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1

세친(世親보살 지음현장(玄奘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① 3

 

▶論曰:復次云何得知有染污意? 謂此若無, 不共無明, 則不得有, 成過失故.

又五同法亦不得有,成過失故.所以者何? 以五識身, 必有眼等俱有依故. 又訓釋詞亦不得有, 成過失故.

又無想定,與滅盡定,差別無有, 成過失故. 謂無想定,染意所顯, 非滅盡定;

若不爾者, 此二種,定應無差別. 又無想天,一期生中,應無染污, 成過失故, 於中若無我執`我慢.

又一切時,我執現行, 現可得故, 謂善`不善`無記心中;

若不爾者,唯不善心,彼相應故, 有我`我所煩惱現行, 非善`無記.是故若立俱有現行,非相應現行,無此過失.此中頌曰:

▷논문에서; 또한 어떻게 염오의(染汚意)가 있음을   있는 것인가? 

만약 이 염오의(染汚意)가 없다면  불공무명(不共無明)이 있을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며,  

또한 다섯 가지의 5동법(五同法, 오식), 즉 오식(五識)도 역시 있을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5식신(五識身)에는 반드시 안근 등의 구유의(俱有依, 증상연의)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가르치고자 해석하는 말의 훈석사(訓釋詞) 역시도 있을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며, 

또한 무상정(無想定, 상想이 없는 선정)과 멸진정(滅盡定, 심상心想이 멸한 적정의 선정)의 차이도 있을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니, 무상정은 염오의가 나타난 바이고, 멸진정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가지 선정에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며,

또한 무상천(無想天)의  기간, 즉 그 일기(一期)의 생(生)에서 염오가 없어야 할 것이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만약 아집ㆍ아만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느 때나 아집의 현행함이 역시 있을  있기 때문이니,

이른바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의 마음에서 인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직 불선의 마음만이 그것과 상응할 것이기 때문이나, 아집은 불선의 마음만이 아니라, 선(善)과 무기(無記)의 마음에도 있기 때문이다.

나(我)ㆍ나의 것(我所)이라는 번뇌가 현행하면 선(善)도 무기(無記)도 아니니므로, 따라서 만약 다른 미혹과 상응하지 않고 의(意)와 함께 하는 아집인, 구유현행(俱有現行)을 안립하고,

불선과 상응해서 일어나는 아집인, 상응현행(相應現行)이 아니라면 이러한 과실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게송으로 말하나니, 

 

*2무명(二無明),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무명(相應無明) 

불공무명(不共無明)은 독두무명(獨頭無明)ㆍ독행무명(獨行無明)이라고도 하며, 탐(貪)ㆍ진(瞋)ㆍ치(癡)와 상응하지 않고 단독으로 생기하여 진지(眞智)를 장애하는 근본적인 무명이다.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癡)의 무명으로서, 제7식에만 상응하고 다른 식에는 수반되지 않는다.

상응무명(相應無明)은 공무명(共無明)이라고도 하며, 6식(識)에 상응하는 무명으로서, 탐(貪) · 진(瞋) · 만(慢) · 의(疑) · 견(見, 惡見)의 5가지 근본번뇌와 상응하면서 생기(生起)하는 무명이다.

*구유의(俱有依),증상연의(增上緣依)라고도 한다. 두 가지 이상이 서로 의지하여 동일한 결과를 낼 때 동시 의존의 인과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심왕(心王)이나 심소(心所)와 동시에 있으면서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5근(根)ㆍ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을 말한다.

*증상연(增上緣)은 인연(因緣) · 등무간연(等無間緣) · 소연연(所緣緣) · 증상연(增上緣)의 4연(四緣)의 하나이다. 

증상연은 다른 유위법(有爲法)을 생기하는데 힘을 주는 적극적 원인의 유력증상연(有力增上緣)과 다른 유위법이 생기는 것을 장애하지 않는 소극적 원인의 무력증상연(無力增上緣)을 말한다. 따라서, 유위와 무위의 일체법은 그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일체의 유위법에 대해 증상연이 되는 것이다. 
증상연은 설일체유부가 주장한 능작인(能作因) · 구유인(俱有因) · 동류인(同類因) · 상응인(相應因) · 변행인(遍行因) · 이숙인(異熟因)의 6인설(六因說)에서 그 적용 범위가 가장 넓은 능작인에 해당한다.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그 자신을 제외한 유위와 무위의 다른 모든 존재(法)를 능작인으로 삼는다.

*2무심정(二無心定)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

무상정(無想定),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는 원인이 되는 선정으로, 인도의 외도가 닦는 선정이다. 그들은 상념을 생사의 근본이라 생각하고 6식의 현행을 소멸하고자 하여서, 색계의 제4선(禪)에서 닦아서, 이것을 얻으면 참열반을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

색계의 4선천 중 제4선천에 속한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날 인(因)이 되는 선정으로, 6식(六識)의 심(心) · 심소(心所)가 모두 없어져 6식(六識)의 활동, 즉 심상(心想)이 완전히 정지되게 하는 선정이다. 상(想)의 심소를 위주로 하여 멸하기 때문에 '상(想)이 없는 선정'이라는 뜻의 무상정(無想定)이라고 이름한다.

*멸진정(滅盡定),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도 하며, 진제(眞諦) 역본에는 멸심정(滅心定)으로 되어 있다. 무상정은 외도 수행자도 도달할 수 있지만 멸진정은 불교에서 말하는 뛰어난 선정이다. 무상정에서는 아직 제7 염오의(染汚意)가 작용하고 멸진정에서는 소멸된다. 멸진정은 성자가 모든 심상(心想)을 없애고 적정하기를 원하여 닦는 선정이며, 6식의 심(心)ㆍ심소(心所)와 제7식의 유루의 일분(一分)을 현행하지 못하게 하는 분위(分位)이므로, 무색계의 제4 유정천(有頂天)에 해당된다. 소승에서 불환과(不還果)와 아라한과의 성자가 닦는 멸진정은 유루정(有漏定)으로서 제7식의 아집작용까지 소멸된다. 대승의 보살이 이것을 닦는 것은 무루정(無漏定)으로서, 제7식의 법집작용까지 소멸된다.

멸진정은 성자가 모든 심상(心想)을 다 없애고 적정(寂靜)으로 닦는 선정으로, 부처와 구해탈(俱解脫)의 아라한이 그 지닌 바 역량을 바탕으로 득(得)하는 선정으로 그 경지가 거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적정(寂靜)에 비견된다.

*현행(現行, abhisaṃskara)은 어떤 법(존재)이 인연의 화합으로 나타나서 현재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일체법의 종자(種子)가 함장되어 있고 인연이 갖추어지면 그 인연을 따라 해당 종자가 전변하여 현재의 법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현행은 실체의 형태로 미래에 존재하건 혹은 종자의 형태로 아뢰야식 안에 존재하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법이 현재 시점에서 나타나는 것, 즉 생(生) · 기(起) · 발(發) · 생겨남 · 일어남 · 나타남 · 일으킴을 말한다. 끌어들여 일으킨다 또는 끌어들여 현재화시킨다는 뜻에서 인기(引起)라고도 한다. 현재 시점으로 일어난다 또는 현재 시점으로 일으킨다는 뜻에서 현기(現起)라고도 한다.


“若不共無明, 及與五同法, 訓詞二定別, 無皆成過失.

만약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癡)의 불공무명과 오동법(五同法, 오식)과

가르치고자 해석하는 말의 훈석사(訓釋詞)와

 선정(멸진정과 무상정)에 차이가 없다면 모두 과실을 이루네.


無想生應無, 我執轉成過, 我執恒隨逐, 一切種無有.

무상천의 생(生)에 아집의 유전이 없다면 과실을 이루어야 하리니, 

아집이 항상 수축(隨逐)함이 모든 종류에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라네.


離染意無有, 二三成相違, 無此一切處, 我執不應有.

염오의(離染意)를 떠나서는 불공무명과 오동법(五同法, 오식)의  가지가 없을 것이니,

가르치고자 해석하는 말의 훈석사(訓釋詞)와  두 선정의 차이와

무상천의 생에 아집이 항상 따른다는, 세 가지에 위배되는 것이라.

이러함이 없다면, 마땅히 일체처아집이 없어야 하리라.


眞義心當生, 常能爲障㝵, 俱行一切分, 謂不共無明.”

참된 의미의 진의심(眞義心)이 장차 일어나는 것에 항상 장애가 되는 것이니,

모든 부분에 함께 작용함을 불공무명(不共無明)이라 이름한다네.

 

此意染污故,有覆無記性, 與四煩惱,常共相應.如色` 無色二纏煩惱, 是其有覆無記性攝,

色無色纏爲奢摩他所攝藏故;此意一切時,微細隨逐故.

 의(意)는 염오이기 때문에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며, 사번뇌(四煩惱)와 항상 함께 상응하며,

색계ㆍ무색계의 이전(二纏)의 번뇌와 같이, 이것은  유부무기성에 포섭되며,

색계ㆍ무색계의 전(纏, 수번뇌)은 사마타가 섭장(攝藏)하는 바이니, 

 의(意)는 어느 때나 항상 미세하게 따르기 때문이다.

 

*유부무기(有覆無記)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성품이다. 제7식이 선ㆍ불선이 아니므로 무기이면서 아집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부무기성이 되는 것이다.

유부무기(有覆無記)는 '가림(覆) 또는 막음(障)이 있는 무기(無記)'로,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이지만 번뇌와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무기를 말한다. 
유부무기는 이숙과(異熟果, 현생에서 타고나는 몸과 마음)를 낳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도(聖道, 출세도, 8정도, 도제, 또는 무루지에 의한 정도)를 가리며,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이런 뜻에서 유부무기를 부정(不淨)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유부무기는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맑고 명료하게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수행에 방해가 되는 무기이다.
예를 들어, 욕계의 번뇌들 중에서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의 2가지 염오견과 상2계(上二界)의 모든 번뇌들, 즉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번뇌들이 유부무기(有覆無記)에 속한다. 상2계(上二界)의 모든 번뇌들은 번뇌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유부(有覆)이고 선정의 힘에 의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무기(無記)이다.

*전(纏)은 범어 paryavasthāna의 번역어로서 번뇌, 특히 수번뇌(隨煩惱)의 다른 이름이다. 마음을 얽어매어 선(善)을 행할 수 없게 방해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釋曰:此文復以餘道理, 成立染污意. 何等名爲成立道理? 謂此若無, 不共無明卽不得有.

不共無明其相云何? 謂未生對治, 能障眞智愚. 此於五識理不相應, 是處無容能爲障故.

若處有能治,此處有所治,亦不得在.

▷해석한다; 이 문장은 또한 다른 도리로써 염오의(染污意)를 성립하는 것이니, 무엇을 성립(成立)의 도리(道理)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만약 이것이 없으면  불공무명이 있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불공무명의 상(相)은 어떠한 것인가? 

아직 다스림을 생겨나게 하지 않은, 즉 다스리는 수도의 대치도(對治道)에 의지해서 참다운 지혜의 진지(眞智)가 생기지 않은, 미생대치(未生對治)일 때, 능히 참다운 지혜의 진지(眞智)를 장애하는 어리석음이다. 

이 불공무명은 5식에 대해서는 이치적으로 상응하지 않으니, 안근 등 5관(官)에 의지하는 5식 자체에는 장애될 만한 뜻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처소로서 능히 다스림이 있다면 이곳에는 다스려짐이 있기 때문이니, 즉 능히 대치(對治) 지혜가 생겨나는 곳에서는 반드시 다스려지는 미혹의 장애가 있으나, 5식에는 능히 다스릴 수 있는 능치(能治)가 없기 때문에 다스려지는 소치(所治)도 역시 없는 것이다.

 

染污意識, 此非有者,餘惑現行,名不成故. 若立此煩惱在染污意識, 卽應畢竟成染污性, 云何施等心得成善?

與此煩惱,恒相應故. 若說有意識與善法俱轉, 此卽與彼煩惱相應, 是染意識引生能治,不應道理.

또한, 염오의식(染污意識)에도 있을  없으니,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차비유(此非有)’라는 것은 무명이 염오의식에 없는 까닭을 밝힌 것으로, 다른 미혹이 현행하여 불공(不共)의 명칭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니,  이미 염오의식이라면 다른 미혹이 현행하여 상응함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만약 이곳에 불공무명이 있다면 그것은 불공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약  번뇌가 염오의식에 존재한다고 안립한다면, 궁극적으로 염오의 성품인, 염오성(染污性)이 되는 것이니, 어떻게 보시 등의 마음이 선(善)이   있겠는가?  번뇌와 항상 상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의식(意識)과 선법(善法)이 함께 유전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번뇌와 상응하는 것이 될 것이니, 이 염오의식이 능히 다스릴 수 있는 능치(能治)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若說染污意俱轉有善心, 卽此善心引生能治,此生彼滅,卽無過失.

又五同法故.所以者何? 譬如眼等五識,必有眼等五根,爲俱有依,如是意識亦應決定,有俱有依.

만약 염오의(染污意)와 함께 유전하는 선심(善心)이 있다고 말한다면,  선심 능히 다스릴 수 있는 능치(能治)를 이끌어내어서 이 선심이 생겨나고, 그 염오(染汚)가 멸할 것이므로  과실이 없는 것이다.

또한 오동법(五同法, 오식) 때문이니, 무슨 까닭인가? 

비유하자면 안식 등의 오식(五識)은 반드시 안근 등의 오근(五根)이 있어서 구유의(俱有依)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이 의식(意識) 역시도 반드시 구유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ㅡ5식과 비교해서 염오의(染汚意) 성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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