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6 12

 

小七、中二,唯不善攝。小三、大八,亦通無記。

소수번뇌(小隨煩惱) 심소 중의 첨ㆍ광ㆍ교 심소를 제외한 나머지 7 가지와 

2 가지 중수번뇌(中隨煩惱)는 오직 불선의 성품에 포함된다.

수번뇌심소와 3성(三性) 관계를 판별한 삼성문(三性門).

 

小七、中二,唯欲界攝。誑、諂欲、色,餘通三界。

소수번뇌심소  첨ㆍ광ㆍ교 심소의 3 가지와 8 가지 대수번뇌(大隨煩惱) 심소는 역시 무기에도 통하나,

소수번뇌  7 가지와 2 가지의 중수번뇌는 오직 욕계에만 포함된다. 

광ㆍ첨 심소는 욕계와 색계에 있으며, 나머지 교(憍)심소와 대수번뇌의 심소의 8 가지는계에 통한다.

수번뇌심소가 어떤 세계에 계박되는가를 밝힌 계박문(界繫門).

 

生在下地,容起上十一。耽定於他,起憍、誑、諂故。

하부 지위인 하지(下地)에 태어나 살면서 상부 지위인 상지(上地)의 11 가지 심소를 일으킨다고 인정되나니,

선정에 탐착해서 다른 곳에 대해서 교ㆍ광ㆍ첨 심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상지(上地)와 하지(下地)에서 어떤 수번뇌의 심소를 일으키는가를 밝힌, 하상생기문(下上生起門)의 제이자문(第二子門).

 

若生上地,起下後十。邪見、愛俱容起彼故。

상지(上地)에 태어나서 하지(下地) 뒷 부분의 무탐(無貪)ㆍ무진(無瞋)과 대수번뇌의 심소 8 가지를 합한 10 가지 심소를 일으키기도 하나니, 사견ㆍ탐 심소와 함께 그것을 일으킨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小十生上,無由起下。非正潤生,及謗滅故。中二、大八,下亦緣上。上緣貪等相應起故。

10 가지 소수번뇌는 상지(上地)에 살면서는 하지(下地) 일으키는 것에 의하지 않으니,

진정으로 태어남을 촉진하고 멸(滅)함을 비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2 가지 중수번뇌와 8 가지 대수번뇌는 하지(下地) 있으면서 역시 상지(上地) 반연하나니,

상지(上地) 반연하는 탐심소 등과 상응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수번뇌심소가 상부 지위와 하부지위에서 서로 반연하는 것을 밝힌 상하상연문(上下相緣門)의 제삼자문(第三子門).


有義小十下不緣上。行相麤近不遠取故。有義嫉等亦得緣上。於勝地法生嫉等故。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10 가지 소수번뇌는 하지(下地) 있으면서 상지(上地) 반연하지 않으니, 인식활동이 두드러지고 가까워서 멀리 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로는, 질(嫉)ㆍ간(慳)ㆍ교(憍) 심소 등은 역시 상지(上地) 반연할  있으니,

뛰어난 지위와 법에 대해서 질투 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大八諂、誑上亦緣下。下緣慢等相應起故。梵於釋子起諂、誑故。憍不緣下,非所恃故。

8 가지 대수번뇌(大隨煩惱)와 첨ㆍ광 심소는 상지(上地) 있으면서 역시 하지(下地) 반연하는 것으로, 하지(下地)를 반연하는 만(慢)심소 등과 상응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며, 범천왕이 석존의 제자에 대해서 첨ㆍ광 심소를 일으키기 때문이고,

교심소는 하지(下地) 반연하지 않으니,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등(馬騰) 비구가 4대종(大種) 멸진한 지위를 알고 선정에 들어 사왕천(四王天) 대중들에게 물었을 때, 아무도 알지 못하여서, 마침내 범천왕(梵天王)에게 물었으나  역시도 모르는데 문득 교묘하게 속여서 말하기를 “나는  대중 중에서 대범(大梵)이고, 자재하며 일체를 만들어내는 작자(作者)이고, 변화시키는 화자(化者)이며, 생겨나게 하는 생자(生者)이고, 기르는 양자(養者)이며, 모든 것의 어버이이므로, 따라서 나는 안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대중 밖으로 나와서 마등 비구의 손을 잡고 아첨의 말을 하고서 돌아가서 부처님께 여쭈었으니, 이것은 본질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고, 만약 영상(影像)이라면 모두 오직 자기 지위일 뿐이니, 자기 마음에 속하기 때문이다.


二十皆非學、無學攝。此但是染彼唯淨故。

20 가지 수번뇌심소는 모두 유학과 무학에 포함되지 않으니,

수번뇌는 다만 잡염법뿐이고, 유학 등은 오직 청정법뿐이기 때문이다. 

수번뇌심소와 유학(有學) 등의 포함관계를 밝힌 학등문(學等門).

 

後十唯通見修所斷與二煩惱相應起故。

20 가지 중에서 뒷부분의 10 가지 심소는 오직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과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이니,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와 (俱生起)와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분별기(分別起)의 두 가지 번뇌심소와 상응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며, 

수번뇌심소가 어떤 ()에서 단멸되는가를 밝힌 삼단문(三斷門).

 

見所斷者隨迷諦相,或摠或別煩惱俱生。故隨所應皆通四諦。迷諦親疏等皆如煩惱說。

견도(見道)에서 단멸되는 것은, 4성제의 상에 혹 미혹하거나  총체적이거나 혹 개별적으로 미혹한 번뇌의 심소에 따라서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따라서 상응하는 것을 따라서 모두 4제(四諦) 통하며,

4제(四諦)에 미혹한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등은 모두 번뇌심소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前十有義唯修所斷。緣麤事境任運生故。

20 가지 중에서 앞부분의 10 가지 수번뇌에 대해서 제일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오직 수도(修道)에서 단멸될 뿐이니, 두드러지는 현상의 추사(麤事)의 대상을 반연하여 자연히 생겨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有義亦通見修所斷。依二煩惱勢力起故,緣他見等生忿等故。見所斷者隨所依緣,摠別惑力,皆通四諦。

호법의 정의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역시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과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에 통하는 것으로,

구생(俱生)과 분별(分別)의 2 가지 번뇌심소의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고, 다른 악견 등을 반연하여 분(忿)심소 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은 소의(所依 의지처)ㆍ소연(所緣, 인식대상)의 총체적이거나 개별적인 미혹의 세력을 따라서 모두 4성제에 통한다고 하였다


此中有義忿等但緣迷諦惑生,非親迷諦。行相麤,不深取故。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분(忿)심소 등은 다만 4성제에 어두운 미혹을 반연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직접적으로 4성제에 미혹한 것은 아니니, 행상(行相, 인식활동)이 두드러지고 얕아서 깊게 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有義嫉等亦親迷諦,於滅道等生嫉等故。然忿等十但緣有事。要託本質方得生故。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소수번뇌의 심소 중에서 부(覆)ㆍ광ㆍ첨 심소를 제외한 나머지의 질(嫉)심소 등도 역시 직접 4성제에 미혹한 것으로, 멸제ㆍ도제 등에 대해서 질투 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忿) 등의 10 가지 심소는 다만 본질이 있는 대상인 유사(有事)만을 반연하나니, 반드시 본질에 의탁해서 바야흐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번뇌심소가 본질이 있는 대상을 반연하는가 등을 판별한 유사등분별문(有事等分別門)으로, 여기에서 본질은 나(我)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견(我見과 함께하지 않는 심왕 등을 유사(有事) 반연한다고 이름하고,  

아견과 함께하는 심왕 등을 무사(無事) 반연한다고 이름하고,  

(忿)   가지 소수번뇌의 심소는 아견(我見) 함께하지 않으므로, 본질이 있는 대상인 유사(有事)를 반연한다고 이름하고,  

중수번뇌의 심소와 대수번뇌의 심소의 10 가지는 유사(有事) 무사(無事) 통하지만, 본문에서는 생략하였다.

 

緣有漏等准上應知。

유루 등을 반연하는 것도 이상의 내용에 견주어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수번뇌심소가 유루와 무루를 반연하는 누무루문(漏無漏門)으로, 명칭에 의한 대상과 본질이 있는 대상을 반연하는 명경사경문(名境事境門) 등은 문의  내용에 견주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 말한다.

 

成唯識論卷第六 終 성유식론 제 6권을 마침.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6 11

 

云何不正知?於所觀境謬解爲性。能障正知毀犯爲業。謂不正知者多所毀犯故。

무엇이 부정지(不正知)심소’인가? 관찰되는 대상에 대해서 그릇되게 이해하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바르게 아는 정지(正知)를 장애하여 계율 등을 훼범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 것으로,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훼범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부정지(不正知, asamprajñānya)심소는 대상을 잘못 이해하는 심리작용으로서 정지(正知)를 장애하며, 혜(慧)와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다.


有義不正知慧一分攝。說是煩惱相應慧故。有義不正知癡一分攝。'瑜伽'說此是癡分故。令知不正名不正知。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부정지(不正知)는 혜(慧)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것이 번뇌와 상응하는 혜(慧)라고 말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제2사(第二師)의 견해로는, 부정지(不正知)는 치(癡)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으로, '유가사지론'에서 이것은 치심소의 부분이라고 말한 때문이며,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을 부정지(不正知)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며, 


有義不正知俱一分攝。由前二文影略說故。論復說此遍染心故。

호법의 정의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부정지는 혜(慧)와 치(癡) 심소의  가지가 함께하는(俱) 것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이니, 앞에서 인용한  문장에서 그림자처럼 생략해서 말한 때문이며,

다시 논서에서 이것이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한 때문이라고 하였다.


與、幷、及言,顯隨煩惱非唯二十。󰡔雜事󰡕等說貪等多種隨煩惱故。隨煩惱名亦攝煩惱。是前煩惱等流性故。煩惱同類餘染污法,但名隨煩惱非煩惱攝故。唯說二十隨煩惱者,謂非煩惱唯染麤故。此餘染法或此分位或此等流,皆此所攝。隨其類別,如理應知。

'삼십송'의 제13ㆍ제14 게송에서, ‘더불어 여(與)’, ‘아울러 병(幷)’, ‘미칠 및의 급(及)’이라는 말은 

수번뇌(隨煩惱)심소가 오직 스무 가지만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잡사경(雜事經)', '아비달마법온족론(阿毘達磨法蘊足論)' 8권 등에서   많은 종류의 수번뇌를 말한 때문이며,

수번뇌라는 명칭하는 것은 역시 번뇌도 포함한다는 것이니, 앞에서의 번뇌심소와 등류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유가사지론' 제62권에서, 번뇌와 같은 종류인 다른 염오법은 다만 수번뇌라고 이름하나니, 번뇌심소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번뇌(隨煩惱)가 오직 20 가지 뿐이라고 말한 것은 번뇌심소가 아닌, 오직 잡염이며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에 나머지 잡염법은 이것의 분위기이거나 혹은 이것의 등류이므로 모두 여기에 포함되며, 그 종류의 차이에 따라서 논리에 맞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삿된 욕구인 사욕(邪欲) 등의 나머지를 수번뇌심소에 포함시키지 않고 폐지(廢止)하는 근거를 밝힌 것이다. 

오직 20 가지를 수번뇌심소라고 말한 것은, 이 20 가지가 번뇌심소인 본혹(本惑)이 아닌, 잡염이며, 두드러짐의  가지 뜻에 의해서 수번뇌심소로 말한 것이다. 

20 가지 이외의 사욕(邪欲) 등은 모두  20 가지의 분위(分位)이고 등류성이므로, 20 가지 수번뇌에 포함되는 것이다.


如是二十隨煩惱中,小十、大三定是假有。無慚、無愧、不信、懈怠定是實有。教、理成故。掉擧、惛沈、散亂三種,有義是假,有義是實。所引理、教如前應知。

이상과 같이 20 가지 수번뇌(隨煩惱) 중에서 소수번뇌(小隨煩惱)심소 10 가지와 대수번뇌(大隨煩惱) 심소 중의 3 가지인 실념(失念)ㆍ방일ㆍ부정지(不正知) 심소는 반드시 가유(假有)이며,

무참ㆍ무괴ㆍ불신ㆍ해태 심소는 반드시 실유(實有)이니, 성스러운 가르침과 바른 논리로써 성취되기 때문이다. 

도거ㆍ혼침ㆍ산란의 3 종류는 가유라는 견해도 있고, 실유라는 견해도 있으니, 인용되는 바른 논리와 성스러운 가르침은 앞에서와 같이 알아야 한다.

 스무 가지 수번뇌심소 중에서 실유(實有) 가유(假有) 판별하는 가실분별문(假實分別門)이다.


二十皆通俱生、分別。隨二煩惱勢力起故。

20 가지 수번뇌심소가 모두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기(俱生起)와 후천적으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분별기(分別起) 통하나니, 생기(俱生起)와 분별기(分別起), 2 가지는 번뇌심소의 세력에 따라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 구생분별문(俱生分別門)

 

此二十中,小十展轉定不俱起。互相違故,行相麤猛各爲主故。

이 20 가지 수번뇌 중에서 10 가지 소수번뇌(小隨煩惱)심소는 전전(展轉)하여 반드시 함께 일어나지 않으니, 서로 위배되기 때문이고, 인식활동이 두드러지고 맹렬해서 각각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 자류상응문(自類相應門)

 

中二一切不善心俱。隨應皆得小、大俱起。論說大八遍諸染心。展轉小、中,皆容俱起。

2 가지의 중수번뇌(中隨煩惱)심소는 모든 불선심과 함께하는 것인, 상응한 바를 따라서 소수번뇌와 대수번뇌심소와 함께 일어날  있으니, 

논서, '유가사지론' 제58권에서 8 가지 대수번뇌심소는 모든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하였으며, 전전하여서 소수번뇌나 중수번뇌심소와 함께 일어난다고 인정하였다.


有處說六遍染心者。惛、掉增時不俱起故。有處但說五遍染者,以惛、掉等,違唯善故。此唯染故非第八俱。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는 혼침ㆍ도거(掉擧) 심소를 제외한, 6 가지 심소만이 잡염심에 두루하다고 말하였으니, 혼침ㆍ도거 심소가 증성할 때에는 함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6권에서는 단지 불신ㆍ해태ㆍ혼침ㆍ도거ㆍ방일 심소의 5 가지 심소만이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하는 것은, 혼침ㆍ도거 심소 등이 안(安)ㆍ행사(行捨) 등의 선법(善法)에 거스르기 때문이니,

이것은 오직 잡염뿐이기 때문에 제8식과는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 수번뇌심소와 8식과의 상응관계를 밝힌, 제식구문(諸識俱門).

 

第七識中唯有大八。取捨差別如上應知。

본 논서의 제5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7식 중에는 오직 여덟 가지 대수번뇌심소만이 있으며, 취하고 버리는 것의 차이는 본 논서 제3권에서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알아야 한다.

 

第六識俱容有一切。小十麤猛五識中無。中、大相通,五識容有。由斯中、大,五受相應。

제6식과 함께하는 것에는 모든 수번뇌가 있음이 인정되는 것으로, 10 가지 소수번뇌심소는 두드러지고 맹렬해서 5식 중에는 없으며,

중수번뇌와 대수번뇌심소와는 불선(不善)과 잡염법에 두루하기 때문에 행상이 통하므로 5식에도 있다고 인정되며,

이상에 의거한다면, 중수번뇌와 대수번뇌심소는 5수(受)와 상응하는 것이다.  수번뇌심소와 5수(受)와의 상응관계를 밝힌 수구문(受俱門).


有義小十,除三忿等唯喜憂捨三受相應。諂、誑、憍三四俱,除苦。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10 가지 소수번뇌는 첨ㆍ광ㆍ교(憍) 심소의 3 가지를 제외하고, 분(忿)심소 등은 오직 희수(喜受)ㆍ우수(憂受)ㆍ사수(捨受)와 상응하며,

첨ㆍ광ㆍ교(憍) 심소는  가지 느낌인 사수(四受)와 함께하며 고수(苦受)를 제외한다고 하였다.

 

有義忿等四俱除樂。諂、誑、憍三,五受俱起。意有苦受前已說故。此受俱相如煩惱說。

제2사(第二師)의 견해로는 다음과 같으니, 분(忿) 등의 심소는  가지 느낌인 사수(四受)와 함께하며 낙수(樂受) 제외하나니, 첨ㆍ광ㆍ교 심소는 5(五)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지옥에서의 의지(意地) 고수(苦受) 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때문이다. 

 느낌(受)과 함께하는 인식 활동은 번뇌심소에서 말한 바와 같고 하였다.


實義如是。若隨麤相, 忿、恨、惱、嫉、害,憂、捨俱。覆、慳,喜、捨,餘三增樂。中、大隨麤亦如實義。

참다운 의미에서 말하는 것은 이와 같으니, 두드러진 양상의 추상(麤相)을 따라서 말한다면, 분ㆍ한ㆍ뇌ㆍ질ㆍ해(害) 심소는 우수(憂受)와 사수(捨受)만 함께하며,

부(覆)ㆍ간(慳) 심소는 희수ㆍ사수와 함께하고,

나머지 첨ㆍ광ㆍ교  가지심소는 낙수가 증성하며,

대수번뇌와 중수번뇌는 두드러진 양상의 추상(麤相)을 따라서도 역시 참다운 의미와 같다.


如是二十與別境五皆容俱,起不相違故。

이와 같은 20 가지 수번뇌심소는 5 가지 별경심소와 모두 함께 일어난다고 인정되는 것이니,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 수번뇌심소와 별경심소와의 상응관계를 밝힌 별경상응문(別境相應門)

 

染念、染慧,雖非念、慧俱,而癡分者亦得相應故。

잡염의 염(念)심소와 잡염의 혜(慧)심소는 염ㆍ혜 심소와 함께하지는 않지만, 치(癡)심소의 일부분인 실념(失念)ㆍ부정지(不正知) 심소와는 역시 상응할  있기 때문이며,

망념(妄念)이 어떻게 염(念)심소와 함께하며, 악혜(惡慧)가 어떻게 혜(慧)심소와 함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念亦緣現、曾習類境,忿亦得緣剎那過去故,忿與念亦得相應。

염심소는 역시 현재와 예전에 익힌 대상의 종류를 반연하고,

분(忿)심소는 역시 찰나의 과거도 반연할  있기 때문에 분심소는 염심소와 역시 상응할  있다.

(忿)심소는 현재를 반연하고, ()심소는 예전에 익힌 것을 반연하는 것이거늘, 어떻게  둘이 함께 일어날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답한 것이다.

 

染定起時,心亦躁擾。故亂與定相應無失。

잡염의 정(定)심소가 일어날 때에는 심왕도 역시 조급하고 어지러워지므로, 따라서 산란은 정심소와 상응한다고 말하는 것에 과실이 없는 것이다.

()심소는 하나의 대상에 기울이고, 산란심소는 많은 () 취하거늘, 어떻게  심소가 함께 일어날  있는가 하는 의문에 답한 것이다.

 

수번뇌심소와 번뇌심소와의 상응관계를 밝힌 근본상응문(根本相應門).
中二、大八,十煩惱俱。小十定非見疑俱起。此相麤動,彼審細故。忿等五法容慢、癡俱,非貪、恚竝。是瞋分故。慳癡、慢俱,非貪、瞋竝,是貪分故。憍唯癡俱,與慢解別,是貪分故。覆、誑與諂,貪、癡、慢俱。行相無違,貪癡分故。

2 가지 중수번뇌와 8 가지 대수번뇌는 열 가지 번뇌심소와 함께하며,

10 가지 소수번뇌는 반드시 악견ㆍ의(疑)심소와는 함께 일어나지 않으니, 이 소수번뇌는 인식활동이 두드러지게 작용하는 것이며, 살피고 미세하기 때문이다.

분(忿) 등의 5 가지 심소법은 만ㆍ치 심소와 함께한다고 인정되나니, 분 등은 탐ㆍ진 심소와는 함께하지 않으니, 이 분 등은 진심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간(慳)심소는 치ㆍ만 심소와는 함께하나, 탐ㆍ진 심소와는 함께하지 않으니, 탐심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교심소는 오직 치심소와 함께하나니, 만 심소와는 이해가 다르고, 탐심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부ㆍ광ㆍ첨 심소는 탐ㆍ치ㆍ만 심소와 함께하나니, 행상(行相, 인식활동)이 거스르지 않으므로 탐ㆍ치 심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6 10

 

云何惛沈?令心於境無堪任爲性。能障輕安、毘鉢舍那爲業。

무엇이 혼침(惛沈)심소’인가? 심왕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해서 자재하지 못하게, 무감임(無堪任)하게 하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경안과 위빠사나(毗鉢舍那, 관觀)를 장애함을 업(業)으로 삼는다.

 

혼침(惛沈, styāna)심소는 인식상황 속에서 심왕을 어둡고 답답하게 하는 심리 작용으로, 그리하여 경안(輕安)과 위빠사나를 장애한다.

위빠사나(毗鉢舍那, vipayan)는 관(觀)으로 번역하며, 미세하고 분명하게 식별하는 것을 말한다.


有義惛沈癡一分攝。論唯說此是癡分故,惛昧沈重是癡相故。有義惛沈非但癡攝。謂無堪任是惛沈相。一切煩惱皆無堪任。離此無別惛沈相故。雖依一切煩惱假立,而癡相增但說癡分。有義惛沈別有自性。雖名癡分而是等流,如不信等非卽癡攝。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혼침은 치(癡)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으로, 논서,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오직 이것은 치심소의 부분이라고 말하였으며, 혼미하고 어두워 무겁게 가라앉는 것이 치심소의 인식활동이기 때문이라 하였으며,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혼침은 다만 치심소에만 포함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자재하지 못한 것이 혼침의 인식활동으로, 모든 번뇌심소는  자재하지 못한 것으로, 이것을 떠나서는 별도로 혼침의 인식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에 의거해서 가립(假立)하지만, 치심소의 인식활동이 증성하므로 다만 치심소의 일부분이라고만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제3사(第三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혼침은 별도로 체성이 있는 것이다. 치심소의 부분이라고 이름하지만, 이것은 등류이기 때문에 불신 등과 같이  치심소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隨他相說名世俗有。如睡眠等是實有性。惛沈別相謂卽瞢重。令俱生法無堪任故。

다른 것의 인식활동인 행상(行相)을 따라서 세속유라고 이름하나니, 수면(睡眠) 등과 같이 이것은 실유의 속성이며,

혼침의 개별적인 인식활동이란, 곧 답답하고 무거운 것을 말하며,

함께 일어나는 심왕과 심소법으로 하여금 자재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若離煩惱無別惛沈相,不應別說障毘鉢舍那。故無堪任非此別相。此與癡相有差別者,謂癡於境迷闇爲相,正障無癡而非瞢重。惛沈於境瞢重爲相,正障輕安,而非迷闇。

만약 번뇌심소를 떠나서 별도로 혼침심소의 인식활동이 없다고 말한다면, 별도로 혼침이 위빠사나(觀)를 장애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자재하지 못한 것은 이것의 개별적인 행상인 별상이 아니며,

이것이 치(癡)심소의 인식활동과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면, 치심소는 대상에 대해서 미혹하고 어두운 것을 인식활동의 상(相)으로 하고, 바로 무치(無癡)심소를 장애하지만 답답하고 무거운 것은 아니며, 

혼침은 대상에 대해서 답답하게 무거운 것을 인식활동의 상(相)으로 하고, 안(安)심소를 장애하지만 미혹하고 어두운 것은 아니다.

云何不信?於實、德、能、不忍樂欲,心穢爲性。能障淨信墯依爲業。謂不信者多懈怠故。不信三相翻信應知。

무엇이 ‘불신(不信)심소’인가? 참다운 존재(實)ㆍ덕(德)ㆍ능력(能)에 대하여, 인정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욕구하지 않고, 심왕을 더럽히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청정한 믿음을 장애하여 게으름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다.

믿지 않는 사람은 게으름이 많기 때문이니, 불신의 세 가지 행상은 신(信)심소를 반대로 뒤집은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불신(不信, aśraddhā)심소는 신(信)의 반대 심소로서, 믿음을 장애하여 심왕을 오염케 하는 심리작용으로, 그리하여 해태(懈怠)심소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然諸染法各有別相。唯此不信自相渾濁,復能渾濁餘心、心所。如極穢物自穢穢他。是故說此心穢爲性。由不信故於實、德、能,不忍樂欲。非別有性。若於餘事邪忍樂欲,是此因、果非此自性。

모든 잡염법은 각각 별도의 인식활동이 있으나, 오직 이 불신만이 그 자성이 혼탁하고, 또한 능히 다른 심왕과 심소를 혼탁하게 하나니, 매우 더러운 물건은 스스로도 더럽고 다른 것도 더럽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불신은 심왕을 더럽히는 것을 체성(體)으로 한다고 말하며, 불신에 의거하기 때문에 참다운 존재(實)ㆍ덕(德)ㆍ능력(能)을 인정하거나 즐거워하거나 욕구하지 않으며, 별도로 다른 체성(體)이 있는 것은 아니니,

만약 다른 잡염법에 대해서 삿되게 인정하고 즐거워하고 욕구한다면, 불신의 삿되게 인정하게 된 원인과 삿되게 즐거워하고 욕구하는 결과가 될 뿐, 이 불신의 체성(體)은 아니다.

만약 다른 잡염법 등에 대해서 삿되게 인정하고 즐거워하며 욕구한다면, 자체가 사욕(邪欲)ㆍ사승해(邪勝解)가 되는 것이다.


云何懈怠?於善惡品修斷事中懶墯爲性。能障精進增染爲業。謂懈怠者滋長染故。於諸染事而策勤者亦名懈怠。退善法故。於無記事而策勤者,於諸善品,無進退故,是欲、勝解非別有性。如於無記忍可樂欲,非淨非染,無信、不信。

무엇이 ‘해태(懈怠)심소’인가? 선품(善品)을 닦고 악품(惡品)을 끊음에 대해서 게으른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정진을 장애하여 잡염을 증장함을 업(業)으로 삼는 것으로, 게으른 사람은 잡염법을 증장하기 때문이다.

모든 잡염법의 일에 대해서 부지런히 책려하는 것도 역시 해태 심소라고 이름하나니, 선법을 퇴전시키기 때문이다.

무기에 대해서 부지런히 책려하는 것은 모든 선품(善品)에 대해서 나아가게도 물러나게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욕(欲)ㆍ승해(勝解) 심소가 되며, 별도로 체성이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니, 

무기에 대해서 인정하고 즐거워하고 욕구하는 것이 청정도 잡염도 아니므로 신(信)심소도 아니고 불신(不信)심소도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해태(懈怠, kausīdya)심소는 ‘게으름’의 심리로서 근(勤)심소의 반대이다. 선을 닦지 않고 악을 방지하지 않으며, 당장은 안락하지만 결국 자신을 망치게 된다. 성불을 향한 수행을 장애하는, 이것은 해태ㆍ탐ㆍ진ㆍ치 심소의 일부분이며 따로 체(體)가 없다.


云何放逸?於染淨品不能防修,縱蕩爲性。障不放逸增惡損善所依爲業。謂由懈怠、及貪、瞋、癡,不能防修染淨品法,摠名放逸。非別有體,雖慢、疑等,亦有此能,而方彼四勢用微劣。障三善根、遍策法故。推究此相如不放逸。

무엇이 ‘방일(放逸)심소’인가? 잡염품을 방지할 수 없거나 청정품을 닦을 수 없고 방탕하게 흐르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불방일(不放逸)을 장애하여 악을 증장하고 선법을 훼손하는 것의 의지처가 됨을 업(業)으로 삼는다.

해태ㆍ탐ㆍ진ㆍ치 심소 때문에 잡염품을 방지하거나 청정품의 법을 닦을 수 없는 것을 총체적으로 방일이라고 이름하며,  별도의 자체는 없는 것이다.

만(慢)ㆍ의(疑) 심소 등도 역시 이러한 작용이 있지만,  그러한 해태ㆍ탐ㆍ진ㆍ치 심소의 네 가지에 비해서 세력이 미약하고,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 심소의 세 가지 선근과 정진의 변책(遍策)의 법을 장애하기 때문이며, 이것의 인식활동을 추정하는 것은 불방일 심소와 같은 것이다

 

방일(放逸, pramāda)심소는 흐트러진 심리로서 선행을 하고 악행을 방지할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방탕하며 함부로 행동하려는 심리이다. 이것은 해태ㆍ탐ㆍ진ㆍ치 심소의 일부분으로서 따로 체(體)가 없다.

 

云何失念?於諸所緣不能明記爲性。能障正念,散亂所依爲業。謂失念者,心散亂故。

무엇이 ‘실념(失念)심소’인가? 모든 소연(所緣, 인식대상)에 대하여서 분명하게 기억할 수 없음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바른 기억의 정념(正念)을 장애하여 산란의 의지처가 됨을 업(業)으로 삼는 것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이다.

 

실념(失念, muṣitasṁṛtitā)심소는 기억하지 못하는 심리작용으로서,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기분이 산만하여 선법을 지속적으로 상기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것은 염(念)과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다.


有義失念念一分攝。說是煩惱相應念故。有義失念癡一分攝。'瑜伽'說此是癡分故。癡令念失故名失念。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실념(失念)은 염(念)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것이 번뇌와 상응하는 것을 염(念)심소라 하나니,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권에서 말한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실념(失念)은 치(癡)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이니, '유가사지론' 제 55권에서 이것이 치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때문이며, 치심소가 기억하는 것을 잃게 하기 때문에 실념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有義失念俱一分攝。由前二文影略說故,論復說此遍染心故。

호법의 정의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실념(失念)은 염(念)ㆍ치(癡) 심소의 두 가지를 갖춘(俱)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으로, 앞에서 인용한 두 문장에 그림자처럼 생략해서 말한 것에 의한 때문이고, 또한 논서에서는 이것이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한 때문이라고 하였다.


云何散亂?於諸所緣令心流蕩爲性。能障正定惡慧所依爲業。謂散亂者發惡慧故。

무엇이 ‘산란심소’인가? 모든 소연(所緣, 인식대상)에 대하여서 심왕(心)을 방탕하게 흐르게 함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바른 정(定)심소를 장애하여 악혜(惡慧)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業)으로 삼으니, 산란한 사람은 악혜(惡慧)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산란(散亂, vikṣepa)심소는 심왕을 갖가지 대상으로 치달리게 하고 흩뜨려서 정정(正定)을 장애하고 악혜(惡慧)를 일으킨다.


有義散亂癡一分攝。󰡔瑜伽󰡕說此是癡分故。有義散亂,貪、瞋、癡攝,󰡔集論󰡕等說是三分故。說癡分者遍染心故。謂貪、瞋、癡令心流蕩,勝餘法故說爲散亂。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산란은 치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이니, '유가사지론' 제 55권에서 이것이 치심소의 부분이라고 말한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산란은 탐ㆍ진ㆍ치 심소에 포함되는 것으로,  '대승아비달마집론' 제 1권과 '대승광오온론' 등에서 이것이 세 가지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설한 내용을 회통하자면, 치심소의 일부분이라고만 말한 것은 잡염심에 두루하기 때문이고, 탐ㆍ진ㆍ치 심소가 심왕을 방탕하게 흐르게 하는 것이 만(慢)심소 등의 다른 법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산란이라 말하는 것이다.


有義散亂別有自體。說三分者是彼等流,如無慚等非卽彼攝。隨他相說名世俗有。散亂別相謂卽躁擾。令俱生法皆流蕩故。

호법의 정의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산란은 별도로 자체가 있으니, 세 가지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 그것의 등류이기 때문이고, 무참(無慚) 등과 같이 곧 탐ㆍ진ㆍ치 심소에 포함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대승아비달마집론' 제1권 등의 내용을 회통하자면, 다른 것의 인식활동을 따라서 세속유(世俗有)라 이름하고, 산란의 개별적인 인식활동은 조급하고 어지러운 것을 말하는 것이니, 함께 일어나는 구생법(俱生法)으로 하여금 모두 방탕으로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若離彼三無別自體,不應別說障三摩地。掉擧、散亂二用,何別?彼令易解,此令易緣。雖一剎那解、緣無易,而於相續有易義故。染污心時,由掉、亂力常應念念易解易緣。或由念等力所制伏如繫猿猴。有暫時住故,掉與亂俱遍染心。

만약  탐ㆍ진ㆍ치 심소의 세 가지를 떠나서 별도의 자체가 없다고 말한다면, 별도로 삼마지(三摩地, 등지)를 장애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도거와 산란, 이 둘의 작용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도거는 이해(解)를 바뀌게 하고, 산란은 연(緣)을 바뀌게 하는 것으로, 이해(解)와 연(緣)을 한 찰나에 바뀌게 하지는 않지만, 상속함에 있어서는 바꾸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염오심의 시기에는 도거와 산란의 세력에 의해서 항상 생각생각마다 이해를 바꾸고 연(緣)을 바꾸는 것이니, 혹은 염(念)심소 등의 힘으로 억제하고 조복하는 것이 마치 원숭이를 묶어 놓은 것과 같아서 잠시 안주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도거와 산란 심소는 함께 잡염심에 두루하는 것이다.

 

삼마지(三摩地, samdhi)는 등지(等持)로 번역하며, 선정을 닦아서 마음을 한 대상에 안주하여 움직임이 없는 것을 말한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6 9

 

云何爲慳?耽著財、法不能慧捨,秘悋爲性。能障不慳,鄙畜爲業。謂慳悋者,心多鄙澀,畜積財、法,不能捨故。此卽貪愛一分爲體。離貪、無別慳相用故。

무엇이 ‘(, mātsarya)심소가? 재물과 법에 탐착해서 베풀지 못하고 감추고 아끼는 것을 체성()으로 삼으니인색하지 않음의 불간(不慳) 능히 장애하여 비루하게 비축함을 ()으로 삼는다.

인색한 사람은 마음이 비루하게 많이 머뭇거리나니, 재물과 법을 축적해서 능히 주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탐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하나니탐심소를 떠나서 별도로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심소 인색’,  자신의 재산ㆍ가정ㆍ사회적 지위 나아가 수증과(修證果) 지나치게 아까워하여서 남에게 베풀지 않고 몰래 감추어 두려는 심리작용으로, 이것은 ()심소의 일부분이다.


云何爲誑?爲獲利譽,矯現有德,詭詐爲性,能障不誑,邪命爲業。謂矯誑者,心懷異謀,多現不實邪命事故。此卽貪、癡一分爲體。離二無別誑相用故。

무엇이 광(誑, śaṭya)심소’인가? 이익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교묘하게 덕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서 속이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속이지 않음의 불광(不誑)을 능히 장애하여 삿되게 살아가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다. 

교묘하게 속이는 사람은 마음에 다른 음모를 품고, 대부분 진실치 못한 삿된 생계수단의 일을 나타내며, 이것은 탐ㆍ치 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하나니, 탐ㆍ치 심소를 떠나서는 별도로 광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광(誑)심소는 ‘속임’, 즉 이익과 명예를 얻기 위해 거짓으로 덕이 있는 것처럼 꾸미는 심리작용으로, 그리하여 정직하지 못한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탐(貪)심소와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다.


云何爲諂?爲網他故,矯設異儀,險曲爲性,能障不諂、教誨爲業。謂諂曲者,爲網帽,他,曲順時宜,矯設方便,爲取他意,或藏己朱,不任師友正教誨故。此亦貪、癡一分爲體。離二無別諂相用故。

무엇이 첨(諂)심소’인가? 남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교묘하게 다른 행동을 보여서 진실하지 못하게 굽히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아첨하지 않음의 불첨(不諂)과 가르침의 교회(敎誨)를 능히 장애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다. 

아첨해서 굽히는 사람은 남을 끌어들이기 위해 굽혀서 적절한 시기에 따라 교묘하게 방편을 시설해서 남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혹은 자기의 과실을 감추기 위해 스승과 친구의 바른 가르침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탐ㆍ진 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삼으니, 탐ㆍ진 심소를 떠나서는 별도로 첨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첨(諂, māya)심소는 ‘아첨’, 즉 자기 본심을 숨겨 두고서 남에게 거짓으로 순종하는 것처럼 위장하거나, 남에게 아첨해서 자기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심리작용이다. 탐(貪)심소와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다.


云何爲害?於諸有情,心無悲愍,損惱爲性,能障不害,逼惱爲業。謂有害者,逼惱他故。此亦瞋恚一分爲體。離瞋無別害相用故。瞋、害別相,准善應說。

무엇이 ‘해(害)심소’인가? 모든 유정에 대해서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지 않고 손해를 끼치고 괴롭히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해롭게 하지 않음으니 불해(不害)를 능히 장애하여 핍박함을 업(業)으로 삼는다. 

해롭게 하는 사람은 남을 핍박하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진(瞋)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삼으며, 진심소를 떠나서는 별도로 해(害)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진(瞋)ㆍ해(害) 심소의 개별적인 모습의 별상(別相)은 선심소에 견주어서 말해야 한다. 

 

해(害, vihiṃsā)심소는 ‘해침’, 즉 모든 유정에게 연민의 정을 갖지 못하고 손해를 입히며 괴롭히는 심리작용으로, 진(瞋)심소의 일부분이다.

진(瞋)ㆍ해(害) 심소의 개별적인 모습의 별상(別相)

진(瞋)심소는 11 가지 선심소 중에서 무진(無瞋)심소를 장애하므로, 바로 자(慈)를 장애하고,  

해(害)심소는 선의 심소 중에서 불해(不害)심소를 장애하므로, 바로 비(悲)를 장애하고,

진(瞋)심소는 자주 남의 목숨을 괴롭히고 끊게 하며,

해(害)심소는 오직 남을 괴롭히는 작용을 한다.


云何爲憍?於自盛事,深生染著,醉傲爲性,能障不憍,染依爲業。謂憍醉者,生長一切雜染法故。此亦貪愛一分爲體。離貪無別憍相用故。

무엇이 교(憍)심소’인가? 자신의 번성한 일에 대해서 깊이 탐착심을 일으켜서 취하여 방자(교만)함을 체성(體)으로 삼고, 방자하지 않음의 불교(不憍)을 능히 장애하여 잡염의 의지처가 됨을 업(業)으로 삼으니, 방자한 사람은 모든 잡염법을 일으키고 증장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탐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삼으며, 탐심소에서 떠나서는 별도로 교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교(憍, mada)심소는 ‘방자함’, ‘교만’, 즉 자신이 지닌 우월한 특성(미모ㆍ혈통ㆍ학식 등)에 도취되어 교만해지는 심리작용으로서, 이에 특별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며, 탐(貪)심소의 일부분이다.

 

무참 · 무괴, 두 가지 중수번뇌인 중수혹(中隨惑) 체성과 업을 해설한다.

云何無慚?不顧自、法,輕拒賢善爲性,能障㝵慚生長惡行爲業。

謂於自法無所顧者,輕拒賢善,不恥過惡,障慚生長諸惡行故。

무엇이 ‘무참(無慚)심소’인가? 자신과 법을 돌아보지 않고 현인을 가볍게 여기고 선법(善法)을 거부함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참(慚)심소를 장애하여 악행을 증장함을 업(業)으로 삼는다. 

자신과 법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현인을 가볍게 여기고 선법을 거부하여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참(慚)심소를 장애하여 모든 악행을 일으키고 증장하기 때문이다.

 

무참(無慚, āhrīkya)심소는 참(慚)의 반대 심소로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여 부끄러움을 내지 않으며, 현인과 선법을 경시하는 심리작용이다.


云何無愧?不顧世閒崇重暴惡爲性,能障㝵愧,生長惡行爲業。謂於世閒,無所顧者崇重暴惡,不恥過罪,障愧生長諸惡行故。不恥過惡,是二通相。故諸聖教假說爲體。

무엇이 ‘무괴(無愧)심소’인가? 세간을 돌아보지 않고 포악함을 받들어 중히 여기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괴(愧)심소를 장애하여 악행을 일으키고 증장함을 업(業)으로 삼는다. 

세간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포악함을 받들어 중히 여겨서 죄과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괴심소를 장애하여 여러 악행을 일으키고 증장하기 때문이니,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은 무참 · 무괴  가지의 공통된 양상이다. 

따라서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에서 가정적으로 말해서 자체로 삼는 것이다.

여러 경론에서 무참(無慚)ㆍ무괴(無愧)심소의 자체를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불취(不恥)로 설명하므로 여기서 그것을 회통하여 불치(不恥)   가지 심소의 공통된 상임을 밝힌 것이다.

 

무괴(無愧, anapatrāpya)심소는 괴(愧)의 반대 심소로서, 남을 고려하지 않고 나쁜 짓을 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이 포악하며, 악덕인(惡德人)을 따르는 심리작용이다.

 

若執不恥爲二別相,則應此二體無差別。由斯二法應不俱生。非受想等有此義故。若待自、他,立二別者,應非實有。便違聖教。若許此二,實而別起,復違論說俱遍惡心。不善心時,隨緣何境,皆有輕拒善及崇重惡義故。此二法俱遍惡心,所緣不異,無別起失。

만약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불취(不恥)에 집착해서  가지 개별적인 이별상(二別相)으 삼는다면, 곧  둘의 자체에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다.

종래의 견해를 비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참과 무괴,  법은 함께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므로, 수(受)ㆍ상(想) 심소 등에 이러한 뜻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과 남을 기다림으로써 둘의 개별적인 별상(別相) 건립한다면, 실유(實有)가 아니어야 하는 것으로, 만약 그러하다면 성스러운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다.

무참(無慚)ㆍ무괴(無愧) 심소가 실유(實有)로서 전후(前後)하여 일어난다고 말한다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음이 있으므로 () 두루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 비판한 것이다.

만약 무참(無慚)ㆍ무괴(無愧) 심소가 실유로서 따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또한 논서,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함께 악심에 두루한다고 말한 것에 위배되는 것이니, 불선심(不善心)의 시기에는 따라서 어떤 대상을 반연해도 모두 선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하고 악을 받드는 뜻이 있기 때문에,   법은 모두 악심에 두루하고, 소연(所緣, 인식대상)이 다르지 않으므로 따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과실이 없는 것이다.


然諸聖教說不顧自、他者,自、法名自,世閒名他。或卽此中拒善崇惡,於己益損名自他故。而論說爲貪等分者,是彼等流非卽彼性。

그러나, 모든 성스러운 가르침인에서 자타(自他)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자신과 법을 자(自)라고 이름한 것이고, 세간을 타(他)라고 이름한 것이다. 

혹은   가운데에서 선법을 거부하고 악을 받든다고 말하였으니, 자기에 대해서 이롭게 하거나 손해를 끼치는 것을 자타로 이름하기 때문이나,

그런데 논서, '유가사지론' 제58권에서 탐심소 등의 일부분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은, 이것이 그것의 등류이기 때문인 것으로, 그것의 체성(性)은 아닌 것이다.

 

云何掉擧?令心於境不寂靜爲性。能障行捨、奢摩他爲業。

무엇이 도거(掉擧)심소’인가? 심왕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해서 고요하지 않게 함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행사(行捨)와 사마타(奢擧他)를 장애함을 업(業)으로 삼는다.

 

도거(掉擧, auddhatya)심소는 ‘들뜸’, 즉 심왕을 들뜨게 하여 어수선하며, 고요하지 못하게 하는 심리작용이다. 행사(行捨)심소와 사마타를 장애한다.

사마타(奢摩他, amatha)는 지(止)ㆍ적정(寂靜)ㆍ지식(止息) 등으로 번역하며, 심왕을 거두어 연(緣)에 안주하여 산란을 떠난 것을 말한다.


有義掉擧貪一分攝。論唯說此是貪分故,此由憶昔樂事生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도거심소는 탐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이니,  

논서,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오직 이것은 탐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때문이니, 이것은 과거의 즐거웠던 일을 생각함에 의해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有義掉擧非唯貪攝。論說掉擧遍染心故。又掉擧相謂不寂靜。說是煩惱共相攝故。掉擧離此無別相故。雖依一切煩惱假立而貪位增。說爲貪分。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도거심소는 오직 도거심소에만 포함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논서,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6권과 '유가사지론' 제58권에서 도거심소는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한 때문이다. 

또한 도거심소의 인식활동의 행상(行相, 작용)은 적정(寂靜)하지 않음을 말하며, 이것이 번뇌의 공상(共相)에 포함된다고 말한 때문이니, 도거심소는 이것을 떠나서 별도의 인식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에 의거해서 가립하지만, 탐욕에서 증장되므로 탐심소의 일부분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이며, 


有義掉擧別有自性。遍諸染心如不信等,非說他分體便非實。勿不信等亦假有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도거심소는 별도로 체성이 있어야 하나니, 모든 잡염심에 두루하기 때문에, 불신 등과 같이 다른 것의 일부분이라고 말함으로써 도거심소 자체가 문득 실유가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불신 등도 역시 가유라고 말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며, 


而論說爲世俗有者,如睡眠等隨他相說。掉擧別相謂卽囂動。令俱生法不寂靜故。若離煩惱無別此相,不應別說障奢摩他。故不寂靜非此別相。

그런데 논서,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세속유(世俗有)라고 말한 것은 수면(睡眠) 등과 같이 다른 것의 인식활동에 따라 말한 것이니, 도거심소의 개별적인 별상(別相)이란, 시끄럽게 움직이는 것을 말하며, 함께 일어나는  심왕ㆍ심소법으로 하여금 적정치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번뇌를 떠나서 별도의 별상(別相) 없다고 말한다면, 별도로 사마타(奢摩他)를 장애한다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따라서 적정하지 않은 것은 이것의 개별적인 인식활동이 아닌 것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6 8

 

然迷諦相有摠有別。摠謂十種皆迷四諦。苦、集是彼因、依處故。滅、道是彼怖畏處故。別謂別迷四諦相起。二唯迷苦,八通迷四。身邊二見唯果處起。別空非我屬苦諦故。

진리의 상인 제상(諦相)에 미혹함에는 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있으니,

총체적인 것의 14 가지 모두는 성제(四聖諦)에 미혹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고제ㆍ집제는 그것의 원인이고 의지처이기 때문이며, 멸제ㆍ도제는 그것이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것이란, 사성제의 상(相)에 각각 별도 미혹해서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유신견과 ㆍ변견(邊見), 두 가지는 대부분 유루의 과보처(果報處)를 계탁하는 것으로, 오직 고제에 미혹한 것이고,

나머지 8 가지는 4성제에 공통적으로 미혹한 것이다. 

유신견ㆍ변견은 오직 과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니, 개별적인 것의 공(空)ㆍ비아(非我, 무아)는 오직 고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성제의 16행상(十六行相)은 4제(諦)를 관찰하는 16종의 관법(觀法)을 말한다.
*고제(苦諦)의 4행상 : 만유의 현상은 생멸 변화하는 것이며, 고(苦)ㆍ공(空)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행상을 관함.
*집제(集諦)의 4행상 : 온갖 번뇌와 업(業)은 고과(苦果)를 내는 인(因)이며, 고과를 모아(集) 나타나게 하며, 상속하여 나게(生) 하며, 고과를 이루게 하는 연(緣)이라 관함.
*멸제(滅諦)의 4행상 : 멸제는 물(物)ㆍ심(心)의 속박이 없는 진리며(滅), 번뇌의 시끄러움이 없으며(靜), 3계를 벗어나 온갖 근심이 없으며(妙), 온갖 재액(災厄)을 여의었다고(離) 관함.
*도제(道諦)의 4행상 : 도제는 진리에 들어가는 길이며(道), 올바른 이치에 계합하며(如), 열반 적정한 경지에 가게 하며(行), 생사계를 뛰어나게 하는(出) 것이라고 관함. - 천석


謂疑三見親迷苦理。二取執彼三見、戒禁及所依薀爲勝能淨。於自他見及彼眷屬,如次隨應起貪、恚、慢。相應無明與九同迷。不共無明親迷苦理。疑及邪見親迷集等。二取、貪等准苦應知。

의(疑)와 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의 3 가지 악견심소는 고제의 이치에 미혹한 것이며,

견취견(見取見)과 계금취견(戒禁取見)의 2 가지 견취견은 유신견ㆍ변견ㆍ사견의 세 가지 악견 계금(戒禁)  의지처인 5온에 집착해서, 뛰어나고 능히 청정하게 하는 것으로 소의(所依, 의지처)로 삼으며, 자신과 타인의 견해   권속에 대해서 순차적으로 상응한 바에 따라서 탐ㆍ진ㆍ만 심소를 일으킨다.

9 가지 번뇌와 상응하는 무지(無智)는 9 가지 번뇌와 함께 모두 미혹하며,

불공무명(不共無明)은 바로 고제의 이치에 미혹하며,

의(疑)ㆍ사견(邪見)은 집제 등에 미혹하며,

견취견과 탐심소 등의 2 가지는 고제에 미루어 알아야 하는 것이다.

 

2무명(二無明) 또는 2종무명(二種無明)은 다음 중 어느 하나를 뜻한다.
① 독두무명(獨頭無明, 불공무명)과 상응무명(相應無明)
② 견고소단(見苦所斷)의 무명과 견집소단(見集所斷)의 무명.

무명(無明)은 탐(貪) · 진(瞋) · 만(慢) · 치(癡, 無明) · 의(疑) · 견(見, 惡見)의 6근본번뇌 가운데 하나인데, 무명은 나머지 5가지 근본번뇌와 상응하면서 생기(生起)할 수도 있고, 이들과 상응하지 않고 그 자체로 홀로 생기할 수도 있다. 후자의 홀로 생기하는 무명(無明)을 독두무명 또는 불공무명이라 한다.- 위키


然瞋亦能親迷滅道。由怖畏彼生憎嫉故。迷諦親疏麤相如是。委細說者貪、瞋、慢三,見、疑俱生,隨應如彼。

踈 트일 소, 거칠 소, 적을 소

진(瞋)심소는 역시 직접 멸제와 도제에 미혹한 것으로, 그것을 두려워함으로써 증오와 질투를 일으키기 때문이며,

사성제에 미혹한, 직접적인 친(親), 간접적인 소(踈) 두드러짐의 추(麤)와 미세함의 세(細)가 이와 같으니, 자세히 말하자면 탐ㆍ진ㆍ만의 3 심소가 악견(惡見)ㆍ의(疑) 심소와 함께 생겨나는 것은 상응하는 바에 따라 그것과 같은 것이다.


俱生二見及彼相應愛、慢、無明,雖迷苦諦,細難斷故,修道方斷。瞋、餘愛等,迷別事生,不違諦觀故修所斷。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기(俱生起)의 유신견과 변견의 두 가지 견해와 그것에 상응하는 탐ㆍ만ㆍ무명은 고제(苦諦)에 미혹하지만, 인식작용이 미세하여 단멸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수도(修道)에서 비로소 단멸될 수 있고,

진(瞋)과 나머지 탐(貪) 등은 별도의 본질인 별사(別事)에 미혹해서 생겨나는 것으로, 진리를 관찰하는 것에 거스르지 않기 때문에 수도(修道)에서 단멸된다.

 

여기서의 '별사(別事)'라는 용어에는 두 가지의 해석이 있어서, 

하나는 별(別)과 사(事)를 구분하여 별개의 유정과 대상의 본질인 경사(境事)로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별(別)을 형용사로 보아서 별개적인 유정의 본질인 유정사(有情事)와 대상의 본질로 설명한 것이다.

 

번뇌심소의 대상에 본질(事)이 있고 없음을 판별한다.
雖諸煩惱皆有相分,而所仗質或有或無,名緣有事、無事煩惱。

모든 번뇌심소 모두가 상분(相分, 객관으로서의 식)이 있지만, 의지되는 것의 본질이 혹 있기도 하고 혹 없기도 한 것으로, 

본질이 있는 유사(有事)을 반연하는 번뇌와 본질이 없는 무사(無事)를 반연하는 번뇌라고 이름한다. 

유신견 등과  상응하는  등은 본질이 없으므로 무사(無事) 반연한다고 이름하고,

나머지 그것들과 함께 일어나지 않는 것은 유사(有事) 반연한다고 이름한다.

 

彼親所緣雖皆有漏,而所仗質亦通無漏,名緣有漏、無漏煩惱。緣自地者相分似質,名緣分別所起事境緣。滅、道諦及他地者相分與質,不相似故,名緣分別所起名境。餘門分別,如理應思。

그것의 친소연(親所緣)은 모두 유루이지만, 의지되는 본질(事)은 역시 무루에도 통하는 것으로,

유루를 반연하는 번뇌와 무루를 반연하는 번뇌라고 이름하며, 

자기 지위인 자지(自地)를 반연하는 것은 상분(相分, 주관으로서의 식)이 본질에 비슷하므로 분별해서 일어난 분별기(分別起)의 본질의 대상인 경사(境事)을 반연한다고 이름한다.

멸제ㆍ도제ㆍ다른 지위의 타지(他地)를 반연하는 것은 상분(相分)이 본질과 비슷하지 않기 때문에, 분별해서 일어난 명칭의 대상인 명경(名境)을 반연한다고 이름하며, 다른 부문을 판별하는 것은 논리에 맞게 생각해야 한다.

번뇌심소가 본질이 있는 대상인 경사(境事) 반연하는 것과 명칭만 있는 대상인 명경(名境) 반연하는 것을 판별한다.

 

*유식학에서는 우리가 외계사물을 직접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식상(識上)의 형상을 인식한다고 본다. 이것은 곧 하나의 인식이 성립될 때, 식이 주관과 객관으로 이분화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상분(相分)은 객관으로서의 식, 즉 식상(識上)의 영상(影像)으로서 소취분(所取分)ㆍ소량(所量)ㆍ사경상(似境相)ㆍ유상식(有相識)이라고도 하며,

견분(見分)은 주관으로서의 식, 즉 상분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작용으로서 능취분(能取分)ㆍ능량(能量)ㆍ능취상(能取相)ㆍ유견식(有見識)이라고도 하며,

자증분(自證分)은 이분화 되기 이전의 식 자체로서 견분과 상분에 의한 인식작용의 결과를 확인하는 인식체의 역할을 한다.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에 관하여 해설한다.
已說根本六煩惱相。諸隨煩惱,其相云何?頌曰:

이상의 6 가지 번뇌심소의 양상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러면 여러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의 상(相)은 어떠한 것인가?

'삼십송'의 제12ㆍ13 ㆍ14에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으니; 


隨煩惱謂忿 恨覆惱嫉慳, 誑諂與害憍 無慚與無愧

掉擧與惛沈 不信幷懈怠, 放逸及失念 散亂不正知。

수번뇌심소는 분(忿, 성내고 원망)ㆍ한(恨, 원한을 품)ㆍ부(覆, 감)ㆍ뇌(惱, 괴로워)ㆍ질(嫉, 시샘하고 미워)ㆍ간(慳, 아끼고 망설)ㆍ광(誑, 속이고 유혹)ㆍ첨(諂, 아)과 해(害, 해)ㆍ교(憍, 교만함)

무참(無慚, 자신의 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음) 및 무괴(無愧, 남에게 부끄럽게 여기지 않음), 도거(掉擧, 들뜬 마음)와 혼침(惛沈, 가라앉은 마음), 불신(不信) 아울러 해태(懈怠, 게으름), 방일(放逸, 선법을 닦지 않음) 및 실념(失念, 망념),

산란(散亂)ㆍ부정지(不正知, 그릇된 앎, 그릇된 이해)이다.

20 가지의 수번뇌심소를 밝힌 것으로, 수번뇌심소는 독립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근본번뇌심소의 작용에 의해 동류(同類)로서 이끌려 일어나는 것이다.


論曰:唯是煩惱分位差別,等流性故,名隨煩惱。此二十種類別有三。謂忿等十各別起故,名小隨煩惱。無慚等二遍不善故,名中隨煩惱。掉擧等八遍染心故,名大隨煩惱。

▷논하여 말한다; 이것은 오직 번뇌의 분위(分位, 측면)의 차이이고, 등류(等流, 비슷한 종류)의 성질이므로 수번뇌라고 이름하며, 이 20 가지의 종류를 구분하면 3 가지가 되는 것으로,

분(忿)ㆍ한(恨)ㆍ부(覆)ㆍ뇌(惱)ㆍ질(嫉)ㆍ간(慳)ㆍ광(誑)ㆍ첨(諂)ㆍ해(害)ㆍ교(憍) 심소 등의 10 가지는 각각 따로 일어나기 때문에 소수번뇌(小隨煩惱)라 이름하고,

무참(無慚)ㆍ무괴(無愧) 심소 등의 2 가지는 불선(不善)에 두루하기 때문에 중수번뇌(中隨煩惱)라고 이름하고,

도거(掉擧)ㆍ혼침(惛沈)ㆍ불신(不信)ㆍ해태(懈怠)ㆍ방일(放逸)ㆍ실념(失念)ㆍ산란(散亂)ㆍ부정지(不正知)의 심소 등의 8 가지는 잡염심에 두루하기 때문에 대수번뇌(大隨煩惱)라고 이름한다.

*소수번뇌심소의 10가지 모두: 분 · 한 · 부 · 뇌 · 질 · 간 · 광 · 첨 · 해 · 교
*중수번뇌심소의 2가지 모두: 무참 · 무괴
*대수번뇌심소의 8가지 모두: 도거 · 혼침 · 불신 · 해태 · 방일 · 실념 · 산란 · 부정지

 

분위(分位)= 측면, 국면, 상태, 양태, 단계, aspect, phase

등류(等流)= 비슷한 종류

 

먼저 열 가지 대수번뇌인 대수혹(大隨惑)의 체성과 업을 해설한다.

云何爲忿?依對現前不饒益境,憤發爲性。能障不忿,執杖爲業。謂懷忿者多發暴惡身表業故。此卽瞋恚一分爲體。離瞋無別忿相用故。

무엇이 ‘분(忿, krodha)심소’인가? 현전의 이롭지 않은 대상을 대함으로써 분발하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분노하지 않는 불분(不忿)을 능히 장애하고 몽둥이를 잡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다. 

분노를 품는 사람은 대부분 포악한 몸의 신표업(身表業)을 많이 일으키기 때문이며, 이것은 성냄의 진(瞋)심소의 일부분으로써 자체(體)를 삼는 것이니, 성냄의 진(瞋)심소를 떠나서는 별도의 분노의 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분(忿)심소는 ‘분노’, ‘노여움’, 즉 자신에게 이익이 없는 대상ㆍ경우에 대해 분노하는 심리작용이며, 이로써 포악한 행동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은 진(瞋)심소의 일부분이며 따로 체(體)가 없는 것이다.

분노하기 때문에 몽둥이를 잡아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을 때히는 것은 악한 신표업(身表業)이고, 이외에 욕과 악담을 하는 악한 어표업(語表業)이 있다.


云何爲恨?由忿爲先懷惡不捨,結怨爲性。能障不恨,熱惱爲業。謂結恨者,不能含忍,恒熱惱故。此亦瞋恚一分爲體。離瞋無別恨相用故。

무엇이 ‘한(恨, upanaha)심소’인가? 이전에 분노가 있었기 때문에 악을 품고 버리지 않아서 원한을 맺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으며, 원한을 품지 않는 불한(不恨)을 능히 장애하고 매우 괴롭게 함을 업(業)으로 삼는다.

원한을 맺은 사람은 참을 수 없어서 항상 매우 괴롭기 때문이며, 한(恨)심소도 역시 진(瞋)심소의 일부분을 자체(體)로 하는 것으로, 진심소를 떠나서는 별도로 한(恨)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한(恨)심소는 ‘원한’, 즉 분노하고 원한을 품어서 마음이 열뇌(熱惱)하는 작용이며, 이것 역시 진(瞋)심소의 일부분이다.


云何爲覆?於自作罪,恐失利譽,隱藏爲性,能障不覆,悔惱爲業。謂覆罪者,後必悔惱,不安隱故。

무엇이 ‘부(覆, mrakṣa)심소’인가? 이익과 명예를 잃을까 두려워하여 자신의 지은 죄를 감추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숨기지 않음의 불부(不覆)를 능히 장애하며 후회하면서 괴로워함을 업(業)으로 삼으니, 

죄를 숨기는 사람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고 괴로워하여 안온함이 없기 때문이다.

 

부(覆)심소는 ‘숨김’ㆍ‘덮음’ㆍ‘허물 감추기’, 즉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면 재산과 명예의 손실을 볼까 두려워 감추는 심리작용으로, 그리하여 마음이 불안하고 후회하며 열뇌하게 된다. 이것은 탐(貪)심소와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다.


有義此覆癡一分攝。論唯說此癡一分故,不懼當苦覆自罪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 부(覆)심소는 치(癡)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으로,

논서, '유가사지론' 제55권과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권에서 이것은 오직 치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하였으니, 

장래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자신의 죄를 덮어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有義此覆,貪、癡一分攝,亦恐失利譽,覆自罪故。論據麤顯,唯說癡分。如說掉擧是貪分故。然說掉擧遍諸染心。不可執爲唯是貪分。

또한 호법이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 부(覆)심소는 탐ㆍ치 심소의 일부분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 역시 이익과 명예를 잃을까 두려워해서 자신의 죄를 덮어두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논서, '유가사지론' 제55권과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에 의거해서 오직 치(癡)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도거(掉擧)심소를 탐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거심소는 모든 잡염심에 두루한다고 말하였으므로, 이에 집착해서 오직 탐심소의 일부분으로만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유가사지론' 제55권과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권 등에서는 ()심소가 무지(無智) 함께함으로써 명예를 잃을까 두려워 죄를 덮어 두는 것에 의거하여 ()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것으로, 사실은 탐심소의 일부분에도 있는 것이다예를 들면 도거(掉擧)심소는 실제는 별도로 자체(體) 있지만, () 모습이 증성하므로 탐심소의 일부분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


云何爲惱?忿、恨爲先,追觸暴熱很戾爲性,能障不惱,蛆螫爲業。謂追往惡,觸現違緣,心便很戾,多發囂暴凶鄙麤言,蛆螫他故。此亦瞋恚一分爲體。離瞋無別惱相用故。

무엇이 ‘뇌(惱, pradāsa)심소’인가? 먼저 분(忿)ㆍ한(恨) 심소가 있었으며, 그것을 좇아서 사납고 맹렬하게 다투고 어그러지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고뇌하지 않음의 불뇌(不惱)를 능히 장애하여, 타인에게 지네가 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다.

이전의 악을 좇고 현재의 거슬리는 위연(違緣)에 접촉하여서 마음이 문득 다투고 어그러져서, 대부분 사납고 흉하고 비루한 구체적인 말을 하여서 타인에게 마치 지네가 쏘듯이 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진(瞋)심소의 일부분을 자체(體)로 삼으니, 진심소를 떠나서 별도로 뇌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뇌(惱)심소는 ‘열뇌(熱惱)’, 즉 과거에 분하게 여긴 일을 돌이켜 생각하거나, 현재 일이 마음에 맞지 않아 괴로워하는 심리작용이다. 불편한 심기로 조악(粗惡)한 말로 타인을 씹게 되며, 진(瞋)심소의 일부분이다.


云何爲嫉?徇自名利,不耐他榮,妒忌爲性,能障不嫉,憂慼爲業。謂嫉妒者,聞見他榮,深懷憂慼,不安隱故。此亦瞋恚一分。爲體,離瞋無別嫉相用故。

무엇이 ‘질(嫉)심소’인가?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지나치게 구하여, 남의 영화를 참지 못하고 시기함을 체성(體)으로 삼고,  질투하지 않음의 불질(不嫉)을 능히 장애하여 근심함을 업(業)으로 삼는다.

질투하는 사람은 남의 영화를 보고 듣고서 깊이 근심을 품어 안온하지 못하며, 이것 역시 진(瞋)심소의 일부분을 자체로 삼는다. 진심소에서 떠나서 별도로 진심소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질(嫉, īrṣyā)심소는 ‘질투’, 즉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앞세워 다른 사람의 영화를 질투하는 심리작용으로, 진(瞋)심소의 일부분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 6 7

 

번뇌심소와 8식의 상응관계를 밝힌다

此十煩惱,何識相應?藏識全無,末那有四,意識具十。五識唯三,謂貪、瞋、癡。無分別故,由稱量等,起慢等故。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의 10 가지 번뇌심소는 어떠한 식(識)과 상응하는 것인가?

장식(藏識)에서는 전혀 없으나, 말나식에는 치(癡, 아치)ㆍ유신견(有身見, 살가야견)ㆍ만(慢, 아만)ㆍ탐(貪, 아애) 의 4 가지 심소 있으며

의식(意識)에서는 10 가지 모두를 갖고 있으며,

5식(五識)에서는 오직  가지이니, 탐ㆍ진ㆍ치 심소가 있으니,

5식(五識)에는 수념분별과 계탁분별이 없기 때문에, 만ㆍ의(疑) 등의 심소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고, 헤아리는 칭량(稱量) 등에서 만심소 등을 일으키는데,  5식(五識)은 헤아리는 작용을 하지 않으므로 그러한 심소들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에 따르면, 탐(貪) · 진(瞋) · 치(癡) · 만(慢) · 의(疑) · 악견(惡見)의 6가지 마음작용이 번뇌심소를 구성한다. 이들 중 치(癡)는 무명(無明)이라고도 하며, 악견(惡見)은 부정견(不正見)이라고도 한다.
악견(惡見)은 그 행상(行相)에 따라 살가야견(薩迦耶見: 유신견)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의 5견으로 세분된다. 따라서, 번뇌심소는 펼쳤을 때는 10가지가 되며 그렇지 않을 때는 6가지가 된다. -위키

 

번뇌심소와 5()와의 상응관계를 밝힌다.
此十煩惱何受相應?貪、瞋、癡三俱生分別,一切容與五受相應。貪會違緣憂苦俱故。瞋遇順境,喜、樂、俱故。

10 가지 번뇌심소는 어떠한 수(受, 느낌)와 상응하는가?

탐ㆍ진ㆍ치의 3 심소는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俱生)에서도 후천적인 분별(分別)에 의해 생겨나는 것에서도 모두 5수(受)와 상응한다고 인정되는 것으로,

탐심소가 거슬리는 위연(違緣)을 만났을 때에는 우수(憂受)ㆍ고수(苦受)와 함께하게 되기 때문이고,

진(瞋)심소가 수순의 대상을 만났을 때에는 희수(喜受)ㆍ낙수(樂受)와 함께하게 되기 때문이다.

 

5수(五受)는 느낌 · 지각 · 정서의 마음작용인 수(受) 또는 수온(受蘊)을 5가지로 세분한 고수(苦受, 괴로움) · 낙수(樂受, 즐거움) · 우수(憂受, 슬픔) · 희수(喜受, 기쁨) · 사수(捨受, 무덤덤함, 평온)를 말한다. 줄여서 낙(樂) · 고(苦) · 희(喜) · 우(憂) · 사(捨)라고도 한다. 5수는 '증상력 즉 뛰어난 작용력을 가진 5수'라는 뜻에서 5수근(五受根)이라고도 하며, 5수의 각각을 낙근(樂根) · 고근(苦根) · 희근(喜根) · 우근(憂根) · 사근(捨根)이라고 한다.


有義俱生分別起慢容與非苦四受相應。恃苦劣薀,憂相應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기(俱生起)의 만(慢)심소와 후천적으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분별기(分別起)의 만(慢)심소는 고수(苦受)는 아닌 네 가지의 사수(四受)와 상응함이 인정되나니, 

고수(苦受)가 있는 열등한 온(蘊)을 믿을 때에는 우수(憂受)와 상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有義俱生亦苦俱起。意有苦受前已說故。分別慢等純苦趣無。彼無邪師、邪教等故。然彼不造引惡趣業。要分別起能發彼故。

호법의 정의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기(俱生起)의 만(慢)심소는 역시 고수와도 함께 일어난고 하였으니, 극심한 고통의 세계에서 의식에 고수가 있다는 것은 앞의 본 논서 제5권에서 이미 언급하였 때문이다.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만심소 등은 순전히 고통만 있는 세계에서는 없으니, 거기에는 삿된 스승이나 삿된 가르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악취(惡趣)로 이끄는 업을 짓지 않으니, 반드시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써 능히 만(慢)심소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유가사지론' 제59권에서 설하였다.


疑、後三見容四受俱。欲疑無苦等,亦喜受俱故。二取若緣憂俱見等,爾時,得與憂相應故。

의(疑)심소와 나머지의 사견ㆍ견취견ㆍ계금취견의 3  악견(惡見)은  가지의 느낌의 사수(四受)와 함께하는 것이 인정되나니, 욕계에서 고수 등은 없는 것인가라고 의심할 때에 역시 희수와 함께하기 때문이고,  

 가지 견취견이 만약 우수(憂受)와 함께하는 악견 등을 반연할 때에는 우수(憂受)와 상응할  있기 때문이다.


有義俱生身邊二見但與喜、樂、捨受相應。非五識俱,唯無記故。分別二見容四受俱。執苦俱薀爲我、我所常,斷見翻此,與憂相應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유신견ㆍ변견(邊見)은 다만 희수ㆍ낙수ㆍ사수(捨受)와 상응할 뿐, 5식과 함께하지는 않으니, 5식과 함께하지 않으므로 고수(苦受)가 없기 때문에 오직 무기이며,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유신견과 변견(邊見)은 오직 무기(無記)이므로 우수(憂受)와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견해는  가지 느낌의 사수(四受)과 함께하는 것이 인정된다. 

고수(苦受)와 함께하는 5온을 집착해서 아(我, 나)ㆍ아소(我所, 나의 소유)이며 상주하는 것으로 삼는다면, 단견(斷見)이 반대로 뒤집어져서 우수(憂受)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有義二見,若俱生者亦苦受俱。純受苦處,緣極苦蘊,苦相應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두 견해 중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기(俱生起)는 역시 고수(苦受)와도 함께하나니, 순전히 고통만 받는 세계에서 극심한 고통의 5온을 반연할 때에는 고수와 상응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論說俱生一切煩惱,皆於三受現行可得。廣說如前。餘如前說。

논서, '유가사지론' 제59권에서 말하기를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기(俱生起)의 일체 번뇌는 모두  가지 느낌의 삼수(三受)에서 현행할  있다”고 하였으니, 구체적으로는 본 논서 5권에서 설명한 바와 같으며,

나머지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분별기(分別起)의 유신견과 변견은 앞에서 것과 같다.

 

此依實義。隨麤相者,貪、慢、四見樂、喜、捨俱。瞋唯苦、憂、捨受俱起。癡與五受皆得相應,邪見及疑四俱除苦。

이러함은 진실된 의미의 실의(實義)에 의해 말한 것이나, 그 두드러진 추상(麤相)을 따라 말하여 밝힌다면,

5견(見) 중에서 사견(邪見)을 제외한 유신견 · 변집견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의 4 가지 악견과 탐ㆍ만은 낙수ㆍ희수ㆍ사수와 함께하나니, 탐ㆍ만ㆍ4 가지 악견의 행상(行相)이 오직 기쁨(欣)일 뿐이므로, 우수(憂受)ㆍ고수(苦受)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瞋)심소는 오직 고수ㆍ우수ㆍ사수와 함께 일어나나, 진(瞋)심소는 오직 근심이나 슬픔의 행상(行相)일 뿐이므로 고수ㆍ우수ㆍ사수와 함께하는 것이며,

치(癡)심소는 5수(受)와 모두 상응할  있으니,

사견(邪見)과 의(疑) 심소는 고수를 제외한 낙수 · 우수 · 희수 · 사수의 사수(四受)와 함께한다.


貪、癡俱樂,通下四地。餘七俱樂,除欲通三。疑、獨行癡,欲唯憂、捨。餘受俱起如理應知。

탐(貪) 심소ㆍ치(癡)심소가 낙수와 함께하는 것은 하계의 4지(地)인 욕계ㆍ초선천(初禪天)ㆍ제2선천ㆍ제3선천에 통하며,

나머지 일곱 가지가 낙수와 함께하는 것은, 오직 제6식과 함께하기 때문에, 욕계를 제외한 나머지 셋에 통한다.

의(疑) 심소  홀로 작용하는 치(癡)심소는 욕계로서는 오직 우수와 사수뿐이니,

나머지가 수(受, 느낌)와 함께 일어나는 것은 논리에 맞게 알아야 한다.

 

번뇌심소와 별경심소와의 상응관계를 밝힌다.

此與別境幾互相應?貪、瞋、癡、慢,容五俱起。專注一境得有定故。疑及五見各容四俱。疑除勝解不決定故。見非慧俱不異慧故。

이 번뇌 심소가 몇 가지의 별경심소와 서로 상응하는 것인가? 

탐ㆍ진ㆍ치ㆍ만 심소는 사욕(邪欲) · 사승해(邪勝解) · 사염(邪念) · 사정(邪定) · 사혜(邪慧)의 5 심소와 함께 일어난다고 인정되며,

하나의 대상에 집중할 때에 정(定)심소가 있을  있기 때문이다. 

의(疑)와 다섯 악견은 각각 4 가지 심소와 함께하는 것이 인정되나니, 의심소에서는승해(邪勝解)를 제외하는 것은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악견은혜(邪慧)심소와 함께하지 않으니, 사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별경심소(別境心所), 욕(欲, chanda) · 승해(勝解, adhimoksa) · 염(念, smrti) · 정(定, 三摩地, samādhi) · 혜(慧, prajñā)의 5가지 마음작용.

 

번뇌심소의 3()판별한다.
此十煩惱何性所攝?瞋唯不善,損自他故。餘九通二。上二界者,唯無記攝。定所伏故。若欲界繫,分別起者,唯不善攝。發惡行故。若是俱生,發惡行者,亦不善攝,損自他故。餘無記攝,細不障善,非極損惱自他處故。

10 가지 번뇌심소는 어떠한 성(性, 성품)에 속하는 것인가?

진(瞋)심소는 오직 불선이니, 자신과 남을 해롭게 하기 때문이고,

나머지 9 가지는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의  가지에 공통되나니,

9 가지 번뇌심소가 위의 상이계(上二界)라면 오직 무기에만 포함되나니, 반드시 조복되기 때문이며,

욕계에 계박된 것이라면,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분별기(分別起)라면 오직 불선에만 포함되나니, 악행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기(俱生起)라면, 악업을 일으키는 것은 역시 불선에 포함되니 자신과 남을 해롭게 하기 때문이고, 그 나머지는 무기에 포함되나니, 미세하여 선을 장애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을 괴롭히거나 해롭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當知俱生,身邊二見唯無記攝,不發惡業。雖數現起,不障善故。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선천적으로 일어난 구생기(俱生起)의 유신견ㆍ변견은 오직 무기에만 포함되는 것으로 악업을 일으키지 않으니, 여러  현행하지만 선을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뇌심소가 계박되는 세계를 밝힌 계박분별(界繫分別)이다.
此十煩惱何界繫耶?瞋唯在欲,餘通三界。生在下地未離下染,上地煩惱不現。在前要得。彼地根本,定者彼地煩惱容現前故

  가지 번뇌심소는 어떤 세계에 계박되는가?

진(瞋)심소는 오직 욕계에만 있으나, 나머지는 3계(三界)에 통하나니,

하부 지위의 하지(下地)에 태어나 살면서 아직 열등한 잡염을 떠나지 못한 때에는 상부 지위인 상지(上地)의 번뇌를 현전하지 않으니, 반드시  지위의 근본정(根本定)을 얻은 자만이  지위의 번뇌를 현전한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번뇌심소가 상지(上地) 하지(下地)에서 현전(現前)하는 관계를 밝힌, 상하상기문(上下相起門)이다.

 

상지(上地)는 여러 지(地)가 있을 때 서로를 비교하여 하위에 위치하는 지(地)에 대하여 상위에 위치하는 지(地)

하지(下地)는 여러 지(地)가 있을 때 서로를 비교하여 상위에 위치하는 지(地)에 대하여 하위에 위치하는 지(地)

 

謂有漏道雖 不能伏分別起惑 及細俱生 而能伏除俱生麤惑,漸次證得上根本定。彼但迷事。依外門轉,散亂麤動,正障定故。得彼定已,彼地分別、俱生諸惑,皆容現前。

모든 유루도는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분별기(分別起)의 미혹과 미세한 선천적인 구생(俱生)의 것을 조복시킬 수는 없지만, 능히 선천적인 두드러진 미혹인 구생추혹(俱生麤惑)을 조복하고 제거하여 점차 상계의 근본정을 증득하나니,

선천적인 두드러진 미혹인 구생추혹(俱生麤惑)은 다만 현상에 미혹하고 감각기관(根)에 의해 전전하며,

산란하고 두드러지게 작용하여서 바로 선정을 장애하기 때문이니,

 선정을 증득한  지위의 선천적이거나 분별에 의한 모든 미혹을  현전한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生在上地,下地諸惑,分別俱生皆容現起生。第四定中有中者,由謗解脫,生地獄故。身在上地,將生下時,起下潤生俱生愛故。

상부 지위인 상지(上地)에 태어나 살면서는 하부 지위인 하지(下地)의 모든 미혹은 선천적이거나 분별에 의한 것이거나 모두 현전할  있으며,

제4선정의 중유(中有)에 태어나는 자가 해탈을 비방함으로써 지옥에 나기도 한다고,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6권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몸이 상지(上地) 있으면서 장차 하지(下地) 태어나고자 할 때에는, 하지(下地)에 태어남을 촉진하는 선천적인 애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중유(中有, antarabhāva), 즉 바르도(Bardo)는 불교에서 사유(死有)에서 생유(生有)로 이어지는 중간적 존재를 말하며, 중음(中陰), 중간계(中間界)라고도 한다. 

사람의 존재 상태를 4가지로 구분하는데, ① 생유(生有) ② 사유(死有) ③ 본유(本有, 生에서 死까지 생애) ④ 중유(中有: 이생에 죽어서 다음 生까지를 말함)이다.
이 중 네 번째의 중유(中有)의 상태의 정상적인 기간이 49일, 즉 사람이 죽은 뒤에는 일반적인 경우 49일이면 중유(中有)가 끝나고 다음 생(生)이 결정되므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49일재이다.


而言生上不起下者,依多分說,或隨轉門。下地煩惱亦緣上地。'瑜伽'等說欲界繫貪,求上地生,味上定故。旣說瞋恚憎嫉滅道,亦應憎嫉離欲地故。摠緣諸行,執我、我所,斷常慢者,得緣上故。

'유가사지론' 제58권의 내용을 회통하자면, 상지에 태어나서 하지의 견(邊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의 세 악견 일으키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많은 것의 다분(多分)에 의해서 말한 것이거나 근기에 따른 방편문이다.

하지의 번뇌는 역시 상지도 반연하나니, '유가사지론' 등에서 욕계에 계박된 탐(貪)심소가 상지에 태어남을 구하고, 상지의 선정을 음미한다고, '유가사지론' 제 62권에서 말한 때문이다. 

진(瞋)심소는 멸제ㆍ도제를 싫어하고 질투한다고, '유가사지론' 제 58권에서 말하고 있으므로, 역시 욕망을 떠난 지위도 싫어하고 질투해야 하기 때문이다. 

총체적으로 모든 행(行)을 반연해서(我, 나)ㆍ아소(我所, 나의 소유)로 집착하여서 단멸이나 상주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거만한 자는 상지를 반연할  있기 때문이다.


餘五緣上其理極成。而有處言貪、瞋慢等不緣上者,依麤相說或依別緣。不見世閒執他地法爲我等故。邊見必依身見起故。

나머지 치(癡)ㆍ의(疑)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의 5 가지 번뇌심소는 상지(上地) 반연한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가 매우 타당하나,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6권과 '유가사지론' 제58권ㆍ제59권에서 탐ㆍ진ㆍ만 심소 등이 상지를 반연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두드러진 추상(麤相) 의해서 말하거나 혹은 별도로 자신을 반연하여 나(我)로 삼는 것을 반연하는 것에 의해 말한 것이니,

세간에서 다른 지위의 법에 집착해서 자아 등으로 삼는 것을 보지 못하는 때문이고,

변견은 반드시 유신견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上地煩惱亦緣下地。說生上者於下有情,恃己勝德而陵彼故。摠緣諸行,執我、我所斷常愛者,得緣下故。疑後三見如理應思。而說上或不緣下者,彼依多分,或別緣說。

상지(上地)의 번뇌도 역시 하지(下地)를 반연하나니,

상계에 태어나는 자가 하계의 유정에 대해서, 자신의 뛰어난 덕을 믿어서 그들을 멸시한다고, '유가사지론' 제59권에서 말하기 때문이며,

총체적으로 여러 행을 반연하여 아(我, 나)ㆍ아소(我所, 나의 소유)라는 유신견이나,

단멸ㆍ상주한다는 변견에 집착해서 애착하는 자는 하지를 반연할  있기 때문이다. 

의(疑)와 사견ㆍ견취견ㆍ계금취견의  악견은 논리에 맞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나, 상계의 미혹은 하계를 반연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많은 것의 다분(多分)에 의한 것이거나 또는 별도로 반연하여서 말한 것이라고, '유가사지론' 제58권에서 말한 것을 회통한다.

 

번뇌심소와 유학(有學) 등에 속하는 관계를 밝힌, 학등분별(學等分別)이며,

번뇌심소는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에 포함된다.
此十煩惱學等何攝?非學、無學,彼唯善故。

10 가지 번뇌는 유학(有學) 등에 대해서는 무엇에 포함되는 것인가?

유학도 무학도 아닌 것이니, 이 아니다. 유학(有學)과 무학(無學) 오직 선(善)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此十煩惱何所斷耶?非非所斷,彼非染故。分別起者唯見所斷。麤易斷故。

若俱生者唯修所斷。細難斷故。見所斷十實俱頓斷。以眞見道摠緣諦故。

이 열 가지 번뇌가 단멸되는 번뇌인 소단(所斷) 중에서는 어떠한 것인가?

단멸해야 할 것이 아닌 비소단(非所斷)이 아니니, 단멸해야 할 것이 아닌 비소단법(非所斷法)은 잡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분별기(分別起)의 번뇌심소는 오직 견도에서 단멸되는 견소단(見所斷)일 뿐이니, 두드러져서 단멸하기가 쉽기 때문이며,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기(俱生起)의 것은 오직 수도에서 단멸되는 수도단(修所斷)일 뿐이니, 미세하여 단멸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견도에서 단멸되는 10 가지는 참으로 단박에 단멸되는 될 수 있으니, 진견도(眞見道)는 4성제(四聖諦)를 총체적으로 반연하기 때문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제 6 6

 

5 가지의 악견의 행상(行相, 작용)을 구별하는 것에서의 세 번째. 

三邪見謂謗因、果、作用、實事,及非四見,諸餘邪執。如增上緣。名、義遍故。

셋째는 사견(邪見)이니, 보시(布施)나 탐착 등 모든 선악(善惡)의 원인(因)과

선악의 업에 초감(招感)되는 이숙과(異熟果)인 결과와

세간ㆍ부모 등 모든 사회ㆍ국가를 부정하는 등의 작용과

세간의 참다운 아라한(阿羅漢) 등의 실유(實事) 등이 모두 없다고 부정하면서 비방하고

위의 4 가지 견해가 아닌, 다른 모든 삿된 것에 집착하는 것을 말하며, 증상연과 같이 명칭과 뜻이 두루하는 것이다.

 

此見差別,諸見趣中,有執前際,二無因論,四有邊等,不死矯亂及計後際,五現涅槃。

사견 종류를 구분하면, 여러 취착된 견해 중에서 전제(前際, 과거)에 집착하는 2 가지 무인론(無因論)과 4 가지 유변론(有邊論) 등과 불사교란(不死矯亂)과

후제(後際, 미래)를 계탁하는 오현열반(五現涅槃)이 있다고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제6권 말(末)에 각각의 견해에 관하여 상세하게 발명되어 있다.

 

무인론(無因論) 또는 무인견론(無因見論) 또는 무인유론(無因有論)은 '원인 없이 존재한다는 견해 또는 이론'으로, 나와 우주가 원인 없이, 즉, 우연히, 즉,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는 견해.

유변론(有邊論) 또는 변무변론(邊無邊論) 또는 유변등론(有邊等論)은, 세간, 즉,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에 대한 견해 또는 자아와 우주가 유한한가 무한한가에 대한 견해이다. 자아와 우주의 공간적 유한성과 무한성에 대한 견해인데, 공간은 사물의 운동이 일어나는 곳이고 사물의 운동을 순서에 따라 나열한 것이 시간이므로, 공간이 무한하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끝이 없다는 것을 내포하고 공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끝이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변무변론(邊無邊論)은 부처님께서 대답하기를 거부하고 침묵한 14무기 가운데 공간과 관련된 4가지 질문에 대한 견해, 즉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하다(世間有邊) · 무한하다(世間無邊) ·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世間有邊無邊) ·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다(世間非有邊非無邊)'라는 견해를 가진 외도들에 대응한다. 

불사교란(不死矯亂) 또는 종종론(種種論), 영원한 생명을 가진 신(天, deva), 즉 최고신을 귀히 여기고 섬기며 사후에 이 신의 거주처로서의 불사천(천국 또는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데, 특이한 점은 이들의 교의 중에 '누군가가, 특히, 이치에 밝은 사람이 불사천에 대해 질문할 때, 답을 잘하면 그것이 좋은 원인이 되어 사후에 불사천에 태어나고, 반대로 거짓을 답하거나 답을 잘하지 못하면 그것이 장애가 되어 불사천에 태어나지 못한다'는 교의가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이러한 교의는 바른 원인이 아닌 것을 청정하고 뛰어난 원인으로 삼는 것이므로 계금취에 해당하는데, 이들 외도에게는 답을 잘하지 못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회피하는 답 혹은 얼버무리는 답을 한다는 것이다.《불설범망육십이견경》에서 "사문과 바라문이 수행과 지식이 많고, 영리하고 슬기로워 그 뜻을 해설하며, 그 말이 틀림이 없는가 자세히 관찰하며, 그의 명성이 먼 지방까지 알려지고 다른 이의 소견을 버렸더라도(경험적 선정력은 없지만 아주 밝은 추론적 지식이 있을 때), 그곳에 와서 자세히 묻는 이를 깨우쳐 주지 못하면, 그 외도(즉, 질문을 받은 사문과 바라문)는 죽어서 악도에 떨어진다고 하니, 이것이(즉, 이러한 계금취가 종종론의) 첫 번째 견해(가 있게 된 이유)이다."

5현열반론(五現涅槃論), 문자 그대로의 뜻은 '현재의 법을 열반으로 여기는 견해 또는 이론'으로, '현재의 법'이란 현재의 존재 상태, 즉, 물질적 노력이나 영적 수행을 통해 성취한 상태 또는 경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열반, 즉,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가 아닌 경지를 열반, 완전한 깨달음, 또는 최고의 상태라고 여기는 것을 뜻한다.

물질적 노력 또는 영적 수행을 통해 성취한,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가 아닌 현재의 상태 또는 경지, 예를 들어, 욕계에서 산해진미와 풍요로운 재화를 누리는 상태 또는 색계의 제4선을 성취한 중간 상태의 경지를 열반, 즉,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 즉, 최고의 상태라고 여기는 견해이다. - 위키

 

或計自在、世主、釋、梵及餘物類常恒不易,或計自在等,是一切物因,或有撗計諸邪解脫,或有妄執非道爲道,諸如是等皆邪見攝。

혹은 욕계 제6천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ㆍ세주(世主), 즉 색계의 18천 가운데 최고천인 색구경천(色究竟天)ㆍ제석천ㆍ색계 초선천(初禪天)의 주(主)인 범천왕  다른 사물 등의 물류(物類)인 자성(自性) 등이 상주해서 변화가 없다고 계탁하는 것이며,

혹은 자재천 등은 모든 사물의 원인이라고 계탁하는, 집제(集諦)에 대한 삿된 견해이며,

혹은 어떤 사람들은 제멋대로 여러 삿된 해탈을 계탁하는, 멸제(滅諦)에 대한 삿된 견해이며,

혹은 어떤 사람들은 망령되게 도(道)가 아닌 것을 집착해서 도(道)로 삼는, 도제(道諦)에 대한 삿된 견해이니,

이와 같은 모든 견해들은  삿된 견해인 사견(邪見)인 것이다.

 

四見取,謂於諸見及所依薀,執爲最勝,能得淸淨,一切鬪諍所依爲業。

넷째는 잘못된 견해에 취착하는 견취견(見取見)이니, 여러 잘못된 견해와 의지처인 5온에 대하여 집착하여서 그러한 것이가장 뛰어난 것으로 삼아서 능히 청정(열반)을 얻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모든 투쟁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業)으로 한다.

 

五戒禁取,謂於隨順諸見,戒禁及所依薀,執爲最勝,能得淸淨,無利勤苦所依爲業。

다섯째는 계금취견(戒禁取見)이니, 여러 견해에 수순하는 계율과 의지처인 5온에 대하여 집착해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삼아서, 능히 청정을 얻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로움 없이 수고롭게 애쓰는 고통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業)으로 한다.

 

계금(戒禁)은 계법(戒法)이라는 뜻으로, 계금취견에는 2 종류가 있다.

하나는 외도에서 잘못된 계법에 집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인 중에서 계법의 진정한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기보다는 계법의 형식 그 자체에 취착하는 경우이다.

 

然有處說執爲最勝名爲見取,執能得淸淨名戒取者,是影略說,或隨轉門。不爾如何非滅計滅,非道計道說爲邪見,非二取攝?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1권, '유가사지론' 제8권, '현양성교론' 제1권, '대승광오온론(大乘廣五蘊論)'에서 말하기를,

집착해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삼는 것만을 견취견(見取見)이라 하고,

능히 청정을 얻는다고 집착하는 것만을 계금취견(戒禁取見)이라 한다고 한 것은 그림자처럼 생략한 영락(影略)해서 말한 것이거나, 근기에 따라 말한 방편문인 수전이문(隨轉理門)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유가사지론'의 섭결택분에서 멸제가 아닌 것을 멸제라고 계탁하고, 도제가 아닌 것을 도제라고 계탁하는 것을 삿된 견해라고만 말하고, 두 가지 견취견에 포함된다고는 말하지 않았겠는가?

견취견(見取見) 중에도 사실은 청정(열반) 얻는다고 집착하는 것이 있고,

계금취견(戒禁取見) 중에도 사실은 최승(最勝)이라고 집착하는 것이 있으므로, 따라서 각각 한쪽만을 말하고, 다른 것은 영략(影略)해서 미루어 알게 하였다는 뜻이다.

 

이하 열두 가지 부문을 판별하는 제문분별(諸門分別)으로, 먼저 10 가지 번뇌심소 중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기(俱生起)와 후천적인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분별기(分別起)를 판별한다.

如是摠、別十煩惱中,六通俱生及分別起,任運、思察俱得生故,疑後三見唯分別起,要由惡友或邪教力,自審思察方得生故. 邊執見中通俱生者,有義唯斷,常見相麤,惡友等力方引生故。

이상과 같이 총체적인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악견(惡見)의 6 가지 번뇌(煩惱)심소와

여섯 가지 근본번뇌심소 중에서 악견을 세분하여 유신견ㆍ변견ㆍ사견ㆍ견취견ㆍ계금취견등으로 분류한 개별적인 5 가지를 합한 10 가지 번뇌(煩惱)심소 중에서,

6 가지는 구생기(俱生起)와 후천적인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분별기(分別起)와 자연히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기(俱生起) 의해 생겨나는 것에 통하나니, 자연히 일어날 때에도, 사려 관찰할 때에도 함께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소와 나머지의 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  가지 견해 오직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분별기(分別起)이니, 반드시 나쁜 친구나 삿된 가르침의 힘을 말미암아 스스로 살펴서 사려 관찰함에 의해서 비로소 생겨날  있기 때문이다. 

변견(邊見) 중에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기(俱生起)에 통하는 것은 오직 단견(斷見)뿐이니, 상견(常見) 양상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쁜 친구 등의 힘에 이끌려서 비로소 생겨나기 때문이다.

 

'瑜伽'等說:何邊執見,是俱生耶?謂斷見攝,學現觀者,起如是怖。今者我我何所在耶?故禽獸等若遇違緣,皆恐我斷而起驚怖。

'유가사지론' 등에서 말하기를 “어떠한 변견(邊見)이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俱生)인가? 

단견(斷見)에 포함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현관(現觀)을 배우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공포심을 일으킨다. 

지금 구생(俱生)의 나(我)는 분별에 의한 나(我) 어느 곳에 있는 것인가?”라고 '유가사지론' 제86권, 제88권과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4권, 제7권에 말하였다. 

따라서 짐승 등은 거스르는연(違緣)을 만날 때에는, 모두 내가 단멸된다고 두려워하는 공포심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현관(現觀) 얻은 자가 무아관(無我觀) 들어가 분별에 의한 나(我) 이미 단멸되었음을 알며,

출관(出觀) 때에 문득 공포를 일으켜서 지금 나의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따라서 수도(修道) 중에서도 상견(常見) 없다고 말해서는  된다는 것이다. 

 

有義彼論依麤相說,理實俱生亦通常見,謂禽獸等執我常存,熾然聚集長時資具。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그 논서에서는 두드러진 상(相)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고, 논리와 진실로써 말하자면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구생기(俱生起) 역시 상견(常見)에 통하는 것이니, 

짐승 등은 내가 항상 존재한다고 집착해서 오랜 기간 동안을 지낼  있는 재료ㆍ도구로서의 자구(資具, 동굴과 음식)등을 치열하게 만들고 모으는 것이니, 그와 같이 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 없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으로, 이것은 반드시 선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故'顯揚'等諸論皆說,於五取薀執斷計常,或是俱生或分別起。

따라서 '현양성교론' 제1권과 ‘유가사지론’ 제8권 등의 여러 논서에서 말하기를 “5취온에 대해서 단멸되는 것에 집착하거나 항상하는 것에 계탁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후천적으로 분별에 의해 일어나기도 한다”고 한 것이다.

 

此十煩惱誰幾相應?貪與瞋、疑定不俱起,愛、憎二境必不同故,於境不決,無染著故。貪與慢、見或得相應,所愛、所陵境非一,故說不俱起。所染、所恃境可同,故說得相應。於五見境皆可愛故,貪與五見相應無失。

회통(會通), 법문(法文)의 어려운 뜻을 알기 쉽게 해석하는 것.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의 10 가지 번뇌심소에 있어서 무엇이  가지와 어떻게 상응하는, 자류상응(自類相應)인가?

탐(貪)심소는 진(瞋)ㆍ치(癡) 심소와는 반드시 함께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애착과 증오의 대상이 반드시 같지 않기 때문이며, 대상에 대해서 결정하지 않을 때에는 탐착이 없기 때문이다. 

탐(貪)심소는 만ㆍ악견(惡見) 심소와 혹은 상응할  있으나, 애착되는 것과 멸시되는 대상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고, '유가사지론' 제58권에서 탐ㆍ만 심소가 상응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을 회통하며,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 탐ㆍ만 심소가 상응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회통하면, 잡염되는 믿어지는 대상은 같을  있기 때문에 상응할  있으니,

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의 5 가지 악견(惡見)의 대상에 대해서는 모두 애착할 만하기 때문에 탐심소가 다섯 가지 악견과 상응한다고 하는 것에 과실이 없는 것이다.

 

瞋與慢、疑或得俱起,所瞋、所恃境非一,故說不相應,所蔑、所憎境可同,故說得俱起。初猶豫時未憎彼,故說不俱起,夂思不決便憤發,故說得相應,疑順、違事隨應亦爾。

진(瞋)심소는 만(慢)ㆍ의(疑) 심소와 혹은 함께 일어날  있으나, 성내게  것과 믿어지는 대상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고 말하나니, '유가사지론' 제58권과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6권에서 진(瞋)ㆍ만(慢) 심소가 상응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회통하며,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진ㆍ만 심소가 상응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회통한다면, 멸시되는 것과 증오되는 대상이 같을  있기 때문에 함께 일어날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유가사지론' 제55권과 제58권에서 진ㆍ의(疑) 심소가 상응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회통하면, 의(疑)심소가 처음에 결정을 미룰 때에는 진(瞋)심소가 아직 그것을 증오하지 않기 때문에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며,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6권에서 진ㆍ의 심소가 상응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회통하면, 오랫동안 생각하여도 결정되지 않을 때에는 문득 분발심이 일어나기 때문에 상응할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만약 이미 수순되는(順) 일을 의심할 때에는, 진(瞋)심소를 일으키지 않으며, 또는 만약 이미 거스르는(違) 일을 의심할 때에는, 문득 그것에 성을 내므로 상응할 수 있는 것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瞋與二取必不相應,執爲勝、道,不憎彼故。

진(瞋)심소는  가지의 견취견과는 반드시 상응하지 않으니, 집착해서 뛰어나며 도(道)인 것으로 삼을 때에는 그것을 증오하지 않기 때문이다.

 

此與三見或得相應,於有樂薀起身、常見,不生憎,故說不相應,於有苦薀起身、常見生憎恚,故說得俱起。斷見翻此說瞋有無。邪見誹撥惡事、好事,如次說瞋或無或有。

이것은 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의  가지 악견과 혹은 상응할  있으며,

'대승아비달마잡집론' 제 6권에서 진(瞋)심소가 유신견ㆍ변견(邊見)과 상응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회통하면, 유신견이나 변견이 즐거움이 있는 5온에 대해서 유신견ㆍ상견(常見)은 선천적인 구생기(俱生起)일 수도 있고, 후천적인 분별에 의한 분별기(分別起) 일 수도 있으므로, 이를 일으킬 때에는 증오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며,

고통이 있는 5온에 대해서 유신견ㆍ상견을 일으키는 것은 후천적인 분별에 의한 분별기(分別起)이기 때문에 증오를 일으키기 때문에 함께 일어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단견(斷見)은 유신견(有身見)ㆍ상견(常見)과 정반대로 성냄이 있고 없다고 말 할 수 있으며,

사견(邪見)이 나쁜 일과 좋은 일을 비방하거나 부정할 때에는 순서대로 성냄이 있기도 없기도 하다고 할 수 있다.

 

慢於境定,疑則不然,故慢與疑無相應義。慢與五見皆容俱起,行相展轉不相違故。

만(慢)심소는 대상에 대해서 결정적이고, 의(疑)심소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만심소는 의심소와 상응하는 뜻이 없으며,

만심소는 다섯 가지 악견(惡見)과 모두 함께 일어난다고 인정되나니, 인식작용이 전전하여 서로 거스르지 않기 때문이다.

 

然與斷見必不俱生,執我斷時無陵恃故,與身、邪見一分亦爾。疑不審決,與見相違,故疑與見定不俱起。五見展轉必不相應,非一心中有多慧故。癡與九種皆定相應,諸煩惱生必由癡故。

그러나 단견(斷見)은 반드시 함께 생겨나지 않는 것이니, 내가 단멸된다고 집착할 때에는 남을 멸시하고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며, 유신견ㆍ사견의 일부도 역시 그러하며,

의(疑)심소는 살펴서 결정하지 않는 것이니, 악견과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의심소는 악견과 함께 일어나지 않으며,

다섯 가지 악견은 전전하여서 반드시 상응하지 않는 것이니, 일심(一心) 중에서 많은 혜(慧)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치(癡)심소는 나머지 9 가지 모두에 반드시 상응하나니, 모든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어리석음에 의하기 때문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제 6 5

 

如是已說善位心所。煩惱心所其相云何?頌曰:煩惱謂貪嗔 癡慢疑惡見。

이상과 같이 선위(善位)의 심소를 말하였으니, 모든 번뇌의 근간인 근본번뇌를 일으키는 번뇌(煩惱)심소의 상은 어떠한 것인가?

번뇌심소는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악견(惡見)의 6 가지라고 '삼십송'의 제12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論曰:此貪等六,性是根本煩惱攝故,得煩惱名。云何爲貪?於有、有具,染著爲性,能障無貪,生苦爲業。謂由愛力,取薀生故。

▷논하여 말한다; 이러한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악견(惡見)의 6 가지는 체성이 근본번뇌에 포함되기 때문에 번뇌(煩惱)심소라고 이름한다. 

무엇이 ‘탐(貪, rāga)심소’인가? 윤회하는 삶(有)과  원인인 유구(有具)에 탐착함을 체성(體)으로 삼으니, 능히 무탐(無貪)심소를 장애하여 고통을 일으키는 것을 업(業)으로 삼아서 애착의 세력에 의해 5취온이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탐(貪)심소는 ‘탐욕’, 즉 애착을 일으키는 심리작용이다.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특히 윤회하는 삶과 그 원인인 5온 나아가 열반에 대해서까지 애착심을 일으킴으로써 고통을 자초하는 것이다.


云何爲瞋?於苦、苦具,憎恚爲性,能障無瞋,不安、隱性、惡行所依爲業。謂瞋必令身心,熱惱起諸惡業,不善性故。

무엇이 ‘진(瞋, dveṣa)심소’인가? 고통(苦)과 그 고통의 원인인 고구(苦俱)에 대해서 미워하고 성내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으니, 능히 무진(無瞋)심소를 장애하여 불안과 악행의 의지처가 됨을 업(業)으로 삼는 것이니,

진(瞋)심소는 반드시 몸과 마음을 매우 괴롭혀서 모든 악업을 일으키게 하는 불선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진(瞋)심소는 ‘성냄’, 즉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불쾌감의 심리이다. 고통과 그 원인에 대해 증오심을 일으키는 심리작용이다. 몸과 마음을 열뇌하게 해서 갖가지 악업을 짓게 만든다.

 

云何爲癡?於諸理、事,迷闇爲性能障無癡一切雜染所依爲業謂由無明,起疑、邪見、貪等,煩惱、隨煩惱業,能招後生,雜染法故。

무엇이 치(癡, moha, avidhya)심소’인가? 모든 본질과 현상에 대해서 미혹하고 어두운 것을 체성(體)으로 삼으니, 능히 무치(無癡)심소를 장애하고 모든 잡염법의 의지처가 됨을 업(業)으로 삼는 것으로,  

무명에 의해서 의(疑)ㆍ삿된 정(定)ㆍ탐(貪) 등의 번뇌와 수번뇌(隨煩惱)의 업을 일으켜서 능히 다음 생의 잡염법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치(癡)심소는 ‘어리석음’, 즉 특히 현상계(事)와 그 본질(理)의 진리(연기ㆍ무아ㆍ중도 등)를 모르는 무명의 심리작용이다. 여기서 의(疑)ㆍ사견ㆍ탐(貪) 등 여러 번뇌들이 일어난다.

 

수번뇌(隨煩惱, upakleśā) 또는 수혹(隨惑)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①첫 번째는 근본번뇌(根本煩惱, mūla-kleśa)를 따라 일어나는 2차적인 번뇌라는 뜻으로, 이 경우의 수번뇌를 근본번뇌와 구분하여 지말번뇌(枝末煩惱) 또는 지말혹(枝末惑)이라고도 한다.

②두 번째는 마음(心, citta)을 따라 일어나서 유정을 괴롭고 혼란스럽게하는 마음작용, 즉 근본번뇌라는 뜻이다.

③세 번째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의미를 통칭하는 것으로, 이 경우의 수번뇌는 곧 일체(一切)의 번뇌 즉 모든 번뇌를 말하며, 이 경우 수번뇌는 번뇌의 여러 다른 이름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위키

 

云何爲慢?恃己於他,高擧爲性,能障不慢,生苦爲業。謂若有慢,於德、有德,心不謙下。由此生死輪轉無窮,受諸苦故。此慢差別,有七、九種。

무엇이 ‘만(慢, māna)심소’인가? 자기를 믿고 남에 대하여 자신을 높이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불만(不慢)을 장애하여 고통을 일으킴을 업(業)으로 삼으니,

만(慢)심소가 있는 사람은 덕(德)과 덕이 있는 유덕(有德)의 사람에 대해서 마음이 겸손하지 않으므로, 생사에서의 윤회가 끝이 없고 모든 고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만(慢)을 구분하면, 만(慢)ㆍ과만(過慢)ㆍ만과만(慢過慢)ㆍ아만(我慢)ㆍ증상만(增上慢)ㆍ비열만(卑劣慢)ㆍ사만(邪慢)일곱 가지의 칠만(七慢),

또는 아만(我慢), 아등(我等), 아열(我劣), 유승아(有勝我), 유등아(有等我), 유열아(有劣我), 무승아(無勝我), 무등아(無等我), 무열아(無劣我)의 아홉 가지인 구만(九慢)이 있다.

 

만(慢)심소 ‘거만’, 즉 자신을 높이고 타인을 얕보며 나아가 덕이 높은 성자에게도 자신을 낮추지 않는 심리작용이다.

 

칠만(慢);①만(慢)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고 잘난 척하는 것,

②과만(過慢)은 자신과 동등한 자격의 사람에 대하여 자신을 높이는 것,

③만과만(慢過慢)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높이는 것,

④아만(我慢)은 5취온을 나ㆍ나의 것으로 집착하여 교만하면서 자기의 능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

⑤증상만(增上慢)은 자기를 가치 이상으로 보는 것,

⑥비열만(卑劣慢)은 겸손하면서도 자만심을 갖는 것,

⑦사만(邪慢)은 덕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을 덕이 높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삼보를 경시하는 것이다.

 

구만(九慢); ①아만(我慢), ②아등(我等), ③아열(我劣), ④유승아(有勝我), ⑤유등아(有等我), ⑥유열아(有劣我), ⑦무승아(無勝我), ⑧무등아(無等我), ⑨무열아(無劣我).

 9만의 자체(體)에서 7만의 만(慢)ㆍ과만(過慢)ㆍ비만(卑慢)을 내는 것으로, 

③아열(我劣), ⑤유등아(有等我), ⑦무승아(無勝我)가 만(慢)을 내고,  

①아만(我慢), ⑥유열아(有劣我), ⑧무등아(無等我)이 과만(過慢)을 대고

②아등(我等), ④유승아(有勝我), ⑨무열아(無劣我)가 비열만(卑劣慢)을 낸다.

 

謂於三品、我、德處生。一切皆通見修所斷。聖位我慢,旣得現行。慢類由斯起,亦無失。

삼품(三品)과 자아(我)ㆍ덕(德)의 다섯 곳에서 만(慢)이 생겨나나니,

하품(下品)과 중품(中品)의 일분(一分)에서 만(慢)이 생겨나고,

중품과 상품의 일분에서 과만(過慢)이 생겨나고, 

상품의 일분에서 만과만(慢過慢)이 생겨나고,

상품의 일분에서 비만(卑慢)이 생겨나고,
아처(我處)에서 아만(我慢)이 생겨나고,

덕처(德處)에서 증상만(增上慢)과 사만(邪慢)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일체가 모두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에서 단멸되며, 성스러운 지위인 성위(聖位)서도 아만이 현행할 수 있으니,

만(慢)의 종류가 이러함에 근거해서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에 과실이 없는 것이다.

 

云何爲疑?於諸諦理猶豫爲性,能障不疑善品爲業。謂猶豫者善不生故。

무엇이 의(疑, vicikitsā)심소’인가? 모든 진리의 제제(諸諦)와 논리(理)에 대한 결정을 미루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능히 불의(不疑)의 선품을 장애함을 업(業)으로 삼으니, 결정을 미루는 곳에서는 선(善)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의(疑)심소는 ‘의심’하는 작용, 특히 4성제 등의 진리를 의심하여 참으로 그러하다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심리이다. 불신(不信)이 아닌, 불설(佛說)을 신봉하지만 그 교설의 내용ㆍ중요성을 애써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얼버무려 둔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 진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강한 동기와 선(善)심소가 생길 수 없는 것이다.

 

有義此疑以慧爲體。猶豫簡擇說爲疑故。毘助末底是疑義故。末底、般若義無異故。

다른 견해의 대승인, 이사(異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이 의(疑)심소는 혜(慧)심소를 자체로 하는 것으로, 결정을 미루어서 간택하는 것을 의심이라고 말하나니, 접두어 비(毘, vi)가 혜(미저末底, mati)를 돕는 것이 의심의 뜻이기 때문이다. 혜(미저 末底)와 반야는 뜻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mati(미저 末底) () 뜻이다. 이에 접두어 vi() 덧붙여 vimati 하면 의심의 의(疑) 뜻이 되므 (慧, mati) 반야(般若, praj) 뜻이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有義此疑別有自體。令慧不決非卽慧故。'瑜伽論'說六煩惱中,‘見世俗有,卽慧分故。餘是實有,別有性故'

호법의 정의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심소는 별도로 자체가 있으며, ()심소를 결정하지 않게 하는 것은 이것이  ()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6 가지 번뇌심소를 설명하는 중에서 “악견(惡見) 세속유(世俗有)이니,  ()심소의 일부이기 때문이고, 다른 것은 실유이니, 별도로 체성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毘助末底,執慧爲疑,毘助若南,智應爲識。界由助力義便轉變。是故此疑非慧爲體。

또한 접두어 (毘, vi) 혜(미저 末底, mati) 도우므로 () 고집하여 ()심소라고 말한다면, 접두어 (毘, vi) 지혜(약남 若南, jna) 돕기 때문에 지혜를 (識, vijna)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界, 성 性) 돕는 힘에 의해 뜻이 바뀌는 것이므로, 따라서  의심소는 () 자체로 삼지 않는 것이다.

jna(약남若南) 지혜(智) 뜻이다. 여기에 접두어 vi 붙여서 vijna(毘若南) 하면 () 뜻이  자체가 지혜는 아닌 것과 같이, ()심소의 자체가 ()심소는 아닌 것이다.

 

云何惡見?於諸諦理顚倒推度染慧爲性。能障善見招苦爲業。謂惡見者多受苦故。

무엇이 ‘악견(惡見)심소’인가? 모든 진리와 논리에 대해서 뒤바뀌어 전도(顚倒)되게 추측하고 헤아리는 잡염의 혜를 체성(體)로 하여서, 능히 바른 견해를 장애하여 고통을 초래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으니, 악견은 고통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악견(惡見)심소는 그릇된 견해를 일으키는 심리작용으로, 특히 인습에 사로잡혀서, 4성제 등의 진리를 오해하고 인과법을 무시한다. 이것은 별경심소 중의 혜(慧) 심소의 일부분인 염오성이 작용된 것으로, 악견은 작용의 차이에 따라 유신견ㆍ변견ㆍ사견ㆍ견취견ㆍ계금취견의 다섯 종류로 나뉜다.

 

此見行相差別有五。一薩迦耶見,謂於五取薀執我、我所。一切見趣所依爲業。此見差別有二十句、六十五等。分別起攝。

 악견의 행상(行相, 작용)을 구별하면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살가야견(薩迦耶見)으로, 5취온에 대해서 나ㆍ나의 소유인 아아소(我、我所)로 집착하는 것을 말하며, 모든 견해의 의지처가 되는 것을 업(業)으로 한다. 

 견해를 구분하면 20 가지 문구인 이십구(二十句)와 65 가지 문구 등이 있으며, 후천적인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살가야견(薩迦耶見)은 산스끄리뜨 satkāya-dṛṣṭi의 번역어이며, 유신견(有身見)ㆍ신견(身見) 등으로 의역(意譯)되며, 5온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임시적 육신을 실아(實我)라고 집착하는 소견 또는 육신에 달려 있는 일체의 소유도 고정된 소유주가 있는 것이 아닌데, 그것을 나의 소유라고 집착하는 소견을 말한다.

 

이십구(二十句), 5온(蘊)의 각각에 네 가지 문구가 있어서 합하면 스무 가지가 되는 것으로,

즉 색온(色蘊)에 대해서는 “물질(色)은 나이다”, “나는 물질(色)을 갖는다”, “물질(色)은 나에게 속한다”, “나는 물질(色) 중에 있다”라고 계탁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온(蘊)에 4 가지가 있고, 5온(蘊)으로 말하면 20 가지의 문구(句)가 된다.

다시 말하면 다섯 가지의 아견(我見, 5온 각각에 대한 나라는 견해)과 15 가지 나의 소유라는 견해인 아소견(我所見, 5온 각각에 아영락我瓔珞ㆍ아동복我童僕ㆍ아기我器라는 세 가지씩의 아소견我所見)이 있으므로 합하면 20 가지의 문구(句)가 되는 것이다.

 

二邊執見,謂卽於彼隨執斷常。障處中行、出離爲業。

둘째는 극단에 집착하는 견해의 변견(邊見) 또는 변집견(邊執見)이니, 아견(我見)의 대상을 따라서 단멸 또는 상주한다는 것으로 집착하는 것을 말하며,

단멸(斷)과 상주(常)의 극단을 떠난 중용(中容)의 의처(意處) 중의 실천의 행(行)인 도제(道諦)와 벗어남의 출리(出離)인 멸제(滅諦)를 장애하는 것을 업(業)으로 한다.

 

此見差別,諸見趣中,有執前際,四遍常論,一分常論及計後際,有想十六,無想、俱非,各有八論,七斷滅論。等分別起攝。

 견해의 종류를 말한다면, 여러 견해 중에서

과거에 의해 분별의 견해를 일으키는 전제(前際)에 집착하는 4 가지의 두루 상주한다는 견해인 변상론(遍常論),

일부만 상주한다는 견해인 일분상론(一分常論), 

미래에 의해 분별의 견해를 일으키는 후제(後際)에 계탁하는 16 가지의 표상작용이 존재한다는 견해인 유상론(有想論),

표상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인 무상론(無常論)과

표상작용의 상(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구비팔론(俱非八論) 각각 8론(八論)이 있으며,

또한 7 가지의 단멸론인 칠단론(七斷論) 등이 있으니, 이것은 분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에 포함되는 것이다.

극단적인 견해인 변견(邊見)은 62() 중에서 47() 포함하고, 47 가지 중에서 40 가지(사변상론四遍常論ㆍ사일분상론四一分常論ㆍ유상육십론有想十六論ㆍ무상팔논無想八論ㆍ구비팔론俱非八論) 상견(常見)이고,

7 가지는 단견(斷見)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제 6 4


有義不疑卽信所攝。謂若信彼,無猶豫故。有義不疑卽正勝解。以決定者無猶豫故。

제1사(第一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의(疑) 심소와 정반대로써 의심하지 않음의 불의(不疑)는 신(信)심소에 포함되는 것으로, 결정된 것은 유예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제2사(第二師)의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의심하지 않음의 불의(不疑)는  진정한 승해(勝解)심소에 포함되는 것으로,  결정된 것은 유예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有義不疑卽正慧攝。以正見者無猶豫故。

호법의 정의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의심하지 않음의 불의(不疑)는  진정한 혜(慧)심소에 포함되는 것으로, 바른 견해의 정견(正見)은 유예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不散亂體卽正定攝。正見、正知俱善慧攝。不忘念者卽是正念。悔、眠、尋、伺通染不染。如觸、欲等無別翻對。

산란(散亂)심소와 정반대인 산란하지 않음의 불산란(不散亂)의 자체는 진정한 정(定)심소에 포함되며,

정견(正見)과 바르게 아는 정지(正知)는 모두 착한 성품의 혜(慧)에 포함되며,

실념(失念)심소의 정반대인, 잊어버리지 않음의 불망념(不忘念)은 곧바로 염(念)심소이며,

회(悔)ㆍ면(眠)ㆍ심(尋)ㆍ사(伺) 심소는 잡염법과 청정법의 모두에 통하는 것으로, 촉(觸)ㆍ욕(欲) 심소 등이 별도로 반대 되는 심소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何緣諸染所翻善中有,別建立,有不爾者?

▷외인의 질문; 무슨 까닭으로 모든 잡염의 심소와 정반대인 것을 선심소 중에서, 어떤 것은 별도로 건립하고 어떤 것은 별도로 건립하지 않는 것입니까?

근본번뇌의 심소와 수번뇌의 심소 중에서 여기서는 다만 수번뇌의 심소 11 가지만을 별도로 뒤집어서(飜) 정반대의 선의 심소로 하고, 다른 것은 별도로 배대하지 않는 까닭을 물은 것이.

 

相用別者,便別立之,餘善不然。故不應責。

▷답한다; 체상과 작용이 다른 것들은 별도로 건립하고, 나머지 선심소는 그렇지 않은 것이므로, 책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又諸染法遍六識者勝故翻之,別立善法。

또한 모든 잡염법이 6식에 두루하는 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뒤집어서 정반대로 별도의 선법으로 건립한 것으로, 

만(慢) 등과 분(忿)심소 등은 오직 의식(意識)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10 가지의 근본번뇌심소 중에서 ()ㆍ진()ㆍ치() 제외한 나머지 7 가지와 소수번뇌인 소수혹(小隨感) 중에서 () 제외한 나머지 9 가지는 오직 의식(意識)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므로, 따라서 뒤집어서 별도로 건립하지 않은 것이다.

 

慢等、忿等唯意識俱。害雖亦然,而數現起,損惱他故,障無上乘,勝因悲故,爲了知彼增上過失,翻立不害。

해(害)심소도 역시 그러하지만, 여러 번 일어나서 남을 괴롭히고 손해 입히기 때문이고,

최상의 교법의 뛰어난 원인인 자비를 장애하기 때문이며,

해(害)심소의 증상(增上)의 과실을 요별하기 때문에, 뒤집어서 정반대로 불해(不害)심소로 건립한 것이며,

()심소도 역시 의식에만 있고 6식에 두루하지 않지만, 그것을 뒤집어서 불해(不害)심소를 건립하는 이유를 밝힌 것이다.

 

失念、散亂及不正知,翻入別境,善中不說。

실념(失念)ㆍ산란ㆍ부정지 심소 등은 뒤집으면 별경심소에 포함되기 때문에 선심소에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染、淨相翻,淨寧少染?

▷외인의 비판적인 질문; 잡염법과 청정법의 체상을 뒤집어 배대하는데, 어째서 청정법의 숫자가 잡염법보다 적은 것입니까??


淨勝染劣。少敵多故。

▷답한다; 청정법은 뛰어나고 잡염법은 열등하며, 적은 것이 많은 것에 대적하기 때문이다.


又解理通,說多同體。迷情事局,隨相分多。

또한 이해(解)는 본질이 통하므로 많은 법의 동체(同體)라 말하고, 미혹한 생각의 미정(迷情)은 현상적인 자체(事)가 국한되므로 상(相)을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누는 것이다.

청정법은 해(解)이고, 지해(解)는 본질(理) 통하고  원만하므로 11 가지 법에 많은 법의 동체(同體) 포함하고,

미혹한 생각의 미정(迷情) 현상적인 자체(體) 이미 국한되어 잡염이 증성한 모습에 따르기 때문에 여러 종류로 나눈다.

 

故於染、淨,不應齊責。此十一法,三是假有。謂不放逸、捨及不害。義如前說。餘八實有。相、用別故。

따라서 잡염ㆍ청정법에 대해서 일제히 책망하지 않아야 하나니,

11 가지 선(善)심소 중에서 셋은 가유(假有),  불방일과 행사(行捨)  불해이며, 그 뜻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나머지 8 가지는 실유(實有)로써 체상과 작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음에 11 가지 선심소의 자체(體) 있고 없음을 판별하는 가실분별(假實分別)이다.


有義十一,四遍善心。精進、三根,遍善品故。餘七不定。推尋事理,未決定時,不生信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11 가지 중에서  가지는 선한 심왕에 두루 작용하는 것이니,  근(動, 정진) 및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삼선근(三善根) 선품에 두루하기 때문이고, 나머지 7 가지는 일정하지 않으니, 현상과  본질인 진리를 추구하는 추심사리(推尋事理)로써, 아직 결정되지 않았을 때에는 신(信)심소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慚、愧同類,依處各別,隨起一時,第二無故。要世閒道,斷煩惱時,有輕安故。不放逸、捨,無漏道時,方得起故。悲愍有情時,乃有不害故。

참(慚)ㆍ괴(愧)는 의지처가 각각 다를지라도 같은 종류이므로,  따라서 하나를 일으킬 때에는 다른 하나가 없기 때문이며,

모름지기 세간도로써 번뇌를 끊었을 때에는 안(安)심소가 있기 때문이며,

불방일 심소ㆍ행사 심소는 무루도의 시기에 비로소 일어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니, 유정을 불쌍히 여길 때에 불해심소가 있기 때문이다.


論說:‘十一,六位中起。謂決定位,有信相應。止息染時,有慚、愧起。顧自、他故。於善品位,有精進、三根。世閒道時,有輕安起。於出世道,有捨、不放逸。攝衆生時,有不害故。’

논서,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말하기를 “11 가지 심소는 6 가지 지위 중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결정된 지위인 결정위(決定位)에서는 신(信)심소가 상응하고,

잡염을 그치게  때에는 참(慚)ㆍ괴(愧) 심소가 일어나나니, 자신과 남을 돌아보기 때문이다. 

선품위(善品位)에서는 근(勤)심소와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삼선근(三善根) 있으며,

세간도의 시기에는 안(安)심소가 일어나고, 출세도에서는 사(捨)ㆍ불방일 심소가 있으며,

중생을 섭수할 때에는 불해심소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有義彼說未爲應理。推尋事理,未決定心,信若不生,應非是善。如染心等。無淨信故。慚、愧類異,依別境同。俱遍善心,前已說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그가 말하는 것은 아직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니, 현상과  본질인 진리를 추구하는 추심사리(推尋事理)이거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심왕에 만약 신(信)심소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선(善)이 아니어야 하고,

잡염심 등과 같이 청정한 믿음의 정신(淨信)이 없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慚)과 괴(愧)는 종류가 다르고, 의지처(依)가 다를지라도 대상이 같으며, 모두 착한 심왕의 선심(善心)에 두루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때문이다.


若出世道,輕安不生,應此覺支,非無漏故。若世閒道,無捨、不放逸,應非寂靜,防惡修善故。又應不伏掉、放逸故。有漏善心,旣具四法,如出世道,應有二故。善心起時,皆不損物,違能損法,有不害故。

만약 출세도에서 안(安)심소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각지(覺支)는 무루가 아니어야 할 것이며,

만약 세간도에는 사(捨)ㆍ불방일 심소가 없다고 말한다면, 적정(寂靜)도 아니고 악을 방지하고 선을 닦음도 아니어야 할 것이며, 또한 도거ㆍ방일을 조복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유루의 착한 심왕에서도 이미 근(勤)심소와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삼선근(三善根)의  가지의 사법(四法)을 갖추고 있으므로, 출세도와 같이 사(捨)ㆍ불방일 심소의 두 가지가 있어야 할 것이며,

착한 심왕의 선심(善心)이 일어날 때에는 모두 유정을 해롭게 하지 않으니, 해롭게 하는법(損法)에 거스르는 것이므로 불해심소가 있게 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論說,六位起十一者,依彼彼增作此此說。故彼所說定非應理。

논서, '유가사지론' 제55권에서 6위(六位)에서 11 가지 심소를 일으킨다고 말한 것은,

연(緣)에 여섯 가지가 있어서 하나가 아니므로 ‘그것들의 피피(彼彼)’ 증성함에 의지해서

결정위(決定位)에서는 신(信)심소와 상응하고, 잡염을 지식(止息)할 때에는 참(慚)ㆍ괴(愧) 심소가 일어나는 등의 6 종류가 있으므로 '이것들의 차차(此此)'라고 말한 것이므로, 따라서 그가 말한 것은 바른 논리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應說信等十一法中,十遍善心,輕安不遍。要在定位,方有輕安,調暢身心,餘位無故。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나니, 신(信)심소  11 가지 십일법(十一法) 중에서 10 가지는 착한 심왕의 선심(善心)에 두루하나, 안(安)심소는 두루하지 않는 것이나, 모름지기 선정의 지위에 있을 때에만 비로소 안(安)심소가 있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조화되고 화창하게 하는 것은 다른 지위에는 없기 때문이다.


'決擇分'說‘十善心所,定、不定地,皆遍善心。定地心中,增輕安故。’

'유가사지론' 제69권 '섭결택분'에서 말하기를 “여러 가지 선심소는 선정의 지위와 선정에 들지 않은 지위에서 모두 선한 심왕의 선심(善心)에 두루하고 선정 지위의 심왕 중에서는 안(安)심소를 증장한다”고 때문이다.


有義定加行亦得定地名。彼亦微有調暢義故。由斯欲界亦有輕安。不爾便違本地分,說信等十一通一切地。

제1사(第一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선정의 가행(加行)도 역시 선정의 지위라고 이름할  있으니, 그것도 미약하게나마 조화되고 화창하게 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만약 이에 의거한다면, 욕계에서도 역시 안심소가 있는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유가사지론'의 '본지분(本地分)'에서 신심소  11 가지 심소는 일체지(一切地, 3계의 9지地)에 통한다고 말한 것에 위배되는 것이다.

다른 견해의 이설(異說)들을 열거하여 의문점을 풀어주는 것이다. 


有義輕安,唯在定有。由定滋養,有調暢故。論說:‘欲界諸心、心所,由闕輕安,名不定地。’說一切地有十一者,通有尋伺等三地皆有故。

호법의 정의로써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안(安)심소는 오직 선정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선정에서 자양되어 조화되고 화창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논서, '유가사지론' 제63권에서 말하기를 “욕계의 모든 심왕과 심소는 경안(輕安)이 없기 때문에 선정이 아닌 지위인 부정지(不定地)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며,

일체지(一切地)에 11 가지가 있다고 말한 것은, 심(尋)ㆍ사(伺) 심소 등이 있는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ㆍ무심유사지(無尋有伺地)ㆍ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의 삼지(三地)에 모두 있기 때문이다.

 

此十一種前已,具說第七八識隨位有無。第六識中定位皆具,若非定位唯闕輕安。

11 가지 심소는 앞에서 이미 모두 제7식과 제8식에서는 지위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고 말하였으니,

제6식에 있어서는 선정의 지위인 정위(定位)에서는 모두 갖추고, 만약 선정이 아닌 비정위(非定位)라면 오직 안(安)심소만이 없는 것이다.


有義五識唯有十種。自性散動,無輕安故。有義五識亦有輕安。定所引善者亦有調暢故。成所作智俱必有輕安故。

안혜(安慧)의 견해는 다음과 같으니, 5식에서는 오직 10 가지만 있는 것으로, 자성이 산만하게 작용해서 안(安)심소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호법의 견해는 다음과 같으니, 5식에서도 역시 안심소가 있으니, 선정에 이끌려 생겨나서 착한 유루(有漏)의 5식(識) 역시 조화되고 화창함이 있기 때문이며, 성소작지와 함께하는 것에는 반드시 안심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此善十一何受相應?

 선(善)심소 11 가지는 어떠한 수(受, 느낌)과 상응하는 것인가?

다음은 선심소(善心所) 어떤 () 상응 관계를 밝히는 수구분별(受俱分別)이다.

 

十五相應,一除憂、苦。有逼迫受,無調暢故。

11 가지 선심소 중에서 안(安)심소를 제외한 나머지 열 가지는 3계에 두루하므로 5수(受)와 상응하고,

안(安)심소는 우수(憂受)ㆍ고수(苦受)를 제외하나니, 핍박하는 느낌에서는 조화되고 화창함이 없기 때문이다.

안심소는 우수(憂受)ㆍ고수(苦受) 상응하지 않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조화되고 화창하게 하는 안심소와 핍박의 고수ㆍ우수와는 전연 상반되기 때문이고, 

우수ㆍ고수는 욕계에 있는 것이나, 안심소는 욕계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此與別境皆得相應。信等、欲等不相違故。十一唯善。輕安非欲,餘通三界。

선(善)심소는 별경심소와 모두 상응할  있으니, 신(信)심소 등과 욕(欲)심소 등은 서로 거스르지 않기 때문이며,

선심소와 별경심소와의 상응관계를 밝힌다.

11 가지 심소는 오직 선의 성품이며, 

선심소의 삼성분별(三性分別)

안(安)심소는 욕계에서는 없으나, 그 나머지는 모두는 3계에 통하는 것이다.

선심소의 삼계분별(三界分別).

 

3성 분별(三性分別), 법들 중에서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불선)이며 무엇이 선도 악도 아닌 것인지 분류하는 것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도덕적 기준에서 해당 법들을 나눈 것으로, 말하자면, 무엇이 깨달음의 길에서 장애가 되는 법이며 무엇이 깨달음의 길에서 나아가게 하는 법인지를 가려내어, 선으로 악을 막고 또한 선 그 자체를 증대시킴으로써 깨달음에로 더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 3성 분별의 목적이고 의의이다.


皆學等三。非見所斷。'瑜伽論'說:‘信等六根唯修所斷,非見所斷。’餘門分別,如理應思。

선심소가 유학(有學)ㆍ무학(無學)ㆍ유학도 무학도 아닌 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에 모두 통하나 견도에서 단멸되는 것은 아닌 것이니, '유가사지론' 제 57권에서 신(信)심소 등의 여섯 가지는 오직 수도에서 단멸되는 것으로,

단멸해야  것이 아닌 비소단(非所斷)이라고 말하였으니, 나머지 부문을 판별하는 것은 논리에 맞게 생각해야 한다.

 가지 단멸됨을 판별하는 삼단분별(三斷分別)이다.

成唯識論 卷第一 

護法等菩薩造 호법(護法 지음

三藏法師 玄奘  詔譯 현장(玄奘한역

성유식론(成唯識論제 6 3

 

此五別者謂初發心自分勝進自分行中三品別故或初發心長時無閒慇重餘修差別故或資糧等五道別故乘究竟道欣大菩提故。諸佛究竟道樂利樂他故。

맹렬함을 일으키는 피갑(被甲, 유세有勢)ㆍ가행(加行, 유근有勤)ㆍ낮추지 않음의 무하(無下, 유용有勇)ㆍ물러나지 않음의 무퇴(無退, 견맹堅猛)ㆍ만족하지 않음의 무족(無足, 불사선액不捨善軛)의 5 가지의 차이를 말한다면,

맹렬함을 일으키는 피갑(被甲, 유세有勢)은 초발심이며, 그 나머지 넷은 수행이나, 이 수행은 다시 자분(自分, 그 지위에 해당되는 수행)과 승진(勝進, 상위를 위한 수행)으로 나뉜다.

가행(加行, 유근有勤)은 자분(自分)으로써 하품(下品)이며,

낮추지 않음의 무하(無下, 유용有勇)은 자분(自分)으로써 중품(中品)이며,

물러나지 않음의 무퇴(無退, 견맹堅猛)은 자분(自分)으로써 상품(上品)의 삼품(三品)이고, 

만족하지 않음의 무족(無足, 불사선액不捨善軛)은 승진(勝進)에 해당 되는 것이니, 

자분(自分)ㆍ승진(勝進)ㆍ자분행(自分行)의 세 가지 품류로서 다르기 때문이다.

혹은 초발심ㆍ오랜 기간인 장시(長時, 삼대겁)ㆍ무간(無間, 일체시)ㆍ은중(慇重)ㆍ무여(無餘, 6바라밀)의 수행의 차이이기 때문이고,

혹은 자량도(資糧道)ㆍ가행도(加行道)ㆍ견도ㆍ수도ㆍ무학도등의 오도(五道)의 차이이기 때문이고,

2승의 구경도에서는 대보리를 기뻐하기 때문이고,

부처님의 구경도에서는 남을 이롭고 즐겁게 함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3승(乘)의 무학(無學)도 증과(證果)를 원만히 이루었는데, 어째서 만족하지 않는 무족(無足)이나 선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 불사선액(不捨善軛)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2승(乘)의 구경도(究竟道, 무학無學)는 마음을 대승으로 회향하여 대보리를 기뻐하기 때문이고,

모든 부처님의 구경도에서는 영원히 미래세가 다하도록 유정을 이롭게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모두 만족하지 않는 무족(無足)이나 선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 불사선액(不捨善軛)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或二加行、無閒、解脫、勝進別故。

혹은 가까운 근(近)과 먼 원(遠)의 두 가지 가행(加行)ㆍ무간(無間, 일체시)ㆍ해탈ㆍ승진(勝進)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安謂輕安,遠離麤重,調暢身心,堪任爲性。對治惛沈,轉依爲業。謂此伏除能障定法,令所依止轉安適故。 

‘안(安, prasrabdhi)심소’는 경안(輕安)을 말하며, 추중(麤重)을 멀리 여의고 몸과 마음을 고르고 화창하게 해서 자재함의 감임(堪任)을 체성(體)으로 삼으며, 혼침을 다스려서 몸, 즉 소의신(所依身)를 전환함을 업(業)으로 한다.

이것이 선정을 장애하는 법을 조복시켜 없애서, 의지처인 몸으로 하여금 바뀌어 평안하고 적절하게 하기 때문이다.


안(安, prasrabdhi)심소는 ‘경안(輕安)’, 즉 번뇌를 멀리하고(輕), 몸과 마음을 편안히 조절하는(安) 능력의 심리작용이다. 이것은 욕계의 산심위(散心位)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색계ㆍ무색계의 정위(定位)에서만 생기(生起)하는 것이다.

 

不放逸者,精進、三根於所斷修防修爲性。對治放逸,成滿一切世、出世閒善事爲業。

불방일(不放逸, apramāda)심소’는 근(勤)과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삼선근(三善根)으로 하여금, 단멸하고 닦아야 할 것에 대해서 방지하고 닦는 것을 체성(體)으로 삼고, 방일을 다스리고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의 착한 일을 원만히 이루는 것을 업(業)으로 삼는다.

 

불방일(不放逸, apramāda)심소는 방일함을 없애는 심리작용, 즉 정진ㆍ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심소력으로 번뇌를 끊고 선행을 닦음에 있어서 선법을 획득하고 보존하게 하는 능력의 심소이다.


謂卽四法,於斷、修事,皆能防修名不放逸,非別有體。無異相故,於防惡事修善事中,離四功能無別用故。雖信、慚等亦有此能,而方彼四勢用微劣,非根遍策,故非此依。
곧 근(動)심소와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삼선근(三善根) 심소의 네 가지 법이 단멸하고, 닦아야 할 것에 대해서 방지해야 할 것을 능히 방지하고 닦는 것을 불방일이라 이름하고, 다른 체상이 없기 때문에 별도로 자체(體)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악한 일을 방지하고 착한 일을 닦는 것에 있어서 근(動)ㆍ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네 가지 법의 능력을 떠나서는 별도의 작용이 없으며, 

신(信)ㆍ참(慚) 심소 등도 역시 이러한 능력이 있지만, 근(動)ㆍ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네 가지에 비해서 세력이 미약하고, 선근에 두루 책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불방일(不放逸)의 의지처가 아닌 것이다.

 

豈不防修是此相用?

▷외인의 질문; 어째서 방지하고 닦는 것이 그 체상과 작용이 아닌 것입니까?

防修何異精進三根?彼要待此方有作用。此應復待,餘便有無窮失。勤唯遍策,根但爲依,如何說彼有防修用?
▷논주가 반대로 질문하여서; 방지하고 닦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근(動) 및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삼선근(三善根)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외인의 답변으로; 그것은 모름지기 이 불방일을 기다려서 비로소 작용이 있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논주의 논파로써; 그러하다면, 이 불방일도 다시 다른 것을 기다려야 하고 그러면 문득 끝없이 소급하는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이다.

▷외인이 비판하여 묻는 것으로; 근(勤)심소는 오직 착한 심왕을 두루 책려하고,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의 3근(根)은 다만 선법의 의지처이거늘, 어째서 근(動) 및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삼선근(三善根)의 심소에게 방지하고 닦는 작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汝防修用其相云何?若普依持卽無貪等。若遍策錄不異精進,止惡進善卽摠四法,令不散亂應是等持,令同取境與觸何別?令不忘失卽應是念。

▷논주의 반대질문으로; 그대가 주장하는 방지하고 닦는 작용의  체상은 어떠한 것인가?

만약 널리 모든 선심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무탐심소 등이 될 것이고,

만약 두루 책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근(勤)심소와 다르지 않을 것이고,

악을 그치고 선을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전체적으로 곧 근(動) 및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사법이 되는 것이고,  

산란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등지(等持)심소이어야 할 것이며,

 같이 대상을 취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촉(觸)심소와 무엇이 다르겠으며?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염(念)심소이어야 할 것이다.


如是推尋不放逸用,離無貪等竟不可得。故不放逸定無別體。

이와 같이 불방일(不放逸) 심소의 작용을 분석하여 보면, 무탐심소 등을 떠나서는 마침내 얻을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불방일심소는 반드시 별도의 자체(體)가 없는 것이다.

 

云何行捨?精進、三根令心平等,正直無功用住爲性。對治掉擧靜住爲業。

무엇이 행사(行捨, upekṣā)심소’인가? 근(勤)과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세 가지 선근이 심왕으로 하여금 평등하고 적정하며, 공용(功用, 작용)없이 머물게 함을 체성(體)으로 삼으며, 도거(掉擧)를 다스려서 고요히 머물게 함을 업(業)으로 삼는다.

 

행사(行捨, upekṣā)심소는 마음의 ‘평정’을 이루게 하는 심리작용이다. 여기서 ‘사(捨)’는 혼침이나 들뜸의 도거(掉擧)가이 아닌 평정상태를 말하며, ‘행사(行捨)’란 5온(蘊) 중에 수온(受蘊)이 아닌 행온(行蘊)에 포함되는 사(捨)의 뜻이다.


謂卽四法令心遠離掉擧等障,靜住名捨。平等正直無功用住,初中後位辯捨差別。由不放逸先除雜染,捨復令心,寂靜而住。

근(勤)과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사법(四法)이 심왕에서 도거 등의 장애를 멀리 여의어서 고요히 머물게 하는 것을 행사(行捨)라고 이름하며, 평등하고 적정하며 작용없이 머물게 한다는 것이란, 처음ㆍ중간ㆍ나중의 지위에서 행사(行捨)심소의 차이를 판별하는 것이다. 

먼저 불방일이 잡염을 제거함에 의해서, 행사 심소가 다시 심왕을 적정하게 머물게 하는 것이다.


此無別體。如不放逸,離彼四法無相、用故。能令寂靜卽四法故。所令寂靜卽心等故。

이것에는 별도의 별체(別體)가 없으니, 불방일과 같이 근(勤)과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사법(四法)을 떠나서는 별도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며,

능히 적정하게 하는 것은 근(勤)과 무탐ㆍ 무진ㆍ무치의 사법(四法)이기 때문이며,

적정하게 되는 것은 심왕 등이기 때문이다.

 

云何不害?於諸有情不爲損惱,無瞋爲性。能對治害,悲愍爲業。謂卽無瞋於有情所,不爲損惱假名不害。

무엇이 불해(不害, ahiṃsā)심소’인가? 모든 유정에 대해서 손해와 괴로움을 주지 않는 무진(無瞋)심소를 체성(體)으로 삼으며, 해롭게 하는 것을 다스리고 연민히 여겨 고통을 없애주고자 하는 것으로 업(嶪)을 삼으니,  

 무진(無瞋)심소가 유정에 대해서 손해나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을 가정적으로 불해(不害)심소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불해(不害, ahiṃsā)심소는 타자(他者)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심리작용이며, 이것은 무진(無瞋)심소에 의해서 생기하는 것이다.


無瞋翻對斷物命瞋,不害正違損惱物害。無瞋與樂,不害拔苦。是謂此二麤相差別。

무진(無瞋)ㆍ불해(不害) 심소를 별도로 건립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자면,

무진심소는 생물의 목숨을 끊는 진(瞋)심소의 정반대이고, 

불해심소는 생물을 괴롭히고 손해 입히는 해(害)심소의 정반대이니, 

즉, 무진심소는 약을 주는 것이고, 불해심소는 고통을 없애주는 것으로,

이러함이   가지의 두드러진 상의 차이다.

 

理實無瞋,實有自體。不害依彼一分假立。爲顯慈、悲二相別故。利樂有情,彼二勝故。

참다운 이치로써 말하자면, 무진심소는 참으로 자체(自體)가 있으며, 

불해심소는 그것의 일부에 의지해서 가립하는 것이며,  

자(慈)와 비(悲)의 이상(二相)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유정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 것에 있어서는 이 무진심소와 불해심소,  가지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有說不害非卽無瞋。別有自體,謂賢善性。

설일체유부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불해심소가  무진심소가 아니니, 별도로 자체(自體)가 있어서 어질고 착함의 체성인 현선성(賢善性)이라 하였다.


此相云何?

▷논주의 질문; 이것의 상(相)은 어떠한 것인가?


謂不損惱。無瞋亦爾。寧別有性?謂於有情,不爲損惱,慈悲賢善,是無瞋故。

▷외인 답; 손해나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이다.

▷논주의 논파로써; 무진심소도 역시 그러해야 하거늘, 어째서 별도로 자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유정에게 손해나 괴로움을 주지 않는 자비와 어질고 착한 것이 무진심소이기 때문이다.


及顯十一義別心所,

'삼십송'의 제11게송에서 ‘및 즉, 급(及)’이라고 말한 것은 열한 가지로부터 뜻이 다른 심소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및, 즉 급(及)’이라는 글자에 상위(相違) 합집(合集) 뜻이 있어서,

상위(相違)는 선심소(善心所) 11 가지가 각각 모두  자체(體)가 다른 것을 나타내고,

합집(合集)은 11 가지 이외에 다른 심소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후자의 개념이다.

 

謂欣、厭等善心所法。雖義有別,說種種名,而體無異,故不別立。

기뻐함과 싫어함 등의 착한 성품의 선(善)심소법을 말하는 것이나, 뜻의 차이가 있으므로 갖가지 명칭을 붙인 것이지만, 자체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별도로 건립하지 않는다.

선심소에 관한 장행석(長行釋) 중의 3제문분별(第三諸門分別) 일단(一段)으로, 그것에는 12 가지가 있는데, 먼저 뜻의 의(義)으로써 다른 것을 포섭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欣謂欲俱無瞋一分。於所欣境,不憎恚故。不忿恨惱、嫉等亦然。隨應正翻瞋一分故。

기뻐함의 흔(欣)이라는 것은 욕(欲)심소와 함께하는 무진심소의 일부이니, 기뻐하게  대상에 대해서 증오나 성냄이 없기 때문이다. 

분노하지 않음의 불분(不忿), 원한을 품지 않음의 불한(不恨), 고뇌하지 않음의 불뇌(不惱), 질투하지 않음의 불질(不嫉) 등도 역시 그와 같으니,

상응한 바를 따라서 바로 진(瞋)심소의 일부에 정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분노하지 않음의 불분(不忿), 원한을 품지 않음의 불한(不恨), 고뇌하지 않음의 불뇌(不惱), 질투하지 않음의 불질(不嫉) 등은 분(忿)ㆍ원(恨)ㆍ뇌(惱)ㆍ질(嫉) 등의 심소를 뒤집어서 정반대로 건립된 것으로, 모두 무진(無瞋)심소의 일부이다.


厭謂慧俱,無貪一分。於所厭境,不染著故。不慳、憍等,當知亦然。隨應正翻貪一分故。不覆、誑、諂、無貪、癡一分。隨應正翻貪、癡一分故。

싫어함의 염(厭)이라는 것은 혜(慧)와 함께하는 무탐(無貪)심소의 일부이니, 싫어하게  대상에 대해서 탐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색하지 않음의 불간(不慳), 교만하지 않음의 불교(不憍) 등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상응한 바를 따라서 탐심소의 일부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덮어두지 않음의 불복(不覆), 거짓으로 꾸미지 않음의 불광(不誑), 아첨하지 않음의 불첨(不諂) 등은 무탐ㆍ무치(無癡) 심소의 일부이니, 상응한 바를 따라서 탐ㆍ치(癡) 심소의 일부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義不覆唯無癡一分。無處說覆,亦貪一分故。有義不慢,信一分攝。謂若信彼,不慢彼故。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감추지 않음의 불복(不覆)은 부(覆)심소를 뒤집은 정반대이며, 오직 무치심소의 일부이니, 어떤 경론에서도 부(覆)심소가 탐심소의 일부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제1사(第一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거만하지 않음의 불만(不慢)은 만(慢)심소를 뒤집은 정반대이며, 신(信)심소의 일부에 포함되는 것이니, 믿을 때에는 그것을 얕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有義不慢捨一分攝。心平等者不高慢故。有義不慢,慚一分攝。若崇重彼,不慢彼故。

제2사(第二師)의 주장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거만하지 않음의 불만(不慢)은 행사(行捨)심소의 일부에 포함되는 것이니, 마음이 평등한 자는 자신을 높이고 거만하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으며,  

호법이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거만하지 않음의 불만(不慢)은 참(慚)심소의 일부이니, 그것을 받들고 존중할 때에는 그것을 거만하게 높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Recent posts