시도  이 식이 섭수하는 것이니,  

아뢰야식에서 한평생의 자체는 훈습하여 머물기 때문이며, 그것의 자체가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생(生)’이라 말하는 것이며, ‘그 생(生)’을 수용하기 때문에 ‘‘그 생(生)’을 취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능히 취함으로 인해서 자체를 집수하는 것이다. 

이런 때문에 아뢰야식을 또한 아타나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청어(靑瘀), 시체의 부정한 양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에 시체가 부어서 마치 곡식 담긴 자루처럼 팅팅한 모습의 창상(脹相),

시체의 가죽과 살이 문드러지고 오장이 썩는 모습의 괴상(壞相),

시체의 온몸이 피고름으로 더러워진 모습의 혈도상([血塗相),

시체에서 고름과 벌레가 흘러나오고 살이 흩어져서 여러 군데에 낭자한 모습의 농란상(濃爛相),

시체가 바람에 쏘이고 비에 씻겨서 피고름이 엉겨 푸르퉁퉁한 모습의 청어상(靑瘀相),

시체가 새ㆍ짐승ㆍ구더기에 파먹히는 모습의 영상(霙相),

가죽과 살이 없어지고 뼈만 붙어 있으면서 머리와 다리가 뒤섞인 모습의 산상(散相),

백골이 낭자한 모습의 골상(骨相),

불에 타서 그슬리어 악취가 나고 재가 되는 모습의 소상(燒相)이 있다.

5욕락을 즐기는 미혹을 없애기 위한 관법인 부정관(不淨觀) 가운데 9상관(想觀)은 이러한 시체의 부정한 모습들을 관찰한다.

 

ㅡ심(心)ㆍ의(意)ㆍ식(識)명칭을 해석한다.
▶論曰:此亦名心,如世尊說:心`意`識三.

此中意有二種: 第一與作等無閒緣 所依止性, 無閒滅識能與意識作生依止;

第二染污意,與四煩惱恒共相應: 一者薩迦耶見`二者我慢`三者我愛`四者無明,

此卽是識雜染所依. 識復由彼第一依生, 第二雜染,了別境義故.等無閒義故`思量義故,意成二種.

▷논문에서; 이것을 또한 심(心)이라 이름하나니, 세존께서 심(心)ㆍ의(意)ㆍ식(識)의  가지를 말씀하신 바와 같다.

여기서 의(意, manas)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의 의지처의 성품으로, 무간멸(無間滅)의 식은 능히 의식(意識)이 생기하는 의지처가 되며,  

둘째는 염오의(染汚意)로서 사번뇌(四煩惱) 항상 함께 상응하나니,  

그 첫째는 살가야견(薩迦耶見, 아견)이고, 둘째는 아만(我慢)이며, 셋째는 아애(我愛)이고, 넷째는 무명(無明, 아치)이다. 

이것은  식(識)의 잡염의 의지처인 잡염소의(雜染所依)이며, 식은   번째 의지처로 인하여 생겨난다. 

 번째의 것은 잡염이니, 대상을 요별하는이기 때문이고, 등무간의이기 때문이며, 사량의이기 때문에 의(意)에  종류를 이루는 것이다.

 

의(意), 제7 말나식을 가리키며, 이때 의(意)의 범어는 manas(思量)이다. 그런데 제6의식을 mano-vijāna라고 해서 똑같이 manas가 사용된다. 따라서 제6 의식과 구분하기 위해서 단지 의라고 부르거나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음역어를 사용한다.

의(意), 즉 제7식에 무간멸의(無間滅意)와 염오의(染汚意)의 두 가지 의미가 있어서,

무간멸의(無間滅意)는 제7식이 제6식의 의지처인 의근(意根)임을 나타내고 낸다.

염오의(染汚意)는 제7식으로 인하여 무명의 아치(我癡)ㆍ아견 등의 근본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4연(四緣)은 인연(因緣)ㆍ소연연(所緣緣)ㆍ등무간연(等無間緣)ㆍ증상연(增上緣) 으로,

등무간연(等無間緣)은 차제연(次第緣)이라고도 하며, 전념(前念)의 식이 멸하는 것이 후념(後念)의 식이 생겨나는 연(緣)이 되는 것으로, 연속하는 마음의 활동에서 뒤의 생각은 앞의 생각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 자신도 원인이 돼 다음 생각을 일으키는데, 이 경우에 원인이 되는 것을 등무간연, 결과는 증상과(增上果)에 해당한다. 

4번뇌(四煩惱) 또는 4혹(四惑)은  아치(我痴, 무명)가 근본원인이 되어서 아견(我見, 아집)→아만(我慢)→아애(我愛, 아탐)의 순서로 생겨난다.


▶釋曰:此亦名心者,阿賴耶識, 卽是心體. 意識二義差別可得, 當知心義亦有差別, 顯示此故.

此中與作等無閒緣因性, 謂無閒滅識與意識爲因,是第一意;

▷해석한다; ‘이것을 또한 심(心)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아뢰야식이 심(心)의 체(體)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의(意)와 식(識), 두 가지 의미의 차이를 얻을  있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심(心)의 의미에도 역시 차이가 있으니,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세 가지 차별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등무간연(차제연)의 원인의 성품인 인성(因性)이 된다”는 것은 

ㅡ논()에는 ‘의지처인 소의지(所依止) 성품’으로 되어 있는데, ()에서는  의미를 따라서 인성(因性)이라 하였.

 

무간멸(無間滅)의 식이 의식의 원인이 되는 것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번째 의(意)인 무간멸의(無間滅意)이다. 

 

由四煩惱,常所染污, 是第二意. 此中薩迦耶見者, 謂執我性;由此勢力,便起我慢;恃我`我所而自高擧,

於實無我, 起有我貪,名爲我愛.如是三種無明爲因. 言無明者, 卽是無智

아치(我痴, 무명), 아견(我見, 아집), 아만(我慢), 아애(我愛, 아탐)의 사번뇌(四煩惱)로 인하여 항상 염오되나니, 이것이  번째의 염오의(染汚意)이다.

여기에서 ‘살가야견(薩迦耶見)’은 자아에 집착하는 성품으로, 이 세력으로 인하여 문득 아만(我慢)을 일으켜서 나(我)와 나의 소유(我所)라고 믿고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며,

실제로는 무아인 것에 대해서 자아가 있다는 욕심의 아탐(我貪)을 일으킴을 아애(我愛)라 이름 하는 것으로,

아견, 아만, 아애의 이러한  가지는 무명(無明)이 원인이 되며, 무명이란  무지(無智)인 것이다

 

살가야견(薩迦耶見, 아견 신견)은 범어 satkāya-dṛṣṭi의 음역으로서, 유신견(有身見)이라 번역하며 신견(身見)ㆍ아견(我見)이라고도 한다. 자아(Ātman)가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으로,

제7 염오말나식이 제8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제6 의식이 5취온(取蘊)을 대상으로 해서 자아로 착각하여 나(我)와 나의 소유(我所)로 삼아서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기본으로 해서 아만(我慢)과 아애(我愛)를 일으키는 것이다.

아만(我慢), 살가야견에 의해 설정된 자아를 의지처인 소의(所依)로 삼아서 자기는 존재한다고 교만하게 뽐내는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에 아만은 5취온을 나와 나의 소유로 집착하여 교만한 것을 의미하였으나,

유식학파에서는 말나식(제 7식)이 아뢰야식(제 8식)을 자아로 인식함으로써 자아를 더욱 대상화하고, 대상화된 자기를 근거로 교만하게 뽐내는 것을 근본적인 아만이라 하였다.

아애(我愛), 자아에 대한 애착은 일상생활에서 갖가지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이다.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는 근본원인이 된다.

무명(無明, 아치), 근본적인 무지는 자기 본질의 이치인 무아(無我)라는 것을 모르는 아치(我癡)를 말한다.

무명은 초기불교 이래 4성제ㆍ연기의 도리에 무지한 것으로 설명되었으며, 유가유식학파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입장에 있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야말로 근본적인 무명이며, 그것이 항상 말나식과 함께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무명이란 곧 무지(無智)인 것이다' 에서의 무명은 구체적으로 무아의 이치를 모르는 아치(我癡),  제7식이 제8식을 대상으로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의 자아로 착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견, 아만, 아애의 세 가지 번뇌가  무명을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가지 근본번뇌가 생겨나는 순서는 무명→아견→아만→아애이다.

 

復由彼第一依,生第二雜染者, 謂無閒滅識,說名爲意, 與將生識容受處所故 作生依.

第二染污意, 爲雜染所依, 以於善心中,亦執有我故`

‘식(識)은   번째인, 등무간연(等無間緣)의 의지처로 인하여 생겨나고, 

 번째의 잡염(雜染)’이란 무간멸(無閒滅)의 식을 말하며, 의(意)라 이름하는 것이다. 

장차 생겨나는 식의 수용의 처소(處所)인, 즉 전찰나의 식이 멸하는 곳에 다음의 식이 생겨나기 때문에, 생겨남의 의지처인 작생의(作生依), 즉 다음 찰나의 식이 생겨나는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번째의 염오의(染污意)는 잡염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니, 착한 마음인, 선심(善心)에도 역시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ㅡ선심(善心) 번뇌가 있는, 유루(有漏) 동안에는 아집을 근본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염오의(染汚意) 의지처인 소의(所依)로 하기 때문이다.

 

了別境義故. 等無閒義故,思量義故,意成二種者, 謂於此中,由取境義, 說名爲識, 由與處義, 名第一意,

由執我等,成雜染義,名第二意.

‘대상을 요별하는이기 때문이고, 등무간의이기 때문이며, 사량의이기 때문에 의(意)에  종류를 이룬다’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중에서 대상을 취하는 취경(取境)의 뜻으 인하여 식(識)이라 이름하고, 

처소를 주는 여처(與處)의 뜻으로 인하여  번째의 무간멸의(無間滅意) 이름하며, 

자아 등에 집착해서 잡염을 이루는 의미로 인하여  번째의 염오의(染汚意)라 이름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1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① 1

 

▶論曰:此中最初,且說所知依,卽阿賴耶識. 世尊何處說阿賴耶識名阿賴耶識?謂薄伽梵於『阿毘達磨大乘經』伽他中說:

▷논문에서; 이 가운데 우선 처음으로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인 소지의(所知依)는 곧 아뢰야식이라.

세존께서는 어디에서 아뢰야식을 아뢰야식이라 이름하여 설하셨던가?

박가범(薄伽梵, Bhagavat)께서는 '아비달마대승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으니, 

ㅡ제8식의 여러 명칭에 관하여 말한, 제3중명장(3 衆名章).

 

박가범(薄伽梵, Bhagavat), 바가바(婆伽婆)ㆍ바가범(婆伽梵)이라고도 하며, 세존ㆍ중우(衆祐)로 번역된다.

박가범에는 유덕(有德)ㆍ자재ㆍ치성(熾盛)ㆍ단엄(端嚴)ㆍ명칭ㆍ길상ㆍ존귀 등 여러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의역(意譯)하지 않는 것으로, 5종 불번(不飜)의 하나이다.
의역하여 유덕(有德) · 능파(能破) · 세존(世尊) · 존귀(尊貴) · 중우(衆祐)라고도 하며, 

또한, 자재(自在) · 치성(熾盛) · 단엄(端嚴) · 명칭(名稱) · 길상(名稱) · 존귀(尊貴)의 6 가지의 육의(六義)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정의(正義) · 이욕(離欲) · 해탈(解脫) 등의 뜻도 있다.

 

“無始時來界, 一切法等依, 由此有諸趣, 及涅槃證得.”

무시(無始)로부터 계(界, 원인)가 있어서, 일체법이 평등히 의지하는 등의(等依, 소지의)이니, 

이로 인하여 모든 윤회세계의 제취(諸趣)가 존재하며, 열반을 증득하느니라.

 

계(界)는 범어 dhātu의 번역어로서 층(層)ㆍ근기(根基)ㆍ요소ㆍ원인(因)ㆍ세계ㆍ경계 등의 의미이다. 일체법의 종자를 계(界)라고 할 때에는 원인ㆍ요소의 의미기 된다.


▶釋曰:此中能證阿賴耶識,其體定是阿賴耶識. 阿笈摩者,謂薄伽梵卽初所說,『阿毘達磨大乘經』中, 說如是頌.

界者, 謂因,是一切法等所依止. 現見世閒,於金鑛等,說界名故, 由此是因故, 一切法等所依止 因體卽是所依止義.

▷해석한다; 여기서 아뢰야식은 그 체(體)가 결정적으로 아뢰야식임을 증명하였다.

'아급마(阿笈摩, 아함)에서는, 아비달마대승경에서 박가범께서 이와 같은 게송을 말씀하셨다고 하였으니, 

계(界)는 원인(因)을 말하고, 이것은 일체법이 평등히 의지하는 등의(等依)이며, 

현재의 세간에서는 금광(金鑛) 등에 대해서 계(界)의 명칭을 말하기 때문이고,

이것이 원인(因)이기 때문에 일체법이 평등히 의지하는 바의 인(因)이니, 

원인의 인체(因體)는 곧 의지처를 뜻하는 것이다.

 

아급마(阿笈摩, 아함), 범어 Āgama의 음역이다. 일반적으로 아함(阿含)이라 번역하며,

여기서 광의(廣義)로는 성교(聖敎)의 의미, 즉, 교증(敎證)으로서 열거하였다.

이숙과(果熟果)의 업인(業因)은 선이나 악인데 결과가 무기(無記)임을 말한다.

 

由此有者,由一切法等所依有. 諸趣者,於生死中, 所有諸趣.趣者,謂異熟果. 由此果故, 或是頑愚瘖瘂種類`或有勢力能了善說惡說法義`或能證得上勝證得.又爲煩惱所依止性, 由此故有猛利煩惱`長時煩惱.

‘이로 인하여 존재한다는 유차유(由此有)’란, 일체법의 평등한 의지처로 인하여 존재(有)한다는 것이며, 

‘제취(諸趣, 윤회세계)’는 생사의 모든 윤회세계이다.

윤회세계는 이숙과(果熟果)이니, 이 결과로 인하여 혹은 완고하고 어리석으며 벙어리와 같은 부류가 있고,

혹은 세력이 있어서 능히 좋은 말이나 나쁜 말의 법의(法義)를 알고,

혹은 능히 뛰어나게 증득하여 점차 뛰어난 상승(上勝)의 지위를 증득하고,

혹은 번뇌가 의지하는 성품이 되기도 하나니, 

이로 인하여 맹렬한 번뇌, 오랜 동안의 번뇌가 있게 되는 것이다.

 

如是四種異熟差別,所依止故, 無有堪能. 應知翻此名有堪能.

非唯諸趣由此而有, 亦由此故證得涅槃,要由有雜染,方得涅槃故.

이와 같은 네 종류의 이숙의 차이가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에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는 무감능(無堪能)인 것이나,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와 반대되는 것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는 유감능(有堪能)이라 한다. 

오직 제취(諸趣, 윤회세계)만이 이로 인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역시 이로 인하여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니, 모름지기 잡염(雜染)이 있음으로 인하여 비로소 열반을 증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論曰:卽於此中,復說頌言:

▷논문에서; 여기에서 다시 게송을 말하나니, 


“由攝藏諸法, 一切種子識, 故名阿賴耶, 勝者我開示.”

제법을 거두어 저장하는 것은 일체종자식에 의한 것이니, 

그러므로 아뢰야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라, 승자(勝者)들에게 내가 열어 보이는 것이다.


▶釋曰:已引阿笈摩,證阿賴耶識是所知依體, 復引阿笈摩,證阿賴耶識,名阿賴耶識.

於此頌中,由第二句,釋第一句.勝者,卽是諸菩薩衆.

▷해석한다; 이미 아급마(阿笈摩, 아함)을 인용하여 아뢰야식이 소지의(所知依)의 체(體)라는 것을 증명하였으니,

다시 아급마(阿笈摩, 아함)을 인용하여 아뢰야식을 아뢰야식이라 이름한 것을 증명하였다.

이 게송의 두 번째 문구에 의해서 첫 번째 문구를 해석하게 되는 것이니,

‘승자(勝者)’란 곧 모든 보살대중을 말하는 것이다.


▶論曰:如是且引阿笈摩證,復何緣故, 此識說名阿賴耶識? 一切有生雜染品法,於此攝藏,爲果性故;

又卽此識,於彼攝藏,爲因性故,是故說名阿賴耶識. 或諸有情,攝藏此識,爲自我故,是故說名阿賴耶識.

▷논문에서; 이와 같이 아급마(阿笈摩, 아함)을 인용하여 증명하였으나, 

다시 무슨 까닭으로 이 식을 아뢰야식이라 이름한 것인가?

모든 유정의 잡염품법(雜染品法)이 여기에 저장되어 결과의 성품인 과성(果性)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식은 그것에 저장되어 원인의 성품인 인성(因性)이 되어서 소장(所藏)하기 때문에 아뢰야식이라 이름하며,

혹 모든 유정은 이 식이 저장한 집장(執藏)으로 자아를 삼기 때문에 아뢰야식이라 이름한 것이다.

 

*제8식의 자상(自相)ㆍ과상(果相)ㆍ인상(因相)의 3상(相)에서 자상(自相)인 장식(藏識)에서 장(藏)의 세 가지 의미인 능장(能藏)ㆍ소장(所藏)ㆍ집장(執藏) 가운데에서 능장(能藏)을 해석한다.

*집장(執藏), 제7식이 제8식을 소의(所依)로 하면서 동시에 소연(所緣, 대상)으로 하는데, 여기서 제8식을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을 띤 자아로 착각하여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釋曰: 今訓此識阿賴耶名.一切有生者,諸有生類,皆名有生. 雜染品法者,是遮淸淨義,於中轉故,名爲攝藏.

或諸有情,攝藏此識,爲自我者,是執取義.

▷설명한다; 이제는 이 식의 아뢰야(阿賴耶)라는 명칭을 해석할 것이니, 

‘모든 유생(有生, 유정)’은 모든 윤회세계에 사는 생명이 있는 생류(生類) 모두를 유정이라 이름하는 것이고,

‘잡염품법(雜染品法)’은 청정을 막는다는 뜻이니, 그 안에서 전전하기 때문에 저장하는 섭장(攝藏)이라 하는 것으로,

‘혹 모든 유정이 이 저장된 섭장(攝藏)의 식을 자아로 삼는 것이 집취(執取)의 의미인 것이다.


▶論曰:復次此識,亦名阿陁那識. 此中阿笈摩者,如『解深密經』說:

▷논문에서; 또한 이 식을 역시 아타나식(阿陁那識)이라 이름하나니,

이 가운데 아급마(阿笈摩, 아함)에서 말한 것은 '해심밀경'에서 말씀한 바와 같으니, 

 

“阿陁那識甚深細, 一切種子如瀑流, 我於凡愚不開演, 恐彼分別執爲我

아타나식(阿陁那識)은 매우 심오하고 미세한 심심세(甚深細)한 것이나, 

일체종자식은 폭류(瀑流)와 같으니, 

나는 일반 범부(凡)와 아공법유설(我空法有說)을 주장하는 어리석은 무리(愚, 소승)에게는 열어 보이지 않는 것이니

그들이 분별하고 집착해서 자아로 삼을까 두려운 까닭이니라.


▶釋曰:復引『解深密經』.卽此阿笈摩中, 佛告廣慧菩薩摩訶薩曰: 廣慧當知, 於六趣生死,彼彼有情, 墮彼彼有情衆中, 或在卵生`或在胎生`或在濕生`或在化生,身分生起. 於中最初一切種子心識成熟,展轉和合增長廣大,依二執受.

一者有色諸根及所依執受` 二者相名分別言說戲論習氣執受. 有色界中,具二執受,無色界中,不具二種.

▷해석한다; 다시 '해심밀경(解深密經)'을 인용하였으니, 즉 이 아급마(阿笈摩, 아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광혜(廣慧)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시기를, 

‘광혜여! 마땅히 알라. 여섯 가지 윤회세계인 육취(六趣)의 생사에서 그들 각각의 유정들은 제 각각의 유정의 무리 속에 들어가서 혹 난생(卵生)으로, 혹 태생(胎生)으로, 혹 습생(濕生)으로, 혹 화생(化生)으로 몸을 형성하기 시작하느니라.

그 중, 최초에 일체종자(一切種子)의 심식(心識)을 성숙하고 전전하고 화합하여서 점차 광대하여지면, 두 가지의 집수(執受, 감수)에 의지하는 것이니,

첫째는 색근(色根, 승의근)과 소의근(所依根, 부진근)을 집수하고,

둘째는 상(相, 대상)과 명(名)과 분별된 언설과 희론의 습기(習氣)를 집수하느니라.

유색계에서는 이 두 가지 집수를 갖추나, 무색계에서는 두 가지 모두를 다 갖추지 않는다.

 

*사생(四生), 유정이 태어나는 네 가지 형태로써

①태생(胎生)은 모태를 통해 태어나는 것으로서, 사람이나 짐승 등이다.

②난생(卵生)은 알에서 태어나는 것으로서 조류 등이다.

③습생(濕生)은 습기로 태어나는 것으로서 파리ㆍ모기 등이 있다.

④화생(化生)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업력에 의해 변화로써 홀연히 태어나는 것으로, 하늘이나 지옥에 나는 것이다.

집수(執受, upātta)는 ‘감수 유지작용’, 외부대상을 접촉하여 그것을 섭지(攝持)해서 잃어버리지 않고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지각하는 작용이다.

*색근(色根)은 승의근(勝義根)을 가리킨다. 승의근은 ‘뛰어난 승의(勝義)의 감각기관’이라는 뜻이다.

미세 청정한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신경(神經)과 신경전달물질이다.

감각기관의 근(根)의 기능인, 식(識)을 일으켜서 대상을 인식하는, 발식취경(發識取境) 가운데 식의 작용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소의근(所依根)은 부진근(扶塵根)을 말는 것으로, 외부대상, 즉 진(塵)을 파악하는 것을 도우는 부(扶) 감각기관으로, 안구ㆍ귀 등 눈에 보이는 기관이다.


廣慧!此識亦名阿陁那識.何以故? 由此識於身隨逐執持故. 亦名阿賴耶識.

何以故?由此識於身攝受藏隱同安危義故. 亦名爲心.

何以故?由此識色`聲`香`味`觸等積集滋長故.

광혜여! 이 식을 또한 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 하나니, 왜 그러한가?

이 식으로 말미암아 신(身, 몸)을 쫒아 상속하고 집지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나니, 왜 그러한가?

이 식으로 말미암아 신(身, 일체 법의 종자)를 섭수하고 저장하며, 몸의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함께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심(心, 집기集起)이라 하나니, 왜 그러한가?

이 식으로 인하여 빛깔(色)ㆍ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 등의 종자를 적집하여서 잘 자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니라.

 

심(心)의 범어 원어는 citta로서 집기(集起)의 의미이다. 제8식에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의 인식내용이 종자의 형태로 적집되고 성장되므로 심이라고 부른다.


廣慧!阿陁那識爲依止`爲建立故, 六識身轉, 謂眼識耳`鼻`舌`身`意識.

此中有識,眼及色爲緣生眼識;與眼識,俱隨行同時同境有分別意識轉.

광혜여! 아타나식(阿陀那識)을 의지처로 하고 건립함으로 육식(六識)이 전변하여 생기하나니,

육식(六識)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니라.

이 중에서 식(識)이 있어서 안근과 색경을 연(緣)으로 하여 안식을 일으키고,

안식을 따라 함께 일어나서 동시에 같은 대상인 동경(同境)을 분별하는 의식(意識)이 전변하여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有識,耳`鼻`舌`身, 及聲`香`味`觸爲緣, 生耳`鼻`舌`身識, 與耳`鼻`舌`身識俱 隨行同時同境有分別意識轉.

식(識)이 있어서  이근(耳根)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ㆍ신식(身識)이 → 근(根)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의 경계를 연(緣)으로 하여  → 경(境)

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을 일으키느니라.  → 식(識)

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과 함께하여서, 동시에 같은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意識)이 전변하여 일어나느니라.

 

廣慧!若於爾時,一眼識轉,卽於此時, 唯有一分別意識,與眼識所行轉.

若於爾時,二三四五諸識身轉, 卽於此時,唯有一分別意識,與五識身同所行轉.

광혜여! 만약 하나의 안식(眼識)이 전환하여 일어날 때에는, 곧 오직 하나의 분별의식이 안식과 같이하여 일어나고, 

만약 그 때에 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의 여러 식이 전환하여 일어날지라도 오직 하나의 분별의식이 5식(五識)과 함께 일어나느니라.


廣慧!譬如大瀑水流, 若有一浪生緣現前,唯一浪轉.若二若多浪生緣現前,有多浪轉.

然此瀑水,自類恒流,無斷無盡. 又如善淨鏡面, 若有一影生緣現前,唯一影起.

若二若多影生緣現前,有多影起.非此鏡面轉變爲影,亦無受用減盡可得.

광혜여! 비유하자면 큰 폭포의 흐름에서 만약 하나의 물결이 일어나는 조건이 현전(現前)한다면 오직 하나의 물결이 일어나는 것이고, 둘 또는 많은 물결이 일어나는 조건이 현전한다면 둘 또는 많은 물결이 일어나는 것이나,

그러나 이 폭포수 자체의 흐름은 항상 이어져 끊임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또한 깨끗하고 맑은 거울에 하나의 영상이 비치게 된 때(緣)에는 오직 하나의 영상이 있을 뿐이고,

둘 또는 많은 영상이 비치게 될 때(緣)에는 둘 또는 많은 영상이 있는 것이나,

그러나 이 거울 자체가 전변하여 영상이 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영상의 수용작용을 다하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1권 5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 총표강요분(總標綱要分) 5

 

▶論曰:復次云何,由此十相殊勝殊勝如來語故, 顯於大乘眞是佛語,遮聲聞乘是大乘性?

由此十處,於聲聞乘,曾不見說,唯大乘中,處處見說. 謂此十處, 是最能引大菩提性`

是善成立`隨順無違,爲能證得一切智智.此中二頌:

▷논문에서; 또한, 어찌하여  상(十相)의 수승(殊勝)함과 수승한 여래의 말씀으로 인해서 대승이 참으로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성문승은 대승의 종성인 대승성(大乘性)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인가? 

 십처(十處) 성문승에서는 일찍이 설함을 보지 못하였으니, 오직 대승 안의 여러 곳에서만 설하셨기 때문이며,

 십처(十處) 대보리성(大菩提性)을 능히 최상으로 이끌어 내어서,  성립하고 수순하여 위배되지 않고, 능히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증득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所知依及所知相, 彼入因果彼修異, 三學彼果斷及智, 最上乘攝是殊勝.

알아야  바의 의지처인 소지의(所知依), 알아야  바의 소지상(所知相),

그것에 들어가는 원인(因)과 결과(果), 그리고  수행의 차이인 수이(修異),

3학, 그것의 증과인 과단(果斷) 과지(果智) 최상승의 교법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수승(殊勝)한 것이라네.


此說此餘見不見, 由此最勝菩提因, 故許大乘眞佛語, 由說十處故殊勝.”

 말씀은 다른 곳에서   없으니, 이것이 가장 뛰어난 보리의 인(因)이 되는 것이므로

대승이 참다운 부처님 말씀이라 인정하며,

십처(十處)를 설하는 것이기에 수승(殊勝)한 것이라 하네.

 

▶釋曰:此復云何謂復顯此所說十處? 是最能引大菩提性, 是善成立隨順無違.

是最能引大菩提性者,是大菩提能引因義. 是善成立者,謂由正理等量思擇,如見導師所說道相.

言隨順者, 謂爲證得, 勤修行時,隨順住故,如隨導師所說正道隨順而住.

言無違者,謂諸地中無障㝵因, 如隨導師所說, 道中無劫賊等所有障難. 或復生死`涅槃二種互不相違.

▷설명한다; 또한 이것이 어떻게 십처(十處)를 다시 나타내는 것인가? 

이것은 대보리의 성품(性)을 능히 최상으로 이끌어 내고  성립하며, 수순하여서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보리의 성품(性)을 능히 최상으로 이끌어낸다’는 것이란, 대보리가 능히 이끌어 내는 원인의 능인인(能引因)이라는 뜻이며,

‘잘 성립한다는 선성립(善成立)’이란, 바른 논리의 정리(正理) 등의 바른 인식방법에 의거해서 사량하고 간택함을 말하는 것으로, 마치  안내자가 말한 바른 길을 보는 것과 같으며,

‘수순(隨順)한다’는 것은 증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할 때, 수순하여서 안정되게 수행하기 때문이니, 길 안내자가 말한 바른 길을 따라 수순하여 가는 것 같은 것이다. 

'위배되지 않는, 무위(無違)’란, 모든 지위에서 장애의 원인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길 안내자가 말한 바를 따르면, 그 도중에 도적의 겁탈 등의 모든 어려운 장애가 없음과 같은 것이며, 혹은 다시 생사와 열반의  가지가 서로 위배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復有異門,是最能引大菩提性者,謂此能引無戲論, 無分別智故.是善成立者, 謂與四理不相違故.

言隨順者, 謂與三量不相違故.言無違者,非先隨順後相違故.如有頌言:

또는, 다른 견해로서는, ‘이것이 대보리의 성품(性)을 능히 최상으로 이끌어낸다’는 것이란, 이것이 능히 희론이 없고 분별이 없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며,

‘잘 성립한다는 선성립(善成立)’이란 것은 관대(觀待)도리ㆍ작용(作用)도리ㆍ증성(證成)도리ㆍ법이(法爾)도리의  가지 도리인 사리(四理)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며,

‘수순(隨順)한다’는 것은 현량ㆍ비량ㆍ성교량의  가지 바른 인식방법의 삼량(三量)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며,

‘위배되지 않는, 무위(無違)’란, 먼저 수순하여서 그 후에도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으니,

아래의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것이다.

 

사리(四理), 네 가지 도리(道理)는 관대(觀待)도리ㆍ작용(作用)도리ㆍ증성(證成)도리ㆍ법이(法爾)도리이다.

첫째, 관대도리(觀待道理)는 필요로 함을 관찰하는 도리, 즉 모든 유위법이 생겨날 때에는 반드시 갖가지 연(緣)을 필요로 함(待)을 관찰하는 도리이다.

둘째, 작용도리(作用道理)는 인연에 의해 생겨난 유위법에는 반드시 일을 이루는 작용이 있음을 말한다.

셋째, 증성도리(證成道理)는 증명하여 성립되는 도리로써, 현량(現量)ㆍ비량(比量)ㆍ성교량(聖敎量)에 의해 증명되고 성립되는 참되며 바른 도리이다.

넷째, 법이도리(法爾道理)는 본래부터의 법의 도리로써,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거나 출현하시지 않음에 관계없이 법계에 안주하는 본래부터의 도리이다. 예를들면 연기법ㆍ선인낙과 악인고과(善因樂果 惡因苦果)의 인과법 같은 것을 말한다.

삼량(三量), 바른 인식방법의 양(量, pramāṇa)으로서 현량ㆍ비량ㆍ성교량을 말한다.

첫째, 현량(現量, pratyakṣa)은 감각기관과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서 아는 감각지(感覺知)이다. 예를 들면 안식이 안근(眼根)을 통해서 빛깔(色)의 대상을 인식하는 것 등이다.

둘째, 비량(比量, anumāna)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비교해서 아직 알지 못하는 사실을 추측해서 아는 추리지(推理知)이다. 예를 들면 연기가 있음을 미루어서 불을 안다거나, 나비와 벌이 모이는 것을 미루어서 꽃이 있음을 아는 것 등이다.

셋째, 성교량(聖敎量, śabda)은 성언량(聖言量)ㆍ정교량(正敎量)ㆍ지교량(至敎量)이라고도 하며, 성자의 말씀에는 잘못이 없다고 해서 이것에 의해 여러 가지 사실을 미루어 아는 것이다.

 

“初任持愛悲, 後隨順不善, 非黑白我見, 有益亦有損.”

처음에 사랑과 자비의 애비(愛悲)를 지니고, 나중에 불선(不善)에 수순할지라도

흑백의 아견(我見)에 증익이 있거나 손감이 없네.

 

爲能證得一切智智者,謂於一切法中,發生無上無閒一切行相智故.善成立等,

復有餘義, 謂善成立隨順無違展轉標釋. 云何善成立?謂能隨順故.云何能隨順?謂無違轉故.

능히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증득하기 위함’이란법에 대해서 무상(無上)이고 간격이 없는 무간(無閒)의 모든 행상(行相)을 아는 지혜를 발생시키는 것이며, 

‘잘 성립한다는 선성립(善成立)’ 등에도 다시 다른 의미가 있으니,

이른바 ‘잘 성립한다는 선성립(善成立)’과 ‘수순(隨順)한다’와 ‘위배되지 않는 무위(無違)’을 차례대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성립하는 선성립(善成立)인가? 능히 수순(隨順)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능히 수순(隨順)하는 것인가? 위배되는 무위(無違)로 전전함이 없기 때문이다.

 

ㅡ십처의 순서에 관하여 말한, 제2십의차제장(2 十義次第章).

▶論曰:復次云何如是次第說此十處? 謂諸菩薩於諸法因, 要先善已, 方於緣起應得善巧.  次後於緣所生諸法,

應善其相, 善能遠離增益損減二邊過故. 次後如是善修菩薩應正通達,善所取相, 令從諸障心得解脫.

▷논문에서; 또한 어찌하여 이와 같이 순서를 두어서 십처(十處) 말하는 것인가? 

보살은 법의 법인(法因) 대해서 우선  알고난 후에야 응당 연기(緣起)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다음에 마땅히 인연에 의해 생겨난 법에 대하여  상(相)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의 양극단의 과실을 능히 멀리 여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다음에 이와 같음으로써 잘 수행하는 보살은 마땅히 바르게  취한 상의 소취상(所取相)에 통달하게 되고, 

모든 장애로부터 마음의 해탈을 얻는 것이다.

 

次後通達所知相已, 先加行位六波羅蜜多,由證得故,應更成滿, 增上意樂得淸淨故.

次後淸淨意樂, 所攝六波羅蜜多, 於十地中, 分分差別, 應勤修習, 謂要經三無數大劫.

次後於三菩薩所學,應令圓滿. 旣圓滿已, 彼果涅槃,及與無上正等菩提,應現等證.故說十處如是次第.

그러한 다음에 알아야  바의 소지상(所知相) 대하여 잘 알게 되어서, 이전의 가행위(加行位)에서의 6 바라밀다를 증득하게 됨으로써 마땅히 다시 매우 높은 의욕의 증상(增上)의 의락(意樂)을 원만히 이루는 것이니, 청정함을 증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다음에 청정한 의락(意樂) 포섭되는 6 바라밀다를 10지에서 각각 차이를 두는 분분차별(分分差別)로써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 하나니, 이른바 3무수(無數, 아승지)의 대겁의 시간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한 다음에 마땅히 증상계(增上戒), 증상심(增上心), 증상혜(增上慧)의 보살학(菩薩三學)을 원만하게 해야 하며,

원만하게 하고 나서는,  증과인 열반과 무상정등(無上正等)의 보리를 평등히 증득해야 하기 때문에, 

십처(十處)를 말함에 있어서 이와 같은 순서를 두는 것이다.

 

의락(意樂), 범어 āśaya의 번역어이다. 휴식처ㆍ주처(住處)ㆍ사의(思意)ㆍ의향(意向) 등의 의미가 있으며, 의요(意樂)ㆍ의욕(意慾)ㆍ지원(志願)이라고 한역한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생각이며, 특히 선정 중의 작의(作意)를 가리킨다.

무수겁(無數劫)은 아승기겁(阿僧祇劫)의 번역어이다. 아승기는 범어 asaṁkhya의 음역어로서, 원래 발음은 아승기이지만 보통 아승지라고 부른다.

삼학(三學), 매우 높은 계율의 증상계(增上戒), 매우 높은 마음의 증상심(增上心), 매우 높은 지혜의 증상혜(增上慧)이다.

 

▶釋曰:云何如是次第說者, 問 謂諸菩薩, 於諸法因, 要先善已, 廣說乃至彼果涅槃, 及與無上正等菩提,應現等證故者答

要先了知諸法因已,後於緣起方得善巧, 必有因故,果得生起, 非自在等,由此能得因果兩智.

▷설명한다; ‘어찌하여 이와 같이 순서를 두어서 말하는가?’는 질문이며,  

‘보살은 법의 법인(法因) 대해서 모름지기  알아야 하나니, 자세히 설하자면, 그 증과인 열반과 무상정등보리를 지금 평등히 증득해야 하기 때문이다'는 대답이니,

모름지기 우선적으로 제법의 법인(法因)  알고 난 후에야 연기(緣起)에 대하여 비로소  통달할  있는 것이니,

반드시 원인(因)이 있음으로써 결과(果)가 생겨날  있는 것이다. 

자재천(自在天)을 섬기는 외도의 주장 등이 아니며, 자재천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역시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니, 이러함으로 인하여 능히 원인(因)과 결과(果)의  가지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자재천(自在天)은 색계의 초선천(初禪天)에서 3천 계(界)를 주관한다고 한다(혹은 욕계의 제6 天主라고도 한다).  신(神)이 세계의 본체 또는 창조의 신으로서, 만물이 자재천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된다고 한다.  신이 기뻐하면 중생이 편안하고 성내면 중생이 괴롭게 된다고 한다.

 

次後於因所生諸法,應了其相.何等爲相? 謂實無有遍計所執, 定執爲有, 名爲增益.

增益無故, 損減實有圓成實性. 遠離如是二邊過失, 故名善巧.

그러한 다음에 원인이 일으킨 인소생(因所生)의 제법에 대한 상(相)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무엇을 상(相)으로 삼는 것인가? 실제로는 변계소집(허망한 집착)이 아닌데, 결정적으로 집착해서 있다고 하는 것을 증익(增益)이라 이름하며,

비존재(無)를 증익함으로써 참존재인 원성실성(존재의 진실)을 손감(損減)하게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극단의 과실을 멀리 여의기 때문에  통달하는 선교(善巧)라고 말하는 것이다.

 

변계소집(遍計所執), 두루 계탁(計度)하여 집착하는 것이며 존재의 허망한 상태를 말한다.

원성실성(圓成實性), 원만히 성취한 실재하는 것이며, 존재의 진실한 상태를 말한다

 

次於如是所取諸相,由唯識性, 應正通達, 得無障㝵. 次於隨順入唯識性, 世俗所證, 世閒六種波羅蜜多,由勝義故,

應更證得. 是應修作,淸淨增上意樂攝義.

다음에 이와 같이 취착된 소취(所取)의 모든 상(相)에 대해서 유식성에 의거해서 마땅히 바르게 통달하여 장애가 없다면,

그러한 다음에 수순하여 유식성(唯識性)에 들어가는 것으로, 승의(勝義)에 의거해서 세속에서 증득한 세간의 6 바라밀다를 다시 증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마땅히 닦아야  응수(應修)의 청정하고 높은 의욕의 증상의락(增上意樂)의 섭의(攝義)인 것이다.

 

次於十地分分差別,應勤修習, 謂要經三無數大劫, 非如聲聞極疾三生勤修對治便證解脫.

次後卽於如是修中, 增上戒等,菩薩三學, 應令圓滿. 最後於彼學果涅槃, 煩惱永斷,

及與無上正等菩提`三種佛身,應現等證故,說十處如是次第.

그러한 다음에 10지(地)에서 각각 나누어 차이를 두어서 마땅히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 하나니, 말하자면, 3무수(無數)의 대겁 동안을 말하는 것이니, 성문이 매우 빠르게 3생(三生)에서 부지런히 닦고 다스려서 문득 증득하고 해탈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한 다음에 이와 같은 수행으로 증상계(增上戒) 증상심(增上心), 증상혜(增上慧) 등의 보살의학(三學)을 원만하게 하며,

마지막으로  수학의 증과인 학과(學果)의 열반으로 번뇌가 영원히 단멸되고,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와 자성신(自性身), 수용신(受用身), 변화신(變化身)의 삼불신(三佛身)을 평등히 증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처(十處)에 있어서 이와 같은 순서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論曰:又此說中,一切大乘,皆得究竟.

▷논문에서; 또한 이러한 설(說)에서 모든 대승의 구경(究竟)을 얻는 것이다.

 

▶釋曰:一切大乘,齊此究竟.何以故?若欲說緣起, 卽入阿賴耶識攝.若欲說諸相,卽入三自性攝.

若欲說證得,卽入唯識性攝. 若欲說波羅蜜多,卽入波羅蜜多攝. 若欲說諸地,卽入諸地攝.

若欲說諸學,卽入諸學攝. 若欲說斷及智,

卽入無住涅槃及三種佛身攝.齊是名爲一切佛語,是故但說如此次第.

▷설명한다; 모든 대승이 여기에서 구경을 얻는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만약 연기를 말하고자 한다면, 곧 아뢰야식을 이해(攝)하여 들어가며,

만약 모든 상(相)을 말하고자 한다면, 곧 삼자성(三自性)을 이해(攝)하여 들어가며,

만약 증득(證得)을 말하고자 한다면, 곧 유식성(唯識性)을 이해(攝)하여 들어간다.

만약 바라밀다를 말하고자 한다면 곧 바라밀다를 수행(攝)하여 들어가며,

만약 모든 지위를 말하고자 한다며, 곧 모든 지위를 수행(攝)하여 들어가며,

만약 보든 학(學)을 말하고자 한다면, 곧 모든 학을 수행(攝)하여 들어가며,

만약 단멸과 지혜를 말하고자 한다면 곧 무주열반과 삼불신을 수행(攝)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모든 부처님의 말씀하신 바이니, 그러므로 오직 이와 같은 순서로 말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1권 4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 총표강요분(總標綱要分) 4

 

▶釋曰:此中所知依殊勝殊勝語者, 所應可知, 故名所知, 所謂雜染淸淨諸法,卽三自性.

依是因義,此所知依,卽是殊勝,故名所知依殊勝,由此殊勝,故語殊勝.

▷설명한다; ‘이 중에서 알아야  바의 의지처의 뛰어남인, 소지의수승(所知依殊勝)과 뛰어난 말의 수승어(殊勝語)’란,

마땅히 알아야  바이기 때문에 ‘알아야  바의 소지(所知)’라 하는 것으로,

이른바 잡염과 청정의 법이  의타기성ㆍ변계소집성ㆍ원성실성의  가지 자성(三自性)인 것이다. 

 

*삼자성(三自性), 3성(三性)은 의타기성ㆍ변계소집성ㆍ원성실성이다.

진제(眞諦)의 역본에는 의타성ㆍ분별성ㆍ진실성으로 되어 있다.

 

此依卽是阿賴耶識,如是持業釋,乃至彼果智殊勝亦爾,謂彼果智卽是殊勝,故名彼果智殊勝等.

‘의지의 의(依)’는 원인(因)의 의미이니, 이 알아야  바의 의지처인, 소지의(所知依)는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소지의(所知依)의 수승(殊勝)’이라고 말하며,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말도 뛰어난 수승어(殊勝語)가 되는 것이다. 

 의지처(依)는  아뢰야식(阿賴耶識, 제8식)이며, 이와 같은 것은 지업석(持業釋)이고, 나아가 그것의 증과인 지혜의 뛰어남의 지수승(智殊勝) 역시도 그러한 것으로,  증과(果)인 지혜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것의 증과(果)인 지혜의 뛰어남인, 지수승(智殊勝)’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뢰야식(阿賴耶識), 범어 ālaya-vijāna의 음역으로서 8식(識) 가운데 제8식이며, 유정의 근본적인 식체(識體)이다.

ālaya는 저장ㆍ집착ㆍ무몰(無沒)의 의미로써, 이 식에 종자를 ‘저장’하고, 제7 말나식에 의해 상주불변의 자아로 착각 ‘집착’되며, 아득한 옛적부터 해탈에 이르기까지 이 식의 흐름이 결코 단절되지 않는 것이다.

근본식ㆍ본식ㆍ장식(藏識)ㆍ이숙식(異熟識)ㆍ일체종자식ㆍ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고도 하며,

진제는 아리야식(阿梨耶識)ㆍ아려야식(阿黎耶識)으로 음역하고, 무몰식(無沒識)으로 의역하였다.

*지업석(持業釋), 지업(持業)은 어떤 체(體)가 그 용(用)을 능히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지업석은 6합석(合釋)의 하나로서, 앞절(前節)의 문언(文言)이 뒤의 절(後節)의 문언에 대해 형용사ㆍ부사 또는 동격의 명사의 관계를 갖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장식(藏識)이라고 할 경우에 장(藏)은 용(用)이고 식(識)은 체(體)로서, 식(體)이 장(用)을 갖고 있으므로 지업석인 것이다.

 

所知相者,是所知自性義.所知卽是相,故名所知相,謂三自性. 入所知相者,謂於所知相,若能入若正入,卽唯識性.

‘알아야  바의 상인 소지상(所知相)’이란 알아야  바의 자성의 뜻이니, 알아야  바는  상(相)이기 때문에 알아야  바의 소지(所知)의 상(相)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른바  가지 자성인, 삼자성(三自性)인 것이다. 

‘알아야  바의 상에 들어가는 입소지상수승(入所知相殊勝)’이란, 알아야  바의 소지(所知)의 상(相) 대해서 능히 들어가거나 혹은 바르게 들어가는 것이니, 곧 유식성(唯識性)이다.


彼入因果者,謂能入彼,故名彼入, 卽是悟入,唯識理性. 因,謂加行時, 世閒施等波羅蜜多. 果,謂通達時, 出世施等波羅蜜多.

‘그것에 들어가는 원인과 결과, 입인과(入因果)’란 능히 그것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니,  곧  유식의 진여성인 유식이성(唯識理性)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원인의 인(因)’은 가행위(加行位)에서의 세간의 보시 등의 바라밀이고, 

‘결과의 과(果)’는 통달위(通達位)에서의 세간을 벗어나는 보시 등의 바라밀이다. 

 

*가행위(加行位), 유식학에서는 보살의 수행 계위(階位)를 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ㆍ10지(地)ㆍ불지(佛地)의 41단계로 인정하고, 이것을 자량위ㆍ가행위ㆍ통달위ㆍ수습위ㆍ구경위의 5위(位)에 배대한다.

가행위(加行位)는 제2위로서 수행심을 더욱 경책해서 정진을 가행하도록 하는 단계이며,

이 지위에서 난위(煖位)ㆍ정위(頂位)ㆍ인위(忍位)ㆍ세제일위(世第一位)의 네 가지 선근을 닦는다.

*통달위(通達位)는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하며, 이 지위에 오르면 진여성(眞如性)을 관찰하게 된다.

10지의 초지初地, 환희지)에서 입심(入心)의 수행위이다.

 

彼因果修差別者,卽彼因果, 故名彼因果,卽於此中,修之差別.

그것의 원인(因)과 결과(果)의 수행의 차이인 인과수차별(因果修差別)의 수승(殊勝)이란 그것의 원인ㆍ결과이기 때문에 ‘그것의 원인(因)과 결과(果)’라고 말하는 것이니,  곧  가운데에서 그것을 수행의 차이인 것이다. 

 

修,謂數習,卽此數習於諸地中, 展轉殊勝, 故名差別, 卽是十地.

‘수행의 수(修)’는 누누이 익히는 삭습(數習)이며, 이렇게 삭습(數習)으로 익히는 것은 모든 지위에서 전전하여 뛰어나게 되어서 수승(殊勝)하게 되기 때문이며, ‘차별(差別)’라고 이름하는 것은  10지(地)인 것이다. 

 

卽於如是修差別中, 增上戒者, 謂十地中,依戒而學, 故名增上戒, 卽諸菩薩所有律儀, 於諸不善, 無復作心.

‘이와 같은 수행의 차이에서의 매우 높은 계율의 증상계(增上戒)의 수승(殊勝)’이란, 10지 중에서는 계율에 의지해서 수학하기 때문에 ‘매우 높은 계율의 증상계(增上戒)’라 이름하는 것으로, 모든 보살은 지니 율의로써 모든 불선(不善)에 대하여 다시는 마음이 동하지 않는, 즉 계율을 호지(護持)하기 때문에 불선(不善)을 짓는 마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增上心者, 謂在內心, 或卽依心而學 , 故名增上心, 卽諸三摩地.

‘매우 높은 마음의 증상심(增上心)’이란 내면에 머무는 내심(內心)으로, 혹은 그 마음에 의지해서 배우기 때문에 ‘매우 높은 마음의 증상심’이라 하는 것이니,  모든 삼마지인 것이다. 

 

增上慧者, 謂趣證慧, 故名增上慧, 或依慧而學,故名增上慧,卽是無分別智.

‘매우 높은 지혜의 증상혜(增上慧)’란 깨침에 나아가는 지혜이기 때문에 ‘매우 높은 지혜의 증상혜’라 하며,

혹은 지혜에 의지해서 배우기 때문에 ‘매우 높은 지혜의 증상혜’라고 말하나니,

 분별이 없는 지혜의 무분별지(無分別智)인 것이다.


斷殊勝者,謂最勝品別,自內棄捨煩惱及所知障,卽是無住涅槃.

‘단멸의 뛰어남의 과단수승(果斷)의 수승(殊勝)’이란, 전의(轉依)의 증과인 멸이 제법에 있어서 가장 승묘(勝妙)하기 때문에 가장 뛰어남의 수승이며,

전의(轉依)의 품류(品類)의 차이와 스스로 내면에서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버리는 것이니,  무주열반(無住涅槃)인 것이다. 

 

*번뇌장(煩惱障), 중생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해서 열반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번뇌로 인한 장애이다. 여기서 번뇌는 제7 말나식이 제8 아뢰야식의 견분을 대상으로, 그리고 의식이 5취온을 대상으로, 실아(實我)로 집착함을 말한다. 이와 같은 아집의 번뇌로 인해 열반을 장애하고 생사에 유전하게 하므로 이렇게 부른다.

*소지장(所知障), 알아야 할 소지(所知)의 모든 대상을 덮어서 바른 지혜가 생기는 것을 방해하는 번뇌로 인한 장애이다. 즉,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인식대상인 소지(所知)의 참다운 모습의 법공(法空)을 그대로 알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이들 번뇌를 소지장(所知障)이라 한다. 

법집(法執)을 근본으로 하며 보리를 장애하며, 참다운 지혜가 발현함을 장애하는 점에서 지장(智障)ㆍ보리장(菩提障)이라고도 한다.

*무주열반(無住涅槃), 무주처열반ㆍ무주상열반이라고도 하며, 진여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모두 벗어난 열반으로, 본래자성청정열반ㆍ유여의열반ㆍ무여의열반ㆍ무주처열반의 4 가지 열반에서 최상의 경지이다.

대지(大智)이므로 생사에 머물지 않고 대비(大悲)이므로 열반에 안주하지 않으나,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일을 미래세가 다할 때까지 할지라도 항상 고요하기 때문에 열반이라 이름한다.

 

智殊勝殊勝語者,謂無障智名智殊勝,彼無分別智,有所對治;

今此佛智已離一切障及隨眠, 是名於彼無分別智佛智殊勝.

‘지혜의 지수승(智勝殊)과 뛰어난 말의 수승어(殊勝語)’란 장애가 없는 지혜를 ‘지혜의 뛰어남의 지수승(智勝殊)’이라 이름하며, 그것의 무분별 지혜에는 다스려지는 바가 있는 것이다. 

이제  부처님의 지혜는 이미 모든 장애와 수면(隨眠, 잠재번뇌)을 떠났으니, 이러한 부처님의 분별 지혜를 부처님 지혜의 뛰어남인 불지수승(佛智殊勝)이라 하는 것이다.

 

*수면(隨眠), 번뇌의 종자로써 번뇌의 잠재세력이다. 이에 대해 현재 작용하는 번뇌를 전(纏)이라 한다.


▶論曰:復次云何能顯? 由此所說十處, 於聲聞乘, 曾不見說, 唯大乘中, 處處見說, 謂阿賴耶識, 說名所知依體

三種自性:一依他起自性`二遍計所執自性`三圓成實自性,說名所知相體. 唯識性,說名入所知相體.

六波羅蜜多,說名彼入因果體.菩薩十地,說名彼因果修差別體.

▷논문에서; 또한 능히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가? 이러한  가지의 의지처인 십처(十處)는 일찍이 성문승에서 설하는 것을 보지 못했고, 오직 대승의 여러 곳에서만 설하셨음 볼 수 있으니,

이른바 아뢰야식을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인 소지의(所知依)의 체(體) 이름하는 것이다. 

 가지의 삼자성(三自性),  첫째는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이고, 둘째는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이며, 셋째는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을 알아야  바의 소지상(所知相)의 체(體)라고 이름하며,

유식성(唯識性)을 알아야  바의 상에 들어감의 입소지상(入所知相)의 체(體)라고 이름하며,

육바라밀다를 말하여 그것에 들어가는 원인ㆍ결과의 입인과(入因果)의 체(體)라고 이름하며,

보살의 10지 그것의 원인ㆍ결과의 수행 차이인, 인과수차별(因果修差別)의 체(體)라고 이름한다.


菩薩律儀,說名此中增上戒體. 首楞伽摩`虛空藏等諸三摩地, 說名此中增上心體.

無分別智,說名此中增上慧體. 無住涅槃, 說名彼果斷體.

三種佛身,一自性身`二受用身`三變化身,說名彼果智體.

由此所說十處,顯於大乘異聲聞乘, 又顯最勝世尊, 但爲菩薩宣說, 是故應知但依大乘,

諸佛世尊,有十行相殊勝殊勝語.

보살의 율의를 여기에서 매우 높은 계율인, 증상계(增上戒)의 체(體) 이름하며,  

수능가마(首楞伽摩)ㆍ허공장(虛空藏) 등의 여러 삼마지를 매우 높은 마음의 증상심(增上心)의 체(體) 이름하며, 

무분별지  가운데 매우 높은 지혜인 증상혜(增上慧)의 체라고 이름하며,

무주열반 그것의 증과인 과단(果斷) 체(體)라고 이름하며,

삼불신(三佛身),  첫째는 자성신(自性身)이고, 둘째는 수용신(受用身)이며, 셋째는 변화신(變化身)을 그것의 증과의 지혜인 과지(果智)의 체(體)라 이름한다.

여기에서 말한  가지의 의지처인 십처(十處)로 인하여 대승은 성문승과 다름을 나타내고, 또한 가장 뛰어남을 나타내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다만 보살을 위해서만 널리 말씀하셨으므로, 다만 대승에 의지하는 모든세존(佛世尊)에게만  가지의 십행상(十行相)의 수승(殊勝)과 뛰어난 말씀의 수승어(殊勝語)가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수능가마(首楞伽摩), 범어 śūraṁgama의 음역으로서, 수능엄(首楞嚴)이라고도 하며, 건상(健相)ㆍ건행(健行)ㆍ일체사경(一切事竟)이라고 의역(意譯)한다.

부처님께서 증득한 삼매의 이름으로, 건상이란 당기(幢旗)가 견고함에 비유한 것으로서, 부처님의 덕이 견고하여 모든 마군에 의해 파괴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일체사경은 불덕(佛德)의 구경(究竟)을 나타낸다.

*허공장(虛空藏), 무색계의 네 가지 선정의 사공처정(四空處定) 가운데 하나로서,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ㆍ허공처정(虛空處定)ㆍ허공기삼매(虛空器三昧)라고도 한다.

물질의 색법(色法)에 얽매임을 싫어하여 마음에 색상(色想)을 버리고 무한한 허공을 관(觀)의 대상으로 하는 선정이다.


▶釋曰:云何能顯者,是問何緣義. 六波羅蜜多說名彼入因果體者,謂由唯識性,

入三自性時,世閒施等波羅蜜多名淸淨因,由能引發出世閒故.

▷설명한다; ‘무엇을 능히 나타내는 능현(能顯)인가?’란, 무엇을 반연(緣)으로 삼는것인가를 묻는 것이며, 

‘육 바라밀다를 말하여서 그것에 들어가는 원인ㆍ결과의 입인과(入因果)의 체(體)라고 이름한다’는 것은 유식성(唯識性)으로 인하여 삼자성(三自性) 들어갈 때를 세간의 보시 등의 바라밀다를 청정인(淸淨因)이라 이름하나니, 능히 세간을 벗어남의 출세간(出世間)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入地已去,卽彼施等波羅蜜多, 成出世閒,名淸淨果. 菩薩十地說名彼因果修差別體者,

謂菩薩十地, 是前所說波羅蜜多,因果二位,修差別性. 無分別智說名此中增上慧體者, 若諸聲聞,

離四顚倒分別, 名無分別;若諸菩薩,離一切法分別,名無分別,二無分別差別如是.

10지의 지위에 들어간 이후에는,  보시 등의 바라밀다가 출세간(出世間) 이루는 것을 청정과(淸淨果)라고 이름한다.

‘보살의 10지를 그것의 원인ㆍ결과의 수행 차이의, 인과수차별(因果修差別)의 체(體)라 이름한다’는 것은, 보살의 10지가 앞에서 말한 바라밀다의 원인ㆍ결과의  지위에서 수행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무분별지를  가운데에 매우 높은 지혜의 증상혜(增上慧)의 체(體)라고 이름한다는’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성문들은  가지의 사전도(四顚倒)의 분별을 여의는 것을 무분별이라 이름하고, 

보살들은법의 분별을 여의는 것을 무분별이라고 하는 것이니,  가지의 무분별(無分別)의 차이인 것이다.

 

사전도(四顚倒), 현상계의 존재인 유위법(有爲法)들의 실상(實相)이 무상(無常)ㆍ무아(無我)ㆍ고(苦)ㆍ부정(不淨)임을 알지 못하고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전도(顚倒)된 견해를 일으키고, 또한 열반계가 상ㆍ낙ㆍ아ㆍ정인 것을 무상ㆍ무아ㆍ고ㆍ부정이라고 망령되게 집착하는 것이다.


無住涅槃說名彼果斷體者, 謂三學果, 故名彼果.彼果卽斷, 名彼果斷. 此性名爲彼果斷體, 卽是煩惱`所知二障斷義.

‘무주열반(無住涅槃)을 계ㆍ정ㆍ혜 3학 증과인 과단(果斷) 체(體)라고 이름한다'는 것은, 삼학(三學)의 증과이기 때문에 그것의 증과라 이름하는 것이며, 그것의 증과가  단멸(斷)이므로 과단(果斷)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성품을 그것의 증과인 과단(果斷) 체(體)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이것은 번뇌장과 소지장의 2장(二障)을 단멸한다는 뜻이다.

 

三種佛身說名彼果智體者,彼三學果, 故名彼果,彼果卽智,名彼果智, 此性名爲彼果智體.

此中若無自性身, 應無法身,譬如眼根;

‘삼불신(三佛身)을 그것의 증과인 지혜인 과지(果智)의 체(體)라고 부른다’라는 것은, 3학의 증과이기 때문에 그것의 증과라고 이름하며, 그것의 증과는 지혜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혜의 증과인 과지(果智) 이름하며,  

 성품을 그것의 증과인 지혜인 과지(果智)의 체(體)라 이름하는 것이다. 

 가운데 만약 자성신(自性身)이 없다면 마땅히 법신(法身)도 없어야 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안근과 같은, 즉 안근에 의지해서 안식이 일어나는 것과 같으며,

 

*자성신(自性身), 2공(空) 소현(所顯)의 진여로서의 자성을 말한다. 자성신은 완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행 이전부터 본래 원만히 성취되어 있는 성품이 현현된 상태이다.

본래의 자성청정세계ㆍ진여 법성이 전의(轉依)에 의해 드러난 세계,  깨달음의 세계  자체인 것이다.

 

若無法身,應無受用身,譬如眼識.

만약 법신(法身)이 없다면 마땅히 수용신(受用身)도 없어야 하나니, 수용신(受用身)은 법신에 의지하면서 불국토에서 법락을 향수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안식과 같은 것으로, 안근이 있기 때문에 안식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應知此中所依`能依,爲同法喩.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중에서 의지처인 소의(所依)와 능히 의지하는 것의 능의(能依)를 동일한 법의 비유로 삼은 것이다, 

ㅡ감각기관의 근(根) 의지처인 소의(所依)이고 식이 의지의 주체인 능의(能依) 것과 같이 법신(法身)과 자성신(自性身)도 역시 각각 소의(所依)와 능의(能依)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若無受用身,已入大地諸菩薩衆,應無受用法樂;若無受用法樂,菩提資糧應不圓滿;譬如見色.

만약 수용신(受用身)이 없다면 이미 대지(大地), 즉 10지 중의 초지위(初地位) 들어간 모든 보살들에게는 법락을 수용할 수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 법락을 수용하는 일이 없다면 깨달음의 자량은 원만하지 않은 것이어야 할 것이니,

비유하면 빛깔(色)을 보는 것과 같은, 즉 안근에 의지하여 안식을 일으켜서 빛깔(色)을 봄으로써 인식작용이 완료되는 것과 같은 뜻이다.

 

*수용신(受用身), 수용(受用) 향수(享受) 의미이다. 보살이 오랜 세월 동안 수행하여 청정국토와 대법락(大法樂) 향수함을 말하는 것으로, 수용신은 복덕과 수행을 닦아서 성취되는 불신(佛身)으로서, 스스로 대승 법락을 향수할 뿐만 아니라 지상(地上) 보살을 위해 대승법을 설하여 법락을 수용하게도 한다.

 

若無化身,勝解行地諸菩薩衆`諸聲聞等劣勝解者,最初發趣皆不應有, 是故決定應有三身.

顯於大乘,異聲聞乘者,聲聞乘中,不說此故.又顯最勝者,顯大乘中,此亦最勝.

만약 화신(化身)이 없다면 승해행지(勝解行地)의 모든 보살들, 모든 성문등 승해가 열등한 자가 최초로 발심하여 나아감은 모두 없어야 한다. 따라서 결정적으로 마땅히 3신(身)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승이 성문승과 다른 것을 나타낸다’는 것은, 성문승에서는 이러한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을 나타낸다’는 것은 대승 안에서도 이것이 역시 가장 뛰어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승해행지(勝解行地), 10주(住)·10행(行)·10회향(廻向)을 닦는 지위로서 자량을 쌓고 가행하는 시기이다.  

아직 유식의 진여를 증득하지 못하였으나 승해(勝解)의 힘에 의지해서 여러 가지 뛰어난 수행으로 자량위와 가행위에 든 것을 승해행지(勝解行地)라고 한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1권 3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 총표강요분(總標綱要分) 3

 

ㅡ아비달마(阿毘達磨, 논장)을 해석한다.

對故`數故`伏故`通故`應知名阿毘達磨. 謂阿毘達磨,亦名對法, 此法對向無住涅槃,能說諦`菩提分`解脫門等故.

阿毘達磨,亦名數法, 於一一法數數宣說訓釋言詞, 自相`共相等, 無量差別故.

阿毘達磨, 亦名伏法, 由此具足論處所等,能勝伏他論故.

阿毘達磨,亦名通法, 由此能釋通素怛纜義故.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상대함의 대(對)이기 때문이고, 헤아리는 수(數)이기 때문이며, 

조복의 복(伏)이기 때문이고, 통달이기 때문에 아비달마(논장)라고 이름한다. 

또한 아비달마(논장)를 대법(對法)이라 이름하는 것은,  법이 무주열반(無住涅槃)을 향하는 것으로,

능히 4성제ㆍ37가지 보리분법ㆍ삼해탈문(三解脫門) 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아비달마(논장)를 또한 헤아림의 수법(數法)이라 이름하는 것은, 하나하나의 법에 대해서 용어의 자상(自相)ㆍ공상(共相) 등의 수많은 차이를 누누이 널리 해석하여서 설명하기 때문이며,  

아비달마(논장)를 역시 조복의 법인 복법(伏法)이라 이름하는 것은, 이것이 갖춘 논처소(論處所, 칠인명七因明)로써 능히 다른 논을 승복시키기 때문이며,  

아비달마(논장)를 역시 통달의 통법(通法)이라 이름하는 것은, 이로 인하여 능히 소달람(素怛纜, 경전)의 의미를 해석하고 통달하기 때문이다.

 

*무주열반(無住涅槃), 무주처열반ㆍ무주상열반이라고도 하며, 진여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모두 벗어난 열반으로, 본래자성청정열반ㆍ유여의열반ㆍ무여의열반ㆍ무주처열반의 4 가지 열반에서 최상의 경지이다.

대지(大智)이므로 생사에 머물지 않고 대비(大悲)이므로 열반에 안주하지 않으나,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일을 미래세가 다할 때까지 할지라도 항상 고요하기 때문에 열반이라 이름한다.

*삼해탈문(三解脫門), 해탈에 들어가는 세 가지 선정으로, 

첫째, 공해탈문(空解脫門)은 사람과 법의 본성이 공함을 관조하는 것이고, 

둘째,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은 차별상을 떠나는 것이고, 

셋째,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은 원하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자상(自相)은 그것만의 고유하고 특수한 상으로서 불공상(不共相)이라고도 하고,

*공상(共相)은 다른 것과 공통되는 일반적인 상을 말하는 것으로, 낱낱의 색법의 공상은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 등이고, 또한 승의제(勝義諦)인 진여는 유위법의 진실한 성품으로서 모든 법에 공통되는 보편적인 것이므로 공상이라고 한다.

*논처소(論處所), 유가사지론』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칠인명(七因明)을 가리키는 것으로, 논의를 결택함에 있어서의 일곱 가지의 요건을 말한다.

첫째는 논의(論義)의 체성(體性), 둘째는 논의의 처소, 셋째는 논의의 의지처인 소의(所依),

넷째는 논의의 장엄, 다섯째는 논의에 지는 타부(墮負), 여섯째는 논의의 벗어나는 출리(出離),

일곱째는 논의의 다소작법(多所作法)이다.

 

 비나야장(毘奈耶藏, 율장)을 해석한다.

犯罪故`等起故`還淨故`出離故, 應知名毘奈耶. 此中犯罪者,謂五衆罪. 等起者,謂無知故

`放逸故`煩惱盛故` 不尊敬故, 而犯諸罪. 還淨者,謂由意樂, 不由治罰, 如受律儀.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범죄(犯罪)이기 때문이고, 함께 일어나는 등기(等起)이기 때문이며, 

다시 청정하여지는 환정(還淨)이기 때문이고, 벗어남의 출리(出離)이기 때문에 율장이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죄를 범한다는 범죄(犯罪)는 다섯 가지의중죄(五衆罪)를 말하며,

함께 일어나는 등기(等起) 무지하기 때문이고, 방일하기 때문이며, 번뇌가 치성하기 때문이고,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며,  

다시 청정해진다는 환정(還淨)이란, 벌로 다스려서 율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지로써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등기(等起)는 범어 samutthāna의 번역어로서, 신(身)ㆍ구(口)ㆍ의(意)의 3업(業)에서 의업(意業)이 원인이 되어서 신업과 구업을 이끌어 내어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중죄(衆罪), 비구ㆍ비구니의 죄를 다섯 부문의 오과(五科)로 분류한 것으로,

째, 바라이(波羅夷)는 살생ㆍ음행 등 가장 무거운 죄로서 다시는 비구ㆍ비구니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승잔(僧殘)은 이 죄를 범하면 죽게 되어 있으나 겨우 목숨이 살아남아 있는 정도의 죄로서, 대중에게 참회하고 남은 생명을 보존한다.

셋째, 바일제(波逸提)는 지옥에 떨어지는 죄이다.

넷째, 바라제제사니(波羅提提舍尼)는 다른 비구ㆍ비구니에게 참회하면 없어짐을 받는 죄이다.

다섯째, 돌길라(突吉羅)는 그 지은 바가 나쁘지만 가장 가벼운 죄이다.

 

出離者, 有七種:一各各相對,說悔所犯;二誓受治罰,謂授學等;三等有妨害,先制學處.後由異門,還復開許;

四別更止息,謂僧和合,還捨所制;五轉依,謂苾芻苾芻尼轉男女形故,捨不共罪;

六由眞實觀,謂作殊勝法殟柁南諸行相觀;七由法爾得,謂由見諦法爾,得無小隨小罪. 殟 병들 온

벗어남의 출리(出離) 일곱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각각 서로 대해서 범한 바를 말로써 참회하는 것이고, 

둘째는 벌의 다스림으로써 맹세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니, 이른바 백중학(百衆學, 응당학) 등을 주는 것이다. 

셋째는 방해가 있으면 먼저 학처(學處, 계율)을 제정하고 나중에 이문(異門)에 의거해서 다시 열어서 허락하는 것이며,

넷째는 별도로 다시 멈추게 하는 것으로, 대중이 화합해서 제어한 바를 다시 버리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는 의지처를 바꾸는 전의(轉依)이니, 비구ㆍ비구니가 남녀의 입장을 따라 공통되지 않은 불공죄(不共罪)를 버리는 것을 말하며,  

여섯째는 참다운 관법의 진실관(眞實觀)에 의거하는, 이른바 뛰어난 수승법(殊勝法)인 온타남(殟柁南, 울타남鬱陀南, 법인)의 모든 작용에 대해 관찰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에 의한 것이니, 이른바 4성제를 관찰함으로써 부수되는 작은 죄가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백중학(百衆學), 응당학(應當學)이라고도 하며, 돌길라(突吉羅)죄의 계법이다.

비구ㆍ비구니의 복장ㆍ위의ㆍ식사 등에 관한 세칙을 규정한 것을 중학(衆學)이라 하며, 그 수가 많아서 범하기 쉽고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항상 학습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중학이라 한다.

지금은 그 중에서 백 계(戒)만을 들어서 백중학이라 한다.

*불공죄(不共罪), 비구ㆍ비구니의 어느 한 편의 입장에서 규정된 남여의 공통되지 않은 죄과(罪過)이다.

*온타남(殟柁南), 즉 울타남(鬱陀南)은 범어 udāna의 음역으로서, 울타나(鬱陀那)라고도 한다.

① 12部經의 하나의 무문자설(無問自說)

② 사법인(四法印)ㆍ집시(集施)로 번역하며, 많은 의미를 함축한 게송을 말한다. 사법인(四法印)은 제행무상(諸行無常)ㆍ일체개고(一切皆苦)ㆍ제법무아(諸法無我)ㆍ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應知毘奈耶復有四義:一補特伽羅故,世尊依彼制所學處;

二制立故,謂告曰:彼補特伽羅所犯過已,大師集僧制所學處;三分別故,謂制學處已,更廣解釋先所略說;

四決擇故,謂於此中決判所犯,云何有罪`云何無罪.

율장에 다시  가지의 사의(四義)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보특가라(補特伽羅, 윤회하는 유정)이기 때문에 세존께서 그것에 의지해서 계율을 제정하신 것이며,

둘째는 제도를 건립하는 제립(制立)이니,  보특가라(윤회하는 유정)가 범한 허물을 고백하고 나서 대사(大師, 세존)께서 대중을 모이게 하여 계율을 제정한 것이며,

셋째는 분별(分別)이니, 계율을 제정하고 나서 앞에서 간략히 말한 내용 다시 자세히 해석한 것이며,

넷째는 결택(決擇)이니, 이른바  가운데 범한 바가 어느 것이 잘못이고 어느 것이 잘못이 없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보특가라(補特伽羅)는 범어 pudgala의 음역으로, 구역에서는 인(人)ㆍ중생ㆍ유정(有情)으로,

신역에서는 삭취취(數取趣)로 번역된다. 유정이 누누이, 삭삭(數數) 5취(趣)를 취착(取着)해서 윤회하기 때문에 유정 또는 유정의 자아를 말하는 것이다.


▶今當釋本文.薄伽梵前者,顯有所敬,故無異言.

善入大乘者,是由已得陁羅尼等,勝功德義, 顯已得此諸功德故, 於義於文, 能正任持`能正開示,如是名菩薩.

爲何義故說? 爲顯大乘體大故說. 所言顯者, 開發大乘實有大體. 依大乘者,依止大乘而起所說.

有十相殊勝殊勝語者, 謂卽由彼十種殊勝所殊勝語, 名十相殊勝殊勝語. 此殊勝言是差別義,

兩互相待, 如言此義殊勝於彼. 又最上義, 是殊勝義, 或是異類謂義, 因殊勝故,語果是殊勝.

今當說此十種別相.

▷이제부터 본문을 해석하겠다;

‘박가범(薄伽梵, 세존) 앞에서’는 공경함이 있기 때문에 다른 말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대승에  들어간다는 선입대승(善入大乘)’이란, 이미 다라니 등의 뛰어난 승공덕(勝功德)의 뜻을 얻음으로써, 이 모든 공덕 얻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니, 의미에 대해서도, 문장에 대해서도 능히 바르게 지니고, 능히 바르게 열어 보이는, 이와 같은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무슨 의미를 위해서 설하는 것인가? 대승 자체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설하는 것이다. 

‘나타낸다는 현(顯)’이라 말하는 것은 대승의 참존재인 대승실유(大乘實有)의 위대한 대체(大體)를 드러내는 것이며, 

‘대승에 의지한다는 의대승(依大乘)’이란, 대승에 의지해서 하여야  말을 하는 것이며, 

‘열 가지 십상(十相)의 수승(殊勝) 수승어(殊勝語)가 있다’는 것은,   가지 뛰어난 것과 뛰어난 말로 인하여  가지 상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라고 이름하는 것을 말하며,

 뛰어남의 수승(殊勝)이란 차별된 의미가 서로 상대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의 뜻이 그것의 뜻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최상의 의미인, 최상의(最上義)가 수승의 뜻이며,

혹 다른 부류가 뛰어나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그 원인이 뛰어난 인수승(因殊勝)이기 때문에 그 말의 결과도 뛰어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리(義理)를 표현하고 언어로 되었기 때문에, 의미(義)는 원인이고 말(語)은 결과인 것이다.

이제   가지의 개별적인 별상(別相)을 설명한다.

 

論曰:一者所知依殊勝殊勝語` 二者所知相殊勝殊勝語` 三者入所知相殊勝殊勝語`

四者彼入因果殊勝殊勝語` 五者彼因果修差別殊勝殊勝語` 六者卽於如是修差別中增上戒殊勝殊勝語`

七者卽於此中增上心殊勝殊勝語` 八者卽於此中增上慧殊勝殊勝語` 九者彼果斷殊勝殊勝語`

十者彼果智殊勝殊勝語.由此所說,諸佛世尊,契經諸句,顯於大乘眞是佛語.

▷논문에서; 첫째는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의 수승인 소지의수승(所知依殊勝)과 뛰어난 말의 수승어(殊勝語)이고,

둘째는 알아야 할 상(相)의 뛰어남인 소지상수승(所知相殊勝)과 수승어(殊勝語)이고,

셋째는 알아야 할 상(相)에 들어감에 뛰어난, 입소지상수승(入所知相殊勝)과 수승어이고,

넷째는 유식에 들어가는 원인과 결과에 뛰어난, 입인과수승(入因果殊勝)과 수승어이고,

다섯째는 유식에 들어가는 원인과 결과의 수행에 차별됨에 뛰어난 인과수차별수승(因果修差別殊勝)과 수승어이고,

여섯째는 이와 같은 수행의 차이 중에서 매우 높은 계율의 뛰어남인, 증상계수승(增上戒殊勝)과 수승어이며,

일곱째는 이 가운데 매우 높은 마음이 뛰어난, 증상심수승(增上心殊勝)과 수승어이고,

여덟째는 이 가운데 매우 높은 지혜의 뛰어남인, 증상혜수승(增上慧殊勝)과 수승어이며,

아홉째는 그것의 증과인 단멸 즉, 열반의 뛰어남인, 과단수승(果斷殊勝)과 수승어이고,

열째는 그것의 증과인 지혜인 보리(菩提)에 뛰어난, 과지수승(果智殊勝)과 수승어이다.

여기서 설한 바는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경전의 모든 문구로써 대승이 참으로 부처님 말씀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과단(果斷)을 열반, 단과(斷果)를 보리(菩提)라 한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1권 2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 총표강요분(總標綱要分) 2

 

今造此論,有所用者,爲欲開曉無知者故.爲顯法門別名故 擧阿毘達磨, 爲顯通名故擧經言,

爲簡聲聞阿毘達磨,復擧大乘.

지금  논서를 짓는 이유는 무지한 자를 깨우치기 위해서이고, 

법문에 대하여 별도의 명칭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비달마(阿毘達磨, 논장)’를 들고, 

공통된 명칭의 현통명(顯通名)을 나타내기 위해서 ‘경(經)’이라는 용어를 들며,  

다시 성문의 아비달마와 구별하기 위해서 다시 ‘대승(大乘)’이라는 말을 든다.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논 論) 또는 아비담마(Abhidhamma), 대법(對法: abhi + dharma = 對 + 法)이다.

대법(對法)은 승의법(勝義法)인 열반을 대향(對向)하고 법상법(法相法)인 4성제를 대관(對觀)한다는 뜻이다.

범어 abhidharma의 음역으로 아비담(阿毘曇)ㆍ비담(毘曇)이라고도 한다. ‘교법에 대한 연구’의 의미로서 대법(對法)ㆍ무비법(無比法)ㆍ승법(勝法)ㆍ논(論)으로 번역한다.
구사론(俱舍論)에 따르면, 아비달마(대법)은 승의의 아비달마(勝義阿毘達磨)와 세속의 아비달마(世俗阿毘達磨)의 2가지로 나뉜다
아비달마는 법(法) 즉 부처님이 설한 교법에 대한 연구와 해석을 말하는 것으로서, 협의의 아비달마는 부파불교의 여러 논(論, sastra), 즉 논서(論書)들을 뜻하며, 오랫동안에 걸쳐서 많은 논(論)들이 만들어지고 후일에 정비되어 논장(論藏)이 되었다. 경(經) · 율(律)은 부처님의 활동 당시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나, 논(論)은 부처님 입멸 후 제자들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논(論)의 저술은 부파 불교(部派佛敎) 시대의 특징 중 하나로 각 부파는 부처님의 교법에 대한 해석 · 주석과 거기에서 도출된 설법의 해석에 의거하여 자파(自派)의 교리학설을 체계적으로 수립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각 부파에 따라 상이(相異)한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틀에 박힌 해석 방법이 교법 자체의 생명력을 잃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ㅡ위키

 

由今亦有非聖所說阿毘達磨, 如現有人,自尋思慧, 謂是佛說阿毘達磨` 或聲聞說`或世智造.

又言大乘素怛纜者, 爲欲顯示異聲聞等, 爲欲顯示菩薩藏攝故, 復擧其阿毘達磨.

又藏攝者,謂入自宗素怛纜藏, 現滅自惑. 毘奈耶藏,卽大乘中,菩薩煩惱,

以諸菩薩種種分別,爲煩惱故. 不違最勝阿毘達磨, 廣大甚深爲其相故.

요즈음 성인이 말씀하신 아비달마(논장)가 아닌 것이 있기 때문이니,

어떤 사람이 스스로 헤아려 아는 얕은 지혜로써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아비달마이다. 혹은 성문이 말한 것이라거나 혹은 세속의 지혜로 지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등이다. 

또한 대승의 소단람장(素怛纜藏, 수다라, 경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문 등과 다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보살장에 포섭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대승 아비달마를 드는 것이니,  

또한 장(藏)에 포섭된다는 것이란, 자기 종파의 경장인 소단람장(素怛纜藏)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 스스로의 미혹을 소멸하는 것이다.

비나야장(毘奈耶藏, 율장)은 대승 안에서는 보살의 번뇌를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보살은 갖가지 분별을 번뇌로 삼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아비달마에 위배되지 않으니, 광대하고 매우 심오함을  상(相)으로 삼기 때문이다.

 

수다라(修多羅)는 범어 sūtra의 음역으로서, 소달람(素怛纜)이라고도 하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법을 말한다. 경전인 정경(正經)ㆍ계경(契經), 즉 경전의 뜻이 위로는 진리에 계합하고 아래로는 중생의 마음에 맞고 뜻에 합당하며, 의리(義理)를 꿰어 중생을 잡아 거둔다는 뜻으로 의역(意譯)한다.

비나야(毘那耶)는 범어 vinaya의 음역으로서, 비나야(毘奈耶)ㆍ비니(毘尼)라 하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율을 말하는 것으로, 율(律)ㆍ멸(滅)ㆍ조복(調伏)이라 의역한다.

 

此中三藏者,一素怛纜藏`二毘奈耶藏`三阿毘達磨藏.如是三藏,下乘`上乘有差別故,則成二藏:一聲聞藏`二菩薩藏.此三及二,何緣名藏?由能攝故,謂攝一切所應知義.

여기에서 3장(三藏)이란,

첫째는 경장의 소단람장(素怛纜藏, 수다라)이고, 

둘째는 율장의 비나야장(毘奈耶藏)이며, 

셋째는 논장의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이다. 

이와 같은 3장은 뛰어난 교법과 열등한 교법으로 차이가 있는 까닭에 2장(二藏)으로 나뉘나니,

첫째는 성문장이고, 둘째는 보살장이다. 

  종류와  종류는 무슨 인연으로 장(藏)이라 부르는 것인가? 

능히 포섭하기 때문이니, 이른바 마땅히 알아야  모든 의미를 포섭한다는 것이다.


復由何緣,建立三藏?由九種緣, 謂爲對治疑惑立素怛纜藏, 若於彼彼義中,有疑惑者, 卽爲決定宣說彼彼義故;

爲對治二邊受用,立毘奈耶藏, 謂遮有罪著欲樂邊受用故, 及開無罪不自苦邊受用故;

爲對治自見取執,立阿毘達磨藏,顯照諸法無倒相故.

또한 무슨 이유로 3장(三藏)을 건립하는 것인가? 9 가지의 구종연(九種緣)에 의해서이다. 

하나, 이른바 의혹을 다스리기 위해서 경장을 건립한 것이니, 만약 그 의미들에 대해서 의혹이 있다면,  의미들을 결정하여 널리 설명하는 까닭이며,

둘, 두 가지 극단적인 쾌락행과 극단적인 고행의 수용(受用)을 다스리기 위해서 비나야장(毘奈耶藏, 율장)을 건립한 것이니, 이른바 과실이 있는 욕락에 집착하는 극단적인 수용을 막기(遮) 위해서이고, 

과실이 없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극단적인 고행의 수용이 아니라는 것을 열어(開)주기 위해서이다. 

셋, 스스로의 견해에 지나치게 집착함을 다스리기 위해서 아비달마(논장)을 건립하나니, 제법의 전도됨이 없는 상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막을 차(遮)는 유죄(有罪)로 규정해서 금한다는 의미이다. 즉, 극단적인 쾌락행을 금한다는 뜻이다.

연다는 (開)는 무죄(無罪)로 규정해서 허용한다는 의미, 즉, 자신을 괴롭히는 극단적인 고행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又能說三學故,立素怛纜藏;能成辦增上戒`增上心故,立毘奈耶藏, 謂具尸羅卽無悔等, 漸次能得三摩地故;

能成辦增上慧故,立阿毘達磨藏,謂能決擇無倒義故.

넷, 또한 능히 계율(戒)ㆍ선정(定)ㆍ지혜(慧)의 3학(三學)을 말하기 위해서 소단람장(素怛纜藏, 경장) 건립하고,

다섯, 능히 매우 높은 계율의 증상계(增上戒)과 매우 높은 마음의 증상심(增上心)을 이루기 위해서 비나야장(毘奈耶藏, 율장) 건립하나니, 이른바 계(戒, 시라尸羅)를 구족하면  후회 등이 없고, 점차 능히 삼마지(三摩地, 등지)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여섯, 또한 능히 매우 높은 지혜의 증상혜(增上慧)를 이루기 위해서 아비달마(논장)를 건립하나니, 전도됨이 없는 의미를 능히 결택하기 위해서이다.

 

시라(尸羅)는 범어 śila의 음역으로서, 보통 계(戒)라고 번역된다.

삼마지(三摩地), 범어 samādhi의 음역으로서 정(定)ㆍ등지(等持)라고 번역한다. 일반적으로 삼매(三昧)라는 음역어를 사용하며,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해서 망념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정위(定位)ㆍ산위(散位)에 통하지만, 유심위(有心位)에만 통하고 무심위(無心位)에는 통하지 않는다.


又能說法義故,立素怛纜藏;能成滿法義故,立毘奈耶藏, 謂爲調伏煩惱勤修行者,便於此二能通達故;

能於法義決擇善巧故,立阿毘達磨藏.由此九緣,許立三藏.

일곱, 또한 능히 법과 그 의미의 법의(法義)를 말하기 위해서 소단람장(素怛纜藏, 경장)을 건립하고,

여덟, 법의(法義) 원만히 이루기 위해서 비나야장(毘奈耶藏, 율장)을 건립한 것이니, 이른바 번뇌를 조복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하는 이는   가지에 대해서 능히 통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홉, 법의(法義)에 대해서 결택을  하기 위해서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 논장)을 건립한 것이니,

이러한 아홉 가지의 이유로 인해서 3장을 건립한 것이다.

 

又此皆爲解脫生死.此復云何能得解脫?熏`覺`寂`通,故得解脫. 謂由聞熏習心故`

由思覺悟故` 由修奢摩他寂靜故`由證毘鉢舍那通達故,能得解脫.

또한 이것은 모두를 생사에서 해탈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어떻게 해탈할  있다는 것인가? 

훈습함(薰)ㆍ깨침(覺)ㆍ고요함(寂)ㆍ통(通)함으로 인하여 해탈할  있으니,

이른바 바른 가르침을 들음으로써 마음에 훈습되는 문훈습(聞熏習)이 되기 때문이고, 

사유함으로써 깨닫는 각오(覺悟)를 할 수 있기 때문이며,

사마타(奢摩他, śamatha,  지 止)를 닦음으로써 정적(寂靜)하기 때문이며,

위빠사나(毘鉢舍那, vipaśyanā, 관 觀)를 증득함으로써 통달하기 때문에 해탈할  있는 것이다.

 

사마타(奢摩他), 범어 śamatha의 음역으로서, ‘고요ㆍ평온’의 의미이다. 지(止)ㆍ지식(止息)ㆍ적정(寂靜)ㆍ능멸(能滅)이라고 의역한다. 선정삼매를 본질로 하며 삼매(三昧, 삼마지三摩地)ㆍ정(定)으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한다. 정신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정신통일의 상태인 심일경성(心一境性)에서 신체와 마음의 평안함의 경안(輕安)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사마타를 행함으로써 8선정(색계 4ㆍ무색계 4)을 이루고 5신통(神通)을 성취할 수 있으나, 누진통(漏盡通)은 위빠사나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다.

위빠사나(毘鉢舍那, vipaśyanā)는 ‘꿰뚫어 봄’ㆍ‘통찰’ㆍ‘관찰’의 의미로서, 관(觀)ㆍ관찰ㆍ견ㆍ능견(能見)으로 번역한다. 사마타(止)에 의해 심신의 평안함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몸과 마음의 현상으로부터 연기ㆍ무아ㆍ중도ㆍ진여의 이법(理法)을 통찰한다. 위빠사나에 의해 8선정이 완전함을 이루게 되고, 멸진정(滅盡定)이 가능해진다.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완전히 소멸하고 견성ㆍ해탈ㆍ열반을 성취한다.


又若略說,此素怛纜`毘奈耶`阿毘達磨藏各有四義, 菩薩於此若具了知,則能證得一切智性;

聲聞於此雖但解了一伽他義,亦得漏盡.

또한 간략히 말한다면,  소단람장(素怛纜藏, 경장)ㆍ비나야장(毘奈耶藏, 율장)ㆍ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 논장)에 각각 4 가지 뜻의 사의(四義)가 있으니, 보살은 이에 대해서 갖추어 분명히 알게 되면  능히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의 일체지성(一切智性)을 증득하고,

성문은 다만 하나의 가타(伽他, 게송)의 뜻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역시 번뇌가 다하는 누진(漏盡, 아라한과)을 얻는다.

 

가타(伽他)는 범어 gāthā의 음역으로서, 풍송(諷頌)ㆍ게송(偈頌) 등으로 번역한다. 12부경(部經)의 하나로서 운문의 형식을 취한 경문(經文)이며, 흔히 교설의 끝부분에 서술되어 있다. 

산문 형식의 경문의 의미를 거듭 말하는 게송, 기야(祇夜), 중송(重頌)과 구별하기 위해서 고기송(孤起頌)이라고도 한다.

누진(漏盡), 번뇌가 완전 소멸한 무루(無漏)의 성과(聖果)인 아라한과이며, 이로써 생사윤회의 흐름이 그치게 된다.

 

云何此三各有四義? 謂能貫穿,依故`相故`法故`義故,名素怛纜.

此中依者,謂於是處, 由此爲此,而有所說. 相者,謂世俗諦相`勝義諦相.

어찌하여 경ㆍ율ㆍ논의 세 가지의 각각에 사의(四義)가 있는 것인가?

능히 꿰뚫는다는 능관천(能貫穿)이란,  의지처(依)이기 때문이고, 상(相)이기 때문이며, 법(法)이기 때문이고, 의미(義)이기 때문에 소단람장(素怛纜藏, 경장)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의지처(依)  장소(處)에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이러한 것을 위해서 말씀하신 바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상(相) 세속제(世俗諦)의 상과 승의제(勝義諦)의 상을 말하는 것이다. 

 

능관천(能貫穿), 경ㆍ율ㆍ논 3장을 분명히 알게 되면 능히 모든 것을 꿰뚫어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法者,謂薀`界`處`緣起`諦`食`靜慮`無量`無色`解脫`勝處` 遍處`菩提分`無㝵解`無諍等.義者,謂隨密意. 

법(法) 5온(五蘊)ㆍ12처(十二處)41)ㆍ18계(十八界)ㆍ12연기(十二緣起)ㆍ4성제(聖諦)ㆍ4식(四食)ㆍ

정려(靜慮)ㆍ네 가지 무량한 마음의 사무량심(四無量心)ㆍ무색계ㆍ해탈ㆍ뛰어난 곳의 승처(勝處, 팔승처) 

ㆍ두루하는 곳의 변처(遍處)ㆍ37보리분법(菩提分法)ㆍ4무애해(無碍解)ㆍ번뇌가 없는 무쟁(無諍) 등을 말하며,

뜻의 의(義) 부처님의 비밀스러운 본래의 뜻인, 밀의(密意)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ㅡ여기에서의 밀의(密意) 교설에 함축되어 있는 부처님의 본래 취지를 말한다.

 

*5온(五蘊)은 현상계의 모든 존재인 유위법(有爲法)을 다섯 가지 요소인 온(蘊)으로 분류한 것이다. 

색온(色蘊)은 물질(신체와 자연계), 수온(受蘊)은 감수작용, 상온(想蘊)은 표상ㆍ개념화 작용, 행온(行蘊)은 짓고 유지하는 작용, 식온(識蘊)은 식별작용 또는 식별작용의 주체이다. 

유정의 심신은 이 다섯 요소가 잠정적으로 모여서 이루어진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으로서 나(我)라고 집착할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12처(十二處)는 일체법을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12가지 요소로 분류한 것이다. 

이에 눈의 안근(眼根)ㆍ귀의 이근(耳根)ㆍ코의 비근(鼻根)ㆍ혀의 설근(舌根)ㆍ몸의 신근(身根)ㆍ의지의 의근(意根)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 육내처 6內處)

물질의 색경(色境)ㆍ소리의 성경(聲境)ㆍ냄새의 향경(香境)ㆍ맛의 미경(味境)ㆍ감촉의 촉경(觸境)ㆍ법의 법경(法境)의 여섯 가지 대상인 육경(六境, 육외처 6外處)이다.

*18계(十八界), 계(界)는 부류ㆍ층ㆍ종족이라는 의미이고, 일체법을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으로 분류한 것이다.

*12연기(十二緣起), 12지연기(支緣起)ㆍ12인연(因緣)이라 하며,

현상세계에서 인간이, 특히 인간의 괴로움이 존재하게 되는 방식을 열두 단계로 설명한 것이다.

진리에 대한 무지인 무명(無明) →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형성작용의 행(行)

식별작용ㆍ윤회의 주체인 식(識) →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인 명색(名色)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의지의 6입(六入) → 6根과 6境과 6識의 화합인 촉(觸)

감수작용의 수(受) →갈애의 애(愛) → 애(愛)의 대상에 대한 집착하는 취(取)

생사하는 존재 자체의 형성의 유(有) → 태어남ㆍ삶의 생(生)

늙고 죽음ㆍ근심ㆍ슬픔ㆍ고뇌 등의 괴로움의 노사우비뇌고(老死憂悲惱苦)이다.

*4식(四食)은 유정의 신명(身命)을 유지시키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음식작용물이다. 

첫째, 단식(段食, 團食)은 밥이나 나물처럼 형체가 있는 음식으로서, 이것을 쪼개고 으깨는 분분단단(分分段段)하여 먹어서 능히 신명을 무너지지 않게 한다.

둘째, 촉식(觸食)에서 촉(觸)은 육식(六識)에 상응하는 심소(心所, 심리작용)으로, 사랑할 만한 대상에 접촉할 때 희락의 쾌감을 일으켜서 신체를 이롭게 하기 때문에 능히 음식작용물의 뜻이 있게 된다.

셋째, 의사식(意思食) 또는 사식(思食)에서, 의사는 의식에 상응하는 사(思)의 심소이며, 이 심소가 욕구(欲) 등의 심소를 동반해서 사랑할 만한 대상을 희구해서 심신을 자양(滋養)하기 때문이다.

넷째, 식식(識食)은 앞의 세 가지 음식작용물의 세력에 의해서 증장할 수 있고, 이 식이 모든 감각기관이나 4대(大)를 장양(長養)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정려(靜慮), 범어 dhyāna의 의역(意譯)으로서, 선나(禪那)ㆍ선(禪)ㆍ사유수(思惟修) 등이라고도 하며,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오로지 기울여서 자세히 사유하는 것으로서, 정(定)과 혜(慧)가 균등하다. 

정려라는 용어는 현장의 신역(新譯)이다.

*4무량심(四無量心)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으로, 무량한 중생을 상대로 하고, 또한 무량한 복과를 얻기 때문에 무량(無量)한다.

자(慈)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비(悲)는 괴로움을 없애 주는 것이며,

희(喜)는 남이 즐거워함을 보고 같이 즐거워함이고,

사(捨)는 남에 대해서 애증원친(愛憎怨親)의 마음이 없이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승처(勝處)는 제입(制入)ㆍ제입(除入)ㆍ제처(除處)라고도 하며, 대경(對境)을 제복(制伏)하여 자재를 얻는 차이에 따라 여덟 단계로 나누어서 8승처라고 한다. 즉, 욕계의 볼 수 있는 대상, 즉 색상(色想)인 색처(色處)를 관찰함으로써 이를 이겨내고서 탐욕을 제거하는 여덟 단계이다.

 색상(色想)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색처(色處)의 일부분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이겨서 탐욕을 없애고, 

 다시 색처의 대부분에도 이겨낸다. 

 마음속에 색처가 멸했으나 다시 색처의 일부분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이겨낸다. 

 다시 색처의 대부분도 이겨낸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 색상이 없고 다시 대경(對境)의 색채의 청(靑)ㆍ⑥ 황(黃)ㆍ⑦ 적(赤)ㆍ⑧ 백(白)을 관찰하여 이것도 이겨낸다. 

이중에서 ①②③④는 초선(初禪)과 제2선에 의하고, ⑤⑥⑦⑧은 제4선에 의한다. 

또한 ①②는 8해탈(解脫)의 제1, ③④는 제2, ⑤⑥⑦⑧은 제3에 해당한다. 

참고로 8해탈은 탐심은 버리지만 아직 자재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변처(遍處)는 변입(遍入)ㆍ일체입(一切入)ㆍ변처정(遍處定)이라고도 하며, 구체적으로 지(地)ㆍ수(水)ㆍ화ㆍ풍ㆍ청ㆍ황ㆍ적ㆍ백ㆍ공(空)ㆍ식(識)의 열 가지 법이 일체의 온갖 장소에 널리 퍼져서 틈이 없다고 관찰하는 열 가지 관법(觀法)ㆍ관상(觀想)이다. 십법은 각각 지변처(地遍處)ㆍ수변처(水遍處) 등으로 말하며, 이 관법은 8해탈ㆍ8승처를 닦은 다음에 행한다.

*37보리분법(菩提分法)은 37조도품(助道品)이라고 하며,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을 실현하는 지혜를 얻기 위한 37가지의 실천수행법으로, 4념주(念住)ㆍ4정단(正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正道)가 있다.

*4무애해(四無碍解), 4무애지(無碍智)ㆍ4무애변(無碍辯)이라 하며,

마음의 측면에서는 지(智)ㆍ해(解)라 하고, 입의 방면에서는 변(辯)이라 한다. 

첫째, 모든 교법에 통달한 법무애(法無碍),

둘째, 모든 교법의 요의(要義)를 아는 의무애(義無碍),

셋째, 여러 가지 말을 알아서 통달하지 못함이 없는 사무애(辭無碍),

넷째, 일체 교법을 말하는 데 자재한 요설무애(樂說無碍)이다.

*무쟁(無諍), 쟁(諍)은 다툰다는 의미로서 번뇌의 이명(異名)이다. 

무쟁은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탐욕ㆍ성냄 등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지혜이고,

또한 남의 번뇌를 쉬게 하는 힘이므로 부처님과 아라한만 갖고 있을 뿐, 다른 이는 아무도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뛰어난 덕력(德力)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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