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觀門(관문)
復次若人唯修於止(부차약인유수어지) 則心沈沒(즉심침몰) 或起懈怠(혹기해태)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지만을 닦는다면 곧 마음이 가라앉아 혹은 게으름을 일어나며,
不樂衆善(불락중선) 遠離大悲(원리대비) 是故修觀(시고수관)
여러 선함을 즐겨 행하지 않으며 대비심을 멀리 여의게 되므로, 그래서 관을 닦아야만 한다.
[지운 : 위빠사나(觀觀) 수행의 조건
① 선지식에 의지해야 한다. 선지식의 조건은 많이 아는 것, 명확하게 표현하는 능력, 연민을 가짐(가장 큰 조건), 역경을 견딜 수 있음 등이다.
② 가르침에 대한 신중한 탐구.
③ 육식 자제. 이것은 자비심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나쁜 음식을 먹지 말 것. 이것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 憨山 : 心沈沒(심침몰) - 진여에서 오로지 고요함으로만 취향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두 가지 실수를 하게 된다. ① 게으름을 피우며 모든 선업을 수행하지 않으므로 자리(自利)를 잃는다. 그 때문에 다음으로 법상관으로써 그것을 다스리고 성취하였던 것이다. ② 대비심을 멀리 여읜다면 이타(利他)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대비관으로 대치하고 대원관으로 성취하였던 것이다.
* 지운 : 위빠사나 방법. 문(聞) - 법문을 들음. 사(思) - 비판적 관조적 사유. 수(修) - 확인.
* 元曉 : 사(思)의 네 가지 방법
① 능정사택(能正思擇) - 어디서나 현상계의 모든 차별상을 감싸는 궁극적 성품을 바르고 깊이 생각함. 맑은 행으로 반연하는 경계, 좋은 방편으로 반연하는 경계, 번뇌를 맑히는 경계.
② 최극사택(最極思擇) - 인연 경계에서 존재자의 궁극적인 본질인 진여를 가장 잘 생각함.
③ 주변심사(周徧尋思) - 심(尋)은 거친 생각이다. 인연 경계에서 지혜로운 행으로 분별하는 마음이 있어, 그 모습을 취함에 두루 살피고 생각함.
④ 주변사찰(周徧伺察) - 인연 경계에서 세밀하게 살피고 두루 챙기는 마음.-물처럼바람처럼]
[지(止)는 육바라밀에서 정(定)에 해당되고, 관(觀)은 혜(慧)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정(定)도 지관(止觀)에 통하고 혜(慧) 또한 지관에 통하는 것이므로, 이를 본론에서는 나누지 않고, 통합하여 지관(止觀)을 설한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관(止觀)을 설함에 있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먼저 지(止)에 관하여 설하였으며, 그에 이어 관(觀)을 설하고, 최후로 이를 통합하여 함께 수행하는 것을 설하게 된다. 먼저 관(觀)의 필요성을 설한다. 지(止)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지(止)만을 닦게 되면, 지(止)가 바로 무상무념(無想無念)의 상태에 있는 것이므로, 이것이 실현되면 심적정(心寂靜)이 되어 마음이 침체, 진취력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그리하여 마음이 해이해지고 태만해진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선(善)을 행하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고 또한 이타(利他)적 대비심마저 상실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止)와 함께 적극적인 관(觀)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관(觀)에는 법상관(法相觀), 대비관(大悲觀), 대원관(大願觀), 정진관(精進觀)의 사관(四觀)이 있다.-금강사]
[여기서서는 지(止)만 닦는 수행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여 관(觀)수행, 즉 관(觀)의 위빠사나를 함께 닦는 지관쌍수(止觀雙修)를 권장하였습니다.
"마음이 침몰한다"는 것은 진여에서 오로지 고요함으로만 취향하기 때문에 마음이 공적의 세계에 쉽사리 침몰하게 되기 때문에 두 가지 실수가 있게 됩니다. 첫째는 게으름을 피우며 모든 선업을 수행하지 않으므로 자리(自利)를 잃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법상관(法相觀)으로써 그것을 다스리고 정진관(精進觀)으로써 성취하게 합니다. 두 번째 대비심을 멀리 여읜다면 이타(利他)를 잃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대비관(大悲觀)으로써 그것을 대치하고, 대원관(大願觀)으로써 성취하게 합니다.-수선]
① 法相觀(법상관)
修習觀者(수습관자) 當觀一切世間有爲之法(당관일체세간유위지법)
無得久停須臾變壞(무득구정수유변괴) → 무상(無常)을 관함
관을 수습하는 자는 일체 세간의 유위의 법은 오래 머물 수 없어, 순간순간 변하고 무너지며,
고순호 : 유위법이란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것, 모든 사물을 말한다. 인연에 관계없는 열반과 같은 것은 무위법이라고 한다.
一切心行念念生滅(일체심행념념생멸) 以是故苦(이시고고) →고(苦)를 관함.
일체 마음의 진행=心行이 생각 생각에 생멸하니, 이러한 때문에 괴롭다는 것을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應觀過去所念諸法恍惚如夢(응관과거소념제법황홀여몽)
과거에 생각했던 모든 법은 황홀한 꿈과 같다고 마땅히 관찰해야 하며,
應觀現在所念諸法猶如電光(응관현재소념제법유여전광)
현재에 생각하는 모든 법도 마치 번개 불과 같다고 마땅히 관찰해야 하며,
應觀未來所念諸法猶如於雲忽爾而起(응관미래소념제법유여어운홀이이기)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도 마치 구름이 홀연히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마땅히 관찰해야만 한다. → 무아(無我)를 관함.
應觀世間一切有身悉皆不淨(응관세간일체유신실개부정)
세간의 일체 존재의 몸은 모두가 청정하지 않아
種種穢汚無一可樂(종종예오무일가락) → 부정(不淨)을 관함.
갖가지 더러움으로 오염되었기에 한 가지도 즐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근본불교의 관법 수행은 신수심법(身受心法)을 관하여 몸은 부정하고, 감수 작용은 괴로우며, 마음은 무상하고,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음(無我)을 관하는 것이다. 이를 사념처관(四念處觀)이라고 한다.
* 《앙굿따라 니까야》<깨달음경> 사람에 따라 다른 수행법 - 탐욕을 제거하기 위해서 부정관(不淨觀), 악의롤 제거하기 위해 자비관(慈悲觀), 자아관을 제거하기 위해 무상관(無常觀), 산란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 수식관(數息觀)을 한다.
* 憨山 : 무상관(無常觀) - 상주라고 집착하는 것을 대치. 고관(苦觀) - 즐거움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대치. 무아관(無我觀) - 주재한다고 집착하는 마음을 대치. 부정관(不淨觀) - 청정하다고 집착하는 마음을 대치.]
[법상관은 법의 관찰이다. 유위법(有爲法)은 무상(無常)하다고 보는 무상관(無常觀), 무상한 것은 고(苦)라고 보는 고관(苦觀), 일체제법은 무아(無我)라고 보는 무아관(無我觀), 자기의 신체는 농혈이나 내장 등 모두가 부정하다고 보는 부정관(不淨觀). 이와 같이 제법의 성품을 관찰하는 것이 법상관이다.
관(觀)을 수습하는 자는 일체세간의 유위법(有爲法)은 영구히 동일한 상태로 머무르지 않는다. 순간순간 변화한다고 제법의 무상(無常)을 관하는 것이다. 또한 일체의 마음의 활동도 찰나찰나 변하고 있어, 한 순간도 생멸함이 머무르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고(苦)라고 유위법(有爲法)의 고(苦)를 관한다. 또한 과거에 인식한 온갖 법은 지나가 버린 황홀한 꿈과 같은 것이라고 관하는 것이다. 현재 인식하고 있는 모든 법은 찰나에 과거가 되고, 그 속도가 번갯불과 같이 빠른 것이라고 관하는 것이다.
또한 미래에 인식되는 법은 오직 뜬구름이 홀연히 일어났다 사라지는, 의지할 것이 못된다고 관하는 것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이기 때문이다. 세간에 있는 일체생물의 육신(肉身)은 피나 농, 내장 등 모두가 깨끗하지 못한 부정(不淨)한 것이며 더러운 것이라고 관하고, 하나도 즐겨할 것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론에서 말하는 법상관(法相觀)이다.]
[근본불교 이래 전통적으로 관법수행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이것이 사념처관(四念處觀)입니다. 즉, 몸은 부정(不淨)하고, 감수작용은 괴로움이며, 마음은 무상(無常)하고, 모든 존재는 무아(無我)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를 통합해서 관수시고(觀受是苦)를 항상 수행하여 관신부정(觀身不淨)으로 종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을 수습하는 데는 넷이 있는데, 첫 번째는 법상관(法相觀)이며, 두 번째는 대비관(大悲觀), 세 번째는 대원관(大願觀), 네 번째는 정진관(精進觀)입니다. 처음의 법상관을 넷으로 나눈 첫째가 무상관(無常觀)이고, 둘째는 고관(苦觀)이며, 셋째는 무아관(無我觀)으로 과거는 주재하는 자체가 없는 무아(無我)이기에 그 실체를 쫓기 어렵고, 현재는 찰나찰나에 흐르며 안주하지 않고, 미래는 본래 아직 나타나지 않아 단지 인연이 집합하여 홀연히 있으므로 시방세계의 시간 속에서 실재하는 법을 찾아보아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부정관(不淨觀)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는 법상관(法相觀)으로 범부들의 네 가지 전도(顚倒)된 견해인 상(常)·낙(樂)·아(我)·정(淨)에 집착하는 망상을 제거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법은 상주하여 항상하다고 집착하는 것은 무상관(無常觀)으로, 즐거움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은 고관(苦觀)으로, 상일주재(常一主宰)한 아(我)에 집착하는 마음은 무아관(無我觀)으로, 청정하다고 집착하는 마음은 부정관(不淨觀)으로 대치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법의 내용이 '기신론'에 언급된 특이한 관법수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념처관(四念處觀)도 역시 사전도(四顚倒)를 대치하는 수행법인데 여기서는 새로운 관법을 제시하여 대치시키고 있습니다.]
② 대비관(大悲觀)
如是當念(여시당념) 一切衆生從無始世來(일체중생종무시세래)
다음과 같이 마땅히 생각해야 하나니, 일체중생은 시작이 없는 세월로부터 흘러오면서
皆因無明所熏習故(개인무명소훈습고) 令心生滅(령심생멸)
모두가 무명으로 인해서 훈습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생멸하게 되었으니,
已受一切身心大苦(이수일체신심대고) 現在卽有無量逼迫(현재즉유무량핍박)
이미 일체 몸과 마음의 큰 괴로움을 받았고,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未來所苦亦無分齋(미래소고역무분재) 難捨難離(난사난리)
미래에도 괴로움을 받을 것이 한계=分齊가 없을 것이니, 버리기도 어렵고 여의기도 어려우니,
而不覺知(이불각지) 衆生如是(중생여시) 甚爲可愍(심위가민)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중생이 이와 같이 매우 불쌍하게 되었다.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의 법상관(法相觀)을 바탕으로 하여, 중생의 존재를 불쌍히 여기는 대비관(大悲觀)이다. 일체중생은 무시이래(無始以來)의 무한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무명(無明)에 의하여 훈습되어 있어, 망념이 일어나고, 마음이 생멸하는, 미망(迷妄)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이미, 일체의 심신(心身)에 큰 고통을 받고 있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도 무량한 고통으로 핍박당하고 있다. 더욱이 미래에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막대하지만, 그것은 실로 버리기도 어렵고 벗어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중생은 그 사실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을 알지 못하는 중생은 심히 불쌍한 존재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의 어리석음을 가엽게 보는 것이 대비관(大悲觀)이다.]
['법성관'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임을 알아, 세상의 모든 중생을 불쌍하고 측은하게 바라보는 것이 대비관입니다.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자비가 나옵니다.-통섭불교]
③ 대원관(大願觀)
作此思惟(작차사유) 卽應勇猛立大誓願(즉응용맹립대서원)
이와 같이 사유하여, 곧 마땅히 용맹하게 큰 서원을 세워야 하나니,
願令我心離分別故(원령아심리분별고)
하여금 나의 마음이 분별을 여의도록 원하였기 때문에
遍於十方修行一切諸善功德(편어시방수행일체제선공덕)
시방에 두루하여 일체 모든 좋은 공덕=善功德을 수행하고
盡其未來(진기미래) 以無量方便(이무량방편) 救拔一切苦惱衆生(구발일체고뇌중생)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써 일체 고뇌하는 중생을 구해내어
令得涅槃第一義樂(령득열반제일의락)
하여금 열반의 제일의 즐거움=第一義을 얻게 해야 하나니,
[다음은 대비관(大悲觀)을 바탕으로 하여 중생구제의 대서원(大誓願)을 세우는 것이다. 즉, 보살은 중생의 어리석음을 가엽게 여기는 대비관의 사유를 한 뒤에는 큰 용맹심을 일으켜 다음과 같은 큰 서원을 세우는 것이다.
" 원컨대 나의 마음으로 하여금 분별을 떠나게 하여, 일체중생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시방세계에 두루한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모든 선공덕을 수행하여, 미래를 다하여 영원히, 무량한 방편으로 일체중생의 고통을 제거 구제하며, 그들로 하여금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최고의 즐거움을 얻게 하소서." 라고. 이같은 서원을 세우는 것을 대원관(大願觀)이라 한다.]
['서원관', 목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이 바로 목표입니다. 목표가 없는 삶은 방향성과 발전이 없습니다. 목표가 있으면 매일매일 내 삶을 되돌아 보고 갈고 닦을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고를 여의고 진리, 해탈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만 열반에 들고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부처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목표입니다.]
④ 정진관(精進觀)
以起如是願故(이기여시원고) 於一切時一切處所有衆善(어일체시일체처소유중선)
이와 같은 원을 일으켰으므로, 일체의 시간과 일체의 처소에 있는 여러 선행을
隨己堪能(수기감능) 不捨修學(불사수학) 心無懈怠(심무해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대로 닦고, 배움을 버리지 않아 마음에 게으름이나 태만함이 없어야 하나니,
唯除坐時專念於止(유제좌시전념어지)
오직 좌선할 때 지에 전념하는 것만은 제외하며,
若餘一切悉當觀察應作不應作(약여일체실당관찰응작불응작)
나머지 모든 것에서는 응당 지어야 할 것과 응당 짓지 않아야 할 것을 관찰해야 한다. → 정진관(精進觀).
[이상에서 중생구제를 위한 대서원(大誓願)을 세웠으므로, 다음은 이 대원(大願)을 어디까지 실행할 것인가의 정진(精進)을 일으키는 것이다. 정진은 언제, 어디서나, 일체시(一切時), 일체처(一切處)에서 실행하는 것이며, 세상에 있는 온갖 선(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힘이 미치는 한 모두 실행하여야 하며, 한 순간도 버리지 않고, 게을리 하는 마음을 일으킴이 없이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진관(精進觀)이다.
이와 같이 일체시, 일체처에서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켜 정진해 나가는 것이지만, 그러나 앉아서 지(止)를 전념으로 수행하는 동안은 관(觀)을 수행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시간을 제외한 일체의 시간에는 하여야 할 도리(道理)와 하여서는 안될 일을 구별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여야 할일[應作]을 실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觀)에 대한 설명은 끝마친다.
지금까지 지(止)와 관(觀)의 수행방법을 따로 설명하였으므로 다음에는 이 지(止)와 관(觀)을 함께 하는 지관구행(止觀俱行)을 밝히는 부분이다.]
[대비관(大悲觀)은 중생은 괴로움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싫증을 내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괴로움 또한 한이 없기에 이것을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심오한 대비가 아니면 그들을 구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원관(大願觀)은 일체중생을 일심의 자체와 동일하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구제하리라고 발원합니다. 즉, 분별을 여의었다는 것은 동체대비이고, 미래제가 다한다고 하는 것은 오랜 시간의 마음이며, 일체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는 것은 광대한 마음이며, 열반을 얻게 한다고 하는 것은 제일심(第一心)입니다. 그리고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정진관(精進觀)입니다.]
['정진관', 원력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관찰하여 아는 것이 정진관입니다. 이 정진관을 통해 원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향해 정진 이외의 왕도는 없습니다.
'위빠사나 닦는 것을 총결하다. 오직 좌선할 때 사마타 지(止)에 전념하는 것 외에는 나머지 일체에서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관찰해야 한다.' 생각을 집중할 때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관찰해야 합니다. 집중하는 것 이외의 모든 것이 바로 위빠사나입니다. 육조단경에서는 지와 관이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중 어느것을 먼저 닦아도 좋다고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하면 더욱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바퀴가 굴러가듯이 위빠 사나와 사마타를 같이 닦는 것이 좋습니다. 본질은 다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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