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 6권
세친(世親) 보살 지음, 현장(玄奘) 한역.
4. 입소지상분(入所知相分) 1
▶論曰:如是已說所知相,入所知相,云何應見?多聞熏習所依,非阿賴耶識所攝,如阿賴耶識成種子;
如理作意所攝,似法似義,而生似所取事,有見意言.
▷논문; 이와 같이 알아야 할 바의 상인 소지상(所知相)을 말하였으니,
알아야 할 바의 상에 들어가는 입소지상(入所知相)을 어떻게 보아야 마땅하겠는가?
이는 다문훈습(多聞熏習)의 소의(所依, 의지처)이고 아뢰야식이 포섭하는 바가 아닌, 아뢰야식이 종자를 이루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치 그대로의 작의(作意)가 포섭하는 바로서, 법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며,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비슷하게 현현하고, 유견식(有見識)인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인 것이다.
ㅡ이상에서 소지상(所知相)으로서 심식론과 3성설에 관하여 설명한 것은 유식학의 이론문(理論門)이다. 이제는 그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수행문에 들어간다.
작의(作意),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심왕과 심소(心所, 심리작용)를 대상에 주의시켜서 인도하는 작용으로, 촉(觸) 심소(心所) 다음에 일어나며, 이로 인해서 감수작용의 수(受)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의언(意言), 뜻 속의 말, 즉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釋曰:如能悟入,如是種類所應知相,今當顯說.入所知相者,謂能悟入所知境義. 多聞熏習所依者,謂大乘法所熏自體.非阿賴耶識所攝者,謂能對治阿賴耶識故.如阿賴耶識成種子者,謂如阿賴耶識,爲一切雜染法因,此爲一切淸淨法因亦爾.如理作意所攝者,謂如理作意,爲自性.似法似義而生者,謂似法義相而生起時.似所取事者,謂似色等義.有見者,謂似於見此卽成立有相見識.
▷해석한다; 이와 같은 종류로 마땅히 알아야 할 바의 소지상(所知相)에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지금 말하는 것으로,
‘알아야 할 바의 상에 들어간다는 입소지상(入所知相)’이란, 알아야 할 바의 대상에 능히 깨달아 들어간다는 의미이며,
‘다문훈습(多聞熏習)의 소의(所依, 의지처)’란, 대승법이 훈습된 자체이며,
‘아뢰야식이 포섭하는 바가 아니다’란, 능히 아뢰야식을 다스리기 때문이며,
‘아뢰야식이 종자를 이루는 것과 같다’는 것이란, 아뢰야식이 모든 잡염법의 원인이 되듯이, 이것이 모든 청정법의 원인이 되는 것 역시도 그러하다는 것을 말하며,
‘이치 그대로의 작의(作意)가 포섭하는 바’란, 이치 그대로의 작의(作意)를 자성으로 삼는 것을 말하며,
‘법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다’는 것은, 법과 의미(義)의 상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때이며,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와 비슷하게 현현한다’는 것은, 빛깔(色) 등의 대상과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을 말하며,
‘유견식(有見識)'이란, 곧 상분과 견분을 갖는 식(識)을 성립하는 것을 말한다.
▶論曰:此中誰能悟入所應知相?大乘多聞熏習相續,已得逢事,無量諸佛,
出現於世,已得一向決定勝解,已善積集諸善根故,善備福智資糧菩薩.
▷논문; 여기서 어떠한 사람이 알아야 할 바의 소지상(所知相)에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것인가?
대승의 다문훈습(多聞熏習)을 상속하고, 무량한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에 받들어 섬길 수 있으며,
한결같이 결정적인 뛰어난 승해(勝解)를 얻고, 모든 선근을 잘 쌓음으로써 복덕과 지혜의 자량(資糧)을 잘 갖춘 보살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ㅡ유식학에서 보살의 수행과정인 5위(位) 중에서 제1위인 자량위(資糧位)의 수행을 설명한다. 이것은 길고 긴 수행의 도정에서 재산이 될 정신적인 양식을 저장하는 단계로써, 여기서 자량(資糧)은 복덕과 지혜를 가리킨다. 37보리분법과 6바라밀다를 닦는 과정이다. 10주ㆍ10행ㆍ10회향(제10회향의 住心)까지이다.
유식학에서는 보살 수행 계위 41단계(41위)를 자량위 · 가행위 · 통달위 · 수습위 · 구경위의 5위(五位)에 배대한다.
자량위(資糧位), 10주 · 10행과 10회향의 제10위인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廻向)의 주심(住心)까지,
가행위(加行位), 10회향의 제10위인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廻向)의 출심(出心)의 단계, 즉, 통달위 즉 견도(見道)에 들기 위해 닦는 난(煖) · 정(頂) · 인(忍) · 세제일(世第一)의 4선근(四善根) 즉 4가행(四加行)의 단계,
통달위(通達位), 견도위(見道位), 즉 10지의 첫 번째 계위인 초지(初地)의 입심(入心) 즉 환희지(歡喜地)의 입심(入心)
수습위(修習位), 10지 가운데 초지(初地) 즉 환희지(歡喜地)의 주심(住心)에서 제10지 즉 법운지(法雲地)의 출심(出心)까지,
구경위(究竟位): 묘각(妙覺), 즉 부처의 지위 · 불지(佛地) · 불과(佛果) · 여래지(如來地) · 불지(佛智) · 일체지(一切智) · 대원경지(大圓鏡智)
▶釋曰:如是品類,如此方便,而能悟入,今當顯示. 大乘多聞熏習相續者,簡聲聞等, 所有多聞熏習相續.
已得逢事,無量諸佛,出現於世者,已得現前逢事,諸佛出現, 世閒超過數量. 已得一向決定勝解者, 謂於大乘,所得勝解,非諸惡友所能動壞,卽由無閒所說三因,已善積集諸善根故,乃得名爲善備福智資糧菩薩.
▷해석한다; 이와 같은 품류와 이와 같은 방편에 의해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지금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대승의 다문훈습을 상속한다’는 것은 성문등이 갖는 다문훈습의 상속을 가려낸 것이며,
‘무량한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에 받들어 섬길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현전에 세간에 출현하신다면, 받들어 섬길 수 있음이 수량(數量)을 초월한다는 것을 말하며,
‘한결같이 결정적인 뛰어난 이해의 승해(勝解)를 얻는다’는 것은 대승으로부터 얻는 뛰어난 승해(勝解)를 모든 악한 벗이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이니, 즉 앞에서 말한, 다문훈습(多聞熏習)과 봉사무량제불(逢事無量諸佛)과 선적집제선근(善積集諸善根)의 세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이미 모든 선근을 잘 쌓은 까닭이니,
이에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잘 갖춘 보살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又卽如是福智資糧,云何漸次而得圓滿? 謂由因力`由善友力`由作意力`由依持力. 此中兩句,卽是二力,如數應知.
또한 이와 같은 복덕과 지혜의 자량은 어떻게 점차 원만해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른바 원인의 세력인 인력(因力)에 의해서이고, 착한 벗인, 선우력(善友力)에 의해서이며,
작의력(作意力)에 의해서이고, 의지력(依持力)에 의해서이다.
여기서 두 구절은 곧 원인의 세력인 인력(因力)과 선우력(善友力)의 두 가지 세력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숫자 그대로 두 세력만을 해석한다고 알아야 한다.
作意力者,卽是一向決定勝解.此用大乘熏習爲因`事佛爲緣,以有一向決定勝解,能修正行,修正行故,積集善根, 如是名爲由作意力善修福智二種資糧. 由此漸次善修福智二資糧故,能入大地,如是名爲由依持力.
작의력(作意力)은 곧 한결같이 결정적인 승해이니, 이것은 대승의 훈습을 원인(因)으로 삼고, 부처님 섬기는 것을 조건(緣)으로 삼아서 한결같이 결정적인 뛰어난 이해인 일향결정승해(一向決定勝解)를 갖춤으로써 능히 바른 정행을 닦고, 바른 정행을 닦음으로써 선근을 쌓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작의력으로 인하여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잘 닦는다고 말하는 것이며,
점차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잘 닦음으로써 능히 큰 지위인 대지(大地, 10지)에 오르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의지력에 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지(大地), 10지(地)의 지위를 가리킨다.
급다(笈多)ㆍ행구(行矩)의 역본인 수본(隋本) 및 무성석(無性釋)에서는 ‘초지(初地)에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論曰:何處能入?謂卽於彼有見似法似義意言, 大乘法相等所生起勝解行地,見道`修道`究竟道中,於一切法,唯有識性,隨聞勝解故`如理通達故`治一切障故`離一切障故.
▷논문; 어떠한 곳에 능히 들어가는 것인가? 이른바 그 유견식이 법과 비슷하게 현현하고, 의미(義)와 비슷하게 현현하는 마음속의 생각인 의언(意言)에 대해서 대승법의 상(相)을 평등히 일을키는 승해행지(勝解行地)ㆍ견도(見道, 통달위)ㆍ수도(修道, 수습위)ㆍ구경도(究竟道)이다.
제법에 오직 식의 성품인 식성(識性)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듣고, 따라서 뛰어나게 이해한 때문이고,
이치 그대로 통달한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다스리기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떠난 때문이다.
승해행지(勝解行地), 10주(住:제1주에 10신을 포함)ㆍ10행ㆍ10회향을 닦는 지위이다.
본문에서 승해행지는 곧 자량위(10주〜제10회향의 住心)와 가행위(제10회향의 滿心)에 해당된다.
▶釋曰:入如是類,及入行相,今當顯示.意地尋思,說名意言,如是意言,以大乘法,爲因而生,此中顯示意言差別.
▷해석한다; 이와 같은 부류에 들어가고, 수행의 행상(行相)에 들어가는 것을 이제 나타내어 현시하겠으니,
명칭(名)ㆍ대상(義) 등에 의한 의식의 사유 분별인 의지심사(意地尋思)를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이라 하며,
이와 같은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은 대승법이 원인이 되어 생겨나는 것으로,
여기서 생각 속의 언어의 차별인 의언차별(意言差別)을 나타내는 것이다.
大乘法相等所生者,是此教法,爲緣生義.或有卽於勝解行地,名能悟入,由但聽聞一切諸法,
唯有識性,深生信解,故名能入.於見道中,如是悟入,
‘대승법상(大乘法相)이 평등히 일으킨 바’라는 것은 이 교법을 조건으로 삼아서 생겨난 생의(生義)이거나, 혹은 승해행지(勝解行地)에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만 일체법은 오직 식의 성품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들음에 의해서 깊이 믿음과 이해를 일으키는 것을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오입(悟入)이라 한다.
今當顯示.如理通達故者,謂於意言,如理通達.云何於此,如理通達?謂此意言,非法非義`非所取非能取,如是通達.於修道中,如是悟入,今當顯示.治一切障故者,謂觀此意言,非法非義`非所取非能取時,便能對治一切障故. 究竟道中,如是悟入,今當顯示.離一切障故者,謂善淸淨妙智位中,最微細障,亦無有故.
견도(見道, 통달위) 중에서 이와 같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이제 나타내 보이겠으니,
‘이치 그대로 통달하기 때문’이란 생각 속의 언어에 대해서 이치 그대로 통달함을 말한다.
어떻게 이치 그대로 통달하는 것인가? 이른바 이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은 법이 아니고, 의미가 아니며,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아니고, 인식주체인 능취(能取)도 아니라고 통달하는 것이다.
수도(修道) 중에서 이와 같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이제 나타내 보이겠으니,
‘모든 장애를 다스리기 때문’이란 이 생각 속의 언어인 의언(意言)은 법이 아니고, 의미가 아니며,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가 아니고, 인식주체인 능취(能取)도 아니라고 관찰할 때, 문득 능히 모든 장애를 다스리게 되기 때문이다.
구경도(究竟道) 중에서 이와 같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 보이겠으니,
‘모든 장애를 떠난 때문’이란 이른바 매우 청정하고 승묘한 지혜의 지위에서는 가장 미세한 장애 또한 없기 때문이다.
견도(見道), 통달위라고 하며, 10지 중에서 초지의 입심(入心)의 수행이다. 이 지위에 오르면 무루의 지혜가 생겨나서 진여의 일분(一分)을 관찰하게 되며, 후천적인 분별기(分別起)의 번뇌는 한꺼번에 소멸되지만, 선천적인 구생기(俱生起)의 번뇌는 아직 요지부동이다. 제6 의식과 제7 말나식의 일분이 각각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수도(修道), 수습위(修習位)라고 하며, 초지의 주심(住心)부터 제10지의 끝까지의 지위이다. 견도에서 일부 증득된 진여의 도리를 반복적으로 닦아 익혀서 번뇌장과 소지장을 정화하여 나아간다.
3혜(慧)에 의해 아집과 법집을 정화하는 아공관(我空觀)과 법공관(法空觀)을 닦아서 진여의 경지에 진입하는 수행을 한다. 제7지에서 번뇌장이 정화되어 아집이 단절되고, 제10지에서 금강유정을 수행하여 소지장을 정화해서 법집이 단절된다.
▶論曰:由何能入?由善根力,所任持故,謂三種相練磨心故`斷四處故`緣法義境止觀恒常殷重加行無放逸故.
▷논문; 무엇으로 인하여 능히 깨달아 들어가게 되는 것인가? 선근력(善根力)을 지닌 때문이니,
이른바 세 가지의 삼상(三相)으로 마음을 연마하여 닦기 때문이고, 네 곳의 사처(四處)를 끊은 때문이며,
법(法)과 대상(義)의 경계를 반연하여 지관(止觀)을 닦고, 항상 간절히 가행하여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釋曰:由此能入,今當顯示.由何能入?由善根力,所任持故.謂三種相練磨心故,乃至恒常慇重加行無放逸故者,謂於如是所說八句,善順相應,名善根力所任持故.言恒常者,無閒修故.言慇重者,恭敬修故.若於如是品類造修,卽於如是能無放逸.
▷해석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능히 들어감을 나타내 보이겠으니, 무엇으로 인하여 능히 들어가는가?
‘선근력을 지니기 때문이니, 이른바 세 가지의 삼상으로 마음을 연마하기 때문이고,
나아가 항상 간절히 가행하여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렇게 말한 여덟 개의 구절에 대해서 잘 수순하여 상응하는 선근력을 지닌 때문이라 말하며,
‘항상’이란 끊임없이 닦기 때문이고,
‘간절히’란 공경하여 닦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품류에 대해서 잘 닦아 나아가면 곧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능히 방일하지 않는 것이니,
즉, 구경위(究竟位)라 하는 것으로, 불과(佛果)를 증득한 지위이며, 대보리의 사지(四智)와 대열반인 무주열반(無住涅槃)을 증득하는 것이다.
▶論曰:無量諸世界,無量人有情,剎那剎那,證覺無上正等菩提,是爲第一練磨其心.
由此意樂,能行施等波羅蜜多,我已獲得如是意樂,我由此故,少用功力,修習施等波羅蜜多,當得圓滿,是名第二練磨其心.
若有成就諸有障善,於命終時,卽便可愛一切自體圓滿而生.我有妙善,無障㝵善,云何爾時,不當獲得一切圓滿?是名第三練磨其心.
▷논문; 무량한 세계의 수많은 인간(人)과 유정(有情)은 찰나 찰나마다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나니, 이것을 첫째로 그 마음을 연마하는 것으로 삼는, 제일연마심(第一練磨心)이며,
이러한 의요로 인하여 능히 보시바라밀다 등을 행하고 “나는 이미 이와 같은 의요를 얻었다, 나는 이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의지의 노력인 공력(功力)을 가하여 보시바라밀다 등을 닦아 익힌다면, 장차 원만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둘째로 그 마음을 연마하는 제이연마심(第二練磨心)이라 하며,
장애가 있는 모든 유장선(有障善)을 성취한 이가 있다면, 목숨이 다할 때에 문득 사랑할 만한 모든 것의 자체에서 원만하게 생겨나나니, 그리하여 “나에게 승묘한 선과 장애 없는 무장애선(無障㝵善)이 있었거늘, 어찌하여 그 때에 그 모든 원만함을 획득하지 못한 것인가?”라고 한다면, 이것을 셋째로 그 마음을 연마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釋曰:此中對治三種退屈心故,唯修三種練磨心.所以者何? 以諸菩薩,聞於無上正等菩提最勝甚深廣大,難可證得,心便退屈.對治此故,修第一練磨心. 又諸菩薩,聞所修行波羅蜜多最勝甚深廣大, 難可證得,心便退屈. 對治此故, 修第二練磨心.
▷해석한다; 여기서 세 가지 퇴굴심(退屈心)을 다스리기 위해서 오직 세 가지 마음을 연마함을 닦는 것이니, 무슨 까닭에서인가?
보살은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인,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이 가장 뛰어나고 매우 심오하며 광대하여 증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듣고서 마음이 문득 퇴굴하나니, 이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첫 번째로 마음을 연마함을 닦는 제일연마심(第一練磨心)이며,
보살이 수행하는 바라밀다가 가장 뛰어나고 매우 심오하며 광대하여 증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듣고서 마음이 문득 퇴굴하나니, 이러한 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두 번째로 마음을 연마하는 제이연마심(第二練磨心)을 닦는다.
由此意樂,能行施等波羅蜜多者,此中意樂,謂信及欲.菩薩於諸波羅蜜多,眞實有性`具功德性`有堪能性,深生信解,是名爲信.深信解已樂欲修行,是名爲欲. 菩薩旣得如是信欲,自性意樂,少用功力, 修習六種波羅蜜多,當得圓滿. 又諸菩薩,於佛甚深廣大言教,思議決擇,善巧轉時,如是思量:如是無上正等菩提,難可證得,隔一念心,方可證得.心便退屈.對治此故,修第三練磨心.
‘이러한 의요로 인하여 능히 보시바라밀다 등을 행한다’는 것에서 의요(意樂)는 믿음과 욕구를 말하는 것이다.
보살은 모든 바라밀다가 진실된 진실유(眞實有)의 성품(性), 공덕을 갖춘 성품(性), 감당 능력이 있는 성품(性)에 대해서 깊이 믿음과 이해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니, 이것을 믿음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깊이 믿고 이해하고서 기쁘게 수행하고자 하는, 이것을 욕구라 한다.
보살은 이미 이와 같은 믿음과 욕구를 얻어서, 자성의 의요에 조금이라도 노력하여 6 바라밀다를 닦아 익힌다면 장차 원만해질 수 있으며,
또한 보살은 부처님의 매우 심오하고 광대한 가르침에 대해서 사색하고 결택하여 좋은 선교방편(善巧方便)을 굴릴 때, 생각하기를 ‘이와 같이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인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기란 어려우니, 한 순간 일념(一念)에 마음을 단절하여, 제10지(地)의 금강심(金剛心)의 다음 찰나에 모든 장애를 다 소멸하여서 비로소 증득할 수 있다’고 하면서, 문득 마음이 퇴굴하는 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세 번째로 마음을 연마함을 닦는, 제3연마심(第三練磨心)을 닦는 것이다.
我有妙善者,我有一切十種地中.妙善積集,福智資糧.無障㝵善者,謂金剛喩定,能破在骨麤重微細極難破障,此定無閒得一切障離繫轉依.
‘나에게 승묘한 선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열 가지 지위에서 모든 승묘한 선을 쌓은 복덕과 지혜의 자량이 있다는 뜻이며,
‘장애없는 무장애선(無障㝵善)’이란 이른바 금강유정(金剛喩定)이 능히 뼈에 있는 거칠고 미세하여 매우 없애기 어려운 장애를 없애고, 이 선정의 다음 찰나에 모든 장애의 속박을 떠난 전의(轉依)를 얻는 것이다.
ㅡ재골추중미세극난파장(在骨麤重微細極難破障), 번뇌의 거칠고 무거운(重), 미세(微細)함에 의해서 피부에 있는 번뇌, 살(肉)에 있는 번뇌, 마음 또는 뼈에 있는 번뇌로 표현하여 나눈 것이다.
云何爾時,不當獲得一切圓滿者,此中意說,於障離繫,似彼命終時,一切種智,如彼體圓滿.
‘어찌하여 그 때에 그 모든 원만함을 획득하지 못한 것인가?’란, 장애의 속박을 떠나면 그 목숨이 다할 무렵에 모든 것을 아는 일체종지(一切種智)가 그 자체 그대로 원만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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