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7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6. 피수차별분(彼修差別分) 2

 

遍行義者, 謂此法界遍一切行,以無少法非無我故,若如是知得入初地. 最勝義者,謂此法界一切法中,最爲殊勝,若如是知得入二地.勝流義者,謂大乘教,從此所流,最爲殊勝,若如是知得入三地.無攝受義者,謂於此中,無計我所`無攝我所,如北洲人,無有繫屬,於此法界,若得證時,其中都無謂有我所,若如是知得入四地.

‘두루 행함의 편행의(遍行義)’란,  법계는 일체의 모든 행에 두루하니, 아무리법일지라도 무아(無我)가 아닌 것이 없는 까닭이라고 안다면, 초지에 들어갈  있으며,

‘가장 뛰어남의 최승의(最勝義)’는,  법계가 일체법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니, 이렇게 안다면, 2지에 들어갈  있으며,

‘뛰어난 흐름의 승유의(勝流義)’란, 대승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니, 이 대승의 가르침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을 가장 뛰어난 것으로 삼는 것이라고 안다면, 3지에 들어갈  있으며,

‘섭수가 없는 무섭수의(無攝受義)’란,  안에서는 나의 소유를 계탁함이 없고, 나의 소유를 거두는 일이 없으며, 북구로주(北拘盧洲) 사람들과 같이 계박함이 없으니,  법계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을 ,  안에서 나의 소유라고 말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4지에 들어갈  있다.

 

북구로주(北拘盧洲)는 수미산의 4대주(大洲)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곳으로, 사람들의 수명이 천 세(歲)이고, 의식주 등이 자연히 얻어지므로 나의 소유라는 생각이 없다고 한다.

 

相續無差別義者,謂於此中,體無有異,非如眼等隨諸有情相續差別各各有異,若如是知得入五地.無雜染淸淨義者,謂於此中,本無雜染,性無染故,旣無雜染,卽無淸淨,若如是知得入六地.種種法無差別
義者,謂於此中,契經等法,雖有種種差別安立而無有異,若如是知得入七地.不增不減義者,謂於此中,雜染減時,而無有減,淸淨增時,而無有增.相自在依止義者,謂此法界,是相自在之所依止,於諸相中,而得自在,名相自在,隨所欲相,卽現前故.土自在依止義者,謂此法界,是土自在之所依止,於所現土而得自在,名土自在,如欲令土成金等寶隨意成故.若如是知得入八地.

‘상속의 차별이 없는 상속무차별의(相續無差別義)’이란, 이 안에서는 자체가 차이 없는, 즉 모든 부처님은 진여가 나타난 바이기 때문에 상속하여도 그 체에 차이가 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눈 등도 모든 유정을 따라 상속차별하여 각각 차이가 없다고 안다면, 제5지에 들어갈 수 있으며,

‘잡염과 청정이 없는 무잡염청정의(無雜染淸淨義)’란, 이 안에서는 본래부터 잡염도 없는 것이니, 성품에 잡염이 없기 때문이다. 잡염이 없기 때문에 청정도 없다는 것으로 안다면 제6지에 들어갈 수 있으며,

‘갖가지 법의 차별이 없는 종종법무차별의(種種法無差別義)’이란, 이 안에서 계경(경전) 등의 법에 갖가지 차별을 안립하지만 차이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안다면 제7지에 들어갈 수 있으며,

‘증가도 감소도 없는 부증불감의(不增不減義)’란, 이 안에서 잡염이 감소할 때도 감소가 없으며, 청정이 증가할 때도 증가함이 없는 것이며,

‘상이 자재한 의지의 상자재의지의(相自在依止義)’는, 이른바 이 법계는 상호(相好)의 자재가 의지하는 바이니, 모든 상에 대해서 자재를 얻음을 상자재(相自在)라 하며, 원하는 상을 따라 바로 현전하기 때문이다.

‘국토가 자재한 의지의 토자재의지의(土自在依止義)’란, 이 법계는 국토 자재가 의지하는 곳임을 말하는 것으로, 현현하는 국토에 대해서 자재를 얻는 것을 국토 자재라 이름하며, 국토로 하여금 금 등의 보배를 만들고자 한다면, 마음을 따라 이루기 때문이라고 안다면, 제8지에 들어갈 수 있다.


智自在依止義者,謂此法界無㝵辯智自在所依,若如是知得入九地.業自在等依止義者,謂此法界是身等業自在所依,及陁羅尼`三摩地門自在所依,若如是知得入十地.

‘지혜가 자재한 의지의 지자재의지의(智自在依止義)란,  법계가 말에 걸림이 없는 지혜 자재의 의지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안다면 제9지에 들어갈  있으며,

‘업이 자재한 의지 업자재의의(智自在依止義) 등’이란, 소위  법계는 신업 등의 업이 자재한 의지처이고, 다라니와 삼마지문이 자재함의 의지처이라고 안다면 제10지에 들어갈  있는 것이다.

 

如是無明, 於聲聞等非染污者,由彼不欲入諸地故.於初地中,已能通達一切諸地,何故次第復立諸地?釋此難者,雖初地中,達一切地,然由此住而得安住,由此住力建立諸地.

‘이와 같은 무명은 성문등에 있어서는 염오가 아닌 비염오(非染污)이다,'라는 것은 그는 10지에 들어감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초지 중에서 이미 능히 모든 지위에 통달하였는데, 어째서 순서대로 다시 모든 지위를 건립하는 것인가? 이러한 비판을 해석한 것이니, 비록 초지 중에서 모든 지위에 통달하지만 여기에 안주함으로써 안주를 얻으며,  안주하는 힘에 의해서 모든 지위를 건립하는 것이다.


▶論曰:復次何故,初地說名極喜?由此最初得能成辦自他義利勝功能故.何故二地說名離垢?由極遠離犯戒垢故.何故三地說名發光?由無退轉等持等至所依止故`大法光明所依止故.何故四地說名焰慧?由諸菩提分法焚滅一切障故.何故五地名極難勝?由眞諦智與世閒智更互相違,合此難合令相應故.

▷논문; 또한 어째서 초지를 극희지(極喜地, 환희지)라 이름하는 것인가? 이로 인하여 최초로 자신과 남의 이익을 판단하는 뛰어난 작용의 힘을 얻기 때문이다.

어째서 제2지를 이구지(離垢地)라 이름하는 것인가가? 계율을 범하는 과실을 아주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어째서 제3지를 발광지(發光地)라 이름하는 것인가? 퇴전함이 없는 등지(等持, 삼마지)ㆍ등지(等至, 삼마발저)가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이고,  법(大法)의 광명이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제4지를 염혜지(焰慧地)라 이름하는 것인가? 모든 보리분법(37 조도품)이 모든 장애를 태워 없애기 때문이다. 

어째서 제5지를 극난승지(極難勝地)라 이름하는 것인가? 진제(眞諦)의 지혜와 세간의 지혜는 서로 위배되나,  합하기 어려운 것을 합해서 상응하게 하기 때문이다.

 

何故六地說名現前?由緣起智爲所依止,能令般若波羅蜜多,現在前故.何故七地說名遠行?至功用行最後邊故.何故八地說名不動?由一切相,有功用行,不能動故.何故九地說名善慧?由得最勝無㝵智故.何故十地說名法雲?由得摠緣一切法智,含藏一切陁羅尼門`三摩地門,譬如大雲能覆如空廣大障故,又於法身能圓滿故.

어째서 제6지를 현전지(現前地)라 이름하는 것인가? 연기(緣起)의 지혜를 의지처로 삼고, 능히 반야바라밀다로 하여금 현전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제7지를 원행지(遠行地)라 이름하는 것인가? 의식적인 노력인 공용(功用)의 행이 궁극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어째서 제8지를 부동지(不動地)라 이름하는 것인가? 모든 의식적인 노력이 있는 유공용(有功用)의 행이 동요할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제9지를 선혜지(善慧地)라 이름하는 것인가? 가장 뛰어나고 걸림없는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어째서 제10지를 법운지(法雲地)라 이름하는 것인가? 총체적으로 일체법을 반연하는 지혜를 얻고, 모든 다라니문ㆍ삼마지문을 함장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구름과 같아서, 허공 같은 광대한 장애를 능히 덮어 버리기 때문이며, 또한 법신에 대해서 능히 원만하기 때문이다.

ㅡ10지의 명칭의 이유에 관한 제2 입명장(2 立名章).

 

등지(等持, samādhi), 일반적으로 삼마지(三摩地)ㆍ삼매(三昧)라하며,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해서 망념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하며, 정위(定位)ㆍ산위(散位)에 통하지만 유심위(有心位)에만 통하고 무심위(無心位)에는 통하지 않는다.

등지(等至, samāpatti), 삼마발저(三摩鉢底)로 음역하며, 몸과 마음의 평등에 이른다는 뜻이다. 정(定)의 일곱 가지 이명(異名) 중의 하나이다.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의 2정(定)에 통하며 산위(散位)에는 통하지 않는다.

37도품(道品), 즉4념처(念處)ㆍ4정근(正勤)ㆍ4여의족(如意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분(正道分)이다.


▶釋曰:何故初地,名爲極喜?由於此時,初得能辦,自他俱利,勝堪能故.諸聲聞等眞現觀時,唯得能辦,自利堪能,不得他利,故彼不生,如是歡喜同諸菩薩.
何故二地,名爲離垢?由此地中,性戒成就,非如初地思擇護戒. 性戒成故,諸犯戒垢,已極遠離.何故三地,名爲發光?由此地中,與三摩地`三摩鉢底,常不相離,無退轉故,於大乘法,能作光明. 何故四地,名爲焰慧?由此地中,安住最勝菩提分法,由住此故,能燒一切根本煩惱,及隨煩惱,皆爲灰燼.

▷해석한다; 어째서 초지를 극희지(환희지)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시기에서 최초로 능히 자신과 남을 모두 이롭게 함을 판단하는, 뛰어난 감당 능력을 얻기 때문이니, 모든 성문등은 진리를 현전에서 관찰할 때, 오직 스스로 이익만을 판단하는 감당 능력을 얻을 뿐, 남의 이익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이와 같은 환희를 일으킬지라도 보살과는 다른 것이다.

어째서 제2지를 이구지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지위에서는 계율을 범하거나 보호함과 무관한 자성청정의 계율인 성계(性戒)를 성취하기 때문이니, 초지에서와 같이 사유 결택해서 계율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청정의 계율을 이루기 때문에, 계율을 범하는 모든 과실을 매우 멀리 여의는 것이다.

어째서 제3지를 발광지라 이름하는 것인가?  지위에서는 삼마지와 삼마발저가 항상 서로 여의지 않고 퇴전하지 않기 때문에 대승법에 대해서 능히 광명이 되는 것이다.

어째서 제4지를 염혜지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지위에서는 가장 뛰어난 보리분법에 안주하기 때문이니, 이에 안주하기 때문에 모든 근본번뇌와 수번뇌를 능히 태워서 없애는 것이다.

 

근본번뇌(根本煩惱, mūla-kleśa)는 탐(貪) · 진(瞋) · 만(慢) · 무명(無明) · 견(見) · 의(疑)의 6가지 번뇌성의 마음작용들을 말하며, 이들 중 무명(無明)은 치(癡)라고도 하며, 여기서 견(見)은 악견(惡見) 즉 부정견(不正見)을 뜻한다. 즉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 견취 · 계금취의 5견(五見)을 말한다.

수번뇌(隨煩惱)는 수혹(隨惑)이라고도 하며, 세 가지의 뜻이 있다.

첫 번째는 근본번뇌(根本煩惱)를 따라 일어난 2차적인 번뇌라는 뜻으로, 이 경우의 수번뇌를 근본번뇌와 구분하여 지말번뇌(枝末煩惱) 또는 지말혹(枝末惑)이라고도 하며,

두 번째는 마음(心, citta)를 따라 일어나서 유정을 괴롭고 혼란스럽게하는 마음작용, 즉 근본번뇌라는 뜻이며,

세 번째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의미를 통칭하는 것으로, 이 경우의 수번뇌는 곧 일체(一切)의 번뇌 즉 모든 번뇌를 말하며, 번뇌의 여러 다른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何故五地,名極難勝?由此地中,知眞諦智,是無分別,知諸世閒工論等智,是有分別,此二相違,應修令合,能合難合,令相應故,名極難勝. 何故六地,名爲現前?謂此地中,住緣起智,由此智力無分別住,最勝般若波羅蜜多,而得現前,悟一切法無染`無淨,

어째서 제5지를 극난승지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지위에서는 출세간의 진지(眞智)인 진제지(眞諦智)는 무분별지혜임을 알고, 모든 세간의 공론(工論), 학예(學藝)ㆍ기술(技術) 등의 세속의 지혜는 분별이 있음을 아는 것이니,   가지의 위배되는 것을 닦아서 마땅히 합해야 하는 것으로, 합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합해서 상응하게 하기 때문에 극난승지라 이름하는 것이다. 

어째서 제6지를 현전지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지위에서는 연기의 지혜에 안주하고, 이러한 연기지력(緣起智力) 무분별에 의해서 가장 뛰어난 반야바라밀다에 안주하고 현전함을 얻어서, 일체법이 잡염도 없고 청정도 없는 무염무정(無染無淨)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於第七地,當成有行,第八地中,當成無行.何故七地,名爲遠行?謂此地中,於功用行得至究竟,雖一切相不能動搖,而於無相,猶名有行. 何故八地名爲不動? 由此地中,所有諸相,及一切行,皆不能動,無分別智,任運流行.

제7지에서는 장차 의식적인 노력이 있는 행인, 유행(有行)을 성취하고, 

제8지에서는 장차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행인 무행(無行)을 성취하나니,

어째서 제7지를 원행지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지위에서는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행(功用行)의 궁극에 이르는 것이니, 모든 형상(相)이 동요시킬 수는 없지만, 무상(無相) 대해서 아직 의식적인 노력이 있는 행(有行)이라 부르는 것이다.

어째서 제8지를 부동지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지위에서는 모든 형상(相)과 일체의 모든   동요시킬  없으니, 무분별지혜가 자연스럽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何故九地,名爲善慧?由此地中,無㝵解智,說名爲慧,此慧妙善,故名善慧.何故十地,名爲法雲?由此地中,所有摠緣,一切法智,譬如大雲,陁羅尼門`三摩地門,猶如淨水,此智所藏,如雲含水, 又如大雲,能覆虛空. 如是摠緣,一切法智, 普能覆滅,諸廣大障. 又於法身,能圓滿者,如大雲起周遍虛空,如是此智,於諸菩薩,所依法身,悉能周遍.此中圓滿,意說周遍.

어째서 제9지를 선혜지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지위에서는 걸림없는 이해의 지혜인 무애해지(無礙解智)를 지혜(慧)라 이름하고,  지혜는 승묘한 선(善)이기 때문에 선혜(善慧)라 하는 것이다.

어째서 제10지를 법운지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지위의 총체적으로 일체법을 반연하는 지혜는, 비유하자면 마치  구름과 같고, 다라니문과 삼마지문은 마치 청정한 물과 같기 때문이다. 

 지혜가 함장한 바는, 구름이 물을 함유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 능히 허공을 덮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이 총체적으로 일체법을 반연하는 지혜는 널리 광대한 모든 장애를 덮어서 없앨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법신에 대해서 능히 원만하다’는 것은  구름이 일어나서 허공에 두루하는 것과 같이,  지혜는 보살의 의지처인 소의법신(所依法身)에 두루하나니, 여기서의 원만이라는 뜻을 두루함의 주변(周遍)이라 말하는 것이다.


▶論曰:得此諸地,云何可見?由四種相:一得勝解,謂得諸地深信解故;二得正行,謂得諸地相應十種正法行故;三得通達,謂於初地達法界時,遍能通達一切地故;四得成滿,謂修諸地到究竟故.

논문; 이 모든 지위를 증득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가지의 사종상(四種相)에 의거한다.

첫째는 뛰어난 이해를 얻는, 득승해(得勝解)이니, 모든 지위에서 깊이 믿고 이해함을 얻기 때문이며,

둘째는 바른 행을 얻는, 득정행(得正行)이니, 모든 지위와 상응하는  가지의 십종정법행(十種正法行)을 얻기 때문이며,

셋째는 통달을 얻는, 득통달(得通達)이니, 초지에서 법계를 통달할  능히 모든 지위에 두루 통달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원만히 성취함을 얻는 득성만(得成滿)이니, 모든 지위를 닦아서 구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ㅡ증득의 상에 관한, 제3 득상장(3 得相章).

 

십종정법행(十種正法行), 경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열 가지 행법을 말하는 것으로, 

① 서사(書寫):경ㆍ율ㆍ논 3장을 기록해서 오래 보존케 함.

② 공양(供養):경전이 있는 곳을 부처님의 탑묘(塔廟)처럼 공양 존중함.

③ 시타(施他):다른 이를 위해 바른 법을 말하거나 경전을 남에게 주어서 널리 교화함.

④ 제청(諦聽):다른 이가 경을 읽거나 강의하는 것을 지극한 마음으로 경청함.

⑤ 피독(披讀):경전을 독송하고 외우는 것.

⑥ 수지(受持):부처님의 교법을 받아 지님.

⑦ 개연(開演):불법을 말해서 다른 이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함.

⑧ 풍송(諷誦):소리를 내어 경전과 게송 등을 읽어서 다른 이로 하여금 좋아하 는 마음을 내게 함.

⑨ 사유(思惟):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의 뜻을 생각하고 헤아리며 기억해서 잊 지 않음.

⑩ 수습(修習):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몸소 수행해서 물러남이 없는 것.


▶釋曰:得成滿者,應知爾時,修習諸地,已至究竟.

해석한다; ‘원만히 성취함을 얻는다는 득성만(得成滿)’이란, 그 때에 모든 지위를 닦아 익히고 나서 구경에 이르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論曰:修此諸地,云何可見?謂諸菩薩,於地地中,修奢摩他`毘鉢舍那,由五種相修.何等爲五?謂集摠修`無相修`無功用修`熾盛修`無喜足修. 如是五修,令諸菩薩,成辦五果,謂念念中,消融一切麤重依止,離種種想,得法苑樂,能正了知周遍無量無分限相大法光明,順淸淨分無所分別無相現行,爲令法身,圓滿成辦,能正攝受,後後勝因.

논문; 이 모든 지위를 수행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보살은 지위마다 사마타(奢摩他)ㆍ비발사나(毘鉢舍那, 위빠사나)를 닦음에 있어서 다섯 가지 상의 수행에 의거하나니, 무엇이 그 다섯 가지인가? 

이른바 총체적인 것을 일으키는 수행의 총수(摠修)와 형상 없음의 수행의 무상수(無相修),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수행의 무공용수(無功用修)와 맹렬한 수행의 치성수(熾盛修), 

기쁘게 만족함이 없는 수행의 무희족수(無喜足修)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수행의 오수(五修)는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다섯 가지의 증과인 오과(五果)를 성취하게 하나니,

이른바 순간 순간마다 번뇌장과 소지장의 모든 유루종자의 추중(麤重)의 의지(依止)를 녹이고, 갖가지 생각을 여의어서 법의 동산의 즐거움을 얻게 하고, 바르고 두루하며, 무량하고 한정되지 않은 상의 대법의 광명을 능히 알게 되는 것이다. 

청정분에 수순해서 무분별의 무상(無相) 진여가 현행하고, 법신으로 하여금 능히 바르게 그 다음 다음의 뛰어난 승인(勝因) 섭수하는 것을 원만히 성취하도록 하는 것이다.

ㅡ수행의 상에 관한, 제4 수상장(4 修相章).


▶釋曰:如一一地,有五相修,今當顯示.修奢摩他`毘鉢舍那,皆由五相,竝得修習.謂念念中,消融一切麤重依止者,謂煩惱障,及所知障,無始時來,熏習種子,說名麤重.此二障聚,由緣摠法,止觀智力,念念消融.此中意取,障聚破壞,故名消融,或令羸損,故名消融.

해석한다; 하나하나의 지위에서 다섯 가지 상의 수행인 오상수(五相修)가 있음을 이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수행함에 있어서 모두 다섯 가지의 오상(五相)에 의거해서 아울러 닦아 익힐 수 있는 것이다.

‘순간 순간의 염념(念念)마다 번뇌장과 소지장의 모든 유루종자의 추중(麤重)의 의지(依止)를 녹인다’는 것이란, 번뇌장과 소지장이 아득한 무시로부터 훈습시킨 종자를 추중(麤重)이라 하며,

이 두 가지 장애의 덩어리인 이장취(二障聚)는 총법(摠法, 무상진여)을 반연하는 지관의 지혜의 힘에 의해서 염념(念念)마다 녹이는 것이니, 여기서의 의취(意取)는 장애의 덩어리인 장취(障聚)를 파괴한다는 뜻으로 녹이는 소융(消融)이라 하는 것이니, 쇠퇴시키는 여손(羸損)하는 것이기 때문에 녹인다고 하는 것으로, 다스려야 할 장애는 소멸시키고, 그렇지 않은 것은 그 세력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離種種想,得法苑樂者,契經等法住種種性,遠離如是種種性想,卽是證得法苑之樂,於中可居,故名爲苑.

‘갖가지 생각을 여의어서 법의 동산의 즐거움을 얻는다’는 것은 계경(경전) 등의 법은 갖가지 성품에 머물고, 이와 같은 갖가지 성품의 성상(性想)을 멀리 여의면, 곧 법동산의 즐거움을 증득하며, 그 안에 머물기 때문에 동산이라 하는 것이다.

ㅡ교화 받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갖가지 교법이 있으니혹은 그 앞뒤가 달라서 의혹을 일으키기 때문에 무상(無相) 안주하여  차별의 집착을 여의어야 한다.

 

復有餘義,於隨所受尋伺法中,不起麤顯,領納觀察,但由止觀憶念光明,而起微細,領納觀察.

다시 별도의 의미가 있으니, 처소에 따라 감수작용의 수(受)ㆍ찾고 탐구하는 심구(尋求)ㆍ정밀하게 살피는 사찰(伺察)의 심소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감수하는 영납(領納)의 관찰을 일으키지 않고, 다만 지관(止觀)의 사념의 광명에 의해서 미세한 감수의  영납(領納)의 관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염념(念念)은 일념일념(一念一念)으로서 극히 짧은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60찰나가 1념이라고도 한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7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5. 피입인과분(彼入因果分) 4

 

▶論曰:如是六種波羅蜜多,所得勝利,云何可見?謂諸菩薩,流轉生死,富貴攝故`大生攝故`大朋大屬之所攝故`廣大事業加行成就之所攝故`無諸惱害性薄塵垢之所攝故`善知一切工論明處之所攝故,勝生無罪,乃至安坐,妙菩提座,常能現作一切有情,一切義利,是名勝利.

논문; 이와 같은 여섯 가지의 바라밀다로부터 얻게 되는 뛰어난 이익의 승리(勝利)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보살은 생사에 유전할지라도 부귀를 포섭하는 까닭에, 부귀하고 자재하니, 범천(梵天)ㆍ제석천(帝釋天) 등에서 생을 받기 때문이고,

훌륭한 삶의 대생(大生)을 포섭하는 까닭에 인간계에 태어날지라도 최상의 과보를 받기 때문이며,

널리 알려진, 대명(大朋)의  권속을 포섭하기 때문이며, 광대사(廣大事) 가행의 성취를 포섭하기 때문이며, 

모든 고뇌가 없고 번뇌가 미약함을 포섭하기 때문이며,

공예 기술  모든 학문의 아는 것의 명() 포섭하기 때문에, 뛰어난 생의 승생(勝生)으로서 죄가 없으며,

나아가 승묘한 보리좌에 편안히 앉아서, 많은 유정에게 항상 나투어 모든 이익을 지으니,

이를 뛰어난 이익의 승리(勝利)라 하는 것이.

바라밀다의 공덕에 관한, 제10 공덕장(10 功德章).

 

명(明)은 범어 vidyā의 번역어로서, 배운 것을 분명히 한다는 뜻이며, 학예(學藝)ㆍ학문을 말한다.


▶釋曰:今當顯說波羅蜜多,所得勝利.勝生無罪者,非如外道雖得勝生,而名有罪,雜染污故.又彼勝生,皆是無常.

해석한다; 이제 마땅히 바라밀다가 얻는 뛰어난 이익의 승리(勝利)을 말하는 것이니,

‘뛰어난 생(勝生)으로서 죄가 없다’는 것이란, 외도가 뛰어난 생을 받을지라도 죄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니, 잡염에 오염된 때문이고, 또한  뛰어난 생은 모두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다.

외도의 뛰어난 생이 유죄(有罪) 이유를 밝힌다.

 

波羅蜜多果,非無常,由說乃至安坐妙菩提座故.又彼勝生,唯能自利,不能利他,由不說彼常,能現作有情義利.

波羅蜜多所得勝果,常能現作一切有情,一切義利.如是名爲諸到彼岸,得無罪等,勝果義利.

바라밀다의 결과는 무상(無常)하지 않으며, 나아가 승묘한 보리좌에안히 앉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며,

또한  뛰어난생은 오직 자신만을 이롭게 할 뿐이지 남을 이롭게  수는 없는 것이니, 그는 유정을 이롭게 하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라밀다가 얻는 뛰어난 결과의 승과(勝果)는 항상 나투어 많은 유정에게 모든 이익을 짓는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모든 바라밀다가 무죄 등의 뛰어난 결과의 승과의리(勝果義利)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論曰:如是六種波羅蜜多,互相決擇,云何可見? 世尊於此一切六種波羅蜜多,或有處所以施聲說`或有處所以戒聲說`或有處所以忍聲說`或有處所以勤聲說`或有處所以定聲說`或有處所以慧聲說.

如是所說,有何意趣?謂於一切波羅蜜多,修加行中,皆有一切波羅蜜多,互相助成.如是意趣.

논문;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바라밀다가 서로 결택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세존께서는  여섯 가지 바라밀다에 대해서 어떤 곳에서는 보시의 이름으로 말씀하시고, 

어떤 곳에서는 계율의 이름으로 말씀하셨으며, 어떤 곳에서는 인욕의 이름으로 말씀하시고, 

어떤 곳에서는 정진의 이름으로 말씀하셨으며, 어떤 곳에서는 선정의 이름으로 말씀하시고, 

어떤 곳에서는 지혜의 이름으로 말씀하셨으니,

이렇게 말씀하신 것에 어떠한 의취(意趣) 있는 것인가? 

모든 바라밀다의 가행을 수행하는 가운데에는 일체의 모든 바라밀다가 있으며, 서로 도와서 이루는 것이라는 의취(意趣) 있는 것이다.

11 호현장(第 十一 互顯章).


▶釋曰:於三百頌般若波羅蜜多等經中,本爲說一波羅蜜多,乃說一切波羅蜜多.於如是說,有何意趣? 於修一時,一切相助,應知此中,有是意趣.謂修施時,防護身語,由此有戒波羅蜜多,而相助成.乃至了知施之因果,由此有慧波羅蜜多,而相助成.其餘相助,如應當知.

해석한다; '대반야경'의 도섭품(度攝品)의 3 게송의 반야바라밀다 등의 경전에서 본래 하나의 바라밀다를 설명하기 위하여 모든 바라밀다를 말씀하셨으니,  

이러함에 어떠한 의취(意趣) 있는 것인가? 

하나를 수행할 때, 일체가 서로 돕는 것이니, 이러한 의취(意趣)가 있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른바 보시를 수행할  신업과 구업을 보호하나니, 이것은 지계바라밀다가 있어서 돕는 것이기 때문이며,

나아가 보시의 인과를 아는 것은 지혜바라밀다가 있어서 서로 돕기 때문이며,

 나머지가 서로 돕는 것도 그 상응하는 바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


▶論曰:此中有一嗢拕南曰:

논문; 이러함에 하나의 게송이 있으니, 


“數相及次第, 訓詞修差別, 攝所治功德, 互決擇應知.”

決擇결택, 도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함

숫자(數)ㆍ양상(相)ㆍ차제(次第, 순서)ㆍ훈사(訓辭, 말)ㆍ수행(修行)ㆍ차별(差別)ㆍ소섭(所治, 포섭)

다스려지는 것의 소치(所治)ㆍ공덕이 서로 결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리라.


▶釋曰:次第頌前,其文易了.

해석한다; 그 문장이 알기 쉬우니 순서대로 앞의 내용을 읊으면 된다.


6. 피수차별분(彼修差別分) 1
 
▶論曰:如是已說彼入因果.彼修差別,云何可見?由菩薩十地.何等爲十?一極喜地`二離垢地`三發光地`四焰慧地`五極難勝地`六現前地`七遠行地`八不動地`九善慧地`十法雲地,

▷논문; 이상과 같이 그것에 들어가는 인과를 말하였으니, 그것을 수행하는 차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가?

보살의 10() 의거하는 것이니, 무엇을 10지라 하는 것인가? 

첫째는 극희지(極喜地, 환희지歡喜地)이고, 둘째는 이구지(離垢地)이며, 셋째는 발광지(發光地)이고, 

넷째는 염혜지(焰慧地)이며, 다섯째는 극난승지(極難勝地, 난승지)이고, 여섯째는 현전지(現前地)이며, 

일곱째는 원행지(遠行地)이고, 여덟째는 부동지(不動地)이며, 아홉째는 선혜지(善慧地)이고, 

열째는 법운지(法雲地)이다. 

 

如是諸地,安立爲十.云何可見?爲欲對治十種無明所治障故.所以者何? 以於十相所知法界,有十無明所治障住.

이와 같은 여러 지위(地)를 안립하여  가지로 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가지의 십종무명(十種無明)의 다스려야  장애인 소치장(所治障)을 다스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서 인가?  가지 상의 알아야  소지법계(所知法界)에  가지 무명의 다스려야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云何十相,所知法界?謂初地中,由遍行義;第二地中,由最勝義;第三地中,由勝流義;第四地中,由無攝受義;

第五地中,由相續無差別義;第六地中,由無雜染淸淨義;第七地中,由種種法無差別義;

第八地中,由不增不減義`相自在依止義`土自在依止義;第九地中,由智自在依止義;第十地中,由業自在依止義`陁羅尼門三摩地門自在依止義.此中有三頌:

무엇이  가지 상의 알아야  소지법계(所知法界)인가? 

초지에서는 두루 행함의 편행의(遍行義) 의거하고, 

2지에서는 가장 뛰어남의 최승의(最勝義) 의거하며, 

3지에서는 뛰어난 흐름의 승유의(勝流義) 의거하고, 

4지에서는 섭수가 없는 무섭수의(無攝受義) 의거하며, 

5지에서는 상속이 차별없는 상속무차별의(相續無差別義) 의거하며,

6지에서는 잡염과 청정이 없는 무잡염청정의(無雜染淸淨義) 의거하며, 

7지에서는 갖가지 법의 차별이 없는, 종종법무차별의(種種法無差別義) 의거하고, 

8지에서는 증가도 감소도 없는 부증불감의(不增不減義) () 자재한 의지의 상자재의지의(相自在依止義) 국토가 자재한 의지의 토자재의지의(土自在依止義) 의거하며,

9지에서는 지혜가 자재한 의지의 지자재의지의(智自在依止義) 의거하고, 

10지에서는 업이 자재한 의지의 업자재의의(智自在依止義) 다라니문(陀羅尼門)ㆍ삼마지문(三摩地門) 자재한 의지의(依止義) 의거한다. 

이러함에 세 개의 게송이 있으니, 

ㅡ10() 수행에 관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수행의 차이를 대치장(對治章)ㆍ입명장(立名章)ㆍ득상장(得相章)ㆍ수상장(修相章)ㆍ수시장(修時章) 다섯 부문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가운데, 다스림의 제1 대치장(1 對治章)이다.


“遍行最勝義, 及與勝流義, 如是無攝義, 相續無別義,

두루 행함의 편행의(遍行義)ㆍ가장 뛰어남의 최승의(最勝義)뛰어난 흐름의 승유의(勝流義)

이와 같은 섭수가 없음의 무섭수의(無攝受義)상속의 차별이 없는 의미의 상속무차별의(相續無差別義)와


無雜染淨義, 種種無別義, 不增不減義, 四自在依義.

잡염과 청정이 없는 무잡염청정의(無雜染淸淨義)갖가지 차별이 없는 종종법무차별의(種種法無差別義)

증가도 감소도 없는 부증불감의(不增不減義) 가지 자재한 의지의 의(義)와


法界中有十, 不染污無明, 治此所治障, 故安立十地.”

법계 안에  가지의 염오가 없는 무명이 있으니, 

이렇게 다스려야  장애를 다스리는 것이니, 그러므로 10지(十地)를 안립한다네.


復次應知如是無明,於聲聞等,非染污,於諸菩薩,是染污.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와 같은 무명은 성문등에게는 염오가 아닌 비염오(非染污)이나,

보살에게는 염오(染污)라는 것을!


▶釋曰:依彼因果,修位差別,故問答言. 云何十相所知法界?謂初地中,由遍行義,乃至第十地中,由業自在依止義`陁羅尼門三摩地門自在依止義,由十種相,法界可知,故名十相所知法界.

 해석한다; 그 인과(因果)에 의지해서 수행의 지위를 구분하는 것이므로 문답으로 말하기를

‘무엇이  가지의 알아야  상(相)의 소지법계(所知法界)인가?’라고 하였다.

‘초지(환희지)에서는 두루 행함의 편행의(遍行義) 의거한다’에서부터 ‘제10지에서는 업이 자재한 의지의 의미와 다라니문ㆍ삼마지문이 자재한 의지의 의미에 의거한다’까지의  가지의 상에 의거해서 법계를   있는 까닭 ‘열 가지 상의 알아야  십상소지법계(十相所知法界)’라 말하는 것이다.

 

謂地地中,各有一相所知法界,由無明力,不能了知,爲欲對治,如是無明, 故立十地. 又所治障有其十種, 故立十地. 何等名爲所治十障?一異生性;二於諸有情,身等邪行;三遲鈍性,於聞思修,而有忘失;四微細煩惱現行,俱生身見等攝,此最下品故`不作意緣故`遠隨現行故,應知是微細;

각각의 지위마다 각각  가지 상의 알아야  법계가 있으나, 무명력(無明力)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무명을 다스리기 위해서  가지 지위인 십지(十地)를 건립한 것이며,

또한 다스려야  장애의 소치장(所治障)에   가지가 있기 때문에 10지를 건립한 것이니,

무엇을 다스려야   가지 장애의 소치십장(所治十障)이라 하는 것인?

첫째는 아집과 법집을 갖는 유정인, 범부의 성품인 이생성(異生性)이고,

둘째는 모든 유정에 있어서 신체 등의 삿된 행의 사행(邪行)이며,

셋째는 더디고 둔한 성품이니, 듣고 사유하며 수행함에 있어서 잊어버림이 있는 것이며,

넷째는 법집(法執) 분별의 종자를 체(體)로 하는 미세한 번뇌 현행하여, 신견(身見) 등과 함께 생겨는 것이니, 이러한 미세한 번뇌를 3 가지로 나타내자면,

보살의 마음을 오염시킬 수 없어서 가장 하품에 포함되기 때문이고,

후천적으로 분별해서 일어나는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가 아닌,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이기 때문에 무작의가 없음을 반연하는 불작의연(不作意緣)이기 때문이며,

본래부터 신체를 좇아서 일어나는 구생성(俱生性)인 까닭에, 멀리 따라서 현행하는 원수현행(遠隨現行)이기 때문이니, 이러한 것이 미세한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五於下乘般涅槃;六麤相現行;七細相現行;八於無相作行;九於饒益有情事,不作行;十於諸法中,未得自在.

다섯째는 생사의 괴로움을 두려워해서 오로지 생사를 버리고자 하는 열등한 교법에서의 반열반이며,

여섯째는 잡염과 청정의 두드러진 추상(麤相)에 집착해서 무상(無相)에 안주하지 못하는, 두드러진 모습의 추상현행(麤相現行)이며,

일곱째는 아직 모든 유위법의 상속상을 여의지 못하여 유전(流轉)의 생에 집착하는, 미세한 모습의 세상현행(細相現行)이며,

여덟째는 무상(無相)의 작의력(作意力)에 의해 짓는 행인, 무상작행(無相作行)이며,

아홉째는 유정을 이롭게 있어서의 작의가 아닌 행, 즉 의식적인 노력이 아닌 무공용행(無功用行)이며,

열째는 일체법에 대해서 아직 자재를 얻지 못한, 미득자재(未得自在)인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7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5. 피입인과분(彼入因果分) 3

 

又諸菩薩,以其六種波羅蜜多,饒益有情,見彼於己,有大恩德,不見自身,於彼有恩,是名菩薩荷恩意樂.

又諸菩薩,卽以如是六到彼岸所集善根,深心迴施一切有情,令得可愛勝果異熟,是名菩薩大志意樂.

또한 모든 보살은 6 가지의 바라밀다로써 유정을 이롭게 하여서, 유정들이 보살에 대해서 큰 은덕이 있다고 볼지라도, 보살 스스로는 그들에 대한 은덕이 있다고 보지 않으니, 이것을 보살이 은혜를 짊어지는 하은의요(荷恩意樂)이며, 

또한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은 6 가지의 도피안으로 쌓은 선근으로써 깊은 마음으로 모든 유정들에게 되돌려 베풀고, 사랑할 만한 뛰어난 결과인 이숙을 얻게 하나니, 이것을 보살의 큰 뜻의 대지의요(大志意樂)라 이름하며, 

 

又諸菩薩,復以如是六到彼岸所集善根,共諸有情,迴求無上正等菩提,是名菩薩,純善意樂,

如是菩薩,修此六種意樂所攝,愛重作意.

또한 모든 보살은 다시 이와 같은 6 가지의 도피안으로 쌓은 선근으로써, 모든 유정과 함께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무상정등보리를 구하나니, 이것을 보살의 순수한 순선의요(純善意樂)라 하며,

이와 같이 보살은 이러한 6 가지의 의요에 포섭되는 지극히 사랑하는 바의 애중작의(愛重作意)를 수행하는 것이다.


又諸菩薩,於餘菩薩六種意樂,修習相應,無量善根,深心隨喜,如是菩薩,修此六種意樂,所攝隨喜意樂.

又諸菩薩,深心欣樂,一切有情,六種意樂所攝六種到彼岸修, 亦願自身與此六種到彼岸修,恒不相離, 乃至安坐妙菩提座,如是菩薩,修此六種意樂,所攝欣樂作意.

若有聞此菩薩,六種意樂,所攝作意修已,但當能起一念信心,尚當發生無量福聚,諸惡業障,亦當消滅,何況菩薩.

또한 모든 보살은 다른 보살이 6 가지의 의요를 닦아 익힘과 상응하는 무량한 선근을 깊은 마음으로 따라서 기뻐하나니, 이렇게 보살은  6 가지의 의요에 포섭되는 바를 따라 기뻐하는 수희의요(隨喜意樂)를 수행하며,

또한 모든 보살은 깊은 마음으로 즐겁게, 모든 유정의 육종의요(六種意樂)에 포섭되는 6 가지의 도피안을 닦아서, 스스로가 6 가지 도피안의 수행을 항상 여의지 않으며, 나아가 승묘한 보리좌에 편안히 앉을 것을 서원하나니, 이렇게 해서 보살은  여섯 가지의 육종의요(六種意樂) 포섭되는 수희의요(隨喜意樂) 수행하는 것이다. 

만약  보살의 여섯 가지의 육종의요(六種意樂)에 포섭되는 작의의 수행을 듣고 나서, 다만 일념동안 만이라도 믿는 신심(信心) 일으킨다면, 장차 무량한 복취(福聚)를 일으키고, 모든 악업의 장애를 소멸할  있거늘, 하물며 보살이겠는가!


▶釋曰:五種修中,現起加行修者,謂於現起加行而修.成所作事修者,謂諸如來安住法身,有無功用所作佛事,常無休息.於其六種波羅蜜多,雖無現行,然爲攝益諸有情故,恒常現行,成所作事.

▷해석한다; 5 가지의 수행 가운데 ‘현재 가행을 일으키는 현기가행수(現起加行修)’란, 현재 가행을 일으켜서 수행함이며,

‘해야  사업을 성취하는 소작사수(所作事修)’이란, 모든 여래는 법신에 안주하고,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無功用)으로 불사(佛事)를 지으시나, 항상 휴식이 없으며,  6 가지의 바라밀다에 대한 현행이 없을지라도 모든 유정을 섭수하여 이롭게 하기 때문에, 항상 현행해서 해야  사업을 성취하는 것이며, 

 

於爾所時,一一剎那者,假使以三無數劫量,爲一剎那,如是剎那積集時量,乃至菩提.經爾所時,一一剎那,假使頓捨一切身命等,其義易了,應隨本文.如此次第積集時量,乃至菩提,經爾所時,一一剎那,假令爲起一戒等心,處在三千大千世界,滿中熾火,恒乏一切資生衆具,此言顯示住處艱難資緣乏少,

‘그 경과하는 시기의 낱낱의 찰나’는 가령 3무수겁(無數劫)의 분량을  찰나로 삼는다면, 이러한 찰나가 적집된 시간의 분량인 것이며,

‘나아가 깨달음으로부터  시기를 경과하는 낱낱의 찰나마다 가령 단박에 모든 신명을 버리고’ 등은  의미를 알기 쉬운 것이니, 본문에 따라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순서로 적집된 시간의 분량으로부터 나아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경과하는 시기의 낱낱의 찰나마다 가령 지계 등의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히 타오르는 불에 처하고, 항상 삶을 돕는 여러 도구가 부족하다’는 것이란, 머무는 곳의 어려움과 도구, 조건의 궁핍을 나타낸 것이다.


此中意樂無有厭足,當知卽是廣大意樂.卽此長時,恒無閒斷,當知卽是長時意樂.長者久也.餘義易了.諸惡業障,亦當消滅者,此中意說,滅彼能與異熟功能,或對治彼往惡趣力.

‘이 중에서 의요(意樂)에 싫어함이 없다’는 것은, 곧 광대한 광대의요(廣大意樂)라고 알아야 하며,

이것이 오랜 기간 동안 항상하여서 중단됨이 없다는 것은, 곧 오랜 기간의 장시의요(長時意樂)이니,

‘장(長)’은 오래된 구(久)의 의미이니, 그외 다른 것의 뜻은 알기 쉬운 것이다.

‘모든 악업의 장애도 역시 장차 소멸시킨다’것의 취지는, 그것을 멸하여도 능히 이숙의 작용 능력을 주거나, 혹은  살기 괴로운 악취(惡趣)로 나아가는 다스리는 것이다.

장애를 소멸하여도, 오히려 이숙의 결과를 얻는 것은 보살의 원력에 의한 생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論曰:此諸波羅蜜多差別,云何可見?應知一一各有三品.施三品者:一法施`二財施`三無畏施.戒三品者:一律儀戒`二攝善法戒`三饒益有情戒.忍三品者:一耐怨害忍`二安受苦忍`三諦察法忍.

논문;  모든 바라밀다의 차이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나하나에 각각  가지의 품(三品)이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보시의 시삼품(施三品)은 첫째는 법의 보시인 법시(法施)이고, 

둘째는 재물의 보시인 재시(財施)이며, 

셋째는 두려움을 없애 주는 무외시(無畏施)이다.

계율의  품류인 계삼품(戒三品)은, 첫째는 율의계(律儀戒)이고, 

둘째는 일체의 선법을 닦는 섭선법계(攝善法戒)이며,

셋째는 유정을 널리 이롭게 하는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이다. 

인욕의  품류인 인삼품(忍三品)은 첫째는 원한을 참는 내원해인(耐怨害忍)이고, 

둘째는 고통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안수고인(安受苦忍)이며, 

셋째는 법을 자세히 관찰하는 제찰법인(諦察法忍)이다.

 

精進三品者:一被甲精進 `二加行精進`三無怯弱,無退轉,無喜足精進. 靜慮三品者: 一安住靜慮`二引發靜慮`三成所作事靜慮. 慧三品者:一無分別加行慧`二無分別慧`三無分別後得慧.

정진의  품류인 정진삼품(精進三品)으로는, 첫째는  서원을 일으키는 피갑정진(被甲精進)이고, 

둘째는 가행정진(加行精進)이며, 

셋째는 두려움이 없는 무겁약(無怯弱), 퇴전이 없는 무퇴전(無退轉), 만족함이 없는 무희족(無喜足)의 정진이다.

정려의  품류인 정려삼품(靜慮三品)으로는, 첫째는 안주함의 안주정려(安住靜慮)이고, 

둘째는 이끌어 내는 인발정려(引發靜慮)이며, 

셋째는 해야  바를 성취하는 성소작사정려(成所作事靜慮)이다. 

지혜의  품류인 혜삼품(慧三品)으로는,

첫째는 아공을 체득하는 무분별지혜의 무분별가행혜(無分別加行慧)이고,

둘째는 법공을 체득하는 무분별지혜인 무분별혜(無分別慧)이며,

셋째는 아공과 법공을 체득하는 무분별지혜의 무분별후득혜(無分別後得慧)이다.

ㅡ바라밀다의 종류에 관한, 제7 차별장(7 差別章).

 

피갑(被甲)은 갑주(甲胄, 갑옷)를 입는다는 뜻으로, 보살의 수행을 말한다. 갑옷을 입고 적진을 향할 때 두려워하지 않고 큰 위세가 있는 것과 같은 정진을 말한다.


▶釋曰:於此宣說波羅蜜多品差別中,顯示體性,各三差別. 此中何故,說法施等三種差別? 謂由法施故,資他善根,由財施故資益他身`由無畏施故資益他心,以是因緣故,說三施.

▷해석한다; 이 바라밀다 품류의 차별을 널리 말하는 가운데 체성에 각각  가지의 차별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니, 어찌하여 여기에서 법보시 등의  가지 차별을 말하는 것인가? 

‘법의 보시의 법시(法施)’에 의해서 다른 이들 선근을 키우고,

‘재물의 보시인 재시(財施)’에 의해서 남의 몸을 이롭게 하며, 

‘두려움을 없애 주는 무외시(無畏施)’에 의해서 남의 마음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으로  가지 보시의 시삼품(施三品)를 말하는 것이다. 

 

三種戒中,律儀戒者,是依持戒,爲欲建立其餘二戒,是故安住.所以者何?住律儀者, 便能建立攝善法戒, 由此修集一切佛法,證大菩提,復能建立益有情戒,由此故能成熟有情.

 가지 계율 중에서 ‘율의계(律儀戒)’란 의지(依持)의 계율로서,  나머지  가지 계율을 건립하기 위하여 안주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곧, 율의에 안주하는 자는 능히 ‘섭선법계(攝善法戒)’를 건립할 수 있고, 이로 인하여 모든 불법을 닦아서 대보리를 증득하게 되며,  

또한 ‘능히 유정을 이롭게 하는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을 건립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능히 유정을 성숙시키는 것이다.

 

三種忍中,耐怨害忍,能忍受他所作怨害,勤修饒益有情事時,由此忍力,遭生死苦,而不退轉.安受苦忍,能正忍受所遭衆苦,由此忍力,於生死中,雖受衆苦,而不退轉.諦察法忍,堪能審諦觀察諸法,由此忍力,建立次前所說二忍.

 가지 인욕 가운데 ‘원한을 참는 내원해인(耐怨害忍)’이란, 능히 남이 짓는 원한을 참고 받아들이는 것이니, 유정을 이롭게 하는 일을 부지런히 닦을 때,  인욕의 힘에 의해서 생사의 고통을 만나도 퇴전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안수고인(安受苦忍)’이란, 맞닥드려진 갖가지의 고통을 능히 바르게 참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 인욕의 힘에 의해서 생사 안에서의 갖가지 고통을 받을지라도 퇴전하지 않는 것이다. 

‘법을 자세히 관찰하는 제찰법인(諦察法忍)’이란, 능히법을 진실하게 살펴서 관찰하는 것을 감당해 내는 것이니, 이 인욕의 의해서 앞의 두 가지 인욕을 건립하게 되는 것이다.

 

三精進中,其體差別,卽薄伽梵契經中說:有勢`有勤`有勇`堅猛`不捨善軛.彼經五句,卽是此中,三精進體之所解釋.由被甲精進故,最初有勢.由加行精進故,於加行時,能有精勤.由無怯弱,無退轉,無喜足精進故, 如其次第,於此後時,有勇`堅猛,不捨善軛故.

 가지 정진 중에서  자체의 차이는  박가범(부처님)께서 계경(契經, 경전)에서 ‘힘이 있고, 부지런함이며, 용맹스러움이고, 견고하고 맹렬하며, 선법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경전의 다섯 문구는    가지 정진의 자체를 해석한 것이다. 

‘큰 서원을 일으키는 피갑정진(被甲精進)’에 의해서 처음의 힘이 있게 되고, 

‘가행정진(加行精進)’에 의해서 가행시에 능히 정진하며,

‘두려움이 없는 무겁약(無怯弱), 퇴전이 없는 무퇴전(無退轉), 만족함이 없는 무희족(無喜足)의 정진’에 의해서  순서대로, 이후의 시기에 용맹하고, 견고하며, 맹렬하여서 선법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由此三釋彼五句.所以者何?或有最初,爲求無上正等菩提,雖有勢力,而加行時不能策勵,故說有勤. 雖復有勤,心或怯弱,爲對治彼,故說有勇.由有勇故,心無退屈,應知怯弱卽是退屈. 心雖無怯,逢生死苦,心或退轉,由此退失所求佛果,爲對治彼,立無退轉. 無轉退者,卽是堅猛,故無退轉,顯示堅猛,由堅猛故,逢苦不退.

따라서   가지에 의해서  다섯 문구를 해석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혹은 처음에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무상정등보리를 구하기 위해서 힘이 있을지라도, 가행할 때에 책려할  없기 때문에 부지런함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며,

또한 부지런한 마음이 있을지라도, 두려움이 있는 것 다스리기 위해서 용맹하다고 말하는 것이니, 용맹이 있음으로써 마음에 퇴굴심이 없는 것이니, 두려움이 곧 퇴굴심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겁약즉시퇴굴怯弱卽是退屈)

비록 마음에 두려움이 없을지라도 생사의 고통을 만나면, 혹 마음이 퇴전하기도 하여서 구하던 불과를 잃어버리게 되나니,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퇴전이 없는 것을 건립하는 것이다.

‘퇴전이 없는 무퇴전(無退轉)’이란, 곧 견고하고 맹렬한 것이니, 따라서 퇴전이 없다는 것은 견고하고 맹렬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견고하고 맹렬함으로, 고통을 만날지라도 퇴전하지 않는 것이다. 

 

有雖逢苦能不退轉,而得少善,便生喜足,由此不證無上菩提,是故次須說無喜足.是不得少生喜足義,此卽顯示不捨善軛.由是義故,說三精進.

어떤 이는 비록 고통을 만났을지라도, 퇴전하지 않아서 작은 선(少善)을 얻게 되어, 문득 기쁘하고 만족함을 일으키나니,  이로 인하여 무상보리를 증득하지 못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다음에 반드시 ‘기뻐하거나 만족함이 없는 무희족(無喜足)’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조금도 기쁘하고 만족함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의미로써, 곧 선법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 것이니, 

이러한 뜻에 의거해서  가지 정진을 말하는 것이다.

 

三靜慮中,安住靜慮者,由此能安現法樂住.引發靜慮者,由此引發六種神通.成所作事靜慮者,謂依此故,成立所作利有情事,是故說名成所作事.由此義故,靜慮有三.安立慧體,有三種中,其義易了.

 가지 정려 가운데 ‘안주함의 안주정려(安住靜慮)’란 이로 인하여 능히 현재 안락한 경지에 머무는 현법낙주(現法樂住, 선정의 다른이름)에 안주하는 것이다. 

‘이끌어 내는 인발정려(引發靜慮)’란, 이로 인하여 여섯 가지의신통을 이끌어 내는 것이며,

‘해야  바를 성취하는 성소작사정려(成所作事靜慮)’는, 이것에 의지함으로써 해야  바, 즉 유정을 이롭게 하는 사업을 성취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해야  사업을 성취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뜻에 의거해서 정려에  가지가 있으며, 반야를 안립함에도  가지가 있으나,  의미는 알기 쉬운 것이다.

 

▶論曰:如是相攝,云何可見?由此能攝一切善法,是其相故`是隨順故`是等流故.

논문; 이와 같이 서로 포섭함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이것에 의거해서 능히 모든 선법을 포섭하나니, 그것의 상(相), 즉 체상(體相)이기 때문이고, 수순(隨順)하기 때문이며, 등류(等流)이기 때문이다.

서로 포섭함에 관한, 제8 섭(8 攝章).


▶釋曰:如是相攝,云何可見者,此問如是波羅蜜多,與諸善法,互相攝義,云何可見.由此能攝一切善法者,應知由此波羅蜜多,能具足攝一切善法,彼亦能攝波羅蜜多.應知此中,一切善法,卽是一切菩提分法.是其相故者,是般若相.是隨順故者,應知卽是信輕安等.是等流故者,謂六神通及十力等,諸餘功德.

해석한다; ‘이와 같이 서로 포섭함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란, 이와 같은 바라밀다와 모든 선법이 서로 포섭하는 뜻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며,

‘이것에 의거해서 능히 모든 선법을 포섭한다’는 것이란, 능히  바라밀다를 구족해서 모든 선법을 포섭함으로써, 그것도 역시 능히 바라밀다를 포섭한다는 것이며,

여기서 모든 선법이란 모든 보리분법(菩提分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의 상(相), 즉 체상(體相)이기 때문’이란, 반야의 상(相)을 말하는 것이며,

‘수순하기 때문’이란, 믿음의 신(信)과 경안(輕安) 등의 심소를 말하는 것이니, 믿음과 경안 등은 선심소(善心所)이기 때문에 바라밀다에 수순함을 말하는 것이며,

‘등류(等流)이기 때문’이란 여섯 가지 신통의 육통(六通)과 10력(力)  나머지 모든 공덕으로, 바라밀다로부터 등류(等流)된 결과들이다.

 

경안(輕安), 번뇌를 멀리하여 경(輕)하고, 몸과 마음을 평안히 조절하여 안(安)하는 능력의 심소로서 선심소(善心所)이다. 이것은 욕계의 산심위(散心位)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색계ㆍ무색계의 정위(定位)에서만 생기하는 것이다.


▶論曰:如是所治攝諸雜染,云何可見?是此相故`是此因故`是此果故.

논문; 이와 같이 다스려지는 소치(所治)에 모든 잡염이 포섭됨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이것 자체의 상(相)이기 때문이고, 이것의 원인(因)이기 때문이며, 이것의 결과(果)이기 때문이다.

다스림에 관한, 제9 대치장(9 對治章).


▶釋曰:如到彼岸攝諸白法,前已顯示;此所對治,亦攝一切諸雜染法,今當顯示.是此相故者,是貪等相.是此因故者,是慳等因,所謂不信及邪見等.是此果故者,謂慳`犯戒`忿等諸果.

해석한다; 바라밀다(도피안到彼岸)에 모든 청정법을 포섭한다는 것은 앞에서 나타내 보인 바와 같으며,

이 다스려지는 바의 소대치(所對治) 역시도 일체의 모든 잡염법을 포섭한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며,

‘이것 자체의 상(相)이기 때문’이란 탐욕 등의 자체의 상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의 원인(因)이기 때문’이란 인색한 간(慳) 등의 원인으로서 불신(不信)과 삿된 사견(邪見) 등이며,

‘이것의 결과(果)이기 때문’이란 인색한 간(慳)ㆍ계율을 범하는 범계(犯戒)ㆍ분노 등의 모든 결과인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7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5. 피입인과분(彼入因果分) 2

 

如是證諸佛法所依處故,唯立六數.由施波羅蜜多故,於諸有情,能正攝受.由戒波羅蜜多故,於諸有情,能不毀害.由忍波羅蜜多故,雖遭毀害,而能忍受.由精進波羅蜜多故,能助經營彼所應作.卽由如是攝利因緣,令諸有情,於成熟事,有所堪任.

從此已後,心未定者令其得定`心已定者令得解脫,於開悟時,彼得成熟.如是隨順成熟一切有情,唯立六數,應如是知.

이상과 같이 모든 부처님법의 의지처인 불법소의처(佛法所依處)를 증득하는 까닭에 오직 6 이라는 숫자를 건립한 것이니,

보시바라밀다에 의거함으로써 모든 유정을 능히 섭수하며,

지계바라밀다에 의거함으로써 모든 유정을 능히 해치지 않으며,

인욕바라밀다에 의거함으로써 해침을 당할지라도 능히 참으며,

정진바라밀다에 의거함으로써 능히 도와서, 마땅히 해야  바를고, 이러한 뛰어난 이익의 인연에 의해서 모든 유정을 성숙시키는 업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다음에, 마음이 아직 선정에 들지 않은 자에게는 그로 하여금 선정을 얻게 하고, 

마음이 이미 선정에  자에게는 해탈을 얻게 하나니, 깨달음의 개오시(開悟時)에 그는 성숙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수순하여 모든 유정을 성숙시키는 것이니, 6 이라는 숫자를 건립한 것은 오직 이러하다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釋曰:成立對治所治障中,失壞因,謂邪惡慧者,顚倒執取,名邪惡慧,如諸外道,由邪惡慧,而失壞故.餘義可知.

證諸佛法,所依處者,謂證一切佛法因故.由此第二成立因緣,波羅蜜多,其數唯六,不增不減.

해석한다 ; 다스려야  장애인 소치장(所治障)에 대하여 다스림이 성립하는 가운데, 

‘잃고 무너뜨리는 원인은 이른바 모든 산란된 움직임의 산동(散動)과 사악한 지혜의 사악혜(邪惡慧)이다’란,

전도되어 집착하는 것을 사악혜(邪惡慧)라 하는 것으로, 모든 외도와 같이 사악한 지혜에 의해서 잃고 무너뜨리게 되기 때문이며, 그 나머지의 뜻은   있을 것이다.

‘모든 부처님 불법의 의지처인 불법소의처(佛法所依處)를 증득한다’는 것이란, 모든 불법의 법인(法因) 증득하기 때문이니, 이러한  번째 성립의 인연에 의거함으로써 바라밀다는 오직 6 가지로서 늘거나 줄지 않는 것이다.

 

此不散動,爲依止故,如實等覺諸法眞義者,依止靜慮波羅蜜多,能起般若波羅蜜多,如實等覺諸法眞義.餘義可知. 第三成立數因緣中,隨順成熟諸有情者,謂爲隨順,成熟一切有情類故,唯立六數,不增不減.其心未定,令得定者,謂得靜慮波羅蜜多心.已得定令解脫者,謂得般若波羅蜜多.於開悟時,彼得成熟者,謂教授時,令彼成熟.

‘이 산란되게 움직이지 않음을 의지로 삼음으로써, 있는 그대로 여실하고 평등하게 일체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이란,

정려바라밀다에 의지해서 능히 반야바라밀다를 일으키고, 있는 그대로 여실하고 평등하게 제법의 진의(眞義) 깨닫는다는 것이며, 그 나머지의 뜻은 알  있을 것이다.

그 숫자를 성립하는 인연 가운데 세 번째로,

‘수순하여 모든 유정을 성숙시킨다’는 것은, 이른바 수순하여 모든 유정의 부류를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니, 따라서 오직 6이라는 숫자를 건립하여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이다.

‘그 마음이 아직 선정에 들지 않은 이에게는 그로 하여금 선정을 얻게 한다’는 것은 정려바라밀다를 증득하게 하는 것을 말하며,

‘마음이 이미 선정에 든 자에게는 해탈을 얻게 한다’는 것은 반야바라밀다를 증득하는 것을 말하며,

‘깨달음의 개오시(開悟時)에 그는 성숙할  있다’는 것은 가르침을  때에 그로 하여금 성숙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論曰:此六種相,云何可見?由六種最勝故.一由所依最勝,謂菩提心爲所依故;二由事最勝,謂具足現行故;三由處最勝,謂一切有情,利益安樂事,爲依處故;四由方便善巧最勝,謂無分別智所攝受故;五由迴向最勝,謂迴向無上正等菩提故;六由淸淨最勝,謂煩惱`所知二障無障,所集起故.

논문; 이 여섯 가지의 육종상(六種相)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여섯 가지의 가장 뛰어남에 의해서이니,

첫째는 의지처의 가장 뛰어남인 소의최승(所依最勝)에 의해서이니, 보리심을 의지처로 삼기 때문이며,

둘째는 하는 일(事)의 가장 뛰어남인 사최승(事最勝)에 의해서이니, 구족하여 현행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처소의 가장 뛰어남인 처최승(處最勝)에 의해서이니,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의지하는 곳으로 삼기 때문이며,

넷째는 훌륭한 방편의 가장 뛰어남인 방편선교최승(方便善巧最勝)에 의해서이니, 무분별지혜에 섭수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회향의 가장 뛰어남인 회향최승(迴向最勝)에 의해서이니, 최상의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인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에 회향하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청정함의 가장 뛰어남인 청정최승(淸淨最勝)에 의해서이니, 번뇌장과 소지장의 이장(二障)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若施是波羅蜜多耶?設波羅蜜多是施耶?有施非波羅蜜多,應作四句.如於其施,如是於餘波羅蜜多,亦作四句,如應當知.

보시가 바라밀다인가?  바라밀다가 보시인가? 

보시로서 바라밀다가 아닌 것이 있으니, 마땅히  개의 문구(문장)를 짓는 것이다.

 보시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나머지 바라밀다도 역시  개의 문장을 짓는 것과 상응한다고 알아야 한다.

6바라밀다의 상에 관한 제3 상장(3 相章).


▶釋曰:以何等相,施等得名波羅蜜多.由諸世閒及聲聞等,亦有施等,是故決定,應說其相.謂六最勝,爲施等相.

해석한다; 어떠한 상에 의해 보시 등이 바라밀다라고 이름할  있는 것인가? 

모든 세간과 성문등에게도 역시 보시 등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상을 말하는 것이니, 이른바 여섯 가지 가장 뛰어남의 육최승(六最勝)을 보시 등의 상(相)으로 삼는 것이다.

 

所依最勝者,謂菩提心,爲所依止.事最勝者,謂無有一,於內外事,具足現行,唯有菩薩,能具現行.處最勝者,謂以一切有情,利益安樂爲處.方便善巧最勝者,謂三輪淸淨是此中所取方便善巧,由無施物施者,受者三分別故. 如是無分別智所攝,施等得名波羅蜜多.

‘의지처의 가장 뛰어남남인 소의최승(所依最勝)’은 보리심을 의지처로 삼는 것을 말하며,

‘하는 일(事)의 가장 뛰어남인 사최승(事最勝)’이란, 보통의  사람이 내ㆍ외부의  대하여 구족해서 현행할 수는 없으나,  오직 보살만이 능히 갖추어서 현행할 수 있다는 것이며,

‘처소의 가장 뛰어남인 처최승(處最勝)’이란, 이른바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곳을 처소로 삼는다는 것이며,

‘훌륭한 방편의 가장 뛰어남인 방편선교최승(方便善巧最勝)’이란, 보시하는 시자와 받는 수자와 보시물의 3륜(三輪)이 청정하다는 것이니, 여기에서는 방편을 취함이 훌륭하여서, 보시하는 물건ㆍ보시하는 시자ㆍ받는 수자 셋에 대한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분별지혜에 포섭되는 보시 등을 바라밀다라고 이름할  있는 것이다.

 

迴向最勝者,謂以施等,迴求無上正等菩提.淸淨最勝者,謂至佛果,施等方淨,爾時,解脫煩惱`所知二種障㝵,所集起故.

‘회향의 가장 뛰어남인 회향최승(迴向最勝)’이란, 보시 등으로써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 구하기 때문이며,

‘청정의 가장 뛰어남인 청정최승(淸淨最勝)’이란 불과(佛果)에 이르면 보시 등이 비로소 청정해지기 때문이니, 그 때에 번뇌장과 소지장의 이장(二障)이 일어나는 것으로부터 해탈하기 때문이다.


若施是波羅蜜多耶,設波羅蜜多是施耶者,是問於答中,有施非波羅蜜多,謂離六種最勝而行布施. 有波羅蜜多非施, 謂六種最勝所攝戒等.有亦施亦波羅蜜多,謂六種最勝所攝布施.有非施非波羅蜜多,謂離六種最勝,而行戒等.如是一切處,作四句應知.

‘보시가 바라밀다인가? 혹은 바라밀다가 보시인가?’는 질문으로,

대답 가운데에서 ‘보시로서 바라밀다가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은 여섯 가지 가장 뛰어난 육종최승(六種最勝) 떠난 보시를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바라밀다로서 보시가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은, 여섯 가지 가장 뛰어난 육종최승(六種最勝) 포섭되는 지계 등을 말하는 것이며, 

보시이면서 바라밀다인 것이 있다는 것은, 육종최승(六種最勝) 포섭되는 보시를 말하는 것이며,

보시도 아니고 바라밀다도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은, 육종최승(六種最勝) 떠난 지계 등을 행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곳에서  개의 문구(문장)인 사구(四句)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ㅡ본문에 없는 질문에 응하여 보시와 바라밀다에서 4 분별(分別) 보인 것으로,  4 분별은 다른 바라밀다에서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論曰:何因緣故,如是六種波羅蜜多,此次第說?謂前波羅蜜多隨順,生後波羅蜜多故.

논문; 무슨 인연으로 6 바라밀다를 이와 같은 순서로 말하는 것인가?

앞의 바라밀다를 수순하여 그 뒤 바라밀다를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6바라밀다의 순서에 관하여 설명한, 제4 차제장(4 次第章).


▶釋曰:如是六種波羅蜜多,依生前後說此次第.

해석한다; 이와 같은 6 바라밀다의 앞의 것 그 뒤의 것을 생겨나게 함에 의해서 이러한 순서를 말한 것이다.


▶論曰:復次此諸波羅蜜多,訓釋名言,云何可見?於諸世閒,聲聞`獨覺施等善根, 最爲殊勝,能到彼岸, 是故通稱波羅蜜多. 又能破裂慳悋貧窮,及能引得廣大財位福德資糧,故名爲施.又能息滅惡戒惡趣, 及能取得善趣等持,故名爲戒. 又能滅盡忿怒怨讎,及能善住自他安隱,故名爲忍. 又能遠離所有懈怠惡不善法,及能出生無量善法,令其增長,故名精進.又能消除所有散動, 及能引得內心安住,故名靜慮. 又能除遣一切見趣諸邪惡慧,及能眞實品別知法,故名爲慧.

논문; 또한  모든 바라밀다의 명칭 해석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모든 세간ㆍ성문ㆍ독각은 보시 등의 선근을 가장 뛰어난 것으로 삼아서 능히 피안에 이르는 까닭에 공통적으로 바라밀다라 부르며,

또한 능히 인색과 빈궁을 부수고, 능히 광대한 재물과 지위, 복덕의 자량을 이끌어 내기 때문에 보시바라밀다라 이름하며, 또한 능히 악한 계율의 악계(惡戒)와 살기 괴로운 악취(惡趣) 멸하고, 살기 좋은 선취(善趣) 등지(等持, 삼마지)를 얻기 때문에 지계바라밀다라고 부르며,

또한 능히 분노와 원수를 모두 없애고, 자신과 남을 안은(安隱)함에  머물게 하기 때문에 인욕바라밀다라 이름하며,

또한 능히 모든 게으름의 해태(懈怠)ㆍ악(惡)ㆍ불선법(不善法)을 멀리 여의어서 무량한 선법을 생겨나게 하여서 그것들을 증장시키기 때문에 정진바라밀다라고 부르며,

또한 능히 모든 산란됨의 산동(散動)을 없애고, 내심(內心)의 안주를 이끌어 내기 때문에 정려바라밀다라고 이름하며,

또한 국집된 견해와 모든 사악한 지혜를 제거하고 능히 진실하게 품류에 따라 법을 알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다라 부른다.

ㅡ6바라밀다의 명칭을 해석한, 제5 입명장(5 立名章).


▶釋曰:今當顯示訓釋名言.且釋摠名.由此一切能到彼岸,是故說名波羅蜜多.

超諸世閒,聲聞`獨覺施等彼岸, 是故通名波羅蜜多.

해석한다; 이제 마땅히 명칭의 해석함을 나타내는 것이니, 우선 총체적인 총명(摠名) 해석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 능히 피안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바라밀다라 이름하는 것으로, 모든 세간과 성문ㆍ독각이 보시 등으로 피안을 초월하기 때문에 공통적인, 통명(通名)으로 바라밀다라 부르는 것이다.

 

次釋別名.以於因時,破慳惠施,果時能裂一切貧窮, 及於果時,引大財位廣福資糧,故名爲施. 又於因時,息諸惡戒,果時能滅一切惡趣,及於未來,能取善趣,於現在世,能得等持,故名爲戒. 如是一切波羅蜜多,訓釋言詞,如應當說.及能善住自他安隱者, 謂於自身,不爲忿怒過失所惱,不生他苦,故得安隱.

다음에 개별적인 별명(別名)을 해석하나니, 수행의 시기인 인시(因時)에 인색함을 부수고, 은혜로운 보시를 함으로써, 증과의 시기인 과시(果時)에 능히 모든 빈궁을 없애고, 또한 증과의 시기인 과시(果時)에  재물과 지위ㆍ광대한 복의 자량을 이끌기 때문에 보시바라밀다라 이름하며,

또한 수행 시기인 인시(因時)에 모든 나쁜계(惡戒)를 소멸시킴으로써, 증과의 시기인 과시(果時)에 살기 괴로운 모든 악취(惡趣) 없애고,

또한 미래에 능히 살기 좋은 세계인 선취(善趣)를 취하며, 현재세에 능히 등지(等持, 삼마지)를 얻기 때문에 지계바라밀다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모든 바라밀다의 명칭을 해석하는 것은 상응하는 바대로 장차 말해야 하리니, 

‘능히 자신과 남의 안은(安隱)함 머문다’는 것은 스스로는 분노의 과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고, 남에게 고통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편안함을 얻는 것이다.

 6바라밀다를 어떻게 닦아 익히는지에 관한, 제6 수습장(6 修習章). 


▶論曰:云何應知修習如是波羅蜜多?應知此修略有五種:一現起加行修`二勝解修`三作意修`四方便善巧修`五成所作事修.

논문; 이와 같은 바라밀다를 어떻게 닦아 익히는 것으로 알아야 마땅한 것인가?. 

 수행에 대략 다섯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나니,

첫째는 현재 가행을 일으키는 현기가행수(現起加行修)이고, 

둘째는 뛰어난 이해의 승해수(勝解修)며, 

셋째는 작의수(作意修)이고, 

넷째는 훌륭한 방편의 방편선교수(方便善巧修)이며,

다섯째는 해야  일을 성취하는 소작사수(所作事修)이다.

 

此中四修如前已說.成所作事修者,謂諸如來,任運佛事,無有休息,於其圓滿波羅蜜多,復更修習六到彼岸.又作意修者,謂修六種意樂所攝愛重`隨喜`欣樂作意: 一廣大意樂`二長時意樂`三歡喜意樂`四荷恩意樂`五大志意樂`六純善意樂.

意樂의요, 어떤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마음

 중에서 네 가지 수행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의며,

‘해야  성취하는 소작사수(所作事修)’란, 모든 여래께서는 자연스러운 임운(任運)으로 불사를 짓고 휴식함이 없는 것이니, 그 원만한 바라밀다에서 다시 여섯 가지의 육도피안(六到彼岸)을 닦아 익히는 것이다. 

또한 ‘작의수(作意修)’는, 이른바 여섯 가지의 육종의요(六種意樂)에 포섭되는 바의 지극히 사랑하는 애중(愛重)ㆍ따라서 기뻐함의 수희(隨喜)ㆍ즐거워함의 흔락(欣樂)의 작의를 수행하는 것이며,

여섯 가지의 육종의요(六種意樂)란, 

첫째는 광대의요(廣大意樂)이고, 둘째는 오랜 기간의 장시의요(長時意樂)이며, 

셋째는 환희의요(歡喜意樂)이고, 넷째는 은혜를 지는 하은의요(荷恩意樂)이며, 

다섯째는  뜻의 대지의요(大志意樂)이고, 여섯째는 순수한 선의 순선의요(純善意樂)이다.


若諸菩薩,乃至若干無數大劫,現證無上正等菩提,經爾所時,一一剎那,假使頓捨一切身命,及以殑伽河沙等世界,盛滿七寶,奉施如來,乃至安坐妙菩提座,如是菩薩,布施意樂,猶無厭足.經爾所時,一一剎那,假使三千大千世界,滿中熾火,於四威儀,常乏一切資生衆具,戒`忍`精進`靜慮`般若心恒現行,乃至安坐妙菩提座,如是菩薩,所有戒`忍`精進`靜慮`般若意樂猶無厭足,是名菩薩廣大意樂.

만약 보살이 나아가 셀  없는 약간의 대겁에서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하고,  경과하는 시간의 낱낱의 찰나마다 가령, 단박에 모든 신명(身命)을 버리고, 나아가 갠지스강의 모래의 수와 같이 많은 세계를 7보로 장엄하여 여래께 공양하고, 나아가 승묘한 보리좌에 편안히 앉을지라도, 이와 같은 보시의요(布施意樂)에 보살은 오히려 싫어함이 없으며, 

그 경과하는 시기의 낱낱의 찰나마다 가령, 삼천대천세계를 타오르는 불로 가득히 채우고, 행(行)ㆍ주(住)ㆍ좌(座)ㆍ와(臥)의 사위의(四威儀)에 항상 삶을 돕는 여러 도구가 부족할지라도 계율ㆍ인욕ㆍ정진ㆍ정려ㆍ반야의 마음이 항상 현행하며,

나아가 승묘한 보리좌에 편안히 앉을지라도, 이와 같은 보살이 가진 계율ㆍ인욕ㆍ정진ㆍ정려ㆍ반야의 의요에 대하여 싫어함이 없으니, 이를 보살의 광대의요(廣大意樂)라 이름한다.

 

又諸菩薩,卽於此中,無厭意樂,乃至安坐妙菩提座,常無閒息,是名菩薩長時意樂.又諸菩薩,以其六種波羅蜜多,饒益有情,由此所作,深生歡喜,蒙益有情所不能及,是名菩薩歡喜意樂.

또한 모든 보살은 이 중에서 싫어함이 없는 무염의요(無厭意樂)로써, 나아가 승묘한 보리좌에 편안히 앉아서 잠시도 쉬지 않으니, 이를 보살의 오랜 기간의 장시의요(長時意樂)라 하며,

또한 모든 보살이 그 여섯 가지 바라밀다로써 유정을 이롭게 하고, 이 짓는 바로 인하여 깊은 환희심을 일으켜서 이익을 받는 유정이 미칠 수 없이 많으니, 이를 보살의 환희의요(歡喜意樂)라 이름한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7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5. 피입인과분(彼入因果分) 1

 

▶論曰:如是已說入所知相,彼入因果,云何可見? 謂由施`戒`忍`精進`靜慮`般若六種波羅蜜多.

云何由六波羅蜜多,得入唯識? 復云何六波羅蜜多成彼入果? 謂此菩薩,不著財位`不犯尸羅`於苦無動`於修無懈,於如是等散動因中,不現行時,心專一境,便能如理簡擇諸法,得入唯識.

▷논문; 이상과 같이 알아야  바의 상에 들어가는 입소지상(入所知相)을 설명하였다.

그것에 들어가는 인과(因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보시(施)ㆍ지계(戒)ㆍ인욕(忍)ㆍ정진(精進)ㆍ정려(靜慮, 선정)ㆍ반야(般若)의 여섯 가지의 바라밀다(波羅蜜多)에 의해서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6 바라밀다에 의거해서 유식에 들어갈  있으며? 

또한 어떻게 6 바라밀다가 유식에 들어가는 입과(入果)를 이루는 것인가? 

이른바  보살은 재물에 탐착하지 않고(施), 계율을 범하지 않으며(戒), 괴로움에 있어서 동요하지 않고(忍), 수행에 있어서 게으르지 않으며(精進), 이처럼 산란되게 동요하는 원인 가운데서 현행하지 않을 때는 오로지 정신통일의 심일경성(心一境性, 정려靜慮)에서, 능히 이치 그대로 법을 간택(簡擇)하여 유식에 들어갈  있는 것이다.

 

바라밀다(波羅蜜多), 범어 pāramitā의 음역으로서, 보통 바라밀이라 하며, 도피안(到彼岸)ㆍ도(度)로 번역한다. 미혹의  언덕에서 깨달음의  언덕에 이른다는 뜻으로서, 보살이 그것에 의지해서 닦는 행을 말한다.

심일경성(心一境性), 선정의 본질은 심일경성(心一境性) 즉 일심으로 집중하는 일심집중(一心集中)이다. 마음(心)이 대상(境)과 하나(一)가 되는 상태(性), 즉 대상에 마음이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물아일체(物我一體)를 말한다. 
선정은 기본적으로 지혜(반야, 무치)가 함께하며,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집중이 주가 되고 심(尋)의 일으킨 생각 · 사(伺)의 지속적 고찰 · 희(喜, 희열) · 낙(樂, 행복)의 4요소가 함께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菩薩依六波羅蜜多,入唯識已,證得六種淸淨增上意樂所攝波羅蜜多.是故於此,設離六種波羅蜜多,現起加行,由於聖教得勝解故,及由愛重`隨喜`欣樂諸作意故,恒常無閒相應方便,修習六種波羅蜜多,速得圓滿.

보살은 6 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유식에 들어간 후에 여섯 가지의 청정하고 매우 높은 증상의요(增上意樂)에 포함되는 바라밀다를 증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설사 6 바라밀다를 일으키는 가행(加行)을 떠날지라도,

성스러운 가르침의 성교(聖敎)에 대해서 뛰어난 이해인 승해(勝解)를 얻음으로써, 

깊이 사랑함ㆍ따라서 기뻐하는 수희(隨喜)ㆍ즐거워함의 여러 작의(作意)에 의거함으로써,

항상 끊임없이 상응하는 방편을 써서 6 바라밀다를 닦아 익혀서 속히 원만해질  있는 것이다.

ㅡ바라밀다의 수행에 관하여 설명한 제1 인과위장(因果位章).

 

▶釋曰:若於爾時,得入唯識, 卽於是時,證得淸淨增上意樂波羅蜜多.現起加行者,謂波羅蜜多現行加行.由於聖教,得勝解者,謂卽於此波羅蜜多,相應聖教,雖極甚深,而能信解.愛重作意者,謂卽於彼,見勝功德,深生愛味.欣樂作意者,謂如已到最勝彼岸,諸佛所得,淸淨意樂,願我及彼一切有情,亦當證得.

▷해석한다; 만약 그 때에 유식에 들어가게 되면,  청정하고 매우 높은 의요의 바라밀다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일으키는 가행(加行)’이란 바라밀다를 현행하게 하는 가행이며,

‘성스러운 가르침의 성교(聖敎)에 대해서 뛰어난 이해의 승해(勝解)를 얻는다’것이란, 이 바라밀다와 상응하는 성스러운 가르침이 극히 심오할지라도 능히 믿고 이해한다는 것이며,

‘깊이 사랑함의 작의(作意)’란  그것에 대해서 뛰어난 공덕을 보고 깊이 사랑스러움을 일으키는 것이며,  

‘즐거워함의 작의(作意)’란 이미 가장 뛰어난 피안에 이른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청정한 의요(意樂)와 같이, 자신과  모든 유정들 역시 장차 증득할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論曰:此中有三頌:

▷논문;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已圓滿白法, 及得利疾忍, 菩薩於自乘, 甚深廣大教,

等覺唯分別, 得無分別智, 希求勝解淨, 故意樂淸淨.

이미 청정한 백법(白法)을 원만히 하고, 예리하고 빠른 인(忍)을 얻어서,

보살은 자기 교법인 자승(自乘)의 매우 심오하고 광대한 가르침에 대해서,

평등히 오직 분별(分別)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무분별지혜를 얻으니, 

희구하고, 뛰어난해(勝解)의 청정이라. 그러므로 의요(意樂)가 청정하다네.

 

백법(白法)은 잡염을 떠난 청정한 법의 의미이다.

분별(分別)은 심식(心識)의 반연ㆍ훈습작용이다. 여기서는 유식의 이치를 증득함을 나타낸다.

 

前及此法流, 皆得見諸佛, 了知菩提近, 以無難得故.”

이전(以前)과 선정의 지위인  법류(法流)에서 모든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니, 

깨달음이 가까움을는 것이라. 증득하기 어렵지 않기 때문이라네.

 

由此三頌,摠顯淸淨增上意樂,有七種相:謂資糧故`堪忍故`所緣故`作意故`自體故`瑞相故`勝利故.

如其次第,諸句伽他,應知顯示.

  개의 게송은 전체적으로 청정하고 매우 높은 의요(意樂)를 나타낸 것으로, 일곱 가지 칠종상(七種相)이 있으니, 

이른바 자량(資糧)이기 때문이고, 감당하여 인내하는 감인(堪忍)하기 때문이며,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이기 때문이며, 작의(作意)이기 때문이며, 자체(自體)이기 때문이고, 

상서로운 모습의 서상(瑞相)이기 때문이며, 뛰어난 이익의 승리(勝利)이기 때문이다. 

게송의 모든 문구가 이러한 순서대로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釋曰:如是淸淨增上意樂,有何等相,而能攝彼波羅蜜多?爲答此問,次說三頌,顯示其相.

해석한다; 이와 같은 청정하고 매우 높은 의요(意樂)에는 어떠한 상(相)이 있어서 능히  바라밀다를 포섭하는 것인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개의 게송을 말하여  상을 나타내었다.

 

已圓滿白法者,謂先於彼勝解行地,善備資糧故,於此中,白法圓滿. 及得利疾忍者,忍有三品, 謂軟`中`上, 此中最上,名利疾忍.由是所緣,而得淸淨,次當顯示.菩薩於自乘甚深廣大教者,謂於大乘,名於自乘,此中宣說,無量甚深廣大事故. 法無我性,名甚深事,虛空藏等,諸三摩地,名廣大事.由是作意,而得淸淨,次當顯示.

‘이미 청정한 백법(白法) 원만히 한다’는 것은, 이미  승해행지(勝解行地)에서 자량을  준비한 가닭에, 여기에서는 청정한 법을 원만히 한다는 것이며,

‘예리하고 빠른 인(忍)을 얻는다’는 것은, 인(忍)에 연약함(軟)ㆍ중간(中)ㆍ최상(最上)의 삼품이 있으니,  

 중에서 최상(最上)을 예리하고 빠른 질속인(利疾忍)이라 하는 것으로,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에 의거해서 청정함을 얻는 것을 마땅히 나타내는 것이다.

‘보살은 자기 교법인 자승(自乘)의 매우 심오하고 광대한 가르침에 대해서’란,

대승을 스스로의 교법인 자승(自乘)이라 하며,  가운데 무량하고 매우 심오하며 광대한 일을 널리 잘 설하 때문이며,  

법무아(法無我)의 성품(性)을 매우 심오한 일이라고 말하고, 허공장삼마지(虛空藏三摩地)  모든 삼마지를 광대하다고 하는 것으로, 이러한 작의(作意)에 의거해서 청정함을 얻게 되는 것 마땅히 나타내는 것이다.

 

等覺唯分別,得無分別智者,謂若覺知一切諸法,唯有分別,卽能獲得無分別智.意樂自體,次當顯示. 希求勝解淨,故意樂淸淨者,欲及勝解俱淸淨,故意樂淸淨. 應知此中欲名希求, 信名勝解. 意樂瑞相,次當顯示.

‘평등히 오직 분별 뿐임을 깨닫고 무분별지혜를 얻는다’는 것이란, 일체법이 오직 분별(分別)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곧, 능히 무분별지혜를 얻는다는 뜻으로, 의요(意樂)의 자체를 마땅히 나타내는 것이며,

‘희구하고, 뛰어난 승해(勝解)의 청정이라. 그러므로 의요가 청정하네’는 욕구의 욕(欲)과 뛰어난 이해의 승해(勝解)와 함께 청정하기 때문에 의요가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욕구를 희구(希求)라고 부르고, 믿음을 뛰어난 해라고 말하는 것을 알아야 하며,  

의요(意樂)의 상서로운 모습의 서상(瑞相)을 이어서 나타내는 것이다.

 

前及此法流,皆得見諸佛者,前謂意樂淸淨位前, 此謂意樂淸淨位中,皆得見佛,是其瑞相.言法流,謂定位中.意樂勝利,次當顯示.了知菩提近,以無難得故者,謂此位中,見菩提近得,彼能得勝方便故,得不爲難.

‘이전(以前)과 선정의 지위인 이 법류(法流)에서 모든 부처님을 친견하게 된다’는 것에서,

이전(以前)은 의요가 청정하여진 단계 이전이고, 

‘이 법류(法流)’은 의요가 청정한 단계이며,

모든 부처님을 친견하게 된다는 것  상서로운 이며, 

‘법의 흐름인 법류(法流)’란 선정의 지위를 말하는 것이며, 의요의 뛰어난 이익을 나중에 나타내는 것이다.

‘깨달음이 가까움을 아는 것이라. 증득하기 어렵지 않기 때문이라네'란,

 지위에서는 깨달음이 가까이 있음을 보는 것이니, 그가 능히 뛰어난 방편을 얻었기 때문에 증득함이 어렵지 않은 것이다.

 

此三頌中,顯示淸淨增上意樂,有如是資糧`如是堪忍`如是所緣`如是作意`如是自體`如是瑞相`如是勝利.由此三頌,成立淸淨增上意樂,所有體相.

이러한 3 게송 중에서 청정하고 매우 높은 의요에는 이와 같은 자량(資糧), 

이와 같은 감당하여 인내하는 감인(堪忍), 이와 같은 인식대상인 소연(所緣), 이와 같은 작의(作意), 

이와 같은 자체(自體), 이와 같은 상서로운 모습의 서상(瑞相), 

이와 같은 뛰어난 이익의 승리(勝利)가 있음을 나타낸 것으로,

  게송에 의거해서 청정하고 매우 높은 의욕이 갖는 모든 체상(體相) 성립하는 것이다.

 

▶論曰:何因緣故,波羅蜜多,唯有六數?成立對治所治障故`證諸佛法所依處故`隨順成熟諸有情故` 爲欲對治不發趣因故,立施戒波羅蜜多.不發趣因,謂著財位及著室家.爲欲對治,雖已發趣,復退還因故,立忍進波羅蜜多. 退還因者,謂處生死,有情違犯所生衆苦,及於長時,善品加行所生疲怠.

논문; 무슨 인연으로 바라밀다는 오직 여섯 개만 있는 것인가?

다스려야 할 장애인 소치장(所治障)에 대한 다스림의 대치(對治)가 성립하기 때문이고,

모든 불법의 의지처인 소의처(所依處)를 증득하기 때문이며, 수순하여 많은 유정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다.

발심하여 나아가지 않는 원인을 다스리기 위한 까닭에 보시ㆍ지계의 바라밀다를 안립하며,

발심하여 나아가지 않는 원인이란 재물에 탐착함과 가정에 집착함이다.

비록 이미 발심하여 나아갈지라도 다시 퇴전하는 원인을 대치(對治)하기 위한 까닭에 인욕ㆍ정진바라밀다를 안립하는 것이니, 퇴전의 원인이란 생사에 처하여 유정이 잘못을 범함으로써 생기는 갖가지 고통과 오랜 기간 동안 선품의 가행으로부터 생기는 피로함이다.

 

爲欲對治,雖已發趣,不復退還,而失壞因故,立定慧波羅蜜多.失壞因者,謂諸散動及邪惡慧.如是成立對治所治障故,唯立六數.又前四波羅蜜多,是不散動因,次一波羅蜜多,不散動成就,此不散動,爲依止故,如實等覺諸法眞義,便能證得一切佛法

이미 나아가고 다시 퇴전하지 않을지라도 잃거나 무너뜨리는 실괴(失壞)의 원인을 다스리기 위한 까닭에 선정바라밀다와 반야바라밀다를 건립한 것이니,

잃고 무너뜨리는 원인은 이른바 모든 산란된 움직임의 산동(散動)과 사악한 지혜의 사악혜(邪惡慧)이다.

이와 같이 다스려야 할 장애에 대한 다스림을 성취하기 때문에 오직 여섯 이라는 숫자를 건립한 것이며,

또한 앞의 보시(報施)ㆍ지계(戒)ㆍ인욕(忍)ㆍ정진(精進)의 4 바라밀다는 산란되게 움직이지 않음의 원인이고,

그 다음의 정려(靜慮, 선정) 바라밀다는 산란되게 움직이지 않음을 성취하는 것이니, 이것이 산란되게 움직이지 않는 의지가 되는 까닭에,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평등한 일체법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서 능히 모든 불법을 증득하는 것이다.

ㅡ바라밀다의 숫자를 여섯 가지로 안립하는 이유를 밝힌, 제2 성립육수장(成立六數章).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6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6

 

▶論曰:復有教授二頌,如『分別瑜伽論』說:

▷논문; 다시 가르침의  게송이 있으니, '분별유가론(分別瑜伽論)'에서 설하신 바와 같다.


“菩薩於定位, 觀影唯是心, 義想旣滅除, 審觀唯自想.

보살은 선정의 지위인 정위(定位)에서 영상이 오직 마음일 뿐이라는 것을 관찰하고,

대상(義)의 표상인 의상(義想)이 이미 소멸되어서, 

오로지 스스로 표상인 자상(自想) 뿐라는 것을 살펴서 관찰하네.


如是住內心, 知所取非有, 次能取亦無, 後觸無所得.”

이렇게 해서 내심(內心)에 안주한다면, 인식대상인 소취(所取)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되니, 

다음에 인식주체인 능취(能取) 역시도 비존재인 무(無)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이후에 무소득에 이르게 된다네.


▶釋曰:爲入眞觀,授以正教, 於此義中,說其二頌. 菩薩依定位, 觀影唯是心者, 謂觀似法似義影像,唯是其心. 誰能觀?謂菩薩.在何位?於定位. 義想旣滅除,審觀唯自想者,謂此位中,義想旣遣,審觀似法似義之想,唯是自心.

▷해석한다; 참된 관찰인 진관(眞觀)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바른 가르침의 정교(正教)의 뜻으로  게송을 설한 것이다. 

‘보살은 선정의 지위인 정위(定位)에서 영상이 오직 마음뿐임을 관찰한다’는 것은, 법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한 영상이 오직  마음일 뿐이라고 관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누가 능히 관찰하는가? 보살이다. 

어떤 지위에 있는 것인가? 선정의 지위인 정위(定位)에서 이다. 

‘대상의 표상인 의상(義想)이 이미 소멸되고 오직 스스로 표상인 자상(自想) 뿐임을 살펴서 관찰하네’란,

 지위에서 대상의 표상인 의상(義想)은 이미 없어지고, 법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대상(義)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표상이 오직 자기 마음일 뿐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如是住內心者,如攝自心住於無義,卽是令心住於內心.知所取非有者,謂了所取義,無所有.

次能取亦無者,由所取義, 旣是非有, 故能取心, 能取之性,亦不得成. 後觸無所得者,謂從此後,觸證眞如,由此眞如無所得故,名無所得.

‘이렇게 해서 내심(內心) 안주하면’이란, 이른바 스스로의 마음을 거두어 대상의 비존재인 무의(無義)에 머무는 것이  마음으로 하여금 내심(內心) 안주하게 하는 것이다.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는 것은 취착된 인식대상의 소취(所取)인 대상(義)에는 존재하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라는 것을 아는 것이며,

‘다음에 인식주체인 능취(能取) 역시도 비존재인 무(無)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이른바 취착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이미 비존재인 비유(非有)이기 때문에 취착된 인식주체의 마음인 능취심(能取心)이 능히 취하는 성품도 역시 성립될  없다는 것이며,

‘이후에 무소득에 이른다’는 것은 이것으로부터 나중에 진여를 접촉하여 증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진여는 무소득에 의거하기 때문에 무소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論曰:復有別五現觀伽他,如『大乘經莊嚴論』說:

▷논문; 다시 별도로 현관에 대한 다섯 개의 게송이 있으니, '대승경장엄론(大乘經莊嚴論)'에서한 바와 같은 것이다.

ㅡ제2 진실품의 게송에 상당하는 것으로, 5() 게송으로 되어 있다.


“福德智慧二資糧, 菩薩善備無邊際, 於法思量善決已, 故了義趣唯言類.

복덕과 지혜의  가지 자량(資糧)을, 보살은  갖추어서 끝이 없으니, 

법에 대해서 사유하여  결택하므로, 의미의 취지인 의취(義趣)는 오직 언어의 종류라고 안다네.

ㅡ이 게송은 자량위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若知諸義唯是言, 卽住似彼唯心理, 便能現證眞法界, 是故二相悉蠲除.

만약 모든 의미(義)가 오직 언어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에 비슷하게 현현하며 오직 마음이라는 도리에 안주하나니, ㅡ가행위에 대한 것이다.

문득 능히 참다운법계(眞法界)를 현전에 증득하게되 되어 이상(二相)을 모두 없애게 된다네.

 

體知離心無別物, 由此卽會心非有, 智者了達二皆無, 等住二無眞法界.

자체는 마음을 떠나서 별도의 사물이 없음을 아나니, 이로 인하여 마음이 곧 비유(非有)라는 것을 안다네.

지혜로운 이는  가지가  비유(非有)라는 것 통달하여

평등히 이무(二無)의 진법계(眞法界)에 안주한다네.

ㅡ위 게송의  문구와  게송은 통달위인 견도(見道) 관한 내용이다.


慧者無分別智力, 周遍平等常順行, 滅依榛梗過失聚, 如大良藥消衆毒.

지혜로운 이는 무분별지혜의 힘에 의해서, 널리 두루 평등하여 항상 수순하게 행하나니, 

의지처의 무성하여 막힌 듯한 과실의 덩어리를 소멸함이 훌륭한 양약이 갖가지 독을 없애는 것과 같다네.

ㅡ이 게송은 수습위인 수도(修道) 대한 것이다.


佛說妙法善成立, 安慧幷根法界中, 了知念趣唯分別, 勇猛疾歸德海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묘법을  성립하여, 지혜와 함께 근본 법계에 안주하나니, 

취지를 생각하는 것은 오직 분별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용맹하고 빠르게 공덕 바다의 언덕으로 돌아간다네.

ㅡ이 게송은 구경위에 관한 내용이다.


▶釋曰:復有現觀伽他,如『經莊嚴論』說.其中難解於此顯示.福德智慧二資糧,菩薩善備,無邊際者,資糧有二種:一福德資糧`二智慧資糧.謂施等三波羅蜜多,是福德資糧,第六般若波羅蜜多,是智慧資糧,精進波羅蜜多,二資糧攝.何以故?若爲智慧,而行精進,是智慧資糧,若爲福德,而行精進,是福德資糧.

▷해석한다; 다시 현관의 게송이 있으니, '대승경장엄론'에서 설한 것과 같으며, 그 중에서 알기 어려운 것을 여기에서 나타내 보인 것이다.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보살은 잘 갖추어 끝이 없다’는 것에서,

자량(資糧)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복덕의 자량이고, 둘째는 지혜의 자량이다.

보시ㆍ지계ㆍ인욕 바라밀다는 복덕의 자량이고, 여섯 번째의 반야바라밀다는 지혜의 자량이며,

정진바라밀다는 두 가지의 자량에 포함되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만약 지혜를 위하여 정진을 행한다면 이것은 지혜의 자량이고, 복덕을 위하여 정진을 행한다면 이것은 복덕의 자량이기 때문이다.

 

如是靜慮波羅蜜多,亦通二種,若緣無量,而修靜慮,是福德資糧,餘是智慧資糧.如是資糧,是誰所有?謂諸菩薩.長遠難度,名無邊際,如無邊語,非無有邊,但以多故,得無邊稱,此亦如是.

이와 같이 정려바라밀다도 역시 두 가지에 통하나니, 만약 네 가지의 무량한 마음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의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를 반연하여 정려를 닦으면 이것은 중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므로 복덕의 자량이 되고,

나머지의 아공ㆍ법공 등을 반연할 때에는 지혜의 자량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량은 누구의 소유인가? 모든 보살이다.

매우 멀어서 건너기 어려운 것을 끝이 없다는 무변제(無邊際)라 말하는 것에서 ‘끝이 없다는 무변(無邊)’이란, 끝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많기 때문에 끝이 없다고 부르는 것과 같으니, 이 역시도 그와 같은 것이다.


於法思量,善決已者,要由定後思惟諸法,方善決定,非餘所能.故了義趣,唯言類者,謂了知諸義,唯意言爲因.若知諸義唯是言,卽住似彼,唯心理者,謂若了知似義顯現,唯是意言,卽住似義,唯心正理,便能現證眞法界.是故二相悉蠲除者, 謂從此後現證眞如,永離所取`能取二相,如入現證,次當顯示.

‘법에 대해서 사유하여  결택하니’는 반드시 선정에 의거하여서 제법을 사유하여 비로소  결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다른 것이  바가 아니기 때문이며, 

‘의미의 취지인 의취(義趣)는 오직 언어의 종류라고 안다’는 것이란, 모든 의미가 오직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을 원인으로 삼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만약 모든 의미(義)가 오직 언어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과 비슷하게 현현하며 오직 마음이라는 도리에 안주하여’란, 만약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한 것은 오직 생각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며, 오직 마음이라는 바른 이치에 안주한다는 것이며, 

‘문득 능히 참다운 진법계(眞法界)를 현전에 증득하게 되어 이상(二相)을 모두 없애게 된다네.’란,

이것 이후에 진여를 현전에 증득하고, 영원히 취착된 인식대상의 소취(所取)와 인식주체인 능취(能取)  가지의 상을 떠나는 것을 말하며, 현전에 증득함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것이다.

 

體知離心,無別物,由此卽會心非有者,體知離心無所緣義,彼無有故,卽會能緣心,亦非有.智者了達二皆無者,謂諸菩薩了達此二悉皆是無.等住二無眞法界者,謂平等住離義離心眞實法界.慧者無分別智力者,謂諸菩薩,無分別智,所有勢力.周遍平等,常順行者,於平等中,隨順而行,觀契經等,一切諸法,猶如虛空, 性平等故.內外諸法,皆如是觀,故名周遍. 常者,時恒. 滅依榛梗過失聚,如大良藥消衆毒者,滅謂除滅,依謂所依,卽所依中,雜染法因極難了故.如溪谷林榛梗難入.過失聚者,是雜染法熏習自性.

‘자체는 마음을 떠나서 별도의 사물이 없음을 아나니, 이로 인하여 마음이 곧 비유(非有)라는 것을 안다네.’란,

자체는 마음을 떠나서 인식대상인 대상인 소연의(所緣義)가 없음을 알고, 그것이 비존재인 비유(非有)이기 때문에  인식주체인 마음 역시 비존재인 비유(非有)라는 것을 아는 것이며,

‘지혜로운 이는 두 가지가 다 비유(非有)라는 것을 통달한다’는 것은, 보살이   가지는  비존재인 비유(非有)임을 통달하는 것이며, 

‘평등히 이무(二無)의 진법계(眞法界)에 안주한다’는 것이란, 평등히 대상을 떠나고 마음을 떠난 참된 법계에 안주함이며,

‘지혜로운 이는 무분별지혜의 힘에 의해서’는 모든 보살의 무분별지혜가 갖는 세력을 말하며,  

‘널리 두루 평등하여 항상 수순하게 행한다’는 것이란, 평등 안에서 수순하여 행하고, 계경 등의법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관찰하니, 본성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내부와 외부의법 모두를 이렇게 관찰하기 때문에 ‘널리 두루의 주변(周遍)’이라 말하며,

‘항상한 상(常)’은 시간의 항상함이며,

‘의지처의 무성하여 막힌 듯한 과실의 덩어리를 소멸함은 훌륭한 양약이 갖가지 독을 없앰과 같네’에서,

‘소멸’은 제거하는 것을 말하고, ‘의(依)’는 의지처인 소의(所依)이다. 

소의(所依, 의지처) 안의 잡염법의 원인은 매우 알기 어렵기 때문에, 계곡의 숲이 무성하여서 들어가기 어려운 것과 같으며,

‘과실의 덩어리’는 잡염법으로서 훈습된 자성이다.


佛說妙法善成立,安慧幷根,法界中者,謂由佛教善安其慧,置眞如中,及能緣彼根本心中.根本心者,謂緣如來所有正教,摠爲一相,應知卽是無分別心.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묘법을 잘 성립하여 지혜를 아울러 근본과 법계 안에 안주한다’는 것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지혜를 진여와 능히 그것을 반연하는 근본 마음 안에 잘 안주시키기 때문이니,

‘근본 마음’은 여래의 모든 바른 가르침을 반연하여 총체적으로 하나의 상으로 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무분별의 마음이라고 알아야 한다.

 

了知念趣唯分別者,謂彼安住根本心已爲說正教,由後得智,念諸義趣,知此念趣唯是分別.勇猛疾歸德海岸者,謂諸菩薩,由無分別智及後得智巧方便故,速趣佛果功德海岸.如是五頌摠略義者,謂第一頌顯資糧道`第二初半顯加行道`後半第三顯於見道`第四一頌顯於修道`第五一頌顯究竟道.

‘취지를 생각함은 오직 분별임을 안다’는 것이란, 그 근본 마음에 안주하고 나서, 바른 가르침을 설하기 위해서 후득지에 의거해서 모든 의취(義趣)를 생각하나, 이 취지를 생각하는 것은 오직 분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며,

용맹하고 빠르게 공덕 바다의 언덕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란, 모든 보살은 무분별지와 후득지의 훌륭한 방편에 의거함으로써 불과(佛果)의 공덕 바다의 언덕에 조속히 도달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다섯 개의 게송의 뜻를 간략히 말한다면,

첫 번째 게송은 자량도(資糧道)를 나타내고,

두 번째 게송의 전반부는 가행도(加行道)를 나타내며, 후반부와 세 번째 게송은 견도(見道)를 나타니며,

네 번째 게송은 수도(修道)를 나타내고, 다섯 번째 게송은 구경도(究竟道)를 나타낸 것이다.


攝大乘論釋卷第六 終 섭대승론석 제 6권을 마침.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6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5

 

▶論曰:如是菩薩,已入於地`已得見道`已入唯識,於修道中,云何修行? 於如所說,安立十地,攝一切經,皆現前中,由緣摠法出世後得止觀智故,經於無量百千俱胝那庾多劫數修習故,而得轉依.爲欲證得三種佛身,精勤修行.

▷논문; 이렇게 해서 보살은 10지(地) 중에 들어가서 견도(見道)를 얻어 유식의 이치에 들어간다.

수도(修道) 중에서는 어떻게 수행하여야 하는가? 

말한 바와 같이 안립된 10지의 모든 경전을 포섭하여 현전하는 중에서, 총체적인 총법(摠法)을 반연하는 출세의 후득지관의(後得止觀) 지혜에 의거하고, 무량한 백천 구지(俱胝, 억億) 나유다(那庾多)겁을 지나서 누누이 닦아 익힘으로써 전의(轉依)를 얻어 삼불신(三佛身)을 증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다.

5 중에서 통달위인 견도(見道) 수습위인 수도(修道) 수행을 설명하였다.

 

견도(見道)는 무루(無漏)의 바른 지혜인 정지(正智)가 처음으로 진리를 비추는 때를 말한다. 초지(初地)의 입심(入心)에서 존재한다.

구지(俱胝), 범어 koṭi의 음역어로서, 억(億)이라 번역하며, 인도에서 쓰던 숫자의 단위이다.

나유다(那庾多), 범어 nayuta의 음역으로서 매우 큰 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천만(千萬) 또는 천억(千億)이라 한다.

 

▶釋曰:於如所說安立十地者,謂於隨說安立菩薩十種地中.由緣摠法者,謂緣摠相,非分別緣.

해석한다; ‘말한 바와 같이 안립된 10지’란, '십지경(十地經)'에서 말씀하신 바에 따라 안립 보살의  가지 지위를 말하며,

‘총체적인 총법(摠法) 반연한다’는 것은 총체적인 총상(摠相)을 반연하는 것으로, 분별해서 반연하지 않는, 즉 하나하나의 상을 각각 별도로 반연하지 않고, 전체를 하나의 상으로 해서 그 공통된 상, 즉 진여를 반연하는 것이다.

 

言出世者,無分別智.後得卽是能成立智,此不應說唯是世閒,由於世閒,未積習故;亦不應說唯出世閒,由隨世閒,而

現前故,由是因緣,不可定說.而得轉依者,由緣摠智,故得轉依.爲欲證得三種佛身,精勤修行者,謂我當證三種佛身,故勤修行.

‘출세간’이란 무분별지혜를 말하고,

‘후득’은 능히 성립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즉 후득지(後得智)가 일체법의 차별상을 능히 성립하는 지혜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마땅히 오직 세간이라고 말해서는  되는 것으로, 세간에 대해서 아직 쌓아 익히지 않은 때문이며,

역시 오직 출세간이라고 말해서도  되는 것이니, 세간을 따라 현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후득지는 세간의 지혜 또는 출세간의 지혜의 어느 한 가지라고 결정적으로 말할  없는 것이다.

‘전의를 얻는다’는 것은 총체적인 총상(摠相) 반연하는 지혜에 의거함으로써 전의를 얻는 것을 말하며,

‘세 가지불신을 증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한다’는 것이란, 스스로가 장차 삼불신을 증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현관(現觀),문자 그대로의 뜻은 '앞에 있는 경계 즉 대상을 관(觀)한다'는 뜻인데, 산스크리트어 원어 아비삼마야(abhisamaya)는 아비사미(abhisami)와 동의어로, 서로에게 다가가다(approach together), 합치다 또는 합일하다(come together) 또는 만나다(meet at)를 뜻한다. 즉, 지혜와 대상이 바로 직접 만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관(現觀)은 무루의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 즉 명료한 이해(clear understanding), 각(覺, Buddh) 즉 깨달음(Buddh, realization)이라고도 정의된다.

불교에서 현관(現觀)이라고 할 때, 그 대상은 진리를 말하는데, 부파불교의 4제현관(四諦現觀)과 대승불교의 6현관(六現觀)이 있다. 

 

ㅡ이하는 성문과 보살의 현관(現觀) 차이를 11가지로 설명한다.

▶論曰:聲聞現觀`菩薩現觀,有何差別?謂菩薩現觀,與聲聞異,由十一種差別應知. 一由所緣差別,以大乘法,爲所緣故;二由資持差別,以大福智二種資糧,爲資持故;三由通達差別,以能通達補特伽羅法無我故;四由涅槃差別,攝受無住大涅槃故;五由地差別,依於十地而出離故;六七由淸淨差別,斷煩惱習,淨佛土故;八由於自他得平等心差別,成熟有情加行無休息故;九由生差別,生如來家故;十由受生差別,常於諸佛大集會中,攝受生故;十一由果差別,十力`無畏`不共佛法無量功德果成滿故.

논문; 성문의 현관(現觀)과 보살의 현관(現觀)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보살의 현관과 성문의 현관에 11가지 차이가 있으며, 이에 의한 것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번째는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의 차이에 의하는 것이니, 대승법으로써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을 삼기 때문이며,

 번째는 자량(資糧)을 지니는 것의 차이에 의하는 것이니,  복과 지혜의  가지 자량으로써 깨달음의 바탕 삼기 때문이며,

 번째는 통달의 차이에 의하는 것이니, 능히 보특가라의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에 통달하기 때문이며,

 번째는 열반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생사와 열반에 머무름이 없는 대열반을 섭수하기 때문이며,

다섯 번째는 지위의 차이에 의하는 것이니, 10지에 의지해서 벗어나기 때문이며,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는 청정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번뇌와 습관을 끊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며,

여덟 번째는 자신과 남에 대해서 평등심을 얻는 차이에 의한 것이니, 유정을 성숙시키는 가행은 휴식함이 없기 때문이며,

아홉 번째는 태어남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여래가(來家故)에 태어나기 때문이며,

 번째는 생을 받는 차이에 의한 것이니, 항상 모든 부처님의  법회에서 생을 섭수하기 때문이며,

열한 번째는 증과(果)의 차이에 의한 것이니, 10력(力)ㆍ네 가지 두려움이 없음의 사무외(四無畏)ㆍ18 불공법(不共法)인 부처님법의 무량한 공덕의 증과를 원만히 이루기 때문이다.

 

십력(十力), 부처님만의 열 가지 지혜의 힘으로, 첫째, 바른 도리와 그렇지 않은 도리를 변별하는 지혜의 힘.

둘째, 선악업과 그 과보를 여실하게 아는 지혜의 힘.

셋째, 4선(禪)ㆍ8해탈(解脫)ㆍ3삼매(三昧)ㆍ8등지(等持) 등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넷째, 중생의 근기의 고하(高下) 우열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다섯째, 중생의 여러 가지 의욕 성향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여섯째, 중생계와 그 성류(性類)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일곱째, 어떤 수행에 의해서 어떤 도에 나아가는가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여덟째, 중생의 숙명(宿命)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아홉째, 중생의 미래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

열째, 모든 번뇌가 다한 것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사무외(四無畏), 부처님께서 10력(力)을 갖추셨으므로 다음과 같은 두려움이 없음을 말한다.

① 모든 것을 아는 분인 ‘일체지자’로서의 자신감, ② 모든 번뇌를 극복했다는 자신감,

③ 모든 장애를 극복한 까닭에 수행에 장애되는 길을 말할 수 있는 자신감,

④ 모든 괴로움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말할 수 있는 자신감.

18 불공법(不共法)이라 함은 범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라한ㆍ벽지불 또는 보살과도 공통되지 않는 부처님 특유의 법이다. 이에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3염주(念住)ㆍ대비(大悲)의 18가지가 있다.

 

▶釋曰:由涅槃差別者,以菩薩現觀攝受無住大般涅槃,聲聞不爾.由淸淨差別者,以菩薩現觀永斷煩惱及諸習氣,能淨佛土,聲聞不爾.

해석한다; ‘열반의 차이에 의거한다’는 것은 보살의 현관은 생사와 열반에 머물지 않는 대열반을 섭수하지만 성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며,

‘청정의 차이에 의해서’란 보살의 현관은 번뇌와 모든 습기를 영원히 끊고 능히 불국토를 청정케 하지만 성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論曰:此中有二頌:

논문; 이러함에 대하여 두 게송이 있으니, 

 

“名事互爲客, 其性應尋思, 於二亦當推, 唯量及唯假.

명칭(名)과 사물(事)은 서로 객(客)이 되나니,  속성을 마땅히 심사(尋思, 사색)해야 하리니,

오로지 인식작용인 유량(唯量)과 오로지 가립인 유가(唯假)라는 둘에 대해서도 마땅히 추리해야 하네.

 

實智觀無義, 唯有分別三, 彼無故此無, 是卽入三性.”

진실된 실지(實智)는 대상의 비존재인 무의(無義)로서, 오직  가지의 분별(分別)이 있을 뿐임을 관찰하네.

저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도 없는 것이니, 이것이 성(三性)에 들어가는 것이라네.

진제 역본인 진본(陳本)이나 급다(笈多)ㆍ행구(行矩) 역본인 수본(隋本)에는 3무성(無性)으로 되어 있다.

 

▶釋曰:將入眞觀,故說二頌.名事互爲客,其性應尋思者,謂名於事爲客,事於名爲客,非稱彼體故.

해석한다; 장차 참된 관찰에 들어가기 위해서 두 개의 게송을 말하였다.

‘명칭(名)과 사물(事)이 서로 객(客)이 되니, 그 속성을 마땅히 사색해야 하네’란,

명칭(名)은 명칭에 의지해서 나타내어지는 사상(事相), 즉 사물(事)에 대해서 객(客)이 되고, 사물(事)은 명칭(名)에 대해서 객(客)이 되는 것이니, 그것의 자체에 계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명칭(名)과 사물(事)이 서로 객관이 되어 각각 다르게 떨어져 있는 것은 명칭(名)과 사물(事)이 하나의 체(體)가 아니기 때문이다.

 

由定而觀,故名尋思. 於二亦當推唯量及唯假者,應當推尋義之自性 `差別竝無,唯有識量,唯有自性`差別假立.

선정에 의거해서 관찰하기 때문에 심사(尋思, 사색)라고 하는 것이며,

‘오로지 인식작용인 유량(唯量)과 오로지 가립인 유가(唯假)라는 둘에 대해서도 마땅히 추리해야 하네.’란,

마땅히 대상의 자성과 차별도 모두 비존재인 무의(無義)이고, 오직 식의 인식작용만이 있고, 오직 자성과 차별의 가립(假立)만이 있다고 추리해야 하는 것이다.

 

言實智者,應知卽是如實遍智,謂由四種尋思爲因,發生四種如實遍智.

‘참다운 지혜의 실지(實智)’란, 곧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여실편지(如實遍知)이다.

네 가지의 심사(尋思, 사색)을 원인으로 함으로써 발생되는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네 가지의 지혜인 사여실편지(四如實遍知)인 것이다.

 

所言觀無義唯有分別三者,謂觀於義本無所有,唯有三種虛妄分別,謂名分別`自性分別`差別分別. 彼無故此無者,謂義無故,分別亦無.何以故?若有所分別義,可有能緣分別;由義無所有故,當知分別亦無.

‘대상의 비존재인 무의(無義)로서 오직 세 가지의 분별(分別)이 있을 뿐임을 관찰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대상(義)에 대해서 본래부터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오직 세 가지의 허망분별이 있을 뿐임을 관찰하는 것이니,

명칭의 분별인 명분별(名分別), 자성분별(自性分別), 차별분별(差別分別)이 그 세 가지이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도 없다’는 것은 대상(義)이 없기 때문에 분별(分別) 역시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만약 분별되는 대상(義)이 존재한다면 인식의 주체인 분별도 존재해야 하는 것이나, 대상(義)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이기 때문에 분별 역시도 없는 것이다.

 

是卽入三性者,謂於此中,悟入三性,觀見名事互爲客故,卽是悟入遍計所執性.觀見二種本無有義,唯有分別量,唯有名自性`差別假立故,卽是悟入依他起性. 亦不觀見此分別故,卽是悟入圓成實性.如是名爲悟入三性.

‘이것은 곧 세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중에서 세 가지 자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명칭(名)과 사물(事)이 서로 객(客)이 됨을 관찰함으로써 곧 변계소집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며, 

명칭(名)과 사물(事), 두 가지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고, 오직 분별의 인식작용이 있을 뿐이며, 오직 명칭의 명분별과 자성분별과 차별분별의 가립이 있을 뿐임을 관찰함으로써 곧 의타기자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며,

역시 이러한 분별도 관찰하지 않음으로써 곧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ㅡ앞에서 능히 반연하고 분별하는 식을 인정하여 명칭의 자성과 차별을 가립했는데, 다시 나아가  인식주체인 분별식마저도 보지 않는, 경식구민(境識俱泯)이면 아공ㆍ법공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세 가지 자성인, 삼성(三性)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6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4

 

是諸菩薩,所緣名類略有十種:一法名,謂眼等;二補特伽羅名,謂我等;三法名,謂十二分教;四義名,謂此十二分教所詮諸義;五略名,謂一切法,爲無爲等;六廣名,謂色受等,及虛空等;七姓名,謂阿字爲初,訶字爲後;

이러한 보살의 소연명(所緣名, 인식대상의 명칭)의 종류로서 대략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의 명칭인 법명(法名)으로, 눈 등을 말하며,

둘째는 보특가라의 명칭(名)이니, 이른바 자아의 아(我) 등이며,

셋째는 교법의 법명(法名)이니, 12분교(分敎)를 말하며,

넷째는 의미(義)의 명칭(名)이니, 이른바 이 12분교로 말해지는 모든 것의 뜻이며, 

다섯째는 대략(略)의 명칭(名)이니, 일체법ㆍ유위법ㆍ무위법 등을 말하며,

여섯째는 자세함(廣)의 명칭(名)이니, 이른바 물질(色)ㆍ감수작용(受) 등과 허공 등이며,

일곱째는 본성(性)의 뜻이니, 아자(阿字)를 최초로 삼고 하자(訶字)를 마지막으로 삼는 것이다.

ㅡ범어의 37가지 자모(字母) 중에서 최초의 a자와 최후의 자를 들고 중간은 생략하였다.

 

八不淨名,謂諸異生;九淨名,謂諸見諦;十究竟名,謂一切法摠相所緣,卽是二智所緣境界.

謂出世智及後得智, 以一切法眞如實際,爲所緣故,以一切法種種相別,爲所緣故, 如十地等.

여덟째는 부정(不淨)의 명칭(名)이니, 이른바 모든 범부이며,

아홉째는 청정(淨)의 명칭(名)이니, 진리를 본 성자들을 말하는 것이며,

열째는 구경(究竟)의 명칭(名)이니, 이른바 일체법의 총체적인 총상(摠相)의 소연(所緣, 인식대상)으로, 이것은 곧 두 가지 지혜인 이지(二智)의 소연경계(所緣境界, 인식대상의 경계)이다.

즉, 세간을 벗어나는 출세지(出世智)와 후득지(後得智)는 일체법의 진여 실제로써 소연(인식대상)을 삼기 때문이고,

일체법의 갖가지 상의 차이로써 소연(인식대상)을 삼기 때문이니, 10지(地) 등과 같은 것이다.

ㅡ10지의 관법(觀法) 중에서는 지위마다 각기 다른 법을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此中意取,於一切義摠相緣智所緣境界,如是品類,是諸菩薩,名所行別.

이러한 의취(意取)는 일체의 모든 뜻과 총상(摠相)을 반연하는 지혜의 소연경계(所緣境界, 인식대상의 경계)이며,

이상과 같은 품류가 모든 보살의 명칭(名)이 행하는 바의 차별인 것이다.

 

▶論曰:如是菩薩,悟入唯識性故,悟入所知相;悟入此故,入極喜地,善達法界,生如來家,得一切有情平等心性,得一切菩薩平等心性,得一切佛平等心性,此卽名爲菩薩見道.

▷논문; 보살은 이와 같이 유식성(唯識性)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알아야  바의 소지상(所知相) 깨달아 들어가나니,

이러함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극희지(極喜地)에 들어가게 되고, 

법계를  통달하게 되며, 여래가(如來家)에 태어나고, 모든 유정과 평등한 심성을 얻으며, 

모든 보살과 평등한 심성을 얻고,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심성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를 보살의 견도(見道)라 이름하는 것이다.

 

▶釋曰:生如來家者,由此能令諸佛種性,無斷絕故.得一切有情平等心性者,由作是思;如我自身,欲般涅槃,一切有情,亦如是故.得一切菩薩平等心性者,由得菩薩等意樂故.得一切佛平等心性者,由此位中,得佛法身,證得此故,得一切佛平等心性.

의요(意樂), 어떤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마음

해석한다; ‘여래가(如來家)에 태어난다’는 것은 이로 인하여 능히 모든 부처님의 종성이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유정과 평등한 심성을 얻는다’는 것은,  스스로가 반열반하고자 하는 것과 같이, 모든 유정들 역시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과 평등한 심성을 얻는다’는 것은 보살과 평등한 의요(意樂)를 얻는 때문이며,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심성을 얻는다’는 것은  지위에서 부처님의 법신을 얻고, 이를 증득함으로써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심성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한다.

 

又得一切有情平等心性者,謂證自他平等性故,如於自身,欲盡衆苦,於他亦爾.得一切菩薩平等心性者,謂與一切菩薩,意樂加行,皆平等故.得一切佛平等心性者,見彼法界,與己法界,無差別故.

또한, ‘모든 유정과 평등한 심성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과 남이 평등한 성품임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에게 있는 갖가지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것과 같이, 남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며,

‘모든 보살의 평등한 심성을 얻는다’는 것은, 의요(意樂)와 가행(加行)이 보살과 모두 평등한 때문이며,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심성을 얻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법계와 자신의 법계가 차이가 없음을 보기 때문이다.

ㅡ다른 뜻을 서술한 것이.

 

▶論曰:復次爲何義故,入唯識性?由緣摠法,出世止觀智故,由此後得種種相識智故. 爲斷及相阿賴耶識諸相種子`爲長能觸法身種子

논문; 또한 어떤 의미에 의거해서 유식성(唯識性)에 들어가는 것인가? 

총체적인 총법(摠法)을 반연하는 출세간의 지관(止觀)의 지혜에 의거하기 때문이고, 

후득(後得)의 갖가지 상식(相識)의 지혜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상(相)인 아뢰야식의 모든 상의 종자를 단절하기 위해서, 능히 법신에 이르는 종자를 증장하기 때문이다. 

ㅡ여기서 상(相) 아뢰야식의 삼상(三相)인 자상(自相)ㆍ고상(果相)ㆍ인상(因相) 가운데에서 원인의 인상(因相)을 말하는 것이.

 

`爲轉所依`爲欲

소의(所依,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이며,

ㅡ소의(所依, 의지처)의 식을 전환하여 반야의 지혜를 이루는 전의(轉依)인 것이다.

 

證得一切佛法`爲欲證得一切智智,入唯識性.

모든 불법을 증득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얻고자 함으로써 유식성에 들어가는 것이다.

 

又後得智,於一切阿賴耶識所生,一切了別相中,見如幻等性無倒轉.是故菩薩,譬如幻師,於所幻事,於諸相中,及說因果,常無顚倒.

또는 후득지(後得智)는 아뢰야식이 일으키는 모든 요별(了別)과 상(相) 있어서, 요술(幻) 등의 성품과 같이 전도됨이 없이 보는 것이다. 

이러함으로 인하여, 보살은 비유하면 요술쟁이가 요술로 일으킨 환사(幻事)와 같이 모든 상과 인과를 말함에 있어서 항상 전도됨이 없는 것이다.

 

▶釋曰:由緣摠法,出世止觀智故者,謂由止觀所顯智故.爲斷及相阿賴耶識諸相種子者,此中及相是及因義,於阿賴耶識中,諸雜染法種子,名阿賴耶識諸相種子.復擧相者,爲欲顯示卽彼種子,是所緣相. 如是說已,顯彼種子,因果俱斷.

해석한다; ‘총체적인 총법(摠法) 반연하는 출세간의 지관(止觀)의 지혜에 의거하기 때문’이란, 이른바 지관에서 나타나는 지혜에 의거하기 때문이며,

‘상(相)인 아뢰야식의 모든 상(相)의 종자를 단절하기 위해서’에서, ‘상(相)’은 원인의 뜻이다. 아뢰야식 안의 모든 잡염법의 종자를 아뢰야식의 모든 상의 종자라고 하는 것으로, 다시 상(相)을  것은   종자가 소연상(所緣相, 인식대상의 상)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니, 이렇게 말함으로 인해서  종자의 원인과 결과를 함께 단절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ㅡ상이란 언어에 의지해서 능훈(能熏) 결과의 상을 보이는 것이므로 다음에 종자의 원인과 결과를 함께 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若無分別智,斷一切障,證得佛法,此後得智,復何所用? 無分別智,不能宣說諸因果法,無分別故. 由是因緣,須後得智,宣說所有諸因果法,常無顚倒,譬如幻師, 於所幻事.

만약 무분별지혜에 의해 모든 장애를 끊고 불법을 증득한다면,  후득지(後得智)가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가? 

무분별지혜는 모든 인과법을 널리 말할  없는 것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후득지(後得智)가 필요로 하며, 모든 인과법을 널리 말하는  항상 전도되지 않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요술쟁이가 요술로 만든 사물과 같은 것이다.

 

於一切阿賴耶識所生者,謂阿賴耶識爲因.一切了別相中者,謂識爲因,見相分中,由後得智,見如幻等,及宣說時,皆無顚倒.

‘아뢰야식이 일으킨 모든 것’이란 아뢰야식이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모든 요별과 상에 있어서’란, 식이 원인이 되는 견분과 상분을 말하는 것으로,

후득지에 의거해서 요술 등과 같이 보며, 널리 설할 때에 전도됨이 없는 것이다.

 

▶論曰:於此悟入唯識性時,有四種三摩地,是四種順決擇分依止. 云何應知?

▷논문; 이 유식성에 깨달아 들어갈   가지의 삼마지가 있으며, 이것은  가지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의지이니, 어떻게 알아야 하는 것인가? 

 

순결택분(順決擇分),난위(煖位)ㆍ정위(頂位)ㆍ인위(忍位)ㆍ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의 네 가지 선근의 지위이며,

자량위(資糧位)ㆍ가행위(加行位)ㆍ통달위(通達位)ㆍ수습위(修習位)ㆍ구경위(究竟位)의 5위(位) 중에서 가행위(加行位)는 통달위인 견도(見道)에 수순하고 그것을 이끌어 내는 단계이므로 순결택분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진실결택분에 수순하고, 또한 무루의 지혜가 생겨나서 진리를 보는 통달위에 가까이 준비하기 때문이다.

 

應知由四尋思,於下品無義忍中,有明得三摩地,是煖順決擇分依止.於上品無義忍中, 有明增三摩地, 是頂順決擇分依止.

네 가지 사색의 4심사(四尋思)에 의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나니, 

하품(下品)의 대상이 없는 무의인(無義忍) 중에 명득삼마지(明得三摩知)가 있으니, 이것은 난위(煖位)의 순결택분의 의지이며,

상품(上品)의 대상 없는  중에 명증삼마지(明增三摩地)가 있으니, 이것은 정위(頂位)의 순결택분의 의지(依止)이다.

 

명득삼마지(明得三摩知), 보통 명득정(明得定)이라 하며, 4선근위(善根位) 중의 난위(煖位)에서 하품(下品)의 심사관(尋思觀)을 일으켜서 취할 대상의 경계가 공함을 관찰하는 선정으로, 이 선정에 의해서 처음으로 무루지혜의 전상(前相)을 얻게 되므로 명득정이라 한다.

난위(煖位), 난(煖)은 따뜻함을 느끼는 것과 같이 견도무루지화(見道無漏智火)의 전상(前相)으로 뛰어난 유루의 지혜가 일어나는 것을 말하며, 지혜를 증득하려고 준비하는 단계이다.

명증삼마지(明增三摩地), 명증정(明增定)이라 하며, 정위(頂位)에서 상품(上品)의 심사관을 발하여 취할 대상의 경계가 공함을 관찰하는 선정으로, 이 선정에서 지혜의 밝은 상이 점점 더해지게 됨으로 명증정이라 한다.

정위(頂位), 네 가지 선근 중에서 난위ㆍ정위를 동선(動善)이라 하고, 인위ㆍ세제일위를 부동선(不動善)이라고 한다. 정위는 동선 중에서 최극위(最極位)이므로 마치 사람의 정수리와 같다고 해서 정위라 한다.

 

復由四種如實遍智,已入唯識,於無義中,已得決定,有入眞義一分三摩地,是諦順忍依止.從此無閒,伏唯識想,有無閒三摩地,是世第一法依止.應知如是諸三摩地,是現觀邊.

다시  가지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4여실편지(四如實遍知)에 의거해서 유식성에 들어가나니,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에 대해서 이미 결정적으로 알고, 대상의 진실성인 진의(眞義)의 일부분에 들어가는 삼마지가 있으니, 이것이 진리의순인위(諦順忍位)의 의지(依止)이며,  

이것으로부터 다음 찰나에 유식의 표상작용인 유식상(唯識想)을 조복하는 무간삼마지(無間三摩地)가 있으니, 세제일법(世第一法)의 의지(依止)이니,  

이와 같은 여러 삼마지는 현관의 궁극인 현관변(現觀邊)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ㅡ난위에서 대상이 공함을 관찰하는 것은 하품(下品)의 심사관(尋思觀)이고, 

정위에서는 대상이 공함을 확실하게 관찰하는 것은 상품(上品)의 심사관이고,

인위에서는 대상이 공함을 인가하고, 나아가 인식주체도 공함을 관찰하여 인가하며는 하품의 여실지관이고,

세제일위에서는 대상과 주체가 공함을 ()으로 인가하는 것이다.

 

진의(眞義), 취착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를 공(空)으로 볼 뿐만 아니라, 취착된 인식주체인 능취(能取)도 공으로 보아 대상도 식도 모두 공임을 아는 것이다.

제순인위(諦順忍位), 보통 인위(忍位)라 하며, 보살이 인순정(印順定)으로부터 하품의 여실변지(如實遍智)를 내어서 능취(能取)가 공함을 관찰하여 인가(認可) 결정하는 지위이다.

세제일법(世第一法), 보살의 수행계위인 52위(位) 가운데 10회향의 만심(滿心)에서 무간정(無間定)에 의해 상품의 네 가지 여실변지(如實遍智)를 내어서, 인식의 대상뿐만 아니라 관하는 식 그 자체를 공무(空無)라고 분명하게 결택한다. 이 지위에서 일어나는 선근은 유루법 가운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세제일법이라 한다.

현관변(現觀邊), 현관(現觀)은 범어 abhisamaya의 번역어로서, 현전(現前)에서 직접 명료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현관변은 현관의 후변(後邊)에서 얻는 유루(有漏)인 세속의 지혜를 말하며, 보살이 비안립제관(非安立諦觀)에 들어가기 전의 방편이다.

 

▶釋曰:於一切處,入眞觀時,皆有四種順決擇分,故於此中,亦應顯示.是順決擇分依止者,謂決擇分因所依止義.於下品無義忍中,有明得三摩地者,謂於無義中,起下品愛樂,以其明名顯下品無義智, 三摩地名顯此無義智所依止定.

해석한다; 모든 곳에서 참된 진관(眞觀)에 들어갈 때에는, 모두  가지의 순결택분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역시 나타내는 것이니,

‘순결택분의 의지(依止)’는 결택분의 원인으로서 의지처의 의미이며,

‘하품(下品)의 대상이 없는 무의인(無義忍) 중에 명득삼마지가 있다’는 것은 하품의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無義) 가운데 애락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며, 그 명(明)의 명칭으로써 하품의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인(無義忍)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삼마지의 명칭은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인(無義忍)임을 아는 지혜의 의지처인 선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於上品無義忍中者,謂於無義中,起上品愛樂.有明增三摩地者,謂以明名顯上品無義智,三摩地名顯此無義智所依止定.諦順忍依止者,法無我理名諦,此忍順彼名諦順忍.此云何成?謂於外無中,已決定者,於無能取,亦深愛樂,應知於利順忍轉時.是現觀邊者.謂現觀時義.

‘상품의 대상이 없는 무의인(無義忍) 중에’란,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無義) 가운데 상품의 애락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며,

‘명증삼마지가 있다’는 것은 명(明)의 명칭으로써 상품의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無義)를 아는 지혜를 나타내고, 

삼마지의 명칭은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無義)를 아는 지혜의 의지처인 선정을 나타낸다.

‘진리의 순인위의 제순인(諦順忍)의 의지(依止)’는 법무아(法無我)의 이치를 진리인 제(諦)라 부르고, 이것의 인(忍)  그것에 수순함을 진리의 순인(順忍)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외부대상이 없는, 무의(無義)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아는 이는 인식주체인 능취(能取)가 없음에 대해서도 역시 깊이 기뻐하는 것이다. 

지혜의 작용이 예리하고 강렬한 순인이 전전할 때가 ‘현관의 궁극인 현관변(現觀邊)’이니, 현관의 시기라는 뜻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6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3

 

▶論曰:由四尋思,謂由名`義`自性`差別,假立尋思;

及由四種如實遍智,謂由名`事`自性`差別,假立如實遍智,如是皆同不可得故.

논문; 네 가지 사색인 4심사관(四尋思觀)에 의거하는 것으로, 이른바 명칭(名)ㆍ대상(義)ㆍ자성(自性, 자체의 체성體性)ㆍ차별(差別, 모습과 작용의 차별성)에서 가립된 사색에 의거하며,  

그리고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두루 아는  가지 지혜인 사종여실편지(四種如實遍智)에 의거하나니, 이른바 명칭(名)ㆍ사물(事)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에서 가립되어 있는 그대로 두루 여실하게 아는 여실편지(如實遍知)에 의거하나니, 

이러한 것들 모두는 얻지 못하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다.

 

4심사관(四尋思觀) 인식의 대상인 명칭(名)ㆍ대상(義)ㆍ자성(자체의 체성體性)ㆍ차별(모습과 작용의 차별성)의  가지 법이 임시적인 존재인 가유(假有)이고 실무(實無)라고 심구(尋求)하여 사찰(思察)하는 관법이다.

4여실지관(四如實智觀)  가지 심사관 다음에 다시 명확히 인가(認可) 결정하고 또한 이렇게 관찰하는 마음인 능취심(能取心)까지도 가유실무(假有實無)라고 인가 결정하는 관법이다.

 

以諸菩薩,如是如實爲入唯識,勤修加行,卽於似文似義意言,推求文名唯是意言, 推求依此文名之義, 亦唯意言, 推求名義自性差別,唯是假立.若時證得唯有意言,爾時,證知若名若義, 自性`差別,皆是假立,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유식에 깨달아 들어가기 위해서 부지런히 닦고 가행함으로써  글자(文)와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는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에 대해서, 글자(文)와 명칭(名)은 오직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일 뿐이라고 추구하는 것이다. 

또한  글자(文)와 명칭(名) 의지하는 의미(義)도 역시 오직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일 뿐이라고 추구하며,

명칭(名)과 대상(義)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은 오직 가립일 뿐이라고 추구하는 것이니,

오직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득한다면, 그 때에 명칭(名)이나, 대상(義)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 모두 가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自性`差別義相無,故同不可得.由四尋思,及由四種如實遍智,於此似文似義意言,便能悟入唯有識性.

자성과 차별에는 대상(義)의 상이 없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인 것이다.

 가지 사색의 4심사(四尋思)와  가지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4여실지(四如實智) 의거해서,  글자(文)와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는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에 대해서, 오직 식(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능히 깨닫는 것이다.

ㅡ가행위에서 닦는 4심사관(四尋思觀) 4여실지관(四如實智觀) 대한 설명으로,


釋曰:如是悟入,今當顯示.由四尋思者,謂由名`義`自性等文之所顯說.及由四種如實遍智者,謂由名`事`自性`差別,假立等文之所顯說.如實遍知若名`若事`自性`差別,皆是假立,於中實義,皆不可得,是故說言,如是皆同不可得故.又先推求若名`若義`自性`差別,唯是假立,後如實知,如是眞實皆不可得, 於推求時,名爲尋思.若如實知,不可得時,卽名四種如實遍智.

해석한다; 이와 같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이제 나타내 보이겠으니,

‘4심사(四尋思)에 의거한다’는 것은 ‘명칭(名)과 대상(義)의 자성(自性) 등에 의거한다’는 문장에서 말하는 바이며,

‘4여실지(四如實智)에 의거한다’는 것은 ‘명칭(名)과 사물(事)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에 의거해서 가립한다’ 등의 문장에서 말하는 바이다. 

있는 그대로 두루 아는  여실지(如實智) 명칭(名)이나 사물(事)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 모두 가립으로서, 그로부터  참다운 실의(實義) 얻을 수가 없으므로, 마찬가지로 이러한 것들 모두는 얻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먼저 명칭(名)이나 대상(義)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 4심사관(四尋思觀)에 의해서 오직 가립임을 추구하고,

나중에 있는 그대로 여실한 것들은 사여실변지관(四如實遍智觀)에 의해서 참으로 무소득임을 아는 것이다.

추구하여 사색하는 때를 심사(尋思)라 하고,

무소득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을 사여실변지(四如實遍智) 이름하는 것이다.


▶論曰:於此悟入唯識性中.何所悟入?如何悟入?入唯識性,相見二性及種種性,若名`若義`自性`差別假自性差別義,如是六種義皆無故,所取`能取性現前故, 一時現似種種相義而生起故.

논문; 이 유식성 안에 깨달아 들어감에 있어서, 어느 곳에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며? 

어떻게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유식성과 상분(相分)ㆍ견분(見分)의  성품과 갖가지 성품에 들어가는 것이다. 

명칭(名)이나, 대상(義)ㆍ자성(自性)ㆍ차별(差別)ㆍ가유의 자성인 가자성(假自性)ㆍ차별의 대상인 차별의(差別義),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의미는 모두 없는 무(無)이기 때문이다. 

취착된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취착된 인식주체인 능취(能取)의 성품이 현전하기 때문이고,

동시에 현전하여 갖가지 상과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如闇中繩顯現似蛇,譬如繩上蛇非眞實,以無有故.若已了知彼義無者,蛇覺雖滅,繩覺猶在.若以微細品類分析,此又虛妄色`香`味`觸,爲其相故,此覺爲依繩覺當滅.

어두울 때에 노끈이 뱀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비유하자면 뱀이라고 생각한 노끈, 즉 그 뱀은 진실이 아닌 것이니, 존재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대상이 비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뱀이라는 지각은 없어졌으나 노끈의 지각은 아직 남아 있으니,  

만약 미세한 품류로써 분석한다면, 이 노끈의 상 또한 허망한 것이니, 빛깔(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을  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렇게 빛깔(色)ㆍ냄새(香)ㆍ맛(味)ㆍ감촉(觸)을 지각하는 것 의지처로 삼는다면, 노끈의 지각도 마땅히 멸하여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如是於彼似文似義六相意言,伏除非實六相義時, 唯識性覺,猶如蛇覺,亦當除遣,由圓成實自性覺故.

이상과 같이  문장(文)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한 여섯 가지 육상(六相)의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 속의 언어에 대해서 진실하지 못한 육상(六相)의 뜻을 조복할 때, 유식성의 지각은 마치 뱀의 지각과 같이 마땅히 없어져야 하는 것이니,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의 지각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釋曰: 今於此中,問所悟入及悟入譬. 唯識性者,唯有識性. 相見二性者,顯示有相, 有見之識, 顯現似因似所建立, 故名爲相. 種種性者,唯是一識顯現, 似有種種相生,非速疾故, 別別而現.於此悟入唯識性中,如是三種爲所悟入.

해석한다; 여기에서는 깨달아 들어가는 바의 소오입(所悟入)과 깨달아 들어감의 비유인 오입비(悟入譬)를 묻는 것이다. 

‘유식성(唯識性)’은 오직 식만이 존재하는 성품이며,

‘상분과 견분의  성품’은 유상식(有相識)과 유견식(有見識)을 나타내는 것으로, 원인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건립된 것과 비슷하게 현현하기 때문에 상이라 한다.

‘갖가지 성품’은 오직 하나의 식(識)이 현현할지라도, 존재(有)와 비슷한 갖가지  생겨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빠르게  지나가지 않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유식성(唯識性)에 깨달아 들어감에는 이와 같은  가지를 깨달아 들어가는 것으로 삼는 것이다.

 

一時現似種種相義而生起故者,謂似種種名`句`文相而生起故,及似種種依止此義而生起故.此中繩喩顯示悟入三種自性.伏除非實六相義時者,謂於遣滅六相義時,此中遣滅,名爲伏除.

‘현전에서 동시에 갖가지 상과 의미와 비슷하게 생겨나기 때문’이란, 갖가지 명칭(名)ㆍ문구(句)ㆍ글자(文)의 상과 비슷하게 현현하기 때문이고, 이것을 의지로 하는 갖가지 의미와 비슷하게 현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끈의 비유는  가지자성(三自性)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진실이 아닌 여섯 가지 육상(六相) 의미를 조복할 때’는 여섯 가지 육상(六相) 의미를 제거할 때를 말하는 것이며, 여기서 제거한다는 것은 조복하여 없애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명칭(名, nāman)은 어떤 의미를 갖는 최소단위의 단어. 명칭이라는 뜻으로, 사물을 가리키는 명칭이며, 언어표현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다.

문구(句, pada)는 단어로 구성된 문구ㆍ문장 전체를 가리키며,

문자(文ㆍ味, vyañjana)는 단어나 문구ㆍ문장을 구성하는 낱낱의 글자의 음절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이 논서는 '섭대승론석'이다”라고 할 때, ‘이’ㆍ‘논’ㆍ‘서’ 등 한 자 한 자가 글자인 문(文)이고, ‘논서’ㆍ‘섭대승론석’이 명칭(名)이며, 이들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 전체가 문구(句)인 것이다.


▶論曰:如是菩薩,悟入意言似義相故,悟入遍計所執性,悟入唯識故,悟入依他起性.云何悟入圓成實性? 若已滅除意言,聞法熏習種類,唯識之想,爾時菩薩,已遣義想,一切似義,無容得生,故似唯識,亦不得生.由是因緣,住一切義無分別名,於法界中,便得現見相應而住, 爾時菩薩,平等平等所緣能緣無分別智,已得生起,由此菩薩,名已悟入圓成實性.

논문; 이와 같이 보살은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과 비슷하게 현현한 대상(義)의 상(相)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변계소집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유식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의타기성에 깨달아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 어떻게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만약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으로 법을 들어서 훈습한 종류의 유식의 표상(想)을 없앤다면, 그때 보살은 대상의 표상인 의상(義想)을 없애어서, 모든 대상(義)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이 생겨날  없기 때문에, 오직 식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 역시도 생겨날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모든 의미의 일체의무분별지혜(一切義無分別)의 명칭에 안주하고, 

법계 안에서 문득 현전에 보는 것과 상응하여 안주할  있는 것이다. 

그때 보살은 평등하고 평등한 인식대상의 평등소연(平等所緣)과 인식주체인 능연(能緣)의 무분별지혜를 일으킬  있는 것이니, 이로 인하여 보살은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釋曰:悟入意言似義相故,悟入遍計所執性者,謂知諸義唯是遍計分別所作.由是故言悟入遍計所執自性. 悟入唯識故,悟入依他起性者,擧其唯識,卽取意言,了知一切唯意言性,由此悟入依他起性.

해석한다;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이 대상과 비슷하게 현현한 상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변계소집상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것은 이른바 모든 대상이 오직 변계의 분별이 지은 것임을는 것이니, 이로 인하여 변계소집자성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며, 

‘유식(唯識)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의타기성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것에서,  유식(唯識)이라는 말을 거론하여도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을 가리키는 것이니, 일체는 오직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 성품임을 알고, 이로 인하여 의타기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유식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하여 ‘유식’이란 말을 거론하지만, 여기서는 유식의 의언(意言, 생각 속의 언어) 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一切似義無容得生者,謂無如是品類實義可似其生.故似唯識亦不得生者,謂唯識相,亦不得起.何以故?計有識時,卽有義故.從是已後,現證眞如,此現證位,不可宣說,內自證故.

‘모든 대상(義)과 비슷하게 현현한 것이 생겨날  없다’는 것은 이와 같은 품류의 참된 대상은 그것과 비슷하게 생겨날  없기 때문이며,

‘오직 식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도 역시 생겨날  없다’는 것은 유식상(唯識相) 역시도 생겨날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식이 존재할 때에는  대상(義)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것 이후에는 진여를 현전에서 증득하는 것이니, 현전에서 증득하는 지위는 널리 말할  없는 것으로, 내면에서 스스로 증득하는 내자증(內自證)이기 때문이다.

 

爾時菩薩,平等平等所緣能緣無分別智,已得生起者,所緣謂眞如,能緣謂眞智,此二平等,譬如虛空,卽是不住所取能取二種性義.由不分別所取能取,是故說名無分別智.如是悟入圓成實性.

‘그때 보살은 평등하고 평등한 인식대상인 평등소연(平等所緣)과 인식주체인 능연(能緣)의 무분별지혜를 일으킬  있다’는 것이란,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은 진여를, 인식주체인 능연(能緣)은 근본지혜인 진지(眞智)를 말하는 것으로, 둘은  평등한 것이니, 비유하자면 허공과 같은 것이다. 

 인식대상인 소연(所緣)과 인식주체인 능연(能緣)의  가지 성품의 의미에 머물지 않는 것이니, 인식대상인 소연(所緣)과 인식주체인 능연(能緣)를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무분별지혜라 이름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원성실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論曰:此中有頌:

▷논문; 이러함에 게송이 있으니, 


“法補特伽羅, 法義略廣性, 不淨淨究竟, 名所行差別.”

법과 보특가라(윤회하는 유정)ㆍ법ㆍ의미(義)ㆍ대략(略)ㆍ자세함(廣)ㆍ본성(性)ㆍ부정(不淨)ㆍ청정(淨)ㆍ구경(究竟)은

명칭(名)이 행하는 바의 차별이라네.


▶釋曰:如前所說,住一切義無分別名,何等爲名?幾品類義?爲答此問,以頌顯示,名類差別.

해석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의미의 일체의무분별(一切義無分別)의 명칭(名)에 머문다는 것에서,

무엇을 명칭(名)으로 삼고,  가지 품류의 뜻하는 바 있는 것인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게송으로써 명칭(名)과 품류의 차별을 나타내었다.

 

此中法名者,謂色受眼耳等.補特伽羅名者,謂佛及隨信行等.又法名者,謂契經等.義名者,謂依此法義.略名者,謂有情等,廣名者,謂彼一一各別能詮.

여기에서, 존재의 구성요소라는 뜻의 법(法)의 명칭(名)은 물질(色)ㆍ감수작용(受), 눈ㆍ귀 등이고, 

보특가라의 명칭(名)은 부처님을 따라서 믿고 행하는 수신행(隨信行, 수행의 계위(階位)에서 최초의 단계를 예로 든것) 등이며,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법의 법(法)의 명칭(名)은 계경 등을 말하고, 

의미(義)의 명칭(名)은  법에 의지하는 의미를 말하며,

대략(略)의 명칭(名)은 유정 등을 말하고, 

자세함(廣)의 명칭(名)은  하나하나의 각각 다른 능전(能詮)을 말하는 것이다.

ㅡ여기서 능전은 이름(名)의 뜻으로, 유정들 사이에 각가 다른 이름이 있는 것을 말한다.

 

姓名者,謂諸字本母.不淨名者,謂諸異生.淨名者,謂有學等.究竟名者,謂一切法摠相所緣.

본성(性)은 모든 글자의 본모(本母)를 말하고, 부정(不淨)의 명칭(名)은 모든 이생(異生, 범부)를 말하며,

청정(淨)의 명칭(名)은 유학(有學) 등을 말하며,

구경(究竟)의 명칭(名)은법의 총체적인상(摠相)의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을 말한다.

 

이생(異生)은 범부라는 뜻으로, 갖가지 견해와 번뇌에 의해 여러 가지 과보를 받고 여러 세계(趣)에 태어나며, 또한 성자와 다른 생류(生類)이기 때문에 이생이라 한다.

유학(有學), 이미 4성제 등의 진리를 지견(知見)하여 자각하였지만 아직 번뇌를 다 끊지 못한 까닭에, 번뇌를 소멸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항상 계율ㆍ선정ㆍ지혜의 3학(學)을 닦는다.

성문의 4향(向)4과(果) 중에서 최후의 아라한과를 제외한 다른 단계인 수다원과ㆍ사다함과ㆍ아나함과를 유학이라 하고, 아라한과를 무학(無學)이라고 한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6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2

 

又於此中,三種練磨心者,謂諸菩薩, 善根無缺`善根力持,由此力故,則能三種練磨其心,心無退屈. 初當顯示第一練磨心,謂人趣中,無量世界,無量有情,剎那剎那,能證無上正等菩提, 云何我今獨不能證?

또한 여기서 세 가지 마음을 연마함의 삼종연마심(三種練磨心)은 모든 보살이 선근(善根)을 빠뜨리지 않고 선근력(善根力)을 지니며, 이러한 힘에 의하여 능히 세 가지로 그 마음을 연마하고, 퇴굴함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처음에는 마땅히 그 첫째의 제일연마심(第一練磨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인취(人趣, 인간세계)의 무량한 세계의 수많은 유정(有情)은 찰나찰나마다 능히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거늘,

어째서 나 혼자만이 증득하지 못하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며, 

 

次當顯示第二練磨心,謂諸菩薩,作是思惟: 我此意樂離諸障㝵, 波羅蜜多慳等障㝵, 皆無有故,不由功用,波羅蜜多,當得圓滿,此圓滿故,證佛菩提.

다음으로는 둘째로 제이연마심(第二練磨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보살이 사유하기를 “나의 이 의요는 모든 장애를 떠났으며, 바라밀다에도 인색 등의 모든 장애가 없기 때문에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功用)없이도 바라밀다가 장차 원만해질 수 있으니, 이 원만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을 증득한다”라고 하는 것이며,

 

後當顯示第三練磨心,有障善者,謂由世善而成其善.此有障善,尚命終時,卽便可愛一切自體圓滿而生,況我今者,由無障善而成其善,不當成佛無上菩提,無有是處.

다음에 마땅히 셋째로 마음을 연마함의 제3연마심(第三練磨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장애 있는 선의 유장선(有障善)’이란, 세간의 선에 의거해서 그 선을 이루는 것을 말하며,

이 장애 있는 유장선(有障善)도 오히려 목숨이 다할 때에는 사랑할 만한 모든 것을 자체에서 원만히 생겨나게 하거늘, 하물며 나는 지금 장애 없는 무장애선(無障㝵善)에 의거해서 그 선을 이루려 하나니, 장차 부처님의 위없는 깨달음의 무상보리(無上菩提)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論曰:此中有頌:

논문; 이러함에 게송이 있으니, 

 

“人趣諸有情, 處數皆無量, 念念證等覺, 故不應退屈.

인취(人趣, 인간세계)의 모든 유정은 처소도 숫자도 무량하거늘, 

생각 생각의 염념(念念)에 등각(等覺)을 증득하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퇴굴하지 않아야 하리라.

 

등각(等覺), 등각위(等覺位)라 하고,'보살영락본업경'에서는 등각위를 무구지(無垢地)라 한다.

첫째, 등각(等覺), 완전한 깨달음은 부처님의 십호 가운데 하나이며, 또한, 성문 · 연각 · 보살의 모든 수행계위에서 최후의 단계인 부처의 깨달음 즉 구경각(究竟覺)을 말한다. 여기서의 '등(等)'은 한결같이 평등하다 또는 동등하다 또는 동일하다는 뜻으로, 모든 부처 또는 여래의 깨달음은 각자마다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평등하기 때문에 즉 모두 동등한 또는 동일한 깨달음이기 때문에 등각이라고 한다. 평등한 바른 깨달음이라는 뜻에서 등정각(等正覺) 또는 정득각(正等覺)이라고도 하며, 묘각(妙覺) ·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 불지(佛地) 또는 불지(佛智)와 동일한 지위 또는 계위이다.
둘째, 등각(等覺)은 지극히 비슷한 깨달음, 거의 같은 깨달음, 거의 동등한 깨달음은 52위 등의 보살 수행계위 즉 대승불교의 수행자 또는 보살승의 수행자의 수행계위에서 최후의 단계인 부처의 깨달음 즉 구경각 직전의 단계를 말한다. 여기서의 '등(等)'은 지극히 비슷하다 또는 거의 같다는 뜻으로, 구경각 즉 묘각과는 1등급의 차이가 있지만 그 깨달음 즉 지혜[覺]가 온갖 공덕이 원만한 부처의 지혜[覺]와 지극히 비슷하다 또는 거의 같다는 뜻에서 등각이라고 한다. 
셋째, 조선시대에 편찬된 불교대장경인 '월인석보'에서 설하고 있는 58위의 보살 수행계위에서는 구경각의 2단계 전의 계위로 보고 있다.


諸淨心意樂, 能修行施等, 此勝者已得, 故能修施等.

모든 청정한 마음의 의요(意樂)로, 능히 보시 등을 수행하네.

뛰어난 승자(勝者)는 이미 증득하였으니, 그러므로 능히 보시 등을 수행하네.


善者於死時, 得隨樂自滿, 勝善由永斷, 圓滿云何無?”

착한 선자(善者)는 죽을 때에, 기꺼이 즐거움을 따라 스스로 원만해질 수 있으니, 

뛰어난 승선(勝善)은 영원히 단절하거늘, 어찌 원만함이 없겠는가?


▶釋曰:復以伽他,顯如是義.故不應退屈者,由上因緣,策持其心,令不怯弱,謂生是心: 我不能證無上菩提.

諸淨心者,是非不善無記心義.謂或有人,以其散亂無記之心,而行施等,如是外道,以不善心,而行施等.若求無上正等菩提,是最勝善,故名淨心.

해석한다; 다시 게송으로써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었으니,

‘그러므로 마땅히 퇴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란, 위에서 말한 인연으로 인하여 그 마음을 책려하여 “나는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할 수 없다”는 이러한 겁약한 마음을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모든 청정한 마음’이란 불선이나 무기심(無記心)의 뜻이 아니다.

어떤 이는 그 산란된 무기심으로써 보시 등을 행하는 것과 같이 외도들은 불선심으로써 보시 등을 행하나,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구하는 이것이 가장 뛰어난 최승선(最勝善)이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의 정심(淨心)이라 하는 것이다.

 

此勝者已得,故能修施等者,最勝菩薩,名爲勝者,此之意樂,菩薩已得,是故能修施等諸度.卽是已得能斷慳等所治心義 等者,取始從尸羅,乃至般若波羅蜜多. 善者於死時,得隨樂自滿者,是乃至得非想非非想處義.

‘이 뛰어난 승자(勝者)는 이미 증득하였으니, 그러므로 능히 보시 등을 수행한다네’란,

가장 뛰어난 보살을 뛰어난 승자라고 부르고, 이 의요를 보살이 이미 얻었기 때문에 능히 보시 등의 여러 바라밀을 닦는 것이니, 이것은 곧 인색함 등을 능히 끊어서 다스려진 마음을 얻었다는 뜻이다.

‘등(等)’이란, 처음에 지계바라밀다로부터 나아가 반야바라밀다에 이르기까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착한 선자(善者)가 죽을 때에 기꺼이 즐거움을 따라서 스스로 원만해질 수 있네’는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얻는다는 뜻이다.

ㅡ범부가 세간의 선을 행하면 색계ㆍ무색계의 하늘나라에 태어날  있고, 나아가 무색계의 최고의 하늘인 비상비비상처에도   있다는 뜻이다.

 

勝善由永斷,圓滿云何無者,是由永斷障,而成勝善,圓滿佛果.云何無義?

‘뛰어난 승선(勝善)은 영원히 단절하거늘, 어찌 원만함이 없겠는가?’는 영원히 장애를 단절하였으므로 뛰어난 승선을 이룬 까닭에 부처님의 증과를 원만하게 하는 것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論曰:由離聲聞`獨覺作意,斷作意故.由於大乘諸疑離疑,以能永斷異慧疑故.由離所聞`所思法中,我`我所執,斷法執故.由於現前現住安立一切相中,無所作意,無所分別,斷分別故.此中有頌:

논문; 성문ㆍ독각의 작의를 떠남으로써 작의(作意)를 끊은 까닭이며,

대승에 관한 모든 의심에 대한 의심을 여읨으로써 능히 다른 견해(삿된 견해)와 의심을 영원히 끊은 까닭이며,

듣고 사유한 법 가운데에서 나(我)ㆍ나의 것(我所)이라는 집착을 여읨으로써 법집(法執)을 끊은 까닭이며,

현재 눈앞에 머물러서 안립한 모든 일체의 상(相)에 대해서 작의하는 바도 없고 분별하는 바도 없음으로써, 분별을 끊은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現前自然住, 安立一切相, 智者不分別, 得最上菩提.”

현재 눈앞에 자연히 머물러, 안립한 모든 일체의 상(相)을

지혜로운 이는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최상의 깨달음인 최상보리(最上菩提)를 얻는다네.


▶釋曰:今當顯示斷除四處. 斷作意故者,謂斷聲聞等, 諸作意故.以能永斷異慧疑故者,謂於大乘甚深廣大,能永斷除異慧及疑.此中異慧,謂鄙惡慧,於理動搖.疑謂猶預.

해석한다; 이제 마땅히 네 가지를 끊어 없애는 것을 나타내 보이겠으니,

‘작의(作意)를 끊기 때문’이란, 이른바 성문등의 모든 작의를 끊는 것이며,

‘능히 다른 견해와 의심을 영원히 끊은 때문’이란, 이른바 대승의 매우 심오하고 광대함에 대한 다른 견해와 의심을 영원히 끊어 없애는 것이니, 여기에서 다른 견해는 비루하고 잘못된 이해로서 바른 도리에 대해서 흔들리는 것이며, 의심은 결정을 미루는 것이다.

 

由於大乘諸疑離疑者, 謂於大乘,安立法相三自性教,謂若說諸法,皆無自性`無生無滅`本來寂靜`自性涅槃,諸如是等,永無異門.依遍計所執自性而說,若說諸法如幻`陽炎`夢相`光影`影像`谷嚮`水月`變化,諸如是等,虛妄異門.依依他起自性而說,若說諸法眞如`實際`無相`勝義`法界`空性.諸如是等眞實異門,依圓成實自性而說, 於此一切異慧及疑永無復轉.

‘대승에 관한 모든 의혹에 대하여서 의심을 여읜다’는 것이란, 대승에 있어서 법상(法相)의 세 가지 자성의 가르침을 안립함을 말하는 것으로, 만약 제법이 모두 무자성(無自性)으로서, 생겨남도 없고 소멸도 없는 무생무멸(無生無滅)이며, 본래 적정한 자성열반이라 말한다면, 이러한 것들은 본래부터 비존재인 까닭에 영원한 비존재의 이문(異門, 다른 견해)로서 변계소집자성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며, 

만약 제법이 요술ㆍ아지랑이ㆍ꿈의 모습ㆍ그림자ㆍ영상ㆍ메아리ㆍ물에 비친 달ㆍ변화와 같다고 말한다면, 이와 같은 것들은 허망된 다른 견해로서, 의타기자성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며,

만약, 제법이 진여ㆍ실제ㆍ무형상ㆍ승의ㆍ법계ㆍ공성이라고 말한다면, 이와 같은 것들은 진실의 다른 견해로서, 원성실자성에 의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서 다른 견해와 의심이 영원히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이다.

 

由離所聞`所思法中,我`我所執者,此中意說斷除法執.

‘듣고 사유한 법 가운데 나(我)ㆍ나의 것(我所)이라는 집착을 여읜다’는 것은 법집을 끊어 없앰을 의미하며,

ㅡ아집이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오직 법집 끊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다.

 

斷法執故者,乃至所聞`所思法中,執我`我所,終不於彼,如實悟入. 由於現前現住安立一切相中,無所作意,無所分別者,謂加行無分別智轉時,如理作意,住一切定心,諸相作意,分別皆斷.斷分別故者.謂於現前色等現住,及骨鎖等定所安立,一切所緣,諸境界相,皆不作意,無所分別,由無分別方便能入,若異分別,終不能入.現前自然住等頌,唯顯最後所斷義.

‘법집을 끊기 때문’이란 나아가 듣고 사유한 법에 대해서 나(我)ㆍ나의 것(我所)에 집착한다면, 끝까지 진리 그대로 깨달아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눈앞에 머물러서 안립한 일체의 모든 상에 대해서 작의하는 바도 없고 분별하는 바도 없다’는 것이란,

가행하여 무분별지혜가 작용할 때, 이치 그대로 작의하여 모든 선정의 마음에 안주하고 모든 상에 대한 작의 분별도 모두 끊는 것이며,

‘분별을 끊기 때문’이란 현재 눈앞에 빛깔(色) 등이 머물고 있는 것과 같이, 산란된 마음 밖에서 현재 눈앞에 머물고 있는 모든 법과 골쇄(骨鎖, 부정관의 골쇄관) 등의 선정이 안립한 모든 소연(所緣, 인식대상)의 경계상(境界相)에 대해서 전혀 작의하지 않고 분별하는 바가 없는, 무분별의 방편에 의해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만약 다른 분별이라면, 종내 깨달아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현재 눈앞에 자연히 머물러’ 등의 게송은 오직 최후에 단절되는 소단(所斷)의 의미를 나타낼 뿐이다.

 

골쇄관(骨鎖觀), 부정관(不淨觀)의 하나로서 신체에 대한 애착을 끊기 위해서 신체가 죽어서 백골(白骨)이 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論曰:由何云何而得悟入?

논문; 무엇에 의거해서, 어떻게 깨달아 들어갈  있는가?

ㅡ제2위인 가행위에서의 수행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는 수행심을 더욱 경책하여 정진을 가행하도록 하는 단계이며, 10회향의 만심(滿心)에서 난위(煖位)ㆍ정위(頂位)ㆍ인위(忍位)ㆍ세제일위(世第一位) 가지 가행을 닦는 단계이다.

 

▶釋曰:爲顯由此如是悟入,故爲此問.

해석한다; 이것에 의거해서 이와 같이 깨달아 들어갈 수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다.

 

▶論曰:由聞熏習種類,如理作意,所攝似法 似義,有見意言.

논문; 들어서 훈습되는 문훈습(聞熏習)의 종류에 의거하는 것이니,  

이치 그대로의 여리작의(如理作意)에 포섭되는 법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대상(義)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유견(有見, 견분)의 의언(意言)이다.

유견(有見) 말하고 유상(有相) 들지 않은 것은, 관법이 내부의 식을 반연하고 외부 대상을 제외하기 때문이다.

 

▶釋曰:由此悟入,今當顯示.此中由聞熏習種類者,謂由聞熏習爲因,

卽前所說悟入任持大乘熏習等所生故,應知是圓成實自性所攝.

해석한다; 이것에 의거해서 깨달아 들어감을 이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이 중에서, ‘들어서 훈습되는 문훈습(聞熏習)의 종류에 의거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들어서 훈습되는 것을 원인으로 삼는 것에 의하는 것이니, 곧 앞에서 말한 깨달아 들어가는 오입(悟入)은 대승의 훈습 등을 보전하여 지녀서 생겨나기 때문이니, 

이것은 원성실자성에 포섭된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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