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6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1

 

▶論曰:如是已說所知相,入所知相,云何應見?多聞熏習所依,非阿賴耶識所攝,如阿賴耶識成種子;

如理作意所攝,似法似義,而生似所取事,有見意言.

▷논문; 이와 같이 알아야  바의 상인 소지상(所知相)을 말하였으니,

알아야  바의 상에 들어가는 입소지상(入所知相)을 어떻게 보아야 마땅하겠는가? 

이는 다문훈습(多聞熏習)의 소의(所依, 의지처)이고 아뢰야식이 포섭하는 바가 아닌, 아뢰야식이 종자를 이루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치 그대로의 작의(作意)가 포섭하는 바로서, 법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며,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비슷하게 현현하고, 유견식(有見識)인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인 것이다.

ㅡ이상에서 소지상(所知相)으로서 심식론과 3성설에 관하여 설명한 것은 유식학의 이론문(理論門)이다. 이제는 그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수행문에 들어간다.

 

작의(作意),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심왕과 심소(心所, 심리작용)를 대상에 주의시켜서 인도하는 작용으로, 촉(觸) 심소(心所) 다음에 일어나며, 이로 인해서 감수작용의 수(受)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의언(意言), 뜻 속의 말, 즉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釋曰:如能悟入,如是種類所應知相,今當顯說.入所知相者,謂能悟入所知境義. 多聞熏習所依者,謂大乘法所熏自體.非阿賴耶識所攝者,謂能對治阿賴耶識故.如阿賴耶識成種子者,謂如阿賴耶識,爲一切雜染法因,此爲一切淸淨法因亦爾.如理作意所攝者,謂如理作意,爲自性.似法似義而生者,謂似法義相而生起時.似所取事者,謂似色等義.有見者,謂似於見此卽成立有相見識.

▷해석한다; 이와 같은 종류로 마땅히 알아야 할 바의 소지상(所知相)에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지금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할 바의 상에 들어간다는 입소지상(入所知相)’이란, 알아야 할 바의 대상에 능히 깨달아 들어간다는 의미이며,

‘다문훈습(多聞熏習)의 소의(所依, 의지처)’란, 대승법이 훈습된 자체이며,

‘아뢰야식이 포섭하는 바가 아니다’란, 능히 아뢰야식을 다스리기 때문이며,

‘아뢰야식이 종자를 이루는 것과 같다’는 것이란, 아뢰야식이 모든 잡염법의 원인이 되듯이, 이것이 모든 청정법의 원인이 되는 것 역시도 그러하다는 것을 말하며, 

‘이치 그대로의 작의(作意)가 포섭하는 바’란, 이치 그대로의 작의(作意)를 자성으로 삼는 것을 말하며,

‘법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다’는 것은, 법과 의미(義)의 상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때이며,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비슷하게 현현한다’는 것은, 빛깔(色) 등의 대상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을 말하며,

‘유견식(有見識)'이란, 곧 상분과 견분을 갖는 식(識)을 성립하는 것을 말한다.

 

▶論曰:此中誰能悟入所應知相?大乘多聞熏習相續,已得逢事,無量諸佛,

出現於世,已得一向決定勝解,已善積集諸善根故,善備福智資糧菩薩.

▷논문; 여기서 어떠한 사람이 알아야  바의 소지상(所知相)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대승의 다문훈습(多聞熏習)을 상속하고, 무량한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에 받들어 섬길  있으며, 

한결같이 결정적인 뛰어난 승해(勝解)를 얻고, 모든 선근을  쌓음으로써 복덕과 지혜의 자량(資糧)을  갖춘 보살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ㅡ유식학에서 보살의 수행과정인 5() 중에서 1위인 자량위(資糧位) 수행을 설명한다. 이것은 길고 수행의 도정에서 재산이 정신적인 양식을 저장하는 단계로써, 여기서 자량(資糧) 복덕과 지혜를 가리킨다. 37보리분법과 6바라밀다를 닦는 과정이다. 10주ㆍ10행ㆍ10회향(10회향의 住心)까지이다.

 

유식학에서는 보살 수행 계위 41단계(41위)를 자량위 · 가행위 · 통달위 · 수습위 · 구경위의 5위(五位)에 배대한다.
자량위(資糧位), 10주 · 10행과 10회향의 제10위인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廻向)의 주심(住心)까지,
가행위(加行位), 10회향의 제10위인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廻向)의 출심(出心)의 단계, 즉, 통달위 즉 견도(見道)에 들기 위해 닦는 난(煖) · 정(頂) · 인(忍) · 세제일(世第一)의 4선근(四善根) 즉 4가행(四加行)의 단계,
통달위(通達位), 견도위(見道位), 즉 10지의 첫 번째 계위인 초지(初地)의 입심(入心) 즉 환희지(歡喜地)의 입심(入心) 
수습위(修習位), 10지 가운데 초지(初地) 즉 환희지(歡喜地)의 주심(住心)에서 제10지 즉 법운지(法雲地)의 출심(出心)까지,
구경위(究竟位): 묘각(妙覺), 즉 부처의 지위 · 불지(佛地) · 불과(佛果) · 여래지(如來地) · 불지(佛智) · 일체지(一切智) · 대원경지(大圓鏡智)

 

▶釋曰:如是品類,如此方便,而能悟入,今當顯示. 大乘多聞熏習相續者,簡聲聞等, 所有多聞熏習相續.

已得逢事,無量諸佛,出現於世者,已得現前逢事,諸佛出現, 世閒超過數量. 已得一向決定勝解者, 謂於大乘,所得勝解,非諸惡友所能動壞,卽由無閒所說三因,已善積集諸善根故,乃得名爲善備福智資糧菩薩.

▷해석한다; 이와 같은 품류와 이와 같은 방편에 의해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지금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대승의 다문훈습을 상속한다’는 것은 성문등이 갖는 다문훈습의 상속을 가려낸 것이며,

‘무량한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에 받들어 섬길  있다’는 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현전에 세간에 출현하신다면,  받들어 섬길  있음이 수량(數量)을 초월한다는 것을 말하며,

‘한결같이 결정적인 뛰어난 이해의 승해(勝解)를 얻는다’는 것은 대승으로부터 얻는 뛰어난 승해(勝解)를 모든 악한 벗이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이니, 즉 앞에서 말한, 다문훈습(多聞熏習)과 봉사무량제불(逢事無量諸佛)과 선적집제선근(善積集諸善根)의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이미 모든 선근을  쌓은 까닭이니,  

이에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갖춘 보살이라 이름할  있는 것이다.

 

又卽如是福智資糧,云何漸次而得圓滿? 謂由因力`由善友力`由作意力`由依持力. 此中兩句,卽是二力,如數應知.

또한 이와 같은 복덕과 지혜의 자량은 어떻게 점차 원만해질  있는 것인가? 

이른바 원인의 세력인 인력(因力)에 의해서이고, 착한 벗인, 선우력(善友力)에 의해서이며, 

작의력(作意力)에 의해서이고, 의지력(依持力)에 의해서이다. 

여기서  구절은  원인의 세력인 인력(因力)과 선우력(善友力)의  가지 세력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숫자 그대로 두 세력만을 해석한다고 알아야 한다.

 

作意力者,卽是一向決定勝解.此用大乘熏習爲因`事佛爲緣,以有一向決定勝解,能修正行,修正行故,積集善根, 如是名爲由作意力善修福智二種資糧. 由此漸次善修福智二資糧故,能入大地,如是名爲由依持力.

작의력(作意力)은  한결같이 결정적인 승해이니, 이것은 대승의 훈습을 원인(因)으로 삼고, 부처님 섬기는 것을 조건(緣)으로 삼아서 한결같이 결정적인 뛰어난 이해인 일향결정승해(一向決定勝解)를 갖춤으로써 능히 바른행을 닦고, 바른행을 닦음으로써 선근을 쌓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작의력으로 인하여 복덕과 지혜의  가지 자량을  닦는다고 말하는 것이며,

점차 복덕과 지혜의  가지 자량을  닦음으로써 능히  지위인 대지(大地, 10지)에 오르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의지력에 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지(大地), 10지(地)의 지위를 가리킨다.

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역본인 수본(隋本) 및 무성석(無性釋)에서는 ‘초지(初地)에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論曰:何處能入?謂卽於彼有見似法似義意言, 大乘法相等所生起勝解行地,見道`修道`究竟道中,於一切法,唯有識性,隨聞勝解故`如理通達故`治一切障故`離一切障故.

▷논문; 어떠한 곳에 능히 들어가는 것인가? 이른바  유견식이 법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는  마음속의 생각인 의언(意言)에 대해서 대승법의 상(相)을 평등히 일을키는 승해행지(勝解行地)ㆍ견도(見道, 통달위)ㆍ수도(修道, 수습위)ㆍ구경도(究竟道)이다.

제법에 오직 식의 성품인 식성(識性)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듣고, 따라서 뛰어나게 이해한 때문이고, 

이치 그대로 통달한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다스리기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떠난 때문이다.

 

승해행지(勝解行地), 10주(住:제1주에 10신을 포함)ㆍ10행ㆍ10회향을 닦는 지위이다.

본문에서 승해행지는 곧 자량위(10주〜제10회향의 住心)와 가행위(제10회향의 滿心)에 해당된다.

 

▶釋曰:入如是類,及入行相,今當顯示.意地尋思,說名意言,如是意言,以大乘法,爲因而生,此中顯示意言差別.

▷해석한다;  이와 같은 부류에 들어가고, 수행의 상(行相)에 들어가는 것을 이제 나타내어 현시하겠으니,

명칭(名)ㆍ대상(義) 등에 의한 의식의 사유 분별인 의지심사(意地尋思)를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이라 하며,

이와 같은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은 대승법이 원인이 되어 생겨나는 것으로, 

여기서 생각 속의 언어의 차별인 의언차별(意言差別)을 나타내는 것이다. 

 

大乘法相等所生者,是此教法,爲緣生義.或有卽於勝解行地,名能悟入,由但聽聞一切諸法,

唯有識性,深生信解,故名能入.於見道中,如是悟入,

‘대승법상(大乘法相)이 평등히 일으킨 바’라는 것은  교법을 조건으로 삼아서 생겨난 생의(生義)이거나, 혹은 승해행지(勝解行地)에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만 일체법은 오직 식의 성품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들음에 의해서 깊이 믿음과 이해를 일으키는 것을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오입(悟入)이라 한다. 

 

今當顯示.如理通達故者,謂於意言,如理通達.云何於此,如理通達?謂此意言,非法非義`非所取非能取,如是通達.於修道中,如是悟入,今當顯示.治一切障故者,謂觀此意言,非法非義`非所取非能取時,便能對治一切障故. 究竟道中,如是悟入,今當顯示.離一切障故者,謂善淸淨妙智位中,最微細障,亦無有故.

견도(見道, 통달위) 중에서 이와 같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이제 나타내 보이겠으니,

‘이치 그대로 통달하기 때문’이란 생각 속의 언어에 대해서 이치 그대로 통달함을 말한다.

어떻게 이치 그대로 통달하는 것인가? 이른바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은 법이 아니고, 의미가 아니며,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아니고, 인식주체인 능취(能取)도 아니라고 통달하는 것이다. 

수도(修道) 중에서 이와 같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이제 나타내 보이겠으니,

‘모든 장애를 다스리기 때문’이란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은 법이 아니고, 의미가 아니며,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아니고, 인식주체인 능취(能取)도 아니라고 관찰할 때, 문득 능히 모든 장애를 다스리게 되기 때문이다. 

구경도(究竟道) 중에서 이와 같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 보이겠으니,

‘모든 장애를 떠난 때문’이란 이른바 매우 청정하고 승묘한 지혜의 지위에서는 가장 미세한 장애 또한 없기 때문이다.

 

견도(見道), 통달위라고 하며, 10지 중에서 초지의 입심(入心)의 수행이다. 이 지위에 오르면 무루의 지혜가 생겨나서 진여의 일분(一分)을 관찰하게 되며, 후천적인 분별기(分別起)의 번뇌는 한꺼번에 소멸되지만, 선천적인 구생기(俱生起)의 번뇌는 아직 요지부동이다. 제6 의식과 제7 말나식의 일분이 각각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수도(修道), 수습위(修習位)라고 하며, 초지의 주심(住心)부터 제10지의 끝까지의 지위이다. 견도에서 일부 증득된 진여의 도리를 반복적으로 닦아 익혀서 번뇌장과 소지장을 정화하여 나아간다.

3혜(慧)에 의해 아집과 법집을 정화하는 아공관(我空觀)과 법공관(法空觀)을 닦아서 진여의 경지에 진입하는 수행을 한다. 제7지에서 번뇌장이 정화되어 아집이 단절되고, 제10지에서 금강유정을 수행하여 소지장을 정화해서 법집이 단절된다.

 

▶論曰:由何能入?由善根力,所任持故,謂三種相練磨心故`斷四處故`緣法義境止觀恒常殷重加行無放逸故.

▷논문; 무엇으로 인하여 능히 깨달아 들어가게 되는 것인가? 선근력(善根力)을 지닌 때문이니,

이른바  가지의 삼상(三相)으로 마음을 연마하여 닦기 때문이고,  곳의 사처(四處)를 끊은 때문이며, 

법(法)과 대상(義)의 경계를 반연하여 지관(止觀)을 닦고, 항상 간절히 가행하여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釋曰:由此能入,今當顯示.由何能入?由善根力,所任持故.謂三種相練磨心故,乃至恒常慇重加行無放逸故者,謂於如是所說八句,善順相應,名善根力所任持故.言恒常者,無閒修故.言慇重者,恭敬修故.若於如是品類造修,卽於如是能無放逸.

▷해석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능히 들어감을 나타내 보이겠으니, 무엇으로 인하여 능히 들어가는가?

‘선근력을 지니기 때문이니, 이른바  가지의 삼상으로 마음을 연마하기 때문이고, 

나아가 항상 간절히 가행하여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렇게 말한 여덟 개의 구절에 대해서  수순하여 상응하는 선근력을 지닌 때문이라 말하며,

‘항상’이란 끊임없이 닦기 때문이고, 

‘간절히’란 공경하여 닦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품류에 대해서  닦아 나아가면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능히 방일하지 않는 것이니, 

즉, 구경위(究竟位)라 하는 것으로, 불과(佛果)를 증득한 지위이며, 대보리의 사지(四智)와 대열반인 무주열반(無住涅槃)을 증득하는 것이다.

 

▶論曰:無量諸世界,無量人有情,剎那剎那,證覺無上正等菩提,是爲第一練磨其心.

由此意樂,能行施等波羅蜜多,我已獲得如是意樂,我由此故,少用功力,修習施等波羅蜜多,當得圓滿,是名第二練磨其心.

若有成就諸有障善,於命終時,卽便可愛一切自體圓滿而生.我有妙善,無障㝵善,云何爾時,不當獲得一切圓滿?是名第三練磨其心.

▷논문; 무량한 세계의 수많은 인간(人)과 유정(有情)은 찰나 찰나마다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나니, 이것을 첫째로  마음을 연마하는 것으로 삼는, 제일연마심(第一練磨心)이며,  

이러한 의요로 인하여 능히 보시바라밀다 등을 행하고 “나는 이미 이와 같은 의요를 얻었다, 나는 이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의지의 노력인 공력(功力)을 가하여 보시바라밀다 등을 닦아 익힌다면, 장차 원만해질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둘째로  마음을 연마하는 제이연마심(第二練磨心)이라 하며,  

장애가 있는 모든 유장선(有障善)을 성취한 이가 있다면, 목숨이 다할 때에 문득 사랑할 만한 모든 것의 자체에서 원만하게 생겨나나니, 그리하여 “나에게 승묘한 선과 장애 없는 무장애선(無障㝵善)이 있었거늘, 어찌하여 그 때에 그 모든 원만함을 획득하지 못한 것인가?”라고 한다면, 이것을 셋째로  마음을 연마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釋曰:此中對治三種退屈心故,唯修三種練磨心.所以者何? 以諸菩薩,聞於無上正等菩提最勝甚深廣大,難可證得,心便退屈.對治此故,修第一練磨心. 又諸菩薩,聞所修行波羅蜜多最勝甚深廣大, 難可證得,心便退屈. 對治此故, 修第二練磨心. 

▷해석한다; 여기서 세 가지 퇴굴심(退屈心)을 다스리기 위해서 오직 세 가지 마음을 연마함을 닦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보살은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인,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이 가장 뛰어나고 매우 심오하며 광대하여 증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듣고서 마음이 문득 퇴굴하나니, 이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첫 번째로 마음을 연마함을 닦는 제일연마심(第一練磨心)이며, 

보살이 수행하는 바라밀다가 가장 뛰어나고 매우 심오하며 광대하여 증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듣고서 마음이 문득 퇴굴하나니, 이러한 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두 번째로 마음을 연마하는 제이연마심(第二練磨心)을 닦는다.

 

由此意樂,能行施等波羅蜜多者,此中意樂,謂信及欲.菩薩於諸波羅蜜多,眞實有性`具功德性`有堪能性,深生信解,是名爲信.深信解已樂欲修行,是名爲欲. 菩薩旣得如是信欲,自性意樂,少用功力, 修習六種波羅蜜多,當得圓滿. 又諸菩薩,於佛甚深廣大言教,思議決擇,善巧轉時,如是思量:如是無上正等菩提,難可證得,隔一念心,方可證得.心便退屈.對治此故,修第三練磨心.

‘이러한 의요로 인하여 능히 보시바라밀다 등을 행한다’는 것에서 의요(意樂)는 믿음과 욕구를 말하는 것이다.

보살은 모든 바라밀다가 진실된 진실유(眞實有)의 성품(性), 공덕을 갖춘 성품(性), 감당 능력이 있는 성품(性)에 대해서 깊이 믿음과 이해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니, 이것을 믿음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깊이 믿고 이해하고서 기쁘게 수행하고자 하는, 이것을 욕구라 한다.

보살은 이미 이와 같은 믿음과 욕구를 얻어서, 자성의 의요에 조금이라도 노력하여 6 바라밀다를 닦아 익힌다면 장차 원만해질 수 있으며,

또한 보살은 부처님의 매우 심오하고 광대한 가르침에 대해서 사색하고 결택하여 좋은 선교방편(善巧方便)을 굴릴 때, 생각하기를 ‘이와 같이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인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기란 어려우니, 한 순간 일념(一念)에 마음을 단절하여, 제10지(地)의 금강심(金剛心)의 다음 찰나에 모든 장애를 다 소멸하여서 비로소 증득할 수 있다’고 하면서, 문득 마음이 퇴굴하는 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세 번째로 마음을 연마함을 닦는, 제3연마심(第三練磨心)을 닦는 것이다.

 

我有妙善者,我有一切十種地中.妙善積集,福智資糧.無障㝵善者,謂金剛喩定,能破在骨麤重微細極難破障,此定無閒得一切障離繫轉依.

‘나에게 승묘한 선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열 가지 지위에서 모든 승묘한 선을 쌓은 복덕과 지혜의 자량이 있다는 뜻이며,

‘장애없는 무장애선(無障㝵善)’이란 이른바 금강유정(金剛喩定)이 능히 뼈에 있는 거칠고 미세하여 매우 없애기 어려운 장애를 없애고, 이 선정의 다음 찰나에 모든 장애의 속박을 떠난 전의(轉依)를 얻는 것이다.

ㅡ재골추중미세극난파장(在骨麤重微細極難破障), 번뇌의 거칠고 무거운(重), 미세(微細)함에 의해서 피부에 있는 번뇌, 살(肉) 있는 번뇌, 마음 또는 뼈에 있는 번뇌로 표현하여 나눈 것이다.

 

云何爾時,不當獲得一切圓滿者,此中意說,於障離繫,似彼命終時,一切種智,如彼體圓滿.

 

‘어찌하여 그 때에 그 모든 원만함을 획득하지 못한 것인가?’란, 장애의 속박을 떠나면 그 목숨이 다할 무렵에 모든 것을 아는 일체종지(一切種智)가 그 자체 그대로 원만해진다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5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② 6

 

▶釋曰:由義處中,於一切有情, 起利益安樂增上意樂故者, 此句義,由十六業餘句顯示.

由何等業, 顯示利益安樂增上意樂? 謂展轉加行業者,卽是令入一切智智故,謂令諸有情,入一切智智,展轉化導, 譬如一燈傳然千燈,此卽顯示利益安樂增上意樂. 如是一切所餘句中,皆應配屬利益安樂增上意樂.

▷해석한다; 의처(義處)에 의거하는 내용 중에서 ‘모든 유정에 대해서 이익과 안락을 더하고자하는 이익안락증상의락(利益安樂增上意樂) 때문에’라는 문구의 의미는 열여섯 가지 업의 다른 문구로써 나타내었다.

어떠한 업들에 의거해서 이익과 안락을 더하는 의업을 나타내는 것인가?

‘전전하여 가행하는 전전가행업(展轉加行業)’은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지(一切智智)에 들어가기 위한 까닭이니, 이른바 유정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아는 지혜에 들어가게 하고자 전전하면서 교화하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하나의 등불로 전전하여서  개의 등불을 밝히는 것과 같이, 이것은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의요를 나타낸 것이니, 이와 같이 나머지 모든 문구도 마땅히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의요에 배당해야 한다.

 

無顚倒業者,卽是自知我今何假智故. 謂或雖有利益安樂增上意樂, 仍是顚倒, 如有發起利益安樂增上意樂, 勸飮酒等. 若有正智,如實自知, 方能稱量,教導有情,非增上慢,不如實知,起饒益心,勸他令作不饒益事.

‘전도됨이 없는 무전도업(無顚倒業)’이란, 스스로가 어떤 임시적인 가지(假智)를 알기 때문이니,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의요가 있을라도 전도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의요를 일으키고서 음주 등을 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바른 지혜가 있다면 진리 그대로를 여실하게 스스로 알아서, 능히 올바른 인식에 계합해서 유정을 교화해야 하는 것이니, 이는 증상만(增上慢)이 아니며,  

진리를 여실하게 알지 못하면 남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일으켰을지라도 남에게 권할  이롭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증상만(增上慢),성도(聖道)를 얻지 못하였으나, 이미얻 었다고 잘난체하는 거만심.


不待他請,自然加行業者,卽是摧伏慢故,謂由摧伏憍慢心故,不待勸請,自爲說法.

不動壞業者,卽是堅牢勝意樂故,不以有情行邪行故,動壞菩薩利益安樂增上意樂堅固之心.

無求染業者,卽是非假憐愍故`於親非親平等心故`永作善友乃至涅槃爲後邊故.謂後三句, 釋此三句,非爲利養恭敬等因作諸有情利益安樂,是故說名無求染業

‘남이 청함을 기다리지 않고 자연히 가행하는 자연가행업(自然加行業)’이란,  거만함을 조복한 때문이니, 교만심을 조복한 까닭에 남이 청함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설법을 하는 것이다. 

‘동요하거나 무너지지 않는 부동괴업(不動壞業)’이란,  견고하고 뛰어난 의요인 까닭에, 유정이 삿된 행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보살의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의요의 견고한 마음을 동요하거나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며, 

‘잡염을 구하지 않는 무구염업(無求染業)’이란,  임시적인 연민이 아니기 때문이고, 친한 이와 친하지 않은 이에 대해서 평등한 마음이기 때문이며, 영원히 착한 벗이 되어 열반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나중의  문구는   문구를 해석한 것으로, 이익이나 공경 등을 받으려고 유정들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잡염을 구하지 않는 업이라 이름한 것이다.

 

利益安樂增上意樂.云何可知?謂由相稱語身業者,卽是應量而語故`含笑先言故. 此二句中,應量而語,及先言是語業,含笑是身業.應量語者,唯作法語.言含笑者,舒顏往來,作饒益事.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이익안락증상의락(利益安樂增上意樂)을 어떻게   있는 것인가? 

이른바 ‘서로 일치하는 구업과 신업의 상칭어신업(相稱語身業)’은 올바른 인식에 상응하여 말하는 까닭이고, 미소를 머금고 말하기 때문이다.

  문구에서 올바른 인식에 상응하여 말하는 것과 먼저 말하는 것은 구업이고, 미소를 머금는 것은 신업이며,  

올바른 인식에 상응하여 말하는 것은 오직 진리의 말을 하는 것이고, 미소를 머금는 것은 웃는 얼굴로 왕래하며 이롭게 하는 것이다.

 

於樂`於苦,於無二中,平等業者,卽是無限大悲故,無限悲者,愍三苦故,於有苦有情愍其苦苦`於有樂有情愍其壞苦`於不苦不樂有情愍其行苦,不苦不樂,故名無二.

‘즐거움에 대해서도, 괴로움에 대해서도,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것에 대해서도 평등한 업’이란  무한한 대자비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대자비는  가지 괴로움의 삼고(三苦)를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괴로움이 있는 유정에 대해서는  괴로움의 고통인 고고(苦苦)를 불쌍히 여기고, 

즐거움이 있는 유정에 대해서는  즐거움이 파괴되는 고통의 괴고(壞苦)를 불쌍히 여기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유정에 대해서는  무상하게 바뀌는 것에 대한 괴로움의 행고(行苦)을 불쌍히 여기나니,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기 때문에  가지가 없는 무이(無二)라 말하는 것이다.

 

삼고(三苦), 고고(苦苦)는 누구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고통인 생로병사의 고통을 말한다. 생로병사 중 특히 생과 사는 아직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며, 깨달음을 성취할 때까지는 배움을 위해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괴고(壞苦)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무너지는 고통"인데, 모든 것이 인과 연에 의해 발생한다는 연기의 법칙 즉 인과의 법칙과 모든 존재가 고정됨이 없이 항상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법칙에 바탕하여 일어나는 "변화하고 무너지는 고통"이다.

행고(行苦)는 오온(五蘊) 또는 오취온(五取蘊)으로 이루어진 존재인 인간 자신에 대하여 "나"라고 할 수 있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함에 의해 비롯되는 고통으로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도 한다. ㅡ위키

 

無下劣業者,卽是於所受事,無退弱故,謂不自輕,云我不能當得佛果,如此等類.無退轉業者,卽是無厭倦意故,謂勤精進修成佛因,心無厭倦.攝方便業者,卽是聞義無厭故,謂由多聞,成善巧智,饒益有情.

‘열등하지 않은 무하열업(無下劣業)’이란, 곧 수용한 대승의 교법에 대해서 약해져서 물러나지 않는 업으로, 스스로를 가벼이 여겨서 “나는 장차 불과(佛果)를 얻을  없다”고 말하지 않는, 이와 같은 부류이다. 

‘퇴전하지 않는 무퇴전업(無退轉業)’이란,  권태의 마음이 없는 까닭에 부지런히 정진하여서 성불의 원인을 닦는 것에 마음으로 권태가 없는 것이다.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는 방편의 섭방편업(攝方便業)’이란,  교의의 의미를 듣고서 싫어하지 않는 까닭에, 많이 들음으로써 훌륭한 방편의 지혜를 이루어 유정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厭惡所治業者,卽是於自作罪,深見過故,於他作罪,不瞋而誨故,由此方便,乃能如實調伏有情.無閒作意業者,卽是於一切威儀中,恒修治菩提心故.如是句義,如所行淸淨,契經廣說. 勝進行業者,卽是不悕異熟,而行施故,乃至由四攝事攝方便故.謂卽依前利益安樂增上意樂,修此加行,以爲增長趣向果因.

‘다스려지는 것을 혐오하는 염오소치업(厭惡所治業)’이란,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해서 깊이  허물을 보기 때문이고, 남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성내지 않고 가르치기 때문이니, 이러한 방편으로써 능히 진리 그대로 유정을 조복할 수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작의하는 무간작의업(無閒作意)’이란,  모든 위의(威儀) 가운데에서 항상 보리심을 닦기 때문에, 이러한 문구의 의미는 '소행청정계경(所行淸淨契經)'에서 자세히 말씀하신 바와 같으며,

‘뛰어나게 나아가는 행의 승진행업(勝進行業)’이란,  과보를 바라지 않고 보시를 행하기 때문이고, 나아가  가지 포섭하는 사섭사(四攝事)의 방편에 의하기 때문이니,  앞에서 말한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의욕에 의지해서  가행을 닦음으로써 증과에 나아가는 원인을 증장시키게 되는 것이다.

 

成滿加行業者,卽是於持戒`破戒,善友無二故,乃至親近善友故.

‘가행을 원만히 성취하는 성만가행업(成滿加行業)’이란,  계율을 지키고 계율을 파함에 있어서 착한 벗으로서  가지가 없기 때문이고, 나아가 착한 벗을 가까이하기 때문이다. 

ㅡ착한 벗으로서  가지가 없다는 것은, 이른바 계율을 지키거나 파하거나 그것을 거론하지 않고 그를 가까이해서 가르침을 받기 때문이다.

 

謂後六句, 釋此八句.若有習近,如是加行,速得成滿.以慇重心,住阿練若故者,由住此處,離惡尋思.世雜事者,謂歌儛等.

나중의 여섯 문구는  여덟 문구를 해석한 것으로, 만약 착한 벗을 가까이해서 그 가르침을 익히면, 이와 같은 가행을 빨리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간절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아련야에 머물기 때문’이란, 아련야에 머묾으로써 나쁜 분별들을 여의기 때문이며,

'세간의 번잡한 일’이란 가무 등을 말하며,

 

成滿業者,卽是恒修治四梵住故`常遊戲五神通故`依趣智故.謂後三句,釋此三句,此成滿業所有相狀.

‘원만히 성취하는 성만업(成滿業)’이란 곧 항상 네 가지 청정의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사범주(四梵住, 사무량심四無量心)에 머무름을 닦기 때문이고, 항상 다섯 가지의 오신통에서 노닐기 때문이며,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나중의 세 문구는 이 세 문구를 해석한것으로, 이것이 원만히 성취하는 성만업이 갖는 상이다.


大威力者,謂六神通.依趣智故者,謂依趣智`不依趣識,內智生故,由此內智現見相應安住於法.安立彼業者,卽是於住正行等.謂後四句,釋此四句.由利益安樂增上意樂故,安立有情利益安樂.御衆功德故者,由於破戒,亦不棄捨,安立不擯,令出不善,令住於善.

‘큰 위력(大威力)’은 여섯 가지의 육신통을 말하며,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이란 지혜에 의지하고, 식에 의지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으로, 내면의 지혜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니,  내면의 지혜에 의거해서 현재 보는 것과 상응하여 법에 안주하는 것이다.

‘그것을 안립하는 안립피업(安立彼業)’이란,  ‘바른 행에 머무는' 것 등이다. 

나중의  개의 문구는   문구를 해석한 것으로, 이익과 안락을 더하려는 의요에 의거함으로써 유정의 이익과 안락을 안립하는 것이다.

‘대중을 제어하는 공덕이기 때문’이란 파계(破戒)에 대해서도 역시 버리지 않고 맞아들이고, 불선을 버리고 선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육신통(六神通), 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신족통(神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ㆍ누진통(漏盡通,

 

決定無疑教受教誡故者,由能一向與彼教勅,非自說已還復說言我言不善,由是因緣,其言威肅.財法攝一故者,由言誠諦,以法攝取,衣服等財,還如是施.無雜染心故者,由善攝受大菩提心,饒益有情,非欲自求爲給使故.云何有情,由此善故,速證無上正等菩提?如此攝受一切有情.

‘결정적으로 의혹없이 가르치고 훈계하기 때문’이란 능히 한결같이 그에게 가르침을 주고, 스스로 말하고 나서 다시 ‘나의 말은 옳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으로 인하여 그의 말은 엄숙한 것이며, 

‘재물과 법을 하나로 포섭하는재법섭일(財法攝一)이기 때문’이란, 말이 진실하여 법으로써 중생을 거두고, 의복 등의 재물도 이처럼 베푸는 것이며,

‘잡염심이 없는 무잡염심(無雜染心)이기 때문’이란 대보리심을  섭수하여 유정을 이롭게 하며, 스스로 공양받기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정으로 하여금 속히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하게 하기 위해서, 이상과 같은 선법(善法)으로써 모든 유정을 섭수하는 것이다.


▶論曰:如說:

▷논문;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由最初句故, 句別德種類, 由最初句故; 句別義差別.”

최초의 문구로 말미암은 문구의 차이는 덕(德)의 종류이라.

최초의 문구로 말미암은 문구의 차이는 의미(義)의 차이라네.


▶釋曰:此伽他中,卽爲顯示前所說義,說如是言.

▷해석한다; 이 게송은 앞에서 설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말한 것이다.


攝大乘論釋卷第五 終 섭대승론석 제 5권을 마침.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5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② 5

 

▶論曰:說語義者,謂先說初句,後以餘句,分別顯示,或由德處`或由義處.

논문;가르침의 의미인 어의(語義)를 말함’이란, 먼저 첫 번째 구절을 말하고, 그 다음에 나머지 구절로써 분별하여 나타내는 것이니, 혹은 덕처(德處)에 의거하고, 혹은 의미의 의처(義處)에 의거하는 것이다.

▶釋曰:由說語義如所造釋,今當顯示,或攝其德`或攝其義.

해석한다; ‘가르침의 어의(語義)를 말한다’는 것은, 마땅히 본문에서 해석한 바와 같이 나타내는 것으로, 혹은 그 덕을 포섭하고, 혹은 그 의(義)를 포섭하는 것이다.

▶論曰:由德處者,謂說佛功德:最淸淨覺,不二現行 , 趣無相法,住於佛住, 逮得一切佛平等性, 到無障處, 

不可轉法,所行無㝵, 其所安立不可思議,遊於三世平等法性, 其身流布一切世界, 於一切法智無疑滯,

於一切行成就大覺, 於諸法智無有疑惑, 凡所現身不可分別, 一切菩薩等所求智, 得佛無二住勝彼岸,

不相閒雜如來解脫妙智究竟, 證無中邊佛地平等, 極於法界, 盡虛空性, 窮未來際,

▷논문; ‘덕처(德處)에 의거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니, 즉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최청정각(最淸淨覺)으로써, 번뇌장과 소지장의 두 가지가 현행하지 않으며, 

무상법(無相法, 진여)에 나아가며, 부처님께서 안주하신 바의 대비심(大悲心) 머무시며,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성품을 증득하고, 장애 없는 곳에 이르셨으며,

퇴전하지 않는 법으로서 행이 걸림이 없으시며,

중생구제를 위하여 정법을 시설하고 안립하시는 바가 불가사의하하며,

삼세를 모두 잘 아시니 평등한 법성에 노닐며,  몸은 일체의 세계에 두루하며, 

일체의 제법과 지혜에 대해서 의심과 막힘이 없으시고, 

모든 행에 있어서  깨달음을 성취하셨으니, 모든 중생의 근기에 따라 적절하게 제도하시며,

제법과 지혜에 대해서 지혜가 의혹이 없고, 

무릇 시현하시는 타수용신과 변화신의 소현신(所現身)은 분별할  없으니, 바로 모든 보살이 구하는 지혜이다. 

부처님의 둘이 없는 경지의 법신진여(法身眞如)를 증득하시어 뛰어난 피안에 안주하시며,

여래의 서로 혼잡되지 않는 해탈의 미묘한 지혜를 구경에  이루시고, 중간과 극단이 없는 부처님 지위의 평등한 성품을 증득하셨으며, 법계를 다하고, 허공의 성품을  이루며, 미래 영겁이 다하도록 중생구제의 이타활동을 하는 덕을 갖추시어, 미래 세상을 다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ㅡ여래의 경계에 대해서 우선 총덕(總德)인 최청정각(最淸淨覺) 말하고 나서 21가지 별덕(別德) 들어서 원만함을 나타낸다.

 

소현신(所現身), 타수용신과 변화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타수용신(他受用身)은 10지의 보살들을 위해 법을 설하여 대승 법락(法樂)과 청정국토를 수용시키는 부처님이며,

변화신(變化身)은 이승(二乘)과 범부를 교화하기 위하여, 성소작지(成所作智)의 힘으로 화현한 불신(佛身)이다. 


最淸淨覺者.應知此句, 由所餘句分別顯示, 如是乃成善說法性 最淸淨覺者,謂佛世尊最淸淨覺,

應知是佛二十一種功德所攝.謂於所知一向無障轉功德` 於有無無二相眞如最勝淸淨能入功德`

無功用佛事不休息住功德` 於法身中所依意樂作業無差別功德` 修一切障對治功德`降伏一切外道功德`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최청정각(最淸淨覺)’이란,  구절은 나머지 구절로써 분별하고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이와 같이 법성을  말씀함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며,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최청정각(最淸淨覺)’은 부처님 세존의 가장 청정한 깨달음이니, 이에 부처님의 21가지 공덕이 포섭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알아야  바에 대해서 한결같이 장애 없이 전전하는 공덕, 

유무(有無)의 두 까지에 대하여 이상(二相)이 없는 진여의 가장 뛰어나고 청정함에 능히 들어가는 공덕,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무공용불사(無功用佛事)를 지으심에 쉬지 않고 머무시는 공덕, 

법신의 소의(所依, 의지처)ㆍ의요(意樂)ㆍ불사(作業)에 대하여 차별이 없는 공덕, 

모든 장애의 다스림을 닦는 공덕, 모든 외도를 항복시키는 공덕, 

 

生在世閒不爲世法所㝵功德` 安立正法功德` 授記功德` 於一切世界示現受用變化身功德` 斷疑功德`

令入種種行功德`當來法生妙智功德`如其勝解示現功德`無量所依調伏有情加行功德`

平等法身波羅蜜多成滿功德 `隨其勝解示現差別佛土功德` 三種佛身方處無分限功德`

窮生死際常現利益安樂一切有情功德,無盡功德等.

세간에 머물러도 세간의 법에 걸림이 없는 공덕, 정법을 안립하는 공덕, 수기(授記)하는 공덕, 

모든 세계에서 수용신(受用身)과 변화신(變化身)을 나투는 공덕, 의심을 완전히 끊은 공덕, 

갖가지 행에 들어가게 하는 공덕, 장차 법의 승묘한 지혜를 일으키는 공덕, 

 뛰어난 이해 그대로 중생의 뜻을 따라 현현하여 시현하시는 공덕, 

무량한 의지처로서 유정을 조복하는 가행(加行)의 공덕, 평등한 법신의 바라밀다를 원만히 이루는 공덕, 

 뛰어난 승해(勝解)를 따라 다른 불국토를 나타내는 공덕, 삼불신(三佛身) 장소에 한계가 없는 공덕, 

생사를 다하고 항상 현현하여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공덕, 다함이 없는 무진공덕 등이다.

 

▶釋曰:此中不二現行者,謂二現行此中無有,是故說名不二現行.卽是於所知,一向無障轉功德,

해석한다; 이 중에서 ‘두 가지가 현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지의 여기에는 현행이 없음으므로  가지가 현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니,  소지장에 대해서 한결같이 장애 없이 전전하는 공덕으로,  

ㅡ두 가지 장애 중에서 이승(二乘) 이미 번뇌장을 끊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소지장만을 든다.

 

非如聲聞`獨覺智,亦有障亦無障故.趣無相法者,謂淸淨眞如,

성문ㆍ독각의 지혜가 역시 소지장의 장애가 있고, 역시 번뇌장의 장애가 없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名無相法,趣謂趣入,卽是於有無,無二相眞如,最勝淸淨能入功德. 謂此眞如,非是有相, 諸法無性, 以爲相故;

亦非無相,自相有故. 於此無相眞如, 最勝淸淨能入,最勝能入故`淸淨能入故.

‘무상법(無相法)에 나아간다’는 것은 청정한 진여를 무상법이라 이름하고, 

나아간다는 취(趣)란, 향하여 나아가 들어가는 취입(趣入)의 뜻으로, 이것은  유무(有無)에 대해서  가지 상이 없는 진여의 가장 뛰어나고 청정한 것에 능히 들어가는 공덕인 것이다.

 진여는 상이 있지 않으니, 일체법의 자성 없음을 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역시 무상(無相)인 것도 아니니, 자상이 있기 때문이다. 

 무상진여의 가장 뛰어나고 청정한 최승청정(最勝淸淨)함에 능히 들어가는 것은,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에 능히 들어가기 때문이고, 청정(淸淨)함에 능히 들어가기 때문이다. 

 

住於佛住者,謂住佛所住無所住處,卽是無功用佛事,不休息住功德,謂此住中,常作佛事,無有休息.

逮得一切佛平等性者,卽是於法身中, 所依意樂作業無差別功德. 到無障處者, 卽是修一切障對治功德,

謂一切時,常修覺慧, 對治一切障故. 不可轉法者,卽是降伏一切外道功德. 所行無㝵者, 卽是生在世閒,

不爲世法所㝵功德,謂雖生世閒行,於世閒,所行之處,不爲利等世閒八法所染污故.

‘부처님의 안주하는 곳에 머문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안주하시는 바이나, 안주함이 없는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의식적인 노력없이 자연스럽게 무공용(無功用) 불사(佛事)를 짓고 휴식 없이 머무는 공덕으로, 이른바  안주하는 가운데 항상 불사를 짓고 휴식 없이 머무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성품을 증득한다’는 것은  법신의 의지처인 소의(所依)ㆍ의요(意樂)ㆍ불사(作業)에 대해서 차별이 없는 공덕이며,

‘장애 없는 곳에 이르셨다’는 것은  모든 장애의 다스림을 닦은 공덕이니, 이른바 어느 때나 항상 깨달음의 지혜를 닦아서 모든 장애를 다스리기 때문이다.

‘퇴전하지 않는 불가전법(不可轉法)’이란  모든 외도를 항복시키는 공덕이며,

‘행에 걸림없는 소행무애(所行無㝵)’란, 곧 세간에 머물러도 세간의 법에 걸림없는 공덕이니, 이른바 세간에 태어나서 세간에서 행하여지는 행할지라도 이익  세간팔법(世間八法)에 의해 오염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간팔법(世間八法), 이득(利)ㆍ손실(衰)ㆍ뒤에서 험담하는 훼(毁)ㆍ뒤에서 칭찬하는 예(譽)ㆍ면전에서 칭찬하는 칭(稱)ㆍ면전에서 비방하는 기(譏)ㆍ괴로움(苦)ㆍ즐거움(樂)의 여덟 가지 법은 세인(世人)의 마음을 동요시키기 때문에 8풍(風)이라고도 한다.


其所安立不可思議者,卽是安立正法功德,由契經等正法無量不可思議, 非諸愚夫所能解故. 由此故,名最淸淨覺,此最淸淨覺句,於句句中,皆遍相應.

‘그 안립하는 바가 불가사의하다’는 것은  정법을 안립하는 공덕으로, 계경 등의 정법은 무량하고 불가사의하므로 모든 어리석은 범부가 능히 이해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가장 청정한 깨달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구절은 구절구절마다 두루 상응하는 것이다.

가장 청정한 깨달음은 총덕(總德)이며,  구절을 해설하기 위해 21가지의 별덕(別德) 들기 때문에,  구절은  구절마다 공통적으로 해당된다는 뜻이다.

 

遊於三世平等法性者,卽是授記功德. 其身流布一切世界者, 卽是於一切世界, 示現受用變化身功德.於一切法智,無疑滯者,卽是斷疑功德.於一切行,成就大覺者,卽是令入種種行功德. 於諸法智 無有疑惑者,卽是當來,法生妙智功德, 謂知當來如是法生如來妙智.

‘삼세의 평등한 법성에 노닌다’는 것은  수기의 공덕이며,

‘그 몸은 모든 세계에 나타내 보인다’는 것은  모든 세계에서 수용신과 변화신을 시현하는 공덕이며,

‘제법과 지혜에 대해서 의심과 막힘이 없다’는 것은  의혹을 완전히 끊은 공덕이다. 

‘모든 행에 있어서  깨달음의 대각(大覺)을 성취하셨다’는 것은,  갖가지 행에 들어가게 하는 공덕이며,

‘제법과 지혜에 대한 지혜가 의혹이 없다’는 것은  장차 법에 대한 묘지(妙智)가 생겨나게 하는 공덕이니, 이른바 장차 이와 같은 법은 여래의 승묘한 묘지(妙智)가 생겨나는 것을 아는 것이다.

 

凡所現身不可分別者.卽是如其勝解示現功德.一切菩薩等所求智者,卽是無量所依調伏有情加行功德,謂無量菩薩,所依`能作調伏諸有情事, 此非諸佛已得自他平等更求此智,唯有諸佛,已作如是勝調伏事.

‘무릇 시현하는 몸은 분별할  없다’는 것은   뛰어난 승해(勝解) 그대로 시현하는 공덕이니, 무량한 중생의 뛰어난 승해(勝解)에 따라 불신(佛身)을 시현하는 것이며,

‘바로 모든 보살이 구하는 지혜’란, 무량한 의지처로서 유정을 조복하는 가행의 공덕이니, 이른바 무량한 보살의 의지처로서 능히 모든 유정을 조복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미 자타(自他)의 평등을 얻으셨기 때문에 다시 이러한 지혜를 구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부처님들만이 이와 같은 뛰어난 조복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得佛無二住勝彼岸者,卽是平等法身波羅蜜多,成滿功德.謂無二法身,名平等法身, 卽於如是,無二法身, 得善淸淨波羅蜜多.

不相閒雜, 如來解脫妙智究竟者,謂於無雜如來智中,勝解究竟. 此中勝解,名爲解脫,卽是隨其勝解, 示現差別功德.

‘부처님의 둘이 없는 경지를 증득하여 뛰어난 피안에 안주한다’는 것은  평등한 법신의 바라밀다를 원만히 성취한 공덕으로, 둘이 없는 법신, 무이법신(無二法身)을 평등법신(平等法身)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곧 이와 같은 무이법신(無二法身) 대해서 청정한 바라밀다를  증득하는 것이다. 

‘여래의 서로 혼잡되지 않는 해탈의 미묘한 지혜를  이룬다’는 것은 여래의 서로 혼잡되지 않는 지혜의 뛰어난 이해를  이루어 해탈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승해(勝解) 해탈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것은   뛰어난 이해를 따라 차별한, 각각 다른 불국토를 나타내는 공덕이다.

 

證無中邊佛地平等者,卽是三種佛身, 方處無分限功德, 謂佛法身,不可分限爾所方處, 受用變化,

亦不可說爾所世界. 極於法界者,謂極淸淨法界,是名極於法界, 卽是窮生死際, 常現利益安樂一切有情功德.

盡虛空性者,卽是無盡功德,謂佛智無盡,如虛空故. 窮未來際者,卽是究竟功德.

等言, 等此佛智究竟窮未來際無有閒斷,是故名爲最淸淨覺.

‘중간과 극단이 없는 부처님 지위의 평등한 성품을 증득한다’는 것은   가지 불신이 장소에 한계가 없는 공덕으로, 부처님의 법신은  장소를 한계 지을  없으며, 수용신과 변화신 역시도  세계를 말할  없는 것이다. 

‘법계를 다한다’는 것은 청정한 법계를 다함을 법계를 다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곧 생사를 다하고 항상 현현하여서 모든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공덕이다. 

‘허공의 성품을  이룬다’는 것은 바로 다함이 없는 무진공덕이니, 부처님 지혜가 무진한 것이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미래 세상을 다한다’는 것은  궁극적인 구경공덕(究竟功德)이며,

‘등(等)’이라고 말하는 것이란, 부처님의 지혜는 궁극적으로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중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최청정각(最淸淨覺)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論曰:復次由義處者,如說若諸菩薩,成就三十二法,乃名菩薩,謂於一切有情, 起利益安樂增上意樂故: 令入一切智智故` 自知我今何假智故`摧伏慢故` 堅牢勝意樂故` 非假憐愍故` 於親非親平等心故`永作善友乃至涅槃爲後邊故` 應量而語故`含笑先言故`無限大悲故`於所受事無退弱故`

▷논문; ‘또한 의미의 포섭처, 의처(義處)에 의거한다’는 것이란, 보살이 32가지 법을 성취하면  보살로 이름한다고 말한 것과 같이, 모든 유정에게 이익과 안락을 더하여 주려는 의요를 일으키기 때문이며,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지(一切智智)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고,

나는 지금 어떠한 임시적인 지혜인가를 스스로 알기 때문이며, 아만을 조복하기 때문이다. 

또한 견고하고 뛰어난 승의락(勝意樂)이기 때문이며, 임시적인 연민이 아니기 때문이며,

친한 이와 친하지 않은 이에 대하여 평등한 마음이기 때문이며,

영원히 착한 벗이 되어서 열반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며,

올바른 인식에 상응하여 말하는 까닭이며, 미소를 머금고 먼저 말하기 때문이며, 

무한한 대자비이기 때문이며, 수용한 대승의 교법 대해서 약해져서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無厭倦意故`聞義無厭故`於自作罪深見過故` 於他作罪不瞋而誨故`於一切威儀中恒修治菩提心故` 不悕異熟而行施故`

권태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교의(義) 듣는 것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고,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하여 깊이  허물을 보기 때문이며, 남이 지은 죄에 대해서 성내지 않고 가르치기 때문이며,

모든 위의(威儀) 가운데 항상 보리심을 닦기 때문이고, 과보인 이숙(異熟) 바라지 않고 보시를 행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숙(異熟, vipāka) 행위(業) 대한 과보의 의미이다.

 

不依一切有趣受持戒故` 於諸有情無有恚㝵而行忍故` 爲欲攝受一切善法勤精進故` 捨無色界修靜慮故` 方便相應修般若故`由四攝事攝方便故`於持戒破戒善友無二故`以慇重心聽聞正法故`以慇重心住阿練若故`

모든 유정의 윤회세계(趣)에 의지하지 않고 계율을 수지하기 때문이며,

모든 유정에 대해서 성내지 않고 인욕을 행하기 때문이며,

모든 선법을 섭수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하기 때문이며, 무색계를 버리면서 정려를 닦기 때문이고, 

방편과 상응하여 반야를 닦기 때문이며, 사섭사(四攝事, 사섭법) 섭방편(攝方便) 의거하기 때문이며,

계율을 지키고 계율을 파함에 있어서 착한 벗으로서  가지가 없기 때문이며,

간절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법을 듣기 때문이며,

간절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아련야(阿練若) 머물기 때문이다.

 

아련야(阿練若)는 범어 ārāṇya의 음역(音譯)으로, 아란야(阿蘭若)라고도 한다. 마을에서 떨어진 고요하고 한가한 공한정처(空閑靜處)를 말하며, 세속의 번뇌ㆍ산란ㆍ투쟁 등이 이르지 않는 곳으로서 출가 구도자가 머무는 곳이다.

 

於世雜事不愛樂故`於下劣乘曾不欣樂故`於大乘中深見功德故`遠離惡友故`親近善友故`恒修治四梵住故

세간의 번잡한 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며, 열등한 교법에 대해서 일찍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며, 

대승 안의 깊은 공덕을 보기 때문이며, 나쁜 벗을 멀리하고 착한 벗을 가까이하기 때문이며,

항상 청정에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사범주(四梵住, 사무량심四無量心)를 닦기 때문이다. 

 

`常遊戲五神通故`依趣智故`於住正行不住正行諸有情類不棄捨故`言決定故`重諦實故`

大菩提心恒爲首故. 如是諸句,應知皆是初句差別,謂於一切有情,起利益安樂增上意樂.

항상 다섯 가지의 오신통(五神通)에서 노닐기 때문이며,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바른행에 머물거나 혹은 바른행에 머물지 않는 모든 유정의 무리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며,

말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며, 참다운 진리를 존중하기 때문이며, 대보리심을 항상 으뜸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문구들은 모두  번째 문구를 분별한 것으로서, 모든 유정에 대해서 이익과 안락을 더하고자하는 이익안락증상의락(利益安樂增上意樂)을 일으킨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오신통(五神通), 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신족통(神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


此利益安樂增上意樂句,有十六業差別應知.此中十六業者,一展轉加行業;二無顚倒業;三不待他請,自然加行業;四不動壞業;五無求染業,此有三句差別應知,謂無染繫故`於恩非恩無愛恚故`於生生中恒隨轉故;

이 이익과 안락을 더하고자하는 이익안락증상의락(利益安樂增上意樂)의 문구에 16가지 업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16가지 업이란,

첫 번째는 전전하여 가행하는 전전가행업(展轉加行業)이고, 두 번째는 전도됨이 없는 무전도업(無顚倒業)이며,

세 번째는 남이 청함을 기다리지 않고 자연히 가행하는 자연가행업(自然加行業)이고,

네 번째는 동요하거나 무너지지 않는 부동괴업(不動壞業)이며,

다섯 번째는 잡염을 구하지 않는 무구염업(無求染業)이니, 이에 세 가지 구절의 차별된 뜻이 있으니, 잡염의 속박이 없기 때문이고, 은혜와 은혜 아닌 것에 대해서 사랑과 성냄이 없기 때문이며, 끊임없는 윤회의 생사에 유전(流轉)하여 끝이 없는 생생(生生)을 항상 따라 유전하기 때문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六相稱語`身業,此有二句差別應知;七於樂`於苦,於無二中,平等業;八無下劣業;九無退轉業;十攝方便業;

여섯 번째는 서로 일치하는 구업과 신업의 상칭어신업(相稱語身業)이니, 이에 두 문구의 차별된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일곱 번째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괴로움에 대해서도,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무이(無二)에 대해서도 평등한 업이며,

여덟 번째는 열등하지 않은, 무하열업(無下劣業)이고, 아홉 번째는 퇴전하지 않는 무퇴전업(無退轉業)이며,

열 번째는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는 섭방편업(攝方便業)이다.


十一厭惡所治業,此有二句差別應知;十二無閒作意業;十三勝進行業,

此有七句差別應知,謂六波羅蜜多正加行故,及四攝事正加行故;

열한 번째는 다스려지는 것을 혐오하는 염오소치업(厭惡所治業)이니, 이에 두 문구의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열두 번째는 끊임없이 작의하는 무간작의업(無閒作意)이며,

열세 번째는 뛰어나게 나아가는 행의 승진행업(勝進行業)이니, 이에 일곱 문구의 차별된 뜻이 있으니, 이른바 여섯 가지 바라밀다의 바른 가행이기 때문이고, 네 가지 포섭하는 사섭사(四攝事)의 바른 가행이기 때문이다.

 

사섭사(四攝事), 4섭법(攝法)이라고도 하며, 보살이 중생을 제도할 때 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태도으로, 

첫째, 보시섭(布施攝)은 재물을 기꺼이 베풀거나 진리를 가르쳐 주며, 

둘째, 애어섭(愛語攝)은 남에게 미소띤 얼굴과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 대하며,

셋째, 이행섭(利行攝)은 신체ㆍ언어ㆍ의지의 3업에 의한 선행으로 남에게 이익을 주며,

넷째, 동사섭(同事攝)은 자타가 일심이 되어 협력하여 중생과 같이 일하면서 제도하는 것이다.

 

十四成滿加行業,此有六句差別應知,謂親近善士故`聽聞正法故`住阿練若故`離惡尋思故`作意功德故,此復有二句差別應知,助伴`功德故,此復有二句差別應知;

열네 번째는 가행을 원만히 성취하는 성만가행업(成滿加行業)이니, 이에 여섯 문구의 차별된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선지식을 가까이하기 때문이고, 정법을 청해 듣기 때문이며, 아련야에 머물기 때문이고, 나쁘게 헤아리는 생각을 여의기 때문이며, 바르게 사유하는 공덕, 즉 이승(二乘)을 버리고 대승을 구하는 작의의 공덕이기 때문이니, 이에 다시 두 문구의 차이가 있으니, 도와주는 공덕이며, 이에 다시 두 문구의 차별한 뜻이 있다고 알아야 한다.

 

十五成滿業,此有三句差別應知,謂無量淸淨故`得大威力故`證得功德故;

열다섯 번째는 원만히 성취하는 성만업(成滿業)으로, 이에  문구의 차별된 뜻이 있으니, 이른바 무량 청정하기 때문이고, 대 위력을 얻기 때문이며, 증득하는 공덕이기 때문이다.


十六安立彼業,此有四句差別應知,謂御衆功德故`決定無疑教授教誡故`財法攝一故`無雜染心故.如是諸句,應知皆是初句差別.
 

열여섯 번째는 그것을 안립하는 안립피업(安立彼業)이니, 이에 네 문구의 차별된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하나니,

이른바 대중을 제어하는 공덕이기 때문이고,

결정적으로 의혹 없이 가르치고 훈계하기 때문이며,

재물과 법을 하나로 포섭하는 재법섭일(財法攝一)이기 때문이고, 잡염심이 없는 무잡염심(無雜染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문구는 모두 첫 번째 문구의 차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5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② 4

 

▶論曰:復有四種意趣,四種秘密,一切佛言,應隨決了. 四意趣者,

一平等意趣,謂如說言:我昔曾於彼時,彼分卽名勝觀正等覺者;

二別時意趣,謂如說言:若誦多寶如來名者,便於無上正等菩提,已得決定.又如說言:由唯發願,便得往生極樂世界;

三別義意趣,謂如說言:若已逢事爾所殑伽河沙等佛,於大乘法,方能解義;

四補特伽羅意樂意趣,謂如爲一補特伽羅,先讚布施,後還毀呰.如於布施,

如是尸羅,及一分修,當知亦爾.如是名爲四種意趣.

▷또한  가지 취지인 사의(四意)와  가지 비밀의 사비(四秘)가 있으니, 이는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므로, 따라서 마땅히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가지 취지의 사의(四意)란, 

첫째는 평등한 취지의 평등의취(平等意趣)이니, “내가 옛날에 있었던 그 때의 그분, 즉 과거의 나를 승관정등각자(勝觀正等覺者, 과거 7불의 한 분이신 비바시불毘婆尸佛, Vipaśyin)라고 불리웠다”고 말씀한 바와 같으며,

둘째는 다른 시기의 취지인 별시의취(別時意趣)이니, “만약 다보여래(多寶如來)의 명호를 염송하는 자는 문득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에 대해서 이미 결정할  있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으며,

또한 말씀하시기를 “오직 발원하는 것만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할  있다”고  것과 같으며,  

셋째는 별도 의미의 취지인 별의의취(別義意趣)이니, “만약 이미 그곳에서 긍가하(殑伽河, 갠지스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면, 비로소 대승법에 대해서 능히 의미를 해석할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

넷째는 보특가라(補特伽羅, 윤회하는 유정)의 의요(意樂)의 의취(意趣)이니, 이른바  보특가라를 위해서 먼저 보시를 찬탄하지만 나중에는 도리어 비방함과 같으니, 이와 같이 보시와 마찬가지로 계율  일부분의 수행인 일분수(一分修)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들을  가지 취지의 사의(四意)라 하는 것이다.

ㅡ네 가지 의미와 가지 비밀에 관한 제4 사의사비장(4 四意四秘章).

 

일분수(一分修), 일부분의 수행은 세간에서의 일반적인 수행을 말하는 것으로, 앞에서 출세간의 행으로서 6바라밀을 들었고, 다음에 세간의 일반적인 수행도 역시 그렇다는 의미이다.


四秘密者, 一令入秘密,謂聲聞乘中,或大乘中,依世俗諦理,說有補特伽羅,及有諸法自性差別;

二相秘密,謂於是處,說諸法相,顯三自性;三對治秘密,謂於是處,說行對治八萬四千;

四轉變秘密,謂於是處,以其別義,諸言諸字卽顯別義.

 가지 비밀의 사비(四秘)에서의 그 첫째는 들어가게 하는, 영입비밀(令入秘密)이니, 성문승에서 혹은 대승에서 세속제의 도리에 의지해서, 보특가라가 있고법의 자성에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둘째는 상비밀(相秘密)이니, 이곳에서법의 상(相)을 말하여서 삼자성(三自性)을 나타내며,

셋째는 다스림의 대치비밀(對治秘密)이니, 이곳에서 수행의 다스림이 8만 4천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넷째는 전변비밀(轉變秘密)의 비밀이니, 이곳에서  별도의 의미로써 모든 언어와 모든 문자에 별도의 의미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ㅡ여기서의 전변은 단어에 여러 의미를 가진 용어라는 의미에서의 전변을 말하는 것이다.

 

如有頌言:게송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覺不堅爲堅, 善住於顚倒, 極煩惱所惱, 得最上菩提.”

견고하지 않음을 깨달아서 견고함으로 삼고,

전도됨에  머물러서 지극한 번뇌에 고뇌하며 최상의 보리를 얻는다네.


▶釋曰:意趣秘密,有差別者, 謂佛世尊先緣此事,後爲他說,是名意趣.由此決定,令入聖教,是名秘密.

平等意趣者,謂如有人,取相似法,說如是言:彼卽是我.世尊亦爾,平等法身,置在心中,說言:我昔曾於彼等.非彼昔時毘鉢尸佛,卽是今日釋迦牟尼,依平等義所起意趣,作如是說.

▷해석한다; 의치(意趣, 취지)와 비밀(秘密)의 차이는, 부처님 세존께서 먼저  일을 반연하시고 나중에 남을 위해서 말씀하신 것을 의취(意趣)라 부르고,

이것의 결정으로 인하여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는 것 비밀이라 이름한다.

‘평등의취(平等意趣)’는 이른바 어떤 사람이 비슷한 법을 취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나다”라고 하는 것 같이, 세존도 역시 그러해서 평등한 법신이 마음 가운데 있기 때문에 “나는 과거에 그와 같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과거의 비바시불이  오늘날의 석가모니불인 것은 아니지만, 평등한 의미를 일으키는 의취 의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別時意趣者,謂此意趣令懶惰者,由彼彼因,於彼彼法,精勤修習,彼彼善根,皆得增長. 此中意趣, 顯誦多寶如來名因,是昇進因,非唯誦名,便於無上正等菩提,已得決定.如有說言:由一金錢,得千金錢.豈於一日? 意在別時,由一金錢,是得千因,故作此說.此亦如是,由唯發願,便得往生極樂世界,當知亦爾.

‘다른 시기의 취지인 별시의취(別時意趣)’란,  의치 게으른 자로 하여금 그러저러한 원인에 의거해서 그러저러한 법을 부지런히 닦아 익히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모든 선근이 증장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의치 다보여래의 명호를 염송하는 원인(因)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것은 승진의 원인(因)으로써, 오직 명호를 염송하는 것만으로 문득 무상정등보리에 대해서 결정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니,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의 금전으로 인하여  개의 금전을 얻는 것이 어찌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뜻이 다른 시기에 있는 것으로, 하나의 금전은  개를 얻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역시 그와 같아서 오직 발원하는 것만으로 문득 극락세계에 왕생할  있게 되는 것 역시도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

 

別義意趣中,於大乘法,方能解義者,謂於三種自性義理,自證其相. 若但解了隨名言義,是佛意者,愚夫於此亦應解了.故知此中言解義者,意在證解要由過去逢事多佛.

‘별도 의미의 취지인 별의의취(別義意趣)’ 중에서 ‘비로소 대승법에 대한 의미를 능히 해석한다’는 것은 삼자성(三自性) 의리에 대해서 스스로  상을 깨닫는 것이다. 

만약, 다만 말의 의미를 따르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라고 해석한다면, 어리석은 범부 역시도 이에 대해서 마땅히 해석할  있어야 할 것이므로, 

여기서 의미를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를 깨달아 아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것은 모름지기 과거에 많은 부처님을 받들어 섬겼어야만 가능한 것이.

 

補特伽羅意樂意趣者,謂如爲一先讚布施,後還毀呰. 此中意者,先多慳悋,爲讚布施;後樂行施,還復毀呰,令修勝行.若無此意,於一施中,先讚後毀,則成相違.由有此意,讚毀應理.於尸羅等,當知亦爾. 一分修者,謂世閒修.

‘보특가라(補特伽羅, 윤회하는 유정)의 의요(意樂)의 의취(意趣)’는  사람을 위해서 먼저 보시를 찬탄하지만, 나중에 도리어 비방하는 것과 같이, 여기서의 의취는 먼저는 인색함이 많기 때문에 보시를 찬탄하고, 나중에 보시를 행하는 것만을 즐긴다면, 도리어 다시 비방하여 뛰어난 승행(勝行)을 닦도록 하는 것이니,

만약 이러한 의취가 없다면 보시 하나에 대해서 앞에서는 찬탄하고 나중에 비방하는 것으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찬탄함도 비방함도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계율 등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일부분의 수행의 일분수(一分修)’는 세간의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令入秘密者,謂若是處,依世俗諦理,說有補特伽羅及一切法自性差別,爲令有情入佛聖教,是故說名令入秘密.

‘들어가게 하는 영입비밀(令入秘密)’이란, 만약 이곳에서 세속제의 도리에 의지해서 보특가라(윤회하는 유정)  일체법의 자성에 차별이 있다고 말한다면, 유정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이니,  

그러므로 들어가게 하는 비밀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相秘密者,謂於宣說諸法相中,說三自性.對治秘密者,謂於是處,宣說有情諸行對治,

爲欲安立有情煩惱行對治故. 轉變秘密者,謂於是處,以說餘義,諸言`諸字轉顯餘義.

‘상비밀(相秘密)’은 일체법의 상을 널리 말함에 있어서  가지의자성을 밝히는 것이며,

‘다스림의 대치비밀(對治秘密)’은 이곳에서 유정의 모든 행의 다스림을 널리 말하는 것으로, 유정의 번뇌행의 다스림을 안립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다. 

‘전변비밀(轉變秘密)’은 이곳에서 다른 것을 말함으로써 의미의 모든 언어ㆍ모든 글자가 바뀌어 다른 의미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於伽他中,覺不堅爲堅者,不堅謂定,由不剛强馳散難調,故名不堅;卽於此中, 起尊重覺,名覺爲堅.

善住於顚倒者,是於顚倒,能顚倒中,善安住義.於無常等, 謂是常等名爲顚倒, 於無常等,謂無常等是能顚倒,是於此中,善安住義.極煩惱所惱者,精進劬勞,名爲煩惱.爲衆生故,長時劬勞精進所惱,如有誦言:處生死久惱,但由於大悲.

如是等. 得最上菩提者,其義易了.

가타(伽他, 게송)에서 ‘견고하지 않음을 깨달아서 견고함으로 삼네’란,

견고하지 않음은 선정이 견고하지 않고 산란하여 조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견고하지 않다고 이름하는 것이니, 곧  가운데에서 깨달음에 대하여 존중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견고함으로 삼는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전도됨에  머문다’는 것은 전도와 능히 전도되게 하는 것에 대해서  안주한다는 의미이며, 무상 등을 항상함 등이라고 말하는 것을 전도됨이라 하며, 무상 등을 무상 등이라고 말하는 것은 능전도(能顚倒)된 것으로, 이것은  가운데  안주한다는 의미이다. 

‘지극한 번뇌에 고뇌한다’는 것이란, 애써 정진하는 것을 번뇌라 이름하나니, 중생을 위해서 오랫동안 애써 정진하여 고뇌하는 것으로, 게송에서 “생사에 머물러 오랫동안 고뇌함은 다만  자비 때문이네”라고 말함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로 인하여 ‘최상의 보리를 얻는다’는 것은  의미가 쉬운 것이다.


▶論曰:若有欲造大乘法釋,略由三相,應造其釋:一者由說緣起`二者由說從緣所生法相`三者由說語義.

논문; 만약 대승법을 해석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마땅히 간략한  가지의 삼상(三相)에 의거해서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니,

첫째는 연기를 말하는 것을 말미암은 것이며,

둘째는 조건의 연(緣)에 의해 생겨나는 법상을 말하는 것을 말미암으며,

셋째는 가르치는 말씀의 어의(語義)를 말하는 것에 말미암아야 하는 것이다.


▶釋曰:由此三相,隨其所應,應造一切大乘法釋.

해석한다; 이  가지의 삼상(三相)으로 인하여, 마땅히  상응하는 바를 따라 모든 대승법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論曰:此中說緣起者,如說:

논문; 여기서 ‘연기를 말함’이란,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言熏習所生, 諸法此從彼, 異熟與轉識, 更互爲緣生,”

언어의 훈습에서 생겨난 제법, 이것은 그것을 따르는 것이네.

이숙식(異熟識, 유부무기)과 전식(轉識, 7식)이, 다시 서로의 조건이 되어 생겨나는구나.


▶釋曰:言熏習所生諸法者,由外分別熏習在阿賴耶識中,以此熏習,爲因一切法生,卽是轉識自性.此從彼者,此分別熏習用彼諸法爲因,此卽顯示阿賴耶識與彼轉識,更互爲因.

해석한다; ‘언어의 훈습에서 생겨난법’이란, 외부 분별의 훈습은 아뢰야식 안에 저장되어 있고,  훈습의 원인으로써 제법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전식(轉識, 7식)의 자성인 것이다. 

‘이것은 그것을 따른다’는 것이라, 이 분별의 훈습은 법을 원인으로 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아뢰야식과  전식이 다시 서로 원인이 되는 것 나타낸 것이다.


▶論曰:復次彼轉識相法,有相`有見,識爲自性.又彼以依處爲相`遍計所執爲相`法性爲相,由此顯示三自性相.如說:

논문; 또한  전식(轉識)의 상법(相法)에는, 상분이 있고 견분이 있는 식(識)을 자성으로 삼으며,

또한 그것은 의타기성을 의지처로써 상을 삼고, 변계소집성으로써 상을 삼으며, 법성(원성실성)으로써 상을 삼으니, 

이로써자성(三自性)의 상을 나타내는 것이니, 게송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從有相`有見, 應知彼三相.”

상분이 있고 견분이 있음에 따라, 마땅히   가지의 삼상(三相)을 알아야 하리.


復次云何應釋彼相?謂遍計所執相,於依他起相中,實無所有,圓成實相於中實有.由此二種非有及有,非得及得`未見已見眞者同時.謂於依他起自性中,無遍計所執故,有圓成實故.於此轉時,若得彼卽不得此,若得此卽不得彼.如說:

또한  상을 어떻게 마땅하게 해석해야 하는가? 

변계소집상은 의타기상에서는 실제로 존재함이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원성실상은 실로 존재(有)하며,

이러한  가지의 비존재(非有)와 존재(有), 얻지 못함과 얻음, 아직 진실을 보지 못함과 이미 진실을 보는 것은 동시의 것이니, 이른바 의타기자성에 변계소집자성이 없기 때문이고, 원성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전할  만약 그것을 얻는다면,  이것을 얻지 못하고, 만약 이것을 얻으면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

게송에서 바와 같다.

 

“依他所執無, 成實於中有, 故得及不得, 其中二平等.”

의타기성에는 변계소집성이 없고, 원성실성은  안에 있으니, 

따라서 얻음과 얻지 못함의 두 가지는  안에서 평등하다네.


▶釋曰:彼轉識相法,有相`有見,識爲自性者,謂彼識有相`有見,以爲其體.又卽彼相,有其三種,依處爲相者,謂依他起相.由此所說三種自性,顯示彼相,

 해석한다; ‘그 전식의 상법(相法)은, 상분이 있고 견분이 있는 식을 자성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 식이 상분과 견분을 그 체로 삼기 때문이며,

또한 그 상에 세 가지가 있으니, ‘의지처를 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의타기상이니, 세 가지의 삼자성(三自性)에 의거해서 그 상을 나타낸 것이다.

 

於伽他中,卽顯此義.從有相`有見應知彼三相者,如釋顯示. 由此二種,非有及有`非得及得`未見已見眞者同時者,

遍計所執及圓成實,名爲二種.如是二種:第一非有`第二是有. 未見眞者,得遍計所執,不得圓成實.

已見眞者,卽此剎那,得圓成實,不得遍計所執. 於伽他中,卽顯此義,謂依他所執無等.

게송에서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었으니, ‘상분이 있고 견분이 있음에 따라, 마땅히 그 세 가지 양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해석에서 나타내 보인 것과 같으며,

‘이 두 가지의 비존재(非有)와 존재(有), 얻지 못함과 얻음, 아직 진실을 보지 못함과 이미 진실을 보는 것이 동시에 있다’는 것은, 변계소집성과 원성실성을 두 가지라 한 것이며,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첫 번째는 비존재(非有)이고, 두 번째는 존재(有)이다.

‘아직 진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변계소집성을 얻으면 원성실성을 얻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

‘이미 진실을 본다’는 것은 곧 이 찰나에 원성실성을 얻는다면, 변계소집성을 얻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 

가타(伽他, 게송)에서 이러한 뜻을 나타내어서 ‘의타기성에는 변계소집성이 없으며’ 등이라고 말하였다.

 

平等者,謂一剎那.其中者,謂依他起中.二者,謂未見眞者及已見眞者.故者,是由此因義.謂於依他起中,由遍計所執無故,及由圓成實有故.又諸愚夫顚倒執故,如是見轉.若諸聖者,由正見故,如是見轉.

‘평등(平等)’이란 한 찰나(一剎那)를 말하고,

‘그 안에서’란, 의타기성의 안이며,

'두 가지'는 아직 진실을 보지 못한 것과 이미 진실을 본 것을 말하며,

‘따라서’는 이러한 원인에 의거해서라는 의미이니, 이른바 의타기성 중에 변계소집성이 없기 때문이고, 원성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전도되게 집착함으로써 이러한 견해가 전전하지만,

만약 모든 성자라면 바른 견해에 의거하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가 전전하지 않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5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② 3

 

▶論曰:『阿毘達磨大乘經』中,薄伽梵說,法有三種:一雜染分`二淸淨分`三彼二分.依何密意, 作如是說?

於依他起自性中,遍計所執自性,是雜染分,圓成實自性,是淸淨分,卽依他起,是彼二分.依此密意,作如是說.

▷논문; '아비달마대승경(阿毘達磨大乘經)'에서 박가범(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잡염분(雜染分)이고, 둘째는 청정분(淸淨分)이며, 셋째는 그 두 부분의 이분(二分)이다”라고 하셨으니,

어떠한 비밀스런 뜻에 의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인가?

의타기자성 중에서 변계소집자성은 잡염분이고, 원성실자성은 청정분이며, 의타기자성은 그 두 부분이니, 이러한 비밀스런 뜻에 의지해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於此義中,以何喩顯?以金土藏,爲喩顯示.譬如世閒金土藏中,三法可得:一地界`二土`三金.

이러한 뜻에 대해서는 어떠한 비유로써 나타내는 것인가?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인 금토장(金土藏)으로 비유하여 나타내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세간의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에 세 가지의 법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첫째는 지계(地界)이고, 둘째는 흙(土)이며, 셋째는 금(金)이다.

 

於地界中,土非實有,而現可得.金是實有,而不可得.火燒鍊時,土相不現,金相顯現.又此地界,土顯現時,虛妄顯現,金顯現時,眞實顯現,是故地界,是彼二分.

지계(地界) 가운데에서 흙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현재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금은 실제로 있는 것이지만 얻을 수 없는 것이니,  불로 제련한 때에는 흙의 상은 나타나지 않고 금의 상이 현현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이 지계(地界)는 흙이 현현할 때에는 허망되게 현현하고, 금이 현현할 때는 진실되게 현현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지계는 그 두 부분이 되는 것이다.

 

識亦如是,無分別智,火未燒時,於此識中,所有虛妄遍計所執自性顯現,所有眞實圓成實自性不顯現. 此識若爲無分別智,火所燒時,於此識中,所有眞實圓成實自性顯現,所有虛妄遍計所執自性不顯現. 是故此虛妄分別識, 依他起自性,有彼二分,如金土藏中,所有地界.

식(識) 역시도 이와 같아서, 무분별지(無分別智)의 불이 아직 타지 않을 때에는, 이 식 안에 있는 허망된 변계소집자성이 현현하고, 진실된 원성실자성은 현현하지 않으나,

만약 이 식이 무분별지혜의 불에 탈 때에는, 이 식 안에 있는 진실된 원성실자성이 현현하고, 허망된 변계소집자성은 현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허망된 분별식인 의타기자성에는 그 두 가지 부분 모두가 있어서,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에 있는 지계(地界)와 같은 것이다.


▶釋曰:『阿毘達磨大乘經』中,由此密意,說有三法:一雜染分,謂遍計所執自性,是雜染故;二淸淨分,謂圓成實自性,是淸淨故;三彼二分,謂依他起自性,通彼二故.爲顯此義, 以金土藏,爲其譬喩. 此中藏者,是彼種子.

▷해석한다; '아비달마대승경'에서 이 비밀스런 뜻에 의거해서 세 가지의 삼법(三法)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첫째는 잡염분으로서, 변계소집자성을 말하는 것이니, 변계소집은 잡염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청정분으로써, 원성실자성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청정함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 두 부분 모두로써, 의타기자성을 말하는 것이니, 그 두 가지 모두에 통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금이 함장된 흙덩어리인 금토장(金土藏)으로써 그 비유를 삼은 것이다.

여기에서 저장의 장(藏)은 그것의 종자이고,

ㅡ여기서 종자라는 것은, 흙에 함장되어 있는 금의 분자(分子)로서 아직 금의 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종자라 하는 것이.

 

言地界者,是堅硬性.土之與金,是所造色.於此喩中,三法可得,謂此藏中,先時有土相貌顯現,後時金相方乃可得.爲顯金相後方可得,說火燒鍊後可得故,金眞實有.

지계(地界)는 견고함의 속성이며, 흙과 금은 지계(地界)로 만들어진 색법(色法, 물질)의 소조색(所造色)인 것이다.

이 비유에서 세 가지의 삼법(三法)을 얻을 수 있으니,

이 금토장(金土藏) 중에서 우선 흙의 모습이 현현하고, 나중에는 금의 모습을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니, 금의 모습을 나중에 비로소 얻을 수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불로 제련한 후에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따라서 금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論曰:世尊,有處說一切法常,有處說一切法無常,有處說一切法非常非無常.依何密意, 作如是說?

謂依他起自性, 由圓成實性分,是常,由遍計所執性分,是無常,由彼二分,非常非無常.依此密意,作如是說.

▷논문; 세존께서는 어떤 곳에서는 일체법은 항상한 상(常)이라 말씀하시고, 어떤 곳에서는 일체법은 무상(無常)이라 말씀하셧으며, 어떤 곳에서는 일체법이 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다고 말씀하셨으니,

어떤 비밀스런 뜻에 의지해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인가?

의타기자성은 원성실성분으로 말미암아 항상한 상(常)이고,

변계소집성분으로 말미암아서는 무상(無常)한 것이며,

그 두 부분에 모두로 인한 것은 항상함도 무상함도 아닌 것이니,

이러한 이런 비밀스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如常無常無二, 如是苦樂無二`淨不淨無二`空不空無二`我無我無二`寂靜不寂靜無二`有自性無自性無二` 生不生無二`滅不滅無二`本來寂靜非本來寂靜無二`自性涅槃非自性涅槃無二,生死涅槃無二亦爾.如是等差別一切諸佛密意語言,由三自性,應隨決了,如前說常無常等門.此中有多頌:

항상함(常)ㆍ무상(無常)함ㆍ항상함도 무상함도 아닌 것과 같이,

괴로움(苦)ㆍ즐거움(樂)ㆍ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것과,

청정ㆍ부정ㆍ청정도 부정도 아닌 것과,

공(空)ㆍ불공(不空)ㆍ공도 불공도 아닌 것과,

자아ㆍ무아ㆍ자아도 무아도 아닌 것과,

적정(敵靜)ㆍ부적정(不寂靜)ㆍ고요함도 고요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과,

자성이 있는 유자성(有自性)ㆍ자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ㆍ자성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것과,

생(生)ㆍ불생(不生)ㆍ생겨남도 생겨나지 않은 것도 아닌 것과, 소멸ㆍ불멸ㆍ소멸도 불멸도 아닌 것과,

본래 적정(敵靜)ㆍ본래 적정(敵靜)하지 않음ㆍ본래 적정함도 아니고 본래 적정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과,

자성열반ㆍ자성열반이 아님ㆍ자성열반도 자성열반이 아닌 것도 아닌 것과,

생사ㆍ열반ㆍ생사도 열반도 아닌 것 역시도 그러한 것이니,

이와 같은 차별이 모든 부처님의 비밀스런 뜻의 말씀으로서, 삼자성에 의거해서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니, 

앞에서 말한 항상함ㆍ무상함 등의 법문과 같은 것이다.

이러하다는 것에 많은 게송이 있으니, 


“如法實不有, 如現非一種, 非法非非法, 故說無二義.

법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현재 한 종류가 아닌 무량한 종류인 것과 같이,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닌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둘이 아닌 무이(無二)의 뜻을 말씀하셨네.

ㅡ법은 실재하지 않으나, 무량한 종류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依一分開顯, 或有或非有, 依二分說言, 非有非非有.

한 부분에 의해서 열어 보인다면, 혹 존재(有)이거나 혹은 비존재(非有)이나, 

두 부분에 의해서 말한다면, 존재(有)도 아니고 비존재(非有)도 아닌 것이네.


如顯現非有, 是故說爲無, 由如是顯現, 是故說爲有.

현현하듯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비유(非有)이니, 그러므로 비존재의 무(無)라 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현현하므로, 따라서 존재(有)라고 말한다네.


自然自體無, 自性不堅住, 如執取不有, 故許無自性.

자연과 자체에 비존재(無)로서, 자성이 견고히 머물지 않는 것이니, 

집착하는 것과 같이 존재하지 않는 불유(不有)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음을 인정하네.


由無性故成, 後後所依止, 無生滅本寂, 自性般涅槃.”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루어지고, 이후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니, 

생겨남도 소멸함의 생멸(生滅)도 없는, 본래 고요한 자성이 완전한 열반이라네.


▶釋曰:伽他義中,如法實不有,如現非一種者,如其次第,釋非法非非法因緣,由實不有故非法,由現非一種故非非法,以非法非非法,故說無二義.

▷해석한다; 게송의 뜻 중에서

‘법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현재 한 종류가 아닌’것이란, 법이 아닌 것ㆍ법이 아님도 아닌 것의 인연을 그 순서대로 해석한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법이 아닌 것이고, 현재 한 종류가 아니기 때문에 법 아님이 아니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에 둘이 아닌 무이(無二)의 뜻을 말한 것이다.

 

依一分者,謂依一邊.開顯者,說示也.或有或非有者,或是有性`或是無性.依二分說言,非有非非有者,取依他起,具二分性,說爲非有及非非有.如顯現非有者,如現所得,不如是有.是故說,爲無者,由此義故,說之爲無.由如是顯現者,由唯似有,相貌顯現.是故說,爲有者,卽由此義說之爲有.

‘한 부분에 의한다는 의일분(依一分)’이란, 한쪽에 의지하는 것을 말하며,

‘열어 보인다는 개현(開顯)’이란, 말로 나타내는 것이며,

‘혹은 존재이거나 혹은 비존재’란 혹은 존재의 성품이거나 혹은 비존재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며,

‘두 부분에 의해서 말하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다’라는 것은, 의타기자성이 두 부분의 성품을 갖춘, 즉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며, 

‘현현하듯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란, 현재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비존재라고 말한다’는 것이란, 이러한 의미로 인하여 그것을 비존재로 삼는 것을 말하며,

‘이와 같이 현현한다’는 것은, 오직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현현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존재라고 말한다’는 것이란, 곧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그것을 존재로 삼는 것음을 말한다.


說一切法無自性意,今當顯示.自然無者,由一切法無離衆緣自然有性, 是名一種無自性意.自體無者,

由法滅已不復更生,故無自性, 此復一種無自性意.

'일체법에 자성 없다는, 일체법무자성(一切法無自性)'의 뜻을 지금 마땅히 나타낼 것이니,

'자연의 비존재인 자연무(自然無)'란, 일체법이 여러 조건의 중연(衆緣)을 떠나서는 자연에 자성이 없으므로, 일종의 무자성(無自性)의 뜻이며,

'자체의 비존재, 자체무(自體無)'란, 법이 소멸하면 다시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자성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 역시 일종의 무자성(無自性)의 뜻이다.

 

自性不堅住者,由法纔生一剎那後 無力能住,故無自性. 如是諸法無自性理,與聲聞共. 如執取不有故,許無自性者,此無自性不共聲聞. 以如愚夫,所取遍計所執自性,不如是有,由此意故,依大乘理,說一切法皆無自性.

'자성은 견고하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법이 생겨난 한 찰나 이후에는 힘(力)이 머물 수 없기 때문에 자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을 말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일체법의 무자성(無自性)의 이치는 성문과 공통되는 것이다.

그러나 ‘집착하는 것과 같이 존재하지 않는 불유(不有)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음을 인정하네.’에서의 자성 없음은 성문과 공통되지 않은 것이니, 어리석은 범부가 취한 것은 변계소집자성이므로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로 인하여 대승의 도리에 의지해서 일체법이 다 자성이 없는 개무자성(皆無自性)이라 말하는 것이다.

 

由無性故,成者,由一切法無自性故, 無生滅等皆得成就.所以者何?由無自性故無有生,由無生故,亦無有滅,無生滅故,本來寂靜,本寂靜故,自性涅槃.後後所依止者,是後後因此,而得有義.

‘자성이 없는 무성(無性)이기 때문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란, 일체법이 자성이 없기 때문에 생겨남도 소멸함의 생멸(生滅)도 없고 불생불멸 이후의 ‘본래적정 자성열반’등이 다 성취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자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에 생겨남도 없는 무생(無生)이고, 무생이기 때문에 역시 소멸함도 없는 무멸(無滅)이며, 무생 무멸이기 때문에 본래 고요한 본적정(本寂靜)이고,

본래 고요한 본적정이기 때문에 자성이 열반인 것이다.

‘이후의 의지처인 후후소의지(後後所依止)’란, 이후에는 이것에 근거해서 존재의 의미인 유의(有義)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5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② 2

 

▶論曰:復次何緣,如經所說,於依他起自性,說幻等喩? 於依他起自性,爲除他虛妄疑故. 他復云何, 於依他起自性, 有虛妄疑? 由他於此,有如是疑: 云何實無有義,而成所行境界?爲除此疑,說幻事喩.

▷논문; 또한 무슨 까닭으로 경전에서 의타기자성에 대해서 요술(幻) 등의 비유를 말한 것인가? 

의타기자성에 대해서 다른 이들의 허망된 의심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다른 이가 의타기자성에 대하여 허망된 의심을 갖는 것인가? 

다른 이가 이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심을 갖기 때문이니,  

즉 실제로 대상이 존재하지 않거늘, 어떻게 심식(心識)이 행하여지는 소행경계(所行境界)를 이루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요술(幻) 등의 비유를 말한 것이다.

 

云何無義心`心法轉?爲除此疑,說陽炎喩. 云何無義,有愛`非愛,受用差別? 爲除此疑,說所夢喩.云何無義,淨`不淨業,愛`非愛果,差別而生?爲除此疑,說影像喩.云何無義,種種識轉?爲除此疑,說光影喩.云何無義,種種戲論,言說而轉?爲除此疑,說谷嚮喩.

云何無義,而有實取諸三摩地所行境轉?爲除此疑,說水月喩.云何無義,有諸菩薩無顚倒心,爲辦有情諸利樂事,故思受生?爲除此疑,說變化喩

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이거늘, 어떻게 심왕과 심소법이 작용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아지랑이의 양염(陽炎) 비유를 말하였으며,

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이거늘, 어떻게 사랑스럽고 사랑스럽지 못한 것의 수용(受用)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꿈(夢)의 비유를 말하였으며,

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이거늘, 어떻게 청정하고 청정하지 못함의 업과 사랑스러움과사랑스럽지 못함의 결과가 다르게 생겨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영상(像)의 비유를 들었으며,

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이거늘, 어떻게 갖가지 식이 전전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그림자의 비유를 말하였으며,

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이거늘, 어떻게 갖가지 희론과 언설이 전전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메아리의 곡향(谷嚮)의 비유를 들었으며, 

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이거늘, 어떻게 실제로 모든 삼마지에서 행하여지는 대상(境)을 취하여 전전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물에 비친 달의 비유를 말하였으며,

대상이 없는 무의(無義)이거늘, 어떻게 모든 보살은 전도됨이 없는 마음으로 유정을 이롭게 하는 일들을 애써 하기 위해서 생을 받고자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변화(化)의 비유를 말하였다.


▶釋曰:爲此義故,於依他起,說幻等喩,今當顯示.

此中虛妄疑者,謂於虛妄依他起性,所有諸疑,爲除此疑,說幻等喩顯依他起.

▷해석한다; 이러한 뜻으로 의타기자성에 대해서 요술 등의 비유를 말하는 것을 마땅히 나타내 보인 것이니,

 중에서 ‘허망된 의심의 허망의(虛妄疑)’는, 허망된 의타기성에 대해서 갖는 모든 의심을 말한 것이며,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요술 등의 비유를 말하여서 의타기성을 나타내었다.

 

若實無義,云何成境?爲治此疑,說幻事喩,顯依他起.譬如幻象,雖無實義,而成境界,義亦如是.

만약 실제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무의(無義)라면 어떻게 경계(境)를 이루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다스리기 위해서 요술의 환사(幻事) 비유를 말하여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비유하자면 환상은 실제의 대상인 실의(實義)가 없지만 경계(境界)를 이루는 것과 같이, 대상(義)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이다.

 

他復生疑:若無有義,卽無所緣,諸心心法,云何而轉?爲除此疑,說陽炎喩,顯依他起.此中陽炎,譬心`心法,水喩於義,譬如陽炎,有動搖故,雖無有義,而生水覺.諸心`心法,亦復如是,由動搖故,雖無有義,而生義覺.

다른 이가 다시 의심을 일으키기를, 만약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이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심왕과 심소법이 작용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다스리기 위해서 아지랑이의 양염(陽炎) 비유를 말하여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여기에서 아지랑이는 심왕과 심소법을 비유한 것이고, 물은 대상(義)을 비유한 것으로,

아지랑이에는 동요가 있기 때문에 대상(義)이 없지만 물이라는 지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모든 심왕과 심소법 또한 이와 같아서 동요로 말미암아 비록 대상(義)이 없을지라도,  대상(義)이라는 지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是諸愚夫,於此復疑:若無有義,諸愛`非愛,受用差別,云何可得?爲除此疑,說所夢喩,顯依他起.如於夢中,雖無實義,而見種種愛與非愛,受用差別現前可得,此亦如是.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이에 대해서 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의 모든 감각 수용의 차이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 하나니,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꿈의 비유를 말하여서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꿈속에서는 실제의 대상이 없어도 갖가지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은 감감의 수용 차이가 현전할  있는 것과 같이, 이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於此復疑:淨`不淨業,義旣實無,愛`非愛果,義云何起?爲除此疑,說影像喩,顯依他起.譬如影像,實無有義,卽於本質, 起影像覺, 然影像義,無別可得.此亦如是,應知雖無愛與非愛眞實果義,而現可得.

이에 대해서 다시 의심하기를,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은 업의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의 결과의 대상인 과의(果義)가 일어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거울면에 비친 갖가지 영상 비유를 말하여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비유하자면 거울에 비친 영상은 실제로는 대상(義)이 없지만 본질에 대해서 영상의 지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영상의 대상(義)은 별도로 없을  없는 것과 같이, 이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니,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은 참된 결과의 대상인 진실과의(眞實果義)가 없을지라도 현재에서 얻을  있는 것이다.

 

於此復疑:若無有義,云何得有種種識轉?爲除此疑,說光影喩,顯依他起.如弄影者,有其種種光影可得,雖有多種光影可得, 而光影義,實無所有.識亦如是,無種種義,而有種種義現可得.

이에 대해서 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갖가지 식이 전전할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그림자의 비유를 말하여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그림자 장난을 하는 이는, 갖가지 그림자를 얻을  있는 것과 같이, 많은 종류의 그림자를 얻을  있지만, 그림자의 대상(義)은 존재하지 않는 무소유(無所有)이며,

식 또한 이와 같아서 갖가지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아도 갖가지 대상(義)이 현재에 나타날  있는 것이다.

 

於此復疑:若無有義,無量品類,戲論言說,云何而轉?爲除此疑,說谷響喩, 顯依他起.譬如谷響, 雖無有義,而現可得,戲論言說,亦復如是,雖無實義,而現可得.

이에 대해서 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량한 품류의 희론과 언설이 전전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메아리의 비유를 말하여서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비유한 메아리에는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아도 현재 얻을  있음과 같이,

희론과 언설 역시도 이와 같아서 실제의 대상(義)이 없어도 현재에서 얻을  있는 것이다.


於此復疑:若無有義,云何世閒定心`心法,有義可得? 由說定心,能如實知`如實見故.爲除此疑,說水月喩,顯依他起.譬如水月,其義實無,由水潤滑,澄淸性故,而現可得.定心亦爾.所緣境義,雖實無有,而現可得.水喩其定,以是潤滑,澄淸性故.

이에 대해서 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대상(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간의 선정인 세간정심(世閒定心)에서 심왕과 심소법에 대상(義)이 있을  있는 것인가? 

선정의 마음인 정심(定心)은 있는 그대로를 여실하게 알고,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본다고 말하기 때문이니,

이러한 것에 대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물에 비친 달의 비유를 말하여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물에 비친 달의 비유는  대상이 실제로는 없어도 물의 부드럽고 맑고 깨끗한 성품으로 인하여 현재에 얻을  있는 것과 같이,

선정의 정심(定心) 역시 그러해서 인식대상인 소연경의(所緣境義)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현재에 얻을  있는 것이다.

물은  선정에 비유된 것으로, 이것은 부드럽고 맑으며 깨끗한 성품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於此復疑:若有情義,實無所有,云何證眞諸菩薩等,作彼利樂覺慧爲先, 彼彼趣中,攝受自體? 爲除此疑,說變化喩,顯依他起.譬如變化,實無有義,由化者力一切事成,非變化義,而不可得.應知此中亦復如是,所受自體,其義雖無,而有能作一切有情利益安樂,所受自體,義現可得.

이에 대해서 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유정이 대상(義)으로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진리를 증득한 보살들이 어떻게 유정을 이롭게 하는 깨달음의 지혜를 우선으로 삼고, 유정들의 윤회세계(趣)에서 자체를 섭수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변화의 비유를 말하여 의타기성을 나타내었으니, 비유한 변화는 실제의 대상(義)이 없으나, 변화자인 화자(化者)의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으로, 변화가 아니고서는 대상(義)을 얻을  없는 것과 같으니,  여기에서도 역시 그와 같아서 받는 자체에는  대상(義)이 없지만, 능히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고, 받는 자체의 대상(義)이 현재에 있을  있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復有別義,世尊意說,幻等八喩,今當顯示.此中幻喩,爲除眼等,六種內處,應知顯示眼等六處,譬如幻象,雖實非有,而現可得.說陽炎喩,爲除器世閒,由彼大故.於陽炎中,實無有水,動搖力故,似水可得.

다시 별도 의미의 세존의 취지로서 요술 등의 여덟 가지 비유인 팔유(八喩)를 말씀하신 것을 마땅히 지금 나타내 보인 것이니,

여기에서 요술의 비유는 안근처(眼根處) 등의 육내처(六內處)를 없애기 위해서  등의 여섯 가지 육처(六處) 나타낸 것으로, 비유한 환상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아도 현재에 얻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지랑이의 비유를 말한 것은 기세간(器世間, 자연계)를 없애기 위한 것이니, 그것이 광대하기 때문이니,  

실제 아지랑이에는 물이 없지만, 동요하는  때문에 물이라고 아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說所夢喩,爲除色等所受用境,顯如所夢,色等實無,而能爲因, 起愛`非愛,受用差別.說影像喩, 爲除身業果, 顯善`不善身業爲緣,而有餘色影像生起.說谷嚮喩,爲除語業果,顯語業因,感語業果,猶如谷嚮.

꿈의 비유를 말한 것은 물질(色) 등이 수용하는 경계를 없애기 위한 것으로,

꿈에서  물질(色)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능히 원인이 되어서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의 수용의 차이를 일으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에 영상의 비유를 말한 것은 신업(身業)의 결과(果)를 없애기 위한 것이니,  

선ㆍ불선의 신업을 조건으로 인하여, 다른 물질(色)의 영상이 생겨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메아리의 비유를 말한 것은 구업(口業)의 결과(果)를 없애기 위한 것으로, 구업의 원인(因)이 구업의 결과(果)를 초감하는 것을 비유하여서 골짜기의 메아리인 곡향(谷嚮)과 같다고 표현하였다.

 

意業三種:一非等引地`二等引地`三聞種類.說光影喩,爲除非等引地,諸意業果,顯此意業,所得諸果,猶如光影.說水月喩,爲除等引地,諸意業果,顯等引地,諸意業果,猶如水月.說變化喩,爲除聞種類意業,聞種類者,卽是聞`思之所熏習,此卽顯示聞種類意差別而轉,猶如變化.

의업(意業)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마음의 평정을 이끌지 못하는 비등인(非等引)으로서, 곧 욕계의 산란되게 움직이는 업을 말하는, 비등인지(非等引地)이고, 

둘째는 선정으로 마음을 집중하여 안정된 등인지(等引地)이며, 

셋째는 들어서 이루는 문혜(聞慧)와 사유해서 이루는 사혜(思慧)의 종류인 문종류(聞種類)이다. 

그림자의 비유를 말한 것은 비등인지(非等引地)의 모든 의업의 결과를 없애기 위한 것이니,  의업이 얻는 모든 결과는 마치 그림자와 같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물에 비친 달의 비유를 말한 것은 등인지(等引地)의 모든 의업의 결과를 없애기 위한 것이니, 등인지의 모든 의업의 결과는 마치 물에 비친 달과 같음을 나타낸 것이며,

변화의 비유를 말한 것은 들어서 이루는 문혜(聞慧) 종류의 의업을 없애기 위한 것이니, 들어서 이루는혜의 종류는  들어서 이루는 지혜와 사유해서 이루는 사혜 훈습한 바인 것이다. 

이는 곧 들어서 이루는 문혜 종류의 의미가 차별적으로 전전하는 것이 마치 변화와 같음을 나타낸 것이다.

 

등인(等引)은 범어 samāhita의 번역어로서 삼마혜다(三摩呬多)라 음역된다. 선정으로 마음을 집중하여 안정시켰다는 의미이며, 등(等)은 마음에 혼침(昏沈, 암매暗昧)과 들뜸의 도거(掉擧, 산란)이 평정되어 평등한 것을 말한다. 선정을 닦으면 이러한 등(等)을 일으키게 되므로 등인이라 하며, 등인지(等引地)는 적정지(寂靜地)이며, 진제 역본에는 수혜(修慧)로 말한다.

문종류(聞種類)는 들어서 이루는 지혜인 문혜(聞慧)와 사유해서 이루는 지혜인 사혜(思慧)를 의미한다.


▶論曰:世尊依何密意,於『梵問經』中說:如來不得生死`不得涅槃?於依他起自性中,依遍計所執自性,及圓成實自性,生死`涅槃,無差別密意.何以故?卽此依他起自性,由遍計所執分,成生死,由圓成實分,成涅槃故

▷논문; 세존께서는 어떠한 비밀스런 뜻에 의지해서 '범문경(梵問經)'에서 “여래는 생사를 얻지 않고 열반을 얻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의타기자성에서는 변계소집자성과 원성실자성에 의지해서 생사와 열반에 차별이 없다는 비밀스런 뜻이니,

왜냐하면  의타기자성은 변계소집분으로 인하여 생사를 이루고, 원성실분으로 인하여 열반을 이루기 때문이다.


▶釋曰:如是三種自性相法,所說契經,悉皆隨順,今當顯示.世尊,依何密意,於『梵問經』中說,如來不得生死`不得涅槃者
問, 於依他起自性中,依遍計所執自性,及圓成實自性,生死`涅槃無差別密意者,答次當廣釋.

▷해석한다; 이와 같은 삼자성의 상법(相法)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경(契經, 불경)에 모두 수순한다는 것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세존께서는 어떠한 비밀스런 뜻에 의지해서 '범문경'에서, '여래는 생사를 얻지 않고 열반을 얻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는가?’는 묻는 것이다.

‘의타기자성 중에서는 변계소집자성과 원성실자성에 의지해서 생사와 열반에 차별이 없다는 비밀스런 뜻이다’라는 것은 그 대답으로써 다음에 마땅히 자세히 해석할 것이다.

 

依他起自性,非定生死,由圓成實分,成涅槃故;亦非定涅槃,由遍計所執分,成生死故,是故不可定說一性.由此自性,若得一分,餘分不異.依此意趣,於彼經中,說如來不得生死`不得涅槃.

의타기자성은 결정적으로 생사는 아니니, 원성실분(圓成實分)으로 인하여 열반을 이루기 때문이다.

역시 결정적으로 열반은 아니닌, 변계소집분(遍計所執分)으로 인하여 생사를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정적으로 하나의 성품인 일성(一性)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니, 이 자성에 의거해서 만약 한 부분을 얻었을지라도 다른 부분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취지에 의지해서 그 경전에서 '여래는 생사를 얻지 않고 열반을 얻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5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② 1

 

ㅡ제3 분별장(分別章) 나머지 부분.

▶論曰:復次云何得知,如依他起自性,遍計所執自性,顯現而非稱體?

由名前覺無稱體相違故`由名有衆多多體相違故`由名不決定雜體相違故.此中有二頌:

▷논문; 또한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Other dependent, Dependent nature)과 같이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 Fully conceptualized, Imaginary nature)이 현현할지라도 자체(體)에 계합하지 않음을 어떻게   있는가?

명칭(名)에 대한 지각이 없음으로 인하여 체에 계합함과 위배되기 때문이고, 

명칭(名)에 많은 것이 있음으로 인하여 체가 많음에 위배되기 때문이며, 

명칭(名)은 결정적이지 않음으로 인하여 체의 잡염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由名前覺無, 多名不決定, 成稱體多體, 雜體相違故.

명칭에 대한 지각이 없음과 많은 명칭과 결정적이지 않음으로 인하는 것이니,

체에 계합함과 체가 많음과 체의 잡염이 위배됨을 이루기 때문이라네.


法無而可得, 無染而有淨, 應知如幻等, 亦復似虛空.”

법은 비존재(無)이지만 얻을  있는 것이며, 잡염이 없고 청정함이 있으니, 

환상(幻) 등과 같으며 또한 허공과 같은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리라.


▶釋曰:如依他起自性,遍計所執分, 雖顯現可得, 而非稱彼體.爲顯此義故, 說由名前覺無稱 體相違故等.

若依他起`遍計所執, 同一相者,應不待名, 於義覺轉.  如執有甁, 

▷해석한다; 의타기자성과 같이 변계소집분은 현현할 수는 있을지라도  체에 계합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명칭(名)에 대한 지각이 없음으로 인하는 것이니, 체에 계합함과 위배되기 때문이다’는 등으로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이 동일한 일상(一相)이라면, 마땅히 명칭(名)을 기다리지 않고 대상(義)에 대해서 지각이 일어나야 할 것이니, 병(甁)이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若離甁名, 於甁義中, 無有甁覺. 若此甁名與彼甁, 義同一相者,甁覺應轉;以非一相,是故不轉.

由此名義,若體相稱, 則成相違, 此中安立名爲依他起`義爲遍計所執, 以依他起,由名勢力成所遍計故.

만약 병의 명칭(名)을 여읜다면 병이라는 대상(義)에 대하여 병이라는 지각이 없을 것이며,

만약  병의 명칭(名)과  병의 대상(義)이 동일한 일상(一相)이라면 병의 지각이 마땅히 일어나야 할 것이나,

일상(一相)이 아니기 때문에 지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명칭(名)과 대상(義)으로 인하여 만약 체와 상이 계합한다면  위배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안립은 명칭(名)을 의타기성으로 삼고, 대상(義)을 변계소집성으로 삼는 것이니,

의타기성은 명칭(名)의 세력으로 인하여 소변계(所遍計, 경 境)를 이루기 때문이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가지가지의 연(緣)으로 생긴 것일 뿐, 실체(實體)가 없는 존재를 실아실법(實我實法)이라고 집착하는 미(迷)한 마음의 능변계(能遍計)와, 그 식(識)의 대상(境)인 소변계(所遍計)에 의해서 나타난 것일 뿐, 실체가 없는 체성도무(體性都無)이다.

 

又於一義,有衆多名,若名與義同一相者,義應如名,亦有多種.若爾,此義應成多體, 一義多體, 則成相違.

是故兩性,若同一相,則成第二相違過失.

또한 하나의 대상인 일의(一義)에 대해서 많은 명칭(名)이 있고, 만약 명칭(名)과 대상(義)이 동일한 일상(一相)이라면, 대상 역시도 마땅히 명칭(名)과 같이 많은 종류가 있어야 할 것이며,

만약 그러하다면  대상(義)은 마땅히 많은 체의 다체(多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하나의 대상인 일의(一義)로서 체가 많은 다체(多體)라면  위배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만약  자성이 동일한 일상(一相)이라면, 곧  번째 위배됨의 과실을 이루게 될 것이다.

 

又名不決定,以一瞿聲,於九義轉.

또한 명칭(名)은 결정적이지 않은 것이니, 하나의 볼 구(瞿, 산스크리트 go)라는 소리는 아홉 가지의 뜻으로 전전하는 것이니,

 

아홉 가지 뜻의 구의(九義)는 장소의 방(方)ㆍ짐승의 수(獸) 또는 우(牛)ㆍ땅 지(地)ㆍ빛 광(光)ㆍ말 언(言)ㆍ금강보(金剛寶)ㆍ눈의 안(眼)ㆍ하늘의 천(天)ㆍ물 수(水)이다. 산스크리트 go에 이와 같은 뜻이 있는 것을 말한다.

 

若執名義同一相者,多義相違,應同一體,則成第三相違過失.由執牛等非一相義,同一性故,初一伽他,重顯此義.於中成者,顯依他起`遍計所執非一義成. 瞿 볼 구

만일 명칭(名)과 대상(義)이 동일한상이라고 집착한다면 많은 대상(義)에 위배되는 것이니,

만약 동일체라면   번째 과실을 이룰 것이니, 소 우(牛) 등은 하나의 모습이 아닌 것이나, 대상(義)이 동일한 성품이라고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니, 첫 번째의 게송에서 이러한 의미를 거듭 나타내었으니, 

그 게송의 성칭체다체(成稱體多體)에서 ‘이룬다는 성(成)’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이 하나가 아닌 뜻을 이룬다는 말이다.


法無而可得等者,此一伽他,以幻等喩,開悟弟子. 弟子有二相違疑問: 云何法無而現可得?
云何無染而有淸淨? 此中兩喩,釋此疑問. 如幻等者, 譬如幻象, 實無所有, 而現可得. 應知此中義亦如是, 雖現可得而非實有.

‘법은 비존재(無)이지만 얻을  있다’는 등은 다음과 같으니,

  게송은 요술 등의 비유로써 제자를 깨우치는 것이다. 

제자에게  가지의 의문이 있었으니,

“법이 비존재(無)이거늘 어떻게 현재 얻을  있는가?”와 “어찌하여 잡염이 없는 청정함이 있는 것인가?”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의 비유로써  의문을 해결하였으니,

‘환상 등과 같다는 여환등(如幻等)’이란, 비유하자면 환상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현재에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니, 여기서의 대상 역시도 이와 같이 현재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似虛空者, 譬如虛空, 雖非雲等所能染污, 性淸淨故, 而離彼時, 說名淸淨. 當知諸法亦復如是, 雖實無染, 性淸淨故, 然客障垢, 得滅離時, 說名淸淨.

‘허공과 비슷하다는 사허공(似虛空)’이란, 비유하자면 허공은 본성이 청정하기 때문에 구름 등이 능히 오염시킬  없지만, 그러한 구름 등이 없을 때를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법도 역시 이와 같아서, 실제로는 잡염이 없고 본성이 청정한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장애의 오염이 소멸하였을 때,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復次何故,如所顯現實無所有,而依他起自性非一切,一切都無所有? 此若無者,圓成實自性,亦無所有.此若無者,則一切皆無.若依他起及圓成實自性無有,應成無有染淨過失.旣現可得雜染`淸淨,是故不應一切皆無.此中有頌:

▷논문; 또한 무슨 까닭에 현현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의타기자성은 일체 모두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인가? 

만약 이것이 없다면 원성실자성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만약 이것이 없다면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의타기자성과 원성실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잡염과 청정이 없다는 과실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잡염과 청정을 현재에서 얻는 까닭에, 마땅히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若無依他起, 圓成實亦無, 一切種若無, 恒時無染淨.”

만약 의타기성이 없다면, 원성실성 역시도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 모든 종류가 없다면, 잡염과 청정이 어느 때에도 없을 것이라네.


▶釋曰:若依他起, 如所可得不如是有, 旣爾何不一切一切都無所有? 此若無者, 圓成實性, 亦應無有. 何以故? 由有雜染淸淨有故.若二俱無, 則一切種,皆無所有.今當顯此非都無有, 有謗雜染淸淨過故. 雜染淸淨, 旣現可得, 故此二性俱非不有. 若執爲無,則撥現有雜染淸淨, 言無所有.

▷해석한다; 만약 의타기성이 있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일체 모두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인가? 

만약 이것이 없다면 마땅히 원성실성 역시도 없어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잡염이 있음으로써 청정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두 가지 모두가 없다면,  모든 종류도  없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이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나타내어야 할 것이니,  

잡염과 청정을 비방하는 과실이 있게 되기 때문이고, 잡염과 청정은 현재에 이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타기성과 원성실성, 두 가지 자성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만약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현재 잡염과 청정이 있는 것을 부정하면서 없다고 말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論曰:諸佛世尊,於大乘中,說方廣教,彼教中言:

▷논문;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대승 안에서 방광(方廣) 가르침을 말씀하셨으니,  가르침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방광(方廣), 세간 출세간을 다 아우르는 내용의 설법, 즉 대승 경전을 가리키며, 대승의 경에서 설하는 이치는 방정(方正)한 것이므로 방(方)이라 하며, 그 뜻이 원만히 구비되었고 언어가 풍족하므로 광(廣)이라 한다.

 

云何應知遍計所執自性?應知異門,說無所有. 云何應知依他起自性? 應知譬如幻`炎`夢`像`光影`谷響`水月`變化. 云何應知圓成實自性?應知宣說四淸淨法.

“변계소집자성을 어떻게 알아야 마땅한 것인가? 마땅히 알지니, 이문(異門, 다른 견해)에서는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라고 말하는 것이다. 

의타기자성을 어떻게 알아야 마땅한 것이가? 마땅히 알지니, 비유하자면 요술ㆍ아지랑이ㆍ꿈ㆍ영상(像)ㆍ그림자ㆍ메아리ㆍ물에 비친 달ㆍ변화(化)와 같은 것이다. 

원성실자성을 어떻게 알아야 마땅한 것인가? 마땅히 알지니,  가지의 청정법인 사청정법(四淸淨法)이라고 널리 말하는 것이다.

 

何等名爲四淸淨法?一者自性淸淨,謂眞如`空`實際`無相`勝義`法界;二者離垢淸淨,謂卽此離一切障垢;三者得此道淸淨,謂一切菩提分法,波羅蜜多等;四者生此境淸淨,謂諸大乘妙正法教. 由此法教,淸淨緣故,非遍計所執自性;最淨法界,等流性故,非依他起自性.如是四法,摠攝一切淸淨法盡.此中有二頌:

무엇을  가지 청정법인 사청정법(四淸淨法)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첫째는 자성청정(自性淸淨)이니, 이른바 진여(眞如)ㆍ공(空)ㆍ실제(實際)ㆍ무상(無相)ㆍ승의(勝義)ㆍ법계(法界)이며,

둘째는 오염을 여읜 이구청정(離垢淸淨)이니, 이른바 모든 장애를 여읜 것이며,

셋째는 이것을 증득한 도의 도청정(道淸淨)이니, 이른바 모든 보리분법(菩提分法)과 바라밀다 등이며,

넷째는 이것을 생겨나게  경계의 경청정(境淸淨)이니, 이른바 모든 대승의 미묘하고 올바른 교법이다. 

 교법의 청정함의 조건(緣)으로 인하여 변계소집자성이 아닌 것이며,

가장 청정한 법계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오는 성품이기 때문에 의타기자성이 아닌 것이며,

이와 같은  가지의 법에 네 가지의 사청정법(四淸淨法)  포괄하는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幻等說於生, 說無計所執, 若說四淸淨, 是謂圓成實.

요술(幻) 등은 생겨남(生)을 말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無)이라고 말하는 것은 헤아려서 집착한 것이라.

만약  가지의 청정을 말한다면, 이를 원성실성이라 말하는 것이라네.


自性與離垢, 淸淨道所緣, 一切淸淨法, 皆四相所攝.”

자성(自性, 자성청정)ㆍ오염을 여읜 이구(離垢, 이구청정)ㆍ도(道, 도청정)ㆍ인식대상의 소연(所緣, 경청정)의 청정 

모든 청정한 법 모두는  가지의 사상(四相)에 포섭된다네.


▶釋曰:自性淸淨者,謂此自性,本來淸淨,卽是眞如自性,實有一切有情平等共相;

由有此故, 說一切法, 有如來藏. 離垢淸淨者, 卽此眞如, 遠離煩惱`所知障垢,卽由如是淸淨眞如, 顯成諸佛.

▷해석한다; ‘자성청정’이란 이 자성이 본래 청정한 것을 말하는 것이니, 곧 진여자성(眞如自性)이고 참존재인 실유(實有)로서 모든 유정의 평등한 공상(共相)이다.

이것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법에 여래장(如來藏)이 있다고 말하며, 

‘오염을 여읜 이구청정(離垢淸淨)’이란, 곧 이 진여가 번뇌장과 소지장의 오염을 멀리 여읜 것으로, 이와 같은 청정한 진여로 인하여 모든 부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得此道淸淨者,謂能得此眞如聖道卽是淸淨,謂念住等菩提分法,及以一切波羅蜜多.生此境淸淨者, 生此能證菩提分法所緣境界.生此境界,卽是淸淨,故名生此境淸淨,卽契經等十二分教. 何以故? 若此聖教,是遍計所執, 應成雜染因. 若是依他起,應成虛妄.最淨法界,等流性故,非是虛妄.旣離二自性,故成圓成實.

‘이것을 증득한 도의 청정인 도청정(道淸淨)’이란, 이 진여를 증득한 성스러운 성도(聖道)가 청정한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른바 4념주(四念住) 등의 보리분법과 모든 바라밀다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생겨나게 한 경계의 경청정(境淸淨)’이란, 이 능히 증득하는 보리분법을 생겨나게 하는 인식대상의 경계인 소연경계(所緣境界)이다.

이것을 생겨나게 하는 경계가 청정하기 때문에, 이것을 생겨나게 하는 경청정(境淸淨)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곧 계경(契經) 등 12분교(分敎)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만약 이 성스러운 가르침의 성교(聖教)가 변계소집성이라면 마땅히 잡염의 원인을 이루어야 할 것이며,

만약 의타기성이라면 마땅히 허망됨을 이루어야 할 것이며,

가장 청정한 법계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오는 성품이기 때문에 허망된 것이 아니니, 이미 이 두 자성을 여읜 까닭에 원성실성을 이루는 것이다.

 

又此四種,於大乘中,隨說一種,應知是說圓成實性. 於中初二,無有變異,圓成實故,名圓成實.

後之二種,無有顚倒,圓成實故,名圓成實.

또한 이 네 가지는 대승 안에서 한 종류를 말하는 것을 따라 원성실성이라 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그 중에서 자성청정과 이구청정, 두 가지는 변이(變異)가 없는 원성실이기 때문에 원성실성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도청정과 경청정의 두 가지는 전도(顚倒)됨이 없는 원성실이기 때문에 원성실성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後伽他中,具頌此義.幻等說於生者,謂依他起,此中名生.若於是處,說一切法,譬如幻事,乃至變化, 應知此說依他起性. 說無計所執者,若於是處,說無有色,乃至說無一切諸法,應知此說遍計所執性.

가타(伽他, 게송)의 뒷 부분에서 이러한 의미를 갖추어 읊었으니,

‘요술(幻) 등은 생겨남(生)을 말한다’란, 의타기성을 여기서는 생겨남의 생(生), 즉 인연에 의한 생멸(生滅)이라 이름한 것이며,

만약 여기에서 일체법을 비유하여 요술(幻) 나아가 변화(化)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의타기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비존재(無)라고 말하는 것은 헤아려서 집착한 것이라네’란, 만약 이곳에서 물질(色)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나아가 일체의 제법이 비존재(無)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변계소집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4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① 6

 

▶論曰: 復次遍計有四種:一自性遍計`二差別遍計`三有覺遍計`四無覺遍計.

논문; 또한 변계(遍計)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변계이고, 둘째는 차별변계이며, 셋째는 명언(名言)을 잘 아는, 유각(有覺)변계이고, 넷째는 명언을 잘 알지 못하는, 무각(無覺)변계이다.

 

변계(遍計)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두루 ~라고 헤아린다', '널리 ~라고 헤아린다', '일반적 또는 보편적으로 ~라고 헤아린다'이다. '헤아린다'라는 뜻의 계(計)는 전통적인 용어인 계탁(計度) 또는 계탁분별(計度分別)의 줄임말이다.

계탁분별을 줄여서 그냥 분별(分別)이라고도하며, 계 · 계탁 · 계탁분별 · 분별을 순한글로는 일반적으로 헤아림이라고 한다. 계 · 계탁 · 계탁분별 · 분별 · 헤아림은 특히 제6의식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사물에 대해 생각(量)하고 사유(思惟), 뜩히 심사숙고하고 분별(分別)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아비달마구사론'에 따르면 계탁분별의 본질적 성질 즉 본질은 제6의식과 상응하는 산혜(散慧) 즉 산란된 지혜이다. 
계탁분별의 정의인 '생각하고 사유하고 구별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는 것' 그 자체에는 본래 부정적인 의미가 없지만, 선정에 의해 나타나는 바른 지혜, 즉 무루혜가 아니라는 점에서 계탁분별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변계(遍計)라는 낱말의 문맥에서의 계탁분별, 즉 계(計) · 계탁 · 분별 · 헤아림은 항상 부정적인 의미인 그릇된 헤아림의 뜻으로 사용된다.ㅡ위키

 

有覺者,謂善名言. 無覺者,謂不善名言.如是遍計,復有五種:一依名遍計義自性,謂如是名有如是義;二依義遍計名自性, 謂如是義,有如是名;三依名遍計名自性,謂遍計度未了義名;四依義遍計義自性,謂遍計度未了名義;五依二遍計二自性,謂遍計度此名此義.如是體性.

유각(有覺)은  명언(名言)을 잘 아는 것을 말하고, 무각은 명언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해서 변계에 다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명칭(名)에 의지해서 대상(義)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의명변계의자성(依名遍計義自性)이니, 이러한 명칭(名)에 이러한 대상(義)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둘째는 대(義)상에 의지해서 명칭(名)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의의변계명자성(依義遍計名自性)이니, 이러한 대상(義)에 이러한 명칭(名)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명칭(名)에 의지해서 명칭(名)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의명변계명자성(依名遍計名自性)이니, 아직 알지 못한 대상(義)의 명칭(名)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며,

넷째는 대상(義)에 의지해서 대상(義)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의의변계의자성(依義遍計義自性)이니, 아직 알지 못한 명칭(名)의 대상(義)을 계탁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명칭(名)과 대상(義), 두 가지에 의지해서 두 가지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의이변계이자성(依二遍計二自性)이니, 이것의 명칭(名)과 이것의 대상(義)은 이와 같은 체성이라고 두루 계탁하는 것이다. 


釋曰:善名言者,謂解名言.不善名言者,謂牛羊等,雖有分別,然於文字,不能解了.

해석한다; ‘명언(名言)을 잘 안다’는 것은 명언을 잘 이해하는 것을 말하고,

‘명언(名言)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은 소ㆍ양 등을 분별하지만, 문자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論曰: 復次摠攝一切分別,略有十種:一根本分別,謂阿賴耶識;二緣相分別,謂色等識;三顯相分別,謂眼識等幷所依識;四緣相變異分別,謂老等變異`樂受等變異`貪等變異`逼害時節代謝等變異` 捺落迦等諸趣變異,及欲界等諸界變異;五顯相變異分別,謂卽如前所說變異,所有變異;六他引分別,謂聞非正法類,及聞正法類分別;七不如理分別,謂諸外道聞非正法類分別;八如理分別,謂正法中,聞正法類分別;九執著分別,謂不如理作意類,薩迦耶見爲本, 六十二見趣相應分別;十散動分別,謂諸菩薩,十種分別.

논문; 또한 모든 분별(分別)을 모두 포섭하면 대략  가지가 있으니,

첫 째는 근본분별(根本分別)이니, 아뢰야식을 말하며,

둘 째는 반연하는 상의 연상분별(緣相分別)이니, 색식(色識) 등을 말하는 것이며,

셋 째는 현현함의 현상분별(顯相分別)이니, 안식 등의 의지처의 식인 의식(依識)이며,

넷 째는 반연의 모습이 변이함의 연상변이분별(緣相變異分別)이니, 늙음 등의 변이, 즐거움의 감수작용인 낙수(樂受) 등의 변이, 탐욕 등의 변이, 핍박ㆍ시절의 대사(代謝) 등의 변이, 지옥  모든 윤회세계(趣)의 변이  욕계  여러 세계의 변이를 말하는 것이며,

다섯 째는 현현의 모습이 변이함의 현상변이분별(顯相變異分別)이니,  앞에서 말한 변이와 같은 모든 변이를 말하며, 

여섯 째는 남이 이끄는 타인분별(他引分別)이니, 정법이 아닌 종류를 듣거나 정법의 종류를 듣고 분별하는 것이며,

일곱 째는 진리가 아닌 불여리분별(不如理分別)이니, 모든 외도가 정법이 아닌 종류를 듣고 분별하는 것을 말하며,

여덟 째는 진리 그대로의 여리분별(如理分別)이니, 정법 안에서 정법의 종류를 듣고 분별하는 것이며,

아홉 째는 집착분별(執着分別)이니, 진리가 아닌 작의의 종류로서 살가야견을 근본으로 삼아서 62견(見)과 상응하는 분별이며,

열 째는 산란된 움직임의 산동분별(散動分別)이니, 모든 보살의  가지 분별이다.

62견(見), 석존 재세시(在世時)에 주장된 이교도의, 62가지의 잘못된 견해로서, 자신과 세계에 관하여 불교의 정도(正道)에서 빗나간 견해(사상)의 총칭이다.   


▶釋曰:摠攝一切分別,略有十種者,是摠摽擧,後當別釋. 根本分別者,謂阿賴耶識, 是諸分別根本,自體亦是分別.

緣相分別者,謂色等識, 爲所緣相, 所起分別. 顯相分別者,謂眼識等幷所依識, 顯現似彼所緣境相所起分別. 有所分別,或能分別故, 名分別

▷해석한다; ‘일체분별을 모두 포섭하면 대략  가지가 있다’는 것은 총표(總標)를 든 것이니, 나중에 마땅히 별도로 해석할 것이다. 

첫 째의 ‘근본분별(根本分別)’이란 아뢰야식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모든 분별의 근본으로서, 그 자체도 역시 분별이다. 

둘 째의 ‘반연의 모습의 연상분별(緣相分別)’이란 색식 등을 말하는 것으로, 인식대상의 소연상(所緣相) 때문에 일으켜진 분별이며,

셋 째의 ‘현현함의 모습의 현상분별(顯相分別)’이란 안식 등의 의지처인 식, 즉 소의식(所依識)을 말하며, 그 인식대상과 비슷한  현현하여 일으켜진 분별이며, 분별의 대상, 혹은 분별의 주체가 있기 때문에 분별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緣相變異分別者, 謂卽緣相所有變異. 緣此緣相變異分別,故名緣相變異分別. 謂老等變異者, 身中大種, 衰朽改易, 名老變異分別. 此故說名緣相變異分別. 等者,等取病死變異. 樂受等變異亦爾, 謂由樂受,身體改易, 等者等取苦及不苦不樂.貪等變異亦爾,等者等取瞋癡. 逼害時節代謝等變異亦爾,謂身變異, 爲所緣境,所起分別.逼害者,謂殺縛等. 時節代謝者, 謂寒時等時節改易. 捺落迦等諸趣變異者, 等取傍生及餓鬼趣, 及欲界等諸界變異亦爾,等者等取色`無色界.

넷 째의 ‘반연의 모습이 변이함의 연상변이분별(緣相變異分別)’이란 반연하는 연상(緣相) 모든 변이를 말하는 것으로, 이 반연하는 연상(緣相)의 변이를 반연하는 분별이기 때문에, 반연의 모습이 변이하는 분별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늙음 등의 변이’는 신체에서 물질 구성요소인 대종(大種)이 쇠락하여 바뀌는 것을 늙음의 변이의 분별이라 이름하고, 따라서 반연하는 연상(緣相)이 변이함의 분별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등(等)’이란 병듬과 죽음의 변이를 가리키며, 즐거움의 감수작용인 낙수(樂受) 등의 변이 역시도 그러하며, 즐거움의 감수작용인 낙수(樂受)로 인하여 신체가 바뀌는 것을 말하며,

‘등(等)’은 괴로움의 감수작용인 고수(苦受)와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수작용의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를 말하며,  

탐욕 등의 변이 역시 그러하며, ‘등(等)’은 성냄과 어리석음도 가리키는 것이다.

핍박ㆍ시절의 대사 등(等)의 변이도 역시 그러하며, 신체가 변이하여 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이 되어 일으키는 분별이며,

‘핍박’은 살해ㆍ결박 등을 말하고, ‘시절(時節)의 대사’는 추울  등과 같이 시절이 바뀌는 것을 말하며,

‘지옥  모든 윤회세계의 변이’는 축생ㆍ아귀 등의 세계(趣)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며, 욕계  모든 세계의 변이도 역시 그러해서 ‘등(等)’은 색계와 무색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顯相變異分別者, 謂眼識等顯現,似彼所緣境相,所有變異,緣此顯相變異分別,此亦如前所說,老等種種變異,由此亦於老等位中,變異起故.他引分別者,謂由他教,所起分別,此復二種:一聞非正法類`二聞正法類. 此復二種:於法分別, 謂聞正法類. 或善或不善,聞非正法類, 亦如是釋.

다섯 째의 ‘현현의 모습이 변이함의 현상변이분별(顯相變異分別)’이란 안식 등이 현현하여  인식대상과 비슷한 모습의 모든 변이를 말하며,  현현하는 모습(相)의 변이를 반연하여 분별하는 것이니, 이것도 앞에서 말한 늙음 등의 갖가지 변이와 같은 것이니, 이 역시도 늙음 등의 단계에서 변이하여 일으키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 째의 ‘남이 이끄는 타인분별(他引分別)’이란, 남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일으켜지는 분별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에 다시  가지가 있으니, 그 첫째는 정법이 아닌 종류를 듣는 것이고, 그 둘째는 정법의 종류를 듣는 것이다. 

이에 다시  가지가 있어서 법에 대하여 분별하는 것이니, 이른바 정법의 종류를 듣고 선이 되거나 혹은 불선이 되는 것이며, 정법이 아닌 종류를 듣고서도 역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不如理分別者,謂諸外道及彼弟子,聞非正法類,爲因分別.如理分別者,謂正法中,諸佛弟子,聞正法類,爲因分別.執著分別者,謂不如理作意爲因,依止我見,起六十二諸惡見趣相應分別,如經廣說.散動分別者,謂諸菩薩,如後所說,十種分別.

일곱 째의 '진리가 아닌 불여리분별(不如理分別)’이란 모든 외도와  제자들이 정법이 아닌 종류를 들은 것을 원인으로 삼고 분별하는 것을 말하며,

여덟 째의 '진리 그대로의 여리분별(如理分別)’이란 정법 안에서 모든 불제자들이 정법의 종류를 들은 것을 원인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것을 말하며,

아홉 째의 '집착분별(執着分別)’이란, 진리가 아닌 작의를 원인으로 삼고 아견에 의지해서 잘못된 62견(見)과 상응하는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니, 경전에서 자세히 말씀하신 바와 같으며,

열 째의 '산란된 움직임의 산동분별(散動分別)’이란, 모든 보살이 아래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가지 분별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論曰:一無相散動`二有相散動`三增益散動`四損減散動`五一性散動`六異性散動`七自性散動`八差別散動`九如名取義散動`十如義取名散動.爲對治此十種散動,一切般若波羅蜜多中,說無分別智.如是所治,能治應知具攝般若波羅蜜多義.

논문; 첫째는 비존재 상의 산란된 움직임인 무상산동(無相散動)이고, 

둘째는 존재 양상의 산란된 움직임인 유상산동(有相散動)이며, 

셋째는 증익의 산란된 움직임인 증익산동(增益散動)이고, 

넷째는 손감의 산란된 움직임인 손감산동(損減散動)이며, 

다섯째는  성품의 산란된 움직임인 일성산동(一性散動)이고, 

여섯째는 다른 성품의 산란된 움직임인 이성산동(異性散動)이며, 

일곱째는 자성의 산란된 움직임인 자성산동(自性散動)이고, 

여덟째는 차별의 산란된 움직임인 차별산동(差別散動)이며,

아홉째는 명칭 그대로 대상을 취하는 산란된 움직임의 여명취의산동(如名取義散動)이고, 

열째는 대상 그대로 명칭을 취하는 산란된 움직임의 여의취명산동(如義取名散動)이다. 

  가지의 산동(散動)을 다스리기 위해서 모든 반야바라밀다에서 무분별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다스려지는 소취(所治)와 능히 다스리는 능취(能治)는 반야바라밀다의 의미를 모두 포섭하는 것으로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釋曰:此中無相散動者,謂此散動,卽以其無,爲所緣相.爲對治此散動故,『般若波羅蜜多經』言:實有菩薩.言實有者,顯示菩薩實有空體.空卽是體,故名空體.

▷해석한다; 이 중에서 ‘비존재 양상의 산란된 움직임인 무상산동(無相散動)’은 다음과 같으니,  산란된 움직임의 산동은   비존재인 무(無)로써 소연(所緣, 인식대상)의 상(相)을 삼는 것이니, 이 산동 다스리기 위해서 '반야바라밀다경(般若波羅蜜多經)에서는 “실제로 보살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실제로 있다”고 말한 것은 보살에게는 실제로 공의 자체인 공체(空體)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공은   자체이기 때문에 체(空體)라 이름하는 것이다.

 

有相散動者,謂此散動,卽以其有,爲所緣相.爲對治此散動故,卽彼經言:不見有菩薩.此經意說,不見菩薩,以遍計所執及依他起爲體.增益散動者,爲對治此散動故.卽彼經言:色自性空.由遍計所執色自性空故.

‘존재 양상의 산란된 움직임인, 유상산동(有相散動)’은 다음과 같으니, 이 산동은   존재인 유(有)로써 소연(所緣, 인식대상)의 상(相)을 삼는 것이니, 이 산동을 다스리기 위해서 경전에서 “보살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며, 이 경전의 취지는 보살을 보지 않음을 말하는 것으로,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으로써 체를 삼기 때문이다.

‘증익의 산란된 움직임의 증익산동(增益散動)’에서, 이 산동을 다스리기 위해서   경전에서 “물질(色)의 자성은 공(空)이다”라고 말하였으니, 변계소집성인 물질(色)의 자성이 공한 색자성공(色自性空)이기 때문이다.

 

損減散動者,爲對治此散動故,卽彼經言:不由空故.謂法性色性不空故.一性散動者,爲對治此散動故,卽彼經言:色空非色.何以故?若依他起,與圓成實,是一性者,此依他起,應如圓成實, 是淸淨境.

‘손감의 산란된 움직임의 손감산동(損減散動)’에서,  산동을 다스리기 위해서   경전에서 “공(空)에 의거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으니, 법성의 색성(色性) 공이 아닌, 불공(不空)이기 때문이다.

‘한 성품의 산란된 움직임의 일성산동(一性散動)’은,  산동 다스리기 위해서   경전에서 “물질은 공으로서 물질이 아닌, 색공비색(色空非色)이다”라고 말하였으니, 왜냐하면 만약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이  성품이라면,  의타기성은 마땅히 원성실성과 같이 청정한 경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異性散動者,爲對治此散動故, 卽彼經言: 色不離空. 何以故?此二若異,法與法性,亦應有異.若有異性,不應道理, 如無常法與無常性.若取遍計所執自性,色卽是空`空卽是色.何以故? 遍計所執,色無所有,卽是空性, 此空性卽是彼無所有,非如依他起與圓成實,不可說一.

‘다른 성품의 산란된 움직임인 이성산동(異性散動)’은,  산동을 다스리기 위해서   경전에서 “물질은 공을 떠나지 않는, 색불이공(色不離空)이다”라 하였으니, 왜냐하면 만약 색(色) 공(空), 이 둘이 다르다면 법과 법성 역시 마땅히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다른 성품이라면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마치 무상법(無常法)과 무상성(無常性)과 같으며,

만약 변계소집의 자성을 취한다면, 물질은  공인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공은  물질인, 공즉시색(空卽是色)인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 인가? 변계소집성인 물질(色)은 실재함이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라  공의 성품이고,  공의 성품은  그것이 실재함이 없으며, 의타기성과 원성실성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라고 말할  없는 것이다.

 

自性散動者,爲對治此散動故,卽彼經言:舍利子!此但有名,謂之爲色.何以故?色之自性, 無所有故. 差別散動者,爲對治此散動故,卽彼經言:自性無生無滅,無染無淨.生卽有染`滅卽有淨,無生滅故,無染無淨,如是諸句,有如是義.

‘자성의 산란된 움직임의 자성산동(自性散動)’은,  산동을 다스리기 위해서   경전에서 “사리자여, 이것은 다만 이름 있을 뿐이니, 그것을 물질(色)이라고 말한다”고 하였으니, 왜냐하면 물질(色)의 자성은 실재함이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이다.

‘차별의 산란된 움직임인 차별산동(差別散動)’에서,  산동을 다스리기 위해서   경전에서 “자성에는 생겨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는 무생무멸(無生無滅)이며, 잡염도 없고 청정도 없는 무염무정(無染無淨)이다. 생겨나면  잡염이 있게 되고, 소멸하면  청정함이 있으나, 생멸이 없기 때문에 잡염도 없고 청정도 없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모든 구절에 이러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如名取義散動者,謂如 其名於義散動.爲對治此散動故,卽彼經言:假立客名,別別於法,而起分別.言別別者,謂別別名.如義取名散動者,如義於名而起散動.爲對治此散動故,卽彼經言:假立客名,隨起言說,非義自性,有如是名.爲對治此十散動故,說般若波羅蜜多.由此說爲因,無分別智生.

‘명칭 그대로 대상을 취하는 산란된 움직임의 여명취의산동(如名取義散動)’이란,  명칭 그대로 대상에 대하여 산란되게 움직이는 것이니, 이 산란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경전에서 “객관의 명칭을 가립하여 개별적으로 법에 대해서 분별을 일으킨다”고 말하였으며, ‘개별적’이란 개별적인 명칭을 말하는 것이다.

‘대상 그대로 명칭을 취하는 산란된 움직임의 여명취의산동(如名取義散動)’이란, 대상 그대로 명칭에 대해서 산란된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 산란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경전에서 “객관의 명칭을 가립하여 따라서 언설을 일으키고, 대상이 아닌 자성에 이러한 명칭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가지 산란된 움직임의 산동(散動)을 다스리기 위해서 반야바라밀다를 말씀하셨으니, 이 말씀을 원인으로 삼음으로써 무분별지혜를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論曰:若由異門,依他起自性,有三自性.云何三自性,不成無差別?若由異門, 成依他起,不卽由此成遍計所執及圓成實.若由異門,成遍計所執,不卽由此成依他起及圓成實.若由異門,成圓成實,不卽由此成依他起及遍計所執.

논문; 만약 이문(異門, 다른견해) 의하지 않는다면 의타기자성에  가지 자성이 있는 것이니, 어찌하여  가지 자성은 무차별을 이루지 않는 것인가? 

만약, 이문(異門, 다른견해)으로 인하여 의타기성을 이룬다면, 이로 인하여 곧 변계소집성과 원성실성을 이루지 못할 것이며,

만약 이문(異門, 다른견해)으로 인하여 변계소집성을 이룬다면,  이로 인하여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을 이루지 못할 것이며,

만약 이문(異門, 다른견해)으로 인하여 원성실성을 이룬다면  이로 인하여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釋曰:此義如前道理解釋.

해석한다; 이 뜻은 앞에서 말한 도리와 같이 해석하기 바란다.

 

攝大乘論釋卷第四 終 섭대승론석 제 4권을 마침.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4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① 5

 

▶論曰:若依他起自性,實唯有識,似義顯現之所依止.云何成依他起? 何因緣故,名依他起?

從自熏習種子所生,依他緣起故,名依他起;生剎那後,無有功能,自然住故,名依他起.

논문; 만약 의타기자성이 실제로는 오직 식(識)뿐인 것으로서 대상(義)으로 비슷하게 사현(似現)하는 의지처라면, 어떻게 의타기를 이루는 것이며? 무슨 인연으로 의타기자성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자신이 훈습시킨 종자로부터 생겨난 바로서, 다른 조건(緣)에 의지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의타기라고 이름하며,

생겨난 찰나 후에는 작용의 힘인 공능(功能)이 없으며, 자연히 머물기 때문에 의타기라 하는 것이다.

ㅡ제3 분별장.


▶釋曰:實唯有識,似義顯現之所依止者,謂實無義, 唯有其識,與彼似義,顯現爲因, 卽此唯識,名依他起.

云何成依他起者,問自攝受.何因緣故,名依他起者,問爲他說.從自因生,生已無能暫時安住,名依他起.應自攝受,亦爲他說.

해석한다; ‘실제로는 오직 식뿐인 유식(唯識)으로서 대상(義)으로 비슷하게현(似現)하는 의지처이다’라는 것은,

실제의 대상이 없는, 오직  식만 존재하는 것이며,  대상으로 비슷하게현하는 원인이 되는 것 말한다. 

  유식(唯識)을 의타기(依他起)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어떻게 의타기를 이루는 것인가?’는 스스로가 섭수하는 것을 질문한 것이고,

‘무슨 인연으로 의타기라고 이름하는가?’는 다른 것, 타(他)라는 뜻을 질문한 것이다. 

스스로의 원인으로부터 생겨나고, 생겨나서는 잠시도 안주하지 않는 것을 의타기(依他起)라고 이름하며, 스스로 섭수하는 것에 상응하나, 역시 다른 것의 타(他)도 되는 것다.


▶論曰:若遍計所執自性,依依他起,實無所有,似義顯現.云何成遍計所執?何因緣故,名遍計所執?無量行相意識遍計顚倒生相,故名遍計所執.自相實無,唯有遍計所執可得,是故說名遍計所執.

논문; 만약 변계소집자성이 의타기자성에 의지해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면서 대상으로 비슷하게현(似現)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변계소집을 이루는 것이며? 어떠한 인연으로 변계소집자성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무량한 행상(行相, 인식작용)은 의식이 두루 계탁하고 전도하여서 생겨나는 모습이기 때문에 변계소집이라 이름하며,

실로는 자상(自相)이 비존재이고, 오직 두루 계탁하여서 집착된 것만 얻을 뿐이므로, 변계소집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釋曰:依依他起者,謂依唯識.實無所有者,實無自體.似義顯現者,唯有似義,顯現可得.云何何故等者,如次前說.無量行相者,所謂一切境界行相.意識遍計者,謂卽意識說名遍計.顚倒生相者,謂是能生虛妄顚倒所緣境相.自相實無者,實無彼體.唯有遍計所執可得者,唯有亂識所執可得.

해석한다; ‘의타기자성에 의지한다’는 것은 유식에 의지함 말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제로는 자체가 없는 것이고,

‘대상으로 비슷하게현한다’는 것은 오직 대상으로 비슷하게현할 뿐임을 말하고,

‘어떻게’와 ‘어떠한 인연으로’ 등은 바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무량한 행상(行相, 인식작용)’은 모든 경계의 인식작용을 말하고,

‘의식이 두루 계탁한다’는 것은  의식을 변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전도하여 생겨나는 모습’은 능히 생겨나게 하는, 허망되고 전도된 인식대상의 경계인 소연경(所緣境)의 상을 말하고,

‘실로는 자상(自相)이 비존재’라는 것은 실제로 그것의 자체가 없음을 말한다. 

‘오직 두루 계탁함이 집착된 것만 얻을 뿐’이란, 오직 산란된 난식(亂識)이 집착한 것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論曰:若圓成實自性,是遍計所執,永無有相.云何成圓成實?何因緣故,名圓成實?

由無變異性故,名圓成實.又由淸淨所緣性故`一切善法最勝性故,由最勝義,名圓成實.

논문; 만약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은, 변계소집의 상이 영원이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원성실을 이루며? 어떠한 인연으로 원성실자성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변이(變異)가 없는 성품에 의거하기 때문에 원성실이라 이름하며,

또한 청정한 인식대상의 성품에 의거하기 때문이고, 

모든 선법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최승성(最勝性)이기 때문이며, 

가장 뛰어난 승의(勝義) 의거하기 때문에 원성실자성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釋曰:是遍計所執,永無有相者,謂遍計所執自性,無性爲性.云何何故等,如前依他起中已說.

由無變異性故者,謂無虛誑性,如不虛誑性.

해석한다; ‘변계소집의 상이 영원히 없다’는 것은 변계소집자성은 체성이 없음을 자성으로 삼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어떻게’와 ‘어떠한 인연으로’ 등은 앞의 의타기성 부분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변이(變異)가 없는 성품에 의거하기 때문’이란 허망되지 않은 무허광(無虛誑)의 성품을 말하는 것으로, 허망되지 않은 성품과 같다.

ㅡ이 문장은 급다(笈多)ㆍ행구(行矩) 역본인 수본(隋本)에서 성실한 신하와 같다”로 되어 있고, 

진제(眞諦) 역본인 진본(陣本)에서 세간에서 말하는 진실된 벗과 같다”로 되어 있다.

 

又由淸淨所緣性故,一切善法, 最勝性故.由最勝義,名圓成實者,謂由淸淨所緣性故,最勝性故,名圓成實.

‘또한 청정한 인식대상의 성품인 소연성(所緣性)에 의거하기 때문이고, 

모든 선법의 가장 뛰어난 성품의 최승성(最勝性)이기 때문이며, 

가장 뛰어난 승의(勝義) 의거하기 때문에 원성실자성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이른바 청정한 인식대상의 성품에 의거하기 때문이고, 

가장 뛰어난 성품이기 때문에 원성실자성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論曰:復次有能遍計`有所遍計,遍計所執自性乃成.此中何者,能遍計?何者,所遍計? 何者,遍計所執自性?

當知意識,是能遍計,有分別故.所以者何? 由此意識用自名言熏習爲種子,及用一切識,名言熏習爲種子,

是故意識, 無邊行相, 分別而轉,普於一切,分別計度, 故名遍計.

논문; 또한 능변계(能遍計)가 있고 소변계(所遍計)가 있어서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이 성립되는 것이니,  

무엇이 능변계(能遍計)이고? 무엇이 소변계(所遍計)이며? 무엇이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 인가? 

의식(意識)이 능변계이니, 분별이 있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의식은 자신의 명언훈습을 종자로 삼고, 나아가 모든 식의 명언훈습을 종자로 삼기 때문이니,  

따라서 의식은 무변한 행상(行相, 인식작용)으로 분별하여 전전하고, 널리 모든 것에 대해서 헤아려서 분별하기 때문에 변계라 이름하는 것이다.

 

又依他起自性,名所遍計.又若由此相令依他起自性, 成所遍計, 此中是名遍計所執自性. 由此相者,是如此義.

또한 의타기자성을 소변계라 이름하나니, 만약  상에 의거해서 의타기자성으로 하여금 소변계를 이루게 한다면, 이것을 변계소집자성이라 이름하는 것으로, 상에 의거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뜻이다.

 

능변계(能遍計), 변계소집을 일으키는 분별인 능변계가 어떤 식인가에 대해서  논서에서는 의식만을 들었지만, 후대의 '성유식론' 제8권에서는 의식과 제7 말나식을 들었다.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실아(實我)로 착각하고, 의식이 5온을 대상으로 또한 실아로 착각하는 것이다.

소변계(所遍計), 능변계의 계탁 작용에 의해 실재하는 것으로 집착되어지는 대상, 즉 비슷하게 현현된 자아인 사아(似我)와 사법(似法)이며, 분별망집은 인연으로 생겨난 존재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소변계는 의타기의 법, 즉 5온ㆍ12처ㆍ18계 등의 인연소생법이다.

변계소집상(遍計所執自性), 소변계가 능변계의  위의 상분으로 떠올라 있을 때, 그것이 마음 밖에 실재한다고 집착하여  허망된 생각 앞에 나타나는 실아실법(實我實法)의 허망된 모습이다.

 

復次云何遍計, 能遍計度? 緣何境界? 取何相貌? 由何執著? 由何起語? 由何言說? 何所增益?

謂緣名爲境, 於依他起自性中, 取彼相貌,由見執著,由尋起語, 由見聞等四種言說,而起言說,

於無義中,增益爲有,由此遍計,能遍計度.

또한 무엇이 두루 계탁하고? 능히 두루 계탁하는 것이며? 

어더한 경계를 반연하고? 어떠한 상을 취하는 것이며?

무엇에 의거해서 집착하고? 무엇에 의거해서 말을 일으키는 것이며?

무엇에 의거해서 말하고? 어느 곳을 증익하는 것인가?

이른바 명(名, 이름)을 반연하여 대상(境)으로 삼고, 의타기자성 중에서  취하며,

견해(見)로 인하여 집착하고, 심구(尋求)로 인하여 말을 일으키며, 

보고 듣는 견문(見聞) 등의  가지 언설로 인하여 언설을 일으키고, 

대상이 없는 무의(無義) 가운데 증익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삼으니,

이로 인하여 두루 계탁하고, 능히 두루 계탁하는 것이다.

 

심구의 심(尋, vitarka)의 심소는 부정심소(不定心所) 중의 하나로써, 말을 일으키기 전에 심구 사량하는 심리작용이며, 대상에 대하여 그 뜻과 이치를 대강 심구(尋求)한다.

참고로, 사찰의 사(伺, vicāra)의 심소가 그 대상을 세밀하게 분별하여 사찰(伺察)하는 것으로, 이로써 몸과 마음의 평안이나 불안이 있게 되므로 부정심소라 하는 것이다.

 

▶釋曰:復次云何遍計,能遍計度者,謂意識名能遍計,依他起性, 名所遍計. 爲欲顯示由此品 類能遍計度故,

又說緣名爲境等.於依他起自性中,取彼相貌者,謂卽於此依他起中, 由眼等名,取彼相貌,由取彼相,能遍計度.

해석한다; ‘또한 무엇이 두루 계탁하고 능히 두루 계탁하는가?’란, 이른바 의식(意識)을 능변계로 이름하고,

의타기성을 소변계하며,  품류로 인하여 능히 두루 계탁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또한 명(名, 이름) 반연하여 대상으로 삼고, 의타기자성 중에   취한다’는 것은,  의타기자성 중에  등의 명칭으로 인하여   취하고,   취함으로써 능히 두루 계탁하는 것을 말한다.

 

由見執著者,如所取相, 如是執著.由尋起語者,如所執著,由語因尋,而發語言.由見聞等,四種言說,而起言說者,如語所說,見聞覺知,四種言說,與餘言說.於無義中,增益爲有者,如所言說,於無義中,執有義故.

‘견해(見)로 인하여 집착한다’는 것은 취해진 대상의 같이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고,

‘심구(尋求)로 인하여 말을 일으킨다’는 것은 집착한 그대로의 말의 원인인 심구로 인하여 말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고,

‘보고 듣는 견문(見聞) 등의  가지 언설로 인하여 언설을 일으킨다’는 것은 말이 설하여진 바대로 보고 듣고 깨달아서 아는  가지 언설 그대로를 바탕으로 다른 언설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고,

‘대상이 없는 가운데 증익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삼는다’는 것은, 언설하는 바와 같이 대상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대상이 존재한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論曰:復次此三自性,爲異`爲不異?應言非異`非不異.

謂依他起自性,由異門故,成依他起,卽此自性,由異門故, 成遍計所執,卽此自性,由異門故,成圓成實.

논문; 또한   가지의 삼자성(三自性)은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은 것인가? 

마땅히 다르지 않은 비이(不異)이나,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닌, 비불이(非不異)라고 말해야 한다. 

의타기자성은 다른 부문으로 인하여 의타기를 이루고,  자성은 다른 부문으로 인하여 변계소집을 이루며,  자성은 다른 부문으로 인하여 원성실을 이루는 것이다.

ㅡ변계소집자성은 의타기자성의 잡염분이고, 원성실자성은 의타기자성의 청정분인 것이다.

 

由何異門,此依他起,成依他起?依他熏習種子起故. 由何異門,卽此自性, 成遍計所執?

由是遍計所緣相故,又是遍計所遍計故.由何異門,卽此自性, 成圓成實? 如所遍計,畢竟不如是有故.

어떠한 다른 부문으로 인하여  의타기자성이 의타기를 이루는 것인가? 다른 훈습의 종자에 의지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떠한 다른 부문으로 인하여  자성이 변계소집자성을 이루는 것인가? 이것은 두루 계탁하는 대상의 의거하기 때문이고, 또한 두루 계탁하는 것에 두루 계탁되어지기 때문이다. 

어떠한 다른 부문으로 인하여  자성이 원성실자성을 이루는 것인가? 소변계와 같이 필경에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ㅡ우리는 아득한 옛적부터 의타기의 자성 위에 집착해서 아법(我法) 분별하고 아법의 모습을 제법(諸法) 종자를 심식에 훈습시켜 왔기 때문에, 습성에 의해 아법에 비슷하게 잡염의 의타기상을 일으킨다.

생기된 잡염의 의타기상에 다시 잠재의식에 의해 전도의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의타기상과 변계소집상은 다시 서로 () 되어 생사에 전전히 상속하여 끊어짐이 없는 것이나, 청정한 눈을 지닌 사람의 눈에 여러 안질의 증상들을 멀리 여의고 어지러운 경계가 항상 없는 것이 원성실상인 것이다.


▶釋曰:由是遍計所緣相故者,謂彼意識,名爲遍計,此爲所取所緣境性,能生遍計, 是故亦名遍計所執.

又是遍計所遍計故者,卽彼意識, 名爲遍計,緣彼相貌,爲所取境, 爲所遍計. 由此義故, 依他起性,

亦名遍計所執自性. 如所遍計者,如彼意識遍計所執. 畢竟不如是有故者, 所遍計上, 遍計所執, 畢竟無故.

由此義故,卽此自性,成圓成實.

해석한다; ‘이것은 두루 계탁함의 대상인 소연(所緣)의 의거하기 때문’이란,

 의식을 변계로 이름하고, 이것을 취해진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의 성품으로 삼아서 능히 변계를 일으키기 때문에 변계소집이라 이름하고,

‘또한 변계와 소변계이기 때문’이란  의식을 변계로 이름하고,  반연하여 인식대상의 경계로 삼는 것을 소변계라고 하는 것이니, 이러한 의미로 인하여 의타성도 역시 변계소집자성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소변계와 같이’란, 그 의식이 변계소집한 바와 같음을 말하고,

‘궁극적으로 이렇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란 소변계 위의 변계소집은 궁극적으로 비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인하여   자성은 원성실자성을 이루는 것이다.


▶論曰:此三自性,各有幾種?謂依他起, 略有二種:一者依他熏習種子而生起故` 二者依他雜染淸淨性不成故. 由此二種,依他別故,名依他起.

논문; 이 자성에 각각  종류가 있는 것인가? 

의타기자성에 간략히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다른 것이 훈습하는 종자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이고, 

둘째는 다른 잡염과 청정의 성품이 성립되지 않는 것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가지 의타의 차이로 인하여 의타기자성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遍計所執,亦有二種:一者自性遍計執故`二者差別遍計執故,由此故,名遍計所執.

변계소집자성에도 역시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자체)의 변계소집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앞의 자성(자체)의 속성 차별의 변계소집이기 때문이니, 

이로 인하여 변계소집자성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圓成實性,亦有二種:一者自性圓成實故`二者淸淨圓成實故,由此故,成圓成實性.

원성실자성에도 역시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의 원성실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청정의 원성실이기 때문이니, 이로 인하여 원성실자성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釋曰:雜染淸淨性,不成故者,由卽如是依他起性,若遍計時,卽成雜染,無分別時,卽成淸淨.由二分故,一性不成,是故說名依他起性.自性遍計執故者,如於眼等遍計執,爲眼等自性.差別遍計執故者,如卽於彼眼等自性,遍計執,爲常`無常等,無量差別.自性圓成實故者,謂有垢眞如.淸淨圓成實故者,謂無垢眞如.

해것한다; ‘잡염과 청정의 성품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란, 곧 이와 같은 의타기성을 두루 계탁할 때에는 곧 잡염을 이루고, 분별이 없을 때는 곧 청정을 이루기 때문이니, 

이러한 두 부분 중에서 어느 한 부분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의타기성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자성의 변계소집이기 때문’이란 눈 등에 대해서 두루 계탁하여서, 눈 등이 자성이 되는 것과 같으며,

‘차별의 변계소집이기 때문’이란 곧 그 눈 등의 자성에 대하여 두루 계탁하여 항상함과 무상함 등의 수많은 차별을 만들기 때문이며,

‘자성의 원성실이기 때문’이란 번뇌가 있는 단계의 유구진여(有垢眞如)를 말하고,

‘청정의 원성실이기 때문’이란 번뇌가 없는 단계의 무구진여(無垢眞如)인 것이다.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제 4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① 4

 

▶論曰:又於一切,所依轉時,似種種相二影像轉,謂唯似義影像及分別影像.

又一切處,亦似所觸影像而轉,有色界中,卽此意識依止身故,如餘色根,依止於身.

논문; 또한 모든 소의(所依, 의지처)에서 전전할  갖가지의 상에 비슷한  가지의 영상이 전전하나니,

이른바 오직 의(義, 대상)로 비슷하게 현현하는 의영상(義影像)과 분별영상(分別影像)이다. 

또한 신식(身識)의 대상인 촉감의 사경(似境)인, 모든 곳에서도 역시 접촉된 영상과 비슷하게 전전하나니,

유색계에서  의식(意識)은 의지하기 때문이니, 나머지 감각기관인, 색근(色根)이 의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釋曰:或有難言:眼等諸根,無有分別,是故意識,依彼轉時,應無分別;

如染污意,爲雜染依,令雜染轉,此亦應爾.

해석한다; 혹 어떤 이는 비판하여 말하기를, “안근  모든 감각기관인, 색근(色根)에는 분별이 없는 까닭에, 의식이 그것들을 의지하여 전전할 때에도 마땅히 분별이 없어야 하며,  

염오의는 잡염의 의지처가 되어서 잡염으로 하여금 전전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 역시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하였다.

 

故次解言: 又於一切, 所依轉時, 似種種相二影像轉,謂唯義影像及分別影像. 此中一切所依者,謂眼等所依.

似種種相二影像轉者, 謂唯似義影像及分別影像, 二句解釋. 由此二句, 說唯一識,一分唯義影像顯現, 第二分別此義相生, 是故前說無有過失.

그에 따라서, 이제 해석하여 말하겠으니, 

“또한 소의(所依, 의지처)에서 전전할  갖가지의  비슷한  가지 영상이 전전하나니, 이른바 오직 대상의 영상인 의영상(義影像)과 분별영상(分別影像)이다”라고 한 것에서,

‘모든 소의(所依, 의지처)’란 안식(眼識) 등의 의지처를 말하는 것이고,

‘갖가지  비슷한  가지 영상이 전전한다’는 것이란, 이른바 오직 의(義, 대상) 비슷하게 현현한영상과 분별영상이라는  문구는 해석이고, 

  문구로 인하여, 오직 하나의 식(識)에서, 그  부분에는 오직 대상(義) 영상이 현현하고, 다른 부분에는  대상(義) 분별하는  생겨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것에 과실이 없는 것이다.

 

又一切處,亦似所觸影像而生,謂有色處於定位中,無五識時,在色身中, 內領受起,如餘色根,依止於身者, 如餘眼等,有色諸根,依止於身.由此諸根,依止身故,於自所依,能起損益.意識亦爾, 依止身故, 應知於身, 能作變異.

‘또한 일체처(一切處)에서도 역시 접촉된 영상과 비슷하게 생겨난다’는 것이란, 유색계에서의 선정 중에서 5식(識)이 없을 때에는 몸(身) 있어서 그 내면으로 받아들여서 일으키는 것이며, 

‘나머지 감각기관(根)이 의지함과 같다’는 것은, 나머지 안근 등의 감각기관이 몸(身) 의지하는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감각기관(根)은 몸(身) 의지함으로써 스스로 의지처에 대해서 능히 손익(損益)을 일으키는 것이다.

의식 역시도 그러한 것으로, 몸(身)을 의지하기 때문에 몸(身) 대해서 변이(變異)를 지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復有別義,謂如身根依止於身,若有外緣,所觸現前, 身根便似所觸相起.卽此起時,於自依身,能作損益.意識亦爾,依止身故,似彼所觸影像生時,於所依身,能作損益.

또한 별도의 의미가 있으니, 몸(身)을 의지하는 것과 같이, 만약 외연(外緣, 외부대상)이 있어서 소촉(所觸, 접촉의 대상)이 현전한다면, 신근(身根)에 소촉(所觸, 접촉의 대상) 비슷한 모습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것이 일어날 때에는 스스로의  의지처인 몸(身) 대해서 능히 손익(損益) 지으며,

의식 역시도 그러한 것은 몸에 의지하기 때문에  소촉(所觸, 접촉의 대상) 비슷한 영상이 일어날  의지처인 대하여 능히 손익을 짓는 것이다.

 

▶論曰:此中有頌:

▷논문; 이러함에 게송이 있으니, 

 

“若遠行獨行, 無身寐於窟, 調此難調心, 我說眞梵志.”

멀리 작용하거나 홀로 작용하고, 몸(身)이 없는 것으로서, 동굴에서 잠자는 것이라.

 조복하기 어려운 난조심(難調心)을 조복하는 이를, 나는 참다운 범지(梵志)라 말하노라.

 

범지(梵志), ‘청정한 행을 하는 자’라는 의미로서, 바라문의 네 기간의 생활 가운데 제1기이다. 이 기간에는 스승에게 가서 수학하면서 훈식(熏食)ㆍ사치ㆍ정욕을 금하는 등 여러 가지 고행을 하며 성지(聖智)에 이르기 위해 정진한다. 이 기간을 마치면 집에 돌아가 결혼하여 살다가 나중에 다시 숲으로 가서 공부하며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교화활동을 한다.


▶釋曰:彼諸菩薩,爲成此義,引阿笈摩伽他爲證. 若遠行者,能緣一切,所緣境故.言獨行者,無第二故.言無身者,遠離身故.寐於窟者,於身窟中,而居止故.言調此者,作自在故.難調心者,性暴惡故.

해석한다; 그 여러 보살은 앞에서 말한 바대로 오직 하나의 의식만 있고 별도로 오식이 없다고 주장하는 뜻을 성립시키기 위해 아급마(아함)의 게송을 인용하여 증명하였으니,

‘멀리 작용한다’는 것은 능히 모든 소연(所緣, 인식대상)의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며,

‘홀로 작용한다는 독행(獨行)’이란, 하나의 의식 이외에 다른 식, 즉 제이(第二)가 없다는 것이며,

‘신체가 없다는 무신(無身)’이란, 신체를 멀리 여의는 까닭이며,

‘동굴에서 잠잔다’는 것이란, 식이 신체라는 동굴에 머문다는 것이며,

‘이것을 조복한다는 것’은 작용함이 자재(自在)한 것이며,

‘조복하기 어려운 마음의 난조심(難調心)’이란, 성품이 포악한 것이다.


▶論曰:又如經言:如是五根所行境界,意各能受,意爲彼依.

논문; 또한 경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식은 이러한 5근(五根)이 행해지는 경계를 각각 능히 수용하나니, 의식이 그것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釋曰:復引餘教,證成此義.如是五根所行境界,意各能受者,諸根所行,名爲境界.如是境界,意各能受,悉能分別一切法故.一一各各,能領受故,名各能受.意爲彼依者,是彼諸根,能生因故,以意散亂,彼不生故.

해석한다; 다시 다른 경전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의미를 증명하였다. 

‘의식은 이러한 5근이 행해지는 경계를 각각 능히 수용한다’는 것이란,

모든 감각기관의 제근(諸根)이 행하는 바를 경계라 이름하며, 이러한 경계를 의식이 각각 능히 수용하여서, 능히 일체법을 분별하기 때문이며, 각각 하나하나를 능히 받아들이기 때문에 능히 각각 수용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의식은 그것의 의지처가 된다’는 것이란, 그 모든 감각기관의 제근(諸根)이 능히 생겨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고, 의식이 산란하면 그것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論曰: 又如所說十二處中,說六識身皆名意處.

논문; 또한 말씀한 바와 같이 12처설(處說)에서는 6 가지 식을 말하여서 모두 의근의 의처(意處, 포섭처)라고 이름한다.


▶釋曰:復有聖教,能證此義,謂六識身,皆說名意,無餘識名.由六識身,皆是意處,聖所說故,是故得知唯有意識.

해석한다; 또한 성스러운 가르침이 있어서 능히  의미를 증명하였으니, 이른바 여섯 가지 육식(六識) 모두를 의(意)라 이름하고 다른 식의 명칭이 없는 것으로, 여섯 가지의 육식이 모두 의근의 포섭처인 것은 성인이 말씀한 바에 의거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오직 의식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있는 것이다.


▶論曰:若處安立阿賴耶識識爲義識,應知此中, 餘一切識,是其相識,若意識識及所依止,是其見識.由彼相識, 是此見識, 生緣相故,似義現時,能作見識生依止事.如是名爲安立諸識,成唯識性.

논문; 어떤 곳에서는, 아뢰야식의 식을 안립하여 의식(義識)으로 삼으니, 여기에서의 나머지 모든 식이란  상분(객관)의 식이라고 알아야 하며,  

의식(義識)의 식과 소의지(所依止, 의지처)는  견분(주관)의 식으로, 그것의 상분의 식에 의거하는 것이다. 

 견분의 식이 일어나는 연상(緣相, 인식대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니, 대상과 비슷하게 현현할  능히 견분의 식이 일어나는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함을 이름하여 모든 식을 안립하고 유식성(唯識性)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이다.


▶釋曰:於阿賴耶識,亦得安立相`見二識.謂阿賴耶識,以彼意識及所依止,爲其見識,眼等諸識,爲其相識,以一切法,皆是識故.由彼相識者,謂眼等諸識.是此見識生緣相故者,是見生因,由所緣性,名見生因. 似義現時,能作見識生依止事者,能於彼見,故名見識. 卽此見識,似義現時,彼諸相識,與意見識,能作相續不斷住因,是故說名生依止事.

해석한다; 아뢰야식에 대해서도 역시 상분의 식과 견분의 식을 안립할  있으니,

이른바 아뢰야식은  의식과 소의지(所依止, 의지처)로써  견분의 식을 삼고,

안식 등의 여러 식을  상분의 식으로 삼으니, 일체법은 모두 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상분의 식에 의거한다’는 것은 안식 등의 여러 식을 말하는 것이며,

‘이 견분의 식이 일어나는 연상(緣相, 인식대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란 견분이 일어나는 원인인 것으로, 인식대상의 성품으로 인하여 견분이 일어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대상으로 비슷하게 현현할  능히 견분의 식이 일어나는 의지처가 된다’는 것은 능히 그것을 보기 때문에 견분의 식이라 이름하는, 즉  견분의 식이 대상과 비슷하게 현현할 때,  모든 상분의 식은 의식의 견분의 식과 함께 능히 상속하여서 끊임없이 머무는 원인이 되는 것이므로, 일어나는 의지처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論曰:諸義現前分明顯現,而非是有,云何可知? 如世尊言:若諸菩薩,成就四法, 能隨悟入一切唯識, 都無有義.

논문; 모든 대상들이 눈앞에 분명히 현현하거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있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모든 보살이  가지의 사법(四法)을 성취하면, 일체가 오직 식인 유식(唯識)으로서 대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깨달아 들어갈  있다”고 하신 것과 같다.

ㅡ이하  가지 지혜를 성취한 보살은 유식무경(唯識無境) 도리를 깨달을  있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가지 내용은 외적인 사물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一者成就相違識相智,如餓鬼`傍生及諸天`人,同於一事,見彼所識,有差別故;

첫째는 다른  식의  대한 지혜인 상위식상지(相違識相智)를 성취하는 것으로, 아귀ㆍ축생ㆍ여러 천인들 같이, 동일한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  인식하는 바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ㅡ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다르면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같은 물에 대해서도 아귀는 고름이나 피가 가득한 강으로 보고, 고기는 살아가는 장소나 통로로 보고, 천인들 보석으로 장식한 땅으로 보고, 인간은 깨끗한  또는 파도로 보는  제각가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나, 만약 외적인 사물이 실재한다면 이런 일은 있을  없을 것이다.

 

二者成就無所緣識現可得智,如過去`未來夢影緣中,有所得故;

둘째는 소연(所緣, 인식대상이) 없는 식을 현재 얻는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무소연식현가득지(無所緣識現可得智)를 성취하는 것이니, 과거ㆍ미래ㆍ꿈의 영상의 대상 중에서 얻는 바가 있는 유소득(有所得)이기 때문이다. 

실재하지 않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이 현실적으로 있음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과거나 미래의 , 꿈속의 대상, 물이나 거울에 비친 영상 등은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는데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三者成就應離功用無顚倒智,如有義中,能緣義識,應無顚倒,不由功用智眞實故;

셋째는 노력하지 않아도 전도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응이공용무전도지(應離功用無顚倒智)를 성취하는 것이니, 어떠한 대상으로부터 능히 대상을 반연하는 식과 같이, 전도되지 않는 것이 노력에 의하지 않고서도 지혜가 진실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ㅡ의식적인 노력의 공용(功用),  수행하지 않고서 오류가 없는 무전도(無顚倒) 지혜를 얻을  있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만약 인식대상이 인식되는 것과 같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범부도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노력 정진하지 않고도 자연히 해탈할  있기 때문이다.

 

四者成就三種勝智隨轉妙智.何等爲三?

넷째는  가지의 뛰어난 지혜인 승지(勝智)를 따라서 전전함이 묘하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수삼지전지(隨三智轉智)를 성취하는 것이니, 무엇이  가지인가? 

ㅡ다음의  가지 지혜를 따라 인식대상이 갖가지 존재로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一得心自在,一切菩薩,得靜慮者,隨勝解力,諸義顯現;

첫째, 마음의 자재를 얻은 보살로서 정려를 얻은 자는 뛰어난 이해의 승해력(勝解力)을 따라 모든 의(義, 대상)이 현현하는 것이며,

ㅡ자재자(自在者) 지혜를 따라 바뀌는,  마음이 자재함을 얻은 보살은 하고자 하는 대로   있으니, 예를 들면 땅을 물로 변화시킬  있는 것 등이다.

 

二得奢摩他,修法觀者,纔作意時,諸義顯現;

둘째, 사마타(奢摩他)를 얻어서 법관(法觀)을 닦는 이가 작의할 때에는  모든 대상이 현현하는 것이며,

ㅡ관찰자의 지혜를 따라 바뀌는 것으로, 즉 지관(止觀) 닦는 유가사(瑜伽師) 부처님의 교법을 관찰해서 사색할 , 어떤 대상이 사색하는 대로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三已得無分別智者,無分別智現在前時,一切諸義,皆不顯現.

셋째, 무분별지혜를 얻은 자의 무분별지혜가 현전할 때에는, 모든 대상이  현현하지 않는 것이다.

ㅡ무분별지를 따라 바뀌는 것으로, 무분별지가 일어날 때에는 어떠한 인식대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由此所說三種勝智隨轉妙智,及前所說三種因緣,諸義無義道理成就.

여기서 말한  가지 뛰어난 지혜인 삼종승지(三種勝智)가 전전하는 승묘한 지혜와 앞에서 말한  가지의 인연인 삼종인연(三種因緣)에 의거해서 모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도리가 성취되는 것이다.


▶釋曰:相違識相智者,謂能了知相違者,識所緣義相.無所緣識,現可得智者,謂現見有雖無所緣而識得生,如過去等.

 해석한다; ‘다른 자의 식의 모습에 대한 지혜인 상위식상지(相違識相智)’란 능히 다른 이의 식의 인식대상의 상을 아는 것이다.

‘인식대상이 없는 식을 현재 얻는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무소연식현가득지(無所緣識現可得智)’란 현재에 존재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인식대상이 없지만 식이 생겨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과거 등과 같은 것이다.

 

應離功用無顚倒智者,謂能了知若如是義,如所顯現,卽是實有,離起對治,無顚倒智,任運應成.三種勝智隨轉妙智者,謂能了知三種勝智,境隨轉義.

‘노력하지 않아도 전도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응이공용무전도지(應離功用無顚倒智)’란, 만약 이러한 대상이 현현하는 것과 같이, 이러란 것들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다스림의 대치(對治)를 일으키지 않고도 전도됨이 없는 지혜가 자연히 성취된다는 것을 능히 아는 것이다.

‘세 가지 뛰어난 지혜에 따라서 전전함이 묘하다는 것에 대한 지혜인 수삼지전지(隨三智轉智)’는 세 가지의 뛰어난 지혜의 경지를 따라 전전하는 의미를 능히 아는 것이다.

 

得心自在者,得心調順,有所堪能.得靜慮者,謂諸聲聞及獨覺等,已得靜慮.

隨勝解力,諸義顯現者,謂若願樂地成其水,如意則成,火等亦爾.

‘마음의 자재를 얻는다는 득심자재(得心自在)’란, 마음의 조복을 얻어서 감당 능력이 있게 되는 것이고,

‘정려를 얻은 득정려자(得靜慮者)’란, 모든 성문과 독각 등은 이미 정려를 얻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뛰어난 승해력(勝解力)을 따라서 모든 대상이 현현한다’는 것이란, 만약 땅에서 물을 이루려는 소원을 세우면, 곧 뜻대로  성취되는 것으로, 불 등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得奢摩他者,得三摩地,修法觀者,於契經等,策勤觀察. 纔作意時,諸義顯現者, 隨於一義, 如如作意, 如是如是, 非一品類境相顯現. 無分別智,現在前時,一切諸義,皆不顯現者,若如顯現義,卽如是實有,應不得有無分別智.無分別智,若是實有,決定應許諸義皆無.

‘사마타를 얻는다는 득사마타(奢摩他)’란, 삼마지를 얻는 것이고,

‘법의 관찰을 닦는 수법관(修法觀)’이란, 계경(契經) 등을 부지런히 관찰하는 것이고, 
‘작의할 때 곧 모든 대상이 현현한다’는 것은, 하나의 대상(義)을 따라 작의하는 그대로 이렇게 이렇게 하나가 아닌 품류의 대상의 모습인 경상(境相)이 현현하는 것이고,

‘무분별지혜가 현전할 때에는 모든 대상(義)이 다 현현하지 않는다’는 것은, 만약 현현하는 대상(義)과 같이 곧 그렇게 실재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무분별지혜를 얻지 않아야 하고,

무분별지혜가 실체라면 결정적으로 모든 대상(義)이 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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