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8

 

▷대상 불질에 의지하여 티끌(塵)을 보이심

卽時,如來於大衆中屈五輪指,屈已復開,開已又屈,謂阿難言:“汝今何見?”

즉시, 여래께서 대중을 향하여 다섯 손가락을 구부렸다 펴시고, 폈다가 다시 구부리시면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는가?”


阿難言:“我見如來百寶輪掌衆中開合。”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저는 여래께서 대중을 향하여 보배무늬 손의 백보륜장(百寶輪掌) 펴시고 구부리시는 것을 봅니다.”


佛告阿難:“汝見我手衆中開合,爲是我手有開有合?爲復汝見有開有合?”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대중 가운데 손을 펴고 구부리는 본다고 하였으니, 

 손이 펴고 구부린 것인가?

아니면 너의 보는 작용(見)이 펴고 구부린 것인가?


阿難言:“世尊!寶手衆中開合,我見如來手自開合,非我見性自開自合。”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세존께서 보배의 손인 보수(寶手)를 대중 가운데에서 펴시고 구부리시니, 

저는 여래의 손이 스스로 펴고 구부리는 보았을 뿐, 저의 보는 성품은 펴거나 구부려지지 않았습니다.”


佛言:“誰動誰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 움직이는 동(動)이며?

무엇이 고요한 정(靜)인가?”


阿難言:“佛手不住,而我見性尚無有靜,誰爲無住。”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부처님의 손이 움직이는 불주(不住)이었을 뿐이나, 

저의 보는 성품인 견성(見性)은 애초에 고요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움직이는 무주(無住)라 할 수 있겠습니까?”


佛言:“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ㅡ거친 추미혹(麤迷惑)운 대상 경계를 따라 생기고 없어지고 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손을 대상 경계에 비유한 것이다. 

처음에 폈다 쥐었다 한 것을 물어서 동요하는 대상 물진(塵)을 밝힌 것이고, 다음에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것을 물어서 무물지 않지 나그네를 밝힌 것으로, 모두가 대상 경계에 있고 성품(性)에 있지 않은 것이다.

 

▷미세한 의혹을 보이심
如來於是從輪掌中飛一寶光在阿難右,卽時阿難迴首右𥌊,又放一光在阿難左,阿難又則迴首左𥌊。

여래께서 손바닥으로 한 줄기의 보배 광명을 날려서 아난 존자의 오른쪽으로 보내시니, 아난 존자는 오른 쪽으로 머리를 돌려서 보았고,

 한줄기의 보배 광명을 날려서 아난 존자의 왼쪽으로 보내시니, 아난 존자는 머리를 왼쪽으로 돌려서 보았다.

 

佛告阿難:“汝頭今日何因搖動?”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머리가 어찌하여 좌우로 움직였던 것인가?”


阿難言:“我見如來出妙寶光來我左右,故左右觀,頭自搖動。”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여래께서 미묘한 보배의 광명을 저의 왼쪽과 오른쪽에 날려 보내시니, 

저는  광명을 보느라고 저절로 머리가 좌우로 움직인 것입니다.”


“阿難!汝𥌊佛光左右動頭,爲汝頭動?爲復見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여래의 광명을 보느라고 머리가 좌우로 움직였다고 하였는데,

 머리가 흔들린 것인가?

아니면 너의 보는 성품인 견(見) 흔들린 것인가?”


“世尊!我頭自動,而我見性尚無有止,誰爲搖動。”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머리가 혼자서 움직였을 뿐, 저의 보는 성품은 애초에 멈춘 일도 없었는데, 어찌 움직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ㅡ미세한 미혹은 몸과 함께 생기기 때문에 아난 존자의 머리에 광명을 좋아서 일깨워 주신 것이묘, 이것도 동요하는 진(塵)과 머물지 않는 나그네가 모두 눈에 있는 것일 뿐, 성품(性)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품(性)은 가만히 있는 것조차 아닌데, 어찌 움직였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한 것이다.


佛言:“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於是如來普告大衆:“若復衆生,以搖動者名之爲塵,以不住者名之爲客,

汝觀阿難頭自動搖見無所動,又汝觀我手自開合見無舒卷,

부처님께서 널리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중생이 흔들림읜 요동(搖動)을 티끌의 진(塵)이라 하고,

머물지 않음의 불주(不住)를 나그네인 객(客)이라 한다면,

너희들 모두는 아난을 보거라. 머리가 단독으로 움직였을 뿐, 보는 성품은 움직이지 않았느니라.

 너희들은 나를 보아라. 손이 스스로 펴고 구부렸을 뿐, 보는 성품은 구부리거나 펴지지 않았느니라.

 

云何汝今以動爲身、以動爲境,從始洎終念念生滅,遺失眞性顚倒行事,性心失眞認物爲己,輪迴是中自取流轉?”

그러하거늘, 어찌하여 너희들은 지금 움직임의 동(動)을 몸(身)으로 삼고,

흔들림의 동을 경계(境)로 삼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생각마다 생(生)하고 멸(滅)하는 가운데에서 진실한 성품의 진성(眞性)을 잃어버리고 거꾸로 전도(顚倒)되게 일을 행하는 것인가!

이렇게 심성(心性)이 진실을 잃고 사물을 자신으로 앎으로써, 그 안에서 윤회하면서 스스로 흘러 다니는, 자취유전(自取流轉)할 뿐인 것이니라.”

ㅡ아난 존자로 인하여 대중들에게 객진(客塵)을 인정하고 자성을 잃어 버린 것을 꾸짖는 것이다. 모든 중생들은 눈과 대상 물질이 움직이는 망념에 집착하고 자성의 고요하고 변하지 않는 진성(眞性)에 어두운 까닭에 부처님께서 손을 펴고 쥐고 하시면서 동요하는 것이 대상 물질에 있고 성품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하시고, 또 좌우로 머리를 돌리게 하는 것으로 동요함이 눈에 있고 마음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하셨다. 그러한 다음에 교진여의 말을 인용하여 증명이 되게 하여서 경책하고 스스로 깨닫게 하신 것이다.

 

The Buddha taught the assembly; Why do you who cosider motion to be the body, taken motion to be the external environment since beginning to end, who continuously have this thought after that thought, arising and falling, upside-down crazy. You lose your true nature, take the motion as yourselves and accept the cycle of six realms. 

부처님께서 회중에게 가르치시기를, 왜 너희들은 움직임을 몸으로 여기고, 움직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부 환경으로 여기고, 끊임없이 이 생각과 저 생각을 하여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거꾸로 전도되어 있는 것인가?

너희들은 참된 본성을 잃고, 움직임을 자신으로 여기고, 육근(六根)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We fall into the situation of either brightness or darkness(of the eye), either motion or stillness (of the ears), either bland or taste (of the tongue), either a combination or separation (of the nose), either touch or untouching (of the body), either arising or falling (of consciousness). 즉, 우리는 밝음과 어두움의 (눈), 움직임과 고요함의 (귀), 싱겁고 맛있는 것의 (입), 배합되고 분리된 냄새의 (코), 만지고 만져지는 촉의 (몸), 생각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의식)에 빠진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If we detach the six active faces of six worldly objects, such as if we detach from the brightness (of the eye), motion (of the ear), bland (of the tongue), combination (of the nose), touch (of the body), arising (of consciousness), we will cling to the other side of six objects, such as darkness (of the eye), stillness (of the ears), separation (of the nose), taste (of the tongue), lack of touch (of the body), falling (of consciousness). All these faces are conditional and illusory. 만약 우리가 여섯 가지 세속의 경계의 대상에 대한 육근(六根)의 활동적인 면을 떼어낼 수 있다면, 예를 들어, 우리가 밝음의 (눈), 움직임의 (귀), 밋밋함의 (혀), 배합된 것의 (코), 촉감의 (몸), 일어남의 (의식)을 떼어낸다면, 여섯 가지 대상의 다른 면, 즉 어둠의 (눈), 고요함의 (귀), 분리의 (코), 맛의 (혀), 촉감 없음의 (몸), 멸함의 (의식)에 집착하게 될 것이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조건적이고 환상일 뿐입니다.If we covered six active face of six faculties, then in the tranquil state of the six stillnesses, the faces of six faculties appear. 만약 우리가 여섯 가지 능력의 여섯 가지 활동적인 기능을 덮어서 가려버린다면, 여섯 가지가 정지된 고요한 적정의 상태에서 여섯 가지 능력의 면이 나타날 것입니다.However, over all, it is also the mental consciousness that distinguishes the external scene, i.e., the false thinking or imagining of the illusory object shadows our true mind.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깥으로부터의 모든 것을 것을 구별하고 있는 그 자체도 정신적 의식(마음)인 것으로, 즉, 허황된 대상에 대한 허위의 생각이나 상상이 우리의 진정한 마음의 진심(眞心, 정심 淨心)을 가리는 것입니다.The habit of giving up this shadow to grasp another is still false thinking, the external scene, and it is not the true mind. We must be aware and live surely with the essence of bodhi on the seeing, listening,and knowing. That is the purpose of the Surangama Sutra. ㅡ Dr. Bhikkuni Gioi Huong이렇게 하나의 물상에 대한 영상으로부터 다른 영상으로 끊임없 옮겨가면서 잡아채는 우리의 버릇(습관) 역시 여전히 ​​허황된 생각의, 외적인 것으로 참된 마음의 진심이 아닌 것으로, 
보고, 듣고, 아는 것에 대한 보리(菩提)의 본질을 활실히 알고 살아야 한다는 그것이 능엄경의 목적인 것입니다.


大佛頂萬行首楞嚴經卷第一終 대불정만행수능엄경 제 1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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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7

 

▷아난 존자의 애청(哀請)

阿難聞已,重復悲淚五體投地,長跪合掌而白佛言:“自我從佛發心出家,恃佛威神,常自思惟無勞我修,將謂如來惠我三昧,不知身心本不相代,失我本心,雖身出家心不入道,譬如窮子捨父逃逝,今日乃知雖有多聞,若不修行與不聞等,如人說食終不能飽。

아난 존자가  말을 듣고  다시 슬피 울면서 온몸을 땅에 던지는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한 후, 장궤합장(長跪合掌)을 하고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제가 부처님을 따라 발심하여 출가하였으나, 부처님의 위신(威神)을 믿고 항상 홀로 ‘내가 수고롭게 닦지 않아도 여래께서 저에게 삼매(三昧)를 내려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본래 몸과 마음이 서로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저의 본심(本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비록 몸은 출가하였으나 마음은 도(道)에 들지 못하였으니, 궁자(窮子)가 아버지를 버리고 달아난 것과 같다는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비록 들은 지식이 많을지라도 수행하지 않는다면, 듣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마치 입으로 맛있는 음식을 아무리 말할지라도 끝내 배부를  없는, 설식종불능포(說食終不能飽, 그림의 떡)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ㅡ'궁자(窮子)가 아버지를 버리고 달아난 것'은 본심(本心)을 잃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

장궤(長跪), 몸을 똑바로 세운 채 오른쪽 무릎을 꿇거나 혹은 두 무릎을 대고 허리를 세운 채 꿇어앉는 것.

 

▷거듭청하는 중청(重請)

世尊!我等今者二障所纏,良由不知寂常心性。唯願如來哀愍窮露發妙明心,開我道眼。”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지금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이장(二障)에 얽매인 까닭은, 고요하고 영원한 심성의 적상심성(寂常心性)을 알지 못한 까닭입니다. 

부디 여래께서는 헐벗고 궁핍한 저희를 가엾게 여기시어서, 밝고 묘한 마음을 밝히셔서 도안(道眼)을 열어주시옵소서.”

 

*이장(二障)=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번뇌장(煩惱障)은 아집(我執)으로 인해 생겨나는 번뇌로서, 열반(涅槃)의 증득을 장애하는 번뇌, 즉 해탈을 장애하는 번뇌이다.
소지장(所知障)은 법집(法執)으로 인해 생겨나는 번뇌로서, 보리(菩提)의 발현을 장애하는 번뇌, 즉 완전한 깨달음의 증득을 장애하는 번뇌이다.

*적상(寂常), 열반의 이치이며, 번뇌가 없음을 '적(寂)'이라 하고, 생멸이 없을 '상(常)'이라 한다. 

 

*궁자(窮子), 법화칠유(法華七喩) 중 하나이며, 법화경 신해품(信解品) 제4에 나오는 비유이다.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가출하여서 50년 동안 가난과 싸우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품팔이를 하며 유랑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부자 아버지의 집 앞에 도착했지만, 알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갈려고 하였지만,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직감한 장자는 다양한 방법으로 거지를 자신의 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유인해서는, 점차 환경에 익숙해지자 여러 가지 기술을 가르쳐 마침내는 장자의 출납을 담당하는 회계로 키우고, 그 이후 집사로 성장시켰다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는 내용입니다.
못난 아들이 아버지가 쫓아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기절하는 것은 궁자경악 화엄시(窮子驚愕華嚴時),
화엄경을 설한 때이고, 
그 다음에 집으로 유인을 당해서, 거름을 치고 청소를 하고 하찮은 일들을 하면서 일당을 조금씩 받아오는 것은 제분전가 아함시(除糞定價阿含時), 아함경을 설한 때이며, 
그 다음 세월이 흘러서 그 집에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을 때를 출입자재 방등시(出入自在方等時), 방등경을 설할 때가 출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정도이며,   
그 다음에 영지보물 반야시(令知寶物般若時), 보물을 다 알게 되었을 때는 반야경을 설하신 때이다. 
반야부 경전이 내용에 있어서 중간에 위치하지만, 그 보다 낮은 교리와 높은 교리의 모두를 아우르고 근본이 되는 것이 반야부 경전인 것입니다. 
그리고 훌쩍 한 단계 뛰어넘어서 , 전부가업 법화시(傳付家業法華時)라 해서 집안의 모든 재산과 살림살이 일체를 전부 물려받는 시기가 법화경을 설하던 때이라고 배대를 합니다.  
그래서 화엄경 21일, 그 다음에 아함경 12년, 방등경 8년, 반야부 경전 21년, 법화열반 8년 동안 설하신,

아함십이(阿含十二) 방등팔(方等八) 이십일재담반야(二十一載談般若), 종담법화우팔년(終談法華又八年), 최초 화엄삼칠.ㅡ 무비스님

 

*We solve one problem and then we continue to grasp others, nonstop. The conditional mind has dozens, hundreds of thoughts that it grasps and relies on. Taking refuge in or relying on and clinging to something outside becomes our habit and forms the Karma wheel. 

Consciousness is the false thoughts following the external conditions, which we wrongly consider as our mind. So when the shadows of the six objects show up, we catch; then another shows up, we give up this shadow to grasp another. The shadow is destroyed, another objet appears. We are movable and attach to the rising-falling objects without direction. 

우리는 한 가지의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도 끊임없이 다른 문제들에 파고듭니다. 조건부적 마음은 수십, 수백 가지의 생각을 따라 움켜잡고 의지하고자 합니다. 외부의 무언가에 의지하여서 위안을 받고자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습관이 되고 또한 윤회를 형성합니다.

의식은 외부 조건에 따르는 거짓된 생각이나,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마음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섯 가지 대상의 그림자, 육경(六境)이 나타나면 바로 받아 들여서 집착하고, 다시 다른 그림자가 나타나면, 이 그림자를 포기하고, 다른 그림자를 받아 들여서 집착해서 다시 이 그림자는 파괴되고 다른 대상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움직이면서, 일정한 방향 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대상에 집착할 뿐입니다.

ㅡ Dr. Bhikkuni Gioi Huong


卽時如來從胸卍字涌出寶光,其光晃昱有百千色,十方微塵普佛世界一時周遍,遍灌十方所有寶剎諸如來頂,旋至阿難及諸大衆。

즉시 여래께서는 가슴의 만자(卍字)에서 보배로운 광(寶光)을 놓으시니, 백천 색으로 어우러진  찬란한 광명이 일시에 시방의 미진과 같이 많은 부처님의 세계에 두루 퍼져서, 시방 일체의 보배로운 국토인 보찰(寶刹)에 계신 모든 여래의 정수리를 두루 비춘 뒤에, 다시 돌아와 아난 존자와 모든 대중을 비추었다.

 

'만자문(卍字紋)', 영원한 법과 복덕의 상징이며, 불교의 진리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이 문양은 우주와 자연의 조화를 나타내며, 부처님의 공덕과 지혜를 상징하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일반적으로 왼쪽 방향(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좌만자(卍)가 주로 사용되며, 고대 인도에서 사용된 것이었다.

卍은 불경과 함께 중국에 전해졌으며, 후진의 구마라습과 당나라의 현장은 이를 '덕(德)'으로 번역했지만 북위 시대의 보리류지(菩提流支)는 '만(萬)'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만덕(萬德)의 의미를 가진다. 측천무후 시절에는 卍은 '만(萬)'으로 읽도록 정했는데 이는 길상만덕(吉祥万徳)이 모인다는 뜻이다.ㅡ나무위키

 

▷아난 존자의 요청에 응하심.

告阿難言:“吾今爲汝建大法幢,亦令十方一切衆生,獲妙微密性淨明心得淸淨眼。

阿難!汝先答我見光明拳,此拳光明因何所有?云何成拳汝將誰見?”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으니,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위대한법(大法)의 깃대(幢)를 세우리니, 따라서 시방의 일체중생에게 미묘하고 비밀스러운 심오한 성품인 미묘밀성(妙微密性)의 맑고 밝은 정명심(淨明心) 얻게 하여서 청정한 안목의 청정안(淸淨眼)을 밝히도록 할 것이니라.”

아난아, 네가  전에 나에게 ‘광명이 빛나는 광명권(光明拳) 본다’고 답하였는데, 

 주먹의 광명이 있는 까닭은 무엇이며? 

어떻게 주먹이 되었으며?

또한 너는 무엇으로 보았는가?”

깃대(幢)이란 삿된 것을 꺾고 올바른 것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묘한 마음과 깨끗한 눈을 밝혀서 삿된 것을 꺽고 항복받아서 올바른 지견(智見)을 얻게 하신 것이 대법의 깃대(幢)를 세운 것이다. 지견(知見)이 바르게 되면, 묘한 마음과 깨끗한 눈을 얻게 되는 것이니, 중생과 여래가 다같이 가지고 있으나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을 '미묘하고 비밀스러운 심오한 성품의 미묘밀성(妙微密性)이라 하였고,

때가 능히 더럽힐 수 없고 어두움이 능이 어둡게 할 수 없는 것을 맑고 밝은 정명심(淨明心)이라 하였으며,

봄에 있어서 눈병을 벗어나 환하고 뚜렷하게 보는 것을 말고 깨끗한 눈을 청정안(淸淨眼)이라 한다.


阿難言:“由佛全體閻浮檀金赩如寶山,淸淨所生故有光明,我實眼觀五輪指端屈握示人,故有拳相。”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염부단금(閻浮檀金)과 같은 부처님의  몸이 보배 산과 같이 붉어서 청정한 빛을 내시는 까닭에 광명이 있는 것이며, 

그러한 것을 저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다섯 손가락의 오륜지(五輪指)을 구부려 쥐시고 사람들에 보여주신 까닭에 주먹의 모습인 권상(拳相)이 있는 것입니다.”

염부단금(閻浮檀金), 염부나무 사이를 흐르는 강에서 나오는 사금(沙金), 또는 염부나무 밑에 있다고 하는 금.


佛告阿難:“如來今日實言告汝,諸有智者要以譬喩而得開悟。

阿難!譬如我拳,若無我手不成我拳;若無汝眼不成汝見。以汝眼根例我拳理,其義均不?”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래는 오늘 진실한 말로써 네게 알려주리라.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비유로 반드시 깨달을  있을 것이니,

아난아, 비유하자면 나의 주먹과 같은 것이다. 

만약 내 손이 없다면  주먹을 만들  없었을 것이며, 

 눈이 없다면 너는   없었을 것이니라. 

이와 같은 이치로  눈을  주먹에 비교한다면  뜻이 같은 것이 겠는가?”


阿難言:“唯然,世尊!旣無我眼不成我見,以我眼根例如來拳,事義相類。”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눈이 없다면 저는   없었을 것이므로, 

 눈을 여래의 주먹에 비교한다면 실제와 뜻이 서로 같은 사의상류(事義相類)인 것입니다.”

ㅡ눈(眼)을 주먹(拳)에 비유한 것은 이치가 비슷하지 않으나, 아난 존자가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한 까닭에 비슷하다고 대답한 것이다.

 

▷정택진견(正擇眞見)

佛言阿難:“汝言相類,是義不然。何以故?如無手人拳畢竟滅;彼無眼者非見全無。所以者何?汝試於途詢問盲人:‘汝何所見?’彼諸盲人必來答汝:‘我今眼前唯見黑暗,更無他矚。’以是義觀,前塵自暗,見何虧損?”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서로 같다고 하였으나  뜻은 그렇지 않은 것이니,

 까닭은 만약 손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주먹을 만들  없으나, 

눈이 없는 사람은 전혀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유를 말할 것이니, 네가 시험 삼아 길거리로 가서 맹인(盲人)들에게 ‘당신은 무엇을 봅니까’라고 묻는다면, 

 맹인들은 ‘나는 지금 눈앞에 캄캄한 것만을 볼 뿐,  밖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니라. 

이러함으로 본다면, 앞 경계가 스스로 어두울 뿐, 보는 작용에는 모자람이 없는 것이니라.”


阿難言:“諸盲眼前唯睹黑暗,云何成見?”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맹인들의 눈앞이 캄캄함을 어찌하여 본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佛告阿難:“諸盲無眼唯觀黑暗,與有眼人處於暗室,二黑有別?爲無有別?”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눈의 기능이 없는 맹인들이 보는 캄캄함과 눈의 기능이 있는 사람이 암실(暗室)에서 보는 캄캄함을 비교한다면, 

이러한 두 캄캄함인 다른 것이겠는가?

다르지 않은 것이겠는가?”

ㅡ두 어두움이 다르지 않다면, 어두움은 곧 눈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다만 보는 대상이 어두운 것일 뿐이다.


“如是,世尊!此暗中人與彼群盲,二黑挍量曾無有異。”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암실에 있는 사람을  맹인들과 비교한다면,  캄캄함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阿難!若無眼人全見前黑,忽得眼光還於前塵,見種種色名眼見者;彼暗中人全見前黑,忽獲燈光,亦於前塵見種種色,應名燈見。若燈見者,燈能有見自不名燈,又則燈觀何關汝事?是故當知燈能顯色。如是見者是眼非燈,眼能顯色,如是見性是心非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약   사람이 눈앞의 캄캄함만을 보다가 홀연히 눈빛을 얻어서, 앞 경계의 갖가지 물체를 보는 것을 눈이 본다고 하는 것이라면, 

 암실에 있는 사람이 눈앞의 캄캄함만을 보다가 홀연히빛을 얻어서,  경계의 갖가지 물체를 보게 된다면, 당연히 등(燈)이 본다고 해야 하리라. 

만약 등이 본다고 한다며, 등(燈)에게 보는 능력이 있으므로 등(燈)이라 이름할  없을 것이며, 

 등(燈)이 보는 것이니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등(燈)은 빛을 드러낼  있으나,

이렇게 보는 작용은  눈(眼)이요, 등(燈)이 아니며, 

눈은 색(色)을 드러낼  있으나, 이렇게 보는 성품은  마음(心)이요 눈이 아닌 것이니라.”

ㅡ모는 주체는 성품(性)이라는 것이다. 

 

*견() 마음의 작용이다

우리는 눈으로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는 것은 <눈> 이 아니고 <마음> 이다. 

캄캄한 방에 촛불을 켜면 환하게 보인다고해서 촛불이 보는 것인가? 

환한 것을 아는 것은 촛불이 아니고 마음(眞心)이며, 눈(眼根)은 기관일 뿐이다.

보는 것은 물론이고 견문각지(見聞覺知) 하는 것은 전부다 마음이다.
등(燈) ―― 물체 ―― 눈(眼)
눈(眼) ―― 물체 ―― 마음
등과 눈을 비교하여 등이 보는 것이 아니고 눈이 보는 것과 같이,

눈과 마음을 비교하여 눈이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보는 것이다.ㅡ향적법진

 

▷아난 존자가 아직 깨닫지 못함
阿難雖復得聞是言,與諸大衆口已默然心未開悟,猶冀如來慈音宣示,合掌淸心佇佛悲誨

이러한 말씀을 듣자 아난 존자는 대중들과 함께 비록 입으로는 이미  말이 없어졌으나, 마음으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오로지 여래께서 자비하신 음성으로 설해주시기를 바라면서, 

합장하여 마음을 비운, 합장정심(合掌淸心)으로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기다릴 뿐이었다.

ㅡ마음으로 보는 것임을 조금 알았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으나 아직 의심은 남아 있다.

 

▷객진번뇌를 떨쳐버림 - 추문하여 깨닫게 함.
爾時,世尊舒兜羅緜網相光手,開五輪指,誨勅阿難及諸大衆:“我初成道於鹿園中,爲阿若多五比丘等及汝四衆言:‘一切衆生不成菩提及阿羅漢,皆由客塵煩惱所誤。’汝等當時因何開悟今成聖果?”

이때 세존께서 그물 모양처럼 무늬 진, 도라면(兜羅綿, 깨끗하고 부드러운 솜)과 같이 부드럽고 광명이 빛나는 손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펴시면서, 아난 존자와 대중에게 가르침을 주셨다.

“내가 처음 도를 이루고 녹원(鹿園)에서 아야다(阿若多, 得解, 앎의 뜻, 교진여)  다섯 비구와 너희들 사부대중(四部大衆)에게 말하기를 ‘일체중생이 보리(菩提)와 아라한(阿羅漢)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모두  객진번뇌(客塵煩惱)의 잘못 때문이니라’고 하였 때, 당시에 너희들은 무엇을 근거로 깨달았기에 거룩한 과위의 성과(聖果)를 이룬 것인가!”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설파를 '법의 수레바퀴가 굴러간다'고 하여서 전법륜(轉法輪)이라 하며,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린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깨달음을 얻은 직후 자신과 수행했던 다섯 수행자, 콘단냐(Kondanna, 교진여, 아야다)· 아사지(Assaji, 아설지) · 마하나마(Mahanama, 마하남) · 밧디야(Bhaddhiya, 바제) · 바파(Vappa, 바파)에서 초전법륜을 하였다. 이들은 처음 싯다르타가 출가했을 때에 아버지 숫도다나가 아들을 호위하라고 파견했다는 설이 있고, 혹은 싯다르타의 인간됨을 보고 따랐던 그의 수행 시절 동료였다고도 전한다. 

*객진번뇌(客塵煩惱)와 자진번뇌(自塵煩惱), 미세하고 수가 많으므로 진(塵)이라 함.
객진번뇌는 외부 환경이나 상황에서 비롯된 번뇌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타인의 비판, 물질적 손실, 사회적 갈등 등 외부 자극에 반응해서 생기는 분노, 시기, 불안 등으로, ‘객(客)’은 ‘손님’을 뜻하며,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특성을 지닙니다.
자진번뇌는 개인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번뇌를 가리키며, 예를 들어, 탐욕(貪), 성냄(瞋), 어리석음(癡) 등 삼독(三毒)과 같은 선천적 습관이나 무명(無明)으로, ‘자(自)’는 ‘스스로’를 의미하며,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심층적인 문제로 간주됩니다.

대처 방식으로는; 
객진번뇌는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조절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마음챙김(念)이나 상황에 대한 객관적 관찰을 통해 일시적인 감정의 흐름을 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 비판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상대방의 해석일 뿐’이라고 인식하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자진번뇌: 내면의 근본적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수행(修行)이 필요합니다. 명상, 계율 준수, 지혜 함양 등을 통해 무명을 벗어나고 삼독을 소멸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예를 들어, 탐욕의 뿌리를 찾아 집착을 버리는 과정입니다. ㅡ향림

 

▷교진여가 뜻을 밝힘.
時,憍陳那起立白佛:“我今長老於大衆中獨得解名,因悟客塵二字成果。

이때 교진나(憍陳那, 아야다)가 일어나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제가 지금 장로(長老)로서 대중 가운데 홀로 ‘잘 아는 사람의 득해(得解)’로 널리 알려진 것은 객진(客塵)의  글자를 깨닫고 과(果, 과위, 불과)를 성취한 까닭에서 입니다.

 

世尊!譬如行客投寄旅亭,或宿或食,食宿事畢,俶裝前途不遑安住;若實主人自無攸往。

如是思惟不住名客、住名主人,以不住者名爲客義。

세존이시여,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나그네가 여정(旅亭)에서 머물러서 자기도 하고, 먹기도 하다가, 자고 먹는 일이 끝나면, 편안히 머무를 여유도 없이 짐을 싸서 길을 떠나지만, 주인은 멀리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유해 보면, 머물지 않는 것은 나그네인 객(客)이고, 머무는 것은 주인(主)이니, 

머물지 않는 것을 객(客)의 뜻으로 생각하였습니다.

 

又如新霽淸暘昇天光入隙中,發明空中諸有塵相,塵質搖動虛空寂然。

如是思惟澄寂名空,搖動名塵,以搖動者名爲塵義。”

또한 날씨가 맑게 개인 아침에 밝은 태양이 하늘에 떠올랐을 때,  빛이 틈새로 들어와서 빈틈의 티끌(塵)을 밝게 비추면, 티끌은 흔들리지만, 허공은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사유하여 보면, 맑고 고요한 자체는 허공의 공(空)이고, 

흔들리는 것은 티끌(塵)이니, 흔들리는 것을 진(塵)이라는 뜻으로 생각하였습니다.”


佛言:“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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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6

 

▷혼미한 이류를 전체적으로 보이심

佛告阿難:“一切衆生從無始來種種顚倒,業種自然如惡叉聚,諸修行人不能得成無上菩提,

乃至別成聲聞、緣覺,及成外道、諸天魔王及魔眷屬,皆由不知二種根本,錯亂修習,

猶如煮沙欲成嘉饌,縱經塵劫終不能得。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체중생이 시작 없는 무시(無始)로부터 가지로 뒤바뀐 전도(顚倒)된 업의 종자가 악차(惡叉)의 열매가 쌓인 덩어리와 같은 것으로,

수행자들은 더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의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성취하지 못하고, 따로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이 되거나, 일체의 외도(外道)와 모든 하늘과 마왕(魔王)과  권속(眷屬)이 되어 버리는 것은,  가지 근본을 알지 못하고 어지럽게 뒤섞이게 수습(修習)하는 때문이니라.

이러한 수행은 마치 모래를 삶아서 좋은 음식을 만들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아무리 오랜 겁 동안을 노력할지라도 성취할  없는 것이니라.

ㅡ중생들의 업종(業種)은 서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며, 수행하는 사람이 정과(正果)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반연심과 청정체의 두 가지 근본을 알지 못하고 어지럽게 닦고 익히는 까닭이니, 모름지기 결택(決擇)을 잘하여야 하는 것이다. 

반연심이란, 앞의 칠처(七處)에서 망령되게 인식하는 것이고, 청정심이란 바르게 분별하여 밝히는 것이다.번뇌에 물들지 않은 것을 보리(菩提)라 하고, 생사에 간섭되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 하는데, 물둘지도 않고 간섭되지도 않으므로 본래 청정한 본체(本體)라 한 것이다. 

 

*악차(惡叉, rudra-akṣa) 과일의 이름으로, 그 씨로 염주를 만들며, 이것을 금강자(金剛子)ㆍ천목구(天目球)라고 하며,  과일이 땅에 떨어지면  장소에 많이 쌓이기 때문에,  장소에 많이 있는 것을 설명할  흔히 이것으로 비유한다.

 

*자사욕성가(煮沙欲成嘉饌), 모래를 삶아 좋은 음식을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노력을 말한다. 모래를 쪄서 밥을 만든다는 뜻의 증사작반(蒸沙作飯),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는 사상누각(沙上樓閣), 공중에 떠있는 누각이라는 공중누각(空中樓閣)과 비슷한 말이다. 증사작반은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 나오는 말로서 전체 글은 다음과 같다. 부지런히 수행을 해도, 지혜가 없는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서쪽으로 간다. 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쌀로 밥을 짓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지으려고 한다. 누구나 배가 고프면 밥을 먹을 줄은 알면서도 불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모르는구나.

 

ㅡ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본성(本性)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진여심(眞如心)이 있다. 아뢰야식은 진심(眞心)과 무명(無明)인 망심(妄心)이 화합한 것으로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 이라고 한다. 화합을 깨뜨리면 본성(本性)이 저절로 나타난다.
반연하는 마음으로 보면, 대상은 ①고정되어 보이고 ②분리되어 보이고 ③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인식하는 마음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실체가 없다. 무아(無我)이고 무자성(無自性)이다. 또한 이러한 대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은 바로 마음이 만든 대상이다. 즉, 망막에 맺힌 "영상" 을 보고 실재하는 대상이라고 인식한다. 실제 사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본다고 하지만 사실은 망막에 맺힌 이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주관의 마음이 객관의 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연심(返緣心)이고 육식(六識)이고 무명(無明)이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의 껍질을 통하여 밖으로 나타난 것이 반연심이다.- 향적법진

 

云何二種?阿難!一者無始生死根本,則汝今者與諸衆生,用攀緣心爲自性者;

二者無始菩提涅槃元淸淨體,則汝今者識精元明,能生諸緣緣所遺者。

由諸衆生遺此本明,雖終日行而不自覺,枉入諸趣。

무엇을  가지 근본이라고 하는 것인가?

아난아, 첫째는 무시(無始)로부터 나고 죽는 생사(生死)의 근본으로서, 네가 지금 모든 중생과 함께 반연하는 마음의 반연심(攀緣心)을 스스로의 성품인 자성(自性)으로 아는이며, 

둘째는 무시(無始)로부터 보리열반의 원래 청정한 본체인 보리열반원청정체(菩提涅槃元淸淨體)이니, 네가 지금 식정(識精)의 원래 밝음으로 모든 인연을 내기도 하여서, 그 인연으로 잃어버린 것이니라.

모든 중생은  원래의 밝은 본체(本體)인 본명(本明)을 잃어버린 까닭에, 비록 종일토록 행할지라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어긋나게 여러 갈래의 제취(諸趣, 육취 六聚)로 들어가는 것이니라.

 

우리는 조건화된 외부 사물(대상)으로부터 고통, 기쁨, 사랑, 괴로움 등으로 허망하게 분별하는 반연심(攀緣心)을 따르는 까닭에 생사를 거듭하는 것이다. 아난 존자가 부처님의 상호를 우러러 본 것과 마탕가의 아름다움에 빠진 것도, 아난 존자는 칠처징심 중에서외부 대상에 대한 육근의 반연심을 스스로의 자성(自性)으로 잘못 안 까닭에 부처님께서 7 가지로 마음이 소재를 물었을 때,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반연심으로 대답한 것이다. 

그러므로 육근(六根, 주체)이 육경(六境, 객체)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육식(六識)으로 말미암아 반연심(攀緣心, 망상, 분별심)을 일으켜서 본명(本明)을 잃어 버리고, 제취(諸趣, 육취 六聚)로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반연(攀緣), 반(攀) 더위잡을 반, 무엇을 붙잡고 오르는 것, 
                    연(緣) 가선 연, 연줄 연, 인연 연
반(攀)이란 의지한다는 뜻이고, 연(緣)이란 조건이라는 뜻으로, 마음의 대상에 의지해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 곧 얽힌 인연이라는 말인데, 번뇌 망상의 시초이며 근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번뇌란 의미로도 쓰이고, 인식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대경(​對境,대상 경계)을 의지하는, 즉 대상이 나타나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휘감고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마치 칡넝쿨이 나무나 풀줄기가 없으면 감고 올라가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마음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대경(對境)을 의지하고 일어나는 것으로, 마음은 대경을 반연 하는 것이다. ㅡ해가지니 달이뜨네

*식정(識精), 중생의 진심(眞心), 즉 정명한 지식을 말한다.

*정과(正果), 불법을 닦는 사람이 정진하고 수련하여서 성과(聖果)를 얻는 것을 증과(證果)라고 하는데, 이는 외도와 다른 것이다.  

 

▷바로 결정하여 선택함의 정여결택(正與決擇)
“阿難!汝今欲知奢摩他路願出生死,今復問汝。”

아난아, 네가 이제 사마타(奢摩他)의 길을 알고 생사(生死)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이제 다시 네게 묻겠으니!”

 

卽時,如來擧金色臂屈五輪指,語阿難言:“汝今見不?

즉시 여래께서  황금색 팔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구부리면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보고 있는가?”


阿難言:“見。”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예 보고 있습니다.”


佛言:“汝何所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았는가?”


阿難言:“我見如來擧臂屈指,爲光明拳,曜我心目。”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저는 여래께서 팔을 들어 올리시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 광명이 빛나는 주먹을 만드셔서, 제 마음과 눈에 비추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佛言:“汝將誰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무엇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阿難言:“我與大衆同將眼見。”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저는  대중(大衆)들과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佛告阿難:“汝今答我。如來屈指爲光明拳,耀汝心目,汝目可見。以何爲心,當我拳耀?”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제 나에게 답하기를 ‘여래가 팔을 들고 손가락을 구부려 광명이 빛나는 주먹을 만들어서 너의 마음과 눈에 비춰 주는 것을 본다’고 하였는데,  눈은 본다고 하겠으나, 무엇을 마음이어서,  주먹의 비치는 아는 것인가?”

 

▷아난 존자의 망령된 대답.
阿難答言:“如來現今徵心所在,而我以心推窮尋逐,卽能推者,我將爲心。”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여래께서 방금 마음이 있는 곳을 물으시자, 저는 마음으로 추궁하여 찾아보았으니, 저는  추궁하는 자체를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佛言:“咄!阿難!此非汝心。” 
咄 꾸짖을 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돌(咄), 아난아, 그것은  마음이 아니니라.”


阿難矍然避座合掌,起立白佛:“此非我心,當名何等?”

 말을 듣자 아난 존자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합장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이것이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비진(非眞)을 보이심. 
佛告阿難:“此是前塵虛妄相想惑汝眞性。由汝無始至于今生認賊爲子,失汝元常故受輪轉。”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네 앞의 경계인 전진(塵虛)의 허망한 상(相) 인연하는 생각이며, 너의  성품인 진성(眞性)을 미혹시킨 번뇌이니라. 

너는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금생(今生)에 이르도록 도적을 아들로 잘못 알고, 너의 본래 영원한 마음을 잃어버린 까닭에, 생사의 윤회를 받고 있는 것이니라.”

 

육근(六根, 주체, 감각기관) + 육경(六境, 객체, 인식하는 대상, 경계) = 육식(六識, 분별 인식 작용, 인연) 

안근(眼根, 눈) 시각 기관 + 색경(色境) 눈이 인식하는 색깔 = 안식(眼識) 눈의 분별 인식 작용
이근(耳根, 귀) 청각 기관 + 성경(聲境) 귀가 인식하는 소리 = 이식(耳識) 귀의 분별 인식 작용

비근(鼻根, 코) 후각 기관 + 향경(香境) 코가 인식하는 냄새 = 비식(鼻識) 코의 분별 인식 작용
설근(舌根, 혀) 미각 기관 + 미경(味境) 혀가 인식하는 맛 = 설식(舌識) 혀의 분별 인식 작용
신근(身根, 몸) 촉각 기관 + 촉경(觸境) 몸이 인식하는 촉감 = 신식(身識) 몸의 분별 인식 작용
의근(意根, 마음) 정신적 인식 기관 + 법경(法境) 마음이 인식하는 대상, 즉 생각, 개념, 정신적 대상 = 의식(意識) 마음의 분별 인식 작용

 

*인적위자(認賊爲子) ① 도둑을 아들로 생각하다 ② 부정당한 견해를 진실로 여기다.

여기에서는 마음, 즉 망심을 자신으로 생각한다는 것으로, 육식(六識, 분별 인식 작용, 인연)은 진심이 아니다.

 

阿難白佛言:“世尊!我佛寵弟,心愛佛故令我出家,我心何獨供養如來,乃至遍歷恒沙國土,承事諸佛及善知識,發大勇猛,行諸一切難行法事皆用此心;縱令謗法永退善根亦因此心。若此發明不是心者,我乃無心同諸土木,離此覺知更無所有。云何如來說此非心?我實驚怖,兼此大衆無不疑惑,唯垂大悲開示未悟!”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부처님의 귀여운 아우로서, 마음 깊이 부처님을 연모하여 출가하였으나, 

어찌 제 마음만이 홀로 여래를 공양하는 것이 겠습니까! 

나아가 항하(恒河)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국토를 두루 다니면서 모든 부처님과 선지식(善知識)을 받들어 섬기거나,  용맹을 일으켜서 일체의 행하기 어려운 불법의 난행법사(難行法事)를 행하는 것 모두가 이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며, 

가령 법을 비방하여 영원히 선근(善根)에서 물러난다 할지라도, 역시  마음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마음을 내 마음이 아니라고 밝히신다면, 저는 바로 마음이 없는 흙과 나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깨달아 아는 마음을 떠나서는  이상 아무것도 없을 것인 즉,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마음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혼자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여기의  대중들도 의혹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대비(大悲)를 내리시어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옵소서!”

 

▷시유진심(示有眞心), 진심이 있음을 보이시다.
爾時,世尊開示阿難及諸大衆,欲令心入無生法忍,於師子座摩阿難頂而告之言:

“如來常說諸法所生唯心所現,一切因果世界微塵因心成體。

阿難!若諸世界一切所有,其中乃至草葉縷結,詰其根元咸有體性,縱令虛空亦有名貌,

何況淸淨妙淨明心性一切心而自無體?

이때 세존께서 아난과 대중에게 열어 보이시고  마음을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게 하시고자, 사자좌(師子座)에서 아난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이 여래는 항상 ‘제법이 생겨나는 제법소생(諸法所生) 오로지 마음에 나타난 경계인 유심소현(唯心所現)이며, 

일체의 인과(因果)와 세계 미진(微塵)은 마음으로 자체를 이루는 인심성체(因心成體)이다’라고 설해 왔느니라.

아난아! 만약 모든 세계의 일체 존재인 일체소유(一切所有)에서 조그마한  잎새나 가느다란  가닥까지도  근원을 따져보면, 그 모두 자체의 성품이 있고, 허공일지라도 이름과 모습이 있거늘,

더욱이 청정하고 미묘하고 맑고 밝은 마음은 일체 마음의 본성인 청정묘정명심성(淸淨妙淨明心性, 본성)이 어찌하여 자체가 없는 무체(無體)이겠는가?

 

▷망령된 집착을 분별하여 물리침
若汝執悋分別覺觀,所了知性必爲心者,此心卽應離諸一切色、香、味、觸,諸塵事業別有全性,如汝今者承聽我法,此則因聲而有分別,縱滅一切見聞覺知,內守幽閑猶爲法塵分別影事,

만약 네가 분별(分別)하고 깨닫고 살피는 각관(覺觀, 추측하여 헤아리는 마음)으로, 분명하게 아는 성품에 굳게 집착하여서, 그것이 틀림없는 마음이라 한다면, 

 마음은 마땅히 색(色, 모습)을 보고 냄새(香)를 맡고 맛(味)을 알고 닿음(觸)을 느끼는 일체경계를 떠나서, 따로이 완전한 스스로의 성품이 있어야 할 것이니라. 

네가 지금 나의 설법을 받들어 듣고 있을지라도 소리를 따라 분별하고 있는 것이니, 가령 일체의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견문각지(見聞覺知)의 작용이 멸하여 안으로 고요한 경계를 지킬지라도, 오히려 법의 경계인 법진(法塵)을 분별하는 그림자의 분별영사(分別影事) 일 뿐이니라. 

 

각관(覺觀), 거친 마음으로 처음 생각하는 것을 각(覺)이라 하고, 세밀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것을 관(觀)이라 한다.
각관(覺觀)은 심사(尋伺)이며, 심(尋)은 찾아 헤매는 마음과 사물에 대한 개략적인 사고 작용, 

사(伺)는 그보다 세심한 분별 작용을 가리킨다. 번뇌에 수반되는 수번뇌(隨煩惱)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선정=定도 무의식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생각하고 살피는 작용이 있다. 그러나 심사와 다른 점은 선정은 '바르게' 생각하고 살피는 것이고 심사는 바르지 못한 것이며, 이 각관(覺觀), 즉 심사(尋伺)를 버려야 2선으로 들어갈 수 있다.  

 

非勅汝執爲非心,但汝於心微細揣摩,若離前塵有分別性卽眞汝心;若分別性離塵無體,斯則前塵分別影事,塵非常住若變滅時,此心則同龜毛兔角,則汝法身同於斷滅,其誰修證無生法忍?”

卽時阿難與諸大衆默然自失。

나는 네게 굳이 마음이 아님을 고집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그저 마음으로 자세히 헤아려 보거라. 

만약 앞의 경계(塵)를 떠나서 분별하는 성품이 있다면, 바로 진실한 너의 마음인 진심(眞心)이라 하겠는가?

만약 분별하는 성품의 경계(塵)를 떠나서 자체가 없는 무체(無體)라면, 

이것은  앞의 경계를 분별하는 분별영사(分別影事)이니라. 

경계는 영원히 머무는 상주(常住)의 진리가 아니니, 만약 변하여 사라질 때의 그 마음이 곧 거북의 털인 귀모(龜毛)나 토끼의 뿔인 토각(兔角)과 같은 것이라면, 너의 법신(法身)도 끊어져 없어지는 단멸(斷滅)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니라. 

그러하다면  무엇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닦아서 증득한다는 것인가?”

그러자 아난과 대중은 무엇을 잃어버린  말없이 잠자코 있는 묵연자실(默然自失)하였다.

 

▷망령되고 잘못됨이 이루어진 것임을 결론 지음.
佛告阿難:“世閒一切諸修學人,現前雖成九次第定,不得漏盡成阿羅漢,皆由執此生死妄想誤爲眞實。

是故汝今雖得多聞不成聖果。”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닦고 배우는 수학인(修學人)들이 현재 비록 아홉 단계의 선정인 구차제정(九次第定)을 성취할지라도, 번뇌를 다한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생사(生死)의 허망한 생각에 집착하여서 그것을 진실한 마음으로 잘못 알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제 비록 많이 들어 아는 지식을 쌓았을지라도, 성인의 과위인 성과(聖果)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니라.”

 

불성과 여래장에는 자아라는 실체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실체가 없다.

불성·여래장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씨앗을 의미할 따름이다.

'불성론(佛性論'에 의하면 공성(空性)이 모든 상(相)을 없애고 궁극에는 부처를 이루게 하므로 이를 불성이라고 설하고 있다. 공성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중도(中道)이며, 모든 견해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다.

유마경(維摩經)에서는 병을 깨트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공(空)이 아니라 병 그대로 공(空)이라고 설한다. 그렇다면 어찌 공성(空性)을 자아라고 할 수 있을까?
열반(涅槃)의 4덕(德)인 상락아정(常樂我淨)에도 힌두교의 아트만(ātman)처럼 아(我)가 명시돼 있지 않느냐고 반론할 수 있다. 그러나 힌두교의 아트만은 고정불변의 유아(有我)인 반면에 공(空)이란 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이다.

'보성론(寶性論)과 불성론'에서 분명히 설하고 있는 것과 같이, 상락아정의 아(我)는 자체성품이 없는 공(空)이며 무아(無我)이다.
한때 인도의 힌두수행자 라마나 마하리쉬에 의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명상법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것을 화두참구법의 하나인 <이뭣고>와 유사하게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확연히 다르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탐구하는 전제는 자아(自我)이다. 자아를 전제로 자아를 탐구하면 그 결과는 자아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뭣고>의 전제는 자아가 아닌 말과 생각을 떠난 불성(佛性)이다. 불성은 본래 말과 생각을 떠나있지만 어쩔 수 없이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 뿐이다. 그러나 불성조차 실체적 개념으로 파악될 여지가 있으므로 화두(話頭)라는 말로 바꾸어서 간(看)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를 참구해서 <참나>를 깨쳤다면 그 <참나>는 무아(無我)의 아(我)이므로 힌두교의 아트만인 <참자아>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어느 시민선방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도를 맡은 분이 “지금부터 <이뭣고>합니다”라고 말한 뒤 죽비치고 좌선에 들어갔다. 좌선시간이 끝나는 죽비를 치니까 한 사람이 일어서면서 “이뭣고가 사람잡네”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런 설명 없이 무작정 <이뭣고>만 하라고 하니 이것을 염불처럼 외우라는 것인지, 아니면 이 말을 깊이 사유하라는 것인지 도통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작정 앉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그 분이 “이뭣고가 사람잡네”라는 말을 왜 했을까 쉽게 짐작이 간다.
참선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으면 수행은 진전될 수 없다. 무아로서의 불성을 깨닫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수행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꼼꼼한 점검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그것이 대중들이 불교를 제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첩경이기도 하다.ㅡ향적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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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5

 

▷ 6. 마음은 중간에 있는 것이다.

阿難白佛言:世尊!我亦聞佛與文殊等諸法王子談實相時,

世尊亦言:心不在內亦不在外。如我思惟,內無所見外不相知,內無知故在內不成;

身心相知在外非義。今相知故,復內無見,當在中閒。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

저도 들었습니다만부처님께서는 문수 보살  모든 법왕자(法王子)들과 더불어 함께 실상(實相) 담론하실 때,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닌, 심불재내(心不在內)이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닌 심불재외(心不在外)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말씀을 따라 사유하여 보니마음이 안에 있다면 몸의 속을  볼 것이

밖에 있다면 서로를 알지 못할 것이니,

몸의 속을 알지 못하므로 안에 있다고   없고몸과 마음이 서로 알기 때문에 밖에 있다고 하는 것 옳지 않습니다

이제 몸과 마음이 서로 알면서도 몸속을  보는 것이니마음은 당연히 중간에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ㅡ아난 존자는 여섯 번째로 마음은 6근(六根)과 6경(六境)의 중간(中間, In the middle)에 있다고 하였다

만약 근(根)과 경(境, 진塵)의 중간에 있는 것이라면, 아는 지(知)의 체성은 양쪽 모두에 있어야 할 것이므로, 중간에 있다는 것을 옳지 않은 것으로,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안에 있다고 하자니 장부를 보지 못하고, 밖에 있다고 하자니 몸과 마음이 서로 알지 못하고, 그래서 눈과 대상의 중간에 있다고 한 것이다. 

 

▷ 중간의 위치를 분별하여 결정함. 

佛言:汝言中閒,中必不迷,非無所在。今汝推中,中何爲在?爲復在處?爲當在身?

若在身者,在邊非中,在中同內。若在處者,爲有所表?爲無所表?無表同無,表則無定。

何以故?如人以表表爲中時,東看則西,南觀成北。表體旣混,心應雜亂。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마음이 중간에 있다고 하였으니 '중간(中間)'이란 반드시 일정한 곳이 없지 않고 미혹(애매)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네가 그 중간을 찾아보아라중간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곳이 따로 있는 것인가? 너의 몸 안에 있는 것인가?

만약, 몸에 있다고 한다면

 주변(변두리)이라면 중간이 아닐 것이며몸속이면 내장을 보아야 할 것이며,

만약, 따로 있는 곳이라 한다면, 표시를 할  있는가? 표시를 할  없는가?

표시할  없다면, 중간이 없다는 것이며표시한다 할지라도 일정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어떤 사람이 중간에 푯말을 세워서 표시하고자 할 동쪽에서 보면 서쪽이 되고남쪽에서 보면 북쪽이 될것이니그 표시 자체가 혼란스러운 것으로, 마음이 어지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阿難言:我所說中,非此二種。如世尊言:眼色爲緣,生於眼識。

眼有分別,色塵無知,識生其中,則爲心在。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제가 말씀드린 중간은 그러한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 ‘눈(根)과 (色, 境)의 색진(色盡) 인연(緣)하여서 안식(眼識) 생긴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눈(根)에는 분별작용이 있고색진(色塵, 색경色境, 대상)은 아는 작용이 없으나,

그 중간에 () 생기므로, 그러한 중간을 마음이 있는 곳이라고  것입니다.”

ㅡ이는 몸과 장소의 중간이 아니고 눈과 색진의 중간이라고 말한 것이다.


佛言:汝心若在根、塵之中,此之心體爲復兼二?爲不兼二?

若兼二者,物體雜亂,物非體知,成敵兩立云何爲中?兼二不成,非知不知卽無體性,中何爲相?

是故應知,當在中閒,無有是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이 만약 눈(根)과 색진(色塵, 색경色境, 대상) 중간에 있는 것이라면

 마음 자체는 눈(根)과 색(境)의 둘을 겸한 것인가? 눈(根)과 색(境)의 둘을 겸하지 않은 것인가?

만약 둘을 겸한 것이라면, 색(色, 物, 塵, 대상)과 체(體, 根) 어지럽게 섞일 뿐만 아니라

색(色, 物, 塵, 대상)은 눈(體, 根) 분별작용(知) 아닌 까닭에 색(境)의 무지(無知) 눈(根)의 분별이 서로 다르게 갈라질 것인즉, 어찌 중간이 될 수 있겠는가!

만약 둘을 겸하지 않은 것이라면눈(根)의 분별(知) 색(境)의 무지(不知) 아닌 것이니, 자체의 체성(體性) 없으니,

중간이란 어떠한 상(相)이 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이 중간에 있다는  말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ㅡ만약 마음이 눈과 대상인 물질, 두 가지를 겸하여서 그 중간이 된다고 한다면, 대상 물질은 앎이 없고 눈은 앎이 있으니, 앎이 있는 것과 앎이 없는 것이 서로 상대겆인 것으로, 둘로 갈라질 것이니, 어떻게 이것이 화합해서 중간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 7. 집착이 없는 무착(無着)이다.

阿難白佛言:世尊!我昔見佛與大目連、須菩提、富樓那、舍利弗四大弟子共轉法輪,常言:覺知分別心性,旣不在內,亦不在外,不在中閒,俱無所在。一切無著名之爲心。則我無著名爲心不?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어제가 예전에 들은 바로는부처님께서 목건련(目揵連) 존자와 수보리(須菩提) 존자  부루나(富樓那) 존자 사리불(舍利弗) 존자 등의  제자와 함께 법륜(法輪) 굴리시면서, 

깨닫고 알고 분별하는 마음의 각지분별심(覺知分別心)은 안(內)에도 있지 않고밖(外)에도 있지 않고중간(中間)에도 있지 않은 것으로, 그 어디에도 있는 곳이 없는 무소재(無所在)이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체 무착(無着, Nonattachment) 마음이라는 뜻이오니제가  무착(無着)을 마음이라 한다 어떻겠습니까?

ㅡ아난 존자는 안 밖, 일곱 번째로 마음은 중간 어디에고 있지 않은, 무착(無着, Nonattachment, Cling to nothing)이 마음이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본래 있을 곳이 없으므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히시고자 한 것인데, 지금 아난 존자는 다시 무착이라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다. 

 

▷무착(無着)을 파(破)하다.

佛告阿難:汝言覺知分別心性俱無在者,世閒虛空水陸飛行,諸所物象名爲一切。

汝不著者,爲在爲無?無則同於龜毛兔角,云何不著?有不著者不可名無,無相則無,

非無則相,相有則在,云何無著?是故應知,一切無著名覺知心,無有是處。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바대로 깨닫고 알고 분별하는 마음의 각지분별심(覺知分別心)이 어디에도 있지 않은 것이라면

세상과 허공의 물과 육지에서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는 일체의 물상을 일체(一切)라고 하거늘,

네가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일체가 있음(有)에 집착하지 않는다는인가?

일체가 없음(無)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일체가 없음(無)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면거북이의 털인 귀모(龜毛)와 토끼의 뿔인 토각(兔角)과 같이, 있을 수 없는것이 거늘, 무엇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또한 일체가 있음(有)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면집착하지 않는다고   없을 것이니,

무상(無相)이라면, 곧 아무것도 없는 무(無)이고

없지 않은 비무상(非無相)이라면, 곧 상(相) 있는 것이며, 상(相) 있으면 마음이 있는 것이니

어찌 집착이 없는 무착(無着)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일체에 집착이 없는, 무착(無着) 깨닫고 아는 마음의 각지심(覺知心)이라는  말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ㅡ지금까지 아난 존자의 주장은 마음의 소재에 대하여 있다(有)와 없다(無)의 유무(有無) 두 가지였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을 설명하실 때 항상 ‘관계성(연기성 緣起)’으로 말씀 하셨으니, 있다 없다라는 것은 고정된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고 항상하지 않은 이 세계는 상호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일 뿐, 유무(有無)의 고정된 실체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셨으나, 아난 존자는 망심(妄心)을 진심(眞心)으로 잘못알고 7 곳을 대답하였다. 부처님서는 아난 존자의 틀린 부문을 지적하셨으나, ‘마음의 소재지’를 정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신, 파사(破邪)만 하시고 현정(顯正)은하지 않으셨다.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원인은 ‘진심’을 모르기 때문이다. - 洗心堂 

 

마음(心)의 소재(所在)에 관한 아난 존자의 잘못된 대답의 칠처징심(七處徵心); 

① 아난 존자의 첫 번째의 주장으로는 몸안(身內, The mind is inside the body)에 있다는 것,

② 두 번째의 주장으로는 몸의 밖(身外, The mind is outside the body)에 있다는 것,

③ 세 번째의 주장으로는 눈의 뒤(안구의 뒤)에 숨어서, 잠복근이(潛伏根裏, The mind is behind the eyes)하고 있는 것,

④ 네 번째 주장으로는, 눈을 뜨면 밝은 밖을 보는 개안견명(開眼見明)이고, 눈을 감으면 어두운 몸속을 보는 폐안견암(閉眼見暗)으로, 마음은 어두운 몸 속에 있는, 장암(藏暗, Closing the eyes to see darkness, that is to see it)하는 것이라 하였다. 

⑤ 다섯 번째의 주장으로는 경계(대상)를 따라 합하는 곳에서 생기는 수합(隨合, it exists in response)하다는 것.

⑥ 여섯 번째로 마음은 6근(六根)과 6경(六境)의 중간(中間, In the middle)에 있다는 것, 

⑦ 일곱 번째로, 안 밖, 중간 어디에고 있지 않은, 무착(無着, Nonattachment)이 마음이라고 하였다

 

*반연심(攀緣心)과 청정체(淸淨體)의 두가지 근본(根本, The two fundamental roots)

 

爾時,阿難在大衆中卽從座起,偏袒右肩右膝著地,合掌恭敬而白佛言:

我是如來最小之弟,蒙佛慈愛,雖今出家猶恃憍憐,所以多聞未得無漏,不能折伏娑毘羅呪,

爲彼所轉溺於婬舍,當由不知眞際所指。唯願世尊大慈哀愍,開示我等奢摩他路,令諸闡提墮彌戾車

作是語已,五體投地。及諸大衆傾渴翹佇,欽聞示誨。

그러자 아난 존자가 대중 가운데에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걷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왼쪽 무릎을 세우는 우슬착지(右膝著地)하여서, 합장하고는 공손하게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부처님의 가장 어린 아우로서 부처님의 자애로운 사랑 입고 비록 지금 출가하였으오히려 사랑하여 주시는 것만을 믿고, 많이 들어서 알기만 하였을 뿐, 여태껏 무루(無漏)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사비가라주(娑毗迦羅呪, 수론외도의 주문) 꺾지 못하고마등가(摩登伽) 홀림을 당하여 음실(婬室) 빠졌으니이것은 진실한 경지의 진제(眞際, 깨달음) 가는 길을 몰랐던 까닭입니다.

부디 세존께서는 대비(大悲) 내리시어 저희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사마타(奢摩他) 길을 열어 보여 주시고

모든 천제(闡提, 부처님을 비방하는 무리)들 마저도 추악한 성격의 미려차(彌戾車, 악견) 헐어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오체(五體, 온몸) 땅에 던져 대중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공손히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ㅡ마음은 물과 같아서 가만히 있지 않으면 밝아지지 못한다. 그래서 사마타의 길로 진제에 나아가기를 구하였는데, 만약 진제가 나타나면 망심의 때는 저절로 없어진다. 

 

천제(闡提, icchantika, ecchantika), 일천저가(一闡底迦) · 일전가(一顚迦) · 일천제가(一闡提柯)라고도 음역하고, 단선근(斷善根) · 불신구족(不信具足) · 극욕(極欲) · 대욕(大欲) · 무종성(無種性)이라고 의역한다.
icchantika를 통속적인 어원 해석으로 풀이하면 ‘욕구하는 자’를 뜻하기 때문에 그 유래를 고대 인도의 쾌락주의자에서 찾을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불법(佛法)을 믿지 않고 깨달음을 구하는 의지가 없어 성불의 소질과 인연이 결여된 자들을 가리킨다. 즉 일천제는 선근(善根)이 끊겨서 성불할 가능성이 없는 자, 아무리 수행해도 절대 깨달을 수 없는 자를 말한다.ㅡ다움

미려차(彌戾車, Mleccha믈레차), 낙구예인(비루한, 하천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의역하며, 불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 치우친 견해·삿된 견해와 같이 바르지 못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다.  
미려차는 ‘변경(邊境)의 사람’, ‘타국인·외국인’, ‘야만인’ 등을 뜻하는 말로, 불교의 경론(經論)에서는 사견(邪見)·악견(惡見) 등 ‘바르지 못한 견해’나 그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사람 등을 가리킵니다. ㅡ운곡원포

 

▷상서로운 광명을 얼굴로부터 발하시다.

爾時,世尊從其面門放種種光,其光晃耀如百千日,普佛世界六種震動,如是十方微塵國土一時開現;

佛之威神令諸世界合成一界,其世界中所有一切諸大菩薩,皆住本國合掌承聽。

이때, 세존께서는 얼굴에서 여러 가지 광명을 놓으시니,  광명  천의 햇살과 같이 휘황찬란하게 비치자드넓은 부처님의 세계인 보불세계(普佛世界) 여섯 가지로 육종진동(六種震動)하면서, 시방(十方) 미진과 같은 많은 세계가 일시에 열리어 나타났다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  모든 세계를 합하여  세계를 이루시니

 세계의 보살들은 그들의 토에 머문 그대로 합장하여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육종진동(六種震動), 동(動), 기(起), 용(湧), 후(吼), 격(擊). 인도의 풍습에서 큰 경사가 있을 때면 대지가 진동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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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4

 

▷ 4. 어두운 곳에 감추어진 장암(藏暗)이 마음이다.

阿難白佛言:“世尊!我今又作如是思惟:‘是衆生身,府藏在中竅穴居外,有藏則暗有竅則明”

今我對佛,開眼見明名爲見外,閉眼見暗名爲見內,是義云何?”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씁드리기를, 

“세존이시어, 제가 다시 생각해 보니, 중생의 몸을 보면 5장(藏)ㆍ6부(腑)는속에 들어있고,

규혈(竅穴, 구멍)들은 밖에 있으므로,

마음이 부장(腑藏)에 있는 것이라면 어두우나, 구멍에 있는 것이라면 밝은 것이 되겠습니다. 

지금 제가 부처님을 마주하여서 눈을 뜨고 그 밝음을 보는 것을  밖을 보는 견외(見外)라 하고, 

눈을 감고 어둠을 보는 것은 몸속을 보는 견내(見內)라고 한다면, 이러한 뜻은 어떻습니까.”

아난 존자의 네 번째 주장으로, 눈을 뜨면 밝은 밖을 보는 개안견명(開眼見明)이고, 눈을 감으면 어두운 몸속을 보는 폐안견암(閉眼見暗)으로, 마음은 어두운 몸 속에 있는, 장암(藏暗)하는 것이라 하였다. 

 

장암(藏暗)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파(破)하다.
佛告阿難:“汝當閉眼見暗之時,此暗境界爲與眼對?爲不對眼?若與眼對,暗在眼前云何成內?若成內者,居暗室中無日月燈,此室暗中皆汝焦府?若不對者,云何成見?若離外見內對所成,合眼見暗名爲身中,開眼見明何不見面?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눈을 감고 어둠을  때, 그 어두운 경계가 눈과 상대하여 마주 하는가? 

눈과 상대하여 마주하지 않는가?

만약 눈과 상대하여 마주한다면, 어둠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어떻게 몸속이 성립될 수 있겠으며?

만약 눈앞의 어두움으로 몸속이 성립된다고 한다면, 해와 달과 등불도 없는 암실(暗室)에 있을 때,  방안의 어둠은 온통 너의 내장인 초부(焦腑)이겠구나!

만약 어둠이 눈과 마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는 것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만약 바깥을 보는 것을 떠나서 안을 마주하는 것이 성립된다고 한다면, 

눈을 감고 어둠을 보는 것을 몸속을 보는 것이라 할 것이며,  

눈을 뜨고 밝음을  때에는 어찌하여 스스로의 얼굴을  보는 것인가?

ㅡ눈 앞의 경계를 밖을 보는 것이라 하고, 몸 속(身內)의 경계를 안을 마주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앞에서는 눈을 마주하는 것으로써 맊이라 하여서 안이 성립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 비록 밖으로 보는 것을 떠나고 안을 마주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이는 곧 눈이 되돌아 보는 것이다. 또 눈을 감았을 때, 몸 속을 되돌아 볼 수 있다면 눈을 떴을 때에는 마땅히 자신의 얼굴을 보아야 할 것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若不見面,內對不成。見面若成,此了知心及與眼根乃在虛空,何成在內?

若在虛空,自非汝體。卽應如來今見汝面亦是汝身,汝眼已知身合非覺,必汝執言身眼兩覺應有二知,

卽汝一身應成兩佛。是故應知汝言:‘見暗名見內者。’無有是處。”

만약 스스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안을 마주하여 본다는 말도 성립되지 않으리라!

스스로의 얼굴을 보는 것이 성립된다면,  분별하여 아는 마음은 눈과 함께 허공에 있어야 할 것이거늘, 

어떻게 몸 속을 보는 것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만약 허공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체로써  몸이 될 수 없을 것이며, 

 여래가 지금  얼굴을 보는 것도, 마땅히  몸을 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하다면 허공에 있는  눈이 이미 알아차렸을지라도, 몸은 아직 깨닫지 못해야 할 것이나, 

네가 끝까지 고집하여 몸과 눈,   알아차린다고 한다면, 당연히  개의 아는 작용이 있어야 할 것이니,

네 한 사람이 마땅히  부처를 이뤄야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어둠을 보는 것으로 몸속을 본다는  말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ㅡ돌이켜 보는 이치가 없음을 반복하여 밝힌 것으로, 너의 눈은 이미 알고 있을지라도 몸은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허공에 있으므로 자연히 너의 몸이 아닐 것이거늘, 만약 둘 다 지견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두 몸이 되는 것이다. 

 

*눈을 감고 보는 어두움도 하나의 경계일 뿐이다.   

 

▷5. 합하는 곳을 따라 마음이 있는 수합(隨合)하는 것이다. 
阿難言:“我常聞佛開示四衆:‘由心生故,種種法生;由法生故,種種心生。’

我今思惟,卽思惟體實我心性,隨所合處心則隨有,亦非內、外、中閒三處。”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부처님께서 사부대중(四部大衆)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종종법(種種法)이 생기고, 

법이 생긴 까닭에 여러 가지 마음의 종종심(種種心)이 생긴다’고 하시는 것을 제가 항상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말씀을 사유(思惟)하였으며,  사유하는 자체가 바로 저의 심성(心性)으로, 

저의 육근과 경계(육경, 대상)가 합하는 곳을 따라서 마음도 있는 것이므로, 

안이나 밖이나 중간의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ㅡ아뢰야식의 한 생각이 망령되면, 이 것이 변하여 몸(身)과 세계(器界)가 생겨 나는 것이니, 마음이 생김으로 인하여 법이 생기고, 또 경계의 바람이 움직이면, 의식의 물결이 일어나나니, 이는 법이 생김으로 인하여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마음과 법이 서로 생겨나면 경계를 따라 생각하는 것이 곧 마음의 본체인 것이니, 그래서 마음과 법이 어울리는 곳이 마음이 있다고 한 것이다. 

 

ㅡ아난 존자의 다섯 번째의 주장으로 마음은 경계(대상)를 따라 합하는 곳에서 생기는, 수합(隨合)하는 것으로, 

마음은 육근(六根) ㅡ 육경(六境, 육진六塵) ㅡ 육식(六識)이 합할 때 생기는 것인데, 아난 존자는 눈이 경계를 보고 안식(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마음이라고 하였다.

육근(六根) ㅡ 육경(六境, 육진六塵) ㅡ 육식(六識)에서, 육식은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반연심으로, 좋은 것을 보고 좋아하고, 나쁜 것을 보고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일어나고 멸하는 것과 같이, 육진경계를 따라 변하고 생주이멸하는 것으로써 상주진심이 아니다.

마음이 눈을 뜨면 밝은 밖을 보는 개안견명(開眼見明)이고, 눈을 감으면 어두운 몸속을 보는 폐안견암(閉眼見暗)이거나, 그 중간에 있는 것이 아닌, 주관(육근)과 객관(육경 대상)이 합칠 때 떠오르는 생각의 육식(六識)을 마음이라고 한 것이다. 

 

ㅡ여기에서의 법은, 해당 사물에 대한 앎의 해(解), 인식, 요해, 요별, 지식을 낳게 하는 뜻으로, 사물과 사물 사이에 작용하는  법칙적 관계를 뜻한다. 

 

▷수합(隨合)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시다. 
佛告阿難:“汝今說言,‘由法生故種種心生,隨所合處心隨有’者,是心無體則無所合。

若無有體而能合者,則十九界因七塵合。是義不然!若有體者,如汝以手自挃其體,汝所知心爲復內出?

爲從外入?若復內出還見身中;若從外來先合見面。’”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법(法, 여기에서의 법은 대상, 사물, 경계)이 생겨나는 까닭 여러 가지 마음의 종종심(種種心)이 생기는 것으로, 그 육근과 육경이 합하는 곳을 따라 마음도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음의 자체가 없는 무체(無體)라면 합할없을 것이며, 

만약 없는 것일지라도 합할  있다고 한다면, 19계(界)가 7진(塵, 경境)을 따라 합한다는 말이되는 것이니,

그러한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니라.

만약 자체가 있는 유체(有體)라면, 손으로  몸을 찔러 보아라. 아는 마음이 안에서 나오는 것인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인가?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몸의 안속을 보아야 할 것이고,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라면 마땅히 얼굴을 보아야 할 것이다.”

ㅡ생각하는 그 자체를 마음이라고 한 것은 다만 쓸데없는 생각이므로 그 본체가 있고 없음을 힐난하신 것이다. 가령 마음의 본체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한갓 이름만 있는 것이니, 어는 곳을 따라 어울린다고 하겠는가? 십구계(界)나 칠진(塵, 경境)과 같아서 다만 헛된 이름일 뿐이다. '만약 본체가 있다고 한다면, 어는 곳에 있겠는가?'라고 물으시면서 몸을 찔러서 징험하게 하여서 마음의 본체가 사실은 없는 것임을 밝히셨다. 

 

ㅡ19계(界)가 아닌, 육근(六根) ㅡ 육경(六境, 육진六塵) ㅡ 육식(六識)의 18계이고,

7진(塵)이 아닌 6진(塵, 육경)인 것이다.

 

阿難言:“見是其眼,心知非眼,爲見非義。”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보는 것은 눈이지만, 마음으로 아는 것은 눈이 아닌데, 마음이 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ㅡ아난 존자의 해명으로, 마음은 다만 능히 알기만 하는 것이므로 본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보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으로, 눈만으로는 본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佛言:“若眼能見,汝在室中門能見不?則諸已死尚有眼存應皆見物。若見物者,云何名死?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눈만으로 능히 보는 것이라 한다면, 네가 방안에 있을 때, 문(門)으로 능히   있는가?

그러하다면, 이미 죽은 사람도 아직 눈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물건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니,

만약 물체를 볼 수 있다면 어찌 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ㅡ문은 볼 수 있는 것은 마음에 있음을 비유하였고, 죽은 것은 눈만으로는 보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신 것이다.

 

▷합하는 곳을 따라 마음이 있음을 자세히 밝힘.

阿難!又汝覺了能知之心若必有體,爲復一體?爲有多體?今在汝身,爲復遍體? 爲不遍體?

아난아, 또한, 만약 너의 깨달아 아는 마음이 분명한 체(體) 있는 것이라면, 

 체는 하나인 일체(一體)인가? 여럿의 다체(多體)인가? 

지금  몸에 두루  편체(遍體)인가?

두루 하지 않은 불편체(不遍體)인가? 

 

若一體者,則汝以手挃一肢時,四肢應覺,若咸覺者,挃應無在。若挃有所,則汝一體自不能成。

만약 그 체가 하나인 일체(一體)이라면, 네가 손으로 한쪽 팔을 찔렀을 때,

너의 4지(四支)가  같이 그것을 느껴야 할 것이고, 

만약 너의 사지가 모두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찌른 곳이 따로 없을 것이며,  

그러나 찌른 곳이 따로 있다면, 체가 하나란 뜻은 저절로 성립될  없을 것이다. 

ㅡ한 개의 몸이 아님을 밝힌 것으로, 있는 곳이 없다는 무재(無在)는 정해진 곳이 없음은 말한 것이다.

 

若多體者,則成多人。何體爲汝?

만약 체가 여럿의 다체(多體)라면, 여러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거늘, 어느 체를 '너'라고 할 수 있겠는가?

 

若遍體者,同前所挃。

만약  몸에 두루  체(遍體)라고 한다면, 앞에서와 같이 한쪽 팔을 찔렀을 때,  전체가  느껴야  것이며,

 

若不遍者,當汝觸頭,亦觸其足,頭有所覺,足應無知。

今汝不然,是故應知,隨所合處心則隨有,無有是處。”

만약  몸에 두루 하지 않은 불편체(不遍體)라면, 너는 머리를 부딪치고, 또 발도 부딪쳤을 때, 머리가 느낌이 있어야 할 것이만, 발은 당연히 아무 느낌도 없어야 할 것이나, 

이와 같지 않으므로, 그 합하는 곳을 따라서 마음이 따라 있다는  말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법(法), 불교에서의 법의 뜻은 매우 복잡하게 여러 가지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설(敎說)이나 성전(聖典)의 교법(敎法),
최고의 진리나 깨달음의 내용, 
일체의 현실 존재로 하여금 현재의 상태로 존재하게 하고 있는 법칙과 기준의 법칙(法則),
인간이 실천하여 생활해야 할 도리 · 도(道) 또는 규정으로서의 도리(道理),
존재, 실체: 객관적으로 독립된 실체 또는 존재,
법(법칙)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는 유형 · 무형, 심적 · 물적의 일체 존재(存在, 현상), 즉 의식의 대상이 되는 일체법(一切法)으
로도 사용되는데, 이와 같이 법을 일체의 존재 또는 모든 존재라고 보는 견해는 불교 독자의 것이며, 법에 관한 다방면의 연구가 불교의 중요한 과제이다. 특히, 원시불교에 이은 부파불교의 시대에서는 모든 존재(일체법)를 분석하여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뚜렷히 밝히는 작업이 크게 일어났으며, 이러한 분석법은 후대의 대승불교의 유가유식파의 유식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위키.

‘법(法)’은 인연가화합(因緣假和合)으로 상주의 실체가 없는 것이나, 자성을 지키고 알게 하는 궤지(軌持), 즉 자성을 보존하고 본보기로 하여서 그 사물에 대한 요해심(了解心)을 내게 하는 것을 말하며,
자아(我)와 법(法), 그 둘은 모두 갖가지의 모습들로 바뀌어 생겨나는(轉) 것이다. -성유식론(成唯識論) 제1 권 1

 

*18계(十八界)에서 계(界, dhātu, dhātu, 영어: realm)는 법(法)의 종류(種類, gotra) 또는 종족(種族)의 뜻이다.

18계는 하나의 산(山)에 금(金) · 은(銀) · 동(銅) · 철(鐵) 등의 다양한 광물이 있는 것과 같이, 한 사람의 몸(所依身소의신)에 18종의 법(法)인 실체 또는 요소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각 사람의 인생의 흐름, 즉 5온의 상속(相續)에서도 이들 18종 법(法)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6근(六根): 주관의 작용 기관
안계(眼界): 시각 기관, 즉 눈
이계(耳界): 청각 기관, 즉 귀
비계(鼻界): 후각 기관, 즉 코
설계(舌界): 미각 기관, 즉 혀
신계(身界): 촉각 기관, 즉 몸
의계(意界): 마음(6식, 심왕, 심법)의 작용 기관, 즉 의근(意根)
6경(六境): 객관
색계(色界): 시각 기관의 지각 대상, 즉 색깔이나 형태(모양과 크기)를 가진 물질 일반, 즉 소리 · 냄새 · 맛 · 감촉을 제외한 모든 물질적 성질
성계(聲界): 청각 기관의 지각 대상, 즉 소리
향계(香界): 후각 기관의 지각 대상, 즉 냄새
미계(味界): 미각 기관의 지각 대상, 즉 맛
촉계(觸界): 촉각 기관의 지각 대상, 즉 감촉
법계(法界): 마음작용 및 마음작용의 대상
마음작용으로는 탐욕 · 성냄 · 어리석음 · 탐욕 없음 · 성냄지 않음 등이 있으며, 마음작용의 대상에는 특히 무위법(열반 · 진여 · 법성 등)이 포함되며,
무위법을 제외하면 마음작용의 대상은 대체로 개념(또는 비물질적 사물)이라 할 수 있다.
6식(六識): 마음(6식, 심왕, 심법), 주관
안식계(眼識界): 색깔과 형태를 대상으로 하는 마음, 즉 시각
이식계(耳識界): 소리를 대상으로 하는 마음, 즉 청각
비식계(鼻識界): 냄새를 대상으로 하는 마음, 즉 후각
설식계(舌識界): 맛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 즉 미각
신식계(身識界): 감촉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 즉 촉각
의식계(意識界): 법계(法界, 전5식의 대상을 제외한 기타)를 대상으로 하는 마음, 즉 제6식 또는 제6 의식 ㅡ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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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3

 

▷ 1. 마음은 몸속(身內)에 있는 것이다.

阿難白佛言:“世尊!一切世閒十種異生,同將識心居在身內;

縱觀如來靑蓮花眼亦在佛面,我今觀此浮根四塵秖在我面,如是識心實居身內。”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일체세간의 열 가지의 십종중생(十種異生)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분별하는 마음의 식심(識心)은  안에 있고, 보는 눈은 얼굴에 있습니다. 

비록 푸른 연꽃과 같은 부처님의 눈을 보아도 부처님의 얼굴에 있는 것이며,

지금 부근(浮根) 사진(四塵)으로 된 제눈을 보아도  얼굴에 있을 뿐이니,

알아차리는 마음인 식심(識心)은 몸속(身內)에 있는 것입니다."

 

*십종중생(十種異生)은, 중생이 태어나는 12 가지 형류에 따라, 십이류생(十二類生)의,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 유색(有色), 무색(無色), 비유색(非有色), 비무색(非無色), 비유상(非有想), 비무상(非無想), 유상(有想), 무상(無想)에서 무색(無色)과 무상(無想)을 제외한 것은 그것들은 마음과 눈이 있는 무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대(四大),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부근사진(浮根四塵), 부근(浮根)은 물에 뜬 식물의 뿌리를 말하며,

사진(四塵)은 색(色) 향(香) 미(味) 촉(觸)의 4 가지 경계인, 눈, 코, 입, 몸의 경계인 색경(色境, 색진), 향경(香境, 향진), 미경(味境, 미진), 촉경(觸境, 촉진)이며, 여기에서는 눈이 얼굴에 있다는 뜻이다.


佛告阿難:“汝今現坐如來講堂,觀祇陁林今何所在?”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지금 여래의 강당(講堂)에 앉아 있으므로, 기타림(祇陀林)을 볼 수 있으니,

네가 지금 기타림을 보고 있는, 그 기타림이 디에 있는 것인가?”


“世尊!此大重閣淸淨講堂在給孤園,今祇陁林實在堂外。”

아난 존자가 답하기를, 

“세존이시여, 이  중각(重閣, 이층)의 청정한 강당은 급고원(給孤園, 기환정사)에 있으며, 

기타림(祇陀林)은 강당 밖에 있습니다.”

ㅡ여기에서 안과 밖의 경계를 정한 것을 안에 있는 마음이 반드시 차례로 보게 되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阿難!汝今堂中先何所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네가 지금 강당 안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世尊!我在堂中,先見如來,次觀大衆,如是外望方矚林園。”

아난 존자가 답하여,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강당 안에 있으며, 우선 여래를 볼 수 있고,  다음으로는 대중을 볼 수 있으며,

이렇게 밖을 바라 본다면, 비로소 기타림(祇陀林)과 급고원(給孤園)을 볼 수 있습니다.”


“阿難!汝矚林園因何有見?”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네가 지금 기타림과 급고원을 본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보는 것이냐?”


“世尊!此大講堂戶牖開豁,故我在堂得遠瞻見。”

아난 존자가 답하기를, 

“세존이시여,   강당의 문과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까닭에,

제가 강당 안에 앉아 있으면서도  곳까지를   있는 것입니다.”


爾時,世尊在大衆中,舒金色臂摩阿難頂,告示阿難及諸大衆:
“有三摩提名大佛頂首楞嚴王,

具足萬行,十方如來一門超出妙莊嚴路。汝今諦聽!”阿難頂禮,伏受慈旨。

이 때에, 부처님께서 대중(大衆) 가운데에서 황금색의 팔을 펼치시고, 아난의 정수리를 만지시면서 아난과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여기 삼마제(三摩提)가 있으니, 대불정수릉엄왕(大佛頂首楞嚴王)이라 이름하는 것이니라. 

일체의 만행(萬行)을 구족하게 갖추고 있는 것이니, 시방의 여래께서 이 일문(一門)을 통하여 묘하게 장엄된 길을 향하여 초출(超出)하셨느니라. 너는 이제 자세히 듣도록 하여라.”

아난 존자가 머리를 조아려 정예(頂禮)를 올리고, 엎드려서 부처님의 자애로우신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마은은 몸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트림. 
佛告阿難:“如汝所言身在講堂,戶牖開豁遠矚林園,亦有衆生在此堂中,不見如來見堂外者。”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하기를 네 몸은 강당 안에 있으면서도 문과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까닭에 멀리 기타림(祇陀林)과 급고원(給孤園)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이 강당 안에 있는 어떤 중생이 여래를 먼저 보지 못하고, 강당의 밖만을 볼 수 있겠는가?”


阿難答言:“世尊!在堂不見如來能見林泉,無有是處。”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세존이시여, 강당 안에 있으면서 여래를 보지 못하고, 밖의 숲과 냇물만을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ㅡ몸이 강당 안에 있으므로 먼저 안을 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阿難!汝亦如是!汝之心靈一切明了。若汝現前所明了心實在身內,爾時先合了知內身;頗有衆生先見身中後觀外物,縱不能見心、肝、脾、胃,爪生、髮長、筋轉、脈搖,誠合明了,如何不知?必不內知,云何知外?是故應知汝言:‘覺了能知之心住在身內。’無有是處。”

“아난아, 너도 마찬가지이니라!  마음(심영 心靈)은 일체를 밝게 알고 있거늘, 

만약 현재 너의 밝게 아는 그 마음이   안에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네 몸의 안을 밝게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떠한 중생이 먼저 그 몸의 안 보고 난 후에야, 바깥의 물건들을 보는가!

비록 심장, 간장, 비장, 위장은   없다 할지라도, 손톱이 자라나고, 털이 자라고, 근육이 움직이고, 맥박이 뛰는 것 등은 당연히 밝게 알아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모르는 것인가!

스스로의 몸속도 모르거늘, 어떻게 밖을 안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깨달아 아는 마음이  안(身內)에 있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니라.”

ㅡ오장육부는 안에 있으므로 가까운 것이라서 마땅히 잘 알 것이나, 손톱과 털은 밖에 있으므로 멀어서 알 수 없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으므로 마음이 몸 안(身內)에 있는 것이 아니다. 

 

▷ 2. 마음은 몸의 박(身外)에 있는 것이다.

阿難稽首而白佛言:“我聞如來如是法音,悟知我心實居身外。所以者何?譬如燈光然於室中,是燈必能先照室內,從其室門後及庭際,一切衆生不見身中獨見身外,亦如燈光居在室外不能照室。是義必明將無所惑,同佛了義得無妄耶?”

아난 존자가 머리를 조아리고 부처님께 다시 말씀드리기를, 

“제가 이렇게 부처님께서 법문하시는 법음(法音)을 듣고 보니, 제 마음이 몸 밖(身外)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방안에 등불을 켰을 때, 그 불빛은 반드시 먼저 방안을 비추고 나서, 그 방문으로부터 뒷뜰과 마당까지 비치게 되는 것과 같은 까닭입니다.

일체중생이 몸속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몸의 밖만을 본다는 것은, 방의 밖에 있는 등불이 방의 안을 비추지 못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 되겠습니다.

이러한 뜻은 확실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어서, 부처님의 분명하신 요의(了義)와 일치하는 것이니, 잘못되지 않은 것이라 생각 됩니다.”

ㅡ아난 존자의 번째의 주장으로 마음은 몸의 밖(身外)에 있다는 것이다. 

 

佛告阿難:“是諸比丘適來從我室羅筏城,循乞摶食歸祇陁林,我已宿齋,汝觀比丘一人食時諸人飽不?”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 있는 비구들은 얼마 전에 나와 함께 실라벌성(室羅筏城)에서 법식대로 공양을 얻어서 기타림(祇陀林)으로 돌아온, 환걸(循乞)하였느니라. 나는 이미 공양을 끝냈으나, 공양하고 있는  비구들을 보아라.  사람이 공양함으로써 나머지의 모든 사람들이  배부를  있는 거신가?”

ㅡ마음이 몸의 밖에 있는 것이라면, 그 몸을 가진 사람에게 속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속한다는 뜻이다.  


阿難答言:“不也。世尊!何以故?是諸比丘雖阿羅漢,軀命不同,云何一人能令衆飽?”

아난 존자가 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비구들이 비록 아라한(阿羅漢)일지라도, 

몸과 목숨이 같지 않은 부동(不同)이거늘, 어떻게  사람의 공양으로 이 모든 사람이 배부를  있겠습니까?”

ㅡ저 사람이 먹음으로써 이 사람을 배부르게 할 수 없듯이 몸 밖에 있는 마음은 몸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마음이 몸 밖(身外)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트리시다.
佛告阿難:“若汝覺了知見之心實在身外,身心相外自不相干,則心所知身不能覺,覺在身際心不能知。我今示汝兜羅緜手,汝眼見時心分別不?”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너의 깨달아서 알고 보는 마음이 참으로 몸밖(身外)에 있는 것이라면, 몸과 마음은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서 서로를  상관하지 않을 것이니라.

그러하다면 마음이 알게 되는 것을 몸은 깨달을 수 없어야 할 것이며,

몸이 알게 되는 것을 마음도 알 수 없어야 할 것이다.

아난아! 나의 도라면(兜羅綿)과 같은 손을 보거라.

지금 네 눈이 내 손을 보면서, 마음이 함께 분별하고 있는가?”


阿難答言:“如是,世尊!”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예, 분별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佛告阿難:“若相知者,云何在外?是故應知汝言:‘覺了能知之心住在身外。’無有是處。”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네 눈과 마음이 서로를 알고 있다면, 어찌하여 네 마음이 밖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깨달아 아는 마음이 몸밖(身外)에 있다는 네 말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3. 마음은 눈 속에 숨어 있는 잠근(潜根)이다.
阿難白佛言:“世尊!如佛所言,不見內故不居身內;身心相知不相離故,不在身外。我今思惟,知在一處。”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몸속을 보지 못하는 것이므로 몸 안(불거신내不居身內)에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몸과 마음이 서로를 아는 것으로써,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까닭에 몸밖(불재신외不在身外)에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다시 생각하여서, 그 마음이 있는 한 곳을 알았습니다.”


佛言:“處今何在?”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한 곳이란 어디를 말하는 것이냐?”


阿難言:“此了知心,旣不知內而能見外,如我思忖潛伏根裏,猶如有人取琉璃椀合其兩眼,雖有物合而不留㝵,彼根隨見隨卽分別,然我覺了能知之心,不見內者爲在根故,分明矚外無障㝵者潛根內故。”

아난 존자가 말씀드리기를, 

“이 분명하게 아는 마음이 몸속은 알지 못하나, 밖은 잘 보고 있으므로, 제가 헤아려 보건데 마음은 눈의 뒤인, 근이(根裏, 안구의 뒤)에 가만히 숨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유리조각(안경)으로 두 눈을 가렸을 경우, 비록 눈은 물체에 가리워졌으나, 그 눈이 보는 것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으므로, 마음이 따라서 분별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깨달아 아는 마음이 나의 몸속을 보지 못하는 것은, 눈에 있는 까닭이며,

걸림없이 밖을 분명하게 보는 것은 눈 속에 숨어 있는 까닭입니다.

ㅡ아난 존자의 세 번째의 주장으로 마음은 눈의 뒤(안구의 뒤)에 숨어서, 잠복근이(潛伏根裏)하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佛告阿難:“如汝所言,潛根內者猶如琉璃。彼人當以琉璃籠眼,當見山河見琉璃不?”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하는 바대로  속에 숨어 있는 것이 마치 유리로 가린 것과 같은 것이라면, 

유리로 눈이 가리워진 사람이 산과 강을 본다면, 유리를 보는 것인가?”

ㅡ유리로 눈을 가리는 것을 눈 속에 마음이 숨어 있는 것을 비유한 것이고, 보는 곳을 따라 분별함은 눈이 보는 대상 경계에 대해서 마음이 눈을 따라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눈에 있기 때문에 오장 육부를 보지 못하는 것이고, 눈이 투명하기 때문에 밖의 것을 환하게 볼 수 있으므로, 마음이 눈의 뒤에 숨어 있다고 한 것이다.


“如是,世尊!是人當以琉璃籠眼,實見琉璃。”

아난 존자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람은 유리로 눈을 가리고 있는 까닭에 당연히 유리를 보게니다.”

 

▷잠복근이(潛伏根裏)를 깨트리심
佛告阿難:“汝心若同琉璃合者,當見山河何不見眼?若見眼者,眼卽同境不得成隨;若不能見,云何說言此了知心,潛在根內如琉璃合?是故應知汝言:‘覺了能知之心潛伏根裏如琉璃合。’無有是處。”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눈에 유리를 댄 것과 같은 것이라면, 산과 강을 볼 때 어째서 눈을 보지 못하는 것인가?

만약 눈을 본다면, 눈은 곧 경계(境)와 같은 것으로써, ‘눈이 보는 바대로 마음이 따라 분별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을 것이며,

만약 눈을 볼 수 없다면, 어찌하여서 이 분별하고 아는 마음이 눈에 유리를 댄 것과 같이, 눈 속(안구 뒤)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깨달아 아는 마음이 눈에 유리를 댄 것과 같이 눈 뒤에 가만히 숨어 있다는 네 말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ㅡ유리를 눈에 댄 것과 같다고 하면, 사실에 어긋나고, 눈에 마음이 숨어 있다고 하면 이치에 어긋난다. 사실과 이치 모두에 어긋나는 것이니, 마음이 눈 뒤에 숨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는 '보는 곳을 따라 분별한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눈이 보는 대상 물질이 된다'고 하면, 보는 곳을 따라 분별한다는 말이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

 

*안근(眼根)의 근(根)은 우리의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을 말하는 것으로, 

만약 마음이 눈 뒤에 숨어 있는, 즉 마음이 우리의 육근 뒤에 숨어 있는 것이라면, 육근이 대상(경계)이 되는 것이며, 또한 눈이 바깥의 대상을 보기전에 망막을 먼저 보아야 할 것이므로, 옳지 않다고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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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 1권 2

 

▷아난 존자의 반성(反省)

阿難見佛頂禮悲泣,恨無始來一向多聞未全道力,慇懃啓請十方如來得成菩提妙奢摩他、三摩禪那最初方便。

於時,復有恒沙菩薩及諸十方大阿羅漢、辟支佛等,俱願樂聞,退坐默然承受聖旨。

아난(阿難) 존자는 부처님을 뵙고 머리를 조아려 정예(頂禮)를 올리고 슬피 울면서, 시작이 없는 무시(無始)로부터 한결같이 많은 불법을 들어서 알기만 하였을 뿐, 도력(道力)이 완전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리고는, 은근하게 시방의 여래께서 보리(菩提)를 성취하신 묘한 사마타(奢摩他, Samatha, 집중된 선정)와 삼마(三摩, 삼마발저)와 선나(禪那, 정려)의 최초방편(最初方便)을 간절히 청하였다.
그러자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보살들과 시방의 여러 훌륭한 대 아라한(大 阿羅漢)들과 벽지불(辟支佛)들도 모두 기뻐하면서 원하는 마음으로, 묵연(默然)히 물러나 앉아서 거룩한 가르침의 성지(聖旨)을 받들고자 하였다.

우리 모두는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를 구하기 위해서 설하시는 수능엄경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신 아난존자에게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사마타(奢摩他, Samatha, 정定), 등지(等持)ㆍ삼매(三昧)라하며,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해서 망념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하며, 정위(定位)ㆍ산위(散位)에 통하지만 유심위(有心位)에만 통하고 무심위(無心位)에는 통하지 않는다.

Samatha is the theory that distinguishes between trueness anf falseness.

삼마발저는 근본적인 망상 분별과 진실을 구별하는 지혜를 닦는 방법을 위하여 방법이다 

*삼마(三摩, samāpatti, 지止), 삼마발저(三摩鉢底), 삼마발제(三摩鉢提)로 음역하며, 등지(等至)라고도 하며, 몸과 마음의 평등에 이른다는 뜻이다. 정(定)의 일곱 가지 이명(異名) 중의 하나이며,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의 2정(定)에 통하며 산위(散位)에는 통하지 않는다.

Smapatti is the practice of the truth, the fundamental bodhi or basic wisdom. 

디아나(Dhyana)는 모든 진실은 거짓이고 모든 거짓은 진실이라는 지혜를 적용하는 것이다.- 수(修)

*선나(禪那, dhyāna, 혜慧), 정려(靜慮)ㆍ선(禪)ㆍ사유수(思惟修) 등이라고도 하며,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오로지 기울여서 자세히 사유하는 것으로서, 정(定)과 혜(慧)가 균등하다. 이것은 번뇌를 보리로 바꾸고, 생사를 여래의 열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Dhyana is the application of the resulting wisdom that all truth is falseness and all falseness is truth. 

정려는 모든 진실은 거짓이고 모든 거짓은 진실이라는 지혜를 적용하는 것이다.

 

Another way to explain: samatha is stopping, samapatti is contemplation, and dhyana is meditation, explained by Zhiyo Master. ㅡ Rebirth Views in The Surangama Sutra by Dr. Bhikkhuni Gioi Huong. 

다시 말하자면, 사마타는 멈추는 것이고, 사마파티는 관조하는 것이고, 디아나는 명상하는 것이라고 지요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견도분(見道分) 

ㅡ진망(眞妄)을 선택하여 밀인(密印)으로 삼음

마음(心)의 소재(所在)

佛告阿難:“汝我同氣情均天倫,當初發心,於我法中見何勝相,頓捨世閒深重恩愛?”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와 나는 천륜(天倫, 사촌)으로 정(情)을 나눈 동기(同氣)이니라.

네가 처음에 초발심(初發心)을 하였을 때, 나의 법 가운데에서 어떠한 훌륭한 승상(勝相)을 보았기에,

세간에서의 깊고 소중한 은혜와 애정을 단박에 버렸건 것인가?”


阿難白佛:“我見如來三十二相勝妙殊絕,形體映徹猶如琉璃。常自思惟:“此相非是欲愛所生。何以故?欲氣麤濁,腥臊交遘膿血雜亂,不能發生勝淨妙明紫金光聚。”是以渴仰從佛剃落。”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답하여 말하기를, “저는 여래의 더없이 미묘하고 훌륭한 승상(勝相)의 32상(相)에서 유리(琉璃)와 같이 사무치는 영철(映徹)한 빛을 보았으며, 항상 생각하기를, ‘이 상(相)은 애욕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애욕의 기운은 추하고 탁한 추탁(麤濁)한 것이며, 비린내와 누린내가 서로 어울린 것이며, 고름과 피가 어지럽게 섞인 것이니, 이렇게 자금(紫金, 황금)과 같이 훌륭하고 맑고 묘하고 밝은 빛의 광취(光聚)를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함에 감동하여서, 간절히 우러러 존경하는, 갈앙(渴仰)하면서 부처님을 따라 머리를 깍게 되었습니다.”

佛言:“善哉,阿難!汝等當知,一切衆生從無始來生死相續,皆由不知常住眞心性淨明體,

用諸妄想,此想不眞故有輪轉。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훌륭하구나! 아난아, 너희들 모두는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일체중생이 시작이 없는 무시(無始)로부터 생사를 계속한다는 것 모두는, 상주진심(常住眞心)의 성품이 맑고 밝은 본체를 알지 못하고,

일체의 허망한 망상(妄想)을 제 마음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탓이며,

이러한 진실하지 못한 생각(想) 때문에 생사에서 윤회하는 것이니라.

 

▷마음과 눈으로 인하여 뒤바뀌는 것이다.

汝今欲硏無上菩提眞發明性,應當直心酬我所問。十方如來同一道故,出離生死皆以直心,心言直故,如是乃至終始地位,中閒永無諸委曲相。

네가 이제 더없이 높은 무상보리(無上菩提)의 진실하게 열린 밝은 성품의 명성(明性)을 닦아 나아가고자 한다면, 마땅히 내가 묻는 말에 곧은 마음의 직심(直心)으로 대답하여야 하느니라.

시방 여래께서도 동일한 일도(一道)를 따라 생사를 벗어나셨으니, 곧은 마음의 직심(直心)으로 행하신 가닭이셨느니라.

마음(心)과 말씀(言)이 곧고 바르신 까닭에 시작의 초지위(初地位)에서부터 마지막의 종지위(終地位)에 이르실 때까지의 그 중간에 조금도 구부러지거나 잘못된 위곡상(委曲相)이 없으셨던 것이니라.

선재(善哉),  ‘매우 좋다' 매우 훌륭하다, 잘했다는 칭찬의 뜻으로 쓰이는 말.

 

阿難!我今問汝,當汝發心緣於如來三十二相,將何所見誰爲愛樂?”

“아난아! 내가 너에게 묻겠으니, 네가 답하기를 여래의 32상을 보고 출가할 마음을 발심(發心)하였다고 하였으니,

무엇으로 보았으며? 누가 좋아하였던가?.”

ㅡ누가 좋아하였던가?는 망(妄)의 근본을 물어서 일으키는 것이다.

 

*불변의 상주하는 진심의 상주진심(常住眞心)은 본래 청정하고 밝은 근본체인 성정명체(性淨明體)이며, 바로 직심(直心)의 정념진여(正念眞如)로 제1의제의 진실혈맥眞實血脈임을 설하고 있습니다 -한울림

阿難白佛言:“世尊!如是愛樂用我心目。由目觀見如來勝相心生愛樂,故我發心願捨生死。”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답하였으니, 
“세존이시여. 이렇게 좋아하게 된 것은 저의 마음(心)과 눈(目)으로 입니다.

눈(目)으로 여래의 거룩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으로 좋아했기 때문에 저는 발심하여 생사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ㅡ'마음과 눈으로'라는 것은 망(妄)의 근본을 나타낸 것이다.

 

▷거짓의 실체를 깨트리고 전체를 추구함
佛告阿難:“如汝所說,眞所愛樂因于心目,若不識知心目所在,則不能得降伏塵勞。譬如國王爲賊所侵,發兵討除,是兵要當知賊所在。使汝流轉心目爲咎。吾今問汝,唯心與目今何所在?”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진실로 좋아한 동기가 마음(心)과 눈(目)에 있다고 말하였으나,

만약 마음(心)과 눈(目)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진로(塵勞, 번뇌)를 항복시킬 수 없는 것이니, 마치 적의 침략을 당한 국왕(진심)이 군대(진실되게 보는 것)를 일으켜서 적(망상)을 토벌하고자 한다면, 먼저 적군의 소재를 알아야 하는 것과 같이,

너를 생사에 흘러 다니게 하는 것은 마음(心)과 눈(目)의 잘못이므로, 마음(心)과 눈(目)마음과 눈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니라다.

내가 이제 너에게 묻겠으니,  마음(心)과 눈(目)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ㅡ 왕은 진심에 비유한 것이고, 적은 망상에 비유하였으며, 군대는 참되게 보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망령된 마음과 망령되게 보는 것은 모두 본래 실체가 없고 반연(攀緣)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나타낸 것으로, 이것이 곧 시작이 없는 생사의 근본인 것이다. 

 

ㅡ아난 존자는 부처님의 32 상호의 아름다움과 함께 마탕가의 아름다움의 육체적인 욕망의 눈으로 본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아난 존자가 아난 존자가 옳든 그르든, 그가 자신의 사고 과정을 깨닫고 이해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We can see the Buddha was very psychological and subtle in the way he comforted Ananda, so he would not feel shamed, would have spiritual trust, rely on the Buddha, and avoid fear and sadness about his faults. The Buddha reminded him that "Ananda and the Buddha are cousins in the same royal family. So, we love each other as real brothers." The Buddha showed his friendliness to stabilize Ananda's mind. Then, he began asking him some questions, so he could experience for himself why Ananda willingly left the palace to become a monk.

여기에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아난다를 위로하시는 방범이 매우 심리적이고 미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난 존자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부처님을 정신적으로 신뢰하면서 의지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와 부처님은 같은 왕족의 사촌이지만, 우리는 진짜 형제와 같이 서로를 사랑한다."라고 상기시켜서 인자하게 아난다의 마음을 안정시킨 후에, 몇 가지 질문을 하기 시작하여서, 아난다가 왜 기꺼이 궁전을 떠나 승려가 되었는지를 다시 상기 시키고 있습니다.

 

Since beginningless time, all living beings have been born and have died continuously. It can be illustrated by the picture of a ferryman sailing on the river of birth and death. The ferry man is the mind, the boat is the body, and the river of birth and death receives countless bodies(boats) from this life to the next, since ancient time, without end. It is out mind, the ferryman, who insturcts us to sail. So, the Buddha asked, which mind transformed Ananda to become the sage and which mind rose up to attach to Matangi? 

시작이 없는 무시로부터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는 생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는 생사의 강을 항해하는 뱃사공의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뱃사공은 마음(心)이고, 배는 몸이고, 생사의 강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몸(배)을 받는 것으로, 태고부터 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항해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뱃사공이므로, 부처님께서 아난다를 성인으로 변화시키는 마음(心)과 마탕가에 빠져드는 마음(心)이 무엇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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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반랄밀제)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은 줄여서 '대불정수능엄경' 또는 '수능엄경' 또는 '능엄경(楞嚴經)'은 선(禪)을 닦아서 인간의 감각작용에서 유발되기 쉬운 일체의 번뇌로부터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요의(要義)를 설하는 경전으로, 10권으로 되어 있다.

제1권에서는 칠처징심(七處徵心)으로, 마음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가를 밝히고 있으며, 

제2권에서는 깨달음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밝히면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밝히고 있으며, 

제3권에서는 세간(世間)의 만법이 모두 여래장묘진여성(如來藏妙眞如性)이라는, 마음의 영원불멸성을 밝히고 있으며,

제4권에서는 여래장을 밝히고, 업(業)을 짓게 되는 근원과 수행의 마음가짐 등에 대해 설명하며, 

제5권에서는 수행할 때 풀어야 할 업의 근원을 밝히고,

제6권에서는 사바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관음수행문(觀音修行門)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 부분은 '법화경'과 함께 우리나라의 관음신앙에 크게 영향을 끼틴 부분이다.

제7권에서는 해탈에 들어가는 주문인 능엄다라니를 설명하고,

제8권에서는 보살의 수행 단계로 57위(位)를 설한 뒤 , 7가지 중생의 생존양상을 설명하며, 

제9권에서는 말세의 중생이 수행하는 도중에 나타나는 50가지 마(魔)에 관해 밝히고 있으며,

제10권에서는 오음(五陰)의 근원을 설하고, 이 경의 공덕에 관하여 부언하고 있다.

 

이 경은 중국에서 찬술한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인데, '소화엄경(小華嚴經)'이라 불리면서 널리 독송되어 한국 불교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경에 대한 주석서로, 고려 때 보환(普幻)의 '능엄경신(楞嚴經新科)' 2권과 '수능엄경환해산보기(首楞嚴經環解刪補記)' 2권, 조선시대 유일(有一)의 '능엄경사기(楞嚴經私記)' 1권과 의첨(義沾)의 '능엄경사기' 1권 등이 있다.

현재의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는 1235년 이승광(李勝光) 등이 간행한 것이 해인사에 목판으로 전하고 있으며, 그외에도 송광사·용장사(龍藏寺)에 경판이 소장되어 있으며, 1492년 조선 세조(世祖)가 간경도감에서 언해본을 간행하기도 했다.

'능엄경'은 인도의 나란다사(那爛陀寺)에 비장된 이후로 인도 안에서만 유통시키고, 타국에는 유출하지 못하도록 왕명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 이전까지는 중국에 전래되지 못하다가, 당(唐) 중종(中宗) 때인 705년 인도 승려 반랄밀제(般剌蜜帝)에 의해 전래되고 방융(房融)과 함께 한역됐다고 한다.

그러나 내용으로 봐서 중국에서 많이 가필되어서, 오히려 중국에서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AD 720년경 중국 선종에서 찬술한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How is the Surangama Sutra different from the Lotus Sutra? In the Lotus Sutra, the Buddha encouraged stabilizing the body and mind of listeners by saying they will gain merit, blessings, or Buddhahood as they wish, so that they will be delighted to practice.

The Surangama Sutra preaches clearly the methods of cultivation and how to awaken the Buddha nature and get rid of Samsara. - Rebirth Views in The Surangama Sutra by Dr. Bhikkhuni Gioi Huong. 

능엄경은 법화경과 어떻게 다른가?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안정시켜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따라 공덕, 복, 불성을 얻는 수행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도록 격려하여서 장려하는 반면에, 
능엄경은 수행 방법과 함께 불성을 깨우치고 윤회(삼사라)를 벗어나는 방법을 키우는 것을 설파하였다. 

 

수능엄경(首楞嚴經, Surangama Sutra)1권 1

 

1. 서분(序分)

▷ 수능엄경(首楞嚴經)의 명목(名目)

一名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於灌頂部錄出別行

일명,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 이라고도 하며, 관정부(灌頂部)에서 따로 간추려 낸 것이다.

 

大唐神龍 元年 龍集乙巳五月己夘朔二十三日辛丑中 天竺沙門 般剌蜜帝 於廣州制止道場譯出

菩薩戒弟子 前正諫大夫同中書門下平章事 淸河房融筆授

대당(大唐)의 신룡 원년(705년) 5월 23일에 천축의 사문 반라밀제(般剌蜜帝)가 광주(廣州) 제지도량(制止道場)에서 역출하였으며,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 전정간대부동중서문하평장사(前正諫大夫同中書門下平章事) 청하방융(淸河房融)이 필수받아 쓰는, 필수(筆授)하였고,

오장국(烏長國)의 사문 미가석가(彌伽釋迦)가 중국어로 번역하는 역어(譯語)를 하였다.

 

▷서두(序頭)

如是我聞: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ㅡ직역하면 “이와 같이 나에게 들렸다.”는 의미이다. 내 의지로 들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 들려진 것을 그대로 전한다는 뜻으로, 문여시(聞如是)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의 여시아문(如是我聞)’이란, 내가 사무외(四無畏)와 십력(十力)를 갖추신, 법의 자재자, 법왕, 법주,  법의 귀의처, 정법의 최상전법자이고 정각자이신, 세존으로부터 면전에서 직접 들은 것이니, 이러함에 의문이나 의심이나 불신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믿음을 증명하는 서두

一時,佛在室羅筏城祇桓精舍,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실라벌성(室羅筏城, 사위성)의 기환정사(祇桓精舍, 기원정사)에서 

一時(일시), 어느 때라는 말도 역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모든 경전에서 통용하고 있으므로 특별한 시기를 가리키지 않는다. 

 

▷법회청중(法會聽衆), 항상 같이하는 대중들이다.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1,250명의 뛰어난 비구(比丘)들과 함께 하셨으니,  

 

▷탄덕(嘆德)

皆是無漏大阿羅漢。佛子住持善超諸有,能於國土成就威儀,從佛轉輪妙堪遺囑,

嚴淨毘尼弘範三界,應身無量度脫衆生,拔濟未來越諸塵累。

이 비구들 모두는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의 대아라한(大阿羅漢)이며, 불자(佛子)로서 불법(佛法)을 잘 지켜서 보호하며, 일체 세계인 제유(諸有)의 속박을 벗어났으며, 태어나는 국토에서마다 능히 위의(威儀)를 갖추었으며,

부처님을 따라 법륜(法輪)을 굴리며,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신 뒤의 유촉(遺囑)을 감당할 만한 분들이셨다.

또한 이 비구들의 비니(毘尼, 계율)을 매우 청정(嚴淨)하게 지키고 지녀서 널리 삼계(三界)의 모범이 되고,

무량한 응신(應身)으로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며, 미래의 중생도 건져내어서 일체 번뇌의 얽힘인 진누(塵累, 속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분들이셨다.

ㅡ응신(應身), 변화신(變化身), 응불(應佛), 응신불(應身佛), 응화신(應化身), 열응신(劣應身),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중생이 바라는 바를 따라 몸을 나타 내는 것.

 

▷예명(例名)

其名曰:大智舍利弗、摩訶目乾連、摩訶拘絺羅、富樓那彌多羅尼子、須菩提、優波尼沙陁等而爲上首。

그 이름을 말하자면, 지혜가 뛰어난 대지(大智)의 사리불(舍利弗) 존자와 마하목건련(摩訶目犍連) 존자와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존자와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존자와 수보리(須菩提)존자와 우바니사타(優波尼沙陀) 존자 등으로, 이들이 으뜸가는 상수(上首)들이었다.

▷성문의 대중

復有無量辟支 無學幷其初心同來佛所,屬諸比丘休夏自恣。十方菩薩諮決心疑,欽奉慈嚴將求密義。

또한 무량한 벽지불(연각 또는 독각)과 무학(無學)의 아라한과 새로이 발심한 초심자(初心者)들도 다 함께 부처님 계신 곳으로 왔으니, 
마침 비구들이 여름의 하안거수행(夏安居修行, 여름결제) 마치고, 그 동안의 잘못을 서로 고백하여 참회하는 날인 자자(自恣)를 하는 날이었으므로, 시방의 보살들도 마음속으로 의혹이 있는 것을 여쭈어서 의심을 끊어내기 위하여 자애롭고 엄한 부처님을 공손히 받들어 흠봉(欽奉)하여서 심오한 뜻의 밀의(密義)을 듣고자 하였다.

ㅡ자자(自恣), 안거기간 중에 신체적, 언어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고백하고 참회 하고 훈계를 받는 것.

 

卽時如來敷座宴安,爲諸會中宣示深奧,法筵淸衆得未曾有,迦陵仙音遍十方界,

그 때에 여래께서 자리를 펴시고 편히 앉으셔서, 모든 법회 대중을 위하여 깊고 오묘한 심오법(深奧法)을 설하시니, 법석(法席)의 청정한 대중인 청중(淸衆)은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을 얻게 되었으며,

가릉빈가(迦陵頻伽)처럼 맑고 고운 음성이 시방세계에 널리 퍼지자, 

심오법(深奧法)을 설하신 것은 '능엄경'을 발기한 이유가 된다 

ㅡ가릉빈가(迦陵頻迦, 칼라빈카)는 전설적인 것으로, 서방극락정토에 거주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불법을 설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새의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새라고 하는데, 알을 깨고 나오기 전부터 매우 아름답고 묘한 소리를 낸다고 해서, 묘음조(妙音鳥), 호성조(好聲鳥)ㆍ일음조(逸音鳥)ㆍ묘성조(妙聲鳥)라고도 불리며, 부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새이다.

 

▷보살대중
恒沙菩薩來聚道場,文殊師利而爲上首。

항하 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보살들이 이 도량으로 모여 왔으니, 그 분들의 상수(上首)는 문수사리(文殊師利) 보살 이었다.

ㅡ문수(文殊)는 묘덕(妙德)이라고도 하며, 근본지(根本智)를 나타내며, 능엄회상에서 법(法)을 선택하는 눈이 되는 까닭에 상수(上首)가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왕의 초청에 참석하심

時,波斯匿王爲其父王諱日營齋,請佛宮掖自迎如來,廣設珍羞無上妙味,兼復親延諸大菩薩;

이때 바사닉왕(波斯匿王)은 부왕(父王)께서 돌아가신 날에 재(齋)를 차렸으니,

맛있는 진수(珍羞)를 마련하여 부처님과 여러 훌륭한 대보살들을 궁궐의 내정인 궁액(宮掖)으로 초청해서, 몸소 친히 영접하여서 대접하였으며, 

ㅡ바사닉왕(波斯匿王), 중인도 코살라국의 왕으로 승군, 승광, 월광이라고도 하며, 부처님을 궁중의 내정으로 초대한 것을 지극한 공경으로 예우한 것이다. 

 

▷城中分應(성중분응)

城中復有長者居士,同時飯僧佇佛來應。佛勅文殊分領菩薩及阿羅漢應諸齋主;

그와 동시(同時)에 성안의 장자(長者)와 거사(居士)들도 스님들을 위한 공양을 준비해 놓고 부처님께서 참석하여 주시기를 원하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문수(文殊) 보살에게 보살과 아라한들을 나누어 거느리고 가서 재주(齋主, 시주施主)의 청에 응하도록 허락하셨으나, 

 

▷아난독이(阿難獨異)
唯有阿難先受別請,遠遊未還不遑僧次,旣無上座及阿闍梨,途中獨歸其日無供。

卽時阿難執持應器,於所遊城次第循乞,心中初求最後檀越以爲齋主,

無問淨穢剎利尊姓及旃陁羅,方行等慈不擇微賤,發意圓成一切衆生無量功德。

오직 아난(阿難) 존자 만이 다른 청을 받고 멀리 가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까닭에, 그러한 대중의 차례에 참여할 겨를이 없었다.

아난 존자는 동행해야 하는 상좌(上座)와 아사리(阿闍黎)도 없이 혼자 돌아오는 길에 공양이 없었으므로,

아난(阿難) 존자는 공양을 얻기 위해서 응기(應器, 발우)를 들고 성으로 들어가서 차례로 공양하고자 마음 속으로 생가하면서, “아직 스님들께 공양해 본 적이 없는 단월(檀越, 시주)을 찾아서 처음으로 공양하게 되는 재주(齋主, 공양주)를 삼으리라” 생각하고는, 깨끗한 귀족 찰제리(刹帝利, 지배계급)나 비천한 전타라(旃陀羅, 노예, 백정)를 가리지 않고, 평등한 자심(慈心)으로, 공양하는 복을 얻게 하고자 하였으니, 이렇게 신분을 가리지 않으려는 것은, 일체중생에게 무량한 공덕을 원만하게 성취하게 하고자 하려는 마음에서 이었다.

ㅡ아난 존자가 음실에 빠지게 된 이유를 서술한 것으로, 승려가 먼길을 갈 때에는 반드시 상수와 궤범사와 함께 세 사람이 짝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행동을 바르게 하고 실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ㅡ인도의 4성 계급인 카스트 제도;

①브라만; 성직자, 학자, 승려 등 사회인의 교육과 힌두교의 신들에게 기도를 드리는 일
②크샤트리아는 찰제리(刹帝利) 또는 찰리종(刹利種); 왕족, 귀족 사회 제도와 안보를 유지하며 국가를 통치하는 일
③바이샤;  자작농, 상인, 수공업자, 하급 관리, 음악가 등 생산 활동과 관련된 일
④수드라수타라(首陀羅); 소작농, 어민, 노동자, 농노 등

카스트 아래의 계층으로서 달리트와 같은 불가촉천민이 있다. 

 

阿難已知如來世尊訶須菩提及大迦葉爲阿羅漢心不均平,欽仰如來開闡無遮度諸疑謗。

經彼城隍徐步郭門,嚴整威儀肅恭齋法。

또한, 아난 존자는 여래께서 수보리(須菩提) 존자와 대가섭(大迦葉) 존자에게 ‘아라한(阿羅漢)이 되어서도 마음이 평등하지 못하다’고 책망하신 것을 알고 있었으며,

활짝 열어서 가리지 않는 행으로 모든 의심과 비방을 벗어나신 여래를 우러러 존경하는 흠앙(欽仰)하고 있었으므로,

아난 존자는 재법(齋法, 공양법)에 걸맞게 엄숙한 위의(威儀)를 갖추고 큰 성 둘레의 해자(垓字)를 지나 성문 밖으로 천천히 걸어 가면서 공양을 구하고 있었다.

ㅡ이것을 평등하게 자비를 행하는 것을 뜻하며 수보리 존자는 부자라야 쉽게 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대가섭 존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연을 심어주려고 생각한 것이다. 

재법(齋法), 몸가짐을 단정히하고 신중하게 차례로 걸식하는 것.

 

▷악연을 만남.
爾時,阿難因乞食次經歷婬室,遭大幻術摩登伽女以娑毘迦羅先梵天呪攝入婬席,婬躬撫摩將毀戒體。

이때, 아난 존자는 걸식(乞食)을 하면서 환술(幻術)을 잘 부리고 음란한 마등가(摩登伽, 기생) 여인의 집을 지나게 되었다.

마등가는 사비가라(娑毗迦羅, 수론외도의 시조)라고 하는 선범천주(先梵天呪, 외도의 진언)의 주문으로 아난을 음실(婬室)로 끌어들여서 음탕하게 몸으로 만지고 비비면서 아난의 계체(戒體, 계행)를 망치고자 하였다.

ㅡ마등가(摩登伽), 마탕가의 음역으로,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사성(四姓) 이외의 천민 계급 중에서 최하위인 전다라(旃陀羅, 찬달라Caṇdāla의 음역)이며, 도살업이나 사형 집행 등의 비천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킴.  

 

▷부처님께서 자비로 아난 존자를 구원함

如來知彼婬術所加,齋畢旋歸;王及大臣長者居士,俱來隨佛願聞法要。

于時,世尊頂放百寶無畏光明,光中出生千葉寶蓮,有佛化身結加趺坐,宣說神呪,

勅文殊師利將呪往護,惡呪銷滅,提獎阿難及摩登伽歸來佛所。

여래께서는 아난이 마등가의 음탕한 환술에 걸리게 된 것을 아시고 공양을 마치신 즉시, 곧바로 기원정사(祇垣精舍)로 돌아오시니, 바사닉왕과 대신과 장자와 거사들 모두가 부처님을 따라와서, 법문의 요의인 법요(法要)를 듣고자 하였다.
바로 이때, 세존께서는 정수리로부터 백 가지의 보배의 두려움이 없는 백보무외광명(百寶無畏光明)을 놓으셨으니, 그 광명으로부터 천 잎의 보배 연꽃인 천엽보화(千葉寶蓮)가 나왔으며, 그 천엽의 연꽃 위에 가부좌(跏趺坐)하신 화신 부처님께서 신비한 주문을 외우고 계셨다.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보살에게 그 주문을 가지고 가서 아난을 구해 오도록 명하시니, 문수보살은 그 주문으로 나쁜 주문인 악주(惡呪)를 소멸시키고, 아난과 마등가(摩登伽)를 데리고 부처님 계신 곳으로 돌아왔다.

ㅡ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마치신 뒤에는 항상 시주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셨는데 이번에는 곧바로 돌아가신 까닭에 모두가 부처님을 따라와서 법문을 듣고자 한 것이다.

 

아난다(阿難陀, Ananda), 다문제일(多聞第一), 매우 잘생긴 용모로써 경희(慶喜) 또는 아난(阿難)이라고도 하며,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며 제바달다는 아난 존자의 형님이었다.  
부처님께서는 특정한 시자를 두지 않았으나, 대중들의 천거에 따라 아난다가 시자를 맡게 되었으며, 그 후 25년간 부처님을  모셨으며, 부처님의 반열반을 지켜보았으며, 부처님임 입멸 후 마하가섭의 지휘하에 열린, 불교 경전의 편찬을 위한 칠엽굴의 제1차 결집에서 아난 존자는 부처님의 말씀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분명하게 모두 기억하여서 결집이 가능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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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0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② 6

 

▶論曰:何因變化身,非卽自性身?由八因故,謂諸菩薩,從久遠來,得不退定,於睹史多及人中生,不應道理.

又諸菩薩,從久遠來,常憶宿住,書算數印工巧論中,及於受用欲塵行中,不能正知,不應道理.

▷논문; 어떠한 원인으로 변화신(變化身)은 자성신이 아닌 것인가? 여덟 가지 이유의 팔인(八因) 때문이니,

모든 보살이 아득한 옛적부터 퇴전하지 않는 선정을 얻었다면, 도솔천과 인간세계에서 태어나는 것 도리에 맞지 않으며,

또한 모든 보살이 아득한 옛적부터 과거 세상의 숙주(宿住)를 돌이켜 보아, 글씨ㆍ산술ㆍ조각ㆍ공예 기술 등과 욕락의 경계를 수용하는, 가무(歌舞)ㆍ음식(飮食) 등의 행에 대해서 바르게   없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과거 수 많은 세상에서 닦아 익힌 효력이 나타나서 모든 일을 바르게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又諸菩薩,從久遠來,已知惡說,善說法教,往外道所不應道理.又諸菩薩,從久遠來,已能善知三乘正道,修邪苦行,不應道理.又諸菩薩,捨百拘胝諸贍部洲,但於一處,成等正覺,轉正法輪,不應道理.若離示現成等正覺,唯以化身,於所餘處,施作佛事,卽應但於睹史多天,成等正覺,何不施設,遍於一切贍部洲中,同時佛出?旣不施設,無教無理.雖有多化,而不違彼無二如來出現世言,由一四洲,攝世界故,如二輪王不同出世.此中有頌:

또한 모든 보살이 아득한 옛적부터 잘못 말하였거나 훌륭하게 말하여진 교설을 아는 까닭 외도의 처소에 간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또한 모든 보살이 아득한 옛적부터 능히 삼승의 바른 수행을  아는 까닭 삿된 고행을 닦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또한 모든 보살은  구지(拘胝)의 많은 섬부주(贍部洲)를 버리고 다만  곳에서 등정각을 이루고 바른 법륜을 굴린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니,

만약 등정각을 이루는 것을 시현하지 않고서 오직 화신으로써 나머지 처소에서 불사를 짓는다면, 마땅히 오직 도솔천에서만 등정각을 이루어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모든 섬부주에서 두루 동시에 부처님께서 출현함을 시설하지 않는 것인가? 

이미 시설하지 않으며, 성스러운 가르침도 없고 바른 논리가 없어서 교증(敎證)과 이증(理證)이 모두 성립되지 않으며, 많은 화신이 있지만   분의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는 일이 없다는 말에 위배되지 않으니, 하나의 사주(四洲)에서 세계를 섭수하기 때문이다.  분의 전륜성왕이 동시에 세상에 출현하지 않음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佛微細化身, 多處胎平等, 爲顯一切種, 成等覺而轉.”

부처님의 미세한 화신의 대부분은 모태에 처하여 평등하시니, 

일체 종류의 등각을 이루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전전하신다네.

전전함을 급다(笈多)ㆍ행구(行矩) 역본인 수존(隋本)에서는생을 받음을 나타내네’로 되어 있고,

진제(眞諦) 역본인 진본(陳本)에는세간에 시현하네’로 되어 있다.


爲欲利樂一切有情,發願修行證大菩提,畢竟涅槃,不應道理,願行無果,成過失故.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시고자 원을 세우고 수행하여 대보리를 증득하셨으니, 필경에 열반에 든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니, 서원과 행이 결과가 없다는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釋曰:今當顯示,佛變化身,卽自性身,不應正理,由八因故.此中最初不應理者,謂諸菩薩,從久遠來,已無量劫,得不退定,尚不應生睹史多天,況於人中?然此世閒現受生者,是變化身,非自性身.又諸菩薩,從久遠來,常憶宿住,於書筭等,不能正知不應道理,但爲調伏諸有情故,化爲此事.

▷해석한다; 이제 마땅히 부처님의 변화신이  자성신이라는 것은, 바른 도리에 맞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여덟 가지 원인의 팔인(八因)에 의해서이다.  중,  번째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은, 모든 보살은 아득한 옛적부터 무량겁 동안 퇴전하지 않는 선정을 얻었으니, 오히려 도솔천에도 태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거늘, 하물며 인간세상 이겠는가? 그러므로, 이 세간에 시현하여 생을 받는 것은 변화신일 뿐, 자성신이 아닌 것이며,

또한 모든 보살은 아득한 옛적부터 항상 과거생을 생각하여 글씨ㆍ산술 등에 대해서 바르게   없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다만 많은 유정을 조복하기 위해서 이러한 변화를 하는 것이다.

ㅡ보리수 밑에서 성도하신 석존에 비추어서 변화신을 말하여 자성신이 아님을 밝힌다.


又諸菩薩,三無數劫,勤修福慧,不能正知惡說`善說,邪苦行事,於最後身,證菩提時,何能頓悟?由此道理,是變化身,非自性身.又諸菩薩,捨百拘胝諸贍部洲,但於一處,成等正覺,轉正法輪,不應道理;若變化身,遍一切處,同時現化,應正道理.故變化身,非自性身.

또한 모든 보살은 3무수겁 동안 복과 지혜를 부지런히 닦아서 나쁘게 말해지거나, 훌륭하게 말하여지거나, 삿된 고행 등을 바르게   없다면, 최후신에서 보리를 증득할 때, 어떻게 능히 단박에 깨닫는 돈오(頓悟)를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도리로 인하여 변화신이지, 자성신이 아닌 것이며, 또한 모든 보살은  구지의 섬부주를 버리고 다만  곳에서만 등정각을 이루고 바른 법륜을 굴린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만약 변화신이 모든 곳에서 두루 동시에 시현한다고 한다면 바른 도리에 맞는 것으로, 따라서 변화신이지 자성신이 아닌 것이다.


若諸異部,作如是執,佛唯一處,眞證等覺,餘方現化,施作佛事.若爾,何故不許但住睹史多天,眞證等覺,遍於一切四大洲渚,示現化身,施作佛事?又於一切四大洲中,不現等覺,無教無理,故不應說,此佛土中,有四洲渚,不現成佛.

만약 다른 부파에서 국집하여 “부처님께서는 오직  곳에서 진실로 등각을 이루시며, 다른 곳에는 화신을 나투어서 불사를 짓는다”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다만 도솔천에 머물러서만 진실로 등각을 증득하시고, 모든 사대주(四大州)에 두루 화신을 시현하여 불사를 지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가? 

또한 모든 사대주에서 등각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가르침에도 없고 바른 논리에 맞지 않으니, 이러한 까닭에 이 불국토 중에서 사대주에서의 성불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급다(笈多)ㆍ행구(行矩) 수본(隋本)에는하나의 불찰(佛刹) 중에서 어느 하나의 사대주에서의 정각을 증득하지 않는다’로 되어 있다.


若有說言,縱有是事,便違契經故,經中說,無二如來俱時出現.應知此經,同轉輪王,如說輪王無二竝出,依一四洲,非一佛土.無二如來俱時出現,當知亦爾,此中意說,一四大洲,名一世界.

만약 어떤 이가 비록 이러한 일이 있다고 말한다면, 계경에 위배되는 것이니, 경전에서 말하기를 “두 분의 여래께서는 동시에 출현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경전은 전륜성왕도 마찬가지여서 두 전륜성왕이 함께 출현하는 일은 없다고 하였다고 알아야 한다.  

하나의 사대주에 의지하나, 하나의 불국토는 아니니,  분의 여래께서 동시에 출현하지 않음도 역시 그러하다고 알아야 한다. 여기서 하나의 사대주를 하나의 세계로 이름한다는 것이다.

급다(笈多)ㆍ행구(行矩) 수본(隋本)에는 하나의 사대주 안에 함께 출현하는 일이 없다. 하나의 불찰(佛刹) 아니다’로 되어 있어서 의미가 분명하다.

 

今復以頌顯示,諸佛化現等覺.佛微細化身等者,此中義說,若於爾時,佛現安住睹史多天,示從彼沒,入母胎等,卽於彼時,化作尊者,舍利子等,無量眷屬,亦現入胎出生等事.安立如是,變化眷屬,當知爲顯一切種覺,殊勝佛事.

이제 다시 게송으로써 모든 부처님께서 등각을 변화로 시현함을 나타내었으니, ‘부처님의 미세한 화신’ 등이 그 뜻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때 부처님께서 나타나서 도솔천에 안주하시고, 그곳으로부터 생을 다하여 모태에 들어가는  등을 시현하신다면,  그 때에 존자 사리자(舍利子) 등의 무량한 권속을 변화로 지어서 역시 모태에 들어가고 출생하는  나타내는 것이니, 이와 같은 변화의 권속을 안립하는 것은, 일체 종류의 깨달음의 뛰어난 불사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今當顯示,如來畢竟,入般涅槃,不應道理.謂爲化度一切有情,先發大願,及修大行,常自誓言:我當利樂一切有情,勤修正行.若始成佛已,便般涅槃,卽所修願行空無有果.由此非理,是變化身,非自性身.

이제 마땅히 여래께서 궁극적으로 반열반에 드신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모든 유정을 교화하기 위해서 먼저  서원을 세우고  행을 닦으며, 항상 스스로 원을 세워 말하기를 “나는 장차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고 부지런히 바른 행을 닦게 하겠다”고 하셨다. 

만약 처음으로 성불하고 나서 문득 반열반에 드셨다면,  수행한 서원과 행은 헛된 것으로, 결과가 없는 것이니,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변화신일 뿐, 자성신이 아닌 것이다.


▶論曰:佛受用身及變化身,旣是無常,云何經說,如來身常?此二所依法身常故.又等流身及變化身,以恒受用無休廢故`數數現化不永絕故,如常受樂`如常施食.如來身常,應知亦爾.

▷논문; 부처님의 수용신과 변화신은 무상한데, 어찌하여 경전에서 “여래신(如來身)은 상주한다”고 말하는가? 

수용신과 변화신 의지처인 법신은 상주하기 때문이며, 또한 등류신(等流身)과 변화신은 항상 수용하여 쉬지 않 때문이고, 자주자주 나투어서 영원히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간이 항상 즐거움을 수용하고, 항상 음식을 베푸는 것과 같이, 여래신이 상주하는 것 역시도 그러하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釋曰:經說如來其身常住,佛受用身及變化身,皆是無常,云何身常?故次成立二身常義.謂此二身依法身住,法身常故,亦說爲常.又受用身,受用無廢,故說爲常.其變化身,恒現等覺般涅槃等,相續不斷,故亦名常.復以譬喩,顯此二身,是常住義.猶如世閒,言常受樂,雖所受樂,非唯無閒,而得說言,此常受樂.又如世閒,言常施食,非此施食,恒無閒斷,而得說言,此常施食.應知二身,常義亦爾.

▷해석한다; 경전에서 “여래께서는  몸이 상주한다”고 설하지만, 부처님의 수용신과 변화신 모두는 무상하거늘, 어찌하여 몸이 상주한다는 것인가? 따라서 다음으로  불신의 상주의 의미를 성립하는 것이다. 

  불신은 법신에 의지해서 머무는 것이니, 법신이 상주하기 때문에 역시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한 수용신은 수용하여 중단하지 않기 때문에 상주한다고 말하며, 그 변화신은 항상 등각과 반열반을 나타내고 상속하여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역시 상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비유로써   불신이 상주하는 의미를 나타내었으니, 마치 세간에서 항상 즐거움을 수용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수용하는 즐거움이 끊임없는 것만은 아니지만, 항상 즐거움을 받는다고 말할  있는 것이며,

또한 세간이 항상 음식을 베푼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음식을 베품이 끊임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항상 음식을 베푼다고 말할  있는 것이니, 두 불신이 상주하는 의미 역시도 그러하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由六因故,諸佛世尊,所現化身,非畢竟住.一所作究竟,成熟有情,已解脫故;二爲令捨離不樂涅槃,爲求如來,常住身故;

▷논문; 여섯 가지 원인의 육인(六因)으로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시현하시는 화신은 필경에는 머물지 않는 것이니,

첫째는 해야  바를 마치는 것으로, 유정을 성숙시켜 해탈하게 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열반을 즐기는 것을 버리게 하기 위한 것이니, 여래의 상주하는 불신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ㅡ이 문장의 의미가 모호하다. 급다(笈多)ㆍ행구(行矩) 수본(隋本)에는 열반을 즐기는 생각을 바꾸어 상주하는 불신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으로 되어 있고, 진역(陳譯)에는 만약 해탈을 얻어서 반열반을 구하면 그로 하여금 반열반의 생각을 버리고 상주하는 불신의 얻음을 구하게 하기 때문’으로 되어 있다. 

  소승을 돌려서 대승으로 향하는 회소향대(廻小向大) 의미이며, 아마도 열반을 즐기지 않음을 버리기 위해서’는 열반을 즐기는 것을 버리기 위해서’의 오기(誤記) 듯하다.

 

三爲令捨離輕毀諸佛,令悟甚深正法教故;四爲令於佛深生渴仰,恐數見者,生厭怠故;五令於自身發勤精進,知正說者,難可得故;六爲諸有情極速成熟,令自精進,不捨軛故.此中有二頌:

셋째는 모든 부처님을 가볍게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니, 매우 심오한 정법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부처님에 대해서 깊이 존경함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것이니, 자주 보는 자가 권태로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스스로 있어서 부지런히 정진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것이니, 바르게 말하는 이는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모든 유정을 지극히 빠르게 성숙시키게 하기 위한 것이니, 스스로 정진하여 중생제도의 무거운 임무의 멍에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由所作究竟, 捨不樂涅槃, 離輕毀諸佛, 深生於渴仰.

해야  바를 마치고, 열반을 즐기는 것을 버리며

모든 부처님을 가볍게 여김을 여의고, 깊이 존경심을 일으키며


內自發正勤, 爲極速成熟, 故許佛化身, 而非畢竟住.”

내면에서 스스로 바른 정진을 일으키고, 지극히 빠르게 성숙하기 위함이니

그러므로 부처님의 화신을 인정하지만, 필경에는 머물지 않는다네.


▶釋曰:如是六因,直說及頌,證佛化身,非畢竟住.其文易了,故不煩釋.

▷해석한다; 이상과 같은 여섯 가지 원인의 육인(六因)에 대한 산문과 게송은 부처님의 화신이 필경에는 머물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한 것으로, 그 문장이 알기 쉽기 때문에 번거롭게 해석하지 않겠다.


▶論曰:諸佛法身,無始時來,無別無量,不應爲得,更作功用.此中有頌:

▷논문;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이 없고 무량하나니, 마땅히 얻기 위해서 다시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功用)을 짓지 않는 것이다. 이러함에 게송이 있으니, 


“佛得無別無量因, 有情若捨勤功用, 證得恒時不成因, 斷如是因不應理.”

부처님의 증득은 차별이 없는 무별(無別)이고, 무량함이 원인(因)이라.

만약 유정이 정근(精勤)의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功用)을 버린다면, 증득은 항상 원인을 이루지 않을 것이니, 

이와 같은 원인을 단멸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釋曰:此中有難:若佛法身,無始時來,無別無量,作證得因,能辦有情,諸利樂事,爲證佛果,不應更作正勤功用.

▷해석한다; 이 중에서 비판하기를 “만약 부처님의 법신이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무량한 것으로서, 증득의 원인을 짓는 것이라면, 유정을 이롭게 하는 모든 일들을 능히 하여 하며, 불과를 증득하기 위해서 마땅히 다시 정근(正勤)의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을 짓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爲釋此難,以頌顯示,諸佛證得,無始時來,無別無量,若是有情,爲求佛果,捨精進因,可有此難,諸佛證得,於得佛果,無始時來,不成因故.然佛證得,無始時來,無別無量,恒與有情,作得佛果,勤精進因,故不應難.諸佛法身,無始時來,無別無量,作證得因,爲證佛果,不應更作正勤功用,是故諸佛,證得法身,非是有情,爲求佛果,捨精進因.又佛證得,無始時來,無別無量,作求佛果,勤精進因.

이런 비판에 대답하기 위해서 게송으로써 나타내었으니, 

모든 부처님의 증득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무량하다. 만약  유정이 불과를 구하기 위해서 정진의 원인을 버린다면, '모든 부처님이 증득하여 유정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유정 스스로 발심 수행하여 정진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비판이 있어야 할 것이며,

유정이 정진하지 않고 불과(佛果)를 얻는 일은 없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증득은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뜻의 '모든 부처님의 증득은 불과를 얻음에 있어서 아득한 옛적부터 원인을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증득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무량한 것으로서, 항상 유정에게 불과를 얻는 부지런한 정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옳지 않은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없고 무량한 것으로서, 증득의 원인(因)을 지으며, 불과를 얻기 위해서 다시 올바른 정근의 의식적인 노력의 공용을 짓지 않아야 하는 까닭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신을 증득하며,

유정은 불과를 구하기 위해서 정진의 원인(因)을 버려서는  되며, 또한 부처님의 증득은 아득한 옛적부터 차별이 없고 무량한 것으로서 불과를 구하는 부지런한 정진의 원인(因)이 되는 것이다.


若諸有情,捨勤功用,如是證得,恒不成因故.又斷此因,不應道理,謂諸菩薩,悲願纏心,於諸有情,愍如一子,諸有情類,處大牢獄,具受艱辛,是故菩薩,於諸有情,利益安樂.若作是心:餘旣能作,我當不作.不應道理.恒作是心:餘於此事,若作`不作,我定當作.是故不應斷如是因.

만약 유정이 정근의 의식적인 노력인 공용을 버린다면, 이와 같은 증득은 항상 원인(因)을 이루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원인을 단멸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다. 

모든 보살은 자비와 서원의 마음에 매여서 모든 유정에 대하여 외아들처럼 연민하나니, 모든 유정의 무리는  감옥에 처하여 일체의 고통을 받으므로, 따라서 보살이 유정의 이롭고 안락함에 대해서 “다른 이가 이미 능히으니, 나는 짓지 않아도 된다는, 즉 유정들이 스스로 발심하여 수행하지 않고,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방임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나니, 항상 이러한 마음을 지어서 “다른 이는  사업에 대해서 혹은 짓거나 혹은 짓지 않을지라도, 나는 반드시 지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이러한 원인을 단멸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論曰:『阿毘達磨大乘經』中「攝大乘品」,我阿僧伽,略釋究竟.

▷논문; '아비달마대승경(阿毘達磨大乘經)' 안의 '섭대승품(攝大乘品)'을 나, 아승가(阿僧伽, 무착)는 간략히 해석해 마친다.


▶釋曰:正趣大乘,制造無量殊勝,論者軌範世親,略釋究竟.

▷해석한다; 바르게 대승에 나아가서 무량수승(無量殊勝)을 저술한, 논사 궤범(軌範, 아사리)인 세친(世親)이 간략히 해석해 마쳤다.

 

아사리(阿闍梨)는 범어 ācārya의 음역어로서, 궤범사(軌範師)ㆍ정행(正行)으로 번역한다. 제자를 가르치고 제자의 행위를 바르게 하여 그 모범이 될 수 있는 스승을 말한다.


攝大乘論釋卷第十 終 섭대승론석 제 10권을 마침.

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0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11. 피과지분(彼果智分) ② 5

 

▶釋曰:此中二頌,辯諸佛說一乘意趣.爲引攝一類者,謂爲引攝不定種性諸聲聞等,令趣大乘,

▷해석한다; 여기서의  게송은 모든 부처님께서 일승을 말씀하신 취지를 밝힌 것으로,

‘한 부류를 이끌어 내어 섭수하고, 나머지를 맡아 지니기 위함이니’란, 이른바 부정종성의 성문등을 이끌어 포섭하기 위해서이다.

ㅡ부정종성(不定種性) 성문과 독각은 소승의 근성을 벗어나서 대승에 통달할 만한 소질이 있기 때문에 일승을 설하여서 이끄는 것이.

 

오성(五姓)= 五種姓(오종성)은  菩薩定姓(보살정성, 定性菩薩정성보살) ·  獨覺定姓(독각정성, 定性緣覺정성연각) · ③聲聞定姓(성문정성, 定性聲聞정성성문) · ④三乘不定姓(삼승불정성, 不定種性부정종성) · ⑤無姓有情(무성유정, 無種性무종성)의 다섯으로,

 ② ③은, 각각 佛果(불과 · 辟支佛果벽지불과) · 阿羅漢果아라한과)를 얻는 것에 정해진 決定性(결정성),

② ③을 합쳐서 定性二乘(정성이승)이라하고, 

④는 보살 및 독각 · 성문의 三類(삼류)의 本有種子(본유종자)를 아울러 갖추고, 二乘(이승)의 수행을 한 뒤 大乘(대승)에 轉向(전향)해서 佛果(불과)를 깨닫는 등, 果(과)가 결정적이 부정종성(不定種性)이다.  

⑤의 무성유정은 영원히 迷界(미계)에 빠져서 苦(고)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고, 겨우 五戒(오계) · 十善(십선)의 善因(선인)을 닦아서 사람이나 天(하늘)에 태어날 수가 있게 되는 무종성(無種性)이다.

이 五姓各別(오성각별)의 說(설)은 楞伽經(능가경) 권二와 解深密經(해심밀경) 권二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이 입장에서 보면, 법화경 등과 같이 모든 중생이다 成佛(성불)할 수 있다는 說(설)에 대하여, 그것은 不定性(부정성)인 사람을 인도하여 大乘(대승)에 들어가게 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 說(설)이라고 해석한다. 

 

云何當令不定種性諸聲聞等,皆由大乘,而般涅槃.及任持所餘者,謂爲任持,不定種性諸菩薩衆,令住大乘,云何當令不定種性諸菩薩衆,不捨大乘,勿聲聞乘,而般涅槃.爲此義故,佛說一乘.由不定等句義,已說法無我解脫,乃至廣說,

어떻게 장차 부정종성의 성문등으로 하여금 대승에 의거해서 반열반하게   있는가! 

‘나머지를 맡아 지니기 위함’이란, 부정종성의 보살 대중을 맡아 지녀서 대승에 머물게 하는 것이니,

어떻게 장차 부정종성의 모든 보살 대중으로 하여금 대승을 버리지 않고 성문승으로 반열반하지 못하게   있는가?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 일승을 말씀하신 것이니, 부정종성 등의 문구의 의미로 인하여 이미 법ㆍ무아ㆍ해탈을 말하는 등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此中復由別意趣力,唯說一乘.何別意趣?謂法等故等.法等故者,法謂眞如,諸聲聞等,同所歸趣,所趣平等,故說一乘.無我等故者,謂聲聞等,補特伽羅,我皆無有.由無我故,此是聲聞`此是菩薩,不應道理.由此無我平等意趣,故說一乘.解脫等故者,謂聲聞等,於煩惱障,同得解脫,故說一乘.如世尊言:解脫解脫無有差別.

 중에서 다시 별도의취력(意趣力)에 의거해서 오직 일승을 말씀하셨으니, 어떠한 별도의 의취인가? 

이른바 ‘법이 평등한 법등(法等)이기 때문’ 등이니, ‘법이 평등한 법등(法等)이기 때문’에서의 법은 진여(眞如)로서 모든 성문등이 다 같이 돌아가야  곳으로, 돌아가야  곳이 평등하기 때문에 일승이라 하는 것이다. 

‘무아가 평등한 무아등(無我等)이기 때문’이란 성문등에는 보특가라의 자아는 실재하지 않으니, 무아이기 때문이다. 

성문의 무아와 보살의 무아가 다른 것이 아니기에 ‘이것은 성문이다, 이것은 보살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며, 이 무아의 평등한취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하는 것이다. 

‘해탈이 평등한 해탈등(解脫等)이기 때문’이란, 성문등은 번뇌장에 대해서  같이 해탈을 얻기 때문에 일승을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성문의 해탈과 보살의 해탈에 차이가 없는 것이다.


性不同故者,種性差別故,以不定性諸聲聞等,亦當成佛.由此意趣,故說一乘. 得二意樂故者,得二種意樂故.一攝取平等意樂,由此攝取一切有情,言彼卽是我`我卽是彼.如是取已,自旣成佛,彼亦成佛.由此意趣,故說一乘;二法性平等意樂,謂諸聲聞,法華會上,蒙佛授記,得佛法性平等意樂,未得法身.由得如是平等意樂,作是思惟:諸佛法性,卽我法性.復有別義,謂彼衆中,有諸菩薩,與彼名同,蒙佛授記.由此法如平等意樂,故說一乘.

‘종성이 같지 않은 성부동(性不同)이기 때문’이란, 종성의 차별인 까닭이니, 부정종성의 모든 성문등도 장차 성불할  있으므로, 이러한 의취 의거해서 일승을 말하는 것이며,  

‘두 가지 의욕인 이의락(二意樂)을 얻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의욕을 얻기 때문이니,

첫째는 섭수의 평등의욕인 섭취평등의락(攝取平等意樂)이니, 이로 인하여 모든 유정을 섭수하여 “그는  나이고, 나는  그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렇게 섭수하고 나서 스스로 이미 성불하고, 그들도 역시 성불하게 하는, 이러한 의취 의거해서 일승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법성 평등의 의욕인 법성평등의락(法性平等意樂)이니, 이른바 모든 성문은 법화회상(法華會上)에서 부처님의 수기를 받고, 부처님 법성의 평등한 의욕을 얻었지만 아직 법신을 얻지 못한 까닭에, “모든 부처님의 법성은  나의 법성이다”라고 사유하게 하는 것이며,

다시 다른 뜻으로는,  대중 가운데 많은 보살이 있어서, 법화회상에서 부처님께 수기받은 성문들과 이름을 같이하면서 부처님의 수기를 받는 것이니, 이 법여(法如)의 평등한 의욕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한 것이다.


言化故者,謂佛化作聲聞乘等.如世尊言:我憶往昔,無量百返,依聲聞乘,而般涅槃.由此意趣,故說一乘.以聲聞乘,所化有情,由見此故,得般涅槃,故現此化.究竟故者,唯此一乘,最爲究竟,過此更無餘勝乘故.聲聞乘等,有餘勝乘,所謂佛乘.由此意趣,諸佛世尊,宣說一乘.

‘화현(化)이기 때문’이란 부처님께서 성문승 등으로 화작(化作)하여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세존께서 “내가 옛날을 생각해 보건대 무량한 성문승에 의지해서 반열반하였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은, 이러한 의취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한 것으로, 성문승으로 변화되었으므로 유정은 이것을 봄으로써 반열반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구경(究竟)이기 때문’이란 오직  일승만이 가장 구경임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지나서 다시 다른 뛰어난 교법이 없기 때문이며, 성문승 등에는 나머지 다른 뛰어난 교법의 승승(勝乘)이 있으니, 바로 불승(佛乘)이다. 

이러한 의취(意趣)에 의거해서 일승을 말하는 것이다.


▶論曰:如是諸佛,同一法身,而佛有多,何緣可見?此中有頌:

▷논문;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께서는 동일한 법신이시거늘, 부처님께서 많이 계시는 것은 무엇을 반연하여   있는가?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一界中無二, 同時無量圓, 次第轉非理, 故成有多佛.”

 세계에  분이 계시니 않으니, 동시에 무량한 이가 원만하게 되네.

순서대로 전전함은 도리에 맞지 않으니, 그러므로 많은 부처님께서 계신다네.


▶釋曰:今當顯示,由此因緣,應知諸佛,雖同法身,而或成一,或復成多.應知一者,法界同故,諸佛皆同法界爲體,法界一故,應知一佛.又一佛者,以於一時,一世界中,無二佛現,故知一佛.又伽他中,顯示諸佛,或一或多.

해석한다; 이제 마땅히 이러한 인연에 의거함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신을 같이하면서도 혹은  분이기도 하고, 혹은 많은 분이기도 하다는 것 알아야 한다. 

‘하나(一)’라는 것은 법계를 같이하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하나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마찬가지로 법계를 자체로 삼으시니, 법계가 하나이기 때문에 마땅히  분의 부처님이라고 알아야 한다. 

‘또한  분의 부처님’이란 동시에  세계에서  분의 부처님께서 출현하시지 않는 까닭에  분의 부처님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으로, 가타(伽他, 게송)에서 모든 부처님의 제불(諸佛)이란, 혹은  분, 혹은 많은 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一界中無二者,此句顯示,唯有一佛.一世界中,無有二佛俱時出現,是故說言,唯有一佛.餘句顯示,諸佛有多.同時無量圓者,無量菩薩,同一時中,資糧圓滿.若諸菩薩,福智資糧,同時圓滿,不得成佛,如是資糧,應空無果;衆多菩薩,修集資糧,同時圓滿,是故應知一時多佛.

‘한 세계에  분이 계시지 않는다’는  문구는, 오직  분의 부처님만이 계심을 나타낸 것으로, 한 세계에서  분의 부처님께서 동시에 출현하는 일은 없으므로 오직  분의 부처님만이 계신다고 말한 것이다. 

나머지 문구는 부처님께서 많이 계심을 나타낸 것으로,

‘동시에 무량한 이가 원만하게 된다’는 것은 무량한 보살이 같은 시기에 자량(資糧)이 원만해지는 것을 말한다. 

만약, 모든 보살의 복과 지혜의 자량이 동시에 원만하여 질지라도 성불을 얻지 못한다면, 이와 같은 자량은 마땅히 헛된 것으로, 결과가 없어야 할 것이나, 많은 보살이 자량을 닦아 모아서 동시에 원만해지는 것이므로 동시에 많은 부처님께서 계시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次第轉非理者,無有次第轉成佛義.若諸菩薩,修資糧時,觀待次第前後成滿,可得佛時,前後次第;然諸菩薩,修資糧時,不待次第前後成滿,故得佛時,亦無次第前後成義.是故同時,有衆多佛.

‘순서대로 전전함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순서대로 전전하여서 성불한다는 뜻이 없음을 말한 것으로,

만약 보살이 자량을 닦을  순서대로 이전과 이후를 관찰하여 원만히 성취한다면, 성불할 때에도 이전과 이후의 순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보살이 자량을 닦을  순서대로 이전과 이후를 기다리지 않고 원만히 성취하는 까닭에, 성불할 때에도 역시 순서대로 이전과 이후를 이룬다는 뜻이 없는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동시에 많은 부처님께서 계시는 것이다.


▶論曰:云何應知於法身中,佛非畢竟入於涅槃,亦非畢竟不入涅槃?此中有頌:

▷논문; 어찌하여, 마땅히 법신 안에서 부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에 들지 않으시며,

역시 궁극적으로 열반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있는가? 여기에 게송이 있으니, 


“一切障脫故, 所作無竟故, 佛畢竟涅槃, 畢竟不涅槃.”

모든 장애를 벗어난 까닭이고, 해야  바의 소작(所作)이 끝이 없는 까닭이니, 

부처님께서는 필경에 열반에 드시나, 필경에 열반에 들지 않으신 것이라네.


▶釋曰:有餘部說,諸佛無有畢竟涅槃,復有別部聲聞乘人說,諸佛有畢竟涅槃故,此頌中顯二意趣.一切障脫故者,由佛解脫一切煩惱`所知障故,依此意趣,說言諸佛畢竟涅槃.所作無竟故者,由佛普於一切有情,未成熟者,欲令成熟;已成熟者,欲令解脫,是所應作,此事無有究竟之期,故佛畢竟不入涅槃.若異此者,應如聲聞畢竟涅槃,是則本願,應空無果.

해석한다; 다른 부파에서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께서는 필경에 열반에 들지 않는다”고 하며,

또한 다른 부파의 성문승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께서는 필경에는 열반에 드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가지의 의취(意趣)를 나타낸 것으로, 

‘모든 장애를 벗어난 까닭’이란, 부처님께서는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을 해탈하신 까닭에, 이러한 취지에 의지해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에 든다고 하는 것이며,

‘해야  바의 소작(所作)이 끝이 없기 때문’이란, 부처님께서는 널리 모든 유정에 대하여, 성숙하지 않은 자는 성숙시키고, 이미 성숙한 자는 해탈시키고자 하시는 까닭에,  마땅히 해야  바인  사업은 궁극의 시기가 없는 것이므로 부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열반에 들지 않으시는 것이다. 

만약 이러함과 다르다면, 마땅히 성문이 궁극적으로 열반에 드는 것과 같아야 할 것이니, 그러하다면,  본원(本願)이 헛되어 결과가 없는 무과(無果)이어야 할 것이다.


▶論曰:何故受用身,非卽自性身?由六因故,一色身可見故`二無量佛衆會差別可見故`三隨勝解見自性不定可見故`四別別而見自性變動可見故`五菩薩聲聞及諸天等種種衆會閒雜可見故`六阿賴耶識與諸轉識轉依非理可見故,佛受用身,卽自性身,不應道理.

논문;어째서 수용신(受用身)은 자성신(自性身)이 아닌가? 여섯 가지 원인에 의거하기 때문이니,

첫째, 색신(色身)을   있기 때문이며, 둘째, 무량한 부처님의 여러 법회의 차이를   있기 때문이며,

셋째, 뛰어난 승해(勝解)를 따라 보는 자성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며,

넷째, 각각 다르게 보는 것은 자성을 변동하여   있기 때문이며,

다섯째, 보살ㆍ성문ㆍ여러 하늘 등의 갖가지 법회에 섞여서   있기 때문이며,

여섯째, 아뢰야식과 전식(轉識)의 전의(轉依)는 도리에 맞지 않음을   있기 때문이니, 

부처님의 수용신이  자성신이란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수용신이 자성신과 다른 점을 여섯 가지로 말하였다.

 

자성신(自性身)은 모든 여래의 법신(法身)이니, 일체법이 자재하게 전전하는 소의(의지처)이기 때문이며,  

수용신(受用身)은 법신에 의지하여서, 모든 부처님의 갖가지 법회에 나타나는 바로서 청정한 불국토에서 대승의 법락을 향수(享受)하기 때문이며,  (공덕을 수용하는 입장의 부처)

변화신(變化身) 역시도 법신에 의지하며,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이 머무는 도사다천궁(睹史多天宮, 도솔천궁)으로부터 몰(沒)하여, 생을 받는 수생(受生)하고, 하고자 함을 수용하는 수욕(受欲)하며, (성소작지 成所作智의 소현所現으로 초지初地 이하의 보살·2승乘·범부가 감각하는 불신佛身)

성을 나와서 출가하는 유성출가(踰城出家)하며, 외도의 처소에 가서 모든 고행을 닦고, 

대보리를 증득하며, 큰 법륜을 굴리는 전대법륜(轉大法輪)을 하고, 대열반에 드는 까닭이다. -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9 권 4


▶釋曰:今當顯示佛受用身,卽自性身,不應正理.色身可見故者,佛受用身,色身可見,非佛法身,由此非理,故受用身,非卽法身.

▷해석한다; 이제 마땅히 부처님의 수용신이  자성신이라는 것이 바른 도리에 맞지 않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색신(色身)을   있기 때문’이란, 부처님의 수용신은 색신을   있어도 부처님의 법신은 그렇지 않으니, 이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 까닭에 수용신은 법신이 아닌 것이며, 


又受用身,有佛衆會,差別可得,法身無有,如是差別.由此非理,故受用身,非自性身.又受用身,隨勝解見,如契經說:或見佛身,唯有黃色,或見佛身,唯有靑色,如是廣說.若受用身,卽自性身,此自性身,應不決定,體不決定,名自性身,不應正理.由此非理,故受用身,非自性身.

또한 수용신은 부처님의 여러 법회에서 차이를   있지만, 법신은 그 같은 차이가 없으니, 이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 까닭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닌 것이며,

또한 수용신은 뛰어난 이해를 따라서 보는 것이니, 계경(경전)에서 "부처님을 뵈오니 혹 오직 황색뿐이고, 부처님을 뵈오니 혹 오직 청색뿐이다”라고 설한 바와 같은 것으로,

자세히 말한다면, 만약 수용신이 자성신이라면  자성신은 마땅히 자체가 일정하지 않아야 하고, 일정하지 않은 것을 자성신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바른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이니, 이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 까닭에 수용신은 법신이 아닌 것이며, 

 

又受用身,一類有情,先見別異,卽此後時,復見別異,非佛法身,自性變動.由此非理,故受用身,非自性身.又受用身,有諸天等,種種衆會,常相閒雜,非自性身,有此閒雜.由此非理,故受用身,非自性身.

또한 수용신은  무리의 유정이 이미 다름을 보고, 그 다음의 때에 다시 다름을 불 수 있는, 사람이 보는 때를 따라 색상(色相)을 달리하지만, 부처님의 법신의 자성은 변동하지 않는 것이니, 이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수용신은 자성신이 아닌 것이며,

또한 수용신은 여러 하늘 등의 갖가지 법회에서 항상 서로 섞여 있지만, 자성신은 이렇게 섞여 있지 않으니, 이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 까닭에 수용신은 법신이 아닌 것이며, 


又轉阿賴耶識,得自性身,若受用身,卽自性身,轉諸轉識,復得何身?由此非理,故受用身,非自性身.由此六因,不應理故,二不成一.

또한 아뢰야식을 전환하여 자성신을 얻는 것이니, 만약 수용신이 자성신이라면, 모든 전식(轉識)을 전환한다면 다시 어떠한 불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 까닭에 수용신은 법신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도리에 맞지 않는 여섯 가지의 이유인 육인(六因)으로, 두 가지는 하나를 이루지 않는 것이다.

 

자성신은 진여와 진지(眞智)가 독존하는 이지명합성(理智冥合性)의 불신이다. 이것은 진여 그 자체가 지성(智性)을 띄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성신이 단순히 진여법성 그 자체만을 가리키지 않고 진여가 ‘현현(顯現)된’ 상태로서, 전의(轉依)에 의해 아공ㆍ법공의 2공(空)이 현현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3신과 5법(진여眞如ㆍ사지四智)의 포섭관계에 있으며,  자성신은 이지명합의 성격므로 진여와 대원경지에 포섭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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