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3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③ 2

 

▶論曰:復次生無色界,若離一切種子異熟識,染污善心應無種子,染污善心應無依持.

▷논문; 또한 무색계에 태어나서, 만약 일체종자의 이숙식(異熟識)을 여읜다면 염오심(染污心)과 선심(善心)은 마땅히 종자가 없어야 할것이고, 염오심과 선심이 의지할 곳 또한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다.


▶釋曰:生無色界者,謂已解脫.色染污善心者,謂能愛味及三摩地.應無種子者,謂應無因.應無依持者,謂應無依.

復有別義,謂此二心,若無種子, 從何而生? 若無依持,依何而轉?

阿賴耶識所攝受故,從自種生,爲所依故,令此能依,相續而轉.

▷해석한다; ‘무색계에 태어나는’ 것은 물질로부터의 해탈을 말하며,

‘염오심(染污心)과 선심(善心)’은 선정의 맛에 애착하는 것과 삼마지이며,

‘마땅히 종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마땅히 원인이 없어야 하는 것을 말하며,

‘마땅히 의지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마땅히 의지처가 없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다른 의미가 있으니, 염오심과 선심, 두 가지 마음에 만약 종자가 없다면 무엇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만약 의지할 곳이 없다면 무엇에 의지해서 전전하는 것인가? 

아뢰야식이 섭수함으로써, 스스로의 종자로부터 생겨나고, 의지처가 됨으로써, 능히 의지하는 것으로 하여금 상속해서 전전하게 하는 것이다.


▶論曰:又卽於彼,若出世心,正現在前,餘世閒心,皆滅盡故,爾時,便應滅離彼趣.

▷논문; 또한, 만약 그곳에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심(出世心) 바로 현전한다면, 나머지 세간심은  멸진한 까닭에, 그 때에는 바로 그 세계(趣)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釋曰:卽於彼界,若出世心,現在前時,除此所餘,是世閒心,彼世閒心,爾時皆滅.

如是彼趣便應永斷,不由功用,自然證得無餘涅槃.旣無此理,不應撥無阿賴耶識.

▷해석한다; 그 세계(界)에서 만약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심(出世心) 현전할 때, 이 출세심을 제외한 나머지는 세간심으로 그 세간심이 그 때에  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계(趣)는 문득 영원히 단절되기 때문에,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功用)에 의하지 않고 자연히 무여열반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마땅히 아뢰야식을 부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論曰:若生非想非非想處`無所有處,出世閒心,現在前時, 卽應二趣, 悉皆滅離.

此出世識,不以非想非非想處,爲所依趣,亦不應以無所有處,爲所依趣,亦非涅槃爲所依趣.

▷논문; 만약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무소유처(無所有處)에 태어나서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이 현전할 때에는 마땅히  세계를  여의어야 하는 것이니,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식(出世識)은 비상비비상처를 의지할 세계의 소의취(所依趣)로 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무소유처로써 의지할 세계의 소의취(所依趣)로도 삼지 않으며,

또한 열반을 의지할 세계의 소의취(所依趣)로 삼지도 않는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무색계의 제4천으로, 이 하늘은 삼계 최고의 위치이므로 유정천(有頂天)이라고도 한다. 이 하늘에 나는 이는 하지(下地)와 같은 거친 표상작용의 상(想)이 없기 때문에 비상(非想) 또는 비유상(非有想)이라 하나, 그러면서도 아직 미세한 표상작용이 있으므로 비비상(非非想) 또는 비무상(非無想)이라고 한다.

비유상(非有想)이므로 외도들은 이곳을 참다운 열반인 진열반처(眞涅槃處)라 하고, 비무상(非無想)이므로 불교에서는 이곳도 생사윤회의 범주에 넣는다.

무소유처(無所有處), 무색계의 제3천으로서, 제2천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서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의 공함을 관하여 무소유의 지혜를 얻어서, 그 수행한 힘으로 나게 되는 하늘이다.


▶釋曰:若生非想非非想處,或時起彼無所有處,出世閒心,令現在前,由彼處心極明利故.

又由非想非非想處,心闇鈍故,住於彼處,極明利心,起出世心,令現在前,

此出世心,不應以彼第一`第二爲所依趣,由彼二地,皆世閒故,

▷비상비비상처에 태어나서  어느 때는  무소유처의 출세간심(出世閒心)을 일으켜서 현전하게 하나니, 그 무소유처의 마음은 극히 밝고 예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비상비비상처의 마음은 어둡기 때문에, 무소유처의 극히 밝고 예리한 마음에 머물러서 출세간심 일으켜서 현전하게 하나니,  출세간심은 마땅히   번째의 비상비비상처와  번째의 무소유처로써 의지할 세계의 소의취(所依趣)로 삼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지위 모두는 세간이기 때문이다. 

 

又生餘地,起餘地心,現在前故,二所依趣,俱不應理.

또한 다른 지위에 태어나면 다른 지위의 마음을 일으켜서 현전하기 때문이니, 두 가지의 의지할 세계인 이소의취(二所依趣)와 함께 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다.

ㅡ이 마음은 명료하기 때문에 비상비비상처에 의지하지 않고, 이미 무소유처를 여의었기 때문에 무소유처도 역시  마음의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又卽此心,不應涅槃,爲所依趣,有餘依故.如是三種,爲所依趣,旣不得成,若不信有阿賴耶識,此出世心,何所依趣?

또한  마음은 열반을 의지할 세계의 소의취(所依趣)로 삼지 않으니, 업보의 과체(果體)가 있는, 유여의(有餘依)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상비비상처, 무소유처, 열반의  가지는 의지할 세계의 소의취(所依趣)로 삼을  없는 것이니,

만약 아뢰야식이 존재함을 믿지 않는다면, 어떠한 곳 출세심이 의지할 세계의 소의취(所依趣)가겠는가?


▶論曰:又將沒時,造善造惡,或下或上,所依漸冷. 若不信有阿賴耶識, 皆不得成.

是故若離一切種子異熟識者,此生雜染,亦不得成.

▷논문; 또한 장차 죽으려  때에는 지은 선과  때문에 혹은 아래부터 혹은 위로부터의 소의(所依, 의지처)가 점점 차가워지나니,

만약 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이러한 것 모두가 성립될  없으므로,

따라서 만약 일체종자의 이숙식을 여읜다면,  생의 잡염 역시도 성립될  없는 것이다.

생전에 선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임종할 식이 4()의 말단에서부터 머리쪽으로 점차 거두워지고, 반대로 악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머리부터 식어져서 점차 아래로 내려간다고 한다.


▶釋曰:將捨命時,造善造惡,或下或上,身分漸冷,以造善者,必定上昇,若造惡者,必定下墜.若

不許有阿賴耶識爲能執受,云何得有所依漸冷?阿賴耶識,能執受故,或下或上,如其次第,隨所捨處,身卽有冷.

▷해석한다; 장차 목숨을 버리려  때에는, 지은 선과  때문에 혹은 아래부터 혹은 위로부터 신체가 점차 차가워진다. 그리하여 선(善)을 지은 자는 반드시 위로 올라가고, 악(惡)을 지은 자는 반드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만약 아뢰야식이 존재하여 집수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소의(所依, 의지처) 점차 차가워질  있겠는가? 

아뢰야식이 능히 집수하기 때문에 혹은 아래부터 혹은 위로부터  차례대로 버린 곳을 따라서 신체가 차가워지는 것이다.


▶論曰:云何世閒淸淨不成?謂未離欲纏貪未得色纏心者, 卽以欲纏善心爲離欲纏貪故,勤修加行. 此欲纏加行心與色纏心,不俱生滅故, 非彼所熏,爲彼種子,不應道理.

▷논문; 어찌하여 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아직 욕전(欲纏, 욕계)의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색전(色纏, 색계)의 마음을 얻지 못한 자는, 욕계의 선심(善心)으로써 욕계의 탐욕을 여의기 위해서 가행(加行)하여 부지런히 닦는다. 

 욕계의 가행하는 마음과 색계의 마음은 함께 생멸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소훈(所熏, 훈습처)이 아닌 것이므로, 따라서 그것의 종자가 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又色纏心,過去多生,餘心閒隔,不應爲今定心種子,唯無有故. 是故成就色纏定心, 一切種子異熟果識, 展轉傳來, 爲今因緣, 加行善心,爲增上緣.如是一切離欲地中,如應當知.如是世閒淸淨,若離一切種子異熟識,理不得成.

또한 색계의 마음은 과거의 여러 생에서의 다른 마음들과 사이가 벌어져서, 지금은 선정의 마음인 정심(定心)의 종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색계 선정의 마음을 성취하는 일체종자의 이숙과식(異熟果識)이 전전하여서 전래하여 지금의 인연이 되고, 

가행의 선심(善心)이 증상연이 되는 것이다. 

욕락을 떠난 모든 지위에서도 마땅히 이와 같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세간의 청정은 일체종자의 이숙식을 여의고는 그 도리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ㅡ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말한, 제14 세간정장(14 世間淨章).

 

욕전(欲纏)은 재물욕ㆍ식욕ㆍ수면욕ㆍ음욕ㆍ명예욕의 세간 5욕락(欲樂) 등에 얽매인 욕계를 말한다.

색전(色纏)은 물질(色)에 얽매인, 색계이다.


▶釋曰:如世閒淸淨理不得成,今當顯示.謂爲遠離欲纏貪故,以欲纏善心,修加行時,卽此欲纏加行善心,未曾爲彼色纏善心之所熏習,不俱生滅故,今色纏心,應無種子,自然而生. 又過去世色纏善心,多生所閒`餘識所隔,唯無有故`已過去故, 不得爲今定心種子.

▷해석한다; 세간 청정의 도리가 성립될  없음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 보이겠으니,

욕계의 탐욕을 멀리 여의기 위해서 욕계의 선심(善心)으로써 가행을 닦을 때,  욕계에서의 가행의 선심은 일찍이  색계의 선심으로부터 훈습된 바가 아니고, 함께 생멸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색계심에 종자 없이 자연히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과거세의 색계의 선심은 여러 생의 사이에서 오는 것이고, 다른 식과의 간격이 있어서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이미 과거인 까닭에, 지금의 정심(定心, 선정의 마음)의 종자가   없는 것이다. 

 

展轉傳來,爲今因緣者,阿賴耶識持彼種故.今色纏心, 從自種生, 加行善心,非無功力.言功力者,但增上緣,非是因緣,由彼增上力,生此色纏心,如是遠離色纏貪等,如應當知.

‘전전하여 전래하여서 지금의 인연이 된다’는 것은 아뢰야식이 그 색계의 종자를 지니기 때문에, 지금 색계의 마음이 스스로의 종자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이며,

가행의 선심에는 공력(功力, 작용의 힘)이 없지 않으니, 공력(功力)이란 다만 증상연일 뿐, 인연이 아닌 것이다. 

그것의 증상력으로 인하여  색계의 마음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니, 이렇게하여 색계의 탐욕 등을 멀리 여읜다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云何出世淸淨不成?謂世尊說,依他言音, 及內各別如理作意, 由此爲因,正見得生.

此他言音,如理作意,爲熏耳識` 爲熏意識`爲兩俱熏?

▷어찌하여 세간을 벗어나는 청정이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타인의 말과 함께 각각의 내면적인 이치 그대로 작의(作意)함에 의하는 것이며, 이것을 원인으로 해서 바른 견해가 생겨날  있다”고 하셨다. 

이 타인의 말과 이치 그대로 작의하는 것이 이식(耳識)에 훈습되는 것인가? 

의식에 훈습되는 것인가? 

아니면 양쪽에서 함께 훈습되는 것인가?

 

若於彼法, 如理思惟,爾時,耳識且不得起,意識亦爲種種散動,餘識所間. 若與如理作意,相應生時,此聞所熏意識,與彼熏習,久滅過去,定無有體,云何復爲種子,能生後時,如理作意,相應之心?

만약  법에 대해서 이치 그대로 사유한다면, 그 때의 이식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며,

의식(意識) 역시도 갖가지로 산란하게 움직이는 다른 식에 의해서 중단되나니,

만약 이치 그대로 작의함과 상응해서 생겨날 때에는,  들음으로써 훈습된 의식과  훈습은 오래전에 멸하여 과거가 되어서 그 자체가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다시 종자가 되어서 능히 나중에 이치 그대로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又此如理作意,相應是世閒心,彼正見相應是出世心,曾未有時,俱生俱滅,是故此心非彼所熏.

旣不被熏,爲彼種子,不應道理. 是故出世淸淨,若離一切種子異熟果識,亦不得成.

此中聞熏習攝受彼種子不相應故.

또한  이치 그대로 작의하는 여리작의(如理作意)와 상응하는 것은 세간심(世閒心)이고, 

 바른 견해의 정견(正見)과 상응하는 것은 출세간심(出世閒心)이다. 

예전에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한 적이 없으니, 따라서  마음은 그것의 훈습처가 아닌 것이며,

훈습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종자가 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간 청정은 일체종자의 이숙과식(異熟果識)을 떠나서는 성립될  없는 것이니,

여기에서 들음의훈습(聞熏習)이  종자를 섭수하는 것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아뢰야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출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설명한, 제15 출세간정장(15 出世間淨章).


▶釋曰:如出世閒淸淨不成,今當顯示.此他言音,如理作意者,謂與言音, 相應作意. 意識亦爲種種散動餘識所閒者,是與正見相應出世閒心被閒隔義.

▷해석한다;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간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 보이겠다. 

‘타인의 말’과 ‘이치 그대로 작의함의 여리작의(如理作意)’는 말과 상응하는 작의(作意)를 말한다. 

의식 역시 갖가지의 산란되게 움직이는 다른 식에 의해 중단되는 것은, 정견(正見)과 상응하는 출세간심(出世閒心)이 다른 식에 의해서 사이가 벌어진다는 뜻이다.

 

작의(作意),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심왕과 심소(心所, 심리작용)를 대상에 주의시켜서 인도하는 작용으로, 촉(觸) 심소(心所) 다음에 일어나며, 이로 인해서 감수작용의 수(受)가 있게 되는 것이다.

 

若與如理作意,相應生時者,謂於後時.此聞所熏意識與彼熏習,久滅過去定無有體者,謂經長時,已謝隔越,決定無體.云何復爲種子能生後時,如理作意,相應之心者,謂彼久滅,現無有體,不能爲因. 此中聞熏習攝受彼種子,不相應故者,謂在世閒意識之中故.言此中聞熏習者,依他言音,正聞熏習. 攝受彼種子者,在意識中,攝受出世淸淨種子.不相應故者,謂彼所計,不應理故,云何可說,此從彼生?

‘만약 이치 그대로의 여리작의(如理作意)와 상응해서 생겨날 때’란, 나중에 청정한 마음이 일어날 때의 그 시기를 말하는 것이며,

‘이 들어서 훈습된 문훈습 의식과  훈습은 오래전에 멸하여 과거가 되어서 반드시 자체가 없다’는 것은 오랜 기간이 지나서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결정적인 자체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어떻게 다시 종자가 되어서 능히 나중에 이치 그대로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란,

그것이 오래전에 멸하여 현재 자체가 없기 때문에 원인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중에서 '들음의훈습이  종자를 섭수하는 것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세간의 의식 중에 있기 때문에 ‘이 중에서’라고 말한 것이며,

‘들음의 문훈습(聞熏習)’은 남의 말을 바르게 들음으로써 훈습되는 것이며,

‘그 종자를 섭수한다’는 것은 의식에 있으면서 출세간의 청정종자를 섭수하는 것이며,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그가 사량하는 바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출세간의 청정이 그 의식(意識)으로부터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論曰:復次云何一切種子異熟果識,爲雜染因, 復爲出世能對治彼淨心種子?

又出世心,昔未曾習故,彼熏習決定應無,旣無熏習,從何種生?

是故應答:從最淸淨法界等流,正聞熏習種子所生.

▷논문; 또한 어떻게 일체종자의 이숙과식(異熟果識)이 잡염의 원인이 되며, 

또한 출세간과 그것을 능히 다스리는 청정한 마음의 종자가 되는 것인가? 

또한 출세간의 마음은 예전부터 아직 훈습되지 않았기 때문에,  훈습은 결정코 없는 것이며,

이렇게 훈습이 없는데 어떠한 종자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마땅히 가장 청정한 법계(法界)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오는, 바르게 들음의 훈습인 정문훈습(正聞熏習)된 종자가 생겨난 것이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釋曰:云何等者,謂異熟識是所治因,爲能治因,不應道理.又出世心,昔未曾習者, 謂先未生故. 彼熏習決定應無者, 由此因故,彼出世心,無有熏習,決定無疑.

▷해석한다; ‘어떻게……’ 등은 이숙식이 다스려지는 원인이면서 또한 능히 다스리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음을 말한 것이며,

'또한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심(出世心)은 예전부터 아직 훈습되지 않은 것이다’는 것은 이전에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훈습은 결정적으로 없어야 한다’는 것은 이 원인으로 인하여 그 출세간의 마음에 훈습이 없음은 결정적인 것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며, 

 

從最淸淨法界等流, 正聞熏習種子所生者, 爲顯法界異聲聞等. 言最淸淨,由佛世尊所證法界,永斷煩惱`所知障故, 從最淸淨法界所流經等教法,名最淸淨法界等流.無倒聽聞如是經等,故名正聞.由此正聞,所起熏習,名爲熏習.或復正聞,卽是熏習,是故說名正聞熏習. 卽此熏習相續住在,阿賴耶識爲因,能起出世閒心,是故說言:從最淸淨法界所流,正聞熏習,種子所生.

‘가장 청정한 법계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오는, 바르게 들어서 훈습된 정문훈습(正聞熏習)의 종자가 생겨난 것’이란,

법계는 성문등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가장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니,

부처님 세존께서 증득하신 법계는 번뇌장과 소지장을 영원히 끊었기 때문에, 이러한 가장 청정한 법계로부터 흘러나오는 가르침의 경전 등의 교법을 가장 청정한 법계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온 것이라 이름하며,

전도됨이 없이 이러한 경전 등을 듣기 때문에 바르게 듣는 정문(正聞)이라 하며,

이 바르게 들은 정문(正聞)으로써 일어난 훈습을 훈습이라 이름 하는 것이다.

혹은 바르게 듣는 것이 곧 훈습이기 때문에 바르게 들음의 정문훈습(正聞熏習)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곧 이 훈습이 상속해서 아뢰야식에 머무름으로서, 원인이 되어 능히 출세간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청정한 법계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온 바를 바르게 들음의 정문훈습(正聞熏習)의 종자가 생겨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3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③ 1

 

▶論曰:云何爲生雜染不成?結相續時, 不相應故.

▷논문; 어찌하여 태어남의 잡염인 생잡염(生雜染)이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모태에 다음 생을 위탁하는 결생(結生) 상속의 시기에 상응하지 않는, 즉 그 의미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ㅡ아뢰야식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태어남의잡염이 성립되지 않음을 말한, 제13 생염장(13 生染章).

 

결생(結生), 윤회하면서 중유(中有)가 없어지고 모태에 다음 생을 위탁하는 것.


▶釋曰:若不信有阿賴耶識,如生雜染, 亦不得成,今當顯示.結相續時,不相應故者,謂得自體,不相應故.

▷해석한다; 만약 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태어남의 잡염인 생잡염(生雜染) 역시 성립될  없음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 보일 것이니,   

‘결생(結生) 상속의 시기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란, 이 생에서 멸하여 다음 생을 맺는 결생(結生)의 생명 자체를 얻는 것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論曰:若有於此非等引地,沒已生時,依中有位,意起染污意識, 結生相續,此染污意識,於中有中滅,於母胎中,識羯羅藍,更相和合.

▷논문; 만약 선정이 아닌 지위인, 비등인지(非等引地)에서 죽어서 태어날 때, 중유(中有) 단계의 의(意)에서 염오의식(染污意識)을 일으킴으로써 결생 상속하는 것이라면,  염오의식(染污意識)은 중유 안에서 멸하고, 모태 중에서 식(識)과 갈라람(羯羅藍)과 다시 서로 화합하는 것이다. 

 

등인(等引) 범어 samāhita의 번역으로서 선정(禪定),  마음을 집중하여 안정시켰다는 의미이고,

등(等) 마음에 혼침과 들뜸의 도거(掉擧)가 평정되어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선정을 닦으면 등(等)을 일으키므로 등인이라 이름하며, 비등인지(非等引地) 선정이 아닌 지위,  산지(散地)인 욕계(欲界)의 뜻이다.

중유(中有) 4유(有)의 하나로서, 죽은 뒤에 다음의 생을 받아  때까지의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갈라람(羯羅藍)은 범어 kalalaṃ의 음역으로서 가라라(柯羅邏) 등으로 음역되고, 응골(凝骨)ㆍ시태막(始胎膜) 등으로 의역된다. 수태(受胎)로부터 1주일 동안의 태아이다.

갈라람은 식(識)과 수정란의 물질적 사대(四大) 요소가 화합한 것으로, 아뢰야식이 갈라람에 의탁함과 동시에 중유(中有)가 소멸되고, 아뢰야식 안의 종자가 동력인(動力因)이 되어 4대와 작용하기 시작해서 미세한 감각기관이 생겨날 가능성이 시작되는 것이다.

 

若卽意識,與彼和合,旣和合已,依止此識,於母胎中,有意識轉. 若爾,卽應有二意識, 於母胎中,同時而轉. 又卽與彼和合之識,是意識性,不應道理,依染污故`時無斷故`意識所緣,不可得故.

만약 의식과 그 갈라람이 화합한다면, 이미 화합한 후에는  식에 의지하여서 모태 중에서 의식이 전전함이 있게 되는 것이며,  

만약 그러하다면 마땅히  의식이 있어서 모태 중에서 동시에 전전하게 될 것이며,

또한 그것과 화합하는 식이 의식성(意識性)이라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을 것이니, 염오(染污)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때로는 끊어짐 없기 때문이며, 의식의 소연(所緣, 인식대상)을 얻을  없기 때문이다.

 

設和合識,卽是意識,爲此和合意識,卽是一切種子識`爲依止此識, 所生餘意識,是一切種子識?若此和合識,是一切種子識,卽是阿賴耶識,汝以異名,立爲意識.

설사 화합식(和合識)이 의식(意識)이라 할지라도  화합의식(和合意識)이 바로 일체종자식인 것인가? 

화합의식에 의지해서 생겨나는 다른 의식이 일체종자식인 것인가? 

만약  화합식이 일체종자식이라면 이것이 바로 아뢰야식인 것이니, 그대는 다른 명칭으로 안립하여서 의식이라 하는 것이다.

 

若能依止識,是一切種子識, 是則所依因識非一切種子識, 能依果識是一切種子識,不應道理. 是故成就此和合識,非是意識,但是異熟識,是一切種子識.

만약 능히 의지하는 의지식(依止識) 일체종자식이라면, 소의인(所依因, 의지처의 원인)으로서의 식이 일체종자식이 아니고, 능히 의지하는 과보로서의 능의과식(能依果識) 일체종자식이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합식은 의식(意識)이 아니라, 다만 이숙식(異熟識)일 뿐이니, 

이것이 일체종자식이라는 것이 성취되는 것이다.

 

▶釋曰: 非等引地,卽是欲界.沒者,死也.染污意識,卽是煩惱俱行意識.

結生相續者,謂攝受自體,此染污意,識緣生有爲境,於中有中滅.

▷해석한다; ‘선정이 아닌 지위의 비등인지(非等引地)’란  욕계이며,

‘죽는다는 몰(歿)’은 죽음의 사(死)를 말하며,

‘염오의 의식인 염오의식(染污意識)’이란 번뇌와 함께 작용하는 의식을 말하는 것이며,

‘결생상속한다는 결생상속(結生相續)'이란, 그 자체를 섭수하는 것을 말한다. 

 염오의식(染污意識) 모태에 임신되는 순간의 존재인, 생유(生有)를 반연하여 대상으로 삼고, 내세에 다시 태어나게 되는 중유(中有)에서 멸하는 것이다. 

 

윤회과정을 생유(生有)ㆍ본유(本有)ㆍ사유(死有)ㆍ중유(中有)의 4유설(四有說)로써 설명하기도 하는데, 4유는 생명적 존재의 윤회 속에서의 네 가지 존재형태이다.

생유(生有), 모태에 임신되는 순간의 존재이다.

본유(本有)는 모태에 임신되면서부터 출산되어서, 생존하다가 사망할 때까지의 존재이고,

사유(死有)는 사망하는 찰나에 수온( 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ㆍ식온(識蘊)의 4온(蘊)이 신체인 색온(色蘊)을 벗어나는 순간의 존재이고, 

중유(中有)는 사망한 이후부터 업력에 따라 내세에 태어나기까지의 존재이다.

 

言和合者,識與赤白同一安危, 若和合識卽是意識, 依此復生所餘意識,是則一時, 二意識轉, 謂所依止和合意識, 及能依止所餘意識.

‘화합(和合)’이란 식(識)과 적백(赤白, 부모의 정혈精血)이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함께하는 것이니, 

만약 화합식이 의식이라면 이것에 의지해서 다시 다른 의식을 생겨나게 할 것이니, 그렇게 된다 일시(一時)  개의 의식이 전전하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의지처인 화합식(合意識)과 능히 의지하는 다른 의식의 여의식(餘意識)인 것이다. 

 

화합(和合), 범어로는 saṃmūrcchati로서 ‘결합ㆍ응결(凝結)’의 의미이며, 윤회의 주체인 아뢰야식이 부모의 수정란에 결합해서 응결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의 어원인 √saṃmūrch는 ‘응결해서 증대하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이 화합은 단순한 기계적이고 무기적(無機的)인 결합이 아니라 생리적이고 유기적(有機的)으로 결합해서 성장하고 발달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현장은 이를 ‘화합’ 이외에 ‘의탁(依託)’ㆍ‘화합 의탁’으로 번역하였다.

 

又和合識,是意識性,不應道理. 何以故? 依染污故`時無斷故. 謂此意識,貪等煩惱,所染污意, 爲所依止, 緣生有境, 故是染污,卽此爲依,名依染污. 於此位中,所依異熟,不容染污,是無記故.此和合識,常無閒斷,任業轉故.

또한 화합식이 의식의 성품이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염오(染污)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때에 따라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며,  

 의식은 탐욕 등의 번뇌에 염오되고, 의(意, 말나식, 제 7식)을 의지처로 삼고, 생유(生有)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 염오가 이것의 의지가 되어 주는 것을 염오에 의지하는 의염오(依染污)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에서의 의지처는 이숙으로써, 염오가 아니니, 이것은 무기(無記)이기 때문이며,  

 화합식은 항상 중단됨이 없고, 업에 의해서 전전하기 때문이다.

 

意識所緣不可得故者,意識所緣明了可得,所謂諸法.此和合識,無有如是明了所緣,是故此識,是意識性,不應道理.

‘의식의 인식대상인 의식소연(意識所緣)은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으니,

의식의 인식대상인 의식소연(意識所緣)은 명료한 것이니, 이른바법인 것이다. 

그러나, 이 화합식은 이와 같은 명료한 인식대상인 의식소연(意識所緣)이 없기 때문에,  화합식이 의식의 성품이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論曰:復次結生相續已,若離異熟識, 執受色根,亦不可得.其餘諸識,各別依故`不堅住故,是諸色根不應離識.

▷논문; 또한 결생(結相) 상속하고 나서, 만약 이숙식을 여읜다면, 감각기관(根)을 집수(執受)하는 것이 있을  없으니, 그 나머지 모든 식은 각각의 의지처가 다르기 때문이고, 견고하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기관은 식(아뢰야식)을 떠날  없는 것이다.


▶釋曰:結生相續已者,謂已得自體.若離異熟識者,謂離阿賴耶識,其餘諸識各別依故. 不堅住故者, 謂餘六識各別處故`易動轉故.且如眼識,眼爲別依,如是其餘,耳等諸識,耳等色根,爲各別依.由此道理,如是諸識,但應執受自所依根.又此諸識,易動轉故,或時無有,若離阿賴耶識,爾時,眼等諸根,無能執受,便應爛壞.

▷해석한다; ‘결생상속(結生相續)한 후’란, 이미 자체를 얻은 것을 말하며,

‘만약 이숙식을 여읜다면’이란, 아뢰야식을 여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 나머지 모든 식은 각각의 의지처가 다르기 때문이고 견고하게 머물지 않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으니,

나머지 육식(六識) 각각의 의지처를 달리하기 때문이고, 쉽게 전전하기 때문이니,

우선 안식은 안근을 별도의 의지처로 삼는다는 것으로 알  있는 것과 같이, 나머지 이식(耳識) 등의 여러 식은 이근(耳根) 등의 여러 감각기관(根)을 각각의 의지처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로 인하여, 이와 같은 여러 식은 다만 스스로 의지처인 감각기관(根)만을 집수할 뿐이며, 또한 이들 식은 쉽게 전전하기 때문에 간혹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만약 아뢰야식을 여읜다면, 그 때의 안근(眼根) 등의 여러 감각기관(根)은 능히 집수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흩어져서 파괴되는 것이다.


▶論曰:若離異熟識,識與名色,更互相依,譬如蘆束,相依而轉,此亦不成.

▷논문; 만약 이숙식(아뢰야식)을 여읜다면, 식(識)과 명색(名色)이 다시 서로 의지하여서, 마치 갈대 묶음이 서로를 의지해서 전전하는 것과 같은 것이 성립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명색(名色, nāma-rūpa)은 정신적인 명(名)과 물질적인 색(色)이 결합된 상태이다.


▶釋曰:若離異熟識者,謂離阿賴耶識,如不得成, 今當顯示.謂世尊言:識緣名色,名色緣識.此中識緣名者,謂六識中,非色四薀.識緣色者,謂羯邏藍.若不說有阿賴耶識,何等名爲名色緣識?由依名色,剎那展轉,相似相續,流轉不絕.

▷해석한다; ‘만약 이숙식을 여읜다면’이란, 아뢰야식을 여의면 성립될  없음이다.

지금 마땅히 현시(顯示)할 것이니,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식(識)은 명색(名色)을 반연하고, 명색(名色)은 식(識)을 반연한다”고 하신 가운데에서, 

여기서의 ‘식(識)이 명(名)을 반연한다’는 것은식(六識) 중에서 물질이 아닌 수온, 상온, 행온,식온의 사온(四蘊)을 말하는 것으로,

‘식은 색을 반연한다’는 것은 갈라람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아뢰야식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이름하여 명색이 식을 반연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명색에 의지해서 찰나에 전전함으로써 비슷하게 상속하고 유전하여 단절되지 않는 것이다.


▶論曰:若離異熟識,已生有情識食不成.何以故?以六識中,隨取一識,於三界中,已生有情,能作食事,不可得故.

▷논문; 만약 이숙식을 여읜다면 이미 태어난 유정의 식식(識食)은 성립되지 않으니, 어떠한 까닭인가? 

육식(六識) 가운데 하나의 식만을 취하여 따른다면, 삼계에 태어난 유정은 능히 음식작용의 일을   없기 때문이다.


▶釋曰:此言顯示識食不成.如世尊說:食有四種,一者段食`二者觸食`三者意思食`四者識食.此中段食者,是能轉變,由轉變故,饒益所依.觸食者,是能取境,由暫能見色等境界,便令所依,饒益生故.意思食者,是能悕望,由悕望故,饒益所依,如遠見水,雖渴不死.識食者,是能執受,由執受故,所依久住,若不爾者,應同死屍,不久爛壞. 是故應許識亦是食,能作所依饒益事故.

▷해석한다; 이 말은 식식(識食)이 성립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음식작용물(食)에  가지의 사식(四食)이 있으니,

첫째는 단식(段食)이고, 둘째는 촉식(觸食)이며, 셋째는 의사식(意思食)이고, 넷째는 식식(識食)이다. 

 가운데 단식(段食)은 형태를 변화시켜서 영양분이 될 수 있게끔 능히 전변하고, 전변함으로써 의지처를 이롭게 하며,

촉식(觸食)은 능히 대상을 취하는 것이니, 빛깔 등의 경계를 잠깐 보는 것에 의해서 문득 의지처로 하여금 이익이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며,

의사식(意思食)은 능히 희망하고,  희망으로 인하여 의지처를 이롭게 하는 것이니, 멀리에서 물을 보게 되면 갈증이 날지라도 죽지 않는 것과 같으며,

식식(識食)은 능히 집수하는 것이니, 집수함으로 인하여 의지처를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니,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마땅히 시체와 같아서  않아 문드러지고 파괴될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식(識)도 역시 음식작용의 식(食)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니, 능히 의지처를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此中觸食,屬六識身,意思食者,屬悕望意,有何別識,可說爲食?

又若無心`睡眠`悶絕`入滅定等,六識身滅,誰復有餘能執受身令不爛壞?若有棄捨阿賴耶識,身必爛壞.

 중에서 촉식은 6식신(六識身)에 속하고, 의사식은 희망의 의식인 희망의(希望意)에 속하는 것이니, 어떠한 별도의식(別識)이 있어서 음식작용물(食)로 삼겠는가? 

또한, 만약 무심(無心)ㆍ수면(睡眠)ㆍ기절함의 민절(悶絕)ㆍ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간 경우 등에는 6식신(六識身)이 멸하는 것이니, 나머지 무엇이 신체를 집수하여 파괴되지 않게것인가? 

만약 아뢰야식을 여의게 되면 신체는 반드시 문드러지고 파괴되는 것이다.

 

사식(四食), 유정의 신명(身命)을 유지시키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음식작용물이다.

첫째, 단식(段食, 團食)은 밥이나 나물처럼 형체가 있는 음식으로서, 이것을 쪼개고 으깨는 분분단단(分分段段)하여 먹어서 능히 신명을 무너지지 않게 하며,

둘째, 촉식(觸食)에서 촉(觸)은 육식에 상응하는 심소(心所, 심리작용)으로, 사랑할 만한 대상에 접촉할 때 희락의 쾌감을 일으켜서 신체를 이롭게 하기 때문에 능히 음식작용물의 뜻이 있는 것이며,

셋째, 의사식(意思食 또는 사식思食)에서 의사는 의식에 상응하는 사(思)의 심소이며, 이 심소가 욕구(欲) 등의 심소를 동반해서 사랑할 만한 대상을 희구해서 심신을 자양(滋養)하는 것이며,

넷째, 식식(識食)은 앞의 세 가지 음식작용물의 세력에 의해서 증장할 수 있고, 이 식이 모든 감각기관이나 4대(大)를 장양(長養)하기 때문이다.


▶論曰:若從此沒,於等引地,正受生時,由非等引, 染污意識, 結生相續. 此非等引染污之心,彼地所攝,離異熟識,餘種子體定不可得.

▷논문; 만약 여기서 죽어서(沒) 선정의 지위인 등인지(等引地)에서 바로 생을 받을 때, 선정이 아닌 비등인지(非等引地)의 염오의식으로 인하여 생을 맺어 상속하는 결생상속(結生相續)하는 것이다. 

 선정이 아닌 지위의 비등인지(非等引地)의 염오심은  지위에 포섭되는 것이니, 이숙식을 여의고는 다른 종자의 자체는 결정코 반드시 있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인 것이다.


▶釋曰:如是已說非等引地, 結生相續,離異熟識,不可得成. 如等引地,亦不得成,今當顯示.

謂於此處, 由染污識結生相續, 於等引地, 由非等引染污意識結生相續.

言染污者,彼地煩惱之所染污. 彼地煩惱者,謂飡定味等.此染污心在不定地.

不定地沒,從此沒已,卽彼地心,云何現前?旣不現前, 云何當得結生相續?

由此道理,定應許有阿賴耶識,無始時來,恒有彼地,此心熏習,由此熏習,此心現行,由此心故,結生相續.

▷해석한다; 이와 같이 선정이 아닌 지위의 비등인지(非等引地)에서 생을 맺어 결생상속(結生相續)한다는 것은 이숙식을 떠나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선정의 지위인 등인지(等引地)와 같은 것에서도 역시 성립될 수 없음을 이제 나타내 보이겠으니,

이곳에서 염오식(染污識)으로 인하여 생을 맺어 결생상속(結生相續)한다는 것은, 선정의 등인지에서도 선정이 아닌 비등인지의 염오식으로 인하여 생을 맺어 상속한다는 것이니, 

‘염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지위의 번뇌에 오염된 것이며, 

그 지위의 번뇌란 선정의 맛을 만끽하는 것 등으로, 이 염오심은 선정이 아닌 지위의 부정지(不定地)에 있는 것이니,

부정지(不定地)에서 죽은(沒) 다음에 그 지위의 마음은 어떻게 현전한다는 것인가!

이미 현전하지 않거늘, 어떻게 장차 결생(結生)하여 상속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도리로 인하여 반드시 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나니, 아득한 무시로부터 항상 그 지위가 있어서 이 마음을 훈습하고, 이 훈습으로 인하여 이 마음이 현행하는 것이며, 이 마음으로 인하여 생을 맺는, 결생상속(結生相續)을 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2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5


▶釋曰:此中受用,是生起義. 受用中有,名受用者.爲顯此義故,引『中邊分別論』頌,爲阿笈摩.

▷해석한다; 여기에서의 ‘수용(受用)’은 생기(生起)의 뜻으로, 수용 중에 있는 것을 ‘수용자(受用者)’라고 하는 것이니, 이런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중변분별론'의 게송을 인용하여 아급마(阿笈摩 , 아함阿含)을 삼으니, 광의(廣義)의 성교(聖敎)로서의 교증(敎證)인 것이다.


▶論曰:如是二識,更互爲緣,如『阿毘達磨大乘經』中說伽他曰:

▷논문; 이와 같은 근본식인 아뢰야식과 전식인 7식(識)의 이식(二識)은 다시 서로의 연(緣)이 되나니, '아비달마대승경(阿毘達磨大乘經)'에서 말한 게송과 같다.

 

“諸法於識藏, 識於法亦爾, 更互爲果性, 亦常爲因性.”

제법은 식에 저장되고, 식 또한 법에 대해서 역시 그러하니, 

서로 결과의 과성(果性) 되고, 또한 마땅히 원인의 인성(因性)이 된다네.


▶釋曰:阿賴耶識,與一切法,於一切時,互爲因果,展轉相生, 若於此時, 阿賴耶識, 爲諸法因,卽於爾時,諸法爲果;若於此時,阿賴耶識,爲諸法果,卽於爾時,諸法爲因.

▷해석한다; 아뢰야식과 일체법은 일체시에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어서, 전전하여 서로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때, 아뢰야식이 제법의 원인이 된다면, 그 때에는 법이 바로 결과가 되며,

만약 아뢰야식이법의 결과가 된다면, 그 때의 제법은 원인이 되는 것이다.

 

ㅡ이하는 사연(四緣)에 관한 제10 사연장(第10 四緣章)으로, 정신과 물질의 모든 현상이 발생함에 있어서 그 연(緣)을 인연ㆍ증상연ㆍ소연연(所緣緣)ㆍ등무간연의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論曰: 若於第一緣起中, 如是二識互爲因緣, 於第二緣起中,復是何緣?是增上緣.

如是六識幾緣所生?增上`所緣`等無閒緣.如是三種緣起 ,謂窮生死`愛非愛趣及能受用,具有四緣.

▷만약, 첫 번째의 분별자성연기(分別自性緣起) 있어서 이와 같은 아뢰야식과 전식(제7식)의 이식(二識)이 서로 인연이 된다면,  

 번째의 분별애비애연기(分別愛非愛緣起) 있어서는 어떠한 연이 되는 것인가? 이것은 증상연(增上緣)이다.

이와 같은 육식(六識)  가지의 연(緣)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인가? 증상연(增上緣)ㆍ소연연(所緣緣)ㆍ등무간연(等無間緣)이니, 이와 같은  연기는 생사를 다할 때까지 계속하는 오온,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윤회세계(趣)와 능히 수용하는 능수용(能受用)의 사연(四緣)을 갖추는 것이다.

 

증상연(增上緣), 그것이 생겨나는 데 외부로부터 도와주는 힘을 말하며, 유력(有力) 증상연과 무력(無力) 증상연이 있다. 유력증상연은 다른 법이 생겨나는 데 힘을 주는 조건의 연(緣)이고, 무력증상연은 다른 법이 생기는 것을 장애하지 않는 조건이다.


▶釋曰:此中第一緣起,謂阿賴耶識中, 所有習氣與彼諸法,互爲因緣. 第二緣起, 謂無明等, 爲增上緣, 由無明等增上勢力, 行等生故. 又六轉識, 名受用緣起, 三緣所生. 謂眼識以眼爲增上緣,以色爲所緣緣`等無閒緣,謂彼無閒此識生起.所以者何?若彼不與容受處者,此不生故.餘識亦爾.

▷해석한다; 여기에서 “첫 번째 연기”는 아뢰야식의 모든 습기와 법이 서로 인연이 되는 것을 말하며,

“두 번째의 연기”는 무명 등이 증상연이 됨을 말하는 것이니, 무명 등이 증장하세력인 증상세력(增上勢力)으로 인하여 행(行) 등이 생겨나기 때문이며, 

또한 여섯 가지 전식을 수용연기(受用緣起)라고 하는 것으로, 삼연(三緣)이 생겨나는 곳이니, 이른바 안식은 눈으로써 증상연을 삼고, 빛깔로써 소연연(所緣緣)으로 삼는다. 

등무간연(等無間緣)은 그것과 끊어지지 않고  식이 생기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것이 수용하는 곳을 주지 않으면 이것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며, 다른 식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소연연(所緣緣), 마음의 대경(對境)인 소연(所緣)이 마음의 연(緣)이 되어서 활동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인 대경(對境)이 있어서 비로소 식이 생기하게 되는 까닭에 그 인식대상을 연(緣)으로 삼는다.

등무간연(等無間緣), 전찰나의 생각이 사라지면서 다음 찰나의 생각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전찰나의 식이 멸하면서 다음 찰나의 식에개 주지 않으면 식이 생기하지 않기 때문에 전찰나의 식을 등무간연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論曰:如是已安立阿賴耶識異門及相.復云何知如是異門及如是相, 決定唯在阿賴耶識,非於轉識?

由若遠離如是安立阿賴耶識, 雜染`淸淨皆不得成, 謂煩惱雜染`若業雜染`若生雜染, 皆不成故, 世閒淸淨`出世淸淨,亦不成故.

▷논문; 이와 같이 아뢰야식에 관한 이문(異門, 다른견해)  상(相)을 안립하였다. 

또한 이러한 이문(異門, 다른견해)과 상(相) 결정코 오직 아뢰야식에만 있는 것으로, 전식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있는 것인가? 

만약 이와 같이 아뢰야식을 안립하지 않으면 잡염과 청정이 모두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니, 이른바 번뇌의 잡염이나 업의 잡염이나 생의 잡염 모두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며, 세간의 청정도 출세간의 청정도 역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ㅡ앞에서 말한 이문(異門) 상들이 오직 아뢰야식에만 있고 다른 식에는 없으므로 아뢰야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에 관하여 말하였으며, 그것을 번뇌의 잡염ㆍ업의 잡염ㆍ태어남의 잡염ㆍ세간의 청정ㆍ출세간의 청정ㆍ도리에 수순함이 성립되는 순서대로 설명하였다.


▶釋曰:如是已說阿賴耶識安立異門及安立相,今當顯示此二唯在阿賴耶識,應正道理,非於餘處,以理決擇.

▷해석한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을 안립하는 이문(異門)과 안립하는 상을 말하였다. 이제 마땅히   가지가 오직 아뢰야식에만 있음이 바른 도리에 맞는 것으로, 다른 곳에는 있지 않음을 나타내고, 도리로써 결택해야다.


▶論曰:云何煩惱雜染不成? 以諸煩惱及隨煩惱熏習所作彼種子體,於六識身,不應理故.所以者何? 若立眼識貪等煩惱及隨煩惱,俱生`俱滅, 此由彼熏成種非餘,卽此眼識, 若已謝滅`餘識所閒,如是熏習`熏習所依皆不可得,

從此先滅`餘識所閒現無有體, 眼識與彼貪等俱生,不應道理,以彼過去現無體故.

▷논문; 어째서 번뇌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모든 번뇌와 수번뇌(隨煩惱)의 훈습으로, 그 종자의 체(體)가 육식에 있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안식이 탐욕 등의 번뇌ㆍ수번뇌와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며, 이것이  훈습으로 인하여 종자를 이루고 다른 곳에 있지 않다고 안립한다면,   안식이 이미 없어져 다른 식으로 듣게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훈습도 훈습의 의지처 모두가 있을  없는 것이다. 

이러함으로부터 이전에 멸하여 다른 식이 듣게 되고 현재의 체가 없다면, 안식과  탐욕 등이 함께 생겨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그것은 과거로써 현재의 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번뇌(隨煩惱), 근본번뇌인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악견(惡見) 수반하여 일어나는 번뇌이며, 유식학에서는 분노(忿)ㆍ원한(恨)ㆍ질투(嫉)ㆍ속임(誑)ㆍ아첨(諂)ㆍ게으름의 해태(懈怠)ㆍ혼침(婚沈)ㆍ들뜸의 도거(掉擧)  20가지를 말한다.

 

如從過去現無體業,異熟果生,不應道理. 又此眼識貪等俱生所有熏習,亦不成就, 然此熏習不住貪中,由彼貪欲是能依故`不堅住故,亦不得住所餘識中,以彼諸識所依別故, 又無決定俱生滅故.亦復不得住自體中,由彼自體決定無有俱生滅故.

과거로서 현재의 체가 없는 업으로부터 이숙과가 생겨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과 같이, 또한  안식이 탐욕 등과 함께 생겨나는 것도, 훈습도 역시 성취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훈습은 탐욕 중에 머물지 않는 것이니, 그 탐욕은 능히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견고하게 머물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나머지 식에도 머물  없으니, 그 식들은 의지처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함께 생멸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자체 안에서 머물 수도 없는 것이니, 그것의 자체는 결정적으로 함께 생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是故眼識貪等煩惱及隨煩惱之所熏習,不應道理. 又復此識非識所熏.如說眼識,所餘轉識,亦復如是,如應當知.

그러므로, 안식이 탐욕 등의 번뇌와 수번뇌에 훈습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며, 또한  식은 식의 훈습처도 아닌 것이니, 안식에서 말한 것과 같이 나머지 전식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ㅡ아뢰야식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번뇌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음을 말한, 제11 번뇌염장(11 煩惱染章).


▶釋曰:此中此者,卽此眼識. 由彼熏者,由貪等熏.言成種者,謂成因性.言非餘者,非耳識等. 餘識所閒者,耳等識所閒. 如是熏習者,貪等熏習.熏習所依者,謂卽眼識.眼識與彼貪等俱生等者,謂從過去現無體因, 眼識與彼貪等俱生,不應道理. 如從過去現無體業,異熟果生,不應道理者,如彼果生不應道理,此亦如是,不應道理. 復有餘師,執彼有體,謂異論師,欲令過去,是實有性.然過去能詮`所詮不可得.所以者何?若法是實有,云何名過去?是故從彼異熟果生,不應道理,熏習無故.

▷해석한다; 여기에서 ‘이것’이란, 곧 안식이며, ‘그것의 훈습으로 인한다’는 것은 탐욕 등의 훈습으로 인하는 것을 말하며, ‘종자를 이룬다’는 것은 원인의 인성(因性) 이루는 것을 말한다.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은 이식(耳識) 등에는 있지 않음을 말하며,

‘다른 식으로 듣게 된다는 여식소문(餘識所閒)’이란, 이식 등으로 듣게 된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훈습’은 탐욕 등의 훈습이니, 훈습의 소의(昭儀, 의지처)는  안식을 말하는 것이며, 

‘안식과  탐욕 등이 함께 생겨난다’ 등은 과거로서 현재의 체가 없는 원인으로부터 안식과  탐욕 등이 함께 생겨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며,

‘과거로서 현재의 체가 없는 업으로부터 이숙과가 생겨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음과 같다’는 것은  결과가 생겨나는 도리에 맞지 않는 것과 같이, 이 또한 도리에 맞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논사는 과거로 낙사(落謝)한 법 체가 있다고 집착하나니,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논사들이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를 주장하는 등의 다른 견해의 논사는 과거가 실체의 성품이기를 원하는 것이나,

그러나 과거는 능전도 소전도 있을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만약 법이 실체라면 어떻게 과거라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이숙과가 생겨난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훈습이 없기 때문이다.


又此眼識者,謂與貪等俱生眼識 所有熏習,亦不成就者, 謂彼熏習尚不成就, 何況從彼後時眼識與貪俱生 而當得成?

然此熏習不住貪中者, 謂眼識熏習在貪欲中,不應道理. 何以故? 由彼貪欲依眼識故.不堅住故,

‘또한  안식’이란 탐욕 등과 함께 생겨나는 안식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훈습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른바  훈습조차 성립되지 않는데 하물며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이후의 안식이 탐욕과 함께 생겨나는 이루어질  있겠는가?

‘그런데  훈습은 탐욕 중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안식의 훈습이 탐욕 중에 머무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탐욕은 안식을 의지로 삼기 때문이고, 견고하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亦不得住所餘識中者, 謂此熏習不得在於耳等識中. 何以故? 以彼諸識所依別故.由所依別, 無有決定俱生滅義.

謂眼識依眼`耳識依耳,如是乃至意識依於未那,所依遠故,所餘熏習在所餘處,不應道理.

‘역시 나머지 식에도 머물  없다’는 것은  훈습이 이식(耳識) 등에도 머물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식들은 소의(所依, 의지처)가 다르기 때문이며, 소의(所依, 의지처)가 다르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함께 생멸하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른바 안식은 눈에 의지하고 이식은 귀에 의지하며, 나아가 의식은 말나식에 의지하는 것이니, 소의(의지처)가 멀기 때문에 나머지 훈습이 나머지 장소에 있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亦復不得住自體中者,謂此眼識,亦復不得熏習眼識, 無二眼識俱時起故.以無二故,決定無有俱生滅義.

由此道理, 是故眼識, 定不應爲貪等煩惱 及隨煩惱之所熏習,亦非眼識眼識所熏.

‘또한 자체에도 머물  없다’는 것은  안식도 역시 안식에 훈습할  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두 안식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고,  가지가 없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함께 생멸한다는 뜻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로 인하여 안식은 반드시 탐욕 등의 번뇌와 수번뇌가 훈습되는 곳이   없으며, 또한 안식은 안식에 훈습되지도 않는 것이다.


▶論曰:復次從無想等上諸地沒來生此閒, 爾時煩惱及隨煩惱所染初識, 此識生時, 應無種子,

由所依止及彼熏習竝已過去現無體故.

▷논문; 또한 무상천 등의 상부의 여러 지위로부터 떨어져서  세간에 태어난다면, 그 때의 번뇌와 수번뇌에 잡염된 처음의식(初識)이 있게 된다. 그런데  식이 생기할 때에는 마땅히 종자가 없어야 하는 것이니, 소의(의지처)와 그것의 훈습은 모두 이미 과거의 것으로, 현재에 체가 없기 때문이다.


▶釋曰:所染初識者,謂來此閒最初生識.此識生時應無種子者,謂初生識,應無因生.所依止者,謂所依止.彼熏習者,煩惱熏習.

▷해석한다; ‘잡염된 처음의 식(初識)’이란, 이 세간에 와서 최초로 생기하는 식을 말하는 것으로,

‘이 식이 생기할 때에는 마땅히 종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처음에 생기하는 식은 마땅히 원인없이 생겨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소의(의지처)’는 의지하는 곳을 말하고, ‘그것의 훈습’은 번뇌의 훈습을 말하는 것이다.


▶論曰:復次對治煩惱識若已生,一切世閒餘識已滅,爾時若離阿賴耶識, 所餘煩惱及隨煩惱種子, 在此對治識中,不應道理.此對治識自性解脫故,與餘煩惱及隨煩惱, 不俱生滅故. 復於後時,世閒識生, 爾時若離阿賴耶識, 彼諸熏習及所依止, 久已過去現無體故,應無種子,而更得生.是故若離阿賴耶識,煩惱雜染,皆不得成.

▷논문; 또한 만약 번뇌를 대치식(對治識, 다스리는 식)이 생기하고 나서, 세간의 나머지 모든 식이 멸한다고 한다면, 그 때에 아뢰야식을 떠나서 나머지 번뇌와 수번뇌의 종자가  대치식(對治識)에 존재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대치식은 자성 해탈이기 때문이고, 나머지 번뇌와 수번뇌와 함께 생멸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중에 세간식(世閒識)이 생겨날 때, 만약 아뢰야식을 떠난다면,  모든 훈습과 소의(의지처)가 오랜 이전의 과거가 되어서 현재에 체가 없기 때문이니, 종자가 없는데 어떻게 다시 생겨날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떠난, 번뇌의 잡염은 모두 성립될  없는 것이다.


▶釋曰:對治煩惱識若已生一切世閒餘識已滅者,謂六識已滅.所餘煩惱及隨煩惱種子,在此對治識中,不應道理者,謂對治識非後世閒識生起因.復於後時者 ,謂復從此出世心後. 彼諸熏習者, 謂餘煩惱及隨煩惱所有熏習. 及所依止者,謂所依識.應無種子而更得生者,謂若無有阿賴耶識,彼應無因而更得生. 此中煩惱卽是雜染, 是故說名煩惱雜染.由上道理,煩惱雜染,皆不得成.

▷해석한다; ‘만약 번뇌를 다스리는 대치식이 생기하고 나서 세간의 나머지 모든 식이 이미 멸한다’는 것은 육식(六識) 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나머지 번뇌와 수번뇌의 종자가  대치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는 것은 대치식은 이후의 세간식이 생기하는 원인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나중'이란, 이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의 이후를 말하는 것이며,

‘그 모든 훈습’이란, 나머지 번뇌와 수번뇌의 훈습을 말하는 것이며,

‘그리고 소의(의지처)’는 의지처인 식, 즉 소의식(所依識) 말하는 것이며,

‘종자가 없는데도 어떻게 다시 생겨날  있겠는가?’는 만약 아뢰야식이 없다면 그것은 마땅히 원인이 없게 되는 것이므로 다시 생겨날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여기서의 번뇌는  잡염을 말하는 것이므로 번뇌의 잡염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도리로 인하여 번뇌의 잡염은 모두 성립될  없는 것이다.


▶論曰:云何爲業雜染不成? 行爲緣識不相應故.此若無者,取爲緣有,亦不相應.

▷어째서 업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 행(行)의 지분이 식(識)의 지분에 조건(緣)이 되는 것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이것이 없다면 취(取)의 지분이 유(有)의 지분에 조건(緣)이 되는 것 역시도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ㅡ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업의 잡염품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한, 제12 업염품(12 業染章).


▶釋曰:爲辯業雜染不得成因緣故, 次問云何業雜染不成?業爲緣識不相應故者,謂福`非福及不動行生已謝滅, 若不信有阿賴耶識,當於何處, 安立熏習? 如六識身,不能任持所有熏習, 於諸煩惱雜染事中,已具顯示. 此若無者, 謂若無有行爲緣識.取爲緣有亦不相應者,謂亦無有取爲緣有.此復何緣?謂前諸行所熏習識,由取力故,熏習增長轉成有故. 此中卽業是雜染性,名業雜染,或依於業而有雜染,名業雜染.若不信有阿賴耶識,此業雜染,亦不得成.

▷해석한다; 업의 잡염의 인연이 성립될 수 없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찌하여 업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는 것인가?’라고 물은 것이다.

‘행업(行業)이 식의 지분에 조건이 되는 것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는 다음과 같으니, 이른바 복(福)ㆍ비복(非福)ㆍ부동행(不動行)은 생겨나고서 지나가 버리는 것이니, 만약 아뢰야식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마땅히 어느 곳에 훈습을 안립할 수 있겠는가?

육식(六識)과 같은 것이 모든 훈습을 지닐 수 없음은 앞의 번뇌 잡염의 일을 말하는 가운데에서 갖추어서 나타내 보였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은 만약 행(行)의 지분이 식(識)의 지분에 조건(緣)이 되지 않는다면, 이라는 뜻이며,

‘취(取)의 지분이 유(有)의 지분에 조건이 되는 것 역시도 상응하지 않는다’란, 역시 취의 지분이 유의 지분에 조건이 되지 않는다면, 다시 이것은 무엇을 조건으로 삼겠는가?라는 뜻이니,

이른바 이전의 여러 행의 지분에 훈습된 식은 취의 지분의 세력으로 인하여 훈습되어 증장하고 전전하여서 유(有)의 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업은 잡염의 성품이기 때문에 업의 잡염이라 이름하거나, 혹은 업에 의해서 잡염이 있기 때문에 업의 잡염이라 부르는 것이다. 만약 아뢰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이 업의 잡염 역시도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攝大乘論釋卷第二 終 섭대승론석 제 2권을 마침.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2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4

 

ㅡ이하는 8식이 종자를 훈습받아서 저장하는 소훈처(所熏處)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가지의 속성을 말한다.

堅無記可熏, 與能熏相應, 所熏非異此, 是爲熏習相.

견고함, 무기성, 훈습이 가능하다는 것은 능훈(能熏)과 상응함이며, 

소훈(所熏)은 이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니, 이것을 훈습의 상으로 삼는다.


六識無相應, 三差別相違, 二念不俱有, 類例餘成失.

육식(六識)에는 상응하지 않으니,  가지의 차별로 서로 위배되는 것이며

 찰나의 생각이 함께하지 않으니, 다른 것에 견준다면 과실을 이루네.


此外內種子, 能生引應知, 枯喪由能引, 任運後滅故.”

이 내부와 외부의 종자가 능히 생겨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말라 죽은 고상(枯喪)은 능히 이끌어 내는 능인(能引)에 의한 것이니

그러한 연후에 자연스럽게 멸하기 때문이라네.

 

爲顯內種非如外種,復說二頌:

내부 종자는 외부 종자와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게송을 말한다.


“外或無熏習, 非內種應知, 聞等熏習無, 果生非道理.

혹 외부에서의 혹은 훈습이 없어도, 내부 종자는 그렇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ㅡ외부 종자는 훈습없이도 생겨나지만, 내부 종자는 훈습에 의하지 않으면 생기(生起)  없다.

듣는  등의 훈습이 없어도, 결과가 생겨난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네.

ㅡ듣고 사유하며 수행하는 문사수(聞思修)는 훈습없이 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 결과는 생기지 않는.


作不作失得, 過故成相違, 外種內爲緣, 由依彼熏習.”

지은 것과 짓지 않은 작불작(作不作)으로 상실과 소득의 과실이 있게 됨으로써, 서로 위배되는 것이니, 

외부 종자는 내부를 반연하여 연(緣)으로 삼고, 그것의 훈습에 의지하기 때문이라네.


▶釋曰:如是已說阿賴耶識, 爲一切法眞實種子, 復欲顯示彼種子體,說斯五頌.

此中外者,謂稻穀等. 內者,卽是阿賴耶識. 不明了者, 謂外種子,是無記義.

▷해석한다; 이와 같이 이미 아뢰야식이 일체법의 진실한 종자임을 말하였다. 다시  종자의 체(體)를 나타내기 위해서  다섯 개의 게송을 말하였으니,

여기에서 ‘외부(外)’는  등을 말하고, ‘내부(內)’는  아뢰야식이다. 

‘명료하지 않다는 불명료(不明了)’는 외부 종자가 무기(無記) 말하는 것이다. 

ㅡ외부의 종자는  성품이 () 아니고 불선도 아니므로 명료라고 말하였으니,  무기(無記)인 것이다.

 

言於二者,阿賴耶識於善`不善二性明了, 通有記故. 復有別義,謂於雜染`淸淨明了.

唯世俗者,謂外種子,唯就世俗,說爲種子. 所以者何? 彼亦皆是阿賴耶識,所變現故.

勝義卽是阿賴耶識.所以者何?是一切法,眞種子故.

‘두 가지의 이자(二者)’란, 아뢰야식은 선ㆍ불선의  성품에 대해서 명료한 것은, 모두 유기(有記)이기 때문이나,  

다시 다른 의미가 있으니, 이른바 잡염과 청정의  가지에 대해서 명료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세속이라는 유세속(唯世俗)’은 외부 종자는 오직 세속에 있어서만 종자라고 말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것도 역시 모두 아뢰야식에서 변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승의(勝義)’는  아뢰야식이니, 이것이 제법의 참다운 종자이기 때문이다.


應知如是一切種子,復有六義. 剎那滅者,謂二種子,皆生無閒定滅壞故. 所以者何? 不應常法,爲種子體, 以一切時, 其性如本無差別故.

마땅히 알지니, 이와 같은 모든 종자에 다시 여섯 가지의 육의(六義)가 있으니, 

‘찰나에 멸한다는 찰나멸(剎那滅)’이란,  종자가 모두 생겨나는 즉시 반드시 소멸하기 때문이니, 무슨 까닭에서 인가? 마땅히 상주하는 법(常法)이 종자의 체가 되지 않으니, 언제나  성품이 본래와 같아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찰나멸(剎那滅), 종자는 고정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생기하고 소멸하면서 지속되는 찰나멸(刹那滅)의 뜻(義)이다.

 

言俱有者,謂非過去,亦非未來,亦非相離,得爲種子.何以故? 若於此時種子有, 卽於爾時果生故.

‘함께 한다는 구유(俱有)’는, 과거도 아니고 역시 미래도 아니며, 또한 서로 여의지 않으면서 종자가   있으니, 왜냐하면 만약 그 때에 종자가 있으면  그 때에 결과가 함께 생겨나기 때문이다.

ㅡ종자가 현행하여 심리 인식작용이 이루어지는 순간과  결과가 종자로서 훈습되는 순간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짐을 말하는 과구유의(果俱有義)이다. 

 

恒隨轉應知者,謂阿賴耶識乃至治生, 外法種子乃至根住, 或乃至熟.

‘항상 따라서 유전한다고 알아야 한다는 항수전응지(恒隨轉應知)’는, 아뢰야식은 나아가 다스림이 생겨날 때까지이고, 외부의 법종자는 나아가 뿌리가 머물 때까지, 혹은 나아가 열매가 성숙할 때까지를 말하는 것이며, 

ㅡ선종자나 악종자는  부류로 상속해서 전후 찰나에 성질이 바뀌거나 단멸되지 않는다는 항수전의(恒隨轉義).

 

言決定者,謂此種子各別決定,不從一切一切得生 ,從此物種,還生此物.

‘결정(決定)’이라는 것은  종자는 각각 결정적이어서 일체의 모든 것에 따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모든 것이 생겨나는 것도  사물의 종자로부터 다시  사물을 생겨나게 하는 것 말한다.

선ㆍ악ㆍ무기를 일으킬 힘이 결정되어 있어서, 선종자에서 악의 결과가 현행된다거나, 악종자에서 선의 결과가 현행되는 경우는 결코 없다는 뜻의 성결정의(性決定義).

 

待衆緣者,謂此種子待自衆緣方能生果,非一切時能生一切, 若於是處`是時,遇自衆緣,卽於此處`此時,自果得生.

‘여러 조건을 기다린다는 대중연(待衆緣)'이란, 이 종자는 자신의 여러 조건인 중연(衆緣)을 갖추어야 비로소 능히 결과를 생겨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어느 때에나 능히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하지는 않는 것이다. 

만약 이곳에서 이 때에 자신의 여러 조건을 만난다면,  이곳에서 이 때에 자신의 결과를 생겨나게   있는 것이다.

ㅡ종자는 선ㆍ악 등의 성질이 결정되어 있지만, 그것이 현행되려면 중연(衆緣,  작의作意ㆍ감각기관ㆍ대상 ) 화합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대중연의(待衆緣義)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 이시인과(異時因果) 관계는 이루어질지라도,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동시인과(同時因果) 관계가 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唯能引自果者,謂自種子,但引自果,如阿賴耶識種子,唯能引生阿賴耶識,如稻穀等,唯能引生稻穀等果.

‘오직 능히 자신의 결과를 이끌어 낸다는 유능인자과(唯能引自果)’는, 자신의 종자는 다만 자신의 결과만을 이끌어 낼 뿐이니, 아뢰야식의 종자는 오직 능히 아뢰야식을 이끌어냄과 같고,  등이 오직  등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우선 종자가 결과를 생겨나게 하는 의미를 나타낸다. 

종자는 오직 자기 스스로의 결과만을 발생시킨다는 인과자의(引自果義)이다.

 

如是且顯種果生義, 今當更示熏習異相.

이제 마땅히 다시 훈습의 다른 이상(異相)을 보일 것이니, 

ㅡ이하는 8식이 종자를 훈습받아서 저장하는 소훈처(所熏處)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가지 속성을 말한다.


堅者,堅住方可受熏, 非如動風. 所以者何? 風性疏動,不能任持,所有熏氣, 一踰膳那,

‘견고하다는 견(堅)’이란, 견고하게 머물러서 비로소 훈습을 받을  있는 것으로, 움직이는 바람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람의 성품은 성글고 또한 움직여서 소유한 훈습의 기운을 지닐  없기 때문이다.

ㅡ식의 흐름이  부류로써 견고(堅)하게 상속해서(住) 단절되지 않는 것 말한, 견주성(堅住性)이다.

 

彼諸熏氣,亦不隨轉;占博迦油,能持香氣,百踰膳那,彼諸香氣,亦能隨轉.

1유선나(踰膳那)는  모든 훈습의 기운을 역시 따라서 전전하지 못하며,  

첨바가(占愽迦)의 기름은 향기 지니는 것으로,  유선나 밖에까지도  향기가 능히 따라서 전전한다. 

 

유선나(踰膳那), 보통 유순(由旬)이라 하며, 인도에서 거리의 단위이다. 멍에를 황소 수레에 걸고 하루에 가는 여정(旅程)으로, 일반적으로 40리(里)에 해당된다고 한다.

점박가(占博迦)는 범어 campaka의 음역으로, 매우 향기가 좋은 금색화(金色花)로부터 취한 향유(香油)이다.

 

言無記者, 是不可記極香臭義. 由此道理,蒜不受熏,以極臭故;如是香物,亦不受熏,以極香故.若物非極香臭所記,卽可受熏.

‘무기(無記)’는 지극한 향을 갖지 않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러한 도리로 인하여 마늘은 훈습을 받지 못하는 것이니, 지독한 냄새 때문이다. 

이와 같이 향기로운 사물도 역시 훈습을 받지 못하는 것이니, 그 지극한 향기 때문이며, 만약 지극한 향취를 갖지 않았다면,   훈습을 받을  있는 것이다.

ㅡ유루ㆍ무루ㆍ선ㆍ악 등의 모든 종자를 저장하려면 체성(體性) 무기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 무기성(無記性).

 

言可熏者.謂應受熏方可熏習, 非不受熏如金石等. 不應受熏,名不可熏. 若於此時,能受熏習, 卽於爾時,名爲可熏, 如可熏物.

‘훈습이 가능하다는 가훈(可熏)’이라는 것은 마땅히 훈습을 받을 만한 것에는 훈습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훈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금ㆍ돌 등과 같이 마땅히 훈습을 받지 못하는 것을 훈습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나, 만약 이 때에 능히 훈습을 받는다면,  훈습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니,  등과 같이 훈습을 받을 만한 사물인 것이다.

ㅡ제8식의 체성이 무부무기(無覆無記, 진여ㆍ무위법이 아님)이므로 훈습을 받아들이는 작용이 생겨날  있음을 말한, 가훈성(可熏性)이다.

 

與能熏相應者, 能熏相應方名可熏,非不相應,當知卽是無閒生義.言所熏者,阿賴耶識.

‘능훈과 상응한다는 능훈상응(能熏相應)’이라는 것은, 능훈(能熏)과 상응하는 것을 훈습이 가능한 것이라 말하는 것이니, 상응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전찰나와 간격없이 생겨난다는 뜻이니, 소훈(所熏)은 아뢰야식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ㅡ능훈식(能熏識) 동시동처(同時同處)에서 화합할 있는 속성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화합성(和合性).


具上四德,應受熏習,故名所熏,非轉識等.

이상과 같은  가지 속성의 사덕(四德)을 갖추어야 훈습을 받을  있기 때문에 소훈(所熏)이라 이름하며, 전식(轉識) 등이 아닌 것이다. 

 

전식(轉識), 근본식인 아뢰야식에서 전변하여 생기한 식으로서 안식부터 말나식까지의 7()이다.

 

非異此者,謂若離此阿賴耶識, 餘非所熏,是故所熏卽此非異. 是爲熏習相者. 謂阿賴耶識有剎那滅等,是熏習相,剎那滅故`與諸轉識俱時有故, 乃至對治恒隨轉故`或窮生死恒隨轉故` 定與善等爲因性故` 待福非福,不動行緣, 於善惡趣,異類熟故.

‘이것과 다르지 않다는 비이차(非異此)’는 아뢰야식을 떠난, 다른 것은 소훈이 아님을 말하는 것으로, 따라서 소훈은  이것과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을 훈습의 상으로 삼는다는 시위훈습상(是爲熏習相)’이란, 아뢰야식에 찰나멸 등이 있어서, 이것이 훈습의 상임을 말하는 것이니, 찰나에 멸하기 때문이고, 모든 전식(轉識)과 함께하면서 존재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다스림의 대치(對治)의 시기까지 항상 따라서 유전하기 때문이고, 

혹은 생사가 다할 때까지 항상 따라서 유전하기 때문이며,

결정적으로  등의 원인의 인성(因性) 되기 때문이며,

복(福)ㆍ비복(非福)ㆍ부동행(不動行, 모든 선정)의 조건을 기다려서 살기 좋은 선취(善趣) 괴로운 악취(惡趣) 대하여 다른 부류로 성숙하기 때문이다.

 

如是等義, 於轉識中,一切異法,皆應成立.是故唯此阿賴耶識,與如是等勝德相應,可受熏習.

이와 같은 등의 의미는 전식(轉識)에 있어서는, 다른 법(異法)이  성립되는 것이니, 따라서 오직  아뢰야식만이 이와 같이 뛰어난 속성과 상응해서 훈습을 받을  있는 것이다.

ㅡ전식(轉識) 앞에서 말한  가지 속성의 사덕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이법(異法)이라 하는 것이.

 

六識無相應者,謂彼諸識有動轉故. 三差別相違者,謂彼諸識,別別所依`別別所緣`別別作意.復有餘義,別別行相,一一轉故.

‘육식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육식무상응(六識無相應)’이란, 그 모든 식은 움직여서 유전됨이 있기 때문이며,

‘세 가지 차별로 서로 위배된다는 삼차별상위(三差別相違)’란, 그 모든 식이 소의(所依, 의지처)를 각각 다르게 하고, 소연(所緣, 인식대상)을 각각 다르게 하며, 작의(作意)를 각각 다르게 한다는 것을 말하나,

다시 다른 의미로서는, 각각 다른 작용이 그 각각 전전하기 때문이다.

 

작의(作意),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심왕과 심소(心所, 심리작용)를 대상에 주의시켜서 인도하는 작용으로, 촉(觸) 심소(心所) 다음에 일어나며, 이로 인해서 감수작용의 수(受)가 있게 되는 것이다.

 

譬喩論師欲令前念熏於後念, 爲遮彼故, 說言二念不得俱有, 無二剎那一時而有, 俱生`俱滅,熏習住故.

경량부의 비유논사(譬喩論師)는 전찰나의 생각인 전념(前念)이 후찰나의 생각인 후념(後念)에 훈습되는 것으로 하고자 하였으나,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이러한 두 찰나의 생각이 함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두 찰나에는 동시에 함께 생겨나는 구생(俱生)이고 함께 멸하는 구멸(俱滅)의 훈습이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若謂此識種類如是,雖不相應, 然同識類, 亦得相熏. 如是例餘,應成過失. 謂餘種類例亦應爾, 以眼等根同淨色類, 亦應展轉,更互相熏. 此意說言

만약 이 식의 종류가 이와 같이 상응하지는 않지만 같은 식의 부류는 역시 서로 훈습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와 같음을 다른 것에 견주어서 당연한 과실이어야 하는 것이니, 다른 종류의 예 또한 역시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안근 등은 청정한 물질의 부류인 정색류(淨色類, 승의근勝義根)를 같게 함으로써 역시 마땅히 전전하여 다시 서로 훈습해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말한 것이다.

 

승의근(勝義根), 정색의 정묘한 내적인 감각기관을 승의근(勝義根)이라 하고, 육신의 거친 외적인 감각기관을 승의근을 돕는 부진근(扶塵根)이라 한다. 예를 들어, 승의근(勝義根)인 안근이 부진근(扶塵根)인 육신의 눈의 도움(부扶)를 받아 외계대상인 색경(色境)을 취하면 이러한 취함을 바탕으로 안식(眼識)이 생겨나는, 즉, 안식이 외계대상을 직접 취하여 안식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안근의 취함을 바탕으로 하여 안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5근을 5식의 소의(所依)라고 말한다.

 

眼耳兩根同有淨法, 二淨展轉應互相熏,餘亦如是. 然汝不許,雖同淨法,異相續故, 不得相熏.識亦應爾, 雖同識法, 何得相熏?

안근과 이근에 마찬가지로 청정한 정법(淨法)이 있고, 두 가지 청정한 이정(二淨)이 전전하여 마땅히 서로를 훈습하는 것이며, 다른 것도 역시 이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나, 

그런데 그대는 인정하지 않으니, 청정한 정법(淨法)을 같이한다고 할지라도 상속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훈습할 수 없는 것인, 식(識) 역시도 마땅히 그러한 것이니, 

비록 식법(識法)을 같이한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서로를 훈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如是所說二種種子,謂外及內, 應知皆有能生`能引. 此中外種乃至果熟,爲能生因, 內種乃至壽量邊際,爲能生因.

外種能引枯後相續,內種能引喪後屍骸,由引因故,多時續住.

이와 같이 말한 두 종류의 종자, 즉 외부와 내부의 종자는 모두 능히 생겨나게 하는 능생(能生)과 능히 이끌어 내는 능인(能引)이 있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 중에서 외부 종자는 나아가 결과가 성숙할 때까지를 능히 생겨나게 하는 원인인 능생인(能生因)이 되고,

내부 종자는 나아가 수명이 다할 때까지를 능히 생겨나게 하는 원인인 능생인(能生因)이 되는 것이다.

외부 종자는 말라 죽은 후의 상속을 이끌고, 내부 종자는 죽은 후의 시체를 이끄는 것이니, 이끄는 원인인, 인인(引因)으로 인하여 오랜 시간 동안 상속해서 머무는 것이다.

 

若二種子,唯有生因,此因旣壞,果卽應滅,應無少時相續住義. 若謂剎那展轉相續,前念爲因,後念隨轉, 是則後邊不應都滅, 由此決定應有引因.此二種子,譬如放弦,彎弓爲因,箭不墮落,遠有所至.

만약 두 종자에 오직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있을 뿐이라면, 이 원인이 파괴된다면 결과도 마땅히 곧 소멸해야 할 것으로, 잠깐 동안이라도 상속해서 머무는 의미가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 찰나에 전전해서 상속한다고 말한다면, 전찰나의 전념(前念)을 원인으로 삼아서 후찰나의 후념(後念)이 따라서 전전할 것이니, 이러한 것은 뒤의 모두가 멸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이로 인하여 반드시 이끄는 원인인, 인인(引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종자를 비유한다면, 활을 놓을 때, 활을 쏘려고 활시위를 당기는 것을 원인으로 삼아서 화살이 떨어지지 않고 멀리 이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화살을 놓아버리는 것을 생겨남의 생인(生因)이라 하고, 둥글게 활시위를 당기는 것을 이끄는 원인의 인인(引因)으로 삼는다. 만약 다만 화살을 놓는 것을 원인으로 삼을 , 둥글게 활시위를 당기는 것을 원인으로 삼지 않는다면 화살이 멀리 없기 때문이다.

 

▶論曰:復次其餘轉識普於一切自體諸趣, 應知說名能受用者.如『中邊分別論』中說伽他曰:

▷논문; 또한  나머지 전식(轉識)은 널리 모든 일체의 자체의 제취(諸趣, 여러 윤회세계)에 대해서 능히 수용하는 것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에서 게송으로 말한 것과 같다.


“一則名緣識,第二名受者,此中能受用,分別推心法.”

첫째는 인연의 연식(緣識, 아뢰야식)이라 이름하고

둘째는 수용의 수자(受者, 수식受識)이라 부르는 것이니, 

 중에서67) 능히 수용함과 분별하고 헤아리는 추(推)는 심리작용인 심법(心法, 심소법)이라네.

연식(緣識)아뢰야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식이 전변 생기하는 인연이기 때문이다.

수자(受者), 수용식ㆍ수식(受識)이라 하며, 외부 대상을 수용하는 식,  전식(轉識)이다.

헤아리는 추(推)는 사(思)ㆍ작의(作意) 등의 심소법을 말한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2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3

 

▶論曰: 云何熏習無異無雜, 而能與彼有異有雜諸法爲因? 如衆纈具纈所纈衣, 當纈之時, 雖復未有異雜,

非一品類可得. 入染器後, 爾時衣上便有異雜, 非一品類染色絞絡文像顯現.

阿賴耶識,亦復如是, 異雜能熏之所熏習, 於熏習時, 雖復未有異雜可得, 果生染器現前已後,

便有異雜無量品類諸法顯現. 纈 홀치기염색 혈, 

▷논문; 훈습에는 차이도 없고 잡염도 없는데, 어떻게 능히  차이가 나고 잡염된법의 원인이 되는 것인가?

여러가지 무늬를 만드는 홀치기 도구와 그 무늬로 물들여진 옷과 같은 것이니,

그것을 물들이기 전에는 다르고 잡염된 것이 아닌, 한 가지의 종류이었지만, 염색 그릇에 들어간에는 옷에 잡염되고 차이가 있게 되어서, 염색으로 물들여져서 같은 종류가 아닌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아뢰야식 역시도 이와 같아서 잡염의 다른 능훈(能熏)이 훈습하는 곳이다. 

훈습하기 전에는 잡염된 다름이 없지만, 염색 그릇에 들어 간, 현전의 결과가 생긴 이후에는 문득 잡염되어서 무량하게 다른 품류의법이 현현하게 되는 것이다.

ㅡ원인과 결과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개별이면서도 개별이 아닌 속성을 띄는 것 말하는, 제8 인과별부별장(8 因果別不別章).


▶釋曰: 云何熏習無異無雜, 而能與彼有異有雜諸法爲因者, 欲以譬喩顯斯道理, 故爲此問.

如衆纈具纈所纈衣, 當纈之時,雖無異雜文像可見, 入染器後, 便有異雜文像可見.

阿賴耶識,如所染衣,果生卽染器,故名果生染器.

入者, 卽是緣所攝義.於熏習時, 雖無異雜, 至果熟位,便有非一品類諸法因性顯現,如已染衣.

▷해석한다; ‘훈습자체에는 차이도 없고 잡염도 없거늘, 어떻게 능히  잡염되고 다른 제법의 원인이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비유로써  도리를 나타내고자 질문을  것이다. 

여러 무늬를 내는 홀치기 도구와 그 무늬로 물들여진 옷과 같이, 그것을 물들일 때에는 아직 차이가 나지 않고 잡염된 것을   없지만, 염색 그릇에 들어간 이후에는 문득 차이가 나고 잡염된 모습을   있음과 같은 것이다. 

아뢰야식은 물들여진 옷과 같은 것이니, 결과가 생기는 것은 염색 그릇으로 인하여, ‘결과가 생기는 염색 그릇의 과생염기(果生染器)’라 부르는 것이다.

‘들어간다는 입(入)’이란, 이러한 연(緣)에 포섭되는 뜻으로, 훈습할 때에는 잡염되어서 차이가 나지만, 결과가 성숙한 단계에 이르러서는 문득 하나의 품류가 아닌, 제법의 인성(因性)이 나타나는 것은, 염색된 옷과 같은 것이다.


▶論曰:如是緣起, 於大乘中,極細甚深. 又若略說有二緣起: 一者分別自性緣起` 二者分別愛`非愛緣起.

此中依止阿賴耶識諸法生起, 是名分別自性緣起, 以能分別種種自性, 爲緣性故.

復有十二支緣起, 是名分別愛`非愛緣起,以於善趣`惡趣,能分別愛`非愛種種自體,爲緣性故.

▷논문; 이와 같은 연기(緣起)는 대승에서 극히 미세하고 심심(甚深)한 것이며,

또한 간략히 말한다면  종류의 이연기(二緣起) 있으니,

하나는 자성을 분별하는 분별자성연기(分別自性緣起)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분별애비애연기(分別愛非愛緣起)이다. 

 중에서 아뢰야식에 의지해서 생기는 제법을 자성을 분별하는 분별자성연기(分別自性緣起)라 하는 것으로,

능히 갖가지의 자성을 분별함으로써 조건(緣)의 성품이 되는 연성(緣性)이기 때문이다. 

다시 12지연기(十二支緣起)가 있으니, 이것을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분별애비애연기(分別愛非愛緣起)라 하나니, 살기 좋은 세계의 선취(善趣)와 괴로운 세계의 악취(惡趣)에 대해서 능히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갖가지의 체를 분별함으로써 조건의 성품인, 연성(緣性)이 되기 때문이다.

ㅡ연기(緣起) 관하여 설명한, 제9 연기장(9 緣起章).

 

12지연기(十二支緣起), 일반적으로 12연기(緣起)ㆍ12인연(因緣)이라 하며, 현상세계에서 인간이, 특히 인간의 괴로움이 존재하게 되는 방식을 열두 단계로 설명한 것이다.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의 무명(無明)→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형성작용의 행(行)

식별작용ㆍ윤회의 주체인 식(識) →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의 명색(名色)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입(入)  →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육식(六識)의 화합인 촉(觸)

감수작용의 수(受) → 갈애의 애(愛) → 애(愛)의 대상에 대한 집착하는 취(取)

생사하는 존재 자체의 형성인 유(有) → 태어남ㆍ삶의 생(生)

늙고 죽음ㆍ근심ㆍ슬픔ㆍ고뇌 등의 괴로움의 노사우비뇌고(老死憂悲惱苦).


▶釋曰:如是緣起,於大乘中,極細甚深者,異生覺慧,難了知故, 名爲極細. 阿羅漢等, 難窮底故, 名爲甚深.

又若略說有二緣起者,擧數.一者分別自性緣起`二者分別愛`非愛緣起者,列名.

此中依止阿賴耶識者,謂阿賴耶識爲因, 諸法生起, 是名分別自性緣起, 由能分別異類自性, 爲因性故.

若無明等,是名分別愛`非愛緣起,由能分別愛`非愛種種自體,爲因性故.

▷해석한다; ‘이와 같은 연기를 대승에서 극히 미세하고 심심(甚深)하다’고 하는 것은 이생(異生, 범부)의 지혜로는 알기 어렵기 때문에 ‘극히 미세하다’고 하는 것이며,  

연각(緣覺)의 벽지불(僻支佛)인 아라한(阿羅漢) 등도 철저하게 궁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심오한 심심(甚深)’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간략히 말하여서  종류의 이연기(二緣起) 있다’는 것은 숫자를 드는 것이며, 

‘하나는 자성을 분별하는 분별자성연기(分別自性緣起)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분별애비애연기(分別愛非愛緣起)이다’라고 한 것은, 명칭을 열거한 것이다.

‘이 중에서 아뢰야식에 의지한다’는 것은 이른바 아뢰야식이 원인(因)이 되어서 법이 생기(生起)하는 것을 자성을 분별하는 분별자성연기(分別自性緣起) 이름한다는 것이니, 능히 다른 품류의 자성을 분별해서 인성(因性)으로 삼기 때문이다.

만약 무명(無明) 등이라면,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분별애비애연기(分別愛非愛緣起)라 하나니,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갖가지의 자체(自體)를 분별해서 인성(因性)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생(異生)은 갖가지 견해와 번뇌에 의한 여러 가지의 과보를 받아서 여러 세계(趣)에 태어난 중생이란 뜻이다. 또는 성인(聖人)과 다른 생류(生類)라는 의미로서, 곧 범부인 것이다.


▶論曰:於阿賴耶識中,若愚第一緣起, 或有分別自性爲因 `

▷논문; 아뢰야식에서, 만약  번째의 분별자성연기 어리석을 경우에는,

혹은 자성을 원인(因)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가 있고,

ㅡ인도의 6파철학(派哲學) 하나인 상캬(Sākhya)학파의 주장으로, 자성은 프라크리티(prakti)로서, 근본 원질(原質)ㆍ근본 자성ㆍ제1 원인인 승인(勝因) 등의 뜻이. 상캬학파에서는 세계를 푸루샤(puruṣa, 神我, 순수 청정한 정신성) 프라크리티의 2원론(元論)으로 파악하고, 세계를 25원리에 의해 설명하였다. 

프라크리티(자성)는 라자스(rajas, 動質)ㆍ사트바(sattva, 純質)ㆍ타마스(tamas, 暗質)  가지의 속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계 만물의 차이는   요소가 어떤 비율로 결합되고,  결합에서 어떤 요소가 지배적인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한다. 프라크리티(자성)의 내적인 평형상태가 깨어져서 23원리 , 붓디(buddhi:大ㆍ智)→아만→5유량(唯量:色ㆍ聲ㆍ香ㆍ味ㆍ觸)5(:地ㆍ水ㆍ火ㆍ風ㆍ空)11(:눈ㆍ귀ㆍ코ㆍ혀ㆍ피부ㆍ손ㆍ발ㆍ입ㆍ생식기관ㆍ배설기관ㆍ心根) 전개된다고 하였.

 

或有分別宿作爲因`

혹은 과거에 지은 것을 원인(因)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도 있으며

ㅡ순세외도(順世外道, Lokāyatika) 주장이다. 그들은 세간의 모든 원인은 다만 과거에 지은 것만 있을 , 현재 노력하는 것은 결과를 초감할  없다고 하였다.

 

或有分別自在變化爲因`

혹은 자재천(自在天) 변화를 원인(因)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도 있고,

ㅡ자재천(自在天) 섬기는 외도의 주장으로, 이들은 다만 자재천이라는 하나의 원인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자재천은 색계의 초선천(初禪天)에서 3 () 주관한다고 하며, 혹 욕계의 6천주라고도 하며,  () 세계의 본체 또는 창조의 신으로서, 만물이 자재천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된다고 한다.

 신이 기뻐하면 중생이 편안하고, 성내면 중생이 괴롭게 된다고 한다.  자재천의 () 자아 등으로 하여금 선악을 일으키고 생사에 윤회하게 하며, 나중에 혐오를 일으켜서 해탈을 구하게 만든다고 하였.

 

或有分別實我爲因`

 혹은 실체의 자아를 원인(因)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도 있으며,

ㅡ바이세시카(Vaiśeṣika, 勝論)학파의 주장으로, 학파는 극단적인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유물론적(唯物論的) 다원론(多元論)으로서 세계의 구성을 여섯 가지 범주인 육구의(六句義), 실체(實)ㆍ속성(德)ㆍ행위(業)ㆍ보편성(同, 大有性)ㆍ특수성(: 同異性)ㆍ내재성(和合性)으로 설명하고, 이것들은 식을 떠나서도 별도로 상주하는 자체(自體) 있다고 인정하였다.

 

或有分別無因`無緣.

혹은 원인도 없는 무인(無因)이고 조건도 없는 무연(無緣)이라고 분별하는 이도 있다.

 

若愚第二緣起,復有分別我爲作者`我爲受者.

만약  번째의 분별애비애연기(分別愛非愛緣起) 어리석을 경우에는 자아를 짓는 작자(作者) 하고, 

자아를 받는 수자(受者)라고 하여서 분별하는 이도 있으니,

ㅡ상일주재(常一主宰) 자아가 모든 것의 작자(作者),  원인이고 또한  과보를 받는 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譬如衆多生盲士夫未曾見象, 復有以象, 說而示之. 彼諸生盲有觸象鼻`有觸其牙`有觸其耳`

有觸其足`有觸其尾`有觸脊梁.諸有問言: 象爲何相?或有說言,象如犂柄

,或說如杵`說如箕`或說如臼`或說如帚,或有說言,象如石山.

비유하자면, 일찍이 코끼리를 보지 못한 여러 선천적인 맹인들이, 어떤 이가 코끼리를 말하면서 그것을 보여주는 경우와 같은 것이니,  선천적인 맹인들은 코끼리의 코를 만져보는 이도 있고,  이빨을 만져보는 이도 있으며,  귀를 만져보는 이도 있고,  다리를 만져보는 이도 있으며,  꼬리를 만져보는 이도 있고, 등을 만져보는 이도 있어서,

어떤 이가 코끼리는 어떻게 생겼는가?”라고 물으면, 

 어떤 맹인은 코끼리가 보습자루 같다고 말하고,  절구공이 같다고도 하며,  삼태기 같다고도 하고,  절구 같다고도 하며,  길다란 추(箒)와 같다고도 하고,  어떤 맹인은 코끼리가 산신제를 재낼 때 사용하는 산석(山石) 같다고도 하는 것과 같.

 

若不解了此二緣起,無明生盲, 亦復如是, 或有計執自性爲因` 或有計執宿作爲因` 或有計執自在爲因`

或有計執實我爲因` 或有計執無因無緣, 或有計執我爲作者`我爲受者.

阿賴耶識自性`因性及果性等,如所不了象之自性.

만약 이  가지의 연기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명의 선천적인 맹인이 코끼리를 이해하는 것과 같이,

혹은 자성을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하고, 혹은 과거에 지은 것을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하고, 혹은 자재천을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하고, 혹은 실체의 자아를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하고, 혹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고 헤아려서 집착하고, 혹은 자아를 짓는자, 자아를 받는자라고 헤아려서 집착하는 것이니,

아뢰야식의 자성(自性)ㆍ인성(因性, 원인)과성(果性, 결과) 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코끼리의 상(想)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釋曰:或有分別宿作爲因者,謂彼不許有士用因,故成邪執. 爲顯此等,
說生盲喩. 無明生盲者, 謂由無明, 故成生盲.

▷해석한다; ‘혹은 과거에 지은 것이 원인이라고 분별하는 이도 있다’는 것은, 사람의 공력(功力)을 원인으로 삼는, 사용인(士用因)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삿된 집착을 이루는 것이니, 이를 나타내어 보여주기 위해서 선천적인 맹인의 비유를 말한 것이다. 

‘무명의 선천적인 맹인이라는 생맹(生盲)'의 비유는 무명으로 인하여 선천적인 맹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阿賴耶識自性`因性及果性等, 如所不了象之自性者, 謂前所立此識自相, 說名自性,

所立因相說名因性,所立果相說名果性,

‘아뢰야식의 자체의 자성(自性)ㆍ인성(因性, 원인)ㆍ과성(果性, 결과) 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코끼리의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은, 앞에서 안립한 이 식의 자상(自相)을 자체의 성품인 자성(自性)이라 하고, 

안립된 원인의 인상(因相) 원인의 성품인 인성(因性)이라 말하며, 

안립된 결과의 과상(果相) 결과의 성품인 과성(果性)이라 하는 것이다. 

 

由無明力,不了此等. 於阿賴耶識分別自性緣起,不解了故,執自性等,爲諸法因.

무명의 으로 인하여 이것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아뢰야식의 자성을 분별하는 분별자성연기를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 자성 등에 집착해서 제법의 원인이라 하는 것이다. 

 

於第二分別愛`非愛緣起,不解了故,執有我爲作者`受者. 此中因謂阿賴耶識,諸法熏習,

於中持故.果者,卽是阿賴耶識,卽彼諸法,所熏習故.

 번째인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분별애비애연기를 알지 못한 까닭에 자아에 집착하여서 짓는 작자와 받는자라고 하는 것이니, 여기에서의 원인(因)은 아뢰야식이니,법의 훈습을  안에 지니기 때문이며,

결과도 곧 아뢰야식이니, 법에 훈습되기 때문이다.

 

▶論曰:又若略說, 阿賴耶識, 用異熟識一切種子, 爲其自性,能攝三界一切自體一切趣等.

▷논문; 또한 간략히 말한다면 아뢰야식은 이숙식(異熟識)의 모든 종자를 사용해서  자체의 자성(自性)으로 삼고, 능히 삼계(三界)의 모든 것의 자체(自體)와 모든 윤회세계인 일체취(一切趣) 등을 포섭하는 것이다.


▶釋曰:阿賴耶識,用異熟識一切種子,爲自性者,謂得自體異類熟故`諸法種子熏在中故

一切趣等者,謂五趣等. 一切自體者,謂趣趣中同分`異分種種差別.

▷해석한다; ‘아뢰야식이 이숙식의 모든 종자를 사용해서  자체의 성품인 자성(自性)으로 삼는다’는 것은 자체가 다른 부류로서 성숙하기 때문이니, 식의 자체는 원인과 부류를 달리하여 성숙된 과체(果體, 이숙식)이기 까닭이고,

제법의 종자가  안에서 훈습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윤회세계인 일체취(一切趣)’는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ㆍ인간의 5취(五趣)를 말하는 것이며,

‘모든 것의 자체인 일체자체(一切自體)’는 윤회세계인, 취취(趣趣) 가운데에서 같거나 다른 갖가지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論曰:此中五頌:

▷논문; 여기에 다섯 게송이 있으니, 


“外內不明了, 於二唯世俗, 勝義諸種子, 當知有六種,

외부와 내부는 명료하지 않음과 명료함이니, 이러한 두 가지는

오직 세속과 승의(勝義, 아뢰야식)의 모든 종자이니, 여섯 종류 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섭대승론석 2권의 4에서 해석한것; 

여기에서 ‘외부(外)’는 쌀 등을 말하고, ‘내부(內)’는 곧 아뢰야식이다. 

‘명료하지 않다는 불명료(不明了)’는 외부 종자가 무기의 뜻임을 말하는 것으로, 외부의 종자는 그 성품이 선(善)도 아니고 불선도 아니므로 불명료라고 말한 것으로, 곧 무기(無記)이다.

‘두 가지에 있어서’는 아뢰야식은 선ㆍ불선의 두 가지 성품에 대해서 명료한 것은, 모두 유기(有記)이나,  
혹은 다시 다른 의미로, 잡염과 청정의 두 가지에 대해서 명료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세속이라는 유세속(唯世俗)’은 외부 종자는 오직 세속에 있어서만 종자라고 말하는 것으로, 왜냐하면 그 역시 모두 아뢰야식에서 변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승의(勝義)’는 곧 아뢰야식으로, 이것이 제법의 참다운 종자이기 때문이다.


剎那滅俱有, 恒隨轉應知, 決定待衆緣, 唯能引自果.

찰나에 멸하는 찰나멸(刹那滅)과 함께하는 구유(俱有)는 항상 따라서 유전한다고 알아야 하나니, 

결정적인 여러 조건의 중연(衆緣)을 기다렸다가, 오직 자기의 결과를 능히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섭대승론석 2권의 4에서 해석한것; 

‘찰나에 멸한다는 찰나멸(剎那滅)’이란, 두 종자가 모두 생겨나는 즉시 반드시 소멸하기 때문이니, 무슨 까닭에서 인가? 마땅히 상주하는 상법(常法)이 종자의 체가 되지 않으니, 언체나 그 성품이 본래와 같아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찰나멸(剎那滅), 종자는 고정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생기 소멸하면서 지속되는 찰나멸(刹那滅)의 뜻(義)이다.

‘함께 한다는 구유(俱有)’는, 종자가 현행하여 심리 인식작용이 이루어지는 순간과 그 결과가 종자로서 훈습되는 순간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짐을 말하는 과구유의(果俱有義)이다. 

‘항상 따라서 유전한다고 알아야 한다는 항수전응지(恒隨轉應知)’는, 선종자나 악종자는 한 부류로 상속해서 전후 찰나에 성질이 바뀌거나 단멸되지 않는다는 뜻 항수전의(恒隨轉義).

‘결정(決定)’은 선ㆍ악ㆍ무기를 일으킬 힘이 결정되어 있으므로, 선종자에서 악의 결과가 현행된다거나, 악종자에서 선의 결과가 현행되는 경우는 결코 없다는 뜻의 성결정의(性決定義)이다.

‘여러 조건의 기다린다는 대중연(待衆緣)'은, 종자는 선ㆍ악 등의 성질이 결정되어 있지만, 그것이 현행되려면 중연(衆緣,  작의作意ㆍ감각기관ㆍ대상 등)과 화합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대중연의(待衆緣義)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의 이시인과(異時因果) 관계는 이루어질지라도,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의 동시인과(同時因果) 관계가 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오직 능히 자신의 결과를 이끌어 낸다는 유능인자과(唯能引自果)는, 종자는 오직 자기 스스로의 결과만을 발생시킨다는 인과자의(引自果義)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2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2

 

▶論曰: 如是已說阿賴耶識安立異門. 安立此相, 云何可見? 安立此相, 略有三種:

一者安立自相` 二者安立因相` 三者安立果相.

▷논문; 이와 같이 아뢰야식을 안립하는 다른 견해들을 말하였다. 

이 아뢰야식의 상(相)을 안립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아뢰야식의 상(相)을 안립함에 간략히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체의 상(自相)을 안립하는 것이고, 

둘째는 원인의 인상(因相)을 안립하는 것이며, 

셋째는 결과의 과상(果相)을 안립하는 것이다.

 

此中安立阿賴耶識自相者, 謂依一切雜染品法所有熏習, 爲彼生因, 由能攝持種子相應.

此中安立阿賴耶識因相者, 謂卽如是一切種子阿賴耶識, 於一切時與彼雜染品類諸法, 現前爲因.

此中安立阿賴耶識果相者,謂卽依彼雜染品法, 無始時來,所有熏習,阿賴耶識相續而生.

 중에서 아뢰야식의 자체의 자상(自相)을 안립한다는 것이란, 

일체의 모든 잡염품의 법이 훈습에 의해서 그것이 생겨나는 생인(生因)이 되고, 능히 종자를 거두어 지니는, 섭지종자(攝持種子)하고,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중에서 아뢰야식의 원인의 인상(因相) 안립하는 것이란, 

이와 같이 일체 모든 것의 종자인 아뢰야식이 언제 항상  잡염 품류의법이 현전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 말한다. 

 중에서 아뢰야식의 결과의 과상(果相) 안립한다는 것이란,

 잡염품의 법이 아득한 무시(無始)로부터 있어 온 훈습에 의지해서 아뢰야식이 상속하여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ㅡ아뢰야식의 상에 관하여 말하는 제4 상장(4 相章).


▶釋曰:如是已說阿賴耶識安立異門. 非說異門卽了其相, 是故次說此識自性`因性`果性.
此中安立自相者,

謂緣一切雜染品法,所有熏習,能生於彼功能差別識爲自性. 爲欲顯示如是功能, 故說攝持種子相應.

▷해석한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을 안립하는 다른 견해들을 말하였으나, 다른 견해를 말한다고 해서   상(相)을 아는 것이 아니니, 이러한 까닭 다음으로   자체의 성품인 자성(自性)ㆍ원인의 성품인 인성(因性)ㆍ결과의 성품인 과성(果性)을 말한다.

‘이 중에서 자체의 자상(自相) 안립한다’는 것은, 모든 잡염품의 법이 모든 훈습을 조건의 연(緣)으로 하고, 그것을 일으키는 특수한 작용의 공능차별(功能差別)의 식을 자성으로 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작용의 공능(功能)을 나타내기 위해서 종자를 거두어 지니는 섭지종자(攝持種子)하고 상응하는 것이다. 

 

謂依一切雜染品法, 所有熏習,卽與彼法,爲能生因. 攝持種子者,功能差別也. 相應者,是修義.是名安立此識自相.

此中安立因相者, 謂卽次前所說品類,一切種子 阿賴耶識, 由彼雜染品類諸法熏習, 所成功能差別, 爲彼生因. 

是名安立此識因相.

일체의 모든 잡염품의 법에 의지해서 모든 훈습이 있으니, 그 법이 능히 생겨나게 하는 생인(生因)이 되는 것이다. 

‘거두어 지닌 종자의 섭지종자(攝持種子)’란 특수한 작용의 힘인 공능차별(功能差別)이며,  

‘상응(相應)한다’는 것은 수행의 의미로써 이것을   자체의 자상(自相)을 안립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 중에서 원인의 인상(因相)을 안립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품류의 모든 일체 종자이니,

아뢰야식은  잡염 품류의법의 훈습으로 인해서 공능차별(功能差別, 특수한 작용의 힘)이 이루어져서 생겨나는 생인(生因)으로 삼는 것이니,

이를 이 아뢰야식의 원인의 인상(因相) 안립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此中安立果相者, 謂卽依彼雜染品法, 無始熏習, 此識續生, 而能攝持無始熏習.是名安立此識果相.

‘이 중에서 결과의 과상(果相)을 안립한다’는 것은  잡염품의 법이 아득한 무시로부터의 훈습에 의지해서  식이 상속하여 생(生)기는 것으로, 능히 아득한 무시로부터의 훈습을 거두어 지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식의 결과의 과상(果相)을 안립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此中自相,是依一切雜染品法, 無始熏習, 爲彼生因, 攝持種子識爲自性, 果性因性之所建立.

此中因相, 是彼雜染品類諸法, 熏習所成, 功能差別, 爲彼生因,唯是因性之所建立.

此中果相,是依雜染品類諸法,無始熏習,阿賴耶識相續而生,唯是果性之所建立.是三差別.

 중에서 자체의상(自相)이란, 모든 잡염품의 법이 아득한 무시로부터의 훈습에 의해서 생겨나는 생인(生因)으로, 종자식(種子識)을 거두어 지니는 것을 자성(自性)으로 삼는 것이니, 자상(自相)은 결과의 과성(果性)과 원인의 인성(因性)을 갖추는 식의 자체이기 때문이다.

 중에서 원인의 인상(因相)  잡염 품류의 제법의 훈습으로 이루어진 공능차별(功能差別, 특수한 작용의 힘)로서 그것이 생겨나는  생인(生因) 되는 것이니, 오직 인성(因性)만이 건립하는 바이며, 

 중에서 결과의 과상(果相) 잡염 품류의법이 아득한 무시로부터의 훈습에 의지해서 아뢰야식이 상속하여 생겨난 것으로, 오직 결과의 과성(果性)만을 건립하는이다.

이러함이  가지의 차이인 것이다.

 

▶論曰:復次何等名爲熏習? 熏習能詮,何爲所詮. 謂依彼法俱生`俱滅, 此中有能生彼因性,是謂所詮.

如巨勝中,有花熏習,巨勝與花俱生`俱滅, 是諸巨勝, 帶能生彼香因而生 .

▷논문; 또한 무엇을 훈습이라 하는 것인가?  훈습은 능전(能詮)의 언어이다. 

무엇을 능전(能詮)이 나타내는 의미의 소전(所詮)의 의의(意義)인 것인?

그것은 법과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는 것이니, 그 가운데에 능히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의 성품이 있는 것을 소전이라 하는 것이다. 

거승(蕂, 깨와 참깨의 총칭인, 호마胡麻) 꽃의 훈습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거승과 꽃이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는 것이니,  모든 거승은  향기를 내는 원인을 생겨나는 것이다.

ㅡ훈습에 관하여 설명의 제5 훈습장(5 熏習章).

 

설명할 전(詮)은 나타내는 것의 의미로써, 능전(能詮) 어구(語句)ㆍ문장ㆍ교법 등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에 따라 나타나는 의의(意義)와 내용을 소전(所詮)이라 한다.

 

又如所立,貪等行者,貪等熏習,依彼貪等俱生`俱滅,此心帶彼生因而生.

或多聞者,多聞熏習,依聞作意俱生`俱滅, 此心帶彼記因而生,

由此熏習,能攝持故,名持法者. 阿賴耶識熏習道理,當知亦爾.

다시, 이와 같이 탐욕 등을 행하는 자의 탐욕 등의 훈습이 그 탐욕 등과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기 때문에, 그 마음은 그것이 생겨나는 원인의 생인(生因)을 띄고 생겨나는 것이다.

혹은 많이 듣는 자의 많이 듣는 훈습은 듣는 작의(作意)와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기 때문에, 그 마음은 그것이 기억하는 원인을 띄고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훈습이란, 능히 거두어 지녀서 섭지(攝持)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을 지니는 지법자(持法者)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으니, 아뢰야식의 훈습의 도리 또한 역시 그와 같은 것으로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작의(作意),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심왕과 심소(心所, 심리작용)를 대상에 주의시켜서 인도하는 작용으로, 촉(觸) 심소(心所) 다음에 일어나며, 이로 인해서 감수작용의 수(受)가 있게 되는 것이다.

 

▶釋曰:謂依彼法俱生`俱滅, 此中有能生彼因性, 是謂所詮者. 

謂卽依彼雜染諸法俱生` 俱滅阿賴耶識, 有能生彼諸法因性,是名熏習,

▷해석한다; ‘그것은 법과 함께 생겨나는 법구생(法俱生)이고, 함께 멸하는 구멸(俱滅)이기 때문에, 능히 이 가운데에서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의 인성(因性)이 있는 것이다.

'이를 소전(所詮)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곧 그 모든 잡염법과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함으로써 아뢰야식에 능히 그 모든 법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의 성품이 있는 것으로 이것을 훈습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論曰:復次阿賴耶識中,諸雜染品法種子,爲別異住`爲無別異?

非彼種子有別實物, 於此中住,亦非不異. 然阿賴耶識如是而生,有能生彼功能差別,名一切種子識.

▷또한, 아뢰야식 안의 모든 잡염품의 법종자는 별개의 다른 것으로서 머무는 것인가?

별개의 다른 것이 아닌 것인가?

그것의 종자는 별도의 사물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니, 그 안에서 머무는 것 역시 별개의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은 이렇게 해서 생겨나고, 능히 그것을 생기게 하는 특수한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있는 것이니, 이를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ㅡ아뢰야식과 종자의 불일불이성을 논한, 제6 불일불이장(6 不一不異章).

 

▶釋曰:阿賴耶識中,雜染法種子,爲異`爲不異?

▷해석한다; 아뢰야식 안의 잡염품의 종자는 별개의 것인, 이체(異體)인가?

별개의 것이 아닌 동체(同體)인 것인가?

ㅡ아뢰야식과 종자가 동체(同體)인가, 이체(異體)인가를 묻는 것이다.

 

若爾何失?若有異者, 彼諸種子應分分別, 阿賴耶識剎那滅義, 亦不應成, 有別異故.

만약 그렇다면 무슨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인가?

만약 별개의 것이라면 그 모든 종자는 마땅히 부분마다 개별적이어야 할 것으로, 아뢰야식의 찰나멸의 뜻이 성립되지 않아야 할 것이니, 개별적이고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ㅡ아뢰야식 여섯 가지 종자의 속성인 육의(六義) 가운데 하나로써, 종자는 아뢰야식 안에서 고정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생기하고 소멸하면서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由善`不善熏習力故,種子應成善`不善性,然許無記. 若不異者, 云何有多?此不應理. 是故二說俱有過失.

선과 불선의 훈습력으로 인하여 종자는 마땅히 선과 불선의 성품을 이루어야 하는 것, 즉 종자는 선과 불선의 성질을 띄고 있지만 아뢰야식은 무기(無記)라고 인정되는 것이니,

만약 별개의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많은 종자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종자는 무수히 많이 있지만 아뢰야식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가지의 설(說) 모두에 과실이 있는 것이다.

 

非彼種子有別實物, 於此中住, 亦非不異, 乃至名一切種子識者, 爲避如前所說過失, 故不定取異及不異.

‘그것의 종자는 별도의 사물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안에서 머무는 것 역시 별개의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니, 나아가 일체종자식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과실을 피하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별개나 별개가 아님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ㅡ아뢰야식과 종자는 별개라거나 별개가 아닌, 어느 한쪽으로 결정할  없는 것으로, 불일불이(不一不異) 관계이기 때문이다.

 

如是而生者,謂由如是品類而生. 有能生彼功能差別者, 謂有能生雜染品法功能差別相應道理.

由與生彼功能相應故, 名一切種子識. 於此義中,有現譬喩,如大麥子, 於生自芽,有功能故, 有種子性.

若時陳久,或火相應, 此大麥果功能損壞,爾時麥相雖住如本, 勢力壞故, 無種子性.

阿賴耶識,亦復如是, 有生雜染諸法功能,由此功能相應故,說名一切種子識.

‘이렇게 해서 생겨난다’는 것은 이와 같은 품류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을 말하며,

‘능히 그것을 생기게 하는 특수한 작용의 힘인 공능차별(功能差別)’이라는 것은 능히 잡염품의 법을 생기게 하는 공능차별(功能差別)과 상응하는 도리가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생기게 하는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과 상응하기 때문에 일체종자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대해서 현실적인 비유가 있으니, 마치 보리와 같은 것으로, 

스스로 싹을 내는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있기 때문에 종자의 속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랜 동안 묵었거나 혹은 불(火)과 상응한다면, 이 보리는 결과를 내는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을 상실하여서, 보리의 모습은 본래와 같지만 공능(功能, 작용의 힘)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종자의 속성이 없는 것이다.

아뢰야식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니, 모든 잡염법을 생기게 하는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있으며, 이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과 상응함으로써 일체종자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論曰:復次阿賴耶識與彼雜染諸法, 同時更互爲因 ,云何可見?

譬如明燈. 焰炷生燒同時更互.又如蘆束,互相依持, 同時不倒. 應觀此中, 更互爲因,道理亦爾.

如阿賴耶識爲雜染諸法因,雜染諸法,亦爲阿賴耶識因,唯就如是安立因緣,所餘因緣,不可得故.

▷논문; 또한 아뢰야식과 그 모든 잡염법은 동시에 서로 원인이 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비유하자면, 밝은 등불의 불꽃과 심지가 생겨나고 타는 것이 동시에 서로 그렇게 이어지는 것과 같으며,

또한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동시에 함께 쓰러지지 않게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서로 다시 원인이 되는 도리 또한 그러한 것이라고 마땅히 관찰하여야 하는 것이다.

아뢰야식이 모든 잡염법의 원인이 되는 것과 같이, 모든 잡염법 역시도 아뢰야식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니,

오직 이렇게 해야만 인연을 안립할 수 있고 나머지로는 인연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ㅡ아뢰야식과 잡염품이 서로 원인ㆍ결과의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제7 갱호위인과장(7 更互爲因果章).

 

▶釋曰:復次阿賴耶識與彼雜染諸法 同時更互爲因云何可見?者, 欲以喩顯,故爲此問.

譬如明燈焰,炷生燒同時更互者,謂一剎那燈炷爲依發生燈焰, 是則燈炷, 爲焰生因;

卽此剎那焰復能燒所依燈炷,是則燈焰,爲炷燒因.餘喩亦爾.

▷해석한다; ‘또한, 아뢰야식과 그 모든 잡염법은 동시에 서로 원인이 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는 비유로써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밝은 등불의 불꽃과 심지가 생겨나고 타는 것이 서로 동시에 그렇게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니,  한 찰나의 등불의 심지를 의지해서 등불의 불꽃이 생기게 되는 것이니, 곧 등불의 심지는 불꽃이 생기는 원인이 되고, 이 찰나의 불꽃은 다시 능히 의지처인 등불의 심지를 태우는 것이니, 곧 등불의 불꽃은 심지가 타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으로, 다른 비유 역시도 그러한 것이다.

 

如是顯示有俱有因,由因現在住,卽見果生故.

이와 같이 구유인(俱有因)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니, 원인은 현재에 머물러 결과가 생기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6인(六因)은 6인(六因) · 5과(五果) · 4연(四緣)의 인과설에서의 6인(六因)은 6가지 종류의 원인이다.

①능작인(能作因) ②구유인(俱有因) ③동류인(同類因) 
④상응인(相應因) ⑤변행인(遍行因) ⑥이숙인(異熟因)

구유인(俱有因)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함께하면서 서로 인과관계를 이루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從如阿賴耶識, 爲雜染諸法因,乃至所餘因緣,不可得故者, 此言顯示阿賴耶識與雜染法,更互爲因,卽是因緣.

‘아뢰야식이 모든 잡염법의 원인이 됨과 같다’로부터 나아가 ‘나머지로는 인연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아뢰야식과 잡염법이 다시 상호의 원인이 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곧 인연인 것이다.

ㅡ여기서 인연은 광의(廣義)의 인연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인과관계만을 가리킨 것으로, 즉 4연(緣) 중의 인연으로서, 직접적인 자기 결과를 원인으로 하고, 그 원인을 연(緣)으로 함을 말한다. 이에 능생(能生)의 종자와 능훈(能熏)의 현행(現行)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2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1

 

▶論曰: 復次聲聞乘中 ,亦以異門密意, 已說阿賴耶識. 如彼『增一阿笈摩』說: 世閒衆生, 愛阿賴耶` 樂阿賴耶`

欣阿賴耶` 憙阿賴耶. 爲斷如是阿賴耶故, 說正法時,恭敬攝耳` 住求解心`法隨法行.

▷논문; 또한 성문승 중에도 역시 다른 견해의 비밀스런 뜻의 이문밀의(異門密意)으로써 이미 아뢰야식을 말하였으니,

'증일아급마(增一阿笈摩, 증일아함경 增一阿含經)'에서 “세간의 중생은 아뢰야를 사랑하고, 아뢰야를 즐기며, 아뢰야를 기뻐하고, 아뢰야를 좋아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아뢰야를 단멸하기 위해서 정법(正法)을 말씀하실 때에는 공경히 듣고,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안주하여 법을 따르고 법을 행하는 것이다. 

 

*이문밀의(異門密意), 이문(異門)은 관찰점을 달리하는 견해이고,

밀의(密意)는 본래 취지를 은밀히 해서 표면에 나타내지 않음을 말한다.

 

如來出世, 如是甚奇希有正法, 出現世閒. 於聲聞乘『如來出現四德經』中, 由此異門密意, 已顯阿賴耶識.

於大衆部阿笈摩中, 亦以異門密意, 說此名根本識, 如樹依根.

化地部中,亦以異門密意,說此名窮生死薀,有處有時,見色心斷,非阿賴耶識中,彼種有斷.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시어, 이렇게 매우 기이하고 희유한 정법이 세간에 출현하게 되었으니,

성문승의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중의 '여래출현사덕경(如來出現四德經)'에서는 이러한 이문밀의(異門密意)에 의거해서 아뢰야식을 나타내었으며, 

대중부(大衆部)의 '아함경' 중에서도 역시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나무가 뿌리에 의지하는 수의근(樹依根) 같다고 하여서, 근본식(根本識)이라 이름하였으며,

화지부(化地部) 중에서도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궁생사온(窮生死蘊)이라 이름하였으니,  

어느 곳, 어느 때에는 물질과 마음이 단절됨을 보지만 아뢰야식 안의 종자는 단절됨이 없는 것이다.

ㅡ두 번째로 성문승에 이미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제8식을 설하신 것을 밝혔다. 

 

*나무가 뿌리에 의지하는, 수의근(樹依根), 근본식의 범어는 mūla-vijāna로서, 마치 나무가 뿌리(mūla)에 의존하는 것과 같이, 이 식이 모든 식의 근본이 된다는 뜻이다.

*궁생사온(窮生死蘊)은 궁생사, 즉 생사를 거듭하는 것을 마칠 때까지, 범부의 6도 윤회나 성현의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이르기까지, 윤회하는 주체라는 뜻이다.


▶釋曰:世閒衆生,愛阿賴耶者, 是摠摽句. 如其次第, 復以餘句, 約就現在`過去`未來三時別釋.

復有別義, 謂於現在愛阿賴耶, 於過去時樂阿賴耶. 由先世樂阿賴耶故, 復於今世,欣阿賴耶.

由樂由欣阿賴耶故, 於未來世, 憙阿賴耶.

▷해석한다; “세간의 중생은 아뢰야를 사랑한다”는 것은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구절이고, 

차제(次第)의 다시 다른 구절에서는, 현재ㆍ과거ㆍ미래의 삼시(三時)를 요약하여 별도로 해석하였으며, 

다시 다른 뜻으로는, 과거에 아뢰야를 즐겼으므로 현재에서 아뢰야를 사랑하는 것이며, 

선세(先世)에서 아뢰야를 즐김으로써 다시 금세(今世)에서 아뢰야를 기뻐하고,  

이렇게 아뢰야를 즐기고 기뻐함으로써 미래세(未來世)에서도 아뢰야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차제(次第)는 순서(順序) · 차례(次例) · 단계(段階) 또는 변화하는 순서를 뜻한다.

 

法隨法行者, 如教行故. 大衆部中, 名根本識,如樹依根者,謂根本識, 爲一切識,根本因故,

譬如樹根, 莖等摠因;若離其根,莖等無有. 阿賴耶識, 名根本識,當知亦爾.

 “법을 따르고 법을 행한다”는 것은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이며, 

“대중부에서는 나무가 뿌리에 의지함과 같이 근본식(根本識)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근본식이 모든 식의 근본 원인(因)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나무의 뿌리는 줄기 등의 전체적인 원인(因)으로서, 만약  뿌리를 떠난다면, 줄기 등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 같은 것이니,  

아뢰야식을 근본식이라 이름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化地部中,異門說爲窮生死薀, 爲釋此因說有處等.言有處者, 謂無色界, 無有諸色.

言有時者,謂無想等,諸定位中,無有諸心. 非阿賴耶識中,彼種有斷者,謂阿賴耶識中,色心熏習,由此爲因,色心還有.

화지부(化地部)의 다른 견해로서는 궁생사온(窮生死蘊)이라 하였으니,

 원인(因)을 해석하기 위해서 ‘어느 곳의 유처(有處)’ 등이라 말하였다. 

‘어느 곳의 유처(有處)’라고 말하는 것은 무색계에서는 모든 물질(色)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어느 때의 유시(有時)’라 말하는 것은 무상정(無想定) 등의 여러 선정의 지위에서는 일체의 마음(心) 작용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아뢰야식 안에서 그것의 종자는 단절이 없다”는 것은 아뢰야식에서의 물질(色)과 마음(心)의 훈습은 이것이 원인이 되기 때문에 물질과 마음이 다시 있게 되는 것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신 다음 해에 마하가섭의 주재로 왕사성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제1회 결집이 열렸다. 아난(阿難)이 경(經)을 독송하고 우바리(優婆離)가 율(律)을 송출(誦出)하여, 원시불교의 기본 경전과 계율이 확립되었다. 
제1회의 칠엽굴(七葉窟)의 결집에 참여하지 못한 여러 승려들은 부루나(富樓那)의 주재로 굴외결집(窟外結集)을 열어서 이의를 제기하였는데, 이와 같이 불교 교단의 밑바닥에서는 신구의 두 경향이 대립하였다. 

입멸하신 후 약 100년이 지나서 계율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주장하는 비구들이 있어 논쟁이 일어나서, 계율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의 근본이부根本二部)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근본 분열(根本分裂)을 계기로 인도 불교는 부파불교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근본분열 후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상좌부와 대중부 모두에서 부파적 분열이 거듭되어 지말분열(枝末分裂)하여서 18부로 나뉘어서, 근본이부와 지말분열에 의한 18부를 합하여 총 20부의 부파를 소승20부(小乘二十部)라 한다. 그 후 기원 전후에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일어나서 대승불교도들은 부파불교를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폄하하여 칭하였다.

소승20부로서는 상좌부 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 설산부(雪山部) · 독자부(犢子部) · 법상부(法上部) · 현주부(贅胄部) · 정량부(正量部) · 밀림산부(密林山部) · 화지부(化地部) · 법장부(法藏部) · 음광부(飮光部) · 경량부(輕量部)의 11부와

대중부 계통의 대중부(大衆部) · 일설부(一說部) · 설출세부(說出世部) · 계윤부(鷄胤部) · 다문부(多聞部) · 설가부(說假部) · 제다산부(制多山部) · 북산주부(北山住部)의 9부의 합계 20부를 든다.  

 

▶論曰:如是所知依, 說阿賴耶識爲性`阿陁那識爲性`心爲性` 阿賴耶爲性` 根本識爲性`

窮生死薀爲性等. 由此異門, 阿賴耶識, 成大王路.

▷논문; 이와 같이 알아야  바의 의지처인 소지의(所知依)는 아뢰야식을 성(性)으로 삼고, 

아타나식을 성(性)으로 삼으며, 마음을 성(性)으로 삼고, 아뢰야를 성(性)으로 삼고, 근본식을 성(性)으로 삼으며, 

궁생사온을 성(性)으로 삼는다는 등으로 말하여 지는 것이니,  

이러한 다른 견해들로 인하여 아뢰야식은 대왕(大王)의 길을 이루는 것이다.


▶釋曰:由此異門,阿賴耶識,成大王路者,是極廣義.

▷이러한 다른 견해들로 인하여 아뢰야식이 대왕의 길을 이룬다는 것은 매우 넓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ㅡ진제 역본에는 대왕의 길이라 표현하는 이유를 가지 의미로써 자세히 설하였다.

첫째는 대왕의 길은 곧고 갈림길이 없으며,

둘째는 넓고 평탄하여 성숙하고,

셋째는 광명에 장애가 없으니, 

본식(本識)도 그러해서, 곧고 갈림길이 없다는 것은 선정이 의심할 바가 없음에 비유하고,

넓고 평탄하여 성숙하다는 것은 대승ㆍ소승이 모두 이런 의미를 널리 펴는 것에 비유한 것이며,

광명에 장애가 없다는 것은 무량한 도리를 인용함으로써 식을 증명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論曰:復有一類,謂心意識義一文異. 是義不成, 意`識兩義差別可得,當知心義亦應有異.

▷논문; 또한 어떤 다른 부류에서는, 심의식(心意識)은 하나의 뜻으로, 글자가 다르다고 하였으나, 이러한 의미는 성립되지 않는다. 

의(意)와 식(識)의  차이는 쉽게   있으며, 심(心)의 뜻에 역시 차이가 있음을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復有一類, 謂薄伽梵所說, 衆生愛阿賴耶,乃至廣說, 此中五取薀說名阿賴耶. 有餘復謂貪俱樂受, 名阿賴耶.

有餘復謂薩迦耶見,名阿賴耶.此等諸師由教 及證愚阿賴耶,故作此執.

다시 어떤 부류에서는, 박가범(薄伽梵,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생은 아뢰야를 사랑하고…등의 자세히 설명하신 것"에서는 5취온(五取薀)을 아뢰야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며,

다른 논사는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낙수(樂受, 감수작용)를 아뢰야라 이름한다고 말하였고, 

또 다른 논사는 살가야견(薩迦耶見, 유신견)을 아뢰야라 이름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들 여러 논사들은 교의와 증명에 의거해서 아뢰야에 어리석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5취온(五取薀)5온(五蘊, pañca-skandha)은 생멸 · 변화하는 모든 것, 즉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구성하고 있는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을 말한다. 이들을 각각 색온(色蘊: 육체, 물질) · 수온(受蘊: 지각, 느낌) · 상온(想蘊: 표상, 생각) · 행온(行蘊: 욕구, 의지) · 식온(識蘊: 마음, 의식)이라고도 한다.  
5온설(五蘊說)을 사유하는 것은 개인 존재인 나(我)는 이 5가지 집합적 요소로 분해되고, "나(我)"라고 할 때에는 결국 이 5가지 집합적 요소들 중의 하나 혹은 다수를 가리켜 하는 것이며, 이들 5가지 집합적 요소들 밖에 나(我)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의 이치를 깨우쳐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5온은 유루와 무루에 모두 통하고, 유루에 통한 5온을 5취온(五取蘊) 또는 5수음(五受陰)이라 하고,

무루에 통한 5온을 5무루온(五無漏蘊)이라고 한다. 즉 무루에 통한 5온은 유위 무루이며 이것은 곧 4성제 중의 도제(道諦), 즉 '열반(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如是安立阿賴耶名, 隨聲聞乘安立道理,亦不相應. 若不愚者,取阿賴耶識安立 彼說阿賴耶名, 如是安立, 則爲最勝.

云何最勝? 若五取薀,名阿賴耶,生惡趣中,一向苦處, 最可厭逆, 衆生一向, 不起愛樂, 於中執藏不應道理, 以彼常求速捨離故.

이와 같이 아뢰야라는 명칭을 안립함에 있어서 성문승에서 안립하는 도리가 있으나, 역시 상응하지 않으며,

만약 어리석지 않은 자라면 아뢰야식을 취하여  말씀을 안립하나니, 아뢰야라는 명칭을 이와 같이 안립하는 것을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으로 삼는 것이다.

어찌하여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인 것인가?

만약 5취온(五取薀)을 아뢰야라고 이름하면, 살기 괴로운 악취(惡趣) 중에서는 괴로운 악취(惡趣) 태어나는 것을 한결같이 가장 혐오해야 할 것이나, 그곳의 중생은 사랑하고 즐거운 감정을 한결같이 일으키지 않으니, 그 악취 집착한다는 도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그들은 항상 속히 떠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ㅡ대승이 안립한 명의(名義) 가장 뛰어난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若貪俱樂受,名阿賴耶, 第四靜慮以上無有, 具彼有情,常有厭逆,於中執藏 ,亦不應理.

若薩迦耶見, 名阿賴耶, 於此正法中, 信解無我者,恒有厭逆, 於中執藏,亦不應理. 阿賴耶識內我性攝,

만약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낙수(樂受, 감수작용)를 아뢰야라고 이름한다면 제 4 정려(四靜慮, 사선) 이상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니, 그 사정려를 갖춘 유정은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싫어하여서 따르지 않으니, 그러한 경지에서 집착한다는  역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만약 살가야견(薩迦耶見, 유신견)을 아뢰야라고 이름한다면,  정법에서 무아를 믿고 이해하는 자는 항상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싫어하여서 따르지 않으니, 그러한 가운데에서 집착한다는  역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아뢰야식은 내면의 자아의 성품인 아성(我性)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사정려(四靜慮), 4선(四禪)은 수행을 통해 심(尋) · 사(伺) · 희(喜) · 낙(樂) · 심일경성(心一境性)을 개발함으로써 욕계(欲界)의 번뇌, 즉, 욕계의 혼면(惛眠) · 의(疑) · 진에(瞋恚) · 도회(掉悔) · 탐욕(貪欲)의 5개(五蓋)를 일시적으로 또는 항상 조복(단멸이 아님)한 상태에서 들어갈 수 있는 색계의 네 가지 세계 또는 마음 상태를 뜻한다. 즉, 우리가 욕계와 함께하는 즉 상응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이 세계에 있듯이, 이 경지 즉 마음 상태들과 함께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4선에 든 것이다. 일시적으로라도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비록 일시적이더라도 욕계에서 색계로 들어갈 수 있다. 즉, 초선에 들어갈 수 있다.
초선 一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一 욕계를 떠남으로서 생기는 희열과 행복을 느끼는 경지
제2선 一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一 선정으로부터 생기는 희열과 행복을 느끼는 경지
제3선 一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一 희열을 떠나 마음이 안정되어 뛰어난 행복만을 느끼는 경지
제4선 一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一 행복마저도 떠나 평온(捨)하여 마음(念)이 청정하고 평등한 경지, 사무량심(捨無量心)의 경지 ㅡ위키

 

雖生惡趣,一向苦處,求離苦薀,然彼恒於阿賴耶識, 我愛隨縛,未嘗求離. 雖生第四靜慮以上, 於貪俱樂,

恒有厭逆,然彼恒於阿賴耶識,我愛隨縛. 雖於此正法, 信解無我者, 厭逆我見, 然於藏識, 我愛隨縛.

是故安立阿賴耶識,名阿賴耶,成就最勝.

비록, 한결같이 괴로운 악취(惡趣) 태어나서 괴로움의온인 고온(苦蘊)을 여의고자 하지만, 그는 항상 아뢰야식에 대한 아애(我愛)를 따라서 계박되어 있어서 여의지 않으니, 제 4 정려(四靜慮, 사선) 이상에서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싫어하여서 거스르고자 하지만, 항상 아뢰야식에 대한 아애의 계박이 따르는 것이다. 

 정법에 대해서 무아를 믿고 이해하는 자는 아견을 혐오하긴 하지만, 장식(藏識)에 대한 아애를 따라서 계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아뢰야라고 이름하여 안립하는 것이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인 것이다.


▶釋曰:不愚者者,謂諸菩薩, 彼所宣說,阿賴耶識, 理成立故. 惡趣中者,謂餓鬼`傍生及那落迦,諸惡趣中.

一向苦處者,謂一向受非愛業果處. 於彼有時,樂受生者,是等流果,生彼所受異熟果者,唯是其苦.

▷해석한다; ‘어리석지 않은 불우자(不愚者)’란 모든 보살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립된 아뢰야식의 이치를 널리 설하 때문이다. 

‘괴로움의 세계인 악취(惡趣)’는 아귀ㆍ방생(傍生, 축생)ㆍ나락가(那落迦, 지옥) 모든 괴로움의 세계인 악취(惡趣)이다. 

‘한결같이 괴로운 곳의 일향고처(一向苦處)’란 한결같이 애착하지 못할 과(業果)를 받는 곳으로, 때로는 그곳에서도 즐거움의 감수작용인 낙수(樂受)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것은 등류과의 생겨남이며, 그것이 받는 이숙과(異熟果) 오직 괴로움뿐인 것이다.

 

방(傍)은 누운 것, 생(生)은 생물이란 뜻으로서 몸을 가로 눕히고 다니는 축생을 말한다.

나락가(那落迦)는 범어 naraka의 음역으로서 지옥이며, 줄여서 나락(奈落)이라고 한다.

등류과(等流果)는 원인과 결과가 같은 부류인 것을 말한다. 지옥에서 때로는 즐거움을 초감하는 경우는 이전에 그럴 만한 같은 부류의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고, 지옥의 과보인 이숙과(異熟果) 자체는 순전히 괴로움뿐이다.

등류습기(等流習氣), 선 · 악 · 무기의 3성의 기준에서 습기(종자)의 성질과 같은 성질의 과보, 즉 등류과(等流果)를 일으키는 습기(종자)이다. 
8식과의 관련하여서는, 등류습기는 전7식의 유루와 무루의 선 · 악 · 무기의 업 즉 모든 성질의 업이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아뢰야식 내에서 생성되고 증장되는 종자로, 이 종자가 친인연(親因緣)이 되어서 해당 종자의 성질과 같은 선 · 악 · 무기의 과보 즉 선 · 악 · 무기의 현행법(現行法)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전7식에 의해 선한 업이 제8아뢰야식에 훈습되어 아뢰야식 내부에 선한 종자가 생성 및 증장된 경우, 그 선한 종자로부터 일어나는 결과는 선한 언행과 사상이 되어서 몸 · 입 · 뜻으로 표현되는 현행법(現行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숙과(異熟果), 다르게 익는, 이숙(異熟)은 선(善)이 쌓여서 그 결과 무기의 낙(樂)으로 성숙(成熟) 또는 변환되고, 불선 즉 악(惡)이 쌓여서 그 결과 무기의 고(苦)로 성숙 또는 변환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이숙(異熟)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과보가 이숙과(異熟果)이며, 전생의 선악업의 총체적인 결과물로서 현생에서 태어날 때 받은 몸과 마음이다.

 

第四靜慮以上無有者,謂卽第四靜慮及上諸地. 具彼有情者, 謂生所得.

阿賴耶識, 內我性攝者,謂諸衆生攝取此識爲內我性. 求離苦薀者, 求離苦受.

然於藏識我愛隨縛者, 謂於阿賴耶識,執我起愛隨縛不離.

“제4 정려(四靜慮, 사선)이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색계의 제4선천(禪天)과  이상의 모든 지위인 무색계의 4천(天)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을 갖춘 유정’이란 생을 받게  것을 말하며, 

‘아뢰야식은 내면의 자아의 성품인 아성(我性)에 포섭된다’는 것은 모든 중생은  식을 거두어 취하여서 내면의 자아의 성품으로 삼는 것을 말하며,

‘괴로움의 5온인 고온(苦薀)을 여읠 것을 구한다’는 것은 괴로움의 감수작용인 고수(苦受)를 여읠 것을 구한다는 것이며,

‘장식(藏識)에 대한 아애를 따라 계박되어 있는 것'이란, 아뢰야식을 자아로 집착하여 애착을 일으키고 따라서 계박되어서 떠나지 못하는 것 말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1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① 4 

 

又訓釋詞故.所以者何?能思量故,說名爲意.

此訓釋詞何所依止? 非彼六識與無閒識作所依止, 應正道理,已謝滅故.

또한 가르치고자 해석하는 말의 훈석사(訓釋詞) 때문이니, 무슨 까닭에서 인가?

능히 사량(思量)하기 때문에 의(意)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 훈석사(訓釋詞)라는 말은 무엇의 의지처인가?

육식(六識)이 전념(前念)의 6식(識)인 무간식(無間識)의 의지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당연한 바른 도리이어야 하는 것이니, 전찰나의 6식은 이미  이미 지나가서 멸한 까닭에 체(體)가 없으므로 의지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ㅡ의(意)라는 명칭을 해석하여 염오의를 성립하였다.

 

又二定別故.所以者何? 若定說有染污意者, 無想定中,卽有此意,餘定中無,故有差別.

若異此者,於二定中, 第六意識, 竝不行故, 應無差別. 又無想中生, 應無我執故.

所以者何?若彼位中,無染污意,彼一期生,應無我執.若爾,不應聖所訶厭.旣被訶厭,是故定知彼有我執.

또한 무상정과 멸진정의 이정(二定)이 다른 때문이니, 무슨 까닭에서 인가?

만약 선정에 염오의가 있다고 말한다면, 무상정에는 이 의(意)가 있는 것이고 멸진정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이것과 다르다고 한다면, 두 선정 중에서 제6의식(第六意識)은 함께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며,

또한 무상천의 생에도 아집이 당연히 없어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만약 그 지위에서 염오의가 없다면 그 한 기간의 생에도 응당 아집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그러하다면 성인이 혐오하는 바가 되지 않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혐오하는 바이기 때문에, 그 곳에는 반드시 아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ㅡ 무상정ㆍ멸진정의 차이에 의해서 염오의를 성립하였다.

 

의(意)마나스(manas)의 번역어로 말나(末那)라고도 음역하며, 사량(思量)을 뜻한다.

마나스(manas)의 어근인 만(√man)은 '생각하다'의 뜻으로 이에 따라 '사량(思量)'이라 번역한 것이다.

사량(思量)이라는 한자어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생각하고 헤아린다'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전찰나의 의근(意根), 즉 바로 직전까지 집기(集起)했던 행위의 총체, 즉 바로 직전까지의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 즉 바로 직전까지 축적된 모든 경험을 토대로 현재의 인식 대상 또는 마음작용 대상에 대해 이모저모로 생각하고 헤아리는 능력 또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능력과 그 작용을 통칭하여 사량(思量)이라고 한다.


又我執隨故.所以者何? 施等位中,亦決定有我執隨故. 此我執隨若離無明, 不應道理. 非此無明離所依止,

此所依止離染污意,無別體故, 故定應許有染污意. 若不許者,有上過失,重顯彼故, 說四伽他,

若不共無明等, 乃至廣說. 此中不共無明者, 謂於一切善`不善`無記煩惱隨煩惱位中,染污意相應,俱生無明;

彼若無者, 成大過失. 常於苦等,障㝵智生, 是其業用, 此卽顯無業用過失.

또한 아집(我執)이 따르기 때문이니, 무슨 까닭에서 인가? 보시 등을 행하는 단계에서도 반드시 아집이 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무명을 떠난다면 이 아집이 따른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 무명은 의지처인 소의지(所依止)를 떠나지 않으며, 이 의지처는 염오의를 떠나서는 별도의 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염오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인정하지 않는다면 위와 같은 과실이 있는 것이니, 거듭해서 그것을 나타내고자, 네 개의 가타(伽他, 게송)을 말하였으니, ‘만약 불공무명 등'으로 자세히 설하였다. 

이 가운데 불공무명(不共無明)은 모든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ㆍ번뇌(煩惱)ㆍ수번뇌(隨煩惱) 중에서 염오의와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무명이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큰 과실을 이루는 것이니, 항상 괴로움 등에 대하여 지혜가 생기는 것을 장애하는 이것이 그 기능인 업용(業用)이나, 곧 그 업용(業用)이 없다는 과실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五同法者, 第六意識, 與五識身, 有相似法, 彼有五根, 阿賴耶識, 爲俱有依. 此亦如是,

有染污意, 阿賴耶識 ,爲俱有依. 此五同法, 離染污意決定無有,此則顯無自性過失.

‘다섯 가지 같은 법의 오동법(五同法 , 오식五識)’이란, 제6의식(第六意識)에 5식과 비슷한 법이 있고, 그것에 5근이 있으며 아뢰야식을 구유의로 삼는다. 

이 제6의식(第六意識)의 오식도 역시 그와 같이 염오의가 있고, 아뢰야식을 구유의로 삼는다.

오동법(五同法 , 오식五識)은 염오의를 떠나서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곧 무자성(無自性)이라는 과실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訓詞若無成過失者,取所緣相,而思量故. 無閒滅時,能取境故,說名爲意. 過去已滅, 無所思量,

云何當有能思量性? 訓詞無故,成大過失.

‘가르치고자 해석하는 말의 훈석사(訓釋詞)'에 만약 과실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은, 

인식대상의 소연상(所緣相) 취하여 사량하기 때문이고, 전찰나의 식에 간격없이 멸하는 무간멸(無閒滅) 시(時)에도 능히 대상을 취하기 때문에 의(意)라 이름하며,

과거에 이미 멸하여 사량하는 바가 없다면 어떻게 장차 능히 사량하는 사량성(思量性) 있을 수 있겠는가? 

훈석사(訓釋詞)에도 없기 때문에  과실을 이루는 것이니, 의(意, manas)의 뜻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염오의가 없다면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이다. 

 

二定別者,滅盡定中, 無染污意,無想定中,有染污意. 此若無者, 如是二定差別應無, 成大過失.

又染污意,若無有者, 無想身中,應無我執, 非異生者,於相續中, 暫離我執, 應正道理.

如是諸過,離染污意,皆定應得,故應定許有染污意.

‘두 가지 선정의 다름의 이정별(二定別)’이란 멸진정 중에는 염오의가 없고, 무상정에는 염오의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다름이 없다면  선정에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고, 그러하다면  과실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또한 만약 염오의가 없다면 무상천의 생에 마땅히 아집이 없어야 할 것이나,

이생(異生, 중생)의 상속에서는 잠시도 아집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당연한 바른 도리인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과실 모두는 반드시 염오의를 떠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결정코 염오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爲顯此義故,復說言無有二等. 二者,卽是不共無明`五相似法.

三相違者, 謂訓釋詞` 二定差別` 無想生中, 我執恒隨,離染污意,如是三事皆成相違.

이러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두 가지가 없다는 무유이(無有二)’ 등으로 말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불공무명과 오동법(五同法 , 오식五識)인 것이다.

 ‘세 가지가 위배된다는 삼상위(三相違)란’는 것은, 훈석사(訓釋詞), 두 가지 선정의 다름의 이정멸(二定別), 무상천의 생에도 아집이 항상 따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염오의를 떠나서는 이와 같은  가지에 다 위배되는 것이다.

 

無此一切處,我執不應有者,離染污意, 於一切種善等位中,我執恒隨,不應得有, 故應定許有染污意.

餘文易了,不復須釋.

‘이곳에 없다면 당연히 일체처에도 아집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란, 염오의를 떠나서는 모든 종류의 선(善) 등의 지위에서 아집이 항상 따를 수 없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염오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문장은 알기 쉬우니, 다시 해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論曰:心體第三, 若離阿賴耶識, 無別可得. 是故成就阿賴耶識, 以爲心體, 由此爲種子,意及識轉.

▷논문; 세 번째로, 심(心)의 자체인 심체(心體)는 아뢰야식을 떠나서는 별도로 얻을  없는 것이므로 아뢰야식을 성취함으로써 심체(心體) 삼는 것이니, 이 심체(心體)를 종자로 삼음으로써 의(意)와 식(識)의 전변 생기하는 것이다.

ㅡ식(識)을 번째로, () 번째로 말하였고, 지금은 번째의 ()이.

 

▶釋曰: 心體第三若離阿賴耶識, 無別有性, 由此爲因, 意及轉識,皆得生起.

見取轉識, 當知亦卽取第二意. 所以者何?彼將滅時,得意名故.

▷해석한다; 세 번째로, 심체(心體) 아뢰야식을 떠나서는 별도의 체성이 없으니, 이 심체를 인(因)으로 삼음으로써 의(意)와 전식(轉識) 모두가 생기할  있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견취(見取)의 전식은 역시  번째의 의(意)를 취하나니,  왜냐하면 그 전식이 장차 멸할 때, 의(意)를 얻기 때문이다.

 

전식(轉識),8 아리야식을 제외한 일곱 가지 식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생기식(生起識)순식(順識), 이라고 한다.

과보를 수용하는 수과보(受果報, 전식)의 식(識)이니, 즉 수용식ㆍ수식(受識)이라 하며, 외부 대상을 수용하는 식이 전식(轉識)이다.

견취(見取)는 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의 5견(五見), 즉  5가지 염오견(染汚見) 중의 하나로, 그릇된 견해를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즉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등을 일으킨 후 이를 고집하여 진실하고 뛰어난 견해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견취견(見取見)이라고도 한다. 

 

▶論曰:何因緣故,亦說名心?由種種法,熏習種子,所積集故.

▷논문; 무슨 인연으로 역시 심(心)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갖가지 법에 의해서 훈습된 종자가 적집되는 이기 때문이다.


▶釋曰:復欲釋名,故作此問. 由種種法者,由各別品類法.

熏習種子者, 功能差別因. 所積集故者, 是極積聚, 一合相義.

▷해석한다; 다시 명칭을 해석하기 위해서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니,

‘갖가지 법에 의해서라는 유종종법(由種種法)’이라는 것은, 각각 다른 품류의 법으로 인한다는 것으로,

훈습된 종자는 특수한 작용의 차이인, 공능차별(功能差別)의 원인인 것이다. 

‘적집하는 곳이기 때문의 소적집고(所積集故)’란, 이것이 많이 쌓이고 모여서 하나의 화합상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공능차별(功能差別)의 범어는 śakti-viśeṣa 또는 sāmarthya-viśeṣa이다.

śakti, sāmarthya는 ‘작용을 가진 힘ㆍ세력의 뜻인 공능(功能)’이고, viśeṣa는 ‘특별하다는 뜻의 차별(差別)’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종자는 공능차별(功能差別), 즉 특수한 작용의 힘, 특수한 정신적인 에너지의 의미이다.


▶論曰:復次何故,聲聞乘中, 不說此心名阿賴耶識`名阿陁那識? 由此深細境所攝故.

所以者何? 由諸聲聞不於一切境智處轉, 是故於彼, 雖離此說, 然智得成解脫成就, 故不爲說.

若諸菩薩, 定於一切境智處轉, 是故爲說. 若離此智, 不易證得一切智智.

▷또한 어찌하여 성문승에서는  심(心)을 아뢰야식으로, 아타나식으로 이름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이것은 세간의 총명한 지혜로도 알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미세한 경계인 심세경(深細境)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문은 모든 대상에 대한 지혜인, 일체경지(一切境智)가 전전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그들에 대해서는 이것을 말하지 않아도 지혜를 이룸으로써 해탈을 성취하기 때문인 것이다. 

보살이라면 반드시 모든 대상에 대한 일체경지(一切境智)가 전전하는 까닭에 그들을 위해서는 설하는 것이니,  만약  지혜를 떠난다면,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증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ㅡ성문승에도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8식을 말하는 것을 밝힌다.  


▶釋曰:由此深細境所攝者, 謂此境界卽深細故, 名深細境.此卽深細境界中攝,難了知故.

非諸聲聞爲求一切境界智故正勤修行, 唯正希求自義利故, 彼由麤淺苦等正智, 便能永斷煩惱障故.

若諸菩薩, 爲利自他, 求斷煩惱及所知障, 正勤修行, 是故爲說.

▷해석한다; ‘이것은 매우 미세한 경계인 심세경(深細境)에 포섭되기 때문’이란, 이 경계가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심세경(深細境)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매우 미세한 경계에 포섭되어 알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니, 성문은 모든 경계를 아는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바르고 부지런히 정근(正勤)하여 수행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는 까닭에, 그들은 거칠고(麤), 얕은(淺), 괴로움(苦) 등의 바른  정지(正智), 즉 고제(苦諦) 등의 4성제(聖諦)를 거칠고 얕게 관찰하여 얻는 지혜로 인하여 능히 번뇌장(煩惱障)을 영원히 단멸하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라면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하기 위해서,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단멸하고자 바르게 부지런히 정근(正勤) 수행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는 설하는 것이다.


攝大乘論釋卷第一 終 섭대승론석 제 1권을 마침.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1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① 3

 

▶論曰:復次云何得知有染污意? 謂此若無, 不共無明, 則不得有, 成過失故.

又五同法亦不得有,成過失故.所以者何? 以五識身, 必有眼等俱有依故. 又訓釋詞亦不得有, 成過失故.

又無想定,與滅盡定,差別無有, 成過失故. 謂無想定,染意所顯, 非滅盡定;

若不爾者, 此二種,定應無差別. 又無想天,一期生中,應無染污, 成過失故, 於中若無我執`我慢.

又一切時,我執現行, 現可得故, 謂善`不善`無記心中;

若不爾者,唯不善心,彼相應故, 有我`我所煩惱現行, 非善`無記.是故若立俱有現行,非相應現行,無此過失.此中頌曰:

▷논문에서; 또한 어떻게 염오의(染汚意)가 있음을   있는 것인가? 

만약 이 염오의(染汚意)가 없다면  불공무명(不共無明)이 있을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며,  

또한 다섯 가지의 5동법(五同法, 오식), 즉 오식(五識)도 역시 있을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5식신(五識身)에는 반드시 안근 등의 구유의(俱有依, 증상연의)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가르치고자 해석하는 말의 훈석사(訓釋詞) 역시도 있을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며, 

또한 무상정(無想定, 상想이 없는 선정)과 멸진정(滅盡定, 심상心想이 멸한 적정의 선정)의 차이도 있을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니, 무상정은 염오의가 나타난 바이고, 멸진정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가지 선정에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며,

또한 무상천(無想天)의  기간, 즉 그 일기(一期)의 생(生)에서 염오가 없어야 할 것이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만약 아집ㆍ아만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느 때나 아집의 현행함이 역시 있을  있기 때문이니,

이른바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의 마음에서 인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직 불선의 마음만이 그것과 상응할 것이기 때문이나, 아집은 불선의 마음만이 아니라, 선(善)과 무기(無記)의 마음에도 있기 때문이다.

나(我)ㆍ나의 것(我所)이라는 번뇌가 현행하면 선(善)도 무기(無記)도 아니니므로, 따라서 만약 다른 미혹과 상응하지 않고 의(意)와 함께 하는 아집인, 구유현행(俱有現行)을 안립하고,

불선과 상응해서 일어나는 아집인, 상응현행(相應現行)이 아니라면 이러한 과실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게송으로 말하나니, 

 

*2무명(二無明),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무명(相應無明) 

불공무명(不共無明)은 독두무명(獨頭無明)ㆍ독행무명(獨行無明)이라고도 하며, 탐(貪)ㆍ진(瞋)ㆍ치(癡)와 상응하지 않고 단독으로 생기하여 진지(眞智)를 장애하는 근본적인 무명이다.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癡)의 무명으로서, 제7식에만 상응하고 다른 식에는 수반되지 않는다.

상응무명(相應無明)은 공무명(共無明)이라고도 하며, 6식(識)에 상응하는 무명으로서, 탐(貪) · 진(瞋) · 만(慢) · 의(疑) · 견(見, 惡見)의 5가지 근본번뇌와 상응하면서 생기(生起)하는 무명이다.

*구유의(俱有依),증상연의(增上緣依)라고도 한다. 두 가지 이상이 서로 의지하여 동일한 결과를 낼 때 동시 의존의 인과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심왕(心王)이나 심소(心所)와 동시에 있으면서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5근(根)ㆍ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을 말한다.

*증상연(增上緣)은 인연(因緣) · 등무간연(等無間緣) · 소연연(所緣緣) · 증상연(增上緣)의 4연(四緣)의 하나이다. 

증상연은 다른 유위법(有爲法)을 생기하는데 힘을 주는 적극적 원인의 유력증상연(有力增上緣)과 다른 유위법이 생기는 것을 장애하지 않는 소극적 원인의 무력증상연(無力增上緣)을 말한다. 따라서, 유위와 무위의 일체법은 그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일체의 유위법에 대해 증상연이 되는 것이다. 
증상연은 설일체유부가 주장한 능작인(能作因) · 구유인(俱有因) · 동류인(同類因) · 상응인(相應因) · 변행인(遍行因) · 이숙인(異熟因)의 6인설(六因說)에서 그 적용 범위가 가장 넓은 능작인에 해당한다.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그 자신을 제외한 유위와 무위의 다른 모든 존재(法)를 능작인으로 삼는다.

*2무심정(二無心定)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

무상정(無想定),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는 원인이 되는 선정으로, 인도의 외도가 닦는 선정이다. 그들은 상념을 생사의 근본이라 생각하고 6식의 현행을 소멸하고자 하여서, 색계의 제4선(禪)에서 닦아서, 이것을 얻으면 참열반을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

색계의 4선천 중 제4선천에 속한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날 인(因)이 되는 선정으로, 6식(六識)의 심(心) · 심소(心所)가 모두 없어져 6식(六識)의 활동, 즉 심상(心想)이 완전히 정지되게 하는 선정이다. 상(想)의 심소를 위주로 하여 멸하기 때문에 '상(想)이 없는 선정'이라는 뜻의 무상정(無想定)이라고 이름한다.

*멸진정(滅盡定),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도 하며, 진제(眞諦) 역본에는 멸심정(滅心定)으로 되어 있다. 무상정은 외도 수행자도 도달할 수 있지만 멸진정은 불교에서 말하는 뛰어난 선정이다. 무상정에서는 아직 제7 염오의(染汚意)가 작용하고 멸진정에서는 소멸된다. 멸진정은 성자가 모든 심상(心想)을 없애고 적정하기를 원하여 닦는 선정이며, 6식의 심(心)ㆍ심소(心所)와 제7식의 유루의 일분(一分)을 현행하지 못하게 하는 분위(分位)이므로, 무색계의 제4 유정천(有頂天)에 해당된다. 소승에서 불환과(不還果)와 아라한과의 성자가 닦는 멸진정은 유루정(有漏定)으로서 제7식의 아집작용까지 소멸된다. 대승의 보살이 이것을 닦는 것은 무루정(無漏定)으로서, 제7식의 법집작용까지 소멸된다.

멸진정은 성자가 모든 심상(心想)을 다 없애고 적정(寂靜)으로 닦는 선정으로, 부처와 구해탈(俱解脫)의 아라한이 그 지닌 바 역량을 바탕으로 득(得)하는 선정으로 그 경지가 거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적정(寂靜)에 비견된다.

*현행(現行, abhisaṃskara)은 어떤 법(존재)이 인연의 화합으로 나타나서 현재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일체법의 종자(種子)가 함장되어 있고 인연이 갖추어지면 그 인연을 따라 해당 종자가 전변하여 현재의 법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현행은 실체의 형태로 미래에 존재하건 혹은 종자의 형태로 아뢰야식 안에 존재하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법이 현재 시점에서 나타나는 것, 즉 생(生) · 기(起) · 발(發) · 생겨남 · 일어남 · 나타남 · 일으킴을 말한다. 끌어들여 일으킨다 또는 끌어들여 현재화시킨다는 뜻에서 인기(引起)라고도 한다. 현재 시점으로 일어난다 또는 현재 시점으로 일으킨다는 뜻에서 현기(現起)라고도 한다.


“若不共無明, 及與五同法, 訓詞二定別, 無皆成過失.

만약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癡)의 불공무명과 오동법(五同法, 오식)과

가르치고자 해석하는 말의 훈석사(訓釋詞)와

 선정(멸진정과 무상정)에 차이가 없다면 모두 과실을 이루네.


無想生應無, 我執轉成過, 我執恒隨逐, 一切種無有.

무상천의 생(生)에 아집의 유전이 없다면 과실을 이루어야 하리니, 

아집이 항상 수축(隨逐)함이 모든 종류에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라네.


離染意無有, 二三成相違, 無此一切處, 我執不應有.

염오의(離染意)를 떠나서는 불공무명과 오동법(五同法, 오식)의  가지가 없을 것이니,

가르치고자 해석하는 말의 훈석사(訓釋詞)와  두 선정의 차이와

무상천의 생에 아집이 항상 따른다는, 세 가지에 위배되는 것이라.

이러함이 없다면, 마땅히 일체처아집이 없어야 하리라.


眞義心當生, 常能爲障㝵, 俱行一切分, 謂不共無明.”

참된 의미의 진의심(眞義心)이 장차 일어나는 것에 항상 장애가 되는 것이니,

모든 부분에 함께 작용함을 불공무명(不共無明)이라 이름한다네.

 

此意染污故,有覆無記性, 與四煩惱,常共相應.如色` 無色二纏煩惱, 是其有覆無記性攝,

色無色纏爲奢摩他所攝藏故;此意一切時,微細隨逐故.

 의(意)는 염오이기 때문에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며, 사번뇌(四煩惱)와 항상 함께 상응하며,

색계ㆍ무색계의 이전(二纏)의 번뇌와 같이, 이것은  유부무기성에 포섭되며,

색계ㆍ무색계의 전(纏, 수번뇌)은 사마타가 섭장(攝藏)하는 바이니, 

 의(意)는 어느 때나 항상 미세하게 따르기 때문이다.

 

*유부무기(有覆無記)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성품이다. 제7식이 선ㆍ불선이 아니므로 무기이면서 아집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부무기성이 되는 것이다.

유부무기(有覆無記)는 '가림(覆) 또는 막음(障)이 있는 무기(無記)'로,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이지만 번뇌와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무기를 말한다. 
유부무기는 이숙과(異熟果, 현생에서 타고나는 몸과 마음)를 낳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도(聖道, 출세도, 8정도, 도제, 또는 무루지에 의한 정도)를 가리며,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이런 뜻에서 유부무기를 부정(不淨)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유부무기는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맑고 명료하게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수행에 방해가 되는 무기이다.
예를 들어, 욕계의 번뇌들 중에서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의 2가지 염오견과 상2계(上二界)의 모든 번뇌들, 즉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번뇌들이 유부무기(有覆無記)에 속한다. 상2계(上二界)의 모든 번뇌들은 번뇌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유부(有覆)이고 선정의 힘에 의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무기(無記)이다.

*전(纏)은 범어 paryavasthāna의 번역어로서 번뇌, 특히 수번뇌(隨煩惱)의 다른 이름이다. 마음을 얽어매어 선(善)을 행할 수 없게 방해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釋曰:此文復以餘道理, 成立染污意. 何等名爲成立道理? 謂此若無, 不共無明卽不得有.

不共無明其相云何? 謂未生對治, 能障眞智愚. 此於五識理不相應, 是處無容能爲障故.

若處有能治,此處有所治,亦不得在.

▷해석한다; 이 문장은 또한 다른 도리로써 염오의(染污意)를 성립하는 것이니, 무엇을 성립(成立)의 도리(道理)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만약 이것이 없으면  불공무명이 있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불공무명의 상(相)은 어떠한 것인가? 

아직 다스림을 생겨나게 하지 않은, 즉 다스리는 수도의 대치도(對治道)에 의지해서 참다운 지혜의 진지(眞智)가 생기지 않은, 미생대치(未生對治)일 때, 능히 참다운 지혜의 진지(眞智)를 장애하는 어리석음이다. 

이 불공무명은 5식에 대해서는 이치적으로 상응하지 않으니, 안근 등 5관(官)에 의지하는 5식 자체에는 장애될 만한 뜻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처소로서 능히 다스림이 있다면 이곳에는 다스려짐이 있기 때문이니, 즉 능히 대치(對治) 지혜가 생겨나는 곳에서는 반드시 다스려지는 미혹의 장애가 있으나, 5식에는 능히 다스릴 수 있는 능치(能治)가 없기 때문에 다스려지는 소치(所治)도 역시 없는 것이다.

 

染污意識, 此非有者,餘惑現行,名不成故. 若立此煩惱在染污意識, 卽應畢竟成染污性, 云何施等心得成善?

與此煩惱,恒相應故. 若說有意識與善法俱轉, 此卽與彼煩惱相應, 是染意識引生能治,不應道理.

또한, 염오의식(染污意識)에도 있을  없으니,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차비유(此非有)’라는 것은 무명이 염오의식에 없는 까닭을 밝힌 것으로, 다른 미혹이 현행하여 불공(不共)의 명칭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니,  이미 염오의식이라면 다른 미혹이 현행하여 상응함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만약 이곳에 불공무명이 있다면 그것은 불공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약  번뇌가 염오의식에 존재한다고 안립한다면, 궁극적으로 염오의 성품인, 염오성(染污性)이 되는 것이니, 어떻게 보시 등의 마음이 선(善)이   있겠는가?  번뇌와 항상 상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의식(意識)과 선법(善法)이 함께 유전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번뇌와 상응하는 것이 될 것이니, 이 염오의식이 능히 다스릴 수 있는 능치(能治)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若說染污意俱轉有善心, 卽此善心引生能治,此生彼滅,卽無過失.

又五同法故.所以者何? 譬如眼等五識,必有眼等五根,爲俱有依,如是意識亦應決定,有俱有依.

만약 염오의(染污意)와 함께 유전하는 선심(善心)이 있다고 말한다면,  선심 능히 다스릴 수 있는 능치(能治)를 이끌어내어서 이 선심이 생겨나고, 그 염오(染汚)가 멸할 것이므로  과실이 없는 것이다.

또한 오동법(五同法, 오식) 때문이니, 무슨 까닭인가? 

비유하자면 안식 등의 오식(五識)은 반드시 안근 등의 오근(五根)이 있어서 구유의(俱有依)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이 의식(意識) 역시도 반드시 구유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ㅡ5식과 비교해서 염오의(染汚意) 성립하였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1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① 2

 

如是廣慧! 由似瀑流, 阿陁那識,爲依止`爲建立故, 若於爾時, 有一眼識生緣現前,卽於此時,一眼識轉.若於爾時,乃至有五識身生緣現前,卽於此時,五識身轉.

광혜여! 이와 같이 폭포의 흐름과 비슷한 아타나식(阿陁那識)을 의지하여서 건립한 까닭에, 

만약 그 때에 안식이 일어나는 조건이 현전한다면,  안식이 일어나고, 

만약 오식 (五識)이 일어나는 조건이 현전한다면  5식이 일어나느니라.


廣慧!如是菩薩, 雖由法住智爲依止`爲建立故, 於心意識 秘密善巧.

然諸如來, 不齊於此施設彼 爲於心意識一切秘密善巧菩薩.

광혜여! 이와 같이 보살이 비록 여래의 교법에 안주하여 법문을 안립하고 시설하는 지혜인, 법주지(法住智)에 의지하여서  건립하고, 심(心)ㆍ의(意)ㆍ식(識)의 비밀한 밀의  통달한다 할지라도, 

모든 여래께서는 이것에 한하여 시설한 그를 심의식의 비밀한 뜻에  통달한 보살이라고 하지는 않느니라.

 

廣慧!若諸菩薩, 於內各別如實不見阿陁那 不見阿陁那識` 不見阿賴耶不見阿賴耶識`

不見積集不見心` 不見眼色及眼識`不見耳聲及耳識` 不見鼻香及鼻識` 不見舌味及舌識`

不見身觸及身識`不見意法及意識,是名勝義善巧菩薩. 如來施設彼,爲勝義善巧菩薩.

광혜여! 만약 모든 보살이 내면적으로 각각 다르게 여실한 그대로의 아타나(用)를 보지 않고,아타나식(體)을 보지 않으며, 

아뢰야를 보지 않고 아뢰야식을 보지 않으며, 적집을 보지 않고 심(心)을 보지 않으며, 

안근(根)과 색경(境)  안식(識)을 보지 않고, 이근(根)과 성경(境)  이식(識)을 보지 않으며, 

비근과 향경  비식을 보지 않고, 설근과 미경  설식을 보지 않으며, 신근과 촉경  신식을 보지 않고, 

의근과 법경  의식을 보지 않아야 비로소 승의(勝義)에  통달한 보살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여래께서 시설하셔서 그를 승의에  통달한 보살이라 하느니라.


廣慧!齊此名爲於心`意`識一切秘密善巧菩薩, 如來齊此,施設彼,爲於心`意`識一切秘密善巧菩薩.

광혜여! 이러함에 한하여 심ㆍ의ㆍ식의 모든 비밀한 뜻에  통달한 보살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여래께서는 이것에 한하여 시설하셔서 그를 심ㆍ의ㆍ식의 모든 비밀한 뜻에  통달한 보살이라고 하느니라.’”

 

此伽他中,重顯彼義. 阿陁那識者,所釋異名. 甚深細者,難了知故.

一切種子如瀑流者, 次第轉故,一切種子, 剎那展轉,如瀑水流, 相續轉故.

恐彼分別執爲我者, 一行相轉故,分別執可得.

가타(伽他, 게송)에서 거듭  뜻을 나타내고 있으니,

‘아타나식(阿陁那識)’은 해석되는 것의 다른 명칭이며,

‘매우 심오하고 미세한, 심심세(甚深細)’란, 분명히 알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며,

‘일체종자식은 폭포의 흐름과 같다’는 것은 차례로 전전하기 때문에 모든 종자가 찰나에 전전함은 폭포수의 흐름과 같이 상속해서 전전하기 때문이며,

‘그것을 분별하고 집착해서 자아로 삼을까 두렵기 때문’이란 하나의 행상으로서 전전하기 때문에 분별해서 집착할  있기 때문이다.


▶論曰:何緣,此識亦復說名阿陁那識? 執受一切有色根故` 一切自體取所依故.

所以者何?有色諸根,由此執受,無有失壞,盡壽隨轉. 又於相續, 正結生時, 取彼生故,執受自體.

是故, 此識亦復說名阿陁那識.

▷논문에서; 무슨 까닭에  식을 또한 아타나식(阿陁那識)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모든 감각기관의 유색근(有色根)을 집수(執受)하기 때문이요, 일체의 자체(自體)가 취하여 의지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모든 감각기관의 유색근(有色根)이 이러한 집수로 인해서 파괴되지 않고, 수명을 다할 때까지 따라서 전전하는 것인가?

또한 상속해서 생을 맺을 때, 다시  생을 취하기 때문에 자체를 집수하는 것이므로, 이 식을 아타나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아타나(阿陀那)는 범어 ādāna의 음역으로서, 유지ㆍ보존의 뜻이며, 제8식이 신체와 종자를 유지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제8식의 본질적 성질인 자상(自相)과 체성(體性)에는 여러 분위(分位), 즉 여러 성격 또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제 8식을 칭하는 명칭이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가 있다.
1.아뢰야식(阿賴耶識)   2.무몰식(無沒識)
3.장식(藏識) 또는 택식(宅識)   4.이숙식(異熟識) 또는 비파가식(毘播迦識)
5.아타나식(阿陀那識) 또는 집지식(執持識)    6.심(心)
7.소지의(所知依)    8.종자식(種子識) · 일체종식(一切種識) 또는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9.무구식(無垢識) 또는 아마라식(阿摩羅識)    10.본식(本識)
11.초식(初識) 또는 초찰나식(初剎那識)    12.초능변식(初能變識)
13.제1식(第一識)    14.식주(識主)


▶釋曰:執受一切有色諸根故者,所以者何? 有色諸根, 由此執受, 盡壽隨轉, 用此爲釋.

謂由眼等有色諸根, 阿賴耶識所攝受故, 非如死身靑瘀等位.

▷해석한다; '모든 감각기관의 유색근(有色根)을 집수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무슨 까닭에 모든 감각기관의 유색근(有色根)은  집수로 인해서 수명을 다할 때까지 따라서 전전하는가’에 대한 해석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안근 등의 여러 감각기관인 유색제근(有色諸根)은 아뢰야식의 섭수하는 바이기 때문에 시체의 푸르딩딩한 모습의 청어(靑瘀) 등과는 다른 것이다.

 

若至死時, 此捨離故, 彼卽便有靑瘀等位. 是故定知此執受故,乃至壽限, 彼不失壞.

만약 죽음에 이르게 된 때에는 이 아뢰야식을 여의기 때문에 그 감각기관들이 곧 시체의 푸르딩딩한 청어(靑瘀) 등의 단계가 있게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하나니,  집수(執受) 때문에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것이 파괴되지는 않는 것이다.

 

一切自體取所依故者, 又於相續, 正結生時, 取彼生故, 執受自體, 用此爲釋.

謂由此識, 是相續識故, 於相續正結生時, 能攝受生一期自體,亦爲此識之所攝受,

由阿賴耶識中,一期自體熏習住故. 彼體起故, 說名彼生. 受彼生故,名取彼生.

由能取故,執受自體, 以是義故, 阿賴耶識,亦復說名阿陁那識.

‘모든 것의 자체가 취하는 의지처(所依)이기 때문’이란, ‘또한 상속해서 바로 생을 받을 때,  생을 취하기 때문에 자체를 집수한다’에 대한 해석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식은 상속식(相續識)이기 때문에, 상속해서 바로 생을 맺을  능히 그 생의 한평생의 자체를 섭수하는 것 역시도  이 식이 섭수하는 것이니,  

아뢰야식에서 한평생의 자체는 훈습하여 머물기 때문이며, 그것의 자체가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생(生)’이라 말하는 것이며, ‘그 생(生)’을 수용하기 때문에 ‘‘그 생(生)’을 취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능히 취함으로 인해서 자체를 집수하는 것이다. 

이런 때문에 아뢰야식을 또한 아타나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청어(靑瘀), 시체의 부정한 양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에 시체가 부어서 마치 곡식 담긴 자루처럼 팅팅한 모습의 창상(脹相),

시체의 가죽과 살이 문드러지고 오장이 썩는 모습의 괴상(壞相),

시체의 온몸이 피고름으로 더러워진 모습의 혈도상([血塗相),

시체에서 고름과 벌레가 흘러나오고 살이 흩어져서 여러 군데에 낭자한 모습의 농란상(濃爛相),

시체가 바람에 쏘이고 비에 씻겨서 피고름이 엉겨 푸르퉁퉁한 모습의 청어상(靑瘀相),

시체가 새ㆍ짐승ㆍ구더기에 파먹히는 모습의 영상(霙相),

가죽과 살이 없어지고 뼈만 붙어 있으면서 머리와 다리가 뒤섞인 모습의 산상(散相),

백골이 낭자한 모습의 골상(骨相),

불에 타서 그슬리어 악취가 나고 재가 되는 모습의 소상(燒相)이 있다.

5욕락을 즐기는 미혹을 없애기 위한 관법인 부정관(不淨觀) 가운데 9상관(想觀)은 이러한 시체의 부정한 모습들을 관찰한다.

 

ㅡ심(心)ㆍ의(意)ㆍ식(識)명칭을 해석한다.
▶論曰:此亦名心,如世尊說:心`意`識三.

此中意有二種: 第一與作等無閒緣 所依止性, 無閒滅識能與意識作生依止;

第二染污意,與四煩惱恒共相應: 一者薩迦耶見`二者我慢`三者我愛`四者無明,

此卽是識雜染所依. 識復由彼第一依生, 第二雜染,了別境義故.等無閒義故`思量義故,意成二種.

▷논문에서; 이것을 또한 심(心)이라 이름하나니, 세존께서 심(心)ㆍ의(意)ㆍ식(識)의  가지를 말씀하신 바와 같다.

여기서 의(意, manas)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의 의지처의 성품으로, 무간멸(無間滅)의 식은 능히 의식(意識)이 생기하는 의지처가 되며,  

둘째는 염오의(染汚意)로서 사번뇌(四煩惱) 항상 함께 상응하나니,  

그 첫째는 살가야견(薩迦耶見, 아견)이고, 둘째는 아만(我慢)이며, 셋째는 아애(我愛)이고, 넷째는 무명(無明, 아치)이다. 

이것은  식(識)의 잡염의 의지처인 잡염소의(雜染所依)이며, 식은   번째 의지처로 인하여 생겨난다. 

 번째의 것은 잡염이니, 대상을 요별하는이기 때문이고, 등무간의이기 때문이며, 사량의이기 때문에 의(意)에  종류를 이루는 것이다.

 

의(意), 제7 말나식을 가리키며, 이때 의(意)의 범어는 manas(思量)이다. 그런데 제6의식을 mano-vijāna라고 해서 똑같이 manas가 사용된다. 따라서 제6 의식과 구분하기 위해서 단지 의라고 부르거나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음역어를 사용한다.

의(意), 즉 제7식에 무간멸의(無間滅意)와 염오의(染汚意)의 두 가지 의미가 있어서,

무간멸의(無間滅意)는 제7식이 제6식의 의지처인 의근(意根)임을 나타내고 낸다.

염오의(染汚意)는 제7식으로 인하여 무명의 아치(我癡)ㆍ아견 등의 근본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4연(四緣)은 인연(因緣)ㆍ소연연(所緣緣)ㆍ등무간연(等無間緣)ㆍ증상연(增上緣) 으로,

등무간연(等無間緣)은 차제연(次第緣)이라고도 하며, 전념(前念)의 식이 멸하는 것이 후념(後念)의 식이 생겨나는 연(緣)이 되는 것으로, 연속하는 마음의 활동에서 뒤의 생각은 앞의 생각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 자신도 원인이 돼 다음 생각을 일으키는데, 이 경우에 원인이 되는 것을 등무간연, 결과는 증상과(增上果)에 해당한다. 

4번뇌(四煩惱) 또는 4혹(四惑)은  아치(我痴, 무명)가 근본원인이 되어서 아견(我見, 아집)→아만(我慢)→아애(我愛, 아탐)의 순서로 생겨난다.


▶釋曰:此亦名心者,阿賴耶識, 卽是心體. 意識二義差別可得, 當知心義亦有差別, 顯示此故.

此中與作等無閒緣因性, 謂無閒滅識與意識爲因,是第一意;

▷해석한다; ‘이것을 또한 심(心)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아뢰야식이 심(心)의 체(體)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의(意)와 식(識), 두 가지 의미의 차이를 얻을  있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심(心)의 의미에도 역시 차이가 있으니,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세 가지 차별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등무간연(차제연)의 원인의 성품인 인성(因性)이 된다”는 것은 

ㅡ논()에는 ‘의지처인 소의지(所依止) 성품’으로 되어 있는데, ()에서는  의미를 따라서 인성(因性)이라 하였.

 

무간멸(無間滅)의 식이 의식의 원인이 되는 것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번째 의(意)인 무간멸의(無間滅意)이다. 

 

由四煩惱,常所染污, 是第二意. 此中薩迦耶見者, 謂執我性;由此勢力,便起我慢;恃我`我所而自高擧,

於實無我, 起有我貪,名爲我愛.如是三種無明爲因. 言無明者, 卽是無智

아치(我痴, 무명), 아견(我見, 아집), 아만(我慢), 아애(我愛, 아탐)의 사번뇌(四煩惱)로 인하여 항상 염오되나니, 이것이  번째의 염오의(染汚意)이다.

여기에서 ‘살가야견(薩迦耶見)’은 자아에 집착하는 성품으로, 이 세력으로 인하여 문득 아만(我慢)을 일으켜서 나(我)와 나의 소유(我所)라고 믿고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며,

실제로는 무아인 것에 대해서 자아가 있다는 욕심의 아탐(我貪)을 일으킴을 아애(我愛)라 이름 하는 것으로,

아견, 아만, 아애의 이러한  가지는 무명(無明)이 원인이 되며, 무명이란  무지(無智)인 것이다

 

살가야견(薩迦耶見, 아견 신견)은 범어 satkāya-dṛṣṭi의 음역으로서, 유신견(有身見)이라 번역하며 신견(身見)ㆍ아견(我見)이라고도 한다. 자아(Ātman)가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으로,

제7 염오말나식이 제8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제6 의식이 5취온(取蘊)을 대상으로 해서 자아로 착각하여 나(我)와 나의 소유(我所)로 삼아서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기본으로 해서 아만(我慢)과 아애(我愛)를 일으키는 것이다.

아만(我慢), 살가야견에 의해 설정된 자아를 의지처인 소의(所依)로 삼아서 자기는 존재한다고 교만하게 뽐내는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에 아만은 5취온을 나와 나의 소유로 집착하여 교만한 것을 의미하였으나,

유식학파에서는 말나식(제 7식)이 아뢰야식(제 8식)을 자아로 인식함으로써 자아를 더욱 대상화하고, 대상화된 자기를 근거로 교만하게 뽐내는 것을 근본적인 아만이라 하였다.

아애(我愛), 자아에 대한 애착은 일상생활에서 갖가지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이다.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는 근본원인이 된다.

무명(無明, 아치), 근본적인 무지는 자기 본질의 이치인 무아(無我)라는 것을 모르는 아치(我癡)를 말한다.

무명은 초기불교 이래 4성제ㆍ연기의 도리에 무지한 것으로 설명되었으며, 유가유식학파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입장에 있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야말로 근본적인 무명이며, 그것이 항상 말나식과 함께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무명이란 곧 무지(無智)인 것이다' 에서의 무명은 구체적으로 무아의 이치를 모르는 아치(我癡),  제7식이 제8식을 대상으로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의 자아로 착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견, 아만, 아애의 세 가지 번뇌가  무명을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가지 근본번뇌가 생겨나는 순서는 무명→아견→아만→아애이다.

 

復由彼第一依,生第二雜染者, 謂無閒滅識,說名爲意, 與將生識容受處所故 作生依.

第二染污意, 爲雜染所依, 以於善心中,亦執有我故`

‘식(識)은   번째인, 등무간연(等無間緣)의 의지처로 인하여 생겨나고, 

 번째의 잡염(雜染)’이란 무간멸(無閒滅)의 식을 말하며, 의(意)라 이름하는 것이다. 

장차 생겨나는 식의 수용의 처소(處所)인, 즉 전찰나의 식이 멸하는 곳에 다음의 식이 생겨나기 때문에, 생겨남의 의지처인 작생의(作生依), 즉 다음 찰나의 식이 생겨나는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번째의 염오의(染污意)는 잡염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니, 착한 마음인, 선심(善心)에도 역시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ㅡ선심(善心) 번뇌가 있는, 유루(有漏) 동안에는 아집을 근본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염오의(染汚意) 의지처인 소의(所依)로 하기 때문이다.

 

了別境義故. 等無閒義故,思量義故,意成二種者, 謂於此中,由取境義, 說名爲識, 由與處義, 名第一意,

由執我等,成雜染義,名第二意.

‘대상을 요별하는이기 때문이고, 등무간의이기 때문이며, 사량의이기 때문에 의(意)에  종류를 이룬다’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중에서 대상을 취하는 취경(取境)의 뜻으 인하여 식(識)이라 이름하고, 

처소를 주는 여처(與處)의 뜻으로 인하여  번째의 무간멸의(無間滅意) 이름하며, 

자아 등에 집착해서 잡염을 이루는 의미로 인하여  번째의 염오의(染汚意)라 이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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