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眞如熏習(진여훈습) - 진여(眞如) 본래의 작용인 정화(淨化)시키는 힘

ㄱ. 자체상(自體相)의 훈습(熏習)의 작용

眞如熏習義有二種(진여훈습의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진여가 훈습하는=眞如熏習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自體相熏習(일자자체상훈습) 二者用熏習(이자용훈습)

첫째는 자체상훈습이며, 둘째는 용훈습이다.

自體相熏習者(자체상훈습자) 從無始世來具無漏法(종무시세래구무루법)

자체상훈습이란 비롯함이 없는(시작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무루의 법(번뇌가 없는 부동의 공)을 갖추어서 

[체대(體大)와 상대(相大)를 합친 작용이 자체상(自體相)훈습, 진여는 부사의업(不思議業)과 경계(境界)의 두 성품의 존재로서 중생에 훈습하고 있다.]

備有不思議業(비유불사의업) 作境界之性(작경계지성)

불가사의한 업을 갖추어 경계의 성품을 짓는다.(시각)

[여실불공의 힘이 중생의 망심에 나타나 시각(始覺)의 지(智)가 되는 것이 부사의업(不思議業), 여실공문의 경계, 이러한 본래 가지고 있는 경지(境智)의 힘에 의하여 암암리에 망심을 훈습하여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아하는 마음 등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作境界之性]

依此二義(의차이의) 恒常熏習(항상훈습) 以有力故(이유력고)

이 두 가지 뜻에 의지하여 항상 훈습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能令衆生(능령중생) 厭生死苦(염생사고) 樂求涅槃(락구열반)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게 하고, 열반을 구하게 하며,

自信己身有眞如法(자신기신유진여법) 發心修行(발심수행)

스스로 자기 몸에 진여의 법이 있음을 믿어, 발심하여 수행하게 한다.

 

ㄴ. 無量差別(무량차별)의 無明(무명)

問曰(문왈) 若如是義者(약여시의자) 一切衆生悉有眞如(일체중생실유진여)

묻나니, "만약 이와 같은 의미가 있다면 일체 중생이 다 진여가 있을 것이므로 

等皆熏習(등개훈습) 云何有信無信(운하유신무신) 無量前後差別(무량전후차별)

평등하게 다 같이 훈습을 할 것인데, 어찌하여 믿음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한량없이 차별하고 전후 차이가 있는가?

皆應一時(개응일시) 自知有眞如法(자지유진여법) 勤修方便(근수방편) 等入涅槃(등입열반)

모든 것은 마땅히 다 일시에 진여법이 있음을 스스로 알아, 방편을 부지런히 수행하여 열반의 도를 평등하게 깨달아 들어가야만 하리라."  

答曰(답왈) 眞如本一(진여본일) 而有無量無邊無明(이유무량무변무명)

답하나니, 진여는 본래 하나이나, 중생에게는 한량없고 가이없는 무명이 있음으로 해서,

從本已來(종본이래) 自性差別(자성차별) 厚薄不同故(후박불동고)

본래로부터 자성에 차별이 있게 되었으니, 두텁고 엶음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自性差別은 모든 중생들이 갖추고 있는 진여성품이 차별이 있다는 말이 아닌, 厚薄不同故 무명에 물든 정도가 다르다는 말]

過恒沙等上煩惱(과항사등상번뇌) 依無明起差別(의무명기차별)

갠지스 강(항하강)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상의 번뇌(소지장)가 무명을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며,

我見愛染煩惱(아견애염번뇌) 依無明起差別(의무명기차별)

아견과 아애의 물든 번뇌(번뇌장)가 무명에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니, 

如是一切煩惱(여시일체번뇌) 依於無明所起(의어무명소기)

이와 같이 일체의 번뇌는 무명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前後無量差別(전후무량차별) 唯如來能知故(유여래능지고)

전후의 한량없는 차별을 오직 여래만이 능히 알수 있기 때문이다.

 

ㄷ. 內熏(내훈)과 外熏(외훈)의 작용

又諸佛法(우제불법) 有因有緣(유인유연) 因緣具足(인연구족) 乃得成辦(내득성판)

그리고 또 모든 불법은 인=正因이 있고, 연=緣熏이 있으니, 인연이 모두 구족하여야 나아가 판별할 수 있으니,

[有因有緣 : 인(因)은 진여에 의한 훈습이다. 연(緣)은 선지식을 만남.]

如木中火性(여목중화성) 是火正因(시화정인) 若無人知(약무인지)

이는 마치 나무 가운데 불의 성품이 있는 것이 불의 정인이지만,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여 

不假方便(불가방편) 能自燒木(능자소목) 無有是處(무유시처)

방편을 빌리지 못한다면, 저절로 나무가 탈수 있다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衆生亦爾(중생역이) 雖有正因熏習之力(수유정인훈습지력)

중생도 그와 같아서, 비록 정인으로 훈습하는 힘이 있다 하여도,

若不遇諸佛菩薩善知識等(야불우제불보살선지식등) 以之爲緣(이지위연)

만약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 등을 만남으로서, 그 인연을 삼지 않으면, 

能自斷煩惱入涅槃者(능자단번뇌입열반자) 則無有是處(즉무유시처)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든다는 것은 옳다고 긍정할 곳이 없다.

若雖有外緣之力(약수유외연지력) 而內淨法(이내정법) 未有熏習力者(미유훈습력자)

만약 비록 밖으로의 연=外緣이 있다 하여도, 안으로 정법이 훈습하는 힘이 아직 있지 않은 자는, 

亦不能究竟(역불능구경) 厭生死苦(염생사고) 樂求涅槃(락구열반)

역시 구경에 생사의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의 도를 즐겨 구하지 못할 것이다.

若因緣具足者(약인연구족자) 所謂自有熏習之力(소위자유훈습지력)

만약 인과 연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른바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고, 

又爲諸佛菩薩等慈悲願護故(우위제불보살등자비원호고)

또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자비와 원력과 보호함이 되기 때문에,

能起厭苦之心(능기염고지심) 信有涅槃(신유열반) 修習善根(수습선근)

능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선근을 닦아 수습할 수 있으며, 

以修善根成熟故(이수선근성숙고) 則値諸佛菩薩示敎利喜(즉치제불보살시교리희)

선근을 수습하여 성숙한 까닭에, 곧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보여주고 가르쳐 주는 교법의 이익과 기쁨을 만나, 

乃能進趣向涅槃道(내능진취향열반도)

이에 승진하여 열반의 도로 나아갈 수 있다.

[나무에 있는 불의 성품은 중생불성의 정인에 비유하였고, 사람의 힘으로 나무를 비벼서 불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연인에 비유하였으며, 불이 붙어 나무를 태우는 것은 번뇌를 끊고 열반도를 증득하는 요인에 비유]

 

用熏習(용훈습)

用熏習者(용훈습자) 卽是衆生外緣之力(즉시중생외연지력)

용훈습(용대의 작용)이라는 것은 곧 중생의 외연적인 힘이니, 

如是外緣(여시외연) 有無量義(유무량의) 略說二種(략설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와 같은 외연에는 한량없는 뜻이 있지만, 간략히 말하면 두 가지이니,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一者差別緣(일자차별연) 二者平等緣(이자평등연)

첫째는 차별적인 조연=差別緣이고 둘째는 평등한 조연=平等緣이다.

[차별연은 개인별로 제각기 상이한 외연(外緣), 평등연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작용하는 외연(外緣)]

 

ㄱ. 差別緣(차별연) - 갖가지 응화신을 나타내는 것

差別緣者(차별연자) 此人依於諸佛菩薩等(차인의어제불보살등)

차별적인 조연=차별연이란 이 사람이 모든 불보살 등을 의지하여 

從初發意始求道時(종초발의시구도시) 乃至得佛(내지득불)

처음으로 뜻을 내어 불도를 구함=求道를 시작할 때부터 나아가 불과를 얻기까지(성불할 때까지),

於中若見若念(어중약견약념) 或爲眷屬父母諸親(혹위권속부모제친)

그 도중에 혹 보기도 하며, 혹 염(생각)하기도 하며, 혹은 권속, 부모와 여러 친척이 되기도 하며, 

或爲給使(혹위급사) 或爲知友(혹위지우) 或爲怨家(혹위원가) 或起四攝(혹기사섭)

혹은 급사가 되기도 하며, 혹은 자기를 알아주는 벗이 되기도 하고, 혹은 원수의 집이 되기도 하며, 혹은 사섭법을 일으키기도 한다.

乃至一切所作無量行緣(내지일체소작무량행연)

나아가 일체 짓는 바 모든 한량없는 수행의 연=行緣에 이르기까지, 

以起大悲熏習之力(이기대비훈습지력) 能令衆生增長善根(능령중생증장선근)

대비의 훈습하는 힘을 일으켜,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증장케 하여 

若見若聞得利益故(약견약문득리익고)

혹은 보기도 하고, 혹은 듣기도 하면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此緣有二種(차연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외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近緣(일자근연) 速得度故(속득도고)

첫째는 가까운 인연=近緣이니, 빨리 제도를 얻는 까닭이며, 

二者遠緣(이자원연) 久遠得度故(구원득도고) 是近遠二緣分別(시근원이연분별)

둘째는 먼 인연=遠緣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제도를 얻는=得度하는 까닭이니, 이것이 가깝고 먼 두 가지 외연의 분별이다.

復有二種(부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근원과 원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고 하는가? 

一者增長行緣(일자증장행연) 二者受道緣(이자수도연)

첫째는 수행을 증장시키는 연=增長行緣이고, 둘째는 도를 수지하는 연=受道緣이다.

[增長行緣- 보시, 지계 등의 모든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受道緣- 문·사·수(聞思修)를 들어 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ㄴ. 平等緣(평등연) - 승응신(勝應身)을 나타내어 평등하게 감응해 주는 것

平等緣者(평등연자) 一切諸佛菩薩(일체제불보살)

평등한 조연= 평등연이라는 것은 일체 부처님과 보살 모두가 

皆願度脫一切衆生(개원도탈일체중생) 自然熏習恒常不捨(자연훈습항상불사)

일체 중생을 해탈=度脫하기를 원하셨기에, 자연스럽게 훈습하시면서 항상 (중생들을) 버리지 않으시며

以同體智力故(이동체지력고) 隨應見聞(수응견문) 而現作業(이현작업)

동체지의 힘으로 (중생의) 보고 들음을 따라 출현하시어 업을 지으심을 나타내나니,

所謂衆生依於三昧(소위중생의어삼매) 乃得平等見諸佛故(내득평등견제불고)

이른바 중생들이 삼매에 의지하여 평등하게 모든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體用熏習(체용훈습) - 본체와 작용을 종합한 해설(진여 내훈(內熏)인 체훈습과 불보살의 외연(外緣)인 용훈습을 수행자의 입장에서 함께 설하는 것)

此體用熏習分別(차체용훈습분별) 復有二種(부유이종) 云何爲二(운하위이)

이 자체=體와 작용=用 훈습의 분별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一者(일자) 未相應(미상응) 謂凡夫二乘初發意菩薩等(위범부이승초발의보살등)

첫째는 아직 서로 상응(호응)하지 못함이니, 범부와 이승, 초발의 보살 등이 

[미상응(未相應)은 지(智)가 진여와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아직 분열되고 있는 상태] 

以意意識熏習(이의의식훈습) 依信力故而能修行(의신력고이능수행)

의와 의식으로 훈습하면서 믿는 힘=信力에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할 수는 있지만,

未得無分別心與體相應故(미득무분별심여체상응고)

아직 무분별심이 자체=體와 더불어 서로 호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수행자의 지(智)와 진여의 체(體)가 아직 서로 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未得自在業修行與用相應故(미득자재업수행여용상응고)

아직 자재한 업=自在業을 얻지 못하여 수행과 작용이 더불어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二者(이자) 已相應(이상응) 謂法身菩薩(위법신보살)

두 번째는 이미 서로 상응(호응)함이니, 이른바 법신보살(십지 보살)이 

[이상응(已相應)은 행자의 지(智)가 진여에 일치하여 무분별지(無分別智)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

得無分別心與諸佛智用相應(득무분별심여제불지용상응)

무분별심을 체득하여(체와 더불어 상응하여) 모든 부처님의 지혜=佛智의 작용=用과 더불어 상응함을 말한다.

唯依法力(유의법력) 自然修行(자연수행) 熏習眞如(훈습진여) 滅無明故(멸무명고)

오직 법력만을 의지하여 자연히 수행하며,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5. 染法․淨法(염법정법)의 斷不斷(단부단)의 의미

復次染法(부차염법) 從無始已來(종무시이래) 熏習不斷(훈습부단)

다시 염법은 시작 없는 때로부터 오면서, 훈습하여 끊어짐이 없으니,

[염법은 탐진치, 번뇌망상에 오염된 것, 제7식에 우리의 행위가 저장되어 있는 것]

乃至得佛後則有斷(내지득불후즉유단)

나아가 불과를 체득한 후에 (깨달은 뒤에야) 곧 단절한다.

[근본무명을 바탕으로 한 염법훈습은 성불될 때까지는 무시이래(無始以來) 그 훈습이 단절되지 않지만, 진여의 정법훈습은 부처가 된 후에도 끊임없이 영원히 계속된다]

淨法熏習(정법훈습) 則無有斷(즉무유단) 盡於未來(진어미래) 此義云何(차의운하)

정법의 훈습은 단절함이 없이, 미래에 있어서도 다하여 가니, 이 뜻이 무었인가?

以眞如法常熏習故(이진여법상훈습고) 妄心則滅(망심즉멸)

진여법으로 항상 훈습하기 때문이며, 허망한 마음=妄心이 곧 사라지면 

法身顯現(법신현현) 起用熏習故無有斷(기용훈습고무유단)

법신이 나타나 용훈습을 일으키기 때문에 단절함이 없다. 

 

(5) 三大(삼대) - 입의분에서 세운 근본사상은 법(法)과 의(義)로서, 법은 대승(大乘)의 체(體)이며 바로 우리의 중생심이다. 그렇다면 이 중생심이 어찌하여 대승인가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의(義)이며, 이 대승의 의(義)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 바로 생멸문(生滅門)에서 나타내는 체대(體大)·상대(相大)·용대(用大)의 삼대(三大)이다.

① 體大 相大(체대 상대)

 ㄱ. 眞如(진여)의 自體相(자체상)

復次眞如自體相者(부차진여자체상자)

다시 다음에 진여 자체의 모습=眞如自體相이라는 것은

[체대(體大)는 일체법의 진여(眞如)로서 그것은 중생심의 본체이면서 불타의 본체이며, 모두가 평등하고 증감이 없는 것]

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일체범부성문연각보살제불) 無有增減(무유증감)

일체 모든 범부, 성문, 연각, 보살과 모든 부처님이 더하거나 뺄 것=增減이 없으며, 

非前際生(비전제생) 非後際滅(비후제멸) 畢竟常恒(필경상항)

이전에 나지도 않았고, 이후에 소멸하지도 않으며, 필경에 영원하고 항상하여

從本已來(종본이래) 性自滿足一切功德(성자만족일체공덕)

본래부터 성품(본성) 자체가 일체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었으니,

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소위자체유대지혜광명의고)

이른바 자체에 광대한 지혜광명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며, 

遍照法界義故(편조법계의고) 眞實識知義故(진실식지의고)

법계를 두루 비추는 의미이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분별하여 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며, 

自性淸淨心義故(자성청정심의고) 常樂我淨義故(상락아정의고)

자성이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며, 상·락·아·정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시간적으로 과거·현재·미래가 다하도록 변함이 없는 것을 상(常), 중생의 괴로움 속에 있어도 그 괴로움이 간여하지 않는 것을 낙(樂), 생사에 처하여도 그 생사에 구속되지 않는 것을 아(我), 삼세육추의 생멸하는 모습으로 편력하면서도 오염되지 않는 것을 정(淨).]

淸凉不變自在義故(청량불변자재의고)

청량하고 불변하며, 자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불타는 뜨거운 탐진치(貪瞋癡)의 번뇌를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청량(淸凉)이고, 생(生)·주(住)·이(異)·멸(滅)이란 일심의 사상(四相)으로 번뇌가 옮길 수 없기 때문에 불변(不變)이며, 악업이 얽어매지 못하므로 자재(自在).] 

具足如是過於恒沙(구족여시과어항사) 不離不斷(불리부단)

이와 같이 항하사(갠지스강의 모래)보다 많은 수를 지나도록 여의지 않고, 단절되지 않으며,

[진여 자체(自體)에는 항하(恒河)의 모래보다 많은 성덕(性德)이 진체(眞體)를 떠나지 않는 것이어서 '불리(不離)', 무시이래(無始以來) 상속되어 끊임이 없기 때문에 '부단(不斷)']

不異不思議佛法(불이불사의불법) 乃至滿足(내지만족) 無有所少義故(무유소소의고)

다르지 않으며, 불가사의한 불법을 원만하게 갖춤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의미이기 때문에

[자체(自體)와 함께 있어 동미(同味)이므로 '불이(不異)', 또한 항하의 모래보다도 더 많은 뜻이 있어 '부사의(不思議)', 불타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불법(佛法)'.]

名爲如來藏(명위여래장) 亦名如來法身(역명여래법신)

이름하여 여래장이라 하며, 또는 이름하여 여래법신이라고도 한다.

[이 진여로부터 여래가 탄생하는 것이므로 여래장(如來藏), 또한 이름하여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고 한다.]

 

ㄴ. 眞如(진여)의 自體相(자체상)을 거듭 밝힘

問曰(문왈) 上說眞如其體平等(상설진여기체평등) 離一切相(리일체상)

묻나니, 위에서 설명하기를, "진여 그 자체=其體는 평등하여 일체의 모습을 떠났다"고 하였으나, 

云何復說體有(운하부설체유) 如是種種功德(여시종종공덕)

어찌하여 다시 자체에 이와 같은 갖가지 공덕이 있다고 설하는가?

答曰(답왈) 雖實有此諸功德義(수실유차제공덕의)

답하나니, 비록 실로 이 모든 공덕의 의미(뜻)가 있지만,  

而無差別之相(이무차별지상) 等同一味(등동일미) 唯一眞如(유일진여)

차별의 모습이 없고, 평등하고 동일한 한 가지 맛으로, 유일한 진여일 뿐이다.

[평등일미(平等一味)이고 유일진여(唯一眞如)- 진여는 어떠한 별개의 것과 비교하여 설한다면, 진여에 무한히 풍부한 공덕을 꺼내어 나타낼 수가 있으나, 진여 그 자체에 대하여 설한다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라든가 평등진여(平等眞如) 또는 일심(一心)이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

此義云何(차의운하) 以無分別離分別相(이무분별리분별상) 是故無二(시고무이)

이 의미가 무엇인가? 분별이 없으므로 분별의 대상을 여의었으니, 그러므로 둘이 아니다.

[진여의 공덕은 한 맛으로 같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중생들의 업식 때문에 다르게 보일 뿐이므로 무이(無二)] 

復以何義(부이하의) 得說差別(득설차별) 以依業識生滅相示(이의업식생멸상시)

다시 무슨 의미로서 차별하여 설할 수 있는가? 업식의 생멸하는 모습에 의지하여 나타낼 수 있으니, 

[以依業識生滅相示 - 생멸상 내에 모든 허물이 있지만, 다만 그 근본만을 들었기 때문에 업식(業識)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런 허물에 대하여 모든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此云何示(차운하시) 以一切法(이일체법) 本來唯心(본래유심) 實無於念(실무어념)

이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일체법이 본래 오직 마음일 뿐, 실제로는 망념이 없지만, 

而有妄心(이유망심) 不覺起念(불각기념) 見諸境界(견제경계) 故說無明(고설무명)

망심이 있어서, 깨닫지 못하여 망념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보므로, 그러므로 설하여 무명이라고 한다. 

[본래 마음은 망념이 없는 무념(無念)이지만, 현실세계의 우리의 마음은 망심(妄心)이며, 무명에 의하여 발동되어, 불각에서 염(念)을 일으켜, 분별의 인식세계를 만들어내어서 자기의 인식계가 실재라고 망상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무명(無明)'이라고 말한다.]

心性不起(심성불기) 卽是大智慧光明義故(즉시대지혜광명의고)

마음의 본성=心性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그것이 대지혜광명의 뜻이기 때문이다.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인식계가 '대지혜광명'이다. 이것은 범부가 외계를 보려하는 전식(轉識)의 작용과 대비(對比)되는 불타의 인식계이다.]

若心起見(약심기견) 則有不見之相(즉유불견지상)

만약 마음이 견을 일으키면 보지 못하는 모습=不見이 있는 것이나, 

[범부의 마음에는 망념이 일어나 보려고 하는 능견상(能見相)이 있어, 이 보려고 하는 능견상 자신은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불견(不見)의 상(相)'으로 남아, 그것이 마음의 암흑(暗黑) 부분이 된다. 마치 보고 있는 눈이 보는 눈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心性離見(심성이견) 卽是遍照法界義故(즉시편조법계의고)

마음의 성품(본성)이 견을 여의면, 이것이 곧 법계를 두루 비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若心有動(약심유동) 非眞識知(비진식지) 無有自性(무유자성)

만약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참답게 식별하여 아는 것이 아니며, 자성이 없어서,

[불타의 '진실식지(眞實識知)'는 범부가 본능적으로 분별하는 '지식(智識)'의 작용과 대비된다.]

非常非樂(비상비락) 非我非淨(비아비정) 熱惱衰變(열뇌쇠변)

항상함도 아니고=非常, 즐거움도 아니며=非樂, 아도 아니고=非我, 청정함도 아니며=非淨, 뜨거운 번뇌로 쇠잔하고=熱惱衰, 변하면=變, 

[불타의 '상락아정(常樂我淨)'은 범부가 고락에 대하여 벗어나려하고 유지하려는 집착의 집취상(執取相)과 대비]

則不自在(즉부자재) 乃至具有過恒沙等妄染之義(내지구유과항사등망염지의)

곧 자재하지 않으며=不自在, 나아가 갠지스강 모래들=恒沙보다 많은 헛된 물듦=妄染의 뜻을 갖추고 있어서,

對此義故(대차의고) 心性無動(심성무동)

이 뜻을 대비하기 때문에 마음의 성품=심성이 동하지 않으면 

則有過恒沙等諸淨功德相義示現(즉유과항사등제정공덕상의시현)

갠지스강 모래=恒沙보다 많은 모든 청정한 공덕의 상=功德相의 의미로서 나타냄=示現할 수 있으나,

若心有起(약심유기) 更見前法可念者(갱견전법가념자) 則有所少(즉유소소)

만약 마음이 일어나 다시 목전의 법을 보아 생각을 하는 자는 곧 부족한 것이 있을 것이다. 

如是淨法(여시정법) 無量功德(무량공덕) 卽是一心(즉시일심)

이와 같은 청정한 법=淨法의 한량없는 공덕은 곧 일심이므로,

更無所念(갱무소념) 是故滿足(시고만족) 名爲法身如來之藏(명위법신여래지장)

다시 생각할 바가 없으니, 이런 까닭으로 원만한 구족이기에 이를 이름하여 법신여래의 장=身如來之藏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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