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8
▷대상 불질에 의지하여 티끌(塵)을 보이심
卽時,如來於大衆中屈五輪指,屈已復開,開已又屈,謂阿難言:“汝今何見?”
즉시, 여래께서 대중을 향하여 다섯 손가락을 구부렸다 펴시고, 폈다가 다시 구부리시면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는가?”
阿難言:“我見如來百寶輪掌衆中開合。”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저는 여래께서 대중을 향하여 보배무늬 손의 백보륜장(百寶輪掌)을 펴시고 구부리시는 것을 봅니다.”
佛告阿難:“汝見我手衆中開合,爲是我手有開有合?爲復汝見有開有合?”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대중 가운데 손을 펴고 구부리는 것을 본다고 하였으니,
내 손이 펴고 구부린 것인가?
아니면 너의 보는 작용(見)이 펴고 구부린 것인가?
阿難言:“世尊!寶手衆中開合,我見如來手自開合,非我見性自開自合。”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세존께서 보배의 손인 보수(寶手)를 대중 가운데에서 펴시고 구부리시니,
저는 여래의 손이 스스로 펴고 구부리는 것을 보았을 뿐, 저의 보는 성품은 펴거나 구부려지지 않았습니다.”
佛言:“誰動誰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 움직이는 동(動)이며?
무엇이 고요한 정(靜)인가?”
阿難言:“佛手不住,而我見性尚無有靜,誰爲無住。”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부처님의 손이 움직이는 불주(不住)이었을 뿐이나,
저의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은 애초에 고요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움직이는 무주(無住)라 할 수 있겠습니까?”
佛言:“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ㅡ거친 추미혹(麤迷惑)운 대상 경계를 따라 생기고 없어지고 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손을 대상 경계에 비유한 것이다.
처음에 폈다 쥐었다 한 것을 물어서 동요하는 대상 물진(塵)을 밝힌 것이고, 다음에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것을 물어서 무물지 않지 나그네를 밝힌 것으로, 모두가 대상 경계에 있고 성품(性)에 있지 않은 것이다.
▷미세한 의혹을 보이심
如來於是從輪掌中飛一寶光在阿難右,卽時阿難迴首右𥌊,又放一光在阿難左,阿難又則迴首左𥌊。
여래께서 손바닥으로 한 줄기의 보배 광명을 날려서 아난 존자의 오른쪽으로 보내시니, 아난 존자는 오른 쪽으로 머리를 돌려서 보았고,
또 한줄기의 보배 광명을 날려서 아난 존자의 왼쪽으로 보내시니, 아난 존자는 머리를 왼쪽으로 돌려서 보았다.
佛告阿難:“汝頭今日何因搖動?”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네 머리가 어찌하여 좌우로 움직였던 것인가?”
阿難言:“我見如來出妙寶光來我左右,故左右觀,頭自搖動。”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여래께서 미묘한 보배의 광명을 저의 왼쪽과 오른쪽에 날려 보내시니,
저는 그 광명을 보느라고 저절로 머리가 좌우로 움직인 것입니다.”
“阿難!汝𥌊佛光左右動頭,爲汝頭動?爲復見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여래의 광명을 보느라고 머리가 좌우로 움직였다고 하였는데,
네 머리가 흔들린 것인가?
아니면 너의 보는 성품인 견(見)이 흔들린 것인가?”
“世尊!我頭自動,而我見性尚無有止,誰爲搖動。”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제 머리가 혼자서 움직였을 뿐, 저의 보는 성품은 애초에 멈춘 일도 없었는데, 어찌 움직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ㅡ미세한 미혹은 몸과 함께 생기기 때문에 아난 존자의 머리에 광명을 좋아서 일깨워 주신 것이묘, 이것도 동요하는 진(塵)과 머물지 않는 나그네가 모두 눈에 있는 것일 뿐, 성품(性)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품(性)은 가만히 있는 것조차 아닌데, 어찌 움직였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한 것이다.
佛言:“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於是如來普告大衆:“若復衆生,以搖動者名之爲塵,以不住者名之爲客,
汝觀阿難頭自動搖見無所動,又汝觀我手自開合見無舒卷,
부처님께서 널리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중생이 흔들림읜 요동(搖動)을 티끌의 진(塵)이라 하고,
머물지 않음의 불주(不住)를 나그네인 객(客)이라 한다면,
너희들 모두는 아난을 보거라. 머리가 단독으로 움직였을 뿐, 보는 성품은 움직이지 않았느니라.
또 너희들은 나를 보아라. 손이 스스로 펴고 구부렸을 뿐, 보는 성품은 구부리거나 펴지지 않았느니라.
云何汝今以動爲身、以動爲境,從始洎終念念生滅,遺失眞性顚倒行事,性心失眞認物爲己,輪迴是中自取流轉?”
그러하거늘, 어찌하여 너희들은 지금 움직임의 동(動)을 몸(身)으로 삼고,
흔들림의 동을 경계(境)로 삼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생각마다 생(生)하고 멸(滅)하는 가운데에서 진실한 성품의 진성(眞性)을 잃어버리고 거꾸로 전도(顚倒)되게 일을 행하는 것인가!
이렇게 심성(心性)이 진실을 잃고 사물을 자신으로 앎으로써, 그 안에서 윤회하면서 스스로 흘러 다니는, 자취유전(自取流轉)할 뿐인 것이니라.”
ㅡ아난 존자로 인하여 대중들에게 객진(客塵)을 인정하고 자성을 잃어 버린 것을 꾸짖는 것이다. 모든 중생들은 눈과 대상 물질이 움직이는 망념에 집착하고 자성의 고요하고 변하지 않는 진성(眞性)에 어두운 까닭에 부처님께서 손을 펴고 쥐고 하시면서 동요하는 것이 대상 물질에 있고 성품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하시고, 또 좌우로 머리를 돌리게 하는 것으로 동요함이 눈에 있고 마음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하셨다. 그러한 다음에 교진여의 말을 인용하여 증명이 되게 하여서 경책하고 스스로 깨닫게 하신 것이다.
The Buddha taught the assembly; Why do you who cosider motion to be the body, taken motion to be the external environment since beginning to end, who continuously have this thought after that thought, arising and falling, upside-down crazy. You lose your true nature, take the motion as yourselves and accept the cycle of six realms.
부처님께서 회중에게 가르치시기를, 왜 너희들은 움직임을 몸으로 여기고, 움직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부 환경으로 여기고, 끊임없이 이 생각과 저 생각을 하여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거꾸로 전도되어 있는 것인가?
너희들은 참된 본성을 잃고, 움직임을 자신으로 여기고, 육근(六根)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We fall into the situation of either brightness or darkness(of the eye), either motion or stillness (of the ears), either bland or taste (of the tongue), either a combination or separation (of the nose), either touch or untouching (of the body), either arising or falling (of consciousness). 즉, 우리는 밝음과 어두움의 (눈), 움직임과 고요함의 (귀), 싱겁고 맛있는 것의 (입), 배합되고 분리된 냄새의 (코), 만지고 만져지는 촉의 (몸), 생각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의식)에 빠진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If we detach the six active faces of six worldly objects, such as if we detach from the brightness (of the eye), motion (of the ear), bland (of the tongue), combination (of the nose), touch (of the body), arising (of consciousness), we will cling to the other side of six objects, such as darkness (of the eye), stillness (of the ears), separation (of the nose), taste (of the tongue), lack of touch (of the body), falling (of consciousness). All these faces are conditional and illusory. 만약 우리가 여섯 가지 세속의 경계의 대상에 대한 육근(六根)의 활동적인 면을 떼어낼 수 있다면, 예를 들어, 우리가 밝음의 (눈), 움직임의 (귀), 밋밋함의 (혀), 배합된 것의 (코), 촉감의 (몸), 일어남의 (의식)을 떼어낸다면, 여섯 가지 대상의 다른 면, 즉 어둠의 (눈), 고요함의 (귀), 분리의 (코), 맛의 (혀), 촉감 없음의 (몸), 멸함의 (의식)에 집착하게 될 것이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조건적이고 환상일 뿐입니다.If we covered six active face of six faculties, then in the tranquil state of the six stillnesses, the faces of six faculties appear. 만약 우리가 여섯 가지 능력의 여섯 가지 활동적인 기능을 덮어서 가려버린다면, 여섯 가지가 정지된 고요한 적정의 상태에서 여섯 가지 능력의 면이 나타날 것입니다.However, over all, it is also the mental consciousness that distinguishes the external scene, i.e., the false thinking or imagining of the illusory object shadows our true mind.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깥으로부터의 모든 것을 것을 구별하고 있는 그 자체도 정신적 의식(마음)인 것으로, 즉, 허황된 대상에 대한 허위의 생각이나 상상이 우리의 진정한 마음의 진심(眞心, 정심 淨心)을 가리는 것입니다.The habit of giving up this shadow to grasp another is still false thinking, the external scene, and it is not the true mind. We must be aware and live surely with the essence of bodhi on the seeing, listening,and knowing. That is the purpose of the Surangama Sutra. ㅡ Dr. Bhikkuni Gioi Huong이렇게 하나의 물상에 대한 영상으로부터 다른 영상으로 끊임없 옮겨가면서 잡아채는 우리의 버릇(습관) 역시 여전히 허황된 생각의, 외적인 것으로 참된 마음의 진심이 아닌 것으로,
보고, 듣고, 아는 것에 대한 보리(菩提)의 본질을 활실히 알고 살아야 한다는 그것이 능엄경의 목적인 것입니다.
大佛頂萬行首楞嚴經卷第一終 대불정만행수능엄경 제 1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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