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등 지음
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현장(玄奘) 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제 9권 4
此加行位未遣相縛,於麤重縛亦未能斷,唯能伏除分別二取,違見道故。
於俱生者及二隨眠有漏觀心有所得故,有分別故,未全伏除,全未能滅。
이 가행위에서는 아직 상박(相縛, 인식적인 속박)을 버리지 못하고, 추중박(麤重縛, 존재적인 속박)에 대해서도 역시 아직 끊을 수 없으나, 오직 분별의 2취(取)만을 조복하고 제거할 수 있는 것은 견도와 다르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俱生) 및 이수면(二隨眠, 번뇌장과 소지장)에 대해서는 유루(有漏)로서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소득이 있기 때문이며, 분별이 있기 때문에 아직 완전히 조복하여서 제거한 것이 아니므로,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는 것이다.
ㅡ인식적인 속박인 상박(相縛)과 존재적인 속박인 추중박(麤重縛)의 두 가지 계박을 끊는 지위를 밝힌, 제육단이박위(第六斷二縛位)
상박(相縛)은 ‘인식적인 속박’, 즉 상분(相分)이 견분(見分)을 속박하는 것, 인식 체계의 원초적인 속박이다.
추중(麤重)은 잠재적으로는 아뢰야식에 내재하는 유루종자이고, 현재적(顯在的)으로는 몸과 마음의 부자유성이다. 이런 추중에 의한 속박인 추중박(麤重縛)은 ‘존재적인 속박, 즉 존재의 원초적인 속박이다.
此位菩薩於安立諦非安立諦俱學觀察,爲引當來二種見故,及伏分別二種障故,非安立諦是正所觀,非如二乘唯觀安立。
이 지위의 보살은, 차별의 명칭을 세운 진리인 안립제(安立諦)와 우주 본체의 진여인 비안립제(非安立諦)에 대해서 모두 배우고 관찰하나니, 장차 상견도(相見道)와 진견도(眞見道)의 두 가지의 견도를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며,
분별의 두 가지 장애를 조복하기 때문이다.
비안립제는 진정으로 관찰할 바이니, 2승(乘)이 오직 안립제만을 관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ㅡ관찰되는 대상을 밝힌, 제칠명소관경점(第七明所觀境漸)
안립제(安立諦)는 차별의 명칭을 세운 진리이다. 즉 생각과 말이 미치지 못하는 진여(眞如)를 가설(假說)로 차별과 명목을 세워서 일곱 가지 진여인 칠진여(七眞如) 등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기신론'에 나오는 의언진여(依言眞如)나, '승만경'에 나오는 작위(作爲)가 있는 4성제인 유작사제(有作四諦)가 이에 해당된다.
비안립제(非安立諦)는 우주 본체의 진여를 말한다. 진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이렇게 이름한다. 곧 이언진여(離言眞知)이다. 또한 비안립제는 차별의 명칭이 없는 진리라는 뜻으로, '승만경'에 나오는 작위가 없는 4성제인 무작사제(無作四諦)도 이에 해당된다.
▷답한다; 일곱 가지의 칠진여(七眞如)는 다음과 같으니,
제1은 유전진여(流轉眞如)로써, 유위법의 유전하는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2는 실상진여(實相眞如)이니, 두 가지의 이무아(二無我)에 나타난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3은 유식진여(唯識眞如이니, 잡염ㆍ청정법이 오직 식(識)이라는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4는 안립진여(安立眞如)이니, 고제(苦諦)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5는 사행진여(邪行眞如)이니, 집제(集諦)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6은 청정진여(淸淨眞如)이니, 멸제(滅諦)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하며,
제7은 정행진여(正行眞如)이니, 도제(道諦)의 참다운 성품인 실성(實性)을 말한다. - 성유식론(成唯識論) 제 8권 9
菩薩起此煖等善根,雖方便時通諸靜慮,而依第四方得成滿,託最勝依入見道故。
보살이 이 난위(煖位) 등의 선근을 일으키는 것은, 난위(煖位)와 정위(頂位) 및 하인(下忍)과 중인(中忍)의 두 가지 인위(忍位)의 방편시(方便時)에는 모든 선정에 통하지만,
네 번째의 제 4 선정에 의지해서 원만히 이룰 수 있는, 즉 상인(上忍)과 세제일법(世第一法)의 최후에 들어갈 때에는 오직 제4선정에 의지해서 이룰 수 있으니, 가장 뛰어난 의지처에 의탁해서 견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ㅡ가행위의 의지처를 판별한, 제팔변소의처(第八辨所依處).
唯依欲界善趣身起,餘慧厭心非殊勝故,
오직 욕계의 살기 좋은 세계인 선취신(善趣身)에 의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니, 다른 계(界)는 지혜의 마음인 혜심(慧心)과 염오의 마음인 염심(厭心)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ㅡ가행위가 어떠한 세계의 신체에 의지하는가를 판별한, 제구계취분별(第九界趣分別)이며,
욕계의 선취(善趣, 인간ㆍ천상)의 몸(身)으로서 견도(見道)에 들어가는 것으로, 다른 세계는 염오의 마음인 염심(厭心)이 미약하고, 다른 세계의 취(趣)는 지혜의 마음인 혜심(慧心)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此位亦是解行地攝,未證唯識眞勝義故。
이 단계도 역시 승해행지(勝解行地)에 포함되나니, 아직 유식의 참다운 승의(勝義)를 증득하지 못한 때문이다.
ㅡ열 가지 분야 중에서 마지막으로 7지(地)에 대해서 판별한, 제십칠지분별(第十七地分別).
次通達位其相云何?頌曰:
다음으로 통달위(通達位)의 상은 어떠한 것인가? '삼십송'의 제28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으니,
ㅡ 5위(位) 중 제3위인 통달위(通達位), 즉 견도(見道)에 관하여 해설한다.
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 爾時住唯識 離二取相故。
어떤 때, 즉 근본무분별지가 발하여 지(智)가 이(理)를 관조할 때에는 인식대상인 소연(所緣, 유식성 진여)에 대해서
지혜(智慧, 진여를 증오證悟하는 무분별지ㆍ근본지)를 전혀 얻는 바가 없는 도무소득(都無所得)이니,
ㅡ진여를 증오(證悟)할 때, 이지명합(理智冥合)해서 소득상(所得相)이 전혀 없음을 말한다.
그 때에 유식의 성품에 안주하나니,
ㅡ능관지(能觀智)가 소관리(所觀理)에 명합(冥合)하는 경지.
2취(取)의 상(相)을 떠났기 때문이다.
ㅡ능취집(能取執)과 소취상(所取相)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論曰:若時菩薩於所緣境無分別智都無所得,不取種種戲論相故。
▷논하여 말한다; 어느 때의 약시(若時)에 보살이 인식대상인 소연경(所緣境)에 무분별 지혜가 전혀 얻는 바가 없는 도무소득(都無所得)이니, 갖가지 희론의 상(相)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보살의 무루지혜가 진여를 반연함에 있어서, 후득지(後得智)는 상분(相分)을 세워서 관하므로 유소득관(有所得觀, 상견도相見道)이라 한다.
지금 그것을 가려내어(簡) 진견도(眞見道)의 근본무루지혜가 진여를 반연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므로 ‘어느 때인 약시(若時)’라고 하는 것이다.
爾時乃名實住唯識眞勝義性,卽證眞如,智與眞如平等平等俱離能取、
所取相故,能、所取相俱是分別,有所得心戲論現故。
그 때에 참으로 유식의 참다운 승의성(勝義性)에 안주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니, 곧 진여를 증득한 지혜와 진여가 평등하고 평등해서, 모든 인식주체인 능취(能取)와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의 상(相)을 떠났기 때문이다.
인식주체인 능취(能取)와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의 상(相)은 모두 분별이니, 얻는 바가 있는 유소득(有所得)의 마음에만 희론이 현현하기 때문이다.
ㅡ平等平等(평등평등), 마음과 대상이 서로 칭합(稱合)하고, 진여와 지혜가 명합(冥合)해서 모두 인식의 주체인 능취(能取)와 인식대상인 소취(所取)의 구별을 떠나고, 모든 희론(戱論)을 끊었기 때문에 평등하고 평등하다고 하는 것이다.
有義此智二分俱無,說無所取、能取相故。
다음과 같은 제1사(第一師)의 견해가 있으니, 이 근본무분별지혜에는 상분과 견분의 이분(二分) 모두가 없으니, 인식대상인 소취(所取)과 인식주체인 능취(能取)의 상이 없다고 무성(無性)의 '섭대승론석' 제26권에서 말한 때문이며,
ㅡ본 게송을 네 가지 부문으로 자세히 해설한다.
有義此智相、見俱有,帶彼相起名緣彼故。若無彼相名緣彼者,應色智等名聲等智。若無見分,應不能緣。寧可說爲緣眞如智?勿眞如性亦名能緣,故應許此定有見分。
제2사(第二師)의 견해는 다음과 같으니, 이 근본무분별지혜에는 상분과 견분 모두가 있으니, 그것의 상(相)을 띄우고(帶) 일어나는, 즉 인식대상인 소연연(所緣緣)은 반드시 상을 띄우고(帶) 일어나는 것에 의하며, 그것을 반연한다고 이름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만약 그것의 상이 없어도 그것을 반연하는 것으로 이름한다면, 색경(色境)을 반연하는 지혜 등은 마땅히 소리 등을 반연하는 지혜로 이름해야 할 것이며, 만약 견분이 없다면, 능히 반연하는 것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진여를 반연하는 지혜로 삼을 수 있겠는가?
진여의 성품 또한 능히 반연하는 것으로 이름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기에는 반드시 견분도 있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ㅡ만약 대상에 사현(似現)한 모습이 없어도 그것을 반연하는 것으로 이름한다고 말한다면, 색경(色境)을 반연하는 지혜인 색지(色智)는 소리(聲)의 상이 없어도 소리를 반연하는 것으로 이름해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有義此智見有相無,說無相取不取相故。雖有見分而無分別,說非能取,非取全無。雖無相分,而可說此帶如相起,不離如故。
호법의 정의는 다음과 같으니, 이 근본무분별지혜에는 견분은 있고 상분은 없으니, 상분없이 취하고 상분을 취하지 않는다고 '유가사지론' 제73권에서 말한 때문이다.
견분은 있지만 무분별이므로 능취(能取)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 뿐, 취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며, 상분은 없지만 이 무분별지혜이 진여의 상(相)을 띠고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으니, 진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ㅡ진여를 반연하는 지혜는 진여의 체상(體相)을 띄고 일어나기 때문에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으로 이름하는 것으로, 그것의 상분인 영상을 띄고 일어나기 때문에 진여를 반연한다고 이름하는 것이 아니다.
如自證分緣見分時不變而緣,此亦應爾。變而緣者便非親證,如後得智應有分別。故應許此有見無相。
자증분(自證分)이 견분을 반연할 때, 변현하지 않고서 반연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역시 그러해야 하는 것으로, 변현해서 반연한다면 곧 직접 증명하는 것이 아닌 것이니, 후득지와 같이 분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에는 견분만 있고 상분은 없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加行無閒此智生時體會眞如,名通達位。初照理故,亦名見道。
가행위(加行位)의 바로 다음 찰나에 이 지혜가 생겨날 때에 진여을 체득(體得)해서 알기 때문에 통달위(通達位)라 이름하나니, 처음으로 도리를 비추기 때문에 또한 견도(見道)라고도 이름한다.
견도에서 ‘견(見)’은 무루정지(無漏正智)가 비로소 조리(照理)함을 의미하고,
‘도(道)’는 수행인이 견리(見理)한 것을 원인으로 하여 극과(極果)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然此見道略說有二:一眞見道,謂卽所說無分別智。實證二空所顯眞理,實斷二障分別隨眠,雖多剎那事方究竟,而相等故,摠說一心。
그런데 이 견도에 대략 두 종류가 있으니,
ㅡ진견도(眞見道)와 상견도(相見道)의 차이를 판별한 것으로, 견도의 지혜에 정체지(正體智)와 후득지(後得智)가 있다.
정체지(正體智), 즉 근본무루지혜는 무차별을 관조하는 참다운 지혜인 실지(實智)이고,
후득지는 차별을 관조하는 권지(權智)이다.
참다운 지혜가 먼저 진여(理)를 관조하고, 이에 권지(權智)가 일어나는 것이며,
참다운 근본무루지를 진견도(眞見道)라고 하고, 권지(權智)를 상견도(相見道)라고 한다.
첫째는 진견도(眞見道)로써, 곧 앞에서 말한 무분별지혜이니, 실로 아공과 법공의 이공(二空)에서 나타나는 진리를 증득하며, 한다. 실로 분별과 수면(종자)의 이장(二障)을 단멸하며, 많은 찰나에 비로소 궁극에 이르지만, 상이 같은 상등(相等)이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일심진견도(一心眞見道)라 말하는 것이다.
진견도(眞見道) 또는 일심진견도(一心眞見道)라고 한다. 무분별의 정체지(正體智)가 아공ㆍ법공에서 나타난 진여인 이공소현진여(二空所顯眞如)의 도리를 인식대상인 소연으로 하여서 갖가지 희론의 상을 전혀 취하지 않고 유식(唯識)의 참다운 승의(勝義)의 성품에 계합한다. 그리하여 인식대상인 소연(所緣)인 진여와 인식주체인 능연(能緣)의 지혜가 평등하고 평등해서 모두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상을 떠난다.
비록 진여를 인식대상인 소연으로 할지라도 상분을 띄고 반연하는 것이 아니라, 곧 진여의 체상(體相)을 띄고서 반연하는 것으로, 진여의 자체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인식대상인 소연의 상이 없고, 인식 주체인 견분 또한 분별이 없으니,
진여와 무분별지혜가 완전히 계합하여 평등한 것이다.
일심진견도(一心眞見道), 무간도(無間道)에서 미혹의 종자의 자체를 단멸하고, 해탈도에서 그 습기를 버려서 택멸(擇滅)의 도리를 증득한다.
이와 같이 많은 찰나에 걸쳐 있지만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그 상이 같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일심진견도(一心眞見道)라고 한다.
有義此中二空二障漸證漸斷,以有淺深麤細異故。
다음과 같은 제1사(第一師)의 견해가 있으니, 이 가운데에서는 아공과 법공의 이공(二空)과 번뇌장과 소지장의 이장(二障)을 점진적으로 증득하고 끊는 것이라 하였으니,
도리에 얕고 깊음과 장애와 지혜의 행에 두드러짐과 미세함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ㅡ제 1사의 견해에 의하면 두 가지 공(아공ㆍ법공)과 두 가지 장애(번뇌장ㆍ소지장)를 점진적으로 증득하고 끊는다고 한다.
有義此中二空二障頓證頓斷,由意樂力有堪能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 가운데에서는 아공과 법공의 이공(二空)과 번뇌장과 소지장의 이장(二障)을 단박에 깨닫고 단박에 끊는 것이니, 즐거워하는 의지의 힘이 능히 감당하는 데 의거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ㅡ이것을 정의(正義)로 삼는다. 이에 의하면 이공(二空)을 단박에(돈頓) 증득하고, 이장을 단박에(돈頓) 끊는다고 한다.
二相見道。此復有二:一觀非安立諦,有三品心:一內遣有情假緣智能除軟品分別隨眠。
둘째는 상견도(相見道)이며, 이것에 다시 비안립제(非安立諦)와 안립제(安立諦)의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안립제를 관찰하는 것으로, 세 가지 품류의 마음인 삼품심(三品心)이 있으니,
첫째는 내면적으로 유정의 허망함을 버려서 반연하는 지혜, 즉 생공진여(生空眞如)를 반연하는 지혜이며, 능히 하품(下品)의 분별수면(分別隨眠, 번뇌장의 종자)을 없애며,
ㅡ내심(內心)을 반연하여 유정(有情)이 임시적 존재인 가(假)라고 버리는 유거(遣去)하는 것으로서, 즉 생공진여(生空眞如)를 반연하는 지혜이다.
二內遣諸法假緣智能除中品分別隨眠。三遍遣一切有情諸法假緣智能除一切分別隨眠。
둘째는 내면적으로 일체법의 허망함을 버려서 반연하는 지혜, 즉 내심(內心)을 반연하여 일체법은 임시적 존재라고 버리는 법공진여(法空眞如)를 반연하는 지혜이니
중품(中品)의 분별수면(分別隨眠, 소지장의 종자)을 없애며,
셋째는 두루 모든 유정과 일체법의 허망함을 버려서 반연하는 지혜, 즉 아공(我空)ㆍ법공(法空)의 이공진여(二空眞如)를 반연하는 지혜이니, 모든 분별의 수면을 끊을 수 있는 것이다.
상견도(相見道)는 진견도(眞見道) 이후에 분별지(分別智)로써 유식상(唯識相)을 반연한다.
여기서는 상분과 견분이 있으므로, 진견도의 무분별지혜가 직접 유식성(唯識性)을 반연하는 것과는 같지 않으며, 상견도(相見道)에는 이공진여(二空眞如)를 반연하는 비안립제(非安立諦)의 관(觀)과, 4성제를 반연하는 안립제(安立諦)의 관(觀) 두 가지가 있다.
前二名法智,各別緣故。第三名類智,摠合緣故。法眞見道二空見分自所斷障無間解脫別摠建立,名相見道。
앞의 두 가지는 법지(法智)라 이름하나니, 각각 별도로 반연하기 때문이며,
세 번째의 것은 유지(類智)라 이름하나니, 총합해서 반연하기 때문이다.
진견도에서 이공(二空)의 견분이 자신이 끊은 장애에 대해서 무간도(無間道)와 해탈도(解脫道)에 법칙(法則)함을 개별적ㆍ총합적으로 건립하여 상견도(相見道)라 이름하는 것이다.
ㅡ무간도(無間道)에서 단멸되는 것에 차별이 있으므로 개별적인 별(別)이라 하며,
해탈도(解脫道)에서 증득된 것은 오직 일미(一味)이므로 총합적인 총(總)이라 이름한다.
법지(法智), 일체법의 진리인 제리(諦理)를 증지(證知)하므로 법지(法智)라 이름하며, 이는 곧 인식대상인 소취(所取)를 관찰한다.
유지(類智), 이후의 대상과 지혜는 이전의 욕계(欲界)와과 비슷하한 상사(相似) 또는 유사(類似)이기 때문에 부류(類)라 이름한다. 부류를 관찰하는 지혜인 유지(類智)는 이전의 지혜 품류인 지품(智品)을 관찰하므로, 곧 인식주체인 능취(能取)를 관찰하는 것이다.
ㅡ번뇌를 끊는 수행에 가행도ㆍ무간도ㆍ해탈도ㆍ승진도의 네 단계가 있어서,
가행도(加行道)는 번뇌를 끊는 지위의 예비로서 수행에 힘을 가(加)하는 기간이고,
무간도(無間道)는 근기가 성숙하여 참으로 번뇌를 끊고자 하는 단계이며,
해탈도(解脫道)는 무명(無明) 번뇌를 여읜 곳에 나타나는 진여를 얻고자 하는 찰나이며,
승진도(勝進道)는 다시 정진을 계속하여 열반에 나아가는 기간이다.
有義此三是眞見道,以相見道緣四諦故。有義此三是相見道。以眞見道不別緣故。
앞에서 점진적으로 증득하고 끊는다고 주장한 제1사(第一師)의 견해로는, 이러한 세 가지는 진견도인 것으로, 상견도는 4성제를 반연하기 때문이라 하였고,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러한 3 가지는 상견도이니, 진견도는 별도로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ㅡ이것을 정의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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