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지관이문 함께 수행할 때 장애도 없다
다음은 지관을 합해서 닦는 것을 밝힌다.
행하거나 머물 때, 눕거나 일어날 때든 어느 때든지 항상 지관을 함께 행해야 하는데, 이 수행에 두 가지가 있다.
◆ 첫째 이치에 따라 지관을 함께 수행하는 것이니
모든 법의 자성이 나지 않음을 생각하나 또한 인연으로 화합한 선악의 업과 고락 등의 과보가 빠뜨려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비유문(非有門)에 의해 지행을 닦는 것과 비무문(非無門)에 의해 관행을 닦는 것이니, 실제를 움직이지 않은 채 모든 법을 건립하는 것이므로 지행을 버리지 않고 관행을 닦을 수 있다.
인연의 선악의 업보를 생각하나 또한 곧 본성은 얻을 수 없음을 생각하는 것이니, 이는 가명(假名)을 파괴하지 않은 채로 실상을 따르기 때문에 관행을 그만두지 않고 지문(止門)에 들어갈 수 있다.
◆ 둘째, 장애에 대하여 지관을 함께 수행하는 것이니
① 만약 지를 닦는다면 두 가지 허물을 여읜다. ㉠ 범부가 집착한 인법상(人法相)을 없애며, ㉡ 이승들의 오음(五陰)이 있다고 보아 고통을 두려워하는 겁약한 소견을 다스린다.
② 만약 관을 닦는다면 역시 두 가지 허물을 여읜다. ㉠ 이승의 협렬(狹劣)한 마음을 없애어 널리 중생들을 살펴 대비를 일으키게 한다. ㉡ 범부들이 무상을 보지 아니하여 분발하여 도에 나아감을 게을리 하고 선근을 닦지 않으므로 이를 다스린다.
이 지관 이문은 함께 수행해야 하며 또한 두 가지 장애를 아울러 대치하여 쌍으로 없애야 한다. 지와 관의 두 가지 수행이 함께 이루어져야 함은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한 날개라도 없다면 허공을 나는 힘이 없을 것이오, 두 바퀴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운재(運載)의 공능이 없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기신론』에서는 수행자의 물러남이 없는 방편을 밝힌다.
즉 이 사바세계에 머무름에 스스로 항상 부처님을 만나 친히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신심은 성취하기 어렵다’고 걱정하면서 뜻이 퇴전하려고 하는 이는 여래가 수승한 방편으로 신심을 섭호함을 알아야 한다.
즉 뜻을 오로지 하여 부처를 생각한 인연으로 원에 따라 타방불토에 나게 되어 항상 부처를 친히 보아서 영원히 악도를 여의게 된다. 이는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염하고 그가 닦은 선근으로 저 세계에 왕생하게 되며, 부처를 친히 보기 때문에 끝내 퇴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 다음은 권수이익분이다.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매우 깊은 경계에 대해 바른 믿음을 내어서 비방을 멀리 여의고 대승도에 들고자 한다면, 이 논을 가지고 사량·수습함으로써 마침내 무상도에 이를 수 있다. 모든 여래가 이 법에 의해 열반을 얻으며, 모든 보살이 이에 의해 수행하여 불지(佛智)에 들게 되기 때문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보살이 이 법에 의해 정신(淨信)을 이루게 됨으로 우리 중생도 이 법을 부지런히 수학해야 할 것이다.
18. 불교 핵심 가르침은 ‘깨달은 후 중생에 회향’
『대승기신론』에 대하여 무려 7종의 연구저서를 낼 정도로 이 논서에 심취했던 원효는 『기신론』의 성격을 다음의 세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첫째, 『기신론』은 인간의 마음이 원래 청정한 것임을 강조하는 중관학파와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현실적으로는 깨닫지 못하여 물든 상태에 있으며, 이를 분석, 관찰하는 데 주력하는 유가학파, 이 두 학파의 주장을 지양·종합한 논서임을 주장한다.
원효, “기신론은 삼세·아라야식설”
실제로 『기신론』은 일심, 즉 중생심에는 마음의 자성청정을 밝히는 심진여문과 현실의 물든 마음을 긍정하고 이를 분석하여 종국에는 청정심을 얻을 수 있다는 심생멸문의 두 가지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일심이문의 구조는 『기신론』 전체의 대전제로 설정되어 있으며, 『기신론』이 중관·유가학파의 지양·종합으로 나타난 논서라는 주장을 입증하고 있다.
둘째, 원효는 위의 중관·유가(유식)학파의 지양·종합이라는 성격을 더욱 드러내는 구체적인 전개로서 『기신론』이 삼세·아라야식설임을 주장한다.
이 삼세·아라야식설은 아라야식이 각의(覺義)와 불각의(不覺義)의 이의(二義)를 가진 진망화합식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설득력이 있다.
삼세란 자성청정의 진여심에 무명이 훈습하여 최초에 동요하기 시작하려고 하는 무명업상, 동요하는 맨 처음의 증상으로서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전상, 그리고 바라보는 상대(境界)에 비춰지는 현상의 매우 미세한 의식을 말한다.
아라야식은 오늘날의 무의식에 해당하는 심층의식으로서 우리의 물든 의식으로의 전개에 최초의 기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 전개된 염오심이 다시 청정심으로 환멸코자 할 때, 마지막 귀결처가 되는 곳이 또한 이 아라야식이다.
원효는 삼세가 바로 아라야식임을 창설하는데, 이 주장은 당(唐)의 법장이 그대로 수용한 바 있다.
아라야식이 바로 삼세라는 주장은 『기신론』 본문에 명시되지는 않았으나『기신론』의 내용 중에서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것임은 이미 필자가 논문으로 입증한 바 있다.
『기신론』 출현 이전의 유식학파에서 아라야식을 막연한 잠재심 내지 진실치 못한 망식으로 주장한데 비해서 이 삼세아라야식설에서는 아라야식이 진망화합식 즉 청정심과 염오심이 화합된 심층의식으로서 수행에 의해 삼세의 망식 부분을 제거하면 바로 삼세 자체에 청정식 부분만 남게 되어 이가 곧 깨달음의 심원(心源)에 이르는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는 아라야식을 막연한 잠재심으로 설정한 유식학파와는 달리 삼세라는 구체적인 수행단계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이다.
불사의업상이 곧 이타행
셋째, 수행에 의해 삼세에서 염오심을 제거하여 청정심에 이르게 되면 지정상(智淨相)과 불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라는 두 가지 모습이 나타난다.
지정상이란 모든 염오한 마음이 제거되어 지혜가 순정하게 된 것, 즉 무분별심(根本智)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무분별심에는 또한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일반 범부가 사량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공덕상을 끊임없이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불사의업상이 있다.
원효는 지정상이란 자신이익을 성취하는 것으로 해탈한 뒤에 번뇌장과 소지장의 두 번뇌를 모두 멀리 여의어 아무런 장애가 없는 청정법신을 얻은 경지이며, 불사의업상이란 타신이익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미 자신이익을 성취하였으면 자연히 세간에 자재한 위력과 행위를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즉 지정상과 불사의업상은 자리행과 이타행에 다름 아니다.
한편 『기신론』에서는 수행심신분의 지관문을 설명할 때, 지(止)를 닦으면 범부가 세간에 집착함을 대치하고 관(觀)을 닦으면 이승이 대비를 일으키지 않는 협열심을 대치할 수 있다고 하며, 이 지관 이문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보리(菩提)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언한다.
위에서의 지정상은 지문에, 불사의업상은 관문에, 나아가 지정상은 심진여문에, 불사의업상은 심생멸문에 배대시킬 수 있다.
원효는 진여문에 의해 지행을 닦음으로써 세간에의 집착을 벗어나 무분별지를 얻으며(自利行), 생멸문에 의해 관행을 닦음으로써 대비심을 일으켜 후득지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지·관 이문 갖춰야 보리에 들 수 있다
깨달음을 얻은 이가 깨친 자리에서 홀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중생에게 회향하는 이타행, 즉 부주열반 사상이야말로 원효가 그의 수많은 저술들에서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으로 이는 석가 이후 원효에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19. 眞·俗 초월한 일심의 세계가 바로 깨달음 (끝)
원효는『대승기신론』에 열중하여 그에 대한 『기신론 소』2권, 『기신론 별기』1권, 『기신론 이장장』(이장의) 1권, 『대승기신론 종요』1권, 『대승기신론 요간』1권, 『대승기신론 대기』1권, 『대승기신론 사기』1권 등 7종의 연구서를 내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 이론의 실천을 통해 당시 신라사회에서의 문제 상황을 해결하려 했다. 그는 과연 『기신론』의 어떤 점에 주목하여 그의 대중 불교화 운동의 이론서로서 『대승기신론』을 선택하였을까.
당시 신라사회의 불교계는 왕실이나 귀족 중심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출·재가 모두에 불성 있음 알아야
승려들은 성내(城內)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면서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는 거의 무관심하였다. 승려들은 자기네들만이 ‘진여’의 세계에 안주하면서 스스로를 ‘세속’에 머물러있는 서민대중과는 전혀 별개의 존재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원효는 서민들이 높은 승려들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고 보았다.
즉 승려나 서민들이 다 같이 불성, 즉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민들이야말로 바로 승려들 자신이 교화해야 할 대상이며 나아가 이들 서민들이 깨달음을 얻어야만 승려 자신의 깨달음도 참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대승기신론』을 통해 이 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뒤, 드디어는 스스로 집필의 붓을 꺾고 지방의 촌락이나 가항(街巷)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무애(無碍)박을 두드리고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를 부르며 가무와 잡담 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불교의 상구보리(上求菩提:自利)·하화중생(下化衆生:利他)의 가르침과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부주열반(不住涅槃) 바로 그것이다.
원효는 그의 모든 저술을 통해서 이 부주열반 사상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나 혼자 깨달았다고 착각하고 그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제대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깨닫지 못한 중생들에게 회향(廻向)하여 중생들까지도 함께 깨달음의 세계로 이르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원효, 부주열반사상 강조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진여의 세계와 생멸의 세계, 즉 진(眞)과 속(俗)을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이 둘을 초월하는 세계에 이르는 것이다. 진과 속을 초월한 일심(一心)의 세계에서는 진과 속의 구분은 이미 무의미하다.
진이 바로 속이며, 속은 바로 진이기 때문이다. 진은 속을 거부하지 않고 포용하며, 속은 진을 향해 나아가므로 속은 진의 표출이 되어 진과 속이 하나의 세계, 즉 하나의 법계(一法界)가 되는 것, 이것이 깨달음의 경지이다.
열등 중생도 놓치지 않고 제도
『기신론』은 진여문에서 이 깨달음의 정체를 밝히고 생멸문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다양한 방편들을 제시한다.
육바라밀은 향상·진보하여 이상 경지에 도달할는지 타락·퇴보하여 악도에 떨어질는지 결정이 안 된 대부분의 우리 부정취중생들을 위한 수행요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관문의 설명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선방편(禪方便)을 자세히 논구하고 마지막에 힘이 열악한 중생을 위해서는 염불문(念佛門)을 통해 궁극의 경지에 갈 수 있음을 말하였다.
이 또한 열등한 중생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제도(濟度)하려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이자 부주열반의 정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海印의 뜨락
'대승기신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승기신론 2 (3) | 2023.01.22 |
---|---|
대승기신론 1 (1) | 2023.01.22 |
대승기신론 수행인을 위한 경율론 (은정희 전 서울대 교수)4 (0) | 2023.01.20 |
대승기신론 수행인을 위한 경율론 (은정희 전 서울대 교수)3 (1) | 2023.01.19 |
대승기신론 수행인을 위한 경율론 (은정희 전 서울대 교수)1 (1) | 2023.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