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제1권
세친(世親) 보살 지음, 현장(玄奘) 한역.
2. 소지의분(所知依分) ① 2
如是廣慧! 由似瀑流, 阿陁那識,爲依止`爲建立故, 若於爾時, 有一眼識生緣現前,卽於此時,一眼識轉.若於爾時,乃至有五識身生緣現前,卽於此時,五識身轉.
광혜여! 이와 같이 폭포의 흐름과 비슷한 아타나식(阿陁那識)을 의지하여서 건립한 까닭에,
만약 그 때에 안식이 일어나는 조건이 현전한다면, 곧 안식이 일어나고,
만약 오식 (五識)이 일어나는 조건이 현전한다면 곧 5식이 일어나느니라.
廣慧!如是菩薩, 雖由法住智爲依止`爲建立故, 於心意識 秘密善巧.
然諸如來, 不齊於此施設彼 爲於心意識一切秘密善巧菩薩.
광혜여! 이와 같이 보살이 비록 여래의 교법에 안주하여 법문을 안립하고 시설하는 지혜인, 법주지(法住智)에 의지하여서 건립하고, 심(心)ㆍ의(意)ㆍ식(識)의 비밀한 밀의에 잘 통달한다 할지라도,
모든 여래께서는 이것에 한하여 시설한 그를 심의식의 비밀한 뜻에 잘 통달한 보살이라고 하지는 않느니라.
廣慧!若諸菩薩, 於內各別如實不見阿陁那 不見阿陁那識` 不見阿賴耶不見阿賴耶識`
不見積集不見心` 不見眼色及眼識`不見耳聲及耳識` 不見鼻香及鼻識` 不見舌味及舌識`
不見身觸及身識`不見意法及意識,是名勝義善巧菩薩. 如來施設彼,爲勝義善巧菩薩.
광혜여! 만약 모든 보살이 내면적으로 각각 다르게 여실한 그대로의 아타나(用)를 보지 않고,아타나식(體)을 보지 않으며,
아뢰야를 보지 않고 아뢰야식을 보지 않으며, 적집을 보지 않고 심(心)을 보지 않으며,
안근(根)과 색경(境) 및 안식(識)을 보지 않고, 이근(根)과 성경(境) 및 이식(識)을 보지 않으며,
비근과 향경 및 비식을 보지 않고, 설근과 미경 및 설식을 보지 않으며, 신근과 촉경 및 신식을 보지 않고,
의근과 법경 및 의식을 보지 않아야 비로소 승의(勝義)에 잘 통달한 보살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여래께서 시설하셔서 그를 승의에 잘 통달한 보살이라 하느니라.
廣慧!齊此名爲於心`意`識一切秘密善巧菩薩, 如來齊此,施設彼,爲於心`意`識一切秘密善巧菩薩.
광혜여! 이러함에 한하여 심ㆍ의ㆍ식의 모든 비밀한 뜻에 잘 통달한 보살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여래께서는 이것에 한하여 시설하셔서 그를 심ㆍ의ㆍ식의 모든 비밀한 뜻에 잘 통달한 보살이라고 하느니라.’”
此伽他中,重顯彼義. 阿陁那識者,所釋異名. 甚深細者,難了知故.
一切種子如瀑流者, 次第轉故,一切種子, 剎那展轉,如瀑水流, 相續轉故.
恐彼分別執爲我者, 一行相轉故,分別執可得.
이 가타(伽他, 게송)에서 거듭 그 뜻을 나타내고 있으니,
‘아타나식(阿陁那識)’은 해석되는 것의 다른 명칭이며,
‘매우 심오하고 미세한, 심심세(甚深細)’란, 분명히 알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며,
‘일체종자식은 폭포의 흐름과 같다’는 것은 차례로 전전하기 때문에 모든 종자가 찰나에 전전함은 폭포수의 흐름과 같이 상속해서 전전하기 때문이며,
‘그것을 분별하고 집착해서 자아로 삼을까 두렵기 때문’이란 하나의 행상으로서 전전하기 때문에 분별해서 집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論曰:何緣,此識亦復說名阿陁那識? 執受一切有色根故` 一切自體取所依故.
所以者何?有色諸根,由此執受,無有失壞,盡壽隨轉. 又於相續, 正結生時, 取彼生故,執受自體.
是故, 此識亦復說名阿陁那識.
▷논문에서; 무슨 까닭에 이 식을 또한 아타나식(阿陁那識)이라 이름하는 것인가? 모든 감각기관의 유색근(有色根)을 집수(執受)하기 때문이요, 일체의 자체(自體)가 취하여 의지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모든 감각기관의 유색근(有色根)이 이러한 집수로 인해서 파괴되지 않고, 수명을 다할 때까지 따라서 전전하는 것인가?
또한 상속해서 생을 맺을 때, 다시 그 생을 취하기 때문에 자체를 집수하는 것이므로, 이 식을 아타나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아타나(阿陀那)는 범어 ādāna의 음역으로서, 유지ㆍ보존의 뜻이며, 제8식이 신체와 종자를 유지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제8식의 본질적 성질인 자상(自相)과 체성(體性)에는 여러 분위(分位), 즉 여러 성격 또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제 8식을 칭하는 명칭이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가 있다.
1.아뢰야식(阿賴耶識) 2.무몰식(無沒識)
3.장식(藏識) 또는 택식(宅識) 4.이숙식(異熟識) 또는 비파가식(毘播迦識)
5.아타나식(阿陀那識) 또는 집지식(執持識) 6.심(心)
7.소지의(所知依) 8.종자식(種子識) · 일체종식(一切種識) 또는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9.무구식(無垢識) 또는 아마라식(阿摩羅識) 10.본식(本識)
11.초식(初識) 또는 초찰나식(初剎那識) 12.초능변식(初能變識)
13.제1식(第一識) 14.식주(識主)
▶釋曰:執受一切有色諸根故者,所以者何? 有色諸根, 由此執受, 盡壽隨轉, 用此爲釋.
謂由眼等有色諸根, 阿賴耶識所攝受故, 非如死身靑瘀等位.
▷해석한다; '모든 감각기관의 유색근(有色根)을 집수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무슨 까닭에 모든 감각기관의 유색근(有色根)은 이 집수로 인해서 수명을 다할 때까지 따라서 전전하는가’에 대한 해석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안근 등의 여러 감각기관인 유색제근(有色諸根)은 아뢰야식의 섭수하는 바이기 때문에 시체의 푸르딩딩한 모습의 청어(靑瘀) 등과는 다른 것이다.
若至死時, 此捨離故, 彼卽便有靑瘀等位. 是故定知此執受故,乃至壽限, 彼不失壞.
만약 죽음에 이르게 된 때에는 이 아뢰야식을 여의기 때문에 그 감각기관들이 곧 시체의 푸르딩딩한 청어(靑瘀) 등의 단계가 있게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하나니, 이 집수(執受) 때문에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것이 파괴되지는 않는 것이다.
一切自體取所依故者, 又於相續, 正結生時, 取彼生故, 執受自體, 用此爲釋.
謂由此識, 是相續識故, 於相續正結生時, 能攝受生一期自體,亦爲此識之所攝受,
由阿賴耶識中,一期自體熏習住故. 彼體起故, 說名彼生. 受彼生故,名取彼生.
由能取故,執受自體, 以是義故, 阿賴耶識,亦復說名阿陁那識.
‘모든 것의 자체가 취하는 의지처(所依)이기 때문’이란, ‘또한 상속해서 바로 생을 받을 때, 그 생을 취하기 때문에 자체를 집수한다’에 대한 해석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이 식은 상속식(相續識)이기 때문에, 상속해서 바로 생을 맺을 때 능히 그 생의 한평생의 자체를 섭수하는 것 역시도 이 식이 섭수하는 것이니,
아뢰야식에서 한평생의 자체는 훈습하여 머물기 때문이며, 그것의 자체가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생(生)’이라 말하는 것이며, ‘그 생(生)’을 수용하기 때문에 ‘‘그 생(生)’을 취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능히 취함으로 인해서 자체를 집수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 때문에 아뢰야식을 또한 아타나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청어(靑瘀), 시체의 부정한 양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에 시체가 부어서 마치 곡식 담긴 자루처럼 팅팅한 모습의 창상(脹相),
시체의 가죽과 살이 문드러지고 오장이 썩는 모습의 괴상(壞相),
시체의 온몸이 피고름으로 더러워진 모습의 혈도상([血塗相),
시체에서 고름과 벌레가 흘러나오고 살이 흩어져서 여러 군데에 낭자한 모습의 농란상(濃爛相),
시체가 바람에 쏘이고 비에 씻겨서 피고름이 엉겨 푸르퉁퉁한 모습의 청어상(靑瘀相),
시체가 새ㆍ짐승ㆍ구더기에 파먹히는 모습의 영상(霙相),
가죽과 살이 없어지고 뼈만 붙어 있으면서 머리와 다리가 뒤섞인 모습의 산상(散相),
백골이 낭자한 모습의 골상(骨相),
불에 타서 그슬리어 악취가 나고 재가 되는 모습의 소상(燒相)이 있다.
5욕락을 즐기는 미혹을 없애기 위한 관법인 부정관(不淨觀) 가운데 9상관(想觀)은 이러한 시체의 부정한 모습들을 관찰한다.
ㅡ심(心)ㆍ의(意)ㆍ식(識)명칭을 해석한다.
▶論曰:此亦名心,如世尊說:心`意`識三.
此中意有二種: 第一與作等無閒緣 所依止性, 無閒滅識能與意識作生依止;
第二染污意,與四煩惱恒共相應: 一者薩迦耶見`二者我慢`三者我愛`四者無明,
此卽是識雜染所依. 識復由彼第一依生, 第二雜染,了別境義故.等無閒義故`思量義故,意成二種.
▷논문에서; 이것을 또한 심(心)이라 이름하나니, 세존께서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세 가지를 말씀하신 바와 같다.
여기서 의(意, manas)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의 의지처의 성품으로, 무간멸(無間滅)의 식은 능히 의식(意識)이 생기하는 의지처가 되며,
둘째는 염오의(染汚意)로서 사번뇌(四煩惱)와 항상 함께 상응하나니,
그 첫째는 살가야견(薩迦耶見, 아견)이고, 둘째는 아만(我慢)이며, 셋째는 아애(我愛)이고, 넷째는 무명(無明, 아치)이다.
이것은 곧 식(識)의 잡염의 의지처인 잡염소의(雜染所依)이며, 식은 그 첫 번째 의지처로 인하여 생겨난다.
두 번째의 것은 잡염이니, 대상을 요별하는 뜻이기 때문이고, 등무간의 뜻이기 때문이며, 사량의 뜻이기 때문에 의(意)에 두 종류를 이루는 것이다.
의(意), 제7 말나식을 가리키며, 이때 의(意)의 범어는 manas(思量)이다. 그런데 제6의식을 mano-vijāna라고 해서 똑같이 manas가 사용된다. 따라서 제6 의식과 구분하기 위해서 단지 의라고 부르거나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음역어를 사용한다.
의(意), 즉 제7식에 무간멸의(無間滅意)와 염오의(染汚意)의 두 가지 의미가 있어서,
무간멸의(無間滅意)는 제7식이 제6식의 의지처인 의근(意根)임을 나타내고 낸다.
염오의(染汚意)는 제7식으로 인하여 무명의 아치(我癡)ㆍ아견 등의 근본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4연(四緣)은 인연(因緣)ㆍ소연연(所緣緣)ㆍ등무간연(等無間緣)ㆍ증상연(增上緣) 으로,
등무간연(等無間緣)은 차제연(次第緣)이라고도 하며, 전념(前念)의 식이 멸하는 것이 후념(後念)의 식이 생겨나는 연(緣)이 되는 것으로, 연속하는 마음의 활동에서 뒤의 생각은 앞의 생각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 자신도 원인이 돼 다음 생각을 일으키는데, 이 경우에 원인이 되는 것을 등무간연, 결과는 증상과(增上果)에 해당한다.
4번뇌(四煩惱) 또는 4혹(四惑)은 아치(我痴, 무명)가 근본원인이 되어서 아견(我見, 아집)→아만(我慢)→아애(我愛, 아탐)의 순서로 생겨난다.
▶釋曰:此亦名心者,阿賴耶識, 卽是心體. 意識二義差別可得, 當知心義亦有差別, 顯示此故.
此中與作等無閒緣因性, 謂無閒滅識與意識爲因,是第一意;
▷해석한다; ‘이것을 또한 심(心)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아뢰야식이 심(心)의 체(體)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의(意)와 식(識), 두 가지 의미의 차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심(心)의 의미에도 역시 차이가 있으니,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세 가지 차별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등무간연(차제연)의 원인의 성품인 인성(因性)이 된다”는 것은
ㅡ논(論)에는 ‘의지처인 소의지(所依止)의 성품’으로 되어 있는데, 석(釋)에서는 그 의미를 따라서 인성(因性)이라 하였다.
무간멸(無間滅)의 식이 의식의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첫 번째 의(意)인 무간멸의(無間滅意)이다.
由四煩惱,常所染污, 是第二意. 此中薩迦耶見者, 謂執我性;由此勢力,便起我慢;恃我`我所而自高擧,
於實無我, 起有我貪,名爲我愛.如是三種無明爲因. 言無明者, 卽是無智
아치(我痴, 무명), 아견(我見, 아집), 아만(我慢), 아애(我愛, 아탐)의 사번뇌(四煩惱)로 인하여 항상 염오되나니, 이것이 두 번째의 염오의(染汚意)이다.
여기에서 ‘살가야견(薩迦耶見)’은 자아에 집착하는 성품으로, 이 세력으로 인하여 문득 아만(我慢)을 일으켜서 나(我)와 나의 소유(我所)라고 믿고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며,
실제로는 무아인 것에 대해서 자아가 있다는 욕심의 아탐(我貪)을 일으킴을 아애(我愛)라 이름 하는 것으로,
아견, 아만, 아애의 이러한 세 가지는 무명(無明)이 원인이 되며, 무명이란 곧 무지(無智)인 것이다
살가야견(薩迦耶見, 아견 신견)은 범어 satkāya-dṛṣṭi의 음역으로서, 유신견(有身見)이라 번역하며 신견(身見)ㆍ아견(我見)이라고도 한다. 자아(Ātman)가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으로,
제7 염오말나식이 제8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제6 의식이 5취온(取蘊)을 대상으로 해서 자아로 착각하여 나(我)와 나의 소유(我所)로 삼아서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기본으로 해서 아만(我慢)과 아애(我愛)를 일으키는 것이다.
아만(我慢), 살가야견에 의해 설정된 자아를 의지처인 소의(所依)로 삼아서 자기는 존재한다고 교만하게 뽐내는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에 아만은 5취온을 나와 나의 소유로 집착하여 교만한 것을 의미하였으나,
유식학파에서는 말나식(제 7식)이 아뢰야식(제 8식)을 자아로 인식함으로써 자아를 더욱 대상화하고, 대상화된 자기를 근거로 교만하게 뽐내는 것을 근본적인 아만이라 하였다.
아애(我愛), 자아에 대한 애착은 일상생활에서 갖가지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이다.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는 근본원인이 된다.
무명(無明, 아치), 근본적인 무지는 자기 본질의 이치인 무아(無我)라는 것을 모르는 아치(我癡)를 말한다.
무명은 초기불교 이래 4성제ㆍ연기의 도리에 무지한 것으로 설명되었으며, 유가유식학파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입장에 있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야말로 근본적인 무명이며, 그것이 항상 말나식과 함께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무명이란 곧 무지(無智)인 것이다' 에서의 무명은 구체적으로 무아의 이치를 모르는 아치(我癡), 즉 제7식이 제8식을 대상으로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의 자아로 착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견, 아만, 아애의 세 가지 번뇌가 이 무명을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이 네 가지 근본번뇌가 생겨나는 순서는 무명→아견→아만→아애이다.
識 復由彼第一依,生第二雜染者, 謂無閒滅識,說名爲意, 與將生識容受處所故 作生依.
第二染污意, 爲雜染所依, 以於善心中,亦執有我故`
‘식(識)은 그 첫 번째인, 등무간연(等無間緣)의 의지처로 인하여 생겨나고,
두 번째의 잡염(雜染)’이란 무간멸(無閒滅)의 식을 말하며, 의(意)라 이름하는 것이다.
장차 생겨나는 식의 수용의 처소(處所)인, 즉 전찰나의 식이 멸하는 곳에 다음의 식이 생겨나기 때문에, 생겨남의 의지처인 작생의(作生依), 즉 다음 찰나의 식이 생겨나는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의 염오의(染污意)는 잡염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니, 착한 마음인, 선심(善心)에도 역시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ㅡ선심(善心)도 번뇌가 있는, 유루(有漏) 동안에는 아집을 근본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염오의(染汚意)를 의지처인 소의(所依)로 하기 때문이다.
了別境義故. 等無閒義故,思量義故,意成二種者, 謂於此中,由取境義, 說名爲識, 由與處義, 名第一意,
由執我等,成雜染義,名第二意.
‘대상을 요별하는 뜻이기 때문이고, 등무간의 뜻이기 때문이며, 사량의 뜻이기 때문에 의(意)에 두 종류를 이룬다’는 것은 다음과 같으니,
이 중에서 대상을 취하는 취경(取境)의 뜻으로 인하여 식(識)이라 이름하고,
처소를 주는 여처(與處)의 뜻으로 인하여 첫 번째의 무간멸의(無間滅意)라 이름하며,
자아 등에 집착해서 잡염을 이루는 의미로 인하여 두 번째의 염오의(染汚意)라 이름하는 것이다.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권 9 (0) | 2025.03.06 |
---|---|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권 8 (0) | 2025.03.06 |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권 6 (0) | 2025.03.05 |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권 5 (0) | 2025.03.04 |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권 4 (0) | 2025.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