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거칠고 미세함은 무명에 의해 일어난다
거칠고 미세함은 무명에 의해 일어난다
앞서 설명한 6염심에 덧붙여 번뇌애와 지애에 대해 간략히 밝혀 보겠다. 원효는 그의 『기신론·소』에서 자세한 설명을 그의 저서 이장장(二障章=二障義)에 미루고 있는데, 우선 명료한 인식을 위해 도표에 의지하면서 설명하겠다.
번뇌애와 지애는 은밀문에서의 구분이고 번뇌장과 소지장은 현료문에서의 구분인데 『기신론』은 은밀문의 입장이기 때문에 번뇌애와 지애를 말했다.
번뇌애란 앞서 밝힌 여섯 가지 염심 즉 지말무명이며 이는 근본무명에 의해 움직인 염심(무명업상)이 전식, 현식, 지식으로 변전해 나가 근본지의 능·소평등을 어기므로 진여의 근본지를 막는다고 한다.
지애란 근본무명을 말하며 본래의 법성자리는 항상 고요하여 일어나는 상이 없으나 무명불각(근본무명) 때문에 법성을 혼미케하여 세간의 후득지를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를 세간의 자연업지 즉 후득지를 막는다고 한다. 흔히 번뇌장과 소지장을 각기 번뇌애와 지애에 배대시키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며 소지장, 번뇌장은 번뇌애 안에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생멸문에서 심생멸분과 생멸인연분을 대략 밝혀보았다. 이번에는 생멸상을 이루는 부분을 밝히겠다.
생멸상은 우선 거친 모습(麤)과 미세한 모습(細)으로 크게 나눈다. 거친 모습은 전에도 언급한 상응심이며 미세한 모습은 불상응심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를 좀더 자세히 구분한다면 추중의 추, 추중의 세, 세중의 추, 세중의 세로 나뉜다. 추중의 추는 범부의 경계이며 추중의 세와 세중의 추는 보살의 경계, 세중의 세는 부처의 경계이다.
그렇다면 추중의 추는 집상응염과 부단상응염이며 이들은 의식에 있는 것이어서 행상이 거칠기 때문에 범부가 알 수 있다. 추중의 세는 분별지상응염이며 이는 제7식이므로 행상이 거칠지 않아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중의 추는 현색불상응염과 능견심불상응염이며 능·소가 차별되므로 보살이 아는 경계이다. 세중의 세는 근본업불상응염이며 능·소가 아직 나뉘지 않았으므로 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는 경계이다.
이 추·세의 생멸이 무명의 훈습에 의해 있는 것인데, 여기에 인(因)에 의한 것과 연(緣)에 의한 것으로 나뉜다.
인에 의한다는 것은 불각 즉 근본무명에 의해 불상응심이 일어나는 것이며 연에 의한다는 것은 경계상(현식이 나타내는 경계)에 의해 상응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무명인이 멸하면 불상응심이 멸하고 경계연이 멸하면 상응심이 멸한다. 이상으로 추·세의 두 가지 생멸은 모두 무명주지에 의해 일어나는 것임은 물론이겠다.
그런데 자성청정심의 진여와 무명주지인 근본무명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인데 어떻게 진여에 무명이 훈습하고 무명에 진여가 훈습하는 것일까. 이를 원효는 『능가경』의 불사의훈(不思議熏)과 불사의변(不思議變)이란 표현을 빌려 해명한다.
즉 불사의훈이란 무명이 진여를 훈습하는 것을 말하니 훈습할 수 없는 곳에 훈습하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는 훈습이라 하며, 불사의변이란 진여가 무명의 훈습을 받아서 변이할 수 없는데도 변이하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는 변화라고 한다. 이렇게 매우 미세하고 은미한 훈습과 변화에 의해 업·전·현식이 일어나고 또 마지막 현식이 나타내는 경계를 반연하여 분별사식(제6의식)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점은 무명인이 멸할 때 불상응심이 멸하고 경계연이 멸할 때 상응심이 멸하는데 이때 불상응심이나 상응심의 심상(心相)이 멸하는 것이지 자상(自相)의 심체(心體)가 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바람이 바닷물에 의해 동상(動相 즉 風相)이 있는 것처럼 무명의 바람이 심체에 의지하여 움직이는 것과 같다. 바닷물이 멸한다면 바람이 의지할 때가 없어 풍상이 단절해 버리지만 바닷물은 멸하지 않기 때문에 풍상이 상속하는 것처럼 그 자상의 심체는 멸하지 않고 업·전·현 등의 심상만 멸하는 것이다.
드디어 불지에 도달했을 때 무명이 영구히 멸하여 업·전·현 등의 지말무명상만 멸하고 그 자상의 심체 즉 심지(心智) 즉 신해(神解)한 성질, 지성(智性)은 멸하지 않는다.
11. 본각과 무명염법은 一識에 든 두가지 뜻
지금까지 생멸문에서의 심생멸, 생멸인연, 생멸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 생멸의 현상들은 근본적으로 훈습의 작용을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훈습이란 옷에 원래 향기가 없지만 향으로 훈습하면 향이 옷에 배어드는 것과 같이 우리의 몸과 입으로 표현하는 선악의 말이나 행동, 또는 뜻에 일어나는 선악의 생각들이 일어나는 그대로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어떠한 인상이나 세력을 자기의 심체에 머물러두는 작용이다. 『기신론』에서는 훈습에 정법(淨法)으로서의 진여, 일체 염인(染因)으로서의 무명, 업식인 망심(妄心), 육진인 망경계의 네 가지 법을 들고 있다.
진여정법(본각)에는 본디 염이 없으나 무명의 훈습 때문에 염상이 있고, 무명염법(불각)에는 본래 정업이 없으나 진여로 훈습하기 때문에 정용(淨用)이 있다. 여기서 진여정법 즉 본각과 무명염법 즉 불각은 하나의 식에 함유된 두 가지 뜻으로서 번갈아 서로 훈습함에 의해 두루 염정을 내는 것이므로 이를 불사의훈과 불사의변으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진여법에 의해 무명이 있고 이 무명염범의 인, 즉 근본무명이 있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한다. 이 근본무명의 훈습에 의해 업식심(業識心)이 있으며(무명훈습 중의 근본 훈습) 이 근본무명에서 일어난 견애가 그 의식을 훈습하여 추분별을 일으키므로 이를 무명훈습 중의 소기견해훈습이라 한다.
이 업식심이 거꾸로 무명을 훈습하여 진여법을 요달하지 못함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전식과 현식 등 허망한 경계를 이루는 것이다. 이를 망심훈습 중의 업식근본훈습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삼승인(三乘人)이 삼계를 벗어날 때 분별사식에 의한 분단생사의 고통은 여의었으나 아직 변역생사의 아라야행고(行苦)를 받는다.
근본무명이 있어 진여를 훈습
여기서 의식의 견애번뇌가 증장되어 삼계의 업에 메인 과보를 받으므로 범부의 자리에서 분단생사의 고통을 받게 되니, 이를 증장분별사식훈습이라 한다.
이 망경계가 또 망심을 훈습하여 이 망심으로 하여금 염착케 하여 여러 가지 업을 지어 모든 심신의 고통을 받게 하는데 이 망경계훈습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증장념훈습으로서 분별사식 중의 법집분별념을 증장시키며 둘째는 증장취훈습이니 사취(四取 : 욕취, 견취, 계금취, 아어취)의 번뇌장을 증장하는 것이다.
이상의 염법훈습과는 달리 이번에는 거꾸로 진여법이 무명을 훈습하여 이 훈습하는 인연의 힘으로 망심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를 좋아하게 하는 것이다. 즉 이 망심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 좋아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로 자기 본성을 믿으니 이는 십신 자리의 신(信)이다.
이리하여 마음이 헛되이 움직이는 것이지 앞의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 멀리 여의는 법을 닦으니 이는 삼현위의 수행이다. 이 수행 뒤에 앞의 경계가 없음을 확실히 알게 되는데 이는 초지의 견도에서 유식관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방편으로 수순행을 일으켜 사취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법집분별념도 일으키지 아니하면서 오랫동안 훈습한 힘에 의해(십지의 수도위 중 만행을 닦는 것) 무명이 곧 없어지게 된다. 무명이 없어지므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없고 따라서 경계도 없어진다. 이렇게 인과 연이 다 없어지므로 심상(心相)도 없어지니 이를 열반을 얻어 자연업(부사의업용)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
이상의 정법훈습을 『기신론』에서는 좀 더 세분해서 밝히고 있다.
정법훈습이니 만큼 추에서 세의 순서로 설명하는 방법을 취한다. 먼저 망심훈습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사식훈습으로 모든 범부와 이승인등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함에 의해 힘닿는 대로 무상도(불과)에 나아가는 것이다.
범부와 이승인은 그 의식이 모든 경계가 오직 식뿐임을 알지 못하므로 마음 밖에 실제로 경계가 있다고 집착하여 생사는 싫어할 것, 열반은 기뻐할 것이라 생각하니, 이는 분별사식의 집착과 다르지 않으므로 분별사식훈습이라 한다.
둘째는 의훈습으로 모든 보살이 용맹하게 발심하여 속히 열반에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업식훈습이라고도 하니 이 업식은 가장 미세하여 모든 식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아직 견분과 상분으로 나뉘어지지 않았다. 모든 보살은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일 뿐 따로 경계가 없음을 알며 일체법은 오직 식의 헤아림인 줄 알기 때문에 앞의 경계가 밖에 있다는 집착을 알고 발심하여 열반에 나아가는 것이다.
다음 진여훈습에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자체상훈습이니 무시의 때로부터 무루법을 갖추고 부사의업을 갖추며(본각불공문) 여실공문의 경계성을 짓는다. 이에 의해 항상 훈습하므로 이 훈습의 힘에 의해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여 스스로 자기 몸에 진여법이 있는 줄 믿어 발심하고 수행케 하는 것이다.
일체법은 오직 식의 헤아림일 뿐
둘째 용훈습이니 이는 중생의 외연의 힘을 말한다. 이 외연에 또 차별연과 평등연이 있다. 차별연은 범부와 이승의 분별사식훈습을 위하여 연을 짓는 것이니 이 사람이 처음 발심하여 구도할 때로부터 부처가 될 때까지 권속, 부모, 제친, 급사, 지우, 원가(怨家) 등이 되어 이런 대비의 훈습력으로 선근을 증장케 하고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다.
평등연은 모든 부처와 보살이 일체의 중생을 도탈시키고자 하여 동체지력으로 중생의 견문에 따라 응하여 업용을 나타내는 것이니 십주(十住) 이상의 모든 보살들이 삼매에 의해서 부처의 보신의 무량한 상호가 분제상을 떠나 있음을 보는 것이다.
12. 마음에 망념 없는 줄 알면 곧 진여문에 든다
지금까지 해석분 가운데 바른 뜻을 밝히는 부분(顯示正義)에서 먼저 뜻을 풀이하였다. 이제는 생멸문으로부터 바로 진여문에 들어가는 부분에 대해 살피기로 한다.
우리 인간의 구성 요소인 오음(五陰)은 크게 색과 심으로 나뉜다. 색음을 추구한다면 모든 색을 부러뜨려서 극미에까지 이른다 해도 그 실체를 영구히 얻을 수가 없다. 육진경계라는 것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마음을 떠나서는 생각할 만한 모양이 없는 것이다. 또한 수·상·행·식음의 심(心)도 형상이 없어서 시방(十方)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얻을 수가 없다.
중생은 무명으로 혼미하기 때문에 마음을 망념이라 하지만 마음은 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동념(動念: 즉 망념)을 추구해 본다면 이미 없어졌거나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오, 중간에 머무는 바가 없다. 머무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일어남이 없으니 그러므로 심성(心性)이 실로 움직이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잘 관찰하여 마음에 망념이 없는 줄 알면 바로 진여문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정의를 밝혀 진여문에 들어가게 되는 데에는 또 하나의 관문이 있다. 바르지 못한 삿된 집착(邪執)을 다스려 없애는 것이다. 모든 삿된 집착은 결국 아견(我見)에 말미암는 것이므로 이 아견을 없애면 삿된 집착이 없어진다. 이 아견에는 인아견(人我見: 人執, 我執이라고도 함)과 법아견(法我見: 法執)의 두 가지가 있다. 인아견은 총상(總相)을 주재하는 자가 있다고 계탁, 집착하는 것이오, 법아견은 일체법이 각기 체성(體性)이 있다고 계탁, 집착하는 것이다.
『기신론』에서는 인아견을 다섯 가지로 나누고, 그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는다.
즉 첫째 경의 “여래법신이 적막하여 허공과 같다.”는 말에서 허공을 여래성으로 잘못 계탁하는 것이다. 허공상은 망법이므로 실체가 없는 것이나 색으로 인해 볼만한 상이 있으며, 이 때문에 마음을 생멸케 한다. 모든 색법은 본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만약 색이 없다면 허공상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경계가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망념이 없어지면 모든 경계가 없어지고 오직 하나의 진심(眞心)으로서 두루하지 않은 바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여래의 광대한 성지(性智)다. 이를 허공에 빗대어 말했을 뿐 허공상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
둘째 경에서 “…열반·진여의 법도 필경 공하다.”는 말을 듣고 진여·열반의 본성이 오직 공(空)이라 잘못 생각하는 것이니 진여·법신은 자체가 공하지 아니하여 무량한 성공덕을 구족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 경에서 “여래장은 증감이 없어서 그 체가 일체 공덕의 법을 갖추었다.”는 말을 듣고 여래장은 색·심법의 자상과 차별이 있다고 잘못 생각하니 이는 진여의 뜻으로 말한 것이며, 다만 생멸염 즉 업식의 생멸상의 뜻에 의해 차별된 상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넷째 경에서 “세간의 모든 생사염법이 다 여래장에 의해 있는 것으로 일체의 모든 법은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여래장 자체에 모든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을 갖추었다고 잘못 생각하니 여래장은 본래 간지스강의 모래보다 많은 정공덕(淨功德)이 있어서 진여의 뜻을 여의지 않은 것이지, 간지스강의 모래보다 많은 염법이 오직 망녕되이 있는 것일 뿐 그 자성은 본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여래장의 체에 망법이 있다면 우리가 깨달아서 영원히 망법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다섯 째, 경에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으며,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서 중생은 처음이 있으며, 그 처음을 보기 때문에 여래가 얻은 열반이 마침이 있어 다시 중생이 된다고 잘못 생각한다. 여래장은 과거(시초)와 미래(마지막)가 없으니 과거가 없으므로 무명의 상이 시작함이 없으며, 미래가 없으므로 부처가 얻은 열반도 후제가 없는 것이다.
위의 다섯 가지 집착이 모두 법신·여래장 등 총상의 주(主)에 대해 집착을 일으키므로 인집이라 한다.
다음 법아견이란 중생은 오음으로 구성된 것이므로 오음이 생멸하는 것에 대해 생사를 두려워하여 잘못된 생각으로 열반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음법은 그 자성이 없는 것이며 본래 없으므로 따라서 없어지지도 않아 본래 열반임을 알아야 한다.
원래 여래는 둔근인 이승에게는 인무아(人無我)만을 설하였으나 이는 구경한 설법이 아니며 이에 법무아(法無我)까지 설명한 것이다. 요컨대 인아집·법아집의 망집을 끝까지 다 여의려면, 염법과 정법은 서로 의지하는 것이므로 말할 만한 자상이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색도 아니요, 심도 아니며 지(智)도 아니요, 식(識)도 아니며, 유(有)도 아니요, 무(無)도 아니어서 그 모양을 끝내 말할 수 없는데도 여래가 이처럼 교묘한 방편으로 언설을 빌어 중생을 인도하는 뜻은 중생 모두 망념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海印의 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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