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3권 11
阿難!汝心昏迷,不悟四大元如來藏,當觀虛空爲出爲入,爲非出入。
汝元不知如來藏中,性覺眞空性空眞覺,淸淨本然周遍法界,隨衆生心應所知量。
아난아. 너의 마음이 혼미하여 사대가 본래 여래장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
마땅히 허공을 살펴보아라! 나오는가? 들어가는가? 나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너는 원래 알지 못하는구나. 여래장 가운데 성품이 공(空)인 진공(眞空)과 성품이 공(空)인 진각(眞覺)은 청정(清淨)하고 본연(本然)하여서 법계에 두루 널리 퍼져있으면서, 중생의 마음을 따라 아는 바의 소지량(所知量)에 호응하는 것이니라.
ㅡ‘성각진공(性覺眞空)’이란, 허공의 성품은 바로 중생 본각의 성품으로 진공적멸하여 얻을 수 없음을 말하며,
‘성공진각(性空眞覺)’이란, 이 본각의 성품이 진공적멸하여서 따로 깨달을 것이 없음이 참 깨달음임을 말한다.
阿難!如一井空 空生一井,十方虛空亦復如是,圓滿十方寧有方所,循業發現。世閒無知,惑爲因緣及自然性,皆是識心分別計度,但有言說,都無實義。
아난아, 만약 하나의 우물을 파서 한 우물의 공간이 생기면 허공이 한 우물만큼 생기는 것과 같이, 시방의 허공도 그와 같아서, 시방에 원만한 한 것이니, 어지 방향과 장소가 있겠는가?
업(業)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거늘,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 또는 자연의 성품이라고 의혹하고 있느니, 이는 모두 인식하는 식심(識心)이 분별하고 헤아리는 것이므로 다만 언설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실의(實義)는 없느니라.
▷사대(四大)의 견대(見大)
阿難!見覺無知,因色空有。如汝今者在祇陁林,朝明夕昏;設居中宵,白月則光 黑月便暗,則明暗等因見分析。
此見爲復與明暗相幷太虛空,爲同一體、爲非一體?或同、非同?或異、非異?
아난아, 보고(見) 깨닫는(覺), 견각(見覺)은 앎이 없어서 색(色)과 공(空)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니,
네가 지금 기타림(祇陀林)에 있으니, 아침이면 밝고 저녁에는 어두우며,
설사 한밤중일지라도 백월(白月, 보름)이면 환하고, 흑월(黑月, 그믐)에는 어두운데, 그 밝고 어두운 것들을 보는 것으로 인하여 가려내고 분석하나니,
이 보는(見) 것이 밝고 어두운 상(相)과 아울러 넓은 허공과 똑같은 일체(一體)이겠는가?
일체가 아니겠는가?
혹은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겠는가?
혹은 다르기도 하고 다르지 않기도 하겠는가?
ㅡ이 문장은 네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①안근과 육진 경계는 같은 일체인가?
②안근과 육진 경계는 다른 체인가?
③같음 중에서 다른 성질이 있는 것인가?
④동일체인데 다른 성질이 있는 것인가?
阿難!此見若復與明與暗及與太虛空 元一體者,則明與暗二體相亡。暗時無明,明時無暗,
만약 이 보는(見) 것이 밝음과 어두움, 그리고 큰 허공과 더불어 원래 일체(一體)라면, 밝고 어두운 두 가지 체(體)가 서로 없애서 어두울 때에는 밝음이 없고, 밝을 때에는 어둠이 없어지리라.
ㅡ서로 없앤다는 것을 서로 빼앗는다는 뜻과 같다.
若與暗一,明則當亡;必一於明,暗時當滅,滅則云何見明見暗?若暗明殊,見無生滅,一云何成?
만약 어둠과 일체라면, 밝을 때에는 마땅히 보는(見) 것이 없어질 것이며,
만드시 밝음과 일체라면, 어두울 때에는 당연히 보는(見) 것이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없어진다면 어떻게 밝음을 보고 어둠을 보겠는가?
만약 어둠과 밝음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보는(見) 것은 생멸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일체가 성립되겠는가?
ㅡ일체가 아닌 비일체(非一體)임을 밝힌 것이다.
若此見精 與暗與明 非一體者,汝離明暗 及太虛空,分析見元 作何形相?離明離暗 及離虛空,是見 元同龜毛兔角。明暗虛空 三事俱異,從何立見?
만약 이 보는 정기의 견정(見精)이 밝음과 어둠으로 더불어 일체(一體)가 아니라면, 너는 밝음과 어둠, 그리고 큰 허공을 떠나서 보는(見) 것의 근원(根元)을 가려서 분석해 보아라. 어떠한 상(相)인가?
밝음을 떠나고 어둠을 여의고, 허공을 여읜다면, 이 보는(見) 것은 본래 거북의 털인 귀모(龜毛)나 토끼의 뿔인 토각(兔角)과 같을 것이니, 밝음과 어둠, 그리고 허공의 삼사(三事)가 모두 다르다면, 무엇으로 인하여 보는(見) 것이 성립되겠는가?
ㅡ체가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明暗相背,云何或同?離三元無,云何或異?分空分見 本無邊畔,云何非同?見暗見明 性非遷改,云何非異?
밝음과 어둠은 서로 등진 상배(相背)하는 것인데, 어떻게 혹 같다고 하겠으며?
밝음과 어둠과 허공의 셋을 여읜다면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혹 다르다고 하겠으며?
허공을 가려서 나누고 보는(見) 것을 가려 나눈다면, 본래 경계가 없는데, 어떻게 같지 않다고 하겠으며?
어둠을 보고 밝음을 보아도 보는 성품은 변하여 바뀌지 않는데, 어떻게 다르지 않다고 하겠는가?
ㅡ혹 같거나 같지 않은 것도 아니며, 혹 다르거나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님을 밝힌 것이다. '성품은 변하여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밝고 어두움은 변하여도 보는 주체는 바뀌지 않는 것을 말한다.
汝更細密 諦審諦觀 明從太陽、暗隨黑月、通屬虛空、塞歸大地,如是見精 因何所出?
너는 다시 자세히 살피고 자세히 관찰하여 보아라. 밝음은 태양을 좇아 오고, 어둠은 흑월(黑月, 그믐밤)에서 오고, 통함은 허공에 속하고, 막힘은 대지(大地)로 돌아가나니,
보는 정기의 견정(見精)은 무엇을 근거로 나오는 것인가?
ㅡ그 성품이 참되고 원융한 것을 자세히 살펴서 모든 허망함에 연루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치에 합당함을 '체(諦)'라 하고, 깊이 분별하는 것을 '심(審)'이라 하고, 유심히 보는 것을 '관(觀)'이라 한다.
見覺空頑 非和非合,不應見精 無從自出。
보는(見) 것이 깨달음의 각(覺)이고, 허공은 완고한 것이라서 화합이 아니며,
보는 정기의 견정(見精)도 당연히 나오는 데가 없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니라.
ㅡ성품(性)은 원만하고 두루한 것이다.
妙見聞知,性圓周遍 本不動搖,當知無邊 不動虛空 幷其動搖,地水火風 均名六大 性眞圓融,皆如來藏 本無生滅。
묘하게 보고 듣고 아는 것은 그 성품(性)이 두루 원만하고 두루하여서 본래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끝이 없는 무변(無邊)이고 움직이지 않는 부동(不動)이고 허공과 흔들리는 땅(地)과 물(水)과 불(火)과 바람(風)을 아울러 여섯 요소인 육대(六大)라고 이름하나니,
성품(性)이 참되고 원융하여서 다 여래장(如來藏)이므로, 본래 생멸이 없느니라.
阿難!汝性沈淪,不悟汝之 見聞覺知 本如來藏,汝當觀此見聞覺知,爲生 爲滅?爲同 爲異?爲非生滅?爲非同異?
아난아, 네 성품이 망상에 깊이 잠겨서 너의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견문각지(見聞覺知)가 본래 여래장(如來藏)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느니라.
너는 마땅히 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견문각지(見聞覺知)를 관찰해야 하나니,
생(生)기는 것인가? 멸(滅)하는 것인가? 같은(同) 것인가? 다른(異) 것인가?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는 비생멸(非生滅)인가?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비동이(非同異)인가?
ㅡ생멸과 동이(同異)한 것이라는 허망한 것을 여의면 곧 여래장(如來藏)이다.
汝全不知 如來藏中,性見眞空 性空眞見 淸淨本然 周遍法界,隨衆生心 應所知量。
如一見根 見周法界,聽嗅嘗觸 及與覺知,妙德瑩然 遍周法界,圓滿十方 寧有方所,循業發現。
世閒無知,惑爲因緣 及自然性,皆是識心 分別計度,但有言說,都無實義。
너는 전혀 알지 못하는 구나! 여래장 가운데의 성품이 보는 주체인 성견(性見)이 진공(眞空)인 것과
성품이 공인 성공(性空)의 진견(眞見)이 청정하고 본래 자연 그대로이라서 법계에 두루 퍼져 있으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따라 아는 바 정도의 소지량(所知量)에 맞추어 호응하는 것이니,
이는 마치 하나의 보는 주체인 근견(見根)이 법계를 두루 보는 것과 같이, 듣는 청(聽)과 냄새 맡는 후(齅)와 맛 보는 상촉(嘗觸)과 닿음의 각촉(覺觸)과 인식작용의 각지(覺知)의 묘한 덕이 환하게 밝아서 법계에 두루하고 시방에 원만한 것이니, 어찌 따로 장소가 있겠는가!
업(業)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거늘,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 또는 자연의 성품이라고 의혹하고 있으니,
이는 모두 인식하는 마음의 식심(識心)으로 분별하고 헤아리는 것이므로 다만 언설(言說)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실의(實義)는 없느니라.
ㅡ성품(性)이 보는 주체인 근견이라는 것은 체(體)와 용(用)을 서로 의지해서 거론한 것으로, 보는 견(見)이 있음은 비록 각명(覺明)의 체이나, 체는 보는 성품(性)이고 용(用)은 깨닫는 각정(覺精)이며, 각지(覺知)는 곧 의식(意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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