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지관구행(止觀俱行) - 止觀雙修(지관쌍수)를 권함
若行若住若臥若起(약행약주약와약기) 皆應俱行(개응구행)
혹 다니거나 혹 머물거나 혹 눕거나 혹 일어남에 모두 마땅히 지관(止觀)을 함께 수행해야 하나니,
[ 《앙굿다라 니까야≫ 쭌다 경(Chunda-sutta)
도반들이여, 그러므로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합니다. ‘법에 열중하는 우리는 참선하는 비구들을 칭송하리라.’라고.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불사(不死)의 경지를 몸으로 체득하여 머무는 이러한 경이로운 인간들은 세상에서 얻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도반들이여, 그러므로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합니다. ‘참선하는 우리는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을 칭송하리라.’라고.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심오한 경지를 통찰지로 꿰뚫어 보는 이러한 경이로운 인간들은 세상에서 얻기 힘들기 때문입니다.-물처럼바람처럼]
所謂雖念諸法自性不生(소위수념제법자성불생) 而復卽念因緣和合(이부즉념인연화합)
이른바 비록 제법의 자성이 나지 않음을 생각하나, 다시 곧 인연으로 화합한
善惡之業(선오지업) 苦樂等報(고락등보) 不失不壞(불실불괴)
선악의 업과 고와 락 등의 과보가 잃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음을 생각해야 하며,
[앞부분은 지행(止行)이며, 뒷부분은 관행(觀行)이다.
* 元曉 : 雖念諸法自性不生이란 것은- 비유문(非有門)에 의해 지행(止行)을 닦는 것이다.
而復卽念因緣和合이란 것은 비무문(非無門)에 의해 관행(觀行)을 닦는 것이다. 이는 실제를 건립하지 않은 채 모든 법을 건립함을 따르기 때문에 지행을 버리지 않고 관행을 닦을 수 있는 것이니, 진실로 법이 유가 아니지만 무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雖念因緣善惡業報(수념인연선오업보) 而亦卽念性不可得(이역즉념성불가득)
비록 인연이 화합한 선악업보를 생각한다 하여도, 그러나 또한 생각하는 자성=念性은 얻을 수 없음이니,
[앞부분은 관행(觀行)이며, 뒷부분은 지행(止行)이다.]
若修止者(약수지자) 對治凡夫住著世間(대치범부주착세간)
만약 지(止)를 수행하는 자라면, 범부가 세간을 머물고 집착하는 것을 대치할 수 있으며,
能捨二乘怯弱之見(능사이승겁약지견)
능히 이승의 겁내고 약한 견해=怯弱之見을 버릴 수 있다.
[元曉 : 止를 닦으면 첫째 범부의 주착(住着)하는 고집을 제거하는 것으로 그가 집착한 인법상(人法相)을 없애는 것이며, 둘째 이승의 겁약한 소견을 다스리는 것으로 오음이 있다고 보아, 그 고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若修觀者(약수관자) 對治二乘不起大悲狹劣心過(대치이승불기대비협열심과)
만약 관을 수행하는 자는 이승이 대비를 일으키지 않는 편협하고 용렬한 마음의 허물을 대치할 수 있으며,
遠離凡夫不修善根(원리범부불수선근)
범부가 선근을 수행하지 않는 것을 멀리 여의게 되니,
[元曉 : 觀을 닦으면 첫째 이승의 협열(狹劣)한 마음을 없애는 것으로 널리 중생을 살피어 대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둘째 범부의 게으른 뜻을 다스리는 것이니 무상(無常)을 보지 아니하면 분발하여 도에 나아감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다.]
以此義故(이차의고) 是止觀二門(시지관이문) 共相助成(공상조성) 不相捨離(불상사리)
이런 뜻(의미)이므로 이 지와 관의 두 문은 함께 서로 도와 이루며,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니,
若止觀不具(약지관불구) 則無能入菩提之道(약무능입보리지도)
만약 지와 관을 갖추지 않으면 보리의 도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元曉 : 지(止)와 관(觀)은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지(止)와 관(觀), 이 둘을 동시에 닦는 방법을 설한다. 지(止)와 관(觀)을 따로따로 수행하는 것은 수행이 미숙한 사람들이 행하는 것으로서 오랫동안 수행하여 선정(禪定)과 지혜(智慧)가 성취되면, 지와 관을 함께 수행하는 지관구행(止觀俱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止)와 관(觀)을 함께 수행하는 것은,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즉, 지(止)를 수행하는 것은 본체적 입장에서 제법의 자성(自性)은 불생(不生)이라는 것을 염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현상적 입장에서 인연화합(因緣和合)으로 생기는 선악업(善惡業)이나 고락(苦樂)의 과보는 절대로 없어지거나 부서져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前者)는 지(止)의 입장이고 진여문(眞如門)의 입장에서 '영원'의 불생을 보는 것이며, 후자(後者)는 생멸문(生滅門)의 입장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실재로 있다[實有]고 보는 관(觀)의 입장이다. 지(止)는 비유(非有)이고 관(觀)은 비무(非無)로서「비유즉비무(非有卽非無)」는 지(止)를 버리지 아니하고, 더불어 관(觀)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止)에 즉(卽)하는 관(觀)」즉 지관(止觀)을 함께 닦는 것이다.
다음은 역으로, 관(觀)의 입장에 서서 인연선악의 업보(業報)를 염한다 하더라도, 그러나 동시에 지(止)의 입장에 서서 제법의 본성은 공(空)이므로 불가득(不可得)이라고 염하는 것이다. 이것은「관(觀)에 즉하여 지(止)를 행하는 것」으로서, 유(有)를 인정하면서 그러나 그 깊은 곳에서 동시에 공(空)을 보는 것이다.
이상은 법(法)에 대한 지관구행(止觀俱行)을 밝힌 것이며, 다음은 장(障)에 대한 지관구행, 즉 지와 관을 동시에 실천하는 방법을 밝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止)를 수행하게 되면 법의 무자성(無自性)을 보는 유심삼매(唯心三昧)의 정(定)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범부가 세간의 명리(名利)에 집착하는 것을 없앨 수 있음과 동시에, 이승(二乘)의 염세, 즉 생사를 싫어하여 세상을 버리는 겁약한 견해를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지(止)는 범부의 세간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치유하는 것이며, 동시에 관(觀)은 보살로서 세간을 버리지 않는 대비심(大悲心)을 갖게 하는 것으로, 지관구행(止觀俱行)의 실천을 보게 된다.
다음, 관(觀)을 수행하게 되면 대비관(大悲觀)과 대원관(大願觀)을 갖게 되는 것은 물론, 동시에 세간에 집착하지 아니하므로, 대비심을 일으키지 않는 이승(二乘)의 편협하고 옹렬한 마음의 과실을 치유할 수 있음과 동시에, 범부가 세간에 집착하여, 해탈을 위한 선근(善根)을 닦지 않는 과실을 없앨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세간을 버리지 아니하면서 세간에 집착하지 않는「관(觀)에 즉하는 지(止)의 입장」을 볼 수 있게 된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止)는 진여문, 관(觀)은 생멸문의 입장이며, 지(止)는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 관(觀)은 후득지(後得智), 지(止)는 평등관, 관(觀)은 차별관, 지(止)는 공관(空觀), 관(觀)은 유관(有觀) 등 상이한 성격의 것이지만, 그러나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은 일심(一心)의 두 면이므로, 양자는 둘이면서 둘이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또한 공(空)이라고 하더라도 유(有)를 떠난 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유(有)의 본성이 공(空)이기 때문이다. 유(有)는 공(空)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므로 유와 공은 상호 동시에 성립되는 것이다. 평등과 차별 또한 같은 이치이다.
이와 같이 지(止)와 관(觀)은 다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그러나 서로 도와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론에서는「이 지와 관의 두 문은 함께 서로 조성(助成)하여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지(止)와 관(觀)은 동시에 함께 행할 때만이, 비로소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로서의 진실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며, 그 어느 하나를 결하게 되면 불교의 깨달음은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므로, 결론적으로「만약 지와 관을 갖추지 못하면 바로 보리(菩提)의 길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施), 계(戒), 인(忍), 진(進), 지관(止觀)의 오문(五門) 중 지관이 정행(正行)이고 기타 사문(四門)은 조행(助行)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상에서 오행(五行)으로 사신(四信)을 수행하여, 신심을 성취하는 것을 설한 바 있다. 그러나 중생 가운데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는 수행하지 못하는 근기 낮은 중생 또한 있는 것이므로, 불퇴의 방편으로서 다음과 같이 염불왕생(念佛往生)을 설하게 된다.-금강사]
[여기에서는 일상의 수행에서 지(止, amatha)와 관(觀, Vipasyana)을 쌍수(雙修)하라고 다시 강조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비록 제법을 깊이 사유하더라도 자성은 망령된 생각을 따라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지(止)이고, 망령된 생각을 그친 그 자리에서 곧바로 갖가지 인연화합에 의해서 선악의 업과 고락 등의 과보가 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觀)에 해당하겠습니다. 그러나 진여는 불생(不生)의 본체로 없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으며 선악의 업보를 생각하더라도 자성은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止)와 관(觀)의 두 방편은 서로 도와서 평등한 가운데 차별이 있고, 차별이 있는 가운데 평등한 것으로 평등의 본체에 들어가는 것은 지(止)이고, 다시 차별의 법을 관찰하는 것은 관(觀)입니다. 지(止)를 닦으면 차별에 집착하여 세간에 안주하는 범부의 마음을 다스리고, 또한 이승(二乘)의 비겁하고 나약한 견해를 버리게 하며, 관(觀)을 닦으면 자리이타의 대비심을 일으키지 않는 이승의 비겁하고 용렬한 마음을 다스려 선근을 닦지 않는 범부를 멀리 떠나 자리이타를 다 갖추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사마타와 위바사나는 서로 도와 떠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지 않으면 보리의 도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지관(止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선행을 광대하게 닦아 중생을 거두어 교화한다는 것은 지(止)에 상즉(相卽)해서 일으키는 즉지지관(卽止之觀)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비록 인연업보를 깊이 사유한다"는 것은 관(觀)의 수행이며, "사유하는 자성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은 관(觀)에 상즉(相卽)한 즉관지지(卽觀之止)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止)의 공적함에 거처한다 해도 만행의 관(觀)을 버리지 않고, 관(觀)으로 생사의 세계를 거닌다 해도 그 자리에서 지(止)이므로 한결같은 성품은 고요하여 담담하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을 두고 지관(止觀)을 쌍수(雙修)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 사마타를 수행하는 자는 범부가 세간에 안주하여 집착하는 것을 대치하면 이승의 비겁하고 나약한 견해를 버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자는 이승인이 대자비를 일으키지 않는 편협하고 근기가 낮은 마음의 허물을 대치하면 범부가 선근을 수행하지 않는 것을 멀리 여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지관의 두 문은 공통으로 서로가 돕고 성취하여 서로가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만일 지관을 함께 다 갖추지 않는다면 깨달음의 불도에 깨달아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관을 함께 닦아 범부로 하여금 세간에 염증을 내게 하기 때문에 뭇 선행을 부지런히 닦게 되고, 이승은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대비심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서로가 돕는 수행의 철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사와 열반 어느 쪽에도 집착하여 안주함이 없어야만 보리의 도로 곧장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지관을 쌍수(雙修)하여 운행하는 데서 얻어지는 이익입니다. 앞에서부터 누차 강조해온 수행의 요체를 결론짓고 있습니다. 즉, 지(止)인 사마타만 수행하면 혼침에 빠지거나 단공(斷空) 또는 악취공(惡取空)에 떨어져 버려서 허무주의에 침잠(沈潛)합니다. 반면에 관(觀)인 위빠사나만 수행하다보면 수행자의 마음이 들떠서 도거(掉擧)를 야기하여 온갖 대상에 현혹되어 번뇌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듭니다.-수선]
④ 道(도)에서 물러나지 않는 방편
復次衆生初學是法(부차중생초학시법) 欲求正信(욕구정신) 其心怯弱(기심겁약)
다시 다음에 중생이 처음으로 이 법을 배워 바른 믿음을 구하고자 하나, 그 마음에 겁이 많고 약한=怯弱하여
以住於此娑婆世界(이주어차사바세계)
이 사바세계에 머묾으로써
自畏不能常値諸佛親承供養(자외불능상치제불친승공양)
스스로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몸소 받들고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懼謂信心難可成就(구위신심난가성취) 意欲退者(의욕퇴자)
두려워서 말하길, "신심은 성취하기 어렵다"라고 하면서 의욕이 물러나고자 하는 자라면,
當知如來有勝方便(당지여래유승방편) 攝護信心(섭호신심)
여래께서는 수승한 방편이 있어 신심을 거두어 보호하심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謂以專意念佛因緣(위이전의념불인연) 隨願得生他方佛土(수원득생타방불토)
이른바 뜻을 하나로 하여=專一하게 하여 염불한 인연으로 원을 따라 다른 불국토에 태어나서,
常見於佛(상견어불) 永離惡道(영리악도)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고, 악도를 영원히 떠남을 말한다.
如修多羅說(여수다라설) 若人專念西方極樂世界阿彌陀佛(약인전념서방극락세계아미타불)
수다라(경)에서 설하신 것처럼 만약 어떤 사람이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오로지 생각=專念하고
所修善根廻向(소수선근회향) 願求生彼世界(원구생피세계) 卽得往生(즉득왕생)
닦은 선근을 회향하며, 저 세계에 왕생하기를 구한다면, 곧 왕생하여
常見佛故(상견불고) 終無有退(종무유퇴)
항상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침내 물러남이 없으며,
若觀彼佛眞如法身(약관피불진여법신) 常勤修習畢竟得生(상근수습필경득생)
住正定故(주정정고)
만약 저 부처님의 진여의 법신을 관찰하고 항상 부지런히 수습한다면 필경에 왕생하여 정정취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작은 선근(善根)이나 공덕과 인연으로는 저 세계에 날 수 없다. 사리불아,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 이야기를 듣고 그 이름을 지니고, 하루나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를 외우되, 한 마음으로 흐트러짐이 없다면, 그 사람은 목숨을 다 할 때, 아미타부처님께서 모든 성인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나실 것이다. 이 사람은 목숨을 마칠 때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에 가서 날 것이다. -《아미타경》
* 元曉 : 정정취에 머무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견도(見道) 이상을 이제 정정이라고 하니 무루도에 의거하여 정정을 삼기 때문이다. 둘째, 십해 이상을 정정이라고 하니 불퇴위에 머무는 것을 정정으로 삼기 때문이다. 셋째, 구품왕생을 모두 정정이라고 하니 수승한 연(緣)의 힘에 의해 퇴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은 물러서지 않는 불퇴의 방편으로 염불왕생(念佛往生)을 밝히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오행(五行)으로 사신(四信)을 수행하여 신심을 성취하는 방법을 설한바 있으나, 처음 이 법을 배워, 진여를 믿고 수행하여 바른 믿음을 얻고자 하는 중생 가운데에는, 의지가 박약하여, 모처럼 한 발심을 단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자기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 살고 있으나, 현재 이 땅은 무불(無佛)의 세상으로서 석가불(釋迦佛)은 이미 열반에 드시었고, 뒤를 잇는 미륵불(彌勒佛)은 아주 후대에 출현하는 것이므로 이 사바세계에서는 부처를 만나 친승공양(親承供養)할 수 없어, 신심을 성취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근기가 낮고 의지가 약한 사람을 위하여 불타는 대비심(大悲心)을 가지고 훌륭한 방편을 가르쳐 수행을 단념치 않도록 하고 있다. 이 방편으로 중생의 신심이 성취되도록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것이다. 그 사실을 마땅히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 훌륭한 방편이란 마음을 하나로 하여 염불(念佛)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이 정신을 집중하여 불타를 염상(念想)하고 불(佛)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인연에 의하여, 그 중생이 염원한 바에 따라 타방(他方)의 불국토에 왕생하게 된다. 이것은 그 불타의 본원(本願) 즉 원력에 의하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그 불국정토에 태어나 항상 불타를 친견하게 되어 영구히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 이에 대하여 경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해지고 있다. 만약 사람이 전념으로 서방극락세계에 계시는 아미타불을 염(念)하고, 그렇게 얻어진 공덕을 회향(廻向)하여, 그의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여 구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그렇게 하여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나면, 항상 불타를 친견할 수 있게 되어, 신심이 후퇴하는 일이 없게 된다. 그보다 근기가 나은 사람이 바로 아미타불의 진여법신을 관하여, 항상 부지런히 그 진여를 염하게 되면, 마침내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게 되어 정정취(正定聚)에 들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론의 저자는 저술의 이유를 밝히는 인연분(因緣分) 제7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아둔한 열근기의 사람 가운데에서도 상품(上品)의 사람들은 자력으로 깨달을 이근(利根)은 없으나, 악(惡)의 업장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애당초 아미타불을 염하여,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방편을 가르쳐, 서방정토의 아미타불 앞에 태어나, 반드시 구원받는 몸이 된다는 것을 확신시켜, 불퇴의 신심을 성취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이상으로 사신오행(四信五行)의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끝마친다.]
이를 도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는 중생 가운데 근기가 하열한 이를 위하여 퇴전하지 않는 방편을 제시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걸맞은 말씀이라 여겨집니다. 우리는 조그만 어려움이 닥쳐오면 그만 물러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공부는 현실적으로 나타난 이득이 없는 듯하기 때문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중도에 그만 두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땅히 여래에게는 수승한 방편이 있기에 신심을 거두어 보호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는 생각을 오로지 하여 집중된 간절한 의식으로 염불한 인연으로 원을 따라 타방의 불국토에 태어나 항상 부처님을 뵙고 영원히 삼악도를 여읠 수 있습니다. 정토삼부경에서 말씀한 것처럼 어떤 사람이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전일(專一)하게 염불하고 수행한 선근을 회향하여 그 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갈구하면 반드시 왕생하여 항상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절대 수행에서 물러나는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 부처님의 진여인 법신을 관찰하고 항상 부지런히 수습한다면 필경에 왕생하여 그는 정정취에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대승을 처음 배우는 중생은 올바른 신심을 체득하지 못하여 안으로는 마음이 하열하고 밖으로는 수승한 인연이 결여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에 대한 올바른 신심에서 물러나 그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수승한 방편을 시설하시어 그 마음을 거두어 보호하십니다. 그 의도를 말해 본다면 전일한 의식으로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을 구하는 것인데, 이는 부처님을 의지함으로써 그의 신심에 보호되는 것입니다. 이는 즉 아미타불을 항상 염하고 서방정토에 왕생하여 불퇴의 수행지에 거처하는 것과 같은 경우인데 이것이 그 수행입니다. 그러나 정토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을 요약한다면 세 단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극락세계의 구품연지(九品連池)에 연꽃이 아직 피어나지 않아 신심과 수행이 원만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이는 단지 물러남이 없는 탁월한 인연에 거처하는 측면에서만 요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불퇴위(不退位)라고 이름합니다. 두 번째는 극락세계에 연꽃이 피어나고 아미타불을 뵙는 것인데, 이는 십신위(十信位)가 원만하게 갖추어져 그 수행의 분야만큼 부처님의 진여법신을 보고 정정취(正定聚)에 안주라는 것인데, 이야말로 진실한 불퇴위라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삼현위(三賢位)의 수행이 원만하여 십지 가운데서 초지에 깨달아 들어간 것인데, 거기에서 두루 원만하게 충만한 진여의 법신을 증득하고 끝없는 불국토에 태어납니다. 이는 본문의 후위(後位)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수행신심분은 끝이 났고, 다음은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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