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개운조사 능엄경 참조

수능엄경(首楞嚴經) 3 2

 

설입(舌入)
阿難!譬如 假令有人以舌舐吻熟舐令勞,其人若病 則有苦味,無病之人微有甜觸,由甜與苦顯此舌根,不舐之時淡性常在。兼舌與勞同是菩提,瞪發勞相. 舐 핥을 지, 

아난아, 가령 어떤 사람이 혀로 입술을 핥아서, 그렇게 핥기를 오랫동안 하여서 피로하여졌을 때,

만약 그 사람에게 병이 있으면, 곧 쓴 맛을 느낄 것이고, 병이 없는 사람이라면 약간 단 촉감을 느낄 것이다.

이렇게 달고 쓴 것으로 인하여 이 설근(舌根)이 드러날 것이고, 핥지 않을 때에는 담담한 성품이 항상 있을 것이니,

혀와 피로는 다 같은 보리(菩提)로서 똑바로 보다가 피로하여져서 생기는 현상과 같은 것이다. 

단맛과 쓴맛으로 혀의 감각이 나타나고, 혀를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항상 담담한 맛이 있는 것은 혀와 피로를 겸하여 보리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이니라.

ㅡ입술이 달고 쓴 것이 아닌데, 피로와 허망함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에 핥지 않을 때에는 담담한 성품이 항상 있을 것이니, 설입(舌入)의 허망함이 이러한 것이다.

달고 쓴 2종 허망은 모두 인연으로 생긴 망법으로 보리심 중에서 발한 피로한 모습이다. 
맛을 아는 지미성(知味性)이 필경에 처소(處所)가 없는데, 달고 쓰고 담담함을 사람들은 혀의 체(體)라고 잘못 알고 있다. 
혀가 달고 쓴 2진(塵)을 서로 느낄 때, 그 앎이 발하는 중에 머물며, 진상(塵象)을 흡취하는 것을 지각성(知覺性)이라 하는데 그 지각성은 혀로부터 드러나는 것이지만, 혀의 체인 성체(舌體)는 본래 지각(知覺)이 없는 것이다. 

 

甜苦及淡 二種妄塵,發知嘗居中吸此味像,名知味性,此知味嘗覺性 離彼甜苦及淡二塵,畢竟無體嘗 맛볼 상

달고 쓴맛과 담담한 맛의  가지 허망한 대상 물질인 망진(妄塵)으 인하여맛을 아는 것이 생겨서 그 가운데에서 이 미상(味像)을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맛을 깨닫는 성품의 상각성(嘗覺性)이라 하나니,

그 맛을 아는 주체가 달고 쓴 맛과 담감한 두 가지 대상 물질을 의읜다면, 필경에는 맛이라는 그 실체가 없어질 것이다.

ㅡ맛으로 인해 맛을 느끼는 것이 생겨나고, 혀로 인해서 대상 물질을 흡수하여 들이므로 설입(舌入)의 허망함이 생기는 것이다.

 

如是,阿難!當知 是嘗覺性 非淡味來,非於舌生,不於空出。何以故?若甜苦來,淡卽知亡,云何嘗淡?若從淡來,卽知亡,甛苦卽隨亡, 復云何嘗其 甜苦 二相?若從舌生,必無甛苦及淡 如是嘗精 本無自性。若從空出,有嘗成性 卽非虛空

又空自知,何關汝入。是故當知舌入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맛을 느끼는 성품인 상각성(嘗覺性)은 달고 쓴 것에서 온 것이 아니고, 담담한 맛에서 온 것도 아니며, 혀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왜냐하면, 만약 달고 쓴맛에서 온 것이라면 담담한 맛일 때에는 곧 따라서 없어질 것이니, 어떻게 담담한 맛을 알겠으며,

만약 담담한 맛에서 온 것이라면, 달고 쓴맛을 따라 곧 없어질 것이 어떻게 그 달고 맛을 알 것이며,

만약 혀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달거나 쓰거나 담담한 맛이 없으면 이와 같이 맛을 보는 정기가 본래 자성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맛을 보는 상성(嘗性)이 자성을 이룰 것이니, 곧 허공이 아닐 것이요

또한 허공이 스스로 맛보는 것이니, 그것이 너의 설입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맛을 보아 인식하는 설입(舌入) 허망한 것이라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진여성이니라.

ㅡ진여성에는 본래 능소(能所)가 없다. 상황과 조건을 따라 각종 인연법을 발현(發現)하지만, 스스로의 체성(體性)은 떠나지 않는다.

만약 달고 쓰고 담담함이 올 때 생기는 객체가 있다고 집착한다면, 인연이 만드는 법에 미혹하게 되는 것이요, 
만약 달고 쓰고 담담함이 올 때 생하는 주체가 있다고 집착한다면, 자연의 능생법(能生法)에 미혹하게 되는 것이다.

 

▷신(身)

如是 阿難!譬如 假令 有人以一冷手觸於熱手,若冷勢多 熱者從冷,若熱勢多 冷者從熱,如是以此合覺之觸顯於離知,涉勢若成因于勞觸。兼身與勞 同是菩提,瞪發勞相

아난아, 가령 어떤 사람이 차가운 한 쪽의 손으로 다른 쪽의 더운 손을 잡았을 때, 만약 차가운 기운이 많으면 더운 손이 차가워지고, 만약 더운 기운이 많으면 찬 손이 더워 질 것이다. 

이와 같이 두 손이 합해 졌을 때 느끼게 되는 감촉의 각촉(覺觸)이 서로 떨어져도 느낌이 남아 있나니,

서로 교섭하는 세력이 만약 이루어진다면, 접촉으로 인한 피로 때문일 것이다.

몸과 피로는 다 같은 보리(菩提)로써 똑바로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피로하여져서 생기는 현상과 같은 것이니라.

ㅡ신입(身入)은 접촉으로 인한 것이나, 접촉에 자성이 없는 것이 차고 더운 손이 서로 교섭하는 것과 같아서 정해진 형세가 없는 것으로 역시 망령된 것이다.

손이 스스로 접촉하는 것이 아니고 합쳐짐으로 인하여 접촉함을 느끼기 때문에 합해졌을 때 느끼는 감촉의 합각촉(合覺觸)이라 한 것이고, 합쳐지는 것은 떨어짐으로 인하여 합쳐지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서로 떨어져도 느낌이 남아 있다고 한 것이다. 

 

因于離合 二種妄塵,發感居中 吸此觸像,名感覺性。此感覺體,離彼離合違順二塵,畢竟無體。

떨어지고 합하는 이 두 가지의 허망한 대상 물질인 망진(妄塵)으로 인하여 촉감이 생긴 그 가운데에 있으면서 촉상(觸像)을 흡수하여 들이는 것을 느껴 깨닫는 성품의 감각성(感覺性)이라고 하나니,

그 느낌이 떨어지고 합하는 것과 어기고 순종하는 두 가지의 대상 물질을 여의면 필경에는 느끼는 실체가 없어질 것이니라.

ㅡ접촉으로 인하여 느낌이 생기고, 몸(根)으로 인하여 대상 물질을 흡수하여 들이므로 신입(身入)의 허망함이 생기는 것이다.

 

如是,阿難!當知 是感覺性,非離合來,非違順來,非於身生,又非空生。

何以故?若從離來,合卽隨亡,云何感合 若從合來 離即隨亡 云何感離 違順二相,亦復如是。

若從身生,必無離合違順(四相)。如是感精 本無自性。

若從空出,空自知覺,何關汝入 有感成性 卽非虛空 又空自知。是故當知身入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느껴 깨닫는 성품의 감각성(感覺性)은 떨어지거나 합함에서 온 것도 아니고, 어기거나 순종하는 것에서 온 것도 아니며, 몸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만약 떨어지는 것에서 온 것이라면, 합할 때에는 곧 따라 없어질 것이거늘, 어떻게 합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만약 합하는 것에서 온 것이라면 떨어지면 곧 따라서 없어져야 할 것이니, 어떻게 떨어짐을 느끼겠는가!

어기고 순종하는 두 가지 현상도 역시 그러한 것이며, 만약 몸에서 나온 것이라면 반드시 떨어지고 합해지고 어기고 순종하는 것이 없으면 이와 같이 느끼는 정기가 본래 자성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느끼는 것이 있으면 자성을 이룰 것이니, 곧 허공도 아닐 것이고, 또 만약 허공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라면, 그것이 너의 입(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몸으로 느끼는 신입(身入)은 허망한 것이라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여래장의 묘한 진여성이니라.

ㅡ각촉성(覺觸性)은 본래 법계(法界)에 임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떨어지고 합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만약 떼고 합함이 있다고 집착한다면, 인연으로 생긴 것에 떨어진 것이며,

만약 뗄 수 있고 합할 수 있다고 집착한다면, 자연의 체성(體性)을 모르는 것이다. 
인연은 임시적인 가명이며 자연은 체성(體性)이 없는 것이니, 그래서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니라고 한다. 
만약 인연이 바로 중도리체(中道理體)가 발현한 용(用)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환신(幻身)이 바로 천백억의 화신(化身)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의(意)

阿難!譬如 假令有人勞倦則眠睡熟便寤,攬法斯憶失憶爲忘,是其顚倒生住異滅,吸習中歸 不相踰越,稱意識根。兼意與勞同是菩提,瞪發勞相.  攬 잡을 람,

아난아, 어떤 사람이 피곤하고 나른하여 잠이 들어서,  자고는 문득 깨어서 대상인 법(法)을 더듬어 보고 기억하는 남억(攬憶)하며, 그 기억이 사라지면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뒤바뀌게 전도(顚倒)되어서 생겨나는 생(生), 머무르는 주(住), 변하는 이(異) 사라지는 멸(滅)의 것이니라.

습기를 흡수하여 들여서 가운데로 돌아가되 서로 뛰어넘지 아니하는 것을 의식근(意識根)이라 하나니,

의식과 피로는 다 같은 보리(菩提)로써 똑바로 바라보다가 피로하여 져서 생기는 현상과 같은 것이니라.

ㅡ의입(意入)은 기억해서 아는 것을 주재하고, 기억했던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깨고 자는 것에서 생기기 때문에 잠자고 깨는 것으로 예를 들어 밝힌것이다. 

더듬어 기억하는  남억(攬憶)이 생(生)이고, 망각하는 것이 멸(滅)이니, 머무름의 주(住)와 변함의 이(異),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이미 더듬어 기억하였다가 곤 사라져서 망각하는 것을 전도(顚倒)라 한 것이니, 습관이 허망한 대상 물질의 망진(妄塵)을 흡수해서 중간의 의근(意根)으로 돌아 갔으나 앞의 생각과 뒤의 생각이 차례로 상속(相續)되는 것이므로 '서로 뛰어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의입의 현상인 것이다.

ㅡ의지근(意知根)은 제8식 심왕(心王)으로 51 가지의 심소(心所)를 모두 포섭하며, 제7말나식을 취하여 깊이 사량(思量)하는 것을 체성(體性)으로 삼는다.

 

因于生滅 二種妄塵,集知居中 吸撮內塵,見聞逆流 於五根流不及之地,名覺知性。此覺知性,離彼寤寐生滅二塵,畢竟無體。

생멸(生滅)하는 두 가지의 허망한 대상 경계(妄塵)으로 인하여 모아진 앎(知)이 그 중간에 있으면서 내진(內塵, 곧 法塵)을 흡수하여 들여서, 보고 듣는 견문(見聞)이 오근(五根)의 흐름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거꾸로 흐르는 역류(逆流)하는 것을 알아서 깨닫는 성품의 지각성(知覺性)이라 하나니,

그 앎이 생멸하는 것과 잠자고 깨어나는 두 가지 대상 물질을 여읜다면, 필경에 그 앎의 실체가 없는 것이니라.

ㅡ의(意)는 알고 깨닫는 성품의 지각(知覺)을 주재하고,근(根)은 몸 속에 숨어 있으므로 '모아진 앎이 그 중간에 있다'고 하였으며, 그 의근이 법진(法塵)을 집착하여 생각하는 현상이 안에서 생기는 까닭에 '내진을 흡수하여 들인다'고 한 것이다. 문수 보살이 말하기를 '법(法)을 내진이라고 한다'고 한 것은, 곧 과거 제법의 영상을 말한 것으로 낙사진(落謝塵)이라고도 하고, 또 무표색(無表色)이라고도 한다.'역류(逆流)'한다는 것은 돌이켜 반연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의근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을 총괄하기 때문에 견문이라 한 것이다. 즉 전5진이 멸한 후에 그 잔영이 의지(意地)에 머무는 것을 법진의 역류라 하는 것으로, 전5진이 반복하여 드러나지만 의지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 오근은 다만 나타나는 대상을 따라 순하게 반연할 뿐이지만, 오직 의근만은 오근이 반연하여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돌이켜 반연하나니, 그것은 추억이나 꿈 같은 것들이다.*근(根), 어떤 작용을 발휘할 수 있는 각각의 감각 기관의 기능을 뜻한다.*낙사진(落謝塵),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의 오진(五塵)은 그 작용을 쉬고, 제6식(意識)으로 과거를 반연하는 영상을 뜻한다. 

*무표색(無表色), 색법 중에서 다른 이에게 나타낼 수 없는 것, 즉 어떤 원인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무형무상한 사물을 뜻한다.

*반연(攀緣), 칡넝쿨이 나무에 의지하여 감고 올라가듯이, 마음도 눈 앞에 전개되는 사물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반연이 바로 일체 번뇌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如是,阿難!當知 是知覺性,非生滅來,非寤寐來 非於身生,亦非空出。

何以故?若從生來,滅即隨亡,令誰知滅 若從滅來 生即隨亡 云何知生 寤寐二相 亦復如是 若從意生 必無生滅寤寐 如是知精 本無自性 若從空出 有知成性 卽非虛空 又空自知 何關汝入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이 알고 깨닫는 성품의 지각성(知覺性)은 생멸에서 온 것이 아닌고, 잠자고 깨어남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몸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니,  

왜냐하면, 만약 생(生)에서 온 것이라면, 소멸되면 곧 따라서 없어질 것이니, 무엇으로 하여금 멸하는 것을 알 게 할 것이며,

만약 멸(滅)하는 것에서 온 것이라면, 생겨나면 곧 따라서 없어질 것이니, 무엇으로 하여금 생기는 것을 알게 하겠는가!

잠자고 깨어나는 두 가지의 이상(二相) 역시도 그러한 것이니,

만약 의근에서 생긴 것이라면 반드시 생멸하고 잠자고 깨어나는 것이 없으면 이와 같은 아는 정기의 지정(知精)은 본래 자성이 없어야 할 것이며,

만약 허공에서 나온 것이라면 느끼(知)는 것이 있으면 자성을 이룰 것이니, 곧 허공도 아닐 것이고, 또 허공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니, 너의 의입(意入)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ㅡ여래장의 묘각명심(妙覺明心)은 생멸이 없지만, 무명의 정(精)에 나쁜 습성에 훈습되어서 생멸하는 의식과 화합해서 서로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지관(止觀)을 부지런히 닦아서 본각으로써 무명을 훈습하여 음(陰)을 없애고 양(陽)이 생겨나게 하는 것을 시각(始覺)이라 한다. 처음에는 지말무명부터 끊고, 점점 더 정진하여서 양(陽)만 순수하게 되는 진각(眞覺)이 되어야 비로소 근본무명이 끊어지는 것이다. 

식(識)의 성품인 밝게 아는 성식명지(性識明知)는 법계에 두루한 것이다.
만약 인연으로 난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소생(所生)에 떨어지므로 비인연이라 하고, 
만약 자연에서 난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능생(能生)에 떨어지므로 비자연이라 한다. 
이 성식명지(性識明知)는 의지근(意知根)과 비교가 안 되는, 알음알이의 앎이 아니다. 
알음알이는 능지장(能知障)에 떨어지고, 의지근은 모든 곳을 분별한다. 
분별을 넘어서서 초연할 때 무상지각(無上知覺)이 나타나나니, 이것이 성식명지(性識明知)인 것이다.

 

是故當知意入 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뜻으로 인하여 느끼는 의입(意入)은 허망한 것으로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여래장의 묘진여성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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