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2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1

 

▶論曰: 復次聲聞乘中 ,亦以異門密意, 已說阿賴耶識. 如彼『增一阿笈摩』說: 世閒衆生, 愛阿賴耶` 樂阿賴耶`

欣阿賴耶` 憙阿賴耶. 爲斷如是阿賴耶故, 說正法時,恭敬攝耳` 住求解心`法隨法行.

▷논문; 또한 성문승 중에도 역시 다른 견해의 비밀스런 뜻의 이문밀의(異門密意)으로써 이미 아뢰야식을 말하였으니,

'증일아급마(增一阿笈摩, 증일아함경 增一阿含經)'에서 “세간의 중생은 아뢰야를 사랑하고, 아뢰야를 즐기며, 아뢰야를 기뻐하고, 아뢰야를 좋아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아뢰야를 단멸하기 위해서 정법(正法)을 말씀하실 때에는 공경히 듣고,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안주하여 법을 따르고 법을 행하는 것이다. 

 

*이문밀의(異門密意), 이문(異門)은 관찰점을 달리하는 견해이고,

밀의(密意)는 본래 취지를 은밀히 해서 표면에 나타내지 않음을 말한다.

 

如來出世, 如是甚奇希有正法, 出現世閒. 於聲聞乘『如來出現四德經』中, 由此異門密意, 已顯阿賴耶識.

於大衆部阿笈摩中, 亦以異門密意, 說此名根本識, 如樹依根.

化地部中,亦以異門密意,說此名窮生死薀,有處有時,見色心斷,非阿賴耶識中,彼種有斷.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시어, 이렇게 매우 기이하고 희유한 정법이 세간에 출현하게 되었으니,

성문승의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중의 '여래출현사덕경(如來出現四德經)'에서는 이러한 이문밀의(異門密意)에 의거해서 아뢰야식을 나타내었으며, 

대중부(大衆部)의 '아함경' 중에서도 역시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나무가 뿌리에 의지하는 수의근(樹依根) 같다고 하여서, 근본식(根本識)이라 이름하였으며,

화지부(化地部) 중에서도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궁생사온(窮生死蘊)이라 이름하였으니,  

어느 곳, 어느 때에는 물질과 마음이 단절됨을 보지만 아뢰야식 안의 종자는 단절됨이 없는 것이다.

ㅡ두 번째로 성문승에 이미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제8식을 설하신 것을 밝혔다. 

 

*나무가 뿌리에 의지하는, 수의근(樹依根), 근본식의 범어는 mūla-vijāna로서, 마치 나무가 뿌리(mūla)에 의존하는 것과 같이, 이 식이 모든 식의 근본이 된다는 뜻이다.

*궁생사온(窮生死蘊)은 궁생사, 즉 생사를 거듭하는 것을 마칠 때까지, 범부의 6도 윤회나 성현의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이르기까지, 윤회하는 주체라는 뜻이다.


▶釋曰:世閒衆生,愛阿賴耶者, 是摠摽句. 如其次第, 復以餘句, 約就現在`過去`未來三時別釋.

復有別義, 謂於現在愛阿賴耶, 於過去時樂阿賴耶. 由先世樂阿賴耶故, 復於今世,欣阿賴耶.

由樂由欣阿賴耶故, 於未來世, 憙阿賴耶.

▷해석한다; “세간의 중생은 아뢰야를 사랑한다”는 것은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구절이고, 

차제(次第)의 다시 다른 구절에서는, 현재ㆍ과거ㆍ미래의 삼시(三時)를 요약하여 별도로 해석하였으며, 

다시 다른 뜻으로는, 과거에 아뢰야를 즐겼으므로 현재에서 아뢰야를 사랑하는 것이며, 

선세(先世)에서 아뢰야를 즐김으로써 다시 금세(今世)에서 아뢰야를 기뻐하고,  

이렇게 아뢰야를 즐기고 기뻐함으로써 미래세(未來世)에서도 아뢰야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차제(次第)는 순서(順序) · 차례(次例) · 단계(段階) 또는 변화하는 순서를 뜻한다.

 

法隨法行者, 如教行故. 大衆部中, 名根本識,如樹依根者,謂根本識, 爲一切識,根本因故,

譬如樹根, 莖等摠因;若離其根,莖等無有. 阿賴耶識, 名根本識,當知亦爾.

 “법을 따르고 법을 행한다”는 것은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이며, 

“대중부에서는 나무가 뿌리에 의지함과 같이 근본식(根本識)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근본식이 모든 식의 근본 원인(因)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나무의 뿌리는 줄기 등의 전체적인 원인(因)으로서, 만약  뿌리를 떠난다면, 줄기 등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 같은 것이니,  

아뢰야식을 근본식이라 이름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化地部中,異門說爲窮生死薀, 爲釋此因說有處等.言有處者, 謂無色界, 無有諸色.

言有時者,謂無想等,諸定位中,無有諸心. 非阿賴耶識中,彼種有斷者,謂阿賴耶識中,色心熏習,由此爲因,色心還有.

화지부(化地部)의 다른 견해로서는 궁생사온(窮生死蘊)이라 하였으니,

 원인(因)을 해석하기 위해서 ‘어느 곳의 유처(有處)’ 등이라 말하였다. 

‘어느 곳의 유처(有處)’라고 말하는 것은 무색계에서는 모든 물질(色)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어느 때의 유시(有時)’라 말하는 것은 무상정(無想定) 등의 여러 선정의 지위에서는 일체의 마음(心) 작용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아뢰야식 안에서 그것의 종자는 단절이 없다”는 것은 아뢰야식에서의 물질(色)과 마음(心)의 훈습은 이것이 원인이 되기 때문에 물질과 마음이 다시 있게 되는 것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신 다음 해에 마하가섭의 주재로 왕사성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제1회 결집이 열렸다. 아난(阿難)이 경(經)을 독송하고 우바리(優婆離)가 율(律)을 송출(誦出)하여, 원시불교의 기본 경전과 계율이 확립되었다. 
제1회의 칠엽굴(七葉窟)의 결집에 참여하지 못한 여러 승려들은 부루나(富樓那)의 주재로 굴외결집(窟外結集)을 열어서 이의를 제기하였는데, 이와 같이 불교 교단의 밑바닥에서는 신구의 두 경향이 대립하였다. 

입멸하신 후 약 100년이 지나서 계율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주장하는 비구들이 있어 논쟁이 일어나서, 계율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의 근본이부根本二部)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근본 분열(根本分裂)을 계기로 인도 불교는 부파불교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근본분열 후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상좌부와 대중부 모두에서 부파적 분열이 거듭되어 지말분열(枝末分裂)하여서 18부로 나뉘어서, 근본이부와 지말분열에 의한 18부를 합하여 총 20부의 부파를 소승20부(小乘二十部)라 한다. 그 후 기원 전후에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일어나서 대승불교도들은 부파불교를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폄하하여 칭하였다.

소승20부로서는 상좌부 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 설산부(雪山部) · 독자부(犢子部) · 법상부(法上部) · 현주부(贅胄部) · 정량부(正量部) · 밀림산부(密林山部) · 화지부(化地部) · 법장부(法藏部) · 음광부(飮光部) · 경량부(輕量部)의 11부와

대중부 계통의 대중부(大衆部) · 일설부(一說部) · 설출세부(說出世部) · 계윤부(鷄胤部) · 다문부(多聞部) · 설가부(說假部) · 제다산부(制多山部) · 북산주부(北山住部)의 9부의 합계 20부를 든다.  

 

▶論曰:如是所知依, 說阿賴耶識爲性`阿陁那識爲性`心爲性` 阿賴耶爲性` 根本識爲性`

窮生死薀爲性等. 由此異門, 阿賴耶識, 成大王路.

▷논문; 이와 같이 알아야  바의 의지처인 소지의(所知依)는 아뢰야식을 성(性)으로 삼고, 

아타나식을 성(性)으로 삼으며, 마음을 성(性)으로 삼고, 아뢰야를 성(性)으로 삼고, 근본식을 성(性)으로 삼으며, 

궁생사온을 성(性)으로 삼는다는 등으로 말하여 지는 것이니,  

이러한 다른 견해들로 인하여 아뢰야식은 대왕(大王)의 길을 이루는 것이다.


▶釋曰:由此異門,阿賴耶識,成大王路者,是極廣義.

▷이러한 다른 견해들로 인하여 아뢰야식이 대왕의 길을 이룬다는 것은 매우 넓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ㅡ진제 역본에는 대왕의 길이라 표현하는 이유를 가지 의미로써 자세히 설하였다.

첫째는 대왕의 길은 곧고 갈림길이 없으며,

둘째는 넓고 평탄하여 성숙하고,

셋째는 광명에 장애가 없으니, 

본식(本識)도 그러해서, 곧고 갈림길이 없다는 것은 선정이 의심할 바가 없음에 비유하고,

넓고 평탄하여 성숙하다는 것은 대승ㆍ소승이 모두 이런 의미를 널리 펴는 것에 비유한 것이며,

광명에 장애가 없다는 것은 무량한 도리를 인용함으로써 식을 증명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論曰:復有一類,謂心意識義一文異. 是義不成, 意`識兩義差別可得,當知心義亦應有異.

▷논문; 또한 어떤 다른 부류에서는, 심의식(心意識)은 하나의 뜻으로, 글자가 다르다고 하였으나, 이러한 의미는 성립되지 않는다. 

의(意)와 식(識)의  차이는 쉽게   있으며, 심(心)의 뜻에 역시 차이가 있음을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復有一類, 謂薄伽梵所說, 衆生愛阿賴耶,乃至廣說, 此中五取薀說名阿賴耶. 有餘復謂貪俱樂受, 名阿賴耶.

有餘復謂薩迦耶見,名阿賴耶.此等諸師由教 及證愚阿賴耶,故作此執.

다시 어떤 부류에서는, 박가범(薄伽梵,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생은 아뢰야를 사랑하고…등의 자세히 설명하신 것"에서는 5취온(五取薀)을 아뢰야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며,

다른 논사는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낙수(樂受, 감수작용)를 아뢰야라 이름한다고 말하였고, 

또 다른 논사는 살가야견(薩迦耶見, 유신견)을 아뢰야라 이름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들 여러 논사들은 교의와 증명에 의거해서 아뢰야에 어리석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5취온(五取薀)5온(五蘊, pañca-skandha)은 생멸 · 변화하는 모든 것, 즉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구성하고 있는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을 말한다. 이들을 각각 색온(色蘊: 육체, 물질) · 수온(受蘊: 지각, 느낌) · 상온(想蘊: 표상, 생각) · 행온(行蘊: 욕구, 의지) · 식온(識蘊: 마음, 의식)이라고도 한다.  
5온설(五蘊說)을 사유하는 것은 개인 존재인 나(我)는 이 5가지 집합적 요소로 분해되고, "나(我)"라고 할 때에는 결국 이 5가지 집합적 요소들 중의 하나 혹은 다수를 가리켜 하는 것이며, 이들 5가지 집합적 요소들 밖에 나(我)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의 이치를 깨우쳐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5온은 유루와 무루에 모두 통하고, 유루에 통한 5온을 5취온(五取蘊) 또는 5수음(五受陰)이라 하고,

무루에 통한 5온을 5무루온(五無漏蘊)이라고 한다. 즉 무루에 통한 5온은 유위 무루이며 이것은 곧 4성제 중의 도제(道諦), 즉 '열반(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如是安立阿賴耶名, 隨聲聞乘安立道理,亦不相應. 若不愚者,取阿賴耶識安立 彼說阿賴耶名, 如是安立, 則爲最勝.

云何最勝? 若五取薀,名阿賴耶,生惡趣中,一向苦處, 最可厭逆, 衆生一向, 不起愛樂, 於中執藏不應道理, 以彼常求速捨離故.

이와 같이 아뢰야라는 명칭을 안립함에 있어서 성문승에서 안립하는 도리가 있으나, 역시 상응하지 않으며,

만약 어리석지 않은 자라면 아뢰야식을 취하여  말씀을 안립하나니, 아뢰야라는 명칭을 이와 같이 안립하는 것을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으로 삼는 것이다.

어찌하여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인 것인가?

만약 5취온(五取薀)을 아뢰야라고 이름하면, 살기 괴로운 악취(惡趣) 중에서는 괴로운 악취(惡趣) 태어나는 것을 한결같이 가장 혐오해야 할 것이나, 그곳의 중생은 사랑하고 즐거운 감정을 한결같이 일으키지 않으니, 그 악취 집착한다는 도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그들은 항상 속히 떠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ㅡ대승이 안립한 명의(名義) 가장 뛰어난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若貪俱樂受,名阿賴耶, 第四靜慮以上無有, 具彼有情,常有厭逆,於中執藏 ,亦不應理.

若薩迦耶見, 名阿賴耶, 於此正法中, 信解無我者,恒有厭逆, 於中執藏,亦不應理. 阿賴耶識內我性攝,

만약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낙수(樂受, 감수작용)를 아뢰야라고 이름한다면 제 4 정려(四靜慮, 사선) 이상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니, 그 사정려를 갖춘 유정은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싫어하여서 따르지 않으니, 그러한 경지에서 집착한다는  역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만약 살가야견(薩迦耶見, 유신견)을 아뢰야라고 이름한다면,  정법에서 무아를 믿고 이해하는 자는 항상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싫어하여서 따르지 않으니, 그러한 가운데에서 집착한다는  역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아뢰야식은 내면의 자아의 성품인 아성(我性)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사정려(四靜慮), 4선(四禪)은 수행을 통해 심(尋) · 사(伺) · 희(喜) · 낙(樂) · 심일경성(心一境性)을 개발함으로써 욕계(欲界)의 번뇌, 즉, 욕계의 혼면(惛眠) · 의(疑) · 진에(瞋恚) · 도회(掉悔) · 탐욕(貪欲)의 5개(五蓋)를 일시적으로 또는 항상 조복(단멸이 아님)한 상태에서 들어갈 수 있는 색계의 네 가지 세계 또는 마음 상태를 뜻한다. 즉, 우리가 욕계와 함께하는 즉 상응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이 세계에 있듯이, 이 경지 즉 마음 상태들과 함께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4선에 든 것이다. 일시적으로라도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비록 일시적이더라도 욕계에서 색계로 들어갈 수 있다. 즉, 초선에 들어갈 수 있다.
초선 一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一 욕계를 떠남으로서 생기는 희열과 행복을 느끼는 경지
제2선 一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一 선정으로부터 생기는 희열과 행복을 느끼는 경지
제3선 一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一 희열을 떠나 마음이 안정되어 뛰어난 행복만을 느끼는 경지
제4선 一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一 행복마저도 떠나 평온(捨)하여 마음(念)이 청정하고 평등한 경지, 사무량심(捨無量心)의 경지 ㅡ위키

 

雖生惡趣,一向苦處,求離苦薀,然彼恒於阿賴耶識, 我愛隨縛,未嘗求離. 雖生第四靜慮以上, 於貪俱樂,

恒有厭逆,然彼恒於阿賴耶識,我愛隨縛. 雖於此正法, 信解無我者, 厭逆我見, 然於藏識, 我愛隨縛.

是故安立阿賴耶識,名阿賴耶,成就最勝.

비록, 한결같이 괴로운 악취(惡趣) 태어나서 괴로움의온인 고온(苦蘊)을 여의고자 하지만, 그는 항상 아뢰야식에 대한 아애(我愛)를 따라서 계박되어 있어서 여의지 않으니, 제 4 정려(四靜慮, 사선) 이상에서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싫어하여서 거스르고자 하지만, 항상 아뢰야식에 대한 아애의 계박이 따르는 것이다. 

 정법에 대해서 무아를 믿고 이해하는 자는 아견을 혐오하긴 하지만, 장식(藏識)에 대한 아애를 따라서 계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아뢰야라고 이름하여 안립하는 것이 가장 뛰어난 최승(最勝)인 것이다.


▶釋曰:不愚者者,謂諸菩薩, 彼所宣說,阿賴耶識, 理成立故. 惡趣中者,謂餓鬼`傍生及那落迦,諸惡趣中.

一向苦處者,謂一向受非愛業果處. 於彼有時,樂受生者,是等流果,生彼所受異熟果者,唯是其苦.

▷해석한다; ‘어리석지 않은 불우자(不愚者)’란 모든 보살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립된 아뢰야식의 이치를 널리 설하 때문이다. 

‘괴로움의 세계인 악취(惡趣)’는 아귀ㆍ방생(傍生, 축생)ㆍ나락가(那落迦, 지옥) 모든 괴로움의 세계인 악취(惡趣)이다. 

‘한결같이 괴로운 곳의 일향고처(一向苦處)’란 한결같이 애착하지 못할 과(業果)를 받는 곳으로, 때로는 그곳에서도 즐거움의 감수작용인 낙수(樂受)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것은 등류과의 생겨남이며, 그것이 받는 이숙과(異熟果) 오직 괴로움뿐인 것이다.

 

방(傍)은 누운 것, 생(生)은 생물이란 뜻으로서 몸을 가로 눕히고 다니는 축생을 말한다.

나락가(那落迦)는 범어 naraka의 음역으로서 지옥이며, 줄여서 나락(奈落)이라고 한다.

등류과(等流果)는 원인과 결과가 같은 부류인 것을 말한다. 지옥에서 때로는 즐거움을 초감하는 경우는 이전에 그럴 만한 같은 부류의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고, 지옥의 과보인 이숙과(異熟果) 자체는 순전히 괴로움뿐이다.

등류습기(等流習氣), 선 · 악 · 무기의 3성의 기준에서 습기(종자)의 성질과 같은 성질의 과보, 즉 등류과(等流果)를 일으키는 습기(종자)이다. 
8식과의 관련하여서는, 등류습기는 전7식의 유루와 무루의 선 · 악 · 무기의 업 즉 모든 성질의 업이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아뢰야식 내에서 생성되고 증장되는 종자로, 이 종자가 친인연(親因緣)이 되어서 해당 종자의 성질과 같은 선 · 악 · 무기의 과보 즉 선 · 악 · 무기의 현행법(現行法)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전7식에 의해 선한 업이 제8아뢰야식에 훈습되어 아뢰야식 내부에 선한 종자가 생성 및 증장된 경우, 그 선한 종자로부터 일어나는 결과는 선한 언행과 사상이 되어서 몸 · 입 · 뜻으로 표현되는 현행법(現行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숙과(異熟果), 다르게 익는, 이숙(異熟)은 선(善)이 쌓여서 그 결과 무기의 낙(樂)으로 성숙(成熟) 또는 변환되고, 불선 즉 악(惡)이 쌓여서 그 결과 무기의 고(苦)로 성숙 또는 변환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이숙(異熟)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과보가 이숙과(異熟果)이며, 전생의 선악업의 총체적인 결과물로서 현생에서 태어날 때 받은 몸과 마음이다.

 

第四靜慮以上無有者,謂卽第四靜慮及上諸地. 具彼有情者, 謂生所得.

阿賴耶識, 內我性攝者,謂諸衆生攝取此識爲內我性. 求離苦薀者, 求離苦受.

然於藏識我愛隨縛者, 謂於阿賴耶識,執我起愛隨縛不離.

“제4 정려(四靜慮, 사선)이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색계의 제4선천(禪天)과  이상의 모든 지위인 무색계의 4천(天)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을 갖춘 유정’이란 생을 받게  것을 말하며, 

‘아뢰야식은 내면의 자아의 성품인 아성(我性)에 포섭된다’는 것은 모든 중생은  식을 거두어 취하여서 내면의 자아의 성품으로 삼는 것을 말하며,

‘괴로움의 5온인 고온(苦薀)을 여읠 것을 구한다’는 것은 괴로움의 감수작용인 고수(苦受)를 여읠 것을 구한다는 것이며,

‘장식(藏識)에 대한 아애를 따라 계박되어 있는 것'이란, 아뢰야식을 자아로 집착하여 애착을 일으키고 따라서 계박되어서 떠나지 못하는 것 말하는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