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用大(용대) - 본행(本行)과 본원(本願)과 방편(方便), 진여의 작용

 ㄱ. 用(용)의 原理(원리)

復次眞如用者(부차진여용자) 所謂諸佛如來(소위제불여래) 本在因地(본재인지)

다시 다음에 진여의 작용이란 이른바 제불 여래께서 본래 수행하는 지위=因地(보살 재위시)에 계시면서

發大慈悲(발대자비) 修諸波羅蜜(수제바라밀) 攝化衆生(섭화중생)

대자비심을 발하시어 모든 바라밀을 닦아 중생을 포섭하여 교화하시고, 

[諸佛如來 ~ 攝化衆生이라 한 것은 본행(本行)을 든 것]

立大誓願(입대서원) 盡欲度脫等衆生界(진욕도탈등중생계)

대서원을 세워 중생계를 평등하게 다 제도하여 해탈시키고자 하시고, 

亦不限劫數盡於未來(역불한겁수진어미래)

또한 한정 없는 겁수로 미래를 다하며, 

[立大誓願 ~ 盡於未來이란 본원(本願)을 든 것]

以取一切衆生如己身故(이취일체중생여기신고) 而不取衆生相(이불취중생상)

일체의 중생을 자기 몸과 같이 취하기 때문이나, 그러나 중생의 모습=衆生相을 취하지는 않음이다.

 

此以何義(차이하의)

이것이 무슨 뜻인가? 

謂如實知一切衆生及與己身(위여실지일체중생급여기신)

이른바 여실히 일체중생과 더불어 자기 몸이 

眞如平等(진여평등) 無別異故(무별이고)

진여로 평등하여 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중생은 미혹에 빠져 있을 뿐 그 성품은 다 평등하다. 이러한 진여평등(眞如平等)을 여실히 아는 여실지(如實知)가 '기신론'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

 

ㄴ. 大方便智(대방편지)와 法身(법신)의 작용

以有如是大方便智(이유여시대방편지) 除滅無明(제멸무명)

이와 같은 대방편지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제거하여 소멸하고 

[以有如是大方便智는 전인(前因)을 든 것. 除滅無明 見本法身은 자리(自利)의 果. 自然而 이하는 작용의 모습을 나타낸 것]

見本法身(견본법신) 自然而有不思議業(자연이유불사의업) 種種之用(종종지용)

본래의 법신을 보아, 저절로 자연스럽게 불가사의한 업의 갖가지 작용이 있으니,

卽與眞如等(즉여진여등) 遍一切處(편일체처) 又亦無有用相可得(우역무유용상가득)

곧 진여와 더불어 평등하여 일체처에 두루 미치되, 또한 역시 얻을 수 있는 작용의 모습=用相도 없다. 

何以故(하이고) 謂諸佛如來(위제불여래) 唯是法身智相之身(유시법신지상지신)

왜냐하면 이른바 제불여래는 오직 법신지상의 몸일 뿐이며,

第一義諦(제일의제) 無有世諦境界(무유세제경계) 離於施作(이어시작)

제일의제(진제(眞諦), 진여 본체의 진리)로서 세간=世諦의 경계가 없으며, 베풀고 만드는 것을 떠난 것이니, 

但隨衆生見聞(단수중생견문) 得益故說爲用(득익고설위용)

다만 중생이 듣고 봄에 따라 이익을 얻게 할 뿐이기 때문에 용이라고 설하는 것이다.(이와 같은 갖가지 작용이 있으므로 용대(用大)라고 한다.)

[특정한 불타의 중생구제행만이 진여의 용(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용대(用大)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진여의 용대는 법신(法身)으로서 행자(行者)의 내부, 외부에서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구하는 행자 자신 속에 불타의 용대(用大)가 내포되어 있어 바로 수행자 자신이 용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서 별도의 특정한 불타의 용대에 의하여 구제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때 불타의 응신(應身)은 바로 자기자신이 된다. 법신(法身)은 평등한 진여 그 자체이고 보신(報身)과 응신(應身)은 방편신(方便身)이다.]

 

ㄷ. 用(용)의 二種(이종) - 應身(응신)과 報身(보신)

此用有二種(차용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작용=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일자) 依分別事識(의분별사식) 凡夫二乘心所見者(범부이승심소견자)

첫째는 분별사식을 의지하여 범부와 이승의 마음에 보이는 것을 

[依分別事識이란 범부와 이승은 오직 식(識)뿐임을 알지 못하고 바깥의 경계에 있다고 계탁하는 것, 범부의 일상적 판단과 인식]

名爲應身(명위응신) 以不知轉識現故(이불지전식현고)

이름하여 응신이라 하니, 전식의 나타냄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응신(應身)은 주관(主觀)적 전식(轉識)이 보는 객관(客觀)적 현식(現識)]

見從外來(견종외래) 取色分齊(취색분제) 不能盡知故(불능진지고)

밖으로부터 온 것이라 보고, 색상의 한계=色分齊를 취하지만, 능히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色分齊 : 보이는 차별상의 내용이나 정도. 즉 불신(佛身)의 크기를 정하고, 32상(相) 80종호(種好) 등과 같은 불타의 상호(相好)를 주관적으로 결정하는 것]

二者(이자) 依於業識(의어업식) 謂諸菩薩從初發意(위제보살종초발의)

두 번째는 업식을 의지한 것으로, 이른바 모든 보살이 처음 뜻을 발함=初發意로부터 

乃至菩薩究竟地心所見者(내지보살구경지심소견자) 名爲報身(명위보신)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보이는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라고 하며,

[업식(業識)이 보는 불신, 즉 보신(報身) 주객의 대립이 사라진 업식(業識)에 반영되는 불타, 보살이 깊은 심층(心層)에서 불신을 보는 것]

身有無量色(신유무량색) 色有無量相(색유무량상) 相有無量好(상유무량호)

몸에는 한량없는 색신이 있고, 색신에는 한량없는 모습(형상)이 있으며, 모습(형상)에는 한량없는 상효=好가 있다.

[相은 몸에 특별히 잘생긴 것을 말하고, 好는 相 중에 자세한 모습]

所住依果(소주의과) 亦有無量種種莊嚴(역유무량종종장엄)

머무는 의보의 과보도 또한 한량없는 갖가지 장엄이 있으며,

隨所示現(수소시현) 卽無有邊(즉무유변) 不可窮盡(불가궁진) 離分齊相(리분제상)

나타나는 바에 따라 곧 끝이 없어, 궁극에 다할 수가 없고, 한정된 모습=分齊相을 여의었기에

隨其所應(수기소응) 常能住持(상능주지) 不毁不失(불훼불실)

그 상응함을 따라 항상 주지하면서 훼손하지도 않고, 퇴실하지도 않는다.

如是功德(여시공덕) 皆因諸波羅蜜等無漏行熏(개인제바라밀등무루행훈)

이와 같은 공덕은 다 모든 바라밀 등의 무루한 수행의 훈습에 의한 것이며, 

及不思議熏之所成就(급불사의훈지소성취) 具足無量樂相故(구족무량락상고) 說爲報(설위보)

불가사의한 훈습으로 인해서 성취한 것으로, 한량없는 안락한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에 설하여 보신이라고 한다.

又爲凡夫所見者(우위범부소견자) 是其麤色(시기추색) 隨於六道(수어륙도)

또 범부에게 보여지는 이것은 바로 그 거친 현색(대상)으로 육도를 따라서

各見不同(각견불동) 種種異類(종종리류) 非受樂相(비수락상) 故說爲應(고설위응)

각각 보는 것이 동일하지 않아, 갖가지 다른 무리가 안락한 모습을 수용하지 못하므로 설하여 응신이라고 한다.

[응신(應身)은 범부, 이승(二乘)의 전식(轉識)에 의하여 분별사식(分別事識)으로 유한(有限)한 불타를 보는 것, 보신(報身)은 보살(菩薩)이 그들의 수행의 결과로서 업식(業識)에 의하여, 과거의 순수 경험적 인식으로 보는 무한(無限)한 불타. '기신론'이 설하는 응신(應身)과 보신(報身)은 중생의 망심(妄心)에 나타나는 불타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에 대응하는 객관적 실재(實在)로서의 응신과 보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객관적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은 진여(眞如)의 용대(用大) 뿐이며 그것은 상이 없는 무상(無相)일 따름이다.]

 

③ 다시 밝히는 응신(應身)과 보신(報身) 

復次初發意菩薩等所見者(부차초발의보살등소견자)

다시 다음에 초발의보살 등이 보는 것은 

以深信眞如法故(이심신진여법고) 少分而見(소분이견)

진여법을 깊이 믿기 때문에 약간의 분야를 보아,

[以深信眞如法故 少分而見- 십해 중에 인공문(人空門)에 의하여 진여의 이치를 보는 것과 같다. 비슷하게 안 것이므로 少分而見이라 하였다.]

知彼色相莊嚴等事(지피색상장엄등사) 無來無去離於分齊(무래무거리어분제)

그 보신의 색상과 장엄 등의 현상이 옴도 없고, 감도 없어, 분제를 여의어, 

[그들이 보는 보신은 신체의 색상이나 장엄 등 모든 것들이 상주(常住)하고 있는 진여를 바탕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無來無去, 또한 보신의 색신(色身)은 그 크기에 있어서 한이 없는 것이므로 '離於分齊 ]

唯依心現不離眞如(유의심현불리진여)

오직 마음의 분별에 의지하여 나타났을 뿐, 진여를 여의지 않았음을 안다.

然此菩薩猶自分別(연차보살유자분별) 以未入法身位故(이미입법신위고)

그러나 이 보살은 오히려 스스로 분별할 뿐이지, 아직은 법신의 계위(지위)에는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보신을 보는 것이지만 그 보신(報身)은 지상(地上)의 보살이 보는 보신과는 뒤떨어진다.]

若得淨心(약득정심) 所見微妙(소견미묘) 其用轉勝(기용전승)

만약 정심지를 체득하며, 보는 바가 미묘하고, 그 작용은 더욱 수승해지며,

乃至菩薩地盡見之究竟(내지보살지진견지구경)

나아가 보살지가 다하여 보는 것이 구경이다.

若離業識則無見相(약리업식즉무견상) 以諸佛法身(이제불법신)

만약 업식을 여의면, 볼 만한 모습이란 없는 것이니, 

無有彼此色相迭相見故(무유피차색상질상견고)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이런 저런 현색의 모습으로 번갈아 드는 모습=迭相함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 보신을 본다는 것은 마침내 성불(成佛)하게 된 것을 의미하므로 업식(業識)이 완전히 소멸되어 진체(眞體)에 귀입(歸入)한 것이어서 전식(轉識)과 현식(現識) 또한 소멸된다. 그렇게 되면 보는 주관도 보이는 객관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므로 견상(見相)이란 있을 수 없다.]

 

問曰(문왈) 若諸佛法身離於色相者(약제불법신리어색상자)

묻나니, 만약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색상을 떠난 것이라면, 

云何能現色相(운하능현색상)

어떻게 색상을 나타낼 수 있는가?

答曰(답왈) 卽此法身是色體故(즉차법신시색체고) 能現於色(능현어색)

답하나니, 이 법신이 곧 색상의 본체=色體이기 때문에 능히 색상=色을 나타낼 수 있다.

所謂從本已來(소위종본이래) 色心不二(색심불이)

이른바 본래부터 색과 심이 둘이 아니며, 

[색심불이(色心不二)- 불이(不二)는 둘을 인정하면서, 그 둘을 초월하는 것. 단순한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와 같이 법신(法身)은 색상을 떠나 있으면서, 보신(報身) 응신(應身)의 색상을 나타내는 이유는 법신 그 자체가 보신, 응신의 본체이고 본래부터 색심불이(色心不二)이기 때문이다. 유심(唯心)과도 같은 뜻]

以色性卽智故色體無形(이색성즉지고색체무형) 說名智身(설명지신)

색의 본성(자성)이 곧 지혜=智이기 때문에, 색상의 본체=色體는 형상이 없는=無形임을 설하여 지신이라 이름한다.

[色體無形 說名智身- 보응이신(報應二身)이 나타나는 근거가 바로 지신(智身)이라는 것을 의미]

智性卽色故(이지성즉색고) 說名法身遍一切處(설명법신편일체처)

지의 성질=智性이 바로 색인 까닭에, 설하여 법신이 모든 곳=一切處에 두루 한다고 이름한다.

[진여(眞如)의 본성은 지(智)이고, 이 지(智)가 바로 색의 본성이므로 '색성(色性)이 곧 지(智)'라고 설하는 것]

所現之色無有分齊(소현지색무유분제) 隨心能示十方世界(수심능시시방세계)

나타내는 바 색상=色은 분제가 없기에,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능히 시방세계의 

無量菩薩(무량보살) 無量報身(무량보신) 無量莊嚴(무량장엄)

무량한 보살과, 무량한 보신, 무량한 장엄을 나타내고, 

各各差別(각각차별) 皆無分齊(개무분제) 而不相妨(이불상방)

각각의 차별이 다 분제가 없으며, 더욱이 서로가 방해하지 않는다.

此非心識分別能知(차비심식분별능지) 以眞如自在用義故(이진여자재용의고)

이는 심식의 분별로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여의 자재한 작용=用의 뜻이기 때문이다.

 

④ 생멸문(生滅門)에서 진여문(眞如門)으로 귀입(歸入)

復次顯示從生滅門卽入眞如門(부차현시종생멸문즉입진여문)

다시 다음에 생멸문으로부터 곧 진여문에 들어감을 나타내 보이나니,

所謂推求五陰(소위추구오음) 色之與心(색지여심)

이른바 오음(色受想行識)을 추구해 보면, 색 그것은 심과 더불어 존재하며,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오음이며, 이중 색(色)이외의 수상행식(受想行識)을 마음으로 본 것]

六塵境界畢竟無念(륙진경계필경무념) 以心無形相(이심무형상)

육진의 경계에는 필경 생각이 없는=無念이며, 마음에도 형상이 없으니, 

十方求之(시방구지) 終不可得(종불가득)

시방으로 구해도 끝내 얻을 수 없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경계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므로 마음을 떠나 따로 생각할 만한 독립된 형상이란 없다]

如人迷故(여인미고) 謂東爲西(위동위서) 方實不轉(방실부전)

마치 사람이 미혹한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나, 방향은 실제로 바뀌지 않는 것과 같이,

衆生亦爾(중생역이) 無明迷故謂心爲念(무명미고위심위념) 心實不動(심실부동)

중생 또한 그러하여, 무명의 미혹 때문에 마음=心을 일러 염이라고 하나 마음=心은 실제로 움직이지 않으니,

若能觀察(약능관찰) 知心無念(지심무념) 卽得隨順入眞如門故(즉득수순입진여문고)

만약 능히 관찰하여 심에 념이 없음=無念임을 알면, 곧 수순하여 진여문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이 점을 깊이 관찰하여, 항상 동요하는 망념(妄念)의 깊은 곳에, 동요하지 않는 부동(不動)의 심성(心性)을 발견하고, 마음은 곧 무념(無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생멸문(生滅門)을 떠나 진여문(眞如門)에 들어갈 수 있다.]

[이상으로 현시정의(顯示正義)에 있어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에 대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제 2 절 對治邪執(대치사집) - 그릇된 견해와 고집을 정론(正論)으로 치유하는 것

  (1) 二種 邪執(이종 사집)

對治邪執(대치사집) 一切邪執(일체사집) 皆依我見(개의아견)

삿된 집착을 대치하는 것은, 일체 삿된 집착 모두가 아견을 의지하므로, 

[我에 대한 견해가 아견(我見), 見이란 정견(正見)을 벗어난 잘못된 견해,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을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널리 해석하여 '고정적으로 보는 견해'] 

若離於我(약리어아) 則無邪執(즉무사집)

만약 '나'라는 아견을 여읜다면, 삿된 집착이 없을 것이다.

是我見有二種(시아견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러한 아견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두가지인가? 

一者人我見(일자인아견) 二者法我見(이자법아견)

첫째는 인아견이고 둘째는 법아견이다.

[인아(人我)란 개별적인 인간의 실체를 말한 것이며, 법아(法我)는 모든 사물의 실체를 말한다.

인아견(人我見)은 일반적으로 자아(自我)를 고정적 불변의 실체로 보는 것, 법아견(法我見)은 모든 현상을 구성하는 요소[法]를 또한 고정적 실체로 보는 견해]

 

① 人我見(인아견)

人我見者(인아견자) 依諸凡夫(의제범부) 說有五種(설유오종) 云何爲五(운하위오)

인아견이란 모든 범부들에 따라 설명하면, 다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다섯 가지인가?

 

一者(일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如來法身畢竟寂寞(여래법신필경적막)

첫째, 경전=修多羅에서, '여래의 법신은 궁극적으로 적막하여 

猶如虛空(유여허공) 以不知爲破著故(이불지위파착고) 卽謂虛空是如來性(즉위허공시여래성)

허공과 같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그것이 집착을 파하기 위한 것임을 모르고, 허공이 곧 여래의 본성(성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如來法身畢竟寂寞 猶如虛空- 여래의 본체를 설한 것인데, 범부는 현상계에 모습을 나타낸 불타의 본성을 상(相)으로 보고, 육신(肉身)이나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그릇된 견해]

云何對治(운하대치) 明虛空相是其妄法(명허공상시기망법) 體無不實(체무불실)

어떻게 다스려 대치해야 하는가? 허공의 모습=虛空相 또한 허망한 것=妄法이어서, 자체(본체)=體가 없고 실제=實이 아니며, 

以對色故有(이대색고유) 是可見相(시가견상) 令心生滅(영심생멸)

그것이 색에 대비하기 때문에 있다고 한것을 밝히며, 이것은 역시 볼 수 있는 모습=相이며,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하게 하지만,

以一切色法本來是心(이일체색법본래시심) 實無外色(실무외색)

일체의 색법은 본래 마음이기 때문에 실제로 밖의 색=外色은 없는 것이다. 

[범부가 허공이라고 눈으로 보는 것은 색(色)이므로 범부가 그렇게 인식하는 색(色)은 범부의 분별사식(分別事識)에 의한 것]

若無色者(약무색자) 則無虛空之相(즉무허공지상)

만약 색이 없는 것이라면 곧 허공의 모습=相 또한 없는 것이니,

所謂一切境界(소위일체경계) 唯心妄起故有(유심망기고유)

이른바 일체의 경계는 오직 마음으로서, 허망하게 망을 일으키기 때문에 있는 것이며, 

若心離於妄動(약심리어망동) 則一切境界滅(즉일체경계멸)

만약 마음이 헛된 움직임=妄動을 떠나면, 일체의 경계도 곧 사라지고(멸하여), 

唯一眞心無所不遍(유일진심무소불편)

오직 하나의 참된 마음=唯一眞心만이 두루 하지 않음이 없는 것으로,

此謂如來廣大性(차위여래광대성) 智究竟之義(지구경지의)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광대한 성품과 지혜=廣大性智의 궁극적 의미이며,

非如虛空相故(비여허공상고)

허공의 모습=虛空相과 같지 않다고 하는 까닭이다.

[如虛空- 여래(如來)의 광대한 본각(本覺)의 지혜이고 궁극적인 여래의 성품인 것이다. 따라서 如虛空'은 현상의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인식되는 허공이 아니라 본체의 세계에서 여래의 광대한 지혜가 일체처에 두루한 여실공(如實空) 여실불공(如實不空)을 의미하는 것]

二者(이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世間諸法畢竟體空(세간제법필경체공) 

둘째는 경=修多羅에서 '세간의 모든 법=諸法은 필경 본체가 공한=體空이며, 

乃至涅槃眞如之法(내지열반진여지법) 亦畢竟空(역필경공)

나아가 열반의 진여의 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필경에 공적하고, 

從本已來(종본이래) 自空離一切相(자공리일체상)

본래부터 스스로 공적=自空하여 일체의 색상을 여의었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以不知爲破著故(이불지위파착고) 卽謂眞如涅槃之性(즉위진여열반지성)

그것은 집착을 타파하기 위함인 줄 모르기 때문에, 곧 진여열반의 본성은 

唯是其空(유시기공) 云何對治(운하대치) 

오직 공적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니,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明眞如法身自體不空(명진여법신자체불공) 具足無量性功德故(구족무량성공덕고)

진여의 법신은 자체가 공적하지 않은=不空임을 밝히나니, 한량없는 본성의 공덕=性功德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唯是其空 이렇게 생각하면 절대무(絶對無)에 떨어지게 된다. 공이란 번뇌가 없으며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며, 영향을 받으면 언제든 작용하는 힘을 갖추고 있어서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고 있다. 진여는 여실공[不變]과 여실불공[隨緣]을 모두 갖추고 있다.]

三者(삼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如來之藏無有增減(여래지장무유증감)

세 번째, 수다라에서 말씀한, '여래의 장=如來藏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減, 

體備一切功德之法(체비일체공덕지법) 以不解故(이불해고) 

일체 공덕의 법을 갖추고 있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卽謂如來之藏(즉위여래지장) 有色心法自相差別(유색심법자상차별) 云何對治(운하대치) 

곧 여래장에는 색법과 심법이 있어 자체의 모습=自相을 차별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가?

以唯依眞如義說故(이유의진여의설고) 因生滅染義(인생멸염의) 示現說差別故(시현설차별고)

오직 진여의 뜻에만 의지하여 설명한 때문이니, 생멸의 물듦의 뜻으로 인하여 나타내 보여 차별을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여래장의 본성이 색법(色法)이 심법(心法)과 동일하다고 생각한 잘못된 집착을 타파한 것, 중도(中道)의 실상을 나타낸 설명 ]

四者(사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一切世間生死染法(일체세간생사염법)

네 번째는 수다라에서, '일체 세간의 생사하는 염법이 

皆依如來藏而有(개의여래장이유) 一切諸法不離眞如(일체제법불리진여)

모두 여래장에 의지하여 있는 것이며, 일체제법은 진여를 여의지 않고 있다.' 라고 설하는 것을 듣고

以不解故(이불해고) 謂如來藏(위여래장)

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른바 여래장 자체에 

自體具有一切世間生死等法(자체구유일체세간생사등법) 云何對治(운하대치) 

일체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인,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가?

[본체를 의지(依持)하는 것과 본체에 그대로 갖추어져 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인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以如來藏(이여래장) 從本已來(종본이래)  唯有過恒沙等諸淨功德(유유과항사등제정공덕)

여래장에는 본래부터 오직 항하의 모래 등을 능가하는 모든 청정한 공덕=淨功德이 있어서, 

不離不斷不異眞如義故(불리부단불리진여의고)

진여의 뜻을 여의지도 않고, 끊지도 아니하여 그(진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以過恒沙等煩惱染法(이과항사등번뇌염법) 唯是妄有(유시망유) 性自本無(성자본무)

항하의 모래 수보다 많은 번뇌의 염법은 오직 허망한 존재일 뿐, 본래부터 성품이 없는 것이어서 

從無始世來(종무시세래) 未曾與如來藏相應故(미증여여래장상응고)

시작이 없는 때부터 일찍이 여래장과 더불어 상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若如來藏體有妄法(야여래장체유망법) 而使證會永息妄者(이사증회영식망자)

만약 여래장의 체에 망령된 법=妄法이 있다면, 진여를 증득하고 이해=證會하여 망령됨을 영원히 끊는다는 것은

則無有是處故(즉무유시처고)

바로 근거=處가 없기 때문이다.

 

五者(오자) 聞修多羅說(문수다라설)

다섯째는 수다라에서 

依如來藏故有生死(의여래장고유생사) 依如來藏故得涅槃(의여래장고득열반)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사법이 있고,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열반을 체득한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

以不解故(이불해고) 謂衆生有始(위중생유시) 以見始故(이견시고)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생은 시작이 있다'고 하며, 시작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復謂如來所得涅槃(부위여래소득열반) 有其終盡還作衆生(유기종진환작중생)

다시 '여래가 체득한 열반에도 그 끝이 다함이 있어, 도리어 되돌아 가 중생이 된다'고 말한다.

云何對治(운하대치) 어떻게 대치해야 하는가?

以如來藏無前際故(이여래장무전제고) 無明之相亦無有始(무명지상역무유시)

여래장은 시간적으로 과거=前際가 없기 때문에 무명의 상도 시작이 있는 것이 아니며,

若說三界外(약설삼계외) 更有衆生始起者(갱유중생시기자) 卽是外道經說(즉시외도경설)

만약 삼계 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것은 외도 경전=外道經의 설명이 된다.

又如來藏無有後際(우여래장무유후제) 諸佛所得涅槃與之相應(제불소득열반여지상응)

또한 여래장에는 미래=後際가 있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깨서 체득하신 열반도 그것과 더불어 상응하여,

卽無後際故(즉무후제고)

바로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첫째, 둘째는 공(空)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서
(1) 본체의 공(空)을 현상계의 사공(事空) 즉 허공(虛空)으로 보는 것
(2) 본체 진여에는 번뇌가 없다는 여실공(如實空)을 본체마저도 아무것도 없는 공 무(空無)로 보는 것이며,
셋째, 넷째, 다섯째는 유(有)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서
(3) 본체의 여래장진여에 갖추어진 성공덕을 현상계의 차별있는 색심(色心)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
(4) 본체의 청정한 여래장진여에 염법(染法)이 있다고 보는 것
(5) 시원(始源)이 없는 생사(生死)와 열반에 시작과 끝이 있다고 보는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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