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發心(발심)의 利益(이익)
菩薩發是心故(보살발시심고) 則得少分見於法身(즉득소분견어법신)
보살이 이 마음을 발하였기 때문에 곧 약간의 분야에서 법신을 볼 수 있으니,
[是心= 직심(直心), 심심(深心), 대비심(大悲心)
元曉 : 이것은 자리(自利)의 공덕을 밝힌 것이니, 이는 상사견(相似見)이므로 조금(少分)이라고 말한 것]
以見法身故(이견법신고) 隨其願力(수기원력) 能現八種利益衆生(능현팔종리익중생)
법신을 보기 때문에 그 원력에 따라 능히 여덟 가지의 모습을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하나니,
所謂從兜率天退(소위종도솔천퇴) 入胎住胎出胎(입태주태출태)
이른바 도솔천(지족천)으로부터 물러나 入胎=모태에 들어가고, 住胎=모태에 머물다가 出胎=모태에서 출생하고,
出家成道(출가성도) 轉法輪入於涅槃(전법륜입어열반)
출가하여 成道=도를 이루고, 轉法輪=법륜을 굴리다가 入涅槃=열반에 드시니,
[元曉 : 이것은 이타(利他)의 덕을 나타낸 것]
然是菩薩未名法身(연시보살미명법신)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법신보살이라 이름하지 못하는 것은,
以其過去無量世來(이기과거무량세래) 有漏之業未能決斷(유루지업미능결단)
그는 과거 한량없는 세상으로부터의 유루의 업을 아직 결연히 끊지는 못하여,
隨其所生(수기소생) 與微苦相應(여미고상응) 亦非業繫(역비업계)
그가 태어날 곳을 따라서 미세한 괴로움과 상응하긴 하지만, 역시 업에 얽매이진 않으니,
以有大願自在力故(이유대원자재력고)
대원의 자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업을 따르는 변역생사가 있으므로 아직은 법신보살이 아니며, 대원력을 지녀 수명의 길고 짧음을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범부가 혹업에 얽매여 받는 분단생사도 아닌 것. 유루의 업을 아직은 결연히 끊지를 못하여 태어날 곳을 따르는 이 점에서 법신보살과는 다름]
如修多羅中(여수다라중) 或說有退墮惡趣者(혹설유퇴타악취자)
수다라=경에, 혹은 "혹 어떤 이가 물러나 악한 세계로 떨어진다"고 설하는 것 같은 것은,
["본업경(本業經)"에서, "십주위 가운데 칠주(七住)보살위의 이전을 수행지에서 퇴전하는 퇴분(退分)이라고 말한다]
非其實退(비기실퇴) 但爲初學菩薩(단위초학보살) 未入正位(미입정위)
그것은 실제로 물러난 것=實退가 아니고, 초학의 보살이 아직 정위에 들지도 못하고서
而懈怠者恐怖(이해태자공포) 令使勇猛故(령사용맹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를 위해, 두렵게 하여 하여금 용맹하게 정진하게 하려는 까닭이다.
又是菩薩一發心後(우시보살일발심후) 遠離怯弱(원리겁약)
또한 이 보살은 한번 발심한 후에는 겁약함을 멀리 여의고
畢竟不畏墮二乘地(필경불외타이승지)
필경에 이승의 지위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若聞無量無邊阿僧祇劫(약문무량무변아승기겁) 勤苦難行(근고난행)
만약 무량무변의 아승기겁토록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부지런히 고행=勤苦難行을 하여서,
乃得涅槃(내득열반) 亦不怯弱(역불겁약)
이에 열반을 얻는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역시 겁약하지 않으니,
以信知一切法(이신지일체법) 從本已來(종본이래) 自涅槃故(자열반고)
일체의 법은 본래부터 스스로 열반이라고 믿어 알기 때문이다.
[自涅槃-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을 의미하는 것, 열반은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清淨涅槃) ·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의 4종열반(四種涅槃)이 있음]
(3) 解行發心(해행발심) -십주와 십행이 원만하여 십회향에서 발심
解行發心者(해행발심자) 當知轉勝(당지전승)
해(解)와 행(行)의 발심=解行發心이라는 것은, (신성취발심보다) 더욱 수승하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하나니,
[해행발심(解行發心)은 십주(十住)에서 십행(十行)의 자리에 나아가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행을 닦는 발심]
以是菩薩從初正信已來(이시보살종초정신이래)
이 보살은 처음 바른 믿음=初正信을 따른 이래,
於第一阿僧祇劫將欲滿故(어제일아승기겁장욕만고)
제1의 아승기겁에서의 (수행이) 장차 원만하게 다 채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於眞如法中(어진여법중) 深解現前(심해현전) 所修離相(소수리상)
진여법 가운데서 깊은 이해가 앞에 나타나고, 닦은 바 수행이 그 모습=相을 여읜 것이다.
以知法性體無慳貪故(이지법성체무간탐고) 隨順修行壇波羅蜜(수순수행단바라밀)
법성의 자체는 아끼거나 탐함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단바라밀=보시바라밀을 수행하며,
以知法性無染(이지법성무염) 離五欲過故(리오욕과고) 隨順修行尸波羅蜜(수순수행시바라밀)
법성은 오염됨=染이 없어, 오욕의 허물에서 떠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시바라밀=지계바라밀을 수행하며,
[五欲(오욕) 재물욕(財物慾), 색욕(色慾),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欲), 명예욕(名譽欲). 계(戒)라 함은 악행(惡行)을 제어하는 것으로, 신구의(身口意) 삼업의 악행을 제어하고 십선(十善)을 행하는 것]
以知法性無苦離瞋惱故(이지법성무고리진뇌고) 隨順修行羼提波羅蜜(수순수행찬제바라밀)
법성에는 괴로움=苦가 없어, 성냄의 번뇌=瞋惱를 떠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찬제바라밀=인욕바라밀을 수행하며,
以知法性無身心相(이지법성무신심상) 離懈怠故(리해태고)
법성에는 신심의 모습=상이 없어 게으름=懈怠를 떠나 있음을 알기 때문에,
隨順修行毘黎耶波羅蜜(수순수행비리야바라밀)
수순하여 비리야바라밀=정진바라밀을 수행하며,
以知法性常定體無亂故(이지법성상정체무란고) 隨順修行禪波羅蜜(수순수행선바라밀)
법성은 항상 안정되어 그 자체=體에 산란함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선바라밀=선정바라밀을 수행하며,
以知法性體明離無明故(이지법성체명리무명고) 隨順修行般若波羅蜜(수순수행반야바라밀)
법성의 자체=體는 밝아 무명을 여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4) 證發心(증발심)- 진여를 증득하여, 그 증득한 진여의 지(智)를 바탕으로 일으키는 발심
① 發心(발심)의 因緣(인연)
證發心者(증발심자) 從淨心地(종정심지) 乃至菩薩究竟地(내지보살구경지)
증발심이라함은 정심지(환희지)로부터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법운지)에 이르기까지이니,
證何境界(증하경계) 所謂眞如(소위진여) 以依轉識(이의전식) 說爲境界(설위경계)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이른바 진여이다. 전식을 의지하는 것으로, 설하여 경계(경계상)로 삼는다.
而此證者(이차증자) 無有境界(무유경계) 唯眞如智(유진여지) 名爲法身(명위법신)
그러나 이러한 증득에는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진여의 지혜=眞如智일 뿐이므로 이름하여 법신이라고 한다.
[진여를 아는 것은, 아는 지(智)와 알게되는 진여와의 사이에 주객(主客)의 분열이 없는 전체적 직관(直觀)이며,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법신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 진여지(智)는 곧 진여이다. 진여는 이(理)이지만 이지(理智)는 합일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근본지(根本智),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이다. 진여(眞如)는 이(理)이면서 본성이 지(智)이고, 그것이 바로 범부의 본성이며, 동시에 불(佛)의 본성인 법신(法身)이다. 법신은 바로 지신(智身)이다.]
是菩薩於一念頃(시보살어일념경) 能至十方無餘世界(능지시방무여세계)
이 보살은 한 찰나=一念頃에 능히 시방의 남김이 없는 세계=無餘世界에 이르러
供養諸佛請轉法輪(공양제불청전법륜)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진리의 바퀴=法輪을 굴리시기를 청하며,
[진여를 인식의 대상으로 관(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바로 진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진여를 자기의 인식대상으로 관하는 것은 지전(地前)의 보살]
唯爲開導利益衆生(유위개도리익중생) 不依文字(불의문자)
오직 중생을 개도하여, 이익되게 하기 위할 뿐이며, 문자에 의존하지 않으며,
或示超地速成正覺(혹시초지속성정각) 以爲怯弱衆生故(이위겁약중생고)
혹은 경지=地를 초월하여 속히 정각을 이룸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니, 이는 겁이 많고 약한 중생을 위한 까닭이며,
說我於無量阿僧祇劫(설아어무량아승기겁) 當成佛道(당성불도)
혹은 아=我는 무량아승기겁에서 마땅히 불도를 성취하게 된다고 설하기도 하는 것은,
以爲懈慢衆生故(이위해만중생고) 能示如是無數方便(능시여시무수방편) 不可思議(불가사의)
게으르고 교만한 중생을 위한 까닭이며, 능히 이와 같은 무수한 방편을 보이는 것이 불가사의하나,
而實菩薩種性根等(이실보살종성근등) 發心則等(발심즉등) 所證亦等(소증역등)
그러나 실은 보살의 종성은 뿌리(근기)가 같고, 발심 또한 같으며, 증득하는 바도 역시 같아서,
[種性根等(종성과 근기가 같음)- 성불할 근기가 같다는 말. 發心則等(발심이 같음)- 모든 보살이 성불하려는 발심을 하기 때문.所證亦等(증득한 것이 같음)은 모든 보살이 경계와 주관이 없음을 증득하였음을 말한다. ]
無有超過之法(무유초과지법) 以一切菩薩皆經三阿僧祇劫故(이일체보살개경삼아승기겁고)
초월해서 능가할 만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니, 일체의 보살은 모두 삼아승기겁을 경유했기 때문이다.
[無有超過之法(이를 넘어서는 법이 없음)은 보살들을 뛰어넘는 법이 없음]
但隨衆生世界不同(단수중생세계부동) 所見所聞(소견소문)
다만 중생의 세계는 한결같지 아니하여, 보는 바도, 듣는 바도,
根欲性異故(근욕성리고) 示所行亦有差別(시소행역유차별)
근기=根와 바라는 바=欲과 성품=性이 다르기 때문에 수행하는 바를 나타내는 것도 역시 차별이 있는 것이다.
[진여와 그가 지닌 덕상과 작용에 의지하여 권지(權智)와 실지(實智)의 수행을 나타내었음. 증발심(證發心)의 보살의 이와 같은 방편은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를 증득한 보살이 나타내는 후득지(後得智)로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뛰어난 작용이다. 후득지는 근본지의 뒤에 일어나는 지혜라고 해서 후득지라고 한다.]
② 증발심(證發心)의 상(相)
又是菩薩發心相者(우시보살발심상자) 有三種心微細之相(유삼종심미세지상)
또한 이 보살의 발심상에는 세 가지 마음의 미세한 상이 있으니, 무엇을 그 셋이라 하는가?
云何爲三(운하위삼) 一者眞心(일자진심) 無分別故(무분별고)
첫째는 진심으로, 분별이 없기 때문이며, (眞心(진심) - 무분별지(無分別智))
二者方便心(이자방편심) 自然遍行利益衆生故(자연편행리익중생고)
두 번째는 방편심으로, 자연스럽게 두루 수행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며,(方便心(방편심) - 후득지(後得智))
三者業識心(삼자업식심) 微細起滅故(미세기멸고)
셋째는 업식심으로, 미세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起滅하기 때문이다.
[業識心(업식심) - 두 가지의 지혜에 의거하는 아리야식. 사실을 말한다면 또한 전식과 현식이 있는 것이지만 다만 지금은 근본의 세상(細相)만을 대략 든 것]
③ 증발심(證發心)의 공덕성만(功德成滿)의 상(相)
又是菩薩功德成滿(우시보살공덕성만) 於色究竟處(어색구경처)
또한 이 보살의 수행공덕이 원만하게 성취되어, 색구경처에서
示一切世間最高大身(시일체세간최고대신)
모든 일체 세간의 가장 큰 몸을 나타내 보이나니,
謂以一念相應慧(위이일념상응혜) 無明頓盡(무명돈진) 名一切種智(명일체종지)
이른바 일념이 상응하는 지혜로써 무명이 단박에 다하는 것을 이름하여 일체종지라고 하니,
[일념상응혜(一念相應慧), 시각(始覺)의 마지막 찰나의 지혜가 본각(本覺) 진여의 근본지(根本智)와 합일되어, 심원(心源)을 각(覺)하는 지혜로서 여기서 망념이 모두 없어지는 것. 일체종지(一切種智), 일체제법의 본질[理]에 통달한 지혜로서 차별(差別)과 평등(平等)의 양자를 포함하는 지혜]
自然而有不思議業(자연이유불사의업) 能現十方(능현시방) 利益衆生(이익중생)
자연스럽게 불가사의한 업이 있어, 능히 시방에 나타나서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
④ 一切種智(일체종지)
問曰(문왈) 虛空無邊故世界無邊(허공무변고세계무변)
묻나니, 허공이 끝이 없기 때문에 세계가 끝이 없으며,
世界無邊故衆生無邊(세계무변고중생무변)
세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중생이 무변하며,
衆生無邊故心行差別亦復無邊(중생무변고심행차별역부무변)
중생이 끝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작용=心行의 차별도 또한 끝이 없다.
如是境界不可分齊(여시경계불가분제) 難知難解(난지난해) 若無明斷(약무명단)
이와 같이 경계는 한계 지음=分齋할 수 없으니, 難知=알기 어렵고 難解=이해하기 어려우니, 만약 무명이 끊어지면
無有心想(무유심상) 云何能了名一切種智(운하능료명일체종지)
심상이 있지 아니할 것이나, 어떻게 능히 알아 일체종지라고 이름하는가.
[일체제법의 본질을 안다는 점에서는 근본지(根本智)이고, 동시에 일체의 차별상을 조견(照見)하는 점에서는 후득지(後得智)]
答曰(답왈) 一切境界本來一心(일체경계본래일심) 離於想念(리어상념)
답하여 말하나니, 일체경계는 본래 일심으로서, 상념을 떠나 있으나,
[一切境界本來一心 離於想念이란 도리를 세운 것이다. 모든 경계는 일심을 벗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며 끝이 없지 않기 때문에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닌 때문에 상념을 여의었다고 하는 것]
以衆生妄見境界故(이중생망견경계고) 心有分齊(심유분제) 以妄起想念(이망기상념)
중생이 망상으로 경계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에 한계=分齊가 있는 것이다.
[以衆生妄見境界故 心有分齊란 보는 바가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있음을 밝힌 것]
不稱法性故(불칭법성고) 不能決了(불능결료)
허망하게 상념을 일으킴으로써, 법성에 稱合=맞지 않기 때문에 결코 요해하지 못하지만,
諸佛如來(제불여래) 離於見想(리어견상) 無所不遍(무소불편) 心眞實故(심진실고)
제불여래는 견해의 모습=見想을 여의었기 때문에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마음은 진실한 것이기 때문에,
[離於見想 無所不遍- 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바가 없음을 밝힌 것. 心眞實故 卽是諸法之性- 불심은 망상을 여의어 일심의 근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니, 망상을 여의었기 때문에 마음이 진실하다고 한 것. ]
卽是諸法之性(즉시제법지성) 自體顯照一切妄法(자체현조일체망법)
바로 이것이 제법의 본성=性이며, 자체가 일체의 허망한 제법=妄法을 환하게 비추고,
[일체종지(一切種智)는 중생의 일체망법이 불심(佛心)에 비치어 나타나게된 것으로서 이를 자체현조(自體顯照)라 한다.]
有大智用(유대지용) 無量方便(무량방편) 隨諸衆生所應得解(수제중생소응득해)
대지의 작용과 무량한 방편이 있어서, 온갖 중생이 응하는 것을 따라, 이해=得解하는 바에 따라,
皆能開示種種法義(개능개시종종법의) 是故得名一切種智(시고득명일체종지)
모두 능히 여러 가지 법의 뜻=法義를 열어 나타내니, 그러므로 일체종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④ 世間(세간)에서 부처를 보지 못하는 이유
又問曰(우문왈) 若諸佛有自然業(약제불유자연업)
또 묻나니, 만약 모든 부처님에게 자연업이 있어서,
能現一切處利益衆生者(능현일체처리익중생자)
일체의 모든 곳에 나타나시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분이라면,
一切衆生(일체중생) 若見其身(약견기신) 若覩神變(약도신변) 若聞其說(약문기설)
모든 중생이 그 몸을 보거나 신통변화를 보거나, 그 설법을 듣는다면
無不得利(무부득리) 云何世間多不能見(운하세간다불능견)
이익을 얻지 않음이 없을 것이나, 어찌하여 세간에서는 보지 못함이 많은가?
答曰(답왈) 諸佛如來(제불여래) 法身平等遍一切處(법신평등편일체처)
답하나니,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지만,
無有作意故(무유작의고) 而說自然(이설자연)
의도를 지음=作意가 없기 때문에 자연이라고 설하나니,
但依衆生心現(단의중생심현) 衆生心者猶如於鏡(중생심자유여어경)
다만 중생의 마음에 의지하여 나타낼 뿐이니, 중생의 마음이라는 것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鏡若有垢色像不現(경약유구색상불현) 如是衆生心(여시중생심)
만약 거울에 때가 끼어 있으면 색상이 나타나지 않으니, 이처럼 중생의 마음도
若有垢法身不現故(약유구법신불현고)
만약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제불여래인 진여법신의 위대한 작용인 보신과 화신은 항상 여여하지만 단지 중생이 처한 상황에 밝음과 어두움이 있을 뿐임을 문답으로 밝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